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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 관한 인터넷 자료 모음[모셔온 향기 ]
2016년 03월 19일 15시 51분  조회:2845  추천:0  작성자: 강려
수필에 관한 인터넷 자료모음   2010.  6. 5.

먼저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써 창작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작자의 주관적인 직관력과 사색적인 인생 철학에서 이루지는 것과 같이 수필도 작자의 주관적인 인생 철학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산문적인 작품이 것이다.
 수필은 하나의 산문시적인 정신으로써 창작되어야 할 것이며, 줄이면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적인 아이디어가 없는 작품은 문학도 음악도 회화도 될 수 없을 것이고, 하나의 예술적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김광섭의 '수필 문학 소고'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우리는 시를 쓰려 한다. 소설을 지어 보려고 한다. 혹은 희곡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그 어느 것에나 함부로 달려 들려는 무뢰한은 아니다. 동일한 작자이면서도 그 태도가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이나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희곡과 소설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 된 형식이다.
  피천득의 '수필'에는 이런 글귀들이 있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을 갖지 아니한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김시헌의 「수필문학」제 2 집 책 머리에 이런 글귀가 있다.
 수필은 호젓하면서도 군색하지 않고 멋이 있으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우둔하지 않다. 수필은 건강하지만 파격을 좋아하고, 야유스럽지만 악의가 없고, 날카롭지만 따갑지 않다. 수필은 길이가 짧지만 소설이 담겼고, 리듬은 없지만 시가있다. 수필은 부담 없이 걷는 산책과 같고, 장바구니 든 아낙네 같다. 그 속에는 꿈을 돌아보는 낭만이 있고, 회의를 극복한 철학이 있고, 생사를 초월한 우주가 있다.
  이상의 수필론에서 수필의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 인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특히 영문학상 수필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다. 우리 한국 문단에도 빛나고 높은 품위의 수필 문학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구원과 절제와 동반의 언어     정 태 헌 (수필가)
1. 들어가기
  수필에 대한 의견은 수필을 쓰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수필의 상식적인 면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수필문학의 본질과 보편성을 상실한 글이 이즘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김광섭은 그의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오늘까지의 위대한 수필문학이 그 어느 것이 비록 객관적 사실을 취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닥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히 짜내는 심경적이 아니요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라고 수필을 정의 내린 바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김광섭의 정의에서 일부 사람들이 자구 해석에 급급하여 수필 문학의 성격을 호도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러 독자들 중 수필문학에 대한 인식을 잘못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 장르의 글을 쓰는 어떤 이가 ‘그까짓 수필 하루에 열 편은 너끈히 쓸 수가 있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수필의 본질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목젖 너머로 꾹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자신의 장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허튼 수필들을 많이 보아왔으면 저런 말까지 할까 하고요. 이런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수필가들은 작금의 수필 현실을 직시하고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끊임없이 반성적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장의 분칠로 독자를 속이려는 글은 금방 들통이 나고 말며, 자신을 과시하는 글은 역겨움을 주고, 바탕이 문체보다 승하면 거칠고 문체가 바탕보다 승하면 필요 이상의 치장이 값싼 사치로 전락하질 않던가요. 즉 내용이 형식에 비해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뜻이지요. 이런 글을 만나면 책장을 덮는 독자들이 어찌 필자뿐이겠습니까. 
  수필은 원고지 15매 내외의 짧은 글입니다. 그러기에 고도의 문학성과 철학성이 요구됩니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모든 종류의 노력이 아니던가요. 또한 앎의 바탕을 찾아 가는 과정이 철학입니다. 소재에 대한 개성적 해석이나 독창적인 의미화도 넓은 의미에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재를 수직적으로 파고 내려가면 의미가 발견되며. 소재의 뼛속까지 내려가다 보면 그곳에 철학이 있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삶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철학을 하기 전에 미리 살아 움직여야 하고 살기 위해서 일정한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활동에 대한 이해와 반성으로부터 출발한 학문이 철학이 아니던가요. 즉 철학은 인간의 삶을 전제로 하는 학문이기에 인간 삶의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에 철학이 없다는 것은 잡문에 불과하다는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모든 장르의 고갱이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물론 상상이나 정서, 정경이나 이미지만으로도 좋은 글을 빚어낼 수는 있지만, 문학적 공감을 얻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않던가요.
  하여 좋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문학성과 철학성이 두루 갖추어져야 한다고 여깁니다. 철학을 담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는 항상 대상을 바라보면서 참된 인식을 얻고자 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하겠지요. 대상의 본질에 대해 깊이 궁리하고 다양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에 논리적 오류나 정서적 편견은 없는가 등을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습관화될 때 얻어지는 수필의 철학성은 통찰력을 통해 형상화됩니다. 삶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한 깊은 시각과 다채로운 경험이 필요하겠지요. 경험만으로는 깊은 맛이 나지 않습니다. 경험이 사유의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체험이 되며, 이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면 통찰력이 생겨납니다. 통찰력이란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힘, 즉 생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아니던가요. 그래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사유와 관조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신변잡사를 늘어놓거나 주관적인 감정만을 토로한 글은 생활의 기록일 뿐 문학수필로 대접받기는 곤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필은 평범한 일들의 기록이 아니라 음악에 있어 편곡처럼 자기화하여 육화된 글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커피에 설탕을 가미하여 잘 저어야 제 맛을 내는 것처럼 문학성 속에 철학성을 잘 휘저어놓아야 용해되어 글 속에 어우러질 것입니다.
2. 
  가을 호에 게재된 30여 편의 수필을 읽다 보니 끝가지 읽히는 글이 있는가 하면 첫 단락을 읽다가 그만 둔 글도 있고, 처음과 끝만 읽고 책장을 덮게 되는 수필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읽히는 글은 무언가 독자를 잡아끄는 힘이 있었지만, 중간에 읽기를 멈추게 하는 글은 그런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를 잡아끄는 힘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 할 수는 없지만 진실과 문학성에 바탕을 둔 공감과 울림이 있는 경우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필 한편이 독자에게 생생한 울림과 공감을 주기란 녹록치 않습니다. 공감 있는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글 속에 울림의 요소를 은밀하게 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발효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 소재를 쓰다 보면 독자에게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실험적인 수필을 쓴다 하여 공허하고 허튼 글을 내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독자들은 한 작가의 발효된 삶에서 진실을 보고 싶어 합니다.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작가와 독자와의 사이에 공감의 통로, 즉 교감의 길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좋은 글이란 급조하거나 포장한 글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난 진국이어야 합니다. 자잘한 일상만을 쓰는 게 아니라 인간의 뼛속과 영혼의 고처(高處)까지 방문하여 우려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독자에게 감동을 주어 우리들의 몸 속에 맑은 개울을 흐르게 하고 환한 길을 내어주지 않겠습니까. 다음에서 다루고자 하는 세 작가의 문학적 자세와 태도를 살펴보면 참 치열하고 진지합니다. 이들이 수필가로서 독자들에게 수필을 통한 삶의 공감을 주기 위해, 또 작품쓰기의 충실함, 즉 좋은 글을 빚어내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필자는 이들의 문학적 태도와 글 쓰는 자세를 통해 그들의 문학적 열정을 편안한 마음으로 한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구원의 언어 
  박영덕 ‘절반은 구속 절반은 구원’은 마흔 셋이 되던 해, 문학 세미나에서 후배가 찍어준 사진 한 장을 소재로 쓴 글입니다. 문학이 자신에게 갖는 의미를 곱씹어 의미를 반추하며 치열한 글쓰기를 속으로 회다짐하고 있습니다. 문학을 하는 일은 취미가 아닌 운명의 굴레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며 작가입니다. 어쩌면 글쓰기는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작업인지도 모릅니다. 구속한다는 것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올곧은 자세이고, 구원이라는 것은 삶의 치열하고 결곡한 정신적 자세일 터입니다. 박영덕의 문학 정신을 통해서 수필쓰기의 한 전형을 읽습니다. 치열성이 없는 글쓰기란 특히 수필에서는 잡문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필은 아무렇게나 쓰는 잡문이 아니라 치열한 고뇌와 문학적인 미적과정을 통해 형상화되어야 합니다. 형상화란 무엇입니까.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형상화 이전의 글이 신변잡기면 형상화 이후의 글이라야 비로소 문학 작품입니다.
  ‘절반은 구속 절반은 구원’은 박영덕의 문학적 명제가 배어있으며 그의 생의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박영덕에게 문학은 일상적 삶의 구속이면서 구원의 손길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구속은 구원을 낳게 될 것입니다. 흔히 문학 작품을 통해서 불멸의 글 한 편, 그 글을 통해 영생의 기쁨, 하고 말하는 분들이 있지만 박영덕에게는 그보다 구원이 더 중요한 명제인 듯싶습니다. 영생과 불멸이라는 말은 실은 끔찍한 말들이 아닙니까. 그것은 인간이 지닌 탐욕과 사유의 놀이가 빚어낸 그로테스크한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생전에 구원이라는 심적 해방감만으로도 문학은 그 얼마나 은혜로움이겠습니까. 박영덕의 문학적 자세는 구원을 위해서 구속까지 마다하지 않겠다는 진지한 문학적 태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이 소재로 삼은 것은 앞모습과 뒷모습이 함께 찍힌 사진 한 장입니다. 소재를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진지함과 철학적 사유가 묻어납니다. 그 사진은 그 무렵 마흔앓이를 심하게 하는 도중에 찍힌 사진이어서 남달랐을 것입니다. 앞모습은 현재의 모습이지만 뒷모습은 과거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을 함께 담곤 하지요. 박영덕은 그 사진을 보며 어느 쪽에 더 눈길이 쏠렸을까요. 아마 뒷모습이었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현재의 구속된 모습보다는 미래의 구원된 모습을 바랐을 테니까요. 또한 인간의 본질적 모습은 뒷모습에 더 진지하게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박영덕은 한때 마흔 살이 되면 괜찮은 인생이 펼쳐지리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기대로 어서 마흔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세월에 대한 믿음으로 40대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강물과 같은 평화를 가져다주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꿈꾸었던 40대는 실망이었습니다. 어찌 박영덕에게만 그랬겠습니까. 40대의 나이를 불혹이라 하건만 그건 공자와 같은 경지에 이른 자에게 적용되는 말이지 생에 대한 방황과 고통이 가장 심한 때가 아니던가요.
  기실 40대는 갈등의 세월이지요. 올라온 생만큼 다시 내려가야 하는 분기점이기도 하고요. 삶에 대한 회의가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하며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박영덕은 해야 할 일들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지고 미래에 대한 설계보다는 과거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어찌 그리움만 있었겠습니까. 앞날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이 삶을 뒷걸음치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생은 갈수록 경직돼 가고 타인과 부대끼기를 거부하는 완고함으로 자기 성 쌓기에 급급하게 되었겠지요. 박영덕은 그래서 50이 되기를 또 바랐습니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또 50대에 걸면서 말입니다. 
  이런 세대별 생의 부침과 매듭을 겪으면서 박영덕은 생의 중심점을 문학에 깊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흔에 들어선 그녀에게 글쓰기는 절반은 구속으로 다가왔고 절반은 구원으로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문학이 박영덕에게 운명인지 숙명인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구원이 될 거라는 믿음은 확실합니다. 문학의 치열성 때문에 고통을 겪고 생의 무늬닦기와 성찰을 위해서 무두질을 하다 보니 구속감을 느꼈을 것이고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한 삶의 활력을 문학에서 찾으려고 하니 문학은 자연 삶의 구원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한데 삶의 망루에서 내려다보니 영혼은 생기를 잃고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또 다른 자각이자 생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거울 속의 모습처럼 웃는 모습이라면 나머지 뒷모습은 잘 닦이고 빗질된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은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함께 문학에 대한 견고한 의지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박영덕 문학의 내공과 철학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박영덕이 문학 동네에 발목을 디민 때는 사십대였다고 술회를 합니다. 기대와 실망을 지닌 40대는 그래도 박영덕의 삶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행복한 때라 여겨집니다. 문학을 숙명처럼 만난 때였기 때문입니다. 삶의 길목에서 가슴을 움켜잡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난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것이 설령 고통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시기가 지내놓고 보면 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산 때가 됩니다. 결국 지내놓고 보면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안고가야 한다는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40대는 예배 같은 시간이었고 정화하는 기도의 때가 될 수 있습니다. 박영덕에게 40대는 구속이자 구원이었지만 문학의 힘은 40대에서 시작되었으니 60대가 돼서 망루에서 내려다본다면 박영덕에게 문학의 꽃은 찬란하게 다가오리라 여깁니다.
  박영덕에게 문학이 구속뿐이었다면 후배의 말처럼 절필했을 것이지만 구원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박영덕 문학의 열매는 갈수록 올곧고 단단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기계론적 세계관과 학습에 의해 상식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건너뛰었을 때 박영덕의 문학은 더욱 완숙되어 절정을 이룰 것입니다. 나아가 박영덕의 구원의 문학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독자를 위해서도 유효하리라 여깁니다. 문학은 현실의 제약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내일의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구원의 기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절제의 언어
 ‘파도의 언어’를 읽고 김상희가 단단하며 만만치 않은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희는 수필적인 언어는 아끼며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굳게 믿으며 여백과 함축의 아름다움을 수필의 미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당연하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또한 주변의 미세한 소리나 감각, 현상이나 사물에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고 소라고동처럼 눈과 귀를 열어놓고 사물과 현상을 받아들여 걸러내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미덥습니다. 단단한 작가정신과 치열한 수필정신으로 무장한 작가입니다.
  김상희의 ‘파도의 언어’는 작가 자신의 수필론이자 수필을 쓰는 사람들을 향한 조용한 외침입니다. 여운은 독자를 위한 배려이고 함축은 문학적 형상화를 위한 장치입니다. 산들바람이 무풍지대의 파도를 일으켜 먼 항해를 거쳐 동해의 남단 외진 바닷가에 도달해 ‘차알삭’하는 마지막 속삭임으로 남듯이 여백과 함축미를 지닌 수필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지만 글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하찮은 소재가 한 편의 글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파도의 언어’를 통해 구현해 놓고 있습니다. 즉 문학 작품을 통해 원초적 이미지를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변용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는 역동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삶과 자연의 현상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작가의 모습은 잡사만을 쓰려는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소재의 본질을 파고 내려가서 영혼과 만나려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가 엿보입니다. 소재는 늘 가시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김상희는 형체가 없는 바람에게도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람의 존재를 다른 사물을 통해서 보려는 소재 탐색의 진지함도 엿보입니다. 나뭇잎에서, 깃발에서, 눈송이의 원무에서도 소재의 변형된 모습을 보려는 작가의 소재잡기는 집요합니다. 또한 소재의 변형된 이면을 보려는 시선도 날카롭습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수필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사물만을 소재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김상희의 또 다른 작가적 힘이 엿보입니다.
  문학은 인간의 가치 있는 체험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문학은 인간계과 자연계 등 모든 것이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지만,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만으로는 문학작품으로 연결짓기에는 무리입니다. 소재를 통해 다른 이면을 유추하기도 하고 숨은 그림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통해 바닷새도, 달도, 외로움도, 포용도, 양보도 그려내야 합니다. 또한 바람을 통해 평화도, 공포도, 강인한 의지도, 아름다운 사랑도, 공포와 참상까지 보아야 합니다. 탐욕도, 천진무구도, 고운 마음씨도 읽어내야 합니다. 소재의 겉모습, 즉 작가의 가슴에서 발효되지 못하고 날것 그대로 밋밋하게 써지는 수필을 작가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한 주제에 대해 진지한 탐구를 착수하기 전에 그 주제를 비켜 바라보거나, 그것과 먼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광범위한 관점에서 뒤틀어보거나 꼼꼼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도에서 인 바람이 수많은 과정을 겪고 동해 바닷가에 도착해서 토해낸 말은 그저 ‘차알삭’ 한 마디뿐이어야 한다는 표현 속엔 언어의 절제와 내용의 함축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체험이 응축되고 미세한 감정과 예지가 융합된 가장 소중한 달관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파도는 한 마디 화두를 던지고 물러나는 여운을 독자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치밀하고 치열하며 융화된 언어로 발효된 체험을 절제의 언어로 표현해야 독자에게 울림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글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많은 수필가들에게 쉽게 언어를 부리지 말기를 에둘러 말하고 있습니다. 김상희는 수필의 언어를 체득한 작가로 제 멋에 겨워 아무렇게나 써내고 발표하는 일부 수필가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겸손하게 말입니다. 김상희의 다른 글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반의 언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의 작가 이정숙은 문학을 생의 도반으로 여깁니다. 문학 때문에 현실적 삶에서 욕심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으며 산통을 겪지만 이도 은혜라 여기고 운명처럼 받아들이겠다는 다부진 작가정신입니다. 다른 것은 대충하더라도 글쓰기만은 치열하게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삶의 갈증이 풀릴 것 같다고 여기면서요. 오랜만에 비가 오고 유리창을 말끔히 닦아내듯이 문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의 창을 응시합니다. 일상에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찾아보지만 언제나 그날이 그날인 것이 불만입니다. 소시민적인 닳아 가는 삶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불꽃이 튀는 정열적 삶을 꿈꾸어보지만 언제나 방황으로 끝이나 불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야무지게 살고 있는데 자신은 언제나 그 자리라고 자신을 탓하기도 합니다. 욕심뿐 주변에서 밀려나 변방을 떠돌고 있는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어찌 이정숙의 삶뿐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삶이 그렇고 조금 다른 삶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대동소이합니다. 이정숙의 이런 생각은 자의식이 강하고 문학에의 욕심이 불러온 치열한 실존적 인식 때문입니다.
  갈수록 생활에 자신감을 잃게 되자 이는 체계성 없는 생활과 게으름 때문에 쉬 기존의 안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기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활력을 일상보다는 문학에서 찾고자 합니다. 일상은 생존을 위한 일이고 문학은 스스로를 구원해 주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말 욕심내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하나만 선택한다면 단연 글쓰기라고 여깁니다.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며 스스로를 닦달하는 것은 역시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처럼 문학이 턱하니 안겨들지를 않습니다. 이는 여지없는 문학에의 짝사랑입니다. 작가는 이것이 그 동안의 글쓰기가 겉핥기였다고 스스로를 질책하게 됩니다. 글쓰기에 대한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쉽게 오아시스만 찾으려는 안이한 태도 때문이라 여깁니다. 노력을 하지 않고 능력 밖의 욕심을 부린 때문이라고 자신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작가가 자신 있게 내세울 일이라고는 개떡 찌는 일인데 단순한 이 일도 10년이 넘어서야 어느 정도 터득하지 않았던가요. 개떡 찌는 일도 이럴진대 고도의 정신작업인 문학은 얼마나 많은 고뇌와 문장 수련이 있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작가의 체험이 문학적 형식이나 방법에 따라 재구성되어 작품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점을요. 그래서 글 욕심 이전에 글을 쓰기 위한 바탕을 마련하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늘 밖에서 서성거리는 글감을 안으로 끌어들여 발효시켜 보려 합니다. 글쓰기가 녹록치 않음을 깨달은 겁니다. 아니 쉽게 글을 써 내놓을 수도 있으련만 작가는 수필에 치열성을 지니고자 합니다. 수필을 끌어안고 평생의 도반으로 여기며 문학을 운명처럼 주어진 숙제로 여기며 살려 합니다. 문학에의 길이 고통일지언정 은혜라 여기며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삶에 태클 거는 일도 참 많을 텐데 문학에 대한 태도가 참 열정적이고 진지합니다. 
  어찌 보면 수필쓰기는 생존에 비하면 사치이며 잉여일 수도 있습니다. 글보다 밥이 수필집보다 몸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밥과 몸이 수필쓰기의 토대가 되듯이 이제 이정숙의 글쓰기는 삶의 든든한 토대가 될 것입니다. 일상의 삶 위에 문학적 삶을 지향하려는 작가의 눈물겨운 고뇌와 다짐이 앞으로 그의 문학의 성을 밀도 있고 견고하게 쌓아 가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시련의 문턱을 건너면 문학이 고통과 구속에서 벗어나 삶의 활력과 재미를 주는 유쾌한 작업이라 여기게 될 날이 분명 오리라 믿습니다. 그때 가서는 그에게 문학은 유미적이고 자유로움으로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3. 나가기  
  위 세 작가의 글이 필자의 눈길을 끈 이유는 글쓰기의 진지한 자세와 어려움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분 다 여류들로서 수필쓰기의 고뇌와 자세를 쓴 글들이어서 꼼꼼히 몇 번씩 읽어보았습니다. 글의 미학적 구조나 내용과 문장에 앞서 견고한 글을 쓰기 위한 세 작가들의 내적 고뇌와 그 문학이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박영덕의 ‘절반은 구속 절반은 구원’, 김상희의 ‘파도의 언어’, 이정숙의 ‘내가 하고 싶은 것’ 세 편은 글쓰기가 자유롭고 유쾌한 삶의 구속이 되기도 하고 구원이 되기도 하지만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수필을 생의 도반으로 여기며 평생의 반려로 삼겠다는 다부진 작가 정신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들의 말처럼 수필은 작가에게 구속과 구원도 되고,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는 도구도 되며, 생의 도반으로 동반자가 되기도 합니다. 어찌 이들뿐이겠습니까. 많은 수필가들이 밥이 되지도 못하는 수필쓰기에 날밤을 바치는 것도 바로 이점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수필가들의 폭발적 증가로 내 멋과 맛에 쓴 글을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내보내 그야말로 문학작품인 수필은 쓰러지고 허명뿐인 수필가란 이름만 남기는 사람들이 많은 이 때, 이러한 견고한 문학정신은 귀하디귀한 문학적 자세들임에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세 분 여류의 짱짱하고 단단한 문학적 삶과 문학에의 치열한 정신은 독자들에게 수필의 격을 높여줄 것이며 이들이 써 낸 글들은 분명 수필의 문학성을 충분히 갖추리라 믿습니다. 세 분 여류의 문학적 정신과 자세에 경의를 표하며 앞날의 문운이 창대하기를 바라며 다음 글을 기대해 봅니다.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수필문학은 항간에 그것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란 그릇된 이해와 인식을 가져 왔다.
그것은 수필을 사전적 의미에만 국한하여 ‘붓 가는 대로’의 정도로만 이해하여 왔거나 또는 ‘어떤 주의가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 이라든지 ‘그때그때 본대로 들은 대로 붓 가는 대로 적어낸 글’이라고 하는 사전적 의미에 매달려 왔던 것이 사실이다.
수필 어원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최초 문헌으로 중국 남송 때의 홍매에 의해 정의된 용재수필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이 용재수필에서 ‘나는 게으른 버릇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으나, 그때그때 혹은 뜻한 바 있으면 곧 기록하였다. 앞뒤의 차례를 가려 갖추지도 않고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수필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양에서 에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자기 작품에 붙인 이는 프랑스의 몽테뉴다.(Les Essais : 수상록 1580) 그 후 2년 뒤 영국의 베이컨에 의해 에세이가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필의 개념을 사전적 의미에서만 국한하여 해석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광섭은 그의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오늘까지의 위대한 수필문학이 그 어느 것이 비록 객관적 사실을 취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닥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히 짜아 내는 심경적이 아니요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라고 수필을 정의 내린 바 있다.
바로 이러한 김광섭의 정의에서 일부 사람들이 자구 해석에 급급하여 수필 문학의 성격을 호도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철의 말(문학개론 p353) 대로 ‘수필은 산문으로 씌어진 문학이며 그것이 아무리 무형식이고 개인적이라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우성(對偶性)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이 수의수제(隨意隨題), 또는 자조(自照)의 문학이니 하는 바와 같이 자유로운 산책이거나 그때그때 뜻한바 있으면 앞뒤의 차례를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바로 메모하여 놓은 것 정도로 정의 할 수 있을 것인가는 다시 한번 음미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상렬은 (수필 창작과 읽기)이러한 수필의 개념상 해석의 호도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수필이 문학임에 틀림이 없다면 그것이 어찌 붓 가는대로 씌어질수 있을 것인가? 또 실제로 붓 가는 대로 씌어진 글을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천래의 영감을 지닌 작가라 할지라도 그저 붓 가는 대로 쓴 것이 한편의 완벽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김광섭교수나 김진섭교수 그리고 피천득의 수필에 대한 정의를 수필문학이 여타의 장르와 달리 자연스러움과 진실성을 요구한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형식적 제약을 무시한 글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견해가 수필문학의 정의인 듯 오해를 불러온 것은 진정한 수필의 개념 파악도 없이 표피적 해석에 그쳤던 논자들이나 작가들의 잘못된 인식의 탓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결국 수필문학은 평범 속에서 비범함, 그리고 평이함 속에 어려움, 자연스러운 가운데 세련됨, 거침없는 듯 하면서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문학이라 할 것이다.
필자도 이 말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향금 횡행하고 있는 신변잡기식의 글이나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난무하고 있는 작금의 수필문단의 공해성에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따라서 수필을 쓰고자 하는 작가는 우선 이러한 신변잡기식의 공해에서 탈피하여 근원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원형을 탐색하고 천착해야만 할 것이며 보다 진솔한 자기성찰과 고뇌에 찬 직관과 깊은 관조가 있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에게 감동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손가락 끝에서 부려지는 기교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쓰는 글이어야 할 것이며 어느 누가 읽어도 은은한 감동으로 여울져 오는 글이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 편의 수필은 그 속에 작가 자신의 인생관이 담긴 비평정신이 깃들어야 할 것이며 작가자신 해박한 지식과 넉넉한 정서와 문학적 감성, 그리고 사상이 깃들어야 할 것이다.
흔히들 범람하고 있는 자신의 신변 잡기성 자랑거리의 나열과 넋두리의 나열, 입심 좋은 사람들의 푸닥거리의 장이 되어서는 더욱이 안 될 것이며 음담패설이나 상대방의 약점이나 잘못됨을 물고 늘어지는 독설과 아집의 사설장이 되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수필들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신변잡기적이라고 비하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독자는 한편의 수필이 작가 자신의 현실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상의 의미화 과정과 내적 승화를 통해 완성된 작품을 읽음으로써 작가 자신의 주장과 공명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필 개론 (隨筆槪論)

[1]. 수필의 본질

1. 수필의 정의
수필은 인생이나 자연에 대하여 느낀 바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부담 없이 산문으로 쓰는 글이다.

2. 수필의 어원
(1) 중국에서의 어원 : 남송시대의 홍 매(洪邁; 1123∼1202년)가 '수필(隨筆)'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그의 저술'용재수필(容齋隨筆)'의 서문에서, 저술 제목에 '수필'이란 말은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습성이 게을러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썼기 때문에 수필이 라고 한다."

(2) 서양에서의 어원
①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수필이라는 용어는 영어 '에세이(essay)'를 번역해서 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essay'는 'assay'에서 비롯된 말인데, 'assay'는 '시금(試金)하다', '시험하다'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또 이 'assay'는 프랑스 어'essai'에서 왔으며, 'essai'는 '계량하다','음미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exigere'에 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② 이러한 뜻의 '에세이'라는 용어를 실제 작품에 처음 쓴 사람은 몽테뉴다. 몽테뉴는 1580년 'Les Essais(수상록)'라는 수필집을 출판하였다. 현재 사용하는 에세이라는 용어는 몽테뉴로부터 비롯된다.

3. 수필의 역사
(1) 서구
① 근대 이전 : 고대에는 플라톤의 '대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등에서 수필 형식을 찾을 수 있으며, 본격적인 수필은 16세기에 들어와 몽테뉴의 '수상록(隨想錄 Les Essais)'에서 시작되어서 베이컨으로 이어진다.
② 근대 : 18세기에 영국의 수필가 차알스 램의 '엘리아 수필'과 해즐리트의 '탁상담화(卓上談話 : Tavle Talk)'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2) 우리 나라
① 고려 시대 : 이제현(李霽賢;1287∼1367)의'역옹패설(轢翁稗設)',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백운소설(白雲小說)' 중의 일부에서 수필 형식의 글을 찾을 수 있다.
② 조선 시대 : 조선 시대에는 수필 형식의 글이 문집속에 잡설(雜說), 만필(漫筆)등의 용어로 많이 쓰여졌는데, 문헌상 '수필'이란 용어가 보이는 것은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속에 '일신수필(일신수필)'이란 말이 들어 있는 것이 최초이다.

4. 수필의 특성
(1) 자유로운 형식 : 형식이 다양하다는 뜻이며,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수필은 무형식의 자유로운 산문이다. 이것은 수필의 특성을 말할 때에 누구나 가장 먼저 말하는 것으로, 수필은 구성상의 제약이 없이 자유롭게 쓰여지는 산문임을 뜻한다. 수필은 일기체, 서간체나 담화체로도 쓰이며, 그 밖에 갖가지 산문으로 쓰여진다. 내용면에서도 인간이나 자연에 관한 어느 것 한 가지만을 다루는 수도 있고, 여러가지를 생각나는 대로 토막토막 다루는 수도 있다. 수필 작품에 '단상(斷想)','편편상(片片想)','수상(隨想)'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 것은 수필 문학의 이런 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2) 다양한 소재 : 인생이나 자연 등 소재를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다.
수필 문학은 그 소재가 대단히 광범위하다. 수필은 그 작자가 인생이나 사회, 역사, 자연 등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느낀 것, 생각한 것을 무엇이나 다 그때 그때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자유자재로 서술하는 것이므로, 그 소재는 대단히 다양하다.

(3) 개성적 고백적인 글 : 글쓴이의 개성과 적나라한 심성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문학이다.
수필의 내용은 다분히 주관적, 주정적이고, 독백에 가까운 것이 많다. 수필의 대부분은 작자 자신의 생활이나 체험, 생각한 것이나 느낀 것을 붓 가는 대로 솔직하게 서술한 글이다. 따라서,주관적, 주정적이고 독백에 가까운 것이 많으며, 이로 인해서 수필 작품에는 작자 자신의 인생관이라든가 사상이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수필을 가리켜 '개성의 문학'이라고도 말하는 것은, 이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수필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아무리 그 길이가 짧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매우 심오한 것, 광범위한 것이 많다.

(4) 심미적 철학적인 글 : 흔히 글쓴이의 심미적 안목과 철학적 사색의 깊이가 드러나는 글이다.
현대에 와서는 어떤 문학 양식이든지, 그 제재에 구속을 받는 일이란 거의 없다. 삼라 만상이 다 문학의 제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재가 다른 문학 양식에서는 기법과 융합되어 함축적어어야 하지만, 수필의 제재는 생생하고 단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수필이라는 이름 아래 과학론, 철학론, 종교론 등을 피력할 수도 있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을 고백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수필의 제재는 무한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모든 제재가 그 자체로 수필이 될 수는 없고, 거기에는 지은이의 투철한 통찰력, 달관에 의한 독특한 기법 그리고 문장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5) 유우머 위트 비판 의식이 요구되는 글 : 때론 글쓴이의 유우머와 위트와 비판 의식이 나타난다.
유우머, 위트, 비판 정신, 이런 것들은 다른 문학 양식에서도 나타나지만, 어떤 사건의 구성이 없는 수필에서는 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유우머나 위트는 수필의 평면성, 건조성을 구제해 주는 요소이며, 비평 정신은 수필의 아름다운 정서에 지적 작용을 더해 주는 요소이다.

(6) 간결한 산문의 문학 : 수필은 간결한 것이 특색이며 산문으로 씌어진다.
수필은 비교적 길이가 짧은 산문이다. 근래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수필 작품의 길이는 2백 자 원고지로 5매 정도에서 10여매 정도인 것이 많다. 산문 문학의 다른 쟝르에 속하는 작품들, 예컨데 소설 작품이 2백 자 원고지로 짧게는 몇십 매에서 길게는 몇천 매에 이르는 것을 보면, 수필은 대단히 짧게 씌여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7) 비전문성의 문학 : 생활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오늘날 문학의 여러 쟝르 가운데서 수필 문학은 가장 대중적이다. 근래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필 자굼의 예를 다시 들어 보면, 전문적인 문학인의 것보다 비전문적인 필자들의 것이 훨씬 더 많으며, 독자들 또한 어떤 특수한 분야나 계층의 사람들이 아닌 대중이다. '수필'하면 대개는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5.수필의 요건
(1) 수필은 자연 발생적이고 지속적인 관찰력을 필요로 한다.
(2) 사색과 명상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사색의 체계이다.
(3) 가치 감각과 느낌, 공감력을 가져야 한다.
(4) 개성의 발로이되, 겸허하고 품위 있는 개성의 반영이다.
(5) 수필은 문학성을 지녀야 한다.


[2] 수필의 내용

1. 수필의 내용
(1) 일상 생활, 자연 및 사회 현상에 관한 관찰과 생각, 느낌 등.
(2) 독자는 위의 것들에 관한 정보(지식)와 교훈, 정서를 얻는다.
(3) 수필의 내용에는 감동과 해학이 따른다.

2. 수필의 소재
(1)체험(體驗) : 생활해 가면서 특별히 겪은 일. 예) 여행, 사랑, 직업, 학업 등.
(2)관찰(觀察) : 무엇에 대하여 유심히 살핀 일이나 대상. 예)사회, 자연, 환경 등.
(3)독서(讀書) : 책을 읽고 느낀 내용이나 방법. 예) 독서론, 독후감(독서 감상문) 등.
(4)사고(思考) : 인생이나 가치관에 대하여 생각해 낸 일. 예)죽음, 인생, 종교 등.


[3] 수필의 갈래

1. 수필 문학의 분류
한 마디로 수필 문학이라고는 해도,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로 세분해서 말하게 된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옛 한문 수필 작품에 있어 기(記), 록(錄),문(聞), 화(話)등,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의 말이 쓰인 것도, 이를테면 수필 작품을 세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흔히 경수필(輕隨筆:informal essay 또는 miscellany)과 중수필(重隨筆:formal essay)로 구분하였다.

2. 수필의 종류

(1) 태도상의 종류
① 경수필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미셀러니(miscellany). 감성적, 주관적 성격을 지니되, 일정한'주제보다 사색이 주가 되 는 서정적 수필이다. 비정격 또는 비격식 수필이라고도 한다.
예) 정비석의 '들국화' 등.
② 중수필
포멀 에세이, 에세이, 지성적, 객관적성격을 지니되, 직감적, 통찰력이 주가 되는 비평적인 글로서, 논리적, 지적인 문장이다. 정격 또는 격식수필이라고도 한다.
예) 조연현의 '천재와 건강' 등.


(2) 내용상의 종류
① 사색적 수필(思索的隨筆) : 인생의 철학적 문제를 다룬 글이나 감상문 따위.
② 비평적 수필(批評的隨筆) : 작가에 관한 글이나,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소감을 밝힌 글.
③ 기술적 수필(記述的隨筆) : 주관을 배제하고 실제의 사실만을 기록한 글.
④ 담화 수필(譚話隨筆) : 시정(市井)의 잡다한 이야기나 글쓴이의 관념 따위를 다룬 글.
⑤ 개인적 수필(個人的隨筆) : 글쓴이 자신의 성격이나 개성, 신변 잡기 등을 다룬 글.
⑥ 연단적 수필(演壇的隨筆) : 실제의 연설 초고는 아니나, 연설적, 웅변적인 글.
⑦ 성격 소묘 수필(性格素描隨筆) : 주로 성격의 분석 묘사에 역점을 둔 글.
⑧ 사설 수필(社說隨筆) : 개인의 주관이나 의견이긴 하지만, 사회의 여론을 유도하는 내용의 글.


[4] 수필의 구성

1. 수필의 구성
(1) 3단 구성 : 서두(도입, 起)+본문(전개,敍)+결말(結)[중수필의 경우]
(2) 4단 구성 : 기(起)+승(承)+전(轉)+결(結)[중수필의 경우]
(3) 자유구성 : 자유로운 구성[경수필의 경우]

2 수필의 짜임
(1) 직렬적(直列的)인 짜임
'A→B→C →주제'와 같이 수필의 각 부분인 A,B,C 등이 인과(因果)나 시간적 순서, 공간적 순서 등의 유기적인 관계에 놓이는 짜임이다.
이 짜임의 전형은 '서두 본문 결말'로 짜이는 3단 구성인데, 가운데 부분인 '본문'은 또 몇 부분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2) 병렬적(竝列的)인 짜임
'A+B+C →주제'와 같이 수필의 각 부분인 A,B,C 등이 서로 유기적 관계가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주제에 봉사하는 짜임이다.
이 짜임은 연시조의 짜임과 같은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리를 바꾸어 놓아도 주제에 봉사하는 기능은 마찬가지가 된다.

(3) 혼합적(混合的)인 짜임
'A→B+C→D →주제'나 'A→B+C→D→E + F→G 주제'와 같이 직렬적인 짜임과 병렬적인 짜임이 한 편의 수필에 섞여 있는 짜임이다.
이 짜임은 전체적으로는 직렬 구성이나 일부는 병렬 구성으로 된 경우와 전체적으로는 병렬 구성이면서 그 부분 하나하나는 직렬 구성으로 된 경우 등이 있다.


[5] 수필의 진술 방식

진술 방식의 면에서 보면, 수필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된다. 즉, 교훈적(敎訓的) 수필, 희곡적(戱曲的) 수필, 서정적(抒情的) 수필, 서사적(敍事的) 수필로 나눌 수 있다.

1. 진술 방식에 의한 수필의 종류
(1) 교훈적 수필
필자의 오랜 체험이나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수필.

<특징>
수필로서는 그 내용이라든가 문체가 다 같이 중후하며, 필자 자신의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신념과 삶의 태도 등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유의점>
수필 문학에 있어서의 교훈적인 경향은 이른바 교훈주의를 생각하게 한다. 즉, 문학 예술은 독자에게 쾌락보다는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창작된다고 보는 일종의 공리설(功利設)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시나 소설에서처럼 수필에 있어서도 이런 교훈적인 경향에 있어서는 자칫 예술성을 소홀히 하게 되는 예가 많다.

<교훈적 수필의 예>
소(牛)의 덕성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본받을 것을 권장한 이 광수의 '우덕송(牛德頌)'.
일제 치하라는 30년대의 암담한 시점에서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우고 있는 심 훈(沈熏)의 '대한의 영웅'
나무의 덕성을 찬양하면서 인간이 그것을 배울 것을 강조한 이 양하(李敭河)의 '나무'
혼란한 사회에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는 태도를 제시한 이 희승(李熙昇)의 '지조(志操)' 등.

(2) 희곡적 수필
필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체험한 어떤 사건을 생각나는 대로 서술하되, 그 사건의 내용 자체에 극적인 요소들이 있어서, 대화나 작품의 내용 전개가 다분히 희곡적으로 이루어지는 수필.

<특징>
사건의 전개가 소설에서처럼 유기적, 통일적인 진행을 이룬다. 그리고,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문장에 있어 극적 현제의 시제가 흔히 쓰인다. 즉, 현제 시제를 사용한다.
필자가 어떤 곤란을 겪게 될 때나 슬픈 일을 겪게 될 때,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보여 주는 점에서 각별한 흥미를 끈다.

<희곡적 수필의 예>
자신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기이했던 탓으로, 어떤 낯 모르는 여인에게 자칫 불량배로 오해받을 뻔한 수모를 당한 체험담을 쓴 계 용묵(桂鎔默)의 '구두'.
낯선 산에서 길을 잃고 죽을 뻔한 조난의 체험을 쓴 이 숭녕(李崇寧)의 오봉산 등산기 '너절하게 죽는구나'.
김 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 등.

(3) 서정적 수필
일상 생활이나 자연에서 느끼고 있는 감상을 솔직하게 주정적,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수필.

<특징>
문장은 흔히 서정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서정의 내용은 정서, 즉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 이라고도 설명된다.
교훈적 수필에 공리성이 강하다면, 서정적 수필에는 예술성이 강하다. 그것은 작자의 의도가 자기의 정서적 경험을 독자에게 전달해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으므로 표현에서 주로 기교에 유의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서정적 수필의 예>
이 효석의 '청포도(靑葡萄)의 사상(思想)', '화초(花草)', 이 양하의 '신록 예찬(新綠禮讚)', 김 진섭의 '백설부(白雪賦)', 이병기의 '백련(白蓮), '난초(蘭草)' 등.

(4) 서사적 수필
인간 세계나 자연계의 어떤 사실에 대하여 대체로 필자의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수필.

<특징>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 또는 현실에 가까운 것인가, 서술이 얼마나 정확한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이런 작품을 쓰려면 평소의 날카로운 관찰, 세심한 조사,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서사적 수필의 예>
유명한 작품으로 최 남선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覲參記)' '심춘순례(尋春巡禮)' 이 광수의 '금강산 유기(金剛山遊記)', 이 병기의 '낙화암을 찾는 길에'. 김 동인의 '대동강', 노 천명의 '묘향산 기행기' 등이 있다.
이 밖에 필자 자신의 학문에 대해 다양하게 술회하고 있는 양 주동의 '연북록(硏北錄)', 옛날의 선비들에 대해서 뛰어나게 묘사한 이 희승의 '딸깍발이'등이 서사적 수필로 분류된다.


[참고] 김광섭(金珖燮) - 「수필 문학 소고(小考)」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고,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위대한 수필 문학이, 그 어느 것이나 비록 객관적 사실을 다룬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딪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하게 짜내는 것이라기보다,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동일한 작자에 의해 씌어졌다 하더라도, 그 태도가 각각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이나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비롯되며, 소설과 희곡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을 바탕으로 한다.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을 때, 수필은 제작되는 것이다. 제작이라고 하나,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요, 결과적 현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논리적 의도에서 제작된 일은 없다. 수필은 써 보려는 데서 시작되어 자연스럽게 씌어진 글이다.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글을 써 보고자 하는 한가로운 마음으로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의식적으로 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試筆)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필은 수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가 운율적, 정서적이요, 희곡이 조직적, 활동적이라면,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형식에서 보면, 수필에는 시나 소설이나 희곡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어떤 완성된 형식이 없다. 단편 소설을 제작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에드거 앨런 포나 안톤 체흡이나 혹은 모파상에게 잠시라도 사숙하여야 하겠고, 시나 희곡을 지으려면 괴테나 셰익스피어나 혹은 입센등을 통해 그 완성된 형식을 한번 살펴볼 아량쯤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필에 있어서 그 형식을 구하거나 참고하려고 찰스 램이나 해즐리트를 찾을 필요성까지는 없을 것같다.
가장 아름다운 수필을 찾아 우리의 문학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점은 찬(讚)하여 마지아니할 바이나, 그 형식의 섭취에 구속될 바는 없는 것이다.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 붓을 잡아야 한다.
한가로운 기분을 지니면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한 편의 문장을 쓸 때,그것은 곧 수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 이것은 수필의 운명이요, 또한 성격이다.
한 시대나 한 세기의 시, 소설, 희곡은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아, 개괄적으로 몇 가지의 주류로 나누어 논할 수 있다. 그것은 이들 문학 형태가 모두 시대 사조나 사회 의식에 연결되어 발전, 쇠퇴하는 특징을 가진 까닭이다. 하지만 수필은 생활 단면에 부딪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렇게 커다란 조류를 따르지 않는다. 가을 밤 무심히 잡은 펜으로 가지가지의 아름다운 서정을 느끼는 대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소하나마 매력 있는 제목을 붙잡고 시종이 없을 드한 기분으로 표현, 향락할 수도 있겠고, 야시의 풍경에서도 흥미진진한 글 한 구절은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필은 참고서를 구하거나 지식의 정돈을 요할 바는 아니지만, 어딘가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수필은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다다러하도,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천성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속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필은 그저 무미 건조한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유머와 위트가 수필의 속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솜씨 좋게 짜여서 섬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위대한 문학으로서의 수필에는 유머와 위트가 수필의 속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솜씨 좋게 짜여서 섬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위대한 문학으로서의 수필에는 유머와 위트가 혼연히 숨어 있어서, 더욱 우리를 매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결국 사람에게서 생겨서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소설이나 희곡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수필보다 우월하며 향상성이 많다거나, 혹은 수필이라는 산만하여 보이는 어의에서 오는 선입견때문에, 그것이 발전성이 적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어떤 사회이건 그것이 인간의 사회요 인간으로 구성되는 이상, 수필은 전인격적 표현의 문학으로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것이다. 수필은 개성적 심경과 기분에 싸여서, 어떠한 대상이나 또는 문제를 간단하게 단편적으로 그리면서도, 진지하게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그 내용이 정치 경제로 향하든지 사회 문제나 생활 개선으로 향하든지, 그것은 평론의 논리성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평론이 가질 수 없는 깊은 영역을 포괄한다. 그리고 수필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완성을 기다리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그 자체로서의 완결된 형태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인간에 있다면, 자연스럽게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학 형식은 수필을 두고 달리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수필의 맛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자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인간의 생활이란, 요컨대 수필의 심경에서 성숙된다. 다시 말하면, 생활은 시와 산문의 조화를 통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으로 볼 때 곧 수필이 된다. 그러므로 수필의 성격은 인간의 성격이라 하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바로 잡아야 할 수필의 개념 (鄭木日)

수필의 개념과 성격에 대한 정의(定義)로 고정 관념화 돼온 것들이 있다. '여기(餘技)의 문학', '붓가는 대로 쓰는 글', '산만과 무질서, 무형식의 글', '40대의 문학'등이다. 그러나, 현대에도 수필에 대한 이같은 개념들이 타당성을 갖고 있는가, 재점검해 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수필의 개념들은 30년대에 정립된 것으로,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여기(餘技) 삼아 수필을 써 왔던 때에 이뤄졌다. 당시엔 본격적 문학의 대상이 아니라, 여유가 있으면 쓰는 '붓가는 대로 써지는 글' 쯤으로 가볍게 인식하였던 게 사실이다.

문학평론가 조연현(趙演鉉)씨가 수필은 '비전문 문학'이다 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문단에 수필가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신춘문예, 종합 문예지들이 문단 데뷔 종목에 '수필'을 포함시켜 전문 수필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 시점(時點)은 우리 수필문학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종전까지 '주변문학', '아웃사이드 문학' '비전문 문학' '여기의 문학'으로 수필을 경시해 오던 문단의 인식변화를 보여준 것으로 대등한 문학 장르로서 공인하는 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현대의 다양한 삶의 양식, 고학력화 속에서 생산자인 작가와 소비자인 독자로 나눠졌던 엄격한 구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문 직업인들과 독자들도 자신의 삶을 기록하거나 작품화하여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애매해지면서 생활 속의 문학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추세 속에서 픽션보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논픽션인 「수필」이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게 되었다.

수필이 대중적인 문학, 삶의 문학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현대인들의 자의식이 높아진 점, 시와 소설의 중간 위치에서 양 장르의 장점을 취하면서 대중들의 구미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시의 압축, 비유, 절제, 리듬을 살리면서 소설의 사실, 설명, 묘사, 구성법을 활용하고 시의 난해성과 의사 전달력의 취약성, 소설의 읽기의 시간 부족에서 벗어나 적당한 독서물로써 '수필'이 대중 속에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수필문학은 「여기(餘技)의 문학」 「주변문학」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삶과 직결된 문학 장르로서 자리 매김과 함께 미래문학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수필의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향상이 따르지 못한 점, 수필문학을 본격적 문학으로 보지 않는 문단의 사시적 시각을 바로 잡지 못한 데 대해서는 수필문단은 진지한 성찰과 각성이 필요하다.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투철한 작가 정신, 치열한 창작열, 전문성 등과 함께, 고정 관념화 돼 온 수필의 개념 및 정의에 대해 과감한 수정과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첫째, 수필은 「여기의 문학」이 아니다.

수필은 '여기의 문학'이라 했던 것은 농경시대의 사고(思考)이며, 당시 시, 소설, 평론을 썼던 문인들이 본업 외 시간이 날 때, 여기로 수필을 써 왔기에 어느새 '수필=여기의 문학'으로 굳어진 것이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수필가가 배출되기 시작했고 오늘의 수필가들은 '여기'로 수필을 쓰고 있지 않다. 시와 소설이 치열한 삶과 다양하고 복잡다난한 시대상, 사회상을 수용하는데 비해, 수필이 다소 느긋하게 한 걸음 물러서 인생을 바라보는 면도 없지 않으나 종전처럼 '여기의 문학'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수필도 시와 소설처럼 치열성, 실험성, 본격성, 전문성, 개성, 참신성을 추구해 나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여기(餘技)의 문학'으로 안주한다면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무한경쟁과 무한 변화 속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현대에서 「여기」로 멈춰 있는 것은 생존 이유를 상실하는 것과 다름없다. 시대상과 삶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수필은 더욱 치열성, 전문성, 본격성, 개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김광섭 「수필문학 소고」) 이라는 개념은 수정돼야 한다.

이와 같은 개념은 '隨筆'이란 어원의 해석에서 나온 말이 굳어진 것이다. 수필을 '여기의 문학'으로 알던 농경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물론 수필의 형식상 자유스러움을 말하는 부분이 있지만, '마음대로 쓴 글' '아무렇지 않게 쓴 글' 로 인식되어 수필을 폄훼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오랜 인생수련과 습작을 통해 고도의 구성과 표현 기법과 질서를 획득하여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써 내려가는 경지의 글을 말한다. 그럼에도 누구나 쉽게 마음 내키는 대로 쓰면 수필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인식하여, 수필을 경시하는 풍조를 불러왔다. 수필은 소설, 희곡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이다.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은 산만, 중복, 과장이 있기 쉽다. 수필은 짧은 글이기 때문에 보다 치밀, 함축, 사색을 요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수필은 '산만과 무질서, 무형식의 글'(김진섭「수필의 문학적 영역」)이 아니다.

시와 소설은 허구(픽션)의 세계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논픽션)의 세계이다. 진실을 생명으로 삼는다. 작가가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쓰기 때문에, 상상력과 허구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시, 소설에 비해. 더욱 적나라하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명쾌하고 절서 정연하기는 쉬워도 '산만하고 무질서하다'는 말에는 설득력이 없다. 본격 수필 시대에 '산만과 무질서'를 수용할 수필가가 있을지 의문이며, 이는 농경시대 '여기(餘技)의 문학'이라고 인식할 때의 개념인 것이다. '무형식의 글'이라는 개념도 수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시, 소설, 희곡에 비해 엄격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스런 표현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지, '무형식'은 아닌 것이다.

수상, 일기문, 서간문, 기행문, 칼럼 등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글들이 많아서, 일일이 형식을 정해 엄격히 적용시키기보다는 작가에게 창의성과 자유성을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상, 일기문, 서간문, 기행문 등이 '무형식의 글'은 아니다. 형식과 구성이 있으되, 엄격한 형식의 틀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넷째, 수필은 '40대의 문학이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피천득씨는 「수필」이란 글에서 '수필은 서른 여섯 고개를 넘어선 중년 여인의 글'이라고 했다. 또한 수필을 가르켜 '40대의 문학'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수필이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형상화하는 문학임을 들어, 다양한 체험과 인생적 경지를 담기 위해선 40대가 돼야만 비로소 좋은 수필을 낳을 수 있는 연령이 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해석에 수긍하면서도,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 없어야 하며 '40'로 한정하여 고정관념화 해선 안될 것이다.

10대의 순수, 20대의 감수성, 30대의 정열은 수필의 소중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또 수필에 대한 개념으로 '청자연적'이 있다. 피천득씨가 자신의 수필론을 전개한 '수필'에서 수필을 '청자연적'에 비유하였다. 수필을 도자기예술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청자연적'에 비유한 것은 기능과 깨달음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에서 피워 올린 꽃으로 생각한 까닭에서다. 수필의 참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한 빛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피천득씨의 수필관(隨筆觀)이다. 수필 '토기 항아리', '유리 그릇'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다양성을 해치는 요소가 된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라는 말은 수필의 고귀함과 높은 경지의 문학임을 일깨워 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청자연적'은 피천득씨의 추구 목표이자, 개성으로 보아야 한다. 수필을 쓰는 모든 사람이 '청자연적'을 수필쓰기의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발견과 깨달음을 최대한의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최상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작업이 수필쓰기의 방법이 돼야 한다.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바르지 못한 수필의 개념들을 깨트려야 한다.
낡은 틀을 벗어 던져야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수필사기론(隨筆四忌論)    권대근(수필학박사,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
1.
글을 쓴다는 것에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술성이란 의미의 각색이다. 작가의 인식이 녹아 있는 메시지의 미적 조형성이 결국 본격적인 수필의 격을 결정짓는 축이다. 이것은 단순한 직관이나 관찰로는 수필이 일상성을 못 벗어난다는 의미다. 문학성은 제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얼마나 개성을 참신하게 탄력적으로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지적 치열성도 요구된다. 의미를 논리적으로 정돈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객관적 지식이 배제된 감성이 주된 역할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좋은 수필을 쓰는 사람은 거의 계속 좋은 수필을 쓴다. 왜 그렇까. 이들은 잘 피하기 때문이다. 폭풍이 불면 고개를 숙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재앙을 잘 피해 나가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본격수필 쓰기도 마찬가지라 본다. 무엇보다도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인식 활동이 수필가에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본고는 ‘본격수필유사기本格隨筆有四忌’, 즉 본격수필은 네 가지를 기피한다는 관점에서 집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詐欺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기’란 남보다 먼저 보고, 남보다 깊이 보고, 남이 드러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삶, 그리고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빚어지는 ‘사기’다. 자의적인 뜻의 속임수가 아니라 예술의 창의적 속성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필자는 감히 “수필도 사기四忌다”라고 말하고 싶다. 수필은 본질적 속성상 네 가지를 기피한다는 점에서 분명 사기四忌다. 그 첫째가 ‘格弱’이고, 둘째가 ‘理短’이며, 셋째가 ‘才浮’이고, 넷째가 ‘意雜’이다. 이름하여 ‘본격수필유사기本格隨筆有四忌’란 본격수필론이다.
  
 
첫 번째로 피해야 할 ‘격약格弱’이란 수필은 품위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의미다. 수필에 있어서 품위는 작가의 인격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김광섭은 <수필문학소고>에서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격’은 품격을 말한다. 수필은 작가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품위를 잃으면 결정적인 타격이 된다. 따라서 수필은 필자의 자질이 중요시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나 소설의 경우에는 생산적 상상을 통하여 허구적 언어로써 집을 짓기 때문에 작가의 인격적인 문제와 직접적인 상관성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수필의 경우는 생산적 상상으로 허구적 언어의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심적 나상, 즉 마음의 옷을 벗는 것처럼 작가 자신의 신변잡사라든지 미묘한 심리 세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수필의 소재나 제재 등의 취사 선택에 따라서 작자에게는 치명적인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비구니가 사는 절에 반바지를 입고 경내를 거닐다 연세 지긋한 여승으로부터 혼이 난 적이 있다. 품위를 지키지 못한 탓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고궁의 뜰을 거닐기 위해서는 우선 의상부터가 우아해야 하고, 걸음걸이는 덤비거나 허둥대는 법이 없이 여유 있고 맵씨있게 걸어서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일 요새 젊은이들처럼 배꼽이 드러나 보이는 배꼽티를 입고 흔들거리거나 건들거리면서, 또는 껍을 씹기도 하고 뱉아 가면서, 그렇게 히히덕거리면서 고궁의 뜰을 내달리는 식으로 수필을 쓴다면, 우성 품위를 잃기 때문에 독자로부터 외면당할 뿐 아니라 그 천박스러움이 작가의 인격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또 품위 있는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품위 있는 글을 많이 읽어서 고상하고 품위 있는 인품을 길러가면서 품위를 잃지 않는 글을 쓰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시법에 '격약 불로' 格弱不老란 말이 있다. 수필은 품격이 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윤오영은 내용이 저속한 글을 속문이라 하고, 문장이 좋지 않아 표현이 졸렬한 글을 악문이라 했다. 속문과 악문이 결합된 수필을 맹수필이라 부르면 어떨까? 수필의 시대에 수필로서의 격을 갖추지 않은 맹수필류의 글이 넘치는 것은 아마도 수필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인 듯싶다. 수필이 대중화되는 추세에 따라 수필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은 좋으나 격이 낮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수필의 격이 낮아지는 요인은 수필가에게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쓰는 사람보다 편집자, 독자, 비평가에게 더 책임이 크지 않을까. 특히 비평가의 책임이 막중하다 할 것이다. 수필의 격을 냉정하게 재단해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리라 본다.
  
 
두 번째로 피해야 할, ‘이단’理短이란 이치가 짧은 걸 수필은 기피한다는 의미다. 이는 수필가에게는 지성이 요구된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비평가인 알베레스는 수필을 가르켜 “지성을 바탕에 깐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고 했다. 이 말은 백번 타당한 말이다. 짤막한 이 말에 ‘지성’과 ‘정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지적 욕망이 있다. 수필이란 마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에 내적인 지, 정, 의가 외적인 진, 미, 선 또는 의, 인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을 통찰하고 달관하는 경지나 여과되거나 뱔효된 정서로서 얻어지는 멋스러움이나 맛스러움이라든지, 재기 발랄한 유머와 위트, 날카롭게 찌르는 풍자 등 지성이 세련되게 번득여야 한다. 짧은 산문 속에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든지 그 무슨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흐뭇한 유머나 재치있는 위트라든지, 날카로운 지성적 통찰력과 찌르는 듯한 풍자, 또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페이소스 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중국의 시법에 있는 '이단 불심'理短不深이란 이치가 짧으면, 그 뜻이 깊지 못하니, 내용이 없는 부실한 글이 됨을 이르는 말이다. 사상과 철학 즉 정신적인 요소가 결여되면 결국 잡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수필은 신변을 수필적 소재로 하여 쓰되, 반드시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수필가의 개성적 시각이 없는 흔해빠진 일상사가 나열된 수필이 아직도 문학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현실은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의 시법에 나와 있는 두 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볼 때, 수필은 지식의 나열이나 사상의 조술에 진의가 있는 것도 아니요, 글로 씌어진 지식의 축적은 더더군다나 아닌 것이다. 또한 단순한 생활의 기록이거나 신변의 잡사를 보고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수필은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세 번째로 피해야 할, ‘의잡意雜’은 집필 의도가 잡스러우면 안 된다는 뜻이다. 문학 장르는 모두 정서적인 감화를 목적으로 해서 쓰여지는 글이다. 수필은 자기의 박식을 선진하는 글도 아니요, 지나치게 아는 체 하면서 자기를 선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 글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목적이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수필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깊은 우물에서 시원한 샘물이 길어 올리듯, 깊은 생각에서 수필다운 수필이 탄생된다. 생각이 깊지 못하고 천박하면 아무리  많은 글을 써낸다 하여도 질 좋은 비단 같은 언어가 짜여져 나올 리 만무하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깊이깊이 얘기하는 그 떨림과 울림을 수필에서 맛볼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이제는 연지 찍고 분 발랐다고 해서 무조건 미인이 아니듯이,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고 해서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수필이 피해야 할 ‘재부才浮’란 재주를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훌륭한 수필가는 글재주꾼을 말함이 아니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문과 지志를 겸비해야 한다.  문이 없는 지는 거칠고, 지가 없는 문은 황홀할 따름이다. 요즈음도 이상 야릇한 제재, 특이한 제재를 찾아 헤매며 고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이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게 하는 올바른 처방이 되지 못한다. 제재란 물론 주제에 기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가 빈약한 상태에서의 제재 편중주의는 재사의 문인, 장색적 수필가를 낳게 한다고 지적한 황송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알멩이 없는 상태에서 제재를 선택하여 기묘하게 다듬어 놓은 것은 글재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주를 부리면 안 된다는 말과 관련하여 수필 창작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허구’의 수용 문제다. 어떤 이는 수필에 허구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건 소설이지 수필이 아니라고까지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지나친 억지라는 걸 알 수 있다. 수필가는 소설가가 즐겨 쓰는 그런 허구를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수필을 쓰는 사람은 사실을 바탕으로 수필을 쓰기 마련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소설가처럼 그렇게 허구를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수필에는 허구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도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것은 거짓이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수필가가 거짓말을 쓸 수도 없고 또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도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허구는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fact'와 'reality'는 엄연히 그 성격이 다르다. 허구가 사실은 아니기는 해도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수필이란 사실을 얘기하기 위해서 창작하는 것도 아니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다. 수필이란 사실이건 허구이건 삶의 진실을 창작하거나 읽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작가가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쓰되 그 사실 이상의 어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거짓이 아닌 허구적 방법을 차용할 수도 있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부분적 수용론이다. 이러한 경우, 분명히 허구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허구는 소설가가 즐겨 다루는 그런 허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처음부터 상상의 집을 지어나가지만, 수필가는 사실적인 이야기를 쓰되 질서화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차용하는 허구임으로 문학의 본질상 이 점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문학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 사실에 근거하거나 허구를 차용할 수 있는데, 소설은 주로 허구를 차용하고 수필은 사실에 근거할 따름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여러 요건이 요구되는데, 수필은 특히 사실을 근거로 진실을 추구하는 게 특징이라는 것이다.
  
3.
 
 
  독자들은 이 논고를 통하여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네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수필에도 나름의 작법이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면서도 그 붓을 끌고 가는 주제의식, 즉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지시에 의해서 쓰여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수필을 가리켜 이야기에 앞선 사색이라고도 하고, 철학적 깊이에까지 이르는 관조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가 짧아서는 안 된다는 말과 통한다. 그러면서도 문장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의도’가 잡스러워서 안 된다는 것과 통한다. 수필이 문학의 장르인 이상 문학 일반론을 무시할 수 없다. ‘재주’를 부려서 되는 글이 아니다.
  아무튼 수필은 삶의 이삭줍기다. 한 알의 보리나 밀을 가지고 천하 대소사나 우주의 진리를 애기할 수 있는 수필은 우리들 인생의 길동무다. 그 길동무는 고아하고 담박하여 품위를 잃지 않는다. 이는 수필이 ‘품격’을 유지해야 된다는 의미다. 사소한 신변잡사 가운데 파생되는 기억의 부스러기 하나를 보면서 열 가지 백 가지, 우주 천주의 섭리를 말하기도 하는 그것은 완성을 지향하는 미완의 글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 길동무의 발걸음은 끝이 없다. 어쩌면 수필이라는 인생의 길동무는 성속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살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삶의 질을 높여주며, 그렇게 높아진 삶을 우리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광주수필문학회 문학강좌

수필의 어휘 그리고 문장   강사 김수봉

1. 들어가기

   가, 문학은 인간정신의 자기전개가 형태를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형태를 얻는’ 이란 문장으로 표현해서란 말이다.

   나, 나는 지금도 한편의 수필을 쓰다가 어휘 한두 개에 막혀 날밤을 꼬박     샌  일이 많다.

      -어떻게 하면 좋은 문장을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적확한 어휘를 찾아낼까.

      -어떻게 하면 나만의 색깔을 내는 문체를 써 볼까.

   다, 이런 고심은 때때로 원고지 앞에 앉는 두려움까지를 불러오지만 ‘내가 어 려움을 겪고, 써낸 글이 독자에겐 쉬운 글로 다가간다.’ 라는 철칙 앞에 다시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이제껏 수필을 써온 나는 ‘불행한 문인은 면했구나.’라고 위안을 얻는다.

   다. 김광섭 씨는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을 써 보지 못한 채 문필을 마친 사람은 불행하다.’ 고 하였다.

   라, 지금부터 수필의 어휘와 문장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 해 볼까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소견은 어디까지나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것에다 나의 경험을 보탠 것이기에 편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언어의 의미

   가.  언어의 의미는 청각영상으로부터 이루어진 개념영상이라 할 수 있다.

   나. 의미에는 중심적 의미(기본적, 핵심적)와 주변적 의미(상징, 비유 등의 다른 의미)로 나뉘며, 단어들의 의미관계는 동의관계,이의관계,유의관계,반의관계,당대관계, 하의관계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런 것을 ‘낱말밭’ 또는 언어의 자장(磁場)이라고도 한다. 때문에 이런 관계의 구분은 아주 섬세하게 가려서 구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 어휘란 일정한 범위에 사용되는 말의 총체이지만 가려쓰기에 소홀해서, 비슷하니까  그냥 써버리거나 남들이 쓰니까 따라 써 버린다면 범문(凡文)이거나 악문이 되기 쉽다.

   <예>;그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방증(傍證)→반증(反證)이라도 하듯 난잡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마크 트웨인’은 ‘비슷한 말과 정확한 말은 반딧불과 번갯불만큼이나 다르다.’고 했고, ‘문학은 상투어를 극복하는 노력이라야 한다.’라고 했으며 ‘최일남’은 ‘말은 말임자를 만나야 제값을 받는다.’ 고 했다.

3. 어휘와 어법

   가. 사람은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듣고, 보고. 읽어서 습득된 말로 생활하며 언어활동을 한다. 그러나 그런 언어는 어법에 맞지 않는 말들이 허다하다. 그런 언어는 생활의 언어는 될지언정 문학 언어는 되지 않는다.

   나. 한때 ‘언문일치’라는 말이 강조되어 말하듯 글을 쓰면 된다고 여긴 적이 있었고, 지난 날 한문 투의 문장이 너무 심했던 것을 반성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말하는 그대로를 글로 옮긴다고, 요즘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꼬부린 말들을 그대로 써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평범한 일상에서는 재미있고 신선한 느낌마저 든다고 할지 모르나 문학적 문장은 아니다.

   다. 글을 쓰는. 특히 수필을 짓는 우리에겐 모국어를 바르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소명이 있다. 그래서 정확, 적절, 적확한 어휘구사가 요구되며 이것이 후학들을 위한 우리의 책무이기도 하다.

   라, 물론 어법이라는 게 불변의 절대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언중(言衆)이 요구하면 바뀌는 것 또한 어법이다. 그러나 지금의 어법은 현재로선 최선의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문장이 어렵거나 어법에 어긋나면 의미전달에  많은 오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4.어휘는 글의 자본(資本)

   가. 우리는 남의 글을 읽으면서 쉽게 따라가 버리는 일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그 표현의 적절성을 곱씹어 봐야 한다. 사전을 펼치고 확인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 나는 수시로 어휘를 수집하여 노트해가는 습벽이 있다. 책을 읽다가. 신문을 보다가 , 방송을 듣다가 좋은 말, 몰랐던 말은 곧 메모를 해 놓고, 사전을 펼쳐 확인을 한다. 고유어, 옛말, 한자어, 외래어, 속어, 비어, 사투리, 심지어 시골 노파나 푸성귀 파는 아낙들에게서도 좋은 말을 많이 배운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어휘노트가 30 권쯤은 된다. 요즘 KBS TV에서 월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되는 우리말 달인 프로를 보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 풍부한 어휘는 문필가의 자본이다. (문장연구가 장 하늘)

    * 정확, 적절치 못한 어휘 혼용 사례

      -생명/목숨. 저희나라/우리나라, 버스 값/버스 삯, 아는 척(체)/알은 체(척),

       쉬파리/쇠파리

      -옥편/자전(대용어), 정종/청주(대용어), 트렌지코트/버바리코트. 스테이폴러/호지키츠,

       크리넥스/스카치테이프, 귀걸이(제구)/귀고리(장식품), 경신(기록)/갱신(고침)

      -전기세(료), 전화세(료), 수도세(료) 재산세, 면허세, 자동차세

    *호응 어

     -쌀(곡물)-사다(팔다). 책- 사다. 옷감-뜬다(끊다). 연탄-떼다(들이다),정육-사다(뜨다)

      술(물)- 들다(마시다). 담배-태우다(피우다)




5.문장의 요건

   가. 수필을 통합문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수필은 문학 전 장르의 요소를 아우른다고 볼수 있다. 시적이며 소설적이며 극적(희곡)인 요소에 동요, 동화적 요소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수필을 읽는 독자에게는 가슴으로 읽는 기쁨(정서적 감동)과 두뇌로 읽는 보람(지적인 소득)을 함께 주어야 한다.

   다. 수필은 첫째도 문장, 둘째도 문장이라고 강조한 수필가가 있듯 위의 요소들을 만족 시키는 첫발이 곧 문장이다.

   * 이응백은 좋은 조건의 글로

     1).충실한 내용일 것

     2).독창적일 것

     3).정성이 담길 것

     4).정확한 어휘가 구사될 것

     5).표현이 경제성일 것

     6).논지의 일관성

     7).구성의 치밀성을 들었고.

   * 수필이론가들은 수필의 덕목을

     1).독자를 향해 자랑하지 말 것

     2).독자를 향해 교훈하지 말 것

     3).스스로 도취하지 말 것

     4).전부를 알아도 그 반만 이야기할 것 등을 강조 하였으며 이는 문장이 갖춰야 할 요건으로 요약된다.

   * 덧붙이면 좋은 문장의 5대 요체는

     1).분명하게.

     2).정확하게.

     3).간결하게.

     4).정중하게.

     5).쉬운 말로 평이하게 라 할 수 있다.

   라. 생각을 대신하는 것이 말이요, 말을 옮겨 쓰는 것이 글이다. 고로 글은 말맛이 나게 써야 하고, 말맛은 글이 쉬워야 나오며 그 말맛은 독자의 생각을 뻗어가게 한다.

   * 선배 수필가 윤오영 선생은

     1).간결성을 문단의장(文斷意長) 즉 문장은 짧게 의미는 길게 써야 한다. 그러나 효과를 감쇄시키는 절약은 오히려 결손이라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고수의 문장일수록 간결하다.)

     2).평이성으로는 의현사명(義玄詞明) 즉 속뜻은 깊어도 말은 알기 쉬워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쉽게 하려다 평범에 빠지는 것을 염려했다.

     3).정밀성은 지리멸렬하고 산만하지 않게, 선명하고 구체적 실감으로 강한 무드가 배게 할 것

     4).솔직성은 수식이나 과장 변명을 늘어놓지 말 것을 강조 했다.

     * 또한 선생의 저서‘수필문학 입문’에서 문장의 ‘탈’을 무려 15가지로 지적 했는데 몇 가지만 소개하면 수식이 많은 것. 인용이 많은 것. 구체성이 결여 된 것. 박학을 자랑하는 것. 다 아는 것을 혼자만 아는 체 하는 것 들이다.

     -‘김태길’은 ‘미사여구. 예화. 인용구 등을 많이 써서 문장을 현란하게 함은 일종의 교란 전술이며 사이비 행위다.’ 라고 했고.

     -‘한비야’(걸어서 지구 밖으로 행진하자. 저자)는 ’미사여구 없애는 작업시간이 길면 길수록 독자들의 시간을 덜 빼앗는다.‘ 라고 했다.

     - 이 모두가 쉬운 문장의 중요성을 같은 맥락에서 강조한 것이다.

     - 고로 수필쓰기는 나 자신만을 위한 ‘배설의 언어’가 아니라 모든 독자를 위한 ‘소통의 언어’이므로 항상 새로움을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한다.

6. 거친 문장 모호한 문장

   가. 거친 문장 모호한 문장은 독자에게 혼란을 겪게 하여 자신의 작품을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신문기사 제목): 시급한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시급한 걸 이제야 통과? 중요한걸 심사숙고하지 않고. 졸속으로 서둘러 통과?)

       -(어떤 소설): 박 사장은 그에게 남겨 두었던 술을 권했다.(그에게 보관했던 술인지?  본인이 남겨 두었던 것인지?)

       -(어떤 수필): 풋고추에 고추장 쿡 찍어 막걸리 한잔을 ...( 풋고추에 고추장을 찍은 것인지? 고추장에 풋고추를 찍은 것인지?)

       -(어느 책 제목):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자신의 문화유산인지?  남의 문화유산도 있다는 것인지?)=우리문화유산,~내가 답사한 문화유산

       -(가사 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시)를 넣었을 때-- 아는 사람 있나요?.

         (시)를 뺄 때=모르는 사람 없이 다 안다.(역설법)

       -(어느 수필):총성이 멎고, 한참 후에 나는 동굴 밖을 나섰다.(동굴 밖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인지? 동굴 속에서 나갔다는 것인지?)=밖으로 나섰다.

       -(어느 병원 선전 현수막): 불임 전문병원( 임신을 못하게 하는 병원인지?

       -(어느 초등학교 정문 현수막): 학교 폭력은 우리가!( 하자는 것인지?   없애자는 것인지?

       -(충장로 어느 방법초소 명): 법질서 단속 초소( 법을 지키는 사람을 단속하는 것인지? 법질서 문란자를 단속하는 것인지?)

       -(동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내가 살던 고향은

       -칸트의 명제= 너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번역판 ‘순수이성 비판’)




7. 쉽게 쓰기의 어려움

   가. ‘욕이선난(欲易先難)’이란 말이 있다. 서예의 운필지침에 ‘말로서 쉽게 하고자 하면  먼저 어려움을 겪으라.’는 말이 어찌 서예에만 국한하겠는가. 글쓰기는 물론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다.

   나. 쉬운 문장을 쓰기위한 필수 적 요건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이 먼저 철저히 이해하는 일이다. 독자에게 자기가 쓴 글의 뜻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달라고 요구하는 작가는 이미 실패한 글쟁이다.

   다. 독자들에게 이해를 위한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작가의 문장이 바로 쉬운 글이다.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대중의 언어’로 나타내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한다.

   다. 그러나 실제로 쉬운 글을 써서 독자들의 호감을 사는 문장가 자신은 하루 종일 반 페이지도 못 쓰는 날이 많다.

   라. ‘쇼펜하우어’는 “평범한 표현 속에 비범한 내용을 담으라.” 했으니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재미있게, 재미있는 것을 깊게라는 원칙을 신조로 삼을 일이다.

    *쉬운 글의 요소 셋은

     1).비유법을 쓴다.

     2).구체적 경험이나 실례를 든다.

     3).인용법을 짤막하게 쓴다. 한자라도 덜 써도 효과가 같으면 줄이는 게 글이다.

    * 내가 나름대로 좋은 문장이라고 노트해 뒀던 몇 문장을 골라 함께 보면서 어휘와 문장에 대한 소견을 마무리 한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絃)을 가만가만 흔들어 준다.(최명희)

     -동짓달 마른 바람이 베 폭 찢는 소리로 날카롭게 가른다.(최명희)

     -나이 든 사람들에게 보다 잘 맞는 것은 유머와 웃음이다. 스스로가 덧없는 저녁구름의 유희 같은 존재인 것처럼(헷세)

8. 수필의 기술(記述) 단계

   가. 한편의 수필을 쓸 때는 힌트-구상-소재-자료수집-틀 짜기(가장 고심해야 함)단계를 거쳐야 한다. 즉 무엇부터 시작할까? 무슨 얘기를 깔고 갈까? 어떻게 마무리 할까 이다. 비유를 하자면 주부가 식단을 짜는 것과 같다.

   나. 수필이 다른 문학에 비해 자유롭다보니 몇 개의 틀로 정해질 수 없으며 소재와 주제에 맞는 그때그때의 적합성을 찾아야 한다.

   다. 가장 일반적인 기술 순서는 서두쓰기, 본문쓰기, 결미쓰기 이다. 글 쓰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다 아는 것이긴 하지만 참고삼아 간단히 열거 해 보기로 한다.

     1). 서두쓰기

        서두의 한 두 문장은 독자가 수필을 대하고 30초 정도 걸리는데 이 시간에 독자의 발목을 잡지 못하면 실패한 글이 된다. 밥은 먹어야 배가 부르고 수필은 읽어줘야 가치를 발휘한다.

    * 서두 쓰기에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예를 들면

      - 관련 화제나 배경을 제시한다. (오랜만에 해변마을에서 하룻밤을...)

      - 자주 쓰는 용어를 미리 정의하여 제시한다. (목욕탕이란... / 승려의... 신문의... /경종의... 등 개념상 오해의 소지를 미리막음)

      - 짧고 참신한 경구나 명구를 인용한다. ( 너 자신을 알라, 고사 성어, 속담 등)

      - 구체적 사건이나 일화를 실감나게 소개한다. (꽝!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현장묘사

      - 설문을 던져 주의를 집중시킨다. (눈보라치는 겨울 바다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 ~~어떨까?. 누군가 ~~라고 했던가. 등)

      - 글의 주제를 분명하게 미리 정의 또는 암시한다. (논설, 사설, 두괄식, 연역법)

     2). 본문 쓰기

        - 주제에 초점이 맞는 내용(앞문장의 풀이. 연유, 시점 등으로 뒷받침 )

        - 화제의 내용과 범위에 맞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도 그 본질에서 유추 해석이 나올 수 있도록)

        - 단락의 전개가 긴밀하고 합리적일 것 (유기적 관련)

        - 개성 있는 사고와 새로운 인식의 독창성을 지닐 것 (특수체험,지식정보를 줄 것.)

        * 이성계의 파자 점(破字占 ‘問’字) :이성계 에게는 왼쪽 오른쪽이 모두‘君’字 이니 장차 王이 된다. 진짜 거지에게는 문(門)에 입(口)을 매단 꼴이니 천상 거지이다.)

        - 문장의 형식이 다양하고 리듬감, 정중동의 변화를 줄 것(문체 바꾸기.서술, 명령,  청유문/비유, 강조. 비약법/~다. --명사형 종결)

     3). 결말쓰기

        - 서두의 말을 반복하거나 되살린다. (시에서 수미 상관, 기승전결,--진달래꽃)

        - 인용을 할 것(명언, 속담, 고사,--윤오영의 ‘마고자’-귤화위지의 고사)

        - 정경묘사로 암시하며 끝맺기 식( 희망적. 절망적.)

        - 요망하거나 전망하면서 (~하면 좋겠다. ~하기를 기대한다. ~해야 한다.)

      *경고: 자신만 순수하고, 고고한 척 하면서 세상을 개탄하는 식은 독자의 반발을 사게 됨)

9. 마무리

   나는 한편의 수필 원고를 써 놓고 숙성의 시간을 오래 가진다. 읽고 또 일고, 아침에 읽어보고 저녁에 읽어보고, 눈으로 읽고 소리 내어 읽고, 취중에도 읽어보고 술 깬 후에도  읽어 본다. 여러 날 잊었다가 문득 꺼내어 읽어보기도 한다. 한 스무 번쯤은 읽는다. 물처럼 흘러야 할 문장의 흐름이 막힘이 없는가 해서이다. 마무리 할 때의 유의사항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진권의 ‘수필쓰기의 이론’ 중에서)

  가. 글 전체를 살필 때

     1) 주제를 구현하는데 불완전하거나 결여된 내용은 없는가.

     2) 주제에 어긋나거나 무관한 내용은 없는가.

     3) 글의 각 부문(문단)의 이음새는 유연한가.

     4) 냉정을 잃어 갑자기 흥분하거나 감상에 빠진 데는 없는가.

     5)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는 미심적은 내용은 없는가.

     6) 제자랑(가족포함)으로 받아들여질 곳은 없는가.

  나. 문단단위로 살필 때

     1) 소주제를 구현하는데 불완전하거나 결여된 내용은 없는가.

     2) 소주제에 어긋나거나 무관한 내옹은 없는가.

     3) 문장들의 이음새는 유연한가.

     4) 문장은 정확하고 분명한가.

     5) 단어는 정확하고 알맞은가.

     6) 심상은 선명하고 표현은 참신항가.

     7)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정확하고 오․탈자는 없는가.

한국 수필계의 현황과 문제점 해결
1

영상매체의 발전과, 사이버 시대의 도래는 21세기 이전부터 문학 전반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 공적(共敵)으로 거론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수필계는 오히려 놀라운 변화를 거듭해온 것이 사실이다. 1971년에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되고 이듬해엔 회원지《수필문예》(75년에 한국수필로 개칭)가 창간되었다. 1972년에 수필 월간지《수필문학》(관동출판사)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1977년에 잡지의 운영과 수필의 발전을 위한 수필문학진흥회가 만들어지던 때에 비하면 20종에 가까운 수필지(월간, 격월간, 계간지)와 3,000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수필가, 많은 그룹의 출현은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꼭  긍정적 발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장르보다 수필계는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신춘문예는 전통적으로 신인 등단의 중요한 관문이지만, 주요 일간지에서 수필은 여전히 제외되고, 오랜 전통의 종합문예지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표적 문학단체의 하나인 한국작가회의에도 수필가는 없다.  

이런 현상은 수필을 본격적인 문학으로 보지 않는다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들어 낸 것이다. 한국 수필계에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없다. 그리고 사실은 외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벨 문학상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문학상에서 수필은 아예 후보 명단에 오르지도 않는다.  

그런데 외국의 사례도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태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2천6백 여 명의 수필가가 엄연히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되고 기타 많은 수필가가 활동하고 있다. 이런 양적인 위세가 무조건 수필의 위상을 높여줄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한국수필을 바로 파악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로 문화단체 등에서 차별대우를  받기도 하는데 이것은 먼저 수필가 자신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성취해야 한다.
 
2

1) 수필 장르에 대한 바른 인식

수필은 진화했다. 1930년대부터 김진섭 김동석 김용준 이양하 이태준 등의작품들이 수필을 독립적인 문학 장르로 인식시키게 되었고 그것이 광복 후로 이어졌지만 지금의 수필은 달라졌다. 

수필을 이름대로 해석한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란 인식에서는 거의 모든 수필가들이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식의 변화와 실천은 다르다.  소수는 새로 진화된 수필을 쓰고 있지만 예술성을 위한 기법에 충실하지 못한 수필이 많은 편이어서 수필에 대한 외부의 인식 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은 언어로써 상상을 통하여 사상과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한 예술이다”

이것이 문학의 기본 개념인데 시나 소설은 그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형태지만 수필은 그렇지 않다. 상상이 아닌 실제적 경험적 소재를 거짓 없이 다루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은 이 조건에서도 문학성을 잃을 위험이 크다.   

그러나 지금의 진화된 수필은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김태길의「대열(隊列)」에는 그의 꿈 얘기가 나온다.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엇갈리며 행진하고 최루탄과 돌이 난무하는 광경이 나타난다. 이것은 작자가 실제로 꾼 꿈이니까 실제적 경험적 사실이고 남들이 흔히 말하는 ‘신변잡기’의 소재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독재정권시대에 지식인이 갈 길과 우리 민족의 갈 길 그리고 그 역사적 시기에 대한 구체적 증언이 압축되어 있다.  이런 작품은 그 소재만으로도 신변적 위험이 따르기 쉽다.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이렇게 정면도전하는 장르다. 그런데 그것은 독자가 상상을 통해서 도달해야 한다. 이 밖에도 적지 않은 수필들이 은유법등을 구사하며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심오한 사상과 정열을 담아 나간다. 

이렇게 일상적 신변 소재로 출발하면서도 넓은 상상의 세계를 담아 나가고 영원한 인생 문제를 논하는 수필들은 확실히 과거와 달리 진화된 수필이며 이것이 한국의 현대수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수필들이 많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 그것은 오래도록 가지에 매달려 서리를 맞은 홍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미숙한 떫은 감만 씹어 보고 감나무를 말하는 것과 같은 무지함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가 자신들부터 떫은 감은 팔지 말아야 하고 외부에서도 시대에 뒤떨어진 지식으로 현대수필을 평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2)  늦은 나이에 출발하는 신인들

떫은 감 문제는 수필가들의 전문가적 의식의 문제이며 그것은 수필가들의 등단 시기 및 등단 동기와도 관계가 있다. 시, 소설 등 다른 장르에도 젊은 지망자가 적다지만 수필에는 문학소년, 소녀였던 사람들이 퇴직 후에, 또는 자녀를 다 성장시킨 후에 등단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전문성 없이 나이 든 수필가가 많다. 수필은 ‘36살 이후의 문학’이고 인생의 경륜이 쌓여야 쓸 수 있는 것이라 하지만 어떤 장르이든 이런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유물이 된 과거 수필의 인식일 뿐이고 이런 인식대로라면 수필은 뒤늦게 시작하는 문학이 되고 따라서 전문성은 애초부터 바라기도 어렵게 되며 젊은 독자들과 감각도 맞지 않는다.  

늦은 나이에 출발한 수필가들이라면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해도 생리적 감수성이 젊은이들보다 둔하고 세속의 때도 많이 묻어 있어서 중고품 자동차처럼 기능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흔히 늦은 출발을 제2의 인생이라고 미화하지만 그것은 제1의 인생만큼 도전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철저한 전문의식이 따르기 어렵다. 제2인생은 ‘남은 여생’이라는 인식이 다분히 깔려 있다. 

수필이 30대 후반이나 넘은 사람들에게 적당한 문학이고 퇴직자와 자녀를 다 키운 아줌마들의 문학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는 이상 젊고 유능한 신인들의 배출로 수필문단의 발전을 기대하기에 현실은 어둡다. 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서도 수필 지망생이 줄고 대학원에서도 수필전공이 없어서 우수한 작가와 평론가 배출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결국 이것은 어떤 제도의 모순 때문도 아니며 오직 수필가들 자신의 인생관의 문제다. 수필가라는 이름의 형식적 명예에만 안주하고 고객도 없는 떫은 감 장사에 만족하든지 아니면 철저한 전문가의 의식을 갖고 홍시를 파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다.   

3) 한 우물 파기

한 우물을 파야 사막에서도 샘을 만나고 깊이 파야 더 맑고 시원한 지하수를 만난다. 얕은 우물은 자칫 지상의 탁류가 스며들어 있기 쉽다. 전문성이란 한 우물 파기다. 

문학은 일생 동안 최선을 다 해도 완성이 있을 수 없는 분야다. 그런데 등단한지 몇 해 되지도 않아서 수필가이며 시인임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한 우물도 다 파기 전에 다른 우물을 파는 사람이다. 수필가로서 아직 갈 길이 먼데 문예지를 통해서 시인도 되고 소설가도 되고 또 평론가의 자격증을 얻는 사람이 있다. 자격증의 남발도 문제지만 이것은 전문가집단이어야 할 한국수필계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행위다. 

물론 두 가지 이상에서 우수성을 나타내는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시 수필 소설 평론은 모두 다른 전문성과 타고난 재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런 재능을 모두 갖춘 문인이 있더라도 그것을 누구나 모방할 수는 없다. 

모든 문학의 장르는 전문분야다. 그래서 시인이나 소설가도 수필에 대해서는 대개 무지하며 쓰더라도 기법도 모르고 재능미달 사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혹시 시인이나 소설가가 수필집을 내서 잘 팔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것은 자기 전문분야의 인기도 때문이지 수필도 역시 시인이나 소설가가 써야 잘 쓴다는 주장은 무지의 소치다.

 4) 완벽한 문장력과 예술성

수필이 전문분야이고 예술분야인 이상 수필가는 이에 맞는 문장력을 갖춰야 한다. 수필은 일반 산문이 아니다. 인문이나 사회과학 논문도 아닌 예술의 문장이다. 그러므로 표현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 우선 어법에 맞는 정확성이 기본 조건이며 다음으로 감동적인 의미 전달을 위한 다양한 기법이 따라야 한다. 사실만 전하는 것이 아닌 이상 수필이라는 짧은 장르 형식에 맞는 문장을 갖춰야 하고 자기 개성에 맞는 문체를 지녀야 한다. 

한국의 수필가들이 대개 등단시기가 늦는 것은 유감이지만 늦었더라도 전문성을 갖추려면 창작의 기초가 되는 문장 수업부터 해야 한다. 시나 소설은 그 형태가 허구나 이미지의 창출을 통해서 만들어져야 하므로 문학성이 따른다. 이와 달리 수필은 실제적 경험적 사실의 거짓 없는 표현이 기본적 형식이므로 문학성이 처음부터 배제되기 쉽다. 따라서 우선 기본적으로 문장의 표현력으로 문학성을 획득해야 된다. 모든 예술분야가 다 그렇듯이 대가가 되었더라도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정진은 숙명이며 이를 위해서는 항상 어린 학생처럼 많이 쓰고 많이 배워야 한다. 인생말년에 잠시 여기로 쓴다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문장력과 함께 예술성은 다양한 기법을 요구한다. 예술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주제를 만들고 상상의 세계를 통해서 감동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5) 평론가들의 외면과 비평의 수용문제

이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다.
미술계의 거장이라는 피카소나 유명 화가들도 평론가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평론가가 그렇게 별난 그림에다 이유를 달아 주었기 때문에 유명해지고 미술사에 남고 거액의 값이 붙은 것이다. 

수필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수필이 곧 재미없는 신변잡기라는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고 떫은 감이 너무 많아서 홍시를 먹어 보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비평의 수용문제 때문이다. 자기 발전을 위한 정직한 비평을 받아들일 풍토가 되어 있지 않은 이상 평론가들은 수필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되고, 따라서 수필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 못한 이가 어디서 황당한 수필 강의를 하고 있어도 개선될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수필잡지에는 지난호의 작품 평란이 있다. 평자의 입장에서는 다룰만한 작품이 적다하고, 수필가들은 덮어놓고 좋은 평을 기대하기도 한다. 평자들은 수필의 핵심적인 문제와 도움 될 방향제시, 그리고 개선이론을 전개하고 나서 서너 작품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화려한 이론전개보다 실제 필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많은 작품을 대상으로 하면 좋겠다는 요구가 있다. 그러자면 필자들도, 객관적인 시선과 이론에 따라 평한 지적을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책을 출판할 때 지도교수가 써주는 발문, 축사와 비평은 성격이 다르다.

편집인들중에 자기가족 감싸기가 지나쳐서 손이 안으로 굽는 식의 평론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체 수필가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6)동인지와 문호 개방

한국 수필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각 문예지들의 폐쇄성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수필 전문지들은 본질적으로 동인지다. 등단으로 기성문인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그 문예지에나 통하는 그 동네의 등단일 뿐이다. 

수필계는 유난히 그룹과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타 동호인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문예지나 그룹 출신이더라도 출중한 작가의 작품을 게재하고 수상자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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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들뿐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새로움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그 결과로 얻어지는 감동적인 삶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1930년대에 김광섭(金珖燮) 선생이 「수필문학소고」에서 감동적인 삶을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은 그 어느 분야에서나 공통될 것이다”한 말을 오늘에도 적용하여 글쓰기에 임해야 할 것이다. 

삶이란 긴 여정이고, 사람은 오직 그 자신이 하나하나의 주인인 독립된 개체들이다. 수필은 삶과 체험을 형상화한 짧은 글이어서 영상시대에 그나마 좁은 입지를 차지할 수 있는 희망을 갖고 있어 다른 장르에서 부러워하는 추세이다. 진지하고 값진 체험과 사색, 관조 등 기본도 갖추지 않은 채 안일한 자세로 쓴 글이라면 짧은 수필도 외면당할 것이다. 좋은 수필을 쓰고 싶은 것은 수필가 누구나의 열망이리라. 수필가 개개인에게 치열한 문학정신과 전문성이 요구된다. 아직도 수필의 문학성이나 위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얼마나 열의 있고 진실된 삶을 살며 의미 있는 생활을 하는지, 그런 생활에서 얻은 좋은 경험이 수필의 바탕이 되어야 하고, 경험을 탁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필력을 갖춰야 하리라. 

누구나 발랄하고 미래지향적인 글을 쓸 수야 없겠지만, 나이든 수필가들도 허무하고 체념에 찬 상념보다는 인생을 오래 산 사람만이 발견하는 참신한 시각과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글로 노인의 글이라고 외면당하지 않아야 한다. 

현대문명의 눈부신 발달로 급변하는 세태에 시대에 앞서가는 대처능력이 부족한 수필가가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신함과 함께 도전정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도 갖춘 이들이 많아야 한다. 문학작품은 시대나 환경의 변화를 넘어서는 원칙적 진실을 가지고 있는 글이 오래간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시효가 있는 진지한 경험을 소재로 하되, 표현하는 언어를 마지막 단계까지 걸러낸 것을 사용해야 한다.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형태의 글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퓨전수필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적인 그림을 연마하여 아주 잘 그리는 화가가 추상을 시도하듯이 기본적인 필력과 양식이 갖춰진 사람들이라야 성공한 경우를 본다. 문장력을 갖추지 못하고 기초가 부족한 사람이 시도하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또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사회수필이 요구된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 역시 사회 전반적인 지식이 깊고 안목이 넓어 중후한 문장으로 쓰지 않으면 일간지의 논설보다 못한 글이 되기 쉽고 뒷북을 치는 수가 많음에 유의해야 한다. 소재를 장기적인 것으로 해서 공감을 살 수도 있으나 문학성과 결부시키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수필의 위상을 높이려고 소리 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의 뛰어난 작품이 많아져서 아직도 수필이 정식으로 문학 대접을 못 받는다든가, 수필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구호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한국수필가협회 제15회 해외심포지엄 발표 원고입니다.)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

최승범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 딴은 그동안 몇몇 잡지사의 수필 청탁에도 응해왔고, 내 나름의 몇 권 수필집을 내놓기도 하였다. 또한 대학에서는 <수필론>의 강의를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붓을 움직이자니 자신이 없다.
나의 두번째 수필집 『여운의 낙서』(1973)를 엮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덧붙인 바 있었다.

수필의 정체·본령을 파고 들면 들수록 확연한 모가 잡히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수필에 대한 매력만은 잊을 수가 없다. 수필을 쓰고 싶은 일이나 수필을 알고 싶은 일이 매한가지다. 내 삶을 갈아(耕)가는 한, 수필(隨筆)하는 일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이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이지만, 수필에 대한 생각은 그제나 이제나 나아진 것이 없다. 오직, 그 동안 수필의 매력에 이끌려 오면서 생각한 바 몇 가지를 들어 이 글을 이어보고자 한다.

먼저 수필이란 무엇인가를 잠시 살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제 ‘수필이 문학이다’엔 누구나 이의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신문학’의 출발 이후, 특히 30년대 초반만 해도 문학인 간에 있어서조차 수필의 문학성을 놓고 회의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다음 임화(林和)의 글(『文學과 論理』, 1940)로도 짐작할 수 있다.

몇 해 전 어느 문예잡지의 좌담회에서 수필에 관한 이야기를 교환한 일이 있었다. 자세히 기억치는 못하나 이야기의 초점은 아마 수필도 과연 다른 문학, 이를테면 소설과 같이 하나의 독립한 장르로써 취급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었던 듯싶다. 그때 이런 제목이 골라진 것은 수필이 차차 성황해가므로 문학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쓰는 데다가 다분의 정력을 경주해서 족한지 아니한지 하는 문제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로부터 벌써 5~6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즈음에 와서는 잡지에는 물론 신문에까지 수필이 여간 많이 실리는 것이 아니다.

임화가 이 이야기를 『문학과 논리』라는 그의 평론집에 수록하기 전 글로 쓴 것이 1938년이니까, 이로부터 5~6년 전이라면 30년대 초반이 된다. 오늘날과 같이 수필이 하나의 독립한 문학 양식으로써 자리를 차지하기까지에는 이무렵 김기림(金起林, 『수필을 위하여』, 1933)·김광섭(金珖燮, 『수필문학 소고』, 1934)·김진섭(金晋燮 『수필의 문학적 영역』, 1934) 등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이론과 실제 작품으로 우리의 수필문학 정립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수필의 문학적인 특성에 관하여 많은 논자들의 이야기가 있어 왔다. 나도 졸저 『한국수필문학연구』(1980)에서 다음 6가지를 들어 말한 바 있다.

①형식의 자유성 ②개성의 노출성 ③유우머와 위트성 ④문체와 품위성 ⑤제재의 다양성 ⑥주제의 암시성

등이 곧 그것이다. 여기서는 딱딱한 이야기를 피하고, 한 편의 수필로 수필의 이모저모를 말한 피천득(皮千得)의 「수필」에서 몇 가지를 들어 보고자 한다.

⑴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의 서두다. 이 서두의 멋지고도 은유적인 표현은 수필의 문학적인 한 특성을 말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특성을 말해줌에 있어서도 수필적인 표현으로 하였다.
청자 연적의 저 은은하고도 귀품스러운 빛깔, 난초의 잎이 지닌 선(線)과 꽃이 지닌 방향(芳香), 학이 앉았을 때의 모양이나 비상할 때의 모습, 여인의 호리호리 청초하고 날렵한 몸맵시, 이 모두가 얼마나한 멋인가. 시적(詩的)인가.
수필은 이러한 시적인 멋을 풍겨주는 산문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⑵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과 시, 수필과 평론, 수필과 연구논문 등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황홀 찬란하게 번쩍거리는 비단에 시를 비길 수 있다면, 수필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비단’이라는 것이다. 흑백을 가리는 게 평론이라면, 수필은 그렇듯 싹독싹독 잘라 말하지 않아도 읽는 사람이 분간하고 ‘미소’를 띠게 한다는 것이다. 또 연구논문이란 새로운 주장이 나오면 퇴락하여 추해지기 쉬우나, 수필은 사람들의 마음에 한 번 젖으면 언제나 그 빛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연구논문을 소설로 바꾸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⑶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무우드(氣分)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의 제재는 우리의 눈에 와 닿는 무엇이거나 다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그 개성적인 독특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토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필은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도 볼 수 있을지니, 무엇을 그 속에 담던 그것은 오로지 필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김진섭)

수필의 대상은 사유(思惟)의 전영야(全領野)인 것이다.(김동리)

위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어느 면, 문학평론의 대상은 문학이어야 하듯, 시를 쓰려면 시적인 것을, 소설을 쓰려면 소설적인 것을, 희곡을 쓰려면 희곡적인 것을 제재로 선택해야 하는 괴로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수필을 쓰기 위하여 수필적인 제재를 따로 찾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무엇을 제재로 하여 말하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의 심경이 전인생 위에 확충되어 있기만 하면, 그 말한 것은 반드시 문학적인 가치를 가져오기 마련인 것이다.
다시 『문학과 논리』에서의 인용이지만, 임화는 수필의 문학적인 가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참말 좋은 수필이란 일상의 지지한 사소사(些少事)를 사상의 높이에까지 고양하고 마치 거목의 하나하나의 잎사귀가 강하고 신선한 생명의 표적이듯이 일상사가 모두 작가가 가진 높은 사상, 순량(純良)한 모랄리티의 충만한 표현으로써의 가치를 품어야 한다.

여기서도 강조된 것은 수필에 있어서의 제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재에 대한 작가의 안목이나 사상이라는 것이다.

⑷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된다. 쉑스피어는 햄레트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촬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수필의 가장 근본적인 특색의 하나를 말하였다. 수필은 한 마디로 말하여 ‘자기표백(自己表白)의 문학’ ‘personal-note’ ‘필자의 심적(心的) 나상(裸像)’이라고 한 것도 이 점을 단적으로 들어 말한 것이다.
서구에 있어서 수필의 원조라 일컬음을 받는 몽테뉴도 그의 『수필집』의 서문에서,

내가 그리는 것은 내 자신이다. 나의 결점까지도 나의 수필에서 읽혀질 것이다. 내 자신이 이 수필집의 내용이다.

고까지 말하였다. 일본의 한 영문학자도 수필의 이 특색을 강조하여,

수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은 필자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격적인 색채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데에 있다. 그 본질에서 말할 때, 기술(記述)도 아니며 설명도 아니요 논의(論議)도 아니다. 보도를 주안으로 하는 신문 기사가 비인격적(In-personol)으로 기자 그 사람의 개인적 주관적인 노오트를 피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수필은 극단적으로 작자의 자아(自我)를 확대하고 과장하여 씌어진 것으로, 그 흥미는 전혀 personol-note인 점에 있다.

고 하였다. 모두 같은 맥락의 이야기들이다.

⑸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이는 수필의 형식이 지닌 특성을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 흔히 수필의 형식을 말하여,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金珖燮)
‘붓이 가는 대로’의 형식으로써 산문화한 것이 수필의 일반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고정된 형식에 맞추어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장 자유롭게, 시나 소설과 같은 특별한 형식의 제한이 없이, 붓이 가는 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韓黑鷗)

고 하였다. 물론 수필의 형식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제시할 수 있는 하나의 본보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의 연적에 똑같이 생긴 꽃잎들을 정연히 놓아가는 일이란 어떠한 형식만을 그대로 좇는 일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기계적으로 되풀이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로 한 편의 수필을 이룰 수 있다면,

똑같이 생긴 꽃잎들을 정연히 놓아가는 일

을 수필의 형식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그러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정연히 꽃잎틀을 놓아가다가,

그 중의 꽃잎 하나를 약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일

정연한 균형 속에 있는 꼬부라진 꽃잎이면서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

에 수필의 멋은 있다는 이야기다. 굳이 수필의 형식을 들라면, 이 멋을 부릴 수 있는 ‘파격’일 수밖에 없다. 이 ‘파격’은 파격을 짓는 사람, 또 파격을 짓는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필의 형식이라면 일정한 것이 없는 ‘불구격투(不拘格套)’의 자유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상 피천득의 「수필」에서 수필이 지녀야 할, 문학적인 특성의 몇 가지를 들어 보았다. 자못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의 「수필」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수필이란, 문학의 다른 양식과 달리 어떠해야 하고 어떻게 있어야 하리라는 것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수필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는 이 생각으로부터 각자가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다.
사실 문학이란 이론만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학 뿐이랴. 미술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론에 밝다고 꼭 좋은 작품은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흔히 무슨무슨 작법(作法)같은 것을 흔히 말하고, 그러한 것에 관한 책들도 내놓고 있다.
나도 졸저 『수필 ABC』(1965)에서 ‘수필 쓰는 법’의 한 장(章)을 마련하여 다음 몇 가지를 들어 말한 바 있다.

①자기의 렌즈를 갖자 ②일단의 구상은 필요하다. ③서두에서부터 관심을 이끌도록 하자 ④’누에가 실을 뽑듯’ 그렇게 써 나가자 ⑤품위있는 글이 되도록 하자 ⑥길이는 되도록 3천자 내외로 하자

는 것들이었다. 이제 보면, 여기저기서 줏어다가 열거한 것도 같고, 또 꼭 수필만이랴 다른 문학에도 마찬가지의 이야기지 않겠느냐는 항변도 있지만, 그때 내 나름으로는,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수필을 써 나가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이러한 여섯 가지를 들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도 수필을 쓰고자 한 사람이면 이만한 유의점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예문을 들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⑴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이 바위는 비록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
그보다도 처음 놓여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풍우상설(風雨霜雪)에 낡아가는 그 자세가 그지없이 높이 보였다. 바위도 놓여진 자리에 따라 사상이 한결같지 않다. 이 각박한 불모(不毛)의 미가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이는 조지훈(趙芝薰)의 「돌의 미학」 중 한 대문이다. 누구나 ‘바위’에서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훈의 ‘렌즈’에 비친 바위다. 지훈의 ‘렌즈’는 지훈의 눈이요 안목(眼目)이다.
스위스 조각가 쟈코메티는,

눈에 보이는 대로를 그린다.

고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나 조각은 사진기의 렌즈에 비친 어떠한 풍경도 어떠한 사람도 아니었다. 쟈코메티의 눈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풍경이요 사람이 그의 작품에는 담겨지고 조소되었다.
「돌의 미학」은 지훈의 안목이 아니고는 쓰여질 수 없는 수필이다. 지훈은 또 다른 한 편의 글에서,

아안(雅眼)으로 속(俗)을 관(觀)하면 속도 아가 되고, 속안(俗眼)으로 아를 관하면 아도 곧 속이다.

이 말을 한 바 있다.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이 ‘아안’이 필요하다. 아안은 누구에게나 일조일석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부단한 ‘눈의 훈련’을 통해서 비로소 가질 수 있는 ‘렌즈’인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구,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설흔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다.

는 말도 그만한 세상살이·사람살이에서 ‘눈의 훈련’을 거쳐온 사람만이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서 좋을 것이다.
알렉산더 스미스의 말,

수필을 쓰는 사람은 천하가 다 아는 바람둥이, 무슨 일이고 못할 게 없다. 민감한 귀와 눈, 흔히 있는 사물에서 무한한 암시를 식별하는 능력, 생각에 잠기는 명상적인 기질, 이 모든 것만 있으면, 수필가로서 수필 쓰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에서 수필가의 요건으로 든 ‘귀와 눈’ ’능력’ ’기질’이란 것도 따져보면 ‘눈의 훈련’을 통해 가질 수 있는 높은 ‘안목’을 이야기한 것이 된다.
수필을 쓰고자 하면, 평소 사물에 대한 높고도 우아한 자기 안목부터 부단히 닦아 지녀야 할 것이다.

⑵ 붓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 수필이라고들 하지만, 막상 수필을 많이 써 본 분이면 이런 안이한 수필작법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듯이 그대로 써 내려가면 된다는 말도 수긍이 안 간다. 글자로 표현된다는 것은 작품을 뜻하는 것이다. 작품이란 소재와 주제가 겸비되어야 하고 또 매끈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필도 하나의 작품일진대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듯이 붓가는 대로 써버릴 수는 없다. 물론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인 작품으로 승화될 수는 없다. 낙서가 아니면 붓장난의 소산일 뿐이다.

이는 장덕순(張德順)의 수필론 「힘들게 써서 쉽게 읽혀져야」의 서두 부분이다. 흔히, 수필의 글자 풀이, ‘따를 隋, 붓 筆에서 붓가는 대로 쓰여진 글’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갖기가 쉽다. 수필을 쓴 사람의 입장에서는, ‘붓가는 대로 마음 내킨 대로 쓴 글인데’의 겸사로 수필을 말할 수 있을지라도(사실 수필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의 의도는 그러한 것이었다), 문학인 수필을 놓고의 이러한 생각은 금물이다.
수필의 형식이 자유롭다고 해서 막연히 붓을 들고 원고지 앞에 잠깐 써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수필을 위해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작가에 따라서는 대충의 구상만으로 원고지를 메꾸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대충의 구상만으로 붓을 잡았고, 써나가는 동안에 그 구상을 다져 갔다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도스토엡스키는 『죄와 벌』의 구상에 3년이 걸리고 몇 권의 노오트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길이에 있어서는 소설에 비할 바 없는 짧은 길이의 수필이래도 무엇을 내용으로 어떻게 엮어나갈 것인가, 주제·제재·줄거리의 구상은 필요하다.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의 ‘균형’과 ‘파격’을 생각하는 것도 구상에 포함되는 일이다. 수필의 초보자인 경우, 이러한 구상은 더욱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⑶ 문장의 첫 귀절이라면, 글을 쓰는 이는 누구든지 경험한 일이겠지만 글에 있어서 최초의 1귀 같이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1귀, 이것을 얻기 위해서 말하자면 모든 문장가의 노심초사는 자고로 퍽 큰 듯 보이고 그만큼 이 1귀는 문장의 가치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문장을 있게 만드는데 흰 원고지의 유혹도 확실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어데서 졸연히 때늦이 솟아 나왔는지 모르는 이최초의 1장 같이 문장인에게 창조의 정력을 일시에 제공하므로 해서 팔면치구(八面馳驅)를 하게 하는 요소도 없을 것이니, 백 사람의 문장가를 붙들고 물어본다면 그 중에 여든은 가로되 이 최초의 1장이 얼마나 고난에 찬 최대최시(最大最始)의 문장적 위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모든 준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임을 말하리라.

이는 김진섭의 「문장의 도」의 한 대문이다. 여기 ‘문장’을 수필로 바꾸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수필이 짧은 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서두의 몇 줄은 독자의 흥미와 긴장을 이끌기 위해서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계용묵(桂鎔默)은 그의 수필 「침묵의 변」에서,

이 서두 1행 때문에 살이 깎인다. 8·15 이후 내가 들었던 붓을 놓고 침묵을 지키기 거의 이태이거니와 구상까지 다 되어 있는 것도 이 서두를 내지 못해 머리 속에서 그대로 썩어 나는 게 4,5개나 된다.

고 했다. 이는 물론 소설의 경우이지만 서두가 중요하다고 하여 지나치게 거의 집착하다 보면, 이처럼 아예 글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여, 이태준(李泰俊)은 서두를 쓰는 요령으로, ‘①너무 덤비지 말 것이다 ②너무 긴장하지 말 것이다 ③기(奇)히 하려 하지 말고 평범하려 하면 된다’의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다.
한 편 수필의 구상이 이루어졌으면, 주제나 제재, 또는 줄거리를 암시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그 서두를 시작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줄거리에서 서두를 이끌어 내고자 할 때에는 인물·시간·배경에 관한 말로 첫줄을 시작하는 것도 쉽게 풀어나가는 방법의 하나가 되겠다.

⑷ ‘최선의 책이란 그것을 읽는 사람이 나도 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책이다.’ 이것은 빠스깔의 말이다. 사실 그렇다.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다면 나도 쓸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책, 그것이 정말 잘 쓴 책이다. 얘기도 그렇다. 정말 훌륭한 이야기란 쉬운 말로 쉽게 하면서 그 속에 교훈과 생명이 배어 있는 말이다. 들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 자신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대학에서 강의를 해보면 그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완전히 내 것이 된 지식일수록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내가 아직 소화하지 못한 지식일수록 어려운 말로 어렵게 얘기하게 된다. 쉬운 말로 할 수 없으니까 어려운 말로 캄프라쥬하는 것이다. 문장의 호흡도 얘기의 호흡과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병욱(安秉煜)의 『문장도』에서 옮긴 것이다. 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써야 하고, 읽는 사람은 쉽게 느끼고 젖을 수 있어야 한다.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라고 한 피천득의 인용은 알렉산더 스미스의 『On the writing of essays』에 있는 말이다. 누에가 토사구(吐絲口)로부터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드는 광경을 보면 지극히 수월스럽다.
이만한 ‘자연적인 유로(流路)’를 위해서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공정이 필요하다. 누에가 섶에 오르자면 넉 잠을 자고 다섯 돌을 맞는 탈바꿈이 있어야 한다.
한 편의 수필을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쓰자면 먼저 아는 것이 많아야 할 것이다. 수필가에게 폭넓은 견문과 박학다식, 그리고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것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⑸ 꽃가게 앞에서 고전(古典)과 양장(洋裝)이 가지런히 발을 멈춘다. 소담한 꽃묶음을 한 아름씩 안으며 맑고 아름답기가 첫애기를 기르는 산모와 같다.

이는 이동주(李東柱)의 「꽃」의 서두다. 정갈한 표현의 멋을 느끼게 한다. 비유가 시적이다. ‘고전’과 ‘양장’은 한복을 입은 여인과 양장 차림의 여인을 일컬음이다. 「꽃」의 중간에는,

사람도 그늘에 살면 생선처럼 상하기 마련인데 제마다 어둔 방, 이 한묶음 꽃을 고작 은촛대에 불을 켜듯 환히 밝히면 때로 후기(嗅氣)와 음습(陰濕)을 가시는 분향(焚香)일 수도 있는 일.

의 일절도 있다. 앞의 두 여인의 신분과 이들이 꽃묶음을 사든 까닭도 암시되어 있다.
「꽃」의 하반부(轉)에 가면,

취안(醉眼)으로 꽃을 대한 사나이란 죽순밭을 어질르는 악동(惡童)과 같이 심사가 사나와 화즙(花汁)으로 마구 문질러야 몸이 풀린다고.

의 구절이 있다. 이어서 이른바 홍등가에서 들을 수 있는 대화가 나오고,

비린 외어(外語)가 어색지 않다. 하룻밤 청춘이 박리로 팔리는데, 흥정에 따라 에누리가 있고 악착같은 거간이 붙는다. 정희와 희순이는 간간 나들이를 한다. 때로 꽃가게 앞에서 가지런히 발을 멈춘다.

로, 「꽃」의 결말이 맺어진다. 사람살이에 있어서도 그늘진 곳의 추한 이야긴데, 「꽃」을 읽으면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없다. 조촐하고 정갈한 글발은 오히려 멋까지를 느끼게 한다.
수필은 읽어서 멋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멋은 글발에 배어 있는 유모어나 위트로 드러난다. 수필 쓰는 이는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읽는이에게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고 삼박한 재치를 안겨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할 일이다.
다음은 수필의 길이에 관한 문제다. 나는 『수필 ABC』에서 ‘길이는 되도록 3천자 내외로 하자’고 한 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수필을 써보고자 하는 초보자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
수필의 길이는 참치부제하다. 마해송(馬海松)의 「편편상(片片想)」과 같은 원고지 한두장의 짧은 길이의 것일 수도 있고, 이은상(李殷相)의 「무상(無常)」이나 김태길(金泰吉)의 「흐르지 않는 세월」처럼 한 권의 책이 되는 길이의 것일 수도있다.
수필을 쓰고자 할 때 이상 몇 가지를 유의하였으면 싶다는 것으로 들어 보았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글이란 이론만으로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직접 써보면서 스스로 글 쓰는 법을 터득하는 길이 상책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점에서, 수필 쓰는 법이 뭐네눠네 하는 너절한 이야기보다도 『후산시화(後山詩話)』에 나오는 구양수(歐陽脩)의 말,

-간다(看多-多讀)
-고다(做多-多作)
-상량다(商量多-多思)

로 이 글의 결말을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구양수는 문장에 익숙해지는 요령으로 이 3가지를 들었지만, 수필도 먼저 문장이 되어야 하느니만큼, 이 3가지는 바로 수필에 익숙해지는 요령으로 보아 다를 것이 없겠다.◑

◇최승범 문학박사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예총 전북지부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蘭緣記』, 『韓國隨筆文學硏究』, 『바람처럼 구름처럼』 , 『무얼 생각하시는가』, 『풍미산책』, 『거울』, 『蘭 앞에서』, 『3분읽고 2분생각하고』, 『朝鮮陶工을 생각한다』 등이 있다. 정운시조상, 현대시인상, 학농시가상, 가람시조문학상, 황산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좋은 수필을 쓰는 법

 


1. 좋은 수필의 요건

우리는 일상생활에 많은 수필을 읽게된다. 그러나 마음에 감동을 받기가 어렵다.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이 될까? 우선 좋은 글이 되게 하려면 다음의 내용을 잊지 말자.


1. 글의 주제와 내용에 있어서

(1) 글의 내용이 충실해야 한다.

(2) 주제가 선명해야 한다.

(3)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4)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5) 철학이 있어야 한다.

(6) 감동이 있어야 한다.


2. 글의 짜임새는

(1) 논지(論旨)의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2) 내용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2) 문장이나 단락이 연결성이 있어야 한다.


3. 글의 표현은

(1) 표현이 정확하고 명료해야 한다.

(2) 표현이 쉽고 간결해야 한다.

(3) 수사적 표현이 있어야 한다.


2. 단어와 문장 구조

문장에 있어서 구조와 단어는 똑바르게 써야한다. 단어가 잘못 사용되면 엉뚱한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그럼으로 문장에 알맞은 단어를 선택해야한다.


1. 단어의 선택

(1) 단어의 표현 효과는 이렇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㰠† 구체어 : 대상이나 행동을 지시하는 단어

㰠Œ 추상어 : 관념적인 내용을 나타내는 단어

㰠† 일반어 : 보다 포괄적인 범주의 상위 개념어

㰠Œ 특수어 : 보다 한정된 범주의 하위 개념어

㰠† 지시적 의미 :

*사회적으로 공인된 객관적 의미 → 객관적 전달의 효과

㰠Œ 함축적 의미 :

*지시적 의미에서 연상되는 의미 → 느낌·인상·정서의 효과적 표현

(2) 단어의 선택 과정

지식적 의미 이해 → 문맥적 고려 → 함축적 의미 고려



2. 문장 구조의 선택

(1) 문장 구조의 표현 효과

① 홑문장 : 강렬한 인상, 간결성, 명료성

② 이어진 문장

ㆍ 대등하게 이어진 문장 : 평행 구조

㰠† 유사구조 : 균형감

㰠‰ 대립구조 : 차이점 강조

㰠Œ 점층구조 : 점층적 강조효과

ㆍ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 : 종속구조 → 글의 논리적 전개에 효과적이다.

③ 안은문장 : 포유(包有) 구조

두 단위의 생각을 일원화하는 간결성의 효과와 구체화의 효과가 있다.


3. 문장쓰기

자기의 생각을 어떻게 문장으로 표현해야 상대방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려운 단어나 추상적인 생각으로 문장을 쓰지 말아야한다.


1. 문장의 개념 : 하나의 완결된 생각의 표현단위. 주어와 서술어를 포함한 두 개 이상의 성분으로 이루어진다.


2. 좋은 문장의 요건

(1) 평이성 : 쉬운 말, 부드러운 말투를 쓰며, 관념이나 추상어, 상투어는 피한다.

(2) 간결성 : 말을 절약, 문장을 짧게 하며, 한 문장에는 한 가지 내용만을 쓴다.

(3) 정확성 : 어법, 문법을 지키며 모호성을 띠지 않도록 주의한다.


4. 단락쓰기

단어의 모임이 문장이다. 문장은 연결성이 있어야하고 전달하려는 내용이 같아야한다. 그러면 단락들의 문장은 다음을 잊지 말자.


1. 단락의 개념 : 하나 이상의 문장이 모여서 통일된 하나의 생각을 나타내는 글의 단위로 되어야한다.

2. 단락의 구조 : 작은 주제문 + 뒷받침 문장

(1) 작은 주제문은 일반적이며 추상적인 진술

(2) 뒷받침 문장들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진술

① 추상적 진술 : 개념적, 원리적, 요약적

② 구체적 진술 : 특수적, 분석적, 묘사적

3. 단락 구성의 원리는 통일성, 완결성,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1) 통일성 : 단일 주제에 수렴되어야 한다.

(2) 완결성 : 주제를 충분히 뒷받침해야 한다.

(3) 일관성 : 뒷받침 내용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한다.



5. 주제 설정

글에는 어떤 주제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글의 중심은 재미가 있고, 쉽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1. 주제 : 한 편의 글을 통하여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생각을 정한다.


2. 주제 설정 기준

(1) 범위는 되도록 한정한다. (작은 것)

(2)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 잘 알고 있는 것을 고른다. (쉬운 것)

(3) 독자가 관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을 고른다. (재미있는 것)


3. 주제설정 과정

가 주제- 범위가 넓고 막연한 범주의 주제

참주제 - 가 주제에서 범위가 한정된 주제

주제문 - 참주제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진술한 문장


6. 재료의 수집과 선택

1. 재료 : 주제를 뒷받침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글감

2. 재료의 요건

(1) 주제를 뒷받침할 것 (2) 확실할 것 (3) 풍부하고 다양할 것 (4) 관심거리일 것

3. 재료의 정리

(1) 내용이나 성격이 비슷한 것끼리 묶는다.

(2) 중요도, 시대 순 등의 기준에 따라 배열한다.

(3) 편견에 치우치지 않도록 배열한다.


7. 글의 구성

1. 구성

(1) 개념 : 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선택한 글의 전개 방식에 따라 수집· 정리한 제재를 알맞게 배열하여 글의 뼈대를 짜는 것

(2) 기능 : 글의 설계도 구실을 하며, 글의 단계성, 일관성, 응집성을 유지하게 한다.

(3) 구성의 방법

① 자연적 구성 : 시간적 순서나 공간적 질서에 따라 제재를 배열하는 방법

② 논리적 구성 : 제재 자체의 자연적 질서를 무시하고 필자의 의도에 따라 논리적으로 제재를 배열하는 방법 → 단계식 구성, 포괄식 구성, 병렬식 구성, 점층식 구성, 인과적 구성

2. 개요작성

(1) 개요 : 구성을 그대로 정리하여 놓은 것

(2) 개요의 종류

① 화제의 개요 : 줄거리의 각 항목을 핵심적인 어구로 간결하게 표현한 개요

② 문장의 개요 : 줄거리의 각 항목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개요


8. 분석과 묘사

1. 분석 : 하나의 관념이나 사물을 구성요소로 나누어 가는 과정

(1) 분석의 과정 : 대상 식별→기준결정→이유진술→목적명시→항목배열→항목정리→내용제시→분석의 마무리

(2) 종류

① 대상에 따라

㉠ 물리적 분석 : 공간적 분해 가능 경우

㉡ 개념적 분석 : 내용 분석의 방법

② 작용에 따라

㉠ 기능적 분석 : 작용에의 답 형식

㉡ 연대기적 분석 : 사건의 계기적인 단계 구명

㉢ 인과적 분석 : 원인과 결과 구명

2. 묘사 : 대상의 감각적 인상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언어로써 그려내는 지적 작용

(1) 묘사의 유의점 : 치밀한 사건 관찰·지배적 인상을 중심으로 의미 있는 것만을 묘사·일정한 순서에 따른 전개

(2) 관점

① 고정 관점 : 고정시켜 관찰한 묘사

② 동적 관점 : 시점 이동의 관찰 묘사

③ 얼개 형상의 방법 : 대상이 방대하거나 상상적인 공간에까지 확장되는 경우에 채택

(3) 종류

① 객관적 묘사 → 정확하게 표상

② 주관적 묘사 → 분위기, 감정, 인상 창조


9. 분류와 예시와 정의

1. 분류 : 대상이나 생각을 비슷한 특성에 근거하여 기준을 정해 부분으로 나누는 지적 작용

◎ 분류의 유의점 : 단일한 기준 설정․일관된 기준 적용․기준간의 상호 배타성․하위 항목의 충실성․하위항목에 대한 동일성․분류정도에 대한 진실성

2. 예시 : 특수진술이나 특수 사항으로 예를 제시함으로써 유형, 계층 부류 등 일반적인 원리나 법칙, 진술을 구체화하는 지적 작용

◎ 예시의 유의점 : 사례의 구체성․일반적 진술과의 관련성․거례(擧例) 의도의 명확성

3. 정의 : 어떤 대상 또는 사물의 범위를 규정짓거나 그 사물의 본질을 진술하는 지적 작용

◎ 정의의 유의점 : 피정의항과 정의항의 대등성․정의항 개념의 명확성․용어의 반복 사용 회피


10. 비교와 대조와 유추

1. 비교와 대조 : 둘 또는 그 이상의 대상들을 견주어 공통점을 밝혀 내는 지적 작용이 비교, 그 차이점을 밝혀내는 지적 작용이 대조이다.

(1) 기능

① 공통점 - 사물을 다른 사물에 견주는 것

② 차이점 - 비교 : 언어적, 형태적 유사성 대조 : 종류, 특성, 정도면의 차이

(2) 유의점

① 동일 범주 내 사물간의 대비

② 필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기준 설정

③ 시간, 공간, 가치의 연속성에서 배열될 기준 설정

2. 유추 : 생소한 개념이나 복잡한 주제를 단순한 개념이나 주제와 비교해 나가는 지적 작용

◎ 유의점

①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이어야 함

② 알기 쉽고 친밀한 사물과의 비교

③ 두 사물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야 함


11. 서사의 과정과 인과

1. 서사 : 행동이나 상태가 진행되어 가는 움직임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표현하는 진술방식

(1) 목적 : 대상의 행동이나 상황의 변화 양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려 독자에게 뚜렷하게 재생되도록 하는 것

(2) 유의점

① 시간, 움직임의 단계 구분, 이동관계의 명확성

②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시간의 흐름을 뒤바꾸지 말 것

2. 과정 : 결과에 이르게 된 일련의 행동, 변화, 기능, 단계, 작용 등에 초점을 맞춘 전개방식

(1) 목적 : 관계와 절차에 초점을 둠으로써 주제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드러내 주는 데 있다.

(2) 유의점

① 각각의 단계와 절차의 주제에의 집중

② 움직임을 나누는 단계의 기준이 균일해야 하며, 각 단계의 이동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3. 인과 : 원인이 되는 힘과 결과적 현상에 관계된 사고유형

(1) 목적 : 구조적 인식을 위해 행동, 사물의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2) 유의점 : 필연적인 인과관계․체계적 순서․인과관계의 유기적 연결․진술의 동일성



12. 표현 기법

1. 표현기법(수사법) 선택의 원칙

(1) 조화의 원칙 : 문장에 균형, 정제, 해조의 미를 주도록 표현법의 효과를 고려하여 구사한다.

(2) 구상의 원칙 :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막연한 것에 형태를 부여하여 생생하면서도 뚜렷한 인상을 주도록 한다.

(3) 증의의 원칙 :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의 뜻을 덧붙임으로서 내용에 음영을 주어 풍부하게 하고 암시를 줌으로써 상상의 여지를 남기도록 한다.

2. 표현 기법의 종류

(1) 비유법 : 표현하려는 사물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서 그 자체의 성질, 모양 등을 뚜렷하고 선명하게 하여, 공감의 폭을 넓이고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기법. 은유·직유·의인화·활유·대유·성유·시자·풍유·중의 등

(2) 강조법 : 표현하는 내용보다 강렬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취해지는 기법. 과장·영탄·반복·열거·점층·점강·억양·대조·미화·연쇄·비교 등

(3) 변화법 : 문장이 단조롭고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표현 방법에 변화를 주는 기법. 대구·설의·도치·인용·방어·역설·문답·돈호 등


13. 단계별 쓰기

1. 서두쓰기

(1) 서두의 성격 : 독자의 주의를 끌어 들이고, 글의 내용을 함시하여 주제의 방향을 제시

(2) 서두쓰기의 방법

① 글의 내용, 방법 등을 밝힘

② 글의 주제나 관련 화제를 직접 제시

③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 인용, 예화, 경험

④ 대상의 뜻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

2. 본문쓰기

(1) 본문의 성격 :몇 개의 제재에 의해 서두의 주제가 보다 명확해지는 글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

(2) 본문쓰기의 방법

① 개요에 의거하여 전개한다.

② 단락의 소주제문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③ 접속 어구에 유의하여 단락과 단락의 현결을 매끄럽게 한다.

3. 결말쓰기

(1) 결말의 성격 : 서두와 유사항 성격으로 서두 본문에서 전개해온 내용은 요약·정리함으로써 주제를 명확히 하는 부분

(2) 결말쓰기의 방법

① 본문을 요약하고 보충한다.

② 남은 과제나 전망을 제시한다.

③ 암시하거나 여운을 남긴다.(서사적인 글)


14. 고쳐 쓰기

1. 개념 : 일단 만들어진 초고에 첨삭을 가하고 문맥을 가다듬어, 처음 설정한 주제가 일관되면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글로 만드는 글쓰기의 마지막 과정

2. 퇴고의 원칙

(1) 삭제의 원칙 : 불필요한 부분, 지나친 부분 조심하고 과장이 심한 부분들을 삭제한다.

→ 표현의 긴장 효과

(2) 부가의 원칙 : 미비한 부분, 빠뜨린 부분을 첨가·보충한다. → 표현의 상세화 효과

(3) 재구성의 원칙 : 글의 순서를 바꾸어 표현의 효과를 높인다. → 논리적 완결성의 효과

3. 퇴고의 단계 : 전체의 글의 퇴고 → 단락 수준의 퇴고 → 문장수준의 퇴고 → 단어수준의 퇴고

글을 쓴다는 것
 
김태길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整理)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姿勢)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有言無言)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約束)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充實)하게 실천(實踐)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整頓)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方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反省)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想念)을 어떤 형식으로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現在)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過去)와 현재를 기록(記錄)하고 장래(將來)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里程標)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作業)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感情)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妙方)이기도 하다. 만일 분노(憤怒)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중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整頓)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나 간섭(干涉)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被害)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商品)이나 매명(賣名)을 위한 수단(手段)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친한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豫想)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低俗)한 이해(利害)와는 관계(關係)가 없는 풍류가(風流家)들의 예술(藝術)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高尙)한 취미(趣味)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眞實)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內面)을 속임 없이 솔직(率直)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感動)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滿足)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稱讚)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發表)해도 손색(遜色)이 없겠다.”
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稱讚)과 격려를 듣고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原稿用紙)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雜誌社)에 보내기로 용기(勇氣)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想像)하지 못하면서, 활자(活字)의 매력(魅力)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雜誌)나 신문(新聞)은 항상(恒常) 필자(筆者)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記者)들의 수첩에 등록(登錄)된다. 조만간(早晩間) 청탁(請託)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訪問)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自進投稿者)로부터 청탁(請託)을 받는 신분(身分)으로의 변화(變化)는 결코 불쾌(不快)한 체험(體驗)이 아니다. 감사(監謝)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受諾)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원고(原稿)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漸次)로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自我)가 안으로 정돈(整頓)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情熱)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記錄)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壓力)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質)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決心)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 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人事)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請託)을 전문(專門)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 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債務者)의 위치(位置)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經驗)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心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趣味)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苦役)으로 전락(轉落)한다.
 
글이란, 체험(體驗)과 사색(思索)의 기록(記錄)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時間)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餘裕)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 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一旦) 붓을 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誠實)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一部)의 사실을 전체(全體)의 사실처럼 과장(誇張)해서도 안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人氣)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境遇)에서 흔히 발견(發見)된다. 자극(刺戟)을 갈망(渴望)하는 독자나 신기(神奇)한 것을 환영(歡迎)하는 독자의 심리(心理)에 영합(迎合)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墮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罪惡)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衒學)의 허세(虛勢)로써 자신을 과시(誇示)하는 일이다. 현학적(衒學的) 표현(表現)은 사상(思想)의 유치(幼稚)함을 입증(立證)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虛榮)스러움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稱讚)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表明)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自我)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成長)시키는 일이다.
 
김태길 : 학술원 회장 역임. 서울대 명예교수. *수필집 ≪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삶과 그 보람≫≪삶이란 무엇인가≫≪흐르지 않는 세월≫≪무심 선생과의 대화≫≪일상 속의 철학≫≪체험과 사색 Ⅰ.Ⅱ≫≪초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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