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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명시모음
2017년 05월 22일 17시 39분  조회:22287  추천:1  작성자: 강려
일본 명시 모음

머리말
 
 일본 근대시 이후 현대시의 실질적인 역사는 100년 미만이다. 그 짧은 역사 동안에 그들은 수많은 명시를 창작하였다. 그 명시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마음의 눈을 뜨게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한없는 감동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근대시와 현대시의 역사에서 대표 시인이라 할 수 있는 58명을 가려, 그들의 작품 124편을 옮기고 감상하였다. 시의 배열은 가능한 한 연대순으로 하여 시의 역사와 흐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시인의 대표작을 고르되 가능하면 서정적인 것을 택하였고, 시로서의 예술성은 훌륭하더라도 지나치게 어렵거나 또 지나치게 서정을 무시한 시들은 제외하였다.
 내용은 4부로 나누었다.
 1)낭만파와 상징파는 메이지(明治) 시대의 시
 2)민중시파와 다다이즘은 다이쇼(大正) 시대를 중심으로 한 시.
 3)초현실주의와 역정파(歷程派)는 쇼오와(昭和) 전기의 시
 4)황지파(荒地派) 이후 현대는 쇼오와 후기의 시이다.
 124편 의 시가 숫자로서는 별로 대단치 못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시만 이해하여도 시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오만"으로 이 책을 내놓는다.
 
                                             1884년 11월
                                                      김 희보: 목사, 문학비평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국어국문학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수학
                                                           저서: <영원한 문학과 사상> <종교와 문학> 등 다수
                                                         편저서: <한국의 명시> <세계의 명시> 등 다수

 
1 사라(沙羅) 나무 / 모리 오우가이
 
 
갈색의 네부(根府) 강 돌에
하얀 꽃은 뚝 떨어지나니,
안 뵈게 푸른 잎 사이에 숨어
몰래 떨어지는 사라나무 꽃
 
* 동양미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돌은 "갈색"이고, 그 위에 떨어진 꽃은 "흰색"이며
  제 3행에 " 푸른 잎"이 나와 색채가 아름답다. 어느 날 정원을 보고 있는 시인의 눈에
   하얀 꽃이 "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고요함 속에 뚝 떨어진 꽃이기 때문에 주위는
   한층 더 고요하다. 그 낙화를 보는 순간의 느낌을 시인은 기품 있게 표현하면서, 모든 군
   더더기의 말은 생략하고 색채감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리 오구가이(1862~(1992): 본명은 모리 린타로우. 육군 군의감으로 있으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서구시를 번역한 <오모가게(於母影)를 출판하면서 문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대표작으로 소설 <무희(舞姬> <기러기> 등이 있다
 
 
2. 나비가 가는 / 기타무라 도우고쿠
 
 
춤추며 가는 곳을 물어 주시니
  내 마음 한없이 기쁘기는 해도
가을날의 들판을 정처도 없이
  찾아서 방황하는 나비의 신세.
가는 곳도 오는 곳도 같은 길이니
  날아온 곳을 다시 날아 가노라.
꽃 핀 야산에 춤추는 몸은
  꽃 없는 들가도 나의 잠자리.
앞도 없지만 뒤도 또한
  "운명" 말고는 "나"도 없다.
팔락팔락팔락 거리며 날아 가는 것은
  꿈과 현실의 중간이어라.
 
*시인은 나비에 비유하여 자신의 암담한 상태를 노래하고 있다
키타무라 노우고쿠(1868~1894): 고독의 시인이었다.
 
 
3. 산림에 자유 있어라 / 쿠나키다 돗포
 
 
산림에 자유 있어라
내 이 말을 읊고 피가 솟음을 느껴라
아아 산림에 자유 있어라
어이해 나는 산림을 버렸던가
 
동경하며 허영의 길에 오르고 나서
십 년의 세월이 티끌 속에 지났어라
멀리 돌아보면 자유의 고향 마을은
구름 너머 천 리 밖에 있는 듯하다
 
눈을 부릎뜨고 하늘 멀리 바라보면
멀리 높은 봉우리 눈 덮인 곳에 아침 해 빛나리
아아 산림에 자유 있어라
내 이 말을 읊고 피가 솟음을 느껴라
 
그리운 내 고향은 어디이든가
나는 그곳 산림의 자식이어라
돌이켜보면 천리 강산
자유의 마을은 구름 속에 사라지려 한다
 
* 이 시에서 눈에 띠는 것은 반복의 기법이다. "산림에 자유 있어라"라는 구절은 세 차례 사용되고
   "내 이 말을 읊고 피가 솟음을 느껴라"라는 구절은 1연과 3연에 되풀이 되고 있다.
  또한 "어이해 나는 산림을 버렸던가"라는 싯구에 대하여 "나는 그곳 산림의 자식이어라"라는 싯구
  를 대조시키고 있다.
  "산림에 자유 있어라"라는 중심되는 시행을 반복하여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시인은 다른 책에사 자기 마음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아아 자유와 사랑은 나의 열정이어라. 지금은 어떤 상태냐, 지금은 어떤 상태냐, 사랑은 덧없이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어라."
 쿠니키자 돗포(1871~1908): 교사 생활과 신문 및 잡지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작품 발표
           시집: <서장시> <산고수장(山高水長)>
           소설: <무사시노(武藏野)> <쇠고기와 감자> <소년의 비애> 등
 
 
4. 황성(荒城) / 도이 반스이
 
 
1
높은 누각에 벌어진 봄의 꽃잔치
 권하는 술잔에는 달빛이 짙고
  천 년 묵은 솔가지를 헤치고 나온
   옛날의 그 달빛은 지금 어디에
 
2
가을날 진영(陳營)에는 서리가 짙고
 울어 예는 기러기떼 끊이지 않네
  줄지어 선 장검에 빛을 비추던
   옛날의 그 달빛은 지금 어디에
 
3
지금 황성 옛터의 한밤의 저 달
 변함없는 저 빛은 뉘를 위함인가
  담장에 남은 것은 다만 달빛뿐
   소나무에 노래함은 다만 바람뿐
 
4
저 하늘의 달빛은 변함없건만
 흥망이 덧없는 이 세상 모습
  그 모습 비치려나 지금까지도
   아아 황성 옛터의 한밤의 저 달
 
*시로서보다는 노래의 가사로 유명한 작품. 일본 사람치고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이 반스이(1871~1952): 27세 때 처녀시집 <천지유정>을 발간하여 일류 시인의 자리를 굳혔다.
                                 그의 작품은 한시 스타일의 딱딱한 언어 속에 비장미가 감돌아 낭송에 적합하다.
 
 
5. 첫사랑 / 시마자키 토오손
 
갓 땋아 올린 앞 머리카락이
사과나무 아래 나타났을 때
앞머리에 찌른 꽃빛의 모습
꽃같은 그대라고 여겼더니라
 
정답게 하얀 손을 내밀어
사과를 나에게 건네 준 그대
연분홍 빛깔의 가을 열매로
비로소 그리움을 배웠더니라
 
하염없이 머리카락에 닿았을 때
달콤한 사랑의 술잔을
그대의 정으로 기울였더니라
 
사과밭 나무 아래로
절로 생긴 오솔길은
누가 처음 밟은 자리일까 하고
물으면 한결 더 그리워지노라
 
*일본 근대시의 대표적 작품으로 "나는 8 세 때 이미 첫사랑을 느낀 소년으로서 ---비로소 어린이다운 정열을 느끼고---
   우리들 뽕밭 사이에 있는 사과나무 아래를 거닐었다" (<어린 시절>)는 이미지에 의해 지어진 작품.
   일찍부터 외국 문학을 배운 사람의 작품으로서 서양의 시와 구약 아가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사과꽃처럼
   청순하고, 가을 찻물의 채 익지 않은 사과처럼 약간은 새큼한 "첫사랑"을 노래하였다.
6. 소시(小詩) / 시마자키토오손
 
 
해질 무렵 조용히
 꿈을 꾸려고
세상 번거러움에서
 빠져나온다
 
오로지 그대 외엔
 아는 이 없네
꽃나무 그늘에서
 사랑을 운다
 
지나온 꿈길을
 돌이켜보니
사랑은 죄여라
 죄는 사랑이어라
 
기도와 사명 또한
 이 죄 탓이라
그리운 꽃밭으로
 나는 가련다
 
그리운 그대와
 손에 손 잡고
캄캄한 저승까지
 달려 가리라
 
*작자는 처녀시집 <와타나슈우(若菜集)을 간행하여 당시 일본 시단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그 시집은 재래의 시에 서구적인
 향기를 더하였고, 낭만적인 해맑음 속에 고상한 가락으로 노래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시인은 <와카나슈우>머리말에서 이
 렇게 말하고 있다. "마침내 새로운 시가의 시대는 왔도다. 그것은 아름다운 새벽과도 같은 것이다."
  작자는 20세 때 메이지(明治) 학원을 졸업하고, 다음해 9월에 메이지 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 중에는 동갑나기와 연장
자가 많이 있어 "갑자기 화살에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또한 "곧 사토우 양의 눈에 매혹되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고뇌
때문에 사이교토(西行)-바쇼오(芭蕉)의 눈을 추구하여 정처 없는 여행길"에 나서기도 하였다.
 
7. 흰벽 / 시마자키 토오손
 
그 누가 알리오 꽃이 우거진
높은 누각에 나는 올라가나니
심란하고 뜨거운 내 괴로움은
그대로 비쳐져라 하얀 바람벽
 
침으로 써보는 글자이길래
남 모르게 어느덧 지워지나니
아아 아아 새하얀 바람벽에는
내 슬픔이 있어라 눈물 있어라
 
 
8. 치쿠마강(千曲川) 여정의 노래 / 시마자키 토오손
 
1
코모로 지방 옛 성 근방
흰 구름 날고 나그네 마음 시름겹다
초록색 별꽃은 아직 싹트지 않았고
여린 풀 위에 그대로 앉을 수 없어라
은빛 이부자리를 깔아 놓은 듯한 언덕에
햇빛받은 눈 녹아 흘러 내리고 있다
 
따사로운 햇빛은 비치고 있으나
아직 들판 가득한 풀 냄새 나지 않고
어슴푸레 하늘 흐려 이른 봄을 알리고
보리 색깔 희미로이 푸르를 따름
행상의 무리들 몇 패거리가
밭 가운데 난 길을 서둘러 간다
 
해가 저무니 아사마 산도 보이지 않고
노래 슬퍼라 사쿠의 풀피리소리
치쿠마 강 물결 출렁거리는
강기슭 가까운 요정에 올라가
흐린 탁주를 흐리게 마시며
외로운 나그네 시름을 달래노라
 
2
어제도 역시 이러했나니
오늘도 또한 역시 이러하리라
이 생명 무엇을 악착하여
내일의 일을 생각하며 번민하는가
 
여러 번 반복된 영고(榮枯)의 꿈이
이제는 사라진 골짜기에 내려가
강물이 철썩이며 밀려 오는 것을 보면
예대로 모래 싣고 물결은 되돌아간다
 
아아 이 옛 성은 무엇을 말하며
기슭의 물결은 무엇을 대답하는가
지나간 옛날을 고요히 생각해 보면
백 년 세월도 어제 하루와 같아라
 
치쿠마 강에 저녁놀 드리우고
봄날의 얕은 물 흘러 가나니
오직 혼자서 바위 주위를 맴돌며
이 강기슭에 시름을 남겨 둔다
9. 세이노스케(誠之助) 죽음 / 요사노 히로시
 
 
오오이시 세이노케는 죽었습니다.
기분 삼삼하게
기계에 깔려 죽었습니다.
사람 이름에 세이노스케는 많게 마련,
그러나, 그러나
내 친구 세이노스케는 단 한 사람뿐.
 
나는 이제 그 세이노스켸와 만날 수 없다.
아무렴 어떻겠나
기계에 깔려 죽는
바보 멍텅구리인 내 단 하나의 친구 세이노스케.
 
어쨌거나 세이노스케는 죽었습니다.
아아 죽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아니었던 세이노스케,
멀쩡한 정신병자인 세이노스케,
있는지 없는지,
신을 최초로 무시한 세이노스케,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세이노스케.
 
정말이지, 여러분, 기분 삼삼하게
그 세이노스케는 죽었습니다.
 
세이노스케와 세이노스케 일당이 죽었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일본 사람들은 이제부터 평안히 잘 수 있습니다.
축하하오.
 
*오오이시 세이노스케는 천황에 대한 이른바 대역(大逆) 사건으로 말미암아 처형된 사람이다.
 "대역(大逆)"은 인륜에 어긋나는 행위로서 주인이나 부친을 살해하는 일. 여기서는 천황을 암살하려 한 것을 말한다.
*요사노 히로시(1873~1935): 잡지 <명성(明星)>을 창간하여 낭만주의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집: <동서남북> <천지현황(天地玄黃)> <독초> 등이 있다.
 
10. 지혜의 관상장이는 나를 보고서 / 칸바라 아리아켸
 
지혜의 관상장이는 나를 보고서 오늘 말하기를
너의 얼굴 모습에는 나쁜 징조가 보이고 날씨 흐렸나니
마음 약하게도 사람을 사랑하는 그리움의 하늘의
구름과 질풍이 몰아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하라 한다.
 
아아 피신하라 하나니, 심약한 너의
녹색 목장과 풀밭의 파도치는 곳에서
또한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짓는 곳에서-
이 말을 너는 어떻게 들어 해석하려는가.
 
눈만 감으면 계속되는 사막 끝을
해거름에 머리 숙이고 가는 사람의 그림자
굶주려 방황하는 들짐승이 앞길을 막고,
 
그 그림자는 너를 피해 가는 몸의
외로운 여행으로 수심스럽기만 한 모습이라-
그럴진대 향기의 소용돌이와 색채의 폭풍에 몸을 맡길진저.
 
*시인의 상징주의적 기법이 완성된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대표작이다. 시인은 "지혜의 관상장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나"를 보고 있다. "지혜의 관상장이"란 "나"의 이성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나"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된다. 더구나 "나쁜 징조가 보이고 날씨 흐렸나니"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성은 "나"를 부
  정적인 징조로 보고 있다. 이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를 가지
  고 있다.  당시의 시인들이 낭만주의 영향을 받아 자기 확충에 방향을 정하고 있을 때 시인은 자기를 부정하는
  형태로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 시의 중요성이 있다.
*칸바라 아리아케(1876~1952): 시단에 등장할 때는 낭만주의 색채가 강했으나 점차 상징주의로 기울어졌다.
 
11. 망향가(望鄕歌) / 스스키다 큐우킨
 
내 고향은 햇빛이 매미(蟬) 시냇물 위에 어른거리고
나뭇가지에 고운 새 온종일 지저귀며
소원을 비는 도시 처녀의 발걸음 그치지 않는 법회(法會)며
가쯔라 시내에서 아가씨는 발을 쳐 은어를 낚아 내고
그물에 달린 물방울에서 청주 냄새 풍기는 봄날
노젓는 소리와 함게 벚꽃놀이하는 젊은이가
나무 그늘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가면극 광대가
연기하는 몸짓이 우스꽝스러워 모두 흥겹게 웃는
그곳으로 너와 함께 가련다.
 
내 고향은 녹나무의 여린 잎 은은하게 향기 풍기고
잎사귀 큰 떡갈나무들 바람에 흔들리는 첫 여름
잎새 사이로 햇빛 스며 무늬짓는 숲속 오솔길에
해바라기 모양의 모자를 쓴 박수무당은 제사드리고
색칠한 소달구지 천천히 움직이는 그 생일날
또는 6월의 제사와 햇빛 비쳐 하얀 산봉우리 모양의 수레가
삐걱거리며 광장의 구경꾼 사이로
장사꾼도 꽃팔이도 뒤섞여 흥청거리는
그곳으로 너와 함께 가련다.
 
내 고향은 버드나무 잎사귀 춤추는 밭 사이의 밭둑길
벼 찧는 아가씨의 고요한 노래에 누런 소 집으로 돌아가고
해 저물면 아홉 겹 탑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고요히 명상하는 저녁 나절, 잎이 떨어진 벌거숭이 나무는
장례 지낸 늙은 노파처럼 축 늘어져
탄식스럽게 서 있고, 나무 사이로 어른거리는 달빛은
꿈속인 듯 보이고, 종소리 푸르르게 느껴지는데
사찰을 순례하는 나그네는 그저 집 생각에 젖어드는
그곳으로 너와 함께 가련다.
 
내 고향은 서리 맞은 칡넝쿨 벌판에 단풍나무 잎사귀
살랑거리는 가을 달이며, 경건한 불교도들이
드나드는 조용한 날씨, 해가 저물면 고개길 넘어가는
발걸음에 어리는 나그네 마음, 서글픔으로 눈물짓느니,
하양(下鄕)할 무렵 장마철지고, 쓸쓸하게 짧은 하루 해
길 가는 나그네는 향 냄새 스민 불경 보관소에
먼지 쌓인 불상과 세월 오랜 불경이 정겨워
저녁 붉은 노을에 극락의 피안(彼岸)을 그리워하는
그곳으로 너와 함께 가련다.
 
*이 시는 교오토의 4계를 노래한 문어(文語) 7-5조를 중심으로 하는 정형시이다.
*스스키다 큐우킨(1877~1945): 처녀시집 <저녁 피리>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의 시풍은 프랑스 고답파(高踏派)에 가까운 면이 있으면서 기본적으로는
                                        풍부한 고전적 교양에 바탕을 둔 낭만적인 색채가 강하다.
 
12. 발아(發芽) / 노구치 우죠오
 
 
빨간 꽃이라면
불타는 줄 알아라
 
청춘인 아가씨는
모두 몸이 불탄다
 
하얀 수건을
이마에 동여 매고
 
빨간 꽃이라고
몸뚱이만 불태운다.
 
*제목인 구사모에(草萌)는 봄이 되어 싹들이 일제히 트는 것. 하이쿠(俳句)에서
봄을 나타내는 계어(季語)로 사용된다.
*노구치 우죠오(1882~1945): 시집으로 <마른 풀> <도회와 전원> , 동요집으로 <푸른 눈의 인형>이 있다.
 
 
13. 겨울이 왔다 / 다카무라 코오타오로
 
단호하게 겨울이 왔다
팔손이나무의 흰 꽃도 사라지고
은행나무도 빗자루가 되었다
 
싸느다랗게 스미는 듯한 겨울이 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겨울
초목이 등을 돌리고 벌레 도망치는 겨울이 왔다
 
겨울이여
네게 오라, 내게 오라
나는 겨울의 힘, 겨울은 내 먹이다
 
스며 들어라, 뚫고 나가라
화재를 내라, 눈으로 묻어라
칼날 같은 겨울이 왔다
 
*다카무라 코오타로오는 나 자신의 진실을 다한다는 태도로 생의 의식을 언어로 조각하고,
 탐미적인 시풍에서 생명력 넘치는 높은 예술경에 도달하여, 일본 근대시 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시인이며 조각가이다.
 젊은 시절 퇴폐적 조각가로서의 생활을 보내던 작가는 31세 때 나가누마 지에코라는 여
 성을 알게 되면서 심기 일전하였다. 작가는 "나는 이 세상에서 지에코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순애에 의해 깨끗해졌고, 퇴폐 생활로부터 구출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
 다.
 이 시는 그 다음해 1월에 쓴 것으로서, 작품이 완성된 해 10월에 간행된 그의 처녀시집
 <도정(道程)>에 수록되었다.
 지에코와의 생활은 예술을 중심으로 한 사랑에 찬 생활이었으나, 1932년에 지에코는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1938년 10월에 죽을 때까지 그녀는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수천 점의 멋진
 색종이 그림을 남긴다.
 그녀에 대한 시들을 모은 것이 <지에코초(智惠子秒)이다.
*다카무라콩타로오(1883~1956): 지에코와 연애 끝에 결혼하였으나, 지에코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생의 불행을 맛본다.
                         시집: <도정> <지에코초> <전형> 등이 있다.
 
13. 도정(道程) / 다카무라 코오타오로
 
 
내 앞에 길은 없다
내 뒤에 길은 생긴다
아아, 자연이여
아버지여
나를 자립하게 한 광대한 아버지여
내게서 눈을 떼지 말고 지키도록 하시라
언제나 아버지의 기백이 내게 넘치게 하라
이 머나먼 도정(道程)을 위하여
이 머나먼 도정을 위하여
 
*작자 32세 되던 해 2월에 쓴 시. 그 전해에 지에코를 알고서 심기 일전하게 된 시인은
 인간 존재의 가치를 분명하게 자각하고, 그 가치에 알맞는 생의 방법을 발견하고서, 아
 버지의 집에서 나와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된다.
 
 
15. 가을의 기도 / 다카무라 코오타오로
 
가을 바람 낭랑하게 하늘에 울리고
하늘은 물빛, 새가 날며
내 혼은 고동쳐
해맑은 물 마음에 흐르고
마음은 눈을 떠
어린이가 된다
 
복잡다단했던 과거는 눈앞에 누워 혈맥을 내게 보내나니
가을 햇빛받고 나는 고요히 또렷하게 이것을 본다
땅에서의 영위를 스스로 축복하고
내 일생의 행로를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분연한 자세로 기도하지만
기도의 말을 알지 못한다
 
눈물 흘러
빛에 반사되고
나뭇잎 흩어지는 것을 보며
짐승들 기쁘게 뛰노는 것을 보며
나는 구름과 바람에 불리는 뜰 앞의 풀을 보며
그와 같이 인과가 분명한 사실을 보고
마음은 강한 은혜를 느끼며
또한 멈출 수 없는 책임을 생각하고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쓸쓸함과 두려움에 무릎 꿇나니
기도의 말을 알지 못한다
그저 나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한다
하늘은 물빛
가을은 낭랑하게 하늘에 울린다
 
*가을을 맞아 깨끗한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껴
  경건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
  제 1시집 <도정> 마지막에 수록된 작품
  10월에 시집을 간행하고, 12월에 지에코와 결혼, 작가 49세 해 지에코는 정신 분열증을 일으킨다.
 
16. 그리스도에게 부치는 / 야마무라보쵸오
 
 
그리스도여
이런 일은 별로 대수러운 것은 아니겠으나
오늘도 젊은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 죄많은 여인과 같이
흙투성이인 당신의 발을 눈물로 씻고
검고 탐스러운 이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릴 수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대답하기가 어려웠으나
이렇게 말하였다
한 사람이 괴로와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으로 모두는 구원받는다 했다
부인은 나의 이 말에 기뻐하며 돌아갔다
부인의 배는 불룩하였다
그리스도여
내 말이 그릇된 것이나 아닐까
어쩐지 자꾸만 두려운 생각이 든다
 
*이 시의 소재가 된 것은 신약성서 누가복음 7장 36~50절이다.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창녀였던 여성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셔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았고,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발랐다.
  예수는 집 주인에게 "저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 여자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였다.
*야마무라 보쵸오(1884~1924): 성공회 신부로서 기독교적인 시를 많이 썼다. 폐질환으로 실직, 병 요양을 위하여 가난과 싸우며
                                       방랑하면서 동양적인 달관의 시를 많이 썼다.
                              시집: <달밤의 모란> <구름> 등이 있다.
 
17. 장미 2 / 키타하라 하쿠슈우
 
 
1
장미나무에
장미꽃 핀다.
 
조금도 이상스러운 것 없지만.
 
2
장미꽃.
조금도 이상스러운 것 없지만.
 
햇빛 비치면 나무에서 넘쳐 흐른다.
빛이 넘쳐 흐른다.
 
*시인은 이 작품을 계기로 종래의 "언어의 조련사"로서의 수사법을 버리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지난날의 감상과 탐닉의 생활을 떨쳐 버리고 섬 생활을 체험한 시인은 토오쿄오로 돌아와  그 인상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생명을 자라게 하는 태양빛을 예찬하고 생명의 불가사의함을 노래한 작품. "장미나무에서 장미꽃 피었네" 라는
 당연한 사실 속에서 조화의 묘를 찾아보고 시인은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시인으로 하여금 창작에서의 기법상의 문체뿐 아니라, 발상(發想) 그 자체의 전향을 가져오게 하고 있다.
 즉, 종래의 "관능의 시인"으로부터 "자연 순응"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관능에 의해 자아를 주장하는 근대시의 방향으로부터 전통적이며 동양적인 방향으로 옮겨진 것이다.
 시인은 "인간이 이 광대한 대자연 앞에 서서 어찌 자랑스럽게 무엇을 알았다고 외칠 수 있겠는가. 온작 사심(小我)을
버리고 떠난 뒤에 사람은 비로서 우주의 참다운 것에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약함을 진심으로 알게 될 때 사람은
참되게 강해진다. 참된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작은 겨자씨 한 알갱이에도 온갖 대주주의 예지가 차고 넘쳐 있음을 저
파라몬교의 범(梵)의 가르침에서는 설파하고 있다. 오오 그 겨자씨 알맹이"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상은 바로
'장미 2곡' 의해 노래된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키타하라 하쿠슈우(1885~1942): 처녀시집 <사종문(邪宗門)>을 간행하여 일본 시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동요, 민요,
                                           가요, 단가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시집: <신송(新頌)>. 민요집: <일본의 피리> 동요집: <잠자리 눈알> 등이 있다.
 
18. 귀거래 / 키타하라 하쿠슈우
 
 
야마토(山門)는 내가 태어난 고향
구름 뭉개고 마파람 부는 중심 지점
날고 지고, 다시 한번.
 
쯔쿠시여, 이렇게 불러 보면
그리워라 조수(潮水)의 낙차(落差)
빛 비쳐 물든 석양의 해변.
 
눈멀어 일찌감치 이 눈
보지 못하네, 초록빛 갈대 싹
물고기 바구니와 물빛의 반사.
 
돌아가련다, 자, 까치여
고향 하늘과 옻나무의 숲
기다리리라 다시 한번.
 
고향 마을과 거기 사람들
모두 늙고 뜸해졌는데
왜 이리 그리운가 동심(童心)이여
 
*시인은 53세 때 신장병이 원인이 되어 두 눈 모두 실명하게 되었다. 일찌기 그의 작품에
 나타났던 화려한 색채는 이제 추억과 상상에 의하여 눈동자의 그늘 속에 그려볼 수 밖에
 없이 된 것이다.
 이제 눈뜬 장님이 되었고, 육체는 늙었으며 시들게 되니 고향 그리운 생각뿐이다. 아아 그리운
 고향 산천이여, 고향 사람들이여, 이 육체적인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또렷하게 머리 속에 떠
 오르는 고향 쓰쿠시의 바다여, 다시 한번 돌아가 그리운 고향 땅을 밟고 싶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19. 탱자꽃 / 키타하라 하쿠슈우
 
 
탱자나무에 꽃이 피었네
희고 흰 꽃이 피었네
 
탱자나무 가시는 아프다네
맵게 아픈 가시라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울었다네
모두 모두 정다웠다네
 
20. 모래 언덕  / 이시카와 타쿠보쿠
 
 
모래 언덕의 모래 위에 엎드려
첫사랑의
쓰라림을 아련하게 생각하는 날
 
 
21. 장난스럽게 / 이시카와 타쿠보쿠
 
 
장난스럽게 어머니를 업고는
그 너무나 가벼움에 목메어
세 걸음도 못 걸었네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일생은 기구하였다. 아버지는 사찰의 주지였고, 그는 고향에서
 중학을 중퇴한 후 토오쿄오에 상경했다가 병을 얻어 귀향하여, 국민학교 대리 교사,
 지방의 신문 기자, 신문사 교정계를 지냈다.
 그는 시인으로서도 유명하지만 오히려 단가(短歌)를 발표한 가인(歌人)으로서의
 업적이 더 크다. 일본의 전통적 시가 가운데 하나인 단가를 창작하였으며 3행으로
 된 시형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시카와 타쿠보쿠(1886~1912): 처녀시집 <동경(憧憬)>을 출판하여 낭만적 시
                                          인으로 등장하였다. 가집(歌集)으로 <한 줌의
                                          모래>, <슬픈 장난감> 등이 있다.
                                           1912년 폐결핵으로 인하여 극도의 가난 속에서
                                            27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22. 끝없는 토론 / 이시카와 타쿠보쿠
 
 
우리가 읽었고 또한 토론을 벌인 일,
그리고 우리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
오십 년 전 러시아 청년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토론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끈 쥔 주먹으로 책상을 두르리며,
"브 나로드!"라 외치며 나서는 자 없구나
 
우리는 우리의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또한 민중이 구하는 바 무엇인지 알며,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안다
실로 오십 년 전의 러시아 청녀들보다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끈 쥔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브 나로드!"라 외치며 나서는 자 없구나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청년이라
항상 세상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청년이라
우리는 노인이 일찍 죽고, 우리가 마침내 이길 것임을 안다
보라, 우리 눈은 빛나고 우리 토론은 격렬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끈 쥔 주먹으로 세상을 두드리며,
"브 나로드!"라 외치며 나서는 자 없구나
 
아아, 촛불은 이미 세 차례나 바뀌었고,
물 담긴 주전자에는 하루살이가 떠 있고,
젊은 부인의 열심에 변함은 없지만,
그 눈에는 끝없는 토론 뒤의 피곤이 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끈 쥔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브 나로드!"라 외치며 나서는 자 없구나
 
*시인은 죽기 전 해인 1911년 6월 15일에서 17일에 걸쳐 '끝없는 토론 뒤' 라는
  제목으로 9편의 시를 썼다. 이것은 그 중의 하나다.
  이 시에 등장하여 토론을 벌이고 있는 젊은이들의 이상과 정렬은 50년 전 러시아
  의 청년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게 강렬한 것이며, 자기들 자신과 민중들이 구하
  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50년 전 러시아 청년
  들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누구 하나 나서는 이 없다는 묵직한 분위기가 그 회합
  장소를 억누르고 있다.
  * 쓰보이 시게지는 이 시를 평하여, "언어와 실행의 격리및 괴리를 주제로 하여 노
   래한 것이며, 그 격리와 괴리를 메꾸기 위한 초조함이 이 시 전체 일관된 모티브
   가 되고 있다,"고 하였다.
  *브 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쳐, 심훈의 <상록수> 발표되게
    되었다.
 
일본 명시선 <낭만파, 상징파> 끝
 
23. 여행 / 하기와라 사쿠타로오
 
 
프랑스에 가고 싶기는 하지만
프랑스는 너무 멀다
아쉬운 대로 새 양복을 입고
구름 따라 여행길에 나서자.
기차가 산길을 지날 때
물빛 창문에 기대어
나 홀로 즐거운 일을 생각하자
5월 이른 새벽에
어린 싹 돋아나는 마음에 이끌려서.
 
제4시집 <순정 소곡집>에 수록
 
 
24. 고향의 신작로 / 하기와라 사쿠타로오
 
여기에 길이 새로 개통되나니
곧추 시가로 통하는 것이라.
나는 이 신작로 교차점에 서 있으나
쓸쓸하여 사방의 지평선도 분별할 수 없나니
음침스러운 날이라
해도 집들의 처마도 낮기만 하고
숲속의 잡목들은 마구 잘렸네라.
어이하리 어이하리 내 생각을 돌이킬 수 없나니
내가 등을 돌려 가지 않는 길에
새로운 나무들은 모두 잘렸네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고 있는 고향의 숲도 고향 사람들의 손에 의해 날로
  황폐해져 간다. 도시 사람들과 자기는 아무래도 타협할 길이 없다. 그
  렇게 만든 길은 걷지 않겠다는 것이다.
  젊은 나무들이 베어져 있는 곳, 거기는 새로운 사상이 자라지 않는 토양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거리의 현상이다.
   과학 문명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게 된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오(1886~1942): 처녀시집 <달에 젖는다>를 간행. 사상적 상징시풍을 이루어
                                             일본 근대시를 확립하였다. 한편 평론서 <시의 원리>를 간행
                                             하여 시의 체계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시집: <푸른 고양이> <나비를 꿈꾸다><귀향자> 등이 있다.
 
 
25. 마음 / 하기와라 사쿠타로오
 
마음을 무엇에 비유하랴
마음은 수국(水菊)
복숭아 꽃빛으로 피는 날은 있어도
보라색 추억만은 어이하리야.
 
마음은 또한 해거름에 싸인 정원의 분수
소리 없는 소리의 거니는 울림에
마음은 하나로 모여 슬퍼하지만
슬퍼하지만 덧없어라
아아 이 마음을 무엇에 비유하랴.
 
마음은 두 명의 나그네
하지만 길동무는 오래도록 말이 없기에
내 마음은 이렇듯 언제나 외롭다.
 
 
26. 애련 / 하기와라 사쿠타로오
 
질끈 귀엽고 굳은 치아로
초록색 풀을 깨무는 여자여
여자여
그 여리게 푸른 풀의 잉크로
남김없이 네 얼굴을 칠하여
네 정욕을 고양시켜
우거진 풀밭에 남몰래 놀자
보아라
여기에는 은방울풀이 머리를 흔들고
저기에는 용담풀의 손이 살랑살랑 움직인다
아아 나는 힘껏 네 유방을 끌어안는다
너는 네 힘껏 내 몸을 누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인기척 없는 들판 속에서
우리는 뱀과 같은 놀이를 하자
아아 나는 내 한껏 너를 귀여워하고 있고
네 아름다운 피부 위에 푸른 풀잎의 즙을 칠해 주고 있다
 
*이 시는 대담한 에로티시즘을 관능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이 작품 때문에
  시집 <달에 젖는다>는 판금 조치를 받았다.
 
 
27. 참대 / 하기와라 타쿠타로오
 
빛나는 지면에 참대가 돋아나
푸른 참대가 돋아나
지하에도 참대 뿌리가 돋아나
뿌리가 점점 퍼지고
뿌리 끝에서 잔 뿌리가 돋아나
약간 부예지듯 잔 뿌리가 돋아나
약간 떨고 있고,
굳은 땅바닥에 참대가 돋아나
지상에 날카롭게 참대가 돋아나
꼿꼿하게 참대가 돋아나
얼어 붙은 마디 늠름하게
푸른 하늘 아래 참대가 돋아나
참대, 참대, 참대가 돋아나
 
* 이 시는 노출된 대나무의 줄기를 볼 때 어두운 지하에 얽혀 있는 신경과 같은
   모근(毛根)이 연상되고, 지상에 곧게 서 있는 대나무 밑둥을 볼 때 거센 의
   지의 힘을 직감하게 됨을 노래하고 있다.
 
28. 개구리의 죽음 / 하기와라 사쿠타로오
 
개구리가 살해되었다.
어린이들은 원을 이루고 손을 들었다.
모두들 함께,
귀여운,
피투성이 손을 들었다.
달이 떠올랐다.
언덕 위에 사람이 서 있다.
모자 아래 얼굴이 있다.
 
*죄없는 어린이들이 자기들의 놀이 친구인 죄없는 개구리를 살해하고 말았다. 미워서 죽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참극이 행해지고 있다. 그것도 온화한 봄날 저녁에 그런 일이 행해진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도 망연하게 서 있는 인간- 자신도 그 중 한 명이지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인간의 원죄를 슬퍼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제1시집 <달에 젖다>(1917)에 수록. 그러나 처음 발표한 것은 시인의 나이 30세 때인 1915년
 이다. 이 해는 가장 창작에 열중한 시기로서, 1월에 21편, 2월에 12편, 3월에 6편, 4월에 4
 편, 5월에 7편, 6월에는 이 시와 함께 14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일본 현대시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이 시인의 제4집인 <순정 소곡집>은 키타하라 하쿠슈우의 <추
 억> 무로우 사이세이의 <서정 소곡집> 사토오 하루오의 <순정 시집>과 더불어 일본 근대 서정시의 명시집으로 정평이 있다.
 
29. 봄의 송가 / 카와지 류우코오
 
바람은 외로운 땅에서 태어나
어두운 길을 지나간다
 
바람은 고독한 마음에서 태어나
고독한 모습으로 간다
 
바람은 풀 열매 하나를 잉태하게 하고
많은 꽃들을 찾아간다
 
바람은 고요한 발걸음으로 지나가면서
화려한 춤을 춘다
 
바람은 안 보이는 꽃 한 송이에도 입을 맞추고
흔들리는 넝쿨 한 줄기와도 악수한다
 
바람은 노래하며 말을 건넨다
스스로의 노래와 세계를 가락에 맞춘다
 
바람은 울려 퍼지며 울려 퍼지며 새벽으로,
아침으로, 한낮으로 나아간다
 
 
30. 아침 / 카와지 류우코오
 
규방(閨房)은 꽃과 향수
온갖 냄새의 홍수
그 깊은 곳에서
나머지 밤이 아직
그녀의 꿈을 핥고 있다.
 
일어나라! 아침이다!
햇빛은 네 알몸에
새로운 조절을 준다
주름진 시트도 널자.
 
냉수 마찰로 장미색 피부에
아침 바람과 빛의
끊임없는 입맞춤
 
재빨리
면도질 한다, 비누를 칠한다.
거울은 산뜻해진 얼굴을 보여 준다.
 
그림쟁이는 팔레트를 청소하여
빠악빠악 낡은 그림 물감을 제거했다 - 도덕도!
 
맑은 하늘에서 화폭은 푸르다.
 
활동에서 느끼는 기쁨은
아모르와 마찬가지로 즐겁다.
 
아침 해가 하나 가득!
시가지도
아주 건강하다!
 
* 이 시는 맑은 아침 햇빛 속에 전개되는 생명 찬가이다. 소재가 에로틱하고 야릇한 분위기가
   감도는데도 결코 천한 느낌을 주지않는다. 오히려 아주 건강한 것이다.
    이 시는 작자의 제6시집 <맑은 바람>(1932)에 수록되어 있다.
* 카와지 류우코오(1888~1959): 미술학도로서 세잔, 고흐, 고갱 등에 심취되었던 때도 있었다.
              시집: <길가의 꽃> <새벽의 소리> <물결> 등
             평론집: <남방 고대 문화와 미술> <코로> 등
 
31. 가고 있는 5월의 / 미키 로후우
 
나는 본다
폐원(廢園) 안쪽
이따금 소리없이 꽃들은 지고
 
바람의 산책
고요한 오후의 햇빛에
가고 있는 정다운 5월의 뒷모양
 
 
32. 소경 이정(小景異情) 2 / 무로우 사이세이
 
고향은 멀리 떨어져 그리기만 하는 것
그리고 슬프게 노래하는 것
비록
따라지로 타향의 버렁뱅이가 될지라도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곳
홀로 도시의 해거름 속에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짓느니
그런 마음으로
먼 고향을 찾아 돌아가리야
먼 고향을 찾아 돌아가리야
 
* 이 시에 대하여 작자 자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시는 내가 토오쿄오에 있을 때 때로 창가에 서서 시가지의 소음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새로운 시와 그 창작법>)
* 무로우 사이세이(1889~1962): 시집 <서정 소곡집> 간행으로 일본시단에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소설집으로 <성(性)에 눈뜰 때> <결혼자의 수기> 등
                                         시집으로 <시골의 꽃> < 망춘(忘春> 시집> <고려의 꽃> 등이 있다.
 
33. 모래 베개 / 호리구치 다이카쿠
 
모래 베개는 무너지기 쉽다
소녀여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
많은 별들이 보고 있으니
노출된 무릎을 감추어라
 
* 관능적인 작품이다. 작자는 위트가 넘치는 시를 많이 썼다. 작자의 부친은 외교관이었고
   집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프랑스어였으며, 주로 외국 각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교우를 가진
   시인도 롤랑생 등 외국인이 많았다.
   프랑스 시의 번역에도 뛰어나, 장 콕토의 <비누 풍선> 등 명역이 많다.
*호리구치 다이카쿠(1892~1982): 시집 <달빛과 피에로>로 데뷔했으며, 특히 신감각파(新感覺派)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상징적 서정시를 발표하여 구어(口語)의 표현에 이바지하였다.
                                시집: <베뉴스 탄생> <인간의 노래> <동천(東天)의 노래> 등.
 
34. 바다에서사이죠오 야소
 
별을 헤면 일곱 개
금으로 된 등대는 아홉 개
바위 틈에 하얀 굴은 수없이
생겨나지만
내 사랑은 하나뿐이라
외롭구나
 
*작자는 조숙하여 이미 중학 시대부터 시를 발표하였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섬세하고 우아한 서정과 감각을 지닌 상징시인이었다.
  당시의 형식에 얽매었고 심각하며 음침한 시의 풍토에, 작자는  평명(平明)하고 밝으며 투명한
  정감의 시를 발표하여, 일본 시단에 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학자로도 뛰어나 논문에 <아르튜르 랭보 연구>가 있다.
*시이죠오 야소(1892~1970): 처녀시집 <사금(砂金)>을 발표, 섬세한 감각과 화려한 이미지의
                                    세계를 전개하여 주목을 받았다.
                             시집: <알지 못하는 애인> <아름다운 상실> 등
 
35. 이누호우사키 여정의 노래 / 사토오 하루오
 
여기에 와서
여인을 본따서
이름 모를 화초를 꺾는다.
자신의 그림자를 밟는 우리는
우러르지 않으면
등대의 높이를 알 수 없어라.
물결은 굽이치고
고향의 바다와는 같지 않다.
단지 생각하노니
해변에 서 있는 소나무가
녹슬어 검어졌음을.
나의 마음
녹슬어 검어졌음을.
 
* 일본 시에서 여정(旅情)의 노래 중 절창으로 꼽히는 명작이다. 이 시는 흔히
   사마자키 토오손의 '치쿠마(千曲川) 강 여정의 노래'와 비교된다.
   이토오 노부요시는 "토오손이 청춘의 애상을 노래한 반면, 하로오의 여정은 '녹슬어 검어졌음을'
   이라는 한 점에 녹슬어 있다. 고풍스러운 하루오의 서정에는 이 지적인 눈이 빛나고 있으며
   자의식의 통증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이노호우사키: 일본 칸토오(關東) 지방 동쪽 끝에 있다.
*사토오 하루오(1892~1964): 처녀시집 <순정(純情) 시집>을 발표하여, 애상적인 정서와
                                     뛰어난 기교로 고전적 시인의 모습을 보였다.
                     시집: <동천홍(東天紅)> <사쿠의 풀피리> < 서정 신집(新集)> 등
                    소설집: <갱생기> < 아키코 만다라> 등
 
36. 겨울 / 다나카 후유지
 
하얀 돌 위에 겨울은 있다
아름다운 사람아
내 싸늘한 신발을 밟아 주십시오
 
* 작자의 말 - "시 정신의 진수(眞髓)는 순수성이다"
* 다나카 후유지(1894~ ): 그의 시풍은 감각적이고 평명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다.
                                 처녀시집 <푸른 밤길> 외에 <바다가 보이는 언덕> <산비둘기> <고원(故園)의 가을> 등이 있다
                                 일본에서 영향력이 강한 시인 중 한 명이다.
 
37. 바다가 보이는 돌층계 / 다나카 후유지
 
그녀의 어깨에 내 손이 있었다
 
"바다가 보여요" 돌아보며 그녀는 말했다.
 
내 손이 떨어진다 - 게의 집게처럼
귤나무 사이에는 밝은 첫 여름의 바다
나도 바라본다
그러나 나는 곧 바다보다 그녀의 머리와 옆얼굴을 바라본다
 
 
38. 접시 / 다나카 후유지
 
하얀 접시 하나를 보는 일이란 슬픈 노릇이다.
거기에는 계절의 과일이 등불처럼 솟아 오르고,
따뜻하고 좋은 여성의 육체가 넘치고,
빈약한 불빛 내 사상이 넘치고---
아아 하나의
빈 접시를 말없이 바라보는 일은 슬픈 일이다.
 
* 다나카 휴우지는 세련된 일상어로 수채화를 보듯이 산뜻한 복구풍의 시의 정취를 포착하고,
   또한 간명한 일본적 풍물시를 쓰는  시인으로 정평이 있다.
   이 시는 청춘의 꿈과 고독감을 노래하고 있다. 화사한 색채의 아무 것도 없는 하숙방에서
   "하나의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접시를 보는 일이란 슬픈 노릇이다" 여러 가지 화려한 이미
   지가 떠오르기 때문에 더욱 더 슬프다. 이렇게 젊은 날은 지나가는가. 작자 36세 때 발표한
   이 시는 작자의 시 세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대표작이다.
  * 작자의 말 - "나는 가령 표현에 있어서만이라도 시에서만은 영원한 청춘을 간직하고 싶다
                      고 생각하고 있다. 시야말로 나의 참다운 청춘이다. 그리고 그것은 후회 없는 내
                      생명이기를 원한다"
 
39. 겨울날의 저녁 어스름 / 다나카 후유지
 
겨울날 저녁
넓은 부엌에 유자 냄새가 난다
램프를 켜면 창문의 파릇한 그림자가 사라진다
 
처마 끝에 팔딱 무엇인가 떨어졌다
산탄에 상처받은 한 마리 도요새였다
 
그리고 추운 밤은 싸락눈이 되었다
 
* 작자의 말 - "시는 아름다운 꿈이다. 따라서 현대 생활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내게는 비전만이 아름답다. 따라서 이미지네이션을 항상 쫓고 있다."
 
40. 이와데 (岳手山) / 미야자와 겐지
 
하늘의 산란(散亂) 반사 속에
고색스럽고 검게 드러나는 것
휘날리는 티끌의 깊음 속에
더러우면서 희게 찌꺼기진 것
 
* 시인의 고향산인 이와데 산을 농민다운 필치로 중후하면서 거칠게 묘사하여 농총 생활과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 미야자와 겐지(1896~1933): 농업학교 선생과 소작농을 하면서 창작 생활, 과로로 늑막염에 걸려
                                         작고하였다.
                             시집: <봄과 수라(修羅)> 동화집: <주문이 많은 요리점> 논문: <농민 예술 개론 강요(綱要)>
 
41. / 미야자와 겐지
 
해가 빛나고, 새가 울고
여기 저기 도토리나무 숲도
연기 낄 때,
꺼실꺼실한 더러운 손바닥을
나는 이제부터 가지게 된다
 
* 농민에게 있어서 "봄"은 꽃 피는 계절이라기보다도 경작을 개시하는 때로서 감동을 주게 마련인데,
   그런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42. 고요한 불꽃 / 야기 쥬우키치
 
하나의 나무에
하나의 그림자
나무는
고요한 불꽃
 
* 처녀시집 <가을 눈동자>에 수록된 작품.
  시인은 "고요한 불꽃"과 같은 순수한 삶을 살고 싶다고 염원하고 있다.
  즉,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살기를 원한다.
   시인은 시집 머리말에서 "나는 친구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이 가난한 시를  읽어 주시는 분들의 가슴에 바칩니다. 당신의 친구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적고 있다.
*야기 쥬우키치(1898~1927): 크리스찬으로서 경건하게 살았으며, 병의 요양과 문학 생활 속에서 처자와
                                      하나님을 노래하였다. 처녀시집 <가을의 눈동자>를 간행한 뒤 페결핵으로
                                      요양하며 티없이 맑은 시를 썼다. 작고한 뒤 시집 <가난한 신도>가 간행되었다.
 
43. / 야기 쥬우키치
 
하나의 논에서
또 하나의 논으로 흘러 가는 물
약간의 낙차를 떨어져 가는 물
 
* 이 시의 "물"은 기독교의 "사랑"을 뜻한다.
 
44. 햇빛 / 야기 쥬우키티
 
어느덧 벌써 봄이다
 
기분도
걷잡을 수 없이 노근해져 온다
 
하지만 저기 살랑거리며 솟아 오르는
아지랭이 같은 참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 작가 29세 때인 1926년 3월, 페병에 눕게 된 뒤의 작품.
 
 
45. 소박한 거문고 / 야기 쥬우키치
 
이 밝음 속에
하나의 소박한 거문고를 놓으면
가을의 아름다움을 견디지 못하여
거문고는 고요히 울게 될 것이다
 
* 구석구석 널리 비치고 모든 것을 결실하게 하는 가을 햇빛에 한없이 큰 사랑의 힘을 느끼며
   그러한 사랑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46. 여자들을 향한 탄식의 노래 / 카네코 미츠하루
 
아아 오늘도 지나쳐 가는 여자들
알지 못하는 여자들, 말도 주고받지 않고
다시 만날 날도 없는 그 여자들,
뜬 구름과 같이 채색되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여자들.
 
그 누구와 살아도 세월은 흘러가고
마찬가지로 생은 공허한 것이리라.
방탕이여, 모두 써버린 젊음은
쏟는 술과 마찬가지여서 다시금
그 마음을 끓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얀 분 속에 묻혔던 애벌래 여자
아직 따끈한 우유병 여자
잠자리 위에서 깨진 도자기 여자
이십 년 전의 향긋했던 여자들처럼
이십 년 뒤는 젊은 너도 늙고 말겠는가.
 
나는 슬프게 눈을 감는다. 푸른 하늘의 깊음
수많은 돌의 원주(円柱)가 무너진다.
퇴장하는 것들의 요란스러운 울림소리
거꾸로 흐르는 "때"의 혈류(血流) 속에서 나는 외친다.
"1천만 명의 여자들이여 안녕."
 
*시집 <인간의 비극>에 수록
 노년(老年)에 이른 남자가 체력이 쇠하고 성의 능력을 상실한 자각 속에서, 지난날의 여자에 대한 그리운 추억을
 더듬고 있다. 이 시는 노인의 성에 대한 결별의 시기에 느끼는 충격과 체념의 쓸쓸한 이중의 심성을 노래한 것이다.
*키네코 미츠하루(1895~1975): 상징파와 고답파로 출발하여 후기에는 사회 비판의 시를 썼다. 반평생을 유랑 생활을 했다.
                     시집: <적토(赤土>의 집> <딱정벌레> <물의 유랑> <인간의 비극> < 애정 69> 등
 
 
 개여뀌풀 / 니시와키 쥰사부로우
 
 
개여뀌풀이 피어났다
흙탕길에서 방황하는
새로운 신곡의 처음
 
*개여뀌풀이 피어 있는 흙탕길에서 방황하면서도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없다. 흙탕길은 일본 사회, 가련한 개여뀌풀 때문에 거기서 탈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뇌는 더욱 심각해지게 마련이고, "신곡
의 처음"이라는 말과 같은 비유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니시와키 쥰사부로우(1894~?): 언어의 일상적인 의미와 그 조립을
                                  배제함으로써 특이한 이미지를 구
                                  성하는 시를 주장하였다.
                                  "시와 시론"의 새로운 문학 운동을 전
                                  개한 초현실주의 시인이다.
                       시집: <나그네 돌아오지 않다><근대의 우화>등 
 
  / 니시와키 쥰사부로우
 
 
남쪽 바람에 부드러운 여신이 찾아왔다
청동을 적시고 분수를 적시고
제비 배와 황금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물살을 안고 모래를 쓰다듬고 물고기를 마셨다
살짝 사원과 욕장과 극장을 적시고
이 백금의 현금(鉉琴)이 흩어진 것 같은
여신의 혀는 살짝
내 혀를 적셨다
 
* 처녀시집 <암바르발리아>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의 제목인 Amburvalia는
그리스어로 추수제(秋收祭)를 뜻한다.
 저자는 일찌기 화가를 지망했던 일이 있는데 이 시에는 그 회화적 기질이 있
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영문학자답게 이미지스트로서의 시풍을 형
성하고 있다.
*작자의 말: "회화적이면서 이미지 그 자체를 단순히 보고 무엇인가를 느끼고 싶
              은 시를 쓰고 싶다. 그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시의 내용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를 신비적인 것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것을 시의
              아름다움이라 하자, 시의 작품은 이미지로 끝난다"
 
별과 마른 / 쓰보이 시게지
 
별과 마른 풀이 대화하였다
조용한 한밤중
내 주위에만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쩐지 외로와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려 할 때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마른 풀 속을 찾아보았지만
별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아침
눈을 뜨자
무거운 돌이 하나
마음 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날마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돌은 언제 별이 되랴
돌은 언제 별이 되랴
 
* 제1행 "별이 마른 풀과 대화하였다"는 구절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이상(理想)으로서의 평화를 바라고 있는 작자 자신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제3행 "내 주위에만 바람이 불고 있었다"는 작자의 전쟁 현실에 대한 위화감
          과 저항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작자는 자신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전쟁의 공기에 대한 위화감을 위화감으로 의식하다는 것
          은 소극적이기는 해도 전쟁에 대한 저항감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나의 전쟁 경험의 중요한 한 측면이었다"
  제2연 끝의 "돌은 언제 별이 되랴"는 패배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계속하여 살
          기 위한 이상과 희망을 발견하려 하는 작자의 삶의 자세의 신조를 토로한
          것이며, 저항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쓰보이 시게지(1897~1975): 개인 잡지 <출발>을 간행하였고, 오카모토 쥰, 하기
                                  와라 교오타로우 등과 시잡지 <적과 흑>을 간행하였
                                  다. 저항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시집: <전쟁의 눈> <노령의 시초> 등이 있다.
 
탄생일 / 안자이 후유에
 
나는 나비를 핀으로 벽에 꽂았습니다 - 더 움직이지 못한다
행복도 이와 같이.
 
식탁에는 리본을 맨 가축이 가축의 모양을.
병에는 물이 병의 모양을.
슈미즈 속에 그녀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 특히 끝 줄은 그녀의 곡선미를 그대로 나타내어 격조 높은 관능미를 표출하고 있다.
  작자가 만주 땅에서 지은 시.
 
 
/ 안자이 후유에
 
나비 한 마리 달단 해협을 건너갔다.
 
*달단: 종족(몽골족)이름
* 이시는 작자로 하여금 이미지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결정해 준 기념비적 작품이다.
  한가로운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시이다. "달단해협"이란 말이 동양적인
  냄새를 풍겨 주고 있으며, 철새가 떼를 지어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나비 한 마리" 해협을 건너간다고 하는 데서 우아하면서도 용감한 평화의
  사절을 연상하게 한다.
  작자는 <자전(自傳)>에서 "만주에 건너가 산 지가 열 다섯 해, 공간의
  아름다움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고, 지체 하나를 상실하고도 멈출 줄 모르는 속 
  력에의 대쉬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안자이 후유에(1896~1965): 한 단어에서 연상을 계속하여 발전시켜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할 수 있는 심상주의자이다
                                  선명한 이미지로 짧은 시를 쓴 이미지스트이다.
                       시집: <군함 마리> <대학의 휴가> <달단해협과 나비> 등.
 
새벽 / 요시다 잇수이
 
 
누에는 잠잔다
그림자 하얗다
산들의 머나먼 바람소리
선을 그은 언덕의 새벽
 
* 이 시는 먼 지평선의 희게 밝아져 오는 새벽의 이미지를 노래하고 있다.
   현실이라 생각해도 좋고, 환상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 시가 수록된 제1시집 <바다의 성모>(1926) 후기에
   "동경과 추억, 동화의 감상적인 꿈 많던 날의 서정시"라고 적혀 있다.
 
어머니 / 요시다 잇수이
 
아아 아름다운 거리
항상 멀리 사라져 가는 풍경---
슬픔의 저쪽, 어머니를 향해
더듬으며 치는 한밤중의 피아니시모
 
* 처녀시집 <바다의 성모> 에 수록, 조금씩 멀어져서 희미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요시다 잇수이(1898~1973): 초기에 섬세하고 화려한 낭만적 시풍을 지녔으나.
                                                  점차 내면적 사색을 강조하여 고전적 완성미를 추
                                                  구했다. 동인지 <시와 시론> <신시론>에서 활동.
시집: <바다의 성모> <고원(故園)의 서(書)> <미래자> <흑조 회귀(黑鳥回歸)> 등
 
조선 / 마루야마 카오루
 
 
 언제부터인지 아가씨는 달리고 있었다. 아가씨 뒤에 귀신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뛰면서 머리빗을 뽑아 던졌다. 빗은 귀신 사이에 험한 세모의 산이 되었다. 귀신은 그 산 뒤에 가리워졌다. 그 사이에 아가씨는 멀리 달아났다.
 이윽고 산꼭대기에서 귀신이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아가씨는 따라 잡히게 되었다. 아가씨는 허리에 찬 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는 연꽃 피어 있는 못이 되었다. 귀신은 그 건너편에서 흙탕에 빠지며 힘들게 건너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아가씨는 다시 귀신을 멀리 떼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귀신은 다시 따라왔다. 아가씨는 이번에는 한쪽 신발을 벗어 던졌다. 신발은 귀신의 코에 가 맞고, 거꾸로 떨어져 낭떨어지로 변했다. 귀신은 투덜거리며 조심조심 낭떨어지를 기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사이에 그녀는 조금 달아났다.
 끈질기게 귀신은 다시 따라잡으려 했다. 아가씨는 저고리의 푸른 고름을 뜯어 던졌다. 그것은 큰 강이 되었다. 귀신이 뗏목을 찾는 사이에 아가씨는 조금 달아났다.
 이야기 도중에 어르신네가 찾았다. 한씨는 긴 담뱃대를 입에서 떼고는 서둘러 사랑방에서 나갔다.
 그로부터 서른 해가 흘렀다. 어린 내 기억이 거니는 그 나라 지표(地表)에는 아가씨가 울면서 던진 것들의 흔적이 있다. 늑골(肋骨) 같은 들판 길에는 풀 없는 바위산이 환상저럼 앞을 막고, 늪에는 물이 말라 진흙이 타고 있었다. 까마귀는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에서 울고, 돌 뒤로부터 늑대라는 이리는 하품하듯 목청을 울리면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늘도 계속 국토 어디에선가 아가씨는 달리고 있다. 몸에 지닌 모든 것을 버리고 벌거숭이로 외치면서 달리고 있다. 귀신은 계속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려 한다,
 어느 해의 가장 불행한 순간 그녀는 마지막 부분을 가린 천조각을 던지고 슬프게 땅에 엎드렸다. 천조각은 바람에 펄럭거리며 가까운 강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물이 되었다. 기슭에 넘쳐 뚝을 무너뜨리고 홍수가 되어 들을 메꾸었다. 배추밭을 메꾸었다. 소와 말을 메꾸고, 유교의 애곡소리 서린 둥근 무덤을 메꾸었다. 무수한 인가는 물 위에 떠 표류하고, 지붕 위에서 손을 흔들며 이 세상에 결별을 고하는 선들을 싣고 바다로 흘러갔다.
 
* 이 시는 1937년 6월호 <개조(改造)> 발표되었고, 뒷날 <물상(物象) 시집>에 수록되었다.
*마루야마 카오루(1899~1974): 시 동인지 <시와 시론> <사계(四季)>를 중심으로 신시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집: <돛-램프-갈매기> <북극> <청춘부재> 등
 
 
/ 마루야마 카오루
 
선장이 럼주를 마시고 있다.
마시면서 무엇인가 노래하고 있다.
노래는 목쉬어 천천히 활차(滑車)가 돛줄에 돌 듯이 슬프다.
갈매기가 날개 소리를 죽이고 노의 어스름에서 속삭이고 갔다.
이윽고 하구에 달이 솟아 오르리라.
 
선장의 가슴도 붉은 럼주의 만조(滿潮)가 되었다.
그 흐름 밑에
오늘 저녁도 문신을 한 닻이 푸르게 흔들거리고 있다.
 
* 활차: 줄을 걸어서 회전할 수 있게 만든 홈이 파인 바퀴
* 육지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은 가지고 있으면서 끝내 배 이외의 세계에서는
  살지 못하고 다시금 배에 돌아온 선장의 굴절된 상심(傷心)이 묘사되어 있다.
 
 
분수 / 마루야마 카오루
 
학은 날려고 하는 순간, 솟구치는 물방울에
  목이 관통되고 말았다.
그 이후 뒤를 보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생각하고 있다.
 
* 처녀시집 <물-램프-갈매기>에 수록됨. 날려고 하는 몸짓을 한 채 결박된 분수의 학-
  그것은 뜻을 품고있지만 생활 때문에 꼼짝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작자는 명문인 토오쿄오 대학 국문과를 중퇴하고 직업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던 때가
  있었다. <사계(四季)> 동인인 그는 <시와 시론>의 신시 운동의 영향을 받아 어두운 생
  활에서 터득한 허무감과 고독감을 물상(物象)을 초월하여 무게 있는 시를 썼다.
  작자의 말: "<시와 시론>운동은 시의 연못의 흐린 물을 높은 창공까지 물방울로 반짝이게
              하는 분수의 역할을 하였다."
 
 
아름다운 상념(想念) / 마루야마 카오루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것과 같이
낮하늘에도 별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상념처럼
기이하게 아름다운 것은 없다
 
나는 산에 살면서 왜 그런지 이따금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산 속 깊이 들어가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면 실제로
숲과 태양이 잠겨 있는 물 밑에서
무수한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눈에 보여온다
 
* 눈에 보이는 현상의 배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 감추어져 있다. 평상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지만, 마음이 순수해질 때 그 본질을 직감
  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은 깊은 산의 호수에서 한낮에 별을 보고 있다.
 
 
불리(不利) 속에서 / 마루야마 카오루
 
청춘은 머리가 너무 자랐다
청춘은 때로 더럽혀져 있다
청춘은 말을 더듬거릴 뿐이다
청춘은 구두 밑창에 못이 나와 있다
 (뉘우침의 아픈 못이)
청춘은 호주머니가 구멍 뚫렸다
청춘은 팔이 불타고 있다
또한 그 위에
청춘은
청춘은
청춘은
이상의 불리함 속에
청춘은 청춘임을 모르고 있다
 
* 청춘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아쉬움 및 향수를 노래한 것으로서, 지나가 버린
  자기의 청춘을 아쉬어하며 현재 청춘의 한가운데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한없
  는 애정을 쏟고 있다.
  작자의 말: "시에 붙들려 지나온 나의 어느 시대에 과연 청춘이 있었는가---
               지나가 버린 청춘에 대한 아쉬움뿐이다."
 
 
광업 / 마루야마 카오루
 
인간은 처음에 쇠 한 조각을 손으로 만들었다
그 쇠조각으로 쇠를 단련하고
쇠보다 더욱 강한 강철을 만들었다
 
오늘날 부드러운 사람의 손은 쇠를 단련하지 못한다
쇠는 불에 용해시켜 쇠로 두들겨야 한다
하지만 쇠를 달구는 화로도 내려치는 망치도
바로 쇠 그 자체인 것이다
 
쇠를 만드는 쇠가 먼저인가
만들어지는 쇠가 먼저인가
아서라 사람은 처음 쇠 한 조각을 손으로 만들었다
 
옛날 인간의 지헤는 나무를 부벼 불을 일으키고
손으로 손을 깨뜨리는 석기를 갈고
석기와 불로써 돌을 깨뜨리는 쇠를 만들었다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의 손을 펴고 태양을 향해 쳐들었다
그러자 펼쳐진 손가락 사이에서
아프게 피를 뿜는 무수한 먼 조상의 손바닥이 겹쳐 보였다
그것들은 곧 초록과 보라색 불꽃을 튕기며
톱니바퀴처럼 덜컹덜컹 돌기 시작하였다
 
*작자의 말: "나는 자신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강한 경향을 찾아보게 된다.
               그것은 물상에 대한 어떤 뜻대로 안 되는 추구욕과 그것에 대한 향수의
               정서이다."
               작자는 처녀시집 이후 7,8년 동안 계속된 허무와 고독의 생활에 벗어나
               현실에의 접근과 인간 존재의 강한 긍정을 보여 주고 있다.
 
 
미래에 / 마루야마 카오루
 
아버지가 말했다
보아라 이 그림을
썰매가 빨리 달리고 있는 것을
늑대떼가 뒤쫓고 있는 것을
몰이꾼은 필사로 토나카이에게 채찍질하고
나그네는 뒤돌아서 짐짝 사이로부터
계속해서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지금 총부리에서 빨간 불이 번쩍이는 것을
 
이들이 말했다
한 마리가 맞아 쓰러졌어요
아아 다른 한 마리가 덤벼들었으나
그것도 피에 젖어 쓰러졌어요
밤이여요 끝없는 광야가 눈에 묻혀 있어요
하지만 나그네는 쫓아갈 수 없을까요
썰매는 어디까지 달려야 하는 거일까요
 
아버지가 말했다
이리하여 밤이 새게 될 때까지
어제의 뉘우침을 하나하나 사살하여
시간처럼 내일을 향해 달려 가는 것이다
이윽고 태양이 떠오르는 앞길에
미래의 거리는 빛나며 나타난다
보아라
언덕 위 하늘이 이미 환해지고 있다
 
* 이 시는 아버지가 그림책을 펴서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었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해 좀더 깊은 인생적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허들 경기 / 키타가와 후유히코
 
 
다가오는 벽과 같은 허들, 펄쩍 뛰는 그녀들.
조금씩 쳐져 있기는 해도 같은 자세의 그녀들.
허들은 다리 아래 있다 쭉 뻗은 앞 다리,
  한 다리에 맡기는 기수와 같이.
멋진 유연스러움이다. "속력의 융단"을 깔면서 간다.
손가락에 닿는 한 조각 구름.
 
 
*작가의 말: "영화라고 하는 것을 이미지하는 시나리오가 새로운 서사시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알아야 한다."
*허들을 뛰어넘어 달리고 있는 여자 선수의 유연하고 탄력 있는 동작의 아름다움
 을 노래하고 있다.
*키타가와 후유히코(1900~?): 구어시를 부정하고 선명한 이미지의 시를 썼다.
                                 초현실주의의 산문시 운동을 일으킨 그는 <시와
                                 시학>의 멤버로 활약하였다.
                  시집: <검온기(檢溫器)와 꽃> <전쟁> <실험실> 등.
 
중의 / 키타가와 후유히코
 
 
암벽 위에서 화초가 흐트러진다. 그 중 꽃 한 송이. 항구가
   축소한다. 마침내 초록색 반점. 아아 이별.
 
 
*전송객으로 혼잡스런 부두, 거기 섞여 있는 그녀의 모습, 점차 멀어져 가는 항구 도시,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져 잊혀지지 않는 광경이다.
  "화초가 흐트러진다. 그 중 한 송이"는 근경(近景), "항구가 축소한다"는 중경(中景),
  "초록색 반점"은 원경(遠景)이다. 점점 멀어져가는 육지를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는
   선명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작자의 말: "나의 경우는 이미지즘을 주장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시의 어조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언어의 울림에 관하여 신경을 쓰면서 시를 써 왔다. 단지 시론으
              로 말하지 않을 따름이다."
 
풍경 / 키타가와 후유히코
 
 
푸른 하늘 아래에 집오리가 떠 있다.
콘크리트 벽에 세워져 있는 쇠 사다리는 그림자보다도 희박하다.
다이나모처럼 회전하는 태양, 태양, 아아 태양.
 
 
*다이나모: dynamoto. 회전기. 전동기와 발전기의 동작을 조합한 변환장치.
*작자는 1920년대 전위 시인으로 활약했는데, 이 시는 전위파 작품들 중 가장 높
  이 평가되고 있다.
  작자는 한여름날의 한낮에 공장이 오염시키는 운하 가에 서서 자본주의적인 활기찬
  풍경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을 보고 있다.
  이 시를 유화에 비긴다면 액자를 파열시킬 정도의 생명감이 넘치는 풍경이다.
 
신호 / 미요시 타쯔지
 
 
오두막 물방아, 떨기 속에 한 그루 동백
새로 난 수레바퀴 자국에 나비가 내린다. 그것은
방향을 돌리면서
고요한 날개의 억양으로 내 걸음을 멈추게 한다
건널목이여, 여기는---나는 그 자리에 선다.
 
*작자는 제1시집 <측량선>을 간행한 뒤 건강을 해쳐 온천에서 요양생활을 보낸 적이 있다.
 이 시는 그때의 작품이다. 이 시속의 계절은 이른 봄, 산책에 나선 작자는 물레방앗간 뒷길
 에 이르러 봄 소식을 알리는 나비가 날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미요시 타쯔지(1900~1964): 일본 전통시를 계승하면서, 보들레르와 프란시즈 잠의 영향에
                                  의한 새로운 서정시를 개척하였다. 일본 현대시를 고전적 완
                                  성에까지 승화시켰다고 평가되고 있다.
                시집: <측량선> <남창집(南窓集)> <한화집(閒花集)> 등이 있다.
 
 
아베마리아 / 미요시 타쯔지
 
 
나는 서둘러 십자를 긋는다
낙엽 쌓인 가슴, 오솔길의 안쪽에.
 
아베마리아, 마리아시여,
밤이 오면 저는 기차를 타야 합니다.
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요.
 
내 손수건은 새것이다.
하지만 내 눈물은 이미 낡았다.
 
--다시금 만날 날은 없으련가
--다시금 만날 날은 아마 없겠지.
 
 
섬돌 / 미요시 타쯔지
 
 
아아 꽃잎은 흐르고
아가씨에게 꽃잎은 흐르고
아가씨들은 소근거리며 걷나니
한가로운 신발 소리 하늘에 흐르고
이따금 눈을 들고서는
맑게 갠 사원의 봄을 지나가도다
사원의 기와는 이끼 끼어 푸르고
처마 모서리에는
풍경이 꼼짝 않고 매달려 있고
외로이
내 몸의 그림자 섬돌 위에 지느니
 
유모차 / 미요시 타쯔지
 
 
어머니 -
여리게 정겨운 것이 내리고 있나니
수국의 꽃잎 같은 것이 흩날리나니
끝없는 가로수 그림자 따라
바람은 쓸쓸하게 불고 있어라
 
때는 해거름
어머니 내 유모차를 미시라
눈물에 젖은 석양을 향하여
휘청휘청 내 유모차를 미시라
 
붉은 술이 달린 비로드 모자를
싸늘한이마에 쓰게 할지니
간 길 서두는 새의 무리 따라
계절도 하늘을 건너고 있다
 
여리게 정겨운 것이 내리고 있나니
수국의 꽃잎 같은 것이 흩날리는 길
어머니 나는 알고 있나니
이 길은 멀고 멀어 끝없는 길
 
*붉은 술이 달린 모자를 쓰고, 유모차에 태워서 어머니가 밀어 주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림움을 노래하고 있다.
 
 
아침에 꿈꾸다 / 미요시 타쯔지
 
 
어딘지도 모를 산마을에
쉴 새 없이 벚꽃이 지고 있음을
색깔 여린 벚꽃이 쉴 새 없이 비스듬히 지고 있음을
아침에 꿈꾸다
벚꽃은 계속해서 팔락팔락 지고 있음을
팔락팔락 꽃잎은 고요히 숨쉬며
바람에 흩어져 흘러 가고 있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그 꽃은 두 잎 세 잎 떨어짐을
벚꽃이 이렇듯 하염없이 지는 것을 꿈꾸었다
아침의 꿈
눈에 분명하게
또한 물보다도 미끄럽게
마음에 스며 잊을 수 없어라
특히 이것은
모기장 안에서 싸늘하게
뺨에 느끼는
스산한 가을날의 아침이기에
꿈에서 깨어 나는 슬퍼하노니
왜 그런지 모르나 먼먼 날의
탄식이니 한옛날의
끝의 유산이어라
 
*작자는 공습을 피하여 시골에 소개해 있다가 일본의 패전을 겪게 되었다.
 일본 전통 시가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현대 시인으로서, 그는 전통적 운
 율인 5음과 7음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미묘한 리듬을 자아내고, 선명한 이미
 지를 묘사하고 있고, 일본어가 지닌 아름다움을 발휘하고 있다.
 패전의 아침, 꿈속에서 벚꽃(일본의 국화)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일본의 전통적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바다는 푸르리라 / 미요시 타쯔지
 
 
마른 풀밭이라 푸르름은 드물고
드문 푸름도 서리로 아파하는 한낮
사람 있어라 무엇을 보는 것일까
옷무늬 퇴색했고 소매 없는 옷 걸치고 어깨를 웅크리고
  바닷물에 탄 목 언저리는 살이 쪘고 주름투성이어라
노인이라 머리는 희게 새었네라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나도 여기서 그곳을 바라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어라 단지 마른 풀과 마른 모래뿐이어라
노래가 사라지고 만 그 뒤로는 마음 붙일 만한 것 사라졌나니
날개쳐 하늘을 나는 것도 끊어진 시대여라
바라보며 자세히 보니 희미롭지만 마른 풀 사이로
분명히 보이는 것은
-- 오랑캐꽃
줄기 높이 뻗고 피어 있어라
잊은 꽃 잊혀진 꽃이련가
새봄의 선구자임을 그 누가 알랴
한 송이뿐인가 했더니 외롭지 않아라
그 옆에 피었네라 둘둘 셋셋 다섯
내게 기쁜 사실을 가르쳐 주었나니
어부 노인장
소매 없는 노인은 어디 갔는지 모습조차 사라졌어라
저쪽 나무 아래 돌부처는 서 있고
바다는 푸르러라
 
 
/ 미요시 타쯔지
 
 
타로우를 잠재우고 타로우의 지붕에 눈이 쌓인다
지로우를 잠재우고 지로우의 지붕에 눈이 쌓인다
 
* 어느 평자는 미요시 타쯔지를 가리켜 현대 시인 중 온갖 시법을 전부 다 시도해
본 시인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도 이 시는 짧은 작품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해독되
고 있는 명작이다. 2행으로 나란히 나열되어 있는 "타로우"의 집과 "지로우"의 집,
이름을 우리 언어의 뉘앙스로 고치면 "일남이"의 집과 "이남이"의 집처럼 평범하면서
민화적인 전원의 집이 된다. 이런 농촌의 눈 오는 밤의 정경을 노래하고 있다.
 
물고기 / 타카하시 신키치
 
 
어느 곳에서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곳은 바다나 강이나
그 외의 물 속도 아니었다
 
거기는
돌 속이었다
 
화석된 물고기는
돌과 함께 헤엄치고 있었다
 
등뼈만 남고
살은 사라진 상태였다
 
억 년 동안
돌의 평면은 보존되었으나
이윽고 그 선도 사라질 것이다
 
현상은 어디서나
뚝뚝 잘라진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움직여
헤엄치고 있다
 
*타카하시 신키치(1901~?): <다다이스트 신키치의 시>를 간행하여 파괴적인 다다이즘 시인
                                으로서 시단에 충격을 끼쳤다. 일본에 다다이즘을 도입한 그는
                                <역정(歷程)>동인이다.
              시집: <안개섬> <참새> <잔상(殘像)> 등.
 
 
/ 오카모토
 
 
올라가니 산이었다
내려가니 골짜기였다
산에도 골짜기에도 눈이 있었다
하나님도 짐승도 만나지 않았다
 
 
 산의 아이 / 오카모토
 
 
징기스칸의 후예 같은 얼굴을 한 산의 아이가
지나가는 나를 보고 무엇이라 소리쳤다
돌아보았더니
두 손을 쳐들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산의 아이는 몇 살이 되어야 기차를 타게 될까
 
 
세대 / 오카모토
 
 
텅 빈 맥주집 한 구석에서
오십에 가까운 아버지와 25세 딸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나이보다는 젊게 보이는 아버지와
앳되게 보이는 딸이
컵을 부딪치고 마시고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사업으로
딸은 딸의 일로
여느 때는 거의 말을 나누지 못한다.
알고 있는 바는 두 사람 모두
전쟁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일이다.
개와 고양이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얼마 전까지 인형을 안고 자던 딸.
 
딸이 선물한 라이터로 담배를 붙이고
아버지는 생각한다
-딸은 연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밝고 앳된 눈동자 속에
아버지가 모르는 딸의 세계의 비밀이 있는 것일까
 
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일본의 어두운 바윗돌 밑에서 살아온 아버지,
아무리 어려운 생활에도 울음진 얼굴을 보인 일이 없는 딸.
다시 등골이 써늘해지는 충격을 느끼면서
두 세대가 고요히 맥주를 마시고 있다.
 
*작가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이다. 오카모토 쥰의 시는 선풍과 같이 격정에 휩싸인 것이 많지만,
이 작품에서 찾아보게 되는 것은 서정미 넘치는 서민적인 감각이다. 그러나 그속에는 역시 상황 비판이 스며 있다. 이 시는 작자의 초기 서정성이 깊이 마음 속에 잠겨있고, 다듬어진 언어에 의하여 밀도 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 위기를 배경으로 부모의 정을 교묘히 스미게 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평명(平明)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산문에 가깝다. 구성은 극적인 수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일찌기 작자가 영화 관계의 일에 종사한 때문일 것이다.
*오카모토 쥰(1901~1978): 전위 예술파 시에 공명하여, <적과 흑> <탄도(彈道)> <시 행동>등 동인지를 간행하였다
                            시집: <방에서 아침으로> <벌받는 사람은 살아있다> <밤의 기관차> <허름한 깃발> 등.
 
다리 / 무라노 시로오
 
 
도취의 밤은
수천 군데의 상처에서
피를 뿜고 있다
 
그것이 운하에 흘러들어
질퍽하게 웅덩이져 있다
다리는 거기 걸려 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도
과거로부터 온 것도 아니요
단지 저쪽 기슭에서 이쪽 기슭에 걸려 있을 뿐이다
죽은 흐름을 건너서
두 개의 밤을 이어 주고 있을 뿐이다
 
밤이 깊어지면 그 위에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자가 와서
서로 자신 없는 자세로
끌어안는 일도 있다
 
* 붉은 네온등이 비치고 환락의 배설물 오염되어 있는 운하에 충실된 과거로부터 온 것도 아니요
 밝은 미래를 향한 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 의미도 없이 단지 걸려 있는 "다리"는 찰나적이며
 관능적인 자극을 추구해 마지 않는 현대의 절망적 소비 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자가의 말: "오늘의 시인은 인생을 넓게 이해하고 문명이 가르치는 문화의 의의를 이해하여 미
              친 세계게 저항해야 한다."
*무라노 시로오(1901~1975): 전통적 서정성을 배격하고, 객체에 따른 사고를 조형하고 표현
                                하는 즉물주의적 시를 썼다. <시와 시론>동인이다.
            시집: <덫> <체조 시집> <서정 비행> <추상의 성> <망양기(亡羊記)> <예술> 등
 
 
노래 / 무라노 시로오
 
 
꽃내음을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 정다운 것이 내게로 온다
그것은 빛나는 나무들도 아니고
자매들도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혼란한 세게의 밑바닥에서
무엇을 그리워하는 감정일까
늙은 그루터기가 꽃피며
장미가 거기에서 향내를 풍기듯이
 
 
철봉 / 무라노 시로오
 
 
나는 지평선에 매달린다
손끝이 조금 걸렸다.
나는 세계에 매달려 있다.
근육만이 나의 신뢰이다.
나는 벌겋게 된다. 나는 수축된다.
발이 올라간다.
오오 나는 어디 가는가.
커다랗게 세계가 한 바퀴 돌고
나는 세계 위에 있다.
높은 곳에서의 부감(俯瞰)
아아 양 어깨에 유연한 구름.
 
*작자의 말: "여기에 묘사된 인간은 인생관적인 것에 젖은 통속적인 인간이
               아니다. 외계의 사물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구성하는 한 개의
               사물로서 냉정히 객관화된 것이다. 이것은 노이에 자하리히카
               이트(신즉물주의)의 이념적 근거가 되는 존재론적인 관점에 의한
               미학에의 실험이었다."
 
 
가을 / 무라노 시로오
 
 
레몬을 닮은 얼굴빛이
엷어져 가는 사람아
가랑비 속에서 밤의 어두움 속에서
그대의 순수는
나날이 새로와라
그리고 부용꽃은 단추처럼 싸늘하게
기침하는 그대의 가슴 위에서
 
 
밤의 내장(內臟) / 무라노 시로오
 
 
문장은 검게 용해되어
여기저기 웅덩이져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애매하고 어두운 밤을 걸어왔다
어느 거리 모서리에 오자
붉은 빛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고
그 아래서
중국 우동집 사람이 혼자서
자기의 간과 같은 것을 끓이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나의 인생 속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육친 가운데 누구와 닮았으니
아무리 해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부흥의 전망조차 보이지 않는 혼돈 속에서
 자기 생명을 삭제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팔아 먹고 연명
 하는 삶이라 할 성질의 것이었다.
 
 
시인의 조상(彫像) / 무라노 시로오
 
 
그것은 누구의 얼굴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마치 물 속과 같은
다른 세계에 놓여져 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신의 이름과 인간의 사랑
그러한 영혼의 취향도 말하지 않는다
죽기 위한 피가
풍경을 물들이고
의미를 잃은 직박구리새의 울음이 우주를 째는 날
그저 감탕나무 줄기에 얽히어
강렬하게
존재의 가을을 풍기는 것이다.
 
* 제2차 세계 대전 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에도 계속 핵실험은 행해지고 있었다.
  그 결과 지구의 대기는 오염되고 세계 인류를 공포 속에 몰아 넣고 있다.
*작자의 말: "내가 단순히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현대를 성실하게 살려 한다면 이러한 현대의 사회적 현실의 표상은 당연히 나의 시의 중요한 테마가 되게 마련이다.
              나의 시 속에 현대의 고민이나 의혹 또는 사회적 저항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명랑한 소녀들 / 나카노 시게하루
 
 
내 마음은 슬픈데
넓은 운동장에는 흰 줄이 그어지고
명랑한 소녀들이 뛰놀고 있다
내 마음은 슬픈데
소녀들은 모두 토실토실 살쪄 있고
손발의 피부색은
희고 또는 연한 밤색이다
그 가녀린 뒤꿈치는
마치 사슴과도 같다
 
*서정성이 넘치는 이 시에서 노래되고 있는 것은 운동 선수인 소녀들이다.
 예민한 청춘의 감성이 스며 있다.
 작자의 초기 시들은 감상적인 면이 강하다. "내 마음은 슬픈데"로 시
 작되는 첫 줄의 어두운 내면에 외계의 밝은 운동 선수의 묘사를 대비시
 켜 약동하는 선수들의 선명한 이미지를 포착 부각시키는 대비법이 뛰
 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카노 사게하루(1902~?): 동인지 나상(裸像)을 간행하였고
                               시 소설 평론 등의 분야에서 활동.
            시집: <나카노 시게하루 시집>등
            소설: <배꽃>등
 
 
하얀 소녀  / 하루야마 유키오
 
 
하얀 소녀 하얀 소녀 하얀 소녀 하얀 소녀
하얀 소녀 하얀 소녀 하얀 소녀 하얀 소녀
 
 
*작자의 시에 이와 비슷한 제목 없는 시가 있다
 "언덕에 하얀 호텔이 있고 호텔에서 하얀 마차가 뛰어 나왔다. 마차에는
  하얀 프랑스인이 타고서 하얀 파이프 연기를 뻐끔뻐끔 뿜었는데 연기는 하
  늘에 올라가 하얀 구름 비행선과 충돌하였다. 하얀 구름 비행선은 둥실둥실
  커져서 하얀 마차를 추격했으나 하얀 마차는 하얀 프랑스인의 하얀 파이
  프 연기를 뿜으며 점점 사라지고 말았다."
*하루야마 유키오(1902~?)" 개인지 <사육제>와 동인지 <시와 시론>간행.
         시집: <달이 뜨는 거리> <식물의 단면> <실크&밀크>
        평론집: <시의 연구> <문학평론> <새로운 시론> 등
 
가을 밤의 회화 / 쿠사노 신페이
 
 
그래 춥구나
벌레가 운다
그래 벌레가 운다
곧 땅 속에 들어가야지
땅 속은 싫어
파리해졌구나
너도 무척 파리해졌구나
어디가 이렇게 죄어올까
배일까
배라면 죽고 말거야
죽고 싶지는 않아
춥구나
그래 벌레가 운다
 
*시집<제100 계급> 서두에 게재된 작자의 대표작 중 하나
*작자의 말: "이 시는 와세다의 쯔루마치마치를 걸어가다가 생각난 것으로서,
               나의 속에서 두마리 개구리의 회화인데 그것은 노트에 적기 전에
               완성되었다 그저 뒤에 그대로 적었을 뿐이다."
*이 시의 주제는 명확하다. 추의에 떨고 굶주림에 비틀거리며 서글픈 속에서도 이
  기고 살아가려는 의지를 일상어로 노래하고 있다.
*쿠사노 신페이(10903~?): 대륙적인 기질로 장대하고 우주적인 무한감을 교향악
                              적으로 구성하여 노래하는 호방한 시인이다.
                              동인지 <역정(歷程)을 창간하였다.
                 시집: <제100 계급> <내일은 맑은 날씨> <개구리> <후지산> 등
 
 
공간 / 쿠사노 신페이
 
 
니카라하(中原)여,
지구는 겨울이라 춥고 어둡다네.
 
그럼,
안녕히.
 
젊은 장미들 / 안도오 이치로오
 
 
미래에 뿜어 낼
불꽃의 형태를 누가 알겠는가
마노색(碼瑙色)* 투명한 가시에 숨은
젊은 장미들의 비밀
젊은 장미들의 제네레이션
약간 늙은 동산지기는
단지 외부의 세계를 방황할 뿐이다.
 

*시인은 실제로 장미 가꾸기를 즐겼으며,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장미를 가꾸기 시작한 것은 종전 후 3년째 되던 해인가 시작했으니까,
  이미 10년 가까이 된다. 토마토와 배추를 심던 곳에 어떤 다른 꽃을 심기로 하고
  서너 그루 심어 보았는데 병적이 되고 말아 오늘날에는 작은 마당이 좁을세라 40
  그루 이상이 서 있고, 또한 도로에 면한 담장에도 덩굴장미가 여러 겹 겹쳐 가지
  들이 얽혀있다.
*마노(瑪瑙): 보석의 한 가지. 여기서는 보라색을 띤 투명한 가시.
*안도오 이치로오(1907~1972): 시인이며 영문학자. 난해한 현대시 속에 정온(靜穩),
                                  청징(淸澄)한 시심을 노래하였다. <시와 시론>에
                                  발표한 그의 시는 '사상 이전' '고요한 불꽃' '포지션'
                                  '사랑에 관하여' '경험' '먼 여행' '펼친 손바닥' 등이 있다.
 
 
사랑에 관하여 / 안도오 이치로오
 
 
날마다 나와 더불어
내 속에서
하나의 열매가 익어 간다 -
그 내부에 숨어 있는
벌집의 꿀 창고처럼
정연한 짜임새
 (그것도 나와 함께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둥근 모양으로 부풀어 오르는 세계
금빛 명상과 새로운 관능을 부르는 냄새
열매는 점점 연해진다
어떤 때는 화려하게
너무나도 밝게
하늘 한가운데 걸리고
어떤 때는 고독의 무리(彙)를 두르고
땅 위에서 우러르는 나의 이마에
종기처럼 닿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 열매의 무게를 달아 보지 않았다.
 
*이 시는 전체가 "사랑에 관하여"의 은유로 되어 있다. 시는 본질적으로 비유인데, 그 비유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긴박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은유이다. 작자가 계속 추구한 주제는 삶과 죽음 그리
 고 사랑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사랑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
 
 
신설(新雪) / 안도오 이치로오
 
 
어느 한밤에
문득 긴 고통에서 놓여난 것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밑 모르는 피로를 달래는
새로운 잠이 찾아오면서
나는 보드라운 세계로 감싸여 갔다
그 속 깊은 품 안에
은빛 희미한 밝음이 스며 와
먼 하늘에서
모든 깨끗한 것들 위에
새하얀 수만 개의 깃이 떨어져 왔다
모든 문은 닫혀 있다
집 한가운데서
언제나 아름답게 타오르는 불이여
나는 거기서 투명한 청춘의 그림자를 보련다
나는 거기서 거치른 바다의 울림소리에 귀 기울린다
 
 
설해(雪解) / 안도오 이치로오
 
 
다시금 새로운 축제의 때가 왔구나
새하얗게 눈 덮인 들판 여기저기에
몇 줄기 시내가 드러난다
커다란 악보를 펼친 것처럼
어디서나 밝은 노래소리가 흘러 내린다
부드러운 옷의 스침소리를 내며
장농에서 꽃무늬의 드레스를 꺼낸다
기쁨에 겨운 젊은 사람아
그대가 가리키는 아지랭이 저쪽에
결혼 켸익의 눈부심 속에서
언덕은 달콤한 당의(糖衣)를 입고 있다
그리고 투명한 푸른 하늘에서
초록과 붉은색과 노란색 테입이 드리워져 있어
그 끝을 입에 물고
가지에서 가지로 노래하며 오가는 새들
먼 곳에서 주빈인 연인이 도착할 때까지
잠시 동안이라도
깜빡깜빡 조는 하인도 있다
아아 다시금 새로운 축제의 때가 왔구나
 
*작자의 말: "이미지 그것 자체의 아름다움이 현대시의 큰 요소로 되어 있다
               이미지는 단순히 사상의 수단이나 매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있어서 이미지 그 자체가 사상이나 마찬가지다."
 
나의 사람에게 주는 애가 / 이토오 시즈오
 
 
태양은 아름답게 빛나고
또는 태양이 아름답게 빛나기를 바라며
손을 힘껏 마주 잡고
고요히 우리는 걸어갔다
우리들 안에서
스며나오는 깨끗함을 나는 믿는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은 설령
새들은 항상 변함없이 지저귀고
초목의 속삭임은 때를 탓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는 듣는다
우리의 의지의 자세로
그것들의 광대 무변한 찬가를
아아 나의 사람
빛나는 이 햇빛 속에 스며 있는
소리 없는 공허를
역연하게 찾아보는 눈의 발명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보다 인기 없는 산에 올라가
간절하게 희구된 태양으로 하여금
거의 죽은 호수 한쪽을 두루 비추게 하자
 
*처녀시집 <나의 사람에게 주는 애가>에 수록됨. 이 시집을 출판하면서 작자는
 "나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나의 시는 여러 가지 사실을 숨겨 두고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만 유리코(百合子)씨는 어려울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까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면 이제 나의 시는 끝장입니다."
*작자의 말: "내가 시를 진짜로 써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릴케의 <신시집>을
                      읽고나서부터이다. 시가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사고의 정확함
                      이 나로서도 어느 정도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토오 시즈오(1906~1953): 독일 낭만시에 의해 촉발된 강렬한 시 정신을 일본적으로 소화하여 밀도높게 노래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쿄오토 제국 대학 국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시집: <나의 사람에게 주는 애가> <여름꽃> <봄의 서두름> <반향(反響)> 등
 
 
마당의 매미 / 이토오 시즈오
 
 
여행길에서 돌아와 보니
이 마당에는 이 마당의 매미가 울고 있다
나는 어떤 시와 같은 것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
종이를 폈더니
물과 같은 평명(平明)한 몇 줄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써진 것을 앞에 놓고
갑작스럽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일종의 전생에 대한 생각과
약간의 현기증이 동반된 구역질을 느끼며
매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피곤하기 때문에 도리어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마다의 매미 소리에 영원한 시간을 느끼고 있다.
 
 
광야의 노래 / 이토오 시즈오
 
 
내가 죽는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이어진 봉우리들의 몽상이여! 너의 흰 눈을
사라지게 말아라
숨막히는 희박한 이 광야에
사람들 모르는 샘을 지나서
항시 향긋한 나무 열매 열리는
숨겨진 장소를 지나
내가 씨 부린 꽃의 징조가
다가온 날 내 시체를 끄는 말로 하여금
이 이정표를 따라 돌아오게 하리라
아아 그리하여 나의 영원한 귀향을
고귀한 그대의 흰 빛으로 전송하고
나무 열매 빛나고 샘물은 웃고---
나의 아픈 꿈이여 그때야말로 마침내
쉬어야 하리!
 
북쪽 바다 / 나카하라 츄우야
 
 
바다에 있는 것은
그것은 언어가 아닙니다.
바다에 있는 것은
그것은 물결뿐.
흐린 북해의 하늘 아래
물결은 곳곳에서 이를 드러내고
하늘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끝날지 알 수 없는 저주.
바다에 있는 것은
그것은 언어가 아닙니다.
바다에 있는 것은
그것은 물결뿐.
 
 
*작가는 중학 시대(17세)부터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보들레르의 시를 읽고
 방탕한 생활에 탐닉하였고, 10대 말기에는 이미 인생의 온갖 애환을 경험
 한 조숙-퇴폐의 시인이다.
 이 시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북쪽 바다"의 이미지를 통해 인생이란 허무의
 심연(深淵)에 떠 있는 존재에 불과함을 노래하고 있다.
*니카하라 츄우야(1907~1937): 특히 랭보의 영향을 받아, 조숙함과 탐닉
                                    생활을 통한 사랑의 슬픔을 낮은 가락으로
                                    노래하였다. 퇴페와 허무의 시인으로 일컬
                                    어지는 그는 <사계(四季)>를 통해 시를 발
                                    표하였고 <기원(紀元)>의 동인이었다.
                       시집: <염소의 노래>가 있다.
 
 
한적(閑寂) / 나카하라 츄우야
 
 
아무 방문할 일도 없는
내 마음은 한적하다.
 
 그것은 일요일에 건너는 복도
 - 모두 들판에 가고 없다.
 
판자는 싸늘하게 빛나고
새는 마당에서 지저귀고 있다.
 
 꽉 잠그지 않은 수도의
 주둥이 물방울은 반짝이고--
 
땅은 장미빛, 하늘에는 종달새
하늘은 아름다운 4월입니다.
 
 아무 방문할 일도 없는
 내 마음은 한적하다.
 
 
흐린 / 나카하라 츄우야
 
 
어느 아침 나는 하늘 속에
검은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펄럭펄럭 그것을 나부끼고 있었는데
소리는 안 들렸다 너무 높아서
더듬어 가 내리려고 했었지만
줄이 없어서 그러지도 못하고
깃발은 펄럭펄럭 나부끼고 있을 뿐
하늘 깊숙한 곳에 날아가는 것 같이.
 
 
하나의 메르헨 / 니카하라 츄우야
 
 
가을 밤은 아주 멀리
조약돌만의 시내가 있어
거기에 해는 반짝반짝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해라고는 하지만 마치 규석(硅石)처럼
단단한 고체의 분말과 같아서
닿으면 사각사각
희미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조약돌 위에 한 마리 나비가 앉아
여리지만 또렷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 나비가 사라지자 어느새
지금까지 흐르지 않던 강바닥에
물은 졸졸졸
졸졸졸 흐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메르헨marchen: 독일어로 동화, 환상적 이야기.
이 메르헨의 등장 인물이며 주역인 "나비"의 동작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비"의 동작은 오히려 의미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
이다.
*규석:석영(石英)의 입상(粒狀)에 응집한 것으로 빛의 미립자에 비유되고 있다.
 
누이여 / 니카하라 츄우야
 
 
밤, 아름다운 혼은 울며,
- 그 여자는 정당했었는데 -
밤, 아름다는 혼은 울며,
이제는 죽어도 좋아--- 하는 것이었다
 
축축한 들의 검은 흙, 짧은 풀 위로
밤의 바람은 불며,
죽어도 좋아, 죽어도 좋아 하고
아름다운 혼은 우는 것이었다.
 
밤, 하늘은 높고 부는 바람 여린데
- 기도 외에 내가 할 것은 없었다---
 
 
*전 3연을 통해 "그 여자는 정당했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실은 제시
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왜 "이제는 죽어도 좋아"라고 하였는지도 "나"
이외에는 그대까지의 경과가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에는 틀림없이 사랑의 궁극적인 구체성이 제시되어 있다. 남자는 그저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말없는 노래 / 나카하라 츄우야
 
 
그것은 먼 곳에 있어도
나는 여기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는 공기도 희박하고 창백하여
파 뿌리처럼 가늘고 여리다
 
절대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
여기서 충분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처녀의 눈처럼 먼 곳을 보아서는 안 된다
분명하게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먼 저쪽에서 석양에 물들어 있었다
피리 소리처럼 긁으면서 연약하였다
그래도 그 쪽으로 달려 가서는 안 된다
분명하게 여기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그동안에 숨차던 것도 평정을 되찾고
분명하게 저쪽까지 갈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굴뚝 연기처럼
멀리 멀리 언제까지나 노을진 하늘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일상적인 비극 상황 속에서 창작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시는 당연히
어떤 기도하는 마음이라든가 진혼(鎭魂)의 색채를 띄고 있다. 어느, 평
자의 말대로 시인은 "모름지기 인간 존재란 그 자체에도 심한 단절을
느끼고 있었다. 이 단절에의 가교가 그의 만년의 시작(詩作)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부채 / 쯔므라 노부오
   -일찌기 밀키 웨이라 불리던 소녀에게
 
아주 가까이 국경은 한 줄기 흰 물줄기
 
고원을 달리는 여름철 전차 창에서
 
당신은 작은 부채를 폈다.
 
 
*불과 3행의 짧은 시지만 산뜻하고 지적인 서정을 느끼게 해준다.  이 3행에
의해 시각적으로 광경을 포착하는 신선하고 예각적인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른바 모더니즘에 의한 청순함과 산문 정신을 담은 서정이 있다."밀키 웨이"
는 은하수를 이르는 말, 은하수처럼 신비한 소녀가 시인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쯔무라 노부오(1909~1914): <사계>와 <푸른 꽃>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와
                                소설, 아동문학도 발표하였다. 온화한 서구적인
                                지성으로 시를 쓴 그는 초기에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시집: <사랑하는 신의 노래> <아버지가 계신 마당> 등.
 
 
인사 / 아마노 타다시
 
 
아들은 며느리를 얻어
그 며느리는 푸른 눈을 하고
두툼한 프라이팬을 가방에 넣고서
Japanese in hurry
라는 작은 책을 끼고
코 끝만 빨갛게 햇빛에 탄 모습으로
오론제 호라는 큰 배에서
혼자서 슬금슬금 내려왔다.
마중한 것은
아들의 아비와 어미 두 사람
말없이 세 사람은 자동차에 타고
전철로 갈아 타고
다시 버스에 타고
거름 웅덩이와 대나무 숲과 전포와
스크램 공장이 줄지어 선 교외를 달려서
버스에서 내려
두부집 모퉁이를 지나
가락 국수집 앞 판자 다리를 건너
모퉁이 세 채 집 한가운데의
빡빡한 유리창문을 열고서
"들어와요"
하고 아비는 말했다.
낡은 다다미방 위에 단정하게 앉아
새하얀 무릎을 드러내 놓고
푸른 눈의 아가씨는 정중하게
일본식으로 인사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셔요"
서둘러 부모들도
끄떡하고 인사하였다.
그리고서
"안녕하십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Jepanese in hurry: 속성(速成) 일본어, 빨리 익힌 일본어.
*전 1연으로 되어있는 평명한 작품이다. 모름지기 미국 유학을 가서 결혼한 것으로 추측되는
푸른 눈의 아가씨와 그 이국의 며느리를 맞는 "아들이 아비와 어미"의 곤혹스러운 만남이 그
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의도적인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고 유머스러운 소재와 표현으로
이루어져 잇다. 이와 같이 미소짓게 하는 만족감과 서민생활에 본격적으로 깃들어 있는 페
이소스를 자아내는 데 있어서  이 시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
*이마노 타다시(1909~?): 유머와 페이소스가 감도는 평명(平明)한 시를 썼다.
                             그의 시정은 인간의 생사를 대상화하여 작품을 썼다. 
      시집: <돌과 표범 곁에서> <기타 수많은 동행인> 등
 
 
현애(懸崖) / 히시야마 슈우조오
 
 
 나는 21세, 나는 손에 빰을 땐다. 나는 귓밥에 손을 댄다.
나는 21세, 나는 이해하고 있다. 굶음은 단애, 시는 굶음이다.
 
 나는 13세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한 화가의 부인에게 입술
과 뺨을 빼앗겼다. 그리고 총명한 귀를. 나는 13세가 아니다.
과거의 성교(聖橋)를 일찌감치 건넜다. 저 작고 자기만 밝
게하고 있는 겨울을 태양을 향해, 등지고.
 
 나는 21세, 나는 온화함과 순종으로 한 좌석을 지나오고 있다.
나는 확신과 선견과 약간 큰 바람으로 시를 쓴다. 세계사의
일부를 쓴다. 그리고 결국 목을 죄는 저 단애의 시를. 365마리
의 비둘기와 장난치며 굶주리면서.
 
*제목인 '현애'는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로서 '단애'와 마찬가기 말이다.
제 2연의 '성교'는 거룩한 다리라는 뜻으로, 이 이름을 고유명사로 하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면 희랍정교회의 성당이 있는데, 시인은 이 다리의 이미지
에서 순진했던 어린 날을 회상한다.
*히시야마 슈우조오(1909~1967): 지적인 서정과 조형으로 시단의 주목을 끌었다.
        시집:<현애> <황지(荒地)> <망향> <공포의 시대> 등.
 
오리 / 아이다 쯔나오
 
 
오리는 되지 말라고
그때
오리는 말했는가
 
노오
 
깃을 뜯고
털을 태워
고기를 튀겨 먹어 치운 우리들이
입맛을 다시면서
저녁 안개 피는 호수 가에서
떠나오려 했을 때이다
 
"좀 더 먹어
뼈까지 아삭아삭 먹어야지"
 
우리는 얼굴을 돌려
오리의 웃음과
빛나는 용골(龍骨)을 보았다
 
*작자의 말: "아버지는 말하자면 봉(가모)이었다. 바보 취급을 당하고 경멸되었다.
             '봉이 파를 가지고 왔다(일이 착착 잘 되어 간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술도 마시지 못하던 아버지,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내지 않고 일하러 나가시던 아버지.
벌어온 돈은 조금도 쓰지 못하고 억지로 저금을 해야 했다. 제대로 잡숫지도 못했다. 변
변치 못하다고 아내에게 꾸중을 들어야 했다.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자기는 바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열심히
일했다. 한 마디 불만도 말씀하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소박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 때문에 나는 '봉이 되지 말아라'하는 말을 받아서 '봉
이 되도 좋지 않은가'하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오리는 속어로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람, 곧 "봉"을 말한다.
*용골(龍骨)은 새의 가슴뼈 아래쪽, 중앙을 따라서 마치 배의 용골 비슷하고 불룩 튀어
나온 부분,
*아이다 쯔나오(1914~?): 제2차 대전 당시 중국 대륙을 유량하며 시작(詩作) 생활
                             을 했고, 종전 후 <역정(歷程)>의 동인이 되었다. 우화성이
                             짙고 잔혹한 이미지 속에 인간애를 노래했다.
            시집: <함호(鹹湖)> <광언(狂言)> <너> <유언> 등.
 
처음의 것에게 / 다치하라 도오조오
 
 
하찮은 땅의 이변(異變)은 그 흔적으로 재를 뿌린 이 마음에
계속해서
재는 슬픈 추억처럼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에 집들의 지붕에 자꾸 내렸다
 
그 밤에 달은 밝았고 나는 그 사람과
창에 기대어 말을 나누었다(이 창에 산의 모습이 보였다)
방 구석구석 협곡처럼 빛과
잘 울리는 웃음소리가 넘치고 있었다
 
-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란
나는 그 사람의 모기를 쫓는 손짓을 보며 저것은 모기를
잡으려 하는 것일까 하고 의아스러웠다
 
어느 날 봉우리에 재의 연기를 뿜기 시작한 것일까
화산 이야기와--또한 몇 날 밤은 과연 꿈에
그 밤에 배운 엘리자베트 이야기로 지새웠다
 
*작자의 말: "네 편지를 읽고 나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내가 하루도
              잊은 일이 없는 라인하르트 엘리자베트를 네가 읽는다니 말이다! 나는 어
느새 라인하르트가 되고, 엘리자베트는 이미 시집가고 말았다! 네가 내 속에 그 얼마
나 즐거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이랴. 매일밤 잊지 말고 읽어 주기 바란다!"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가 등장하는 시토롬의 <호반> 마지막은 '늙은이'라는 단장(短
章)으로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방안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계속해서 양손을 깍지낀 채 의자에 앉아 멍
청하게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앞에서는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짙은 저녁 어둠이 점
차 넓고 어두운 호반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두운 물빛은 앞으로 앞으로 이어지고 점차 깊고
멀어지며, 그 마지막인 노인의 눈이 가닿지 않는 먼 곳에 흰 수련꽃 한 송이가 쓸쓸하게 넓
은 잎 사이에 떠 있었다."
*다치하라 도오조오(1914~1939): 릴케의 영향을 받은 시인이며, 덧없는 청춘을 노래하다가
                                     젊은 나이로 죽은 청순한 서정 시인이다.
                                     <사계>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집: <훤초(萱草)에 부치다> <새벽과 저녁의 시> <우아한 노래> 등
 
 
제비의 노래 / 다치하라 도오조오
 
 
잿빛으로 너 홀로 내 꿈에 걸려 있는
먼 마을이여
 
그 무렵 짧은 하루 해는 파꽃과 왕골꽃을 피우고
염소가 울며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바닷가 거리의 아침 나절을 갈가마귀들은
떼지어 멀리 서로 부르며 가고 있는
정다운 아침으로 그득하였다-
 
들어 보아라 봄 하늘의 산과 산에
네가 알지 못하는 구름이 타고 있다 밝고 그리고
사라지면서
먼 마을이여
 
 
소담시(小譚詩) / 다치하라 도오조오
 
 
한 명은 불을 켤 수 있었다
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고요한 방이기 때문에 낮은 소리가
구석까지 잘 들렸다(모두는 듣고 있었다)
 
한 명은 불을 끌 수 있었다
그 곁에서 자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물레질하는 여자가 자장노래를 불러 들려 주었다
그것이 창 밖에까지 잘 들렸다(모두는 듣고 있었다)
 
몇 밤이고 몇 밤이고 마찬가지로 지나갔다---
바람이 소리치고 탑 위에서 수탉이 알렸다
-병사는 깃발을 들어라 나귀는 방울을 울려라!
 
그리고 아침이 왔다 정말 아침이 왔다
다시 밤이 왔다 다시 새로운 밤이 왔다
그 방은 텅 빈 채로 있었다
 
* 이 시에 대하여 "동화적 표현이면서 전쟁의 울림소리가 표현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또 한편 "여름에 펼쳐진 청춘의 이야기"로서 후반은
  "슬픈 사랑"을 뜻한다고 본다.
 
 
잠의 유혹 / 다치하라 도오조오
 
 
잘 자요 얌전한 표정의 아가씨들
잘 자요 부드럽고 검은 머리를 매고
너의 배색머리에 호두색으로 켜진 촛대 주위에는
쾌활한 그 무엇이 남아 있다(세계에는 펄펄 함박눈)
 
나는 언제까지나 노래해 주리라
나는 어두운 창 밖에 그리고 창 안에
그리고 잠 안에 너희 꿈속에
그리고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여 노래해 주리라
 
모닥불처럼
바람처럼 별처럼
나의 소리는 한 가락마다 여기저기서---
 
그러면 너희는 하얀 사과꽃이 피고
작은 초록빛 열매를 맺고 그것이 빨갛게 빨리 익는 것을
짧은 동안에 자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 시는 제2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6년에 발표되었다. 시인은 평화를 갈망하며
  생명 긍정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산나리 아가씨 / 다치하리 도오조오
 
 
슬픔은 아니었던 날의 흐르는 구름 아래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외웠다
그것은 하나의 꽃 이름이었다
그것은 노란색 연한 가냘픈 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었다
무엇인가 알고 싶어 황홀한 상태였다
그리고 때때로 생각하기를 대체 무엇을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했다
 
어제 바람에 울던 숲을 지나서 푸른 하늘에
향기로우며 쓸쓸한 빛 한가운데
그 떨기에 피어 있었다---그리고 오늘도 그 꽃은
 
생각 나름이나 뉘우침과 같이-
그러나 나는 너무 늙었다 젊은 몸으로
너를 후회 없이 떠나게 할 정도로
 
*작자의 말: "내 마음을 알 수 없이 되었다. 내 마음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이렇게 지나는 것은 좋은 것일까. 너는 분명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 나
도 분명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밖에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산나리가 꽃 피는 숲속에서 그 사람이 말하는 "산나리"라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헤어졌다. 젊은 나이면서 우리는 너무 늙어버렸다.

나는 아주 달라졌다 / 쿠로다 사부로오
 
 
나는 아주 달라지고 말았다
과연 나는 어제와 같은 넥타이를 매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어제와 아찬가지로 아무 자랑거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아주 달라지고 말았다
과연 나는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술에 취하여
어제와 마찬가지로 멋대로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 달리지고 말았다
아아
엷은 웃음과 벙글거리는 웃음
입 속으로의 웃음과 바보 같은 웃음 속에서
나는 눈을 꾹 감는다
그러면
내 속에서 내일을 향해 날아 가는
희고 아름다운 나비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시집 <한 여자에게>에 수록된 11편의 시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모두 작자가 만난 한 사랑하는 여성(현재 작가의 부인)에게 바친
사랑의 시이다.
 작자는 이 시들을 29세 된 겨울부터 30세 되던 봄에 걸쳐 단숨에 썼다. 이 작품들에
대해서 이미 "현대의 연애시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 <한 여자에게>는 전체적으로 재2차 세계 대전 뒤의 정신적 혼란과 황폐, 물질
적인 곤궁과 핍박의 소용돌이 속에 사는 작자가 "자신의 파멸을 걸고 한 여성을 사랑함
으로써 삶의 희망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여러 각도에서 노래하고 있다.
*쿠로다 사부로오(1919~?): 동인지 에 참가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자
                             신이 직접 <황지(荒地)>를 창간하기도 했다.
                             일본 현대 시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한 여자에게> <잃어버린 묘비명> <목마른 마음> <작은 나라와><좀더 높이> 등.
 
 
정물(靜物) / 요시오카 미노루
 
 
밤의 그릇의 단단한 면 안에서
선명함을 더해 오는
가을의 과일
사과와 배와 포도 종류
그것들은
겹쳐진 그대로의 자세로
잠으로
하나의 해조(諧調)로
크나큰 음악으로 따라 간다
낱낱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러
핵은 천천히 눕는다
그 둘레를
싸고 도는 풍부한 썩어 문드러진 시간
지금 사자의 이빨 앞에서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것들 과일의 종류는
더욱더 무게를 더한다
깊은 그릇 속에서
이 밤의 가상(假象) 안에서
때로
크게 기운다
 
*유리나 또는 스텐레스 따위 단단한 그릇에 소복히 담긴 "가을의 과일"이
이 밤의 실내에 또는 창가에, 아니면 달빛 비치는 문 밖이라도 무방하다.
어쨌든 독자의 상상 속의 공간에 놓여 있다.
 그리고 배경 음악으로 고요히 바하라듣가 텔레만의 곡이 흐르고 있다. 모짜르
트나 베토벤도 좋지만 역시 바로크 음악이 잘 어울린다.
   코울리지는 "시는 완전하게 이해되기 보다는 막연하게 이해될 때 가장
쾌락을 준다"고 했는데 이 시 역시 멋진 음악을 듣고 난 뒤에 남는 것, 즉 설
명하기는 아주 어렵지만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는 쾌미감(快美感)을 느끼
게 된다.
*요시오카 미노루(1919~?): 딱딱한 시어를 유연한 차사(徣辭)로 연결하고
                             다의적(多義的)이며 충격적인 이미지의 시를 쓰
                             고 있다.
     시집: <액체> <정물> <승려> <고요한 집> 등.
 
High Noon / 나카기리 마사오
 
 
용감한 사나이는 서 있었다
언덕 위의 높은 한 그루 나무처럼
단단히 뿌리를 펴고
정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하다, 죽음이 오기 전의 고요함이다
때로 시내의 물줄기 소리가 들린다
"시내라고 하는 것은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
 
용감한 사나이는 권총을 잡았다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는 하나도 없고
그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서 떠났다
한잔의 타오르는 흙
시계 소리를 잃은 때의 지대에서
단 혼자 네 명의 적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심장은 부글부글  불꽃 거품을 뿜었다
대해처럼 거칠었고 또한 설레었다
 
화약 냄새가 처마 아래 스며 들었다
용감한 사나이의 임무는 끝나고
매미가 울었다
서둘러 교회의 종이 울렸다
그는 자기 키가 갑자기 작아진 사실을 느꼈다
수도 꼭지를 틀고
약간의 물이 목에 흘려 들어갈 때
그는 생명이 흘러감을 느꼈다
 
* 제목인 "High Noon"은 유명한 서부 영화에서 따온 것이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
 게리 쿠퍼 주연의 명작으로 우리나라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이 눈"은 때가 차서 바
 로 정오라는 뜻. 이 시는 그 영화의 내용을 빌어 어느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니카기리 마사오(1919~?): <황지파> 그룹의 핵심 멤버로 활동. 주요 작품은 연간
                                         <황지 시집>에 수록.
               시집: <꿈을 꾸며> <나카기리 마사오 시집> 등
 
무엇이든 제일 / 세키네 히로시
 
 
대단하다!
이건 정말 못 당하겠네
모처럼 왔는데
마천루도 보이지 않는다
뭐가 뭔지 오리무중
그럴 수밖에!
미국은 무엇이든 제일
안개도 런던보다 짙도다
괜한 소리라고 하겠지!
직업 안정소에
가서
알아 보라
뉴욕에서는
안개도
삽으로
퍼담고 있다!
 
*이 시인의 초기 대표작이다. 이 시의 빠른 템포는 거쉬인의 "파리의 아메리카"의
첫머리 리듬과 비슷하여 독자들은 그 빠른 템포에 휩쓸리게 된다.
 미국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꼬집고 있다. 풍자가 웃음의 정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이
라면, 이 시는 실로 멋진 풍자와 비평적인 웃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키네 히로시(1920~?): <종합 문화> 편집장. 동인지 <열도(列島)>와 <현대시>
                                      핵심 멤버로 활동. 소설과 희곡 및 평론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시집: < 그림의 숙제> <죽은 쥐> <약속한 사람> 등.
 
 
생활 / 이시가키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밥을
야채를
고기를
공기를
빛을
물을
부모를
형제를
스승을
돈도 마음도
먹지 않고는 살아올 수 없었다.
부른 배를 부축하고
입을 닦으면
부엌에 흩어져 있는
홍당무 꼬리
새 뼈다귀
아버지의 창자
사십이 저물면서
내 눈에 비로소 넘치는 짐승의 눈물.
 
*이시가키 린(1920~?): 여성만의 시잡지 <단층>을 발간, 잡지에 "내 앞에 있는 남비와
                                      가마와 타오르는 불"을 발표하면서 격찬을 받았다. 체험과 생활
                                      에 근거하여 사회성 있는 시를 썼다.
                 시집: <내 앞의 남비와 가마와 타오르는 불> <표찰(表札)> 등
 
 
바지락 / 이시가키
 
 
밤중에 눈을 떴다.
어제 사온 바지락들이
부엌 구석에서
입 벌리고 살아 있었다.
 
"날이 새면
이것 저것
모조리 요리해 먹겠다"
 
마귀 할멈의 웃음을
나는 웃었다.
그리고 나서는
입을 헤 벌리고
자는 것밖에 나의 밤은 없었다.
 
*목숨 있는 것을 죽여서까지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 내지 생물의 잔혹성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2연의 따옴표로 되어 있는 독백체는 비인간적인 면을
여실하게 드러내어 노래하고 있다.
인간성에 잠재되어 있는 잔혹함,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구인가를 희
생시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구조, 그리고 어느 때의 피해자가 언제든지
가해자로 변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 그 잔혹함을 노래하고 있다.
 
죽은 사나이 / 이유카와 노부오
 
 
이를테면 안개나
온갖 계단의 발자취 소리 속에서
유언 집행인이 흐릿하게 모습을 나타낸다.
-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먼 어제---
M이여, 너는 어두운 술집 의자 위에서
찡그리는 얼굴을 짓기도 하고
편지 봉투를 뒤집는 일도 있었다
"실제는 그림자도 형체도 없는가?"
- 정녕 죽음에 접하면 그러하였다
어제의 싸늘한 푸른 하늘이
면도날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때의 흐름의 어느 곳에서
너를 잃게 되었는지 잊고 말았다.
황금 시대 -
활자의 바뀜과 신들의 높이
"그것이 우리의 낡은 처방전이었다"고 중얼거리며---
 
언제나 계절은 가을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쓸쓸함 속에 낙엽이 진다"
그 소리는 사람 그림자로 그리고 거리로
검은 납덩어리의 길을 계속 걸어온 것이었다.
 
매장의 날에는 언어도 없고
입회인도 없었다
분격도 비애도 불평의 유약한 의자도 없었다
너는 그저 무거운 구두 속에 발을 넣고 고요히 누웠었다.
"안녕, 태양도 바다도 믿을 것이 못 된다"
M이여, 지하에 잠든 M이여!
네 가슴의 상처는 아직도 아픈가.
 
*전쟁 체험자의 회복하기 어려운 "생의 의식"의 상실을 다루어, 한스러움과
우수(憂愁)를 풍기며 노래한 시이다.
*아우카와 노부오(1920~?): 주로 <순수시> <황지 시집> 등을 통해 활동.
                              <황지> 그룹의 주요 멤버의 한 사람,
    시집: <다리 위의 사람> <마유카와 노부오 시집> 등.
 
 
환상의 / 키요오카 타카유키
 
 
꿈속에서만 때로 생각해 내는
20년이나 전에 세운 작고 밝은 집.
전쟁 뒤의 불타진 들판 잡초 구석에
세워진 채 그대로 잊은 알뜰한 행복.
 
아니, 그런 것은 현실에는 없었다
한없이 어리석은 젊은이가 그때
임신한 젊은 아내와 둘이서 살기 위하여
독립된 보금자리를 갈망했다 하더라도.
 
그런 가공의 집이 어떻게 이제 새삼
자택에서 자는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인가
가난한 청춘에의 향수를 일깨우듯이?
 
꿈속에서 그 집은 언제나 방바닥이 푸르렀고
담장에는 제비, 마당에는 금잔화
아아 아무도 모르게 서 있다.
 
*키요오카 타카유키(1922~): 쉬르리얼리즘 재평가 운동을 통하여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시집: <일상> <하나의 사랑> 등
       소설집: <아카시아의 배련(大連)> <바다의 눈동자> <꿈을 심는다> 등
 
북국 / 아키야 유타카
 
 
우수수거리는 바람막이 숲 깊숙한 곳
총에 맞아 떨어진 들오리의 양눈에
하얀 안개가 얼어 있었다
 
램프의 차가운 흐름에 젖어
나는 침울한 내력 쓰기를 끝냈다
 
밤새껏 마른 풀 속에서
죽지 못하는 들오리가 날개를 치고
나는 잠자리에서 뒤척거리기만 했다
 
*이 시에서 "램프"나 "들오리"는 여행의 이미지를 짙게 해주고, 여정의 주선율을 연주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총에 맞아 떨어진 들오리""죽지 못하는 들오리"등 빈사(瀕死)의 이미지이다.
이것은 "나"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 이중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청춘의 불안과 상처와 더불어
시대의 공포와 전율이 잠복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키타 유타카(1922~?): 서정시의 전통을 근원적인 의미로 포착하여 깊이 추구하는 있는 일본
                             현대 서정파의 대표적 시인. <사계>를 통해 활동했고, <지구>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시집: <편력의 편지> <겨울의 음악> <히말라야의 여우> 등.
 
내가 가장 예뻤을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지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푸른 하늘과 같은 것이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수 있는 구실을 잃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정다운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 경례밖에 몰랐고
깨끗한 눈짓만 남기고 모두 가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빈 상태였고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손발만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조국은 전쟁에서 패전하였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하며
부라우스 팔을 걷고 비굴의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쳐 흘렀다
금연을 깨뜨렸을 때처럼 현기증이 나서
나는 낯선 나라의 달콤한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몹시 불행하였고
나는 몹시 얼빠져 있었으며
나는 몹시 외로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한  한 오래
  살아야만 한다고
나이 늙어 아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저 루오 할아버지처럼
 
 
나의 카메라 / 이바라기 노리코
 
 

그것은 렌즈
 
깜박거림
그것은 나의 셔터
 
머리칼로 에워싸인
작고 작은 암실도 있어
 
그래서 나는
카메라 따위는 메고 다니지 않는다
 
아시는가? 내 속에
당신의 필름이 많이 간직되어 있음을
 
나무 틈 햇빛 아래서 웃음 짓는 당신
물결치는 밤색의 눈부신 몸뚱이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아이처럼 잔다
난초처럼 향기롭다 숲에서는 사자라
 
세계에서 단 하나 아무도 모른다
나의 필름 라이브러리
 
 
* 작자는 평론집에서 "언제까지나 잊혀지지 않는 언어는 아름다운 언어이다. 그
  두 가지는 거의 동의어처럼 나는 느껴진다" 말한 바 있는데 이 시는 바로 그런
  성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바라기 노리코(1926~?): 전후의 해방된 일본 여성의 꿈과 희망을 노래하고 날카로운
                                               현실 비판을 하고 있다.
               시집: <대화> <보이지 않는 배달부> <진혼가> <인명 시집> 등
 
 
겨울의 벚꽃 / 신카와 카즈에
 
 
사나이와 계집이
깨진 남비 뚜껑처럼 결합하여
다음날부터 벌써 된장 냄새 배듯
그렇게 되는 것은 싫습니다
당신이 종각의 종이라면
나는 그 소리이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노래의 한 가락이면
나는 드 댓구이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한 개의 레몬이라면
나는 거울 속의 레몬
그와 같이 당신과 고요히 마주 있고 싶습니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나도 당신도 영원한 어린이기에
그러한 고집도 용서될 것입니다
습기찬 이불 냄새가 나는
눈꺼풀처럼 무거이 차양이 드리워진
한 지붕 아래 살 수 없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보셔요 천황과 황후의 인형과도 같이
우리가 나란히 앉아 있는 돗자리 위
거기에만 밝게 햇빛 비치고
끊임없이 벚꽃 꽃잎이 떨어집니다
 
*신카와 카즈에(1929~):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취해 인간에 대한 사랑, 남녀 사이의 사랑,
                                         인간애의 근원의 모습을 탐구하는 시를 썼다
          시집: <잠의 의자> <계절의 꽃 시집> <로마의 가을 기타> 등
 
 
백조 / 카와사키 히로시
 
 
날개가 젖는다 백조
바라보면
찢길 듯 하면서
희미하게 날개 소리가
 
꿈에 젖는다 백조
누구의 꿈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밀려 와서는 방울져 떨어지고
그 그림자가 날개에 꽂히듯이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별
 
그림자는 푸른 하늘에 비치면
하얀 색깔이 되는가?
 
태어날 때부터 비밀을 알고 있는
백조는 이윽고
빛의 모양 속에
향기로운 아침 해가 물드는 가운데
하늘로
 
이미 형체가 주어지고
그것은
수줍음으로 해서 하얀 백조
좀더 있으면
빛깔이 되어 버릴 듯하여
 
백조여
 
*카와사키 희로시(1930~)
     시집: <백조> <나무의 사소 방식> <축혼가> <코끼리>  등
 
봄을 위하여 / 오오오카 마코토
 
 
모래밭에 조는 봄을 캐어 일으켜
너는 그것으로 머리를 장식한다 너는 웃는다
파문처럼 하늘에 흩어지는 웃음의 거품
바다는 고요히 풀빛 햇빛을 따뜻하게 하고 있다
 
네 손을 내 손에
네 팔매질을 내 하늘에 아아
오늘의 하늘 밑을 흐르는 꽃잎 그림자
 
우리의 팔에 움트는 새싹
우리의 시야 중심에
물거품을 날리며 회전하는 황금 태양
우리들, 호수이며 나무이며
잔디 위 나무 사이로 스미는 햇빛이며
나무 사이로 스미는 햇빛 출렁이는 네 머리카락의 언덕인
우리들
 
새로운 바람 속에서 문이 열리고
초록색 그림자와 우리를 부르는 수많은 손
길은 부드러운 땅의 살갗 위에 생생하고
샘 속에서 네 팔은 빛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눈썹 아래는 햇빛을 받아
고요히 성숙하기 시작하는
바다와 열매
 
*오오오카 마코토(1931~): "쉬르리얼리즘 연구회" 회원으로 활동. 요미우리 신문 기자를 거쳐
                                             메이지 대학 교수를 지냈다.
            시집: <기억과 현재> <나의 시와 진실> <투시도법-여름을 위해서>등
          평론집: <현대시 시론> <초현실과 서정> 등 다수
 
 
아르와 호른 / 시라이시 카즈코
 
 
흑인인 덩치 큰 사나이 아르는
호른 속에서 자고 있었다
 
바람은 숲에 없다
이 방에 꽃이 없다
여자에게 입술이 없다
흑인인 덩치 큰 사나이 아르는
호른 속에서 이제
눈뜰 수는 없다
 
아르의 팔은 호른의 형체로
뻗어 갔다
아르의 발은 호른밖에 보이지 않는 소리의
   리본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흑인인 덩치 큰 사나이 아르의 가슴은
호른 속의 진공(眞空) 벽이 되고 말았다
 
*시라이시 카즈코의 시는 모더니즘의 방법으로 쓰여져 있다. 때문에 이 시
역시 사실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시인은 회화적으로 이미지를 부각시켜 쓰
고 있다.
 작자는 이 시를 쓸 무렵 "시라이시 카즈코의 앨범'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
이 회상하고 있다.
"나는 참담했던 일상의 현실과는 다르게 아홉 해 만에, 마치 암내가 난 것처럼
그리고 발광한 나이아가라처럼 호연(豪然)하게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미칠 듯이 해피하고 미칠 듯이 엉망진창으로 얻어 맞은 기분인 것이다."
이렇듯 신들린 듯한 상태에서 씌어진 작품 가운데 하나가 <아르와 호른>이다.
*시라이시 카츠코(1931~): 동인지 에 속하며 모더니즘-쉬르리얼리즘의
                                              시풍으로 시단에 나왔다. 시 낭독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시집: <계란이 내리는 거리> <호랑이 유희> < 그 이상 더 늦게 와서는 안된다> 등
 
 
. Kiss / 타니카와 순타로오
 
 
눈을 감으면 세계가 멀어지고
알뜰함의 무게만이 언제까지나 나를 확인하고 있다---
 
침묵은 고요한 밤이 되어
약속처럼 우리를 에운다
그것은 지금 거리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에워싸는 정겨운 거리감이다
때문에 우리는 문득 혼자처럼 된다---
 
우리들은 서로 찾는다
말하는 것보다도 보는 것보다도 확실한 방법으로
그리고 우리는 서로 찾게 된다
스스로를 상실했을 때에 -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련하게 돌아온 정겨움이여
언어를 잃고 정결된 침묵 속에서
너는 지금 그저 숨쉬고 있을 뿐이다
 
너야말로 지금 삶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 언어조차 죄가 된다
이윽고 정겨움이 세계를 충만하게 하고
내가 그 속에서 살기 위하여 쓰러질 때에
 
*키스라는 주제를 암시적으로 표현하여 "알뜰함의 무게"를 그렸다.
*타니카와 순타로오(1931~): 처음에는 새로운 서정시로 출발했으나 반서정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의식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21세 때 처녀시집 <20억 광년의 고독>을 출간하여
                                                 갈채를 받았다.
               시집: <62의 소네트> <사랑에 관하여> <당신에게> 등
 
팔월 / 타니카와 순타로오
 
 
왕의 왕
그는 없다
아아 아름다운 여름이여
 
피의 피
누구를 위해서도 흘리지 않는
아아 아름다움 여름이여
 
아가씨는 벌거숭이
말은 장미를 뛰어넘는다
아아 아름다운 여름이여
 
누구? 누구?
죽음을 위해 우는 강의 소리라
아아 아름다운 여름이여
 
*지배와 복종이 없는 곳, 진정하게 민주적이요 전쟁과 희생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 그리고 사람들은 발랄하여 각자의 생을 즐기는
세상을 공상케 하는 계절로써의 8월을 아름다운 여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 명시선 / 김희보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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