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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명시선 ( 3 )
2017년 08월 09일 15시 56분  조회:2537  추천:0  작성자: 강려
프랑스 명시선 ( 3 )
 
풍신(風神) / 발레리
 
 
보이지도 알 수도 없는,
바람에 실려
살기도 죽기도 하는
나는 뜬 향기(香氣)라네!
 
보이지도 알 수도 없는
우연인가 영감(靈感)인가?
왔다 할 땐
일은 이미 끝났다!
 
누가 읽고 누가 알 것인가?
명석한 정신에게도
얼마나 많은 오해의 씨앗이 담겨 있는가!
 
보이지도 알 수도 없는,
속옷 갈아입는 여인의
언뜻 보이는 젖가슴의 순간!
 
 
*이 5음절의 경쾌한 시는 시집 <매혹> 안에 들어 있다. "풍신(실프Sylphe)란 겔트나 게르만 족의 신화에 나오는
공기나 바람의 신이다. 발레리는 이 바람의 신에 기탁하여 시인의 마음에 떠오르는 시상(詩想)의 도래를 암시하
려고 한 것 같다. 이 때 "풍신"은 마녀의 지팡이 같아 한 번 때리면 끝난다. 그러나 읽혀지지도 이해되지도 않고
많은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제 3절은 천재나 특이한 생각을 가진 시인의 참뜻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고립감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번 더 추측해 보면 여기서 말하는 "풍신"은 발레리가 가장 경계하고 멀리하려는 소위
낭만파 시인들의 영감(靈感)이나 감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영감이란 없는 것은 아니
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때로는 환상에 불과하며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리고 '빛
나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속담대로 영감은 영감이 아닌 것과 구별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여하튼 이 시에서는
이상 세 가지 추측이 모두 동시에 가능한 점에 묘미가 있다. 그렇다고 발레리가 이 시에서 추상적인 논리를 전개하
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구체적이며 명료하고 감각적이며 제 4절에 보는 바대로 관능적이기도 하다. 구체적 사물과
추상적 상징이 완전히 밀착되어 있고 조화되어 있는 점에서 상징파 시인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석류들 / 발레리
 
 
너의 수많은 씨알의 힘에 못 이겨
마침내 반쯤 벌어진 굳은 석류들이여,
스스로의 발견에 파열된
고매한 이마들을 보는 듯!
 
오, 반만 입을 연 석류들이여,
그대들이 받아 온 햇볕들은
자만심에 움직인 그대들로 하여금
홍옥(紅玉)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리고 금빛 메마른 껍질마저
어떤 힘의 욕구에 밀려
과즙(果汁)의 붉은 구슬되어 터진다 하지만,
 
이 눈부신 파열은
일찌기 내가 가졌던 어느 영혼의
은밀한 구조를 몽상켸 한다.
 
 
*이 시도 시집 <매혹>에 수록된 것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짧은 시이다. 짧은 시이나
아름다운 색채 이미지와 상징이 교묘히 조화된 아름다운 시이다.  이 시의 상징은 익어 벌어진 붉은 석
류들을 빌어, 오랫동안 마음 속에서 익어 가다 드디어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 굳은 벽을 뚫고 나오는 어
떤 사상이나 시상(詩想)을 암시한다. 그러나 발레리는 사상가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반쯤 벌어진
석류를 통해 언어가 지닌 음과 색채와 뜻을 서로 어울리게 하고 침투시킴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미적 감각
과 이미지와 상징을 떠오르게 한다. 어떤 사람은 발레리의 세잔느나 마티스의 정물화에 비하고 있다.
 
 
해변의 묘지 / 발레리
 
 
1
비둘기들이 걷는 고요한 지붕1)은
소나무 사이에서 무덤 사이에서 가물거린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정오는 거기에 불로써
바다를 항상 다시 시작하는 바다를 구성한다!
신들의 정온(靜穩)함을 오래 바라다본다는 것은
오 명상 뒤에 오는 크나큰 보상!
                              1)바다를 지붕으로 보았다.
 
2
섬세한 섬광들의 얼마나 순수한 작업이
자디잔 물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태우고
얼마나 큰 평화로움이 형성되는 듯한가!
태양이 바다의 심연 위에 쉴 때
영원불변의 순수한 두 작품
시간은 반짝거리며 꿈은 지식이다.
 
 
10
닫혀지고, 신성하며 물질 아닌 불로 가득 찬
광명에 바쳐진 대지의 한 모퉁이,
태양의 횃불 아래 압도되어
금과 돌과 침울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 곳이 내 맘에 든다
그 많은 대리석이 그 많은 망자(亡者)들 위에서 떨고 있
   는 이 장소가,
충직한 바다는 여기 나의 무덤들 위에서 잠을 잔다!
 
 
11
찬란한 암캐여, 우상 숭배자들을 멀리 하라!
내가 외롭게 목자(牧者)의 웃음을 머금고
오랫동안 신비스런 양들을,
고요한 무덤들의 흰 양 떼를 칠 때에,
너는 이 무덤들로부터 멀리하게 하라, 신중한 비둘기2)들을,
헛된 꿈을, 호기심 많은 천사3)들을!
 
2)3): 기독교 신앙의 상징들.
 
12
일단 여기 오면 미래는 안일무위(安逸無爲).
날카로운 벌레는 대지를 긁는다;
모든 것은 타고 해체되고 어떤 알 수 없는 순화(醇化)된
   본질이 되어
대기 가운데 흡수된다---
부재(不在)에 도취될 때 인생은 광대하며,
고통은 달고, 또한 정신은 맑다.
 
13
숨겨진 망자(亡者)들은 이 땅 속에서 평안히 쉬고 있으며
대지는 그들의 몸을 따듯하게 하고 그들의 생의 신비를
    말린다.
'정오'는 저 높은 곳에, '부동(不動)의 정오'는
자기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에게 자족(自足)하고
    있다---
완벽한 두뇌이며 완전한 왕관(王冠),
나는 그대 속에 은밀히 변화하는 존재.
 
 
14
그대의 공포를 제어하는 자는 나 하나뿐!
나의 회한(悔恨), 나의 회의(懷疑), 나의 부자유는
그대의 큰 금강석의 흠---
그러나 나무 뿌리 아래 누운 어렴풋한 인생들은
대리석에 눌려 한없이 무거운 그들의 밤 사이에
이미 서서히 그대의 편에 가담했다.
 
 
15
죽은 자들은 두꺼운 부재(不在)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그들의 흰 형질(形質)을 마셔 버렸다.
생명의 천혜(天惠)는 꽃 속으로 옮겨 갔다.
지금 어디 있는가, 망자(亡者)들이 항시 쓰던 말들,
개인적인 기교, 특이한 정신들은?
눈물 맺혔던 곳엔 구더기들이 줄지어 달린다.
 
 
16
간지럼당한 처녀들의 찢는 듯한 소리,
그 눈, 그 이, 촉촉히 젖은 눈꺼풀들
불장난하는 매혹적인 젖가슴
내맡기는 입술에서 빛나는 피
최후의 보물들, 이를 지키는 손가락들
모든 것이 땅 밑으로 가고 자연의 운행으로 되돌아간다!
 
 
17
그리고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여기 이 물결과 저 황금의 태양이 육체의 눈에 지어 내는
이 허구의 색채를 갖지 않을 어떤 꿈을 바라고 있는가?
그대는 그대가 공기로 증발할 때도 노래부를 것인가?
가거라! 이 세상 모든 것은 달아난다! 나의 존재는 공기
     구멍으로 되어 있으며,
영생을 바라는 성스러운 초조감도 또한 죽는다!
 
 
18
흑색과 금색으로 된 앙상한 영생(永生)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품으로 만든
끔찍한 월계관을 쓰는 위안자(慰安者)여,
이 아름다운 허위와 이 경건한 속임수!
누가 그것을 모르며 누가 이를 거절치 않으랴,
이 텅 빈 두개골과 이 영원한 웃음을!
 
 
22
아니다, 아니다--- 일어서라 이어가는 시대 속으로!
깨뜨리라, 나의 육체여, 이 생각하는 형태를!
마셔라, 나의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바다에서 떠오르는 싱그러움이
나에게 영혼을 돌려 준다--- 오, 소금의 짠 힘이여!
파도로 달려가자 거기서 다시 살아 솟구쳐 오르기 위해!
 
 
23
그렇다! 광란(狂亂)을 천성(天性)으로 하는
너는 표범의 가죽, 그리고 태양의
수천 수만의 우상으로 뚫린 고대 그리스 인의 망토,
너의 푸른 육체에 취하여,
침묵과 같은 소란 속에서
네 자신의 반짝거리는 꼬리를 물려는 날뛰는 히드라여,
 
 
24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겠다!
크나큰 대기는 나의 책을 열고 또 닫는다.
파도는 물 안개가 되어 바위에서 힘차게 용솟음친다!
날아가라, 광명에 눈이 어두운 책장들이여!
무너뜨려라, 파도들이여! 무너뜨려라 즐거워하는 물결로
작은 돛단배들이 먹이를 쫓고 있는 이 고요한 지붕을!
 
 
*"해변의 묘지"는 발레리의 작품 중 걸작으로 꼽히며 <젊은 여인 파르크(1917)>와 더불어 그의 이름을 드높인
작품이다. 전 6행, 24절로 된 이 장시(長詩)는 또한 난해한 것으로도 유명해 많은 주석가(註釋家)-해설가
-연구가 들이 정력을 바친 작품이다.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시인 자신의 말에 의하면 어떤 감상이나 사상을
전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가 아직까지 써 보지 않은 하나의 시 형식, 즉 매행 10 음절로 된 6 행
시를 써 보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써 가며 그는 이 시 가운데 하나의 개인적 독백을 담고자 했다
따라서 어렸을 때의 추억은 고향인 세트 바닷가의 묘지가 머리에 떠오르게 되고 급기야 이 시는 묘지에서 바
라다보는 바다 앞에서 삶과 죽음, 동(動)과 부동, 존재와 무에 대한 명상이 되었다. 이 세트의 묘지는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지중해의 눈부신 바다는 그가 어린 시절 자주 가고 자주 바라보며 명상한 곳이다.
 이 시는 이러한 자연의 광경을 배경으로 한 사색과 철학의 시이다. 시인은 태양과 바다와 묘지, 이를 바라보
는 시인을 통하여 부동의 절대자와 변화하고 활동하는 인간의 생을 관조하고 부재와 정적(靜寂)이 지배하는
묘지와 광란을 내포하는 바다를 명상한다. 특히 위의 발췌된 10절의 이하에서 시인은 대리석 돌 아래 누운 죽
은 자들을 통하여 죽음과 영생(永生)에 대하여 생각한다. 무와 정온(靜穩)의 영원한 세계는 그를 유혹하나
종교적 신앙의 위로나 사후의 영생은 이를 완강히 물리친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죽음과 빈 해골 앞에 무의 열반
(涅槃)의 세계도 무산된다.. 결국 그는 이 시의 끝부분에서 신(神), 영원, 절대 부동의 세계를 바라느니보다
인간적인 것, 순간적인 것, 연속적인 것, 행동과 변화와 창조가 승리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의 도덕적 결론은
고대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BC518?~438?)의 명구(銘句)와 같이 "나의 영혼아, 영생을 갈구하지 말고 가능
한 땅을 끝까지 파라"이다.
 시인 발레리는 이러한 주제와 명상의 철학시가 가지기 쉬운 현학(衒學)과 생경(生硬)을 극복하고 풍부한 감
수성, 명쾌하고 은밀한 이미지, 연상적(聯想的)인 상징, 때로는 시인 자신이 가장 경계하던 서정적이며 관능적
인 감정과 감각도 섞어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시가 가진 시적 음악성은 거의 마술적인 미를 가졌다고 한다.
  이런 뜻에서 볼 때 필자가 이 시를 번역한 것은 피상(皮相)을 면치 못한 것 같다. 더우기 원시의 형해(形骸)
도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더우기 윈시(原詩)는 24절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1-2, 10-18, 그리고 마지막 부분
22-24절만 번역 게재하였다. 지면 관계와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발레리(1871~1945): 폴 발레리는 신앙적 절대주의자인 폴 클로델과는 대조적인 위치에서 20세기 프랑스 전반의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남 프랑스 지중해안의 세트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코르시카, 어머니는 이탈리아의 제노바 출신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 황혼의 땅인 북방 유럽인과는 다른 자중해 정신을 타고났고 그 속에서 자라났다. 지중해 정신이란 모호하고 신비하고 격정적인 정신에 비해 명쾌하고 지성적이며 정적인 정신을 말한다.
 그는 몽펠리에 법과 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이 동안(1889~1890) 우연히 피에르 루이스를 만나 사귀게 되고 그의 주선으로 앙드레 지드, 말라르메 등을 알게 된 일은 그의 생애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 때 이미 시를 쓰고 있었고 이 시들은 당시 전위적인 문예지에 발표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의 교우 관계로 보나 그의 타고난 재질로 보아 그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한 듯 했다. 즉 문학 특히 시의 길이었다.
 그러나 1892년 10월 어느 날 밤, 그는 이상한 거의 계시와 같은 심적 동기로 일체의 문학이나 시작(詩作)을 버리고 지적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정서적인 예술 활동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지적 활동이나 엄격한 사고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든 문학이나 시작에서 손을 떼고 사색과 성찰의 생활로 들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사고에 대한 흔련 및 과학적 연구에 몰두한다. 이 때에 그는 파리에서 처음에는 육군성, 후에는 아비스 통신사 사장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매일 새벽 5시부터 출근시까지, 그리거 시간만 잇으면 자기 방에 칩거하여 논리와 추상적 과학 방법의 연구와 훈련에 정력을 쏟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17년 동안이나 문학이나 창작 방면에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추상적인 과학적 연구 방법에 전념했는데 이 동안 얻은 지적 작품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 서론(1895)>, <테스트 씨와의 저녁 시간(1897)>, 등이다. 그가 문학 창작을 중단하였다고 해서 그가 예술계와 접촉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말라르메가 죽기까지 그는 그의 가장 충실한 제자이었고 전기한 루이스, 지드, 에레디아 등의 작가들과 자주 만났으며, 또한 유명한 화가 드가, 르느와르 등과도 교분이 있었다. 또한 자주 음악 특히 글록이나 바그너의 오페라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폭넓은 취미와 접촉이 후의 그의 탁월한 미학이나 예술론의 바탕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의 속에서 잠자고 있던 시인이 다시 깨어난 것은 그 후 20년이 지난 1913년 그것도 순전히 타의(他意)에 의한 것이었다. 즉 "지드"와 "갈리마르" 출판사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발레리는 드이어 젊은 시절에 써 두었던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출판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그 첫 시집을 완성하기 위하여 단시(短詩) 한 편을 더 쓰기로 하였다. 이 단시가 유명한 <젊은 여인 파르크>이며, 이 시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512행의 장시가 되었으며, 이 시를 깎고 다듬는 데 발레리는 5년이란 긴 세월을 바쳤다. 결국 이 시는 단독으로 출판되었다(1917), 이 작품은 난해한 것이었으나 그 성공은 그만큼 경이적이었다. 그는 모든 지적 엘리트를로부터 세기적 시인으로 인정되었고, 여기 자극되어 그는 다시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신중하며 작품에 완벽을 기하는 그는 결코 다작(多作)이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그의 걸작이라고 하는 "해변의 묘지"도 <젊은 여인 파르크>가 발표된 지 3년 후에야 발표되었다(1920). 발레리는 이 시를 비롯하여 20세기 전후의 젊은 시절 그가 써 발표하였던 시들(1890~1893) 약 20편을 합쳐 같은 해 그의 첫 시집 <옛 시의 앨범>을 출판하였다. 이 시들은 약 30년 후에 빛을 본 것이나 이 가운데에는 이미 발레리의 독창성을 보여 주는 시들이 들어 있으며 그 중의 많은 시가 아직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다시 1922년 그가 <젊은 여인 파르크> 이후에 쓴 최후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이 두 권의 시집으로 그는 모든 사람이 공인하는 '현대 시인'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된 것이다.
 시집 <매혹>을 계기로 시인으로서의 그의 창작 활동은 끝나고 이후부터 발레리는 지성인의 대표, 현대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유명한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의 논문과 수기를 다투어 싣고 프랑스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의 저명한 학회나 단체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많은 강연과 주제 발표를 하였다. 이러한 논문과 수기와 강연이 편집되고 출판되어 20세기 전반의 상상계와 정신계에 깊은 통찰과 많은 시사를 남기었다.
 만년에 그는 프랑스의 국가적 시인이며 국제적인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다. 1925년에는 아나톨 프랑스의 뒤를 이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고, 1924년에서 1934년 까지 국제 펜 클럽(Pen Club)의 회장이었다. 1935년에는 의장으로 국제 연합 제5차 예술 학문 회의를 주재하였고, 1939년 부터 죽기까지 콜레지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되어 시학 강좌를 맡고 있었다. 이는 시인에게는 처음 있는 영예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독일군 점령 시절 그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국민 작가 위원회에 소속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의 최후의 작품이며 독일 점령군 치아의 어두운 심경을 쓴 것이 <나쁜 생각, 기타(1942)>라는 작품이다. 심신이 극도로 쇠잔된 발레리는 해방된 다음 해인 1945년 병을 얻어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정부에서는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거행했으며 그의 유해는 그의 소망대로 세트 해변 묘지에 묻혔다.
 
 시인으로서의 발레리는 보들레르, 말라르메를 잇는 심미적 상징주의 계보에 속하나, 시의 창작도 지적 작업의 소산이며 엄밀한 방법에 의하여 제작된다는 그의 주장대로 주지적이며 기교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그에 따르면 시는 산문과 달라서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감흥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시는 언어가 가진 모든 능력을 구사하여 독자의 마음 속에 어떤 미의 감각, 조화의 세계를 낳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시인은 말의 모든 힘(음, 리듬, 음률, 낱말과 낱말의 접근과 대조, 이미지, 상징, 비유 등등)을 구사하여 이러한 미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종의 기하학자-건축가-지성인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영감이나 정열이 아니라 맑은 의식과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노력이다. 라고 했다. "나는 무아 상태에서 번갯불을 기다리느니보다 맑은 정신, 의식적의 의지를 가지고 나의 마음대로 반짝거리는 불꽃을 만들기를 좋아한다"고도 했다.
 이러한 그의 시론은(말라르메의 시론과 더불어) 세계 제 2차 대전 후의 프랑스 시단에 중요하고 깊은 영향을 주었고 주지적 심미파에 속하는 많은 시인들은 그들의 시적 창작 활동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이 두 스승에게서 배우고 있는 형편이다.
 
미라보 다리 /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느는 흐르는데
나는 왜 우리들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는가
 
기쁨은 늘 아픔 뒤에 왔는데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 마주 대하자
그러면 우리들의
두 팔이 놓은 다리 아래로
영원한 눈빛의 피로한 물결이 지나간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간다 흐르는 이 강물같이
사랑은 간다
얼마나 인생은 더딘 건가
또 얼마나 희망은 강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날이 가고 달이 지나도
가버린 세월과
우리의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느는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상테 감옥에서 / 아폴리네르
 
 
1
감방에 들어가기 전
나는 알몸이 되어야 했다
한즉 어떤 불길한 목소리가 웅얼거린다
"기욤 군, 이게 어찌된 일이요"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 대신에
무덤으로 들어가는 나의 신세
잘 있거라 잘 가거라 노래하는 원무(圓舞)여
오 나의 청춘이여 젊은 아가씨들이여
 
 
2
아니, 여기서는 이미 나는
나라는 생각이 안 든다
이제 나는 11 감방의
제 15 번
 
햇빛이 창문으로
흘러들어
햇살은 내가 쓰는 시 위에서
장난을 치며
 
종이 위에서 무용을 한다
귀 기울이니
누구인가 발로
천정을 두드린다
 
3
구렁 속의 곰처럼
매일 아침 나는 걷는다
돌자 돌자 쉬지 말고 돌자
하늘은 쇠사슬처럼 푸르다
구렁 속의 곰처럼
매일 아침 나는 걷는다
 
바로 옆 감방에서는
수도물 꼭지를 틀어 놓는다
열쇠를 쩔거럭거리며
잔수가 오가곤 하나
바로 옆 감방에서는
수도물 꼭지를 틀어 놓는다.
 
 
4
뿌연 페인트 칠한 맨벽 안에서
나는 한없이 지루하다
종이 위에 파리 한 마리 종종걸음으로
들쑥날쑥한 글 줄 위를 바삐 다닌다
 
오 저의 고통을 잘 아시며
그 고통을 주신 하나님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불쌍히 여기소서 눈물 마른 제 눈과 창백한 제 얼굴
쇠 사슬에 매인 저의 걸상 소리를
 
그리고 이 감옥 안에서 숨쉬는 모든 불쌍한 가슴들을
저와 항상 함게 하시는 사랑의 신이시여
저의 연약한 이성과 이를 능가하는 절망감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소서.
 
5
시간들은 얼마나 느리게 지나가는가
마치 장례식 행렬 같아
 
그대가 울고 있는 이 시간도 슬퍼할 때가 있으리라
모든 시간과 같이 이 시간도
너무 빨리 지나갈 것이므로
 
 
6
나는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지평선이 없는 죄수에게는
미움에 찬 하늘과
이 감옥의 쓸쓸한 담장들만이 보일 뿐
 
날이 저물고 이윽고
감방 속에 전등불 하나가 붉게 켜진다
아름다운 불빛 친애하는 이성(理性)아
이 감방 속엔 너와 나 단 둘뿐이다.
 
*1911년 가을 프랑스 르부르 박물관 소장의 유명한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가 없어졌다. 그러자 혐의는 당시 과격파 예술 운동
의 하나인 미래파 예술가들에게 걸렸다. 당시 미래파 문인이나 화가들은 극렬 분자로 통용되어 있었던 만금 이들이 과거의 예술품
이나 전통을 파괴하기 위하여 이 불후의 명작을 없애 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피래파 그룹을 조사해 보니 아폴리네
르가 이 운동의 선봉장이며 열렬한 옹호자인 것이 드러났다. 결국 장물 은닉죄라는 죄목으로 그는 파리의 상테 감옥에 수감되었다.
친구들이 백방으로 노력하고 탄원을 넣어 약 1주일만에 집행 유예로 풀려났으나 이 수치스런 경험은 그에게 상당히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 시는 그때의 경험을 쓴 것이다.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 현대시의 시발자(始發者)로 불리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일생은 그의 경쾌하고 화려한 인상과는 달리 슬프고 너무 짧았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 태생인데 아직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 아버지와 폴란드에서 이주해 온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향락과 도박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따라 남 프랑스 지방의 간느-니스 등지를 옮겨 다니며 거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때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올라왔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많은 독서를 하였고 이 때에 폭넓은 교양을 쌓았다고 한다. 파리의 생활은 어려워 은행의 말단 행원의 일을 해오다가 한때는(1901~1902)어떤 부유한 독일 가정의 가정 교사로 초빙되어 독일에 가서 일하기도 했다. 이 동안에 거기서 가정부로 와 있던 영국 소녀 애니라는 처녀와 사랑에 빠지나 얼마 안 되어 실연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이 때의 착찹한 심정을 노래한 것이 유명한 "사랑 못 받는 남자의 노래(1903)"이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신문 기사를 쓰거나 잡지 등에 주로 에로틱한 글을 기고하여 생활을 하면서 앙드레 살몽-막스 쟈콥 등 문인들과 문예지를 펴내기도 하고, 화가 피카소-브라크-블라멩코 등 소위 당시 화단의 전위파(前衛派)들과 친교를 맺어 예술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전위파 예술 운동에는 언제나 선두에 서서 활약했는데 입체주의, 미래파, 흑인 예술, 환상파, 그리고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유파나 '이즘'이 나올 때마다 그는 선구자이며 또 그 운동의 강력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라는 낱말은 그의 창작이다.
 1913년 그가 33세 때 그의 첫 시집 <알콜>이 출판되어 성공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무겁고 음울하고 불안한 유렵 사회에 그의 새롭고 신기하고 경쾌하고 애수 섞인 유머는 인기가 있었다. 소위 새 정신이었다.(이 말도 그의 창작이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나 그는 비록 외국 국적을 가졌으나 자원하여 출전하였다. "나는 모든 것을 프랑스에 빚지고 있다.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것은 나의 최소의 봉사이다." 라고 했다. 1916년 그는 전장에서 포탄의 파편으로 머리에 부상을 입어 두 번이나 뇌 수술을 받았고,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1918년 "아름다운 빨간 머리"로 유명한 젊은 부인의 팔에 안겨 30세을 일기로 죽었다.
 
 그는 두 권의 시집을 남겼는데 하나는 앞서 말한 <알콜>이며 또 하나는 죽기 전에 끝낸 <칼리그람(1918)>*이다. '칼리그람'이란 낱말도 그가 지어 낸 새로운 단어이다.
 <알콜>에는 그가 두 번에 걸쳐 겪은 실연이 서정적이며 회고적인 엘레지와 그가 본 세상에 대한 스냅 사진에다 그의 독특한 꿈과 환상과 무의식을 병치(竝置) 혹은 뒤섞은 현대적인 시들이 들어 있다. 또한 그는 그의 시에서 일체의 구두점을 빼버려 시구의 리듬을 완전히 유동화시켰다. 이는 '상드라르'의 시를 읽고 받은 충격으로 그는 시집 <알콜>의 최종 교정시에 자기 시에서 모든 구두점을 없앴다는 것이다. '상드라르'가 무의식적으로 부분적으로 한 일을 아폴리네르는 의식적으로 전적으로 한 것이다. 이후 많은 현대 시인들이 구둣점 없는 시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이며 마지막 시집인 <칼리그람>에서는 그가 시집 <알콜> 출판 이후 추진해 온 시에 있어서의 새로은 혁신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카페의 소음 속에서 들리는 대화를 주어 모은 소위 대화시라든가 추상파 화가의 수법을 시에 적응시킨 추상시들이 들어 있다. 또한 그는 이 시집에서 시에다 형상적(形象的)인 요소를 합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시를 구성하는 활자나 활자로 구성되는 시구의 배치로 어떤 현상을 나타내어 무언 중에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자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와 같이 시행을 같은 모양으로 늘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그림을 그려서 독자의 시각에 호소하는 수법이다. 심장은 하트 모양, 시가(cigar)는 여송연 담배 모양으로, 분수는 물이 올라가 버드나무같이 퍼져 떨어지는 모양으로 활자를 배열하였다. 시의 음과 그림을 함께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그의 생존시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혹은 즐겁게 할 뿐이었으나 그의 사후 차츰 세월이 감에 따라 그가 시에서 시도한 새로운 정신과 형식의 추구는 20세기의 시가 갈 길에 대하여 큰 시사와 문제를 남겨 주었다. 지금에는 그의 시는 고전(古典)이 되어 프랑스 중학생들이 암송하고 소르본느 대학에서 강의되는 전통 문학이 되었다.
 
*calllgramme: 시구의 배열이 도형을 이루어 시의 대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로 아폴리네르가 만든 조어.
 
빙산 / 앙리 미쇼 
 
 
난간도 울타리도 없는 빙산(冰山)에, 지친 늙은 까
마귀들과 요사이 죽은 수부들의 망령들이 북극의 마(魔)
와 같은  밤에 와서 팔꿈치를 괸다.
 
빙산, 빙산, 영원한 겨울의 무종교(無宗敎)의 대
성당(大聖堂), 유성(流星) 지구의 머리 위에 씌운 빙모(氷
帽) 추위에서 태어난 너의 기슭은 얼마나 고귀하고 또 순
결한가.
 
빙산, 빙산, 북대서양의 등,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바다 위에 얼어 붙은 장엄한 불상(佛像), 출구 (出口) 없
는 죽음의 번쩍거리는 등대, 침묵의 절규는 수세기 동안
계속된다.
 
빙산, 빙산, 필요 없는 고독인, 갇히고 멀고 벌레
없는 나라, 섬들의 가족, 샘물의 가족인 그대들은 보면 볼
수록 얼마나 나에게는 친숙한 것이냐---
 
 
익살광대 / 앙리 미쇼
 
 
어느 날,
어느 날, 아마도 곧
어느 날 나는 바다에서 먼 곳에 내 배를 매어 둔 닻을 뽑
아 내리니.
나는 무(無), 무 가운데서도 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일종
의 용기를 가지고
나에게서 분리할 수 없이 가깝게 보였던 것을 버리리라,
나는 그것을 짜르고, 그것을 뒤엎고, 그것을 꺾고, 그것
을 땅 위에 딩굴게 하리라.
나의 비참한 수치심(羞恥心), 조물조물 이어가는 나의
구차한 계략(計略)과 논리의 맥락을 단번에 내뱉어
버리며,
소위 큰 인물이라는 종기를 짜내 버린 뒤 나는 자양(滋養)
있는 공간을 다시 마시리라.
 
조소와 실추(失墜)에 의하여(도대체 실추란 무엇인가?)>
파열(破裂)과 같이 공허와 전적인 소산(消散)-모멸(侮蔑)
-배출(排出)로 나는 사람들이 나의 주위 환경이나 이
고상하고 고상한 나의 주변 인물들과 썩 잘 합치되고
맞고 조화되고 어울린다고 믿고 있는 생활 형태를 나
의 몸에서 쫓아 낼 것이다.
큰 재난 앞의 겸손이나 극심한 공포 뒤와 같은 완전한 평
지화(平地化)로 줄어 들고
재어 볼 품도 없이 낮아진 나의 참된 위치, 알 수 없는
어떤 생각-야심에서 내가 버렸던 가장 미미한 내 자
리고 되돌아와
고상함도 존경도 사라지고
머나먼 곳에서(혹은 있지 않은 곳인지도 모른다) 이름도
신원(身元)도 잃어버리고,
익살 광대가 되어 조소(嘲笑)와, 폭소와 괴기(怪奇) 가운
데, 내가 모든 양식(良識)에도 불구하고 나의 중요성
에 대하여 가졌던 생각을 없애 버리며
나는 뛰어들리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숨어
있는 무한 정신 속으로
나 자신 새롭고 놀라운 새벽 이슬에 열려
아무것도 아님으로 해서
그리고 벌거숭이가 됨으로 해서---
그리고 웃음거리가 됨으로 해서--
 
 
플룀 여행 하다 / 앙리 미쇼  
 
풀륌 씨는 여행 중 사람들이 자기를 지나치레 우대
해 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무단히 그의
몸을 밟고 지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꺼리낌 없이 그의
양복 저고리에 손을 닦는다. 결국 그는 이런 일에 익숙해
졌다. 겸손하게 여행하는 게 더 좋았다. 가능한 한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만약 식당에서 그의 접시 위에 나무 뿌리를 큼직한
나무 뿌리를 내놓고 무뚝뚝하게
"자 먹어요, 먹지 않고 무얼 기다리시요" 하면
-"좋습니다, 곧 먹지요, 자아, 끝냈습니다"
그는 공연히 그 날 밤 그에게 방이 없다고 거절하면서
"뭐요?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서 잠자러 온 것은
아닐테지요, 그렇지요? 자, 당신의 가방과 물건들을 드
시요. 지금 이 시각이 하루에서 가장 걷기 좋은 때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은요---그렇구 말구요.
물론 웃자고 한 말이지요. 그저 노---농담으로"
그리하여 그는 어두운 밤중에 다시 떠난다.
그리고 만일 누가 그를 기차 밖으로 밀어 내면서
"아니, 우리가 벌써 세 시간 전부터 기관차를 데우
고 여덟 칸의 객차를 단 것이 당신 같은 나이에 건강한
몸을 한 청년을, 또 여기서도 얼마든지 소용이 있고 다른
곳으로 떠나가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수송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우리가 터널을 뚫고 나이너마이
트로 수천 톤의 바위를 폭파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백
킬로의 철로를 놓은 것이 그래 이런 일을 위해서였단 말이
오? 그뿐인가, 사보타지(怠業)가 있을 염려 때문에 아직도
철로를 감시해야 하는 일을 빼놓고라도 말이지.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그래---"
-"좋습니다, 좋아요. 잘 알았습니다. 제가 기차에 오른
건 그건 그저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였지요 자 이젠 됐습니
다. 단순한 호기심, 그런 거지요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짐을 들고 길로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  그가 로마에서 콜롯세움 원형 극장을 보겠다
고 하면
"아, 안 됩니다. 제 말 들으시오. 이 곳은 이미 관리가 잘
못되어 있어요. 그리고 조금  뒤에 선생은 그것을 만지려고
할 것이고 그 위에 기대려고 할 것이고 앉으려고 할 거요.
--- 그리하여 이 곳은 도처에 폐허밖에 남지 않았소. 이건 우
리에게 교훈이, 준엄한 교훈이 되었소. 그러나 앞으로는 안
됩니다, 이젠 그만이오, 알겠소?"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건 --- 저는 그저 그림 엽서나
혹은 사진을 얻고자 했을 뿐입니다---- 혹시 있으면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이 도시를 떠난다.
또한 만일 여객선 위에서 배의 사무장이 갑자기 그를  손
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자는 여기 무얼하고 있지? 거 참, 아래쪽에는 전혀 규율
이 없어 보여.  빨리 저 자를 선창 아래로 내려 보내도록 해! 방금
반시(半時) 종이 쳤어"라고 말하고 나서
그는 휘파람을 불며 가버렸고 플륌으로 말하면 배가 항해
하는 동안 내내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여행을 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런데
자기는 여행을 한다. 계속해서 여행 하지 않는가.
 
 
앙리 미쇼(1899~1984):  앙리 미쇼는 때로는 자기의 무의식 속을 파고들어가 존재의 실태와 존재 이유를 찾기도 하고 또는 악의(惡意)에 찬 세계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고뇌와 무력(無力)을 독특한 풍자와 유머로 표현하므로써, 현재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원래 프랑스어계의 벨기에 출신으로 1955년에야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어려서부터 극히 고독한 성격으로 부모형제나 어떠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기는 이방인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브뤼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신비 작가의 작품이나 성인들의 전기들을 즐겨 읽었고 잠시 의과(醫科) 대학에 다닌 적도 있었으나 중도에 포기했다. 21세 때 새로운 다른 세계를 동경하여 일개 수부(水夫)가 되어 약 2년 동안 바다를 떠다니며 방랑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4년 부터 파리에 정착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로트레아몽'의 작품을 읽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아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927년 자아(自我)의 분열을 다룬 시집 <지난 날의 나>를 발표하고, 계속하여 자신에 대한 거의 과학적-의학적 관찰 보고서인 <나의 속성(屬性)(1929)>,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박해받는 인물을 풍자적으로 그린 <풀륌이라는 자(1930)>, 그리고 꿈과 환각-충동을 조사-보고한 <밤은 움직인다(1935)> 등의 시집을 내어 주목을 끌었다. 아울러 1927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동안 그는 또 다시 다른 세계를 찾아 에쿠아도르를 비롯한 남미-터기-인도-중국-일본 등을 여행하고 두 권의 여행기 <에쿠아도르(1929)>와 <아시아의 한 야만인(1933)>을 펴내었는데 저자는 이 가운데 각국의 도시-인물-풍습-동식물에 대한 학자적인 정밀한 관찰과 시인으로서의 깊은 성찰을 하여 많은 독자에게 감명을 주었다.
 1940년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남 프랑스의 코트다지르로 피난하였는데 여기서 '앙드레 지드'를 만났고 '지드'는 미쇼의 내면적 시가 가지는 현대적 뜻과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앙리 미쇼를 발견하자!"라는 강연을  하여 그의 이름을 높이었다. 같은 시기에 그가 전시(戰時) 중에 쓴 특이한 항전시(抗戰詩)가 발표되어 일약 그는 유럽에서 유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30대 부터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은 자기류의 그림을 발표해 왔는데 이 특이한 그림이 화단에서도 높이 인정되어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퍼졌다.
 그는 시인으로 계속하여 <시련, 푸닥거리)1945)>, <유령(1946)> 등의 환상적인 시집과 <다른 곳에(1948)> 라는 가공적이며 상상적인 3부작 기행 문집을 펴내었다.
 1955년 경부터 인간의 심층 내부를 철저히 탐색하기 위해 그는 마약인 '메스칼린'을 복용하여 그 환각과 취기를 이용하여 의식 내부를 탐험하려고 하였다. 즉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잠입하여, 약의 힘을 빌어 인간의 모든 감각, 꿈, 인상, 이미지, 무의식을 알고 느끼고 경험하려 하였다. 그는 그가 직접 느끼고 본 것을 그의 시로 또는 그림으로 옮기었다. 어느 작가도 그만큼 인간의 희미하고 붙잡기 힘는 내부 세계를 이렇게 철저하게 탐험-실험하려고 애쓴 작가는 없었다.  약 15년에 걸친 실험에서 얻은 작품으로 "비참한 기적(1955)" , "소란스러움의 무한(1957)" "구렁에서 얻은 지식(1961)", "정신의 큰 시련(1966)" 등이 있다.
 미쇼는 만년에도 인간의 내부 세계와 환상 세계에 대한 많은 작품을 ("잠든 모양, 깬 모양"(1969); "사라지는 것과 대면하여"(1976)) 등을 내놓았으나 점점 글자로 표현하기보다는 형상적 그림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 그의 그림이란 회화라기보다 현미경 아래 보는 박테리아의 표본이나 X선 사진 같은 기이하고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화가로서 그는 거의 매년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전람회을 열었고 그 때마다 주목과 논란을 일으켰다. 1965년에는 파리의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그이 총작품 전시회가 개최되어 그의 예술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국가 문학 대상의 수상자로 추대되었으나 그는 이를 사절하였다. 그는 시인으로서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엄밀한 뜻에서 문학권 외에 있으면서도 194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김현, 권오룡 번역의 또 한 편의 앙리 미쇼의 시
 
바다와 사막을 지나 / 앙리 미쇼
 
효력 있다 숫처녀와 씹하듯
효력 있다
효력 있다 사막에 물이 없듯
효력 있다 내 행동은
효력 있다
 
효력 있다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따로 서 있는 배반자처럼
효력 있다 물건을 감추는 밤처럼
효력 있다 새끼를 낳는 염소처럼
조그맣고 조그맣고 벌써 비탄에 잠긴 새끼들
 
효력 있다 독사처럼
효력 있다 상처를 낸 단도처럼
그걸 보존하기 위한 녹과 오줌처럼
강하게 하기 위한 충격, 동요처럼
효력 있다 내 행동은
 
효력 있다 결코 마르지 않는 증오의 대양을 가슴에 심
어주기 위한 모멸의 웃음처럼
효력 있다 몸을 말리고 넋을 굳히는 사막처럼
효력 있다 내팽겨쳐 논 시체를 뜯어 먹는 하이네나의
턱처럼
 
효력 있다 내 행동은.
 
프랑스 명시선 25. 생-존 페르스(1887~1975): 최완복 번역(25)
 
 
원정(遠征) / 페르스  
 
1
세 위대한 계절 위에 영예롭게 포진(布陣)하며 나는
나의 법을 세운 이 땅의 전도(前途)가 탄탄하리라 점친다.
 
아침에 무기들은 아름답고 또한 바다도: 우리들의 말에
맡겨진 이 편도(扁桃) 열매 없는 땅은
맑고 변함없는 이 하늘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손색이 없다. 태양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나 그 힘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
그리고 아침의 바다는 정신의 오만함과 같다.
힘이여, 너는 우리들의 야간 행군길에 노래 불렀다
--아침이 한창 퍼진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의 상속권자인,
꿈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아직 일 년 동안 그대들과 함께! 곡식의 주인, 소금의
주인으로, 그리고 공사(公事)는 공평의 저울로!
나는 다른 기슭의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리라. 나는
산비탈 위에
산호(珊瑚)의 백사(白沙)로 도시들의 구역들을 긋지
않으리라, 허나 나는 너희들과 함께 살 계획이다.
천막(天幕) 입구에 높은 영광 있으라! 나의 힘은
너희들 가운데! 그리고 소금알같이 순수한 관념이 대낮에
회합한다
 
 
---그런데 나는 너희들의 꿈의 거리에서 자주 나타나
인적 없는 장터에서 내 영혼의 순수한 교역을 결정하
는 것이었다. 너희들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그리고 재빨리 마치 강품 속의
가시나무 불같이
힘이여, 너는 우리들의 장도(壯途)에서 노래 불렸
다--- "정신의 모든 창(槍)날은 소금의 단맛에 황홀하며
---나는 소금으로 욕망의 죽은 입을 소생케 하리라!
목마름을 찬양하며 모래밭의 물을 투구로 떠마시지
않은 자와의
영혼의 교역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그리고
태양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나 그 힘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
 
인간들, 먼지 같은 자들과 또 가지각색의 인간들,
상인과 한가한 자, 변두리 사람과 타처 사람, 아, 이
고장의 기억 속에 아무 무게도 없는 자, 골짜기와 고원에
사는 자, 우리들의 기슭의 말단에 사는 자: 징후(徵候)와
종자의 냄새를 맡는 자, 그리고 서방(西方)의 숨결을
듣고 보는 자; 발자취와 계절을 쫓는 자, 새벽의 미풍에
장막을 걷는 자; 오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 이유를 찾는
자, 오, 그 이유를 얻은 자,
그대들은 이 때보다 더 강력한 소금을 사지 못한다.
즉 아침에 왕국들과 죽은 듯한 바닷물이 높이 이 세상의
연기 위에 걸려 있는 예조(豫兆) 가운데 유배의 북소리
가 변경에서
모래 위에서 하품하는 영원을 깨울 이 때.
 
*
---청결한 옷을 입고 너희들과 더불어, 아직 1년 동안
너희들과 더불어! "나의 영광은 바다 위에, 나의 힘은 너
희들 가운데!
우리들의 운명에 약속된 다른 기슭에서 오는 이 소슬 바
람은, 저울대에서 그 정점(頂點)에 이른 세기의 광휘를
시대의 파종을 넘어 저 먼 곳으로 싣고 간다----"
소금의 떠 있는 얼음에 매달린 수학! 시가 자리잡는
나의 이마의 예민한 점(點)에 나는 불멸의 배들을 조선
창(造船廠)으로 끌고 가는 나는 가장 도취된 한 민족 전
체의 이 노래를 새긴다.
 
*'Anabase'란 진군(進軍) 또는 원정이란 뜻이 있다. 역사상으로는 사이러스 2세가 이끈 그리스 용병대의
중앙 아시아 원정이 유명하며 또 이 장시(長詩)와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 시집 <원정>은 전후 두 편의 노래
와 10편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 게재한 것은 그 제1편이다.
 전체적으로 어느 군단이 대륙의 연안을, 그러나 황무지와 고원을 넘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일면 파괴하며 일면
건설하며 진군하여 마른나무라는 도착지까지 이르는 군사적 원정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는 모험에 대한 인류의 끝없는 도전, 영원한 것, 상승, 확대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갈망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1편은 도시를 건설할 땅에 정복자가 도착한 장면이다.
 생-존 페르스는 유년기의 회상을 담은 <찬가>를 발표한 지 13년 만에 이 서사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가
외무성 재직시의 일이다.
 이 장시는 그의 다른 모든(초기 작품은 제외) 작품같이 난삽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어구와 표현이 산재해 있
다. 이 점이 노벨 문학상과 세계의 여러 위대한 작가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경원시되고 일반
에게는 읽혀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인류적이며 문화사적인 서사시는 그 방대한 구상, 백과 사전적인 해박한 지식과 아울러 간소하
며 강력한 리듬, 고양(高揚)된 억양과 변화 있는 문체로 프랑스의 옛 서사시에 견주어지고 있다.
 
 
시인이 증언한 것은--- / 페르스
 
 
시인이 증언한 것은 이렇듯 극한적인 순간에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망(待望)의 극한점에서 누구도
방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라!
"탄생되는 날이 황홀함--- 새 술이 이보다 더 진
실될 수 없으며 새로운 삼베가 이보다 더 신선할 수 없
으니---
 
이방인인 나의 입술 위에 느끼는 이 월귤의 맛은 무
엇인가? 이는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며 이상한 것인데?
---
 
서두르지 않으면 나의 시는 해방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 순간에 탄생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밖에 없다.
(이는 마치 제주(祭主)가 새벽 제사(祭司)를
드리기 위해 한계단 한 계단 안내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와 같다.
- 삭발한 머리와 맨손, 그리고 손톱에 이르기까지 빈틈
없이 차리고 - 그의 존재의 향기로운 이파리가 낮의 첫
햇살에 발하는 메시지는 매우 빠를 것이다.)
그리고 시인도 우리와 함께 그의 시대의, 인간의
길 위에 있다.
우리들의 시대의 흐름에 쫓아, 이 큰 바람의 흐름에
따라,
 
우리들 사이에 그의 사명; 주어진 메시지를 명료히
하는 일, 그리고 심정의 계시에 의하여 그의 마음 속에
주어지는 응답.
 
쓰여진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 생동하는 사물
에서 직접 얻은 것이며 전체적인 것.
 
복사된 것이 아니라 원본의 보존, 그리고 시인의
기술(記述)은 조서(調書)를 따른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기술된 것들도 또한 변하
리라고 - 문제의 장소; 이 세상의 모든 모래 사장들)
 
"드디어 나는 나타나리라, 잃어버린 숫자여!---
너무나 많은 기대가 우리들의 청각의 기능을
 
무디게 하지 않기를! 어떤 불순함도 시각의
문턱을 더럽히지 않도록!---
 
그리고 시인은 아직 우리와 함께 있으니, 그 시대
사람들 가운데, 그 시대의 악을 지닌 채----
 
낙인 찍힌 자의 침상에서 자고 나서 그로 인해
온통 얼룩이 진 자와 같이
엎질러진 기름 속을 걸어 흠뻑 더러워진 자와 같이
꿈으로 부패된 인간, 성스러운 것에 감염된 인간,
 
스키타이* 인처럼 대마초 연기 속에 취함을 찾는 자
들이 아니라
                    *스키타이: 기원 전 6~3세기에 걸쳐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활약한 이란계의 기마 민족
                                    새나 짐승 무늬를 청동기에 새기는 등의 독자적인 문화를
                                    확립했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초원 지대의 여러 유목 민
                                    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가지의 식물 - 벨라돈나나 사리풀에 중독되는 것도
아니며
 
아마존의 사람들이 먹는 올로기의 둥근 씨앗을 냄
새 맡는 자도 아니며
 
사물의 이면(裏面)을 나타나게 하는 빈자(貧者)의
칡뿌리, 야게나 필루 풀도 아니고
 
자신의 명철한 정신을 주시하며 자신의 권위에 민
감하며 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대낮같이 명
확하게 견지하는 자.
 
"이 부르짖음! 신의 날카로운 부르짖음! 그것이
우리들을 방 속에서가 아니고 군중의 한가운데서 붙잡도

 
그 소리는 군중에 의하여 전파되어 우리들의 지각(知覺)
의 한계점까지 울려 퍼지기를----
 
자기의 열매를 찾아 끈적끈적한 담벽 위에 그려진
새벽이 우리들의 이 강렬한 소망을 흐리게 하지 못하리
라."
 
그리고 그 시인은 아직도 우리들 가운데 있다----
이 시간, 아마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 시간, 아니 바로 이
순간, 이 찰나!---
그런데 우리는 이 순간에 태어나기에는 너무나 짧
은 시간밖에 없다.
 
"---약속 자체가 숨결이 되는 이 기대의 극한적인
시점에서,
 
그대는 스스로 숨을 죽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보는 자에게 기회가 있지 않을까? 듣
는 자에겐 그 응답이?---
 
시인은 아직도 우리들 가운데----아마도 마지막일
이 시간---바로 이 순간--- 이 찰나!
 
-"이 부르짖음, 우리들 위에 신의 날카로운 부르짖
음!
 
*이 시는 그의 주요 작품의 하나인 <바람>의 제 3 제 6가(歌)이다. 생-존 페르스는 바람, 비, 눈 등의 자연 현상을
주제로 한 몇 편의 시집을 펴내었다. <바람>에서는 우주 현상이 가진 무한한 힘과 이것이 인간의 생활-문명-
문화가 가지는 관계를 우화나 신화처럼 다루고 있다. 시인은 바람을 땅과 인간과 시와 정신을 창조하는 근원적
인 힘으로 보고 노래하고 찬양하고 있다. 여기 제 6가(歌)가 발췌된 제 3편에서는 이러한 창조적인 바람과 인간
과의 협력 관계가 취급된다. 따라서 <원정>에서 정복자의 동료들과 같은 인간 문명의 선구자들에 대한 열거가 전개
된다. 자산가, 상인, 법률가, 성직자, 개혁자, 과학자, 집제사(執祭司) 등등이다. 이 가운데 시인은 특수한 위치에
있다. 시인은 극한적인 간구에서 증언하기 때문이다. 제 6가에서는 시인과 시, 특시 시가 탄생하는 최고의 그리고 최후
의 순간에 대한 시인의 증언을 나타내고 있다. 시인은 현실 배후에 숨어 있는 시, 생동하는 사물 자체이며 전체적인 것
을 붙잡으려는 정신의 최후의 순간에 대하여 그 긴박성, 찰나성을 증언하고 있다.
 
 
- 페르스(1887~1975): 1960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생-존 페르스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이름은 모국인 프랑스에게서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더 유명하며 그의 작품은 현대 시인 가운데 가장 많이 외국어로 번역된 시인의 하나다.
 그는 쿠바 동쪽 과들루프라는 프랑스 령(領) 섬에서, 프랑스의 오랜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귀공자와 같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11세 때 온 가족과 더불어 프랑스 서남단의 포(Pau)시로 이주하였는데 이 곳 중고등 학교에서 프랑시스 잠, 발레리, 라르보 등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또 잠의 소개로 그의 집에서 클로델과 알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젊은 페르스는 클로델과 같이 자기도 장차 외교관이 될 뜻과 시를 쓸 의욕을 가지게 된 듯하다. 그후 보르도 대학으로 진학하여 법률 공부와 함께 시의 창작도 병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수십 편의 시를 써서 <크루소에게 바치는 그림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적도 있으나. 1911년 여러 친구들의 권고와 주선으로 <찬가>라는 첫 시집을 낸 것이 그의 문학 활동의 첫걸음이었다. 이 시들은 카리브 해의 과들루프에서 지낸 그의 유년 시기의 생활과 그의 머리에 비친 어린 시절의 신선하고 이국적인 풍물에 대한 회상, 바다, 종려나무, 꽃 선풍(旋風), 원주민들의 풍습 등을 다채롭고도 섬세하게 그린 것이다.
 1914년 외무성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중국 북경 공사관에 파견되어 서기관으로 약 5년 동안 근무하며, 일본, 한국, 몽고, 중앙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로 돌아와 외무성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유명한 정치가이며 외무 장관이던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중요한 보조자가 되어 1920년대에서 20년 동안 그는 외무성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맡았고 최고 실무 책임자인 외무 차관으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에도 일면 창작 생활을 계속한 듯하며 1924년 생레제 레제라는 필명으로 <원정>이라는 장시를 발표하였다. 이는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와 같은 모험과 정복의 서사시이나 전설과 현실과 꿈이 뒤섞인 신화(神話)와 같은 작품이다.
 1940넌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6월 14일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페탱 원수가 비시 정부를 수림함에 이르러 페르스는 6월 16일 보르도에서 배를 타고 처음에는 영국으로 갔으나 다시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는 미국 정부의 호의로 워싱턴의 국회 도서관에서 프랑스 어 자문 의원으로 일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2년 비로소 생-존 페르스라는 필명으로 <유배>를 1944년 <비, 눈>, 1945년에 <바람>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인간 존재의 고뇌를 극복하려는 철학적인 시이거나 혹은 바람-비 등 자연적인 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우주적인 서사시로 방대한 구상과 장중한 음률, 박학 심오한 지식으로 위대한 시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영국-미국의 시인-비평가들로부터 높은 인정을 받고 있으며, 영국의 엘리어트는 일찍부터 그의 작품을 소개-번역하였다.
 1944년 전쟁의 종식으로 그는 40년에 박탈당했던 프랑스 국적과 영예가 복권되었으나 1958년이 잠시 프랑스에 귀국하였을 뿐 계속 워싱턴 근처에 살며 시작과 연구 그리고 카리브 해와 뉴 멕시코 등지를 여행하며 지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바다와 사랑의 무한성을 찬미한 <항로 표지 (1957)>. 시간을 정복한 인간과 지구의 위대함과 영원함을 노래한 <연대기 (1960)> 등이 있다. 이 해에 그는 프랑스 대사로 복권되고 그의 전작품에 대한 노벨상이 수여되었다. 이후에도 시의 창작 활동이 계속되어 1963년에는 13가(歌)로 된 <새>를 출간하였고 1975년에는 몇 편의 장시를 모은 시집 <주야 등분시(晝夜等分詩)를 위한 노래>를 내놓았다. 이는 그의 최후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는 이 해 지중해의 지앙 반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존 페르스는 넓은 뜻에서 자연 시인이다. 자연과 세계는 그에게 있어서 늘 경이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는 쉬지 않고 여행하며 보통 사람보다 훨씬 광대한 세계에 살았다. 이미 그의 초기 작품인 <찬가>에서 자연에 대한 영광의 노래를 불렀고, <원정>에서도 중앙 아시아 지방 유목지의 풍물과 사물에 대한 깊은 애착과 동경을 그리고 있다. 또한 빛과 색체와 동식물이 넘쳐 흐르는 땅과 세계는 그에게 있어서 늘 신선한 놀라움과 신비의 근원이었다. 대지를 비단같이 감싸주는 눈, 때에 따라 부는 바람, 우주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바다 등은 그의 시의 영원한 원천이었다. 그는 자연을 무한히 또한 쉬지 않고 찬양한다. 현대시의 조류가 세계와 자연을 멸시하고 저주하는 경향과는 극히 대조되는 태도이다. 그러나 시인 생-존 페르스는 자연을 그리는 데 있어서 서정(抒情)이나 감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구성할 뿐 아니라 자연의 현상과 힘을 인간의 역사와 운명, 인류의 문화와 문명과의 관계에서 다룬 점에 그의 작품의 깊은 뜻이 있다. 또한 언어와 리듬의 장중함, 다채로움, 풍부함, 다양한 이미지와 불가해(不可解)한 상징이 곁들어 그의 작품의 위대함과 신비함과 또한 난해함을 이루고 있다.
 
종소리 / 피에르 르베르디  
 
 
모든 것이 꺼졌다
바람이 노래하며 지나간다 
그리고 나무들이 몸을 떤다
동물들이 죽었다
이제 아무도 없다
     보라
별들은 반짝임을 멈추었다
      지구도 더 돌지 않는다
머리 하나가 숙여졌다
      머리카락으로 밤을 쓸면서
서 있는 최후의 종탑은
      자정을 친다
 
 
서로 가슴을 터놓고 / 피에르 르베르디  
 
 
드디어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그 곳을 지나왔다
누군가 지금 또한 그 곳을 지나간다
내가 그랬듯이
어디를 가는지 모르면서
 
나는 떨고 있었다
깊은 방 속에 벽은 캄캄했다
그 벽도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나는 이 문지방을 넘어 올 수 있었던가
 
소리칠 수도 있으리라
아무도 듣지 않는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의 망혼(亡魂)을 만났다
망혼은 너 자신보다 온화하였다
전날에는
방 한 구석에서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죽음이 너에게 이 평화로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너는 아직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너를 두고 떠나려 한다
 
한 줄기 바람이라도 불어 온다면
바깥 세상을 우리들이 아직도 분명히 볼 수 있게 해 준다면
숨이 막힌다
천정이 내 머리를 누르고 나를 떠밀어 낸다
어디에 몸을 둘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내게는 죽을 자리도 변변히 없다
저 멀리 내게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는 어디로 가나
나와 나의 그림자, 우리는 둘뿐이다
밤이 내린다.
 
 
한데서 / 피에르 르베르디 
 
 
나는 아마 열쇠를 잃어버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
두들 나를 둘러싸고 웃으며 각자 자기 목에 건 큼직한 열
쇠를 내게 보여 준다.
 
나만이 어디라도 들어가자면 가져야 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유일한 존재, 그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닫
혀진 문들은 거리를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아무도 없다.
나는 모든 문을 두드리리라.
 
욕설이 창문들에게서 터져 나오고 나는 거기서 떠나
간다.
 
그러자 나는 이 거리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 강
과 숲 가장자리 사이에 문이 하나 있는 것을 찾아 냈다.
허술한 살문으로 자물쇠도 없다. 나는 그 문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서 창문들은 없지만 넓은 커튼이 드리운
밤 아래서 그리고 나를 지켜 주는 숲과 강 사이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피에르 르베르디(1889~1960): 한때 초현실주의 대장인 브르통, 수포, 아라공 등이 한결같이 당대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부른 르베르디는 한동안 잊혀져 있었으나 현대시의 큰 조류가 허무-부재(不在)-고뇌를 주제로 함으로 인해 다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으며 현대시의 선구자로 부각되었다.
 피에르 르베르디는 프랑스 남쪽 지방 나르본느에서 태어나서 소년 시절을 태양이 빛나고 샘물이 노래하는 야생의 자연 가운데서 지냈고 투르즈와 나르보느의 중고등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1907년에 이 지방에서 일어난 포도 재배 노동자들의 폭동은 그의 아버지의 포도밭을 망쳐 버렸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군경과의 유혈 사태는 소년 르베르디에게 큰 충격을 주어 현실 사회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갖게 했다고 한다.
 돌과 나무를 깎아 조각을 하며 생활하고 문학과 학문을 좋아하던 부친의 권고와 격려를 받아 그는 문필가로 살기 위해 1910년 파리로 올라왔다. 몽마르트 언덕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에 자리를 잡고, 생활을 위해 인쇄소의 교정일이나 직공의 밤일을 하여 가며 남몰래 열심히 시를 썼다. 가난과 고독과 고뇌 속에서 시만이 그를 살게 하는 유일의 것이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는 지원병으로 참전하고 돌아와 소위 입체파(立體派)의 예술가로서 잡지 <남북>을 창간하여 약 1년 반 동안 전위 예술을 위해 애쓰기도 하였다. 이 동안에도 계속 시를 써 오며 1915년에는 <산문시>를 비롯 <타원형의 천장(1916)> <지붕의 슬레이트 기와(1918)> <삼베 넥타이(1922)> <하늘의 표류물(1924)> 등의 시집을 연속적으로 내놓아 입체파 시인 혹은 초현실파 또는 서정 시인이란 평을 받았다.
 그는 원래 극히 개성적이고 고독한 사람이며 자기 자신을 남에게 알리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비록 그가 전위파의 예술가 브라크,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과 교류가 있었다고 하나 누구도 그의 진정한 심중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누룰 수 없는 고독감과 인생과 현실에 대한 허무와 위화감으로 고민했으며 시를 이러한 고뇌와 불안을 극복하는 구제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3년 그는 종교적 목적이라기보다 세속으로부터의 초탈과 진실에 대한 갈구로, 유명한 솔레슴 수도원 근처로 은거하였다. 이 때부터 1960년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여기서 궁핍과 고독와 명상의 생활을 했다. 그의 후기에 속하는 중요한 시와 산문을 수록한 <대부분의 시간(1945)>, <인력(人力)(1949)>이 있으며 <말총 장남감(1947)>, <나의 항해일지(1948)>는 그의 정신적 문학적 자서선이다.
 
 그의 시는 당시의 사상계와 문단을 지배하던 객관주의-자연주의-물질주의에 근본적으로 대치한 것으로 감각이나 통속적인 관념으로 그리는 자연이나 현실이 아니라 사물과 현상 배후에 있는 진정한 실재, 순수한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또한 인간이나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적인 문제보다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인간의 고독과 허무와 고뇌의 상황과 그 감정을 상징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그의 시는 부재와 허무에 대하여 명상하는 현대 실존주의 파 시에 30년이나 앞섰던 것이다.
 그의 언어는 혼자서 조용하게 고백하는 말이며, 그의 어조는 낮고 단조로우며 모든 화려한 음이나 이미지를 고의로 피하고 있다. 또한 그가 그리는 상황은 모든 사물이 정지되고 침묵이 지배하는 세계, 이상한 고뇌의 빛이 감도는 한 폭의 정물화 같은 것이다.
 그의 시가 가진 이러한 정신성과 단순성은 그에게 시인으로서의 큰 영광을 주진 않았으나 그 깊은 내면성과 순수성은 현대시의 가장 중요한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무희(舞姬) /  콕토 
 
 
게는 발 끝으로 걸어 나온다
두 팔로 꽃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귀 밑까지 찢어진 듯한 웃음을 짓는다. 
오페라의 무희는
꼭 게 모양을 닮아
색칠한 무대 뒤에서
두 팔로 원을 그리며 나온다.
 
 
너의 웃음은 콕토 
 
장미꽃 잎의 가장자리처럼 위로 잦혀진 네 미소는
너의 변신(變身)에 원망스럽던 내 심사를 달래 준다.
너는 잠이 깨어 이제는 꿈은 잊어버렸다.
나는 또다시 너의 나무에 매어진 몸이 된다.
너는 제 작은 힘을 다하여 내 몸을 얼싸안는다.
우리는 어째서 나무가 되지 않는가, 한 껍질
한 체온(體溫), 한 빛깔의 나무가,
그리고 우리들의 입맞춤이 그 나무의 유일의 꽃이 되지
않는가
 
 
나의 시풍(詩風)--- /  콕토
 
이 시집의 시풍이 전과 다르다 해도
오호라,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
나는 항상 시를 기다리기 힘들어
그저 오는 것을 붙잡는다.
 
독자여, 뮤즈 시신(詩神)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같아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를 무대로 삼아 움직이는
저들의 깊은 책략을 나로서는 추측할 수가 없다.
 
나는 저들이 내 머리 속에서 춤추며 맺었다 풀었다
혹은 중단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저들의 법을 쫓는 길 외에
별다른 무모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
 
 콕토(1889~1963): 나의 귀는 소라 껍질/ 바다 소리가 그립습니다,  경쾌하고 신기하고 때로는 신비하기까지도 한 시나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도 하고 한편 즐겁게도 한 쟝 콕토는 한때는 20세기 초반 문단의 총아로, 유럽은 물론 이웃 나라 일본이나 우리 나라 독자에게도 친숙한 작가이다. 특히 그는 영화 <비련(悲戀)(1943)>, <미녀와 야수(1945)>, <오르페(1949)> 등의 제작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파리의 명문 가정 태생으로, 조숙하여 어린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20세 전후에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내어 문단과 일반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조숙할 뿐 아니라 실로 다재다능하여 문필뿐만 아니라 미술-조각-연극-영화-발레 등 열 손가락에 이르는 예술 방면에서 창작 활동을 했고, 그의 작품들은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었고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의 재능과 취미는 다방면에 걸쳤으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詩)였다. 그가 손을 덴 모든 예술 양식은 그의 중심 사상인 시 정신의 표현 수단이라고 그 자신이 말해 왔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시집으로 <희망봉(1919)>, <단성성가(單聲聖歌)(1923)> <오페라(1927)> 등을 발표하고, 이 시기 후에 그는 상당히 긴 공백 기간을 이용하여 소설-수필-연극-영화-데생 등에 몰두하였다. 다방면에 걸친 마술사 같은 그의 재간은 실로 종횡무진하여 전기의 활동 이외에도 교회의 내부 장식, 색종이로 붙인 회화, 러시아 발레에서 샤넬의 의상 고안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41년 다시 시단으로 돌아와 <알레고리(1941)> <레온느(1945)><포엠(1948)> <7이라는 수(數)(1952)> <명암(1954)> 등의 시집이 발표되었다. 그의 시풍은 시집마다 경향을 달리하여 각각 전위적, 미래적, 초현실적, 환상적, 주지적, 고전적 등등의 평을 받았으나. 본인은 시에 필요한 것은 시 정신이지 유파(流派)가 아니라고 응수했다. 그런데 <레온느>라는 시집은 이상하게도 죽음의 찬가이다. 콕토는 60이 훨씬 넘어서도 그의 정신의 젊음과 시 정신은 변치 않았다. 새로운 것, 이상한 것, 마적(魔的)인 것에 대한 추구는 계속 각방면에서 추구되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좀더 평온해지고, 좀더 신비로운 것으로 기울어진 점이다. 이 시기의 시집으로서는 <레닉스의 스페인 의식(1961)><진혹곡(1962)>이 있다. 이 유행과 신기(新奇)의 추구자는 1955년 프랑스 문예의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어 다시 한 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의 여러 방면에 걸친 많은 작품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많은 것이 망각의 세계에 묻히고 말았다. 100여 편이 넘는 작품 가운데 10여 편의 작품 또는 제작이 그의 걸작으로 인정되고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상당한 일이다.
 다재다능하고 카멜레온같이 변화무쌍한 그는 당대에 유례없는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경박-피상은 물론, 앙드레 브르통 같은 시인은 그를 한때 사기꾼으로 혹평하였다. 그러나 차츰 그의 가치를 공정하게 인정하고 그의 독창적인 위치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생겼다. 즉 피상적인 허구와 단순한 말장난으로 보이는 많은 그의 작품의 표면 뒤에 진정한 시인, 날카로은 지성의 시인을 발견하고, 화려하게 보이는 이 예술의 곡예사가 사실은 늘 고독과 허무와 죽음의 깊은 늪을 보아 온 심각한 작가라는 것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시인이란 그가 말한 대로 "참다운 시인은 죽은 사람과 같아 산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가 진실이었는지 모른다.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의 주인에서부터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짧으나마 경건한 카톨릭 신자가 되기도 한 콕토는 실로 복잡하고 모순되고 항상 변하고 알 수 없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자신도 자신을 몰랐는지 혹은 숨겼는지 모른다. "나는 항상 진리를 말하는 허위이다"라고도 했고, 또 "나는 낙관적인 비관론자이다"라고도 했으니까---.
 
확신 / 엘뤼아르  
 
 
내가 그대에게 말하는 것은 그대의 말을 더욱 잘 듣기 위함이며
내가 그대의 말을 들으면 나는 확실히 깨닫는다
 
그대가 짓는 미소는 나를 더욱 차지하기 위함이며
그대가 미소 지을 때 나는 온 세계를 본다
 
내가 그대를 끌어안음은 나를 유지하기 위함이며
우리들이 살면 모든 것이 기쁨이리라
 
내가 그대를 떠나면 우리는 서로 기억할 것이며
서로 헤어짐으로써 우리는 다시 만나리라 
 
*이 세상의 많은 사랑의 시 가운데서도 이렇게 다정하며 자연스럽고 뜻깊은 시는 드물다. 마치 사랑하면 이이렇게 된다는 것을 열거라도 하는 것 같다. "서로 헤어짐으로 우리는 다시 만나리라"는 구절은 확신적이며 인상적이다. 사실 시인으로서 엘뤼아르의 근원적 감정은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의 시인으로 출발했고 또 끝냈다. 그 사랑은 남녀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남녀의 사랑이었다. 실제로 그의 생애는 개인적인 사랑의 역사, 여인을 만나고 헤어지는 사건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1912년~1930년 '갈라'와의 만남과 헤어짐, 뉘슈와의 만남, 1946년 이 여인의 돌연한 죽음과 그 이후 몇 해 동안의 위기, 1949년 도미니크를 만남으로써 생의 회복 등이 그것이다. 엘뤼아르는 이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보았고 사랑을 모델로 우주를 만들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은 시인과 우주의 매개체이었으며 양자를 잇는 교량이었다. "나는 너를 통해서 이 세상이 옳다고 했다" 고 그는 노래 했다. 레지스탕스가 낳은 걸작시의 하나이며 엘뤼아르의 이름을 세계에 유명하게 한 시 "자유"도 그 자신의 술회에 의하면 처음에는 한 여성에 대한 사무치는 사랑으로 출발하였지만 차츰 써 가다 보니 문제는 애인의 이름을 쓰는 한 남자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억압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즉 자유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에 가담한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랑의 차원을 개인적인 지평에서 모든 사람의 지평으로 확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서로 사랑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사랑의 시와 정치적 시와의 사이에는 영감이나 근원-어조에 별 차이가 없다.
 그의 시는 시인의 호흡같이 자연스럽고 그의 육체와 마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말은 애써 찾아낸다든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있는 그대로를 노력하는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음악성이나 시구(詩句)의 리듬을 잃지 않는 점이 그의 시를 고전적으로 평가받게 하는 이유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 엘뤼아르 
 
입술엔 가벼운 실과를
물고
몸은 가지각색의 꽃으로
치장하고
태양의 팔에 안겨
빛나며
낯익은 새 한 마리에
행복하며
빗물 한 방울에
황홀해하는
아침 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정숙한 그녀
 
나는 정원을 말하고 있는데
꿈을 꾸는 모양이다.
 
그러나 분명 나는 사랑하나 보다
 
 
그리고 하나의 미소 / 엘뤼아르 
 
 
절대로 완전한 밤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오,
내가 말하거니와
내가 확언하거니와
슬픔의 끝에는 항상 열려진 창문이
빛이 비치는 창문이 있소
항상 눈 뜨고 있는 꿈이 있고
이루어질 욕망 채워질 주림
너그러운 마음
내민 손, 벌려진 손
지켜보는 눈
한 인생, 서로 나누어 살 인생이 있는 법이오.
 
 
올바른 정의 / 엘뤼아르 
 
 
포도로 술을 만들고
석탄으로 불을 만들고
입맞춤으로 사람을 만드는 일
이것은 인간의 따뜻한 법칙이다
 
전쟁과 빈곤 속에서도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순결히 몸을 지키는 일
이것은 인간의 힘겨운 법칙이다
 
물을 빛으로
꿈을 현실로
적을 형제로 변하게 하는 일
이것은 인간의 아름다운 법칙이다
 
어린애의 가슴 속으로부터
최고의 이성(理性)에 이르기까지
항상 완성시켜 가는
오래고도 새로운 법칙이다.
 
 
야간 통행 금지 / 엘뤼아르  
 
문은 감시되어 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우리들은 갇혀 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도로는 막혀 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도시는 무릎을 꿇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도시는 배가 고프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우리는 무장 해제되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밤이 되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우리들은 사랑을 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 이 우아하면서 유머러스한 시는 제 2차 대전 중 수만 수십 만의 프랑스 인이 그의 장시 "자유" 다음으로 즐겨 부른 노래다. 이러한 시로 그는 아라공과 더불어 민중 시인이 되었으며 그것은 그의 희망이었다. 엘뤼아르는 이미 "이미 오늘날 시인의 고독이란 무너져 버렸다. 오늘날 시인은 이미 사람들 사이의 사람이다. 그들은 형체를 가진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그게 어쨌단 말인가"란 야유적이며 반항적인 그리고도 낙천적인 말투에 묘미가 있다.
 
 
  엘뤼아르(1895~1952): 사랑의 시인, 혹은 정치적 시인이란 평을 받는 폴 엘뤼아르는 20세기 프랑스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파리 북쪽 교외에 있는 노동자의 거리 생-드니에서 출생하였으나 아버지는 회계사이며 어머니는 양재사인 비교적 유복한 중산층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중고등 학교 시절 페결핵으로 공부를 중단해야 했고, 1911년에서 1913년까지 스위스의 다보스라는 곳에 있는 사나토륨(요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의 작품을 읽게 되고 특히 미국 시인 휘트만의 시를 좋아하며 스스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소년 엘뤼아르는 여기에서 러시아 태생의 한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은 결실되어 4년 뒤인 1917년 드디어 결혼하게 되는데 후일 그가 애칭으로 '갈라'라고 부른 여인이다. "그녀는 순결한 눈을 녹게 하고 풀 속에서 꽃을 태어나게 한 유일의 존재이다"라고 그는 찬양했다.
 이 보다 앞서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엘뤼아르는 요양원에서 나오자마자 간호병으로 전선에 동원되었다. 그는 야전 병원에서 전쟁의 참상을 맛보았고 이는 그의 마음 속에 큰 충격을 주어 전시 중 병원에서 쓴 "평화를 위한 시"외 1편의 선언문 같은 시들을 자비 출판하였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한때 '차라'와 당시 유행하던 다다이즘 운동을 벌였고 후에는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데스노스-아라공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요하고 열렬한 멤버가 되었다. 엘뤼아르와 초현실주의와의 관계는 밀접할 뿐 아니라. 이 새로운 문학 정신이 그의 시에 준 영향은 깊다. 1920년에서 1936년까지 그는 브르통이나 르네 샤르와 공동으로 여러 권의 초현실주의적인 시집과 평론을 펴냈을 뿐 아니라 "죽지 않으므로 죽는 일(1924)" 및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통의 수도(1926)" "사랑, 시(1929)", "직접적인 생(1932)" "모든 사람의 장미(1934)" 등 그의 중요한 시 작품들은 모두 직접 간접으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시집 <모든 사람의 장미>로 그이 초현실주의 시대는 끝난다. 이 동안에 엘뤼아르는 첫 부인 갈라와 헤어지고 제2의 부인 마리아 벤즈, 속칭 뉘슈와 결혼한다. 뉘슈와의 사랑과 애정은 그의 첫사랑인 갈라에 못지않게 짙고 깊어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낳게 하였으며, 그녀의 영향은 그녀가 죽은(1946) 뒤에도 계속되었다.
 1936년을 전후하여 그의 시는 점차 사회적-정치적 관심을 보이고 인류와 정의를 위한 연대 운동에 가담한다. "지금의 모든 시인은 그가 다른 사람의 생(生)에, 공동의 생에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주장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는 때가 왔다."라고 그는 썼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그는 공화파에 가담하였고 "게르니카의 승리(1938)"를 발표하였다. 이 도안 인간애와 자유를 노래한 시점에 <풍요한 눈(1936)> <자연의 흐름(1938)> < 볼 것을 준다(1939)>등이 있다.
 1940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한때 사랑과 꿈의 시인이었던 엘뤼아르는 자유와 조국을 위한 투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194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독(抗獨) 비밀 저항 운동에 가담하여 싸웠고 작가 국민 위원회의 북부 책임자가 되어 비밀 출판물인 <심야 총서>를 간행하여 자유와 조국 해방을 위하여 시를 통해 투쟁하였다. 이 동안에 그는 시집으로 유명한 그의 시 "자유"가 맨첫머리에 실려있는 <시와 진실(1942)>, <전쟁 중에 일곱 편의 사랑의 시(1943)>< 독일인의 집합지에서(1944)> 등이 있다. 1942년에는 영국의 항공 편대가 수천 부의 그의 <시와 진실>을 독일군 점령 아래 싸우는 프랑스의 마키자르(항독투사) 위에 뿌렸다. 시가 무기가 된 것이다.
 대전이 끝나자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대감을 고취하고 계속 개성적이며 서정적이고, 그의 시의 주재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과 죽음-평화-자유이었다.
 1946년 그가 강연 여행으로 스위스에 있을 때 아내 뉘슈의 죽음의 통지를 받았다. 그는 한때 절망과 공허에 빠져 약 1년 동안 실어증에 빠져 있었으나 인류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희망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49년 멕시코의 세계 평화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거기서 다시 도미니크라는 여성을 만나 제 3의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재혼을 기하여 엘뤼아르는 <불사신>이라는 시집(사후에 출판됨)을 써서 생의 기쁨을 되찾은 행복을 노래했다. 그러나 1952년 엘뤼아르는 과로와 협심증을 일으켜 급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전세계의 지식인과 문인의 애도를 받으며 파리의 페르-라세즈 묘지에 묻히었다.
 
엘사의 / 루이 아라공 
 
 
너의 눈은 한없이 깊은 심연(深淵), 내가 마시려 몸을 굽
히면
이 세상 모든 태양들이 그 속에 와 비추고
모든 절망한 사람들이 죽기 위해 그 속에 몸을 던지는 것
을 나는 보았다
너의 눈은 한없이 깊어 나는 거기서 기억을 상실한다
 
네 눈은 새들 그림자에 거칠어진 대양(大洋)
짐짓 날씨가 개면 네 눈도 변한다
여름은 천사들의 앞치마를 잘라 구름을 만들고
밀밭 위에 보이는 하늘만큼 푸른 것은 또 없다
 
바람이 불어 창공 위의 슬픔들을 날려 버려도 소용 없어
눈물로 빛날 때 네 눈은 창공보다 더 맑아
비 내린 뒤의 하늘도 네 눈을 시새운다
깨진 유리의 틈살보다 더 푸른 빛은 없다
 
칠고(七苦)의 어머니, 아, 젖은 빛이여
일곱 개의 검(劍)이 오색의 프리즘을 꿰뚫었다.
눈물 속에 돋는 해는 더욱 감동적이며
검은 점이 박힌 홍채(紅彩)는 상복(喪服)을 입어 더욱 푸
르다
 
네 눈은 불행 속에 이중(二重)의 돌파구를 열고
이를 통하여 동방 박사의 기적이 또 다시 일어난다
세 박사가 모두 뛰는 가슴 누르고 말 구유에 걸린
성모 마리아의 망토를 보았을 때의 그 기적이
 
5월에 이 세상 모든 노래, 모든 탄식을 부르기 위한 말에
단 하나의 입이면 족하다
수백 만의 별을 담기엔 너무나 좁은 창공
성신(星辰)들에게는 너의 눈이 그리고 저들의 숨은 쌍동이
별이 필요했다
 
아름다운 그림에 도취한 어린애의 벌어진 눈도
너의 눈보다는 크지 못해
나는 네가 큰 눈을 뜰 때 혹시 거짓말을 하는가 싶어
차라리 소나기가 야생의 꽃을 벌린다 하리라
 
네 눈은 벌레들이 격렬한 사랑을 벌이는 이 라벤더 꽃
그 속엔 번갯불이 숨어 있는가
나는 많은 유성(流星)의 그물에 걸렸다.
8월의 한중턱 바다에서 죽는 한 수부(水夫)처럼
 
나는 우라늄 광석에서 이 라디움을 뽑아 냈다
나는 이 금단(禁斷)의 불에 손가락을 태웠다
아, 백 번도 넘게 찾았다 되잃은 낙원이여
네 눈은 나의 페루(Perou)나의 골콩드(Golconde) 나의
인도 제국(帝國)
 
어느 날 저녁 세계는 해적(海賊)들이 불태운
암초에 걸려 깨졌다.
그러나 나는 바다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엘사의 눈 엘사의 눈 엘사의 눈
 
*아라공에 있어서 그의 부인이 된 '엘사 트리올레'와의 만남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남과 같이 그의 생에 일대 전기(轉機)를 가져다주었다. 엘라 트리올레는 러시아 여자로 소련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처제였으며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지성적인 여성이었다. 1928년 11월 4일 아라공은 이 여성을 몽파르나스의 기차 정거장 같이 넓은 카페 쿠폴에서 마야코프스키와 함께 처음 만났다. 그 다음 날 아라공은 같은 장소에서 엘사와 단 둘이서 만났으며 그 후 두 사람은 엘사가 1970년 죽기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엘사는 아라공의 문학의 원천이었으며 그의 시의 존재 이유였으며 그의 정신적인 이상이었다.
 사실 엘사를 만나기 2 개월 전만 하더라도 아라공은 허무주의에 빠져 베니스에서 자살하려고 계획했었다.
 
나는 언제나 나의 고뇌의 교향악을 가지고 다녔다.
런던의 태양은 안개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파리의 마로니에는 얼마 안 되어 누래졌다.
나는 베니스에서 죽고자 한다.
 
이 때 엘사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도움으로 또한 그녀를 위하여 그는 다시 살고 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엘사에 대한 그의 사랑과 경애와 감격은 엘사가 죽은 뒤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그의 시 가운데는 엘사에 주는 노래, 가요, 송가 등이 수없이 많은데 "엘사의 눈"(이는 그의 두번 째 시집의 이름이기도 하다)은 그 중의 하나로 아라공의 엘사에 대한 사랑과 경이(驚異)를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이다.
 
 
(19)40년의 리처드 2 / 루이 아라공
 
나의 조국은 사공들이
버리고 간 거룻배처럼 처량하며
나는 불행보다 더 불행해져
자기 슬픔의 왕으로 남아 있던
저 임금 같아
 
산다는 건 한낱 책략일 뿐
바람도 흐르는 눈물 말릴 줄 모르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미워해야 하며
이미 내게 없는 것도 그들에게 내주어라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심장은 뛰지 않을지 모르며
핏줄에는 찬 피가 흐를지 모른다
도적들의 놀음놀이에서는
이미 2 더하기 2는 4가 아니다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해가 죽으나 다시 사나
하늘은 그 빛을 잃었다
나의 젊은 시절의 다정한 파리여
케-오-플뢰르의 봄이여 안녕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숲과 연못들을 멀리하라
조잘대는 새들이여 입을 다물라
너희들의 노래는 격리(隔離) 당했다
새잡이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고난의 시대가 있는 법이니
이럴 때에 쟌느가 보쿨뢰르에 왔다
아 프랑스를 난도질하라
그 날도 이렇게 창백한 날이었다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리처드 2세"는 아라공이 1940년 9월에 쓴 단시이다. 1940년 프랑스 군이 허망하게 패배하고 독일군이 파리 시를 점령한 지 불과 2 개월, 잇단 충격으로 비탄에 빠진 아라공은 프랑스와 파리를 잃은 절망감과 슬픔을 리처드 2세의 고통과 불행에 견주고 있다. 리처드 2세는 14세기 영국에 실제 있었던 비운의 왕이나 아라공은 세익스피어의 동명(同名)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매 시절(詩節) 끝에 있는 후렴,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은 직접 세익스피어 희곡 <리처드 2세> 제 4막 제 1장에서 옮긴 것이다. 이 장면에서 리처드 왕은 탄식한다. "그대는 나의 영광과 나라를 없앨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없앨 수 없다.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이로다" 또 독일군의 점령 아래 갇혀 살게 된 프랑스의 비참한 모습을 역시 국민과 신하들의 배신을 당하여 프린트 성 가운데 유폐된 리처드 2세의 신세에 비한 것이다.
 아라공은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아이러니칼한 필치로 나치 지배하의 절망적인 생활 단면을 그리고 있다. 새잡이꾼의 통치와 도적들의 '놀이'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자연도 피해야 하며 새도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라공은 최후의 기적을 믿는다. 그는 마지막 시절(詩節)에서 한 줄기 희망을 건다. 프랑스를 구원한 오를레앙의처녀 쟌느 다르크가 보쿨뢰르에 나타났던 것도 프랑스가 가장 비참한 때가 아니었던가. 지금은 바로 그런 슬픈 때이다.
 
루이 아라공(1897~1982): 1897년에서부터 20세기 거의 전부를 살아오면서 60여 년의 작품 생활과 시-소설-에세이-예술 비펑-정치 논설 등 근 80권에 이르는 작품을 남긴 그의 일생은 학실히 현대의 위대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라공이 그의 정수(精髓)를 보이고 후세에 그의 이름을 길이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 특히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에게 패배한 프랑스의 슬픔과 분노와 저항을 나타낸 시들과 또한 그의 아내이며 영원한 여성인 엘사(Elsa)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통하여 그의 프랑스에 대한 사랑과 자유와 희망을 노래한 10여 권의 시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라공은 실은 의학도였으나 청년 시절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가담하여 핵심적 인물로 활약했고 이를 계기로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에 쓴 시를 모든 시집으로 <기쁨의 물(1920)>과 <영원한 움직임(1925)>이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현실적이며 전투적이었던 그는 환상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초현실주의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차츰 이와 결별한다. 1017년 발발한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여파는 유럽에도 강하게 몰아쳐 아라공은 1927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고민의 돌파구에 지나지 않을 뿐 모든 것에 허무를 느끼고 생의 방향을 잃은 그는 한때 자살까지 기도하였다. 이 암담한 시기에 만난 것이 러시아 여인 엘사 트리올레였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결합되었는데 이후 엘사는 그의 생활과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라공이 시인으로서 특히 프랑스의 민중 시인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나타낸 것은 1940년을 전기로 한 그의 상황시(狀況詩)와 사랑의 시에서였다. 1940년 5월 그의 조국 프랑스는 썩은 집같이 무너졌다. 이 허망과 절망 속에서 그는 패배하고 점령당하고 자유를 잃은 프랑스의 설움과 분노와 희망을 노래로 부른 것이다. 아라공은 이 전쟁과 전후를 통하여 문필로써 항독(抗獨) 운동을 전개하며 "단장(斷腸)의 아픔(1941)>, <엘사에게 주는 송가(頌歌)(1942)>, <엘사의 눈(1942)>, <프랑스의 기상 나팔(1946). 등을 연달아 발표하여 허무와 절망에 빠진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하는 민족 시인이 되었다. 그것은 이 시들이 당시 프랑스 국민들이 느끼고 있던 슬픔-분노-사랑-희망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이러한 국민적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시의 주제나 형식을 프랑스의 옛 전통과 국민 감정을 담은 중세의 투훈시(鬪勳詩), 기사담(騎士談), 또는 샤를르도르레앙-도비네-비용 등의 옛 시에서 취했고, 그들의 리듬과 형식을 본떠 일반 대중들고 하여금 자연스럽게 함께 노래 부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안이(安易)- 평속(平俗)이라는 평도 들었으나 프랑스 국민의, 대중의 시인이 되었다. 프랑스 국민은 그 속에서 상처입은 조국의 한탄의 목소리를 들었고 애인에 대한 사랑에서 조국애를 느꼈고 분노와 반항과 희망의 노래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정치 활동을 하면서 만년에도 계속 시-소설-비평-에세이 등을 써 왔고 1958년에 발표된 역사 소설 <성주일(聖週日)은 그의 소설 가운데 걸작으로 인정되고 있다, 또한 시집으로는 <미완(未完)의 소설(1956)>, <침실(1969)> 등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문학적 자서전 <나는 글 쓰는 법이나 첫머리말을 배운 적이 없다(1969)>가 발표되었다.
 한편 그의 영원한 여성이던 아내 엘사는 1970년 그의 팔에 안겨 죽었으나 그의 엘사에 대한 사랑은 변치 않고 그의 작품 가운데 계속 살아 있다.
 그의 재능은 여러 방면에 뻗쳐 있고 그의 활동도 다양하였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시인이며 깊은 뜻으로서의 민중 시인이다. 따라서 그의 많은 시가 애창되고 샹송으로 작곡되었으며 그의 탁월한 언어 구사와 시재(詩才)는 그를 헐뜯는 상징주의 순수시파나 모더니즘의 자유시파로부터도 찬사를 받고 있다. 말썽 많은 그의 정치 활동에 대하여서는 찬반이 구구하다.
 
거룻배 / 프랑시스 퐁지  
 
 
거룻배는 밧줄을 끌어당기고 이쪽 저쪽 몸을 흔드
는 모습이 망아지 같아 참을성 없고 고집장이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투박한 용기(容器)에 불과하여
손잡이 없는 숟가락 모양이다. 사공의 가눔에 따르도록
속이 패고 휘어져 있으나 배도 제딴에 생각이 있는 듯하
다. 마치 이럭저럭 시늉하는 손처럼. 
 
사람이 타면 고분고분한 태도를 취하고 유순하며
말을 잘 듣는다. 배가 뒤로 일어서면 이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다.
 
혼자 내버려두면 물결따라 흘러간다, 가다가 한 잎
의 밀집대처럼 파멸에 이르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같다.
 
 
촛불 / 프랑시스 퐁지   
 
 
밤은 때로 한 그루의 이상한 식물을 소생케 하는데
그것이 발하는 빛은 가구로 가득 찬 방을 해체하여 그림
자의 총림(叢林)으로 변하게 한다.
그 금(金)색 잎사귀는 새까만 꼭지에 달려 가느다
란 백색 석고 기둥의 팬 곳에서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
다.
가련한 불나비들은 숲을 증발케 하는 달이 너무나
높아 주로 이쪽을 공격한다. 그러나 곧 타버리거나 난투(亂鬪)
에 지쳐 모두 망연자실 가까운 광란의 상태에서 떨고 있다.
그러나 촛불은 갑자기 원래의 연기를 내뿜으며 책 위에
밝은 빛을 흔들어 독자를 격려하고 그리고는 제자리에 기울어져
자신의 영양물 속에 빠진다.
 
물에 대하여 / 프랑시스 퐁지  
 
 
물은 나보다 낮은 곳에, 항상 나보다 낮은 곳에 있
다. 내가 그것을 볼 때 내 눈초리는 늘 아래로 향한다.
땅이나, 땅의 일부, 땅의 변모와 같이.
물은 희고 반짝이며 무형(無形)이고 신선하며 수동
적이고 단 한 가지 아집(我執)에 완강하다. 그것은
중력(重力)이란 것으로 비상한 수단을 강구한다.
물의 내부에서도 아집은 작용한다. 물은 쉬지 않고
무너지고 순간순간 어떤 형태라도 버리고 오로지 굴종하
며 어느 종파의 수도사들처럼 거의 시체처럼 땅 위에 엎
드리고 있다. 더 낮은 곳으로: 물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은
것 같다: "향상(向上)에 반대"
 
*
 
물은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자기의 중력에
만 따르려는 이 히스케리컬한 욕망이 고정 관념같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이런 욕구가 있고 이 욕구는
언제 어디서나 충족되어야 한다. 가령 이 장롱으로 말하
면 지면에 붙으려는 욕망이 매우 완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만약 어느 날 자신의 균형이 불안정하게 되면 그
는 욕망에 거역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을 손상시킬 것이다.
그러나 장롱은 어느 정도 중력과 놀고 있고 중력에 도전하고
있다. 장롱은 모든 부분이 붕괴되지는 않는다.
그 돌림대나 쇠시리가 여기 응하지 않는다. 장롱 속에서
자기의 개성과 형태를 지키려는 저항이 있다.
 
액체란 정의(定義)하면 자기 형태를 유지하기보다
는 중력에 순종하는 자, 자기의 중력에 순종하기 위해선
어떤 형태도 버리는 자이다. 그리고 그는 이 고정 관념.
이 병적인 세심(細心) 때문에 모든 품위를 잃는다. 이 고
질로 해서 물은 빠르든가 성급하든가 또는 정체(停滯)한
다; 무기력하든가 난폭하든가, 무기력하면서 또 난폭한
물은 예를 들면 구멍을 뚫는 난폭성이 있다. 숨어 들고 우회
하는 교활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고 물은 관(管)을 통해 수직으로 분출시켜 결국 비가
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즐길 수 있다: 이야말로 진정한 노예
이다.
 
 프랑시스 퐁지(1899~?): 프랑시스 퐁지는 브르통, 엘뤼아르, 아라공 등과 같은 세대의 인물이나 시인으로서 알려지고 인정받게 된 것은 훨씬 뒤인 1942년 이후이다. 이 해에 그는 <사물의 편(便)>이라는 시집을 발표하여 새로운 시학(詩學)에 토대를 둔 독창적인 시로 시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어서 1944년 사르트르가 "인간과 사물"이란 논문으로 상세한 퐁지론을 씀으로써 그의 이름은 일약 유명해졌다. 따라서 그의 시는 현세대에 속하고 있으며 누보 로망파나 <델 켈>이란 잡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소설가나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퐁지는 프랑스 몽펠리에 태생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등 사범 대학의 학과 시험에 통과되었으나 면접 시험에 실패한 뒤로은 철학을 버리고 문학쪽으로 향하였다. <신 프랑스 평론>사에서 출판에 관계하기도 하고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교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제 2차 대전 중에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여 롤랑 마르스라는 익명의 문필로 싸운 적도 있다. 그러나 천성이 학구적이며 사색가인 그는 스스로 문단을 멀리하고 문학과 시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와 관점에서 독자적인 시의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나 그의 초기 작품은 일부 국한된 인사(사르트르, 카뮈, 부라크 등)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오랜 숙고와 각고 끝에 발표된 것이 전기한 시집이며 이 작품은 시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어서 <방법에 대한 10 강좌(1946)>, <송림 수첩(1947)>, 시와 산문을 합쳐 만든 새로운 문학 장르로서의 <프로엠(1948)>, <표현의 분노(1950)> 등이 출판되었다. 60대의 만년에 이르러 그의 모든 작품이 발굴, 출판되고 연구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의 작품으로 <비누(1967)>가 있으며 1977년 3월에는 파리의 조르지 퐁피두 센텨에서 그에 대한 성대한 전람회가 개최되어 노시인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
공원 / 자크 프레베르  
 
 
천년 만년 걸릴지라도
이 말
 다 할 수 없으리
  그대 내게 입맞추고
나 그대에게 입맞춘
이 영원한 순간을
겨울 햇살 비치는 어느 아침
  파리 몽수리 공원에서
파리에서
지상에서
  별의 하나인 지구 위에서.
 
 
매시지 / 자크 프레베르  
 
 
누군가 열어 놓은 문
누군가 다시 닫은 문
누군가 앉았던 의자
누군가 쓰다듬었던 고양이
누군가 한 입 먹은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쓰러뜨린 의자
누군가 열어 놓은 문
누군가 계속 달리는 길
누군가 질러가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늦잠 / 자크 프레베르  
 
 
이건 무섭다
아연판 카운터 위에 삶은 달걀을 두들겨 깨뜨리는 이 작
은 소리는
이 소리가 배고픈 사람의 기억 속에서 움직일 때
이 소리는 정말 무섭다
사람의 얼굴도 또한 무섭다
배고픈 사람의 얼굴은
그가 아침 여섯 시 백화점 유리창에 비친
얼굴, 잿빛 자기 얼굴을
바라다볼 때
그러나 그가 포텡 가게 진열장 속에서 바라다본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다
이제 그로서는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런 건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다른 머리를 상상한다
예컨대 식초 소스를 친
송아지 머리 같은 것
또는 먹을 수 있는 모든 짐승의 머리를 상상한다
그리고 가볍게 아래턱을 움직인다
가볍게
그리고 가볍게 이를 간다
그 까닭은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놀림감으로 삼는데
자기는 이 사람들에 대항하며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리하여 그는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하고 센다
하나 둘 셋
그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지 사흘째다
사흘 전부터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나 아무 소용 없다
이대로 그냥 지낼 수는 없다
그러나 계속하여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굶고 지낸다
그런데 이 유리창 뒤에 즐비한
이 고기 파이들 이 포도주병들 이 통조림들
죽은 물고기들은 통조림 깡통을 지키고
깡통들은 유리창이 지키고
유리창은 순경들이 지키고
순경은 공포가 지키고 있다
여섯 마리의 가엾은 정어리를 위해 이 많은 장애물들---
조금 떨어진 곳에 목로 술집
크림 든 커피와 따끈따끈한 반달 빵들
이 사람은 비틀거린다
그리고 그의 머리 속에는
말(언어)과 말이 혼돈이
말과 말의 혼돈이 일어난다
양념된 정어리들
완숙(完熟)의 달걀 크림 커피
럼술을 친 커피
크림 커피
크림 커피
피 뿌린 범죄 거피---
그의 구역에서 매우 존경받던 인사가
대낮에 목이 찔려 죽었다
그 살인자 부랑자는 그에게서
2 프랑을 훔쳤다
말하자면 술 친 커피 한 잔 값
0 프랑 70전과
버터 바른 빵 두 쪽 값
그리고 웨이터에게 준 팁 25전이다
이건 무섭다
아연판 카운터 위에 삶은 달걀을 두들겨 깨뜨리는 이 작
은 소리는
이 소리가 배고픈 사람의 기억 속에서 움직일 때
이 소리는 정말 무섭다.
 
자크 프레베르(1900~1971): 이브 몽땅이 부른 유명한 샹송 "고엽"의 작사자는 자크 프레베르이다. 그는 파리 서쪽 변두리 태생의 파리지엥으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는 사립 중학교 밖에 다니지 못하였고, 15세부터 시장과 백화점에서 사동이나 점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일찌기 시나 예술에 뜻을 두었던 그는 1926년에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의 대장이라 불리던 브르통이나 아라공 등과 뜻이 맞지 않아 이 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때부터 그는 그의 동생인 피에르 프레베르와 친구 마르셀 뒤아멜 등과 영화 시나리오, 샹송의 작사가로 활약하였으나 신통치 않았다. 후일에 마르셀 카르네와 함께 '제니의 집(1936)' '안개 낀 부두(1938)' '저녁의 손님(1942)' '천국의 아이들(1945)' '밤의 문(1946) 등 유명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와 대사는 그의 작품이다. 또한 '바르바라' 등 많은 샹송의 가사도 지었는데 전기한 샹송 '고엽'은 원래 '밤의 문'의 주제가였다.
 그런데 1946년 출판사 <신문학 평론>에서 그의 옛날 시를 모아 <말>이라는 시집을 펴냈는데 이것이 가히 이변(異變)이었다. 이 시집은 발간된 지 수주일 동안에 10여 만부가 팔렸으며 프레베르는 하루 아침에 일약 가장 인기 있는 시인이 되었다. 이 <말>이라는 시집은 그 후 10 년 동안 500여 판 56만 부가 팔려 시집 출판 사상 신기록을 세웠다. 지금도 그의 시는 본국인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각계 각층의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 후 그는 <구경거리(1951)>, <비와 좋은 날씨(1955)>, <잡동사니(1965)> 등 세 권의 시집을 내놓았는데 여기서도 그의 기지와 서정과 반항과 허무의 불꽃을 엿볼 수 있다
 이 동안 그는 시인으로서뿐 아니라 계속 영화-사진-샹송 방면에서 일하였으며 특히 어린애들을 위한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많은 동화를 출판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는 1977년 4월 북부 프랑스의 셀부르에서 폐암으로 죽었다.
 
신비로운 여인에게 / 로베르 데스노스  
 
나는 너를 너무나 사무치게 꿈꾸었기에 너는 너의 현실성을
잃는다.
숨쉬는 이 육체에 이르러 입술 위에 흘러나오는 정다운
목소리에 입맞출 시간이 아직도 있을 것인가?
나는 너를 너무나 사무치게 꿈꾸었기에 너의 그림자를
껴안으며 내 가슴 위에 겹쳐지던 나의 두 팔은 굳어져 너의
몸 둘레 맞도록 굽어지지 않으리라, 아마도,
그리고 이미 수많은 나날과 달 동안 나를 떠나지 않고
지배해 온, 네가 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 때엔
내가 하나의 그림자가 되리라, 틀림없이,
오, 애정의 숨박꼭질이여,
나는 너를 너무나 사무치게 꿈꾸었기에 사실 나는 깨어
있을 때란 이미 없다. 나는 서서 잠잔다. 나의 육체는 인생과
사랑의 모든 형태에 내맡겨진 채, 그리하여 너, 오늘날 나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너와 만난다 해도 너의 입술이나 이마는
다른 어떤 입술이나 이마보다 다칠 수 없으리라.
나는 너를 너무나 사무치게 꿈꾸고 너의 환영과 더불어 너
무나 걷고 이야기하고 함께 잠잤기에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마도 환영 가운데 환영뿐이며 너의 인생의 해시계 위에 거
닐며 다닐 그림자보다 백 배 더한 그림자가 될 뿐이리라.
 
 
내일 / 로베를 데스노스  
 
 
비록 내 나이 십만 살이 된다 해도 희망으로 예감되는
너, 내일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있으리라.
시간,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이 노인도 시음하듯 말한다.
아침은 새롭고 새로운 건 저녁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너무 많은 일월(日月)을 잠자지 않고 지내며
우리는 밤 새워 빛과 불을 지킨다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노름판에서처럼
순식간에 꺼지고 없어지는 많은 소리에 귀 기울린다.
 
허나 우리는 깊은 밤에 증언한다
낮의 찬란함과 그가 가져다주는 모든 선물을,
우리들이 잠자지 않음은 새벽을 망보기 위함이며
새벽은 드디어 우리들이 현재에 살고 있음을 증명하리라.
 
 
로베르 데스노스(1900~1945): 로베르 데스노스는 파라의 서민가 생 마르탱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순수한 파리지엥이다. 집안이 가난하고 중고등 학교를 나오자 곧 약국의 점원이 되어 일했다. 이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실행활에 대한 고려나 조심성이 없고 어디나 도취하기 잘하는 그는 1017년 브르통-아라공-차라 등 당신의 다다이스트들과 만나 이들의 영향으로 장난기 많은 시를 썼으며, 1922년 브르통이 소위 초현실주의의 새 문학 운동을 일으키자 데스노스는 열성적으로 이에 가담하여 1924년 초현실주의자 선언시에는 이 운동의 선구자이며 실천가로 활약했다. 특히 최면술에 의한 무의식적 자동 언어 기술에는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최면 시법회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도 하였다.
 그러나 데스노스는 차츰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벗어나 자기의 본령인 서정과 애수, 환상과 유머를 담은 좀더 정적(靜的)이며 평이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 수록된 "신비로운 여인에게"뿐만 아니라 "암흑". 경범 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시집 <자유 또는 사랑>, <육체와 행복> 등은 이 시기(1924~1930)의 작품들이다. 그의 시가 파리 서민층의 생활 감정을 표현한 감상적이며 대중적인 시라는 비난도 있었으나, 원래 비용-네르발 등을 좋아한 그는 자연히 꿈과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여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시를 많이 썼다. 1930년 브르통과 그의 초현실주의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방송계에 들어가 소의 '라디오 시'라는 새로운 시를 시도하기도 하고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며 새로운 매체를 통한 예술 세계를 이루어 보려고도 하였다. 그의 시에 나오는 일본 여인 유키와 만난 것도 이 때이며 그는 후일 그녀와 결혼한다. "시라무르", " 사랑 없는 밤마다의 밤"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28년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의 전시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다시 독일군 점령하의 파리에서 레지스탕스운동에 가담하여 <심야 총서(深夜叢書)> 출판에 종사하였다. 1944년 2월 나치의 게슈타포 비밀 경찰에 체포되어 유럽의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레진 수용소에 옮겨져 다음 해(1945) 6월 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이 주요 시 작품집으로는 전기한 작품 외에 <상(喪)을 위한 상>, <자산>, 그리고 일종의 자서전인 소설 <일반적 영역>이 있으며 어린애들을 위한 작품 <이야기 노래와 꽃노래>도 있다.
 시인으로서의 데스노스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거쳐온 만큼 한때 하부의식(下部意識)의 기술자(記述者)로서, 초현실주의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으로, 또는 재미있는 언어의 유희가로 유명하였지만, 그의 시의 참다운 본성과 독창성은 서정적인 데 있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서정성은 꿈과 현실, 환상과 진실이 뒤섞이고 넘나드는 특성이 있다.
 
그게 그리 두렵지 않아 / 레이몽 크노  
 
 
난 그게 그리 두렵지 않아 내 오장육부 죽는 것이
내 코와 내 뼈가 죽은 것이
난 그게 그리 두렵지 않아 크노라는 아버지 아들
레이몽이란 세례명 가진 하루살이 같은 나의 죽음이
 
난 그게 그리 두렵지 않아 헌 책들이 어찌되든
강변이 공동 변소가 먼지가 권태가 어찌되든
난 그게 그리 두렵지 않아 시시한 글 마구 써내고
죽음을 증류(蒸溜)시켜 몇 줄의 시를 만든 내가 어찌되든
 
난 그게 그리 두렵지 않아 밤이 살며시
죽은 자의 흰 좀먹은 눈꺼풀 사이로 흘러드는 것이
밤은 부드러운 것, 붉은 머리 여인의 애무처럼
남북극 자오선의 꿀맛처럼
 
나는 이 밤이 두렵지 않아 나는 영원의 잠(睡眠)이 두렵지 않아
그것은 납덩이같이 무거우리라
용암(熔岩)같이 메마르고 하늘같이 검으리라
다리 모퉁이에서 울먹이는 거지처럼 귀가 먹었으리라
 
내가 무서운 건 불행과 초상과 고통
불안과 불운 그리고 너무 긴 부재(不在)이다
내가 무서운 건 병이 누워 있는 뚱뚱한 구렁텅이이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정신의 결함이다
 
그러나 난 그게 그리 두렵지 않아 이 불길한 바보가
그의 이쑤시개 끝으로 나를 잡으러 올 때엔
이미 나는 혼미하여 희미하고 온화한 눈으로
내 모든 용기를 현재의 잠식자(蠶蝕者)에게 내준 뒤일 것
이다
 
어느 날 나도 율리시스나 아킬레우스 또는 아이네아스나
디동 키호테 또는 판사의 노래를 부르리라
어느 날 나도 평온한 사람들의 행복을
낚시의 즐거움을 또는 별장의 평화를 노래 부르리라
 
오늘은 시간이 늙은 말(馬)처럼
시계판 위를 종일 돌면서 휘말리는 데 지쳐
이 머리통-하나의 공 같은-이 허무의 노래를
푸념 비슷 중얼거림을 만만 용서하시길
 
* 이 시는 <눈물>이라는 비교적 초기의 시집에 들어 있는 것으로 검은 유며, 자조(自嘲), 부정의 정신에 있어서 유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난기 많은 그의 다른 시들에 비하여 죽음에 대하여 성실한 태도를 보인다. 일종의 '허무의 노래'라 불리는 이 시 안에, 크노는 프랑스 시가 지니고 있던 모든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순수한 것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전면 부정을 하고 있다. 그는 의식적으로 통속적이려 하고 비속하려 하고 야비하려 한다. 물론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검은 유머와 자조에 라포르그가 있으며, 장난기에 카르코나 쟝 꼭토가 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심도(深度)에 있어서 철저한 반서정파로서 이러한 경향이후일 극단적인 환상파 시인들에게로 이어진다.
 
 
시의 기술을 위하여(시의 요리법) / 레이몽 크노  
 
 
한 개나 두 개의 낱말을 집어
계란 삶듯 삶으시죠
한 가닥 작은 상식과
순진이란 큰 덩어리의 비상식(非常識)을 합해
작은 불 위에 데우시죠
기교라는 작은 불 위에 말이죠
아리송한 소스를 치고
그 위에 몇 개의 별을 뿌리시죠
후추를 치고 그리고 달아나시죠
 
당신는 대체 무얼 하려는 거요?
글을 쓰자는 거요,
정말입니까? 글을 쓰자는 거요?
 
 
*크노는 소위 시라는 것에 대하여 경멸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시의 기술을 위하여"라는 것도 일종의 야유와 장난이지만 그 위에도 여러 곳에서 시에 대하여 혹평을 하고 있다. "시란 대단한 것 아니다"라고도 했고 "시를 쓰기 위해서는 낱말을 좋아하면 족하다"라고도 했다. 또 "오늘 저녁 혹시 후세를 위하여 시를 쓴다는 어림없는 생각을 한다면 이야말로 개똥이다"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대수롭지 않은 시를 계속하여 써서 15권이나 되는 시집을 남겼으니 그의 시에 대한 집착과 고민은 대단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레이몽 크노(1903~1976): 레이몽 크노는 르아브르에서 출생했고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29년경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열성적인 회원이었다. 그러나 1929년에는 이 운동의 주도자 브르통과 헤어지고 그 후부터는 스스로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개척했다. 그는 첫 소설 <개밀(1933)>써서 <되 마고상>을 받았고 그 후 신문사의 일을 하며 소설-시-영화 시나리오-에세이-번역-예술 평론 등을 썼으며 라 플에이아드 판의 백과 사전 편집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광범위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기었고 1951년에는 아카데미 콩쿠르의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시 작품으로 1937년 시집 <참나무와 개>를 발표하고 1943년의 <눈물> 등 그가 죽은 1976년까지 약 15권의 시집을 펴내어 눈물 섞인 유머와 독특한 문체로 많은 독자들을 즐겁게 혹은 감탄하게도 하였다. 그의 시의 특징은 자조와 해학과 시어에 대한 왕성한 추구와 실험이다. 특히 언어에 대한 실험가로서의 그의 태도는 극단적이며 철저하였다. 그는 10 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들여 <문체 연습(1947)>이라는 문체에 대한 연구 시집을 내었고, 1961년에 출판한 <10조(兆)의 시>라는 시집은 일종의 시의 백과 사전 또는 앞뒤로 맞춰 보는 시의 응용책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서고(書庫) 속의 언어를 변조하여 사용하고 거리에서 통용되는 살아 있고 생명력 있는 프랑스 어를 구사하는 새로운 낱말-속어-은어-조어(造語) 등을 쓰며 새로운 철자-새로운 문법을 구사하여 독특한 스타일을 이루었다. 크노만큼 말을 중요시하고 언어 유희를 즐기고 이를 구사한 시인은 없다고 한다. 그 자신도 "시를 쓰기 위하여는 말을 사랑하면 족하다"라고 했다.
 이러한 방대한 언어의 유희와 새로운 스타일 속에 그는 희화적(戱畵的)이며 허무적인 인생과 세계를 무대에 올려 놓았다. 그 내용은 인생의 무의미함, 죽음의 확실성, 존재의 불안정 등을 검음 유머로 감싸 노래 부르고 있다. "아니에르의 개들"이란 시는
 
사람들은 개들을 땅속에 묻는다 고양들을 땅속에 묻는다
말을 땅속에 묻는다 사람들을 묻는다
사람들은 희망을 땅속에 묻는다 인생을 묻는다
사랑을 땅속에 묻는다 - 사랑하는 사람을 땅속에 묻는다
------
사람들은 평안한 마음으로 평화를 땅속에 묻는다
------
누구에게나 무덤 하나씩은 있다
기다리기만 한다면
 
크노는 언뜻 피상적으로 보이는 해학과 웃음과 장난 아래 신랄하고 비관적인 철학자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
 그는 1976년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새로운 언어, 산 언어를 창조하려고 애쓰고 생의 부조리를 그린 점은 현대 문학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앞서 제기하고 추구한 선구자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카르나크 / 으젠느 기유비크  
 
 
바다 속 깊이 화석(化石)들 속에서 잠자는
검은 거인(巨人)이
일어나 주위를 바라다볼 때,
 
텅 빈 창공 속의 별들은 추워하며
서로 팔꿈치를 맞대고 몸을 녹이러 나온다.
 
십만 사자(死者)의 죽은 눈망울들이
강물 속에 떨어져
물 위에 떠 있다.
 
사물 / 으젠느 기유비크  
 
 
정오(正午)쯤
종탑의 큰 시계는 하얘지고
밀집 속 계란처럼
무게 실린다.
 
 
조리법 / 으젠느 기유비크 
 
대낮 조금 전
낡은 기와 지붕을 놓고,
 
바로 옆에
바람에 흔들리는
벌써 커진 피나무 한 그루를 배치하시오.
 
이 두 가지 위에
흰 구름들에 씻기는
푸른 하늘을 두시오.
 
그대로 내버려두시오
그것들을 바라다보시오.
 
 
영원 / 으젠느 비유비크
 
영원을
아주 잃어버린 적은 없다
 
차라리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은
 
영원을 어떻게 남들과
하늘들과 풍경들과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말과
입증할 수 있는 동작으로 옮길 줄 아는 일이다.
 
그러나 영원을, 우리들을 위해 간직하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이 바로 영원이란 것이
우리들에게 분명한 듯한 순간들이 있었다.
 
*기유비크는 레지스탕스의 힘차고 훌륭한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역시 그의 가장 독창적인 시는 가장 평범하고 구체적인 사물 즉 바위,걸상, 나무, 찬장, 그리고 농촌과 도시 변두리의 풍경, 노동, 사랑, 죽음 등을 지극히 간단하게 거의 소박하게 노래 부른 것 가운데 있다. 그를 사실주의 시인으로 분류하나 사물을 다룰 때에 그는 사물의 외부를 묘사하거나 상상 속의 물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일치되어 그 속에 들어가 그 자신이 사물의 대변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소위 물질주의 시인으로 불리는 퐁지와 비교되기도 하나 사물에 대한 객관성에 있어서 두 사람은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퐁지는 사물을 다룰 때 논리적인 길로 접근하나 기유비크는 애정과 의지를 가지고 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이 강조될 때 그는 일종의 애니미스트(萬有靈魂信者)와 같아진다고 한다.
 그의 시어(詩語)는 일견 색채와 음에 있어서 무미건조하며 생경(生硬)하나 구체적이며 간결하여 힘차고 충격적이다. 그러나 때때로 농민의 식사처럼 단순한 가운데 엄숙하고 진실된 기도와 희망이 들어 있어 시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으젠느 기유비크(1907~ ?): 으젠느 비유비크는 브르타뉴 지방의 대서양을 향한 작은 마을 카르나크에서 출생하였다. 카르나크는 황량한 들위에 선사 시대의 유물인 선돌이 숲같이 늘어선 돌 많은 고장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돌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그의 첫 시집이 <암석>인 것도 이에 연유한다고 보겠다. 이러한 쓸쓸하고 거친 환경에서 보낸 가난하고 야생적인 소년 시절은 그의 시의 형성에 큰 몫을 차지하여 그의 시의 주제와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다.
 1935년 파리로 올라와 재무성에서 국민 경제 감찰관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직책을 1967년 은퇴시까지 계속했다. 이 동안 그는 클로델이나 엘뤼아르 등의 시를 읽고 스스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1949년 첫 시집 <암석>과 이어서 <수륙(水陸)으로 된 물체>를 출간하여 독창적인 시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엘뤼아르, 아라공 등의 영향으로 공산당에 가입하여 <시체 전시실> 같은 작품으로 나치의 잔학한 행적을 맹렬히 고발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시는 대부분 교훈적이며 평범한 애국시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집행 명령(1947)>, <행복의 땅(1952)>, <31편의 소네트(1954)> 등이 있다.
 60년대 들어서 그의 시는 좀더 유화적(柔和的)이며 현실적이며 성숙한 시가 되었다. <카르나트(1961)>, <구체(球體)1963)>, <함께(1966)>, <칸막이 벽(1971)>, <흠(1971)> 등의 많은 시집이 출판되었다. 197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수여하는 시 부문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프랑세즈 시 협회장도 역임했고, 한국에도 온 적이 있다.
 
나무들의 목소리 / 마르셸 베알뤼  
 
 
수줍으나 힘센 나무들은
밤마다 높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너무나 단순하여
새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체들이 재가 된 입술을 움직이는
묘지 옆에는
연분홍 송이로 피어난 봄이
처녀같이 웃고 있다
 
그리고 숲은 때때로 옛 사랑에
붙들린 가슴처럼
창살을 흔들면서
긴 소리를 내지른다.
 
*이 시는 환상을 섞은 나무들의 의인(擬人)화 된 풍경이다. 대지에 묶인 나무들은 괴롭고 슬프다. 그들은 높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않는다. 봄이 되어 죽은 시체들도 입을 놀리고 봄도 장미꽃 송이로 되어 처녀처럼 웃는 때가 오면 이제 나무들은 더 참을 수 없어 때때로 창살을 흔들며 소리친다. 그들은 해방을 자유를 얻기 위하여 소리지른다. 그들이 찾는 해방과 자유는 무엇인가? 잊으려도 잊을 수 없는 옛 사람처럼 그들을 붙잡고 놓치 않는 대지에서의 해방이며 만물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연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영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의 긴 부르짖음은 결국 절망의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
 
 
어항 / 마르셸 베알뤼  
 
 
어항 속의 붕어 때문에 나는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내 눈은 연신 반짝거리며 움직이는 이 생물, 나의 고독의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생명 조각 쪽으로 쉬지 않고 되돌아
갔다. 둥근 모양의 유리 항아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느라면
그 속에 사는 주인이 투명한 벽을 지나서 방 속으로 들어와
헤엄치며 그 금빛 파동(波動)으로 나를 놀리는 듯 했다.
어느 날 나는 참다 못해 어향을 깨뜨려 버렸다. 방바닥
에는 한순간 불꽃의 분출과 비슷한 반짝거림이 있었다. 복
수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는 이 작은 생명을 손에 거두었고
이 생물은 손바닥 안에서 최후의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내
가 놀라 망연자실한 것은 이 미물이 움직이지 않게 되자
나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것은 이미 하나의 차가운 물체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은 황금의 열쇠이었다. 열쇠--- 순간,
나는 깨달았다. 미친 듯 방을 튀쳐나온 나는 도시를 가로 질
러갔다. 그리하여 이 희한한 열쇠 덕분에 어제까지도 문지
방을 넘을 수 없던 나의 애인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나
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꿈속에서 보던 그녀와 몇천 배 달
랐고 몇천 배 어여뻤다. 나는 그녀를 나의 팔 안에 안았다.
그러자 그녀가 몸을 뒤트는 모습은 일순간 금붕어의 최후의 꿈틀
거림을 생각케 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강물 같은 애무로
나를 뒤덮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쾌락의 극에 이르렀을
때 내 주위의 벽들은 수정같이 빛나고 동시에 죽음 같은 냉기
가 나의 온 몸에 퍼졌다.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나의
육체가 차츰 생선 비늘로 덮여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 산문시는 그의 대표적 산문 시집 <어둠의 비망록>에 들어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장기이며 특징인 환상과 경이와 괴기가 논리정연하고 빈틈 없이 진행되고 묘사되어 있어 전율적 감각을 일으키는 그의 작품 경향을 가장 잘 보여 준다. 그로 인하여 (물론 그의 선배인 앙리 마쇼, 그의 친구인 막스 자콥, 또는 그이 뒤를 이을 피에르 드 망디아르그 등과 함께) 소위 환상파라는 시풍은 20세기에 하나의 조류가 되었으며 이는 현대 정신의 신화적 성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르셸 베알뤼(1908~?): 마르셸 베알뤼는 20세기 중반을 풍미한 환상적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 중 하나다. 그는 서민층 가정 출신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여러 가지 미미한 작업을 거쳐 가며 독학으로 공부했고 여가를 이용해 시를써 왔다. 1941년 출판한 시집 <살아 있는 심장>으로 독창성을 보여 아폴리네르, 상드라르의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후예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후 막스 자콥과의 친교, 독일 낭만파 시인들, 특히 카프카의 발견, 앙리 미쇼의 작품 세계 등이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완전히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환상적이며 경이적, 괴기적인 세계를 지어 내고 이를 가장 리얼하게 그려 냈다. 1944년에 나온 <어둠의 비망록>은 이러한 시가 들어 있는 그의 대표적 시집이다. 여기 들어 있는 시들은 산문시와 콩트의 중간 형태로 그 속에 이상한 인물들이 꿈과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분위기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인물과 분위기를 창출하고 묘사함에 있어서 베아뤼의 언어와 필치는 가장 정확하고 자연스러우며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 또한 여기에 검은 유머와 에로틱한 필치를 가해 모더니즘의 풍취를 자아내고 있다.
 그는 파리의 생-미셀 가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시를 썼다. 
 
스페인 장군의 눈물 방울--- / 앙드레 피에르 망디아그르  
 
 
낮의 흥분에서 거둔
스페인 장군의 눈물 한 방울과
밤의 흥분에서 거둔
포르투갈 장군의 눈물 한 방울이
이 항아리 속에서 콧물 모양이 되어 떨고 있다
이 항아리는 미래의 사막에서
한 암소 해골의 목덜미에 걸릴 것이다.
 
* 앙드레 피에르 드 망디아르그는 마르셀 베알뤼와 마찬가지로 환상적 모더니스트 파에 속한다. 그도 베알뤼처럼 시나 단펀,심지어 소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특징과 독창성을 이루는 상상이나 환상의 국면을 자유자재로 또 교묘하게 지어 내었다. 그리하여 때로는 괴기와 비극적인 것이 합하여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도 하고 때로는 외설과 대담한 풍자로 사람들을 웃기기도 놀라게도 한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관능적으로 독자를 이상한 감각과 세계로 이끈다. 스페인 장군의 눈물과 포르투칼 장군의 눈물이란 물론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과 포르투칼의 카르모나의 군사정권을 암시적으로 가리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가지는 강한 풍자와 크로테스크한 이미지와 미래에 대한 격렬한 고발은 두 군사 정권의 차원을 넘어서 역사적인 현실성을 가진다.
 
조촐한 모습의 하숙집은 / 앙드레 피에르 망디아그르 
 
 
로카르노 호숫가에 있는
조촐한 모습의 한 하숙집은
혀 달린 피아노라고 알려진 유일한 생물을 간직한다.
 
사람들은 이 소리나는 존재의 부드러움을 자랑하나
이것이 한산한 해에는 약간 여위는 것은
이 생물이 외교관의 씨앗만을 먹고 사는 까닭
그러나 이것은 오랫동안 금식할 수 있는 검소한 새
그리고 메레 오펜하임은 이 새를 마치 그의 머리칼 속에
서 떨어진 검은 백조처럼
줄에 매어 산보를 시킨다
다음 번 평화 회의 때까지
굶주림을 꾹 참게 하기 위해.
 
*'로카르노'는 1925년에 열렸던 로카르노 조약을 위한 외교 회의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시 같다. 로카르노 회의는 다국적 회의로서 말도 많았고 따라서 참석한 외교관의 수도 엄청 났다. 로카르노는 인구 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호반의 도시이며 한적한 요양지였는데, 갑자기 수백 수천 명의 외교관, 정치인, 언론인이 몰려들어 떠들어 댈 때는 혀 달린 피아노도 신이 났지만 그들이 가버린 뒤에는 약간 여위더래도 이상할 것 없다.
 
무덤의 겨울 / 앙드레 피에르 망디아그르  
 
 
토마는 그가 밤중에 그리 높지 않은 허물어진 담장
을 넘어 묘지 안에 들어간다고 상상한다. 묘지는 마치
여름, 어느 남국의 만월(滿月)의 밤같이 빛이 가득하다.
그러나 달도 별도 없는 하늘은 마치 등불 아래 큰 너울을 친
것같이 흐릿하고 무겁다. 토마는 오래 된 무덤들에는 눈도 돌
리지 않고 그 사이를 지나간다. 무덤들은 황폐하게 버려져
있어 꽃도 볼 수 없고 무너지고 가시덤불이 무성하다. 그가 향
하는 곳은 새로 된 무덤으로 그 뚜껑은 멀리서도 보인다. 번쩍
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상한 빛을 반사하며 영사기처
럼 굵은 광선 다발을 올려 보내고 있다. 거기 다다라 보니 토
마는 사실 그 뚜껑이 큰 삭각형의 거울인 것을 안다. 거울은
묘석 위에 놓여 있고 묘비명(물론 그런 것이 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나 그런 증거는 없다)을 가리고 있다. 토마는 힘겹게, 왜
냐하면 묘석의 높이는 거의 그의 키만했으므로, 그는 그 뚜껑 위
에 올라가 약간 경사지고 매우 미끄러운 거울 표면을 기어서
중간 지점까지 가 멎는다. 엎드려 누워 거울을 내려다보니 자
기가 무덤 안쪽에 있다. 하늘은 그의 뒤, 무덤 속 가장 깊은 곳,
제자리에 있다.
 
*그의 장기인 자유로운 상상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전율과 괴기의 장소로 묘지와 거울의 뚜껑이 덮인 무덤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시체나 해골 혹은 망령 같은 괴기한 공포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무덤 위에 놓인 거울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무덤 안쪽에 들어 있으며 그의 등 뒤에 있는 하늘은 무덤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다는 하나의 심미적인 경이(驚異)를 나타낸다. 가장 높은 하늘이 무덤 속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며 거울에서 반사되는 하늘의 빛이 하늘로 올라가는 신비로운 정경을 보여준다.
 
앙드레 피에르 망디아그르(1909~?): 20세기 후반의 문단의 시가는 일부 정치적인 시 작품을 제외하고는 비현실적 혹은 반현실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어떤 시인은 절대를 찾아 현실을 부정하고 어떤 시인은 현실이 부조리하므로 현실을 적대시했다. 피에르 드 망디아르그도 이러한 비현실파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현실 부정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 감각적 또는 심미적(審美的)으로 현실 아닌 환상과 환영의 세계를 찾는다.
 그는 파리 태생으로 상당히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독서와 여행과 창작에 열중하였다. 그가 열광적으로 좋아한 시인은 18세기 아그리파 도비네, 영국의 콜리지, 로트 레아몽과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또 그가 시를 쓴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으며 읽은 작품에서 받은 흥분과 감동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가 오랜 습작 뒤에 처음으로 출판한 시집은 <더러운 세월 속>라는 산문 시집으로 1943년 모나코 몬테카르로에서였다. 당시 그는 독일군의 파리 점령을 피해 거기에 와 있었다. 이 시집에서는 이미 괴기와 환상, 에로스와 풍자가 뒤섞이는 독창성이 충분히 나타나 있었다. 그 후에도 약 9권의 시집을 간헐적으로 발표하여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같은 세대 작가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심미적, 신비적 환상과 상상력에 그의 특징이 있었다. 그는 시뿐 아니라 단편 작가, 소설가, 극작가, 예술 비평가로서도 유명하여, 1951년에는 비평 대상(大賞)을, 1967년에는 유명한 콩쿠르 소설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중요한 시집으로는 전기한 것 외에 <엄청난 몰상식(1948)> <아스티아낙스(1957)> <백악기(白堊紀)(1961)> 등이 있다.
 
미완성(未完成) 정상(頂上)이다 / 이브 본느프와 
 
 
깨뜨리고 깨뜨리고 또 깨뜨려야만 했던 일이 있었다
구원이란 이 댓가를 치러야만 얻어지던 일이 있었다.
 
대리석 안에 떠오르는 나체의 얼굴을 파괴하는 일
모든 형태 모든 아름다움을 망치로 깨뜨리는 일.
 
완성이란 문턱인 까닭에 이를 사랑하는 것
그러나 알려지면 곧 이를 부정하고 죽으면 곧 이를 잊어
버리는 것,
 
미완성이 정상이다.
 
 
참된 이름 / 이브 본느프와    
 
 
나는 한때 너였던 이 성(城)을 사막이라 부르리라
이 목소리를 밤이라고, 너의 얼굴을 부재(不在)라고
그리고 네가 물모(不毛)의 땅 속으로 떨어질 때
너를 데리고 간 번갯불을 허무라고 부르리라.
 
죽은 일은 네가 좋아하던 나라, 나는 온다
그러나 영원히 너의 어두운 길을 따라.
나는 너의 욕망, 너의 형태, 너의 기억을 파괴한다
나는 인정 사정 없는 너의 적이다.
 
나는 너를 전쟁이라 부르리라 그리고 나는 너에 대하여
전쟁시의 자유 행동을 행사하리라 그리고 나의 두 손 안
에는
너의 금 그어진 검은 얼굴을, 그리고
나의 가슴 속에는 천둥 번개 치는 이 나라를 가지리라.
 
 
쟝과 잔느 / 이브 본느프아
 
 
너는 낮고 낡은
이 집의 이름을 묻는다
이는 다른 나라에 있는 쟝과 잔느.
 
아무 노래도 소리도 인기척도 없는 문턱을
휑한 바람이 지날 때,
 
이는 쟝과 잔느, 그들의 잿빛 얼굴에서
낮의 회(灰) 반죽이 떨어지고 나는 다시 본다
옛 여름의 창문 유리를, 너는 기억하는가?
멀리서 가장 빛나는 것은 망령 중의 태장여(太長女)
 
오늘 저녁 우리는 큰 홀 안에
불을 피우리라
우리는 떠나갈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 불을 살려 두리라
 
*본느프와의 시는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이라고 한다. 그말은 그의 시에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사상이 담겨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시 자체가 철학이며 형이상학이란 뜻이다. 다만 그의 철학이나 형이상학이 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점이 그의 시의 특색과 가치를 이루고 있다.
 그의 시는 심오하고 장중하며 고뇌에 차 있다. 시의 주제는 현실적인 생활이나 역사가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존재와 (無), 동(動)과 부동(不動), 생과 사, 실존과 시간 등의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헤겔,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의 사상과 사르트르, 카뮈 등 현대 실존주의 작가들의 허무주의가 들어 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소위 내적인 정신의 변증법이다. 현존(現存)과 부재(不在), 생과 사, 존재와 무(無), 언어와 침묵 등이 상호 부정을 통하여 새로운 긍정으로 이른다는 변증법의 논리를 시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모든 것을 파괴, 부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육체적 파괴, 침몰, 부재, 사막, 밤 등의 부정적 형상화(形象化)로 나타나며 매장(埋葬)의 음울한 노래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가치 없는 파괴를 통하여 죽음의 극복, 생의 탄생, 인간의 희망을 찾고자 한다. 그는 "희망을 재발명하여야 한다. 오늘날 참다운 시로서 새로운 희망을 수립하려고 하지 않는, 또는 최후의 순간까지 수립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변증법에 따르면 언어는 침묵 위에 토대를 두고 생명은 죽음의 뒷받침 위에 서 있으며 허무의 경험이 완전한 생을 긍정하는 보증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시의 사상과 뜻과 생명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상을 그는 그의 고독한 목소리, 가장 고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에는 말이 없다고 한다. 있어도 침묵에 가깝다. 나타난 말도 상징이나 숨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러한 침묵의 목소리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장중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요컨대 부정(否定)과 죽음을 통하여 실재(實在) 재생에 이른다는 그의 깊은 철학 사상을 은밀하고 상징적인 언어로 형상화하고 서정화한 점에서 그의 시는 발레리의 시를 연상케 하며 그의 몇 펀의 시는 전후 프랑스 최고의 시로 평가되고 있다.
 
 
이브 본느프와(1923 ~ ?): 대학의 철학 교수이며 또 예술 비평가, 에세이스트로 특히 프랑스 로마네스크 시대의 벽화(壁畵) 연구가로 유명한 이브 본느프와는 시인으로서 철학자이며 실존주의적인 시를 써서 현대 시단의 중진으로 꼽힌다.
 투르에서 출생하여 고향과 포아티에 대학에서 수학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고 파리의 대학으로 옮겨 문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에서는 보들레르와 키에르고르를 연구하여 학위를 얻었다. 1945년 전후부터 초현실주의 경향의 문학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시인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54년 그의 첫 시집인 <두브의 동(動)과 부동(不動)>을 발표한 뒤이었다. 이 시집은 소위 실존주의적인 철학시로서 두브라는 반여신(半女神), 반상징적인 인물을 통하여 동과 부동, 죽음과 생, 열매 없는 말과 창조의 실질적인 침묵으로의 변모를 다루고 있다. 난해하고 애매한 점이 없지 않았으나 깊은 내면성은 높이 평가되어 발레리의 <젊은 파르크> 이후의 주목할 만한 시집이라는 평을 받았다. 58년에는 <사막에 군림하는 어제>를 발표하였고 <엑스프레스>지가 시상하는 1959년도 '누벨 바그' 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제 3의 시집 <글이 쓰여진 돌>을, 1975년에는 <한계(限界)의 환상에서>를 발표하였다. 그는 이러한 시작 활동 외에도 1957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동안 약 10 편의 세익스피어의 주요 작품을 번역하였고 많은 평론과 에세이를 써 문단과 학계에 공헌하였다.
  그는 주네브, 벵센느, 니스 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강의하면서 시와 평론 등을 썼다.
 
과실들 / 필립 자코테 
 
 
과수원의 방 속에서
때의 흐름이 물들리는
매달린 공들이며
시간이 불켜 놓은 등물들
그리고 저들의 빛은 향기
 
가지가지 아래서 풍기는
서두름의 채찍 같은 향기를 들이마신다
 
이는 나전(螺鈿) 풀숲 속의 진주알들
안개가 가까울수록
더욱 분홍빛을 띠운다
 
엷은 옷 위일수록
더욱 무거운 귀걸이 보석
 
그들은 얼마나 오래도록
수천의 녹색 눈꺼풀 아래 잠자는가!
 
그리고 더위는
 
서두름으로 더욱 생기를 얻어
얼마나 그들의 눈초리를 탐욕스럽게 만드는가!
 
 
진혹곡(鎭魂曲) 중에서 / 필립 자코테  
 
 
걱정 말라, 그것은 온다! 아니, 그대가 가까이 다가선다
거의 닿는다! 시(詩)의 첫 낱말보다
끝에 오는 낱말이 그대의 죽음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죽음은 도중에서 멎지 않는다.
 
죽음이 나뭇가지 아래 잠들고
그대 글 쓰는 동안 숨을 돌리리라 믿지 말라.
그대의 가장 심한 갈증을 풀어 줄 이 입술
달콤한 부르짖음을 동반한 이 입술을 그대가 마실 때에도
 
그대를 머리칼의 타는 듯한 어둠 속에
그대들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기 위해
그대가 힘차게 네 개의 팔 매듭을 죄일 때에도,
 
죽음은 온다, 어떤 돌림길인지 모르나 그대 두 사람을 향
하여 온다
아주 먼 곳에서 오는지 혹은 바로 옆에 와 있는지, 어째
튼 걱정 말라
죽음은 온다! 이 낱말에서 저 낱말로 가는 동안 그대는
더욱 늙는다.
 
 
새벽에 / 필립 자코테
 
 
밤은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 같은 빛의 뒷면
해의 추락(墜落) 광명의 부정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밝게 비출 때에는 제시되지 않는 것
에 대하여,
우리들의 눈을 열게 하기 위한 계략이다.
 
보이는 것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들을 멀리한 후
어둠의 나무 그늘 아래
오랑캐꽃의 주거(住居), 조국 없이 늙는 자의
최후의 피난처가 세워진다---
 
등잔 속에서 잠자는 기름은 멀쟎아
온통 빛으로 변하여 새 떼가 가져가 버리는
달 아래서 숨쉬는 것같이,
너는 중얼거리며 또 타고 있다(그러나 어떻게 말하나
목소리에 담기엔 너무 순수한 이 물체를?)
너는 차가운 강물 위에 생겨나는 불이며
밭에서 솟아오르는 종달새--- 나는 네 속에서
땅의 아름다움이 열리고 확고해지는 것을 본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나의 새벽이여,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공중을 나는 말에 불과한 것일까?
빛은 유랑민(流浪民), 우리들이 가슴에 안은 빛은
이미 안겼었던 것이 되며 또 없어진다.
원컨대 빛을 간구하는 목소리 가운데 최후로 다시 한 번
일어나 빛나기를, 빛이여, 여명이여.
 
필립 자코테(1925~ ): 필립 자코테는 현대 프랑스 시단의 중진의 한 사람이다. 1950년대 초 시집을 펴냈을 때 이미 그는 그의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로 20세기 시단의 가장 촉망받는 시인으로 불리었다. 그 후 60년대의 그의 사상적 심화와 표현의 순화(醇化) 단계를 거처 현재에도 화려하지는 않으나 진실되고 무게 있는 대표적 시인으로 인정되고 있다.
 자코테의 시는 <진혼곡(1947)>, <올빼미(1953)> 등의 초기 시집 때만 해도 전통적인 서정 시인의 계열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깨끗한 형태 가운데 자연의 변화무쌍한 형태와 빛깔이 주는 순간적 감각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했다. 또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신중하고 평이했다. 여기 실은 "과실들"은 그런 경향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 시에는 다른 많은 동시대 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꿈도 환상도 상상도 형이상학도 들어 있지 않다. 순간적 현실을 아름다운 감각적 이미지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네트 형식으로된 "걱정 말라, 그것은 온다"의 진혼곡도 과거의 죽음을 주제로 한 많은 시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다만 그는 죽음을 긴급성-긴박성 가운데 파악한 점에 특색이 있다. "우리가 읽는 낱말마다 우리가 쓰고 말하는 순간마다 죽음에 더 가까이 간다 그리고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려고 네 팔의 매듭을 죄어도 소용 없다"는 죽음에 대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관념이다. 여하튼 이 때까지의 그의 시는 대체로 프랑스 정통파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 3시집 <새벽에는(1958)>에 들어있는 "무지(無知)한 자"와 특히 제 4시집 <파종> 이후부터 그의 시는 내용과 형식에서 큰 변화를 보인다. 그는 보이는 현상의 묘사나 서술-비록 시적인 이미지나 음악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도 시를 통하여 현상 배후에 있는 참다운 실재(實在)를, 허무의 인생에서 제시의 빛을 추구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코테의 특징이자 비극은 이러한 초월적인 것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 자기의 이성과 개인적인 경험만을 믿고 고수한 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도달하기 위해 동원하는 모든 수단과 도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꿈-무의식-환상-신비-종교 등에 기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노력하나 참다운 실재의 빛은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항의하거나 탄식하지 않는다. 불완전하고 부족하나, 단순하고 순간적인 작자의 이성과 체험을 통하여 존재와 인생의 붙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자연이나 풍경은 초월적인 실재로 향하는 기호(記號)이지만 초월적인 실재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명석한 눈에 의하여 다시 단순한 일상성으로 되돌아온 곳에 그의 시 세계가 있다.
 위에 실린 시 "새벽"는 시인의 빛애 대한 동경과 추구,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였다(껴안았다)고 믿는 순간 빛은 이미 소유되었던(껴안았던)빛이 되어 없어지는 비극, 그러나 일상 생활을 통하여 되풀이되는 빛을 향한 원망(願望) 등 시인의 태도와 윤리를 잘 보여 준 작품이다. 요컨대 시인은 현상과  실재, 어둠과 빛의 중간에 위치하여 이 양자(兩者)의 갈등과 모순을 통하여 조화와 일치의 세계에 이르고자 노력하고 기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보면 "새벽에"이란 때는 밤도 낮도 아닌 중간 상태의 시간으로서 시인의 정신 세계에 가장 걸맞는 주제라고 생각된다.
 
요루 () / 페롤  
 
 
  그는 자신을 추적하며 자신을 괴롭혀 기진맥진한다. 이는 밤마다 그의 길 위를 달리는 그의 또는 그녀의 발소리 때문이다. 그 발걸음, 그 발걸음 소리는 그의 기다림 가운데 제자리걸음을 한다. 그는 너무나 외롭다. 너무나 편안하다. 무자비한? 그의 속마음은 바보스러운 싸움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상상적인 철조망에 실컷 찔렸다. 대지(大地)가 사구(沙丘)같이 둥그래질 때--- 그는 드러눕는다. 별 박힌 젖빛 하늘이 그의 가슴을 문댄다. 벗은 상체를 모래 속에 묻고 그의 뒷등을 에테르 수같이 찬 죽은 조개 껍질 위에 갖다 댄다. 그의 생활 이곳의 생활을 먼 곳에서의 생활 위에 갖다 댄다. 그의 위에는 한 젊은 여인이 검은 머리칼을 헤치고 움직이지 않는 두 눈을 움직이는 밤 위에 연다. 바닷바람이 여인의 가는 팔을 시원하게 한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3개국의 다른 언어로 허위를 건너면서, 세계(世界)의 배를 탄 고독인(孤獨人)들, 무거운 물결, 파도의 흰 물결은 어둠 속에서 그들의 고요함과 박자를 맞추고 있다. 행복의 추구에서 그들은 어디에 이르렀는가? "오프 리미트, 당신들은 금지 구역 안이오" 그들에게 이 말을 한 것은 신이 아니라 미국 장교의 목소리다. 느린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흰 불빛이 두 개의 서 있는 작은 그림자로 집중한다. 둥근 후광(後光)에 꽂힌 검은 영상(影像)들.
 
 
시의 구슬 / 페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으로 지어진 것이다 라고
시는 말한다.
나는 돌과 돌을 접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돌에 구멍을 뚫고
문과 창문을 낼 빈 공간이라고
시는 또한 말한다.
나는 벽이 승리하고 일어서고 완강해질 때
나는 그가 약해져 도울 손과 나무와 보살핌이 필요하도록
그 속에 균열(龜裂)처럼 나를 연다
아니, 나는 무장하지 않으며 나는 연결하지 않으며 나는
떠받치지 않는다
확실히 나는 가능한 곳에서 돌을 쪼개는
결빙(結氷)이며 불이다
나는 갈라진 금이며 그 속의 물이다
나는 바위도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하기 위하여
나는 잠식하며 나는 약화시킨다
 
저기 우리들의 광장 위를 높이 질러가는 줄타기 곡에사에
대하여
나는 그의 일시적 현기증이며 결코 그의 숙련(熟鍊)이나
그의 평행봉은 아니다
나는 그의 무게를 느끼기 위해 내가 필요하며
나에 힘입어 그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자신을 훈련하며 자
신을 확인한다
나는 그의 두려움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하여 그의 걸음걸이의 특성이 된다
나는 안심시키지 않고 나는 불안하게 한다
나는 증명하지 않고 나는 찾는다
나는 무엇이거나 주장하는 데 쓰여지지 않는다
나는 되풀이하지만 나는
문이나 창문의 빈 공같같이 용도(用途)가 없다
나는 하나의 부족(不足)이며 하나의 구멍
나는 도착하지 않으며 하나의 출발이다
나는 평형을 이루지 않고 나는 평형을 깨뜨린다 라고
시는 말한다
 
그러나 시는 계속하여 말한다
나는 바라보는 사람을 인정케 하며
도착하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한다
나는 이 집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이다.
 
*페롤은 현대 시인으로서 프랑스에서 중요한 시인으로 인정되고 외국에서는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페롤은 21세 때 첫 시집을 발표한 이래 10여 권이 넘는 많은 시집을 펴내었다. 그의 초기 시 작품들은 반지성적(反知性的)(말라르메나 발레리 등의 지성적 경향에 대하여) 경향이 두드러져서 "폭력적인 것을 동화하고 표현할 수 없는 시는 20세기의 체험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현대의 너무나 현학적이며 문학적 시에 대하여 '시에 피가 다시 도는' 힘차고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본 체류 시기를 계기로 그의 시는 점차 달라졌다. 페롤의 사물을 느끼는 감각은 더욱 세련되고 인생과 자연을 보는 눈은 깊어졌다. 때로 평범한 일들과 생활 가운데 신비를 느끼고 변하는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깊은 애수를 느끼게 되었다. 위의 "요루"는 그러한 감각을 보여 주는 산문시이다. 이러한 점이 그의 시가 동양적 감각이나 사고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되고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시인으로서 페롤은 이러한 정적이며 동양적인 감각이나 정취(情趣)를 현대적인 속도-가속-난폭-폭력 등의 감각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쟝 페롤(1932~ ): 쟝 페롤은 프랑스 국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출생했으나 어렸을 때 프랑스에 와 소년 시절을 프랑스 동남부 지방(리용과 님무 사이)에서 보냈으며 이 고장의 추억은 그의 마음 가운데 깊이 깔려 있다. 그 까닭은 이 지방은 제 2차 세계 대전시 레지스탕스 운동의 거점의 하나였으며 그는 소년 이 곳에서 전쟁의 비참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학으로 공부를 하여 바카로레아(대학 입학 자격 고시)를 거쳐 리용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얻어 프랑스 문학 교사가 되었다. 그 후 그의 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경험은 1961년에서 1967년까지 6년 동안 일본의 후쿠오카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일본과 동남아 각국을 여행한 일이다. 일본에 머문 것은 그의 시작품이나 인생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약 2년 동안(1968~69) 프랑스에 돌아와 시작에 종사하다가 1970년 다시 일본으로 가 도쿄의 일불 고등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저술을 하였다. 일본을 '이곳이 아니고는 거의 살기 힘든 나라'라고까지 쓰고 있다. 그의 시는 일본은 물론 터키, 폴란드, 루마니아, 셀비아 그러시아(유고슬라비아) 등의 비(非) 유럽 국가의 언어로까지 번역되어 있다.
 페롤은 현대 프랑스 시단의 주요한 조류나 유행과는 멀리 떨어져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의 과제는 과거의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또 시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죽음-시 등을 어떻게 현대적 상황 아래 다루고 표현하는가를 모색하는, 말하자면 새 정통파에 속하는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문학 평론-문화 평론도 썼다. 그이 주여 시집은 다음과 같다.
 <동결(凍結)의 불(1959)>, <아틀리에(1961)>, <먼 나라에서(1965)> <풍력점(風力點>, <격렬한 마음(1968)>,
 <이제는 햇빛(1972)> 등이 있다 / 최완복 번역 <프랑스 시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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