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거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그 글은 아무에게도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은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시인의 숙명
말은?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나를 말들 속에 사라지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뉘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휴식
새 몇 마리가
찾아온다.
그리고 검은 생각 하나.
나무들이 수런댄다.
기차소리, 자동차 소리.
이 순간은 가는 걸까? 오는걸까?
태양의 침묵은
웃음과 신음소리를 지나
돌들 사이 돌의 절규를 떠뜨릴 때까지
깊이 창을 꽂는다.
태양 심장, 맥박 뛰는 돌,
과일로 익어가는 피가 도는 돌;
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나의 삶이 삶의 참모습으로 흐를 때.
행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세바스또 대로를 가고 있었지,
이 일 저 일 생각하며,
빨간 불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어.
위를 쳐다 보았지:
위에는
잿빛 지붕 위에는, 검으잡잡한 새들 사이에 끼어
은빛으로 반짝이며
생선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어.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고
길을 건너면서 그는 문득
뭘 생각하고 있었지 하고 혼자 물었지
너의 눈동자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
말하는 고요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 속의 환한 빈 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씌어진 말
첫마디 써놓은
말(결코 생각한 일이 없는
다른 말-이 말
즉 말도 않고 딴 소리를 하는
즉 말은 않지만 말을 하고 있는)
첫마디 써놓은
말(하나, 둘, 셋-
위에는 태양, 너의 얼굴
우물 한가운데
멍청한 태양처럼 박혀 있는 네 얼굴)
첫마다 써놓은
말(넷, 다섯-
조약돌이 끝내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며 네 얼굴을 본다, 떨어지며
추락의 수직선을 헤아린다)
첫마디 써놓은
말 (다른 말이 없다. 밑에는,
떨어지고 있는 말이 아니라
얼굴과 태양의 시간을 떠받고 있는
지옥 위에 간신히 떠받고 있는 말
추락 전, 사고 전의 말)
첫마디 써놓은
말(둘, 셋, 넷-
부서진 네 얼굴을 보라,
흩어지는 태양을 보라,
부서진 물속에 돌을 보라,
똑같은 얼굴, 똑같은 태양을 보라,
똑같은 물 위에 새겨진
첫마디 써놓은
말(을 계속한다,
생각이 있는 말밖에는 말이 없다)
말한 말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위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고드름
글로 쓴 기둥
하나씩 하나씩 글자 글자마다,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인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정확한 말의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의 자궁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말하지 않는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일지도 몰라
외침 한 마디
사위어간 통감 속-
다른 천체에서는
<천체>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은 한다.
마음은 마음 아프고
미친 마음 때면에
묘지는 묘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이야기를 하려면 말 안 하는 것을 배우라
우정
기라리라던 시간
책상 위에
끝없이 떨어지는 램프의 머리칼
밤은 창문만 키워놓고
아무도 없다
이름없는 실체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육체를 보며
마침내 어둠이 열리고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너의 머리칼, 짙은 가을, 태양빛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너의 입과 그 식인종 치아의 하얀 군대는 불길 속에 잡혀 있다.
갓익은 노란 빵 색깔의 너의 살결과 불에 태운 설탕 빛 너의 눈,
거기에서 시간은 흐름을 멈춘다.
오직 나의 입술만 아는 언덕이여,
가슴을 거슬러 너의 목까지 오르는 달의 행로,
목덜미의 굳어진 분수 폭포,
너의 배의 높은 고원,
너의 옆구리의 끝없는 해변
너의 눈동자는 응시하는 호랑이의 눈이다가
일 분이 지나면 물기 젖은 강아지 눈이 된다.
너의 머리칼에는 항상 벌이 있다
너의 잔등은 조용하게 나의 눈 밑을 흘러간다
불길 밑에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의 잔등처럼.
잠든 물결이 밤 낮 진실로 된 너의 허리를 두들긴다
달 빛 아래 모래벌 같은 크막한 너의 바닷가에서
바람은 내 입으로 불려나오고, 그 긴 신음소리는
이 육체와 육체의 밤을 잿빛 날개로 감싼다,
사막의 고적을 덮고 가는 독수리 그림자처럼.
너의 발가락의 발톱들은 한여름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너의 다리 사이에는 물이 잠든 우물이 있다.
밤 바다가 고요해지고 물거품의 검은 말이 머무는 항만,
보물을 감춘 산 자락의 동굴,
성스러운 빵을 빗는 화덕의,
반쯤 열린 사나운 입술의 미소,
빛과 그림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결혼
(거기 육은 스스로의 부활과 영원한 삶의 날을 기다린다.)
피의 조국,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아는 고향,
내가 믿는 유일한 조국,
영원으로 행해 열려진 유일한 문 하나.
새벽
차갑고 날쌘 손길이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껍질을 벗긴다.
눈을 뜬다
아직
난 살아 있다
한가운데
아직 생생한 상처의 한가운데
되풀이
심장과 그 성난 고동소리
피 속의 검은 말
눈먼 망아지 고삐 풀린 망아지
밤의 축제 행진 공포의 수레바퀴
벽을 향한 절규와 빨간 불
걸어온 길은
걷지 않은 길
날을 곧두세운 사념과 육박전
날마다 심문을 해도 대답없는 아픔
이름도 부피도 없는 아픔
핀 하나가 뚫고 나간 동공
고생 많았던 날의 동공
때묻은 시간 침 뱉는 사랑
미친 웃음과 지독한 거짓말
고독과 세상
걸어온 길은
걷지 않은 길
피와 괭이와 휘파람 소리의 광장
상처 위에 햇빛
죽은 물 위에 털보 하늘
분노와 온몸이 뒤틀리는 쓴 입맛
녹슬어가는 사고
병든 글씨
괴로운 새벽 잎에 자갈을 물고선 하루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밤 갉아먹는 밤의 뼈
항상 새로운 항상 되풀이되는 공포
걸어온 길은
걷지 않는 길
물 한 컵 약 한 알 양철판 같은 혓바닥
한 밤 꿈 속에 개미굴
피 속의 검은 폭포
밤 속의 돌의 폭포
허무의 총 무게
커다란 도시에 차의 모터소리
나의 귀 주위에 멀리 가까이 멀리
눈이 나타나고 벽이 몸짓을 하고
절름발이 지하철이 나타나고
부서진 다리와 물에 빠져죽은 사람
걸어온 길은
걷지 않는 길
뱅글뱅글 도는 사념 가족 분위기
내가 뭘 했는가 넌 뭘 했는가 우리는 무얼했는가>
죄없는 죄의 미궁
이의를 제기하는 거울과 상처를 내는 침묵
불모의 날과 불모의 밤 불모의 고통
잡동사니 고독한 사람이 없는 세계
이젠 아무도 없는 대기실
그 길이 그 길이고
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버리고 없다.
소녀
아직 사라지지 않는 하오의 빛과
쌓여 있는 밤 사이
한 소녀의 시선이 있다
노트와 글씨 쓰는 것을 그만둔다.
그녀의 모든 존재는 앞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뿐.
벽에는 빛이 사라진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종말인가? 시초인가?
그녀는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고 말하리라.
영원한 투명한 것.
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결코 모르리라.
마지막 여명
지평선에 누운 채
너의 머리칼은 숲으로 사라진다
너의 발이 내 발을 만진다.
자고 있으면 너는 밤보다 더욱 크고
그러나 너의 꿈은 이 방에 찬다.
그렇게도 작으면서 그렇게도 큰 우리!
밖에는 택시 하나가 지나간다
도깨비들을 한 짐 가득 싣고
흘러가는 강물
항상
돌아오고 있는 강물.
내일은 진정 다른 날이 올까?
움직이는 것
네가 호박빛 암말이라면
나는 피의 길
네가 첫눈이라면
나는 첫새벽의 화롯불에 불 붙이는 사람
네가 밤의 첨탑이라면
나는 너의 이마에 박힌 불붙은 못
네가 새아침의 밀물이라면
나는 거기 첫새의 외마디 울음
네가 오렌지 바구니라면
나는 태양의 칼
네가 돌의 제단이라면
나는 성배를 하는 손
네가 가로누운 땅이라면
나는 푸른 갈대
네가 뛰어오르는 바람이라면
나는 땅 속에 묻힌 불더미
네가 물의 입이라면
나는 이끼의 입
네가 구름의 숲이라면
나는 구름을 가르는 도끼
네가 속세의 도시라면
나는 성스러운 비
네가 노란 산이라면
나는 리켄으로 된 빨간 품
네가 떠오르는 태양이라면
나는 피의 길
말
말, 정확한 소리
그러나 틀린 말;
어둡고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광휘인 것 ;
광휘이면서 칼인 것,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칼,
이젠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드라운 손; 열매
나를 자극하는 불길;
고요한 잔인의 눈동자
현기증의 절정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차거운 빛이
나의 심연을 파헤친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
그 바쁜 움직임에 나의 발길을 맡긴다.
이제 나를 벗어난 말, 허나 나의 말,
내 죽은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도 없는, 가냘픈 내 육신의 흔적;
나의 어두운 눈물의
소금 맛, 얼어붙은 금광석.
말, 하나의 말, 버림받아
웃고 있는, 순수한, 자유로운,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온 땅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하나의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더미인 것.
날
시간의 물결 속에 떨어진,
아 놀라운,
어느 하늘에서 떨어진
외로운 나그넨가, 이 고요한 사람아.
너는 길이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익어간다.
어느 크막한 순간에 투명해진다:
공중에 뜬 화살 하나,
표적을 잃은
마침내 화살의 기억을 잃은 공간 하나.
시간과 허공으로 이루어진 날들이여,
너는 나를 비우고, 내 이름을
지우고, 나의 실체를 없애고
대신, 너로 나를 채운다, 빛이며 허무뿐인 너로
그리고 나는 뜬다, 마침내 나를 잃고, 순연한 존재만으로.
수사학
1
새가 노래한다, 노래한다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울대뿐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이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일 뿐.
3 투명한 수정의 맑음은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신비
대기가 반짝인다, 반짝인다
정오가 빛난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투명함 속에 빠져 길을 잃고
나는 빛에서 현란한 빛 속으로 간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그리고 해는 빛 속에 벌거숭이가 되어
빛살마다 묻는다
하지만 해도 해를 보지 못한다.
말들
뒤집어 엎어라,
꽁지를 잡아라(악을 쓰라고 그래, 똥갈보 년들),
집어 패라,
채찍에 묻혀 입에다 설탕을 먹여라,
풍선처럼 불어대, 그리고 터뜨려,
피고 골수고 빨아 마셔라,
말려라,
공알을 까버려라
짖이겨라, 멋진 수탉처럼,
울대를 비틀어라, 요리사처럼,
털을 벗기고
창자를 꺼내고, 투우처럼
숫소처럼, 짓이겨 놓아라,
새 말을 만들어라, 시인아
말은 제가 한 말을 혼자 다 들어 마시게 하라.
시
너는 말없이, 은밀하게 온다.
와서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이 무서운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만지는 대로 불을 붙이고
사물마다 어두운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은 물러나고, 불 속에 집어넣은 쇠붙이처럼
허물어져 녹는다.
허물어진 나의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일어선다.
내가 선 곳은 침묵의 크막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한
외로운 투사다.
불타는 진실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너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그 철없는 질문도
뭐하러 이 소득없는 전쟁을 벌인 것이냐?
인간은 너를 포용할만한 존재가 못 된다.
너의 목마름은 또 다른 목마름으로 배가 찰 뿐,
너의 불길은 모든 입술을 태울 뿐
너의 정신은 아무 형태로든 살기를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병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점 커지고 너의 목마름은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열광의 칼 끝에
항복하지 않는 모든 무리를 추방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 혼자 나를 점령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실체여,
지하의 목마름, 그 광기여,
너의 유령들이 내 가슴을 친다,
내 감촉을 일깨우고
내 이마를 얼리고
내 눈을 띄운다.
세상을 감지하며 너를 만진다
너, 만질 수 없는 실체여,
내 영혼과 내 육체의 조화여.
나는 내가 싸우는 싸움을 바라보며
땅의 결혼식을 본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들에
다른, 더 깊은 이미지들이 앞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불타는 더듬거림,
더욱 숨겨진, 더욱 짙은 물길이 앞의 물길을 흩트린다.
이 젖은 어둠의 싸움 속에 삶도 죽음도
고요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다.
계속하라, 승리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입, 나의 혀도
오직 너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너의 은밀한 음절들, 만질 수 없는
횡포한 말은
내 영혼의 실체다.
너는 오직 하나의 꿈.
하지만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 말 없는 세상은 너의 말로 입을 연다.
너의 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삶의 지평의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피는
사랑에 취한 잔인한 입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살 욕망으로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결탁한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어느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에.
외로운 사람아, 나를 데려가 다오,
꿈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주고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하라,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하여 나를 찾게 해다오.
손으로 느끼는 삶
나의 손은
너의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을 창조한다.
태양의 돌
-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 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도리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서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 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짝수와 홀수
무게가 없는 한 마디 말
새 날에 인사를 보내는
돛 달고 날아가는 말 한 마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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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자서 네 눈자위에 생긴 커다란 쌍꺼풀
네 얼굴은 아직 밤.
----------------------------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엮은 목걸이가
너의 목구멍에 달려 있다.
-----------------------------------
신문이
떨어지는 동안
너는 새들에게 휩싸인다
-------------
나의 품 속에
y
너의 다리 속에
우리가 있다.
물 속에 물처럼
비밀을 간직한 물처럼
---------------------
내 손에 너의 두 가슴
다시 계곡을 내려오는 물
----------------------
한 발코니에서
(부채가)
다른 발코니로
(펼펴진다)
태양이 뛰어나간다
(그리고 닫힌다)
상호보조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 중간에서
발사
생각보다 앞서
말 하나가 튀어나온다
소리보다 앞서 말이 말처럼 뛴다
바람보다 앞서
유황빛 송아지처럼
밤보다 앞서
두개골 속 거리로 사라진다
곳곳에 맹수의 발자취
나무의 얼굴엔 진홍빛 문신
첨탑의 이마에는 얼음 문신
교회의 음부에는 전기 문신
너의 목에도 맹수의 발톱
너의 배에도 맹수의 발
오랑캐빛 상흔
하얗게 될 때까지 돌아가는 해바라기꽃
비명이 터질 때까지, 이제 그만! 할 때까지
해바라기 꽃이 돌아간다 껍질이 벗겨진 비명처럼
너의 피부를 타고 줄줄이 새겨진 이름없는 도장
곳곳마다 눈을 멀게 하는 절규
생각을 덮고 마는 검은 물줄기
나의 이마에서 두들기는 성난 종소리
나의 가슴에 번지는 피의 종소리
탑 맨 꼭대기에서 웃는 영상 하나
말들을 터뜨리는 말 하나
모든 다리를 불지르는 하나의 영상
포옹의 순간 사라져버린 여인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거지 할멈
멍충이 거짓말장이 근친상간을 일삼는
쫓기는 암노루
점장이 거지할멈
삶의 한 가운데서 나를 일깨우는
<기억해줘요> 나를 일깨우는
소녀 하나
너의 이름
너의 이름은 내게서 태어난다, 나의 그림자에서
나의 피부로 오르며 동이 튼다,
조으르는 듯한 빛의 예명.
사나운 비둘기 너의 이름은
나의 어깨 위에서 마냥 부끄럽다
독백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들의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의 음절들,
붉으레한 너의 긴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꿈의 어두운 물살,
허무로부터 너를 벼루어내는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거기 눈 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듯 후려치고 있다.
눈 앞에 다가온 봄
투명한 보석의 잘 닦여진 광채,
기억을 잃은 석상의 훤칠한 이마:
겨울 하늘, 더욱 깊고 더욱 텅빈
어느 하늘에 되비친 공간.
바다는 거이 숨을 멈춘다, 거이 빛을 감춘다.
빛은 나무들 사이에서 눈을 감는다.
잠든 병사들.그들을 깨우는 것은
짙푸른 깃발을 들고 온 바람.
봄은 바다에서 태어난다, 언덕을 휘덮는다,
육체도 없는 물결은 노란 유칼토스 나무 숲에 가서
부딪기도 하고, 이내 메아리가 되어 평원으로 쏟아진다.
대낮이 눈을 뜨고 철 이른
봄 속으로 헤집고 들어간다.
내 손에 닿은 것은 모두가 날개를 단다.
세상이 온통 날으는 새뿐이다.
새
투명한 고요 속에
한낮이 머물고 있었다;
투명한 공간은
투명한 고요이기도 했다.
하늘의 단단한 빛이
풀잎의 자람을 고요히 잠재우고 있었다.
땅의 벌레들도, 돌들 사이에선
빛이 같아서, 그냥 돌멩이들이었다.
시간은 1분 속에서도 배가 불렀다.
고요한 침묵 속에
한낮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때 새 한 마리가 울었다, 가느다란 화살 하나.
상처난 은빛 가슴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잎사귀들이 움직였다.
풀잎들이 잠을 깼다.........
그 때 나는 죽음이 누가 쏜지 모르는
하나의 화살인 줄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침묵
음악의 맨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듯이
하나의 음계가 솟아올라
떨리는 동안 커지다가 이내 가늘어진다
다른 음악이 오르면 그 음계는 입을 다물고
침묵의 맨 밑바닥에서
또다른 침묵이 솟아오른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탑이거나
칼 같은 것이 오르다, 커져가다, 머문다.
오르는 동안 또 떨어지는 것은
추억과 희망과, 우리의
크고 작은 거짓말들.
소리치려해도 목구멍 끝에서
외침은 사라지고
우리는 수많은 침묵이 입다무는 그곳으로
또 다른 침묵이 되어 튀어나간다
새로운 얼굴
밤은 네 얼굴 위에 수많은 밤을 지운다.
메마른 너의 동공 위에 기름을 붓고
너의 이마 위에 생각을 불태운다.
생각 저편에는 추억만 남는다.
수많은 어둠들이 너를 없애고
또 다른 얼굴을 떠올린다
내 옆에 잠든 네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여기 잠든 건 네가 아니라
지나간 어떤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 그 여인은 단지 네가 잠드는 이유가
다시 돌아와 또 다시 나를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었지.
연인들
풀밭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밀감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파도와 파도가 거품을 나누듯이.
해변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레몬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구름과 구름이 거품을 나누듯이.
땅 밑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말이 없다, 입맞춤이 없다
침묵과 침묵을 나눈다.
두 개의 몸뚱아리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파도 같다.
밤은 크낙한 바다.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두 개의 돌멩이 같다.
밤은 그땐 사막.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뿌리같다,
밤에 꽁꽁 얽어맨.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칼 같다.
밤은 번개.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두 개의 별똥별
빈 하늘에 떨어지고 있다.
잠깐 본 세상
바다의 밤 속에
물고기, 아니면 번개,
숲의 밤 속에
새, 아니면 번개.
육체의 밤 속에
뼈는 번개.
오 세상이여, 모든 것은 밤이다
삶은 번개.
흩어진 돌멩이들
1 꽃
외침, 부리, 이빨, 으르렁거리는 소리들,
살기등등한 허무와 그 혼잡도
이 소박한 꽃 앞에선 자취를 감춘다.
2 여인
밤마다 우물로 내려가곤
아침이면 다시 얼굴을 내민다,
품에는 새로운 뱀을 안고,
3 자서전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랬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랬던 것들은 이미 죽은 것들이다.
4 밤중에 듣는 종소리
그림자의 물결, 눈먼 파도가
불 타는 이마 위에 밀려온다;
내 사념을 적셔다오, 그리고 아주 불을 꺼버려!
5 문 앞에서
사람들, 말들, 사람들,
잠시 멈칫했지:
문은 위에 있다, 홀로 떠 있는 달 하나.
6 보이는 것
눈을 감자 내가 보였다;
공감, 공간
내가 있고 내가 없는 이곳.
7 풍경
저토록 바쁜 벌레들,
태양빛 말들,
구름빛 당나귀들,
구름은 무게를 잃은 커다란 바위,
산은 내려앉은 하늘,
나무들이 무리져 내려와 골짜기 물을 마신다.
모두들 있다. 행복하게, 저기, 스스로의 분수만큼
행복하게, 우리 앞에, 그런데 우리는 없다
분노와 증오와 사랑에, 마침내 죽음에
송두리채 먹혀버린 우리는 없다.
8 무식장이
하늘을 쳐다보았지.
하늘은 비문이 닳아진 커다란 바위돌,
별들도 한 마디 내게 읽어주질 못했어.
불면의 기록노트
1
시계가 갉아먹는다.
내 심장을,
독수리가 아니다. 쥐다.
2
한 순간의 정점에서
나는 홀로 부르짖었다. <나는 영원하다,
지금 시간은 충만해 있다>
하나 그 순간은 떨어지고 있었다
또다른 순간 속에, 시간도 없는 심연 속에.
3
나는 문득 어느 벽 앞에 당도했다.
벽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여기서 너의 미래가 시작된다.>
4 향수
똑같은 푸르름 속에
똑같은 샛별이
반짝이지만 우리는 몰라본다.
......하지만 수탉마다 제 헛간을 노래하는 것을.
그 많은 날들의 하나
태양의 홍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보인다
무게 없는 육체들 두께 없는 땅
우리는 올라가고 있는가 내려가고 있는가?
너의 육체는 금강석 하나
너는 어디 있는가?
너는 너의 육체 속에 묻혔다
이 시간은 조용한 번개. 발톱도 없다
결국 우린 모두 형제들
오늘 우리는 안녕하세요 할 수도 있고
심지어 멕시코인까지 행복해도 좋다
물론 다른 이방인까지도
자동차들은 풀잎이 그립다
집 꼭대기들이 걸어다닌다.
시간은 멈췄다
두 서너 눈동자가 나를 못잊게 한다
석회빛 남녘의 반짝이는 해변같이
분노빛 바위 사이의 바다같이
분노한 유월, 그 벌떼의 이불같이
태양은 바다의 사자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아
나를 보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우상이여
우리를 보라
하늘은 돌며 바뀌어도 항상 똑같다
너는 어디에 있는가?
태양과 사람들을 마주하고 나는 홀로 있다
너는 육체였다 너는 빛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날 나는 너를 다른 태양에서 발견했다
하오가 내려온다
산들이 자라난다
오늘은 아무도 신문을 읽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발을 반쯤 벌리고 앉아
아가씨들이 커피를 마시며 지껄인다
내 책상을 연다
파란 날개로 가득하다
노란 엘레뜨르 꽃으로 가득하다
타자기가 혼자 간다
쉴 새 없이 똑같은 불타는 음절을 써간다
밤은 마천루 뒤에 숨어 있다.
식인종의 포옹의 시간이다
긴 손톱의 밤
기억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분노!
떠나기 전
태양은 모든 보이는 것을 불태운다
시간 자체
바람이 아니다
물이 아니다, 몽유병자 같은 물의 발걸음이 아니다
돌이 된 집들과 나무들 사이를 스쳐가는
붉으스레한 밤을 따라 흐르는
바다가 아니다, 층계를 밟고 올라가는
모든 것은 고요하다
자연계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건 도시다, 스스로의 그림자에 휩싸여
스스로를 찾고 있는, 항상 찾고 있는
스스로의 광대한 어둠 속에 묻혀
한번도 찾지 못한 스스로를 찾고 있는
한번도 스스로를 헤쳐나오지도 못한
도시. 나는 눈을 감는다,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불이 켜졌다가 켜졌다가 켜졌다가
이내 꺼져간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더 이상 아는 게 있는가?
벤치에서 노인 한 사람이 혼자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혼자서 말을 할 때 우리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까?
과거는 잊었다
미래는 만져보지도 못할 것이다.
누군지 모른다
밤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일 뿐
자기 말소리를 혼자 듣고 있다
담장 근처에선 남녀 한 쌍이 포옹을 하고 있다
여자가 웃는다, 뭔가 물어본다
그 물음은 떠올라 높은 곳에서 펼쳐진다
이때 하늘은 주름살 하나 없다
한 나무에서 이파리 세 개가 떨어진다
누군가 골목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다.
맞은편 집 창문 하나에 불이 켜진다
살아 있다는 감각ㅇ느 참 이상하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간다는 것
살아 있다는 비밀을 소리쳐 입증이라도 하듯이
소깔로에는 사람 하나 없는 새벽이 오간다
다만 미치광이 같은 우리의 열정과
전철들
따꾸바 따꾸바야 소치밀꼬 산 앙헬 꼬요야깐
밤보다 넓은 광장에
이들 정거장만이 불을 켜고
어딘가 우리를 데려갈 차비를 하고
시간은 있는 대로 넓게 잡고
이 세상의 마지막 끝까지 데려갈 차비를 하고
검은 선들
전차의 우뚝 솟은 가공선 접촉 촉수들만이
돌 같은 하늘을 찌른다
불똥 튀기는 상투 끝, 불의 혓바닥
밤을 뚫는 화염
새
새가 날아간다. 물푸레 나무의 칩칩한 그림자 사이로
산 뻬드로에서 미스꼬악까지 두 줄로 늘어선
가로수 사이로 비비거리며 나르는 새
푸르뎅뎅한 하늘
젖은 침묵의 두께가
불타는 우리 머리 위를 누르고 있다
우리는 뒤늦게 다가오는 전차를 타고
무너져 내린 탑이 우글대는
빈민촌을 지나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걷고 있다는 것이다
돌 자잘, 밭길, 바로 그 길을
웅덩이를 넘고 진흙탕길을 누비며
유월에서 구월까지의 긴 포도를
현관을 지나고 높은 담장, 잠든 꽃밭을 지난다
지금 여기 눈 떠 있는 것은 오직
하양 파랑 하양
꽃향기
손에 잡히지 않는 꽃가지들
어둠 속에
살아 있는 듯한 가로등 하나
죽은 담장에 기대어 서 있다
개 한 마리가 짖는다
밤을 향한 물음표
아무도 없다
바람이 나무숲에 스며들었을 뿐
구름 구름 일어나고 무너지는 구름 구름
무너진 사원 새로운 왕조들
하늘에 떠 있는 암초와 재난들
위에 뜬 바다는
고원의 구름, 다른 바다는 어디?
눈을 가르치는
구름은
침묵의 건축가
그리고 문득 다짜고짜 금방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얀 눈조각같은
어디서 나타난지도 모르는 가느른 투명함
너는 말했다
내 그말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야 겠어
음절의 성곽을 말이야
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하얀 눈송이 같은
꽃도 없고 향기도 없는
피도 없고 물기도 없는 석고
어디선가 잘려나온 하얀색 그것
목구멍 오직 목구멍만 남은
밑도 끝도 없는 노래
나는 오늘 살아 있다, 별다른 향수도 없이
밤은 흐르고
도시도 흐르고
흐르는 종이 위에 낱 글을 쓴다
흘러가는 말을 타고 나도 흐른다
세상이 나와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죽을 것도 아니다
나는
생명의 맥박의 강 속의 하나의 맥박
이십 년 전에 바스꼰셀로스가 내게 그러더구먼
<철학을 하게나
삶은 얻는 게 없어
죽지나 말도록>
그리고 오르떼가 이 가셑은
로다노 위에 있는 바에서
<독일어를 배우게
그리고 생각 좀 하게나
딴 일이야 잊어버리구>
하더구먼.
나는 사실 시간이나 죽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시간이 나를 통해 살도록, 되살아나도록
하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 오후는 다리 위에서
강물 속으로 태양이 들어간느 것을 보았다
모든 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석상들도 불타고 집들도 문짝들도 불타올랐다
정원에는 여성스러운 포도송이들이 열렸다
물빛 햇살의 토막들
태양빛 물그릇들의 신선함
포플러 나무 숲은 무성한 빛살의 축제
하늘 아래, 불붙은 세계 속에
물은 수평선처럼 꼼짝않고 서있었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고정된 눈동자
그 크막한 아름다움의 무게는
열려진 동공마다 반짝였다
시간의 줄기 끝에
머물고 있는 현실
아름다움은 무게가 없다
시간과 아름다움은
고요한 반영일 뿐 모두가 한가지다
빛도 물도
아름다움을 받들고 있는 눈길
눈길 속에 황홀한 시간
무게를 잃은 세계
사람이 무게가 있다면
아름다움의 무게 이외 더 있는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남는 것뿐이다.
충분한 게 아니다
무지는 아름다움처럼 어렵다
언젠가 내 조금 더 모르게 되는 날 나는 눈을 뜨리라
어쩌면 시간은 무겁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거운 건 시간의 영상이다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현제가 돌아온다
이 삶에는 또다른 삶이 없다
저 무화과 나무도 오늘 밤 다시 오리라
오늘 밤 또 다른 밤들도 돌아오리라
글을 쓰면서 나는 강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 강이 아니라
저 강이 바로 이 강이다
순간과 영상이 맞부딪는 곳
앵무새 하나 잿빛 돌 위에 있다
삼월 어느 청명한 날
까망은
맑음의 한 가운데 있다
올 것 같은 황홀의 순간이 아니다
지금 느끼는 현실
더없는 현재
더 없이 가득하고 충일한 것
기억이 아니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원하지 않았던 것
똑같은 시간이 아니다
다른 시간
항상 다른 시간이면서 같은 시간이
들어와서 우리를 우리로부터 몰아낸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눈이 보지 못한다
시간 속에 또 다른 시간이 있다
시간도 무게도 그림자도 없는
고요한 시간
과거나 미래도 없는
살아 있기만 하는
벤치에 앉은 노인처럼
하나가 된 똑같은 영원한 시간
우리는 결코 볼 수는 없다
투명할 뿐
마이투나
나의 눈이 너를 벗긴다
벌거숭이로
그리고 이내 너를 덮는다
뜨거운 빗줄기
눈길 세례
소리가 갇힌 새장이
열린다
찬연한 아침
새하얗게
너의 허벅지보다 새하얗게
한밤중에
너의 웃음
아니, 차라리 너의 짙푸른 잎사귀
너의 달빛 속옷이
침대에서 펄럭일 때
곱게 쏟아지는 달빛
노래하는 소용돌이가
흰 실 꾸러미를 감는다
산골짜기에 심은
풍차의 날개
너의 밤 속
나의 대낮이
폭발한다
너의 탄성이
파편이 되어 튄다
밤이
너의 몸을 풀어 흩뜨린다
썰물
너의 흩어진 몸뚱아리들이
되모아진다
다시 너의 몸이 탄생한다
수직의 시간
가뭄이
거울 달린 바퀴를 돌린다
칼들이 피어난 정원
협잡의 축제
그 번뜩이는 눈길 사이로
너는 상처 하나 없이
들어선다
내 손의 강물로
신열보다 빠르게
너는 어둠 속에서 헤엄친다
너의 그림자가 더욱 밝아온다
애무 속에서
너의 몸뚱아리는 더욱 검다
예측할 수 없는 강 저편으로
네가 뛰어넘는다
어떻게 언제 그게 그런 거야
자료 2
태양의 돌
옥타비오 파스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순간 하나만이
이 밤을 되찾고, 꿈 하나에 대항하며
모아 놓은 이미지들을 꿈꾸며,
꿈에 대항하며 모질게 조각된,
이 밤의 허무, 글자글자마다
일어선 맥박을 뽑아 버린 순간만이,
한편 바깥에선 시간이 풀려져
내 영혼의 문들을 부순다
잔혹한 시간표를 지닌 세계,
다만 순간 하나 한편 도시들,
이름들, 맛들, 살아 있는 것이,
내 눈먼 이마에서 허물어진다,
한편 밤의 괴로움
내사고는 고개를 수그리고 내 해골,
이제 내 피는 좀더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내 치아는 느슨해지고 내 눈은
흐려지고 하루들과 연도들
그 텅빈 공포들이 쌓여간다,
한편 시간은 그의 부채를 접는다
이제 그 이미지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순간이 가라앉아 떠돈다
죽음에 둘러싸여, 밤과
그 음산한 하품에 위협 받고,
질기고 가면 쓴 죽음의
아우성에 위협 받고 있다
순간이 가라앉아 흡수된다,
주먹만한 크기로 닫힌다, 자신의 내부를
향해 익어가는 과실 하나처럼
자신에 입맞추며 흩어진다
이제 내부를 향해 무르익는다, 뿌리를 내린다,
나의 내부에서 성장한다, 모두가 나를 차지 한다
몽롱할 정도로 무성한 잎새들이 나를 몰아낸다,
나의 사고들은 다만 그 새들이다,
그의 수은이 내 혈관들, 정신의 나무,
시간의 맛난 열매들을 순환한다,
오! 살아가기 위한 삶과 이미 살고 있는 삶,
하나의 큰 파도로 바뀌어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물러나는 시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라져가는 다른 순간에서
말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초석과 돌멩이의 오후
눈에 보이지 않는 칼들로 무장한 오후를 마주보며
해독할 수 없는 붉은 문자 하나가
나의 피부에 글을 쓰고 그 상처들은
하나의 불꽃옷처럼 나를 덮는다,
나는 자신을 소멸함이 없이 불탄다, 나는 물을 찾는다,
이제 네 눈망울에는 물이 없다, 돌이 있다,
이제 네 가슴, 네복부, 네허리는
돌로 되어 있다, 네 입에선 먼지맛이 난다,
네 입에선 썩어 버린 시간맛이 난다,
네 육체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이다,
반복되는 거울들의 회랑
목마른 자의 눈동자,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랑,
이제 너는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고
저 끝이 가물가물한 통로로
원의 중심부를 향해 데려가서 버티고 서 있다
횃불 속에서 얼어붙은 하나의 광휘처럼,
껍질을 벗기는, 매혹적인 빛처럼
사악한 자를 위한 교수대처럼,
채찍처럼 탄력 있고 달과 짝을 이룬
하나의 무기처럼 화사하게,
이제 날을 세운 네 단어들이 내 가슴을
파내고 나를 황폐하게 하고 텅비게 한다,
하나씩 하나씩 너는 내게서 기억들을 뽑아낸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내친구들은
돼지들 사이에서 꿀꿀대거나 벼랑에 걸친
태양에 잡아먹혀 썩어간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길다란 상처 하나뿐,
이미 아무도 거닐지 않는 동굴 하나,
창문들 없는 현재, 사고가
돌아와, 되풀이되고, 반사된다
이제 그 동일한 투명 속에서 사라진다,
눈 하나에 의해 옮겨진 의식
밞음으로 넘쳐 흐를 때까지 돌아봄을
서로 마주보는 의식:
나는 네 지독한 비늘을 보았다.
멜루시나, 동틀녘에 녹색으로 빛나는,
너는 시이트 사이에 동그라미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이제 너는 깨어나 한 마리 새처럼 부르짖었다
이제 끝없이, 부숴진 창백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네게는 남지 않았다 네 외침만이,
이제 세기들의 말에 나는 발견한다
기침을 해대며 흐릿한 시선으로, 오래 묵은
사진들을 뒤섞으며: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도 아니다,
잿더미 하나와 빗자루 하나,
이빠진 나이프 하나와 깃털하나,
몇몇 뼈다귀들이 매달린 가죽 하나,
이미 말라 버린 꽃송이 하나, 시꺼먼 구멍 하나
이제 구멍 바닥에는 천년 전에 질식해 버린
한 여자아이의 두 눈이 있다,
한 우물에 묻혀 있는 시선들,
태초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들,
늙은 어머니의 어린 시선
덩치 큰 아들에게서 보는 한 젊은 아버지,
고만한 여자아이의 어머니 시선
몸집 큰 아버지에게서 보는 한 어린 아들,
삶의 바닥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이제 죽음의 함정들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 눈 속에 떨어짐이 진정한 삶에로의 회귀인가?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 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 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 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일이 없다.
우리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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