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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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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제1장 일부[9~14쪽
2018년 10월 21일 15시 00분  조회:744  추천:0  작성자: 강려
 
 제1장 질병, 기호들, 그리고 의미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저작을 집필할 계획에 대한 1988년의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들뢰즈는 “『비평과 진단』이라는 대강의 제목 아래 일단의 연구들을 구상했다”(PP 195; 142)고 말했다.1) 1993년에 드디어 그와 같은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들뢰즈의 마지막 저작인 『비평과 진단』은 18편의 논문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8편은 1970년과 1993년 사이에 간행되었던 것이고 나머지 10편은 새로운 연구물들이었다. 대부분이 문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일부는 철학, 정신분석, 그리고 영화와 관련된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자신의 대부분의 저작들 전반에 걸쳐 문학을 빈번하게 다루고 있고, “비판[비평]적인 것”과 “진단적인 것”이라는 주제는 일찍이 1967년의 『매저키즘: 냉정함과 잔인함에 대한 해석』에서 제안되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들뢰즈는 사드와 마조에 대한 그의 고찰을 통해 “아마 비판[비평](문학적인 의미에서의)과 진단(의학적 의미에서의)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관계 속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영향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문학과 의학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그 자체로 들뢰즈가 이미 『니체와 철학』(1962)에서 다루었던 것이었다. 여기에서 해석은 징후학과 기호학의 형태로 취급되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우선 비판[비평]의 개념과 그것이 들뢰즈의 니체적 의미에서의 의학과 맺는 관계를 간단하게 고찰할 것이며, 그런 뒤에 마조에 대한 그의 책에서의 비판[비평]과 진단의 상호 강화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미의 논리』2)에서의 기호들, 징후들, 그리고 의미 사이의 관계(connection)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들뢰즈가 어떻게 문학을 여타의 글쓰기 형태들과 구별하는지를 묻는 것이고, 들뢰즈가 문학적인 예술 작품들에 귀속시키는 특정한 기능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해석과 평가


들뢰즈는 니체가 “비판[비평]을 비판[비평]으로서 총체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최초의 철학자인”(NP 102; 89) 칸트에 의해 개시된 비판적 기획을 완성했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독해에 따르면, 칸트는 자신의 비판 철학 속에서 진리와 도덕성의 주장들[요구들]을 문제 삼지만, 그것들의 근저에 있는 가치들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그는 비판[비평]을 지식과 진리의 모든 주장들에 대하여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지식 그 자체나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힘으로서 간주했다. 마찬가지로 도덕성의 모든 주장들에 대하여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도덕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힘으로 간주했다.”(NP 102; 89) 니체는 비판을 그 극한까지 밀고 가서, 참된 것과 선한 것의 가치들을 포함하여 모든 가치들의 재평가를 수행한다. 들뢰즈는 니체의 비판[비평]에서 두 개의 기본적인 활동들 - 의미의 해석과 가치의 평가 - 을 구별한다. 두 활동들은 모두, 관계 속에서의 힘들의 질(quality)을 포함하는 해석, 그리고 주어진 힘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권력에의 의지의 질(quality)을 포함하는 평가(evaluation)라고 하는 힘들의 평가(assessment)를 수반한다.
어떤 대상(object)의 의미는 “사물을 전유하는, 사물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는(exploit), 사물을 파악하거나 사물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힘”(NP 4; 3)으로부터 비롯한다. 모든 힘은 실재의 일부(a portion)의 전유이며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소유해 온 힘들의 계승(succession)[계열체]의 역사이다. “단일한 대상, 즉 단일한 현상은 그것을 전유하는 힘에 따라 의미를 변화시킨다.”(NP 4; 3) 힘들은 항상 다중적이며, 그리하여 해석은 생득적으로 복수적이다. 힘들은 또한 이전에 동일한 대상들을 전유했던 힘들의 외관(guise) 아래 스스로를 은폐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해석의 기술(art)은 또한 가면들을 꿰뚫는 기술이다.”(NP 6; 5) 따라서, “하나의 현상은 하나의 가상(appearance) 혹은 심지어는 환상(apparition)이 아니라, 현실적(actual) 힘 안에서 그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징후이다. 철학 일반은 징후학이고 기호학이다. 과학 일반은 징후학적이고 기호학적인 체계이다.”(NP 3; 3) 예컨대,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는 “선”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노예의 해석이 그러한 대상에 대해 주인이 갖는 의미와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노예의 “선”은 주인의 “선”의 가면을 빌려 쓰지만, 그 단어[선]의 두 의미들은 힘들의 상이한 배치들로부터 비롯한다. 노예의 “선”은 힘들의 반동적인[반작용적인] 관계로부터 유래하는 반면, 주인의 “선”은 힘들의 능동적인[작용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노예는 주인의 우월(superiority)을 원망하고, 선한 것을 주인의 사악한 권력(power)의 부정으로 간주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주인은 선한 것을 단순히 그/그녀 자신의 존재의 긍정으로서 이해한다. 대상에 대한 노예의 해석은, 주인의 해석과 같이, 일정한 정신상태(mentality)의 징후, 힘들의 일정한 관계의 기호이고, 해석의 기술(요컨대, 노예의 해석들 그리고 주인의 해석들에 대한 해석)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들에 대한 주의 깊은 판별 - 그것들이 능동적인지 반동적인지, 고결한지 비열한지 - 에 달려 있다.
하지만 해석은 권력에의 의지를 포함하는 평가 활동과 짝을 이룰 때에만 그것의 완전한 의의(significance)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니체에게는 세계가 서로서로 관계를 이루는 힘들의 역동적인 양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힘들은 특정한 양들을 지니지만, 힘의 양은 다른 힘들과 떼어놓고 생각하면 잘못 해석된다. 모든 힘들은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관계된 두 개의 힘은 동일한 양을 갖지 않는다; 하나의 힘은 언제나 다른 힘보다 더 크며 힘들이 갖는 양들의 그와 같은 변별적인 관계들로부터 각각의 힘의 질이 유래한다. 그것들의 양들의 맥락 속에서 힘들은 지배를 하거나 지배를 당한다; 그것들의 질들의 맥락 속에서 힘들은 능동적이거나 반동적이다.(NP 60; 53) 그러나 힘들은 관계들을 산출하는 힘들의 내부에 역동적인 요소가 없다면 서로서로의 관계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와 같은 요소를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러므로 힘에 덧붙여지지만, 변별적이고 발생적인 요소로서, 그것의 생산의 내적인 요소로서 덧붙여진다.”(NP 57-58; 51) 변별적 요소로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이 갖는 양들의 차이들의 관계를 생산하고, 발생적 요소로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이 갖는 질들의 차이들의 관계를 생산한다. 만약 지배와 피지배가 힘의 양들을 가리킨다면, 그리고 능동과 반동이 힘의 질들을 가리킨다면, “긍정과 부정은 권력에의 의지의 근본적인(primordial) 질들을 가리킨다.”(NP 60; 53-54) 해석하는 것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결정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다.”(NP 61; 54) 따라서, 해석하는 것은 힘의 능동적인 혹은 반동적인 질을 평가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은 힘들의 주어진 관계 속에서 표현된 권력에의 의지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질을 평가하는 것이다.
힘, 권력, 그리고 지배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힘이 정의인” 그리고 “적자생존의” 조야한 기계론적 세계를 연상시킬 수도 있으나, 들뢰즈는 그러한 독해에 반대하는 중요한 구별들을 끌어낸다. 첫째, 그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권력에의 의지는 다른 권력에의 의지를 누르는(over)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다.3) 이러한 권력 관점은 주인을 원망하고 주인과 노예 사이의 권력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복수하기를 원하는 노예에 전형적이다. 능동적 힘들은 다른 힘들을 지배하지만, 지배한다는 것은 “형태들을 부과하고, 상황들을 이용[착취]하는 데 있어서 형태들을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NP 48; 42)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변태적이고, 자기-변형적이다. “변형의 역량(puissance), 즉 디오니소스적 활력(pouvoir)은 활동의 첫 번째 정의이다.”(NP 48; 42) 둘째, 권력에의 의지는 변용하는 힘(power)이자 변용되는 힘(power)이다. 신체[몸]는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힘들의 집합이다. 신체의 잠재력(potency)과 가능성(capability), 즉 그것의 역량(puissance)은 그것이 변용하는 힘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변용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에 의해서도 역시 결정된다. 신체의 변용되는 힘(power)은 필연적으로 수동성(passivity)의 형태가 아니라, “변용성, 감수성, 센세이션”(NP 70; 62)의 형태이다. 따라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의 감수성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NP 71; 62-63) 셋째,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단지 행동의 힘(power)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의 반응들을 행사하는 힘이기도 하다.(NP 127; 111) 모든 신체들은 힘들의 다수성으로 이루어지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능동적이고 반동적인 힘들의 결합(combination)으로 이루어진다. 뒤이어 각각의 신체는 능동적이자 반동적인 다중적인 힘들과 관계한다.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변별해내는 것은 그러므로 신체 내부에 있는 반동적인 힘들의 결핍이나 존재[현전] 여부가 아니라, 반동적인 힘들이 그들의 관계들을 펼쳐내는 방식(way)이다. 주인들은 때때로 우월한 힘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그것들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반응하고 계속 나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응들을 행사한다. 그와 반대로 노예들은 결코 우월한 힘들과의 관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은 잊을 수 없는 병리학적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반응들의 행사(discharge)를 불가능하게 하는 병든 기관을 갖고 있다. 그것들 속에서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의 모든 관계들을 감염시키고 힘들의 전반적인 반동-되기를 퍼뜨린다. 그렇게 됨으로써 힘들은 스스로에 대립하게 되고 자신들의 가능성들(capabilities)을 완수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결국, 들뢰즈가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술적 감수성 - 형성하고 창조할 수 있는, 변용성을 확장할 수 있는, 변태와 변형을 촉발하고 겪어낼 수 있는 의지 - 이다. 권력에의 의지의 철학은 “자신의 기쁜 메시지를 전하는 두 개의 원리들 - 의지하는 것 = 창조하는 것, 의지 = 기쁨 - 을 지니고 있다.”(NP 96; 84) 오직 노예들만이 지배(mastery)[주인됨]를 타자들의 종속으로, 타자들에 대한 무감각으로, 그리고 우월한 힘들로부터의 둔감성(invulnerability)과 고립으로 간주한다. 주인들은 창조적인 가치 부여를 통해, 타자들을 변용하고 타자들에 의해 변용되는 고양된 힘(power)을 통해, 그리고 자신들의 능동들과 반응들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긍정한다. 하지만, 니체가 파악한 바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가 힘들의 보편적인 반동-되기의 역사라는 점이다. 모든 곳에서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승리를 거두고, 모든 곳에서 노예들이 우세하다. 힘의 수적 우위와 양적 거대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쁜 양심의 질병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주인들이 자신들[의 내면으]로 돌아가고, 자신들의 힘들을 제한하여 자신들의 활력들(powers)을 현실화시키지 못하도록 힘들을 가로막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반동성과 원한(ressentiment)으로써, 삶에 대한 편재하는 증오로써 모든 인간들을 감염시키게 된다. 부정성의 질병은 보편적인 질병이며, 이런 이유로 긍정의 철학자들은 의사, 즉 질병의 기호들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진단자이자 치료법을 처방하는 치료사가 되어야 한다.4) 치료사로서의 의사는 삶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조하고, 이런 점에서 변태와 변형을 긍정하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새로운 가치들을 양식화하는 입법자로서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 ‘미래의 철학자’의 니체적 의미의 삼위일체”(NP86; 75)이다. 철학자-의사, 철학자-예술가, 철학자-입법자.
비판[비평]은 의미의 해석과 가치의 평가를 포함하지만, 해석이나 평가가 원래 수용적인(receptive) 활동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해석자를 독자로, 그리고 평가자를 비평가(critic)로 생각하지만, 니체의 해석자/평가자는 항상 철학자/예술가/입법자, 동시에 평가자(assessor)이자 창조자이다. 들뢰즈가 지적하고 있듯이, 니체는 예술을 청중보다는 예술가의 지위에서 바라본다.(NP 84-85; 74-75) 마치 그가 문헌학[언어학]을 단어들의 단순한 사용자들이 아니라 단어들의 발명자들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래서 또한 비판[비평]은 수용적이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능동적인, 변형하고 창조하는 해석과 평가의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비판[비평]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의 질병과 해독(poison)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용(acceptance)의 상징은 짐 나르는 짐승, 즉 자신의 등에 얹혀진 모든 짐에 대해 “Yea-Yuh”라고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나귀이다.5) 비판[비평]은 창조이지만, 그것은 또한 부정적이고 삶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기쁜 파괴이다. 긍정적인 비판[비평]의 디오니소스적인 “예[긍정]”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안다: 그것은 순수한 긍정이며, 그것은 허무주의를 극복했으며 부정에게서 그 모든 자율적인 힘(power)을 박탈했다. ······ 긍정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지 참고 견디고 위장하는 것이 아니다.”(NP 213; 185-186)
들뢰즈는 니체의 사유를 해석과 평가의 비판적인 철학으로 간주한다. 미래의 철학자는 의사이자 예술가이며 입법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조를 통해 삶을 긍정하는 예술가이다. 따라서 예술은 철학에 대한 니체의 개념화를 이해하기 위한 모델로 기능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예술이 철학의 역할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니체와 철학』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들뢰즈가 작가이자 사상가로서의 니체의 실천에 있어서의 문학과 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결(connection)[관계]을 정말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니체는 “철학 내부에 두 개의 표현 수단, 즉 아포리즘과 시를 통합한다. 이러한 형태들은 철학의 새로운 개념화를, 사상가의 그리고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포함한다.”(N 17) 아포리즘은 단편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복수적인 사유 형태이다.”(NP 35; 31) 그것의 대상(object)은 “존재의, 행위의, 사물의 의미이다.”(NP 35; 31) 아포리즘은 홀로 “의미를 분절할 수 있으며, 아포리즘은 해석이자 해석의 예술이다.”(NP 36; 31) 마찬가지로 시는 “평가이자 평가의 예술이다; 그것은 가치들을 분절한다.”(NP 36; 31) 아포리즘의 의미는 힘들의 관계들을 - 능동적인지 반동적인지 - 결정하는 변별적 요소로부터 비롯하고, 시의 가치는 그와 동일한 변별적 요소, 즉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 요소로부터 발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별적 요소는 항상 존재한다 할지라도, “또한 항상 시나 아포리즘 속에 함축되어 있거나 숨겨져 있다.”(NP 36; 31) 따라서 심화된 해석과 평가를 필요로 한다. 아포리즘은 해석이다. 그러나 2차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시는 2차적 평가를 필요로 하는 평가이다. 바로 이렇게 항상 존재하지만 아포리즘과 시 속에 숨겨진, 권력에의 의지의 변별적 요소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철학이, 시와 아포리즘과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완전한 해석과 평가, 즉 사고의 예술, 다시 말해 우월한 사유의 능력(faculty) 혹은 ‘묵상의 능력’을 구성한다.”(NP 36; 31)6) 문학은 니체에게 해석들과 평가들의 첫째-수준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그런 다음에 그는 문학을 철학적인, 둘째-수준의 해석과 평가에 할당시킨다. 그러나 니체가 철학과 문학의 혼성적 형태를 실천하는 철학적인 아포리스트/시인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철학적 목적들을 위해 문학적인 아포리즘들과 시들을 적응시킨 철학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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