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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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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제1장 - 의미와 표면들[22-30]
2018년 10월 21일 15시 09분  조회:820  추천:0  작성자: 강려
 
 
출처 Rhizoma *^^* | 뿌리줄기
원문 http://blog.naver.com/conscom/100006959622
 의미와 표면들


『의미의 논리』(1969)의 13번째 절인 「분열증과 어린 소녀」에서 들뢰즈는 비평과 진단의 개념들로 돌아가서 어린이, 광인(le fou), 작가들(루이스 캐럴과 안토닌 아르토) 사이의 관계를 고찰한다. 들뢰즈는 “제버워키”에 대한 논평이 덧붙여진 아르토의 유사-번역에서 시작한다. 한 편의 시에 대해 아르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시를] 결코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LS 113; 92에서 인용) 캐럴의 무의미 운문(verse)이 종종 아동 문학으로 분류되고, 아르토의 대부분의 텍스트들이 일관되지 않은 정신병적 발산으로 읽히지만, “제버워키”의 두 판본들 사이의 차이는 어린 엘리스와 분열증을 대립시키는 것 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들뢰즈는 시, 자장가, 광적 산만함[주절거림] 이 세 가지 모두 합성어들(pormanteau words)처럼 유사한 테크닉들을 종종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위대한 시인은 어린이(한때 그도 그러했던)와 어린이들(그가 사랑하는)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광인은 시인(한때 그러했으며 [지금도] 계속 그러한)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가장 훌륭한 시 작품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도 이것은 어린이, 시인, 광인의 기묘한 삼위일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LS 101; 82-83) 캐럴과 아르토는 자신들의 제버워키들 속에서 상이한 문제들을 다룬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린이들의 노래들과 광인들이 꾸며낸 이야기들(inventions)에서 문제되고 있는 이슈들과는 다르다. “문제는 진단의 문제, 즉 하나의 조직화에서 다른 조직화로의 미끄러짐의 문제, 혹은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탈조직화(disorganization)[해체]를 형성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는 또한 비판의 문제, 즉 [그 안에서] 무의미가 자신의 형상을 바꾸고, 합성어들이 자신의 본성을 바꾸고, 언어 일반이 자신의 차원을 바꾸는, 차별적(differential) 수준들을 결정하는 문제이다.”(LS 102; 83) 들뢰즈에 따르면, 캐럴과 아르토의 대립 속에서 드러나는 진단 문제는 표면들과 심층들의 문제이고, 비판 문제는 그러한 두 가지 차원들에 특징적인 언어적 요소들의 문제이다. 캐럴의 표면들과 아르토의 심층들은 유아기의(intantile) 신경증과 정신분열적 분열(dissociation)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만, 진단이 비판에 의해 인도될 때에만, 정신분석 이론이 문학적 허구(invention)에 의해 인도될 때에만 그렇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루이스 캐럴의 작품들과 스토아학파의 사유를 유별나게 병치시킴으로써 sense, 즉 의미의 이론을 전개한다.1) 들뢰즈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거울 나라의 엘리스』와 여타 작품들의 무의미와 역설들 속에서, 캐럴이 스토아학파가 자신들의 비실체적 이론 속에서 분절하는(articulate) 의미라는 수수께끼 같은 표면을 재발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2) 스토아학파에게는, 오직 신체들만이 실제적인 존재를 갖는다(“신체들”이 심지어 영혼the soul과 같은 이러한 실체들entities을 포함하기 위해 가장 폭넓은 맥락 속에서 해석된다 할지라도). 신체들은 식물들과 동물들과 같은 유기적 존재들의 선들을 따라 성장하는, 자기-형성적인 실체들로 간주된다. 그것들은 그들 자신의 원인들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인과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간에 원인들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신체들은 우주, 즉 신이라는 유일한 신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신체들은 누군가 와인을 마시거나 칼이 살을 잘라내는 때처럼 스며들고 뒤섞이지만, 신체들의 능동들과 수동들은 서로에 대해 오로지 원인들일 뿐이지, 원인들과 결과들이 아니다. 칼은 살 속에서의 상처라는 결과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살과 칼은 신이라는 우주적 신체의 자기-원인적 전개 속에서 뒤섞인다.
그렇지만 신체들의 세계에 속하지는 않는다 해도 결과들과 같은 사물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실제적인 존재를 갖지 않지만, 단순히 “내속하고(insist)”, “지속하고(persist)”, “존속하는(subsist)” 표면 현상들이다. 그것들은 비실체적인 것들(asomata)이다. 스토아학파는 한 마리의 개가 길을 건너갈 때 그 걷기가 그 개의 신체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관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아가 나무의 “푸르러짐(greening)”을 나무 신체의 자기-원인적 전개에 의해 생산된, 똑같이 비실체적인, 단순한 표면 효과[결과]로 간주한다. 모든 곳에서 신체들은 효과들, 즉 안개나 아우라처럼 신체들 위에서 피어나는 표면적 방사물들(emanations)을 생산한다. 이러한 비실체적인 효과[결과]들은 그들 자신의 시간성을 갖는 사건들이다. 현재만이 실제적인 존재이며, 신체들은 영속적인 현재 속에서 실존한다. 한 신체의 지속(duration)은 연장된 현재, 즉 신이라는 신체의 위대한 현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시간의 총체성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들뢰즈가 크로노스라고 부르는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 - 즉 기억과 기대의 차원들 - 은 실제적인 존재(existence)를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지속하거나 내속하고, 들뢰즈가 아이온이라고 이름 붙인 사건의 시간 속에서 현현한다. 아이온의 시간은 부정사(不定詞), 즉 미구분성 속에 놓인 동사의 시간이자 비결정의 시간성이며, 현실적인 현재의 순간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는 시간이다. 순수한 생성(becoming)의 시간이 사건들을 알려준다. 한편 신체들은 순수한 현재 존재의 시간에 거주한다.3) 핵심적인 사건은 전투이다.(LS 122-23; 100-101) 전투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신체들은 다른 신체들을 만나서 서로 뚫고, 자르고, 찢고, 스며들지만, “전투”는 주어진 장소(locus) 어디에서도 현존하지 않으며 항상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한다. 전투는 신체들에서 퍼져 나오고, 안개처럼 그것들 위에 맴돈다. 그것은 신체들에 의해 하나의 효과[결과]로 생산되지만, 그것은 그것들의 가능한 만남들의 조건으로 그것들에 선재한다.
그렇다면 사건들은 신체들의 속성들이며, 동사들로 가장 잘 이해되는 존재의 태도들인 반면, 신체들의 실제적인 특징들은 자질들(qualities), 즉 명사들에 내재하는 형용사들이다. 하지만 사건들과 신체들이 각각 언어적 대응물들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언어 그 자체는 사건들에 대해 특권화된 관계를 갖는다. “사건은 생성(becoming)과 동연(同延)적이고, 생성 그 자체는 언어와 동연(同延)적이다.”(LS 18; 8) 스토아학파가 인식한 비실체적인 것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렉턴(lekton), 다시 말해 “의미화된 것”,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의미된 사물”이다.4) 그리스인이 이방인(Barbarian)에게 이야기할 때, 말은 이해될 수 없지만, 다른 그리스인이 그와 똑같은 말을 들을 때에는, 그 말은 이해된다.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소리 신체가 화자에 의해 말해지지만, 두 번째 경우에서는 어떤 것, 즉 의미의 표면 효과가 물리적인 소리들에 덧붙여진다. 이러한 언어적 효과들은 렉타(lekta), 즉 신체들의 표면들에서 발산되고 단어들과 사물들의 묘사(delineation)를 가능하게 해주는 “표현 가능한 것들”이다. 단어들은 의미를 표현하지만, 표현되는 것은 사물들의 속성, 즉 하나의 사건이다. 렉턴(lekton)은 단어의 음성적 신체의 표면임과 동시에 사물의 표면적 속성이다. 그것은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 즉 의미-사건들의 유일한 표면이다.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경계는 “그것들을 섞지도 않고 그것들을 통일시키지도 않는다(그것은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들의 차이의 분절(신체/언어)과 같다.”(LS 37; 24)
들뢰즈는 이 표면을 sens, 즉 의미(sense, meaning)라고 이름붙이고, 『의미의 논리』전반에 걸쳐서 언어적 의미의 역설들이란 것이 사건들 및 생성의 역설들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단어들은 의미를 이차적 효과로서 생산하지만, 어떤 점에서 의미는 언어가 그 내부에서 발생하는 요소로서 단어들에 선행한다. “베르그송이 말한 바처럼, 우리는 소리들에서 이미지들로, 이미지들에서 의미로 나아가지 못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처음부터’ 의미 내부에 놓는다. 의미는 내가 가능한 지시들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들의 조건들을 생각하기 위해 내가 [그 안에] 이미 놓인 영역(sphere)과 같다.”(LS 41; 28) 그렇다면 의미는 이런 점에서 언어의 앞과 뒤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과 그것의 잔여 효과의 앞과 뒤에 존재한다. 하지만 의미는 또한 결코 완전히 현존하지 않으며, 그러한 점에서 그것은 특정한 언어적 발화 속에서 표현될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는 오직 두 번째 발화 속에서 지시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의 의미는 이어서 세 번째 발화 속에서 지시되어야 하는 등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의미는 하나의 결론으로 소진되거나 귀결될 수 없는 지시들의 부정형(不定形)의(infinite)의 회귀(regression)를 낳는다. 사건처럼 의미는 현재에 존재해 본 적 없이 과거와 미래에 존재한다. 의미는 또한 자신 안에 무의미를 포함한다. 그러한 상상적 존재자들(그리핀들5)) 속에서 불가능한 대상들(네모난 원들) 그리고 심지어 1회적 단어들의 나열조차도 모두, 꼭 양식(良識)(good sense)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들뢰즈는 양식(le bon sens)이란 단일하게 제한된 의미이며, 유일한 방향의 의미라고 주장한다(불어의 sens는 또한 sens unique, 일방 도로에서처럼 “방향”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의미 속에서 인과관계들은 빈번하게 역전되고, 시간적 순서는 무시되며, 정체성[동일성]들은 혼동된다. 무의미의 역설들은 플라톤이 그리도 불신하는 “생성”의 역설들(Phielbus 24 a-d, Parmenides 154-55)이고, 더 뜨거움과 동시에 더 차갑고, 더 늙음과 동시에 더 젊고, 더 큼과 동시에 더 작은 대상들의 역설들이다. 엘리스는 과거의 그녀보다 더 크게 자라지만, 과거의 엘리스(엘리스 A)는 지금 되어가고 있는 엘리스(엘리스 B)보다 더 작다. 크게-되어가는-엘리스(엘리스 B가 되고 있는 엘리스 A)가 동일한 엘리스이지만(그러나 그녀는 A나 B 점 모두에서 더 이상 동일한 엘리스가 아니지 않은가?), 엘리스는 동시에(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결코 동일한 현재의 순간인 크로노스가 아닌 동일한 생성인 아이온의 내부에서) 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있다. 무의미 속에서는, 매우 단순하게, 세계는 동일한 아이온 속에서 모든 방향들 속에서 생성된다.
캐럴의 무의미는,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양식/일방향이 발생하는 의미의 다방향적 장(場)이다. 그리고 진정한 무-의미는 의미의 그러한 광범한 장(場)이 솟아나는 발생적 요소라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스나크 사냥(the Hunting of the Snark)』에서, “Snark"라는 단어는 ”shark"와 “snake”의 단순한 혼성적 조합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기능은 요소들의 두 개의 분기적 계열들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골무를 들여 그놈을 찾고, 주의를 들여 그놈을 찾았다.
포크와 희망으로 그놈을 쫓고
철도 주식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웃음과 비누로 그놈을 홀렸다.


스나크(Snark)는 신체들의 계열들(골무, 포크, 비누)과 비실체적인 것들의 계열들(주의, 희망, 삶, railway-share, 미소)의 접합이다. 그것의 무-의미는 의미(그 두 계열들)가 유래하는 차별적(differential) 요소이다. 만약 이 두 개의 계열들이 다수의 점들로 이루어진 분기적 선들로서 기하학적으로 생각된다면, “스나크”는 외관상 동시에 두 선들에 있는, 하지만 결코 주어진 순간에 어떠한 유일한 지점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우발점(aleatory point)”이다. 우발점으로서의 스나크는 엘리스가 양이 관리하는 가게에서 만나는 물건과 같다(『거울 속의 엘리스』): 그것은 그녀가 바라보는 어느 곳에도 없지만, 언제나 선반의 위쪽과 아래쪽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여지를 갖지 못한 빈 공간이며, 결정적(determinate) 요소들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비고정적 요소이다. 우발점과 그것이 내재하는 두 개의 분기적 계열들은, 들뢰즈에 따르면, 어떠한 구조의 최소한의 요소들을 구성하고, 의미의 영역이 무-의미의 우발점의 작동을 통해 발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건들의 영역은 우발점들의 작동으로부터 유래한다. 왜냐하면 우발점은 결국 단지 차이를 위한 비유(figure)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이는 (어디에도 스스로 고정되지 않는, 안정되지 않거나 유일한 정체성을 소유하지 않는) 스스로와는 다른 (분기적인 결정들을 통해) 자기-구별하는 (예컨대 발생적인) 차이화이다.
캐럴의 “제버워키”의 무의미는 의미의 표면적 작동(play)의 무의미이고, 제버워크의 추구와 획득을 통해 분기적 계열의 용어들을 드러내는 합성어들의 무의미이다.


‘Twas brilling, and the slithy toves / 저녁 무렵, 유연활달 토우브가
Did gyre and gimble in the wabe: / 언덕빼기를 선회하며 뚫고 있었다.
All mimsy were the borogoves, / 보로고보들은 모두 우울해했고,
And the mome raths outgrabe. / 침울한 라스는 끼익거리고 있었다.


험프티 덤프티가 설명하는 바처럼, brilling[저녁 무렵]은 “저녁 식사를 위해 음식을 끓이기 시작하는 시간인 오후 네 시”를 의미하고, slithy[유연활달]는 “유연하고 활달한”을 의미하고; toves[토우브]는 “오소리 같은 것 - 도마뱀 같은 것 - 그리고 타래송곳 같은 것이다.”(Carroll 187-88) 오후 네 시/끓이기, 유연한/활달한, 오소리/도마뱀/타래송곳: 제버워크의 우발점을 통해 생성된 복수적 계열들,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 위의 의미-사건들. 그러나 들뢰즈는 아르토가 캐럴의 시를 “번역한 것”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의미를 발견한다.


Il était roparant, et les vliqueux tarands
Allaient en gibroyant et en brimbulkdriquant
Jusque là où la rourghe est à rouarghe a rangmbde et rangmbde a rouarghambde:
Tous les falomitards étaient les chat-huants
Et les Ghoré Uk'hatis dans le Grabugeumnet.(LS 103; 342에서 인용)


물론 이 텍스트를 험프티 덤프티가 다룰 것처럼 다루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아르토 스스로 “rourghe”와 “rouarghe”가 ruée(돌진하다), roue(차바퀴), route(도로), règle(규칙), route à règler(문자 그대로는 정해진 길, 비유적인 의미로는 똑바로 펴져야 하는 물건)를 결합시킨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rourghe”를 “slithy”의 번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비판적・진단적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캐럴과 아르토 사이에는 접촉의 지점들, 즉 아르토의 언어적 발명품들이 의미의 표면 위에 남아 있는 사례들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rourghe, rouargh, rangmbde, rouarghambde 등과 같은 계열 속에는, 단어들이 낭비적이고(profligate) 비조절적인 혼합물들, 상호뒤섞임(interminglings), 상호침투의 물리적 영역 내에서 다른 신체들과 상호작용하는 소리 신체가 되는 것처럼 의미의 표면이 분해되고 와해된다. 들뢰즈의 진술에 따르면, 정신분열자들은 종종 단어들을, 살을 공격하는 찢고 괴롭히는 물건으로 경험한다. 이것들은 정신분열적 신체와 섞이는 “수동-단어들”이다. 이 신체 자체는 일관된 기관으로 존재하지 않고 침투가능한 구멍들의 신체-여과기(body-sieve), 이질적인 토막들과 조각들의 파편적 신체, 안과 밖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없는 분리된 신체로서 존재한다.(LS 107; 87) 수동-단어들은 끊임없는 식인적 해체, 분해, 흡수, 배제 등의 놀라운 영역 속에서 뒤섞인다. 그러나 정신분열적 신체가 완전한 전체(totality) - 하나의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부분들이 없는, 날숨, 들숨, 발산, 유체 전송 등을 통해 모든 것을 하는(초월적 신체, 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LS 108; 88) 신체로서의 - 에 도달하는 계기들 역시 존재한다. 이 기적적인(miraculous)[신비한] 신체에 “능동-단어들”, 즉 음성적 재질의 분리될 수 없는 덩이들(blocks)을 형성하는 소리-신체들(sound-bodies)이 대응한다. 언어적 기호들을 조각난 음성적 요소[원소]들로 세분화하는[원자화하는] 수동적으로 고통을 겪는 수동-단어들과 달리, 능동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능동-단어들은 “분절 없는 언어”의 “독점적인 강세적 가치들”을 갖는다. (LS 108-9; 88-89) 아르토가 말하는 cris-souffles(외침들-호흡들)은 분리할 수 없는 소리의 혼합물들(amalgams) 속에서 자음과 모음을 융합하는 이와 같은 능동-단어들, 외침-단어들, 호흡-단어들이다. 수동-단어들과 는동-단어들은 의미의 진공(void)이지만, 그것들의 무-의미는 신체들의 무-의미이지 비신체적[비육신적] 표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무-의미의 두 가지 유형들, 즉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유형들 - 음성적(phonetic) 요소들로 분해되는 의미가 박탈된 단어 유형, 그래도(no less) 의미의 박탈이 없는 비분해적 단어를 형성하는 강세적(tonic) 요소들의 유형 - 과 관련된다.”(LS 110-11; 90) 아르토의 “제버워키”에서 표면들의 무의미는 수동-단어들과 능동-단어들, 놀라운 신체 파편들과 우아한 기관 없는 신체, 음성학적 파편들과 강세적 융합들에 자리를 내준다.
일부 정신분석가들은 캐럴에게서 정신분열적 모티프들을 지적해 왔다. 예컨대 엘리스의 변신하는 신체, 그녀의 음식에 대한 강박관념, 정체성의 혼란, 환각적인 인물들(3월 토끼, 미친 모자 제조인, 체셔 캣[늘 능글맞게 웃는 사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읽게 되면 “진단적인 정신병적 측면과 문학적인 비판적 측면 모두를 동시에 망쳐버리게 된다.”(LS 113; 92) 정신분석은 우선 “지리학적”이 되어야 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왜냐하면 표면들을 심층들과 구별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캐럴과 아르토를 구별하면서 들뢰즈가 우선 진단적 문제를 “하나의 조직화에서 다른 조직화로의 미끄러짐, 즉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탈조직화[해체]의 형성”(LS 102; 83)의 문제로 틀지운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것이다. 캐럴은 언어 속에서 양식/일방향에서 무의미로의 미끄러짐을 유발하지만,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그러한 표면은 유지된다. 양식/일방향의 조직된 규칙들(regularities)은 침식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의미의 조직된 형식들 - 분기적 계열들을 가로지르는 우발점들(aleatory points)의 작동에 의해 구조화된 형식들 - 로 대체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르토는 단어들의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해체, 기호들의 음성적 파편들과 강세적 덩이들로의 분해, 공존하는 파편적 부분들(shattering parts)과 융합적 합체들(melding accretions)의 흐름 속에서 다른 신체들과 뒤섞이는 비통어법적(asyntactic), 비문법적(agrammatical) 소리 신체들(기관 없는 신체들)을 다룬다. 그렇다면, 우리는 캐럴과 아르토가 제기한 비판의 문제가 왜 “무의미가 자신의 형상(figure)을 변화시키고, 합성어가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언어 일반이 자신의 차원을 변화시키는 구별적 수준들의 결정”(LS 102; 83)의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캐럴의 표면들에서는 언어가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고 무의미가 그 자신의 이상하게 구조화된 의미를 유지하는 반면, 아르토의 심층에서는 언어가 놀랍고 기적적인 신체들의 불가해한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린이, 시인, 광인의 기묘한 삼위일체”(LS 101; 83)가 떠오른다. 왜냐하면 캐럴처럼 어린이가 (자장가, 무의미한 구절들 등등에서의) 언어의 비신체적 표면 효과들과 노는 반면, 아르토처럼 광인이 신체적 심층 내부에서 소리의 흐름들의 움직임들을 겪고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어린이나 광인의 실천들과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실험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발명품들은 어린이들이나 광인들이 결여하고 있는 자율성, 비인칭성, 그리고 분석적 명석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캐럴은 재미있는 무의미를 만들 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에서 스콜라학파를 거쳐 마이농과 후설로 이어지는 전통의 발견물을 종합하는 전체적인 “의미의 논리”를 펼쳐 놓는다. 아르토는 언어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언어의 비분절적인 수동들과 능동들을 분절하고, 외침-단어들과 호흡-단어들을 잔인함의 극장으로 바꾸어 버린다.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문명의 임상의[진단자]들”(LS 277; 237)로서의 작가들을 논의하면서 신경증 환자들과 소설가들이 표면들에 존재하는 양식들을 대조한다. 신경증 환자들은 “가족 이야기”(프로이드의 Familienroman, 불어로는 roman familial, 문자 그대로는 “가족 소설”)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소설가들은 표면들로부터 “순수한 사건”, 즉 비인격화되어 주어진 예술 작품의 인물들과 행동들을 통해 펼쳐지는 사건을 뽑아낸다.6) 이와 유사한 예술적 자율성과 비인칭성은 시인/소설가로서의 캐럴을 어린이(그리고 성장한 어린이 신경증 환자)와 분리시킨다. 마찬가지로 시인/극작가로서의 아르토는 정신병적 징후들을 유출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들뢰즈는 정신분열적인 루이스 울프슨(Louis Wolfson)의 글들에서 아르토의 예술적 실천들에 이르는 유용한 지침들(guides)을 발견하지만, 울프슨의 텍스트들의 “아름다움, 밀도”는 “여전히 진단적”이며 그의 재능은 “아르토의 천재성과는 거리가 멀다.”(LS 104; 84) 울프슨의 징후들은 단일하고 풍부한(redundant) 이야기 속에서 그를 표현하는 반면, 아르토의 cris-souffles는 다양한 배경과 장면 속에서 다수의 형식들을 취한다.7)


『의미의 논리』는 언어에 대한 들뢰즈의 가장 확대된 논의이지만, 어떤 점에서 이 책은 그의 저작들 내에서 이례적인 지위를 점한다. 그렇게 장황하고 세밀하게 다루어진 표면들과 신체들의 대립은 『앙띠오이디푸스』와 이후의 책들에서는 사라진다. 실제로, 표면들과 심층들이 『앙띠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가 『천 개의 고원』의 일관성의 평면들 위에서의 아상블라주에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결국에는 결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8) 『의미의 논리』 후반부에서 들뢰즈는 프로이트적이고 라캉적인 용어법의 완전무장(full panoply)을 활용하면서 신체라는 심층들로부터 언어라는 표면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복잡한 정신분석적 설명을 전개시키지만, 『앙띠오이디푸스』에서 그는 정신분석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개시하고 그로부터 정신분석의 어휘를 사실상 내던진다. 의미는 신체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표면들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말해진다.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우주론에서 비신체적 사실들/사건들은 신체적 힘들(forces)과 대립되지만, 『니체와 철학』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해석의 의미는 힘(force)과 힘에의 의지의 관계들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기호론적 체계들의 결정요인들(determinants)로서의 힘과 역량(force and power)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는 들뢰즈의 대부분의 저작, 특히 『앙띠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푸코』 등에서 두드러진다. 결국, 『의미의 논리』에서의 몇몇 지점들에서 들뢰즈는 사건들에 대한 언어-중심적 관점을 진전시키는 것 같다. 그는 사건이 “생성과 동연(同延)적이며, 생성 그 자체는 언어와 동연적”(LS 18; 8)이라고, 또 “사건이 본질적으로 언어에 속하고, 사건이 언어와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 존재한다”(LS 34; 22),고 혹은 “사건들-효과들은 그것들을 표현하는 명제들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LS 36; 23)고 역설한다. 하지만 (15번 째 계열인 “특이성”에서 매우 잘 요약된)(LS 122-32; 100-108) 사건들의 특징들은 본질적으로 『천 개의 고원』에서 밑그림이 그려진 “생성”의 특징들이다. 그리고 생성들이 언어 외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가 거기에 존재한다. 사실상, 들뢰즈로 하여금 사건에 관여하는 그 자신의 자율적인 방식을 각각의 예술에 부여하는 예술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허용해 준 것은, 바로 언어와 사건 사이의 이러한 분리 가능성이다.
문학적 의미의 비판과 의학적 의미의 진단 사이의 관계에 대한 들뢰즈의 관심은 그가 정신분석 이론에 몰두했을 때 최고조에 이른다. 『마조히즘』에서 그는 징후학자들인 사드와 마조흐를 대비시킨다. 그들의 소설들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알려진 임상학적 존재들(entities)의 형식들을 분절한다. 『의미의 논리』에서 그는 왜곡된 표면들과 정신병적 심층들을 다루는 기호론자들로서의 캐럴과 아르토를 대립시킨다. 들뢰즈는 정신분석에서 벗어남에 따라 문학과 임상학적 의학 사이의 특별한 연결을 탐사하는 것을 그만둔다. 비록 그의 저작 전반에 걸쳐 그가 작가를 니체적 의미의 기호 해석자와 문명 치료사로 바라보는 폭넓은 생각(conception)을 유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프루스트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통해 들뢰즈는 글쓰기를 기호들의 펼침[설명]과 생산으로 고찰한다. 카프카에 대한 자신의 저작에서 들뢰즈는 “소수적 문학”의 작가를 문화의 진단자(diagnostician)로 취급한다. 1988년의 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프루스트의 “『찾아서』는 일반 기호학이자 세계들의 징후학이다. 카프카의 작업[작품]은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사악한 권력들에 대한 진단이다. 니체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은 문명의 의사들이다.”(PP 195; 142-43) 다음의 세 개의 장들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프루스트의 징후학과 사악한 권력들에 대한 카프카의 진단을 꽤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 들뢰즈가 문학에 어떤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인식하고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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