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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제2장 프루스트의 기호 기계(31-39)
2018년 10월 21일 15시 13분  조회:810  추천:0  작성자: 강려
 
 
 
 제2장 프루스트의 기호 기계






『프루스트와 기호들』(1976)의 제3판에 붙인 서문에서 들뢰즈는 1964년에 『마르셀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제1부가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에 관계된 것인 반면, 1970년에 두 번째 판에 추가되고 1976년에 여러 장들로 나누어진 제2부는 “『찾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기호들 자체의 생산과 증식”에 관계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각각의 경우들에서 들뢰즈가 제기하는 문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잃어버린 시간(그리고 제7권의 되찾은 시간)을 찾아나서는 이 엄청난 찾기, 그 시간에 대한 조사와 탐색 - 의 통일성 문제이다. 그 본성에 의해 하나의 전체로 파악될 수 없는 어떤 것 - 즉 시간 - 을 그 자신의 주제로 가지고 있는 소설의 단일함(singleness)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파편들의 전체로서, 이 다수(multiple)의 통일성, 이 다수성(multiplicity)의 통일성은 무엇인가? - 즉 원리는 아니지만, 그와 반대로 그 다수와 그것의 연결되지 않은 부분들의 ‘효과’일 일자(One) 및 전체(Whole)."(PS 195; 144)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찾기』는 기호들 안에서의 “도제수업 이야기”(PS 10; 4)이지만, 발견(discovery)의 계속되는 과정과 예술 작품에서 기호들의 진리(truth)의 궁극적인 계시(revelation) 양자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만 하는 이야기이다. 기호들의 증식과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 『찾기』는 독자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들뿐만 아니라 “통일성 효과들”을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이다. 시간은 서술자의 연구 대상이자 그러한 연구가 일어나는 매개이지만, 시간은 또한 기호들과 『찾기』의 통일성 효과들을 생산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왜냐하면 “서술자의 차원(dimension)인 시간이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전체화하지 않는 [이것들의] 전체가 될 수 있고, 이러한 부분들을 통일시키지 않는 [이것들의] 통일성이 될 수 있는 힘(puissance)을 가지기 때문이다.”(PS 203; 150)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


들뢰즈의 기본적인 목적들 중의 하나는 비자발적인[무심결에 떠오르는](involuntary) 기억과 주관적인 연상이 『찾기』를 해석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통념(common notion)에 도전하는 것이다. 마르셀의 마들렌은 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일종의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7권의 『되찾은 시간』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기호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들이 단순한 심리학적 상태 이상의 것과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루스트에게 기호들은 수수께끼이며,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즉각적인 해독(decoding)을 거부하는 상형문자이다. 기호들은 드러냄과 동시에 숨기며, 그것들이 기호들로 기능하는 한에서는 즉각적인(immediate) 이해를 거부하고 간접적인(indirect) 판독 과정을 유도한다. 기호들의 내용들은 기호들 안에 싸여져 있고, 말려져 있으며, 압축되어 있고, 위장되어 있다. 따라서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은 그것들을 펼치는 것, 즉 그것들을 해설하는 것이다(라틴어로 explicare는 펼치다, 풀다의 뜻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들렌은 실제로 전형적인 기호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마르셀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기호의 해설은 “일본인들이 사기그릇에 물을 채운 뒤 그 안에 작은 종이 조각들을 넣고, 처음에는 문자나 형태가 없다가 나중에 물에 젖어서 펴지고 뒤틀려서 색깔과 특이한(distinctive) 형상이 나타나면 딱딱하고 알아볼 만한 꽃들이나 건물들, 사람들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즐거워하는 게임”(Proust I 51)과 같다.
그러나 마들렌은 네 가지 종류의 기호들 중의 하나만을 대표할 뿐이다. 첫째, 사교계의 기호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관습, 우아한 대화, 품위 있는 예절, 에티켓, 관행, 예의바름[예법] 등등이 포함된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여러 수수께끼들을 던진다. 왜 한 개인이 어떤 특정한 서클에는 허용이 되면서 다른 서클에는 허용이 되지 않는가? 하나의 사교 그룹을 다른 사교 그룹과 구별지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간접적인 언급, 슬쩍 엿보기나 힐끗 보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기호들은 결국 달리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고 단지 어떤 행동이나 생각의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이것들은 지루하고 상투적이지만, “이 공허함(vacuity)은 그것들에게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의례적인(ritual) 완벽성, 형식주의를 제공해준다.”(PS 13; 7) 둘째는 사랑의 기호들로서,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사랑하는 사람들(beloved)의 기호들이다. “사랑받는 존재는 판독해야 하는, 즉 해석해야 하는 세계를 함축하고[접고](implicate), 감싸고(envelope), 감금한다(imprison).”(PS 14; 7) 실제로 다수의(multiple) 세계들은 사랑받는 사람들 속에 접혀져 있으며,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사람들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숨겨지고, 신비스러운 풍경들을 펼치고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한 펼쳐진 세계의 일부로부터 배제되고, 이러한 이유로 해서 질투와 실망이 사랑의 진실을 유지한다. 사랑받는 사람의 소견은 불가피하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이 알 수 없는 세계들을 펼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사람의 거짓말들은 사랑의 상형문자들이다. 사랑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거짓말들의 해석이다.”(PS 16; 9) 세 번째는 마들렌, 베니스의 고르지 않은 포석(鋪石), 게르망트 호텔에 있는 빳빳하게 접힌 냅킨 등과 같은, 감각적 기호들이다. 이것들은 비자발적인 기억의 잘 알려진 기호들인바, 이것들로 인해 함축된 세계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감각적인(sensate) 경험으로부터 펼쳐진다. 마르셀이 마들렌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한순간 우리 뜰과 스완 씨의 정원의 모든 꽃들, 뷔봉(Vivnonne) 강에 핀 수련들과 그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 그들의 작은 집들, 교구 교회, 꽁브레 전체와 그 주위 환경들이 형상과 형태를 갖추고서, 마을들과 정원들과 똑같이, 내 찻잔으로부터 피어올라 존재하게 되었다.”(Proust I 51) 이러한 기호들은 압도적인 기쁨을 가져다주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며, 해석과 해설을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생각들(ideas)이나 회상이 합류(confluence)하는 단순한 연상 이상의 것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하한 감각 경험이나 기억을 넘어서는 본질들 - 꽁브레의 본질, 발벡의 본질, 베니스의 본질 - 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호들은 여전히 물질적이며, 그것들 안에 구현된 본질들은 빨리 지나가서[무상해서] 유지하기가 힘들거나 어렵다. 오직 네 번째 종류의 기호들인 예술 기호들 안에서만, 본질들은 탈물질화되고 그리하여 자율적이고 자기-유지적이게 된다. 비자발적인 기억의 기호들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의 목적들로서가 아니라 예술 기호들에 이르는 통로로서 중요한 것이다. 예술 기호들 안에서야말로 본질들이 그 자신의 완전하고 적절한 형태를 갖추고 드러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진리 - 기호들의 진리 - 찾기이지만, 그 진리는 선한 의지나 자발적인[의식적인](voluntary) 행동을 통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호들은 사유에 영향을 미치고, 불균형과 방향상실[혼미]을 초래한다. 고르지 않은 포석들이 가져다주는 감각(sensation)을 회상하면서 마르셀은 그것이 “이러한 그리고 이와 다른 감각들이 마주치게 되었던 우연적이고(fortuitous) 불가피한 방식(fashion)이야말로 그것들이 삶에 다시 가져다준 과거의 참됨으로 입증되었다”(Proust III 913)라고 언급한다. 지성에 의해 형식화되는 생각들(ideas)은 단지 “논리적인, 가능한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임의적으로 선택된다. 우리가 그 상형문자들의 패턴들을 추적할 수 없는 책이 진실로 우리에게 속한 유일한 책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형성하는 생각들이 논리적으로 정확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참된지는 알 수가 없다.”(Proust III 914) 그렇다면, 진리는 우연적임과 동시에 불가피하며, 그것의 탐험은 탐험해야 할 진리를 선택하는 기호들과의 우연한 마주침들을 통해 계속된다. 진리 찾기는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를 해설하는, 즉 그것의 숨겨진 의미를 펼치는 행위는 기호 자체의 펼침, 그 자체의 자기-전개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뜻에서, 진리 찾기는 언제나 시간적이고, “진리는 언제나 시간의 진리이다.”(PS 25; 17) 그러므로 들뢰즈는 마르셀이 기호들에 대한 그 자신의 도제수업 중에 마주친 네 가지의 시간 구조들을, 그 진리를 갖는 각각의 시간들을 구분한다. “지나가는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변화(alteration)의, 숙성(aging)의, 노화(decay)의, 파괴의 시간이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다양한 사교계 인물들의 신체적 노쇠의 명백한 형태 속에서, 그러나 또한 세련된[품위 있는] 사회를 선점하는 양식들과 방식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이 시간을 배반한다. 시간의 이행은 또한 사랑의 기호들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랑받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사랑과 질투의 기호들이 스스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즉 사랑은 결코 그 자신의 사라짐을 준비하는 것을, 그 자신의 파열을 흉내내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PS 27; 18) 그리고 감각적 기호들에서도 역시 시간의 노화가 감지될 수 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서 마르셀이 장화를 벗으며 그의 죽은 할머니를 회상하면서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느낄 때처럼 말이다.(Proust II 783) 오직 예술적 기호들에서만 지나가는 시간이 극복된다. 잃어버린 시간은 또한 “사람이 잃어버리는 시간”, 즉 사교계의 유희들의, 그리고 실패한 사랑의, 심지어는 마들렌의 맛과 같은 사소한 일들에 대한 감각적인 탐닉(indulgence)의 낭비적인 시간의 형태를 취한다. 그렇지만 더욱 진지한 사태들에 주의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된 작업과 강렬한(deep) 의도는 의지에 속하고 진리는 기호들과의 우발적인(contingent) 마주침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교계의, 사랑의, 그리고 감각적인 기호들의 낭비된 시간은 결국 마르셀의 도제수업, 즉 기호들에서의 하나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신비한 수단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판명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우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식으로 배우든지 그것은 항상 기호들의 매개를 통해서,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객관적인 내용들의 흡수(assimilation)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PS 31; 21-22) 세 번째 형태의 시간은 “되찾는 시간”이며, 이것은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시간이다. 겉으로 볼 때 프루스트는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성을 사용하는 것을 신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지성이 기호들과의 마주침의 필연성 속에 놓인 논리적 진리들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작동할 때뿐이다. 지성이 기호들과의 마주침 이후에 나타나면, 그것은 기호의 진리, 고로 시간의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능력(faculty)이다. “인상(impression)과 작가와의 관계는 실험과 과학자와의 관계와 같다. 과학자에게 지성의 작용이 실험에 선행하고 작가에게 그것이 인상 뒤에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Proust III 914) 회고적인[소급적인] 분석을 통해, 지성은 사교계의 공허한 기호들이 일반 법률들을 따르고, 사랑의 거짓된(deceptive) 기호들이 반복적인 테마들을 되풀이하며(reiterate), 본의 아닌 기억의 덧없는(ephemeral) 기호들이 비물질적 본질들을 드러낸다는 것을 밝혀준다. 이러한 뜻에서, 잃어버리고 낭비된 시간은 우리가 되찾는 시간이 된다. 그러나 네 번째 형태의 시간은 예술 작품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되찾은 시간”이며, 순수한 형태를 갖춘 시간이다. 이 시간의 진리는 모든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기호들을 변형시킨다. 마르셀은 순수한 시간을, 자신의 찾기의 종착점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마르셀의 도제수업은 네 가지 종류의 기호들 -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예술적인 기호들 - 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의 찾기 과정은 네 가지 형태의 시간 - 지나가는 시간, 잃어버리는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 으로 구조화된다. 그것은 또한 혼란과 실망이라는 필수적인 패턴들 속에서 자신의 복잡한 리듬을 발견한다. 마르셀은 불가피하게 두 가지 방식으로 기호들을 오해한다. 첫째, 그는 기호의 대상이 어쨌든 그 자체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찻잔 자체에서 꽁브레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처럼 반복적으로 차를 홀짝거린다. 그는 “게르망트”라는 이름을 계속 반복해서 발음한다. 마치 그 음절들 자체가 게르망트 부인의 위광(威光)(prestige)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일찍이 세상과의 마주침 속에서 “그는 기호들을 방출하는 사람은 또한 그것들의 코드를 이해하고 소유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PS 38; 27) 이러한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각(perception)은 본래 기호들의 성질[특성]들을 그것들이 기원하는 대상들에 귀착시키기 때문이다. 욕망 역시 대상 그 자체가 욕망적이라고 가정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받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지성은 마찬가지로 진리가 분절되고 소통되어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객관성을 향하는 고유의(inherent) 경향을 갖는다. 바로 이러한 편견이 우리로 하여금 대화, 우정, 작품[노동], 철학을 통해, 다시 말해 전통적인 추론적인(discursive) 사유의 선한 의지와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언제나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signify). 이렇게 해서 마르셀은 자신이 찾는 대상들에 대해서, 기호들에 의해 지시된 실재물들(entities)에 대해서 끊임없이 실망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종종 보상적(compensatory) 주관론으로 향하는데, 이것은 그의 도제수업의 두 번째 오류의 구성 요소가 된다. 만약 기호의 비밀이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속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주관적인 연상 속에 존재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연상들의 행사(exercise) 속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PS 48; 35) 즉 무엇이든지 다른 무엇인가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자발적인 기억이 주관적 관념 연합론[연상 심리학](associationism)의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마들렌은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 마들렌의 힘과 뱅퇴이유 소나타의 힘이 똑같이 엄밀히 개인적이고 색다른(idiosyncratic) 본성의 임의적이고 덧없는 연상들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기호의 비밀은 지시된 대상 속이나 해석하는 주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 속에 접혀진 본질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과 구별해 주는 것은 예술 안에서 기호가 비물질적이라는 점이다. 진정,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뱅퇴이유 소나타의 악절(phrase)을 울리지만, 예술적 기호는 소리의 매개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나의 본질, 하나의 생각이지 하나의 물질적 실재물이 아니다.1)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기호들에서 기호의 의미는 무언가 다른 것 속에서 발견되지만, “예술은 우리에게 진정한(veritable) 통일성 - 비물질적 기호와 완전히 정신적인 의미의 통일 - 을 제공해 준다.”(PS 53; 40-41) 들뢰즈는 프루스트에게 본질이란 “하나의 차이, 즉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이”(PS 53; 41)라고 주장한다. 들뢰즈는 마르셀의 다음과 같은 언급 속에서 우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강의 짐작을 한다. “작가에게 문체는, 화가에게 색채만큼이나,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vision)의 문제이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방법들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했을 질적 차이를, 세계가 우리들 각자에게 보여주는 방식의 유일성(uniqueness)을, 예술이 없었다면 영원히 모든 개인의 비밀로 남아 있게 되었을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Proust III 931-32) 각각의 개인은 특정한 관점에서 세계를 표현하고, “그 관점은 차이 그 자체, 즉 내적으로 절대적인 차이이다.”(PS 55; 42) 하지만 이것은 주관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주체의 기능[함수](function)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는 세계와 그것의 내적인 절대적 차이를 생산하지 않는다. 주체와 세계는 그러한 차이의 펼침을 통해 함께 출현한다. “본질을 해설하는[펼치는] 것은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 속에 스스로를 함축하고, 스스로를 감싸며, 스스로를 말아 올리는 것은 본질이다.”(PS 56; 43) 모든 주체는 비록 모호한 방식이긴 하지만 자신 안에 전 세계를 포함하는, 라이프니츠적인 단자(monad)와 같다. 세계는 단자들 속에서 스스로를 펼치고 해설하며, 세계는 각각의 단자 내부에서 펼쳐지고 해설된다. 개별적인 단자가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그 특수한 관점의 조명(illumination)에 의해 제한된다. 라이프니츠가 종종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는 하나의 도시와 같고, 단자들은 그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같다. 도시에 대한 이들의 다양한 관점들은 전체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에게는 세계와 그것의 단자들의 통일을 보장하기(ensure) 위한 “예정된 조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주체는 차이나는 세계를 표현하고, 오직 예술 속에서만 이러한 세계들이 상호간의 소통 속에 놓일 수 있다. 마르셀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자신이 보는 것과는 같지 않은 우주(universe)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이 없었다면 그 풍경들이 달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풍경들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을 우주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무엇을 보는지를 알게 된다. 예술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의 세상만을, 우리 자신의 세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스스로를 증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세계들을,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순환하는 세계들보다 서로 간에 훨씬 다른 세계들을 마음대로 다루게 된다.”(Proust III 932)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뱅퇴이유 소나타의 대화를 들으면서 스완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태초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아직 대지 위에 두 사람만[아담과 이브]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세상은 다른 모든 것에 닫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안에 결코 그것들 외에 다른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창조자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이 소나타의 세계.”(Proust I 382) 들뢰즈는 프루스트에게 모든 예술 작품은 태초, 즉 “근본적이고(radical) 절대적인 시초”(PS 57; 44)라고 주장한다. 각각의 작품에서 우리는 마르셀이 나이어린(adolescent) 소녀들의 얼굴에서 식별해 내는 것 - 우리가 바다 앞에 설 때 명상하는(contemplate) 자연의 최초의(premordial) 요소들의 그러한 부단한(perpetual) 재-창조를 상기시키는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play)"(Proust I 967) - 을 발견한다. 그러나 최초의 자연의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에 덧붙여 태초는 시간의 시초를 포함한다. 이것은 예술 작품 속에 드러나는 시간 - 질적으로 다른 시간, 본질들의 되찾은 시간 - 이다. 들뢰즈는 일부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자들이 창조 행위 속에서 펼쳐지기 전의 세계의 최초의(originary) 상태를 complicatio - “일자(One) 속에 다수를 감싸는 그리고 다수의 일자(One)를 긍정하는 주름[복합](complication)”(PS 58; 44) - 라는 용어로 지칭한다고 언급한다. 주름[복합]은 외부의 정상적이고 통시적인 시간이지만, 초시간적인(timeless)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 자체의 주름잡혀진[복합적인] 상태이다.”(PS 58; 45) 주름[복합]은 그것 자체 내부에 싸여진 시간, 즉 순수한 형태의 시간이다. 이것은 이후에 창조의 과정 동안에 현실적인 시간적 경험의 다양한 차원들 속에서 자신을 계속해서 펼친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은, 그[태초] 안에서 드러나는 본질이 “자연의 최초의 요소들의 부단한 재-창조”를 가져온다[초래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본질이 되찾은 시간, 주름잡혀진[복합적인] 시간, 순수 형태로서의 시간, 시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시간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시초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렇다면 본질들은 어떻게 예술 속에 구현되는가? 본질은 예술작품들이라는 물리적인 물질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만, “예술은 물질의 참된 변형(transmutation)이다.”(PS 61; 46) 그리고 예술이 물질을 변형시키는 수단은 스타일이다. 『되찾은 시간』에서 마르셀은 특별한 순간의 이질적인 감각들과 연상들이 단일한 경험 속에서 현재의 자극(stimuli)과 과거의 기억들을 결합시키는 방식을 고찰한다. 그는 작가가 주어진 장면의 개별적인 대상들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할 수도 있지만, “진리는 그가 두 개의 다른 대상들을 선택해서 그 둘 사이의 관계(connection) - 과학 세계에서 인과율에 의해 제공되는 유일한 관계와 유사한 예술 세계에서의 관계 - 를 진술하고, 그것들을 잘-가공된 스타일의 필연적인 연쇄들로 감쌀 때에만 그에게 성취될 것이다. 진리는 - 그리고 삶 역시도 - 우리가 두 가지 감각들에 공통적인 성질을 비교하면서 그것들의 공통적인 본질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시간의 우발성들로부터 해방시켜 메타포 속에서 서로 재통합시키는 데 성공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Proust III 924-25) 그렇다면 그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스타일은 메타포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서로 다른 대상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쇄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스타일은 말(words)의 단순한 놀이 이상이다. 상이한 대상들 사이의 연쇄는 공통적인 성질이며, 그것은 “이러한 명료한(luminous) 물질 속에 굳어진(petrified), 이러한 굴절하는(refracting) 환경(milieu) 속으로 내던져진(plunged)”(PS 61; 47), 하나의 본질의 표현이다. 본질은 “원래 세계의 성질”(PS 61; 47)이며, 스타일이라는 “필연적 연쇄들”을 통해서 예술가는 상이한 대상들로부터 “그것들의 공통적인 본질”을 “추출할” 수 있고, “시간의 우발성들로부터” 그것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더 나아가 만약 스타일이 메타포라면 “메타포란 본질적으로 변형(metamorphosis)”(PS 61; 47)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물질 내부에서 예술이 공통적 성질들을 통해 필연적 연쇄들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또한 물질의 변형을 유발한다. 엘스티르의 그림들 속에서처럼, 바다는 육지가 되고 육지는 바다가 되며, 물 같은 육지 형태들과 땅 같은(geological) 바다의 파도는 펼치는 힘들에 의해 횡단되는 유연한(pliable) 덩어리들(masses)로 작용한다. 스타일은 “물질을 정신화하고 그것을 본질에 적절한 것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불안정한 대립, 최초의(original) 주름[복합], 본질 그 자체를 구성하는 최초의(primordial) 요소들의 투쟁과 교환을 재생산한다.”(PS 62; 47)
만약 본질이 태초라면, 그것은 또한 창조의 계속적인 힘(power)이다. 본질은 근원적인(originary) 차이임과 공시에 개별화하는 힘(force)이다. 이것[힘]은 “그 자체로 스타일의 연쇄들 속에서 그것[본질]이 감싸는 대상들처럼, 그것[본질]이 스스로를 구체화시키는 물질들을 개별화하고 결정한다.”(PS 62; 48) 본질은 스스로를 반복하는 차이이며, 예술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를 통해 작동하는 자기-차이 및 자기-개별화의 부단한 과정이다. 차이와 반복은, 오히려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분리불가능하고 상관적인, 본질의 두 가지 힘들(puissances)이다.”(PS 63; 48) 세계의 성질로서의 차이는 “오직 다양한 환경들을 횡단하고 갖가지의 대상들을 통일시키는 일종의 자기-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긍정한다. 반복은 근원적인 차이의 정도들을 구성하지만, 다양성(diversity) 역시 적잖은(no less) 근본적인 반복의 수준들을 구성한다.”(PS 63; 48) 그렇다면 본질은 태초이며, 주름잡힌[복잡한] 시간 속에 있는 최초의 요소들과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펼쳐지도록 야기하는 세계의 계속적인 재-시초 속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시초이다. 예술작품에서, 물질은 변형되고, 비물질화되며, 본질에 적절한 것으로 만들어진다. 그 결과, 예술의 기호들은 투명하다. 그것들의 의미는 그것들[기호들]을 통해 작동하는 본질이다. 필연적인 연쇄들로 기호들을 감싸고 물질을 변형시키는 예술적 힘으로서의 스타일은 본질을 갖고 있는 것, 즉 세계를 펼치는 차이와 반복의 힘이다. “스타일로서의 기호의 정체성, 그리고 본질로서의 의미. 바로 이것이 예술 작품의 특징이다.”(PS 64; 49) 뷔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타일, 그것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스타일은 예술가-주체의 단순한 발명품이 아니다. 스타일은 주체를 관점으로 포함하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펼치는, 필연적으로 주체를 관통하지만 주체 내부에서 근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체를 그러한 세계의 구성요소로 구성해 내는 자기-차이화하는 차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타일은 사람이 아니다. 스타일은 본질 그 자체이다.”(PS 62;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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