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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 기계, 탈영토화, 되기의 개념을 어떻게 몸으로 살까./ 작성자 / 이야기밥
2018년 11월 09일 21시 05분  조회:1157  추천:0  작성자: 강려
[들뢰즈] 배치, 기계, 탈영토화, 되기의 개념을 어떻게 몸으로 살까.
 
 
<천 하나의 고원- 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 서평 글에서 옮겨본다.
 
 지은이가 <천 하나의 고원>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천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 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한겨레. 2008.10.25)
 
 -우리를 다른 목숨들, 개체들과 관계 맺는 기계라고 부르는데, 이 기계라는 말이 참 재미있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무언가 좀 그야말로 너무 딱딱한 느낌도 듭니다. 기계는 그 스스로는 존재하기 힘든 무언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싶은데요. 기계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인 반면에 생명체는 관계를 맺으면서 사니 기계라고 말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존재 자체가 스스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동양의 사고로 본다면 이 기계라는 말이 어딘가 좀 어감에 거슬리는데, 하여튼 서양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 기계란 말을 쓰면서 요즘 우리 근대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하는데요. 근대 사회를 말할 때는 기계라는 말이 어쩌면 어울릴 것도 같구요.  
 
 그런데 이 다음 말은 재미있습니다. 생각해볼 점이 있어요.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야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구 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언표적 배치란 말은 참 어려운데요.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라는 거지요. 이 언표적 배치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고, 늘 변화 무쌍하게 변해가지요. 기계적 배치란 말도 참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나중에 알아봐야겠습니다.
더 들어보지요.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 양식은 '차이 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 생성의 일시적 응결 상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 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재미있는 말입니다. 욕망하는 기계라는 말은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욕암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라는 거지요. 이것도 좋습니다.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 되면 좋겠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무언가의 권력이나 유행에 그냥 따라서 동일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어떤 권력이나 유행이 생기면 거기에 동일시되어 동일성의 섬이 아니라 동일성의 거대한 육지를 형성하면서 고착되고 있는게 아닐까요.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속에는 자본의 독점과 이윤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일성의 섬들이 하나의 게릴라처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타자성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참 좋겠는데요. 동일성의 섬이 너무나 확대되어 하나의 권력을 이루고 있을 때, 차이 생성의 바다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오염되는 거지요. 차이 생성의 바다라는 것이 어찌보면 이 세상의 근원적인 원시 자연의 그 무엇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저 동일성의 섬들은 크든 작든간에 어떤 형태로든 부서지게 되어 있지요. 해체되고 재 구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저 동일성의 섬에 안주해서 지금 자본의 힘 앞에 모여 있는 게 아닐까, 늘 우리의 무의식을 점검해봐야 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어떤 권력을 추구하는 섬에 안주해 있을 때는 자연 비평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싯점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라는 것, 저 위에서 말하는 언표적 배치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해 봐야 할 것도 같습니다.
 또 옮겨보지요.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 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탙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 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 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기존에 이루어진 배치, 이미 동일성의 섬을 이루고 고착화되어 가는 섬의 배치를 푸는 작업이 바로 탈영토화가 되겠군요. 그렇다면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 특히 판타지를 하는 사람들은 이게 아주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하겠지요. 판타지의 생명은 기존의 동일성의 섬에 하나의 영토를 더 해주는 그런 재영토화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지요.재영토화가 아니라 탈영토화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판타지의 세계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특히 어린이문학에서 말하는 판타지는 더욱 이런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판타지와 전복의 문제는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탈영토화의 길을 가려면 당연히 기존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삶의 배치에서 탈주하려는 상상력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 상상력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상상력은 그냥 현실과는 동떨어지는 어떤 공상이라고 보면 안될 것 같습니다. 상상력은 하나의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사유를 자극하는 내면의 힘, 영감,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정신의 힘에서 나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에서 내면을 바라보는 그런 심리에너지의 문제가 역시 개입됩니다. 지금 이 자리를 탈주하는 상상력의 힘, 세계관의 힘은 바로 자신의 마음 속 우주에서 태어나는 거지요. 그런 사유, 에너지 모두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여기서 우리는 노자와 통하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외부 현실은 모두가 내면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태어나는 거지요. 노자의 말을 빌면요.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되는데, 이 된다는 말이 참 여럽군요. 판타지에서 어떤 한 시공간을 창조하는데, 그 창조된 시공간은 역시 스스로 그러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런 차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일시적인 섬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역시 헤체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섬일 수가 있겠지요. 아니면 그런 일시적인 섬을 뛰어 넘는 근원적인 도의 세계를 닮은 그 어떤 시공간으로 상징되는 곳일 수도 있겠지요. 이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더 공부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더 옮겨보지요.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라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 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이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 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도태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이 참 좋습니다. 판타지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지요. 바로 저 되기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마음 속 우주에서 되기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음 속 우주에서 되기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당연히 그 되기가 밖으로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현실에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고, 탈주와 탈영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거지요. 외부현실에서 탈영토화와 탈주를 꿈꾸며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몸에서는, 내면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되기의 상징이 태어나는 거지요. 아마도 꿈에서 다 그런 상징을 올려보내주지 않을 까도 싶습니다. 꿈만이 아니라 사유나 명상이나 상상력을 통해 저런 마음 속 우주에서 먼저 되기의 시공간이 생겨나겠지요. 태어나겠지요. 하여튼 판타지를 얘기할 때도 이 들뢰즈의 철학은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공부해 봅시다. 실제 작품을 통해 이런 사유를 더 발전해 나가면 좋을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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