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오 신문 연재:
시가 있는 마을 - 김영찬
용서하라, 저녁이 된 것을!*
김영찬
내 생애의 마지막 남자가, 라고 말문을 연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라이터 있니?
옆의 여인은 한없이 느리고 게으른 손가락으로
가늘고 뚱뚱한 핸드백을 열어
뒤적거린다
Cafe Gracias의 흐린 유리창 밖으로 끈 끊어진 풍선
하나가
날아가다가 전선에 감겨 제지당하는 걸
두 사람 모두 못 본 체 한다
담배는 없고
불만 있네……,
불필요한 사람도 글쎄 얼마든지 드물지 않는 법
비를 머금은 구름이 커튼 틈새로 하릴없이 참견하려다가
검은 외투를 걸친 듯이 무거운 침묵
촛불 흔든 바람의 길이 엇갈리고
내 생애의 마지막 남자를, 이라는 상투어를 수습하려던 여인은
손마디가 풀려 찻잔을 놓쳤다
박살난 커피 잔이
크고 작은 파편들로 나뉘자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처럼
저녁이 되었다
용서하라 저녁이 된 것을!
그리고 오래 머물러 있어라, 밤이여
* 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연극 대사의 한 토막처럼, 연극 도입부처럼 대사를 툭 던져 놓는다. 김영찬의 시는 설명적이지 않다. 또한 긴 시도 지루하지 않다. 연극은 길어도, 장면이 바뀌고, 극적 구도를 갖기 때문이다. 김영찬의 시도 대부분이 길다. 장면전환을 하면서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사건을 전개하고, 사유와 극적반전, 대사를 치려면 결코 이야기가 짧을 수가 없다.
위의 시는 김영찬 시의 구도를 표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녀의 이야기는 구상과 추상을 섞은 듯, 이해가 되는 추상화를 그렸다고나 할까? 일상의 이야기를 툭 던지지만,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연극처럼, 그의 시는 낯선 풍경을 만든다.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면서 감각적 새로움이 오감을 자극하며 긴장하게 한다. 연극적 요소 때문이다.
1연의 나른하지만 억눌린 남녀의 대화는, ‘박살난 커피 잔이/ 크고 작은 파편들로 나뉘자’ 구체적인 사건이 생성된다. 불안불안한 풍경들이 연극의 배경처럼 2연에서 펼쳐진다. ‘유리창 밖으로 끈 끊어진 풍선 하나가/ 날아가다가 전선에 감겨 제지당하는 걸’ 두 사람 모두 못 본체 하는 구도는 두 남녀의 관계가 갈등구조를 갖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삼류 멜로 드라마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유치하거나 저질이 아니다. 그 이유는 3연의 ‘검은 외투를 걸친 듯이 무거운 침묵/ 촛불 흔든 바람의 길이 엇갈리고’ 처럼 직관과 사유, 시적 은유적 표현을 세련되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잘 계산된, 또는 훅 내던지듯, 놓아버린 ‘자유’가 김영찬 시의 특징이다.
이선 프로필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 은상수상, 2004년 하나은행 공모 특선
2007년 『시문학』 등단
2007년 서경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2011년 <올해의 좋은시> 백인 선정, 2011년 제8회 푸른시학상 수상.
시집: <하이퍼시> 외 동인지 20여권
논문집: <아동의 창의력 계발을 위한 동시쓰기 지도방법 연구> <샤갈과 김춘수 연구>
평론: 심상운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서평, 및 평론 다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
좋은시공연문학회 사무차장
한국시문학문인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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