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오 신문 시가 있는 마을 15
어머니의 간장사리
이 혜 선
시어머니 제사 파젯날
베란다 한 구석에 잊은 듯 서 있던 간장 항아리 모셔와
작은 단지에 옮겨 부었다
20년 다리 오그리고 있던 밑바닥을 주걱으로 긁어내리자
연갈색 사리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툇마루도 없는 영주땅 우수골 낮은 지붕 아래
허리 구부리고 날마다 이고 나르던
체수 작은 몸피보다 더 큰 꽃숭어리들
알알이 갈색 씨앗 영글어
환한 몸 사리로 누우셨구나
내외간 살다보먼 궂은 날도 있것제
묵은 정을 햇볕삼아 말려가며 살아라
담 너머 이웃집 연기도 더러 챙기며
묵을수록 약이 되는 사리 하나 품고 살거라
먼 길 행상 가는 짚신발 행여나 즌데를 디디올셰라
명일동 안산에 달하 노피곰 돋아서
어긔야 멀리곰 비추고 있구나*
물의 마음 환히 비추는 사리 하나
이승 저승 가시울 넘어 맨발로 달려오신
어머니의 간장사리
* 백제 가요 ‘정읍사’에서 차용
<이선의 시 읽기>
이혜선의 「어머니의 간장사리」는 과거형이다. 백제가요 「정읍사」를 차용한 것이나 향토적 순수의 다정인 시어머니에 대한 정서가 예스럽다. 그러나 이 시가 상투적이거나 지루하지 않고 진정성이 있는 것은 ‘간장사리’라는 사물성에서 출발하여 시어머니의 지아비를 향한 사랑과 당부의 말씀을 객관화시켰기 때문이다.
‘간장사리’보다 더 적절한 한국 어머니에 대한 비유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간장항아리는 가난한 지어미가 대를 물려오면서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다. ‘간장 맛이 좋으면 살림이 불어난다’, ‘집안이 망하려면 장맛부터 변한다’는 말이 있다. 간장은 옛 어머니들의 가장 귀중한 기초양념이며 조미료였다.
위의 시는 시어머니가 물려준 간장항아리와 시어머니의 몸체 같은 ‘간장사리’. 시어머니가 들려준 지아비를 섬기는 자세. 백제 여인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여러 세대의 여인의 삶을 조명하였다. 대상에 대한 확장, 소재의 확장을 통한 시의 시케일이 크다.
‘간장 찌꺼기’라는 ‘사물’에 집중하여 묵을수록 약이 되는 ‘사리’의 경지까지 찾아내었다. ‘간장사리’라는 말 속에 인내와 고난, 찌꺼기로 ‘나머지 생’을 산 ‘어머니’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표현과 기교로 멋을 부리지 않아도 좋은 시는 ‘느낌’과 ‘설득력’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진정성’과 ‘객관화’는 시의 중추신경이며 뼈대다. 뼈대가 으스러지면 허리가 굽고 온 몸이 저리고 아프다. 기초공사를 튼튼히 한 작품은 구성이 단단하고 힘이 있다. 연과 연이 서로를 받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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