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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길 / 박소원
2018년 12월 24일 18시 06분  조회:739  추천:0  작성자: 강려
 
사라지는 길
 
 
박소원
 
 
저 속까지 마를 대로 마른 단풍잎
계절 끝까지 각자 한 가지 색만 쓰고 있습니다
 
전깃줄 위로 빈 가지를 세우는
덩치 큰 나무 밑에서
나는 몇 권의 일기장을 불태웁니다
 
벌겋게 달아오른 색만 쓰던 형은
결국 정신요양원으로
나는 멀리서 형을 보내는 길로 들어섭니다
 
바람이 붑니다 붉은 잎사귀들
솟구치는 불길 위로 뛰어내립니다
두툼한 내 일기들도
벌겋게 한 가지 색만 쓰며 사라집니다.
 
 
 
<이선의 시 읽기>
 
  지하철에 걸린 시를 읽으며, 어떤 연령층이 읽어도 이해되는 시, 그러나 졸렬하거나 유치하지 않은 시, 진정성과 감동이 있는 시를 목표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박소원 시에서 대중과 시인이 꿈꾸는 정직하고 쉬운 언어로 쓴 감동적인 시의 요소를 본다, 거기다 사유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위의 시는 쉬운 생활어로 씌어졌다. 구성도 단일하다. 어조도 ‘―습니다’체의 고백적 문체가 담담하다. 복잡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시의 감정은 복잡하다. 화자와 복잡하게 얽히고 꼬인 형의 ‘인생’이 있다. 진정성과 깊이가 있다. 가족사가 아프다.
  위의 시는 철저한 ‘사물시’다. 2연 ‘전깃줄 위로 빈 가지를 세우는/ 덩치 큰 나무 밑에서/ 나는 몇 권의 일기장을 불태웁니다.’ 부분을 눈여겨보자. ‘일기장을 불태운다’는 단순한 ‘그 사실’은 ‘정리한다, 청산한다. 잊는다. 버린다, 아프다’ 등 여러 ‘감정의 전이’를 파생시키며 연상작용을 한다. 독자의 상상력에 ‘불’을 지핀다. 1연과 4연에서 보여주는 ‘색’에 대한 ‘사유’도 힘 있다.
 
  저 속까지 마를 대로 마른 단풍잎
  계절 끝까지 각자 한 가지 색만 쓰고 있습니다(1연)
 
  두툼한 내 일기들도
  벌겋게 한 가지 색만 쓰며 사라집니다.(4연)
 
  다음, 4연으로 구성된「사라지는 길」의 중심어를 살펴보자.
 
  1연의 중심어― 단풍잎, 색
  2연의 중심어― 일기장을 불태우다
  3연의 중심어― 형, 정신요양원
  4연의 중심어― 바람, 붉은 잎사귀, 일기, 색
 
  이 시의 중심어를 압축하면 ‘일기장-형-정신요양원-색’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박소원 시인은 화자를 여성인 ‘언니’를 버리고 남성인 ‘형’으로 치환하였다. 상담심리에서는 ‘성’을 바꾸는 것을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해석하여 정신병 증후군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정신분석적 심리분석 시각으로 보면 ‘정신요양원’과 ‘형’은 밀접한 관계성을 가진다. 위의 시는  ‘설명적이지 않’다. 시시콜콜 ‘형’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았다. 시를 읽는 독자는 아픈 형을 상상력의 세계로 끌어들여, 소설보다 긴 스토리를 재구성하며 궁금해 할 것이다. 단절이 주는 극적인 효과다. 아직 다 타버려 재가 되기 전에, 일기장에 남아있는 곧 사라져버릴 ‘색’에 대한 비밀들을 들추어 읽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시는 가지치기를 할수록 선명해진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가족관계’의 ‘상처’를 시인은 홀로 꽃 피우려 애쓰고 있다.
  박소원 시의 저력을 느낀다. ‘클로즈업’과 ‘가지치기’ 기법, 12행의 짧은 시가 주는 파장이 깊고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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