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대본: 최지하
M: 달빛이 차구나
D: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불가능 할까요 선인장 처럼요
M: 머리를 빗자
D: 물을 마셔야겠어요, 끈적끈적하게 내 몸을 흐르는 외로움을 씻어내야죠
M: 너를 거치지 않은 그리움이 어디 있느냐
D: 그가 뜨거운 그림자에 젖어 달에 잠긴 모래 위를 걷고 있어요
M: 사막에 아마란스가 피었단다
D: 그의 발바닥에서 방황하는 사막의 흔적을 지워줘야겠어요
M: 여러 개의 슬픔중 하나쯤은 떠나보내는 기쁨으로 채워보아라
D: 난 그의 안에서 잉태되었어요
M: 핑계 삼아 그 사막으로 너의 귀를 보내거라
D: 그의 꿈을 다 먹어버려 나를 몰라볼지도 몰라요
M: 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어둠이냐, 그림자이냐, 생각이냐
D: 개구리비가 올까요 그러고 나면 한 쪽 세상은 텅 비워질까요
M: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 같단다
D: 자꾸만 내 생각과 눈이 마주쳐요
M: 길목을 돌아갈 때 어느 쪽으로 가면 바다 일지 생각해 보았니
D: 내 발은 늘 붉었죠
M: 돌아갈 땐 늘 생각은 지난 일이 되어 사라진다
D: 누구를 탓하지는 않아요
M: 돌아올 땐 누구나 길에서 묻은 것들은 버리고 돌아온다. 그래도 길은 흩어지지 않는다
D: 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해요
M: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며 어둠을 손질하며 내일을 기다리지 마라
D: 계절이 지날 때마다 헛되게 버린 구두가 너무 많아요
M: 너의 발자국은 아직 너와 이별하지 않았어, 괜찮다
D: 그래요, 난 자주 아팠지만 절망이든 기대감이든 매끈한 것은 지루했어요
D: 저 바람에 모래가 들 것 같아요 문을 닫아야할지 결정해야겠어요
M: 곧 아침이 올 터인데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이선의 시 읽기>
최지하의 시는 엄마와 딸의 대사로만 이루어지는 2인 시극이다. 낯설게한 언어들이 파노라마처럼 곡선과 직선, 포물선을 그리며 무수히 흩어진다.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만나고, 뭉치고, 헤어진다. 마치 일상의 연인들의 이별처럼. 오래전 떠난 정서적으로 엄마를 떠난, 딸의 독백처럼. ‘Image Show’ 를 한다. 상상력의 공간이 확대될수록 갈등이 증폭된다. 그러나 엉뚱한 이야기 전개와 작위적인 단어연결과 이미지 충돌을 한 행에서 다 보여주고 있지만 내용이 허황되거나 산만하지 않다. 그 이유는 ‘상상력의 객관화’를 시에서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질서정연하게 ‘질문’과 ‘대답’이 교차적으로 오가기 때문에 독자들은 시의 선을 따라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시는 상담심리치료에서 문학치료-‘시 치료’의 한 패턴으로 인지할 수 있 수 있다. 모녀의 갈등상황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심리치료에서 ‘역할 바꾸기’ 상담치료 기법과 그 맥락이 같다. 극은 갈등에서 시작된다. 그 갈등을 증폭시켜 ‘상황극’으로 ‘보여주기’ 한다.
1연 첫행에서 ‘M: 달빛이 차구나’라고 엄마가 먼저 말을 건다. 무차별적 대화를 ‘핑퐁’으로 주고받다가, 2연에서는 상황을 정리한다.
D: 저 바람에 모래가 들 것 같아요 문을 닫아야할지 결정해야겠어요
M: 곧 아침이 올 터인데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딸은 엄마의 ‘수용’할지 망설이고 있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은 상태다. 곧 엄마를 수용할 것이다. 엄마도 ‘곧 아침이 올 터인데’ 라며 희망메시지를 전한다.
2연 마지막 행에서는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상황종료다.
‘딸’과 ‘엄마’가 동시에 현재의 상황을 ‘어둠’으로 인식한다. 상담심리치료에서 ‘직면화’라고 하는데 ‘어둠’의 현재를 ‘인식’하고 ‘직면’한다는 것은 ‘문제’를 인정한다는 거다. 문제를 인정하고 ‘치료’단계로 진입한다.
‘부케’는 자기 구원의 꽃이다. 부케는 한 송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십 개의 꽃을 목을 잘라서 철사를 끼우고, 리본과 잎사귀, 구슬로 장식한다. ‘상처’와 ‘아픔’이라는 이름의 ‘꽃’에게 찬란한 ‘박수’로 치장하는 것이다. 상담심리치료의 완성, 치유의 단계다. 상처도 꽃이다. 시의 영원한 주제다.
갈등의 구조, 엇갈리던 ‘질문’과 ‘대답’이 비로소 해결이라는 국면을 맞이한다. 문학치료는 라깡의 ‘자아의 타자화’ 이론과 같다. 자아를 내려놓고, 냉철하게 분석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은 3일 동안 거울을 바라보는 자라고 하였다.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볼 때 객관화된 시가 써진다. 그 사건 속에 풍덩 잠겨서 허우적거린다면 ‘토로시’나 ‘서정시’를 쓰게 된다. 아직 ‘감정몰입’ 중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에서 ‘설명’을 완벽하게 제거한다면 ‘토막난 단어들의 연결’로 귀결될 것이다. ‘면서, 며, 고서, 고, 아서, 아’ 설명형 어미들은 시를 설명적 패턴으로 만든다.
위 시에는 순례자의 기도 같은 ‘명상시’의 요소가 있다. 명상시의 조건은 ‘본질과의 만남’ 이다. 시에서 금기어인 ‘외로움, 방황, 천국, 내일, 이별’등 관념어가 자주 등장하여도 구태의연하지 않은 것은, 언어충돌 효과로 문장을 비틀어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지만, 가장 갈등의 관계인 ‘딸’과 ‘엄마’를 대조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둘의 관계는 영원한 숙제다.
최지하의 극시의 매력은 엄마와 딸의 ‘진실대담’이다. 일상적인 언어를 걸러내고 영혼의 대화를 한다면 아마도 저런 대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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