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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이선 시해설

[스크랩] 잃어버린 시인을 찾아서- 박항식 시인편/ 이선 / 가온문학 2016년 겨울호연재
2018년 12월 28일 20시 35분  조회:1690  추천:0  작성자: 강려
8月
 
 
 
박항식
 
 
 
 
봉선화 고 빨강 꽃 속에
8月이 들어 있다.
 
콩콩 찧어 물들이면
빨강 8月이 손톱에 옮아 온다.
 
눈동자 푸른 바닷가에서
빨강 모자를 쓰고 웃는 少女―
 
―손톱이 자라면 차츰
8月이 밀려 가겠지만
 
나직한 歲月을 등에 지고 기대어
생각노라면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기억 속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月이 온다.
 
 
 
 
 
 
 
 
 
한국시단의 모더니즘 운동의 선구적 이미지스트
― 박항식의 재조명
 

 
이 선(시인)
 
 
1. 서론
 
한국 시단의 모더니즘 운동의 대표적인 유미주의적 이미지스트는 정지용과 김광균이다. 그런데 한국시단에 알려지지 않은 이미지스트 시인으로 동시대를 살다 간, 남원 출신의 박항식 시인이 있다.
 
「8월」은 박항식의 대표적 이미지 시로서, 김광균의 「추일서정」이나 정지용의 「유리창」과 대비될 작품이다. 박항식의 시를 중앙문단에 소개하면서, 박항식의 이미지 시의 특징을 김광균, 정지용 시와 대조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2. 김광균의 이미지 시의 구조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은 도회적 감각과 서구적 세련미가 있다.
「설야(雪夜)」, 「와사등(瓦斯燈)」, 「외인촌(外人村)」, 「데생」 등의 작품에서도 선명한 이미지 시로서의 고른 작품성을 보여준다.

1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2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3 도룬 시의 가을을 생각게 한다.
4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5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6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7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8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9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10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11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12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13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14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15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16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서정」 전문
 
「추일서정」은 ‘낙엽’을 중심으로 한, ‘추락 이미지’와 ‘소멸 이미지’, ‘하강 이미지’를 각 시행 전체에서 골고루 보여준다. ‘낙엽이 떨어진다’라는 단순한 명제에서 시는 출발한다. 각 행들은 낙엽의 ‘하강 이미지’ ‘소멸 이미지’ ‘추락 이미지’의 동사와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지러진― 풀어져― 사라지고― 구부러진― 나부끼고― 자욱한― 차며― 황량한― 버릴― 없어― 띄우는― 기울어진― 긋고― 잠기어 간다>는 표현을 눈여겨보자. 모두 낙엽의 ‘사라진다’는 ‘소멸 이미지’와 ‘추락 이미지’ ‘하강 이미지’를 가진 용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각 시행의 명사나 주어들은 어떤 이미지 역할을 할까?
<낙엽― 폴란드 망명정부― 지폐― 포화― 가을― 구겨진 넥타이― 일광의 폭포― 급행열차―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 구부러진 철책― 셀로판지― 구름― 풀벌레소리― 호올로― 허공― 돌팔매― 풍경― 장막 저 쪽― 고독한 반원> 는 표현을 눈여겨 보자. 모두 낙엽의 ‘소멸 이미지’를 가진 단어와 표현이다. ‘떨어진다’는 낙엽의 이미지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각 행마다 철저히 계산된 낙엽과 치환되는 단어, ‘소멸 이미지’와 ‘하강 이미지’의 사물을 다양하고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각각의 사물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낙엽의 ‘날아간다’와 ‘떨어진다’와 ‘사라진다’는 이미지를 차용한 이러한 표현은 정지된 시에 운동감을 준다. 시를 흔들어 주며 정서를 환기시킨다.
낙엽의 ‘소멸 이미지’와 ‘하강 이미지’를 표현하는 문장들은 어떤 표현이 있을까?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길은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두 시의 급행열차가 달린다―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 내인 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부분을 눈여겨 보자.각 문장들은 다른 사물을 차용하였지만, ‘사라진다’ ‘풀어진다’ ‘나부낀다’ ‘기울어진다’ ‘잠긴다’는 ‘소멸 이미지’ ‘하강 이미지’의 동사를 내포하고 있다. ‘낙엽’의 ‘떨어진다’는 이미지를 붙잡고 여러 형태의 공감각적 이미지의 합일을 보여준다.
6, 9, 11행 <조그만 담배 연기 내어 뿜으며―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부분은 현대문명에 대한 반항과 부정, ‘소멸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닉하게도 ‘연기, 지붕, 구름’의 연상 이미지는 ‘둥둥 뜬다’라는 ‘상승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시에 ‘운동감’을 주며 시를 처지지 않게 받쳐준다.
그러나 12-14행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에서는 다시 부정적 추락과 쇠락의 ’하강 이미지‘로 변환하고 있다.
5, 7, 11, 16행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부분에서도 ‘하강 이미지’가 있다. 무거운 주제를 감각적으로 가볍게 그림을 그리듯 가볍게 터치하고 있다. 다양한 은유는 내용과 주제의식, 시대 상황까지 유의미한 진정성을 심어준다.
시는 역사와 사람을 대변한다. 욕구불만시대의 지성은 나라를 잃고 좌절하였다. 해방을 맞았지만, 남북분단과 강대국의 지배라는 혼란에 휩싸인다. 시인의 박제된 지성과 역사의식, 문명에 대한 불안감이 잘 표출된 작품이다.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 라는 표현은 절박하고 급박한 실존적 반항과 행동주의가 투영되어 있다. 김광균은 「추일서정」 에서 교과서적 표현주의 이미지 문학의 외형적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지는 가볍다, ‘단어 합성’의 기술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시다, 위의 시는 현란한 기교주의, 표현주의 시의 감각적 미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3. 정지용의 이미지 시의 구조
 
정지용의 「유리창」은 또 다른 독특한 이미지와 심상을 보여준다.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2 열 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3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4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5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6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7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8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9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10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 전문
 
정지용의 대표시 「유리창」은 김광균의 「추일서정」이나, 박항식의 「8月」과는 다른 이미지의 시다.
1행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객관적 상관물을 차용한 화자의 심상이 압축된 객관화가 완성된 표현이다. ‘유리’라는 사물에 화자의 마음을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라고 담아놓았다.
3행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나, 5~6행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부분의 선명한 이미지를 주목하여 보자.
「유리창」은 고요한 서정이 내밀하게 압축되어 있다. 7-8행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부분의 내면적 고요의 관조적 심상에 집중하여 보자. 승화된 슬픔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정지용의 「유리창」은 기교가 찬란한 이미지 시가 아니다. 모든 이미지와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시의 기조는 조용하고 단정하다. 아니, 억압이 느껴질 정도로 정숙하다. 냉철한 이성이 폭발적 슬픔을 억압한다. 절제의 미학이다. 그래서 더욱 절절하다.
이 시는 사물인 ‘유리창’과 사물의 마음인 화자가 ‘산새가 되어 날아간, 너’에게 내밀하게 ‘말 걸기’를 한다. ‘너’에게 속삭이는 심상의 편지다. 화자의 독백적 고백록이다.
이미지 시지만, 언어유희라고 느껴지는 구절이 없다. 각각의 시행은 ‘슬프다’ ‘외롭다’ 라는 단어를 관통한다. 시와 시인이 먼저 감상에 빠지면 안 된다. 감정의 절제를 보여주어야 한다. 「유리창」은 심상의 진정성이, 독자를 압도하여 공감을 이끌어낸다. 정지용은 찬란한 슬픔을 완성하는 마력의 이미지스트다.

4. 박항식의 이미지 시의 구조
 
(1) 박항식 소개
 
박항식 시인은 1917~1989년까지 생존한 남원 출신 시인으로 한국적 정한을 이미지로 선명하게 표현한 시인이다. 1949년 한성일보 신춘문예 시 『눈』 당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文藏臺』 당선. 1946년 시집 『白沙場』(1946, 삼덕문화사), 1959년 시집 『流域』(삼덕문화사), 1976년 시조집 『老姑壇』, 1981년 시집 『方壺山 구룸』을 발간하였으며, 원광대에서 시인을 양성한 교육자다.

박항식의 대표시 「8월」은 김광균과 정지용의 이미지 시와 어떻게 다를까?
어떤 구조적 차이와 내용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을까?
 
「8월」은 전통적 이미지 시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의 효과는 위에 소개한 김광균, 정지용의 시와 전혀 다르다. 그 이유는 첫째, 민족적 정한의 상징인 ‘봉선화’를 제재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표현주의는 관념을 배제하며 유미주의를 지향한다. 이미지 시의 문제점은 화려한 기교주의로 인한 내용과 주제의 결핍인데 그 문제점을 박항식 시는 거뜬히 해결하였다.
‘봉선화’는 가장 한국적 정한의 ‘집단무의식’을 대표한다. 한국적 집단무의식은 참고 견디는 인고다. 봉선화는 일제 강점기에 애국가처럼 불렸다. 무언의 항변이며 데모였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구슬프게 부를수록 효과적이다.
시골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보는 봉선화, 화려하고 아름다운 봉선화, 낙화가 더 아름다운 봉선화, 손톱에 꽃물을 들여 겨울까지 견디는 봉선화. 봉선화는 민족의 눈물이요, 카타르시스다. 봉선화는 한국인의 정서적, 정신적 지주였다. 시골마을의 상징이면서― 서울로 시집간 순이, 서울로 돈 벌러 공장에 간 순이, 서울 술집에 팔려간 순이를 상징한다. 또한 아직도 그리운 고향, 어머니, 장독대의 상징이다.
둘째, 위의 시의 완성도는 제목 때문이다.
「8월」은 시간 이미지를 내포한 현대적 감각의 초현실주의적 제목이다. 아마도 시창작 초보자라면 위 시의 제목을 「봉선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시가 제한적이며 한계성을 갖게 된다. 「8월」이라는 제목은 시원하다. 여유와 유연함이 있는 확장된 제목이다.

(2) 「8월」의 이미지 구조
 
그러면 「8월」 시가 갖는 구조적 매력은 무엇일까?
아래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가) ‘색채 이미지- 빨강’

<봉선화 고 빨강 꽃 속에(1연 1행)/ 8월이 들어있다.(1연 2행)/ 눈동자 푸른 바닷가에서(3연 1행)/ 빨강 모자를 쓰고 웃는 少女-(3연 2행)//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月이 온다(6연 1행)>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8월은 선명한 ‘빨강색 이미지’다. 빨강 모자를 쓴 소녀는 곧 봉선화다. 선명한 ‘빨강 이미지’다. 위의 시는 봉선화를 소재로 빨강이라는 ‘색채 이미지’로 「8월」을 구조화하고 있다. 1
 
나) 「8월」이 상징하는, ‘시간 이미지’

위의 시에서 모든 연들은 제목 「8월」에 연결되어 있다. 시간이라는 관점으로 각 연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연― 봉선화 고 빨강 꽃 속에/ 8月이 들어 있다.(시간)
2연― 8月이 손톱에 옮아 온다.(시간)
3연― 눈동자 푸른 바닷가에서(장소인 동시에, 시간― 계절을 명시함)
빨강 모자를 쓰고 웃는 少女(봉선화 이미지)
4연― 손톱이 자라면 차츰/ 8月이 밀려 가겠지만(시간)
5연― 세월을 등에 지고 기대어/ 생각노라면(시간의 경과)
6연―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기억 속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月이 온다.
(과거의 현재화, 지난 기억을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
 
다) 봉선화- 사물의 관점과 시점에서 본 시의 이미지 구조
 
「8월」은 사물시로서, 사물의 관점과 시점에서 씌어졌다.
1연: 봉선화― 빨강꽃― 8월(사물의 관점, 사물적 시점)
2연: 봉선화 물들임― 빨강― 8월― 손톱(봉선화 물들이기, 손톱도 사물임. 사실적 사물의 관점과 시점)
3연: 바닷가(시간, 계절)― 빨강모자(봉선화 치환은유)― 소녀(봉선화 이미지)(봉선화의 사물의 관점)
4연: 손톱― 8월(시간의 경과, 사실적 사물의 관점)
5연: 세월(인간의 관점과 시점)
6연: 1행 기억(화자, 또는 시인의 시간적 시점, 인간의 관점)
2행 손톱물― 빨강― 8월(제목과 연결시킴, 봉선화의 사물적 관점과 시점)

위의 시는 사물시로서 사물의 관점에서 씌어졌다. 그러나 2연, 4연, 5연에서 보여주는 ‘세월’ ‘기억’ 등의 단어들은 숨은 인간 화자의 목소리가 엿보인다.
 
(3) 박항식이 중앙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런데 왜 「8月」과 같은 우수한 이미지 시를 쓴 박항식 시인은 중앙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필자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관점에서 유추해 보았다.
첫째, 지방시인의 한계성. 중앙문단 진출이 막힘. 학연, 지연, 거리, 발표지면 등.
둘째, 장르적 분산. 교육자, 저자, 시인, 시조시인, 동시작가 등 지필활동이 분산됨.
셋째, 홍보 부족. 서울에서 시집을 출판하지 않고 활동하지 않아서 중앙문단이 모름.
넷째, 평론가와 제자들이 부각시키지 않음.
다섯째, 노년기, 시인 후반기에 시집을 내지 않음.
 
(4) 박항식의 기타 이미지 시
 
박항식의 아래 시를 소개하는 이유는, 위의 모든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음을 밝혀 둔다. 아래의 이미지즘 시들은 박항식 시의 경계가 다양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가 쉽게 독자와 친교할 수 있는 시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둔다.


靑山을 사랑에 눈 뜨게 한
도라지꽃 피었네
청산을 만 취하게 한
한들한들 도라지꽃 피었네
 
淸明한 가을날
풀 푸른 내 故鄕 뒷山에
이쁜 固執으로 도라지꽃 피었네
― 박항식, 「도라지꽃」 전문
* 청산을 반만 취하게 한 → 의인화
* 이쁜 고집으로 도라지꽃 피었네 → 의인화
「도라지꽃」은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단 7행의 짧은 시가 갖는 매력은 김소월의 「산유화」에 비교할 수 있다. 정답고 친절하며 사유적이다. 특히 밑줄 친 부분은 압권이다. <청산을 반만 취하게 한/ 한들한들 도라지꽃 피었네> <이쁜 고집으로 도라지꽃 피었네> 인간과 산, 도라지가 한 공간에서 포옹하고 호흡하는 시다. 「동그라미」처럼 노래로 만들어 불러도 좋은 이쁜 시다.
 
 
마음이 서러우면 쏟아지는 눈물
알알이 이슬져 영롱하구나
 
하늘은 언제나 쪽빛이어도
푸른 잎 푸른 恨을 연상 지녀서…
 
무성한 구름이 지나가는 날에는
길 잃은 새들이 여기 모여서
가지각색 이야기를 조잘대었다.
― 박항식, 「앵두」 전문
* 쏟아지는 눈물/ 알알이 이슬져 영롱하구나 → 앵두의 시각 이미지
* 무성한 구름이 지나가는 날에는 → 시각적 이미지
「앵두」처럼 그의 시는 달콤하다. 인간과 자연을 품어주는 따뜻함이 묻어난다.
동시를 쓰는 시인의 맑고 순수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바다는 사과처럼 둥그러운 껍데기에 싸여 있습니다
(중략)
사과를 먹은 사람은
그 향기에 볼이 붉어지고
바다를 가는 사람은
그 물감에 눈이 파알해집니다
 
바다!
바다는 사철 사과처럼 행그럽습니다
― 박항식, 「바다」에서
* 향기에 볼이 붉어지고 → 후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화
* 물감에 눈이 파알해집니다 → 시각 이미지, 색채 이미지
「바다」는 권태응의 동시 「감자꽃」과 비교되는 시다. <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같은 발상에서 시작한 시지만, 내용의 질량이 다르다. 박항식의 「바다」는 동그라미에서 이끌어낸 사유와 철학이 있다. 시의 향기가 시간을 넘어 코끝에 맡아진다. 세상을 위로하는 착한 시다.
 

해는 西으로 기울어
琉璃窓마다 칸칸이 곱게 크레용을 발라 놓고
― 박항식, 「송학초등학교 일요일 오후」에서
* 크레용을 발라놓고 → 색채 이미지
곱디 고운 초등학교 교실의 어린이들 모습이 상상되는 색채 이미지 시다.
 
 
초록 치마를 입고 섰는 少女
덧없이 흐르는 歲月이지만
빠알간 리본 하나로
푸른 하늘을 온통 꾸미고 섰다.
― 박항식, 「코스모스」에서
* 빠알간 리본 → 색채 이미지
* 하늘을 꾸미고 섰다 → 역발상
역발상 시의 진수다. ‘소녀가 하늘을 꾸미고 섰다’는 새로운 표현은, 거시적 색채 이미지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발랑 발랑 발랑 발랑……
조랑 조랑 조랑 조랑……
― 박항식, 「포플라·Ⅰ」
* 발랑 발랑 발랑 발랑/ 조랑 조랑 조랑 조랑
→ 시각 이미지/ 운동감
양면이 다른 미루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팔랑이는 모습을, 이토록 귀엽고
명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발랑 발랑, 조랑 조랑 귀여운 의태어가 압권이다.

 
베짜는 소리
한창 들려 오는 날
 
나무는 고깔을 쓰고
합창을 했다.
― 박항식, 「살구꽃」
* 합창 → ‘살구꽃’의 청각 이미지
살구꽃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그 진한 향기와 팝콘처럼 닥지닥지 붙은 하얀꽃을. 꽃들이 합창을 한다면, 온 동네에 향기가 진동할 것이다.
 
 
항상 끄트머리로부터 처음이 온다는
號外의 방울소리
― 「아침」
* 방울소리 → ‘아침’의 청각 이미지
사유가 있는 한 문장의 짧은 시로 처음부터 창작하였으면 한다. 이 한 문장으로 완성된 시다. 아침의 청각 이미지가 청량하다.
 
5. 결론
 
「8月」과 함께 한국의 중앙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박항식의 이미지 시 몇 편을 소개하였다. 또한 과거의 작품을 통한 현재적 관점에서, 박항식 시인의 위치와 문학적 가치를 평가하여 보았다. 박항식 시의 한국적 서정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김광균, 정지용과 함께 박항식을 새로운 이미지스트 시인으로 인정하는, 문학적 재평가의 장이 열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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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날샘일기- 김정현/ 가온문학 봄호 2016년/ 이선 명시 읽기 2018-12-26 0 1683
99 민용태- 서울에 시집온 봉숭아/ 2016년 가을호/ 가온문학- 명시 읽기/ 이선 평론 2018-12-26 0 1680
98 강기옥- 담쟁이 1/ 가온문학- 명시 읽기/ 이선 평론/ 2015년 가을호 2018-12-26 0 1701
97 이선 평론/ 가온문학- 명시 읽기/ 이기철- 불행에게 이런 말을 2018-12-26 0 1703
96 이선 평론/ 심상운- 칠 놀이 또는 페인트통/ 2015년 가온문학 겨울호 <명시 읽기> 2018-12-26 0 1702
95 6 ․ 25 33 전봉건 2018-12-26 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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