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21세기 '하이퍼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상운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 '나'라면 제2 제3의 화자는 '너'와 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칭 시점에서 3인칭 시점으로 바귀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땨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 '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조향/「 바다의 층계」, 문덕수/「마릴린 몬로」는 하이브리드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문덕수「철원군 노동동 당사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 만이 아닌 '너' 나 '그' 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방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 '나' 와 일반 서정시의 '나'는 입장이 전혀 다는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 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엥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모겆ㄱ의식, 의도상과 연관ㅇ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송의 서열에서 해방 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모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므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조1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하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으이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갓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
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
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
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이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직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 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
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
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자연풍경 + 사회와 정치적 사건 + 실내의 식탁 광경 + 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드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 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먹는다'라는 행위와 '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히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 '나'와 '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 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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