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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창작론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2019년 03월 09일 21시 46분  조회:1950  추천:0  작성자: 강려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1
죽음을 향해 바삐바삐 진행되는 삶의 행진 속에서 하나의 웃음, 하나의 즐거움은 초월적 득도의 자세, 곧 풍류스러움이다. 우리의 멋 또한 버선코의 가벼운 오름세, 높은 파도의 가벼운 내림세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2
살아 있음은 늘 살아 있을 것 같은, 늘 살아 있고 싶은 소망을 키운다.
이것은 삶이 지향하는 불멸에 대한 욕구이다 
 
3
자유시, 자유시.....
그 자유시가 너를 구속할 때는
차라리 그 자유로부터도 떠나라.
 
 
4
자화상 / 안또니오 마차도
 
이게 제 얼굴, 이게 제 마음입니다 읽어보시지요
권태스러운 눈 몇낟, 목마른 입 하나
다른 거야 별거 아니지요 산다는 거 그저 그런 거
뻔히 아는 그런 거
놈팡이 짓이나 바람기 같은 별 중요할 것 없는,
 
조금은 미친 기, 조금은 시가 있는,
거기, 한방울의 우수의 포도주
주색잡기요 다 좋아하지요 하나도 안 좋아하든지
노름이요? 한번도 안했습니다
마시는 건 하지요, 어찌 내 고향 세비야를 배반하겠습니까,
 
작설차 다섯 여섯 잔 정도
여자요? 돈 후안이 아닌 바에야 그건 안되지요
나를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난 모든 걸 너무 가볍게 사랑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몇가지 것들만을
민첩성 재치 멋 그리고 기발함
그런 것을 의지나 힘 위대성보다 좋아하지요
나의 풍류도 어렵게 어렵게 찾은 겁니다 차라리
고대 희랍식 순수한 뜻으로의 멋이나 투우사 같음을 사랑합니다
여리고 가녀린 달의 우수보다, 하나
햇살의 반짝임 하나, 마침맞은 웃음 하나를 사랑합니다
반은 집시 반은 빠리지앵 사람들 말이지요
몽마르뜨 마까레나 성모나 모두 숭앙합니다
그리고 무슨 이렇다 하는 시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나의
첫 소망은 멋진 깃대 꽂은 투우사가 되고 싶었어요
 
이미 늦었죠 세상 산다는 게 바쁘군요 하지만 제 웃음은
즐겁습니다 늘 바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5
인간이 신의 꿈이라면 인간은 신의 명령과 신의 꿈을 벗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다.
 
6
하느님이 하느님이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하듯, 우리 또한 우리이기 위해서(우리가 단순한 그림자나 꿈이 아닌, 실체 혹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신이 꾸는 꿈의 산물이라면, 신 또한 인간이 꾸는 꿈의 산물이다.  
7
"비밀은 가장 따스한 햇살에도 꽃피지 않는다"
꽃과 열매까지를 거부하는 은밀한 이름은 노자의 '무명(無名)'을 연상시킨다.
 
8
(전략)
그러나 그런 마술의 시간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망각이 살지 않는 곳에
행복이 오지 않듯, 하나의 죽은 목소리가
제풀에 꺼져갈 뿐
어느 바다도 하늘도 꽃도 여인도 없다
아무도 상처투성이의 장미를 계속 달고 다니는 하늘을, 여인을 보지 못했다
부질없는 입들 사이에 길을 잃은 사막
얼마나 견고한 침묵이 장미를 덮고 있는가
나는 모른다 어디에 진정한 생명이 있어 장미의 혼을 빼고
그녀를 시간으로부터
떨쳐놓을 수 있을지
어디에 장미의 불가능한 살결이 좁아질 대로 좁아져
그 서서한 수수께끼의 기호가 가능해질지, 변함없는 본질의 불꽃이.
 
- 리까르도 몰리나리 <피에게 바치는 송가>
 
그렇다 영원과 절대, 사랑에 대한 꿈은 곧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집착이다. 시인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자이다. 거기에 시간의 횡포는 우리 눈앞에서 모든 꽃을 사위게 한다. 결국 '변함 없는 본질의 불꽃'으로 남을 수 있는 장미란 불가능하게 된다.
 
 
너는 대평원 속 젖은 계절의 달아나는 태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온다
세월의 차가운 이파리들 그 넓고 굳은 숲을 넘어
색깔도 희미해진 채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행복을 느낀다 행복을 간직한다 말없는 말 하나로
풀잎 사이 소곤대는 발걸음이 권태를 덮는다 멀고 꺼져가는 향기가
머물러 피운 불길 너는 곧바고 몸을 추스리고
뼈 사이 부서진 주름투성이의 옷을 집는다
너를 스치고 네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영혼과 깊
이를 요구하는가
그렇다 대기처럼 불길과 안개가 자욱한 너의 입속으로 내가 들어
가리니
너의 발걸음은 대양의 해일과 느린 하늘 그 마지막 숨결에 젖은 광휘
빨간 바다 기러기와 밤이 날다 깃들이는 남쪽의 꿈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마지막 하늘
꽃핀 어둠 밑으로 돌아와 고뇌의 목소리로 부른다
그리움에 차서 산산히 부서진 채로.
 
망각이 비둘기처럼 커갈 때 너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바람은
끝없이 나무들 사이에서 울부짖고 하나의 경악처럼
굴뚝의 검은 목구멍으로 파고든다 안에 불이 탄다 서서히 그리고
문득 기습당한 고독감이 부서진 기둥 사이에서 서성인다
영혼은 읽어버린 따스함을 찾는다 닳고 닳은 옛 책들 속이나 지
상의 
횡포 속으로 도망쳐온 발걸음 속에서
그토록 너를 사랑했기에, 오늘 과거도 아늑하고 세월의 차가움도
빗줄기도 따스하다
 
나는 나와 함께 있는 허수아비를 바라본다 말없이 키만 우뚝 선
두려움 없이 나의 생각을 이들 불길에 데운다
혹시 이 밤 이 불을 지키며 내가 죽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오늘밤
나의 선조들의 마술스러운 미궁의 삶과 그 영원성을 반추하며 나
자신도 나의 주위에 텅빈 채 머물러 있는 실존의 하나일 것을 생
각하며
 
그리고 나는 나의 거칠고 스산해진 무거운 머리칼과 흩어져서 서성
대는 구름떼를 정성스레 매만진다 허무를 허무 속에 더욱 가두고
사랑도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기
그런 마음으로 너를 생각한다 꿈속에서 이윽고 동이 터오른다.
 
- 기까르도 몰리나리 <겨울밤에 바치는 송가>
 
기억도 아득한 네가 생각난다. 깨어진 기둥처럼 이미 잊혀진 사연들이 겨울의 찬바람과 함께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나는 나의 사랑 그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키만 큰 허깨비의 삶. 날이 갈수록 나는 더욱 춥고, 추억의 벽난로에 몸을 데운다. 책을 읽는다. 거기에도 나와 같은 애절한 사랑이 있음을 본다. 전신전화국 앞에서의 이별을 아파한다. 그와 똑같은 아픔과 절규가 나의 선조들의 아픔이었음을 알고 놀란다. 나만의 고뇌인 줄 알았는데.
 
나의 나이는 인류의 나이이다. 구름의 나이이다. 이미 머리칼도 스산하고 구름 또한 평온하지 못하다. 나는 나의 머리칼과 우주의 머리칼 혹은 구름을 정성스레 매만진다. 슬픔과 그리움을 졸업해서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거나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는 없음을 안다. '욕심 버리고 사랑하기'의 마음일 때 동이 트는 것이 보인다. 세상은 나처럼 고뇌하고 또 조금은 웃는 모습으로 있구나! 
 
 
- 스페인,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민용태 ; 창작과 비평>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2

 
1
말라르메는 시란 이리저리 떠돌며 사라지려는 이미지들이 주는 암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대상에 이미지가 아니라 정의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을 점차적으로 예측해가는 데서 생기는 기쁨의 4분의 3을 없애는 일"이라고 말한다.
 
2
감동과 공감대의 형성이 시와 수수께끼의 다른 점이다. 시는 같은 수수께끼여도 감동이나 설득력을 가진 공감대를 형성한다.
 
3
상징주의 시는 대상에서 느낀 직접적 감각을 이미지로 전개한다. 시적 이미지란 우리의 일상언어나 문학관습에서 때묻지 않은 창조적 이미지이다.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일수록 좋은 것이다. 그것은 처음엔 생소해서 저항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곧 색다른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4
인상주의에서 대상은 고정된 색깔이나 모양이 없다. 하늘은 항상 푸른 게 아니라 빛에 따라 까맣게 보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 노랗게 보일 수도 있다. 상징주의의 이미지는 시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굴절되는 자연을 제시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런 굴절된 이미지, 그런 오목 볼록 거울의 희미한 이미지들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가늠해보는 재미를 느낀다. 
 
5
산다는 것은 내가 산산이 부서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 슬픔을 반추하듯 바다는 깊게 울부짖는다.
 
6
"주여, 용서하소서,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너무 사랑한 죄이옵니다"
 
6.
돌아오는 길은 모두가 슬픔
 
세르누다에게 바치는 시
-나의 가장 조용한 친구 민용태에게
 
아니면 차라리, 모든 것은 슬픔,
슬픔은 우리 속에 꼭꼭 지니고 다니는
재산, 지금 슬픈 것은 원래 슬펐던 것
백번을 되돌아와도
백번 우리의 슬픔에
꿈은 더욱 멀리라
돌아오는 길은 더욱 비어 있으리.
 
 
-중남미 시인 '에우헤니오 플로리뜨' 중에서 
 
 
 
*
 
1
'자연스러운 화장'은 두 번의 거짓말이다. 첫째는 화장을 자연 그대로라고 속이고 있는 점이고, 둘째는 그 화장된 자연이 실제처럼 보이도록 한 점이다. 새로운 예술은 이 화장술의 영역이다. 시는 말의 놀이이다. 새로운 예술에서 예술가는 비로소 철학자, 도덕군자, 지성인의 말을 벗고 말의 연금술사 정도로 겸손해진다. 말과 '유리창'의 채색을 책임지는 기술자의 위치로 물러서는 것이다.
 
2
'아'의 연속이 갖는 수평감보다 "씨, 씨, 씨"가 갖는 강력한 수직의 솟아오름이 내 존재의 환희다.
더군다나 '씨' (si)는 스페인어에서 '아니다'가 아닌 '이다!'의 뜻이다. '예스!'다 생의 긍정적 환희의 소리가 이 이상 적합할 수 있겠는가. '씨, 씨, 씨'는 높게 솟구치는 존재의 소리며 바다의 말이다.
 
3
세상을 사는 일은 '야간비행'이거나 밤길을 걷는 것이다. 우연과 숙명이 겹치는 벽과 구토의 현장일 수 있다.  살아 있음, 여기 있음, 그 느낌은 또 얼마나 기적처럼 귀한 확신인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환희일 수 있다. 영원한 행복, 본질과 영혼은 이제 육체를 찾는다. 느낌을 찾는다. 육체와 시간 속에 영혼과 영원의 황홀함이 살아간다. 기옌은 선사(禪師)들처럼 색즉시공을 찾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변하는 현실 속에 나라는 실체가 숨을 쉬고 있음을 볼 뿐이다. 본질이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 생명의 욕구와 용기만큼 나는 분명히 있다. 대기는 은혜롭다. 깊다. 나는 알 수 없는 이 실존상황 속에 존재하는 전설!  
 
4
시가 자연이나 현실을 투영한다는 전통 시학이나, 시가 시인의 감정이나 내적 체험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낭만주의적 영감론과는 반대로, 시는 자연과 상관없는 언어의 무늬라는 것이 기옌의 시학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대상이나 일상체험을 발견하려고 하는 독자는 자연히 그의 시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옌은 삶의 넓은 위상과 의미를 궁극적으로 파악하려는 지적 자세를 잊지 않고 있다. 여기에 그의 시가 극도의 지적 성찰과 추상성을 띠게 된 연유가 있다.
 
5
에우헤니오 플로리뜨는  "희망은 인간이 마지막 버리는 병이다"라고 했다. 기옌은 우리 모두처럼 "하늘의 태양과의/ 언약이 있음"을 기억한다. 태양과의 약속이 가장 확실해지는 계절은 봄이다. 기옌은 다음의 연시에서 생의 환희에 이른다.
 
6
봄의 구원
 
오직 너의 벌거숭이
몸뚱어리에 꼭 달라붙어,
대기와 빛 사이
너는 순연한 원형
 
너는 있다! 아주 벌거숭이여서
아주 잇대어 있어서, 아주 단순해서
세상은 또다시 참을 수 없는
우화가 된다
 
주위로 하나씩 하나씩
일상의 사물들이 모양지어
나타난다 그리고 사물들은
기적이다 마술이 아닌
 
썩을 수도 용해될 수도 없는
태양의 행복
하나의 유리창을 통해
투명한 진실이 펼쳐진다
 
온 천지에 확실한
광휘가 펼쳐진다
보라 이 시간이
그 하늘로 행진하고 있음을.
 
7
기옌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달에 대한 무서운 비약 "오, 달이여, 수천의 4월이여!" 이런 구절에서 시어는 상식의 마지막 발판을 잃는다. '달'과 '수천의 4월' 사이에는 무의식에 가까운 유사성만 존재한다. 단순한 상징이기에는 너무나 감각적이고, 감각적이기에는 너무나 먼 비유이다.
 
8
살았기에 죽음까지 어여쁜 법열이여
 
나는 호르헤 기옌을 읽으며 가끔 우리의 김현승을 생각한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고 노래한 플라타너스의 시인은 나무와 새를 노래한 점에서 기옌과 비슷하다.
 
 
시계 12
 
난 말했다 모든 건 이제 충만 그것
플라타너스 하나 몸으로 떨었다
은빛 반짝이는 이파리들이
사랑으로 수런댔다
파란색은 잿빛이었다
사랑은 태양이었다
그러자 한낮
새 한 마리
바람 속에 노래를 태웠다
꽃은 너무도 놀랍게
자신의 바람 속에
노래로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키가 큰 벼이삭들 사이
갑자기 노래로 자라오른 꽃
그게 나였다 모든 주위 속
그 순간 한 중심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 모든 건
완전했다 하나의 작은 신을 위하여
난 말했다 모든 건 완전
시계 12시!
 
여름 한낮, 12시의 절정감 생명의 절정 그 법열을 새가 노래한다. 꽃이 노래로 핀다. 파란색이 잿빛이 된다. 같은 색, 생명의 색깔, 깨달음에 가까운 이런 절정감은 이 시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생명감으로 충일한 절정의 환희를 기옌만큼 명확하게 표현하기도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이름없는 얼굴이 되어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인간이다
아무 상관없는 나의 추상
어찌할 것인가 소리칠 것인가 다정하게
피로의 물결 속에
침묵 속에 변덕 없는 무명을 간직하고
너무 많이 아야기해서 말이 없는 
말소리 하나를 세운다, 난 참 좋은 친구예요.
 
기옌은 사람과 자연이 하나임을 느낀다. 어쩌면 자연이나 동물이 더 인간적일 수 있음을 안다. 그는 말 앞에 선다. 풀밭에 갈기가 질질 끌리거나, 꿈적 않고 가만히 서 있거나, 귀를 조용하게 내린 말을 바라보다 그는 소리친다. "저기 있다, 말들이, 거의 초인간적 자태로."
 
생명의 시인은 죽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생을 구가하는 시인은 사실 그의 열락을 죽음 위에 세운다. 그 기쁨의 뿌리는 사실 죽음이다. 그는 말한다. "나의 확신은 어둠속에 뿌리를 둔다 / 번개가 어두울수록 그 빛은 더욱 나의 것 / 검은 어둠속에 하나의 장미까지 웬지 우뚝 선다." 
 
- 중남미 시인 '호르헨 기옌' 중에서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3

1
앙드레  브르똥은 1924년 쉬르리얼리즘 선언을 발표한다. 그는 "심리적 자동필기법을 통하여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쉬르리얼리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쉬르리얼리스트의 임무는 무엇보다 "일체의 도덕적 미학적 편견을 떠나 이성의 작용으로 인한 모든 제약을 벗어난, 의식과 사고의 진솔한 기능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절대 사랑을 시도하지 말자
 
그날 밤 바다는 잠이 없었다
그 많은 파도들에게 이야기 이야기하다 지친 바다는
마침내 멀리 도망가 살기로 했다
누군가 바다의 쓰라린 색깔을 알아주는 그곳으로
 
잠도 없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곤 했다
밤 한가운데
다정하게 팔과 팔을 껴안고 있는 배들
아니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는
망각의 옷을 입고 늘 창백한 몸뚱어리들
 
바다는 폭풍을 노래했다 어둠의 하늘 아래
그 어둠처럼,
별과 새를 잡아먹는 항상 원한 많은
그 어둠처럼 바다는
소리소리 치며 함성을 터뜨렸다
 
바다의 고함소리가 빛과 비와 추위를 가로질러
구름으로 올라간 도시들에게까지 들렸다
시엘로 세레노 콜로라도 글라시아르 델 인피에르노
그러나 모든 도시는 
광고와 떨어진 별들뿐
흙덩이 손 위에 펼쳐진
 
바다는 도시를 기다리다 지쳤다
거기 바다의 사랑은 오직 하나의 알 수 없는 구실일 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난날의 미소일 뿐
 
그리하여 바다는 다시 꿈을 거두어 서서히 되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아무 이야기도 모르는
세상이 끝나는 곳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벌거숭이 발로 유리알을 밟는 일, 또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정면으로 얼굴을 맞대고 태양을 바라보는 일
해변은 죽어가는 아이 하나하나를 위해 시간과 나날을 헤아린다
하나의 꽃이 핀다 하나의 탑이 허문다
모든 것은 마찬가지 나의 팔을 펼쳤다 비가 오지 않았다 유리를
밟았다 해가 없었다 달을 바라보았다 해변이 없었다
무슨 상관이랴 너의 운명은 일어서는 탑을 바라보는 일, 열리는
꽃을,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일, 그밖에 화투장을 잃어버린 화투처
럼 그냥 우두커니 서서.
 
모든 의미와 좌표를 잃어버린 허무감이 이 시의 분위기를 이룬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고 좌절이 있다. 태어난다 죽는다 모든 것은 매한가지로 삶의 모습일 뿐이다. 거기에는 물론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안타까움과 절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 실존의 냄새일 뿐.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그냥 살아 있기이다. 화투장이 모자란 화투를 들고 칠 수 없는 화투장처럼 그냥 우두커니 서 있기이다.
 
 
망각이 사는 곳
 
망각이 사는 곳
여명이 없는 황량한 정원에서
나는 오직
잡풀 사이 묻힌 하나의 돌의 기억으로 남을지라
그 돌 위에 바람만이 불면의 밤으로 달아나리니
 
수많은 세월의 품속에 하나의 육체를
가리키는 나의 이름 하나로 남을지라
아무런 소망도 없는 내가 될지라
 
거기 그 커다란 지역에서는
사랑이 무서운 천사가 되어
그 날개를 나의 가슴에
이제 쇠창처럼 숨기지 않으리라
폭풍이 몰려와도 가볍게 아름다이 미소지으리라
거기 자기의 모습을 닮은 주인을 찾는 이 열망이 끝나는 곳
스스로의 인생을 남의 인생에게 맡기고
다른 눈들이 마주보는 수평선밖에는 바라볼 데가 없다 할지라도
 
거기서는 고통도 행복도 이젠 이름밖에 아무것도 없으리
하나의 기억 주위로 원형의 하늘과 땅
 
마침내 거기서는 나 자신 알 수도 없이 내가 자유로워지고
나는 그리움의 안개가 되어
어린애 속살 같은 가벼운 그리움으로 남으리
 
저 너머, 그 먼 곳
망각이 사는 곳에서는.
 
 
세르누다의 사랑은 잊혀질 뿐 죽지 않는다. 사랑은 살아 있음의 색깔이다. 그리고 죽음은 또다른 피안이다. 세르누다는 "사랑은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우리들 자신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죽는다, 그 고뇌도, 즐거움도. 그러나 사랑과 사랑에 대한 소망은 영원하다. 그 영원함은 오직 망각에 의해서만 무형으로 된다. 세르누다는 욕망이 아닌 사랑을 영원 속에서 꿈꾼다. 사람은 망각에서 와서 망각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아닌 데서 와서 내가 아닌 데로 간다. 시인은 그 길에 사랑이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내가 없는 곳, 내가 잊혀진 길에 사랑만 오롯이 꽃피어 있길 기원한다.   
 
 
- 중남미 시인, <루이스 세르누다> 중에서
 
 
생명
 
종일 새 하나 가슴에 와 지저귄다
입맞춤의 세월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산다는 것 산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
입맞춤이거나 새거나 늦거나 빠르거나 영원히 오지 않거나
죽는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남의 심장 하나 잠잠해지는 소리
아니면 산다는 것은 결국 남의 무릎 땅에서 헤엄치는
금발의 머리칼을 위한 황금배 하나
아픈 머리, 황금 관자놀이 그러나 곧 떨어질 햇덩이 하나
여기 어둠속에서 나는 강물을 꿈꾼다
지금 태어나는 파란 피의 갈대들
따스함이거나 생명이거나 너에 의지하고 서 있는 꿈 하나.
 
 
삶의 덧없음을 알아야  하루하루가 맛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죽는다. “죽는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또한 산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나는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늘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내가 죽는 소리는 “남의 심장 하나 잠잠해지는 소리”이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남의 배를 타고 잠간 쉬었다 가는 뱃놀이의 즐거움이다. 내게 주어진 생명, 그 ‘햇덩이’는 저녁이 오기 전에 떨어질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모두 다 죽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할 때 사는 맛은 진하다. 산다는 것, 혹은 실존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딛고 잠깐 떠 있는 일이다. “어둠속에서 나는 강물을 꿈꾼다.” 살아 있음의 소중한 느낌을 맛본다. 삶은 유리잔보다 부서지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아주 하찮은 것에 놀란다. 사랑을 느끼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해!”처럼 영원을 저당잡히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
 
 
나는 운명이다
 
그렇다 어느 때보다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어찌하여 내가 너를 입맞추겠는가, 죽음이 바로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다만 산다는 것을 잠깐 잊는 것뿐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
한 육체의 빛나는 한계를 안 보기 위하여
내 어찌 눈앞에 와 있는 어둠 앞에 눈을 감겠는가
 
나는 책 속의 진실을 읽고 싶지 않다, 그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물
처럼 올라온다
나는 그 거울을 포기한다 그 거울 속에는 산이 보이는 곳마다
벌거숭이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는 내 이마가 비친다
거기, 의미를 모르는 새들이 가로질러 날아가는
 
나는 강물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지 않다 거기 색색의 물고기들
이 분홍빛 생명을 번뜩이며 안타까움의 한계인 물가를 돌진하는 모

강물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목소리들이 일어난다
갈대 사이에 누워 있는 나는 그 기호들의 의미를 모른다
 
아니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 먼지를 마시는 것을 거부한
다 그 고통스러운 흙덩어리가 하늘의 눈도 이해할 수 없는
기호처럼 굴러간다는 것을 알 때
나의 살덩이가 말하는 삶의 확실성을 나는 믿을 수 없다
 
아니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혓바닥을 들어 절규하지 않는다
위에서 부딪혀 떨어지는 돌멩이처럼 혓바닥을 쏘아올리지 않는다
쏘아올려 광막한 하늘의 유리창을 깨고
그 하늘 뒤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생명의 소리를 내고 싶지 않다
 
나는 살고 싶다 튼튼한 풀잎처럼 살고 싶다 
북풍처럼 눈처럼 눈을 뜨고 있는 숯덩이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는 어리아이의 미래처럼
달이 모르는 짐승들의 감촉처럼
 
나는 음악이다 그 많은 머리칼 밑에
신비스럽게 날아가며 세상이 만드는 음악
날개에 피를 흘리며 억눌린 가슴속으로 죽으러 가는
순진무구한 새 하나
 
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러모으는 운명이다
사랑을 아는 모든 반경이 모여드는 유일한 바다
모여와서 중심을 찾는 소용돌이쳐 소리소리 치며 완전한
장미처럼 원이 되어 출렁이는
 
나는 벌거숭이 바람을 향하여 갈기를 불태우는 말 한 마리
나는 스스로의 털과 갈기에 고문당하는 사자
무심한 강물을 두려워하는 사슴
밀림을 떠나는 당당한 호랑이
대낮에도 반짝이는 작은 풍뎅이
 
아무도 살아 있는 사람의 현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소리치는 화살들 사이 그 한중간에 서서
보이지 않을 게 없는 투명한 가슴을 내보이는
그러나 맑아도 밝아도 결코 유리창은 될 수 없는 삶
손을 대보라 피를 느낄 테니까.
 
- 중남미 시인 <비센떼 알레익산드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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