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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위원소인간 - 찰스 에릭 메인 Charles Eric Maine 지음
2021년 03월 19일 17시 09분  조회:564  추천:0  작성자: 강려
동위원소인간
 
찰스 에릭 메인 Charles Eric Maine 지음

등장 인물
 
델라니 : 주인공으로서 주간지 '뷰'의 민완 기자. 사건 사진 중 신원 불명인 한 장의 사진이 유명한 과학자와 닮은 걸 발견하고 조사한다. 그런데 그 뒤에 무서운 사건이 숨겨져 있었으니…….
데이 : 주간지 '뷰'의 사진 기자. 델라니와 함께 사건을 추적하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만만치 않은 여자.
레이너 : 원자 물리학자. 방사성 물질 전문가로서 프란드 연구소 교수. 이 사건의 열쇠를 쥔 중요 인물
구레아리 경부 : 이 사건의 음모를 미리 알아채고 있으면서, 델라니의 조사를 방해라고 생각한다.
프레스튼 박사 : 노잔 병원의 의사. 레이너 박사를 치료한다.
바스코 : 이 사건의 음모 주모자.
올리베 : 주간지 '뷰'의 편집장
메인랜드 : 원자력 연구소 소장
브레슬라 박사 : 전쟁 전까지는 유럽에서 제일 손꼽히는 정형외과 의사로 유명했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행방을 감추었다.
마르크스 박사 : 노잔 병원의 정신과 의사
아레건 : 바스코 일당의 한 사람
 
<차 례>
 
사건 발생···················· 4
엉터리 기자··················· 9
레이너 박사··················· 15
한 번 죽었다?·················· 20
수수께끼의 회화················· 23
가짜 박사···················· 29
7초 반 빠르다.················· 36
자백제(자백시키는 약)············· 43
탈출······················ 47
역(반대)치료법················· 50
본 정신을 되찾다.················ 56
원자 폭발은 막을 수 없다.············ 64
타오르다.··················· 68
위기 일발···················· 71
 
사건 발생
 
내가 출판사 편집실에 들어갔을 때 기자 마크레는 편집장 책상 곁에서 현상한 사진을 보아가며 올리베 편집장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보게 델라니, 늦었네. 곧 사진기자를 데리고 신축한 스테파나 병원의 개원식(병원이 개원하는 날 행하는 의식) 상황을 취재하고 오게."
편집장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항상 말하는 식으로 날카롭게 말했다.
"병원의 개원식 에요? 그 따위 일은 누군가 딴 사람에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베 편집장은,
"일하는 데 마음에 드는 일과 안 드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 잔소리 말고 빨리 갔다와!"
하고, 호령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나는 마크레와 서로 마주보았다.
마크레는 빙긋이 웃었다. 나는 그 동료가 부러웠다. 아마 뭔가 재미있는 사건이 있어서 밤늦게까지 뛰어다닌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캄캄한 빌딩 거리를 배경으로 경찰 순찰차가 서 있고, 정복 경찰관과 형사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피해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진과, 고속도로에서 경기용 차와 세단 차가 형편없이 부서져 있는 무서운 교통 사고의 사진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 중의 한 장이 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예사로 보면 흔히 있는 사건 사진이었다.
물에 빠져 온 몸이 물투성이인 한 사나이가 들것에 태워져 있었다. 얼굴빛은 죽은 사람 같고 숨도 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의 흥미를 끈 것은 그 사나이의 얼굴이 어디에서인가 만나 본 낯익은 얼굴인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사나이 몸 둘레가 희미하게 희게 빛나고 있는 것 같이 보인 것이다.
나는 마크레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누구야?"
마크레는 그 사진을 보고 어깨를 들썩하더니,
"누군지 몰라. 대단치 않은 사람이겠지. 총에 맞고 강에 버려진 모양이야. 보통 강도가 아니면 부랑자들 사이의 싸움이겠지."
"죽었는가?"
"아니, 곧 죽을만한 중상인데 숨은 붙어 있어서 노잔 병원에 수용되어 생명은 건진 모양일세."
"이 사진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을 현상할 때 광선이 들어갔겠지."
나는 그 사진을 한 번 더 주의 깊게 보았다. 아무래도 어디에서 만나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40살 정도의 사나이는 눈언저리가 쑥 들어가고 턱이 긴 특징 있는 얼굴이다. 나는 생각이 안 나서 초조하고 짜증이 났다."이 사진을 좀 빌리자."
내가 부탁을 하니 마크레는 이상히 여기며,
"좋아. 이 사진은 쓸모 없는 것이니까."
내가 그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데 올리베 편집장이 되돌아와서 또 재촉했다.
"여보게 델라니, 아직 가지 않았는가? 스테파나 병원의 기사와 사진은 해질 무렵까지 필요한 거네."
"네, 알았습니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승강기를 타고 아래층의 자료실에 들어갔다.
자료실에는 많은 서류가 정리되어 있었다. 기사를 쓸 때 참고로 하기 위하여 가지각색의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유명한 인물, 유명한 장소, 유명한 사건, 그 외에도 어지간한 것은 모두 찾아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곳이다.
나는 방안에 꽉 차 있는 자료 정리 서고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진의 사나이를 여기서 조사할 생각인 것이다.
나는 과학 기자였기 때문에 내가 만나는 사람은 대개 과학자이다. 그러므로 그 사나이는 내가 이 수개월동안 어떤 용무로 만난 일이 있는 과학자일 것이다.
나는 서고 앞을 왔다갔다하며 그 사나이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천문학자도 아니고, 생물학자, 전자공학자, 과학자, 모두 아니다. 나는 물리학자의 서류철이 있는 곳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렇다!
그 사나이는 반년쯤 전에 원자력 연구소 회의장에서 만난 것이 틀림없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한 원자 물리학자를 닮았다!
서류철을 꺼내어 나는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에는 그 인물의 사진과 경력과 주요 연구 제목이 실려 있다.
그 서류철을 반쯤 넘겼을 때 눈언저리가 쑥 들어가고 턱이 긴 40세쯤 되는 사나이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다!"
나는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사진 밑의 기사를 읽었다.
 
<스티븐 레이너, 이학박사, 원자 물리학자. 전에는 미국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야금학 부장. 현재는 영국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 교수. 방사성 동위원소(원자 번호는 같으나 원자량이 다른 원소), 특히 동위원소 K의 연구로 유명하여 동위원소 인간이라고 불리고 있다. 자세한 것은 서류철 NP 3~48을 참조.>
 
나는 마크레에게서 가져온 사진을 꺼내어 서류철에 있는 사진과 대조하여 보았다. 그 사람이 틀림없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레이너 박사라면 지금 동위원소 K를 응용한 원자력 엔진 연료의 발명자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이다. 그러한 중요 인물이 등에 총을 맞고, 빈사 상태의 중상을 입고 강속에 내던져졌다. 더구나 아무도 모르게 병원 한 방에 수용되어 있다!
이것은 큰 사건이다. 특종 기사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료실을 나왔다.
 
엉터리 기자
 
"어디로 갈 거예요. 스테파나 병원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여자 사진 기자 데이가 말했다.
"스테파나 병원에 가기 전에 레이너 박사 일을 조사하러 노잔 병원으로 가는 거다."
"그러나 그 사나이가 레이너 박사가 아니라면 공연한 시간 낭비예요. 스테파나 병원 개원식의 기사를 해질 무렵까지 준비하지 못하면 편집장이 굉장히 화를 낼 거예요."
"책임은 내가 진다. 하여튼 조사 해야겠으니 협력해 줘."
데이는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차가 노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잔 병원에 도착한 나는 데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접수처에 이름을 기재했다.
"오늘 아침 일찍 운반된 환자의 방은 몇 호실입니까? 경찰이 강에서 구조한 사나이 말입니다."
접수계원은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구레아리 경부에게 허가를 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어 봐 주십시오."
"지금 수술실에 계시니 연락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접수계원이 전화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데이의 손을 잡고 재빨리 그 곳을 나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수술실로 간다. 전화를 걸면 면회를 못할 것이 뻔하지."
주저하는 데이를 데리고 수술실 출입문까지 왔을 때 문이 안에서 열리면서 간호원이 침대를 밀고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레이너 박사가 틀림없어 보였다.
방안에는 간호원과 의사, 그리고 비옷을 입은 두 사나이가 있었다. 키가 크고 건장하게 생긴 사람이 구레아리 경부 같았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경부."
구레아리 경부는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쏘아봤다.
"지금 그 사람은 오늘 아침 강에서 구조한 사람이지요? 그의 신원을 알았습니까?"
"자네는 주간지 '뷰'의 델라니 기자인가? 나는 승낙도 없이 찾아오는 무례한 사람에겐 말을 않겠네."
"아니요.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떤 정보인가?"
"나는 그 사람의 신원을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엉터리 같은 소리하지 말게."
"이것을 보십시오."
나는 호주머니에서 마크레에게 빌린 사진과 자료실에서 가지고 온 레이너의 사진을 꺼냈다.
경부는 양쪽 사진을 보고 뒤쪽에 씌어 있는 설명문을 읽었다.
"스티븐 레이너……."
구레아리 경부는 소리 내어 읽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 사실을 딴 사람에게 얘기했는가?"
"아니요. 특종 기사라고 생각되어 편집장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구레아리 경부는 부하 형사를 돌아보고,
"본서에 들어가 레이너의 집과 프란드 연구소를 조사하라! 만약 레이너가 없으면 왜 행방불명 신고를 하지 않았는가도 조사하라."
형사는 명령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다.
"만약 자네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중대한 사건이지만……. 그러나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레이너 박사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
"서둘지 말게. 곧 알게 되겠지."
구레아리 경부는 의사와 같이 방을 나갔다. 우리도 급히 뒤를 따랐다. 의사와 경부는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그 환자의 병실로 가는 모양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별관의 격리 병동으로 갔다. 그 곳에서 경부가 우리를 돌아보더니,
"아직 자네에게는 환자를 면회시킬 수 없다. 돌아가 주게."
"그러나 신원을 알았는데요……."
"나중에 본서에 오면 알려주지."
그 이상 버텨 보았자 별 도리가 없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돌아섰다. 그러나 이대로 두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경부와 의사가 한 방에 들어가고 난 다음, 나는 데이의 팔을 붙들고 속삭였다.
"아무 말 말아."
나는 데이와 함께 살금살금 경부와 의사가 들어간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 방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구레아리 경부와 의사와 간호원이 레이너의 침대를 둘러싸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봐, 데이! 내가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말을 할 것이니 데이는 재빨리 사진을 찍어줘야 해."
"그러나 델라니씨, 그런 짓을 하면 경부가……."
"잔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나는 그렇게 명령조로 말하고 문을 열고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데이가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번쩍이니 모두들 눈이 캄캄한 모양인지, 얼떨떨하니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도망쳐 나왔다.
"야, 도망치지 말고 기다려!"
성난 구레아리 경부의 소리를 들은 체 만 체 우리는 출구를 향한 복도를 달렸다.
우리가 현관 계단을 내려섰을 때 급한 걸음으로 들어서고 있는, 명령을 받고 나갔던 형사를 만났다.
나는 천연스럽게 형사를 불러 세웠다.
"아, 형사님, 레이너 박사는 역시 행방불명이었지요?"
형사는 내 말을 듣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같은 기자는 정말 엉터리없는 거짓말쟁이다. 기사를 재미있게 쓰기 위하여 어떤 거짓말이라도 예사로 하니 말야."
"무슨 이야기요?"
형사는 우리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프란드 연구소에 전화를 걸어 레이너 박사와 직접 이야기하고 왔다. 박사는 여전히 연구에 몰두하고 계시더라."
형사는 쏘아 부치듯 말하고 우리의 옆을 바람같이 스쳐가며, 한 마디 덧붙였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머리나 식혀라."
 
레이너 박사
 
조금 후 우리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사나이는 틀림없이 레이너 박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 레이너 박사는 틀림없이 연구소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나이는 역시 레이너 박사가 아닌 모양이다. 내가 경솔하게 생각하고 엉뚱한 공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이상하다.
그렇게 꼭 닮은 얼굴은 쌍둥이 외에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국가 기밀에 속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과학자이다. 아무래도 무언가 흑막이 있는 것 같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직접 프란드 연구소에 가 레이너 박사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시도 주저할 수가 없었다.
"데이 양은 회사에 되돌아가 방금 찍은 사진을 현상해 줘. 나는 잠깐 프란드 연구소에 갔다 올 테니."
데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스테파나 병원 기사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내 육감으로는 이 일이 스테파나 병원의 취재보다 몇 백 배 더 중요한 것 같다."
"큰 일을 저지르겠네요."
데이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나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끝내고, 차를 집어타고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로 달렸다.
검문소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보니 한 대의 경찰 차가 눈에 띄었다.
<구레아리 경부도 여기에 온 모양이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상한 대로 경부는 부하 형사와 같이 소장인 메인랜드 박사의 사무실에 있었다.
나는 메인랜드 박사와 1년 전에 만난 일이 있어서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내가 사진을 내어놓았더니 메인랜드 박사는 그 사진을 보고,
"정말 이 사나이는 레이너 박사와 아주 닮았네. 그러나 뭔가 잘못 봤겠지. 하여튼 레이너는 여기에 있어요."
"그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닮았기에 확인해보려는 것입니다."
구레아리 경부가 말했다.
"지금 곧 올 것이니 확인해 보십시오."
이윽고 출입문에 노크 소리가 나고, 레이너 박사가 들어왔다.
그는 틀림없이 반 년 전에 내가 만난 레이너 박사였다. 그러나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이마에는 넓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메인랜드 박사는 우리들을 소개하였다. 나는 레이너 박사 앞으로 다가서서,
"오랜만입니다. 박사님. 델라니입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음……기억할 것도 같고……."
그 소리가 감기라도 걸려 있었는지 몹시 쉰 목소리였다.
"레이너 박사, 직무상 물어 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실은 어제 저녁 당신과 꼭 닮은 사나이가 총에 맞고 템즈 강에 떠내려오는 것을 구조했습니다. 이것이 그 사진입니다. 마음에 집히는 것이 없습니까?"
구레아리 경부는 그 사진을 박사에게 건네주었다.
"쌍둥이 형제나, 아니면 당신과 꼭 닮은 친척이라도 계십니까"
레이너 박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그 사나이의 신원을 전혀 알 수가 없어서요."
"그 사나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레이너 박사가 물었다.
"네, 그러나 의식이 없습니다."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는 지금 바쁩니다. 내 사무실로 돌아가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한 마디만 물어 보겠습니다."
나는 나가려는 박사를 불러 세웠다.
"그 부상은 어떻게 입었습니까? 자동차 사고라도 당했습니까?"
"그래요. 트럭이 내 차의 뒤를 받았어요."
레이너는 귀찮은 듯이 대답하고 바로 그 방을 나가버렸다.
"정말 부상이 그만한 것이 다행이었어요. 중요한 실험이 있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메인랜드 박사가 레이너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는 이 이상 이곳에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되어, 우리는 메인랜드 박사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참 걷다가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구레아리 경부에게 말했다.
"경부님, 당신은 트럭에 충돌 당한 일이 있습니까?"
"왜 그런 것을 묻나?"
구레아리 경부는 여기까지 와서 조사하였는데도 별 신통한 게 없어 기분이 좋지 않은지 퉁명스레 대꾸했다.
"충돌 당했을 때는 뒤로 넘어지겠지요? 그렇다면 얼굴에 중상을 입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구레아리 경부는 귀찮은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델라니 군, 자네는 왜 사건에 대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가?"
"네, 알았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 번 죽었다?
 
나는 차를 천천히 몰아 달렸으나 회사에 들어갈 생각도, 스테파나 병원에 갈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솟아올라서 결국 나는 핸들을 돌려 다시 노잔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조금 전에 환자를 치료하고 있던 의사 프레스튼 박사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프레스튼 의사는 귀찮은 듯, 달갑지 않은 태도로 만나 주었다.
"도대체 무슨 용건이오?"
"박사님, 저는 원자력 연구소에 가서 레이너 박사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쩐지 그 사람이 진짜 레이너 박사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즉 진짜는 이 병원에 있는 그 사나이이고, 원자력 연구소에 있는 사람은 가짜같이 느껴집니다."
"자네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프레스튼 박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첫째로 레이너 박사가 얼굴에 심한 부상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 부상을 입게 된 교통 사고 이야기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목소리가 제가 들었던 목소리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설명이 되겠지. 경찰은 뭐라고 하던가?"
"경찰은 저를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것 봐."
프레스튼 박사는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또 질문하였다.
"박사님, 그 환자의 상황을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프레스튼 박사는 우물쭈물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등에 두 발의 권총 탄환이 명중되어 있었다."
"그런 몸으로 강에 빠졌는데, 왜 익사하지 않았을까요?"
"운이 좋았지. 한 발은 어깨 살에 꽂혔을 뿐이고, 또 한 발은 척추 뼈를 스쳐갔다. 그 충격으로 심장과 폐가 정지되어 거의 호흡도 중단되어 있었다. 그 까닭에 익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환자는 아직도 의식불명입니까?"
"아니, 지금은 의식을 되찾았어."
"그렇다면 왜 본인에게 신원을 묻지 않습니까?"
프레스톤 박사는 머리를 저었다.
"그것이 안 된단 말이야. 환자는 일종의 기억상실에 걸려 있다.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가 횡설수설이야."
박사는 조금 생각하더니,
"그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사람은 수술대 위에서 한 번 죽었었으니까."
"한 번 죽고 되살아난 겁니까."
"그렇다. 심장이 몇 초 동안 정지되어 있었는데, 강심제 주사를 놓아서 다시 움직이게 되었다."
프레스튼 박사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해봐도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는 회사로 돌아왔다.
데이가 편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은 다 되었어요."
나는 봉투 안에 든 사진을 꺼내어 보고 깜짝 놀랐다. 사진 속의 그 환자의 둘레가 또 허옇게 흐려져 보이지 않는가!
여기 희미하게 흐릿해진 것은 무엇일까?"
"모르겠어요. 필름에 광선이 들어갈 리 만무하고요. 다른 사진들을 깨끗하게 나왔는데, 정말 이상해요."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흐려진 것은 무언가 사건에 중대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사진을 챙겨들고 올리베 편집장을 만나러갔다. 편집장은 예상했던 대로 굉장한 화를 냈다.
내가 레이너 박사의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하였으나 전혀 듣지도 않으려고 하였다.
"알겠지? 자네는 사건 기자가 아니야. 과학 기자야. 나는 스테파나 병원 개원식의 기사와 사진이 필요한 거야."
편집장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까지 가지고 오지 않으면 너는 해고다. 알겠나!"
"알았습니다."
 
수수께끼의 회화
 
재차 데이를 데리고 스테파나 병원을 향하여 차를 운전하면서 나는 그 사진이 왜 희미하게 흐려졌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문득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흐려진 것에 대한 원인을 하나 생각해냈다.
방사성 물질에 부닥치면 필름이 감광(광선의 감을 받음)되어 사진이 나오지 않는 수가 있다. 방사성 물질……. 레이너 박사는 방사성 물질의 전문가이라서 항상 방사선을 받고 있었다. <주: 방사선은 열선 광선, 자외선 같은 방사선인데, 보통 엑스선 방사능 물질을 내는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별명을 '동위원소 인간'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즉 레이너 박사와 같이 항상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고 있으면 그것이 신체에 영향을 미쳐 방사성을 띠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이 희미하게 흐려진 원인일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핸들을 돌려 노잔 병원 쪽으로 차를 달렸다.
"델라니! 어디로 갈 작정이에요?"
데이가 고함을 쳤다.
"10분밖에 안 걸린다. 부탁하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데이가 쫑알대는 소리를 들은 체 만 체 차를 몰았다.
데이는 화가 나서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어딘 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접수계에서 거절당할 것을 피하기 위하여 뒷문으로 돌아서 살며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프레스튼 박사의 출입문을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여니, 박사는 깜짝 놀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꼭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서였습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데이가 찍은 사진을 꺼냈다.
"이것은 오늘 아침 병원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프레스튼 박사는 사진을 받아들었다.
"이 사진의 흐려진 곳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 사람이 방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레이너 박사는 동위원소 인간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방사능이라…….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생각이 나네. 그 환자는 적혈구(붉은 피톨)가 적고 신경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또 뇌 장애도 일으키고 있었네."
"그것은 모두가 방사성 장애의 징조이지요."
프레스튼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레이너 박사는 틀림없이 연구소에 있다고 경찰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실망하였으나, 다시 기운을 내어 질문하였다.
"박사님, 단 1분이라도 좋으니 그 환자와 이야기하도록 해줄 수 없겠습니까?"
"시간의 낭비이다. 할 필요성이 없네."
프레스튼 박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집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조금 전 환자와 이야기한 속기록이다. 읽어보게."
속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적혀 있었다.
 
"의사 : 너는 미국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환자 : 아니오."
"의사 : 너는 가족이 있는가?"
"환자 : 나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당신 쪽에서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 : 나는 너를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너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있다."
"환자 : UTC이다."
"의사 : UTC라니?"
"환자 : 나는 말리려고 하였다."
 
정말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환자 자신은 나름대로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있으나, 질문은 전혀 무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마음이 통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스티븐 레이너인가하고 물어 보았습니까?"
"이름은 물어 보았지만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이쪽에서 스티븐 레이너 박사인가 물어보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면 무엇인가 기억해낼는지도 모릅니다."
프레스튼 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승낙하였다.
"좋아. 다시 한 번 해보자. 만약 그 환자가 레이너라면 이것은 정말 큰 일이다. 프란드 연구소에 무언가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급히 격리실로 갔다.
프레스튼 박사가 전등을 켜니 환자는 겨우 몸을 요동하고 눈을 떴다. 갑자기 여위어 있었으나, 정신이 든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입을 움직여 중얼거렸다.
프레스튼 박사는 침대를 몸을 굽히고,
"레이너 박사, 스티븐 레이너 박사."
1, 2초 동안 환자는 프레스튼 박사를 쳐다보더니 성난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내가 말하는 것을 모르는가?"
프레스튼 박사는 이렇게 물었다.
환자는 초조한 빛으로,
"왜 모두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가?"
"나의 질문에 대답해라!"
환자는 눈을 감고 피로한지 눈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누가 당신을 쏘았소?"
환자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말하려고 할 때,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테스트(시험) 때문이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였나?"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당신들은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당신은 똑바로 대답해 주시오."
나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환자는 또 힘이 빠진 것 같았다.
"그대로이다. 바스코다."
"바스코는?"
"물론 모든 것이 UTC 때문이다.
나는 신경이 긴장되었다.
"당신은 계속 UTC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아니, 정신이 희미해져 모든 것이……."
"무엇이든 좋으니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까?"
환자는 또 잠자코 있다가 이윽고,
"그 사람이 나를 매수하려 하였다."
"누가 당신을 매수하려 했는가요."
그러나 환자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윽고 가냘픈 소리로 말했다.
"물을 한 잔."
프레스튼 박사는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그 때 간호원이 초록색 큰 봉투를 가지고 들어왔다.
"선생님, 여기에 계셨습니까? 이 환자의 엑스선 사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 뒤에 볼 것이니 거기다 두고 나가."
"지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프레스튼 박사는 이상한 얼굴로 간호원을 쳐다보았다.
"왜? 이상한 일이라도 있었나?"
"아무 것도 찍혀지지 않았습니다!"
간호원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프레스튼 박사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받아들여 안에 든 필름을 꺼내 보았다.
까맣기만 하고 아무 것도 찍혀져 있지 아니하였다.
"방사능 때문이오! 그의 몸에 있는 방사능 때문에 필름이 감광되었습니다."
나는 외쳤다.
박사와 나는 서로 얼굴을 한참 동안 마주보았다.
 
가짜 박사
 
해질 무렵 데이와 나는 회사 가까운 다방에 있었다.
나는 올리베 편집장에게 휴직 명령을 받았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거예요?"
데이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모르겠어. 하여간 그 사나이가 레이너 박사라는 것은 절대로 틀림없는데, 아무래도 그것을 밝혀 낼 방법이 없어."
"그러나 그것을 해결해내지 못하면 올리베 편집장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 그러나 이 이상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도 모르겠다."
"잘 하면……."
데이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잘 하면, 프란드 연구소에 있는 레이너 박사를 조사하면 새로운 좋은 방법의 실마리가 풀릴는지도 몰라요."
"어떻게 조사할까?"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사진을 찍어서……. 그 사진이 만약 방사능의 감광이 없다면……."
"그러면 가짜라고 알 수 있게 된다. 정말 그것은 좋은 생각이다. 데이, 나에게 카메라를 빌려다오."
"왜요. 델라니?"
데이가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내가 그 사람 사진을 찍으러 가는 거야."
"사진이라면 내가 더 전문가예요."
"데이는 안 오는 게 좋겠어. 레이너 박사는 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할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들은 나를 습격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데이도 위험한 거야. 그래도 좋아?"
"좋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데이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데이의 얼굴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결심이 똑똑히 나타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반가웠다. 지금까지 혼자 일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곁에 훌륭한 동료가 나타난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가자. 데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날 밤 8시를 지나 우리는 프란드 연구소에서 나온 레이너 박사의 차를 미행하기 시작하였다.
연구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이너 박사의 집에서 찍으려는 것이었다.
레이너 박사의 차 뒷부분에는 충돌 당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차는 포드 가도를 남으로 달려 주택가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 때 한 대의 검은 차가 우리 차와 레이너 박사 차 중간으로 끼여들어 왔다. 그래서 박사의 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혀를 차며 액셀러레이터(동력을 내는 발로 밟는 장치)를 밟고 속력을 내어 그 차를 앞지르려하였다.
그 때 데이가 내 손을 잡았다.
"앞지르지 마세요."
"왜?"
"그 차는 프란드 연구소에서부터 계속 우리 뒤를 따라왔어요."
"뭐라고?"
"정말이에요. 운전사 옆에 흰 목도리와 흰 장갑을 낀 키 큰 사나이가 앉아 있어요."
"그렇다고 그 차가 우리를 미행한다고는 볼 수 없잖아. 그런데 미행한다면 왜 우리 차를 앞지를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미행한 것이 아니고 레이너 박사를 미행하고 있는 거예요."
"음, 그래!"
데이의 추리가 옳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북 런던 거리에 왔을 때 레이너 박사의 차가 급히 정거하니, 그 검은 색의 차도 따라서 정거한 것이다.
나는 그대로 차를 달려 그 차들을 앞질러가 십자로 모퉁이에 정거하였다.
뒤를 돌아보니 레이너가 차에서 내려 아파트 출입문을 열고 있었다. 그 때 뒤차에서도 키가 큰 사나이가 내렸다. 그 사나이는 검은 색 모자를 쓰고, 목둘레에 털을 단 오버를 입고,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흡사 스파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같았다. 그 사나이는 레이너의 뒤를 따라 아파트로 들어갔다.
"이제 어떻게 하죠?"
데이가 물었다.
"10분 기다렸다가 현관으로 정정당당히 들어가, 주간지 '뷰'에서 인터뷰(기자가 기사를 취재하기 위하여 하는 회담)하러 왔습니다, 라고 말하지."
"만약 거절당하면?"
"그 때는 데이가 재빨리 사진을 찍고 달아나는 거야. 아파트에 들어가서 하얀 장갑을 낀 사나이의 얼굴을 한 번 똑똑히 보아야겠어. 그 놈이 범인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까닭은?"
"가짜 레이너 박사는 이 사건의 주역일는지도 모른다. 주범은 흰 장갑을 낀 사나이이고, 레이너의 가짜는 그 놈에게 조종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조사하는 거다."
10분 뒤에 우리는 레이너 박사 집 앞까지 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살며시 열리고, 얼굴이 둥글고 건강한 사나이가 밖을 내다본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사나이의 차를 운전한 사람 같았다.
"레이너 박사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주간지 '뷰'의 기자 델라니, 이 사람은 사진 기자입니다."
그 사나이는 흘끔흘끔 우리를 쳐다보더니,
"기다려 주십시오. 박사에게 여쭈어 보겠습니다."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또 한 번 문이 열리고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레이너 박사가 나타났다.
"밤늦게 대단히 미안합니다. 편집장이 이번 사건이 대단히 재미있다고 하며, 꼭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총에 맞은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이시겠지요. 그러나 하여튼 세계적 과학자와 꼭 닮은 사람이 총에 맞았으니, 우리 독자들은 대단히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레이너 박사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현관 안에 들어가자 책장 위에 검은 색의 모자와 흰 장갑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털을 단 검은 오버와 흰 목도리도 걸려 있었다.
우리는 서재로 안내되었다. 그 흰 장갑을 낀 사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을 묻고 싶습니까?"
레이너 박사가 물었다.
"나는 이 사건은 내일 원자력 연구소에서 거행될 특별 테스트와 관계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박사는 힐끔 나를 노려보았다.
"그 까닭은?"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기자의 육감이라고 할까요?"
"육감이란 아무 소용이 없어. 내일 테스트와 이 사건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는 몰라."
나는 작전을 바꾸기로 하였다.
"박사님은 지금까지 여러 방면의 연구를 많이 하셨지요? 아마 전쟁이 끝나고 얼마 후인 1948년경에 콜롬비아 대학에서 신기한 금속의 연구를 하시고 계셨을 겁니다."
레이너 박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학에서 몇 년 계셨습니까?"
"아 그렇지……. 똑똑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1년 반정도 아니었던가요. 아참, 타이어 교수님과 공동 연구를 하셨잖아요."
"아 그랬던가."
나는 데이에게 눈짓을 했다. 데이는 준비하고 있던 카메라로 갑자기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비쳤을 때 레이너 박사는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무슨 짓을 하는가, 무례하게!"
"실례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인터뷰할 때는 사진을 찍게 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기분 나쁘다! 곧 돌아가라."
레이너 박사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리고 말해두지만 이 사진을 보도하면 나는 자네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요."
"그건 왜?"
"당신은 진짜 레이너 박사가 아니니까요."
"뭐라고?"
레이너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지금 약점을 드러냈습니다. 알겠습니까? 스티븐 레이너 박사는 1948년경에는 콜롬비아 대학에 재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타이어 교수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내가 꾸며낸 말입니다. 그 무렵 레이너 박사는 남태평양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것을 아는가?"
"6개월 전 진짜 박사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데이의 손을 잡고 방문을 나왔다. 레이너는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나올 때 그 곳에 놓여 있는 모자 안에 새겨진 글귀를 보았다. 거기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모레로스 EV>
라고 씌어져 있었다.
나는 출입문 손잡이를 잡으며 뒤돌아보며 말했다.
"충고해둔다. 가짜 박사, 형무소에 가고 싶지 않거든 빨리 달아나는 게 좋을 거야. 동료 바스코를 데리고."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그 방을 뛰쳐나왔다.
 
7초 반 빠르다.
 
우리는 차를 타고 곧 출발했다. 뒤돌아보았으나 뒤따라오는 차는 없었다. 나는 가까운 공중 전화통 앞에 차를 세우고 경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구레아리 경부는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형사에게 대충 이야기를 했다.
"레이너 박사의 주택을 감시하도록 구레아리 경부에게 부탁해주시오. 박사는 날이 새기 전에 그 일당과 도주할 우려가 있습니다. 정체가 탄로 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우리는 곧 시가를 향하여 빠르게 차를 몰았다.
"정말 용단 있는 일을 했습니다."
데이가 한숨 돌리고 말했다.
"그렇게 했으니 놈들은 꼭 어떤 반응이 있을 거야. 그리고 경시청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아마 그 놈들은 원자력 연구소에서 어떤 비밀을 훔쳐내려는 스파이일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데이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자기들의 정체를 밝혀 낸 기자를 그대로 둘 리가 없잖아요."
"자기들이 도망치기에도 바쁠 텐데, 그럴 여유가 없을 거야."
나는 차를 회사 쪽으로 몰았다.
"하여간 데이 양은 오늘 밤 안에 그 사진을 현상해놓게."
"나는 아무래도 모르겠어요. 어째서 그 사람이 그렇게 레이너 박사를 닮았는지 말이에요."
"그것은 간단하지."
"레이너 박사와 닮은 사람과 의사를 매수하여 성형수술을 시켜, 얼굴을 레이너 박사같이 만든 거야. 교통 사고를 당하였다는 것은 수술할 때 생긴 얼굴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방법이지."
차는 곧 회사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사진부로 가서 사진을 현상하였다. 사진은 깨끗하게 나왔다.
"잘했다. 이 사진을 보니 그 놈이 가짜라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군. 다음은 흰 장갑을 낀 바스코라는 사람을 조사하자."
"그 사람이 바스코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레이너 박사의 아파트에서 나올 때 모자에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을 보았지. EV, 즉 이(E) 바스코이다."
"어떤 사람일까요?"
"그 환자, 즉 진짜 레이너 박사는 바스코의 이름과 UTC라는 말을 자주 하였지. 틀림없이 이 두 사람은 중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자, 회사 자료실에 가서 조사하자."
우리는 자료실로 갔다. 그러나 자료실에는 수천 개의 서류철이 있었으므로 조사는 수월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프레스튼 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 델라니 군인가. 그 환자의 방사능 테스트를 해보니 매분 6천 카운트(방사성의 입자의 수효를 셀 때 1초 또는 1분간당의 수효)의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보통 같으면 이렇게 방사능을 받는다면 살수가 없다."
"오랫동안 차츰차츰 방사능에 익숙해진 사람, 즉 레이너 박사 같은 사람 아니면 이미 죽고 말았을 테지요?"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드디어 프레스튼 박사도 내 편이 되어 준 것이다.
"박사님, 오늘 밤 한 번 더 그 환자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좋지요?"
프레스튼 박사는 승낙하였다. 나는 데이를 돌아보고 지시하였다.
"나는 지금부터 한 번 더 노잔 병원으로 간다. 데이 양은 여기서 UTC를 조사해주게. 자, 내일 만나."
데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회사 녹음기를 찾아들고 차를 탔다.
20분 후, 나는 노잔 병원 경리실에서 프레스튼 박사와 수수께끼의 환자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나는 환자에게 질문을 하기 위하여, 녹음기의 스위치를 켠 뒤에 마이크를 환자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환자는 가냘픈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안 되요……. 할 수 없어요……. 생각해내려고 애쓰지만……."
"당신은 전혀 자기에 대한 일을 기억할 수 없습니까?"
나는 이렇게 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고 말아서……."
그가 또 말꼬리를 흐렸지만 나는 단념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나는 당신이 스티븐 레이너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그러자, 환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 일은 전에 전부 말했습니다. 바스코의 이야기도,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바스코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때까지 나는 그들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은 독일 사람 같았습니다."
"그 외의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레이너 박사의 얼굴에는 땀이 솟아올랐다.
"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고 큰 건물이……."
그렇게 말하고 레이너 박사는 입을 다물었다. 잇달아 질문을 당하니 괴로운 모양이었다.
"그 외에 뭔가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까?"
그러자, 레이너 박사는 갑자기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다보며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당신들의 물음에 나는 성의껏 대답하고 있소. 이 이상 무엇을 대답하란 말이오."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했으나 레이너 박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레스튼 박사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더 이상 질문하는 것은 무리이다. 환자는 몹시 지쳐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녹음기 스위치를 껐다.
나는 프레스튼 박사 방으로 가서 녹음기 소리를 재생시켜 종이에 받아썼다. 그러나 몇 번 들어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아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델라니 군, 헛된 일이야. 그 사람이 진짜 레이너이건 아니건 간에, 아무튼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하여튼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났으니까 뇌가 이상해진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박사님, 레이너는 7초나 8초 동안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났지요?"
"그렇다네."
나는 또다시 녹음기 소리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시계의 초침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나는 흥분하였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내가 생각한 대로 다시 녹음의 소리를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프레스튼 박사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것을 보십시오."
 
"델라니 : 당신은 전혀 자기 일에 대한 일을 기억할 수 없습니까?"
"환자 : 안돼요……. 할 수 없어요……. 생각해내려고 애쓰지만……."
"델라니 : 나는 당신이 스티븐 레이너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환자 :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고 말아서……."
"델라니 : 그 바스코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환자 : 그 일은 전에 전부 말했습니다. 바스코의 이야기도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델라니 : 그 외의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환자 : 이 때까지 나는 그들을 만난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은 독일 사람 같았습니다."
"델라니 : 그 외에 뭔가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환자 : 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고 큰 건물이……."
"델라니 :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환자 : 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당신들의 물음에 나는 성의껏 대답하고 있소. 이 이상 무엇을 대답하란 말이오?"
 
우리 둘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리가 맞는다.
"이 환자는 시간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박사님!"
"그러나…… 그런 일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프레스튼 박사는 우울한 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사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내가 시간을 재어 보니 레이너 박사는 정확히 7초 반만큼 질문하는 것보다 앞의 것을 시간적으로 앞질러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일어섰다.
"박사님, 그 이유는 오늘 저녁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회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녹음기를 거기에 둔 채 밖으로 나와 차를 탔다.
회사로 가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에서 무엇인가 큰 음모를 꾸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진짜 레이너 박사는 그 음모 때문에 유괴되어 총에 맞고 강에 버려진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음모는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을 체포하던가 아니면 진짜 레이너 박사가 기억을 되찾든지 해야만 한다.
회사에 돌아와 자료실에 들어가 보니, 이미 데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경찰에 전화를 걸었으나 구레아리 경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비로소 피로를 느꼈다. 생각해보니, 나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조사하고 여러 가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쉬어야 되겠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내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아파트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1시 30분 경이었다. 나는 무거운 발을 끌다시피 하여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나는 머리를 강하게 두들겨 맞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자백제(자백시키는 약)
 
나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천천히 정신을 되찾았다. 머리가 몹시 아팠다. 나는 아픈 머리에 손을 대어 보려다가 비로소 내 손이 묶여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천천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내 테이블 위에는 검은 모자와 흰 장갑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두 사람의 발이 보였다.
쳐다보니 그들은 요전에 본 운전사와 흰 장갑을 낀 사나이였다.
"일어나라."
운전사가 말했다.
나는 겨우 일어났다.
"델라니 군, 너는 대단히 귀찮은 놈이다."
바스코가 여송연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말했다.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직업이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갑자기 운전사가 내 배를 쳤다. 그 힘이 얼마나 세었던지 나는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운전사가 난폭하게 나를 잡아 일으켰다.
"너는 어느 정도 알고 있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모든 것이라니, 어느 정도이냐?"
"그것은 말할 수 없다."
"이놈아! 바스코 씨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라!"
운전사의 주먹이 내 얼굴에 날아왔다. 나는 또 쓰러졌다.
"이 놈은 대단한 놈이다. 시간이 없으니 이 놈에게 주사를 놓을까?"
흰 장갑의 주인공인 바스코가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방 모퉁이에 있던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독일 사람 같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이 사람이 레이너 박사가 말한 독일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주사기를 꺼내어서 내 팔에 찔렀다.
그 순간 나는 뇌 세포가 폭발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면 무엇이든지 정직하게 대답하겠지."
독일 사람이 말했다.
"됐다. 델라니, 레이너 박사는 지금 어디에 있나?"
바스코가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 입은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노잔 병원에 있다."
"몇 호실에?"
"격리실에 있다."
"레이너 박사는 의식을 회복했나?"
"회복했다."
"경찰은 박사를 만나 이야기하였나?"
"아마 이야기했을 것이다."
"박사는 무슨 말을 했나?"
"아무 이야기도 못 하였다. 기억 상실증에 걸려 아무 것도 기억해 내지 못하였다."
"병세는 좋아졌는가?"
"조금씩 좋아져 간다. 내일이면 기억 상실증이 나을는지도 모른다."
바스코가 독일 사람을 돌아보며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지금 이 놈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일까?"
"사실일거야. 실력 있는 정신과 의사라면 기억 상실증 정도는 간단하게 치료할거야."
"그렇다면 일찌감치 손을 써야지."
바스코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돌아보며 말을 계속하였다.
"이 놈을 잠재워라."
그러자, 독일 사람은 나에게 또 다른 주사를 놓았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 쾅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나는 또 의식을 잃고 말았다.
 
탈출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에는 나는 침대에 묶여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침대 옆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요."
"음…… 잠깐 이 끈을 풀어 불 수 없을까요?"
"안돼요."
"부탁이오. 오줌이 마려워요."
여자는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무거운 자동 권총을 꺼내어 나에게 들이대며,
"달아날 기색이 보이면 쏘아 버리겠어요."
하고 끈을 풀어 주었다.
나는 일어서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시 온 힘을 다해 일어서니 눈앞에 자동 권총의 총구가 보였다.
"자, 빨리 화장실로 가요."
나는 그 여자의 감시를 받으며 화장실로 갔다. 용무를 마치고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힐끔 창 밖을 내다보니 아침인데, 거리에는 왕래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조용하였다.
침실로 되돌아오니 그 여자는 나에게 침대에 누우라고 명령했다.
"조금만 이대로 놓아두시오. 그건 그렇고, 당신같이 예쁜 여자가 왜 강도의 흉내를 내고 있소?"
나는 조금이라도 시간의 여유를 얻기 위하여 그렇게 말했다.
"나는 브레슬라 선생의 간호원이오. 선생의 명령을 지킬 따름이오."
"브레슬라 선생이라니, 그 늙어빠진 독일 사람 말이오?"
"우리 선생님을 헐뜯으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선생님은 전쟁 전에는 유럽에서 제일 가는 의사였던 분이에요."
"그러나 그 훌륭한 선생은 지금에 와서는 강도와 한 패이거나 스파이의 앞잡이가 아니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잘못 알고 있소. 사실은……."
나는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재빨리 그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엉겁결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나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오른손으로 여자를 갈겼다. 그 여자는 권총을 떨어뜨리고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권총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고, 여자를 침대에 눕혀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나서 상처를 돌보았다. 탄환이 어깨에 들어박혀 있어서 왼쪽 팔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웃옷을 입고 주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거기에 많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사진은 모두가 스티븐 레이너 박사의 얼굴을 크게 만든 사진이었다.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었을 때 힘 센 운전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운전사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흉악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권총을 꺼내어 정확하게 겨냥하여 쏘았다. 그러자, 운전사는 신음 소리를 내며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잠시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천천히 운전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눈을 뜬 채로 죽어 있었다. 나는 곧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건물 밖으로 빠져 나왔다.
거리에 나선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8시 30분 경이었다.
 
역(반대)치료법
 
방에 들어서니 전화벨 소리가 계속 났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데이의 전화였다.
"잠꾸러기예요! 계속 전화를 걸었어요."
"알았어……. 그런데 무슨 용건이지?"
데이는 화난 소리로 말했다.
"정말! 당신은 나에게 UTC에 대해서 조사하여 달라는 것을 잊었어요?"
"그랬지……. 알아냈나?"
"알아냈어요. 그것은 회사의 이름이에요."
"어떤 회사이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유나이티드 텅스텐스틸 주식회사인데, 런던에도 지사가 있고 텅스텐 광업에서는 세계 제일의 큰 회사예요. 더욱이 그 중역에 에마뉴엘 바스코라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그것이다!"
나는 흥분했다.
"그 회사가 뭔가 프란드 연구소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지요?"
"나는 노잔 병원으로 가겠다. 데이도 그 곳으로 빨리 와."
"네, 알았어요. 가겠어요."
데이는 힘차게 대답했다.
나는 방을 나오자마자 낯익은 형사와 마주쳤다.
"델라니씨, 구레아리 경부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경부는 어디에 있지요?"
"노잔 병원에."
"그것 참 잘 됐소. 나도 그 곳으로 가려는 중이오."
형사는 부상을 입은 내 얼굴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굴은 왜 그래요?"
"좀 난폭한 친구에게 얻어맞았지."
나는 지난 밤 이야기를 대충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운전사를 쏜 권총을 꺼내어 형사에게 넘겨주었다.
형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순찰차 무전으로 경시청에 연락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 노잔 병원으로 떠났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부상의 치료를 받았다. 어깨의 총알을 빼내고 붕대를 감으니 한결 시원하였다. 그리고 나서 구레아리 경부를 만났다. 경부는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시었다. 어제 저녁 이야기를 이미 형사로부터 보고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제 저녁에 찾아냈던 레이너 박사의 사진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경부의 눈앞에 들이댔다.
"이 사진을 봐요. 이것은 그 가짜 박사의 얼굴을 레이너 박사의 얼굴과 닮도록 하기 위해 정형 수술에 이용한 사진이오. 이래도 그 사나이가 가짜가 아니라고 우겨댈 셈이오?"
구레아리 경부는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내 얼굴을 쏘아보았다.
"델라니, 이렇게 되었으니 다 이야기해주지. 경찰은 자네가 생각하듯 굼벵이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야. 레이너의 정체를 우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네.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에는 어제부터 부하들을 배치시키고 있다. 지금쯤은 UTC의 바스코 사무실을 경찰대가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듣고 보니 내가 어리벙벙해졌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서 왜 지금까지 아무 일을 하지 않았소."
"아무 것도 모르는 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자네가 템즈 강에서 발견한 사나이를 레이너 박사라고 말한 직후부터 MI5(영국 정보부)와 미국FBI(연방 경찰국)와 연락을 하여 수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범인들은 송두리째 체포하기 위하여 비밀도 해두었던 것이다. 레이너 박사의 일도 일부러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범인들은 레이너 박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네 같은, 바보 같은 기자가 소란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맥이 풀려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구레아리 경부는 말을 이었다.
"자네는 모든 것에 훼방을 놓아 일을 그르치게 하고 말았다.
그 때 프레스튼 박사와, 대머리에다 음산한 표정을 한 야윈 사람이 들어왔다. 프레스튼 박사는 그 사람을 구레아리 경부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이 병원 정신과 의사인 아레구스 마르크스 박사입니다."
그리고 나서, 박사는 나를 그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델라니라는 기자인데, 레이너 박사의 의식이 시간적으로 사실보다 앞지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마르크스 박사님, 레이너 박사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천리안(먼데서 일어난 일을 즉각적으로 알아내는 능력)이 된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마르크스 박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보통의 천리안이 아니야, 내가 여러 가지로 테스트해 보았다. 밝은 불빛으로 눈을 비추니, 그 환자는 내가 불빛을 비추기 꼭 7초 반 전에 눈을 깜박거렸다. 말하자면 그 사람은 마음도 육체도 모두 7초반을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구레아리 경부가 참견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박사님, 이런 일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가설을 세울 수는 있지."
마르크스 박사는 조용히 말해다.
"프레스튼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환자는 7초 반 동안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심장이 정지되고 육체가 죽어 있는 동안에도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즉 그 사람의 이식은 7초 반만큼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장이 정지되면 뇌의 활동도 정지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자, 프레스튼 박사가 대답했다.
"그렇다. 보통 같으면 심장이 정지되고 혈액을 보낼 수가 없으면 뇌도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 환자는 보통의 환자가 아니다. 몇 년 동안 보통 사람 같으면 곧 죽고 말 정도의 방사능을 계속 쪼여서 강한 방사능을 지닌 인간이 된 것이다. 즉 동위원소 인간이다."
마르크스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학적으로 조사해보지 않으면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방사선이 그 사람의 뇌를 아주 특수하게 변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구레아리 경부가 또 참견을 했다.
"레이너 박사의 기억 상실증도 치료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시간을 앞지른 것도 고칠 수 있습니까?"
마르크스 박사가 대답했다.
"지금의 레이너 박사의 기억에는 7초반의 차이가 있소. 그 차이를 고쳐 주면 기억은 반드시 되돌아올 수 있소. 다시 말하면, 시간을 앞지르고 있을 때 그 반대 일을 해주면 되는 것이오. 즉 육체를 살려둔 채 의식만을 7초 반 죽이는 방법인 것이오."
"그 일은 위험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죽을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며 영원히 고칠 수 없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 마르크스 박사는 프레스튼 박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글쎄요…… 강력한 알칼로이드(식물 중에서 발견된 특수한 알칼리성의 유기 화합물인데, 모르핀, 코카인, 니코틴 같은 것이다. 사람의 신경에 큰 영향을 주고 환상을 일으키기도 하며 정신을 돌게 하는 작용을 한다. 특히 모르핀 성질을 가진 아편과 코카인 등의 독성은 무섭다.)를 주사시켜 뇌 세포를 마비시키고, 정확히 7초 반 뒤에, 이번에는 반대의 효력을 가진 뇌의 자극제를 주사하면, 환자의 이식과 육체와의 시간적 간격이 없어질는지도 모르지요."
"위험하오. 그건 너무나 위험하오!"
경부가 머리를 흔들며 외쳤다.
한동안 그들은 잠자코 서로 얼굴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때 복도에서 요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출입문이 힘차게 열리고 병원의 한 의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프레스튼 박사님! 지금 격리실의 환자의 방에 이상한 사람이 몰래 숨어 들어와 환자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그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계속하였다.
"겨우 주사를 못 놓도록 막았지만, 그 사람은 자기 목에 주사기를 찌르고 죽고 말았습니다. 주사기에는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구레아리 경부가 앞서 방을 뛰쳐나가고 우리들도 그 뒤를 따랐다.
 
본 정신을 되찾다.
 
네 사람은 격리실로 뛰어갔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마르크스 박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은 브레슬라 박사이다!"
나는 곁으로 가까이 갔다. 그 사람은 내가 바스코에게 잡혔을 때 같이 있었던 늙은 독일 사람이었다.
"그는 유럽 제일의 성형외과 전문 의사로서 유명한 사람이오. 전쟁 중에는 나치스에 협력하여 유태인의 산 사람을 실험용으로 사용하였던 사람이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행방불명이 되었소."
"그래요? 아마 그 동안 영국에서, 숨어서 의사 노릇을 한 모양이지. 성형수술의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레이너 박사의 가짜를 만드는 데 협력했구나!"
나는 구레아리 경부를 돌아다보았다. 경찰 수사를 방해한 것은 잘못했다고 생각되나, 나는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육감이 적중된 것이 기뻤다.
그 때 간호원이 급히 들어와 구레아리 경부에게 전화가 왔다고 전했다.
경부가 나간 다음 브레슬라의 시체는 운반되어 나가고, 레이너 박사도 다른 병실로 옮겨졌다.
이윽고 되돌아온 구레아리 경부는 나에게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자네가 한 일도 귀찮아서 못 견디었는데, 이번에는 자네의 동료인 여자 사진 기자까지 귀찮게 구는구나."
"데이가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
"저지른 것뿐인가? 그녀는 경찰보다 먼저 바스코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갔다."
나는 빙긋이 웃었다. 데이의 기자 정신을 칭찬하여 주고 싶었다.
"그 때문에 바스코 일당은 달아나고 말았다. 물론 그녀를 유괴해서."
나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러면 데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모르니까 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복잡한데 큰 일을 저질러 놓았다."
"그러면, 구출할 방법이 없습니까?"
"글쎄, 우리는 자네의 연락으로 브레슬라의 조수인 간호원을 붙들어 놓았다. 지금 그 간호원을 심문하고 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가짜 레이너 박사도 있지 않습니까. 그 가짜를 잡아서 조사하면 어떨까요?"
나의 제의에 경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레이너도 달아났다. 오늘 아침 일찍이 연구실에서 사라진 채 자기 집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바보 같은 경찰이구나! 용의자를 모두 놓치고 말다니!"
나는 화가 나서 그 방에서 뛰쳐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구레아리 경부가 내 팔을 잡았다.
"자네 혼자 뛰쳐나가 보아야 데이 양을 찾을 수는 없네. 그러기보다 여기서 진짜 레이너 박사의 기억을 되찾는 일에 협력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되면 그녀가 유괴된 장소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켜 병원에 남기로 했다.
그로부터 레이너 박사의 기억을 되찾는 수술 준비가 될 동안 2시간이 걸렸는데, 나에게는 지루한 시간으로 2년이나 된 것 같았다. 겨우 준비가 완료되어 우리는 수술실로 갔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시작한다."
흰 수술복을 입은 프레스튼 박사는 우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최초의 주사를 놓으면 레이너 박사는 의식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은 극히 짧은 시간인 1,2분밖에 약 효과가 없고, 그 시간이 지나면 또 몇 시간 의식을 잃을 것이오."
"우리는 2분간밖에 질문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요?"
구레아리 경부가 말했다.
"그렇지요. 더욱이 너무 복잡한 이야기를 들으면 발작을 일으킬는지도 모르니 주의해주십시오."
프레스튼 박사는 환자 쪽을 향하였다.
"주사기를……."
박사가 이렇게 말하니 간호원이 주사기를 박사에게 넘겨주었다. 박사는 레이너 박사의 목에 주사기를 꽂았다.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얼마 뒤에 레이너 박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프레스튼 박사가 우리들에게 눈짓을 하면서,
"시작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구레아리 경부가 레이너 박사 곁에 바싹 다가섰다.
"나는 경찰에 있는 사람인데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듣겠소?"
"네."
레이너 박사는 가냘픈 소리이나 똑똑하게 대답하였다.
나의 가슴은 두근두근하였다. 레이너 박사가 본 정신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당신을 쏜 사람은 누구요?"
"바스코의 운전사 브로아이입니다."
"왜 총에 맞았습니까?"
"달아나려고 강에 뛰어들었더니 뒤에서 쏘았소."
"당신은 갇혀 있었습니까?"
"그렇소. 바스코가 매수하려 하는 것을 거절했더니……."
"그 일을 좀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구레아리 경부가 계속 질문을 하자 좀 괴로운지 레이너 박사는 고통스럽게 숨을 쉬었다.
이윽고 레이너 박사는 응답을 하였다.
"바스코는 내가 협력해주면 10만 달러를 준다 하였으나 나는 거절했소."
"어떤 일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까?"
"원자로에 손을 써 달라는 것이오. 플루토늄(방사성의 초우란 원소의 하나)을 한 개 더 넣으라고 말했소. 그런 짓을 하면 제어봉(원자로에서 핵분열에 의한 연쇄 반응이 적당한 비율로 진행되도록 하는 막대기)을 당기는 순간에 프란드 연구소는 날아가고 말아요."
레이너 박사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의 일을 회상하니 새삼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프란드 연구소를 파괴하는 것이 그놈들의 목적이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박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구레아리 경부가 다시 물었다.
"그 후 어떻게 했지요?"
"4, 5일전에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소. 나는 강제로 차에 실려가고 말았소."
"세 사람이라니?"
"바스코와 브로아이와 브레슬라 말이오."
"어디로 끌고 갔습니까?"
"강가에 있는 창고 같은 건물이오. 불에 탄 것 같은 건물인데, 나는 사흘동안 그 곳에 감금되어 있었소……."
2분이 다 되어 가자, 레이너 박사는 대단히 괴로운 표정이었으나, 억지로 힘을 내어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나는 연구소에서 아레건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소. 그 사람이 UTC 사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소."
"그 사람은 우리도 알고 있소. 그 사람은 MI5의 협조를 받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구레아리 경부가 말했다.
"모두 체포해주십시오. 제어 장치를 엄중히 지켜주시오."
"잘 알았습니다."
구레아리 경부가 힘있게 대답했다.
"당신이 감금되었던 창고는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까?"
"상파울로…… 엘루……."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레이너 박사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프레스튼 박사는 레이너 박사의 맥을 짚어보고 눈을 조사하고 나서 말했다.
"이제는 더 말할 수 없소. 몇 시간동안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술실을 나왔다.
"상파울로 엘루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남아메리카의 지명 같은데……. 하여간 템즈 강가에 있는 창고를 이 잡듯 찾아볼 수밖에 없다."
구레아리 경부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다가는 어떻게 하지요? 데이는 그 동안 그 놈들이 죽이고 말는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는 화난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경부는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고, 부하 형사들에게 뭔가 지시하였다.
내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경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델라니, 어디로 가는 건가?"
"바스코의 사무실에 가면 어떤 증거라도 잡을 것 같아서……."
경부는 조금 주저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좋아. 그러나 뭔가 발견했을 때에는 우리에게 연락을 하게. 절대 혼자 행동을 하면 안 되네. 그 곳에는 내 부하들이 있을 걸세."
"잘 알았습니다."
 
원자 폭발은 막을 수 없다.
 
얼마 안되어 나는 밥랜드 거리에 있는 바스코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얼굴을 아는 형사와 또 한 사람이 사무실 안을 조사하고 있었다.
구레아리 경부가 전화를 걸어서 부하들에게 연락을 한 모양인지 그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나는 책상과 선반 등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형사들이 뒤진 뒤라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어서 이렇다 한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쳐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가며 방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벽에는 광산과, UTC 본사와, 항구에서 배에 짐을 싣고 있는 칼라 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광석을 실어내는 풍경의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부두에 대놓고 있는 배 이름은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았는데, 곁에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파울로 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그것은 지명이 아니고 배 이름이다!"
나는 무심코 큰 소리로 외쳤다. 형사들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그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얼굴을 아는 형사가 전화를 받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
"알았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경부가 프란드 연구소로 빨리 오라는 전갈이다. 당신은 멋대로 행동하면 안되오."
"알고 있어요."
두 형사가 나가고 난 다음 나는 서류 상자를 뒤적거렸다. 거기에서 주문서 한 장을 보았다. 거기에는 '마그네슘 배달할 곳-런던 항 엘루 도크(부두) 상파울로 호'
라고, 적혀 있었다.
"레이너 박사가 '엘루'하고 말을 끊었는데, 이 엘루 도크라는 말이군! 이제 알았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프란드 연구소에 전화를 걸었으나, 구레아리 경부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나는 경부가 오면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밖으로 나왔다. 구레아리 경부와 연락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지만, 그렇게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데이의 생명이 위태롭다. 1분이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늦을지도 모른다.
나는 엘루 도크로 차를 달렸다.
엘루 도크는 썩은 냄새가 나는 지저분한 부두였다. 이 곳은 작은 화물선만 사용하는 쇠퇴한 부두인데, 이 곳에 서있는 창고도 오래되어 낡은 건물뿐이었다.
부두 근처까지 왔을 때, 폭격을 당해 형편없이 되어 버린 너덜너덜한 창고가 보였다. 입구에는 'UTC 화물 창고'라고 씌어져 있었다.
나는 그 창고를 지나쳐 다른 창고 쪽으로 차를 달렸다.
창고 가까운 바다에 1척의 소형 화물선이 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이 상파울로 호 같았다.
나는 상파울로 호와 창고를 훑어보았다. 바스코와 데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먼저 창고부터 조사해보자. 물론 위험하겠지만 곧 구레아리 경부가 내가 이야기한 것을 전해 듣고 달려와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창고 정면의 출입문 앞에 다가가서 무거운 출입문을 당겼다. 문은 끽 소리가 나고 곧 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계단이 있고 그 위에 있는 방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거기에는 누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쇠파이프를 하나 손에 집어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반쯤 올라갔을 때 아래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회중전등 빛이 내 얼굴을 비추었다.
아래에 있던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바로 그 때 위에 있는 방의 문이 열리고 바스코가 쑥 나왔다.
"아레건인가?"
바스코가 물었다. 나는 그 순간 계단 손잡이를 뛰어넘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그 사람과 맞붙어 마룻바닥에서 뒹굴며 싸웠다. 싸우는 동안에 나는 누군가에게 머리를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갑자기 물을 끼얹어 나는 정신을 되찾았다. 눈을 떠보니 가짜 레이너가 빈 물통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즉 그 사람이 아레건이었다.
나는 방안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지저분한 창고 안인데, 천장에는 거미줄이 걸려 있고 방 한구석에 상자 2개를 포갠 것 위에 초가 커져 있었다. 그 옆에 광석 부대와 파라핀(석유에서 분리되는 희고 반투명한 납 모양의 고체)이 쌓여 있었다. 그 곳에 데이가 힘없이 앉아 있고, 그 옆에 바스코가 앉아 있었다.
"정말 너는 바보 같은 놈이다."
바스코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까? 그렇게도 뽐내던 UTC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곧 여기에 경찰이 달려올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오기 전에 프란드 연구소에 연락해놓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단순한 바보야. 우리 조직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복잡하게 되어 있다. 자네가 프란드 연구소에 부탁한 말은 절대로 경찰에 연락이 안 될 것이다."
나는 속으로 놀라면서 바스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득의에 찬 미소를 띠었다.
"그것 뿐이 아니다. 아무리 경찰이 엄중히 감시하여도 프란드 연구소의 폭발은 막을 수 없다. 원자로는 조금만 있으면 큰 폭발을 일으킨다. 그러나 너는 그 전에 이미 죽을 것이니, 굉장한 폭발을 구경 못할 것이다.
바스코는 그렇게 말한 다음 아레건을 방 모퉁이로 불러 무엇인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타오르다.
 
내가 데이 곁으로 다가가자, 데이는 나를 보고 몸을 떨고 있었다.
"델라니 씨, 용서해요. 내가 잘못하여 당신까지 이렇게 만들고 말았어요."
"염려 마! 그것보다 그들은 왜 기다리고 있을까?"
"한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사람이 오면 모터보트를 타고 상파울로 호로 갈 모양이에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모르겠어요."
데이는 나에게 매달렸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상파울로 호를 탈 때까지는 무사할 것이다. 그리고 출항한 다음 바다에 떠밀어 넣을 거다."
그 때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던 바스코와 아레건이 이 쪽으로 왔다.
"델라니 군, 내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올 때까지 조용히 있는 것이 좋을 거야. 만약 탈출을 기도하면 아레건이 너희들을 그 자리에서 죽일 것이니까."
바스코가 턱으로 가리킨 곳에 대형 자동 권총을 쥔 아레건이 서 있었다. 바스코는 밖으로 나갔다. 아레건은 무서운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촛불 쪽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왜 이래!"
아레건은 권총을 겨누어 다가와서 말했다.
"아레건, 생각을 고치는 것이 어때!"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아레건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바스코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일이 모두 끝나면 바스코에게 귀찮은 사람이 되고 만다. 도망쳐봤자 한평생 숨어살아야 한다. 그리고 바스코에게는 너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언젠가 너는 경찰에 잡히게 될 것이니까. 그럴 경우 바스코는 아주 난처하게 된다. 바스코는 그것을 예상하고 너를 살려 두지 않을 거다."
"닥쳐라!"
아레건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호령했다.
"마음을 고치게, 아레건. 너는 이용당할 뿐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네.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을 거다."
"이 놈 더 중얼거리면……."
아레건이 가까이 왔다. 나는 무서워서 피하는 체 한 발 뒷걸음질하여 일부러 촛불을 세워 놓은 상자에 부딪쳤다. 촛불은 파라핀 위에 굴러 떨어져서 삽시간에 불이 붙었다.
"이 놈!"
아레건이 외치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내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마룻바닥에 엎드리며 광석 부대를 집어 던졌다.
그 부대가 아레건의 얼굴에 맞았다. 그 순간 또 한 발 총알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레건에게 덤벼들었다. 아레건은 넘어져 타오르는 파라핀 안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는 비명을 울렸다. 나는 아레건을 발로 차고 그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다.
"꼼짝 마라!"
나는 호령했다.
아레건은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마룻바닥에서 대굴대굴 뒹굴었다.
불은 점점 퍼져서 나무 계단과 문에까지 번져갔다.
"나가자! 아레건, 밖으로 나가자!"
나는 데이의 팔을 잡고 아레건을 앞세워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불은 이미 2층 창문으로 솟아오르고 사방이 불바다가 되었다.
나는 데이에게 차를 몰고 오라 하여, 아레건의 손을 묶고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로 빠르게 차를 달렸다.
 
위기 일발
 
원자력 연구소에 도착한 것은 8시쯤이었다. 연구소 안은 8시 반에 시작될 테스트 때문에 몹시 분주하였다.
구레아리 경부는 아직 부하 형사와 같이 연구소 안에 있었다. 테스트하는 동안 경계를 맡은 것이다.
나는 차에서 아레건을 붙들어 내려 경부에게 인도하고, 그 동안 일어난 일을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구레아리 경부는 그 장소에서 아레건을 심문하였다. 그러나 아레건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건을 별실로 데려가고, 바스코 체포의 수배를 지시하고 나서, 경부는 나를 흘려보면서 말했다.
"델라니, 자네는 또 자네 멋대로 행동하였구나. 그만큼 주의시켰는데, 왜 우리에게 미리 연락하지 않았는가?"
"아니, 나는 틀림없이 연락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연락을 받고 당신이 급히 달려올 줄 알았어요. 그러나 소식조차 없어서 나 혼자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바스코가 말한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요. 바스코도 그렇게 말했어요. 자기들의 조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연구소 내에 스파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연락하는 것을 방해했군요."
구레아리 경부는 유심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것뿐 아닙니다. 바스코는 연구소의 폭발은 절대로 경찰이 막을 수 없고, 꼭 파괴시킬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군요."
우리는 거의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8시 15분, 15분 후에는 테스트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경부는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인랜드 박사에게 가 보자."
우리는 원자로 실에서 테스트를 감독하고 있는 메인랜드 박사를 만나러 갔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상한데, 그 연락은 나도 받지 않았소. 그 때의 교환수에게 물어 봅시다."
그렇게 말하고 박사가 전화를 걸었으나, 그 때 교환수는 퇴근하고 없었다.
"내일 출근하면 다시 물어 봅시다."
메인랜드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그런데, 그 아레건이라는 사람이 뭔가 자백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나는 메인랜드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박사님, 테스트는 예정대로 하는 것입니까?"
"물론이지요. 장치는 전부 점검하여 아무 곳에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상이 없으면 테스트를 해야지요."
"그러나 바스코는 꼭 이것을 파괴시킨다고 하던데요."
"이상 없는 것을 내 자신이 확인했으니 틀림이 없을 겁니다."
구레아리 경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 더 아레건을 심문하겠습니다. 무언가 자백할는지 모르니까요."
"나도 따라 가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메인랜드 박사는,
"나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곧 테스트가 시작될 것이니까요."
하고, 대꾸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경부와 나는 아레건이 있는 방으로 갔다. 아레건은 냉랭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레건, 만약 바스코가 말한 것이 정말이라면 이 연구소는 10분 후에 핵폭발을 일으킨다. 그로 인하여 연구소는 방사능으로 덮이게 되고 우리들은 형태도 없어질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
내가 부드럽게 말했으나, 아레건의 표정은 변화하지 않았다.
"도대체 너는 남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가? 왜 너만 희생당하려 하는가."
"나는 이용당하고 있지 않다. 우리들의 친구는 비겁한 사람이 없다. 생사를 같이 하자고 맹세했다. 만약 이 곳이 폭발되면 그 친구들도 나와 같이 죽을 것이다. 내가 그 친구들을 배반할 줄 아는가?"
아레건은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확고한 신념이 깃들여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말해 보았자 허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계의 분침은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메인랜드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한 번 이상이 없는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나이였다.
"메인랜드 박사는 방금 나가셨습니다. 조금 전에 전화가 걸려 와서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전갈이 왔답니다. 박사는 병원에 가셨습니다. 실험은 계획대로 진행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구레아리 경부에게 전했다. 구레아리 경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전화를 잡고 무엇인가 몇 마디 빠른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와 아레건을 번갈아 보면서,
"메인랜드 박사의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는 구실을 만들어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하고 말했다.
"엉터리다. 거짓말이다!"
갑자기 아레건이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틀림없다. 지금 내가 박사 부인과 직접 대화했다. 부인은 집에 계시더라."
"이 놈이 나를 속였구나. 나를 희생시키고 저만 빠져나갔구나!"
아레건은 고함을 지르고는 내 몸을 양손으로 붙들고 부르르 떨었다.
"이제 알았겠지! 자, 어디에 폭발 장치를 했는가 말해라!"
아레건은 잠시 동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원자로 안이다. 제어봉 한 개에 플루토늄을 장전하여 놓았다. 제어봉을 넣으면 핵폭발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분전이었다. 나는 원자로로 달려갔다.
스위치 판 앞에 서있던 계원이 달려오는 나를 보고 놀란 빛으로 돌아보았다. 이 곳 시계는 8시 2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분전이다. 곧 스위치를 넣으려고 할 때였다.
"기다려! 스위치를 넣으면 폭발한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모든 일은 끝났다. 바스코와 메인랜드는 상파울로 호에 타고 있는 것을 수상 경찰이 체포했다.
메인랜드는 처음부터 UTC를 중심으로 한 스파이 단의 한 패이고, 원자력 연구소의 비밀에 대해 내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너 박사의 로켓 연료의 비밀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자, 연구소를 파괴시켜 연구를 허사로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폭발을 방지하지 못했더라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정말 위기 일발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데이와 내가 연구소를 나오려 할 때,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는 올리베 편집장으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큰 소리로 호령했다.
"델라니, 원고는 아직 안 썼나? 왜 꾸물거리는가!"
"편집장, 나는 정직 상태가 아니었습니까?"
"그렇건 말건 자네는 기자이다. 델라니, 특종 기사가 있는데 정직이 무슨 상관이냐? 기사를 쓰는 것이 기자이다! 지금부터 두 시간 안으로 기사를 써서 가지고 와라! 알겠나?"
"알았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데이도 따라 웃고 있었다. 나는 줄곧 호령만 하는 편집장이 어쩐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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