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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 웰즈 Herbert George Wells 지음 외 5편 묶음
2021년 03월 20일 15시 30분  조회:821  추천:1  작성자: 강려
하늘의 공포
 
 
이 <소년소녀 세계문학 대선집>은 교훈․전기․문학․모험․탐험․괴담․추리 등 각 분야에 걸쳐 소년소녀들에게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작품을 엄선하여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차 례>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5
 
기적이 일어났다················· 9
이상한 힘···················· 12
지옥으로 꺼져라················· 15
뉘우침····················· 20
내 탓이다···················· 27
모든 것이 전과 같이··············· 30
 
 
하늘의 공포·················· 34
 
피묻은 수첩··················· 38
암스트롱의 수기················· 40
 
 
작은 거인··················· 50
 
이상한 발자국·················· 53
콘크리트 속의 그림자·············· 56
사람이냐 유령이냐················ 60
나타난 괴상한 인간··············· 63
지하 사람이다!················· 66
지하에서의 싸움················· 69
인간의 시체를 표본으로?············· 73
언젠가는 나타날 거다·············· 78
 
 
속의 아프리카··············· 83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86
고장이 났을까?················· 90
겁주는 말투··················· 95
피묻은 스카프·················· 99
덤벼드는 사자················· 103
 
 
우주 스파이·················· 112
 
우주 전쟁··················· 115
너를 체포한다················· 118
이제 살았다.················· 124
외톨박이··················· 127
새튼 숲 속으로················· 131
나는 과연 누구냐················ 135
 
 
우주에서 거머리·············· 143
 
괭이날을 녹이는 바위·············· 146
자라나는 바위················· 149
배탈나게 만드는 작전·············· 153
원자 폭탄 공격················· 158
지구가 깨져도················· 160
꾀어내기 작전················· 164
태양이 잡아먹힌다··············· 168
우주 속의 불꽃················· 172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Men Like Gods
 
웰즈 Herbert George Wells 지음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인간은 옛부터, 자연이나 인간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대해 늘 마음이 끌려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적이 가장 동경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인데, 옛 전설이나 신화 등에서,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만일 자기에게 신기한 힘이 있어서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든지, 산 한복판을 둘로 딱 가르고 그 속을 지나다닌다든지, 혹은 '먹을 것이 나와라'하면 맛있는 음식물이 나온다든지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 이것은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체념할 수 없는 인간의 오랜 염원인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해서 과학 소설이나 공상 소설에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여러 가지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실현시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쓴 <아더왕 궁전의 양키>는 19세기 때의 미국의 기계 기사가 6세기 때의 영국의 아더왕의 궁전으로 옮겨가서 거기서 근대 과학의 지식을 응용하여 당시 아더왕 궁전에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대마술사 멀린을 물리치고, 왕의 자리를 노리는 적을 무찌르고, 영국인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그리고 있는데, 6세기 때의 옛날 영국인들은 그것이 모두 신통한 마술이요, 기술인 것처럼 여겨왔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과학 기술이 한층 더 발달하게 될 미래의 사회에서는 현대인의 눈으로는 기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일도 예사로운 일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과학소설의 시조로 불리는 H. G. 웰즈도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썼습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빛과 굴절률을 바꾸어 유리처럼 투명하게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만드는 <투명 인간>, 동물의 몸 구조를 바꾸어 인간처럼 말을 할 줄 아는 동물 인간을 만들어 내는 <몰로 박사의 섬>, 인간의 운동 신경의 속도를 다른 인간의 눈에는 띄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빠르게 하는 <새 가속제(新加速劑> 등은 모두 이러한 과학적 방법으로 기적을 나타내 보려는 아이디어에서 씌어진 과학 소설입니다.
이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도 웰즈가 쓴 것입니다. 이 소설은 과학과 옛날부터의 기적 - 이 두 가지가 교묘히 잘 이용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포저린게이 청년이 어째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얻었느냐, 어떻게 하여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느냐 하는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야기 가운데는 지구 물리학에 관한 지식이 빈틈없이 응용되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이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 조건의 한 가지로,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지상에서 쓰이는 시간은 지구의 자전을 멈추게 하면 자연적으로 멈춰지게 됩니다.
하지만 지구의 자전을 별안간 딱 멈추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기적이 일어났다
 
롱 드래곤 주점은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흥청거렸다. 수많은 사람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활쏘기 게임장의 담당 점원인 청년 포저린게이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미슈라는 친구하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말을 했댔자…"
하고 비미슈는 포저린게이를 깔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흘겨보며 말했다.
"기적 같은 것이 어찌 일어날 까닭이 있겠나?"
"그야 쉽게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한번 일어났다 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나. 아무튼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 어떤 특별할 힘을 가진 특별한 인물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니까 말야."
"이것 봐, 그따위 소릴 했댔자…"
하고 비미슈는 반박했다.
"일어날 턱이 없는 기적을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렇다고만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어, 기적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당장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포저린게이는 좀 흥분된 표정이 되더니 술집 한 모퉁이에서 타오르고 있는 램프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예를 들어, 저 램프가 보통 때라면 거꾸로 서서 그대로 탈 수 야 없지 않겠어. 그렇지, 비미슈?"
"그야 물론이지. 그런데?"
"그런데 이 자리에 특별한 힘을 지닌 인간이 있어서, 이렇게 한다면 말이다."
포저린게이는 일어나더니, 손을 램프 쪽으로 쭉 뻗었다.
"먼저 정신을 집중시켜, '거꾸로 서서 타거라' 하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 에잇!"
포저린게이는 손을 뻗친 채 갑자기 외치며 램프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램프는 별안간 공중에서 거꾸로 서더니 불꽃이 밑으로 향한 채 조용히 타고 있지 않은가.
램프 곁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어 달아났다. 다른 사람들도 멍하니 입만 딱 벌린 채 램프를 지켜보며 슬슬 뒤로 물러섰다. 1초, 2초, 3초, … 여전히 램프는 거꾸로 선 채 타고 있었다.
포저린게이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숨이 가빠지고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턱이 없지."
그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램프는 별안간 확 타오르더니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램프는 산산조각이 나고 석유는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다행히도 불이 꺼졌으므로 불은 나지 않았다.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 것처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모두 쑥덕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것 참… 우리 눈이 어떻게 된 거야?"l
"그럼, 그럼, 눈의 착각이야."
"아냐, 틀림없이 요술일걸. 포저린게이가 요술을 부려서 우리를 홀린 거야."
포저린게이는 깜짝 놀라 '그런 일이 없어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멸시하는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는 바람에 그만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다.
"이것 봐, 장난도 분수가 있지, 위험한 짓을 어쩌자고 함부로 하는 거야?"
비미슈가 책망을 했다.
"참, 괘씸한 녀석이군."
"얼른 썩 꺼지지 못해."
주위의 술꾼들이 떠들어댔다.
포저린게이는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들의 책망이 쏟아져 나온 데다가 뜻밖의 일이라 정신이 엇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술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이상한 힘
 
포저린게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자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아까 롱 드래곤 주점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했다.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장난 삼아 한 짓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때,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 램프를 보고 '거꾸로 서서 타거라.' 하고 명령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포저린게이는 다시 한 번 더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안에 켜 두었던 촛불에 손가락을 들이대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공중에 떠올라라!"
그러자 촛불은 공중에 스르르 떴다.
"앗!"
포저린게이가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큰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촛불은 방바닥에 툭 떨어져 꺼지고 말았다.
그는 한참 동안 캄캄한 방안에서 몸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역시 엄청난 일이 생기는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촛불에 불을 켤 생각으로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성냥이 없었다.
"아, 성냥이 있었으면…"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순간, 포저린게이의 손에는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성냥갑이 날아 들어왔다.
기적은 또 일어났다.
포저린게이는 다시 한번 더 실험해 보았다.
그는 양초를 꽂아 세우고 말했다.
"불아, 켜 져라!"
그랬더니 양초에 불이 확 켜지는 게 아닌가.
"이것 참, 신통하구나."
포저린게이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젠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특별한 인물 -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그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컵에 물을 담기게 하고, 뱀이 나타나게 했다가 물러가게도 하고, 또 종이쪽지를 공중에 띄워 보고 - 이것이 모두 뜻대로 잘 되어 그는 만족해했다. 그 때는 벌써 밤 1시가 좀 지났다.
(너무 늦게 자다가는 내일의 일에 지장이 생긴다. 이젠 자야지.)
포저린게이는 옷을 벗으면서 또 가슴 설레는 일을 생각해냈다.
"나를 침대에 뉘어라."
그러자 그는 침대 속에 드러누워졌다.
"보들보들한 새 잠옷을 꺼내어 내게 입혀다오."
이번에도 명령대로 되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명령했다.
"기적이여, 이번에는 나를 푹 자게 하라. 그리고 내일 아침 7시에 일어나게 하라."
이렇게 말하자마자 포저린게이는 벌써 쿨쿨 자고 있었다.
 
지옥으로 꺼져라
 
다음날 아침 포저린게이는 7시 정각에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어제 저녁 일이 모두 꿈이 아닐까 하고 여겨졌다. 그래서 시험삼아,
"햄에그를 다오."
하고 말해 보았다.
그러자 식탁 위에는 방금 구운 듯한 맛있는 햄에그가 김을 무럭무럭 내고 있었다. 과연 꿈은 아니었다.
포저린게이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 직장으로 나갔다.
아침 활쏘기 게임장 일은 꽤 바빴다. 청소다 뭐다 하며 모조리 혼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일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기적의 힘으로 청소도 정리도 눈 깜짝할 동안에 끝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거야말로 통쾌하구나."
포저린게이는 얼마나 즐거웠던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기적의 힘을 쓰는 데는 주의해야 할 것이 많았다. 무심코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 날에는, 또 엊저녁의 술자리에서처럼 '나쁜 장난'이라 야단맞을 염려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써먹을 만큼 익숙하지도 못했다.
가령 자전거를 타는 데도 자꾸 연습을 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탈 수 없듯이, 기적은 자전거 타기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저린게이 청년은 근무를 마치자 인적이 없는 가스 공장 뒤로 가서, 거기서 기적 연습을 실컷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그는 언제나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다 장미꽃을 피워 보기로 했다.
시험을 해 보자 지팡이에는 당장 아름다운 장미꽃이 방실방실 피어나서 주위는 온통 달콤한 꽃향기로 가득 찼다.
그 때, 뒤쪽에서 어떤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장미꽃이 만발한 지팡이를 들키는 날에는 또 곤란한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는 얼른 '먼저대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돌아가!"
하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지팡이는 무서운 힘으로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아이쿠, 이게 뭐야!"
하고 성난 고함 소리가 뒤쪽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찔레덩굴을 던진 놈이 ! 아이쿠, 무릎이야!"
포저린게이는 급히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랬더니, 이 근처를 순찰하던 낯익은 경찰관이 아닌가.
경찰관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턱수염을 쓸면서 포저린게이를 노려보았다.
"오라, 너는 엊저녁 롱 드래곤 주점에서 장난을 쳐서 램프를 부순 녀석이 아냐?"
"예, 예에… 참으로 죄송합니다."
포저린게이는 어떻다고 변명할 길이 없어서 어물어물 사과했다.
"또 오늘 저녁만 해도 이런 컴컴한 곳에 숨어서 남한테 찔레덩굴을 집어던지다니 대관절 어째서 넌 그런 장난만 골라 가며 하는 거냐?"
"그것은 에에… 이거 야단났군."
"어서 말 좀 해 보라고."
"즉, 에에… 저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니, 기적을 일으킨다고? 턱없는 소리 작작 해. 너는 경찰관을 찔레덩굴로 때렸단 말이다. 그런 엉터리 수작이 통할 줄 아니? 어쨌든 파출소까지 가자."
이 말을 듣자, 포저린게이는 약이 바짝 올랐다.
"이 멍텅구리 같은! 엉터리인지 아닌지 본때를 보여 주마. 너 같은 건 당장 지옥으로 썩 꺼져!"
이렇게 말한 순간, 포저린게이 청년은 눈을 부릅떴다. 방금 까지도 턱 버티고 큰소리치던 경찰관의 모습이 싹 꺼지고 만 것이 아닌가.
그는 사방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으나, 경찰관의 모습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뉘우침
 
그 이튿날 아침 신문에, 그 경찰관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만큼 크게 보도되었다.
순찰중의 경찰관이 행방불명이 되었으므로 경찰에서는 발을 헛디뎌 템즈 강에라도 빠져 죽은 것이나 아닐까 하며 배와 잠수부를 동원해서 강물에서 시체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포저린게이는 그만 기가 탁 죽고 말았다.
(그 경찰관은 지금쯤 어찌되었을까. 내가 지옥으로 가라고 소리쳤을 순간 싹없어지고 말았으니, 역시 지옥으로 갔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만일에 저 세상에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나같이 죄지은 자도 반드시 지옥으로 가겠지. 그리하여 악마들에게 시달려 고통을 받겠지…)
포저린게이는 일요일 밤, 가까운 교회로 갔다.
빼빼 마르고 휘청거릴 만큼 키가 큰 메딕 목사는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좀처럼 교회에 오지 않던 포저린게이가 끝까지 설교를 귀담아들었을 뿐 아니라, 꼭 상의할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재에 마주앉자, 포저린게이는 대뜸 말을 꺼냈다.
"목사님, 실은 저는 참회를 하러 왔습니다."
"호오, 무슨 일이기에?"
"실은 제가… 어제 .경찰관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것 같아요. 저, 신문에서 행방불명이라 떠들썩한 그 경찰관 말씀입니다."
"뭐라고?"
메딕 목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어 주시진 않겠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저한테는 기적을 일으킬 힘이 있거든요."
"그런 시시한 소린 그만두게. 난 바쁜 몸이니 어서 돌아가 줘."
메딕 목사는 화를 벌컥 내며 일어섰다. 포저린게이는 당황하여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좋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당장 기적을 일으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비꽃 화분이 되어라!"
담뱃갑은 어느 사이에 화분으로 변했다. 메딕 목사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거 참 놀랍군. 자넨 마술사였군 그래. 대관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거지?"
"마술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되는 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자, 보십시오. 금붕어 항아리가 되어라!"
제비꽃 화분은 금시 금붕어 항아리로 변했다.
포저린게이는 그것을 또 비둘기로 바꾸고, 또 토끼로 바꾸자,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또 담뱃갑으로 되돌려 놓았다. 메딕 목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포저린게이의 기적을 넋잃고 보고 있었다.
"자, 이만 하면 아시겠죠, 목사님?"
"응… 직접 내 눈으로 보았으니, 참말로 믿을 수밖에."
포저린게이는 그 롱 드래곤 주점에서 비미슈하고 벌였던 논쟁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그는 메딕 목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응… 그것 참 어려운 문제로군.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들었으니까."
메딕 목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저린게이는 크게 실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군다나 장시간을 지껄여댄 데다가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배를 쫄쫄 곯았던 까닭에 기운도 쪽 빠져 있었다.
마침 점심때가 되었으므로 메딕 목사는 그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그런데 요리사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는 데다가 매우 게으 름뱅이였기 때문에 음식은 아주 맛없고 먹어 볼 것 없는 빈약한 것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의 기적의 힘으로 맛있는 걸 좀 상에 올려놓을까요?"
포저린게이가 말하자 목사는 매우 기뻐하며,
"그러면 나는 먹음직스럽게 두꺼운 비프스테이크하고, 샐러드와 계란 요리, 그리고 맛있는 포도주가 좋겠군."
주문한 요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식탁 위에 가득히 차려졌다.
포저린게이도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기적의 힘으로 주문하고는 두 사람은 사이좋은 친구처럼 마시고 먹었다.
목사는 술기운이 얼큰히 돌고 배가 부르자, 아까까지의 걱정이 싹 달아났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옳지, 내가 왜 미처 이런 생각을 못했던고. 여보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네."
메딕 목사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목사님?"
"자네는 기적의 힘으로 경찰관을 지옥에 보냈잖나. 하지만 역시 기적의 힘으로 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면 그것으로 죄 값은 치러지는 거라네."
"아, 그렇겠군요. 하지만 어떤 일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포저린게이가 물었다.
"그거야 뻔하지 뭔가. 마음씨가 나쁜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만든다든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든지 하는 일이지."
"예, 알겠습니다. 목사님, 그럼 어떤 사람의 마음을 고쳐 주어야 하는지, 또 도와야 하는지를 일일이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럼, 그럼. 가르쳐 주고 말고. 이 맛있는 포도주를 한 병만 더 마시고 곧 출발하도록 하세."
두 사람은 하늘이라도 날 듯한 유쾌한 기분이 되어 그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겨우 일어섰을 때는 벌써 한밤중이었다.
밤거리에는 주정꾼들이 술에 잔뜩 취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었다.
메딕 목사는 곧 포저린게이한테 명령했다.
"저 주정뱅이들을 제정신으로 돌아가게 해 줘."
"예, 알았습니다."
포저린게이가 한쪽 손을 살짝 흔들고 입 속으로 뭐라 중얼중얼하자, 주정뱅이들은 한꺼번에 술이 다 깨어버렸다.
그리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한동안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나, 이윽고 맥없이 슬슬 집으론 돌아갔다.
"옳거니, 됐어. 그런 식으로 하면 돼."
메딕 목사는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두 사람은 한길로 나섰다. 거리에는 사람과 마차가 붐볐으나, 길이 나쁜데다 좁은 탓으로 혼잡을 빚고 있었다.
"이번엔 저 도로다. 저것을 훌륭한 도로로 싹 바꿔 놔 봐."
포저린게이가 도로를 바라보여 입속말로 두세 마디 중얼중얼하자, 도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쭉 곧고 넓고 깨끗한 포장 도로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금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새로운 기적을 자꾸자꾸 일으키며 나아가는 것이었다.
더러운 개천을 물고기가 노는 깨끗한 내로 바꿔 놓았다.
방금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낡아빠진 다리를 튼튼한 새 다리로 바꿔 놓고, 질퍽질퍽한 늪지의 물을 말려 버리는가 하면, 허물어진 선창가를 깨끗이 수리하기도 했다.
거기까지 해 나갔을 때, 교회의 종소리가 3시를 알려 주었다.
포저린게이는 갑자 놀라,
"아, 벌써 새벽 3시가 되었군. 이젠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지."
"무슨 소릴, 아직 시작일 뿐이 아닌가?"
기적의 힘에 홀딱 정신이 빠진 메딕 목사는 꾸짖듯이 말했다.
"아침까지는 이 동네를 완전히 새마을로 만들어 놓아야 하네."
"하지만 저는 직장에 나가야 하고, 또 너무 늦게 돌아가면 하숙집 아주머니가…"
"그런 일엔 더 신경 쓸 것 없어요."
메딕 목사는 어째서 그런 것도 모를까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그 기적의 힘으로 시간을 딱 멈추게 하면 되잖나, 이 사람아! 그러면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아침이 오지 않도록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군요… 하지만 어떡하면 시간이 멈추나요?"
"간단한 일이지 뭐."
메딕 목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구상에 아침이 되고 밤이 되는 건 무슨 까닭인가. 지구가 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지구의 회전을 멈추게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렇군요. 목사님은 과연 머리가 좋으시네요."'
포저린게이는 두 발을 딱 벌리고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구야, 멈춰라!"
 
내 탓이다
 
다음 순간, 포저린게이는 무서운 속력으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메딕 목사도, 옆에 서 있던 마차도, 길을 가던 들개도, 나무도, 돌도… 무엇무엇 할 것 없이 송두리째 공중으로 튕겨 올라가고 만 것이다.
한순간 포저린게이는 무서운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것이 라 여겼다.
"기적이여, 나를 안전하게 땅에 내려 놓아다오."
이렇게 외치자마자, 그는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버린 빌딩의 옥상에 사뿐 내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대관절 어찌된 영문일까.
동네는 마치 무서운 폭격을 당한 것처럼 형편없는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빌딩은 무너지고, 목조 건물은 그 자리에 폭삭 내려앉고, 지붕이나 가로수가 날아가 버리고, 온 하늘에는 벽돌과 돌과 나무와 인간과 소와 말과 돼지… 그밖에도 수많은 것들이 날고 있었다.
우르르 우르르륵.
지옥 세계의 밑구멍이 빠져 버린 것처럼 무서운 태풍이 휘몰아치고, 눈알이 터져 달아날 듯이 번갯불이 번쩍번쩍 빛나고, 천지를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도대체 이건 어찌된 거야. 이 폭풍우는 여간한 폭풍우가 아니다.)
포저린게이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철근에 매달리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밤하늘에는 희푸른 달빛만 비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혹시나, 이 폭풍우도 내 탓이 아닐까?)
포저린게이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으려고. 나는 지구야, 멈춰라 했을 뿐이지, 폭풍우야 불어라, 지진아 일어나거라 란 말은 한 기억이 없는데…)
그는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가만 있자. 나는 시간을 멈추게 하기 위해 지구를 멈추게 했거든. 지구는 시속 1천 6백 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딱 멈추게 했으니, 즉…)
포저린게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만일에 맹렬한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마차를 갑자기 세우면,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좌석에서 쏟아져 내려 달아나게 된다. 그 탄력이 더 강하면 마차 밖으로 탁 튀어나갈지도 모른다. 만일에 그 마차가 지구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속 1천 6백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는 지구가 별안간 멈추어 버린다면 - 물론 지구상에 있는 것은 모조리 대포의 탄환보다 빠른 속도로 공중으로 쏟아질 것은 뻔한 일이다.
도시도 마을도 빌딩도 집도 다리도 인간도… 세계 속의 모든 것이 그 탄력에 의해 부수어지고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그의 기적의 힘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참으로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그 경찰관을 지옥으로 보낸 죄 값을 치르기는커녕, 돌이킬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아아, 나는 세계를 멸망시켰다. 살인자다…)
포저린게이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때 문득, 바다 쪽을 바라본 그는 무서운 광경에 정신이 쏠렸다. 해일이었다. 바다도 역시 기적의 힘으로 뒤흔들려 하늘을 뒤덮는 듯한 무서운 물벼락이 이리로 휘몰아쳐 오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전과 같이
 
포저린게이는 필사적으로 그 파멸을 막으려 하였다.
"그만 멈춰라! 제발 좀 가라 앉아다오!"
그는 밀어닥치는 물벼락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기적도 해일한테는 이기지 못하는지 여전히 자꾸자꾸 몰아닥쳐 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보고,"바람아, 그쳐라!"
하며 있는 힘을 다해 크게 외쳤다. 그러나 바람은 그의 말을 불어 날려 버리듯이 한층 더 세게 불어닥칠 뿐이었다.
"폭풍우여, 가라앉아라. 번개야, 그만 꺼져 버려라!"
그는 두 손 모아 비는 마음으로 외쳐댔다. 하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사그라져 버렸던지, 아니면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서 그런지…
포저린게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맸다.
(차라리 처음부터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얻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자꾸 불어닥치는 바람에 날려가 버리지 않으려고 철근을 꼭 붙잡고 안간힘을 쓰며 막 눈앞에 밀어닥친 해일을 지켜보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기적이여, 기적이여, 잘 들어 다오! 이제 간절히 바라노니, 나한테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거둬 가다오. 나로 하여금 전과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해다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정성껏 빌었다.
"기적이여, 이젠 그만해다오. 아무 일도 없었던 옛날로 날 돌아가게 해 다오. 나로 하여금 롱 드래곤 주점에서 처음 기적을 일으켰던 그 전 상태로 돌아가게 해 다오!"
포저린게이는 눈을 감았다.
"자, 제발 부탁합니다!"
그 순간, 바람 기운이 싹 떨어진 느낌이 들고 주위가 캄캄해졌다. 무서운 소리가 딱 그치고 고요가 온 세계를 둘러쌌다.
(아아… 역시 안 되는구나. 끝내 세계의 끝장이 날 판이구나.)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갑자기 주위가 와글와글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퍼뜩 눈을 떴다.
거기는 다름 아닌 롱 드래곤 주점이 아닌가. 주위에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낯익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웃고 성내고 이야기하고 흥청거렸다.
그 외 앞에는 친구 비미슈가 맥주 잔을 들고, 남을 깔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포저린게이 청년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왜냐 하면, 모든 일이 기적이 일어나던 전으로 되돌아와 버렸기 때문에, 그도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이것 봐, 그 따위 소릴 했댔자…."
하고 비미슈가 말했다.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날 까닭이 있겠나?"
"그야 쉽사리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한번 일어났다 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나."
포저린게이는 어쩐지 언제 어느 곳에서 똑같은 말씨름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아무튼 기적을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저 램프가 보통 때라면 거꾸로 서서 그대로 탈 수야 없지 않겠어, 그렇지? 하지만 기적의 힘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때, 램프가 별안간 공중으로 떠오르고 거꾸로 되더니, 조용히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끝>
하늘의 공포
The Horror of the Heights
 
코난 도일 Arthur Conan Doyle 지음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옛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이라는 것에 대해 보통 다른 감정을 품어 왔습니다.
하늘은 신비스럽게만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하늘은 푸르고 맑고 조용하게 보이다가도, 금새 시꺼먼 먹구름이 몰려와 호우(豪雨)를 퍼붓기도 하고, 바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무서운 폭풍우를 휘몰아쳐 땅 위를 휩쓸고, 홍수를 일으켜 집이나 논밭을 떠내려가게 합니다.
캄캄한 밤하늘을 뒤흔드는 천둥과 벼락 소리나 어둠 속에서 불칼처럼 휘둘러대는 번갯불은 옛날 사람들을 얼마나 놀라게 하고 겁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는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진 것 - 여러 신들과 초자연의 괴물과 악마들이 산다고 여겼습니다.
번개는 번개의 신이 던지는 불덩이요, 폭풍은 바람의 신이 일으키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자연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러한 미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바람은 태양으로 따뜻해진 대기의 이동이고 비는 공중으로 증발했던 수증기가 식어서 물방울이 된 것이고, 또 천둥은 정전기의 부딪침이라는 원리를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도 인간은 하늘에 대한 공포에서 좀처럼 떠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약 2백 년 전, 즉 1784년 프랑스의 몽골리에 형제가 만든 기구가 처음으로 인간을 하늘로 올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 기구는 점점 발달되어 자꾸자꾸 더 높은 하늘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1840년에는 7천 미터까지, 1860년대에는 1만 1천 미터 높이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도 높은 하늘에 올라가면 공기가 적어진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못했던 까닭에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높은 하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인류 사상 처음으로 하늘을 난 것은 1903년의 일이었는데, 그 때부터 한동안은 겨우 고도 1백 미터쯤 되는 낮은 하늘을 흔들흔들 날았습니다.
이 소설이 씌어진 1910년은 아직 비행기가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러한 공상이 떠올랐던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물론 지금은 대개의 제트 여객기는 1만 미터의 높은 하늘을 날고, 2만 미터, 3만 미터 가량까지 올라가는 것으로는 군용기나 실험기 같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따라서, 시대의 흐름에 따른 과학의 눈부신 발전상을 실감케 하는 소설이라 하겠습니다.
코난 도일(1859~1930)은 괴기소설의 아버지라 할 만큼 너무나 유명합니다. 명탐정 셜록 홈즈를 비롯해서 수많은 괴기소설 중에는 문학사에 영원히 남는 걸작이 많습니다.
또, 과학 소설과 공포 소설도 많이 썼습니다. 가장 유명한 과학 소설은 <잃어버린 세계>와 <마라코트의 깊은 바다 밑>, 그리고 공포 소설로는 이 책의 작품 등이 있습니다.
피묻은 수첩
 
세상에는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이라든지, 꾸민 이야기라든지, 혹은 단순한 생각의 잘못이라든지 넘겨버릴 수 없는 사건이 있는 법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도 그와 같이 세상에서도 드문 괴상한 사건의 하나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의 9월 15일, 켄트 주 위지엄 마을의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때, 자유롭게 수첩장을 끼었다 빼었다 할 수 있게 만든 낮선 수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데서부터였다.
수첩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꽉 차 있었지만 농부는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표지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크, 혹시나 끔찍한 살인 사건의 증거일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농부는 그 수첩을 곧 마을 이장한테 가져갔다.
이장은 그것을 자세히 읽어 보고, 그 너무나 괴상한 내용에 깜짝 놀라, 전부터 잘 아는 런던 대학 교수한테 보냈다.
그 대학 교수도 크게 놀랐다. 그래서,
"이것은 전문가한테 보여야지."
하고, 런던 항공 협회에 넘겼다.
런던 항공 협회의 사람들은 그 수첩을 한 번 보고 나더니 매우 흥분했다.
수첩은 앞쪽 두 페이지와, 마지막 한 페이지가 없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에서 누구의 것인지 당장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난해 9월 14일, 혼자서 고공 기록에 도전했다가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영국 항공계의 명조종사 조이스 암스트롱의 최후의 수기였던 것이다.
암스트롱은 영국에서도 손꼽힐 만큼 큰 부자였다. 특히 기계에 관해서 자세하여 특허를 몇 가지나 딴 발명가이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유명했던 것은 그가 비행기에 미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디바이지스 시 근처에 있는 그의 전용 비행장에는 자가용 비행기가 네 대나 있었고, 한해 동안에 1백 50회나 하늘을 날아 여러 가지의 비행 기록을 세웠다.
요즘, 그는 특히 고공 비행에 세계 기록을 세우기 위해 새로운 비행기를 주문하는 등 그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비참한 사건이 하나 생겼다. 영국 공군의 조종사로, 암스트롱에 버금가는 적수 마틀 중위가 1만 미터의 고공(高空)에 도전했다가 원인 불명의 사고로 추락되어 무참히 죽었던 것이다.
중위의 시체는 비행기의 잔해와 함께 발견되었으나 머리 부분이 송두리째 없었다.
암스트롱은 이 사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틀 중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1만 미터 이상의 고공 신기록을 세워 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10일, 1만 2천 3백 90미터라는 눈부신 고공 기록을 거뜬히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암스트롱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날로부터 불과 나흘만에 다시 고공 기록에 도전하였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수첩은 그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과, 행방불명의 진상을 밝혀 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상이란 참으로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상한 것이었다.
당신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는 다음에 적은 수기를 읽고 스스로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
 
암스트롱의 수기
 
(이 수기는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앞의 두 페이지와 뒤의 한 페이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중간에서 시작해서 중간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주의해서 읽을 것.)
 
…하지만 나는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분명히 고공 기록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사고도 일어나기 쉬우므로, 그로 말미암아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 조종사가 몇이나 생겼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죽는 모양이며 추락하는 방법인 것이다.
예를 들면, 2~3년 전에 죽은 프랑스의 베리아 비행사와, 또 그 다음에 죽은 영국의 박스터 비행사의 경우는 비행기의 잔해가 발견되었을 뿐 끝내 비행사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박스터의 경우에는 마침 그 밑을 비행하고 있던 다른 비행사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잡힌 것처럼 자꾸자꾸 올라가는 박스터를 보았다지만 비행기는 도저히 그런 수직 상승을 할 수 가 없는 것이다.
또, 올해에 들어서 코나 비행사는 간신히 비행장까지 돌아오기는 했어도, 조종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심장마비라 했지만, 코나 비행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의 세 배나 건강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느냐 그는 죽기 직전, '아, 무서워라… 무서워라.' 하고 거듭 말했다지 않은가?
그리고 또 이번에는 마틀 중위의 비극이다.
마틀 중위의 시체는 머리가 없어졌다.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떨어져 달아났다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파편도 남기지 않고 없어진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의 비행복에 흥건히 묻어 있던 기름이다. 그것은 비행기에 사용되는 어떤 기름과도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름은 대관절 어디서 묻었단 말인가?
1만 미터 이상의 높은 하늘은 아직도 전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이다.
어쩌면 거기에는 고공 밀림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들이 아직도 모르는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틀 중위도 코나도 박스터도 그 괴물의 습격을 받은 것은 아닐까?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수수께끼를 풀고야 말겠다.
나는 그것을 밝혀내고 싶었다.
 
9월 10일
아침 9시 반이 좀 지나자 나는 나의 애기인 최신식 베로나 단발기로 떠올랐다. 친구들에게는 고공의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엽총과 노루잡이용 총알 한 다스를 잊지 않았다.
그밖에도 물론 고공용 산소 호흡기나 방한용 털스웨터, 방한복에 방한모, 방한화 등 추위를 막기 위한 완전 장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베로나 기는 상쾌하게 날았다. 크게 원을 그리면서 정점 고도를 높여 갔다.
1천 미터쯤 올라갔을 무렵, 강한 천둥과 소나기를 만났다. 그러나 비구름 층을 뚫고 올라가자, 곧 비는 그치고 주위는 매우 잠잠해졌다.
10시경, 3천 미터의 고도까지 도달했다. 그 뒤로는 매우 순조로와 구름 봉우리를 자꾸자꾸 뛰어넘어 어느 사이에 4천 미터, 5천 미터로 상승해 가고 있었다.
그 무렵에 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베로나 기의 나사못이란 나사못은 모조리 삐걱거려 방금이라도 날개가 떨어져 달아나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한참 동안은 바람을 업고 날면서 고도를 높여 갔다. 7천 미터에 도달하자 방향을 바꾸어 월트샤 지방의 상공을 향해 날았다.
마틀 중위 비행기가 조난 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나는 이 근처에도 고공 밀림이 있으리라고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고 에어포켓에 빠지기도 하여 언제 공중 분해 될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지경이었다.
나는 만일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낙하산의 끈을 늦추고 언제라도 금방 뛰어내릴 수가 있도록 했다.
이 때부터 종종 구역질이 나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공기가 적어지고 산소가 부족하게 된 탓이었다. 그래서 산소 호흡기를 달았더니 금방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1시 반, 애기는 드디어 1만 미터를 넘었다. 나는 세계의 왕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저 멀리 땅 위를 내려다보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베로나 기의 기능은 아직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고도를 높여 갔다. 고공 밀림이 만일 있다고 하면 이 근처에서 위쪽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1만 2천 미터쯤 올라가니, 그보다 더 올라가기는 매우 곤란해졌다. 공기가 너무 모자라서 비행기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무렵부터 엔진의 기능이 떨어지며 기침을 하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만 3천 미터 근처까지 상승했을 때, 나는 마침내 단념하고 말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이상으로는 더 올라가지 않는데다가 가솔린이 앞으로 한 시간 분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고도를 유지하면서 쌍안경으로 주위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주위에는 은빛으로 곱게 빛나는 구름 덩어리가 흩어져 있을 뿐 그밖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기수를 돌려 내려가려고 했다. 그 때였다.
비행기 앞에 화환 같은 모양을 한 이상한 구름이 태양 광선을 받아 번쩍 번쩍 빛을 내고, 빙글빙글 돌면서 나타난 것이다. 비킬 사이도 없었으므로 비행기는 그 속을 뚫고 들어갔다.
베로나 기는 별로 다른 일없이 그 속을 지나갔으나, 그 때 나는 뿌연 기름 같은 물질이 비행기의 창과 날개에 묻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수증기도 안개도 아닌, 어떤 매우 작은 미생물의 덩어리 - 바닷물의 플랑크톤 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무서운 괴물을 보았다.
그 괴물은 의사당의 둥근 지붕보다도 훨씬 더 큰 인경(鱗莖)처럼 생긴 괴물 - 하늘을 나는 해파리라고 표현해야 할지, 어쨌든 이상한 괴물이었다.
몸뚱이 전체가 분홍빛이고 가느다란 초록색줄 무늬가 여러 줄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에 두 개의 긴 초록색 촉수가 늘어져 있었다.
그 하늘을 나는 해파리는 규칙적으로 숨을 쉬면서 천천히 너울너울 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생물을 좀더 자세히 보려고 비행기를 선회시켰다. 그러자 비로소 그 일대에 모여 있는 몇십, 몇백, 아니 몇천이나 되는 하늘을 나는 해파리의 큰 무리 속에 뛰어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하늘의 생물은 해파리뿐만이 아니었다. 넘실넘실하며 기나긴 바다뱀과 똑같이 생긴 것이 있는가 하면 기구처럼 둥근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명주처럼 엷고 투명하며 햇빛에 반사되어 일곱 가지 무지개 빛으로 번쩍이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저 아득한 상공에서 또 다른 괴상한 생물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몸 전체가 보랏빛을 띠고 있고, 한가운데에는 눈과 비슷한 검은 원반이 두 개, 희고 딱딱한 듯한 부리처럼 생긴 툭 튀어나온 것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리고 내 비행기를 발견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덮쳐 왔다.
나는 바짝 속도를 내었다. 그 괴상한 매같이 생긴 공중 동물의 속력은 비행기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비행기를 따라와 나란히 날더니, 몸 아래쪽에서 여러 개의 긴 촉수들을 쫙 뻗쳤다.
한 촉수가 열기로 뜨거운 엔진에 닿았다. 데인 탓일까. 촉수가 치직 소리를 내며 움츠려졌다. 또 한 개는 프로펠러에 닿자마자 갈기갈기 찢어졌다.
나는 베로나 기의 기수를 급히 아래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촉수는 또다시 무서운 속력으로 쫓아왔다. 그래서 뒤쪽에서 좌석 안으로 뚫고 들어와서는 내 몸을 휘감았다.
놀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나는 좌석에서 끌려나갈 뻔했다. 그래서 얼른 엽총을 집어들자 두 방을 연거푸 쏘았다.
그 중 한 방이 공중에 뜨는 구실을 하는 듯한 주머니 같은 것에 명중되자 그 속의 기체가 피익 하고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괴물은 갑자기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
나는 이 때다 하고 전속력으로 급강하를 계속했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고공 밀림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비행장에 돌아오자 나는 친구들에게 고공 비행의 신기록을 세웠다고만 말했다.
공중 생물에 관한 이야기만은 도무지 믿어 주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 괴물들의 사진을 찍어 와야지. 그래서 그 사실을 온 세계에 대해 발표해야지.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다시 한번 더 저 고공 밀림을 향해 출발할 작정이다.
 
수기는 여기서 끝났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틀림없이 비행기 안에서 적었으리라 여겨지는, 흔들린 글씨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1만 2천 미터. 이제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가망이 없다. 놈들이 세 방향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아아, 이젠 끝장이다…
 
이것이 조이스 암스트롱의 최후였던 것이다.
작은 거인
The Microscopic Giants
 
에른스트 Paul F. Ernst 지음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과학 소설에는,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을지도 모를 침략자가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합니다.
화성인이나 목성인, 그러고 토성인과 같이, 태양계 외의 행성에서 온 인간인 경우도 있습니다. 태양계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별이나 성운(星雲)의 우주인일 때도 있습니다. 또 바다에서 기어올라온 괴상한 짐승일 경우도 있고, 태고의 공룡이 부활되어 기습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침략자는 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대지 밑에서 사는 지하 인간입니다.
지구 위의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2백만 년에서 3백만 년 전 원숭이 종류가 점점 진화되어, 마침내 호모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인종, 즉 인간)로서 독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방면으로 진출하여 갖가지의 인종과 민족으로 갈라지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동물의 왕자로 군림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모르는 인류의 한 종족이 아득한 옛날에 땅 밑에 파고 들어가서 생활을 하기 시작하지나 않았을까요?
수백만 년 전 인류나 원숭이의 아득히 오랜 선조가 겨우 나무 위 생활을 버리고 땅 위로 내려왔을 무렵, 그대로 동굴이나 지하 굴속에서 살게 되자, 차츰 지하 생활에 익숙해져 진화된 인류가 생기지나 않았을까요?
만일 이러한 인류가 있다고 하면 - 그 인종은 점차 지하의 높은 압력이나 열에 견딜 수 있도록 몸이 진화되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지하 사람들은 땅 표면에서 수천 미터 되는 깊은 지하를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고 거기에 지하 도시를 만들어 독특한 문명을 발전시켰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과학 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인류는 지금까지 갈 수 없었던 지하 세계에도 진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드릴이라든지, 굴착기 같은 땅을 파는 기술이 발전되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광물이나 석유를 찾기도 하면서 지구의 내부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핵무기 실험을 지하에서 한다든지, 바다 밑을 볼링하여 연구한다든지, 지하 도시를 계획하는 등 여러 가지의 일들이 실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은 지하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지하 사람들에게 대한 도전이 아닐까요?
즉, 지하 사람들은 우리들 땅 위에서 사는 인류를 위험한 적, 악질적인 침략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나 아닐까요?
그러한 일이 만의 일이라도 있다면… 그야말로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공상 과학 공포 소설의 작자 폴 에른스트는 1930년대에 미국에서 활약하던 사람인데, 이 작품은 지하에 관한 것의 걸작으로서, 여러 명작집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상한 발자국
 
그 괴상한 사건이 생긴 것은 상당히 오래 전, 그러니까 지난 번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사건 서류는 어디론지 뿔뿔이 흩어져 없어지고, 신문이나 라디오에도 발표된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을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한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구리였다.
그 무렵 세계는 온통 구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구리는 전선이나 탄환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온 세계의 구리 광산에서는 온갖 힘을 다해서 구리를 캐내고 있었다. 나하고 친구인 광산 기사 벨몬트가 일하고 있던 곳도 그러한 광산 중의 하나였다.
다만, 우리들의 구리 광산은 다른 곳과는 좀 달랐다. 그것은 세계에서도 가장 깊은 갱도가 있는 광산이었던 것이다.
보통의 구리 광산의 갱도의 깊이는 기껏해야 5~6백 미터 가량이었다. 가장 깊은 갱도라 해도 2친 미터 가량밖에 안 된다.
그러나 우리 둘이 일하고 있던 휴베리올 구리 광산의 갱도는 무려 1만 3천 미터나 되는 엄청난 깊이였다.
더구나 우리는 보다 더 순수한 구리의 광맥을 찾기 위해, 지하 깊이 자꾸자꾸 파내려 갔다.
그래서 그 사건이 생긴 날, 우리들은 1만 3천 2백 미터의 깊이까지 파내려 갔던 것이다. 거기에는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던 아주 멋진 구리 광맥이 있었다.
"만세, 드디어 찾았다!"
우리들은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 날뛰었다. 그리고 당장에 수평 갱도를 팔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할 일 때문에 한 발 먼저 땅 위로 올라왔고, 벨몬트가 남아서 광부들을 지휘하여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때의 일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나한테, 벨몬트가 눈을 유난히 빛내며 다가왔다.
"프레이터, 굉장한 것을 보았어!"
그는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뭔데 그래. 대관절 무얼 보았다는 거야?"
나는 되물었다.
"기가 막히는 발견일세. 곧 국립 박물관에 전화를 해야겠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무선 전화 앞에 자리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대관절 뭘 가지고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매머드의 뼈나 공룡의 화석이라도 발견했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발자국이야. 화석으로 된 인간의 발자국이란 말일세."
"그럴리가?"
나는 엉겁결에 큰 소리를 질렀다
그 까닭은 1만 3천 미터 깊이의 지층은 1백만 년 이상 전의 것으로, 인류의 조상도 아직 이 세상에 없었던 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몬트는 자신 있듯이,
"하지만 분명히 있는 데야 도리가 없지 않겠나. 저 바위 위에 남아 있는 자국은 틀림없이 인류의 가장 오랜 조상의 발자국이야,"
벨몬트는 갑자기 소리를 낮추었다.
"더구나, 놀랄 만한 사실이 있어. 그 발자국은 신을 신은 발자국이란 말이야."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세히 보고 말하라고. 그건 틀림없이 광부의 발자국일 테니. 아니, 이 사람아, 정신나간 소리 작작해. 그런 걸 국립 박물관의 전문가에게까지 보이며 수선을 떨다간 웃음거리밖에 안 돼요."
그러나 벨몬트는 웃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가 않대도. 그 발자국은 난쟁이나 어린이만큼 작은걸. 기껏해야 60센티미터 가량밖에 안 되는 키를 가진 인간의 것이란 말일세."
"그럼, 광부 중의 누군가가 장난을 쳤겠지 뭐."
"그렇지가 않대도 그래. 내 말 좀 똑똑히 들어보라고. 거기는 아주 단단한 바위 층이어서, 여간해선 지워지지도 않아요, 아무리, 누가 그런 힘든 장난을 치려고."
"도대체 그건 어디에 있는가?"
"수평 갱도의 막다른 곳이야. 왜 그 바위 층의 갈라진 틈새가 있지 않던가. 우리가 콘크리트를 들이붓던 곳 말일세, 바로 그 근처야."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리가 없어. 그 콘크리트는 내가 감독해서 광부한테 시킨 거야. 그 때는 아무 것도 없었어."
"그렇게 고집을 부릴 테면, 어디 한번 자네가 직접 가보고 오란 말이야. 그것이 가장 확실할 테니. 자, 그럼, 나도 같이 갈게." .
그리하여 우리들은 함께 갱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것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콘크리트 속의 그림자
 
이윽, 우리는 갱도 속을 천천히 내려가는 상자 모양의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담고 있었다. 공기 압력이 바뀌게 되므로 너무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간신히 수평 갱도의 막다른 곳까지 왔을 때, 우리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이 지하 세계에는 기압이 높은 관계로 숨이 찼던 것이다. 아무리 송풍 장치를 돌려봐도 온도는 40도 가까운 무더위가 되는 곳이다.
"여기야."
콘크리트 벽 바로 앞까지 왔을 때, 벨몬트가 발 밑의 땅을 가리켰다.
나는 거기를 보았다. 가슴이 섬뜩했다.
그 바위 표면에 길이 10센티미터 가량의 작은 발자국이 열두어 개나 나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 발자국은 마치 보드라운 모래밭을 밟았을 때 나는 것처럼 2~3센티미터쯤 패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분명히 신발 밑바닥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등골에 찬물이 끼얹은 것처럼 오싹함을 느꼈다.
벨몬트가 말한 것은 정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1백만 년이나 전에, 이런 지하에 신발을 신은 인간이 걸어다녔다니, 그런 턱없는 일이 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 때, 문득 콘크리트 벽을 바라본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콘크리트 표면이 희게 흐린 듯이 뿌옇게 빛나며 마치 반투명 유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콘크리트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더니, 그 안쪽에서 빛의 무늬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몸뚱이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확인해 볼 겨를조차 없이 후딱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찌는 듯이 덥고 숨막히는 데다가, 이런 이상한 발자국을 보았으니, 눈 앞에 환상이 나타났던 게지.>
그러나 벨몬트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자, 이젠 알겠지. 바로 국립 박물관에 전화를 걸러가세."
"잠깐만!"
나는 그 때 또 하나의 이상한 사실을 목격했다. 발자국은 앞을 향해 대여섯 개, 뒤를 향해 대여섯 개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콘크리트 벽안에서 나와, 주위를 잠깐 살펴보고는 다시 콘크리트 벽 안으로 돌아 들어간 듯이 보였다.
"앗!"
갑자기 벨몬트가 외치더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발자국에 눈을 가까이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왜 그래?"
"아까 내가 확인했을 때는 발자국이 열두 개밖에 없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 새 자국이 네 개나 더 나 있는걸."
우리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이 꼿꼿이 선 채 그 발자국을 들여다보았다.
새 발자국이 나 있다는 것은, 곧 벨몬트가 사무실에 올라간 동안에 그 어떤 것이 이 근처를 돌아다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숨이 칵칵 막히도록 무더운 갱도 안에서 우리는 숨소리를 죽인 채 꼼짝 못하고 멍청히 서 있었다.
 
사람이냐 유령이냐
 
"프레이터 씨!"
별안간 부르는 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광부 조장 카슨 노인이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것이었다.
"프레이터 씨, 아무래도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아요. 광부들이 일하기 싫다고들 합니다."
"왜요?"
"다름 아니라, 광부 하나가 유령을 보았다는 바람에… 그래서 다른 광부들도 기분이 나쁘다면서 작업을 그만두었습니다."
"유령을요?"
"예, 이 콘크리트 벽 안에 사람이 있더래요."
나하고 벨몬트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카슨 노인은 목을 움츠렸다.
"정말 턱없는 소리지 뭡니까. 그 인간이란 것은 키가 50센티미터나 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난쟁이래요. 콘크리트 속에서 이쪽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나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콘크리트를 통해서 보였다는 겁니다."
카슨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그따위 턱없는 소린 아예 믿지 않지만, 광부들은 미신을 좋아하거든요. 아무튼 이처럼 깊은 곳까지 파내려 온 것은 처음 아니겠어요. 산신령님이 성을 벌컥 내며 나타났느니 뭐니 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겨드랑이 밑에는 식은땀이 흠뻑 배었다.
"알았어요. 그 광부를 좀 데리고 와 주시오."
카슨 노인은 곧 그 광부를 데리고 왔다.
당당한 체격에 다부지게 보이는 늙은 광부로, 여간한 일을 가지고는 함부로 떠들어댈 만한 겁쟁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주름진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일을 그만두겠소, 기사님. 그런 기분 나쁜 것이 있는 곳에선 일할 수 없어요."
"좀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없겠어요?"
"벽 속에 번쩍번쩍하는 난쟁이가 있었어요."
"그럴리가! 당신은 옛날에 난 이 발자국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니오?"
벨몬트가 옆에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렇지가 않아요. 이 내 눈으로 똑똑히 본 걸요."
광부는 이렇게 말한 다음 발 밑을 가리키며,
"이 발자국은 옛날 것이 아니란 말이오. 바로 두 시간쯤 전에 그 번쩍이는 난쟁이들이 낸 거요. 알겠어요, 기사님 들?"
우리 두 사람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 광부는 어쨌든 그만두겠다면서 돌아가 버렸다.
"에잇, 참, 별꼴 다 보는군."
벨몬트가 내뱉듯이 말했다.
"참으로 미신쟁이들만 모였군 그래. 콘크리트 속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생물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 라고…"
나는 아까 내 눈으로 본 것을 벨몬트한테 말하려 했지만 비웃음만 살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자, 그럼 어쩐다?"
"이걸 그대로 두었다간 광부들 사이에 그 터무니없는 헛소문이 퍼져서 모두 일을 팽개칠 거다. 그런 말은 얼토당토않은 착각이라는 걸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돼."
하고 벨몬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튼 나도 그 괴물의 정체를 가려내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나는 카슨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밤에는 광부들을 철수시켜 주시오. 오늘밤은 우리가 이 갱도를 감시할 테니."
"그럽시다."
카슨 노인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물러갔다.
 
나타난 괴상한 인간
 
우리는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서, 손전등과 물통 따위의 장비를 갖추어 갱도로 다시 돌아왔다. 만일을 위해서 둘 다 권총을 한 자루씩 차고 왔다.
인기척이 없는 갱도 속은 그야말로 기분이 나빴다.
갱도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 소리가 괴물의 울음 소리처럼 들려왔다.
우리 두 사람은 바로 그 발자국이 나 있는 갱도의 막다른 곳인 콘크리트 벽 앞에 앉았다.
벌써 한밤중이었지만, 전등불이 환히 비쳐서 그 근처는 대낮같이 밝았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느닷없이 벨몬트가 몸을 움찔하더니,
"이크, 저것 봐!"
하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권총에 손을 갖다 대며 그 쪽을 보았다.
콘크리트의 한가운데가 희미하게 빛나며, 안에서 빛의 무늬 같은 것이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마음 탓이라 여기고 손으로 눈을 닦았다. 그래도 그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두께 3미터나 되는 콘크리트의 가장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 덩어리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마치 콘크리트 속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점점 이쪽을 향해서 번져 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혹시 내 정신이 돌지나 않았나 의심했다. 그러나 벨몬트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심장은 심한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속의 빛나는 그 괴물은 차차 뚜렷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겨우 60센티미터 가량이나 될까말까. 그렇지만 흔히 서커스 따위에 나오는, 머리만 크고 손발이 몽땅한 꼴사나운 난쟁이는 아니었다.
비록 몸은 작지만 그런 대로 쭉 빠진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과학 영화라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말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괴상한 광경이었다.
그 난쟁이는 마치 물 속이나 강한 바람결을 헤치고 오는 것처럼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리고 다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가 야무지게 땅바닥에 내디디며 반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한 가벼운 몸짓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바닷물 속에서 잠수부가 허우적거리며 걸어가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난쟁이가 걸어오면서 헤치고 있는 것은 물론 물도 바람도 아니다. 그 딱딱한 콘크리트인 것이다.
즉, 난쟁이는 콘크리트 속을 마치 물이나 공기 속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난쟁이 뒤에는 마치 물 속을 헤엄칠 때 생기는 물거품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몸 전체가 희미하게 빛났다.
"앗, 저. 얼굴…"
벨몬트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나도 그것을 느꼈다. 난쟁이는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들보다 훨씬 더 다듬어진 멋진 얼굴이었다. 쪽 곧게 뻗은 오똑한 코, 잘생긴 입, 총명하게 보이는 맑고 큼직한 눈매 - 분명히 우리 인간과 같은,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발달된 고등 생물인 것 같았다.
 
지하 사람이다!
 
우리는 몸을 떨었다.
분명, 저것은 지하에서 태어나서 지하에서 자라난 지하 세계의 인간임에 틀림없다.
인류의 조상은 지금부터 1백만 년이나 2백만 년 전에 유인원 무리에서 갈라져 독립되었다고 생물학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보다 훨씬 전에 인류의 조상의 조상이 지상과 지하로 나누어져 따로따로 진화된 것이리라.
인류의 대부분은 지상 생활의 나무 위나 풀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하 생활자는 땅 속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몇만 년, 몇십만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지하의 인류, 다시 말해서 지하 사람들은 점점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것은 보통과 같은 동굴이 아니라, 지하 몇 십 킬로미터나 되는 지각의 갈라진 틈새였을 것이다.
그런데 땅 속 깊은 세계에는 기압이 높고 열도 높다. 그래서 기나긴 세월 동안 지하 사람의 몸은 환경에 적응되어 차차 단단하게 변화되어 갔다.
마침내 지하 사람들의 몸 세포를 이루고 있는 분자의 구조까지도 변화되고 만 것이다.
콘크리트가 단단한 것은 콘크리트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콘크리트보다 훨씬 더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진 생물이 있다고 하면 그 생물은 콘크리트 속을 마치 물고기가 물 속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듯이, 또 인간이 공기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듯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 난쟁이는 어느 사이에 다가와 콘크리트 벽 표면까지는 겨우 수 센티미터만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둘이었다. 지하 사람들은 우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난쟁이는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제트기의 비행사가 입는 비행복과 비슷했다.
"오호라, 저것들이 살고 있는 곳은 여기보다 훨씬 더 깊은 땅 속일 거야. 그래서 여기는 마치 우리들의 높은 하늘과 마찬가지로 기압이 낮은 곳이 되겠지. 그러니 저것은 비행복이란 말일세."
나는 벨몬트한테 귀뜸해 주었다.
"만일에 이 추측이 맞는다면 저것들이 왜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벨몬트가 의문을 나타냈다.
"아마, 우리들이 이 갱도를 파고 있는 소리를 듣고 조사하러 온 거겠지."
그때, 벨몬트가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고 몸을 움츠렸다.
"어이… 저 뒤에도 또 있어."
그것은 나한테도 보였다. 콘크리트의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또 이상한 빛의 덩어리 두 개가 표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나타났던 두 난쟁이 옆에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 봐 ! 놈들은 우릴 적으로 여기고 있어. 저 눈초리는 마치 맹수라도 노려보는 것 같군 그래."
벨몬트가 목구멍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지하 사람의 눈에는 적의와 살기가 등등했고, 기분 나쁜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만일에 물고기에게 인간과 똑같은 지혜가 있어서 인간을 미워한다면, 틀림없이 저런 눈초리로 노려보겠지.)
차갑고도 험상궂고 무서운 그 눈초리…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놈들은 우리를 적이라 여기고 있어. 여기는 놈들의 나라이고, 우리는 그들의 나라를 쳐들어간 침입자라는 거겠지.)
나는 마음속에서 외쳤다.
 
지하에서의 싸움
 
"이크! 온다!"
벨몬트는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한 난쟁이가 별안간 불쑥 두 손을 내밀었다. 콘크리트 속에서 밖으로 두 팔이 불쑥 나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도 하다. 콘크리트에는 아무 자국도 나지 않았다. 부서진 조각마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얼른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을 대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난쟁이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몸뚱이가 콘크리트 밖으로 완전히 나왔다.
다른 세 사람도 얼른 따라나오더니 콘크리트 벽 앞에서 한 줄로 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 뒤에는 구멍 같은 것이 하나도 생기지 않으니 어찌된 일일까.
(역시 내 짐작이 들어맞는구나. 이것들의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의 밀도가 높은 탓으로 보통의 물질 속을 꿰뚫고 다닐 수가 있구나.)
이론적으로는 알겠지만 실제로 눈 앞에 두고 보는 것과 이론과는 또 차이가 있는 법이다. 우리들은 너무나 무서운 광경을 눈 앞에 두고, 그저 멍하니 난쟁이들의 거동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난쟁이들은 일렬 횡대로 늘어선 채, 천천히 우리를 보고 다가 공격선을 죄었다.
벨몬트가 권총을 빼들었다. 그렇지만 함부로 쏘지 않고 내 얼굴을 힐끗 보았다. 상대편이 너무나 작기 때문에 쏠 기분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하 사람은 넷 다 우리의 무릎께밖에 오지 않았으므로 쏜다면 한꺼번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네 난쟁이는 약 2미터 앞까지 오더니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듯이 치켜들고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그 중 하나가 은빛으로 번쩍이는 옷 속에 손을 찔러 넣더니 가는 철사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이 무기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요, 고약한 것이!"
별안간 벨몬트가 큰 소리를 치더니 그 난쟁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탕!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갱내에 메아리쳤다.
총알은 영락없이 난쟁이의 가슴에 명중했다.
나는 난쟁이의 가슴이 펑 뚫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일까. 난쟁이는 마치 모기한테 물린 것만큼도 느끼지 않는 듯이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서 있지 않는가.
그뿐이 아니었다. 놀란 티도 나타내지 않은 채 적개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우리를 쏘아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처럼 무서운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도 권총을 빼들자 다른 난쟁이를 겨누어 갈겨댔다.
탕 타탕!
벼락같은 총소리가 서너 번 갱도 안에 울렸다. 그러나 자욱한 연기와 화약 냄새 속에서, 네 난쟁이들은 총알에 맞았어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제기랄 것! 총알이 놈들의 몸을 뚫고 지나가 버리는군."
벨몬트가 비명 섞인 소리로 외쳤다. 과연 뒤쪽의 콘크리트에 총알 맞은 자리가 대여섯 군데나 있었다.
그렇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지하 사람들이 총알을 맞았다기보다 그들이 총알 속을 뚫고 지나갔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만큼 지하 사람들의 몸의 물질은 단단한 것이었다.
못같이 생긴 무기를 가진 난쟁이가 또 한발 앞으로 다가왔다. 뒤의 세 사람도 따랐다. 우리는 성큼 뒤로 물러섰다.
그 때, 나는 또 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난쟁이들이 발을 내디디면 그 단단한 바위 위에도 마치 진흙 위를 걷듯이 움푹움푹 패이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저 수수께끼의 발자국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지하 사람의 체중이 너무 무거운 관계로, 바위 속에 움푹 패어 들어간 것이다.)
나는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의 상대가 그 얼마나 무서운 적인지를 새삼 느꼈다.
굉장히 단단한 물질로 되어 있는 난쟁이들은 총알이나 다른 무기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어린이만큼 작은 난쟁이 몸에는 불도저만큼이나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침 그 때 선두에 섰던 난쟁이가 가지고 있던 못 같이 생긴 무기 끄트머리에서 희미한 불꽃이 확 튀었다.
"앗!"
벨몬트가 무서워 비명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툭하고 둔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내가 얼른 그를 부축하려고 달려들었을 때, 그의 오른쪽 가슴은 벌써 떨어져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아마 얻어맞는 순간에 벌써 숨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난쟁이가 쥐고 있던 그 작은 무기는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보자, 나는 눈이 뒤집힐 듯한 분함을 느꼈다.
나는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권총으로 그 무기를 가진 난쟁이한테 바싹 들이대고 힘껏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총성이 잇따라 울려 퍼지고, 총알은 모두 난쟁이의 몸을 빠져나가 뒷벽에 맞았다.
난쟁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내 권총의 총알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못 같은 무기를 번쩍 들었다.
빨간 불꽃이 확 튀었다.,
"아이쿠!"
내 자신의 비명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때, 내 오른쪽 손은 권총을 꼭 쥔 채, 손목에서 잘려나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의 시체를 표본으로?
 
그렇지만, 그 때의 나는 적개심과 분노의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나는 중상에도 굴하지 않고 난쟁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선두의 난쟁이를 힘껏 걷어찼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처럼 헛되고 어리석은 공격법은 없었다. 총알이 듣지 않는 상대에게 육탄전으로 달려들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발은 상대편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 순간, 뼛속까지 저려오는 심한 아픔을 느끼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난쟁이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놈한테 꼼짝없이 죽는구나…)
나는 정신이 멀어지는 것 같은 심한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흐려지는 눈을 가까스로 부릅뜨고 상대편을 노려보았다.
난쟁이들은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을 띠더니 등을 홱 돌렸다. 그리고 벨몬트의 시체를 들어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외 세 배나 되는 벨몬트의 몸을 한 손으로 30센티미터 가량이나 달랑 들어올렸다.
난쟁이들은 벨몬트의 시체를 들고 콘크리트 벽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벨몬트의 시체를 지하 세계로 가지고 갈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대로 두지는 않을 테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자, 간신히 엉금엉금 기면서 벨몬트의 시체를 끌어당기려 했다.
지하 사람 하나가 그것을 눈치채고 그의 작은 손으로 내 허벅지를 꾹 찔렀다. 나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지하 사람의 손이 나의 허벅지 속에 푹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놈은 손에 아무 반응이 없자, 몸의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그 힘으로 지하 사람의 팔은 어깨까지 내 다리에 푹 박히고 말았다. 기절할 만큼 아팠다.
지하 사람은 곧 팔을 뺐다. 그런데도 내 바지에는 구멍이 나 있지도 않았으며,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콘크리트의 경우와 똑같았다.
그 난쟁이는 동료들한테 갔다. 그리고 급히 서둘자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 때 알았지만, 지하 사람들은 매우 숨결이 가빠 보였다. 엷은 기압 속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호흡이 답답해진 모양이었다.
세 지하 사람들이 벨몬트의 시체를 옆으로 들고 나란히 콘크리트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하나는 뒤따랐다. 네 사람의 몸은 천천히 콘크리트 벽 속으로 녹아 들어가듯이 사려져 갔다.
그런데 또 기묘한 일이 생겼다. 그놈들의 몸뚱이는 모두 콘크리트 벽 속에 들어가 버렸지만, 벨몬트의 몸만은 콘크리트 벽에 딱 붙어 버린 것처럼 밖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하 사람은 콘크리트 속에 들어갈 수가 있었지만 콘크리트보다 훨씬 밀도가 낮은 인간의 몸은 스며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하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서로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벨몬트의 시체를 콘크리트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벨몬트의 시체를 콘크리트의 벽에 달라붙을 따름이다.
네 난쟁이는 점점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물고기처럼 입을 빠끔빠끔 벌리며 괴로운 듯이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저놈들을 뭣 때문에 저렇게도 벨몬트의 시체를 탐내는 것일까?)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옳지… 저 지하 사람들은 지하 세계의 생물학자인지 뭔지 아무튼 과학자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비경(秘境)을 탐험해서 신기한 동물이나 곤충을 표본으로 채취하여 가져가듯이 벨몬트의 시체를 이 땅 위의 표본으로서 가지고 돌아가 연구하려는 것이구나…)
풀이 죽고 만 내 마음에, 또다시 불길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벨몬트의 시체에 기어가자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기묘한 힘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콘크리트 속에서는 네 난쟁이가 벨몬트를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밖에서는 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벨몬트의 시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는 사이에 난쟁이들은 더 참고 견딜 수가 없게 된 모양이었다.
한 난쟁이가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크게 입을 벌리더니, 벨몬트한테서 손을 떼고 비틀비틀하면서 콘크리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또 한 난쟁이가 어떤 뜻 모를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먼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갱도 속에서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언젠가는 나타날 거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주위에는 광부 조장인 카슨 노인을 비롯해서 여러 광부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모여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콘크리트 벽에서 2미터 가량 떨어진 바위 위에 뉘어져 있었다. 콘크리트 벽에는 직경 2미터 가량의 큰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 아래에는 걸레처럼 무참히 찢긴 벨몬트의 시체가 가로놓여 있었다.
지하 사람들도 마침내 벨몬트의 시체를 가져가는 것을 단념하고 만 것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일어나, 벨몬트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기어가려 했다.
"프레이터 씨, 벨몬트 씨는 벌써 죽어 버렸어요. 당신도 얼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처의 출혈이 심하니까요."
카슨 노인이 나를 붙들었다.
"내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놈들이 내 친구를 죽였어요. 마치 벌레를 짓이겨 죽이듯이 비참하게 말이오. 원수를 갚아야지."
나는 붙들려드는 광부들을 밀어젖히고는 마구 울부짖었다.
너무나 무서운 꼴을 당하여 정신이 좀 이상해지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광부들은 나를 억지로 붙들어 수직갱도까지 날라다가 엘리베이터에 싣고, 땅 위로 데리고 갔다.
나는 곧 병원으로 운반되었다. 그리하여 목숨을 건졌다.
오른쪽 손목 끝이 달아나고 왼쪽 다리와 오른쪽 허벅다리가 삐었다는 진단이었으나 치료가 잘 되었기 때문에 한 달도 채 못 되어 완전히 나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있은 지 한 주일 가량 지나, 상처가 좀 아물기 시작하고 겨우 걸음을 옮겨 놓을 만큼 되자 나는 살그머니 병원을 빠져 나와, 또 다시 그 갱도에 몰래 들어갔다.
그래서 광부들이 한 때 자리를 비우는 휴식시간을 틈타 가장 구석진 사건 현장의 그 갱도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폭약을 장치하여 가지고 갱도를 폭파해 버렸던 것이다.
갱도는 중간에서 완전히 막혀 버리고, 그 구리 광산은 쓸모 없게 되고 말았다.
당연히 나는 군사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뜻밖에도 무죄로 끝났다. 너무 일에 열중했던 나머지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나는 재판 때, 모든 사람들에게 지하 사람의 무서운 모습을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갱도를 폭파한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지하 사람들이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지하 세계에 난쟁이가 있다는 것과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더 미친 사람으로 여기니 기막히는 노릇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벨몬트도 그놈들이 죽였다고 주장해도 사람들은,
(지하에 사는 인류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어. 콘크리트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생물이 어디 있어. 그런 것을 참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머리가 완전히 돌아 버린 증거야.)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벨몬트의 죽음은 결국 원인을 모르는 폭발 사고 탓이라고 했다. 재판소의 무죄판결을 언도 받음과 동시에 나는 정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뒤부터는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신께 맹세코 말하거니와, 이제까지의 내 말에는 털끝만큼의 허풍도 없다.
그 작은 거인들은 지금도 저 지하 세계에서 활개치고 살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최근의 내 걱정거리는 그 괴물들이 앞으로 한층 더 과학 기술을 발달시켜 다시 땅 위 세계를 탐험하고, 땅위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어쩌면 지금 당장에라도, 땅 위에 그 괴기한 모습을 불쑥 내밀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체험했던 그 사건 후, 벌써 몇 십 년이 훨씬 지나갔다. 지금쯤은 벌써 그들의 연구나 조사가 완전히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땅 위 세계를 향해 행동을 일으키기 시작할 무렵인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땅 위에 나타난다면?
지금의 인류의 병기로는 절대로 그들한테 이길 수 없다.
지금 아무리 큰 어느 나라의 로켓포나 대포도 그 작은 지하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렇지만 지하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이 무서운 무기 - 아마 열선총(熱線銃)일 것이다 - 가 있지 않은가.
그 무기로 공격받는 날에는 어떤 제트기나 어떤 탱크도 영락없이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속절없이 그 작은 거인들한테 정복당하고 마는 것이다.
아아… 그들이 땅 위에 모습을 나타내는 때가 언제일까?
한 해 뒤냐, 한 달 뒤냐. 아니, 내일일지도… 오늘일지도 모른다.
<끝>
벽 속의 아프리카
The Veldt
 
브래드베리 Ray Bradbury 지음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세상은 기계 문명의 발달에 따라 차차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겨우 몇십 년 전에 비교해 보아도 지금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만큼 편리하고 살기 좋고 즐거운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고 비행기가 처음으로 하늘을 날게 된 것도 겨우 7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자동차를 타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온 세계의 하늘에는 비행기의 항로가 그물처럼 얽혀 있습니다. 곧 완성될 에스에스티(SST ; 초음속 여객기)는 한국에서 미국까지 세 시간 남짓이면 날아갈 수가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로켓․우주선․텔레비전․전자 계산기 등의 전자공업 기술의 발달은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재 과학 기술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50년이 지난다면 세계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세계로 변해 있겠지요.
이러한 흐름을 따라 인간의 생활 방식도 크게 바뀌어질 것입니다.
전자 두뇌나 텔레비전이나 자동식 기계나 재료나 그 밖의 모든 물질 문명의 발달도, 인간이 사는 집도 놀랄 만큼 바뀔 것입니다.
집의 문도 지금의 사무실의 문처럼 모두 자동식으로 바뀔 것이고, 조명 같은 것도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아도 어두워지거나 하면 필요할 적마다 자동적으로 켜지게 될 것입니다.
전기 냉장고․전기 세탁기․냉온방 장치․전자 조리기 등도 훨씬 더 발달하여, 전자 두뇌에 프로그램을 넣어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인간에게 척척 서비스하게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미래의 집은 거기에 사는 인간을 저절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잠자게 해 주며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게 해 주는 로봇 하우스로 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테니 참으로 편리하고도 편할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와 같은 편리하고도 편한 생활에만 기대고 지내야 옳을까요. 그런 생활로 말미암아 인간은 가장 중요한 것을 희생하는 결과가 되지나 않을까요?
예를 들면, 인간의 마음이 기계에 의해 좀 먹히는 일은 없을까요?
이 소설은 그러한 두려운 문젯거리를 우리한테 깨우쳐 줄 것입니다.
레이 브래드베리(1920~)는 지금 미국의 과학 소설 작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가로서 유명합니다.
브래드베리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이라는 문제를 소재로 하여 <화성 연대기(火星年代記)>, <화씨 451도>등 뛰어난 과학 소설을 많이 써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그날 밤에도 피터와 웬디는 저녁 식사 때를 놓치고 말았다.
따끈따끈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저녁 요리가 자동 조리기에서 식탁 위에 옮겨지는 것을 바라보며,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매우 우울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얘들은 또 어린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가 보군."
하들리 씨가 말을 꺼냈다.
"그런가 봐요. 그것에 정신이 팔려 식사 시간마저 잊었나 보죠."
"그거 참, 성가신 애들인데."
"그래요."
하들리 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서 살짝 들여다보아야지."
"저도 갈께요. 식사를 온장고에 넣어 둬요."
리디어 부인이 말하자 식탁 근처에서,
"예, 알았어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고, 식탁 한복판이 푹 껴지더니 요리 그릇을 그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 부부는 식당을 나왔다.
자동문이 열렸다가 닫혀지자, 복도에는 자동적으로 전깃불이 환하게 켜졌다. 전깃불은 두 사람이 걸어감에 따라 자동적으로 앞쪽에서 켜졌다가, 그들이 지나가자 꺼졌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로봇 하우스인 것이다. 이 집은 옷을 입는 데서부터 식사 준비, 설거지, 아기 돌보기, 어린이의 놀이상대, 어른의 상담역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안 되는 것이라고는 없는 기막히게 편리하고 살기 좋은 집인 것이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어린이방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방 안에 전깃불이 확 켜지더니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거기에는 아프리카의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싱그러운 푸른 초원. 저 먼 곳에는 울창한 밀림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위의 파란 하늘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향긋한 식물 냄새를 풍기는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선지 영양이 제 자리 걸음치는 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푸드득 새가 활개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였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매 한 마리가 쏜살같이 하늘로 치솟았다.
"불길한 새."
"그렇지, 콘도르로군. 시체를 뜯어먹는 놈이오."
리디어 부인이 밀림의 그늘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사자가 있네요. 뭔지 잡아먹고 있는 것 같아요. 콘도르가 먹이를 가로채기 위해 노리고 있어요."
남편과 아내는 식은땀이 흠뻑 배어 나왔다.
때마침 큰 나무 뒤에서 사자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왔다.
사자는 두 사람을 보자, 나직이 으르렁거리며 그 큰 머리를 바싹 낮추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확 드러내더니 별안간 그 사자는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이크, 큰일났어요!"
리디어 부인은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남편의 손을 잡자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문을 쾅 닫고 복도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숨을 헐떡였다.
"당신도 참 바보로군. 저건 입체 영화란 말이오. 저 사자며 초원이며 독수리도 모두 저 방의 벽과 천장에 있는 환상장치에서 비춰진 것인데, 뭘 그러오. 저 싱싱한 나무 냄새며 자연의 소리만 하더라도, 인공 장치에서 나온다는 것쯤 잘 알 텐데. 내 원."
하들리 씨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리디어 부인은 웃지 않았다.
"물론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너무나 실물과 똑같으니 그만…"
하들리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이들은 대관절 어딜 갔을까. 방 안에는 없잖소."
"아마 친구네 집에 놀러 갔겠죠 뭐."
리디어 부인은 더 말하려다 말고 하들리 씨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에는 걱정의 빛이 어리어 있었다.
 
고장이 났을까?
 
리디어 부인은 식당으로 돌아오자 말했다.
"여보, 저 환상 장치는 우리 아이들이 머리 속에 무엇인가 생각하면, 그것을 얼른 느끼고는 생각한 그대로를 입체영화로 만들어서 비쳐 주는 거겠죠?"
"그럼, 그럼."
"그럼 어째서 아이들이 없는데도, 아프리카의 초원 풍경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요?"
"그런 일은 가끔 있어요. 이를테면 텔레비전을 꺼 버렸는데도, 한참 동안 끄기 전의 상이 그대로 스크린에 남아 있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아마, 피터와 웬디는 방금 아까까지도 그 방에 있었을 거요. 그래서 그 영상이 남아 있었을 거요."
"그럴까요…"
"암, 그렇고말고. 내 말이 틀림없다니까."
"저는… 저 방의 환상 장치가 고장난 것이 아닐까하고 여겼는걸요,"
"그럴 리가 없어요. 만일에 고장이 났다면, 당장에 컴퓨터에 그 사실이 나타날 테니까, 우리가 당장 알 수 있지."
"그야 그럴 테지만 만일에 그 장치마저 고장이 났다면?"
"그럴 리가 없소. 그건 지나친 생각이오."
"그랬으면 좋으련만…"
하들리 씨는 아직도 불안해하는 리디어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먹다 만 요리 접시에 나이프와 포크를 걸쳐놓고 일어섰다.
"그렇다면 다시 가서 보고 오겠소. 이젠 아프리카의 풍경도 지워졌을 테지."
하들리 씨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어린이 방을 향해 걸어갔다. 어린이 방에 가까이 가자, 방안에서 어렴풋이 사자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하들리 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자 거기에는 적도와 아프리카 초원이 펼쳐 있고 - 불과 5~6미터 앞에서 아까 그 사자가 쭈그리고 앉아 먹이를 뜯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사자의 입가에는 피가 새빨갛게 묻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물씬 나는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사자는 하들리 씨를 보자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험상궂게 으르렁댔다.
하들리 씨는 문을 열어놓은 채 성큼성큼 방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자는 눈을 까뒤집고 힐끗 그를 노려보았다.
"썩 꺼져 버려!"
사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들리 씨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머리 속에 그렸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초원과 사자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이봐, 이 방아 듣거라! 알라딘의 요술램프라고 했는데도 모르겠느냐?"
하들리 씨는 화를 버럭 내면서 꾸짖었다. 그런데도 풍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좋다. '오즈의 마법사'도 '돌리틀 선생과 동물들'이라도 뭐든지 좋으니 아프리카하고 바꿔 놓아라."
그러나 아프리카의 풍경은 여전히 펼쳐지고 있었다. 사자는 하들리 씨를 경계해 가며 먹이를 우물우물 먹고 있다.
하들리 씨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급히 방을 뛰쳐나오자 부리나케 식당으로 돌아왔다.
'저 아이들 방이 좀 이상하군."
하들리 씨는 내뱉듯이 말했다.
"전혀 말을 듣지 않는군 그래."
"아직 그 아프리카죠?"
리디어 부인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나…"
"혹시라니, 대관절 무슨 뜻이오?"
"아이들이 늘 아프리카나 사자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환상 장치에 버릇이 생긴 것이나 아닌지."
"설마!"
"그렇지가 않다면, 피터가 장치에다가 손을 댔을지도 모르겠군요."
"응,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않고서야 아프리카가 없어지지 않을 까닭이 없지."
리디어 부인은 하들리 씨를 쳐다보았다.
"여보, 2~3일 동안만 아이들 방을 잠가 두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 놓으면, 피터 남매가 야단날 거요. 지난 달이었던가, 그 장난쳤던 벌로 아이들 방을 두세 시간 잠갔더니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소."
"바로 그 점이어요. 피터나 웬디도, 어린이 방이 없어서는 못 견딜 것처럼구니 큰 일이군요. 마치 이 로봇 하우스의 마력에 사로잡힌 것만 같아요. 이래서는 아이들한테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여보."
리디어 부인은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여보, 차라리 이 집을 꼭 잠가 두고 2~3일 동안 여행이나 다녀오도록 합시다. 하이킹도 좋고요. 로봇이며 자동식 기계가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생활이 하고 싶어졌어요."
"정말이오, 여보? 요리나 청소도 당신이 손수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게 힘들걸. 지치고 말 거요."
"그래도 좋아요. 너무나 기계에만 맡기는 일에 그만 싫증이 나요. 또 불안하고요. 제 손으로 뭐든지 하고 싶어요.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시키는 게 좋을 거고요."
하들리 씨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아내 말이 옳을지 몰랐다. 지금의 생활은 너무나 자연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기계만 믿다가 보니, 인간이 하는 일이란 너무도 없다.
(그러고 보니, 나나 아내도 요즘 좀 불안해지고 있는 것 같군.)
하들리 씨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돌아왔어요, 아빠, 엄마."
힘찬 목소리가 들리며, 웬디와 피터가 식당에 들어섰다.
"로봇 헬리콥터로 잠깐 공중 산책을 하고 왔어요."
하고 피터가 말했다.
"식사에 늦어서 미안해요, 엄마."
웬디가 귀여운 보조개를 한쪽 볼에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피터, 너는 어린이 방의 환상 장치에 손을 댄 건 아니겠지?"
하들리 씨가 커피를 마시면서 넌지시 물었다.
"손을 대다니요, 아빠!"
"어린이 방에는 늘 아프리카만 나타나 있으니 말이다."
피터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없어요, 아빠. 우리가 나갈 때는 아프리카를 깨끗이 지워 버렸는데요."
"거짓말해선 못 써요. 아빠는 아까 엄마하고 똑똑히 보고 왔는걸."
피터는 웬디를 돌아보았다.
"웬디, 좀 가보고 오렴."
"안 가도 돼."
하들리 씨가 말렸지만 벌서 늦었다. 웬디는 제비처럼 날쌔게 식당에서 뛰어나갔다.
"그렇다면 어디, 나도 한번 더 확인해 보고 오마."
하들리 씨가 걸상에서 일어서자, 리디어 부인도 피터와 함께 따라 나섰다.
결국 모두가 한 번 더 어린이 방으로 가 보게 되었다.
모두 가 보니 어린이 방의 문이 열어 젖혀진 채, 방 안에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푸른 숲으로 가득 차 있는 풍경이 보였다. 깨끗한 냇물이 졸졸 흐르고, 산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며, 나비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들꽃 위를 펄렁펄렁 맴돌고 있었다. 아프리카 초원과 사자는 아무 데도 없었다.
"저것 보셔요, 제 말이 맞잖아요."
하고 피터가 말했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했다. 그리고 하들리 씨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어린이 방의 문을 잠갔다.
"아빠, 문을 잠그면 어떻게 해요?"
피터가 항의하듯이 말했다.
"오늘밤은 그만 자도록 해라."
"하지만…"
"자라는데도 못 알아듣겠니?"
하들리 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끔하게 말했다. 그렇게 꾸짖은 것은 이주 오랜만이었다. 피터와 웬디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겁주는 말투
 
그날, 하들리 씨 부부는 밤이 이슥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보, 역시 그건 웬디가 한 짓일까요?
리디어 부인이 속삭이듯이 물었다.
"물론이지. 아마 피터하고 짰을 거요. 그래서 우리가 가기 전에 어린이 방의 풍경을 싹 바꿔놓은 게지."
"하지만 왜 그랬을까요? 그 아이들은 어째서 그런 거짓 말을 했을까요?"
"아프리카를 무척 좋아하는 탓이겠지, 그리고 저 방 때문이지. 저 방을 저희들 멋대로 해 두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든지, 말을 듣지 않는 것도 예사로 알게 되어 버렸지."
하들리 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 참 곤란하게 되었군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요."
"저 방을 잠가 둡시다. 그리고 당신 말대로 여행이나 떠납시다. 그것도 2~3일이 아니라 한 달쯤 말이오. 그래서 자연의 공기를 마시면 로봇 하우스에서 들었던 나쁜 버릇도 고쳐지겠지."
"과연 고쳐질까요? 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 제 버릇으로 돌아가고 말 것 아니어요?"
"만일 그렇게 되면… 이 집을 팔아 버립시다. 실은 아이들을 위해서 일부러 지은 집이긴 하지만… 결국 너무나 편리한 기계에만 모든 것을 맡긴 것이 잘못이었어."
하고, 하들리 씨는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로봇학자 친구한테 저 방을 좀 조사해 봐 달랄까?"
 
이튿날 아침 식사 때, 하들리 씨는 피터와 웬디한테 여행 계획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피터는 깜짝 놀란 듯이 식사를 멈추고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방도 잠가 버리나요?"
"그렇단다. 그래서, 좀더 자연 속의 생활을 하자꾸나. 참 재미있을 거다."
"아이 참 아빠도, 전 싫어요."
웬디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구두끈도 자기 손으로 매어야 하나요? 이를 닦는 일도, 머리를 감는 일, 목욕을 하는 것 등 모두 자기 손으로 해야 하나요? 그런 건 싫어요, 전."
"아냐, 때로는 그것도 좋단다."
"귀찮은 일이어요. 아빠, 지난 번 아빠가 자동 그림 그리기 기계를 없애 버리실 땐 정말 실망했어요."
"그건, 네가 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아녀요, 싫어요. 기계가 손보다 훨씬 더 잘 그려 주는데 뭘 그러세요, 아빠."
"닥쳐!"
하들리 씨는 다시 화를 발끈 내고 말았다.
피터는 말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웬디도 눈물을 머금었다. 한참 동안 모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피터가 식사를 마치고 접시를 오물 처리기에 밀어 넣으면서 느닷없이 말했다.
"아빠, 여행은 언제 떠나요?"
"지금 생각 중이란다."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끄고 말이죠?"
"그렇게 해야겠구나."
"그것만은 그만뒀으면 해요."
피터는 넌지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 나쁜 말투로 들렸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쳐다보았다.
(피터가 왠지 우리한테 겁을 주는 것 같구나.)
리디어 부인은 이런 생각이 들자, 새삼스럽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피터하고 웬디는 밖으로 놀러 나갔다.
 
피묻은 스카프
 
친구인 로봇 공학자는 그날 오후가 좀 지나서 찾아왔다. 피터와 웬디는 또 헬리콥터를 타고 어디론지 놀러가 버리고 없었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로봇 공학자를 어린이 방으로 안내했다.
열쇠를 꽂고 방문을 열자, 또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자는 숲가에서 입에 새빨간 피를 묻히고 열심히 먹이를 뜯어먹고 있었다.
로봇 공학자는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응, 정말 이건 좋지 않군.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지?"
"한 달쯤 되었을 걸세."
"이거 안 되겠는걸. 이 따위 방은 당장에라도 부셔 버려야겠는걸. 그러지 않았다가는 피터 남매가 영영 단념할 수 없게 되지. 그것도 하루라도 일찍 서두르지 않는다면 절대로 단념하지 못하게 된다네."
"그다지도 심한가…"
하들리 씨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당신네들이 잘못했어. 당신들 부모가 말일세."
로봇 공학자는 하들리 씨 부부를 힐끗 바라보며 비꼬았다.
"당신들은 아이들을 너무나 응석받이로 만들었단 말일세. 무엇이든지 좋을 대로만 내버려 둔 거로군. 더구나 부모가 돌봐 주지 않고 기계한테 그 일을 전부 맡겼으니 기계는 뭐든지 원대로 들어주고 언제나 놀이 상대로 되어 주었지. 결국, 이 어린이 방은 피터 남매에겐 아빠나 엄마의 대신 역할을 한 거란 말일세. 이대로 두었다가는 저 아이들은 어떤 인간이 될지 몰라요."
"아직 늦지 않았을까요?"
리디어 부인은 조심조심 물었다. 머리 속에는 아침 식사 때, 피터가 배짱 좋게 은근히 겁주던 말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봇 공학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직도 늦진 않아요. 다만 그걸 위해서는 이 방을 그대로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이 방의 스위치를 꺼 버리고, 곧 여행을 떠나세요. 그리고 돌아오시는 대로 저한테 아이들을 데리고 오십시오."
"하지만… 너무 갑작스레, 이 방을 없애 버린다는 건 너무 충격이 심하지 않을까?"
"그런 소릴 하고 있을 때가 못 되니 그리 알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사자가 세 사람을 쳐다보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으나, 곧 로봇 공학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거 너무나 감쪽같이 잘 되어 있어서 나까지 이상한 기분이 드는걸. 자, 나갑시다."
"참 잘 꾸몄다고 생각하셔요?"
하고, 리디어 부인이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저는 때때로 저것이 잘못되어…"
부인은 이렇게 말하다 말고 망설였다.
"잘못되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로봇 공학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진짜 사자가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럴 리야!"
"하지만… 환상 장치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엔? 그렇지 않고 누군가 어떤 이상한 장치라도 해놓는다면."
"가령 아무리 손재주를 부린다 해도 환상이 진짜의 것으로 바뀔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 환상 장치는 너무나 잘 되어 있어. 로봇 하우스로서는 최고급이거든. 이만큼 훌륭한 전자 두뇌는 의지를 가질 수가 있을 거야. 그래서 의지를 가진 것은 - 죽기를 싫어할 테니."
"자넨 대관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로봇 공학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하들리 씨의 표정을 살폈다.
"말하자면… 저 어린이 방은 스위치가 꺼지기를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거야. 전자 두뇌한테는 스위치가 끊긴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하니까."
"아니, 이 사람아! 자네마저 노이로제에 걸린 모양이군. 아니, 그럼, 이 어린이 방이 스위치 끊기는 것이 싫어서 자네들한테 무슨 짓을 한다는 건가?"
"… 혹시, 아이들을 살살 꾀어서…"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하들리 씨는 아차 하고 말을 뚝 끊었다.
발 밑에 무슨 물건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몸을 구부려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매우 구겨져서 짜부라진 헌 지갑이었다. 큰 짐승이 마구 물어뜯은 이빨 자국 같은 것이 나 있었다.
"앗!"
리디어 부인이 별안간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 로봇 공학자가 리디어 부인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 쪽을 보고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스카프였다. 스카프에는 피와 - 그리고 사자의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로봇 공학자는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두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건?"
"제 스카프예요."
리디어 부인은 굳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들리 씨는 터벅터벅 문 앞에 있는 스위치 판으로 다가가더니 스위치를 확 꺼 버렸다.
 
덤벼드는 사자
 
피터와 웬디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들리 씨는 집 안의 전자 장치 스위치를 모조리 끄고 난 다음이었다.
전자 시계․전자 레인지․전자 난방기․자동 구두닦이․구두끈 매는 기계․자동 목욕탕․청소 로봇․마사지 로봇 등 - 모든 것이 스위치가 끊기는 바람에 멈춰 버렸다.
"아빠, 왜 그러세요! 그건 안 돼요, 안 돼!"
피터는 비명 지르듯이 투정을 부렸다.
"어린이 방도 죽어 버렸군요. 우리들의 어린이 방을 그만 죽여 놨네요."
웬디도 히스테리를 일으켜 울부짖었다.
"얌전하게 있어. 이렇게 떠드는 게 아니야!"
하들리 씨는 큰 소리로 두 아이를 꾸짖었으나, 남매는 미친 듯이 날뛰고 떠들고 할 따름이었다. 피터는 앞에 닥치는 대로 손으로 집어던지고, 발로 걷어차고 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웬디는 엉엉 울면서 발버둥쳤다.
"여보, 잠깐만이라도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좀 넣어 줍시다. 아주 잠깐만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나 봐요."
리디어 부인이 흐느껴 우는 웬디를 꼭 껴안아 주면서 말했다.
"아니, 그건 안 돼요! 이젠 절대로 스위치를 안 넣을 거요. 그리고 이 집도 오늘이 마지막이오. 로봇 하우스 따위에선 두 번 다시 살지 않을 거야.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역시 좋아."
하들리 씨는 엄숙히 말했다.
피터와 웬디는 한층 더 소리를 떠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했다.
"아빠는 싫어! 아빠는 죽어 버려!"
피터가 발버둥을 치며 울부짖었다.
"엄마도 그래, 엄마도 이젠 필요 없어!"
웬디도 리디어 부인의 품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울부짖었다. 두 부부는 서로 눈짓을 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피터와 웬디도 정신이 이상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리디어 부인은 하들리 씨한테 말했다.
"여보, 나도 부탁해요. 한 번만 더,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넣어 주세요. - 얘, 피터야, 그렇지? 1분만이야. 그걸로 그 방과 작별하는 거야. 알겠니, 그럼 되겠지?"
"응… 그럴께요. 좋아요."
하들리 씨는 웬디를 보았다. 웬디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이 가득히 괸 눈으로 하들리 씨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들리 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래, 알았다. 단 1분만이야. 너희 둘 다 알겠지?"
"1분이면 돼요!"
두 아이는 입을 모아 대답했다.
하들리 씨는 스위치 판 열쇠를 꺼내어 리디어 부인에게 넘겨주었다.
"1분이 지나거든 얼른 나와서 옷을 갈아입어라. 그리고 헬리콥터로 비행장엘 가는 거다, 알겠느냐?"
"예, 알았어요, 아빠."
두 남매는 이제 기분이 좋아져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리디어 부인의 손을 잡고 어린이 방으로 갔다.
하들리 씨는 그 동안에 2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거기에 리디어 부인이 올라왔다.
"아이들은?"
"1분이 지나면 꼭 끄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맡겨놓고 왔어요. 나도 좀 갈아입어야 할 게 아니여요. 아이구 온통 집이 떠나갈 듯이 야단법석을 떨더니만 그만하고 그쳤으니 원."
"그렇지. 앞으로 5분 남짓 있으면 이런 도깨비 같은 집과는 영영 작별하고 좀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지."
두 부부는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그 때 아래층에서 아이들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엄마. 이것 보셔요! 어서 와 주셔요!"
그 소리는 어쩐지 매우 절박하고도 당황한 것처럼 들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리디어 부인은 안색이 싹 바뀌어, 아래층으로 통하는 공기 파이프 안에 뛰어들어갔다. 하들리 씨도 뒤따랐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린이 방에 내려섰다.
방문은 열려진 채였다. 방안에는 눈부신 태양과 푸른 초원과 밀림, 그리고 사자가 있었다. 그러나 피터와 웬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자는 고개를 낮추고 두 부부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 문이 꽝 닫혀 버렸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당황하여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어라!"
하들리 씨가 손잡이를 잡고 찰칵찰칵 돌리고, 쾅쾅 두드리며 고함을 쳤다.
"여보, 어떻게 된 거여요?"
"밖에서 문을 잠근 모양이오. 얘, 피터.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 벌써 출발 시간이야. 어서 이 문을 열어라!"
하들리 씨는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싫어요, 아빠. 문을 열면 이 방의 스위치를 끄려고 그러시죠? 그러면 우리 로봇 하우스는 죽어 버리는 걸요."
피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피터. 너는 나쁜 아이구나. 벌을 줄 테다!"
하들리 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나쁜 아이여요."
피터가 대답했다.
"실은 이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엄마도 우리의 기분을 몰라주니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자한테 아빠의 헌 지갑과 엄마의 스카프를 던져 줘서 냄새를 익히게 했는걸요. 이제 당장 그 사자가 아빠와 엄마의 냄새를 맡고 덤벼들 거여요. 그러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너 아무래도 좀 이상해진 모양이구나."
"아이쿠, 여보, 저 사자가!"
리디어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얼른 뒤를 돌아보았더니, 어느 사이에 벌써 사자가 -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앞과 좌우 세 방향에서 슬슬 죄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자는 험상궂은 얼굴을 내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목을 골골거리며 천천히 한발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마른 풀을 밟는 소리마저 똑똑히 들렸다.
"저건 영화일 뿐이야. 그렇게 겁낼 건 없어요!"
하들리 씨는 아내의 몸을 꼭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리디어 부인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하들리 씨도 속으로는 겁이 났다.
사자가 덤벼들었다. 그 앞발이 무서운 힘으로 하들리 씨의 몸을 때려눕혔다. 또 한 마리가 리디어 부인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두 사람은 비명을 울렸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피터와 웬디는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속에 있었다. 초원 속에서 번쩍 번쩍 빛나는 햇볕을 쬐며 엎드려 있으니까 땀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저만큼 떨어질 밀림 어귀에 사자 세 마리가 먹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 위를 먹이를 가로채려고 콘도르가 빙빙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피터! 우리는 나쁜 아이들일까?"
웬디가 문득 화환을 만들고 있던 손을 멈추고 피터에게 물었다.
피터는 누이동생을 돌아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지는 모르지만… 할 수 없지. 웬디, 쓸쓸하니?"
"응, 약간."
"하지만 우리에겐 로봇 하우스가 있잖니? 어린이 방엔 아프리카도 있어. 그러니 아빠랑 엄마는 싹 잊어버리도록 하자."
"그래. 곧 잊혀지겠지 뭐."
두 남매는 빙긋 웃으며 또다시 먼 곳에 있는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들도 이제 싸움을 그치고 사이좋게 먹이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
 
<끝>
우주 스파이
Imposter
 
필립 K. 딕 Philip K. Dick 지음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과학 소설 중에는 웰즈 시대부터 뛰어난 침략을 그린 소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소설은 '이것은 소설이다. 꾸며낸 이야기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독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야기 속에 끌려 들어가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를 맛보게 되고, 또 자기 신변에도 그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마음을 졸이는 그러한 것이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뜻에서, 웰즈의 <우주 전쟁>은 우리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바깥 세계에서 들이닥치는 침략을 실감나고 생생하게 상상시켜 주는 최초의 걸작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미국의 어느 방송국이 이 소설은 라디오 드라마로 하며 방송했을 때, 그것을 청취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 줄 알고 큰 소동을 벌였던 일이 있습니다.
화성인의 우주선이 프린스턴 시 교외에 착륙하고, 그 안에서 큰 문어처럼 생긴 괴물 화성인이 나타나 초록빛을 내는 열선(熱線)을 가지고 사람이나 집, 다리, 마을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모조리 태워 버리고, 무서운 독가스를 뿜어내면서 뉴욕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
이것이 실황 방송인 것처럼 전국에 방송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참으로 화성인이 쳐들어왔다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집을 뛰쳐나와 '사람 살려요'하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뉴욕에서 피난 가는 사람도 있고, 경찰서로 몰려가 방독면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는 등, 순식간에 뉴욕의 온 시내는 온통 전쟁의 공포 속에 휘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소동에 말려든 것은 일반 시민만은 일반 시민만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도, 휴가 중이던 장병들에게는 '즉시 귀대하라'는 긴급 명령이 전달되고, 출동 준비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동이 가라앉기까지는 몇 시간이나 걸렸는데, 그 다음날 신문에는, 그 사건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과학 소설에 익숙해진 현대에는 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요. 그 뒤로 우주인의 지구 침략 이야기는 많이 쐬어졌고, 그 침략 방법도 차차 복잡 교묘하게 되어 왔습니다. 즉, 언뜻 보기에는 지구인인지 침략해 온 우주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꾸며 쳐들어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만일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 예를 들어,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혹시나 우주인이 아닐까 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이 소설을 쓴 필립 K. 딕은 지금 미국에서 활약 중인 유명한 공상 과학소설 작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특히 서스펜스가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넘치는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 전쟁
 
그날 아침, 스펜스 올햄 기사는 아침 식사를 들면서 아내한테 말했다.
"머지 않아 반드시 휴가를 얻어내겠소."
"하지만 그러다가 그 계획은 어떡하고요?"
아내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
"잠깐 내가 자리를 비우는 건 괜찮아요. 어쨌든 좀 쉬어야겠어. 벌서 10년이 나 쉴새 없이 꼬박 일해 왔거든. 휴가를 얻거든, 우리 한번 새튼 숲 속으로 가서 캠프를 합시다."
"새튼 숲?"
하고 아내는 설거지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는 이틀인가 사홀 전에 불타고 말았잖아요. 거 왜 무엇인지 번쩍 빛을 내더니 산불이 났다는…"
"아니, 새튼 숲이 불타다니? 대관절 그 원인이 뭔데?"
"잘 모르겠어요."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야. 모두 전쟁밖에 생각지 않으니 원."
"전쟁 이외의 무엇을 생각할 겨를이나 있겠어요."
아내는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올햄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아내의 말이 맞았다.
10년 전, 알파 켄타우리별(星)의 우주 함대가 별안간 지구를 쳐들어왔었다.
지구 방위군은 필사적으로 대항해 싸웠으나, 켄타우리 별 사람들의 워낙 뛰어난 우주선 앞에는, 형편없이 박살나고 알았던 것이다.
우주 함대는 지구의 각 도시를 습격하여 마구 때려부수었다. 그래서 지구는 파멸 직전까지 몰렸다. 때마침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적의 우주선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방공 스크린을 발명했다.
이 스크린은 그 무서운 힘을 떨치던 우주인의 열선이나 미사일도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는 강력한 것이었다. 스크린은 처음에 주요 도시와 기지 위에 쳐졌으나 머지 않아 지구를 완전히 뒤덮게 되었다. 켄타우리 별 사람은 달리 손을 쓰지 못해 당황했다. 거기에다 지구 방위군은 총반격을 가해 적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그 뒤로 우주 전쟁은 이겼다졌다 해가며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켄타우리 별 군(軍)은 어떻게 해서라도 지구의 방공 스크린을 돌파하려 했으나, 그것만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그 반면에 지구군도 바깥 우주에 가서 켄타우리 우주 함대와 싸우기만 하면 언제나 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쪽은 서로 상대편의 동정을 살피다가 기회만 있으면 기습 공격을 가하기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구 쪽에서도 그 동안 아무 일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구상의 우수한 과학자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켄타우리 별 군대를 쳐부술 새 무기 발명에 온갖 힘을 다하고 있었다.
올햄 기사의 '계획'도 그 중의 한 가지였던 것이다 그의 계획은 머지 않아 곧 완성될 참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완성되는 날에는… 그 얄미운 침략자를 철저히 물리치고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낼 수가 있을 것이다.
올햄 기사는 식탁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그 계획을 하루빨리 완성시켜, 휴가를 얻어 푹 좀 쉬었으면…"
그는 양복 저고리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들자 현관으로 나왔다.
연구소로 출근시켜 줄 쾌속(快速) 에어카가 맞으러 오게 되어 있었다.
"여보, 에어카가 왔어요."
아내가 말했다.
아침해가 찬란히 빛나는 동쪽 하늘에서, 지금 딱정벌레처럼 생긴 소형 쾌속 에어카가, 그 검은 차체 룰 번쩍이면서 이리로 날아오고 있었다.
에어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현관 앞에 소리 없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조종석의 문이 열리고, 친구인 넬슨 기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자, 다녀오리다."
올햄은 아내한테 인사말을 남기고 에어카에 올랐다.
 
너를 체포한다
 
올햄이 자리에 올라앉자, 쾌속 에어카는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전속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좌석에는 또 한 사람의 낯선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올햄은 넬슨한테 말을 건넸다.
"어떤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나?"
"별로."
넬슨이 대답했다.
"켄타우리 별 군대가 소행성대에서 소규모의 공격을 가해 왔어. 우리편에서 소행성 하나를 잃기는 했지만 적에게도 손해를 주었어."
"우리들의 '계획'이 완성되면, 아주 단단히 혼을 내어 주겠지만… 글쎄, 언제쯤 완성될까?"
"과학자가 그처럼 마음이 약해서는 안 될 텐데."
느닷없이 옆에 앉았던 낯선 사나이가 말했다. 넬슨이 소개했다.
"이쪽은 피터즈 소령이야."
"안녕하셔요. 연구소에서는 뵌 적이 없군요."
"나는 연구소 사람이 아닙니다."
피터즈 소령은 움푹하고 날카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넬슨한테 힐끔 눈짓을 했다. 올햄은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쾌속 에어카는 지금 황폐해진 무인 사막 위를 전속력으로 날고 있었다.
"난 보안국에서 왔소."
"예? 연구소에 적이라도 몰래 들어왔단 말이오?"
올햄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보안국은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눈을 번쩍이며 켄타우리 별 군대의 스파이를 막아내는 일을 맡고 있는 기관이었다.
"실은 그런 일로 당신을 만나러 온 거요. 올햄 기사."
올햄은 당황했다.
"그건 또 왜요?"
"당신을 켄타우리 별의 스파이로 체포하기 위해서죠. 이자를 체포해, 넬슨!"
이렇게 말한 순간 넬슨이 뒤로 획 돌아앉으며 올햄의 옆구리에 광선총을 들이댔다. 올햄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입만 딱 벌린 채 친구를 노려보았다.
넬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죽여 버릴까요? 당장 해치우는 것이 좋을 겁니다. 뒤로 미루다간 위험할 테니까요."
넬슨은 피터즈에게 쉰 목소리로 빨리 지껄였다. 올햄은 더욱 더 놀라서 친구의 얼굴을 치켜보았다.
"대관절… 대관절, 이게 무슨 짓인가? 어째서 나를 죽이려는 건가?"
피터즈 소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에어카 안에 장치된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켰다. 스크린에는 낯익은 보안국장의 얼굴이 비쳤다.
"무사히 체포했습니다. 국장님, 바로 이 사나이입니다."
피터즈가 보고하자, 보안국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항을 하던가?"
"아닙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순순히 차에 탔습니다."
"응 그래, 거기가 어딘가?"
"지금 막 방공 스크린을 벗어나는 중입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구는 안전합니다. 국장님."
"음, 수고가 많네. 그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달로 가 주게. 제 시간 안에 닿을 수 있겠나?"
"염려 마십시오, 국장님. 제가 얻은 정보로는 그것이 일어나려면, 일종의 암호가 필요합니다."
"달에는 미리 연락을 해 두겠네. 그럼 잘 부탁해."
보안국장의 얼굴이 사라졌다. 올햄은 또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구는 벌써 아득히 멀어져, 아메리카 대륙의 윤곽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해치우는 게 어떨까요?"
하고, 넬슨이 또 물었다.
"기다리게. 두세 가지 질문을 해야겠어."
피터즈 소령은 올햄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지금 달을 향해 가고 있다. 한 시간 뒤에는 달 뒷면의 바다 위에 착륙한다. 착륙함과 동시에 거기에 대기중인 방위군 대원에게 자네를 넘겨 준다. 대원은 자네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토막토막 잘라서 사방에 흩뜨려 버린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냐? 까닭도 없이 함부로 죽이겠다니!"
올햄은 호통을 쳤다.
"물론 그 까닭을 말해 주지. 2~3일 전, 켄타우리 별 군대의 우주선 한 대가 방공스크린을 돌파하여 지구에 침입했어. 그 우주선은 인간의 모습을 한 스파이 로봇을 지구상에 내려놓았어. 그 로봇은 어떤 인간을 죽이고는 감쪽같이 그 인간으로 둔갑해 버렸어."
피터즈 소령은 올햄을 힐끗 거들떠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로봇의 몸 속에는, 유(U) 폭탄이 장치되어 있지. 그것은 아주 모양이 작지만, 도시 하나쯤은 거뜬히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야. 그 폭탄은 암호만 맞으면 언제든지 폭발하게끔 되어 있는 모양이야."
"그것이 바로 나란 말인가?"
하고, 올햄은 간담이 서늘해져 물었다.
"그런 엉터리 수작을!"
"로봇은 죽인 인간으로 감쪽같이 둔갑할 수가 있거든. 얼굴 생김새, 기억, 모습할 것 없이 송두리째 죽인 인간과 똑같게 되어 버릴 수가 있지. 그래서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가려 낼 수가 없을 만큼 완전히 똑같단 말이야."
피터즈 소령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래서 수상하다고 여긴 것이 자네란 말이다. 적은 자네의 연구가 완성의 문턱에까지 도달된 걸 알고서 자네를 죽이고, 가짜 자네를 우리 연구소에 잠입시켜 연구소를 몽땅 날려보낼 흉계를 꾸민 거야.""나는 가짜가 아니야! 진짜 스펜스 올햄이야!"
올햄은 뱃속에서 짜내는 듯한 큰 소리로 내질렀다.
"자네는 사흘 전, 새튼 숲으로 산책하러 갔었지. 그 때 진짜 자네는 죽음을 당하고, 지금의 자네와 같은 가짜로 변한 거다."
"그런 일은 없어."
올햄은 넬슨을 돌아보았다.
"로봇은 올햄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단 한가지, 그 몸 속에 장치된 U폭탄을 제외하고 말이야."
피터즈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달이 눈 앞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곧 도착해."
하고 그는 말했다.
 
이제 살았다.
 
에어카는 달 표면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창 너머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구릉이 끝없이 퍼져 있었다. 올햄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해야 살아날까.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오해를 풀어 버릴 수가 있을까.)
"착륙 준비."
피터즈 소령이 말했다.
한 구릉 기슭에 건물이 보였다. 거기에 지구 방위군의 폭탄 처리반이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몇 분 이내에 그는 죽는 것이다. 폭탄 처리반은 그를 해부하고, 토막토막 잘라 버린다 - 그리고 비로소 폭탄이 들어 있지 않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네라면 내가 진짠지 가짠지 잘 알 것 아니냐. 우리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야. 벌써 20년이나 사귀어온 친한 친구가 아닌가?"
"가까이 오지 마! 쏠 테야!"
넬슨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광선총을 한층 더 바싹 들이댔다.
"잘 들어보라고. 우리가 대학 2학년 때, 데이트했던 아가씨를 알고 있겠지. 그리고 3학년 때, 교수한테서 레포트로 칭찬 받았던 일도 말이야."
"닥쳐! 그 이상 더 지껄이지 마. 네놈은 로봇이야. 올햄을 죽인 살인 로봇이란 말이야!"
넬슨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내뱉듯이 외쳤다.
"아니야, 난 분명히 올햄이야. 너무나 억울하고 엉뚱한 착각을 해선 안 돼. 그 로봇은 나하고 마주친 적이 없어. 우주선이 추락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잖아?"
그는 자기 몸을 어루만졌다.
"나를 지구로 데려가서 조사해 줘. 엑스(X)선으로 검사한다든지, 심리테스트를 한다든지… 아 참 그렇군. 새튼의 숲을 뒤져 보면 추락된 우주선 안에 로봇이 있을 거야."
피터즈가 가로맡았다.
"이 로봇은 자기가 진짜 올햄이라고 여기고 있군."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고 만다.
에어카는 천천히 착륙했다. 겨우 두세 번 튀어 올랐으나 곧 사뿐히 내려앉고 엔진이 멎었다.
먼저 피터즈가 우주복을 입었다. 넬슨을 그 사이에도 올햄 옆구리에 광선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피터즈가 우주복을 입고 나자, 광선총을 받아들고, 다음에 넬슨이 우주복을 입었다.
"이자를 어떻게 할까요, 우주복을 입힐까요?"
넬슨이 묻자, 피터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로봇은 산소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창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처리반이 왔어. 문을 열어라."
"잠깐! 기다려"
하고, 올햄이 외쳤다.
"그 문을 열면, 나는 숨이 막혀 죽는다. 기압이 낮아서 피가 끓어 죽어 버린다"
넬슨은 약간 주저했다.
"부탁이야, 넬슨, 그 문만 열면 나는 당장에 죽고 만다. 죽고 난 뒤에 내가 진짜 올햄으로 밝혀졌댔자 때는 이미 늦고 만다!"
"어서 문을 열어!"
피터즈가 냉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넬슨의 손이 문의 손잡이에 닿은 채 뻣뻣해졌다. 그 순간, 올햄은 번개처럼 어떤 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일부러 태연히 좌석에 기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열어도 좋아. 자네 말대로 나에게는 공기가 필요 없어."
그는 이런 말을 하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자네들이 얼마나 빨리 달아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달아나?"
피터즈 소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들의 목숨은 앞으로 15초야. 방금 나는 기폭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어."
"하지만 암호는…"
"그건 거짓 선전이야. 자네들은 잘못된 정보를 얻었던 거다. 앞으로 14초."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후닥닥 문을 열고 앞을 다투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 안의 공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듯이 진공 속으로 새어 나갔다. 올햄은 재빨리 몸을 날려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자동 기압 장치가 움직이고 새 공기가 나와, 엷어진 공기를 메워 주었다. 올햄은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이다. 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두 사나이는 다른 사나이들한테 무어라 소리치며 걸음아 살려라 달아나고 있었다.
처리반 대원들도 덩달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작전은 생각대로 멋지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올햄은 조종석에 앉아 다이얼을 돌렸다. 에어카는 사뿐 공중에 떠올랐다. 달 표면에서는 사나이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지 뭔가."
올햄은 혼잣말을 지껄이며 에어카를 지구 쪽으로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외톨박이
 
1시간 뒤, 올햄은 지구의 대기권에 다시 돌입했다. 그리고 미국의 자기 집 근처 1킬로미터 떨어진 산 속에 착륙했다.
그는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넣고, 자기 집 번호를 돌렸다. 스크린에는 아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내는 그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스펜스! 당신 어디 계셨어요? 대관절 무슨 일이 생겼어요?"
"지금 뭐라 말할 순 없어. 연구소에 가서, 첸바렌 박사를 집으로 모시고 와 줘요. X선의 기계와 심리 테스트 장치 등 모두 가지고 오도록 일러 줘요."
"하지만…"
"내 말대로 해 줘요, 메어리. 밤이 되거든 살짝 집엘 갈 테니. 누구 연락이 없었소?"
"아뇨, 아무도 없었어요. 왜요?"
"아냐, 그저 물어 본 거요. 나한테서 연락이 있었다는 걸 아무한테도 말해선 안 돼요. 첸바렌 박사에겐 내가 위험한 병에 걸려 있다든지 해서 적당히 말해요. 알겠소?"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올햄은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껐다.
그는 산 속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럭저럭 밤의 어둠이 사방에 내리 깔릴 무렵, 에어카를 나와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이 밝게 비친 창문 하나만 보였다. 서재의 불빛이었다. 그는 울타리 밑에 몸을 바싹 붙이고 집 안의 동정을 살폈다. 집 안은 고요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첸바렌 박사는 벌써 와 있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는 첸바렌 박사한테 자기가 진짜 스펜스 올햄 기사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박사한테 신체 검사를 받아서, 그 결과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첸바렌 박사는 연구소에서도 가장 존경받고 있는 유명한 의사다. 그의 말이라면 모두 믿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금살금 현관으로 다가갔다. 집 안은 역시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기분 나쁘리만큼 너무 조용한걸.)
그는 발길을 멈췄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 보안국 녀석들이 냄새를 맡고 집 안에서 나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만 확인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현관문 앞에 가서 벨을 눌렀다. 벨이 집 안에서 울렸다. 집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내였다.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자기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잠자코 뛰어나와 울타리 옆 나무 그늘에 얼른 몸을 숨겼다.
아내를 밀어뜨리고 두세 명의 보안국원이 뛰어나오며 광선총을 쏘아댔다. 담이 갈라지고 나무 울타리가 타올랐다. 올햄은 필사적으로 뛰고 또 뛰어 산 쪽으로 도망쳤다.
별안간 근처 일대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하늘과 땅에서 조명등이 한꺼번에 그 주위를 비쳤기 때문이었다.
올햄은 나무 그늘에서 나무 그늘로, 재빠르게 건너뛰면서 산으로 치달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에어카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미처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제 그는 이 세계에서 자기편이라곤 아무도 없다. 친구 넬슨은 다짜고짜 그를 쏘아 죽이려 들었다. 그리고 아내는… 아내의 얼굴은 분명히 그를 로봇으로 여기고 있는 표정이 아니던가.
올햄은 뛰고 또 뛰어 달아났다.
 
새튼 숲 속으로
 
올햄은 아까 에어카를 세워 놓았던 장소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나무 그늘 사이로 에어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올햄은 그 자리에 말뚝처럼 멈칫 서 버렸다. 에어카 옆에는 낯익은 피터즈 소령의 모습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령의 손에는 무시무시한 광선총이 꽉 들려져 있었다.
"올햄, 어서 나와라! 자네가 이 근처에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느닷없이 피터즈 소령의 우렁찬 목소리가 밤 공기를 뒤흔들었다. 올햄은 깜짝 놀라 냉큼 몸을 엎드렸다. 이젠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피터즈 소령은 올햄에게 겁을 주어 꾀어내기 위해 마이크를 써서 함부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듣거라, 올햄, 자네는 독 안에 든 쥐란 말이야. 이 근처는 물샐 틈 없이 포위되어 있다."
피터즈 소령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네는 아직껏 자기 자신이 로봇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모양이야. 그렇지만 자네는 로봇이야. 이 지구를 파괴하기 위해서 알파 켄타우리 별에서 몰래 숨어 들어온 폭탄 로봇이란 말이다. 자네가 어떤 암호를 말하는 순간, 둘레 10킬로미터 안에 있는 것은 모조리 증발해 버리는 거야."
올햄은 주위를 살폈다. 보안국원이 포위망을 점점 죄어 들어오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었다.
"자네가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갈 테다. 이 근처는 개미 한 마리 얼씬 못 하게 경비되고 있어."
올햄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터즈 소령의 말이 맞기도 하다. 운이 억세게 좋아야 밤 동안만은 붙들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아침이 되면 영락없이 붙잡히고 만다. 그래서 광선총 한 방으로 이 세상은 하직이다. 그건 이미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살 길이 남아 있을까?
있다. 꼭 한 가지 남아 있다. 있고 말고.
그것은 켄타우리별의 우주선이 부서진 잔해를 찾아내는 일이다.
피터즈 소령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켄타우리 별의 로봇이 자기로 둔갑한 것이라 믿고 있는 점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그럴 겨를조차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럴 턱이 없다는 것을 올햄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로봇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절대로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켄타우리 별의 우주선은 이 근처에서 착륙에 실패하고 추락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을 것이 아닌가. 그러고 그 속에 로봇의 잔해도 남아 있을 것이다.
만일에 그 우주선과 로봇의 잔해를 찾아내어 피터즈들에게 보여 준다고 하면, 아무리 미련한 녀석들일지라도 오해를 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뉘우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그 우주선의 잔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음에 그는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우주선은 땅에 떨어져서 타 버렸다. 그래서 아내 메어리가 오늘 아침, 2~3일 전에 새튼 숲이 불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번갯불처럼 번쩍 빛나더니 별안간 폭발한 것처럼 타올랐다고 하지 않았던가.
새튼 숲이 틀림없다. 우주선은 새튼의 숲에 떨어져서 숲을 불바다로 만들었겠지. 거기에 가기만 하면 자기가 진짜 스펜스 올햄 기사라는 걸 증명할 수가 있겠지.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자, 온몸에 용기와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주위를 살피면서 새튼 숲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새튼 숲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나는 과연 누구냐
 
아침이 밝았다.
올햄은 새튼 숲 속으로 갔다.
우주선이 떨어진 곳은 바로 이 근처일 테지. 이 숲은 소년시절부터 곧잘 놀러오던 곳이어서,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다. 숲 깊숙한 곳에는 불쑥 솟아나 있는 산봉우리가 있다. 아마 우주선은 그 봉우리를 피하다가 그만 충돌되어 떨어졌겠지.
그의 상상은 들어맞았다. 그는 얼마동안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자 숯덩이처럼 타다 남은 나무 재 속에 어지럽게 헝클어진 금속 덩어리가 있었다.
올햄은 그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그것은 틀림없는 우주선의 - 그것도 지구의 것이 아닌, 바늘 모양처럼 생긴 우주선의 잔해였던 것이다.
(이 잔해 속에 로봇의 잔해도 있을 거야.)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미처 찾아내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보안국원들이었다.
그는 나뭇가지 사이로 총을 겨눈 대열이 이쪽으로 밀어닥치는 것을 보았다. 선두에서 피터즈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어떤 결심을 하고 나자, 피터즈 앞에 천천히 걸어나가며 양손을 들고 소리쳤다.
"피터즈 소령, 나야!"
피터즈는 주춤하고 서더니 광선총을 겨누었다.
"쏘지 말아요!"
올햄은 큰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 줘! 내 뒤를 보라고. 켄타우리 별의 우주선의 잔해가 있어."
주위에서 보안국원들이 일제히 뛰어나와서 그를 둘러쌌다.
"부탁이야, 아직 쏘지 말아 줘! 나는 놈들의 우주선이 틀림없이 여기에 추락했을 것을 알고 여기까지 찾으러 온 거야. 피터즈, 좀 조사해 봐 주게. 로봇의 잔해가 반드시 있을 거야."
올햄은 필사적으로 빨리 지껄였다.
피터즈는 망설였다. 그 때 보안국원 하나가, 우주선의 잔해 밑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소령님! 이 밑에 무엇이 있습니다."
"그거야!"
올햄은 펄쩍 뛰면서 외쳤다.
"놈을 쏘아라! 아무도 안 쏘면 내가 쏠 테야!"
누군가 소리쳤다. 넬슨이었다.
"쏘지 마. 내가 책임자다. 내 명령이 내릴 때까지는 아무도 쏘아선 안 돼."
피터즈가 돌아보며 명령했다.
"얼른 쏘지 않으면 안 돼요. 놈은 올햄을 죽였어. 언제 우리를 죽일지 몰라요, 만일 폭탄이 폭발하면…"
"시끄러워!"
피터즈 소령은 넬슨을 꾸짖고 부하에게 일렀다.
"거길 파헤쳐 봐."
부하들은 겁먹은 얼굴로 조심조심 금속 파편을 치우고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올햄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일에 로봇이 완전히 재로 되어 버려서 흔적도 없다면…)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자, 식은땀이 확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모처럼의 기회도 헛되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피터즈 소령님, 제발 저자를 쏘게 해 주시오. 우리가 죽기 전에요."
넬슨이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 때, 부하 두 사람이 일어섰다.
"소령님! 이건 틀림없이 켄타우리 별의 바늘형 우주선의 잔해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인간의 몸뚱이 같은 것이 파묻혀 있습니다."
"어디, 그럼. 내가 좀 보겠다."
피터즈 소령은 비탈을 타고 부하가 작업하는 곳에 뛰어내려갔다. 올햄과 다른 대원들도 뒤를 따랐다.
과연 구부러지고 뒤틀린 인간의 모습 비슷한 것이 반쯤 흙에 파묻혀 넘어졌다.
입을 딱 벌리고 눈은 유리처럼 동그랗게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인간이라기보다는 로봇 같았다.
피터즈 소령이 올햄을 돌아보았다.
"믿어지진 않지만… 자네는 거짓말 않겠지?"
올햄은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소가 자연히 터져 나왔다.
"믿어지지 않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야. 이처럼 꼭 닮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놈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버린걸."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보안국원이 파낸 그 소름끼치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폭탄도 발견되겠지. 만일 폭탄이 암호에 의해서 폭발하는 것이라면 이 놈은 벌써 죽어 버렸으니 이젠 안심이란 말이야."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올햄 기사, 당신에겐 정말 미안하게 되었군. 당신에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상상되고도 남음이 있어요. 실은 당신이 그토록 재치 있게 달아나 주지 않았던들, 지금쯤은 우리가 당신을 죽이고 말았을 거요."
"이젠 다 지난 일인 걸요 뭘."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는 내 기분이 풀리지 않소. 오라, 당신이 휴가를 얻을 수 있도록 내가 주선해 드리겠소. 한 달쯤 마음껏 푹 쉬고 오도록 하시오."
"고맙소. 하지만 지금 심정 같아서는 집에 돌아가고 싶을 따름이오."
그 때, 시체를 뒤적이고 있던 국원 하나가 가슴팍을 가리키며,
"여기에 폭탄 같은 것의 한쪽 끝이 보입니다."
하고 보고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가슴에 뚫린 큰 상처 안에 금속성의 번쩍이는 물건이 보였다.
그러자, 그 때까지 묵묵히 있던 넬슨이 갑자기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가슴팍에 손을 대려고 했다.
"다치면 안 돼. 아직 위험할지도 몰라. 뒷일은 폭발물 처리반에게 맡기는 게 좋을 거야."
올햄이 주의시켰다. 그런데도 넬슨은 거기에 손을 집어넣 어 그 금속성 물건을 확 잡아 뽑았다.
"그만두라니까!"
올햄이 소리쳤다.
넬슨은 얼른 일어섰다. 넬슨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서 종이처럼 핏기가 싹 가셨다.
"이걸… 이걸 좀 보라고."
그는 피에 젖은 그 금속성의 물건을 불쑥 올햄 앞에 내밀었다.
"앗! 이, 이건 켄타우리 별 사람이 쓰는 칼이다."
올햄은 자기도 모르게 입 속에서 중얼댔다. 그것은 분명히 켄타우리 별 사람이 언제든지 몸에 지니고 있는 가늘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이것이 올햄을, 내 친구를 죽인 거다. 네가 죽인 거야. 죽여서 우주선 곁에 파묻어 둔 게 틀림없어…"
넬슨은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모든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넬슨과 그 나이프를 번갈아 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자네는 로봇이야."
넬슨이 올햄의 눈 속으로 파고 들어갈 듯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올햄은 몸을 떨었다.
"이것은 내가 아니라니까!"
그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마음속에 뭉게뭉게 연기처럼 피어올라왔다.
"그렇지만 만일에… 만일에, 이 시체가 진짜의 나라고 하면, 이 나는 바로 로봇…"
올햄은 그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이, 자기가 자기를 의심하는 그 말이 바로 암호였던 것이다. 다음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멀리 알파 켄타우리 별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끝>
우주에서 온 거머리
The Leech
 
셰클리 Robert Sheckley 지음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지구의 인류에게 멸망의 위기를 몰고 오는 것은 우주인의 침략 뿐만은 아닙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위기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태양을 예로 들어봅시다. 태양이 없어진다고 하면, 그 열과 빛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흘도 못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고마운 태양이 도리어 인류를 죽이는 무서운 적이 될 경우도 있습니다.
태양의 열이 지금보다 1할만큼 더 높아진다고 하면 지구는 당장에 뜨거운 사막이 되어 버리고 생물은 도저히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할쯤이 더 높아진다면 지구의 표면 기온은 1백도가 되어 숲이나 들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불바다가 될 겁니다.
더구나 그 높은 온도로 말미암아서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자꾸자꾸 녹을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바다의 수위가 높아져 서해안 지방이나 평야에는 바닷물이 밀어닥쳐 순식간에 바다의 일부로 변해 버릴 것입니다. 뉴욕이나 런던이나 부산도 바다 밑에 잠겨 버릴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온 세계에 무서운 집중호우가 쏟아질 것입니다. 높은 온도 때문에, 바다에서 활발히 증발된 많은 수증기가 비구름이 되어 큰비가 계속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강이란 강은 큰 홍수가 나서 도시나 농촌 할 것이 모두 떠내려가겠지요.
그리고 또 만일에 태양이 좀더 뜨거워지고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큰 폭발을 일으킨다면 우리 지구는 물론 화성이나 금성, 그 밖의 행성도 그 여파를 받아서 한꺼번에 증발해 버릴 것입니다.
또 반대로 태양이 지금보다 더 식는다고 하면, 지구상에는 아득한 옛날에 몇 번이나 있었던 큰 빙하가 생기고, 문명 세계는 모두 두꺼운 얼음 밑에 깔리고 말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일어날지 모르는 자연의 큰 재해를 생각해 보면 끝이 없습니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있는 작은 행성과 충돌할지도 모르고, 수성이 부딪쳐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지구상에서 인류가 평화적으로 번성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너무나 믿고 있다가는 이 소설처럼 엉뚱한 일에 휘말려들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을 쓴 로버트 셰클리는 미국에서 비교적 젊은 층의 작가이지만, 미처 남이 생각지도 못했던 색다른 과학 소설을 곧잘 써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셰클리의 소설은 매우 우습고 익살맞지만, 그 익살 가운데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간의 손이 아직 닿지 않는다> <우주 시민> <죽지 않는 판매 회사> 등의 작품이 유명합니다.
괭이날을 녹이는 바위
 
"교수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마이클즈 교수는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을 건 사람은 마이클즈 교수의 별장지기 코나즈였다.
"좀 쉬셔야 할 텐데, 제가 성가시게 구는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만, 참으로 이상한 것을 발견했으니 꼭 좀 봐 주십시오."
코나즈는 조심조심 말했다.
마이클즈 교수가 쉬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말을 시키든지 전화를 바꿔 주든지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클즈 교수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인류학자이자, 물리학자요, 화학자이다. 언제든지 가을에서 봄에 이르기까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회에 참석하며, 책을 쓰는 등 매우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름 동안에는 이 뉴욕 주(州)의 시골 별장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다만 낮잠과 독서와 낚시, 그리고 등산을 하면서 한가로이 지낸다.
코나즈는 주인 마이클즈 교수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말했다.
"예, 교수님. 꼭 좀 일어나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듣고 계십니까?"
마이클즈 교수는 겨우 실눈을 떴다.
"응, 듣고 말고. 코나즈. 대관절 어떻게 생긴 우주인을 보았다는 거야?"
"우, 우주인이라뇨?"
코나즈는 깜짝 놀란 듯이 되물었다. 교수는 아직도 졸음이 오는 듯한 목소리로,
"에, 초록색을 한 화성인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코나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한테는 바위 조각으로밖엔 보이질 않습니다만…"
이번에는 마이클즈 교수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코나즈를 다시 보았다.
"자네는 대수롭지도 않은 바위 조각을 발견했다면서, 나의 낮잠 시감을 망치려는 거야?"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도 이런 사소한 일로 성가시게 해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그 바위 조각 같은 놈이 저의 괭이 날을 5센티미터나 녹여 버렸기에 그만…"
코나즈는 변명을 늘어놓듯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말하였다.
"괭이 날을 5센티미터나 녹여 버렸다…"
마이클즈 교수는 앵무새처럼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코나즈가 내민 괭이 날을 보았다. 과연 코나즈 말대로 괭이 날이 움푹 패어 들어가 있었다.
"약간 닿았을 뿐인데 이처럼 망가졌습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아무 말도 없이 긴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신을 신었다.
"그걸 좀 보여다오."
"예, 이쪽입니다."
코나즈는 교수를 마당으로 안내했다. 마당에는 깨끗한 잔디가 깔려 있고, 그 앞쪽에는 길이 나 있었다.
길 옆 1미터 가량 되는 곳에 도랑이 있는데, 그 안에는 트럭의 타이어 만한 긴 타원 꼴의 평평한 바위 하나가 도랑을 막고 있었다. 그 표면은 아름다운 얼룩 무늬로 덮여 있었다.
"저것을 들어내려고 괭이로 움직였더니, 아, 글세 괭이 날 이 녹아 버리지 않겠습니까?"
코나즈가 말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쭈그리고 앉아, 안경을 콧등을 밀어 올리고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별로 다른 점이 없는 바위였지만, 마이클즈 교수는 시험삼아 코나즈의 괭이를 바위에 대보았다. 그랬더니 쇠로 된 날이 2~3센티미터나 못 쓰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마이클즈 교수는 괭이 날과 바위를 번갈아 보았다. 바위는 열을 뿜고 있지 않고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도 마치 2~3천 도나 되는 뜨거운 용광로처럼 쇠를 녹여 버리는 것이 아닌가?
교수는 시험삼아 흙을 한 줌 움켜쥐고 그 바위에 뿌려 보았다. 그러자 흙은 바위 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 버려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 교수는 좀 큼직한 돌을 얹어놓았다. 돌은 마치 난로 위에 얹어놓은 얼음덩이처럼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교수님, 참 이상한 바위죠?"
마이클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한 것이로군."
"대관절 이건 뭘까요?"
"보통 바위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마치… 뭐랄까, 거머리 갈군 그래. 거머리는 피를 빨지만, 이 바위는 흙이나 괭이 날이나 돌을 빨아먹는군."
마이클즈 교수는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중얼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 대학에 전화를 걸어서, 광물학 교수와 생물학 교수한테 급히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천하에 유명한 마이클 교수도 그 바위 거머리가 그토록 큰 문제를 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다
 
자라나는 바위
 
이튿날 아침, 마이클즈 교수가 마당에 나가 보았더니, 그 바위는 지름 2미터 반이나 되어 있었다. 또 그 다음날에는 5미터 반이나 될 만큼 커져서, 마침내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길은 사람이나 차가 지나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보안관이 달려 왔다.
"마이클즈 교수님, 야단났군요. 이 바위는…"
"그렇소, 보안관. 이 놈을 녹여 버리기 위해서 지금 산(酸)을 구하는 중이지만, 좀 힘들군요."
마이클즈 교수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잠시라도 이 길이 막히면 곤란해요. 차가 지나갈 수 없고, 첫째 이 도로는 군에서 사용 중이니까요."
"미안하오, 보안관. 나도 손을 써 보았지만 별 도리가 없으니…"
"그럼, 제가 한번 해 보죠."
보안관은 차에서 쇠막대를 가져와 그 바위 밑에 찔러 넣어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쇠막대가 바위에 닿는 순간 반쯤 녹아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보안관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가스등과 큰 망치를 꺼내고, 먼저 가스 불로 그 바위의 가장자리를 15분 가량 열을 가한 뒤에 큰 망치를 휘둘러 힘껏 내리쳤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깨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으리라 여겼으나, 그렇지가 않았다. 망치의 머리가 달아났을 뿐이었다.
그러던 참에 군용 트럭 대열이 들이닥쳤다. 맨 앞의 지프차가 바위 앞에 멈춰서고, 대령의 계급장을 단 키 큰 군인이 내렸다.
"길을 막아서는 안 돼요. 얼른 치워 주시오."
"우리들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요."
마이클즈 교수는 지금까지의 일을 간단히 대령한테 설명했다. 그러나 대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미 육군 군용차의 통행을 막아서는 안 돼요."
대령은 지프차 운전병에게 명령했다.
"이 바위를 타넘고 가도록 해!"
운전병은 엔진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바위를 향해 지프차를 몰았다. 그러나 차가 바위 위에 올라간 순간, 딱 멈춰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액셀레이터를 밟아대도 꼼짝하지 않았다.
"대관절 어찌된 거지?"
대령은 짜증을 냈다.
"대령, 지프차가 녹기 시작했어요. 어서 내리지 않으면 위험해요."
마이클즈 교수가 옆에서 주의시켰다. 대령은 지프차 밑을 내려다보자, 타이어가 반쯤 녹아 없어진 것을 알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다. 그리고 황급히 땅 위로 뛰어내렸다. 운전병도 뒤따라 뛰어내렸다.
지프차는 마치 난로 위의 얼음 덩어리처럼 녹아 버렸다. 타이어가 녹고, 차체가 녹고 -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남았던 무선 안테나도 마침내 녹아 없어져 버렸다.
대령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았다. 그래서 부관인 중위한테 명령했다.
"얼른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오너라!"
"대령… 그런 것도 다 헛일일 겁니다."
마이클즈가 옆에서 말했으나 대령은 막무가내였다.
"미국 육군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이윽고 중위가 다이너마이트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쌓았다.
"모두 멀찌감치 물러가!"
대령은 싸움터에서 군대를 지휘하듯이 가슴을 딱 펴고 의젓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다이너마이트는 쌓이는 족족 녹아 내렸다. 그러나 재빨리 갖다 쌓았으므로 그런 대로 쌓여 갔다.
"기관총 발사 준비!"
대령의 명령이 날카롭게 떨어졌다.
기관총이 마이클즈 교수 댁 마당에 장치되고, 두 병사가 제자리에 앉았다. 마이클즈 교수들은 멀리 떨어져서 형편을 살폈다.
"발사!
탕, 탕, 탕탕탕!
기관총구에서 불이 내뿜어졌다.
다음 순간,
쾅, 쾅, 쾅!
땅이 꺼질 듯한 폭음과 함께 번쩍 하는 섬광과 불기둥이 일시에 일고, 검은 연기가 그 바위를 뒤덮었다. 그리고 폭풍이 마이클즈 교수들의 머리 위를 회오리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까짓 것, 이제야 날아가 버렸을 테지."
대령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검은 연기가 사라지고 나자, 대령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바위는 날아가 버리기는커녕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 바위는 분명히 배 가량이나 더 커져서 덩그러니 솟아 있지 않은가.
마이클즈 교수는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배탈나게 만드는 작전
 
그로부터 한 주일이 지난 뒤, 마이클즈 교수는 언덕 위에 올라가 그의 별장이 점점 무너져 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살아 있는 바위는 이제 지름이 수백 미터나 되는 작은 동산만큼이나 커져서, 그 가장자리가 별장의 현관에 닿아 이제 막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현관 기둥이 부러지고 지붕이 바위 위에 무너졌다.
"별장이여, 안녕."
마이클즈 교수는 혼자 중얼거렸다. 10년 동안이나 매년 여름 시원하게 보내던 그 고마운 별장과 이런 야릇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 때 장교 하나가 마이클즈 교수 뒤로 가까이 걸어왔다.
"교수님, 오도넬 장군님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고개만 끄덕이고, 장교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닥치는 대로 녹이고 삼키며 자꾸만 커 가는 괴물 바위의 주위 5백 미터 밖에는 철조망이 빙 둘러쳐져 있었고, 군대가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신문기자나 구경꾼들을 멀리 하기 위해서였다.
장교는 교수를 막사로 안내했다.
막사 안에는 코밑 수염을 기르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장한 군인이 책상을 향해 앉아 있었다.
"마이클즈 교수님이시죠? 난 오도넬 중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도넬 중장은 교수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좋으시다면 우리 사단의 고문으로 모셨으면 하는데 의향이 어떠신지요. 이 괴상한 살아 있는 바위를 발견하신 분이 바로 교수님 아닙니까!"
"기꺼이 돕도록 힘써 보지요. 하지만 나는 인류학자입니다. 그러니 이 바위에 관해서 잘 알 만한 전문가는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아닐까요?"
"바로 그 점입니다. 교수님."
오도넬 장군은 찌푸린 얼굴을 더욱 찡그리며 말하였다.
"나는 늘 과학에는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군대는 과학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도저히 전쟁에 이길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고스란히 다 듣다가는 아무 일도 되지 않을 때가 많겠죠. 아무튼 과학자는 색다른 연구 재료가 생기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언제까지나 붙들고 있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나의 임무는 단 1분이라도 더 빨리 저 괴물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물론 나도 그럴 작정이고, 또 부숴 버릴 자신도 있어요.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할 수 있어요!"
오도넬 장군은 흥분하여 주먹으로 책상을 탕탕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그리 간단히 처리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이해력이 뒤지는 학생을 가르치듯이 끈기 있게 차근차근 말했다.
장군의 태도는 조용해졌다.
"그렇겠죠. 그럼 어째서 간단히 처리될 수 없는지를 좀 설명해 주십시오. 나한테는 아무래도 그 점이 이해가 안 가니까요."
"그럼 설명해 드리죠."
마이클즈 교수는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것은 이 지구상의 것이 아닌 - 어떤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에서 생겨난, 에너지 생물이라 할 만한 특별한 생물인 겁니다."
"그 까닭은?"
"즉, 이 생물은 물질을 에너지의 형태로 바꿔서 흡수하여, 몸 안에서 다시 물질로 되돌려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괭이 날이나 지프차나 흙이나, 혹은 내 별장을 녹여서 삼켜 버린 것은 그 때문이죠."
"호, 그렇군요."
"또 이 생물은 에너지를 그대로 빨아들여서. 자기의 몸의 일부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키든지, 기관총 탄환에 맞으면 맞을수록 그것은 고스란히 에너지로서 저 생물에 흡수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강력한 무기로 공격해 보면 어떨까요? 나는 방금 이 언덕 저쪽에 중포부대를 배치해 놓았지요. 2백 밀리 야전 중포의 일제 사격을 퍼붓는다면…"
마이클즈 교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장군께서는 내 말을 잘 이해 못 하시는군요. 아시겠어요? 저 생물은 말하자면 먹보 거머리 같은 거란 말입니다. 저 우주에서 온 거머리에게는 에너지가 아주 맛있는 먹이가 되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강력한 에너지 병기를 써 보았자, 모조리 빨아먹고 마는 겁니다."
"그것 참 고약하군. 그까짓 거머리가!"
장군은 짜증스러운 듯이 내뱉었다.
"그래서 나는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필요하다고 한 겁니다. 모두 서로 협력해서 잘 연구해 보면, 그 어떤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게 아닙니까."
"그런 일을 하고 있을 틈이 없어요."
오도넬 장군은 엄숙한 표정이 되더니 말을 이었다.
"방금 교수께서 그 우주 거머리에게는 에너지가 먹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예, 그랬지요."
"우리들도 음식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잖아요?"
"예, 그런데요…"
"바로 그겁니다!"
오도넬 장군은 또 한번 주먹으로 책상을 탁 쳤다.
"지금부터 중포대에 명령해서, 그 에너지를 싫증이 날 만큼 잔뜩 먹여 줍시다. 그래서 배탈이 나게 말입니다. 그래야만 그 놈을 죽일 수가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마이클즈. 교수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장군은 제멋대로 교수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당신은 과연 훌륭한 과학자입니다. 나의 작전에 과학적인 이론을 뒷받침해 주어 나에게 자신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장군은 마이클즈 교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섰다.
"자, 나갑시다. 우리가 저 우주 거머리한테 인간 힘의 위대함을 보여 주기로 합시다!"
 
원자 폭탄 공격
 
그러나 그 중포부대의 포격은 참으로 엉뚱한 결과로 끝나 버렸다.
언덕 밑에 늘어선 10문의 2백 밀리 중포가 포격을 시작하자, 그 우주 거머리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잇따라 명중되는 포탄의 폭발로, 우주 거머리의 몸뚱이는 반쯤 파묻히고, 그 무시무시한 괴물도 죽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엉뚱한 착각이었다.
우주 거머리는 별안간 지름 3킬로미터나 되게 자란 몸뚱이를 번쩍 일으켜, 흔들흔들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중포 진지를 천천히 덮치려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군인들은 대포고 탄약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그러나 67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전사자도 - 물론 한 사람 남김없이 우주 거머리의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오도넬 장군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했다. 그리고 곧 워싱턴의 연합 참모본부에 원자탄이나 수소 폭탄을 사용하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무렵에는 대통령도 이 문제를 놓고 매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장 원폭이나 수폭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과학자단을 현지로 급히 보냈다.
물리학자․화학자․생물학자, 그 밖의 몇 십 명이나 되는 과학자가 현지로 달려와서 여러 가지로 조사하며 연일 회의를 열고 토론을 했다.
그러나 그런 괴물은 일찍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토론은 1주일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 동안에도 우주 거머리는 주위의 땅을 갉아 삼키며 자꾸자꾸 커 가기만 했다. 덩치가 워낙 커서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았다.
열흘이 되자, 우주 거머리는 지름이 10킬로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로 변했다.
그런데 좀 다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주 거머리의 성장은 차차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몸뚱이는 더 많은 에너지를 얼마든지 필요로 하고 있는데도, 흙을 녹여서는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영양분이 모자랐던 것이다.
14일째가 되자 우주 거머리는 지름 12킬로미터로 커졌으나 영양 부족이 뚜렷이 나타나고, 차차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2~3일만 그대로 둔다면 도리어 부피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름째 되는 날, 마침내 과학자단은 원자 폭탄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은 오도넬 장군에게 즉시 원자 폭탄을 사용할 것을 허가했다. 오도넬 장군은 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며 기뻐했다.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미사일 기지에서, 원폭 미사일을 발사했다.
최초의 원폭 미사일이 우주 거머리의 배에 명중하여 버섯 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을 때, 그 때까지만 해도 에너지가 부족해서 지쳐 있던 우주 거머리는 그 굉장한 원폭 에너지를 잔뜩 빨아먹고 숨을 되돌렸다.
잇따라 네 개의 원폭 미사일이 명중되자 하늘에서 정찰을 했다. 정찰기에 타고 있던 비행사는 한동안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우주 거머리는 불과 수 시간 동안에 지름 1백 20킬로미터를 넘는 무서운 속도로 커져서 산과 골짜기를 타넘고 마을과 도시를 집어삼키며 자꾸자꾸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구가 깨져도
 
"내가 뭐랍디까!"
회의장 책상을 탕탕 치면서 오도넬 장군은 흥분을 참지 못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원자 폭탄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을 때, 당장 허가해 줬던들 이런 꼴이 되고 말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을 늘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으니, 이 지경이 된 것 아닙니까."
오도넬 장군은 책상에 둘러앉아 있는 과학자들과 다른 군인들을 독기어린 눈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번에야말로 간섭을 받지 않겠단 말입니다. 이번에 나는 당장 수소 폭탄 1백 개의 사용 허가를 얻을 작정입니다."
"저런 터무니없는!"
과학자 한 사람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수폭을 그렇게 쓰다가는, 대기 중에 방사능이 퍼져서 온 세계가 전멸해 버려요!"
"어디 그뿐이겠소, 지각(땅껍질)이 갈라지고, 지구가 두 조각이 날지도 몰라요!"
또 한 과학자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오도넬 장군을 그 과학자들을 업신여기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쟁이라는 건 항상 모든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겁내지 않고 용감하게 위험을 물리치는 자에게 승리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젠 아무 의견도 필요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께 허가를 얻을 수 있도록 찬성해 주겠지요?"
오도넬 장군은 눈을 부라렸다.
마이클즈 교수는 회의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과학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 쳐다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이젠 오도넬 장군에게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주 거머리는 지금도 한 시간에 4미터 이상이나 자꾸만 커져 가고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한 달만에 뉴욕 주 전체를 삼킬 것이고, 반 년 만에는 북아메리카를… 그리고 1년이 못 되어 전지구를 통째로 삼켜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수폭을 그런 식으로 함부로 썼다가는 비록 우주 거머리는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지구상에는 방사능이 퍼져서 인류는 원자병 때문에 죽어 버릴 것이다.
혹은 땅껍질에 구멍이 펑 뚫리고, 지진과 홍수로 지구상은 형편없이 파괴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어느 쪽을 택해야 옳을지 아무도 모르게 되 고 말았다.
(우주 거머리는 지금도 갈증이 난 듯이 얼마든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에너지가 있는 곳이라면, 뛰어오르거나 파고 들어가서라도 가까이 가려 하고 있다. 그런 성질을 교묘히 이용해서, 저 우주 거머리를 지구 밖으로 용케 쫓아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마이클즈 교수는 골똘히 생각했다.
(수소 폭탄의 에너지는 우주 거머리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동시에 그것은 우주 거머리에게는, 아주 맛있는 먹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 수소 폭탄을 미끼삼아 우주 거머리를 꾀어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오도넬 장군은 책상 위에 장치된 대통령 전용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면 여러분, 이대로 결정된 걸로 알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소 폭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찬성한 겁니다. 대통령 각하께 이렇게 전화를 드려도 이의가 없겠죠?"
"잠깐만, 장군."
마이클즈 교수가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젠 더 기다릴 수가 없어요."
장군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다이얼을 돌리려 했으나, 마이클즈 교수는 그의 손을 잡고 말렸다.
"잠깐만, 좋은 수가 있어요, 장군. 수소 폭탄을 폭발시키지 않더라도, 우주 거머리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그게 정말입니까?"
오도넬 장군은 의심스런 얼굴로 마이클즈 교수를 바라보았다.
"이건 틀림없을 겁니다. 자, 들어보세요. 이런 방법입니다…"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꾀어내기 작전
 
그로부터 한참 뒤에, 오도넬 장군과 마이클즈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군인과 과학자단은 우주 기지의 컨트롤 센터에 모였다.
마이클즈 교수의 계획은 벌써 일찌감치 이 컨트롤 센터의 컴퓨터에 넣어져서, 많은 기사와 장병들이 분주하게 연락을 취하고 또 계산을 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장군님,"
컨트롤 센터의 기지 사령관이 장군에게 보고했다.
"우주선은 10개 분의 수소폭탄을 싣고 발사대에 대기 중입니다. 명령대로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습니다."
"좋아."
장군은 힐끗 사령관의 얼굴을 보고 나서 눈짓으로 알렸다.
"저쪽 준비도 다 됐겠지?"
"예, 절대로 빈틈없이 해놓았습니다."
"수고했네, 사정관."
오도넬 장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니터 텔레비전을 켜 주게. 앞으로 30초 이내에 우주선을 발사시킨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넓은 컨트롤 센터의 벽 정면에 장치된 큰 텔레비전 스크린이 밝게 비쳤다. 그 스크린에는 우주 기지 저쪽 편에 우뚝 솟은 발사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뚜렷이 보였다. 발사대에는 태양계 탐험용의 대형 우주선이 당당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카운트다운 개시 30초 전, 25초 전, 20초 전, …"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컨트롤 센터 안에서는 본격적으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잘 될까?"
한 과학자가 나직이 소곤거렸다.
"잘 될 거야."
마이클즈 교수가 역시 긴장된 나머지 좀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의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이제 지구는 영원히 마지막이야."
"15초 전, 10초 전, …"
"저 우주선은 무인 조종인가 보지. 원거리 조종으로 용케 놈을 꾀어낼 수 있을까?"
또 한 사람의 다른 과학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중얼거렸다.
"그건, 염려 마셔요. 저희들한테 맡겨 주십시오."
기지 사령관이 자신 있는 듯이 말했다.
"9-8-7-6-5-4-3-2-1-0!"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한 우주선은 꼬리에서 굉장히 거센 흰 불꽃을 내뿜으면서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 하늘 한구석으로 사라져 가 버렸다.
스크린의 화면이 확 바뀌어 우주 공간을 맹렬한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의 모습이 비쳐졌다. 우주 정거장에서 중계되어 오는 것이었다.
우주선은 어느 사이에 우주 거머리가 누워 있는 뉴욕 주의 산맥 지대 상공으로 날아왔다. 그래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째 선회가 시작되었을 때, 지상에서는 거대한 바위산 같은 것이 천천히 하늘로 떠올라 가고 있었다. 그것은 여태까지 지상에서 계속 자라고 있던 우주 거머리였다.
"제대로 되어 가는군! 저놈은 방사성 물질의 꾐에 빠져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군 그래."
과학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다.
"이제부터가 문제야. 실패해선 안 돼!"
장군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컴퓨터의 단추를 눌렀다 껐다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스크린 속의 우주선은 천천히 방향을 바꾸더니, 지구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우주 거머리가 그 뒤를 따라갔다.
우주선은 우주 거머리가 간신히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속도로 점점 지구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우주 거머리도 차차 지구로부터 멀어져 갔다.
"야, 계획이 성공했다! 놈은 우주 공간으로 꾀어 나가고 있군!"
누군가 흥분된 어조로 외쳤다.
마이클즈 교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태양이 잡아먹힌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모든 사람들은 스크린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은 어떤가?"
하고 오도넬 장군이 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무인 우주선과 우주 거머리는 지금 수성의 궤도를 지나서 똑바로 태양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됐구나!"
장군은 버릇처럼 되어 있는 깨진 종소리 같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얼마 안 가서, 우주 거머리는 태양에 충돌하여 녹아 버리겠구나."
"예 , 그렇습니다."
기지 사령관이 대답했다.
"속도는 계산보다는 다소 느린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 사흘하고도 10시간 30분만에는 태양 속에 뛰어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만사는 그것으로 골나게 됩니다."
"그것 참, 잘 되어 가는군."
오도넬 장군은 과학자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러분, 축배를 듭시다."
병사들이 유리컵과 술을 가지고 왔다. 모든 사람 앞에 술잔이 놓이고 술이 가득히 따라지자, 장군은 몸을 뒤로 젖혀 의젓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들은 일치 단결하여 저 우주에서 온 괴물을 물리쳤습니다. 여기 계시는 마이클즈 교수님을 비롯해서 여러분이 협력해 주신 덕분에, 미국 육군은 다시금,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대통령 각하께 약속드린 대로 저 괴물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장군은 잔을 높이 들었다. 모두 따라서 잔을 들었다. 그러나 술잔을 옆에 밀어 놓고, 책상 위에서 무슨 계산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이클즈 교수였다.
"마이클즈 교수님, 어떻게 된 겁니까? 함께 건배하시지 않겠습니까?"
장군이 재촉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은 새파래졌다.
"이거 큰일났어요."
"뭐가 큰일인가요?"
"속도가 너무 늦어요."
"하지만, 다소 속도가 늦더라도 결국은 태양에…"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날아간다면 그 놈이 태양 에너지를 빨아들여 자꾸자꾸 커져서, 태양에 도착할 무렵에는, 태양과 거의 같은 정도의 크기로 되어 태양을 잡아먹고 말게 됩니다."
일동은 입을 딱 벌리고 마이클즈 교수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다음 순간 한 과학자가 소리쳤다.
"우주선의 진로를 바꾸면 어떨까요? 태양을 빗나가게 해서, 태양계 밖으로 꾀어내지 않으면 안 될 텐데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우주 괴물을 파괴하지는 못하잖아요…"
오도넬 장군이 입을 뾰족 내밀며 말했다.
"아니, 파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장군님.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면, 우주 거머리는 점점 에너지를 잃어서 짜부라들게 되지요."
하고, 마이클즈 교수가 옆에서 설명을 보탰다.
"그래서, 맨 처음에 내 별장 마당에 떨어졌을 때처럼 아주 작은 바윗돌만큼 되어 버리지요. 그렇게 되면, 우주 거머리도 완전히 해를 끼치지 않게 되죠. 어쨌든 지금 당장 진로를 바꾸지 않으면 우주 거머리의 에너지는 점점 커져서 뒤에 가서는 진로를 바꿀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오도넬 장군은 이런 설명을 듣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불만스러운 듯이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문득 어떤 일이 생각난 듯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지 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좋아, 그럼 진로를 바꾸도록 하게!"
장군의 명령이 전해지자, 컴퓨터로 전파 신호를 무인 우주선에 보냈다.
무인 우주선은 즉시 진로를 바꿨다.
우주 거머리는 잠깐 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똑바로 앞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뜨겁고도 맛있는 에너지 덩어리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도 까마득한 먼 곳에 있었다. 그것에 비해서 방사성 물질의 맛있는 에너지는 바로 앞을 내달리고 있다.
우주 거머리는 역시 먼 곳의 먹이보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가까운 먹이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우주선 뒤를 따랐다.
그 때, 스크린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스크린의 화면 위에서, 작게 빛나는 점 한 개와, 크게 빛나는 점 한 개가 지금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했군…"
"그렇지만, 이젠 안심인걸. 머지않아 저놈은 태양계를 벗어나게 돼. 그렇게 되면 자꾸자꾸 에너지를 잃게 되고 아무 해가 없는 바윗돌로 되고 마는 거야."
모든 사람의 얼굴에 겨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제 다시 축배를 듭시다. "
이번에는 마이클즈 교수도 기꺼이 축배를 높이 치켜들었다.
 
우주 속의 불꽃
 
세계는 이 뉴스를 듣고, 축제 기분으로 들떴다. 세계 모든 곳의 도시나 농촌, 관공서, 회사, 가정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합니다!"
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지구의 평화를 흐뭇하게 여겼다. 세계 각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날마다, 시간마다, 우주 거머리의 행방을 뒤쫓으며 소식을 전했다.
우주 거머리는 시시각각으로 지구에서, 그리고 태양계에서 멀어져 갔다.
그럭저럭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1주일이 지났다. 우주 거머리는 이제 벌써 태양계를 벗어나 아득히 먼 별들이 총총한 끝없는 우주 공간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열흘째 되는 날, 마이클즈 교수는 오도넬 장군의 부름을 받아 또 다시 우주 기지로 갔다. 컨트롤 센터로 갔더니, 장군은 싱글벙글하면서 교수를 맞았다."야아, 마이클즈 교수님, 참 잘 오셨습니다."
"무슨 용건이 라도…"
"예, 꼭 좀 봐 주셔야 할 것이 있어서요."
장군은 텔레비전 스크린을 켜게 했다. 화면에는 작은 점 두 개만이 외로이 비쳐져 있었다. 우주 거머리는 이제 완전히 짜부라들어서 우주선과 거의 비슷한 크기로 되어 있었다.
"거리도 벌써 5백억 킬로미터 이상이나 됩니다. 교수님, 이젠 안심할 수 있겠죠?"
마이클즈 교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터져 나왔다. 장군은 아직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젠 절대 안전합니다. 조금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별안간 컴퓨터 담당자 쪽을 보았다.
"이제 됐어. 아까 내 명령대로 해."
컴퓨터 담당 기사가 얼른 대답을 하더니 계기반의 단추를 조작했다. 그러자 스크린에 비쳤던 점 두 개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좁아지기 시작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깜짝 놀랐다.
"장군, 이거 왜 그러시오?"
"나는 저 우주 거머리를 반드시 파괴해 버리겠다고 대통령 각하께 약속을 했소. 나는 여태까지 절대로 약속을 어긴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러니 나는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겁니다. 우주선에 실어 둔 수소 폭탄은 우주 거머리와 부딪침과 동시에 폭발하겠죠. 그래서 우주 거머리 놈을 아주 박살을 내버릴 작정이오!"
"아, 안 되요, 장군."
마이클즈 교수는 크게 외쳤다.
그러나 때는 벌써 늦었다.
마침 그 순간, 두 개의 점은 딱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눈 앞을 캄캄하게 만드는 큰 폭발이 스크린을 가득히 메운 것이다.
"야, 성공이다!"
오도넬 장군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외쳤다.
"나는 미국 군인답게 드디어 약속은 지켰소. 저 괘씸한 우주 거머리를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소!"
텔레비전 스크린은 곧 어두워졌다. 폭발이 끝난 것이다. 스크린에는 이제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교수님. 이젠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겠죠?"
"그래, 맞았소.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소."
마이클즈 교수는 음산하고 컴컴한 지옥 밑바닥에서 나는 소리처럼 대답했다.
 
태양계를 멀리 떨어진 캄캄하고 차디찬 우주 공간에서 몇 만, 몇 십만이나 되는 작은 조각들로 부서진 우주 거머리는 무서운 속도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날아가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는 지금은 보통과 같은 작은 돌멩이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중의 몇천, 몇만 개는 태양 가까이로 날아간다. 가까이 갈수록 태양 에너지를 빨아들이고는 자꾸만 커져 가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날, 마이클즈 교수의 별장 마당에 떨어진 것만큼의 크기로 자라서 다시 지구로 떨어질 것이다.
단, 이번에는 한 개뿐만 아니라, 몇천, 몇만 개가 떼를 지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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