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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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2-7. ‘죽음’에 대한 명상
2013년 02월 13일 11시 18분  조회:5472  추천:19  작성자: 김문학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7. ‘죽음’에 대한 명상

-----나의 死生觀

1.
삶이 무어냐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어서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무어냐고 물으면 나는 더욱 모른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그것은 사랑과 미움 같이 우리 인간이 항구히 직면하고 있는 테제이며 숙명이다. 죽음과 삶만큼 인간을 희로애락으로 괴롭히는 게 더 있을까?
살만큼 살았으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삶에 대해 이해하고 터득 할 것이며, 나름대로의 “인생관”도 정비될 것이다.
기실 나는 삶에 대해서 특별히 목적이나 의의 같은 따위가 있는가하면 회의적이다. 우연히 이 땅위에 태어났으며, 왜 태어났냐 해도 그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 사느냐 하면 태어났으니까 산다는 것뿐인가 한다.
인간이 사는 데는 목적이기 보다는 방식이라고 인식한다. 왜냐면 목적은 달라도 살아가는 방식은 생물, 동물학적으로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 같이 의,식,주, 행의 방식은 대체로 큰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이라면 삶의 방식의 질(質)일 뿐이다. 강자와 약자, 부유한자와 빈곤한자, 권력자와 비권력자, 남자와 여자, 지식인과 무식자..... 뭐 이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억만장자라 해도 하루 5식 10식을 먹는 것도 아니며, 돈을 베게로 삼고 사후에도 관속에 넣고 가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굳이 인생관, 삶의 의의가 있다고 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 한다. 일 할 수 있는 자유, 적당한 물질적생활 이것이면 너무 충분하다.

2.
“인생관”이란 말은 있어도 “人死觀”이란 말은 없다. 우리는, 특히 동양인은 너무 사는 데는 치중하여 열중하고 삶의 現世 즉 “지금, 이것 여기”에만 집착하는 인생관으로 편향 돼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거의 현세를 살아가는 방식, 기술에 그친 교시다. 그래서 그의 제자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공자는 화를 냈다.
“우리가 현세의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하여 죽음을 알려고 하느냐?” 라고 그는 아예 제자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중국 고려의 유교나, 도교의 원리는 형태는 달라보여도 거의 인간의 현세, 지금 인생을 살아가고 즐기는, 그리고 장수, 쾌락의 방식과 미학에 관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엘리트 지식인의 삶을 출세(出世)해서는 유교적 방식을, 입세(入世)해서는 도교의 도술을 실천하는 두 가지로 삶을 산다.
대중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죽음도 나쁜 삶보다 못하다(好死不如 賴活)” 그러니 살아야 한다. 아무리 곤란해도 살아 뻐쳐야 한다”는 것이 서민들의 인생관이다.
“삶은 행복하고 아름답다”는 인생가치관일 뿐, 죽음은 무조건 마이너스적, 惡으로 취급한다. 특히 유교적 현세가치관에 침혹된 우리는 自殺을 기피하는 성향이 강하며, 부모 보다 미리 떠난 자살 따위는 지탄받을 不孝로 간주한다. 따라서 현세의 삶으로서 대를 잇지 못한 무후(無後)야 말로 최대의 不孝가 된다.
아무튼 이 현세를 살아가는 삶만이 최고의 행복이다. 아니 삶 자체가 전부이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대극에 있는 것, 삶의 마감, 종식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은 美化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세속에서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3.
다만 죽음의 미화되는 경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모종의 일데올로기, 정권체제를 위한 프로패건더로 이용되는 때 만이다.
그것은 인간의 목숨을 초개같이 취급하는 사상이다. 바로 머지않은 文化革命때, 매우 유명한 청년영웅 김훈화(金訓華)의 佳話가 있었다. 그가 왜 목숨을 잃었는가? 공공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서슴없이 생명을 바쳤다고 하는데, 그 재산이라야 홍수에 떠내려가는 하우스 비닐막 한 장이었다.
죽은 본인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고작 하여 비닐막 한 장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그 자체가 비극이다. 비닐막 한장이 생명의 가치와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문제 삼는 것은 그의 죽음을 두고 부풀려서 시대의 본보기 “영웅”으로 만드는 국가적 기구의 프로퍼건다이다.
인명을 초개시하는 국가의 선전, 죽음을 현 체제의 미화, 복종에 이용하는 생명관, 이러한 “인명경시” “체제중시”의 사관(死觀)은 바로 비극을 낳는 장본인이 아닐까.
중국에는 이러한 프러퍼건다에 의해 작위된 영웅이 또 얼마나 많았던가! 초유록, 유문학, 문합, 왕걸.... 등등. 유호란의 생각난다. 모택동은 작두에 목이 날아난 그녀의 죽음을 두고 “위대한 삶, 영광의 죽음”이라고 휘호했다.
국가, 체제, 정권 모든 국가적 이후에 죽음도 불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세뇌교육이 유별나게 강조 되어 왔다. 옛 소련과 현 북한에서도 지금 이런 인명경시의 “영웅”을 간단없이 만들어 내고 있으니 인간의 희극이지 비극인지?

모택동이 자주 인용하던 사마천 발명의 사생관을 벌어 혁명을 위하여 죽으면 “태산보다 무겁고, 연하지 않으면 홍모나 가볍다”고 한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과연 그럴싸한 명구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생관은 진실이 아니라 다만 관념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인다. 혁명, 공산주의 사업자체도 “가설”이거니와, 진짜 죽음이 태산보다 무거운가 하면 그것은 과학이 아닌 것은 차치하고서라고 관념적 가설이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의식에 불과하다. 포퍼가 갈파한 것처럼, 공산주의사상이 과학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설”, “강박관념”을 뒤집어 보면 裏面에는 수많은 “호위”이고 “인명경시”의 기만적 레토릭이 반거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다.

유년시절에 이런 프로패건더에 매혹 된 나는 한때, 고추밭에서 고추도둑을 잡다가 그 악한 도둑에게 피살된 유문학(劉文學)이란 同名의 소년영웅을 선망한 적이 있었다. 고추 몇 개 때문에 아까운 생명을 끊인 그, 국가의 화려한 “세뇌교육”에 넘어간 소년의 비극이 아닐까!

4.
결국 죽음마저도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현실 이익을 위하여 그 가치를 부여해지는 사실, 모종의 국체, 집단사회의 이념에 이용, 프로패건더의 소재로 전락되면 그 죽음은 무엇이 될까?
죽음에 아무리 인공적, 이념적 의의나 가치를 불어 넣어도 죽음은 그냥 죽음 일뿐이다.
하물며 삶과 함께 죽음까지도 어떤 이념에 이용당하는 그것이야 말로 직언하여 인간의 일대 비극일 것이다.
푸코의 말과 같이 살아서 인간 개인의 신체가 국가 지구에 통제 당하는 것도 비운이나, 죽어서 죽음까지도 국가의 통제에 이용당하는 것은 더구나 큰 비운이 아닐까!
옛날 “대일본제국”이 국민을 전쟁의 희생으로 내몰았던 역사체험은 결국 그것을 “대일본 死國”으로 변형시켰다. 마찬가지로 국가 이념에 이용당해 해방 후에도 수많은 국민이 죽은 대한민국 역시 좌파 지식인들의 지적대로 “죽음의 무덤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그리고 신중국의 많은 국민이 내부의 내홍에서 계급투쟁의 이념으로 수천만 생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 현대사는 모택동의 어록에 등장하는 “수천만의 선열의 피”라는 말과 같이 피로 도배 돼 있다. 죽음을 강요하는 허위 장치로 이 나라는 많은 “영웅”을 만들어 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말과 같이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불행이다.” 불행이라 하면 나는 일개의 죽음까지도 국가가 통제, 필요 하는 그것이 더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5.
삶에도 이렇다 할 의의가 없는데 죽음에 무순 대단한 의의가 있을까? 개인의 삶과 함께 죽음도 그냥 죽음 자체로 내두는 사회야 말로 정녕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인간세상일 것이다.
나에게 생사관이란 게 있다면, 나는 삶과 죽음은 흑과 백처럼 준별되는 二分法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 돼 있다고 믿는다. 삶의 延長이 곧 죽음인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말로 “삶”보다 한 글자 더 많다. 한자어로 표현해도 生과 死는 다 같은 한글자로 똑같은 길이이며 박자이다. 삶의 길이와 같이 죽음은 같이 길 것이며, 어쩌면 보이는 삶보다 안 보이는 죽음의 세계가 훨씬 추측할 길 없이 길고 또 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흔히 유심론자 아니면 유물론자로 인간자체를 규정, 구별하기를 즐긴다. 그렇다면 나는 유심론자도 유물론자도 아니다. 양자의 경계에서 오가는 세계관, 아니 우주관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인간 자신의 사상과 모든 자유를 강제로 구속하는 이데올로기, 이념의 속박에서 해탈해야 한다.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 넓고 매력적인 미지의 사상(事象)으로 충만 되어 있다.
이 10년래 나는 우주학 내지 천문학이란 학문에 도취되었다. 우주를 아는 것이란 지구를 넘어 우주를 통해 우리 자신의 앎으로 이어진다. 공자님의 말씀한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아야 하나?”란 난폭한 현세욕의 중국인적인 인생관을 우주학의 지(知)적 세계에서 볼 때 얼마나 옹졸한 것인가 알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하다못해 삶을 위해 먹는 쌀 한 알에도 무한한 우주와 연결돼 있지 않은가! 이를 정성스럽게 가꾼 농군의 농사일, 씨를 수용하고 키운 땅, 그리고 물, 햇빛, 공기.... 이 쌀알을 먹어서 살아가는 자기의 생명, 육신의 존재는 집이 있고 대지가 있고 지구가 있고 태양이 있고 은하계가 있고 많은 행성과 항성, 혹성이 있다.
137억 년 전의 빅뱅에서 탄생 된 우주가 이후 부단히 팽창을 거듭하고 매초 30만Km의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해도 탈출할 수 없는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주전체에서 별 등 눈에 보이는 물질은 겨우 4%에 불과하여, 보이지 않는 96%에 대해서도, 비록 보이는 물질에 대해서라도 그 정체를 아는 것 역시 근소(僅少)에 지나지 않는다.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96%중에 23%가 중력(重力)을 일으키는 “암흑물질”이라 칭하는 정체불명의 물질이라고 한다. 나머지 73%기 우주를 팽창시키는 “암흑에네르기”, 미지의 열량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세계를 3차원이라 보는데, 우주학에서는 진짜 시공은 4차원이 아니라, “양자론 차원(量子論的次元)”에서 일어나는 초대칭성 입자(超對称性粒子)가 존재하여, 이 가벼운 초대칭성입자가 그 “암흑물질”의 유력후보의 하나라 한다.
따라서 시공은 4차원을 넘어 5차원, 6차원 아니 진짜 시공은 10차원까지 있다고 한다.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4차원시공” 마저 어려운데, 그보다 6차원이나 많은 것이니 머리가 아찔해져도 모를 상상의 범위를 절하나는 시공의 세계이다.
5차원이상의 공간에서 운동하는 입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에네르기라고 한다. 그러니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인간의 5관 감각을 훨씬 초월한 별(別)세계이다.

6.
내가 우주의 5차원 6차원, 10차원의 현혹 스러운 미지의 화제를 꺼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죽음과 직결된 차원의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세계적인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그의 명작 <<존재와 시간>>에서 제시한 적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마치 코끼리의 피부의 주름 안에 기생하는 기생충처럼 그 벌레들이 보이는 세계는 주름살이 전부이며 거대한 코끼리의 형태전체를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도 기생충마냥 5관으로 보이는 세계만 “세계”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인간은 필경 기생충에 아니기에 스스로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 우주를 날려고 하는 구지욕으로 “세계내 존재” 범위를 탈출하여 학문적으로 종교적으로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 세계적으로 연구가 가속되고 있는 임사체험(臨死体驗)의 연구, 최민법 연구로 죽음을 체험하는 심리학적 분석으로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사후의 세계에는 인체를 떠난 영혼이 존재 한다는 보고가 무수히도 있다. 이를테면 죽은 뒤 인간은 육체에서 이탈하여 부유(浮遊)하여 둥둥 떠 있으며, 어떤 광(빛)에 의해 (물론 태양이나 전등광 같은 빛이 아니다.) 유혹되기도 하면서 정신, 의식체로 되어 천정에서 자신의 시신을 바라본다고 한다.
실제로 나는 병원에서 죽었다 깨어난 일본인의 체험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부유한 자신의 의식이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결국 빛의 세계에서 “아직 오지 마세요, 어서 돌아가세요” 하는 가르침대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죽음에서 깨어났다고 술회한다.
occult, 즉 신비한 초자연사상(事象)에 눈을 뜨고 4차원 6차원의 세계를 안다는 초능력자라 칭하는 인간도 있다. 순식간에 자신의 혼(정신)이 육체에서 이탈해 오사카 동경의 거리를 갔다 오는 초능력자도 있다고 한다. 한 의학교수가 나에게 내 전세(前世)가 누구인지 안다고도 했다. 그는 나의 영혼은 김시습이라고 했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니 기쁘지만 또 100%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의식 수준은 아직 인간의 의식을 넘은 5차원 6차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 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의 의식 수준을 넘은 고수준의 차원에서 직접적 간섭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 본인 역시 실험물리학자의 시조의 한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대물리학자 뉴톤도 초자연사상에 흥미를 갖고 만년에는 그 영역에 연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노벨생리학 ㆍ의학상(1912년) 수상자 아렉시스 가레르는 영혼을 갖춘 인간을 목격했으며 인간의 “세계내존재”에서 탈출 할 수 있음을 실중한 과학자, 의사이기도 하다.

7.
요컨대 “인간은 물질로서의 자신을 초월하는 정신적 존재이다” 라는 근년의 심리학, 인간학 가설에 대해 나는 차츰 믿게 되었다. 비록 신비체험은 없지만, 잠재의식은 체험하곤 한다. 일테면 “오늘 혹시 내가 찾는 고서가 그 책방에 가면 있겠지”하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헌책서점에 가보면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은 듯 나를 보고 미소하고 있는 그책. 옛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을 만난 기쁜 기분이다.
이때의 그 감은 전세의 혼, 또는 정신이 먼저 그 고서점에 가서 보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해석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영적세계, 초자연능력의 세계에서 육체의 사라짐(죽음)에 따라 정신(혼)이 인른 차원의 세계로 이행 하여 생(삶)이 연속한다고 한다. 임사체험을 겪은 사람이나 초능력자는 이것을 잘 안다고 한다. 즉 죽음-삶-앎의 연결고리인 듯 하다.
나의 한 80 넘은 독자는 자신은 현재 노후이지만, 연금도, 저축도 보험도 일절 없이 그 어떤 대책도 구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고 한다. 지극히 비상식적인 삶을 해왔지만,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그는 웃으면서 답한다. 젊었을 적에 노후의 그 다음만 걱정해왔기 때문에 그 근심을 해결하고 나니 노후의 근심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그 뜻을 몰라서 내가 또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구극의 진실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노후의 근심을 하는데, 노후의 그 다음은 근심 하지 않는다. 초 상식적 진리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니고 있다. 육체는 생명이지만 정신은 아니다. 의식생명이다. 인간은 정신생명이다. 육체는 늙지만 정신은 늙지도 죽지도 안한다. 따라서 나 자신을 무한한 것이며, 무한히 젊다는 것이 곧 해결이다”
“육체는 죽어도 정신을 죽지 아니 한다”가 그 노인의 지론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가 참 부러웠다. 인간의 “죽음”을 일찍 알아버린 “앎”이 있기에 그에게는 “죽음”도 “삶”이었던 것이다.

8.
내가 “죽음”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지하게 사고 한 것은 어머님의 갑작스러운 타계로부터였다. 2008년 4월 14일 심야 2시경, 심양에서 동생이 국제전화로 부고를 전했다.
찰라 나는 머릿속이 온통 흰 색으로 공백을 이룬 자신의 의식을 의식 했다. 그 다음 한참 지나자 집의 천정이 무너지듯 내 머리를 압박해왔다. 시야도 좁아지고 집안이 흰 거대한 암석판 같이 지지 눌렀다.
전화를 놓고 한 식경 지나서야 나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3일 전만해도 입원중인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퇴원하시면 봄에 일본에 오시겠다고 하시던 어머니시다.
부랴부랴 귀국한 내가 어머님의 영결식에서 본 어머님의 용안은 마치 평온하게 깊은 잠에 드신 것만 같았다. 영면(永眠)이란 단어는 고인의 잠든 것과 같은 모습에서 생긴 말일 것이다 며칠 전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날 12시경에 취침한 나는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얘야, 내가 옛날 널 임신할 때 꾼 태몽이 있잖아. 그때 내가 두레밖에 든 큰 뱀을 버리고 왔길래 너와 멀리 떨어져 사누나. 나 멀리 길 떠나야 한다” 라고 내 손을 잡고 말하신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아니”, 여기가 좋은데 갑자기 어디로 떠나신다고 그러세요?“
“아니다, 내가 꼭 갈 때가 있단다. 나 먼저 가니 몸조심하고 잘 살아야 한다.....”
아침에 깨어난 나는 꿈에서 어머님의 “작별”이 심상치 않다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집으로 국제전화를 걸어 어머님과 통화를 하고 나서야 다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죽음”을 타곳으로 가서 산다는 “삶”으로 이미 나에게 고백했던 셈이다.
슬프다는 말이 너무 무력한 만큼, 깊은 슬픔에 빠진 나는 일본에 돌아온 뒤에도 일 년 동안은 거의 3일이 멀다하게 홀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 뒤 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에 대해 늘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육체의 사라짐은 어머님에 대한 무한한 상념으로 연결해 주었다. 그 뒤 나는 왠지 늘 어머님이 영혼이 늘 나의 주위에 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에네르기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이리하여 나는 슬픔의 슬럼프에서 이탈하여, 어머니와 항상 같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늘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어머니는 “죽음”이라는 육신의 사라짐을 통해 영원한 정신의 삶을 지속해가시고 있는 것이다.

나는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왜냐면 살아계시는 분을 위해 제사 따위를 지낸다는 것을 불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육체가 사라지면 아마 혼의 에네르기로 되어 어머니와 같이 살 것이다.
그리고 이상 선배, 이광수선생, 김시습 할아버님과도 만나야겠다.

9.
누구는 영원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시신을 수정관에 넣어 영생을 시도한다고 하는데, 참 어리석은 골계의 풍경이 아닌가!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죽음”이라면 그까짓 육체가 뭐 길래 썩은 시체를 그대로 두고 우러러 첨앙(瞻仰)한단 말인가?
결국은 영원한 육체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유물론자들의 썩은 발상방법엔 정년함구하게 된다. 죽은 시체가, 영혼이 다 날아간 시체를 “영생물멸”연하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에라, 그런데 신경 쓰기보단 그냥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명상하는 편이 퍽 즐겁다.
“소장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생떼벡페리의 <<별의 왕자님>>은 별나라에서 온 작은 왕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잃어버린 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서양의 종교는 몰론 말 할 나위도 없으나, 서양의 회화에도 언제나 “죽음”의 테마가 대거 등장한다. 일테면 1517년에 한스 바르동의 명작 <<죽음과 소녀>>, 사신(死神 )과 쾌락의 원천인 소녀가 같이 있는 그림, 백골의 사신이 아릿다운 나체의 소녀에게 키스를 하는 광경에는 죽음에 대한 동경이 깔려있다. “삶과 죽음은 표리의 일체이다”라는 메시지를 발하여 오늘까지 충격을 주고 있다. “즉음을 잊지마라”는 서양의 “죽음의 영생” 테제는 미술, 문학, 음악예술에 관통한 굵은 주제이기도 하다. 죽음이야말로 삶을 빛나게 한다는 신조에서 서양인들은 죽음을 삶의 연쇄로 보았다는 의식을 읽을 수 있다.

동양의 불교에서도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프로세스에 있는 하나의 통과점이라고 간주한다. 무식한 어머니도 빌기도 하셨다. “죽어서 극락정토에 가서 너희들 행복을 빌겠다” 라고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만 68세에 타계 하신 어머님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않고 더 좋은 하늘나라로 가서 자식들을 위해 정성을 다 할 것이라고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셨으니 고맙기만 하다.

10.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작품엔 항상 “죽음”의 향기가 풍긴다. 왜 그가 세계적으로 그렇게 애독 되냐고 하면 그의 작품에는 국경을 넘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근원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치다(內田樹)교수의 말에 따르면, 무라카미는 인간의 창조족인 근원인 어둠의 장소에 추를 곧추 내리 드리우고, 그 속에 있는 현실세계가 아닌 이계(異界) 즉 “죽음”을 깊숙이 조명하고 자 한다. “현실세계”와 “현실이 아닌 세계”가 교착하는 문학을 통해 죽음에 포위되어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해 사고를 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에서 무라카미를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 그 일부분으로서 존재 한다”는 메시지를 발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통해 언어, 국경, 종교를 넘어 세계 만민이 공유하는 상징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또 하나의 참신한 모델을 고안하고 있으므로 나는 몇 년 안으로 그가 기필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리라 확신한다.

11.
죽음은 무엇인가? 해도 나는 확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삶은 죽음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죽음은 도착점이 아니라 인간의 또 하나의 생의 스타크지점 이라는 것.
인간은 부모님의 선택에 의해 우연히 태어나고, 우연이란 것들이 집합하여 삶을 살고 어느 날 우연히 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법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신”이라는 가설에 나는 매력을 느낀다. 그러므로 유물질적론적인 물질 편향의 인생론보다도 나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찾는데서 더 보람을 느낀다.
따라서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자신의 삶의 종식이 아니라 정신적 자기가 항원히 존재 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 삶에서 나는 내가 살았고 웃었고 울었다는 표식을 남기고저 한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 자식인 나의 글쓰기로 얻어지는 책들이다.
나는 육신은 죽지만 책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욕심 하나 더 있다. 저 세상에 가서도 될 수 있다면 책을 많이 쓰고 싶다.
욕심이라면 공자님과 석가님과 예수님 더불어 노자, 장자와 만나 논쟁을 하고 싶다.
또한 플라톤, 칸트, 세익스피어, 괴테를 만나고 싶고 김시습, 이광수, 이상을 뵙고 그들의 신변에서 살고 싶다.
결국 나는 죽음을 위해서 삶을 행하고 있는 것 같다. 다 죽음을 위한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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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5-3. 내 손이 말 한다 2013-08-11 6 5470
33 5-2.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 2013-07-28 28 5932
32 5-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2013-07-21 26 6313
31 4-6. 한국인과 조선족의 문화갈등 해결 방법 2013-07-14 19 6462
30 4-5.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2013-07-03 37 5815
29 4-4.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2013-06-26 43 5540
28 4-3. 魯迅과 李光洙 2013-06-17 20 5571
27 4-2. 백년의 눈물 2013-06-05 10 6806
26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하) 2013-05-27 15 5351
25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중) 2013-05-19 11 5106
24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상) 2013-05-11 19 5394
23 3-7. 100년전 서양은 한국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2013-05-06 21 5468
22 3-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2013-04-29 12 5483
21 3-5. 한중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2013-04-20 10 5301
20 3-4 검디검게 먹칠한 조선 지도 2013-04-02 13 5735
19 3-3.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 2013-03-26 20 5287
18 3-2. 조선말기 사회 진상은 어떠했는가 2013-03-18 16 5129
17 3-1. 역사란 何오 2013-03-05 24 5801
16 2-7. ‘죽음’에 대한 명상 2013-02-13 19 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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