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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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2013년 07월 21일 16시 23분  조회:6320  추천:26  작성자: 김문학

제5장 월경ㆍ자유ㆍ비판

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아침 식사는 북경의 레스토랑에서 우롱차에다 기름 빵을 먹는다. 그리고 정오에는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서울 시내로 달려가서 삼계탕에 들큰한 동동주 한 사발을, 저녁은 어느새 도쿄에 날아와서 신선한 생선회에 기린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런 3국의 동시 체험이 나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된 지도 오래다. 도쿄의 아담한 선술집에 홀로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어떤 기묘한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국민일까 하는 자문자답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1998년 6월 나의 장남 철야가 태어났을 때 중국에 계신 어머님을 초청하여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3개월의 간의 일본 체류 기간에 어머니께서 놀라시며 몇 번이고 되풀이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기만하다.

“얘야, 넌 꿈속에서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하는 거냐?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지껄이지, 또 이따금 우리말을 하다가도 일본말로 중얼거리기도 하니 원,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어머니와 함께 나도 무심결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자신이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꿈에서까지 세 나라 말을 쓰다 보니 사람까지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게 도대체 뭔가?

나에게는 이런 ‘혼란상태’가 오히려 하나의 낙이다. 나는 스스로 자신을 일종의 ‘분열 인간’이라고 부른다. 내가 감히 ‘분열인간’이라고 자랑삼아 큰소리칠 수 있는 까닭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 항로와 밀착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국어와 중국어을 동시에 구사하며 2중 언어의 문화생활을 해온 내가 20대가 끝나는 무렵에 일본으로 유학 와 일본 문화를 피부로 느끼며 생활한지도 벌써 20년이 된다. 그리고 또 모국인 한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모국 문화를 거듭거듭 체험해 왔다.

게다가 해마다 중국에는 두세 번꼴로 돌아가서 현지 생활을 느끼고 온다.

내 가슴속에는 중국 문화와 일본 문화, 그리고 한국 문화라는 동양 세 나라의 문화에다 조선족 문화까지 비빔밥같이 온통 엉키고 뒤섞여 내 입에는 가장 맛있는 문화 비빔밥이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고 복합화 시키는 체험 없이 세계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지향하는 것은 허위적인 슬로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늘 자신을 가리켜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벌써 50여년 전에 미국의 사회학자 E, V. 스통키스가 그의 저서 에서 경계인(境界人)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경계인이라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복수의 집단에 소속되긴 하나 어느 한 집단에도 완전히 빠져 버리지 않으며 그 귀속이 분명하지 않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나라와 저 나라의 경계선, 이 사회와 저 사회의 경계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최근 문화인류학에서 빈번하게 제기되는 디아스포라가 이에 해당된다. 원래 유태인이 이산이라는 뜻에서 온 것인데, 자기 문화에도 이문화에도 소속되지 않고 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면서 그것을 창조의 에너지로 삼는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동과 이산을 뜻하던 네거티브 개념이 국제화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없이 소중한 포지티브 개념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타향에서 사는 사람, 월경 인간은 어둡고 슬프고 가련하다는 이미지가 다분히 농후하며, 향수에 젖어 망향의 안타까움으로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가는 존재쯤으로 이해하고 있다. 가요만 보아도 타향살이와 고향 떠나 사는 사람의 슬픔과 망향의 절절한 감정을 담은 노래가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문학 작품에도 이 같은 테마의 작품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늘 보아 오던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는 타향에서 온 경계 인간이나 월경 인간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짙다.

내 친구 중에 해외에서 장기간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한국에 간 중국인 가족이 있는데, 아들이 중학교에서 한국 아이들에게 심한 차별을 받는다고 하소연을 했다. 한국어를 잘 모른다고 욕을 하고 따돌려 아들이 등교 공포증에 걸렸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내에 살고 있는 이국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중국 교포에 대한 멸시와 학대는 한두 마디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선족은 한국에서는 경계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껏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국 문화와 중국말에 익숙해 살다가 말로만 들어서 알고 있던 한국 문화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심각한 갭이 생기며 커다란 컬쳐 쇼크를 받는다.

그러나 월경 인간을 못마땅하게 보고 차별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엾기만 하다. 월경 인간은 사실 네커티브한 이미지와는 달리 포지티브하게 문화 모험을 감행하는 시대의 용사라고 할 수 있다. 둘 또는 그 이상 복수의 문화와 사회에 소속하면서 그 모두와 거리를 둔 채 여러 개의 가치관을 갖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의 이들에게는 있다.

나 같은 월경 인간의 눈에는 오히려 하나의 문화에 푹 빠져 그 테두리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같이 하나의 사고밖에 할 수 없는 단일 문화의 인간이 안 되어 보인다. 특히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단일 민족과 단일 문화를 긍지로 삼고 있는 한국인의 단일한 발상, 단일한 스케일, 단일한 스타일은 너무 편협하고 근시안적이고 촌스럽기만 하다. 늘 이런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해 온 한국인은 여기에 푹 절어 해외에 나가지 않고는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한국에서는 세계화 국제화를 소리 높이 외치고 있는데, ‘국제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당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우리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어 그 틀을 깨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인에게 한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깨지는 날 국제화도 성큼 다가설 테지만 지금의 민족의식, 나라의식, 우리나라 최고라는 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터이다. 한국의 겉모습을 보면 지극히 국제적 색체를 띠고 있지만, 그 내실은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다. 겉치레만 국제화지 그 껍질을 벗기면 온통 국수주의뿐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특히 과격하다는 정평이 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국수주의자, 보수주의자가 많기 때문이다. 편협한 나라 사랑, 애국심, 우리나라최고라는 생각에서 조금이라도 깨어나 광대한 세계 지향의 안목을 키우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내가 말하는 월경 인간은 꼭 해외에 사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월경 인간에는 경계를 넘는다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국경은 지구위에 이데올로기나 체제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계선에 불과하다. 사실 이런 경계선은 국경 말고도 지구 전체에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지방별, 직업별, 성별, 학력별, 연령별, 계급별, 민족별로 수많은 경계선이 한국 사회에 엄연히 살아 있다.

이런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인간이 되면 그 역시 월경 인간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한국 남자들이 가장 꺼리는 집안일을 하며 여자로, 주부로 변신해 주부의 경계선을 넘어본다. 남녀 차별의 틀을 깨보라. 그럼 당신도 당당한 주부(主夫)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경상도, 전라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어울려서 지내보라. 지역 경계선을 넘은 월경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모든 차별과 고정 관념의 경계를 초월한 월경인이 되어 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국내 월경인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국내 월경 인간과 해외 월경 인간이 많아지는 것이 바로 세계화와 국제화로 달리는 첩경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국가 의식이나 민족의식에서 벗어나 ‘무국적인’ ‘세계인’ ‘지구촌민’의 의식을 키워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이의 공동 발전만이 인류의 행복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도 월경인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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