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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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갈검웅 김문학 대담]
2016년 06월 11일 11시 36분  조회:3330  추천:40  작성자: 김문학
<33인의 신사유>
문화대담(3)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갈검웅+김문학


 
 
1. "중국문제군(群)"
 
김: 중국 현대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분인 갈선생님과 이렇게 대담을 나눌수 있어 후배인 저로서는 대단한 영광으로 간주합니다.
오늘은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고자 해요.
 
갈: 반갑습니다.김선생의 책을 읽었을때는 나이 듬직한 학자인줄로만 알았는데 아주 젊은 분이시군요. 동아시아 3국 문화비교는 참 정채로왔습니다..
 
김: 감사합니다. ”중국문제”란 개념이 있습니다. 중국 내지 중국사회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결함과 약점들, 이게 우리자신이나 세계 학자들이 중국의 앞으로의 진로를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로도 되고 있잖습니까.
         예를 들면 현재 경제성장에 동반되는 환경오염문제, 정치개혁문제,도시와 농촌의 격차, 그리고 빈부의 격차,국민소질. 한족과 소수민족의 관계문제 …등등 안고 있는 “중국문제”는 방대한 “중국문제군(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갈: 그렇지요. 이러한 “중국문제군”을 해결하거나 극복하는게 우리 중국 관민앞에 가로 놓은 크나큰 과제입니다.
         이런 문제군을 극복하지 못하면 중국은 자칫하면 정체상태에 빠지거나 내부로부터 모순이 쌓이고 터져, 자신의 전진방향을 가로 막는 장벽으로 역작용할수도 십분 있지요.
 
김: 네.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중국문제군”과 관련해 선생님 전공이나 관심분야에 관해서만 담론의 화제로 삼고자 합니다.
 
갈: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2.  “ 중국”이란 무엇인가?
 
김: 중국문제를 인식하는 전제는 “중국”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재고해야 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날까지 “중국”이란 말을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다 보니깐 공기와 물처럼 익숙한 나머지, 이에 대한 생각을 잘 안했지요.

       글로벌시대 세계속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생기면서 나는 누구인가?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은 세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등 아이덴티티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선것이죠.

         선생님은 명작«통일과 분렬-중국역사의 계시»중에서 이념의 터브를 깨고 중국역사의 흐름속에서 “중국”과 “민족”에 관하여 많은 정채로운 발견과 지적을 했습니다. “중국”의 개념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갈: 중국의 “국(國) 자에서 알수 있듯이 국은 或(역)자와 상통하여 본래 성과 읍을 뜻했어요, 그것은 원래 한 촌락이나 종족의 거주지였지요, 상나라때 국군이 거주하는 곳이 곧 “중국”이였어요. 진시황때는 정군통치범위를 뜻하는 대명사로 되었습니다. “중국”의 “개념”이 늘 불확정,모호했으며 그 범위도 언제나 변해왔지요.
 
김: 그렇지요. 미국의 한학자 조셉 P.레빈슨도 고대 중국에서 나라(国)는 하나의 권력체였다고 지적햇습니다.
 
갈: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현재인의 개념이었지.역사 각 단계,시기나 또 동일단계내에서도 “중국”은  꼭 일치하지 않았고 누구나 다 수긍한것은 아니였습니다. 기실 “중국”이란 개념은 산생과 발전과정속에서 객관성과 주관성이 병존해왔지요.

객관성에도 4가지 부동한 개념이 있어요.

첫째. 정치성적인 중국,즉 정권과 국가, 최초의 중국은 많은 나라중에서도 중심,중원 복판에 있었던 나라를 가리켰는데, 그것은 국군이 거주한 나라였습니다.

진시황제가 6국을 멸하고 진나라를 세웠을때 그 수도와 중심구역은 중국이었고,그때 진나라의 강역도 중국이라 칭할수 있었어요. 서한에서 청말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강역을 다 중국이라 칭 할순 있었지만, 부단히 통일과 개발범위에 따라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각 조대의 정식 국명이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청나라의 정식명은 대청, 대청국이었거든요. 1912년 중화민국의 성립에 의해 중국이 그제야 우리 나라의 정식 국명이 되었습니다.

둘째. 문화성적인 개념으로서 “중국”은 종시 강열한 민족함의가 있었는데,일반적으로 한족문화지역을 가리켰거든요. 따라서 지리개념과 불일치하기도 했고, 영토의 귀속문제도 모순이 많았어요. 한편으로 아무리 먼 변강지역이라도 한족인이 많이 거주했거나 한족문화전통이 상당히 발달했다면 “중국”의 일부분으로 인정했어요. 또 한편으론 기타민족이 한족문화를 수용하여 일정한 발전정도를 보이면 한인의 인정을 받았고 이곳도 “중국”의 한 구성부분으로 승인했습니다

셋째. 민족성적인 개념, 이것은 한족의 전신인 여러 하(夏),화하(华夏)여러민족과 한족에게 동화당한 기타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비한족의 집거구는 이적(夷狄) 만이( 蛮夷  )등 외국에 속했고 중국이 아니었거든요.그런데 한족이 남방과 변강으로 집거하면서 여기에 비한족이 대량으로 융합되여 민족개념으로서의 중국도 따라서 넓어지는겁니다.

넷째. 지역성적인 중국, 즉 중원(中原) 과 같지요, 하남, 그리고 섬서,산서,하북, 산동 등지는 중원으로 칭할수 있습니다. 중원은 한 조대의 강역과 수도를 기준으로 하는데 일반적으로 수도나 정치중심일대를 가리켰으니까요.
 
김: 그럼 주관성적 개념은 어떤것이죠?
 
갈: 주관성적으로 볼때,”중국”의 개념은 시간,공간의 차이뿐만아니라 동일시공간내에도 부동한 군체나 개체들이 부동한 이해와 해석을 가할수 있었어요.
     장기간 정치의 목적으로 출발하여 사학계에서는 현재 중국경내의 강역(疆域)에 대해 줄곧 “자고이래(自古以来)”를 강조하면서 중국이 마치 하,상,주나라이래 줄창 이렇게 큰것처럼 우기고, “자고이래”의 증거를 찾느라고 쌍불을 켰지요.
 
3. 왕조는 중국인가?
 
김: 갈선생님의 리론대로라면 “중국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장은 매우 복잡한것으로, “중국”이라는 이 공동체는 “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천하”라고 칭하는편이 더 낫겠군요.

    “천하” 주변의 인간들은 중앙왕조에 대한 귀속감을 정도부동하게 갖게되였고 왕조는 기실 근대적의미의 “국가”가 아니며 중국과 등호를 칠수 없었겠습니다.

갈: 그렇습니다, 왕조는 중국과 동등하지 않지요. 춘추시대 “중국”이란 단어가  나왔을때, 황하중하류 즉 다시 말해서 중원의 몇개 제후국에 해당된것입니다. 그리고 이런것들은 단지 지역적 문화적 개념이었으며 명확한 기준이 없었지요. 중화민국이후 “중국”이 그 간약한 칭호로서 중국이란 국가적 국명이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서 말하는 중국은 현대적 의미의 중국이 아닙니다. 따라서 왕조는 중국과 구별되지요. 청조를 제외하고 어느 하나의 왕조의 영토가 지금의 중국전부를 포괄시킬수 있는 강역을 갖고 있지 못했던건 뻔한 사실입니다.

       역사상의 통일을 판단할때 당연히 왕조의 통일을 빼놓을수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오늘날 중국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논할때, 왕조의 통일을 중국의 통일과 꼭 같다고 말할순 없습니다.

       서주말년 신민들이 “보천지하 막비왕토(普天之下,莫非王土)”란 송가를 부를때 우리는 중국이 통일됐다고 장담할수 있겠어요?없지요. 그리고 명조시기 장성을 건설할때 우리가 명조의 강역을 중국이라 할수 있겠어요?
 
김: 그럴순 없지요. 그러면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다”는 우리의 상식처럼 된 말도 사실과 어긋나겠네요?
 
갈: 그렇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다”고 한다면,여기서 중국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만일 중원, 황하류역이라 한다면 그건 맞어요. 진시황이 황화류역 아니라 오늘날의 전 중국을 통일했다고 하면 그건 말도 안되죠. 진시황이 통일한 강역은 북으로는 음산산맥과 료하하류, 서쪽은 용동(陇东)고원, 서남쪽은 기껏해야 사천분지나 운귀고원에 그쳤습니다.
     대만과 해남은 미치지 못했어요.
 
4. 통일과 분렬의 방정식
 
김: 우리는 보통 “중국”이 역사상 통일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었고 분렬이 짧았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통일과 분렬-중국역사의 계시》에서 중국역사상 최대강역범위의 통일시간은 근근히 82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이 저작을 읽으면서 사실 큰 쇼크를 받았거든요.
 
갈: 여태껏 우리는 중국역사상의 통일과 분열에 대해 인식이 부족한게 실정입니다. 이 체제는 역사상 간단없이 벌어진 과정이고 지금도 여전히 중국정치생활에서 회피할수 없는 모순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우리의 사학관은 이 문제을 정확히 해석하기를 기피했으며 오늘날까지 여기에 대해 터브가 남아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쓴 목적도 사학의 이런 터브를 깨고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때문입니다. 거대한 시공간내의 발전변화중 역사상의 통일과 분열을 규명하고자 썼지요.

    내가 스승 담선생님의 《중국역사지도집》을 협조하여 수정할때 발견했는데 중국역사상의 통일분열문제에 대해 아직 터브구역이 많았어요. 그에 대한 전면적 공정한 인식이 결핍했고 전통적관념의 속박에서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역사상 왕조의 최대강역을 범위로 한다면, 그 통일시간은 82년 밖에 안된다는 통계를 냈어요. 즉 기원 1759년 건륭이 천산남북로를 장악한뒤로 부터 1840년 아편전쟁후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 다음까지지요.
 
김: 사실은 이 82년동안에도 세부에서 보면 지방에 따라 통일의 양상이 미진한점이 많았습니다.
     만주, 즉 동북도 장기간 청정부에서 방치한 상태였고 그냥 군사주둔방역을 위주로 하고 광서말기에 이르러서야 동북3성을 설치했지요.
 
갈: 맞어요. 흑룡강이북, 우쑤리강이동지역이 러시아에 의해 점령당한것도 침략도 있지만 여기에 청나라에서 행정기구를 두지 않은 탓도 있어요. 러시아사학가들도 이를 침략이라 승인하지 않고 “신토지의 개발”이라고 우겨요.

     신강도 내외몽골도  기본적으로 자치였고 서장에는 중앙에서 대신을 파견하였을뿐, 천하사상으로 인해, 천하가 다 우리것인데 하필 행정기구를 설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거지요.

    청말시기 서양의 자극으로 영토의식에 개안하게 됩니다.
    중국에 있어서 분열,분리시간이 길고 통일시간은 짧았어요. 중원왕조에 있어선 통일시간이 분열의 시간보다 약간 짧았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이전의 분열시간이 통일시간보다 길었고 원나라이후에는 기본상 통일된거죠.
 
김: 과연 《3국지》의 “분구필합, 합구필분”(分久必合,合久必分) 이라는 명구처럼 중국은 통일과 분열의 방정식을 풀어가면서 오늘날의 중국을 이루게 된것이네요.

    제가 보건데 현대 중국인은 “대통일”을 좋아하는것 같은데, 이게 중국인의 하나의 절대적 관념으로 고착됐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5.  “통일관” 재사고
 
갈: 중국인이 현재의 사고방식에도 깊이 남아있는것은 중국문화라 하면 곧 유교문화, 화하(한족)문화라 하여 한족의 우월주의 사고가 많지요.

    장기적으로 중국강역의 형성과정에서 아주 편면적인 관념이 있는데 중원 화하민족의 왕조에 가입해야만 통일이고 진보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분열, 반동적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한 변강정권, 지방정권이나 소수민족정권 또는 그 강역에 대해, 언제나 천방백계로 중원왕조에 귀속됐다는 증거를 찾아내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애쓰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예 ”분열정권”이라는 감투를 씌워버리죠. 이런 사고는 문제가 있어요. 기본사실을 간과했기때문입니다. 중원왕조의 강역은 정치적으로 확장되었고, 왕조이외에도 여러 정권, 민족자치와 독립이 존재 했으니까요.

     사실 어떤 변강이나 소수민족지구는 교통의 폐쇄, 간거한 조건 혹은 당사자들의 외래통지자에 대한 저항으로 중앙과 지방정권이 관할하기 싫어했던 점도 있었습니다.
 
김: 이런 국면은 사실 민국시대에도 존재 했습니다.
 
갈: 그러니 그건 분열이 아니고 지방 민족의 자치라 해야죠. 중국같은 다민족국가가 형성되는 장구한 노정에서는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김: 일체 사물에 명암이 있듯이 통일에도 그 이폐가 병존할꺼라 생각합니다. 그 점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갈: 역사를 요약해서 말한다면, 점유와 통치를 막론하고 한 국가의 강역이 크다고만해서 좋은것은 아닙니다.
    비록 자연과 인문적 장애가 없다 하더라도, 한 국가가 무제한으로 영토를 확장하는건 불가능하거니와 불필요하지요. 범위가 적당한 영토라야 정권공고에 유리롭고 인민생활의 안정과 사회생산적 발전도 스무드하게 영위할수 있기때문입니다.

    통일의 유리로운 점은 외적을 방어할수 있는것이고 또 하나는 강대한 역량을 결속하여 자연재해에 저항할수 있는 겁니다
    통일에 의하여 한자문화권이 형성되고 일본, 조선반도 등이 공동한 문화형태를 형성한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폐단도 같이 동반되는것이지요. 역사적으로 “통일”의 폐단은 “통일”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그 통일이 전제집권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치제도 어떤 제도로 통일을 실현하고 통일을 관리하는가에 달렸다고 봐요.
 
6. 왜 제도 문제가 중요한가?
 
김: 갈선생님의 저작에서도 누누히 지적했다싶이 통일시기의 진시황은 강유력한 집권제를 실시하여 역사 발전을 추진시켰지만  인민이 주인이 되지못하고 기본적 민주를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장성은 그렇다치고 그 자신의 궁전과 능묘를 짓는데 인민의 재난을 초래하고 인민에 대한 폭행 역시 그의 역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건륭황제의 《4고전서》를  “위대한 문화공정”이라 침이 마르도록 칭송할때 수만종의 서적을 건륭제 사상과 부합안된다는 이유로 일거에 불사르고 또 많은 지식인들이 문자옥에서 아우성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의 통일에 어디 민주와 자유가 있냐고 질호했습니다.
 
갈: 중국사상에서 두차례나 공전절후의 학술사상 백가쟁명의 절호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차례는 춘추전국시기고 또 한차례는 20세기 신문화운동시기였지요.

      아시다 싶이, 춘추전국시대는 통일된 국가정권이 아니고 대소정권이 병립한 시기였지요. 신문화 5.4 운동시기는 명의상으로는 통일된 중화민국이 존재했으나,실제적으로는 북경정부의 점령이 미친 곳은 수개성에 불과했고, 또 “국중유국”의 조계지세력도 있었으니 이런 난세중에 문화사상이 공전의 활약상을 보이고 많은 사상,문화대가들이 배출했습니다.

      상대로 역사상 천하통일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시기 그와 상응된 사상자유와 학술의 번영,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거장들이 많이 탄생하지 못했지요.

      건륭제시기 성세를 이루었지만 문화사상자유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하고 지식인에 대해 억누른 암흑의 시기였잖습니까.
 
김: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제도문제가 중요하다는것이겠습니다.
 
갈:  맞아요. 중국의 역사가 이미 잘 증명하다싶이 통일정권은 부동한 제도를 실행할수 있으며 상당히 긴시간에 걸쳐 존재할수 있습니다. 대만,홍콩,마카오 등에서 각기 다른 제도를 실행할뿐만아니라, 대륙 각지에서도 기본제도가 불변한 상황하에서 부동한 구체적 제도를 실행할수 있거든요.

      사실상, 각 특구. 해남성에서도 이미 하고 있잖습니까. 헌법이 규정한 기본제도라 해도 민주적 합법과정을 거쳐 필요한 수개도 해야 하지요.
 
김:   지당한 말씁입니다.
 
갈:  이래서 광범한 민주, 건전한 법제를 광범위하게 실행한다면 공민의 언론,출판, 학술의 자유가 보장되며 사상의 자유도 간섭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이러면 진정한 사상해방과 학술의 흥성이 통일된 국가에서 나타나고 이런 실정으로 인해 국가는 더 부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김:   그러니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치제도개혁도 경제개혁과 함께 심도있게 진행하고 언제나 구호나 슬러건으로 외치는데 그치치 않고 실속있게 실천에 옮기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말에서 끝나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중국인이 보편적으로 굳게 믿고 있는 “염황자손”신념에 대해 딴지를 걸었습니다.
 
7.  “염황자손(炎黄子孙)” 은 중화민족의 동의어가 아니다
 
갈:  현재 중국인의 세계에서는 “염황자손”이란 단어가 보편적으로 유행을 타서 “중화민족”이나 “중국인”의 동의어로 되고 있는 상황이지요. 장기적으로 해내외의 화인들은 “염황자손”으로 자칭하면서 동일 조상을 모심으로써 민족국가에 대한 귀속감 아이덴티티를 증폭시키자고 합니다. 염제, 황제 능묘를 수선하고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고 야단법석이지만, 난 여태껏 이에 반대해왔어요.

    왜냐하면 국가의 명의로 어떤 하나 또는 몇개 민족의 조상을 가지고, 그것을 마치도 각 민족의 공동선조로 칭하는건 타당치 못하기 때문이지요. 《헌법》에 중국 각 민족은 평등하다고 규정했으니 한족은 당연히 염황을 본 민족의 선조로 섬길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기타 민족에게도 강제할순 없지요. 그럼 한족은 왜 칭키스칸이나 송짠깜보를 기리지 않나요? 각 민족은 각자 자신의 조상을 기려도 되지만 국가의 명의로 하면 억지죠. 이러면 소수민족의 감정에 손상을 끼칠수도 있습니다.
 
김:  “민족”이나 심지어 “전통”이란 사실 근대에 들어와서 유구한 역사가 있는게 아니고 발명한것입니다. “근대”와 대립적 의미에서 “전통”이란 개념을 발명하여 문화민족주의 발전의 일환으로 민족과 민족문화의 역사자신감,우월감을 형성하여 왔지요.

    사실 “염황자손”이란 단어, 개념 역시 생긴지 100년에 불과  하지요. 진독수 등에 의하면 민족주의를 수립하기 위해 청나라와 맞서면서, 한족지식인들이 고안해낸 “전통”에 불과한거랍니다.
 
갈:  그러니 “염황자손”이란 개념은 한민족 형성발전의 역사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긴 설명을 약하겠는데 현재 약 10억이 넘는 한족중에 진짜 “염황자손”은 오히려 소수민족입니다. 왜냐하면 진한이래 북방에서 황하중하류지역으로 천입한 비 한족 흉노, 선비. 돌궐, 고려, 여진, 몽골,위글,회.민족 등 인구가 대량으로 한족으로 동화되였고 어떤 민족전체가 한족에 융합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은 오늘날 중화민족의 실제에도 부합되지 않지요. 현재 한족외에도 55개 민족이 있는데 그중 어떤 민족은 한족의 문헌에 따르면 염,  황 두황제나 그 후예와 다소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상 이것은 고대 대한족주의자들의 억단이지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미국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이지만 종래로 동일 조상을 운운하지 않고서도 공동으로 미국드림을 향하여 공동으로 나아갈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굳이 이런 일을 벌이니 이건 민족지간의 융합에 불리하고 역사를 거슬러오르는 짓이에요. 통일의 기초는 여럿이 공동한 가치관,이익이지 공동한 조상이 아니니까요. 세계조류에 맞지도 않거니와 자기기만식의 가식에 지나지 않으니 난 지금까지 그 어떤 적극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웃음)

    황차 공민은 언론 신앙자유가 있으니 어떤 명칭을 쓰고 어떤 조상을 섬기든지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염황자손”은  중국인민의 대명사가 아닌것은 꼭 명확히 해야 돼요. 관방언론과 공식서류에서도 호도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8. 절대적 순수혈통의 민족은 없다
 
김: 1920년대 역사학 대가 고석강(顾颉刚) 이 “고사변(古史辩)”을 역설하면서 “민족의 일원(一元)출자관념을 타파”하고 “지역은 종래로 통일됐다는 관념을 타파”하고 “고대는 황금세계였다는 관념’을 타파할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대계도 등 지식인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고씨의 견해는 맞었지요. 일본에서도 메이지이후 민족심 고취를 위해 야마토민족이 단일민족이고  야마토문화가 “만세일계(万世一系) 라 그 순수성을 떠들어 대다가 패전후 그에 대한 반성이 생기고 일본문화의 “잡종성”을 자인하게 됐습니다.

갈: 세계적으로 절대적 순수혈통의 민족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있다고 하면 꼭 빨리 퇴화되어 절멸되고 맙니다.

    한(화하)족이 세계적으로 가장 유구한 민족의 하나로 지금까지 세계 최다 인구의 민족으로 발전될수 있은것은 조상의 위대한 혈통이 아니라 바로 대량적으로 기타 민족을 흡수하고 각 민족의 정화를 응집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치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역량은 각 민족에서 오는바, 각 민족자체의 창조력과 그 단결력에 있지요.
    중국에서 염황2제를 존중해온것은 우량한 민족전통이지만 그것은 한편 “대한족주의”의 표현이지요.
    신해혁명전후에 혁명당파가 독립한 성에서 황제기년(黄帝纪年)을 사용한적있습니다. 청제국에 대한 부정이지와 또한 한족의 협애한 민족감정을 발로했지요.
    황제기년도 그뒤에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9. 소수민족의 시야
 
김: 아까 선생님께서 “대한족주의”란 말씀을 하셨는데요. 저는 조선족지식인으로서 중국,중국문화를 바라 봄에 있어서 아마 많은 한족 지식인과 시각, 입장 또는 이해가 좀 다른면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의 궐기, 중국문제, 중국의 양식에 대해 세계가 주목하고 중국의 한족지식인들도 관심을 갖고 연구, 인식, 탐색해오고 있지만, 여기에는 절대다수가 한족역사시야의 중국이였지, 소수민족의 시야, 시각이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중화민족”이란 단어, 개념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청조의 문화유산 또는 정치유산을 전승하는것이지요. 그러나 그 내실은 한족의 역사, 문화 또는 한족이 생활하는 광활한 지역만이 아니라, 여러 소수민족이 포괄되여야 합니다
 
갈: 맞어요.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늘 말해왔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한족인만의 중국이 아니라 역시 50여개 소수민족의 중국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한족정권,중원정권의 유산을 계승할뿐만아니라 여러 민족의 유산을 계승해야 하고, 소수민족의 시야로 중국을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테제입니다.
 
김: 다민족시각하의 중국을 이해하는것은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 중국은 근대적의미의 근대 국가, 즉 민족국가 ,영어로 칭하면nation-state 인데요.

    루샨W. 페이가 “중국은 실질상 민족국가로 위장한 문명국가”라고 갈파했듯이 “일국일족”의 나라가 아니라 많은 민족, 문화, 종교를 포함한 방대한 국가이지요.
    장족, 위글족이 바라 본 중국과 한족이 바라본 중국은 그 양상이 틀리기 마련인데, 이런 시야를 다원적으로 넣어서 중국을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선생님께 한가지 여쭈고 싶은데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세계적으로도 좋다고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의 “한족화’가 빠른 스피드로 진척되고 있습니다. 이런 강유력한 한 문화중에 소수민족이 자신의 문화를 보존할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10. 소수민족문화, 어떻게 지킬까?
 
갈: 예리한 질문이군요(웃음)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강대한 민족의 문화우세와 정치적 지배가 약소민족의 동화와 함께 그 민족문화의 소멸을 초래했습니다.
    물론 한족도 그 과장에서 이민족의 많은 장점을 흡수 한것도 사실이지요
    그리고 또 자신의 문화적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소실되어버렸습니다.소실은 또 하나의 융합을 말하지요. 소실과 동화의 반복이 곧 중국역사입니다. 이런 방정식을 되풀이 하면서 오늘의 중국, 중국인이 있게 된것이지요.
 
    그 방법에 대해 난 이렇게 생각해요. 보통 민중은 그 자신의 선택권이 있으므로 외부에서 섣뿌른 간섭은 삼가해야 합니다. 서양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생각으로 소수민족은 “영원히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보존되어야 하며 그들이 구경하고 연구하는 활화석으로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서장에 갔다온 어떤 미국학자가 나에게 말하기를 “라싸에는 지금 자동차뿐이고 우마차를 볼수 없다”는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꾸했어요. “내가 당신 나라에 가보니 우마차는 안보이고 자동차천지더라. 당신네들이 자동차를 탈수 있다면 장족들도 못탈 도리가 있냐?”

    현대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 소수민족의 현대화를 반대하는건 웃끼는 얘기죠(웃음)

김:  (웃음) 그렇죠. 이를테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조선족문화가 많이 보유돼 있는데 현재 한국인들이 “연변은 민족문화의 박물관인데 요즘은 너무 근대화되여 볼 멋이 없다”고 하지요. 사실 연변에 어느 정도 근대화적 생활양식을 가르쳐 준게 한국인데 말입니다.
 
갈: 국가적 차원이나 학문적 차원에서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택성 있게 그것들을 보존하고, 보존할수 없는 부분은 빨리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지요.
    그렇다고 현대화를 막는건 아니고 그 자신들이 현대화를 원하지않는다면 그건 딴 문제고.

    내가 80년대 서장에 갔을때만해도 라면(方便面)이없었는데, 물론 그 단어도 없었어요. 근데 캉스푸라면이 들어가면서 장족들은 라면을 아예 “캉스푸”라고 칭해요.

    문화는 그 민족의 선호하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으로서, 우리는 민족의 문화,전통을 존중하고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이야말로 민족평등의 기초이지요. 그러므로 소수민족 자신들의 선택도 존중해주는게 그들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요.
 
김: 저도 조선족지식인으로서 21세기 조선족 생활과 존망에 대해서 매우 고민하고 있습니다. 현재 조선족은 동북3성의 토지를 떠나 해외로, 연해도시로 이동하고 정착중에 있어요. 조선족의 유지들이 이런 이동, 월경에 대해 “조선족의 해체”로 우려와 위구심을 나타내고 있지만, 저는 오히려 구조적으로 이동, 월경이 조선족의 특질이라고 파악하고, 이런 이동과 월경이 농경문화권에서 도시문명권으로의 정착으로써 조선족의 다양한 생활의 장(场)을 개척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으로 없어진게 아니라 A농경권에서 B의 도시문명권으로 이동을 했을 따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대작《중국인구사》《중국이민사》《미래의 생존공간,자연공간》등에서 이동과 이민의 문명탄생과 전승, 전파에 대한 적극적인 역활을 거듭 지적 논증했습니다. 이동과 문명에 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11. 인구 이동이 문명을 살린다
 
갈: 방금 김선생님이 고민하는 조선족문제에 대한 견해 저도 찬동해요. 선진문명권을 지향하는 이동, 이민이 한 민족을 새롭게 탈바꿈하는 방도이지요.

    수천년의 인구이동사를 통괄해보면, 중국역사상의 인구이동,천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 대가정이 있을수 없고 따라서 중국이란 이 국가적실체도 존재할수 없습니다.

    현재 중국의 주요민족인 한족이 바로 그 형성과정에서 대량의 기타 민족요소를 흡수 또는 융합한 결과입니다.
    사실 문화, 문명의 전파는 인구이동에 의해 진행되는 법이지요. 후진구역에 대한 개발은 인구의 이동,이민에 의해 인구 수를 늘릴뿐아니라, 기술, 도구가 같이 오며, 선진적문화, 문명을 갖고 오기때문에 문명전파의 몫을 하지요.

    이를테면 동북3성이 청조의 봉금지역으로부터 중국의 중공업기지, 곡창기지로 변모된것도 많은 이민과 그에 수반되는 문화와 기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아놀드 토인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명은 일종 운동으로서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영원한 항해이지 항구는 아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사학대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중국이 수천년 역사속에서 늘 멸망하지 않고 신선한 혈액을 보전할수 있은 까닭은 타민족의   침략과 혼혈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동은 인구소질자체에도 플러스 요인이 있지요.
 
갈: 그럼요. 인구이동은 근친, 동족간 통혼 등 소규모 범위내의 통혼을 막을수 있기때문에 인구소질에 적극적인 역활을 합니다.
    그리고 이동은 인구의 문화소질 향상에도 이롭습니다. 도시의 형성은 거의 인구이동, 이민에 따른 결과인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유를 막론하고 도시의 확대는 외래인구의 대규모 이동, 천입을 전제로 하는겁니다.

    근대 상해가 그 전형적인 케이스이지요. 1843년 상해가 갓 개항했을 당시 상해는 50여만 인구에 불과했으며, 영국, 프랑스 조계를 설치 한곳의 상해성밖의 농촌구역이였고 인구 역시 희소한 고장이였습니다.
    그러나 1900년에 상해 인구는 100만, 1949년에는 500만으로 대폭 증가되였습니다. 상해가 강남의 한 중등현성으로부터 일약 중국 최대 아시아 최대의 모던 근대도시로 성장된데는 이민이 결정적 작용을 했습니다.
 
김: 인류사는 사실 인류의 이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저는 문명사적 시각에서 인류의 인구가 이동, 월경하면서 일어나는 문명의 양상,면모를 연구정리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저작이 제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갈: 좋지요. 동아시아의 월경, 이동을 문명사시야에서 다루는 연구는 새롭고 심원한 의의가 있는 연구가 되는겁니다.
 
김: 감사합니다. 또 한가지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것은, 현재 경제성장으로 인해 자신감이 생긴 중국에서는 “전통문화”를 회복하고 “국학”을 흥하며, 해외에 많은 공자학원을 설립하는 등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가하십니까?
 
12. 전통문화와 현대
 
갈: 기실 전통문화라도 그 민족의 융합과 변천, 개방의 역사와 같이 고정불변으로 보진 않습니다. 중국문명이 이역문명을 흡수하여 부단히 발전시킨 역사라면 전통 역시 고유, 고정불변으로 고착시켜서 보면 안되지요.
    중국이 현재 전통을 부흥시킨다는것은 쇄락했기때문에 다시 회복시킨다는것인데 왜 쇄락했냐는 이유를 분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전통문화와 전통적 지식체계가 현대성, 현실에 적응할수없은 까닭이지요.
 
김: 문화 자체가 곧 한 민족, 사회집단의 주어진 자연현실에 대한 적응으로서 거기서 생긴 적응상태 즉 생활양식 사고양식이 아닙니까.
 
갈: 그래요. 문화는 이렇게 현실에 따라 변하고 부단히 발전하는거지요. 엄격한 의미에서 말해. 우리 오늘날의 문화는 여전히 전통적 농업문명에서 산업문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과도기, 적응상태에 있다고 해야합니다. 사람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애매모호한 주장이나 전통문화와 현대에 관한 태도 역시 여기서 비롯된것이지요.

    문화, 전통문화에도 순수한 것이 없어요. 증류수처럼 순수한게 없지요. 여러민족이 융합,동화되면서 살아온 우리에게 어디 순수한 전통이 있겠어요. 그러니 전통문화를 논할때 개방, 변천, 융합의 일면을 중시해야지 거기에 대해서 고정형식으로 매이면 안되지요.

    국제적으로 볼때 중화문명 역시 이역, 해외문명을 부단히 흡수, 발전시킨 결과임으로 순수성이란 존재하지 않지요. 이건 영원히 그러게 될껍니다.
 
김: 우리의 근대, 현대는 사실 구미문명의 절대적 영향하에서 영위해 왔고 또 해가고 있지요.
 
갈: 그러니 전통도 현실, 현대를 떠나 운운할수 없어요. 전통이 현대에 적응할수 없는 부분이 많거든요. 그럼 어떡해야죠? 그 정화를 남기고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이 좋지요. 예전에 우리는 정화와 찌꺼기를 한꺼번에 버렸는데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찌꺼기까지 긍정하고 남긴다면 그건 더 어리석은 짓이아닙니까. 그리고 중국의 현대화, 진정한 세계강국으로 되려면 중국인 관념의 현대화를 이루고 전민의 현대화를 성취하는 길이 그 첩경입니다.
 
김: 공사다망하신가운데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정채로운 말씀들이 독자들에 큰 지적(知的) 자극을 주고 계발을 주리가 믿습니다.
 
대담날자: 2015년 12월 27일

대담자 소개
갈검웅 ( 葛剑雄 )
 
1945년 절강 호주 출생
중국 현대 저명한 역사지리 학자
복단대학 교수. 역사지리연구 소장. 도서관장 역임
교육부사회과학위원회 역사학부 위원
중국역사지리.인구사.이민사 연구영역의 제일인자.
주요저작으로 《통일과분렬:중국역사의계시(1994년》《중국인구사》《중국이민사(1993년)》《중국인구발전사(1991년)》《우리가 해야할 반성(2015년)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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