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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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2008년 04월 18일 16시 43분  조회:6000  추천:103  작성자: 김정룡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역사는 발전하고 시대는 전진한다(歷史在發展, 時代在前進.)라는 말을 쌔빠지게 해왔다. 우리는 한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가슴이 아닌 머리로 앵무새처럼 하던 말들을 유치하게 느끼고 멈추는 것과 같이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도 멈추는 것이 좋을 듯싶다.

결론을 말하자면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변화할 뿐이다. 이것이 나의 소견이다.

우리는 역사에 대해 논의하려면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 는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淸末 유명한 사상가 江천의 <<독자치언(讀者巵言)>> 중의 아래와 같은 대목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고대의 官은 단지 巫와 史일 뿐이었다. 사람의 일을 기록하는 관이 史이며 이는 <<說文>>에 史를 해설하여 “記事者也”라고 한 것으로 방증된다. 그리고 귀신을 섬기는 관을 巫라고 한다. ······관은 또 吏라고도 부르는데, 吏라는 글자는 史에서 나온 것이다. 관이 있으면 반드시 관장하는 일(事)이 있게 되는데, 이 事라는 글자도 또한 史에서 나온 것이다.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란 지나간 일들이다. 즉 선조들이 겪었던 ‘값어치’가 있는 지나간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거나 구전으로 전해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나간 일들이 다 역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세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건만이 역사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김정룡이 외간 여자와 간통하다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들켜 맞아죽는 일이 일어난다면 재한조선족신문에서 보도하고 이것을 조선족 관련 사이트나 카페들에서 시끌벌쩍하게 떠들지는 몰라도 역사로 남을 가치는 없다. 만약 클린톤이 나와 똑 같은 일을 저질러 사망한다면 당연히 역사로 남는다.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왜냐? 김정룡과 클린톤은 신분적 차이가 하늘과 땅과도 같기 때문이다. 후세사람들도 이 때문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헌데 역사란 것은 김정룡과 클린톤을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지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불변지식과 가변지식이다. 가령 사각형의 내합을 북경에서 재이면 355이고, 서울에서 재이면 365이고, 동경에서 재이면 370이고, 뉴욕에서 재여야만 360이라는 법이 없다. 만천하 어디 가도 사각형의 내합이 360인데 우리는 이런 지식을 불변지식이라 한다. 이에 비해 역사라는 것은 어제 영웅이 오늘의 개똥이 되고 오늘의 개똥이 내일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역사란 가변성이 너무 많아 필자는 역사지식을 가변지식이라 부르고 싶다.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역사임에는 틀림없지만 같은 일도 어떤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주관적인 견해로 기록하고 평론을 다는가에 따라 일(事)이 달라지고, 또 후세사람들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일(事)을 보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 지게 되고 시비가 생기고 심지어 피비린 싸움까지 일어나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역사란 수학공식처럼 천편일률적이 아니라 역사를 보는 사관이 천차만별이어서 재래시장만큼이나 아니 훨씬 더 복잡하고 시끌 벌쩍 하게 말썽이 많다.

말썽 많은 여러 가지 사관을 아래와 같이 귀납해서 풀이할 수 있다.

첫째 正史와 外史(野史)의 문제

중국에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二十五史>를 정사, <<산해경>>을 비롯한 많은 서들을 외사로 취급하고, 한국에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정사, 김일연의 <<삼국유사>>를 외사로 취급해왔고, 일본에서는 <<日本書紀>>를 정사, <<古事記>>를 외사로 보아왔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 바 정사란 왕조중심의 역사를 의미한다. 한 민족 혹은 국가가 왕조중심을 정사로 취급하는 것은 그 민족 혹은 국가가 자신들의 왕조역사를 빌어 타민족 혹은 타 국가에게 ‘힘’을 과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왕조의 개념은 왕의 세습제 역사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신화로 조상을 ‘지어 낸다’. 예하면 중국에서 공자시대에는 조상을 요, 순으로 보았는데, 전국시대에 오제를, 한조에 이르러 삼황을 조상으로 지어냈다. 조선반도의 단군신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민족 혹은 한 국가로 말하면 왕조역사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인은 다문화시대에서 반드시 왕조역사를 중심으로 하던 것을 재야역사 즉 여태까지 취급해왔던 이른바 외사를 중심으로 하는 방향으로 회전시켜야 함이 옳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인류역사는 대지의 역사이고, 대지위의 인류역사는 왕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 아니라 인류의 삶을 닮고 있는 역사야말로 진정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 선조들이 정사로 높이 받들어온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한 번만 읽어보고 팽개쳐 버렸다. 거꾸로 외사로 취급해온 김일연의 <<삼국유사>>를 한문과 번역본을 대조하면서 적어도 열 번 정도는 읽어보았다. 내가 <<삼국유사>>를 중시하게 된 이유는 본서가 우리민족의 민속, 풍속, 경제, 신화, 민간이야기 등등이 잘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으며 역사문화이야기를 써내는데 훌륭한 참고서로 활용하게 되었다.

결론을 말하면 여태까지 취급해왔던 정사가 외사로, 외사가 정사로 회전되어야 하며 정치판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여당이 야당으로, 야당이 여당으로 되는 것처럼 바꿔야 만이, 그리고 왕조역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절대다수를 차지해온 백성들의 삶이 단긴 역사를 알아야 만이 진정한 인류역사를 알 수가 있다.

여태까지 각국에서 왕조역사를 중시해 온 데는 제도라는 괴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제도는 정치라는 물건과 짝지어 따라 다닌다.

둘째 제도사에 관한 문제

인류가 산에서 대지에 내려오면서 군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집단마을을 형성한 것을 우리는 자연취락이라 한다. 세월이 흘러 도시국가가 출현함에 따라 자연취락에도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게 되고 정부(조정)의 주도로 이뤄진 인위취락도 생겨난다.

상앙변법 10조목의 앞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인민을 什 · 伍의 단위로 조직하여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

당시 진나라 조정은 촌락까지 통제하려고 했으나 간섭이 자연취락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자 마을사람끼리 서로 감독하고 감시하게 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즉 마을의 한 사람, 한 가정이 죄를 지면 인근 什·伍의 가정이 전부 함께 처벌을 받게 하는 제도였다.

이웃이란 낱말과 중국인이 말하는 臨居가 곧 여기서 유래되었다. 연대 책임을 지는 什·伍의 가정은 굳은 일, 좋은 일 모두 동고동락하면서 한 집안 식구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먼 사촌이 이웃보다 못하다는 우리말 속담도 여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伍長이란 군대말단직급이 있는데 역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2) 姦事를 관에 고발하지 않고 숨기는 자는 엄형에 처하고 간사를 상고하는 자는 적의 목을 벤 것과 동등한 상을 준다.

서주시기까지 첫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 버리는 ‘殺首子’란 풍속이 있었다. 뜻인즉 여자가 시집와서 낳은 첫 아이는 누구 아이인지를 알 수가 없고, ‘종자’가 불분명한 아이한테 재산을 물려줄 수 없다는 데서 첫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 버렸던 것이다. 이는 당시 그만큼 정조관념이 희박하고 처녀들이 시집가기 전에 성생활이 활발했다는 방증이다. 하기야 자연취락에서 밭을 갈고 베를 짜고 밥 먹고 잠자는 외에 별로 할 일이 없었고 정치적으로 간섭이 덜 했던 자연취락 사람들이 할 일이란 무엇이었겠는가? 성생활밖에!

당시 정부가 민간의 성생활까지 간섭했던 이유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진나라는 기타 6국보다 힘이 약해다. 그래서 힘을 키우려고 서북쪽의 무인 황무지를 개간하여 군량도 해결하고 인민의 머리수를 늘리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인위취락을 건설해야 한다. 인위취락은 자연취락과 달리 방방곡곡에서 사람이 모여들기 때문에 강력한 질서의 통제가 필요했고, 만약 자연취락의 사람들처럼 남녀가 성생활에 자유롭다면 기강이 약해지고 또한 남녀불륜이란 사회갈등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에 姦事를 엄하게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

3) 남자가 2인 이상 있는 집은 분가시킨다. 만약 분가를 안 시키면 부세를 두 배로 징수한다.

이는 물론 세금징수를 늘리려는 목적이 있겠으나 도가와 유가적인 자연취락의 대가족문화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부국강병을 도모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내린 조치였고 제도였다.

우리는 상앙변법을 기존의 자연취락을 중심으로 하던 분권제시대로부터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어 집권시대에로 이행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실제로 상앙의 덕분에 매우 촌스럽고 힘이 없었던 진나라가 부국강병 하여 최후 천하 대통일을 이루었다. 하지만 상앙을 비롯한 법가들의 운명은 비참했고, 그 후 중국역사는 도가와 유가적인 삶과 제도적인 틀에 얽매어 사는 갈등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제도를 만들어 인간을 속박하는 정치를 한사코 반대했다. 공자도 仁으로 세상을 다스리자고 호소했다.

도가와 유가의 삶은 인간이 가슴으로 사는 것인데 반해 법가의 제도적 삶은 머리로 살아야한다. 이것을 필자는 ‘마음의 문명’과 ‘두뇌의 문명’으로 명명하고 따라서 넓은 범위에서 말하자면 중국문명은 ‘마음의 문명’이라면 유럽문명은 ‘두뇌의 문명’이라 진단한다. 아울러 필자는 중국문명을 ‘情의 문명’으로 본다. 이는 거창한 문제여서 그 입증과정을 여기서 생략하고 금후 별도의 주제로 써낼 작정이다.

분권제시대로부터 집권제시대로 이행하게 된 주요 요소가 곧바로 일련의 제도의 확립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계급, 계층, 신분의 문제

서두에서 말한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는 계급문제일까? 계층문제일까? 신분문제일까? 당연히 계급문제도 아니고 계층문제도 아니며 단순한 신분문제이다. 왜냐? 김정룡과 클린톤을 말할 때는 단순히 개체를 의미할 뿐 집단의 개념이 개입되지 않는다. 이렇게 신분은 개개인의 개체에 사용되는 것이다.

만약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에 기어코 집단을 개입시키려 한다면 계층이란 개념사용까지는 가능할 수 있다. 클린톤은 엘리트층 중의 최고 엘리트이고 김정룡은 엘리트층 중의 최말단 엘리트에 속하기 때문이다.

허나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에 있어서 계급이란 개념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계급이란 집단과 집단의 개념이 개입되고 따라서 계급과 계급사이에는 적대적인 관계냄새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이란 말의 사용에 조심해야 한다.

10년 동란 때 14살짜리 철부지 김정룡이 2,500년 전 공자와 적대적인 계급관계로 설정되고 싸리 꼬챙이에 실을 똘똘 말아 “공자를 타도하자!”는 대자보를 써야했다. 과연 김정룡과 공자 어른이 적대적인 계급관계가 성립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일부 보수파 어른들은 아직도 그렇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 얘기를 좀 해보자. 중국과 조선에 士·農·工·商의 분화가 있었다. 이에 굳이 집단개념을 주입하자면 네 개 계층의 분화였지 사계급분화가 아니었다고 나는 본다. 이 네 개 계층의 분화는 각기 그들의 직업과 사회분공을 의미할 뿐이지 서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양반, 중인, 상인, 노비의 분화도 계층분화일 뿐 계급분화는 아니었다고 본다.

임어당이 “만약 중국에 계급이 있었다면 아문계급과 피아문계급만 있었을 뿐이다.”고 지적한 데는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문계급과 피아문계급은 서로 세금을 바치고 그 세금에 의해 살아가는 관계인데 그 시대에 있어서 현재와 달리 서로 적대관계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계급이란 개념은 맑스가 지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불합리적인 사회현상을 파헤치면서 계급이란 개념을 도입했고 이것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유럽의 계급투쟁 모델이 중국에 도입되어 “계급투쟁을 절대 있지 말자!” “계급투쟁은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날마다 말해야 한다!”는 어명이 내려져 부부, 부자, 형제, 친척 친구 간에도 두 개 계급으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넷째 직선발전관과 정체관의 문제

199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벽두에 중국학계에서 막스·베버를 중시하는 바람이 일었다고 한다. 막스·베버는 칼·맑스, 니체와 함께 3대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본다.

막스·베버의 대표작을 말하라면 나는 그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유교와 도교>>라 생각한다. 그는 “왜 유교국가인 중국에서는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중국학계에서 그를 중시하게 된 데는 아마 그의 어처구니없는 이 질문과 해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학자들은 그의 질문에 해답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여기서 막스·베버의 홍두께 같은 질문을 부정하고 기독교와 유교를 대비해 가며 논술하기엔 편폭상 무리가 있어 제쳐놓고 그의 이러한 사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려 한다.

고대 그리스는 찬란한 문화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델레스, 피타고라스 등 유명인을 배출해냈다. 그리스의 전통사관은 순환론이었으며 중국의 맹자의 일치일란의 사관과 비슷한 것이었다. 역사에서는 그리스문화를 헬레니즘이라 한다. 그토록 찬란했던 헬레니즘이 기원 후 1세기로부터 중동에서 생겨난 히브리즘의 도전을 받았고, 이윽고 기원4세기 초반에 이르러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 함에 따라 헬레니즘을 비롯한 모든 이교문화가 말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서구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 천년의 역사는 신이 통치하는 암흑세계였다. 미국 신화연구학자 <<예수는 없다.>>의 저자 피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는 “서구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천년 동안 벽돌집 하나조차 제대로 지어보지 못했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서구의 신이 통치한 천년의 역사는 말 그대로 정체의 역사였다. 실제로 중국은 18세기 말까지 전 세계 경제총생산량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었다.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 등 기타 면에서도 찬란했다. 막스·베버의 말을 거꾸로 빌려 말하자면 중국이야말로 발전의 역사로 흘러왔다.

그러다가 17세기후반부터 서구에서 기계문명이 탄생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을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때를 빌어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을 빌어 중국정체론을 들고 나왔고 중국인은 전부 사기꾼이라 나발 불었다.

헤겔 이후 서구의 사상가들은 대체로 두 개 파로 나뉘었다. <<서구의 몰락>>의 저자 슈펭글러, “신이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 등은 헬레니즘의 순환론으로 역사를 보았다. 이에 비해 칼·맑스, 막스·베버는 헤겔의 직선발전사관을 이어받았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다윈의 ‘적자생존론’, 막스·베버의 기독교윤리와 자본주의정신론, 헤겔의 ‘중국정체론과 게르만민족 제일주의’는 제국주의의 대외 식민지개척에 크게 이론제공과 명분이 아닌 명분을 제공했다.

이 가운데서 특히 헤겔의 중국정체론은 일본의 제국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즉 일본인들은 일본역사는 발전적인데 반해 중국역사는 정체적이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중국인을 ‘동아병부’라 부르고 위대한 일본민족이 왜 섬에 머물러야 하나? 마땅히 북평(北平) 정도가 大和민족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륙침략에 나섰다.

발전이 이디에 있고 정체가 어디에 있는가? 역사란 어떻게 여행지를 정하고 티켓을 끊어 갖고 출발하여 일정기간이 경과하면 도착하기 마련인듯 직선적으로 발전한단 말인가? 나는 역사란 발전도 없고 정체도 없다고 본다.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중국은 발전이란 말에 얽매이고 목이 말라 모주석은 건국 초기에 15년이면 영국을 초과하고 20년이면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허황한 슬로건을 내놓았고 그의 열정이 이성을 초월하여 무리한 대약진 운동과 문혁 같은 운동을 일으켜 오히려 국민경제를 파탄의 변두리에 이르게 만들었다.

문혁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발전했고, 모든 것이 세상에서 가장 선진적이라고 배웠다. 그러던 데로부터 개혁개방 후 우리가 한때 입이 아프도록 반대했던 자본주의문화와 ‘룰’이 도입되고 있고 이로서 이룩한 업적을 또 발전이라 한다. 과연 발전일까? 나는 발전이 아니라 변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 비해 발전했는가? 아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보다 변화된 사회에서 살아갈 뿐이다.

다섯째 역사유물주의와 역사유심주의 문제

우리는 애들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되면 공통적으로 받는 질문이 있다. 즉 애들은 영화 속의 인물을 “저 사람이 좋은 편인가? 나쁜 편인가?”고 묻는다. 좋은 편이라 말해주면 눈동자가 반짝반짝 해지면서 앗싸 사기 나 하고 거꾸로 나쁜 편이라 하면 얼굴에 웃음기가 가셔지고 증오 심리를 드러낸다.

우리는 한 때 애들이 나쁜 편, 좋은 편을 가르고 무작정 애증을 나타내듯이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무릇 유물주의는 다 좋고 유심주의는 전부 때려 죽일 놈으로 보았고 행동했다.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개념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자연과 인간의 수많은 것들이 풀이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수천 년 전의 인간은 자연과 인간의 현상이 모두 수수께끼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천 년 전의 인류는 이 우주는 필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 창조주를 본체라 보고 그 본체를 물질로 보느냐? 아니면 정신으로 보느냐? 하는 데서 유물주의와 유심주의의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 중국은 서양의 이러한 이원론적인 철학을 도입해 자국역사를 해부 했고 따라서 무릇 유물주의는 다 좋고 모든 유심주의는 전부 나쁘다는 이분법을 적용하고 전통문화마저 다 때려 부수기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자- 맹자- 동중서- 왕필- 한유- 주돈이- 이정- 주희- 육왕계의 도통은 전부 유심주의로 분류하고 타도하고, 왕충- 구양건- 범진- 유종원- 유우석- 왕안석- 왕부지- 대진 등 계열의 인물들이 유물주의로 취급되고 각광받았고 찬양의 인물로 되었다.

이외 도가 계열의 노자- 장자- ··· 등도 유심주의로 분류되고 타도당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중국은 전통문화와 단절을 맞게 되었고 그 후유증은 말치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서양사는 서양이고 중국사는 중국사이다. 我의 역사를 他의 역사에 꿰맞추고 규정해버린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고 비극이 초래되기 마련이다. 현대중국에서 곧바로 이러한 우를 범해왔다. 즉 봉건의 개념을 확대해석하고 군현제역사마저 서양의 ‘feudalism’에 두들겨 맞추고 봉건이란 낡은 것이고 낡은 것이면 다 나쁘다는 렛델을 붙여놓고 타도하는 ‘혁명’바람이 곧 중국역사와 문화를 단절시키고 전통의 미아가 되는 비극을 불러왔던 것이다.

중국이 개학개방 이래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데 대해 러시아학자들이 “중국에 두 가지가 부럽다. 하나는 공부자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화교자원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 중국은 공자를 부활시키고 있다. 역사란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순환론이 맞는 것 같다.

여섯째 종교와 역사의 문제

인류역사는 종교를 떠나서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종교가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실제로 유태인과 같은 민족은 종교와 역사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즉 그들은 그들의 종교가 곧 그들의 역사이고, 그들의 역사가 곧 종교이다.

종교란 신을 섬긴다는 뜻이 아니라 으뜸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역으로 으뜸의 가르침을 종교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사람은 A종교를, 어떤 사람은 B종교를 으뜸의 가르침이라 믿고 따른다. 그래서 인류역사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고 신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에드워드·기번은 그의 <<로마흥망사>>에서 “백성은 모든 종교가 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정치가는 모든 종교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고, 철학자는 모든 종교는 사기라고 여긴다.”고 지적했다.

리차드·닉슨은 그의 <<미래의 영수들에게>>에서 “백성은 영원히 백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발바닥 아래 흙만 볼 수 있을 뿐 지평선 너머의 세계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역사 이래 백성은 정부가 주도하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왕이 무슨 종교에 흥미를 느끼거나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국교로 정하면 백성은 그에 따르기 마련이다.

기독교는 본래 유럽의 산물이 아니다. 아시아 중동에서 생겨난 것을 유럽이 수입해서 자기네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순수한 중동문화로만 형성된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예수는 신화다.>>의 저자는 기독교는 플라토이즘의 복사판이라고 주장한다. 뜻인즉 기독교의 교리교의의 핵심이 플라톤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서양철학의 거장인 버트란트·럿셀은 플라토이즘은 하나의 종교라고 말했다. 화이드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이 맞는다면 헤겔이나 맑스 철학도 그 뿌리는 플라톤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막스·베버는 근대화의 개념을 ‘탈주술적 시대’로 명명한다. ‘탈주술적 시대’란 신이 통치하는 종교시대로부터 이성적인 사고의 시대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인류사회는 점차 탈종교화시대로 가고 있는 추세이다. 허나 종교란 신의 통치만 종교인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가 곧 종교인 경우가 많다. 예하면 중국의 도교와 유교는 중국인의 종교이자 전통문화이다. 그러므로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차원에서 도교와 유교를 중시해야 한다.

일곱째 문화의 성취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보는 사관

대만국립대학 철학교수였던 方東美 선생은 그의 <<중국인생철학>>에서 중국철학의 일반특성을 역설하면서 “중국인의 깊은 사유의 삼대 중심문제는 ‘자연’과 ‘사람’과 ‘인간의 문화적 성취 즉 역사’라고 말했다. 방동미 선생은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제도사보다 문화에 비중을 많이 두었다.

<<역사의 연구>>의 저자 토인비는 그의 저서에서 “인류문화를 도전과 응전의 패턴으로 흘러왔다.”고 지적했는데, 그는 이 이론으로 유명해졌다. 토인비도 역시 인류의 역사를 문화역사에 역점을 두었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文은 紋에서 왔고, 紋은 자연의 특징을 의미하며 인류가 자연을 파악한 상식을 뜻한다. 인류가 파악한 자연의 상식으로서 인간사회를 깨친다는 의미이다. 또 인류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점차 자연의 특징을 인간사회특징과 연관시켜 인위적인 상식, 규칙, 법칙, 제도 등등을 만들어 낸 것이 문화이다. 문명이란 紋으로 인간사회를 밝게 한다는 의미이며 문화와 문명을 상대적으로 말하면 문화는 하위 개념이고 문명은 상위 개념이며, 문화는 개체적인 것에 쓸 수 있지만 문명은 집합적인 개념이다. 이를테면 고대 사대문명을 고대 사대문화라 하지 않고, 1993년 미국의 샤무엘·헌팅턴 교수는 미래 사회 각 종교와 종교, 문화와 문화 간의 충돌을 예측하는 글의 제목을 <<문명의 충돌>>이라 했다.

인류역사를 언급할 때 5천 년의 문명사라 말하는데, 뜻인즉 인류가 5천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문화를 소유하고 살아왔다는 의미이다. 고로 인류역사는 문화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문화라는 개념은 그 사용 범위가 넓고, 내포하고 있는 의미도 광범위하다. 종교문화, 제도문화 등 거창한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성문화, 음식문화, 거주문화 등등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인류가 문화를 발견해서부터 문화 속에서 사는 것이 동물과의 구분이다. 아울러 민족마다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 전통문화란 한 민족의 관성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혁 때처럼 다시는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여덟째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이 명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이해한다.

ㄱ. 역사의 관성

인간의 몸에 관성의 체계라는 것이 있는데 육체적인 관성뿐만 아니라 의식상의 관성도 있다.

한 민족이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적인 패턴이 모두 역사의 관성에서 온 것이다. 즉 역사적인 축적관성이 현재의 삶에 표출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중국인은 만만디 성격과 깊고 넓은 사고방식 등등의 민족성, 일본인의 세심하고 진지하고 아끼고 인내심이 강한 등등의 민족성, 우리민족의 멋을 좋아하고 음주가무를 즐기고 낙천적인 등등의 민족성은 모두 각기 초창기 마을이 형성될 때 처한 지리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을 里制문화라 하며 한 민족의 문화는 대다수가 이제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ㄴ. 역사를 중시하는 것은 오늘의 삶을 위해서이다.

역사는 오늘의 삶의 거울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역사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문혁 때 중국은 전례 없이 역사를 중시했고 동시에 역사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淸末의 疑古風은 역사를 재조명하여 조백을 가리는 작업이었는데 당시 궁극적인 관심은 역사에 있은 것이 아니라 홍수처럼 밀려드는 서양의 문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였다. 현대 중국에서 맑스의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반영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도입하여 전례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했고, 역사유물론을 도입하여 전례 없이 중국역사를 해부했다. 이렇게 전례 없이 역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이란 대과제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아이를 목욕시키는 것이 아이 몸의 오물을 씻어 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결코 아이를 버리려고 목욕시키지 않는다. 허나 현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목욕시키면서 통째로 버리는 우를 범해왔다.

그 우의 핵심과 근원이 곧바로 역사는 발전한다는 터무니없는 논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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