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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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은 아직도 '문화혁명 중?'
2008년 06월 04일 09시 32분  조회:8013  추천:71  작성자: 김정룡

연변은 아직도 “문화혁명 중?”

1970~80년대 연변에 “연변은 중앙 직속이요, 마레고향이다.”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이 유행어는 건국 후 1957년 반우파운동, 1958년 대약진운동, 1960년대 초 공산공식(共産共食)운동, 1966년~1976년 문화대혁명, 1970년대 산아제한운동시기 다른 소수민족 대다수가 이 일련의 운동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남의 일로 대했던데 반해 조선족은 매 차례 운동 때마다 가장 혁명의 선두에 섰고, 그 결과는 자기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행태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이를 민간에서는 ‘조선족은 째빨갛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럼 조선족은 왜 째빨간가? 필자는 이 현상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았다.

동북아시아의 문화역사중심은 황하중하류유역인 이른바 중원이었고, 조선반도는 중원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수천 년 동안 줄곧 중원문화를 수입해왔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조선반도는 중원문화에 대한 절대적 동경과 흠모와 존경과 숭배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이념적으로 오히려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이념화시킨 사례도 많다. 그 일례로 조선반도는 조선조 500년을 통해 삼강오륜을 비롯한 유교와 주자학(신유학)을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경직되게 이념화했다.

학계에서는 동북아시아를 유교문화권이라 칭하는데 필자는 중국, 일본, 조선의 유교를 아래와 같이 명명한다.

중국은 한조이래 유교가 주축이었으나 유불도가 엎치락뒤치락했고 삼교통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유교가 사람들의 근육에까지만 침투되어 ‘근육유교’라 부르고 싶다. 일본은 ‘晝朱夜明’, 즉 낮에는 주자학을 배우고 밤에는 양명학을 공부하는 이중적이었고 유교를 절대화하지 않았으며 유교가 기껏해야 피부에만 스쳐지나갔기 때문에 ‘피부유교’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조선은 조선조 500년 동안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듯 조정으로부터 민간생활에 이르기까지 전부 유교로 규범화시켰고 유교가 사람들의 뼈속까지 침투되었으므로 ‘뼈속유교’라 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근대화 이후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후 조선반도에는 두 가지 ‘중원문화’가 앞에 놓여 있었고, 이남에서는 미국을 중원문화로 받들고 숭배해왔으며, 이북에서는 마레주의를 숭배하고 실천해왔다. 필자는 이 지구상에서 남의 문화에 대해 가장 이념화가 심한 것이 조선반도라 본다. 이를테면 이 지구상에서 밤에 동서남북 어디에 눈길을 돌려도 십자가가 흔하게 보일 정도로 기독교열기가 가장 뜨거운 것이 조선의 남쪽땅이요, 아직까지 문을 걷어 닫고 자본주의문화와 ‘룰’을 거부하는 국가는 조선의 북쪽땅이다. 이런 결과는 결국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을 만큼 서로 쪼개져 있고 통일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참으로 비극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으로 풀이해보면 조선족은 1860년대부터 속칭 만주땅에 이주해 처음에는 땅을 개간하고 생계에만 몰두해오다가 토지소유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약속을 믿었고 그때부터 예로부터 중원에 매달려온 역사의 관성이 <<문학과 예술>>의 조일남 사장이 지적했듯이 ‘공산당의 영도 하에’를 바짝 쫓는 새로운 이념이 자리 잡게 되었고, 누가 ‘공산당의 영도 하에’ 더 충실하느냐는 경쟁이 생겨났고 따라서 서로 죽고 줄일 정도로 사상과 이념이 ‘째빨겨졌다’.

물론 조선족이 ‘째빨간’ 것이 나름대로 이와 폐가 있다. 중국공민의 일원으로 빨리 자리 잡게 된 것은 ‘이’요,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것은 ‘폐’다.

조선족은 문화혁명을 거치고 나서 서로 물고 뜯고 하는 바람에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이 전혀 단합이 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조선족의 ‘째빨간’ 사상이 조선족사회에 피해가 컸다는 것을 마땅히 반성하고 단합을 도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조선족사회 엘리트에 속하는 지식인들이 아직도 문화혁명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조선족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사상과 이념이 개방되지 못해 아직도 한 때 떠들썩하게 받았던 이념과 사상의 교육 틀에 맞춰 남이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는 소위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조선족사회가 아직도 문화혁명 중이라는 근거로서 아래와 같은 실례를 들어보자.

첫째 흑백구의 논리

우리민족이 세상에서 가장 흑백논리가 강하게 된 것은 조선조 500년에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몰아붙인 데서 생겨났다고 필자는 본다.

누가 든 비유였던지 기억에 남지 않지만, 아무튼 <<추한 중국인>>의 저자 백양은 흑백구의 논리로서 중국인의 흑백논리를 지적했다. 즉 커다란 흑백구가 있는데 흑 측에서 공을 본 사람은 축구공은 검은 것이라 주장하고, 백 측에서 공을 본 사람은 축구공은 하얀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흑 백 양측에서 서로 자기주장을 하다 보니 둘 다 틀렸으면서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 진리라고 여기고 남을 이단이라 취급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상대편의 입장에서, 한국의 한자 어휘인 ‘易地思之’해야만 남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문화혁명 때 받았던 사상과 이념 교육 틀에 맞춰 타인을 대한다면 남의 문장에 대한 독해력에도 문제가 있거니와 폐쇄된 언저리문화수준을 뛰어넘을 수가 없고 기껏해야 인신공격밖에 더 있겠는가!

둘째 푼수를 알고 살자.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자신의 푼수를 알고 살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 한마디로 더 유명해졌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인간은 앉을 자리 설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진정 자신의 푼수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마다 나름대로 제 잘난 멋에 살기 때문이다. 허나 집단을 놓고 말하면 푼수를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조선족은 한 때 제 노릇도 하기 힘든 중국이 마치 구세주인양 “전 세계 삼분의 이 인류를 해방하자.”는 등 거창한 교육을 받은 탓에 사유가 따라서 거창해졌고 자신의 푼수를 모를 정도로 거창하게 문제를 들먹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영전 선생을 모른다. 그저 그에 대해 말썽이 많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시시비비에 휘말릴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고 또 그를 모르고 있어 왈가왈부할 자격이 전혀 없다. 다만 일부 그를 비평하는 문인들이 “남영전은 7,000만 겨레 앞에서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사이트에서 보고 한마디 하려고 한다.

우리 조선족은 중국공민으로서 중국법을 지키며 착실하게 살아가면서 조선족공동체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정도이지, 일개 조선족이 가령 어떠한 일을 저질렀다 해도 어떻게 거창하게 7,000만 겨레를 들먹일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좀 자신들의 푼수나 알고 살자.

셋째 김문학의 현상에 대하여

내가 김문학에 대해 들은 것은 2006년 02월 <<연변여성>>잡지사 이선희 사장을 만나고 나서 처음이었다. 그때 나도 조선족사회폐단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7편의 문장을 그 잡지에 시리즈로 발표하게 되니 김문학의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 그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국인이 <<추한 미국인>>을, 일본인이 <<추한 일본인>>을, 중국인이 <<추한 중국인>>을 썼다 해서 국가와 민족의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만 작가 백양이 그의 <<추한 중국인>>에서 “중국유교문화를 ‘장독구더기’로 비유하고 중국인의 추한 면모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하지만 백양은 대륙에 와서 대환영을 받았고 중국인은 그의 작품을 통해 반성의 계기로 삼았다.

김문학의 <<이야기 삼국지>>인지 뭔지 나는 보지 못해 할 말이 없지만 최근에 또 ‘조선족대개조론’인지 뭔지 하면서 그를 들먹이고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누가 어떤 글을 썼던지 있으면 반성하고 고치고 없으면 참고하려는 태도와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임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 본다.

그리고 그러한 글에 대한 흑백 ‘평가’에 열을 올리느라 시간을 허비할 거면 차라리 <<삼국유사>>나 한 페이지라도 읽는 것이 더 생산적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김문학에 대해 얼마나 민감했으면 일부 조선족 지식인들이 나의 글을 읽고 김문학을 들먹이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해 비평의 발언을 하면 민족의 역적이란 말인가? 이는 순전히 문화혁명 때 흑백논리라 볼 수밖에 없다.

넷째 지와 식의 문제

조선족사회 일부지식인들이 나보다 결코 책을 적게 읽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그들보다 책을 적게 읽었다고 인정한다.

지식이란 독서를 통해 얻어지고 또 사회생활을 통해 습득한다. 고로 지식은 ‘지’와 ‘식’으로 나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지’는 풍부할지 모르겠으나 ‘식’도 풍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지’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인데 반해 ‘식’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 우리는 주변에 공부를 못한 사람이 판단력과 결단력 및 언변이 좋고 논리가 정연하고 타인의 존중을 받는 사례를 많이 본다. 이것이 곧 ‘식’의 문제이다. 예로부터 ‘有知之士’란 말은 쓰지 않는데 반해 ‘有識之士’라 하고, “저 사람이 유식하다.”고 말하지 “저 사람이 유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보다 ‘식’이 더 중요함은 더 의논의 여지가 없다. 내가 조선족지식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던 발언도 그들의 ‘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부조선족문인들의 치명적인 폐단은 한때 받았던 이념과 사상의 교육 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비록 책을 많이 읽었다 해도 현대사회에 대한 ‘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認’만 있고 ‘知’가 따라가지 못하거나, ‘學’은 있어도 ‘問’이 결핍하기 때문에 타인의 글을 읽을 때 왜 그렇게 썼을까에 대한 독해력이 부족하고 아울러 엉뚱하게 풀이하고 매도한다. 그들은 타인을 나뭇잎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고 평가하지만 자신들이야말로 그런 폐단을 안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 학문적으로 ‘식’이 매우 결핍하여 남의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에 대한 독해력이 문제가 있어 자신이 모르면서 오히려 타인을 모른다고 함부로 꼬집으니 참으로 비극이다.

이를테면 내가 “우리선조들이 역사기재를 남기지 않아 민족역사를 연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는 발언에 대해 어떤 지식인은 조선왕조실록과 팔만대장경을 거론하고 대조영 드라마제작에 조선족지식인들이 발해사자료제공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나를 남의 역사만 알고 우리민족역사를 모른다고 꼬집는 것은 천박한 발언이다.

나의 발언의 취지는 중국에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상서>>, <<춘추>> 같은 사서가 등장하고 기원전 한무제 때 사마천이 완벽한 사서를 지어냈고, 일본은 702년과 712년에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펴냈던데 비해 우리선조들은 기원 11세기에 이르러도 사서다운 사서가 없어 김부식이 송나라에 가서 3년 동안 배우고 연구하여 중국 사서를 모방하여 겨우 써낸 것이 <<삼국사기>>이며 1145년에 출판되었다. 그 후에도 현재까지 <<삼국사기>>를 뛰어넘는 사서가 등장하지 못했다. 1280년에 출판된 김일연의 <<삼국유사>>도 첫머리가 “魏書云”으로 시작했듯이 중국 사서를 떠나서는 우리민족역사연구가 이뤄질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포괄적인 역사맥락도 모르고 남의 글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올바르지 못한 태도라 나는 생각한다.

‘지’와 ‘식’, ‘인’과 ‘지’, ‘학’과 ‘문’의 문제는 물론 사상해방부터 앞서야 해결될 문제이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한족 지식인들은 한때 문혁교육의 틀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반해 일부조선족지식들은 아직도 그 틀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 전에 지적했던 봉건이란 용어에 대해 한족지식들은 되도록 봉건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데 비해 일부조선족지식인들은 아직도 봉건이란 용어를 반성하자는 나의 발언에 대해 마치 하늘땅이 뒤번져지는 듯 호들갑을 떨고 있다.

서양인이 제작한 <<금단의 도시, 자금성으로 가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봉건이란 말이 단 한번이라도 출현하지 않고 세계 어디를 보아도 과거 중국역사를 말함에 있어 봉건이란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 고국 한국도 마찬가지로 역사를 논함에 있어 봉건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봉건이란 용어가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상서>>에 등장하는데 명사로서의 의미보다 동사에 가깝다. 분봉제를 일컬을듯 봉하고 건설한다(封土建國)는 동사적의미로 나타난다.

서구에서 말하는 봉건은 중세기 농노제이며 그 성격은 장원영주제를 뜻한다. 우리 중국 진나라 때부터 통일중앙집권제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문제는 앞서 지적했던바와 같이 칼·맑스의 역사오단계설의 도입에 따라 중국에서 봉건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었고, 거기다 두들겨 맞추고 교육시킨 결과 조선족마저 아직까지도 봉건이란 용어에 껌뻑 죽을 정도로 깊이 침투되고 뿌리박혔다.

여기서 1930년대 곽말약이 처음으로 칼·맑스의 역사오단계설에 근거하여 <<중국고대사회연구>>를 통해 중국역사시대획분의 시도를 했고, 呂振羽 측과 중국역사시대획분에 대한 논쟁과 그 과정을 생략하고 말하자면 결국 곽말약이 득세함에 따라 그의 학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논쟁을 하지 않기로 결론 냈다. 만약 봉건이란 용어가 청말까지 중국역사와 딱 맞고 똑 떨어진다면 굳이 논쟁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더 이상 논쟁을 금하고 막 밀어붙이기 식으로 결론지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현시대에서 봉건이란 용어의 남용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나는 일부조선족지식인들에 대해 충고할 자격이 없지만 ‘지’만 추구하지 말고 ‘식’을 넓히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울러 이념과 사상을 해방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폐쇄된 언저리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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