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칼럼] 자대
최정실(교원)
살다 보면 인간의 일거일동은 자대의 차이에 따라 부동한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연히 긍정을 받아야 할 습관과 행위가 말밥에 오르거나 부정당할 경우 기분이 잡쳐진다. 이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고정 관념과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애교가 꽤 많은 축이다. 좋으면 “아, 좋아!”라고 손벽을 치며 환성을 올리기도 하고 신나게 춤까지 출 때도 있다. 나의 둘째언니는 그런 나의 애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먼 후날 나의 애교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가살로 느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십년이 지난 어느 날 무용련습이 끝난 후 우리는 한 동료가 사온 꿀떡을 먹게 되였다. 알록달록 여러가지 색갈의 꿀떡을 보는 순간 나는 또 저도 모르게 “아, 좋아!”라고 손벽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그런데 며칠 후 동갑인 A씨가 나를 보고 아주 정색해서 말하는 것이였다. “정실이, 우리 이 나이에 너무 가살 피우면 안돼, 꿀떡은 못 먹어본 음식도 아닌데 그게 뭐 그리 좋아서 그 날 몸짓까지 해가며 환성까지 올리지?” 나는 진심으로 나를 위해 충고를 아끼지 않는 A씨의 마음이 고마왔다. 그러나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그대로 좋다는 표현을 했을 뿐이였다. 이로 해서 나는 며칠 동안 고민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날 한자리에 있었던 나의 몇십년 지기인 B씨에게 느낌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랬더니 B씨는 전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언니도 B씨도 나의 애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은 자주 나의 애교를 보아와서 익숙해졌기 때문이였고 A씨에게 나의 애교가 가살로 비춰진 것은 내가 상대에게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량측 다 자기만의 익숙한 정도의 틀 안에서 만들어낸 자대로 나를 쟀던 것이다. 즉 후자는 자기 틀 안에서 생긴 기준으로 고정된 관념으로 나의 애교를 판단했기 때문에 나의 애교가 가살로 느껴진 것이다.
한 사람의 고정 관념은 또 늘 그 사람의 선입견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한 사물과 사람을 평가할 때 우리는 절대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하늘이 우물 만큼 크다’는 식으로 자기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판정하면 안될 것이다. 반드시 익숙한 틀 안의 자대로 재는 고정 관념과 그로 말미암아 초래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우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포용해주자. 약간은 부자연스럽더라도 인정하고 허용하자. 그런 다음 타인의 단점도 받아들이자.
한 사람의 흉금의 크기는 얼마만큼 포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흉금의 크기는 그 사람의 삶의 무대의 크기를 결정한다. 즉 사람을 너그럽게 많이 포용하면 할수록 우리가 늘 말하는 그릇이 큰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술병을 꽃병으로 사용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고 담기는 꽃에 따라 술병이 꽃병보다 더 돋보이는 것처럼 기존의 틀을 깨여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선입견을 버리면 한 사물과 사람의 단점이 장점으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나무잎이 그렇게 많아도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서로 다른 존재이다.
소시적의 아인슈타인이 둔하기로 이름 나고 문제아 취급을 받았을 때 그의 어머니가 변함없는 모성애로 보듬어주지 않았더라면 후날의 세계의 유명한 과학가로 자라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으로 포용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고정 관념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사람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면 이 세상이 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질 것이며 진정 살맛이 날 것이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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