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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2016년 03월 28일 10시 06분  조회:5470  추천:3  작성자: 오기활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리종권의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에서 두번째 답을 찾았다 
                     오기활
 
별빛도 정다운 강변에서 / 사랑을 속삭이는 련인들이여
텔레비죤앞에 모여앉아 / 이밤을 즐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 / 이 땅을 찾아준 은인들을 
아직도 어느 한 심산속에 /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이 시는 길림신문사 문예부 기자를 지냈던 리선근선생이 1979년에 조선족녀항일투사 최희숙의 사적을 취재하고 이듬해에 작사한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는 제목의 노래 1절가사이다. 작가는 행복한 생활에 대한 가송과 함께 생명을 바친 렬사들에 대한 추모의 감정을 무거운 주제로 선택하고 대화체형식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 가사의 핵심키워드는 “렬사”이다. 작자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산속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잊지 말자는 것을 세인들에게 노래로 부탁을 하였다.이 부탁은 천번만번 옳고 옳은 부탁으로 영원할것이다.
 
이에 비춰 필자는 혁명렬사의 후대인 리종권선생이 최근에 출간한 자서전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를 읽고나서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의 또 다른 답을 찾게 되였다.
 
이에 필자는 렬사후대 리종권과 그의 외사촌 녀동생 김문자 두남매간의 애달푼 원성(怨聲)으로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의 답을 보충한다.
 
이하는 “나는 이렇게 살아 왔다”에서 읽은 두남매간의 원성이다..
 
“아빠야 원망스러워”  
조선전쟁은 가열처절하였다. 
길이 2700메터 너비 1000메터밖에 안되는 상감령고지에서 10만명의 군사들이 43일간 싸우면서 적 아 쌍방이40600명이 사상자를 낸데서 상감령은 사람의 시체로 뒤덮혔고  피물로 물들었다. 
1952년 10월 14일 미군은 7개 보병영과 18개 포병영을 투입하고 200대의 폭격기로 폭탄 600개, 포탄 30만발을 투하발사하였다. 지원군은 두개 련과 한개 패의 병력으로 상감령을 고수하며 40여 만발의 탄알과 10000여 발의 수뢰를 발사하였다. 
상감령전투에서 지원군은 7100명이 사망, 8500명이 부상을 당하고 16개국 련합군은 11300명이 사망,  1360명이 부상당하였다. 사망 비률은 1:1.6이다. 
이처럼 참혹한 전쟁터에 친인을 보낸 이들은 피눈물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는 어머니가 왜 밤마다 울고있는지를 잘 알수가 없었다.  
“엄마, 울지마.”   
“나 공부 잘할께. 아빠처럼 큰 사람이 될께”.
“그래 그래. 응. 나, 안울께. 엄만 그저 울어보고 싶어 그러는 거야. 어서 자자.”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였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지만 나는 내 꿈을 이어 갔다.
“산에 들에 꽃잎 피고 
종달새 노래하는
나서 자란 우리들의 
마을을 보아라
깊은밤 어두움에 
신음소리 흐르네
아…나어린 가슴에 
분노의 불길 싣고
나섰다네. 싸움의 길로
 
나는 날마다 조선영화 “소년 빨찌산 노래”의 주제가를 부르고 붉은 넥타이를 휘날리며 힘차게 학교로 달려 갔다. 내 조국, 내 고향을 위하여 싸우는 아버지를 뒤따라 새나라의 빨지산대원이 되려고 꿈이 많았고 가슴도 벅찼다…
 
우리는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고대했다. 나는 어린나이 때 아버지가 언제오나 기다리며 기차소리만 울려도 아빠가 돌아오는 환각에서 매일마다 역전에 나가 아빠를 기다렸다 …

할아버지는 어쩌다 동네 잔치집이나 제사집에 가시면 폭음을 하고 고주망태가 되여서 돌아왔다. 차거운 강바람에 두루마기자락을 날리며 비틀비틀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왜소한 체구는 방금이라도 쓸어질듯 싶었고 벼랑으로 굴러 떨어 지는듯 하였다. 
 
“귀송아(큰아들로 작자의 아버지임ㅡ필자) 너희들 다 어디에 있는냐? 내가 뭐냐? 무슨 혁명가야? 왜 세자식을 나라에 다 바쳐야 하니? 난 너들의 아버지로 살고 싶다. 너들의 받아다 주는 술을 한잔이라도 마셔보고 싶단 말이다 … 이 못난 자식들아!  남들은 다 있는데 너희들은 왜 가 버렸느냐 …” 
 
애처로운 부름소리가 강물에 실려 흐른다. 고개길마루에 올라서자 그는 쓰러저 버렸다. 할아버지지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정신없이 고개 마루로 달려갔다.
 
 “내 아들들아, 나 어쩌라고 … 귀철아! 귀석아! 귀송아!”   
전방에 내보낸 세 아들들의 이름을 서로 오가며 부르고는 대성통곡을 하는 할아버지의 목갈린 웨침소리는 피를 말리고 간을 말린다. 
쓰러진 할아버지의 두손엔 풀잎이며 흙부스러기가 손이 터지도록 쥐어져 있다. 얼굴에는 생채기와 함께 검붉은 피가 말라 붙었다.
“상무(저자의 애명)야, 너 혼자서도 살아야 한다. 너 잘 살아야 한다!” 
“상무야, 엄마를 따라 가라. 엄마를 놓치지 말고 …”
 “너는 살아야 한다… 이 눔아…!”
산악이 흐느끼며 메아리 친다. 
“너 혼자서도 잘 살아야 한다 … 상무야 …!”
“어 … 허. 흑 ….. 흑”할아버지는 땅을 치며 통곡한다 … 
 

 
아들 리광택에게 가문의 계주봉을 참답게 이어가라고 부탁하는 리종권씨

마을에서는 할아버지를 주정뱅이라고 부렀지만 세아들을 모두 전쟁터에 내 보낸 할아버지는 속타는 마음을 독한 술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처절한 심정을 그 누구도 알아 주지는 못하였다.
 
할아버지는 해마다 나를 공부시켜 주겠다면서 송아지를 키웠지만 그 소가 얼마나 컸는지는 나는 보지 못했다.1955년 가을. 아버지가 조선전쟁에서 사망되였다는 부고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민정부에서 발급한 렬사증이 구정부로부터 내려왔다. 
할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며 기나긴 탄식을 했고 어머니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나는 애처롭게 울면서 힘없이 머리를 떨구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듯했다.
 
 나는 삼으로 짠 베상복을 입고 허리와 머리는 새끼줄로 동여매고 긴수수장지팽이를 손에 집고 맏상제의 자리에 섰다. 조문객들은 먼저 나에게 절을 하며 위안의 말을 하였다. 나는 그들이  “태산같은 희생”이기에 “영생불멸하리” 라며 말하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뜻을 잘 알아 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할아버지가 웃 방에서 “아이고 아이고” 통곡하고 정주문 주방에서 어머니가 “애고애고” 땅을 치고 고모가 애처롭게 우는것을 보며 나는 그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떨구 었다. 이젠 목이 메여 소리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영전앞에 무릅을 끌고 아버지를 회억해보았다.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세살 때 단 한번 돈화에 가서 허리에 권총을 찬 멋진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어슴프레 남을 뿐이다. 그것도 사진으로 본 기억이다. 나는 아버지한테 정이 있어서 운것이 아니라 원망스러워 울었다. 
 
“왜서 우리만 남겨놓고 갔는냐?” 고. 
“왜서 아빠 없는 아이라고 아이들에게 몰리우고 가시를 당해야 하는냐?”고.
“왜 집 없는 아이가 되여 눈치살이를 하여야 하느냐?”고.    
“왜서 마지막 생리별길에서도 전사들 보기가 민망하다고    빨리 돌아 가라고 우리를 재촉하였느냐?” 고… 
나는 어머니를 붙안고 울었다.
 “엄마 울지마….”
 아버지의 기억을 아무리 찾고 헤매도 찾을길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은 어떠하였을까?”
아버지는 수년간의 고학생활과 군인생활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군인적인 사랑”은 나에게도, 어머니 에게도 큰 실망과 상처를 주었지만 어머니는 한눈 팔지 않고 나를 아버지의 씨긁이 라면서 한평생을 지키면서 당당하게 살아 왔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서 저 세상으로 갔을까?” 
 
지금도 손을 꼽아보면서 아무리 헤여봐도 잡히는 것이 없다. 정도, 사랑도 없다. 그저 달랑 사진한장과 혁명렬사증 뿐이다. 사진은 추억을 남겼지만 렬사증은 원한만 남겼다. 렬사증으로 먹고 살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전선에서 목숨바쳐 싸우는 사이에 전쟁이 두렵고 목숨이 아까워 참군하지 않는 인간들은 마음껏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권세도 잡았다. 넓직한 관사에서 장가도 들고 자식들도 한 구들을 두었다. 
 
하지만 우리는?

생사리별의 고통속에서 어머니는 병들어 누웠다. 나어린 나는 어머니를 구할길이 없어 설음이 복받쳤다.어머니는 사업터의 령도를 찾아가 애걸해도 랭대만 받았다. 천장에선 비가 새여 내리고 비바람에 벽이 떨어지고 아궁이에서 삼단 같은 연기가 새여 난다. 수리해야 할 사람은 여라문 살 밖에 안되는 나 혼자뿐이였다. 
 
설명절이면 남들은 조상을 모시고 폭죽을 터뜨리며 등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한산한 우리 집엔 위문왔다는 이들이 집안도 들어다 보지도 않고 달랑 푸른잎도 없는 붉은 종이꽃 한송이를 외벽에 달아놓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하라”는 말만 남겨놓고 꼬리를 뺐다.  
 
우리들의 마음의 고통과 상처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이것이 아버지의  “태산보다 높은 죽음”과 “영생불멸하리라”는 업적의 대가일까? 
 
그래도 나는 아버지를 자랑으로 생각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원히 혁명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지금도 역시 확고부동하지만.
우리에게 큰 산이였던 아버지가 무너졌다.  
   
“혁명이란 이런 것인가? 죽는것이 정말 영광일까? 죽으면 어디로 갈까?” 이런 생각에 지쳐 나는 더 울지도 못하고 수수장지팡이만 잡고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을 받았다. 
 
그후 벽수촌에 렬자비가 세워졌다.퇀장급의 아버지와 삼춘의 이름이 첫머리에 나란이 새겨져 있었다. 부고에는 퇀 참모장이였던 아버지는 1950년 9월 포항뒷산에서 전사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아버지는 25세, 어머니는 23세, 나는 5 살이였다.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상무(종권씨의 애명)는 내가 책임진다고 편지를 보내왔던 세째삼춘도 1954년 정전협정체결직전에 묘향산 군사학원에서 미군의 폭격에 전사하였다. 그때 겨우 21살이였다.
 
 “아버지를 내놔라” 
 
나의 오촌외숙인 김영선이도 사평전역과 남창전역에 참가하여 일급 영웅칭호를 받았고 다시 해남도 해방전쟁후 비밀리에 조선에 파병되여 참전하였다.    
 
외숙모는 혼자의 농사일로는 두 모녀가 살아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60년대 초에 작은 시누이를 찾아 룡정으로 들어와 해빛도 찾지 않는 어둑한 고방 한칸을 세를 맡고 딸 문자를 공부시켰다. 
 
나의 외사촌인 문자누나는 한어를 특별히 잘한데서 조선족들 가운데서 찾기 힘든 인재로 불리였다. 그는 가도판사처의 일손을 돕다가 림시로 저축소에 취직하고18원의 로임으로 두 모녀가 근근득식을 하였다. 그런데 출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 모녀가 농촌에서 왔다는데서 하방호로 획분되여 농촌으로 내려가야 한단다.
 
매일마다 가도판사처사업일꾼들이 집에 찾아 와 빨리 농촌으로 돌아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전선에서 영웅이였던 아버지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의 전우들이 아버지가 조선 전쟁에서 희생되였음을 증명해도 렬사증은 내려오지 않았다. 
 
외숙모가 새우등이 되여 땅을 거의 핧타시피하면서 가도일군들을 찾아가 제발 하방만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문자누님은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의 아버지를 내놔라 … 아버지를 내놔라 …” 
 
나 어린 문자누나는 집을 찾아온 간부들 앞에 업드려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농촌으로 못 갑니다.  갈데도 없습니다…”
 
그는 이성을 잃고 아버지를 찾으며 어머니품에 안기여 한없이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이런 사정을 가슴 아프게 바라 보던 나는 16살 어린 나이에 행여나 해서 조선정부와 최용권위원장에게 편지를 써 보내여 이들의 비참한 사정을 호소하며 렬사증을 보내주기를 간청하였다.  렬사증이 내려오면 농촌에 쫒겨가지 않을거라는 생각에서.
 1962년 여름 중화인민공화국민정부에서 외숙부의 렬사증이 발급되여 행방불명이던 그의 처신이 해명되여 혹시 포로가 되지 않았는가며 왼눈으로 흘겨 보던 사람들의 기시도 풀렸다.  
 
당년에 중국인민지원군들에게 드리는 선물인 하얀 사기 컾에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빨간글이 새겨져있다. 그 컾으로 우리는 사랑을 느꼈고 두손에 그 컾을 바쳐들며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긴듯 하였으며 그 컵에서 희망찬 리상을 그려 보았다….
 
이제껏 나라에서 그들(렬사)에게 진빚은 어떻게 보상할까? 피와 목숨을 바쳐 죽어간 사람은…? 그들의 자식들은…?
인젠 그 컾도 깨지고 우리의 인생도 죽어간다.
 
꽃나이에 죽어간 그 사람들도 불쌍하지만 그 품에 안겨보지 못한 어린것들 역시 더없이 가련하고 불쌍하다. 
 “아빠의 덕이란 도대체 무엇일고?” 
 
“청상과부를 남겨 놓고서도 아빠는 저 세상에서 편할가?”
 
나는 아직도 이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 지난세기 50년에 방금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抗美援朝 保家爲國”이라는 8자 구호를 내걸고 해방을 맞은 백성들을 조선쟁에 보내였다. 금방 해방을 된 고향의 친인들이 가정을 보호하려는 불타는 일념으로 용약 참군, 참전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당년에 50만 조선족인구에서 6만명이란 조선족들이 중화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항미원조보가위국전쟁에 용약 참전하면서 막대한 희생을 빚어냈다. 그렇다면 자기가 죽을것을 각오하고 전선에 나가는 참전용사들이 바랐던 보가(保家)는 구경 무엇이 였을가?
렬사들이 눈을 감으며 바랐던 보가(保家)는 필경 부모, 안해, 형제, 자녀라는 가정의 안녕과 모든 후세들의 자유와 평화, 행복한 생활이였을 것이다.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에서 리선근선생이 바라는 답은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잊지 말자는것이였다면 필자의 기준으로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의 바람은 가족과 친인들의 행복한 생활이 아닐가?
 
이에 비춰 본다면 우리의 당과 정부기관, 그리고 정부관원 및 모든 국민들이 혁명렬사들의 혼을 기리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해 왔으며 렬사들의 후대에 대한 관심사업에 얼마만한 정력을 기울렸을가?
 
이는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는 질문에 한결같이 자문자답할 숙제라 하겠다.
 
 (리종권씨는 도문시문화국, 도문시라지오텔레비방송국 선임부국장으로 사업을 주체했고 연변석유정제공장선전부부장으로 퇴직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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