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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 ‘미태혼’으로 맺은 ‘잠자는 공주’와의 사랑
2020년 06월 01일 05시 03분  조회:3989  추천:0  작성자: 오기활
90대 로부부의 사랑 이야기
나는 연변농학원 정년 퇴직 교수인 김수철이다. 1925년 4월 1일에 룡정시 태양향 횡도촌 향양툰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고 일곱살에 백부님의 계자로 앞을 섰으며 열살에 마을의 서당인 ‘양홍사숙’에서 배움을 시작하여 1942년 1월에 결혼 나이(18세)가 되자 백부님의 강권으로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 때인 1월 31일에 결혼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 부부 사랑은 73년 간 이어졌다.
 
                                                                                             김수철교수

아버지의 ‘선견지명’ㅡ‘미태혼(未胎婚) ’
운명론자의 얘기로 세상에서 자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할 배필을 하늘이 정해준 ‘천생배필’ 또는 ‘운명의 씨앗’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네 약혼례가 전무후무로 사전에도 합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기에 우리 스스로 아버지가 ‘선견지명’으로 정해 준 ‘미태혼(未胎婚)’라 했다.
1920년대에 아버지 김창구(金暢九)가 연길시 백석구 4대에서 살면서 겨울이면 동내야학교를 다녔다.
그 때 웃동네 맹영철이란 동반 선배가 있었는데 맹의 문화수준이 아버지보다 높은 데다가 필법(笔法)과 구변(口辩)까지 좋고 경우가 바른데서 아버지는 맹씨를 숭배하였다.
‘저분과의 인정을 튼튼히 맺으면 천상 랑패가 될 일이 없겠는데…’
언녕부터 이런 속궁리를 해오던 아버지는 어느 날 엉뚱한 생각으로 ‘맹씨와 사돈을 맺는 것이 묘안이다’ 고 생각하며 지체 없이 맹씨를 찾아가서 말을 건넸다.
“맹유사(孟有司)…에!..에!...”, “…”, “…”
“김유사(金有司), 오늘은 어찌된 일이요? 에, 에 …”, “그런게 아니라… 에…어떻게 말씀을 올린다…”,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요, 할 말이 있으면 시원히 하라니까…”, “예, 그럼 감히 말씀을 올리는데 우리가 사돈을 정하면 어떻소이까?”, “아니, 사돈이라니? 뚱딴지 같은 소리를…”
“아니…예…말하자면 내가 딸을 낳고 맹유자가 아들을 낳으면…”, “아, 그런 말이였구만, 알만하이, 단마디로 우리 두집에서 낳는 자식을 약혼시킨다는 말이구려… 약혼을…” , “맹유자는 실로 말귀가 빠르네요, 바로 그런 말씀이우이다”, “아무렴, 그만한 말기야…그런데 아직까지 우리 집 사람이 태기도 없는 데다가 지금의 청년들이 자유 련애를 하는 판에 설마 혼사가 끝까지 성사될가 걱정되네요. 혼사말은 허타히 하는 것이 아닌데…”
“후에 자식들의 혼령이 되면 그 때에 다시 …”, “…자식들의 앞날 일은 이쯤으로 마무리를 합시다.”
그날 저녁에 이렇게 아퀴를 짓고 두분은 조용한 곳을 찾아 대작을 하면서 아직까지 량가 부인들이 태기(胎氣)도 없는데 ‘미태혼’을 축복했다.
1924년 음력 8월 15일에 맹씨가 큰 딸로 맹영자가 출생했고 1925년 음력 4월 1일에 김씨도 큰 아들로 나 김수철(아명 乙祿)을 출생한데서 나와 맹영자의 결혼이 량가의 ‘부정배필(父定配匹)’로 이어졌다.
 
백부님의 강권
 
                                                                            신랑 김수철, 신부 맹영자

공맹지도는 한 가문에 후대(아들)가 없다면 조상에 대한 불효라고 하였다.
하여 ‘갓바위집’ 제9대인 김창윤(金暢胤, 김수철 백부)이 아들을 잃고 ‘갓바위집’ 10대 장손으로 김수철이 7살에 백부의 계자로 되였다.
1941년 12월, 내가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에 진급한 기쁘던 날에 집에 갔더니 생각 밖에 백부님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결혼을 나에게 강권하며 무조건 순종하란다.
백부님은 언녕부터 계자가 결혼 년령(18세)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기에 1942년 첫날 내가 18세가 되자바람으로 동생(친부)을 불러 하루속히 손군을 안아보겠다며 며느리감을 곁드니 아버지는 며느리 감은 언녕 정했다고 했다.
백부님은 동생의 구구한 설명에 당장에서 친척을 밀사로 파견하며 손금보듯이 맹녀의 정황을 알아오도록 했다.
며칠 후 밀사의 회보에 따르면 맹씨 가문은 례절 밝고 인심이 좋고 경제가 넉넉한 가문이라고, 맹씨네 자녀는 5남 1녀로 모두 건강하고 총명하다고, 인물 좋은 맹녀의 단 한가지 흠이라면 아버지가 딸을 공부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백부님은 구수하벌에서 농촌 색시로 공부를 한 18세의 색시를 보고 죽자고 해도 못 찾는다며 결혼을 재촉하였다.
아버지의 선택에 백부님의 강권을 못 이겨 나는 1942년 1월 31일 (음력12월 6일)을 결혼 길일로 스스로 정하였다.
 
신랑의 〈아리랑〉에 신부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결혼 전날인 1942년 1월 30일 저녁이다.
나는 6간 초가집 방에서 초불을 켜놓고 9촌 할아버지(金炳活)의 지도하에서 ‘큰글’을 섰다.
‘큰글’이란 신부집에 보내기 위한 것인데 내용은 ‘백년해로를 맹세하는 신랑의 결심서’이다.
결혼 후 리혼을 하면 이 ‘큰글’종이를 절반으로 나눠서 각기 보관한단다.
이틑날 이른 아침, 아직 해 뜨지 않았지만 신랑이 떠날 준비로 모두가 서둘렀다. 신랑의 몸차림은 나의 주장대로 그냥 중학생 학생복과 겨울모자 차림이였다.
나는 이상분들에게 “색시를 잘 데려 오겠습니다”며 큰절을 올린 후 길을 떠났다.
조양천에서 삯을 내서 붉은 종이로 꾸린 꽃마차는 방울소리를 절렁절렁 울리면서 하얗게 눈이 덮인 산길을 따라 해뜨는 동남 백석구쪽으로 반시간 푼히 달려 20여호의 초가집이 산재한 백석구의 남향쪽 6간 초가집 마당에 서서히 멈췄다.
명절 옷차림을 한 하객들이 사방에서 신랑을 보려고 꽃마차 두리에 몰렸다. 여기저기서 “아무리 봐도 신랑 같지 않다”, “중학생이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꽃마차에 내린 내가 구두를 신은대로 ‘디딜패’를 밟으며 집문 앞에 이르니 신랑측 생빈이 다른 길로 문앞까지 와서 준비한 례단을 올린 후 전안례(奠雁礼)까지 끝내고 신랑 방에 들어서니 크게차린 신랑상이 들어왔다.
그럭저럭 큰상을 처리하고 나니 신부가 떠날 시각이 되였다. 이제부터는 신랑신부가 상면하는 극적인 장면이다.
‘아버지가 어떤 제비를 뽑고 나더러 펼쳐서 보라고 할가?’ 이런 생각이 앞섰지만 아버지가 정한 일이니 할 수 없었다.
하얀 꽃너울을 쓴 녀인이 나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서로 따로 서면 나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살결은 일반 녀인들보다 퍽 흰 편이다. 낯은 반반하고 특별이 보기 싫게 튀여 나온 곳이 없었다. 눈길도 아주 순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현실로 증명되였다.
꽃마차가 영원히 운명을 함께 할 맹양(孟娘)을 싣고 백석의 동구령의 오르막 길을 달리는데 말발굽 소리가 그렇게 가볍고 신나게 들렸다. 집마당에 도착하니 동내외의 하객들이 웅성거리며 밀려온다.
신랑신부가 꽃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었던지 6명의 한족 나팔(새납)쟁이들이 잔치집 마당에 나타나 축하의 나팔을 불어댔다. 그에 따라 온마당의 남녀로소 하객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신부를 맞이했다.
한족 나팔쟁이들에 따르면 지나가던 걸음에 조선족의 잔치 집을 만나 신랑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오매에도 잊지 못할 감사한 분들이였다.
어느덧 밤이 되여 결혼 축하 오락판이 펼쳐졌다.
참석자들이 5, 60명이 잘 되였다.
한동네 청년이 큰 박수로 오락 시작을 선포하고 신랑신부 상견례, 신랑신부 선물교환, 신랑신부의 독창과 합창...순으로 오락판이 이어졌다.
신랑이 절절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넘기고 신부를 걱정했는데 생각 밖에 신부는 물찬 제비마냥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 숙여 수줍은 인사를 하고 나서 미루 준비 했는지 〈홍도야 울지마라〉를 그렇게도 간절하게 불렀다.
신랑신부 합창으로 부부가 손 잡고 〈도라지〉룰 부르니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다음은 중학교 동창 리수호의 축사에 이어 신랑의 발언과 신혼 려행이다.
신랑신부 려행은 신랑신부서로가 팔을 끼고 방안을 한 고패 도는 것이다.
신혼 려행을 끝내니 신랑더러 략사(略史) 보고를 하란다.
나는 략사보고에서 우리들의 약혼은 ‘미태혼’이라는 것, 그 사이 신부가 너무나 보고 싶어 남들의 눈을 피해 늦은 밤길을 다니며 맹녀를 만나 보았다는 등 ‘아름다운 거짓말’로 하객들을 웃기였다.
오락판은 전체 하객들의 합창과 춤으로 여흥을 푼 다음 모두의 기립 박수로 페식을 선포하였다.
아침에 밖에 나가보니 밤새에 싸락눈이 내려 땅을 덮었다.
항간에서 신부가 다녀온 길을 눈으로 덮으면 신부가 시집에 안착하고 시집살이를 잘 한다고 전해지기에 모두가 기뻐했다.
아침 식사 후 사람들이 놀려왔는데 강희태씨가 간밤에 난데없는 부엉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겨울에 들리는 부엉의 울음소리는 경사의 길상이라고 했다.
실로 우리 부부는 4남 1녀를 낳고 금혼잔치까지 지내고 90이 넘도록 동고동락하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냈다.
나는 ‘안해’를 ‘집안의 해(태양)’라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중하듯 안해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딸과 함께 행복했던 안해 맹영자(왼쪽)
 

이하는 부인 탄신 93주년에 올린 나의 축수문이다.
“오늘은 맹모의 93주년 생신 날입니다. 오늘의 행사를 명심하여 준비하고 참여하신 귀빈 여러분과 온집 식구들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로약한 몸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장모님을 부양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위 최명림(崔明林), 딸 김혜란과 보모( 保母), 그리고 맏아들 김상술 부부를 비롯한 자녀, 자부와 손자, 손녀, 증손 일동에게 맘속으로 깊이 간직해 오던 치하를 합니다!
맹모가 산출한 4남 1녀와 그의 자손으로 이뤄진 27명의 대가정은 모두 맹모의 잉태와 양육의 노력으로 이룩되였습니다. 그만큼 맹모는 위대한 녀성이며 나의 둘도 없는 ‘록색로친’ 입니다!
인생의 자연적인 산출과 사회생활, 찬란한 문화, 문명, 절대적인 사랑, 꿈, 행복 등 인류세계에 존재하는 모두가 바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창조한 걸작입니다.
한국의 안영희박사가 훈춘 경신 방천에서 아름다운 사막공원과 련꽃 늪을 비롯한 중, 조, 로 3국의 풍경을 만끽하면서 마음속 찬탄을 못이겨 올리는 말씀이 ‘어머니가 나를 낳았기에 나는 오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을 보게 되였습니다!’며 자기 몸을 낳아준 어머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도 50대 중반에 천신만고를 마다하고 두번째 장백산이라고 불리는 화룡 청산의 베개봉 절정에 올라가 만물을 굽어보며 베개봉의 암석에 ‘어머니’라는 위대한 석자를 새겼답니다.
세상에서 엄마를 잃은 젖먹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습니다. 이 순간 엄마를 잃은 아이가 부르던 노래 말이 떠오릅니다.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 오면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여 필 때마다 안아 주세요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눈에서 피가 흐른다
… … …
눈물이 앞을 가려 더는 읽을 수 없습니다….
맹모는 문화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며 백석(白石)에서 순진하게 자랐고 18세에 갓바위 집 김룡천의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철이 없는 부군(夫君)의 랭대를 받으면서도 수십년을 힘겨운 수전 농사일에 종사하였습니다. 맹모는 젊은 나이에 조상들의 추석 성묘로 가는 길에서 늙으신 시아버님을 업고 구수하강을 건너며 시부모 효도를 다 하였습니다.
맹모는 4남 1녀의 잉태와 양육에서 갖은 생활난을 겪어냈으며 매서운 양력설날 추위에도 홀옷 맵시로 부군과 함께 산에 가 땔나무를 하면서도 아무런 군말이 없었습니다.
맹모는 가지가지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한마디 불평 없이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온 손색없는 참된 어머니 용사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어머님 품에서 자란 자식들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은혜에 보은하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우리 대가정의 창성 발전의 길을 펼쳤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비운을 구원해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항상 몇십년을 갈라졌던 리산가족이 상봉하는 그날처럼 서로 꼭 껴안고 쓰다듬어주면서 이날을 마지막으로 갈라지는 날처럼 아끼면서 서로가 산다면 그 인생의 길은 비단길이며 만화방초가 만발한 꽃길로 삶의 영원한 디딜패로 될 것입니다.
오늘의 비단길 개척자 맹영자 만세!
세상의 위대한 어머니들 만세! 만만세!!
여기에 오신 여러분의 건강 행복 만세!
2016년 추석 , 김수철올림
 
 ‘잠자는 공주’
인간에게 하느님이 내린 최대의 선물이 래일의 일을 오늘에 모르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2017년 5월 7일, 내가 훈춘 경신에 가서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식물을 찍고 돌아온 이틀 후인 5월 9일에 부인이 94세로 고종명을 하였다.
지난해 부인의 생일에 올린 축수문이 아직 1년도 못되여 추도문으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 축수문에서 내가 욕심을 버리고 ‘맹영자 만세!’를 ‘맹영자 백세!’로 표했다면 혹시 백세를 살았을 것인데 말이다.
후회막급으로 모대기였다.
맹녀와 함께 한 나의 인생사는 부모가 정해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 함께 파란곡절을 이겨내면서 분수에 넘친 우리들의 욕망을 실천한 인생사였다.
나는 맹영자씨를 평생의 동반자로 존중했다.
하기에 《길림성식물지》 출판을 위해 90고령에 혼자서 삼성촌에서 자취하면서 주방 벽에 부인의 사진을 정히 모시고 늘 감사한 마음을 표하군 했다.
2017년 추석 맹녀의 생일 날에 나는 ‘맹영자묘석비(孟英子墓石碑)’를 세울 때 비문을 ‘잠자는 공주’의 노래말을 선택했는데 자녀들이 그저 ‘자녀일동립비(子女一同立碑)’라고 쓰려니 늙은 나이에 토를 달지 못하고 묵묵히 따라 주었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지 못해 나는 〈잠자는 공주〉의 노래말을 오선생에게 보인다.
앵두빛 그 고운 두볼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면
그대는 잠에서 깨여나 나에게 하얀 미소지을가
그대여 어서 일어나 차가운 가슴을 녹여요
 
나는 ‘미태혼’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의 ‘미태혼’은 전무후무한 혼사(婚事)이다. 아버지에 순종함이 나의 효도였다. 아버지의‘선견지명’이 우리 부부의 금술을 끝까지 지켜 주었다.
 
 / 오기활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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