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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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블록으로서의 조선족공동체
2008년 06월 17일 10시 39분  조회:2251  추천:80  작성자: 허명철

중국조선족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접근

 
허명철


      Ⅰ 문제의 제기


   주 지하듯 현존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사회는 특정한 역사환경과 조건하에서 한반도로부터 중국에 건너왔고 이미 중국국적에 가입한 이주민과 그 후손들을 근간으로 형성된 특수한 민족공동체로서 주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한 파산된 농민들의 대량적인 이주를 원류로 하고 있다.1) 다시 말하면 중국조선족은 이주민의 신분으로 중국에 건너와 정착한 韓민족의 일개 구성원들로서 이들은 중국 땅에 건너와 정착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특히 국적사항의 변동과 이에 따른 민족심리와 국가관념, 향토의식의 변화로 말미암아 점차적으로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과는 별도의 새로운 상징적 의미와 민족적 속성을 지닌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공동체로 공식 등장하게 되었다.

   과경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이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민족정책의 실시, 조선족사회의 주체적인 자각과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초기 조선족사회의 공동체적인 집단생활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생계유지를 목표로 시작되었던 조선족선민들의 천입과 정착은 형식상에서 개개인의 행위로 나타났지만 결코 분산적인 정착은 아니었다.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분산적인 생활보다 공동체적인 집단생활모습을 보여주었는바 지연, 혈연은 집단거주생활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가능성은 수전개발과 같은 생존방식의 성공적인 도입으로 하여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혈연적인 민족동질성과 수전농사라는 생존방식의 활용으로 경제적인 생존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개인적인 초기 이민행위는 이국 땅에서 자기 민족의 새로운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社會群體로 성장할 수 있게 하었다.

  새 중국의 건립과 함께 “사실”적으로부터 “법률”적으로 중국의 공민으로 된 조선족은 민족지역자치법의 실시와 더불어 연변지역에서 자치권리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반 이주시기에 형성되었던 조선족공동체는  보다 공고화되었다. 또한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이라는 새로운 族性을 지닌 조선족은 주인공적인 자세로 중국사회주의혁명과 건설사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중국본토에서 성장한 기타 여느 민족 못지 않게 중국사회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해왔다. 특히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은 자체의 지역적인 우세와 혈연적인 우세를 발휘하여 주변국과의 경제교류와 문화협력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자체의 물질생활환경을 개선하였고 문화생활수준도 크게 제고시켰으며 전국 56개 민족 중 종합문화소질 제1위까지 자리 매김 했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국사회의 개혁개방정책의 실시와 시장경제의 전면적인 도입, 인력시장의 개방과 산업구조의 조정으로 야기된 조선족사회 이동인구의 급증은 기존의 조선족집거구의 해체를 자초하게 되었다. 또한 이에 따른 민족교육의 위축, 언어문자활용공간의 축소 등등의 문제들은 제반 조선족사회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족사회가 중국이란 다민족국가에서 자체의 언어, 문자, 교육, 생활풍습 등 민족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고 중국사회에서 자체의 입지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으로서의 민족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온 것과 갈라놓을 수 없으며 또한 현재 조선족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진통들도 역시 공동체적 삶의 방식의 해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본 논문은 우선 민족의식, 민족교육, 집단거주의 차원에서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의 형성원인을 고찰하고 새중국이 건립된 후에도 조선족이 자체의 공동체를 계속 보존해올 수 있었던 원인을 국가의 정책적 보호와 제도적 장치, 그리고 조선족사회에서 실시하였던 민족교육의 보급과 같은 주체적 노력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 토대 위에서 현재 조선족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개방화시대에 민족공동체의 보존에 대한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논의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족문제의 근원에 항상 본질적 요소로 작용하여 온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내용으로 하는 “문화공동체”의 형성에 시각을 모아보고자 한다.


      Ⅱ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의 형성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놓고 볼 때 민족(Nation)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생활에서 일정한 정치적 기틀과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고 인종․언어․종교․풍습 등 문화적 유대관계에 의하여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통일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기 시작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주민으로서 조선족이 한 개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지닌 민족공동체로 등장하게 된 것은 원초적인 민족형성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의 성격보다도 각자의 생계유지를 목표로 하는 생활공동체적 특성이 일차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비교적 적합한 것 같다.

    쪽지게를 지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거치른 만주벌판에 자체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민족사를 시작했던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면서 민족공동체의 형성에 주력하였다. 전반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 형성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그 주요요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첫째는 민족의식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이다.

    민족공동체 형성에 있어서 민족의식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민족단위의 공동체를 형성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자체민족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고 민족의식을 키워가게 되며 민족의식은 혈연, 언어, 역사, 문화의 동질성을 통해 진일보로 강화된다.

   혈연적인 동질성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족성을 의식하도록 하게 하며 민족구성원들간의 일차적인 뉴대로 작용하면서 민족공동체형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강한 결속력으로 역할을 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서 활용되고 있는바 공동체내부 성원들간의 교류를 증진하고 애착심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언어의 동질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단지 같은 언어를 쓰고 그것을 통하여 서로의 뜻을 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성원들간의 강한 동류의식을 느끼게 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공동한 역사의 소지는 서로 함께 어울려 살면서 공동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지켜온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숙명적 동질성을 느끼게 하며 또한 역사적 산물로서의 민족의 전통과 습속은 자아민족에 대한 귀속감을 키워준다.

   상술한 기준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아집단(we group)임을 느끼게 하여 주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들로서 한 개  민족의 민족의식을 형성시켜 주는 시발점이 된다.

    조선족선민들은 중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이미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으로 생존해 오면서 독립된 민족속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민족문화와 역사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인 소유와 민족의식의 내재 및 생존이라는 공동한 목표지향으로 하여 조선족선민들은 이주초기부터 비교적 쉽게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올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집거구의 형성이다.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중국의 광활한 지역에 산재되어 있은 것이 아니라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북3성의 농촌지역에서 집단생활을 해왔으며 또한 이러한 집단생활에 의거해서 자체의 민족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조선족이 이주초기부터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가면서 집단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수전농사의 성공적인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조선족선민들은 그 이민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비교적 익숙했던 생존수단에 주로 의거했는바 無霜期가 짧은 동북지역에서 벼 재배 시험하여 1875년 통화지역에서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이는 수전 농사에 익숙했던 조선족이민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고 중국 땅에서의 정착생활을 가능케 하였다. 그때로부터 조선족은 주요하게 수전 농사를 통해 자기의 생활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수전 농사가 가능한 곳을 찾아 동북각지로 진출하여 조선족의 분포지역을 확대시켰다. 수전 개발은 수원지를 중심으로 자연 우리민족이 모여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고 또한 수전 농사에 필요한 관개수로공사는 일정한 규모의 노동력을 수요하였기에 한전농사보다도 쉽게 집단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오면서 형성된 상부상조의 공동체의식도 초기 집거구를 형성하고 집단생활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주요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인연, 지연, 혈연을 중히 여기고 예로부터 상부상조하는 마을공동체의식을 키워왔던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도 초기 집단생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비록 자신들의 생활형편도 넉넉하지 못했으나 “조선에서 갓 이사온 사람들이 서로 이집저집 다니며 온 겨울 먹어도 밥값을 받는 법이라곤 없었다”.2) 그리고 “조선에서 이민들이 들어오면 이집저집에서 강냉이며 감자며를 몇 마대씩 모아서 가져다 주군 했으며”3) 지어 “조선에서 온 가족들을 데리고 돈 한푼 없이 찾아와도 이웃집들에서 사발이랑 접시랑 저가락이랑 모아서 살림을 차려줬다.”4) 한반도에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았고 서로의 안면도 없었지만 일단 이국 땅에 와서는 모두가 서로 의지하면서 사이좋게 지냈고 함께 어울려 화목하게 생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민족의 상부상조하는 전통적인 미덕과 공동체의식이 초기 조선족공동체 형성에 큰 역할을 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셋째는 민족교육의 실시이다.

    남달리 교육을 숭상해 왔던 우리민족은 생활난으로 이국 땅에 건너와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자녀교육만을 잊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선족의 이주사가 바로 조선족교육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국타향에 이주하여 광활한 만주벌판을 개간하면서 격동의 민족 역사를 시작한 조선족은 기타민족에 비해 남다른 교육이념을 갖고 있었으며 자녀교육에 신경을 써왔다.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일정한 민족집거지를 형성하고 사당을 꾸려 자녀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초기 조선족의 원초적인 교육이념은 이조시기 흥행했던 입신양명, 즉 개인적인 지위획득과 신분향상에 대한 지향이었으며 이러한 가치의식은 자기의 신분을 제고시키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변하려는 강력한 성취동기로 작용하면서 초기 조선족교육이 정착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되었다.

    중국에 이주한 조선족선민들은 그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향학열만은 식지 않았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공부시켜야 장차 출로가 있다는 도리를 명심하고 있었던 조선족선민들은 중국에 건너온 후 “이사를 해두 늘 학교 있는데루 이사했다.”5) 학교나 서당을 중심으로 이민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자연히 공동체 형성에 유조하였다.  

    이주시기 조선족이 어려운 사회 여건 속에서도 자체의 민족공동체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주요 원인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대한 반발과 함께 형성된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이다. 일제의 침입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지니고 이국타향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동족에 대한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짙으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민족동화정책의 실시는 민족의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유발하여 본능적인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을 깊이 자극하여 민족의 일체성을 보존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민족공동체에 대한 결속력도 절대적으로 강해지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문화약탈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유발된 민족의식은 어느 정도 정치적 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식민지배라는 사회적 역사적 현실 속에서 조선족사회의 일차적 목표는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독립에 있었다. 이러한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체적 노력은 아울러 문화적 동일성(identity)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동반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선민들이 처음 생활의 터전을 잡았고 그 기초 상에서 형성했던 집단생활지역은 대부분 인가가 드물고 문화적으로도 불모지였던6) 편벽한 산골이었다는 점도 초기 공동체 형성에서 홀시할 수 없는 한 개 변수로 볼 수 있다.

    상술한 원인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초기 조선족공동체가 그때 사회환경에서 그 존속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선민들이 중국 땅에 이주해 온 뒤 자신의 두 손으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일정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자원적인 인구이동과 통치당국의 의한 강제이민조치도 없었기에 대규모적인 인구이동이 원천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단순한 삶의 터전과 생활공간확보를 목적으로 형성되었던 집단생활방식은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온정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바 중국조선족의 초기 공동체형성의 바탕은 폐쇄적인 농촌-마을공동체에 있었던 것이다. 특수한 역사 상황 속에서 중국에로의 이주를 시도한 조선족선민들은 이주 초기부터 거주지역과 생활세계를 중국의 기타 민족과 달리하면서 자체의 마을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오면서 자급자족적 문화 및 경제생활을 진행하였다. 특히 수전농사의 개발과 성공은 수원지와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기에 쉽게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고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기타 민족과 격리된 공동체생활도 가능했다. 

    이렇게 형성된 초기 조선족공동체는 이국타향에서 조선족이주민들이 망향의식과 마음을 달래고 서로 의지하고 협조하면서 생활하는 생존의 기본단위로, 삶의 정신적 기둥으로 역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권에서 자체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지켜오는 보루작용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인 공동체 존재에 힘입어 조선족선민들은 생활상의 어려움을 이겨갔고 서로 일심 단결하여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민족동화정책에 맞서 싸우면서 자기민족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으며 또한 민족경제를 형성 발전시킬 수 있는 최초의 사회적 문화적 토대도 마련하게 되었다. 모종 의미에서 민족공동체형성을 통해 조선족은 중국에서의 정착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시기 조선족구성원들이 의식하고 있었던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역사환경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독립이라는 이념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공동체로서가 아니라 혈연과 지연 등 자연적 유대관계에 의해 결속되고 한반도로부터 이주해 올 때 이미 익숙했던 문화적인 친화력에 의해 동질성을 확보하는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였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Ⅲ 건국초기 조선족공동체의 보존


    전반 이주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삶의 터전을 닦아 놓은 조선족은 광복 후 인민민주정권의 건립과 토지개혁운동에 참가하였고 중국의 기타 민족과 평등하게 토지를 분배받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중국을 자기의 조국으로 받아들이었지만 결코 중국공민으로서의 완전한 국민의식이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국내 사정과 한반도의 불안정된 정세로 하여 이시기 조선족이 유지해 온 공동체의 성격을 놓고 본다면 여전히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였고 민족의식과 민족심리도 재래의 혈연성과 문화성에 기초한 조선민족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동족공동체는 새중국의 건립과 함께 중국의 합법적인 공민으로 신원이 바뀐 조선족성원들은 단순한 조선민족적인 개체로서가 아니라 동시에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공민으로서 생존하게 되었으며 중국사회에서 수동적인 객체로부터 능동적인 주체로 전환하면서 스스로의 자결권(self-determination)을 가지고 국가의 공동의지를 위해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은 중국국민이란 정치적 신분을 지니게 되었고 그 민족적 명칭도 과거와는 달리 조선족으로 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민족공동체의 성격도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에서 중화민족의 대가정의 일원으로서의 “의지공동체Willenseinheit”의 구성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새 중국이 건립된 후 조선족사회는 신원의 변화에 따라 자체의 공동체적 삶의 유지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조선족은 신원상 단순한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족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한 개 공민으로, 조선족이란 새로운 기호의 매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민족적 공동체의 유지에 있어서 비록 당의 민족정책의 보장과 법적인 보호하에 조선족은 자체의 전통적인 문화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었고 또한 이를 토대로 조선족의 상징적인 의의세계도 구축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려 왔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군체라는 신분에 사로잡혀 중국사회주의제도에 대한 적응과 사회주의적 이념에 대한 수용에 보다 더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족공동체형성과 유지에서 주요한 요소로 작용했었던 조선족의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사회주의주류문화와 융합하고 사회주의문화건설에 적응하고 공조하는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성격상에서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중국조선족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해서 조선족의 문화가치의식 속에는 중국사회주의문화의 특성이 점차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국관과 민족관이 한반도중심에서 중화중심으로 이전되기 시작하면서 자각적으로 중국을 자기 삶의 고장으로 여기며 자기 민족의 운명과 중국의 운명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7) 결국 조선족은 자체의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공동체적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갔었지만 그 내연상 이미 상당한 변화를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건국 후 조선족사회가 보존하고 유지해 나아가야 할 민족의 공동체는 그 주체의 민족성격의 변동에 따라 단순한 조선민족의 공동체가 아니라 중국조선족으로서의 공동체로 전환되었다.

    조선족의 신분상의 변경과 공동체 성격의 변화를 떠나서 건국 후 상당한 역사시기 조선족이 비교적 온정하게 자체의 민족공동체를 보존하고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원인을 검토해 본다면 이주시기에 형성해 왔던 집단생활을 계속 유지해 왔고 또한 사회주의교육방침의 지도아래 진행된 민족교육의 보급과 전통문화에 대한 전승이라는 주체적인 노력과도 관련되지만 당시 국가적 차원의 정책적, 제도적 요소들이 깊은 작용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점은 소수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민족지역자치를 허용해 온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의 실시와 소수민족의 경제생활과 문화교육사업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과 법률적 보호이다. 건국 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민족이론을 지침으로, 민족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간주하고 일정한 역사, 언어, 지역, 경제생활, 문화 및 심리적 천성에서 공동성을 갖는 안정된 인간공동체로 간주하였으며 중국의 국정에 알맞는 민족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소수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적 권리와 이익을 특히 중요시하고, 그들의 문자, 풍속, 종교 및 그들이 장기적으로 번영 성장해 온 공동지역을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새중국이 건립된 후 중국정부는 민족구역자치정책과 소수민족의 언어 문자, 풍속습관과 종교신앙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쳐 조선족이 일정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민족적인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유한 민족적 문화특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 정부차원의 이러한 조치들은 조선족공동체 보존과 유지의 중요한 원인으로 되었다.

    다음, 조선족이 자체의 공동체를 보존해 올 수 있었던 원인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민족교육을 보급 발전시키고 민족문화에 대한 고양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공동체를 결속하는 힘의 원천이다.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일반적으로 민족교육을 통해 주입되고 보급되는바 조선족의 공동체적 삶의 유지에 있어서도 민족교육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건국초기 전반 1950년대에 조선족의 문화사업이 발전을 가져올 수 있고 조선족교육이 중국의 기타 민족에 비해 앞장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북한으로부터 오는 문화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북한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해 많은 우수한 인재를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교육문화의 발전을 위해 기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화학부에서 건교초기에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의 교과서를 적잖게 사용했으며 기타 조선족중소학교들에서도 북한에서 출판된 지리, 역사교과서를 사용했고 문학교과서도 북한 교육성에서 비준한 교과서였다.8) 그때 조선족이 자체로 키워낸 지식인이 아직 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만약 북조선의 교과서가 없었다면 가능하게 중국조선족의 민족교육이 요람에서 요절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와 같이 북한의 문화적인 지원에 힘입어 조선족사회는 민족교육의 급속한 발전을 시도할 수 있었고 자체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는 또한 조선족공동체 유지와 발전에 매우 유익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사회의 폐쇄적 자립경제체제 하에서 실시되었던 호적제도와 인사제도를 비롯한 국가의 제도적 장치들도 조선족공동체 보존과 유지에 상당히 유리하였다. 호적제도의 실시와 계획적인 인사제도의 집행은  사회인구이동의 가능성을 거의 근원적으로 제거하였고 전통적인 사회생산구조는 거주지역의 상대적인 폐쇄성과 고정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사회의 폐쇄적인 성격은 조선족들이 동북 3성을 중심으로 자체의 민족적인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민족적인 동질성과 문화적인 유대성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주요한 배경이다.

    이와 같은 정책적, 제도적 및 주체적 요소의 복합적인 작용하에 조선족은 자체의 민족공동체를 보존해올 수 있었고 민족의 정체성도 지켜올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를 토대로 조선족사회는 재래의 민족전통문화를 사회주의문화와 융합하고 중국의 인문사회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점차적으로 중국조선족특색을 띤 문화를 형성해 나갔으며 한반도와 세계 기타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민족이 소유하고 있는 민족문화와 구별되는 일부 문화양상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한 개 민족공동체로서의 자체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작업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그 뒤 중국 국내의 정치기후와 일부 착오적인 결책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사회는 결국 내면으로부터  자체의 정체성 확인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이주민이란 역사성과 중국공민이란 현실성의 조화라는 숙제를 안고 개혁개방이란 또 다른 역사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Ⅳ 개혁개방시기 조선족공동체의 진로

      일반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종족이 상호 교류가 발생하고 접촉이 빈번해 짐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히 자기가 속한 종족과 기타 종족간에 존재하고 있는 동질성과 이질성을 의식하게 되며 자기가 소속한 군체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고려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타민족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20 세기 8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 국내에서 실시되었던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은 조선족은 빈곤에서 해탈하고 경제적으로 부를 창조하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국내에서 국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조선족에게 자체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에 매우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국내외로의 진출을 통해 타민족과의 교류와 접촉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족성원들은 자신의 민족속성에 대한 규명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등 해외의 조선민족과의 인적왕래와 문화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과거 가치의식 심처에서 망연히 존재하고 있던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은 극단적인 형식으로 팽창하였으며 이러한 팽창은 또한 한국과의 교류에서 있었던 불쾌한 경험과 개인적인 소원불성취로 인하여 쉽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나는 누구냐"하는 원초적인 귀속감에 모대기던 조선족은 결국 조국관, 민족관 등 문화가치의식 심처에서 갈등을 겪게 되었고 또한 이러한 갈등은 조선족사회 정체성유지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흐름도 우리를 곤혹 속에 빠뜨리고 있다. 21세기에 진입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적 흐름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국경과 주권의 개념이 모호해 지고 있으며 정보통신혁명과 교통수단의 발달이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시키는 탈이념(post ideology)․탈근대(post modernity)․정보화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헌팅턴(S. Huntington)은 이러한 세계화의 시대적 조류에 따라 새로운 생활권 혹은 문화권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형태가 미래 세계의 기본 구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과거 어느 때와 달리 민족적․국가적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며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서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는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달리 세계가 일체화되고 있는 지구촌시대에 우리들이 굳이 자체의 민족적인 것을 고집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 하는 논조들이 주변에서 일고 있다. 이러한 논조들은 급속히 파급되면서 흔들리고 있는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오는 문화적․심리적 충격과 시장경제의 새로운 체제하에서 급속히 팽창되고 있는 공리주의적인 삶의 자세, 그리고 날로 좁아지고 있는 지구촌시대의 문화보편주의사조는 조선족사회의 정체성유지에 어려움을 갖다주고 있으며 민족공동체의 존속에도 매우 큰 파괴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내부적인 요소들을 분석해 본다면 인구이동으로 인한 집거구의 해체, 민족교육의 위축 역시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불리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까지의 조선족사회의 공동체는 농촌집거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성원들의 도시로의 진출, 외국으로의 진출에 의해 기존의 농촌집거구는 해체되고 있으며 가치의식전환에 따른 조선족의 추구도 크게 바뀌고 있으며 이는 직접적으로 민족교육의 위축을 초래하고 있다. 집단거주지역의 해체와 민족교육의 위축, 그리고 관념상의 모호성은 조선족공동체의 진로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제기하고 있다.

    조선족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과 시대발전의 추세에 입각하여 우리는 조선족공동체의 진로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과거 우리가 혈연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민족적인 동질성을 의식해 왔고 공동생활거주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해 왔다면 오늘날 발달한 정보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 개념을 강요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민족문화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특정한 지역과 생활공간을 초월한 문화적 공동체 형성에 주력하여 기존의 동족공동체에서 문화공동체로의 이전을  실현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한 세기 넘게 생존해 오면서 중국문화와 한반도문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지역문화(local community culture)를 유입, 융합하면서 나름대로의 문화적인 재창조를 진행하여 조선족특색의 문화를 형성하였고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적 동일체성(national identity)을 초보적으로 성립하였다. 이러한 민족적인 동일체성을 구심점으로 민족의식을 정립해 간다면 새로운 문화공동체 형성은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의식은 한민족 공동체 형성의 정신적 구심점일 뿐만 아니라 냉엄한 세계화 시대의 민족경쟁력을 탐지해 낼 수 있는 근원적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방된 중국 사회 속에서, 세계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함께 잘 사는 민족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화라는 패러타임을 민족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모든 민족적 에너지와 힘을 결집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민족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가야 할 당위성이고 목적이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동일한 형태의 생활방식과 사상을 교육받음으로써 점차 독특하고 명확한 동질성을 인식하게 되며 민족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민족의식이란 민족이 동일한 조상에서 유래된 혈연집단으로서 동일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삶의 터전에서 운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의식을 말한다.9) 그러나 현실사회에서 우리들이 집단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운명공동체형성은 불가능한 것이고 현실적인 여건도 갖추고 있지 않는 상황인 만큼 민족의식은 단지 동일민족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민족을 일종 심리현상으로 보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 민족은 일종 문화적 심리적 현상으로 인정되고 민족의식도 민족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상상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기에 여기에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교육과 매체의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과거 우리는 이러한 역할을 흔히 마을공동체 혹은 학교교육을 통해 이루어 왔다. 오늘날 전통적인 조선족집거구가 해체되고 있고 민족교육이 위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정을 기본단위로 하는 공동체의식과 연대의식의 강화는 여전히 가능한 것이며 특히 현대적인 정보통신시설을 이용한 사이버공간에서의 새로운 문화공동체의 구축과 민족의식의 고취도 가능하다.

    현재 조선족은 농경문화, 공업문화, 정보문화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으며 분포된 지역에 따라 그 문화습득도 다소 차이성을 띠고 있다. 공동체의 결속과 문화적인 응집력을 형성하려면 선진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민족의 엘리트집단과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필요하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면 북경과 연변을 중심으로 그 형성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북경은 도시문화권에 있기에 중국사회변천의 흐름을 쉽게 포착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조선족사회발전의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다. 반면 연변은 비록 중국에서 변강 지역에 속해 있고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에 속해 있지만 세계적인 안광으로 보면 그 위치 또한 자못 중요한 것이다. 동북아금삼각지역에 위치해 있는 연변은 대외로 개방하고 세계로 진출하는 전연지에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우리는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심지에, 아-태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세계의 중심지로 될 동북아중심지에 우리 민족의 공동체의 중심지를 구축할 수 있다.

   Ⅴ 앞으로의 과제


    오늘날 우리는 농경문화시대와 전혀 다른 이른바 정보화시대, 사이버시대에 살고 있다. 사이버문명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고 있으며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생존방식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또 한차례 일대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선 먼저 시대의 맥박을 진단하고 이에 따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의 도전을 회피하고 기존의 사유패턴 속에서 민족의 공동체와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우리 민족을 또 하나의 "인디안인"으로 만들어 버릴 뿐이다. 오늘날 지식혁명을 통한 네트워크고속도로의 형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될 뿐만 아니라 천재일우의 기회로도 되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부합되는 의식전환과 관념갱신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시각에 초점을 맞추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에 바탕을 둔 지역적인 개념을 초월한 문화공동체 형성에 주력해야 한다.

   한 개  민족이 동일한 혈통, 영토를 지닐 때 숙명적 공동체(community of fate)의 의미를 지니게 되고 또한 그 민족이 동일한 언어, 역사, 종교, 전통과 관습을 공유할 때 문화적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문화적 공동체란 일정한 영역에서 동류의 언어, 생활방식, 가치체계를 지닌 사람들이 공통의 숙명적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형성하게 된 동질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화적 공동체 내에서 민족이 공유하는 동질감은 민족의식으로 구체화되어 민족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추진해 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는 주체는 민족이며 민족은 혈연, 영토, 언어, 역사성 종교 등의 보편적이며 숙명적인 특성을 내용으로 하는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 폐쇄성을 지닌 집단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현재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민족의 운명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특정된 문화의 평화적이고 지속적이며 자주적인 발전과 자유로운 번영에 대한 기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촌시대는 문화의 대동화거나 혹은 일종의 문화가 다른 문화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서로 부동한 지역과 민족간의 상호영향이다.

    다시 말하면 지구촌시대의 문화는 상호영향을 주는 역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역동관계를 통해 조선족문화는 생존공간을 확대하게 되고 보다 광활한 문화배경 하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특히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로의 가입을 상징으로 하는 제2의 개방을 맞이하게 된 오늘날 우리는 보다 세계적인 안광으로 자체민족정체성 유지와 민족문화의 발전을 기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우리는 우선 우리들의 삶의 자세와 민족적인 가치지향을 정립하고 조선족으로서의 주체의식을 수립하고 자체문화역사행정에 대한 반성과 세계문화흐름에 대한 포착을 토대로 민족교육의 실시, 민족집거구의 보존, 민족문화의 전승, 한반도와의 문화협력 등 차원에서 보다 심층적인 인식과 시각전환을 이루어 문화공동체의 형성에 주력함으로써 조선족사회의 새로운 비전을 도모해야 한다.


참고문헌

1. Elie Kedourie: "Nationalism", 1960

2. Ervin Laszlo: "The Multicultural Planer", Oneworld Publications,      

  England, 1993

3. E. J. Hobsbawm: "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 1992

4. 馬戎: “民族與社會發展”, 民族出版社, 2001

5. 周建新: “民族學槪論”, 廣西民族出版社, 1998

6. 김종국: “세기교체의 시각에서 본 중국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9

7. 정판룡: “21세기와 중국조선족”,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9

8. 박민자: “중국조선족현상태분석 및 전망연구”, 연변대학출판사, 2000

9. 김종국 외: “중국특색조선족문화연구”, 요녕민족출판사, 2000

10. 정신철: “중국조선조사회의 변천과 전망”, 요녕민족출판사, 1999

11. 김강일 외: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

12. 허명철: “당대연변조선족사회발전대책연구”, 요녕민족출판사, 2001

1) 중국조선족 역사의 시작을 대체로 1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으나 고구려설, 원나라설, 명말청초설 등 여러 가지 주장도 있다. 박창욱: 『중국조선족역사연구』연변대학출판사, 1995년 참조.

2) 북경조선족청년학회 편:《중국조선족이민실록》(한희운가정편),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3) 위의 책, 권봉희가족편.

4) 위의 책, 권석진가족편.

5) 위의 책, 황치일가족편.

6)  중국동북지역은 원래 청정부의 봉금지역이었기 때문에 지역에 비해 인가가 드물었고 관내 한족들의 관동진출도 조선족의 천입과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이주초기 동북지역 특히 농촌지역에는 근대문화전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조선족이 문화적으로 열세에 놓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졸고: 「중국조선족문화가치의식을 논함」,『북방민족』1999. 제4기, p100 참조.

7) 정판룡:「세기교체와 중국조선족 가치관의 변화 및 민족 전일체성 문제」,

    박민자 주필:『중국조선족 현상태 분석 및 전망연구』, 연변대학출판사, 2000/4, p.10 참조.

8) 최삼룡: 「21세기를 지향하는 민족지성인의 마음가짐」,

    국제고려학회 아세아분회 편:『중국조선족공동체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0, p.136 참조.

9) 이광규: “민족 복리 우선원칙의 이론적 고찰”, 구영록․임용순 공편:『한국의 통일정책』, 서울: 나남출판, 1995, pp. 137-161.

[이 글은 2003년도 한국 "재외한인연구"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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