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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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아의 정체성 찾기와 사회참여 댓글:  조회:5119  추천:42  2009-12-10
자아의 정체성 찾기와 사회참여-2008년 7월 - 2009년 6월 조글로포럼 논평                                                    허명철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교수    조글로 운영위원회의 위탁을 받고 2008년 7월-2009년 6월까지 조글로포럼 <포럼추천글>에 실린 문장에 대한 논평을 맡게 되어 영광을 느낀다. 한편 논자의 지적수준의 제한과 연구시각의 편파성으로 하여 저자들의 주옥같은 문장 속에 내재되어 있는 진가를 그려내지 못한 점을 미리 양해구한다. 1. 논평글에 대한 소개   이번 논평 대상에 속하는 문장범위는 2008년 7월부터 2009년 6월까지 1년 동안 조글로포럼 코너인 “포럼추천글”에 실린 문장들인데 모두 150편이다. “포럼추천글”은 조글로포럼에 오른 글중에서 관리자가 추천하여 올리는 마당으로서 상기 1년동안 조글로포럼에 오른 총 1000여편의 글중에서 150편이 선정되여 올라있으며 현재 이 논평의 범위에 든 것이다.  소속별로 분류해 보면 문학인의 글이 21편, 외국인의 글이 22편, 사회인의 글이 35편, 학술계인사의 글이 31편, 언론계 인사의 글이 10편, 네티즌의 글이 31편이며 글을 자주 올리는 칼럼니스트들이 주로 활약하는 등 상대적으로 특정 소수인 칼럼니스트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주제별 소개    이번 포럼글마당에 올린 글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보면 대체적으로 사회현실에 입각한 인격수양과 도덕성에 대향 지향, 조선족사회에 현존하는 문제점, 조선족사회(중국사회)와 한국관련문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자아인격수양과 사회도덕성문제:   시장경제체제하에서 경쟁은 날따라 치열해지고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적 공평성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저자들은 나름대로 사회의 도덕기강과 인격수양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이 분야의 글들은 보면 문필가로서의 솔제니친과 김학철 두 사람의 생애에 대한 비교를 통하여 이들의 인격과 추구의 공동성을 지적하면서 현실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하였으며 (김혁: 솔제니친과 김학철) 시대적인 유행과는 달리 물질적인 향수보다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김정룡: 나와 아버지 누가 더 행복할까?) 동시에 현재 전 사회적으로 만연되고 있는 관료기풍에 대해서도 저자들은 날카로운 지적을 가하면서 지도간부는 선택된 봉사일군이지 특권자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장정일: 부모관)    또한 현실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대한 비판은 문제폭로와 현실지적 혹은 도덕적 차원에서 벗어나 신종바이러스 산생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통해 인간중심의 발전이념에서 벗어나 생태중심의 친환경적인 발전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김혁: 신종바이러스)   그 밖에 자연의 경물에 대한 찬양에서 인격추구와 자아수양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노을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와 감탄으로부터 노을속에 비낀 먼지를 인간세상에 존재하는 비도덕적인 점을 은유적으로 지적하면서 밝은 인생에 대한 추구와 철학으로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는 도리를 설명해주고 있으며 (최균선: 노을과 먼지) 보다 참된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조하고자 4H교육(Head머리, Heart마음, Hands손, Health건강)을 강조한다. (이수산: 우리민족이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2)조선족사회 현실문제   조선족사회관련 문제들은 아마 조글로 독자들의 영원한 관심사항인 것 같다. 이번 평의범위에 든 글들을 보면 조선족사회의 현실문제들을 다룬 글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포럼추천글>코너가 민족정체성을 지키면서 발전한다는 민족지향의 선정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짚고넘어가야 할것은 특히 기존의 문제나열에 비해 대안제시가 더 돋보인다는 것이다.   인구감소와 인구이동은 현존하는 조선족사회 제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족인구이동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일가견을 내놓고 있다. 김강일교수는 조선족인구이동현상의 원인을 경제적 미발달, 특유의 문화구조로 설명하면서 문화자원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화자원보호는 조선족사회의 생존뿐만 아니라 동북노공업기지진흥전략의 실시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문화자원보호차원에서 집거구흡인력의 향상을 강조하고 있다.(<조선족사회는 왜서 해체위기를 맞고 있는가>)   조선족인구이동의 주요한 향방의 하나가 한국행이 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파생하고 한국사회나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한층 높아가고 있는 마당에서 중국조선족들이 삶을 위해 한국행을 선택함에 대한 이해와 한국 나름대로의 고충을 받아주는 것도 교류의 정상화에 유조한 것이라는 지적이 제시됐다. (허동식: 조선화교와 중국조선족) 비록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현존하는 공동체적 문제발생의 상대적 원인으로 되고 있지만 보다 긍정적 시각에서 조선족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구이동을 직시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민족이동의 현실적 불가피성과 전통에서 현대로의 적응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장경률: 민족대이동 사회발전의 필연적 추세) 또한 세계화시대 이민들이 가져다 준 긍정적인 역할을 실례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인구이동현상을 분석하면서 조선족의 사명이 무엇이며 이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가를 나름대로 설명해주기도 했다.(박광성: 세계화시대 조선족의 의미)   특히 인구이동현상을 단순한 경제적 부를 창조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에서 벗어나 조선족정체성문제를 비롯한 가치의식변동이라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조선족사회구성원들이 전통집거지역을 떠나 해외로,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민족정체성이 약화됨과 반면 국민정체성이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국민정체성의 강화는 또한 한국인의 단일정체성과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범송: 재중동포사회 아이덴티티의 변화) 이와 상관하여 조선족의 정체성은 국내진출과정에서 강화 - 약화 - 강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진출을 통하여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정신철: 중국조선족 정체성)   논자들은 또한 정체성문제와 관련해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민족정체성의 재정립이 급선무임을 강조한다. 조선족은 국민으로서의 국가사랑, 부모사랑, 민족사랑(중화민족사랑)이라는 정체성을 지적하면서 조선족한테는 중국이란 조국이 있고 한국(조선)이라는 고국이 있다고 하면서 민족정체성의 정립을 요구한다.(리수산: 민족정체성 재정립은 급선무) 이와 관련하여 중국 현지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을 자식에 비유하고 중국을 양부모로, 조선을 어머니로, 한국을 아버지로 비유하면서 현재 조선족이 부딪치고 있는 정체성문제와 조선족사회와 중국 조선 한국과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지적, 그러면서 자식으로서의 도리로 낳은 정, 키운 정을 잊어서는 아니됨을 지적하기도 했다. (유연산: 낳은 정, 키운 정)   조선족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또 하나 주목할 현상은 연변경제발전과 조선족문화보존과 발전을 연관시켜 녹색산업으로서의 문화관광산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 제시로서 연변사회경제발전과 관광산업의 추진을 지역문화자원 개발과 연관시켜 고찰하면서 민족문화자원의 개발문제를 언급한 문장이 돋보인다. 여기에는 문화유산의 문화적 경제적 부가치 창출이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연변문화유산보호 및 개발을 통한 연변의 인문환경개발 및 이를 바탕으로 한 관광산업의 발전을 주장한 글이 있다.(최국철:<문화유산의 보호와 관광산업>)    조선족사회 현실문제에서 또 하나 열점화제로 되고 있는 것이 조선족농촌사회문제이다.    논자들은 농촌경제파탄과 조선족귀농현상의 아픔을 토로하기도 하고 (최균선: 막연한 내일을 대비해두자) 오늘날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조선족농촌사회에서 금전의식보다도 금융의식이 필요함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며 (김산: 다가오는 농촌금융시대) 조선족들이 토지를 타민족에게 양도하고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도시로 진출하는 현상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한다.(김범송: 토지는 농민들의 중요한 자산이다)   또한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어서 생존하려면 규모경제가 출로이며(허동식: 중국조선족 불귀의 길을 다시 걷는다) 따라서 금융위기에 부딪친 노무행에 대한 자제를 촉구하며 창업우대정책과 재정착 권리, 빈곤가정의 한국행, 영주권제도 등을 그 해결책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여호길: 한국노무의 위기) 그러면서 농촌에서 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중국의 조선족은 국가의 유리한 정책을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땅을 열심히 지켜갈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최균선: 막연한 내일을 대비해 두자)    그밖에 현재 추진하고 있는 연룡도일체화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에서 평가하면서 연길시를 중심으로 하는 핵심도시 역할을 기대해보는 동시에(장연하: 연길을 크고 강하고 좋게) 이러한 핵심도시건설과 연변의 관광산업 및 외자유치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연변사회 도덕적 이미지 개선이 급선무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장정: 리룡희주장에게 보낸 편지)    조선족사회문제에 대해 민족교육차원에서 조선어교육의 중요성 및 필요성을 지적하는 글들이 또한 눈에 띈다. 중국 조선어의 역사로부터 “모든 사물의 발전이 그러하듯 언어도 발달한 것을 따라 가기 마련이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조선어의 발전방향을 한국어 기준으로 나아가야 함을 암시한 글이 있다.(유연산: 중국조선어의 방향) 또한 일각에서는 한국어를 도입하고 수용하되 조선족군체의 궤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어를 전부 그대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조선어의 근본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주봉: 조선어가 받는 도전과 대안)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사는 모든 정부인원들이 꼭 조선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찬동할 수 없지만 조선족으로서 조선어를 꼭 잘 배워서 조선족문화를 세계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조선족의 사명이라고 지적했다.(닉네임 네티즌: 조선족은 꼭 조선어를 배워야)    또한 조선족에게 있어서 조선어와 한어가 모두 중요함을 지적하면서 언어학적인 시각에서 언어는 상호연관되어 있기에 한어를 잘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어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이수산: 조선어와 한어) 3)조선족사회와 한국관계   오늘날 개방된 사회 속에서 조선족사회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단지 조선족사회 내부적인 요소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주변사회 특히 한국과의 교류는 조선족사회 발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간의 양호한 역동적관계의 형성은 두 사회에 윈-윈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저자들은 한국과의 교류과정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여기에 대한 해결책을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고민하고 있다.   조선족문화와 한국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문화의 선진성을 열거하면서 한국문화의 접수를 긍정하는 반면 (허동식: 또 한국문화와 조선족문화에 하나 둘)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동포들의 열악한 노동현장(이천화재를 비롯하여)을 지적하면서 한국행 조선족노무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문민: 위험한 코리안드림) 이러한 아픔을 극복하고자 한국재외동포정책의 허점을 지적하고 한국인들의 차별시대우를 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다.(김범송: 중국동포인상속의 “고국이미지”)   한편 현재 한국행이 여전히 조선족사회 경제생활개선의 주요한 선택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고령동포입국취소, 친척방문 인원수 제한 등 규제에 대한 서러움을 토로하면서 글로벌시대 문을 활짝 열고 동포포용정책을 펼치기를 호소한 글도 보인다.(강효삼: 왜 중국동포들의 입국을 규제하려고만 할까?) 이러한 정책개선안을 둘러싸고 방문취업제의 실시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시험제도 취소를 비롯하여 현재 시험제도를 둘러싸고 인터넷 등록신청, 시험장소 배정, 시험내용, 년령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는 분석을 진행하였다. (허동식: 방문취업제, 한국어시험제에 대한 정시) 그러면서 고국을 찾는 동포들에게 한국어시험을 치게 하는 것은 고국의 수치이고 동포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여호길: 한국어능력시험은 폐지되어야 한다.)   서러움과 분노의 토로와 함께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의 교류에서 신뢰를 구축하여 서로가 어울려서 윈-윈 할 수 있는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야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으며 현재 실시되고 있는 유학생 쉼터, 유학생IT단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실추되고 있는 조선족사회 이미지를 재립할 것을 호소하여 주목되기도 한다.(예동근: 재한조선족유학생의 역할)   또한 같은 동포의 입장에서 중국공민의 시각에서 중한관계의 우호적인 유대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한류가 중국에서 강온되어가는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중국과 한국의 정상적인 교류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지난친 민족주의정서에 일침을 가하는 글들도 보인다. (목자: 한국인 중국인 조선족의 화합; 조호길: 민족주의와 중한관계)중국인들의 한국을 싫어하는 이유를 지적하면서 한국인들의 뜨거운 온정과 포용력을 기대함과(주현남: 한국인들의 뜨거운 온정과 포용력을 기대한다)동시에 중국에서 한류가 식어가는 원인을 예술적 바탕이 옅고 내용의 변화가 적고 기법이 승겁고 중복이 많고 격정이 적은 등 방면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지적하기도 했다. (이수산: 한류는 식어만 갈 것인가?)   이번 논평글에서 주목되고 있는 점은 노무현전직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족사회에 많은 정책적 지원을 펼칠 수 있도록 노심초사한 노무현대통령을 추모하는 글들이 올라오면서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조선족사회의 그리움을 반영해준 글들이다.(리수산: 노무현의 죽음 - 한국문화의 액“환); 네티즌:모두의 존업을 지켜준 당신 - 노무현; 강효삼: 로무현을 그리는 마음 등 등 다수) 3. 간략한 총화   전반적으로 보면 논자들의 글은 그 주제가 뚜렷하고 관점이 선명한바 이같이 구애없이 자신의 견해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해주고 있는 조글로에 감사를 드린다. 한편으로는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사회에 대한 관심과 대안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앞으로도 많은 논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진정 조선족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9년 12월 연변대학에서
3    延邊與朝鮮族社會發展 (허명철) 댓글:  조회:3039  추천:72  2008-10-10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延邊與朝鮮族社會發展[提纲]   许 明 哲 (延边大学民族学研究所)   延边既是朝鲜族行使自治权利的少数民族地区,又是与朝鲜一江之隔的边疆。因此,对于中国朝鲜族来说,延边已超出了单纯的地理区域性范畴含义,成为与朝鲜族的生存与发展息息相关的族群社会的象征。 一、社会发展 1、社会发展的基本内容: 1)不断加强基础设施建设,改善公共服务条件,提高人民的生活质量; 2)发展公共教育事业,促进人的全面发展; 3)完善社会保障体系,大力发展社会福利事业,让更多的人得到发展机会; 4)大力发展公共卫生事业,让更多的人得生活状况得以改善; 5)加强生态环境的保护,促进人与自然的和谐,走可持续发展之路; 6)促进区域的均衡发展,推动整个社会的协调发展。 2、当代中国社会发展指导思想及总体目标 1)指导思想:坚持以人为本,以人与自然和谐为主线,以经济发展为核心,以提高人民群众生活质量为根本出发点,以科技和体制创新为突破口,坚持不懈地全面推进经济社会与人口、资源和生态环境的协调,不断提高我国的综合国力和竞争力,为实现第三步战略目标奠定坚实的基础。 2)总体目标:可持续发展能力不断增强,经济结构调整取得显著成效,人口总量得到有效控制,生态环境明显改善,资源利用率显著提高,促进人与自然的和谐,推动整个社会走上产发展、生活富裕、生态良好的文明发展道路。 二、民族发展  民族发展是当今中国社会发展的一个主要领域,具有重要的战略性意义。 民族的发展实际上是一个民族因素、经济因素、地域因素、文化因素和社会因素相互交融、相互作用的动态过程。 1、如何处理全球一体化与民族文化多元化关系? 2、如何解决中心与边缘关系、强势文化与弱势文化之关系? 3、如何处理发展与保护的关系? 三、民族文化变迁 由于通讯手段和交通工具的发达,人类进入“地球村”时代,加快了民族文化变迁速度。 1、民族文化融合:不同民族文化在自觉或自愿的基础上,以和平的方式相融合。 2、民族文化区域化:人口移动、外来文化、生存环境等原因,带来民族文化的扩张、交往、透和融合,使原来连为一体的民族文化逐步分割成板块型的区域文化。即形成民族文化内部的中心与边缘关系。 区域文化经过充分的透、融合、内蓄积累达到一定的量,为人们所接受,并对人们的社会活动和行为准则起规范作用,才能向外传播、发展,寻求新的版图。 一种文化向外传播、扩展、推进的距离愈远,调适过的自然环境差异越大,与不同区域的固有文化发生融合、重组和建构的机会或次数越多。其结果,虽然远离本身的原型文化,但经过优化重组后的文化比原型文化具有更强的适应性和更大的生命力。负面影响:民族文化的流失 —— 民族语言、服装、饮食、建筑、民俗、节庆等。 四、朝鲜族社会发展与延边  1、延边经济发展与朝鲜族文化并进的二元特征: 一方面,历史的延续的朝鲜族传统文化仍是当地现行文化的主流,为地方经济和社会发展积累了丰富而独具特色的文化内容; 另一方面,厚重的历史为延边社会经济改革设置了种种障碍,制约着延边地区的社会发展。 面临的问题:如何对待朝鲜族传统文化的“保护”和“革新”。2、朝鲜族社会发展的内涵 一是朝鲜族人口素质的提高和人口结构的合理化; 二是朝鲜族物质生活水平的改善和生活质量的提高; 三是朝鲜族文化的特色化与现代化 3、延边与朝鲜族互动 延边州提供的支撑点: 1)地缘优势;2)政策保障;3)财政支持;4)人才提供 朝鲜族提供的支撑点: 1)人缘优势;2)民族品牌;3)文化战略;4)经济活力  4、面临的课题 延边能否成为中国朝鲜族(文化)的中心?
2    주체블록으로서의 조선족공동체 댓글:  조회:2250  추천:80  2008-06-17
중국조선족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접근  허명철       Ⅰ 문제의 제기    주 지하듯 현존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사회는 특정한 역사환경과 조건하에서 한반도로부터 중국에 건너왔고 이미 중국국적에 가입한 이주민과 그 후손들을 근간으로 형성된 특수한 민족공동체로서 주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한 파산된 농민들의 대량적인 이주를 원류로 하고 있다.1) 다시 말하면 중국조선족은 이주민의 신분으로 중국에 건너와 정착한 韓민족의 일개 구성원들로서 이들은 중국 땅에 건너와 정착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특히 국적사항의 변동과 이에 따른 민족심리와 국가관념, 향토의식의 변화로 말미암아 점차적으로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과는 별도의 새로운 상징적 의미와 민족적 속성을 지닌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공동체로 공식 등장하게 되었다.    과경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이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민족정책의 실시, 조선족사회의 주체적인 자각과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초기 조선족사회의 공동체적인 집단생활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생계유지를 목표로 시작되었던 조선족선민들의 천입과 정착은 형식상에서 개개인의 행위로 나타났지만 결코 분산적인 정착은 아니었다.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분산적인 생활보다 공동체적인 집단생활모습을 보여주었는바 지연, 혈연은 집단거주생활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가능성은 수전개발과 같은 생존방식의 성공적인 도입으로 하여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혈연적인 민족동질성과 수전농사라는 생존방식의 활용으로 경제적인 생존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개인적인 초기 이민행위는 이국 땅에서 자기 민족의 새로운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社會群體로 성장할 수 있게 하었다.   새 중국의 건립과 함께 “사실”적으로부터 “법률”적으로 중국의 공민으로 된 조선족은 민족지역자치법의 실시와 더불어 연변지역에서 자치권리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반 이주시기에 형성되었던 조선족공동체는  보다 공고화되었다. 또한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이라는 새로운 族性을 지닌 조선족은 주인공적인 자세로 중국사회주의혁명과 건설사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중국본토에서 성장한 기타 여느 민족 못지 않게 중국사회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해왔다. 특히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은 자체의 지역적인 우세와 혈연적인 우세를 발휘하여 주변국과의 경제교류와 문화협력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자체의 물질생활환경을 개선하였고 문화생활수준도 크게 제고시켰으며 전국 56개 민족 중 종합문화소질 제1위까지 자리 매김 했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국사회의 개혁개방정책의 실시와 시장경제의 전면적인 도입, 인력시장의 개방과 산업구조의 조정으로 야기된 조선족사회 이동인구의 급증은 기존의 조선족집거구의 해체를 자초하게 되었다. 또한 이에 따른 민족교육의 위축, 언어문자활용공간의 축소 등등의 문제들은 제반 조선족사회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족사회가 중국이란 다민족국가에서 자체의 언어, 문자, 교육, 생활풍습 등 민족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고 중국사회에서 자체의 입지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으로서의 민족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온 것과 갈라놓을 수 없으며 또한 현재 조선족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진통들도 역시 공동체적 삶의 방식의 해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본 논문은 우선 민족의식, 민족교육, 집단거주의 차원에서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의 형성원인을 고찰하고 새중국이 건립된 후에도 조선족이 자체의 공동체를 계속 보존해올 수 있었던 원인을 국가의 정책적 보호와 제도적 장치, 그리고 조선족사회에서 실시하였던 민족교육의 보급과 같은 주체적 노력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 토대 위에서 현재 조선족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개방화시대에 민족공동체의 보존에 대한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논의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족문제의 근원에 항상 본질적 요소로 작용하여 온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내용으로 하는 “문화공동체”의 형성에 시각을 모아보고자 한다.       Ⅱ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의 형성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놓고 볼 때 민족(Nation)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생활에서 일정한 정치적 기틀과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고 인종․언어․종교․풍습 등 문화적 유대관계에 의하여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통일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기 시작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주민으로서 조선족이 한 개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지닌 민족공동체로 등장하게 된 것은 원초적인 민족형성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의 성격보다도 각자의 생계유지를 목표로 하는 생활공동체적 특성이 일차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비교적 적합한 것 같다.     쪽지게를 지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거치른 만주벌판에 자체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민족사를 시작했던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면서 민족공동체의 형성에 주력하였다. 전반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 형성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그 주요요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첫째는 민족의식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이다.     민족공동체 형성에 있어서 민족의식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민족단위의 공동체를 형성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자체민족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고 민족의식을 키워가게 되며 민족의식은 혈연, 언어, 역사, 문화의 동질성을 통해 진일보로 강화된다.    혈연적인 동질성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족성을 의식하도록 하게 하며 민족구성원들간의 일차적인 뉴대로 작용하면서 민족공동체형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강한 결속력으로 역할을 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서 활용되고 있는바 공동체내부 성원들간의 교류를 증진하고 애착심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언어의 동질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단지 같은 언어를 쓰고 그것을 통하여 서로의 뜻을 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성원들간의 강한 동류의식을 느끼게 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공동한 역사의 소지는 서로 함께 어울려 살면서 공동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지켜온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숙명적 동질성을 느끼게 하며 또한 역사적 산물로서의 민족의 전통과 습속은 자아민족에 대한 귀속감을 키워준다.    상술한 기준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아집단(we group)임을 느끼게 하여 주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들로서 한 개  민족의 민족의식을 형성시켜 주는 시발점이 된다.     조선족선민들은 중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이미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으로 생존해 오면서 독립된 민족속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민족문화와 역사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인 소유와 민족의식의 내재 및 생존이라는 공동한 목표지향으로 하여 조선족선민들은 이주초기부터 비교적 쉽게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올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집거구의 형성이다.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중국의 광활한 지역에 산재되어 있은 것이 아니라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북3성의 농촌지역에서 집단생활을 해왔으며 또한 이러한 집단생활에 의거해서 자체의 민족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조선족이 이주초기부터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가면서 집단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수전농사의 성공적인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조선족선민들은 그 이민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비교적 익숙했던 생존수단에 주로 의거했는바 無霜期가 짧은 동북지역에서 벼 재배 시험하여 1875년 통화지역에서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이는 수전 농사에 익숙했던 조선족이민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고 중국 땅에서의 정착생활을 가능케 하였다. 그때로부터 조선족은 주요하게 수전 농사를 통해 자기의 생활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수전 농사가 가능한 곳을 찾아 동북각지로 진출하여 조선족의 분포지역을 확대시켰다. 수전 개발은 수원지를 중심으로 자연 우리민족이 모여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고 또한 수전 농사에 필요한 관개수로공사는 일정한 규모의 노동력을 수요하였기에 한전농사보다도 쉽게 집단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오면서 형성된 상부상조의 공동체의식도 초기 집거구를 형성하고 집단생활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주요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인연, 지연, 혈연을 중히 여기고 예로부터 상부상조하는 마을공동체의식을 키워왔던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도 초기 집단생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비록 자신들의 생활형편도 넉넉하지 못했으나 “조선에서 갓 이사온 사람들이 서로 이집저집 다니며 온 겨울 먹어도 밥값을 받는 법이라곤 없었다”.2) 그리고 “조선에서 이민들이 들어오면 이집저집에서 강냉이며 감자며를 몇 마대씩 모아서 가져다 주군 했으며”3) 지어 “조선에서 온 가족들을 데리고 돈 한푼 없이 찾아와도 이웃집들에서 사발이랑 접시랑 저가락이랑 모아서 살림을 차려줬다.”4) 한반도에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았고 서로의 안면도 없었지만 일단 이국 땅에 와서는 모두가 서로 의지하면서 사이좋게 지냈고 함께 어울려 화목하게 생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민족의 상부상조하는 전통적인 미덕과 공동체의식이 초기 조선족공동체 형성에 큰 역할을 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셋째는 민족교육의 실시이다.     남달리 교육을 숭상해 왔던 우리민족은 생활난으로 이국 땅에 건너와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자녀교육만을 잊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선족의 이주사가 바로 조선족교육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국타향에 이주하여 광활한 만주벌판을 개간하면서 격동의 민족 역사를 시작한 조선족은 기타민족에 비해 남다른 교육이념을 갖고 있었으며 자녀교육에 신경을 써왔다.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일정한 민족집거지를 형성하고 사당을 꾸려 자녀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초기 조선족의 원초적인 교육이념은 이조시기 흥행했던 입신양명, 즉 개인적인 지위획득과 신분향상에 대한 지향이었으며 이러한 가치의식은 자기의 신분을 제고시키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변하려는 강력한 성취동기로 작용하면서 초기 조선족교육이 정착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되었다.     중국에 이주한 조선족선민들은 그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향학열만은 식지 않았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공부시켜야 장차 출로가 있다는 도리를 명심하고 있었던 조선족선민들은 중국에 건너온 후 “이사를 해두 늘 학교 있는데루 이사했다.”5) 학교나 서당을 중심으로 이민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자연히 공동체 형성에 유조하였다.       이주시기 조선족이 어려운 사회 여건 속에서도 자체의 민족공동체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주요 원인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대한 반발과 함께 형성된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이다. 일제의 침입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지니고 이국타향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동족에 대한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짙으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민족동화정책의 실시는 민족의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유발하여 본능적인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을 깊이 자극하여 민족의 일체성을 보존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민족공동체에 대한 결속력도 절대적으로 강해지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문화약탈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유발된 민족의식은 어느 정도 정치적 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식민지배라는 사회적 역사적 현실 속에서 조선족사회의 일차적 목표는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독립에 있었다. 이러한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체적 노력은 아울러 문화적 동일성(identity)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동반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선민들이 처음 생활의 터전을 잡았고 그 기초 상에서 형성했던 집단생활지역은 대부분 인가가 드물고 문화적으로도 불모지였던6) 편벽한 산골이었다는 점도 초기 공동체 형성에서 홀시할 수 없는 한 개 변수로 볼 수 있다.     상술한 원인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초기 조선족공동체가 그때 사회환경에서 그 존속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선민들이 중국 땅에 이주해 온 뒤 자신의 두 손으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일정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자원적인 인구이동과 통치당국의 의한 강제이민조치도 없었기에 대규모적인 인구이동이 원천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단순한 삶의 터전과 생활공간확보를 목적으로 형성되었던 집단생활방식은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온정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바 중국조선족의 초기 공동체형성의 바탕은 폐쇄적인 농촌-마을공동체에 있었던 것이다. 특수한 역사 상황 속에서 중국에로의 이주를 시도한 조선족선민들은 이주 초기부터 거주지역과 생활세계를 중국의 기타 민족과 달리하면서 자체의 마을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오면서 자급자족적 문화 및 경제생활을 진행하였다. 특히 수전농사의 개발과 성공은 수원지와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기에 쉽게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고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기타 민족과 격리된 공동체생활도 가능했다.      이렇게 형성된 초기 조선족공동체는 이국타향에서 조선족이주민들이 망향의식과 마음을 달래고 서로 의지하고 협조하면서 생활하는 생존의 기본단위로, 삶의 정신적 기둥으로 역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권에서 자체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지켜오는 보루작용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인 공동체 존재에 힘입어 조선족선민들은 생활상의 어려움을 이겨갔고 서로 일심 단결하여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민족동화정책에 맞서 싸우면서 자기민족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으며 또한 민족경제를 형성 발전시킬 수 있는 최초의 사회적 문화적 토대도 마련하게 되었다. 모종 의미에서 민족공동체형성을 통해 조선족은 중국에서의 정착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시기 조선족구성원들이 의식하고 있었던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역사환경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독립이라는 이념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공동체로서가 아니라 혈연과 지연 등 자연적 유대관계에 의해 결속되고 한반도로부터 이주해 올 때 이미 익숙했던 문화적인 친화력에 의해 동질성을 확보하는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였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Ⅲ 건국초기 조선족공동체의 보존     전반 이주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삶의 터전을 닦아 놓은 조선족은 광복 후 인민민주정권의 건립과 토지개혁운동에 참가하였고 중국의 기타 민족과 평등하게 토지를 분배받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중국을 자기의 조국으로 받아들이었지만 결코 중국공민으로서의 완전한 국민의식이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국내 사정과 한반도의 불안정된 정세로 하여 이시기 조선족이 유지해 온 공동체의 성격을 놓고 본다면 여전히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였고 민족의식과 민족심리도 재래의 혈연성과 문화성에 기초한 조선민족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동족공동체는 새중국의 건립과 함께 중국의 합법적인 공민으로 신원이 바뀐 조선족성원들은 단순한 조선민족적인 개체로서가 아니라 동시에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공민으로서 생존하게 되었으며 중국사회에서 수동적인 객체로부터 능동적인 주체로 전환하면서 스스로의 자결권(self-determination)을 가지고 국가의 공동의지를 위해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은 중국국민이란 정치적 신분을 지니게 되었고 그 민족적 명칭도 과거와는 달리 조선족으로 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민족공동체의 성격도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에서 중화민족의 대가정의 일원으로서의 “의지공동체Willenseinheit”의 구성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새 중국이 건립된 후 조선족사회는 신원의 변화에 따라 자체의 공동체적 삶의 유지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조선족은 신원상 단순한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족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한 개 공민으로, 조선족이란 새로운 기호의 매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민족적 공동체의 유지에 있어서 비록 당의 민족정책의 보장과 법적인 보호하에 조선족은 자체의 전통적인 문화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었고 또한 이를 토대로 조선족의 상징적인 의의세계도 구축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려 왔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군체라는 신분에 사로잡혀 중국사회주의제도에 대한 적응과 사회주의적 이념에 대한 수용에 보다 더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족공동체형성과 유지에서 주요한 요소로 작용했었던 조선족의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사회주의주류문화와 융합하고 사회주의문화건설에 적응하고 공조하는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성격상에서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중국조선족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해서 조선족의 문화가치의식 속에는 중국사회주의문화의 특성이 점차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국관과 민족관이 한반도중심에서 중화중심으로 이전되기 시작하면서 자각적으로 중국을 자기 삶의 고장으로 여기며 자기 민족의 운명과 중국의 운명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7) 결국 조선족은 자체의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공동체적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갔었지만 그 내연상 이미 상당한 변화를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건국 후 조선족사회가 보존하고 유지해 나아가야 할 민족의 공동체는 그 주체의 민족성격의 변동에 따라 단순한 조선민족의 공동체가 아니라 중국조선족으로서의 공동체로 전환되었다.     조선족의 신분상의 변경과 공동체 성격의 변화를 떠나서 건국 후 상당한 역사시기 조선족이 비교적 온정하게 자체의 민족공동체를 보존하고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원인을 검토해 본다면 이주시기에 형성해 왔던 집단생활을 계속 유지해 왔고 또한 사회주의교육방침의 지도아래 진행된 민족교육의 보급과 전통문화에 대한 전승이라는 주체적인 노력과도 관련되지만 당시 국가적 차원의 정책적, 제도적 요소들이 깊은 작용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점은 소수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민족지역자치를 허용해 온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의 실시와 소수민족의 경제생활과 문화교육사업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과 법률적 보호이다. 건국 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민족이론을 지침으로, 민족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간주하고 일정한 역사, 언어, 지역, 경제생활, 문화 및 심리적 천성에서 공동성을 갖는 안정된 인간공동체로 간주하였으며 중국의 국정에 알맞는 민족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소수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적 권리와 이익을 특히 중요시하고, 그들의 문자, 풍속, 종교 및 그들이 장기적으로 번영 성장해 온 공동지역을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새중국이 건립된 후 중국정부는 민족구역자치정책과 소수민족의 언어 문자, 풍속습관과 종교신앙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쳐 조선족이 일정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민족적인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유한 민족적 문화특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 정부차원의 이러한 조치들은 조선족공동체 보존과 유지의 중요한 원인으로 되었다.     다음, 조선족이 자체의 공동체를 보존해 올 수 있었던 원인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민족교육을 보급 발전시키고 민족문화에 대한 고양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공동체를 결속하는 힘의 원천이다.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일반적으로 민족교육을 통해 주입되고 보급되는바 조선족의 공동체적 삶의 유지에 있어서도 민족교육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건국초기 전반 1950년대에 조선족의 문화사업이 발전을 가져올 수 있고 조선족교육이 중국의 기타 민족에 비해 앞장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북한으로부터 오는 문화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북한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해 많은 우수한 인재를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교육문화의 발전을 위해 기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화학부에서 건교초기에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의 교과서를 적잖게 사용했으며 기타 조선족중소학교들에서도 북한에서 출판된 지리, 역사교과서를 사용했고 문학교과서도 북한 교육성에서 비준한 교과서였다.8) 그때 조선족이 자체로 키워낸 지식인이 아직 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만약 북조선의 교과서가 없었다면 가능하게 중국조선족의 민족교육이 요람에서 요절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와 같이 북한의 문화적인 지원에 힘입어 조선족사회는 민족교육의 급속한 발전을 시도할 수 있었고 자체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는 또한 조선족공동체 유지와 발전에 매우 유익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사회의 폐쇄적 자립경제체제 하에서 실시되었던 호적제도와 인사제도를 비롯한 국가의 제도적 장치들도 조선족공동체 보존과 유지에 상당히 유리하였다. 호적제도의 실시와 계획적인 인사제도의 집행은  사회인구이동의 가능성을 거의 근원적으로 제거하였고 전통적인 사회생산구조는 거주지역의 상대적인 폐쇄성과 고정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사회의 폐쇄적인 성격은 조선족들이 동북 3성을 중심으로 자체의 민족적인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민족적인 동질성과 문화적인 유대성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주요한 배경이다.     이와 같은 정책적, 제도적 및 주체적 요소의 복합적인 작용하에 조선족은 자체의 민족공동체를 보존해올 수 있었고 민족의 정체성도 지켜올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를 토대로 조선족사회는 재래의 민족전통문화를 사회주의문화와 융합하고 중국의 인문사회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점차적으로 중국조선족특색을 띤 문화를 형성해 나갔으며 한반도와 세계 기타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민족이 소유하고 있는 민족문화와 구별되는 일부 문화양상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한 개 민족공동체로서의 자체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작업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그 뒤 중국 국내의 정치기후와 일부 착오적인 결책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사회는 결국 내면으로부터  자체의 정체성 확인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이주민이란 역사성과 중국공민이란 현실성의 조화라는 숙제를 안고 개혁개방이란 또 다른 역사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Ⅳ 개혁개방시기 조선족공동체의 진로       일반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종족이 상호 교류가 발생하고 접촉이 빈번해 짐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히 자기가 속한 종족과 기타 종족간에 존재하고 있는 동질성과 이질성을 의식하게 되며 자기가 소속한 군체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고려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타민족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20 세기 8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 국내에서 실시되었던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은 조선족은 빈곤에서 해탈하고 경제적으로 부를 창조하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국내에서 국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조선족에게 자체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에 매우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국내외로의 진출을 통해 타민족과의 교류와 접촉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족성원들은 자신의 민족속성에 대한 규명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등 해외의 조선민족과의 인적왕래와 문화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과거 가치의식 심처에서 망연히 존재하고 있던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은 극단적인 형식으로 팽창하였으며 이러한 팽창은 또한 한국과의 교류에서 있었던 불쾌한 경험과 개인적인 소원불성취로 인하여 쉽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나는 누구냐"하는 원초적인 귀속감에 모대기던 조선족은 결국 조국관, 민족관 등 문화가치의식 심처에서 갈등을 겪게 되었고 또한 이러한 갈등은 조선족사회 정체성유지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흐름도 우리를 곤혹 속에 빠뜨리고 있다. 21세기에 진입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적 흐름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국경과 주권의 개념이 모호해 지고 있으며 정보통신혁명과 교통수단의 발달이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시키는 탈이념(post ideology)․탈근대(post modernity)․정보화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헌팅턴(S. Huntington)은 이러한 세계화의 시대적 조류에 따라 새로운 생활권 혹은 문화권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형태가 미래 세계의 기본 구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과거 어느 때와 달리 민족적․국가적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며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서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는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달리 세계가 일체화되고 있는 지구촌시대에 우리들이 굳이 자체의 민족적인 것을 고집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 하는 논조들이 주변에서 일고 있다. 이러한 논조들은 급속히 파급되면서 흔들리고 있는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오는 문화적․심리적 충격과 시장경제의 새로운 체제하에서 급속히 팽창되고 있는 공리주의적인 삶의 자세, 그리고 날로 좁아지고 있는 지구촌시대의 문화보편주의사조는 조선족사회의 정체성유지에 어려움을 갖다주고 있으며 민족공동체의 존속에도 매우 큰 파괴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내부적인 요소들을 분석해 본다면 인구이동으로 인한 집거구의 해체, 민족교육의 위축 역시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불리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까지의 조선족사회의 공동체는 농촌집거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성원들의 도시로의 진출, 외국으로의 진출에 의해 기존의 농촌집거구는 해체되고 있으며 가치의식전환에 따른 조선족의 추구도 크게 바뀌고 있으며 이는 직접적으로 민족교육의 위축을 초래하고 있다. 집단거주지역의 해체와 민족교육의 위축, 그리고 관념상의 모호성은 조선족공동체의 진로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제기하고 있다.     조선족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과 시대발전의 추세에 입각하여 우리는 조선족공동체의 진로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과거 우리가 혈연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민족적인 동질성을 의식해 왔고 공동생활거주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해 왔다면 오늘날 발달한 정보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 개념을 강요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민족문화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특정한 지역과 생활공간을 초월한 문화적 공동체 형성에 주력하여 기존의 동족공동체에서 문화공동체로의 이전을  실현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한 세기 넘게 생존해 오면서 중국문화와 한반도문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지역문화(local community culture)를 유입, 융합하면서 나름대로의 문화적인 재창조를 진행하여 조선족특색의 문화를 형성하였고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적 동일체성(national identity)을 초보적으로 성립하였다. 이러한 민족적인 동일체성을 구심점으로 민족의식을 정립해 간다면 새로운 문화공동체 형성은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의식은 한민족 공동체 형성의 정신적 구심점일 뿐만 아니라 냉엄한 세계화 시대의 민족경쟁력을 탐지해 낼 수 있는 근원적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방된 중국 사회 속에서, 세계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함께 잘 사는 민족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화라는 패러타임을 민족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모든 민족적 에너지와 힘을 결집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민족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가야 할 당위성이고 목적이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동일한 형태의 생활방식과 사상을 교육받음으로써 점차 독특하고 명확한 동질성을 인식하게 되며 민족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민족의식이란 민족이 동일한 조상에서 유래된 혈연집단으로서 동일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삶의 터전에서 운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의식을 말한다.9) 그러나 현실사회에서 우리들이 집단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운명공동체형성은 불가능한 것이고 현실적인 여건도 갖추고 있지 않는 상황인 만큼 민족의식은 단지 동일민족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민족을 일종 심리현상으로 보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 민족은 일종 문화적 심리적 현상으로 인정되고 민족의식도 민족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상상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기에 여기에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교육과 매체의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과거 우리는 이러한 역할을 흔히 마을공동체 혹은 학교교육을 통해 이루어 왔다. 오늘날 전통적인 조선족집거구가 해체되고 있고 민족교육이 위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정을 기본단위로 하는 공동체의식과 연대의식의 강화는 여전히 가능한 것이며 특히 현대적인 정보통신시설을 이용한 사이버공간에서의 새로운 문화공동체의 구축과 민족의식의 고취도 가능하다.     현재 조선족은 농경문화, 공업문화, 정보문화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으며 분포된 지역에 따라 그 문화습득도 다소 차이성을 띠고 있다. 공동체의 결속과 문화적인 응집력을 형성하려면 선진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민족의 엘리트집단과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필요하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면 북경과 연변을 중심으로 그 형성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북경은 도시문화권에 있기에 중국사회변천의 흐름을 쉽게 포착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조선족사회발전의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다. 반면 연변은 비록 중국에서 변강 지역에 속해 있고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에 속해 있지만 세계적인 안광으로 보면 그 위치 또한 자못 중요한 것이다. 동북아금삼각지역에 위치해 있는 연변은 대외로 개방하고 세계로 진출하는 전연지에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우리는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심지에, 아-태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세계의 중심지로 될 동북아중심지에 우리 민족의 공동체의 중심지를 구축할 수 있다.    Ⅴ 앞으로의 과제     오늘날 우리는 농경문화시대와 전혀 다른 이른바 정보화시대, 사이버시대에 살고 있다. 사이버문명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고 있으며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생존방식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또 한차례 일대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선 먼저 시대의 맥박을 진단하고 이에 따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의 도전을 회피하고 기존의 사유패턴 속에서 민족의 공동체와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우리 민족을 또 하나의 "인디안인"으로 만들어 버릴 뿐이다. 오늘날 지식혁명을 통한 네트워크고속도로의 형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될 뿐만 아니라 천재일우의 기회로도 되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부합되는 의식전환과 관념갱신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시각에 초점을 맞추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에 바탕을 둔 지역적인 개념을 초월한 문화공동체 형성에 주력해야 한다.    한 개  민족이 동일한 혈통, 영토를 지닐 때 숙명적 공동체(community of fate)의 의미를 지니게 되고 또한 그 민족이 동일한 언어, 역사, 종교, 전통과 관습을 공유할 때 문화적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문화적 공동체란 일정한 영역에서 동류의 언어, 생활방식, 가치체계를 지닌 사람들이 공통의 숙명적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형성하게 된 동질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화적 공동체 내에서 민족이 공유하는 동질감은 민족의식으로 구체화되어 민족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추진해 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는 주체는 민족이며 민족은 혈연, 영토, 언어, 역사성 종교 등의 보편적이며 숙명적인 특성을 내용으로 하는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 폐쇄성을 지닌 집단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현재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민족의 운명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특정된 문화의 평화적이고 지속적이며 자주적인 발전과 자유로운 번영에 대한 기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촌시대는 문화의 대동화거나 혹은 일종의 문화가 다른 문화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서로 부동한 지역과 민족간의 상호영향이다.     다시 말하면 지구촌시대의 문화는 상호영향을 주는 역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역동관계를 통해 조선족문화는 생존공간을 확대하게 되고 보다 광활한 문화배경 하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특히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로의 가입을 상징으로 하는 제2의 개방을 맞이하게 된 오늘날 우리는 보다 세계적인 안광으로 자체민족정체성 유지와 민족문화의 발전을 기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우리는 우선 우리들의 삶의 자세와 민족적인 가치지향을 정립하고 조선족으로서의 주체의식을 수립하고 자체문화역사행정에 대한 반성과 세계문화흐름에 대한 포착을 토대로 민족교육의 실시, 민족집거구의 보존, 민족문화의 전승, 한반도와의 문화협력 등 차원에서 보다 심층적인 인식과 시각전환을 이루어 문화공동체의 형성에 주력함으로써 조선족사회의 새로운 비전을 도모해야 한다. 참고문헌 1. Elie Kedourie: "Nationalism", 1960 2. Ervin Laszlo: "The Multicultural Planer", Oneworld Publications,         England, 1993 3. E. J. Hobsbawm: "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 1992 4. 馬戎: “民族與社會發展”, 民族出版社, 2001 5. 周建新: “民族學槪論”, 廣西民族出版社, 1998 6. 김종국: “세기교체의 시각에서 본 중국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9 7. 정판룡: “21세기와 중국조선족”,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9 8. 박민자: “중국조선족현상태분석 및 전망연구”, 연변대학출판사, 2000 9. 김종국 외: “중국특색조선족문화연구”, 요녕민족출판사, 2000 10. 정신철: “중국조선조사회의 변천과 전망”, 요녕민족출판사, 1999 11. 김강일 외: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 12. 허명철: “당대연변조선족사회발전대책연구”, 요녕민족출판사, 2001 1) 중국조선족 역사의 시작을 대체로 1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으나 고구려설, 원나라설, 명말청초설 등 여러 가지 주장도 있다. 박창욱: 『중국조선족역사연구』연변대학출판사, 1995년 참조. 2) 북경조선족청년학회 편:《중국조선족이민실록》(한희운가정편),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3) 위의 책, 권봉희가족편. 4) 위의 책, 권석진가족편. 5) 위의 책, 황치일가족편. 6)  중국동북지역은 원래 청정부의 봉금지역이었기 때문에 지역에 비해 인가가 드물었고 관내 한족들의 관동진출도 조선족의 천입과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이주초기 동북지역 특히 농촌지역에는 근대문화전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조선족이 문화적으로 열세에 놓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졸고: 「중국조선족문화가치의식을 논함」,『북방민족』1999. 제4기, p100 참조. 7) 정판룡:「세기교체와 중국조선족 가치관의 변화 및 민족 전일체성 문제」,     박민자 주필:『중국조선족 현상태 분석 및 전망연구』, 연변대학출판사, 2000/4, p.10 참조. 8) 최삼룡: 「21세기를 지향하는 민족지성인의 마음가짐」,     국제고려학회 아세아분회 편:『중국조선족공동체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0, p.136 참조. 9) 이광규: “민족 복리 우선원칙의 이론적 고찰”, 구영록․임용순 공편:『한국의 통일정책』, 서울: 나남출판, 1995, pp. 137-161. [이 글은 2003년도 한국 "재외한인연구"에 실렸음]
1    현시대에 있어서 민족종교의 의미 (허명철) 댓글:  조회:2466  추천:91  2008-04-01
현시대에 있어서 민족종교의 의미 허명철 (연변대학교 민족학연구소) Ⅰ. 인류문화와 종교    주지하는바와 같이 인류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탄생한 최초의 문화형태는 종교이다. 인간이 창출한 초기의 종교문화는 비록 자연의 위력에 대한 敬畏意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지만 인간의 영혼을 啓示하여 참된 삶을 지향한다는 종교의 본연적인 취지를 드팀없이 실천해 왔었고 또한 이러한 궁극적인 목표의식과 실천행위를 통하여 인류역사와 문명의 맥을 끈끈히 이어오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종교를 인류역사발전의 창조적인 원동력이자 전반 인류문화의 발상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 놓고 보면 우리는 하늘을 숭상하고 인간의 생명과 양심을 비롯한 모든 가치ㅢ 근원으로서 하늘의 인격성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창조해 왔었으며 나아가 하늘과 땅과 조화를 이루는 天地人 三才의 同格性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틀을 형성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은 경천사상, 인간존중사상, 생명존중사상, 조화정신 등 문화적 기틀을 형성, 유지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1) 따라서 우리는 하늘을 도덕적인 양심의 근원으로 생각하였고 하늘을 인간생명의 존재근거로 삼았으며,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삶의 가장 존귀한 가치로 간주하여 왔다.    이로부터 우리 민족의 근원적인 사상인 “인간중심”사상,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사상[홍익인간 사상]은 곧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 된다. 하늘이 만물을 낳아 기르지만 그 중에서 인간만이 하늘의 그 뜻, 사랑과 애정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은 곧 사람을 통하여 그 똣이 존재할 수 있게 되며, 사람을 통해서 그 뜻을 지상에 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하늘과 인간은 뜻으로 통하는 존재이며, 하늘과 인간은 同格이 되는 것이며,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되며,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곧 하늘을 받드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 민족종교운동의 효시로 되고 있는 동학에서 인내천으로 표현된다.   아울러 근대화 물결의 충격과 외세의 무력침략에 의해 민족문화는 물론 주권마저 유린 당하는 수난기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은 여러 민족종교단체들에 의해 계승되어 인존사상, 선민사상, 해원상생사상, 후천개벽사상 등 형태로 그 맥을 이어왔으며 또한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국권회복과 민족자존을 위한 주체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는바 이러한 운동은 단순한 민족운동의 차원을 초월한 天道로써 어지러은 인간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는 평화운동이요 상생운동이기도 하였다.    이제 하나의 지구촌에서 공생공존해야 하는 인류는 평화의 소중함을 ㄷ욱 실감하고 있지만 물질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족 간,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은 또한 피치 못할 것이며 그에 따른 민족문화의 생존을 위한 이른바 문화전쟁도 역시 피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경제적인 성장을 추구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문화적인 성장과 가치추구도 홀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제 있게 될 문화전쟁에서 살아남아 우수한 문화를 재창출하고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면 우선 전통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하며 전통문화 특히 도덕문명으로써 인류평화를 실현하여 진정한 지상천국을 건설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을 두고 있는 민족종교문화에 대해서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현재까지 우리는 자체민족문화유산의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민족종교의 근본정신에 대한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학문적인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사실 조선족사회의 민족종교운동연구는 일제시기 조선(한)민족종교운동에 대한 종합연구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며 해외 조선(한)민족종교운동사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지난 일제시기 조선족사회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민족종교운동에 대한 연구가 오늘날 조선족사회의 민족적인 삶의 질 향상과 민족정체성 확립에도 유조하다고 할 때 이러한 작업은 더욱 절실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놓고 보면 우리의 先人들은 경제적인 삶의 어려움 때문에 중국동북지역으로 이주해 왔었다. 그 만큼 경제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추구가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일차적인 목표로 되어왔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 경제적인 삶에 만족을 느끼지 않았으며 보다 높은 삶의 경지를 지향하는 정신적인 기둥이 있었고 추구가 있었던 것이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이 같은 정신적인 기둥이 바로 전통문화를 통해 우리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인 支柱, 문화적인 바탕을 근대 격변기에 탄생했고 민족의 자주적 독립과 평화의 실현을 위해 줄기차게 진행해 왔던 민족종교운동에서 찾아보고자 하며 지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발히 진행되었던 민족종교운동과 그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고찰을 토대로 오늘날 물질주의, 향락주의, 실용주의가 합리화되고 있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고 나아가 인류문명의 진보와 문화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그 도경을 찾아보는데 중점을 도고자 한다.  Ⅱ. 조선족사회형성에 있어서의 민족종교의 역할      우리 민족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에 이주해 오게 된 동기를 요약해 본다면 정치적, 경제적, 시대적 원인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된다. 경제적인 삶을 위해 이 땅에 건너온 파산된 농민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인 원인으로 동북지역으로 건너와 민족사상의 함양, 배일정신의 고취, 독립운동기지 건설, 무관학교의 설립 및 반일무장단체 조직에 주력해온 독립운동가들도 있다. 물론 우리가 현재 주목하고자 하는 민족의 전통문화도 解放欲求나 革新欲求나 再生欲求를 반영하는2) 신생한 민족종교단체들에 의해 이 에 전파되었다.     신생한 민족종교가 빠른 시일내에 동북지역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만주라는 신천지에서 “神人”, “眞人”이 강림하고 출현한다는 당시 사람들의 소박한 종교적 심성과 관련된다.3) 이들은 대부분 생활난으로 이주하였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讖言說의 “眞人”과 “勝地”가 동북지역에 있다는 소문을 믿고 월강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재해로 인한 사회적 불안 속에서 생존의 출구와 구원을 갈구하는 민중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他者”로부터 얻으려 하는 욕망과 욕구를 반영하는 종교적 심성의 표출로서, 이러한 종교적인 심성에 의한 그 어떤 “預言에 대한 盲信”은 일종의 행위동기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4) 여기에 외국 선교사들과 민족종교단체들에서 선교 혹은 반일을 목적으로 이 지역에 이주한 민족구성원들을 주목하게 되고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 또한 “宗敎救國論”에 입각하여 종교적 형식을 사회결사의 모체로 간주하게 됨에 따라 종교는 조선인 사회의 응집력을 결집하는 일종의 유대역할을 하게 되었고 宗立학교는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함양하고 민족계몽교육운동을 전개하는 전초지로 되었다.    이와 같이 이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던 초기의 소박한 종교적 심성은 종교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이 뚜렷한 목표의식과 실천동기를 부여함에 따라 이들의 삶 자체도 단순한 경제적 목표를 초월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공동체적 삶의 의의세계를 구축하게 되었고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신앙생활을 놓고 보면 민간신앙을 비롯하여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이외에 조선에서 유입된 천도교 ․ 시천교 ․ 청림교 ․ 대종교 ․ 증산교 ․ 원종교 등 각종 민족종교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민족종교는 당시 조선족사회에 정신적 기탁으로 되고 삶의 희망을 심어주면서5) 그들이 삶의 터전을 닦고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족사회에서의 종교적 생활은 동학운동의 영향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동학운동을 효시로, 민족종교에서 주장했던 “事人如天”의 평등사상과 “後天開闢” 등 사상은 망국의 서러움을 겪고 있는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하느님”(시천주)을 誠, 敬, 信을 다하여 지성껏 모시면 신통하여 “無極大道”를 크게 깨달아 현존사회를 개조하여 후천개벽을 실현하여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통치 하에 있는 우리 민족의 염원을 반영하였는바 이러한 교의나 주장의 내면에 안받침 되어 있는 사상은 현존의 “일제식민지통치는 멸망하고 조선은 독립된다”는 반일민족독립사상이었다.    당시 민족위기의 역사적 상황에서 동북지역으로 망명한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은 국권회복의 수단으로써 종교전도와 애국계몽교육을 결합시키면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진행된 민족종교운동도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을 넘어 민족문제, 국권회복과 민족독립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종교적 저항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민족종교단체들에서 설립한 종립학교는 반일민족교육운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민족정신을 환기시키고 평등과 자유와 같은 근대적 민주의식을 키우는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 조직적 및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19년 기독교 ․ 천도교 ․ 청림교 ․ 공교회를 중심으로 용정에서 일어난 “3.13만세운동”을 효시로, 4월 말까지 만주지역 조선인들은 약 80여회의 집회를 거행하였고 117,450명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북지역에서 일어난 우리민족의 만세시위운동에는 민족종교지도자 및 단체들이 앞장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6) 뿐만 아니라 동북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점차 무장투쟁으로 전환되던 시기에도 역시  종교계에 몸담고 있던 민족주의자들이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는데 각 독립운동 단체의 구성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인이었다.7)    일제시기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했었고 또한 이미 학계의 연구작업을 통해 널리 알려진 대종교는 민족종교인 동시에 반일독립운동단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8) 대종교에서 진행한 반일독립운동은 중광단 ․ 흥업단 ․ 정의단 ․ 군정부, 그리고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미 많이 연구가 되어 있기에 본문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구체 내용들에 대해서는 大倧敎總本司에서 펴낸『大倧敎重光60年史』, 1970]    대종교 외에 동북지역에서 적극적으로 반일투쟁을 벌린 민족종교단체로는 청림교를 들 수 있다. 20세기 초 동학과 단군신앙으로 민족의식과 민족혁명전통을 보존, 계승하여 설립된 청림교는 1919년부터《야단》을 조직하여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 5월에는 “민족의 번영과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고 당시 “전 민족이 신뢰하는 대한군정서와 합병”하기로 결정하였다. “야단”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하여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림교신도들을 동원하여 각 반일독립단체에도 병력과 군수품을 공급하였다. 1920년 봉오동전투시 청림교는 신도들을 동원하여 병력과 군수품을 지원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있은 청산리전역에서도 북로군정서와 연합하여 일제침략군을 타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병력과 군수품을 지원하였다.9) 그뒤 반일독립무장투쟁이 저조기로 진입하게 되자 청림교는 1920년대 후반기부터 단군을 비롯한 조선의 역대 개국시조를 신앙대상으로 삼고 용정에 영모전을 건축하고 개국시조들의 공덕구석비와《유태묘결명》비사까지 세워놓고 장기적으로 “멸왜기도”를 드리면서 광범한 신도들에게 반일민족독립사상을 선전하였다.10)    결론적으로 말하면 민족종교는 다양한 동기와 목적으로 중국동북지역에 건너온 온 이주민을 중심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사회를 결성함에 있어서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전반 조선족사회가 정신적 ․ 실천적으로 반일민족교육운동과 무장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중추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즉 특정 종교를 배경으로 조직된 각 독립운동단체 구성원과 조선족들은 종교를 통하여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나아가 사회적 ․ 경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11) Ⅲ. 현시대에 있어서의 민족종교의 의미      세계의 냉전질서가 무너지고 통신기술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하여 인류역사는 이미 一日生活圈이라는 지구촌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으며 조선족사회 개개 성원들의 생존무대도 단순 집거지역 내지 거주국이 아닌 지구촌 곳곳으로 펼쳐지고 있다. 장시기 동안 동북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영위해 왔던 조선족들은 거주국의 개혁개방 정책의 실시 및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에 힘입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으로 진출하시 시작하였으며 이주시기 조선(한)민족의 디아스포라에서 현재는 조선족사회자체의 디아스포라를 연출하고 있다. 물리적 공간의 디아스포라는 그래도 나름대로 경제적인 삶의 향상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민족공동체적 응집이 결여된 정신적인 디아스포라로 이어진다면 참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가에서는 흔히 재중동포사회 혹은 조선(한)민족 자체를 유태인과 비교하면서 동방의 유태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물론 나라를 잃고 지구촌 곳곳에서 디아스포라식 삶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유태인과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겠지만 정신적인 삶에서는 단연 명백하게 구분된다. 종교적 심성이 안받침 되어 있는 유태인들의 정신적인 결속력은 세인이 공인하는 바이다. 유태인들은 자체의 민족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으며 자체민족의 지혜를 집대성한 “탈무드”로 후대들에게 계몽교육을 실시한다. 다시 말하면 유태인들은 물리적 공간에서는 디아스포라이지만 정신적인 삶에서는 그들만의 신앙세계가 있는 것이다.     전반 이주시기(광복이전까지 -- 필자 주)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선족사회에서는 민족의 지성인들과 선각자, 종교단체들에 의해 나름대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왔고 민족의식과 민족의 얼을 간직해 왔다. 이 같은 종교적인 목표의식과 실천행위는 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간판으로 되어 있고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교육도 바로 종립(宗立)학교인 서전서숙이 그 효시로 되고 있으며 민족역사의 한 폐지를 장식하고 있고 민족의 긍지로 되고 있는 “3.13”반일시위에도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이 주력으로 앞장에 나섰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어났던 종교운동, 특히 민족종교운동은 조선족사회의 공동체적 문화의식의 형성과 정신적인 삶의 추구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민족교육은 서전서숙의 교육이념을 이어오지 못하고 근근이 우리말로 강의하고 우리글로 된 교재를 사용한다는데 그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민족학교들에서 배양된 후대들은 자체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지 못한 채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만일 우리들 스스로가 주체적인 자각으로 민족문화를 지켜가고 민족의 얼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적극 모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 정신적인 디아스포라가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현실적으로 전혀 극복할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제시기 우리는 민족종교운동을 통해 민족문화를 지켜왔으며 나라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한 힘을 키워왔으며 민족의 개개 성원들에게 정신적 기탁으로, 마음의 고향으로 되었었던 소중한 경험들이 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공간도 우리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현대적인 기술 수단과 자유로운 사이버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비록 세계화시대가 도래되고 지구촌이념이 형성되기 시작한지는 불과 몇십년에 이르지만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정신적인 일체화는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세계적인 종교의 탄생과 함께 이미 실천되어 왔던 것이다.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종교적 신앙생활은 공동한 신념으로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사람들을 일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하나로 될 수 있는 가능한 도구도 종교적 신념차원의 정체성확립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들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민족의 대의를 추구해 간다면 우리는 진정 통합된 민족으로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어떤 기적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거족적인 “3.13반일시위”와 “청산리전역”은 이 점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민족의 화합과 발전을 위하여,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우리는 小我가 아닌 大我가 될 수 있는 자체 민족의 얼을 키워야 한다. 얼빠진 민족은 국경이 무의미해 지고 있는 지구촌 시대에 존중을 받는 지구촌 일원으로 될 수 없으며 지구촌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Ⅴ. 향후의 과제      한 개 민족공동체로서 조선족사회에서 지켜가야 할 민족정신은 바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행정 속에서 면면히 이어내려 오면서 고스란히 지켜온 민족의 얼임은 자명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정신 내지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그릇은 그 민족의 심성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적 신념이 아니겠는가? 종교를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추구라고 할 때 우리는 나름대로의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가치의식의 혼돈으로 삶의 사거리에서 방황할 때 자각적인 종교적 정서와 정신적인 추구가 더욱 필요시하다. 이러한 종교적인 삶은 단순 단체적인 생활을 떠나서 개개인의 심성수련을 통해서 진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개체적인 삶의 경우에는 가능할진대 내가 민족공동체에 소속되고 한 개 민족의 성원이라고 할 때 그럼 민족적 존재로서의 나의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여기에는 공동체적인 삶의 자세와 추구가 수요되는 것이다.    종교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형식으로 세속적이고 원심적인 생활자체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사회통합성의 절대형식인 것이다. 종교의 원초적인 삶으로 하여 인간이 일종의 일치성으로 형성된 응집 ․ 결속인 것이다. 개인과 집단의 관계가 “승화 ․ 헌신 ․ 충성을 합일화한 특징”을 지닐 때 이것이 바로 종교성적인 관계로 되는 것이다.12)    우리가 오늘날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생활 속에서 경제적인 삶을 위해 도시로 진출하고 해외로 나가는 것은 응당 긍정할 바이다. 하지만 단순 경제적인 삶에 만족을 느낀다면 오히려 삶의 빈곤을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인구이동으로 해체되고 있는 기존의 집거구역은 도시에 새로이 일떠서고 있는 코리안타운으로 대처할 수 있지만 물리적 공간에 일떠세운 코리안타운 역시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는 정신적인 삶의 집거구역을 대체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가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누구인가?”, “우리 민족은 대체 어떠한 민족인가?” 하는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 본다면 우리는 이 같은 정신적 허무를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 갈려면 21세기 지구촌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아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민족문화교육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하며 개개 성원들에게 민족의 얼을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로 되고 있다. 특히 근대 이주민족으로 다민족국가에서 생존하고 있는 재중동포사회에서는 그 동안 단절되었던 민족적인 것을 발굴 정리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족공동체적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따르고 있는 것만 사실이다. 특히 종교에 대한 인식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전반 사회적 분위기에서 조선족사회에 필요한 것은 形態化한 종교보다도 민족정체성을 간직하고 공동체의식을 키워가는 그런 종교적 신념과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참고문헌 황룡국:『조선족혁명투쟁사』, 요녕인민출판사, 1988 김  양:『압록강류역의 조선민족과 반일투쟁』, 요녕민족출판사, 2001 朴昌昱:『中國朝鮮族歷史硏究』, 연변대학출판사, 1995 김춘선:『延邊地區朝鮮族社會的形成硏究』, 길림인민출판사, 2001 오경환:『종교사회학』, 서광사, 1979 강돈구:『한국 근대종교와 민족주의』, 집문당, 1992 라인홀트 니버 엮음, 김승국 옮김:『맑스 ․ 엥겔스의 종교론』, 아침, 1991 박환:『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91 金勳:『韓國新宗敎的源流與嬗變』, 宗敎文化出版社, 2006 G. simmel 저:『現代人與宗敎』,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3 사) 한국민족종교협의회:『겨레얼 연구논총』제1집, 2005 사) 한국민족종교협의회:『한국민족종교운동사』, 2003 사) 한국민족종교협의회:『한국민족종교』, 2005 최봉룡:『만주국의 종교정책과 재만 조선인 신종교의 대응』,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6 고병철:『일제하 재만한인의 종교운동』,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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