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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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미룰수 없는 조선족농촌 관광산업개발 댓글:  조회:2051  추천:1  2013-09-18
중국에서 이른바 “3농”문제가 수면우에 떠오르기 시작한것은 1997년 전국적인 범위에서 농업생산이 대풍년을 맞이하면서부터가 아닌가싶다. 이미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선고한 중국사회에서 농업도 기타 여느 생산분야와 마찬가지로 공급과 수요라는 시장경제의 룰을 벗어날수 없는 상황에서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고 가격 또한 국가로부터 엄격한 통제를 받고있었기에 대풍작을 거두어도 농민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따라서 오늘날 농촌사회의 출로는 기존의 토지, 로동, 자본, 기술을 주축으로 한 단순생산성 농업 아닌 시장정보를 장악하고 기술 및 경영 혁신을 이루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경제의 중심키워드는 소비자인만큼 조선족농촌마을들에서도 소비자수요를 중심으로 변화하고있는 소비자의 요구에 주목하면서 치렬한 시장경쟁속에서 자기의 립지를 세우고 소비자의 수요를 만족시킬수 있는 농산물 공급을 위한 생산구도조정과 경영리념을 전환해야 한다. 현재 농산물의 주요소비자로 되고있는 도시주민들은 소득향상과 주 5일근무제 등 원인으로 자체의 생활패턴이 변화를 가져왔으며 자률적인 여가시간도 충족해지고있다. 하지만 이들이 자률적으로 여가생활을 배치하고 가족 또는 친목적인 휴가를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은 개발되여있지 않는것도 실정이다. 도시주민들의 여가시간 증가와 생활패턴의 변화에 부응하고 새농촌건설에 따른 도로교통상황의 개선에 힘입어 이제까지 방치했던 조선족농촌마을의 개성을 살린 관광자원개발이 농민들의 농업생산외의 소득원으로 활용 가능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보아진다. 사실 최근 들어 도시주변에서 서서히 붐을 일으키고있는 딸기채집체험을 통한 딸기재배호들의 판촉활동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 농촌관광자원개발과 산업화 소재가 되는 농사체험, 농산물 수확, 전통음식 만들기, 전통문화상품 등은 도시인,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향수를 느끼게 하고 색다른 생활체험의 장이 될수 있으며 농산물의 생산자와 소비자, 생산지와 소비지의 간격을 좁히고 농산물의 우수성과 안정성을 인식시키고 홍보할수 있는 좋은 계기로도 될수 있다. 그리고 농촌지역은 대체적으로 우수한 자연생태환경을 보유하고있기때문에 생태자원과 문화자원을 활용한 체험프로그램, 례하면 산책로나 삼림욕장의 조성, 산나물 채취, 력사유적탐방 등 소재의 개발도 가능하다. 단 농촌관광자원개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인위적인 개발에 따른 농촌다움의 훼손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농촌다운 전원풍경의 보전과 농촌만의 독특한 문화의 존재가 성공의 열쇠이므로 마을단위로 관광 및 문화 산업에서의 핵심요소로 되고 있는 농촌의 매력, 체험 및 활동, 쾌적한 환경, 접근성, 숙박시설을 적절히 배려한 계획적인 생태환경보전형으로 자원이 개발되고 산업화가 추진되여야 한다. 그리고 최근 도시소비자들의 농산물 소비기호는 량적개념에서 질적개념으로 바뀌고 다시 예술적개념으로 전환되고있다는 점에 류의하여 농촌관광자원개발에 활용되는 농산물도 간편화하고 다양화해야 하며 자기만의 맛이나 이미지 또는 안전성을 돋보여야 한다. 현재까지 우리들의 농촌정책은 대부분 농업생산중심으로 실시되여왔고 조선족농촌마을 문화 산업개발에 있어서도 투자적인 민속촌 건설에 모를 박았다. 사실 농촌산업자원개발은 주유(加油)형 아닌 체류(滯留)형이여야 한다. 우리는 연변농촌마을들이 지니고있는 자원우세와 스토리개발을 리용하여 애국주의교양, 사과배따기체험, 민속전통음식, 레저관광, 력사유적지탐방, 트레킹코스개발 등 특색있는 농촌문화산업을 개발하는데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농촌자원개발과 문화산업개발을 통해 우리는 농민들의 수익을 증대시킬수 있을뿐만아니라 민족문화를 지켜가는데도 일조할수 있다고 보아진다.  
57    자아의 정체성 찾기와 사회참여 댓글:  조회:5223  추천:42  2009-12-10
자아의 정체성 찾기와 사회참여-2008년 7월 - 2009년 6월 조글로포럼 논평                                                    허명철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교수    조글로 운영위원회의 위탁을 받고 2008년 7월-2009년 6월까지 조글로포럼 <포럼추천글>에 실린 문장에 대한 논평을 맡게 되어 영광을 느낀다. 한편 논자의 지적수준의 제한과 연구시각의 편파성으로 하여 저자들의 주옥같은 문장 속에 내재되어 있는 진가를 그려내지 못한 점을 미리 양해구한다. 1. 논평글에 대한 소개   이번 논평 대상에 속하는 문장범위는 2008년 7월부터 2009년 6월까지 1년 동안 조글로포럼 코너인 “포럼추천글”에 실린 문장들인데 모두 150편이다. “포럼추천글”은 조글로포럼에 오른 글중에서 관리자가 추천하여 올리는 마당으로서 상기 1년동안 조글로포럼에 오른 총 1000여편의 글중에서 150편이 선정되여 올라있으며 현재 이 논평의 범위에 든 것이다.  소속별로 분류해 보면 문학인의 글이 21편, 외국인의 글이 22편, 사회인의 글이 35편, 학술계인사의 글이 31편, 언론계 인사의 글이 10편, 네티즌의 글이 31편이며 글을 자주 올리는 칼럼니스트들이 주로 활약하는 등 상대적으로 특정 소수인 칼럼니스트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주제별 소개    이번 포럼글마당에 올린 글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보면 대체적으로 사회현실에 입각한 인격수양과 도덕성에 대향 지향, 조선족사회에 현존하는 문제점, 조선족사회(중국사회)와 한국관련문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자아인격수양과 사회도덕성문제:   시장경제체제하에서 경쟁은 날따라 치열해지고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적 공평성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저자들은 나름대로 사회의 도덕기강과 인격수양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이 분야의 글들은 보면 문필가로서의 솔제니친과 김학철 두 사람의 생애에 대한 비교를 통하여 이들의 인격과 추구의 공동성을 지적하면서 현실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하였으며 (김혁: 솔제니친과 김학철) 시대적인 유행과는 달리 물질적인 향수보다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김정룡: 나와 아버지 누가 더 행복할까?) 동시에 현재 전 사회적으로 만연되고 있는 관료기풍에 대해서도 저자들은 날카로운 지적을 가하면서 지도간부는 선택된 봉사일군이지 특권자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장정일: 부모관)    또한 현실사회에 대한 부조리에 대한 비판은 문제폭로와 현실지적 혹은 도덕적 차원에서 벗어나 신종바이러스 산생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통해 인간중심의 발전이념에서 벗어나 생태중심의 친환경적인 발전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김혁: 신종바이러스)   그 밖에 자연의 경물에 대한 찬양에서 인격추구와 자아수양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노을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와 감탄으로부터 노을속에 비낀 먼지를 인간세상에 존재하는 비도덕적인 점을 은유적으로 지적하면서 밝은 인생에 대한 추구와 철학으로 마음속에 담겨져 있는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는 도리를 설명해주고 있으며 (최균선: 노을과 먼지) 보다 참된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조하고자 4H교육(Head머리, Heart마음, Hands손, Health건강)을 강조한다. (이수산: 우리민족이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2)조선족사회 현실문제   조선족사회관련 문제들은 아마 조글로 독자들의 영원한 관심사항인 것 같다. 이번 평의범위에 든 글들을 보면 조선족사회의 현실문제들을 다룬 글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포럼추천글>코너가 민족정체성을 지키면서 발전한다는 민족지향의 선정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짚고넘어가야 할것은 특히 기존의 문제나열에 비해 대안제시가 더 돋보인다는 것이다.   인구감소와 인구이동은 현존하는 조선족사회 제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족인구이동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일가견을 내놓고 있다. 김강일교수는 조선족인구이동현상의 원인을 경제적 미발달, 특유의 문화구조로 설명하면서 문화자원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화자원보호는 조선족사회의 생존뿐만 아니라 동북노공업기지진흥전략의 실시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문화자원보호차원에서 집거구흡인력의 향상을 강조하고 있다.(<조선족사회는 왜서 해체위기를 맞고 있는가>)   조선족인구이동의 주요한 향방의 하나가 한국행이 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파생하고 한국사회나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한층 높아가고 있는 마당에서 중국조선족들이 삶을 위해 한국행을 선택함에 대한 이해와 한국 나름대로의 고충을 받아주는 것도 교류의 정상화에 유조한 것이라는 지적이 제시됐다. (허동식: 조선화교와 중국조선족) 비록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현존하는 공동체적 문제발생의 상대적 원인으로 되고 있지만 보다 긍정적 시각에서 조선족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구이동을 직시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민족이동의 현실적 불가피성과 전통에서 현대로의 적응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장경률: 민족대이동 사회발전의 필연적 추세) 또한 세계화시대 이민들이 가져다 준 긍정적인 역할을 실례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인구이동현상을 분석하면서 조선족의 사명이 무엇이며 이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가를 나름대로 설명해주기도 했다.(박광성: 세계화시대 조선족의 의미)   특히 인구이동현상을 단순한 경제적 부를 창조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에서 벗어나 조선족정체성문제를 비롯한 가치의식변동이라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조선족사회구성원들이 전통집거지역을 떠나 해외로,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민족정체성이 약화됨과 반면 국민정체성이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국민정체성의 강화는 또한 한국인의 단일정체성과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범송: 재중동포사회 아이덴티티의 변화) 이와 상관하여 조선족의 정체성은 국내진출과정에서 강화 - 약화 - 강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진출을 통하여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정신철: 중국조선족 정체성)   논자들은 또한 정체성문제와 관련해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민족정체성의 재정립이 급선무임을 강조한다. 조선족은 국민으로서의 국가사랑, 부모사랑, 민족사랑(중화민족사랑)이라는 정체성을 지적하면서 조선족한테는 중국이란 조국이 있고 한국(조선)이라는 고국이 있다고 하면서 민족정체성의 정립을 요구한다.(리수산: 민족정체성 재정립은 급선무) 이와 관련하여 중국 현지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을 자식에 비유하고 중국을 양부모로, 조선을 어머니로, 한국을 아버지로 비유하면서 현재 조선족이 부딪치고 있는 정체성문제와 조선족사회와 중국 조선 한국과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지적, 그러면서 자식으로서의 도리로 낳은 정, 키운 정을 잊어서는 아니됨을 지적하기도 했다. (유연산: 낳은 정, 키운 정)   조선족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또 하나 주목할 현상은 연변경제발전과 조선족문화보존과 발전을 연관시켜 녹색산업으로서의 문화관광산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 제시로서 연변사회경제발전과 관광산업의 추진을 지역문화자원 개발과 연관시켜 고찰하면서 민족문화자원의 개발문제를 언급한 문장이 돋보인다. 여기에는 문화유산의 문화적 경제적 부가치 창출이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연변문화유산보호 및 개발을 통한 연변의 인문환경개발 및 이를 바탕으로 한 관광산업의 발전을 주장한 글이 있다.(최국철:<문화유산의 보호와 관광산업>)    조선족사회 현실문제에서 또 하나 열점화제로 되고 있는 것이 조선족농촌사회문제이다.    논자들은 농촌경제파탄과 조선족귀농현상의 아픔을 토로하기도 하고 (최균선: 막연한 내일을 대비해두자) 오늘날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조선족농촌사회에서 금전의식보다도 금융의식이 필요함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며 (김산: 다가오는 농촌금융시대) 조선족들이 토지를 타민족에게 양도하고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도시로 진출하는 현상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한다.(김범송: 토지는 농민들의 중요한 자산이다)   또한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어서 생존하려면 규모경제가 출로이며(허동식: 중국조선족 불귀의 길을 다시 걷는다) 따라서 금융위기에 부딪친 노무행에 대한 자제를 촉구하며 창업우대정책과 재정착 권리, 빈곤가정의 한국행, 영주권제도 등을 그 해결책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여호길: 한국노무의 위기) 그러면서 농촌에서 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중국의 조선족은 국가의 유리한 정책을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땅을 열심히 지켜갈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최균선: 막연한 내일을 대비해 두자)    그밖에 현재 추진하고 있는 연룡도일체화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에서 평가하면서 연길시를 중심으로 하는 핵심도시 역할을 기대해보는 동시에(장연하: 연길을 크고 강하고 좋게) 이러한 핵심도시건설과 연변의 관광산업 및 외자유치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연변사회 도덕적 이미지 개선이 급선무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장정: 리룡희주장에게 보낸 편지)    조선족사회문제에 대해 민족교육차원에서 조선어교육의 중요성 및 필요성을 지적하는 글들이 또한 눈에 띈다. 중국 조선어의 역사로부터 “모든 사물의 발전이 그러하듯 언어도 발달한 것을 따라 가기 마련이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조선어의 발전방향을 한국어 기준으로 나아가야 함을 암시한 글이 있다.(유연산: 중국조선어의 방향) 또한 일각에서는 한국어를 도입하고 수용하되 조선족군체의 궤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어를 전부 그대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조선어의 근본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주봉: 조선어가 받는 도전과 대안)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사는 모든 정부인원들이 꼭 조선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찬동할 수 없지만 조선족으로서 조선어를 꼭 잘 배워서 조선족문화를 세계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조선족의 사명이라고 지적했다.(닉네임 네티즌: 조선족은 꼭 조선어를 배워야)    또한 조선족에게 있어서 조선어와 한어가 모두 중요함을 지적하면서 언어학적인 시각에서 언어는 상호연관되어 있기에 한어를 잘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어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이수산: 조선어와 한어) 3)조선족사회와 한국관계   오늘날 개방된 사회 속에서 조선족사회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단지 조선족사회 내부적인 요소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주변사회 특히 한국과의 교류는 조선족사회 발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간의 양호한 역동적관계의 형성은 두 사회에 윈-윈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저자들은 한국과의 교류과정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여기에 대한 해결책을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고민하고 있다.   조선족문화와 한국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문화의 선진성을 열거하면서 한국문화의 접수를 긍정하는 반면 (허동식: 또 한국문화와 조선족문화에 하나 둘)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동포들의 열악한 노동현장(이천화재를 비롯하여)을 지적하면서 한국행 조선족노무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문민: 위험한 코리안드림) 이러한 아픔을 극복하고자 한국재외동포정책의 허점을 지적하고 한국인들의 차별시대우를 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다.(김범송: 중국동포인상속의 “고국이미지”)   한편 현재 한국행이 여전히 조선족사회 경제생활개선의 주요한 선택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고령동포입국취소, 친척방문 인원수 제한 등 규제에 대한 서러움을 토로하면서 글로벌시대 문을 활짝 열고 동포포용정책을 펼치기를 호소한 글도 보인다.(강효삼: 왜 중국동포들의 입국을 규제하려고만 할까?) 이러한 정책개선안을 둘러싸고 방문취업제의 실시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시험제도 취소를 비롯하여 현재 시험제도를 둘러싸고 인터넷 등록신청, 시험장소 배정, 시험내용, 년령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는 분석을 진행하였다. (허동식: 방문취업제, 한국어시험제에 대한 정시) 그러면서 고국을 찾는 동포들에게 한국어시험을 치게 하는 것은 고국의 수치이고 동포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여호길: 한국어능력시험은 폐지되어야 한다.)   서러움과 분노의 토로와 함께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의 교류에서 신뢰를 구축하여 서로가 어울려서 윈-윈 할 수 있는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야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으며 현재 실시되고 있는 유학생 쉼터, 유학생IT단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실추되고 있는 조선족사회 이미지를 재립할 것을 호소하여 주목되기도 한다.(예동근: 재한조선족유학생의 역할)   또한 같은 동포의 입장에서 중국공민의 시각에서 중한관계의 우호적인 유대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한류가 중국에서 강온되어가는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중국과 한국의 정상적인 교류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지난친 민족주의정서에 일침을 가하는 글들도 보인다. (목자: 한국인 중국인 조선족의 화합; 조호길: 민족주의와 중한관계)중국인들의 한국을 싫어하는 이유를 지적하면서 한국인들의 뜨거운 온정과 포용력을 기대함과(주현남: 한국인들의 뜨거운 온정과 포용력을 기대한다)동시에 중국에서 한류가 식어가는 원인을 예술적 바탕이 옅고 내용의 변화가 적고 기법이 승겁고 중복이 많고 격정이 적은 등 방면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지적하기도 했다. (이수산: 한류는 식어만 갈 것인가?)   이번 논평글에서 주목되고 있는 점은 노무현전직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족사회에 많은 정책적 지원을 펼칠 수 있도록 노심초사한 노무현대통령을 추모하는 글들이 올라오면서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조선족사회의 그리움을 반영해준 글들이다.(리수산: 노무현의 죽음 - 한국문화의 액“환); 네티즌:모두의 존업을 지켜준 당신 - 노무현; 강효삼: 로무현을 그리는 마음 등 등 다수) 3. 간략한 총화   전반적으로 보면 논자들의 글은 그 주제가 뚜렷하고 관점이 선명한바 이같이 구애없이 자신의 견해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해주고 있는 조글로에 감사를 드린다. 한편으로는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사회에 대한 관심과 대안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앞으로도 많은 논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진정 조선족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9년 12월 연변대학에서
56    延邊與朝鮮族社會發展 (허명철) 댓글:  조회:3090  추천:72  2008-10-10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延邊與朝鮮族社會發展[提纲]   许 明 哲 (延边大学民族学研究所)   延边既是朝鲜族行使自治权利的少数民族地区,又是与朝鲜一江之隔的边疆。因此,对于中国朝鲜族来说,延边已超出了单纯的地理区域性范畴含义,成为与朝鲜族的生存与发展息息相关的族群社会的象征。 一、社会发展 1、社会发展的基本内容: 1)不断加强基础设施建设,改善公共服务条件,提高人民的生活质量; 2)发展公共教育事业,促进人的全面发展; 3)完善社会保障体系,大力发展社会福利事业,让更多的人得到发展机会; 4)大力发展公共卫生事业,让更多的人得生活状况得以改善; 5)加强生态环境的保护,促进人与自然的和谐,走可持续发展之路; 6)促进区域的均衡发展,推动整个社会的协调发展。 2、当代中国社会发展指导思想及总体目标 1)指导思想:坚持以人为本,以人与自然和谐为主线,以经济发展为核心,以提高人民群众生活质量为根本出发点,以科技和体制创新为突破口,坚持不懈地全面推进经济社会与人口、资源和生态环境的协调,不断提高我国的综合国力和竞争力,为实现第三步战略目标奠定坚实的基础。 2)总体目标:可持续发展能力不断增强,经济结构调整取得显著成效,人口总量得到有效控制,生态环境明显改善,资源利用率显著提高,促进人与自然的和谐,推动整个社会走上产发展、生活富裕、生态良好的文明发展道路。 二、民族发展  民族发展是当今中国社会发展的一个主要领域,具有重要的战略性意义。 民族的发展实际上是一个民族因素、经济因素、地域因素、文化因素和社会因素相互交融、相互作用的动态过程。 1、如何处理全球一体化与民族文化多元化关系? 2、如何解决中心与边缘关系、强势文化与弱势文化之关系? 3、如何处理发展与保护的关系? 三、民族文化变迁 由于通讯手段和交通工具的发达,人类进入“地球村”时代,加快了民族文化变迁速度。 1、民族文化融合:不同民族文化在自觉或自愿的基础上,以和平的方式相融合。 2、民族文化区域化:人口移动、外来文化、生存环境等原因,带来民族文化的扩张、交往、透和融合,使原来连为一体的民族文化逐步分割成板块型的区域文化。即形成民族文化内部的中心与边缘关系。 区域文化经过充分的透、融合、内蓄积累达到一定的量,为人们所接受,并对人们的社会活动和行为准则起规范作用,才能向外传播、发展,寻求新的版图。 一种文化向外传播、扩展、推进的距离愈远,调适过的自然环境差异越大,与不同区域的固有文化发生融合、重组和建构的机会或次数越多。其结果,虽然远离本身的原型文化,但经过优化重组后的文化比原型文化具有更强的适应性和更大的生命力。负面影响:民族文化的流失 —— 民族语言、服装、饮食、建筑、民俗、节庆等。 四、朝鲜族社会发展与延边  1、延边经济发展与朝鲜族文化并进的二元特征: 一方面,历史的延续的朝鲜族传统文化仍是当地现行文化的主流,为地方经济和社会发展积累了丰富而独具特色的文化内容; 另一方面,厚重的历史为延边社会经济改革设置了种种障碍,制约着延边地区的社会发展。 面临的问题:如何对待朝鲜族传统文化的“保护”和“革新”。2、朝鲜族社会发展的内涵 一是朝鲜族人口素质的提高和人口结构的合理化; 二是朝鲜族物质生活水平的改善和生活质量的提高; 三是朝鲜族文化的特色化与现代化 3、延边与朝鲜族互动 延边州提供的支撑点: 1)地缘优势;2)政策保障;3)财政支持;4)人才提供 朝鲜族提供的支撑点: 1)人缘优势;2)民族品牌;3)文化战略;4)经济活力  4、面临的课题 延边能否成为中国朝鲜族(文化)的中心?
55    43. 역사는 진실을 댓글:  조회:3264  추천:104  2008-08-03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43역사는 진실을허명철현재 중국관변언론이나 많은 역사책들에서는 중국 항일전쟁을 흔히 8년 항쟁이라고 한다. 1937년에 있은 로구교사변을 계기로 시작된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은 1945년 8월 15일까지 말그대로 8년이란 세월을 경과한 것이다.하지만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결코 1937년 "7.7사변"이 일어나서부터가 아니다. 그 이전에 연변땅에는 일제와 맞서 싸운 "3.13반일운동" 및 청산리전투,봉오동전투가 있었고 1931년 "9.18사변"후에도 홍기하전투와 같은 동북항일련군의 가열처절한 항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까지 항일전쟁을 공식적으로 8년 항일전쟁이라고 할 때 이들이 진행한 항일무장투쟁은 공정한 역사적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일제가 이미 1910년대에 소위 중국땅이라는 간도지역에 들어왔었고 1931년 "9.18사변"후에는 동북에 위만주국까지 세웠다. 이에 맞서 싸운 동북인민들의 항쟁이 그래 중국의 항일전쟁이 아니란 말인가? [현재는 국부적인 항일전쟁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자발적으로 일떠나 손에 무장을 들고 백산흑수를 넘나들면서 6년동안(1931-1937) 제일 낙후한 장비로 제일 강대한 일제 관동군과 피흘리면서 싸워온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이며 진정한 항일투사들임이 손색없다. 이들의 정신과 업적은 서책 아닌 어머님품처럼 드넓은 동북땅에 기재될 것이다.
54    조선족력사,문화를 관광자원화 해야 댓글:  조회:3289  추천:118  2008-07-12
조선족력사,문화를 관광자원화 해야허명철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소장, 교수지난해부터 준비단계에 들어섰고 연변의 “10가지 대사”중의 하나로 지목되였던 제13회 중국북방관광교역회는 이미 결속되였다. 이번 행사 전반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립장은 아니지만 근 1년 넘게 자치주 차원에서 힘을 기울인 행사였던만큼 나름대로 소감을 말해보고자 한다. 이번 교역회개최를 성공적으로 유치하게 되면서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이번 교역회를 형식이 새롭고 특색이 선명하며 교류가 밀접하고 참여가 광범위하며 성과가 뚜렷한 관광축제로 만들어가며 북방 10개 성, 시 및 우리 주의 관광지명도와 영향력을 높이여 “새 북방, 새 연변, 새 전시장, 새 형상”이라는 목표를 실현하는것으로 세계에 연변의 풍채를 남김없이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 같은 취지하에 진행된 이번 행사의 문화적 경제적 시너지 효과는 과연 어떠한지? 이번 교역회가 연변의 향후 발전과 경제적 문화적 비약을 위해 어떠한 플랫홈을 제공할것인지 한번 허심탄회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솔직히 새 천년에 들어와서 자치주 차원에서 민속문화와 관광문화를 골자로 대형행사를 여러번 개최하였었지만 오늘까지 우리의 민속문화와 관광문화는 별다른 질적으로 변화된 양상을 보여주지 못하고있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모두가 알다시피 민속문화관광은 할 때 특정된 지역의 특정된 민족의 특정된 민속활동을 주된 자원으로 진행되는것이다. 현재까지 연변에서의 관광산업은 주로 장백산, 중조변경관광, 민속관광을 브랜드로 삼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관광코스 즉 “볼거리”를 좀 더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연변의 관광지명도와 영향력을 높이려면 자체의 독특한 자원우세를 확보해야 한다. 말그대로 연변은 조선족자치주인만큼 조선족력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관광자원을 창출해내야 한다. 이를테면 지금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을 진행하고 있는데 우리는 조선족마을에 전통적인 가옥을 짓고 마을입구마다 지명 및 마을의 력사가 새겨진 돌비석 같은 것을 세워놓는다면 이것은 기존에 있던 렬사기념비와 더불어 조선족의 이주력사와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을 보여줄수 있을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단순한 관광코스로서의 “볼거리”로만 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고향에 대한 애착도 불러 일으킬수 있는 산교과서로 되여 후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것이다. 다음 민속문화 특히 음식문화에서 우리는 민족적인 정서와 결합하여 개개 음식의 문화적 부가치 창출에 좀 더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례를 들면 이번 행사기간 찰떡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쳐서 관광객들에게 이색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에 우리가 찰떡의 민족적인 정서와 문화적 가치를 첨부하여 손님들에게 찰떡이 우리 민족 음식문화에서의 위치, 우리 민족이 왜서 찰떡을 선호하는지를 보여주었더라면 더 좋은 효과를 거둘수 있을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속관광에서 민속의 민족문화적 가치 발굴에 좀 더 심혈을 기울린다면 한국관광객들은 물론 국내외 손님들에게 연변에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들만의 특색적인 민족민속을 보여줄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번과 같은 대형행사가 우리 주에서 개최되였다는 점에 비해 시민들의 참여가 너무 적다. 이 같은 행사를 정부에서 주도하는것은 당연하지만 행사 준비나 진행과정에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역시 절대 필요한것이다. 자원봉사나 기타 사회구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모습으로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다면 행사도 성공적으로 진행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주인공된 의식을 키워줄수도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53    42.짜장면 단상 (허명철) 댓글:  조회:2978  추천:111  2008-07-11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42짜장면 단상허명철어느 한 학자가 이야기 하기를, 20세기 민족주의의 성행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두 사조의 실패라고...거창하게 민족주의를 논하기에 앞서 민족과 그 정체성에 대한 소감을 적어보자고 한다. (조선족에 있어 아직은 주의까지 논하기는 무리라는 판단에서, 물론 틀린 판단일수도 있겠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류]의 한개 분자로 소속되고 있는 만큼 그 [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태어날때 남녀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어느 한개 집단의 성원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집단이 일차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가족 더 나아가서 민족이라 할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이란 이 민족은 어떠한 공동체인가? 그 정체성을 본다면 우선 중국내 기타민족과 구분되어 조선족으로 상징되고 국가적 차원에서 본다면 중국공민이란 정체성을 지니게 되며, 범민족 차원에서 한민족이란 정체성을 소유하게 된다. 즉 조선족은 다원화한 정체성 소유자로 되는 것이다(삼위일체?). 다원화된 오늘의 시대에 조선족은 오히려 다원화된 정체성때문에 고민이 생기고 자아 정체성에 대한 흔들림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인과 조선족, 중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생기는 갈등과 벽이 바로 이러한 다원화된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인정이 아닌 자아 입장에서 오는 정체성의 강요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인은 한민족 정체성을, 중국인은 중국국민성을 요하고 있는데 조선족은 자기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문제의 관건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어찌보면 과거 우리는 민족을 논의하면서 객관적인 요소에만 집착해 왔었고 주관적인 심리적 경향성과 귀속의식을 홀시해 왔다고 할수 있다. 개체성원들에게 어떠한 정체성 교육을 진행하고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가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조선족의 현실은 짜장면의 입지와 같다고 할수 있다. 한국에서는 중국요리로, 중국에서는 한국요리로 불리우고 있는 짜장면, 누구나 자기의 것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원조가 중국이라는 이유로, 중국은 이미 한국맛으로 변형되었다는 이유로...자기의 귀속처를 잃어버린 짜장면, 그 신세가 가엾다. 조선족도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과 의식적인 교육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짜장면의 신세를 면치못할 것이다.
52    41.짜장면과 조선족 (허명철) 댓글:  조회:2769  추천:38  2008-07-09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41짜장면과 조선족 허명철간만에 먹어보는 짜장면이지만 오늘 따라 웬지 속이 개운하지 못하다. 짜장면을 먹다보니 또 썩궁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에 가면 짜장면은 중국료리로 취급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한국료리로 취급한다. 원 산지는 중국이 맞지만 이미 한국식으로 개량되었기에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맛있는 짜장면은 누구나 즐겨드시지만 또 누구도 자기네 음식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짜장면 그 신세 어찌 보면 나하고 이리도 같을까.여태까지 나는 조선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떳떳히 살아왔다. 그래서 대학입학했을때 열린 신입생환영회에서도 부른 노래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였다. 지난 월드컵때에도 "대한민국 짝짝궁..."하면서 시대광장에서 열심히 응원하군 했다. 근데 어느날, 엄숙한동지가 찾아와서 "너의 조국은 중국이구 너는 중화민족이야"고  엄숙히 타일러주었다. 그 소리에 나는 한참 어리둥절해졌다. 우리 부모도 할아버지도 분명히 한반도에서 살아왔고 조상의 뼈도 한반도에 묻혀있는데... 조국 역시 말 그대로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나라가 아닌가. 그리구 나는 조선족이고 중국공민이지 중화족은 아닌데.. 웬체 사상이 낙후한 사람으로 소문이 있는지라 엄숙한동지는 천천히 학습하면서 세계관을 개조하라고 한다. 후일 명심해서 학습했지만 학습할수록 인식은 점점 비뚤어지게 된다. 마침 새로 당선된 온가보총리가 미국방문 길에 미국에 이주한 한족들에게 "조국은 영원히 당신들의 뒤심이 될 것이라"는 격정으로 가득찬 연설을 했다. 그럼 미국에 이민가서 미국적을 갖고 있는 한족의 조국은 중국이구 중국에 이민와서 중국적을 가진 우리네 조국은 왜 한반도가 아닌 중국으로 되어야 하는가. ㅎㅎㅎ, 그래두 국가급 지도자들이 인식수준이 높구나. 결국은 엄숙한동지의 사상이 틀렸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의 학습과 세계관 개조를 끝내고 말았다.
51    40.현대판 "나성교이야기" 댓글:  조회:6265  추천:91  2008-07-08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40현대판 "나성교이야기"허명철물에 빠진 조선어린이를 구하다가 영용히 희생된 지원군전사 라성교이야기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런데 수영상식이 있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물건 메듯이 어깨로 떠밀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판 라성교이야기가 시작된다. ....부대로 돌아가던 라성교는 강가에서 신나게 스케트 타는 어린이들을 보고 자기도 타고 싶은 충동을 못이겨 얼름강판위로 달려갔다. 그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살얼음이 꺼져내려가는 바람에 어린이와 라성교아자씨는 함께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강가에서 자란 조선어린이는 재빨리 헤염쳐 얼름위로 나오려고 했으나 헤염칠 줄 모르는 라성교아자씨가 어린이 발목을 잡고 놓칠 않는 바람에 실패하고 다시 물속에 빠져들어갔다.... 이렇게 거듭하던 와중에 라성교 아저씨는 의식을 잃어가게 되었고 어린이는 끝내 얼름위로 기여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어린이 발목을 놓치 않았던 라성교아저씨도 어린이가 얼름위로 올라가게 되면서 자연이 머리가 수면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장면이 나중에 라성교가 어린이를 떠밀어 구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라성교아저씨는 왜서 끝내 장렬히 희생되었는가. 그 어린이 발을 보면 답안이 나온다. 엉? 왜 어린이 신발이 한짝 잃어졌지. 누가 가져갔나?????????????? 오늘은 이 영웅을, 내일은 저 모범을... 맨날 누구를 따라배우는 인생추구에 지칠때가 있겠죠. 특이 그 어떤 정치적 수요에 의해 허위로 포장된 영웅사적에 눈물을 흘리다가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 배신감을 느낄 때................이미 설계된 완숙한 인생프로그램을 실행하기보다는 가끔 바이러스침해도 당하고 또 스스로 이를 극복하고 자아를 실현해가는 그런 인생을 즐겨보는 것도 일종 락이 아니겠어요    
50    39. 내가 존중하고 싶은 사람 댓글:  조회:2734  추천:78  2008-07-06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9내가 존중하고 싶은 사람 허명철昨飮金剛水(금강산 물 마신 것이 어제 같은데) 今食春川魚(오늘은 춘천 물고기를 맛보는구나) 錦繡三千里(삼천리 금수강산이여) 何日慶統一(언제면 통일을 경축할가) 이 시구는 풍교장이 10년전에 지은 즉흥시인데 이번 여름 심양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풍교장은 이 시구를 다시 읊어 남북학자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였다. 내가 풍교장을 알게 된 것은 2002년 심양에서 가졌던 모임에서 였다. 첫 인상에서 나는 풍교장은 자기 사상이 있고 학식 있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뒤에 있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풍교장이 걸어온 지난날의 역사 특히는 우리 민족을 위해 하신 일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진정으로 풍교장을 스승처럼 존중하게 되었다. -- 1957년 2월 ≪大公報≫에 톱기사로 스탈린의 계획경제이론을 부정하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당시 풍교장의 나이는 24세였다. -- 1988년 당시 워싱톤에서 당시 방문학자로 있던 조선족핵전문가 천문갑(현요녕발해학원 원장)교수가 한국에 가보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고려로 감히 제기를 못하고 있을 때 풍교장은 서면보증서를 써주었다.“出訪韓國 責任我負”(한국을 방문하라 책임은 내가 진다) 천문갑교수는 그 자리로 워싱톤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방문을 신청했고 한국행을 실현하였다. 중한수교 이전 특히 제3국을 통해 한 조선족학자가 한국방문을 신청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보증서는 지금도 천문갑교수가 보관하고 있다) -- 풍교장은 중국 대륙 1000여개 대학중 제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1989년)한 대학총장이었고 또한 제일 처음으로 한국유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킨 분이다.(1986년 독일에서 온 한국유학생을 홍콩으로 신분을 바꾸어서 입학시켰다.) -- 한국에서 불법체류로 있다가 심양공항에 내리면 벌금을 안기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풍교장은 요녕성정부 참사의 신분으로 직접 요녕성정부에 벌금을 취소할 것을 강력하게 제기하여 심양공항에서 벌금을 안기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 요녕조선문신문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에도 때 풍교장이 직접 나서서 성정부와 교섭하여 해마다 30만원씩 지원받을 수 있게 하여 우리말 신문이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는 큰 도움을 주었다. ...... 광복60주년을 맞으며 내가 구체책임을 맡은 회의에 풍교장을 대회집행주석으로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풍교장은 나에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 지금 내가 하고 있다면서 아무런 부담을 갖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의 말씀을 주었으며 힘들면 심양에 와서 하라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풍교장의 관심과 배려에 난 단지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49    48.인생사색 댓글:  조회:3269  추천:100  2008-07-02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48인생사색허명철먹기 위해 사는것일가 아님 살기 위해 먹는 것일가? 참 잼있는 고민이다. 먹는 것과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1차적인가 하는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왜서 먹고 왜서 사는가 하는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가 먹는 목적은 무엇이고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어찌 보면 인생의 목적을 논하는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철학문제인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한 질문이다. 먹는 목적도 좋고 사는 목적도 좋고 한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죽기 위해서인 것이다.  인간은 죽기 위해 먹고 또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생애의 목적지는 이미 주어졌는바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다만 어느 때 죽고, 어떻게 죽느냐? 죽음으로 향한 길에서 어떠한 발자취를 남기느냐 ? 이것이 진정 우리의 관심 사항으로 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내가 남긴 발자취에서 바로 나의 인생 추구와 가치가 체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보면 그 사람의 존재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은 이 영웅을, 내일은 저 모범을 ..이렇게 남을 뒤쫓는 삶을 살다 보면 비록 남긴 발자취는 많은것 같지만 어느 하나도 자기 것이 없다. 무슨 무슨 식 인물로 평가를 받는 인생은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결국은 자아의 존재와 개성이 결여된 누구식일뿐이다. 죽음이란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에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이 남긴 발자취, 즉 자기가 걸어온 인생여정을 돌아보게 된다.  화려한 인생은 아닐지라도 단 하나라도 진정 자신의 발자취를 남길 수만 있다면  아무런 유감도 미련도 없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자연의 예속에서 벗어난 인간이 아직도 자연의 본성대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을 가엽게 생각할 때 동물들은 사회의 예속에서 허둥대는 인간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   -- <로완퉁 사전 > 제 32페지에서
48    38. 내가 가야 할 길 댓글:  조회:3939  추천:78  2008-07-01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8미래지향적인 삶과 독서허명철이틀간 심양에서 열린 "조선민족전통음악"관련 회의를 마치고 오늘 한국학자들을 공항까지 바래다 주고 나니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을 달랠길 없었다.(저는 연변 포됴우협회 회장의 명의로 참석했음.ㅎㅎㅎㅎ) 이번 행사를 위해 음력설 이튿날에  평양에 다녀와야 했고 4월초 심양에서 열린 예비회의에서도 남북 대표들 사이를 오가며 많은 입씨름도 했다. 모임 사흘 앞두고 한국에서 걸려오는 "회의가 제시간에 열릴 수 있냐"는 문의전화를 받을 때도 솔직히 파악이 없었다. 하지만 회의가 제시간에 열리고 전반 회의분위기가 화기애애한 모습들을 보여 줄 때, 특히 6.15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민족의 전통문화--음악 예술들을 지켜가야 한다는 일치한 주장을 펼칠 때 필경 우리는 한민족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학술회의도 중요했지만 평양관에서 있었던 환영만찬에서의 그 모습들은 더욱 인상이 깊었다. 원체 음악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모임인지라 식당 직원들의 공식적인 공연이 시작되자 만찬은 완전히 즐거운 오락마당으로 탈바꿈 했다. 서로 앞다투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여기에 감명되어 식사하러 온 낯모를 손님들도 함께 참여했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술을 권하기도 했다. 남북학자들과 조선족 학자을 포함하여 식당 종업원, 그리고 식당을 찾아온 손님들이  서로 어깨 잡고 통일열차 달리기를 할 때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 좁은 식탁 사이를 40여명이 만든 열차가 달려가는 모습을 볼 때 진정 민족의 통일의 그날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연속 3기 전국인대 대표로 계셨고 료녕대학 교장을 지냈던 풍교장님은 눈물이 글썽해서 마이크를 잡고 일어서서 오늘 이 광경에서 조선민족의 희망을 보았다고 하면서 조선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며 21세기 인류역사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47    37. 조선족 호칭에 대하여 댓글:  조회:4038  추천:113  2008-06-24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7조선족 호칭에 대하여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온 이주민과 그 후손들을 근간으로 형성된 민족공동체이다. 그러나 이주시기부터 조선족이란 호칭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예하면 1931년에 반포한 "중화소베트공화국 헌법대강" 제14조에는 고려인으로, 1936년 남만지역 "하리회의" 결의문에서는 재만한인으로, 1949년 제1차 정협 및 국경 1주년행사에 주덕해 등은 조선민족 대표로 참석했다. 1952년도 연변에 자치구가 건립될 때 명칭도 "연변조선민족자치구"였다. 그럼 언제 조선족으로 호칭되었는까? 사실 1949년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당시 중국 경내에는 약 400여개 상이한 족성을 가진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민족식별사업이 시작되면서 1953년도에 37개 소수민족이 확정되었고 (우리도 이시기에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확정받은거죠) 65년도까지 17개 민족 1979년도 기노족이 독립민족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오늘날 55개 소수민족이 탄생하게 되었다.(현재까지 약 80만 정도 민족획분을 받지 못했음) 이렇게 볼 때 1953년도부터 중국경내에서 중국국적을 소유한 우리민족은 조선족이란 공식 명칭을 같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1952년도에 성립된 "연변조선민족자치구" 가 55년도에 자치주로 변경하면서 그 공식명칭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46    36. 문화재유실을 보고 댓글:  조회:2749  추천:79  2008-06-18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6문화재유실을 보고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어제 오늘 모임에 참석하고 나서 분노와 허탈과 짜증으로 괴롭기만 하다. 금년 "중화민족"이란 제목으로 대형기록편을 만들게 되는데 제1집으로 조선족을 선정하였다. 어제 중앙TV 유명한 陆감독과 총설계사 刘사장과 자리를 함께 하여 이 프로를 어떻게 만들가 하는 좌담회를 소집했다.(류사장은 김일성종합대학 유학하고 북경대학에서 10년간 교편을 잡다가 한국주재 중국대사관에 문화참사로 지냈었고 현재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산하 영상출판사 사장직을 맡고 있음, 육감독은 고궁 등 대형기록편 감독을 맡았던 분) 좌담회에서 분노와 허탈을 느끼게 된 원인은 다름 아닌 우리 주변에서 인간문화재가 하나 둘 유실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유명했던 조선족 민간이야기 3대 대왕인 황귀연, 차병걸, 김덕순, 민간예술인 김경운, 김학천이  이미 세상뜨셨다는 소식을 듣고 더우기 생전에 이 보귀한 문화재에 대해 너무 등한시하여 민족문화의 귀중한 자산들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노인네들, 이주, 반일, 항일, 해방전쟁과 같이 우리 민족역사의 산 증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하직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 너무 방심한 것이 아닐까? 이들이 바로 정치화한 민족역사로부터 진실한 역사를 회복하는 산 증인인데...... 오늘 저녁에는 "문학과 예술"잡지사의 송년모임이 있었는데 자금난으로 어렵게 운영하던 중 금년에는 성보 정영채사장님이 2만원을 후원해 주신다고 한다. 한국인이 민족에 대한 애정으로 자금난을 해결해주고자 하는데 우리 조선족기업인들은 무엇하고 있는지? 어렵다고 아우성만 치지 말고 우리도 호주머니를 털어 자기 문화진지를 지켜갈 수 있는 자세를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확실히 우리 사회에 베푸는 문화가 필요할 것 같다.
45    34. 방문취업비자 발급에 즈음하여 댓글:  조회:2646  추천:85  2008-06-18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4방문취업비자 발급에 즈음하여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한국정부에서 오늘 7월부터 중국과 옛 소련지역 동포를 상대로 “방문취업비자(H-2)”를 신설, 발급하기로 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외교적 마찰”이란 “우려”를 가셔내고 진정으로 동포들의 고국임을 보여주는 모습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한국의 입장에서 놓고 보면 이번 조치는 단순한 해외동포에 대한 정책차원의 개진뿐만 아닌 여직껏 말밥에 오르고 있던 송출비리, 노동시장 혼란, 불법체류, 범죄 발생 등 문제들을 해결하는 면에서도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조선족사회의 입장에서 놓고 보아도 이번 조치는 역시 매우 고무적이다. “방문취업비자”가 신설됨에 따라 해외노무송출시장이 더욱 활기를 가져올 수 있으며 조선족의 한국에서의 취업 및 연수인원 수도 급증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해외노무로 인해 발생되는 이혼률 상승, 자녀교육, 귀국 재정착과 재창업의 혼돈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은 오히려 감소될 수 있다. 따라서 곧 실시하게 될 이번 조치는 조선족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현실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방문취업비자”의 신설과 발급은 그 동안 쌓여온 한국과 조선족사회간의 불신의 벽을 깨뜨리고 새로운 “밀월”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로 될 수 있으며 이는 쌍방에 모두 유익한 것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주요 수혜대상으로 되고 있는 조선족사회에서 지방정부 관련부처에 위탁하든 민간단체에 위탁하든 적극적인 자세로 상응한 대비책을 내세워 고국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그러하지 않을 경우 자칫 또 다른 형식의 사기피해가 조성될 수 있다.   현재의 경우를 놓고 보면 우리는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노무일군들의 권익을 대변하지 못했었으며 이들의 가정과 자식들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 부족했다. 이들이 조선족사회의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도에 비하면 받은 관심은 너무나도 적었다. 인간사랑의 결여가 과거 우리들의 노무송출사업에서의 커다란 오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과거에는 노무송출 및 취업에 있어서 제도적 장치가 문제시 되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방문취업비자”의 발급을 계기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은 수혜자의 입장에서 한 가지 희망사항이라면 부디 “신(信)”과 “의(義)”를 지켜 좋은 제도를 악용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44    주체블록으로서의 조선족공동체 댓글:  조회:2286  추천:80  2008-06-17
중국조선족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접근  허명철       Ⅰ 문제의 제기    주 지하듯 현존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사회는 특정한 역사환경과 조건하에서 한반도로부터 중국에 건너왔고 이미 중국국적에 가입한 이주민과 그 후손들을 근간으로 형성된 특수한 민족공동체로서 주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한 파산된 농민들의 대량적인 이주를 원류로 하고 있다.1) 다시 말하면 중국조선족은 이주민의 신분으로 중국에 건너와 정착한 韓민족의 일개 구성원들로서 이들은 중국 땅에 건너와 정착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특히 국적사항의 변동과 이에 따른 민족심리와 국가관념, 향토의식의 변화로 말미암아 점차적으로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과는 별도의 새로운 상징적 의미와 민족적 속성을 지닌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공동체로 공식 등장하게 되었다.    과경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이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민족정책의 실시, 조선족사회의 주체적인 자각과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초기 조선족사회의 공동체적인 집단생활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생계유지를 목표로 시작되었던 조선족선민들의 천입과 정착은 형식상에서 개개인의 행위로 나타났지만 결코 분산적인 정착은 아니었다.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분산적인 생활보다 공동체적인 집단생활모습을 보여주었는바 지연, 혈연은 집단거주생활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가능성은 수전개발과 같은 생존방식의 성공적인 도입으로 하여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혈연적인 민족동질성과 수전농사라는 생존방식의 활용으로 경제적인 생존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개인적인 초기 이민행위는 이국 땅에서 자기 민족의 새로운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社會群體로 성장할 수 있게 하었다.   새 중국의 건립과 함께 “사실”적으로부터 “법률”적으로 중국의 공민으로 된 조선족은 민족지역자치법의 실시와 더불어 연변지역에서 자치권리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반 이주시기에 형성되었던 조선족공동체는  보다 공고화되었다. 또한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이라는 새로운 族性을 지닌 조선족은 주인공적인 자세로 중국사회주의혁명과 건설사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중국본토에서 성장한 기타 여느 민족 못지 않게 중국사회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해왔다. 특히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은 자체의 지역적인 우세와 혈연적인 우세를 발휘하여 주변국과의 경제교류와 문화협력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자체의 물질생활환경을 개선하였고 문화생활수준도 크게 제고시켰으며 전국 56개 민족 중 종합문화소질 제1위까지 자리 매김 했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국사회의 개혁개방정책의 실시와 시장경제의 전면적인 도입, 인력시장의 개방과 산업구조의 조정으로 야기된 조선족사회 이동인구의 급증은 기존의 조선족집거구의 해체를 자초하게 되었다. 또한 이에 따른 민족교육의 위축, 언어문자활용공간의 축소 등등의 문제들은 제반 조선족사회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족사회가 중국이란 다민족국가에서 자체의 언어, 문자, 교육, 생활풍습 등 민족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고 중국사회에서 자체의 입지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으로서의 민족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온 것과 갈라놓을 수 없으며 또한 현재 조선족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진통들도 역시 공동체적 삶의 방식의 해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본 논문은 우선 민족의식, 민족교육, 집단거주의 차원에서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의 형성원인을 고찰하고 새중국이 건립된 후에도 조선족이 자체의 공동체를 계속 보존해올 수 있었던 원인을 국가의 정책적 보호와 제도적 장치, 그리고 조선족사회에서 실시하였던 민족교육의 보급과 같은 주체적 노력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 토대 위에서 현재 조선족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개방화시대에 민족공동체의 보존에 대한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논의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족문제의 근원에 항상 본질적 요소로 작용하여 온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내용으로 하는 “문화공동체”의 형성에 시각을 모아보고자 한다.       Ⅱ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의 형성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놓고 볼 때 민족(Nation)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생활에서 일정한 정치적 기틀과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고 인종․언어․종교․풍습 등 문화적 유대관계에 의하여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통일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기 시작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주민으로서 조선족이 한 개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지닌 민족공동체로 등장하게 된 것은 원초적인 민족형성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의 성격보다도 각자의 생계유지를 목표로 하는 생활공동체적 특성이 일차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비교적 적합한 것 같다.     쪽지게를 지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거치른 만주벌판에 자체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민족사를 시작했던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면서 민족공동체의 형성에 주력하였다. 전반 이주시기 조선족공동체 형성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그 주요요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첫째는 민족의식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이다.     민족공동체 형성에 있어서 민족의식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민족단위의 공동체를 형성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자체민족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고 민족의식을 키워가게 되며 민족의식은 혈연, 언어, 역사, 문화의 동질성을 통해 진일보로 강화된다.    혈연적인 동질성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족성을 의식하도록 하게 하며 민족구성원들간의 일차적인 뉴대로 작용하면서 민족공동체형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강한 결속력으로 역할을 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서 활용되고 있는바 공동체내부 성원들간의 교류를 증진하고 애착심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언어의 동질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단지 같은 언어를 쓰고 그것을 통하여 서로의 뜻을 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성원들간의 강한 동류의식을 느끼게 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공동한 역사의 소지는 서로 함께 어울려 살면서 공동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지켜온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숙명적 동질성을 느끼게 하며 또한 역사적 산물로서의 민족의 전통과 습속은 자아민족에 대한 귀속감을 키워준다.    상술한 기준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아집단(we group)임을 느끼게 하여 주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들로서 한 개  민족의 민족의식을 형성시켜 주는 시발점이 된다.     조선족선민들은 중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이미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으로 생존해 오면서 독립된 민족속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민족문화와 역사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인 소유와 민족의식의 내재 및 생존이라는 공동한 목표지향으로 하여 조선족선민들은 이주초기부터 비교적 쉽게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올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집거구의 형성이다.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중국의 광활한 지역에 산재되어 있은 것이 아니라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북3성의 농촌지역에서 집단생활을 해왔으며 또한 이러한 집단생활에 의거해서 자체의 민족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조선족이 이주초기부터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가면서 집단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수전농사의 성공적인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조선족선민들은 그 이민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비교적 익숙했던 생존수단에 주로 의거했는바 無霜期가 짧은 동북지역에서 벼 재배 시험하여 1875년 통화지역에서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이는 수전 농사에 익숙했던 조선족이민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고 중국 땅에서의 정착생활을 가능케 하였다. 그때로부터 조선족은 주요하게 수전 농사를 통해 자기의 생활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수전 농사가 가능한 곳을 찾아 동북각지로 진출하여 조선족의 분포지역을 확대시켰다. 수전 개발은 수원지를 중심으로 자연 우리민족이 모여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고 또한 수전 농사에 필요한 관개수로공사는 일정한 규모의 노동력을 수요하였기에 한전농사보다도 쉽게 집단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오면서 형성된 상부상조의 공동체의식도 초기 집거구를 형성하고 집단생활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주요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인연, 지연, 혈연을 중히 여기고 예로부터 상부상조하는 마을공동체의식을 키워왔던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도 초기 집단생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비록 자신들의 생활형편도 넉넉하지 못했으나 “조선에서 갓 이사온 사람들이 서로 이집저집 다니며 온 겨울 먹어도 밥값을 받는 법이라곤 없었다”.2) 그리고 “조선에서 이민들이 들어오면 이집저집에서 강냉이며 감자며를 몇 마대씩 모아서 가져다 주군 했으며”3) 지어 “조선에서 온 가족들을 데리고 돈 한푼 없이 찾아와도 이웃집들에서 사발이랑 접시랑 저가락이랑 모아서 살림을 차려줬다.”4) 한반도에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았고 서로의 안면도 없었지만 일단 이국 땅에 와서는 모두가 서로 의지하면서 사이좋게 지냈고 함께 어울려 화목하게 생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민족의 상부상조하는 전통적인 미덕과 공동체의식이 초기 조선족공동체 형성에 큰 역할을 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셋째는 민족교육의 실시이다.     남달리 교육을 숭상해 왔던 우리민족은 생활난으로 이국 땅에 건너와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자녀교육만을 잊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선족의 이주사가 바로 조선족교육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국타향에 이주하여 광활한 만주벌판을 개간하면서 격동의 민족 역사를 시작한 조선족은 기타민족에 비해 남다른 교육이념을 갖고 있었으며 자녀교육에 신경을 써왔다.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일정한 민족집거지를 형성하고 사당을 꾸려 자녀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초기 조선족의 원초적인 교육이념은 이조시기 흥행했던 입신양명, 즉 개인적인 지위획득과 신분향상에 대한 지향이었으며 이러한 가치의식은 자기의 신분을 제고시키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변하려는 강력한 성취동기로 작용하면서 초기 조선족교육이 정착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되었다.     중국에 이주한 조선족선민들은 그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향학열만은 식지 않았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공부시켜야 장차 출로가 있다는 도리를 명심하고 있었던 조선족선민들은 중국에 건너온 후 “이사를 해두 늘 학교 있는데루 이사했다.”5) 학교나 서당을 중심으로 이민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자연히 공동체 형성에 유조하였다.       이주시기 조선족이 어려운 사회 여건 속에서도 자체의 민족공동체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주요 원인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대한 반발과 함께 형성된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이다. 일제의 침입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지니고 이국타향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동족에 대한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짙으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민족동화정책의 실시는 민족의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유발하여 본능적인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을 깊이 자극하여 민족의 일체성을 보존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민족공동체에 대한 결속력도 절대적으로 강해지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문화약탈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유발된 민족의식은 어느 정도 정치적 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식민지배라는 사회적 역사적 현실 속에서 조선족사회의 일차적 목표는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독립에 있었다. 이러한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체적 노력은 아울러 문화적 동일성(identity)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동반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선민들이 처음 생활의 터전을 잡았고 그 기초 상에서 형성했던 집단생활지역은 대부분 인가가 드물고 문화적으로도 불모지였던6) 편벽한 산골이었다는 점도 초기 공동체 형성에서 홀시할 수 없는 한 개 변수로 볼 수 있다.     상술한 원인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초기 조선족공동체가 그때 사회환경에서 그 존속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선민들이 중국 땅에 이주해 온 뒤 자신의 두 손으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일정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자원적인 인구이동과 통치당국의 의한 강제이민조치도 없었기에 대규모적인 인구이동이 원천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단순한 삶의 터전과 생활공간확보를 목적으로 형성되었던 집단생활방식은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온정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바 중국조선족의 초기 공동체형성의 바탕은 폐쇄적인 농촌-마을공동체에 있었던 것이다. 특수한 역사 상황 속에서 중국에로의 이주를 시도한 조선족선민들은 이주 초기부터 거주지역과 생활세계를 중국의 기타 민족과 달리하면서 자체의 마을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오면서 자급자족적 문화 및 경제생활을 진행하였다. 특히 수전농사의 개발과 성공은 수원지와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기에 쉽게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고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기타 민족과 격리된 공동체생활도 가능했다.      이렇게 형성된 초기 조선족공동체는 이국타향에서 조선족이주민들이 망향의식과 마음을 달래고 서로 의지하고 협조하면서 생활하는 생존의 기본단위로, 삶의 정신적 기둥으로 역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권에서 자체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지켜오는 보루작용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인 공동체 존재에 힘입어 조선족선민들은 생활상의 어려움을 이겨갔고 서로 일심 단결하여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민족동화정책에 맞서 싸우면서 자기민족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으며 또한 민족경제를 형성 발전시킬 수 있는 최초의 사회적 문화적 토대도 마련하게 되었다. 모종 의미에서 민족공동체형성을 통해 조선족은 중국에서의 정착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시기 조선족구성원들이 의식하고 있었던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역사환경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독립이라는 이념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공동체로서가 아니라 혈연과 지연 등 자연적 유대관계에 의해 결속되고 한반도로부터 이주해 올 때 이미 익숙했던 문화적인 친화력에 의해 동질성을 확보하는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였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Ⅲ 건국초기 조선족공동체의 보존     전반 이주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삶의 터전을 닦아 놓은 조선족은 광복 후 인민민주정권의 건립과 토지개혁운동에 참가하였고 중국의 기타 민족과 평등하게 토지를 분배받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중국을 자기의 조국으로 받아들이었지만 결코 중국공민으로서의 완전한 국민의식이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국내 사정과 한반도의 불안정된 정세로 하여 이시기 조선족이 유지해 온 공동체의 성격을 놓고 본다면 여전히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였고 민족의식과 민족심리도 재래의 혈연성과 문화성에 기초한 조선민족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동족공동체는 새중국의 건립과 함께 중국의 합법적인 공민으로 신원이 바뀐 조선족성원들은 단순한 조선민족적인 개체로서가 아니라 동시에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공민으로서 생존하게 되었으며 중국사회에서 수동적인 객체로부터 능동적인 주체로 전환하면서 스스로의 자결권(self-determination)을 가지고 국가의 공동의지를 위해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은 중국국민이란 정치적 신분을 지니게 되었고 그 민족적 명칭도 과거와는 달리 조선족으로 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민족공동체의 성격도 “동족공동체Abstammungseinheit”에서 중화민족의 대가정의 일원으로서의 “의지공동체Willenseinheit”의 구성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새 중국이 건립된 후 조선족사회는 신원의 변화에 따라 자체의 공동체적 삶의 유지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조선족은 신원상 단순한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족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한 개 공민으로, 조선족이란 새로운 기호의 매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민족적 공동체의 유지에 있어서 비록 당의 민족정책의 보장과 법적인 보호하에 조선족은 자체의 전통적인 문화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었고 또한 이를 토대로 조선족의 상징적인 의의세계도 구축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려 왔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군체라는 신분에 사로잡혀 중국사회주의제도에 대한 적응과 사회주의적 이념에 대한 수용에 보다 더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족공동체형성과 유지에서 주요한 요소로 작용했었던 조선족의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사회주의주류문화와 융합하고 사회주의문화건설에 적응하고 공조하는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성격상에서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중국조선족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쉽게 말해서 조선족의 문화가치의식 속에는 중국사회주의문화의 특성이 점차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국관과 민족관이 한반도중심에서 중화중심으로 이전되기 시작하면서 자각적으로 중국을 자기 삶의 고장으로 여기며 자기 민족의 운명과 중국의 운명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7) 결국 조선족은 자체의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공동체적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갔었지만 그 내연상 이미 상당한 변화를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건국 후 조선족사회가 보존하고 유지해 나아가야 할 민족의 공동체는 그 주체의 민족성격의 변동에 따라 단순한 조선민족의 공동체가 아니라 중국조선족으로서의 공동체로 전환되었다.     조선족의 신분상의 변경과 공동체 성격의 변화를 떠나서 건국 후 상당한 역사시기 조선족이 비교적 온정하게 자체의 민족공동체를 보존하고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원인을 검토해 본다면 이주시기에 형성해 왔던 집단생활을 계속 유지해 왔고 또한 사회주의교육방침의 지도아래 진행된 민족교육의 보급과 전통문화에 대한 전승이라는 주체적인 노력과도 관련되지만 당시 국가적 차원의 정책적, 제도적 요소들이 깊은 작용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점은 소수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민족지역자치를 허용해 온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의 실시와 소수민족의 경제생활과 문화교육사업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과 법률적 보호이다. 건국 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민족이론을 지침으로, 민족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간주하고 일정한 역사, 언어, 지역, 경제생활, 문화 및 심리적 천성에서 공동성을 갖는 안정된 인간공동체로 간주하였으며 중국의 국정에 알맞는 민족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소수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적 권리와 이익을 특히 중요시하고, 그들의 문자, 풍속, 종교 및 그들이 장기적으로 번영 성장해 온 공동지역을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새중국이 건립된 후 중국정부는 민족구역자치정책과 소수민족의 언어 문자, 풍속습관과 종교신앙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쳐 조선족이 일정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민족적인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유한 민족적 문화특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 정부차원의 이러한 조치들은 조선족공동체 보존과 유지의 중요한 원인으로 되었다.     다음, 조선족이 자체의 공동체를 보존해 올 수 있었던 원인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민족교육을 보급 발전시키고 민족문화에 대한 고양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공동체를 결속하는 힘의 원천이다.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는 일반적으로 민족교육을 통해 주입되고 보급되는바 조선족의 공동체적 삶의 유지에 있어서도 민족교육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건국초기 전반 1950년대에 조선족의 문화사업이 발전을 가져올 수 있고 조선족교육이 중국의 기타 민족에 비해 앞장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북한으로부터 오는 문화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북한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해 많은 우수한 인재를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교육문화의 발전을 위해 기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화학부에서 건교초기에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의 교과서를 적잖게 사용했으며 기타 조선족중소학교들에서도 북한에서 출판된 지리, 역사교과서를 사용했고 문학교과서도 북한 교육성에서 비준한 교과서였다.8) 그때 조선족이 자체로 키워낸 지식인이 아직 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만약 북조선의 교과서가 없었다면 가능하게 중국조선족의 민족교육이 요람에서 요절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와 같이 북한의 문화적인 지원에 힘입어 조선족사회는 민족교육의 급속한 발전을 시도할 수 있었고 자체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는 또한 조선족공동체 유지와 발전에 매우 유익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사회의 폐쇄적 자립경제체제 하에서 실시되었던 호적제도와 인사제도를 비롯한 국가의 제도적 장치들도 조선족공동체 보존과 유지에 상당히 유리하였다. 호적제도의 실시와 계획적인 인사제도의 집행은  사회인구이동의 가능성을 거의 근원적으로 제거하였고 전통적인 사회생산구조는 거주지역의 상대적인 폐쇄성과 고정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사회의 폐쇄적인 성격은 조선족들이 동북 3성을 중심으로 자체의 민족적인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민족적인 동질성과 문화적인 유대성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주요한 배경이다.     이와 같은 정책적, 제도적 및 주체적 요소의 복합적인 작용하에 조선족은 자체의 민족공동체를 보존해올 수 있었고 민족의 정체성도 지켜올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를 토대로 조선족사회는 재래의 민족전통문화를 사회주의문화와 융합하고 중국의 인문사회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점차적으로 중국조선족특색을 띤 문화를 형성해 나갔으며 한반도와 세계 기타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민족이 소유하고 있는 민족문화와 구별되는 일부 문화양상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한 개 민족공동체로서의 자체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작업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그 뒤 중국 국내의 정치기후와 일부 착오적인 결책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사회는 결국 내면으로부터  자체의 정체성 확인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이주민이란 역사성과 중국공민이란 현실성의 조화라는 숙제를 안고 개혁개방이란 또 다른 역사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Ⅳ 개혁개방시기 조선족공동체의 진로       일반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종족이 상호 교류가 발생하고 접촉이 빈번해 짐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히 자기가 속한 종족과 기타 종족간에 존재하고 있는 동질성과 이질성을 의식하게 되며 자기가 소속한 군체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고려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타민족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20 세기 8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 국내에서 실시되었던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은 조선족은 빈곤에서 해탈하고 경제적으로 부를 창조하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국내에서 국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조선족에게 자체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에 매우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국내외로의 진출을 통해 타민족과의 교류와 접촉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족성원들은 자신의 민족속성에 대한 규명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등 해외의 조선민족과의 인적왕래와 문화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과거 가치의식 심처에서 망연히 존재하고 있던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은 극단적인 형식으로 팽창하였으며 이러한 팽창은 또한 한국과의 교류에서 있었던 불쾌한 경험과 개인적인 소원불성취로 인하여 쉽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나는 누구냐"하는 원초적인 귀속감에 모대기던 조선족은 결국 조국관, 민족관 등 문화가치의식 심처에서 갈등을 겪게 되었고 또한 이러한 갈등은 조선족사회 정체성유지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흐름도 우리를 곤혹 속에 빠뜨리고 있다. 21세기에 진입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적 흐름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국경과 주권의 개념이 모호해 지고 있으며 정보통신혁명과 교통수단의 발달이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시키는 탈이념(post ideology)․탈근대(post modernity)․정보화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헌팅턴(S. Huntington)은 이러한 세계화의 시대적 조류에 따라 새로운 생활권 혹은 문화권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형태가 미래 세계의 기본 구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과거 어느 때와 달리 민족적․국가적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며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서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는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달리 세계가 일체화되고 있는 지구촌시대에 우리들이 굳이 자체의 민족적인 것을 고집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 하는 논조들이 주변에서 일고 있다. 이러한 논조들은 급속히 파급되면서 흔들리고 있는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오는 문화적․심리적 충격과 시장경제의 새로운 체제하에서 급속히 팽창되고 있는 공리주의적인 삶의 자세, 그리고 날로 좁아지고 있는 지구촌시대의 문화보편주의사조는 조선족사회의 정체성유지에 어려움을 갖다주고 있으며 민족공동체의 존속에도 매우 큰 파괴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내부적인 요소들을 분석해 본다면 인구이동으로 인한 집거구의 해체, 민족교육의 위축 역시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불리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까지의 조선족사회의 공동체는 농촌집거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성원들의 도시로의 진출, 외국으로의 진출에 의해 기존의 농촌집거구는 해체되고 있으며 가치의식전환에 따른 조선족의 추구도 크게 바뀌고 있으며 이는 직접적으로 민족교육의 위축을 초래하고 있다. 집단거주지역의 해체와 민족교육의 위축, 그리고 관념상의 모호성은 조선족공동체의 진로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제기하고 있다.     조선족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과 시대발전의 추세에 입각하여 우리는 조선족공동체의 진로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과거 우리가 혈연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민족적인 동질성을 의식해 왔고 공동생활거주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해 왔다면 오늘날 발달한 정보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 개념을 강요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민족문화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특정한 지역과 생활공간을 초월한 문화적 공동체 형성에 주력하여 기존의 동족공동체에서 문화공동체로의 이전을  실현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한 세기 넘게 생존해 오면서 중국문화와 한반도문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지역문화(local community culture)를 유입, 융합하면서 나름대로의 문화적인 재창조를 진행하여 조선족특색의 문화를 형성하였고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적 동일체성(national identity)을 초보적으로 성립하였다. 이러한 민족적인 동일체성을 구심점으로 민족의식을 정립해 간다면 새로운 문화공동체 형성은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의식은 한민족 공동체 형성의 정신적 구심점일 뿐만 아니라 냉엄한 세계화 시대의 민족경쟁력을 탐지해 낼 수 있는 근원적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방된 중국 사회 속에서, 세계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함께 잘 사는 민족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화라는 패러타임을 민족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모든 민족적 에너지와 힘을 결집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민족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가야 할 당위성이고 목적이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동일한 형태의 생활방식과 사상을 교육받음으로써 점차 독특하고 명확한 동질성을 인식하게 되며 민족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민족의식이란 민족이 동일한 조상에서 유래된 혈연집단으로서 동일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삶의 터전에서 운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의식을 말한다.9) 그러나 현실사회에서 우리들이 집단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운명공동체형성은 불가능한 것이고 현실적인 여건도 갖추고 있지 않는 상황인 만큼 민족의식은 단지 동일민족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민족을 일종 심리현상으로 보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 민족은 일종 문화적 심리적 현상으로 인정되고 민족의식도 민족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상상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기에 여기에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교육과 매체의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과거 우리는 이러한 역할을 흔히 마을공동체 혹은 학교교육을 통해 이루어 왔다. 오늘날 전통적인 조선족집거구가 해체되고 있고 민족교육이 위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정을 기본단위로 하는 공동체의식과 연대의식의 강화는 여전히 가능한 것이며 특히 현대적인 정보통신시설을 이용한 사이버공간에서의 새로운 문화공동체의 구축과 민족의식의 고취도 가능하다.     현재 조선족은 농경문화, 공업문화, 정보문화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으며 분포된 지역에 따라 그 문화습득도 다소 차이성을 띠고 있다. 공동체의 결속과 문화적인 응집력을 형성하려면 선진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민족의 엘리트집단과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필요하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면 북경과 연변을 중심으로 그 형성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북경은 도시문화권에 있기에 중국사회변천의 흐름을 쉽게 포착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조선족사회발전의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다. 반면 연변은 비록 중국에서 변강 지역에 속해 있고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에 속해 있지만 세계적인 안광으로 보면 그 위치 또한 자못 중요한 것이다. 동북아금삼각지역에 위치해 있는 연변은 대외로 개방하고 세계로 진출하는 전연지에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우리는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심지에, 아-태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세계의 중심지로 될 동북아중심지에 우리 민족의 공동체의 중심지를 구축할 수 있다.    Ⅴ 앞으로의 과제     오늘날 우리는 농경문화시대와 전혀 다른 이른바 정보화시대, 사이버시대에 살고 있다. 사이버문명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고 있으며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생존방식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또 한차례 일대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선 먼저 시대의 맥박을 진단하고 이에 따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의 도전을 회피하고 기존의 사유패턴 속에서 민족의 공동체와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우리 민족을 또 하나의 "인디안인"으로 만들어 버릴 뿐이다. 오늘날 지식혁명을 통한 네트워크고속도로의 형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될 뿐만 아니라 천재일우의 기회로도 되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부합되는 의식전환과 관념갱신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시각에 초점을 맞추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에 바탕을 둔 지역적인 개념을 초월한 문화공동체 형성에 주력해야 한다.    한 개  민족이 동일한 혈통, 영토를 지닐 때 숙명적 공동체(community of fate)의 의미를 지니게 되고 또한 그 민족이 동일한 언어, 역사, 종교, 전통과 관습을 공유할 때 문화적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문화적 공동체란 일정한 영역에서 동류의 언어, 생활방식, 가치체계를 지닌 사람들이 공통의 숙명적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형성하게 된 동질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화적 공동체 내에서 민족이 공유하는 동질감은 민족의식으로 구체화되어 민족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추진해 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는 주체는 민족이며 민족은 혈연, 영토, 언어, 역사성 종교 등의 보편적이며 숙명적인 특성을 내용으로 하는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 폐쇄성을 지닌 집단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현재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민족의 운명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특정된 문화의 평화적이고 지속적이며 자주적인 발전과 자유로운 번영에 대한 기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촌시대는 문화의 대동화거나 혹은 일종의 문화가 다른 문화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서로 부동한 지역과 민족간의 상호영향이다.     다시 말하면 지구촌시대의 문화는 상호영향을 주는 역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역동관계를 통해 조선족문화는 생존공간을 확대하게 되고 보다 광활한 문화배경 하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특히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로의 가입을 상징으로 하는 제2의 개방을 맞이하게 된 오늘날 우리는 보다 세계적인 안광으로 자체민족정체성 유지와 민족문화의 발전을 기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우리는 우선 우리들의 삶의 자세와 민족적인 가치지향을 정립하고 조선족으로서의 주체의식을 수립하고 자체문화역사행정에 대한 반성과 세계문화흐름에 대한 포착을 토대로 민족교육의 실시, 민족집거구의 보존, 민족문화의 전승, 한반도와의 문화협력 등 차원에서 보다 심층적인 인식과 시각전환을 이루어 문화공동체의 형성에 주력함으로써 조선족사회의 새로운 비전을 도모해야 한다. 참고문헌 1. Elie Kedourie: "Nationalism", 1960 2. Ervin Laszlo: "The Multicultural Planer", Oneworld Publications,         England, 1993 3. E. J. Hobsbawm: "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 1992 4. 馬戎: “民族與社會發展”, 民族出版社, 2001 5. 周建新: “民族學槪論”, 廣西民族出版社, 1998 6. 김종국: “세기교체의 시각에서 본 중국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9 7. 정판룡: “21세기와 중국조선족”,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9 8. 박민자: “중국조선족현상태분석 및 전망연구”, 연변대학출판사, 2000 9. 김종국 외: “중국특색조선족문화연구”, 요녕민족출판사, 2000 10. 정신철: “중국조선조사회의 변천과 전망”, 요녕민족출판사, 1999 11. 김강일 외: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 12. 허명철: “당대연변조선족사회발전대책연구”, 요녕민족출판사, 2001 1) 중국조선족 역사의 시작을 대체로 1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으나 고구려설, 원나라설, 명말청초설 등 여러 가지 주장도 있다. 박창욱: 『중국조선족역사연구』연변대학출판사, 1995년 참조. 2) 북경조선족청년학회 편:《중국조선족이민실록》(한희운가정편),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3) 위의 책, 권봉희가족편. 4) 위의 책, 권석진가족편. 5) 위의 책, 황치일가족편. 6)  중국동북지역은 원래 청정부의 봉금지역이었기 때문에 지역에 비해 인가가 드물었고 관내 한족들의 관동진출도 조선족의 천입과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이주초기 동북지역 특히 농촌지역에는 근대문화전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조선족이 문화적으로 열세에 놓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졸고: 「중국조선족문화가치의식을 논함」,『북방민족』1999. 제4기, p100 참조. 7) 정판룡:「세기교체와 중국조선족 가치관의 변화 및 민족 전일체성 문제」,     박민자 주필:『중국조선족 현상태 분석 및 전망연구』, 연변대학출판사, 2000/4, p.10 참조. 8) 최삼룡: 「21세기를 지향하는 민족지성인의 마음가짐」,     국제고려학회 아세아분회 편:『중국조선족공동체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0, p.136 참조. 9) 이광규: “민족 복리 우선원칙의 이론적 고찰”, 구영록․임용순 공편:『한국의 통일정책』, 서울: 나남출판, 1995, pp. 137-161. [이 글은 2003년도 한국 "재외한인연구"에 실렸음]
43    33. 인생담론 댓글:  조회:2694  추천:61  2008-06-14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3인생담론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인생의 가치는 무엇이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인생이라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왔고 또 실천해왔었지만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항상 머리속에 잠재해 있다. 예를 든다면 인생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남들은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단순 생리학적으로 인생을 논한다면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인생이 시작된다고 혹자는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속에서 요동치던 10달의 성장기는 나의 인생이 아니란 말인가. 또한 생리학적 시각에서만 인생을 논한것이 옳은지? 가치의식 차원에서 혹은 이성적인 차원에서 인생을 논할 수는 없는지? 그리고 내가 철이들기 시작하면서 터득한바가 바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서 사람들은 죽음을 회피하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태여나서 죽음에 이르는 전반 로정이 아니겠는가. 단 이 로정에서 개개인이 남긴 발자국이 다를뿐이다. 어떤 사람이 남긴 발자국은 한해도 못 넘기고 종적을 감추지만 어떤 사람이 남긴 발자국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 인간으로 태어났었으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데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지 알 길 없으니 죽는 그날까지 스스로 나는 인간답게 살았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정녕 한이 없겠다.
42    32. 멋있는 인생에 대하여 댓글:  조회:2987  추천:95  2008-06-12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1멋있는 인생에 대하여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노래는 항상 포됴우하지만 "제 잘난 멋에 사는 게 인생인데" 이 구절만은 정말 좋아한다. 인생은 제 잘난 "멋"에 산다. 참 의미 깊은 말이다. 제 본신도 그렇겠지만 누구나 모두 인생을  "멋"있게 살고자 할진대 그 "멋"은 과연 무엇일까 ? "제 잘난 '멋'에 사는" 인생을 흔히 이상과 추구가 결여한 소극적인 인생관이고 자기의 삶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그게 아니라고 본다. "제멋"에 사는 인생이야말로 세속적인 유행을 추종하지 않고 그 어떤 전형에 예속되지 않는,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 개척하는 자아의식과 자주정신이 투철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제멋'에 사는 인생은 목표없이 좌왕우왕하는 인생이 아니고 "멋" 그것도 스스로 판단한 잘난 "멋"을 추구하는 이상있는 인생이며 또한 창조만이 아닌 스스로 그 "멋"을 즐기는 인생. 즉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그 결정체에 대한 향수를 동반하는 즐거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멋"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넘 나도 오묘한 단어여서 음미할 수는 있어도 말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멋"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러한 "멋"에 의해 살아가는 인생. 이 역시 일종의 "멋"이 아니겠는가. 우리 님들도 나름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멋"이 있겠지요. 이 글은 비록 읽을 "멋" 없다해도 점잖은 "멋"만 부리지 말고 한번 "멋"있게 이야기하세요. "멋"있게 새빨간 인사 올립니다.    创造人生 享受人生
41    31. 문화적 전승에 대하여 댓글:  조회:2825  추천:107  2008-06-11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1문화적 전승에 대하여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한국 교보문고에 가보면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참 옳은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바로 문화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했고 또한 조상들이 창조한 문화적인 풍토에서 후세들이 자라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숙명적으로 특정된 사회문화환경에서 자라게 되고 조상들이 창조한 생활방식과 지혜, 나아가 처세술까지 습득하게 된다. 그러나 조상들의 생활지혜를 자각적으로 현실생활에 응용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무거운 십자가로 될 수 있다. 간단하게 조상들의 생활지혜의 소산인 성구 혹은 속언들을 예를 들어보자. " 아는 길도 물어가라" --- 아는 길이면 그냥 곧추 가면 될거지 왜 물어보아야 하나? " 돌다리도 두드리며 가라" --- 그 튼튼한 돌다리도 왜 두드리며 가야 하나요? 돌다리마저도 믿음이 가지 않아 두드려 보아야 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 --- 혼자 들 수 있는 종이장을 왜서 굳이 같이 들어야 할까? 가벼운 종이장도 맞들고 다닐려면 오히려 찌여질 확률이 높지 않는가? "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 --- 오르지 못한다고 쳐다볼 자유도 없는가. 쳐다보다 나면 사다리를 생각할 수도 있는데.조상들의 생활지혜는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될 수 있지만 거기에 만족을 느껴서는 안된다. 즉 계승만이 아닌 창조와 발전이 없다면 오늘의 승자로 될 수 없지 않는가.
40    30. 럭비공같은 인생살이 댓글:  조회:3008  추천:88  2008-06-09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30럭비공같은 인생살이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스포츠경기중 내가 제일 즐겨보는 것이 럭비이다. 럭비에 흥취를 갖게 된 것은 어느 방향으로 튕겨나갈지를 예측할 수 없는 럭비공의 특징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럭비공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인생을 살면서도 생각처럼 좌우할 수 없는 것 역시 인생이다. 바로 이러한 인생을 살고 있기에 더욱 매력적이고 자극적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인생길 선택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은 달리된다. 로신은 이런 말 한적 있다. "세상에 원래 길이란 없었다. 사람이 다니니 길이 생긴 것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 이것이 인생의 길이고 人道가 아니겠는가. 人道라면 人道의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자연에서 생겨나 결국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살이에서 우리가 걷고자 하는 人道도 자연의 순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가 강조하는 법을 보라 法이란 삼수(水)변에 갈 거(去)로 이루어진다. 즉 물의 흐름에 따라 간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인것 같다.
39    29. 연인절을 맞으며 댓글:  조회:2755  추천:85  2008-06-06
로완퉁 썩궁리 시리즈29연인절을 맞으며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신성한 권리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원초적인 본능에서 발로된 것이든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든 인간이라면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유가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婚外恋이 사회적인 이슈로 되고 있으며 情人节가 년령을 불문하고 하나의 명절로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여간의 사랑과 혼인을 놓고 보아도 그렇다. 남남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룰때 우리는 사랑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고 나면 사랑만이 아닌 책임과 의무가 더 강요된다. 특히 이러한 책임과 의무가 경제적인 형태로 평가되어야 할 때 그것은 무거운 십자가로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십자가를 벗어던지고자 애초의 그러한 사랑을 되찾고자 사람들은 또다른 사랑의 동반자를 찾는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情人이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갈망하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도덕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 교제의 범위가 확대되고 자신욕구와 추구가 다양화됨에 따라 인생의 동반자에 대한 요구도 변하기 마련이다. 지난 80년대초반 중국사회에서 이혼률이 하나의 고봉기를 맞았던 것도 농촌에 내려갔던 지식인들이 도시로 돌아오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랑의 자유와 도덕의 예속,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혼인방식이 一夫一妻制라고 하지만 이 역시 완벽한 것이 아니다.때문에 우리는 그 보완책으로 사랑에 대한 자유를 허락하면서도 도덕적인 예속에 벗어나게 할 수 있는 离婚制 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혼하고 다른 사랑의 반려를 선택한다면 사회적인 도덕적인 질책을 면할 수 있다. (인간 허위성의 적라라한 표현?) 책임과 의무가 동반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추구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情人制가 현재의 一夫一妻制 를 대처할 날도 머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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