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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 북경서 노래인생에 도전한 가수
2010년 02월 23일 06시 55분  조회:1170  추천:0  작성자: 박미래

타향에 살아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에

ㅡ조선족청년가수 정성씨에 대한 이야기


정성가수 프로필:

1978년 5월 2일 룡정 출생

연변대학 예술학원 졸업

키: 174센치메터

체중: 55킬로그람

혈형: B형

언어: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

애호: 사고 독서

즐기는 운동: 축구 당구

개인소망: 세계려행


도전자의 꿈은 아름답다. 온갖 시련을 이겨가며 이루는 꿈이기에 그 아름다움도 더 빛나는것이다. 요즘 연변의 작은 무대를 떠나 광활한 중국대지를 누비며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는 젊은 조선족가수들이 적지 않다. 바로 그 젊은 조선족가수들속에 룡정출신 정성(郑晟)씨의 모습도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있다.

현재 북경 양광상품문화유한회사에서 가수 겸 음악총감독으로 활약하고있는 정성씨는 가요창작, 편곡, 노래, 악기연주 등 만능형실력파인재로서 아직 연변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경 등 내지에서 맹활약하며 이미 《믿음(相信)》과 《누가 당신을 남자라 했는가(谁叫你是男人)》라는 제목의 음반 두개를 출판한데 이어 오는 3월이나 5월쯤에 제3의 음반을 출판할 예정으로 준비사업까지 기본상 마친 상황이다. 그의 노래는 현대사회에 대한 한 조선족청년의 체험을 생동하게 그려내는 특색을 갖추어 많은 관중들의 호평을 받고있다.                                                                         

1978년 5월 2일, 룡정에서 태여난 정성씨는 형제가 없는 외동아들로서 부모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어릴적부터 재잘거리며 음악에 남다른 흥취를 느꼈던 정성씨는 이미 세살때 노래를 잘 불러 동네에 소문났고 그 까닭에 가끔은 동네어른들도 “세살짜리 짜개바지어린애의 노래를 들으러 가자”며 정성씨의 집에 몰려들군 했다. 그때는 집집마다 텔레비죤이 있을 때도 아니여서 문화생활이 결핍한 동네사람들에게는 코흘리개의 노래라도 하도 잘 부르다보니 순간의 향수로 될수 있었던것이다.

다혈질인 정성씨는 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축구와 음악을 남달리 즐겼는데 그러는 아들이 공부에 영향받을것을 우려해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정성씨는 아쉬운대로 축구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음악까지 포기할수 없었던 그는 어느날 아버지에게 “음악만은 반대하지 말아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들었다. 가정교양에서 늘 엄격했던 아버지였지만 결국 아들의 간절한 애원앞에서 더이상 반대를 고집할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정말 성악을 할수 있겠는지 걱정된 아버지는 한번 스승을 찾아 성대를 검사해볼것을 권고했고 그래서 정성씨는 초중(룡정시제5중학) 3학년때 무작정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찾아 림만호선생을 만나게 되였는데 당시 림만호선생으로부터 “이 학생이 성악을 하려면 남저음이 좋을것 같다”는 평가를 듣고는 아버지도 오히려 아들의 가수꿈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그후부터 정성씨는 림만호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1년간 일주일에 한번씩 룡정에서 연길로 통근하며 성악을 배웠는데 림만호선생 역시 학교에서 “1.29”운동기념공연때마다 독창으로 인기를 끌고 초중 2학년때는 룡정시가라OK콩클에서 3등상을 따낸적이 있는 제자의 싹수를 발견하고 사심없이 가르쳐주었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기량을 제고시킨 정성씨는 그후 룡정제1고중에 진학해서 1학년때 자습으로 3학년까지의 학과를 마치고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시험을 쳐서 무난히 합격되였다.

1999년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졸업한 정성씨는 연변가무단에 배치받아 전문배우로 1년간 활약하는 동안 남보다 못하지 않으려는 승벽심으로 여러가지 악기다루는것을 익혔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추구는 단지 무대에서 노래부르는것만이 아니였다. 보다 넓은 무대에 나가 자신의 열정을 능력껏 불태우고싶었다. 하여 그는 2000년도에 무작정 북경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 북경역에 내려서 시내로 들어갈 때 정성씨는 “정말 북경이 넓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문화도시, 정치도시의 짙은 내음을 느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생존문제에 발목을 잡힐줄이야. 우선 아버지의 친구집에 한달간 머무는 동안 그는 여기저기 돌아보며 당시 악대가 크게 류행되는것을 목격하고 그룹을 만들려는 생각을 품게 되였다. 하여 신문 등을 통해 함께 그룹을 만들수 있는 사람들을 물색하다가 한 문화회사에서 가수, 악사들을 모집하는것을 발견하고 즉시 달려가 등록하였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 정성씨는 마음맞는 사람들과 함께 창설한 악대그룹 《세기악대》의 일원으로 되여 자신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사실 처음 밖에 나가 이런 그룹을 만들려니 실력은 있어도 나타낼 기회가 없어서 정성씨는 선배들에게서 많이 배우는 한편 저녁마다 술집에 나가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비록 술집이라고는 하지만 북경의 밤문화는 술집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당시 그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 《다섯시반까지 기다릴래요》를 밤무대에서 많이 불렀는데 그 노래가 크게 성공하면서 일부러 그 노래를 들으러 오는 관중들까지 생겨났다. 그러던 2004년의 어느날 저녁, 드디여 기회가 왔다. 그의 공연이 끝나자 한 관중이 그를 부르는것이였다. 그 사람은 자신이 북경중구계제(中  梯)문화회사 사장이라고 자아소개를 하고나서 “사실 당신의 노래에 반해 이 술집에 많이 찾아오게 되였다. 당신의 창작곡으로 음반을 내오고싶은데 의향이 있는가”고 묻는것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원래부터 그런 야망을 품고있던 정성씨는 대번에 동의했고 이로써 중구계제문화회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전문 류행음악가수로 가요계에 진출한 그는 2004년 4월부터 제작을 시작해 2005년 5월에 마침내 전부 자신이 작사, 작곡한 11수의 노래가 수록된 자신의 첫 음반 《믿음》을 출판하게 되였다. 당시 소속사에서 100만원을 들이며 국내외 음악계의 유명한 제작진과 합작하여 출판한 《믿음》은 발행 두달만에 전부 다 팔려 중국음반판매량 5위안에 들었고 인터넷상에서도 높은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그 음반에 수록된 가요중에서 주제곡 《믿음》은 지금도 히트곡으로 널리 애창되고있다.

한번의 성공은 정성씨에게 희열뿐만아니라 그후 그의 발전에 더욱 탄탄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이미 재작년에 북경중구계제문화회사와의 계약이 만료된 정성씨는 북경양광상품문화유한회사의 초청을 받고 가수 겸 음악총감독으로 활약하며 최근에 또 두번째 음반 《누가 당신을 남자라 했는가》를 출판했다. 바로 이 두번째 음반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정성씨는 첫 음반에 수록됐던 《믿음》을 포함해 세곡의 반주곡, 새로 창작한 6수를 더 수록하면서 편곡은 물론 록음 등 후반작업까지 모두 직접 자기절로 해 만능형실력파인재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 두번째 음반은 현재 발행중에 있다.

이제 중국류행음악계에서 자신의 립지를 확고히 다진 정성씨는 지금까지 300여수의 가요, 7편의 순음악(음의 순수한 예술성만을 목표로 작곡된 음악)과 2부의 교향악을 창작해 단지 류행음악가수뿐만이 아닌 “창작가수”로도 실력을 과시하고있다. 그중 2001년도에 그가 조선족들로 무어진 《아리랑》그룹을 위해 창작한 가요 《큰비가 지난 뒤(一 大雨 后)》가 바로 당시 중국전역을 울린 경전작품의 하나로 된다. 또한 그는 2003년도에 천안문광장 동북측에 있는 태묘에서 열린 “사스와의 전쟁” 대형공익야회에 참가하고 2005년 10월에는 “중국자선협회ㅡ사랑과의 동행”을 주제로 한 대형야회에도 출연하는 등 각종 공익성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사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이같은 그의 노력과 공헌은 주렁진 성과를 안아왔는바 2006년도에는 CCTV10대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수차 묵직한 상도 수상했다.

오늘의 성공을 두고 정성씨는 우선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부모님들의 다함없는 사랑과 엄격한 교양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였다”며 그는 “부모님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초중시절 담임교원이였던 리해선선생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당시 자존심이 강했던 그로서는 남들과 싸우는 일도 많았지만 바로 리해선선생님이 그의 음악재질을 발견하고 마침 인생관이 바뀔 나이인 그를 학교의 “1.29”기념활동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추천하는 등 적극적으로 인도함으로써 음악에 농후한 흥취를 키워주었던것이다. 이밖에 그는 자신을 사심없이 가르쳐준 림만호선생, 김덕균선생, 강광훈선생 등 스승들과 객지에서 자신을 이끌어준 여러 선배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여느집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정성씨의 부모님들 또한 어느덧 30고개를 넘어선 아들을 바라보며 그 눈빛에서부터 아들이 하루빨리 가정을 이루어 손군을 안아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사업을 첫자리에 놓고있는 정성씨는 “좋은 녀자들도 많고 부모님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음악은 자유가 필요한만큼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일축하며 부모님들에 대한 미안한 심정도 밝혔다.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정성씨는 “연변의 류행음악을 새로운 단계에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싶다”며 연변음악에 도움될수 있는 일이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연변의 음악을 많이 알려지게 하고싶다. 도움이 될수 있다면 연변의 음악을 북경에 가져가 내 음악과 결합해서 전국적으로 보급될수 있도록 뉴대적역할을 하고싶다”고 말했다.

이제 정성씨에게 한번 더 기대를 걸게 되는것은 오는 3월 혹은 5월에 출판하게 될 그의 세번째음반이다. 그 음반의 제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미 제작까지 다 끝나서 마무리단계에 들어선것으로 알려지고있는바 정성씨의 노래를 사랑하는 관중들의 기대를 한층 부풀리고있다.

이번 연변TV 음력설야회에 초청가수로 참가해 자신의 히트곡 《믿음》을 조선말로 번역해 불러 연변시청자들과 처음 대면하게 되는 정성씨는 “고향을 떠난지 10년만에 다시 고향무대에 설수 있게 되여 참으로 기쁘다”며 “비록 타향에서 10년을 살아왔지만 나는 늘 자신을 조선족가수라고 밝혀왔다. 내가 하는게 민족음악은 아니지만 내 음악속에 우리 민족의 피를 주입하고싶은 생각이 많다”고 고향정과 민족에 대한 애정을 토로했다.

오는 음력설이면 안방에서 연변시청자들과 대면하게 될 정성씨, 그의 아름다운 노래가 수도 북경에서 인기를 얻은만큼 연변시청자들의 심금도 울려줄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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