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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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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내 인생의 뼈골 속 피 같이 스며든 작품 댓글:  조회:1196  추천:13  2018-10-31
.김혁 신간 장편소설 출간기념회 소감문. 내 인생의 뼈골 속 피 같이 스며든 작품     갑작스러운 마가을의 추위와 휴일의 소중함도 물리치며 한 작가의 작품의 출간의 자리를 함께 해주셔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여느 작품의 구상때보다 나의 창작충동을 특히 강렬하게 불러준 작품입니다. 창작 당시 소설가와 기자라는 이중의 신분으로 활개짓하고 있던 필자에게 가장 크게 안겨온 것은 농촌인구의 대거 도시진출과 그속에 선봉으로 나선 녀인들의 운명이였습니다. 80년대말로부터 산해관이남을 넘어선 조선족수는 20여만, 90년대 중기로부터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수는 이제 100만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200만 안으로 헤아리는 중국조선족의 인구수효로 볼때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을을 비우고 집을 비우고 사랑을 비우고 떠나간 우리의 녀인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막중한 현실을 정시하고싶었습니다.  글에서 나는 산업화과정의 부산물로서의 시골녀성들이 고향을 떠나고 산업예비군으로 충당되며 그한 과정에 육체적파멸 내지 정신적 파멸로 이어지는 도식과 현사회를 증언하는 녀인들의 다양한 삶의 양상을 한 인물에 집대성시켜 풀이하려 했습니다.    작가라면 자신의 출산아와도 같은 작품 전반에 애정이 가겠지만 이 작품은 여느 작품에 비해 잊을수 없는 작품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태여난 작품으로 내 창작생애에 기록될 작품이 될겁니다. 내 인생의 뼈골 속에 피같이 스며든 작품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겁니다.     이 작품은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지다”에 마침표를 찍기 바쁘게 두달도 못되여 “연변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했습니다. “연변문학”지에 2003년 10월호부터 2005년 2월호까지 일년반 가량, 16회에 거쳐 련재를 마쳤습니다.  여태 작가라는 이름으로 글밭을 경작해 오면서 도합 6부의 장편소설을 발표, 출간했고 그외에도 10여부의 여러 쟝르의 작품집들을 출간했지만 이 작품은 내 인생이 송두리째 뽑히던 그 절실했던 시기에 창작한 작품이여 각별히 사랑이 가고, 화인처럼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기성작품이 아니고 한편 쓰면서 한편 련재하는 형테로 창작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4회째 련재하고 내 신상에 거대한 변고가 일었다. 나는 어수룩한 사람들, 두수없는 사건에 휘말려들어 수십년간의 공직을 일조일석에 떼우고 처연히 한지에 쫓겨나게 되였습니다.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나에게 돌을 던지는 형국에 문인가정으로서는 천문수자 같은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꾸어서 부과해야도 했습니다.   그런 사면초가에서도 련재는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이를 옥물고 등짝이 으깨질듯한 거대한 압력을 이겨내며 썼습니다. 안해와 함께 여기저기 찾아가 하소하면서 돈을 꾸어들고 돌아와서, 저녁도 거른 채 1만5천자를 치고 윤색하고 나니 동이 번히 밝아오던 그때가 생각 납니다. 어떻게 그 형국에 컴퓨터앞에 앉을수 있었고 또 두드려댈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과정이 이 소설의 행간 속에도 은연중 스며들어 있고 녹아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요편집이였던 “연변문학” 조성희 편집님의 로고가 컸습니다. 번마다 투고가 늦어졌고 세상이 번거로와 전화를 끊어버린 나에게 메일로 기마다 간절한 청탁을 해주었습니다. 아울러 수십통의 메일편지에서 위안과 격려의 말을 내내 잊지 않았습니다. 후문이지만 조성희 선생님은 나 때문에 편집부 상벌제도에 따라 벌금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격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외에도 많은 분들이 좋은 글 그냥 보고있다, 문학의 끈을 놓지말고 시련을 이겨내라고 근근간간히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위무(慰撫)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이어나가지 못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곤고(困苦)했던 시간을 16회 40여만자의 처절한 글쓰기로 메워나갔습니다. 어쩌면 당시의 련재잇기는 내 삶 잇기의 그 자체가 아니였는지도 모릅니다.    재액 속에 탄생한 불운아같은 작품은 련재 당시와 그 이후에도 독자들중에서 커다란 반응을 자아냈다.    출판이 언제 되냐는 문의가 쇄도했고 작품이 련재된 수년이후에도 나는 서점가에서 책이 언제 나오냐고 묻는 생면부지의 독자들과 자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이 작품을 애대한 나머지 련재된 작품의 낱장을 한장 한장 복사해 묶어서 세상에 단 한권 밖에 없는 책자로 만들어 나에게 선물한 애독자도 있었습니다. 그 고마운 분들이 오늘 이자리에 와 계십니다.   주인공 박신애의 불운한 운명을 설계한 나에게 “신애를 작작 못살게 구시요!”하고 타매하는 전화가 오는가 하면, “왜 신애를 죽였소? 당신은 악마요!” 하고 저주의 메일이 오기까지 했고, 퇴근하니 마누라의 눈이 퉁퉁 부어있기에 따져 물으니 이 작품을 읽고 방성통곡했다는 말에 자신도 읽고는 베란다로 나가 목청깨져라 소리쳤다는 데퉁스러운 어떤 사내도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독자들의 성원과 청탁에 밀려 나는 4년후인 2008년경에 연변일보”종합신문”주간에 작품을 “각설탕”이라는 새로운 표제로 다시 일년여동안 련재하기도 했습니다. 그후 이 작품에 대한 연구로 평론가가 묵직한 상을 수상했고, 연변대학의 연구생이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작품이 발표된이후 10년만인 2014년에는 50회 방송소설로 개작되여 청중들과 새로운 쟝르의 얼굴로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자비출판이 란무하는 형국에도 빈한도골(貧寒到骨) 문인의 신세라 내내 출판하지 못했던 작품이 오늘 14년만에 드디여 빛을 보게 되였습니다. 감개라 할지 아이러니할지 쓰라린 마음입니다.   불우한 작가만큼 불운했던 작품의 마침내의 출간에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전하며 축하차 모여오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의 원형이 되여 준 모든 조선족 여인들, 작품에 간간이 비친 나를 닮은 세상에 소외된 문인들, 문인가장을 둔 죄로 내내 불운에 시달렸지만 꿋꿋이 서로 의지해 지금은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성장해 준 내 딸 소정이, 잔약한 어깨에 산악같은 인고의 사연과 세월을 함께 짊어져 준 내 안해 주향란에게 오늘 이 책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401    신(新) 매체시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테제 댓글:  조회:1214  추천:20  2018-09-14
  . 연변작가협회 세미나 "멀티미디어 시대 조선족문학의 출구는 어디에"에서의 발언 요지 .   신(新) 매체시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테제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90년대 말 경, 해외 모 문학지에서 “래년부터 우리는 원고지가 아닌 이메일 투고를 전격 실시합니다.”라는 공모공지를 보고 적이 놀란적이 있었다. ‘천일야화’같은 이야기인줄로 알았는데 불과 2년도 안되여 우리 문단에서도 컴퓨터 창작과 편집이 본격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만년필을 던지고. 컴퓨터로 타자하여 문학지에 실린 첫 작품이 2000년 순수문학지 《도라지》 톱에 실린 중편소설 (生活空间)인줄을 난 경희와 함께 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문단에서 그 누구보다 앞서 문학, 뉴스, 력사로 분류하여 무려 다섯개의 블로그를 쟝르 별 만들어서 거의 20년간 꾸려왔다.   그러나 이제 위챗이 우리의 일상의 공간에. 문학공간에 비집고 들기 시작했다. ‘촉새 황새 따르기’로 뒤미처 스마트폰에 문학 위챗계정을 만들었다. 문학블로그와 더불어 나의 신작들을 실시간 올리면서 독자들과 새롭게 만나고 있다. 나의 위챗계정의 이름은 고향 룡정에 있는 오프라인의 나의 서재의 이름과도 꼭 같은 ‘청우재(听雨斋)’, 그 키워드를 문학, 력사, 영화, 음악, 동물 등등으로 정하고 매일이고 게시물들을 나름 선정해 올리고 있다. 작은 핸드폰 속에 세상만사, 천태만사, 사방오방을 다 담으면서 구지욕에 넘쳐 ‘작은 두레박에 우물 통째를 담으려’하고 있다. 문단 처음으로 위챗계정에 장편소설 를 련재했다. 십여년 전에 출간되였던 나의 첫 장편 는 수상의 특혜로 나온 책이라 겨우 200권밖에 출간되지 못했는데 위챗련재를 하면서부터는 일 조회수가 거의 천명에로 치달아 올랐다. 게다가 댓글 기능까지 있어 독자들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가능했다.   문학을 담는 그릇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또 변할 수 밖에 없다. 죽간(竹简)이나 양피지(羊皮纸)를 사용하던 시대에는 값싼 종이 책에 외려 령혼이 없다고 보았다. 그처럼 모바일 기기를 문학의 ‘적’으로 생각하는 부정적,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모바일 기기를 활용한 새로운 방식을 문학의 상실이라고 보면 더구나 안된다.   눈부신 통신수단의 발달과 미디어 외연의 확장과 더불어 문화와 예술의 패러다임은 바뀌고 있다. 전통 매체의 권위성과 독선이 희석화 되고 문학단체와 작가, 독자 등이 직접 미디어를 운영하고 작가, 독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들어섰다. 따라서 탈이데올로기, 문학과 예술의 대중화, 디지털화 등으로 바뀌여지는 오늘날의 문화풍토에서 전통문학의 책무가 더욱 절실하게 되였다.   이제 우리 문단도 주류문단과의 접목, 세계화로의 출두를 위해 다양하고 선진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세계 각지의 독자들에게 보다 손쉽게 조선족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블로그, 위챗계정에서 독자들과 만나는 전자작품은 시효성, 접근성, 범용성 등에서 큰 장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박봉을 털어 자비로 낸 종이책을 지인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고 보면, 시장류통이라는 환절이 탈락되고 책이 더욱 많은 독자군체와 대면할 수 없어 소통이 단절되였던 문단풍토에서 벗어나 문학이 새롭게 독자들과의 만남과 호성을 불러내는 기꺼운 변화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인터넷, 위챗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의 발랄한 운용은 아직도 오지, 변두리 문학에 머물러 있는 우리 문학의 광범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전통문학과 새로운 미디어의 어떤 종속관계에 신경을 도사리지 말고, 응당 적극적으로 쌍방향적이고 복합적인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변혁기의 필수적 변화는 형식의 쇄신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함으로 새로운 창작방식, 새로운 소재, 새로운 문체를 지니고 새로운 류통전략으로 새로워진 독자들의 미뢰(味蕾)와 만나야 한다.   작가와 독자들이 문학의 정체성 문제에 직면하고, 모든 것이 미디어로 환원되고 있는 오늘날, 작가는 이 모든 혼란에 미상불 대응해야 한다. 문학의 위기를 목메여 부르짖는 대신, 득달 같이 다가 온 기계혁명에 적극 부응할 때 그 것은 위상이 바닥에 내쳐진 우리의 문학을 새롭게 촉발시키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만이 갖고 있는 문화의 토속적인 정서와 력사의 중후한 무늬를 세상에 알리고자 오늘도 컴앞에서, 혹은 스마트폰을 들고 불면의 밤을 새우는 작가와 독자들이 미디어의 미래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가 소망해 본다.   "연변일보" 2018-09-06    
400    잊혀진“영화 황제” 댓글:  조회:2228  추천:13  2018-05-01
 말  작가의 말      잊혀진“영화 황제”     김 혁      나의 신작 장편소설 "무성시대"가 대형문학지 "장백산"지에서 새해 제1호부터 련재를 시작했다. 30년대의 옛 상하이를 배경으로, "영화 황제"의 보좌에 오른 조선족 배우 김염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금번의 소설 “무성시대”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문화대혁명의 난장을 그린 “마마꽃, 응달에 피다”,  출국붐 속에 스러진 조선족 여인상을 그린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한민족이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조명한 “시인”,  연길감옥에서 숨진 청나라 마지막 황후 완룽의 비극을 그린 "완룽 황후". 조선족 최초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그린 “춘자의 남경”에 이은  나의 여섯번 째 장편소설이다.     1    그이는 “황제”로 불린다.   우리의 예술계에서 그이만큼 이러한 미칭(美称)과 극찬의 보좌에 등극한 이는 전무후무, 류례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이를 잘 모른다.   그이는 “민국4대미인”으로 꼽히는 배우 완령옥(阮玲玉)과 영화작품을 가장 많이 한 절대 콤비였다.    하지만 구설수에 못이겨 자살한 아릿다운 완령옥에 대해 알지만 우리는 그이를 잘 모른다. 완령옥을 위한 무수한 전기에도 그의 이름은 겨우 한 두번 정도 나오고, 그녀를 위한 전기영화에도 그이는 어쩌면 단역으로 단 2, 3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이의 가문은 무려 일곱 명의 항일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그이의 아버지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서울의 최초 양의사로부터 중국 동북의 치치하르로 이주했고 핍박과 아픔이 없는 리상촌 건설을 꿈꾸다가 일제 끄나풀에 독살당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이도, 그이의 가족사도 잘 모른다.  대문호 로신의 산문시 “사화(死火)”을 읽고 감명 된 나머지 본명 김덕린에서 화염 “염(焰)”자를 따서 개명한 그이의 이름은 김염이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일찍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향항과 대만이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해영화에 두고 있다.  1930년대의 상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바로 그 당시 상해 영화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 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으니 바로 김염이였다. 영화 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상해가 일제의 손에 함락된 뒤 일본영화의 출연 제안에 “기관총으로 나를 쏴죽인다 해도 난 못해!”하고 칼날 같은 거부를 보였던 그의 패기는 일제의 출연요구를 거부해, 녀장배우로서 수염을 길렀던 경극대사 매란방과도 꼭 닮았다. 그처럼 김염 역시 대사급의 아우라를 간직한 예술가였다.  1962년 은퇴할 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이의 신화는 오늘도 계속 된다.  “중국 최고의 미인”이요, “공주”로 불렸던 진이(秦怡)와 사랑을 맺었고 그래서 주은래 총리가 “중국의 공주를 채 갔으니 당신은 우리의 부마(驸马)”라고 일컫을 만큼 김염은 뭇사람들의 선망을 자아냈던 배우였다.  "녀자 롱구선수 5번" 등 경전영화에 출연했던 진이는 96세, 구순의 고령에도 아직도 김염이 족적을 남긴 상해에 건재 해, 중국영화의 백년사를 육안으로 지켜 본 산증인으로 되였다.  지난해 중앙TV영화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진이는 “나의 남편 김염은 영화로서 일제와 싸웠다”고 자부심에 넘쳐 말했다.  현재 상해시 용화렬사릉원 기념관에 그이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고 북경영화박물관에 그이의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2   “조선족 중에 나보다 영화를 더 본 사람 있다면 한번 나와 보시지?” 수년 전 모 문학지에 발표했던 “영화, 그 현란한 중독”이라는 수기의 들머리에서 필자가 치기에 넘쳐 호언했던 첫 마디이다. 이렇듯 필자가 영화광이라는 것은 이제 문단이 다 아는 일이다. 세계영화사의 류류별별 영화들을 vcd, dvd 혹은 테잎으로 족히 6천장 넘게 소장하고 있다. 거기에 영화 론평집과 관련잡지들도 천권은 실히 넘는다. 이제 예술지들의 약력소개에서 나는 소설가 외에도 “영화 수집가”라는 호칭이 기어이 따라 붙는다. 왠지 그 별칭이 싫지만은 않다.  그러한 나였기에 김염 관련 영화들은 당연 적지않게 소장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대로(大路)”는 물론 콤비 완령옥의 출세작 “신녀(神女)”며 완령옥에 대한 전기영화들, 김염의 첫 부인이자 중국의 첫 국제영화상을 수상한 왕인미의 “어광곡(漁光曲)”, 일생을 함께 한 부인 진이의 영화들도 빠침없이 소장하고 있다.  근 10여 년래 민족사의 갈피에 큰 족적을 남긴 우리의 인걸(人杰)들을 논픽션과 픽션으로 번갈아 조명하는 일에 빠져 있는 나에게서 김염은 선참 조명하고 싶은 둘도 없는 인물이자 소재였다.  하지만에 나에 앞서 김염 관련 논픽션물들이 해내외에서 련이어 나왔다. 영화 100주년, 김염 탄생 100주년에 영화광으로서 헌례작품을 꿈꾸었으나 나의 감질난 창작의욕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픽션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는 내가 시인 윤동주를 평전뿐 아니라 우리 문단에서 처음으로 소설화 한 것과 같은 맥락의 창작성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고심에도 불구하고 픽션과 논픽션의 완충지대에서 고전하며 자맥질 하고 있는 우리 “력사+소설 쟁이”들에 대한 문단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편한 문체, 자극적인 스토리에 길들여진 동인들과 독자들의 몰리해가 그 주된 원인이다. “문(文)과 사(史)는 불가분리”라지만 왜서인지 우리 문단에서는 력사소재를 다루는 이가 적고, 그 소재를 순문학이 아닌 낡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한 세기 이전에 내던진 양것의 박래품을 주어들고 그에 대한 아집적인 취미야말로 모던하고 전위적인 문학인 듯 스스로의 상아탑을 쌓고 자족의 미주를 기울이는 이들이 외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향도 있다.    “소설을 쓰면서 그 분야를 관장(管掌)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력사에만 빠져있다”며 미간을 찌푸리는 웃사람들의 로파심적인 우려에다, “왜 케케묵은 냄새나는 사료집이나 뒤지고 앉았냐?”며 온라인에서의 악플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한 몰리해의 탁류에 치대이며 나는 한 사람의 명구를 떠올렸다.  유성영화시대가 왔다며 비아냥거리는 영화사 사장에게 “당신은 유성영화를 만드시오, 나는 위대한 영화를 만들겠소”라고 말했던 무성영화의 거장 챨리 채플린이 호매롭게 던졌던 유명한 어록. 그러한 편협한 시안을 가진 이들에게 나도 “당신은 당신 나름의 모던한 작품을 쓰시오. 나는 나 나름대로 우리의 옛 인걸들을 쓰겠소”라고 말하고 싶다.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하려는 나의 간절한 소망에 보응이라도 주련 듯 소설 “무성시대”의 스토리는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중점지지 작품”으로 선정되였다. (기획서 출제 당시의 중문 원제는 “火焰”, 조선문 원제는 “수은등 아래의 황제”였다.)  금번의 소설 “무성시대”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문혁의 란장을 그린 “마마꽃, 응달에 피다”, 출국붐 속에 스러진 조선족 녀인상을 그린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한민족이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조명한 “시인”, 조선족 최초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그린 “춘자의 남경”에 이은 나의 여섯번 째 장편소설이다.   그리고 김염 타계 35돐에 드디여  련재를 시작했다, 영화의 무성시대를 살아 온 예술가를 위해 한 목청 랩소디를 부르게 되여 기쁜 마음이다.    3   영화채널에 혹간 나오는 김염을 두고 그이의 빼여난 용모나 늘씬한 신장, 복근에 시선을 몰부어 부러운 듯 얘기하며 그이를 아이돌에 비하는 요즘의 시선들을 두고 그들의 용어처럼 나는 “멘붕”(신세대 용어로서,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멘탈리티”의 줄임말과 “붕괴”의 합성어이다. 즉 “정신이 허물어져버린 상황”을 이르는 말)에 빠진적 있었다.  어제의 세대를 기억해 둘 우리의 지금의 세대가 사라진 후 이 세상에는 어떤 기억들이 기억되고 어떤 기억들이 망각될까?  우리 또한 다음 세대들에게 아무런 기억도 없이 망각되지 않을가? 그러한 속찬식 문화풍토에 우려를 가지며 스스로 자문을 구해봤던 질문이다.    심리학 학자이자 영화감독인 루이스 브뉘엘은 일찍 “기억은 우리들의 일관성이자 우리들의 리성이며, 우리들의 행동이며, 우리들의 감정이다. 기억 없이는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한적있다.  기억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만드는 하나의 큰 요소가 바로 기억이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할진대 과거의 력사와 그 굴곡진 장하를 거슬로 온 민족의 인걸들, 그들의 력사의 공적을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을 후세에 남기는것은 밀어버릴 수 없는 책임이며 또한 망각할 수도 없다. 망각해서는 안되는 그 기억들이 그 민족의 소급과 비전을 위한 받침돌이 된다.    소리와 영상이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와 3D 영화들이 극장가를 점령한 21세기의 오늘 날, 김염의 무성영화를 보면서 조금 어색하고 당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를 알고 다시 보면서 차츰 익숙해졌고 오히려 편안했고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소리는 없어도 울림이 컸다. 배우의 풍부한 표정과 몸짓과 그 것이 전해주는 강렬한 메세지에 오감이 열리는 듯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무차별적인 악음이나 소음에 로출되여 있었던 것 같다. 눈 두덩이와 코마루, 귀바퀴 위에 거추장스러운3D 안경을 얹고 얻어내는 더 실감나는 립체영상은 기술적인 감탄은 주지만 정신적인 감동은 주지는 못하는 듯 하다. 때문에 때때로 무성영화, 흑백영화, 그 옛날 영화가 그립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활동인형이라 불리던 영화도 그 양상이 많이 바뀌였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이다.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김염의 아우라가 한동안 잊혀지지 않 것 같다.    몇해 전 중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중국영화의 한 세기를 통틀어 가장 뛰여난 영화인 1백 명을 선정하는 작업이 있었다. 그 1백 명 가운데 최선두를 다툰 사람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완령옥과 김염이였다. 무성영화나 유성영화나 대배우들은 하나 같이 예술을 위한 생활의 형극이라는 길을 걸었다. 김염도 외는 아니였다.  서울 의사가정에서 태여나 약관의 나이에 상해로 가서 중국영화의 톱스타가 된 전설의 예술가 김염. 력사와 인간이 빚어낸 놀라운 신화와 한 배우의 생애가 중국과 한민족의 현대사와 예술사를 관통한다. 수난 많은 민족사와 중국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우리민족의 걸출한 인걸- 김염, 그의 모습을 퇴색하지 않는 한 컷의 필림으로 가슴 골방 깊이 소장하고 싶다.   - “청우재(听雨斋)”에서    “장백산” 2018년 제1호    
399    "음수사원"의 마음으로 댓글:  조회:1226  추천:10  2018-05-01
후 기   "음수사원(饮水思源)"의 마음으로   김혁     가을 비가 추적거리던 6년 전의 가을 날, 지인들과 함께 발족한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의 답사차로 룡정에서 명동 지역까지 비줄기를 거스르며 강행군을 한 적 있었다. 그때 승지마을에 이르러 주덕해 주장님의 고향집 옛 터를 찾아 보았었다. 비에 젖은 조촐한 기념석조물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열심히 비문을 읽다가 아, 명년 3월이 주장님의 탄신 100주년이구나!하고 소스라쳐 깨닫고 그 동안의 무감각에 대해 자책하며 감개에 흠뻑 젖었었다.   비 속에서 강행한 답사 끝에 독감을 앓다가 그 감기의 펄펄 끓는 온열속에 나는 주덕해 주장님을 위한 위인전기를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다. 창작충동은 주체할 수 없는 열기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금방 민족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소설화하는 작업을 끝내기 바쁘게 이 작품의 집필에 헛헛한 의욕을 느끼며 달라붙었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숙명의 락인이 찍혔는 작가로서 음수사원(饮水思源)의 마음으로 중국조선족의 오늘을 있게한 “대부”격인 한 인물의 발자취를 감동하며 더듬어 보았다.  절박함으로 나선지라 시간에 쫓겨 설명절 기간에도 나의 키보드는 쉼모르고 창밖의 폭죽소리와 더불어 맹렬하게 울렸다.   그리고 이 전기물은 특별히 아이들을 위한 문체로 만들기로 하였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해리포터를 알고 손오공을 알고 트랜스포머(变形金刚)를 알지만 우리의 주장 주덕해를 모른다. 주문을 외면 동물로 둔갑하고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거짓의 판타지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왜놈과 맞서고 국민당을 물리치고 미제와 싸운 우리의 걸물들의 진실한 이야기에는 흥취를 잃는다. 그 응당 충만해야 할 부분이, 잊혀지고있는 공백과 유감과 아픔이 내가 금방 한부의 장편소설의 고된 창작에 마침표를 찍기 바쁘게 또 한번 이 작품의 집필에 냉큼 뛰여든 리유다.   주덕해 그이는 중국조선족의 “왕 별”이시다. 조선민족 력사의 거대한 산맥 한가운데 의연히 솟은 거대한 봉우리이며 200만에 달하는 중국 조선족들을 대표하는 졍겨운 얼굴이다. 어려서 두만강을 건느며 민족의 수난에 마음을 적셨고 북만의 깊은 밀림 속에서 일제와의 처절한 사투에 청춘을 바쳤으며 혁명의 성지 연안을 찾아 중국혁명의 승리의 신념을 다졌고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활보했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의 산파로서 중국조선족의 정초를 닦아 온 한 혁명가의 초상을 그리면서 나는 여태 창작해온 여느 쟝르나 문체보다는 다른 농도와 줄기의 중후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하여 불과 석 달도 못되는 잛은 시간이였지만 주장님의 100주년 탄신을 맞으며 가히 조선족문단사상 첫 청소년인물전이라 할만한 이 작품을 그이의 령전에 바칠 수 있었다.     초판본 표지   중판본 표지   그러다 6년이 지난 후인 오늘 또 중판본을 내게 되였다. 중판본은 시간에 쫓겨창졸하게 창작했던 초판본에서 많은 거친 부분을 더 정제해 다듬었고 특히 조선족자치주의 건설에 바친 그이의 마멸할 수 없는 업적에 대해 큰 장절을 내여 더욱더 상세하게 보완해 다루었다. 중판본을 내면서도 초판본을 내였던 그때와 꼭 같은 심경, 그저 나의 미숙하고 작은 필봉이 이 위대한 인물을 그려내는데 그 터치가 모자라 후덕하고 청렴하고 강직한 그이의 모습에 흠결을 줄가 두려운 마음이다.   빠른 시일 내에 질 좋은 중판본을 찍어 준 연변인민출판사에도 감사를 드린다. 초판본을 내던 시기, 방학기간 나와 함께 방대한 자료를 타이핑 해준 딸 소정이, 지금은 류학길에 오른 딸애에게 이 중판을 다시 한 번 기꺼이 선물하고 싶다. 걸 그룹이나 아이돌의 음악에만 빠져 있던 딸애는 아빠를 도와 이 책을 묶어내기 위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할아버지 세대의 헌신적이고 빛나는 족적에서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클릭 한번에 무어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딸애 또래들이 이러한 민족의 위인들의 삶을 기록한 쟝르도 더불어 읽으며 사색의 문도 클릭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기자, 소설가의 삶을 병행 해 온 나로서는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어 질 수 있는 다큐멘터리적 글 쓰기가 남들과 차별화 된 나의 창작성향”이라고 밝힌적 있다. 그러한 창작성향으로 소설쓰기 외에도 근년간 인물평전, 력사기행, 칼럼 등 쟝르들을 내 창작 스케줄의 주요한 순위에 놓고 다량으로 창작해 내고 있다. 또 몇해 전 어느 아동문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제 짬을 내여 아동문학창작에도 간간히 필봉을 돌릴 터라고 서약한적 있다. 오늘까지도 그 서약을 잊지않고 결과물들을 한 권 또 한 권 펴내게 되여 마음이 뿌듯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소명의식을 갖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우리 위인들의 이야기를 펴내는 응분의 작업에 계속하여 필봉을 크게 기울일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린다.   -      2017년 9월 룡정 “청우재”에서    
398    글 속에 흐르는 력사와 시대 댓글:  조회:1174  추천:16  2018-04-19
   
397    2017 《민족문학》 문학상 수상 리유 댓글:  조회:1005  추천:12  2018-03-27
    2017《民族文学》年度奖授奖词 《舅舅的左脚》(小说·5期) 作者:金革(朝鲜族)   朝鲜族作家金革,多年坚持书写现实和鲜活的“民族记忆”,其笔下一系列赴韩务工家庭题材小说中的各色人物,已然交织成了一个民族在全球化、城市化背景下最震撼人心的交响。 其中小说《舅舅的左脚》更是以其独特视角及哲学意味奏出一段精彩华章。 《民族文学》   2017 《민족문학》 문학상 수상 리유  "피에누아르의 춤" ("민족문학" 2017년 5기) 저자: 김혁 조선족 작가 김혁은 다년래 현실 속 살아있는 ‘민족적 기억’의 재현에 주력하고 있다.  출국, 리산가족에 관한 계렬소설을 발표, 글로벌화, 도시화의 진척과정에서 엇갈린 삶과 운명을 화려한 문체, 강한 울림으로 보여주었다.  금번 수상작인 ‘피에누아르의 춤’은 이 계렬 중의 한부로서 독특한 시각과 철학적인 사고로 이채로운 수작을 펼쳐 보이고 있다.” "민족문학" 잡지사
396    2017 "민족문학"상 수상소감 댓글:  조회:1922  추천:35  2018-03-27
. 2017“民族文学”年度小说奖获奖感言 .   "灿烂如锦的民族文学"   金革(小说家,延边作家协会副主席)       尊敬的领导, 尊敬的评委,尊敬的同行作家们元宵节好!   此时此刻,请允许我弯下腰来,首先向勾起我无限怀想的延边山水,向我笔下的圣山- 长白山、金达莱花、和图们江鞠躬,然后再向我故乡的穿白衣素装的亲人们鞠躬。   一个民族的文学是由这个民族的人民经过很长时间的摸索,奋斗所创造出的,它在这个民族历史的进程中成为这个民族辉煌的成就的重要一部分。   在接受民族文学年度奖这个奖项之际,还允许我简要地追溯一下中国朝鲜族文学的源流吧。   众所周知中国朝鲜族是过境民族。 19世纪末,由于自然气候的恶化,以及日帝国主义的统治和镇压加剧,朝鲜人纷纷渡江移民到东北地区和中国大地开始定居下来。 这期间文人辈出,他们开始用文学语言形象化地描述东北朝鲜人的生活,这一时期可以说拉开了朝鲜族文学的序幕。 在日帝铁蹄下整个朝鲜半岛形成“文学空白期”的黑暗年代里,被称作“北间岛”的中国东北部的延边地区成为了能够让我们朝鲜民族的文学得以存续的唯一空间。就成为了延续这一民族文学的血脉,填补了民族文学空白的一方天地。   文学是维系一个民族的生存、延续的灵魂。经过这种烈火淬炼的朝鲜族文学拥有了独特的地缘和文化特性。 这样一来,中国朝鲜族文学就开始呈现出与韩国、朝鲜,以及与其他少数民族迥然不同的独特面貌。在中华文化这片土壤上开始绽放出朝鲜族文学这朵崭新的花蕾。 我们中国朝鲜族文学拥有历经65年风风雨雨的纯文学期刊《延边文学》,拥有享誉全亚洲的“诗圣”尹东柱,拥有有“朝鲜族的鲁迅”之称的文学大家金学铁先生。   在全球一体化的现代语境下,我们要形成适应全球化潮流的新思维,在此基础上,发扬勤劳民族坚韧不拔的忘我精神投入其中,才能作为中华民族大家庭优秀的一分子,在世界文学的殿堂占据哪怕微小却足以傲人的一席之地。 我们一直在努力。 谢谢大家!   2018年3月2日    
395    「柳叶纷飞」- 연산형 7주기에 부쳐 댓글:  조회:1386  추천:11  2018-02-02
「柳叶纷飞」 - 致柳吾兄7周忌   金革   元月那朔风似把剪刀 不知片片柳叶谁裁出   与兄初相识犹如故人归 我们因笔会而芳华相遇   我们不言徒君之高义 我们不言自蓬勃万里 我们不言自奔腾不息   无论与知音和风雅墨客 人生最美之遇莫过于此   杨柳不语苍天风云啼 碑前无思柳叶飞满地 哎...... ......   2017. 1.22       柳燃山작가 타계 7주기(1월 22일)를 맞아,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촌 산더기에 敬立된 류연산 문학비를 찾았다.   나는 류연산 작가와 80년대 중기에 처음 만나 문학 선후배로 돈독하게 지냈고, 또 연변작가협회 소설创作委员会 주임, 부주임의 동사관계로 10여년을 지냈다.   나의 첫 소설집 "천재 죽이기"와 르포집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도 류연산 작가의 편집으로 세상에 나왔다.   부박한 요즘의 문단풍토에서, 그이의 민족애와 匠人정신을 더더욱 그리게 된다.     1995년, 한국의 한 언론인이 플로라이드 사진기로 찍어 준 사진. 사뭇 젊은 모습들이다.  
394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3 댓글:  조회:1681  추천:13  2017-11-22
  . 련작칼럼 .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김혁 공책 셋 “별”을 쏘다   모 잡지에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라는 인물칼럼을 련작한적 있다.  2년반 되게 련재한 칼럼은 조선족 수십명 인걸들의 생애를 사전형식으로 가나다라 순으로 짧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는 소전기물이다.  민족을 위해 커다란 족적을 남긴 기라성같은 별들을 헤아리는 작업에 기꺼이 투신하면서 아낌없이 산화해간 별들을 두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한면 그가운데 이름은 화려해도 아무런 빛도 내지 않은 암흑성(暗黑星)도 끼여있어 선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룡정의 명인들을 정리하면서 그러한 어려움은 곱배로 밀려왔다.  룡정에서 윤동주의 시대에 함께 족적을 남긴 저 유명한 동요 “반달”의 작곡자 윤극영, 녀류시인 모윤숙 모두가 친일의 혐의에서 여유롭지 못했기때문이였다.    윤극영은 1926년경  피아니스트 오인경과의 애정행각으로 서울에서 룡정으로 도피를 했다.  윤동주와 문익환이 다녔던 광명중학교등 학교들에서 음악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했다. 이후1940년에는 할빈에서 예술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룡정에서 간도성협화회(間島省協和會)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윤극영이 가담한 이른바 협화회는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협화회에는 조선인과 한족, 만주족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가담했는데, 이들의 역할은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서 만중을 선동하고 감시하는데 있었다. 고 박창욱 연변대학 교수는 일찍 "협화회(協和會)는 소위 민중조직이라고 하나, 사실은 비밀공작을 위한 특무조직이다. 협화회는 일반적인 만중조직인 동시에 내부에는 특무가 있는 것이다. 협화회의 선무반, 특별공작반 등은 완전히 일본군 토벌대와 같이 독립운동 세력을 토벌하는것이다."고 밝힌바 있다.    일본이 투항하자 1946년에 체포되여 3년형 선고를 받고 연길 감옥에서 복역중 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1950년대초 북경에서 조선족 음악인 김정평과 김철남이 윤극영의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했다. 노래는 근 30년간 애창되였으며 1979년 전국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였다.   윤극영이 협화회 책임자로서 적극적 친일을 한 경위는 90년대 조선족 소설가 고 류연산씨의 추적을 통해 속속 드러났다.   모윤숙은 1931년 리화녀전 영문과를 졸업했고 그해 친지의 주선으로 룡정에 있는 명신(明信)녀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바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과 나란히 이웃한 학교였다.   명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새긴 당신의 얼골을”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뒤 교사, 기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중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 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친일 강연을 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등에 친일 론설을 기고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론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녀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소년 학도병에게”,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등을 련달아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이 시기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로천명과 함께 문인중 가장 로골적인 친일파로 전락했다.   몇해 전 한국에서 펴낸 “친일파인물사전”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파의 정의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규정했다. 편찬자들은 친일파선정 원칙에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고 밝혔다.  높은 위치의 정계인사들뿐아니라 문화예술계의 이름이 쟁쟁한 인사들도 대량 포함되여 세간을 경악케 했다.    지난세기 30,40년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고 민족문학사가 실종된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였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물자를 수탈하고, 징용령을 만들어 조선인을 군인, 보국대, 로무자, 위안부로 징발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게 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조상이 준 이름을 일본식대로 뜯어고치게 했다.  그 마수는 문화예술계에도 미쳤다. 조선말로 된 유명 일간지며 문학지들을 폐간시켰고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 어용 문학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민족의 수난기에 안일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무릎 꿇은 문인들의 친일행위였다. 그동안 민족주의 작가로 주목받던 문단의 대표적 인사들이 대거 친일문학의 대렬에 끼여든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오명을 진 문학인들로는 신체시 “바다에게서 소년에게”로 민족시의 전환점을 지었던 시인 최남선, “화사집”, “귀촉도”등  탐미적인 시편들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것으로 평가되였던 시인 서정주,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감자”, “운현궁의 봄”의 저자 소설가 김동인… 등등이다.    그 전형으로 개화계몽기부터 1920년대까지 언제나 민족주의적인 립장에서 앞장 섰던 “무정”, “흙”의 작가 리광수를 들수있다. 리광수는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그 뛰여난 문필가의 기량을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글을 써내는데 허비했다. 남보다 앞서 꼭두 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인으로서의 본질과 껍데기까지 모조리 던져버리고 일본인으로 변종할”것을 공공연히 웨쳤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들을 선하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천황폐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자고 선동했다. 근시안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행태는 우리의 민족문학사에 치명적인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문단을 대표하고 민족의 지성을 상징한다는 이들이 하나 같이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칭송하고 “황군(皇军)”을 위해 비루한 붓을 들고있을때, 숭앙했던 문인들과 자기 학교의 교장마저 친일에 앞장설때 중국 동북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작은 촌부락에서 태여난 한 문학청년이 괴로움에 찬 시편“참회록” (忏悔录)을 내놓았다. 윤동주, 식민지시기 스물네살의 문학청년이 령혼의 잉크를 재워 각혈처럼 지었던 그 시작(诗作)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전률하게 만든다.   “참회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류학을 준비할 무렵에 쓴 시이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고백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각인해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원고의 하단 여백에는 도일(渡日), 시란? 문학, 생존, 생과 같은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절절한 락서들이 남아있다.    “…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굴욕, 치욕, 릉멸, 방황,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그때 그 시가 담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반성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      윤동주 "참회록" 육필고   그리고  2년 후 일본 도지샤대에 수학하던 윤동주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여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윤동주는 식민지체재에 동화될수도 저항할수도 없던 여리고 섬세한20대의 문학 청년이었다. 당시 그에게서 생의 출구는 막혀있고 현실은 랭혹하고 폭력적이며 미래는 어둡고 삶의 리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분렬을 거듭했다. 윤동주는 “나약”했고 “감성적”이였지만 감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주변부 식민지의 생활과 속악한 삶의 행태에 수치심을 느꼈다. 의지할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의 마음은 종국에는 때묻지않은 령혼의 시줄에 깃들었다.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고있는 정신적 바탕은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방관자적 립장에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뇌라 할수 있다. 그의 시의 중심적인 심상을 이루고있는 “부끄러움”은 이 같은 자기 반성과 고뇌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물론 당시는 극한의 식민지 현실에서 그 누구도 정상적인 문학을 할수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에 가장 먼저 민족문학의 전통과 자존을 지켜야할 문인들이 저항은 커녕 오히려 굴종과 어용과 변절로 민족문학사를 훼손한 친일행위에 민족사의 심각한 비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력사의 갈피에 지울수없는 오점으로 남은 이러한 문인들의 행태처럼 오늘 날에도 여전히 보잘 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에 매달려 권력과 리념과 공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문인들을 찾아볼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를 다시금 떠올려 보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윤동주, 그의 시를 읽을때마다 우리는 먹먹한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민족과 언어를 빼앗겼던 정말 암울하고 힘들었던 식민지 시대에 자아와 민족이 부재한 력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윤동주는 참회와 헌신의 신앙적 결의로 마침내 도래 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확신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시인의 고향의 하늘에 별은 오늘도 또렷하다. 그 밤 하늘을 쳐다보노라니 윤동주의 “달을 쏘다”라는 산문의 한 구절이 또록이 떠오른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곳곳한 나무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매어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오늘날 우리는 “보람처럼 풀이 무성한” 고향의 언덕배기에 잠든 시인을 더더욱 기리고 있으며 시인이 읊었던 별의 밝음과 어둠을 낱낱이 헤아리고 있다. 찬란한 별무리 속에 은닉(隱匿)해 있는 별 조차 낱낱이 헤여보다 “좀 탄탄한” 오안(五眼)의 빛을 “화살로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별”을 쏜다.    “도라지” 2017년 제5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93    동주의 남자 댓글:  조회:1490  추천:12  2017-11-21
중편소설 ​ "동주의 남자" (발취) ​ 김 혁​ ​ ​ 영화 "동주"의 한 장면​ ​ ​ -      한범, 보이니 그 언덕? 시가지 변두리에 나지막히 솟아있던 그 언덕. 룡정에서 맨 먼저 해솟는 동쪽의 그 언덕, 코 큰 카나다사람들의 선교부가 있고 제창병원(濟昌病院)이 있고 하얀 깃 세라복이 이쁜 녀학생들의 명신학교가 있고 우리가 책상을 나란히 했던 은진중학이 있던 그 언덕, 북간도 사람들이고 보면 너나없이 선망했던 마음의 대처, 간도의 “서울”, 룡정에 우리 살던 그 언덕, 해환에서 동주, 한범에서 몽규 몽실한 아명들을 의젓한 이름으로 바꾸고 우리 새로 시작한 그 언덕,  버틸 주, 꿈 몽, 새로운 주춧돌 놓고 새로운 꿈을 펼치려 막 올랐던 우리들의 언덕, 보이니 한범? 보이니 몽규? ​ 청춘의 언덕 - 룡정 은진중학 1935년   ​ ​ 롱구공이 튀였다. 몽규는 용수철을 밟은듯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동주도 솟아오른다. 점프해서 공을 낚아챈다. 떨어진 공을 걷어내며 몽규가 다시 자유투를 날린다. 철렁 공이 바스켓을 뚫었다. 날으는 몸짓들이 대공을 가르는 새와도 같다.   롱구를 마친 몽규와 동주는 공을 안고 운동장을 나와 백양나무 그늘아래 나란히 앉았다. 은진중학이라는 넘버가 달린 유니폼이 땀으로 흥건하다. 옷자락으로 땀을 훔쳐내는 몽규에게 동주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역시 너였어 한범, 주장다워” 몽규는 벌씬 웃어보인다. 은진중학 롱구부 클럽의 주장이였다. 롱구에서 둘이는 클럽의 력장이라 할수 있었다. 롱구에서는 점수가 많이 벌어졌다가도 쉽게 좁히거나 역전 시킬수가 있어서 흥미진진할 때가 있는데 그 반전은 거의 다 몽규의 몫이다.  그늘아래 땀을 삭히며 둘은 언덕아래 펼쳐진 룡정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푸릇푸릇 자라는 벼의 색조로 물들은 세전이벌, 세전이벌을 은검처럼 가로 지른 해란강, 강우에 무지개처럼 가로 걸린 룡문교, 짐군, 인력거군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삼산봉-룡정행 기차를 시간 맞춰 기다리는 룡정역, 새 연극포스터를 건물 이마전에 떠인 “성세”극장, 잡화상, 포목상, 리발소, 양복점이 어깨를 비비대며 서있는 오층대거리, 돌을 아귀맞추어 쌓아올린 룡두레 우물,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과 누런 황소가 뒤섞여 붐비는 우시장,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오니 간도성 룡정이로다.   선들선들 바람에 몸을 맡기며 동주가 나지막히 노래를 불렀다.   굽이굽이 감도는 해란강변에 충암절벽 기암이요 일송정이라   몽규가 따라 불렀다. 그런데 아름다운 “룡정경치가”는 음치인 몽규에게서 다른 곡조처럼 불리고 있었다.동주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한범, 넌 아무래도 롱구쪽으로 해야겠다. 곡조가 다 틀리잖냐” 그래도 몽규는 개의치 않고 짐짓 더 소리를 높혀 부른다.  울뚝불뚝 북망산 공동묘지는 외국사람 모여 사는 영국더기라 동주는 웃으며 그 자꾸만 삐여져 나가는 음조에 자기의 가락을 정확하게 집어넣었다.   동주의 아버지 윤영석 일가가 명동에서 룡정으로 이사를 와서 영국더기에 머물게 된것은 1932년 가을께였다.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동주와 몽규 그리고 마을 아이들은 명동에서 20여리나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 학교를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 먼 산길을 매일이고 걸어서 통학하는 어린것들의 힘에 부친 모습이 어른들에게는 늘 마음에 걸렸다. 한편 “물은 낮은데로 흐르지만 사람은 높은 곳으로 오르듯이” 북간도의 오지에 발 닿는대로 뿌리를 내리고 오로지 입에 풀칠하기 위해 뛰였던 사람들은 가마에 앉힐 쌀 걱정이 덜어지고 생활이 윤택해지자 대처로 나가고싶은 배부른 욕심들을 품기 시작했다. 그 시선들이 몰부어진곳이 룡정이였다. 동주의 아버지 윤영석도 몽규의 아버지 송창희도 그 열망의 대류에 합류했다. 룡정은 명동에서 북쪽으로 약 30리가량 떨어진 그닥 멀지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동주는 자라면서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동주가 처음 본 인구 10만명이 숨쉬고있는 간도의 서울- 룡정은 컸고 눈부셨다. 토담과 초가지붕만 보아오던눈에 기와 지붕과 네모번듯 벽돌층집 그리고 붐비는 네거리와 그 거리가 빚어내는 성마른 소음은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붐볐던 그에게 아름찬 모습으로 다가왔고 아련한 현기증까지 자아내게 했다. 동주네 일가는 “영국더기” 아래에 새롭게 깃을 틀었다.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딸리고 지붕얹은 큰 대문이 있는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 그런 큰 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짜리 초가집에 부모, 동주와 녀동생 혜원이 태여난지 얼마안되는 남동생 일주, 거기에다 은진중학에 입학한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짜리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룡정생활은 시작되였다. 그럼에도 소년들의 새로운 꿈은 이사오던 날 시가지 입구에서 보았던 룡두레 우물처럼 날로 깊어만 갔다. 둘이 함께 입학한 은진중학은 영국더기의 넓다란 부지에 본관과 기숙사, 그리고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 북간도의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이제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잇고있는것이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몸과 마음을 담금질하기 시작했다.    “요즘 난 지용님의 시집을 읽고 있어. 더기아래 룡정의 풍경에 눈을 박은채 동주가 말했다. 무아지경으로 소리내여 한수를 읊었다.   “…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여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지용님의 ‘카페 프란스’야! 좋지! 어쩜 시가 이렇게 아름다울수 있다니!” 동주의 눈동자에 경모의 빛이 잔뜩 배여 들어 있었다. “지용님은 동시도 성인시 못잖게 잘 쓰시는 분이다. 나도 요즘은 동시가 좋다. 동시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몇수 써봤는데 한수 들어볼래?” 문학에 대한 화제만 나오면 자기를 잃고 말수가 부쩍 많아지는 동주였다. 동주는 자작 동시 한수를 읊었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어! 제법인데, 바다소리가 막 들리는거 같네” 몽규가 갈채를 올렸다. 하지만 동주는 머리를 저었다. “멀었어 난. 역시 임자는 따로 있는것 같다. 지용님도 그렇고 윤석중님도 그렇고. 그분들의 동시를 읊노라면 빠져든다. 아주 흠뻑. 그분들의 동시는 화려한 수사로 재치있게 묘사하는 수준에서 끝나는것 보다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을 주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시편들이다. 어떻게 하면 그분들 같은 글 써낼수 있을가 밤잠마저 잘수 없다. 부끄럽지만.” 동주는 깊은 고민을 보였다. 그런 동주를 미덥게 바라보다가 몽규가 한마디 했다. “동주 넌 언젠가 문학으로 대성할거다. 그런 예감이 들어 내가” “그런 날이 올가?” 동주가 절박한 음성으로 물었다. “오구말구. 꼭 올게다.”  “그런데 말이다 한범…” 동주가 정색해진 얼굴로 다른 화두를 꺼냈다.  “그럼 이제 이 북간도마저도 만주국 황제의 천하가 된단 말이냐?” “철마(鐵馬. 기차)가 씽씽 내달리는 세월에 가소롭게 황제가 다 뭐냐?” 몽규가 소리나게 코방귀를 끼였다. “만주국은 허수아비제국이고 황제님 푸이도 사실은 꼭두각시나 다름없지. 탈을 씌운 사람도 춤판에 내 몬 사람도 다 일본놈들 아니고 뭐냐.” “남의 집 가사일에 감놔라 배놔라하면서 놈들이 원하는건 대체 뭐냐?” 동주가 물었다. 몽규가 롱구공을 빙그르르 돌리다가 대답했다. “일본놈들이 하필이면 자금성 황궁에서 쫓겨난 푸이에게 도포를 주어입히고 룡관을 씌워 황제랍시고 내세운 깜냥은 알고보면 간단하지. 저희들 작은 섬나라보다 땅넓고 풍부한 이곳의 물산을 강탈하고 또 이곳에 숨어있는 우리 조선사람들의 독립운동을 말살하여 안정적인 식민지 조선을 관리하고자 하는 야욕에서가 아니겠냐. 쪽바리 놈새끼들” 몽규는 열변을 토하며 찰삭 공을 내리쳤다. 공이 튕겨올랐다. 몽규는 동주네 집에서 석달을 앞두고 태여났다. 동주보다 겨우 몇달 손우였지만 생각이나 말하는 품이 늘 자신보다 달랐고 앞섰다. 각진 이마와 날카로운 코에 목소리는 우렁차며 굵직했고 언제보나 적극적인 인상이다. 그닥 크지않은 몸집이지만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미지의 힘을 마른 체구안에 감춰놓은듯 했다.   언제나 내성적이고 조용한 동주에 비해 몽규는 결단이 빠르고 생각한것은 우선 행동에 옮기고 보는 약간은 과격한 성품이였다. 명동마을 아이들중에서도 그랬고 지금 룡정으로 이사온뒤에서도 은진중학에서몽규는언제나 리더격이였다. 명동학교때 동주와 “새 명동” 등사판 문예지를 꾸릴때도 그가 앞장섰고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교회에서 하는 연극에서도 음치이지만 몽규가 주로  이래라 저래라하며 배역을 정하곤 했다. 몽규의 입에서 나오면 억지소리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동주도 익환이도 마을아이들은 모두다 몹시도 몽규를 따랐다. 요즘 항간의 화제는 온통 만주국이였다. 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사를 했던 시기는 북간도가 세상의 거친 회오리 바람속에 휩쓸리던때였다. 1931년9월 18일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만주 침략에 나선 일본은 동삼성과 열하 및 내몽고 동부를 판도로 하는 이른바 “만주국”이라는 이름의 괴뢰국을 세우고 청나라의 마지막황제였던 부의(傅儀)를 왕으로 올려앉힌것이다. “야욕에 가득찬 간교한 놈들, 허욕에 머리가 빈 어리숙한 놈들이 어우러져 살판치니 세상은 란세가 아니겠냐?” 롱구공을 만지작거리다가 몽규가 동주를 둘러보았다.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우리 해환의 희망은 무엇인가? 몽규가 안 그래도 건 음성을 더 걸쭉하게 해갖고 운문을 써가며 묻는다. 그 눈길이 여느때보다 진지하다. “익환인 평양으로 간단다”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동주는 동문서답을 했다. “뭐 평양으로? 익환이가”” 몽규가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익환이는 그냥 전도사가 되는게 꿈이래. 평양으로 신학공부를 떠난단다. 아버지 문재린목사님의 뜻이란다.”  “그럼 우리 해환이는?” 몽규의 눈길이 동주를 찔러왔다. 동주는 잠시 머뭇거렸다. 궁색해진 자신이 어색해 몽규의 손에서 롱구공을 앗아내려 했다. 그런데 롱구공을 묘기를 부리듯한 손놀림으로 몽규가 공을 등뒤로 감추었다. 그러면서도 그 눈길은 집요하게 동주를 잡고 놓지않는다. 동주는 저도모르게 몽규를 피해 눈길을 더기아래로 돌렸다. 세전이벌을 가로지른 해란강이 보였다. 아우라져 돌돌돌거리며 해란강은 끝없이 흘러간다. 어디로 가는것일까. 이 많은 물들은 다 어디서 오며 기어이 어디로 가는것일까. 물의 끝은 어디일까? 그리고 나의 끝은 어디일까? 이런 질정없는 생각을 굴리다가 동주가 입을 열었다. “난, 그냥 시인이 되고싶다. 정지용처럼, 좋은 시를 쓰고싶다. 시집도 내고싶어.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시집을 말이다. 책방에 내 이름자 박힌 책이 올려지고 사람들이 내 시를 돌려가며 읊조리고… 그런 날이 있을가 한범아?” 하지만 꿈을 말하는 동주의 목소리는 윤기없이 갈라져있었다. 아름찬 꿈을 남앞에 꺼내놓는것이 스스로도 부끄러운듯 동주는 자기소망에 대한 회의를 외려 남에게 묻고말았다. “꿈이 차암 소박하다.” 몽규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말이 칭찬인지 힐난인지 몰라 둘은 몽규를 지켜보았다. 누구나 몽규를 대할때 그 얼굴의 분위기가 미치는 힘이 컸다. 그 얼굴에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칼의 매서움을 릉가하는 카리스마같은것이 배여있다. “그럼 한범이 꿈은 뭐냐? 어떤 거창한 꿈이기에” 이번에는 동주가 진지하게 따져 물었다. “전번 상하이 사건있잖아, 그 벤또(도시락)폭탄사건말이다.” 몽규가 화제를 돌렸다. “난 그분이 참 존경스럽다. 와늘 존경스러워” "윤봉길 그분 충남 예산 사람이라면서” “김구 선생의 ‘애국단’ 성원이였지” “그 폭탄세례에 두놈이 뒈지고 한놈은 눈통이 멀어버리고 한놈은 다리짝 잃고. 다친 놈은 기수부지래.” “천황만세를 웨치던 놈들이 삽시에 애고 사람살려를 웨쳐댔겟지” “통쾌하다. 안중근의병장이 이또를 확 쏴버린 다음으로 이렇게 통쾌한적이 없었다. 핫핫핫.” 둘은 지난 봄철에 상해 훙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기념열병식장에서 있은 세상을 놀래운 윤봉길 의사의 폭탁투척의거를 두고 화제를 만들었다. 그들의 한옥타브 높아진 소리에 백양나무가지에 앉았던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개를 치며 하늘로 날아 올랐다. “내 꿈은 말이다” 몽규의 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분들같은 독립운동가가 되는거다.” 몽규가 형형한 눈빛이 되여 말을 이었다. “해환이 너 우리집 송창빈 삼촌의 얘기 들어봤지. 나의 창빈삼촌은 홍범도 부대소속의 독립군이였잖냐. 쪽바리왜놈들과 싸우다 전사하셨지. 이런 가문에서 태여난 한범이가 아니였더냐. 그저 이렇게 죽치고 앉아있을수만 없지” 몽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달리다가 공중에 붕 뜨며 덩크슛을 날렸다. 공은 준확하게 바스켓에 들어갔고 착지한 몽규가 씨익 웃으며 동주를 보고 말했다. “해환아 다시 한판 붙어 보지 않을래?”   - 한범, 내가 맨 처음 쓴 시가 있다.   “초 한대”라는 시   내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초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양초의 심지가 지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양초의 그을음내를 맡으며 난 여태껏 쓴 시의 끝머리에 처음으로날짜를 명기해 적었다. 그리고 아 한범,넌 모를거다 나의 이 처녀시는, 치기와 어눌함으로 가득한 이 시는 너때문에 씌졌다는걸… ​   "중편소설 "동주의 남자" 제4장절에서 발취 "연변문학" 2017년 1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92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2 댓글:  조회:1687  추천:20  2017-11-21
. 연작수필 .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김혁     공책 둘 간(肝)의 노래     남자들끼리 앉으면 간에 대한 화제가 많이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남성들이 녀성들 보다 간암 발병 위험이 7배나 높다고 하니 잦은 음주로 인한 간 질병에 대한 걱정으로 남성들 화제의 일순위에 오르는때가 많은것이다.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인 간은 복부의 오른쪽 웃쪽에 위치하는 내장기관으로 입을 통해 섭취돼 위장관에서 소화, 흡수되는 대부분의 물질들을 걸러낸다. 갑옷 떨쳐입고 칼과 창을 비껴들고 성문이나 궁문을 지키던 옛날의 무관들처럼 우리 몸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것이다. 뿐만아니라 영양분의 대사와 저장, 단백질과 지질의 합성, 면역 조절 등 정상적인 신체 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생화학적 대사 기능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고 저장하며 인체의 해로운 물질을 해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고마운 장기이다.      여기 간에 대해 읊은 시인이 있다. 윤동주,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는 시가 바로 “간”이다.   바다가 해빛 바른 바위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여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룡궁(龙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경성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에 쓴 작품으로 알려진 이 시는 두 개의 이질적인 설화를 결합하여 형상화하고있다.   시는 거북이의 꾀임에 빠져 간(肝)을 잃을뻔했던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우리민족의 “구토지설(龟兎之说)”과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어 신의 저주를 받고 매일 재생되는 간을 독수리로부터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희랍신화를 적절히 변용하면서 작품속에 투영시키고 있다.      윤동주는 궁지에 몰려서도 슬기롭게 자기의 “간”을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될수밖에 없었던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자신과 동일시하며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최근들어 한국 연세대 설성경교수가 윤동주의 시 “간”에 대해 저항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한국 고전소설의 난제를 해결해 온 전문가인 설교수는 "윤동주의 “간(肝)”에 형상화된 “프로메테우스 연구"를 출간하면서 이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는 "윤동주의 ‘간’이 저항시임을 외면한 채 그간의 연구자들은 시인이 희생적 모습을 묘사한것으로 오판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시 “간”은 윤동주 시인이 프로메테우스에 자신을 빗대여 식민지 시절 손상을 입은 량심의 회복 의지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돼 왔다. 하지만 설교수는 “오히려 “간”은 일제시대의 가장 저항적인 시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심판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설교수에 따르면 그동안 학계는 “간”의 핵심 시어인 “프로메테우스”를 희랍 신화의 영웅의 오기로 간주해 왔고 이를 토대로 마광수등 기존 학자들은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를 시적 자아인 윤동주의 상징으로 봤다. 순수성(불)을 상실(도적)한 시인 자신에 대한 비탄으로 해석한것이다.  그러나 설교수는 “프로메테우스의 의도적 변형을 통해 윤동주가 ‘가짜 영웅’ 일제의 패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인은 나라(불)를 빼앗고 착취(도적)한 일제에게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설 교수는 “이 표현은 기독교에서 지옥과 사탄을 이야기할때 사용했다”며 “시의 바탕에 기독교주의적인 민족주의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설교수는 특히 윤동주의 시가 다른 저항시보다 한수 우의 경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리륙사, 한용운등의 시에 등장한 저항은 아래에서 우로의 저항이고 세계문학의 모든 저항시들이 택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며 “하지만 이 시는 력사의 이름을 빌려 가짜 영웅을 내치는 심판시이자 동서양 신화의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한 시”라고 평가했다.   윤동주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의 련속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사라져 가는데 대해 내장이 상할만큼 맹독(猛毒)의 아픔을 느끼며 몸부림을 거듭했다. 그의 시편들은 비록 조용하고 어딘가 소극적으로 보기기도 하지만 실은 부끄러운 자아의 응시로부터 력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그 기저에 깊이 깔고 있다. 때문에 그에 대해 “저항시인”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시 “간”에 대한 새로운 해제 또한 이를 뒤받침해준는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속출하고있는 민족 공동체의 아픔과 그 위기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한채 신상의 작은 질병에 대한 걱정에나 전전긍긍하며 무사안일의 나날에 버릇된 현대인들에게 윤동주의 시 “간”을 한번 읊어보라 권장하고 싶다.    "도라지" 2017년 제5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91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1 댓글:  조회:1370  추천:15  2017-11-12
    . 연작수필 .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김혁     공책 하나   소울메이트     친구가 차를 뽑았다. 차 이름은 “소울”이였다. 가격이 너무 착해서, 차를 너무 갖고싶던차 이곳에서는 잘 알려지지않는 형의 차를 샀다고 했다. 그리고 중고차라 혀아래 소리로 굳이 밝히며 어딘가 자존심의 어깨가 쳐져있는 친구를 위로할겸 나는 우수개로 한마디 했다.   “중고가 좋아, 친숙해, 우리 사이도 이젠 중고가 됐잖아” 즐겁게 웃고나서 나는 차 이름의 “소울” 대신 다른 “소울”을 생각하고 있었다.        소울메이트는 령혼 (soul)과 동료 (mate)의 합성어로 서로 뜻이 잘맞는 사이를 지칭한다. 문학, 예술, 스포츠, 비즈니스 등 분야에서 큰 성공을 한 사람에게는 흔히 도타운 솔메이트의 존재가 있다.   그 일례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 괴테와 실러를 들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한 자극과 격려를 통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해나갔다.    두 예술가의 우정은 베토벤과도 이어졌다. 두 문호를 존경했고, 이들의 작품에 큰 령감을 받은 베토벤은 두 사람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소울메이트들끼리 단순한 우정을 넘어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을 유발시킨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또 한쌍의 유명한 소울메이트이다.    동생 테오는 괴퍅한 성격을 가진 형의 재능을 알았고 힘들게 번 돈으로 형을 위해 생계비를 대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고흐가 자살한 뒤, 애달픈 나머지 테오는 여섯달만에 형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형제의 묘는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에게도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바로 송몽규이다. 둘이는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 석달을 차이 두고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명동학교도,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함께 다녔다.   송몽규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자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여 자신의 작품에 날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둘은 또 경성의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했고 학교에서 함께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당시 “문우”에 실었던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그의 룡정자택 장례식에서 랑송되였다.   두 사람은 또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제경찰의 마수에 떨어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일제의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와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가족에서는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송몽규의 시신도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혔고 “청년문사(文士) 송몽규” 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 윤동주의 묘쇼곁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둘이는 묻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오늘날 윤동주는 겨례 시인으로 높이 추앙되였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오래전에 등단한 문사이자, 철저한 반일지사인 송몽규에 대해 아는이는 적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나눈 진정한 소울메이트였으니깐.   "도라지" 2017년 제5호     일본류학시절, 방학에 고향으로 돌아와 친지들과 사진을 남긴 윤동주(뒷줄 오른 쪽)와 송몽규(앞줄 가운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90    우리 문학의 영속과 번영을 기원하며 댓글:  조회:1005  추천:12  2017-11-12
우리 문학의 영속과 번영을 기원하며 - 제36회 《연변문학 문학상》시상식에서의 축사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존경하는 김병민 총장님, 오상순 교수님 이하 평심단 여러분, 존경하는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님, 존경하는 수상자 여러분, 래빈 그리고 동인 여러분,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하여 제36회 《연변문학 문학상》시상식에서 축사하의 메세지를 드리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저 역시 왕년의 연변문학상 몇차례의 수상자의 신분으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의미있는 순간이라 생각됩니다.   해마다 의례적으로 진행되는 우리 문단의 하나의 축제, 《연변문학 문학상》시상식은 이제 굳이 감흥스러운 설명이 필요없는 민족 공동체 사회 최고 굴지의 문학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권위적이고 성숙된 문학상은 더 격이 높은 문학플랫폼을 만들고 나아가 민족공동체사회의 문화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추진력 있는 처방전으로 될수도 있습니다.  진정 우리의 작가가 주인공이 되고, 훌륭한 작품이 본위가 되는 문학상, 이러한 흔들림없는 품위의 지속적인 유지야 말로 속기와 금전의 번뜩임으로 란무하는 요즘 세속에서 바람직한 문학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고 그러한 문학 풍토야 말로 침체기의 우리 문학을 보다 앓음앓이뒤의 수척함을 거둔 해맑고 건강한 얼굴로 거듭 날 수 있게 할수 있지않냐 생각해 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야말로 자호할만한 상을 수상하신 본 기 《연변문학 문학상》수상작가들에게 동인으로서의 가감이 없는 축하와 뜨거운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더불어 우리 문단의 웅숭깊고 년륜깊은《연변문학》지를 통하여 어제의 행간에서도 그랬듯이 래일의 갈피에서 보다 많은 윗 세대를 따라잡고 초월할 수 있는 빼여난 작가와 우리 문학사에 얼골을 남길만한 작가, 작품들이 나오기를 진심 기대합니다.   불과 달포전 세계 굴지의 문학상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수상소식을 접하고 영국국영방송 BBC를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대단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밟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매우 감동적이다”고 말했습니다.     문학의 위상에 바닥에 내쳐진 순간에도 굳이 삶의 방편이 돼 주지않는 문학을 선택하신 우리의 수상자 여러분들도 이 말을 그대로 복창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변문학 문학상 수상은 대단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밟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매우 감동적이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는 또 “불확실한 순간에 있는 우리에게 노벨상이 긍정적인 힘이 돼 주기를 희망한다”고 전언했습니다.   오늘 문단사 영광의 한페지에 이름 올린 우리의 수상자들, 그리고 아직도 서재 구석쪽에서 외로움을 무릅쓰고 고전하고 있을 우리의 모든 작가들, 우리 모두가 문화적 자신감을 다시금 환기하며 삶의 불확실한 순간순간에도 긍적적인 에너지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필과 문장력과 자세를 갖추고 보다 좋은 작품들을 량산, 헌물(獻物)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어 재삼 축하의 말씀을 드림과 아울러 우리 모두 두손 모아 중국조선족 문학의 번영과 영속을 기원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2017년 10월 27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9    一颗眼泪 댓글:  조회:903  추천:9  2017-10-21
一颗眼泪     有一种眼泪是黑白相间的 黑的是沉迷 白的是期望 它的名字叫坚强。   热泪的意旨和重量 感动穿白衣的球迷, 也撼动有血性的虎的队伍......   心若在圆梦就在 潸然泪下,豪迈放歌 只不过是明年戊戌年 从头再来......     2017-10-21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8    “피에 누아르”의 춤 댓글:  조회:2452  추천:39  2017-10-19
  . 단편소설 . “피에 누아르”의 춤 김 혁     이바닥의 변두리 그곳의 변두리 보다 더 멀리서왔지, 너와 다른 나의 출신  ... ... 난 이방인 이라지 그래 아직까지 찬바람 배인 이방인 난 이방인 이라지 얼마나 걸릴까 너희들이 되기까진 난 이방인 이라지  아직까지 낯선 냄새 풍기는 이방인 난 이방인 이라지 I'm a Stranger Stranger Stranger ... ... 난 이방인 이라지 그래 아직까지 찬바람 배인 이방인 난 이방인 이라지 얼마나 걸릴까 진실된 곳이 되기까진 난 이방인 이라지  끝까지 낯선 냄새풍기는 이방인 난 이방인 이라지  ... ... - 심바 자와디 “이방인”중에서 1,  족욕기에 그녀의 두발이 곱다라니 담겼다. 족욕기는 내가 련인을 위해 특별히 주문해 산 것이였다.  측백나무의 결이 곱게 살아난 목제 족욕기에 담긴 그녀의 발은 하나의 정교한 조각품을 방불케 했다. 내 련인의 발보다 더 고운 발이 이 세상 더없으리라 난 확신하고 있는터다.  푼수라 웃을터이지만 내 련인의 발은… “예술의 발”이기 때문이다.  내 련인은 이 도회지 발레극단의 수석 무용수다. 발레극이란 무언지 보지도 못하고 조선족 집거촌에서 자란 녀자애가 그 수석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 터이다.  무리한 훈련에 련인의 엄지가 변형이 가기 시작하고 있다. 토스쥬를 신을때마다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곤 한다. 그 것이 나에겐 형벌 같은 시각의 아픔이다. 하지만 그렇게 변형이 간 그 발이 내게는 아름답다. 그건 예술에 의한, 예술을 위한 발이니깐… 이제 몇달 후의 출국공연을 앞두고 그녀는 밤늦도록 련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니 그 발은 전에 비해 더 한 중압감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녁이면 나는 족욕기에 온도가 알맞춤한 물을 만들어서는 련인의 발을 담가준다. 씻어주고 안마해 준다.  “슬리퍼 대령이요, ‘잠자는 공주’님” 나는 련인의 발을 수건에 감싸 물기를 닦아주고는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냈다. 발레극단에서 그녀의 보류 절목은 “숲속의 잠자는 공주”이다, 그래서 듣는 이들은 닭살 돋는다 할터지만 나는 내 녀자를 어디서나 그렇게 불렀다.  그녀는 나를 “까뮈”라고 부른다. 내가 까뮈에 대한 연구테마로 박사학위를 타게 되였던 것이다. 곧 그 졸업론문집이 출간된다. 그리고 “숲속의 잠자는 공주”는 이제 보름 후면 실존주의 철학자에 심취된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나는 진기품을 보자기에 감싸 듯이 말끔히 닦은 그녀의 발을 슬리퍼 속에 밀어 넣어주었다.  “딩동” 이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느닷없는 초인종 소리에 나와 련인은 소스라쳐 놀라했다. 신문뉴스도 끝난 이 시간대에, 더우기 보름 후면 결혼식을 치르게 될, 일껏 꾸민 신혼의 보금자리로 찾아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택배 시킨거라도 있나?” “택배가 오면 이 시간에 오겠나요? ” “음식 배달이라도 시켰나” “내가 야식 먹는걸 본적 있나요? 참”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는 어깨전을 툭툭 건드리 듯 듣그럽게 울렸다.   “누구세요?” 나는 짐짓 목소리를 걸죽히 해서 중압감 있는 소리를 만들며 문을 땄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의 키가 무척이나 작았기에 나이 시선이 급히 아래로 쏠렸다. 그리고 순간 옹근 아파트를 들깨우며 극적인 소리가 터져 올랐다.  “올쿠나, 맞꾸나, 우리 양머리 조캐” 보통 장년의 키보다 한 눈금 내려 온 작은 키, 다복솔 같이 더부룩한 머리칼, 오짓물을 바른 듯 윤나게 검은 얼굴, 눈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메밀 눈, 모나게 유난히 도드라진 울대뼈… 칙칙한 재킷차림의 침입자를 나는 한동안 헤아려 보았다.  “외삼촌?” 곱슬머리인 나를 그렇게 부를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나의 입으로 드디여 뜨악한 한 마디가 새여 나왔다. 외삼촌이 풀쩍 뛰다싶이 하며 나의 곱슬머리를 두손으로 마구 엉클어 놓았다. 련인과의 로맨틱한 밤의 향연을 꿈꾸며, 은근한 향이 나는 “리앙뜨” 샴푸로 금방 감은 머리가 바람에 새집이 지듯 엉클어 졌다.  “조캐, 이게 얼마만이냐 이게, 응 조캐?” 외삼촌은 흥분으로 넘어질듯 비틀거렸다. 그런 외삼촌의 팔뚝을 내가 덴겁히 잡아 부추켜 주었다.  십일년인가, 아니 이제 십이년이 되는 듯 했다. 외삼촌을 못본지가… 외삼촌은 출입문 쪽 봉당에 철퍼덕 퍼더리고 앉아 신을 벗었다. 이제 기온이 막 치솟는 초여름이였지만 삼촌은 운두가 굉장히 높은 육중한 겨울신발 같은 것을 착용하고 있었다.   내가 쪼그리고 앉으며 외삼촌을 거들어 주려 했다. 그런 나의 손을 외삼촌이 탁 뿌리쳤다.  “치에라 임마” 예전에 들어 못보던 사투리 같은 걸 내뱉으며 외삼촌은 강한 거부를 보였고 나는 그만 떨떠름해 지고 말았다. 신발을 다 벗고 외삼촌이 무릎을 짚으며 일어 섰다. 힘들게 벗은 발은 꿉꿉한 냄새가 날 것 같은 까만 양말차림이였다.  “조캐, 아이고 양머리 조캐야” 외삼촌은 다시 나의 머리를 쥐여박으려다가 키가 닿지않자 그만 두었다. 그런 외삼촌에게서 술 냄새가 좀 나는 듯 했다.  너무나 격한 상봉식에 극장의 맨 앞자리에서 조금 민망해진 관객 같은 표정으로 문칮거리고있는 련인에게 내가 인사를 시켰다.  “울 외삼촌이요. 한국 갔던… 내 여자친굽니다” 그녀가 얼른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오호!” 또 온 집채를 흔들 듯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카 며눌이구마” 곧 결혼 할 사이지만 막상 그런 호칭을 처음 들어 보는 그녀가 낯꽃을 확 붉혔다. 어색한 듯 족욕기를 들고 화장실로 사라졌다. “저녁… 드셨어요?” “묵었따. ‘백전풍’네 집에서 묵었다, 백전풍이 기억나지 울 뒷 집에 살던…” 성이 백씨인데다 백전풍병을 앓고 있는 동네 이웃을 삼촌은 말하고 있었고 나는 인차 칠하다 만 회벽집처럼 얼룩덜룩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하면서도 외삼촌의 눈길은 나의 몸에 들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또 톱질하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 제꼈다.  “야! 우리 양머리 조캐, 천상선녀 같이 고분 여자두 얻구, 이제는 또  높으신 박사라메, 니 출세했구랴, 출세했어!”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양철통을 엎어놓고 란타하는 소리처럼 왁살스럽게 높다. 외삼촌의 목소리가 원체 이렇게 높았던지 나는 다시 뜨악해 졌다.  쿵! 쿵! 곁 집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전해 왔다. 전에 없던 소음에 항의하는 소리였다. 화장실 문이 빠꼼히 열렸고 그녀가 한쪽 눈만 내놓은 채 다람쥐처럼 살금 우리 쪽을 훔쳐 보고있었다.   그렇게 출국한 외삼촌과 12년만에(삼촌의 말로는 13년 7개월이라고 했다.) 다시 만났고 외삼촌은 덜컥 우리 신혼 집에 눌러 앉아 버렸다.  2,   나는 철이 들기까지 외삼촌네 집에서 붙박이로 자랐다.  무능자처 아버지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따라 대처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나가버렸고, 울화술만 대두병으로 부어 마시던 아버지는 결국 알콜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시시콜콜 앓다가 여섯살배기 나를 버렸고 이승을 버렸다. 사고무친이 돼버린 나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외삼촌네 집에 얹혀있을 수 밖에 없었다.  외삼촌은 난쟁이를  겨우 면한 바라진 몸매였다. 외삼촌과 나의 어머니는 부모도 없이 오누이가 의지해 살았다. 잔병치레를 끝없이 했던 나의 어머니를 위해 외삼촌은 초중도 나오지 못하고 학업을 버린채 목재판이며 탄광소들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보니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갔다.  그런 외삼촌이였지만 조카인 나에게만은 지극정성이였다. 자식도 버리고 외간 남자와 야밤도주를 해 버린 누님 대신 미안한 보상을 자처해서 조카에게 하련 듯 했다. 그런 처경에도 내내 반급 일등인 나를 두고 학부형회에 가서는 “우리 아들”이라고 흥감스럽게 말했고 그런 외삼촌이 나는 죽도록 싫었다.  내가 월등한 성적으로 시가지의 고중에 붙을 무렵 외삼촌은 한국으로 나갔다.  한국으로 나가던 날 내가 그렇게 감질내였던 “니키”표 운동화를 사주며 미안천만 해 하던 외삼촌의 얼굴이 지금도 또록이 기억난다. “내 서울가서 돈 많이 벌어 보낼게, 미안하다 불쌍한 우리 조캐, 조캐 미안하다”  내 곱슬머리를 마구 엉클어 놓으며 외삼촌은 그 한 마디를 복창하 듯이 거듭 했고 그 얼굴은 당금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역시 나처럼 출국하고 의지가지 없는 아이 셋을 집에 류숙시키고 있는 반주임네 집에서 자랐다. 그동안 어떤 증오를 기저에 깐 배심 같은 힘이 나의 몸에서 기생하고 있었다. 그 것은 나를 저버린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외삼촌을 비롯한 친지들에 대한 원망이였고 또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 주고픈 배심이였다. 고아나 진배없이 돼버린 내가 도회지의 일류 중점대학에 붙을 수 있었던 것도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도 있지만 바로 그러한 복잡하게 혼효(混淆)된 힘의 용오름이였던 같다.  그동안 어머니는 한국에서 석달에 한번씩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전화 한 통 오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사춘기의 내게 있어서 석달에 한번 씩 오는 송금봉투와 같은 존재로 각인되여 남았다. 때로 돈보다 대신 전화 한 통이라도 오 는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더우기 설명절 같은 때면 그런 야속함이 나의 우두망찰한 동공 속에 애수처럼 흥건하게 고여들었다.  나의 그녀 역시 어쩌면 나와 판박이로 꼭 같은 리력을 갖고 있었다. 부모들은 어린 그녀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함께 출국해 버렸고 할머니가 세상뜨자 가문 해의 수수짱처럼 깡말라 버린 그녀는 이모네, 고모네 집을 전전하면서 자랐다. 그런 동질적인 아픔이 있었기에 대학가 예술학원에서 얼짱으로 손꼽히는 그녀가 키도 작고 용모도 수수함에서 한 눈금 내려온 나의 불가능한 미션 같은 청혼을 두말없이 받아준 것이였다. 모두들 “수선화가 소똥에 꽂혔다”고 한탄들이 자지러졌다. 하지만 아픈 가슴끼리 맞댄 우리 두 사람의 애정은 쭈욱 변함이 없어 결혼까지 눈앞에 둔 것이였다.     그녀의 발레극단과 가까운 곳에 간신히 마련한 셋방 집은 “토끼 굴”처럼 협착하기 그지없었다. 침실 하나에 거실 겸 주방이 딸린 집이였다. 미안쩍은 대로 외삼촌을 거실의 쏘파에서 쉬라고 했다.  “어구매, 내가 일하던 그 곳에 비함 천당이다!” 외삼촌은 녹쓴 치륜처럼 삭아 떨어진 치아를 보이며 왁살스럽게 웃고는 쏘파에 널브러져 버렸다.  화적 같은 용모를 가진 외삼촌은 예기치 못한 길목에서 풀쩍 나타났고 그 이후로 우리의 수난은 시작되였다. 신혼 토끼들의 불면의 밤이 시나브로 막을 열었다. 삼촌이 코를 골았다. 그 것도 여간 고는 편이 아니였다. 음을 맞추지 못한 낡아빠진 첼로의 G음처럼 삼촌은 코골이의 악장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코 고는 소리가 우리의 작은 신혼집을 소음의 파도 너울우에 싣고 늠실거렸다. 그녀는 물론 나도 한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밤을 꼬박 팬 그녀의 눈가에 도렷하게 그늘이 졌다. 머리가 어지러워 내가 먼 륙교아래까지 가서 사온 꽈배기와 콩물도 먹지못하고 출근했다. 대신 그녀가 좋아했던 꽈배기와 콩물을 외삼촌이 흡족해 하며 깡그리 먹어버렸다.  저녁이면 외삼촌은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조캐야. 우리 양머리 조캐야”하고 까랑한 목소리로 아파트 단지를 왕창 울리며 들어왔다.  술은 번마다 백씨네 집에서 먹었다고 했다. 술을 마시고 나면 외삼촌은 많은 말을 했는데 원체 언어 표달이 어누룩하고 그동안 어디서 배웠던지 어느 육자배기에도 붙이지 못할 사투리를 막 람발했다. 게다가 술이 들어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니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꼭 같은 내용들이 레코드 풀 듯 되풀이 되자 사투리와 술에 절어 곱슬머리처럼 고불고불 굽이쳐 나온 말들이 거개가 자신이 일하던 업체 사장들에 대한 분노의 발설임을 나는 간신히 헤아려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삼촌이 나의 테불우에 놓여진 액자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잘 생긴 나그네 누구냐?, 장인 어른이시냐?” 나는 그만 고소를 머금고 말았다. 액자 속 담배를 물고 쿨한 자세를 취한 이는 나의 연구분야의 장본인인 알베르 까뮈였다. 자유주의적, 인도주의의 모습을 제시한 소설가이자 극작가, 리론가, 모랄리스트이며,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서는 전세계에서 그의 세대의 대변가이자 다음 세대의 스승으로 추앙되였던 이 위대한 존재에 대해 외삼촌에게 어떻게 해석할지 머뭇거리는데 외삼촌이 불쑥 또 한마디 했다.  “담배를 무척 즐기나 보네, 접때 같으면 내 울 동네 독한 화건종 담배를 갖다드렸을건데” 삼촌이 호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궐연 한개비를 꼬집어 내여 입에 물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럽게 웃으며 다시 궐연을 담배갑에 꽂아 넣었고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며칠전 안해가 집안에서 담배만은 안된다고 단단히 까박주었던 것이다.  “이분 작가입니다, 프랑스 사람” 그제야 내가 삼촌이 궁금해 하며 나의 장인으로 오인하는 액자속 인물에 대해 짧게나마 설명했다.  “작가? 쁘랑스 사람? 음허허, 그런걸 난 또” 삼촌이 두어깨를 들썩이며 극적으로 웃어제꼈다.  처음 까뮈의 “이방인”을 읽었을때 나는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를 상상하기가 조금은 어려웠었다. 정작 이를 론문테마로 잡고 천착한뒤에 “부조리의 인간”에 메스를 들이 댄 그의 작품의 진수에 대해 깨쳐 알기 시작했다.  지금 내 눈앞의 외삼촌도 부조리한 인간에 다름아니다. 어쩌면 외삼촌이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또 다른 분신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외삼촌의 부조리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가? 술을 마신 날이면 코골이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됐다. 나의 그녀는 린치를 당하는 사람처럼 귀를 막고 몸부림쳤다.  “미안해”를  련발하면서 나는 그녀를 소음에서 막아주련듯 꼭 품어줄뿐이였다.  아침마다 그녀는 내가 사온 꽈배기와 콩물을 먹지도 못한 채 출근했고 그 것은 또 모두 외삼촌의 아침거리로 충당되고 말았다.  어느 한번은 삼촌이 보이지 않자 둘이 충동에 밀려 와락 껴안고 입맞춤을 하고 있는데 삼촌이 불쑥 쏘파뒤에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우리는 화들짝 놀라며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런 삼촌의 손에는 쏘파뒤편에서 주어낸 동전 한 잎이 들려져 있었다. 삼촌의 얼굴이 모주먹은 사람처럼 순간에 붉어졌다.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다가 탁자를 걷어 찼고 문설주에 이마를 탁 쫗고 말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으실 작정이얘요?” 내 심중은 그날 이후 며칠째 이마에 작은 혹을 달고 있는 외심촌을 향해 이런 말을 뭉뚱그리고 있었지만 뱉지는 못하고 있었다. 첩첩 소리를 내며 꽈배기를 씹어 대는 삼촌의 두툼한 입술을 보노라면 어느 한번 원족 갔다가 뱀에게 물린 나의 발목을 입으로 독즙을 빨아내고 한달내내 괴물처럼 부어 있던 외삼촌의 입술이 순간 떠올랐다. 그런 외삼촌을, 조금 툽상스럽지만 10여년만에 만난 외삼촌을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없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였다. 원체 고고한 “백조의 호수”의 곡조가 흐르던 집 안에서는 외삼촌이 끝간데 없이 흥얼거리는 곡조의 아귀가 맞지 않는 끈적한 트로트 가락으로 차 넘쳤다.  나는 원체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곁집 남정이 복도에서 피우는 담배연기에도 그녀는 질색하며 창문을 쾅하고 닫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외삼촌이 복도에서 담배를 피웠다. 퇴근하여 들어서며 그녀는 식지로 코끝을 가리였다. 그런 그녀의 이마살은 잔뜩 찌프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랑하의 창문에 매달려 투신하려는 사람처럼 몸을 반쯤 밖으로 내밀고 담배를 피우는 외삼촌을 말리기도 무엇했다.  이동안 그녀의 량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원체 재깔이며 말이 많던 그의 앵도같은 입술은 꾹 닫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보 여린 그녀는 막상 퇴근할 때면 찬거리는 세 사람 분으로 사들고 있었다.  그러다 굳게 닫혔던 그녀의 입이 급기야는 열렸다. 며칠 만에 열린  그 입술은 투명한 고음을 뱉어 냈다. 그 소리는 랑하에서도 들을 수 있었고 퇴근하던 나는 덴겁히 집으로 뛰여 들어갔다.  그녀가 봉당에 선채로 두 손으로 얼굴을 잔뜩 싸쥐고 있었다. 외삼촌이 누웠는 쏘파쪽으로 눈길을 돌리던 나의 두 눈 역시 허깨비라도 본 듯 뒤집히고 말았다.  쏘파 아래에 무언가 놓여있었다. 쏘파아래에… 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낮술을 한 듯 소파에 누워있던 외삼촌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뜨악하니 느침이 흘러내리는 입 언저리를 닦던 외삼촌이 그제야 무언가 기수챈 듯 얼른 그 발을 주어들었다. 주체할바를 모르다가 덮고 자던 재킷으로 그 발을 후딱 덮어 버렸다.  “미, 미안해 조카 며눌이” 우리 둘의 경악한 두쌍의 눈은 못볼 것을 본 것처럼 온통 외삼촌의 발에 몰부어 져 있었다.  외삼촌은 격자무늬가 있는 재킷으로 신통히도 발을 닮은 그 의족을 감쌌다. 그리고는 외발로, 하지만 그렇게 재빠른 속도로 겅중겅중 밖으로 뛰쳐 나갔다.    3,  우리들의 결혼식은 교내 식당에서 열렸다. 전국에서도 몇 손 안에 꼽히는 이 유명대 여느 졸업생으로서도 볼 수 없었던 결혼식이였다.  그녀와 나는 두 사람다 남다른 결혼식을 치르려 했다. 그렇다고 지중해의 수중결혼이나 세계 최고봉의 티벳 안나푸르나 산아래에서의 그런 랑만이 팽창해 오르는 결혼식이 아니였다. 결혼식은 나의 졸업론문집 “까뮈의 ‘이방인’ 연구”의 출간기념회와 더불어 치르었다. 이 품위있는 결혼식에 모두들 갈채를 올렸다.  지도교수들의 축하에 이어 나의 출간기념 소감 그리고 몇달 후 출국공연을 앞둔 신부의 춤표현도 있었다.  그녀는 몇달 후면 한국으로 가서 한 발레극단의 창작발레 “이방인”의 일원으로 뛰게 되여 있었다. 한국에서 온 늙은 발레 교수에게서 레슨을 받았고 그 유명 교수가 나의 그녀의 숨은 기량을 보아내였다.  “여느 무용수들과는 체형도 다르고 유연성이나 근력도 다르다”며 그녀의 타고난 끼와 끈기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그 늙은 교수가 많은 경쟁자 속에서 대담하게 나의 그녀- 조선족 무용수를 기용한 것이였다.  나의 졸업작품처럼 그녀가 해외에서 처음 선보이는 춤 역시 까뮈와 관계있었다. 이러한 예술적인 교감이 우리 둘 사이를 더 돈독히 하게했다.  그녀의 춤사위는 더없이 우아했고 모두들은 결혼식이 아니라 극장에 모여 온 듯 그녀의 춤에 온통 정신이 몰부어져 있었다.  이때 덜컥!하고 문이 열렸다. 그렇게도 큰 소리로 왁살스러움에 가깝게 열렸다. 춤사위는 뚝 멎었고 모두들의 눈길이 문가에 쏠렸다.  오, 마이갓! 순간 나의 입으로 헛비명이 새여 나가고 말았다.  목발을 짚은 사람 하나가, 걷우어 올린 왼쪽 바지아래로는 허무처럼 아무도 없이 텅 빈 사람 하나가 겅둥겅둥 뛰여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신데요?” 하객 몇이 나가며 저돌적인 그의 행보를 가로 막았다.  “조캐, 내 조캐가, 결혼식 한다던데…” 급히 뛰여 온양 얼굴이 땀벌창이 된 외삼촌은 헉헉대며 아래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서 빌렸는지 쥐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넥타이도 매고 있었는데 땀으로 흥건한 누른 셔츠에 매인 천박하게 뻘건 넥타이가 게게히 풀려 있었다.  나는 덴겁히 달려나가 채문하는 하객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왜 이렇게 오셨어요? 말도 없이?” 내가 한껏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외삼촌이 맹하니 나를 쳐다 보았다. “하나 밖에 없는 조카인디. 외삼촌으로 생겨먹어 와야지” 외삼촌이 녹쓴 치륜처럼 삭아 떨어진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누구시니? 친지분이 오셨어?” 나의 지도교사가 가까이 와 악수의 손을 내밀며 관심조로 물었다.  “네, 저…우리 마을서 살던 이웃집…사람…” 나는 혀아래 소리로 말을 뭉뚱그렸다.  외삼촌의 얼굴이 얼음망치에라도 맞은 듯 와락 굳어져 버리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지도교수의 악수를 청하는 손이 가슴패기까지 다가와서야 외삼촌이 그제야 헤덤비며 나의 스승의 두손을 헐렁하니 부여 잡았다. 문칮거리며 말했다.  “내 조카” 나와 외삼촌의 눈빛이 마주쳤다.  “조, 조카 친구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슴다” 외삼촌이 목구멍으로 갱엿이라도 넘기 듯 우물거렸다. 탕!하고 목발이 넘어졌다. 덴겁히 허리를 굽혔으나 목발이 손에 닿지 않아 외삼촌이 허우적 거렸다. 나는 급히 목발을 주어 삼촌의 겨드랑이에 끼워 주며 부축하려 했다.  “치에라 임마” 삼촌이 나의 손을 뿌리쳤다. 거부하는 손길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절뚝이며 외삼촌이 구석 쪽의 의자를 찾아 앉았다.  외삼촌은 나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목발에 옹근 몸체를 의지 한 채 높게 걸린 결혼식 현수막을 쳐다보고 있었다. 충혈된 동공이 텅 비여 보였다.  결혼연은 다시 이어졌다. 하객들의 축사, 축가, 교배주, 학우들의 지꿏은 장난,  합영이 이어졌다.   그 환락의 란장(亂場) 속에서 어느 순간 나는 외삼촌이 보이지 않음을 발견했다.  창가로 다가갔다. 괴물 같은 외삼촌의 느닷없는 출현에 기쁜 날 온통 신경을 들고있던 신부도 다가왔다.  신부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창유리 한 곳을 짚었다. 창밖으로 교정 저쪽 금방 피여 난 조팝나무꽃 화단곁으로 목발을 짚고 가고 있는 삼촌의 뒤모습이 보였다.  목발을 짚고 한쪽 발로 잽사게 걷고있는 외삼촌의 걸음사위가 발레에서 한 다리 발끝으로 서는 “푸앵트 기법”처럼 보였다.  이내 외로운 짐승처럼 꿈지럭이던 삼촌의 잔등은 교정의 솔나무 숲 사이로 사라졌다.  이때 친구가 다가와 빨간색 봉투를 내게 건넸다. “아까 그 고향 이웃집에서 오셨다는 분이 주시던데” 축의금이였다.  축의금이 오늘 치고는 액수가 제일 많았다.    4, 며칠 후 외삼촌이 그간 머물러 있으며 신세를 졌던 백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외삼촌에게서 나의 핸드폰 전화를 알았다고 했다. 나더러 당장 자기네 가게로 오라고 했다. 가게는 그녀네 그녀의 발레극단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보신탕집이였다.  “네 삼촌 엊저녁 비행기로 돌아갔다” 가게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수년 만에 만나지만 서로 수인사를 할 새도 없이 백씨가 입을 열었다.  백씨가 술을 내왔다.  “나 개고기를 먹지 않는데요, 낮술도 안 먹어요” 백씨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스스로 한 잔 소주를 따랐다. 주욱 마셨다. 하얗게 분칠한 창극 속의 인물처럼 하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진한 고량주 냄새와 함게 토해내는 첫 마디가 충격적이였다.  “니 엄마는 14년전에 이미 죽었다” 나는 집채가 일렁이는 듯한 충격에 휘청거렸다.  백전풍 환자의 험상궃은 얼굴을 한 지라 내가 개구멍 바지 시절부터 무섭게 보아 온 백씨는 늙어서 더구나 추레해진 얼굴로 괴담같이 무서운 말을 많이 했다.  출국붐이 금방 시작되던 때라 당시는 불법체류자에 대한 단속이 심했고 단속을 피해 달아나다가 나의 엄마는 층집에서 추락사했다고 했다. 그래서 삼촌이 급히 엄마의 시신을 처리하러 출국했고 그 걸음에 눌러앉아서 돈을 벌어서는 여태 엄마의 이름으로 나에게 부쳐 보냈다는 것이였다.  나의 손이 저도 모르게 소주잔을 잡았다. 백씨가 얼룩이 진 손으로 한 잔 부어주었다. 나는 단숨에 한 모금 들이 마셨다. 쫘악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술기운과 함께 이름 못한 슬픔, 서러움과 미안함과 같은 것이 전신의 혈관을 타고 전신에 퍼져내려갔다.  그러다 외삼촌은 공사장에서 콘크리트를 반죽하는 레미콘에 미끄러져 들어가 발 하나를 잃었다고 했다. 일년도 안되여 의족을 부착하고 다시 공사장에 나타났다. 여기 저기 전전하며 소박맞으면서도 쉬운 일이라도 찾아하려 헤맸다고 했다.   “그 지역서 유명하다 네 삼촌, 네 외삼촌 별명이 ‘우산귀신’이다, 발 하나 없이 외다리로 폴짝 폴짝 뛰여다니며 일한다고” 백씨가 또 한잔 비웠다. 자신의 잔을 비우고 나의 잔에도 첨잔해 주었다. “노가다판서 하필이면 다리 한 짝 없는 사람 쓸 필요가 있나, 그 것도 불법체류 조선족을, 그래서 여기저기서 쫓겨다니다 요행 일자리라도 생기면 악착스럽게 일했다그러데.” 백씨의 목소리가 꺼룩하게 젖어 들었다. “첨엔 외다리라는 걸 속이려고 무척 애를 썼단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성한 사람보다 다른 기미가 들통나군 했지, 더구나 오래된 의족이 낡은 구두처럼 판나고 삐걱거리더라네. 그래서…” 헐값으로 만든 의족이 탐탁치 않았는데 다시 만들려해도 값이 엄청 비싸 고향으로 의족을 만들어 잠간 온 터라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의족값이 한국 못잖게 비싸자 치수까지 재놓고는 맞추지도 않고 외발로 가버렸다고 했다. “불쌍한 사람…”   백씨가 한 숨을 하얗게 내뱉었다. 구태여 주섬주섬 의족공장의 치수 견본서를 내 앞에 내놓으며 보라고 했다.    번성거리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숙이며 한 손으로 소주잔을 다른 한 손으로 그 의족 견본서를 그러잡았다.  5, 안해가 무대우에 섰다. 돔 모양의 천정에 샹들리에가 드리운 호화로운 극장, 푸른 커튼이 내려진 무대에서 토스쥬를 신은 발레리노들과 발레리나들 앞에 나섰다. 푸른색 빌로도 커버를 씌운 의자에는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스커트가 무릎위로 껑충 뛰여오른 “로맨틱 롱튀튀(발레복의 이름)”를 입은 안해의 예쁜 모습은 그야말로 무용복의 이름처럼 로맨틱의 극치였다.  몇달 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드디여 창작발레극 “이방인”이 첫 막을 열었다. 현지 매체에는 까뮈의 극이 처음 발레무대에 오른다는 뉴스보다는 조선족 발레수가 무대에 선다는 것이 이슈거리였다. 공연 며칠전부터 대서 특필로 예고소식을 냈다.  사랑하는 이의 첫 해외 출연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나는 사비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안해와 함께 서울행차를 했다.  공연에 앞서, 서울에서 도착하자 바람으로 외삼촌을 찾았다.  그리고 그이의 비보를 들었다.  외삼촌은 부모와 꼭 같은 간병으로 진단을 받자 한 달 만에 죽었다고 했다. 암진단이 내린지는 오래 됐고 진단서를 받고도 그냥 일했다고 했다. 그러니 저번 고향 행차가 자신으로서는 마지막임을 외삼촌은 어쩌면 알고 다녀간 것이였다. 죽기전에, 살같을 괴롭히는 둔중한 의족이 아닌, 좀 더 편한 의족을 신어보는 것이 삼촌의 소원이라고 했다.  외삼촌은 조선족을 도우는 어느 자선단체의 숙소에서 운명했다. 중국의 연고자에게 통지하려 하자 고향에 연고자가 아무도 없다고 했다고 한다. 죽음의 막바지, 무원조함에 내뱉았을 처연한 말마디가 날카론 송곳처럼 나의 앙가슴을 찔러 댔다. 그 자선단체의 사무실을 찾아 나는 우두망찰 천장을 우러르고 서버렸다.  소음이 자오록한 공사장에서 목발을 짚은채 무거운 자재를 메고 외발로 겅중겅주 뛰여다니는 외삼촌이 환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속죄의 마음으로 외삼촌에게 vip공연 티켓을 갖고 왔던 안해도 그만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우중충한 마음을 억누르며 안해는 예술의 전당 무대우에 섰다.  발레극의 안무인 내 안해를 발탁했던, 그 늙은 발레교수가 공연에 앞서 특별히 나의 그녀를 무대앞에 모셔 소개를 했다.  소감을 부탁하는 사회자의 말에 이윽토록 안해는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붙인 반짝이 화장때문이였던지 안해의 눈에는 이슬이 비쳐든 듯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발레극의 제목이 '이방인'이고 저의 남편도 다름아닌 까뮈의 ‘이방인’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슴다. 비행기에서 남편에게서 이방인에 관한 얘기를 들었슴다. 그리고 낱말 하나를 배웠슴다.” 그녀가 생소한 단어를 배우는 소학생 처럼 또박또박 말을 새겨 뱉았다. “‘피에 누아르’라는 낱말을요” “피에 누아르?”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피에 누아르’ 프랑스어로 ‘검은 발’이라는 뜻이라고 함다. 그리고 ’이방인’을 쓴 까뮈가 바로 ‘피에 누아르’였다고 함다.  까뮈는 프랑스에서 알제리로 이주해 온 가난한 로동자 집안 출생이였는데 알제리에서 태여난 프랑스인을 가리키는 ‘피에 누아르’로 불렸다고 함다.  ‘피에 누아르’들은 유럽인도 아니고 아랍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통 알제리 인도 아니였기에 늘 편견과 기시를 받았다고 함다.” 그녀가 고개를 수긋하고 잠시 문칮거리다가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일하는 우리 조선족이 바로… ‘피에 누아르’가 아닌가 생각해 봄다.” 좌석이 다시 한번 크게 웅성거렸다. 안해가 좌석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말했다. “이 발레를 이방인으로 해외에서 떠도는 모든 조선족 ‘피에 누아르’들에게 바침다.” 그녀는 감성으로 무대를 누볐다. 눈부신 무대 조명 속에 그의 눈에 간간이 비친 이슬을 나는 가려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춤사위를 쫓는 나의 눈에도 주체할길 없는 눈물이 그득 차 있었다.  안해의 춤사위를 지켜보며 나는 무용수들의 분장실 캐비넷에 넣어둔 안해의 트렁크를 떠올렸다.  그 속에는 내가 외삼촌에게 미처 드리지 못한 중국에서 맞추어 가져 온 “발” 한 짝이 들어 있었다. (끝)   “민족문학” 2017년 제5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7    동주와 아베 댓글:  조회:1774  추천:12  2017-09-12
  . 칼럼 .   동주와 아베   김혁     “동주”가 다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간다. 영화 《동주》가 오는 7월부터 8월까지 도꾜 시네마 신쥬큐 (東京シネマ新宿)에서, 오사카 시네마 신사이바시(心斎橋)에서 상영된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2015년에 개봉된 영화 《동주》는 “왕의 남자”로 중국에도 널리 알려진 한국 영화계 리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 언어도, 이름도 모든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어두운 일제강점기, 북간도 룡정의 한 집에서 태여나 자란 동갑내기 사촌 윤동주와 송몽규의 일대기를 담백하면서도 절제감있는 미학으로 담아낸 수작이다. “동주”라는 명료한 제목과는 달리 영화의 일본 명은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의 생애《空と風と星の詩人−尹東柱の生涯》”이다. 요즘 일본이 “테러대책법안(조직범죄처벌법 개정안)” 추진을 강행하고 있는 시끌벅적한 가운데, 일제감옥에서 한줌의 재로 되여 백자기에 안겨 돌아왔던 윤동주가 다시 스크린에 담겨 현해탄을 건넌다. 아사히신문은 영화 “동주”를 소개하며 치안유지법과 테러대책법안의 류사성을 지적했다. 이 치안유지법은 바로 일제가 윤동주 시인을 체포할 때 적용한 법률이기도 하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식민지시대 일본에 류학하여 교토(京都)와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재학중 조선문화와 민족의식 고양을 도모했다는 리유로 체포되였고, 1944년 징역 2년의 유죄 판결을 받고 1945년 2월과 3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숨졌다. 꼭 같은 그들의 사인은 생체실험이라는 주장이 안받침되고 있다.   테러대책법안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치안유지법”과 비슷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베 정권이 이 법안을 통과시켜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는 비판이거세다. 윤동주 시인 시비가 경립(敬立)되여 있는 도시샤 대학 코리아연구센터의 오타 오사무(太田修) 교수는 "치안유지법과 유사한 법안이 론의되고 있는 지금, 그저 모여서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 처벌된 윤동주 시인을 돌아보고교훈을 얻는 것은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일제감옥에서 미완의 청춘으로 스러져간 윤동주가 올해로 탄신 100주년을 맞는다. 루루 세월의 장하가 흐른뒤에도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군국주의 극우세력은 아직도 황국사관에 경도되여식민사관의 미몽(迷夢)에서 깨여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동주"가 또 한 번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쉽게 씌어진 시”를 부끄러워 하며 “다만 홀로 침전(沈澱)”한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과 새로운 패권주의적 움직임은 작은 스크린에 흑백의 영상으로 담긴 우리의 시인을 새삼 기억하게 한다. 력사의 교훈을 모르는 아베에게 영화 “동주”를 한 번 보라고 권장하고 싶다.   2017년 5월 22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6    아오... /김혁 댓글:  조회:891  추천:7  2017-09-10
(마광수의 그림) 아오.../김혁   낙엽 한 잎 떨어졌다그리오. 아직 푸르러 상수리 나무는 모르오.   풀잎 한 대 꺾였다그리오 매니큐어 눈부셔 손톱은 모르오   꽃잎 한 장 졌다그리오 자잘해서 조팝꽃은 모르오   과일 한 알 떨어졌다그리오 배불러서 맛망울은 모르오   개미 한 마리 죽었다그리오 운두높아 구둣발은 모르오   유랑견 한 마리 죽었다그리오 보신탕집 단골은 식사중이라 모르오   소설가 한 사람 목 맸다그리오 작가들은 모르오 편집들은 모르오 출판상은 모르오 독자들은 모르오   몽당 붓이 아오 원고지 빈 칸이 아오 키우던  눈먼 강아지가 아오 상여가의 목 쉰 가락이 아오 빈소의 종이 꽃이 아오 납골당의 하얀 도자기가 아오 무덤 위 잡풀에 쑥색 치마 입혀 줄 무덤가 잡꽃에 다홍빛 저고리 입혀 줄 그 봄이 아오 아오   - 이천십칠년구월오일, 스스로 필대와 이승을 버린 한 소설가에게...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5    민족문학사의 텃밭에 더불어 피고지고 댓글:  조회:1198  추천:20  2017-09-06
.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상 수상소감 .   민족문학사의 텃밭에 더불어 피고지고   김 혁   8월 15일의 그날, 문인들과 함께 윤동주 생가에서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활동을 마치고 돌아 오던 귀로에서 수상소식을 접했습니다. 10대에 등단하여 문단이 제정 한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해외에서 날아 온 희보(喜報)에 또 한 번 문학도 시절 첫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처럼 저으기 격정에 꺼둘리는 나를 느꼈습니다. 금번의 수상작인 “춘자의 남경”은 조선족 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위안부 소재의 장편소설입니다. 불과 수십년 전에 한국과 중국의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었습니다. 수십 만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습니다.   소설의 들머리에 나는 지난 세기 일제가 자행한 북간도 지역에서 일어난 장암동 대참안을, 말미에는 고도(古都) 남경에서의 대학살사건을 필묵으로 세세히 재현했습니다. 그 나락에서 몸부림쳤던 우리 겨레의 수난을 눈물로 적었습니다.  “춘자의 남경”은 중국작가협회에서 번역지지작품으로 선정되여 이미 번역을 마쳤으며 곧 우리말과 중국말로 출간되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일전 출간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동안 오로지 문학에 매진하면서 느낀 바이지만 우리 조선족은 비록 광대한 중국땅에서 변강의 오지에 위치해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문학의 지정학적 위치는 “변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주민족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은 지난19세기 후반부터 고향을 잃은 설음을 안고 통한의 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여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청국인들의 땅에서 개간을 시작하고 일본인들과 항쟁하며 새로운 기원을 열었습니다. 거치른 땅의 개척과 피어린 항쟁의 와중에도 “이역하늘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들의 “거친 꿈”은 문학의 한 형태로도 만개되었습니다.   이 무렵 안수길, 강경애, 최서해 등이 이 곳을 주무대로 문학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온 겨레가 애대하는 윤동주도 바로 이 곳에 태줄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작가 김창걸과 시인 리욱 등을 배출했으며 이들이 바로 조선족 문학의 비조(鼻祖)로 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문단에는 또 “조선족의 루쉰”으로, “구소련의 량심” 솔제니친과도 비견되는  “조선족문학의 거목” 김학철 옹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룩한 눈부신 문학적 유산은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한 전형이 되였고 이들은 한민족 문학사의 텃밭에 더불어 장려(壯麗)한 꽃으로 피어 올랐습니다.   조선족 문학은 한민족 문학과 정신적, 문화적 연계를 확보해 오면서 중국의 역사 변천과 그 속에서 영위하고 있는 조선족의 삶을 나름의 서정과 서사의 힘으로 보여주어 왔습니다. 그러할진대 이질적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우리 문화를 승계하고 다시 모어로 담아내는 우리 조선족문인들의 고심이야말로 더욱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수상에 저는 더 다른 가치와 소중함을 부여해 봅니다.   그날 우리 문인들은 복원 된 명동학교 옛터에서 윤동주네가 불렀던 교가를 목청껏 열창했습니다. 이 시각 그 교가의 한 구절이 떠 오르는군요.   흰 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이 깃 치신 이 터에 /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필대를 올곧게 고누고, 민족을 위한 일에 일필(逸筆)하고저 하는 저의 소명의 의지에 격려의 감로수를 부어준 한국문인협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9월 1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4    필끝에 건곤乾坤세상 있나니(련재1) 댓글:  조회:1592  추천:14  2017-08-03
필끝에 건곤乾坤세상 있나니(련재1)  -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김혁   수도에서 열리는 문학성회에 다녀왔다.   중국작가협회 제 9 차 전국작가대표대회가 2016 년 11 월 30 일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개막 식을 시작으로 성황리에 열렸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대표단은 연변작가협회 최국철주석을 비롯해 장계신, 정봉숙, 김 혁, 김영건, 김홍란, 채시봉 등 조선족작가와 문화계 사업일군들이 대표로 선정되여 참석했다.   습근평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대회 개막식에 출석한 가운데 중국 각지의 문학계 엘리 트들이 참석한 대회는 제8차 중국작가협회의 사업보고를 심의채택하고 “중국작가협회 규정”을 수정하였으며 철응을 주석으로 한 중국작가협회 차기 지도기구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12 월 3 일에 페막, 5 박 6 일간의 대회일정을 원만히 마치고 대표들은 귀환했다. 10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글밭만 경운해온 작가로서 중국대륙의 문학계를 대표하는 기 라성 같은 거장, 엘리트들이 운집한 전국작가대표대회에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게 된것을 행 운과 자호감으로 생각한다.   20 여년전부터 전국청년작가회의 등 전국적인 문화행사에 적지 않게 다녀왔다. 하지만 이 번의 성회는 여느때와는 또 다른 농도와 줄기의 계시와 감수를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회의기 간 나는 매일 휴대폰으로 간명하나마 그날그날의 수감을 일지로 적어 위챗에 올리고 나의 문 학블로그에도 올렸다.   스모그로 몸살하던 북경이였지만 그 며칠만은 초동 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의 련속이였다.   그처럼 “가슴속에 대의를 품고 마음속에 대중을 담아야 하며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필 끝아래 건곤을 적어내리기를 바란다(胸中有大义、心里有人民、肩头有责任、笔下有乾坤).” 라는 회의의 주제문구는 작가들의 마음벽을 울려주고 우리 문학의 화창한 봄날을 제시하는듯 했다. 성회에서 받은 감수와 사색을 편단으로나마 테마별 적어본다.    자신감을 소환하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1)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옥색 저고리우에 감색 마고자를 받쳐입었다. 헌활하게 통이 트인 바지를 떨쳐입고 발목에 대님을 조여 고풍스러운 멋을 강조했다. 저고리의 섶이 약간 들린 품이 나래를 펼치려는 학의 그것과도 같다. 간결함과 섬세함이 매치된 선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그려낸다. 오방색 수공의 옷은 단아하고 아취가 있다. 마음은 싱그럽고 발길도 가벼워 건들건들 걸으니 자신감이 그윽하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한복이다.   전국작가대표대회 개막식이 열리던 날 아침, 나는 참말로 오랜만에 한복을 떨쳐입고 나섰 다. 15 억인구중 민족을 대표하는 소수민족 작가로 선정된 기쁨으로 처음 민족복장을 맞추어 입었다.   역시 한복을 떨쳐입고 나선 녀성대표들인 김홍란, 정봉숙 역시 여느때보다 청초한 모습이 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기자들의 카메라의 앵글이 우리 복장이 주는 운치에 맞추어져있었 다.   연변대표단의 대표들은 인민대회당의 가장 현요한 앞자리에 자리배당이 되여있었다. 우리는 부풀은 한복처럼 한껏 부풀은 마음으로 총서기와 중앙의 지도자들, 전국 각지에서 온 민족작가들과 만났다.   개막식에서 한, 총서기의 예술변증법과 과학정신으로 일관된 강화는 새로운 문화리념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관점의 밀도가 농후하고 새로운 용어로 가득한 그 강화에서 몇줄을 임의로 뽑아내도 느낀바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문화자신감”이라는 용어를 나는 정중하게 뽑아보았다.    “문화자신감은 기초로 되고 더 광범위하고 심후한 자신감으로 되여야 하며 기본으로 되고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합니다. 문화적자신감을 갖는것은 국운의 흥망성쇠와 관련되며 문화의 안전, 민족정신의 독립성에 관련되는 큰 문제입니다. 문화자신감이 없이는 골기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풍채가 보이는 작품을 써낼수 없습니다.”   자신감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렇게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기는 근년 들어 처음이였다. 우리 는 언제부턴가 자신감이라는 이 단어를 잊고있었다. 잃어버리고있었다.   근년래 중국조선족은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서 부침해오고있으며 따라서 “위기론”, “비관 론”도 머리를 쳐들고있다.   도시진출, 출국붐에 잇달아 가꾸며 살던 터전이 비여지고 인구가 마이나스성장률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기록하고 학교들이 줄줄이 페교되고 독서인구가 급락되고 잡지사와 출판사가 불황을 겪는 악순환이 지속되여왔다. 그에 따라 작가들은 바닥까지 실추된 문학의 위상에 설 자리를 잃고 방황과 고민을 거듭하고있다.   그리고 조선족작가들은 전국 여러 도시에서 가장 낮은 최악의 고료를 받고있다. 물론 “오 두미배요(五斗米拜腰)” 즉 쌀과 돈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것을 작가들의 지조로 알고있지만 작 가들에게 문학은 먹고 살아나갈 삶의 방편이 못되였다.   이렇게 위축의 일로를 걷고있는 사회상을 바라보며 작가들에게 자신감이란 운운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근년래 우리의 문학계는 조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수 있었다. 그 감지는 독자층과 문학애호가들로부터 왔다. 미약하나마 독자와 문학애호가들이 전에 비해 상당히 붇고있음을 놀라웁게 발견할수 있었다. 시가지들에서 단지 커피나 음료를 팔던 청일색의 다방, 까페들로부터 책을 읽을수 있는 북카페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민간에서 “책읽 기 동아리”가 하나 둘 속출하고있다.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조직하는 문학강습반도 몇해전에는 참가수가 너무 적어서 개강을 하지 못한적도 있었지만 올해는 신청자가 넘쳐나서 그 인원을 제한하기 까지 했다.   해외문화와의 충돌로부터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 소실되여가는 민족언어에 대한 우려, 출 국인원들의 귀향후 재정착에 대한 고민 등등에서 유발된 사고, 개개인의 노력을 수반으로 한 생활수준의 제고와 질적인 삶의 변화, 경제가 발전한 선진국의 수준 높은 문화생활에서 배운 지식들이 이러한 변화를 촉구한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이로써 책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인생 에서의 지식경영의 중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다시금 책을 들고있는것이다.   비록 아직은 작은 파문에 불과할터이지만 이제 좀더 큰 이랑을 이루기 시작한다면 이는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파고(波高)의 높이가 아닐수 없 다.   주지하다싶이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령혼이다. 문화생명력에 대한 신심은 리성인식에 서의 고도로 성숙된 정신적인 면모라 할수 있다. 할진대 문화의 자신감은 그 혼의 기초로 되 여야 하며 광범위하게 더 깊게 더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하는것이다. 이러한 문화자신감으 로서 자신의 작품의 품위를 높이고 력사사명감을 자각하고 심령을 정화하고 민족의 인문소양 을 높여야 한다.   여기서 바로 원견과 지명의 “자신감”이 소요된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보조를 흐트리지 않으며 나아가야 한다. 발에 채이는 비관의 돌덩어리들을 치우면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앞으로 형성될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서 그 립지를 강 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것이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변강소수민족이라는 특유의 위치와 특수 한 문화환경을 용유(拥有)하고있다. 우리 중국조선족공동체는 조선반도 문화와 중국 문화의 사 이에 있는 변연문화의 특징을 지니고있다.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로 인해 새 로운 문화요소를 창출할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적기능을 나타 낼수 있다.   거기에 한국과 조선 두 나라 가운데 끼여있는 조선반도에서의 민족의 교두보 역할도 무시 못한다. 이러한 민족적우세를 도약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족 공동체사회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중국과 조선반도간의 교류, 협력에 필히 긍정적 인 역할을 미칠것이고 중국과 조선반도간 광범위한 교류의 진일보는 동북아 국제협력이라는 중국의 대동북아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전략 의 구축과 실행 과정은 정부의 직접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그 와중에 정부에서 소수민족에 게 돌려지는 점점 더 원활해지고있는 무양한 특혜도 우리는 적극 활용할줄 알아야 한다. 현정세에 대한 바른 리해를 토대로 자신의 립장과 토대를 굳건히 설정해나가면서 우리의 오래된 가치관에 자신감을 덧입히고 그것을 미래 지향적인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것이 우리 제반 분야의 바탕이 되도록 하여 우리의 얼을 살려야 한다. 그러한 저력이 근로용 감한 우리의 문화전통에 잠재하고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것이다.   목전의 진통을 극복하면서 모색속에 새로운 대안을 찾는 험준한 과정에 비관을 엎누르는 자신감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때이다. 대회의 개막식과 페막식에서 초겨울의 추위도 무릅쓰고 우리는 한복을 입고 북경의 장안 가, 인민대회당앞 광장에서 포토타임을 가졌다. 외성의 대표들과 매체 기자들이 다투어 우리들의 현란한 색조를 향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 추었다. 우리 복장의 단아함과 민족작가로서의 자호감 머금은 자세에 타성의 대표들과 행인들 이 찬탄의 소리를 보냈다. 소슬한 겨울바람이 한복의 자락을 스치나 우리는 모두다 상기된 얼굴, 더워나는 가슴을 느꼈다. 그야말로 자신감을 소환해본 시간이였다.   문호들의 고향 - 관씨, “마”씨 그리고 최씨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2)   대회기간 문단의 거목,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가까이할수 있다는건 아직도 문학도의 초심 과 정열을 온곱게 갈무리하고있는 나에게는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회의장에서, 이동하는 셔틀 뻐스에서, 호텔 로비에서, 지어 엘레베터속에서도 마음속 우상들과 꿈결처럼 만날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막언선생과 함께 할수 있은건 크낙한 기쁨이였다. 나는 80 년대중기 막언의 출세작 “붉은 수수”를 스크린에서 본 뒤로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해 읽었고 영화, 드라마로 각색된 영상물도 모두다 갖출 정도로 그의 “골수팬”이다. “백구 그네대(白狗秋千架)”와 같은 그의 단편소설을 조선말로 번역했었고 언감 평문도 달아보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 랑보(朗報) 가 터져오르자 곧 평론, 대담, 칼럼, 방송 등 다쟝르를 동원해 그의 작품들을 조선족독자들에 게 소개하기도 했었다.   나는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작품에 대해 소개해드리면서 그이와 합영도 하고 회의노트에 싸인도 받았다.   노벨문학상 계관을 쓴 문호임에도 막언선생은 차림새가 지극히 소박했고 말수 또한 적었 다. “고향이 어디지요?” 사진을 남기고싶다는 간청에 흔쾌히 카메라, 휴대폰앞에 서면서 문호는 나지막한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연변입니다, 조선족작가입니다” 그 몇마디뿐이였다.   막언의 본명은 관모업(管谟业), 필명인 막언은 “말이 없다”라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시종 과언(寡言)이였다. 그저 합영이나 싸인을 청하는 문학팬들에게 인자한 흙좌불(坐佛)처럼 소리없는 미소로 화답하곤 했다.   호텔로 돌아와 흥분을 곰삭이노라니 그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음이 왠지 막중하게 떠올랐 다. “고향이 어디지요?” 나는 은연중 고향이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고있었다.   막언 소설의 또렷한 특점이라면 거의 모든 작품마다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펼 쳐나간다. 그리고 다작의 그의 작품속에는 어김없이 “동북 고밀향(高密)”이라는 고향이 등장한 다. 시간적배경은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이고 공간적 배경은 자신의 고향을 문학적으로 확장한 “고밀향”이다. 그의 작품속에서 중국의 대약진운동, 반우파투쟁, 문 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굵직굵직한 력사적사건들을 배경으로 민담과 습속의 화려한 색채를 입 은 “고밀 동북향”의 이야기들이 줄레줄레 펼쳐진다.   막언은 일찍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향은 아주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라고 고백했었다. 그는 “소설속의 고향은 실제 고향과는 좀 다르지만 그 소설속 고향에는 나의 리념, 사상, 상상 력이 부과돼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민속예술과 민속문화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고향에서 목격한 문화적요소들에 영향을 받았다.”며 “창작을 위해 펜을 들었을 때 고향이 불가 결하게 내 소설에 스며들어 영향을 줬고 문학스타일을 결정했다”고 력점을 찍어 말했다.   30 년 넘게 왕성하게 글을 써왔지만 그의 창작의 안목은 여전히 낡은 치벽지인 고향 고밀 향에 머물러 고향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과 그 력동성을 낡지 않게 그려내고있다. 고향인 “고밀향”을 대상으로 중국적인 력사와 삶의 가치문제에 천착해오고있는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 에는 이렇게 고향으로 징표되는 민간의 립장과 시선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민속이 그려 져있다. 이는 바로 막언 문학의 핵심적요소이다.    1981 년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로 등단한 이래 “고밀향”이 단순히 고향이란 의 미를 넘어 막언 창작의 밑그림과 같은 문학적공간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최근작 《개구리》 에 이르기까지 막언의 거의 모든 소설은 “고밀향”에서 진행되거나 그것을 기초로 한 가상공간 에서 펼쳐진다.   “제 소설속 고향은 이미 문학적인 개념입니다. 실제 지명을 기초로 하였지만 허구의 공간 으로 확장된것이죠.” 막언은 북경에 거주하면서 문학행사와 해외에 다니는 일이 잦지만 창작에 집중할 때는 수 수가 붉게 익어가는 고향에 내려간다고 한다.   막언은 중국의 전통이라는 씨줄과 창작이라는 날줄을 엮어 그 매듭의 지점에서 “고밀 동 북향”을 발견했다. 고향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속에서 이루 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이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그 원초적공간과 근대적변화라는 력 사공간을 마주세우고 겹치면서 성찰의 주추돌을 쌓는다. 따라서 막언은 “중국적인것을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불린다.   막언은 “내 작품들은 세계문학의 일부인 중국문학이고 중국인의 삶과 중국의 독특한 문화 및 민속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내 소설들은 지역과 종족을 넘어선다”고 설명했다. 막언은 고향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라렬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마술적(魔幻) 리얼리즘”을 가미해 작품을 “촌스러움”에서 해방시킨다. 그렇게 재구성한 작가의 작품은 극히 다채롭다. 사실적이지만 풍자적이며 때로 잔혹하다가 문뜩 환상적이고 몽상적이여서 타의추종 을 불허하는 나름의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막언이 자신의 독특한 문 체로 고향이라는 이 협애한 향토적개념을 초월하려 시도한것이다. 그 개념은 좁게는 고향에서 비롯된것이지만 넓게는 중국의 농경문화, 더 넓게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비롯된것인데 여기서 그의 작품의 거대한 스타일과 깊이를 감지할수 있다.   막언은 일찍부터 남미의 마술적사실주의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남미의 문호 마르케스에게서 막언은 의식류소설의 시공간의 처리수법과 “마환현실주의” 소설의 구조 방식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막언에 대해 지칭할 때 “중국의 마르케스”로 통하며 그의 작품들은 “중국적인 ‘마술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정평을 받는다. 일관된 창작태도, 민족적인 토양과 그에서 삶을 영위하고있는 인간들의 령혼상태에 대한 탐색, 예술형식에서의 락오를 허용치 않는 쉼 모르는 실험정신, 그러한 큰 그릇에 담겨져있는 사회의 통증과 인간의 삶에 대한 천착,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고난속 에서도 결코 놓지 않는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 이러한 요소들이 바로 중국 인들의 오래동안의 숙원을 이룩하면서 막언이 노벨문학상의 견고한 대문을 드디여 열어젖히게 된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막언이 심취되였고 그의 창작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남미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 품에서도 고향은 앵콜 레파토리처럼 거듭 나온다.   막언보다 30 년 먼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20 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중 한명”으로 자리매김되고있다. 《백년고독》, 《콜레라시대의 사랑》 등 명작을 남긴 그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현대소설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마술적리얼리즘”의 창시자로서 그가 현대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마르케스는 1927 년 봄, 콜롬비아 북부의 작은 해안마을에서 태여났다. 생계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부모님과 떨어져 8 살때까지 외할머니 슬하에서 살았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환 상적인 이야기들은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됐다.   그의 고향은 적도의 해빛이 격렬하게 정수리를 비추는 곳, 악사들이 손풍금과 기타로 흥 겹고 강렬한 리듬의 “바예나토(Vallenato)”을 튕겨내는 곳이다.   외할머니가 들려준 콜롬비아의 력사, 온갖 신기하고 기괴한 이야기들은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중남미 력사를 그려낸 그의 대표작 《백년고독》의 바탕으로 되였다. 그의 소설속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 이름은 외가에서 기차로 10 분 거리에 있는 바나나농장 이름 에서 따온것이라 한다.   첫 소설이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뒤 작가로서 좌절에 빠졌던 그는 기자로서 먼저 두각 을 드러냈다. 유럽 특파원으로 발령되였고 반평생을 타향에서 떠돌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해했 다. 기자로서의 경험과 그의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이 뒤얽혀 라틴아메리카의 력사와 원시 토 착신화를 결합한 “마술적리얼리즘”이라는 특이한 쟝르를 낳았다.   그렇게 창작된 작품들은 남미뿐만아니라 미국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드디여 1967 년 발표한 《백년고독》으로 1982 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3 년뒤 내놓은 《콜레라시대의 사랑》 역시 세계 35 개국 언어로 번역돼 5000 만부가 팔려나가고 영 화로 각색되며 전작에 못지 않은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민초들의 사랑과 애환을 담은 그의 고향은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끝없이 중첩되는 《백년고독》과 같은 서사구조를 가지고있다”며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그의 고향 열대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빚어낸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케스가 들으며 자랐던 “바예나토” 음악은 민담이나 사랑이야기를 빠른 템포로 구연口 演하듯 부르는“옛날옛날에”로 시작한다고 한다. 동네방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 운 말투로 랩 같이 리듬있게 전개해나간다.   고향은 마르케스에게서 “옛날옛적에”로 운을 떼는 오래된 음악과 같은 마술적리얼리즘의 원형이였다. 마르케스는 력사와 생활의 관찰자로서 우리앞에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그 필법속에 그가 마법처럼 부린 환상의 세계는 무한한 진실로 통하는 문을 거쳐 다 달은 고향이였다.   막언에게 동북 “고밀향”의 이야기가 있고 마르케스에게 “마콘도”의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 에게는 “남대천”의 이야기가 있다.   이번 전국작가대표대회에 연변작가대표단을 휘동하고 나선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소 설가의 작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짚어볼수 있다.   최국철의 이미지와 련관지어 기억들을 끄집어낸다면 그 기억들은 그의 소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남대천”과 직결되여있다. 최국철소설가의 3부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20여부의 중단 편소설들은 모두다 남대천을 무대로 그려진것이다.   조선족문단의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최국철소설가는 지난 60년대 바로 이곳 남대촌에서 5 남매의 맏이로 태여났다. 소설가의 필끝에 고향이 많이 묘사되였지만 이제 고향 남대촌을 말할라치면 막상 소설가를 빼놓을수 없을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고향의 하늘과 땅은 가장 근원적인 령혼의 장소이고 소설적인 발견, 흥분점이 무진장하게 깃들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고로 고향은 남녀간의 사랑주제만큼 지속 적이고 영구적으로 격조높게 그려져온것이다”고 소설가는 말한다.   최국철소설가네 남대천은 “마을 외곽에는 토벽자리가 황페하게 남아있었고 그 토벽우로 헌 삿자리, 낡은 고무신짝들이 걸려서 스산한 풍경을 자랑하는, 토벽아래로 호성하가 소오줌 같이 지줄거리는, 비가 한줄금만 내려도 황토길이 질척거리고 안해가 없이 살아도 장화가 없 으면 못산다는, 외눈박이 개딸년도 주기 싫어하는 빈한한 마을”이였다.   “찰떡처럼 찰진 황토땅, 그것은 내 고향의 슬픈 표상이다.”고 소설가는 말한다. 이런 동네에서 소설가는 “석탄을 주으며 가난을 알았고, 새차꼬를 놓아 참새와 메새를 잡 으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소똥을 차고 지저분한 마을길을 오르내리며 문학청년의 꿈을 키웠다.”   나날이 문학수련을 거쳐 점차 완숙하게 벼려진 그의 필끝아래 고향의 정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윽한 민속화처럼 그려진다.    그의 필아래 그려지는 고향은- “모내기철이면 이랴 끌끌 나래를 놓고 점심이면 두렁밑에서 캔 미나리에 벌건 고추와 식 초를 팍팍 무쳐 술안주로 해서 아버지와 동생들과 마주앉아 재미있게 술을 마시는”, “호미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들방초가 우거진 석골개천에 숨어들어 홀랑 벗고 저 락저락 물을 끼얹고는”, “해거름녘이면 앞마당에 짚멍석을 깔고앉아 늙은 어머니가 버들조리에 쪄주는 가지와 풋 고추, 깨잎을 맛나게 먹으며 검푸른 잎을 이들거리며 우긋이 자라오른 강냉이와 처마사이에서 집을 짓는 거미를 재미있게 구경”하는, “장마비에 기세가 오른 버들숲에서 그윽그윽 간신히 톺는 황소의 영각소리, 온갖 풀벌레 소리도 가만히 들”리는, “헐어서 바늘로 꿰맨 코신을 겨우 끌고 마당에 나선 조모가 앞마당의 곰삭은 나무바자를 짚고 서서 서산에서 후르르 달려 내려오는 가을 저녁바람에 흰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단풍이 깊어가는구나’ 하며 서글픈 탄식을 하던”, “두만강에 황어가 거슬러오를 때 콩의 떡잎부터 먼저 들고 다시 차례로 산으로 오르고 나 무잎에 옮겨타면서 단풍이 드는”, “입안에 착착 감겨드는 찰옥수수죽에 하얀 무우동치미를 얹어 게걸스레 먹어”대다가, “추위에 얼어빠진 달이 구름사이로 어망치망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남대천에서 쩡쩡 얼음이 갈라터지는 소리를 듣는” 그런 곳이다.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독보적인 문체로 풍경이면 풍경, 인물이면 인물, 풍속이면 풍속, 정서면 정서를 어렸을적 모두가 보고 겪었던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는 솜씨는 실로 경탄을 자아낸다.   모던한 기교도, 화려한 장식적인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그의 붓 터치는 때로는 크고 툽상 스러운 륜곽선으로, 때로는 세세한 국부로 삶의 순간을 굵은 결의 캔버스에 봉선화 물들듯이 정감스레 옮겨내고있다.   그야말로 최국철만의 미덕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며 최국철이기에 가능한 그만의 감성과 력 량이다. 최국철 소설의 미학은 바로 고향 내지 자연이 지닌 의미성을 천착해내는것이다. 그것 속에 그의 인생관과 나름의 철학을 투영화시킨다. 이는 호방하면서도 온유한 성격의 그가 살 아온 삶 그 자체였다. 그 삶이 거짓말 못하는 어린애의 순진한 대답처럼 서사적으로 표현되고 어릴적으로부터 싹터온 강한 호기심과 적극적 삶에의 용기로 작품속에서도 그의 성정만큼이 나 깊고 강하게 나타난다.   최국철소설가가 단절된 고향의 풍경속에서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을 추겨준 작품을 량산하면서 고향의 자연풍경을 문학적인 예술공간에 복원하는데 성공할수 있었던것은 고향에 대한 그의 남다른 정감과 향수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토속적인 방언으로 다시 빚어낸 너스레, 투박함, 감칠맛이 혼재되여있는 조어(造語)들의 련금술적인 효과덕도 톡톡히 입었던때문이 아닐가싶다.   “고향은 나에게 고향 자체만은 아니다. 그것은 끈끈한 민족의 삶이 적취된 터전이다. 그 원천적인 터전을 등지면 민족작가에게는 보람이 없고 문학사상을 운운할수 없다.”고 작가는 적고있다.   최국철소설가의 고향 남대천에 대한 사랑은 나이가 들어도, 삶의 터전이 시가지로 옮겨도 변하지 않고있다. 고향 남대천은 그에게 피와 살을 준 곳임과 함께 그에게 령혼을 부여하고 작가적인 삶을 영위하게 해준 자궁이자 요람이였다.   한 작가의 성장과정에 지배적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환경과 작가의 의식세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토대가 곧 고향이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고향 남대천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해 늘 향수에 젖어있고 그 향수는 진한 사념의 절주가 되여 키보드장단속에 가락 맞는 고향타령 을 두다려대고있는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현대인들에게는 “고향”이라는 단어조차도 낯설어지고있는듯하다. 작가들은 저마다 피페화되여가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고향의 상실이라는 문제는 현대인 들의 심리속에도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자아를 잃고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리유의 하나가 되기도 하는것이다. 이제 새로이 태여날 세대에게 고향의 문제를 어떻 게 일깨워줄것인지 우리의 문학은 그것을 새롭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였다고 하겠다.   문학작품에서 고향은 작품의 줄거리를 동반한 정서로 미화되거나 작품의 후경으로 보조역 할을 한다. 작중인물에게 고향이 차지하는 심리적배경도 큰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문학작품에 드러난 공간과 배경의 의미는 작품 연구와 구분해서 다룰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 고있다.   현대인들은 물리적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상실했을뿐만아니라 인류의 근원적인 고향으로서 의 심적공간도 상실해가고있는 현실이다. 그 점에서도 우리 문학속에서의 고향의 의미에 대하 여 검토해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것이다.   세상은 넓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반드시 그곳이여야만 했던 문호들의 문학적 본향, 그 곳의 어제와 오늘, 그속 인간 존재들의 속됨과 아름다움, 우환과 희망을 망라하는 그곳만의 이 야기가 파노라마로 펼쳐지기에 독자들의 향수와 더불어 그 작품은 명저의 반렬에 오를수 있은 것이 아닐가!   이 한 면에서 관씨, “마”씨, 최씨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지 않냐고 스모그가 자욱한 수부에서 고향의 파란 하늘을 그리며 새삼스러운 향수 한자락 머금어보았다.   쟝르, “낭떠러지”에서 “바람소리”를 듣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3)   대회기간 연변작가협회대표단은 절강성대표단, 중경대표단과 분조토론(分组讨论)을 함께 하기로 배치되여있었다. 그중 절강성대표단의 명단을 본 나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터뜨렸다. 그 명단속에 소설가 맥가(麦家)가 우리와 같은 조에 있었던것이다.   작가대표대회에 오기전까지도 나는 마침 맥가의 소설 《칼날刀尖우를 걷다》를 읽고있었다. 맥가는 그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영화 “바람소리”를 보면서 홀딱 반하게 되였다.   주신, 황효명, 리빙빙, 장함여, 소유붕 등 중국대륙과 대만의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영 화는 원체 영화광인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후 원작을 찾아 읽으며 그의 작품에 홀딱 빠져 한부, 두부 그의 모든 작품을 소장하고 읽고있다.   《바람소리(风声)》는 2 차대전시기 일본의 침략에 맞서 활동했던 중국 스파이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1942 년, 일본군은 “유령”이라 불리는 정보부 내부의 첩자를 잡아내기 위해 가짜 암호를 내보내고 암호에 접근할수 있었던 5 명의 중국 내부요원을 외딴섬에 감금한다. 한명씩 차례로 고문과 회유를 통해 심문하지만 끝끝내 첩자를 잡아내지 못한다.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원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속에 침략자 일본과 그에 맞선 중국 엘리트들사이의 두뇌싸움이라는 심리 스릴러를 흥미 진진하게 풀어가고있다.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속에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대의명분과 우정 과 배신으로 얽힌 개인적인 감정이 교차되면서 놀라운 감동을 선사한다.   맥가의 출현은 문학계에 작지 않은 충격을 불러왔다. 그의 소설은 쟝르문학과 본격문학의 중간쯤에서 흥미있는 스토리를 박진감 있게 엮어나가는 품이 기존소설의 문법을 확연하게 뛰 여넘는다. 그의 작품을 첩보소설, 추리소설의 형태로 귀납할수 있지만 암호의 고안과 파해, 신 비한 직업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소재로 한 작품구성에 만족하지 않고 맥가는 이 신비로운 세 계속의 개인의 생존상태에 더욱 주목한다. 이것이 곧 그의 작품이 추리소설이나 정탐소설보다 초월적인 품격을 갖춘 품격의 높이이다. 맥가는 이제 순 문학의 리념과 쟝르소설을 가장 훌 륭하게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전범으로 자리매김되였다.   해외 주요 언론들에서도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작가 탐방기사를 장문으로 실었고 《월스트리트저널》이나 《옵서버》 같은 주류 매체에서 “가독성과 문학성이 뛰여나다”고 호평했다.   한 문학잡지는 “1980~1990 년대의 막언, 여화, 소동, 왕안억 이후 단 한명을 꼽으라면 바 로 맥가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대회기간 여러 쟝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또 한분의 작가를 만날수 있었다.   지난해 우리 문단의 최고액의 상인 “단군문학상”을 수상한 전용선소설가였다. 흑룡강대표 단으로 온 전용선은 인민대회당에서 특별히 연변대표단의 좌석을 찾아와 우리와 악수를 나누 고 담소를 나누었다.   전용선은 1966 년 흑룡강성 가목사에서 태여났다. 북대황문공단 창작원, 《삼강석간》신문 사 기자로 근무했고 중한수교 이전 한국 파주의 한 공장에서 힘든 고역을 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이후 34세가 되던 해 꿈을 안고 북경에 올라온 그는 로신문학원과 북경영화학원에서 공부 하며 비로소 작가로서의 길을 내딛게 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중편소설 “흰 태양 붉은 태양”, 장편소설 《독신자》, 소설집 《소화 18 년 (昭和十八年)》 등이 있다. 드라마창작에도 매진하여 “세월”, “눈속의 승냥이(雪狼)”, “어머니” 등 드라마를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첩보드라마 “낭떠러지”로 드디여 중국문단에 크게 문명을 떨친것이다.   요즘 TV 채널을 열면 온통 첩보드라마 열풍이다. 몇해전 첩보드라마 “잠복(潜伏)”이 공전 의 히트를 해 묵직한 상도 받았고 조선에까지 수출되여 인기리에 방영되였다. “중국드라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린 드라마의 시작”이라고 관객과 전문가들은 첩보드라마의 출현을 반겼 다.   그를 선두로 몇해간 중국의 거의 모든 채널에서는 다투어 첩보드라마 열풍이 일었는데 가 히 토네이도 급이다. 주요 방송국에서 황금시간대에 방영된 드라마 200 여편중 항일전쟁드라마 가 70 편 넘게 차지했는데 그중 과반수가 첩보드라마이다. 지난해 절강성의 유명한 드라마 촬 영지인 횡점(横店)스튜디오에서는 동시에 50 작품이나 되는 항일전쟁드라마가 촬영되였는데 일 본군 배역을 도맡다싶이하는 한 전문 배우는 최대 하루에 10 여번이나 죽는 장면을 찍었다는 후문이다.   이 활기찬 항일전쟁드라마, 첩보드라마의 배후에는 성숙한 영업, 판매 생산 라인과 정의의 애국이라는 정서와 무대가 뒤받침하고있다. 그것은 문화의 트렌드와 자본의 추구로 인해서 생겨난 산물인 동시에 중국인들의 항일전쟁시기에 대한 특수한 정감과 력사관에서 유래한것으 로 단순한 오락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드라마 작품들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량산된 드라마중에는 단순한 열풍에 편승한 싸구려수준의 드라마가 란무하 였고 수작이란 몇부밖에 되지 않았다. 그 수작들중에서도 장가락으로 솟아오른 작품은 단연 전용선의 “낭떠러지(悬崖)”가 아닐가 생각한다.   드라마는 일본의 침략과 국민당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공산당의 특공인원 주을(周乙)의 활 약을 시종 팽팽한 긴장감속에 사랑과 증오, 음모와 배신을 현념과 액션을 곁들인 프레임으로 그려내고있다. 여느 드라마에 비해 총격전이나 동작씬 같은것이 적고 미녀들의 선정적인 유혹 도 없지만 30 여집 내내 마음 졸이며 보게 하는 영화, 극작가가 심혈을 쏟아부은 탄탄한 스토 리와 주연들의 웅숭깊은 연기가 돋보인 드라마이다.   “낭떠러지”는 “제 18 회 상해 TV 페스티벌”에서 “최우수드라마 작가상”을 수상했고 이밖 에 “최우수작품상”, “녀우주연상” 등을 휩쓸며 그해 중국 최고의 드라마로 선정됐다.   “낭떠러지”는 전용선의 장편소설 《호바트거리(霍尔瓦特大街)》를 개편한 작품이다. 2012 년 1 월부터 상해동방위성 TV, 흑룡강위성 TV, 천진위성 TV 에서 동시에 저녁황금시간대에 방영 했다. 상영 3 일만에 관객들의 열띤 론의를 불러일으켰고 시청률은 으뜸을 차지했으며 시장점 유률은 새해 대형드라마가운데서 최고에 달했다. 이에 중앙 TV 제 1 프로에서 인차 황금시간대 에 방송을 했고 중앙 TV 종합프로에서도 뒤이어 역시 황금시간대에 재차 방송했다.   드라마가 방영된후 중국 TV 예술위원회에서 “낭떠러지”에 대한 연구토론회를 조직했다. 회 의에서는 근간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듯 식상함을 보이고있는 첩보전드라마창작에 있어서 “낭 떠러지”는 “하나의 좋은 돌파구를 제시했다”, “슈제트로 승부한것보다는 인물, 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물의 내심세계와 세부의 진실로 승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사실 우리 문단에서 전용선을 극구 알린 장본인은 필자라고 감히 말해본다. 필자는 전용 선의 씨나리오 “낭떠러지”와 그 본인을 소개하는 글들을 수차 여러 간행물과 웹사이트에 실었 고 그의 《소화 18 년》, 《한사(恨事)》 등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그의 대표작인 “낭떠러지”를 DVD 물로 여러부 구입해 동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가 “단군문학상”에 입상되자 평심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기뻐했던 나였다. 내가 그에게 흠뻑 빠진 또 다른 원인은 중국의 주류문단과 드라마계에 진출하여 모두를 놀래운 그가 다름아닌 조선족이라는 동질성 어린 정감에도 있었다.   전용선은 근래 출간문의가 비발치는 이 미완의 장편소설 《호바트거리》를 완수하여 드라 마에서의 아쉬운 점을 보완하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늘로 치솟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단에서 맥가 그리고 전용선의 작품들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그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맥가의 작품 《바람소리》가 제 6 회 중국어문학미디어 대상을, 《해밀(解密)》이 국가도서 상을, 《암산(暗算)》이 심지어 제 7 회 모순문학상이라는 중국문단 최고의 상들을 수상했음에도 그를 모른다.   바로 이들이 추리문학이라는 특정된 소재를 다룬다는 쟝르적특성때문이 아닌가싶다. 우리 문단에서 추리소설은 찬반론이 심하게 엇갈리는 쟝르이다.   그럼에도 일찍 80 년대에 우리 주변에서는 이미 추리소설 열독붐이 일었다. 당시 일본작가 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 한국작가로는 김성종 그리고 미국작가로는 시드니 쉴던(西德尼·谢尔 顿)의 작품들이 거의 서점가를 독점하다싶이 했다. 그리고 애거서·크리스티(阿加莎·克里斯蒂)의 추리소설을 각색한 영화 “나일강 살인사건(尼罗河上的惨案)”과 “동방특급렬차 살인사건(东方 快车谋杀案)”이 중국말로 더빙되여 나와 인기를 끌었다.   조선족작가들에게 소개된 작품들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인간의 증명”, 김성종의 “피아 노살인”, “제 5 의 사나이”, 시드니 쉘던의 “가령 래일이 오면” 등이 있다. “가령 래일이 오면” 은 당시 《천지》문학지에서 꾸리던 문학애호가들의 통신간물 《개간지》에까지도 련재된적 있 다.   김성종의 추리소설은 그후로도 거의 20 년 가까이 서점가를 강타했고 모든 간행물들에서 그의 소설들을 다투어 련재했었다. 우리의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많은 소설들이 중문으로 번역되였는데 불과 몇해까지만도 진설홍, 윤금단 등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소설이 중문 으로 번역되여 서점가에 올랐다.   사실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오래전에 추리소설과 같은 쟝르문학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1960~1970 년대에 이미 인물설정과 플롯구성에서 탐정소설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황당한 년대에 계급투쟁의 주제는 우리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숨 은 계급의 적을 수색하고, 그들의 반동적인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소설의 플롯을 형성한것 이였다. 따라서 탐정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했다.   장춘식평론가의 평문에 따르면 “김지훈의 단편 ‘첫 근무’(1976)와 김청송, 황하성의 ‘철벽’ (1976)은 상당히 정교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다.” 그리고 이처럼 본격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작품들도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는 작품이 적지 않았는데 “김 희철의 중편소설 ‘전우의 딸’(1976)과 ‘림해의 풍파’(1977)”가 대표적이다.   당시는 이른바 “3 돌출원칙”이라는 좌적인 철쇄에 매여 모든 작품들이 소재나 구성면에서 천편일률적인 자유롭지 못한 상황임에도 이러한 창작경향이 슬그머니 일었는데 평론가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현상을 해석해본다. 하나는 많은 금지구역이 존재하였기때문에 작가들이 리 용할수 있는 플롯구성의 방식에 별로 여지가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 전에 우리 글로 번역소개되였던 쏘련의 탐정소설 《구리단추》 등 작품들이나 70 년대 중반 중 국에서 방영되였던 조선영화 “숨길수 없는 정체”, 쏘련영화 “발자욱” 그외 알바니아와 로므니 아의 탐정영화가 준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이다. 탐정영화, 당시에는 흔히 “반특”영화라 불 렀는데 몇편 안되는 혁명적 본보기극 영화들만이 란무하던 그시절, 단일한 제재의 반복에 식 상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보태여준 제재라 볼수 있겠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은 점차 자취를 감추나 소설 플롯구성에서의 이와 같은 탐정, 혹은 추리적인 수법의 관성은 여전히 이어졌다. 그후 《아리랑》총서에 몇회에 나뉘여 련재되였던 김경련의 중편소설 “흉수는 누구?”, 리만호의 “국장과 나리꽃” 등 몇부의 소설들이 추리소설, 통속소설의 형태를 띠고 창작되여 당시로는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 다.   그외에도 추리소설에 대한 전문창작시도를 보여준 작가들도 몇분 있었다. 연변 로투구출 신의 윤송이라는 젊은 작가도 있었고 경찰계통에서 사업했던 룡정의 전강이라는 작가가 추리 소설을 몇부 내놓았다. 하지만 량적으로 적었고 수작을 내놓지 못했기에 쟝르문학 창작군을 뭇기에는 그 기세가 판부족이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도 80 년대에 추리소설을 발표하려 고심한적 있었다. “꿈의 변두 리”라는 제목으로 4 만자 되는 꽤 큰 편폭으로 창작했는데 여러 문예지들에서 퇴짜를 맞고 나 중에는 당시 번역작품들을 전문 싣다가 페간된 《갈피리》라는 잡지에 그나마 실려 추리소설 창작에 대한 감질난 창작욕구를 무마한적 있다.   이 와중에 크게 느낀바이지만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에 대한 수용태도는 그닥 원활하지 못하다는것이다. 때문에 추리소설외에도 쟝르소설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무협이나 과학환상소 설, 판타지 같은것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있다. 과학환상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환상동화가 그런대로 몇편 나왔지만 성인을 상대로 한것은 리태학선생이 《아리랑》지에 발표한 겨우 한 두부로 알고있다. 무협형태의 작품 역시 80 년대 내부간행물인 《개간지》에 당시 문학통신원 출신의 젊은 작가였던 류순호씨에 의해 겨우 한편이 나왔다.   오래동안 탐정소설을 비롯한 추리소설들은 중국 정통문학 및 정통독서계 그리고 주류 미 학관에서 부자연스러운 위치에 처해있어왔다. 막상 추리소설을 좋아해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꺼린다. 특히 품위있다는 문화인, 엘리트 지식인이 그렇다. 추리소설은 로맨스, 무협 등의 소 설과 마찬가지로 통속적이며 격조가 높지 않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 는 부류도 사회문화수준이 어떠하든 본질적으로 취미가 낮은 사람으로 찍힌다. 이러한 쟝르에 대한 거부와 폄하가 쟝르문학의 정체를 빚어내고있다고 해야겠다. 우리 문단에서도 마찬가지 이며 외려 그 편향적인 시선이 더 강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몇해전 필자가 추리소설에 좀 필묵을 돌려보려 한다고 창작의향을 밝히자 어느 선배작가 는 술까지 사주면서 극구 만류했고 어느 잡지사 편집은 아예 그런 쟝르는 우리 잡지의 관문을 넘을수 없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또 어느 한번 문학도들을 위한 특강의 자리에서 나는 편협한 독서의 범위를 넓혀 추리소 설 같은 쟝르소설도 읽으면 플롯이나 구성에서 도움이 될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 자리 에 동석했던 해외에서 학위까지 따내고 왔다는 한분이 벌떡 일어서더니 “추리소설을 읽지 마 세요. 쓰레기입니다.”고 벌겋게 흥분한 목소리로 나의 특강을 무질러버리는것이였다. 특강이 끝난후 식사자리에서 나는 “뿌쉬낀, 스티븐슨, 월리엄 포크너 같은 순 문학의 대가들도 모두 추리소설을 창작한적 있습니다. 레이먼드 첸들러의 추리작품을 읽었나요? 순 문학보다 더 깊 습니다.” 하고 진지하게 반문하며 그 편견을 깨려다 돌아온건 “난 그런 작품들을 읽은적도 없 고 그 작가들 이름조차 모르오.”라며 한사코 머리를 가로젓는 거부의 표정이였다.   이처럼 우리의 일부 작가들과 주류문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추천하고 언급하고 연구하는 것만을 문학으로 간주하면서 배타적으로 쟝르문학 같은것은 순수문학으로부터 배제된 “상업주 의문학” 지어 “하위문학”이라고 락인을 찍고있다. 이러한 쟝르가 우리가 흔히 접해온 근대소설 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것은 변조하고있는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 아닐가고 감히 말해본다.   이렇게 쟝르문학을 “수준 낮은 문학”으로 치부하는 시선들이 있기때문에 쟝르문학에 아예 근접해보지도 못하고 쟝르문학이 정체되는 리유중 하나일것이다.  우리 문단의 작가들과 독서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근년래 쟝르문학의 최고봉 으로 꼽는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 톨킨의 《반지의 제왕》 조차 읽은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독서량의 편식에 놀란적도 있었다.   사실 필자는 국외의 쟝르문학 작품들을 대량 사들여 소장하고 읽으면서 나름 쟝르문학 창 작에서 시도를 많이 해보았다. 아동력사소설에 미스터리와 무협요소를 가미한 “거북구술”과 “신라의 검”을 발표했고 “환을 말하다”라는 평론을 게재하여 판타지문학의 추세에 대해 분석 도 해보았고 순 문학지에 호러작품 몇편도 발표하여 평론가들의 찬반의 평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판타지작품 “불의 제전”을 발표하여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 다. 당시 문단의 첫 판타지였음에도 그 새로운 쟝르를 존중해 큰상에 뽑아준 심사위원들에 감 사를 느꼈지만 1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판타지작품은 아직도 거의 한편도 보이지 않아 갑갑 한 마음이다.   그만큼 이렇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새로운 매체나 틀이 등장하였을 때 관습적인 서사형태 로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던 우리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다. 해외의 경우“순수문학”과 “쟝르문학” 사이의 경계조차 허물어지고있다. 이 경계가 허물어 지고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게 벌써 십년 저쪽의 일이다. 추리, 과학환상, 판타지, 로 맨스, 무협 같은 쟝르소설들이 본격문학의 령역안으로 대거 밀고 들어오는 한편 순수문학쪽과 의 대화를 시도하고있다. 그리고 태고적에 칼날을 휘두르고 은하계밖에서 날아예고 피투성이 의 복수극을 펼치던 쟝르문학이 이제는 사회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있다. 쟝르문학 전문작가들 은 그 시대의 사회문제를 포착하고 민감하게 의식하고있고 대중들도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 사 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작품에 담아내고있다.   해외작가들중에서 쟝르문학에 심취한 순 문학가들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앙 드레 지드, 《인간의 굴레》의 저자인 영국 소설가 서머셋 모옴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서머셋 모옴은 “미래에 살아남는 문학은 추리소설뿐이다. 책방에도 도서관에도 추리가 넘쳐날것이다.”고 예견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이 엄격한 그들의 문학풍토에서 쟝르문학 시 장이 활성화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하위쟝르로 폄하되던 쟝르소설들이 미래의 문학을 이끌어갈 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점치기도 한다.   추리소설이 단순한 추리가 아니고 “소설”의 체제를 갖춘 추리요, 추리를 위한 “소설”인만 큼 문학의 쟝르임에 틀림없으며 문학의 쟝르인 한 문학성을 부정할수는 없다. 만약 문학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전히 추리에 대한 문제의 제시와 해답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소설은커녕 원고지 몇장이면 충분한 퀴즈풀이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 즉 작가들이 다양한 쟝르에 손 댈수 있는 욕구가 필요한데 조선족문단에서는 이것이 너무 미약하다 할수 있다. 다양한 쟝르의 창작에 관심을 가질수 있 는 가장 강력한 욕구는 독서시장의 요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 작가들이 그것 도 자비로 출판한 책들이 겨우 300 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 말 출판시장과 독서시장의 부재는 오래된 현상이다. 게다가 가련할 정도로 적은 우리의 독자들조차 중국이나 외국의 영 화나 텔레비죤 영상물 그리고 인터넷쪽에 경도되여있다.   작은 시장, 엷은 독자층을 가진 우리 문단, 하기에 더욱더 생존의 길을 뚫어야 한다. 생존 화하려면 다양화 그리고 분화할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쟝르문학을 바로 분화, 다양화의 한가 지 중요한 방식으로 봐도 무방할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대중이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대중에 의해 문화가 창조된다.”고 전문가 들은 말한다. 이러한 정론은 쟝르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한다. 독자들의 흥미를 무시하고 독자를 외면하며 씌여진 작품은 비록 작품성이 뛰여나다 할지라도 “읽히지 않는 소 설”이라는 모순에서 벗어날수 없을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문단은 편협한 변두리사유에서 벗어 나 첨단 다매체시대에 걸맞게 활용매체에 부합되고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소통전략을 필요로 해야 할것이다. 그런것이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서서히 극복하고 넘어서는것이 우리 문학 의 다양화와 정체의 극복 나아가 비전을 위해선 상당히 중요한 고리가 아닐가 하고 생각해본 다.   번역인재들을 적극 동원하여 우리의 수작들을 번역하여 주류문단에 소개하는 한편 우리 말의 동질성을 갖고있는 한국을 포함시킨다면 물론 작은 시장은 아닐터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만의 특유의 정서와 소재로 한번 승부사를 던져본다면 가능성이 없 는것도 아니지 않을가? 근년래 외려 한국에서 우리의 소재를 활용하여 책도 내고 영화도 만들 고있다. 그 와중에 상업효과만 쫓아가고 조선족에 대한 리해의 결핍때문에 상업의 맛망울을 따라가며 내놓은 작품들이 조선족을 심하게 외곡해 독자와 관객들의 불평의 소리도 크게 들린 다. 여기서 우리 조선족작가들이 해외에서 사뭇 선호하는 쟝르문학에 대한 연구와 동참의식에 대해 한번 호출해보는것도 무리가 아닐것이다.   쟝르문학이 가지고있는 오락성은 분명 순수문학의 엄숙성과는 구분지어질 특징이라 할만 도 하다. 그러나 쟝르문학의 가치 전부가 부정적으로 판단될 성격의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훈 적이기보다는 오락적인 재미를 얻기 위해 소설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순수문학이 추구 하는 목적달성의 “일석이조”의 효과도 줄수 있다면 쟝르문학의 가치를 작지 않게 매길수 있다 고 생각한다.   몇해전에 《도라지》에 발표한 호러작품 “산장”에서 필자는 단지 공포물이라는 취미로 쟝 르문학에 접한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변혁기 농촌사회의 붕괴와 그 와중에 겪게 되는 농촌총 각들의 실의와 아픔에 대해 다루려 했다. 그리고 《연변문학》에 발표한 판타지 “불의 제전”에 서는 민족의 렬근과 분단의 아픔에 대해 말하려 꾀했다. 오래동안 엄숙한 자세로 소설창작에 림해온 작가로서 필자는 기존의 본격소설은 쟝르문학과 같은 다양한 자양분을 수용해야 그 지 평을 넓힐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독자들을 섭렵하고있는 쟝르문학의 흥미 가 종국에는 순 문학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라마지 않고있다.   “호불호”가 엇갈릴지라도 현재의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양식과 감각은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의 양상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쟝르문학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중요한 령역이다.   쟝르문학에 대한 새삼스러운 환기와 구구한 담론은 산업화시기에 맞닥뜨려 어딘가 무력해 진 우리 문학의 현황과 그 문학의 생존을 갈망하는 열정때문이라고 말하고싶다. 탈변에 탈변 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문학은 더욱 문학답게 정련될것이며 그것만의 절대적인 기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싶다.   추리소설은 이미 충분한 호소력을 갖고있다. 그것은 나날이 성숙해지고있으며 작가, 도서, 출판사에서부터 독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추리소설을 많은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혼돈에서 이끌어내 하나의 명확한 문화상품이 되게 하였다.   추리물은 또 중국의 유명 작가들이 다투어 애호하는 서사양식으로 되고있다. 북경 작가 왕삭王朔은 몇몇 소설에서 추리물의 서사모델을 채택했다. 그는 전통 추리소설 속의 정의, 지혜, 제도와 질서를 해소시키는 대신 세속적이며 경멸적인 태도로 숭고하고 정통 적인 모든 사물을 조롱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여화(余华)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그는 창작초기에 몇편의 추 리물과 미스테리물을 쓴바 있다.   모순문학상을 수상한 상해 녀류작가 왕안억(王安忆)의 근작 장편소설 《닉명》도 역시 추리 소설의 형태를 띠고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순 문학작가들이 쟝르소설적 틀과 장치를 적극 활용한 작품들을 다투어 내놓고있다. 그들은 “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독자와 정면승부하자는게 취지”라고 창작의 취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그중 맨 선두주자로 달리고있는 맥가가 바로 전형적인 례이다.  대표대회가 열리는 기간 중국의 유명 순 문학잡지인 《수확(收获)》에서 추리소설상을 공모 한다고 발표, “순 문학과 쟝르문학의 경계를 가르련다”고 선언했다. 사실 중국문단에서 중요한 소설상의 하나인 욱달부(郁达夫)소설상의 단편부문상 역시 올해에는 추리소설가 채준(蔡骏)의 추리작품 《눈물의 돌(眼泪石)》에 돌아갔다.   우리 문단의 경우 권위 문학지 《연변문학》에서 올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12 월호에 참으 로 오랜만에 큰 편폭을 할애해 추리소설을 실었는데 기꺼운 시도라 본다.   전통적으로 추리소설은 의식적으로 자신과 순수문학의 신분을 갈랐으며 일반대중을 상대 로 자신의 “서자(庶子)”와 같은 명분을 정해왔다. 이제 좁고 추운 별채에서 소박받던 그 “서 자”가 궁궐 같은 본채로 들려 한다.   그럼에도 중국문단에서 이러한 자리매김은 아직도 “낭떠러지”우에서 소슬한 “바람소리”를 듣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아직도 산자락에서 서성이는 상태, 산봉에 오르기까지는 등반의 모험을 수반한 긴 시간과 각오가 수요된다고 해야겠다. 우리 문학에서는 더 긴 등반이 수요될 듯하다… (다음호에 이음)   김혁 략력: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룡정 윤동주연구회 회 장, 중국작가협회 회원. 《길림신문》, 《연변일보》 등 매체에서 20 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시인 윤동주”, “춘자의 남경”, “완용황후”, 소설집 《천재 죽이기》, 인물평전 “윤동주평전”,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등 10 여부 간행.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문학상, 《장백 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진달래”문예상 등 수상. 작가메일: Ckkh99@hanmail.net 대형문학지 《장백산》2017년 1월호  
383    오! 캉린포체 댓글:  조회:772  추천:12  2017-07-25
. 시 . 오, 캉린포체 -    영화 “캉린포체”를 보고서 김혁 사람의 무리를 떠나네 빛의 무리를 떠나네 마음은 멀리 있어 몸은 길 위에 있네 가노가노가노니 신을 찾아 가노니 오, 캉린포체 캉린포체 눈길은 멀리 두고 보법은 온건해라 엎드리나이다, 부모님 전에 엎드리나이다, 신의 은전에 오, 캉린포체 캉린포체 두손 모아 고목은 하늘 향해 까치발 괴이고 두손 모아 돌바위는  머리숙여  땅을 향하여 홈마니베베홈, 홈마니베베홈 보나이다 듣나이다 새기나이다 하많은 동사(動詞)는 길 위에 있나이다. 가노가노가노니 신을 찾아 가노니 찾으면 안신할 것이오 찾지 못해도 안신할 것이오 가노가노가노니 신을 찾아 가노니 억겁의 품안에 이 작은 육신은 큰 대(大)자로 엎드렸소 오, 캉린포체 캉린포체 2017- 7- 13 강린포체- 티베트 푸란에 위치한 산이다. 카일라스산의 주봉(主峰)이며 해발은 6,714m, 티벳에서는 '신령의 산(神灵之山)'으로 불린다. 해마다 인도, 네팔, 부탄 등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온다. ​​ 영화 "캉린포체"는 1년여에 걸쳐 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삼보일배를 하며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의 대장정을 담은 작품이다  티베트인들은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하는 캉린포체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 평생의 꿈이다. 그리하여, 순례단 11명이 함께 길을 나선다. 순례단에는 노인에서 임산부, 어린 소녀까지 끼어 있다. 그들은 순례길 도중에 숱한 난관에 봉착하지만, 꿋꿋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 끝에 그들의 영혼은 깨달음을 얻고 정화되어 간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2    苹果祭/金革 댓글:  조회:1081  추천:8  2017-06-22
  苹果祭  金革   我被一个人在背后里挨刀 像一只熟透的苹果   大片大片的果皮从岁月飘落 鲜艳鲜艳的果汁从记忆流淌 失落滑过我的手指, 滑向季节的角落   我是在暗夜里被切开的一枚苹果 谁的刀  与欲念为伴 让我的核赤裸裸摆在世人面前 从深夜一直摆到天明​ 我本是春天的第一枚苹果 我本是和歌谣一起飞扬的一枚苹果 我本是恋人手中蓓蕾初放的一枚苹果 我本是小鸟儿明天早餐的一枚苹果   我被熟人在背后里挨刀 像一只无奈的苹果   2017- 5-5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1    죽음의배- "페스카마"호 댓글:  조회:2115  추천:17  2017-06-13
  . 칼럼 . 죽음의 배- "페스카마"호 김혁     요즘들어 배가 화두다. 만경창파를 누벼야할 배가 어쩌구려 사람들의 눈물 속에 스미고, 가슴패기를 짓누르고 있다. 요즘처럼 배가 사람들에게 회자된적은 없는 것 같다.   우선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를 찾으러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홍콩과 터키인들이 합동으로 구성한 노아방주선교회(NAMI) 아라랏산 노아방주 탐사팀은 터키 동쪽 해발 4000미터의 아라랏산에서 발견한 거대한 목조 구조물에 대해 찍은 영상물을 공개, "7000-10000BC의 유물이라는 것이 증명된 상태"라고 밝히면서, “발견된 구조물이 ‘노아의 방주’라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내년 7월 중 4~6명 정도의 원정대를 꾸려 탐사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사상 최대의 해난 사고로 기록된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를 복제하고 있어 화제다. 중국 사천의 “칠성” 에너지투자그룹이 10억원을 투자해 타이타닉호를 복제하고 있다고한다. .   무엇보다 수년 내내 눈물 위로 떠다니는 배는 “세월호”일 것이다.   3년전,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 300여명의 애닯은 청춘을 수장(水葬)시킨 비정의 “세월호”. 그 미수습자 신원의 발견과 확인에 온 세간의 젖은 눈길이 오늘도 모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바다에서 일어난 해난사고들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낸 사고에 조선족 한금희(녀, 37)씨와 리도남(남, 38)씨도 조난당했음이 확인됐다.   하지만 동질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세월호 중국인 사망자를 비하하는 글을 올린 혐의(형법상 모욕)로 권모(당시 27세 ·무직)씨가 불구속 입건되는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다. 권씨는 인터넷 한 사이트의 게시판에 '실종자 중 조선족 2마리가 있다는데, XX버리고 학생들이 살아났으면 좋겠다'란 글을 올려 중국인 실종자를 모욕한 혐의로 입건되였다.   또한 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이 막을 올려 화제다.   선상 반란 사건 “페스카마호” 실화를 담은 문제작 연극 “페스카마-고기잡이 배”가 대통령의 취임 이튿날인 10일 막을 올렸다.   연극 “페스카마- 고기잡이 배”는 1996년 8월 남태평양에서 조업중이던 원양어선 페스카마15호에서 일어난 선상(船上) 반란 사건을 다룬다.   연극 포스터     1996년 여름. 남태평양.   참치잡이배 “페스카마호”에 오른 승선경험이 전무한 조선족선원들은 수차례 작업설명을 해도 손이 느리고 서툴러 갑판장과 갑원에게 구타를 당한다.   한국선원들은 조업 실패를 조선족선원들의 탓으로 돌리며 더욱 심한 폭력을 행사하고 조선족선원들은 비인간적인 처우에도 한국 배에 타기 위해 맡겨놓은 거액의 보증금 때문에 협조하지 않으면 하선시키겠다는 선장의 말에 굴복하고 작업에 림한다.   평소의 열배나 많은 참치가 낚시에 달려 올라온다. 태풍이 예고된 상태에서 선장까지 갑판에 내려와 작업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 조선족 선원이 낚시에 걸린 참다랑어 한 마리를 바다에 떨어뜨린다. 이에 격분한 선장이 조선족 선원을 구타하자 맞은 선원도 선장의 뺨을 때리는 일이 벌어진다. 순식간에 칼과 흉기를 든 한국선원과 조선족 선원들이 갑판에서 대치하는데 나이가 많은 기관장이 중재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분을 삭이지 못한 선장이 조선족 선원 전원을 강제 하선시키기로 통보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족 선원들은 선장에게 찾아가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빌지만 오히려 선장으로부터 강제하선은 물론이고 선상란동으로 형사고발조치를 하고 조업 손실금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청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한다.    커다란 실의에 빠진 조선족 선원들은 한국인 선원들을 차례로 살해한다... 연극의 한 장면     이 연극이 주목을 모은것은 제38회 서울연극제 공식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이고,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소재에도 있겠지만, 금방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시절에 변론을 맡았던 사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 이 사건의 조선족 선원 6명의 변론을 맡아 화제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일각에서는 당시 문재인이 조선족 인권을 자국민에 우선시했다며 비난하면서 “문재인의 '아킬레스건'”이라 부르기도 했다. 변호사 시절의 문재인   중국 국적 조선족들의 반란 사건에서 한국인 선원 7명, 조선족 선원 1명, 인도 네시아 선원 3명 등 11명이 숨졌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범인들은 칼과 도끼로 피해자들을 무자비하게 란자(亂刺)하고 찍었으며 저항력이 없는 환자를 산채로 바다에 내던져 죽이기도 했다.   법원은 1심에서 해상 강도살인 및 시체유기 등 혐의로 전원 사형을 선고했다가 항소심에서 주범을 제외한 5명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후 주범인 전재천 씨는 2007년 12월31일 로무현 정부 말기 특별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페스카마호 사건 관련보도   작품은 비극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많은 담론과 정서를 만들어 내는 한편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몸부림쳤던 조선족 선원들의 비극을 보여준다.   모두를 경악케 했고 가슴아프게 했던 이 사건은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불협화음으로 얼룩졌던 지난 90년대 중기를 다시 무대우에 소환한다.  20년전 한척의 배위에서 벌어진 연극과도 같은 이야기는 력사와 세월의 “만경창파”에서 한국과 민족적 동질성을 가졌던 이민자의 후예들이 만나는 과정을 서로 잘못 풀었던 시대적 “침몰”을 소급해 보여준다.   다시 한번 그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동포 사이의 참극을 반추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고해성사처럼 다시 한번 그 상처자욱을 들여다 봐야 한다. 이 사건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100여년 정착사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없고 한국과의 관계사에서 있을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조선족 사망자를 비하하는 글을 올린 사례에서도 보다싶이 조선족에 대한 몰리해, 비하와 질시는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비일비재한 편견과 악폐이다.   또한 조선족도 단순한 부에 대한 열망으로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나선 일그러진 “코리안 드림”의 허허실상에 대해 심각한 반추와 검토가 재다시 수요된다.   이렇게 서로의 소통과 화합의 장을 모색하지 않는 한, 페스카마호처럼 “어사망파”의 침몰선이 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장하는 수가 없다.   중한수교 25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이로부터 한국과 조선족이 모두 교훈을 얻고, 상처를 리성으로 치유하는 예시로 이 연극에 큰 의미를 두어 본다. "료녕신문" 2017-05-27   악몽의 배 "페스카마"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80    独舞 댓글:  조회:1124  추천:11  2017-06-13
独 舞  金革   舞, 寂然的舞 摆出一个姿式 把阳光的手抬高 黑暗的沉步离开 摆出一个姿式 把信仰的手抬高 异端的碎步离开 舞, 铿锵的舞 2017-5-11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79    일송정에 달빛 비추거든... 댓글:  조회:1153  추천:8  2017-06-07
. 추모수필 .   일송정에 달빛 비추거든... 리태수 은사님의 타계를 애달퍼하며   김혁         그날은 “슈퍼 달”이 뜬다고 했다.  5월 9일, 올 들어 가장 큰 보름달이 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부푸는 심정을 강타하며 늦은 저녁, 선생님의 부음이 들려왔다.   잡지사의 청탁원고에 밀려 서재를 울리며 가락맞게 달리던 나의 키보드소리가 급기야 뚝 멎었다. 망지소조(罔知所措)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장이다가 창가로 다가가 서재의 뙤창을 열어젖혔다. 저리도 밝은 달이, 저리도 둥근 달이 유난스레 떠 있었다. 슈퍼달(Super Moon)은 지구와 가장 근지점에 있을 때에 보이는 큰 보름달, 저마다 소원을 빈다는 그 달뜬 밤에 비보를 들었다.   나의 서재 “청우재(听雨斋)”에서 낮이면 저 유명한 남산의 일송정이 훤히 내다 보인다. 밤이라도 산정우에 우람하게 솟아있는 방송탑곁에 그 무슨 초대처럼 꽂혀있는 일송정 정자의 실루엣을 그나마 가려볼수 있다. 슈퍼달은 높이 떠서 일송정을 훤이 비추고 있었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어언 33년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열기로 가득했던 초여름의 그날을 나는 내내 잊을수가 없다. 그날을 잊을수 없는건 내가 처음으로 당시 류행이던 청바지(당시 항간에서는 홀태바지라 불렀다)를 사입은 날이였고, 또 그 새물내나는 바지를 입고 처음으로 소설가라는 린봉(麟凤)같은 존재를 만나본 날이였기때문이다.   그때 나는 초라니(몹시 경망스럽고 야단스러운) 문학도였다. “눈 먼 장비 헛 창 질”하듯 뭣모르고 곰바지런히 설익은 필을 놀리는 극성스러운 문학도였던 나에게는 소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룡정에 계시는 리태수선생님을 만나고픈 열망이였다. 당시 “천지”(“연변문학”의 전신), “아리랑”등 여러 간행물에 “보름달, 둥근달” 등 중편소설들을 다량으로 발표하고 라지오 매주일가에서 인기리에 방송되는 류행가요의 가사도 써내고 항일설화를 소재로 한 장막극도 써내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선생님이였다.   나의 양모와 선생님의 사모님이 한 학교에서 근무하셨기에 그 연줄로 나는 행운스럽게 선생님을 만날수 있었다. 가슴패기에 놓고 손절구라도 찧는양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안추리며 자택에  들어섰을때 선생님은 안방에  엎디여서 한창 집필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이 엎드려 글 쓰시는 남다른 창작방식을 오래동안 고수해 왔음을 난 기억하고 있다. 내가 들어서자 선생님은 쓰던 글을 접어두고 맞아주셨다. 유명 소설가를 만난다는 설레임과 어려움에 한밤을 설쳤는데 선생님은 그렇듯 온화하고 부드럽게 나를 맞아 주셨다.   어줍게 소설이랍시고 어머니의 교안책 뒤장에 쓴 어지러운 소설 초고를 선생님에게 맡기고 돌아섰을때 선생님은 대문밖까지 날 배웅해 주셨다. 그러던 선생님의 눈길은 바지 아래단을 두겹 걷우어올린 나의 새 청바지에 머물렀다.   “바지단이 좀 긴것 같구나 가서 적당히 자르려무나.”   이것이 리태수 선생님과 나의 첫 만남이였다.     그후로 나는 때때로 소설 초고지를 들고 선생님의 집으로 뛰여들곤했다. 난삽하고 미숙한 작품임에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선생님께 읽어드렸고 선생님은 빙그레 미소를 띈채 그 긴 작품들을 마지막까지 들어주고는 세세하게 수개평을 달아주시곤했다.    어느 한번 룡정의 한 소학교 교실에서 소설합평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십대의 어린 나이인지라 내가 들고 간 소설은 편집들의 빈축을 받았다. 어린 나이인것도 있었거니와 종교색채까지 띈 소설이여서 나중에 편집들은 표절 내지 도작으로 의심하며 몰아갔다. 이때 선생님께서 상을 탁 치면서 일어섰다. 강경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혁이의 초고들을 적지않게 봤는데 아주 력량이 있는 애더구만. 내가 이 애의 부모와 일면식이 있어서가 두둔하는게 아니요. 난 혁이가 꼭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리라 믿소” 그때 나는 그야말로 왜틀비틀 걸음마 타던 아이가 큰 나무둥이에 의지해 넘어지지 않은듯한 심정이였다.      드디여 열아홉살 나던해 나의 처녀작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이 지면에 올랐다. 선생님은 그렇듯 기뻐하시면서 우리 집을 찾아 주셨다.  김재권 선생님, 오흥진 선생님, 전광하 선생님, 황병락 선생님등 룡정의 중견 문인들과 함께 밤늦게 까지 축하주를 들어 주셨다. 그리고는 밤늦게 방영하는 중앙영화채널의 심야영화까지 선생님들은 흑백의 텔레비죤앞에 오손도손 모여앉아 다 보셨다. 그 영화의 제목이 “나비의 꿈”이였음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외국영화임에도 우리 말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성우들의 더빙을 들으며 선생님은 곁에 앉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음(配音)을 참 잘 하지, 하지만 혁이야, 앵무새 따라 읊기를 해선 안돼, 자기 특색이 있는 작품을 써야지” 은사님의 그 살푼한 눈길과 목소리의 가르침을 난 지금까지도 잊을수 없다. 그날은 그야말로 어린 나의 성인식이요, 문학에로의 통과의례같은 축복의 날이였다.      1986년 나는 룡정의 젊은 문인들과 함께 문학협회를 발족시켰다. 당시는 문인들이 소박받는 요즘의 풍토와는 달리 문학의 전성시대였다. 룡정 주위의 조양천, 로투구, 지신, 삼합, 백금 지역에서 문학도들이 거의 백명가까이 협회에 가입했고 선생님을 비롯해 김재권 선생님, 전광하 선생님은 흔쾌히 협회의 고문을 맡아 주었습니다. 우리가 경필로 써서 프린트 해낸 “희망봉”이라는 협회지를 까근히 읽어 주셨고 소설 합평회에도 참가해 문학도들의 글짓기에서의 병소를 족집게처럼 집어 내 주셨다.   그후 선생님은 또 룡정에 “보름회”라는 문학협회를 발족시켰다. 지금은 이즈러져 있지만 언젠가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되리라는 깊은 뜻이 담긴 선생님이 친히 지은 동아리의 이름이였다. 그때 연길 “길림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밤늦게 차를 타고 보름에 한번씩 열리는 “보름회” 작품합평회에 빠짐없이 참여하곤 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알기 쉽고 유머섞인 단평을 경청하고 설익은 작품을 탁마하기 위해서였다. 동아리 성원들은 일송정이 금방 복구된 비암산 자락으로 원족을 가기도 했다.  시원한 솔바람 그늘에 앉아 문학을 안주로 삼아 매운 막소주를 나누기도 했고 선생님이 가사를 지으신 “들놀이 가자, 꽃놀이 가자”를 열창하기도 했다. 그때의 그 열렬하고 진지했던 문학분위기는 열혈문학도였던 나의 뇌리에 아직도 화인(火印)처럼 남아있다.     그동안 번중한 일과 창작에 딸려, 불운한 운명의 조롱에 치여 고향에도 자주 들리지 못하고 선생님도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은 나의 문학도 시절의 은사와 같은 존재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여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질시를 이겨내고 6년만에 은둔해 있던 서재를 나와 자치주 “진달래”문학상 시상대에 섰을때 어쩌면 공교롭게도 미더운 선생님과 나란히 서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년전, 선생님의 대하소설 “해란강”이 출간되였을때 나는 룡정으로 달려와 선생님을 찾아뵈였고 “연변문학”에 장문의 인터뷰를 낸적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 손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이 앓고 있는 그 통증의 학명은 “손목 턴넬 증후군”이였다. 빨래등 가사일에 혹사하는 주부들이 흔히 하는 병이였고 또 대하소설 세 부를 펴낸 한국의 소설가 조정래가 앓았던 병이였다. 컴퓨터와 같은 기기(机器)가 아닌 육필로 한글자 한글자 수백만자의 대하소설을 펴낸 선생님이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원주필로 원고를 집필한다고했다. 가벼운 원주필을 쓰면 손목의 통증을 덜수 있을뿐더러 연필을 깎거나 잉크를 채우는 등 번거로움을 줄일수 있다는것이다. 원고지의 필적 또한 선생님처럼 단아했다. 단정한 기운의 글씨가 원고지 칸을 가득가득 채워 원고지가 아주 묵직해 보였다.   각박한 표현 같지만 요즘들어 치렬한 자세와 의식을 지닌 작가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작가혼은 오간데 없고 속도나 경쟁 그리고 의뭉스러운 독선만이 보인다. 돈후한 아량은 없고 녹쓸은 명예의 상패에 기대여 후배들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전배(前輩)들도 보인다.   이러한 독선과 명리만이 란무하는 풍토속에서 선생님과 같이 룡정의 궁벽한 서재에 묻혀 육필을 고수하는 이들은 시대에 떨어진 모습으로 오인(误认)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진정 부박한 속도의 가치에 저항하면서 한 획, 한 획 새겨나가는 철저한 장인정신의 표출이 아닐가! 선생님이 마주 앉아 집필한 낡은 밥상, 겉가위를 알뜰히 씌운 키를 넘는 원고지 더미를 목전에서 지켜보며 나는 문학가의 장인정신이란 무엇인가? 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3년전,  고향 룡정에 대한 궁극적인 사랑과 고향의 력사와 인물을 재다시 발굴, 조명하려는 가상한 각오로 3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를 선생님은 반겨 맞아주셨다. 아픈 몸으로 기어이 술 한잔 사주겠다고 했다. 집에서 불과 사거리 하나를 건너는 짧은 거리도 택시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한 몸이였지만 선생님이 지팽이에 의지해 기어이 나를 잡아끈 곳은 샤브샤브 고기집이였다.   선생님이 평생 고기붙이와는 멀리하고 수도자들처럼 줄곧 소식을 하셨다는데 대해 아는 이가 적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선생님은 양고기를 드셨다.   “혁이, 팔십이 다 돼서 먹어 본 고기맛이 참 좋데그려”    오목눈이 붕어눈이 되고만 나의 경아한 반응에 선생님이 앓는 사람같지않게, 비쩍 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홍소를 터뜨리셨다.   병마에 시달리면서 치료에 배합하기 위해서는 몸을 추슬려야한다는 의사의 식단조절 권고에 수도자처럼 깨끗한 음식습관을 여태 고수해 왔던 선생님은 산수(伞寿)의 나이를 앞두고 “파계”를 한것이였다. 그날 나는 선생님의 강한 생활의지에 다시 한번 감동을 머금었다.     지난 2015년, 선생님의 문학생애 기념 55주년을 맞으며 축사를 도맡은 나는 억석당년(忆昔当年)으로 어젯날 문학스승과의 사제의 정을 다시 떠올렸다. 축사의 말미에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이 읊은 “등왕각서(滕王阁序)”의 한구절을 선생님에게 삼가롭게 드렸었다.   “老当益壮 宁移白首之心(늙은 몸 씩씩하니 백발이 된다고 초심을 움직이랴)” 그렇게 선생님의 건강을 기망했건만 그로부터 2년이 못되여 선생님은 달빛을 즈려밟고 이승의 강을 넌느셨다.    요즘 들어 우리의 문학은 무서운 진통과 부침을 겪고 있다. 그젯날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로 알려진 인끔 높던 내 고향 룡정도 그 물굽이를 피해갈수는 없었다.   하지만 룡정에는 선생님과 같이 수수하나 뿌리깊은 나무처럼 고향땅의 “파수군”을 자청하고 나선 선배들이 계셨다. 은사님과 같은 로익장들의 계시와 가르침이 이어져 내려가는 한 강경애, 안수길, 최서해, 윤동주, 김창걸등 기라성 같은 문호들을 배출한 룡정지역의 문학은 저 일송정처럼 사철 짙푸르게. 저 배꽃처럼 수수하나 강인하게, 저 해란강의 흐름처럼 면면하게 이어나갈것임을 나는 오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은사님을 보내며 “역보역추(亦步亦趋)”라는 성어 한구절을 마음속에 갈무리한다. 또 역(亦), 걸을 보(步) , 추창할 추(趋). “스승이 걸어가면 따라서 걷고 스승이 종종걸음을 하면 따라서 종종걸음을” 했던 스승 공자와 제자 안연의 이야기.   그 이야기처럼 나 또한 우리 문화의 발상지 룡정에서 또 한명의 “파수군”으로 거듭날것을 구구절절 애재(哀哉)의 문구 행간에 담아 서약해본다.   일송정 푸른 솔을 비추는 달이 오늘도 우련히 밝다… … … …   2017년 5월 11일.   “연변문학” 2017년 제6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78    童年/金革 댓글:  조회:1218  추천:11  2017-06-02
童 年  金革 那一年 在动物园门口 妈妈给我买的红气球 从我的手中挣脱 飞得卒然 鲜艳的恍惚   单纯捧手的天真 被某段记忆 挂在了 六月的树枝上 以诗韵的状态,在飘动 飘的恍惚 动的璀璨... 2017- 6- 1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77    창피함에 대하여 댓글:  조회:1653  추천:13  2017-05-31
. 미니칼럼 . ​ 창피함에 대하여 ​김혁 ​ ​ ​​   단오에 대해 검색하다가 굴원이 떴고 굴원의 생을 따라가다가 “창피”하다는 낱말의 어원을 알게 되였다.   창피(猖披)에서 창(猖)은 옷을 입고 마무리를 하지 않은 듯 흐트러져 있다는 뜻, 또는 미쳐 날뛴다는 뜻이다. 피(披)는 손으로 옷을 풀어헤치는 모양의 글꼴이다,    창피라는 말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의 대표시 “리소(離騷)”에서 나온다.   중국 력사상 폭군을 들자면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이 꼽히는데 폭정을 일삼다가 나라를 망치고 궁궐에서 급히 도망쳐나가는 그들의 꼴에  대해 굴원은 이렇게 읊는다.   “어찌 걸과 주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허둥대면서 군색한 걸음으로 달아날 지름길만 찾는가(何桀紂之猖披兮 夫唯捷徑以窘步)”   여기서 "창피”(猖披)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창피”는 본래 옷매무새가 란잡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 옷이 풀어져 흐트러지면 남 보기에 부끄럽기 마련이다. ​   여기까지 쓰고나니 또 한분의 시인이 떠른다.   역시 부끄러움을 읊조렸던 윤동주 시인이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천고절창을 남긴 윤동주.   윤동주는 그 암흑의 시대에 자신의 무가내한 모습을 부끄러워했고 부끄러움에 휘청인 필에서 나온 시들에서는 창피와 참회의 눈물이 슴배여 있다. 나약하지만 그 부끄러움에는 선하고 올곧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 부끄러움이 오늘따라 시리도록 아름답다.   부끄러움이 실종돼버린 요즘 세월, 새삼스레 “창피”의 옷깃을 여미여 본다. ​ 2017년 5월 30일 단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76    屈原/金革 댓글:  조회:1011  추천:12  2017-05-30
屈原 ​金革 把头脚尖的粽子 抛向锅里的一瞬间 想起了 悲愤沉寂的一颗心 纵身的一瞬间 我们吃着粽子 感念苍生有魂魄 在粒粒粽香中 咀爵一个诗人的故事。   - 2017 端午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75    圆润的思念/ 金革 댓글:  조회:1039  추천:6  2017-05-23
圆润的思念   - 致母亲节   金革     妈!   拿起苹果想起了您   苹果是您最爱吃的果实   赶集回来   您挑了个最红最大的给我   那素洁,那温婉历历在目     妈!   呼唤的声音撞在了四面墙   可不见您苹果一样圆润的脸     咬了一口   心形的牙印   妈!   原来您把甜柔深谧的思念   种在了我心上     2017- 5- 13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74    孤独中结巴的斋/金革 댓글:  조회:1048  추천:12  2017-05-23
  孤独中结巴的斋 - “听雨斋”愚感   金 革   从雨滴的弹奏中升起的斋 和尘埃的蜉蝣里沉沦的斋 以及在母语中结巴的斋 是一组不同羽色的 幻变于尘世之外的书林   羽化的思想在书页里闪耀 它们反射着渴望,扩张雨季的泪腺 像播种在冬天里的银质的思维   而那光,作为凌晨的细雨,或做为雨后的长虹 在窗边缓缓上升,直至成为书林的一部分 直至成为房主未曾说出的孤独     2017-4-23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73    骨头/金革 댓글:  조회:1192  추천:18  2017-05-23
  . 中篇小说 .   骨 头   作者 金革(朝鲜族) 译者 靳煜(汉族)   第33届“延边文学奖”获奖作品 星期三:冷面与窃贼   服务员端来了冷面 。 看着就令人馋涎欲滴的肉汤,筋筋道道的面条,浮在上面的牛肉片、鸡丸子、半拉煮鸡蛋,还有苹果梨片,这碗冷面可谓色香味俱全,仿佛它不是食品,而是精美的雕刻。 寿根呆呆地瞅着这碗面。 就像仔细检验陛下水喇床(加注释:古代朝鲜王朝国王用膳的专用工具)的内侍一样, 寿根小心翼翼地往嘴里送着面条,舀了一口漂着松仁和芝麻的冷面汤。 又筋道又爽口。   有几年没吃到家乡的冷面了?满嘴回味幽香…… 一碗冷面很快就见了底。 用鱼子酱拌元葱、鸡蛋做的冷面汤放上韭菜和黄瓜的温面,用辣白菜和芝麻油、辣椒酱拌的拌冷面,味道均不如冷面。 又要了一碗冷面, 寿根忙不迭地往嘴里送着面条,眼眶中涌出了泪水。因为他想到了可以尽情吃冷面的时光和曾经一起结伴吃冷面的人们,再也抑制不住泪水。 和着泪水,寿根把冷面吃得一干二净,而后去了卫生间。 由于名声在外的老字号冷面馆正在建新址,所以临时开了家分店,想不到,门庭若市,连卫生间里都人满为患。就好像全世界的人都是冲着来吃冷面似的。也是,正值盛夏烈日,完全可以理解。 曾几何时,寿根屯子里的人们上城里逛,不管是身强力壮的男人,还是大妈大嫂,都会不约而同地到冷面部来一碗冷面,吃冷面几乎成了乡下人进城必备的一种仪式。 在卫生间那面大镜子前,人们纷纷拿出餐具里面配备的牙签,开始抠牙,整理衣冠。寿根也跟着他们学,突然像是想起什么似的,尖叫着,冲出卫生间。 回到刚刚坐过的位置,放在吃了两碗冷面的餐桌旁的行李不见了,灰色扶手的带拉杆的行李不见了。寿根用拳头猛砸自己的脑袋,这是寿根兴奋和紧张时的条件反射。 “行李,放在这儿的行李,没人看到吗?” 因为着急,寿根又变得结巴起来。 感觉像来了地震,听了寿根突如其来带着尖叫的质问,旁边座位上的大嫂不住地摇头。 寿根环顾四周,然后将目光投向窗外。 冷面部对面就是公交站点,有一辆市内公交正打算开走,寿根再次发出尖叫, 冲出冷面部。 他挥舞着双手,使出吃奶的劲儿,在追公交车。由于公交车刚刚起步,寿根很快就追上了车。他张开双臂,拦在车前。 吱嘎!汽车一个急刹车,司机破口大骂。寿根失魂落魄的只顾砸门,司机一边骂,一边开了车门。全然不顾司机的破口大骂和乘客们的议论,寿根穿过散发着汗湿味的人群,一把揪出拉着灰色行李箱的干巴瘦,有着三角眼的二十出头的小伙子,一边吼到: “小偷!这家伙偷了我的包。” 被说成小偷的那个男的拼命为自己辩解,不过,这个男的声音有些奇怪,不说话,只是发出”啊!啊!”的声音,一个劲地比划。 “看样子是个哑巴。” “哑巴还干这缺德事?” 就像看西洋景,乘客们的视线在寿根和哑巴之间来回游移。 “开往派出所,司机同志,去派出所吧!” 寿根在乞求司机,听了这话,乘客们更加骚动了,大家纷纷抱怨,说什么天气炎热,本就令人心烦,还卷入无关自己的事情,真够倒霉的。 “确认一下行李里面有什么不就行了吗?谁要是说对了,谁就是行李的主人,谁要是说错了,那无疑就是小偷。” 司机穿过人群,来到寿根面前,提议道。人群中一位中年男人递过来一支圆珠笔。考虑到哑巴说不了话,让他写在自己的右手掌上,而让寿根写在自己的左手掌上。 哑巴一脸无辜的表情,连手势带比划的,还发出怪叫,要下车,而那位中年男子死死地拽住了他,不得已,哑巴在中年男人的手掌上写了什么。 司机摊开手掌,哑巴写的是“衣服” 。 接过圆珠笔,寿根也用力地写着什么, 摊开手掌,中年男人的眼睛瞪得溜圆,手心都开始冒汗,手掌上只有一个字,中年男人给司机和乘客看那个字,大家仿佛也像受到电影导演开拍的命令一样, 把眼睛瞪得溜圆,显得有些夸张和滑稽。由于写得过于用力,那一个字在中年男人的手心里,显得那么触目惊心。 骨。 “你的精神正常吗?是不是把精神头留在韩国了?到发达国家混了十一年的人就这水平?你说哪有人大白天抱着人骨头可哪儿晃?嗯?” 在派出所里,寿根被值班警察训个臭够,在场的警察们都围拢过来,像看怪物似的看着寿根,寿根只是用拳头锤着脑袋,不知该说些什么。 客车载着哑巴窃贼和不寻常的失主,驶向附近派出所,警察很快就认出了那个哑巴窃贼,这是有前科的罪犯,是一个哑巴绺窃集团的成员,警察已经撒开天罗地网,在静候他们。 可是在确认被盗物品时,一拉开行李箱,值班警察就直往后退,根本不像每天面对罪犯的老练警察。 行李箱里放有两个塑料袋,里面装的是骨头。眼窝处空空洞洞,进进出出的牙齿,仿佛碟子般的骨盆,长长的腿骨……分明是人的骨头。 “是我父母的尸骨。” 寿根赶紧辩解起来,解释说自己在韩国打工时,接到父母亲的坟墓需要迁移的通知,于是急忙回国,买的是往返机票,由于急着回到韩国,着急忙慌进行火葬,结果差点遗失尸骨。 “难道你不清楚迁坟、火化尸骨需要到民政局开具相关的证明吗?你这个人真是死脑筋。” 值班警察的意思分明就是大千世界无奇不有啊! 傍黑了,寿根才走出派出所。从寿根的身份证、护照、亲朋好友的联系地址和电话号码、具体证明以及寿根的解释和尸骨的久远程度,大致可以了解事情的来龙去脉,寿根是羊毛头,皮肤黝黑,浓眉大眼,声音浑厚,浑身散发着一股率真。而且,也咨询报社寿根老家”迁坟通知”的事宜,警察方才相信了寿根。 折腾了一下午,虽说心里郁闷,不过仔细想想也可以理解,光天化日之下,也不是别的东西,而是拎着人的尸骨,可哪儿晃,怎能不让人误解。 抱着侥幸心理,想也许还有通往老家的末班车,于是,拉着行李,沿着漆黑的公路,寿根缓缓走向了客车站,突然,有人轻轻拍了拍寿根的肩膀,寿根本能地回头一看,鼻粱骨上冷不丁地挨了一拳。 就在用双手捂着鼻子的当儿,腰部又挨了一脚。面部、后背,都遭到了拳打脚踢,这不是一个人干的,由于没有任何思想准备,寿根被拽到了路边的下水沟,施了暴行的匪徒们却很快消失在夜色中。 寿根挣扎着站了起来,眼前直冒金星,鼻子也流了血。 “这是怎么啦?” 一位提着菜篮子的大娘过来,看到寿根在流鼻血,就递过来手纸,寿根将手纸弄成卷,堵住鼻子。尽管如此狼狈,寿根也不忘找行李箱,好在行李箱还在。行李箱就如同其一整天不走运的主人,被丢弃在路边。寿根拉着行李箱,坐在路旁的花坛,强作镇定。 寿根大概猜到了他们是谁,他想起派出所警察说哑巴窃贼在出没,肯定就是这帮人,因为冲着寿根拳打脚踢的这帮人和大白天见到的那帮人一样,也发出”呜呜”的声音。 说起来,这真是倒霉的一天,怕误了回乡的末班车,寿根扶着腰部,发出一阵阵呻吟,腰就像针扎似的疼,他靠着行李箱的拉杆,强忍着疼痛。 看样子,是伤到腰了。              星期二: 水没地的人们        回到了久违的祖国,寿根直接回了老家,前去办理父母坟墓迁移事宜。      第二天,寿根背着被誉为村里活化石的八旬老汉,来到了后山。      后面跟着十一年后才见到的发小炳泰,虽说才四十多岁,但由于中风, 炳泰手指弯曲,走起路来步履蹒跚。尽管身体如此不给力,但是,为了帮助老朋友, 炳泰执意参与进来。      同其他村子一样,寿根老家的人也差不多都离开了村子,原来有一百多户,现在只剩下六户人家,而其中还有五户是来自关里的汉族,坐地户只有炳泰和他的爷爷。       “现在,村子里只剩下我这个废人和老天巴地的我爷爷了,正所谓,不起眼的树更能守祖坟。”      炳泰冲着分别十几年才得以相见的老朋友淡淡地说道。二人从对方布满皱纹的脸上,深深地体会到”似水流年”的含义,禁不住苦笑起来。昨夜, 二人备了些酒菜,推杯换盏,畅叙别离之情。       这当儿,寿根背着的小老头就是炳泰的爷爷,村子里的外来户汉族老张拿着镐头跟在后面。这老张是寿根到韩国打工回村后见到的第一个人, 炳泰叫老张"老光棍儿",为了让帮着迁坟, 寿根决定每天支付老张300元,因为咨询了专业殡葬服务部门,他们少一千不干。因为现在懂得祭祀程序的人为数不多了,再加上有人忌讳,因此,这一行业从业者要的都是天价。迫不得已, 寿根请炳泰的爷爷出马。炳泰爷爷的个头也就刚刚摆脱了侏儒,因此被称作"小老头",是村里的老者。日本帝国主义侵略中国时,念过书,还当过村里的会计,村子里的大事小情几乎没有落过,据说也懂迁坟程序,最为重要的是,参加过寿根父母的葬礼。    寿根连父母的坟在哪里都记不清了,更遑论迁坟。父亲在寿根四岁时去世,寿根几乎没有印象。据说寿根的大哥长相随父亲,寿根去韩国打工两个月后,传来了母亲去世的消息,这很意外,但是由于刚刚到韩国,寿根没能参加母亲的葬礼。 炳泰的爷爷老的都快抽巴了,他说他的心愿就是在自己百年之前再爬一次家乡的后山,老人家艰难地跟着出了门,本就上了年纪,“雪上加霜”,加上很久以前,还中了风。中风是炳泰家的家族病,他的父亲也因中风去世,好在他的爷爷病情不那么严重,算是不幸之中的万幸。 沿着乡间小路,一行人来到后山。大山仿佛也张开双臂,迎接久违了的人们。 杂草丛生,拦住了去路。寿根背起炳泰的爷爷,老爷子瘦的皮包骨,背起来轻飘飘的。可是,那也不过是一小会儿,随着山路愈发陡峭, 寿根觉得就像背着一座大山,再加上天气炎热,脑门开始出汗,咬紧牙关爬山,可仍然汗流浃背,尽管如此,总不能让身子骨不怎么样的炳泰来背。 由于市里正在进行确保城市水源和发电的水库扩建工程, 寿根老家这个村屯即将被水淹没。寿根决定将父母的遗骨撒到图们江里去。村子的后山原本有几十座坟墓,由于人们纷纷外出打工,有的被迁到别的地方去了,还有的就那么搁着,几乎成了无主坟。寿根也是接到消息后,匆匆忙忙回国,结果就剩下一天时间。 山脚下,推土机、挖掘机发出“嗡嗡”的轰鸣声,正在紧张地进行作业,砍倒了一排排树木,推走岩石,把山削平。参天大树被拦腰折断,露出了“白骨”,倒下了。推土机仿佛有了用武之地,无主坟一瞬间就被夷为平地。 推土机、挖掘机、拖拉机发出的轰鸣声和煤烟味道掩盖了鸟鸣和草香。山不再巍峨,丛林也在消失。 “好像是……那边……那棵孤零零的老松树下,咱们上那边去看看……我的判断应该没错。” 小老头的手穿过榆树、常绿树、白杨树,指向傲然挺立的那株老松树。 在山上一处向阳的地方有一座圆圆的坟墓,既没立碑也没基石,杂草丛生,坟墓已经有些下沉了。将小老头放了下来,老头用松树般粗糙的双手敲打起坟墓来: “对!就是这儿,你从这儿简直往烈士碑下面看,果园下面是三个女儿都去塞班打工的老姜头家,他家隔壁是去老毛子打工,客死他乡的假洋鬼子老朴家,他家旁边不就是寿根你们家吗?” 小老头手指的地方那座山脚下依次就是寿根他们家、老姜家、老朴家,房屋早已成为一片废墟,由于曾经的房主或是离乡背井,或是早已不在人世,真是物是人非,房屋四周长满了嫁菜、藜等杂草,分外凄凉。看到这种情形,寿根心里也不是滋味。 在好不容易找到的老坟前,铺上几张旧报纸,供上了高粱酒和明太鱼、苹果梨、香肠、饼干等,在小老头的指挥下,行祭祀礼仪。 用一次性纸杯斟上酒后,寿根边磕头边说: “爸,妈,我给你们找了个更好的地方,你们千万别怪罪我。” 将酒洒到了坟上,而后围着坟墓转了一圈,大叫三声: “破墓!破墓! 破墓!” 于是,开始挥锹铲土。 这真的是座老坟了,父亲去世已有40多年,母亲也有11年,坟墓四周真的是杂草丛生,有些挖不动。用镐头使劲挖,才多少挖了一些。把最上面的一层土挖开后,开始用锹挖,寿根方才知道这个活儿不好干。土比想的要硬,还有不少石头子儿。 锹碰上硬石头子儿,锹把儿弯了,老张不满地嘟囔起来,并且蹲下来,用石头敲打锹把儿。 锹挖土的声音打破了山的荒凉寂静。小老头也打开了话匣子。 “这片土地湿润肥沃,供奉祖宗不是做人的道理吗?而且生在这儿长在这儿,是这方水土养育了你,不应该葬在这儿,滋养这片土地吗?可是近来也不知怎么了,家里的老人也不管,老婆孩子也不要,纷纷出去挣钱,难道真是有钱能使鬼推磨?” 小老头发泄出一肚子的怨气,并且一直在盯着寿根,寿根感觉到那话就是说给自己听的,赶紧转过头去,低着头,自顾自干活。 虽说寿根在韩国干的也是体力活,可是在三伏天挖土,真不容易。不一会儿功夫,就汗流浃背了,腰疼自不必说,感觉关节炎又犯了,手腕也疼,快折了。 老张可能也吃不消了,用汉语骂着什么,并且弄出动静来。 寿根提议歇会儿再干,并且从兜里掏出烟和打火机递给炳泰。 “这是韩国烟,” 炳泰又把烟塞到爷爷的嘴里。 “韩国烟啊,那就尝尝。” “韩国的也不一定都好,烟还是咱们这儿的烤烟最好。” 也把烟递给了老张,老张拿起烟,用鼻子闻了闻,点燃后,找个荫凉处坐了下来,用拇指和食指叼起烟,很享受地抽了起来。 炳泰把刚刚点燃的烟又掐灭,也开始吐露不满: “难道那里的月亮也比这里的圆?比这里的亮?为什么都像被蚂蜂蛰了似的,往外跑?” 烟圈笼罩在坟墓四周。 鞋里进了不少沙子,寿根把手放到锹把上,默默地瞅着山下。 田野里一片夏天热烈的景象。尽管欣欣向荣的夏天来了,可是,村子里依然荒凉。 大部分农田都廉价转让给了汉族农民,多数则弃耕。水田当央立起来高压线送电塔,仿佛不期而至的怪物。 房屋和黄色屋顶叠加的情形早已不见踪迹,空空如也的房屋就像被怪物追逐着的凶宅。 往年感觉那么亲切的村路也变得脏乱不堪,路当央全是马粪,农机内燃机配件,还有像毛毛绒玩具般的小狗的尸体。 后山种的全是果树,不知是不是缺乏栽种经验的外地人所种,苹果梨就像没吹起来的气球一样,小的不行。 这个村子曾经被誉为“粮仓”,不仅果子成熟得好,而且,家家户户的孩子也都有出息,远近闻名。可是时至今日,故乡就像张数不对的画图一样陈腐凄凉,可是,哪怕这种陈腐的景象也即将消失殆尽。 祖先在这片土地上扎下根来,种植水稻,苹果梨,将贫瘠的土地开拓成了富庶的热土,而今,却又被寿根等“糟蹋”成了如此模样。 立在果园山坡上的烈士碑格外引人注目,由于常年经受风雨的洗礼,碑名和碑上的烈士姓名已经看不清了,只剩下孤独的碑体,曾经投身抗日,守护村子的这些长眠着的烈士们的纪念碑如今就像奇葩一样。 看到寿根在发愣,柄泰说道: “看啥呢?有什么好看的?没了,什么都没了,寿根,你得觉得万幸,毕竟还能迁坟,以后,村子被水淹了,都没地去尽孝。” 唉唉 就像掉入水中,好不容易探出头来的人,寿根长长地出了一口气。 挖了两尺半左右,泥土的颜色开始变色。又过了一阵子,棺材露了出来,形态大致完好,小老头说,用红松做成的棺材可以十多年不烂,白松做成的棺材可以五十年不烂。用锹把夹住棺材盖中间,在使劲用力。盖碎了,没有想像中的那么结实,在发红的黄土中露出来白骨,发霉的味道刺鼻。 “出来了,骨头出来了!” 小老头发出了欢呼,却带着哭声。 由于有年头了,肉身基本都变成了尸骨,保存得较为完好。发黄发黑的骨头仿佛在瞅着寿根。常言道:男左女右,这么看来,左面更加发黑的尸骨是父亲的,右面仍然在发出白光的尸骨是母亲的。 寿根用拳头在捶着自己,眼圈也红。小老头赶紧过来劝。 “拿来锄头了吗?不能再用锹了,得用锄头了,小心点。” 让老张从墓穴里上来后,寿根独自一人在整理尸骨。拿着锄头,在小心翼翼地刮。 “寿根,算起来,你父亲去世的时候还没有你现在大,偏偏又在春寒料峭的时候去世,地还没解冻,梆梆硬,根本挖不动,只好放炮,挖开了冻土。不过那时候,好在全村的人都来帮忙,葬礼办的还算像样。” 小老头沉浸在对亡者的回忆中。 寿根用镐头挖出来石头子后,把从土里拿出来的骨头用掸子掸了掸灰,而后用酒清洗后,依次放到了报纸上。 “这成何体统?居然将如此贵重的骨头放到报纸上?现在的世道真是太不讲究。” 从一开始,小老头就倚着松树下面的绿草坪,不停地在嘟囔。寿根毛手毛脚的,也确实该挨说。 “按理来说,应该将骨头放到韩纸和麻布上,实在不行,也应该剥下桑树皮,将骨头放到上面。” 由于烟呛到嗓子眼了,小老头停了停,接着唠叨。 “寿根来的匆忙,没时间买韩纸,再说如今,上哪儿去弄到麻布?能够从韩国首尔赶回来,已经很不容易了。别人家祖坟被人家平了,都不在乎呢……” 炳泰站在寿根的立场,忙着替好友打圆场。但是,小老头仍然觉得很遗憾。 “其实,除了要用韩纸包骨头以外,还要写逝者的铭旌,迁坟也是葬礼啊,应该写铭旌。将骨头放到七星板后,在骨头上写上铭旌。还有按照常理,应该在办事的前一天,到迁坟的地方供上酒和糕点,背诵祝文,尽管现在没多少人会写祝文。尽管老礼有些繁琐,但是,太不遵守也说不过去。不能因为古老就抛弃,事实上,越是旧的,才越值钱,这么简单的道理,现在的人居然不明白,唉……现在的年轻人太不懂事,都闹着往外走,家里,村子里,就变成了这副冷清的模样……” “祝文上写的是什么意思?” 在一旁,用尖尖的石头蹭着沾在锹上泥土的炳泰不禁也问道。 “你怎么那么多话?你懂这些,难道要用吗?没用了,村子眼瞅着就要没水淹了……”,尽管如此,小老头还是详细地告诉寿根迁坟的程序。 “维岁次敢昭告于……这个祝文是什么意思呢?就是今日迁坟,恳请土地神帮帮忙!就是这个意思。” 小老头尽管不时在咳嗽,但一直在说,就像在讲民俗讲座,寿根只能听着小老头的絮絮叨叨,认真地在拣着骨头,用镐头扒开,再用掸子掸一掸,用嘴吹一吹,清除沾在骨头上的泥土和小虫子,将骨头一一对好。 “如果迁坟后不再下葬了,进行火葬的话,就没有必要拣骨头,如果还要下葬,就要把手指骨,脚趾骨一一分拣好,不能混杂在一起,对于碎骨和断了的骨头,要放到细细的树枝上……” 也不知听没听进去小老头的唠叨,寿根在一丝不苟地拣着骨头,唯恐有遗漏。 寿根的手有些发抖,每当分拣出一枚骨头时,沾在骨头上的粉尘就会飘向空中,在阳光下,乘着风,轻轻地挥舞着,那是先人的生活轨迹。 “想想也是,就算选了个风水宝地,把墓地整得无限风光,不亚于王公贵族,那又如何呢?人活着的命运就像浮萍,还不如狗。所以仔细想想,为了日后避免迁坟啊这些繁文缛节,还不如痛快地将骨灰撒了。就算建了坟,立了碑又能怎样?没人去看,人都跑没影了,连中秋清明去给上坟,除草培土的人都没有。” 小老头在憋着一口痰,可是仍然在不停地絮叨。 拣完父亲的遗骨,轮到拣母亲的遗骨了。 “妈,我来了,儿子来晚了。” 念叨着,寿根用双手捧起头盖骨,在慢慢的,仔细地看。 寿根的哥哥因为贪玩,摸村木材加工所的机器,被机器卷进去夭折,才有的寿根。但是,父亲的快乐也是暂时的,也许因为无法忘记大儿子,父亲卧病在床,连得的是什么病都没有弄清楚,就撒手人寰。因此,大哥,甚至连父亲的形象对于寿根来说,都只能从照片中来辨认。那时候寿根小,不懂事,根本不懂得父亲去世是件悲痛的事情,只是觉得白事的宴席不错。 大家都说,跟哥哥相比,寿根更随母亲。寿根也觉得自己圆圆的下巴像妈妈。自己的肤色也随妈妈,就像新土豆似的,白白的,脸型也像妈妈,像土豆似的,圆圆的,妈妈也擅长做土豆酱汤,在寿根要去韩国打工时,握着寿根的手,哽咽着问到,是否非得去?一想到自己连母亲的最后一面也没见到,都没能给母亲斟上最后一杯酒,想起自己的不孝,寿根强忍着泪水。 “妈妈,妈妈……” 寿根的哭声就像布谷鸟的哭声,那么凄惨,无法停下来。 炳泰将手伸向墓穴,拍打着寿根的肩,在安慰。 “别管他,让他尽情地哭吧……哭够了,就会舒服多了。” 尽管话是这样说,小老头的声音也哽咽了。 小老头擦拭了一下浑浊的眼睛,开始慢慢地哼唱起来。由于激动,面部肌肉也显得有些紧张。   昨天还好好的身子骨 北邙山这是咋说的 哎呦哎呦哎呦哎呦   草芥一生 何来长生不老 只顾埋头苦干 就那么驾鹤西去 哎呦哎呦哎呦哎呦   父母生我 吃尽苦头 不知天高地厚 不懂父母恩情 哎呦哎呦哎呦哎呦   无尽的人生 人生无憾 彼岸都得去 让我们在那里再相会 哎呦哎呦哎呦哎呦   丧舆歌就像腌好的泡菜一样醇厚,节奏刚开始那么缓慢,就像夏日的蜗牛一样,但是到了高潮,就像瀑布般,一泻而下,饱含遗恨,叹气,凄凉的丧舆歌在和着寿根的哭声。 “这是我小时候死人发丧时唱的丧舆歌,原来比这个长,很久没唱了,有点想不起歌词了。” 小老头张着没压的嘴,凄惨地笑了。 听着歌声,寿根拭去泪水,从墓穴里走了出来。 尽管没有韩纸和麻布,但是,寿根恭恭敬敬地把父母的遗骨放到了四张报纸上。     星期四: 干明太鱼和爱情       炳泰告诉的那家公司坐落在市郊外环,是一家生产干明太鱼的公司,虽说挂着“有限公司”的牌子,实际上也就是将废旧学校改建的作坊。      挂在铁门上的牌子非常醒目,产品名称,加工所的联系方式都标得清清楚楚,那大字比脑袋都大。       看样子,公司的经营状况还可以,院子里停放着运输用的,车体上标有产品名称的面包车,靠着墙,写有产品标号的包装箱堆成了山。       干明太鱼在这里作为下酒菜由来已久,尤其是就着生啤酒喝,那味道简直好极了。以前,坐落在小胡同里的小杂货店里卖生啤加干明太鱼,流传下来,时至今日,茶座,咖啡屋,甚至酒吧里,都在卖。因此,明太鱼加工部通常生意兴旺。      在韩国,通常用明太鱼做汤喝,很少晒成干明太鱼。因此在韩国打工每到周末休息时喝个小酒的时候,就会特别想念家乡的干明太鱼。听说延边人在韩国首尔加里峰洞开了家饭店,从延边拿来了干明太鱼,但是离那儿太远了,不敢奢望,因此,寿根几乎忘了家乡的口味。      腰疼得不行,就像有什么异物在扎你,寿根一直在按着腰部,勉强来到这里。他在腰那儿贴了只有家乡才有的“虎骨膏”。最早上韩国做买卖的那一批朝鲜族带去的是牛黄清心丸和“虎骨膏”之类,而今,这些药品不仅禁止出国,而且禁止在市面销售。这个“虎骨膏”还是炳泰将藏在家里的拿来的,可是据说那么灵验的“虎骨膏”却减轻不了寿根的疼痛。炳泰说看样子是伤到骨头了,应该去医院拍个片子,但是,寿根既没心情,也没工夫。他只能埋怨自己运气不好。也就是到韩国打工变得皮实了,小病小伤根本不在乎。      就像提心吊胆地过铁索桥,寿根小心翼翼地进到公司小院。在挂着加工所牌子的地方传来了人声,寿根就跑向那里。寿根透过玻璃窗往里看,几十名女工站在操作台前,用剪刀剪掉明太鱼的鱼头、鳍、鱼尾后,放到塑料包装袋里。这些女工们头戴卫生帽,戴着口罩、套袖,用剪刀飞快地肢解着明太鱼,忙碌不停。      犹豫了一会儿,还是鼓起勇气敲了敲门,不知是不是声音太低了,没有反应,又用力敲了一次,这把有回音了,出来一位女工。 “这里有叫明月的吗?果树村的?”    听了这话,着急忙慌来给开门的那位女工愣愣地瞅着寿根,躲在口罩里的面部肌肉也在发抖。女子踉跄了一下,赶紧靠着墙。不知是不是因为正午的阳光过于强烈,女子看起来非常疲惫,手里攥着正在收拾的明太鱼,同瘦削的身材相比,手指骨节粗。 女子看样子很不耐烦地将碎发撸上去,双眼皮看起来是因为疲劳才出现的,女子突然泪如泉涌,寿根不免大吃一惊。抚摸着耳边的头发,摘下了口罩。 寿根不禁发出惊叫,眼前的这位女工不是别人,正是寿根要找的明月,他的前妻明月。 分别有11年了,明月变化太大,满月般的脸早已不见,脸颊全陷进去,丰满的身材曲线也没了,最令人触目惊心的是眼睛深深地陷进去,眼圈发黑。      明月什么也不说,抬起深陷的眼睛,在瞅寿根,那眼神就像枯井,女子的嘴唇在不停地颤抖。 寿根无法直视那目光,赶紧开口表明来意,想见儿子一面,寿根说话声音低的,就像蚊子在叫。 “我想见见儿子,小旭……” 霎时,女子的声音变得尖锐起来,同时把手伸向了寿根, “什么?想见小旭?” 女子的那一巴掌太辣了,寿根一下子捂住脸,呆住了,因为女子的手里有明太鱼,寿根的脸上很快就肿了。 明月的脸沉了下来,终于放声痛哭,并且瘫在地上,将头深深地埋在双臂中间,肩膀在不停地抖动,哭得很委屈。终于憋出一句话: “你有脸见小旭吗?你还有什么脸见小旭?你……” 深深的呜咽,寿根不知该如何去劝。 哭声引来了一大帮女工,一些人在劝明月,另一些人则围住了寿根, “你究竟是什么人?” 女工们在询问,那几十双眼睛分明就是在怒视坏人,看到这些含有敌意的眼神,寿根不知所措。 寿根不知该如何去表明自己的身份,一紧张,汗如雨下,他实在没有勇气告诉大家,我是这位正在哭泣的女人的前夫。 就在这时,一人穿过女工,挤了过来。 “好了,中午了,大家都去吃饭吧。” 这个男人身材魁梧,声音洪亮,给人的第一印象不错,女工们开始散了,搀扶着明月,进到加工所里去了。可是,明月的肩头仍然在抖动,就像在打嗝似的。 “我是负责这儿的经理,为什么来找明月?有什么事吗?” 这位爷们生了浓密的连毛胡子,牙齿非常洁白,从他的口音一下子就能听出来他是汉族,不过朝语说的还可以。 寿根不知该如何开口,犹豫了半天,他紧张地摸着衣角,一下子摸到了装在兜里的烟,赶紧掏出一支,递给这位自称是经理的人。男人摇摇头,从自己的兜里掏出烟来,撒开红色包装盒,拿出一支,递给寿根,寿根接了过来,男人又给点着了火,寿根吸了几口,可是,烟太呛了,寿根忍不住咳嗽起来。 二人蹲在面包车前面。 身材魁梧的这个男人一个劲地问寿根来这儿的用意,可是,寿根真的不知道该从哪儿说起。寿根呆呆地看着自己吐出的眼圈飘向空中,消失在正午的阳光中,禁不住想起自己这十几年浮萍般漂泊的日日夜夜。 起初,是妻子明月张罗出国,以假结婚的名义,当时,大家都疯了似的一门心思想出国,因此,以假结婚的名义出国的现象屡见不鲜。 可是,真正办了离婚手续,明月却没出成国,只是被蛇头骗去了好几万块钱,而根本没想过出国的寿根却先踏上了出国之路。 寿根同妻子说:“我先出去,你也尽快再办。”,可是,明月又一次办的出国手续,持的也是假签证,在韩国仁川机场被发现,明月被遣送回国,此后又办了几次,明月始终无法敲开出国之门。 出国的日子里,寿根在韩国吃了不少苦,原以为到了首尔,满地的黄金在等着他,没想到真正踏上首尔,才发现前路茫茫。 “我又不是享福去了”,刚才,明月哭泣的时候,寿根原本想说这句话,可还是忍了下来。在亲朋好友的眼里,寿根混的太差了,他们看寿根的目光,就像在看一出悲剧。 首尔给寿根带来希望的同时,也让他经历了挫折。 过去的十一年,寿根回想起来,又冷又饿又凄凉。 刚开始在韩国打工的时候,活再累也可以忍受,可是,同胞之间的那种误解和蔑视真让人无法忍受。在工地上,即使是在干同样的工种,可是,韩国老板却总是无故辱骂他们是“杂种”。 寿根活了四十多岁,没挨过如此辱骂,可是,韩国老板却还在说,他的辱骂对于你们这些打工仔是营养剂。 每天顶着辱骂和污蔑,寿根为了留在家乡的亲人在强忍着。他麻木地忙着搬运水泥袋,贴着砖瓦和瓷砖。 可是这一天,像“蜘蛛人”一样站在十几米高的玻璃窗外贴着瓷砖的来自中国的两位打工者失足坠落而亡,而韩国老板一下子不见踪影。 中国朝鲜族联谊会和首尔的教会出面,积极加以解决,但是,久拖未决,在韩国辛辛苦苦赚的钱打了水漂。由于韩国老板缺乏信用,此后,寿根也遇到过几次工资被拖欠的情况。 “为什么我总会遇到狂风骤雨,电闪雷劈?”      为了捞回本钱,寿根四处筹钱,投入电视赛马,却赔了个底掉。为了躲避债主,他甚至躲到了江原道雉岳山山脚下。其间,寿根都有了酒精中毒症状,有的时候躲到教会办的慈善团体呆个一两天,后来好不容易康复后,才重新又去打工挣钱,就这样,一晃儿,十多年就过去了。      用地契、房照等做抵押,负债累累出国打工,每次打电话的时候,家人都是埋怨,也难怪,寿根一分钱没给家里寄过。 每当这时,寿根总会反复说:“再等等,我刚换了工种,这次看来还不错。”可是事与愿违,美好的愿望每每落空,妻子先是絮叨,后来就变成了埋怨,哀怨。每次,寿根给家里打电话的时候,寿根都怕听到妻子满含哀怨的声音,后来,寿根干脆不接妻子打来的电话。 但是,假离婚最终变成了真离婚。同妻子中断联系的第七个年头,听来到韩国打工的老乡说,妻子改嫁了。虽说切断联系的是自己,可是真正听了这个消息,寿根就像被兜头泼了一盆凉水。他感到了某种挫折和失败,开始不停地到大排档借酒浇愁。 那些个日日夜夜,感觉自己连个救命稻草也抓不着,在绝望的泥沼中徘徊,那些个岁月谁又知道呢? 对于自己一直不肯说出口的艰难岁月,寿根第一次说给了汉族汉子,尽管是不愿意提及的往事,但一旦说出口,就觉得解脱了。 听了寿根的话,汉子慢慢地站了起来,慢慢地踱进加工所里。随后,汉子的手里拿了一瓶高粱酒和两个干明太鱼。寿根接过汉子递过来的干明太鱼,撕下一条,干明太鱼很香,很有嚼头。的确,家乡的饮食有一种无需说明的亲切,汉子往玻璃杯里倒了半杯酒,递给寿根。 “你吃苦了。”      寿根将半杯酒一饮而尽,就着干明太鱼,寿根连干了几杯。几杯酒下肚,肚子里火辣辣的,感觉到了燥热。 捋着连毛胡子,汉族汉子瞅了半天寿根。 “我说几句成吗?” 汉族汉子自斟自满,一饮而尽后,开了口: “我就寻思你们真是怪,中国有句谚语,叫:心急吃不了热豆腐,你们干嘛那么着急?急到地不要了,家不要了,孩子不要了,父母不要了,都走了,去首尔,去日本。钱是好,赚钱好啊,可是,赚了那么多钱后怎么办?房子没了,土地没了,老婆没了,父母死了,鱼死网破,真应了中国那句老话:人为财死,鸟为食亡。近来,大肆开发土地和大山,政府给不少赔偿,朝鲜族廉价将自己的土地转让出去,现在后悔了,有什么用?晚了,世上哪儿有卖后悔药的?我真搞不懂你们葫芦里究竟装的什么药?真的不知道……”寿根干咽了一下,这倒不是因为刚刚喝下酒的原因。只是觉得想说的话都被蒸发掉了。听了汉族汉子略带教训口吻的话,寿根意识到自己无力反驳。正如汉子所说,寿根自己也搞不懂葫芦里究竟装的什么药?这也是自己在疲惫的打工生活中,不时会问自己的问题。尽管问过,却无人给自己明确的答复。也许大家都被眼前的一己小利所蒙蔽,所迷惑,根本不去想这个问题。 寿根什么也说不了,只有默默地嚼着干明太鱼。 汉子接着说道: “明月现在很幸福,很幸福,所以,你不用操心。” 寿根愣愣地看着汉子,迎着寿根的目光,汉子开了口,而汉子的话对于寿根来说,无异于晴天霹雳, “明月现在是我老婆!” 感觉盘旋在脑海中的白鸟都飞走了,一霎那,寿根感到了眩晕,酒劲儿上来了。 世上人本就是有着千丝万缕的联系,可是,自己和骨肉已经失去了联系。 寿根突然感觉到了疼痛,就像很久以前感受到的牙疼,感觉胸闷,寿根忍不住发出了哀鸣,紧紧地摁住了贴着膏药的腰部。   星期五: 滑板   下课铃响,孩子们一窝蜂的出了校门,校门口霎时变得人声鼎沸,突然变得水泄不通,机动车和行人就像在玩捉迷藏。出校门后,孩子们径自走进附近林林总总的文具店或者紫菜饭馆、过桥米线店、烤鱿鱼的小店。也有些孩子在马路上走,嘴里还吃着烤鱿鱼、金鱼饼。 在校门口,寿根就像警卫一样,瞪大双眼,在一一仔细打量着孩子,他等儿子都有一上午了。 利用间操时间,见了见儿子。 坐早晨第一班车来到市里,按照明太鱼加工部汉族经理告诉的,来到学校找儿子,告诉学校门卫儿子的学年和班级,门卫说不让见,寿根低三下四地求情,说自己上韩国打工十多年没见着儿子了,通融一下,打动了门卫,说孩子现在在上课,等下课再说吧。 寿根就这样足足等了有两个多小时,等到了间操时间,门卫通报了班主任,班主任从列队的孩子们中间领出一个孩子,指向校门口的方向。 孩子不情愿地走了过来。 “你是小旭吧?” 寿根非常欣喜,嗓子都有些嘶哑了。 哪怕没人提醒,寿根还是一眼就认出了孩子,孩子太随寿根了,羊毛头发,国字脸,更何况,肤色也随寿根,就像黑铁蛋似的。上韩国打工的时候,孩子才四岁,现在长高了,比寿根都高,下巴下面长了喉结,鼻子下面也开始长胡子了。 觉得自己不在儿子的身边,儿子还能长成大小伙子,寿根觉得都得谢谢儿子了,同时又觉得自己没有进到父亲的责任,不免感到惭愧,就像没有完成作业,被老师叫去的学生,低下头来。 妻子叫月,儿子叫旭,是冉冉升起的太阳之意,可是在着日月的轨迹上,寿根却没有找到自己可以接轨的地方。 “你是谁呀?” 孩子皱着眉,问道。 “我,我是你爸爸。” 尽管有些羞愧,寿根还是嘟囔着,含糊不清的,像蚊子叫似的,说了出来。 寿根艰难地开了口,话说的磕磕巴巴,孩子很快将拳头伸向自己的额头,捶胸顿足,怎么连手势也随自己呢? 孩子捶着自己的额头,像看不速之客一样,很不友好地看着寿根,寿根感觉自己就像闯进人家家里收废品的。看样子,明月回家没有同孩子提及自己,孩子的反应分明就是很吃惊的样子。父亲突然出现,他究竟想干什么呢? 二人都将拳头放到自己的额头上,什么也不说。二人紧闭双唇,一眼不发,空气异常沉闷,孩子猛然转过身去: “我去做操了,现在是间操时间……” 孩子就说这一句话,就向着做操队伍跑去。 可是,间操做完了,孩子却再也没有出现。然而寿根却一直在校门口等,直到中午时间。 寿根一眼就认出孩子们中间比别人高出一头的儿子,他赶忙跑过去,抓住儿子的手,正午的阳光刺眼,可是,孩子的脸色却突然一变, “怎么还没走?在这儿干什么?你究竟想干什么?” 孩子很不耐烦地问道。 “我一直在等你!” 孩子又问道:“为什么?”孩子对待父亲的态度不是暗含感激的叹号,而是富有挑战性的问号。寿根本来有一肚子话要同儿子讲,可是,儿子一反问,寿根却不知该说什么了,只能说想一起吃个饭。 “我要和朋友一起吃。” 儿子指了指在一旁等候的小伙伴。看到儿子说完话就要走,寿根赶忙拽住孩子的手,可是,孩子将寿根的手甩开了,因为孩子的反应太过强烈,寿根不免愣了一下。 孩子很明显在排斥寿根,从孩子的眼神中,寿根能够看出某种敌意。看到孩子真要走了,寿根紧紧地抓住了孩子的手。二人就像在艰难地角力,孩子停止了反抗,现出一副无可奈何的表情。孩子在咬着嘴唇思索着什么,终于开了口, “午饭就算了……能给我买个东西吗?” 这话在寿根听来就像谕旨,寿根咧着嘴,笑着问道: “好说好说,别说一个,十个也行,你想要什么?” 孩子指了指在学校前面广场上玩耍的孩子们。 这些孩子们戴着遮阳帽,穿着宽筒裤,在悠闲地玩着滑板,孩子们时而在敏捷地旋转,时而又蹦到半空中。 “我也想有一个那样的滑板,给我买一个吧。” 学校附近就有专门的大型体育用品商店,寿根跟着孩子走了进去。 孩子一下子就串到滑板柜台前,据说现在在孩子们中间最为流行的就是滑板。 有些危险吧…… 寿根看着柜台广告牌子上印着的向着天空飞翔的真人般大小的广告模特,心里在想,但是,孩子却完全被滑板迷住了。 “最近流行这个,父母去韩国打工的孩子能够买得起,没去韩国打工的就买不起,这个挺贵的。” 孩子答非所问,瞅着寿根问道: “不想给买吗?” “不,我不是那个意思……” 寿根赶紧掏出了钱包,只要孩子高兴,有什么舍不得的。 “父母到韩国打工的孩子买进口的,没出国的,一般买国产的。” 孩子拿起各个价位的滑板,给寿根解释起来,感觉孩子了解的比售货员还详细。寿根吃惊的不是自己不那么熟悉的滑板,而是孩子们以父母是否出国划分三六九等。 寿根给儿子买了进口的,而非廉价的国产,同时还买了价格不菲的滑板帽,滑板服,手套,自然也没忘买护肘和护膝。 作为父亲,寿根还是第一次给孩子买东西。别说花个上百上千了,就算花掉辛辛苦苦赚来的所有的钱,寿根也会连眼睛也不眨一下。 “看样子,你是我爸爸,我想要的,你都舍得给我买。” 直到这时,孩子的脸上才有了点笑模样,可是,说的话仍然不中听。 “对,我就是你爹!” 寿根小心翼翼地说出这句话,同时,五味杂陈,想搂住孩子,可是,孩子一闪身躲开了。抱着一大堆礼物出了体育用品商店后,孩子问道: “你怎么才来?躲到哪里干嘛去了?” 羊毛头的孩子戴上了滑板帽以后,就像乘着降落伞从直升飞机上下来的特工队员一样,在审问寿根。孩子开始玩滑板,迅速滑出去后,转眼间,又滑回寿根面前,问道: “为什么和我妈妈分手?两个人看起来都是好人。” 听起来,儿子并不想要明确的答案,只是问问而已。还没等寿根回答,孩子又飞快地滑走了,新买的滑板就像胶布一样,仅仅贴在孩子的脚上。孩子炫了几个滑板技巧后,就消失在了学校门前的胡同里。 “小旭!” 寿根从嘴里发出呼声,孩子连续提出的几个问题狠狠地抽打了他,而且也为自己无法给出明确的答案而吃惊,不免生起自己的气来。感觉有一股凉风穿过自己的前胸。 寿根在首尔在韩朝鲜族团体创办的网站上看到家乡的迁坟通知后,寿根决心回到家乡。虽说一直以来,寿根淡忘了故乡,可是这次却不知为什么,感觉有某种东西在催促他回去。犹豫也是暂时,很快就下了决心,进而变为一种义务。时隔十几年后,寿根终于回到了阔别已久的故乡。 但是,想象中的故乡是温暖的,而一旦实际面对,却变得心凉,也许这种温度与时间成正比,难道是因为物是人非,一切都在泯灭,一切都在进行改造的缘故吗?还是因为一心奔钱去,忘记了那种温度? 寿根又开始捶胸顿足,顶着烈日,就那么呆呆地站在校门口的柏油路上。     星期六 水葬   那条河看起来那么安静,河流一直在流淌,不论是过去还是现在,家乡的小河就一直在那里流淌着。 家乡的小河环绕着家乡的小山,仿佛懂得岁月的世故,对于久别归来的游子,也是一如既往地默默地流淌。 寿根面向河畔的石岩,坐了下来。 原以为到了火葬场要求二次火化会很顺利,可是第二天真正到火葬场一看,才发现去往天国的亡者是那么多,站在殡仪馆的大厅里,寿根才真正开始思索以往自己一直忽视的死亡这一话题。 殡仪馆的人说大概得等到下周一,可是,明天周日,寿根就得回韩国了,尽管低三下四地哀求,可是,却不给通融,寿根搓着被水泥磨坏了的双手,终于下了决心。 在出国前一天,寿根来到家乡的小河,图们江畔。 首先,用水将家乡的岩石洗得干干净净。 打开陪伴了自己多日的行李。 掏出骨头,一一放到了洗好的岩石上。 迎着上午的阳光,骨头发出白光,如同玉洋木。 寿根呆呆地盯了白天这些骨头,随后拣起一个可以握在手里的小石头,深吸一口气,寿根开始划这些骨头。 就像专业的做祭祀活儿的人一样,寿根在认真地粉碎着骨头。 河畔,白色的紫芒在不停地舞动,就像是吊花,除了偶尔有水鸟鸣叫着飞过,小河是安静的。听了水鸟的鸣叫,人会莫名地感伤,也许正因为听了水鸟的鸣叫,寿根都快哭了。 由于右面的腰疼,寿根在用左手做,因此,一上午都在面对河流。 一边在认真地切割骨头,同时也在发泄自己的悲愤。 寿根将变成粉末的骨头握在手里,比一捧沙土和石头更加沉重的东西握在手里,虚无感攫住了寿根。 看着这些骨头粉,寿根的心就像被咸盐浸过的似的,那么难受,这种疼痛甚过腰疼,攫住了寿根。 寿根流下了热泪,同时,将紧紧攥着的手摊了开来。 骨头碎块像流星一样掉了下来。 就这样,寿根将满含着悲哀的记忆与虚无的化石块一捧一捧放入大河。 骨头被水流冲刷,迎着阳光,如同贝壳一样。寿根一动不动地盯着这些骨头在泛着白光。 尽管成千上万的水流在混淆着寿根的视线,但是,寿根仍然在一动不动地盯着那些骨头,直到它们消失在自己的视野中。 被遗忘的、丢失的、被抛弃的、到伤害的、渴望得到宽恕的……世上万物就像这条河流,在奔流不息。 寿根心中的压抑伴随着河流,也被释放出来。 扶着腰,寿根慢慢站了起来,一只水鸟飞过来,没有进入水中,而是消失在芦苇荡。 由于寿根的目光刚才一直在追逐河流,眼睛发酸,他抬头望向天空,眨巴着眼睛。天空的各个角落有一片一片的白色的云朵,装扮着天空,可是,风不期而至,在撵走它们。白云就像摆脱狭窄村路的丧舆一样,在慢慢地飘走。 寿根想起了几天前小老头唱过的丧舆歌,开始轻轻哼唱起来。   草芥一生 何来长生不老 只顾埋头苦干 就那么驾鹤西去 哎呦哎呦哎呦哎呦   父母生我 吃尽苦头 不知天高地厚 不懂父母恩情 哎呦哎呦哎呦哎呦   哎呦哎呦哎呦哎呦 哎呦哎呦哎呦哎呦   星期日 骨头之间 机场候机大厅里人满为患,尽管已经有那么多人离开了家乡,可是今天,机场里仍然人头攒动,依然有那么多人要离开家乡。他们的脸上满含期待,同时也有某种不安,交织在一起,脸上都是潮红。 寿根也到了乘机时间。 当天,在迁完坟后,看着空空的墓穴,寿根突然想到,迁坟不只是整理死亡的过程,同时也是准备新生的过程,这样想着,也就能原谅自己的再度离开了。 炳泰前往机场送行,尽管寿根考虑到炳泰身体不便,不让他来送行,可是,炳泰却说,这次分别后,不知何日才能相见,因此执意要来送。 一想到这个发小如同被弃在田野里的稻草人一样,独自度过家乡的春夏秋冬,寿根心里就不好受。炳泰的外套最上面的那个扣子不知掉到哪里去了,寿根在一直帮他掖衣服。 “你别埋怨明月,你妈生病的时候,也是她在护理,去世后,也是由她独自一人给办的后事。自然,小旭也是由她独自一人抚养成人的,虽说被逼无奈,嫁给了汉族爷们,可是她过得好,不也是好事吗?” 听了哥们的安慰,寿根更加无法平复自己的心情,赶集转换了话题: “扩建工程什么时候开始?水库……” 虽说已是无法躲避的事实,可是,一想到村子即将被水淹没,寿根的心里就很不好受,同时,寿根的话语里也有着对炳泰的担心,我这么一走,你可怎么办?寿根担心地看着好朋友。 “不用担心,我们家有水田,一旦开发,能得到不少赔偿,用那笔钱,我可以衣食无忧,也许会比你过得更好。” “哥们,一定要好好活!” “那是自然,我还要用那笔钱买药吃。” “那就好那就好。” “在市郊还要买套房子。” “好啊好啊!” “在成为鬼魂之前,也许还能娶个大姑娘。” “应该应该。” “我要好好赡养我爷爷,好好过日子。” “好,好!” 二人就这样在开着玩笑,尽管彼此都在安慰对方,可是,那话自己听起来都觉得不自然。对于彼此说的过时的玩笑话,只能一笑而过。 炳泰的手机突然响了起来,打破了二人的对话,接电话后,炳泰的脸色一变,赶紧把电话递给寿根,说道: “怎么办啊,寿根,小旭出事了。”   小旭正在骨科医院的病房里躺着打点滴,脖子上打着石膏,一动不动。 寿根从机场气喘吁吁地跑到这里,明月吃惊地看着他。 在家期间,为了便于联系,寿根给明太鱼加工部经理留下了炳泰的电话,就这样知道了小旭的消息。 寿根赶紧扑到床前,仔细地端详孩子。打着点滴,孩子睡着了,也许因为疼痛,孩子在睡梦中也发出了呻吟。 “你今天不是走吗?” 尽管没有开口,可是靠在床边的明月的表情分明在这么说。 “怎么搞的?伤哪儿了?” 明月默默地递过来X光片和处方。 伤到了颈骨和肋骨,颈骨裂纹。肋骨断了三根。 “我不让他玩滑板,可他执意要玩,就成这样了。” 明月不免埋怨道。 有一阵子,寿根感到眩晕,怎么孩子会因为自己给买的第一份礼物,就受伤了呢。 面向孩子,二人隔着床坐了下来。看样子,明月想说什么,在咬着嘴唇,可是,终究什么也没说。 难忍的沉默,双方各自都沉浸在自己的想法中。也许实在无法忍受沉默,寿根举起X光片在看。 片子上,如同冬日凋零树木般的骨头就像一幅木版画,明月的脸印到了木版画上,明月的脸也变成了黑白的,寿根清晰地记起了从前。 那个时候尽管贫穷,却是那么幸福,彼此紧紧拥抱,鼓励,憧憬更加美好的明天。可是时至今日再想过去,就如同一幕幕电影。有些片段可以清晰地记得,而有些片段,已经记不起来了。 那天走出加工部的时候,寿根不自觉地回头看,因为就这样走了总觉得不甘心,也觉得有什么东西在绊着自己。 明月来到院子里,目送寿根的明月靠着墙,显得很无力,能看出明月也很悲伤。 破镜重圆是不可能的了,都已经成为过去了,明月就此是前妻,路人了。寿根突然感到很难过。 曾经共同孕育过美好的梦,而今,那梦已经离自己远去了,也许正是因为认识到了这一点,寿根才会突然造访家乡。 也许重新回到久违的家乡,对于失去家乡的人们是一种挑战,因为要具体面对留在家乡的时光和心境。但是无论走到哪儿,家乡都会折磨着你,也正因此,感觉不会思念的穷苦家乡总会不时折磨着你,这就是乡愁。 也许正因此,义无反顾地回到家乡,像回流性鱼类一样,并且执意拾起追忆的骨头,最终进行了水葬。 明月已经开始有白头发了,寿根只是期望吃尽苦头的这个女人从此不再不幸。 孩子翻着身子,醒了,也许没睡醒,愣愣地瞅着寿根,开始委屈地哭了起来。 “疼吗?” 寿根给孩子擦着额头上的汗,问道。孩子的哭声更大了,一边哭,一边说, “都怨你,都怨你……” 寿根的身子不禁抖了一下,尽管因为打着石膏,孩子无法动弹,可孩子的表情满怀敌意,寿根后悔自己给孩子留下了憎恨和埋怨。 “对不起,爸爸对不起你!” 寿根喃喃自语道,这一个星期,他说的最多的就是这句话。虽说“对不起”这句话显得有些无足轻重,可是,除了这句话,寿根不知该说些什么,只能重复这一句话。 对不起,对不起,对不起,对不起…… 鼻子一酸,孩子再也无法忍住眼泪,泪珠掉到了脸颊上。将父母的遗骨放流到图们江进行水葬后,寿根觉得奇怪,为什么自己还是感到压抑,感到有什么东西在羁绊着自己,今天,他终于明白了,原来是因为儿子。 寿根低下身子,抚摸孩子的脸,结果一低头,又感觉到了刺骨的疼痛,腰疼得不得了。 忍住疼痛,寿根搂住了孩子的肩膀,比腰部疼痛痛过好几倍的疼痛,无法形容的疼痛席卷了寿根的全身,感觉自己身体的某一部分要废了,疼痛蔓延到全身。可是,寿根不愿意放下儿子,紧紧地抱住了儿子。 骨头疼痛的人们之间紧紧搂住彼此疼痛的身体,放声痛哭。     星期一:  丧失   航班飞行两个多小时后,寿根回到了阔别十一年之久的家乡。 家乡的空气里没有雾霾,寿根尽情地呼吸起来。 寿根在机场乘坐44路公交前往长途客运站,可是,途中,寿根改了主意,在报社站点下了车。 自己义无反顾地回到家乡,满腔热情,需要用某种东西平复心情,这就是冷面。服务大楼,太过平凡的店名,牌匾也不显眼,可是对于这里的人们来说,这座服务大楼已经成为冷面的代名词。 寿根非常喜欢吃服务大楼的冷面,因此,和邻村富富态态的姑娘明月见面的时候,也是选择了服务大楼,那一次见面,二人不顾体面,把冷面吃得一干二净,二人饮食口味也相同。 身怀六甲的时候,别的孕妇想吃酸的,可是,明月却想吃冷面,为此,还特地乘车,来到服务大楼吃了冷面。 寿根赴韩国前一天,也选择去吃冷面,那时候就想,一旦出国,不知何年何月才能吃上冷面。 下了飞机后,寿根就赶到了无法忍受的饥饿感,虽说飞机提供餐饮,可是仍然无法摆脱饥饿感,一想到即将回到家乡,突然就特别想吃家乡的饮食了。身在异乡,心灵是饥饿的。寿根一直在想,回到家后,第一件事情干什么?这一次,他终于有了主意,那就是去吃冷面。 就像迷路的小狗凭借嗅觉找到地方,寿根凭借着记忆,辨认既熟悉又陌生的这座城市。 拉着行李杆,寿根边打听,边来到了位于市中心的广场。 广场以东就是那家老字号的冷面馆。 可是,真正往广场东面走的时候,寿根不禁发出了惊叫。 寿根愣在了那里,不知所措。 寿根要找的那家冷面馆不见了踪影。 那家老字号冷面馆连同那家建筑不见了踪影。 就像魔术师施了魔法,建筑销声匿迹,如同人体内脏上的孔洞,只有空地在迎接他。 在空地上正在打新的地基,机器声轰鸣。 寿根面向空地,定在了那里…… 延边文学 2015年 5月号 民族文学 2017年 4月号  
372    왕붓으로 돋을새김 할 그 이름 댓글:  조회:1453  추천:18  2017-04-27
  . 작가노트 . ​ 왕붓으로 돋을새김 할 그 이름​   김 혁   ​ ​십여년전부터 나는 내 고향 룡정의 력사와 인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투신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민족의 독립과 반일의 전초였던 룡정에 대한 긍지와 자호감을 머금고 시작한 벅찬 작업이였다. 휴일을 타서 혼자거나 혹은 동인들을 휘동하여 력사전적지 수십여곳을 일일이 답사하고 수백명의 관련 증인, 유가족, 학자들을 찾아 취재한 끝에 50만자에 달하는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을 집필하여 대형문학지에 3년간 련재를 마쳤다. 그 와중에 한락연이라는 이름과 다시금 만나게 되였다. ​ 비록 예전의 력사총서들에서 한락연에 대해 접하지않은것은 아니지만 룡정의 대사기,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의 력사를 세세히 쫓는 가운데서 나는 한락연은 응당 기행문의 한 단락으로 쉽게 묘사할 인물이 아니라 대서특필해야할 인물, 작은 글체로서가 아니라 대문자로 돋을새김해야 할 인물임을 황연대오(恍然大悟) 느끼게 되였다. ​ 한락연, 그를 지칭하는 칭호는 많다. “인민예술가”, “정치활동가”, “반파쑈투사”, “동북지구 공산당의 초기 창시자”, “조선족 첫 공산당원”, “중국의 피카소” … 여러가지 타이틀로 력사의 갈피에 그 이름이 우람하게 적혀있다. 한 사람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채로운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만큼 다채롭다는 방증이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룡정에서 출생한 한락연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혼신을 바쳤으며 국공량당의 통전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한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 한락연은 그야말로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들의 귀감이였다  .  그 생애에 초연이 피여 오르는 력사의 현장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어왔지만 운명의 굴레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예술가적 기질을 보이고 실천한 동시에 고매한 혁명가적 기질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한락연을 통해 우리는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고난을 대하는 그의 락관주의적 풍모를 대할수 있을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비록 그가 살았던 세상과는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것이 바뀌여버렸지만 그가 보여준 진취적인 삶과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 본다. ​ ​ 2013년에 출간된 나의 청소년 인물평전 "한락연의 이야기"   주은래 총리가 생전에 “왜 한락연을 위한 전기물이 나오지 않냐”고 애석해 했듯이 그에 대한 조명은 여러모로 진행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정한 인물전의 결여로 그의 생애는 편파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서 커다란 유감을 남기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문집 한 두부가 나왔을 뿐이고, 해외에서도 그에 대한 조명한 문장이 더러 있으나 겨우 수만자 미만, 몇편 정도의 미비한 량에 그쳐 있었다. ​ 중국조선족의 수많은 인걸들중에서도 혁혁한 인물인 그에 대한 체계적인 인물평전조차도 없다는것은 어찌보면 우리 후세로서는 결례요, 실책이라 말해야 할것이다. 그리하여 한 고향의 위인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품고 인물전기 집필에 열정을 불살라 착수했다.  2008년부터 사비를 털어 한락연의 자취를 찾아 심양, 할빈, 치치할, 상해, 중경 등 지역을 답사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한락연 관련 신문기사, 인물소개들을 다각적인 쟝르를 동원하여 수차 간행물들에 기고, 발표하였고 연변일보 “종합신문”주간에 그의 인물전기를 8개월간 련재하였다. 그리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한락연 인물전기를 책자로 묶었다. ​​ 한락연이라는 인물에 천착되여 관련 연구를 감행한지도 어언 8년철이다. 그만큼 힘든 시간, 벅찬 시간들이였다. 그리고 속필을 자랑하는 나였지만 감불생심 평전에 필을 대는 가벼움이나 서두름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한락연의 일대기에 대한 나의 집필은 선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진지함을 기하는 진행형이라 해야할것이다. ​ ​ 한락연의 딸 한건립 녀사를 취재하고​   ​근년래 우리문단에서도 뒤미처 인물전기서들의 “봇물”이 터진듯 하다.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 주고 있다. 품격이 두드러진 인물전기 수작(秀作)을 읽을수 있기를 우리의 출판과 독자들은 바라고 있다. ​ 그에 편승하여 이 십여년동안 나는 한락연 외에도 자치주 성립의 산파인 주덕해, 겨레의 창공에 “별”처럼 빛나는 민족시인 윤동주,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상해와 태항산을 주름잡으며 일제와 싸운 항일녀걸 리화림, 무성영화시대 오렷한 소리와 자취를 남긴 “영화황제” 김염 등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인걸들을 장편소설, 인물평전, 청소년전기등 픽션과 논픽션물로 재현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관련서적들이 이미 출간되였거나 바야흐로 출간중에 있다.  수십년동안 매체의 기자와 소설가로서의 삶을 병행해 살았던 나에게 있어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나만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싶다. ​ 사학자들은 력사란 “인간이 거쳐 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라고 정의하고 있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수 있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 여기에 인물전의 매력이 있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우리의 위인들을 조명하는 작업은 현재 변혁기의 소용돌이에 꺼둘리고있는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고 비젼을 제시하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왕붓을 무겁게 고누고 만방에 자호 할 우리네 인호(人豪)들의 진영(真影)을 한 획, 한 자 경필(劲笔)로 그리고있다. 굵다랗게 돋을 새김하고 있다. ​ “장백산”2017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71    꼬마 축구팬의 눈물 댓글:  조회:1682  추천:15  2017-04-21
。 미니칼럼 。   꼬마 축구팬의 눈물   김혁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이라는 그림이 있다.   유명 광고나 만화책에서 이미지를 차용 해 작업하는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다.     그림은 2002년 뉴욕의 어느 한 경매에서 715만 9500 달러에 경매되였다. 당시 영국 BBC 뉴스는 이 작품이 고가에 판매, 경매 기록을 깼다는 기사를 내보낸 적 있다.  이 그림은 지금 한국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자택에 걸려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작품이 인상적이였다기 보다는 그 가격 자체가 충격적이였다.   오래 된 만화책에서나 볼법한 촌스러운 아가씨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이 수백만대를 호가한다니? 사람들은 과연 이 그림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지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머금은 아가씨의 얼굴은 그로서 강렬한 이미지로 모두들의 뇌리에 남았다.       며칠전에도 우리는 행복한 눈물을 목격했다.   4월 16일, "백두의 호랑이" 연변팀 대 하북팀전에서 올 시즌 첫 꼴을 터뜨리자 꼴문을 연 용장 김승대와 그 꼴에 도움을 준 윤빛가람 못지 않게 관중들의 주목을 받은 축구팬이 있었다.    선수와 팬들이 흥분의 도가니로 들끓는 사이 생방송 카메라는 홀연 한 꼬마 축구팬을 포착했다.    부진에 시달리던 우리의 "호랑이"가 올 시즌 첫꼴을 선사하는 순간, 한 꼬마가 격동에 못이겨 그만 눈물 왈칵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이였다. 붉은 빛 응원 유니폼을 입은 앳된 얼굴의 소년은 목에 두르고 있던 응원 타올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을 터뜨렸다. 곁자리 친구의 다독임에 마음을 안추리고 다시 눈물 머금은 얼굴로 꼬마는 “연변팀 이겨라”를 목청껏 복창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시청자들의 감동과 공명을 자아냈고 그 동영상이 인터넷과 위챗을 달구어 불과 며칠사이에 5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피폐한 환경, 풍토에 "안구건조증" 환자가 속출하고 눈물을 잃어가고있는 요즘 세월 인공눈물까지 등장하고 있다. 어느때 부터인가 세상은 진정한 눈물을 잃어버렸다. 대신 위장된 눈물, 계산된 눈물로 넘쳐난다. 돈으로 치환되는 눈물도 있다.    그에 비하면 한 꼬마 축구팬이 자신의 팀을 위해 흘린 눈물을 우리는 그야말로 거금으로도 환산할수 없는 수정같은 눈물이라 높이 사고 싶다. 그것은 정녕 순수한 눈물, 값진 눈물, 행복의 눈물이 아닐가!   2017- 4- 18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70    100년의 성좌.星座 를 우러르다 댓글:  조회:1251  추천:15  2017-03-26
100년의 성좌.星座 를 우러르다 김혁 (소설가,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인물전 “윤동주 평전”과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의 저자)   시민 여러분, 추운날씨에도 소슬한 바람을 맞받아 이 언덕까지 삼오삼오 모여오신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옷깃을 삼가 여미고 하나의 순결한 령혼앞에 섰습니다.   오늘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짓눌린 령혼을 일깨우는 희망의 시로 잠자고 있는 민족정신을 깨닫게 한 민족적 저항시인 윤동주님이 서거 72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순결한 시인은 “시대처럼 올 아침”을 맞지 못한채 민족의 해방을 겨우 여섯 달을 앞두고 결국에는 일제형무소에서 나젊은 스물아홉의 삶을 마감합니다.   그렇게 이국의 형무소에서 이슬로 사라진 나젊은 시인의 탄생 백주년, 서거 72주기를 기념해 지금 해내외에서 추모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순차적으로 열리고있습니다. ​   여러분, 1917년 만주의 북간도, 바로 오늘날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여나 올해로 백세지후(百歲之後)를 맞는 그이는 고향이 자호할만한 시인입니다. 국내외에도 추앙받는 저명한 문인들이 많지만 윤동주만큼 우리들이 목놓아 찬미 할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문인은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리면 어느결에 감격과 느낌표가 머무는 시인이 바로 윤동주 시인입니다.   민족을 사랑한 윤동주는 강인한 항일,저항정신을 지녔으며 사랑과  평화를 지향하며 이를 맑고 순한 언어로 써나갔기 때문에 오늘날 그렇게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시는 생활일반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보편적인 서정으로 적었으며, 그의 시에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져 있습다. 비록 시인이 20대의 애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 이상 아주 많은 생애를 산 사람의 안목에 시인의 생애와 작품은 들어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세를 준엄하게 점검하고 자성하는 목소리가 들어있는 그이의 시를읽으며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의 생애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봅니다. 따라서 그이를 기리는 일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자긍심과 책임감을 일깨우는 시간과 기회로 될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   그러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우리 룡정.윤동주 연구회는 올 한해 많은 일들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룡정.윤동주 연구회 산하의 력사답사팀의 주도로 룡정 나아가 연변의 력사 유적지들의 탐방을 정기적으로 이어나가려 합니다.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선양하며 나아가 민족의 력사와 현황을 아우르는 문화 포털사이트를 개설하려 합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숙명의 동반자인 송몽규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윤동주에 대한 기념과 더불어 펼쳐나가려 합니다.  - 조선족 처음으로, 윤동주의 생애를 어린이들의 눈 높이로 맞춘 청소년인물전 “’별’의 시인 윤동주”를 출간, 각 학교에 무상으로 보내주려 합니다. - “'별을 노래하다'- 윤동주 시 가영대회”를 지난해에 이어 제2탄으로 성대하게 거행하려 합니다. 윤동주의 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합니다. - “윤동주 평전” 그리고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소설화한 장편소설을 출간하여 백주년에 헌례하려 합니다. 이외 윤동주 묘소 참배, 시랑송회, 세미나 등 다채로운 행사들로 시인의 백주년을 맞은 이 한 해를 축제의 분위기로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   여러분, “별의 시인”이라 불리는 윤동주 시인님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많은 명상을 해왔습니다. ‘별하나의 이름과 별 하나의 추억” 윤동주님이 입을 모아 세였던 별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별은 백년전의 그 별일테지요.  그 별을 다시 보는 마음이 새롭습니다. 별 하나 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던 시인은 이제 자신이 하늘의 별이 되였습니다, 우리들의 심방에 오롯이 떠오른 민족의 별이 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얄 일들은 시인의 주옥같은 글을 읊조리며 시인이 우러러보았던 수많은 별들을 눈이 시도록 바라볼 일입니다.   여러분, 윤동주와 같은 민족시인을 고향에 모실수 있고  또 그이의 백주년을 기념할수 있는건 우리 문단, 우리 사회의 축복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오늘 우리는 그이의 혼이 스며있는 이 동산 언덕에 모여 섰습니다. 그리하여 루루 한세기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와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시인의 “이름자 묻힌 무덤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합니다.​ 감사합니다. ​ 2017년 2월 16일 "백명의 시민, 백년의 시인을 노래하다" -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기획, 주최한 "윤동주탄생 100주년", 윤동주 옥사 72주기 기념대회에서  
369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댓글:  조회:1716  추천:11  2017-03-26
   . 독서칼럼 .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김혁   민족영웅 안중근에 대한 책자는 많이 나왔고 나의 서가에도 적지않게 꽂혀 있다. 지난 1980년대 장춘의 송정환 선생이 집필한 인물전기 “안중근”, 조선족 시인 김파의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으로부터 한국의 유명작가 리문렬이 안중근의 일대기를 소설화 한 장편소설 “불멸”에 이르기까지 안중근 관련전기물들을 픽션과 논픽션물로 여러권 소장하고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접하는 순간 제목부터 강렬하게 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고 감질난 독서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책은 짧은 단편 력사소설로 포켓(袖珍)용으로 발간되였다. 몇해전 한국행차에서 이 책을 접했고 귀국하는 비행기내에서 단숨에 독파해버렸다. 몇십분내에 읽을수 있는 분량이였지만 읽고난뒤 그 느낌은 강렬했다. 책은 한국의 력사학자 리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와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의 후손인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가 집필했다. 력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소설형식을 빌었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의 할빈 거사 30년 후인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둘째 아들 안준생은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 남산 장충단에 지은 절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죄의 머리를 숙인다. 이튿날 일본과 한국 전체가 발칵 뒤집힌다. 각 신문들은  톱소식으로 "안중근의 아들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라고 전했다. 안중근의 거사에 두손 번쩍 쳐들었던 전체 민족의 환성이 탄식으로 바뀌는 순간이였다. 안중근은 민족의 이름으로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는 죽었고 그로서 안중근은 나라 잃은 조국과 민족에 불세출의 영웅으로 남았고 력사에 큰 획을 그으며 잠들었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 최고의 영웅의 아들은 대체 왜 이런 력사를 거꾸로 뒤집는 선택, 터무니없는 행각을 벌렸을가?   안중근이 중국 려순의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뒤 일제치하에 남겨진 가족의 생은 분명 곤고했다. 큰 아들은 일곱살 어린 나이에 일제의 끄나불이 넘겨준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었고 안중근 일가족이 김구선생을 찾아 상해로 가지만 림시정부가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되자 급히 철퇴하면서 안중근의 유가족을 챙기지 못해서 둘째아들 안준생은 타지에 버려졌다. 책은 바로 그 둘째 아들 준생의 힘겨운 성장과정을 극화시켜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있다. 가족은 돌보지 못하고 오로지 조국과 민족만 생각했던 아버지, 영웅 아버지를 둔 덕에 그는 평화와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과 감시속에 촌보난행의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버지 안중근의 아들로 태여나 형은 피살당하고 일제의 방해와 횡포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근근득식하면서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간 그다. 그런 안준생을 향해 일제가 손을 내민다. 그 배후에는 력사를 기만하려는 일제의 야욕이 숨어있었다. 일제는 안준생이 다름 아닌 안중근의 아들이기에 “내선일체”에 리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 민족말살정책에 안준생을 끌어들이고자 악랄한 수법을 꾸몄던 것이다. 그만큼 안준생의 고뇌는 깊었다. 일제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그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누이까지 죽이겠다는 협박이 그의 잔등을 윽박질렀다. 무릎을 꿇으면 일시 안정된 삶이 주어질터지만 그때로부터 친일파, 변절자라는 오명이 따라 붙을것이였다. 그러다 모진 세월을 견디다 못해 그만 아버지가 단죄한 그 민족의 원쑤의 후예에게 사죄의 머리를 숙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과 우리 민족을 향해 복수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앞자리 맨 왼쪽 안준생, 오른 쪽이 이토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개 같은 자식). 안준생에 쏟아진 가장 큰 비난이다. 영웅 안중근의 삶과 그 뒤에 가려져 고난의 삶을 살아야했던 영웅의 아들의 엇갈린 간극을 보여준 소설, 하지만 책은 그에 대해 단죄하고 묻어버리기 보다 그를 그렇게 만든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 묻고 그 심연에 대해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책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겨레를 더럽히는 선택을 강요받는 극단적인 비극에 던져져야 했던 한 심약한 령혼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근년래 문체혁신에 고민하는 소설가들에 의해 대체력사(代替历史, Alternate History)물이라는 새로운 쟝르가 나왔다. "실제 력사가 다른게 전개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하에 그 뒤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가상소설의 한 기법이다. 제목만 보면 대체력사소설처럼 보일 소설, 하지만 그런 현학적인 문체로 쓰지않고 담담히 내려간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외려 더 강한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요즘들어 섬나라의 몰지각한 지도자들에 의해 우경화의 행보가 더 우심화되고 중국 할빈의 역두에 드디여 안중근 기념관이 설치된 시점에서 다시 읽은 책, 작은 책자가 주는 울림은 그래서 더욱 강했다. “길림신문” 2014년 2월 15일 안중근의 의거를 재현한 유화(김봉학 그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68    필끝에 건곤(乾坤)세상 있나니 댓글:  조회:1739  추천:17  2017-02-28
. ​련작칼럼 .​ 필끝에 건곤(乾坤)세상 있나니 - 제9차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수도에서 열리는 문학성회에 다녀왔다. 중국작가협회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가 11월 30일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성황리에 열렸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대표단은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을 비롯해 장계신, 정봉숙, 김혁, 김영건, 김홍란, 채시봉 등 조선족작가와 문화계 사업일군들이 대표로 선정되여 참석했다. 습근평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대회 개막식에 출석한 가운데 중국각지의 문학계 엘리트들이 참석한 대회는 제8차 중국작가협회의 사업보고를 심의채택하고 “중국작가협회 규정”을 수정하였으며 철응을 주석으로 한 중국작가협회 차기 지도기구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12월 3일에 페막, 5박 6일간의 대회일정을 원만히 마치고 대표들은 귀환했다. 10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글밭만 경운해 온 작가로서 중국대륙의 문학계를 대표하는 기라성같은 거장, 엘리트들이 운집한 전국작가대표대회에 대표의 일원로 참석하게 된것을 행운과 자호감으로 생각한다. 20여년전부터 전국청년작가회의 등 전국적인 문화행사에 적지않게 다녀 왔다. 하지만 이번의 성회는 여느때와는 또 다른 농도와 줄기의 계시와 감수를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회의기간 나는 매일 핸드폰으로 간명하나마 그날 그날의 수감을 일지로 적어 위챗에 올리고 나의 문학블로그에도 올렸다.  스모그로 몸살하던 북경이였지만 그 며칠만은 초동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의 련속이였다.  그처럼 “가슴속에 대의를 품고 마음속에 대중을 담아야 하며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필끝아래 건곤을 적어내리기를 바란다.(胸中有大义、心里有人民、肩头有责任、笔下有乾坤)”라는 회의의 주제문구는 작가들의 마음벽을 울려주고 우리 문학의 화창한 봄날을 제시하는듯 했다. 성회에서 받은 감수와 사색을 편단으로나마 테마별 적어본다.      자신감을 소환하다 -    제9차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1)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옥색 저고리우에 감색 마고자를 받쳐 입었다. 헌활하게 통이 트인 바지를 떨쳐 입고 발목에 대님을 조여 고풍스러운 멋을 강조했다. 저고리의 섶이 약간 들린 품이 나래를 펼치려는 학의 그것과도 같다. 간결함과 섬세함이 매치된 선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그려낸다. 오방색 수공의 옷은 단아하고 아취가 있다. 마음은 싱그럽고 발길도 가벼워 건들건들 걸으니 자신감이 그윽하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한복이다. 전국작가대표대회 개막식이 열리던 날 아침, 나는 참말로 오랜만에 한복을 떨쳐입고 나섰다. 15억의 작가들을 대표하는 성회에서 민족대표로 선정된 기쁨으로 처음 민족복장을 맞추어 입었다. 역시 한복을 떨쳐입고 나선 녀성 대표들인 김홍란, 정봉숙 역시 여느때보다 청초한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기자들의 카메라의 앵글이 우리 복장이 주는 운치에 맞추어져 있었다. 연변대표단의 대표들은 인민대화당의 가장 현요한 앞자리에 자리 배당이 되여 있었다. 우리는 부풀은 한복처럼 한껏 부풀은 마음으로 총서기와 중앙의 지도자들, 전국각지에서 온 민족작가들과 만났다. 개막식에서 한 총서기의 예술변증법과 과학정신으로 일관된 강화는 새로운 문화리념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관점의 밀도가 농후하고 새로운 용어로 가득한 그 강화에서 몇줄을 임의로 뽑아내도 느낀바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문화자신감”이라는 용어를 나는 정중하게 뽑아보았다.   “문화자신감은 기초로 되고 더 광범위하고 심후한 자신감으로 되여야 하며 기본으로 되고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합나다. 문화적자신감을 갖는것은 국운의 흥망성쇄와 관련되며 문화의 안전, 민족정신의 독립성에 관련되는 큰 문제입니다. 문화자신감이 없이는 골기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풍채가 보이는 작품을 써낼수 없습니다.” 자신감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렇게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기는 근년들어 처음이였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신감이라는 이 단어를 잊고 있었다. 잃어버리고 있었다. 근년래 중국조선족은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서 부침해 오고있으며 따라서 “위기론”, “비관론”도 머리를 쳐들고 있다. 도시진출, 출국붐에 있따라 가꾸며 살던 터전이 비여지고, 인구가 마이나스 성장률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기록하고, 학교들이 줄줄이 폐교되고, 독서인구가 급락되고, 잡지사와 출판사가 불황을 겪는 악순환이 지속되여 왔다. 그에 따라 작가들은 바닥까지 실추된 문학의 위상에 설 자리를 잃고 방황과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작가들은 전국 여러 성시에서 가장 낮은 최악의 고료를 받고 있다. 물론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즉 쌀과 돈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것을 작가들의 지조로 알고 있지만 작가들에게 문학은 먹고 살아나갈 삶의 방편이 못되였다. 이렇게 위축의 일로를 걷고있는 사회상을 바라보며 작가들에게 자신감이란 운운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근년래 우리의 문학계는 조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수 있었다. 그 감지는 독자층과 문학애호가들로부터 왔다. 미약하나마 독자와 문학애호가들이 전에 비해 상당히 붇고 있음을 놀라웁게 발견할수 있었다. 시가지들에서 단지 커피나 음료를 팔던 청일색의 다방, 까페들로부터 책을 읽을수 있는 북카페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민간에서 책 읽기 동아리가 하나 둘 속출하고 있다.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조직하는 문학강습반도 몇해전에는 참가수가 너무 적어서 개강을 하지못한적도 있었지만 올해는 보명수가 넘쳐나서 그 인원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해외문화와의 충돌로부터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 소실되여 가는 민족언어에 대한 우려, 출국인원들의 귀향후 재정착에 대한 고민 등등에서 유발된 사고, 개개인의 노력을 수반으로 한 생활수준의 제고와 질적인 삶의 변화, 경제가 발전한 선진국의 수준 높은 문화생활에서 배운 지식들이 이러한 변화를 촉구한것이아닐가 생각해 본다. 이로서 책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인생에서의 지식경영의 중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다시금 책을 들고 있는것이다. 비록 아직은 작은 파문에 불과할터이지만 이제 좀 더 큰 이랑을 이루기 시작한다면 이는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파고(波高)의 높이가 아닐수 없다.   주지하다싶이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령혼이다. 문화생명력에 대한 신심은 리성인식에서의 고도로 성숙된 정신적인 면모라 할수 있다. 할진대 문화의 자신감은 그 혼의 기초로 되여야하며 광범위하게 더 깊게 더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하는것이다. 이러한 문화자신감으로서 자신의 작품의 품위를 높이고 력사사명감을 자각하고 심령을 정화하고 민족의 인문소양을 높여야 한다.   여기서 바로 원견과 지명의 “자신감”이 소요된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보조를 흐트리지 않으며 나아가야한다.  발에 채이는 비관의 돌덩어리들을 치우면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앞으로 형성될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서 그 립지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것이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변강소수민족이라는 특유의 위치와 특수한 문화환경을 용유(拥有)하고있다.그로서 우리 중국조선족공동체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사이에 있는 변연문화의 특징을 지니고있다.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수 있다는점에서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적 기능을 나타낼수 있다. 거기에 한국과 조선 두나라 가운데 끼여있는 한반도에서의 민족의 교두보 역할도 무시못한다. 이러한 민족적 우세를 도약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족 공동체사회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중국과 한반도간의 교류,협력에 필히 긍정적인 역할을 미칠것이고, 중국과 한반도 간 광범위한 교류의 진일보는 동북아 국제 협력이라는 중국의 대 동북아 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전략의 구축과 실행 과정은 정부의 직접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그와중에 정부에서 소수민족에게 돌려지는 점점 더 원활해지고 있는 무양한 특혜도 우리는 적극 활용할줄 알아야 한다.  현정세에 대한 바른 리해를 토대로 자신의 립장과 토대를 굳건히 설정해 나가면서 우리의 오래된 가치관에 자신감을 덧입히고 그것을 미래 지향적인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제반 분야의 바탕이 되도록 하여 우리의 얼을 살려야 한다. 그러한 저력이 근로용감한 우리의 문화전통에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목전의 진통을 극복하면서 모색속에 새로운 대안을 찾는 험준한 과정에 비관을 엎누르는 자신감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때이다. 대회의 개막식과 페막식에서 초겨울의 추위도 무릅쓰고 우리는 한복을 입고 북경의 장안가, 인민대회당 앞 광장에서 포토타임을 가졌다. 외성의 대표들과 매체 기자들이 다투어 우리들의 현란한 색조를 향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 복장의 단아함과 민족작가로서의 자호감 머금은 자세에 타성의 대표들과 행인들이 찬탄의 소리를 보냈다. 소슬한 겨울 바람이 한복의 자락을 스치나 우리는 모두다 상기된 얼굴, 더워나는 가슴을 느꼈다. 그야말로 자신감을 소환해본 시간이였다. "장백산" 2017년 1월호      
367    소설로 읽는 남경대학살 댓글:  조회:1990  추천:14  2017-02-10
​ 소설로 읽는 남경대학살 -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중에서​ 김 혁 ​​​ 오늘 12월 13일은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 97주기가 되는 날이다. 중국 정부는 2014년부터 12월 13일을 남경대학살에 따른 '국가 애도일'로 지정하고 전국적인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 ​ 1937년 12월 13일 고도(古都) 남경은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졌고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 이후 한달여 동안 적수공권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미친듯이 살륙했다. 남녀로소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고문, 강간, 생매장등으로 끔찍한 처형 방법도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세계사적인 참극이다. 인류사에 이처럼 짧은 기간에 무차별적인 살륙전을 벌린 사례가 없다. 한개 도시의 일원(一圓)에서만 자행된 만행은 단기간에 저질렀다는 점에서 나치의 학살을 릉가한다. ​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 몇줄의 기록이 내가 조선족 첫 위안부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을 집필한 동기가 되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진술,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문서, 르포 등 갖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력사의 질곡에 붙매였던 그녀들을 대상화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한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자 했다.​ ​ 2015년 옹근 한해 12회에 나뉘어 조선족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련재된 "춘자의 남경"의 말미에는 주인공 춘자가 목도한 대학살의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남경의 아비규환의 ​모습이 국부로나마 재현되여 있다. ​ ​ 소설 집필기간 남경대학살 기념관을 찾은 필자​​ ​ 혈우(血雨) ​ 네모난 해가 지고 네모난 달이 떠올랐다. 그 해와 그 달이 몇번 지고 몇번 떠올랐는지 춘자는 모른다. 뙤창 하나 없이 사면이 벽뿐인 방에서 출입문의 틈새로 새여 들어오는 빛은 장방형의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환영같은 그 네모 난 해, 네모난 달을 헤아리면서 춘자는 날이 바뀜을 느끼고 자신이 놀랍게도 아직 살아있음을 매일 매일 느끼고 있다. 몸은 피둔하고 정신은 비몽사몽의 진펄사이에서 빠져들었다 빠져나왔다를 반복한다. 비소리가 들렸다. 한겨울인데도 이곳에는 비가 내린다. 춘자는 쑥색의 담요를 몸에 두르고 몸을 한껏 웅그렸다. 등을 대고 앉은 벽은 얼음기둥처럼 한기가 랭랭하게 스며든다. 추적추적 비소리와 더불어 꾸르륵 텅 빈 뱃구레는 배고픔을 하소연했다. 위안부들에게 매일 차려지는 음식은 멀건 옥수수죽과 조막손같이 작은 만두 그리고 죽순짠지뿐이였다. 그것도 처벌방에 갇힌 사람에게는 매일 한끼밖에 주지 않는다. 아래배쪽 속살이 아직도 띠끔띠끔 아파 온다. 춘자는 저고리속에 손을 넣어 배를 만졌다. 지렁이 지나간듯 오돌토돌한 흉터가 만져졌다. 상처는 이제 딱지가 앉으려 하고 있었다. 춘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춘자는 “쇼바쯔(처벌방)”라는 방에 갇혀 있다. 일어 서면 머리가 닿고 앉으면 두 다리를 뻗을수 없어 쪼그리고 앉아야만 하는 조롱같이 작은 방이다. 위안소에서 소위 계률을 위반한 처녀들은 가차없이 “처벌방”에 갇혀야 했다. 처벌의 리유란 혹간 몸이 아파 들어온 병사를 거부했다던가, 위안소 관리인 “오까상”과 말대꾸를 했다든가 하는것들이였다.  “돌격1번”을 사용하지 않아도 처벌방에 갇혀야 했다. ​ 그날 춘자는 광분하여 달려드는 장관의 손가락을 물고 늘어졌다. 어깨에 벌건 계급장을 달고 사병들의 옹위를 받으며 들어선 장관은 몹시 취해 있었다. 인중에 가증스럽게 쪼막 수염 한 가닥이 김쪼박처럼 붙어 있다.  “기레이(이쁜데)” “쪼막수염”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춘자의 턱을 쥐여 들어 올렸다. 외투의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납작한 철제술병 하나를 끄집어 냈다. 철제술병을 춘자에게 내밀었다. “노므(마셔라)” “모릅니다. 술 마실줄을” 춘자가 고개를 틀었다. 놈의 외투를 벗겨 벽에 걸려 했다. 그러는 춘자의 어깨를 놈이 왁살스럽게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벽에 밀어 붙혔다. 털부숭이 손으로 춘자의 볼을 움켜잡고는 벌려진 춘자의 입속으로 술을 부어 넣었다. 사레가 들려 춘자는 목줄기를 부여잡으며 괴롭게 기침을 했고 놈이 흐아흐아 웃었다. “쪼막수염”은 또 기어이 “돌격 1번”을 착용하려 들지 않았고 착용을 권고하는 춘자의 귀뺨을 때려 쓰러 뜨렸다. 춘자는 가까스로 야수처럼 달려 들어 온몸을 부숴뜨릴듯 하는 놈의 수모를 견뎌 냈다. 수욕을 다 채운 놈이 춘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쪼막수염”은 허우적거리며 바지 혁띠에서 무언가 떼냈다. 단도였다. 칼집에서 빼낸 칼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철제술병을 들어 칼에 술을 부었다. 칼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술방울을 “쪼막수염”은 혀로 핥았다. 놈이 어떤 연극을 벌리는지 하회를 알수 없어 춘자는 불안한 눈길로 놈의 손길을 쫓았다. 놈이 칼에서 눈길을 떼고 탈진하여 누워있는 춘자를 내려다 보았다. 쪼막수염을 밀어 올리며 음습하게 웃었다. 홀연 놈이 춘자에게 다시 덮쳐들었다. 추자의 배를 가로타고 앉았다. 순간 살갗을 파고 드는 아픔에 춘자는 비명을 질렀다. 놈은 춘자의 박속같은 아래배쪽을 칼끝으로 긋고 있었다. “이쁜 아가씨, 기넹(기념) 한번 남기자고” “쪼막수염”은 춘자의 속살에 자기 이름자를 새기고있었다.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했으나 놈은 완력으로 춘자를 제압하고 배애 한글자 한글자 새겨나갔다. 놈은 한손으로 새기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한사코 반항하는 춘자의 얼굴을 짓뭉개 눌렀다. 그런 놈의 장지가 춘자의 비명을 토하는 입에 닿였다. 그 손가락을 물고 늘어졌다. 놈이 거세하는 돼지처럼 비명을 질렀다. 놈의 얼굴이 구겨진 마지(麻紙)처럼 일그러졌다. “조센삐!” 놈이 주먹으로 춘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춘자가 의식을 찾고 보니 “처벌방”이였다.​ 한달여전,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를 걸치고 그들이 이른 곳은 남경이였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연도에서 강을 보았다. 폭이 넓고 길게 이어진 큰 강이였다. 겨울에도 강은 얼지 않고 있었다. “양자강이다. 지나(支那)에서 가장 긴 강이라더군…” 역에서 그녀들을 맞아 다시 마차에 태운 어눌한 조선말을 구사하는 일본 녀인네가 말했다. 그녀들을 보자 녀자는 광대를 말라올리며 웃었는데 웃을때 입안 가득 덧이가 보였다. 관례대로 그녀를 “오까상”이라 불렀다. 마차는 성문으로 들어섰고 제법 번화한 거리가 활짝 펼쳐졌다. 하늘 변을 가리며 치솟은 높은 건물, 분주히 오가는 멋진 복색차림의 인파, 그 사이 들려오는 낯선 말씨… 신사, 숙녀를 태운 인력거가 그들이 탄 마차를 앞질러 달렸다. 댕. 댕. 댕. 종소리 울리며 전차가 그들의 곁을 스쳤다. 길 복판으로 질주하는 기차바곤같은것을 처녀들은 희한한 눈길로 바라 보았다. 낯선 풍경을 두리번거리는 춘자를 보고 혜숙이 말했다. “오다가다 이젠 대처로 왔네” 하지만 그 이색적인 풍경속으로 들어가면서도 처녀들은 석연치 않은 모습들이였다. “집에서 점점 멀리 떠나오는구나” 한숨 한번 짓고나서 누군가 쫑알거렸다. 보따리를 가슴에 꼭 껴안으며 춘자가 말했다. “여긴 칩(춥)지 않아 좋구나”​ 그들이 거처하게 될곳은 누른 흙으로 담장과 벽체를 두른 가옥에 주홍빛 창문을 낸 2층집 구조였다. 대문에 “상군남부위안소(上军南部慰安所)”라는 패말이 걸려 있었다. 함께 끌려온 30여명의 조선인 처녀들에 앞서 위안부들이 이미 와 있었다. 그네들이 탄 마차가 뜨락에 들어서자 창문으로 녀자들이 목을 빼들고 내려다 보았다.  복식이 판달랐고 소근거리는 말씨들이 달랐다. 바지런히 해바라기씨를 까서 부수듯 자잘한 말씨를 구사하는 그녀들은 중국인 처녀들이였다. 누군가 2층에서 달아 내려왔다. 출입문앞에 기대여 서서 마차에서 내리는 춘자네를 지켜 보았다.   춘자는 우로는 목, 아래로는 발의 복숭아뼈까지 흘러내린 기다란 장포(長袍)차림의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량볼에 보조개가 깊이 파인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하얀 저고리 검은 치마에 외머리태를 한 춘자를 신기하다는듯 지켜보고 있었다. 춘자는 저도모르게 옷깃을 한번 다듬었다. 떠날때 이모가 내준 새 옷은 이미 헌 걸레처럼 되여버렸다. 보푸라기 투성이에 여기저기 탈색이 되여있다. 옷 앞섶에 언제 튀였는지 피자욱같은것이 단추처럼 동그랗게 배였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와 눈과 눈이 한데 얽히자 그녀는 눈길을 다른데로 돌려버렸다. 까만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거렸으나 그것도 잠시, 내리 깐 눈매는 순간에 생동함을 잃고 있었다. 다시보면 생기를 잃은 눈이였다. 마치 마른 우물의 동공과도 같은 무원조하고 구원을 갈구하는듯한 그런 눈길이였다. 그 눈동자에서 춘자는 다른 눈을 떠올렸다. 그 눈은 룡드레 촌에서 온 혜숙의 눈이였다.​ 광옥이가 달리는 군용트럭에서 뛰여 내린 소동이 벌어진뒤 트럭은 다시 달렸다. 흐느끼는 춘자를 실은 트럭은 달리고 달려 어느 간이역까지 와서는 또 한번 처녀들을 기차에 실었다. 꿈틀거리는 이무기같아 뵈는 기차가 춘자는 싫다. 처음 타보면서 호기심에 할랑거리는 마음으로 올랐던 기차였지만 그 기차는 수많은 턴넬들을 지나고 또 지나서 그녀를 지옥에 실어다 주었다. 이번에는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다. 창문하나없이 무지하게 큰 쇠문을 무작스럽게 드르륵 밀어 열고 그녀들의 등을 마구 떠밀어 짐짝 실듯 기차에 실었다. 찬 바닥에는 그저 짚이 깔려져 있을뿐이다. 눈앞을 가려볼수 없을정도로 기차바곤은 컴컴했다. 그저 부딛히는 팔뚝과 어깨 그리고 서로의 입에서 풍겨나오는 긴장한 단김만으로 상대가 누군가를 간신히 가릴수 있었다. 기차의 덜컹거리는 동음이 춘자의 심장박동수와 겹쳤다. “또 어델(어디를) 델꼬(데리고) 가는거야?” 어둠속에서 장님이 더듬듯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훑으며 춘자가 불안감을 못이겨 물었다. 그 불안감으로 허우적이는 손을 누군가 잡아주었다. “혜숙이니?” 손의 임자를 알듯해 춘자가 물었다. 후유… 상대가 아무말도 없이 긴 한숨을 뱉어 냈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누구도 알길없다. 그저 기차의 동음만이 집요하게 귀바퀴에서 맴돌뿐이다. 이 세상 풍파 심하고 또 환난 질고 많으나 춘자가 홀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거리든 해야 육신을 친친 동이고 있는 이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날것 같아서였다.   나 편히 쉬게 될 곳은 주 예비하신 주의 전​ “이 세상 풍파 심하고”라는 성가를 불렀다. 그젯날 사슴골 교회에서 장모세 선생님이 배워주었던 성가였다. 깎은 밤처럼 단정한 밤색 옷차림에 빛나는 반듯한 이마를 가졌던 선생님은 지금 어데 계시는지? 우리가 겪는 이 환난을, 이 질고를 알고 계시는지? 그렇게 애틋해 하던 신영이가 귀축같은 놈들에게 유린당하고 무간나락으로 떨어져 갔는지를 알고 계시는지? 광옥이는 지금쯤 어떻게 되였는지? 총탄에 쓰러졌는지 아니면 살아남아 아직도 수림속에서 헤매는지? 우리가 겪는 이 환난 이 질고를 선생님은 알고 계시는지? 주님은 알고 계시는지? 광옥이에게 생각이 미치자 춘자는 심장이 뜯겨나간듯한 괴로움에 앙가슴을 부여 잡았다. 이제 이 생에 울 분량을 다 울어버려 더는 흐를것 같지 않던 눈물이 또다시 보뚝을 허문 봇물처럼 흘러 내렸다.​ 주 믿는 형제 자매들 그 몸은 떠나 있으나…​ 목메이는 소리로 춘자는 마지막절 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혜숙이가 꼭 안아 주었다. 춘자의 손을 꼭 잡아 자기 가슴에 대여 주었다. 춘자와 꼭 같이 슬픔의 레일우에 올른 그녀의 가슴도 기차의 동음과 함께 오르내리고 있었다. 덜커덩. 기차가 어떤 역에 멈춰 섰다. 드르륵 무지하게 큰 철문이 열렸다. 갑작스레 덮쳐들어오는 한기 그리고 불빛에 처녀들은 눈시울을 좁혔다. 그것은 손전등의 불빛이였다. 수십개의 손전등의 불빛들이 란무하는 칼날처럼 처녀들의 육신을 훑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흐아! 괴성같은 홍소가 터져 올랐다. 춘자는 손전등 불빛뒤에서 쩌억 벌려져 홍소를 흘리고 있는 군인들의 벌건 입속을 보았다. 노부유키가 종이 메가폰을 들고 나와 그들을 향해 마주 섰다. 두 발꿈치를 착소리나게 모으고나서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성전을 위해 싸워주신 황군용사 여러분 수고많으셨습니다. 우리들이 몸과 마음으로 제공하는 호우시(봉사)를 받아주십시오. 주어진 시간은 한시간뿐이니 차바곤 세개로 나누어 공작하기를 바랍니다. 용사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반드시 ‘돌격1번’을 사쿠요(착용)하시길 바랍니다.” 병사 몇몇이 킬킬 거리며 노부유키가 건네준 군용배낭에서 피임도구를 꺼내 나누어 주었다. “용사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반드시 ‘돌격1번’을 사쿠요(착용)하시길 …” 노부유키가 메가폰을 들고 거듭 강조했으나 그 말을 맺기도 전에 병사들이 그를 밀치고 우르르 기차바곤에 뛰여 올랐다. “유끄리, 유끄리 데이오(천천히 천천히 해요)” 노부요키가 목에 피줄기를 세우며 소리질렀으나 광분하는 병사들은 이미 방죽을 무너뜨린 홍수였다. 병사들이 밀치는 바람에 노부유키는 바람개비처럼 맴을 돌았고 그의 손에서 메가폰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그야말로 산에서 내려 온 이리떼가 어린 병아리들이 있는 축사를 덮쳐드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밀치닥거리며 뛰여 올라 저마끔 위안부들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차바곤은 경악에 찬 비명과 괴기스러운 홍소소리로 가득했다. 미처 오르지 못한 사병들은 차바곤안에 손전등을 들이 비추며 킬킬거렸다. “빨리빨리 끝내” “늑장부리지마”, “다음은 내 쥰방(순번)이다” 기다림에 급해난 병사들은 멱따는 소리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때 역사쪽에서 노래소리가 터져 나왔다. 왁살스럽게 터져나오는 노래소리에 춘자는 와뜰 몸을 떨었다. 너무나 익숙한 노래였다. 그날, 춘자네가 이름 모를 역에서 군영에 실려 가서 맨 처음 처녀를 앗기던 그날, 온 군영과 그녀들의 육신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그 마당에서 들려왔던 바로 그 노래였다. 행진곡풍의 노래소리는 역사의 지붕에 처매 단 스피카에서 울려와 작은 역의 상공에 울려 퍼졌다. 방어도 공격도 쇠로 만든 성이라 믿음직하네 떠 있는 그 성은 해 뜨는 황국의 사방을 수호하리라 . 차바곤 바닥에 대자로 누운 춘자와 혜숙의 머리는 서로 맞닿아 있었다. 이리떼에 몸퉁이를 짓눌리고 휘둘리우며 두 사람의 머리가 쿵쿵 맞부딛했다. 둘의 눈이 한데 얽혔다. 어둠속에서 손전지불빛에 언뜻언뜻 드러난 그 눈길은 그렇듯 무원조했고 그렇듯 절망적이였다. 그렇게 처연한 눈길을 춘자는 여태 본적이 없었다. 춘자는 두눈을 감아 버렸다.​ 떠 있는 그 성은 해 뜨는 황국의 사방을 수호하리라​ 흔들리는 손전지불이, 귀청을 란타하는 노래의 고성이 그녀들의 몸을 훑고 흔들고 때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광란의 잔치가 끝나고 처녀들이 미처 혼나간 정신을 수습할사이도 없이 노부유키가 기차바곤에 뛰여 올랐다. “17번, 21번, 23번, 36번, 42번 나와라” 손전지불로 얼굴들을 하나하나 비추어 보며 되는대로 10여명의 처녀들을 점명해 내였다. 처녀들은 노부유키의 윽박지름에 차바곤에서 내렸다. 너나가 비칠거리며 기차에서 내렸다. 그중에는 혜숙이도 있었다. 하신의 통증으로 혜숙이는 서지도 못한채 배를 부여잡고 쭈그리고 앉았다. 역구내의 한켠으로 트럭 한대가 왕방울눈같은 헤드라이트 불빛을 쏘며 달려 왔다. 달려와 처녀들 앞에 멈춰 섰다. 기차바곤에 앉은채 이 광경을 보는 춘자의 가슴으로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아가르(타라)” 노부유키가 처녀들을 떠밀었다. “부대의 수요로 너희들은 다른곳으로 이도오(이동)한다” 혜숙이가 트럭에 오르다 말고 춘자쪽을 건너다 보았다. 또 한번의 무원조한, 절망적인 눈길을 춘자는 보아야 했다. 하염없이 춘자쪽을 바라고섰는 그녀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쓰러져 있던 춘자는 팔꿈치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겨든 목소리를 살려 불렀다. “혜숙아!” 이때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무작스럽게 철문이 닫혔다. 철문의 쇠소리가 춘자의 부름소리를 잘라 먹었다. 꽤액! 사나운 짐승의 포효처럼 기적이 울었다. 덜컹, 뒤로 한번 움칠하다가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흔히 “처벌방”에는 하루의 시간을 가두곤 했다. 소위 위안부들이 어긴 위안소의 계률이 크더라도 이틀, 사흘이 고작이였다. 하지만 춘자가 처발방에 내쳐진 시간은 길었다. 그 이전에도 춘자는 “처벌방”에 갇힌적 있었다. 위안소 탈출을 기도하다 잡혔던것이였다. 혼자서 트럭에서 뛰여 내린 광옥이를 생각하면 이 낯선 지역에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또 그처럼 왜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을가 자신이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위안소밖을 벗어나 갈래갈래 뻗은 골목길에서 춘자는 방향감을 잡지못하고 허둥댔고 인차 쫓아온 사람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갔다. 눈두덩이가 붓도록 맞았고 이틀간 처벌방에 갇혔다. 아마 그때의 일도 있고하니 더 갑절로 처벌을 주는상 싶었다. 배에 난 상처에 딱지가 앉은것만 봐도 일주일은 더 되는것 같다. “쪼막수염”이 내뱉었던 말이 다시 귀청을 때리며 떠올랐다. 조센삐 그녀와 같은 조선의 위안부들을 비하하는 욕이였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욕을 귀에 못박히게 들으며 자랐던 춘자였다. 허나 엄마의 그 것은 끝없는 생활고에 찌들은 엄마가 습관처럼 내뱉는 어투였고 또 귀한 자식이 애틋한 나머지 하는 사랑의 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놈들이 내뱉는 욕은 이와 달랐다.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이 사이로 찌익 내뱉는 그 욕설은 그녀들의 자존을 란타해 탕갈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살갗을 파고들어 뼈를 부수고 골수깊이 박히는 말이였다. 노부유키가 늘 내뱉었던 말이였다. 이제 그 덤턱스러운 놈의 상판대기를 보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에서 또 그 채찍형벌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처벌방”에 갇혀 처음에는 귀축같은 놈들의 얼굴을 보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랭하고 독한 어둠살만이 가득한 독방에 갇혀 있는 시간이 오래되자 불안이 그물그물 덮쳐왔다. 하루에 한번 들이미는 만두와 죽도 이제는 배당되지 않았다. 이대로 굶어죽이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물을 마시지 못해 목이 탔다. 자긋자긋 깨문 보풀딱지로 가득한 입술에서 배릿한 피냄새가 느껴진다. 바깥의 동정을 살펴 출입문에 귀전을 바싹 가져다 대기도 했다. 처벌방은 위안소 2층건물에서 담 하나 사이둔 폐가의 한방에 설치되여 있었다. 풍향이 바뀌면 위안소 2층의 소리가 귀에 잡혀 오기도 했다. 깊은 밤이면 노래소리도 간혹 들려왔다. 중국인 위안부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쇼탕(小唐)이라고 하는 량볼에 보조개가 깊이 파인 앳된 위안부소녀가 악기를 타며 노래를 부르곤했다. 소녀가 타는 것은 거북등 같은 곳에 네줄을 메운 비파라는 악기였다. 쇼탕은 연주를 하려고 그랬던지 오른손의 손톱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그 손톱으로 튕겨내면 청아한 곡조가 뿜어져 나오곤 했다. 곡조에 꼭 걸맞게 쇼탕은 명주실처럼 가는 소리로 노래부르곤했다.​ 금릉의 성은 크기도 하여라 안으로 십팔리 밖으로 십팔리 그 풍경은 천하의 으뜸으로 알려 졌네​ 아름다운 곡조였지만 겨울바람이 소슬한 밤에 들을려니 왠지 청승맞기 짝이 없다. 비록 알아들을수는 없지만 그 곡조와 그 노래소리에 춘자네도 함께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병사들이 찾아드는 날이면 명주실처럼 가는 소리를 내던 그녀는 위안소에서 변형된 고성으로 울부짖곤 했다. “이따이(아파요), 이따이!” 야수같은 놈들에게 고통을 호소하려 겨우 배운 일어 한마디로 목놓아 하소했다. 허나 수욕에 리성을 상실한 야수들은 그 절규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유난을 떤다고 “처벌방”에 가두까지 했다. 어느 한번 노래를 부르던 쇼탕이 비파를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춘자네는 그녀와 그저 눈빛으로만 의사소통을 했다. 허나 이 순간만은 그 신산한 울음의 의미를 알것 같았다. 알수 있었다. 이튿날 쇼탕은 끊어진 비파의 줄을 다시 메웠다. 그리고 비파의 원뿔형 줄감개에 붉은 술을 달았다. 그리고는 춘자를 향해 비파를 들어 보였다. 파리한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이 떠올랐다. 새로 단장한 비파를 들고 쇼탕은 또 노래를 부르기 지작했다.​ 금릉의 성은 크기도 하여라 안으로 십팔리 밖으로 십팔리​ 그러던 그 노래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 춘자네가 도착한 이 곳은 첫날부터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쾅 쾅 어디선가 포성이 간헐적으로 울려 왔다. 탕탕, 따다당 총소리도 들려 왔다. 마치 콩볶는 소리처럼 끝없이 들여 왔다. 덤턱스럽게 큰 것이 지나가는듯 으르렁하는 쇠바퀴 소리도 들려 왔다. “으고꾸나아(꼼짝하지 말고 있어라)” “지금은 센지죠교오(전시상황)이다. 위안소 밖을 한발자국도 나가면 안된다. 섿다이(절대) 안된다” 덧이 “오까상”이 처녀들을 향해 윽박지르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부터인가는 쥐죽은듯이 고요해 졌다. 그 고요함이 더욱더 불안을 가배 시켰다.     “누구 없소? 게 누가 없나요?”     목청껏 소리질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나레까 기데?(누구 없어요?” 위안소에서 엉성하게 나마 배워둔 일본어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밖은 역시 물밑처럼 괴잠잠하다. 춘자는 쾅쾅 문을 두드렸다. 그러다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판난 버선발에 걸친 고무신도 해여져 밑창이 말랑말랑했다. 발이 못견디게 아팠으나 춘자는 필사적으로 처벌방의 문을 걷아찼다. 물밑에서 솟아오르려는 사람처럼 단말마로 비명지르며 필사적으로 문을 걷어 찼다. 우지끈!   나무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찬 바람이 훅 들이 닥쳤다. 추위에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덴겁히 쑥색 담요를 머리우부터 뒤집어 썼다. 비칠거리며 처벌방을 나왔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나온 춘자는 밝은 빛에 현기증을 느끼며 두 손으로 눈을 가리였다. ​ 위안소는 텅텅 비여 있었다. 어느새 철수 했는지 횅댕그렁하게 말끔히 비여 있다. 기차에 실려 왔던 수십명의 조선인 처녀들도, 어눌한 조선말, 중국말을 쓰며 꺼드럭대던 관리인 “오까상”도 앳된 얼굴의 쇼탕도 어디로 갔는지 없다. 대문가에 걸었던 위안소 간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춘자는 담요를 뒤집어 쓰고 골목길로 나왔다. 혹시 누군가 뒤쫓아 나오지 않나 해서 위안소쪽을 되돌아 보았다. 아무도 쫓아오는이가 없다. 허겁지겁 걸음을 옮기는 그의 황황한 눈길에 무언가 밟혀왔다. 그 물건을 확인하는 순간 까닭없는 공포가 후려치듯 덮쳐왔다. 그것은 비파였다. 분명 쇼탕이 타던 현악기 비파였다. 비파의 원뿔형의 줄감개에 빨간 술이 달려 있으니 분명 그의 악기가 맞았다. 비파는 공명함이 깨져 있었고 줄이 끊어져 문어발처럼 너불거리고 있었다. 더럽혀진 빨간 술이 소슬한 바람에 나붓겼다. 쇼탕이 그렇게 아끼던 악기였다. 어느 한번 신기하게 눈여겨보는 춘자에게 만져보라고 내주었다. 가야금비슷한 그 악기를 받아들고 춘자는 조심스럽게 줄을 튕겨 보았다. 탱! 맑고 쟁쟁한 소리가 났다. 둘은 마주보며 어줍게 처량하게 웃었다. 으깨진 비파를 보노라니 쇼탕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고 불안감이 엄습해 들었다.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춘자는 알수 없었고 그 미지의 상상이 그녀에게 국수발 불듯 공포를 배가시켜주었다. 다시 위안소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주홍빛 대문과 주홍빛 창틀이 눈에 안겨오자 새삼스러운 공포가 느껴졌다. 올크러진 상상과 공포를 주체할길 없어 춘자는 뒤미처 뛰기 시작했다. 먹지 못한 몸은 삭풍에 내쳐진 허수아비같았다. 하지만 허우적거리며 일심으로 뛰기 시작했다. 위안소만 멀리 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뛰였다. ​ 골목길을 벗어났고 포구가 눈앞에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 다음순간 춘자는 그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몽매(夢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현실감을 다잡기 위해 두눈을 올롱하게 치떴다. 넘실거리는 강을 마주한 포구에서 춘자는 무엇을 보았던가? 포구에는 무언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산채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그것이 당금 배에 실을 그 무엇인줄로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보는 순간 춘자는 정수리로 우럭우럭 뜨거운 피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시체였다. 시체더미였다. 시체가 집채처럼,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시체들은 그 무슨 넝마조각처럼 형체가 비탈려져 있었고 피칠갑이 된 얼굴은 저마다 기괴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시체더미주위에 흥건한 피가 고여있었는데 이미 응고되여 온 포구 바닥이 주홍빛으로 번들거렸다. 수십명의 쿠리(苦力)들이 장갑을 끼고 시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시체들을 들어 방파제 우에서 강에 던져 넣었다. 그 무슨 공사장에서 토벽돌을 옮기는 인부들처럼 무덤덤한 기색으로 시체들을 맞들어 양자강에 던져 넣었다. 시체는 강바닥에 덧쌓여 새로운 둑을 만들고 있었다. 인부들의 장갑이 벌건 피로 물들어 있다. 던져 넣을때마다 방파제 아래 얼지않은 양자강의 물이 철썩 튕겨 올랐다. 튕겨오르는 물보라는 진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붉은 물결이 수귀의 혀바닥마냥 널름거렸다. 문득 욕지기가 느껴져 춘자는 쭈그리고 앉으며 토악질을 해댔다. 먹지도 못한 속으로 멀건물을 토해 냈다. 무언가 발에 물컹한 기운이 느껴졌다. 춘자는 깜짝 놀라 발을 옮겼다. 그것은 사람의 팔뚝이였다. 잘려진 사람의 팔뚝이였다. 게걸음치는 그의 발에 또 무언가 걸채였다. 또 사람의 시신이였다. 물컹물컹 시체의 조각들이 허둥대는 그의 발에 밟혔다. 악악 춘자는 새청맞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하나 그녀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바탕 피의 광풍이 휩쓸고 간 성은 기괴하리만치 고요한 체념에 빠져 있었다. 석고를 바른듯 하얗게 질린 얼굴, 체념한듯한 얼굴의 사람들은 짐짝을 메고 들고 길바닥에 뒹구는 시체를 징검다리 넘듯 훌쩍 훌쩍 뛰여 넘어서 어디론가 황급히 가고 있다. 그들의 발치에 걸려 잘려진 머리통이 그 무슨 뽈처럼 데구르르 구울기도 한다.   그저 부지런히 옮기는 걸음들만에서 어서빨리 이 지옥의 성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들이 엿보였다. 둘러보니 온 시가지는 오물의 사태를 뒤집어 쓰기라도 한듯 순식간에 더럽혀져 있었다. 깡그리 부서져 있었다. 건물도 성벽도 나무도 차량도 그리고 사람도… 포구 둘레의 사거리 구석구석에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다. 집채들은 불에 타버렸고 성벽은 무너져 있고 그 가녁을 따라 또 시체들이 쌓여 있다. 아직도 저 멀리서 뭉게뭉게 연기가 자우룩하게 피여 오른다. 어디선가 토혈하는듯한 녀인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끔찍한 현장앞에 움음소리라도 들려오면 실감이 나련만 울음은 인차 그쳤다. 이 도시 사람들은 이제 울음조차도 잃어버린듯 했다. 트럭들이 포구를 향해 몰려 오고있었고 트럭에 실린것은 모두가 시체였다. 화물을 부리듯 시체들을 우르르 쏟아놓으면 다른 트럭이 또 다가와 쏟아내는것 역시 시체였다. 꿈이리라, 꿈이면 아주 지독한 꿈이리라. ​춘자는 우묵한 악몽의 구덩이에 빠져들어 가위눌린 사람처럼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소한 겨울비는 피비린내를 몰고 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물에 바닥에 응고되였던 피물들이 다시 벌창해져 흐르기 시작했다. 비바람에 춘자의 검은 치마가 차랑차랑 나붓겼다. 하늘과 땅이 몰경계(沒經界)로 자오록히 내리는 피빛 겨울비속에 춘자는 망연자실 서버렸다. ​ "연변문학" 2015년 9월호 ​  
366    우리의 이야기를 여러 어종(語種)으로 세상에 들려주자 댓글:  조회:1904  추천:15  2017-02-10
우리의 이야기를 여러 어종(語種)으로 세상에 들려주자  - 연변작가협회 성립 60주년 기념 간담회에서 한 발언 김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몇해전 연변대학과 한국 제주대학교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스토리텔링학술대회에 참석해 크게 감명을 받은적 있다. 여기서 우선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란 “사건에 대한 진술이 지배적인 담화 양식”으로 작가의 이야기 전개를 이르는 말이다. 최근에는 쓰임에 따라 더 넓은 의미를 갖기도 해서 문학을 넘어 음악, 미술, 무용은 물론 영화, 연극, 만화 등 모든 문화 예술 령역에서 스토리 텔링은 어느 곳 어디에나 있다.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실감케 해주는 실례로 중국의 불멸의 고전 “삼국연의”를 들수 있고 우리 민족은 “춘향전”을 들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영화나 드라마, 연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만화등으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번안되면서 수없이 활용되고 있다. 그로서 창조된 거대한 효익은 스토리 텔링이 얼마나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 올수 있는가를 보여준 실례이다. 그 스토리에 새 옷을 입혀 번안한 작품 “춘향”으로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도 몇해전 “준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었다.   정보, 뉴스의 과잉시대에 우리의 작품을 더 크게 알리려면 스토리의 옷을 입혀야 한다. 좋은 스토리는 독자들의 몰입과 공감도를 높이고 그 만큼 감정이입 효과도 크다. 이야기의 향연은 사람들을 절로 책을 들게 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문화 원형자료는 빈곤하고 생동한 이야기는 자리를 비웠다.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멋 등 문화원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만의 특산인 사과배며 황소며, 벼에 대한 마케팅은 아직도 원활하게 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에 깃든 구수한 이야기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음식이야기도 없다. 한국에서는 음식테마를 이야기로 풀어내린 드라마 “대장금”으로 아세아에서 폭넓은 성공을 거두었다. 아직도 연변의 CD점들에 가면 “대장금”은 현요한 위치에 놓여져 있고 이 드라마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에 비해 우리에게는 김치며 랭면이며 찰떡등 타민족과 외빈들이 감탄해 마지않은 특색음식들이 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느 민족처럼 우리 민족 역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민족이다. 설화, 민담, 전설… 우리의 산하, 우리의 력사에 깃든 그러한 것들은 매우 유용한 이야기 소재가 된다. 룡정은 우물 이야기, 도문은 두만강 이야기, 안도는 집단부락 이야기, 화룡은 청산리 이야기, 훈춘은 충청도마을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생산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가공할 수 있는 원형들이다. 그동안 전해 내려오는 우리네의 다양한 인문자원에서 남들의 이목을 끌만한 이야기꺼리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투신할 필요가 있다. 전통문화유산에서 실질적인 콘텐츠를 찾는 스토리 라인 발굴이 요구되는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리해와 중시가 결여된 탓으로 우리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고스란히 넘기고 있다. 일제와 맞선 15만원 탈취의거, 민생단사건의 교훈,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화가 한락연의 일대기, 지어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에서의 조선인들의 활약상등 우리의 주인공 우리만의 이야기가 이미 해외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장편소설로 엮어지고 연구론문으로 나왔다.   이제 문학창작에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이 필요하다. 본격문학의 완결성을 지향하면서도 소설과 독자 더욱이 독자층이 빈곤한 우리 민족독자층을 넘어 외래의 독자와의 쌍방향성, 수용의 접점을 찾아내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 우리 특색의 문학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이른바 우리 특색의 문학이란 곧 지역문학사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어떻게 간직할것인가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그 지역특수성과 독자성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면 변별성을 잃게 되고 반복적인 소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문학은 매력과 탄력성을 잃게 될수있다. 그러면 주류문단과의 접목이며 세계로의 진출은 지상담론에 그칠수밖에 없을것이다. 우리문학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통해서 조선족문학의 본연의 모습을 우리의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야기해낼수 있어야 하며 그로서 자가(自家)의 독특한 경지를 새로 개척해야한다.  따라서 우리말 작품의 번역의 진부함에 관해 감히 말해보고저 한다. 글로벌화시대, 번역의 중요성은 더 운운할 나위가 없이 중요하다. 우리 문학이 “중국문단과 접목하고 세계로 나가자”고 호소를 거듭한지도 수십년째 잘된다. “쌍수리개 전략”이요하고 거창한 이름을 달고 진척해보았지만 그 효과는 미비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훌륭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전면적으로, 체계적으로 번역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해째 번역이 몇몇 같은 사람에만 국한적으로 그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아니다. 지어 윤동주나 김학철 같은 거목들의 보귀한 유산인 주옥같은 작품들에 대한 번역조차 빈약하다. 타민족은 이들이 누군지조차 잘 모른다.    번역인재는 타지로 대도시로 빠지고 있고 번역의 후배양성도 미흡하다. 번역가들은 생계때문에 한국의 작품, 그리고 상업성에 치우친 작품을 번역하는데 많은 필봉을 바친다. 조선족의 번역가가 대도시로 나가서 타민족의 민족영웅을 소재로 한 대형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활약하는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적 있다. 또 “민족문학”과 같은 소수민족작가들을 전문 소개하는 권위문학지를 받아들고 목록을 펼치면 조선족 작가가 가장 적고 때론 지어 작품 한편도 없을때면 그야말로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 작가들중에 중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는 사람이 몇명 안된다. 근년래 우리 문학사에서는 중국말로 전문 창작하고있는 김인순, 전용선, 김창국등을 문학사에 보충해 넣음으로서 이면에서의 공백의 유감을 무마하려 하고있다. 이로서 번역에 대한 중시도를 다시금, 더 강도있게 호소하고 관련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소수민족문학치고는 비교적 많은 문학상을 갖고있는 우리의 허다한 작품상중에 번역상은 없다. 우리의 문학지들은 더불어 코너를 신설하여 조선족 번역작품도 중국어로, 외래어로 싣고 소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을 선정기획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상급과 기업가들의 호응과 찬조를 얻어내야 한다. 이면에서 연변의 가무와 축구는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작가는 “번역은 나를 국경 밖으로 데리고 가는 우방과도 같다”고 했다. 번역이 없다면 한 어종의 문학이 다른 어종의 나라로 뻗어나갈 방법이 없다.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주류문단과 접목하고 세계로 나가는 지름길은  좋은 번역가를 만나고 그에 따른 마케팅법을 기획하는 것이다.  FTA, 즉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수출입 장벽을 낮춰 경제령토를 넓힌다”는것을 슬로건처럼 내걸었다. 이처럼 외국과 타민족과의 문학을 많이 읽을뿐더러 우리의 좋은 작품이 더 많이 더 수준높게 번역되여 널리 읽힐수록 우리작가들에게는 높기만 한 언어 간의 장벽이 낮아지며 문학, 문화의 령토가 더욱더 넓어질것이다. 아무쪼록 우리 작가와 번역가들의 선전(善戰)을 빈다.
365    노벨문학상수상자 막언(莫言)과 댓글:  조회:1576  추천:12  2017-02-10
 ​ 노벨문학상수상자 모옌과​ 지난 11월30일부터 11월3일까지 북경에서 열린 전국작가대표대회기간 중국대륙문단의 거목,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가까이 할수있었던건 아직도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막언선생과 함께 할수 있은건 크낙한 기쁨이였다.​ 나는 80년대 중기 막언의 출세작 “붉은 수수”를 스크린에서 본뒤로,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해 읽었고, 영화, 텔레비드라마로 각색된 영상물도 모두다 갖출 정도로 그의 “골수팬”이다. “백구 그네대(白狗秋千架)”와 같은 그의 단편소설을 조선말로 번역 했었고 언감 평문도 달아보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 랑보(朗報)가 터져오르자 곧 평론, 대담, 칼럼, 방송등 다쟝르를 동원해 그의 작품들을 조선족 독자들에게 소개하기도 했었다.     중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막언은 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영화 의 원작 소설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다. 막언은 1955년 2월 17일  산동성(山東省) 고밀(高密) 대란향(大欄鄕) 평안춘(平安村)의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관모업(管謨業)이나, 글로만 뜻을 표할 뿐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모옌(莫言)’이란 필명을 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학업을 포기하고 수년 간 농촌 생활을 하다가 소학교를 중퇴한 뒤 18세 되던 해 면화 가공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1976년 20세 나이로 고향을 떠나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 문학에 눈을 돌려 1978년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해방군 예술학원에 입학, 1986년에 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과 루쉰 문학창작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81년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소속 1급 작가로 일하다가 1997년 사직하고, ‘검찰일보’에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981년 격월간지 『련(蓮池)』에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春夜雨)」를 발표한 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84년 발표한 「황금색 홍당무(金色的紅蘿蔔)」(1985년 「투명한 홍당무(透明的紅蘿蔔)」로 개작)가 좋은 평가를 얻게 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87년 대표적인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을 발표해 반향을 일으켰고, 그 작품의 일부를 장예모 감독이 영화 으로 제작해 198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이는 막언의 작품이 전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   와 이후 장편소설 『천탕 마을 마늘종 노래(天堂蒜S之歌)』(1988), 『열세 걸음(十三步)』, 『술의 나라(酒國)』(1993), 『풀 먹는 가족(食草家族)』(1993), 『풍유비둔(豊乳肥臀)』(1995), 『탄샹싱(檀香刑)』(2001), 『사십일포』(2003), 『생사피로(生死疲勞, 인생은 고달파)』(2006) 등을 발표했다. 「환락」, 「생화를 품은 여인」, 「폭발」,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등의 중편소설과 「그네 틀의 흰둥이」, 「메마른 강」, 「엄지수갑」, 「눈얼음 미녀」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여줬다. 이 중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는 장예모 감독에 의해 영화 로 제작된 바 있다. 장편소설 와 『풍유비둔』은 그의 창작상 최고조에 오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1,2』는 1980년대 중국의 개혁ㆍ개방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농촌 마을과 관료 사회의 부패 양상을 탁월한 주제의식과 기교로 그려낸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희곡과 텔레비전 드라마 극본을 썼는데, 1997년 창작한 희곡 「패왕별희(覇王別姬)」는 무대에 올려져 중국 대도시를 중심으로 두 달간 연속 공연되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93년에 출간된 『술의 나라』는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소개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데뷔 후 중국 최고의 문학상인 대가大家)문학상을 비롯, 프랑스 루얼 파타이아 문학상, 이탈리아 노니로 문학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상, 홍콩 아시아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대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막언은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중국의 첫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영예까지 얻었다.스웨덴 한림원은 막언이 “환상적인 리얼리즘을 민간 구전 문학과 역사, 그리고 동시대와 융합시켰다”며 “환상과 현실, 역사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이 절묘하게 엮인 문학 세계를 창조했다”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막언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윌리엄 포크너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시킨다고 분석했다.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364    김혁의《마마꽃, 응달에 피다》에 대한 심리분석학적고찰 댓글:  조회:2087  추천:10  2017-01-17
  김혁의《마마꽃, 응달에 피다》에 대한 심리분석학적고찰        오광욱 (연변대학, 문학박사)  "마마꽃, 응달에 피다" (초판본) 2005년 "마마꽃, 응달에 피다" (재판본) 2014년 1. 들어가는 말    조선족문단의 유명한 중견작가인 김혁(1965~)의 장편소설《마마꽃, 응달에 피다》1)는 작가의 자서전적요소가 짙은 성장소설이다. “문화대혁명”을 시대배경으로 사춘기 청년들의 방황과 갈등, 그리고 그들의 부동한 운명을 그려낸 이 소설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2)한국에서는 2009년부터 이 소설에 관한 석사학위론문과 평론들3)이 륙속 출현하였다. 지금까지 이 작품에 관하여 비교적 심도있는 연구들이 진행되였는데 전경업, 이새아 등은 이 소설을 사회력사적인 각도에서 우리민족의 생존환경과 그 심태를 보여준 작품으로, 혹은 시대가 개인에게 가져다준 상처에 대해 론의하였고 우상렬, 최미령 등은 이 소설을 왕삭(王朔)의《동물의 사나움》(动物凶猛)과의 비교를 통하여 내용, 형식 등 방면에서 성장소설의 여러가지 양상에 대해 론의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조선족문단에 출현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고 더욱이 작가의 고백에서처럼 “성장기소년의 심리의 궤적”4)을 그린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한 론문은 보이지 않고있다. 하여 필자는 본고에서 김혁의 장편소설《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분석심리학의 리론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스위스 칼․융(Carl Gustav Jung,1875-1961)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고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실현(自己实现)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식의 중심에 흔히 “나”라고 부르는 자아(自我)가 존재하고 반대로 무의식의 중심에는 “모르는 나”인 자기(自己)가 존재하며 의식속에 있는 자아가 무의식속의 자기를 하나하나 깨달아 둘이 서로 상호보완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하나로 통합될 때 자기실현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자기실현은 사실 엄숙한것도 심각한것도 아니다. 바로 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며 우리 모두가 가지고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삶을 가능한 한 많이 실현하는것이다. 한마디로 분석심리학은 자기실현은 인간의 삶의 본연의 목표이며 자아(알고있는 나)가 무의식세계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자기(모르는 나)를 부단히 파헤쳐 만나고 함께 “포옹”함으로서 자기실현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며 이로써 자신의 행복, 나아가 전반 사회의 행복이 가능한것이라고 주장한다.    김혁의 장편소설《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주인공 김찬혁의 자기성장을 보여준 소설인것만큼 주인공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성장하고 자기실현을 하였는가를 재미있게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분석심리학적으로 보면 자기성장이 없는 자기실현은 있을수 없고 자기성장은 자기실현 그 자체이거니와 자기실현의 과정이라고 할수 있기때문이다. 작품에서 성장기의 내면적갈등을 보여주고있는 주인공 김찬혁은 의식의 세계에만 치우치지 않고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크나큰 호기심과 탐구정신, 즉 강렬한 자기실현욕구를 가지고있으며 미지의 무의식세계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파헤쳐 만나고 통합하면서 원활하고 즐거운 자기성장을 이룩한다. 하지만 작품속의 주요 인물인 “똥파리”는 자기성장은커녕 무의식이 자아를 덮쳐 자아훼멸을 맞이한 비극적인물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주인공 김찬혁의 자기성장과 작품의 다른 중요인물인 “똥파리”의 자아훼멸을 분석심리학적으로 접근하여 그 심층적인 의미를 확실히 하는 동시에 작품을 분석심리학적으로 연구하는 방법론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소설속의 작중인물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접근은 현시대 복잡다단한 생활속에서 심리적인 고통을 받고있는 이들에게나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줄수 있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2. 김찬혁과 “똥파리”의 자아(Ego)      인간의식의 중심에 우리가 흔히 “나”라고 부르는 자아가 존재하고있다. 자아 또는 “나”는 의식된 마음을 통솔하고 또한 무의식의 마음과도 관계를 맺을수 있는 의식의 특수한 콤플렉스5)이다. 그래서 자아콤플렉스라고 한다.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느낌, 나의 리념, 나의 과거, 내가 아는 이 세계, 무엇이든 자아를 통해서 련상되는 정신적내용물들은 모두 의식이다. 바로 이 의식의 중심에 자아가 자리잡고 의식을 통치하고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없으면 인간정신의 성숙이나 개성화, 즉 자기실현은 불가능하다. 자아는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바깥세계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의 내면세계를 살펴 이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하는 기능이다. 의식의 중심으로서 의식을 통제하고 견고히 하는것이 자아이지만 동시에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 받아들여 이를 동화시키거나 그 뜻을 인식하는것도 자아의 몫이다. 그만큼 자아는 자기실현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되는것이다.6)    《마마꽃, 응달에 피다》의 주인공 김찬혁의 자아, 즉 김찬혁이 스스로 느끼는 “나”의 모습이 도대체 어떠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화상편에서 상세히 묘사되여있다. 머리가 보통 큰게 아니라 무지무지 커서 “가분수”라고 불리우며 그만큼 총명하여 동네에서 “총기가 있는 아이, 똑똑한 아이, 어른스럽고 진중한 아이”7)로 정평이 나있다. 그리고 “성미가 고와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고 남의 집 바람벽에 쌍스런 그림을 그려넣거나 지나가는 계집애들의 태머리를 쥐여당겨놓고는 아닌 보살하는 그런 불량배들의 무리에도 가담하지 않았다.”8)여기서 “총명”하고 “똑똑”함은 지적으로 성숙되였음을 의미하며 “어른스럽고” “진중”함은 심리적으로 성숙되였음을 의미하는바 자아가 의식의 중심을 통치하고 자아의식이 어느정도 성숙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은 무의식을 의미하고 “고분고분”하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주인공 김찬혁은 자아의식을 의미하며 그런 불량배무리에 가담하지 않았다는것은 그에게 있어서 이미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분화되였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어린시절 김찬혁은 자아가 의식의 중심을 통제하고 자아의식이 어느정도 성숙되여 자기성장, 즉 자기실현의 필수조건을 갖추었고 의식과 무의식이 분화되여 이제는 자아가 무의식세계의 여러 내용물들을 서서히 맞이하고 파헤칠 준비가 되였음을 의미한다.      이런 김찬혁은 어느날 어머니의 심부름을 받고 물고기를 사러 늪으로 가며 늪에 버려진 죽은 아기를 보고 충격에 휩싸이며 “딱 이름할수는 없지만 분하고 억울하고 뭔가 잘못된것 같은”9)심정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아기의 죽음에 대한 무수한 의혹과 질문덩이들이 머리속에서 맴돌며 “처음으로 생명이라는 존재와 그 소중함, 그에 대한 인간의 처사에 대해 생각을 더듬었다.”10)    늪에 버림받아 죽은 아기는 무엇을 상징하고 그걸 목격한 김찬혁의 분하고 억울한 심정과 의혹을 어떻게 리해할수 있을까? 심리학적으로 늪은 그 깊이, 내용물 등을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인것만큼 미지의 세계, 즉 무의식세계를 상징하며 물은 모든 잠재적가능성의 원천, 무의식에 잠재한 모든 에네르기의 상징이다.11)그리고 죽음이 있음으로 하여 새로운 탄생이 있듯이 부모의 버림을 받아 죽은 아이는 김찬혁의 지금까지의 기존의 자아를 상징하며 성숙된 자아의 탄생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름할수 없는 울분과 고민은 주인공이 낯선 무의식세계의 진입을 앞두고 자기성장에 대한 내적인 갈등과 고민이 시작되였음을 의미하며 또한 아기의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의혹은 낯선 무의식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욕구로 해석된다. 그리고 아기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생각하고 느꼈다는것은 자아의식이 한단계 성숙되였음을 의미하는바이다.    한마디로 늪에 버려져 죽은 아기의 모습을 보았음은 김찬혁이 무의식세계를 마주하여 기존의 자아를 돌이켜보고 성숙된 자아의식을 가지고 심리적으로 힘든 고통을 감수하고 어려운 상황들을 이겨내며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자기성장, 즉 자기실현을 시작하였음을 암시해 주고있는것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찬혁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 절박해지며 어머니한테 집요하게 문의를 거듭한 결과 자신이 부모가 신분이 나쁜탓으로 버림받고 지금의 양부모한테 부양된 사실을 알게 된다. 진상을 알게 된 김찬혁은 “온몸의 실피줄이 터져버리는것만 같았고 발가벗기우고 네거리에 밀려난듯한 한없는 수치감을 느꼈고 온 세상이 공모해 나 하나만을 똥구덩이에 밀어넣은것만 같게 생각되였다.”12)자신의 정체가 밝혀지고 늪에서 본 죽은 아기가 눈에 자주 떠올랐고 김찬혁은 울분과 괴로움에 휩싸이게 된다. 여기에서 “버림받음”을 자기실현, 자기성장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새로운 정신을 이루기 위하여 자아가 기존의 낡은 정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다. 즉 지금까지의 “나”를 버림으로써 자아가 안주해있었던 익숙한 세계로부터 분리되여 낯선 무의식의 령역에 입문하여 자기성장, 자기실현을 하는것이다. 칼융은 말한다. “어린이한테 있어서 버림받음, 내버림, 위험 등은 한편으로는 보잘것없는 출발점의 전형적형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에 가득찬 비범한 출생에 속한다. 이런 표명은 창조적인 성질을 지닌 정신적체험을 묘사하고있다.”13)융은 “버림받음”을 새로운 성장과 탄생을 위해서는 부수적인 현상이 아니라 필요한 조건으로 보았고 그 “버림받음” 고통의 의미를 알고 견디어 나간다면 정신의 창조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자기성장의 값진 밑거름이 될것이라고 보았다. 김찬혁에게 심리적갈등이 생기는것은 자아가 창조적원천의 무의식을 통합해 자기성장을 이루고 자신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는 심리적으로 필연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이 동반됨을 의미해주는것이다.    총적으로 주인공 김찬혁은 성숙된 자아가 무의식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되여 미지의 낯선 무의식세계에 대해 입문과 탐구를 시작하며 개성화의 실현, 즉 자기성장을 서서히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작중 중요인물인 “똥파리”의 자아는 어떤 모습일가?  “똥파리”에 대한 소개는 그가 유명짜한 불량배로부터 시작된다. “똥파리”는 “싸움질, 로략질을 밥먹듯 하는” 악명이 자자한 인간이며 말을 더듬는 언어장애자다. 우선 “황야의 무법자같은” 존재인 “똥파리”는 자신의 공격, 생존 등 본능적욕구에 따라 행동하는만큼 자아가 강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인간임을 의미한다. 기분 나쁘게 말하면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가 언어구사를 제대로 못하는 말더듬쟁이라는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따위를 제대로 똑똑히 표현하지 못하는만큼 자아의 세력이 극히 미약함을 의미한다. 세번째로 “똥파리”무리는 모두 엄연히 본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는 “똥파리”를 포함한 이들에 대해 별명으로 대신하며 심지어 “똥파리”는 김찬혁을 무리에 받아들일 때 “찬혁이는 우리 네 사, 사람이다”14)라고까지 한다. 이름은 한사람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운명과 직결되고 그 사람의 자아를 대신한다고 할 때, 이같이 별명으로 본명을 대신함은 “똥파리”의 자아라는 개체의 형성자체가 불투명하거나 자아의 세력이 극히 미약함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똥파리”의 불투명한 자아는 강한 무의식의 지배와 수시로 되는 공격에 기를 펴지 못하고 의식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힘이 약한 “불쌍한” 존재인만큼 자아의식이 성숙되지 못하였고 무의식세계가 거의 그 자신을 지배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처럼 “똥파리” 의 자아는 항상 훼멸의 위험에 처해있는것이다.     3. 김찬혁과 “똥파리”의 페르조나(Persona)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의 자기성장과정에서 자아는 한편으로는 무의식의 내면세계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세계와도 관계를 맺어야 한다.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필요한것은 바로 개체의 외적인격인 페르조나이다.    페르조나는 고대 희랍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말한다. 이것은 자아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해가는 가운데 형성된 행동양식이면서 집단무의식에 속한 일종의 기능 콤플렉스로서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고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15)페르조나는 우리말의 얼굴, 낯, 체면 등과 같은 개념이며 사명이니 본분, 도리니 하는 말은 페르조나를 표현하는것으로 사회집단이 개인한테 기대하고 요구할 때 생긴다. 부모의 앞에서는 자식의 페르조나, 안해앞에서는 남편의 페르조나, 후배앞에서는 선배의 페르조나, 이처럼 인간은 사회적관계속에서 이런저런 가면들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면서 생활하며 자기성장을 도모한다.    이제 주인공 김찬혁의 페르조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김찬혁은 “똥파리”무리에 가담하려고 그 패거리 일원이고 친구인 김표를 찾는다. 김표는 김찬혁의 의향을 듣고 “니가? 니같은 모주석의 훌륭한 어린이가?” 하며 앙천대소를 한다. 그리고 “똥파리”를 만났을 때 학급의 문예선전대골간이였기에 노래를 잘 불러 “똥파리”의 칭찬을 받는다. 뒤이어 김찬혁은 “똥파리”의 “시험”에 응해 “회충”과의 싸움을 거쳐 나중에는 “똥파리”의 승인을 받고 성공적으로 그 무리에 가담한다. 여기서 김찬혁은 원래 “모주석의 훌륭한 어린이”, “노래잘 부르는 애” 등 페르조나를 지녔지만 “회충”과의 싸움을 통해 이제는“불량배”라는 또다른 페르조나를 집어쓰기 시작한다. 그뒤 김찬혁은 자전거를 훔쳐오고 몸에 문신을 하고 패싸움을 하며 별명이 “앵무새”인 계집애를 “귀신집”에 가두어놓는 등 여러가지 악행을 저지른다. 이런 점은 그가 이미 “똥파리”무리에 가담하여 악당, 건달로 탈바꿈함으로써 “불량배”의 페르조나를 완전히 지녔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불량배”의 페르조나를 지닌 김찬혁은 상철형님에게서《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라는 소설을 지꿋게 간청하고 빌려 이틀동안 독파해버림으로써 공부를 잘하고 책읽기를 즐기는 김찬혁 자아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쌍두마차”패와의 싸움에서 상철형님의 권고에 따라 싸움에서 빠지고 도망치며 “친구들이 생사결단을 벌리는 판국에 여우처럼 혼자서 빠지다니? 나는 아직도 똥코치임이 틀림없어.”16)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도 역시 김찬혁은 “불량배”의 페르조나에서 벗어난, 성미가 온순하고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하는 자아의 숨기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나타낸다. 뿐만아니라 학교문예콩클에 참가하여 자신의 장끼인 시랑송을 하고 멋진 연극까지 선보이는 행동, “앵무새”라는 계집애를 골탕먹인 사건때문에 “앵무새”집으로 사과하러 가고 “앵무새” 벙어리엄마의 후덕한 마음씨에 얼굴까지 붉히며 자신이 저지른 못된 행동에 심심한 후회까지 하는 장면, “마스크귀신”을 만나 함께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금붕어까지 얻어가져 기르는 장면 등등에서 우리는 남을 때리고 도적질하고 건달행세를 해야만 하는 “불량배”의 페르조나를 도저히 볼수가 없다. “똥파리”무리에 가담하여 싸움하고 빼앗고 남을 괴롭히고 “영웅행세”를 하는 “불량배”의 페르조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찬혁은 그러한 페르조나에 얽매이지 않고 책읽기, 공부하기를 즐기고 순박하고 선량하며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김찬혁은 불량배와 자아를 동일시하지 않고 성숙된 자아의식의 지배를 받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때때로 나타낸것이다.     칼융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개인이 자신의 페르조나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단일한 페르조나를 지녔을 때, 즉 사회적 의무로 대변되는 외적인격인 페르조나를 자아와 완전히 동일시할 때, 자아는 무의식의 내면세계와 내적관계를 상실당하여 인간정신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할뿐더러 심리적건강을 방해받게 된다. 하여 “페르조나는 가상(假相)이다”라고 칼융은 말한다. 페르조나는 사회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기능 콤플렉스이지만 그것이 바로 그 사람자신, 진정한 그 사람의 길은 아닌것이다.17)그리고 페르조나를 거짓, 가상이라고 여겨 없애야 할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격의 발전과정에서 여러가지 페르조나는 형성되여야 하고 다만 자아와 구별하고 상대적인것으로 구별되여야 자기성장이나 자기실현이 가능한것이다.      페르조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것이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고 할 때, 김찬혁처럼 페르조나에 얽매이지 않고 수시로 자신의 내면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것이야말로 자기성장이나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이다.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널리 인정을 받고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가면에 빠지지 않고 자아에 충실함으로써 정신적으로 건강한 힘을 얻을수 있기에 소설속의 김찬혁은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를 유지하여 무의식세계를 좀더 살필수가 있는것이며 결국에는 자기성장을 도모할수가 있는것이다.    김찬혁에 이어  “똥파리”의 페르조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똥파리”는 불량배무리의 “우두머리”이고 힘으로 대변되는 “형님”이라는 페르조나를 시종일관하게 지니고있다. 즉 “똥파리”의 자아는 싸움질 잘하고 누구나 무너뜨릴수있는 강한 힘을 지닌 “나”이고 무리에서도 언제나 남을 지배하고 영웅적행세를 하는 “우두머리”이고 “형님”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시종 자아와 페르조나를 동일시하고있음을 알수있다. 뿐더러 “쌍두마차”를 힘으로 굴복시켜 자기 무리에 끌여들여 동생으로 만드는 장면, 특히 “사마귀”가 “똥파리”에게 있어서 분명히 “불량배선배”이고 나이도 많은 “형님”임에도 불구하고 “똥파리”는 후배, 동생의 페르조나를 바꿔쓸 대신 힘과 세력을 동원해 “사마귀”를 오히려 동생으로 만들고 “형님”의 페르조나를 고집하고있다. 이처럼 힘으로 대변되는 “형님”이라는 페르조나를 자기의 유일한 사명과 삶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똥파리”한테 있어서 자아와 외적인격인 페르조나와의 동일시때문에 자아는 내심을 살펴볼 겨를이 없고 자아는 무의식세계와 관계를 건립할수 없다. 그리고 “똥파리”가 “사마귀”를 위수로 하는 “마가네”패싸움에서 여지없이 참패를 당한후 히스테리적으로 변하게 되는것 또한 자신과 “형님”이라는 페르조나를 동일시하던 그가 자신이 항상 고집하던 “형님”의 페르조나가 상실됨으로서 생기는 도덕적혼란이거나 정신적인 충격인것이다.    한마디로 “똥파리”는 “형님”, “우두머리”의 페르조나에서 어느 순간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형님”의 페르조나를 고집하고 자아의 절대적인 모습으로 간주하고 행동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간의 단절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의식과의 관계단절때문에 살기 힘든 무의식의 공격적인 내용들이 자아를 수시로 침범하고 힘이 약한 자아는 항상 불안에 빠지고 훼멸의 위험에 처해있을수밖에 없는것이다.   4. 김찬혁과 “똥파리”의 그림자(Shadow)      칼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는 의식에 가장 가까운데 있는 무의식의 내용이며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심리적내용이다. 그림자는 자아의 어두운 면, 자아로부터 배척되고 버림받아 무의식에 억압된 자아의식의 여러가지 성격측면이다. 쉽게 말하면 그림자는 “나”가 싫어하는 “또다른 나”, 앞으로 “나”가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있는 나의 어두운 “형제”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부정적이고 열등한 측면과 자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도덕한 요소들로 구성되여있다. 이처럼 그림자는 우리가 직면하기를 꺼려하는 모든 렬등요소이고 아직 자아가 접수하지 않은 요소들이지만 사람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기에 언제나 의식에 동화되려고 하며 우리가 그림자를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심하면 자아의식을 덮쳐 지배하고 자신뿐만아니라 남까지도 해칠수 있는 거대한 파괴적인 힘이 작동된다. 하여 칼융은 “사람들이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할 때 그것은 본능의 랭혹하고 위험한 양상을 지니게 된다”18)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그림자를 밖에 있는 다른 대상을 통하여 본다. 이를테면 상대방에게서 간사하다, 치사하다, 비굴하다 등 열등한 성향을 느꼈을 때, 자신의 간사함, 치사함 등 그림자가 대방에게 투사되여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칼융은 인간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그림자 투사로 인해 생긴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나와 같은 성(性)의 대상에 투사되며 거기서 우리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19)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억압되여 있는 그림자는 절대적으로 나쁜것이 아니다. 무의식에 억압되여 해빛을 보지 못하고 있기때문에 나쁜것처럼 보일뿐이고 의식화로서 그림자는 발전될뿐더러20)자기성장, 자기실현의 좋은 에네르기가 될수 있다. 자아가 그림자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살려서 자신의것으로 통합하게 되면 그속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의식세계를 지배하여 심리학적인 의미의 성숙이 이루어진다. 그동안 배척하고 버린 자아의 “또다른 나”, 어두운 “형제”인 그림자를 통합하는것은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며 자아가 무의식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했을 때, 에너지가 흐르는 온전하고 행복한 삶, 즉 칼융이 요구하는 자기실현을 이룰수 있다.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주인공 김찬혁과 주변인물들간의 갈등, 또한 그 주변인물들간의 상호갈등을 그렸고 더 큰 의미에서 혼란의 시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묘사한것만큼 그림자를 그려낸 소설이라고 해도 억지는 아닌상싶다. 특히 제목자체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때, “마마꽃”은 주인공의 그림자를 의미하고 그러한 그림자가 무의식을 상징하는 “응달”에서 피였음은 주인공이 무의식세계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새롭게 탄생되였을뿐만아니라 자기성장을 이룩하였음을 시사하는 바다. 재미있는 표제이다. 이제 주인공 김찬혁이 어떻게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자아의 “친구”와 자기성장의 밑거름으로 만들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김찬혁은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똑똑한 아이”, “어른스럽고 진중한 아이”이고 “머리로 을 배격하면서 선생님들을 마구 떠박지른적이 없었고” 또한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성미가 고운 애”였다. 뿐만아니라 “앞장서 담임교원에게 대자보를 써붙이는 그런 영웅적기질을 가진 소년영웅들의 서렬에도 없었고” 계집애들을 희롱하는 건달도 아니였다.21)초중으로 진학함에 따라 김찬혁은 이런 자아의식이 성숙되고 자신이 싫어하는 그림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체육과대표였다. 김찬혁의 고백을 한번 보기로 하자. 길지 않기에 원문을 그래도 인용해본다.      “학창시절을 지낸 사람들이고보면 거개가 학급의 체육과대표에 대해 은연중 콤플렉스를 지니고있는것 같다. 그 무진장해보이는 힘, 까닭없는 위세에 질려 기가 죽는것이다. 더우기 질서와 법이 무시된 란리의 세월에 약골의 신체를 가진 애들에게 있어서 힘의 상징물로 대변되는 체육과대표에 대한 콤플렉스는 더욱더 큰것이였다”22)      김찬혁은 힘과 위세를 가지고있는 체육과대표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있다. 특히 자신은 약골의 신체를 가지고 있기에 힘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체육과대표에 대해 강한 콤플렉스를 지니고있다. 자신은 힘이 약하기에 항상 힘으로 모든 상대를 제압하는 체육과대표는 그가 싫어하는 인물이며 그의 그림자인것이다. 즉 김찬혁의 자아는 순진하고 힘이 약하기에 힘이 강한 상대는 김찬혁 자아의 배척과 버림을 받아 무의식에 잠재한 자아의 어두운 “형제” 인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는 바로 힘이 센 체육과대표에 투사되여 나타난것이다. 한마디로 김찬혁은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한것이다.      그후 김찬혁은 김표의 소개로 모두가 부르죠아보다 더 미워하는 “똥파리”불량배무리에 가담한다. 불량배무리에 가담하는것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이 싫어하는, 힘이 강한 그림자를 직면한 김찬혁은 그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는것을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얌전하고 말썽을 안 일으키고 건달을 싫어하는 김찬혁에게 있어서 강탈, 싸움, 녀자를 희롱하는 등 악행을 일삼는 “똥파리”불량배무리는 김찬혁 자아가 싫어하는 또 하나의 그림자이며 이러한 무리에 가담함으로써 김찬혁은 그 그림자가 두렵다고 억압하거나 회피 또는 억제하지 않고 용감하게 직면하여 힘이 강한 불량배의 페르조나를 가짐으로써 불량배그림자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 받아들여 통합함을 의미하는것이다. 그리고 문예콩클에서 김찬혁은 체육과대표와 함께 재미있는 연극을 선보이는것도 그가 자신의 그림자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하여 편안하고 활기가 차넘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느 정도의 자기성장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림자를 다룬 소설인것만큼 작품속의 많은 갈등에는 그림자가 보여지며 김찬혁은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하는것을 많은 곳에서 보여주고있다. 작품에서 김표는 김찬혁의 또다른 그림자일뿐만아니라 심지어 “똥파리”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그림자이다. 김표는 변소틈새로 녀자들의 치부를 훔쳐보고 녀자들의 속옷을 훔치고 심지어는 생리대까지 훔치는 “치사하고” “치졸스런” 습관을 가진 인간인것만큼 김찬혁을 포함한 모두가 싫어하는 그림자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하여 김찬혁은 그와 친구로 사귀였고 김표의 소개로 “똥파리”무리에 가담한후 녀자의 생식기해도를 같이 볼뿐더러 “저녁에 나오면 굉장한것을 보여주겠다”23)는 김표의 말에 김찬혁은 저도 모르게 김표의 부름대로 나와 둘은 녀자목용탕을 훔쳐보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김찬혁은 “치사하고” “치졸한”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하여 무의식속의 그림자를 의식화하여 “어두운 면”을 극복하였을뿐더러 그림자와의 통합을 통하여 자아와 무의식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의미한다. 만약 김찬혁이 김표같은 치사하고 치졸한 사람을 시기하고 그에 대한 분노를 품는다든가 혹은 그런 너절한 인간이 싫어 욕하고 구박하면 그것은 그림자의 함정에 사로잡힌 상태, 즉 무의식의 그림자를 의식화하지 못하고 배척, 거부하는 상태로서 그 결과는 자아가 내면세계를 살피지 못해 자아와 무의식세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심리학적의미의 성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것이다. 필경 자기성장은 자아와 무의식의 지속적인 련계를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하는것을 념두에 두어야 한다.    한마디로 작품에서 김찬혁은 자아의 이런저런 그림자를 대면하지만 그것을 부정적으로 여겨 억압, 회피 또는 거부하지 않는 반면, 무의식속의 그림자를 대담하게 자신의것으로 받아들여 돌보고 통합시킴으로서 시종 무의식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정신적으로 더 성숙되고 인간적인 사람으로 되여가는것이다.      이제 “똥파리”의 그림자를 살펴보기로 하자. 힘이 세고 싸움 잘하고 영웅적기개를 내세우는 “똥파리”한테 있어서 그림자는 분명 약하고 비굴하고 치사한 모습 등이며 이러한 그림자는 그가 시종 억압, 거부하는 대상이다. “똥파리”무리가《꽃파는 처녀》라는 영화를 보러 갔을 때 기타 애들은 영화속의 감동적인 장면에 눈물을 훔치지만 “똥파리”만은 성냥개비 하나를 물고 씹어댈뿐 무표정하다. 영웅적기개를 주장하는 똥파리에게 있어서 남자가 눈물을 쥐여짜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인것만큼 “눈물 흘리는 남자”는 “똥파리”의 또 다른 그림자이다. 그런 그가 눈물을 거부함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신의 그림자에 대한 억압, 외면과 거부이고 그 대가로 “똥파리”는 무의식의 공격에 심한 심리적갈등을 겪게 되며 모아산기슭에서의 울분과 고통의 눈물이 생겨나게 되는것이다.    그뒤 “똥파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배척하고 거부하는 모습을 시종일관하게 보여주고있다. 똥파리의 또 다른 그림자인, 별의별 치사한 짓거리를 다 하는 김표에 대해서도 “노기가 상설같이” 일어나고 김표에게 무서운 책벌을 안기고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리는 장면24), 자신의 녀자를 좋아한 상철이를 “광분하는 사자처럼 달려들어” 각목으로 후려갈기는 장면25)등등에서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강하게 배척하고 거부하는 “똥파리”를 쉽게 만나게 된다.    작품에서 “똥파리”의 훼멸은 자신의 그림자에 대한 억압과 거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자로 자부하던 “똥파리”가 “마가네”패싸움에서 여지없는 참패를 당하고 약자로 변했을 때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상대한다. 품위있게 실패를 인정하고 자신의 그림자를 기분좋게 안아줄 대신 그는 역시 강하게 배척, 거부한다. 이제는 자아와 무의식세계와의 관계가 완전히 상실되고 살지못한 무의식의 내용들이 의식세계를 공격하여 “똥파리”는 변태적으로 변하였고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국에는 자아훼멸에 이른것이다. 5. 나오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장편소설《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칼융의 분석심리학의 자아, 페르조나, 그림자 등 리론으로 접근하여 주인공 김찬혁의 자기성장과 “똥파리”의 자아훼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이상 론의한것을 다시 종합해보기로 하자.      작품에서 주인공 김찬혁은 성숙된 자아의식을 지녔고 자기실현, 즉 자기성장의 욕구를 가지고있는 소년이고 또한 무의식세계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탐구정신을 지녔기에 자기성장, 자기실현이 가능한것이다. 무의식세계와의 지속적인 련계를 취하기 위해 우선 김찬혁은 여러가지 페르조나를 쓰고 외부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아와 페르조나를 동일시하지 않고 자아 본연의 모습을 가끔씩 나타냄으로서 의식과 무의식사이의 지속적인 련계를 기할수 있었고 무의식세계의 내용물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창조적인 내용으로 변화시켜 자기성장을 해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렬등한 인격인 그림자를 억압, 배척, 거부하지 않는 반면, 그림자를 인식하고 살려서 자신의것으로 보기좋게 통합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창조적인 힘이 자아에 스며들어 심리학적인 의미의 자기성장을 이루는것이다.    작품의 다른 중요한 인물인 “똥파리”는 자아훼멸에 이른 비극적인간이다. “마가네”패싸움에서의 참패는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 “똥파리”로 대변되는 자아가 무의식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령당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품에서 김표 외 김찬혁을 포함한 기타 사람들이 “똥파리”의 자아의식을 상징한다고 할 때 그들이 “똥파리”무리에서 떠남은 무의식의 공격에 “똥파리” 자아의식이 떨어져나가고 무의식에 점령당했음을 의미한다. 비록 장님이 된 김표가 “똥파리” 곁에 남았다고 하나, 눈이 멀었음은 심리학적으로 무의식상태를 상징하기에 “똥파리”는 그 자체가 무의식전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자아의식이 약한 “똥파리”는 자아와 페르조나와의 동일시, 그림자에 대한 억압, 배척, 거부를 지속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간의 소통을 진일보 단절시켰고 자아와의 관계를 맺지 못한 무의식의 살지못한 내용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자아와 의식의 구조를 산산조각내버렸던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의 공격에 무너진 자아는 소멸됨으로써 전체정신의 훼멸을 의미하며 “똥파리”는 비극적운명을 회피할 수가 없는것이다.    김혁의 장편소설《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심리학적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계시를 주고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태여나 사회와 관계를 맺고 여러가지 규범을 지니고 사회적자아로 태여날뿐만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과 대면하며 정신적으로 또 한번 태여나야 하는 정신적존재인만큼 자기성장을 하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기필코 수많은 심리적고민과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인간은 태여나 성장하여 사회적존재가 되면서 불가피면적으로  페르조나를 쓰지만 지식, 신분, 지위, 금전 등 기호에 의해 표현되는 이런저런 페르조나는 사회적관계속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표피적자아의 모습일뿐 인간 본연의 모습은 절대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자신의 표피적자아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적인 모습을 찾아야 할뿐더러 자신을 둘러보고 진지하게 내적인 자신과 대면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심리적고통이 동반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융은 진정한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세계의 자신의 그림자를 억압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자기의 주동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만이 자신이 싫어하는 “어두운 나”를 통합하여 그속의 창조적인 힘이 의식세계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심리학적인 의미의 성장, 즉 자기실현이 가능하기때문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하는것은 평생동안 해나가야 할 작업이라고 칼융은 말하고있다. 그림자를 통합하는 작업에 앞서 다른 사람에게만 있다고 생각한 그림자가 내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좀 더 낮은 자세로 바라다 볼수 있는 여유를 가질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겸손과 여유는 인간리해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여 일상생활에서 원활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기여할것이다.                                      --------------------------------------------------------------------------------------- 참고문헌: 1) 김혁,《마마꽃, 응달에 피다》,연변인민출판사, 2005년 12월. 2) 소설은 연변작가협회 제5기 계약작가 작품으로 선정되였고 2000년《도라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단행본이 2005년《장백산》문학상과 제5회 “진달래”문예상을 수상. 그리고 이 소설에 관하여 평론가 전경업의《생명, 그 노래는 레드》, 연변대학 우상렬교수의《성장소설 과 의 경우》 등 론문이 있음. 3) 한국에서 발표된 평론을 보면, 2009년 한국숭실대학교 권성은의 석사론문《디아스포라 문학의 ‘공간’연구: 김혁의 를 중심으로》, 2011년 한국방송대학 이새아의《일상사로 끌어안은 문혁의 폭력》등 론문이 있음. 4) 김혁,《그 시대 사춘기의 제전에 바치는 조화--장편소설초판본 후기》,《마마꽃, 응달에 피다》,상해원동출판사, 2014년 8월, 389페지. 5) “‘콤플렉스’란 의식, 무의식 모두를 구성하는것이지만 특히 집단적무의식을 이루는 ‘콤플렉스’를 像, 또는 원초적 또는 근원적유형, 줄인말로 原型이라고 한다.”이부영,《분석심리학》,서울, 일조각, 1998년, 60페지. 6) 이부영,《자기와 자기실현》, 할길사, 2006년7월, 32페지 참조. 7) 《마마꽃, 응달에 피다》, 11페지. 8) 《마마꽃, 응달에 피다》, 11페지. 9) 《마마꽃, 응달에 피다》, 17페지. 10) 《마마꽃, 응달에 피다》, 19페지. 11) (德)汉斯·比德曼著,刘玉红等译,《世界文化象征词典》,漓江出版社,2000年1月,323页。 12) 《마마꽃, 응달에 피다》, 37페지. 13) (瑞士)荣格著,徐德林译,《原型与集体无意识》,国际文化出版社,2011年5月,133页。 14) 《마마꽃, 응달에 피다》, 65페지. 15) 이부영,《자기와 자기실현》, 할길사, 2006년7월, 44페지 참조. 16) 《마마꽃, 응달에 피다》, 106페지. 17) 이부영,《자기와 자기실현》, 할길사, 2006년7월, 46페지 참조. 18) 김성민,《악의 문제와 그 극복에 대한 고찰》,한국기독교신학논총,2001년 22기,382페지. 19) 이부영,《그림자》, 할길사, 1999년10월, 41페지 참조. 20) 이부영,《자기와 자기실현》, 할길사, 2006년7월, 133페지 참조. 21) 《마마꽃, 응달에 피다》, 11페지. 22) 《마마꽃, 응달에 피다》, 34페지. 23) 《마마꽃, 응달에 피다》, 296페지. 24) 《마마꽃, 응달에 피다》, 300페지. 25) 《마마꽃, 응달에 피다》, 312페지 "장백산" 2016년 4호  
363    해란강의 늠실한 흐름에 이 몸을 실어 댓글:  조회:1370  추천:13  2017-01-17
. 축사 .   해란강의 늠실한 흐름에 이 몸을 실어 - 제2회 룡정시문학축제 “해란강은 흐른다”에 부쳐   김혁     존경하는 래빈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바르고 아름다운 운문(韻文)을 사랑해 불더위를 물리치며 이 자리에 모여 오신 문필가 여러분, 랑송애호가 여러분 이 소중한 자리를 빌어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해 여러분들께 축사를 올리게 됨을 광영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룡정이 낳은, 겨레가 애대하는 걸출한 인걸 세분을 추앙의 높은 제단에 모셨습니다.  저 하늘의 찬란한 성좌로 빛나는 걸출한 민족 시인 윤동주, 일제강점기 항일의 저항혼을 일깨운 심련수, 조선족 당대시단의 대표자 김성휘… 이들의 존함 석자를 부르고 되뇌는 일 조차도 우리는 사무침에 애련(愛戀)과 앙모의 심정을 먹먹히 곰삭이게 되는군요.   일송정 푸른솔의 기상과 해란강의 유장한 흐름을 안고 룡두레 우물가에, 북간도의 상공에 그리고 온 겨레의 마음속에 우련한 함자를 도렷이 새긴 이들, 그러한 민족혼들을 기리는 절절한 초혼의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그이들을 곡진하게 불러봅니다.   불과 한달전 저희 룡정.윤동주 연구회는 “별을 노래하다"는 명제로 윤동주 시인의 시읊기 가영대회를 비교적 규모있게 개최한적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민족의 인걸들의 아름다운 시심과 민족혼을 받들어가는 행사들을 이어나갈 서약을 주고 받았는데 오늘 또 한번 그러한 취지의 시 축제가 열리게 되니 참말로 소회가 가없네요.   우리의 선각자들이 개척의 보습을 박고, 교육계명의 종소리를 울리고, 일제와의 가렬한 사투에 해란강반의 진달래 꽃잎처럼 산화해갔던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 룡정에서 어머니 해란강은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기상 그 혼은 “잎새를 스치는 바람”(윤동주)으로 “힘차고 늠실늠실한 흐름”(심련수)으로 “세월은 흘러도 변함이 없이”(김성휘) 우리들의 심성에 스미고 뇌리를 흔들어 깨웁니다.    연변시랑송회가 2년째 비교적 훌륭하게 펼쳐 나가고있는 “해란강은 흐른다”라는 타이틀의 축제는 바로 고향의 강의 위상에 걸맞게 그 기상을 격앙된 목청에 담고 현란한 퍼포먼스에 싣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민족의 인걸들을 노래하고 그이들의 보귀한 정신적 유산을 고양해 가는 일들이 우리 문단 나아가 사회의 하나의 기상으로 자리 잡을때 우리의 하늘은 더욱더 청명을 펼치고 우리의 강은 더욱더 맑은 여울소리를 들려주지 않을가요!   해란강반에 족적을 남긴  시인들을 노래하는 이 자리에서 해란강을 읊조렸던 심련수 시인의 명시 “추억의 해란강”을 추려서 읊는것으로 오늘의 축사를 가름하고자 합니다.   내 잊지 못할 하나의 흐름인 너 검은 땅 간도의 품을 흐르는 생명수야 너는 영원히 믿음성있는 나의 동무였다  … …   얼마나 반겼는지 너는 알리라 고갈(枯渴)을 축이고 고로(苦勞)를 씻은 것도 이 몸이 이만 됨도 누구의 힘인지 알리라.   봄, 여름, 가을, 겨울 흐린 날 개인 날 말없이 혼자서 다닐 때에도 마음속엔 언제나 네가 동무하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2016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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