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창작론

전체 [ 123 ]

현상 저 너머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4)       김철교(시인, 평론가)         7. 읽기       문덕수는 시가 ‘소리의 시’와 ‘의미의 시’를 거쳐 이제 ‘이미지의 시’의 단계에 도달하여 ‘이미지의 지적 주권’ 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시인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문덕수, 『현실과 초월』, 시문학사, 2014, 13-22쪽).       문학비평용어사전에 의하면, 시의 이미지는 표현상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고, 시적 상황을 암시하여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엘리엇(T.S Eliot)의 ‘객관적 상관물’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녁노을을 통해 독자는 죽음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영섭에 의하면, ‘이미지는 철학에서는 실체의 환영, 심리학에서는 심리적 체험을 단순히 재생하는 심리적 작용, 시에서는 마음속에 언어로 그린 그림으로 운율과 더불어 시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는 역할을 한다’(이영섭, 「이미지의 유형과 실제」, 『시창작 이론과 실제』,(오세영 외 편) 시와시학사, 1998, 252-276쪽).       미술용어 사전에서는 ‘자연주의 미술에서는 대상을 직접 갖다 놓을 수 없으므로 그 이미지를 그렸던 것인데, 반자연주의적인 현대미술에서는 마음속에 잠재하는 환각이나 형상을 그리게 되고 여러 가지 사물을 변형시키고 조립함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표현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월간미술편, 『세계미술용어사전』, 369쪽).       어떤 정의를 인용하든 이미지는 實在(the real) 자체가 아니라 그림자다.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인간이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다.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파이프를 그리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써넣었다. 그림의 제목을 이라고 붙여 놓은 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미지)이지 진짜 파이프가 아니란 뜻도 담겨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는 파이프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어떤 나무로 되어 있고, 얼마나 낡았는지, 그리고 실물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 지 등 어떤 특성도 파악할 수 없다.     언어학적 측면에서도 ‘파이프’라는 단어는 파이프의 참된 성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파이프’라고 부르자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약속한 것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 멋있는 단어인 ‘곰방대’가 있다.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와 이미지(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한 원본은 인간인 이상 누구도 볼 수 없다) 사이의 정확한 의미 전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시각에 의존하여, ‘이것은 천국이다’, ‘이것은 죽음이다’라고 파이프가 그려진 그림 아래에 써놓는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여, 애연가의 경우 파이프 담배를 피움으로써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담배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폐암의 원인이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현존 너머의 원본의 세상을 보고자 하는 예술가에게는, 특히 시인에게는 언어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자신의 이미지로 무한히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물론 언어의 한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시인도 적지 않다.           *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   1929, 캔버스에 유채, 60×81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캘리포니아.         바짝 마른 장미꽃 다발에서 앵앵거리는 꿀벌의 날갯짓 들리나요? 닳아빠진 촛불에서 넓디넓은 꿈을 읽을 수 있나요? 장맛비에 휩쓸려온 뼛조각에서 화장품 냄새를 맡을 수 있나요?       지금 우리 자리는 죽은 자들 이미지의 묘지가 아닌가요? 우리 삶은 또 다른 복제물 복제물, 복제물이 아닌가요? 원본의 기억은 살아있나요? 원본은 있기는 있나요?       우리는 어디에 둥지를 마련할 수 있나요? 내가 눈을 감은 후에도 저 바다는 저 산은 감히 저기 저 자리에 버티고 있을 건가요? 아니 내가 있는 이곳은 도대체 어딘가요?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시인은 촛불이 다 닳아빠져 흔들리고 있는 서재에서 마른 장미꽃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전 산보하다 길가에서 마른 뼛조각을 발견했던 것을 문득 떠올린다. 지금-여기 내가 있는 것은, 오래 전에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관습이라는 이미지와 언어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진정한 모습’, ‘사물의 실재(the real)’와는 먼 시뮬라크르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죄를 짓기 이전의 하나님 형상(Imago Dei)을 닮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낙원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와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에 젖어 있는 것이다. 시인의 먼 미래, 사후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 존재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질문형을 반복하며 대위법적 기교를 활용함으로써, 그 질문의 절실함을 담아내고 있다.       김유중은 “시인은 여기서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가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이미지의 묘지’는 아닌지,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또 다른 복제물’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원본은 벌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추방되고 지워져버렸으며, 따라서 이 시대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창조적인 활동도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삶의 원형으로서의 원본, 예술가의 절대적인 이상으로서의 원본은 벌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그것을 되찾기에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실물로서의 원본이 사라진 시대, 그리하여 그것이 남긴 이미지만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시대가 바로 지금 현재, 우리 시대인 것이다”라고 평설에서 언급하고 있다(김유중, 김철교의 시집 『무제2018』평설, 2018, 시와시학, 141쪽).       8. 읽기       예술작품은 좋은 시뮬라크르다. ‘좋은 시뮬라크르’라 함은, 현상 저 너머에 대한 꿈을 머금고 있는 시뮬라크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시뮬라크르는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플라톤의 에이콘의 개념에 가까울 수도 있다.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개념은, 가상, 모조품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simulacrum)에서 유래한 말로,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즉 원본을 알 수 없는 복제물을 뜻하는 개념이다.       넓은 의미의 이미지, 보통명사로서의 이미지는 복사물(플라톤의 eidolon의 개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에이돌론(eidolon)을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으며, 에이콘은 원본이 반영된 복사물이라는 이미지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의 복사물로 원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만 시뮬라크르다. 플라톤은 이 시뮬라르크를 악마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에이콘은 실재를 닮은 것이지만 시뮬라크르는 에이콘을 복사한 것으로 원본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원본(이데아 + 실재)을 반영하지 않은 복사물은 저급한 것이다. 여기서 ‘이데아’는 지성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 즉 머리로서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실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 즉 오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들뢰즈는 원본이 반영되지 않은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 이데아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탈중심의 세상, 이데아를 재현하지 않는, 이데아를 바라보지 않는 재현파괴의 세상, 카오스적 다양성을 가진 개인중심의 세상, 다분히 ‘디오니소스적’이어서 유희적인 유목성을 가진 개인 중심의 세상, 무질서를 내포한 질서를 중시했다. 시뮬라크르 세계는 원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플라톤의 시각에서는 버려야할 악마적인 것이지만 들뢰즈에 의하면 시뮬라크르가 탈중심화된 체계의 중심을 여는 새로운 사유매체이자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한국외국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60~79쪽).       그러나 시뮬라크르에도 원본의 그림자가 남아있지 않을까? 복사의 복사를 반복하다보면 차이가 누적되게 되고 결국 원본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지는 몰라도 원본의 그림자는 남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뮬라크르인 것이지, 원본의 그림자조차도 없다면 그것은 ‘새로운 창조’와 다름 아니다. 시인이 한편의 시를 써서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읽힐 때, 그 시가 원본이냐? 시뮬라크르냐? 시인은 그것이 ‘원본’이라고, ‘실재’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독창적이어서), 그러나 그 시가 이 사회에 존재하고 수용된다는 것은, 환경과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복사한)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의미한다(김철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21-26쪽).         시인은 신에 가깝다고? 에라이, 시뮬라크르 너는 어떤 모습으로 복제된 거지? 어느 것도 원본은 없고 그저 차이만 반복된다면서?       y = ax + b, 변수들의 변치 않는 정의는 무엇일까? y = 나 x = 너 아니 하나님 a와 b는? 그림 속 텍스트도 텍스트를 그린 그림에 불과하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은 양 두툼한 책을 서슴없이 써내지만 행간에는 그저 황무지만이 널따랗고 위안을 주는 작은 풀꽃 하나 찾을 수 없다       인식 저 너며 이성 저 너머 감성 저 너머 거기엔 아무 것도 없는데 용량이 부족한 두뇌로 열심히 삶의 프로그램을 짜서 돌려본들 루핑이 걸려 평생 그칠 줄 모르고 쳇바퀴를 돌릴 뿐이다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가 인류의 원본(Imago Dei)이라면 지금의 시인 역시 시뮬라크르인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원본의 그림자가 남아있기에,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이어진 복제과정을 반복되어 온 ‘지금의 나’이지만, 창조주의 존재를 잊지 않고 복락원의 꿈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y = ax + b가 간단한 삶의 방정식이라고 한다면, 나(y)는 하나님(x) 혹은 이웃(x)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a와 b는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위치 혹은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x가 하나님일 때 a가 0인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겠고, -인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이 삶의 공식이 참인가? 여기서는 단순하게 1차방정식으로 표시했지만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기에 무한대의 다차원방정식일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그림 속 텍스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의미도,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글씨그림’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이 세상은 들뢰즈의 시각에 의지하면, 온갖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마치 원본을 찾은 양, 실재(實在)를 찾은 양, 사람들은 많은 책을 써내지만 그 글 중에서 진실의 양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신 직후 죄짓기 이전의 모습을, 온갖 이성과 감성을 동원해 찾으려 해도 여전히 죄악과 욕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에 루핑(looping)이 걸리면, 프로그램 속에서 동일한 명령이나 처리과정을 반복하여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주어진 뇌세포의 10%도 가동 못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언제 우리는 원본, 실재, 이마고데이를 찾아내어, 저절로 의인으로 살아질 날이 온단 말인가?       9. 읽기       예술의 본령은 현상 저 너머의 탐구라 하겠다. “다른 상징주의 작가들이 그러하듯 랭보에게도, 현실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외관을 지닌 모든 사물들은 단지 본질을 나타내고 투영하는 일부분일 뿐이지, 결코 본질 그 자체이거나 또는 본질을 충분히 투영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 파괴와 해체를 통해 현실적인 외관을 제거하고, 그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전혀 다른 ‘실체’를 ‘재건축’, ‘재창조’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랭보에 의하면 진정한 시인이란 ‘투시자’가 되어, 의식과 이성으로 느끼기보다는 현상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궁극적 본질을 ‘무의식’과 ‘상상력’에 의해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곽민석 역, 『랭보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148-154쪽).     * 미로(Joan Miro, 1893~1983), ,   1978, 캔버스에 유채, 92x73Cm, 마르요카 호안 미로 재단. 스페인.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 그 안에는 원죄로 인해 잊어버렸던 우리의 원본이 있을까?       천진난만한 언어로 꿈을 길어 올리는 환쟁이 천국의 지도를 완성하러 별나라에서 온 그가 날마다 주문으로 외우는 그림과 음악으로 외우는       함께 가자 함께 가자 함께 가자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 2018) 전문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왜 자기 작품에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고, 특히 미술가들은, 즐겨 「무제」라는 제목을 쓸까. 작곡가들도 대부분 작품의 제목대신 일련번호를 즐겨 쓴다. 베토벤 도 작곡 당시「운명」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아니다. 베토벤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가 붙인 이름이다. 특정 제목이 붙지 않은 예술작품은 수용자에게 무한자유를 허용한다. 호안 미로의 「무제 1978」라는 그림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그림을 보고 이라는 시를 쓴 시인은 미지의 별에서 온 우주선을 떠올렸다.     이성은 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감성은 자주 우리를 욕심에 휘둘리게 한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모두 천사일 수 없는가?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기 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는가? 내 멋대로 살아도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우리가 선하게 살도록 자동프로그램화 될 수 없는가? 모든 인간이 선하게 남을 배려하도록 프로그램된 칩을 머릿속에 심을 수 없을까?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주기도문’에서 외우듯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이 시에 대한 이덕주의 평설을 인용해보자. 시인은 이 그림을 보면서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을 연상해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쩌면, “원죄로 인해 잊어버렸던/ 우리의 원본이 있을까?”라며 삶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탐색하려 한다. 화자는 호안 미로에게, 타고난 “천진난만한 언어로/ 꿈을 길어 올리는 환쟁이”라고 신뢰를 보낸다. 예술가에게는 “천국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기에 긍정적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별나라에서 온 그”이기 때문에 자신이 희원하는 근원적 해답을 반드시 줄 것이라고 “날마다 주문으로 외우”며 기대치를 높여보는 것이다. 반복적인 “함께 가자”라는 구호는 후안 미로가 상상해내는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에 동승하려는 화자의 기원이 내포되어 있는 주문이기도 하다(이덕주, 「화가의 영혼과 교류하는 심미안」, 한국시문학아카데미 발표원고, ).       예술세계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본다. 호안 미로가 초대하는, 천국에서 온 우주선이 초대하는, 예술세계에서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원본(Imago Dei)을 만날 수 있을 것도 같다.(*)  
음악의 옷을 입은 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3)       김철교(시인, 평론가)         4. 읽기           * 클레 (Paul Klee, 1879~1940) ,   1929, 캔버스에 유채, 83.7×67.5Cm, 루드비히 미술관, 쾰른, 독일.       은 과 함께 클레가 음악의 대위법(對位法)을 활용하여 그린 그림이다(김광우,『칸딘스키와 클레』, 미술문화, 2015, 321~323쪽). 크고 작은 사각형 모양의 돌들이 반복되어 쌓이면서 길을 만들고 있다.   ‘예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클레는 스위스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화가가 되었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클레는 색을 소리처럼 사용하였다. 칸딘스키와 클레 모두 음악을 자신들의 추상화에 적용했지만, 사실상 이를 먼저 주장한 사람을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었다. 고갱은 “생활이나 자연에서 가져온 주제를 가지고 선과 색을 배열하여 일종의 교향곡과 화음을 만든다”고 하였다.       대위법(對位法, counterpoint)은 음악에서 두개 이상의 선율(멜로디)을 동시에 결합하는 다성음악(多聲音樂)이다. 규칙적인 시차를 두고 같은 음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연주되기 때문에 연결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여러 성부(聲部)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각 성부가 선율적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음악에서는 일반적으로 음의 수직적 결합(화성, 화음)과 수평적 결합(선율, 멜로디)을 통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있는데, 대위법은 수평적 결합에 해당한다. 캐논과 푸가는 대위법의 일종이다. 캐논은 하나의 성부에서 주제가 노래되면, 시간의 차이를 두어 다른 성부가 그 주제를 그대로 ‘모방’하여 뒤따른다. '돌림 노래'는 캐논형식의 전형이다. 푸가는 하나의 성부에서 주제가 제시되면, 이어서 제2의 성부가 이것을 모방하는데 이것을 ‘응답주제’라 한다. 그 동안에 제1의 성부는 응답주제에 대위(對位)하는‘대주제(對主題)’를 부르면서 진행한다. 주제, 응답주제, 대주제의 관계가 모든 성부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것이 푸가형식이다.       문학에서의 대위법은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으로,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어구를 연결하여 대비의 느낌을 강하게 강조하는 동시에 그 대립 자체가 하나의 통일성을 갖게 한다. 김종삼의 시에서 이러한 음악기법들이 잘 활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조용훈, 「김종삼 시에 나타난 음악적 기법 연구」, 『국제어문』, 2013, 321-346쪽), 푸가 형식을 활용하여 시의 의미를 한층 풍성하게 한 사례를 첼란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박미리, 「음악과 문학의 상호 매체성 – 한 예로서 푸가 형식과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 『독일어 문학』제56집, 2012, 121-146쪽).       클레의 그림 에서 그림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곧게 뻗고 안정적인 길이다. 그 옆의 수많은 샛길들은 좁고 불안정하고 아무렇게나 생겨난 오솔길이다. 우리의 삶은 고속도로처럼 평탄한 한 평생을 보내든, 불안정하고 흔들리며 어렵게 살든 결국은 하나의 지평선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게 될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결국은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났을 때, 후회 없는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클레가 그린 을 보면서, 대위법을 염두에 두고 을 썼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주어진 길이 어떤 길이더라도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푸른 바다로 향하는 길 모두에게 넓고 모두에게 좁은 모든 길 가지각색으로 가지각색의 길을 닦고 있다       바다 건너 아주 먼 바다 건너 내가 온 별자리를 향해 층층마다 다른 색깔로 비틀거리기도 하며 뜀박질도 하며 때로는 목적지를 환히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목적지를 잊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길       점. 선. 면. 색을 통해 가야할 길 가는 길을 알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치는 화가의 붓질 속에 아득하게나마 찾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붙들자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들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더라도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첫째 연과 둘째 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푸른 바다를 향하는 길을 가는 길손이며 각각의 길은 다르다. 푸른 바다란 각각이 지향하는 낙원, 본향, 고향인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며, 연어도 알을 낳고 죽기 위해 고향으로 회귀한다. 물론 그 고향, 즉 삶의 목적, 가고자하는 종착지는 모든 사람에게 다르다. 또한 가는 방법(삶의 노정)도 다르다. 어느 것이 정답이고 옳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연에서는 가는 길을 멈출 수 없는 숙명을 말하고 있다. “내가 온 별자리를 향해/ 층층마다 다른 색깔로/ 비틀거리기도 하며/ 뜀박질도 하며/ 때로는 목적지를/ 환히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목적지를/ 잊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길”인 것이다.       셋째 연은 예술가의 길을 노래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가야 좋은지 고민 없이 그저 간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가야할 길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른 길들은 어떤 길들일까? 길 너머에는 어떤 길이 있을까? 끊임없이 질문하며 가는 사람이 예술가다. “점. 선. 면. 색을 통해/ 가야할 길/ 가는 길을 알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치는/ 화가의 붓질 속에/ 아득하게나마 찾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붙들자/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들/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더라도” 꼭 그림 속에서 만이 아니다. 모든 예술, 더 넓혀 모든 학문 속에서 삶의 목표를 향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그저 아무 할 일 없이 세월을 소비하는 것을 시인을 참지 못한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인생은 얼마나 불쌍한가? 목적, 꿈, 소망(죽음을 앞에 두었더라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라도 가져야 한다)이 없는 삶은 동물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물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동물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시는 음악적 기법 중에 대위법을 잘 활용하였다. 대위법을 통해 리듬을 살리고 있고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또한 색채 이미지 ‘붉고 푸른 오렌지 빛깔’은 도, 미, 솔을 색채로 나타낸 것이다.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1-1915)은 음과 색채와의 상응관계를 연구한 바 있다.       삶의 조화로운 것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비록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아무 것도 볼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나의 모습을 찾아 예술 속에 한 평생을 던지겠다는 것이다. 이 시의 형식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리듬과 색이 합쳐진, 즉 ‘보는 리듬’도 클레의 이론에 따라 도입한 것이다.         5. 읽기                         피카소의 15m의 조각 작품 는 시카고 시청 앞에 세워져 있다. 이 조각상을 보고 쓴 시 에서, 시인은 거대한 조각 앞에 서 있다가, 자신이 조각 작품이 되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앞을 지나가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이,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을 관조하면서, 대위법적 구성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나름의 해답으로 자족한다. 반야심경에서 세상 모든 삶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없다’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저 있는 자리에서 자족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작품화 하였다. 없는 해답을 찾아 애쓰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구원이요 행복의 지름길이 아닐까 자문자답하면서.         거대한 몸짓이 우리를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안쓰러운 듯 행복한 듯 무심한 듯       거리를 초점 없이 거닐고 있는 노인들 손잡고 휘파람 부는 정다운 애인들, 애인들, 천방지축 재잘대는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       존재마다 무슨 제목을 붙일 수 있나요? 사람마다 딱 맞는 옷이 있나요?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데 있나요?       도서관에 꽉 찬 책들이 해답을 줄 수 있나요? 책장마다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그림자를 알 수 있나요? 책 속에 뭔가 있긴 있나요?       그냥 저 거리에 부는 매연 섞인 바람 속이지만 웃고 싶은 웃음이나 실컷 웃지요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6. 읽기                 미로,         호안 미로의 그림(, 1974, 216x174Cm, 캔버스에 아크릴과 목탄, 마요르카 호안 미로 재단)은 사람의 얼굴을 단순화 시킨 모습이다. 위쪽에는 머리를 표현하는 듯한 검은 색이 있고, 그 아래 검은 눈, 그리고 그 아래는 회색 얼굴빛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의 크기는 제법 커도 아주 간결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시로 쓴 에서는 빛의 3원색이 등장하고, 그러한 밝고 맑은 색깔에서, 다장조의 화음까지 읽어낼 수 있다. 사방에서 우리는 지켜보는 하나님의 눈을 염두에 두면서 그림을 응시하고 얻은 이미지를 시로 옮긴 것이다. 검은 색과 회색으로 그려진 그림 앞에 서면, 수용자의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을 법하지만, 시인은 이 그림에서 항상 우리를 따뜻한 눈으로 보살피는 창조주의 마음을 읽고, 삶을 평화롭게 관조하는 행복한 얼굴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도 대위법을 염두에 두었으며, 색깔의 이미지도 도입하여 미술과 음악 기법을 동시에 활용하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하늘에도 눈 뒤에도 눈 앞에도 눈 바다에도 눈       마음 깊은 곳에도 눈 너머 저 너머에도 눈 온 세상에 눈 눈 눈       정염이 맴도는 빨간 눈 세상 빛으로 가득한 파란 눈 교회 종소리 가득한 초록 눈   도 · 미 · 솔 저 너머 투명한 눈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 그분의 눈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우리 주위에는 많은 눈들이 있다. 하늘도 바다도 미지의 세계도 시인을 응시하고 있다. 주위 온갖 세상 사람들의 눈도 시인을 향하고 있다. 내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 대상과 내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인식의 눈은 그 분의 눈 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은 확인한다. 이해할 수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삶의 속박 속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그 분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다.(*)
춤과 색과 음의 불협화속에 있는 은근한 질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2)   김철교(시인, 평론가)     3. 읽기       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1911년 쇤베르크(A. Schoenberg, 1874〜1951)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 그 느낌을 그린 것으로, 청각적 체험을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하여 회화와 음악의 공감각을 표현한 것이다.       검은 색 부분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상징한다.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에 있는 청중을 나타낸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좌우 흰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란색은 쇤베르크의 음악이 홀을 가득채운 것을 그린 것이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색들은 각종 악기들의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김광우, 『칸딘스키와 클레 – 추상미술의 선구자들』, 미술문화, 2015, 19~20쪽).       보다 관련 작품을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딘스키, 쇤베르크, 스크리아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의 아버지,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의 창시자, 스크리아빈은 음을 색으로 표현한 선구자라는 점이다.       당시 칸딘스키가 다녀온 음악회에서는 쇤베르크의 ‘현악 4중주’와 ‘3개의 피아노 소품’이 무대에 올랐다고 하며, 이는 무조음악(無調音樂)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회였다. 무조음악이란 악곡의 중심이 되는 장조(長調), 단조(短調) 등의 조성(調性)이 없는 음악을 말한다. 으뜸음도 없어서 모든 음은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 쇤베르크는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7개의 온음과 5개의 반음을 포함한 12개의 음을 모두 사용하여 곡을 구성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12음 기법을 창안하였다. 장조나 단조의 조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조음악(無調音樂)은 쇤베르크 이후 일반화되었다.       당시로서는 불협화음이 음악에 도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것이 불협화음인지 화음인지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당시로는 혁신적인 기법이었다. 불협화음을 음악에 편입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부조화와 삭막함을 예술에 담아내어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아도르노가 현실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는 예술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현실을 왜곡하게 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현실의 고통을 표현해서 사람들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며, 그런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고 아도르노가 주장한 바 있다.       러시아의 신비주의 작곡가 스크리아빈(A.Scriabin, 1871~1915)은 자신의 음악에 시각적 효과를 더하기 위하여 작품이 연주되는 동안 개개의 음에 해당하는 빛을 투사하는 것을 시도한 바 있는데, C(도)=빨간색, D(레)=노란색, Db(레b)=자주색, E(미)=파란색, Eb(미b)=구리색, F#(파#)=군청색, G(솔)=오렌지색, A(라)=초록색, Ab(라b)=제비꽃색, B(시)=암적색, Bb(시)=철색이었다.(전상직, 『음악의 원리』, 음악춘추, 2014, 36쪽)       색의 삼원색은 상호조합에 따라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내고, 모두 합쳐지면 검은 색을 나타낸다. 음(音)들의 어울림에 따라 다양한 색깔로 표시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서 역으로 어떤 음악을 떠올릴 수 있을까? 또 어떤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각 개인의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의 역동에 따라 똑같은 그림과 음악에서도 행복 혹은 불행, 질서 또는 무질서, 고요함 혹은 잡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시상(詩想)을 얻었는지 살펴보자.                   *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 , 1911,   캔버스에 오일과 템페라, 77.5x100Cm, 렌바흐하우스(Lenbachhaus), 뮨헨.               색깔 속에서 화음이 들리고 (조화롭지 않아도 된다) 무질서한 선(線)에서도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캔버스에 콘서트 장이 서고 누군가 시를 낭송하면 된다 (시인이 아니어도 된다)       땀범벅 마당에서는 그렇게 음악과 미술이 문학이 뒤엉켜 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가 서고 지성도 감성도 찾지 못한 화성(和聲)이 완성된다       도는 빨간색 옷을 입고 미는 파란색 모자를 쓰고 솔은 오렌지색, 그래 오렌지를 입에 물고 흥겨운 춤을 추자 가야 할 길을 몰라도 그저 가는 길로 가자       - 김철교 (『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이승하에 의하면, “이 시야말로 ‘음악과 미술이 문학이 뒤엉켜/ 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를 세우는 융ㆍ복합적인 시가 아닌가 한다. (······) 시의 제3연은 랭보의 시 「모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 「춤추는 음악」은 음악과 미술과 문학의 융ㆍ복합을 꾀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승하, 「그림을 본 관람객, 어떻게 시를 쓰는가」,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202~203쪽)       시인은 칸딘스키의 그림 를 보면서, 음을 색으로 표현했던 스크리아빈(A.Scriabin, 1871-1915)을 생각한다. 스크리아빈은 음 높이와 색채의 상호관계를 연구하고 각 음계마다 색깔로 나타냈다. 빨간색, 푸른색, 오렌지색(노란색)은 도·미·솔을 은유한 것이다. 또한 시인은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를 떠 올린다.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콘서트에서 들었다는 무조음악과 연관시켜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제1연은 를 듣고 쓴 시이다. 처음에는 부조화(不調和)의 조화(調和)라할까 좀 생경한 맛이 있지만 자주 듣다보면 묘한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음들의 어울림, 조화로울 것 같지 않는 색들의 조화, 시인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대신하려는 시낭송가, 음악과 미술과 시가 어울리는 한마당이다. 화음이란 본래 조화롭다는 것을 말하지만, 조화로워야 할 화음이 조화롭지 않아도 조화로워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을 뭉뚱그린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그런 것이다.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이성적인 것이 현실이다. 서양에서 경영경제의 모든 이론들은 합리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기본적인 전제아래 경제이론과 정책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영경제 현장에서 모든 결정이 이성적인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 투자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17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일러(Richard H. Thaler; 1945〜)는 심리학과 경제학을 연결시킨 ‘행동경제학’을 세상에 내놓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으로만 행동한다고 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경제사회를 설명하고 있다.       비이성적인 결정들이 난무하는, 그러면서도 그럴듯하게 어울려 경제 경영사회가 비교적 순항하고 있다. 무질서 속의 질서, 그것이 인간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학문에서 이제는 의사결정 주체들이 더 이상 이성적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인간세계에서 비이성적인 의사결정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미가 전혀 없는 로봇이 경영하는 세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음악의 세계에서도 장·단조에 따라 화음을 잘 맞추어 오선지에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림도 현실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화폭에 오선지에 반영하고 있다. 표현주의 예술, 초현실주의 예술이 우리 삶의 참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쇤베르크가 표현주의 음악으로 분류되는 에서 사용한 알베르 지로(Albert Giraud; 1860~1929)의 시는 의미의 그림자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초현실주의 시(詩)다. 쇤베르크의 는 악기들과 소프라노의 음성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소리로 더 초현실적이다. 전통적인 조성(調性)과 화성(和聲), 형식과 구성 등을 부정하여 당시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음악이다. 표현주의 음악은 20세기 초의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세계대전의 어두운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혁신적인 운동이다.   제2연에서“무질서 속에서/ 은근히 질서가 서고// 지성도 감성도 찾지 못한 화성이 완성된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바로 인간 삶의 진면목이다. 인위적인 법칙과 질서, 지성만으로, 감성만으로 만들어진 예술, 정교한 이론에 의한 이루어진 화성, 그런 것들이 아니라, 모든 것이 뒤엉켜있으나 은근히 질서가 있는 삶, 그것이 이성적이지만은 않은 인간의 세계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토((Arthur Danto; 1924〜2013)가 『예술의 종말이후』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예술은 잘 정돈된 르네상스식의 예술이 종말을 고하고, 1964년 워홀의 가 미술전시장에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기존 예술이라는 것이 예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즉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던 예술이, 이제는 인간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그대로, 즉 이성에 의해 간추려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예술의 시대, 음(音)과 색(色)과 시(詩)가 구분 없이 어우러지는 세계, 그것이 진정한 예술의 세계이며 진정한 삶의 세계인 것이다.       제3연을 보자.“도는 빨간 색 옷을 입고/ 미는 파란색 모자를 쓰고/ 솔은 오렌지색, 그래 오렌지를 입에 물고/ 흥겨운 춤”을 추는 마당. 전통예술의 정돈된 오페라의 무대, 원근법과 잘 복사된 현실을 나타내는 캔버스가 아니라, 나이트클럽에서 추는‘막춤’의 예술이, 예술의 진정한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삶은“가야 할 길을 몰라도/ 그저 가는 길로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무슨 법칙과 이성적인 흐름에 편승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하루 아니 한 순간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 우리네 삶인 것이다.       시인이 경영대학원에서 지도했던 러시아 학생 중에‘나자’라는 학생이 있었다. 아주 춤을 잘 추었는데, 러시아에서 고등학교 때 정규과목으로 춤을 배운다고 했다. ‘나자’는 시인에게 춤을 가르쳐 주겠다하여 자주 유성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갔다. 시인은 짧은 시간에 스텝을 배울 수도 없어 그저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소위‘막춤’을 추게 되었다. 동행한‘나자’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한참 흥겨운데 무슨 격식이 필요하겠는가. 시인은 학생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막춤을 추면서 깔깔대며 즐거운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춤의 기본을 배운 학생들은 내가 보기엔 멋대로 추는 것 같아도, ‘은근한 질서’를 갖추었을 것이었지만, 나는 그런 기본기를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마구잡이로 흥에 겨워 추는‘막춤’이었다. 격식에 맞는 춤, 원칙에 맞는 춤, 그런 춤은 재미가 없다. 공연장에서 점잔을 빼면서 감상하는 발레도 나름대로 좋겠지만, 그것은 관객인 ‘나’의 세계가 아니라 특수 계급 즉 전문 배우들, 발레리나들의 세계인 것이다. 관객은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타자인 것이다. 막춤은 그저 흥겨운 대로 몸을 흔들어대는 무질서한, 그렇지만 보는 사람이나 추는 사람이나 함께 어울려 흥겨울 수 있다. 나이트클럽에서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막춤같은 음악, 그것이 정신과 맞닿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시를 쓴 것이다.       제3연에서, 도, 미, 솔은 다장조 으뜸화음이다. 으뜸화음은 으뜸음을 기준으로 3도 위의 음과 5도 위의 음을 함께 표현한 화음을 말한다. 장조에서는 ‘도 · 미 · 솔’의 화음이, 단조에서는 ‘라 · 도 · 미’의 화음이 으뜸화음이다. 일반적으로 장조(major)는 밝고 깨끗한 느낌을, 단조(minor)는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도·미·솔이 무질서하게 어울려도, 멋들어진‘자연스러운’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 물론 그 무질서는 낙서와 달리, ‘은근한 질서’를 가진 무질서인 것이다. 예술혼이 무질서를 무질서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은근한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무질서가 무질서로 머물 때 그것은 낙서요 소음이다. 예술가에 의해 은근한 질서를 갖추어져 있을 때 비로소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낙서 같은 한 줄의 글, 혹은 시장 잡배들의 상소리 같은 글들이 버젓이 시라는 옷을 입고 무대에 등장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원색이 서로 엉켜 모든 색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화음과 비화음이 어울려서 또 다른 조화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성과 비이성, 현실과 초현실, 의식과 무의식, 그것들의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넘나들며 ‘조화로움’을 생산하는 것이 예술의 세계다.       절경을 잘 묘사해놓은 그림보다, 어린아이들이 투박하게 그린 그림에서 진실된 감동을 얻고, 유명한 서예가의 정돈된 서체로 써진 글씨보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글씨들에서 우리는 더 푸근함을 느낀다. 정돈된 그림과 글씨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감상해야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그림과 글씨를 보면, 우리의 이성을 무장해제 시켜 안온한 느낌을 주어, 현대 사회의 톱니바퀴에서 짓이겨진 우리 영혼을 치유해 준다. ‘예술의 전당’에서 가끔 전시되는 어린아이들의 작품 앞에서 머무를 때가 더 평화를 느끼는 이유라 하겠다.(*)
그림으로 쓴 시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1)       김철교(시인, 평론가)     1. 열린 예술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 이후』(이성훈·김광우 역, 미술문화, 2012, 13쪽)에서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미술의 개념은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쓴 르네상스 때에 비로소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미술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며, 바자리 이후 1964년까지의 서양미술사를 하나의 르네상스 패러다임에 비유했는데, 이 전형이 1964년 워홀의 가 등장하면서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1965년부터를 ‘서양미술사 이후’의 시기로 인식하면서, 예술가는 이제 모든 형식과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예술가의 유일한 역할은 ‘예술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화장실의 낙서도 시집(詩集)으로 들어오면 시가 될 수 있고, 거리에 버려진 찌그러진 깡통도 전시장에 전시되면 예술이 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예술의 본질과 교신하는 예술 철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예술은 열려 있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질문과 해답을 읽을 수 있다. 생산자인 예술가의 의도와 소비자인 수용자(관객/독자)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예술이다. 수용자 사이에도 일치할 수가 없다. 무의식의 역동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양한 질문과 다양한 해답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술의 존재가 더 우리 삶에 귀중한지도 모른다.   삶의 본질과 행복에 대한 물음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 해답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모든 물음과 모든 해답이 다 옳다고도 할 수 있고 그르다고도 할 수 있다. 오직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김철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7쪽)   최근 예술은 미술이라는 장르를 앞세워, 활발한 융·복합을 통해 각자의 품을 넓히면서 영역을 계속 확장하여 왔다. 파리의 퐁피두 현대미술관, 니스의 근현대미술관은 물론, 우리나라 현대미술 전시장에 가면 회화, 조각, 사진, 음악, 영상, 스토리텔링 등을 비롯하여, 오만가지 혐오스런 오브제까지 어울려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는,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 장르를 넘겨다보며, 미술과 음악을 문자로 은유해 내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시문학의 좌표를 그려보고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을 2018년 12월에 출간한 바 있다.       이에 앞서, 관련된 실험시들을 2018년 8월에 시집 『무제2018』에 묶었다. 본고에서는 이 시집의 제5부 「이미지의 반란」에 수록된 열여섯 편을 해설하면서, 각종 미술 및 음악 이론과 기법을 어떻게 시 창작에 활용할 수 있는 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들 시는 마치 추상화 그림 앞에 서있을 때처럼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 올릴 수 있도록 의도된 시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면 쉽게 다가 설 수 없다. 마치 이우환(1936~)의 점·선·면 관련 작품들 앞에서 현상 저 너머의 세계를 유추한다든지, 호완 미로(1893~1983)의 동화 같은 추상화를 보면서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든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추상화 앞에서 가부좌하고 명상에 빠진다든지, 하는 것처럼, 독자들이 어떤 분명한 메시지나 의도를 캐려 하지 말고 오직 무한의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오직 리듬만을 추구했다면, 『무제2018』 제5부 「이미지의 반란」에 실린 시들은 음악과 미술이 한판 거나하게 어우러졌으면 하는 바램을 담았다.       앞으로 이어질 몇 편의 글에서는, 단지 비평가의 견지에서 시인(생산자)의 이미지를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수용(소비자)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술 비평가의 역할은 흔히 예술가의 이미지를 번역 혹은 해설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번역의 우열, 번역의 정오(正誤)는 없다. 단지 비평가의 눈으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는 비평가에게 동의할 필요도 없다. 다만,‘저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면 되는 것이다. 원본도 번역본도 ‘실재’는 아니다. 원본도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 시인이 쓴 시(원본)도 결국 현상 혹은 인식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시인의 손짓(열망)일 뿐이니까. 시인의 작품도, 그에 대한 평설도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좋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일반적으로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복사물을 지칭하지만, 필자는 시뮬라크르에 원본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고 본다(김철교,『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21-24쪽)       2. 읽기       는 호안 미로가 그린 라는 그림을 보고 쓴 시다. 호안 미로는 나름대로 떠오르는 詩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렸다. 시인은 이 그림을 보고 문자로 시를 그렸다. 우리는 추상화나 절대음악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절대음악은 음악 외의 문학, 철학, 회화 등 다른 예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순수한 음의 논리적 조합에 의해서 예술성을 추구하는 음악이며, 표제음악은 곡의 내용을 설명 및 암시하는 표제(標題)로써 구체적 또는 추상적인 대상을 묘사하려는 음악. 을 들을 때에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올리며 감상을 한다. 비록 문자로 된 메시지가 없어도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수용을 하는 것이다. 추상예술은 예술가에게나 수용자(관객/독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호안 미로는 물론이요, 시인도, 호안 미로의 그림을 본 관람객도, 시인의 시를 읽는 독자도, 모두 머리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각기 다를 것이다.       ----------------------------------------------------         * 미로(Joan Miro, 1893~1983), , 1966, 캔버스에 유채와 목탄, 259.5x173.5Cm, 마요르카 호안 미로 재단, 스페인. --------------------------------------------------         호동그랗게 검은 눈 검은 눈 소녀 잠 기지개 아주 큰 기지개       물구나무 하늘 바다 손자국 손금 영혼길 길 큰길 작은길       크레센도 쿵쾅쿵쾅쿵 돛 닻 갈매기 부두 어시장 선혈 해변 장미 말벌 쾅 데크레센도 라르고       묘지 흰나비 흰국화 비너스의 하얀 젓가슴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 김철교 (『무제2018』, 시와시학, 2018.) 전문     --------------------------------   호안 미로는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여, 1907년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12년 이후 갈리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1925년에 초현실주의 제1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의 초현실주의는 아주 밝은 시정과 단순화되고 순수화된 형태와 색채의 조화에 의한 율동적인 구성에 의하여, 조형성(造形性)의 긴밀감을 준다. 별 ·여자 ·새 등을 거의 상형문자와 같이 환상화(幻想化)하여, 그것들을 조화시킨 화면은 건강하고 명쾌한 유머마저 풍긴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호안 미로의 그림 를 보고 있노라면, 시인에게는 해변가에서 검은 눈이 커다란 소녀가 큰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이내 물구나무를 선다. 하늘과 바다가 뒤집혀 보인다. 땅 바닥에는 손자국이 선명하다. 손금에는 사람의 굴곡진 한 평생 가는 길이 나타나 있다. 젊은 시절에는 겁 없이 세상에 도전을 하게 된다. 세상을 거꾸로 보고 싶은 것이다. 음악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소녀는 물구나무를 선 채, 부두와 배와 갈매기를 뒤로 하고 어시장으로 들어간다. 시장에는 싱싱한 고기들이 팔딱팔딱 선혈을 흘리고 있다. 어시장만큼 생과 사가 분주한 곳이 어데 있으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거친 도전에서 때때로 피도 흘리게 된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가까이 해변에 장미 꽃밭이 보이고, 아름다운 말벌이 꽃에 앉았다 날았다 하며 점점 커지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쾅’하면서 크게 한번 울리고 음악이 점차 잦아들자 소녀는 물구나무서기에서 벌떡 일어난다. 저 멀리 해변가의 묘지로 눈을 돌리자 하얀 국화에 흰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소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 사이로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고 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음악과 함께 점점 사라진다.   한 소녀가 이 세상으로 건너와 격렬하게 살다가 퇴장해야 하는, 인간 삶의 한 노정이 파노라마처럼 상상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특히 명사만을 사용함으로써 속도감을 높이려는 장치를 하였다.       는 데페이즈망 기법과 표현주의 기법을 사용하되, 특히 색채 이미지와 음악 기호를 차용하였다. 호안 미로의 라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색깔과 음향의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때 마음속에 격하게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쓴 시가 이다. 전혀 엉뚱한 이미지들이지만 합쳐지면 통일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도록 유념하였다.       데페이즈망기법이란 사물을 상식적인 관계를 벗어나 엉뚱한 관계에 두는 것을 말한다. 초현실주의자의 선구자인 시인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eamont, 1846-70)의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2010). 표현주의 기법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에 있음을 나타낸다. 구성(구도)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 혹은 왜곡된다.       여기에서 소녀, 배, 어시장, 선혈, 해변, 말벌, 장미, 국화, 젖가슴 등은 엉뚱한 이미지들의 집합이지만 소녀의 격정적인 삶이라는 통일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강약, 고저 등 음악에 사용되는 용어들을 활용함으로써 음악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미술적 이미지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한편의 영상을 마음속에 떠올리게 인도한다.(*)  
   ■ 2011년『詩文學』9월호 신인우수상       안개-넬라판타지아 (외 2편)                  김이교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뿌연 안개 피어오르고 번쩍이던 빌딩의 유리창이 서서히 지워지고 유리창 속에서 움직이던 얼굴들이 지워지고 그들이 쏟아낸 소리가 지워진다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큰꽃으아리 연보라 꽃잎과 꽃잎 사이 깊은 골짜기에 안개가 모여들고 춘천 시가지에 떼 지어 돌아다니는 안개는 중도와 공지천 오래전에 먹은 소양호 동강 갠지스강 다뉴브강의 푸른 입김을 게워낸다 욕조에 물이 넘실거리는 동안   큰꽃으아리 가쁜 숨을 몰아쉬고 허벅지를 핥아내리는 뜨거운 입김 으아리 으아리 축축한 신음이 흐르고   거리에 등불이 내걸리기 시작한다.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는 수도 없이 떠오르는 ···· 흐린 불빛들   안개 속 깜박이는 UFO의 불빛에 사격을 하는 병사들   트윗~ 트윗~ 트위터들이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뛰며 놀고 있다       이명     아침부터 굴착기가 땅을 파고 있다 좌르르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 내려앉은 지반으로 하숫물이 쏟아진다 왼쪽 귀가 소리들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냉장고로 세탁기로 전류 흐르는 소리 빨래 삶는 소리   그 여자는 가끔씩 실로폰 소리를 듣는다 도미쏠 쏠시레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소리가 방안 가득 커피 향을 풀어 놓자 왼쪽 귀가 슬그머니 숲을 끌고 온다 숲에는 바람이 불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찍어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뭇잎 소리를 파도 소리로 착각하는 날에는 끼룩끼룩 갈매기 울고 파도 소리 멀리 타이티 섬까지 떠내려간다 꽃과 나비로 장식한 춤추는 해변의 여인이 고갱의 손을 맞잡는다 고갱의 어깨엔 버석거리는 해바라기와 고흐의 귀가 말벌처럼 달라붙어 있다   119를 불러 말벌집을 뜯어낸 뒤에 까맣게 태웠던 기억이 굴뚝처럼 솟아오른다 굴뚝을 타고 붕붕붕 말벌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왼쪽 귀가 다시 119를 부른다 삐뽀삐뽀 사이렌이 울리고 사이렌 소리를 피해 까무룩 잠이 들면 밤새 샤워기에 물이 흐르고 김이 오르는 물기둥 아래서 몸을 씻는 여인, 여인의 실루엣   넉 장의 꽃잎을 활짝 펼쳐놓은 병실 꽃잎 한 장이 떨어진 고흐의 귀를 들고 젖은 머리를 빗는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각 또는 아침햇살     때때로 아침햇살과 서먹한 사이가 된다 바동대며 뒤따라가는데 저희들끼리 수군대면서 먼저 가버린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에서는 자글자글 웃음을 쏟으며 가고 옷자락 걸리는 덤불숲에서는 덤불들 속살을 간질이며 간다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거리에서 서성거리면 간혹 처진 아이들을 데리러오는 또 다른 햇살이 있다   대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까딱까딱 조는 날에는 햇살이 나뭇가지를 세워들고 단잠을 깨우러 온다   어느새 모퉁이가 닳아버린 내 하루 햇살이 몸을 안아 일으켜 마디마디 소독을 한다 금가룹니다 은가룹니다   거울처럼 난반사되어 걸음걸음 눈이 부시다       --------------------------------------------   결빙 (외 2편)                  심우기     맑았던 물이 얼어 물속을 보지 못하게 될 때 사람의 눈물도 단단한 결정으로 굳어버릴 때   나는 나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서로의 마음은 보지 못하고 단단해진 뼈만 쓰다듬는다 쿨렁거리는 피와 살이 눈물을 만든다 집 나간 사람 집 지키는 사람 혼자 노는 아이   서로의 길 가고 있을 때 결국 혼자라고 말끝 하나에도 자갈을 물리는   실금의 그것은 무엇?   달그락거리는 자물쇠 출근길 전동차 칸칸마다 굳게 채워진 지퍼들로 그득하다     종소리     그느드 르므브 스으 하고 어느 산사의 종소리 ㅡ로만 퍼져 나가면 멀리 각과 변으로 서 있던 산들이 느슨한 180도 한 선분으로 눕는 밤 그 선 위의 모든 것을 까만 물감으로 북북 칠하며 산 하나를 넘고 또 산 하나를 넘는 지치키 티피히이 하고 어느 도심 속 종소리 l로만 쨍그랑거리면 벽을 넘고 집 하나를 타고 넘어 이제는 커다란 빌딩도 훌쩍 넘어 널찍한 광장까지 이르러서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깡충깡충 건너가는 몸이 걸친 옷 조각 실 오르라기 한 올 한 올 풀어져 소리를 타고 ‘ㅡ'와 ’l'로 부서져 뼈와 피로 도로를 넘고 길을 건너 이명으로 울리는 종소리 조그만 가슴 속 우로 좌로 위로 아래로 사방팔방 그지느치드키 으 이 뎅 뎅 응하고 쨍그랑 댕그랑거리며 텅 빈 속을 알 수 없는 낮은 소리로 어느새 꽉 채우고 여운으로 터져나오는------ l l l       괄호     꽃술 속의 괄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괄호 계곡과 산을 잇는 괄호 건너갈 수 없는 강폭을 메우는 괄호 코와 가슴 사이의 괄호 하늘의 푸른 선 하나를 끌어 와 벌린 대지와 하늘 사이의 환한 괄호 괄호 안엔 돼지가 산다 도시 비둘기가 구구대며 둥지를 튼다 나비가 날개에서 꽃가루를 괄호 안에 털어내고 배 밑창이 간지러운 꿀벌들이 괄호와 괄호 사이를 날고 딱딱한 돌덩이 암흑이 미세물질 잔뜩 묻힌 괄호 괄호 안에서 내가 방긋 웃고 괄호 속에서 꽃들이 튀어나온다   --------------------------------- ---------------   색깔 있는 날 (외 2편)                  고현석     하얀 섬광이 번쩍이더니 밤하늘이 유리같이 갈라지고 깨진 몸에서 먹물이 쏟아진다.   먼지 쌓인 전구가 안무 낀 태양이 되어 부연 빛을 발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무지개를 잘라 입은 사람들이 해변을 뒹굴고 쪽빛 파도가 넘실대며 금방이라도 방안으로 밀려오려한다.   어항 속 빨간 금붕어가 허우적거릴 때 붉은 색이 물에 번진다.   그가 불을 끄고 들꽃 같은 누비이불을 뒤집어쓴다.   검은 시간이 되었다. 혼자만의 세상이다.       가로등이 된 남자     늦은 밤 버스 정류장에 낡은 코드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남자가 무겁게 서 있다.   불황이 겨울바람보다 싸늘하게 사람들을 스치며 어둠만큼 짙게 도시에 번져간다.   그의 질환처럼 구겨진 휴지가 발밑을 어지럽게 맴돌고 이지러진 그믐달이 비스듬히 엿보고 있다. 한 남자가 희미한 가로등 되어 서 있다.   이미 떠난지도 모르는 막차를 잃어버린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다.       돌지 않는 물레     항아리가 되려고 배가 불룩하고 커다란 술독 닮은 남자와 사기그릇처럼 희고 호리병 같은 여자가 얼싸안고 빙글빙글 춤을 춘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마치 돌아가는 물레 위 잘 빚어진 도자기가 되어 간다.   내가 돌지 않는 물레에 고립이 되어 일그러진 도자기 되어 비스듬히 서 있다.   막걸리사발을 연거푸 들이켠다. 멈추었던 물레가 서서히 돌아가고 내가 허공을 안는다.   ---------------------------------------------------------------   ■ 2011년 9월신인상 심사기        신인들의 경향이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단서가 되는 것이 텍스트 속의 시각변화視角變化다. 주지적 경향의 시나 일반 서정시의 시각이 대부분 주체의 내부에서 바깥을 보는 것이었는데, 신인들의 텍스트는 그 반대로 바깥에서 주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경향은 텍스트 속에서 주체의 의식과 관념(영탄, 해석, 판단, 설득 등)을 최소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무의식無意識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시각과 연결된다. 따라서 주체 중심의 논리적인 관념의 텍스트들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변화를 보여준다. 주체(시인)의 무의식이 텍스트의 표면을 형성하는 경향이 주류主流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응모작품 중에서 신인 우수작품상에 선정된 김이교 심우기 고현석의 시편들은 그런 점에서 신선한 개성을 풍긴다.     김이교의「안개-넬라 판타지아」는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장면들이 동일한 시간의 상황 속에서 발생하고 움직이는 판타지(fantasy)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판타지는 주체의 관념을 무화無化 시키면서 자유로운 가상현실의 문을 열어준다. 그 속에는 현실적인 어떤 욕망이 잠재한 것 같지만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이미지뿐이라는데 주목된다.「이명」에서도 ‘굴착기 소리’ ‘실로폰 소리’ ‘파도 소리’ ‘사이렌 소리’ 등에서 파생되는 상상과 소리가 다양한 현상現象의 세계를 감각하게 한다. 그것은 현상의 배후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하이퍼(hyper)의 감각적 영역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현실이 배제된 감각적 향락에 빠지는 위험성도 감지하게 된다. 이에 비해 「지각 또는 아침햇살」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어릴 적 햇살의 기억이 투명한 물방울처럼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밝고 가볍고 감각적인 동심의 이미지가 시선을 끈다. 그러나 무엇인가 빠져 있는 듯한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이 부족함이 자신의 내면을 겸손한 자세로 더 진지하게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긍정적인 에너지로 환원되리라고 생각된다. 더 분발하고 낮은 자세로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바란다.     심우기의 시편들은 개성적인 기법이 흥미를 끈다. 그것은 그의 시작 태도가 도전적이고 실험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결빙」은 고독한 내면의식의 코드를 몇 개의 이미지로 나열하면서, 끝내 자신의 내면을 열어보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심리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달그럭거리는 자물쇠/출근길 전동차 칸칸마다/굳게 채워진 지퍼들로 그득하다’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 이미지 속에는 시인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도 투영되어 있어서 진정성을 진하게 한다.「종소리」는 기표(시니피앙)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어떤 관념의 세계에서 해방된 소리만의 감각적 이미지가 매우 참신하고 개성적이다. 지성의 반대편에 위치한 이런 감각현상感覺現象은 현대시의 기호성과 연결된다는데 의미가 있다.「괄호」는 독자들을 기의(시니피에)의 세계 속으로 유인한다. 숨은 의미 찾기가 이 시의 키포인트인 것 같다. 괄호가 의미하는 것을 독자들이 나름대로 추적해서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괄호에는 독자참여의 공간이 들어있다. 그래서 독자와 소통하는 현대시의 형태를 생각하게 한다. 앞으로 이런 덕목들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짝이는 재치의 세계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단순한 언어놀이’에 머물지 않으려면 자기 시의 방법론을 확립하는 시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깊이 있는 성찰과 확고한 의지를 요망하게 된다. 개성의 성취를 기대하면서 겸손히 공부하는 자세를 당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고현석의「색깔 있는 날」에는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영상감각이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외부(객관적)의 시각으로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쉽게 경험하는 문명현상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그 속에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의 존재 모습을 넣어서 한 컷의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부각된다. 그와 함께 텔레비전 속의 ‘쪽빛 파도가 넘실대며 금방이라도/방안으로 밀려오려 한다.’는 생동하는 사물성의 감각이 개성적인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가로등이 된 남자」에서는 현대도시인 중에서 불황 속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남자의 모습이 희미한 가로등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이미지화 되어 있다. 어떤 관념에도 쏠리지 않은 중립적 태도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존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서 사물시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런 기법은「돌지 않는 물레」에서 ‘멈추었던 물레가 서서히 돌아가고 /내가 허공을 안는다.’라는 주체와 객체의 융합을 통한 정서의 율동을 보여준다. 그 율동 속에는 무의식 속 주체의 욕망이 들어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접근이 단편적이고 소극적인 것 같다. 이런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극복할 때 규모가 크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끝까지 경합하다 선외選外로 밀려난 김귀란, 김경옥, 현자의 도전적인 분발을 기대한다. 김귀란의「투명인간」의 발상의 신선함과 명료한 언어, 김경옥의「다시 청사포」의 서정성과 세련된 언어 감각, 현자의「어느 봄날의 기억」의 고향풍속 사생 등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서 재도전의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이번 수상자들이 ‘재도전의 결실’을 얻었다는 점에서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   (심사위원: 문덕수· 신규호· 심상운)   출처 :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 글쓴이 : 박정원 | 원글보기
한 수인이 그의 감방의 벽에 풍경을 하나 그려 놓았다. 그 그림에서는 조그만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간수들이 그를 찾으러 오면, 그는 그들에게 내가 내 그림에 있는 저 조그만 기차 안에 들어가 뭘 좀 검사하고 나올 수 있도록 잠시 동안 기다려 달라고 상냥하게 요구한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조그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 조그만 기차에 올랐다. 그러자 기차는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 조그만 터널의 깜깜한 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동안 터널의 그 동그란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약간의 솜 같은 연기가 보였다. 그러다가 그 연기는 흩어졌고, 그리고 연기와 더불어 그림마저, 그림과 더불어 나 자신까지 흩어져 버렸다……. 얼마나 여러 번 그 시인-화가는 그의 감방 속에서 그 감방의 벽을 터널로 뚫어 관통해 나가지 않았으라! 얼마나 여러 번 그는 그의 꿈을 그리며 벽의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가지 않았으라! 감옥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좋은 것이다. 필요하다면 불합리성이, 그 자체만으로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 공간의 시학 274
97    말라르메 댓글:  조회:1963  추천:0  2019-03-13
그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을 일종의 시각적 휴지로 이용하여 말과 이미지의 리듬감 있는 운동감을 창출했다. 마치 음악에서 음표들이 리듬감 있는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또한 그는 시란 모름지기 뭔가를 환기하고 충동질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 '사물을 그리지 말고 그것이 빚어내는 효과를 그려라.'에는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주제-대상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전의 중심적 지위를 잃었다. 브라크가 대상 주변의 공간을 대상과 동등한 실질을 가진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이 회화에서 지니던 권위를 무너뜨렸듯이, 말라르메는 대상을 시에서 떼어내고 대상의 그림자와 효과들을 재료로 하여 언어 구성물을 말들어냄으로써 대상이 문학에서 보유해온 권위를 감쇄시켰다. 1895년, 한 강의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새로운 시에서는 정확한 묘사가 필수적인 게 아니고 그보다 환기와 암시, 시사를 사용한다. '갑작스런 도약과 당당한 주저'야말로 대상을 암시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심상과 연상을 가지고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안주해온 낡은 미학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제프리 스콧이 낡은 건축 미학에 대해 퍼부은 공격에 상응하는 문학적 사건이다. 제프리 스콧은 낡은 건축 미학이 '우리의 감각기관과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공간의 창출이라는 건축 본연의 임무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공격하였다.) 말라르메는 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시인들이 그동안 빠뜨려온 지점이라고 주장했다.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스티븐 컨, 425-426
96    앙드레 브로통 - 댓글:  조회:1995  추천:0  2019-03-13
앙드레 브로통 - 초현실주의 제 1선언   내 사유라는 의식의 리듬이 우위에 놓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잠들고 싶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는 잠이 들기 직전에 어떤 이상스럽기 짝이 없는 문장 하나가 내 귓가로 들려옴을 느꼈다. 단어 하나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또렷하면서도, 온갖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져 멍멍해진 소음으로 들려온 이 문장은, 그 당시 내가 연루되어 있던 갖가지 사건과는 무관하게 내게 들려온 것으로, 내게는 워낙 완강하게 보여, 감히 말을 하지면, 그 문장은 유리창에 와 부딪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금새 그 뜻을 파악했으므로, 그 목소리의 특성이 나는 놀라고 말았다. 불행히도 나는 지금까지 그 문장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대충 이런 것이었다. 창문으로 두 동강이 난 남자가 하나 있다. 하지만 그때 그 문장에 전혀 애매한 점이 없어 보였던 것은, 이 문장과 함께 몸의 축선과 수직으로 놓여져 있는 창문에 의해 몸의 중간 부분이 두 동간이 난 남자 하나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 앞에 희미하게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화가였다면 이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나은 표현이 될 것이다.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 - 꿈, 바슐라르의 말을 빌리자면 몽상, 몽상 속에 떠오른 장면(시각이 우세)을 일상적 언어 의미의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기법. 하지만 색과 선을 사용하는 화가이든,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이든 상징계 안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두 가지 현실의 상호관계가 멀면서도 적절할수록, 이미지는 더욱더 강렬한 것이 될 것이고, 보다 더 강력한 감동력과 시적인 현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을 이미지라고 보았다. 비유적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상호유사성에 의존하지 말아얗 한다고 했다. - 이를 종합하면, 그에게 시란 멀리 있는 두 사물 간의 밝혀지지 않는 유사성(관련성)를 찾아내는 것이리라.   그는 시인을 기묘한 유사성을 찾아내는 감시병이라고 했다.   언어에 의해 분별되는 사물이나 관념들이 사실은 한 덩어리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표현 가능한 것과 표현 불가능한 것, 숭고함과 저속함 등 상호 대립의 인식을 멈추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며 그때서야 비로소 주관과 객관, 꿈과 현실의 이원성이 제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브르통은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대립된 요소로 보지 않았고,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이성적 세계와 결합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현실주의가 지향하는 '절대적 실재'이다.   '시의 이해', 민음사 / 현대시 창작시론, 시인동네 참고
95    평론: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댓글:  조회:2113  추천:0  2019-03-13
월간 한비문학 세계명시감상 6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두메솔 이재관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27세에 소용돌이라는 미술 유파를 태동시켰고 유럽의 화가, 조각가,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다. 거칠고 난해한 그의 시를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은 흔히 모더니즘의 조류를 대입하거나 그의 개인적 특징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보다 잘 해석하기 위해 미술사를 넘겨볼 필요가 있다. 에즈라 파운드 자신의 평론 또는 그에 관한 전문적 논문들이 매우 다양하고 많지만 미술사와 연관된 부분에 초점을 두어보는 이 글은 나름대로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1. 미술과 문학의 만남 아카데미즘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만국박람회나 살롱의 출품작을 심사했던 일종의 국립단체인 아카데미 데 보자르 Academie des Beaux-arts의 전통을 말한다. 이 단체의 회원 화가들은 부자들의 취향에 영합했으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추한 것을 찾아 나설 이유가 없다. 시대와 무관하게 오직 한 가지 회화가 있을 뿐이다."라고 자신들을 변명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주로 역사, 신화, 종교, 귀족, 신화의 영웅을 모델로 삼았으나, 개혁적인 화가들은 평민, 상인, 하녀 등 보통사람을 그림의 모델로 등장시켰다. 현대성 및 사실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시대와 함께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로 들어서는 문턱은 높았다. 충동, 본능 등 정신분석학적 개념들과의 갈등이 불거져 미술의 전통적 법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화가들은 기호와 시어詩語를 빌려 본능적 인간을 표현하려 하거나 추상미술 쪽으로 진출했다. 폴 세잔은 회화를 언어나 수학 같은 것, 새 시각을 위한 실험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윤곽선, 명암, 원근법을 무시했으며 뒤이어 나비Nabis파, 야수파, 다리파 등 '색채에 의한 혁명'의 유파들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나비파의 피에르 보나르는 형상의 소실점을 과감히 제거하고 빛은 차가운 색으로, 그늘은 따듯한 색으로, 채색방법을 대담하게 전도시켰으며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다리파(또는 표현주의)는 “인간은 초인과 짐승 사이의 다리”라는 니체의 말에 근거하여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 양극화, 경제적 고통, 사회주의 등 혼란기의 독일에서 부르주아적 가치를 혐오하는 화가들이 공동화실을 설치하고 대중에게 다가선 것인데 다리파는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격렬한 색을 사용하지만, 현실 참여적이고 심리적 과장을 한다는 점에서 야수파와 달랐다. 모딜리아니, 샤갈 등 파리에 모여든 화가들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면서 파리파를 형성했고 지중해 연안에서는 우체국 직원, 농사꾼, 인쇄공, 가정부, 세관원 등 평범하지만 재능 있는 화가들이 소박파의 기치를 걸었다. 소박파는 구상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대담한 색채혁명을 시도했으며 소박하지만 꼼꼼하고 세밀했다.   개혁파를 대별하면 ‘색채에 의한 혁명’과 ‘형태에 의한 혁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를 통칭하여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부른다. 아방가르드는 군대 용어였으나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계급투쟁의 선봉을 가리켰고 기존 예술을 뒤엎는 혁명적 예술운동을 또한 아방가르드라 한다. 그 계보는 입체파, 소용돌이파, 미래파,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으로 이어졌다.   소용돌이파Vorticists는 미술의 유파지만 산업사회 및 문학적 배경이 강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주의, 프로이드 심리학, 과학혁명, 전쟁 등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1910년대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는 연간 수십만 대라는 경이적인 대량생산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기계문명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안겨주었다. 소용돌이파의 잡지 창간호(1914-15)에 게재된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소용돌이vortex는 최대의 에너지, 최대효율을 내는 지점이다. 최대효율이란 기계공학의 최대효율과 같은 뜻이다. 인간은 방향성을 갖는 지각perception의 운동체인데, 인간은 환경의 장난감일 수도 있고 환경에 대항하는 유체 역학적 통제권자가 될 수도 있다. 소용돌이파는 각자의 물감을 신뢰한다. 개념과 정서는 스스로 구현되는 것이지만 활기찬 양심과 주된 방식에 따른다. 미술은 100편의 시요, 음악은 100편의 그림, 가장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가능한 문장이다. 경험을 소용돌이에 퍼붓는다. 모든 과거, 전환점, 경쟁, 달리던 추억, 평온을 원하는 본능, 에너지가 담기지 않은 미래, 모두를. 인간 소용돌이 속에 벌어지는 미래의 설계. 과거를 미래에 쏟아 붓고 소용돌이에서 잉태시킨다. 바로 지금"   에즈라 파운드는 이 창간호에서 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로 인사말을 대신하고 있다. "타임지의 점잖음을 비웃어주자, 하하/입마개 쓴 평론가들 너무 많다/벌레들이 몸에 우글거릴 때 깨달을까/..."   소용돌이 운동은 3년간(1912~1915) 전개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으나 전후 "X 그룹"이란 명칭으로 계승되었다. 초기 가담자는 화가이며 소설가인 윈덤 루이스, 화가 윌리엄 로버츠, 에드워드 웨즈워드, 프레데릭 이첼스, 조각가 고디에-브르체스 등이다. 로버츠는 소용돌이파 10인의 에펠탑 회동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루이스 Wyndham Lewis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소용돌이 운동은 흔히 영국의 예술혁신운동, 영국의 아방가르드 또는 영국판 큐비즘이라고도 한다.   의식세계는 불완전하다. 환경, 감정, 사회적 요소가 끊임없이 감각과 판단을 왜곡시킨다. 작가가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독자(또는 관람자)들이 동일한 의미를 느끼도록 하려는 노력 자체가 종종 헛수고로 끝난다. 따라서 화가와 시인들은 추상과 무의식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현실과 의미적 일대일 대응에 지쳐버린 작가들로서는 비로소 진정한 휴식과 자유의 가능성을 전망하게 되었다. 추상의 세계에서는 의미를 규정하는 부담이 줄어들고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아내는 신선함이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는 청색(힘) 또는 노란색(감미로움)의 말을 좋아했고 자신들을 청기사라고 호칭하였다. 피터 몬드리안 등은 수학기호와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 추상의 세계를 구축했다. 1910~1920년에 나타난 다다이즘, 메르츠, 초현실주의는 모두 문학에 기원을 둔 것들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운동에 많은 시인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본능, 리비도, 충동에 종속된 상상의 세계였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말, 글 또는 다른 모든 방식을 통해 사고의 실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순수한 정신적 자동성"이라고 초현실주의를 정의한다. 조르지오 키리코는 모든 사물의 외양을 "무의식의 거울"이라고 보았다. 의식세계 일변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현실감각을 파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복고주의를 규탄하고 틀에 박힌 언어를 흥분된 의성어로 변형시켰다. 갖가지 조각과 고물을 더덕더덕 붙이는 꼴라주, 아상블라주, 레디메이드가 시도되고, 그라타주(긁어내기), 환각제, 약물 등이 사용되었으며 비참한 사회의 고발에 몰두하였다.   2. 에즈라 파운드의 시 감상 앞에서 고찰한 미술사, 그리고 화가와 시인들의 정신적 교류와 혼신의 몸부림을 생각하면서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읽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소용돌이 운동기에 쓴 시들은 그의 시집 (1917)에 실려 있다. 초기의 비판적인 시를 중심으로 가급적 짧은 작품 5편을 번역하여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서는 미국의 대표적 시인인 휘트먼에 대해 빈정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빈정거림이 아니다. 휘트먼으로 대표되는 시문학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마음과 각오가 서려 있다. 은 문학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전체에 대해 도전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다. 즉, 이 시에서의 비판 대상은 자기 노래(시)라고 볼 수 있다. 는 1920년에 출간된 시집에서 뽑은 장시의 일부분이다.     계약  -A Pact   당신과 계약 한 건 합시다, 월트 휘트먼 씨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혐오했답니다. 당신은 고집쟁이 부친 슬하의 다 큰 아이 같았는데 나는 친구를 사귈 만큼 나이를 먹었어요. 나무를 자른 건 당신이었고 이제 나는 목각을 제작해야 하니 우린 한 뿌리 한 수액을 공유하는 셈입니다. 둘이 거래를 해봅시다. -----------     연극처럼  -Histrion   아직 아무도 이런 걸 감히 쓴 적이 없었지 아직 내가 알기로는, 우리 곁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어찌 그리 위대한 척 했는지 우리 모두 홀딱 빠졌지 반성시켜야 할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러니 나 역시 한 구석에선 단테였고 또 다른 구석에선 발라드의 왕이자 도둑인 프랑소아 빌론이었지 이런 거룩한 자들에 대해 내 이름 때문에 모독적 언행은 못했다네 하지만 순간에 지나가 불길은 꺼졌지   우리 한 복판에서 반투명구체, 용해시킨 황금인 "나"를 자라게 하면서 요상한 프로젝트를 집어넣어 스스로 그리스도 또는 존 또는 위대한 피렌체 가문인 척 했지 그 후 즉시 떠밀려 당대에 해야 할 일을 그만 두었네 정해진 형식이 투명하지 못한 것이었거든 뭐 그렇고 그래서 '영혼의 대가'들이 영원한 거지 -----------     추가적인 주의사항  -Further Instructions   내 노래야 정신 좀 차려 우리의 더 근본적인 열정을 표현해보자 안정된 직장에서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자를 부러워할 건 없다 내 노래야 너는 게을러서 끝이 안 좋을까봐 그게 두렵다 너는 길거리에 나가 모퉁이와 버스정류장을 서성대고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려는 것인가   우리 태생이 고귀한 신분이란 것조차 노래에 담질 않는구나 그러면 끝은 안 좋을 거야   나는 어떠냐구? 반쯤 깨져 못 쓰게 됐어 너를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네게 입이 닳게 말했지 건방진 작은 놈! 뻔뻔스럽기는! 옷이나 걸쳐라!   그러나 너, 많은 중 제일 새로운 노래, 너는 아직 젊다 나쁜 짓을 많이 할 새가 없었지 나는 네게 용이 수놓아진 중국제 초록 코트를 입게 했지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아기 그리스도 상에서 따온 진홍 실크바지를 입혔지 우리가 맛이 갔다거나 천한 신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안 되니까 -----------     새벽의 노래 (알바) -Alba   새벽녘 내 곁에 누워 있는 그녀는 계곡의 백합 젖은 잎처럼 차고 창백했다. -----------     휴 셀윈 마버리 I-2  -Hugh Selwyn Mauberly, Part I-2   시대는 다른 이미지를 요구했다 가속적으로 찌푸려지는 얼굴 같은 것 현대적 무대에 필요하다고들 하는 것 하여튼 희랍식 기품과는 다른 어떤 것 아니, 내면의 애매한 몽상은 분명 아니고 고전 미사여구들 보다는 나은 허위! 시대적 요구란 시간 손실 없이 회반죽 본을 뜨는 일 산문 영화, 아니, 확실히 그건 설화석고 또는 운문의 조각 작품 -----------   3. 아름다운 고발 현대 예술의 주류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다. 사실주의는 폭로 고발하는 것이고 표현주의는 자기 주관을 뿜어내는 과시(또는 자기고발)이다. 그런데 사실주의적 고발이든 표현주의적 자기과시든 자칫 지저분한 것이 되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궁극적 가치관이 요구된다. 작가들은 처절하게 고발하거나 자기고발을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실험에 도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고결한 미에 다가서고자 몸부림친다. 자연, 동식물, 거짓과 폭력의 현장에서 고결한 미를 찾고 작품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무표정하고 허약한 자신, 오염된 자신을 먼저 꾸짖는다.   화가는 빈 공간을 의미 있게 채우기 위해 추상, 무의식, 초현실성까지 동원한다. 캔버스는 의미들이 와서 형성되거나 부서지는 장소가 된다. 거리 공간은 의미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화가는 점, 선, 색, 도형, 빛들을 의미 있는 조형미로 바꾼다.   시인은 일상 언어를 쪼개고 갈고 붙여서 의미 있는 시어로 바꾼다. 그것은 기술적 실험일 수도 있다. 많은 시인들이 언어의 유희에 빠진다. 반대로 현장고발이나 주관의 표현에만 급급한 경향도 있다. 화가들이 필사적으로 공간과 싸우는 것처럼 시인들은 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처절하게 시어를 만져야 한다.   고발하거나 고발당하는 치열함, 실험에 대한 열정, 고결한 미의 추구는 미술과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었다. 시는 예술과 문학의 꽃이고 그런 만큼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단지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이라면, 19세기 미술사의 아카데미즘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혐오스러운 단어를 써야 진보적이라 할 것인가? 에즈라 파운드의 거친 표현의 시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4행 시 을 음미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보석계단의 불평 The Jewel Stairs' Grievance   보석 박힌 계단이 이슬에 많이 젖었다, 너무 늦어 나의 외올베 양말이 젖었지 뭐요 그래서 난 크리스털 커튼을 내리고 청명한 가을을 통해 달을 바라봤지요 -----------   원작자가 이백(李白, Rihaku)임을 밝히면서 파운드는 자기가 개작한 시와 그 해설을 발표했다. 고대 라틴 시, 중국 시 등을 왕성한 열정으로 번역한 파운드는 간간히 이와 같은 개작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개작은 파운드의 경우 그의 실험정신의 일단이었다. 사실 시의 번역은 직역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시에 대한 파운드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보석이 박힌 계단이라면 아마 왕궁일 것이다. 그 곳에 불평이 있다는 것인데 외올베(가제, 紗) 스타킹은 귀부인이 신는 것이니 불평하는 사람은 귀부인일 것이다. 귀부인은 청소가 늦은 것을 탓하니 너무 일찍 현장에 온 것이다. 날씨는 쾌청하니 날씨 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귀부인은 아무도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는 멋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라는 이유로 이백의 이 시가 좋다고 말한다. 평생 비판적인 시를 썼던 그가. 그 많은 독설과 빈정거림, 비아냥대는 시를 썼던 사람이 한 해설이니 또 한 방 맞은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본다. 만일 그가 누구를 지목해서 괴롭히려고 그런 시를 쓴 것이 아니었다면, 진정한 사랑이 복받쳐 터져 나온 비판이나 고발이었다면 말이 되지 않을까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94    폴 발레리 - 노고 댓글:  조회:2307  추천:0  2019-03-12
폴 발레리 - 노고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세트에서 태어나 몽펠리에 대학을 졸업했다. 홀로 습작을 하던 중 1890년 몽펠리에 대학 개교 기념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피에르 루이스를 통해 지드를 알게 되고 말라르메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뒤에 파리로 이주하여 「테스트 선생과의 저녁」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방법론 입문」 등의 글을 통해 깊이 있는 사고와 필력을 과시했으나, 절필하고 무려 20여 년간 문학 활동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뒤에 프랑스 시에서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장시 「젊은 파르카 여신」을 발표하고, 대표작 「해변의 묘지」와 「나르시스 단장」 등을 담은 시집 『매혹』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밖에도 유럽 정신의 회복을 주장한 일련의 문명 비평과 철학적 성찰, 시학의 새로운 개념 정립을 시도한 시론, 문학비평 등도 발표했는데, 이런 글들은 『바리에테』 『요즘의 세상을 바라봄』 등에 실렸다. 또한 플라톤의 대화 형식을 부활시킨 『외팔리노스 또는 건축가』 『나무에 대한 대화』 『고정관념』 등도 발표했다. 발레리의 전체적인 사상은 말년의 미완성작 『나의 파우스트』와 평생에 걸친 성찰의 결실인 작업 공책 모음 『카이에』 등에 담겨 있다. 1945년 세상을 떠난 발레리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세트 해변의 묘지에 묻혔고, 드골 정부는 국장으로 그를 예우했다.           해변의 묘지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은 반짝이고 은 지식이로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간소한 사원, 정적의 더미,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하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 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至日)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반향도 드높은 저수조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빛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케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삶은 부재에 취해있어 가이없고, 고초는 감미로우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리운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적연부동의 정오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합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혼은? 눈물이 솟아나던 곳에서 애벌레가 기어간다.       간지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쁜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또한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색체도 없을 덧없는 꿈을? 그대 노래하려나 그대 한줄기 연기로 화할 때에도? 가려므나!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나고, 성스런 초조도 역시 사라진다!     깡마르고 금빛 도금한 검푸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거짓말 겸 경건한 책략이여! 뉘라서 모르리, 어느 누가 부인하지 않으리, 이 텅빈 두개골과 이 영원한 홍소(哄笑)를!   땅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민 없는 머리들이여, 가래삽으로 퍼올린 하많은 흙의 무게 아래 흙이 되어 우리네 발걸음을 혼동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지 않도다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도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싱그럽게 용솟음치세!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大海)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석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폴 발레리-노고 시는 영감에 온다. 영감은 우발적 진동, 전기적 에너지이다. 영감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시인이 되지 않는 이유는 시인은 제작에서 노고가 있기 때문이다. 영감은 시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꿈의 우주, 꿈의 상태, 발생과 유사하다. 폴 발레리는 영감을 꿈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꿈은 곧 상실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노고에 의한 제작이다. 영감은 독자에 의해 발견되며 작품에 부여하는 것이다. 독자가 작품을 읽고 경탄하게 되는데, 이때 경탄은 기존의 이성이 끼치는 것이다. 발레리는 영감이 독자에 의해 작품에 의미 지어지는 것이지, 시인의 방법론은 아니라고 한다. 영감에 의해 시를 쓰기보다 노고에 의해 써야한다고 한다. 폴 발레리는 법대출신이다. 법대 출신들은 지성의 메카니즘적 사고를 한다. 시와 소설(산문)의 차이는 라캉이 샤플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라르브가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무용이다 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보행은 목적이 있고, 무용은 보행과 같이 신체기관을 움직이는 동시에 신경들도 사용한다. 그러므로 시는 산문과 동일한 요소, 동일한 메카니즘에 적용된 운동이나 규칙, 관습의 차이로 구별된다. 시는 산문시라도 리듬이 있다면 시다. 산문시를 읽을 때, 리듬을 찾지만 소설은 리듬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시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상대를 이해시키고 즉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고 서술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산문에서 형식은 보존되지도 않고 이해작용이 끝난 후까지도 존속되지 않는다. 사라진다. 그러나 시는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폴 발레리는 시와 산문의 구분을 시의 추동운동에 빗대어 표현한다. 대칭적인 두 점 사이를 왕복하는 추처럼 시란 외형(소리, 음성, 리듬)과 내형(의미, 관념, 추상, 사고) 즉 형식과 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형태와 내용사이, 소리와 의미 사이, 한편의 시와 시적 상태 사이에 왕복운동이 나타난다. 산문은 독자를 환각에 빠져 자신의 이미지에 몰두하게 하지만 시는 가짜 현실을 강요하지 않으며 존재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어떤 시인도 관념을 쫓으려했다. 제작에 있어서도 철학자의 사유와 관념에서의 철학적 사유는 다르다. 철학과 시속의 철학은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루크네티우스는 철학을 시에 담으려고 시도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호평적이지 않다. 그런 면에서 시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발레리는 고전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어려운 이유는 의미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리듬, 소리, 음성, 목소리가 어렵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폴 발레리는 상징주의 계열 시인이다. 상징주의 시는 원관념이 빠진 보조관념의 시다. 보조관념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상징주의 시는 10명 정도. 나머지는 초현실주의, 다다, 미래파. 그 이후에 현대 시인들은 본질을 제거하고 의미를 담지 않는다. 초현실, 미래파는 의미를 포기한 예라 할 수 있다.)말라르메 계보를 이어간다. 말의 건축성을 가지고 의미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건축성을 가지고 세계의 원리를 보여주려 한다. 보통 시를 짓는 것은 영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인간적 성취의 느낌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시들은 노고로 얻어진 시들이다. 여기에서 영감은 시인을 위한 영감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영감이다. 그래서 시인은 독자가 시를 읽고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노고의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93    스티븐슨 상상력 댓글:  조회:2210  추천:0  2019-03-12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년~1955년)는 미국의 시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으로, 하버드, 뉴욕 양 대학을 졸업, 변호사가 되고, 그 후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재해보험회사에 입사, 부사장까지 되었다. 비즈니스와 시를 양립시킨 특별난 시인이다. 그는 자기 비평에 엄했으며, 44세 때 처음 간행한 시집 (1923)에 의해서 그의 천재성을 비평가에게 인정받았다. 그 밖에 (1935), (1937) 등을 출판, 영국에서 간행된 (1954)도 있으며, 다시 75세 탄생을 기념하여 (1954)이 출판된 후 곧 죽었는데,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언어를 단지 의미 전달의 도구로 삼지 않고 언어 그 자체의 모양이나 음조(音調)를 효과적으로 써서 이 세계의 음영(陰影)을 나타내는 그의 시는 세련의 극에 달한 고도(高度)의 것으로 1950년에 볼링겐상(賞), 1955년에 퓰리처상을 획득했다.       The Snow Man   우리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만 서리를 볼 수 있고 눈으로 딱딱하게 껍질이 입혀진 소나무의 가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오랫동안 추위를 경험하고 나서야 얼음으로 덥수룩하게 털이 돋은 노간주 나무를 볼 수 있고 정월의 햇빛을 받고 멀리서 반짝이는   꺼칠한 가문비 나무를 그래야만 바람이 내는 소리에서 어떤 곤궁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몇 개의 가랑잎이 내는 소리는 대지가 내는 소리, 대지는 허허로운 곳에서 불어오는 꼭같은 바람으로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눈 속에서 경청하고 있는 청자(聽者)는 자신도 없음이면서 거기에 있지 않는 없음과 있는 없음을 듣기 때문이다.     The Course of a Particular   오늘 잎새들이 운다. 바람에 나부끼는 가지에 매달려서 그러나 겨울의 텅 빔은 덜 허허롭다. 아직도 겨울은 차디찬 그늘과 모양을 갖춘 눈으로 가득하다.   잎새들이 잉잉 운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울음이다. 어느 누군가가 들으라는 울음이다. . . . 잎새들이 운다.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는 울음이 아니다. 그것은 숨을 거둔 영웅들에게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아니며 인간의 울음소리도 아니다. 이는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는 잎새들의 울부짖음이다.   드디어 한 사람의 듣는 귀는 찾았으나... 울부짖음은 아무하고도 상관이 없다.           스티븐슨 -상상력   자본주의에 적응을 잘 한 시인이다. 보험회사 부사장까지 맡았다. 그 만큼 정신세계는 파운드나 엘리어트와 다르다. 시가 난해하고 어렵다. 스티븐슨은 현실을 배제한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상상력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상상력이 현실로 표현된다. 현실은 상상력이 표현된 것이다. 질서는 혼란에서 정리인데, 스티븐슨은 상상력에서 인식되는 것이 질서는 곧 인식이다. 아이가 태양을 그릴 때, 태양의 모양은 다양하다. 본 것이 질서가 된다. 상상력에서 잠정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상력은 형이상학적이다. 실재에 이르는 실마리이다. 실마리는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티븐슨의 상상력은 카시러, 논리실증주의, 낭만주의 요소, 프로이드와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 카시러는 낭만주의에서 시적 상상력은 본원적 형이상학적이다.고 한다. 오직 낭만주의 시가 예술이고 철학이며 우주라 한다. 낭만주의 사상에서 시적 상상력은 실재에 이르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그래서 참다운 시는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우주 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논리실증주의는 실제로 있는 것만 믿는다. 형이상학을 믿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없고, 시인이 떠드는 이상한 소리이다.고 한다. (신을 형이상학적 용어라 한다면 신이 실재에 속한다면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신이 없는데,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미학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낭만주의 요소에서 상상력(낭만주의)은 마음의 자유롭고(실재) 감정적이고(감상) 추상이다(감정 푸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억압이고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프로이드가 상상력은 없다고 한다. 무의식은 상상력을 억압한다고 한다. 바슐라르는 프로이드 이론을 꽃을 두엄으로 만든다고 표현한다. 상상의 의도적 허구들이 과학의 선구자가 된 예가 많다. 상상력은 형이상학이다. 삶에서 상상력은 사회적 제도, 관습, 신분제, 장례, 결혼, 의식, 죽음 보고 들은 것 모두를 의미한다. 그 모든 것이 삶에서의 상상력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인간이 유토피아에 접근하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사람의 이성이나 과학 또는 철학이 사회를 지배해도 다수의 대중은 그들의 삶에서 상상력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세상은 상상력이 지배한다. 세상이 곧 상상력이다.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예술에서의 상상력이다. 현실속의 비현실, 비정상속에 정상, 혼란 속의 질서이다. 현실속의 비현실이라는 것은 잠정적인 질서가 부여된 현실 속에 또는 비현실 들어오는 게 예술이다. 그것은 영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영상 즉, 이미지는 관념이 복사된 것이다. 영상은 현실속의 비현실을 흔든다. 잠정적 질서를 부여하는 현실을 흔든다. 이것이 상상력이다. 비정상 속에 정상은 랭보나 카프카가 비정상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정상이다. 이것은 상상력이 이룬 결과이다. 이성이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정상, 질서를 먼저 본다. 이성은 상상력의 방법화 작업을 맡은 것에 불과하다. 이성은 규범, 정상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이성을 앞선다. 이성은 상상력에 의해 정의된다. 그 예로, 의상은 사회 형식으로서의 상상적 삶의 사례이다. 비범상한 것을 범상화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 예이다. 또는 정원에 꽃을 들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고 한다. 이때 정원, 꽃은 질서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정원희의 꽃은 정원희라는 공공의 질서에 꽃이라는 개인의 질서가 드러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마음의 힘으로서의 상상력의 차이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실제에 이르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참고할 만한 자료(싸이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hm29&logNo=110043942953&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http://builder.hufs.ac.kr/user/ibas/k2board/F374B91EA10B4F3DBD431B05BA030C52_002.pdf  
92    T.S 엘리어트 댓글:  조회:2204  추천:0  2019-03-12
T.S.엘리어트(Thomas Stearns Eliot)          시인·극작가·문학비평가  생몰 1888년 9월 26일 ~ 1965년 1월 4일  출생지 미국 / 영국으로 귀화 학력 하버드 대학교 철학, 불문학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적인 시 (황무지)는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의  세계와 작가 자신의 황폐한 사생활을 형상화해 표현하였다.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웨어 엘리엇(1843–1919)은 성공한 사업가로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벽돌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의 어머니 샬럿 챔프 스턴즈(Charlotte Champe Stearns, 1843–1929)는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엘리어트는 살아남은 형제자매 여섯 명 중 막내였으며,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 모두 44세였다. 그의 네 명의 누나는 11세에서 19세까지였으며, 친구와 가족들에게는 외할아버지 토마스 스턴즈의 이름을 따서 톰으로 불렸다. 1898년에서 1905년까지 《스미스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다. 그는 14세 때 이미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오마르 하이얌의 작품을 번역한 루바이야트의 영향이 컸다. 그의 최초의 시는 15세 때 수업시간에 연습으로 쓴 것이며, 이것은 후에 하버드 대학교의 학생 잡지인 《The Harvard Advocate》에 실렸다. 학교 졸업 후에 그는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밀턴 아카데미》로 입학을 한다. 그곳에서 그는 이후 황무지(The Waste Land)를 출판하게 될 〈스콧필드 세이어〉(Scofield Thayer)를 만난다. 1906년에서 1909년까지 그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하여 철학을 공부했고, 이곳에서 3년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비평가인 〈프랭크 커모드〉는 재학 중 〈아써 시몬스〉(Arthur Symons)의 《시에서 상징주의 운동》(The Symbolist Movement in Poetry , 1899)을 발견한 1908년이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섰다. 이 책은 그에게 쥘르 라포르그(Jules Laforgue), 아르튀르 랭보, 폴 발레리를 그에게 소개를 했으며, 엘리어트는 발레리가 없었다면 트리스탄 꼬르비에(Tristan Corbière)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졸업 후 유럽과 미국을 왕복하며 연구 활동을 한다. 그 다음 파리 대학, 마르부르크 대학, 옥스포드 대학을 간다. 1917년 시집 , 1922년 라는 시를 발표하여 젊은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초기의 시는 영국 형이상학 시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문명의 퇴폐성을 그리고 있다. 1927년 영국에 귀화한 후에 유니테리언에서 성공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스스로 문학은 고전주의, 정치는 왕당파, 종교는 앵글로 가톨릭(성공회의 가톨릭 전통을 중시하는 신학조류→고교회파)노선의 성공회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황무지(荒蕪地)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주) 로마신화에서 무녀 Sivil은 앞날을 점치는 힘을 지닌 여자다. 특히 로마의 식민 도시였던 이탈리아의 쿠마의 무녀는 유명했다. 그녀는 아폴로 신에게서 손안에 든 먼지 만큼 (황무지 30행 참조) 많은 햇수의 장수를 허용받았으나 그만큼 젊음도 달라는 청을 잊고 안했기 때문에 늙어 메말라들어 조롱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죽음보다도 못한 죽은 상태의 황무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나은 예술가 (il maglor fabbro)"는 단테가 신곡 26장에서  12세기 이탈리아 시인  Arnaut Daniel을 찬양한 문구이다. 엘리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혼란한 상태에 있던 의 초고를 에즈라 파운드가 절반의 길이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황무지(荒蕪地) / T.S.엘리어트    한 번은 쿠마에서 나도  한 무녀가 조롱 속에 달여있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여, 넌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물으니, 무녀는 "난 죽고 싶다"라고 대답했지요.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 죽은 이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대지에서 라일락꽃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뒤덮고, 매마른 뿌리로  희미한 생명을 길러주었다네.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하며, 슈타른베르게르시 호수를 넘어  소나기를 몰아왔지. 우리는 주랑에 머물다가  햇볕나자 호프가르텐으로 가서는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는 러시아여인이 아니고 리투아니아 출신 순수한 독일인이죠.  우리 어릴 적 내가 사촌인 공작 집에 머물렀을 때,  그는 날 썰매 태워주었지,  나는 놀랐지. 그는 말했지, 마리  마리 날 꼭 잡아. 그리고 우리는 내려갔지.  산에서는 자유를 느낄 수 있지요.  밤에는 대부분 책을 읽고 겨울이면 남쪽으로 가지요.  이렇게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대체 어떤 가지가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간의 아들이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추측하지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부서진 우상더미 뿐 그 곳에는 햇살 부서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가 위안도 주지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나지 않다.  다만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밑 그늘로 들어오라),  그러면 내 아침에 네 등 뒤로  다가오는 네 그림자와  저녁에 너를 맞으려 나온  그림자와 다른 무엇을 보여주리니.   내 네게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주리니.                바람은 선선히      고향으로 부는데      아이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가려 주나?  "일 년 전 그대가 처음으로 내게 히야신스를 주셨기에,  사람들은 날 히아신스 소녀라 부르죠."  하지만 우리 밤늦게 히아신스 정원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대 팔 한아름 히야신스를 안고 머리는 젖은 채,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다만 빛의 핵심,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유명한 천리한 마담 소소스트리스는   심한 감기에 걸렸어도   그저 사악한 카드 한 벌만 가지고도  전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소문이 났다,여기, 그녀가 말했다,  그대 카드가 있소, 익사한 페니키아 수부군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답니다, 보세요!)  벨라도나도 있군요, 암석의 귀부인이자  시시때때 변하는 여인이죠.  여기 삼지창을 지닌 사내와 바퀴,  외눈박이 상인도 있고, 이 카드,  텅 빈 이 카드는 상인이 등에 짊어진 것인데,  내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군요. 교수형 당한 남자를  못찾겠어요. 익사를 조심하세요.  빙빙 원을 돌며 걷는 사람들 무리가 그려진 카드가 보여요.  고마워요. 혹시 에퀴튼 부인을 보시거든  천궁도는 내가 직접 가져간다 전해주세요.  요즘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은 시절이거든요.  비현실의 도시,   겨울 새벽 갈색의 안개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런던 브리지 위로 흘러간다,  죽음이 이리도 많은 사람을 파멸시켰는지 몰랐다.  이따금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기 발에 눈을 고정한 채  언덕 위로 흘러 킹 윌리엄가로 내려가더니  성 메이 울노스 교회가 죽은 소리로  아홉시의 마지막 타종을 하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아는 이를 만나 "스테쓴"하며 그를 불러 세웠다!  "자네 밀리에 해전 때 나와 함께 있었지!   "작년에 자네가 자네 정원에 묻은 시체는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는 꽃이 피겠는가?  "아니라면 갑작스런 서리가 그 토대를 어지럽혔는가?  "오, 인간의 친구인 개를 멀리하게,   "그렇지 않으면 그 놈의 발톱이 그 시체를 다시 파헤칠거야!  "자네! 위선의 설교자여! 나의 동포, 나의 형제여!"      참고) 마지막 부분은 보드레르의 서시 "독자에게"의  마지막 행을 엘리어트가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보들레르처럼 엘리어트도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어 적극적으로 시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시행이다.     2. 체스 게임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눈부신 왕좌처럼  대리석 위에 빛나고, 거울이  열매 달린 포도넝쿨이 새겨진 지주로 받쳐져 있고  그 넝쿨로부터  황금빛 큐피트가 힐끔 내다보았다  (다른 하나는 날개 뒤에 눈을 감추고)  거울은 일곱가지 촛대의 불꽃을 두겹으로 비추며  테이블 위에 빛을 반사했다   그녀의 보석들의 광채와 어울려.  비단 상자 속에서 화려하게 흘러넘치는  상아와 색유리로 된 호리병은  마개가 열린 채 그녀의 기묘한 온갖 향수를 담고 있고,  연고, 분, 혹은 액체향유가 어지러이 혼란시키며  감각을 향내 속에 마비시켰다. 창으로 신선히 불어오는  대기에 흔들리며 향기는 날아올라  늘어진 촛불의 연기의 살찌우며  그 연기를 우물반자 속으로 던져 넣어  소란으로 장식된 천장 무늬를 아른거리게 했다.   銅箔 뿌린  커다란 바다 나무는  색대리석 테두리를 한 채 초록 오렌지빛으로 불타오르고  그 슬픈 빛 속을 돌고래 조각상이 해엄치고 있었다.   고풍스런 벽난로 위에는   마치 삼림의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처럼  야만스런 왕에게 거칠게 능욕당한 나이팅게일의 변신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나이팅게일은  맑은 목소리로 황야를 가득 채우며  여전히 울고 있었다, 여전히 세상을 뒤쫓으며,  더러운 귀에 "짹짹"소리로 들렀다.  그 박에도 시간의 공초들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응시하는 형상들이  몸을 밖으로 내밀고 닫힌 방을 조용하게 했다.   계단에서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화로 불 아래서 빗질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뻗쳐올라  작열하여 말(speaking)이 되었다가 다시 끔찍하게도 침묵했다.   "오늘밤 내 신경이 이상해요. 예, 정말 이상해요, 함께 있어줘요."  "내게 말해요. 왜 그리 말을 하지 않는지. 말해 봐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요? 대체 무슨 생각을?"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생각해봐요."  체스 게임"나는 우리가 쥐의 골목에 있다고 생각해,  죽은 이들이 자신의 유골을 잃어버린."  "저 소리는 뭐지요?"       문 밑을 지나는 바람.    "지금 저 소리는 뭐지요?" 저 바람은 뭘 하는 건가요?"              아무 것도 하지않아 아무것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못 봐요?" "기억도 못해요?"  "아무것도?"    나는 기억해  저것들은 그의 눈이 변한 진주들이라는 것을.    "당신은 살았나요? 죽었나요? 당신 머리 속엔 아무것도 안 들었나요?"    하지만,  오 오 오 오 셰익스피어의 파편 같은 재즈 말고는 그것 참 우아하고 지적이야  "이젠 뭘 하죠? 이젠 뭘 해야하죠?"  "이렇게 이 상태로 달려 나가 거리를 뛰어나갈까요?  "머리를 늘어뜨린 채. 내일은 뭘 하죠?   "도대체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요?"    열 시에 더운 물.  비가 오면, 네 시에 세단 차  그리고 우리는 체스게임을 하리.  졸리는 눈을 억누르며 문의 노크를 기다리며.  릴의 남편이 제대했을 때, 나는 말했지  말들을 더듬지 않고 직접 릴에게 말했지,  서둘러 때가 되었어  알버트가 돌아오니 좀 깔끔하게 치장을 해 봐.  알버트가 이 해 넣으라고 당신에게 준 돈으로  뭘했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야. 알버트가 물을 때, 나 거기 있었지.  릴, 이 다 빼고 좋은 틀리를 해 넣어.  알버트가 말했어, 정말이지 난 널 볼 수가 없어.  그래 나도 그렇다고 했지. 가엾은 알버트를 생각해 봐.  4년이나 군에 있었다고. 재미보고 싶어 할거야.   당신이 즐겁게 안 해주면 다른 여자들이 그럴거야, 내가 말했지.   오, 그런 여자가 있을까, 릴이 말했지. 있을걸, 내가 말했지.  그럼 그 여인한테 인사나 해야겠군, 릴이 말하고는 나를 쏘아보았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그게 싫다면 결과는 당신이 견뎌야지, 나는 말했다.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여자들이 골라 잡을거야.  하지만 알버트가 도망간다면, 누가 말 안 해줘서 그런 것은 아닐거야.  그렇게 늙어 보이는 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나는 말했지.  (그녀는 겨우 서른 하나.)  어쩔 수 없지. 릴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  건 아이를 떼려고 먹은 피임약 때문이라고, 그녀가 말했지.  (이미 애가 다섯, 막내 조지를 낳을 땐 거의 죽을 뻔 했지)  약제사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그 뒤로 전과 같지 않았지.  당신 정말 바보로군, 내가 말했지  알버트가 당신을 원하면 어쩔 수 없잖아, 나는 말했지.  아이들을 원치 않으면 결혼은 뭣 땜에 한거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알버트가 돌아온 일요일, 그들은 따끈한 베이컨을 마련하고  -맛있고 뜨거운 요리를 먹자고 만찬에 날 초대했지  서둘러 때가 되었어  서둘러 때가 되었어  안녕 빌, 루, 메이, 안녕.  타 타 안녕, 안녕.  안녕히 부인들, 안녕히 사랑스런 부인들, 안녕히, 안녕히.      3.  불의 설교   강의 천막이 찢어졌다.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지며 가라앉는다.  바람은 소리 없이 갈색 땅을 가로지른다. 님프들이 떠나갔다  아름다운 템스야,고이 흐르라,내 노래 끝날 때가지   강물 위엔 빈 병도, 샌드위치 쌌던 종이도  명주 손수건도, 마분지 상자도, 담배 꽁초도  그 밖의 여름밤의 증거품도 없다. 님프들은 떠나갔다.  그리고 그네들의 친구들도, 빈둥거리던 중역 자제들도,  떠나갔다. 주소도 남기지 않고.  레먼  호숫가에 앉아 나는 울었노라.(바빌론을 생각하며 울었노라.성경구절)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노래 끝날 때가지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내 크게도 길게도 말하지 않으리.  그러나 등 뒤에 일진 냉풍 속에서 나는 듣는다.  뼈들이 덜컹대는 소리와 입ㄹ이 찢어지도록 낄낄거리는 소리를.  어느 겨울 저녁 가스 공장 뒤를 돌아  음산한 운하에서 낚시질을 하며  형인 왕의 난파와 그에 앞서 죽은   부왕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쥐 한 마리가 흙투성이 배를 끌면서  강둑 풀밭을 슬며시 기어갔다.  흰 시체들이 발가벗고 습기 찬 땅 속에  뼈들은 조그맣고 낮고 메마른 다락에 버려져서  해마다 쥐의 발에만 채어 덜거덕 거렸다.   허나 나는 등 뒤에서 대론 듣는다.  클랙슨 소리와 엔진 소리를,그 소리는  스위니를 샘물 속에서 있는 포터 부인에게 데려가리라.  오 달빛이 포터 부인과  그네들의 달 위로 쏟아진다.  그들은 소다수에 발을 씻는다.  그리고 오 둥근 천정 속에서 합창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여!  투윗투윗투윗  ? ? ? ? ? ?  참 난폭하게 욕보았다  테루.  허망한 도시  겨울 낮의 갈색 안개 속에서  스미르나 상인 유게니데스 씨는  수염도 깍지 않고 호주머니엔 보험료 운임 포함 가격의  건포도 일람 증명서를 가득 넣고  속된 불어로  나에게 캐논 스트리트 호텔에서 점심을 하고   주 말을 메트로폴 호텔에서 보내자고 했다.  보랏빛 시간,눈과 등이  책상에서 일어나고 인간의 내연기관이  태시처럼 털털대며 기다릴  때,  비록 눈이 멀고 남녀 양성 사이에서 털털대며  시든 여자 젖을 지닌 늙은 남자인 나 티레지어스는 볼수 있노아  보랏빛 시간, 귀로를 재촉하고  뱃사람을 바다로부터 집으로 데려오는 시간  茶 시간에 돌아온 타이피스트가 조반 설거지를 하고   스토브를 켜고 깡통 음식을 늘어 놓는 것을 .  창밖으로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마르고 있는  그네의 속옷이 위태롭게 늘려있다.  (밤에 그네의 침대가 되는)긴 의자 위엔  양말짝들,슬리퍼, 하의,코르셋이 쌓여있다.  쭈그러진 젖이 달린 노인인 나 티레지어스는  이 장면을 보고 나머지를 예언했다.  나 또한 놀러올 손님을 기다렸다.  여드름투성이의 청년이 도착한다.  소 주택 중개사무소 사원,당돌한 눈초리,  하류 출신이지만 블랫포드 백만장자가 쓰는  비단모자처럼 뻔뻔스러운 젊은 사내.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지루하고 피곤해하니  호기라고 짐작하고   그는 그네들을 애무하려든다.  원치 않지만 내버려둔다.  얼굴을 붉히며 결심한 그는 단숨에 달려든다.  더듬는 손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   잘 난체하는 그는 반응을 필요로 하지않아  그네들의 무관심을 환영으로 여긴다.  ( 나 티레지어스는 바로 이 긴 의자 혹은침대위에서  행해진 몬든 것을 이미 겪었노라.  나는 테베 시의 성벽 밑에 앉기도 했고  가장 비천한  죽은 자들 사이를 걷기도 했다.)  그는 생색내는 마지막 키스를 해주고  더듬으며 층계를 내려간다,불거진 층계를...  그네는 동아서서 잠시 거울을 본다.  애인이 떠난 것조차 거의의식하지 않는다.  머리 속엔 어렴풋한 생각이 지나간다.  “흥,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좋아.”  사랑스런 여자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혼자서 방을 거닐 대는  무심한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고  축음기에 판 하나를 건다.  “ 이 음악이 물결을 타고 내 곁으로 기어와.”  스트랜드 街를 지나 퀸 빅토리아 街로 따라  오 도시여, 나는 때론 듣는다.  로우 템스 가의 술집 곁에서  즐거운 만돌린의 흐느끼는 소리와  낮엔 생선다루는 노동자들이 어슬렁거리며  거기서 떠들어대며 지껄이는 소리를.  마구누스 마아터 성당의 벽이  이오니아 풍의 흰빛 금빛 형언할 수 없는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강은 땀흘린다  기름과 타르르  거룻배는 썰물을 타고  흘러간다.  붉은 돛들이 활짝  육중한 돛대위에서  바람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거룻배는 떠있는  통나무들을 헤치고  개 섬을 지나  그리니지 하구로 내려간다.  웨이얼랄라 레이어   웨이얼랄라 레이어  엘리자베스 여왕과 레스터 백작  역풍에 젓는 노  고물은  붉은 빛 금빛 물들인  조개 껍질  힘차게 치는 물결은  양편 기슭을 잔 무늬로 꾸미고  남서풍은  하류로 가지고 갔다.  진주 같은 종소리를,  하얀 탑들을,        웨이얼랄라 레이어        월랄라 레이얼랄라  “전차와 먼지 뒤집어쓴 나무들  하이베리가 저를 낳고 리치몬드와 큐가  저를 망쳤다, 리치몬드에서 저는 좁은 카누 바닥에 누워  두 무릎을 치켜 올렸다.”  "저의 발은 무어게이트에, 마음은  발 밑에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는 울었다. 그는 을 약속했으나  저는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무엇을 원망해야 할까?"  '마아게이트 모래밭.  저는 하찮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 다녔다,  더러운 두 손의 찢겨진 손톱.  제 집안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  아무 기대도 없는’       랄라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탄다.      4.  익사(溺死)    페니카아 사람 플레버스는 죽은 지 2주일  갈매기 울음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바다 밑의 조류가  소근대며 그의 뼈를 추렸다.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그는 노년과 청년의 고비들을 다시 겪었다.  소용돌이로 들어가면서.       이교도이건       유태인이건  오 그대 키를 잡고 바람 부는 쪽을 내다보는 자여  플레버스를 생각하라, 한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      5.  천둥이 한 말   땀 젖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횃불이 있은 이래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이 있은 이래  돌 많은 곳의 고뇌가 있은 이래  아우성 소리와 울음 소리  감옥과 궁궐  먼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있던 우리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으며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큼에서는 멈출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山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 속엔 정적마저 없다  비를 품지 않은 메마른 불모의 천둥이 있을 뿐  산 속엔 고독마저 없다  금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우르렁댈 뿐  만일 물이 있었고  바위가 없었다면  만일 바위가 있었고  물도 있었다면  물  샘물  바위 사이에 물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로록 또로록  허지만 물이 없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세어 보면 당신과 나 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요?  공중 높이 들리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비탄 같은 흐느낌 소리  평평한 지평선에 마냥 둘러싸인  갈라진 땅 위를 비틀거리며 끝없는 벌판 위로 떼지어 오는  저 두건 쓴 무리는 누구인가  저 산 너머 보랏빛 하늘 속에  깨어지고 다시 세워졌다가 또 터지는 저 도시는 무엇인가  무너지는 탑들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런던  현실감이 없는  한 여인이 자기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팽팽히 당겨  그 현 위에 가냘픈 곡조를 타고,  어린애 얼굴들을 한 박쥐들이 보랏빛 황혼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개치며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시커먼 벽을 기어 내려갔다  공중엔 탑들이 거꾸로 서 있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종을 울린다, 시간을 알렸던 종소리  그리고 빈 물통과 마른 우물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들.  산속의 이 황폐한 골짜기  희미한 달빛 속에서 풀들이 노래하고 있다  무너진 무덤들 너머 성당 주위에서,  단지 빈 성당이 있을 뿐, 단지 바람의 집이 있을 뿐.  성당엔 창이 없고 문은 삐걱거린다  마른 뼈들이 사람을 해칠 수는 없지.  단지 지붕마루에 수탉 한 마리가 올라  꼬꾜 꼬꾜 꼬꾜  번쩍하는 번개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일진의 습풍  캔지스 강은 바닥이 나고 맥없는 잎들은  비를 기다렸다. 먹구름은  멀리 히말라야 산봉 너머 모였다.  밀림은 말없이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천둥이 말했다  다  다타: 우리는 무엇을 주었던가?  친구여, 내 가슴을 흔드는 피  한 시대의 사려분별로도 취소할 수 없는  한 순간에의 굴복, 그 엄청난 대담,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다.  그것은 죽은 자의 약전에서도  자비스런 거미가 덮은 죽은 자의 추억에서도  혹은 텅 빈 방에서  바싹 마른 변호사가 개봉하는 유언장  속에도 찾을 수 없다  다  다야드밤: 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돌아가는 소리  각자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다만 해질녘에는 영묘한 속삭임이 들려와  잠시 몰락한 코리올레이누스를 생각나게 한다.  다  담야타: 보트는 경쾌히 응했다.   돛과 노에 익숙한 사람의 손에.  바다는 평온했다. 그대의 마음도 경쾌히 응했으리라  부름을 받았을 때, 통제하는 손에  순종하여 침로를 바꾸며.  나는 기슭에 앉아 낚시질했다. 등위엔 메마른 들판.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바로잡아 볼까?  런던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에 몸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오 제비여 제비여  황폐한 탑 속에 든 아퀴텐 왕자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 왔다.  분부대로 합죠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다다. 다야드밤. 담야타.  샨티 샨티 샨티.        히스테리    그녀가 웃으면,나는 그녀의 웃음속에 휘말려  그것의 일부분이 된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의 이는 分隊敎練의 재능을 가진  우연의 星群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갑작스런 가쁜 숨결 속에  끌려들었고,게서 빠져나려 하면 그때마다 들이마셔져,    마침내는 캄캄한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 떠돌아 다니다  보이지 않는 근육의 파문에 상처입었다.    늙수그레한 웨이터가,녹이 슨 초록빛의 철제 식탁위에,손을 떨며,  핑크빛의 흰 격자무늬를 수놓은 식탁보를 급히 펴면서 말했다.    '만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면,만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면, '하고.`    그녀 가슴의 진동을 멈출 수만 있다면,나는 오후의 단편을 얼마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세심하고 교묘하게 나의 주의를  이 목적에 집중했다        하마   등이 멋없이 넙쩍한 하마 녀석 진흙 가운데 배를 깔고 자빠져 있다. 보기엔 아주 건장한 놈 같지만 겨우 살과 핏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살과 피는 힘없고 약하여, 신경의 충격에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끄떡 않음은 바다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먹이나 줍고 있는 하마의 연약한 발은 잘못 딛는 수가 있지만, 진정한 교회는 가만히 있어도 배당이 굴러 들어오게 마련이다.   하마군은 망고나무의 망고 열매에 결코 닿지 않지만, 석류나 복숭아는 바다 건너서 교회의 먹이가 된다.   발정기의 하마군의 목소리는 목 쉬고 이상한 변성을 내지만 우리가 매주 듣는 교회의 목소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있음을 기뻐하는 소리.   하마군의 하루는 낮에는 자고 밤엔 먹이를 찾는 일. 하느님의 일은 알고도 모를 일― 교회는 잠자며 동시에 먹는다.   나는 하마군이 날아서 습한 대초원에서 하늘에 오르고, 합창하는 천사들이 그를 에워싸고, 드높은 호산나로 하느님의 찬가를 부름을 보았다.   어린 양의 피로 씻기고 천사의 팔에 안겨 성자의 대열에 참여한 그는 황금의 거문고를 연주하리라.   그는 눈처럼 하얗게 씻겨 모든 순교한 처녀들의 키스를 받으려니 허나 참된 교회는 하계에 머물며 낡고 썩은 안개에 싸여 있으리라.       버언트 노오튼 I. - '4중주곡'에서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모든 시간이 끊임없이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보상할 수 없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은 하나의 추상으로서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가능성으로서 남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은 일은  한 점을 향하여, 그 점은 항상 현존한다.    발자국 소리는 기억 속에서 반향하여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로 내려가  우리가 한 번도 열지 않은 문을 향하여  장미원薔薇園속으로 사라진다. 내 말들도  이같이 그대의 마음속에 반향反響한다.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 꽃잎에 앉은 먼지를 뒤흔드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 밖에도 메아리들이 장미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그걸 찾아요, 찾아요, 모퉁이를 돌아서.  새가 말한다. 첫째문을 빠져,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우리 따라가 볼까   믿을 순 없지만 지빡새를?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아 있구나. 위엄스럽게, 눈에도 안 보이게, 죽은 잎 위에 가을 볕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대기 속에 가벼이 움직인다.    그러나 새는 노래한다, 관목 숲속에 잠긴  들리지 않는 음악에 호응하여. 보이지 않는 시선이 오고간다. 장미는 우리가 보는 꽃들의 모습이었다.    그건 영접받고 영접하는 우리의 빈객이다.  우리들이 다가서자 그들도 하나의 정형의 패턴으로  텅 빈 소로小路를 따라 변두리 황양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물마른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못은 마르고, 콘크리트는 마르고, 변두리는 갈색 햇빛이 비치자 연못은 뮬로 가득차,  연꽃이 가벼이 가벼이 솟아오르며, 수면은 광심光心에 부딪쳐 번쩍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등 뒤에서 염못에 비치고 있었다. 그러자 한 가닥 구름이 지나니 연못은 텅 빈다.  가라, 새가 말했다. 나뭇잎 밑에 아이들이 가득 소란하게 웃음을 지니고 숨어 있다.   가라, 가라, 가라, 새가 말한다. 인간이란  너무 벅찬 현실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니.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끝은 언제나 현존한다.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만일 나의 대답이 저 세상에 돌아갈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내 생각한다면 이 불길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내가 들은 바가 참이라면 이 심연에서 살아 돌아간 이 일찍이 없으니, 내 그대에게  대답한들 수치스러운 염려 없도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갑시다, 거의 인적이 끊어진 거리와 거리를 통하여 값싼 일박 여관에서 편안치 못한 밤이면 밤마다 중얼거리는 말소리 새어 나오는 골목으로 해서   굴껍질과 톱밤이 흩어진 음식점들 사이로 빠져서 우리 갑시다. 음흉한 의도로 싫증나게 질질 끄는 논의처럼 연달은 그 거리들은    그대를 압도적인 문제로 끌어 넣으리다. 아아, '무엇이냐'고 묻지는 말고 우리 가서 방문합시다.   방안에선 여인네들이 왔다 갔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며    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는 노란 안개, 저녁의 구석구석까지 혀를 핥고서   수채에 괸 웅덩이 위에서 머뭇거리다가, 굴뚝에서 떨어지는 그을음을 등에 받으며,   테라스곁을 살짝 빠져 껑충 한 번 뛰고선, 아늑한 10월달밤인 줄 알았던지, 집 둘레를 한바퀴 핑 돌고선 잠이 들어 버렸다.   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며 거리를 미끄러져 가는 노란 안개에도 확실히 시간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만날 얼굴들을 대하기 위하여 한 얼굴을 꾸미는 데에도 시간은 있으리라, 시간은 있으리라.   살해와 창조에도 시간은 있으리라.    백번이나 망설이고  백번이나 몽상하고 백번이나 수정할 시간은 있으리라. 토스트를 먹고 차를 마시기 전에.   방안에서 여인네들이 왔다갔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며   정말 생각해 볼 시간은 있으리라. '한번 해 볼까?' '해 볼까?'하고 망설일 만한 시간은   한복판은 대머리가 벗겨진 내 머리를 끄덕이며  발을 돌려 계단을 내려갈 만한 시간은 (여인들은 말하리라, 저이 머리는 어쩌면 저렇게 벗겨진담.)   내 모닝코트, 턱까지 빳빳이 치받치는 내 칼라 화려하고 점잖지만 수수한 핀 하나로 그 것을 나타내는 넥타이 여인들은 말하리라. '참 저이 팔다리는 가늘기도 하지?'   한 번 해  볼까? 천지를  뒤흔들어 볼까?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일순간에 의하여 역전하는 결단과 수정의 시간을.   나는 이미 그 것들을 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저녁과 아침과 오후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일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 왔다. 저쪽 어느 방에서 음악에 섞여   갑자기 낮아지며 사라지는 목소리들도 나는 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감히 해 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미 그 눈들을 알고 있다. 그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 공식적인 문구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노려보는 눈들을   그리고 내가 공식화되어 핀 위에 펼쳐질 때 내가 핀 꽂혀 벽위에서 꿈틀댈 때   어떻게 나의 생활 나의 태도의 한토막 한토막을 비로소 모조리 뱉어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그 팔들을 알고 잇다. 그것은 모두 알고 있다. 팔지 낀 허옇게 드러나 팔들을  (그러나 램프 불에 보며, 엷은 갈색 솜털로 덮인)   내가 이처럼 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는 것은 옷에서 풍기는 향기 때문인가?   테이블에 놓인 팔, 쇼올을 휘감은 팔 그러면 한번 해 볼까? 그러나 어떻게 말을 꺼낼 것인가?   이렇게나 말해볼까, 나는 저녁때 좁은 거리를 지나왔습니다. 샤쓰만 입은 외로운 사나이들이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뿜어대는 파이프의 연기를 나는 보았습니다라고   나는 차라리 고요한 바다 밑바닥을 어기적거리는  한 쌍의 엉성한 게 다리나 되었을 것을.   그런데 오후도 저녁도 저렇게 편안히 잠들었구나. 긴 손가락들도 쓰다듬어져서! 잠이 들었거나, 피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앓은 체 하는 것이다.   그대와 내 곁 여기 마루 위에 펼쳐서 차도 끝내고 케이크도 아이스크림도 먹고 났는데, 이제 내게 무슨 힘이 있어 이 순간을 한 고비로 몰아 가겠는가?   그러나 나는 울기도 하고, 단식도 하고, 울며 기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머리(조금 벗겨지긴 했지만)가 쟁반 위에 놓여 들어오는 것을 보긴 했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여기에 별로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는 나의 위대한 순간이 가물거리는 것을 보았고,   영원한 '하인'이 내 코트를 잡고 킬킬 거리는 것을 보았다. 결국 나는 두려웠었다.   도대체 그 것이 보람이 있었겠는가? 잔을 거듭하고, 마말레이드를 먹고, 차를 들고 나서,   화병을 옆에 놓고 내 그대와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그 것이 보람있었겠는가?   미소로써 문제를 물어 뜯어 버리고 우주를 뭉쳐서 공을 만들어   어떤 어마어마한 문제로 그 것을 굴려 간다한들 또는 '나는 주검으로부터 살아나온 나자로다.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알리기 위하여 돌아왔다, 모든 것을 말하리라'고 말한들.   만약 어느 여인이 머리맡에 베개를 놓고서 '나 조금도 그런 뜻에서 말한 것 아네요, 조금도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한들,   아니다! 나는 햄릿 왕자가 아니다, 될 처지도 아니다. 나는 시종관 행차나 흥성하게 하고 한 두 장면 얼굴이나 비치고   왕자에게 진언이나 하는, 틀림없이 만만한 영장, 굽실굽실 심부름이나 즐겨 하고,   빈틈 없고, 조심정 많고, 소심하고 큰 소리치지만, 좀 머리가 뜨고   때로는 정말 바보같기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때로는 틀림없이   나는 늙어 간다... 늙어 간다. 바짓가랑이 끝이나 접어 입을까   머리를 뒤에서 갈라 볼까? 복숭아를 한번 먹어볼까? 흰 플란넬 바지를 입고 해변을 걸어 볼까?   나는 인어들이 서로 노래를 주고 받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인어들이 날 들으라고 노래 부르는 것은 아니겠지.   그 것이 물결타고 바다 안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흴락 검을락 물결이 바람에 불릴 때   뒤로 젖혀지는 파도의 흰 물머리를 빗질하며 우리는 적색 갈색의 해초를 두른 바다 처녀들에 섞여   바다의 방안에서 지금까지 머뭇거리다 그만 인간의 목소리에 잠이 깨어 물에 빠진다.       바람 부는 밤의 광시곡    열두 시.  달의 종합 속에 들어있는 쭉 뻗은 거리를 따라  속삭이는 날의 주문은 기억의 심층과  그 모든 뚜렷한 관계와  그 구분과 정밀성을 용해하고,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은 저마다 숙명적인 북처럼 울리고,  어둠의 공간을 통하여 한밤은 기억을 뒤흔든다, 광인이 죽은 제라늄을 흔들듯이.   한 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고, 가로등은 중얼대고, 가로등은 말했다. "저 여자를 보라 방긋 웃는 듯이 열려 있는 문간의  불빛 아래서 그대를 향해 망설이고 있는 저 여자를,   그녀의 옷자락이 찢겨져  모래로 더렵혀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꼬리가  구부러진 핀처럼 비틀린 것도 볼 수 있다.   추억은 많은 뒤틀린 것들을 높이 밀어올려 마르게 하고, 해변의 비틀린 가지는  매끈히 벌레에 먹히고 반들반들 닳아 마치 세계가 희고 빳빳한 그 뼈대의 비밀을  내던져 버린 것 같다.   공장 마당의 부서진 용수철, 힘이 빠져 막막하게 구부러지고 꺾일 지경이 된 그 형체에 달라붙은 녹.   두시 반, 가로등이 말했다.   "보라 도랑에 납작 업디어 혀를 쑥 내밀고 한 조각의 썩을 버터를 탐식하는 저 고양이를"   그렇게 어린 아이의 손이 자동적으로 쑥 나와 부두를 따라 달리는 장난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 뒤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거리에서,불켜진 덧문 사이로  들여다보려고 하는 눈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날 오후 웅덩이 속에서 게 한 마리가, 등에 조개삿갓이 붙은 늙은 게 한 마리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막대기 끝을 움켜잡았다.   세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며, 가로등은 어둠속에서 중얼댔다. 가로등은 흥얼거렸다--   "저 달을 보라, 달은 아무런 원한도 품질 않는다, 그녀는 약한 눈을 깜박이며  구석구석에 미소를 보낸다. 그녀는 풀의 머리털을 쓰다듬는다.   달은 기억을 잃었다. 색이 바랜 천연두로 그녀의 얼굴은 금이 가고 그녀의 손은 먼지와 오 드 꼴로뉴의 냄새를 풍기는 종이 장미를 비튼다.   그녀는 다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오랜 밤의 온갖 냄새와 더불어 있도다"   추억이 밀려온다 햇빛 받지 못하는 마른 제라늄과  갈라진 틈바구니의 흙과    거리의 밤 냄새와  덧문 닫힌 방의 여자의 냄새와 복도와 담배와  술집과 캐테일 냄새 등의 추억이.     가로등은 말했다. 지금은 네 시, 여기 문 위엔 번호가 있다. 추억이라고!   열쇠를 가진 것은 그대, 작은 등불이 계단에 원을 펼쳤으니, 올라오라. 침대는 비었고,칫솔은 벽에 걸려 있다 신일랑 문간에 놓고,잠자라,그리고 내일의 삶에 대비하라    나이프의 마지막 비틀림       T.S 엘리어트-전통   1888-1965 하버드→프랑스→하버드→독일→영국: 1927년 미국의 전통이 짧아서 영국으로 귀화한다. (여기에서 나는 엘리어트가 자신의 모국이 짧은 역사의 국가라는 이유로 전통이 있는 영국으로 귀화한다는 것은 지식적 탐욕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1917년에 나온 시를 읽어보면 영국성향의 시적 면모가 드러난다. 1920년 평론가로 활동한다. 1922년 황무지를 쓴다. (박식다학한 시, 문명비판사의 시) 엘리어트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고수는 인정한다. 그 예로 파운드가 엘리어트의 시를 고쳐주는데, 그것을 그대로 싣는다. 그것은 작가로서 치명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실을 정도면 자기위의 사람을 무조건 따른다는 성향을 알 수 있다.   전통과 개인의 재능 엘리어트가 말하는 전통은 움직이는 전통, 조류이다. 정체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의 통시적 흐름에서 조류를 제대로 알고,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시대의 정신을 흡수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어트는 경험과 창조적 정신은 분리시켜야 한다고 한다. 경험에서의 격한 감정표현을 외면하고 창조에 접할 때, 더 강렬한 뜻이 창조된다. 그래서 개성을 외면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시창작 방법론이 이성적이고 좋은 창작품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계승의 유일한 형태가 우리 앞 세대의 방식을, 그 성공적인 면들에 맹목적이거나 소심하게 달라붙어 뒤따르는 것이라면 그런 전통은 저지되어야 한다. 전통은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를 띤다. 그것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매우 공들여 얻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작가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갖춘다. 첫째, 역사의식이다. 단, 시간성과 영원성을 동시에 느끼는 역사의식이다. 자신의 시대의식 뿐만 아니라 유럽의 全문학과 그 속에 들은 자신의 나라의 전문학이 동시에 존재하여 하나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글을 쓰게끔 한다. (그래서 황무지라는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어떤 시인이나 예술가도 자신의 전적인 의미를 혼자 가질 수 없다. 즉 홀로 평가될 수 없다. 죽인 시인이나 예술가들과의 대조와 대비를 통해 이뤄진다. 이를 엘리어트는 역사적 비평의 원칙으로서 뿐만 아니라 심미적 비평의 원칙이라 한다. 그래서 전통이 중요하다. 오래된 것과 새것의 화합은 새로운 작품이 출현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기존의 질서가 아주 조금이라도 변경되어 전체를 향해 균형을 가지고 재조정되면서 유지된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 이끌어지듯 과거가 현재에 의해 변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새로운 것은 전통의 변형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은 전통, 조류를 매우 잘 의식해야 한다. 그 조류는 가장 특출한 명성을 지닌 시인들을 통해서만 전적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절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더불어 예술의 소재는 항상 똑같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개인의 정신보다 유럽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유럽의 정신은 변하는 정신이다. 시인은 엄청난 양의 박식을 요구한다. 많은 학식은 시적 감수성을 죽인다거나 왜곡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의 필수적인 감수성과 필수적인 나태성을 침범하지 않을 한도로 알아야만 한다. 반면, 지식을 단지 시험이라든가, 응접실이라든가. 아니면 보다 더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우쭐대는 데 유용한 형태로 묶어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몰개성이 전통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를 산소와 이산화유황에 백금을 넣었을 때 일어나는 반응으로 비유한다. 여기에서 백금은 촉매이다. 개성 있는 작가는 특별하거나 매우 다양한 감정들이 자유로이 새로운 결합을 이룰 수 있는 보다 더 세밀하게 완숙된 매개체이다. 그래서 촉매, 백금은 시인의 정신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정서와 감정이라는 요소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새로운 정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정서를 이용하여 그것을 시 속에 다듬어 넣고 전연 실제의 정서 속에 들어있지 않던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시를 쓰는 데 있어 의식적이고 의도적이어야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시란 정서의 풀어놓음이 아니라, 정서로부터 탈피이고.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탈피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탁월성을 알아보고 감상할 수 있는 자들은 보다 소수이다.   시의 사회적 기능   엘리어트는 시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며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언어뿐만 아니라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고 고 말한다. 그러나 각국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는 실정에서 이것은 슬픈 일이다. 시의 사회적 기능1. 문화를 고립, 단절하지 않는다. 통합도 안 된다. 시의 사회적 기능2. 시가 사라지면 안된다. 시가 사라지면 감정이 사라진다. 시의 사회적 기능: 종교적 기능 (찬송에서의 시), 교훈적 기능(농경시, 이때 산문으로 쓰이면서 풍자가 드러난다.) , 역사적 기능(사회, 도덕, 정치를 드러낸다. 이때 지나치게 드러내서도 또는 아니어서도 안되다) 좋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모든 사람이 갖기는 힘들지만 노력해야 한다. 그림이나 음악을 한 나라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즐길 수 있듯 말이다. 언어를 문학적으로 사용하려는 충동은 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시에 그 나라의 민족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시가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말로 그 나라의 시를 이해하는 데는 큰 즐거움을 얻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국어를 보존하고 그것을 확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것을 좀 더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그 느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도니다면 그것은 좀 의아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 있지 않고 대중들이 벌써 잘 알고 있는 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세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 것을 다만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 빛을 발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해 있던 시대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해야 한다. 건전한 사회에서는 각 부분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 계속적인 영향과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사회적 기능이 그러해야 한다. 시인은 자기 주위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그대로의 언어를 소재로 취해야 한다. 시는 어느 정도 언어의 미를 보존하고 나아가서 부활시켜야 한다. 그래서 시는 다만 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외국어 하나를 수고해서 배우고 어느 정도 모국어와 같이 외국어로서 느낄 수 있는 개인들이 없이는 민족과 민족사이 정신적인 교통은 불가능하다(여기에서 번역가의 힘, 또는 작가가 번역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연수가 부럽다) 결국 다양성이라는 것은 여러 문화의 통일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91    에즈라 파운드 댓글:  조회:2033  추천:0  2019-03-12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 - 1972)        에즈라 파운드는 모더니즘의 주도자로서 이미지즘을 주도하여 현대시의 방향을 설정했고 음악가들과도 접촉을 하면서 시예술이 회화적, 음악적 특성의 확충을 도모했다.그는 T.S.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로버트 프로스트, W.C.윌리엄즈 그리고 다른 여러 작가들이 인정 받도록 격려, 충고, 또는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파운드는 문학사에 거인적 존재로 남을 만하다.        그의 시적 명성이 걸려있는 필생의 작품 이 뒤늦게 1970년에야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낸 탓도 있지만, 그 내용이 악명 높을 정도로 까다롭고 난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흔히 논리나 수사를 거부하여 일상적인 구문이 무시되고, 전통을 중시하여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의 한자, 그 외의 여러 언어로부터의 인용이 빈번하고, 시의 예술성을 제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회화적, 음악적 특성이 강하다. 그의 초기 시 몇 편을 소개한다.    *     나무      나는 숲속에 조용히 서서 나무가 되어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의 진실을 알게 되었네:    더프네1)와 월계수의 인사  그리고 숲 속에서 느릅나무 상수리 나무로 변한  저 신을 대접하던 늙은 부부,2)  신들을 친절히 초청하여, 안으로,  마음 속 가정의 노변爐邊 에 모시고야  그들은 그 경이로운 일을 이루었는지 모르네.  그럼에도 나는 숲 속에 나무가 되어  많은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네,  전에는 나의 머리에 지독한 어리석음이었던 것들을.    1)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 신에 쫓기어 월계수가 되었다는 요정.  2)변장한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잘 대접하였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나무로 변신한 가난한 늙은 부부 바우키스와그 남편 필레몬.      - 이 작품은 W.B.예이츠의 "그는 자신의 지난 날의 위대함을 생각하네"를 본받은 것이다. 정신적 경험을 통한 변신의 주제가 다루어져 있다.       *  다락방       오라, 우리보다 유복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자,  오라, 내 친구여, 그리고 부자는 하인은 있어도                    친구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지만 우리는 친구는 있어도 하인은 없다.  오라, 우리 기혼자들과 미혼자들을 불쌍히 여기자.    새벽은 작은 발걸음으로                    도금한 파블로바같이 다가온다.  나에게 욕정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 속의 생명력엔  이 맑은 서늘한 시간,  함께 깨어나는 시간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 다락방 작업장에서의 호색적 에피소드는 부르주와의 인습에 대한 중상과 함께 문학적 보헤미안들의 상투적 수단이다. 황금빛 새벽이 도금한 신을 신은 러시아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에 비유되어 있다. 그녀는 1910년 영국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  기질       아홉 번의 간통, 12번의 밀통密通, 64번의 사통私通  그리고 강간에 가까운 어떤 짓이  밤마다 우리의 허약한 친구  플로리얼리스트의 영혼에 찾아드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말이 없고 처신이 신중하여  기운이 없고 정욕이 없는 것으로 통하네.  반면에 성교에 대해서만 지껄이고 글을 쓰는                배스티디더스는  쌍둥이의 아버지가 되었네,  그는 얼마간의 대가를 치르고 그 위업을 이루었네.  그는 네 차례나 오쟁이 저야했네.        - 이 시에 등장한 성에 대해 대조적인 두 인물들은 미확인이나 허구적인 인물이나 다름없다.       *  지하철 역에서       군중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비에 젖은 검은 가지 위에 꽃잎들.       - 파운드는 한때 파리의 콩꼬르드 지하철 역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느낀 데서 얻은 경험을 소재로 처음에 31행의 시를 썼으나 일본의 단가인 하이꾸 형식을 빌어 이와같이 두 줄로 압축해 놓았다.            *  찻 집      그 찻집의 소녀는  예전만큼은 예쁘지 않네.     8월이 그녀를 쇠진케 했지.  예전만큼 층계를 열심히 오르지도 않네.     그래,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우리에게 과자를 날라줄 때  풍겨 주던 청춘의 빛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겠네.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  인 사       오 철저히 점잔빼고  철저히 거북한 세대여,     나는 어부들이 햇빛 속에 소풍가는 걸 보았고,  그들이 지저분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걸 보았고    이 다 드러낸 그들의 웃음을 보았고  본때없는 웃음소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행복하고  그들은 나보다 행복했다;     고기는 호수에서 헤엄치는데  옷조차 갖지 않았다.         *  소 녀      나무가 내 손으로 들어오니  수액(樹液)이 내 팔로 올라왔네.     나무가 내 가슴 속에서  아래를 향해 자라니,    가지들이 나에게서 뻗어 나오네.  두 팔처럼.    너는 나무,  너는 이끼,    바람이 그 위를 스쳐가는  오랑캐꽃들. 너는,  너는 어린이 - 그렇게도 키가 큰 -    세상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에즈라 파운드- 본격 예술가   1885년-1922. 뛰어난 언어학자. 그리스어: 희랍어 로만스: 라틴어(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게르만어: 영어. 네덜란다.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슬라브어: 러시아, 폴란드 인도, 이란어. 칸토스cantos-1~100편의 연작시   각 국의 언어가 혼합되어 번역하기 힘들다. 파운드는 번역하지 마라, 그대로 각국, 언어와 문화를 혼합한 것이다. 예술은 과학이다. 라는 도발적 질문을 한다. 에즈라 파운드가 말하는 정확성이란? 과학적 수치의 정확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리를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정확성이다. 예술 자체가 진리임을 인정하라. 인간은 같지 않고 다르다.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이 정확성이다.   정확한 심상을 파악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소수의 비평가이다. 시와 소설(산문)은 구분가능한가? 산문은 말하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시는 없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시적으로 쓴 글은 시인가? 소설이라 하면 내러티브라는 틀의 강화 또는 소멸을 말한다. 여기에서 내러티브가 붕괴되었다고 해서 소설이 시가 되지 않는다.   「본격예술가」 논문에서 파운드의 고전적인 면, 고지식한 면이 느껴진다. 파운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없다. 그것을 예술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잘 하자고 주장한다.   예술이 가장 이상이고, 나라는 동양의 중국 요순시대이다. 이를 병합하여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간 동안 칸토스를 쓴다. 58년에 이탈리아에 간다. 45년에 파시즘 붕괴되고 미국에서 추방된다. 미국에서 사형대신 25일 동안 동물원에 갇혀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다. 이 때, 파운드는 미국은 정신병동이다 라는 말을 하고 미국을 떠난다.   예술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 박식하고 다재다능해야 한다. 고 말한다. 파운드가 기고만장해 보이나 사실 예술가로서 맞는 말이다. 나라나 외국의 작품이나 발표작에 대해 작가라면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구별 할 수 있는가? 예술이 왜 필요한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여러 서문보다 훨씬 가치가 뛰어나다. 그럼에도 를 통해 예술이 무엇인가를 변론한다.   예술은 인간, 비물질적인 인간, 인간의 본성에 관해 이야기해준다. 예술은 통해 인간이 어떤 점에서 닮았고 어떤 점에서 동물과 다른가를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은 어떤 종류의 동물인가를 결정하는 데 가장 훌륭한 자료를 제공한다.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다. 허위보고를 하는 예술이다. 설사 허위를 보고하더라고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나 의사들에게 나쁜 예술은 비도덕적 예술이다. 그들에게 좋은 예술은 도덕적인 예술이다. 그래서 비도덕적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   파운드는 좋은 예술을 자기도 참된 증언을 하는 예술이 가장 정확한 예술이라고 한다.   의학에 진단의 의술과 치료의 의술이 있듯이 예술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시라고 하는 진단의 예술과 치료의 예술이 있다. 진단의 예술은 추의 예찬이고, 치료의 예술은 미의 예찬이다. 미의 예찬은 위생학이다. 태양, 공기, 바다, 비이다. 추의 예찬은 프랑스 시인 비용, 평판 나쁜 것을 시의 소재로 삼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코르비에르, 데카당 운동에 가담한 영국의 삽화가 비어즐리이다. 플로베르는 진단의 예술이다. 풍자나 비판은 수술, 삽입, 절단이다.   본격 예술가는 과학적이다. 개론적인 심리학자들이나 사회이론가들의 경험적과는 다르다. 본격 예술가는 자신의 욕망, 증오, 무관심의 심상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자신의 심상도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본격 예술가의 기록이 정확할수록 예술작품은 지속적이고 논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론가들은 보편성을 이끌며 사람들에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예술은 그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이끌지 않는다. 예술은 있는 그대로 (향유하는 것)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의 시금석은 정확성이다. 이 정확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종류의 것이라 전문가만이 어떤 예술작품들이 어떤 종류의 정확성을 지니는지 결정할 수 있다. 걸작을 알아내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와 시   위대한 시인은 그들의 시간이 울림과 동시에 태어났고 많은 사람들의 노작의 결과를 집적하고 배열하고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사람이다. 이 혼합을 위한 능력이 위대한 시인의 재능의 일부이며 어느 점에서는 겸허, 무사심無私心이다. 단테가 차용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 못지않게 그가 차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억된다. 동시에 단테는 자신의 것을 내놓았다. 그래서 단테가 대시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에너지, 아주 맑은 모래를 뚫고 분출하여 재빨리 그것을 움직이게 할 때의 물과 같은 힘, 예술가가 좋아하는 어떤 심상을 만들어야 한다.   시와 산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는 고도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단,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다. 상대적이다. 좋은 글은 에너지가 없다. 너무 무겁지 않고 통제하기 쉬우며 일상어로 되어 있다. 완전한 명료성과 간결성을 가지고 최소한의 말을 사용한다. 또한 다양한 종료의 명료성이 있다. 요구의 명료성도 있다.   산문과 시는 언어의 확장에 불과하다. 더욱이 산문은 시라는 언어의 확장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의사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관념과 그것의 변형, 관념과 수많은 그것의 효과들, 분위기, 모순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그럼으로써 뛰어난 소설을 얻게 된다. 음악을 가진 말들로, 음악을 가진 묘사, 운율이 있는 말, 어떤 정확한 묘사를 간직한 리듬이 있는 발로 발전한다. 산문의 말들과 그 의미는 그 정서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고, 또는 반대되는 관념의 단편들이 지적이고 정적인 복합물의 정서와 부수적인 정서들은 조화이루고, 유기체를 형성해야 한다.   산문은 정서가 필요하지 않다. 시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데 능숙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생각하고 어휘를 배열하고 해명하는 능력은 에너지를 발산, 지각하는 음악적인 능력들과 함께 움직이고 뛰어야 한다. 결국 시인을 만드는 것은 정서적 활력의 지속성이고, 이것과 결합될 때의 독특한 종류의 통제이다.
90    김춘수 무의미시 댓글:  조회:2075  추천:0  2019-03-12
1920~1940년대~28세 1922년 11월 25일 출생  11월 25일 경남 통영읍 서정 61번지(현 경남 통영시 동호동 61)에서 아버지 김영팔(金永八), 어머니 허명하(許命夏)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29년 (8세) 진학  통영 근처 안정의 간이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가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전학.    1935년 (14세) 통영공립보통학교 졸업  5년제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4학년 때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바뀜)에 입학.    1939년 (18세) 자퇴 후 일본으로 감  11월, 졸업을 앞두고 경기공립중학교 자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1940년 (19세) 4월, 동경의 니혼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    1942년 (21세) 12월, 니혼대학 퇴학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 사상혐의로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간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됨).    1944년 (23세) 부인 명숙경(明淑瓊) 씨와 결혼.    1945년 (24세)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전혁림 등과 통영문화협회 결성.    1946년 (25세) 9월,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에 시 ‘애가哀歌’를 발표.  통영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근무.  조향, 김수돈과 함께 동인 사화집 [노만파(魯漫派)] 발간. 3집 발간 후 폐간됨.    1948~1949년 (27세~28세) 8월, 첫 시집 [구름과 장미](행문사)를 자비로 간행.  1949년 마산중학교로 전근, 1951년까지 근무.   김춘수 보충자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922&path=|462|570|&leafId=841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가을 저녁의 詩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갈대 섰는 風景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너와 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네가 가던 그 날은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 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물망초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부재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靑石(청석)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 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김춘수-무의미시   김춘수는 관념에 대한 시를 쓴다. 플라토닉, 이데아를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관념어를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관념 도피증이 생긴다. 그래서 관념시에서 무의미 시로 간다. 무의미의 시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서술적 이미지 즉 이미지를 서술한다. 이것은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이다. 또는 비유적 이미지 즉, 은유이다. 여기에서 서술적 이미지는 대상이 있을 때 관념을 배제한다. 대상이 없을 때 김춘수는 대상이 있지만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대상을 놓치고 언어와 이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한다. 김춘수에게 초이미지나 탈이미지는 별 차이 없다. 김춘수는 무의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쓰되 무의미하게 쓰는 것이다. 언어와 언어의 배합과 충돌에서 그려지는 이미지, 그림자를 쓴다. 그러나 대상을 없애고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쓰나 이미지가 있는 시가 된다. 그래서 그 의미를 지우는 시를 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이미지를 또 다른 이미지로 지우고, 또 다른 이미지는 제 3의 이미지로 지운다. 그것이 반복된다. 대상이 없어졌다고 해도 의식이 자꾸 감시한다. 무의식적으로 시를 써도 대상과 이미지를 끊임없이 의식이 감지하여 의식이 비대해진다. 이때 허무해진다. 그러나 일반적 허무와 달리 끊임없이 나아가는 허무이다.  
89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 댓글:  조회:2235  추천:0  2019-03-12
독일의 시인·수필가. 자신이 ‘현대적’이라고 자부하였던 그는, 전후 독일의 젊은 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12년에 전위적인 처녀시집 《시체공시소》를 발표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만스펠트 출생.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루터파(派) 목사였고, 어머니는 프랑스계(系) 스위스인이었다.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신학·철학을 공부하고, 이어 베를린의 군의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후 피부과·성병과 의사로서 베를린에 정주하였다. 그 동안 1912년에 전위적인 처녀시집 《시체공시소(屍體公示所) Morgue》를 발표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으며, 그 때 단편 《의사 레네》(1916)를 썼다. 표현주의와 니체의 영향을 바탕으로 출발한 그는, 신화와 원초적 세계에 있어서의 자아(自我)의 상실과 도취를 노래하였다. 에세이 《신국가와 지식인》(1933)에서 니힐리즘 초극(超克)의 가능성으로서 나치즘을 찬양하였으나, 즉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붓을 놓았으며, ‘망명의 귀족적 형식’을 선택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군의로서 참가하였다. 종전 후 1948년에 시집 《정학적 시편(靜學的詩篇) Statische Gedichte》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항상 자신의 태도를 ‘현대적’이라고 자부하였던 그는, 전후 독일의 젊은 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만년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해체(解體)와 몰락의 시대에 있어서 확실한 것이란 예술적 형식뿐이라고 주장하여, ‘창조의 환희’라는 초월성을 신봉하여 직업적 정열을 가지고 절대시를 추구하였다. 시작품으로는 위에서 말한 것 외에 《아들들》(1914) 《서정시집》(1917)이 있고, 수필에 《프톨레메이어》(1949) 《표현의 세계》(1949) 《3인의 노인》(1949) 등이 있으며, 자서전에 《이중생활》(1950)이 있다.  [출처]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 | 네이버 백과사전       시체공시소       작은 아스터꽃   익사한 술배달꾼이 테이블 위에 받쳐져 있다 누군가 그의 이빨 사이에 한 송이 짙은 연보라색 아스터꽃을 끼워 넣었군 긴 메스를 들고 피부 아래 흉곽에서부터 혀와 입을 잘라낼 때 그 꽃과 난 부딪쳤던 모양이군, 그럴 것이 꽃은 옆에 있는 뇌수로 미끄러져 내렸으니까 꿰맬 때 대패밥 사이 가슴 구멍 속으로 나는 그만 그 꽃을 싸 넣었네 네 꽃병 속에서 실컷 마시거라! 편안히 쉬거라! 작은 아스터꽃아!       아름다운 청춘   갈대밭에 길게 누워 있는 처녀의 입이 무엇엔가 갉아먹힌 듯 했다 가슴을 풀어헤쳐보자 식도에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급기야 횡경막 아래 으슥한 곳에서 새끼쥐들의 둥지가 나왔다 거기 한 작은 암컷이 죽어 나자빠져 있네 다른 쥐들은 간과 콩팥을 먹고 살며 찬 피를 빨아마시고 여기서 아름다운 청춘을 보냈지 시원스럽게 후다닥 그들도 죽어갔다 그들 모두 물 속에 던져졌는데 아, 그 작은 주둥이들의 찍찍거리는 소리라니!       순환   이름 모르게 죽어간, 한 창녀의 외로운 어금니는, 금니였다 나머지 이빨들은 조용히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빠져 있었고 금니는 시체 치는 사람이 뽑아서 저당 잡히고 춤추러 갔다 왜냐하면, 그의 말인데, 흙만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혼자 있는 사람은   - 고트프리트 벤   혼자 있는 사람은 또한 신비 속에 있는 사람, 그는 언제나 이미지의 밀물 속에 젖어 있다. 그 이미지들의 생성, 그 이미지들의 맹아, 그림자조차도 불꽃을 달고 있다.       그는 모든 층을 품고 있고 사색에 충만하며 그것을 비축해 두고 있다. 그는 파멸에 강하며 남을 부양하고 짝을 맺어주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강하다.       대지가 처음과는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그는 아무 감동 없이 바라본다. 더는 죽을 것도, 더는 이루어질 것도 없이 조용한 형식의 완성이 그를 지켜 보고 있을 뿐.       고트프리트 벤-절대시 「서정시의 제문제(Problem der Lyrik)」   그의 시는 표현주의 시조를 대표한다. 벤의 서정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정시와 다르다. 우리는 서정시는 세계와 자아가 동일함이나 일체성을 갖는다. 자연을 내세우고 시적 주체의 동일시를 내세워 정서적인 동일시다. 세계와 소통가능하다. 그러나 벤은 서정시가 아니라 감정이나 정서, 주제와 구분되는 기예를 추구한다. 새로운 서정시의 진원지는 프랑스로 말라르메, 네르발, 보들레르가 중심이 되어 시작된다. 발레리, 부르통,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에 이른다. 서정시는 독일, 앵글로 아메리카로 나아가서 영국의 엘리어트, 파운드 등이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다. 이들은 형식이라는 틀 안에서 의식적으로 시를 만들어낸다. 독일의 표현주의 서정시운동, 마리네티의 미래파선언 역시 현대서정시의 문을 연 정초로 볼 수 있다. 벤은 현대시의 제문제를 두고 절대시 즉, 개인의 자아에 대해 시를 쓴다. 현대시의 기준은 기예이다. 기예는 체험으로부터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려는 시도이다. 기예는 표현주의, 추상주의 반휴머니즘, 무신론, 反역사를 포괄한다. 현대시의 특징을 함축하는 말은 니체로부터 나온다. 니체는 기예를 다섯 개의 예술 감각에 깃들어 있는 정교함, 뉘앙스를 나타내는 손가락들, 심리적으로 병적인 상태, 연출의 진지함이라 표현한다. 자기의 내면 존재를 말로서 표현하고 정형화하는 것이다. 기예는 공작성과 창작성이다. 조작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현대시처럼 보이지 않는 시의 네 가지 징후는 다음과 같다. 첫째, 허구성이다. 허구처럼 등장한 죽은 자연과 내면화된 작가가 분리되거나 대립된다. 둘째, 직유의 사용이다. 이런 말은 환상 가운데 부서진 소리로 다가오는 것이지 원초적인 확정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직유는 산문에서 나온 말이다. 직유는 언어의 긴장감을 풀어지게 하고 창조적 변형을 약하게 한다. 셋째, 해맑은 톤 사용이다. 졸졸대는 샘물, 아름다운 밤, 고요, 밑도 끝도 없이 사라짐과 별 이런 말에 기대는 시는 현실에 대한 도피이고 독자의 감상을 노리고 값싸게 머리를 짜낸 시이다. 그러나 시인은 현실의 짐을 진 리얼리스트이다. 비의에 찬 장중한 것을 견실한 리얼리즘의 토대에 신중히 나누어주는 존재이다. 넷째, 색깔을 나타내는 말의 사용이다. 시에 색깔을 나타내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정열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나타낼 순 없다. 시의 생성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작가의 마음속에 창조의 싹이 생긴다. 작가는 말이라는 것과 씨름한다. 시는 시인을 매개로 나올 뿐 이미 완성된 텍스트를 갖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내면적으로 이끌려가는 순간이 오게 된다. 절대시를 쓰려면 시의 형식이 중요하다. 예술가는 형식이 없으면 안 된다. 예술가의 작업은 곧 형식이다. 내용으로부터 형식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느낌을 의식하고 말로써 이를 형성하는 과정(라임이나 연의 배치와 같은 형식에 힘을 부여하는 과정)이 있어야 시가 이루어진다. 대상 어느 시이든 그 배우헤는 언제고 헤아릴 수 없는 작자가 서 있다. 그의 본질, 존재, 내적 상태, 대상조차도 시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서정시인에게는 서정시인 자신밖에는 다른 대상은 없다. 릴케는 엘리어트, 말라르메의 대상에 대한 말을 빌려와 시와 인생, 시와 삶을 분리시켜서 절대시를 설명하려 한다. 서정시는 오직 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말이 주도동기가 되어 변주를 이끈다. 짚신벌레의 조직체는 섬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간 즉 시인의 몸이 섬모로 덮여 있다면 인간(시인)은 섬모로 말을 느껴서 시를 창작해야 한다고 한다. 시정자아가 말에 의해 도취, 충렬 되면 현실은 붕괴되고 돌파하여 자기 연소를 통해 자기가 사라진다. 이때 치명적 불빛이 나오는데, 한편의 시는 바로 치명적 등대이다. 결국 절대시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1884년에서 1956년 시집에서 보면, 죽음, 시체, 부패 이야기가 끌려 시를 쓴다. 1910년 이전에는 표현주의 시를 쓴다 표현주의는 독일의 회화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포미즘, 입체파로 번진다. 내면의 모습을 표현한다. 1933년에서 34년에 히틀러 집권기가 시작되고 지식인들이 처음엔 히틀러의 정체를 몰랐을 때 히틀러에게 친목한다. 사회주의면모만 보고 지지한다. 나중에 히틀러의 진실을 알고 반대한다. 이 사건은 벤 일생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 벤은 절대시를 쓴다. 삶을 예술로, 사회를 고립된 자아, 정제되고 밀폐된 사회, 희망 없고 고립된 자아에서 시를 쓴다. 절대시로 히틀러의 치욕을 벗어나려 한다. 벤은 절대시를 쓰게 된 동기가 치욕, 정치적 실수에 대해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삶과 떨어진 세계에서 무념무상, 욕망, 정치적 노선이 없는 상태에서 즉, 완전무결한 상태에서 시를 쓰려 했다. 그래서 절대시가 나온다. 삶과 예술은 선을 명확히 긋는다. 밀폐된 공간에서 시상 연구한다. 그러다보니 벤은 창작보다 기술이나 기예, 공작성, 운율, 형식, 말에 대해 언급한다.  
88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초월주의> 댓글:  조회:2359  추천:0  2019-03-10
초월주의   미대륙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지적 사건 중의 하나는 초월주의다. 그것은 제한된 학파를 넘어서, 하나의 개혁운동을 형성했다. 작가들, 농장지기, 수공업자, 상인, 기혼 및 미혼여성들도 참여했다. 그 정신운동은 1836년부터 약 25년 동안 꽃을 피웠다. 근거지는 뉴잉글랜드의 콩코드 시였다. 그것은 18세기의 이성주의, 로크의 심리학, 유니테리언교에 대한 반발이었다. 정통 청교도주의의 계승자인 유니테리언교는 유일신교라는 이름 그대로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예수가 행한 기적들의 역사적 진실은 인정했다.    초월주의의 근원은 다양하다. 힌두교의 범신론, 신플라톤주의, 페르시아의 신비가들, 스베덴보라(스웨덴의 성서학자이자 과학자로 서구 신비주의의 정상으로 평가된다.)의 신지학神知學(보통의 신앙이나 추론으로는 알 수 없는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에 의하여 알게 되는 철학적, 종교적 지혜), 독일 관념론, 콜리지(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사회비평가. 문학평론가로 특히 이름이 높다.) 와 역사학자 칼라일의 저작물 등이 그것이다. 또한 청교도의 윤리적 관심을 계승했다. 신은 선민들의 영혼에 초자연적인 빛을 비추어준다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가르쳤다. 스베덴보리와 유대 카발라주의(중세 유대교 신비주의)는, 외부세계는 정신계의 반영이라고 믿었다. 이런 사상들이 콩코드의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주에 내재하는 신의 속성이라는 개념이 아마도 그 중심이론을 이룰 것이다. 초월주의 시인 에머슨은 소우주, 즉 축소세계가 아닌 존재는 없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영혼은 세계의 영혼과 일치한다. 물리법칙은 도덕법칙과 맞물린다. 만일 각각의 영혼마다 신이 계시다면, 외부의 모든 권위는 무의미해진다. 한 사람 산 사람마다 내면 깊은 곳에 깃든 비밀스런 신성이면 족하다. 에머슨과 소로는 이런 초월주의 운동의 가장 저명한 인사가 되었다. 이 초월주의의 영향은 롱펠로, 멜빌과 휘트먼에까지 미쳤다.    우리가 살펴볼 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은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이다.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개신교 목사였다. 그도 선조가 걸어간 길을 따랐고, 1829년 안수를 받고는 유니테리언 교회에 부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결혼했다. 1832년 그는 아내와 형제들의 죽음에서 촉발된 정신적 위기 끝에 목사직을 버렸다. "형식적 종교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얼마후 첫 영국 여행을 떠났다. 그는 영국에서 워즈워스, 급진파 시인 랜더, 콜리지, 그리고 칼라일과 친분을 나누었는데, 특히 칼라일을 스승으로 모셨다.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간형이었다. 에머슨은 일관되게 노예제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칼라일은 지지자였다.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온 뒤, 에머슨은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다. 덕분에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알게 되었다. 강연장은 사람들로 꽉 찼다.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가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니체는 편지를 보내오길, 자신은 에머슨이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져서 감히 칭송을 삼간다고 했다. 왜냐면, 니체의 입장에서는 에머슨을 칭송하는 것이 곧 자기를 칭송하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행을 제외하곤 에머슨은 줄곧 콩코드에 머물렀다. 그는 1853년 재혼했고, 1882년 4월 27일에 죽었다.   논리는 어느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으며, 진실은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상대를 감복시킨다고 에머슨은 말했다. 이런 그의 신념은 그의 글이 논리적 일관성 대신 단상의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지혜가 깃든 인상적인 문장들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기에, 앞의 글 또는 뒤의 글과 연결되지 않는게 많다. 그의 전기 작가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연성을 하거나 에세이를 쓸 때 그는 단상들을 메모했는데, 막상 그 순서는 우연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초월주의에 관한 우리들의 탐색도 그런 단상적 성격을 띨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인들의 무위로 이끈 범신론이 에머슨에게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촉구하는 근거라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의 중심에 신성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믿으면, 그런 힘이 나게 되는가 보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야 한다." 그의 정신에 깃든 자비심은 놀랍다. 1845년에 행한 여섯 강연들의 제목을 보라. , ,, , , , 열두 권에 이르는 그의 전집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의 시집이다. 에머슨은 위대한 지성의 시인이었다.   그는 포를, 약간 경멸조로, '수다쟁이'라 부르며 경원시했다. 그의 시 (유럽의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에머슨을 포함한 초월주의자들 역시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를 읽어보자.   만일 붉은 살해자가 자기가 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피살자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나의 미묘한 길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지나가고 돌아온다.   내게는 먼 것과 잊혀진 것이 가까이 있다. 그들과 햇볕은 동일하다. 사라진 신들이 나타나고, 수치와 명예는 같은 것이다.      나를 도외시하는 자들은 오산이다. 만일 내게서 도망치면 나는 날개이다. 나는 의심하는 자이고, 내가 의심이다. 나는 브라만이 노래하는 찬가이다.   강한 신들이 내 집을 동경하고, 일곱 성스러운 자들도 헛되이 동경한다. 그러나 너, 선을 사랑하는 겸허한 자여 나를 찾고, 하늘에는 등을 돌려라.      자연주의 작가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역사와 동양과 인디언들의 생태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장시간의 계약직에 얽매이는 대신 자급자족의 독자적인 생활을 선호했다. 직접 배와 울타리를 만들었고, 측량기사이기도 했다. 에머슨의 집에서 2년을 살았는데, 그와 외모도 흡사하게 닮아갔다. 1845년, 그는 월든의 인적 드문 호숫가의 통나무집에 은거했다. 거기서 그는 고전을 읽고, 글을 쓰고,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며 살았다. 그는 고독을 즐겼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들이 깨뜨린 침묵보다 더 나은 교훈을 내게 주지 못했다." 그 어떤 전기도 에머슨의 다음의 간명한 언급보다 그를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처럼 탈속적인 삶을 산 사람은 보기 어렵다. 직업도 없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투표도 하지 않았고, 납세를 거부했으며, 육식을 하지 않았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또한 자연주의자였기에 덫을 놓지도 않았고, 총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색욕, 색욕, 명예욕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소시민의 경박한 행복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서른 권이 넘는다. 가장 유명한 책은 1854년에 출판된 이다. 마르크스의 이 나온 후인 1849년, 소로는 을 발표했다. 이 책은 간디의 사상과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서두에 말하길, 최고의 정부는 가급적 통치하지 않는 정부로서, 간섭이 적을수록 좋은 정부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직업 군대와 상설 정부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미국민의 자연스런 발전을 정부가 오히려 방해한다고 믿었다. 그가 받아들인 유일한 의무는 매순간 양심이 명하는 바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법률보다는 자연법에 복종하는 것을 선호했다. 신문을 읽는 것도 의미 없는 짓인데, 왜냐하면 화재나 범죄 소식은 하나만 읽어도 나머지는 모두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사건들을 낱낱이 죄다 알려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언젠가 토끼 사냥개 한 마리, 털복숭이 말 한 마리, 멧비둘기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찾고 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곤 한다. 개 짖는 소리를 들은 사람, 말 달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 멧비둘기가 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 걱정을 마치 자기 일처럼 나누어주었다."   마치 동양의 우화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 같은 이런 글에서 소로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 무정부주의 역사가들은 흔히 소로의 이름을 빠뜨린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평생 동안 일관되게 간직한 그의 신념이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좀 잊혀진 감이 드는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살아생전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시인이었다. 그는 메인 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 어문학과에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정신활동은 지칠 줄을 몰랐다. 영어로 스페인의 중세 시인 호르헤 만리케(15세기 스페인의 시인, 이 세상의 무상함을 통렬하게 읊은 "아버지의 죽음에 부치는 노래"는 스페인의 시 중에서도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스웨덴의 시인 에사야스 텡네르, 프로방스와 독일의 음유시인들, 앵글로색슨 무명시인들의 시를 번역했으며, 스노리 스툴루손의 의 일부를 시로 지었다. 남북전쟁의 불안한 나날을 지내며 스스로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착수한 의 번역은 최고의 영역본으로 꼽힌다. 특히 상세한 주석에는 그의 지적 호기심이 잘 나타나 있다. 1847년에는 육운각의 장시 를 발표했다. 또한 핀란드 서사시 칼레발리 풍으로 백인들의 도래를 예감하는 인디언들을 노래한 도 출판했다. 를 비롯해 에 수록된 수많은 시들은 동시대인들의 애정과 존경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에도 여러 시선집에 실려 있다. 지금도 다시 읽어보면, 단지 마지막 손질만 더하면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헨리 팀로드(1828-1867)는 초월주의와는 동떨어져서 남부의 희망, 승리, 부침과 최후의 패배를 노래했다. 그는 뉴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 독일 출신 제본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남부 동맹군 편에 서서 전선에 뛰어들고 싶어했지만, 패결핵 때문에 군인으로 입신하려는 자신의 열망을 접어야 했다. 그의 시에는 열정이 넘치고, 고전적인 형식에 대한 감각이 엿보인다. 그는 38세에 죽었다.      타이핑, 채란
87    보르헤스와 카발라 댓글:  조회:2000  추천:0  2019-03-10
보르헤스와 카발라   민원정 지음     보르헤스는 카발라를 종교적 의미에서가 아닌 해석학적 글쓰기의 이론으로 받아들였다.   카발라주의자들은 신은 말을 자신의 역사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말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말이 처음에는 어떤 소리였을 것이고, 그 다음에 문자가 생겼을 것이라고 역사적인 순서로 생각한다. 그러나 카발라주의자들은 이와는 반대로 문자가 먼저 생겼을 거라고 추측한다.   머리글   1. 연구의 목적 및 문제제기   보르헤스에게 있어 카발라의 핵심은 세상은 단순히 상징체계이고,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보르헤스가 카발라에서 취하고자 한 바는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오독을 통한 글쓰기, 즉 고전을 모방하고, 이미 쓰인 것의 다시 쓰기, 혹은 다시 해석하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증명하고자 함이 이 논문의 의도이다. 12   "카발라는 글쓰기의 이론이며 글쓰기와 말하기 사이의 명백한 구별을 거부하는 글쓰기 이론이며 심지어는 존재와 부재에 대한 인간적 구별마저도 거부한다." ㅡ헤럴드 블룸 14   카발라적 이미지 15 ; 우주는 한 권이 책이다. 우주 안의 각각의 자연적/정신적 현상은 의미를 갖고 있다. 세상은 거대한 알파벳이다. 육체적 현실, 역사적 사실, 인간이 창조한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메시지의 음절이다. 우리는 제한 없는 의미의 회로망에 둘러싸여 있다. 15   부스트로페돈boustrophedon 15 ; 알파벳을 두 체계로 나누고 텍스트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가는 치환읽기 15,17   알레프el aleph 19 ; 알레프는 모든 책을 포함하고 있고, 이미 쓰인 책들뿐만 아니라, 쓰일, 더 나아가 상상 속에 쓰일 수 있는 모든 책의 모든 페이지들까지도 포함한다. 20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카발라는 모든 세상이 단순한 기호체계이며, 우주를 포함한 모든 세상은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카발라의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단순히 문자 그대로 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숨겨진 의미를 찾도록 만드는 데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글쓰기는 고전을 모방하는 창조적 행위이며 이미 쓰인 것을 재해석하여 다시 쓰는 것이라 할 것이다. 21   모든 문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왔다는 카발라처럼 실제로 보르헤스는 새로운 문학을 쓰는 것은 예전의 문학을 다시 읽는 것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소재의 고갈로 전지전능한 작가로서의 지위가 퇴위당했다는 것은 카발라적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카발라와, 카발라적 글쓰기를 시도한 보르헤스에 따르면 우리의 글쓰기는 신의 글쓰기를 모방하는 것이다. 22   2. 연구동기 및 방법   노드롭 프라이의 문학관 23 - 아스토텔레스적 심미적 문학관; 문학을 작품으로 본다. 문학관의 중심을 이루는 개념은 카타르시스 - 롱기노스적 문학관; 문학을 과정으로 본다. 문학관의 중심개념은 망아 또는 몰입인데, 이는 독자와 시, 그리고 때로는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시인, 이 모두가 일체가 되는 것    카발라와 오독에 대한 고찰   1. 카발라의 시작   서양철학은 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글'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명해 왔다는 점에서 '음성중심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또 모든 사상, 언어, 그리고 경험의 토대로서 작용할 궁극적인 '로고스'.'현존','본질','진리','실재'에 대한 믿음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로고스중심적'이라고 하겠다. 28   형이상학 29 ; 선성불가침의 토대, 제일원인, 또는 절대적인 기원들을 가정하며 다른 모든 의미의 체계가 그것에 의존해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사유체계 ㅡ데리다가 정의한 '형이상학' , 마단 시럽   ;논리적인 생각으로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간단하게 추론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로고스중심주의'의 맹점이며 이를 벗어나 보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서구지성들의 움직임이라면, 보르헤스는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작가였다. 29   보르헤스의 표준적인 포맷은 5~10페이지 정도의 단순하고 압축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이야기들에서 보르헤스는 완벽하게 상상된 새로운 세계, 우리의 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른 현실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32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인간성은 오직 반대되고 도전적인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용기나 의지로서의 믿음은 오직 의심 그리고 반대되는 것과 만날 때에만 존재할 것이다. ;만약 세상의 의미가 명확하다면 우리는 생각하거나 우리의 고유한 의미를 창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4   엔 소프 40 ;엔 소프, 곧 무한한 일자가 되는 것이 카발라의 궁극적 실재    보르헤스는 성경을 서양 미학의 기초로 그리고 서양 문학의 근본적인 텍스트 중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성경을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 칭한다. 41   비르겔리우스는 옛 작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고전의 모방으로서의 텍스트를 의미하며 끝없는 재창조를 통하여 탄생되는 상호텍스트성을 의미한다. ㅡ버나드 쇼 44   2. 신비주의 흐름 속에서의 카발라   보편적인 신비주의는 없으며 힌두, 불교, 회교,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그 외의 각각의 신비적 체계와 개인만이 있을 뿐 ㅡ게르숌 숄렘 50   카발라의 뿌리는 메르카바 신비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영지주의gnosticism과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 51   보르헤스의 작품은 언제나 이중적 대칭구조로 전개되지만, 결론은 유일한 저자는 성령이고, 독창적 작품은 성경 하나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57   카발라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개념 57 - 아인소프ayin-sof; 아인소프를 이해하면 신성한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요, - 세피로트 sefiroth; 세피로트 체계를 이해하면 인반적인 존재의 의미를 이애하게 될 것이라 한다.   신화의 주요 테마 62 - 무한자 - 초월적 합일 - 대대의 분리 - 대대의 합일   정의 불가능한 무한자에 대한 개념은 그 안에 이중성 또는 다중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63   3.보르헤스와 카발라   보르헤스가 취한 카발라의 아이디어 64 ; 그 아이디어라는 것은 모든 세상은 단순히 상징체계이고, 별들을 포함하여 모든 세상은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르헤스는 카발라의 텍스트는 독자의 협력을 구하고, 문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가 아니라, 대신 숨겨진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려는 독자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글스기는 고전을 모방하고, 이미 쓰인 것의 다시 쓰기, 혹은 다시 해석하기를 의미한다. 보르헤스는 자신은 다른 사람에 의해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썼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하나의 문학은 그것이 읽히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고 지적하였다.    1) 오독   '모든 독서는 오독' 86   ;힐리스 밀러는 모든 문학 텍스트가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다양한 의미들의 끝없는 유희이며 비종결적 속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이론에 기초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독서는 오독'이라는 그 툭유의 이론을 주장   텍스트의 즐거움 ㅡ롤랑 바르트 89   -쾌감 ;텍스트의 일반적인 쾌감이란,단순하고 명백한 표면적 의미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독서하는 동안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상호 연관이라든가, 메아리라든가, 또는 지시사항를 발견하게 되는데, 순수하고도 연속적인 텍스트의 흐름에 이렇게 끼어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쾌감이란 두 개의 표면 사이 '합일(틈,잘못,약점)'에서도 비롯된다.   -희열 ;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문화적,심리적 관습을 불안하게 하며 언어에 대한 그의 관계에 위기를 가져다준다."    카프카 ㅡ데리다에 의해 반복 98 ;쓰는 것은 말하는 것과 다르고, 말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며,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다르다.   차연 100 ;'차이지움'이라는 공간개념에 '연기'라는 시간개념을 합쳐 차이와 연기가 합쳐진 신조어이다. 현재 차이 지워진 것은 다음 순간 자리부꿈을 일으킨다. 따라서 차연은 온갖 차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해석의 이질성이란 독자가 아무렇게나 해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해석들이 똑같이 좋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능력 있는 독자가 꿰뚫어 보는 정확한 통찰도 있고 어딘가에서 보편적인 의견의 일치도 불 수 있다. 다만 꼭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듯 의미가 하나라는 것이 잘못이다. 가장 좋은 비평은 그 텍스트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비평이다. ㅡ밀러의 해체비평 101   독자에게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 글쓰기와 책 읽기에 내재된 윤리성이다. 102   솔로몬은 말한다. "지구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ㅡ베이컨 108   망각, 그리고 반복은 보르헤스의 오독의 글쓰기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 110   2) 상호 텍스트성   카발라주의자들은 작가는 그의 책의 절대적인 창조자는 될지 모르나 그것의 절대적인 독자는 될 수 없다고 하였다. 115   상호텍스트성 ㅡ바흐친의 '대화주의 이론'   전재   -첫째, 모든 작가는 텍스트를 창작하는 사람이 되기에 앞서 먼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독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독자가 어느 한 텍스트를 읽을 때 그는 이제까지 그가 읽은 모든 텍스트들을 총동원하게 된다.   저명한 시인은 발명가라기 보다는 발견자라는 겁니다. ㅡ보르헤스 119   '비평이 종족 작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국 독자의 오독이 새로운 글쓰기를 창조해 낸다는 말이 아닌가. 11   ㅡ윌리엄 H. 개스 121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ㅡ에드워드 사이드 122   3) 메타픽션   메타픽션은 픽션의 픽션이다. 즉 이미 쓰인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127   메타언어 128 ; 덴마크의 언어학자 루이스 옐름슬레브, ; 이 세계에 존재해 잇는 비언어적인 사건이나 상황 또는 대상을 지시하는 대신 또 다른 언어를 지시하는 언어 ; 메타언어는 다른 기호체걔를 그 대상으로 삼는 기호체계를 말한다.   4) 창조적 비평 또는 비평의 창조성   비평은 ㅡ포스트구조주의자들 131   보르헤스에게 있어 아무도 문학의 독창성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작가들은 다소간의 시대정신의 충실한 기록자이며 기존 원형들의  해석자이자 주석자이다. 132   카발라주의자들의 반복, 특히 문학작품에 있어서의 반복은 성령으로 쓰인 성경만이 독창성를 갖는 작품이고, 이후에 쓰인 작품들은 모두가 성경을 모방한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반복이고, 보르헤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135   5) 상징   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 독창적인 시인과 모방적인 시인의 진정한 차이는, 단순히 전자가 후자보다 더 철저히 모방적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또한 성경이 유일한 책이라는 카발라적 관점에서 보면 독창적인 시인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136   우주는 신의 글쓰기미여 자연은 성스런 책이라면, 기호로 이루어진 신의 글쓰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보르헤스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오독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오독을 통하여 독자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144  
86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댓글:  조회:1944  추천:0  2019-03-09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1 죽음을 향해 바삐바삐 진행되는 삶의 행진 속에서 하나의 웃음, 하나의 즐거움은 초월적 득도의 자세, 곧 풍류스러움이다. 우리의 멋 또한 버선코의 가벼운 오름세, 높은 파도의 가벼운 내림세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2 살아 있음은 늘 살아 있을 것 같은, 늘 살아 있고 싶은 소망을 키운다. 이것은 삶이 지향하는 불멸에 대한 욕구이다    3 자유시, 자유시..... 그 자유시가 너를 구속할 때는 차라리 그 자유로부터도 떠나라.     4 자화상 / 안또니오 마차도   이게 제 얼굴, 이게 제 마음입니다 읽어보시지요 권태스러운 눈 몇낟, 목마른 입 하나 다른 거야 별거 아니지요 산다는 거 그저 그런 거 뻔히 아는 그런 거 놈팡이 짓이나 바람기 같은 별 중요할 것 없는,   조금은 미친 기, 조금은 시가 있는, 거기, 한방울의 우수의 포도주 주색잡기요 다 좋아하지요 하나도 안 좋아하든지 노름이요? 한번도 안했습니다 마시는 건 하지요, 어찌 내 고향 세비야를 배반하겠습니까,   작설차 다섯 여섯 잔 정도 여자요? 돈 후안이 아닌 바에야 그건 안되지요 나를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난 모든 걸 너무 가볍게 사랑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몇가지 것들만을 민첩성 재치 멋 그리고 기발함 그런 것을 의지나 힘 위대성보다 좋아하지요 나의 풍류도 어렵게 어렵게 찾은 겁니다 차라리 고대 희랍식 순수한 뜻으로의 멋이나 투우사 같음을 사랑합니다 여리고 가녀린 달의 우수보다, 하나 햇살의 반짝임 하나, 마침맞은 웃음 하나를 사랑합니다 반은 집시 반은 빠리지앵 사람들 말이지요 몽마르뜨 마까레나 성모나 모두 숭앙합니다 그리고 무슨 이렇다 하는 시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나의 첫 소망은 멋진 깃대 꽂은 투우사가 되고 싶었어요   이미 늦었죠 세상 산다는 게 바쁘군요 하지만 제 웃음은 즐겁습니다 늘 바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5 인간이 신의 꿈이라면 인간은 신의 명령과 신의 꿈을 벗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다.   6 하느님이 하느님이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하듯, 우리 또한 우리이기 위해서(우리가 단순한 그림자나 꿈이 아닌, 실체 혹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신이 꾸는 꿈의 산물이라면, 신 또한 인간이 꾸는 꿈의 산물이다.   7 "비밀은 가장 따스한 햇살에도 꽃피지 않는다" 꽃과 열매까지를 거부하는 은밀한 이름은 노자의 '무명(無名)'을 연상시킨다.   8 (전략) 그러나 그런 마술의 시간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망각이 살지 않는 곳에 행복이 오지 않듯, 하나의 죽은 목소리가 제풀에 꺼져갈 뿐 어느 바다도 하늘도 꽃도 여인도 없다 아무도 상처투성이의 장미를 계속 달고 다니는 하늘을, 여인을 보지 못했다 부질없는 입들 사이에 길을 잃은 사막 얼마나 견고한 침묵이 장미를 덮고 있는가 나는 모른다 어디에 진정한 생명이 있어 장미의 혼을 빼고 그녀를 시간으로부터 떨쳐놓을 수 있을지 어디에 장미의 불가능한 살결이 좁아질 대로 좁아져 그 서서한 수수께끼의 기호가 가능해질지, 변함없는 본질의 불꽃이.   - 리까르도 몰리나리   그렇다 영원과 절대, 사랑에 대한 꿈은 곧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집착이다. 시인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자이다. 거기에 시간의 횡포는 우리 눈앞에서 모든 꽃을 사위게 한다. 결국 '변함 없는 본질의 불꽃'으로 남을 수 있는 장미란 불가능하게 된다.     너는 대평원 속 젖은 계절의 달아나는 태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온다 세월의 차가운 이파리들 그 넓고 굳은 숲을 넘어 색깔도 희미해진 채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행복을 느낀다 행복을 간직한다 말없는 말 하나로 풀잎 사이 소곤대는 발걸음이 권태를 덮는다 멀고 꺼져가는 향기가 머물러 피운 불길 너는 곧바고 몸을 추스리고 뼈 사이 부서진 주름투성이의 옷을 집는다 너를 스치고 네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영혼과 깊 이를 요구하는가 그렇다 대기처럼 불길과 안개가 자욱한 너의 입속으로 내가 들어 가리니 너의 발걸음은 대양의 해일과 느린 하늘 그 마지막 숨결에 젖은 광휘 빨간 바다 기러기와 밤이 날다 깃들이는 남쪽의 꿈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마지막 하늘 꽃핀 어둠 밑으로 돌아와 고뇌의 목소리로 부른다 그리움에 차서 산산히 부서진 채로.   망각이 비둘기처럼 커갈 때 너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바람은 끝없이 나무들 사이에서 울부짖고 하나의 경악처럼 굴뚝의 검은 목구멍으로 파고든다 안에 불이 탄다 서서히 그리고 문득 기습당한 고독감이 부서진 기둥 사이에서 서성인다 영혼은 읽어버린 따스함을 찾는다 닳고 닳은 옛 책들 속이나 지 상의  횡포 속으로 도망쳐온 발걸음 속에서 그토록 너를 사랑했기에, 오늘 과거도 아늑하고 세월의 차가움도 빗줄기도 따스하다   나는 나와 함께 있는 허수아비를 바라본다 말없이 키만 우뚝 선 두려움 없이 나의 생각을 이들 불길에 데운다 혹시 이 밤 이 불을 지키며 내가 죽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오늘밤 나의 선조들의 마술스러운 미궁의 삶과 그 영원성을 반추하며 나 자신도 나의 주위에 텅빈 채 머물러 있는 실존의 하나일 것을 생 각하며   그리고 나는 나의 거칠고 스산해진 무거운 머리칼과 흩어져서 서성 대는 구름떼를 정성스레 매만진다 허무를 허무 속에 더욱 가두고 사랑도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기 그런 마음으로 너를 생각한다 꿈속에서 이윽고 동이 터오른다.   - 기까르도 몰리나리   기억도 아득한 네가 생각난다. 깨어진 기둥처럼 이미 잊혀진 사연들이 겨울의 찬바람과 함께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나는 나의 사랑 그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키만 큰 허깨비의 삶. 날이 갈수록 나는 더욱 춥고, 추억의 벽난로에 몸을 데운다. 책을 읽는다. 거기에도 나와 같은 애절한 사랑이 있음을 본다. 전신전화국 앞에서의 이별을 아파한다. 그와 똑같은 아픔과 절규가 나의 선조들의 아픔이었음을 알고 놀란다. 나만의 고뇌인 줄 알았는데.   나의 나이는 인류의 나이이다. 구름의 나이이다. 이미 머리칼도 스산하고 구름 또한 평온하지 못하다. 나는 나의 머리칼과 우주의 머리칼 혹은 구름을 정성스레 매만진다. 슬픔과 그리움을 졸업해서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거나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는 없음을 안다. '욕심 버리고 사랑하기'의 마음일 때 동이 트는 것이 보인다. 세상은 나처럼 고뇌하고 또 조금은 웃는 모습으로 있구나!      - 스페인,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2   1 말라르메는 시란 이리저리 떠돌며 사라지려는 이미지들이 주는 암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대상에 이미지가 아니라 정의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을 점차적으로 예측해가는 데서 생기는 기쁨의 4분의 3을 없애는 일"이라고 말한다.   2 감동과 공감대의 형성이 시와 수수께끼의 다른 점이다. 시는 같은 수수께끼여도 감동이나 설득력을 가진 공감대를 형성한다.   3 상징주의 시는 대상에서 느낀 직접적 감각을 이미지로 전개한다. 시적 이미지란 우리의 일상언어나 문학관습에서 때묻지 않은 창조적 이미지이다.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일수록 좋은 것이다. 그것은 처음엔 생소해서 저항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곧 색다른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4 인상주의에서 대상은 고정된 색깔이나 모양이 없다. 하늘은 항상 푸른 게 아니라 빛에 따라 까맣게 보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 노랗게 보일 수도 있다. 상징주의의 이미지는 시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굴절되는 자연을 제시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런 굴절된 이미지, 그런 오목 볼록 거울의 희미한 이미지들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가늠해보는 재미를 느낀다.    5 산다는 것은 내가 산산이 부서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 슬픔을 반추하듯 바다는 깊게 울부짖는다.   6 "주여, 용서하소서,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너무 사랑한 죄이옵니다"   6. 돌아오는 길은 모두가 슬픔   세르누다에게 바치는 시 -나의 가장 조용한 친구 민용태에게   아니면 차라리, 모든 것은 슬픔, 슬픔은 우리 속에 꼭꼭 지니고 다니는 재산, 지금 슬픈 것은 원래 슬펐던 것 백번을 되돌아와도 백번 우리의 슬픔에 꿈은 더욱 멀리라 돌아오는 길은 더욱 비어 있으리.     -중남미 시인 '에우헤니오 플로리뜨' 중에서        *   1 '자연스러운 화장'은 두 번의 거짓말이다. 첫째는 화장을 자연 그대로라고 속이고 있는 점이고, 둘째는 그 화장된 자연이 실제처럼 보이도록 한 점이다. 새로운 예술은 이 화장술의 영역이다. 시는 말의 놀이이다. 새로운 예술에서 예술가는 비로소 철학자, 도덕군자, 지성인의 말을 벗고 말의 연금술사 정도로 겸손해진다. 말과 '유리창'의 채색을 책임지는 기술자의 위치로 물러서는 것이다.   2 '아'의 연속이 갖는 수평감보다 "씨, 씨, 씨"가 갖는 강력한 수직의 솟아오름이 내 존재의 환희다. 더군다나 '씨' (si)는 스페인어에서 '아니다'가 아닌 '이다!'의 뜻이다. '예스!'다 생의 긍정적 환희의 소리가 이 이상 적합할 수 있겠는가. '씨, 씨, 씨'는 높게 솟구치는 존재의 소리며 바다의 말이다.   3 세상을 사는 일은 '야간비행'이거나 밤길을 걷는 것이다. 우연과 숙명이 겹치는 벽과 구토의 현장일 수 있다.  살아 있음, 여기 있음, 그 느낌은 또 얼마나 기적처럼 귀한 확신인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환희일 수 있다. 영원한 행복, 본질과 영혼은 이제 육체를 찾는다. 느낌을 찾는다. 육체와 시간 속에 영혼과 영원의 황홀함이 살아간다. 기옌은 선사(禪師)들처럼 색즉시공을 찾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변하는 현실 속에 나라는 실체가 숨을 쉬고 있음을 볼 뿐이다. 본질이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 생명의 욕구와 용기만큼 나는 분명히 있다. 대기는 은혜롭다. 깊다. 나는 알 수 없는 이 실존상황 속에 존재하는 전설!     4 시가 자연이나 현실을 투영한다는 전통 시학이나, 시가 시인의 감정이나 내적 체험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낭만주의적 영감론과는 반대로, 시는 자연과 상관없는 언어의 무늬라는 것이 기옌의 시학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대상이나 일상체험을 발견하려고 하는 독자는 자연히 그의 시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옌은 삶의 넓은 위상과 의미를 궁극적으로 파악하려는 지적 자세를 잊지 않고 있다. 여기에 그의 시가 극도의 지적 성찰과 추상성을 띠게 된 연유가 있다.   5 에우헤니오 플로리뜨는  "희망은 인간이 마지막 버리는 병이다"라고 했다. 기옌은 우리 모두처럼 "하늘의 태양과의/ 언약이 있음"을 기억한다. 태양과의 약속이 가장 확실해지는 계절은 봄이다. 기옌은 다음의 연시에서 생의 환희에 이른다.   6 봄의 구원   오직 너의 벌거숭이 몸뚱어리에 꼭 달라붙어, 대기와 빛 사이 너는 순연한 원형   너는 있다! 아주 벌거숭이여서 아주 잇대어 있어서, 아주 단순해서 세상은 또다시 참을 수 없는 우화가 된다   주위로 하나씩 하나씩 일상의 사물들이 모양지어 나타난다 그리고 사물들은 기적이다 마술이 아닌   썩을 수도 용해될 수도 없는 태양의 행복 하나의 유리창을 통해 투명한 진실이 펼쳐진다   온 천지에 확실한 광휘가 펼쳐진다 보라 이 시간이 그 하늘로 행진하고 있음을.   7 기옌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달에 대한 무서운 비약 "오, 달이여, 수천의 4월이여!" 이런 구절에서 시어는 상식의 마지막 발판을 잃는다. '달'과 '수천의 4월' 사이에는 무의식에 가까운 유사성만 존재한다. 단순한 상징이기에는 너무나 감각적이고, 감각적이기에는 너무나 먼 비유이다.   8 살았기에 죽음까지 어여쁜 법열이여   나는 호르헤 기옌을 읽으며 가끔 우리의 김현승을 생각한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고 노래한 플라타너스의 시인은 나무와 새를 노래한 점에서 기옌과 비슷하다.     시계 12   난 말했다 모든 건 이제 충만 그것 플라타너스 하나 몸으로 떨었다 은빛 반짝이는 이파리들이 사랑으로 수런댔다 파란색은 잿빛이었다 사랑은 태양이었다 그러자 한낮 새 한 마리 바람 속에 노래를 태웠다 꽃은 너무도 놀랍게 자신의 바람 속에 노래로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키가 큰 벼이삭들 사이 갑자기 노래로 자라오른 꽃 그게 나였다 모든 주위 속 그 순간 한 중심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 모든 건 완전했다 하나의 작은 신을 위하여 난 말했다 모든 건 완전 시계 12시!   여름 한낮, 12시의 절정감 생명의 절정 그 법열을 새가 노래한다. 꽃이 노래로 핀다. 파란색이 잿빛이 된다. 같은 색, 생명의 색깔, 깨달음에 가까운 이런 절정감은 이 시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생명감으로 충일한 절정의 환희를 기옌만큼 명확하게 표현하기도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이름없는 얼굴이 되어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인간이다 아무 상관없는 나의 추상 어찌할 것인가 소리칠 것인가 다정하게 피로의 물결 속에 침묵 속에 변덕 없는 무명을 간직하고 너무 많이 아야기해서 말이 없는  말소리 하나를 세운다, 난 참 좋은 친구예요.   기옌은 사람과 자연이 하나임을 느낀다. 어쩌면 자연이나 동물이 더 인간적일 수 있음을 안다. 그는 말 앞에 선다. 풀밭에 갈기가 질질 끌리거나, 꿈적 않고 가만히 서 있거나, 귀를 조용하게 내린 말을 바라보다 그는 소리친다. "저기 있다, 말들이, 거의 초인간적 자태로."   생명의 시인은 죽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생을 구가하는 시인은 사실 그의 열락을 죽음 위에 세운다. 그 기쁨의 뿌리는 사실 죽음이다. 그는 말한다. "나의 확신은 어둠속에 뿌리를 둔다 / 번개가 어두울수록 그 빛은 더욱 나의 것 / 검은 어둠속에 하나의 장미까지 웬지 우뚝 선다."    - 중남미 시인 '호르헨 기옌' 중에서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3 1 앙드레  브르똥은 1924년 쉬르리얼리즘 선언을 발표한다. 그는 "심리적 자동필기법을 통하여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쉬르리얼리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쉬르리얼리스트의 임무는 무엇보다 "일체의 도덕적 미학적 편견을 떠나 이성의 작용으로 인한 모든 제약을 벗어난, 의식과 사고의 진솔한 기능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절대 사랑을 시도하지 말자   그날 밤 바다는 잠이 없었다 그 많은 파도들에게 이야기 이야기하다 지친 바다는 마침내 멀리 도망가 살기로 했다 누군가 바다의 쓰라린 색깔을 알아주는 그곳으로   잠도 없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곤 했다 밤 한가운데 다정하게 팔과 팔을 껴안고 있는 배들 아니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는 망각의 옷을 입고 늘 창백한 몸뚱어리들   바다는 폭풍을 노래했다 어둠의 하늘 아래 그 어둠처럼, 별과 새를 잡아먹는 항상 원한 많은 그 어둠처럼 바다는 소리소리 치며 함성을 터뜨렸다   바다의 고함소리가 빛과 비와 추위를 가로질러 구름으로 올라간 도시들에게까지 들렸다 시엘로 세레노 콜로라도 글라시아르 델 인피에르노 그러나 모든 도시는  광고와 떨어진 별들뿐 흙덩이 손 위에 펼쳐진   바다는 도시를 기다리다 지쳤다 거기 바다의 사랑은 오직 하나의 알 수 없는 구실일 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난날의 미소일 뿐   그리하여 바다는 다시 꿈을 거두어 서서히 되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아무 이야기도 모르는 세상이 끝나는 곳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벌거숭이 발로 유리알을 밟는 일, 또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정면으로 얼굴을 맞대고 태양을 바라보는 일 해변은 죽어가는 아이 하나하나를 위해 시간과 나날을 헤아린다 하나의 꽃이 핀다 하나의 탑이 허문다 모든 것은 마찬가지 나의 팔을 펼쳤다 비가 오지 않았다 유리를 밟았다 해가 없었다 달을 바라보았다 해변이 없었다 무슨 상관이랴 너의 운명은 일어서는 탑을 바라보는 일, 열리는 꽃을,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일, 그밖에 화투장을 잃어버린 화투처 럼 그냥 우두커니 서서.   모든 의미와 좌표를 잃어버린 허무감이 이 시의 분위기를 이룬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고 좌절이 있다. 태어난다 죽는다 모든 것은 매한가지로 삶의 모습일 뿐이다. 거기에는 물론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안타까움과 절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 실존의 냄새일 뿐.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그냥 살아 있기이다. 화투장이 모자란 화투를 들고 칠 수 없는 화투장처럼 그냥 우두커니 서 있기이다.     망각이 사는 곳   망각이 사는 곳 여명이 없는 황량한 정원에서 나는 오직 잡풀 사이 묻힌 하나의 돌의 기억으로 남을지라 그 돌 위에 바람만이 불면의 밤으로 달아나리니   수많은 세월의 품속에 하나의 육체를 가리키는 나의 이름 하나로 남을지라 아무런 소망도 없는 내가 될지라   거기 그 커다란 지역에서는 사랑이 무서운 천사가 되어 그 날개를 나의 가슴에 이제 쇠창처럼 숨기지 않으리라 폭풍이 몰려와도 가볍게 아름다이 미소지으리라 거기 자기의 모습을 닮은 주인을 찾는 이 열망이 끝나는 곳 스스로의 인생을 남의 인생에게 맡기고 다른 눈들이 마주보는 수평선밖에는 바라볼 데가 없다 할지라도   거기서는 고통도 행복도 이젠 이름밖에 아무것도 없으리 하나의 기억 주위로 원형의 하늘과 땅   마침내 거기서는 나 자신 알 수도 없이 내가 자유로워지고 나는 그리움의 안개가 되어 어린애 속살 같은 가벼운 그리움으로 남으리   저 너머, 그 먼 곳 망각이 사는 곳에서는.     세르누다의 사랑은 잊혀질 뿐 죽지 않는다. 사랑은 살아 있음의 색깔이다. 그리고 죽음은 또다른 피안이다. 세르누다는 "사랑은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우리들 자신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죽는다, 그 고뇌도, 즐거움도. 그러나 사랑과 사랑에 대한 소망은 영원하다. 그 영원함은 오직 망각에 의해서만 무형으로 된다. 세르누다는 욕망이 아닌 사랑을 영원 속에서 꿈꾼다. 사람은 망각에서 와서 망각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아닌 데서 와서 내가 아닌 데로 간다. 시인은 그 길에 사랑이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내가 없는 곳, 내가 잊혀진 길에 사랑만 오롯이 꽃피어 있길 기원한다.        - 중남미 시인, 중에서     생명   종일 새 하나 가슴에 와 지저귄다 입맞춤의 세월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산다는 것 산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 입맞춤이거나 새거나 늦거나 빠르거나 영원히 오지 않거나 죽는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남의 심장 하나 잠잠해지는 소리 아니면 산다는 것은 결국 남의 무릎 땅에서 헤엄치는 금발의 머리칼을 위한 황금배 하나 아픈 머리, 황금 관자놀이 그러나 곧 떨어질 햇덩이 하나 여기 어둠속에서 나는 강물을 꿈꾼다 지금 태어나는 파란 피의 갈대들 따스함이거나 생명이거나 너에 의지하고 서 있는 꿈 하나.     삶의 덧없음을 알아야  하루하루가 맛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죽는다. “죽는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또한 산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나는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늘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내가 죽는 소리는 “남의 심장 하나 잠잠해지는 소리”이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남의 배를 타고 잠간 쉬었다 가는 뱃놀이의 즐거움이다. 내게 주어진 생명, 그 ‘햇덩이’는 저녁이 오기 전에 떨어질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모두 다 죽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할 때 사는 맛은 진하다. 산다는 것, 혹은 실존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딛고 잠깐 떠 있는 일이다. “어둠속에서 나는 강물을 꿈꾼다.” 살아 있음의 소중한 느낌을 맛본다. 삶은 유리잔보다 부서지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아주 하찮은 것에 놀란다. 사랑을 느끼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해!”처럼 영원을 저당잡히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     나는 운명이다   그렇다 어느 때보다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어찌하여 내가 너를 입맞추겠는가, 죽음이 바로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다만 산다는 것을 잠깐 잊는 것뿐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 한 육체의 빛나는 한계를 안 보기 위하여 내 어찌 눈앞에 와 있는 어둠 앞에 눈을 감겠는가   나는 책 속의 진실을 읽고 싶지 않다, 그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물 처럼 올라온다 나는 그 거울을 포기한다 그 거울 속에는 산이 보이는 곳마다 벌거숭이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는 내 이마가 비친다 거기, 의미를 모르는 새들이 가로질러 날아가는   나는 강물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지 않다 거기 색색의 물고기들 이 분홍빛 생명을 번뜩이며 안타까움의 한계인 물가를 돌진하는 모 습 강물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목소리들이 일어난다 갈대 사이에 누워 있는 나는 그 기호들의 의미를 모른다   아니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 먼지를 마시는 것을 거부한 다 그 고통스러운 흙덩어리가 하늘의 눈도 이해할 수 없는 기호처럼 굴러간다는 것을 알 때 나의 살덩이가 말하는 삶의 확실성을 나는 믿을 수 없다   아니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혓바닥을 들어 절규하지 않는다 위에서 부딪혀 떨어지는 돌멩이처럼 혓바닥을 쏘아올리지 않는다 쏘아올려 광막한 하늘의 유리창을 깨고 그 하늘 뒤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생명의 소리를 내고 싶지 않다   나는 살고 싶다 튼튼한 풀잎처럼 살고 싶다  북풍처럼 눈처럼 눈을 뜨고 있는 숯덩이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는 어리아이의 미래처럼 달이 모르는 짐승들의 감촉처럼   나는 음악이다 그 많은 머리칼 밑에 신비스럽게 날아가며 세상이 만드는 음악 날개에 피를 흘리며 억눌린 가슴속으로 죽으러 가는 순진무구한 새 하나   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러모으는 운명이다 사랑을 아는 모든 반경이 모여드는 유일한 바다 모여와서 중심을 찾는 소용돌이쳐 소리소리 치며 완전한 장미처럼 원이 되어 출렁이는   나는 벌거숭이 바람을 향하여 갈기를 불태우는 말 한 마리 나는 스스로의 털과 갈기에 고문당하는 사자 무심한 강물을 두려워하는 사슴 밀림을 떠나는 당당한 호랑이 대낮에도 반짝이는 작은 풍뎅이   아무도 살아 있는 사람의 현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소리치는 화살들 사이 그 한중간에 서서 보이지 않을 게 없는 투명한 가슴을 내보이는 그러나 맑아도 밝아도 결코 유리창은 될 수 없는 삶 손을 대보라 피를 느낄 테니까.   - 중남미 시인 중에서  
스페인 시인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고독과 고독의 대화 민 용 태   오늘 스페인 시는 어느때보다도 다양하고 풍성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바야흐로 스페인의 시의 르네상스가 오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은 그 반대다. 다양하다는 말은 그렇게 두드러진 목소리가 없다는 말이고, 풍성하다는 말은 시의 대중성보다는 내적인 깊이가 좋아졌다는 말이 된다. 문학의 시장가치는 떨어진 반면 형이상학적 깊이나 내적 진솔성이 신비주의에 가까울만큼 돈독해졌다는 뜻이다.   오늘 스페인 문학이나 시를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아직도 여러가지 시도들이 창작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스페인 내란 이후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스페인 현대시는 이데올로기적 좌우 갈등구조에서 시적 체험의 내부화로 색깔을 달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전후 스페인 시는 기독교적 종교시, 르네상스 시대의 목가적 서정시가 유행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 스페인 시 풍조는 소위 “사회참여시” 혹은 “사회시(la poesía sicial)"가 주류를 이루었다.   스페인 전쟁은 프랑코파와 공화당파의 전쟁이었으니까, 프랑코가 승리하고 난 뒤에는 마르크스주의나 민주파가 맥을 못추었다. “프랑코 만세!”를 외치는 극우파의 세상이었으니까. 그런 시인들은 시잡지 “가르실라소(Garcilaso)를 중심으로 16세기 스페인 제국과 황금세기의 문학의 부활을 꿈꾸었다. 프랑코가 16,17세기의 스페인 황금세기(Siglo de oro)를 꿈꾸며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 스페인을 재건하겠다고 큰소리쳤으니까. 거기에 발을 맞춰, 그 황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르실라소의 사랑시, 목가시를 모방한 소네트나 신비주의적 시를 흉내냈다.겉으로 보면 사회 정치 도피적 시들로 보였으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프랑코 아부파들이라고 좌파들은 꼬집었고, 정확이 말하면 호세 가르시아 니에또(José García Nieto)가 주동이 된 이들 극우파 시인들은 복고주의 서정시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스페인 시단에 등단한 것도 1970년도 “마차도 시인 형제 문학상(Certámen poético de los hermanos Machado)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우화(Fábula)“라는 시로 시상을 준 심사위원은 좌파라고 할수 있는 레오뽈도 데 루이스(Leopoldo de Luis)시인이었고, 잡지에 내 시를 소개하고 나를 키워준 시인은 금방 말한 우파 시인 가르시아 니에또였다. 그리고 지금 말하는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시인은 다름 아닌 레오뽈도 시인의 아들인 것. 어떻게 보면 우루띠아 시인과 나는 같은 한 분을 詩의 아버지로 섬긴 자식들이라 할 수 있으리라.   사실 우루띠아 시인은 1991년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발명(Invención del enigma)”으로 시단에 발을 들여놓았으니까, 나이 40이 넘어 늦둥이로 詩作에 손을 댄 셈이다. 그 동안 기호학이나 문학교수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마드리드에 있는 “까를로스 3세 대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1996년 “항해 허가증으로 준 늑대 대가리(Cabeza de lobo para un pasavante), 2000년에 ”미지의 발음(Una pronunciación desconocida)” 에 이어 오늘 소개하는 “바다, 혹은 사기(詐欺)(El mar o la impostura)”로 유명한 “14회 하이메 힐 데 비에드마 시상 (XIV Premio de poesía Jaime Gil de Biedma)을 수상한다. 2004년 출간된 이 시집은 벌써 3판에 들어갈 정도로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시집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디 오딧세이”의 율리시즈의 모험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르띠아에게 산다는 것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바다가 죽음과 고통의 상징이라면 산다는 것은 죽음 위에 떠 있는 위대한 물거품이거나 부질없는 영광 혹은 사기 당하기이다. 율리시즈 같은 위대한 영웅의 항해도 인생도 결국 사라져가는 울부짖음의 기억이나 우울증을 위한 밑밥들이었을 뿐. 다만 거기 유일한 희망은 그 속에서 노래와 말의 금광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가 죽음의 잿더미 속 곰팡이에서 다시 태어난 불사조임을 고백한다. 거울에서 나를 보면 나에게는 주검 냄새가 난다 나는 끝없이 내 속에 침몰하며 죽어가고 있었기에.   새벽의 꽃이며, 네가 나와 함께 왔었지. 그리고 강가 사원의 기둥들 앞에서 나에게 해질 무렵의 색깔을 보여주었지. 나는 오직 그것을 피로 보았지. 최소한도 너는 나에게 활을 당기는 법을 가르쳐주었지. 나는 이따까로 돌아왔다.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평상 일과로 돌아왔다. 나를 씻어주고 향를 뿌려준다. 깨끗한 까운을 걸치고 다닌다. 동이 트면 업무로 생긴 일들을 해결하러 나간다.   밤이 되어 눈을 감을 때 사랑스런 페네로페가 나를 껴안을 때 나는 여자들의 얼굴을 본다, 허우적거리는 남자들의 긴 팔을 본다 파도 속에 죽어가며 작별하는 몸짓들을 본다, 이마에 불타는 눈먼 눈길들.   "나는 노래와 말의 광맥을 찾기를 갈망한다“   우루띠아의 인생은 여행한다는 것. 그것이 율리시즈와 같은 항해여도 모험이어도 여행은 여행이고 여수(旅愁)가 남는다. 그러나 여행이나 여수는 그 자체로서는 체험일 뿐 무명이고 무가치이고 금방 사라진다. 그 삶과 여행이 쓰여졌을 때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게 되는 것. 시인은 논술조에 가까운 서시에서, “나는 오직 동사라는 말일 뿐” 이라고 말한다.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말은 유태인 “레비 사촌”의 기록적인 말에서 영감을 찾는다. 그는 말한다: “안나 프랑크라는 한 소녀의 기록이 그녀처럼 고통을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욱 우리를 감동 시킨다. 어쩌면 그게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거나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우리 모두는 계속 숨쉬고 살아갈 수가 없을 테니까.”   이 말은 기호학적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고 시인은 말한다. 소녀 안나는 그녀의 일기를 통해서 인간의 사악함의 기호가 되었다. 안나는 그 고통을 글로 씀으로서 인간의 사악함과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안나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안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나가 없었다면 그녀를 고통에 빠뜨린 사회의 불의나 고통은 인간에게 고발되지 않았을 것. 따라서 시인은 말한다:   “그러므로, 소름끼치지만(이 “소름끼치다”는 나의 표현이 맞다), 오직 쓴다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종국에 남는 것은 오직 쓴 글 뿐이다. 글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루띠아의 “바다,혹은 사기”라는 시집에서는 인생과 여행, 글쓰기가 모두 동의어이다. 거의 이야기투로 쓰여진 이 시집은 모험가, 영웅 율리시즈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똑같은 평범한 생할인의 우울과 무의미가 무체색으로 그려진다. 우울한 것은 우리 모두 행복하기 위해 싸웠고, 행복하고 싶었고, 지금도 행복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말하듯 우리는 인생이라는 우연의 사고 많은 길에 내던져진 소경들이다. 우리 인생은 알 수 없는 일들이다. 오랜 세월 기다림 끝에 돌아온 율리시즈를 맞은 페네로페는 말한다:   “나는 행복해야 해, 내가 잘 아는 이 모르는 사람이 내게 왔으니까.”   우루띠아의 “시의 진리”는 삶의 씁쓸함을 깊은 맛으로 반추한다. “율리시즈처럼 아름다운 여행을 한 자는 행복할지어다 / 로마에 가서 로마를 찾았고,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으니까”라는 아이러니한 말을 자꾸 반복한다. 돈 끼호떼 속에 나오는 산초도 자기 이름이 책 속에 나온 것을 보고 신기해 한다. 또한 행복해 한다. 그러나 율리시즈나 영웅들, 아니면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인생의 결사대인 모든 우리들의 좌절된 꿈과 불안과 공포 쓰라림들, 그것이 행복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진실들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끝났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시, 한 권의 노래집. 우리의 율리시즈는 서사시가 되어 돌아온다. 자신은 “자기 자신의 책의 책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바로 이따까임을 / 모르고 있었으니까.” “율리시즈는 어두운 방에 있다 피부에 윤기가 없고 머리칼이 백발이다. 그러나 누가 저것을 알았던가? 누가 그의 인생을 묘사했던가? 그리고 율리시즈는 무엇을 아는가? 그가 한 것은 오직 우울과 우수의 여행이었을 뿐.”   호르헤 우루띠아는 오늘 스페인 시의 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동서의 문학과 시의 구분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외국문학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하니까.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의사 감정 소통 부재(incomunicación), 기계화 속에서의 인간 소외, 고독과 우울, 시 쓰기에서 있어서 문학적 텍스트와 나의 실존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현대시의 화두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진솔한 내면 세계 속에서의 대화.  밤새 누구에겐가 썼던 편지를 아침이면 다 태워버리듯이, 시 쓰기는 구태어 읽어주는 사람을 위한 거라기보다는 자기와 자기의 대화, 그런 위안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의 내면과의 진솔한 대화가 오늘 우루띠아의 시다.   사실 요즘 세계화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은 모든 지구를 시장으로 만들겠다는 수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밥만 잘 먹으면 사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내 속의 그 인간은 더욱 왕따 당하고 그러나 왕따 당하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자유일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명상하고 생각하고, 자신과의 대화를 즐기는 즐거움이 오늘 시인의 낙樂이 아닐까.   1 시인의 역사 / 호르헤 우루띠아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 떠나지 않았던 그 집으로. 절름발이가 다 된 불쌍한 신천옹, 새가 다 알 듯이 모든 새의 비상의 둘레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먼저 꿈의 불룩한 내부의 오목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본 뒤 꿈꾸며 꿈의 길을 왔다.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온통 살과 눈길, 촉감과 애무가 되어 돌아 온 것. 영웅주의와 결별했다. 그리고 비상의 신천옹은 그냥 나비가 되었다. 그는 말로부터 침묵까지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씩 죽어간다, 다 부서지고 사라져 살아날 때까지.   2 역사학   다시 한 번 추억을 거리를 밟는다 현재를 찾는 자의 따스한 정성으로. 모퉁이들, 빛들을 찾는다 멀어져간 목소리의 메아리, 그 컵에 남은 진홍빛 입술 자국, 쓰레기통 속 구겨진 종이들을.   세월과 함께 쌓여 갈 실낱 같은 사랑 하나 기다리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마침내 모든 쓰레기로 시 하나를 만들기로 한다 잃어버린 모든 시간을 되찾기 위해.   3 정복자   너의 몸을 만졌다, 몸은 자라나고 있었다. 너의 몸을 만졌다, 몸은 미끌어지듯 빠져나갔다, 서서히 그의 손가락 사이를, 절대 굴하지 않는 손에 쥐려고 하는 물의 저항처럼 물의 밑바닥과 비밀은 끝내 잡히지 않는다. 물의 칼은 물고기 몸이 되어 그의 피를 말렸다.   그렇게 빠져나가던 그 먼 너의 물을 뚫고, 액체로 에워싸인 너의 몸에 다달았다. 너의 손을 너에게 놓고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소유란 아무런 행복도 아니라는 것을.   4 호텔 방   누가 문을 노크했다. 잠에 취해, 벌거숭이로 침대에 있는 그를 급습했다, 그는 제 정신이 아닌 채로, 빠져들었다 그 손의 부드러운 추억 속으로, 그 입술의 따스한 구름 속으로, 그 눈의 물끼 젖은 파닥거림 속으로.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불분명하던 것이 이제 분명해진다. 시가 벌떡 일어나 우뚝 선다. 그리고 문턱에 서니 여명 저 너머로, 한한 대낮.   문을 연다는 것은 참 쉬웠다! 열쇠를 돌리고 손잡이를 돌리고, 그 전에 옷은 반쯤 입고 (시가 새벽의 벌거숭이 모습을 다 드러낸다는 것은 절대 좋은 게 아니다)     5 외부   길을 밟는다. 부질없이 바라본다는 것이 결코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안다. 오직 상처만이 여명을 알게 하리라. 손이 더 안다. 너의 살결이 안다 확실한 두 가슴의 둥그런 부피 입술의 한계, 등에 와 닿는 불타는 듯한 손가락들의 깊은 자국들.   보지 않고 안다. 하지만 보려고 한다, 눈먼 사람의 포옹 밖에는 다른 눈길이 없다, 안개가 방향을 잃게 한 뱃고동 소리.   네가 한 말 하나, 아니면 침묵 하나. 피는 달콤하게 그의 셔츠를 적신다, 그의 왼쪽 옆구리에 혈관이 하나 터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맑은 풍경이 있다, 하나의 평원: 노란 선이 지지 않는 해를 향하여 꼬불꼬불 기어간다, 자유롭게, 아주 자유롭게.  
84    표현의 광란 / 프랑시스 퐁주 댓글:  조회:1489  추천:0  2019-03-07
루아르 강둑    1941년 5월 24일, 로안느    이젠 그 어떠한 것도 나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나의 연구 대상을, 그 대상에 관한 구술적 표현의 가치 창조를 위해서나, 아니면 이런 표현들을 시로 정리하기 위해서나 결코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다른 것 으로서의 대상 그 자체로 되돌아가야 한다. 특히 내가 이미(이 순간까지) 그것에 관하여 써놓은 것과도 다른 것으로.    나의 작업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위해 내 표현의 끊임없는 수정작업이어야 한다(그렇다고 이러한 표현 형태를 미리 걱정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 강둑의 한 지점에서 루아르 강에 대한  글을 쓸 때면, 나의 시선과 나의 정신을 끊임없이 그곳에 담가야 하리라. 또한 그것이 표현 위에서 마를  적마다, 다시 강물에 담가야 할 것이다.     대상의 가장 큰 권리, 즉 모든 시에 대항할 수 있는, 절대 불가침의 원리를 인정해줄 것…… 그 어떠한 시도, 시의 대상 쪽의 최소한의 호소 내지는 대상 자신의 권리 침해에 대한 불평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대상이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로우며, 더 많은 능력을(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에 대해 그 어떠한 의무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모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앞서 말한 것들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니까 , 결코 시적  형태에 머무르지 말 것―그렇다고는 해도 이 시적 형태는 나의 연구에 이용되기는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의 어떤 어두운 면들을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거울의 유희와도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낱말들을 상호 충돌시키고, 구술적으로 유추하는 것이 대상을 탐색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사물들을 조정하려 들지 말 것, 사물과 시는 양립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시를 짓고 싶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이 승리하여, 새로이 몇 보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사물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 양자택일 중 나의 취향(사물들과 정신의 진보에 대한 강렬한 취향)이 주저없이 선택하도록 하는 것은 후자이다.    그러므로 나의 결정은 내려졌다……    결국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하여 시라고 부르기를 원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만일 조금이라도 *시의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으면. 나는 그것이 곧 꼬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힘을 다해 거기서 빠져 나오고 싶어질 뿐이니까.    *ronnon poetiqe. 감상적 서정주의 시를 일컫는다. 11   출처, 네블,인드라의그물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