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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댓글:  조회:1549  추천:0  2019-03-07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 손을 계속 움직이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 된다.  * 편집하려 들지 말라. 설사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 철자법이나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여백을 남기고 종이에 그려진 줄에 맞출려고 애쓸 필요 없다.  *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어라.  *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것을 배운 다음 글을 쓰게 되면 그 글에 힘이 실리게 된다. 자신의 깊은 자아를 믿게 되면, 이제 그곳에는 글쓰기를 회피하려는 목소리가 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    ※ 습작을 위한 이야깃거리를 묶어 보자    1. 방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성질에 대해 써 보자. 10분, 15분, 30분, 시간을 정해 놓고 멈추지 말고 계속 적어가라.    2. '기억이 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본다.  그러다가 중요한 기억이나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간다.  만약 막히면 '기억이 난다'라는 첫 구절로 다시 돌아가 계속 적어보라.    3.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아주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을 하나 골라서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적어보라. 다음에는 같은 것을 두고 싫어하는 시각으로 새롭게 써보라.  그런 다음 이번에는 완전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글을 써보라.    4. 한 가지 색만을 생각하며 15분 동안 산책해 보자.  산책하는 동안 주변의 자연과 사물에서 그 색을 발견할 수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자.  그리고 이제 노트를 펼치고 15분 동안 적어보라.    5. 오늘 아침 당신의 모습을 적어 보라. 아침 식사로 뭘 먹었는지, 잠에서 깨어날 때 기분이 어땠는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무엇을 보았는지 등등 가능한 구체적으로 서술하라.  6. 당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를 시각화시켜 보자.  그곳은 주로 어떤 색으로 채워져 있는가?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가? 또 어떤 냄새가 나는가?    7. '떠남'에 대해 써보자.  내용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며 단지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8. 당신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    9.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10. 당신이 몸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써보라.    11.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 묘사해 보라.    12.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적어 보라. 모호하고 추상적인 표현은 금물이다.  실제로 있는 그대로 적어라. 솔직하고 상세하게 접근해야 한다.(수영하기, 하늘에 떠있는 별, 당신이 경험했던 가장 무서웠던 일, 초록빛으로 기억되는 장소, 性에 대한 의식이 생기게 된 동기  혹은 최초의 성 경험, 신의 존재나 자연의 위대함을 깨달았던 개인적 체험,  당신의 인생을 바꾼 책이나 문구, 육체가 가진 한계와 인내, 당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인물)    13. 시집 한 권을 꺼낸다. 아무 데나 책장을 열고, 마음에 드는 한 줄을 골라 적은 다음,  거기서부터 계속 이어서 글을 써보자. 쓰다가 막히면 첫 줄을 다시 적은 다음 새로 이어서 쓴다.  다시 쓰는 글은 좀전에 썼던 글과 완전히 방향이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써본다.    14. 당신이 동물이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어떤 동물인가?      ※ 나태함과의 싸움    텅 빈 노트 또한 에고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당신 속에서 싸움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싸우도록 내버려 두라.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회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 편집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라    만약 당신이 열심히 창조적 목소리를 내려는데 편집자가 성가시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작업을 진행시키기 힘들다면 편집자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를 한번 적어보라. 편집자를 정확히 알면 알수록 편집자를 무시해 버리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 바로 당신 앞에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만일 내가 겁을 낸다면, 내가 쓰는 글도 왜곡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하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 모든 것을 항상 처음 대하는 기분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당신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라.    ※ 내면의 잠재능력에 가 닿아라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목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곧장 나가라.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 '대하여'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 시인과 시는 다르다    우리가 쓰는 글은 순간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당신은 좋은 시를 쓰고, 그 시에서 떠나라. 시에 들어가 있는 단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 몸을 빌어 밖으로 표출되었던 '위대한 순간'이다.    ※ 논리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수용하라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정도로 수용적이어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다른 하나를 볼 수 있는 폭넓고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은유는 이러한 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종교적이다.    ※ 글쓰기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아니다    글을 쓸 때 모든 것을 풀어주라. 글쓰기는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 강박증의 힘을 이용하라    작가란 종국에는 자신의 강박증을 쓰게 되어있다.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강박증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을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라. 창작에 대한 강박증은 무언가 가치있는 길을 찾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일종의 회피이고 게으름이다.    ※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    우리의 삶 모든 순간순간이 귀하다. 이것을 알리는 일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한 모금의 물, 식탁에 묻어있는 커피 얼룩에 대해서까지 "그래!"하고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부묘사는 우리가 만나는 세상 모든 것들, 모든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는 것과 같다.    ※ 케이크를 구우려면    당신 마음에서 나오는 열과 에너지를 첨가하라. 강에 대해 쓰고 있다면 그 강에 온몸을 적시라.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말라. 열을 가하다 중단한다면 그것은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 글쓰기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시를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주고, 많이 써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 파리와 결혼하지 말라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마음 속에 무수한 길들이 열리는 법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파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 원한다면 파리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파리와 결혼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 글쓰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기 체면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작품에 대해 보내는 칭찬에 기대 살아가는 한 그 작가는 다른 이들의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원조자에 대해 아는 편이 작품성을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 당신의 깊은 꿈은 무엇인가?    소망들을 글로 적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가운데에 그 소망을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꿈은 우리가 삶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 문장 구조에서 벗어나 사유하라    우리의 사고 방식은 문장 구조에 맞추어져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도 그 안에서 제한된다. 당신이 결국에는 인간이 만든 언어 체계 속으로 돌아가겠지만, 당신과 이 세상을 이루고 지탱하며 관통하고 아우르는 그 근원적인 큰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    ※ 말하지 말고 보여달라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의 작가라는 사실을 잊고 비판적인 편집자 행세를 할 필요는 없다.    ※ 그냥 '꽃'이라 말하지 말고 그 꽃의 이름을 불러주라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 사물의 존엄성을 지켜주라.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꽃' 대신 '제라늄'을 말할 때 당신은 현재 속으로 더 깊게 뚫고 들어가게 된다.    ※ 평범과 비범은 공존한다   우리는 세부묘사를 대단하지 않게 여기거나 개미나 파리같은 것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이미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세부묘사와 우주는 서로를 변화시켜 준다.    ※ 이야기 친구를 만들라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작가는 어떤 사건에 대해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를 원한다.    ※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사랑에 빠진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사랑하게 되는 능력이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을 흔들어 깨운다. 그들도 훌륭하고 나도 훌륭하다.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받는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버려라.    ※ 동물적인 감각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길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항상 길을 잃어버리는 이유인 것이다.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끼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정맥에서부터 곧장 펜을 통해 종이 위에 토해 놓게 만들라. 제일 좋은 글은 당신의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실린 글이다.    ※ 자기 마음을 믿어라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의 사고 속에 똑바로 서 있는 훈련이 따라야 한다. 자신의 만들어낸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종이 위에 안개를 옮겨 놓지 말라.    ※ 변덕스러운 마음을 길들이는 법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이 작업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들이 백 가지도 넘게 나를 유혹하는 것을 항상 느낀다. 마음은 항상 일과 집중력에 대해 저항하려 든다. '오, 그건 그냥 게으름일 뿐입니다. 어서 가서 일하세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오히려 당신을 혼자가 될 수 있게 해준다.    ※ 성性, 그 거창한 주제에 대하여    우리는 먼저 긴장을 풀어야 한다. 화제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당신과 그 화제와의 관계를 발견하라. '에로티시즘'이라는 단어를 다루기가 벅차다면, 이렇게 해보라.  * 무엇이 당신 몸을 뜨겁게 만드는가?  * 성과 관련된 과일 이름을 아는대로 모두 적어보라.  * 당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먹는 음식은 무엇인가?  * 당신의 신체 중에서 가장 성적인 곳은 어디인가?  * 당신이 맨 처음 성애를 느꼈던 기억은?    ※ 글쓰기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렇다. 그냥 쓰라. "그래! 좋아!"라고 외치고, 정신을 흔들어 깨우라. 살아 있으라. 쓰라. 그냥 쓰라. 그냥 쓰기만 하라. 우리가 글쓰기의 심장 안에 있다면 장소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앞으로, 더 멀리    당신이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최고의 글을 쓰고 있을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낀다. 충분히 자신을 밀고 나갔고 철저하게 에고가 깨졌다고 느낄 때조차도 조금 더 앞으로 밀고 나가라.    ※ 인생에 대한 연민    우리에게 두려움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지와 암흑의 장소에서 출발한 글쓰기가 결국에는 우리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    ※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사물은 그냥 있는 것이다. 당신이 글을 쓰기 원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라. 그러니 계속 쓰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또는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라고 묻되, 깊이 생각하지는 말라.    ※ 작가로서 살아남는 길    작가로서는 강하고 용감하지만 한 인간으로 돌아오면 한없이 무기력하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위대한 사랑과 생활인으로서 우리 등에 달라붙은 불명예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종이에는 멋진 시를 적지만 자기의 삶에는 침을 뱉거나, 자동차를 저주하거나,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매도하지 말라. 책상에서 시를 치우고 부엌으로 돌아가라.    ※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라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즉흥 글쓰기 창구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작가로서 완전하게 설 수 있다.    ※ 방랑을 위해 들판으로 나가라    한번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분별력을 놓아버린 천치가 되고 낯선 들판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를. 당신이 말을 겁내는 사람이라면, 말 한 마리를 사서 말과 친구가 되어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 시간이 작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목숨 전체를 기꺼이 그 글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을 때까지 기다리라.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살아있는 존재를 향해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심장 전체로 글을 쓰라. 종이에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인생 전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정되어진 운명이 글쓰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전술의 변화와 상관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글쓰기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 외로움을 이용하라    익숙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    ※ 더 큰 자유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라    당신이 내면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당신은 당신으로 된다. 당신이 집에 가는 이유는,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뿌리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뿌리가 묻힌 곳에서 발견되는 고통을 견디기 싫어서 그것을 외면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도망치려 한다. 단 한 사람과 접촉하고 교제하면서도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독자에게 당신 심장 더 깊은 속으로 들어오는 기회를 만들어 주라.    ※ 사무라이가 되어 글을 쓰라    만약 그 시에 한 줄이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그 한 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버려도 좋다. 우리의 글이 계속 타들어가 환한 빛을 내는 지점이 결국 하나의 시와 산문이 된다. 미적지근한 글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    ※ 다시 읽기와 고쳐 쓰기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버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전사, 사무라이가 되어야 한다.    출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한문화/2000 재출처, 다블,고도문예창작원  
82    이규보의 論詩 댓글:  조회:1285  추천:0  2019-03-07
  이규보의 論詩   作詩尤所難(작시우소난) 시 지음에 특히 어려운 것은 語意得雙美(어의득쌍미)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움을 얻는 것. 含蓄意苟深(함축의구심) 머금어 쌓인 뜻이 진실로 깊어야 咀嚼味愈粹(저작미유수) 씹을 수록 그 맛이 더욱 순수하나니. 意立語不圓(의립어불원) 뜻만 서고 말이 원할치 못하면 澁莫行其意(삽막행기의) 껄끄러워 그 뜻이 전달되지 못한다. 就中所可後(취중소가후) 그 중에서도 나중으로 할 바의 것은 彫刻華艶耳(조각화염이) 아로새겨 아름답게 꾸미는 것뿐. 華艶豈必排(화염기필배) 아름다움을 어찌 반드시 배척하랴만 頗亦費精思(파역비정사) 또한 자못 곰곰이 생각해볼 일. 攬華遺其實(람화유기실) 꽃만 따고 그 열매를 버리게 되면 所以失詩眞(소이실시진) 시의 참뜻을 잃게 되느니. 爾來作者輩(이래작자배) 지금껏 시를 쓰는 무리들은 不思風雅義(불사풍아의) 풍아의 참뜻은 생각지 않고, 外飾假丹靑(외식가단청) 밖으로 빌려서 단청을 꾸며 求中一時耆(구중일시기) 한때의 기호에 맞기만을 구하는구나. 意本得於天(의본득어천) 뜻은 본시 하늘에서 얻는 것이라 難可率爾致(난가솔이치) 갑작스레 이루기는 어려운 법. 自?得之難(자췌득지난) 스스로 헤아려선 얻기 어려워 因之事綺靡(인지사기미) 인하여 화려함만 일삼는구나. 以此眩諸人(이차현제인) 이로써 여러 사람을 현혹하여서 欲掩意所?(욕엄의소궤) 뜻의 궁핍함을 가리려 한다. 此俗寢已成(차속침이성) 이런 버릇이 이미 습성이 되어 斯文垂墮地(사문수타지) 문학의 정신은 땅에 떨어졌도다. 李杜不復生(이두불복생) 이백과 두보는 다시 나오지 않으니 誰與辨眞僞(수여변진위) 뉘와 더불어 진짜와 가짜를 가려낼겐가. 我欲築頹基(아욕축퇴기) 내 무너진 터를 쌓고자 해도 無人助一?(무인조일궤) 한 삼태기 흙도 돕는 이 없네. 誦詩三百篇(송시삼백편) 시 삼백편을 외운다 한들 何處補諷刺(하처보풍자) 어디에다 풍자함을 보탠단 말인가. 自行亦云可(자행역운가) 홀로 걸어감도 또한 괜찮겠지만 孤唱人必戱(고창인필희) 외로운 노래를 사람들은 비웃겠지.   위의 시는 고려시대의 문신이며 문학가였던 백운거사 이규보의 시입니다. 보시다시피 시를 시로 논한 작품으로 당시 시인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지난 시절의 통박이지만 여전히 그 의미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시는 한양대학교의 정민선생의 저서 [한시미학산책-도처출판 솔]에서 발췌하였으며, 번역 또한 정민선생의 역입니다.  출처, 시의향기   
81    [시 창작]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 / 믹스앤매치 댓글:  조회:1364  추천:0  2019-03-07
[시 창작]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 / 믹스앤매치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상상력, 표현 기법, 율격, 어조, 이미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미지는 시가 압축을 생명으로 삼는 문학이면서도 구체성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어(詩語)란 시에만 쓰이는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일상적 언어가 시 작품의 재료로 선택될 때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어와 일상적 언어는 다른 점이 있다.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국한되지만 시어는 언어 기호가 갖는 자체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연상되는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의미이다.      흔히 말하는 직유니 은유니 상징이니 하는 표현 기법은 시어가 일상어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해'의 경우 '해'를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밝음, 정열, 희망 등이다. '어둠을 살라 먹고 ∼ 해야 솟아라'를 반복하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밝은 세계로 향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일 것은 당연하다. 유치환의 '일월(日月)'을 보면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유치환, '일월(日月)' 제 1연)      제목부터 '해와 달'로 설정되면서, 제 1연에서는 '내가 가는 곳 어디인들 밝은 대낮이 없을 소냐(있을 것이다)'하여 '밝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읊었다. 같은 시인의 다른 작품을 보자.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중략)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이 작품은 '바위'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죽은 뒤에 산에 있는 바윗 덩어리로 환생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위가 가지고 있는 단단하면서도 불감부동(不感不動)의 이미지를 지닌 그 속성을 닮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 해', '바위'는 두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어들이다. 어떤 작품이든지 핵심 시어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대개는 작품의 제재(題材)가 되는데 이 제재에 대한 이미지를 통하여 내용 분석을 시도하면 70% 정도는 작가가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시의 흐름이 어떤 방향이냐에 따라 시어의 이미지는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생사(生死)    춘산(春山)에 눈 녹일 바람    어제 불고 간 데 없다.    그 바람 불어야    이 언덕 파릇파릇 새싹 돋아      두 작품의 '바람'은 어떠한가. 전자는 '잎새를 흔들리게 하는 바람'으로 나를 괴롭게 할 정도라면 외부적 시련의 이미지로 적당하다. 그러나 후자는 눈을 녹이고 새싹을 돋게 만드는 '바람'이니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바람'이 아닌가. 이와같이 같은 시어라도 시적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은 시어로서 선택된 일상어의 흥미로운 여행이다.      ' 밤(夜)'은 어둠의 속성으로 부정적 현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붓한 공간을 제시해주는 포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눈(雪)'은 추위와 관련되는 속성으로 고통, 시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매개체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일러 일반적 이미지 혹은 보편적 이미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편성을 떠난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만큼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자료: 믹스앤매치      
80    對象 無意味 自由 / 金 春 洙 댓글:  조회:1620  추천:0  2019-03-03
對象 ․ 無意味 ․ 自由                                  金 春 洙   * 이 글은 「韓國現代詩의 系譜」에 대한 註釋이다.       같은 서술적 이미지라 하더라도 寫生的 素朴性이 유지되고 있을 때는 대상과의 거리를 또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는 이미지와 對象은 거리가 없어진다. 이미지가 곧 對象 그것이 된다. 現代의 無意味詩는 對象을 놓친 대신 言語와 이미지를 實體로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19號 p. 10.      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은 시인은 항상 자기의 인상을 대상에 덮어씌움으로써 대상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모든 寫生畫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상파의 그림에서처럼 개성이 어떻게 다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대상은 현실의 대상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나무가 개로 둔갑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 그 대상은 조금씩 달라져 있다. (나무가 어둡게도 보이고 밝게도 보인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 구속이 긴장을 낳는다. 긴장이 몹시 팽팽해질 때 반 고흐의 풍경들이 된다. 그것들은 물론 風景(대상)이긴 하지만, 풍경 이상의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은 記號理論이나 意味論에서의 그것과는 전연 다르다. 어휘나 센텐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한 편의 詩作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편의 詩作品 속에서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여러 곳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데가 한 군데도 없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에는 실지로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더러 끼어 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라는 말의 차원을 전연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경우에는 반 고흐처럼 무엇인가 意味를 덮어씌울 그런 대상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대상이 없으니까 그만큼 구속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 된다. 聯想의 쉬임없는 파동이 있을 분 그것을 통제할 힘은 아무 데도 없다. 비로소 우리는 현기증나는 자유와 만나게 된다.     言語가 詩를 쓰고 이미지가 詩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 하여 가능해진다. --種의 放心狀態인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상태를 僞裝이라고 해야 한다. 詩作의 진정한 方法과 단순한 技巧의 차이는 이 방심상태(自由)와 그것의 僞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上揭誌 p. 12.      대상이 없어졌으니까 그것과 씨름할 필요도 없어졌다. 다만 있는 것은 汪洋한 자유와 대상이 없어졌다는 불안뿐이다. 시에는 원래 대상이 있어야 했다. 풍경이라도 좋고 사회라도 좋고 神이라도 좋다. 그것들로부터 어떤 구속을 받고 있어야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는 의미가 있게 된다. 의미가 없는데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에는 항상 이러한 의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대상이 없어졌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 의문에 질려 있고, 그러고도 시를 쓰려고 할 때 우리는 자기를 위장할 수밖에는 없다. 기교가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이때의 기교는 심리적인 뜻의 그것이지 수사적인 뜻의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위장이라고 하는 기교가 수사에도 드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차르트의 「C 短調 交響曲」을 들을 때 생기는 의문은, 그는 그의 자유를 어찌하여 이렇게 다스릴 수 있었을까 하는 그것이다. 시는 음악보다는 훨씬 방종하다는 증거를 그에게서 보곤 한다. 그에게도 대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의 음악은 너무나 음악이다. 음의 메커니즘에 통달해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우리는 언어의 속성에 너무나 오래도록 길이 들어 있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도 한다. 시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는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어떤 시는 언어의 속성을 전연 바꾸어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하고 언어와 언어의 배합, 또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음색이나 의미의 그림자나 그것들이 암시하는 제 2의 자연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런 시도를 상징파의 유수한 시인들이 조금씩은 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대상과 의미를 잃음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면, 는 가장 순수한 예술이 되려는 본능에서였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제동을 걸어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대상(現實 ․ 社會)으로부터 심한 拘束을 받고 있다.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까 遊戱의 氣分(放心狀態)이 되지 못하고 매우 긴장되어 있다. 그 긴장은 根本的으로는 道德的인 긴장이긴 하나 詩의 方法論的 긴장이 서려 있기도 하여.......                                                      --上揭誌, p. 14.     무엇이든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전연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그 불안과 함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소외된다는 그 불안이 겹친다. 이러한 불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치관의 공백기에 생기는 불안이다. 회의를 모르는 소박한 사람들이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때, 예민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성실하다고 한다면 이 허무 쪽으로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다. 허무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돌린다. 나무가 있지만 없는 거나 같고, 사회가 있지만 그것도 없는 거나 같다. 물론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실지의 나무와 실지의 사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의식 속에서는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즉 허무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 된다. 그 대신 그에게는 보다 넓은 시야가 갑자기 펼쳐진다. 이렇게 해서 는 탄생한다. 그는 바로 허무의 아들이다. 시인이 성실하다면 그는 그 자신 앞에 펼쳐진 허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개성의 가치관이 모두 편견이 되었으니 그는 그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뭔가를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다른 또 하나의 편견이 되더라도 그가 참으로 성실하다면 허무는 언젠가는 초극되어져야 한다. 성실이야말로 허무가 되기도 하고, 허무에 대한 제동이 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새로운 의미(對象), 아니 의미가 새로 소생하고 대상이 새로 소생할 것이다. 이 진실로 그때 나타난다.    여기서의 이란 칸트의 유희설과 근본적으로는 같을 것이지만, 약간 부연할 것이 있다. 노동의 여가에 사람은 그 남은 정력을 유희에 쏟는다고 칸트는 말하고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가 않을는지도 모른다. 노동의 여가가 없고, 남아있는 정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노동 그것을 유희로 만들어 버릴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노동이 그대로 유희라는 환상을 만들어 낼는지 모른다. 유희는 그 자체 하나의 해방(자유)이기 때문이다. 유희야말로 대상이 없는 유일한 인간적 행위가 아닌가? 유희에 대상이 끼어들 때, 그때 유희는 유희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국가의 명예라는 대상이 경주자의 자유를 구속한다. 국가의 명예가 경주자를 긴장케 한다. 그것이 바로 100미터 경주라는 것의 의미가 되겠지만, 우리는 그런 대상과 그런 의미로부터 자기를 구하고자 한다. 유희의 긍정적인 뜻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희를 끝내 감당할 만큼 우리는 용감하지도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화투놀이에 돈이 끼여들고, 우리는 곧 돈의 구속을 받아 자유를 잃게 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유희의 경지를 또한 허무로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능력은 한정돼 있고, 구속을 자초해야만 안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유희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에 겁을 먹기도 한다. 유희는 우리에게 영원한 실낙원이기 때문에 이 오욕의 땅위에서의 유희(허무)는 초극되어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의 영역을 사람이 침범할 수는 없지 않은가?       韓國의 現代詩가 50年代 이래로 비로소 詩에서 자유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비교적 자유에 점근해 간 경우가 있었다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자유를 僞裝해서라도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어하는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上揭誌, p. 14.     李箱의 시를 보면 내던진 듯한 방심상태에서 씌어지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분명히 치밀한 계산 아래 씌어지고 있는 것도 있다. 유희 ․ 선택 ․ 방심상태 등의 낱말들은 방법론적으로는 자동기술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자동기술이란 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무의식이란 전연 감추어진 세계고, 그것이 어떻게든 말로써 기록되는 이상은 의식의 힘을 입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이 밝혀 준 상식이다. (물론 우리는 과학이고자 하는 정신분석학 자체의 그동안의 성과에도 의심을 품을 수가 있긴 하지만) 우선 이 상식에 따라 말을 하자면, 글자 그대로의 자동기술이란 없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李箱을 드는 것은 이 땅에서는 그래도 그가 처음으로 시를 하나의 유희로서 써보려고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는 그 점에서다. 그의 소설 「날개」에는 라는 대상을 놓친 가 그녀가 없는 그녀의 방에서 휴지를 돋보기 광선으로 태운다든가, 화장품 냄새를 맡는다든가, 벽에 걸린 치마를 보고 그녀의 肢體를 연상하다든가 하는 따위 장면이 나온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것을 대상행위라고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에게는 욕망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다. 그러니까 대상행위도 있을 수가 없다. 대상을 놓친 가 그냥 그러고 있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는 그에게 부닥쳐 온 자유에 압도되고 있을 뿐이다. 李箱의 시의 어느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李箱과 같은 시기에 동인들이 시를 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창작심리가 어느 정도로 李箱을 닮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李箱은 다행히도 소설과 수필, 특히 그의 활동을 통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창작심리의 비밀을 보여 주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고 한다. 시의 혁명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혁명을 위한 시(또는 藝術)를 수단으로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시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되자 냉철한 사람들은 그것(초현실주의)을 하나의 교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으로서는 초현실주의와는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시의 입장으로서만 초현실주의자가 된 시인이 세계의 도처에서 생겨난 것이다. 매우 아이러니컬하지만 이리하여 자동기술이 하나의 기교로서 유행을 보게 된다. 30年代 이래로 한국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詩 지상주의적 초현실주의자들을 낳게 했다고 보아진다. 시를 위하여는 그러나 많은 것들을 읽히게 했고, 특히 기교의 새로운 방면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僞裝된 自由인 것만은 틀림없다.     
79    에즈라 파운드 Ezar Pound / 이일환 譯 댓글:  조회:1530  추천:0  2019-03-03
  에즈라 파운드 Ezar Pound / 이일환 譯   * 이 글은 Poetry 誌(1913년)에 “Imagisme”으로 발표되고 T. S. Eliot가 편집한 Literary Essays of Ezra Pound(London, 1954)에 “A Retrospect”란 제목으로 수록한 것을 초역한 것이다.     이미지스트가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인 복합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라는 용어를 우리가 이 말을 쓸 때 그들과 전적으로 같은 의미로 쓸 수는 없겠지만, 하트와 같은 보다 새로운 심리학자들이 쓴 기술적인 의미로 썼다.   그러한 를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런 해방의 의식,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 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장 의식을 고취시킨다.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모든 얘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운문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즉시로 필요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모세처럼 부정문으로만 표현할 수는 없다.   우선, 플린트씨에 의해 기록된 세가지 규칙들(사물을 직접적으로 다룰 것. 이미지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절대적으로 쓰지 말 것. 연속되는 음악적 문구로 리듬 창조.)을 절대적 신조 ---어느 것도 절대적 신조로 생각하지 말라--- 로서가 아니라, 오랜 동안의 숙고의 결과 --비록 어떤 다른 이의 숙고였다 해도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있는 ---로서 고려해 보도록 하라.   그들 자신이 주목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이들의 비평엔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희랍 시인들과 극작가들의 실제 글과 이들의 운율을 설명하기 위해 조작된 그리이스-- 로마어 문법학자들의 이론과의 사이에 균열을 생각해 보라.      언어   어느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 것. 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 것은 이미지를 둔화시킨다. 추상과 구체를 뒤섞은 꼴이다. 그것은 자연적 대상물이 언제나 적절한 상징이라는 것을 작가가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추상화를 두려워하라. 훌륭한 산문에서 이미 행해진 것을 어줍잖은 운문으로 다시 얘기하려 들지 말라. 당신의 時作을 행의 길이로 쪼갬으로써 당신이 훌륭한 산문의 말할 수 없이 어려운 기술의 모든 난점들을 피하려 할 때, 지각있는 독자들이 속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늘 전문가가 싫증내는 것을 내일 대중이 싫증낼 것이다.   시 예술이 음악 예술보다 조금이라도 단순하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평범한 피아노 선생이 음악 예술에 쏟는 정도의 노력을 운문 예술에 쏟음 없이 전문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될 수 있는 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아라. 그러나 그 빛을 공공연히 시인하거나 아니면 숨기려고 노력하거나 할 정도의 예의는 보일 것.    이란 말을 당신이 어쩌다 존경하게 된 어떤 한 두 시인의 특정한 장식적 어휘를 훔쳐 써먹는 것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한 터어키 종군기자가 언덕, 아니면 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의 특파 기사에 그런 식의 글을 써갈기는 것을 최근 직접 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쓰지 말거나 아니면 훌륭한 장식만 쓸 것.     리듬과 각운     시인 후보자는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운율들로 채워보라. 그런데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외국어로 된 글들을 보라 ---예컨대, 색슨 말의 매력, 헤브리디즈 열도 민요들, 단테의 시, 그리고 운율과 어휘를 구별해 낼 수만 있다면, 세익스피어의 서정시들, 그리고 괴테의 서정시들을 音價, 장단 음절, 강약 음절, 모음과 자음 등으로 냉정하게 해보해 보도록 하라.   시가 그 음악에 의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음악에 의지할 경우엔 그 음악은 전문가를 기쁘게 해줄 그러한 것이어야만 한다.    신출내기는 모운, 두운, 즉각적 각운, 지연 각운, 단음 각운, 다음 각운 등을 알아야 한다. 마치 음악가가 화음과 대위법과 그 밖의 모든 세세한 기술들을 알아야 하듯이. 비록 예술가가 이것을 거의 필요치 않는다 해도, 이것들을 위해 쏟는 시간도 많다 할 수 없다.    산문에 넣기에는 너무 둔한 것이기 때문에 운문에는 고 생각하지 말라.   하지 말라 ---이것은 예쁘장한 철학적 에세이들을 쓰는 사람에게 맡겨라.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라. 화가가 당신보다 훨씬 잘 경치를 묘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세익스피어가 이라고 말할 때, 그는 화가가 제시하는 못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의 이 행위에는 묘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나타내려 한다.   새로운 비누를 선전하기 위한 광고대행업자의 방법보다는 과학자의 방법을 고려하라.   과학자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위대한 과학자로 불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발견된 것을 배움으로써 시작한다. 그는 거기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라는데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자신의 초기 습작 결과를 칭찬하기를 기대치 않는다. 시의 신입생들은 불행하게도 확고히 알아볼 수 있는 교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 것이 무어 놀랄 만하랴?   당신의 글을 분리된 약강격으로 쪼개지 말 것. 각 행이 말미에서 뚝 그치는 일이 없이 하며, 다음 행을 매번 고양시켜 시작할 것, 확연한 긴 休止를 원하는 때가 아니라면, 다음 행의 시작을 리듬 물결이 올라갈 때를 택하라.   간단히 말해 당신의 예술에서 음악과 정확히 같은 양상을 다룰 때는 음악가처럼, 훌륭한 음악가처럼 처신하라. 같은 법칙들이 지배하는 것이며, 그 이외의 다른 것에 당신이 묶이지 않는다.   당연하겠지만, 당신의 리듬의 구조가 당신의 어휘들의 형태 그 자연적 음, 그 의미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行尾와 休止 때문에 모든 종류의 나쁜 행 멈춤에 희생이 되면서도, 그 형태, 음, 의미들에 영향을 끼칠 만큼 강력한 리듬 구조를 처음에 당신이 얻을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음악가는 오케스트라의 음도와 음량에 의지할 수 있다. 당신은 그렇지 못하다. 화음이라는 용어는 시에 잘못 적용되었다. 그것은 상이한 음도의 동시 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운문에서는 듣는 이의 귀에 남아 다소간 저음의 오르간 소리처럼 들리는 일종의 잔여음이 있다. 각운은 즐거움을 주려면 약간의 놀라움의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 기묘하거나 별날 필요는 없으나, 각운을 쓸 때는 잘 써야만 한다.   『시의 기술』에서 빌드락과 뒤아멜이 각운에 행한 설명을 더 참조하라. 당신의 시에서 독자의 상상적 눈에 인상을 남긴 부분은 외국어로 번역되더라도 손상되는 것이 없으나, 귀에 호소한 부분은 원문으로 대하는 자들에게만 다가갈 수 있다.   밀턴의 수사학과 비교해 볼 때의 단테의 확고한 표현을 숙고해 보라. 너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둔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많이 워즈워드를 읽어라.   내 말의 요지를 알고자 한다면, 사포, 카를루스, 비용, 제대로 시상에 잠겼을 때의 하이네, 너무 굳어 있지 않을 때의 고티에를 읽어보라. 만약 그 나라 말들을 모른다면, 유유자적한 초서를 찾아나서라. 훌륭한 산문은 해가 안 될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씀으로서 얻어지는 좋은 교훈이 있다.   만약 원문을 다시 써보려 했을 때 그것이 거린다면, 번역도 좋은 훈련이 된다. 번역하려는 시의 의미는 거릴 수 없다.   조직적 형태를 쓰고자 한다면,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삽입시키고자 하지 말 것이며, 나머지 진공들을 감상적인 글로 채울 것.    하나의 감각 기관의 지각을 다른 감각 기관의 지각의 관점에서 정의하려 함으로써 혼란을 야기시키지 말 것. 이는 통상 단지 너무나 게을러서 정확한 단어를 찾아낼 수 없을 때 생기는 결과일 뿐이다. 이 말에는 아마 예외들이 있겠지만.    처음의 세 가지 금기사항들이 지금까지 표준이라거나 고전이라고 받아들여져 온, 모든 나쁜 시의 십분의 구를 쫓아버린 것이며, 당신을 작품생산의 여러 범죄로부터 막아줄 것이다.   뒤아멜씨와 빌드락씨는 그들의 조그만 책, 『시의 기술에 관한 노트』의 말미에서 말하기를, . 그러나 미국인인 경우엔 적어도 그것은 당연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 당당한 대륙에서 태어나겠는가?  
78    명상과 시 / 장석주 댓글:  조회:1214  추천:0  2019-02-28
명상과 시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시를 쓰는 자들이 "비가 온다."고 표현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본디 비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사람의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항상 있어온 현상이다. 비는 언제나 있다. 그것은 오고 가지 않는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도 비라는 현상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주체로 고정시키고 사물들을 객체화하는 인간 중심의 오래된 인습이 비를 제 몸 가까이 끌어당겨 "비가 온다."라고 쓰게 한다. 국소적 공간 경험에 갇혀 있는 자들만이 "비가 온다."고 쓴다.  좋은 시인은 "비가 온다."라고 쓰지 않는다. 제 몸의 경험을 받들어 이렇게 쓴다.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주용일, 「봄비」)  "나무에서 나오는 방법은 나무를 통하는 길뿐이다."(프랑시스 퐁쥬)  명상은 인습적 관념의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명상은 시의 반숙(半熟)이다. 그럼 완숙은 어떤 경지일까? 열반(涅槃). 하나의 현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순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 시는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짓이다. 시는 우주의 데이터 베이스를 훔치는 짓이다. 플라톤이 역정을 내며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을 모조리 추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화국에서 시인들은 파렴치한 자들이라고 낙인찍힌다. 이것은 우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1964년에 소비에뜨 공화국의 법정은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인 브로드스키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는 기생충"이라고 규정지었다. 그 법정에서 있었던 심문 내용의 일부를 보자. 판사: 당신은 누구인가? 브로드스키: 나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판사: '~ 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허용되지 않는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 브로드스키: 나는 시를 쓴다. 출판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판사: 당신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라. 브로드스키: 나는 시를 썼다. 그것이 내 일이다. 판사: 당신을 시인으로 공인한 것은 누구인가? 브로드스키: 없다. 그것은 나를 인간으로 공인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판사: 소비에뜨에서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왜 일을 하지 않았는가. 브로드스키: 나는 일을 했다. 시가 나의 일이다. 나는 시인이다. 결국 브로드스키는 공화국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브로드스키의 재판은 시의 DNA가 생물학적 합목적성과 무관하며 공익적 세계의 건설에 기여하는 바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시학』에서 "시인들에 대한 비난은 다음의 다섯 종류, 즉 불가능, 불합리, 도덕적으로 해로운 요소, 모순, 시 창작 기술의 올바른 기준에 반하는 것 등으로 구분된다."고 쓰고 있다. 시, 무용한 짓. 상상임신. 옐로카드를 받는 헐리우드 액션.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의지와 표상 사이에 있다,고 선언했다. 베르그송은 그것이 생의 비약이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시의 미학적 선택에 내재한 반도덕성, 무용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명상은 초언어(超言語)를 지향한다. 초언어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는 태허(太虛)의 상태다. 가령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너, 가련한 육체여/살 것 같으니 술 생각나냐?"(김형영, 「일기」).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뒤 비어서 가뿐한 몸에서 태허를 감지한다.  명상은 그 태허의 상태에서 사물들의 저편에 숨은 신을 만나는 일이다. 숨은 신은 죽은 고양이다. 어느 선사에게 물었다.―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죽은 고양이다. "국도 한 가운데 널브러져 있는/죽은 고양이의/저 망가진 외출복!"(이창기 「봄과 고양이」)  명상과 시는 그 계통분류상 다른 가지에 속해 있다. 하지만 명상과 시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명상에서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시의 영감도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순간에 뇌속에서 부화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아니었음, 침묵도 아니었어,/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밤의 가지에서,/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격렬한 불 속에서 불러어,/또는 혼자 돌아오는 길에 / 얼굴 없이 있는 나를/그건 건드리더군."(파블로 네루다, 「시」) 사람들은 깨달음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한다. 일본 불교의 한 맥인 본각사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이미 깨달았으니 다른 좌선도 필요 없고, 악을 행하는 것도 자유다. 조악무애(造惡無碍)의 뿌리가 본각사상이다. 도겐(道元, 1200~ 1253)도 그 영향권 아래에 있던 승려다. 도겐은 수행의 결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게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을 향한 지향이 있을 뿐이다.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언어라는 도구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되 궁극에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 퐁쥬는 새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새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도 그 중의 일부다. 그러나 새는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활강하지만, 프랑시스 퐁쥬가 원할 때 그의 시 속으로 날아들지는 않는다.  시는 언어를 딛고 언어를 넘어간다. 시는 없다. 시를 지향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있을 뿐이다.  시와 명상은 다 함께 초언어를 지향하지만 시는 방법적 도구로 언어를 쓴다. 언어는 물(物)을 지시하는 기호다. 언어는 물이 아니다. 언어는 관념이다. 언어는 나와 물 사이에 있다. 언어는 나와 세계, 존재와 부재 사이에 걸쳐진 다리다.  시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론적 연관의 장(場)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만나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들에 메아리치고 있는 비언어적인 울림 속에서다.  시는 언어가 아니다. 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 그 여백에서 아직 형태소(形態素)를 얻지 못한 생성하는 언어, 발효하는 언어다.  시는 의미가 아니다. 의미 이전이다. 이를테면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혹은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김기택, 「얼룩」)와 같은 구절들은 시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미의 잠재태(潛在態)임을 말해준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모든 작가들이 바로 나이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사랑한 모든 여인들이 바로 나다. 또 나는 내가 갔던 모든 도시이기도 하며 내 모든 조상이기도 하다." 거울과 부성(父性)은 시와 상극이다. 다시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마치 그것을 사실인 양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거울의 뒷면, 그 텅 빈 공허를 본다. "내가 보는 것은 늘 청동거울의 뒷면이다"(조용미, 「청동거울의 뒷면」) 의미로서의 시는 사물로서의 시보다 하급이다. B급이다. 하이쿠는 17자로 끝난다. 의미가 언어의 양에 비례한다면 하이쿠는 가장 무의미한 언어의 형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의미는 대개는 언어와 반비례한다. 하이쿠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시 형식 중에서 가장 슬림하다. 하이쿠는 해석의 언어가 아니다. 사물과 만나는 순간의 아주 희미한 떨림을 기록한다. 그것은 아직 시로 진화하기 이전의 원시적 흔적이다. 하이쿠에서 언어에 대한 근검절약은 의미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진다. 가장 성공한 하이쿠는 무의미의 의미를 체현해낸다. 하이쿠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의 은폐된 후경(後景)을 겨냥한다. 하이쿠는 오류와 우연들에 필연의 에너지를 수혈하는 선(禪)과 명상에 가깝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하나 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쉼보르스카, 「두 번이란 없다」) 명상은 사물의 계통분류상 속(屬)이고 시는 그 하위에 속하는 종(種)이다. 명상은 유실수고, 시는 앵두나무다.     출처 : http://cafe.daum.net/poem-reader?t__nil_cafemy=item  
77    <현대시의 구조> 후고 프리드리히 댓글:  조회:1306  추천:0  2019-02-25
장희창(동의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     이 책은 보들레르 이후 약 100년간의 서구시의 흐름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나타났던 시의 경향의 통일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등의 전통과 결별하고 광범위한 의미에서 소위 모더니즘으로 지칭될 수 있는 현대성의 시인들, 이를테면 릴케, 트라클 및 벤과 같은 독일 시인들, 아폴리네르에서 생존 페르스에 이르는 프랑스 시인들, 가르시아 로르카에서 기옌에 이르는 스페인 시인들, 팔라체스키에서 웅가레티에 이르는 이탈리아 시인들, 예이츠에서 엘리엇까지의 영국 시인들을 서로 연결하는 문체 원리 및 정신적 상황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그 본질을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와 같은 선구자들의 시와 시론에 대한 집중적 해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나가는 것이 이 책의 대략적인 윤곽이다. 우선 지은이는 이러한 현대시인들의 보편적 특성을 ‘불협화와 비규범성’으로 규정하면서, 그 배경을 이루는 이론적 단서들을 루소, 디드로, 노발리스, 그리고 프랑스 낭만주의에서 확인한다.     인간존재의 해석에 있어서 모든 역사적 전제 조건들을 거부하며 현대적 전통 단절이라는 과격한 사상을 최초로 구체화시킨 루소는 자아와 세계의 필연적인 화해 불가능을 확신하고 비규범성을 자기 해석의 도식으로 삼는다. 특히 노년의 저작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그는 기계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과거와 순간, 상상력과 현실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내면의 시간 속으로 침잠한다. 그에게 있어서 기술 문명의 산물인 기계적인 시간개념은 가장 혐오스런 대상이다. 반면에 내면의 시간은 억압적인 현실과 문명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시의 성곽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성의 자기 전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상상력이며, 이것은 19세기 시인들에게서 절대적 상상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디드로도 상상력에 독자적인 지위를 부여하며 심미적인 능력을 지적, 윤리적 능력보다 우위에 둔다. 그에게 있어서 상상력은 천재만의 것으로서 이념, 선과 악, 진리와 오류 사이의 구분을 뛰어넘어 더 이상 내용적으로 구속되지 않는 순수한 동력에 따라 평가해야 하는 정신적인 힘들의 자기운동이다. 그러므로 시란 애초부터 대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며, 자유자재한 은유의 창작과 아울러 극단적 음향을 사용하여 자신을 극단 속으로 내던질 수 있도록 허용받은 감정의 운동이다. 이러한 견해는 보들레르의 시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며 흔히 추상시라고 부르는 시의 현대성의 근거가 된다.     루소와 디드로가 말하는바 상상력과 시에 대한 개념들은 독일, 프랑스 및 영국의 낭만주의에서 더욱 강화되며, 낭만주의 시에 대한 해석을 목표로 미래의 시문학이라는 개념을 구상한 노발리스가 그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에게 있어서 시는 일상의 삶에 대항하는 방벽이며 예감과 마술을 그 본질로 하는 시적 인간들이 관습의 세계에 맞서서 노래하는 저항이다. 아울러 상상력은 모든 형상을 구성과 대수학적 방식에 의해 서로 뒤섞어 놓는 자유를 누린다. 그러므로 시어는 전달이라는 목표가 없는 자족적인 언어가 되며 수학의 공식과 같이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고 그 자신으로서만 작용한다. 여기에서 현대시의 주요한 특징인 공작성(工作性)의 개념이 생긴다. 정감이 아니라 중성적인 내면성, 현실이 아닌 상상력, 세계의 통일성이 아닌 파편성,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혼돈, 모호함과 언어 마술에 의한 매혹,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수학에 비견할 만한 냉철한 작업 방식, 이러한 것들이 보들레르의 시론, 랭보, 말라르메와 현대시인들의 시의 토대를 이루는 바로 그 구조다.     프랑스 낭만주의를 매개로 하여 루소, 디드로, 노발리스 등으로부터 시와 상상력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여 유럽 최초로 현대시와 예술 개념의 이론을 정립하고 동시에 현대성을 체화한 시인 보들레르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시와 개인의 심정을 철저하게 분리시켰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이후 엘리엇과 여타 시인들에 의해 시 창작의 엄밀성과 타당성의 전제 조건으로 선언된 탈개성화라는 미래의 발전 방향은 보들레르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악의 꽃≫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의 주체는 결코 보들레르 자신의 경험적 자아가 아니며, 현대성을 대표하는 중성적인 자아가 시 창작의 주체가 된다. 즉 개성이라는 우연이 제거되고 현대성이 창작의 주체가 되며, 아울러 정신적인 엄격성과 청명한 예술가 의식이 이러한 창작 방식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방법상의 끈질김과 철두철미함으로써 현대성의 필연적 산물인 불안, 무출구성, 이상성 앞에서의 좌절과 같은 자신의 내면에 투영된 생의 국면들에로 진입해 들어가서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감내하며 자신의 창작 방식에 대해 집중적으로 천착함으로써 개인적인 심정의 도취에 빠지지 않으려는 의도를 철저하게 관철시킨다. ≪악의 꽃≫은 이러한 방식에 따라 건축공학적으로 구축되었으며, 현대시에 있어서의 형식의 힘을 극도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형식의 힘은 장식 내지는 관행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극단적으로 불안한 정신적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추구되는 구제의 수단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고도로 형식화된 언어로의 변형을 통한 고통의 정화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현대성이란 무엇보다도 황량한 대도시의 뒷골목, 창녀, 돈의 추악함, 아스팔트, 인공조명, 범죄, 소란한 군중 속의 고독이며 증기와 전기로 작동되는 기술과 진보의 시대다. 하지만 불협화음적인 대도시의 형상은 그에게 오히려 강렬한 자극이 된다. 그것들은 가스등과 황혼, 타르 냄새와 꽃향기를 결합시키며 또한 욕망과 비탄으로 가득 차 있는 역설의 세계다. 그러나 대도시의 범속성에서 생겨난 그러한 형상들은 시적인 변용을 통해 범속성이라는 죄악을 치유받게 되며, 여기에서 추의 미학이라는 현대시의 한 특성이 확인된다.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대도시 문명에 둘러싸인 시인 존재의 저항 의식과 그 표출 방식에서 생겨난 이러한 추의 개념과 더불어 불협화의 미, 주체로부터 심정을 배제시킴, 비규범적 의식 상태, 공허한 이상성, 탈사물화, 언어의 마술적인 힘과 절대적인 상상력에서 생겨나서 수학적 추상성과 음악의 운동 곡선에 접근하는 신비로움. 이런 것들에 의해서 보들레르는 미래의 시에서 실현될 방향을 예비했다.     현대 문명에 대한 저주 가운데서도 체계를 만들 수 있었던 보들레르와는 달리 랭보에게 있어서 저주는 혼돈이 되었고 마침내는 침묵이 되었다. 무어라 해명할 수 없긴 하지만 질서 정연하고 엄격한 형식에 따라 구축되었던 ≪악의 꽃≫의 긴장들이 랭보에게서는 절대적인 불협화가 된다. 그의 시의 목표는 미지의 것에 도달함이며, 불가시적인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음이다. 그의 시의 현실을 넘어서는 폭발적인 돌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폭발적인 욕구 자체의 방출이며, 그 결과 현실을 탈형상화해서 내용 없는 긴장의 극만을 남긴다. 시적 직관은 의도적으로 파괴시켜 버린 현실을 꿰뚫고 공허한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무의식의 혼돈에 내맡기는 이러한 경험은 20세기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랭보를 그들의 선구자로 보는 이유다. 종교적, 철학적, 신화적으로는 더 이상 해명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은 그 공허함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 충격을 가하는−보들레르의 경우보다 더욱 강력한−긴장의 극이다. 현실은 그 불충분함으로 인해 공허한 초월과 대비되어 경험되기 때문에 초월에의 열정은 현실성에 대한 무목적적인 파괴를 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된 현실성은 이제 현실 전체의 불충분성과 아울러 미지의 것에로의 도달 불가능에 대한 혼돈의 표지가 된다. 현대성의 변증법이라 불릴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랭보를 훨씬 넘어 유럽의 문학과 예술을 규정한다. 피카소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그림이란 파괴의 총합이다”라고 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미지를 향한 채울 수 없는 열정으로 기지의 것을 파헤치고 낯설게 만드는 방식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이러한 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굳이 대답하자면 그러한 시는 과학적인 계몽, 기술적ㆍ경제적 힘의 장치들이 자유를 조직화하고 집단화시킴으로써 자유의 본질을 죽여버린 역사적인 상황에서 비규범적인 언술과 상상력의 독재를 통하여 정신의 자유를 구출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로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라르메는 예술적 상상력의 본질은 현실의 탈형상화에 있다는 보들레르 이후 정립된 견해를 완결 지음으로써 예술적 상상력에 존재론적 토대를 부여한다. 아울러 시 자체의 모호함뿐 아니라 시에 대한 협소한 이해로부터의 탈피와 관련해서도 그는 존재론적으로 입증한다. 왜냐하면 예술가 존재와 예술에 대한 성찰 사이의 통일은 이제 그가 절대적 존재와 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사색함으로써 드높은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절대의 영역과 언어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고자 한다. 하지만 그곳은 결코 행복의 장소는 아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초월도, 신들도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창작과 사색은 경험적인 세계에서 존재론적 보편성에로의 방향이 아니라 그 역으로 진행된다. 그의 시는 꽃병, 까치발 테이블, 부채, 거울 같은 단순한 사물을 소재로 한다. 이것들은 탈사물화되고 부재 속으로 밀려 들어가 불가시적인 긴장의 흐름을 담는 그릇이 되는 한편 이들을 지칭하는 말을 통하여 그 어떤 표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에 의해서 사물의 의미는 예기치 않게 증대된다. 왜냐하면 저 불가시적인 긴장의 흐름이 그것들 속으로 매우 깊숙이 스며들어 단순한 사물은 온통 비밀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에 적용된다.     이와 같이 말라르메는 개념적인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대 존재, 무를 가장 단순한 사물들에 각인시켜 수수께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친숙한 것에 근원적인 불가사의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낯선 영역으로 빠져든다 할지라도 영혼이 그 앞에서 전율하게 되는 말과 형상에 의한 비밀의 노래인 시가 탄생한다. 낯설기는 하지만 말없이 끌어당기는 울림 속에서 그의 시는 정신이 현실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주목하고 자신의 추상적인 긴장의 유희 속에서 마치 수학 공식들을 대할 때와 유사한 지배의 만족을 경험하는 자리, 즉 무형의 고독한 내부 공간으로부터 진술하는 것이다.     정신 내지는 그 어떤 중심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러한 내부 공간은 세세하게 구분될 수 있는 감정들이 아니라 이성 이전의 것인 동시에 이성적인 힘들이며 꿈과 같은 정취일 뿐 아니라 냉정한 추상성을 동시에 포괄하며 또한 그 통일성이 시적 언어의 진동의 흐름 속에서 인지되는 총체적 내면성을 말한다. 이와 같이 말라르메는 노발리스와 포가 개척했던 길, 시의 주체가 초개인적인 중립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계속 이어간 것이다. 모든 실재를 절멸시키는 그의 시는 그만큼 더 강력하게 언어의 형식화된 미를 환기시킨다. 형식에 대한 말라르메의 이러한 견해는 18세기 이래로 시작되었던바, 진리로부터의 미의 분리가 완결되었음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절대 형식의 미는 무의 순간에서조차도 로고스, 즉 인간존재의 위엄의 광휘가 꺼지지 않음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시를 지배하는 기본 유형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성립되었다. 이러한 유형은 독일인 노발리스와 미국인 포로부터 예감을 전해 받았던 보들레르 이후 그 윤곽이 드러났으며, 랭보와 말라르메에 의해서 시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경계 지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징후들은 프랑스를 비롯하여 스페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후계자들에게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이들 시인들의 정신적 상황을 관통하는 것은 기술 문명, 상품 시장, 노동 소외, 집단적 강요에 의해 지배되고 산업혁명과 더불어 인간적 영역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시대의 부자유로부터 오는 고통이다. 시대의 경향에 맞서서 극단적인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이러한 시는 또한 그 시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 시인들의 창작 행위는 근대화 과정의 모순에 대항하는 개인적인 생산양식, 즉 물량화되어 가는 세계 속에서의 질의 회복이고, 합리화된 시장 체계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감정의 피난처를 마련함이며, 삶의 파편화와 개인의 단자화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의 내면화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시의 구조≫의 윤곽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모더니즘 시학의 고전인 이 책에서 옮긴이는 무엇보다도 모더니즘의 기본 개념을 거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산문이라기보다는 운문에 가까운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그만큼 더 생생하게 현대시의 본질에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수필의 새 진로: 상상을 통한 문학의 길 박양근 (부경대 영문과교수, 문학평론가)   1. 짧은 시간의 긴 만남을 위하여   수필은 ‘짧은 시간의 긴 만남’이다. 5분 미만에 읽는 한 편의 수필에는 작가가 겪어온 생활과 개성적 사유가 함유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하루를 보낸들, 며칠을 함께 여행한들, 그의 본성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문화비평가 콜라쿠시오가 “한 나라의 민족성을 알려면 그 나라의 고전을 읽어라.”고 하였듯이 사람을 알기위한 가장 적절한 방식은 그의 수필을 읽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수필은 글쓴이의 자전성이 강하게 배어나는 문학으로서 이러한 자전성과 문학성을 결속시키는가라는 방식이 문제로 남는다. 수필문학의 정체는 물상의 내적 의미를 밝혀내는 ‘의미화 작업’이다. 그리고 의미화는 미적구조로 구축되는 과정으로써 수필의 문예화는 상상이라는 얼개에 걸려져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진지한 수필가는 한 편의 수필을 쓸 때 체험을 나상의 상태로 기록하지 않고 미적구조로 변환시킨다. 이러한 수필화 작업이 상상에 의존하는 이유는 수필은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상상의 재구성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이 없으면 현실 상황이나 사물을 묘사하더라도 외적 묘사에만 그치게 되고 그런 수필은 수기나 생활보고문에 그쳐버리기 십상이다. 문학적 상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삶 자체가 수필적일 필요가 있다. 자동차를 타기도 하지만 한번쯤 틈을 내어 바닷가 바위틈을 걸어보는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냉잇국을 좋아하는 마음의 가난함을 거부하지 않고, 무리지어 수다를 떨기보다 홀로 핀 야생초와 대화를 하면 좋은 수필이 다가온다. 이러한 고독, 소외, 초연은 현실과 유리된 삶을 추구하자는 유혹이 아니라 우주와 소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야한다는 필수조건으로서 사물의 의미를 포착하고 문학을 이해하는 기회가 된다.     2. 좋은 수필의 요건은 무엇인가   좋은 수필은 시적이고 소설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시보다 영감이 넘치며 소설보다 구성력이 뛰어나고 드라마보다 현장감이 있어야한다는 요청이다. 수필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소설적 요소와 삶의 단편을 극명하게 무대에 올리는 드라마적 요소, 그것에 율격을 부여하는 시적 요소가 조화롭게 어울려야 하는 것처럼 수필은 사상과 철학을 담되 딱딱한 외골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면 영성과 샤머니즘에 가까운 소통으로 인간애와 자연애를 그려내면서 사회학, 신화, 생물학과 구별된다. 수필의 문학성은 무엇보다 언술을 격조 있게 발전시키는 데 있다. 진솔한 수필은 부끄러운 약점, 잘못된 실수, 숨기고 싶은 결점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면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표현해낸다. 서사를 전개하는 구성, 적절한 비유, 참신하며 유연한 문체를 통해 체험을 형상화하고 의미화한 수필은 춘풍처럼 부드럽게 속삭이고 때로는 날선 비수처럼 폐부를 찌르며 때로는 가을 낙엽처럼 처연한 몸놀림을 보여주게 된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필의 서사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서술구조와 의미전달과의 관계를 안정감 있게 구축하는 데 있다. 그것은 압축성, 독창성, 절제성, 체험성, 소통성, 해학성, 서사성, 그리고 심미성의 기법을 차용하는 일이다 위대한 문학작품일수록 독자에게 제공하는 해석의 폭은 넓고 무한하다. 해석의 무한상은 텍스트가 그 자체로서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말과 같다. 독서의 대상으로서 텍스트는 작가가 꾸며낸 스토리와 선택한 담론의 결합체가 아니라 독자의 관점에서 읽고 수용하는 대상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독자가 작품을 통해 향유하는 즐거움은 독서 행위를 통해 습득하는 다양한 의미의 생산이라는 점에서 수필은 본질적으로 열려진 텍스트여야 하며, 이러한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를 데리다(Derrida)는 "산종(Dissemination)"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Cuddon 250). Cuddon, J. A. A Dictionary of Literary Terms and Theory. Oxford: Blackwell, 1991. 하지만 수필의 열려진 구조는 허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서사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이 허구적 구조가 아니라 열린 구조를 가진다 함은 스토리를 이루는 등장인물, 배경, 사건을 왜곡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행동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밝히거나 독자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도록 미적구조를 구축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수필의 가독성과 의미의 확장을 간과하고 수필의 사실성을 허구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작금의 논쟁은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본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수필이 의미구조를 통하여 의미를 생성하고, 미적구조를 통하여 심미감을 전유(傳諭)하려면 어떤 조건을 구비하여야 하는가. 우선 수필에는 언술의 4차원이 충족되어야한다. 1차원은 고백의 진지성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허구가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사실의 왜곡이나 누락은 문학의 진실성을 훼손하면서 말 그대로 신변잡기가 되어버린다. 문학성을 추구하는 작가는 일상을 기본소재로 하면서도 일상의 다양성, 수용의 다양성, 지식의 다양성, 그리고 표현의 다양성을 통해 자기의 문학적 자질을 발전시켜 나간다. ‘내가 하니까’ 개성이 아니라 ‘나만 할 수 있으니까’ 개성이다. 다양한 문학의 재료인 인생을 자신이 지닌 색깔로 서술하여야 자조와 자성과 자각의 공유가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수필을 최고의 인생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차원은 지적 생산성을 가진 수필을 말한다. 캐캐묵은 지식이나 피상적 개념으로 짜깁기한 글은 설득력뿐만 아니라 정보의 바다인 IT시대에서는 인상미와 호소력이 부족하다. 산문으로서 수필은 신선한 지성, 객관적 논리, 공유화되는 경험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문학의 효용론에서 말하는 교훈설에 부응하는 요건으로서 수필은 아는 것만큼 쓴다고 하듯이 읽을거리가 있어야 독자가 공감하고 생각거리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체계화된 지식이 아니라 흩어진 이삭 같은 글이라면 별다른 소용이 없을 것이다. 3차원은 연륜의 향기가 풍겨나야 한다는 뜻이다. 연륜이라 함은 인공적인 지식이나 싸구려 감정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과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과 관용을 말한다. 과거의 체험을 반추하여 현재와 현실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식 그 자체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종합하고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능력, 달리 말하면 메타지식체계를 담아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지적 여과장치를 거친 글은 미래와 우주를 꿰뚫어내는 통찰력을 지니게 된다. 4차원은 예술가적 소명감을 지니는 경우다. 시적 요소인 미래, 이상, 감각, 사색, 감성, 직관이 수반되는 이 단계에서는 수필의 완성단계인 예술수필이 나타난다. 지정의(知情意)가 문자향(文字香)을 얻고 우주를 읽어내는 투시력(透視力)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잡문수필가가 자신이 수필가라는 명예에 골몰하는 현시욕(現示慾)에 빠지고 저자수필가는 양적 발표에 집착한다면 작가수필가는 비로소 문인다운 수필가로서 하나의 표현에도 문학성을 저울질하고, 마지막으로 예술가수필가는 영감의 문학화에 헌신하는 끼를 실천한다고 할 것이다.     3. 상상력의 3가지 질문   노드롭 프라이는 일찍이『문학의 구조와 상상력』에서, “상상력이란 인간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있음직한 본보기(model)를 구성하는 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베이컨은 “상상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좋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영국의 수필가인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1672~1719)은 「상상의 즐거움」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은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서 심상을 만들어가며,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상상력이 ‘경험을 토대로 한다’ 함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의미하고, ‘있음직한 본보기를 구성하는 힘’이라 함은 ‘우리가 살고 싶은 이상 세계’의 제안을 뜻하며 “새로운 심상을 형성한다.” 함은 현실의 이상화라는 변증법적 상상을 의미한다. 수필적 생성은 “새롭게 보기”다. 작가는 체험 속에서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선택된 소재를 가지고 새롭게 형상화한다. 이때 “새롭게”라는 뜻이 바로 작가 나름의 체험과 인식력을 바탕으로 극히 평이한 소재조차 남다른 가치와 실존성을 지니도록 하는 의미화 작업을 말한다.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표현하면 이미지와 의미가 재창조된다. 작고한 김병규 씨가 “수필가가 일상생활 속에서 여태껏 발견되지 못한 것을 발견하여 썼을 때 그것은 하나의 창조에 해당한다.”고 했을 때 그가 의도한 창조의 의미는 “새롭게 보기”에 일치한다. 그렇다면 상상은 미완의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꾸미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상상력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다. 오직 인간만이 시공을 초월하여 경험을 분석하고 종합하며 때로는 의식주라는 생존조건을 무시하면서까지 문화와 예술을 통해 더욱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창조력과 상상력을 지닌다. 작가는 부단하게 움직이면서 생각하고 인생을 통해 주변을 항상 주시하지만 저편에 있는 그 무엇과 제3자가 세월의 주름을 새기며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음을 모를 경우가 많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갑자기 그라는 존재와 자신 사이에 어떤 굴레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기본적으로 오감을 통해서 대상을 만나지만 사실은 영감만으로 새롭게 포착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 여기에 상상이 필요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되는 시간과, 이곳과 저곳이라는 이분법으로 분할되는 공간은 상상계에서는 저해 요소가 되지 못한다. 또한 기술과 문명이 지금도 진화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답보하는 세상에 만족할 수 없다. 하지만 상상은 시간과 과학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상상이라는 존재는 우리의 심신 안에 무의식 상태로 숨어있을 수도 있고, 오감을 넘어선 저편에 있을 수 있으며, 인류가 꿈꾸는 미지의 세계일 수 있고, 물리적으로 아무리 노력하여도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우주일 수도 있다. 가령 작가가 꽃병에 담긴 싱싱한 꽃과 쓰레기통에 버려진 시든 꽃을 대비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한 편의 글을 쓰게 되더라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동일시의 사색 과정이 주어지지 않거나 그 과정이 어렵기 마련이다. 따라서 작가는 꽃과 인간에 관해 가능한 모든 생각들을 떠올려 보아야 하며 그 미지의 세계로 작가의 영혼을 안내하는 인공위성과 같은 것이 상상력의 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상력이 철학적이며 미학적 담론이라는 난해한 풀이를 할지라도 그 본질적 요체는 “왜”라는 부단한 질문에 불과하다. “왜”라는 질문은 인식의 입구로 들어서는 초인종과 같으며 질문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로써 모두 우주를 대상으로 한다. 첫째는 대상이 지닌 근원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다. 이를테면 “무엇?”이라는 내재적 질문이다. 근원은 오감이 포착할 수 없는 미지(未知) 그 자체로서 사랑의 근원, 미움의 근원, 존재의 근원, 아름다움의 근원, 갈등의 근원, 죽음의 근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새(鳥)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조류도감에 해설된 새가 아니라 새라는 존재의 뿌리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에 대한 무한한 궁금증을 말한다. 둘째는 우주 전체에 대한 외향적 질문이다. 작가가 선택한 제재가 우주 전체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외적 물음이라고 하겠다. 우주의 대상 하나 하나는 다른 우주의 대상과 유기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역으로 범우주 역시 개체로서의 대상과 이어지는데,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제재를 통해 우주는 무엇이며, 우주는 어떤 구조와 층으로 이루어있는가 하는 전모를 이해하려는 소망을 꿈꾼다. 작가는 “새는 왜 나무에 머무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새와 나무, 새와 하늘, 새와 둥지 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모든 대상이 우주의 일부이면서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야한다. 셋째는 선택한 제재를 매체로 인간 세계를 향해 던지는 인과적 질문이다. 곧 “그렇다면”에 해당한다. 모든 인간이 그 제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묻다 보면, 작가는 어느 순간 대상과 우주와 인간이 거대한 패러다임 속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새의 울음은 내겐 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다 보면 새, 자아, 타자, 그리고 우주가 거대한 구조를 이룬다는 독특한 인식 방법과 안목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면 작품을 통해 진정한 수필가는 상상력을 이용하여 어떻게 질문을 던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첫 번째 예는 대상을 근원 세계와 연결시켜 질문을 던지는 경우이다.   바싹 마른 옥수숫대 너덧 잎 남은 이파리가 몸뚱이를 감싸 안고 바람 앞에 울고 있다(청각). 한 잎은 꺾이어 아랫도리를 감았고, 또 한 잎은 위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시각) 누렇게 마른 이파리는 영락없는 삼베다. 꺼칠하면서도 풀 먹인 베처럼 온몸을 두르고 있다.(촉각) 덩굴이 기어올라 등허리를 감아버린 모습 같이 말라 있다. 그것도 제 몫이려니 참아낸 옥수숫대. 마른 잎 속에는 비바람과 폭염에 시달린 삶이 숨겨져 있다. -강돈묵, 「옥수숫대」 일부   옥수숫대의 종말에 대한 명상을 보여주는 이 글에서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근원은 죽음이다. 옥수수의 죽음에 대한 질문 속에는 우주의 근원에 대한 구도자적 사색이 발견된다. 시각, 청각, 촉각 이미지로 가득한 상상을 통해 죽음이 무엇인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줌으로써 대상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다. 이것은 마치 작가가 물속에 들어가서 물위에 있는 사물을 살피기 위해 잠망경을 올려 돌려보는 것과 같다. 전반부의 표층적인 줄거리를 보면 바싹 마른 옥수숫대의 묘사에 불과하다. 겨울바람에 노출된 옥수숫대는 말라서 물기도 생명이 없지만 비바람을 맞이하는 꼿꼿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을 의미화하면 무엇인가를 지켜내는 성자나 수행자 같기도 하고 가족을 위해 모든 기운을 다 쏟아버린 늙은 가장의 모습이기도 하다 옥수수의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로 읽기 시작하면 충격적인 인식의 세계와 만난다. 옥수수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의 과정이 옥수수에서도 나타나고, 모든 시공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강돈묵의 옥수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살다가 죽어 존재의 근원으로 귀환한다. 그 간절한 순간에 작가는 옥수수를 안테나로 삼아 생멸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주와 교신하려한다. 작가가 사별이라는 극적 순간에 어떤 영성을 체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인에게조차 이러한 체험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질문은 작가가 상상력으로 대상과 우주 전체를 연결시켜 질문을 던지는 경우이다. 이러한 예로는 김용옥의「수련」을 들기로 한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서 상상력이 얼마나 원대하고 강력한 투시력을 발휘하는 가를 새삼 깨달을 것이다. 진지한 작가라면 누구나 일생동안 우주의 근원에 질문을 던지지만, 그 탐구 결과를 제대로 들려줄 수 있는 수필가는 드물다. 그래서 현재 살아가는 우리 수필가가 탐구하여야할 질문거리가 여전히, 어딘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좁은 물둠벙을 메우다시피 한 수련잎 사이로 눈이 부시게 하얀 꽃 한 송이가 떠 있다.(질문1) 백옥같이 흰 꽃잎으로 울 두른 속을, 샛노란 꽃술들이 촘촘히 도열하여 또 하나의 작은 원을 그리고 있는 수련 한 송이. 꽃이라기보다는 사뿐히 물 위에 내려앉은 선녀의 모습이다.(답1-1) 새하얀 색과 샛노란 색의 신비한 조화는 그 청순함이 극에 이르러 있다. 이럴 때의 수련은 정녕 관음보살의 화신이 아닐 수 없다(답1-2)는 생각에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맑은 물 속에는 다음으로 피어날 봉오리가 말없이 기다리고 서 있다.(질문2) 그것은 두 손을 곱게 합장한 소녀의 손이다.(답2-1) 그 봉오리에 시간이 여물어 꽃을 피울 양이면 우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러다가 아침 해돋이부터 모았던 봉오리를 조금씩 조금씩 펴기 시작한다. 이어 연못 가득 아침 햇살이 덮는 때를 기다려 수련은 순백의 속살을 살포시 펼친다. 일생일대의 찬연한 개화이다.(답2-2) -김용옥, 「수련」 일부   한 마디로 놀랍고 경탄스러운 질문과 답이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무심히 피어나는 연꽃 하나에서 우주의 생명과 생태계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가. 강돈묵의 옥수숫대가 안테나로서 우주와 교신하고 있듯이 김용옥은 연꽃의 형상에서 소녀의 기도 모습을, 이미지에서 관음보살의 화신을, 기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마이크가 된다. 화자는 우주의 신비로운 변화를 외계에 전파하는 천체망원경의 구실을 연꽃에서 감지하고 있다. 그래서 김용옥의 연꽃은 시인조차 부러워할 영성을 지니게 된다. 상상력을 지닌 작가는 과학자보다도 먼저 우주를 비행하고, 철학자보다 앞서 우주의 근원 세계와 교신한다. 이러한 상상력은 근원세계에 도달하고자하는 간절한 수행과 미미한 물체에서조차 우주의 태아로 볼 수 있는 내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상상은 초월적인 영성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밤을 새워 공부하는 작가, 뼈를 깎는 노력, 그리고 허명을 버리고 무욕으로 정진하려는 작가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세 번째 질문은 대상과 인간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보는 작용과 관련된다. 설령, 탁월한 상상으로 사물의 근원과 전체 우주를 향한 투시가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삶과 연결시킬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우주가 전하려는 가치는 작가 자신과 우주가 연관성을 맺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을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작가에 내재하는 상상력은 대상을 매체로 하여 우주적 관점을 찾는 X-레이와 같은 투시경의 역할을 한다.   한발 두발 숲길을 따라 걷는데 앞 산등성이에서 ‘솨아아’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바람소리(현상1)에 발을 멈추었다. 정수리부터 가슴까지 오장을 타고 흘러드는 시원한 소리는 심한 갈증을 풀어내 준 샘물 (투시1)같았다. 그 맑은 바람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는데 또다시 초록색 잎새 사이에서 마른 침엽수 잎이 우수수 (현상2)떨어져 내렸다. 소나무는 이른 봄 내 머리에다 풋 익었던 인생의 낙엽(투시2)을 고스란히 떨구어 주었다. 그 밑 넓은 공간은 마른 갈비가 고르게 펼쳐져 있어 보료를 깔아놓은 듯 했다. 두 사람은 달려가 그 자리에 벌떡 누웠다. 눈앞의 빽빽한 초록 숲 사이로 간간이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녹색의 파노라마 속에 휩쓸려 쾌적하고 상쾌한 솔바람 소리를 드는 행복감은 말하지 않아도 전류가 되었다.(교감) 사랑의 눈빛이 푸르름 안에 번졌다. (관상(觀想)) -박종숙,「소리1」일부   화자는 숲길과 바람소리와 침엽수 잎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삶의 계단에 도달해 있는지를 계속하여 자문한다. 숲길을 지나가는 바람과 나뭇잎을 투시하면서 화자는 이것을 촉감이나 시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그러면 그들은 내게 무엇인가?”라고 내적 질문을 던진다. 나아가 바람을 영감과 생명의 원형으로 인지하여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과 삶을 연결하는 입체적 시선을 얻게 되었다. 숲 속에 간간이 비치는 햇살과 솔바람 소리에서 행복을 느끼는 화자는 타자 중심의 실존을 인식하며 이때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보은(報恩)이다. ‘나는 바람으로 산다.’라는 다음 단락의 시적 도입문이 보여주듯이 화자는 자연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과 바람에서 인간과의 생태적 상관성을 찾아내는 관상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 이로써 박종숙의 숲은 우주의 원리를 건져내는 투망이면서 보이지 않는 고리를 찾는 투사물이 된다. 화자는 우주가 부단하게 던지는 물음을 적극적으로 포착하여 얻고자 하는 답을 찾았다. 그리고 “숲 속에 들어가면 서서 걷는 것이 아니라 마른 갈비 위에 눕는다.”는 행위처럼 숲에 대한 경배와 귀의라는 수필적 삶에서 이 글이 쓰였다. 대상을 통한 인식은 모든 작가가 궁극적으로 얻어야 하는 질문이며 여기서부터 문학적 주제가 싹트고 철학적 인식이 열매로 맺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수필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가는 자연이라는 텍스트가 여백으로 남겨두고 있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고 “왜”, “무엇”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내공을 키워 철학적 단애(斷崖)로 한없이 내려가야 한다. 문학적 상상력의 반지를 끼고 대상과 우주 전체를 투사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 예술가문학가의 사명이다. 모름지기 수필가는 상상력의 영토를 넓혀가는 알렉산더이고 상상의 우주를 유영하는 스타워즈 선단의 전사들이다.     4. 상상의 4원소   문학 창작의 질적 수준은 상상력의 유무와 고저와 순도(純度)에 좌우된다. 문학 창작의 순서는 우선 무엇을 쓸까 하는 주제가 선행되고 다음으로 그것에 부응하는 소재를 찾아 나서는 경우다. 아니면 소재에서 얻은 인상을 바탕으로 무엇을 쓸까 하는 순서도 가능하다. 그 어느 경우든 주제를 뽑아내고, 미적 구조를 이용해서 사물의 속성을 살펴 인간의 속성을 유추해내는 과정은 유사하다. 여기에 상상의 힘이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어떤 대상에 상징성을 부여하고, 새로운 주제로 의미화하려면 특별한 상상이 필요하다. 상상은 불완전한 사실을 완전하게 꾸며내는 일종의 능력으로서 정서와 형식을 유기적으로 맺어주는 계단과 같다고 하겠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상상력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가져왔다. 그는 상상이 현실과 아무 관계가 없는 비현실적 기능이면서도 현실세계를 변형하고 변모하는 놀라운 창조성을 지닌 것이라고 새롭게 인식한 인물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 정신활동의 보편적인 기능으로서 상상력은 주체가 자신의 전 존재를 통해 이미지를 활성화하거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행위로서 상상은 외부 사물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자체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바슐라르가 말한 상상의 주체는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주와의 일치가 가능하도록 노력하며 종국에는 그 상상력을 통하여 존재의 근원에까지 닿으려고 한다. 상상력이라는 힘은 아니무스라는 논리적 분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심리 속의 아니마라는 넋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바슐라르의 상상력은 말 그대로 연구 방법이 아니라 이미지가 이끄는 힘에 자신을 맡기는 현상학이 된다. 문학적 상상력은 물질적, 역동적, 원형적, 그리고 변증법적 상상력으로 구분된다. 상상력에 대한 이러한 메커니즘은 글의 미학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설명해주는 단서의 역할을 한다. 문학적 상상력을 좌표화한다면 양극단에는 물질적 상상력(현실세계)과 변증법적 상상력(예술세계)이 자리하고 있으면 그 사이에서 역동적 상상력(감성세계)과 원형적 상상력(이성세계)이 상호 작용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우주를 구분하면 삶을 영위하는 현실세계와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에 부응하는 예술세계가 존재한다. 나아가 현실이 예술에,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순응하고 접속하는가라는 방식에 따라 감성에 주로 의존하는 역동적 상상계와 이성으로 인식하는 원형적 상상계가 있다. 두 상상은 물질적 상상력과 변증법적 상상력 사이에서 상호 작용을 한다. 물질적(物質的) 상상력은 희랍의 철인 엠페도클레스가 주창한 4원소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만물이 지닌 형태와 질료와 그 용도적인 기능을 파악하는 힘을 말한다. 가령 “정선의 곤드레 밥은 손님대접을 하는 양식으로서 그 밥이 밥상에 오르면 양식이 떨어졌다는 신호”라는 경우에는 곤드레 밥의 용도를 해학적으로 밝힌 물질적 상상이 나타나 있고, 사람 인(人)을 “죽어서도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하얗게 말라 기운이 느슨해진 울타리와 버팀목”으로 나타낸다면 덩굴손을 받친 버팀목에서는 사람(人)의 형태에 일치시킨 물질적 상상의 예가 발견된다. 역동적(力動的)상상력은 존재 가치를 추론해내는 힘으로써 진선미와 같은 가치를 감성적 분위기로 엮어내는 상상을 말한다. 이것은 주로 사물을 의미화 하는 서술에 적합한 상상으로서 “한국을 근화지향(槿花之香)이라 하여 무궁화의 나라”로 부른다면, 무궁화꽃은 민족정신을 밝혀내고, 정선아리랑을 이야기하면서 “쌓인 애환을 가슴에 삭혀 마지막 한의 찌꺼기를 물소리마냥 풀어내는” 강을 그려낸 단락에서는 역동적 상상의 예를 찾을 수 있다. 원형적(原型的)상상력은 시공을 초월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으로, 어머니라면 모성애, 갈대라면 생각하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구조이다. 원형적 상상력은 세계와 꿈, 현실과 이상과의 상관관계 밑에서 파악해준다. 가령 “호수는 언제나 제 자리에 있어 긴 여행을 할 줄 모르고 고향 지킴이처럼 어떤 유혹에도 휩쓸릴 줄 모른다.”라고 묘사한 박종숙의 「내 마음의 호수」에서 호수는 불변성, 항구성, 생명의 자궁이라는 의미로 환원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박수는 상대를 즐겁게 하고 스스로 손바닥을 자극하여 건강에도 보탬이 된다.’는 박수의 이점을 제시한 글에서는 관용의 미학을 찾아낸 원형적 상상이 발휘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법적 상상력은 역동적 상상력을 분출하는 단계로서 사물을 뒤집어보거나 낯설게 보거나 거꾸로 보면서 상식과 인습과 관습을 전복하여 반전을 가져오는 상상의 단계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모성이 지닌 용기를 형상화하거나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구들장의 온기를 강조하거나 뜨거운 눈물처럼 모순어법을 통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여내는 상상을 말한다. 흔히 수필에서는 부재의 대상을 부활시키는 줄거리에서 변증법적 상상이 자주 구사되는데 ‘아비 없는 아들은 버릇이 나쁘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아버지가 없음으로 더욱 아버지답게 처신하려는 노력을 표현한 내용이 있다면 부성의 부재를 반전시킨 변증법적 해법이라고 할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의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행동에 따른 성찰을 바탕으로 문학성과 철학성을 제대로 살려내려면 작품마다 물질적 상상에서부터 변증법적 상상이 필요해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보면 상상의 유형과 위계는 물질적 상상력 → 역동적 상상력 → 원형적 상상력 → 변증법적 상상력으로 진행되는 흐름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바탕은 포착된 제재가 어떻게 의미화 하는가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기준이 된다. 그런 점에서 상상력은 현실세계의 모순을 해결하고 이상세계를 제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5. 에필로그 상상력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서적이며 이지적인 기능이다. 예술을 창조하고 수용하기 위한 불가피한 미적 기능이기도 하다. 영국의 철학자인 베이컨은 역사는 기억을, 철학은 이성을, 문학은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할 만큼 모든 예술작품은 상상의 모태에서 태어난다. 상상력은 작가의 문학적 세계를 확장시켜 주는 동력이다. 작가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경계는 그가 비행할 수 있는 상상력이라는 동력에 비례하므로 상상력은 작품 세계의 깊이와 넓이, 높이와 두께, 그리고 사상과 인식의 무게까지 결정짓는다. 만일 어떤 작품에 질적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문장표현의 한계나 체험의 제약 때문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상상력의 한계 때문이다. 화가, 목공, 작곡가, 작가 등 예술 분야가 무엇이든 그가 주변소재에 대하여 얼마나 깊게 상상력에 취해있고 얼마나 폭넓게 상상력을 발휘하는가에 따라 미적 수준이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력은 작가의 문학적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상상이라는 쟁기로 우주를 밭갈이하는 농부다. 작가는 부단하게 ‘상상적 농기구를 개량’하면서 문학적 자산을 넓혀나가야 한다. 적어도 문학적 수필을 쓰려는 수필가에게 상상력은 위대한 신약이면서 스스로 짐져야할 시지프스의 바위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75    거지 황아전 / 김 춘 수 댓글:  조회:1742  추천:0  2019-02-06
거지 황아전   김 춘 수     어릴 때 본 참빗과 나막신이 없다. 약과틀도 없다. 죽음이 주검이 되어 얼굴이 조막만하다. 살갗이 가짓빛이다. 체인 코코스는 메뉴가 화려하다. 대낮이다. 햇살이 햇살을 보고 히죽이 웃는다. 공원에 다람쥐가 없다. 한바[飯場]의 벽에는 바끔한 틈도 없는 빈대의 핏자국이다. 눈앞에 남자의 그것이 축 늘어져 있다. 날이 샜는데 아침이 오지 않는다. 작년에 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다. ―『현대문학』, 2005년 1월     물성物性들의 혼곤하고 아름다운 엇섞임, 또는 퍼즐 풀기의 즐거움       해제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선생의 유일한 미발표작이다. 먼발치에서 몇 번 뵙고 정진규 선생님의 소개로 선생의 맥주도 두어 차례 받아 마셔 본 적이 있을지언정, 선생을 향한 무슨 살뜰한 감정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유일한 미발표작이라는 이 시를 곰곰이 뜯어 읽으면서, 선생의 생전 모습과 내가 전혀 모르는 그의 내력來歷이 불현듯 살갑게 느껴지는 까닭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시는 매우 난해하게 여겨진다. 내용도 그렇지만 "거지 황아전"이라는 제목부터 그 의미를 간추리기 어렵다. "거지", 그리고 "-전"에 주목하면 "황아"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의 전기傳記, 또는 「임경업전」이나 「조웅전」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딴 고전소설의 제명題名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결구 "작년에 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다"의 뒷받침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는, 전고典故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황아"라는 이름이 낯설다. 더구나 대개 "황아"가 ‘황아장수’에서처럼 ‘황화荒貨’, 즉 담배나 쌈지 따위의 잡동사니를 가리킨다는 점, 그리고 시의 "참빗", "나막신", "약과틀" 등속이 황아장수가 파는 잡동사니라는 점에서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품는다. 그렇다고 "황아"를 ‘황화荒貨’로 이해한다면, 앞에서의 "거지"나 "-전", 그리고 결구와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킨다. 참 난처한 딜레마다. 일단 숙제로 남겨 놓는다.   화자는 무릎을 담요로 덮은 채 흔들의자에 앉아 창틈으로 새는 봄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문득 두 가지 장면이 기억의 창고로부터 빠져나와 화자의 눈앞에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하나는 "공원에는 다람쥐가 없다"까지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에피소드고, 다른 하나는 "……축 늘어져 있다"까지 비교적 먼 과거의 에피소드다. 과거의 일을 현실에서 동시에 환상처럼 다시 보며, 화자는 창밖의 봄볕을 바라본다. 무심히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의 한 구절, "작년에 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다"를 떠올린다.   화자는 패밀리레스토랑 코코스의 체인점에 와 있다. 손자․손녀를 포함한 가족단위 외식을 위한 모임일 듯하다. 코코스는 현대식 레스토랑답게 선명한 붉은빛을 주조로 깨끗하면서 쾌적하게 꾸며져 있다. 해가 잘 들도록 설계해서 실내는 한층 밝고 화려해, 잘 다듬어진 공원과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공원이 아닌 레스토랑의 실내에 "다람쥐"가 있을 리 없다. 모처럼의 가족 외식에 화자는 한껏 들떠 있다. 실내 가득한 "햇살"도 손주들을 혼자 생각하며 흡족히 바라보는 화자의 미소처럼 "히죽이" 웃는 것 같다. 메뉴는 햄버거스테이크와 데리야끼소스를 이용해 만든 치킨요리를 묶은 믹스드그릴, 부드러운 안심스테이크에 석탄난로로 구운 왕새우를 곁들인 것, 닭가슴살구이에 바삭바삭 튀겨진 옥수수칩을 섞은 멕시칸 샐러드 등속이다. 그런데 식탁 위에 놓인 스테이크요리가 갑자기, 화자의 눈에 음식물이 아닌 생명체의 "주검"으로 비친다. 어쩌면 의식의 한 모서리에서 늘 죽음을 감촉하면서 생활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화자는 하나의 "주검"인 채 "가짓빛"으로 놓여 있는 스테이크요리에서, 언젠가 이장移葬할 때 본, 거의 육탈해 터무니없이, "조막"만하게 작아진 얼굴을 가진 "가짓빛" 시신을 겹쳐 떠올린다. 화자는 자신의 뜬금없는 상상에 스스로 놀라 새삼 주변을 둘러본다. 현대식 패밀리레스토랑에 "참빗"이나 "나막신", "약과틀" 따위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화자가 돌연 그것들을 찾는 이유는 뭘까.   그건 결구 "작년에 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화자가 창밖의 봄볕에서 떠올린 것은 "각설이"다. "각설이"는 봄볕의 비유물이다. 매년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띤다. 화자의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 있는 "각설이"는 황아장수다. 떠돌이행상인 그는 늘 초라하기 짝이 없는 거지몰골일 수밖에 없다. "각설이"처럼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점도 황아장수를 "각설이"로 기억하는 이유다. 화자는 어린 시절 마을에서 그가 풀어놓는 보따리의 각양각색 잡동사니에 "참빗", "나막신", "약과틀" 따위가 섞여 있음을 생각해 낸다. 봄볕을 보며, 잠시 과거의 기억에 취해 있던 화자는 다시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틈입한 현대식 패밀리레스토랑 "체인 코코스"의 환상 속에서 그것들을 더듬어 찾는다.   "체인 코코스"의 환한 환상과 겹쳐 떠오른 것은 아득히 먼 젊은 시절의 기억이다. 어떤 정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자가 요기를 위해 든 곳은 노무자들의 임시식당인 "한바[飯場]"다.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는 것은 "체인 코코스"와 식당이라는 면에서 겹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분위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화자의 자의식을 예리하게 긁는다. "바끔한 틈도 없는 빈대의 핏자국"은 기억의 사생寫生이다. 의미보다는 "체인 코코스"에 대비된, 습기가 많고 채도가 낮은 이미지를 위해 봉사한다. 이것은 "벽"에 그려진 낙서의 우울한 배경이 된다. 남자의 성기인 "그것이" "축 늘어져 있다". 비록 그림일지언정 하늘을 향해 탱탱하게 용립聳立하지 못하고 땅으로 초라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은, 단순한 성적 기호記號를 넘어 삶과 죽음의 회로도가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환멸과 체념의 고단하고 쓸쓸한 상징이다. 그것은 화자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자신의 자의식을 베낀다. 이러한 환상 속에서 화자가 "날이 샜는데 아침이 오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은 낯설지 않다.    여기까지 이 시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제목 "거지 황아전"의 의미가 드러났다. 이는 애초 "거지 황아장수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전" 앞의 "황아장수"가 너무 길고 구체적인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 일반명사라 어색할뿐더러, 제목다운 여운을 주기에는 의미가 너무 선명하다. 과감히 "장수"를 빼 본다. "거지 황아전"의 "황아"는 특정인을 가리키는 이름 같기도 하고 황화荒貨, 즉 잡동사니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상상력의 숨통을 묘한 방향으로 뚫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름으로 치더라도 「우상전虞裳傳」의 "우상"처럼 예스러우면서 그럴 듯하다. 선생은 투명한 사실 대신 모호한 언어적 묘미를 선택한다. 선생의 제목 짓기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이 시의 난해함은 문장의 배열이 시간의 맥락이나 에피소드의 인과관계와는 상관없이 "무의식의 자동기술법"을 본따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본따’라고 표현한 것은 그 배열이 ‘무의식의 자동기술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전략적으로 그 비슷하게 배열했다고 여겨서다. 그러나 그것이 2류시인의 유치한 꾀부림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탄력있게 조였다 끊는 리듬의 깨끗함도 깨끗함이지만, 천진하면서도 그윽한 이미지의 태깔과 그것들의 리드미칼한 파동 때문이다.    이 시의 주조적 이미지는 "참빗", "나막신", "약과틀", "가짓빛" "주검"으로부터 투사된다. 이 낱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산란散亂하는 이미지들은 얼핏 검박 ․ 산뜻하면서도 마치 오래 손때가 탄 채 맑게 닦인 대청마루의 어슬녘빛 같은 깊고깊은 고요를 거느린다. "주검"조차 그렇게 여겨진다. 그것은 "주검"의 표면에 칠해진 "가짓빛" 식물성 이미지의 윤기 있는 진보라빛 깊고 향긋한 채색으로부터 발원한다. "가짓빛" "주검"은 "참빗", "나막신", "약과틀"의 이미지와 약간 거리를 둔 채 그것들을 더 깊고 향기롭게 감싼다. 또 "바끔한 틈도 없는 빈대의 핏자국" 위에 "축 늘어져" 있는 남근男根은 그것이 품는 의미와 상관없이 미묘한 조형성을 느끼게 한다. 이중섭의 은지화銀紙畵나 「꽃과 어린이와 게」처럼 낡고 꼬질꼬질한 배경 위에 송곳이나 목탄 따위로 그려진 남근을 연상하게 된다. 여기에서 조형미를 바라보는 것은 나만의 상상인지 모르겠다.     더 중요한 미덕은 "날이 샜는데 아침이 오지 않는다"의 타나토스적 전경前景 아래 봄볕을 각설이패로 비유하는 은근하면서도 흐벅진 여유다. 위에서 말했지만, "각설이"는 황아장수이며, 그것은 현재 화자가 무릎을 담요로 덮고 바라보는 거실 바깥의 봄볕이다. 어쩌면 더욱 비감 어리게 할 수 있을 봄볕을 각설이의 개구지고 활발한 이미지로 바꿔치기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노련한 세공술사의 솜씨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각설이패의 이면에 가려진 비애를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타나토스적 정황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그러한 여유는 언어에 대한 무봉無縫하고 겸허한 태도에서 유로된다.   이 시를 다 읽고 난 후 독자들은 원래의 의미와 정서는 봄볕에 희석된 채, 각각의 이미지들만이 살아 순연한 물성物性에 육박하는 장면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소위 무의미시로 다듬어지고 세척된 정서의 염결과 세련에 연유한다. 이는 선생의 가장 선생다운 기호嗜好다. 아무러나 이 시가 내장한 퍼즐을 푸는 것은 어렵고 재미없는 난수표를 읽는 곤혹스런 짜증이 아니라, 유쾌한 사건을 추리하는 탐정의 그것처럼 시원한 재미를 선사한다.  
74    문학 작품의 해석 방법 댓글:  조회:2008  추천:0  2019-02-06
  문학 작품의 해석 방법   문학은 그 자체로 진공의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자 - 작품 - 독자'의 구도 속에서 '현실 세계'에 역동적으로 구체화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문학의 참된 의미는 작자, 독자,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서 어디에다 중점을 두고 문학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나온다.    현실세계 ∥ 작가 〓 작품 〓 독자      표현론적 관점(생산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작가의 체험, 사상, 감정의 반영물이다.                      문학 작품은 작가의 창조 능력의 소산이다. ⑵ 특징 ♠ 작품이 작자와 맺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관점 ♠ 문학 작품은 작가의 표현욕구가 드러난 대상이기에 작가의 모든 것을 작품에 연관시켜 해석하려 함. ♠ '작가론(作家論)'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님. ⑶ 방법 ♠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연구 ♠ 작가에 대한 전기적(傳記的) 연구 ― 성장환경, 가계, 학력, 교우관계, 취미, 사상, 병력 등의 조사. ♠ 작가의 심리 상태에 대한 연구 ⑷ 장 • 단점 ♠ 장점 : 작가의 개인적인 능력과 천재성을 중시함. ♠ 단점 : 의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작가가 표현하고자 의도한 것과 그것이 실제로 표현된 결과인 작품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    반영론적 관점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현실 세계의 반영이다. ⑵ 특징 ♠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작품과 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임. ♠ 실제로 인간의 삶은 현실 세계에서 영위되고 있으므로, 작품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작품에 나타난 현실과 실제의 현실이 맺고 있는 관련성에 촛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방법임. ⑶ 방법 ♠ 작품이 대상으로 삼은 현실 세계에 대해 연구한다. ♠ 작품에 반영된 세계와 대상 세계를 비교 검토한다. ♠ 작품이 대상 세계의 진실한 모습과 전형적 모습을 반영했는지 검토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문학이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며, 문학 작품에 대한 이해가 삶의 현실, 시대 및 역사에 대한 이해로 확대될 수 있게 한다. ♠ 단점 : 이 방법이 지나치면 작품을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사실들의 조립체 또는 역사적 자료로 보게 되는 단점이 있음.    효용론적 관점(수용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은 독자에게 미적 쾌감, 교훈, 감동 등의 효과를 주기 위해 창작한 것이다. ⑵ 특징 ♠ 작품과 독자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 ♠ 능동적 참여자로서의 독자의 역할을 강조함.(독자가 작품을 수용함으로써 의미가 구현된다는 점, 즉 작품 해석이 수용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제시함) ♠ 작품의 가치를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어느 정도 주었느냐에 따라 평가하려는 관점이다. ⑶ 방법 ♠ 독자의 감동이 무엇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품의 어떤 면에서 촉발되는가를 검토한다. ♠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과 정신 등 객관적이고 타당한 기준이 도입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독자가 능동적인 주체가 되며, 일반 독자들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관점이다. ♠ 단점 : 독자의 주관적 느낌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질 염려가 있음.    절대주의적 관점(구조론적)   ⑴ 기본 입장 : 문학 작품은 고도의 형상적 언어로 조직된 자율적인 체계이다. ⑵ 특징 ♠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작품밖에 없으며, 작품 속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함. ♠ 작품을 그 자체로 독립된 자족적 세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작품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생각함. ♠ 작품을 작가나 시대, 환경으로부터 독립시켜 이해한다. ♠ 언어 표현의 방식과 작품의 내적인 짜임새를 중시함. ⑶ 방법 ♠ 작품의 언어적 구조를 중시한다. ♠ 문학의 언어가 지니는 특징 및 언어의 이미지, 비유, 상징 등에 주목한다. ♠ 작품을 유기적 존재로 본다. 특히, 시에 있어서 시어와 시어 사이, 행과 행, 연과 전체 작품의 상관 관계, 운율과 의미와의 관계 등을 분석적으로 이해한다. ⑷ 장 • 단점 ♠ 장점 : 언어에 민감한 시의 분석에 뛰어난 성과를 보임. ♠ 단점 :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을 좁힐 수 있으며, 문학이 궁극적으로는 역사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종합주의적 관점   ⑴ 기본 입장 : 작품의 총체적이고도 통일적인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표현론적, 반영론적, 효용론적, 절대주의적 관점을 통합하여 연구해야 한다. ⑵ 특징 ♠ 작품을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그 작품의 부분적 의미만을 볼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함. ♠ 작품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⑶ 방법 ♠ 네 가지 관점을 통합한다. ♠ 네 가지 관점을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한다  
73    낭만주의에서 고답파, 상징주의로/ 민 용 태 댓글:  조회:1907  추천:0  2019-02-04
낭만주의에서 고답파, 상징주의로     민 용 태(고려대 명예교수.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1. 그리움의 미학   “산 너머 저 산 너머 어느 먼 곳에/ 행복이 산다고 사람들은 말 하네”, 독일의 시인 카알 붓세(Busse,1872-1918)의 이런 그리움이 낭만주의 냄새이다. 초기 낭만주의의 자연과 원시인에 대한 그리움, 빅또르 위고의 동양인에 대한 향수가 소위 ‘이국취향(exoticism)’의 유행을 낳았다면, 후기 낭만주의와 상징주의는 보다 깊은 형이상학적 우주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메아리친다. 오르떼가 이 가셑(Ortega y Gasset)은 토인비의 ‘세계사’를 언급하면서, 인간의 그리움에 대한 철학을 말한다. 사람은 애초에 어떤 크막한 우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시인들은 늘 그 잃어버린 원초적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태초의 태아의 자궁 속 행복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죽음의 욕망(Thanatos)으로 본다. 이들 사고 또한 인간에게는 어떤 잃어버린 원형적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상존한다는 생각이다. 초기 낭만주의에서 떼오필 고띠에(Théophile Gautier,1811-1872)의 고답파(Parnasse)에 이르는 이국 취향(exoticisme)의 문학은, 고띠에의 주장처럼 시간과 공간에서 먼 것이 아름답다는 시각을 발전시켰다. 이 아름다운 것, 즉 먼 것, 먼 곳은 시인의 끝없는 그리움이 향하는 지표이다. 그들은 시간상의 먼 시대, 자연과 원시 속에 호랑이와 사자의 원초적 힘이 용솟음치는세계와 전설적인 중세를 그리워했다. 동시에 공간적으로 먼 이짚트나 동양을 늘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그리움의 지표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헤매는 아라비아인들부터, 만리장성을 넘어 이태백이 달을 보고 시를 읊조리는 당 나라까지 갔던 것.   “중국 시인들은 오래된 예절에 익숙해 있지. 그래서 이 태백도 이를 쓸 때는 책상 위에 마가리트 꽃병을 놓고 썼느니...”   1865년 7월 15일, ‘고답파’ 그룹이 형성되던 때에 쓴 고티에의 이런 중국 타령은 이들의 이국 취향이 단순한 그리움의 차원을 넘어,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관심으로 기울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 이 시기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시가와 예술은 서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엑조티시즘은 현실을 추한 것으로 보았던 낭만주의자들이, 한편으로 적극적인 이상을 추구하고, 또 다른 한 편 소극적으로는, 먼 곳으로의 도피를 꿈꾸었던 성향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이상주의는 자유와 조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미학적으로는, 추하고 싫증나는 현재나 현실보다는, 멀고 아름다운 과거, 꿈같이 먼 나라의 이야기 속에 그들이 추구하는 심미적 세계가 오롯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극도의 상상의 자유를 꿈꾸었던 낭만파 시인들의 고향은 그 고재 면에서 엑조티시즘을 낳았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꿈의 세계, 낮보다는 밤, 눈에 보이는 오늘보다는 먼 어제의 세계, 손에 잡히는 여기보다는 닿을 수 없는 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풍(詩風)이 그것이다. 이들은 그 먼 곳에 자유롭게 그들이 꿈꾸던 아름다움의 이상향을 그렸다. 따라서 낭만주의자들이 꿈꾸던 아라비아나 중국, 일본의 예술은 그것이 원형 그대로 이해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꿈의 색깔로 얼룩진 안타까운 그리움의 지표였을 뿐. 그러나 낭만파들의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 플라톤의 ‘이데아’의 이미지에 가까운 어떤 우주적 원형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한다. F. 슐레겔은 말한다.   “낭만주의는 전진하는 우주의 시(詩)다. 그 사명은 단순히 시의 색다른 장르를 통합하여, 시를 철학이나 수사학과 결부시키는 일이 아니다. 낭만파 시가 사명으로 알고 의도하는 것은, 시와 산문, 독창성과 비평, 예술과 자연을 때로는 혼합하고, 때로는 융합하여, 시를 생기 있고 친근하게 만들어, 인생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고, 재치를 시화하고 예술의 재형식을 여러 가지 내용이 풍부한 형성소재로 충일 포화시키고, 또한 유머를 불어넣음으로써 활기를 부여하는 일이다. 낭만주의 시는 모든 시적인 것을 포괄한다. 그 범주는 엄청나게 복잡한 예술의 소우주로부터, 문학 소년의 꾸밈새 없는 노래에서 내뿜는 한숨과 입맞춤에까지 이르고 있다. (중략 )낭만주의 시는 무한하며 낭만 시만이 자유이다. 시인의 자의는 어떠한 법칙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최고 원리로 삼는다.” 우선 낭만주의의 상상의 자유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독일의 엑조티시즘이 선호하는 이딸리아에 대한 향수나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우주에 대한 무한한 동경으로 나아간다. 문학이나 예술이 대상으로 삼는 개개의 자연이나 현실, 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크막한 우주의 열쇄를 푸는 끄나풀들이다. 그 우주는 무한한 만큼 개인의 상상력에 또한 무한한 자유를 허용한다. 개인주의, 주관성에 뿌리한 낭만주의는 내가 꿈꾸는 환상세계, 내가 생각하는 우주에 대한 창조적 사고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신(神)은 죽었다!”라고 한 니체 이전에, 낭만주의는 크리찬이즘의 유일신(唯一神)적 우주관을 흔들어 놓았다. 개인감정을 중시하고 개성을 추구하는 낭만주의는 궁극적으로 사람 개개인, 시인 개개인이 우주를 생각하고 모시는 “사제(司祭)”가 된다. 카알 슈미트(Carl Schmitt)는 “낭만주의와 낭만적 재현상의 가장 밑바탕에는 사적(私的)인 사제를 모시는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때까지는 신을 받드는 주체가 성직자였다면 이제 일반 개인으로 믿음의 주체가 넘어는 오는 것. 그러나 그 낭만주의가 모시는 신은 독재(獨裁)자가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가능의 신이다. 서방 세계에서 우주나 초월적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신이였다면, 낭만주의로부터는 운명과 귀신, 요정 등, 불가사이의 현실들이 현상 세계의 저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때로부터 우주는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베일을 쓰고는 시인들을 끝없이 유혹한다. 따라서 낭만주의 시인들이 막연한 것을 동경하고, 꿈, 모험, 동화, 마술, 마약, 알코올, 도취의 상태로 접근하려고 하는 초의식(超意識)적 노력 또한 어떤 잃어버린 낙원이나 우주에 대한 그리움의 소산이었던 것. 낭만주의 시인에게 늘 현실의 삶은 천국에서 추방당한 이방인의 설음이 아우른다. 노발리스 또한 자신을 이방인으로 본다. 추위와 피로에 쌓인, 그대 이방인(Fremdling)이여, 이 하늘이 그대에게는 낯설 뿐이겠지-- 그대 고향에서는 보다 따스한 바람이 불고 옛날에는 젊은 가슴 한층 꿈에 부플었으리.   고향의 들판에는 항상 봄의 입김이 빛나는 삶의 씨를 뿌려주지 않았던가? 늘 평화가 굳게 자리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한 번 싹텄던 것은 반드시 꽃이 피곤 했었지?   아, 부질없이 무언가를 찾아 해매는 그대여-- 저 천상의 나라는 이미 멸망하였나니-- 아무도 모르리, 그 오솔길, 영원히 광막한 대양에 묻혀버린 그 길.   노발리스는 항상 봄이 살아 숨 쉬는 평화로운 고향을 꿈꾼다. 고향으로 가는 오솔길은 이미 바다와 파도와 현실이라는 세상 풍파에 깊이깊이 묻혀버렸다. 잃어버린 천국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낭만주의로부터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이르는 긴 긴 안타까움의 이정표들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코와 피부로 느껴지던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 보들레르(C.Baudelaire,1821-1867)가 아니었던가. 그는 “교감(Correspondences)”에서, “어린애 살처럼 싱싱하고/오보에처럼 부드럽고, 풀밭처럼 푸른 향기가 살아 숨쉬는” 영원한 고향을 꿈꾼다. 자연의 생명력이 그 원형으로 숨쉬는, 때 묻지 않은 우주의 주소를, ‘숲’은 ‘이따금 어렴풋한 말’들의 ‘교감’을 통하여 알려준다. 그래서 자연은 그에게 하나의 신전이며 그 ‘상형문자’이며, 그 속에서 시인은 우주의 크막한 숨소리를 듣는다. F. 슐레겔은 “모든 인간에게는 무한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개발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이런 충고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드려졌다. 슐라이에르마하(Schleiermacher)는 동경이 모든 종교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과 시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동경뿐만 아니라, 무한한 우주, 어떤 아름다움과 생명성의 근원에 대한 동경과 열망, 그리고 절망이 현대 시정신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교적 깨달음에 대한 관심이나 사물의 본 모습에 대한 그리움, 또 그 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언어에 대한 탐구가 말라르메로부터 발레리에 이르는 순수시의 몸부림이 아니었겠는가. 낭만주의로부터 현대시는 태어난다. 그것은 이성(理性)적이고 관념적인 사추의 방법보다는 동화같은 어린애스러운 동경이나 그리움이 삶이나 아름다움의 원형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의 출발이기도 하다. 플라톤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어떤 보이지 않는 틀의 모조품이라는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그 잃어버린 참 세계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이성보다는 감성, 감성보다는 꿈, 자유로운 상상과 환상을 통하여 접근이 더욱 용이하다는 생각을 현대는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현실적 사고보다는 그리움이, 눈 뜨고 보는 세상보다는 눈 감은 제3의 눈이 시인이나 철학자에게 보다 참스러울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낭만주의의 그리움은 엑조티시즘처럼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먼 것에 대한 동경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역사와 지리 속에서, 멀고 아득한 것에 대한 미적 가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사고는 이제, 낮보다는 밤, 깨어있는 것보다는 꿈꾸는 것, 똑똑한 것보다는 흐리 멍텅한 것, 확실한 것보다는 희미한 것이, 그 자체로 훨씬 아름답고 참에 가깝다는 것을 배웠다. 후기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에 이르는 시적 에스프리의 깊어짐은 이런 원초적 그리움의 애틋함이 더욱 진솔해지면서 나타난다. 말라르메로부터 시인은 이미 어느 사물도, 그 사물을 감지하는 느낌도, 그 느낌을 표현하는 언어도 시인이 꿈꾸는 원형적 아름다움의 세계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더 나아가서, 시가 표현하는 확실한 시어일수록, 사람들의 관습이나 일반적 편견에 길들여진 순수하지 못한 언어의 조작이 만들어낸 허상들임을 깨닫는다. 그런 쉬운 시, 확실한 시어, 비순수한 언어의 시는 첫째, 확실한 만큼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다. 둘째, 참스러운 우주적 비젼을 마치 자기가 다 아는 신인 것처럼 확실히 표현하는 그 자체가 이미 엄청난 위선이다. 따라서 말라르메의 “천지 창조의 첫날같이 순수하고 성스러운 모습”을 구현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그리움은 일상적 언어에 대한 끝없는 부정으로 나타난다. 그의 시와 시어는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형태도 거부한다. 그는 현실을 경멸하듯 현실적 언어를 거부한다.   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누구나 삶에 등을 돌리는 모든 창에 나는 매달린다. 그리고 축복을 받아, ‘무한’의 순결한 아침이 금빛으로 물들고 영원한 이슬로 씻겨 진 그 창 유리에 나를 비추니, 나는 천사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 그리고   --그 유리가 예술이건 신비로움이건-- 내 꿈을 왕관으로 쓰고 다시 태어나리라 ‘아름다움’이 꽃피는 전생의 하늘에!   --‘창(窓)’에서   말라르메의 시학은 끝없는 언어 파괴를 통해 ‘창’을 닦음으로서 ‘전생의 하늘’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안타까움의 몸부림이다. 그의 시의 매력은 바로 그 시어의 모호함, 희미함 자체이며, 그것은 동시에 불교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처럼, 다시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초월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의 철저한 고행 행위이다.     2. 예술을 위한 예술 : 탐미(眈美)주의와 데까당(頹廢主義)   19 세기인들의 현실에 대한 혐오는 “그리움의 미학”을 낳고 “예술을 위한 예술”에 탐익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신화가 유효했다면, 이제 예술은 자연적인 것도 아닌, 인간적인 것도 아닌,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에 가까운 지고의 이상 현실의 구현으로 생각된다. 자연이나 현실은 인공(人工)이나 예술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이들에게 지배적이다. 휘슬러(Whisler)는 말한다. “자연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술적으로 맞지 않은 주장이다. 비록 인반적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 옳은 것이라는 사고가 늘 지배적이어왔지만, 자연이 옳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차라리 자연은 늘 옳지 않다고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하나의 그림으로 그릴만큼 완전한 조화를 가진 사물들의 모습이란 흔치 않은 법.” 이런 비슷한 사고의 뿌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있어왔다. 희랍의 철인이 예술은 자연을 완전한 방향으로 모방한다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이미 자연은 완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둔 생각이었을 법하다. 이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인간 현실의 모방이나 도덕적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한다. 이것들보다 더욱 차원 높은 영원한 아름다움의 이상향을 인공적으로 구축하려 한다. 호라티음으로부터 오랜 전통을 가진 예술의 효용성, 즉 예술은 교훈적인 유용한 내용을 재미있게 표현한다는 생각이, 이제 그 도덕 선생 같은 위선자적 탈을 벗고 지고한 쾌락주의자로 변신한 것도 이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사는 작가들의 모습이었다. 예로부터 예술은 아름답고 재미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없어온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적극적으로 하나의 미학과 생활할 방식을 택한 것은 19 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칸트의 “판단 비판”에서의 미적 판단의 무관심성(無關心性=desinterestness)은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의 이론적 바탕이 된다. 칸트는 위 책의 14 장에서 “오직 순수한 미적 판단들만이(그 판단들이 형식에 의거한 것들이기 때문에) 가장 올바른 취향의 판단이다.”라고 말한다. 한 예술 작품이나 자연물이 아름답다고 판단되는 것은, 칸트 생각에는, 어떤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아름답다고 하는 판단의 대상이 된 그 “형태”에 대한 순수한(따라서 보편적인) 성찰에 말미암는다. 이런 판단이야 말로,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해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 만큼 순수하다. 칸트의 생각은 상상과 이해 사이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상상력이란 생각들을 정리하고 그 모습을 재생시키는 기능이고, 이해는 그것을 관념화시키는 작용이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볼 때는, 우리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에 따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거기에 따른 상상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칸트의 미적 판단 개념을 따르면, 상상은 자유로워서, 상상과 이해 사이의 관계 또한 결정적인 것이 아닌, 끝없는 생각과 연상을 유도한다는 것. 어떤 미적 판단도 결국 정해 진대로 객관화되거나 관념화될 수 없으며,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에 따라,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어떤 미적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칸트가 “무관심성”이라고 말한 “미적 쾌감”의 성격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은 “이것이 장미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식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롭고 순수한 주관적 느낌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누구에서나 통하는 보편성을 갖는다. 이런 칸트의 무관심성 미학은 19 세기 이후 구라파와 미주 대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심미주의, 데까당, 쿠비즘, 추상화 같은 현대 예술론에 크나큰 파문을 던진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론의 발화시기 때부터 독일의 미학이 주효했음을 말해준다.   “쉴러가 부른다. 그는 그의 예술에서 날카로운 감성의 소지자이며 거의 그 자신이 시인이라고 해야 한다. 나는 쉴러파의 제자인 헨리 크랩 로빈슨(Henry Craa Robinson)을 만난다. 그의 칸트의 미학에 관한 작품은 몇 가지 대단히 강력한 사고를 제시한다. 모든 목적성이란 예술을 타락시킴으로, 아무 목적 없는 ‘예술을 위한 예술!’!그러나 예술이 목적이 없을 때 진정한 목표를 달성한다.” 윌리엄 K.윔사트는 이민간 프랑스 지성인(꽁스땅과 그의 친구 마담 드 스탤)들이 파리 로 돌아오고, 1814년 보르봉 가의 왕권 복귀로, 프랑스에는 이런 칸트의 미학을 반추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말한다. 소위 ‘독일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예술 풍조는 ‘순수 예술’ ‘무관심성’ “자유‘ ’순수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19 세기 초 프랑스와 영국 문단을 누빈다. 1832년에 나온 고띠에(Théophile Gautier,1811-1872)의 “초기 시(Premiéres poésies)”의 서문에서는 “이 책이 무슨 목적이 있는가? 아름다움이라는 목표 이외에는 없다.”라고 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공리주의자들, 경제학자, 산 시몬의 사회주의파들을 공격한다. 고띠에가 창안하고 발전시킨 “고답파” 시학, 특히 르꽁 드 릴르(Leconte de Lisle,1818-1964)를 비롯한 이들 시인들은 모두 예술 지상 주의자들이다. “고답파”가 주장하는 시 쓰기의 이론 몇 가지를 보자. “--시는 인간의 고통을 쏟아내는 배출구가 아니다. 결괴적으로 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예술은 효용성에서 벗어나야 한다.“아무 쓸모없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고띠에는 말한다. --예술은 형식의 순수성만을 지향해야 한다.” 이상에서 보듯, 고답파 시인들에게 칸트의 미학의 무관심성, 무효용성, 그리고 특히 “형식의 순수성”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공꾸르 형제는 칸트가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한 “색깔은 부수적이며,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형식주의를 본따라, “세련미(préciosité) 와 정확성(présicion)을 시 표현의 핵심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시는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세부 묘사에 정확성을 기하고, 그리스나 라틴어 등에서 따온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거나,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말, 중국의 당시나 이태백까지 들먹이게 된다. 고띠에의 이국취향은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특히 그의 중국이나 중국시에 대한 관심, 공꾸르 형제의 일본 “우끼요에(浮世畵)”에 대한 관심은 물론 이국적인 예술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칸트가 말한 예술적 ‘느낌’의 주관적 보편성, 세계성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고답파의 예술 이론가들은 이처럼 오래고 먼 예술에서, 오히려 변하지 않는 정확한 미적 ‘느낌’의 공통분모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윌리엄 K.윔사트는 영미 문학에서의 예술을 위한 예술론, 혹은 오스카 와일드의 탐미주의를 비교문학적 입장에서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우선 애드가 앨런 포우(Edgar Allan Poe)가 슐레겔의 드라마론(Drmatic Lectures)을 번역으로 읽고, “이상성의 기능이 시적 감정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1840년 이후 쉘리가 낭만주의의 상상력을 격찬하는 시를 알게 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문학론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문학 창작론(Philosophy of Composition)”, “시학 원리(Poetic Principle)”를 쓰게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 또한 애매하나마 칸트의 미학이 녹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위 학자가 인용한 포우의 주장들을 보자. “무덤을 넘어서 전해오는 영광스런 광휘들을 황홀하게 감지하고, 영감을 받아, 우리는 싸운다. 시간의 소산인 생각들과 사물들 사이, 수많은 짜 맞추기를 통해, 어쩌면 오직 영원의 세계에만 속할지 모르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사랑스러움(Loveliness) 몇 조각을 얻기 위하여. 그 즐거움은 동시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양되고, 가장 강렬한 것으로, 나의 주장은 그것이 아름다움의 성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 아름다움의 성찰에서만이 우리는 쾌락의 승화(昇華)와 영혼의 열락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시적 감정으로 인지하게 된다. 나는 아름다움을 만든다, 고(故)로--숭고미와 같은 의미로 말해서--나는 아름다움을 시의 마을로 꾸민다.” 이런 천상의 아름다움(supernal beauty)은 물론 일시적 센티멘탈리즘이나 열정에 나온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최대 고양 상태”에서 느껴지는 것인만큼, 감정이나 이성의 산물일 수 없다. 포우의 이런 숭고한 아름다움 지상주의는 보들레르에서 가장 훌륭한 동반자를 만난다. 프랑스 시인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라는 이름부터 악(惡)을 넘어선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보들레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결국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반대 의견을 표시한다. 그것은 인간 본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생명 중심의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술이 생명적인만큼 도덕적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단순이 인간의 본성을 넘쳐나리만큼 풍성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도덕주의자다.”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다. 결국 보들레르는 기존의 선과 악의 구분에 의한 도덕률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생명과 삶의 의지로 충만한 활동이 시작활동인 만큼 그 자체가 이미 도덕적이라고 보들레르는 말한다. 악과 부패로부터 피어난 꽃도 보들레르에게는 생명적인만큼 도덕적이다. 그래서 그는 “악의 꽃의” 서시에서 “불명예스러운 도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외친다. 보들레르는 자연 숭배자는 아니다.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예술은 마술적 매혹이다. 마술인 만큼 고양된 기술이며 “존재의 화장“이다. “루즈와 화장이 가장 고양된, 초자연적으로 강력한 존재의 방법에 대한 상징이다.”보들레르 또한 인공적 매혹의 천국을 꿈꾼다. 예술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을 위에 두는 새로운 도덕률을 꿈꾼다. 영국의 탐미주의 또한 좁은 기존 도덕의 벽을 허물고 출발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 대표적 작가이다. 보들레르와 같이 와일드의 인생 또한 타락과 시련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와일드는 “나는 예술을 최상의 현실로, 현실을 단순한 일종의 허구로 생각했다.”라고 고백한다. 탐미주의는 예술 지상주의인 만큼 반도덕적, 반사회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데 킨세이(De Quincey)의 에세이, “예술의 하나로서의 살인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만 들어보자. 시간의 변화 속에 퇴색되어 가는 아름다움을 시간의 늪에서 구원하기 위해, 한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화 시키기 위해, 그 아름다움의 절정의 순간에 여자를 죽여, 원형 그대로의 조각으로 만든다.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머물게 한다. 흔히 이런 사고가 탐미주의 작품의 바탕이 되곤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비도덕적인 이유를 “감동을 위한 감동이 예술의 목표이다. 행동을 위한 감정이 인생이 목표이듯이.”라고 설명한다. 즉 인생의 도덕률과 예술의 도덕률이 같을 수 없으며, 예술은 인생의 도덕의 예속물일 수 없다는 것. 이렇게 해서 탐미주의는 일부러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소름 끼치게 타락한, 추한 현실을 기꺼이 소재로 삼았다. 우리의 알반 상식과는 전연 무관한 현실 속에서 예술성만으로 살아있는 “최상의 현실”을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퇴폐주의나 댄디즘이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 순수성, 진솔성에 대한 집착이다. 사회에 유용하고 도덕적인 것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다. 현실적으로 부서지고 허물어지고 타락한 현실 속에 지고한 예술성이 오롯이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심미적 쾌락주의는 한 편으로 세기 말적 염세주의에 물들면서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보들레르, 베를레느, 말라르메, 랭보 등 거의 모두 데까당들이다. 베를레느는 말한다. “나는 데까당스 말기의 제국이다.” 이들은 인간의 원죄와 양심의 가책을 느낀 크리스천들인 데가 있었다. 보들레르는 “사랑을 한다는 것은 악(惡)을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악마적 낭만주의자였다. 사랑이 악(惡)이라면, 그 최고의 기쁨은 바로 그 악을 저지른다는 의식에 있다고 했다. 창녀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데까당과 낭만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으로, 우리 작가 이 상의 기녀와의 삶이나 “날개” 속의 주인공의 창녀와의 동거가 바로 비슷한 취향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도덕률과 사회, 그리고 부르조아지적 가정의 타성과 관습에 반발하는 순수한 저항아들이었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운명의 질곡 속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모든 고난 받은 자들에 대한, 순수한 이해와 사랑은 퇴폐주의가 개척한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72    인과 관계를 비틀거나 풍경 바꾸기 댓글:  조회:1431  추천:0  2019-02-04
인과 관계를 비틀거나 풍경 바꾸기    우리가 새롭게 느끼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인식의 주체가 새롭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제재들을 택하려는 것은 누구나 듣고 생각한 것들을 말할 경우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스쳐 듣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부부간의 대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내가 조금만 눈빛이 달라도 무슨 일이냐고 민감하게 묻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아내가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수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너무 자주 그런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던 방식을 택하지 말고, 하늘을 보며 하이얗게 웃는다든지,  한 1분쯤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과 같은 낯선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과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라고 합니다.    낯설게 만들기는 작품의 을 비롯하여 과  에 이르기까지 전 국면에서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발상의 단계이므로 의미적 국면에서 낯설게 만들기의 방법만 살펴보기로 하면,  크게 인관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과 낯선 배경을 설정하는 방법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인과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김춘수, [눈물]에서    이 작품은 원관념을 잠재시킨 3개의 치환은유를 인과관계를 맺지 않고 병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가 무엇을 의미하여,  왜 다음에 이야기하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들을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인과관계를 설정하면 숙친한 것들이 되고 맙니다.    (밤에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아랫도리가 젖어 있(었)다./밤에 (사랑하다가 창문 너머로 바라본)보는 오갈피나무,/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마치 사랑하는 자기들처럼) 젖어 있(었)다./(누군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너의 영혼의 바다를 건너는 것)/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새(처럼)가 되었다고 한다./(새처럼 가벼워)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수정에서 오직 추가된 것은 라는 상황 하나뿐입니다.  는 원작의 경우 시에서는 과거도 현재로 표현하는 때문이고,  수정한 것의 경우는 산문에서는 현재의 일도 과거로 표현하는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서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된 랑그(langue)를 살펴볼 때에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도 마찬가지입니다.  랑그의 층위에서는 입니다.    우리는 흔히 , , 은 완전하게 끊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선은 무수한 점의 연속이고, 논리와 비인과 같은 상반된 개념은  한 쪽은 논리적이고 다른 쪽은 비논리적이라고 가정한 직선상의 한 지점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로 인해 비인과적인 것들도 그 빈틈을 메워주면 인과적인 것들이 되고,  이와 반대로 인과관계를 자르거나 비틀면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이루는 요소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논의한 것들은 화자와 화제를 새롭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화자와 화제가 등장하는 배경을 아래의 예처럼 비일상적인 것으로 바꿔도 새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내 아득한 마음의 들판 한 구석/엇슥엇슥 엇베인 마른 수수대궁 밑으로/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네 웃음은 참 아름답다  → 네가 웃는다/잔잔하게 웃는 네 웃음 속/이름 모를 풀꽃들이 하늘거리며 손짓을 한다.    어떻습니까? 배경만 바꾸어도 아주 새롭게 보이지요? 새롭다던지 낡았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배경을 바꿀 경우, "어? 비가 마음의 들판에 내리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하고 긴장을 하며 읽으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헤아려보기 때문에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아, 시상을 새롭게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고른 시상을 검토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1.시의 제재가 새로워야 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2.어떤 제재를 선택하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생각해 봅시다.  ①대상의 위치 전환  ②주체와 객체의 입장 전환  ③서로 다른 것의 동정화(同定化)와 동일한 것의 이화(異化)  ④작은 것의 확대(擴大)와 큰 것의 축소(縮小)  ⑤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이동  3.어떤 제재를 선택하고 연상을 거듭한 다음 중간 단계를 자르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봅시다.  4.자기가 좋아하는 시 한편을 고르고, 그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꿔봅시다.   
71    [공유] 시의 이론정리 댓글:  조회:2340  추천:0  2019-02-02
  김용식 문학서재 | 김용식   http://blog.naver.com/blackhole68/220098077755   시(1) : 특성•시어     시의 개념   ⇒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 문학의 한 갈래 < 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정의 > ♥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시는 모방의 기술이다.   (필립 시드니) ♥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이다. (워즈워드) ♥ 시는 정에 감응하여 말소리로 나타낸 것이다.  (이규보의 ) ♥ 시는 감흥을 주고, 볼 수 있게 하고, 사귀게 하고, 원망하게 하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공자) ♥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맥리쉬)    시의 특성   ♠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 ♠ 내면화된 세계의 주관적이고 은밀한 토로(吐露)이다. ♠ 언어가 지니는 '소리(운율)'를 많이 활용한다. ♠ '시적자아(서정적 자아)'라는 대리인에 의해 전달된다.     시의 여러 요소   ♠ 4대 요소 ㉠ 의미적 요소(생각) : 시에 담긴 시인의 뜻과 생각 → '주제' ㉡ 음악적 요소(운율) : 반복되는 소리의 질서에 의해 창출되는 운율감 → '운율' ㉢ 회화적 요소(심상) : 대상의 묘 사나 비유에 의해 떠오르는 구체적인 모습 → '형상' ㉣ 정서적 요소(감정) : 시어에 의해 환기되는 심리 및 감정 반응 → '정서' ♠ 형식적 요소 ㉠ 시어(詩語) : 시에 쓰이는 언어로, 함축적 의미를 중시하는 압축된 형태의 언어이다. ㉡ 행(行) : 시에서의 한 줄을 가리킨다. ㉢ 연(聯) : 시적 사고와 내용 전개의 단위로 하나 이상의 행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 운율(韻律) :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소리의 규칙적인 리듬이다.    시의 언어   ♠ 시어의 특성 ㉠ 시는 언어 예술이다. : 시는 언어의 의미와 소리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언어 예술이다. ㉡ 언어의 외연적 의미보다 내포적 의미를 중시한다. * 외연적 의미(지시적 의미) → 언어의 과학적 쓰임으로, 사전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인 의미 * 내포적 의미(함축적 의미) → 언어의 정서적 쓰임으로, 암시적이고 간접적이며 주관적인 의미 ㉢ 사이비(似而非) 진술 : 과학적 진실이나 상식에 어긋나면서도 시적 진실을 표현하는 진술 방식으로, '가진술(假陳述)'이라고도 하며, 시어의 중요한 속성이다. 예> 사람이 술을 마신다.(과학적 진술) → 술이 사람을 마신다. (가진술) ㉣ 시적 자유(시적 허용) : 문법 파괴, 신조어 구사, 고어와 사투리의 사용 등 규범 문법의 제약에서 벗어난 표현이 시에서는 허용됨. 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십니까?)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범하진) ㉤ 다의성(多意性) : 하나의 시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성질을 말하며, '모호성'이라고도 하며, 이는 시어의 함축적 기능에 연유한다. ♠ 시어의 기능 ㉠ 음악적 효과(운율)를 줌. ㉡ 이미지(심상)를 이루어 냄. ㉢ 시의 어조를 만들어 냄. ㉣ 시의 분위기(정조)를 형성함. ㉤ 함축적 의미를 지님. ㉥ 특수한 기법(반어, 역설, 풍자 등)에 의해 시적 긴장을 가져옴.      시(2) : 운 율     운율의 개념   ⇒ 운율이란, 소리의 일정한 규칙적 질서로,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가락(리듬감)을 말한다. ㈀ 운(韻) :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음이나 모음이 일정한 위치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                   두운, 요운, 각운 등 한시의 압운법이 대표적이다. ㈁ 율(율격)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글자의 수 등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                      영시의 강약률, 한시의 성조율 등이 대표적이다. * 한국 시가의 율격 기준은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에 기초한 음보율(音步律)이 중심을 이룬다.    운율의 요소   ♠ 동일 음운의 반복 : 특정한 음(음운)을 반복하여 사용함. ㈀ 자음 반복 예> 갈래 갈래 갈린 길 / 길이라도 (김소월의 "길") → 자음 'ㄱ'의 반복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 자음 'ㄹ'의 반복 ㈁ 모음 반복 예> 오늘 하루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ㅗ'의 반복 ♠ 동일 음절수의 반복(음수율) 예> 한시, 시조, 가사, 창가 등이 대표적임.       산 너머 / 남촌에는 / 누가 살길래 //       해마다 / 봄 바람이 / 남으로 오네.//  (김동환의 ) → 7.5조의 음수율 ♠ 일정한 음보의 반복(음보율) : 3음보, 4음보가 대표적임 예>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동지 섣달 / 꽃 본 듯이 / 날좀 보소//       아리 아리랑 / 쓰리 쓰리랑 /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 날 / 넘겨주소.//       (민요 ) → 3음보 ♠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 같거나 비슷한 문장의 짜임을 반복하여 사용함. 예①> 물새알은 / 물새알이라서 / 날개 죽지 하얀 / 물새가 된다.          산새알은 / 산새알이라서 / 머리꼭지에 빨간 댕기를 드린 / 산새가 된다. 예②>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a                            a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b                            a ♠ 의성어 • 의태어의 사용 예> 살랑살랑 물결 이는 냇가에 서면 / 가슴 안 여린 모래톱으로 / 그리움 사르르 밀려 들오고.    운율의 종류   ♠ 외형률 : 시의 표면에 겉으로 드러난 운율(정형률) ㈀ 음위율 → 일정한 위치에 같은 음을 배치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한시 • 영시 등의 두운, 요운, 각운 ㈁ 음성률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으로 생기는 운율 예> 영시와 한시에는 두드러지나, 우리 시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 음수율 → 글자의 수를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3(4) • 4조,  7 • 5조 등. ㈃ 음보율 → 일정한 음보(音步. 발음 시간의 길이가 같은 말의 단위)를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우리나라 전통 시가(시조, 가사, 민요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3음보, 4음보 등. ♠ 내재율 : 의미와 융화되어 내밀하게 흐르는 정서적이고 개성적인 운율                  일정한 규칙없이 배열된 시어 속의 리듬으로, 시를 읽어가는 동안에 독자의 마음 속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행이나 연, 문체, 또는 작품 전체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 주관적인 운율을 말한다.    운율의 효과   ♠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소리의 규칙적 질서에 의해 즐거움과 함께 깊은 인상을 준다. ♠ 일상 생활의 말에 대한 무감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한다. ♠ 시의 의미와 연결되어서 독특한 어조를 이루어 낸다.      시(3) : 심상•어조    심상의 개념과 기능   ♠ 개념 → 감각기관에 의해 떠오르는 대상에 대한 영상이나 대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말이다. 즉, 시를 읽을 때 떠오르는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과 움직임, 상태 등을 말한다. 감각을 재현하는 감각적인 표현을 일컫는다. 이미지(image) • 형상(形象)이라고도 한다. 이미지는 추상적인 관념을 형상화하여 대상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제시하며, 특정한 정서를 환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시어나 시구의 함축적 의미까지 포함한다. 예> 그는 용감하게 싸웠다.(추상적 의미) → 그는 성난 사자처럼 싸웠다.(이미지) ♠ 기능 ⑴ 함축적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다. 김수영의 이란 시에서 '풀'은 단순한 식물로서의 '풀'이 아닌, 저항적인 인간, 민중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다. ⑵ 대상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 녀석 눈이 참 곱군.(개념적 서술) → 그 녀석 눈이 샛별 같아. (직유에 의한 이미지) 아름다운 여인 (추상적 진술) → 국화같은 여인 (이미지) ⑶ 보통의 언어로써 풀이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김동명의 이란 시에서는 '나'의 마음을 '호수'라는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대'가 노를 저어 올 수 있고, '나'는 '그대'의 뱃전에 부서질 수 있는 '나'의 내면심리가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⑷ 매우 뚜렷하고도 직접적인 인상을 전해 준다. 이미지는 대개 감각적 경험과 구체적 사물을 나타내는 언어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뚜렷하고 직접적인 인상을 남기게 된다.    심상의 표현 방법과 종류   ♠ 표현 방법 ㈀ 묘사적 심상 : 마치 그림을 그려내는 듯한 묘사를 통해 제시되는 심상 예> 송홧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 눈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이고 / 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       →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도록 외딴 봉우리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 비유적 심상 : 비유를 통해 제시되는 심상 예> 이는 먼 / 해와 달의 속삭임 / 비밀한 울음.          (박두진 "꽃")       → 꽃을 '속삭임', '울음'에 비유함. ㈂ 원형적 심상 :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며 되풀이되는 인류의 보편적 이미지 예>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강은교, )       → 물은 '생성, 생명'이라는 원형적 의미로 쓰임. ㈃ 상징적 심상 : 대상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의미나 관념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심상 ㉠ 생성 이미지 : 새로운 대상이 생겨나거나 소망이 이루어지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 낳고, 꽃을 낳는다.            (박재삼의 ) ㉡ 상승 이미지 :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올라가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정주의 ) ㉢ 소멸 이미지 : 기존의 대상이 사라지거나 어떤 소망이 좌절되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 비애야! //       개찰구에는 /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오장환, ) ㉣ 어둠과 추위의 이미지 : 시어나 시구가 어둠과 추위의 의미를 환기하는 이미지 예> 울엄매야 울엄매, / 별밭은 또 그리 멀리 /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박재삼, ) ㉤ 역동적 이미지 : 힘차게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이육사, ) ㉥ 하강 이미지 :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관이 내렸다. /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 좌르르 하직했다.    (박목월, ) ♠ 심상의 종류 ㈀ 시각적 심상 : 색채, 명암, 모양, 움직임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의 )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유치환의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서정주의 ) ㈁ 청각적 심상 : 소리, 음성, 음향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접동 / 접동 / 아우래비 접동.               (김소월의 )      늙으신 아버지의 / 기침소리랑              (신석정의 ) ㈂ 후각적 심상 : 냄새, 향기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이육사의 )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장만영의 )       산에 가면 / 우거진 나무와 풀의 / 후덥지근한 냄새.  (박재삼의 ) ㈃ 미각적 심상 : 음식의 맛, 맛을 보는 행위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김상옥의 ) ㈄ 촉각적 심상 : 만짐에 의한 것으로 차가움과 뜨거움, 피부결 등으로 세분됨. 예>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       (김종길의 )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이상화의 ) ㈅ 공감각적 심상 :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는 것. 예>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청각의 시각화.      (김광균, )       동해 쪽빛 바람에 /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 촉각의 시각화.  (유치환, )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 ㈆ 지배적 심상 :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심상 중에서 독자의 마음 속에 가장 강렬한 인상이나 정서를 일으켜 내는 심상    어조의 개념과 양상   ♠ 개념 → 어조(語調. tone)란 시적 대상에 대한 시적 화자 특유의 말투 혹은 가락을 말한다. 사람마다 음성 • 억양 • 강세 • 음색 등에 의한 어조가 다른 것처럼, 시에 나타나는 화자의 어조(개성적 목소리) 역시 다르다. ♠ 어조의 양상 ㉠ 화자가 자기 자신을 향한 목소리 → 화자가 혼자 독백하듯이 말하며, 영탄과 감탄의 어조를 띠며, 서정성을 주조로 한 서정시에 알맞다. 시인의 내면세계와 직접 관련되어,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예>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의 ) ㉡ 화자가 청자인 '너'를 향한 목소리 → 화자는 숨고 청자인 '너(독자)'에게 제시하듯이 말하며, 명령 • 권고 • 요청 • 갈망 • 호소의 어조를 띠며, 청자에 대한 소망이 주조를 이룬다. 참여시와 목적시에 알맞다.• 예>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박두진 ) ㉢ 3인칭 '그'를 향한 목소리 → 화자와 청자가 숨고 3인칭 '그'를 지향하며, 정보 전달에 적합한 사실적 • 객관적 어조로 서사시에 알맞다.    어조의 기능과 종류   ♠ 어조의 기능 ㈀ 어조와 분위기 : 시의 어조는 시의 느낌, 분위기(정조)를 창조한다. 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순수하고 맑은 시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삶의 가성적인 앙양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 어조와 주제 : 어조는 시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예>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명상적인 기도조의 어조는 경건한 삶에 대한 염원을 노래하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나타냄. ♠ 어조의 종류 ㈀ 남성적 어조 : 강하고 의지적이고 힘찬 기백을 담은 내용의 전달에 적합함. 예> 이육사의 , 유치환의 등. ㈁ 여성적 어조 : 간절한 기원, 한, 애상 등의 내용 전달에 적합함. 예> 한용운의 시, 김소월의 , 김영랑의 시 등. ㈂ 풍자, 해학, 냉소의 어조 : 사회 비판의 내용 전달에 적합함. 예> 조선 후기의 사설시조, 민중시 등. ㈃ 그 외 * 단호한 어조 → 망설임 없이 엄격하게 딱 잘라서 결정하는 듯한 어조  (함형수, ) * 유장한 어조 → 급하지 않고 느리고 길게 뽑는 가락을 띤 어조  (한용운, ) * 냉소적 어조 → 시적 대상에 대해 쌀쌀한 태도로 비웃는 듯한 어조  (황지우, ) * 비판적 어조 → 시적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어조 (김광섭, ) * 설득적 어조 → 이치를 따져 자기 생각에 동조하게 만드는 듯한 어조 (김남조, ) * 담담한 어조 → 상황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는 어조 (이용악, ) * 독백적 어조 → 혼자 말하는 듯한 어조 (서정주, ) * 경쾌하고 발랄한 어조 → 밝고 긍정적인 시어와 빠른 호흡이 두드러지는 어조 (박두진, ) * 섬세하고 부드러운 어조 → 가냘프고 곱고 순한 어조 (김영랑, ) * 친근한 어조 → 누구와도 거부감 없이 친하게 어울리는 듯한 어조 (김상용, ) * 영탄적 어조 →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태도 (김소월, ) ㈄ 어조의 변화 : 화자의 태도나 심정의 변화에서 유발됨. 어조의 변화는 시정이 전환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게 됨. (한용운, → 이별로 인한 슬픔에서 이별한 임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어조로 변화됨.)    정서적 거리   ♠ 정서적 거리란, 서정적 자아가 시적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정서의 미적 거리를 말한다. ♠ 정서적 거리의 유형 ㈀ 가까운 거리 : 대상에 대하여 주관적인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 예>행여나 다칠세라 / 너를 안고 줄 고르면 //      떨리는 열 손가락 / 마디 마디 에인 사랑 //      손 닿자 애절히 우는 / 서러운 내 가얏고여.    (정완영의 ) ㈁ 균제 • 절제된 거리 : 대상에 대하여 담담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 예> 어두운 방 안엔 / 바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김종길의 ) ㈂ 먼 거리 : 대상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거나, 철저히 객관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 예>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       시(4) : 표현 기교    비유(比喩)   ㈀ 개념 :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을 그것과 유사한 다른 사물이나 관념에 빗대어, 보다 생동감 있고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표현방법이다.   비유는 두 사물의 유사점에 근거하여(유추관계) 이루어진다.   이 때, 표현하려는 대상을 원관념, 비교되는 매개물을 보조관념이라고 한다. ㈁ 종류 ♠ 직유 : 원관념에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하여 표현하는 방법으로, '~처럼', '~같은', '~인 양' 등을 사용하여 연결한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 은유 :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에 따라, 다른 사물이나 관념으로 대치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A는 B이다' 식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고도의 은유에는 A가 생략되기도 한다. 예> 내 마음은 호수요.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번뇌는 별빛이라. ()      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 * 사은유(死隱喩) - 처음 비유되었을 때는 참신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에 그 참신성을 잃은 것. 예) 인생은 일장춘몽.    심금을 울리다.    십자가를 지다 ♠ 의인 : 인간이 아닌 대상이나 관념에 인간의 생명력과 속성을 부여하여 표현하는 기법 예>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김동명의 )       멀리 조국의 사직의 /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유치환의 )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이승부의 ) ♠ 제유 : 어떤 사물의 일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표현 방법 예>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 빵→음식 ) ♠ 환유 :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경험을 통해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게 된 것에 사용되는 표현기법. 예> 백의의 천사 → 간호사       관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 관→뿔 )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흰 옷자락 → 우리 민족) ♠ 풍유 : 속담 등 관용 어구를 통해 원관념을 환기시키는 방법 예> 내 코가 석자라서 그를 도와줄 수 없다.    상징(象徵)   ㈀ 개념 : 어떤 구체적 사물이 다른 대상을 표시하거나, 다른 영역의 의미를 암시하거나 환기시켜 주는 것을 뜻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에서 보면, 원관념은 배제되고 보조관념이 독립되어 함축적 의미와 암시적 기능을 갖는다. ㈁ 속성 ♠ 상징의 본질은 의미의 암시성과 다의성이다. ♠ 비유에서는 원관념, 보조관념이 1 : 1의 유추적 관계를 보이지만, 상징에서는 1 : 다(多)의 다의적 관계이다. ♠ 상징은 비유와 달리 두 대상 간의 공통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 상징은 원관념 파악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 상징의 표현은 대개 비물상적(非物象的)인 것이다. ♠ 상징은 어떤 사물이 자체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원관념이 배제된 은유의 형태로 볼 수 있다. ㈂ 종류 ♠ 원형적 상징 : 인간의 잠재 의식 속에 담겨 있는 대상에 대한 원초적인 이미지로서의 상징 예> 물 → 죽음과 이별, 충만한 사랑 상징       달 → 그리움과 소망의 대상 상징       태양 → 희망, 생명, 탄생과 창조 상징       불 → 정열, 욕망의 파괴 상징       바다 → 죽음과 재생, 무궁과 영원 상징       봄 → 희망, 소생, 생명 상징 ♠ 관습적 상징(제도적 상징) : 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쓰여 관례적이고 공공성을 띠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 예> 십자가 → 속죄양 의식 상징       비둘기 → 평화 상징       소나무 → 절개 상징       백합 → 순결 상징 ♠ 개인적 상징(개성적, 창조적, 문학적 상징) : 개인에 의해 독창적으로 만들어져서 참신한 문학적 효과를 발휘하는 상징으로, 의미의 폭이 넓고 암시적이다. 예> 서정주의 에서 '국화' → 시련을 겪은 뒤의 원숙미       김종길의 에서 '산수유 열매' → 아버지의 사랑       김수영의 에서 '풀' →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지속해 온 민중들의 삶의 모습       이육사의 에서 '청포도' → 시인이 바라는 이상적 세계       김춘수의 에서 '꽃' → 의미있는 존재       유치환의 에서 '깃발' → 영원을 사모하고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       김광섭의 에서 '비둘기' → 사랑과 평화(관습적 상징),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점차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창조적 상징)    반어(irony)   ♠ 개념 : 표현된 것과 표현의 의도가 상반된 진술 방식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해답을 내리도록 하는 기법이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나 잘 사용하면 재치와 풍자, 해학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음. ♠ 반어적 표현에는 '말한 것'과 '의미한 것' 사이의 긴장, 대조, 갈등이 담겨 있다. ♠ 예1> 김소월의 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님을 떠나 보내야 하는 극한 슬픔을, 반대로 고이 보내겠다고 눈물도 흘리지 않겠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보내고 싶지 않으며 서러워서 피눈물이 흐른다는 의미의 표현임.  ♠ 예2> 신경림의 에서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강한 몸짓이며, 자신들의 고뇌와 한의 뜨거운 발산으로 이루어지는 농무인 만큼 실제로 신명이 난다는 것은 아님. ♠ 예3> 김소월의 에서 먼 훗일 당신이 찾으시면 /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일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 화자가 떠난 임을 다시 만날 때 "잊었노라"고 말하겠다는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강조한 것임.    역설(paradox)   ♠ 개념 : 겉으로 보면 명백히 모순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듯한 표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속에 어떤 진실과 진리를 담고 있는 진술 방식이다. ♠ 예> 한용운의 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담긴 진실 : 현실적으로 님은 떠났지만, 시적 자아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될 님이라는 것,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임. 예>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서정주의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윤동주의 )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김지하의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의 )    풍자   ♠ 개념 :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감추어 두는 기법으로, 주로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쓰인다.    언어 유희   ♠ 개념 : 다른 의미를 암시하기 위한 말이나, 동음 이의어를 해학적으로 사용하는 것, 즉, 말이나 문자를 소재로 한 말장난을 뜻한다. ♠ 예1> 송 욱의 에서 "치정(痴情) 같은 정치가 상식이 병인 양하여 ~ 현금이 실현하는 현실 앞에서 다달은 낭떠러지" → 음절 도치에 의한 언어 유희로 재미와 함께 긴장감을 준다. ♠ 예2> 황진이의 시조 " 청산리 벽계수야 ~ "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엇더리. " → 동음 이의어에 의한 언어 유희('벽계수'는 푸른 시냇물이란 뜻이자 당시 종실의 한 사람의 이름이고, '명월'은 밝은 달이자 황진이의 기명이다.)    객관적 상관물과 감정 이입   ♠ 객관적 상관물 → 시는 사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때 사용된 구체적인 사물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의 심정이나 정서, 상태를 화자 대신 표현하는 대리물, 화자와 대조적인 상황에서 화자의 정서를 촉발하거나 심화시키는 자극물, 화자가 그 사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시키는 감정이입물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 예1> 유리왕의 에서 "펄펄 나는 저 꾀꼬리 / 암수 서로 정다워라. / 외로워라 이내 몸은 / 뉘와 함께 돌아갈꼬." → 암수가 서로 정답게 날고 있는 '꾀꼬리'는 화자의 외로운 정서를 자극하고 심화시키는 정서적인 자극물이다. ♠ 예2> 이상화의 에서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ㅇ깨춤을 추고 가네." → 어깨춤을 춘다고 표현된 '도랑'은 화자의 춤추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감정이 이입된 대상물이다.        시(5) : 주제•갈래    시의 주제   ♠ 개념 : 시인이 시를 통해서 나타내려 하는 중심 생각이나 사상으로, 작품 속에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상, 정서, 의지 등으로 나타난다. ♠ 주제의 형상화 : 형상화란 내부의 관념 또는 감각을 통해 느끼거나 생각한 것 등을 어떤 수단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흔히 비유, 상징, 이미지 등 암시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 시의 주제와 시대 정신 : 시의 주제는 시인의 사상, 정서, 의지 등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그가 살던 시대의 정신과 사회의 모습을 비춰 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의 갈래   ♠ 형태에 따라 ㉠ 정형시 → 시의 형식이 일정한 규칙적인 리듬(음수율,음보율,장단,음색 등)에 의해 쓰여진 시를 말한다. 시조, 가사, 민요, 창가와 같은 우리의 전통 시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 자유시 → 형식에 있어서 정해진 틀은 없지만, 그 나름의 자연스런 리듬, 즉 내재율을 갖춘 시를 말한다. 자유시는 내재율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따라 정형시에 가까운 자유시가 되기도 하고, 산문시에 가까운 자유시가 되기도 한다. ㉢ 산문시 → 시 전체가 줄글로 짜여진 시를 말한다. 산문시는 문자 그대로 산문으로만 된 시가 아니고, 산문적 언어를 사용하되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내재율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시의 한 특수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 내용에 따라 ㉠ 서정시 → 개인의 정서를 비교적 짧게 압축한 시이다. 넓은 의미의 서정시는 일반적인 시 전체를 말하지만, 주로 개성적인 정서나 정감, 언어의 미적인 표현, 음악적인 요소 등이 그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향가, 속요, 시조, 현대시 등이 이에 속한다. ㉡ 서사시 → 고대에 성행한 양식으로  이야기가 있는 시이다. 분량이 서정시보다 훨씬 길고, 그 속에는 일정한 배경과 여러 인물이 등장하여 복잡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즉 영웅적인 개인의 업적이나 집단의 중대한 행적을 노래한, 비교적 긴 형식의 이야기체 시다. 호머의 ,  밀턴의 ,  , , 등이 속한다. ㉢ 극시 → 연극을 할 수 있는 희곡의 대본을 시적인 대사와 표현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운문으로 쓴 희곡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발생하여 셰익스피어 시대에 성행되었던 양식으로 현대에는 서사시보다 더 보기가 드물다. 괴테의 가 대표적이다.   ♠ 태도에 따라 ㉠ 주지시→ 인간의 감정을 억제 • 조정하고 지성의 표현을 주로 다루어, 기질, 풍자, 아이러니, 역설 등의 지적작용이 크게 활동하며, 현대 문명 비판 의식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 주정시→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 내용으로 하는 개인적 • 주관적 성격의 시로서, 좁은 의미의 서정시는 대개 주정시를 일컫는다. ㉢ 주의시→ 목적이나 의도를 지닌 의지적인 내용을 표현한 시. 그러나 순수한 의지만 가지고는 시가 되기 어렵기 때문에 대개 지성과 감정을 동반한다.   ♠ 목적에 따라 ㉠ 순수시→ 개인의 순수한 정서를 형상화한 시.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시 ㉡ 목적시→ 선전 • 교훈 등 어떤 정치적 • 사회적 목적을 이루려는 입장에서 쓴 시     시(6) : 시적 화자의 태도와 정서    시적 화자   ♠ 시적 화자란? → 시에는 시인의 정서나 관념,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화자다. 화자가 반드시 시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시를 통하여 표현하고 싶은 정서나 관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나오는 셈이다. 결국 화자란 시 속에서 시인을 대리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시인의 허구적 대리인)이다. ♠ 시적 화자의 양상 ① 화자의 위치와 관련하여 * 이면적 화자 → 화자를 지칭하는 시어가 작품 속에 드러나지 않는 상태의 화자 * 표면적 화자 → 작품에서 '나' 또는 '우리'라는 시어를 통하여 자신을 노출시키는 화자 ② 화자와 관계를 맺는 대상 * 시적 대상 → 시인이 경험한 것 중 시인의 미의식에 의해 선택된 대상이다. 시인은 개인적 고뇌, 경이로운 자연 현상, 시대와 역사의 아픔, 희로애락의 인간사 등 많은 것을 경험한다. 이 중에서 시인에 의해 선택되어 시라는 작품에 녹아든 것을 시적 대상이라고 한다. * 청자 → 화자와 대응되는 개념으로 화자의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대화체로 된 시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나타난다. 즉,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대상을 설정하여 '청자'가 시의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청자가 없는 경우는 주로 화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시적 화자의 태도   ♠ 시적 화자의 태도란? → 시적 화자가 시적 제재 • 독자 • 사회를 향해 내는 개성적 목소리 및 대응방식을 말한다. 주로 시적 화자의 태도는 '어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주된 유형 ㉠ 예찬적 태도 → 사람이나 대상이 가진 좋은 점을 찾아서 그것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태도 예>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 그런 자세로 / 평생을 산다. //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 소란한 마음길 위에 / 스스로 펴는 / 그 폭넓은 그늘……. (이형기, ) ㉡ 비판적 태도 → 사회나 대상의 잘못된 점을 따지는 태도 예>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 시멘트로 밑동을 싸바르고 / 주사까지 놓으면서 /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김광규, ㉢ 구도적 태도 → 진리나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태도 예> 암벽을 더듬는다. /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 결코 쉬지 않는   (오세영, ) ㉣ 긍정적, 낙관적 태도 → 상황이나 대상이 옳다고 인정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는 태도 또는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앞으로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예>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 잊어 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조지훈, ) ㉤ 달관적 태도 → 세상의 근심 걱정, 사소한 사물이나 일 등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에서 벗어나 초월한 자세를 보이는 태도 예>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신경림, ) ㉥ 반성과 성찰의 태도 → 자기의 잘못을 되짚고 뉘우치거나, 자신이나 대상을 찬찬히 살펴보는 태도 예>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 ㉦ 의지적 태도 → 절망적이거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려는 굳센 마음을 먹는 태도 예>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도종환, ) ㉧ 수용적 태도 → 어떤 상황을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예>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백석, ) ㉨ 관조적 태도 → 좀 떨어진 위치에서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그 의미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비추어보는 태도 예> 크낙산 골짜기가 /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 그 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 미처 몰랐었다.   (김광규, ) ㉩ 도피적 태도 →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피하고 도망가려는 태도 예>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백석, 언제나 숭고할 수 있는 푸른 산이 / 그 푸른 산이 오늘은 무척 부러워 (신석정, ) ㉫ 조화와 합일의 추구 →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울리며 하나의 모습을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태도 예>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박두진, ) ㉬ 체념적 태도 → 할 수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 예> 일이 끝나 저물어 /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 쭈그려 앉아 단배나 피우고 / 나는 돌아갈 뿐이다. (정희성, ) ㉭ 회의적 태도 → 믿고 따르려는 태도가 아니라 의심하면서 믿지 않는 태도 예>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김영랑, ) * 그 외 : 여성적, 남성적, 철학적, 명상적, 풍자적, 염세적, 고백적 태도 등.    시적 화자의 정서   ♠ '정서'란 시인(화자)이 세계에 부딪쳐 느끼게 되는 온갖 감정과 생각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에서의 정서라고 하면, 시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느낌, 생각, 사상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 주된 유형 ㉠ 밝음과 긍정의 정서 → 희망, 환희, 소망, 그리움, 동경, 여유, 풍류, 달관(초탈) 등. ㉡ 어둠과 부정의 정서 → 고통, 죽음, 절망, 한, 애상, 허무, 고독(외로움), 우수, 방황, 체념, 분노, 개탄 등.    시의 분위기   ♠ '분위기'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가진 독특한 느낌으로, 문학에서는 개별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는 독특한 색조나 느낌을 가리킨다. 시적 정조(mood)라고도 함. ♠ 주된 유형 ① 숭고한 분위기 : 보통 사람들보다 정신적 경지가 높아서 존경심이 느껴지는 분위기 예> 윤동주의 ② 애상적 분위기 :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하는 분위기 예> 백석의 ③ 정적인 분위기 : 조용하고 고요하며 움직이지 않는 느낌을 주는 분위기 예> 허영자의 ④ 경건한 분위기 :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하는 느낌이 나는 분위기 예> 김현승의 ⑤ 목가적 분위기 : 전원에서 한가롭게 부르는 노래의 느낌이 나는 분위기 예>정훈의 ⑥ 환상적 분위기 :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고 헛된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분위기 예> 김춘수의       시(7) : 시상의 전개방식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   ♠ 자연적인 시간의 변하를 축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시대순이나 역사의 흐름(과거-현재-미래), 계절의 순서나 흐름(봄-여름-가을-겨울), 하루 중의 시간의 흐름 등이 기준이 되어 시의 내용이 전개되는 방식을 말한다.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방법이며 자연스런 흐름을 느낄 수 있으며, 추보식 시상 전개라고도 한다. ♠ 구체적인 예 ㉠ 이육사의 → '과거(까마득한 날)-현재(지금)-미래(천고의 뒤)'로 시상을 전개하면서 의지적이고 남성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 김광균의 → 해질 무렵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면서, 고독과 우수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 박두진의 → 저녁 무렵의 산을 배경으로 하여 밤까지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삶의 외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 정철의 → 계절의 변화(춘하추동)을 기준으로, 계절마다의 특성을 바탕으로 님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가사 작품이다.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   ♠ 화자가 위치한 장소나 화자가 바라보는 장소의 이동을 축으로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는 시적 공간 자체가 변하는 경우와 화자의 시선이 이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대체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보다는 공간이 이동되는 것에 더 초점이 놓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구체적인 예 ㉠ 신경림의 → 텅빈 운동장, 철없는 쪼무래기들만 따라나서는 장거리, 채산성이 없는 농사 등에 따라, 농민의 소외감과 울분과 좌절감을 농무의 신명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송순의 → 면앙정 주변의 자연 경관을 노래하면서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가 이루어진다. ㉢ 조지훈의 → 여성의 한복을 묘사한 시로, '저고리→치마→버선(운혜, 당혜)'의 순서로, 즉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 순서에 의한 시선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선경후정(先景後情)   ♠ 작품의 전반부에는 자연 경관이나 주변의 분위기를 서경적으로 제시하고, 후반부에서는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내적 상태, 즉 정서나 생각을 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중국 한시에서 주로 쓰인 방식이기도 하다. ♠ 구체적인 예 ㉠ 조지훈의 → 퇴락한 궁궐의 모습을 서경으로 묘사한 후(선경), 작자의 심정을 후반에서 봉황새에게 이입하여 표현하고 있다.(후정) ㉡ 두보의 → 여름날 강촌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경을 제시한 후(선경), 안분지족할 줄 아는 화자의 삶의 자세가 이어진다.(후정)    대조(대립)적 심상의 제시에 따른 시상 전개   ♠ 작품의 중심이 되는 대표적 소재(제재)가 지니는 심상이나 의미를 대조적으로 설정하여, 대조적인 둘의 관계를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함으로써 강조의 효과는 물론이고,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더욱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 구체적인 예 ㉠ 박남수의 → 포수(인간의 세계, 공격성, 비생명성, 탐욕)와 새(자연의 세계, 순수성, 생명성, 사랑, 순수)의 대립적 관계 ㉡ 신동엽의 → 껍데기(허위, 가식, 불의, 외세, 무력 등)와 알맹이(순수, 진실, 의로움 등)의 대립적 관계 ㉢ 김수영의 → 풀(약자, 민중)과 바람(강자, 권력자)의 대립적 관계 ㉣ 김현승의 → 봄(지상, 육체적 성숙, 외면적, 일시적)과 가을(천상, 정신적 성숙, 내면적, 항구적)의 대립적 관계 ㉤ 김기림의 → 흰나비(백색, 가냘픔, 낭만적, 순진무구)와 바다(청색, 거대함, 현실적, 모험과 시련의 공간)의 대립적 관계 ㉥ 오규원의 → 완전히 벗어 버린 '겨울 숲'이라는 자연물과 벗지 못한 '화자의 삶'이라는 인간의 대립적 관계 ㉦ 김종길의 → 과거의 성탄제(눈, 어린이, 아픔, 산수유 열매)와 현재의 성탄제(눈, 어른, 아버지의 사랑이 없음)의 대조 ㉧ 두보의 → 푸른 강물과 하얀 물새, 푸른 산과 붉은 꽃의 색채의 대조가 선명히 나타남.    대칭적 구조에 의한 시상 전개   ♠ 구체적인 예  김영랑의 → '기다림-설움-절망-설움-기다림'의 대칭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기승전결에 의한 시상 전개   ♠ 기승전결은 원래 한시를 잘 짓기 위해 고안된 틀이다. 어떤 계기 있어서 시상을 일으키고, 그걸 발전시켰다가, 한번 뒤집고, 이어 결말을 짓는 순서로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의미상 네 개의 연으로 구분되는 시는 대개 기승전결의 시상 전개 구조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 기(시상 제기) - 승(시상 심화) - 전(시상 전환) - 결(중심 생각 제시) ♠ 구체적인 예 이육사의 → 1연은 수평적 극한의 상황, 2연은 수직적 극한의 상황, 3연은 극한적 한계 상황, 4연은 절망 속의 역설적 초극 순으로 노래함.    수미상응에 의한 시상 전개   ♠ 시의 처음과 끝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시구를 배치시켜 형태와 시상의 균형미와 안정감을 얻는 효과를 거두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현대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시상 전개 방식 중의 하나이다. ♠ 구체적인 예 ㉠ 한용운의 → 첫 연과 마지막 연이 동일한 시행( 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 )으로 배치되어, 완벽한 수미상응이 나타나 있음. ㉡ 이상화의 → 첫 연에서 질문(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고 마지막 연에서 대답(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짐.    유사한 구조의 반복에 의한 시상 전개   ♠ 같거나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하여 시를 써 나가는 방법이다. 다른 말로 통사 구조의 반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구체적인 예 윤동주의 → 비슷한 의미 구조를 지니는 구절을 거듭 제시함으로써 화자의 소망이 간절함을 강조하고 있음.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연상에 의한 시상 전개   ♠ 하나의 시어가 주는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와 관련된 다른 관념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 구체적인 예 전봉건의 → '피아노 - 펄펄 뛰는 신선한 물고기 - 바다 - 시퍼런 파도'의 순서로, 피아노 소리에서 연상되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통해 대상의 인상을 노래함.    점층적 강조에 의한 시상 전개   ♠ 시상이 전개될수록 화자의 정서, 의지, 시적 상황이 점점 정도가 높아지도록 전개해 가는 방식이다. ♠ 구체적인 예 정일근의 → 열이가 반짝반짝 닦아놓은 '유리창 한 장'을 '가을 바다 한 장', '맑은 세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뒤로 갈수록 깨끗하게 닦아놓은 유리창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www.woorimal.net/ [출처] [공유] 시의 이론정리|작성자 옥토끼  
70    詩를 쓰기위한 열가지 방법 / 테즈 휴즈 댓글:  조회:1289  추천:0  2019-02-02
  출처 김용식 문학서재 | 김용식 원문 http://blog.naver.com/blackhole68/20198663341 詩를 쓰기위한 열가지 방법   테즈 휴즈      ★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출처] [공유] 詩를 쓰기위한 열가지 방법 / 테즈 휴즈|작성자 옥토끼  
69    [스크랩] 이미지에 말을 걸다 / 황정산 댓글:  조회:1440  추천:0  2019-02-01
송시월 시 접신 외 4편을 중심으로 이미지에 말을 걸다   황정산(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많은 비약을 무릅쓰고 이야기하자면 현대시는 언어의 자각으로부터 시작한다. 과거의 언어는 투명한 매체였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고 하늘의 이치를 형상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바로 말이었다. 그때는 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또는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하고 낭송하기 위해 비유나 운율 등의 시법을 만든 것이다. 현대시는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한 뒤집기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는 언어가 언어이기 때문에 진실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시가 거쳐 온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극단에 무의미시가 존재한다. 무의미시는 언어의 언어성을 배제하고 언어가 가진 물질성만 남겨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극단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송시월의 시는 현대시가 이루어온 이러한 방향성의 또 한 극단에 서있다. 그의 시는 어떠한 서술도 부정한다. 서술이라는 것은 말이 인간이 세상을 설명하는 한 방법일 뿐이고 말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송시월 시인은 그 환상 대신 거기에 이미지는 놓아둔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도 형성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미지는 그냥 이미지로만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이렇게 이미지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지에게 말을 걸 때 이 작품은 해석되고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송시월의 시는 이미지로 된 놀이터라 할 수 있다. 한 작품의 예를 들어 보자.   여자의 잠을 기습 공격하는 말들 여자를 끌고 시베리아의 최북단 툰두라의 벌판을 달린다 투바크 카스쪼르킨과 점니네 카스쪼르킨이 접신예식을 마치고 여자의 껍질을 벗긴다 대지와 강물의 신에게 피를 뿌리고 피를 마신다   순록이 된 여자가 무수한 순록을 낳는다   순한 눈망울 굴리며 바다를 건너려다 물에 빠진 순록들   탕탕탕...... 연평도가 흔들린다 망원경속 나무들이 흔들린다 NLL를 엎어치는 파도   집단 사냥꾼들 쓰러진 순록을 바다의 냉동고에 넣는다 진피가 벗겨지고 알집을 긁어낸 채 부력으로 떠오른 ㅅ ㅜ ㄴ ㄹ ㅗㄱ 이란 자모음들 차마고도를 오른다   길을 구르던 천년 묵은 염주알에 싹이 튼다 - 전문   이 시는 쉽게 연결되지 않은 이미지들의 나열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 이미지들이 시인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연결된 것도 아니다. 또한 그 이미지들 사이의 논리적 연관이나 서사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애써 그것을 만들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만들고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꼴라쥬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렇게 이미지의 꼴라쥬를 보여주자 순록은 "ㅅ ㅜ ㄴ ㄹ ㅗㄱ 이란 자모음들"로 분리가 된다. 말이 의미를 상실하고 완전한 물질성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리된 말의 자료들이 “차마고도를 오”르는 고행을 수행할 때 “천년 묵은 염주알에 싹이” 트는 기적이 만들어 진다. 차마고도를 오른다는 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것이다. 말의 의미를 해체하는 것으로 말이 보여줄 수 없는 진실을 찾아가는 힘든 고행길을 상징한다. 그것은 시를 쓰는 작업이고 부단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럴 때 “천년 묵은 염주알” 즉 이미 사문화된 종교적 설법이나 사상 등이 비로소 생명력을 얻어 가치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시는 이미지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던져진 이미지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시적 이미지에 부단히 말을 걸어야 한다. 다음 인용된 시는 이 이미지에 말 걸기를 형상화 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접시에 담긴 피라미드형원형아파트 무덤 한 알 한 알을 따서 깨물어먹는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먹고 아직 보랏빛 신맛이 도는 조카들을 먹는다 고택이 된 고조부 증조부 할아버지를 먹고 망우리 공동묘지 몇 알도 먹는다 씨를 뱉는다 잇사이에 검푸른 이끼가 낀다   갓을 쓰신 아버지가 걸어 나와 기웃거리다가 다른 씨방으로 들어가신다 또 하나의 씨에서 나오신 백발의 어머니 두리번두리번 문을 잊은 듯 공동묘지로 들어가신다 내가 잠시 흔들린다 - 부분   이 시는 포도송이와 한 집안의 가계를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가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도를 한 알 한 알 먹는 감각을 다시 입안에서 느껴보아야 한다. 그 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포도송이의 생생함을 언어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다시 되살리는 길이다. 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포도알을 한 알 한 알 되새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똑 같은 맛과 비슷한 모양을 갖춘 포도알에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여 한 가계의 모습을 투사한다. 포도알이 아버지도 되고 조부도 되고 어린 조카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말일 뿐이고 포도송이를 이루는 하나의 포도알일 뿐이다. 그런데 그 포도알이 포도알을 넘어, 다시 말해 호칭이 붙여진 조카니 아버지를 넘어 한 알 한 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입안에서 씹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말이기도 하다. 주어진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어진 이미지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이용하여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시는 우리에게 비로소 말을 건넨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에게 꺼낼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포도송이 같은 것이다. 한 알 한 알 따서 입안에서 씹지만 그 모두는 가계의 계보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는 한 무더기를 형성하고 있다가 우리 입안에서 몇 개의 신맛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것은 바로 말이다. 말을 걸어서 말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포도송이다.   뒷산 딱따구리가 드르르르 지나간다 내 배꼽을 중심으로 쩍― 갈라지는 오른쪽과 왼쪽 끊긴 탯줄에서 붉은 강물이 쏟아진다 나는 오른쪽과 왼쪽 손목을 꺾어 강물에 던진다 연어 두 마리 강물을 거슬러 오른다   흔들리다 흔들리다 충돌하는 두 대륙사이, 깊이를 잴 수 없는 눈물의 호수 밤마다 별처럼 반짝이는 울음을 낳는 好哭場 웅얼웅얼 별천지다 근육질의 별을 먹는 연어 온몸 팽팽하게 불을 켠다   불빛지느러미로 물줄기를 당긴다 쭈-욱 끌려오는 알래스카와 베링해협 - 부분   딱다구리와 연어와 강물은 이 시 안에서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다. 연어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배경을 이루는 산자락에서 “딱따구리가 드르르르 지나”가고 있어도 이 들이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다. 사물들은 사물들 나름의 물질성으로 다만 존재할 뿐이다. 첫 연은 바로 이런 사물들의 물질성을 일부러 갈라놓는다. 전통적인 서정시에서라면 이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서 통일성을 형성하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안온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시의 사물들은 배꼽을 중심으로 갈라지듯이 분열한다. 그리고 다음 연에서는 더 크게 두 대륙 사이로 갈라진다. 거기에 알라스카도 만들어지고 베링해협도 만들어진다. 이렇게 거대한 각자 하나의 사물로 형성된 이미지의 물질성은 그것이 그 자체로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의미를 형성하지도 않는다. 이미 그런 의미와 그 의미를 전달하는 말들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거대한 이미지의 압도적인 크기만이 남는다. 그 이미지의 꼴라쥬에 우리는 말은 건다. 이미지야 얼마나 더 가야 너는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느냐고, 이미지는 대답한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아니 어쩌면 베링 해협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알래스카와 베링 해협을 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가당치 않은 손놀림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를 쓰는 일은 의미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존재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일은 더욱 아니다. 다만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에 말 거는 우리의 존재를 살아있게 하는 일이다. 바로 이 점은 송시월의 시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황정산 :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시작,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시 발표,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월간 『우리詩』주간. 비평집으로 가 있음 [출처] [스크랩] 이미지에 말을 걸다 ( 송시월 시 접신 외 4편을 중심으로, 시문학 7월호)|작성자 옥토끼  
68    [공유]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댓글:  조회:1239  추천:0  2019-02-01
전용뷰어 보기  출처 은유의 바다 | 아로마 원문 http://blog.naver.com/kjsrucia/80024315123 1.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시는 예쁜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빛나는 보석이다. 고로 감춤의 미학이다.  그러나 시는 감춤만을 본질의 특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때론 우회나 굴절 그런 다음 스팩트럼의 추상에서 즐거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시가 지각(知覺)에 의해서만 기쁨과 즐거움을 배태하기 때문이다.  그럼 시는 지각 이외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그렇다. 그러나 다른 장르는 예외다    또한 예술과 관련, 즐거움을 주는 것이 모두 다 아름다우며 모두 다 가치 있는 것이냐 하는 명제의 질문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만 답변할 수는 없다.  가령, 미술에 있어 ‘로센버그’의 를 예로 들어보면 페인트칠한 침대를 벽에 걸어놓음으로써 침대는 예술작품으로 인정되는데 이때 폭신폭신한 느낌을 주는 예쁜 색깔의 침대가 우리에게 대단한 즐거움을 주는 사물임은 분명하게 인지되지만 실용성과 관련 있는 그 침대가 꼭 아름다워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결국 시는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예술에서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순으로 보면 예술의 맨 앞자리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미’는 본디 유용성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미’란 바라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천착해 보면 진정한 즐거움이란 현상적 감각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시각이나 청각에 의존한 감각적 즐거움은 순간적이며 단순하지만 지각에 의존한 즐거움은 직선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 이해되지 않는 한 쾌미음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어려운 수학문제를 한참 끙끙거리며 풀어나가다가 갑자기 해답이 전광석화처럼 눈에 들어올 때의 그 기쁨은 예상외로 크다. 그것은 노력 뒤에 오는 배가된 희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기쁨을 이라고 하였는데 감춤의 껍질을 벗긴 뒤에 나타나기에 피부반응보다 더 큰 물결 같은 감동이 되는 것이다.  시는 바로 이 이라는 장르이기에 다른 예술보다 한 단계 위에 자리 매김 되어진다.    예술은 신의 예지에 의해 창조된 질서정연한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는 모방이다. 따라서 예술에는 자연의 질서가 반영된다. 또 예술은 자연에서 표현수단과 방법을 빌려온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술을 신의 창조와 비교한다. 신은 자연의 내적 원리에 따라 창조를 하셨지만 예술가는 자연의 외적원리에 따라 모방할 뿐이다. 예술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단지 신이 창조한 자연 속에서 형상을 인식하여 그걸 모방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신의 창조보다 저급하다. 하지만 예술은 인식활동 및 도덕적 실천 활동과 함께 인간정신 활동의 하나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시는 이런 토양 위에서 삶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행복을 가장 작은 그릇에 담아내기 위하여 비유를 통한 압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노력의 산물인 예술이 '시’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분절성, 상상의 한계성, 추상성이 전제되어 있는 정형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 진정한 시문학이 탄생할 수 없다고 제창하며 추상적 기호로서의 언어를 극복하고 언어의 인습을 거부해야 한다는 낯설게 하기(포스트 모더니즘 포함)의 기법을 주장하면서 실천해야 한다는 시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데 있다’라는 이 말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어떤 형태로든 시인들은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임이 분명하기에 기존의 질서와 전통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춤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의 본질을 몰각한 채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긴장감이 흘러 넘쳐야만 좋은 시가 되는 줄 알고 기상(.奇想)과 절연(絶緣)만을 일삼는 시업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란, 자아와 세계의 만남으로 인한 미적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구원으로 나가야함을 직시해야 하는데, 그것은 웅변과 같은 호소나 만화 같은 표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찾아지는 감춤만이 진정한 시의 미덕이며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를 은유적으로 진술하면 여인의 한복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시=한복)  목부터 발끝까지 몸을 완전히 가리고 덮은 옷, 성적 매력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지지 않는 여성이 제거된 상태 그러니까 머리부터 발 밑까지 내려가면서 점점 넓어지고 퍼지는 전형적인 산의 모습인 이등변 삼각형 속에 인간이 묻힌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여인에게서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가슴라인, 허리라인, 다리라인이 완벽하게 사라진 미(美)의 실종은 말할 것도 없고 통상적으로 표현하는 날렵한 몸매인지 밥상을 다 석권한 몸매인지조차 가늠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감추고 여미는 한복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시선을 단숨에 잡아당기는 하반신과 그에 따르는 각선미를 도외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상반신의 가슴마저 치마끈으로 꽁꽁 묶어 천인단애한 상태를 만들어 놓았으니 상대적 박탈감 운운 이전에 여성은 이미 에로스의 대상에서 제외된 탈 여성의 형이상학적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한복은 앞 코가 뾰족한 버선과 꽃무늬 고무신으로 발의 본 모양을 대치시킴으로써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미를 불러 일으켰으며 반투명의 질감으로 전신의 모습을 우련의 상태로 만들어 매혹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를 해 두었던 것이다. 즉 모시 저고리 속으로 가는 어깨 끈을 보이게 함으로써 속화되기 쉬운 욕정을 천천히 눈빛으로 더듬어가게 하는 미적 배려라든지, 또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하게 함으로써 미감(美感)의 살색을 극대화 시켜 노골적이며 천박해지기 쉬운 급진적 성욕을 반감시킨 다음, 여인의 섬세한 감정을 숨이 막힐 듯 흘러내리는 멋으로 승화시킨 혜안은 한복만이 가진 최대의 상징적 장점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단선적 즐거움을 배제시키고 저고리와 버선의 합일치를 통한 곡선과 몸이 움직일 적마다 사각거리는 음향을 배합한 후, 보는 이로 하여금 스팩트럼의 즐거움을 향유케 하는 고차원적 사랑의 과정을 대변하는 한복, 바로 이 한복이 시(詩)이며, 이 시가 바로 한복인 것이다. 한복은 틀림없이 시(詩)의 변형된 현시적 사물인 것이다.  한복은 감춤의 옷이지 가림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숨김의 옷이지 막음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밝힘의 옷이지 어둠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분명 뜨거운 감성을 용해시키기 위해 걸친 것이지 음흉한 시선을 거부하기 위해 감싼 것이 아니다. 덧붙이면 신비스러운 몸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기 위해 한복을 도구로 삼았다는 뜻이다.  한복이, 몸의 아름다움을 증대시키기 위해 전신을 감추고 숨겼다면, 시는, 느낌의 절묘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묘한 사상을 숨긴 것이다.  한복이 은근함을 강조하는 굴절의 시선을 선호하며 상상력을 발동하여 무한한 황홀감에 접근토록 하는 감춤의 의상이라면, 시는 비유와 압축으로 깊은 맛을 숨긴 감춤의 미학인 것이다.    따라서 한복이 노출을 거부하듯 시도 직설적 표현을 거부해야 한다. 한복이 은근함을 좋아하듯 시도 은근한 비유의 표현을 좋아해야 한다.  한복이 보는 이에 의하여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는 효과를 감춤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게했다면, 시도 읽는 이로 하여금 곰씹는 맛의 효과를 극도로 절제된 단어와 문장 속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감춰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 부연하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는 의 그 미소의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이 질문은 미술에서도 감춤의 미학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춤의 미학은 이렇게 예술 전반에 펼쳐져 있는데 시에서 이것을 소홀히 하고 있어 화룡(畵龍)에 점정(點睛)이 빠진 것이나 진 배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모나리자의 비밀이요? 그건 눈 꼬리와 입가에 있습니다. 살짝 그림자로 덮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감춤의 미학의 진수를 보았을 것입니다. 즐겁지 않습니까?  을 위한 한복의 감춤, 시도 그래야 할 것 아닙니까  역시 시는 예쁜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빛나는 보석이며 감춤의 미학입니다.    2. 시(詩)는 꽃씨와 불씨와 꿈을 지닌 여백(餘白)의 미학(美學)이다    시는 작지만 깨닫고 나면 커지고 미약하지만 터득하고 나면 강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시의 특수성이기에 그 원리는 꽃씨에도 적용되고 불씨에도 적용되고 꿈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시는 별스럽게 작다. 사람으로 말하면 그저 꿈만 지닌 어린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서사과정을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고 행간에 의미를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행간과 끝 구절 다음에는 뒷맛이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분명 시는 긴 감동의 여운을 주는 여백의 미학이다.  시의 본질은 정서(情緖)와 사상(思想)의 결합이다. 이때 정서와 사상은 교직된 직물처럼 서로 녹아 있어야 한다.    사상은 지각(知覺) 지식(知識) 신념(信念) 의견(意見)의 종합물이고 정서는 감화적 요소로서 유기체의 전신적 감각이다. 그러나 시의 효용은 궁극적으로 감동과 쾌락에 있기 때문에 사상이 정서를 앞설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시의 정서가 한없이 약하다는 점이다. 어떤 형태의 정서라 할지라도 시라는 근원적 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전무하리 만큼 미미한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반응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쁨, 두려움, 슬픔, 근심, 노여움 등을 유발하는 매체는 시각과 청각이 주를 이룬다. 이때 시각의 예술이 미술이고 청각의 예술이 음악이다. 연극과 영화는 시청각을 다 합친 것이다.    미술은 원초적 반응을 유발시키고 음악은 몸을 흔들어 춤을 추게 한다. 연극과 영화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러나 시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도 눈물을 흘리게 하지도 못한다. 시는 율동을 하게 할 신명의 청각적 요소도 없고 미추를 구별케 할 시각적 요소도 없다.  이처럼 시는 다른 장르의 예술에 비하면 초라하다 할 만큼 내 세울 것이 없다. 동물로 말하면 날카로운 이빨도,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도, 빨리 달리 수 있는 다리도 없는 하등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하등동물이 인간인 것처럼 미미한 정서를 수반하는 시 또한 굴절의 예각 같은 지각의 촉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차원적인 시청각과는 다른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환언하건데 시는 사물의 순간적 파악을 속성으로 하는 상상력의 산물이기에 작고 가볍다.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암기할 수 있다. 일단 시를 외워 몸의 살붙이가 되도록 만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수없이 반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경험이나 비전이 집중되는 결정의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시의 특성상 인간을 취하게 하고 인간을 변모하게 하는데 있어 더 이상 좋은 처방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시는 예술 중에서도 명약임이 분명하다  시는 바로 이런 강점을 지닌 탁월한 정서를 지닌 문학인 것이다. 강한 충격 한 방으로 인생을 전환시키는 음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도 상당히 효과 있는 장르이긴 하지만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아무리 거대한 철옹성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시를 외워 암송하기만 하면 그 시의 정서는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 드디어 한 인간을 참 사람으로 바뀌어 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시는 참으로 작지만 매력적인 장르임이 분명한 것이다.    전쟁이 한참 치열하던 어는 날,  석양 녘 적탄의 총을 맞은 국군 병사 하나가 피가 흐르는 다리를 끌며 민가에 찾아든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생사기로에 처해 있는 위급한 상황이다.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이러다간 죽고 말겠구나’ 절망이 엄습할 때 주인집 딸로 여겨지는 젊은 여자가 툇간 옆 은폐된 지하곳간으로 병사를 숨겨준다. 병사는 그만 안도감과 함께 의식을 잃는다.  한참 뒤 의식을 차린 병사는 아름다운 처자를 바라보며 고마움의 표시로 씩 웃음을 짓는다. 고맙다는 말은 목 속에 잠겨 혀 밑에 숨고 만다. 젊은 처자는 전쟁의 비극 속에 희생되고 있는 꽃다운 젊은이의 부상이 안쓰러워 울먹 울먹거린다. 젊은이도 눈물이 맺힌다.  “걸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 - - - -- - -”  “저어 - - - - - ”  “저도 최대한 지혈을 하고 치료를 했습니다만 특별히 준비된 약이 없어 죄송하군요”  젊은 처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죄인 듯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뜻이 아니고- - - - - ”  “ - - - - - - - ”  병사는 젊은 처자의 방울진 눈동자를 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잠시 두려움이 없어진다    부상당한 군인병사와 산골 젊은 처자와의 만남, 그것도 전쟁터에서 피아간의 교전 중에 일어난 불행이 주선한 가교, 별난 조우, 숨막히는 치료,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 목숨을 건지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궁금증, 절박한 상황의 눈빛과 눈빛, 그리고 짧은 대화, 바로 여기에 슬픔과 연민의 정이 교차하면서 희망이라는 거대한 생의 좌표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한편의 시이며 아름다운 정서의 채색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상황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어 보겠다고 꾸역꾸역 자꾸 말을 건넨다면 이것이 어찌 전쟁터의 긴박한 상황의 분위기라 할 수 있으며 처음 만난 남녀의 떨림과 애처로움이 섞인 모습이라 하겠는가. 무언의 눈빛에 담겨진 수줍은 슬픔, 이미 서로의 마음이 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시는 이처럼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여인의 작은 손길의 정서, 순박한 정서, 애절한 정서, 말을 다 삼켜버린 아픔의 정서- - - 그런 다음 처자의 가슴에 짙게 배어있는 고혹적인 정서, 그리고 한 움큼의 피와 출렁이는 긴 머리, 숨죽인 산 그림자, 이 모든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자연, 그 침묵의 여백    우리는 이들의 다음 대화를 더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뒤의 상황을 작가가 책임을 지면 소설이 되고 눈에 보이게 만들면 연극이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시는 짧은 대화로 형식적 소임을 다한 것이다. 비록 주인공이 치료 불능으로 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고 살아난다 해도 불구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는 비극적 결말보다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며 유추할 것이다. 그 유추가 여백이다    시는 꽃씨이기 때문에 착지하기만 하면 꽃을 피울 것이고  시는 불씨이기 때문에 눈빛과 만나기만 하면 생의 불을 지필 것이다  시는 꿈이기 때문에 한 발자국 내딛기만 하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상상의 날개 속에서 형용키 어려운 감격을 느낀다면---  생각만 해도 시의 여백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시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작은 것이  시(詩)는 꽃씨와 불씨와 꿈을 지닌 여백(餘白)의 미학(美學)이다.        작자미상   [출처] [공유]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작성자 옥토끼  
67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 유형의 시 쓰기(문광영문창5) 댓글:  조회:3017  추천:0  2019-02-01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 유형의 시 쓰기(문광영문창5)    "공부하는 인천문협"       5차 강의는 묘사시(descriptive poetry), 이미지(image)시, 사물시((physical poetry)의 미학적 형상화입니다.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는 서로 깊게 관련되기 때문에 같이 논의를 하려고 합니다.     문학 창작에서 묘사는 서사와 함께 대단히 중요합니다. 화가가 색과 선으로 형체를 드러내야 하듯이, 문학 작가는 묘사로서 외면풍경의 대상과 그리고 내면 풍경의느낌,생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인천문협 작가 가운데 묘사력이 미흡한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문학은 진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묘사의 '보여주기'와 진술의 '드러내기'가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대개의 시, 수필, 소설들의 경우 첫 모티브에서 묘사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바람직한 서두 쓰기, 곧 good begining은 작품의 성공여부를 판가름짓게 합니다. 나아가 좋은 작품은 묘사력에서 금방 드러납니다. 정서 표현에서 훌륭한 묘사는 글의 구체성과 생동감, 환기력이 높혀 주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의 미학적 형상화       1. 감각적(비유적) 묘사란?       ○ 어떤 대상을 놓고 모양, 빛깔, 감촉, 소리, 냄새 등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내는 방법을 묘사라고 한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묘사의 방법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그 대상에 대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묘사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은행 잎이 노랗다. 은행잎이 金貨로 보인다     ○ 묘사는 대상을 그려 보인다 해도 그 목적이 그 대상에 관한 정보나 지식의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에서 받은 인상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있다는 점에서 설명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은행 잎이 노랗다.”라고 할 때, 은행잎이 ‘노랗다’는 기술은 일반적으로 은행잎이 지닌 형태의 한 부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은행잎이 金貨로 보인다.” 라고 할 때 은행잎의 구체적 상황이 주관적 해석을 통해 관찰자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은행잎 = 금화’라는 등식에 은행잎은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변하고 은행잎이 주는 인상이 금화로 의미론적 이동을 함으로써 특이한 감각을 낳게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어떤 대상을 묘사한다고 할 때, 글쓴이의 눈에 비친 모든 대상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세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글쓴이는 그 대상으로부터 가장 강렬하게 느낌을 받은 인상을 그릴 수도 있고,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중심을 이루는 인상을 ‘支配的 印象’(dominant impression)이라 한다. 말하자면 사물의 특징이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내는 것은 아니므로 지배적인 인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을 선택하여 묘사해야 한다.   ○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요소가 대상의 지배적인 인상과 관계되는 것인지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대상을 보는 입장, 곧 관찰자의 시점․위치․태도․개성․분위기 등이 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만, 치밀한 관찰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2) 묘사하는 글을 잘 쓰려면     ○ 묘사를 잘 해야 글을 잘 쓸 수가 있다. 마치 화가가 뎃쌍을 수없이 연습해 오듯 글쓰기에서 묘사는 문장 표현의 기초가 된다.     (1) 지배적 인상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구성하라 (2) 감각적 인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라. (3) 자신의 느낌을 창의적으로 명료하게 나타내라.     ○ 예를 들어 “그날 밤은 매우 조용했다.”라고 표현했을 경우, 과연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나타냈다고 볼 수 있는가. 얼마나 조용했다는 걸까? 조용한 밤의 정적을 명백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조용한 밤에 들을 수 있었거나 없었던 소리를 쓸 필요가 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그의 작품 ‘햄릿’의 서두에서 이 문제에 부닥쳤는데, 그는“쥐가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이라고 씀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너무나 조용하기에 야행성 동물인 아주 작은 쥐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확한 묘사로써 셰익스피어는 밤의 고요함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 자신의 느낌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응의 결과가 아닌 반응의 원인에 대해 써야 한다.“나는 두려움을 느꼈다.”라고 쓰는 대신 자신의 두려움을 명백히 해서 독자로 하여금 역시 같은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 가졌던 느낌을 독자들도 똑같이 가질 수 있게 할 때, 자신의 느낌을 성공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이외수의 고정 관념의 틀 깨기     나는 소설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을 강화시킬까를 모색해 보았다. 밥이 떠올랐다. 일찍이 밥만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다. 나는 한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았다. 얼음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나는 얼음밥으로 끼니를 연명하면서 묘사적 문체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해 있었다. 더럽게 눈물겨운 겨울이었다. 얼음밥은 도저히 수저로는 먹을 수가 없었다. 망치와 못을 이용해서 깨뜨린 다음 으적으적 씹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내장까지도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한 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으면 1주일은 족히 정신과 내장을 투명하게 유지시킬 수가 있었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 놓고 흩날리는 눈보라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때 문득 글 한 줄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원고지에다 옮겨 보았다.   수천만 마리의 나비떼가 어지러이 허공을 날고   단 한 줄이었다.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너무 추워서 방문을 닫고 방금 원고지에 옮겨 놓은 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만약 한 줄짜리 시라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눈보라로 정한다면 역시 고정관념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터. 나는 왜 그때 화장터라는 단어가 떠올랐을까. 혹시 얼음밥을 먹어가면서까지 묘사적 문체를 얻어내려고 발버둥치는 내게 하나님이 영감이라도 내려주신 것이나 아닐까. 화장터라는 제목을 붙이자, 나비떼는 놀랍게도 사자의 소지품을 태울 때 날아오르는 연소물의 사해조각을 연상시키더니 이내 영혼의 편린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목을 제지공장으로 붙인다면, 나비떼는 종이조각으로 변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내가 원고지에 써넣은 나비떼는 곤충이 아닐 수도 있었다. 눈보라가 될 수도 있었고, 사해조각이 될 수도 있었고, 종이조각이 될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편린까지 될 수 있었다. 관측자의 위치가 어딘가에 따라 내가 빌려오는 사물들은 판이하게 다른 상징성으로 되살아날 수가 있었다. 알았다. 불시에 막혀 있던 시야가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침내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고 있었다. 배반자로부터 보내온 설탕은 달지 않다. 결핵에 걸린 태양은 눈부실 수가 없다. 발가락이 자라는 조랑말의 당혹감. 구걸을 중단한 거지의 허영. 쥐를 보면 도망치는 고양이의 비야. 목이 짧은 기린의 절망.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순간 나는 만물들의 외형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면서 상징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 사물의 외형이 주는 고정관념 때문에 사물의 내부를 들여다 보지 못하는 난관은 극복되어 있었다. 세 솥째의 얼음밥이 비어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사물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앙상한 모습으로 겨울을 지키고 있는 굴참나무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가 있었고, 끊임없이 얼음 밑으로 흐르고 있는 개울물의 도란거림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찌푸린 표정으로 낮게 내려앉아 있는 회색 하늘의 음모도 간파할 수가 있었고, 폭설을 뒤집어쓰고 묵상에 잠겨 있는 산들의 자비심도 읽어낼 수가 있었다. 나는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면서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게 되었고,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면서 만물의 영혼과 합일하게 되었다. 어느새 개떡 같은 세상에 대한 증오심조차 모조리 소멸되어 있었다. 아무리 개떡 같은 세상이라도 눈물겹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외수 중에서       4) 대화적 묘사문단 쓰기를 통한 시 쓰기     o 질문 : 여러분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 하나씩 있지요? 골동품 가운데, 혹은 주방 용품, 혹은 누구로부터 받은 선물, 내가 만든 것 , 오랫동안 보관해 오던 장신구, 혹은 가구 등 하나만 적어 봅시다.   답 : “오지항아리요!”                                                                            답-------------------------------     o 질문 : 그 오지 항아리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입니까? 받은 인상대로 펼쳐보이세요. 앙증맞고 똑똑해 보이나요? 바보스럽게 보이나요? 아니면 슬프게 보이나요? 고독해보이나요? ---------- 형용적 표현   답 : “바보스럽게 보이는데요”                                                               답--------------------------------   o 질문 : 바보스럽게 보인다구요? 바보스럽게 보이는 부분은 무엇을 떠올리게 하나요? 비유로 표현한다면, 무엇처럼 보이는 가요? ---------------------> 시각적 비유 표현, 혹은   답 : 어깨로부터 둥글 넙적한 몸통은 마치 풋고추 된장에 보리밥을           답-------------------------------- 실컷 먹고 낮잠을 자는 머슴의 배같이 튀어나와 있네요. 아니에요, 마치 만삭이 된 시골 누님의 배와 같으네요.   o 질문 : 왜, 그런 표현을 하고 싶은 데요?                       ----------------------> 상상적 진술     답 : 항아리의 생리가 아무 것이나 주는 대로 먹을 수 있기                       답------------------------------- 때문이지요.                                                                                                                 o 질문 :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만 마는가요? 그 가치를 인생의 의미에 두고 한번 간파(看破)해 볼까요? -------------------------> 간파, 통찰, 의미부여하기   답: 아니지요. 다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간수할 뿐이지요. 배고픈 자의  답------------------------------- 굶주림을 구원하기 위해 고이 간직하는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항아리지요.     o 질문 : :오지항아리를 보면 자꾸 누가 떠오르나요?     답 : 어머님이요                                                                                    답 ------------------------------         ● 대화에서 얻은 내용을 묘사문장(문단)으로 나타내기                                                         오지 항아리 20여년 이사 갈 때마다 갖고 다니는 오지항아리는 못난 듯 바보스럽다. 그 어깨로부터 흘러내린 둥글넙적한 몸통은 마치 풋고추 된장에 보리를 실컷 먹고 낮잠을 자는 머슴의 배 같이 튀어나왔다. 아니 만삭이 된 시골 누님의 배 같다. 그런 뱃속에다 아무 것이나 주는 대로 먹는 항아리, 그런 항아리의 생리가 바보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바보스러움은 어리석고 못난 바보스러움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의 멋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깃들어 있다. 주는 대로 먹는 바보스러움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지 항아리는 그것을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간수할 뿐이다. 배고픈 자의 굶주림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는 항아리, 그것이 곧 항아리의 사상이요. 돌아가신 어머님의 철학이다       ● 묘사문단 내용을 바탕으로 시로 써보기                   오지 항아리     20여년 이사 갈 때마다 따라다니는 못난 듯 바보스러운 오지항아리   어깨로부터 흘러내린 둥글 넙적한 몸통, 마치 풋고추 된장에 보리를 실컷 먹고 낮잠을 자는 머슴의 배 같은 만삭이 된 시골 누님의 배 같은   아무 것이나 주는 대로 먹는 어리석은 항아리의 생리 바보스러운 멋, 오직 간수만 할 뿐 그러나, 배고픈 자의 굶주림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는 항아리의 사상   돌아가신 어머님의 철학             2. 묘사시(descriptive poetry) 쓰기   1) 비유적 묘사지향의 시 : 사물(풍경)의 감각적 묘사, 이미지, 비유적으로 나타내기     마량진                                                           김 윤                 갈메기떼가 썰물을 끌고 간다 가다가 저만큼 부리의 힘을 탁 놓아버린다 뻘 건너 수평선이 팽팽해진다 발바닥이 드러난 어선들이 스크류를 이빨처럼 간다 뻘밭이 수천 개의 흡반을 들이댄다 박하지 새끼가 구멍마다 집게발 하나씩을 내밀고 노을을 섬득 베어문다 뻘이 번득이며 붉게 물든다 아직도 흙탕인 바다가 지는 해를 한 번 더 울컥 떠 올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이 뻘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작은 횟집 몇이 불을 켜들고 흡반 속으로 빨려든다                                                                        (《현대시학》2006년 10월호)         ○ 마량진은 충남 서천군에 있는 어촌 포구이다. 우선 이 시는 개펄 바닷가의 노을을 그림 그리듯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갈메기떼가 썰물을 끌고 간다”든가, “수평선이 팽팽해진다”든가, “어선들이 / 스크류를 이빨처럼 간다”든가, “박하지 새끼가 … 노을을 섬득 베어문다” 등의 이미지들이 섬뜩할 정도로 신선하고 생동감이 있다.     ○ 경험시가 서사의 양식을 지향한다면, 묘사시는 묘사 양식을 지향한다. 묘사란 사물의 감각적 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범이다. 묘사시란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라고 할 수 있다.   ○ 화가의 경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쉽지만, 시인의 경우에는 비록 언어로 그린다고 해도 그리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시인의 매체인 언어는 화자의 색이나 선과는 다른 특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보다도 개념(관념)을 소유한다. 그만큼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다. 이를테면 푸른 하늘을 보고 ‘하늘은 푸르다.’고 해도 이 때의 ‘푸르다’는 말은 개념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우리가 푸른 하늘을 보고 느끼는 감각성 특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 그렇기 때문에 시인들은 언어로 그림을 그릴 때, 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특수한 기법을 사용한다. 언어가 감각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흔히 심상 혹은 이미지라고 부른다. 이미지 표현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언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알 수 있듯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대한 감각을 보자.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은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 (1924) 전문   ○ 1연과 2연에서 시인은 시적 사물을 다른 사물에 비유하고 있다. 곧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은 ‘꽃가루’에 비유되며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은 금방울에 비유된다. 전자는 촉각, 후자는 시각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봄=고양이' 이라는 은유법을 구사(권도현, 「이장희론」, 현대문학11, 1976. 참고)하여 고양이를 객관적으로 이미지화하면서 대상의 감각적 측면만을 묘사하고 있다. 즉 1연에서는 고양이의 털에서 봄의 향기를, 2연에서는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서 봄의 생명적 불길을, 3연에서는 고양이의 입술에서 나른한 졸음을, 4연에서는 고양이의 수염에서 푸른 생기를 각각 예리한 관찰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각 연들은 고양이를 객관적으로 시각화시켜 한 마리의 완벽한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 이장희의 특이성은 ‘객관적인 감성’으로 요약된다. 이런 감각성은 1920년대 우리 시의 전통적 요소 말하자면 주관의 범람, 감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으로 당시의 시 흐름에서「봄은 고양이로다」는 감상적 낭만성을 극복하고 현대성을 획득한다(이승훈, 『한국 모더니즘 시사』, 문예출판사, 2000. 참고). 비록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이런 면모가 보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시를 당시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이장희의 독특한 시세계로 보여진다.   ○ 직유는 대체로 사물의 감각적 묘사보다는 사물을 산문적으로 설명하는 폐단이 있다. 따라서 같은 비유의 방법이라 하여도 은유의 방법이 시로서는 더욱 적절하다.   ○ 은유의 방법에 따라 하나의 사물을 묘사하는 전봉건의 를 보자.   ○ 언어를 감각적으로 시의 형식을 빌어 쓸 때, 시는 묘사적 양식을 지향한다. 말하자면 언어가 사물의 감각성을 드러낼 때 그것을 우리는 심상(이미지)이라 부르는데, 언어가 운율적으로 이미지를 생산하거나,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 흩날리는 눈발을 본다.   흩날리는 눈발에 섞여 흩날리는 작은 나비들을 본다.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 흩날리는 눈발은 이내 그치고 작은 나비들도 꿈처럼 사라진다.       ○ 이 시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겨울 저녁의 눈발이다. 1연에서 시인은 ‘흩날리는 눈발을’을 본다. 2연에서는 ‘작은 나비들’로 변용된다. 시인은 눈발을 나비들에 비유함으로써 눈발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보여준다.   ○ 은유는 소박하게 정의하면 표면적으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가하면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으로는 이렇게 비유의 방법에 기대지 않고 사물의 구체적 감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이 있다.   ○ 김춘수의 의하면 사물을 비유적으로 묘사할 때는 묘사적 이미지, 사물을 어떤 비유에도 기대지 않고 묘사할 때는 사물적 이미지가 드러난다. 전자는 이미지가 어떤 관념을 말하기 위한 도구가 되며 , 후자는 이미지 자체를 위한 이미지가 된다. ○ 이런 유형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로 김춘수의 을 들 수 있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 사물의 감각적 특성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 시인의 관념 진술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 사물의 감각적 특성 월동하는 인동잎의 빛깔이           --- 시인의 관념 진술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 시인의 관념 진술 더욱 슬프다                                 --- 시인의 관념 진술           ○ 어떤 관념도 드러내지 않고 사물을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묘사시에서는 보여주기라는 묘사와 관념적 진술이 함께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화자의 반응, 심리, 생각 - 주관적 정서가 꼭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 위 시의 경우, 3행과 6,7,8행에서는 사물의 감각적 특성이 아니라 시인의 관념이 드러나고 있다. 나머지 시행들에서는 초겨울의 붉은 인동초의 열매에 대한 감각성, 특히 시각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한 시각적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에서 읽을 수 있었던 비유의 방법에 기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물의 사물성을 드러내는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라 한다.     3. 이미지(image)시 쓰기       ○ 비유적 묘사를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미지시로 발전한다. 이미지시는 시의 구체성을 확보하고, 환기력을 높여주며, 신선감을 가져다 준다.   ○ 이미시의 대두 배경     이미지시 ---감각적 정서를 환기 관념시-----지적 사유를 매개로 하여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독자들에게 인식     (1) 관념의 횡포를 증오하는 새로운 독자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현대시에서 시의 회화성이 지배적인 요소가 됨. (2) 현대시에서 시의 이미지가 강조되는 것은 현대 과학문명 자체가 가시적인 실증성을 바탕으로 한 시각형의 문화가 창출한 데서 비롯됨. (3) 주관적인 사상과 감정을 재구성하면서 시의 대상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회화적 이미지를 주로 사용함. (4) 이미지는 언어에 의해 조직화한 그림이며 ,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적 체험을 신선하고 강렬하게 환기시키면서 비유와 상징을 결합하는 것 (5) 이미지의 시적 기능은 크게 의미의 전달과 정서 환기로 나누어질 수 있다.     (1) 심리적 이미지(정신적 이미지, 지각이미지)   ○ 심리적 이미지는 시인이나 독자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체험과 인상을 중시한다.     ① 시각적 이미지     나의 심장 앞에서 나의 불을 지키는 피의 사냥개 내 비참의 교외(郊外)에서 쓰거운 콩팥을 먹고 사는 새                      너의 혀의 젖은 불꽃으로 내 땀의 소금을 핥아라 내 죽음의 설탕을 핥아라                               -    Ivan Goil 부분         ○ 시각적 이미지는 가시적 대상이나 추상적 관념을 재생하고 묘사하는 기능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체험을 독자들이 볼 수 있게 바꾸어 놓는다.   ○ 시인은 백혈병에 대한 자신의 절망감을 ‘피의 사냥개’로 가시화시켜 다른 이들에게는 막연하고 모호한 것을 명확하게 그려냄으로써 생생한 고통의 체험을 독자들에게 환기시켜 예술적 감동을 느끼게 한다.       ② 청각적 이미지   明明한 明明한 매미가 우네                             박재삼 부분     ○ 이도령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춘향이의 시점에 선 화자가 한 여름 숲에서 매미 우는 소리를 ‘明明한’ 소리를 들음으로써, 반가운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대님 푸는 소리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상시켜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 특히 의성어를 구사한 ‘明明한’ 이미지는 의미적 요소와 결합되어 기다리는 이의 어두운 마음을 스스로 밝은 마음으로 바꾸어내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③ 후각적 이미지     혼자 몰래 마신 고량주 냄새 조금 몰아내려 거실 창을 여니 바로 봄밤 하늘에 달무리가 선연하고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비릿한 비 냄새 겨울난 화초들이 심호흡하며 냄새 맡기 분주하다                                                                                  황동규 부분       ○ 고량주의 냄새를 조금 내보내려던 화자가 창을 여니, 오히려 봄밤의 비릿한 비 냄새가 코 끝에 스쳐오고, 겨울을 난 화초들도 심호흡하여 봄냄새 맡기에 분주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이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왕성한 생명력을 새롭게 교감하는 미적 체험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④ 미각적 이미지     메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새 사돈을 접대하는 것                                              박목월         ○ ‘싱겁고 구수한’ 메밀묵 맛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오히려 아름다운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인간미를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각적 감각은 감각 자체로 끝나지 않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전통적인 인간미로까지 확장한다.         ⑤ 촉각적 이미지                         젖은 안개와 혀와 街燈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親和                                                 정현종 부분           ○ 사물인 안개와 街燈의 관계를 시인 나름의 느낌으로 그리고 있다. 안개와 가등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젖은 안개의 혀'와 ’ 가등의 하염없는 혀‘처럼 촉각적 느낌으로 구체화시키면서, 그 교감의 밀도 있는 흐름을 감지하기 위해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청각적 이미지와 근육감각적 이미지를 아울러 구사하고 있다.       ⑥ 역동적 이미지     어떤 놈은 화분에서 흘러내리는 폭포가 되어 빛깔의 어기찬 흐름을 흐르고 어떤 놈은 하늘이라도 받들었는가 하나의 발족한 소반이 되어 하늘의 이슬을 받고 있다                                                                                                 박남수 부분       ○ 역동적 이미지는 정지적 이미지의 대립적 개념이다. 이 시에서는 국화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폭포를 방불케 하는 ‘빛깔의 어기찬 흐름’으로 보고, 또 하늘을 떠받들기라도 할 듯 ‘발족한 소반’처럼 오뚝이 서서 하늘의 이슬을 받고 있다고 표현한다.   ○ 시인의 개성적인 시각은 진부한 우아함이 아니라 꽃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곧고 강인한 생명력과 힘찬 순수성을 발견함으로써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를 찾아낸 것이다.     ⑦ 공감각적 이미지     물에서 갓나온 여인이 옷 입기 전 한 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塔이여!   온 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조지훈< 여운> 부분         ○ 이 시의 중심 소재는 탑이다. 달빛 아래 서 있는 탑의 모습은 시인과의 상상력 속에서 ‘물에서 갓나온 여인’으로 바뀌면서, 종교적 심상인 성(性)스러움이 스스럼없이 생생하게 교감되고 있다.     ○ 달빛을 물의 이미지로 치환한 것은 시각의 촉각화이며, ‘온몸에 흐르는 윤기’를 ‘상긋한 풀냄새’로 옮기는 것도 시각적 이미지에서 후각적 이미지로 전환된 것이다. 이 시는 공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성,속의 미적 경지를 훌륭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2) 비유적 이미지     ○ 이 세상은 실제로 무수한 비유가 서로 엉켜 존재한다. 시의 비유적 이미지는 시의 내포성과 더불어 비유의 개념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심리적 이미지보다 현대시의 더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게 되었다.   ○ 이질적인 두 사물을 극적으로 결합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비유적 이미지인데, 비유적 이미지의 일반 유형은 직유, 은유, 제유, 환유, 의인화, 풍유 등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① 은유적 이미지     ○ 두 이미지(언어) 사이의 역동성과 긴장성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역동성과 긴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두 언어가 고정됨 관념으로 환원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바로 창의적 이미지가 요구되는데, 창의적 이미지는 은유적 이미지의 역동성에 의해 산출된다. 이 역동적 은유는 내포의 동질성과 외연의 이질성 사이의 긴장관계에 의해 설립된다.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정현종 부분       ○ 이 시에서 ‘술’의 이미지와 ‘바다’,‘구름‘,’사랑‘의 이미지는 서로 이질적인 존재로 병치되고 있지만, 시인의 의식 속에서 그것은 일차적으로 물을 매개로 결합되고, 이차적으로 물과 술이 매개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술에 취해 주고 받는 사랑의 대화 속에서 젖은 목소리가 연역된다.   ○ 시인은 이제 무수한 수평과 수직을 가로지는 바다와 구름의 거대한 존재가 사랑이라는 젖은 감정 속에 하나로 통합되는 원리를 독자들에게 환기시켜 준다.     ② 환유적 이미지   ○ 은유적 이미지가 정서, 사상, 윤리 등의 주관적 요소를 개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객관화하는 구조를 지닌 반면에 환유적 이미지는 언어의 지시성을 통해 외부 대상을 형상화하기 때문에 객관적 대상, 배경, 사건을 내면적으로 자기인식화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 정서 중심의 은유적인 이미지의 시는 객관적 상관물을 배경으로 자기 인식을 환기시키며 인식 중심의 환유적 이미지의 시는 어떤 배경, 사건에 대한 인식 및 자기 인식이 중심이 된다.     눈 덮힌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한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 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리친다.                                   오장환       ○ 이 시에서 ‘눈 덮인 철로’, ‘소반 귀퉁이’의 ‘농군‘, ’어린애‘의 울음 등의 이미지는 내포적 문맥이 아니라 지시적 문맥 속에서 결합된 환유적 이미지이다. 시인은 배경과 사건을 전경화함으로써 현장감을 환기시키면서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하는 궁핍하고 참담한 이농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3) 상징적 이미지     ○ 상징은 비유와 함께 시의 내용을 이미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비유는 두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반면, 상징은 하나의 이미지만을 표면에 내세운다. 곧 상징은 매재(보조관념)의 이미지만을 사용하여 본의(원관념)를 연상시키는데, 상징적 이미지가 본의를 연상시키는 힘은 시의 전체 문맥 속에 퍼져 있다. 그래서 시인이 유사한 비유적 이미지만들을 반복해 서 사용할 때 취의를 생략하고 매재만 사용해도 우리는 숨겨진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 반복 양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의 다발은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로 회귀하면서 상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비유적 이미지를 이미지의 사용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상징은 “확장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상징적 이미지의 본의는 비유적 이미지의 본의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암시적인 성격을 띤다.   ○ 상징적 이미지의 효과는 매재의 이미지가 얼마나 생생한가. 혹은 그 이미지가 본의를 얼마나 강력하게 환기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보편적 상징, 곧 인습적인 상징은 본의를 환기시키는 힘은 크지만, 창의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개인적 상징은 독창적이지만 본의를 환기시키는 힘이 미약해 난해한 이미지를 종종 산출해 나쁜 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 따라서 시적 상징은 이미지가 독창적이면서도 본의를 환기시키는 힘이 큰 보편성을 띠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 사랑을 잃은 화자는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등 비유적 이미지들을 구사하면서 사랑의 열망을 떠나 보내고 난 후의 절망감과 허무를 “빈 집”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 대화를 활용한 비유적(감각적, 상상력, 이미지시를 위한)인 시 쓰기 훈련   ① ______________________를(가) 보고 싶으면(싶을 때) ① “누군가(무엇인가)를 보고(먹고,) 싶을 때 ( 누구 / 무엇 )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유롭게 떠올려봅시다” (시간을 두고 나서)   대답 :“민정이요”, 혹은 “조카의 웃음이요”   ② 내 몸은 ___________________같이 ___________________ 다. ② “떠올렸더니, 그럼 보고싶을 때 몸이 어떠니? (비유) (온도-촉각적 표현) 따뜻하니? 뜨겁니?”   대답 : “뜨거워요” 혹은 “따뜻해요”   “ 무엇처럼 뜨겁니(따뜻하니)?”   대답 :“ 끓는 주전자 같아요.” 혹은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 처럼요.”   ③ 내 마음은 __________________같은 __________________ 인데, ③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보자. 보고싶은 마음 (소리-청각적 표현) (색깔-시각적 표현) 은 무슨 색이지?”   대답 : “빨강이요.” 혹은 “은빛색이요”   “잘 들어 봐! 빨강, 빨강.” “들었지? 빨강(은빛색)은 무슨 소리와 같지?”   대답 : “빨강은 달리는 기차소리요.” 혹은 은빛색은 출렁거리는 바닷물소리요.“   ④ 그것은 -------------- 이다 ④ “또다시 새로 시작해 보자. 보고 싶은 마음 (맛-미각적 표현) 은 무슨 맛이지?”   대답 “맛있는 햄버거맛이요.” “달콤한 박하 사탕맛이요.”   ⑤ _________________는 ______________________이다. ⑤ “ 하나만 더 해보자. 그 보고싶은 마음 (누구 / 무엇) (냄새-후각적 표현) 무슨 냄새지?“   대답 : “피자 냄새요.” “고기 굽는 냄새요.” “갓 구워낸 버터빵 냄새요.”   * 반전 혹은 비약으로 연(聯)을 준다.     ⑥ _________________는 ____________________을 떠올리게 한다. ⑥ 마지막으로 연상을 해보까요? 누군가(무 (누구 / 무엇) (사물, 풍경, 기억) 엇인가)는 무엇을 떠올리게 하나요?   대답 : “예술의 전당의 음악분수요.”          “ 내 삶의 비타민이요.”       ● “그러면, 지금까지 적은 것을 활용하여 다음 빈 칸에 짧은 시로 만들어 볼까요?”                         예시 (1)   민정이가 보고 싶을 때   내 몸은 끓는 주전자같이 뜨겁다. 내 마음은 달리는 기차소리 같은 빨강색이 된다 그 보고 싶은 마음은 맛있는 햄버거 맛이고, 피자 냄새다.   민정이는 예술의 전당의 음악분수다.           예시 (2)     조카의 웃음이 보고 싶으면   내 몸은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처럼 따뜻해진다 내 마음은 아침바닷물처럼 은빛색깔로 출렁거린다 그 맛은 달콤한 박하사탕맛이다. 조카의 웃음은 갓 구워낸 버터빵 냄새다.   조카의 웃음은 내 삶의 비타민이다.         4. 사물시(physical poetry) 쓰기       (1) 사물시 : 사물에 대한 느낌의 미학(aesthetics) : 감성적 느낌(feeling) - 감각(sensation) - 감동(感動)   ○ 美 : 자연 • 인생 • 예술에 담긴 아름다움의 현상이나 가치 그리고 체험 따위   ○ 미적사실(美的事實) : 심리학•사회학•철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시도할 수 있으며, 또한 미적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미학의 성격도 달라진다. 미적 사실을 아름다움을 가능케 한 창조적 심리로 본다면, 우리는 미학이 창조적 심리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산출된 아름다움 자체.   ○ 미학은 플라톤에서 비롯되었지만, 미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한 자는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이며, ‘감성적 인식의 학문(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이라는 의미로서 에스테티카(aesthetica : 그리스어의 감성적 aisthetikos라는 말에서 유래)라는 명칭을 사용한데서 기인한다. 그는 볼프와 라이프니츠가 이성적 인식이론을 체계화하여 논리학을 수립한 것에 대하여 감성적 인식 이론을 확립하려고 했다.   ○ 이후 미학은 대체로 관념론적 미학과 경험주의 내지 심리학적 미학 등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 관념론적 미학의 창시자는 칸트인데, 그는 미와 예술에 있어서 관념을 넘어선 경험적 판단을 인간의 정신능력 가운데 중요한 측면으로 파악하며, 이것을 미적 판단력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또한 미적 판단력이 오성(悟性) • 이성(理性) 등과 병치(竝置)되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정신 능력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미적 판단력은 특수한 인식능력이다. 칸트 이후 이러한 선험적•비판주의적 미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철학자로 쉘링 • 헤겔 • 쇼펜하우어 등이 있다.   ● 경험주의 내지 심리학적 미학은 19세기 말 실증주의(Positivism)의 전개에 힘입어 형성된 미학이다. 이 미학은 특히 실험적 방법에 의지한다. 특히 립스나 폴켈트 등이 내세운 감정이입설(感情移入說, Empathy)은 경험 및 심리 작용을 잘 설명해준다. 한편으로 미적 규범의 문제를 다루는가 하면,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미적 형식의 문제를 다루며 미적 관조의 구조도 파헤치고자 시도한다. 이와 같은 경험주의의 입장은 프랑스 역사학자인 텐느와 기요 등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사회학적인 방법을 활용한 미학을 성립시켰는가 하면 예술학의 토대를 닦기도 했다.   ● 20세기 독일 철학자 후설은 현상학(現象學)을 도입한 현상학적 미학을 성립한다. 그밖에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형에 속하는 미학,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미학 등이 있다.     (2) 사물의 속성을 살려 쓰기, 시 비교해 보기                    불빛 나가는 창가에 줄을 쳐 놓았다 새소리와 꽃향기를 가로 막고 내 집을 기둥 하나로 삼아 농부가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있다                                         함민복 전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개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딘가로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박성우 전문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해 본다 그는 간간이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 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 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역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 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김두안 전문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물을 짠다 잡는 즉시 단단히 포박한 채   투명한 유혹의 은실을 풀어 고문하듯 뒤틀고 뒤집고 까봐야 한다 끈끈한 욕망의 신경을 늘여 실컷 두들겨 혐의가 풀린 다음 그물을 친다 꼭꼭 씹어 먹어야 좋은 실이 뽑히듯 씨줄과 날줄을 걸어 오늘도 나는 그물을 짠다 사방팔방 짜 늘인 레이스 빈방에 홀로 웅크린 거미처럼 경계가 삼엄한 레이더망이다 은빛 투명한 그리움 풀어 지난 과오를 줄줄이 실토하듯 막막한 허공에 그물을 친다 감히 공중에 내건 죄가 온 하루 날파리를 기다리다 지치면 저토록 길고 아름다울 줄이야 내가 친 그물에 매달려 속셈이 교활한 자의 언어는 늘 대롱대롱 그네나 타고, 때로는 현란하고 멋지고 향기롭다지? 가장 팽팽한 현을 골라 그러니까 머리만 큰 짐승이 뱉어낸 차이코프스키의 을 탄주한다. 달변과 혀를 조심하도록 그건 대개 사람 잡는 덫이 아니면 어디서 슬쩍 해온 장물이므로 저런! 그새 또 걸려들었군                                                   임영조 전문       ○ 위의 시들은 같은 소재의 ‘거미’지만 소재에 대해 접근 방식들이 모두 다르다. 특히 시인마다 사물의 감각적 특성과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의 진술이 시마다 각기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 사물 중심의 시는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시, 일반적으로 물질현상을 노래하는 시, 순수시 등을 포함한다. 이미지스트 시인들은 사물을 사물성 속에서 제시한다. 순수시는 사물시의 변주이며, 죠지 무어처럼 이미지의 구성을 통한 순수한 재현ㆍ관조의 세계를 창조한다.   ○ 사물시는 이미지스트의 시이든,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시이든, 순수시이든 한결같이 관념을 죽임으로써 관념의 허위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미지스트의 경우, 체계적인 추상화의 세계, 곧 과학의 세계에 대한 혐오가 시적 동기를 이룬다.   (3) 내가 사물로서 주인공 되어보기                      너의 좁은 아파트 한 구석            시든 꽃잎 하나 헉! 소리를 내며            우글쭈글해진 모노륨 마루 위에 눕는 소리 들린다.             - 땅에 내려가고 싶다             누가 흑흑 흐느끼기 시작한다 .                                         강은교 전문           ○ 리모콘, 휴대폰, 연필, 스탠드, 화분, 시계, 거울 - 주위에서 온갖 사물 중 시의 소재로 삼을 만한 것들을 많이 발견해 내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그 능력은 달리 말하면 관찰력과 상상력이다.   ○ 유심히 주변을 관찰하면 쓸거리, 글 쓸 꼬투리는 무궁무진하다. 쓸거리가 많으면 글 (시)을 자꾸 쓰고 싶어지고, 마땅한 소재를 찾지 못하면 글(시) 이 잘 안 씌어진다. 글감 선택의 능력과 관찰력, 상상력, 통찰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 어떤 사물을 보고 고정관념에 얽매인,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 따분하고 재미없는 접근은 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1) 끊임없이 사물의 속성을 재해석하고, 2) 확장시켜나가고 3) 부정하고 거꾸로 생각해보고 4)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5) 낯설게 보는 곳에서 6) 남과 달리 보는 데서 시는 탄생한다. 7) 그래서 사물의 본래 모습, 혹은 또다른 모습을 찾아준다.       (4) 사물의 속성에 의미를 부여하기 ( 본 것(사물 현상, 속성)을 정신(관념)으로 진술하기)     ○ 본 것의 현상, 속성을 +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나 삶(존재)의 의미, 깨달음으로 진술해 나가는 방법이다. 문학은 인간의 지각과 상상력을 넓혀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낙엽도 방금 떨어진 낙엽은             살아 있는 것 같다             웃는 것 같다             말하는 것 같다             나뭇가지에 매달아 주면             다시 나무랑 살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생진 전문(2012.11.7)           이놈을 잡는 일은 너무 쉽다 줄에 소라껍질을 매달아놓으면 은신처로 알고 들어가 걸려드는데 문제는 문단속을 잘한다는 것 혹시 남에게 들켜 잡아먹힐까봐 펄을 뭉쳐 입구를 꽉 틀어막다보니 퇴로도 없이 잡히고 만다 바보같이 ‘나 여기 들어 있소’ 자수하거나 ‘눈 가리고 야옹’인 셈이다 하여 입구가 막힌 소라껍질 속에는 틀림없이 쭈꾸미가 들어있다 어부는 옛날 처녀 보쌈해오 듯 그냥 걷어오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는 지나치게 문단속 잘해 폐가망신당한 사람들이 있다.                                                         김선태 부분           ○ 시인에게 있어 자연과 사물이란 우주의 섭리,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요, 인간의 지각과 상상력을 넓혀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김선태의 시 에서는 쭈꾸미의 생리를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해 낸다. 그는 남도의 목포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시간만 나면 섬으로, 바닷가로, 갯벌로 시 사냥을 나간다. 그의 시에는 연체동물이나 꽃게, 숭어, 우럭, 홍어, 말미잘, 개불 등 물고기만을 엮어 올리는 것이 아니다. 한층 더 파고들어 물고기를 통해서 보는 인간 세상의 모습이라든가, 남도 바닷가 사람들과 풍경과 그윽한 향수를 수거하여 시편들 속에 담아낸다. 섬마을의 이팝나무를 조상들의 유산인 ‘쌀밥’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해안선을 어머니의 치맛자락으로 묘사하거나, 갯벌을 ‘넉넉하고 깊은 그늘’을 드리운 ‘진창의 노래판’으로 인식해 ‘잘 삭은 적막’과 ‘절창’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또 진주조개에서 ‘찬란한 중심에 스며 있는 고통’의 삶을 통찰해 내기도 한다.                     처마 끝에 매달린 옥수수 봄볕에 슬몃슬몃 눈을 뜬다 질끈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버틴 씨옥수수 따순 바람에 발이 가렵다 알알이 쟁여둔 욕망들 웃자란 몸 속의 뿌리들 우르르 봄을 향해 발을 뻗는다 세상으로 뛰쳐나갈 신호를 기다린다 딱딱한 알갱이 속, 저 푸른 풀씨들               들판에 확, 불이 붙겠다                                                         마경덕 전문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에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이기철 전문         ○ 사물시는 하나의 사물을 글감으로 삼아 특징, 성질, 속성을 꼼꼼하게 묘사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시이다.   ○ 우리 주위의 흔한 사물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작가다. 여기에서 글쓰기는 출발한다. 주위의 사물을 잘 관찰하고 관심을 갖고 몰입하고, 상상력을 부여하여 속성을 깊이 들여다보면 통찰의 세계가 발견된다. , 관계짓기를 잘 발휘하면, 그리고 나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가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이른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 목을 맨 올가미가       온종일 나를 끌고 다닌다       사무실로 거리로       찻집으로 술집으로       또 무슨 식장으로 끌고 다닌다       서투른 근엄을 위장해 주고       더러는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갖가지 자유를 결박하는 끈       도대체 누굴까?       이 견고한 줄로       내 목을 거뜬히 옭아 쥔 者는...       답답해라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이후       나는 아무런 줄도 잡지 못하고       불안한 도시 안개 속을 헤매는 羊       제발 정신 좀 차려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면서       뒤틀린 넥타이를 고쳐 매지만       나는 다시 고분고분 길들여진다             낯선 시간 속으로               바쁘게 끌려가는 서러운 노예처럼                                      임영조 전문           (5) 사물의 속성에 따른 비유적 관계짓기       ○ 이 세상의 사물들은 다 연관되어 있다. 사물들은 서로 다르지만 연상과 상상을 통하여 같은 속성, 곧 유사성을 발견해 나가는 비유적 관계짓기가 곧 시의 세계다. 그래서 시는 비유덩어리가 아닌가.                   모두들 못생겼다고 하지만 모과는 얼굴이 아니고 주먹이다 돌덩이만큼 단단한 주먹이다                                                                           이 안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질을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를 언제나 남의 손 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下手人이다.               어둠 속에 갖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敵意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焚身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그들은 지금 숨을 죽인 채 어두운 棺 속에 누워있지만 한 순간 화려하게 데뷔할 절호의 챤스를 노리고 있다 빛나는 출세를 꿈꾸고 있다 임영조 전문   이 시대에 희한한 聖者 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빈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주었다 밖에서 묻혀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었다                                          임영조 전반부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곱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나희덕 전문         ○ 우리 주위의 흔한 사물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작가다. 여기에서 글쓰기는 출발한다. 주위의 사물을 잘 관찰하고 관심을 갖고 몰입하고, 상상력과 통찰, 관계짓기를 잘 발휘하면, 그리고 나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가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 우리말의 ‘짓다’라는 단어를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집을 짓다’, ‘밥을 짓다’, ‘옷을 짓다’, ‘다리를 짓다’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만든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자질이다. 이러한 기본의미에서 전이되어 ‘글을 짓다’, ‘시를 짓다’, ‘소설을 짓다’ 등으로 쓰인다. ‘만들기’는 ‘형성하기’이기도 하다. 이는 독일어의 ‘만든다’는 의미의 동사 빌덴(bilden)과 그 명사형 빌둥(Building)에 상응한다. 독일어에서 교양소설을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이라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의 형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조어법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상상력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고 형성하는 능력을 뜻한다.     ○ 사물의 겉모습을 보여주는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상투성의 껍질을 벗겨가다 보면 맛깔스런 과육, 속살이 보인다. 과일에게서 속살의 의미(정신)는 무엇인가? 이것을 나의 일상사에 비춰본다면 여기에서 발견하는 그 어떤 관념이 존재한다.   ○ 마중물을 아는가. 양질의 생명수를 얻으려면, 사물의 또다른 본질, 의미를 찾아내려면 한 바가지, 두 바가지 마중물을 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에는 탁한 물이 나오게 마련, 사물의 관조와 몰입- 상호텍스트의 관계짓기, 스키마, 연상, 상상, 비유적 상상 등에 매진하다 보면 나중에는 맑고 차가운 생수가 나오기 시작한다.   ○ 시란 생수와 같은 대상의 비밀을 캐내는 작업이다. 현실적, 실용적, 일상적, 논리적 관찰을 거부하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려고 하는 노력에서 비로소 그 대상은 자신의 비밀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6) 사물 수필의 예                                                        명품                                                                                                             홍경희 (수필가, 경인문학회)    주책스럽게도 백발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쓰는 도구들을 좋아한다. 뾰족한 모양을 내서 예쁘게 깎을 수 있는 연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써지는 볼펜, 꼭지만 누르면 심 조절이 가능해서 편리한 샤프,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는 제일인 붓, 정봉 중봉 세필 등의 필기구이다.  연필에 대한 욕심은 국민학교 때부터인 것 같다. 공부는 지질하게 하면서도 내 함석필통은 키가 제각각인 연필들이 잘 깎여진 채로 올망졸망 가득 차 있곤 했다. 어쩌다 친구가 가진 연필이 욕심 날 때는 만화책을 빌려주거나 물물교환으로 기어코 내 것을 만들고야 마는 집념까지 있었다.  나는 또 만화책을 동무들이 부러워 할 만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은행이 학교 담과 붙어 있는지라 쉬는 시간이라도 달려가 떼를 쓰면 용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사고 싶거나 보고 싶은 물건을 학교 앞 문구점이나 서점을 통해 곧잘 구할 수 있는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해진다.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사무실로 불숙불숙 찾아오는 딸이 귀여워서라기 보다 창피해서 선뜻 돈을 쥐여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제일 예뻐한다는 착각 속에 철없는 유년을 그렇게 보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연필회사인 독일의 ‘파버카스텔’ 에는 백 만원이 넘는 연필이 있다고 한다. 대 문호 궤테를 비롯해서 화가 빈센트, 반고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그라스 ,영국 수상 처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애용하던 연필이 이 회사 제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유럽의 귀족이나 국제적 명망가들의 애장품이 된 것은 우연히 그들이 먼저 쓰게 되서 유명해진 것인지 아니면 유명회사의 연필이어서 그들이 쓰게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명품브랜드의 값을 높이는 데는 그들의 공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볼펜에 욕심이 많은 내게 손녀는 빈번이 제 필통을 열고 갖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한다. 그리고 아들은 출장길에 기내에서 받는 볼펜과 호텔에서 색다른 모양의 볼펜이나 연필이 눈에 띄면 챙겨다 준다. 이렇게 출신지가 각각 다른 심이 가늘고 굵고, 여러 색을 내는, 이름도 가지가지의 볼펜들로 문구점에 가는 번거로움 없이도 내가 가진 네 개의 필통은 늘 배가 부르다.  이번에 새 식구가 늘었다. 아들이 작년에 박사학위 받을 때 들어온 선물이라며 까만 몸통에 은테를 두르고 뚜껑에는 흰 꽃을 얹은 중후한 모습의 볼펜 하나를 가져왔다.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데 그거야 말로 명품이란다. 나는 눈물날 것같이 감격했고 기뻤다. 명품이라서? 아니 그건 절대 아니고 짜-ㄴ 한 안스러움과 대견함에서 오는 에미의 마음에서였다. 직장 다니며 자식들 가르치며 남보다 곱절의 고생으로 일궈낸 형설지공(螢雪之功). 조금의 뒷받침도 못 해 준 부모의 미안함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의미를 지니고 내게로 온 그 까만 볼펜은 명품중의 명품임은 물론이고 대대로 소장(所藏)하는 가보(家寶)로 삼을 작정이다. 자랑할 기회가 있을 때 언제 어디서나 꺼내 자랑하려고 핸드백 속에 늘 넣고 다닌다. 희망사항 일 뿐이지만 내가 언젠가 그럴듯한 책을 쓴다면 이 볼펜으로 싸인을 해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꿈은 항상 착각 속에 꾸는 것일까.  대학생인 손녀는 요즘도 필통을 열고 내게 자유 선택권을 준다. 할머니에 대한 최대의 사랑 표현 방법이다. 이렇게 모여든 사랑 때문에 가슴은 늘 훈훈하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 볼펜들 하나 하나가 내겐 소중한 명품이 아닐까 생각하며 불룩한 네 개의 필통을 어루만져 본다                                                                아주 특별한 만년필 문화                                                                                                                                 류종호(인천문협 이사. 시인)    내게 좋은 만년필을 꼽으라면 파카(Parker), 파이롯트(PILOT), 몽블랑(montblanc), 쉐퍼(Sheaffer), 워터맨(waterman)을 말하고 싶다. 가격은 변론으로 한다. 파카는 오랜 세월 우리의 인식에 뿌리박힌 만년필이다. 파카21, 파카29, 파카45, 파카51 등 다양한 모델에 관해 들었을 것이다.  파카 만년필 한 자루 갖고 싶던 학창시절이 엊그제 같다. 파이롯트 만년필도 파카 못지않게 익숙한 이름이다. 지금은 대중적인 국산 모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종각에 파이로트 대형 매점이 있긴 하나 과거와는 많이 다른 양상이다. 몽블랑은 독일 브랜드로 수제품임을 강조하고 있다. -대개의 전통 깊은 외국 브랜드는 거의 수제품이다- 아무래도 유럽 쪽에서 인기가 높은 것 같다. 몽블랑산이 4개국에 걸쳐있는 광대한 산세라 그런지는 몰라도 'montblanc' 이라 하면 받아들이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참고로 몽블랑 산의 높이가 4,810m인 바 몽블랑 만년필 닙(nib)에 각인된 '4810' 로고가 몽블랑 마운틴의 높이를, 뚜껑의 흰색 문양이 몽블랑 정상의 만년설(萬年雪)을 의미한다. 쉐파는 미국 브랜드로 아주 오래 전부터 생산되었다. 이베이(ebay) 사이트를 뒤지다 보면 빈티지 제품으로 40-50년 전에 생산된 민트급 제품들이 상당수 올라와 있다. 당시의 주조방식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쉐파 제품의 대다수는 강성(强性)의 닙(nib)을 토대로 한다. 워터맨은 프랑스 제품으로 에드슨 모델을 비롯하여 다양한 제품들이 있다.  쉐퍼와 워터맨 두 브랜드의 역사 역시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다. 국내엔 쉐퍼보다 워터맨이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외국에 나가서도 만년필 만년필을 뒤지고 다닌 적이 있는데 좋은 예로, 홍콩의 골동품 거리에선 파카가 단연 압권이었다. 의외인 점은 국내에서 인식했던 몽블랑 만년필에 대한 눈높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홍콩의 마니아들은 몽블랑 만년필을 빈티지 펠리칸 제품보다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몽블랑의 단점(?)은 절대 바겐세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모델이라 해도 롯데 본점에서 보는 가격과 남대문 지하상가에서 만나는 가격 차이는 현저하다. 이런 현상을 두고 업자들은 A/S같은 혜택에서 ‘정품’을 구입하는 게 유리하다 말하지만 몽블랑 수입업체인 강남의 '유로통상'에선 모든 몽블랑 제품을 차별 없이 대한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만년필을 점검 받거나 수리하러 갈 경우 제품의 구입처를 확인하고 A/S에 임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몽블랑의 트레이드마크인 만년설 문양만 정확하면 균등히 접수하여 처리해준다. 하긴 만년필은 치명적인 결함만 아니라면 수리할 게 없다.  만년필 매장에선 반드시 몽블랑 만년필에 무게를 두고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몽블랑 만년필은 브랜드 가치는 뛰어날지 몰라도 한글이나 한문체엔 어울리지 않는 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글이나 한문체엔 파카 혹은 파이롯트(일제) 제품이 훨씬 잘 어울린다. 닙의 재질이 약간 탄력적이어야 한글체와 한문체에 적합하다. 한글체와 한문체는 글씨의 획을 긋는데 있어 알파벳 필기체처럼 지속적이지 않고 그때그때 유연하고 날렵하게 처리해야하는 특성을 띠기 때문이다.    다음은 만년필 펜촉(nib)의 사이즈에 대한 설명이다. 만년필 펜촉은 회사별 제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한글체엔 F(fine) 사이즈가 적당하다. 일제 파이롯트나 세일러 같은 제품은 사이즈가 정교한데 일제 만년필 대부분이 펜촉에 민감하다. 일본인들의 정신을 보는 것 같다. 수제품의 경우도 돋보기나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 양쪽의 닙 균형이 아주 정확하다. 사실 만년필의 펜촉은 그 자체가 생명이나 다름없다. 비싼 만년필을 사서 잉크 흐름이 좋지 않거나 글씨 써지는 감촉이 매끄럽지 못하다면 스트레스 쌓일 일이다. 물론 몇 달을 꾸준히 연습하면 익숙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왜 비싼 제품을 구입해서 몇 달씩이나 길들여야 하는가? 독일제 몽블랑의 경우 수제품으로 만든다는 명목하에 닙의 구조가 제품에 따라 각기 다른 걸 볼 수 있다. 꼼꼼한 일제에 비하면 다소 엉성한 인상마저 띤다. 과거 미제 쉐퍼 만년필을 보아도 몽블랑처럼 펜촉을 함부로 깎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몽블랑 만년필은 세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숭례문 지하 수입상가에 가면 신품 기준 백화점 가격의 60% 정도로 구입 가능한 제품도 있다.  만년필은 처음 살 때 진열장 형광등 불빛을 통해서 혹은 기타의 방식으로 닙의 균형이 정확한지부터 면밀히 살펴야 한다. 또한 몸통이 지나치게 가늘거나 굵은 제품은 피하는 게 좋다. 손에 쥐어 아담히 쥐어지는 굵기가 적당하다. 지나치게 가늘거나 굵은 몸통의 제품은 오랜 필기시 피로감이 따른다. 펜촉의 사이즈는 F(fine) 사이즈 닙의 만년필을 구입하시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세필(EF) 촉은 가늘어서 그렇고, -남성적인 필체와는 동떨어진- 미드움(M) 촉은 서류 결재 시 사인으로나 어울린다. 따라서 원고용 필기에 어울리는 사이즈는 F촉이다. 컨버터나 카트리지, 플린저 방식은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므로 언급을 하지 않겠다.  내가 소장한 워터맨 중에서 에드슨 모델을 보면 몸통의 굵기가 동양인 손아귀로선 다소 벅찬 느낌이 있어 오랜 시간 글을 쓸 경우 피로가 따른다는 약점이 있다. 물론 워터맨 중에도 몸통이 가느다란 제품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몽블랑이나 쉐퍼 혹은 파카 제품에 비해 전체적으로 무겁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주 가벼워도 경박한 느낌이 따르겠지만 무게감 지나치면 날렵하게 흘려 쓰는 필발에 제약으로 작용함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원고용이 아닌 결재(사인) 전용이라면 오히려 무게감이 있는 게 엄숙히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모 사이트에서 아주 오래된 쉐퍼 만년필을 볼 기회가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사람이 내놓은 만년필인데 모두 하나같이 쉐퍼 제품이었다. 펜촉 형태가 이미 내게 있는 것과 흡사한 것들이지만 오래된 제품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끌렸다. 열 자루의 만년필을 모두 구입해도 100달러가 넘지 않는 것이었다. 국제 배송료를 따져도 10자루라는 점을 감안하면 행운이나 다름없다. 언제 어떤 경로로 저런 만년필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디지털화 돼 가는 세상에 만년필의 정서를 고집한다는 게 뒤떨어진 발상인지 몰라도 '만년필만의 필감(筆感)'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면 컴퓨터를 접고 오직 만년필만으로 글을 쓰는 자세를 고집하고 싶다. 더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오랜 세월 만년필을 애용해온 나로선 얼마든지 가능하다. 상급학교 진학을 앞둔 학생들에게 아담한 만년필 한 자루 선물하는 건 어떨까? 각별한 사람의 정이 느껴지는 만년필을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고 다니면 그가 멀리 있어도 항상 그의 체취가 느껴질 것이다. 진정 만년필을 아끼고 사랑한다. [출처]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 유형의 시 쓰기(문광영문창5)|작성자 옥토끼  
이미지, 변용과 비약적 결합 2014.3월호 시평                                                               이혜선(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인은 익숙하게 보아오는 일상을 비틀어서 낯설게 보기도 하고, 평범한 체험이나 사상(事象)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변용(變容: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하여 전혀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각각의 시에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보이는 현상 너머의 이면과 본질을 보아내는 그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각이 담겨 있어 독자로 하여금 새로움과 경이에 눈 뜨게 한다. 그래서 시에는 독자적인 개성이 중요하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시 창작을 위해서 시인은 이미지를 변용시키고 비약적으로 결합하여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 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   말이 몽골초원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이리로 온다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바람소리와 더불어   지그재그로 달리는 네 개의 다리가 어지러운 곱하기 곱하기를 한다   앵글로 아랍은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름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염색을 하고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   할아버지의 몽골 초원이 그리워 긴 입을 들어 힝힝거리며           (중 략)   서울 아파트의 말매미가 한거번에 운다   말매미의 말은 우랄알타이지방의 거친 말이다                 -김규화 「말 ? 앵글로 아랍」부분    김규화 시인의 위의 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인 결합으로 미끄러지는 시니피앙(signifiant:記標)들 사이에서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동음이의(同音異義)인 시니피에(signifie:記意)들이 새로운 제 3의 이미지로 변용되고 있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에서는 말-언어, 말-말(馬), 말-윷말, 말-마을, 말- 끝(末), 늙음 등 여러 가지의 동음이의어들이 중첩되어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혹은 각각 사용되어 ‘말’이라는 연상기법을 통해 여러 가지 변용된 이미지들을 비약적으로 결합시킨다. ㅁ, ㅏ, ㄹ 은 모두 유성음으로 그 발음만으로도 의성어나 의태어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음성상징을 느끼게 한다.  그 중의 하나의 의미인 ‘말’에서 몽골초원과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 연상되고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보이는 앵글로 ? 아랍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멋진 모습이 ‘염색’한 것이 되어 여기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다시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로 변용된다. 2연에서는 ‘할아버지의 몽골초원’을 그리워하는 말의, 몽골에서의 자유롭고 힘찬 나날의 삶이 묘사된다. 그러나 3연에 와서는 다시 ‘말’이라는 시니피앙과 결합되는 ‘말매미’가 등장하면서 시적 공간은 몽골초원에서 갑자기 시인의 사적 공간인 서울 아파트로 옮겨오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말매미들의 울음에서 ‘말(언어)’을 연상하고 그 말을 다시 ‘우랄 알타이지방의 거친 말’로 변용시킨다. 이 시는 얼핏 보아서는 이미지의 비약적 결합과 변용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지만,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앵글로 아랍에서 연상되는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거센 박차를 받아라’라는 역동성과 함께, 말매미의 ‘거친 말’까지 전체적으로 용감하고 힘찬 느낌을 주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친 말’에서 ‘서울’의 말(언어)의 현주소를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감정의 유로’에서 창작되던 낭만주의 시와는 다르게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말 사전’을 찾아가며, 여러 가지 지식을 동원하여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한다. 특히 다층구조를 기본으로 하이퍼링크로 창작되는 하이퍼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과 함께 더욱 치밀한 구조가 요구된다.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든다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린다 KTX보다 빠른 속도로 풀리는 타임캡슐 어둠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줄장미 붉은 꽃송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쏟아내는 웃음소리 자지러진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술래는 잘 익은 꽈리의 가슴팍을 열어젖힌다 덩그런 태양이 붉다 한가득 입에 물고 햇덩이를 굴린다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 그대와 나 사이에 서면 바람은 구름에 안겨 고개를 넘고 구름은 바람에 업혀 사막을 건너간다 그런 날이면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 라일락 향기가 난다 흙탕물 묽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거린다                             -김예태 「사진을 보다」전문     김예태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행위를 ‘시간의 화석을 꺼내’드는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어서 그것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고 ‘타임캡슐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일어서는 것으로 묘사하여 이미지의 변용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사진을 보는’ 행위로 인해 시적 화자는 단숨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동무들과 민속전래동요를 부르며 즐겁게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손에 손을 잡고 웃음소리 자지러지게 쏟아내는 아이들은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붉은 꽃송이들’로 빛나게 변용된다. 또한 잘 익은 ‘꽈리’를 ‘덩그런 태양’으로, ‘햇덩이’의 이미지로 변용시킴으로써 그 시절의 화자는 ‘햇덩이’를 입에 물고 굴릴 수 있는 태양의 친구가 된다.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개념으로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흘러가는 역사 속의 일반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에 비하여 카이로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특별한 기회와 의미를 갖는 시간이다. 시인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도 카이로스의 개념으로 순식간에 초월하여 자신이 가고 싶은 곳, 가고 싶은 시간 속에 자신을 데려다 놓는 마술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드는 이미지의 제시로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 이미지는 다시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를 화자에게 불러주고, 그곳에서는 삶을 건너는 힘에 겨운 고개도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도 구름에 안겨, 바람에 업혀 힘들이지 않고 건너갈 수 있다.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도 라일락 향기가 나고 ‘흙탕물 붉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반짝이는 환희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처럼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과거와 현재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결합시키고 변용시켜 새롭고 환희로운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방죽의 물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을 때   첫 해의 열매를 큰 짚가마니에 담아 주시던 아버지   이듬해 가을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마니 속의 꿈을 끌고   수줍게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기다림이 부풀리는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고운 잎사귀에서   첫 가을도 우주도 익기 시작했다   섬으로 가득 채워진 가을을 안았다   장대 끝에 꺾여 땅에 내려온   수많은 붉은 해를 누이며   가을의 투명한 창을                 -정숙자 「고욤나무」부분     정숙자 시인은 주렁주렁 달려 익어가는 고욤나무 열매를 ‘태양의 빛을 가득 담은 작은 전구’라는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표현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욤의 못생기고 작은 열매가 순식간에 환하게 빛을 내는 발광체처럼 우리 마음을 밝게 비춰주고 아울러 남루한 우리 삶도 밝게 비춰줄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해 준다. 이처럼 하나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시인은 독자의 마음을 밝고 희망차게 하기도 하고 어두운 수렁을 지나게 하기도 한다. 그 이미지는 다시 ‘가마니 속의 꿈’으로,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생명으로, 익어가는 우주로 무한한 변용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섬으로 가득찬’ 가을이 되어 화자의 품에 안긴 고욤은 다시 ‘수많은 붉은 해’가 되어, ‘가을의 투명한 창’이 되어 끝없이 꿈꾸게 하는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춰준다.     뛰어내리기 바쁘게   스스럼 없이 몸을 포갠다   하나밖에 모르기 때문일까      (중 략)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에   개들이 좋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연애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권숙월 「오랜 연애를 위하여」부분     권숙월 시인은 눈이 내려 쌓이고 그 위에 또 쌓이는 것을 보면서 ‘이루지 못한 연애’를 비로소 이루어 ‘한 몸 되는’ 것으로 ‘눈’의 이미지를 변용시킨다. 그것은 너무도 절실하여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이며 마침내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전부를 바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하나 밖에 모르’는 연애를 ‘이루지 못하는’ 자기 나라를 버리고 겁 없이 뛰어내려 몸을 포개는 사랑을 보면서 화자는 조금 더 더디 녹는, 오래 함께 몸 포개고 싶은 눈의 마음을 짐작해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를 헤아린다. 이처럼 한 번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을 놓아버리면 끝장이었다//   암벽이 그의 하늘이었던 것//   절친한 하늘//   무서운 하늘//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 쪽을 내려다보니//   세상은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암벽에 매달려 있는 것//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눈 감고 눈 뜨고 하늘의 입술에게 입을 맞추었다                         -안수환 「지상시편 Ⅵ부」     안수환 시인은 삶에게 ‘암벽타기’라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아슬한 높이에 매달려  밤마다 암벽을 기어오르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것이 우리네 ‘살이’라고 변용시켜 비유적으로 일러준다.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기어올라야 하는 암벽은 때로 우리에게 ‘절친한’ 가족이며 이웃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고 함의하는 ‘하늘’이기도 하고, 때로는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을 수 없는 ‘무서운’ 칼날이기도 하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쪽을 내려다보니’ 에 이르면 시점의 차이를 일깨워준다. 반대의 시각, 제 3의 시각에서 현재의 나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움과 낯설게 하기는 시인만의 특권이며 시인만의 탁월한 변용능력이다. 이러한 반대의 시각에 의해 변용된 새로운 이미지가 태어나고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깊이를 터득하게 된다. 비록 ‘암벽타기’같은 나날의 삶이지만 때로는 ‘하늘의 입술’에 입을 맞출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쩜 저리 여린 것이   애벌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날 수는 있을까   젖은 날개는 언제 마를까   순한 그 고요 앞에서   박새의 작고 뭉툭한 검은 부리가   번개처럼 날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긴다   있던 자리에    애기나비가 없다                            -박정원「사라진 우주」부분     박정원시인은 ‘막 깨어난 애기나비’를 하나의 ‘우주’라는 확장, 변용된 이미지로 제시한다. 애벌레 자체도 하나의 우주이지만, 그 애벌레의 우화(羽化)는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하는 번데기의 어둠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죽음과도 같은 어두운 터널을 믿음 하나로 거쳐 나와 비로소 탄생된 크나큰 우주인 ‘순한 고요’가 박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충격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기는 절묘한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 세상’이 오다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심정을 ‘층층나무 이파리들’의 담담한 눈길을 통해 제시하는 이미지 등에서, ‘사라진 우주’에 대해 이 작품이 주는 안타까움과 충격이 더 큰 파장으로 확장된다. 他者의 모든 생명에 대한 생명존중의식과 측은지심이 담담한 묘사적 이미지로 표현되어 더욱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처럼 이미지의 변용과, 변용된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할 수 있는 것이 시쓰기의 묘미이다.   이미지의 변용은 새로운 발견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눈은 끝없이 사물과 상황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발견을 하며 ‘낯설게 하기’를 통해 파격적인 새 패러다임과 새 세계를 독자 앞에 제시해준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시인 이혜선의 문학서재 | 글쓴이 : 이혜선| 원글보기   
65    글쓰기 요리법 / 로사리오 페레(Rosario Ferré) /박 병 규 옮김 댓글:  조회:1285  추천:0  2019-01-27
  글쓰기 요리법 로사리오 페레(Rosario Ferré)/박 병 규 옮김       아리스토텔레스가 음식을 만들었더라면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을 텐데. ― 소르 후아나     I 프라이팬에서 불길로 들어가는 방법           오랜 세월에 걸쳐 여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글을 썼다. 에밀리 브론테는 열정의 혁명적 특성을 보여주려고 글을 썼고, 버지니아 울프는 죽음의 공포, 광기의 공포를 이겨내려고 글을 썼으며, 조안 디디온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히려고 글을 썼다. 그리고 클라리세 리스펙토르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유를 알려고 글을 썼다. 내 경우, 글은 건설적인 동시에 파괴적인 의지의 표현이자, 성장가능성과 변화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나는 내 자신을 한 글자 한 글자 구축하기 위해 글을 쓴다. 또한 비존재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려고 글을 쓴다. 이런 의미에서, 모어(母語)라는 말이 최근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모국어라는 말의 의미는 약 이천년 전 요한이라는 유대인 작가도 분명하게 인식한 것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로 요한복음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도 요한은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였다. 그리고 후대의 신학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건 간에, 창조의 원리로서 말씀이란 문학적 의미였다. 요한이 말씀에 부여한 이 의미를 나는 언어,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말에 부여하고 싶다. 부어(父語)는 자동사일 수도 있고 타동사일 수도 있으며, 현재나 과거나 미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어(母語)는 결코 변하지 않으며,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우리가 모어를 신뢰하면, 모어는 우리들만의 길을 개척하자고 틀림없이 손을 내밀 것이다.         사실, 나는 말을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말 덕분이다. 따라서 말을 아주 신뢰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보다 더 신뢰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인생이란 게 거친 바람 앞에 나부끼는 부조리극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말은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내 자신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돌려주었다. 이러한 건설적 필요성은 사랑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 자신을 재창조하고, 세계를 재창조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게 영원하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글을 쓴다.         그러나 글을 쓰는 내 의지 속에는 파괴적인 의지도 있다. 내 자신을 멸절시키고, 세계를 멸절시키려는 의도이다. 말은 본성적으로 모르는 게 없다. 낡고 부패한 것을 일소하고, 새로운 것을 세울 때를 안다. 내가 이 세상의 부패와 관계하면 말은 나를 향해 칼을 겨눈다. 나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글을 쓴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깊은 실망감 때문에 글을 쓴다. 이러한 실망감에서 삶을 재창조할 필요성이 움트며, 현실을 한결 인간적이고 살만한 곳,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토피아적 인간과 세상으로 대체할 필요성이 싹튼다.         이러한 파괴적인 의지는 내가 느끼는 증오의 필요성, 복수의 필요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나는 현실에 복수하고 내 자신에 복수하려고 글을 쓴다. 나에게 그토록 상처를 주고, 나를 그토록 유혹한 것을 영원히 보존하려고 글을 쓴다. 상처만이, 깊은 모욕만이(이 말은 결국 내가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느 날 내 가슴에 인간적 표현의 힘을 창출할지도 모른다.         이제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의지를 내 작품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려고 한다. 처음으로 단편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타자기 앞에 앉은 날, 글을 써서 집을 얻고, 연간 500파운드 남짓한 돈으로 독립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혼녀였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아무튼 그때는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자신의 지적, 정신적 공간을 포기했으니 말이다. 완전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느 순간에 내 자신을 등져버리게 된 것이다. 통념에 따라 아내로서 의무를 다하려고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게 되었다.          아무튼 항상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안온한 삶, 즉 위험도 없지만 그렇다고 책임도 없는 그런 삶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가정의 품안에서 살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다시 말해서, 내 손으로 지식을 얻고, 예술을 하고, 모험을 하고, 위험을 맛보고 싶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얘기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일은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는 일이었다. 삶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인생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기쁨과 공포의 공모자로 만든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종말로서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삶을 모르는 죽음, 아무런 경험도 하지 못한 죽음과 대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죽음은 너무 무자비하고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들은 얘기로는, 순수한 사람들, 살아보지 않고 죽은 사람들, 자신의 행동으로 아무런 손익계산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은 림보로 간다. 천국은 선인의 몫이고, 지옥은 악인의 몫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열심히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림보에는 여자들과 아이들만이 있다. 우리들은 어떻게 림보에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랫동안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다. 단편을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을 향해서 첫발을 떼어놓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한편으로 흥분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가 죽었다. 마치 내가 태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림보의 문을 빠끔히 열고 바깥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만약 그 목소리가 거짓이라면, 내 의지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동안의 희생은 헛고생이 되고 말 것이라고 되뇌었다. 착한 부인과 가정주부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내차버렸으니 프라이팬에서 불속으로 뛰어든 꼴이었다.          당시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복음의 전도사나 마찬가지였다. 두 작가에게서 글 잘 쓰는 법을 배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적어도 졸필을 면하는 방법은 배우리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두 작가의 책을 모두 읽었다. 건강한 사람이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보약을 먹듯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 예전의 여성작가들과 동시대의 많은 여성작가들을 죽게 만든 나쁜 병에 걸리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독서가 여성작가로서 갓 출발한 나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손은 아직도 불 위에 올려놓은 프라이팬을 잡던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공격적으로 펜을 휘두르는 손이 아니었다. 시몬이나 버지니아는 여성작가들의 성취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을 아주 가혹하게 비판했다. 시몬의 견해로, 여성작가들은 전통적인 주제, 이를테면 자신의 존재를 한정시켜버린 관습과 교육을 고발하거나 사랑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해왔다. 이런 주제로 자신을 국한시켜버리는 것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역량을 적절하게 내면화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시몬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 문학, 철학은 새로운 자유, 즉 개별 창조자의 자유 위에 세상을 세우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야망을 성취하려면 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위상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시몬의 견해에 따르면, 여성은 문학에서 건설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내면적인 현실에서는 건설적일 필요가 없으며 외적인 현실, 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서 건설적이어야 했다. 시몬이 보기에 직관, 비이성적인 힘과의 접촉, 감성적인 능력은 매우 중요한 재능이지만, 어느 면으로 보면 부차적인 재능이었다. 세계의 작동원리, 즉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의 질서는 직관과 감성이 아니라 이성과 지식의 빛에 비추어 결정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앞으로 여성은 이러한 테마를 문학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버지니아는 객관성과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버지니아는 여성문학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게 객관성과 거리라고 말하면서 과거의 여성 작가들 가운데 오직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만 예외로 인정했다. 두 작가만이 셰익스피어처럼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글을 쓰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버지니아는 “자신의 성(性)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조금이라도 불만을 강조하거나, 비록 정당하고 할지라도 대의를 무시하거나 의식적으로 여자 입장에서 말하는 것은 여성작가에게 치명적이다.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러한 여성작가들의 책에는 일탈과 왜곡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되면 건전한 판단력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반쯤 미쳐서 글을 쓰는 것이다. 등장인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이는 자기 운명과 전쟁을 하는 것이니, 모순과 좌절 속에서 요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버지니아가 보기에, 여성문학은 파괴적이거나 격분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작품처럼 조화롭고 투명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선택한 주제는 세계였고, 문체는 완벽하게 중성적이고 차분한 언어였다. 시몬과 버지니아의 이러저러한 충고를 따라서 주제의 핍진성이 잘 드러나도록 매진하면 될 것 같았다. 이제 이야기의 단초를 찾는 일만 남았다. 헨리 제임스는 소설에 수많은 창이 있다고 했는데, 이 중에서 나만의 창을 찾아서 주제 속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나는 역사적인 일화를 선택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사탕수수 단작경제에 기초한 농업사회에서 도시화된 산업사회로 변화가 우리나라 부르주아에게 의미하는 바와 관계있는 일화 말이다. 20세기 초에 발생한 그러한 변화는 기존 가치의 상실을 야기했다. 토지로부터 이탈이 있었고, 착취에 기초한 가부장적 행동양식은(때때로 이러한 가부장적 행동양식은 기독교적인 자선과 윤리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이제는 미국에서 유래한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법칙으로 대체되었다) 잊혀졌으며, 지방에 전문직 계급이 등장하면서 예전 지배계급 즉 사탕수수 농장주 중심의 과두세력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런 방향설정에 따라 선택한 일화는 어느 모로 보나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건설적이라거나 파괴적이라는 쓸데없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도 없었고, 신물 나는 여성작가 논쟁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이야기의 배경을 선택한 나는 타자기에 손을 올려놓고 글을 쓸 준비를 했다. 손가락 밑에서는 로마자 26글자가 웅장한 악기의 음표처럼 언제든지 튀어오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텅 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자료도 많이 준비하고, 그렇게 이야깃거리도 많았건만,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이 정도면 초보자라도 단편 정도가 아니라 소설 10권을 쓰고도 남을 분량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쉽지 않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필요하다면 밤을 새울 각오도 했다. 그리고 익기만 기다리면 첫 단편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집중만 하면 언젠가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리겠지. 그런데 날아 밝아오기 시작했다. 서재 창문이 자줏빛으로 물들었을 때는 타자기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주변에 널려진 재떨이는 전사자의 납골함 같았고, 식어빠진 커피잔은 쓸데없이 포위한 도시의 성곽 같았다. 그렇게 처참한 밤을 보내고 나자, 단편을 쓰고 작가가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눈물겨운 교훈은 얻은 게 다행이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곤경에 처하기 마련이며, 내가 창작에 실패했다고 해서 소설을 애호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야기는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평소에 나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은 그게 문학인 줄도 모른다는 데 놀란다. 그와 유사한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어느 날 오후, 숙모 집에 점심 초대를 받았을 때였다.          숙모는 식탁머리에 앉아서 찻잔에 꿀을 넣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20세기 초엽 멀리 떨어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여주인공은 숙모의 먼 친척으로 인형을 만들 때 꿀로 속을 채웠다. 그 여자는 남편의 희생물이었다. 술주정뱅이에 머리가 좀 모자란 남편은 부인의 재산을 탕진하고 막 나중에는 집에서 쫓아내더니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숙모 집안사람들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친척여자에게 집과 식량을 대주었다. 형편이 넉넉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사탕수수 농장은 몰락 직전이었다. 이렇게 뒤를 돌봐주자 친척여자는 보답으로 꿀을 채운 인형을 만들어 숙모집안 여자아이들에게 주었다.          친척여자는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한 지 얼마 후, 아직 젊고 아름다웠는데 그만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오른쪽 다리가 까닭 없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친척들은 인근 마을 의사에게 진찰을 부탁했다. 외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의사는 첫눈에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치유불가능한 병이라고 허위진단을 내렸다. 그 돌팔이 같은 의사가 이상한 고약을 다리에 붙이는 바람에 친척여자는 불구자가 되어 한평생을 의자에 앉아 살아야했다. 이런 치료를 받은 동안 친척여자는 수중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돈마저 의사에게 다 털렸다. 의사의 행동은 두말할 필요 없이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는 내 심금을 울렸다. 날강도 같은 의사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20년 동안 착취를 당하면서도 체념하고 살아간 그 여자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숙모에게 들은 나머지 이야기는 여기서 되풀이 하지 않으련다. 내 첫 작품 「막내인형」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숙모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또 숙모는 순진하게도 이미 사라진 사탕수수 농장 시절을 찬양했으나, 농장의 일꾼들은 영양실조로 죽어 나가는데 농장주 딸들은 꿀이 든 인형을 가지고 노는 그 시절이 좋았다고 얘기하지도 않았다. 대충 들은 그 이야기에 내가 채워야 할 부분이 있었다. 한 계급의 몰락과 다른 계급의 대두, 가족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가치체계의 변모, 이기적이고 실용적인 세계관에서 유래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사취(詐取)가 그것이었다.         드디어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날 오후, 서재에 틀어박혀 내 눈앞에서 타닥거리는 도화선의 불꽃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쉬지 않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탈고하고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작품 전체를 읽어봤다. 객관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이었고, 여성작가 논란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난 작품이었다. 그때 내 우려가 모두 쓸모없는 것이었다고 깨달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두 번씩이나 착취당한 저 여자가 내 작품을 차지하고 앉아 비극적이고 완고한 베스타 여신처럼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었다. 주제는 내가 기획했듯이 역사적이고 사회정치적인 맥락에 잘 부합하였으며, 사랑과 불만과 복수까지도―그래, 이런 것도 알아야 했는데― 잘 드러내고 있었다. 피멍이 든 가슴을 안고 사탕수수밭을 내려다보면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저 여자의 모습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때까지 굳게 닫혀 있던 내 이야기의 창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그 여자였다.         나는 시몬을 배신했다. 여자의 내적 현실을 다룬 작품을 또 썼기 때문이다. 버지니아도 배신했다. 분노에 이끌려 단편을 창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품을 쓰레기통에 던지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시몬과 버지니아 견해에 비추어보면, 나는 형편없는 글을 쓰는 여성작가와 다를 바가 없었고, 그 작품은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물증이었으므로 없애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내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막내 인형」을 쓴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단편을 쓴지라, 이제는 그날 배운 교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시몬 보부아르나 버지니아 울프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단편(또는 시나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나 그 밖의 사람들 조언을 따르고자 하는데, 그 결과는 대부분 상상력과 언어의 마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를테면, 사전에 외적 현실을 구상하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주제를 궁리하더라도 내적 현실을 먼저 구성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또 중성적이고 조화롭고 거리감을 둔 문체를 구사하려고 하더라도 우선 내적 현실을 파괴할 용기가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작가가 작중인물을 묘사할 때도 항상 자기 자신을,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는 모습을 묘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존재에게 그 어떤 장점이나 단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내 인형」의 친척여자와 나를 동일시할 때, 다음 두 과정을 거쳤다. 한편으로는, 그 여자의 불행을 통해서 내 자신의 불행을 재구성하는 한편, 무엇이 그녀의 약점과 잘못(수동적인 태도, 안주하는 마음, 끔찍한 체념)인가를 깨닫고 내 이름으로 그 여자를 파괴했다. 그래서 그녀를 구하는 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작품에서 여주인공들은 훨씬 용감하고 훨씬 자유로워졌으며, 훨씬 적극적이고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아마도 「막내 인형」의 잿더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그 여자의 환멸 때문에 나는 프라이팬에서 문학의 불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II 불길 속에서 몇 가지를 건져내는 방법           지금까지 첫 작품을 어떻게 썼는지 얘기했으므로 이제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첫 창작에서 오늘 내가 어떤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지 얘기하려고 한다. 문학은 모순적인 예술, 어쩌면 가장 모순적인 예술일 것이다. 문학은 한편으로는 창작에 온 정열과 지식과 특히 의지를 다 쏟아 부어야 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예술이기도 하다. 작가가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 작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 양극단 사이에서 문학은 풍성해진다. 그리고 작가가 느끼는 만족감의 원천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내 경우, 이러한 만족감은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와 즐거움의 의지이다.          첫 번째 의지(이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로 대체하겠다는 것으로 작품 주제와 관계가 있다)는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후적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여성작가의 글쓰기 논쟁에서 또 나와 관계가 있는 사회정치적 문제에서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는 작품을 쓸 때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작품을 마치고 나서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글을 쓰기 전에는 이러저러한 대의에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불가능했다. 이러저러한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신조에 집착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러나 창조적 언어는 거세게 불어나는 강물과 같았다. 강안(江岸)으로 밀려드는 물살은 충성심과 신념을 붙잡아버리며, 작가는 진실에 휩쓸려간다.         내 세계관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회가 여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며, 사생활이나 공생활에서 여성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투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 가운데 여기에서는 여성문학의 외설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몇 달 전, 후안 라몬 히메네스 백주년 기념 만찬회에서 백발이 희끗희끗한 유명한 비평가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음식을 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작품을 언급했다. 그 사람은 짓궂은 웃음을 띠고,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이 한쪽 눈을 찡끗하더니 저의가 있는 어조로 물었다. 내가 외설적인 단편을 썼다고 하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번 읽어보게 보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순간에는 젊잖게 나무랄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희끗희끗한 머리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으로는 희끗희끗한 게 아니라 초록색 같기도 하다. 아무튼 쉽게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울적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다음에도 비평가들 사이에 내 작품은 『오양의 이야기』의 예술적 모사라는 소문이 도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물론 그 저명한 비평가에게 내 작품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쾌한 감정이 조금 누그러지자 여성문학에서 외설의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다짐했다. 그 초로의 비평가는 문학을 마치 남성적이고 사적인 영지라도 되는 듯이 여기는 노골적인 성차별 비평가의 전형이라고 확신이 섰다. 그러나 이런 비평가들은 거의 멸종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일을 잊기로 하고, 이번 기회에 외설의 문제를 천착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여성문학의 외설을 다룬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현재 여성문학을 다룬 대부분의 비평은 여성이 쓴 것으로, 이들은 마르크스, 프로이드, 성 혁명 등 매우 다양한 시각에서 여성의 문제를 다룬다. 다양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여성비평가들은 ―예를 들어, 산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 메리 엘런 모어즈의 『여성 문인』, 패트리샤 메이어 스팩스의 『여성의 상상력』, 에리카 종의 다양한 글―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즉, 폭력, 분노, 상황 부적응은 오랜 세월 동안 여성문학을 가능하게 만든 에너지원이었다는 것이다. 17세기 래드클리프의 고딕소설로 시작해서 브론테 자매의 소설과 매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조지 엘리어트의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 』을 거쳐 진 리스, 이디스 워튼,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이르기까지(『델러웨이 부인』은 사회적 안주인의 냉엄한 생활에 대한 승화된 해석, 시적인 해석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이러니와 비판적인 시각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여성문학의 특징은 공격적이고 고발적인 언어였다. 모두들 분노하고 반항했다. 물론 다른 여성작가들에 비해서 좀더 아이러니하고, 좀더 현명한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이 비평가들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현대 문학에서 외설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여성문학에서 성적으로 금지된 언어의 사용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폭력적 경향의 필연적인 귀결인데도 불구하고 외설이라는 주제를 다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성작가들이 그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33년 미국에서 『율리시즈』의 외설 논쟁이 막을 내린 이후 출판된 소설 가운데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한 작가로는 아이리스 머독, 도리스 레싱, 카슨 맥컬러스가 있다. 이 작가들은 처음으로 ‘fuck’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했다. 한편, 에리카 종은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저속한 어휘를 구사했기 때문에 유명세를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페미니즘 문학을 다룬 고상하고 수준 높은 비평은 이에 대해서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외설의 사회학적 정치학적 함의까지 고려하여 깊이 천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문제를 꺼낸 목적은 다름 아니라 작가로서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의 일예였다. 아무튼 그날 연회에서 저명한 비평가가 나를 가리켜 외설문학의 옹호자라고 했을 때까지도, 나는 어떤 목적으로 작품에서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했는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현대 여성비평이 이 난처한 주제를 끈덕지게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내 의도는 바로 칼끝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우리 여성들에게 휘둘러온 성적 굴욕과 낯 뜨거운 모욕이라는 칼끝으로 사회를 겨누고, 수용할 수 없는 낡은 편견을 겨누는 것이었다.          외설이 전통적으로 여성을 굴복시키고 비하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이제는 여성을 구출하는 데 이중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단편 「여자들이 남자들을 사랑할 때」나 「네 곁에서 천국으로」 같은 작품에서 외설적인 언어는 여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불의 앞에서 작중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므로, 사람들이 나를 포르노 작가로 간주해도 상관없다. 이로써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내 의지가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에 나는 만족한다.         그러나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는,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의지와 마찬가지로, 양면을 지니고 있다. 이 양면은 제3의 필요성 때문에 떼어낼 수가 없다. 동전 옆면에서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이 제3의 필요성란 바로 즐거움의 의지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텍스트의 몸에 대한 앎이며, 동시에 지적인 앎이다. 오직 즐거움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특수한 것―일반적인 것의 경험―의 증언을 우리 역사와 우리 시간에 대한 증언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네루다가 잘 알고 있었듯이(네루다에게는 점잖은 말도, 비속한 말도, 위선적인 말도 없었다. 오로지 사랑받는 말만 있었다) 즐거움을 통해서 몸의 피부에서 ‘피부’라는 단어를 용해시킬 때, 이러한 텍스트의 몸에 형태를 부여할 수가 있다.         남여작가와 말 간의 백열하는 즐거움은 한 번의 시도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다. 욕망은 저기 있는데, 즐거움은 우리를 피해 달아난다. 말의 베일에 들어붙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간다. 말의 간극 사이에 매달려 있다가 손끝만 대도 미모사처럼 오므라든다. 처음에는 말이 작가의 요구를 외면하고,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므로, 작가는 앞이 깜깜한 절망 속에서 억지로 말을 깎고 끌어내리고 사랑하고 함부로 다루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말은 점점 온기를 회복하고 움직이고 숨을 쉬고,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맥박이 뛰고, 마침내 작가의 욕망을, 지겹도록 끈질긴 작가의 요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때 말은 폭군이 되어 작가의 생각과 음절을 지배하고, 밤낮없이 작가의 시간을 독차지하고 앉아 자기를 내팽개치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하여 말 속에서 잠을 깰 정도가 되고, 말 또한 직감을 갖게 되면 육화에 이른다. 텍스트의 몸에 대한 앎이라는 신비는 마침내 즐거움의 의지 안에 있게 되며, 작가는 이러한 의지로 다른 의지, 즉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나 세계를 구축하고 파괴하겠다는 의지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앎은, 내 생각에 텍스트의 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지적인 앎이다. 이는 텍스트의 욕망이 나를 백열상태에 이르도록 채근한 결과이다. 모든 남녀작가들은, 모든 예술가들은 육감을 통해서 작업을 해오던 몸이 언제 결정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지 알고 있다. 이러한 순간에 도달하면, 단 한 마디의 말(단 하나의 선線이나 해설)이라도 더하게 되면 작가와 작품 사이에 사랑스러운 씨름의 결과로 생겨난 미의 상태, 미의 불꽃은 즉시 꺼져버리게 된다. 그런 순간은 항상 경이롭고 또 경의를 표하고 싶은 순간이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이를 제빵공이 언제 반죽이 다 되었는지를 아는 신비한 순간과 비교했으며,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텍스트의 몸을 통해서 피가 한 방울씩 흐르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단편을 끝냈을 때 이러한 앎이 내게 주는 만족감은 문학의 불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구해냈다는 것이다.     III 불길을 지피는 방법           이제 모든 문학의 불길을 지피는 데 필요한 저 신비한 연료, 상상력이라는 연료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하련다. 이 문제를 얘기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는 가끔 상상력의 존재에 대해 일반적으로 대중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상한 회의주의 때문이고, 둘째 문학 전공자와 일반인들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까운 지인들에게나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은, 어떻게 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폰세(내가 태어난 곳이다)의 유명한 포주 ‘이사벨 라 네그라’에 대해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과 상상적 현실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의 본질적인 속성이 무언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질문을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를테면, 매리 셸리가 제네바 호숫가의 산책로를 걷다가 키가 10피트나 되는 괴물을 정말로 만났을까하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내가 어렸을 때 『프랑켄슈타인』을 읽었고, 메리 셸리는 이미 백년도 더 전에 죽은 탓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허구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순진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많은 비평가들이 ‘이사벨 라 네그라’하고 안면이 있느냐, 그 여자가 운영하는 사창가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이렇게 넌지시 물어오면 도리 없이 내 얼굴은 빨개진다) 물을 때는 상상력에 대한 인식부재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비평은 작가의 생애 연구를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는데, 내가 철면피하게 자전적 요소를 이야기에 삽입했다는 끈덕진 믿음은 이러한 우려가 사실이라고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오늘날 생애 연구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작가의 생애가 어떤 식으로든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에도 말이다. 아무튼 작품은 일단 탈고하고 나면 절대적인 독립성을 획득한다. 그 후 작품이 작가와 관계를 맺을 때는 작가의 삶에 크고 작은 의미를 지닐 경우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작품 해설은 오늘날 남성문학 연구에서도 흔하지만, 여성 문학의 연구에서는 더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자면, 버지니아 울프나 브론테 자매의 생애를 다룬 최근 저작물의 분량은 이 작가들의 소설 전집을 능가한다. 여성작가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관심의 근원은 여성의 상상력이 남성보다 못하며, 작품 또한 남성작가와 비교할 때 잡다한 일상사를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상상력의 존재에 대한 인식 부재는 근본 원인은 사회에 있다. 상상력이 함축하는 바는 유희, 기존의 것에 대한 경시, 현존 질서보다 상위에 있는 가능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감성이다. 이 때문에 상상력은(문학작품처럼) 항상 전복적이다. 옥타비오 파스도 말했지만, 현대 정신에는 끔찍할 정도로 천박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실생활에서는 갖가지 무가치한 거짓말과 갖가지 무가치한 현실”을 용인하면서도 정작 허구는 배격한다. 이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항상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문학을 주로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교육기관에서는 수천가지 방법론으로 작품을 분석한다. 구조주의, 사회학, 문체론, 기호학 등이 그 예이다. 작품 구석구석을 뒤적거려 분석을 끝내고 나면, 작품은 산산이 쪼개져 형태소와 의미소의 구름만이 우리 주변을 떠다니게 된다. 마치 문학작품이 시계라도 되는 듯이 와셔와 너트 같은 부품들을 분해하여 메커니즘을 밝혀내려고 하는데, 이는 시계의 작동원리보다는 시간 표시 방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문학교육은 오로지 비평가의 관점만 용인된다. 전문가가 되어야, 문학의 분해자가 되어야 품위도 있고 보람도 있는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작가가 된다는 것, 변화가능성과 논다는 것, 상상력과 논다는 것은 전복적인 작업일 뿐, 품위도 보람도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우리 교육기관에서 문학창작과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작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생활을 하려면 부업을 할 수밖에 없다. 말로는 “예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쓰기를(문학비평이 아니라) 배운다는 것은 마술적인 일이다. 그러나 매우 특수한 일이기도 하다. 주문에도 비법이 있으며, 주술사는 필요에 따라 주술의 정확한 양을 재어 말의 그릇에 넣는다. 단편이나 소설이나 시를 쓰는 방법, 전혀 비밀스럽지 않은 방법은 비평가들이 고대 콥트인의 컵에서 건져놓았다. 그러나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작가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다.          문학 연구자가 우리 대학에서 배워야하는 첫 번째 교훈은 상상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모든 문학의 불길을 지피는 가장 강력한 연료라는 점이다. 작가는 상상력을 통해서 작품의 주요한 채석장인 경험, 자전적 경험을 예술로 변형시킨다.     IV 음식에서 진정한 지혜를 성취하는 방법           이제는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냄비 밑바닥에서 뱅뱅 돌고 있던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 테마는 오늘날 가장 뜨겁게 끓어오고 있는 주제가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이 주제를 여러분 식탁에 올려놓기가 두려웠다. 어쨌거나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게 존재할까? 남성문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여성 문학이라는 게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여성문학은 버지니아 울프가 바랐던 것처럼 감정과 감각에 기초를 둔 직관적이고 열정적인 문학일까, 아니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바랐던 것처럼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문학,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에서 영감을 얻는 문학일까? 오늘날 우리 여성작가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여성가치를 옹호해야만 하고, 조화롭고 시적이고 세련되고 외설적인 데가 없는 문학을 창작해야만 할까, 아니면 현대적인 의미의 여성가치를 옹호하여 전투적이고, 고발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실적이고 또 외설적이기까지 한 문학을 창작해야 할까? 우리는 코딜리아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맥베드 부인이 되어야 할까? 도로테아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메데아가 되어야 할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글은 항상 여성적이었다고, 여성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용어를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얘기했다. 버지니아의 이론은 여러 가지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여성작가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잘 써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 기법에 통달해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소네트는 14행으로 구성되며 규정된 음절과 운율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중성이다. 여성적이지도 않고 남성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여자도 남자처럼 완벽한 소네트를 쓸 자격이 있다. 릴케가 말했듯이, 완벽한 소설이 되려면 무한한 인내심으로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려야 한다. 이런 일에도 성은 관계가 없다. 남자가 완벽한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여자라고 못 쓸 까닭이 없다. 그러나 여자가 글을 잘 쓰려면 남자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일곱 번 고쳐 썼으나 버지니아 울프는 『파도』를 14번이나 고쳐 썼다. 여자이기 때문에 플로베르보다 두 배나 더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비평이 두 배나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말에서는 이단의 냄새, 코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는 고약한 음식 만드는 냄새가 난다. 그러나 이 글은 어쨌거나 글쓰기 요리법이다. 내가 주부에서 작가로 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와 요리를 종종 혼동한다. 사실 글쓰기와 요리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일치할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여성의 글쓰기는 남성의 글쓰기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의 본성과 상이한 여성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논리적인 설명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경험에서 찾는 것이다. 만일 여성의 본성이나 남성의 본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예술 작품의 창작에서 여성과 남성의 능력이 다르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남성과 여성의 능력은 동일하다. 이러한 능력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불변의 여성 본질, 성에 의해서 영원히 정의된 여성의 정신은 여성 문체의 불변성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이러한 문체는 과거와 현재 여성들이 쓴 작품의 연구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언어와 작품 구조의 특징이라고 한다. 오늘날 그와 관련된 이론이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측면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논리적이며, 구성 또한 면밀하고 찬란하다는 점에서 열정적이고 신비하고 악마적인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과 정반대된다. 오스틴과 브론테의 소설은 열린구조와 편린구조와 심리적인 미묘함을 천착하고 있는 리스펙토르나 엘레나 가로의 현대 여성작가의 소설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만약 문체가 남성이라면, 문체는 여성이기도 하다. 문체는 근본적으로 남녀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문학과 여성문학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집착하는 주제이다. 우리 여자들은 과거에는 정치적 과학적 모험적 세계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오늘날 이런 상황은 변했다. 우리 문학은 종종 우리 몸과 직접적인 관계에 의해 한정된다. 우리 여자들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먹여주며, 생존의 문제까지 걱정해준다. 자연이 우리 여자들에게 부여한 이러한 운명은 역동성에 걸림돌이 되고, 감정적 필요성과 직업적 필요성을 조화시키려고 할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하지만 그 점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신비한 힘과 접촉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여성 문학은 과거에는 남성 문학보다 훨씬 더 내적 경험을 천착했다. 역사, 사회, 정치와 그다지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여성문학은 남성문학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었다. 종종 금지된 영역, 비합리적인 사건, 광기, 사랑, 죽음과 관련된 영역으로 잠수했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우리 사회에서 그런 영역은 존재자체에 대한 인식만으로도 위험해진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다. 여자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섬세하고 참을성 있게 수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남성의 경험과 마찬가지도, 어느 정도는 변할 수 있다. 더 풍부해지고 확장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 글쓰기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지난한 논쟁은 오늘날에는 비본질적이고 무용한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여성작가들이 열린 구조를 사용하는지 아니면 닫힌 구조를 사용하는지, 시적인 언어를 사용하는지 아니면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하는지, 머리로 쓰는지 아니면 가슴으로 쓰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머니들에게, 초창기 여성작가들에게 배운 기본적인 교훈을 적용시켜 불에 달구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 글쓰기의 비밀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비법처럼 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오로지 재료를 조합하는 지혜에 달려 있다.◇     옮긴이 주 1) 출처: Rosario Ferré, "La cocina de la escritura." Sitio a Eros. México: Joaquín Mortiz, 1980, 13-33. 2)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Sor Juana Inés de la Cruz, 1648-1695): 스페인 식민시대의 멕시코 여성 시인. 최초의 페미니스트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조안 디디언(Joan Didion, 1934):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소설로는 『강물아 흘러라』(1963),『화이트 앨범』(1979)이 있다.  4) 클라리세 리스펙토르(Clarisse Lispector, 1920-1977): 우크라이나 태생의 브라질 작가. 언어의 문제, 여성의 문제를 천착함으로써 현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는 『야성(野性)의 마음에 다가서서』(1944), 『가족의 유대』(1960), 『어둠 속의 사과』(1961), 『살아 있는 물』(1973) 등이 있다.  5) 림보는 가톨릭교회에서 천국이나 연옥 또는 연옥 그 어느 곳에도 가지 않은 죽은 자들의 거처 혹은 그러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6) “초록색 같다”는 말은 음탕하다는 뜻이다. 7) 에리카 종(Erica Jong, 1942- ): 미국의 작가이자 교수. 1973년에 출판한 첫 소설 『날기가 무서워』 (Fear of Flying)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을 대담할 정도로 솔직하고 다루고 있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8) 진 리스(Jean Rhys, 1890-1979): 카리브 해에 위치한 영연방 도미니카에서 출생. 대표작은 1966년에 출판한 『드넓은 사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 9)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1862-1937): 미국 소설가. 소설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 1920)로 1921년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0) 도로테아(Dorotea):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선량한 여성. 11) 엘레나 가로(Elena Garro, 1920-1998): 멕시코 소설가. 작품으로는 소설 『미래의 기억』(Los recuerdos del porvenir, 1963) 등이 있다.    
64    이상李箱의 실험적 정신과 현대시의 실험적 양상- 유창섭 댓글:  조회:1433  추천:0  2019-01-22
이상李箱의 실험적 정신과 현대시의 실험적 양상                           유창섭. 시인. 본지 주간     2010년은 천재 시인 이상李箱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이 남겨놓고 떠난 흔적은 한국시단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근대적 문학에 필요한 시대적 흐름의 반영과 새로운 물결에의 접목은 그의 새로운 실험적 성향과 난해하고도 복잡한 그의 삶의 역정만큼이나 큰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그의 이후에도 현대시에서의 새로운 변화와 시적 형식, 또는 내용에 실험적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 일부를 후술하겠지만 오랜 시간 자신이 창안해낸 “무의미 시”라는 새로운 시적 성향의 탐구로 일생을 천착한 김춘수 시인이나, “날 이미지 시”의 내용을 전개하며 집착한 오규원 시인과 같은 개별적 실험에 일생을 바친 시인도 있고, 하나의 흐름으로 전후세대의 화두가 되었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든가, “해체시”, 또는 “상징시”, 그리고 최근의 “미래파”시라든가 지금도 진행 중인“형이상 시”라든가 하는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동안---그 하나의 업적으로 오랜 탐구와 연구의 집중을 가져오게 한 시인으로 이상을 꼽기를 주저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시적 성향이나 실험적 정신은 우리 현대시에 얼마나 의미있는 영향을 주고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한 것일까를 생각하여 보는 일은 시인들이 좋은 시를 쓰려는 일생의 작업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상李箱의 詩와 실험정신 ----(시 제1호)를 중심으로   1937년 이상과 김유정은 이땅에서 나란히 사라졌다. 김유정은 3월29일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상은 20일 뒤인 4월17일 스물일곱에 죽었다. 둘다 폐결핵이 원인이었고 요절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혼을 이해했던 절친한 문우였다.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구인회]에서 단짝으로 지냈던 이들이 죽자 문단에서는 그해 5월15일 부민관에서 합동추도식을 올렸고, 평론가 백철은 [파시즘의 도래를 앞둔 문학의 죽음]이라고 애도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소설 [날개]에서 번쩍이는 기지와 독설을 남기고 찬란하게 파산한 이상은 지금도 문학청년들이 한번씩 거쳐가는 통로이자 극복의 목표다. 이상과 함께 구인회 멤버였던 시인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으로 우리문학이 50년 후퇴했다”고 말했다. 김윤식 교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문제로 고민하는 문인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근대]를 파악했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에 초극하려 했던 이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문학이라는 [지방성]에 가두지 말고 세계문학의 반열에서 이상을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상은 본명이 김해경으로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건축 기사가 되었다. 31년에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고, 서양화 [초상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했다. 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 36년에 잡지 조광에 소설 [날개]를 발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때 다방 [제비] [69] 등을 경영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불온사상 혐의로 체포됐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지병인 결핵으로 결국 동경에서 사망했다.   이 두 문인 중에 詩의 천재로 인정받고 있는 이상에 대하여, 그것도 그의 작품 (시 제1호)에 대한 詩를 통해 실험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0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1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십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1937년 동경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요절한 시인이다. 출생을 살펴 보면, 그의 할아버지 김병복의 둘째 아들인 그의 아버지는 별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인지 큰아버지 밑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큰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이상은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장손으로 큰아버지에게는 양자가 된 아들로서 친 아버지에게 역시 아들로서의 귀한, 어쩌면 매우 처신하기 어려운 아들”의 위치에 있는 존재적 경험을 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환경에 있던 이상은 3세 때에 자기 친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친부모는 분가를 하게되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그에게 형식상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된 큰어머니에게는 데리고 들어온 자식이 있어 그 사이에서 이상은 알게 모르게 “심리적 박해”을 겪어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면 “심리학상”으로 이상은 친부모와 원치 않는 이별을 통해서 얻게 된 심리적 분리불안分離不安(seperation anxiety)을 경험하게 되고, 동시에 친부모와의 관계에서 다수의 경쟁자인 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라는 여러가지 얼굴의 부성적父性的 대상 사이에서 동일시 현상(identification phenomenon)의 혼돈(confusion)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거기에다 덧붙여서 큰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형제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에 의해 형제충돌(sibling rivalry)을 경험하므로서 정신적 외상外傷을 입었을 가능성이 컸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장애 요인들은 이상의 詩에 투영되어 여러가지 심리적 방어기제(psychological defense mechanism)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이 詩가 발표되던 1934년경에는 세계적으로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sur-realism ; 1920년대에 일어난 예술운동의 한 경향으로 인간을 이성理性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초현실적이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운동)과 반이성주의적反理性主義的 예술운동의 하나인 다다이즘(dadaism ;일체의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예술 형식을 파괴하는 운동으로 후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됨)이 풍미하던 시절이었고, 한국의 몇 안되는 동경 유학파 지식인들 중의 하나인 이상에게도 그러한 사조思潮의 흐름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이상의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당시 풍미하던 예술적인 흐름을 모방한 “하나의 詩的 실험實驗”이라고 보며, 하나의 치기稚氣로 해석하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모방적 실험이든, 아니면 그 자신이 창안해낸 실험 정신의 극치이든 그것은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도전적인 시적 실험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를 보면 한국의 지성인으로서 어찌보면 마음 편안하게 나라 잃은 젊은이가 용기있게 항거할 수도 없는 가슴 속의 수치심, 또는 마음 속에 담고 있던 막연한 울분이나, 자신이 자라난 가족환경 속에서 얻어진 무의식 속에 침전되어 있던 정신적인 상처가 복합적으로 그의 詩에 하나의 투사(投射;projection)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詩의 제1호에 있는 詩는 많은 사람들의 해석적 도전과 해체를 위한 연구 대상이 되었던 대표적인 詩이다.   "모든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고 외쳤다는 이상李箱. 그는 여기에서 절망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제목에서부터 논란이 일었다. 사전에 보면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이 있을 뿐, “오감도烏瞰圖”라는 말은 없다. 여기에서 이 시가 실린 조선일보의 활자 선택에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이상의 의도적인 제목이라는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상의 의도적인 제목이라는 해석은 이 시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그려내기 위한 장치로서 시의 제목에 “음울하고 불길한 새”의 상징인 “까마귀(烏)”를 도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즉 불길하고 갇혀버린 탈출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까마귀의 눈으로 내려다 보며 쓴 형상의 글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먼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13'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의 의미는 (1)당시 우리 나라의 도(道)가 13도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한다는 것, (2)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한다는 것, (3)무수(無數)의 상징이라는 것, (4) “13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로서의 상징이라는 것, (5)일종의 국외적(局外的) 성격을 띤 사물을 상징이라는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 작품에서의 의미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감도”의 까마귀의 불길함과 연관지어 볼 때, 이 13이라는 숫자도 불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러면 각 시의 구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앞의 말을 뒤집어 놓는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결국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로 시작하여 13번의 반복 끝에 매달아 놓은 이 절망의 장치는 피 할 수 없는 숙명적인 절망(=막다른 골목)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무섭다고 그리오”라는 말로 시작하여 “무서운 것”으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같은 의미 전달이 13번이나 되풀이 되면서 처음 언술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느끼는 속도감이 점점 더 빠르게 진행되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 극도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음을 주목해 보면 더욱 뚜렷해 진다.   그 13이라는 상징적인 여러가지 해석 중 몇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이상의 무의식적 인식 속에 자리하고 있던 그 절망의 인식을 그는 이렇게 불길한 언어와 불길한 숫자와 연결하면서 절망적인 상황—“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라고 절망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피할 수 없이 포기하는 하나의 과정(=뚫린 골목이라도 적당)으로 인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에 그가 동경에 머무르다가 불온 사상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지병인 폐결핵으로 그곳에서 죽었다는 것만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노출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근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나약한 한 지식인으로서 식민통치를 하던 일본이라는 존재를 “무서운 존재”로 설정하여 우리나라 전국토의 제1도(제주도)부터 제13도(함경북도)까지 모두가 무섭다고 말하며 도망치는 모습을 상징하였다고 본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드러내놓고 저항할 수 없는 존재들—아버지,큰아버지, 할아버지, 또는 큰어머니와 같은 가족이라는 굴레를 포함하여 일본과 같은 압제자들—로부터 도피 하려는 의식의 강한 표출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처음과 마지막에 장치한 괄호 안의 언술을 보자.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그 작품 속에는 피하고 싶어하는--“자유로움을 향한 탈출”에 대한 강한 희망이 실려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의 편이 아니었다고 포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마찬가지라고 포기하고 있는 자세로, 마음 속으로만 탈출을 꿈꾸었을 뿐 실제로는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면서 그의 삶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는 것이 옳은 지적일 것이다.   그의 유년시절 겪었던 분리불안은 그에게 양가치(兩價値;ambivalance)라는 심리적 갈등상태를 야기시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 속의 갈등을 투사(投射:projecton)시키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어린시절의 정신적 피해가 꼭 그 어린시절에 정신적으로 자신을 꼼짝도 못하게 했던 가족에 대한 도피 또는 절망감으로부터의 탈출로만 노출되고 있다고는 볼 수가 없을 것이며, 그 경험들이 다른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반응하여 그를 옭죄는 사회적 굴레(=속박)들에 대해서도 그 같은 형태로 작용하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난한 삶이나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회적 고통을 상정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경제적으로는 크게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러한 뒷받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다방”을 경영하여 실패를 했다던가 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 당시 한국인의 전체적인 평균적 생활 수준으로 볼 때, 그러한 방황을 감당하면서도 마지막에 동경으로 건너가는 일까지 감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시대의 특권층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그의 삶이 정신적으로는 비참하였을지 모르지만, 요즘의 말로 말하면 정신적 사치 속에서 싹튼 삶에 대한 존재론적인 자유로움의 추구를 획득하지 못한 절망과 고뇌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이다.   어찌 되었건 이상의 이 는 개인적, 정신적인 사치라는 비난 보다는 우리나라 詩문학 발전에 기념비적인 “실험적 문제”를 제기시켜 놓았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듯 하다.   그의 첫째 여인으로 이야기 되는 금봉이와의 동거에서도 드러난바 있거니와 그것이 그의 소설 “날개”로 나타났다는 데에 이론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어린 시절에 겪은 심리적 갈등 상황은 어른이 되어서도 지울 수 없는 큰 멍에로서 작용한 것 같다. 그것은 누구라도 어릴 적의 여러가지 경험이나 사건 속에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정서적 상처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경우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과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시인들이 이 이상李箱의 읽기를 시도하여 왔다. 그의 시를 초현실주의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험적 시로 보는 사람도 있고, 자동기술법에 의한 심리적 실험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 읽기가 상당히 많은 부분까지 깊숙이 파헤쳐서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정과 그의 절망을 통하여 현대인의 절망을 드러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그는 일반적인 시 형식인 산문적 구조로 시를 썼고, 자유시 형식으로 쓴 것도 몇편—“명경”, 무제”, 거울”, 회한의 장”등과 같은 시들—이 있으나 그것도 깊이 들여다 보면 산문적 틀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발표한 이상李箱의 시詩들이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아니던 우리 시詩에 하나의 독특한 실험으로 빛나는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에서의 시적 실험과 양상     이 시대에 詩를 쓰는 사람들 중에도 끊임없이 실험정신을 가지고 새로운 시적 실험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에는 적어도 어떤 통일적인 자신의 의도가 확고한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을 경우에 그 실험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가벼움이나 건들거리는 모방으로, 또 자기 자신도 모르는 표현으로 자기를 감추며 애매성이나 난삽성으로 포장하려는 실험이나 과도한 언어의 비틀기나 목조르기와 같은 기초적인 문법적 소양도 갖추지 못하고, 문법을 뛰어넘으려는 실험은 그 자체로만 끝나고 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에 남다른 열정으로 시적 실험에 집중한 시인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무의미 시”로 대변되는 김춘수 시인이나, “날이미지 시”로 대변되는 오규원 시인, 그리고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시”나, 이후에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미래파 시인들의 시”와 같은 실험이 지속되었고, 일부는 계승 발전되어 새로이 조명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극히 일부의 인식에 그쳐 그 중요한 형식이나 의미론에 다가서지 못한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실험적 정신은 우리 한국시의 지평을 열어가고, 보다 더 넓은 인식의 세계로의 발견과 시로운 시의 등장과 새롭게 접목되는 시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시전문지에서 “우리 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우리 시의 문제점에 대해 정리된 두 가지의 관점이 있었다. 하나는 “실험의식의 부재와 복고적 서정성으로의 퇴행”이고 또 하나는 “소통불능의 자폐적 내면으로의 갇힘”이라는 점이었던 것 같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시가 서정성을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점과 시인들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바탕 위에서 창조해 내는 작품이 과연 내면의 소리를 외면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할 소지는 있지만, 시적 실험이 그러한 요소를 모두 배제한 실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바탕위에서 새로움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초점이 두어지고 있다고 볼 때 그러한 실험은 우리의 사상과 인식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시가 종전 보다 더 많은 아름다움을 다양하고 새롭게 담아내는 역할을 해 내게 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규원 시인의 육성으로 기록된 “날이미지 시”에 대한 일단을 인용하여 살펴 본다.     담쟁이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짝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빈 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 「하늘과 돌멩이」     이 작품은 ‘발견적 날이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적 날이미지’로 되어 있는 「지는 해」와는 다르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느낄 것입니다. ‘발견적 날이미지’로 되어 있는 날이미지시는 사실성 위에 새롭게 발견된 다른 의미가 부과되어야 합니다. 이 작품을 사실적 날이미지로 쓴다면 “담쟁이 덩굴이 뻗어 있다/하늘에서 새가 날고 있다/들찔레 꽃이 졌다/돌멩이 위로 하늘이 있다/길에 바위가 놓여 있다”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사실적 날이미지가 발견적 날이미지로 바뀌는 것은 그 뜻 그대로 발견적 시선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빈 자리를 만들고”라는 현상을 그 예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 현상의 사실적 표현은 “들찔레 꽃이 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인 내가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들찔레의 시선으로 본다면 꽃을 떨어뜨리는 순간은 자신의 일부를 버리는 시간인 동시에 또한 자신의 일부로서의 빈 자리를 만드는 시간인 것입니다. ‘존재가 사라지면 빈 자리가 생긴다’는 인식과 ‘사라지면서 존재는 빈 자리를 만든다’는 인식의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주체 중심의 시선이 아닌 반주체 중심의 시선이 발견적 이미지를 가능하게 합니다. 발견적 날이미지는 관념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낯설지만 분명 사실적이고 객관적입니다. ( “오규원 시인과의 대담“ 중에서 / 시와 세계/ 2004년 4월호)   다음에는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를 더듬어 본다 무의미시는 ‘서술적 언어 체계’속에서 이루어지고, ‘주체 중심의 심리적 세계’로서 심리적 주관적 묘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의 시 “나의 하느님” 한 편을 살펴본다.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비애’이며 푸줏간 살점‘이며 ’놋쇠 항아리‘라고 말하는데, 도무지 하느님과의 연상작용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언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뒷면의 심리적 주관, 즉 비유적 속성으로 읽혀야 마땅할 것 같다. ‘여자의 마음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금전적 대가로 생각된다. 태초에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세월이 가면서 인간은 정신적 가치는 잃어버리고 물질적 가치를 탐하는 형태로 변형되고 말았으니 어찌 하나님이 슬프지 않겠는가. 바로 인간이 물질적 향락에 탐닉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현대인의 모습에 하느님은 비애를 느끼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장치로서 푸줏간의 살점 정도로 표현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무의미하게 해체된 언어의 뒷면에 깊이 박힌 의미를 해석해내어야 하는 고통이 수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시적 실험에 수많은 세월을 바쳐 천착한 시인들의 실험적 양상을 모두 드러내어 섭렵하는 것은 지면상 어렵다. 그것은 좀 더 깊이있는 개별적인 탐구의 과제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우리 시대에 존재했던 시적 실험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가의 예를 들고 싶었을 따름이다. 현재에도 크고 작은 시적 실험정신이 투영된 시들이 탄생되고 있다. 이들은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내용으로 또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양상을 우리는 겨우 신춘문예제도 상으로 학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그것은 치기稚氣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새로움을 새로이 등단하는 젊은이에게만 맡겨둘 일은 더욱 아니다.   대체로 신춘문예에 나타난 시인들의 실험정신은 대부분 일회성에 그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직 문단에 나선다는 면허증, 그 당선에만 목적이 있었을 뿐, 그 이후의 시적 태도나 철학이 없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나 시를 창작하는 데에 자신만의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지 못한 경우에 그러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시적 실험이라는 것이 거대한 흐름으로 정리된다면 더욱 바랄 것이 없겠지만, 개개의 시인 자신이 커다란 물결을 창안해 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라도 언어적 실험이나 이미지의 실험, 또는 새로운 시선의 조립과도 같은 작은 실험들이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으로 믿는다.   시인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시적 정서를 발현해 내는 방법에 대하여 고뇌하고, 자신만의 어법으로 감동을 주는 정서를 노래하는 일은 바로 새로움의 추구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적어도 의식이 있는 시인이라면 언제까지나 과거의 형식이나 내용을 곁눈질 하면서 적당히 모방하면서 흔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자신의 그릇에 담고자 하는 사상들을 새롭게 탐색하고 투영하며 새로운 눈길로 형상화하여 선험적 태도로 시를 창작해 내는 실험정신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문제시. 명시 해설과 감상(자유지성사) 이상문학전집 1 이상문학연구(박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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