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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강조법 댓글:  조회:1022  추천:0  2019-01-31
강조법   생각이나 느낌의 일부를 강조하기 위해서 쓰이는 표현 기법이다. 현대에 와서는 잘 쓰이지 않으며, 특히 설명하는 글이나 주장하는 글에서는 더욱 사용을 꺼린다. 시에서 일부 활용된다. 국회의원 후보의 연설처럼 선동성(煽動性)이 강한 글이나 말에서 자주 등장한다. ※ 선동(煽動) [부추길 선, 움직일 동] 남을 부추겨 어떤 일이나 행동에 나서도록 함.   강조법에는 영탄, 반복, 열거, 점층, 대조, 과장 등이 있다.   영탄(詠嘆) : 감탄사, 감탄조사, 감탄형어미 등을 통해 감정을 직접적으로 강하게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아아!’, ‘오!’, ‘임이시여!’, ‘보았는가!’ 등인데, 현대시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며 자주 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예외적으로 김소월의 「초혼(招魂)」은 이 영탄법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반복과 열거 :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비슷한 내용을 열거하는 방식이다. 시에서 반복과 열거는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와 함께, 강한 운율감을 형성하여 때로는 주술적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반복과 열거의 기법을 활용한 광고가 중독성이 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이 시는 반복과 열거, 그리고 영탄법이 함께 쓰여 강렬한 정서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 - 의미 역시 일정한 구조를 이루면서 점층적으로 강조된다. 산산이 부서져서(1행), 허공 중에 헤어졌으며(2행), 그래서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 되었지만(3행), 그래도 너의 이름을 부르다가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4행).   점층(漸層) : 뜻을 점점 강하게 고조시켜 마침내 절정에 이르게 하는 표현법이다. 이를 거꾸로 하면 점강(漸降)이 된다. 점층도 뜻을 강조하는 효과와 함께 강한 운율감을 동반한다. ※ 점층법을 영어로 ‘climax(클라이맥스)’라고 하며, 점강법을 ‘anti-climax’라고 한다.     - 이 경우, ‘눈은 살아있다’가 점층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운율적 효과와 함께 대상(‘눈’)이 점점 초점화되어 의미가 강조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 밖에도 강조법에는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뜻을 강조하거나 선명하게 하는 대조(對照), 실제보다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표현하는 과장(誇張) 등이 있다. [출처] [공유] 시의 표현 방법 - 강조법|작성자 옥토끼  
35    비유법 댓글:  조회:887  추천:0  2019-01-31
시에서 받는 감동은 내용의 진정성에서도 오지만 표현의 아름다움에서 오기도 한다. 느낌이 깊고 독창적일수록 표현의 기교가 더욱더 요구된다. 아름다운 표현은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에서 나온다.     시의 표현 방법은 크게 비유, 강조, 변화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시에서만이 아니라, 설명하는 글, 주장하는 글과 같은 논리적인 글에서도 활용된다.   비유법   필자는 알고 있으나, 독자가 잘 알지 못하는 사물을 설명하려고 할 때, 또는 감정이나 기분같이 객관화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독자에게 눈에 보이듯이, 손에 잡힐듯이 느끼게 하고 싶을 때 ‘비유’가 사용된다.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원관념)을 다른 사물(보조 관념)에 빗대어 표현한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은 ‘유사성’의 원리에 따라 결합된다.   비유에는 직유, 은유, 활유, 의인화, 풍유, 대유(환유, 제유) 등이 있다.   직유(直喩)와 은유(隱喩)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이 ‘~처럼, ~듯이, ~같이, ~인 듯’ 등의 연결어로 맺어진 관계를 직유라고 하며, 이런 연결어 없이 곧바로 결합된 비유가 은유이다. 은유는 'A는 B이다', 또는 'A의 B'와 같은 형식으로 드러나며 가끔 원관념이 생략되기도 한다.     * 갓나희 여인들   * 층이오레 층이더라   * 백화원리(百花園裡) 온갖 꽃들이 만발한 뜰 안   * 녹수파란(綠水波瀾) 푸른 물결. 푸른 파도   * 비오리 오리과에 속하는 물새   * 개일색 다 뛰어난 미인   - 여인들을 다양한 새에 비유함으로써,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아름답다는 화자의 여인관을 드러내고 있다.       - 꽃을 '속삭임', '울음', '피 흘림', '핏방울', '정적', '호심] 등의 다양한 은유로 표현하여 생명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 사은유(死隱喩) : 처음 비유되었을 때는 참신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에 그 참신성을 잃은 은유. 쥐꼬리만한 봉급, 상다리가 휘어지게, 보름달 같은 얼굴 등   활유(蛞蝓)와 의인화(擬人化) : 무생물을 생물처럼 표현하면 활유, 무생물이나 생물을 인간처럼 표현하면 의인화가 된다. 무생물이나 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이 바탕에 깔려 있다.     풍유(諷諭, 알레고리allegory) : 비유의 방식 중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로서, 원관념은 숨기고 비유하는 말만으로 숨겨진 뜻을 암시하는 방법이다. 원관념은 풍자나 익살, 기지와 교훈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방법은 흔히 의인화의 과정을 거치는데, 의인화가 무생물이나 생물의 인격화(人格化)로 그치는 데 비해, 풍유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것을 보조관념으로 하고 원관념에 깊은 의미를 내포시키는 것이다. 우의적(寓意的) 표현이라고도 한다.     * 기린 성인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동물. - 이 시에서 김영랑은 ‘거문고’를 ‘울지 못하는 기린’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더 이상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일제 강점기의 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시에는 원관념이 끝까지 숨고 보조관념(‘거문고’)만 나타난다.   - 이규보의 「국선생전」과 같은 고려말의 가전체(假傳體)소설*도 풍유에 속한다. * 가전체소설 술, 돈, 지팡이, 대나무, 거북 등 사물을 의인화하여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교훈을 주고자 쓴 고려시대 한문학이다. - 이솝의 「이솝 이야기」, 고전소설 「장끼전」「별주부전」 등도 풍유의 방법을 이용한 우화(寓話)*이다. * 우화 인간 이외의 동물 또는 식물에 인간의 생활 감정을 부여하여 사람과 꼭 같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빚는 유머 속에 교훈을 나타내려고 하는 설화(說話).   대유(代喩) : 친구를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르는 방식이 대유이다. 별명으로 부르면 친밀감이 더해지고 그 친구의 특징을 더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어떤 사물의 특징으로 그 사물을 나타내면 환유(換喩)가 되며,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면 제유(提喩)가 된다.   (운명이 기구한 여자야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홍안’ 즉 붉은 얼굴은 여자, 특히 젊은 여자의 특징이다. '들'은 국토의 부분이다. [출처] [공유] 시의 표현 방법 - 비유법|작성자 옥토끼  
34    페미니즘 (feminism]) 댓글:  조회:1183  추천:0  2019-01-27
페미니즘 (feminism])        1. 개념 *페미니즘 (feminism):여성학, 여성주의-여성해방운동 ('여성'이라는 뜻의 라틴어 femina에서 유래)  남녀는 평등하며 본질적으로 가치가 동등하다는 이념. 여성 중심적이고 여성성 지향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여성 존중의식    *생물학적인 성(性)으로 인한 모든 차별을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지지하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불평등하게 부여된 여성의 지위•역할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여성운동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회복을 위한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189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나 관점, 세계관이나 이념이기도 하다. 여성 억압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페미니즘은 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급진주의•사회주의 등 여러 사상이나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더불어 발전했다. 1960년대부터 현대의 페미니즘을 지칭해 '여성해방운동'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이 권리와 평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를 정적으로 보는 관점이었다면, 여성해방운동은 억압과 해방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사회를 더욱 역동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인용)    *여성주의(女性主義) 또는 여권주의(女權主義), 페미니즘(feminism)은 다양한 사회 이론과 정치적 움직임 그리고 도덕 철학을 포함하며 주로 여성의 경험에 대한 관심, 구체적으로 여성의 사회.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한다. 사회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은 성 불평등을 끝내고 여성의 권리와 이익 그리고 사회 이슈를 대중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학계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젠더 불평등과 여성의 사회적 인식•지위를 기술하는 것에 집중한다.  몇몇 여성주의 학자들은 모든 형태의 위계질서, 기업과 정부, 그리고 모든 형태의 단체에 존재하는 질서가 탈중앙화 되고 극단적인 민주주의체제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그 어떠한 조직이라도 집중화되어 있다면 이는 남근중심적 가족 구조에 기반한 것이며 개혁하고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여성주의 학자들은 여성주의의 본질을 성과 젠더에 국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성주의 정치적 활동가들은 주로 재생산 권리 (낙태를 결정할 권리, 낙태에 대한 법적 제한의 제거와 피임에 대한 접근, 가정의 폭력, 임산부 휴가), 동등한 임금, 성추행, 차별과 성폭력 등을 포함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연구하는 분야들은 가부장제, 편견, 성적 대상화와 억압이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여성주의와 여성주의 이론의 주축은 스스로 모든 여성의 대표라 여기는 서양 백인 중산층 여성의 문제만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다양한 제 3세계 등의 여성주의 사상가들은 "여성"이 균질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그룹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였다. 새로운 조류를 타고 여성주의 운동가들은 다양한 배경에서 출현하였으며 여성주의 이론가들은 젠더/섹슈얼리티와 사회 정체성들, 이를테면 인종이나 계급의 교차점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주의가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이며 사회적 계급과 인종, 문화와 종교에 기반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운동으로 인식한다. 2006년 현재 수많은 여성주의 정당이 존재한다.(위키백과 인용)    2. 제 1의 물결 페미니즘 비평: 울프와 드 보봐르     * 아리스토텔레스: 여성은 어떤 특질들의 결핍으로 여성이 된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여자란 불완전한 남자    *페미니즘의 발생배경: 18세기말, 19세기초의 유럽은 신분제적 장애가 제거되는 과정에 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농노의 권리를 박탈하였던 법적 장애가 점진적으로 제거되었고, 개인이 자유롭게 스스로의 직업을 선택하고 장래를 결정하고, 재산을 보유할 수 있는 기회도 허용되기 시작하였다.  지위 면에서 농노나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었던 여성들도 당연히 이러한 변화를 자신들에게까지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19세기초까지 여성들은 선거권•피선거권은 물론이고 공직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정치단체 가입이나 집회참여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전통적인 제약이 페미니즘 사상의 태동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산업화가 수반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페미니즘의 대두를 도왔는데, 우선 가족제도의 변화, 즉 여성이 가사노동과 생산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던 가내 생산적 대가족제도가 소가족제도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에서 축출, 가정으로 밀폐되었던 중산층 여성의 반발이 그것이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요인은 계급구조의 변화이다. 시민계급의 급속한 성장과 더불어 개인의 능력이 강조되었고 상업, 산업, 행정 분야에서 전문화가 진척되었다. 이것은 전문교육을 받을 기회가 허용되지 않던 중산층 여성의 지위를 급속히 하락시켰다. 페미니즘의 첫 함성이 중산층 여성으로부터 터져나온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제 1의 물결 이전시기의 페미니즘 비평은 그 자체가 독립된 이론적인 담론이라기보다는 ‘제 1의 물결’ 관심사들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1) 버지니아 울프(1882-1941:영국))  페미니즘 이론에 중요한 공헌을 한 두 텍스트 출간-『자기만의 방』(1929)『3기니』(1938) 울프는 남성들과 비교하여 여성들의 물질적인 불이익에 주로 관심을 두었는데, 전자의 텍스트는 여성의 문학적 생산의 역사와 사회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후자는 남성의 권력과 직업들(법, 교육, 의학 등)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저서에서 울프는 육아 수당에 대한 요구와 이혼법 개정에서부터 여성대학과 여성신문에 대한 제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페미니즘 기획의 작성에 기여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는 여성의 글쓰기는 여성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여성의 경험을 탐구해야지, 남성의 경험과 관련된 여성의 경험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성별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서 도전받을 수 있고 변형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페미니즘에 공헌하였다.  페미니즘 비평에 있어서도 여성작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검토했다. 여성들은 그들의 문학적 야망을 가로막는 사회적 경제적 방해물들에 항상 직면했었다고 믿었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받은 제한된 교육( 오빠들과 달리 그녀는 그리스어 교육을 받지 못했다)을 의식했다.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분석에 사회학적인 차원을 포함시킨 최초의 비평가-제 2의 물결 페미니즘으로 이어짐) * 여성 작가들에 대한 에세이『여성을 위한 직업』: 자신의 직업이 두 가지 면에서 방해받고 있다고 본다. 첫째, 여성다움에 대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속과 규제를 받는다고 보고 둘째, 여성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금기가 그녀로 하여금 “ ‘그녀’자신의 육체로서의 경험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여자는 심리적으로 남자와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글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성의 경험에 대한 글쓰기의 시도는 여성의 구속된 삶을 묘사하는 언어학적인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여자들이 마침내 남자들과 동등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획득했을 때에 여성들이 예술적 재능을 자유롭게 개발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2) 시몬느 드 보봐르(1908-1986) 제 1의 물결 페미니즘이 제2의 물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인물.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일생의 동반자이며, 낙태 지지 및 여권운동가이며 이라는 신문과 페미니즘 이론잡지인 의 창립자.  20세기 사상을 논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인물이다. 근대 서구 페미니즘의 ‘성서’라 할 [제2의 성](1949)의 저자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 운동을 사르트르와 함께 이끈 프랑스 전후 지식인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특히 ‘20세기 여성의 강력한 지적 역할 모델’이라고 불릴 만큼 보봐르가 페미니즘 사상에 미친 영향은 깊고도 넓다. 한때 그의 여성주의는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을 비롯한 후배 여성 연구자들에게 무수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주디스 버틀러와 뤼스 이리가레이,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의 여성주의도 나올 수 없었다는 점은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제 2의 성』(1949): 현대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명확하게 획립한 막대한 영향력의 저서. 여성은 남성과 한 쪽으로 지우친 관계를 맺도록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남성은 즉자(the One)이고 여성은 대 타자(the Other)이다. 남성의 우위는 순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분위기를 확보했다. 즉 ‘입법자 신부 철학자 작가 과학자는 여성의 종속적인 위치가 하늘의 뜻이며 지상에서 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써’왔고, 버지니아 울프식으로 여성을 ‘대타자’로 가정하는 것이 여성 자신들에 의해서 보다 더 내면화되고 있다. 보봐르의 저서는 주의 깊제 성(sex)과 성별(gender)을 구별하고 사회적 및 자연적 기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본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지는 것이다....이 피조물을 만드는 것은 대체로 문명이다....다른 누군가의 개입만이 개인을 하나의 로 확립시킬 수 있다.” 그 ‘다른 누군가’의 (남성적)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생물학 심리학 재생산 경제학 등에 관한 해석의 체계들이다. ‘여성임’과 ‘한 여성’으로서 구성됨을 결정적으로 구별함으로써 보봐르는 만약 여성들이 그들의 대상화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면 가부장제의 몰락을 단정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제 1의 물결 페미니스트들과 같이 그녀는 생물학적인 차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며, 여성성을 불신하고 있다.    2. 제 2의 물결 페미니즘 비평 1)시작: 제 2의 물결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비평은 1960년대 중반과 후반의 여성해방운동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1963년 베티 프리단의『여성의 신비』의 출판으로 시작됨( 백인, 이성애자, 직업 없이 집안에 갇혀있는 중산층의 미국여성들의 절망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페미니즘을 실질적으로, 처음으로 국가적인 논란거리로 만들었음) 2)주된 강조점: 제 1의 물결의 투쟁을 계속 공유하면서  재생산의 정치학, 여성들의 경험. 성적 차이, 그리고 억압의 한 형태이면서 동시에 찬양해야 할 것인 ‘성욕’으로 옮겨져 강조되었다. 이러한 성적 차이에 대한 논의에 생물학, 경험, 담론, 무의식, 사회적 경제적 상황 등 다섯 가지 주안점이 포함되어 논의되었다.  ① 생물학을 근본 적인 것으로 다루며 사회화를 경시하는 논의는 주로 여성들을 ‘그들의 자리에’ 두려는 남성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여성은 단지 자궁에 지나지 않는다(옛 라틴 속담)’-여성의 육체는 여성의 운명이라는 관점-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부여된 성역할을 문제시하는 모든 시도들은 자연적 질서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이 된다. ②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생물학적 속성을 열등성이라기보다는 우월성의 근원으로 찬양하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삶과 예술에 있어서 긍정적인 여성적 가치들의 근원으로 여성의 특수한 경험(배란 생리 출산)을 주장(여성들만이 그러한 특수한 경험을 겪어왔기 때문에 그들만이 여성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발전된다. 더 나아가 여성의 경험은 다른 인식적 정서적 삶을 포함하고 있다. 즉 여성들은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들을 보지 않으며,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다른 사고와 느낌을 가진다. 이러한 접근에 대한 영향력 있는 글쓰기에는, 성적 차이에 대한 문학적 재현에 중점을 둔 일레인 쇼월터의 작업이 있다.) ③세번째 주안점인 담론: 데일 스펜더의『남성이 만든 언어』-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언어에 의해 억압받아왔다고 보는 견해. 푸코는 ‘무엇이 진실한 것인가는 누가 담론을 지배하는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함. 담론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여성을 남성적 ’진리‘ 내부에 감금시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성작가들이 별개의 ’여성적인 담론‘을 창조하기보다는 언어에 대한 남성의 지배에 대하여 경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대 견해: 여성사회언어학자인 로빈 라코프- 여성의 언어가 유약성과 불확실성의 패턴을 지니고 있으며 ‘사소한 것 경박한 것 진지하지 않은 것’에 초점을 두고 있고, 개인적인 정서적 반응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언어는 열등하다고 믿고 있다. 남성적인 발언이 더 강하므로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평등을 획득하려고 하는 여성들은 남성적 발언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여성이 세뇌되어왔기 때문에 강한 남성과 연약한 여성의 전형이 생산되었다고 보았다.  *④무의식: 라캉과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힘입음.     *그 외에 제 2의 물결 페미니즘을 지배하고 있는 특정한 주제들: 저메인 그리어의 대중적인 저서『여자 내시』, 사회주의에 대한 비평적 재평가(쉴라 로우보텀), 정신분석학(줄리엣 미첼), 케이트 밀레트와 아드리안 리치의 급진적(레즈비언) 페미니즘 등에서는 가부장제, 여성에 대한 정치적 조직의 부절절성, 여성의 차이에 대한 찬양 등의 주제가 제2의 물결을 지배하였다.    *영미 페미니즘 비평: 일레인 쇼월터의 『여성중심 비평』이 선봉이 되는, 경험적인 접근방법 여성의 글쓰기의 특수성과 여성작가들의 전통의 회복, 여성 자신의 문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등을 집중적으로 다룸 *프랑스 페미니즘 비평: 줄리아 크리스테바, 엘렌 씨이주, 루스 이리가레 등의 작업에 기초를 두고, 작 가(여성)의 ‘성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글쓰기를 강조한다.  - 이러한 두 갈래의 구분이 1960년대 후반 이래의 비평이론에 있어서 두 개의 주도적이고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 케이트 밀레트: 성의 정치학 미국의 제2의 물결 페미니즘은 시민권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다른 저항운동들로부터 그 원동력을 얻고 있으며 케이트 밀레트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이러한 입장에 있다. 1969년에 처음 출판된『성의 정치학』은 그 시기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남성 문화에 대한 맹렬하면서도 낙관적이고 포괄적이고 재치 있으면서도 불경스러운 파괴작업으로 기억되는 그 시대의 한 기념비가 된다. 역사 문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그리고 다른 여러 분야에서, 경제적 불평등만큼 이데올로기적인 주입 역시 여성 억압의 원인이 된다고 밀레트는 주장했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거나 여성을 열등한 남성으로 다루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시민적 및 가정적 생활에 있어서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하나의 정치적인 제도’로 보아 강력한 비판을 하고 있다.  *밀레트는 사회과학으로부터 성과 성별의 중요한 구별-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지만 성별은 문화적으로 획득된 성적 정체성을 일컫는 심리학적인 개념이라는 구별을 도입하여, 문화적으로 학습된 ‘여성적 속성들’(수동성 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사회과학자들을 공격했다.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이러한 태도를 영속시켜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배와 종속이라는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관계 속에서 이러한 성역할들을 실행하는 것을 ‘성의 정치학’이라 불렀다. * 『성의 정치학』은 남성주의적인 역사적, 사회적 및 문학적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선구자격이며 페미니즘 문학비평을 형성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밀레트는 ‘문학’을 하나의 근원으로 특권화 함으로써 글쓰기, 문학연구, 비평을 특히 페미니즘에 적합한 영역으로 확립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D.H.로렌스, 헨리 밀러, 노만 메일러, wid 주네의 소설에서 성적 묘사에 스며들어 있는 남성적 지배를 강조하였다 *비판: 다른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그녀가 남성작가들만 선택한 것은 너무 비전형적이며 소설에 있어서 상상력의 전복적인 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문학: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을 다시 생각하기」에서 코라 카플란은 밀레트가 ‘이데올로기를 모든 계층의 남성들이 여성을 구타하는데 사용하는 보편적인 남근 곤봉(penile club)’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하고, 밀레트의 많은 소설분석의 조야함과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다.    4)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특히 영국에서 제2의 물결의 강력한 분하의 하나였던 페미니즘의 갈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기본과제는 성별과 경제의 복잡한 관계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분석을 여성의 물질적 경제적 억압의 역사로까지 확장시키고, 특히 가족과 여성의 가사노동이 노동의 성적 분업에 의해서 어떻게 구성되며 그것을 재생산하고 있는가를 검토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모두 여성 억압이 개인들의 의도적 행위들의 결과라기보다는 개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 구조들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줄리엣 미첼의 「여성: 가장 긴 혁명(1966)」은, 가부장제가 여성의 재생산적인 기능과의 관계 속에서 미치는 구조적 통제를 역사화하는 선구적인 시도였고, 쉴라 로우보텀은 『여성의 의식, 남성의 세계』에서, 노동계급 여성들은 일터와 가정에서 노동의 성적 분업으로 인한 이중 억압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과 마르크스주의 역사 편찬은 주로 개인적인 경험의 영역, 특히 여성문화의 영역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 다양한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현재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영미와 프랑스 페미니즘사이의 ‘논쟁’의 압도적인 영향 때문에, 그 선명한 입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5) 일레인 쇼월터: 여성중심 비평 트릴 모이의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영미 페미니즘 비평’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이라는 두 가지 주요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는 영미비평은 이론적으로 소박하거나 이론화 자체를 거부하는 한편, 프랑스 비평은 이론적으로 자의식적이며 세련되어 있다고 본다. * 주요 영미 비평가들은 미국인들이다. 제2의 물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비평가는 일레인 쇼월터이고 그녀의 『그들만의 문학(1977)』은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여기서 쇼월터는 역사로부터 숨겨져 있던 여성 작가들의 문학사를 개관하고, 그들의 물질주의적, 심리적 및 이데올로기적 결정 요인들의 개요를 보여주는 역사를 생산하고, ‘페미니즘 비판’과 ‘여성중심 비평가’들을 격상시키고 있다. 쇼월터의 책이 시도하고 있는 바는 브론테 자매 이후 영국 여성소설가들을 여성의 경험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여성의 글쓰기와 남성의 글쓰기 사이에는 심오한 ‘차이’가 있으며, 하나의 전체적인 글쓰기 전통이 남성 비평가들에 의해 무시되어 왔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는 “여성 전통의 잃어버린 대륙이 영문학의 바다로부터 아틀란타 섬처럼 솟아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전통을 세 단계로 나눈다. ① 여성적 단계: 여성작가들로 하여금 여전히 귀부인이기를 요구하는 주도적인 남성적 심미적 척도를 모방하고 내면화하는 단계 ② 페미니즘적 단계: 남성적 가치에 ‘저항하고’ 아마존적 이상향과 여성 참정권론자 동지애를 ‘옹호하는’ 급진적 페미니즘 작가들을 포함하는 단계 ③ 여성의 단계(1920년 이후): 이전 단계들의 특징을 물려받아 ‘자아발견’의 단계, 특히 여성의 글쓰기와 여성의 경험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단계 ( 그에 의하면 레베카 웨스트, 캐서린 맨스필드, 도로시 리차드슨은 가장 중요한 초기 ‘여성의’ 소설가들이다)    6) 프랑스 페미니즘: 크리스테바, 씨이주, 이리가레 제 2의 물결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분파가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여성을 남성에 대한 ‘대타자’로 인식한 것에서 유래하여, 계급 및 인종과 함께 ‘성욕’은 사람들의 집단 사이의 ‘차이’-한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집단을 지배, 억압할 수 있도록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작된 차이들-를 조직하는 이분법적인 대립(남성/여성, 흑인/백인)으로 취급된다. 특히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전통적인 성적 차이의 전형들의 파괴를 강구함에 있어서, 그러한 전형들이 만들어지는 영역인 동시에 특히 ‘여성의 언어’ 속에 묘사될 수 있는 해방적인 성적 차이의 증거로 언어에 관심을 집중해왔다. 문학은 이러한 것이 인식되고 통용될 수 있는 상당히 의미 있는 담론이다.  * 프랑스 페미니즘은 정신분석학 특히 라캉의 프로이트에 대한 재작업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고, 지금까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공유해온 프로이트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했다.  라캉 이전에 프로이트의 이론은 특히 미국에서 미숙한 생물학적인 단계로 환원되어 있었다. 남자의 성기를 본 여아는 남근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한다. 여아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규정하여 ‘남근 선망(penis envy)’을 불가피하게 겪는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근선망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것이며 그들의 ‘거세 콤플렉스’의 원인이 되며, 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권리가 있는 긍정적인 성으로 보기보다는 ‘결핍된 남자들’로 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팰러스 중심적(phallocentric)’ 이라 칭하고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지배를 논할 때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줄리엣 미첼은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1975)에서 ‘정신분석학은 가부장제 사회를 옹호하는 추천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사회에 대한 하나의 분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프로이트를 변호했다. 그녀의 이러한 변호는 재클린 로즈와 쇼샤나 펠만의 작업과 더불어 현대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① 줄리아 크리스테바: 불가리아 출생, 기호학자 소설가 정신분석가 문학비평가 페미니스트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 중의 한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학과 언어이론을 결합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크리스테바는 해방적인 에너지의 억압되지 않은 그리고 비억압적인 유동을 여성을 대표하여 주장하였다.(그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거부하였다) 그는 두 개의 이원적인 남녀라는 성, 두 개의 대립된 성별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을 거부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하여 모순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위계질서를 재평가하거나 변화시키지 않고, 단지 여성이 그 질서에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 1세대 여성주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노선에 따르면 소수의 특권 받은 여성만이 자신의 위치를 옮겨갈 수 있을 뿐 억압적인 구조는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같음’을 강조하는 1세대 여성주의자들의 무비판적 전도의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2세대 여성주의자들은 "권력과 언어, 의미 등에 남녀 각자가 맺는 관계와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명백하게 하(Kristeva)”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성차별적인 구조 그 자체에 저항하며 남성/여성, 이성/감정, 문명/자연과 같은 이분법적 구도를 타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시원적 여성’이라는 힘을 강조하면서 역시 성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논리로 나아가거나, 모성을 신화화하고 여성들에게 욕망의 승화, 금욕을 요구함으로써 마조히즘적인 여성주의로 치달아갔다. 여성성을 온화함, 조화, 평화로움 등으로 환원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입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1세대의 ‘같음’의 여성주의, 2세대의 ‘다름’의 여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타자는 나에게 낯선 악도 아니고 외부의 희생양, 즉 또 다른 성, 계급, 인종이나 국가 등이 아니’며, ‘나는 ‘공격자인 동시에 희생자’이고, 동일자이자 타자이고, 자기동일적 존재이자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모성’을 강조한다.     ②엘렌 씨이주: ‘여성적 글쓰기’라고 그녀 자신이 부르는 담론에서 여성성의 긍정적인 재현을 주장하는 창조적인 작가이자 철학가이다. 에세이 「메두사의 웃음」(1976)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글쓰기에 그들의 ‘육체들’을 던져넣기를 요구하는 ‘여성적 글쓰기’의 유명한 선언서이다. ‘너 자신을 써라. 너의 육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직 그 때만이 무의식의 광대한 자원들이 솟구쳐 흘러나올 것이다.’ 라고 쏟아져나오는 여성의 무의식과 상상력에 대하여 황홀경 속에서 쓰고 있다. 그녀는 또한 ‘여성적 글쓰기’를 아이와 어머니 육체와의 언어 이전 상태의 유토피아적인 합일 속에서 차이가 폐지되는 라캉의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인 ‘상상계’와 연관시키고 있다. *데리다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간격을 설명하기 위하여 차연(differance)개념을 만들었다. 씨이주는 데리다의 차연의 개념을 글쓰기에 적용하면서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를 대조하였다. 여성적 글쓰기는 단순히 새로운 글쓰기 양태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규범들의 변형을 위한 선행적 움직임이고, 전복적 사고를 위한 도약대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인 바로 그 변화의 가능성이다.’ 그는 여성적 글쓰기를 개발함으로써 ‘남성은 자아, 여성은 타자’라는 서구세계의 사고방식, 말하는 방식, 그리고 행동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③루스 이리가레: 이리가레의 목적은, 글쓰기는 물론 심리치료를 통하여 프로이트와 라깡의 사고를 포함하는 남성적인 철학적 사고로부터 여성적인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라깡과 마친가지로 그녀는 상상계와 상징계를 서로 대조시키지만, 라깡과 달리 상상계 내부에 남성의 상상과 여성의 상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리가레는 현재 우리가 상상계나 여성의 성적 욕망을 포함하여 여성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남성의 관점에서 본 것임을 지적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여성은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 ‘남성적 여성성’ 다시 말해 팰러스적 여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여성은 ‘여성적 여성성’ 즉 여성이 보는 여성성이다. 그는 반사경 이론을 통하여 남성이 여성을 볼 때 그들은 여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반사물 또는 영상들과 초상들을 본다고 하였다. 때문에 가부장적 사고의 구조 안에서는 여성적 여성성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다른 여성의 반사경(1974)』) 그녀는 가부장적인 억압이 여성의 성욕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과 관련된 부정적인 구성의 유형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근선망’의 개념은, 여성을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남근을 결핍한 대타자로 보는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은 남성의 부정적인 거울이미지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 남성들은 시각지향적인 반면에 여성들은 촉각을 통해 쾌락을 찾는다. 그러므로 여성의 글쓰기는 유동성 및 촉각과 연관되며 그 결과 ‘그녀의 문체’는 확고히 확정된 모든 형태들, 숫자들, 생각들, 개념들을 거부하고 폭발시킨다.-여성들의 ‘차이’에 대한 찬양만이 여성들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의 재현을 파열시킬 수 있다.    *이러한 비평들은 포스트구조주의적 개념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비평들은 ‘여성’을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글쓰기효과’로 보았다. 또한 이 비평들은 작가의 통제나 비평적 통제를 벗어나 텍스트의 자유 유희를 장려하며 반인본주의적이고 비사실주의적이고 비본질주의적이며, 사실상 정치적 문화적 및 비평적 해체의 잠재적인 형태를 대변한다. 특별히 문학 연구의 관점에 있어서, 이 비평들은 문학의 정전을 재평가하고 재형성하며 일원론적이거나 보편적으로 채택된 이론체계를 거부하며 담론 실행의 모든 영역을 공공연히 정치화시킨다.    * 이 글은 라만 셀던⦁피터 위도우슨⦁피터 부르커 지음, 정정호⦁윤지관⦁정문영⦁여건중 옮김『현대문학 이론 개관』의 「6. 페미니즘 이론」을 요약⦁정리한 것에 사전과 기타참고서적을 참고로 보충한 글임.     *참고    여성비정규직의 수는 급속히 늘어가는데 공식적 통계는 이루어 지지 않고 있고, 직장의 여성은 출산과 육아의 이유로 정리해고 1순위가 되고 있고,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맞벌이 가정은 일반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자녀 교육은 여성에게 집중되어지고 있으며, 여성의 정치 진출은 여성할당제라는 매우 좁은 문만을 만들어 놓았을 뿐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형식적인 여성정책이 이루어지나 실질적 도움이 체화되지 않는 시대에서 여성해방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한국문학사의 페미니즘  현 단계의 페미니즘은 보통 196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당시 여러 정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은 자유와 평등의 수사를 구사하던 남성 동료들이 여전히 남녀를 차별하는 틀에 박힌 가정들에 기초하여 여성을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실망했다. 선언문을 작성한 것은 남성들이었다. 여성들은 자주 차나 끓이는 사람 정도로 인식될 뿐이었다. 또 혁명을 주동했던 남성들은 연좌농성에 참여할 사람들을 조직할 때 여성들을 그곳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모순된 행동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60년대 후반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그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언어적, 시각적 이미지들에 똑같이 대항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정치적 실천 속에서 그들 스스로를 재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여성운동이 학문적으로 연구되고 확산된 것은 이처럼 기존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남성적 사유, 즉 이성이나 합리성, 보편성에 도전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사의 본격적인 페미니즘은 1980년대 말에 이르러 활발하게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서구 페미니즘 이론이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 각 대학에 여성학강좌가 개설되는 등의 이론적 움직임과 때를 같이하는데, 이와 더불어 1980년대 후반 고조되었던 사회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무성해지고, 각계의 다양한 집단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입장을 주장하는 다원적 논리가 등장한 시대적 분위기 역시 페미니즘의 활발한 전개에 주요한 조건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 여성작가들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는 본격적인 페미니즘은, 과거 남성중심 이데올로기 하에서 우아함과 고상함이라는 규범 속에 갇혀있던 여성성의 신화를 그들이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서 진정한 여성성을 탐색하려는 자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시도이다. 치밀한 자기인식 하에 현 사회의 가부장적 습속과 문제점들을 고발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당당한 하나의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있기를 추구하는 다양한 양상의 페미니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작가가 문학작품을 통해 감추었던 말을 한다는 것은 문학이 페미니즘을 논의하는 유효한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80년대 이전 시기까지의 대다수 여성 시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를 보여준 반면, 고정희, 문정희, 김혜순은 여성의 성 정체성을 바탕으로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면서 각각의 방식으로 내면의 자의식을 표출하였다. 그동안 주변화되고 타자화되어온 '여성'이 제자리를 되찾고 여성만의 글쓰기를 통해 기존의 억압적이고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해체하고자 한다.(김현미 경희대 석사학위논문)2010-국회도서관        여 자    임 성숙(1933∼ )    너 위대한 모순이여    저주받은 산고의 곤욕을 축복으로 들어 올리는 거룩한 제기여    너 아름다운 모반이여    사막에 장미를 피워내는 기적의 흙이여    하늘 아래 엎드린 땅이여    쓴 잔을 비워내고 젖이 샘솟는 신비의 잔이여                이불을 꿰매며 /박노해     이불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에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야 한다. 노동자는 이윤을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을 바늘을     찌른다.    성녀와 마녀 사이 /김승희    엄마, 엄마, 그대는 성모가 되어 주세요, 한국전래동화 속의 착한 엄마들처럼 참, 아니, 사임당 신씨 신사임당 엄마처럼 완벽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한평생 변함 없는 모성의 모유를 주셔야 해요, 이 험한 세상 엄마마저, 엄마마저..... 난 어떻게.....    여보, 여보, 당신은 성녀가 되어 주오, 간호부처럼 약을 주고 매춘부처럼 꽃을 주고 튼튼실실한 가정부도 되어 나에게 변함없이 행복한 안방을 보여주어야 하오, 이 험한 세상 당신마저, 당신마저..... 난 어떻게.....    여자는 액자가 되어간다, 액자 속의 정물화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게, 액자 속의 가훈(家訓)처럼 평화롭고 의젓하게, 여자는 조용히 넋을 팔아 넘기고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되어 도배되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액자 하나로 조용히 표구되어 안방의 벽에 희미하게 매달려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웃는 것인가 우는 것인가, 그녀의 미소는 용서인가 배신인가. 난 알 수 없지만 난 그녀의 그림자 망사옷 같은 검은 가슴 속에서 무서운 화산의 힘을 두근두근 느낄 수 있지,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될 수 없는 박제될 수 없는 마녀의 부엌 같은 뜨거운 화산이 그녀의 미소를 영원한 무서움으로 낯설게 만들고 있는데,    그녀는 애매하다, 성녀와 마녀 사이 엄마만으로도 아내만으로도 표구될 수 없는, 정복될 수 없는, 저 영원한 회오리의 명화는, 여인에게 사랑은 벌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여인은 사랑을 통해 여신이 되도록 벌받고 있는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 영원을 표구하면서 세상을 배경으로 거느리고 늠름하게 서 있지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 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음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 소리 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는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              가져온 곳 :   카페 >한국시문학아카데미 | 글쓴이 : 시문학아카데미| 원글보기     
33    병치기법 댓글:  조회:1195  추천:0  2019-01-14
퍼온 글임 현대시의 창작방법과 실제 김관식(시인, 문학평론가)   5. 병치기법   1) 프롤로그      단순하게 이미지를 평면적으로 시간 순서로 배열하여 시를 형상화하게 되면, 너무 시가 단조롭다. 초보자들은 대부분 사물의 외형을 보고 그 느낌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시적 대상에 감정이입하여 진술한다. 여기에서 시의 원리를 모르는 초보시인은 사물의 외형에서 느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주로 하여 토로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의 원리는 자신이 직접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노래나 춤을 출 때이다. 여타의 나머지 예술작품은 자신이 직접 나타나지 않고 등장인물이나 사건, 배경을 만들어 허구의 이야기를 진짜 이야기로 꾸며서 무대 위에 올리게 된다. 시는 언어 예술이다. 따라서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로 형상화하여 무대 위에 올리는 연출자인 셈이다. 연출자가 아 슬프다하고 무대 위에 올라가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의 감정토로의 시 아닌 시인 것이고. 슬픈 느낌이 들도록 상황을 적절히 한 컷의 사진을 찍는 듯이 언어로 형상화하여 이미지로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현대시인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이 간단한 예술의 원리를 망각하고 직접 자신이 무대 위로 올라가 감정을 토로하려고 하니 그 시를 누가 읽으려들겠는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노래나 춤을 출 때임을 명심하고 가급적 무대 위로 올라가지 말고 느낌을 자아내는 이미지로 시각화하여 전달하여야 한다.    이때 단조롭게 하나의 이미지만을 배열하면 시가 너무 평면적이고 단조롭기 때문에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병치시켜서 재미있게 보여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병치기법인 것이다. 병치기법은 여러 개의 공간이나 시간, 사물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 그 원리는 간단하다. 우리나라 조향이나 이상 등 초현실주의 시들도 병치기법을 적용한 시들인 것이다. 이러한 병치 원리에 의해 숨겨진 이미지를 숨은 그림 찾듯이 찾아내면 쉽게 시가 이해되는데 대부분 시적 감수성이 청각적 이미지에 고착이 되어 시각적인 이미지로 치환되거나 병치된 시들은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하니 현대시는 어렵다고 구시대적인 낭만주의 감정토로의 시들을 선호하는 것이다. 실제로 병치기법은 어렵지가 않다, 두 가지 상황이나 사건 또는 사물을 교묘하게 엮어서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방법인 만큼 처음에는 어렵더라도 자꾸 숙달이 되면 시를 쓰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2) 병치비유의 개념      병치란 국어사전에 “한 장소에 나란히 놓이거나 동시에 설치되다”, “두 가지 이상의 것을 같은 장소에 나란히 놓거나 동시에 설치함”을 의미한다. 즉 두 가지 이상을 한 곳에 나란히 배치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두 가지는 사물이 될 수도 있지만, 두 가지 이상의 시간이 병치될 수도 있으며. 공간이 병치될 수 있다. 따라서 현실과 환상이 병치되었을 때 초현실주의 기법 중의 하나인 데페이즈망 기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병치될 수도 있다. 병치기법으로 흔히 시에서는 병치비유로 표현되기도 한다. 비유는 크게 치환비유와 병치비유로 나눌 수 있다. 치환 비유는 사물의 형태, 정서, 상징. 행동, 언어 등의 유사성에 의해 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이동하여 자리바꿈을 하는 것이다. 대체로 비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대어 볼 보조대상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했고 이러한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되는 것을 뜻한다.    그 반면에 병치비유는 자리 이동이 아니라 함께 놓아두는 방식이다.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을 함께 놓아두어서 그것들이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되어 서로 기능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되는 새로운 결합의 형태이다.    휠라이트는 병치비유를 조합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조합이란 치환비유처럼 사물들 사이에 유사성에 의한 자리바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물들이 나란히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는 '새로운 결합'의 형태을 말한다.    병치비유는 나열하거나 병치하여 비유하기 때문에 치환 비유와 달리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찾기가 어렵다. 그 까닭은 치환비유에서는 어떤 한 방향으로 의미가 전이가 되지만, 병치 비유에서는 한 방향으로 의미가 전이되지 않기 때문에 시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시어들과 대등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시어가 원관념, 보조관념이 아니라 각각의 시어가 원관념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시어의 나열과 병열을 통해 그 사이에서 이미지 또는 의미가 제시된다. 나열된 시어들은 무의미하게 배열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시어들이 시로 한자리에 구성됨으로써 이미지 또는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병치비유의 시어들은 그 시에서 하나의 묶임으로 인해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미지 내지는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 치환 비유보다 더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결합을 통해 의미가 형성되기 때문에 이미지의 병치라고 볼 수 있다. 또는 병치 비유는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이 형상을 엮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병치 비유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시를 해석할 때 언어 그 자체를 집중하여 맥락을 찾는 외적인 요소보다는 시 그 자체 즉, 내적 요소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병치 비유는 시 자체에 더욱 집중을 할 수 있게 한다.    휠라이트는 전이가 아닌 병치가 비유의 한 형태로 성립되는 근거는 비유를 어디까지나 의미론적 변용 작용으로 본 데 있다. 자연계의 요소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자질을 생성하듯이 시에서도 이전에 없었던 방법으로 언어와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휠라이트는 병치 비유의 예로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지하철 정거장에서」)이란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인용했다. 이 시에서 병치되어 있는 것은 '얼굴들'과 '꽃잎들'이다. '지하철 정류장'에서 첫 행의 '얼굴들'과 둘째행의 '꽃잎들'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하나의 인상적 대조하여 두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옮겨보기의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얼굴들의 환영과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은 서로 병치된 인상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얼굴이 꽃잎으로 대치된 치환적 구성이다. 그러므로 병치와 치환의 어법은 엄격히 구분되기보다는 병치에 가까운 치환의 시법을 요구하게 된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같은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인지 판단이 유보된다는 점에서 병치은유는 해체주의적 관심까지 불러일으킨다.    병치기법에는 공간의 병치, 시간의 병치, 시공간의 병치, 이질적인 두 사물의 병치, 자연과 인간의 병치, 존재와 존재의 병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병치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병치비유의 활용한 예시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3) 병치비유의 활용      가) 공간의 병치      병치기법에서 먼저 공간의 병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병치라는 의미 자체가 공간적인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언어의 연계성에 의해 진술되기보다는 이질적인 이미지를 공간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병치기법이기 때문이다. 김종삼의 다음의 시는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병치시킨 구조로 되어 있다. 현실공간에 대조적인 환상공간을 병치시킴으로써 부정의 현실을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불연속성을 허물고 새로운 연속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미구에 이른 아침 하늘을 파헤치는 스콥 소리   하늘 속 맑은 변두리 새 소리 하나 물방울 소리 하나   마음 한 줄기 비추이는 라산스카       -김종삼의 「라산스카」 전문      이 시는 하늘이라는 환상공간으로 환유된 천상의 세계와 결합된 양상으로 1〜2연은 환상공간이고, 3연은 현실공간으로 병치되어 있다. “하늘을 파헤치는/스콥 소리”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청각적 이미지 “소리”이고, “마음 한 줄기 비추이는/라산스카”는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빛”이다. “스콥 소리”의 청각적 이미지와 “라산스카”의 시각적 이미지가 천상과 지상의 다리로 연결되는 매개 항이다. 스콥은 낯선 시어로 “scop”은 중세 서양의 음유시인과 땅을 파는 도구인 “삽”을 일컫는 중의적인 말이다. 라산스카는 뉴욕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헐더 라산스카이다.    동이 터 오르는 이른 아침에 어디선가 “하늘을 파헤치는 수콥 소리”가 들려온다. “파헤치는” 이미지와 “콥”이라는 파열음이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파괴의 이미지를 강하게 삽이라면 한 삽 한 삽 파헤치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파문을 일으키고, 음유시인이라면 그 천상을 뚫을 듯한 강렬한 음성으로 하늘로 상승하고, 그 삽질소리나 음유시인의 노래는 다시 새소리, 물방울 소리로 변형되어 하강한다. 결국 화자의 마음을 비추는 라산스카로 연결되면서 시적 주체가 의도한 은유의 의미가 드러난다.    상승하는 소리인 “스콥소리”가 하강하는 빛 “라산스카”로 전이되어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국 천상의 소리로 인간의 마음을 밝게 비추고 싶다는 시인의 의도가 드러나게 된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은 먼 거리로 불연속적이지만 라산스카가 연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두 공간을 서로 병치시켜 의미와 충돌이나 대립 없이 통일된 연속성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병치비유는 공간을 병치시켜 현실 공간과 환상 공간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을 연속성 있게 자연스럽게 연결했을 때 공간의 병치라고 할 수 있다.      나) 시간과 공간의 병치      병치비유의 예시로 이형기의 「폭포」를 보자. 이 시는 높은 벼랑 위에서 낙하하는 폭포와 바위가 만들어진 지질시대 石炭紀의 과거 시간과 공간을 병치시켜 상상력을 발휘하여 형상화한 시이다.   나의 등판을 어깨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疾走하는 전율과 전율끝에 斷末魔를 꿈 꾸는 벼랑의 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마리 장수잠자리의 墜落을 나의 자랑은 自滅이다 무수한 複眼들이 그 무수한 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盲目의 물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億年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이형기의 「폭포」      이 작품을 부분적으로 보면 병치은유이지만 작품 전체로 보면 치환은유가 됨으로써 병치은유와 치환은유의 결합형태가 된다. 원관념인 폭포가 '시퍼런 칼자국', '질주하는 전율', '벼랑의 직립', '석탄기의 종말', '장수잠자리의 추락' 등으로 자리이동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이질적인 보조관념들이 조합됨으로써 폭포가 새로운 의미체로 부상되기도 한다.    이 시에서 화자인 나는 폭포의 암벽이다. 폭포의 암벽에 폭포수가 쏟아지는 모습을 “시퍼런 칼자국”으로 비유되고 있다.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현재의 순간과 공간을 “疾走하는 전율과/전율끝에 斷末魔를 꿈 꾸는/벼랑의 直立”으로 하강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환상공간을 병치시켜 지질시대의 순간과 공간을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로 묘사하고 있다. 환상공간인 지질시대는 “石炭紀의 종말”이다. 환상공간인 지질시대 石炭紀가 종말한 순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한마리 장수잠자리의 墜落을/나의 자랑은 自滅이다”라고 진술하고 있고, 다시 현실공간의 현재 시간에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무수한 複眼들이/그 무수한 水晶體가 한꺼번에/박살나는 盲目의 물보라”로 병치시켜놓고 있다. 현재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는 물이 쏟아지는 촉각적 이미지를 시각적인 이미지인 빛의 이미지로 병치시켜 다시 “2億年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라고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지질시대의 모습으로 새로운 의미를 과거와 현재, 환상공간과 현실공간을 의미와 충돌이나 대립 없이 통일된 연속성을 미무리하고 있다.      다) 이질적인 두 사물의 병치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을 함께 놓아두어서 그것들이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되어 서로 기능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되는 새로운 결합으로 병치기법을 작용하나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사물을 병치하여 조합하기가 어려우므로 처음에는 사물의 형태, 정서, 상징. 행동, 언어 등의 유사성에 의해 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이동하여 자리바꿈을 하는 치환비유를 적용하여 비유하다가 고정적으로 병치시키는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좋다. 이는 엄격하게 치환비유와 병치비유를 구분할 필요 없이 치환비유와 병치비유를 적절히 배합하는 방법이 더 쉽기 때문이다.    아래의 예시를 보도록 하자. 이 시는 식혜 만드는 과정과 미혼모가 아기를 낳아 고아를 다른 나라에 입양하는 과정을 병치시켰다.   둘이 좋아서 몸을 섞었습니다 사랑은 젖은 이슬이 되고 어머니 아닌 처녀 뱃속에서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단단히 조여 오는 압박 벨트도 저희들의 몸부림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남이 볼까 두근두근 스스로 싹을 틔우고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달콤한 사랑도 모두 멈추고 엄마의 품을 떠나 영아원의 엿기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랑도 산산이 부셔져 가루가 되고 허공으로 흩어져 낯선 나라 물과 밥알에 섞여 분노를 삭혀왔습니다  타국 땅에서 밥알로 동동 한때 뜨거웠다 차갑게 식어버린 미혼모의 젊은 날 한 순간 엿 먹은 은혜입니다           -김관식의 「식혜」      이 시는 식혜 빚는 과정과 젊은이들의 사랑과 미혼모들의 출산, 해외 입양으로 보내는 과거 우리나라의 고아수출이라는 사회병리적인 현상을 전체적으로 병치시켜놓고 있다.    식혜를 만들 때는 엿기름으로 만들게 됩니다. 엿기름은 싹이 튼 곡물, 즉 생맥아는 가마에서 말려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데, 구멍이 뚫린 가마 바닥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공기로 말린 것을 말한다. 맥주를 만드는데데 쓰이지만 엿기름은 주로 엿이나 식혜를 만드는 데 이용한다. 이 엿기름은 식혜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데, 만드는 과정을 보면 껍질째 빻은 엿기름을 따뜻한 물에 우러나게 하여 고운 체에 받친 다음 그 물을 가만히 가라앉힌다. 되게 지은 밥을 사기 항아리에 담아 엿기름의 윗물만을 붓고, 온도를 60~70℃로 4~5시간 유지시켜 밥을 삭힌다. 이때 온도가 낮으면 밥이 쉬고, 너무 높으면 당화가 잘 안 된다. 약 4시간 후에 열어보아 밥알이 동동 떠 있으면 밥알을 조리로 건져 찬물에 헹군 뒤 다른 그릇에 담고 나머지 식혜물을 끓이면서 설탕을 적당히 탄다. 끓일 때 떠오른 거품은 숟가락으로 걷어낸다. 식혜물에 생강·유자 등을 가미하여 맛과 모양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식혜 만드는 법을 미혼모들이 젊은 혈기로 사랑을 나누다 그만 임신을 했을 때 몰래 아이를 낳아 영아원에 맡기고 이 아이들이 다른 나라에 입양이 되어 갔다. 가끔 신문과 방송에 이 입양간 아이가 자라서 친모를 찾겠다고 나서나 대부분은 타국에서 한국 사람으로써의 정체성을 작지 못하고 입양된 나라의 국민이 되어 살아간다. 이러한 두 사건의 유사성은 엿기름이 보리 싹의 자람을 멈추게 하여 만든다는 점, 그리고 식혜를 만들면 단맛을 내며 우리나라의 고유한 전통음료라는 점, 식혜를 더 졸이면 엿이 된다는 점, 식혜에는 밥알이 동동 떠있다는 점 등의 식혜 특징과 미혼모들의 사랑이야기가 처음에는 달콤하여 빠져든다는 점, 남에게 말을 못하고 숨겨오다가 몰래 아이를 낳게 된다는 점, 이 아이는 영아원에 맡겨져 고아가 되고 다른 나라에 입양된다는 점 등 미혼모의 사랑이야기가 전혀 유사점이 없는 것 같으나 곰곰이 살펴보면, 사물의 형태, 정서, 상징. 행동, 언어 등의 유사성이 발견되게 된다.    따라서 식혜 만드는 과정과 미혼모의 입양이라는 두 사건을 병치시켜놓고 유사점을 찾아서 빈틈없이 엮어내면 이질적인 두 사물의 병치가 완성된다.      라) 자연과 인간의 병치      자연은 모든 생명을 포용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 속에서 의식주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 등 자연을 이용하여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들의 욕망이 극대화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망각하고 자연을 마구 훼손하여 생태계의 질서를 망가뜨려 오늘날 인간들은 자연의 재앙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적인 생각보다 자연과 인간을 따로 분리하여 이분법적인 사고로 자연을 무조건 지배함으로써 인간만의 행복과 풍요를 누리려는 인간위주의 생태의식이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을 병치시키는 기법을 활용할 수 있다. 이 기법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적인 구도에서 갈등양상을 노출시키기 보다는 자연과 인간을 병치시킴으로써 시적 대상에 대한 시야를 확대시켜서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획득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눈보라 휘몰아간 밤 얼룩진 壁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高山植物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던 오리 오리 맷돌 가는 소리    -박용래의 「雪夜」 전문      이 시는 “눈보라 휘몰고 간 밤”이라는 자연과 “맷돌 가는 소리”로 어머니를 병치시켜놓고 있다.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밤이면 맷돌을 돌리시던 어머니를 떠올려 현재와 과거를 병치시켜놓고 있다.    1행과 2행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밤이라는 시간 집 밖의 공간에서 “얼룩진 壁”이 있는 방안으로 공간이 이동한다. 3행과 4행은 방안에서 어머니께서 밤이 이슥하도록 맷돌 가는 어머니가 떠올리고 있다. 5행과 6행에서 “얼룩진 壁”에 맷돌 가는 소리가 부딪혀 “高山植物”의 서정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이 되다가 7행과 8행에서 맷돌 소리를 여운을 청각적 이미지로 화자의 내면 정서를 공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병치시킨 김관식의 「죽방림」을 보도록 하자.   아파트 분양 떴다방 밀물이 몰려든다   기회는 이때다 밀려들 때 분양받아 웃돈 얹어 잽싸게 빠져야 한다   떴다방들 다 빠지고 어물어물 썰물인 줄 모르고 모델하우스 분양사무실 꾸역꾸역 멸치 떼들이 몰려든다   죽방령 입성 로또 당첨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남해 바다    -김관식의 「죽방렴」 전문      이 시는 남해바다에 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해놓은 죽방렴, 즉 좁은 바다의 물목에 대나무로 만든 그물을 세워서 물고기를 잡는 일, 또는 그 그물을 말하는데 이는 자연현상을 이용한 인간의 지혜이다. 그렇지만 자연의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밀물과 썰물의 조류에 따라 물고기들이 죽방림에 갇히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을 아파트 분양으로 떴다방들이 몰려드는 모델하우스와 병치시킨 시이다.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을 병치시켜서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시공간을 병치시켜 극도의 절제된 서정을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      마) 언어의 해체, 의미를 바꿔서 병치      언어를 해체시켜서 그 의미가 바꿔지는 것을 병치시키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말에는 한 낱말을 분해시켰을 때 두 가지 의미가 생긴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서로 병치시키는 방법인데,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경향으로 장르간의 해체, 낱말의 해체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병치할 수 있다.   나 비다   구름 동동 하늘 떠돌다 되돌아올 줄 정말 몰랐다   팔랑팔랑 꽃을 찾아다닐 때 나를 잊었다   그땐 정말 눈물 흘릴 줄 전혀 몰랐다 비틀비틀 낙하하는 나비 나 비다        -김관식의 「나비」      이 시는 “나비”라는 시어를 “나”와 “비”로 분해해서 해체시켰다. “나”라는 인간과 “비”라는 자연현상으로 분해하여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 것이다.   4) 에필로그      이상에서 병치기법을 살펴보았다. 병치기법은 단순한 시상을 복합적으로 엮어서 시를 시답게 하는 현대시의 기법 중의 하나이다. 일부 초현실주의 데페이즈망 기법도 병치기법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의 구성법에서 단순구성이 아니라 복합구성, 평면구성이 아니라 입체구성, 액자식 구성, 피카레스식 구성보다는 옴니버스식 구성이 바로 시의 병치기법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병치기법에서 치환 비유를 하기 위해 유사점을 찾아 자리바꿈하는 요령은 첫째, 형태의 유사점→모양의 유사점을 찾는다. 예) 빌딩-하모니카. 둘째, 정서의 유사점→느낌의 유사점을 찾는다. 셋째, 상징의 유사점→의미의 유사점을 찾는다. 넷째, 행동의 유사점→움직임의 유사점을 찾는다.   다섯째, 언어의 유사점→동음이의어, 발음의 유사점을 찾는다.    이와 같이 유사점을 찾아 자리바꿈하다가 함께 놓아두는 방식으로 병치비유를 완성해 나가면 된다. 오늘날 현대시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많은 시들이 병치기법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고, 이의 방법을 터득하는 일은 바로 현대시를 바로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며, 시를 창작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방법이 바로 이 병치기법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서정문학 2018년 11.12월호에 실린 연재6회분의 원고입니다)  
32    詩의 이미지 댓글:  조회:1203  추천:0  2019-01-14
1. 詩의 이미지      이미지(Image)는 원래 영화에서 나온 말로 映像․心象․寫像 등의 여러 가지 말로써 표현된다.  시의 언어는 음악성과 회화성을 갖고 있는데 회화성을 이미지라고 한다. 영국의 시인 루이스(Lewis, Cecil Day)도 이미지를 가리켜 ꡒ시어에 의한 회화적 표상ꡓ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시적 이미지는 문맥 속에 인간의 정서를 저류로 가진 어느 정도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한 다소의 감각적인 회화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종래의 시가 창조가 아닌 재현이었음에 비하여 현대시는 창조이지 재현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에서 강조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성이요, 독창성이었다. 따라서 시는 객관적 대상을 이미지에 의하여 재현하는 것, 흉내내는것, 복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국화꽃 한 송이를 사람이 눈으로 보았으면, 마음속에 그 꽃의 이미지, 즉 象이 寫像된다.  시적 이미지들은 존재하는 대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식적 형식이었다. 현대시의 이미지는 서로 모순되거나 이질적 정서 또는 관념들의 텐션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령 엘리어트가 ꡒ4월은 잔인한 달ꡓ이라고 표현했을 경우 우리는 언뜻 여기서 ꡐ탄생과 죽음ꡑ, ꡐ정열과 이성ꡑ 등의 서로 대립된 관념과 정서들의 텐션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실체의 모방으로 나타난다. 이미지를 말의 흐림(Word Picture)이라 했을 때, 그 의미는 대상을 재현하되 색채와 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ꡐ정신ꡑ은 곧 ꡐ언어ꡑ라는 생각은 바로 언어가 실재를 형성한다는 말이 된다. 언어에 의한 이미지의 실체화에는 비유적 방법과 상징적 방법이 주로 사용된다.  예를 들자면 엘리어트의 ꡒ나는 내 생애를 커피 스푼으로 되질하였네ꡓ라는「프루프록의 연가」의 일절은 생의 일상적 반복을 뜻하는 내용으로서 그 자신이 말하는 ꡐ객관적 상관물ꡑ에 의한 시적 이미지 형식인 것이다.  이미지를 감각, 혹은 지각적 체험을 지적으로 재생하는 인식수단으로 보는 웰렉과 웨린(Wellek & Warren)은 이미지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청각적 이미지․미각적 이미지․후각적 이미지․근육감각적 이미지․색채적 이미지․역동적 이미지․공감각적 이미지 등으로 구분했다. 이 밖에도 프라이(Frye, Northmp)는 예시적 이미지와 악마적 이미지 그리고 유추적 이미지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이미지는 육체적 지각을 통하여 산출되는 경우와 육체적 지각을 통하지 않고 산출되는 경우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전자는 지각과 관계되고 후자는 상상력이나 환상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과 관계가 되든 상상력이나 환상과 관계되든 간에 이미지는 모두 정신 속에 기록되는 감각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미지라는 말과 이미져리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는 개념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미지는 去時的으로도 사용되고 未時的으로도 쓰인다. 이미져리(Imagery)란 말은 언어에 의해 정신 속에 생산되는 이미지들을 말한다. 이미지와 이미져리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나 이미져리는 개별적 이미지들의 집합이라는 측면에서 이미지보다 훨씬 개념적으로 분명 해진다.    여기서는 일반성 있게 편의상 이미지라는 용어를 통일해서 쓰기로 한다. 이미지에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①정신적 이미지 ②비유적 이미지 ③상징적 이미지 등이다.  정신적 이미지는 시를 대할 때, 오로지 독자의 정신에 야기되는 감각적 경험만을 강조한다. 표현에 있어서도 축어적 방법이나 비유적 방법인가를 분별하지 않으며 때로는 축어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그리고 더러는 두 가지 개념이 동시에 사용된다.  정신적 이미지를 많은 심리학자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다시 분류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앞에서 말한 웰렉과 웨렌(Wellek & Warren)의 유형과 거의 비슷하다. 곧 ①시각적 ②청각적 ③후각적 ④미각적 ⑤촉각적 ⑥기관적 ⑦근육감각적 이미지 등이다.  그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시각적 이미지의 경우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불면 꺼질듯이 외로운 들길  - 김광균 「뎃상에서」 에서-    여기서 시각적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향료를 뿌린 것처럼 고운 노을/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는 물론/구름=장미/와 같은 은유며. 보라빛 색지 위에/마구 칠한 /것과 같은 시각적 심상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ꡐ목장ꡑ의 ꡐ깃발ꡑ, ꡐ능금나무ꡑ와 같은 실재하는 사물의 시각을 통하여 ꡐ들길ꡑ 의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② 청각적 이미지의 경우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세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 우는 사람처럼 가자  배골 물래  아름다움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윤동주 「또 다른 고향전문」 전문 -    이 시에서 소리처럼 부는 바람/ 눈물짓는 것/ 백골이 우는 것/ 내가 우는 것/과 그리고 어둠을 짖는 개처럼 이 시는 나와 혼 백골의/ 울음소리/와 개의/ 어둠을 짖는 소리/의 청각적 심상에 의하여 정조 되어있다. 청각적 이미지 즉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전체가 상징적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자연의 소리를 묘사하거나 의성․의음 등으로 나타내는 방법도 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 한하운 「보리피리」에서 -    이 시에서는 소리의 상징으로 리듬을 살려 음악성을 높이고 있다.    ③ 후각적 이미지의 경우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 해 고요히 지는 제  머 ㄴ 山 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 김영랑 「가늘한 내음」에서 -    여기서 가늘한 내음/과 떠도는 내음/은 깃든 향취와 동질적인 것으로 모란의 내음을 후각적 이미지로 형성하고 있다.    ④ 미각적 이미지의 경우    소년이었던 나는  담배에 입맛을 붙여  숨어 피우던 그 쌉쏘름한 담배 맛을  시방도 아예 잊을 길이 없다.  - 신석정 「오는 팔월에도」에서 -    이 시에 ꡐ쌉쏘름한ꡑ과 같은 관형어가 미각적 이미지로 나타났는데, 대개의 경우 달디단, 쓰디쓴, 시디신 둥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⑤ 촉각적 이미지의 경우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아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타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흘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에서-    이 시에서 촉각적 이미지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熱, 令 등의 감각을 표상한다. 더 좀 자세한 분석적 해설을 정한모에게서 들어보기로 한다.    유리창이라는 시각․청각․촉각적 연상의 복합적 이미지를 가진 소재를 시적 오브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이 시는 성공적이다.  유리창에/ 차고라는 촉감과 슬픈 것이라는 시적 정서와/ 어른거린다/는 시각이 화합하여/ 시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하며, 여기에 다시/입김을 흐리운다/는 촉감적인 모호한 슬픔의 심상을 결합하고 아울러 생명의 발돋움처럼/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라는 사건의 역동적 이미지를 부가하여 시의 전체적 結構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지우고 보고/새까만 밤이 밀려오고/와 같은 시각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조형하고 다시/물먹은 별이라는 다감각적 이미지의 시어가/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라는 多重的 감각으로/ 인각되어 시의 영역을 확대 심화하고 있다. 아울러/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다/는 상황과 사건 그리고 대상을/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는 多感的 정서와 결합시켜 객관적 상관물에 의한 시의 총체적 정서효과를 완결하고 있는 것이다.    ⑥ 기관적 이미지의 경우    한밤에 불 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잠잠할  나는 조선의 한없는 맥박을 짚어 보노라.  나는 임의 모세관, 그의 맥박이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휜한 동녘 하늘 밑에서  나의 희망과 용기가 두 팔을 뽐낼 때면  나는 조선의 소생된 긴 한숨을 듣노라  나는 임의 기관이요, 그의 숨결이로다.  - 梁柱東 「조선의 脈搏」에서 -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 徐廷柱 「花蛇」에서 -    이 두시에서 보는 바 ꡐ맥박ꡑ, ꡐ모세관ꡑ, ꡐ기관ꡑ 그리고 ꡐ가쁜 숨결ꡑ 같은 것이 기관적 이미지다. 기관적 이미지는 대체로 고통, 맥박, 호흡, 소화 등의 감각을 표상 한다. 따라서 흐느끼는, 할딱이는, 답답한, 숨이 차는 따위의 관형어에 조응한다.    ⑦ 근육감각적 이미지의 경우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 조차 흘리고 싶다.  - 김종길 「성탄제」 에서 -    이 시에서 ꡐ쥐어ꡑ 나 ꡐ발목이 시도록ꡑ과 같은 근육감각적 이미지를 느낀다. 근육 감각적 이미지는 근육의 긴장과 움직임을 표상 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유형들이 詩 해석에 다음과 같은 도움을 준다고 이승훈은 말하고 있다.  -이기반         첫째로 기호의 보편성을 강화한다. 모든 시인들은 상이한 유형의 감각적 능력을 지니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상이한 감각적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들의 기호의 편협성을 극복할 수 있다. 둘째로 시인의 상상력을 이해하는 하나의 색인이 된다. 이를테면 김광균은 시각적 이미지를, 김영랑은 청각적 이미지를 지향한다는 점은 두 시인이 성취한 상상력의 세계를 기술함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셋째로 교육적으로 유용하다. 교사나 비평가는 시의 이러한 양상을 강조함으로써 보다 훌륭한 독서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문학 논의에 있어서는 이미지에 있어서 몇 가지 약점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그 첫째는 이미지 창조력이 시인들마다 다르듯이 독자 혹은 비평가의 이미지 창조가 다르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상대주의적 해석이 나타난다. 둘째는 시의 감상에 있어 정신적 이미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실제로 시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과 시가 구현하는 의미에서 멀어진다. 셋째는 이미지의 감각적 특질만 강조함으로써 시의 문맥 속에 놓이는 그 이미지의 기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된다는 것 등이다.  스켈튼(Skelton Robin)이 지적한 바대로 시의 이미지에 있어서 세 가지 기능은 상징, 은유, 직유이다. 이 세 가지가 상호 종합적인 양식으로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적 양식으로서의 이미지들을 말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전통적 수사학자들의 견해와 둘째는 이것을 극복하는 신비평가들의 견해가 그것이다. 수사학자들의 견해는 문면과 문리, 혹은 매체와 취의를 기준으로 하여 제유법, 환유법,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만화법, 상징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모든 비유법 이론의 핵심은 문명과 문리의 관계, 혹은 매재(媒材)와 취의(取意)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제유법이나 환유법은 문면과 문리 관계가 種과 類, 원인과 결과 같은 일종의 접촉성에 기초를 두며 그 외의 것은 ꡐ비상사성 속의 상사성ꡑ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서로 다른 즉 상이한 두 사물을을 병치함으로써 과학적 인식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세계의 진리를 시가 통찰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의의가 신비평가들에 의해 진술되기도 했다. 여기서 예시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① 두 사물이 모두 이미지인 경우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ꡐ구름ꡑ을 ꡐ장미ꡑ로 은유한 시각적 심상은 두 사물이 모두 이미지로 나타나 있으며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확연하게 나타나 있다.    ② 두 사물이 감정들이거나 관념들인 경우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 김춘수 「나의 하느님」에서 -    이 시에서 시인의 강렬한 의식을 통한 관념의 세계를 볼 수 있다.    ③ 취의는 이미지요 매재는 감정이나 관념인 경우    空間을  조용히 흔드는  종소리  너 향기로운  果實이여!  - 조지훈 「梵鐘」에서 -    이 시에서는 ꡐ종소리ꡑ가 매재로서 관념적이라면 ꡐ과실ꡑ은 취의로서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④ 취의는 감정이나 관념이며 매재는 이미지인 경우    잣나무와 잣나무  사이로 보이는 깊은 산협에  단풍이  타는 듯 붉은 단풍이 고웁고  - 장만영 「만추」에서 -    ꡐ단풍ꡑ이 매재요 ꡐ고웁고ꡑ는 취의이다. 여기서 매재는 이미지이지만 취의는 감정이요 관념으로 나타난다.  사물과 사물이 서로 만남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적 명제로 수용된다. 과학적 진술이나 산문의 진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의 양식, 이해의 양식으로 비유적 이미지가 드러나며, 이때 논의의 핵은 은유가 된다.  신비평가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동일화에의 욕망 때문에 비유어가 존재한다고 본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기 때문에 통합된 감수성의 세계가 시이며 통합된 감수성은 과학의 세계가 노출하는 비인간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훌륭한 시는 시적 상상력을 수단으로 체험의 전체성을 노린다. 체념의 전체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은유적 인식능력이다. 시적 이미지는 시의 주제와 조화되어야 하며 아울러 신선하면서도 독창적이며 감각적 체험을 재생시킬 수 있고 비유법이나 기타 상징법 등과 역동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상징적 이미지는 논의의 기본 가정이 반복과 회귀이다. 대체로 반복과 회귀의 양상은 이미지들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이미지가 아닌 낱말들의 유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시가 노래하는 시로부터 탈피하여 읽고 생각하는 시로 매력의 초점이 移行된 것은 현대시가 이미지 중심으로 전환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미지스트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가 말했듯이 이미지는 융용 상태에 있는 관념의 소용돌이 또는 덩어리이며 따라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미지란 지적․정적 복합체(Complex)를 일순간에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적․정적 복합체이며 융용 상태에 있는 에너지를 지닌 소용돌이 같은 것이 이미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와 정의 표현을 언어를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런데 언어로써는 완전히 풀이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이미지의 효과이기도 하다.  그 방법의 하나인 상징적 이미지는 은유처럼 서로 다른 사이의 비슷한 성질 위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가령 태극기가 우리 나라를 상징하고,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듯이 형식에 있어서는 은유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나 은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태극기가 우리 나라와 유사한 점은 없으면서도 그것이 우리 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국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가 기독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 위에 못 박혔다고 해서 그렇게 상징된 것이다. 어떤 하나의 사실이 반복과 회귀에 의해서 이미지로 성립되기도 하지만 상징은 엄격하게 말해서 이미지는 아니다. 이미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본다.  시에 있어서 상징은 전통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과 그리고 시의 문맥 중에서 비로소 정해지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ꡐ비둘기ꡑ가 ꡐ평화ꡑ를 ꡐ무궁화ꡑ가 ꡐ우리 나라ꡑ를 상징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요, ꡐ하늘ꡑ이 ꡐ자기만의 높은 이상의 세계ꡑ, ꡐ어느 시에서의 문맥상으로ꡑ라면 이는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전자도 후자도 다 함께 나타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예시로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서 그 첫 연만을 들어본다.    쫓아오는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십자가는 전통적으로 상징화되어 있지만, 이 시에서는 문맥에 의해서 의미가 특수화되어 있다. ꡒ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ꡓ에서 시인 자신이 도달하기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동경하여 마지않는 종교적 또는 도덕적 생활의 목표를 상징하고 있다.  이미지는 현대시의 대명사라고 부를 만큼 시에 있어서 강조되어 왔다. 따라서 그 기능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앞에서 정신현상으로서의 이미지, 언어현상으로서의 이미지, 상징현상으로서의 이미지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그러한 이미지들이 시에서 어떠한 기능을 가질 것인가? 이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지가 시를 형성하는 다른 요소들과 잘 조화되고 종합되는 가운데 시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시의 율격, 음율, 리듬, 문체, 문법의 체계, 시점, 압축방식과 확대 방식, 선택과 생략의 방법, 인물, 행동, 사상의 양상들과 적절히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스켈톤(Skelton Robin)이 말한 이미지의 세 가지 기능은 상징․은유․직유라고 했다. 이것도 역시 호존 하는 것이며 시의 형성은 이미 삼자를 포괄하여야하며 삼자의 관계로 하여 시의 이해는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기능은    첫째로 이미져리는 詩속의 화자가 말하고 있는 제재(Subject)를 지시한다. 화자가 詩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이미져리이며, 그것은 화자의 앞에 현전하 거나, 뒤에서 회상된다. 전경과 후경으로 나타나는 일체의 인간, 대상, 장소, 행동 사건들이 모두 제재가 된다. 둘째로 제재는 그러나 축어적 이미져리에서 비 유적 혹은 상징적 이미져리로 전환된다. 따라서 화자의 진술을 통하여 주어진 제재가 다른 제재와 대조됨으로써 이미져리는 제재이면서, 동시에 상징이 되기 도 한다. 셋째로 이미지들은 시속에서 하나의 유추가 된다. 곧 축어적 제재에서 벗어나 순전히 비유적 양식으로서의 기능을 나타낸다.    여기서 시 한 편을 놓고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가끔 편지를 받는다  발끝에 걸리는 일년의 마지막 낙엽  또는 살아 남은 겨울의 나비다    어둠을 뚫는 징검다리  그러나 어느새 돌 뿌리는 패어  삭은니처럼 흔들린다    가끔 편지를 쓴다  그대 흐린 눈의 원근을 밝히거나,  아니면 구멍 뚫린 암호다    그대 창 앞에  방긋이 피어날 꽃봉오리  아니면 떨어질 기러기의 날개다    이것은 문덕수의 시 「편지」의 전문이다. 여기서 ꡐ편지ꡑ를 사실적 기술이나 객관적 서술, 그리고 묘사적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시인의 내면적 체험의 세계를 주관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첫째로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으로서 그가 말하는 ꡐ편지ꡑ는 ꡒ마지막 낙엽, 겨울의 나비, 징검다리, 구멍 뚫린 암호, 꽃봉오리, 기러기의 날개ꡓ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둘째로는 화자가 편지를 통해 체험한 양면성이다. 편지를 받는 경우와 편지를 쓰는 경우다. 여기서 시인의 내면적 이중성이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은유적인 국면이요 또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기법에서의 전환이다.  셋째는 이 시는 비유적 상징적 방법에 의하여 이미지가 유추로 나타나 있음을 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미지의 기능은 첫째로 화자의 말하는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깨닫게 한다. 둘째로 화자의 반응은 화자의 정서와 연결되며 시의 독특한 정조를 자아나게 한다. 셋째로 화자의 의식을 환기시켜 화자의 정신 활동을 자극하여 그 활동을 외면화한다. 넷째로 독자에게 시적 상황을 암시하며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시적 요소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유발케 한다. 다섯째로 독자의 기대를 인도하고 환기하는 방법으로서의 기능을 나나내기도 한다.  특히 현대시에 있어서는 심상이 그 자체로서 배경을 배제해 버리고 독립하여 한편의 시 속에서 제 구실을 하는 때가 많다. 따라서 시의 독자들은 이미지를 통하여 시인의 사상이나 정서를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현대시에서 이미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할 것이다   2. 詩의 象徵      상징이라는 말의 Symbol 은 본래 희랍어의 symballein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Symballein은 동사로서 ꡐ짜맞추다ꡑ를 뜻하며, 명사형으로서의 Symbolon으로 ꡐ표시ꡑ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문학의 경우에 있어서는 상징이란 용어의 설명은 단순하지 않다. 상징은 감각적 대상으로서의 보조관념이 본래의 고유의미 외에 비 본래의 의미를 표현하는 일종의 수사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비유적 방법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상징은 유추적으로 가시의 세계, 즉 물질 세계가 연상작용에 의하여 불가시의 세계, 즉 정신 세계와 일치하게 되는 표현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연상이란 두 사물이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종합되는 정신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에서 말하는 상징이란 심상과 관념의 결합이며 관념은 심상이 암시적으로 환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상징은 비유법과 유사한 것으로 논의되어 오기도 했다. 비유란 관례적인 언어의 사용에서 벗어나 특수한 의미나 효과를 위하여 언어가 인용되는 것을 뜻한다. 브룩스(Brooks. C)와 워렌(Warre. R)은 은유와 상징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징은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법이다. ꡒ소녀들은 장미 동산에 있는 여왕장미ꡓ 라고 하면 은유지만, 시인이 단순히 그가 취급하는 사랑의 성질을 암시하기 위하여 장미를 지시한다면 그것은 상징이 된다. 예를 들면 ꡒ저 소녀는 장미꽃이다ꡓ 라고 하면 장미의 특질은 소녀에게 전화된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대상이나 사건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상징이란 용어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은 의미를 지적하는 기호이다.    그러니까 상징은 비유적인 기교가 아니라 自制的 독립적 존재인 것이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교의 양식으로 다른 지시 대상에 의해 매개화 되었을 때 일어나기 때문에 독립적 현실성이 없다. 이에 비하여 상징은 독립적 현실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유가 하나의 체험의 묘사방법이라고 한다면, 상징은 의의 있는 체험의 심화방법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령 ꡒ고향은 아늑한 보금자리ꡓ라고 하면 은유가 되지만 ꡐ고향ꡑ을 빼고 그냥 ꡐ보금자리ꡑ라고만 표현하여 ꡐ고향ꡑ을 대신하면 이것은 상징이 되는 것이다.  상징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인습(관습)적 상징이며, 다른 하나는 개성(창조)적 상징이다.  인습적 상징이란 태극기가 우리 나라를 그리고 십자가가 기독교를 표상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개인적 상징이란 시인이 창조적 의미를 부여한 상징을 말한다. 시에서의 상징이란 후자의 것에 비중을 두고 있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 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횐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뿌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디찬 의상을 하고  횐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雪夜」전문 -    이 시에서 눈(설)을 ꡒ그리운 소식ꡓ, ꡒ서글픈 옛 자취ꡓ, ꡒ잃어진 추억의 조각ꡓ 등으로 상징하고 있는데 이것은 개성(창조)적 상징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어느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 趙炳華 「의자」에서 -    의자는 우리 인간이 앉는 도구로 쓰이나, 어떤 자리 즉 지위라는 인습(관습)적 상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순한 지위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또 하나의 다른 의미 즉 세대교체라는 개성(창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ꡒ아침을 몰고 오는 분ꡓ이라고 하는 문맥 의미의 특수한 관계와도 연결이 되는 까닭이다.    이 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柳致環 「깃발」에서 -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많은 깃발이 있다. 어떤 종류의 깃발이건 그 깃발에는 공통성이 있다. 각자가 지향하는 이상 혹은 이념의 표상으로서 그것들은 높이 나부끼게 된다. 그러므로 깃발은 이상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대표된다.  상징주의 시인들의 암시의 미학은 시인의 내적 우주가 상징적으로 파헤쳐지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방법이며, 이러한 것은 보오들레에르(Baudelare. C)의 ꡐ교감ꡑ에 집중적으로 담겨져 있다.    자연이란 신전이며  산나무 두리기둥은  신비로운 소리로  때로 주절주절 말씀한다.  사람은 상징의 숲을 비껴 가고  숲은 낯익은 눈초리로 그를 살핀다.    아득한 먼 데서 합치는 긴 메아리처럼  어둡고 깊은 속에서  하나가 되는 메아리처럼  밤처럼 대낮처럼 가 없는 통일에서  향과 색과 소리는  서로 부르며 대답한다.    향기도 저마다  어린이 살결처럼 싱싱한 것  ꡐ오보에ꡑ 소리처럼 부드러운 것  풀에 덮인 들처럼 푸르른 것  또한 썩고 호사롭고 기승스러운 것에  만상이 피워져서 나타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혹은 祭香처럼  정신과 감각의 황흘을 노래한다.  - 보들레르의 「만상의 조응」전문 -    이처럼 상징의 방법은 물질 세계의 상징의 숲을 지나서 비로소 인간의 내면 세계와 접하게 됨을 말해 주는 듯한 상징주의 시인의 시를 보았다. ꡐ자연 이라는 신전ꡑ과 ꡐ숲ꡑ은 상징이다. 그런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본의는 분명치 않으며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징적 수법을 통해서 본의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송욱도「만상의 조응」이 물질 세계와 영혼의 세계가 마치 소리와 메아리처럼 서로 짝을 지어 부르고 대답한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자연과 숲은 물질 세계인 동시에 영혼의 신비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의 구성원리이자 그 방법인 상징은 은유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양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판별할 때 은유는 언어적 기교임에 대하여 상징은 언어적 연락만이 아닌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사유가 물질세계의 대상들과 갖는 상호반응을 그 조건으로 하여 형성되어진다.  -이기반       3. 詩의 類推      類推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이 다른 또 하나의 대상과 많은 표징에 관해서도 유사하리라는 것을 추정해 내는 추리를 말한다. 바꿔 말하면 기지의 언어와 미지의 언어가 함께 나눠 가지고 있는 공통성을 말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사는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위대한 일은 은유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힘이다. 그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창조적인 천재의 표징인 것이다 우수한 비유는 유사안식(an eye far resemblance)을 검출할 것을 의미한다.    라고 했을 때에 유사안식이란 바로 유추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비유 즉 우수한 은유는 유추의 발견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metaphor라는 어원 그 자체가 이동(motion-phora)과 변화(Changometa)의 뜻을 갖고 있는 것처럼 미지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과 유사한 기지의 언어를 이동 변화시키는 것이므로 유추는 비유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것이다. 동시에 유추는 시인의 상상력에 기인한다. 상상력이란 베이컨(Bacon Francis)이 말하였듯이 ꡒ자연이 결합시켜 놓은 것을 분리하고 자연이 분리해 놓은 것을 결합시키는 인간의 힘이다.ꡓ 라고 했듯이 상상은 평범과 습관의 타성을 초월하는 새로운 발견과 창조의 능력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확실히 발명․발견․창조는 상상(비전도 그것의 일종이다)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시에서 상상력이란 기존자연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자연 창조가 가능한 것이며,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서 미지의 언어와 기지의 언어 사이에 유추가 형성되며 그것으로 인하여 토운(tone)은 풍요로워지고 미지의 언어가 기지의 언어보다 훨씬 더 풍성해 지게 마련이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완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 金光均 「秋日抒情」에서 -    이 시에 나타난 유추관계에서 먼저 ꡐ길ꡑ과 ꡐ넥타이ꡑ를 놓고 생각하기로 하자. ꡐ길ꡑ 은 미지의 언어이며 ꡐ넥타이ꡑ는 기지의 언어이다. 이것을 리처드(Richards. I.A)의 용어로 말한다면 관념과 매체로 설명된다.  ꡐ길ꡑ과 ꡐ넥타이ꡑ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시인 김광균은 딴 사람이 미쳐 생각지 못했던 공통점을 발견하여 비유를 창조해 낸 것이다. 꼬불꼬불한 산길과 구겨진 넥타이와는 동질적인 일면이 있다. 이것으로 하여 ꡐ길ꡑ이 과연 어떻게 생긴 길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또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ꡒ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ꡓ 이 구절에서 ꡐ국화ꡑ와 ꡐ누님ꡑ 사이를 유추의 관계로 연결시켜 놓고 있다.  유사에는 관념(tenor)과 媒體 그리고 비유 등의 작용이 서로 뒤섞여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추사는 A는 B이다. A는 B와 같다. 또는 A와 X의 관계는 B와 Y의 관계와 같다. 이와 같은 식으로 명료하게 또는 함축적으로 기술된다. 이런 관계를 예의 파악한 김춘수도 그의 시론에서 유추를 직유와 은유의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사관계를 성립시킴에 있어서는 외형적인 상태나 특질도 있겠으나, 시에 있어서의 경우라면 보다 내재적이며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유사성의 추구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유사도 역시 내재적 정서적 가치적인 것에의 성취에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기반     4. 詩의 修辭    (1) 直 喩    직유는 라틴어 Similis에서 온 말로서 ꡐ명유ꡑ라고 말하기도 한다. 두 가지 사물 또는 의미를 보조형용사인 (~와 같이, ~처럼, ~듯이, ~같은, ~만큼, ~인냥, ~마냥) 등의 연결어로 종합하여 표현하는 수사법의 하나이다. 연결어가 없는 은유보다는 분명하고 직접적이어서 그만큼 비유의 밀도는 약하나 어떤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릴 때에 쓰인다. 즉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A에 다른 대상 B를 끌어다 직접 연결 시켜 빗대는 방법이다. 이 때 A는 원관념이며 B는 보조관념이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朴木月 「나그네」에서 -    흰 누더기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곳  - 김용호 「청계천변」에서 -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에서 -    직유의 방법을 구분하자면, 단지 사상을 선명하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적 직유와 事象이 주는 인상을 강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강의적 직유로 대변된다. 기술적 직유는 단일직유와 확충직유로 세분된다. 단일직유는 ꡒ그는 여우 같다ꡓ, ꡒ장대같은 비ꡓ와 같이 단어와 단어가 보조형용을 매개로 하여 비교됨으로써 어떤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리고 있는 그러한 경우를 두고 일컬을 것이다.  여기서 예시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하다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들 마을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혼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 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네 영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전문 -    이 시에서 ꡒ가르마 같은 논길ꡓ, ꡒ아가씨 같이 ……웃네ꡓ, ꡒ삼단 같은 머리털ꡓ, ꡒ젖가슴과 같은 흙ꡓ 등 모두 ꡐ같은ꡑ과 ꡐ같이ꡑ의 연결어를 매개로 하여 단일직유로 간결한 비유를 보였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徐廷柱 「국화 옆에서」에서 -    이 시에서 ꡐ내 누님ꡑ 그 이전의 부분이 길게 확장된 보조관념이다. 그러므로 단일직유처럼 단어와 단어가 보조형용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문 또는 문장과 문장이 서로 비유됨으로써 어떤 事象을 보다 구체화하는 것이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 朱耀翰 「빗소리」전문 -    이 시에서 첫 연의 끝 행은 본디 도치법으로 구성이 되었거니와 ꡒ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ꡓ는 ꡐ같이ꡑ를 매개로 하여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ꡒ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ꡓ, ꡒ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ꡓ와 같은 정감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삼 연 이 행의 ꡒ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ꡓ는 ꡐ손님ꡑ 이라는 단어가 ꡐ같이ꡑ를 매개로 하여 ꡒ비가 옵니다ꡓ 라는 문장과 연결을 시키고 있다.  강의적 직유는 두 가지의 사상을 기술적으로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ꡒ유태인처럼 인색한ꡓ, ꡒ순이처럼 예쁜ꡓ 등과 같은 것으로 속담직유라고도 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卞榮魯 「論介」전문 -    이 시는 ꡐ보다도ꡑ라는 매개로 ꡐ분노ꡑ를 ꡐ종교ꡑ보다 강조하고 ꡐ정열ꡑ을 ꡐ사랑ꡑ보다 강조했으며, 또한 ꡐ바다ꡑ를 ꡐ강낭콩 꽃ꡑ보다 푸르게, ꡐ마음ꡑ을 ꡐ양귀비꽃ꡑ보다 붉게 강조하여 시인이 표상 하고자 하는 논개의 애국적 정열을 고양하고 있다.    (2) 隱 喩    은유(Metaphor)는 transferring의 뜻으로 그리스어 metapherein에서 온 말이다. 직유가 (A=B) 의 관계라면 은유는 (A는 B다) 라는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A는 B와 같다) 라는 직유의 형식이 아니라A를 B로 대치시키는 것으로 본의와 유의를 결합시키는 비유법의 하나이다. 말뜻 그대로 은유는 ꡐ숨겨진 비유ꡑ로 원관념은 뒤에 숨고 보조관념이 표면에 나타나게 되므로 명유에 대립되는 암유라고도 한다.  은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전이의 개념으로 파악한 이래 많은 개념의 굴절을 나타내면서 가장 중요한 문학적 요소로 수용되는 용어이다. 허버트 리이드(Read Herbert)에 의하면 직유와 은유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직유와 은유의 차이는 단지 문체상의 정련도에 있다. 비교가 직접 두 개의 사물로 이루어지는 직유는 문학표현의 초기 단계에 속하는 것인데, 사물의 일치를 나타내기 위한 교묘한 조탁이며, 이따금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은유는 등가물을 민활하게 조명해내는 것이다. 두 개의 심상, 하나의 관념과 하나의 심상은 대등하게 서기도 하고 반대로 서기도 하는데, 서로 부딪치는가 하면 재미있게 조화하여 돌연한 조명으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리이드는 은유를 ꡐ조명적인 것ꡑ과 ꡐ장식적인 것ꡑ으로 나누고 있다. 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은유는 도입되는 보조관념이 ①주어가 되는 경우 ②목적어가 되는 경우 ③술어가 되는 경우 ④관형어가 되는 경우로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횐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어 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품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리오다  - 金東鳴 「내 마음」전문 -    이 시에서 ꡒ내 마음은 호수요ꡓ, ꡒ내 마음은 촛불이요ꡓ, ꡒ내 마음은 나그네요ꡓ, ꡒ내 마음은 낙엽이요ꡓ 등은 모두 은유가 주관념인 ꡐ마음ꡑ 이 본의가 되고 ꡐ호수ꡑ, ꡐ촛불ꡐ, ꡐ나그네ꡑ, ꡐ낙엽ꡑ 등이 보조관념으로 유의가 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 ꡐ마음ꡑ과 ꡐ호수ꡑ는 유이성의 범위가 넓어 래디칼(rhetorical)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적 능력을 발동하여 은유를 깊이 분석할 필요가 없이 정서로서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휠라이트(Wheelwright Phillip)에 따르면 ꡒ치환은유(epiphor)와 병치은유(diaphor)가 있다.ꡓ 앞의 김동환의 시는 치환은유의 예가 된다. 치환은유란 취의와 매재 상호간에 어떤 유사성을 토대로 하여 그 의미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또 한 편의 예시를 들어보자.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 김춘수 「나의 하느님」에서 -    이 시에서 ꡐ하느님ꡑ이나 ꡐ비애ꡑ라는 일상적 의미가 다른 의미, 즉 이 시의 문맥에 따라 포착될 수 있는 시적 의미로 치환된다. ꡒ하느님은 비애ꡓ, ꡒ하느님은 살점ꡓ, ꡒ하느님은 놋쇠항아리ꡓ 등에서는 혼합은유를 생각할 수 있다. 단일은유는 형식을 매재와 취의의 관계에서 볼 때 1 :1의 공식이 나타나지만 혼합은유의 관계는 多 :1의 공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보인 김춘수의 「나의 하느님」은 혼합은유의 형식에다 치환은유의 방법을 쓰고 있다.  한편 병치은유는 문자 그대로 병치의 방법을 취하는 것인데 휠라이트에 의하면 이것은 의미론적 전이가 신선한 방법으로 어떤 체험 ꡐ실질적이거나 상상적인ꡑ의 특수성을 통과함으로써 오직 병치에 의해서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 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 그 마당 (사원) 한구석  잎사귀 한 잎 두 잎 내려앉았다.  - 김종삼 「주름간 대리석」에서 -    이 시는 병치은유의 좋은 예가 된다. ꡒ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ꡓ과 ꡒ잎사귀가 한 잎 두 잎 내려앉는 마당 한구석ꡓ의 관계가 병치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는 은유라기보다는 이미지로 보아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이질적인 두 요소 즉 ꡐ대리석ꡑ과 ꡐ잎사귀ꡑ의 병치로 말미암아 기존의 의미를 새로운 의미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시에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의 결합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치환은유의 역할은 의미를 암시함에 있고, 병치은유의 역할은 존재를 창조함에 있는 것이다. 은유는 ꡒ등가의 신속한 조명ꡓ이라고 하버트 리이드는 말했지만 20세기의 시 예술이 대체로 일시적인 은유의 원리, 자기 동일성 증명에 집착하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은유의 형식보다 예기치 않은, 혹은 난폭한 은유의 형식으로 현대시는 삶의 동일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시의 본질적 구조는 은유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참된 은유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를 동시에 요구하는 비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3) 擬 喩    의유란 의인․의성․의태를 통괄하는 개념이다.  의인법은 인간 이외의 사물이나 추상개념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 그리스말의 prosopopocia가 어원인 것으로 (Person+Fication)의 곁합어로서 (to make persons) 즉 ꡐ사람을 만들다ꡑ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비인격적인 용어를 인격적인 용어로 전용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폭 넓고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의인화는 단순히 은유의 한 변형이다. 보통의 은유가 대상과 대상 사이의 융합인데 비해서 이 의인화는 대상과 인간의 융합이다. 이러한 종류의 융합은 특별히 원시적인 상상력이 특성이었다. 의인법은 대상을 주체화하여 인간의 차원으로 대치하지만 때로는 인간의 주관이 대상의 존재론적 관여를 기도하기 위하여 미학에서 말하는 감정이입의 방법을 쓰기도 한다.    은빛 잠옷을 길게 끌어  온 마을을 희게 덮으려  나의 신부가 이 아침에 왔습니다.  - 노천명 「첫눈」에서 -    외등들이 입초하는  싸늘한 바람 속을  내게 허락된 하나의 귀로  - 정한모 「Limit time」에서 -    이 두 시에서 노천명의 시는 정적인 데 비하여 정한모의 시는 지적인 데가 있어 시대성 같은 것이 결부되어 보인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 신석성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니다」에서 -    산은 사람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를 올라간다.  - 김광섭 「산」에서 -    이 두 시가 모두 ꡐ산ꡑ을 의인화하여 인격과 생명을 부여하고 산의 내면에 시인의 지혜와 통찰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정신적 저류에 깔린 종교적 자연관까지도 엿볼 수 있다.  김동명의 「파초」는 의인법의 표본적인 시이다. 은유법만큼이나 현대시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는 의인법은 ①불완전의인화 ②완전의인화 ③추상개념의 의인법 둥이 있다.  불완전의인법은 의인화 작용이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그 인격성은 단지 연상에 의해 시사될 정도로 이미지가 전체로서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ꡒ책상다리ꡓ, ꡒ산허리ꡓ, ꡒ뺨부비며 열려있는 꽃봉오리ꡓ 서정주의 「밀어」둥은 의인화되어 있으나 그 이미지는 여전히 책상, 산 꽃봉오리이며 단지 물리적인 인간 속성이 부여되어 있을 뿐이다.  완전의인법은 대상의 인격이 전체적으로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특히 신화적 배경을 갖고 표현된 (해․달․별․바람) 등의 의인화가 그것이다. 예를 들면 ꡒ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ꡓ 박목월의「산이 날 에워싸고」같은 시이다.  추상개념의 의인법은 (진리․사랑․희망․이상) 등이 의인화된 것으로 예를 들면 ꡒ희망의 손짓ꡓ, ꡒ민주주의 미소ꡓ, ꡒ역사의 눈ꡓ, ꡒ회상의 계곡ꡓ 등이다.  의성법은 사물의 소리, 움직임, 모양, 의미 등을 음성으로 묘사하는 수사법의 하나다. 언어학에서는 의성, 수사학에서는 성유로 구별해서 쓰이기도 한다.  성음을 묘사하는 것은 음성상징으로서 그 만큼 어떤 사물의 표현에 실감을 주려는 의도에서 쓰인다.    삐이 호이, 비이 호이, 홀로 우는 새의 소리…, 머언 산에서 뻐구욱, 뻐구욱, 울며오는 뻐국소리…, 또, 물소리…, 돌을 씻고 돌틈으로 돌돌돌 쪼로로록 흘러오는 물소리….  - 박두진 「햇볕살 따실때에」에서 -    이처럼 자연의 교감에 민감한 박두진의 표현에서 의성법이 많이 나타난다.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꺽삐꺽 소리를 치며  오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 김동환 「북청 물장수」에서 -    충암절벽상에 폭포수는 콸콸 수정렴(水晶簾) 드리운 듯 이골 물이 주루루룩 저골 물이 솰솰…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같이 흩어지니…  - 「유산가」에서 -  툭 툭 털고 손 놓고 돌아서는 자리  - 조병화 「시간」에서 -    부 - 엉 부 - 엉  양식 없다 부 - 엉  걱정 마라 부 - 엉  낼 모래가 장이다  부 - 엉 부 - 엉  걱정 마라 부 - 엉  - 구전민요 「부 - 엉」에서 -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가요와 민요 같은 데서 의성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현대시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는 수사법이다.  다음에는 의태법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의태법은 사람의 말이나 동작, 사물의 상태 등을 그대로 모방해서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의태어로 된 의태법은 음성상징의 하나이기도 하다. 음성상징은 그 언어의 음성과 사물의 소리 또는 실물의 모양과의 종합관계의 정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단순한 의성어, 단순한 의태어, 묘사의 대상이 되는 동작을 흉내내기 위하여 입술, 혀, 이 등을 움직이는데 덧붙이는 암시적 음이 있는 경우, 음은 비슷하지 않으나 암시적인 것이 그것이다.    ① 찍찍찍, 쭈우쭈우, 찌이찌이, 삐이 호이, 비이 호이, 삐이삐이배, 뱃종 뱃종(이상 새의 울음소리), 철석철석, 돌돌돌, 쪼로록 (물소리)  ② 소곤소곤, 쑤근쑤근, 쑥덕쑥덕, 휘청휘청, 활활,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너울너울, (불꽃이 너울너울 거린다), 덥석덥석, 벌떡  ③ 오싹, 반짝반짝, 빤짝빤짝, 우뚝, 원산은 첩첩, 태산은 주춤하야 기암은, 층층, 장송은 낙낙    이러한 구분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므로 매우 힘들다. ①은 사물의 소리를 직접적으로 흉내내고 있으므로 알기 쉽다. 그러나, ②와 ③은 구분하기 힘이 든다. ②는 언어의 음성과 사물의 소리나 동작과 직접적인 관련이 적고, 발음할 때 우리의 입술과 혀와 이를 움직여서 나는 소리를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③은 사물의 소리나 상태와 같지 않고, 단지 그것을 암시하는 음으로 사물의 상태나 소리와 관련되어 있다.    해는 오르네.  둥실 둥실 둥실 둥실‥‥  어어 내 젊은 가슴에도 붉은 해 떠 오르네.  둥실 둥실 둥실 둥실‥‥    바다는 춤추네.  추울렁 출렁 추울렁 출렁  어어 내 젊은 가슴에도 바다는 춤추네  추울렁 출렁 추렁 출렁  - 金海剛 「출범의 노래」에서 -    이처럼 음성상징이 사물의 형태를 역동성 있게 표현함으로써 실감을 줌은 물론, 생명이 있는 언어가 독자에게 주는 인상은 평면적이나 단순하지가 않고 보다 입체적임을 볼 수 있다.    (4) 알레고리    알레고리(Allegory)는 諷諭 혹은 寓喩라고 풀이된다. 어원은 Speaking otherwise의 뜻으로 그리스어 allegoria 즉 allos (other)+(agora[speaking])에서 온 말이다. 원관념을 배후로 두고 보조관념으로 본래의 의미를 암시하는 알레고리는 은유적 과정의 전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더러는 확장된 은유로 규정되기까지 한다.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원관념 A를 다른 구체적인 보조관념인 B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하게 암시하면서 원관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풍자․독설․냉소․야유 등의 비판적 표현에 적합하므로 예로부터 격언이나 속담 등에 잘 쓰인 비유이었다. 우화시나 풍자시 그리고 사회시 등은 이런 방법의 결과라고 하겠다. 굳이 우화와 구별을 해서 본다면 반드시 교훈성이 없어도 무방하고 동식물 외의 인물도 등장시킬 수 있다. 알레고리는 비유의 입체사진인 것이라고 할만큼 비유의 방법상 포괄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므로 아이러니(irony), 파라독스(paradox), 유우머(humour) 등이 부대조건처럼 따라다니며 이로써 표현 효과를 높인다. 알레고리의 대표적인 것은 「이솝의 우화」이다. 우화는 동물이나 식물의 생활 풍습으로 구성되는데 「이솝의 우화」에는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나 「구약성서」의 「사사기」에는 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알레고리로 씌어진 시조도 많이 있다.    가마귀 검다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은 건 너 뿐인가 하노라    - 길 재 -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호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잇것 씻은 몸을 더럽힐가 하노라    - 정몽주 모친 -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일반비조이니 네오 지오 다르랴    - 李 澤 -    모두 동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교훈시요 풍자시이다. 그러나 알레고리라 해서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 등장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에 나오는 ꡐ씨 뿌리는 자ꡑ 는 즉 ꡐ목자ꡑ요, ꡐ씨ꡑ는 ꡐ천국의 복음ꡑ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기반         5. 客觀的 相關物      객관적 상관물은 시작의 방법으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표현해 주는 어떤 사물, 정황, 혹은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여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사물, 정황, 사건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엘이어트(Eliot. T.S)가 말한 바    정서를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도는 ꡐ객관적 상관물ꡑ 을 발견하는 것, 말을 바꾸면 그 특정한 정서의 형식을 심는 한 묶음의 사물, 하나의 정황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 형식이란 감각적 경험으로 끝나야 하는 외적 사실이 주어지면 정서가 즉시 환기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면 가보세, 자네와 나와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에 퍼질 무렵,  밤 내 잠 못 이루는 헐찍한 일박여관과  굴 껍질을 내놓은 톱밥 깔린 식당에서  중얼거림이 새어나는 골목,  거의 인기척도 없는 거리를 빠져서 가보세  음흉한 의도에서 우러나오는  진저리나는 시비처럼 나닫는 거리는  압도적인 문제로 자넬 인도할 걸세․  오 ꡐ무엇이냐?ꡑ 고 묻걸랑 말게.  우리 가서 방문이나 하세.    방안에는 오가는 아낙네들이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고    창 유리에 둥을 문지르는 노오란 안개  창 유리에 주둥이를 문지르는 노오란 연기    이 시는 (J. 앨프릿 프루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의 첫 부분이다. 주인공의 모노로그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가 된 환자 같은 저녁,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는 하잘 것 없는 응접실 아낙네들과, 노오란 안개와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면서도 모두가 다 프루프록이라는 인물의 세계와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또 위의 시 가운데서 한 부분을 찾아보면    나는 이미 그것들을 다 알았네, 그것들을 다 알았네  그 저녁들, 아침들, 오후들을 다 알았네,  나는 커피 스푼으로 나의 생을 되질해 나누었네.    이 시의 삼 행인 ꡒ나는 커피 스푼으로 나의 생을 되질해 나누었다ꡓ는 자기 생을 구체화해 주고 있는 객관적인 상관물 ꡐ커피 스푼ꡑ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상징적 수법이라고 하겠다.      6. 自動記述法      자동기술법(Automatisme)은 초현실주의자 앙드레브르통(Breton andre)이 창시한 방법이다. 그 후 초현실주의자들은 세계와 인간을 새로이 들여다보려는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독특하고도 새로운 인식론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이론은 현실은 도덕, 철학, 법률, 미학 등의 낡은 관념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조작된 현실을 탈피하여 진정한 삶의 공간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던 꿈의 세계를 기술하게 되고 자동연상(the automatic association)을 문학에 끌어들인 것이다.  의식이나 의도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의 상태로 대할 때 거기서 솟구치는 이미지의 분류를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것을 자동기술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아니하고 이성을 발동하여 합리성이나 논리성이 개재되면 자동연상작용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전개되는 무의식의 흐름이 중단되거나, 그 이미지가 파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브르통이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Freud)를 응용하여 정신병 환자에게서 들으려고 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들으려고 시도한 데서 발명케 되었다는 자동기술법은 많은 동조자를 얻어 세계적인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도 이상을 비롯한 신백수, 이시우 둥 1930년 대의 시인들에 의해서 실천되었다.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구경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가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지아니하는사람의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하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 李箱 「詩第三號」전문 -    이 시를 읽으면 브르통이 말한 ꡒ이성의 모든 속박을 배제하고 미학적 혹은 도덕적인 일체의 고려도 계산되지 않은 채 행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ꡓ 라는 표현을 수긍케 된다.  ꡒ싸움하는 사람 =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ꡓ, ꡒ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ꡓ 등에서 보는 바처럼 논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정상인의 사고로써는 이해조차 어렵다. 그러므로 잠식의식의 자동기술을 떠나서는 포착할 수 없는 독특한 인간정신의 내면을 조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무의식의 세계만이 참된 삶의 공간이라고 말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을 어떤 정신적 구속에서 풀어 자아의 인식에 도달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가장 새로운 방법임을 자부할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는 파괴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도 이단시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31    시의 구조와 행•연 댓글:  조회:11449  추천:0  2019-01-14
현대시의 시작법 - 시의 구조와 행•연      1.시의 행과 연    시의 구조는 행과 연을 나눠볼 수 있다. 행은 단어, 구, 절 또는 그것들의 연합으로 구성되고, 연은 하나의 행 또는 행의 연합으로 구성된다.  김춘수는 시의 행과 연이 이루워지는 이유를 세가지로 들고 있는데, 리듬의 단락, 의미의 단락, 이미지의 단락이 그것이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花草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울타리 밖」    이 시에 '天然히'가 한 연으로 놓여있는데 그만큼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天然히'는 앞과 뒤에 있는 각 연과 맞먹는 이미지의 중량을 작가가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2. 시의 형태와 행•연    시를 형태상으로 구분하면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로 나누어진다. 이 중 정형시는 자유시나 산문시와 달리 형태가 우선하므로 그 형태로부터 작가가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시조에서 보았듯 정형시는 틀이 우선하므로 행과 연은 그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만큼 틀이 우선하고 작가의 의도는 그 다음이다. 정형시의 행과 연은 그 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春三月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터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이영도, 「아지랑이」    이 작품은 정형시의 현대적인 모습으로 현대시조의 모습을 갖고 있다.  회화적인 형태로 시행의 리듬을 시조의 음수율에 기대기 보다,  음수율을 뒤로 숨기고 시각적으로 행을 배열하여 회화적 리듬을 살리고 있다.  이와는 달리 자유시는 틀에 우선하지 않는다. 행과 연은 작가의 의도에 맡겨져 있다.  자유시에서 우리가 리듬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유사한 어구나 어절을 사용 때문인데,  리듬이란 반드시 정형의 틀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3. 리듬과 행•연    Ⅰ. 외국 시와 우리 시의 정형율    정형시의 리듬은 압운과 율격을 기본으로 한다. 압운은 영시나 한시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시행의 시작, 끝, 중간에 유사한 소리는 음절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그 반복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엄격한 체계를 가진 소리의 반복이란 점에 유의해야하는데  우리의 언어는 첨가어로 음절 의식이 약해서 소리의 반복이 음수 또는 음보 단위로 형성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형시에서는 압운 형태의 구조를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2. 자유시의 리듬    자유시에서 리듬을 창조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그 첫째가 전통적인 시의 율격을 적절하게 변형시켜 운용하는 방법이다.    별똥 떠러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오  정지용,「별똥」    이 시를 2음보로 읽으면 우리의 전통 시가의 율격을 금방 느낄 수 있다.  2음보로 된 한 행을 각각 한 연으로 놓고 있어, 한 행 한 행에 여운이 감도는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자유시에서 리듬을 살리는 둘째 방법은 전통적인 시가, 무가, 민요 등의 양식 또는 그 어투를 적절히 차용하는 것이다.  셋째는 동일한 형태소, 낱말, 이미지, 어절, 통사 및 그 형식의 반복이다.      3. 이미지와 행•연    Ⅰ. 이미지의 개념    문학적 용어로서 이미지는 대개 3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넓은 의미로 시나 그 밖의 문학 작품에서 축어적 묘사나 암시 또는 직유, 은유에 사용되는 보조관념들로  언급된 감각적 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성들을 의미한다.  둘째, 좁은 의미로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의 묘사만을 의미한다.  셋째, 비유의 보조관념들을 의미한다.      4. 이미지의 강조와 행•연    나무마다 하나씩 마음을 걸어두고  노을을 받으며 드러눕는 그림자  돌아갈 것이 없는 빈 몸이다.  뒷산은 뒷산은 내 몸이다.  신달자,「뒷산」    이 작품은 감각적 특성보다 그림자→빈 몸→내 몸이라는 의미를 따라가다보니,  감각적 특성은 시행 속에 숨고, 의미의 단락을 분명히 하는 보다 논리화된 시행을 이룬 것이다.    5. 이미지의 종류와 행•연    시에서의 이미지는 언어발달의 단계에 따라 정신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하고,  관념에 봉사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따라 서술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한다.  정신적 이미지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의 감각기관에 의해 이루지는 현상으로  두 개 이상의 다른 감각이 합해진 형태는 공감각이라 한다.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의 보조관념, 상징적 이미지는 상징적 표현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된다.  시의 행과 연은 이미지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기보다,  첫째는 개별적 이미지 또는 이미지의 단락에 주어지는 작가의 강조에 따라 다르고,  둘째는 회화적 구성에 따라 달라진다.      6.회화적 구성과 행•연    회화적 리듬은 그 특성상 시각적 형태로 강조된다.  시각적 형태를 드러내는 대체로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사실적 구성과 기하학적 구성, 그리고 기성품을 모방한 구성이 그것이다.  사실적 구성은 한 편의 시가 한 폭의 풍경화가 되도록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이다.  언술형태로 보자면 묘사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기하학적 구성은 시행을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는 형태이다.  사실적 구성이 언어의 표현 방법에서 찾아진다면 기하학적 구성은 시행 그 자체의 배열에서 찾아진다.  기성품을 모방한 구성의 한 예로는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에서의 식단표 형식을 빌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7. 의미와 행•연    Ⅰ. 의미와 양태    시에서의 의미란 시 속에 묘사되어 있는 것 또는 진술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묘사라 하더라도 서경적, 서사적, 심상적인 작품 구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있기도 하고,  그것들은 또 축어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한 만큼  그 의미의 가시적 양태는 다양하다.  진술 역시 독백적, 권유적, 해석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며, 서로 섞여 있기도 하다.    2. 의미와 연의 기능    정형의 시행을 가진 형태가 아닌 모든 시에서는 연은 작가의 의도에 맡겨져 있다.    가느다란 갈비뼈가 가만히 만져지는 한 마리 참새의 여윈 가슴과 같다 햇볕이 오히려 춥다  마지막 술 한사발이 조금씩 조금씩 엎질러지고 있다  정진규,「봄이 올 무렵」    이 작품은 이미지 도는 의미의 단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산문적으로 엮고 있다.  그 의도 속에는 단락별의 이미지라든지 의미보다 그것들이 어울려서 얻어지는  전체적인 정서의 질량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의미와 전형적 형태의 행•연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는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이 작품에서 보듯, 각 연은 시행의 다수와 관계없이 의식의 이동 단위로 연이 나누어져 있다.  그러니까,  '사랑'을 잃었다는 지각(1연)→"잘 있거라"라고 인사하고 싶은 것들(2연)→"내 사랑"을 본 것(3연)→ 이런 의식의 편차와 단속(단절과 이어짐)이 연으로 구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4. 양행 걸침과 행•연    양행 걸침이란 일상적 구문의 형태가 시행에서 의도적으로 분절되어 두 행에 걸치는 것을 두고 일컫는다.  즉 일상적인 구문과 시행의 구문이 동일하지만 행의 배열이 달라지는 것이다.  
30    시의 표현 및 비유와 상징 댓글:  조회:3417  추천:0  2019-01-14
시의 표현  (1) 비유(比喩, metaphor) ① 비유란 말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② 비유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원관념)과 비유하는 사물(보조 관념)의 상관 관계가 성립된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③ 대개의 경우 비유는 표현의 구체성, 직접성, 선명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며, 일상어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서 특히 많이 쓰인다.   ④ 비유의 종류   ㈀ 직유(直喩)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처럼', '∼같은', '∼인듯'과 같은 말로 직접 연결시키는 표현 기법→ 유사성 ㈁ 은유(隱喩)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A=B' 또는 'A=B 이다'로 연결하는 방법→동일성 ㈂ 대유(代喩) :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표현법 ㉠ 환유(換喩) : 사물의 속성 특징으로 그 사물을 대표함. ㉡ 제유(提喩) : 사물의 일부분으로 그 사물 전체를 대표함. ㈃ 풍유(諷喩) :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 관념만으로 뒤에 숨겨진 본래의 의미를 암시하는 방법. ㈄ 의인(擬人) :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관념에 인격을 부여해서 인간적인 요소를 지니게 하는 표현법. (2) 상징(象徵, Symbol) ① 어느 대상이 다른 대상을 표시하거나, 본래의 고요한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 기법이다. ② 상징은 의미의 암시성과 다의성을 지닌다. ③ 비유에서는 원관념:보조 관념=1:1의 유추적 관계를 보이지만 상징에서는 1:다수의 다의적 관계이다. ④ 상징의 종류 ㈀ 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 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 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 기타 상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해→희망, 밤→절망 2. 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빼앗긴 들→일제 치하의 조국 3. 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숫자, 문자, 부호, 신호 4. 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날개에서의 『방』→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 상징과 은유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비유와 상징의 차이   비유와 상징은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비유는 그 구조가 아무리 복잡한 것일지라도 궁극적으 로는 원관념에 해당하는 뜻의 파악이 가능하나, 상징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비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간에 1:1의 대응 관계를 지니지만 상징은 보조 관념이 여러 가지 원관념으로 쓰일 수 있는 다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솜이불을 덮고 선 겨울 나무'라는 표현에서 솜이불의 원관념은 '눈[雪]'이 분명하므로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하지만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의 '님'은 연인이나 조국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상징 은유 ① 암시적, 다의적이다 ② 한 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③ 상징 의미가 상징 뒤에 숨어 있다. ① 비교, 유추적이다. ② 한 편의 작품에서 1회적으로 나타난다. ③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관계가 명확하다. * 직유 직유와 은유의 차이는 비유의 효과적인 차이이다. 따라서, 시밀리가 축적된 것이 메타퍼이고, 그와 반대로 메타퍼가 부연된 것이 시밀리라고 말할 수 있다. 시밀리가 두 사물을 직접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메타퍼는 두 사물중 하나를 다른 것과 순간적으로 동일시하거나, 한 사물을 통해서 말하거나 하는 것이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이 시는 전적으로 직유에 의하여 이루어진 시로서 분노와 종교, 정열과 사랑, 강낭콩 꽃과 푸른 물결, 양귀비 꽃과 붉은 마음 등이 모두 유사한 것으로 비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매우 쉽고 독자들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경우지만, 현대의 어려운 시에서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관계가 불분명하고 비논리적 이어서 어리둥절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너무 작위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비유는 기발은 할지언정 결코 좋은 비유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갑시다. 그대와 나는 저녁이 하늘을 향해 퍼져가고 있으니 마치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T.S.Eliot 여기에서는 저녁과 마취된 환자를 비교하고 있는 직유의 기법을 쓰고 있지만, 저녁(evening)과 환자(patient)가 어떻게 해서 유사성을 지니는지 독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저녁의 어두움이 퍼져가고 있는 모습은 곧 마취되어 몽롱해지는 환자의 의식과 비슷함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엘리어트가 쓴 비유의 참뜻을 이해하게 된다. 현대시의 이미지나 비유가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직유는 그 형태에 따라서 단일직유(simple simile)와 확충직유(enlarged simile or expanded simile)의 둘로 나누는데, 전자는 단어 사이의 비교이고 후자는 문장이나 구절 사이의 비교이다. 앞에 인용한 『논개』에서 씌여진 비유라든지 서정주의 『문둥이』에는 단일 직유가 나타나 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특히 '꽃처럼 붉은 울음'은 공감각적 이미지가 나타난 직유로서 매우 독창적이다. 다음의 영랑시는 확충직유의 한 예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 * 은유 은유의 구조적 특질은 다음과 같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 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커질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며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박두진 이 시에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한 원관념은 꽃이다. 그 꽃은 여러가지 다양한 사물에 바로 맺어져 있다. 그리하여 시적인 긴장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의미의 함축성도 높여주고 있다. 원관념인 꽃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꽃의 개념이지만, 이것이 '속삭임', '울음', '피흘림', '핏방울', '정적', '호심' 등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여러 개의 보조관념과 동일성을 근거로 결합되어져 있다. 그러나, 꽃과 이상의 보조관념들은 내부 관계의 공통성의 불일치를 가져와 정적 은유를 형성한다. 未堂시의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처럼 외형상의 유사나 동일성보다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동일성이다. 이렇게 시에 있어서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된다. 현대시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이 없이 이질적인 사물과 결합시키는 경향이 더욱 시의 성과를 얻는다. 현대시의 특징이 바로 은유의 독창적인 사용에 있음을 생각할 때 시에 있어서 은유의 비중은 크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 곳의 여인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김광균 이 시에서 눈은 '그리운 소식' '여인의 옷벗는 소리' '추억의 조각' 등으로 정적인 은유가 된다. 은행나무 그늘엔 노오란 音符들이 떨어진다. 은행 잎파리들에다 내 귀여운 語彙들을 적어 본다 적어 놓은 어휘들은 제법 노오란 발음을 한다.         양명문 원관념 은행잎은 보조관념인 '노오란 音符'로, '제법 노오란 발음'은 공감각으로 표현되어 복합은유(mixed metaphor)로 구성되어 있다. 광화문은 한 채의 소슬한 종교.        서정주 바다는 대낮에 등불을 켜고 추억의 꽃물결 우에 소북이 지다.        김광균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玉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燭불이요. 그대 저 門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에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落葉이요. 잠깐 그대의 뜯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네를 떠나리다.          김동명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김광섭 위에 든 시들은 단순한 은유가 나타나 있는 비교적 성공한 작품이다. 따라서 '내 마음은 호수요' '내마음은 燭불이요'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등의 은유에서 '내 마음'이라는 원관념과 '호수', '燭불', '나그네','낙엽', '물결'이라는 보조관념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鳥籠도 없이 原罪의 噴水가 넘치는 입에서 한 마리 두 마리 띄워 보낸 다.  들은 울지도 않는다. 시간은 앞에 서서 달음박질하고 는 항상 시간의 뒤안에서 나고 있다가는 파다닥 파다닥 날개쭉지를 뒤채기고는 시간 위에 머리 박고 죽어가는 다.             신기선 이 시에는 '새'라는 보조관념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지만 원관념은 없어서 매우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탄식』이라는 시제목이 곧 원관념인 것을 알게 되고, 구체적으로 그 『탄식』이 무늬 놓는 이미지를 깨닫게 된다. *  의인법(personification)-활유 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서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비유로서, 활유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많이 쓰던 이 수사법은 메타포(metaphor)의 한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성난 파도', '시냇물이 소근댄다', '구름이 달린다'등 자연물을 인간화해서 그 성질과 동작을 표현하는 이러한 의인법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의 조선소설 중에는『장끼전』,『별주부전』,『서동지전』과 같이 전체가 의인법으로 되어진 작품들이 있다. 시에 있어서도 이 의인법은 널리 씌어지고 있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넛은 수녀보다도 더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너의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김동오  동명의 파초는 김현승의『푸라타나스』, 이육사의『광야』와 더불어 의인법을 써서 성공한 대표적인 시다. 그밖에도 시 속에 부분적으로 의인법이 씌어진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이상의 시에서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滅해간다. 食口야封한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鍼처럼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 그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壽命을헐어서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여달렸다. 門을열려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 이상 라고 한 것은 띄어쓰기를 전혀 안한 시로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라든지 '우리 집이 앓나보다' 등은 곧 의인법으로 수식되어 있는 시구이다 다음의 시도 활유법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다. 먹구름이 몰고온 여름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판으로 모여 든다. 할아버지 수염을 달고 익어가는 옥수수가 치마폭에 감싸여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알맹이 하나 하나에 이쁘디 이쁜 개구장이 꼬마들이 웃음소리가 가득차 있다. 신나는 것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멋진 노래가 되어 입안 가득히 살아져 내리는 것이다. 여름이 오면 멋진 하모니카를 신나게 불고 싶어진다.        용혜원 '이야기들' '옥수수'를 의인화하여, 동심에 어린 생활의 서정이 옥수수에 이입되어 해학미를 더하고 있다.   * 인유(引喩, allusion) 인유라는 것은 고대의 신화, 전설이라든지 고전, 역사, 성서, 고사 등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 스토리, 시구 등을 인용하여 쓰는 비유를 말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이 인유는 널리 씌어진 표현법으로서 동양에서 고대 중국의 문헌이라든지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및 성경 등은 시와 산문을 통털어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위 시 중 첫 연의 '4월'은 4 19학생혁명을 비유한 것이고, 둘째 연의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은 민중의 자각이 봉기했던 동학혁명의 함성을 뜻하며, 세째 연의 '아사달 아사녀'는 신라 시대에 불국사의 무영탑을 조각하느라고 비연을 감수한 석수와 그 아내를 두고 말한 인유이고, '한라에서 백두'는 한반도 3천리강산을, '쇠붙이'는 모든 무기를 말한 대유이다. 신동엽은 특히『진달래 산천』을 노래하고, 평화를 추구한 레지스탕스 시인이었다.  * 성유(聲喩) 의성어(onomatopoeia)라든지 의태어는 곧 음성을 되풀이 하여 효과를 내는 표현법이다. 전자는 자연이나 인간의 소리 등을 흉내내어 표현한 것이고, 후자는 사물의 모습이나 태도 등을 흉내내어 적는 표현법이다.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골어 흰 구름 걷는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박두진 박두진의『청산도』라든지 『해』에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이 씌어졌다. * 상징 비유(은유)와 비교해서 말하면 상징은 원관념을 떼어 버리고 보조관념만 남아 있는 형태이다.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셔질 그런 정도로 아팠다. 이내 어떤 정신도 발아하지 않았다. '사과'는 도입해온 보조관념이다. 원관념도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상력을 통해서 사과의 의미는 '죽음'을 암시할 뿐이다. '떨어지다' '부서지다' '움트지 않음' '아픔'은 다 죽음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 동일성이다. 그래서 원관념의 '최후'인 죽음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감춰져 있을 뿐이다. 상징의 본질적 성격으로서 동일성을 든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눈이 살아있다는 생명을 느낀다. 눈과 기침의 내부관계는 공통성의 일치를 찾지 못한다. 다만 상상력으로 '눈'과 '기침'은 상징으로서, 이 감각적 이미지는 순결과 진실성이라는 관념과 밀착된 상징이다. 3연의 눈의 생명성은 이 순결의 생명성이며 기침을 하는 행위는 화자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성의 관념과 밀착되어 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이 시에서 '문둥이'는 시인 자신의 정신적 고뇌 자학을 상징하며 그것은 이 시의 문맥 속에서만 의의를 지닌 개인적 상징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이 시의 리듬은 상징의 암시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소리의 신비감으로써 무엇인가를 우리의 영혼에 공명케 하려는 것이 상징주의 순수시가 노린 상징의 기능이라면, 이 시의 리듬이 이미지와 결합되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한 관념을 노출시키지 않고 상징의 암시성을 효과적이게 한다. '풀'이 지닌 드러냄은 감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조화는 리듬이 빠른 템포로 흐르면서 주술성의 어떤 오묘한 맛을 내고 있는 데서 발생한다. 특히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고 울고 일어난다는 반복되는 논리적 모순과 융합되어 이 시의 리듬은 주술성을 느낀다. 이 주술의 리듬속에 풀은 민중을 감추고 바람은 그 민중이 살고 있는 실존적 상황을 감추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것이다. 바람과 대비된 풀의 동작에서 민중의 끈질기고 활발한 삶의 양식만을 시인과 독자가 다같이 관심을 두었다면 이 시도 영락없이 드러남의 알레고리시가 되었거나 단순한 알레고리로서만 수용되었을 것이다. '풀'을 삶의 움직임의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동력'으로 느끼게 한 것은 주술적 리듬, 음악적 성격의 개입으로 드러남과 감춤의 조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들에 가서 비로소 깨닫는 그것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음을      오규원 '만물의 흔들림'은 상징이다. 역동적 이미지는 "잎은 흔들려서" "바람은 오늘도 분다"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음을" 등 여러 장면과 결합되어서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곧 '흔들림'의 역동성은 작품 전체를 확산, 생의 여러 감각을 일깨운 상징이다.   상징과 기호   상징과 은유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3) 현대시의 표현 기교 ① 반어(反語, irony) : 작가가 의도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하여 날카로운 멋과 예리한 감각을 발휘하는 기법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반어적 구조를 통해 주제를 형상화하였다. ② 역설(逆說, paradox) : 본질적으로는 참이나 외견상으로는 모순, 충돌되는 진술 형태, 모순되는 사물이나 관념을 연결하여 경이감, 신선감을 주는 기법. 모순 어법, 모순 형용의 표현 등이 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모순어법,  찬란한 슬픔의 봄-모순 형용 ③ 자동 기술법 : 인간 내면의 깊은 생각, 관념을 아무런 제재없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표출시키는 것이 인간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길이라 믿고 꿈을 꾸는 자가 그 순간 그대로 스스로의 내면 세계를 표출하듯이 무의식의 세계를 기술하는 기법이다.  
상상과 환상 ―시적 환상의 이해를 위해     이은봉 정리     1. 혼돈과 무질서1)   우주는 혼돈과 무질서로, 미지의 신비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거시의 세계만이 아니라 미시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우주물리학의 대상인 거시의 세계 역시 혼돈과 무질서로, 미지의 신비로 가득 차 있지만 양자역학의 대상인 미시의 세계 역시 혼돈과 무질서로, 미지의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거시의 공간도 텅 비어 있는 비의의 존재이지만 미시의 공간도 텅 비어 있는 비의의 존재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 공간이 무질서와 불확정성 그 자체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이들 공간이 환상성과 혼돈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환상성과 혼돈성을 토대로 하고 있기는 흔히 소우주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의 심리세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심리는 언어를 통해 현현되거니와, 언어의 밑바닥에 무의식이라는 혼돈이, 곧 환상(幻想)이 깊이 자리해 있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이 혼돈을, 즉 혼돈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환상(fantasy)은 언어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해 있는 무의식적 이미지의 표현, 곧 혼돈의 이미지를 투사한 것을 가리키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프로이트나 융, 라캉의 연구대상도 이때의 무의식적 환상과 별로 멀지 않다. 무의식적 환상은 본래 주체가 받는 억압과 금지, 핍박을 통해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의 시가 거시의 세계보다는 미시의 세계에 좀 더 집착해 있다는 점이다. 지나칠 정도로 사적인 세계, 트리비얼한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시이지 않은가 싶다. 지나칠 정도로 사소한 공간, 곧 미시한 공간을 시적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시라는 것인데, 어쩌면 그래서 오늘의 시가 독자들과의 소통을 문제로 삼는지도 모른다.   2. 환상의 발생   환상이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렇다. 환상은 무의식에서 태어난다. 시에서의 환상, 곧 시적 환상은 무의식으로서의 환상을 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다.의식에 의해 질서의 안으로 들어온 무의식으로서의 환상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시적 환상이다. 그럴 때 시적 환상은 소통과 공감을 만든다.   프로이트에게는 환상이 응축과 치환의 심리를 통해 일어난다. 응축은 은유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관계되어 있고, 치환은 환유의 형태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관계되어 있다. 라캉에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서 출현하는 환상, 곧 상상계적 환상이 있고, 타자에 대한 욕망이 금지되는 데서 출현하는 환상, 곧 상징계적 환상이 있다. 라캉에 의하면 거울단계에서의 어린 아이는 거울에 비친 환상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소문자 타자를 생성한다. 이 소문자 타자는 상징계에 들어서면서 대타자와 만나는데, 대타자는 절대적인 아버지와 언어, 법률 등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언어, 법률 등 엄중하고 위엄한 것인 대타자는 금지의 대상이기 쉽다. 이들 금지의 대상, 즉 대타자는 끊임없이 욕망을 발생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욕망이 주체에 의해 발생하지 않고 타자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의 욕망이 주체의 정신 내면에 무의식적 환상으로 출현한다. 말하자면 환상이라는 것이 대타자에 의해 억압된 심리기제에서 발생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환상은 주체에 의한 욕망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욕망에서 비롯되거니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체의 소외는 일어난다. 소외를 벗어나려면 타자에 의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 곧 타자에 따른 욕망과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흔히 이를 ‘환상가로지르기’라고 한다. 소외된 주체는 ‘환상가로지르기’를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성찰하는 가운데 진정한 욕망에 이르는데, 정신분석학에서는 바로 이것이 목표이다. 환상 자체는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보다 훨씬 더 절대적인 대타자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병리적인 무의식으로서의 환상이 아니다. 병리적인 무의식으로서의 환상을 주목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인간의 몸이 무의식적인 환상을 발생시키기 쉬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을 세 개의 이미지인 그림자, 영혼, 탈로 구분해 원형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또한 실제로는 환상과 다르지 않다.환상 자체가 대타자라면 원형 자체도 대타자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그렇다면 환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통적인 학습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으로 들어와 대타자로 구조화되어 있는 셈이 된다. 물론 시적 환상을 곧바로 여기서 말하는 무의식적 환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가공되지 않은 무의식적 환상이 시적 환상이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상상과 환상   자본주의적 근대가 진행되는 동안 환상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이 시기 동안 환상은 대부분 무가치한 대상으로 버려져 있었다고 해야 옳다. 그동안은 현실을 왜곡시키는 비주류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왔던 것이 환상이다. 중세와는 달리 근대에는 환상보다는 상상(想像)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의 중심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탈근대의 세계로 진압하면서 환상은 상상에 못지않은 중요한 이미지 사유로 재발견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환상의 시대에서 상상의 시대로, 상상의 시대에서 환상과 상상이 공존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상은 본래 설화의 세계, 곧 신화, 전설, 민담이나 원시예술, 종교적 세계의 주요내용을 이루어온 바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설화, 그리스 로마의 신화, 기독교의 바이블, 불교의 경전 등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탈근대의 시대는 환상의 회복을 통해 인류 초기의 시원성 혹은 원시성을 회복해가는 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원시예술이 지니고 있는 신화적 신비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이 인류의 단기적인 미래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환상에서 상상으로의 이행, 곧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확실성의 세계로의 이행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미지에서 기지로, 신비에서 현실로, 관념에서 구체로, 비합리에서 합리에로의 이행과정으로 이해해도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이로 미루어 보면 상상의 세계는 개연성의 세계를 가리킨다고 해도 무방하다. 있음직한 세계, 예측이 가능한 세계에 대한 전망을 담는 것이 개연성의 세계이고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상상이라는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해 맨 처음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코울리지이지만 그것의 구조를 체계화시키고 집대성시킨 것은 바슐라르이다.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원소로 세계의 모든 사물을 구조화시킨 바슐라르가 이미지의 사유의 하나인 ‘상상’을 가장 설득력 있게 체계화시킨 사람이라는 것은 덧붙여 강조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네 가지 원소와 그 변형을 중심으로 논문을 쓰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바슐라르의 상상에 대한 연구는 놀랄만하다. 그러나 상상이 오성,곧 이해력과 함께 사유의 중요한 두 축으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해력과 함께 상상력이 인식의 두 코드로 인정받는 데는 플라톤 이후 근대에 들어설 때까지 무려 2000년의 세월이 요구되었다는 뜻이다. 이해과 이성이 서로 다른 추상사유능력이듯이 상상과 환상도 서로 다른 구상사유(이미지사유)능력이다. 물론 그것들 사이의 변별성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도 여기서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상상과 환상이 각기 같으면서도 다른 심리상태, 곧 사유형태라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상상과 환상은 쉽게 대조, 비교될 수 있거니와, 우선 상상이 현실에 기초한 이미지 사유라면 환상은 비현실, 신비나 비의의 세계에 기초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환상에 대한 긍정은 비현실, 신비나 비의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 되기도 한다.많은 사람들이 탈근대, 후기근대, 자본주의 이후 등을 얘기하고 있거니와, 이 시기는 이제 상상보다는 환상을 상대적으로 더 필요로 한다. 오늘의 예술은, 곧 문학, 영화, 게임, TV드라마, 애니메이션은 이제 환상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창작되기 어렵다. 복잡한 환상의 개입이 없이 평범한 상상만으로 생산되는 오늘의 예술이 독자들의 구미를 맞추기는 힘들다.   현대예술이 불가피하게 환상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의 토대가 되는 불확정성, 혼돈 등 또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과도한 이성의 개입에 의해 주류를 형성해왔던 상상을 옆으로 좀 비켜 세우고, 그 자리에 신비나 비의로서의 원시적이고도 시원적인 시각을, 곧 환상의 시각을 불러 세우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환상의 수용은 원시의 상태로, 시원의 상태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노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해야 옳다.   4. 상상과 환상의 통합   상상과 환상의 차이는 결국 현실 중심의 이미지사유와 비현실 중심의 이미지사유의 차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상상이 모더니즘과 관계하며 ‘새로움의 유희’를 추구한다면,환상은 아방가르드와 관계하며 ‘다름의 유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상상이 상대적으로 형식이나 질서, 구체성을 소중히 여긴다면 환상은 무형식이나 혼돈, 관념성을 소중히 여긴다고 해도 좋다. 상상이 알 수 있는 것(기지)에, 사실이나 진실에 기대고 있다면, 환상은 알 수 없는 것(미지)에, 신비나 비의에 기대고 있다고 해야 옳다. 상상이 이차원적인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인식능력이라면 환상은 이차원적인 이미지에 입체성을 부여하는 인식능력이라는 것이다. 상상이 대지와 현실, 경험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미지 중심의 심리라면 환상은 하늘과 비현실, 관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미지 중심의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사유, 곧 이미지심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실제적으로 구현되고 실현되는 과정이나 토대는 다른 것이 상상과 환상인 셈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상상과 환상의 충돌은 문명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나날의 현실과 생활에 토대를 두고 있는 유교적 세계관과, 비현실적과 꿈에 토대를 두고 있는 불교적 세계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상상과 환상은 상호충돌의 측면으로 길항하거나 갈등하기보다는 상호공존의 측면으로 화합하거나 통합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상호공존, 현실과 꿈의 상호공존,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공존을 뜻하니 만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새로운 문학, 새로운 미래의 시는 상상과 환상이 행복하게 결합되고 통합되는 데서 가능해지리라는 자명하다. 상상과 환상을 행복하게 결합하고 통합하는 일은 일단 환상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환상에 대한 무분별한 도취가 소통의 어려움을 만들고,시의 난해성을 만든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 시단에 소통의 문제가 거듭 제기되었던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의 난해성에 대한 논의는 항용 시의 애매성에 대한 논의로 전이된다. 이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것은 시의 애매성이 정작의 시에서는 입체성과 깊이를 더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애매성과 다른 것이 시의 애매성이라는 것인데, 이는 일반적인 환상과 시적 환상이 다른 것도 이에 그대로 상응한다.     5. 시적 환상을 위하여   정신분석학에서는 보통 두 가지 환상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무의식적 환상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적 환상이다. 무의식적 환상은 정신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환상을 가리키고, 의식적 환상은 백일몽 등처럼 정신의 표면에 나타난 환상을 가리킨다. 프로이트나 융, 라캉 등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때의 의식적 환상이다. 하지만 이때의 의식적 환상은 새로운 미래의 시의 창작과 관련해 여기서 말하는 의식적 환상과 많이 다르다. 여기서의 의식적 환상은 시적 환상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 환상이 부정확함에 기초하고 있다면 의식적 환상은 비정확함에 기초하고 있다. 비정확함은 정확함을 위해 엄밀하게 의도된 것이고, 부정확함은 문자 그대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의식적인 환상의 토대가 되는 것이 비정확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 환상은 일반적 환상의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비정확성에 기초해 환상을 제어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의식적 환상이거니와, 이 의식적 환상에 의해 시적 환상이 발생한다. 일반적인 환상과는 달리 의식적 환상의 결과인 시적 환상은 들끓는 혼돈에 질서와 체계를 부여하는 시인의 각성된 눈에 의해 태어난다. 말하자면 시적 환상은 환상의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각성된 정신행위라는 것이다. 환상과 상상이 만나 조화롭게 통합되는 자리에도 일반적 환상을 제어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의식적 환상은 존재한다. 환상과 상상이 만나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고서는 앞으로 한국시의 새로운 풍요를 얻기가 힘들다. 환상과 상상이 만나 조화롭게 통합될 때 한국시가 훨씬 더 찬란한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환상과 상상의 통합은 혼돈과 질서의 통합이거니와, 혼돈과 질서의 통합, 곧 카오스모스로서의 세계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의식적 환상은 실질적인 창작의 매개가 되는 정작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 환상이라는 도구를 가질 때 시인은 이차원적인 상상의 이미지에 입체성을 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시의 표현영역이 엄청나게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한국시가 의식적 환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적 환상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환상과 상상의 통합, 곧 혼돈과 질서의 통합 한국현대시의 바른 활로를 틀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환상과 상상이 제대로 통합된 시가 어찌 소통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시가 어찌 소통을 걱정할 수 있겠는가.(2012. 8. 20 이 글은 『시와환상』 2011년 겨울호(통권 3호)에 수록된 원구식 시인과 김제욱 시인의 대담 「상상과 환상의 통합 2」의 내용을 필자가 첨삭, 정리한 것이다.) 1)  이 글은 『시와환상』 2011년 겨울호(통권 3호)에 수록된 원구식 시인과 김제욱 시인의 대담 「상상과 환상의 통합 2」의 내용을 필자가 첨삭, 정리한 것이다.  
28    [스크랩] 용어정리 댓글:  조회:1425  추천:0  2018-11-12
[ 가 ] 감각적 : 감각 기관으로 포착된 외부의 자극에 의한. 감동적 : 무엇에 깊이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감상적 : 어떤 일이나 현상을 슬프게 느끼는. 감성적 :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감정적 : 사물의 현상에 느끼어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 중에서 쾌․불쾌․기쁨․노여움 따위의. 개성적 : 낱낱의 물건이나 또는 한 사람의 인간에게 특유한 특징이나 성질․성격․성향의. 개연적 : 일정한 조건 아래서 어떤 현상이 발생할 만한. 개인적 : 단체나 집단에 대하여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사람의. 객관적 : 개인적 주관을 떠나 냉철한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격정적 : 강하고 또 급격하여 누르기 어려운 정서의. 경세적 : 세상 사람을 깨우치는. 고답적 : 실사회와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고백적 : 비밀이나 생각하는 바를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고전적 : ① 조화․전통․형식을 중히 여기는.          : ② 예술 작품에서 고전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공리적 : 어떤 행위가 자기에게 이로울 것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하는. 공상적 : 현실적이 아닌, 또는 실현될 가망이 없는. 공시론 : 같은 시간, 곧 동시성 위에 존재하는 현상을 파악하는 이론 ↔ 통시론 과장적 : 사실보다 지나치게 나타내는. 과학적 : 구체적인 사상과 그것을 통일하는 보편적인 법칙에 관하여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하고,또 그것을 응용하는. 관념 : 대상에 대한 인상이나 의식 내용. 관념적 : ① 현실을 무시한 추상적인.  : ② 철학적 관능적 : 육체적(성적) 쾌감을 자극하는. 관조적 : 고요한 마음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음미하는.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괴기적 : 이상하고 (불가사의하고) 야릇한. 교술적 :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여 감흥을 자아내는 교훈적 : 앞으로의 행동이나 생활에 있어서의 지도적인 구실이 될 만한. 구비적 : 말로 전해져 퍼져 내려오는 민요나 판소리 따위. 구상적 : 구체적 ↔ 추상적 구체적 : ① 직접 경험․지각할 수 있는.          : ② 일반적․추상적․보편적에 대립적인(개념). 국수적 : 제 나라 것만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극적 : ① 연극적 (대화․행동)     : ② 깜짝 놀랄만한.   [ 나 ] 낭만적 : 비현실적인. 내성적 :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성 격인. 냉소적 : 쌀쌀한 태도로 업신여겨 비웃음. 논리 : ① 말이나 글의 조리.        : ② 생각하여 분별하는 이치. 논거 : 의견이나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 해주는 증거. 논증 : 상대의 신념이라 태도, 의견 등을 필자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진술 방식.   [ 다 ] 달관 :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세속을 벗어난 경지. 당위적 : 마땅히 행해야 하는. 대응 : 짝을 이뤄 서로 응함. = 상응 = 호응 대조적 : 서로 반대적으로 대비되는. 대중적 : 널리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한. 도식적 : 이미 이루어진 틀이나 공식에 맞추어 보려는. 독백적 : 혼자서 중얼거림.   [ 마 ] 명제 : 어떤 사실의 진위나 의견, 주장, 판단 등을 문장으로 나타낸 것. 모순 :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목가적 : 서양의 시골 냄새가 나는. cf. 향토적 : 한국적 시골 냄새가 나는    전원적 : 시골 생활의 자그마한 것들에 애정을 쏟는 묘사적 : 보고 들은 것이나 마음에 느낀 것을 그림이나 소설 따위에서 예술적․객관적으로 재현. 문화 : 인류가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 놓은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의 성과. 미동적 :약간 움직이는.   [ 바 ] 반어적 : 일부러 어떤 말을 실제와는 반대로 표현하는. 아이러니. 배타적 : 남을 배척하는. 변증법 :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 원리로 하여 사물의 발전 법칙을 설명하려는 논리. 보수적 : 재래의 풍속․습관․전통 등을 중시하여 그대로 지키려는. ↔ 진보적 본질 : 근본 바탕, 중심 내용 봉건적 : 봉건제도 특유의 전제적․계급적․인습적인. 부연 : 덧붙여 설명함. 분석적 :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분해하여 그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적 성분․요소를 파악하는. 비약적 : 단계나 순서를 차례대로 밟지 않고 껑충 뛴. 비유적 : 그와 비슷한 다른 성질을 가진 현상이나 사물을 빌어 뜻을 명확히 나타내는 일. 비장미 : 슬픔 속에 훌륭한 뜻을 지님. 비판 : 인물․행위․판단․학설․작품 따위를 평가․검토하여 그릇된 점을 밝혀 내는 일. 비평 : 대상의 가치나 영향을 따져 말함. 비현실적 : 현실과는 동떨어진.   [ 사 ] 사실적 : 현실로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 일의. 사실적 : 사물의 실제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사색적 :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더듬는. 산문적 : 글자의 수나 운율 같은 거의 제한이 없이 자유룝게 기술하는. 상대적 : 사물이 다른 것과의 관계나 대립․비교 등의 상태에 놓여 있는 ↔ 절대적 상보적 :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상상적 :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하여 마음속에 그려보는. 상술 : 자세하게 설명함. 상징 : ①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         : ② 보조관념 : 원관념 = 1 : 多        : ③ 원관념은 숨어 있다. 상투적 : 늘 버릇이 되어 쓰는 예사로운 성격 서경적 : 경치를 펴는. 서정적 : 잔잔하고 아름다운. 서사적 :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적는. 서술적 : (어떤 내용을) 차례를 좇아 말하거나 적는. 선험적 : 논리상 경험에 앞서서 인식의 주관적 형식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설명적 :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밝혀서 말하는. 수사적 :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하여 문장․사상․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언어 수단들의 선택과 그의 이용 수법. 수의적 : 자기 마음대로 하는. 순종적 : 거슬리지 않고 순순히 복종하는. 순행적 : 차례대로 진행되는. ↔ 역행적 숭고미 : 존귀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 대상이 갖는 미. 시사적 : 현재의 정치․경제․사회와 관련된. 신분적 : 개인이 속하는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의./ 신비적 : 사람의 힘이나 지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묘한. 신앙 : 초자연적인 절대자․창조자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 심리적 : 마음의. 심미적 :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미, 탐미 심상 : 기억과 연상을 통해 마음속에 떠오르는 느낌이나 모습. 이미지.   [ 아 ] 암시적 : 어떤 것이라고 꼭 집어서 밝히지 않고 넌지시 깨우쳐 주는. 애상적 :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여성적 : 여성답거나 또는 여성에 특유한. 역동적 : 움직이는. 동적. 역사적 : 역사에 기초하는. 역설 : 두 가지 사실이 얼핏보기에는 서로 충돌하는 것 같으나 이치에 맞음. (표현은 모순이나 실제로는 내용을      강조함.) 역학적 : 부분을 이루는 요소가 서로 의존적 관계를 가지며 또 서로 제약하는. 염세적 : 세상이 싫어짐. ↔ 낙천적 예속적 : 남의 지배 아래 매인. 예술적 :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활동을 빛깔․모양․소리 등에 의하여 미적으로 창조, 표현하는. 예지 :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뛰어난 지혜. 예찬적 : 존경하고 찬탄하는. 외경심 : 숭고한 가치를 지닌 대상(절대자, 생명 등)에 대해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 운명론적 : 모든 자연 현상이나 사람의 일은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어서, 결코 사람의 힘으로는 변경 못 시킨다는. 운치 : 고상하고 우아한 멋. 유기적 : 여러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구성하여, 그 각 부분 사이에 긴밀한 통일을 이루어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원형상징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에게 거의 동일한 느낌을 주는 내용. 유심론적 : 정신적인 것만이 참된 실재이며, 물질적인 것은 그 현상․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유의적 :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것. 유추적 : 어떤 사물에서 다른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는. 의식 : ① 깨어 있음  ② 생각  ③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생각 의지적 : 목적을 자각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이상적 :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이성적 : 본능이나 감상적인 충동에 의하지 않고, 이성에 의한. 이지적 : 사물을 분별․이해하는 슬기를 지닌. 인간성 : 인간다운 면. 인간의 본성. 인습 : 버려야 할 옛 풍습이나 습관. cf)전통-계승해야 할 것 인식 : 깨달아 앎. 일반적 :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추상적․보편적 임의적 : 강제나 제한이 없이 마음이 내키는 대로하는.   [ 자 ] 자조적 : 스스로 자기를 비웃는. 자주적 :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기 뜻과 책임 아래 처리하는. 적층적 : 개인의 창작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아진. 전개 : 내용을 발전시켜 펼치는 것. 전기적 : 이상하고 진기한. 전기적 : 일생의 사적을 중심으로 적은. 전위적 : 예술 운동에서 가장 선구적인. 전제 : 추리에서 결론의 기초가 되는 판단. 전지적 : 모든 것을 다 아는. 전통적 : 지난 세대에 이미 이루어져 그 후로 계통을 이루어 전하여 지는. 전형적 : 동류의 사물들 가운데서 그 사물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그 본보기로 삼을 만한. 절대적 : 아무런 조건도 붙지 않고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상대될 만한 것이 없는 ↔ 상대적 정서적 : 어떤 사물에 부딪혀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에 의한. 정시적 : 드러내 보이는. 종교적 : 신이나 또는 어떤 초월적인 절대자를 인정하여, 그것을 믿고, 숭배하는, 신앙하는. 주관적 : 개인적인 관점이나 견해를 가진. 주술적 : 무당 등이 신의 힘이나 신비력으로 길흉을 점치고, 재앙을 물리치거나 복을 비는. 주정적 : 정서를 위주로 하는. 주지 : 주된 내용. 주지적 : ① 감정․행동보다도 지성․사유 등의 지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는.          ② 지성을 위주로 하는. 지사적 : 국가․겨례․사회의 앞날을 걱정하여 제 몸을 희생해서 일하려는 크고 높은 뜻을 가진. 지성 : 지각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인상을 형성하는 정신적인 작용. 직관 : 지식이나 경험을 배제하고 그 자체대로 파악함. 직서적 : 상상이나 감상 등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직설적 : 있는 그대로 말하는. 직시적 :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바로 봄. 직접적 : 중간에 제삼자나 어떤 사물을 개재시키지 않고 바로 접촉하는. 진술 : 자세히 말함. 또는 그 말.   [ 차 ] 추론 : 주장의 타당성을 논리적 방법으로 밝히는 과정. 추상적 : ① 낱낱의 별개의 사물․사항․구체적 개념에서 그것들에 공통된 속성을 뽑아 내서 이를 일반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② 주장․논의 등이 실적의 구체적․개별적인 사정을 무시하고 있어 막연한. 일반적. 개념적. 참회적 : 잘못에 대하여 뉘우쳐 마음을 고치는. 철학적 : ①사물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② 철학에 기초한.   [ 타 ] 탐미적 :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미의 세계에 빠지거나 도취하는. 통사적 구조 : 문장의 구조. 통설적 : 세간에 널리 알려지거나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있는. 통속적 : 일반에게 널리 통하는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통시적 : 역사(시간)적으로 파악하는. 퇴폐적 : 풍속․도덕․문화 따위가 문란하여 건전하지 못한. 특수성 : 각각의 것이 지니고 있는 성질. ↔ 보편성   [ 파 ] 풍류적 : 속된 일을 떠나서 운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풍속 : 오랜 이전부터 전해 오며 지켜지고 있는 생활상의  여러 가지 습속. 풍자적 : 문학 작품 따위에서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등을 꾸짖는. 필연적 :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 우연적   [ 하 ] 함축적 : 말이나 글 가운데 많은 뜻이 집약되어 있는. 해설적 : 어떤 문제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해학적 : 우습고 익살스러운. 향토적 : 일정한 지방에 특유한 자연과 풍속 또는 생활 등을 전제로 한. 허구적 :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자의 상상력에 의하여 창조해 내는. 현실적 : 존재하거나 또는 실현되어 있는. 현학적 : 학식의 두드러짐을 자랑하여 뽐내는. 형식적 : 내용을 따르지 않고 겉발림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 초감각적인 세계를 진실의 실제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순수한 사고에 의하여 인식하려는. 형이하학적 : 감성적 현상을 대상으로 한. 환상적 : 현실적 기초도 가능성도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회의적 : 어떤 일에 의심을 품는. 희화적 : 익살맞게 그린.                                                                                                                                                          가져온 곳 :  카페 >고운글 | 글쓴이 : 포춘 유영종| 원글보기      
27    [스크랩] 4계절 꽃말 모음 댓글:  조회:1237  추천:0  2018-11-12
4계절 꽃말 모음 [ Spring ] 1.갯버들...친절,자유 2.데이지...순진,평화 3.튤립...자애,명성 4.팬지...쾌활한 마음 5.진달래...절제 6.프림포즈...번영 7.하아신스...마음의 기쁨,승리 8.주목...명예 9.해바라기...동경,숭배 10.황매화...숭고,고귀,왕성 11.벚꽃 - 정신의 아름다움 12.찔레꽃...온화 13.개나리...희망 14.다알리아...감사,우아 15.달맞이꽃...말없는 사랑 16.목련...자연에의 사랑 17.물망초...진실한 사랑, 나를 잊지마세요 18.배꽃...환상 19.꽃베고니아...친절,정중 20.에크메아...만족 21.성화맨드라미...뜨거운 사랑 22.버베나...단결 23.초롱꽃...충실,정의,감사 24.꽃창포...우아한 마음,좋은 소식 25.민들레...사랑의 신탁,선고 26.백합...순결,깨끗한 사랑 27.정미(적색)...정렬,열렬한 사랑 28.거베라...신비,풀 수 없는 수수께끼 [ Summer] 1.라일락...첫사랑의 감동,우애 2.글라디올러스...밀회,조심 3.마거리트...사랑을 점친다. 4.수국...냉정,무정,거만 5.들장미...조촐한 사랑,고독 6.아카시아...쾌락을 바람 7.도라지...영원히 변치않는 사랑,성실 8.과꽃...믿는 사랑,추억 9.베고니아...친절,정중 10.아게라텀...신뢰 11.채송화...순진,천진난만 12.무궁화...은근,끈기,섬세한 아름다움 13.양귀비...위안 14.접시꽃...풍요,대망 15.밀집꽃...항상 기억하라 16.락스퍼...정의,자유 17.센트레아...행복,섬세,유쾌 18.공작선인장...정열 19.담장이...아름다움의 매력 20.미나리...성의 21.부용...섬세한 아름다움 22.대나무...정렬 23.버드나무...애도,경쾌 24.루드베키아...영원한 행복 25.당아욱...자애,어머니의 사랑 26.장미(핑크)...사랑의 맹세 27.장미(진홍)...수줍음 [ Fall ] 1.국화...청결,정조,순정 2.갈대...신의 믿음,지혜 3.보리수...결혼,부부의 사랑 4.코스모스(백색)...소녀의 순정 5.사르비아...불타는 마음,정열 6.서향...불멸,명예 7.아네모네...고독,사라져가는 희망 8.아네모네(적색)...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9.플라타너스...천재 10.히비스커스...섬세항 아름다움,신선한 아름다움 11.스타치스...영원한 사랑 12.은행...장수 13.박하...덕 14.아몬드...기대,희망 15.은방울꽃...행복의 확인 16.오미자...다시 만납시다. 17.색동호박...나의 마음은 아름답다. 18.염주...은혜 19.안개꽃(적색)...기쁨의 순간 20.일일초...우정 21.크립탄서스...만족 22.석류...원숙한 아름다움 23.호프...성의 24.참깨...기대 25.해당화...온화 26.천일홍...불후,불변 27.구즈매니아...만족 28.디기탈레스...열애,나는 애정을 숨길 수 없습니다. 29.마취목...희생 30.작살나무...총명 31.행운목...행운,행복 32.칼라...황희,열정 33.올리브...평화 [ Winter ] 1.풍란...참다운 매력 2.발베르기아...만족 3.유포르비아...박애 4.아도니스...회상 5.능소화...여성,명예 6.베고니아...정중,친절 7.알리움...무한한 슬픔 8.은사철...지혜 9.산세비에리아...관용 10.만년청...상속,모성애 11.덴드로비움...말괄량이,미인 12.일일초...즐거운 추억 13.포인세티아...축복,나의 마음은 불타고 있습니다. 14.전나무...장엄 15.유자나무...기쁜소식 16.소나무...불로장수 17.글락조화...신비 18.군자란...고귀 19.비파...현명 20.노송나무...불멸,불사 21.난...청초한 아름다움 22.치자나무...청결 23.아스파라거스...불변 24.파초...탈속 25.수선화...자만심,자존심,당신을 좋아합니다. 26.매화...깨긋한 마음,결백 27.철쭉...정열,명예 28.스위트피...기쁨,가련 29.레몬...성실한 사랑,정절 30.회양목...금욕,금기 31.탱자...추억 32.프리지아...순결,순진한 마음 33.안시리움...번뇌 34.냉이...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35.산수유...지속 불변   가져온 곳 :  카페 >고운글 | 글쓴이 : 圃春 유영종| 원글보기        
26    검은 색을 표현하는 우리말 77가지 댓글:  조회:1719  추천:0  2018-11-12
[:::문학강의:::] 검은 색을 표현하는 우리말 77가지   혹자는 한글의 우수성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는데 그 우수성을 나타내는 한 방편으로 검은 색을 나타내는 표현 77가지 표현으로 그 대답을 하고싶다.      한가지 색을 나타내는데 반드시 77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는 없겠으나, 글로 써 표현하는데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한글밖에 없을 것 이요 우리네 조상들의 해학과 풍류와 함께 어우러진 글문화라 하겠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글이 있으나, 곤충이나 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은대로 쓸 수 있고 쓴 것을 다시 읽기가 가능하고 나아가 완벽히 다시 재현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글이 바로 한글이다.     그러면 검은 색을 나타내는 77가지의 우리말을 살펴보도록 하자.   NO 목록 의미 1  가마노르께하다  검은색에 노란색 기운이 돈다 2  가맣다  짙게 감다 3  가마가맣다  아주 가맣다 4  감다  산뜻하게 검다 5  감디감다  군데군데가 감거나 감은 듯하다 6  거머거멓다  아주 거멓다 7  거멓다  연하게 검다 8  가무끄름하다  좀 흐리게 가무스름하다 9  가무대대하다  새뜻한 느낌이 없이 가무스름하다 10  가무댕댕하다  격에 어울리지 않게 가무스름하다 11  가무레하다  엷게 가무스름하다 12  가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가무스름하다 13  가무스레하다  가무스름하다 14  가무스름하다  좀 가맣다 15  가무잡잡하다  칙칙하게 가무스름하다 16  가무족족하다  고르지 않게 가무스름하다 17  가무칙칙하다  가맣고 칙칙하다 18  가무퇴퇴하다  탁하게 가무스름하다 19  감파랗다  감은빛을 띠면서 파랗다 20  거무끄름하다  좀 흐리게 거무스름하다 21  거무데데하다  좀 천하게 거무스름하다 22  거무뎅뎅하다  어울리지 않게 거무스름하다 23  거무레하다  엷게 거무스름하다 24  거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거무스름하다 25  거무스레하다  거무스름하다 26  거무스름하다  조금 검다 27  거무접접하다  칙칙하게 거무스름하다 28  거무죽죽하다  고르지 않게 거무스름하다 29  거무축축하다  거무스름하고 축축하다 30  거무충충하다  거무스름하고 충충하다 31  거무칙칙하다  거무스름하고 칙칙하다 32  거무튀튀하다  탁하게 거무스름하다 33  거무끄름하다  좀 흐리게 거무스름하다 34  거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거무스름하다 35  거무스레하다  거무스름하다 36  거무스름하다  조금 검다 37  거뭇거뭇하다  군데군데가 검거나 검은 듯하다 38  검다  검다 39  검디검다  몹시 검다 40  검붉다  검은빛을 띠면서 붉다 41  검측측하다  빛깔이 깨끗하지 않게 검다 42  검퍼렇다  검은빛을 띠면서 퍼렇다 43  검푸르다  검은빛을 띠면서 푸르다 44  검푸르접접하다  푸른빛을 띠면서 거무죽죽하다 45  까맣다  짙게 감다 46  까무끄름하다  좀 흐리게 까무스름하다 47  까무대대하다  좀 천하게 까무스름하다 48  까무댕댕하다  격에 어울리지 않게 까무스름하다 49  까무레하다  엷게 까무스름하다 50  까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까무스름하다 51  까무스름하다  조금 까맣다 52  까무잡잡하다  칙칙하게 까무스름하다 53  까무족족하다  고르지 않게 까무스름하다 54  까무칙칙하다  까맣고 칙칙하다 55  까무퇴퇴하다  탁하게 까무스름하다 56  까뭇까뭇하다  군데군데가 까맣거나 까만 듯하다 57  까뭇하다  좀 까만 듯하다 58  깜다  매우 감다 59  꺼멓다  짙게 껌다 60  꺼무끄름하다  좀 흐르게 꺼무스름하다 61  꺼무데데하다  좀 천하게 꺼무스름하다 62  꺼무뎅뎅하다  격에 어울리 않게 꺼무스름하다 63  꺼무레하다  엷게 꺼무스름하다 64  꺼무스름하다  조금 꺼멓다 65  꺼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꺼무스름하다 66  꺼무접접하다  칙칙하게 꺼무스름하다 67  꺼무죽죽하다  고르지 않게 꺼무스름하다 68  꺼무축축하다  꺼멓고 축축하다 69  꺼무충충하다  꺼멓고 충충하다 70  꺼무튀튀하다  탁하게 꺼무스름하다 71  꺼뭇꺼뭇하다  군데군데가 꺼멓거나 꺼먼 듯하다 72  꺼뭇하다  좀 꺼먼 듯하다 73  껌다  매우 검다 74  새까맣다  아주 까맣다 75  샛까맣다  새까맣다 76  시꺼멓다  아주 꺼멓다 77  시커멓다  몹시 시꺼멓다   (추가) 다음은 검은색의 색감과 모양을 합성한 표현이다. 1. 가마말숙하다 : 검은데 말숙하게 생겼다. 2. 가마무트름하다 : 검으면서 얼굴이 토실토실하다.(동의어 : 가마트름하다.) 3. 가마반드르하다 : 검으면서 반지르하다.  
25    치환은유와 병치은유 [자료 두편] 댓글:  조회:1661  추천:0  2018-11-12
치환은유와 병치은유 (은유에 관한 보고서) - 홍문균선생의 '시어론'에서 1) 옮겨놓기 비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로는 미흡한 것이며 차라리 비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를 발견케 되는 것이다. 동일성이니 유추적이니 하는 사고나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비유의 기능이란 결코 시어법의 전유물이 아니라 산문을 포함한 일반적 어법에서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대어 볼 보조대상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했고 이러한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형태상으로 보면 'A는B이다'라는 구문이 성립한다. 이상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가득 실은 쌍두마차였습니다. 현실은 갈가리 찢겨진 두개의 장송의 만가였습니다. 아하! 내 청춘은 이 두 바위틈에 난 고민의 싹이었습니다. - 김용호의 '싹' 이 시는 옮겨놓기의 일반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제목이나 관념자체가 일상적인데다 이를 해명하는 유추의 매체도 현실에서 선택한 옮겨놓기의 형태다. 첫 연에서는 이상은 쌍두마차, 둘째 연에서는 현실은 만가, 셋째 연에서는 매체 상호간에 어떤 유사성을 토대로 해서 그 의미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유사성이란 덜 알려진 것과 잘 알려진 것의 종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 현실, 청춘이란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모호한 관념의 세계다. 그러나 쌍두마차, 만가, 싹은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사물들이다. 이와 같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원관념이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어 의미의 변용 내지 확대를 가져온다. 그러나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도 물론 동일성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이 동일성은 단순한 외형상의 근사한 특질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동일성이다. 2) 마주놓기 그러나 휠라이트는 시에서 은유의 진수는 의미의 옮겨놓기가 아니라 병치, 즉 마주놓기의 관계에서만 보다 철저히 밝혀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를 epiphor 와 diaphor로 표기한다. 여기서 phor가 의미론적 전환change를 뜻하며 접두사인epi 는 포개어짐, dia는 통과함 through라고 할 때 치환과 병치의 근본적 속성을 확인케 된다. 그는 의미론적 전이가 신선한 방법으로 어떤 경험,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의 특수성을 통과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치환에서처럼 어느 한쪽으로의 합침이 아니라 서로 각각 대결 상태를 유지하면서 제 3의 효과나 의미나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예술의 형식 가운데 비 대상 음악과 추상회화가 추구하는 의미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수단으로서의 리듬이나 선 혹은 색채가 거의 완벽하게 목적으로서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시의 경우 이러한 견해는 일찍이 사르트르에게서 천명된바가 있다. 그는 시는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로서의 언어를 특질로 한다는 것이다. 식당의문깐에방금도착한X웅같은붕우가헤어진다. 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적하된다. 명각을짓밟는군용장화……(생략) -이상의 '건축무한육면체각체'에서 이시는 ‘X웅 같은 붕우의 헤어짐', '삼륜차에 적하되는 각설탕', '명각을 짓밟는 군용장화'라는 전혀 유사성 없는 사건들이 폭력적으로 병치되어있는 시다. 따라서 이러한 시에서는 의미를 암시한다기보다 존재를 표상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질적인 사물들이 이렇게 대치하여 무질서하게 병치됨으로써 의미나 정서의 충돌을 느끼게 한다. 병치은유의 진가는 이처럼 시 속에서 새롭게 고안된 배열, 곧 병치의 형식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어떤 다양한 특수성의 세계 인식에 있다. 한 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 그 마당(사원) 한 구석 잎사귀가 한잎 두잎 내려앉는다. - 김 종삼의 '주름간 대리석' 이 시는 마당을 무대로 하여 두 개의 상반된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마당 한 모퉁이에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이고 다른 하나는 마당 한 구석에 내려앉는 한잎 두잎의 잎사귀이다. 이처럼 마당 모퉁이와 마당 구석이 대칭된 자리에 대리석과 낙엽이 당돌하게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유사성이나 동일성으로 옮겨보기 되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사물들이 마주보기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병치의 상황은 결코 한 사물을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새로운 분위기나 의미를 창조하려는 계획이다. 여기서 존재의 리얼리티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군중 속에 낀 이 얼굴들의 환영 비에 젖은 검은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 - 파운드의 '지하철 정류장'에서 첫 행의 '얼굴들'과 둘째행의 '꽃잎들'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하나의 인상적 대조를 보일 뿐이다. 이들 두 이미지의 관계는 표시적이라기보다는 제시적이라 하겠다. 두 이미지의 사이에서 독자가 포착하거나 포착한다고 생각하는 유사성은 전체적이 아니라 귀납적이다. 그러나 대조적인 시행임에도 불구하고 옮겨보기의 뉘앙스가 어느 정도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얼굴들의 환영과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은 서로 병치된 인상을 주면서도 얼굴이 꽃잎으로 대치된 치환적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병치와 치환의 어법은 엄격히 구분될 것이 아니라 병치에 가까운 치환의 시법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병치은유 자체가 치환은유적 배음(Over Tone)을 환기하거나 상이한 치환은유들이 단순한 관념을 위한 매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매체적 이미지들의 신선한 병치를 통해 독자의 세계를 보여주거나 병치은유처럼 고립된 것이 시 전체의 문맥에 따라 치환은유가 되며 그 역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치환은유가 시 속에서 맡는 역할은 의미 significance를 제시함에 있고 병치은유의 역할은 존재 presence를 창조함에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적 시어의 은유적 어법은 치환과 병치 양자를 동시에 조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에 있어 비유어의 정당한 의미는 비교나 대조나 유추에 의한 동일성의 발견이라는 차원을 넘어 비동일성에 의한 폭력적 결합과 창조에 있으며 어떤 사물을 쉽게 인식하고 표현하려고 원관념에 보조관념을 동원하거나 주지와 매체의 형식을 빌었던 수사학적 방식이 아니라 이질적 언어를 병치시켜 언어의 상호작용, 긴장관계를 조성하고 이로써 새로운 의미와 정서와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독특한 어법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스크랩] 시창작 강의 178강 – 치환은유(옮겨놓기)와 병치은유(마주놓기)- 목동 포레스트카페 임승천시창작교실 강의 교재 중에서   시창작 강의 178강 –치환은유(옮겨놓기)와 병치은유(마주놓기)   ■ 치환은유(옮겨놓기)와 병치은유(마주놓기) 전통적인 은유법(metaphor)은 'A는 B이다.(A=B)' 형식이다. 이 경우에 A를 원관념, B를 보조관념이라 한다. 또는 전통적인(고전적인) 방법으로 많이 사용되어 온 'B같은 A' 형식의 직유법(simile) 도 있다. 보통 국어에서는 '처럼, 양, 같이, 듯'의 말을 사용하여 비유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 치환은유(置換隱愉, epiphor)   의미의 탐색과 확대 작용에 의한 은유. 대상을 비유할 때 동일성에 기초할 때보다는 이질성에 기초하여 비유하면 신선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은유는 일반적으로 단일은유(원관념에 하나의 보조관념이 연결),확충은유(원관념 하나에 두 개 이상의 보조관념이 연결),액자은유(은유 속에 또 은유가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 일반적인 은유 :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유사성에 근거한다  ◈ 단순은유, 확장은유, 액자식 은유      •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 한용운 「님의 沈黙」부분    (황금 = 꽃) = 굳고 빛나던 옛 盟誓 = 차디찬 티끌 → 한숨=微風에 날아가다    ■ 병치은유(倂置隱愉, diaphor)    병치와 합성에 의한 은유. 전통적인 수사법상 '열거법'에 해당하는 개념인데, 열거된 둘 이상의 사물이 서로 의미상 하나의 의미를 창출할 때 이를 병치은유라 한다.  ] • 유사성을 배제한 은유 :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유사성이 없다  • 수소와 산소는 별개의 요소이지만 결합하면 물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만든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 어린 純潔이다 三月에 젊은 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 김춘수 「나의 하나님」    쓰레기 봉지들이 부풀어 올라 올 때   참기름 바른 말에 썩은 냄새 풍긴다   국민의 뜻이라 하내 제 언제 물어 받는지.   전깃줄 참새들이 조용하라 눈짓하며   조금만 기다려라 잔치판이 열린단다   찢어진 봉지 주변에 오염된 먹이 널렸다.   - 전선구의 ‘여의도 방송’               군중 속에 이 얼굴들의 홀연한 나타남 비에 젖은 검은 가지에 꽃 이파리(잎사귀)들                                                     -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역에서’    에즈라 파운드의 시에서 지하철 정거장의 군중 속에서 화자가 발견한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갑자기 나타난 얼굴들이 때로는 비에 젖은 검은 가지에 걸린 꽃잎사귀로 인식되고 있다. 이질적인 두 개의 행이 하나의 의미 맥락에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경우 이질적이지만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의미 있는 열거, 곧 병치은유가 될 수 있다.    3.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의 결합     휠라이트는 가장 바람직한 은유를 치환은유와 병치은유가 결합하는 경우로 보았다.       한용운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 한용운 시 ‘찬송’    강이 얼었다면 녹일 수 있는 방법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강원도에서 빙어 낚시 하는 분들을 보니까 얼음끌로 톡톡쳐서 구멍을 동그랗게 뚫더군요.......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바다가 얼었다면 어떻게 녹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답이 시인의 노래 속에 있네요.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뜻밖이지요. 언 바다를 녹이는 것이 강한 힘이 아니라 부드럽고 여린 봄바람이라는 진실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것이 깨달아지는 아침입니다. 그만큼 긴 ‘마음의 겨울’을 지내 온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찬송’이란 작품은, 사랑하는 대상을 아침의 첫 햇살로, 거문고에 깃든 가락으로, 또 봄바람으로 비유하고 있다. 아무에게나 이런 송축을 드리는 게 아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은 첫째, 고통스런 정련 과정을 백 번이나 거친, 그래서 정금이 된 님이다. 그 금빛을 아침의 최초의 금빛햇살에 비긴 것이다 둘째, 옳은 것, 의를 따르며 사는 삶의 가치를 너무 잘 알기에 어떤 미끼나 회유로도 절대로 변질되지 않는 님이다. 그런 님은 나에게 끊임없이 노래를 흘러나오게 하는 거문고와 같다고 한다 셋째,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는 님이다. 오랜 겨울, 오랜 어둠, 오랜 전쟁의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는 님은, 바다가 얼어붙은(있을 수 없는) 이 기막힌 현실을 걷어낼 유일한 해결자, 바로 봄바람에 비겨 찬양을 받고 있다. 시인이 찬송해 마지않는 님, 그 모습은 바로 시인이 꿈꾸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 치환은유(옮겨놓기)와 병치은유(마주 놓기) • 2   ◎ 치환은유(옮겨놓기)  비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로는 미흡한 것이며 차라리 비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를 발견케 되는 것이다. 동일성이니 유추적이니 하는 사고나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비유의 기능이란 결코 시어법의 전유물이 아니라 산문을 포함한 일반적 어법에서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대어 볼 보조대상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했고 이러한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형태상으로 보면 'A는 B이다'라는 구문이 성립한다.   이상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가득 실은   쌍두마차였습니다.   현실은   갈갈이 찢겨진 두개의   장송의 만가였습니다.   아하! 내 청춘은   이 두 바위 틈에 난   고민의 싹이었습니다.                                                                 - 김용호의 '싹'    이 시는 치환은유(옮겨놓기)의 일반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제목이나 관념자체가 일상적인데다 이를 해명하는 유추의 매체도 현실에서 선택한 옮겨놓기의 형태다. 첫 연에서는 이상은 쌍두마차, 둘째 연에서는 현실은 만가, 셋째 연에서는 매체 상호간에 어떤 유사성을 토대로 해서 그 의미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유사성이란 덜 알려진 것과 잘 알려진 것의 종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 현실, 청춘이란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모호한 관념의 세계다. 그러나 쌍두마차, 만가, 싹은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사물들이다. 이와 같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원관념이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어 의미의 변용 내지 확대를 가져온다.   그러나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도 물론 동일성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이 동일성은 단순한 외형상의 근사한 특질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동일성이다. ◎ 병치은유(마주놓기) 휠라이트는 시에서 은유의 진수는 의미의 옮겨놓기가 아니라 병치, 즉 마주놓기의 관계에서만 보다 철저히 밝혀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치환과 병치 은유를 epiphor 와 diaphor로 표기한다. 여기서 phor가 의미론적 전환 change를 뜻하며 접두사인 epi 는 포개어짐, dia는 통과함(through)라고 할 때 치환과 병치의 근본적 속성을 확인케 된다.  그는 의미론적 전이가 신선한 방법으로 어떤 경험,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의 특수성을 통과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치환에서처럼 어느 한쪽으로의 합침이 아니라 서로 각각 대결 상태를 유지하면서 제 3의 효과나 의미나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예술의 형식 가운데 비 대상 음악과 추상회화가 추구하는 의미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수단으로서의 리듬이나 선 혹은 색채가 거의 완벽하게 목적으로서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시의 경우, 이러한 견해는 일찍이 사르트르에게서 천명된 바가 있다.는 시는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로서의 언어를 특질로 한다는 것이다.  그식당의문깐에방금도착한X웅같은붕우가헤어진다. 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적하된다. 명각을짓밟는군용장화~(한자가 어려워 더이상못쓰겠음)                                                        - 이상의 '건축무한육면체각체'에서 이시는 X웅같은   붕우의 헤어짐', '삼륜차에 적하되는 각설탕', '명각을 짓밟는 군용장화'라는 전혀 유사성 없는 사건들이 폭력적으로 병치되어있는 시다.따라서 이러한 시에서는 의미를 암시한다기보다 존재를 표상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질적인 사물들이 이렇게 대치하여 무질서하게 병치됨으로써 의미나 정서의 충돌을 느끼게 한다. 병치 은유의 진가는 이처럼 시 속에서 새롭게 고안된 배열, 곧 병치의 형식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어떤 다양한 특수성의 세계 인식에 있다.   한 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 그 마당(사원) 한 구석  잎사귀가 한 잎 두 잎 내려앉는다.                                                              - 김종삼의 '주름간 대리석'    이 시는 마당을 무대로 하여 두 개의 상반된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마당 한모퉁이에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이고 다른 하나는 마당 한 구석에 내려앉는 한 잎 두 잎의 잎사귀이다. 이처럼 마당 모퉁이와 마당 구석이 대칭된 자리에 대리석과 낙엽이 당돌하게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유사성이나 동일성으로 옮겨보기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사물들이 마주보기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병치의 상황은 결코 한 사물을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새로운 분위기나 의미를 창조하려는 계획이다. 여기서 존재의 리얼리티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군중 속에 낀 이 얼굴들의 환영 비에 젖은 검은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                                                              -파운드의 '지하철 정류장'에서 첫 행의 '얼굴들'과 둘째행의 '꽃잎들'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하나의 인상적 대조를 보일 뿐이다. 이들 두 이미지의 관계는 표시적이라기보다는 제시적이라 하겠다. 두 이미지의 사이에서 독자가 포착하거나 포착한다고 생각하는 유사성은 전체적이 아니라 귀납적이다.  그러나 대조적인 시행임에도 불구하고 옮겨보기의 뉘앙스가 어느 정도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얼굴들의 환영과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은 서로 병치된 인상을 주면서도 얼굴이 꽃잎으로 대치된 치환적 구성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병치와 치환의 어법은 엄격히 구분될 것이 아니라 병치에 가까운 치환의 시법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병치 은유 자체가 치환은유적 배음(Over Tone)을 환기하거나 상이한 치환은유들이 단순한 관념을 위한 매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매재적 이미지들의 신선한 병치를 통해 독자의 세계를 보여주거나 병치 은유처럼 고립된 것이 시 전체의 문맥에 따라 치환은유가 되며 그 역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치환은유(옮겨놓기)가 시 속에서 맡는 역할은 의미(significance)를 제시함에 있고 병치은유(마주놓기)의 역할은 존재(presence)를 창조함에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적 시어의 은유적 어법은 치환과 병치 양자를 동시에 조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에 있어 비유어의 정당한 의미는 비교나 대조나 유추에 의한 동일성의 발견이라는 차원을 넘어 비동일성에 의한 폭력적 결합과 창조에 있으며 어떤 사물을 쉽게 인식하고 표현하려고 원관념에 보조관념을 동원하거나 주지와 매체의 형식을 빌었던 수사학적 방식이 아니라 이질적 언어를 병치시켜 언어의 상호작용, 긴장관계를 조성하고 이로써 새로운 의미와 정서와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독특한 어법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이형기의 ‘폭포’ 전문    * 단말마(斷末魔):[불교] 숨이 끊어질 때의 마지막 고통    이 시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가 함께 어우러져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원관념 폭포가 '시퍼런 칼자국', '질주하는 전율', '벼랑의 직립', '석탄기의 종말', '장수잠자리의 추락' 등의 자리이동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이질적인 보조관념들의 조합으로 폭포가 새로운 의미체로 부상되기도 한다.        이형기시인 약력    (1933.1.6-2005.2.2)                     • 1933 경남 진주 출생.                        • 동국대 불교과 졸업.                     • 1949 지에 시 외 2편으로 등단.                       • 1957 제2회 한국 문학가 협회상 수상.                       • 시집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祈禱)(1955) ,『적막강산(寂寞江山) (1963)』                               『적막강산(寂寞江山)  (1963)』,『돌베개의 시(詩)   (1971)』                               『꿈구는 한발(旱魃)   (1976) 』,『풍선심장 (1981)』                               『보물섬의 지도(地圖) (1985) 』,『그 해 겨울의 눈(1985)』                     • 수필집 :『바람으로 만든 조약돌』     출처 :한국문인협회 구로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 임승천  
24    상징 시에 대하여 [스크랩] 댓글:  조회:939  추천:0  2018-11-06
상징 시에 대하여   19세기말에 프랑스에서 일어나 20세기초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사조로 사실주의에 반대하고 낭만주의를 계승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실주의·자연주의·고답파 등의 외면적이고 객관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상징의 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신비적 내용을 표현하려 했던 문예사조. 여기서 말하는 상징은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직유에 의해 암시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는 낭만주의적 표현방법이다. 상징주의에서 말하는 상징이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 즉 어느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결합하여 조립되고 환기되어 전혀 엉뚱한 관념 등과 연결되는 상징을 흔히 썼던 것이다. 여기서 새로 창조된 새로운 이미지는 결국 초월적인 세계의 그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까지 연결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후반에 정착되기 시작한 고도의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 서구 사회. 사회는 고도로 조직되고 합리화된 체제로 변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들의 끊임없는 세력확장으로 온 사회가 빈틈없이 얽매어지게 된다. .  1차 세계대전  직후 노동계급과 부르좌 계급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등 사회적 위기감과 불안감이 고조되던 시기. 사회 전반에 위기감과 불안감이 팽배해지자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이 부활하게 되었던 것. 상징주의는  초월적 정신 세계의 상징으로 보고, 문학을 통해 초월적이고 본질적인 정신세계에 접근하려 한 것. 현실세계에서 자아를 구속하는 여러 규범과 사고의 통제를 벗어나 무한한 꿈과 신비의 세계를  노래하던 문예사조 .  감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사물을 그대로 즐기려 하지 않고, 감각의 대상이 암시하는 또 다른 세계를 추구.  대표 작가로는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발레리, 랭보 등.         상징주의(象徵主義)  1. 상징주의(象徵主義)의 개념  (1) 상징주의의 말뜻 ① 상징 : 상징의 서양어인 'symbol' 은 '함께 내던진다'는 뜻인 그리스어 'symballein'에서 유래한다. 이 말의 어원에는 '하나로 맞추어 보다, 비교해 보다'란 뜻이 들어 있었고, 나중에 '표시, 표지, 표징, 기호'등의 의미를 얻었다. 동양어로 상징(象徵)은 유형의 사물을 이용하여 무형의 주관적인 것을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이 때 상(象)은 실재의 세계에 대한 표징을 가리키고, 징(徵)은 징조를 가리키므로 '괘상(卦象)을 통해서 표현된 하늘의 징조'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만유(萬有)의 근원인 형이상학적 실재(實在)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어 암시해 주는 표징이다.  ② 상징주의의 일반적 개념 상징을 사용하여 사물, 정서, 사상 등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와 경향을 의미한다.  (2) 상징주의의 개념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의 예술 운동과 그 경향. 사실주의, 자연주의, 고답파 등의 외면적 객관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상징적 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또는 신비적 내용을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등의 예술 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적 경향을 가리킨다.  2 . 상징주의의 시대적 조건  (1) 사회의 상태 19세기 후반의 서양 사회는 경제적으로 고도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다. 이에 따라 사회는 고도로 조직되고 합리화된 체제로 변하여 이익 범위와 관세 구역, 독점 영역, 카르텔, 트러스트, 신디케이트 등이 빈틈없이 사회를 얽어 맨다. 이와 함께 파리 코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불안이 사회에 팽배하였다. 이것은 불원간 1차 세계 대전으로 분출되지만 제국주의의 국가 간의 경쟁과 함께 한 국가 사회 내에서도 노동 계급과 부르주아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등 사회적 위기감과 불안감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2) 사상적 배경 사회 전반에 팽배한 위기감과 불안 의식은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을 부활시키고, 한편으로 사회의 비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강력한 신앙 운동을 불러일으킨다. 상징주의가 기대고 있었던 사상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타난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 사상,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 칼라일의 '의상 철학'에서 표현된 상징이 의미의 제시와 은폐를 동시에 행한다는 관점 등이다. 이 밖에 영혼의 불멸성, 영혼의 비물질성 등을 주장한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 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또한 직관의 중요성과 체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베르그송의 철학을 상징주의의 사상적 배경으로 들 수 있다.  3. 상징주의의 문학 이론  상징주의의 문학 이론은 체계적으로 제시된 적이 없다. 따라서, 작품 속에 자신들의 문학관을 피력한 시인들의 관점이 상징주의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징주의가 성립된 배경에는 낭만주의와 프랑스의 고답파의 이론이 큰 작용을 하였다. 낭만주의에서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구분하여 알레고리는 구체적 이미지의 형태로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지만 관념이 이미지에서 어느 정도 독립되는 데 반하여, 상징에서는 이미지와 관념이 완전히 통일되어 분리될 수 없으므로 보수의 의미를 지니고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는 이론이 성립되었다. 한편 예술 지상주의의 고답파는 시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은 효용성에서 벗어나야 하며, 형식의 순수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는 관점이 생겨났다.  즉 낭만주의에서 발전되어 온 상징 이론과 고답파의 심미주의적 이론이 상징주의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경향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여 시적 완결성을 기하면서도 도덕적 규범에 매이지 않고 그로테스크한(기괴한) 것이나 퇴폐적인 감정을 문학에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상징주의는 정제된 표현을 지향하는 아폴로적 경향과 그로테스크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악마주의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 양분되었다. 즉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했던 말라르메나 발레리가 아폴로적인 경향이라면, 시인은 견자(見者)가 되어야 한다고 본 랭보는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4. 상징주의 문학의 전개  상징주의는 세기말에 상징파 운동을 낳는다. 하지만 다른 문예 사조와는 달리 상징주의는 유파 활동보다 선구자와 창시자들의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1) 선구자   고티에는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헌정한 시인으로 고답파라는 예술 지상주의를 이끌었다. 그에 의해서 작품의 완결성, 예술적 가치만이 작품 평가의 기준이라는 관점이 성립되었다. 상징주의가 극도의 예술성을 추구하고 심미주의적 특질을 지니게 된 데에는 고티에의 영향이 크다. 한편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도 지대하다.  그는 문학이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반대하여 기괴한 것, 퇴폐적인 것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낭만주의적 열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엄밀하게 계획된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 신비한 효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포의 이러한 생각은 보들레르와 예이츠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보들레르 상징주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출발한다. 근대성을 보인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시집에서 보들레르는 자본주의의 온갖 죄악과 타락과 폭력을 연관시켜 제시하였다. 이러한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충격적 선언을 담고 있는 이 시집은 근대 문명의 정화인 도시의 인공적 삶을 재현하여 인간의 약점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즉 도시는 죽음으로 제시되며 그 속에서 현실의 삶이 무기력과 쇠락의 분위기에 빠져있음이 환기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산문적 형태를 시험하기도 하며 언어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시집의 '상응'은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인간의 감각들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고 그것은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시인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상징주의의 핵심적 교의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3) 랭보 견자(見者) 시인으로 불리는 랭보는 감각의 착란과 언어의 연금술에 의해 현실과 다른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 천재 시인이었다. 평상적인 경험과 습관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완전히 계시에 의해 빚어진 듯한 비전을 제시하였으며, 보들레르가 시작한 산문시를 적극적으로 계발하기도 했다. 사물이 배후에 지니고 있는 미를 발견하기 위해 평소의 습관과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을 냉철히 투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감각을 평소의 무디어져 있는 상태에서 예리하게 분리하여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지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즉 ' ~처럼', '~같은' 등의 설명적인 말을 전적으로 배제함으로서 독자들이 스스로 의미를 추론하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설명되지 않은 상징들이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여러 감각 영역들 사이에 있는 여러 관계와 상응의 양상을 표현하도록 하는 방법을 시에 도입하였다. 말라르메에 이르러서 상징주의는 정점에 이른다.
23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 권경아 댓글:  조회:1532  추천:0  2018-11-06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권경아   1. 현대시와 해체     새로움은 예술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다주는 미학의 한 범주이다. 한국현대시사에서 1980년대는 기존의 미학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전통시 형태를 철저하게 파괴하여 기존문법을 해체하는 양상이 새롭게 등장한다. 1980년대는 모순된 근대성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였다. 해체시는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촉발되어 현실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미학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부정의 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1980년대의 해체시는 1990년대를 들어서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중심의 부재라는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절대 주체로 인식되던 주체가 소멸되고, 이로 인해 텍스트 내적, 외적으로 해체의 양상이 보다 폭 넓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시의 해체적 양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1980년대의 해체시에 나타나는 과격한 실험을 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은 수정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해체시의 새로움은 아방가르드적 요소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도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할 때 우리시의 해체적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을것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배경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후기구조주의를 이해할 때 ‘해체’의 진정한 실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80년대와 90년대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해체의 양상이 이 두 시기에 다르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해체가 근대성에 대한 저항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부정의 양식으로 나타나, 주로 시 형태를 파괴하고 있다. 이와 달리 1990년대는 해체에 대한 폭 넒은 이해를 통해 시각적인 형태 파괴보다는 시에 대한 근본적인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의 해체가 근대성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미학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1990년대의 해체는 사회, 문화적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2. 1980년대 시와 아방가르드 미학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그 동안 형성해온 모순된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양상이 극렬하게 드러나는 시기이다. 현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써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가 80년대를 풍미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억압된 체제의 구조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해체’의 전략이었다. 해체시는 80년대적 억압에 대한 반응으로, 형식을 해체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선을 붕괴시키는 경계 해체의 전략을 구사하며 등장한다. 해체시는 정치적 전략으로 형식을 파괴하고 장르를 해체하는 반미학의 원리로, 기존의 미학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해체시는아방가르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1) 여기서 아방가르드는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20세기 초기에 나타나 유럽을 비롯한 서구세계에 유행한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의미한다.2)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은 차이를 보이면서도 중요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저항하며 기존의 전통에 대한 단절을 전략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모더니즘이 미적 자율성에 근거한 과도한 형식주의라는 것은 아방가르드와 변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근대적 반항이 대부분 미학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지고 심미주의 시각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변별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라면 문학과 문학사이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80년대 해체시는 모더니즘 미학이라기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실제 생활에서 유리되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제도로서의 예술을 부정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선을 붕괴시키려는, 부르주아 예술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모더니즘보다 한결 급진적일 뿐 아니라 더욱 독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역사적·사회적 개념인 모더니티의 발전단계에 일어난 예술운동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3)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80년적 근대성에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근대적 반항이 대부분 미학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지고 심미주의 시각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변별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라면 문학과 문학 사이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80년대의 해체시는 모더니즘 미학이라기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그 동안 형성해온 근대성의 누적된 모순이 극점에 이르는 시기였다. 구모룡에 의하면 80년대는 이중의 부정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편으로 파시즘의 억압에 대한 부정을 필요로 했고, 다른 한편으로 문학 내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4)현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가 80년대를 풍미할 때 해체시는 기존의 미학적 관습을 거부함으로써 억압적 시대에 저항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이 단순히 형식파괴만을 노리는 것이 아닌 억압된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변별된다. 즉 예술 형식과 사회적 제도로서의 미적 자율성을 부정하고 있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와는 달리 예술 형식과 제도로서의 미적 자율성뿐만이 아니라 파시즘으로 드러난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시를 구모룡이 ‘환멸의 자식’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해체시가 근대성을 부정하는 방식은 형태 파괴의 전략이었다. 해체시는 기존의 시 양식을 철저하게 파괴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파편화를 그대로 보여주며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이고있다. 해체시는 기존의 서정시 양식을 전면적으로 해체한다. 해체시가 서정시 양식을 파괴하는 것은 근대성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시 양식에 대한 해체를 감행하는 외적 요인과, 서정시의 언어와 문법으로는 억압적 체제에 대응할 수 없다는 내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世上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 오규원, 「우리 시대의 純粹詩」 부분,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이 시대는 ‘진리란’, ‘믿음이란’과 같은 말을 점잖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누가 이와 같이 말한다 해도 현실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16세기나 17세기였다면 이 말은 인간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시대인 현실에서는 ‘하품’이 날 정도로 무의미한 말이 된다. 이 시대는 모순된 현실을 그대로 보전하여지키려는 보수주의의 시대이다. 보수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 되든 안 되든’ 해체해야 한다.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든지 하는 허위의 말들을 벗겨내야 하는 것이다. 해체시가 기존의 서정시 양식이 억압의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서정시 양식의 파괴를 시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80년대의 해체시는 시각적 형태를 강조한다. 도형, 기호 등의 차용, 내용 없는 시 혹은 제목 없는 시, 그리고 활자 배열에 따른 효과를 이용한 시 등은 인쇄효과를 통해 시각적 형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내용보다 형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서정시 양식의 문장 구조를 파괴하는 형태 파괴 수법이라 할 수 있다. 황지우의 無等은 내용자체가 산이 되는 시각적 효과를 노린다     山 절망의 산, 대가리를 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희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 황지우, 「無等」 전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이 시는 일종의 상형시의 형태로 그림으로 시를 구성한다. 산 정상으로부터 묘사된 모습은 ‘절망, 분노, 죽음, 피투성이’ 등과 같이 어둡고, 격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산이다. 그러나 대지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온화하고, 넉넉하고, 따뜻한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대지는 모성을 상징한다. 뾰족한 정상이 절망과 분노, 숨가쁜 현실을 표상하고 있다면, 넓은 대지는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 현실과 꿈, 그 모든 격정을 감싸주는 평등을 표상하고 있다. 이러한 격정적인 산의 이미지와 넉넉한 대지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상징적 의미는 산의 형태에 따라 변화되고 있다. 산 정상으로부터 대지에 가까이 갈수록 대지의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변화되는 이미지를 산의 형태에 따라 배열시킴으로써 시각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또한 삼각형이라는 형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시각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인다. 결국 산의 형태에 따라 삼각형으로 시를 배열하고 있는 것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의 시들에 나타나는 해체적 양상은 단순히 시 형태를 파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초기의 해체시는 기사, 벽보, TV광고, 사진, 그 밖의 인쇄물 등 현실물을 차용하여 삶을 시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며 예술의 자율성을 부정한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 83. 4. 1.~지: 83. 5. 31.   - 황지우, 「벽1」 전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위의 시는 예비군 편성과 훈련 기피자를 대상으로 자진 신고기간을 알리는 벽보의 내용을 옮겨 놓고 있다. 이 벽보 내용은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이 벽보가 말하는 기피자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행여 내가 그 대상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 자진해서 무언가를 신고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 일제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 사회는 나를 불안하게 함과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과의 불신을 조장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기피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지나도록 나는 불안하다.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가 불안하고,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사회가 불안한 것이다. 1980년대는 영상매체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신문이나 벽보가 인간의 삶에 가깝게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이제 매체는 인간의 삶에 밀착되어 그 힘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해체시는 우리의 현실이 되어 버린 TV나 CF의 내용까지도 차용하기 이른다. 김정란의 TV의 말놀이를 주제로 한 몇 개의 성찰(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는 “어디 갔었어, 전화해도 없대”라는 TV의 유행어를 이용하여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는 현실의 실상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를 차용하고 있는 장정일의 시 산 위에서 내려온 바보(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정도로 거대한 광고의 유혹을 그리고 있다. 또한 박남철은 텔레비전I과 텔레비전Ⅱ(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직사각형의 도형만을 그리고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직사각형만을 그려놓음으로 시인은 독자에게 이에 대한 무수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텔레비전은 아무 의미도 없는 빈 상자일뿐일 수도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일 수도 있으며, 텔레비전에 얽힌 독자들의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면 그것은 무수히 많은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독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열린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 퍼킨스는 1950년대 이후에 나타난 영미시의 새로운 특성으로 자발성, 개성, 자연성, 개방성 등 네 가지를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의 해체시가 개방성이란 특성과 연관된다. 개방성이란 신비평의 원리가 강조하는 폐쇄적 형식에 대한 미적 부정을 일컫는 말로 탈구성을 강조한다.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문학/비문학의 경계 해체, 작품/독자 경계 해체 그리고 패러디 등은 텍스트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개방 형식의 지향은 곧 포스트모더니즘시의 특성이 되는데 80년대 해체시의 이러한 개방성은 90년대 이후에 심화,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3. 1990년대 시와 포스트모더니즘     90년대 이후의 현대시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 중에서 극단적인 형태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시의 아방가르드적 요소는 90년대 전후의 사회·문화적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아래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아방가르드는 주변을 둘러싼 문화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이라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이기도 하지만 아방가르드 미학이 가진 자기파괴적인 자살이라는 내적모순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는 ‘완성된 것에 걸맞기보다는 준비단계에 걸맞는 것’5)으로써 상징적으로 파괴할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아방가르드는 그 자신의 일관성의 감각에 의해 자살로 추동된다. 칼리니스쿠는 이러한 특징을 ‘미학적인 죽음 애호증(thanatophilia)’으로 설명하고 있다.6) 80년대 우리의 해체시 또한 역사화 과정을 겪는다. 해체시가 보여주던 극단적인 형태 파괴와 현실물을 차용한 콜라주 기법은 복제와 재생산의 일반화로 받아들여지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더불어 기법적인 차원에서 더 이상 전위적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 것이다. 80년대 이후의 아방가르드적 해체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으로 해체적 양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90년대를 전후로 나타나는 해체적 양상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을 일부 수용하고 일부는 단절을 꾀하며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제도권 예술로 흡수된 아방가르드 운동의 계승이며 논리적 발전이 동시에 이 운동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의 해체시는 초기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중에서 극단적인 형태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 심화시키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시되는 상호텍스트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초기 해체시가 신문기사, 만화, 사진, 벽보, 광고, 그 밖의 인쇄물 등을 콜라주 기법으로 차용하고 있다면, 90년대 이후의 시들에서는 기존의 시들을 대상으로 함은 물론 자기시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자기반영적인 메타시가 나타나고, 비문학 텍스트마저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장르혼합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미적 자율성을 거부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아방가르드의 미학을 심화,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와 라캉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동일성에 근거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더 이상의 권위는 없다. 데리다는 차연 이론으로 형이상학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동일성을 부정하며 진리의 불확정성, 결정불가능성을 증명한다. 이러한 차연 이론은 텍스트에까지 적용되어 하나의 텍스트는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닌 다른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관계일 뿐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주체 또한 절대 주체가 아닌 차연의 결과일 뿐이다. 주체는 ‘과정 중의 주체’일 뿐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기표로 인식된다. 통합체로 오인되고 있는 주체의 의미는 무의식적 욕망으로 포착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1990년대는 우리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 뉴미디어 사회로 서서히 진입하는 시기이다. 문화에 있어 기술복제에 의한 문화나 영상매체 문화의 발달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복제와 재생산은 낭만주의 이래로 강조되어 온 주체의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있던 수염이 지저분한 그 사람,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집 밖으로 걸어나온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얼굴을 찡그리며 나무 그늘에 앉아 날아가는 나비를 본다. 흘러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들꽃을 본다.들판 너머에서 들려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나비들이 흩어질 때 마네킹을 든 남자 언덕 너머에서 걸어온다. 노래를 부르며, 수염이 지저분한 그 사람 옆을 지나간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고 마네킹을 든 남자 기침을 한다. 바구니를 든 여자 들판 너머에서 걸어온다. 검은 머리칼이 긴 그 여자, 두 남자 옆을 지나가며 흔들리는 들꽃과 흩어지는 나비떼를 본다. 들판 너머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검은 옷의여자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바구니를 든 여자를 스쳐 지나간다. 들판과 언덕 사이의 좁은 길을 통해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의 집 옆을 지나간다. 바구니를 들고 지나간 여자 어느새 들판을 넘어가 검은 색 파이프 오르간을 커다랗게 연주한다. 검은 머리칼의 여자와 마네킹을 든 남자 팔짱을 끼고 언덕을 넘어간다. 혼자 남은 수염이 지저분한 사람 천천히 일어나 어두운 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들판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과 흔들리는 들꽃을 본다. 그가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풍경들이 조용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들판과 언덕이 사라지고 그 사람의 쓸쓸한 집도 그사람의 길고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천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 김참, 「지워지다」 전문,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이 시에서 각 인물들은 서로를 지나치며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의 존재가 확인된다. 즉 ‘마네킹을 든 남자’가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 곁을 지나감으로써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는 ‘마네킹을 든 남자’가 아닌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되고, ‘마네킹을 든 남자’는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아닌 ‘마네킹을 든 남자’가 되는 것이다.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주체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 외부, 곧 ‘마네킹을 든 남자’에 의해서라는 것은 주체 소외를 불러오게 된다. 타자에 의해 인식되던 주체는 ‘바구니를 든 여자’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여자’가 나타남으로써 존재 인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바구니를 든 여자’와 ‘오르간을 연주하던 여자’가 서로를 지나침으로 다른 타자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들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시되며 ‘타자’라는 인식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존재를 확인하던 주체는 타인들의 존재가 미끄러지며 존재 인식이 지연됨에 따라 주체의 존재마저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 주체 외부에서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주체 소외 그리고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멀어지고 마는 주체 소외는 주체 소멸로 이어진다. 결국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는 ‘천천히 지워지기시작’한다. 그와 함께 ‘들판’, ‘언덕’, ‘집’ 그리고 그의 ‘비명소리’ 등 그에게 인식되던 ‘풍경’ 또한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자기 동일적 주체의 소멸은 텍스트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모든 의미는 차이에 의해 끊임없이 지연되며 확정되지 않는다. 의미마저 소멸된 후 남는 것은 언어이며, 언어의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법칙인 것이다. 90년대 현대시에 언어유희,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혼란, 시니피앙만이 나열되는 시가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차연의 결과로 절대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주체는 상대적 개념이 된다. ‘나’의 존재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만 일시적으로 파악될 뿐인 것이다. 여기서 ‘나’와 ‘너’와 관계 또한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닌 사회적 상징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주체는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러나 언어는 단일한 시니피에를 지시하지 못하고 시니피앙에 의해 끊 임없이 미끄러지므로 언어는 곧, 시니피앙에 의해 지배받는 시니피앙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저 황폐한 정원에서 인류가 언제 이 지상으로 옮겨와 살았는지 모른다 지금도 말을 씹을 때 희미한 풀 냄새가 나는 걸 보면 말은 먹고 싶은 욕망의 대용이었을 것이다 말은 이제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구조 속에서!)     - 송찬호, 「옆에서 본 저 달은」 부분,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언어를 구사함과 동시에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욕구는 억압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이 남겨진 억압이 무의식적 욕망으로 환원된다. 이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실현불가능을 의미한다. 말을 하는 것으로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욕망으로 남겨져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만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므로 욕망이 쌓여가더라도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말은 ‘욕망의 대용’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인간이 생각을 표출하는 것은 언어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무의식적 욕망도 언어적으로 형성되고 언어적 규칙에 따라 표출된다. 욕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듯이, ‘욕망의 대용’인 말은 바로 언어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다. 90년대 시들이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은 주체와 의미의 소멸과 더불어 텍스트의 자율성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심의 부재라는 해체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하나의 텍스트는 자신만의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를 확정하지 못하는 결정불가능성이라는 특성을 갖는 것이다. 90년대의 시들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가 중시되는 상호텍스트성에 의한 탈장르화나 장르혼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장르혼합은 시, 소설, 희곡과 시나리오 등 같은 문학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화, TV, CF등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비문학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에 의한 영상매체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문화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논리로 떠오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물론 90년대를 들어서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삶과 예술의 경계 해체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텍스트의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준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벽보, 기사, 광고, 사진, 그 밖의 인쇄물 등 현실물을 차용하여 콜라주 기법으로 일상의 삶을 그대로 이어 붙이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이것은 90년의 시가 소설, 희곡, 시나리오, 영화, TV, 광고 등의 장르 형식을 시의 양식에 도입하는 장르혼합 뿐만이 아니라, 시라는 텍스트 자신마저 불확정성으로 인식하고 시 자체를 대상으로 자율성을 해체하는 자기반영성의 메타시를 시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90년대 시들의 텍스트 자율성 해체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텍스트의 개방성과는 차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90년대의 시들은 기존의 시 장르에 대한 인식을 해체한다. 그 동안 문학은 현실에 대한 관념, 상상을 언어로 표현하는 현실의 반영으로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는 현실을 인식하는 주체가 소멸함에 따라 현실마저도 사라지기에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문학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 텍스트는 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반영하거나 재현하기보다 텍스트 그 자체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90년대에 시라는 텍스트 자체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자기반영성의 메타시가 부각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메타시는 시 자체를 글쓰기 대상으로 하는 자기반영적인 시로 정의할수 있다. 여기에는 시를 대상으로 하는 시론시, 시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인론시, 시쓰기의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시, 그리고 다른 시 텍스트와의 관계성이 드러난 메타텍스트시가 포함된다. 메타시는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반성적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7)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그 동안 많은 시인들의 관심이 되어 오다가 시론시, 시인론시 등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되는 메타시의 유형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이다.8) 장정일의 시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는 시인의 시 쓰는 과정이 그대로 시로 표현되고 있다. 시를 썼다가 지우고 또 다시 쓰는 등 시인이 시를 쓰면서 거치게 되는 많은 습작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작 과정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메타시의 전형이 된다. 장정일은 80년대 후반에 출간된 시집에서 해체시를 선보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장정일이 80년대와 90년대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시집들은 80년대 후반에 출판되어 80년대적 해체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를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시는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과 경계를 허무는 장르혼합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참의 미로여행, 성미정의 동화 연작은 소설의 양식을 시에 도입하고 있으며 장정일은 잔혹한 실내극과 자동차에서 희곡과 시나리오 형식을 실험하며 장르혼합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문학과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비문학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 발전에 의한 영상매체의 발달로 영화, TV, 광고, 대중음악 등이 현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중심의 부재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은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대중문화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영향은 문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영화, TV, 광고 등에서 일부를 취하여 시에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 이러한 대중문화에서 얻은 시적 상상력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영화 감독 지망생 영규는 지난번에 산 8밀리 무비 카메라가 쓸모 없어지는 바람에 그걸 팔러 외출한다 매일 똥을 싸고 요강에 지저분한 꽁초 따위를 넣는 병든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영규는 집 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방학 때지만 매일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충무로 중부경찰서 부근의 카메라 가게로 가보았지만 무비 카메라는 취급을 안 한다고 하여 가격이라도 알아보러 옛날에 자주 다니던 청계천 8가 황학동의 장물 시장에 가기로 맘을 먹은 영규는 황학동 시장에 도착하고 적지 않이 놀라는데 옛날과 완전 딴판으로 서울에 스며든 동남아 네팔 파키스탄 러시아 계통의 수많은 외국인들이 떼지어 물건을 사러 몰려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층 사람들의 동물 냄새나는 활기에 새로운 삶의 의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영규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데…(p. 76에 계속)     - 성기완, 「볼 만한 티브이 프로 1」 전문,       쇼핑 갔다 오십니까?   TV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들어서며 인간의 삶에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TV는 이제 인간의 삶에 그대로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성기완은 연작시 형태로 4편의 시를 쓰고 있다. 영규라는 인물의 평범한 일상이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다 끝 부분에 이르면 (p.76에 계속)이라는 말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말에 시집을 넘겨 76페이지를 읽게 되고 다시 97, 123페이지를 읽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방영되는 TV드라마의 형식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다가 (p. 76에 계속)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기심에 다시 그 페이지를 찾는다. 한번 시청하게 되면 눈을 떼지 못하는 드라마의 중독성이 시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중심의 부재라는 해체주의적 시각에서는 하나의 텍스트는 고정, 불변의 것이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일뿐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90년대 시들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해체시는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며 새로움을 추구하고,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미학으로 나타난다.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경계 해체는 텍스트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90년대로 들어서며 심화,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우리시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논리적 발전인 동시에 비판적 반작용으로서 나타난다. 90년대 이후의 해체시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 중에서 극단적인 형태 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시켜 상호텍스트성과 탈장르화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이 보여주던 현실의 파편화, 사물화 현상과 그로 인한 주체의 소외에 대한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이어받아 주체의 해체, 탈중심주의로 나아가며 파편화된 현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원래 특공대의 ‘전위’나 ‘선봉’ 또는 ‘첨병’을 가리키는 군대 용어에서 비롯되어 프랑스 혁명 이후 정치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쓰이다가 본래의 군사적 의미는 사라지고 정치적 사상이나 사회 사상에서 보이는 급진주의를 의미하게 된다. 19세기 유토피아적 사회 개혁가들이나 사회주의자들, 급진적 저널리스들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심미적 아방가르드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하나의 예술적 관념으로 과거를 거부하고 새로움 추구하는 모든 새로운 유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된다. -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현암사, 1992, pp. 133-138. 2)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다다이즘과 초기의 초현실주의 그리고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이탈리아의 미래파나 독일의 표현주의를 지칭한다. - 페터 뷔르거, 『前衛藝術의 새로운 이해』, 심설당, 1986, p. 24. 3) 김욱동 4) 구모룡, 「억압된 타자들의 목소리」, 『현대시사상』, 1995, 가을호. , 위의 책, p. 143. 5) A. 하우저, 『예술의 사회학』, 한길사, 1983, p. 370. 6) M. 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 언어, 1993, p. 151~155. 7) 고현철, 「메타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현대시의 쟁점과 시각」, 전망, 1998, p. 32. 8) 80년대 후반, 오규원은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에서 「詩人 久甫氏의 一日」연작을 통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시론시를 선 보이고 있다. 박상배는 시집 『모자 속의 詩들』(1988)에서 IV장에 14편의 시론시를 선보이기 시작하여 『잠언집』(1994)에서도 「풀잎頌」연작으로 14편의 시론시를 쓰고 있다. 이승훈 또한 박상배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메타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승훈 씨를 찾아간 이승훈 씨」(『밝은 방』)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시인론와, 시론시, 시작 과정이 드러나는 시 등 이승훈은 메타시를 쓰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권경아 2003년 『시와 세계』 등단. 현 : 한양대 강사. 『시현실』, 『리토피아』 편집위원.   계간 시와 표현 2011년 가을호  
22    환유적 어법의 미적 특성 / 김광기, 시인 댓글:  조회:998  추천:0  2018-11-03
환유적 어법의 미적 특성                        김광기, 시인           흔히 은유적 글쓰기는 시를 쓰는 방식이고 환유적 글쓰기는 산문을 쓰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또 이러한 비유 활용의 글쓰기 방식에서 ‘시는 은유다’라고 말할 정도로 시작(詩作)의 은유적 어법 활용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시 쓰기에서의 환유적 어법 활용은 좀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시들은 모던한 형태를 지향하며 환유적 어법 활용으로 창작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야콥슨은 이야기를 이루는 최소의 자립 단위인 모티브를 ‘A→B→C→D…’처럼 계기적이나 인과적으로 이동하는 어법을 환유적 어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어법적 기능을 활용하여 언어에서 언어로 전이되는 데 그치는 은유적 정조(情調)보다는 문장에서 문장으로 연속되는 정조가 시적기운을 더 확장시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인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시 전체적인 문장의 구조가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닉한 의미구조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의미 구조는 정서가 비슷한 독자가 아니면 그 의미를 곧 찾아낼 수 없거나 복잡한 의미함수를 내재한 문장으로 비쳐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의미구조를 자의적으로라도 파악하여 유추하게 되면 시를 읽는 묘미가 더하게 되고 아이러닉한 시적 긴장구조의 맛에 흠뻑 취하게 된다.     여기에는 또 아이러니가 형태적으로 지니고 있는 기표(記標,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é)의 간극, 즉 의미의 거리에 따른 그 맛을 각기 맛보게도 된다. 기표와 기의의 거리가 멀수록 문장 자체가 낯설고 의미 또한 파악하기 어렵고, 그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거리가 멀든 가깝든 텍스트(시적 문장)에서 풍기는 의미의 정서가 잘 전달되어야 독자는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지난 계절이나 최근 발표한 작품들 중에서 이러한 의미구조가 대별되면서도 도드라지게 개성적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들을 몇 편 골라서 살펴보기로 한다.     내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화살 하나가   종잇장 하나를 매달고 장대(將臺) 기둥에 날아와 꽂혔다   적장의 편지였다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다     수레바퀴만 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오   오늘도 나는 변복을 하고,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제 막 저녁을 먹었다오   망루며 포대며 당최 치고 때릴 데가 없더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성에 이미 무릎을 꿇었소     날 밝으면, 성문 앞 팽나무 그늘에서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우리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가리다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어찌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성을 쌓을 수 있는지,   기술이나 두어 가지 일러주지 않겠소?      ㅡ윤제림 「아름다움에 대하여」, 계간 『시산맥』 2017년 여름호     시인은 어느 날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작품 하나를 만난 듯하다. 자신도 나름 전투적으로 치열하게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전포고와 같은 시 문장을 담은 “종잇장 하나”가 “날아와 꽂”힌 것이다. 읽어보니 도대체가 납득이 가지 않으니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겠다.     듣고 보니 “수레바퀴만 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라 한다. 모름지기 ‘수레바퀴’란 것이 무엇을 싣고자 하는 것인데 아무것도 없이 ‘바퀴’만 있는 모양새로 목적도 없이 참 열심히도 ‘전투적’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래도 화자는 혹시나 하여 ‘변복’도 하고 ‘동서남북’을 열심히도 살폈는데 도대체가 ‘그가 적’이라면 이길 방도 아니 싸울 방도가 없더라는 것이다.     머리가 시끄러우니 이거고 저거고 간에 다 잊고 “바둑이나 한 판” 두자고 한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세월이 가고나면 내가 옳은지 네가 옳은지 알 터이니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갈 테고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의미도 없는 기교를 어떻게 그렇게 전투적으로 키울 수 있는지,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테니 심심풀이로 “기술이나 두어 가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읽고 나니 갑자기 머리가 비어지고 몸이 허공에 툭 던져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시적기교나 작위를 나무라는 것 같고 부질없는 시작(詩作)의 일상을 책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상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위보다도 시인의 골계 내지는 해학적 표현이 적(適)으로 간주되는 나조차도 일단 경계를 풀게 하는 위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읽는 방식이 다분히 자의적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어떤 현상으로 대입해서 해석을 하더라도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묘미가 있다. 이것이 기표와 기의의 의미가 다소 먼 아이러니의 특장(特長)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의미가 멀게만 느껴지는 텍스트에서 문장의 열쇠를 풀 고리(코드)를 발견한다면 그 의미는 쉽게 다가갈 수 있기도 할 것이다. 또 이 작품의 코드를 제목 ‘아름다움에 대하여’로 본다면 그것을 미학적 범주로 간주해서 그 의미거리를 연결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시는 의미거리가 아주 짧아 읽는 대로 그 의미가 전달되는 것 같은 작품이다.     밤하늘이 저리 푸른 까닭은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가 높이 떠 빛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 별자리와 더불어 수많은 별들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많은 별들이 함께 어울려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니! 우리의 눈이 가닿지 못하는 별들까지도 어디선가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만이 덩그러니 놓인 하늘이라면 우리의 태양은 대낮에조차 울려 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름 모를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별 하나하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없어도 좋은 별은 없을 것이며   우주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수명이 다하기까지는 빠트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위대한 천문가가 천문도를 다시 그린다고 칩시다.   저 별은 너무 작아, 저 별은 너무 약해, 저 별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빼버린다면 그 위대한 천문가는 이미 위대한 전문가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가 그 자리에 박혔기에 천문도 또한 아름답지만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는 이름 없는 뭇별, 연약한 뭇별, 쓸쓸한 뭇별과 함께 수수억 년을 빛나고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주의 위대함과   우주의 변함없음과   우리가 받아 갖는 위안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주의 운행은 무한량이지마는   우리의 수명은 순식간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은 함께 빛나는 것입니다.   그를 일컬어 다투어 빛난다 한다지요?   ‘다투어’ 빛난다는 건 저마다 타고난 품이 다르다는 것이고, 그 타고난 숨결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외되거나 무시된다면 우주는 우주로서의 ‘다움’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숱한 별 가운데 하나인 태양에 얹혀   우리는 아침저녁을 챙기고 잠자리에 들며 나이를 보태다가 돌아갑니다.   매양 두꺼운 어둠이 덮칠지라도 점점 살 오르는 달빛과 개밥바라기 아래 내일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작은 별 한 촉도 초롱초롱 솟는 밤하늘   우리의 하루하루도 우리의 한 명 한 명도 그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별도 위대하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거나 소중하지 않다고 여겨서는 안 되느니라,고 모든 별 한눈에 펴 보이는 밤하늘     한 줄의 시조차도   갓 태어났거나   힘없이 늙은 한 명의 시인조차도   우리의 천문도에서 빼먹어선 안 될 별들입니다.     온밤을 망원경으로 지새우는 천문학자는 아주 먼별에서부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하나에 이르기까지 찾고 기억하며 이름 붙여주려 애쓴다지요. 이 작은 지구에서, 이 애달픈 찰나의 인생에서     북극성보다 북두칠성보다 카시오페이아보다 하찮은 별이란 없습니다.   혹자, 혹은 신의 눈에는     저 또한   당신 또한   이파리 뒤의 버러지 또한   다 같은 쪽이며 꼴일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기댈 곳 없는 이 지구상에서 잠시 글썽이는 몸이랄 밖에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생명과 운명은 스스로의 작위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 우연히 맺혔다가 사라지는 피요, 환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ㅡ정숙자 「흙북」, 웹진 『시인광장』 2017년 3월호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정숙자 시인의 「흙북」은 마음으로 쓴 시이다. 따듯함이 듬뿍듬뿍 배어나오는 온정의 의미들이 가슴으로 읽히는 듯하다. 시문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ㅂ니다’의 문체가 시인의 진중한 시작태도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짧은 시라도 사족이 많아 덜어낼 문장이 많은 것 같아 보이는 작품들이 많은데, 환유적 어법의 이 작품의 긴 문장에서는 어디 하나 덜어내고 싶은 사족 하나가 없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절절하게 그 의미를 다하고 있을 뿐더러 주술적인 내러티브가 시인이 인도하는 대로 그 감상에 푹 젖게 한다. 문장의 여백미가 짧은 문장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끝까지 다 읽었음에도 문장 속에 담겨있는 여운이 한동안 그 의미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문장 속의 여백미가 있다. 문장 사이사이를 맴돌고 있는 시인의 시적 기운이 생동감 있게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시적 텍스트의 의미거리는 거의 밀착되어 있다시피 하지만 그 감동스러운 의미파동은 의미거리가 아주 멀고 낯선 어떤 텍스트들보다 더 크다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가닿지 못하는 별들까지도 어디선가 빛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하며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시문이 존재론의 심오한 경지를 가늠하게도 한다. 우리 시각에 비치는 현상은 멀고 가까움의 차이 때문에 크고 작게 보일 뿐이지 그 크기와 존재의미는 일일이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량차이가 다소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의미는 누구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구구절절 내재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기댈 곳 없는 이 지구상에서 잠시 글썽이는 몸이”기 때문이라 한다. “우리 모두의 생명과 운명은 스스로의 작위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 우연히 맺혔다가 사라지는 피요, 환상일 뿐이기 때문”에 서로 보듬고 아끼지 않으면 자신조차도 그 존재의미가 없다는 지각이 형성되기도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고 일상에서 잊고 살면 절대 안 되는 이야기지만 시인이 이렇게 구구절절 환기시키는 것은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잃고 살아가는 시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의 시 백인덕 시인의 「춘천」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캄캄한 시대를 뚫고 가는 이야기를 야간열차를 타고 가는 정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 밤 내 써지지 않는 글자가 있다. 열린 몸은 처음 부는 바람마저 읽는데 머리, 입술까지 달뜬 글자를 손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아니, 완강히 거부한다. 일목요연하게 앓는 몸이 출렁이는 기억의 간헐천을 지난다.   한 밤 내 몰려가는 개미는 검다. 검은 개미가 몰려가는 빈 방은 붉다. 검은 개미가 붉게 몰려가는 한 밤의 붉은 빈 방, 기억에는 없고 몸에만 있는 신열(身熱)은 문을 만든다. 문 밖에는 글자를 벗은 세계, 담장은 낮아지고 달빛에 애가 슬고 길은 한 가운데부터 꺼진다. 중심이 지워진 그림자를 달고 길게 족쇄를 끄는 남자와 여자, 아이 몇 검은 개미에 쫓기는 일가(一家)의 붉은 유배, 툭, 툭 몸의 사슬이 끊어진다. 약 먹은 듯, 술 게운 듯 한 밤 끝끝내 써지지 않는 글자가 선명하다.    ㅡ백인덕 「춘천」, 계간 『문학과 창작』 2017년 여름호       캄캄한 열차 속에서, 아니 캄캄한 자의식 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기억하고 기록해내려 하는 것일까. 출렁이며 가는 열차의 몸 같은 신체를 “일목요연하게 앓는 몸”이라 한다. 무심히 살고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 신열을 앓고 있는 것 같은 화자를 느끼게 한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모든 삶의 상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읽으면 시인과 함께 어디론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는 감상에 젖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을 시인은 “한 밤 내 몰려가는 개미”들과 같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열차의 굴곡진 마디마디가 줄을 잇고 있는 개미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마디마디 텅 빈 붉은 방에서 화자는 신열(身熱)을 앓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화자의 열망이 분출되지 않아서거나 “중심이 지워진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가 ‘유배’ 같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게 족쇄를” 끌며 쾌속의 “검은 개미에 쫓기는” 듯한 자의식 속 개미들의 “붉은 유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몸인들, 마음인들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약 먹은 듯, 술 게운 듯” “툭, 툭 몸의 사슬”을 끊어낼 뿐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여로인 듯하다. 그런데 화자는 ‘춘천’으로 가는 길에 있다. 춘천(春川)이란 목적지를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고뇌를 안고 그것을 흘려버릴 봄 냇가로 가고 있는 탈출구 같다. 그것은 아마도 춘천(春天)과 같은 목적지일 것이다. 삶은 고뇌가 가득한 밤 열차를 타고 가는 것과 같지만 우리 여행의 끝은 결코 불운하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의미의 거리를 팽팽하게 유지하면서도 행간을 탄력 있게 유지하는 시문의 조합이 다양한 의미를 긴장감 있게 확장시키고 있다. 아이러닉한 시적 상황과 텍스트에서 분출되는 시적 기운이 우리의 심상을 한참 동안 감싸며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감동을 주는 시도 있지만 먼저 살펴본 작품들과 같이 그 의미거리가 멀든 짧든 각기 개성적으로 감동스럽게 다가오는 시들도 있다. 작품마다 밝히고자하는 주제에 따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어떻게 독자에게 다가서는지 텍스트의 미적 특성을 찬찬히 살펴보며 감상할 필요가 있다.                ================================================================================= 김광기, 시인 1959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창과 석사,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학습서 『글쓰기 전략과 논술』 등이 있음. 1998년 수원예술대상 및 2011년 한국시학상 수상. 현재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도서출판 『문학과 사람』 편집발행.
21    빛나는 것들, 은유 | 양선규 댓글:  조회:881  추천:0  2018-11-03
  빛나는 것들, 은유                                                    양선규(대구교육대학 교수)     아래에 소개하는 시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상작용 중의 한 극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의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이 유관한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상상작용만으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경우가 됩니다. 시인은 조급증이 애초에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조급증과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상당히 저의 조급증과싸우면서 읽은 시입니다. 조급증을 내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시입니다. 시에 관심 없는 분들은 아예 건너뛰시는 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한 일이 되지 싶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 왜푸른빛인지 의문이나 수사마저 햇빛에 섞이고 마는 그곳이 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밝음과 어둠이 같은느낌인 바다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는 내 하루를 기억한다 나무들은 밤이면 괴로움과 비슷해진다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 내가 만졌던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그리고 등대는 어린 날부터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까지 비추어왔다.   돛이 넓은 배를 찾으려고 등대에 올라가면 그 어둔 곳의 바다가 갑자기 검은 비단처럼 고즈넉해지고 누군가가 불빛을 보내고 그의 향로와 내 부끄러움을 빗대거나…… 죽은 사람이 바다 기슭에 묻힐 때 붉은 구덩이와흰 모래를 거쳐 마침내 둥근 지붕 생기고 그 아래 파도와 이어지는 것들…… 혼자 낡은 차의 전조등 켜고 텅 빈국도를 따라가면 고요를 이끌고 가는 어둠의 집의 굴뚝이 보인다, 낯선 이가 살았던 어둠, 왜 그는 등대를 혹은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는 햇빛은 폭풍처럼 기록된다, 그리고 등대 ─ 「푸른빛과 싸우다 - 등대가 있는 바다」 송재학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사, 1994)     이 시를 한 번 읽고서는 시인이 무슨 뜻을 전하려는지 금방 알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핏얼핏 보이는데 그게 일상의 언어로, 자동적으로, 치환되지 않습니다(언어의 비자동화가 강조되는 시스템 언어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되겠습니다.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탓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시인은 아무나 그저 한번 후딱 자기 시를 읽고 지나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같습니다. 조급증을 되게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급증 내지 말고, 찬찬히 생각해야 합니다. 비단 이런 이미지 중심의 시를 읽을 때가 아니더라도, 주로 섣부른 전문적(?) 독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만, 자기 문맥으로 시가 들어오지 않으면 막말로 ‘난해하다’는 등의 말을 내뱉으면서 쉽게 시를 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무조건 쉽게 쓰는 게 도덕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불문율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보낸, 그 아름답거나 절망적인 시간들을 반드시 충분히고려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내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내 절망이 무엇이냐를 지속적으로 물어주어야 합니다.시인은 그저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어렵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는 입에 넣기만 하면 자기가 알아서 녹는 달콤한 초콜릿이 아닙니다(그 안에 깨물어 먹어야 할 아몬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시를 읽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시를 읽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시는 뜻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뜻으로 매겨지지 않는 그 어떤 것들로 가득합니다. 시인은 뜻보다는 오히려 그 다른 쪽들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겉으로 뜻에 목을 매고 있는 것처럼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인들은 가차 없이 그 허구를 들추어냅니다. 시인은 항상 뜻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시어의 총체성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는 것들, 이를테면 말뜻(Sense), 느낌(Feeling), 어조(Tone), 의도(Intention) 등을 두루 살펴야만 우리는 ‘시인의 시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이 시, 이 기록을 남기는 발화자(시인)의 ‘시를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물론 이 시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적 발화의 ‘의도(Intention)’에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정도의 큰 방향이 가능하겠습니다. 하나는, 마치 화가가 좋은 풍경을 풍경화로 남기고 싶어 하듯이, 시인도 ‘등대가 있는 바다’를 서정적으로 멋지게 한번 그려보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방향에서라면 이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음미하면서 우리도 느긋하게그와 함께 등대가 있는 바다를 한번 그려보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그냥 끝내면 됩니다. 만약, 그러고 말기에는 무언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그림’ 위에다 다시 한 번 내 물감으로 덧칠을 해 보면 됩니다. ‘내안의 풍경’을 꺼내서 그것에다 겹쳐 보면 됩니다. 아마 우리는 후자 쪽을 택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시가 ‘풍경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의 성찰’을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짐작은 이미 ‘푸른빛과싸우다’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들었던 사실입니다. 시인의 ‘싸움의 기술’을 잘 읽어내어야 한다는 각오가 처음부터 들게 합니다. 이미 그 언사에서부터 시인이 삶과 죽음을 하나의 ‘수평선’ 위에서 바라보는 ‘삶의 등대지기’를 자처하는 것 같은, 어떤 구도자와 같은, 느낌을 받았고, 싸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푸른 빛’이 발산해내는 그 신비한 아우라에도 약간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와 같은 시와는 벌써 제목부터 다릅니다. 그런 느낌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시가 어떤 식으로 ‘자기 성찰’의 과정을형상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성찰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내면 성찰’ 쪽에서 살피려면 우선 그가 내세우는 ‘푸른빛’의 의미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사전적 의미의 ‘푸른빛’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함축적 의미는 늘 사전에없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이니까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색깔일 텐데 우리는 그 ‘고통’이 어떤 내용인지알 수가 없습니다. 이 시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적 삶이 서로 대립적인 그 무엇으로 설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 그 자체가 고통인지, 아니면 현재의 삶을 아프게 반추(반성)하도록 강요하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가 고통인지 그 자세한 내막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낍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이리저리 독자를 미로 속으로 안내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어쩌면, 그런 사실적인 것(원인)에 관심하지 말고 ‘고통’ 그 자체에만 집중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 없는 자는 내 시를 읽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시인이 이 시를 쓴 진짜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의 공유, 시 내용은 그 다음 문제고, 시인은 고통(기억)을 잊지 않는 삶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에는 이른바 ‘비유와 상징’이 개인적인 경험, 혹은 오래된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짜여 있습니다. 특히 ‘나무’와 ‘등대’는 전적으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이어서, 그 상처의 근원을 모르는 독자들은 쉽게 의미의 그물을 짜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첫 줄부터 그렇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라는 말을 ‘등대가 있는 바다(세계의 거울)에 도착하자 나는 망연자실했다(세속적 욕망들의 행진이 일순 정지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읽고 싶은데, 그 뒤를 보면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금방 낯선 것은어쩔 수 없다’라고 그런 식으로 독자가 쉽게 읽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어깃장 문맥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의일로 치부하고 쉽게 읽어내는 시 읽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라는 말을 위안 삼아 다음 줄로 넘어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시인 스스로 ‘모르겠다(의문이다)’라는 표현을 쓴다면 십중팔구는 그 부분이 트라우마의 원적지라는 말입니다(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그들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분명합니다. 아마 시인은 그 장소에서 ‘상처 입은 주체’가 되는 자극(충격)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푸른빛’으로(색채 이미지로) 감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연에서는 이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한두 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우선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 나무들은, 특히 밤이면, ‘잠언’처럼‘나’에게 다가와서 ‘기억’을 환기시킵니다. 그것이 괴롭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등대’,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과 같은 또 다른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들은 ‘해송과 배롱나무’와는 달리 한 번 더 가공된 기억들입니다. 유년기의 ‘상처’가 긴 세월 숙성기를 거쳐그렇게 몇 개의 단어들로 삼투압된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의식화(의미화)하겠다는 의지를 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런 식의 사후작용事後作用이 어떤 의미화를 이루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경계선 밖의 것을 생각하고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시인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인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만, 자신이 그 과정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앞에서도 ‘푸른빛’이라고만 말하고는 더 이상 그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내용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으라는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결국 자신의 고통으로 환치될 때 비로소 ‘의미’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계속해서 모호한 발화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 연까지 읽어도 여전히 ‘푸른빛’을 이해하는 데에는 미진함이 남습니다. ‘고통’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어떤 기억과 싸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시인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 그저 ‘푸른빛’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런 의심마저 듭니다.   셋째 연으로 가 보겠습니다. 셋째 연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등대에 오르는 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재의 경험인지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험이 ‘검은 비단’과도같은 심리상태를 선사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무겁고 부드러우며 균질적인 매끄러움이 있는 세계, 안정감이 있는 어떤 심리적 에너지가 현재 자기 안에서 운행되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시인은, 그런 바다 앞에섰을 때 돌연히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환기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부분에서는 죽음을관조하고(시인은 바닷가 무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도 ‘기억’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 심정을 반추합니다. 마지막 부분,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 하는가’라는 말이 이 시를 주제의 차원에서 대표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등대’는, 넷째 연에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어린 날’의 ‘기억’을 대표하는, 혹은 통어하는, 하나의 중심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굳이 그 관습적 상징의 의미를 들추자면, 지상에 수직으로 서서 먼 바다의 행로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화자 자신의 자기실현에 대한 강한 의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연은 그 날, ‘푸른빛’을 만나던 그 날의 심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햇빛’이 ‘폭풍처럼 기록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체가 입은 상처의 흔적이 컸다는 뜻입니다. ‘햇빛’의 원관념이 ‘강렬’이 되든 ‘각성’이 되든 ‘경탄’이 되든 ‘경악’이 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강렬하게 자신의 내면에 금이 간 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만 알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고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의미의 영역은 아주 협소합니다. 시인이 스스로 ‘상처 입은 주체’임을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감추는 것을 통해 그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시의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관계없이우리는 그러한 ‘시의 형식’을 통해 ‘주체의 분열’이라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굳이 심리학적 용어를 동원한다면, 이 시의 내적 형식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異化의 고통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시인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의 고통을 색채 이미지 ‘푸른빛’이라는말로 상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푸른빛’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시인 자신이 새로운 자기통합의 과정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의 주제를 찾아보겠습니다. 시에서 주제는 항상 마지막 주자입니다. 단체전의 주장이지요. 주장이라고 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면 주장의 경기는 그저 ‘폼생폼사’일 수도있습니다. 시에서 주제의 위상이 딱 그렇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서서 승부를 결정짓는 수준이라면 그 시는 일류 시가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일상성日常性과 본래성本來性’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좀 쉬운 해설을 할 수도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실존적인 층위에서 포괄적인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넓은 만큼, 뜻 전달의 모호성이 강한 이 시의 ‘설명과 이해’에는 오히려 적절한 ‘서술어’의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그것을 비본래적으로 사용하여 대지 위에 문화라는 울타리를 건설하고 뿌리 없는 불안정한 생존 조건을 극복하여 일상성이라는 안락한 거소居所를 이룩하였다. 그러한 일상성 속에서 사는 일상인으로서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인 대지를 망각하고 자신을 오히려 문화의 테두리 안에 길들임으로 해서 울타리의 존재마저도 잊고 있었다. 그의 생활방식은 그러므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볼 때 본래성으로서의 자연인 대지와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비본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과의 단절은 비록 삶의 표면에 있어서는 안락하고 평화스러운 것이었으나, 때때로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불안은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근심이나 걱정과는 달리 일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알 수 없는 무無로서, 근원적인 물음에 부딪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 불안은 그러므로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오히려 배반했던 대지에 대해 가지는 그리움이요, 또는 망각하고 있던 본래성으로부터 흘러오는 거부할 수 없는 종소리와 같은 것으로서 일상언어(비본래적인 언어)를 갖고 사유하는 그에게 일상성에 대한 배반을 요구하는 불안이다.” (하이데거, 이진흥, 『한국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홍익출판사, 1995)에서 재인용)     위의 인용문을 보면 「푸른빛과 싸우다」에서 왜 ‘푸른빛’의 실체가 모호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설명이 됩니다.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도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나무들은 내 본래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성에서 멀리 떨어져나온 우리는 모두 ‘불탄 폐허’ 위에서 ‘안락한 일상성의 거소’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는 시인의 일상성이 ‘본래적 자아’ 혹은 ‘불안’을 만나 ‘배반’을 강요받았던 경험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인에게는 특히 ‘일상성에의 몰입’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푸른빛과 싸우다」의 시인은 ‘대양大洋의 아들’을 자처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양’과 ‘대지’가 그저 이음동의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모를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족 한 마디. 지금까지 저는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시와 한 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시인의실존이 처음부터 끝까지 규칙을 어기며 도발해 왔지만 저는 그의 반칙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상을 같이 나눈 친구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이 싸움은 오늘 처음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 ‘싸움의 기록’입니다. 앞서 나온 저의 다른 책에도 이미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약간의 수정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다시 그것을 옮겨 적으면서 느끼는 소감은처음 때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시의 이미지 중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있고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시의 이미지들은 바다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것들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늘내 안에 있습니다. 바다에 큰 해일이 몰려올 때 안에 든 것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러나 늘 잔잔한 바다일 때는 이 시에서처럼 우정 스스로 ‘등대’가 되어 그것들을, 저 깊은 곳에서, 비추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20    자동 기술법과 시 창작 [스크랩] 댓글:  조회:1172  추천:0  2018-10-28
자동 기술법과 시 창작 자동기술법이란 문장 기술 법의 하나로 인간의 의식 상태가 가장 자유스러운 상태로의 이행의 행위를 언어적 본능으로 추적해가는 일련의 자유연상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자유연상의 조건은 자유라는 개념이며 그것은 내적 감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외적 표현에 의한 국가 이념이나 사회구조의 사상에 위반하지 않는 한 사회나 집단의 간섭을 받지 아니 한다. 그러나 시는 언어에 의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언어든 문자든 밖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시로써 성립될 수가 없다. 따라서 자동기술법이란 시나 소설 등 문예 창작의 하나의 기법이기 때문에 그 시인이 소속된 사회의 도덕이나 관습에 저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반시나 저항시 또는 해체시라는 명칭을 후세인은 달아주고 있으나 시인이 시 창작의 순간에는 자신의 도덕관이나 사회관에 의해서 시라는 형태 속으로 사물에 대한 자신의 감각과 이념을 들이밀기 때문에 시인의 시관에 얽힌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시인은 경험이라는 인간의 기억장치를 시인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관념에 의해서 정화해 내야한다. 그 정화의 과정 속에 연마되는 것이 시인의 시적 관념인데 시인이나 작가나 문인이나 예인의 사물에 대한 개별적 직관은 각자의 자유연상에 의하여 유발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장이 자유의 관념에 의하여 패러다이스를 지향해 갈 때 우리는 삶의 여유를 즉 만족감을 자족하면서 자신의 일이나 사유에 대한 자신을 얻으며 어떤 유기적 개체를 구성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유기적 개체는 언제나 아무리 큰 낯설어지는 과정이나 모호성을 유발하여 어떤 개념을 형성해 간다 할지라도 반드시 거기에는 상대적 일반화의 관계를 지녀야 하며 인과 관계의 계선적이며 적층적 구조 속에 들지 않으면 시적 효과를 크게 기대 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곧 미시적이며 거시적인 시선적 구조 속에서 분리 되거나 종합되는 과정이나 너무도 우연적인 필연성이 결여된 엉뚱한 것이어서는 유기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사상 누각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라는 사물에서 '땅'이라는 사물로 자유 연상이 되어졌다고 가정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유기적 문장 구조를 만들 수가 있다 1.'나무가 땅을 마구 먹어 치운다' 2.'땅이 나무를 마구 먹어 댄다' 3.'나무가 땅을 자른다.' 4.'땅이 나무를 분해 한다' 5.'나무 속으로 땅이 스며 든다.' 6.'땅 속으로 나무 들이 숨는다.' 7.'나무에게 땅이 말을 한다.' 8.'나무들이 땅에게 이야기 한다.' 9.'땅 속으로 나무들이 꺼진다' 10.'나무 몸통 속으로 땅이 기어 든다' 위의 문장 구조가 어떤 유기적 느낌을 유발 할려면, 어떤 이는 그 인과적 요소조차도 필요하지 않다고 그대로 가버리는 자유의지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는 대단한 치열성과 십수년간의 시적 숙련도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동일성 있는 문장의 치열한 반복성이 필요 하기에 그 인과적 구조의 요소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1과 2는 배가 고픈 듯이, 화가 난 듯이 정도의 요소를 주장 할 수 있지만 3 은 그 요소가 얼른 생각이 안난다. 그러나 만일 '번개 칼을 들고서'라고 해 볼까요 그리고 그 인과 관계를 거시적 방법으로 땅을 오염물로 잠식해 들어가는 그 순간을 정화해 가는 관념으로 주장한다면 어떨지요 4, 사막화 현상 5. 뜨거운 염천 6. 전쟁터 7. 어서 커서 그늘을 만들어 드리우라고 8.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 하면서 9. 사라지는 기억들 10. 사랑이 시작 되는 날 필자는 그 유기적 관계를 구성하기 위하여 필연적 인과의 요소를 제시해 보았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은 동감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고개를 갸우둥하게 하거나 전혀 동의 할 수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요인의 파생은 다분히 '시적 모호성'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시의 효용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독자를 감동시켜야 한다는 논리에서 본다면 표현의 욕구를 제어 해야 할 어떤 방어기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물에 대한 '직관'인 것이다. 염천 빌딩의 정원 청석 김 석 현 나무가 땅을 마구 먹어 치운다. 땅이 나무를 마구 먹어 댄다' 나무가 땅을 자른다. 땅이 나무를 분해 한다. 나무 속으로 땅이 스며 든다. 땅 속으로 나무 들이 숨는다. 나무에게 땅이 말을 한다. 나무들이 땅에게 이야기 한다. 땅 속으로 나무들이 꺼진다. 나무 몸통 속으로 땅이 기어 든다. 장소는 빌딩의 정원이다. 소나기라도 기다리며 청석 김 석 현 나무가 땅을 마구 먹어 치운다. 배가 고픈 듯이 화가 난 듯이 땅이 나무를 마구 먹어 댄다' 나무가 번개 칼을 들고서 땅을 자른다. 땅이 나무를 분해 한다. 사막화 되어가는 문명의 공간 빌딩의 정원 뜨거운 염천 아래 나무 속으로 땅이 스며 든다. 땅 속으로 나무 들이 숨는다. 전쟁터가 되어 가는 빌딩의 정원 어서 어서 자라서 키 커서 그늘을 드리우라고 나무에게 땅이 말을 한다.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 하면서 자라서 부모님 은혜 꼬옥 깊겠다고 나무들이 땅에게 이야기 한다. 사라지는 기억 속에 땅 속으로 고향의 나무들이 꺼진다. 나무 몸똥 속으로 땅이 기어 든다. 그리고 사랑이 기억 속에 스며 들면서 ....... 염천 아래 분수처럼 소나기가 쏟아진다. 사랑을 존재 이유로 청석 김 석 현 큰 땅을 같이 돌아 다녔어도 파도처럼 밀려 오는 누구의 거부를 수용했어도 언제나 우리는 나는 그대의 나무가 될 수 없고 그대는 나의 땅이 될 수 없기에 세상은 늘 늪이고 우리는 그 늪 속의 나무가 그리운 땅이 그리운 사랑이란 다리가 그리운 존재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서로의 욕망으로 서로가 서로를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정해진 시간을 가진 닳아 없어지는 사랑이란 그리움을 가진 존재, 문명이란 수렁에서 나는 그대의 사랑의 나무를 키우기 위하여 끝도 없이 수렁에 스며드는 황토가 되리니 그대여 우리 서로 그리움이란 사랑이의 다리를 놓아 가자 그리하여 사랑의 성을 지어서 먼 후일 회한 없는 우리들의 사랑의 그림자를 거기 숨기자     자료2 surrealism【명사】 [예술] 비합리적인 잠재의식이나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꾀한 예술 운동. 제일 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다다이즘(dadaism)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괴한 주제나 꿈, 환영(幻影), 무의식의 시각 따위를 이용하여 낯익은 사물들을 비논리적 관계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현실의 관습적이해가 가진 피상성을 폭로하려 하였다. 유의어 쉬르레알리슴 (surréalisme) , 초사실주의 (超寫實主義) ,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자동기술법'이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상을 기술해 가는 표현법을 말합니다. 이는 초현실주의 시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 기법으로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무의식의 상태를 기술하는 방법입니다. 자동기술법과 유사한 표현법에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이는 소설에서 인간 내면(內面)의 심리적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어 관찰과 묘사를 하기 위한 표현법으로 '인간 내면에서 끊임없이 생성?변화하는 의식을 연속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시의 표현법이며 '의식의 흐름'이란 심리 소설의 표현법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자동 기술법은 초현실주의 시에서 독특하게 사용되는 기법입니다. 자동 기술법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의 이론을 원용한 것으로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무의식의 상태를 기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현실주의가 자동 기술법을 애용한 이유는 그것이 보다 인간에 충실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19세기의 유물인 합리의 체계 속에서는 인간의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의 지배하에 놓인 정신이 파악해 내는 외표(外表)의 세계에는 거짓만이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에 깊이 잠들고 있는 생각과 관념을 아무런 제재를 받음이 없이 밖으로 표출시키는 것이 인간의 진실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마치 꿈을 꾸는 자가 그 순간에 손이 닿는 대로 스스로의 내면 세계를 표출해 가는 듯한 입장에서 작품을 썼는데, 이것이 자동 기술법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상과 '삼사 문학(三四 文學)' 동인들이 이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상의 에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것은 다다이즘적인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전통의 극단적인 부정으로 해석됩니다. 이 시에서는 띄어쓰기의 무시가 시를 난잡하게 하며, 읽을 때 좀더 생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곧 현대인의 위기감 또는 고뇌를 절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으며 외형적 형상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이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주된 표현 수법인 자동 기술법을 도입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9    구조론 [스크랩] 댓글:  조회:1096  추천:0  2018-10-27
1. 구조론 기본 요소 여기서는 주로 시를 다루겠지만, 문학 전반의 구조가 과연 이것과 다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그 확신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한 이불 속에서 꿈틀거린다는 점, 단지 장르를 달리 하고 있을 뿐 기본적인 문학장치는 똑 같을 것이라는 유추에서 나온 견해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구조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학이 어떤 기본 요소들로 서로 얽혀있는가를 밝혀가는 이른바 그들의 그물을 어떤 방식으로 짰는가를 살피는 길이라 하겠다. 문학은 크게 두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와 상징이다. 이미지는 소설에서 묘사나 서술,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지는 보여지는 또는 표현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이라는 것은 결코 보여지거나 독자에게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작가가 비둘기는 자유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이미 상징의 성질을 잃어버린 결과를 낳을뿐, 상징의 장치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상징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그것은 이미지인 비둘기가 자유스럽게 날아 다니는 풍경이나 전쟁중 적군을 피해 아군에게 편지를 전해줌으로써 전쟁의 승리 및 평화의 시기를 앞당기는 하나의 형상화를 획득할 때 그것은 자유라는 상징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가 빠른 사람들은 이때쯤 형상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먼저 파악하게 될 것이다. 형상화란 그런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것으로 말하는 것. 2.테크닉 익히기 여기서 쓰는 사람들은 한가지 테크닉을 익혀라. 절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발설하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이야기 한다. 내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면 글 속에서 사랑에 대한 언급을 회피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상징을 발설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연인을 그린다거나, 사랑하는 모자를 그린다거나, 이들을 급박한 상황이나, 대조적인 대치물을 둠으로써 사랑하는 모습을 극대화해야 할 것이다. 이때 많이 쓰이는 방법이 바로 역설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는 대중가요가 바로 그 역설을 이미 말해주고 있다. 그만큼 강렬하게 각인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은 작가가 자신의 글을 어떤 식으로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할 때, 많이 써먹는 방법이다. 고민하는 것이 상투적일 때는 고민하는 것의 반대 의견으로 생각을 전환하라. 자신의 생각을 뒤집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투적인 결말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3. 대상에 대한 관찰 이야기가 조금 빗나간 감이 있지만, 우린 이미 문학의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마친 셈이다. 그것에 대해 간략하게 용어를 통해 정의내려보자. 정의라는 것은 언제나 파기가능한 것임을 명심하자. 어느 누구나 문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는 있기 나름이다. 그것은 이미 의견일뿐 진리는 아니라는 것, 진리에 대한 상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작가는 언제나 사물을 외곬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나쁜 버릇은 빨리 버려야 한다. 언제나 열린사고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도 좋으리라. 자 그렇다면 다음에 내리는 정의는 이미 정의가 아닌 하나의 사견에 불과함을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우린 이 장의 제목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아야 한다. 대상법, 대상법은 대상을 쳐다보는 작가, 주체와 대상이라는 객체가 존재한다. 작가 안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객체에는 작가의 내용을 담아줄만한 그릇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 이들은 형식과 내용으로 나뉘어지는데, 대상은 이미지이며 작가의 생각은 이미지에 담고자 하는 상징, 즉 주제가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제에 해당하는 상징은 드러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대상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하고 대상과 자신의 생각을 잘 용접하고 땜빵하고 연결하며 고리를 만들고 비슷한 것들을 유추해 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작업일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제 이런 훈련을 하자. 어떤 대상이 있다면 그것과 자신의 생각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것, 대상은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너무 강하면 대상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대상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가능하면 처음 대상을 접할때는 자신의 생각을 지우고 대상의 속성으로부터 생각을 만들어가는 것이 좋다. 4.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한 연결연습 어느날 잉크병을 보았다면 그 잉크병으로부터 생각을 시작한다. 대상은 잉크이고 아직 상징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작가는 몇번의 고심 끝에 대상으로부터 말이라는 것을 건져냈다. 이제 잉크병은 말이라는 상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잉크병과 말은 연결되지 않았다 잠정적으로 이미 작가는 사유를 통해서 그 공통점이나 유사점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 설득력을 위해서는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 대상을 관찰할때는 세부적인 것들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잉크병은 검은 잉크로 채워져 있고, 뚜껑이 닫혀 있으며 뚜껑은 돌려야 열린다. 또한 잉크병은 자신의 상표가 붙어있고 단단한 유리병으로 되어 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검은 잉크 때문에 그 바닥조차 검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찰을 통해서 말과 유사점을 찾는 것이다. 자 이제 말과 연결을 시도해보자. 잉크병은 뒤범벅이 된 말들을 가지고 있다. 아직 누군가 날카로운 펜을 넣어주기전까지 잉크병은 할말이 있어도 얼룩투성이 말들을 안쪽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마 우리들도 그럴 것이다. 아직 말이라는 것을 생성하기 전에는 안쪽에 수많은 말들이 잉크의 얼룩처럼 뒤범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능성! 이것은 상상력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잉크병을 흔들어보자. 그럼 잉크병은 자신의 말로 순식간에 안쪽이 검게 얼룩지고 만다. 망설임처럼 뚜껑을 돌리면서 잉크병은 비로소 입을 열고, 가장 날카로운 것들이 제 안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상처일지도 모르고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 인간들은 잉크병처럼 상처나 고통을 통해서 말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누군가 내 머리를 또는 가슴을 툭 쳤을 때, 그 통증과 고통의 소리로 우리는 소리를 지른다. 혹 그것이 말의 시작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잉크병은 말의 시초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사색은 깊어지는 것이며 새로운 화두를 작가에게 던져준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대상에게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속성으로부터 자신의 생각을 더 깊게 또 더 자유롭게 배워가는 것이다. 5.구조론은 연결에서 비롯된다 자 이예를 통해서 우리는 한가지를 알게 되었다. 말이라는 것과 잉크병이라는 것은 서로 잘 연결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어느 무엇이든 이처럼 연결되지 않을 것인가? 연결은 작가의 몫이며 작가는 세상에 널려진 수많은 대상을 연결시켜주는 뚜쟁이의 역할을 수행하는 주술사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잉크병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의미를 빼고 다른 의미를 넣어주는 작업. 그렇게 해서 새로운 상징을 띄게 된 대상은 교묘하게도 연결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구조이다. 이미지는 상징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미지는 드러나는 속성으로 상징을 가리게 되고, 상징은 이미지로 드러날뿐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다른 것으로 환치 또는 바꾸는 것. 그리고 다른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 은유는 이미지만 보일 뿐 그 의미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며, 직유는 이미지와 의미 또는 다른 대상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유는 은유에 더 가깝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메타포, 그것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다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흔히 돌려서 말한다고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미 내 안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고, 돌려서 말하는 것은 내 안에 할말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또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럴때는 언제나 있잖아! 하는 식으로 망설임이 대동되고 이 망설임은 문학에서 긴장감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학은 결코 일상과 멀지 않다. 일상 속의 것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비유의 방식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의 방식이 바로 문학의 구조에 해당한다. 이 비유의 방법을 다양화한 것이 바로 비유법이며 비유는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수사학이다. 이른바 작은 액세서리다. 액세서리 안에는 이미 액세서리를 달고 있는 한 여자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18    낯설게 하기 기법과 데뻬이즈망 기법은 중요하다 / 이사라 댓글:  조회:1030  추천:0  2018-10-27
낯설게 하기 기법과 데뻬이즈망 기법은 중요하다   이사라 (시인, 서울산업대 문창과 교수)     시 창작을 위해서 우리는 현대시를 되도록 많이 읽어야 하는 강독의 단계와 현대시의 이론을 습득하는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연상 작법을 통해 개개인의 상상력을 개발하는 시창작의 기초를 배운 후, 이제 본격적으로 시 창작 연습을 하게 된다.   이미 강조된 바 있지만, 시어와 상상력의 중요성과 더불어 시 창작에 있어서 기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 중 낯설게 하기 기법과 데뻬이즈망 기법은 시 창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1. 낯설게 하기 기법의 중요성   낯설게 하기 기법은 1920년~30년 사이에 러시아 비평계에서 생긴 하나의 비평 그룹이다. 이 명칭은 반대파들이 비난하기 위해 붙여준 것으로, 그들 스스로는 자칭 '형대론적 접근 morphology'이라고 하였다. 미국의 리챠즈I. A. Richards와 랜섬Lansom이 주축이 된 신비평 New Criticism과 전략적인 면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이 비평이 일어나게 된 배경으로 우리는 첫째로 전통적인 학문 분야로서의 문학, 즉 강단 비평에 대한 도전과 둘째로 역사, 사회, 철학에서 벗어난 문학 비평의 독자적인 이론 비평을 개척할 필요성, 그리고 셋째로 사회적 효율성과 도구로서의 문학에 대한 도전으로서 문학의 독자적 영역의 수립 등을 들 수 있다.   러시아 포멀리즘Russia Formalism, 이들이 형성하고 있는 단체를 Opoiaw('시적 언어연구회'의 약자)라고 하는데, 시를 언어적으로 연구하는 그룹으로 두 개의 커다란 그룹으로 나뉠 수 있다. 그 하나가 페테르부르그의 포멀리스트들의 그룹으로, 대표 인물로는 빅터 슈클로브스키Victor Schklovsky, 레오 야쿠빈스키, 보리스 아이텐바움 등이 있다.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 언어그룹으로,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이 대표적 인물이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로브스키에 의해 강조된 개념이다. 그의 초창기 논문 '기교로서의 예술'(1916)에서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가 모든 예술의 주요 과제라고 하였는데, 이 기법은 대상을 낯설게 하여 새로운 경험을 하게하고 그를 통해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자동화된 관습적 인식을 깨뜨리고, 행위의 기계적 습관을 파괴하여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문학의 독특한 장치가 정신의 관습적 태도에 충격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문학은 끊임없이 비일상화하는 낯선 언어들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며, 추상적 사고나 인식의 자동화나 선입견을 파괴하는 것이다. 낯설게하기는 오스트라레니Ostrarenie라고도 하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러시아말을 로마자화한 듯하다. 시와 일상어를 구분하는 척도인 이 기법은 비일상화하는 방법이다.   단락이나 행의 구분, 연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는데, 우리는 생소한 파격적 형식(기호표현)과 내용(기호내용)에 적잖이 당황한다. 무언가 새롭게 사고하도록 만드는 언어의 창조가 돋보인다. 일상 언어, 규범문법의 파괴, 전통적 미적 규범의 파괴에서 낯설게 하기의 본질을 만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낯설게 하기는 소외 기법과 통하고,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모더니즘시의 몽따쥬 기법이다.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시키는 몽따쥬 기법은 일종의 소외 기법이며 그 산물이다. 이는 데뻬이즈망과 개념을 공유한다.   2. 데뻬이즈망 기법의 중요성   데뻬이즈망depaysement은 이미지들의 느닷없는 결합으로 낯설게 하기, 소외 기법, 몽따쥬, 꼴라쥬, 자동기술법, 병치 등 여러 용어에 공통되는 개념이다. 비논리적 이미지의 결합방법인 데뻬이즈망은 본래 환경(혹은 나라, 습관)을 바꾼다는 뜻으로, 사물의 일상적인 장소나 의식적으로 보아 있어야 할 원래의 자리에서 전혀 뜻밖의 다른 장소에 옮겨져 사용함으로써, 경이감, 공포감, 기이함 등을 일으키게 하는 초현실주의 회화의 한 방법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통 데뻬이즈망된 이미지를 폭력적 이미지radical image라고 부르며, 일상적 의미를 넘어서 전연 연관성 없는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는 이미지일 때를 말한다. 기상奇想conceit, 공상空想fancy과도 서로 연결된다. 두 연인 사이를 콤파스 다리에 비유한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 존던Jdhn Donne의 를 예로 들 수 있다.   만일 그들이 둘이라면 그들도 둘이겠네.   마치 뻣뻣한 콤파스의 다리가 두 개이듯이   너의 영혼, 고정된 다리는 움직일 것 같지 않지만   다른 다리가 움직이면 따라서 움직여야 하네.   다리 하나는 중심을 잡아   다른 하나가 방황할 때는   그 곳으로 기울여 주고 뒤따라가야 하네.   또다시 돌아올 때는 똑바로 세워 줘야 하네.   그대로 내게는 그와 같은 존재이네.   나는 콤파스 다리처럼 비스듬히 달리네.   그대의 꿋꿋함이 나로 하여금, 우리의 원을 그리고   내가 출발한 곳에 다시 돌아오도록 해 주네.   이와 같이 자동화된 사고를 거부하고서도 독특한 유추를 획득함으로서 우리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연인과 콤파스라는 두 개의 이미지들이 훌륭하게 결합하게 새로운 충격을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시에서는 이상의 시, 김춘수의 시에서 꼴라쥬, 몽따쥬 기법과 데뻬이즈망의 속성이 드러나는 시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대로 현대시 창작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 기법과 데뻬이즈망 기법은 시의 개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주는 시적 장치가 된다. 자신만이 독창적인 발상을 독창적으로 전개하고 완성하기 위한 최적의 기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사라 |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1년 문학사상 등단.  
17    이미지(Image)의 힘과 이미저리(Imagery)에 관해서 댓글:  조회:2625  추천:0  2018-10-25
이미지(Image)의 힘과 이미저리(Imagery)에 관해서 편집 : 등단문 이미지란 한 마디로 '말로 만들어진 그림'(C.Day Lewis)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에서 운율이 음악성과 관련해 논의 되었다면, 이미지는 대체로 회화성과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웰렉(Rene.Wellek)은 '이미지', '메타퍼', '상징' 등과 같은 용어가 의미론적으로 서로 겹친다는 점을 강조 한 바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심상'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미지는 신체적 지각. 기억. 상상. 환상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되는 것이고, 이미저리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된 이미지군들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흰 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 박목월의 "불국사'에서> 이 시에서 '흰 달빛' '자운문' '달안개' '물소리' 등은 전부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들이 모여 이미저리를 이루고 있다. 여기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이 암시하는 '불국사'라는 핵심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불국사를 통해 시인의 기억과 상상을 볼 수 있다. 기억이나 상상이란 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또한 이미지란 말은 특정 문학 운동의 명칭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말이기도 하다. 1910년 영미의 '이미지즘' 이 그러하며 1930년대 한국 시단에서도 이미지즘을 받아 들인 '주지주의'가 그러하다 할 것이다. 이미지스트 정지용은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언어미술이란 말은 두 말 할것 없이 시라고 할 수 있으며, 주지주의를 지향했던 김기림은 이미지즘의 시를 '조소성' 혹은 '회화성'에서 찾았다. 김기림은 감정을 음악성과 연결시키고(자연발생적인것) 지성을 회화성과 관련지으면서(제작되는 것),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결부시켰다. 1910 년대 영미 이미지즘을 이끈 에즈라 파운드는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 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고 까지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이미지스트란 대상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자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명확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저리(imagery)란 용어는 현대 문학비평에서 가장 일반적이고도 가장 애매한 용어 중 하나이다. 이의 적용 범위는 독자에 의해 경험되는 마음 속의 그림(mental picture)에서 부터 한 편의 시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총체라는 데까지 이르는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이것의 사용 범위를 보여주는 저서의 하나가 바로 루이스(C.D. Lewus)의 (Poetic Image)이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미저리란 낱말들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그림이며, 한 편의 시는 이미지들의 복합체로 구성된, 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다음 세 가지 용법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이미저리는 시를 추상화하는 게 아니라 구체화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첫째, 이미저리란 시나 그밖의 문학작품 안에서 축어적 묘사나 인유 혹은 은유에 사용되는 유사물들(보조관념들인 매체)로 언급된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물이나 속성들을 의미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말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보자 . 워즈워드의 에서 이 넓은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는 시가 언급하고 있는 축어적 대상들('길', '처녀', '무덤')뿐만 아니라 은유로 사용될 '오랑캐꽃'과 '돌', 그리고 둘째 연에서 직유로 사용된 '별'과 하늘 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 그녀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인적 없는 곳에 그녀는 살았다. 다브 강 샘솟는 곳 옆에 찬미할 이 하나 없고 사랑해 줄 이 없는 한 처녀. 사람들 눈에서 반쯤 가리어진 이끼 낀 바위 가의 한 송이 제비꽃! 하늘에 홀로 빛날 때의 별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아는 이 없이 살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루시가 언제 죽었는지를 하지만 그녀가 묻히자, 아, 온 세상 얼마나 달라졌는지! She dwelt among the untrodden ways Beside the springs of Dove, A Maid whom there were none to praise And very few to love; A violet by a mossy stone Half hidden from the eye! Fair as a star, when only one Is shining in the sky. She lived unknown, few could know When Lucy ceased to be; But she is in her grave, and, oh, The difference to me! 그러나 이미저리가 언급된 대상의 시각적 재생산만을 의미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같은 시구절을 가지고도 어떤 독자들은 시각적 이미지를 경험하는 데 비하여 다른 독자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경험하는 독자들이라 해도 그 이미지의 명확성과 세부적인 것에 있어서는 서로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저리는 시각적 속성뿐만 아니라 청각적(소리), 촉각적(촉감), 온도지각적(뜨거움과 차가움), 후각적(냄새), 미각적(맛), 기관감각적(맥박), 근육운동지각적(동작감각), 속성들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데 테니슨은 그의 시 (In Memotiam)의 101번에서 시각적 속성뿐만 아니라 후각적 청각적 속성들도 언급하면서 아울러 '여름의'라는 형용사로 온도 지각적 속성인 따뜻함도 암시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사랑받지 못해, 저 너도 밤나무는 갈색으로 변해가리...... 그리고 무수한 장미빛 카네이션들은 여름의 향기로 잉잉거리는 대기를 살찌우리...... (Unloved, that beech will gather brown...... And many a rose-carnation feed With summer spice the humming air......) 둘째, 좀더 좁은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란, 코울리지의 (An-cient Mariner)에서 보는 바 처럼,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들의 묘사만을, 특히 생생하고 특수화된 묘사만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 다음의 예가 그렇다. 바위가 눈부셨고, 그 바위 위에 서 있는 예배당도 그에 못지 않았네. 달빛은 멈춰 있는 바람개비를 고요로 적시고 있었네. (The rock shone bright, the kirk no less That stands above the rock: The moonlight steeped in silentness The steady weathercock.) 세째,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미저리란, 비유적 언어, 특히 은유나 직유의 보조관념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의 문학비평, 특히 신비평에서는 이 세번째의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를 시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그리고 시의 의미, 구조, 효과들을 평가하는 주요한 단서로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스머어젼(Caroline Sourgeon)은 에서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이 유형의 이미저리의 수를 통계적으로 계산하여, 그 결과를 셰익스피어의 개인적 경험과 관심 및 기질을 알아내는 단서로 사용하였다. 그 이전의 몇몇 비평가들을 따라서 그녀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는 이미지군(image sluster : 반복되는 은유와 직유의 무리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또한 그박의 많은 그의 작품들이 독특한 이미지 모티프들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즉 에서의 동물 이미지들, 에 나오는 질병과 타락과 죽음의 비유 등의 경우가 그렇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요소들이 한 작품의 전체적인 어조를 만들어 낻나고 보았다. 그후 많은 비평가들이 문학 작품 속에서의 이미지나 그 반복적 형태, 주제적 이미저리 등을 찾아내기 위하여 스퍼어젼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왔다. 어떤 비평가들은 명백한 진술이나 등장인물들의 ㅣ공개적인 대화와 행동보다도 오히려 함축적인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이 여러 극작품들과 시 그리고 소설들의 기본적 주제 혹은 주제를 찾아내는 데 더 관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예로는 에서의 나이트(G. Wilson Knight)와 브룩스의 론과, 헤일먼(Robert B.Heilma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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