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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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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댓글:  조회:1309  추천:0  2019-03-12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 ‘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34    제7강 글쓰기의 양화 댓글:  조회:1205  추천:0  2019-03-12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33    제6강 탈기관체 Ⅱ 댓글:  조회:1067  추천:0  2019-03-12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닌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 ‘현실적인 것(l'actuel)’은 개체들과 성질들(“S is P”!), 그리고 사회적 분절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현실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적인 것을 찾는다. 만일 존재론의 핵심이 현실의 가능근거를 찾아 그 근거로부터 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면, 이들의 사유는 ‘잠재성의 사유’ 또는 ‘잠재적인 것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잠재성은 곧 특이성들과 강도들 ― “전개체적-비인칭적 특이성들과 비외연적인 강도들” ― 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의 4장과 5장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의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기관들의 분절체계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은 현실적 분절체계가 아닌 다른 분절체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분절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은 하나의 극한이며, 현실성 없는 추상적 꿈으로 그친다. 때문에 현실의 분절체계가 억압을 가져오는 한에서 새로운 삶에로의 운동은 항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탈기관체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 탈기관체는 기관들에가 아니라 유기체라 불리는 이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여기에서 모든 형태의 분절체계들을 보듬고 있는, 즉 그 위에서 이런/저런 분절체계가 성립하는(더 정확히 말해, 그것“이” 이런/저런 분절체계들로 분절되는) 바탕을 생각하게 되며, 이 바탕은 현실적인 것 아래의 잠재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탈기관체는 잠재성 차원을 개념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강도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공간이 아니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산출된 강도들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강도적인(intense), 형식화되지 않은, 층화되지 않은, 강도-높은(intensive) 모체[코라], 강도=0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기체의 외연(外延)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층들의 형성 이전의 알[卵]”이다. * 여기에서 0[零]은 비움, 소멸의 의미로서의 제로가 아니라 차라리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서의 0, 즉 출발점으로서의 0이다. 바로 뒤에 나오듯이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수한 양태들로 표현되는 출발점 ― “미분화된”이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출발점이 아니라 특정한 양태가 아니라 모든 양태들을 포용하고 있는 출발점 ― 이라는 점에서 강도=0이다.  * 이 때의 알=卵은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실제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잠재성, 탈기관체의 탁월한 예가 수정란이라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물론’은 편협한 유물론이 아니라 차라리 氣 일원론인 것이다. 그러나 氣에 무수한 종류들이 있듯이, 탈기관체에도 무수한 종류들이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추상적 일원론으로 귀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존재의 일의성’ 문제) 탈기관체가 ‘극한’으로 이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기계적 배치가 코드에 의해 영토화되어 있는 현실성 아래에서 잠재성을 들여다보며, 그 충만한 氣로 배치를 탈영토화해 나간다. 그래서 탈기관체는 ‘욕망의 내재장(內在場)’이며 “욕망에 고유한 혼효면”이다. 탈기관체는 어떤 정해진 무엇이 아니다. ‘탈(脫)’의 운동을 통해서 혼효면 쪽으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더 고착화되어 층화의 [수많은 층위들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한다. 층화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신의 심판/판단에 굴복하는 것이며, 혼효면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실험’으로 열린 길을 걷게 된다.  
32    제5강 탈기관체 I 댓글:  조회:1125  추천:0  2019-03-12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 ‘절편성’이다. 분절화는 잘라-붙임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책의 외부성에 대한 논의를 계기로 배치/다양체 개념을 잠정적으로나마 규정해 보았다. 다양체는 앞으로도 보다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배치는 극히 상식적인 무엇이다. 야구경기, 전시, 전쟁, 강의, 결혼식, 선거, 식사, 시위, … 이 모든 것, 바로 우리가 삶에서 영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배치이다.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보다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예컨대 ‘되기’ 개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이끌어내기, 이것이 『천의 고원』의 목적이다.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와 혼효면(plan de consistance) ― 이제 논의의 물꼬를 돌려 보자. 지금까지 배치가 무엇인지 논했다. 이제 배치가 변해 가는 방향, 즉 영토화/탈영토화, 코드화/탈코드화, 층화/탈층화의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가? 라는 가치론적 논의를 언급할 때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뒤로 미루고, 지금은 가장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지평에서 논하자. 이 경우 탈기관체 개념과 혼효면 개념이 핵심적이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 ― 방향성 ― 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 층들과 탈기관체의 구분을 비롯해 『천의 고원』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원적 구분을 기존의 이분법 ― 대립(opposition) ― 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이다. 예컨대 다음을 참조. “예를 들어 『천의 고원』이라 해도 형식적으로 보면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이항대립을 사용합니다. 유목성과 정주성, 무리와 군중, 분자적과 몰적, 마이너리트와 머조리티,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평활(平滑)공간과 조리(條理)공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 제각각 한쪽 편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철학을 전도하는 것은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속적인 것이 이항대립 내의 근저에 놓여지는 형태로 다른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362쪽)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분은 ‘이분법’이나 ‘대립’이 아니다. 즉 ‘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차이와 반복』에서 논의된 ‘유기적 재현’의 구도), 하나=전체의 양분으로서의 대립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이며, 예컨대 하나의 배치는 그것보다 더 유목적인 것에 비해서 더 정주적인 것이고 더 정주적인 것에 비해서는 유목적이다. 가라타니가 들뢰즈/가타리의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런 사고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구절은 이미 헤겔-맑스의 관계를 놓고서 알튀세 시대에 논의된 내용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미 이 단계를 훨씬 넘어 그 후에 등장한 구조주의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담론사의 시계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즉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즉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그래서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는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는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 (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corps sans organes’ 개념을 가져왔다. 1947년 11월 28일 아르토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했다. 신의 심판은 신의 판단이다. 예컨대 신은 “허파는 방광 위에 있다”고 판단/심판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몸에서 허파는 방광 위에 있게 되었다. 神/造物主는 세계의 ‘소당연(所當然)’의 근거이다. 그래서 현실의 소당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심판/판단을 끝장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기관체의 추구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는가?”라는 인식적 맥락보다는 세계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분절체계, 부분들=기관들의 분절체계에 대한 전쟁의 선포이다.  대학은 기관들의 유기적 집합체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선 ‘인문대학’, ‘자연대학’, … 등을 선택해야 하고, ‘물리학과’, ‘생물학과’, …를 선택해야 하고, 다시 ‘광학 전공’, ‘역학 전공’, … 등을 선택해야 한다. 허파냐 심장, 비장, …이냐, 오른쪽 허파냐 왼쪽 허파냐, 어느 허파꽈리냐, … 프락탈 구조처럼 끝없이 기관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더 세분화된 기관들에까지 이어진다. 세상은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체이고, 우리는 늘 그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름’을 할당받아야 한다. 어디에 가나 기관들이 포진해 있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강압적으로 선택 당한다.(“너는 법과대학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해!”) 사실상 우리는 이미 자연에 의해 선택 당해서 이 세계에 ‘인간’이라는 이 종(種)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원숭이, 호랑이, 족제비, …도 아니고, 새나 물고기도 아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이것은 ‘신의 심판’이다. 그래서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것은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 즉 주어진 존재방식, 주어진 존재형식들에 저항하는 것, 새로운 존재방식, 존재형식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인식적 맥락에서 “세계는 왜 꼭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으로, “~인가?”에서 “~이 될 수 있는가?”로 전환된다. 존재론은 저항의 담론, 투쟁의 담론이 된다.  
31    제4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Ⅱ 댓글:  조회:1146  추천:0  2019-03-12
인용된 구절 ―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 에서 알 수 있듯이,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과 ‘추상기계’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 ― 분절선들과 절편선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일탈해 가는 탈주선들 ― 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은 배치 개념의 핵심을 담고 있다. 배치라는 개념이 비교적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개념이라면, 다양체 개념은 길고 복잡한 의미맥락을 가진 난해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길다”고 한 것은 이 개념이 가우스-리만-베르그송-구조주의 등을 거치면서 제련(製鍊)된 개념임을 뜻하며, “복잡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자연철학적-윤리학/정치학적-미학적…인 여러 맥락을 동시에 압축하고 있는 개념임을 뜻한다. 일단 현재의 맥락에서만 잠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여럿은 주로 어떤 주체/주어에 귀속된다. “be attributed to”라는 표현은 최소한 세 가지를 의미한다. 1) 서술. 언어적 측면에서 술어는 주어에 서술된다.(attribute=predicate) 2) 귀속. “맛있다”가 ‘자장면’에 붙을 때(서술될 때), “맛있다”라는 성질은 ‘자장면’이라는 실체에 귀속된다(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했듯이 “부대한다”). 3) 표현. 귀속된/서술된 것은 귀속/서술의 대상을 표현한다. “맛있다”는 ‘자장면’을 표현한다. 여럿은 이런 식의 용법으로, 즉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되어 이해될 때 수적 복수성, 외적 복수성, 현실적 복수성의 역할을 맡는다. “그 날 온 사람들은 열명이다.” 열명이라는 복수성은 사람들이라는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된 양적인 여럿이자,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수성이다. 이렇게 여럿=다자는 귀속됨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이해된다.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다자”, 즉 일자의 쌍으로서의 다자(일자의 나눔을 통해 형성되고, 다시 합해짐으로써 일자에로 歸一하는 그런 다자)가 아니라 순수 다자=여럿으로서의 여럿, 그리고 “~은 여럿이다”에서처럼 무엇인가에 귀속되는 여럿이 아니라 “여럿은 ~이다/한다”에서처럼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것은 ‘무엇’, 어떤 “것”, 어떤 실체, 주체, 주어이다. 그렇다면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어떤 집합체를 뜻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집합은, 그것의 요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의” 집합이며 여럿이 아니라 통일된 하나이다. 여럿이 완전히 봉합될 때, 하나의 통일성, 동일성을 가진 무엇일 때 그것은 여럿이 아니다. 여럿은 어떤 형태로든 불연속, 열림, (그리고 질적 측면들을 감안할 때) 이질성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이라 한 것은 어떤 하나(개체이든 집합체이든)가 아닌 진정한 여럿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주어로서, 어떤 ‘실체’ ― 기존의 실체 개념과는 판이한 어떤 실체 ― 로서,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실사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전통적인 실체 개념으로 포착되기 힘든 어떤 것, 주어의 역할을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여럿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배치와 다양체가 바로 그것이다. 배치와 다양체의 이 성격을 간파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천의 고원』의 문을 열게 된다. *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은 기계들이다. 또 예술의 기법, ‘사조’, 구성방식, 전시의 관례… 등은 코드들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 기법… 등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이 말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술’은 이 모든 것의 집합인가?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이란 바로 하나의 배치이다. 예술가, 예술작품, …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 그것은 바로 배치인 것이다.  
30    제3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I 댓글:  조회:1188  추천:0  2019-03-12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될 때, 즉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코드화) 존재할 때 ‘영토성’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됨으로써, 즉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언표적 배치와 기계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한다. 그러나 여전히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으며,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고 해야 한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영토화도 탈영토화의 흐름을 단절시킬 수는 없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 * 탈코드화 ― 영토화는 코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계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한 어떤 코드가 작동할 때 기계들은 일정한 영토화를 겪게 된다. 예컨대 도시의 ‘플랜’이라는 코드화가 작동하면 도시를 구성하는 기계들은 그 코드에 맞추어 영토화된다. 그러나 기계들의 본질은 욕망이기에(‘기계적 배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이다), 애초에 영토화는 탈영토화로 흐르는 욕망 위에 불안하게 형성되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교통질서라는 코드가 비현실적으로 무리하게 작동할 때 영토성은 와해되고 갖가지 탈영토화 행태들이 등장하게 되며, 기계적 배치를 누를 힘을 상실한 코드는 탈코드화할 수밖에 없다. 법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뜻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에서 기계적 배치와 (탈)영토성이 일차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관계를 장기와 바둑의 비교를 통해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개념 규정들을 토대로 배치와 다양체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간다. 배치(agencement) ― 사물들=‘기계들’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를 형성하며, 서로 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배치(配置)’(또는 다양체, 또는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단일한 하나의 ‘기계’)도 아니며, 또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의 영토성)과 언표들(의 코드)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 층화의 방향과 탈층화의 방향을 오가는 ―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그렇다고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기, 듣기, 사유하기, 대화하기, … 등의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강의’라는 이 배치는 다른 시간에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또 장소를 바꾸어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또 다른 기계들 및 코드들을 통해서 반복되기도 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그리고 경기 규칙들을 비롯한 여러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야구 경기’라는 배치는 우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에 반복되기도 하고, 같은 시간의 다른 장소들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기계들과 코드들을 바꾸어 가면서 반복되기도 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그럼에도 강의, 야구 경기, … 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바로 이것들이 ‘배치’이다.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들을 그러나 전혀 새로운 눈길로, 참신한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의미이고 사유의 기쁨이 아닌가. 사유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 디아그람(diagramme) ―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디아그람’이라 부른다. 이 디아그람은 이질적인 두 배치를 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이어주고 있는 제 3의 차원이다. 여기에서 복잡하다 함은 그것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배치와 배치 사이의 관계, 더구나 (성격을 달리 하는) 기계 차원과 언표 차원의 관계임을 뜻하며, 역동적이라 함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하고 또 (존속하다가) 반복되는 존재임을 뜻한다(야구 경기가 열릴 때 디아그람이 작동하다가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며, 경기가 열릴 때면 다시 나타나 반복된다. 그리고 새롭게 변해 갈 수도 있다 ― 예컨대 야구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규칙이 바뀌기도 한다). 때문에 이 말을 ‘도표’나 영어식 발음인 ‘다이어그램’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치 못한, 아니 차라리 정반대 의미로의 번역이다. 디아-그람은 프로-그람과 대조된다. ‘pro’의 목적론적 뉘앙스와 ‘dia’의 생성론적 뉘앙스를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개념, 그리고 디아그람 개념은 푸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를 디아그람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기계적 배치는 ‘비담론적[신체적] 실천’이고 언표적 배치는 ‘담론적 실천’이다. 푸코는 병원, 수용소, 법원, 감옥, …을 비롯한 기계적 배치들과 정신병리학, 정신의학, 형법학, 범죄학…을 비롯한 언표적 배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디아그람들을 그 다원성과 역사성에 입각해 빼어나게 분석해 주었다.  
29    제2강 텍스트와 층화 Ⅱ 댓글:  조회:1083  추천:0  2019-03-12
제2강 텍스트와 층화 Ⅱ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책을 한 사람의 주체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물질들의 이런 노동, 그것들의 관계들이 띠는 외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질학적 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선한 신을 꾸며내었듯이 말이다.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에도 분절화(分節化)의 선들과 절편성(切片性)의 선들, 층(層)들, 영토성(領土性)들이 있다. 그리고 또한 탈주선(脫走線)들과 탈영토화(脫領土化) • 탈층화(脫層化)의 운동들이 있다.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글쓰기의 새로운 윤리에 대면하고 있다: 책의 내부성을 극복하라. 현대적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이 과제를 우리는 들뢰즈와 데리다에게서 공히 발견할 수 있다.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 텍스트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영혼 앞에 현존하는 의미, 진리의 담지자, 저자의 영혼이 외화(外化)된 표지, 영혼의 시뮬라크르로서의 책, 데리다는 책의 이런 개념의 외부에서 “담론적인 것이 비담론적인 것에 연계되고, 언어적 ‘기층(基層)’이 […] 전언어적 ‘기층’과 서로 섞이는” 짜기(texere)의 차원, 텍스트의 차원을 발견해낸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저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마치 복잡한 지질학적 운동의 저자=창조주로서 선량한 신=조물주를 상정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이 때 모든 것은 ‘신의 심판’, ‘신의 판단’이 된다) 책은 저자의 영혼이 외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외부성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외부성들로서 “분절화의 선들과 절편성의 선들, 층들, 영토성들”, 그리고 “탈주선들과 탈영토화 • 탈층화의 운동들”을 언급한다. 책은 구조의 측면에서 여러 선들, 층들, 영토(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의 측면에서 탈주선, 탈영토화, 탈층화의 운동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책 개념을 논하는 서론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의 주요 개념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 우선 이 개념들을 정리해 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e)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articulation’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層化=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年齡層)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다질적(多質的)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은 ‘탈기관(脫器管)’ 상태를 향하게 되고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 氣의 흐름이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脫層化)’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 ‘기계(機械)’는 일상어에서의 기계 ‘메카닉’과 구분된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물체’에 해당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이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  
28    제1강 텍스트와 층화 I 댓글:  조회:1157  추천:0  2019-03-12
  들뢰즈 & 가타리   『천의 고원』은 개념적 꼴라주이다. 상이한 담론공간에서 형성된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개념들이 모여들어 장대하고 현란한 지적 꼴라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꼴라주 안에서 각 개념들은 본래의 의미에서 ‘탈영토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개념들과 ‘접속’됨으로써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개념들은 일방향적으로 즉 연역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서 비추어 주고 있으며, 하나의 개념 안에는 다른 모든 개념들이 접혀 있다. 각 개념들은 각 ‘관점’에 따라 일정 부분을 밝게 비추어 주지만, 다른 부분들은 숨긴다. 각 개념들은 『천의 고원』 전체를 ‘표현’한다. 개념들은 서로를 입체적으로 참조하며, 따라서 각 개념들의 의미는 책을 전부 읽었을 때에만 온전히 드러난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순환논리 앞에 서 있게 된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없다. 전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기에. 카프카의 저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은 재독(再讀)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독, 삼독, …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미증유의 새로운 사유 지평이 눈앞에서 활짝 열림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계는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생성되어 가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것, 고착화된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서론’에 해당하며, 서론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서론 역시 (『천의 고원』 자체를 포함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리좀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존의 책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리좀-책 개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리좀’ 개념의 포괄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책은 리좀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로서 작동하고 있다.  리좀의 일차적인 의미가 생성하는 관계, 차이 자체의 생성에 있다면, 그러한 사유를 통해 (고중세적 본질주의를 포함해) 근대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는데 있다면, 리좀을 이야기하는 주체들, 『천의 고원』의 주체들=저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떠올린다면, 저자들이 자기 언급적 논의로부터, 저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주체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논의는 ‘저자의 죽음’, 그러나 사실상 복수적 저자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둘이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각이 여럿이었기에, 그것에는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의 이름들을 남겨놓았는가? 관례상, 그저 관례상으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을, 또는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각할 수 없도록. […]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하지 않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자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의 한 측면이다. 주체의 죽음은 존재론/인식론의 맥락 이전에 윤리학적 맥락에서 등장했다. ‘선험적 주체’(칸트) 개념은 세계를, 적어도 현상세계를 인간(의 의식)의 종합 및 구성을 기다리는 대상으로, 더 정확하게는 인식질료로 만들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런 식의 정립에 입각해 유럽적 주체는 비유럽 지역들을 그 눈길 아래에서 대상화/객체화했다. 그래서 선험적 주체의 죽음은 유럽 제국주의라는 주체의 죽음이다.(따라서 탈주체주의 사유가 처음으로 사상사적 의미를 획득했던 것이 바로 인류학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남성 주체는 여성 주체를, 성인 주체는 아동 주체를, …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주체에게서 지배와 정복이 생겨난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주체의 죽음은 근대적/선험적 주체와 그 결과들에 대한 반성을 실마리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주체의 죽음은 주-객 분리와 ‘主體(Sujet)’=‘人間(Homme)’의 지배라는 근대 철학의 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저자-임은 주체-임의 한 방식이고, 그래서 주체의 죽음은 저자의 죽음도 함축한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변형을 뜻한다. 큰 주체의 죽음은 동시에 작은 주체들의 탄생이기도 하다. 저자의 죽음은 복수-저자들의 탄생이다. “나”로부터의 탈주. “나”라고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경지로의 탈주. “나”로부터의 탈주는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에서 사유하기, 즉 의식적/인칭적 주체로 마름질되기 이전의 비인칭적 개체화들, 나아가 현실적 개체로 고착화되기 이전의 비개체적 특이성들의 장에서 사유하기이다. “비인칭적 개체화들,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세계, 이 세계는 누군가(ON)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일상적 진부함의 세계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디오뉘소스의 마지막 얼굴이자 또한 재현/표상에서 탈주하고 시뮬라크르들을 도래시키는 심층(深層)과 층-허(層-虛)의 참된 본성이기도 한 조우(遭遇)들과 공명(共鳴)들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곧 ‘만인(萬人)-되기’의 세계이다. 『천의 고원』에서 우리는 개념들의 꼴라주를 가로지르며 만인이 되고, 또 조우들=만남들과 공명들=함께-울림들을 만끽한다. 모든 이들의 ‘책’이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27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댓글:  조회:911  추천:0  2019-03-12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들뢰즈는 푸코, 데리다와 더불어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들뢰즈는 철학사에 대한 방대하고도 독창적인 독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 틀을 만들어나갔다.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사 이해와는 상반되는 독해를 내놓음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에 대한 니체와 베르그송, 현상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구조주의와 푸코 등,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사 독해를 통해서 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실은 『차이와 반복』(1968)과 『의미의 논리』(1969)에 나타나 있다. 1969년 전투적인 정신의학자이자 정치적 투사이기도 한 펠렉스 가타리와 만나 들뢰즈는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이른바 ‘욕망의 형이상학’이라 불리는 활기찬 사유를 『안티오이디푸스』(1972)에서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에는 그 속편이라고 할 『천의 고원』에서 이른바 ‘노마디즘’이라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제시했다. 들뢰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여러 뛰어난 연구들을 남기기도 했다. 본질철학과 주체철학의 극복: 리좀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상은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펼쳐져 있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시키는 것,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여러 존재들이 복잡하게 접속되면서, ‘그리고’를 만들어가면서 외적으로 부과되는 억압적 코드들로부터 탈주하는 장(場)이다. 들뢰즈는 책 자체도 이런 리좀적 성격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곧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이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기초 개념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우 독창적인 개념들을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사유를 만들어나갔다. 이 개념들은 매우 난해하며, 때문에 꼼꼼한 이해를 요한다. 이제 개념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이들의 세계를 알아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é)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분절화는 잘라(分)-붙임(節)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잘라-붙임이기에 분절은 늘 이중분절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homogène)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이 따로 구분되어 존재하게 될 때 ‘층화(層化=stratification)’가 성립한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그러나 경계선들이 무너지고 다질적(多質的=hétérogène)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사물들은 ‘탈기관체(脫器管體)’를 향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혼화면(混和面)’에 존재하게 된다. 층들이 혼효면을 향해 해체되기 시작하면 ‘탈층화(脫層化=déstratification)’가 이루어진다.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되고,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 기능할 때 ‘영토성(territorialité)’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되고, 동시에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가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한다.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다.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déterritorialisation)’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영토화는 다시 탈영토화에 의해 누수된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différentiation)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이 들뢰즈가 생각하는 세계인 것이다. 기계(machine) ― ‘기계(機械)’는 ‘메카닉(mécanique)’과 구분된다. 메카닉은 일상어에서의 기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sôma’에 해당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가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그러나 매우 복잡하게 큰 기계가 배치/다양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배치와 다양체 배치(agencement) ― 사물들 ―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에서의 ‘기계들’ ― 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일정한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기계’)도,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과 언표들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고 듣고 사유하고, ... 하는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리고 뒤에 다시 반복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경기규칙들 등을 비롯한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반복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 가 ‘배치’이다. 배치 개념은 맥락에 따라 ‘다양체(多樣體)’로 부를 수도 있다. 다양체(multiplicité) ― 배치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수학적-자연과학적인 보다 복잡한 맥락을 함축한다.(뒤에서 다시 설명된다) 다양체는 개체도,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도, 유기적 전체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다양체는 질적으로 상이한 존재들이 접속, 일탈, 통합, 분지(分枝), ...를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하는 장(場)이다. 다양체는 항구적 존재도 일시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되기도 하지만 늘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때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예컨대 ‘야구 경기’라는 다양체). 전통 존재론(개체들, 유기적 전체, 추상적 존재들, ...)으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 그러나 우리 삶의 도처에서 얼마든지 발견되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존재론, 그것이 ‘다양체’의 존재론이다. 프랑스어 ‘multiplicité’는 ‘복수성(multiplicity)’과 ‘다양체(manifold)’로 분화시켜 번역할 수 있다.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이는 곧 탈기관체(body without organs) 개념의 도입과 맞물린다. 다음 구절이 탈기관체 개념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 말할 때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 말할 때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존재의 일의성 들뢰즈의 이러한 사유는 보다 깊은 곳에서는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는 들뢰즈 사유의 핵심인 차이의 존재론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차이 자체’에 대한 파악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들뢰즈는 여기에서 ‘재현의 사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존재의 일의성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의적] 존재는 오로지 차이에 속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로부터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재와 존재자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론의 기본 문제들 중 하나이다. 이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세 가지의 핵심 개념이 제시되었다: 다의성, 일의성, 유비. 들뢰즈의 논의는 이 중세철학의 개념들에 뿌리 두고 있다. 존재의 다의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를 통해 확립되었다: “존재는 여러 가지로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언표는 존재론적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 “존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언표가 개의 존재방식, 물의 존재방식, 神의 존재방식, ...이 다 다르다는 평범한 관찰 결과를 언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언표는 최상위 유들의 불연속성, 통약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 불연속성은 곧 범주들의 존재방식을 뜻한다. 존재는 하나의 이름으로 말해지지만, 그 이름은 그것이 결코 하나로 용해시킬 수 없는 다의성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들뢰즈는 범주의 사유, 즉 유와 종의 사유가 곧 동일성의 사유임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사물들은 그들의 공통점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낸다. 달리 말해 차이는 동일성에 종속된다. 즉 하나의 유가 유지됨으로써만 종차(種差)를 통해 대립하는 술어들이 그 유를 잔여(殘餘) 없이 나누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큰 장르, 즉 최상위 유들이 곧 범주들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범주들은 ‘존재’의 하위 개념들로서 포섭되는가. 아니다. 이들은 통약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가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범주들은 전적으로 불연속을 형성할 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의 개념을 통해서 이들 사이에 보다 높은 연계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는 다의성과 일의성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부활한다. 중세 시대에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는 난항을 겪는다. 신은 ‘존재’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전자와 같이 일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신의 위상에 관련해 거대한 추문이 발생한다. 반면 후자처럼 다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우주의 통일성은 무너진다. 아퀴나스의 해결책은 두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봉합한다. 존재는 다의적이지만 통약 가능하다. 즉 존재는 유비적이다. 들뢰즈는 유비의 사유가 한편으로 존재를 공통의 유로 놓지 못하고(즉 존재의 보편성을 단지 의사 동일성으로만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엇이 개체들의 개별성을 구성하는지를 말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자는 초월철학에 대한 비판이고, 후자는 일반적/추상적 사유의 비판이다. 그래서 유비의 사유는 진정한 보편도 또 진정한 개별성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유사성의 그물 안에서의 일반성이 아니라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개별화하는 차이들의 놀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일의성의 입장이 이런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일의성의 테마는 둔스 스코투스와 더불어 서구 철학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존재는 그것이 존재인 한에서 일의적이다. 즉 존재는 형이상학적으로 일의적이다. 달리 말해, ‘존재’라는 말에 관련해 제시된 의미들 사이에는 어떤 범주적 차이도 없다. 존재는 그것이 말해지는 모든 것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에 있어 말해지는 것이다. 범주의 차이, 종과 유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순수한 존재론, 즉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이런 존재론을 스피노자와 니체에게서도 발견한다. 존재자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존재가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유비적 사유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외부적 시선읕 통해서, 즉 범주들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일의적 사유에서의 차이는 각 존재들 내부에서 즉 역능(potentia=puissance)에 의해서, 강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능의 정도들로서의 차이이며, 유와 종의 위계(이런 위계는 ‘포르퓌리오스의 나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에 입각한 차이(즉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일의적인 존재의 표현들이며, 그들의 차이는 역능의 정도에서의 차이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도 동일성은 남아 있다. 실체의 동일성이 그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의 동일성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순수하게 양태적인 우주, 또는 차생적인(différentiel) 우주일 것이다. 이것은 곧 표면의 사유, 사건의 사유이다.1) 그러나 존재가 완벽하게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개별자들은 역능의 상이한 표현이 되며, 사물들에 대한 파악은 질적 본질(존재의 유비)에서 양화 가능한 역능(존재의 일의성)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곧 한 사물의 ‘임(esse)’에서 ‘할 수 있음(posse)’에로의 옮겨감을 말하며, 이로부터 여러 실천철학적 함의들이 전개된다.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로부터 들뢰즈가 ‘일자’의 철학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바디우는 들뢰즈의 사유는 일자의 사유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자의 바다의 물방울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바디우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을 바로 들뢰즈의 사유가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univocitas’에서의 ‘uni’를 차이들을 보듬는 일자로 보는 한에서이다. 이것은 들뢰즈 사유에 대한 근본적인 오독을 함축한다. 이런 유의 일자의 철학은 오히려 존재의 다의성을 함축한다. 일자와 다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일자의 철학과 일의성의 철학을 혼동하고 있다. 일의성의 철학은 오히려 일자를 제거하는 것, ‘n - 1’로 만드는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사유를 일자의 사유로 보는 것은 들뢰즈에게서 일의성과 차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적 동일성마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그리고’밖에는 없다. 즉 남는 것은 “존재, 일자, 또는 전체로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의 바깥에서의” 관계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런 관계들의 ‘배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역능은 배치 안에서 구체성을 획득하며, 때문에 철학사 연구에서 얻어낸 역능 개념과 역사 연구에서 얻어낸 배치 개념이 하나로 융합되며 들뢰즈(와 가타리) 사유의 원숙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체는 외적 多도, 라이프니츠-베르그송적 연속성을 함축하는 일즉다(一卽多)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고’로 이어진 사물들의 ‘패치워크’이다.(‘그리고’는 단순한 외적 접속 이상의 접속의 경우들까지 포괄한다) 더구나 이 다양체는 영토화/탈영토화 운동을 통해 변해간다. 이 다양체는 곧 ‘배치’이다. 그리고 무한한 다양체들/배치들의 그 어디에도 굵직한 선들은 그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똑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 같으면 다 같고 다르면 다 다르다. 이것이 존재의 일의성의 의미이다. 들뢰즈와 현대 철학 들뢰즈가 남긴 사유의 진동은 거대한 것이어서, 오늘날의 철학은 들뢰즈 사유의 자장(磁場)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전반을 내내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의 사유는 우선 철학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동안 타성에 빠졌던 철학을 새로운 활력 있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기반한 그의 사유는 새로운 형태의 유물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철학사에 대한 계속적인 새로운 독해와 정교한 유물론의 전개가 이어질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남긴 ‘노마디즘’의 사유는 오늘날 네그리와 하트의 유명한 저작인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현대의 핵심적인 정치철학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노마디즘과 꼬뮤니즘의 관계를 규명해 나가면서 21세기의 실천철학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특히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들뢰즈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인물들도 있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맞서 수학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나, 들뢰즈가 강하게 논박한 인물인 헤겔과 라캉을 기반으로 반(反)들뢰즈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지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의 대결이 오늘날 철학적 사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출처 : 배드민턴과 일상 | 글쓴이 : 겨울나그네 | 원글보기
26    들뢰즈의 타자 이론 김 지 영<부산대> 댓글:  조회:767  추천:0  2019-03-12
들뢰즈의 타자 이론   김 지 영 Ⅰ. 서구의 형이상학에서 타자의 문제는 데카르트(R. Descartes)에 의해 확립된 의식 철학의 한계를 폭로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주관화하여버린 의식 철학의 대안을 강구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코기토(Cogito)가 중심이 된 의식 철학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의 문제를 철학의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결코 회의할 수 없는, 생각하는 나의 의식이 인식의 정초로서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고, 나의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는 인식의 대상이 되었다. 의식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의 대립은 실상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으로서 객체의 대립이며, 인식을 넘어선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I. Kant)에 의하면 인간은 오성의 선험적 범주에 따라 종합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식할 뿐이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후설(E. Husserl)은 순수의식 밖의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의식은 지향적 의식이라는 노에시스-노에마(Noesis-Noema) 구도로 주체와 객체의 합일을 입증하지만, 그 구도에서 객체는 절대적 존재인 의식에 대해 상대적일 뿐이다. 타자의 문제는 이러한 구도 즉, 객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주체의 의식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구도를 파열하면서 등장하였다. 주체의 인식의 대상이 아닌 타자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주체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타자를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근대 철학에서 객체가 주체의 인식의 대상으로 환원됨으로써 주관화되었다면, 탈근대 철학의 타자 의제는 주체로 환원되지 않고 동화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탐구한다. 한편 주체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사유하는 일은 근대 역사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었던 타자들의 위치를 복원하는 일과 밀접하게 엮여있다. 서구 백인 남성이 인간을 대표하는 인간중심주의의 근대 담론에서 여성, 원주민, 광인, 동성애자, 소수 민족 등으로 나타났던 타자의 공간을 찾아주는 일은 이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의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주체의 정체성의 일부로 포섭한 근대 담론에서 진정한 타자의 위치는 찾을 수 없다. 근대 담론이 인정하는 타자의 위치는 주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배경과 배제의 위치이거나, 혹은 주체에 포섭되어 주체의 증식을 이루는 동화의 위치이다. 그리하여 근대 담론 안에서 피식민지인과 유색인과 여성의 지위를 복원하는 일은 결국 서구 백인 남성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주변에서 벗어나 중심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피식민지인과 유색인과 여성이라는 타자 안에 주체와 타자, 중심과 주변, 식민과 피식민의 이분법을 증식하는 일이고 동시에 근대 담론의 억압적 구조를 증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근대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고 동화되지 않는 타자의 담론의 생산이 탈근대 비평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것이다. 본 논문은 타자의 담론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이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다른 이론가들에 비해 들뢰즈가 타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저작은 양적으로 미소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가지는 급진적인 탈근대성으로 인해 들뢰즈의 이론 전체가 타자의 담론으로 여겨진다. 들뢰즈의 타자(Autrui)는 단적으로 말하여 ‘가능 세계의 표현인 구조-타자’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채우는 겹주름이며, 언어를 통해 실현되는 가능성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타자는 인간이 사물과 직접 마주했을 때의 생경함과 가혹한 추상성을 완화시켜주는 윤활유 같은 것, 즉 이 세계에 사는 인간의 일상적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타자 이론은 타자를 가능성의 표현으로 규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들뢰즈는 가능성의 표현 너머 이념(Ideas)의 장인 표면으로 나감으로써 타자 저편에 있는 ‘타자의 타자’에 이른다. 이것이 우리가 들뢰즈의 타자 이론을 통해 살펴보아야 할 점이다. 들뢰즈가 타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저작은
25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 / 서동욱 댓글:  조회:863  추천:0  2019-03-12
                                                                                                                                 Ⅰ. 하나의 개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에 진입하는가? 하나의 낱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의 필연적인 주춧돌, 필연적인 개념으로 채용되는가? 어떤 개념이 도무지 이해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 그리하여 글읽기의 진행을 사사건건 방해할 때 우리는 그 개념이 어떻게 텍스트의 중심에 뛰어들어 그런 불유쾌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 묻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이 바로 그렇다. 인문·사회과학의 텍스트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 낱말은 어쩌자고 그들의 글 한복판에 진입했는가? 들뢰즈도, 도무지 분명한 글을 써내지 못하는 일부 프랑스 철학의 풍토병-혹자는 이 전염병을 '문학적'이라며 찬양하지만-에 전염되어 자기 텍스트에 바로크적인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아놓은 것일까? 다시 말해 기계 개념은, 만일 오캄이 글쓰기에도 면도날을 장치해놓았더라면 마땅히 그 목이 잘려나가야 할, 무의미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나 들뢰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기계는 은유로부터 독립해 있다"라고 강조하였다.1) 이 글의 목적은 제목 그대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함의를 밝혀보자는 데 있다. 어떤 방식으로 이 낱말이 그들의 글에 도입되었는지 밝혀볼 실마리를 우리는 가타리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적 문제들, 혹은 어느 단계 혹은 다른 전개 과정중 문제가 되는 어떤 공리들을 다루는 가운데 사람들이 도입하게 된 것들 같은 유의 글쓰기의 기술이 관건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이 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기계이다."2) 즉 기계 개념은 어떤 특정한 문제를 취급하기 위해 도입된 '글쓰기의 기술' 같은 것이다. 어떤 사유에 필요한 표현을 찾아내는 일은 어느 학문에서든 필수불가결한 일인데, 왜냐하면 칸트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사유자는 자기의 개념[생각]에 정확하게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여 당황하며, 또 그러한 말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조차 자기 생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기"3) 때문이다. 들뢰즈는, 새로운 문제와 사유를 떠내기 위한 일종의 '뜰채'로서 특정한 개념을 도입하는 글쓰기의 방식은 그 자신이 유별나게 처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철학자들에게서 빈번하게 발견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있다. 구체적으로 들뢰즈는 이를 스피노자를 통해 밝히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주의는 하나의 체crible로서 취급된다. 그러나 이럴 때 여기선 하나의 새롭고도 놀라운 학문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어떤 철학과도 관련이 없고 또 데카르트주의와도 관련이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주의는 절대로 스피노자의 사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표현 기술' 같은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주의를 그가 필요로 하는 표현 기술로 사용한다."4)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다른 근대 철학자들과 더불어) 많은 개념들(실체·속성 등)을 그 정의에서부터 상당 부분 공유하지만, 그들의 철학은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주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그 자신의 독특한 사유를 써내기 위한 '작문법'으로서 데카르트주의의 개념들을 빌려온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은 선대의 업적을 뛰어넘는 많은 창조적인 철학자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금 다른 경우이지만, 우리는 칸트에게서도 비슷한 개념의 사용법을 발견한다. 칸트는 경험의 한계 너머에 있는, 이성에 뿌리를 둔 표상을 가리키기 위해, 플라톤으로부터 '이념'이라는 용어를 빌려왔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칸트는 플라톤의 계승자가 아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의 차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큰 심연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있다. 그러면 어떻게 칸트는 플라톤의 사상엔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의 개념은 가져왔는가? 칸트는 이렇게 항변한다: "일상의 담화나 저술에서 한 저자가 자기의 주제와 관련해 표현한 생각들을 비교해봄으로써, '그 저자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잘 저자를 이해하게 되는 일'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5)[강조: 인용자]. 즉 이념이라는 말의 저자는 플라톤이지만, 이 말이 뜻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한 사람은 칸트 자신이고,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플라톤의 표현법을 사용해 자신이 이해한 바를 전개시켰다는 것이다. 요컨대, 칸트와 스피노자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개념들을 그 원저자들보다 '더 잘' 이해함으로써, 그 개념들의 속을 채우고 있던 본 주인의 생각을 낙태시켜버리고 자신들의 사상을 배태시킨 것이다. 달리 말하면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그들 자신의 필기구·작문법·표현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말이다. 이렇듯 스피노자와 칸트는 새로운 사유를 담아내기 위해 타인이 쓰던 개념을 빌려 쓴다. 왜 새로운 사유에 적합한 개념을 창안하지 않고, 마치 불구자가 타인의 어깨에 기대듯, 이미 있어온 개념에 의지한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칸트에게서 들을 수 있다. "새 말을 주조하는 일은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는, 언어에서의 입법에 대한 월권(越權)이다. 이런 가망 없는 수단에 의지하기 전에, 지금은 죽은 고전어 중에서 자기의 개념과 이 개념에 적합한 표현이 있지 않은가 찾아보는 일이 현명하다. 어떤 개념의 옛적 사용이 그 개념의 창조자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어느 정도 불분명했을지라도, 그 개념에 특징적으로 귀속하는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그 개념이 당시나 지금이나 엄밀히 동일한 의미로 쓰였는지는 의심스러우나) 스스로 우리의 생각을 이해 불능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의 목적을 망쳐버리는 것보다 낫다."6) 언어의 탄생과 소멸이 한 개인에 달린 것이 아니고, 특정 학문의 용어도 많은 경우 그 분야에 종사하는 자들이 고안한 인공의 부호가 아니라는 점에 착안할 때-예컨대 플라톤은 당대의 종교 용어를, 칸트는 그 시대의 법률 용어와 생물학 용어를 자기 철학에 도입했다-독단적인 새 말의 주조를 일종의 월권이자, 표현코자 하는 사유를 이해 불능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라고 본 칸트의 견해는 꽤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차라리 의미가 동요하고 있는 기존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함으로써, 그 개념의 본 주인의 모순된 쓰임을 밝혀내고 그 개념의 의미를 새로이 확정하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좋은 예로,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ce qui peut exister par soi'이라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으로부터는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다수의 실체가 도출될 수 없으며, 오직 유일 실체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스피노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 안에 자기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사유를 부어넣는다7)).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은 그들만의 특정한 문제를 작문하기 위한 표현 기술로서 '기계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개념은 임의적으로 창조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사용되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인가? 다시 말해, 이 개념은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이 개념의 주목할 만한 사용은 이미 라캉에게서 나타나며 라캉의 용법은 직접적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말하자면,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개념을, 칸트가 플라톤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라캉의 개념을 라캉보다 더 잘 이해해보고자 시도한다. 다른 한편, 이 개념의 또 하나의 원천은 칸트의 기획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8)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역사적 원천(칸트, 라캉)과 더불어 '사용' '절단(혹은 재단)'이라는 기계 개념의 두 가지 주요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충족시켜야 할 것 같다. 기계 개념의 역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발생적 관점)? 그 개념의 용법들은 어떤 것인가(체계적 관점)? Ⅱ.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 비교적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는 후자 쪽, 즉 기계 개념의 칸트적 전통부터 살펴보자. 이 역사적 원천에 대응하는 기계 개념의 함의는 '사용'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그 용법을 묻는 것, 즉 '의미를 묻지 말고 사용을 물어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요약하는 테제이다. 동일한 어조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무의식은 의미에 관해선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용에 관한 문제들만을 제기한다. 욕망의 문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떻게 동작하는가?"9) 어떤 것(이를테면, 욕망)을 '기계'라고 규정할 때 이는 우선 그 어떤 것의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이 문제라는 점을 함축한다. 즉 기계의 기계성을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용법이다. 예컨대, 기계로서의 자동차는 의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는 데 사용됨'이라는 그것의 용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의미가 아닌 사용'의 측면에서 무엇을 규정하려 드는 이 기획을 비트겐슈타인보다도 직접적으로는 칸트에게서 빌려왔다. 왜냐하면 칸트의 비판 철학이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려는 기획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기계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 용법을 묻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칸트적인 질문이 도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것이 기계의 올바른 사용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사용인가? 다시 말해, 칸트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 철학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성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문제삼았던 것처럼, 들뢰즈도 칸트의 어조로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 기계는 작동한다. 이 점은 믿어도 좋다. 내가 그것을 시험해보았으니까.' 그것은 일종의 기계 장치이다. 다만, 의미란 용법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결정적인 원리가 되는 것은, 합법적인 용법을 규정할 수 있는 내재적 기준을 우리가 마련했을 때만 그럴 수 있다. 합법적인 용법과 대립되는 비합법적 용법은…… 일종의 초월을 복원시킨다. 초월적 분석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 내재적 기준에 대한 규정이다."10)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외디푸스』 전체가 욕망이란 기계의 합법적 사용을 규정하고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려는 시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욕망의 비합법적 사용이란 바로 다름아닌 욕망의 외디푸스적 사용, 다시 말해 욕망의 투자investissement 양식을 아빠-엄마-유아라는 가족 제도의 삼각 구도 안에 가두어놓는 것을 말한다.11) 프로이트에 있어서 이 욕망의 투자는 하나의 회로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욕망의 투자를 방향지어주는 그 회로가 바로 외디푸스이다. 그런데 외디푸스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이성의 합법적 사용의 규준을 마련하고 그것의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려고 했던 칸트의 기획을 모방하고 있다. "칸트는 그가 비판적 혁명이라고 부른 것 속에서 의식의 종합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구별하기 위해, 인식에 대해 내적인 기준을 발견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초월'(칸트에게 있어서 이 말은 기준들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칸트는 종래의 형이상학에서 보이던 그런 초재적 사용을 고발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신분석학이 자신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다고, 외디푸스를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12) 칸트가 '변증론'을 통해 이성의 비합법적 사용의 귀결인, '형이상학적 실재'로서의 불멸하는 영혼·세계·신을 비판했듯, 들뢰즈는 욕망의 비합법적 사용의 귀결인, '정신분석학적 실재'로서의 외디푸스를 비판하고자 한다. 결국 들뢰즈는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내재적 규준을 마련코자 한 칸트의 기획을 정신분석학의 영역에도 끌어들여, 프로이트의 외디푸스를 마치 형이상학에서의 가상Schein과 비견될 만한 것으로서 비판한 후 "어떤 해석과도 독립된 욕망의 상태"13)(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외디푸스적 해석에서 자유로운 욕망의 상태)를 그려보이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이 함축하는 바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사용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욕망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예술에 관한 논의, 구체적으로 들뢰즈의 소설에 관한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 작품도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그 사용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현대의 예술 작품은 의미에 관한 문제는 가지지 않으며 오로지 사용의 문제만을 제기한다."14) "현대의 예술 작품은 이것이 되었다가 저것이 되었다가 다시 저것이 되었다가, 여하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이 예술 작품의 특징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된다는 점,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스스로를 중층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예술 작품은 작동하니까. '현대의 예술 작품은 기계이며 그러므로 작동한다'"15)[강조: 인용자]. 구체적으로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예로 든다. 이 소설은 어디에 '사용'되는가?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자기의 작품을 읽지 말고 그 작품을 이용해서 우리 자신을 읽어보라고 충고한다"(같은 곳). 프루스트 소설의 화자는 기계로서의 자기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책은 콩브레의 안경점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은 돋보기 같은 일종의 확대경일 뿐이다. 내 책 덕분에 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었다."16) 이런 확대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설 기계를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예술은 생산하는 기계, 특히 효과들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프루스트는 이 점을 아주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들에 대한 효과인데, 왜냐하면 독자나 관객들은 예술 작품이 생산해내는 효과들과 비슷한 효과들을 자기 내면이나 자기 외부에서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거리를 지나가는데, 예전의 그들과는 다르다. 사실 이는 르누아르의 그림 속의 여자들로서, 우리는 예전에는 이런 여자들을 볼 수가 없었다. 마차들 역시 르누아르의 그림 속의 마차이고, 물과 하늘도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프루스트는 자기가 쓴 책들을 안경 혹은 광학 기구라고 일컫는 것이다."17) 요컨대, 예술 작품은 우리가 우리 내면이나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데 사용하는 기계이다. 사용으로서의 기계에 관한 논의는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우리는 뒤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절단'이라는 기계의 또 다른 함의와 관련하여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Ⅲ. 대상 a(objet petit a), 라캉의 기계 개념 가타리가 직접적으로 라캉의 '대상 a'를 매개로 자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는 만큼18) '절단'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또 다른 기계 개념의 함의를 이해하기에 앞서 라캉에 관한 논의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1964년 1월부터 행해진 세미나-이 강의는 『세미나 ?』라는 제목으로 1973년 출판된다19)-에서 라캉은 자신의 유명한 '대상 a'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구체적으로 여기서 대상 a로서 분석되는 것은,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대상인 '눈초리le regard'이다(라캉이 60년대 '눈초리'에 대한 분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퍽이나 의미심장한 일로서, '눈초리'는 60년대 현상학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20)). 라캉의 논의를 따라가기에 앞서, 우선 기본적으로 instinct(임시로 이 글에선 '욕구'로 옮기겠다)와 pulsion(이것은 프로이트의 용어인 Tribe의 역어로, '충동'이라 옮기겠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알아두어야겠다. "충동과 욕구 사이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21) 욕구의 목적은 '만족'인데 이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컨대, 식욕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만족을 얻는다. 욕구가 이러한 만족을 통해 해소되는 반면, 충동은 해소되지 않는 항상적인 힘이다22)(왜 그것이 만족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힘인가에 대해선 대상 a와 관련하여 이제 다루어질 것이다). 또한 욕구가 의식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힘이라면, 충동은 우리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힘이다. 라캉은 우리의 성적 충동pulsion이란 통일적인 하나를 이루지 않는 부분적인 여러 개의 충동들이라고 주장한다. "심리적 실재에 나타난 것으로서의 충동은 부분적 충동들이다"23)라고 그는 말한다. 각각의 부분적 충동은 그 각각에 고유한 대상들을 추구하는데, 부분적 충동에 대응하는 이 부분적 대상들을 일컬어 바로 대상 a라고 한다. 라캉이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에겐 네 가지 부분적 충동이 있는데, 시각적 충동, 후각적 충동, 입의 충동, 그리고 청각적 충동이 그것이다. 눈초리·배설물·젖가슴·목소리는 이들 각각의 충동이 추구하는 대상 a이다.24) 그 일상어적인 명칭에서 보자면 이것들은 우리의 의식 세계 안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대상들 같지만 실제적인 함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욕구의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의식에 표상 되는 대상(즉 우리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예컨대, 식욕에 대응하는 대상인 '음식'이 그렇다), 이 대상 a는 결코 의식의 대상 혹은 표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욕구의 경우 의식에 표상 되는 외부적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지만, "어떠한 욕구의 대상도 충동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25) 충동은 그것이 추구하는 고유한 대상인 대상 a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시각적 충동은 대상 a로서의 '눈초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 충동은 결코 눈초리를 소유할 수 없고 따라서 만족을 얻을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 표상되는 대상인 타인의 눈[目]은 지각할 수 있는 반면, 대상 a인 눈초리를 시각적 충동은 결코 볼 수 없다.26) 즉 시각적 충동은 그것이 추구하는 바 대상 a(눈초리)를 늘 '잃어버린 대상'으로서 체험한다("우리와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그 관계가 시각을 통해서 구성되는 한에서, 그리고 표상의 형태들을 통해 질서지어지는 한에서-미끄러져나가고 지나쳐지는 어떤 것이 있는데 [……] 이것이 눈초리이다"27)). 요컨대 의식의 차원에서 '시각적 욕구'는 눈을 볼 수 있는(표상할 수 있는) 반면, 무의식의 차원에서 '시각적 충동'은 눈초리를 마치 '베일'이 쳐진 듯 볼 수 없는 것으로(즉, 표상할 수 없는 것으로) 체험한다. 라캉은 이 점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홀바인H. Holbein의 유명한 그림 「대사들Les Ambassadeurs」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 그림은 충실한 사실적 기법을 통해 그린 초상화이다. 그림 한쪽에는 당시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장 드 탄드바르가, 다른 한쪽에는 조르주 드 세르비가 서 있다. 그리고 이 두 인물 사이에는 시대상을 반영해주듯 지구의를 비롯한 많은 당대의 과학적 발명품들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마치 이 그림의 사실주의적인 기법과 원근법을 비웃기나 하려는 듯이 그림 아래쪽 중앙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타원형의 물체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물체는 실은 그림 감상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해골이다. 그러나 홀바인은 이 해골을 원근법을 왜곡시켜 기형적인 대상으로 그려놓았다. 그런 까닭에 감상자는 도대체 그 괴상한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왜곡된 원근법을 통해 그려진 기형적인 대상을 일컬어 왜상(歪像)anamorphose이라고 한다. "미술사에서 퍼스펙티브는 일반적으로 삼차원을 작도하는 사실주의의 요소로 여겨졌다."28) 왜상은 관점을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이 삼차원의 질서를 일그러뜨려 만든 환상apparition이다. "왜상이 이끈 결과, 요소들과 기능들은 결정된 (특정) 관점에서 다시 일어선다."29) 이를테면, 홀바인의 그림 속의 해골은 초상화 전체를 삼차원으로 구성하는 관점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 그림을 옆에서 비스듬히 볼 때(즉 해골의 왜곡을 위해 설정된 관점을 따라서 볼 때) 비로소 해골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 홀바인은 이 숨겨진 해골을 통해, 죽음이 늘 어디선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잘 차려입은 고귀한 인물들 틈에서, 과학적 발명품들 속에서, 그리고 예술을 상징하는 악기 속에서 죽음은 항상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우리는 결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죽음을 볼 수 없지만 말이다(그림에 이런 교훈적 내용을 삽입하는 것은 당시의 유행 가운데 하나였다30)). 홀바인은 우리는 결코 볼 수 없지만, 어디선가 우리를 보고 있을 기분 나쁜 이 죽음의 성질을 표현하기 위해 해골을 원근법의 왜곡을 통해 일그러뜨려버린 것이다. 이제 그림 속의 해골은 우리를 볼 수 있어도 우리는 해골을 보지 못한다. 해골은 보이지 않는 대상, 도달할 수 없는 대상, 라캉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잃어버린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주목하는 것은 죽음의 허무함이라는 이 그림의 교훈적 테마가 아니다. 라캉은 이 초상화의 사실적인 삼차원적 질서는 우리의 표면적인 의식 세계를 표현해주고 있다고 본다. 초상화 속의 두 인물의 '눈'을 우리의 일상적인 시각은 포착(표상)할 수 있다. 반면, 기형적인 대상인 해골은 우리의 시각적 충동이 결코 거머쥘 수 없는 대상 a로서의 '눈초리'를 나타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해골의 눈초리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고, 또 마치 무엇인가를 가리고 있는 베일처럼 여길 뿐이다. 그 이상한 베일 뒤에 무엇인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베일이 가리고 있는 것은 바로 베일 그 자신일 뿐이다.' 우리의 시각적 충동은 이 베일 뒤에 무엇인가 볼 수 있는 대상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베일 자체가 대상일 뿐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렇듯 우리의 시각적 충동은 대상 a를 추구하면서도 늘 만족을 얻지 못하고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홀바인의 그림 앞에서 그 기형적인 대상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궁금하게 여기면서도 결국은 알아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각적 충동은 타자의 눈초리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을 겪음으로 해서, 만족을 얻지 못한 결핍된 자아로서의 주체를 탄생시킨다. 요컨대 주체는 그 자신을 타자의 결핍 속에서 체험한다. 그러므로 라캉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는 '사실'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동, 더 정확히는 좌절하도록 운명지어진 충동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경우 주체는 타자의 눈초리로 인한 수줍음을 통해 스스로를 체험하고, 레비나스의 경우 주체는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했듯,31) 라캉에 있어서 주체란 타자의 결핍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우리는 편의상 '타자의 결핍'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엄밀히 말해 타자의 결핍 혹은 타자의 눈초리의 결핍 등은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눈초리, 즉 대상 a를 추구하다 좌절하는 충동은 주객 관계를 전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주객 관계를 창출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기술하고자 하는 바는 주객이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어떻게 주객의 분열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주체가 탄생하는가 하는 것이지, 이미 전제된 주체와 타자, 혹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캉은 충동과 그것의 대상이 분화되기 이전의 유아기 상태를 가정한다. 이때 유아는, 입은 젖가슴과, 시각적 충동은 눈초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자아의 충동이 추구하는 타자의 눈초리, 젖가슴 등은, 오히려 자아의 신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충동의] 대상은 필수적으로 외래적인 어떤 것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마도 주체의 신체의 부분과 같은 것일 것이다."32) 그런데 대상 a를 소유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충동을 통해, 나(주체)와 나에게 결여된 것(대상)의 관계, 즉 주객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즉 원래 주객의 구별이 없던 자아는 (대상과) 분열된 것, '나누어진 것'으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a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나누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이다(이 점을 잘 기억해두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제 보겠지만, 가타리는 라캉의 대상 a의 이 나누는 기능 혹은 절단하는 기능으로부터 '절단'이라는 자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러한 늘 실패하는 충동이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층위에 있어서,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눈초리, 청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목소리, 후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똥, 입의 충동이 추구하는 젖가슴-이 대상 a들은 결코 표상적인 차원에서 소유될 수 없는 것이며, 이 충동들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의식의 차원, 표상적 차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진정 우리가 보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진정 우리가 듣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냄새 맡는 것은 진정 우리가 냄새 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의식의 차원에서 욕구하는 것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질서지어진 것'이며, 우리의 이면에는 결핍되어 있는 항상적인 에너지로서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여기서 라캉의 기계 개념이 나온다. 그는 표층적인 욕구와 심층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구조가 기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계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상징적 활동을 구체화한다"33)라고 라캉은 말한다. 라캉은 『세미나 Ⅱ』에서 자주 인간을 '인공 두뇌'에 비유하는데, 이는 인간 두뇌의 활동을 상징적으로 모사하는 이 기계의 표층적 면모와 실제로 이 기계의 작동을 지배하는 심층적인 면모의 이중성 때문이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두뇌를 꿈꾸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꿈이 현상적인 것이라면, 이를 가능케 하는 그 두뇌 기계의 내부는 신경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34) 인공 두뇌의 활동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의 기계적 원리에 지배받는 것처럼 의식적인 차원에서 자연적인 욕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도 그 이면에 충동에 의해 구조지어진 무의식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같은 맥락에서, 라캉이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를 잘 나타내준 그림으로 본 홀바인의 「대사들」도 기계이다. 실제로 이 그림에 대한 라캉의 논의에 많은 영향을 준 발트루사이티스35)는 두 개의 상이한 기하학을 하나의 화폭 속에 담은 이 그림을 "예술과 과학이 뒤섞인 하나의 복합적인 기계"36)라고 불렀다. 이 그림에서 예술이 삼차원의 사실적 초상화로 표현된 표층적인 의식을 가리킨다면, 과학은 왜곡된 기하학이 구성해낸 해골을 통해 표현된 무의식을 가리킬 터이다. 이 그림은 이런 이중성을 지닌 기계이다). 또한 라캉은 무의식 혹은 무의식을 형성하는 충동이 인간 정신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이 에너지를 발견한 프로이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헤겔에 있어서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 프로이트에게서는 언급된다. 바로 에너지가 그것이다. 그것은 [……] 헤겔 시대의 의식과 프로이트 시대의 무의식에 관해 우리가 이야기했을 때 다루었던 것이다. [……]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엔 기계 시대의 도래가 있다. 에너지는 기계가 있을 때에만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 프로이트적 생리학은 에너지의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상징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 프로이트의 모든 논의는 에너지와 관련하여 무엇이 프시케, 즉 영혼인가라는 문제의 주위를 맴돈다. [……] 그의 모든 저작을 통해 프로이트는 에너지의 기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 만약 우리가 이 에너지의 신화의 의미를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안다면, 우리는 기계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메타포 속에 암시된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37) 요컨대, 무의식은 인간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라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라캉의 기계 개념의 두 가지 함의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인간의 의식적·표층적 욕구와 무의식적·심층적 충동의 이중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의 표층적 기능은 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기계 내부의 장치들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갖는다. 예컨대 시계의 표층적 기능은 시간을 측정하는 상징적 활동이지만, 그 시계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들의 구조는 표층적 기능과 전혀 부합하는 점이 없다(이 시계 메타포는 라캉이 데카르트로부터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의 말미에서 시계의 상징적 활동에 대해 좀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둘째, 라캉은 무의식이 의식 세계를 이끄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가 그 내부에 동력을 가지듯 인간도 동력을 가지는데,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다. Ⅳ.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 이제 다시 들뢰즈와 가타리로 돌아와보자.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된다"38)라고 그들은 말한다. 절단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두번째 함의이다(첫번째 함의는 이 글의 2장에서 이미 살펴본 '사용'이었다). 그들은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라캉이 욕망의 근원, 꿈의 중심점으로 묘사한 대상 a 역시 폭탄machine infernale과 같은 방식으로 개인의 구조적 균형의 중심으로 돌연히 침입해 들어간다"39)라고 라캉의 대상 a에 대해 언급한다. 이미 보았듯 라캉에 있어서 대상 a는 (마치 주체 안에 내장된 폭탄40)처럼) 주체를 이중적인 것으로 절단해버린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절단하는 기계' 개념은 바로 대상 a의 이 쪼개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에 착안한 것이다. 구조를 전복시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대상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가타리는 라캉을 모방해 '대상-기계 a'라는 새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구조와 상반되는 것으로서 욕망의 대상인 "대상-기계 a의 현존은 구조적 준거점들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41)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절단하는 기계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들은, 어느 것이건 본질적으로 라캉과는 꽤 먼 거리를 두고 진행된다. 미리 밝혀두자면, 그들은 라캉의 대상 a로부터 '절단'이라는 함의만을 받아들여 자신들 고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는 도대체 무엇을 절단하기 위한 기계인가? "절단은 고려되는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차원에서 행해진다."42)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기계의 절단 양태들을 살펴볼 것이다. 기계가 절단하는[재단하는 copupere] 것은 1) 사회 구조와 2) 형이상학의 체계이다.43) 1) 구조와 기계: 가타리는 절단으로서의 기계를 '정태적 구조'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한다. 정태적이며 공시적인 구조가 아니라, 어떻게 통시적으로, 하나의 구조가 파괴되고 다른 구조로 진행해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의 본질이란 구조적으로 수립된 사물들의 질서에 대해 이질적인 절단"이다.44) 우리는 정태적 구조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타리의 비판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기계에 의한 절단이라는 우연한 발견물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어떤 구조적 공간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이 '순수하고' '기초적인' 기표적 사슬, 즉 일종의 욕망의 잃어버린 낙원 혹은 '기계주의 이전의 좋은 시절'은 [……] 절대적 좌표계로 고려될 수 있다. 우리는 절단의 진리, 주체의 진리를 부당하게도 [……] 다른 모든 구조적 결정 양태의 층위에 위치시킬 것이다."45) 정태적 구조는 마치 임의적으로 부당하게 설정된 절대 좌표계 같다는 비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어떤 보편적인 문법을 확립하려는 구조주의적 시도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가타리는 동태적이며 혁명적인 기계와 정태적이며 안정적인 구조는 인간의 두 측면을 구성한다고 본다. 즉 "기계들의 체계에 대해 구조적 질서는 결코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며,"46) "인간 존재는 기계와 구조의 교차 속에서 파악된다."47) 요컨대, 기계는 하나의 구조를 파괴하고(절단하고) 다른 구조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 이른바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타리가 첫번째로 드는 예는 산업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던 기계, 즉 공장에서 돌아가는 '진짜' 기계이다. "산업자본주의와 더불어 기계주의의 발작적인 진보는 수공업들의 현존하는 질서를 절단하고 또다시 절단한다."48) 즉 증기 기관이라는 기계는 기존의 수공업 구조를 무너뜨리고 산업자본주의라는 구조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단계에 있어서 테크놀러지의 역사는 주어진 기계의 현존하는 유형에 따라 구분된다."49)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절단하는 기계로서의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들 몇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발자크와 말콤 로리Malcolm Lowry의 소설이다. 구체적으로 이 두 사람의 소설에서 "제도적 전복의 기계화로서의 혁명적 기획"50)을 발견한다. "말콤 로리는 멋지게도 자기의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이것[로리의 소설]을 일종의 교향곡이나 오페라, 아니면 심지어 웨스턴 오페라로 생각해도 된다. 그것은 재즈이고 시이고 노래이며, 비극, 희극, 익살극, 기타 등등이다. [……] 그것은 예언이고, 정치적 징조이고, 암호문이고, 미친 영화이고, '므네-므네-드겔-브라신'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일종의 '기계' 장치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기계는 작동한다'"51)[강조: 인용자]. 이 인용에서 로리의 소설의 혁명 기계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이 바로 '므네-므네-드겔-브라신'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은 바빌론의 벨사살 왕의 잔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성벽에 쓴 글인데, 예언자 다니엘은 이 말을 바빌론 제국의 멸망을 예고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보시고 마감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드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시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브라신은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시아에게 갈라주신다'는 뜻입니다"52)라고 예언자는 왕 앞에서 암호의 뜻을 풀이한다. 벨사살 왕은 그날 밤으로 살해되고 메대 왕 다리우스가 나라를 차지한다. 현대의 바빌론 제국인 자본주의 세계의 예언자 로리는 다니엘처럼 그의 소설 기계를 통해 자기 시대의 제국의 종말을 예언한다. 그의 소설이 바로 예언이며 동시에 혁명 기계이다. 이 점은 기계로서의 로리의 소설은 "자본주의의 빗장을 파괴한다"53)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평가에서도 잘 나타난다. 로리의 경우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들은 발자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엥겔스는 이미 발자크에 관하여 어떤 작가가 위대한 작가인지를 밝혔다. 위대한 작가는 자기의 작품의 정상적이며 독재적인 시니피앙을 무너뜨리고 [……] 혁명 기계를 키우는 흐름들을 묘사하여 이 흐름들을 흐르게 하는 사람들이다."54)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외디푸스는 욕망을 가족주의라는 제도적 질서 속에 가두어두는 기재이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문학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문학을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그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소비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데서도 역시 외디푸스화가 가장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55) 이러한 외디푸스화된 문학 작품과 상반되는 절단 기계로서의 문학 작품을 보여준 사람들이 바로 로리와 발자크라는 것이다. 구조와 대립된 것으로서의 기계에 관한 가타리의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아마도 현실적인 제도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재단하는 기계의 파괴적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가타리는 자주 '전쟁 기계machine de guerr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어떤 것이 구조적 평행성을 깨뜨릴 때 그러한 상황은 전쟁이 일으키는 효과를 방불케 하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전쟁 기계라는 용어를 '국가 기구appareil d'Etat'라는 용어의 반대말로 사용한다.56) 가타리는 앙드레 말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19세기가 국제주의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국가들의 세기라고 말한다.57) 그런데 가타리가 '국가에 의한 지배'라고 말할 때 이는 정태적 구조를 통한 지배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상상적 덫, 함정-이는 오늘날 구조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분절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적 계획은 '국가의 정치 권력의 지배'를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국가는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 도구의 토대와 동일하게 되었고, 생산 수단의 소유의 제도적 보장과도 동일한 것이 되었다. 혁명적 계획은 이런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이 계획은 그 자체, 사회적 의식에 배태된 이 목적이 더 이상 경제적·사회적 충동에 대응하지 않음에 따라 미끼로서 구조화되었다."58) 사회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혁명적 계획이란 한낱 국가 기구에 의한 지배라는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미끼,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사회주의가 이룩한 국가 기구란 계급 혁명의 동인인 경제적 충동과 대응하지 않는 엉뚱한 정태적 구조가 되었을 뿐이다. 이는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 자기 바깥에 어떤 잠재적인 분절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내부의 정태적 항으로 환원하는 구조적 질서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사회주의가 도달한 바는 그 형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국가 기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정태적인 구조적 질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된다: "화염이 사라지면, 그저 새로운 관료주의의 화분이 남을 뿐이다."59) 요컨대, 사회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본 절단하는 기계는 다름아닌 혁명의 원천이며 구체적으로는 국가 기구의 대립 개념이다. 국가 기구를 유기체에 비유할 수 있다면, 기계는 이 유기체의 해체자이다. 그러나 유기체와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우리는 들뢰즈의 고전 형이상학 비판에서 보다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2) 형이상학과 기계: 절단하는 기계는 전통 형이상학도 예외 없이 자신의 먹이로 삼는다. 들뢰즈는 유기체와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계, 기계주의, '기계적machinique.' 이것은, 기계론적·유기적인 것이 아니다. 기계론은 의존적인 항들 사이의 점점 더 근접하는 연관의 체계이다. 반대로 기계는 비의존적인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이다."60) 여기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두 가지다. 1) 기계와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유기체란 어떤 것인가? 2)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로서의 절단하는 기계란 무엇인가? 첫번 문제부터 살피자면, 들뢰즈는 이 유기체의 면모를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발견한다. 먼저 플라톤식의 변증법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해보자. 들뢰즈는 플라톤 변증법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각각의 사물들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한다. 2) 그리고 나서 그 전체의 법칙을 통해 사물 각각을 전체의 부분으로서 사유한다. 3) 마지막으로 전체는 그 자신을 전체성의 이념을 통해 각각의 부분들(각각의 사물들) 속에 나타낸다."61) 여기서 각각의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형성하는 관절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들뢰즈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플라톤주의에서 보듯이 부분들은 하나의 거대한 동물을 형성하는 [……] 관절들(분절들 articulations)을 따라 구성된다"62)고 말함으로써, '유기적인 전체-개별자들'을 '거대 동물-관절들'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와 같은 하나의 유기적인 동물에 비견되는 전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결합의 방법과 분할의 방법이다. 결합은 흩어져 있는 것(종적 형상)들을 총괄하여 오직 하나의 유적 형상 아래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 뒤 거기에 종차를 주어서 분할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유적 형상이란 곧 그 사물의 본질, 즉 에이도스(이데아)이며, 종차는 '현상 중의 어떤 대상으로 있는 바'이다. 반면 분할의 방법은 우선 '자연 상태의 분절대로 형상에 따라 나눈다'. 이 나누는 일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종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분할된 것들을 다시 종합하여 종개념을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차이나는 존재자들을 하나의 전체 아래,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 종속시킨다는 말은 결국 존재자들을 '유종(類種)의 체계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는 위에서 소개한 '분할의 방법'을 통한, '전체성'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서의 존재자 파악이, 인간 심성의 능력과 관련하여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 심성의 능력들 가운데 하나인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에 의존하는 플라톤의 상기론(想起論)을 살펴보자. 플라톤의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감각 세계 안의 생성 변화하는 이런저런 분할된 개별자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기억은 감각 성질의 도움을 받아 고정된 본질인 이데아라는 종착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출발점[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도착점[이데아]을 미리 모방하는 능력일 때만 가치가 있으며, 그 결과 [플라톤에게 있어서] 능력들의 분할적 용법은 모든 것을 조화롭게 동일한 로고스 속에서 결합시켜버리는 변증법의 '전주곡'일 뿐"63)이라는 점이다. 상기를 통해 정신은 모든 개별자들이 종속되는 유로서의 이데아를 인식하게 되고, 바로 그때에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제대로 역할을 한 셈이 된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현상 중의 생성 변화하는 개별자들을 그 아래 포섭하는 '동일성의 형식'이며, 참된 인식이란 이런저런 개물(個物)들이 아니라 바로 이 동일한 대상 형식, 즉 동일자에 대한 인식이다. 그렇다면 이데아를 미리 모방하지 않는 능력으로서의 '상기,' 존재자들의 차이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기가 가능한가?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와 대립되는 이런 또 다른 상기를 재미있게도 프루스트에게서 찾는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프루스트에게 있어서도 '배운다는 것은 다시 기억해 는 것'이다.64) 프루스트의 상기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대상(예를 들면, 마들렌 과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도달점은 플라톤과 정반대로 통일성이 없는 분할된 부분들의 세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프루스트의 유명한 마들렌 체험, 즉 마들렌 과자로부터 비자발적으로 과거의 고향 마을 콩브레를 상기했을 때의 행복의 체험을 들뢰즈는 현재와 과거간의 공명(共鳴)의 효과라고 말한다. "기계는 공명들 혹은 공명의 효과들을 생산한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비자발적인 기억이 일으키는 효과들이다. 이 효과들이란 현재와 옛날 두 순간이 공명하게끔 만드는 효과들이다."65)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 프루스트적인 상기가 바로 공명을 일으키는 기계이다. 플라톤의 상기에서도 공명의 효과가 일어날까?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현상 중의 이런저런 대상들이 상기를 통해 인식하게 된 동일자, 즉 이데아에 종속될 뿐이기 때문이다. 공명은 두 개의 대상이 상위의 동일적인 대상으로 환원될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플라톤이라면 프루스트와 같은 상황에서,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는 개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 두 대상간의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공명을 어떻게 이루어내겠는가? 오로지 두 개의 대상 사이에 차이가 있을 때만 그 차이로 인해 공명의 효과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는 하나의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서로 다른 대상이어야만 한다. 즉 서로간에 차이를 지닌 전체화하지 않는(동일한 이데아에 종속되지 않는) 조각들이어야 한다. "공명이란 [플라톤의 상기와 달리] 다른 영역으로부터 올 조각들을 전체화하는 일이 아니다. 공명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조각들을 추출해내며 그 조각들이 가진 고유한 목적에 따라 조각들이 공명하게끔 하지만 그것들을 전체화하지는 않는다."66) 들뢰즈는 조이스에게서도 프루스트에서와 같은 '공명'을 찾아낸다. 그는, 조이스 소설의 경우 단어들은 결코 서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서로간의 유사성의 극대치까지 다가가면서 공명한다고 주장한다. 단어들이 서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하기 때문에 쌍방간에 가능한 공명을 가리켜 들뢰즈는 '현현'이라 일컫는다. "언제나, 서로 부조화하는 계열들(극단적인 경우엔 모든 계열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우주[작품]를 구성한다)의 극대치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이다. 불길한 언어적 전조(前兆)들을 가동시키면서 말이다. [……] 특히 이 언어적 전조들, 즉 말들은 원리상 동일화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그 말들의 체계 전체 속에서, 차이 자체의 차이화 과정의 귀결로서 유사성과 동일성의 극대를 이룩해낸다. 불길한 언어적 전조의 활동 아래서 서로 공명하는 계열들 사이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것을 가리켜 '현현'이라 부른다."67) 이러한 프루스트와 조이스의 공명의 효과, 즉 전체화하지 않는 조각난 항(項)들의 차이의 효과를 들뢰즈는 당착어법(撞着語法)alliance de mots에 비교하기도 한다. 당착어법이란 서로 모순되는 단어들을 이웃시켜 새로운 의미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서로 차이나는 조각들간의 공명의 효과는 바로 이런 당착 어법의 효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공명의 효과는 하나의 전체로 맞추어지지 않는 조각들이 이웃해 있는 세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다시 말해,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매개로 얻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 사의의 공명의 즐거움은 세계가 전체화하지 않는 부분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음에 대한 증언이다.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의 중요성이다. "프루스트의 독창성은 고전적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구분……을 추출해냈다는 점이다."68) 이는 곧 전통 형이상학의 구분법(예컨대, 유와 종의 체계)을 해체하고자 한 들뢰즈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의 철학적 기획이란 하나의 통일적인 세계의 분절들[관절들]이 실은 어떤 전체성의 이념(이를테면 플라톤의 이데아) 아래에서도 통일을 이루지 않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69) 요약해보자.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각각의 분절들이 하나의 거대 동물의 관절을 이루는 유기체를 지향한다. 이때 각각의 조각들로부터 출발해 이를 하나의 통일적인 이데아의 질서 속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하는 주체의 능력이 상기였다. 반면 프루스트의 상기는, 세계를 전체화하는 플라톤의 상기와 반대로, 세계를 '절단'하는 기계이다. 다르게 말하면, 전체화할 수 없는 부분적인 조각들을 이웃시켜 공명의 효과를 생산해내는 기계이다(앞서 소개한, '기계는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라는 들뢰즈의 정의를 상기할 것). 그리고 역으로, 우리가 상기를 통해 겪는 공명의 즐거움이란, 세계가 동일적인 것(이데아)의 질서 아래 전체화하지 않는 파편난 조각들로 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말하자면, 회상(回想)으로부터 오는 공명의 행복감은, 오로지 차이가 내재하는 세계가 줄 수 있는 선물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인 동물의 신체로 비유되는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기계의 절단 작업이다.70) Ⅴ. 맺음말 이 글의 목적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 일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사상이 전개되는 다양한 장에서 기계라는 개념이 어떤 용법들로 쓰이는지 추적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장황하리만치 다양한 논의들이 기계 개념이라는 하나의 바늘에 꿰어 이 글 안으로 쏟아져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라캉, 가타리, 들뢰즈로 이어지는 기계 개념의 역사는 어떤 것이며, 구체적으로 그들 각자는 선배의 업적으로부터 무엇을 발전시키고자 했는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한 탐구의 장에서 기계 개념은 어떻게 쓰이는가?-발생적인 것과 구조적인 것, 이 두 가지 질문의 날실과 씨실이 짜내는 영역이 우리의 탐구 대상이었다. 기계 개념이, 역사도 정의(定義)도 없는 속 빈 장식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은유든 아니든 왜 서양인들은 무엇인가를 궁리하기 위해서 기계라는 말을 필요로 했을까? 라캉은 자기의 기계 개념의 철학사적 원천을 밝히면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메타포로서 기계에 관심을 가졌던 최초의 인물로 데카르트를 지목한다. 구체적으로 데카르트가 관심을 두었던 기계는 시계이다("데카르트가 인간 속에서 찾고자 했던 기계는 시계이다"71)). 근대 과학과 함께 출현한 여러 기계들은 그 이전에 인간이 사용하던 도구들과 확실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기계는 단순한 물품, 즉 의자·책상,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그저 조금 상징적인 물건들이 아니다. [……] 기계는 다른 어떤 것이다. 기계는 실제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멀리 나간다.   [……] 기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상징적 활동을 구체화한다."72) 우리 주위의 도구들은 대부분 인간 신체의 기능을 연장해주는 기능을 한다. 망치는 주먹을 연장해주며, 바퀴는 발을 연장해준다. 반면 시계라는 기계는 신비 중의 신비인 시간을 구체화하는 놀라운 일을 해낸다.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우리 몸의 기능의 연장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속한 실재적인 세계와 어떤 연관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혹은 허구적인 가상의 선(線)을 허공에 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근대인들은 이러한 기계의 형이상학적 성격에서 수많은 상징 활동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했을 것이다. 즉 도구가 인간 신체의 표현이라면 기계는 영혼의 표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73) 이것이 데카르트와 라캉의 경우였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히려 세계를 온통 새로 편성해버리는 증기 기관의 찢는 듯한 힘에, 햄을 써는 기계의 파괴력에 매료당한 자들이다. 마치 폭탄machine infernale처럼, 유기체적으로 질서지어진 세계를 조각내버리는 기계를 그들은 발견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다시, 또 하나의 주제·의미가 아니라 사용을 묻는 현대 철학의 테마가 기계의 모습으로 둔갑한 채 두 사람의 철학에 스며든다.   각주) 1)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aris: Minuit, 1972, pp. 7, 43; 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aris: Minuit, p. 146을 참조할 것. 이 글 전체를 통해 이제 밝혀지게 되겠지만, 들뢰즈의 기계 개념은 사유의 필연성에서 요구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임의적으로 채용된 수식어구가 아니고, 이런 의미에서 분명 수사적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의 '은유'는 아니다. 그러나 '사용'과 '절단'이라는 기계의 두 가지 내포를 통해 어떤 것이 파악될 때, 그것에 대해 기계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명명식은 결국, 그 어떤 것의 본질을 드러내는 문체적 기재로서의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라캉은 들뢰즈와 반대로 기계 개념을 '은유'로 본다. "기계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메타포 속에……"(J. Lacan, Le s minaire II, Paris: Seuil, 1978, p. 96). 2)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 Paris: Fran ois Maspero, 1972, p. 240. 3)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1956, A 312/B 368-9. 4) G. Deleuze, Spinoza-Philosophie pratique, Paris: Minuit, 1981, p. 16. 이 인용에서 la rh torique를 '표현 방식'이라고 번역한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한마디 해두어야겠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의 기계 개념이 단순한 수사적 장식품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스피노자의 글쓰기 방식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글을 한낱 글을 장식하는 기술, 즉 수사학la rh torique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 시대에 수사학이란 말은 건전치 못한 허풍과 같은 글쓰기란 뜻의 나쁜 의미를 가진다. "19세기의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수사학은 악평을 받기 시작했고 더 이상 다양한 교육 제도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수사학'이라는 단어는 멸시의 뜻을 담게 되었고, 공정치 못한 속임수·사기·책략의 사용을 암시하게 되었다. 혹은 겉치레뿐인 속 빈 단어들의 나열, 진부한 표현, 단순한 상투어 등을 의미했다. 수사학적으로 된다는 것은 허풍을 떤다는 뜻이었다"(S. Ijsseling, Rhetoric and Philosophy in Conflict,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6, p. 1). 그러나 이와 달리 고대 그리스 이래로 수사학은 본래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수사학을 '잘,' 그리고 '설득력 있게' 말하고 글쓰는 '기술'ars bene dicendi and ars persuadendi"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는, 아름다움과 건전한 설명을 위한 규칙들과 조건들을 마련해주는 이론 과학과 마찬가지로, 수사학이 선으로 인도해주는 기술이며 설득력 있게 말하는 실천적 기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같은 곳). 즉 수사학은 무엇을 '잘'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작문법, 표현 기술이었다. 위에서 스피노자가 자기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개념들을 수사학적 기재로서 빌려왔다고 말할 때에도 바로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5) I. Kant, 위의 책, A 314/B 370. 6) 같은 책, A 312/B 369. 7)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스피노자의 실체, 속성, 양태」, 『철학논집』 제7집, 서강대 철학과, 1994를 참조할 것. 8) 이 후자 쪽 전통에 대해서는 칸트적 기획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칸트적인 기획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정신분석학 비판'이라는 프로그램에 그대로 응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9)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aris: Minuit, p. 129. 10) 같은 책, p. 130. 11)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투자' 개념에 대해 잠깐 설명해야겠다. 프로이트에게는 두 가지 표상 개념이 있다. 욕망이라는 힘이 의식 속에 자기를 새겨넣을 때, 이 활동을 가리켜 표상repr sentieren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을 가리켜 표상Vorstellung이라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젯밤 꿈에 사람을 죽였는데, 아버지였어"라고 진술한다면, 여기서 표상된 것은 성적 욕망이다. 그리고 이 표상 활동의 결과로서 의식의 차원에 나타난 것이 바로 '포어슈텔룽'으로서의 이 진술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종종 'repr sentieren'의 동의어로 '투자'라는 말을 대신 쓴다. 즉 투자란 욕망이 의식 속에 스스로를 새겨넣는 '활동'이며, 욕망이 스스로를 투자해서 의식의 차원에서 얻은 '결과물'이 포어슈텔룽인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R. Bernet, "The unconscious between representation and drive: Freud, Husserl, and Schopenhauer," The Truthful and the Good, John J. Drummond & James G. Hart(eds.), The Hague: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6, pp. 81∼95). 12)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89. 13) G. Deleuze & F. Guattari, Kafka-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 15. 14) 질 들뢰즈, 서동욱 외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1997, p. 230. 15) 같은 책, pp. 226∼28. 16) M. Proust,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Paris: Gallimard, Tome 3, 1954, p. 1033. 17)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0. 작은따옴표 안은 M. Proust, 위의 책, Tome 2, p. 327. 18) 구체적으로 가타리는 「기계와 구조Machine et structure」(1969)라는 논문을 통해 라캉의 '대상 a'를 자기식으로 해석해 '대상-기계 a(objet-machine a)'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다. 필자가 알기로 아마도 가타리의 이 글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모든 글을 통틀어 기계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첫번째 글일 것이다. 그런 만큼 가타리가 라캉의 대상 a를 왜곡시켜 기계 개념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이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19) 『세미나 XI』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밝혀두어야 할 점은, 이 저작의 논의들은 많은 부분 프로이트의 "Triebe und Triebschicksale"에 대한 비판적 주석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라캉은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많은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우리는 때에 따라서 프로이트의 이 작품으로부터 유용한 도움을 얻을 것이다. 20)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21) J. Lacan, Le s minaire XI, Paris: Minuit, p. 49. 22) "충동은 [……] 어떤 항상적인 힘Konstante Kraft으로서 작용한다"(S. Freud, Gesammelte Werke X, 1946, Frankfurt: S. Fischer Verlag, p. 212). 23) J. Lacan, 위의 책, p. 160. 24) 같은 책, p. 219. 25) 같은 책, p. 153. 26) '눈초리'(대상 a)와 표상적 대상인 '눈'(대상)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이 둘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은 마스크의 경우를 예로 분명하게 설명된다. 마스크에는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을 뿐 눈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두 개의 구멍이 거기 있으므로 해서 우리는 마스크에 눈초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눈초리는 눈과 달리 결코 표상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27) J. Lacan, 위의 책, p. 70. 28) J. Baltrusaitis, Anamorphoses ou Thaumaturgus opticus, Paris: Flammarion, 1996, p. 7. 29) 같은 곳. 30) 이에 대해선 P. 아리에스, 유선자 옮김, 『죽음 앞에 선 인간(下)』, 동문선, 1997, 5장 참조. 아리에스는 직접 홀바인의 이 그림을 다루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그림은] 삶 속에 은폐된 죽음의 존재를 그려내고 있다"(같은 책, p. 387). 31)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에 있어서, 타자의 개입을 통한 주체의 발생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32) S. Freud, 위의 책, p. 215. 33) J. Lacan, Le s minaire II, p. 95. 34) 위의 책, p. 96. 35) 라캉과 발트루사이티스 사이의 상호 영향에 대해서는 J. Lacan, Le s minaire XI, pp. 80 이하, J. Baltrusaitis, 위의 책, pp. 299∼300 참조. 36) J. Baltrusaitis, 위의 책, p. 300.   37) J. Lacan, Le s minaire II, pp. 95∼96. 38) G. Deleuze & F. Guattari, L?nti-?ipe, p. 43. 39)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4. 『앙티 외디푸스』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발견된다. "대상 a는 폭탄, 즉 욕망하는 기계와 같은 방식으로 구조적 평형에 침입한다"(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99). 40) 폭탄machine infernale을 '지옥의 기계'라고 오역해보면, 주체를 절단하는 기계로서의 대상 a의 뜻이 더 분명해진다. 41)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4. '구조' 개념과 상반되는 개념으로서의 '기계'를 우리는 아래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42)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p. 43∼44. 43) 이 두 가지 외에도 주체, 소설의 화자, 소설의 부분들의 배치 문제와 관련된 절단하는 기계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화자가 있다기보다는 기계가 있다. 또한 주인공이 있다기보다는, 어떤 사용 혹은 어떤 생산을 위해서 어떤 구성 혹은 어떤 분절 방식을 따라 기계가 작동하게끔 해주는 기계의 배치agencements가 있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p. 276∼77). 프루스트와 카프카의 소설에서 화자와 주인공은 소설의 부분들을 전체화하는 통일적인 원리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부분들을 연결시켜주는 화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화하지 않는 부분들의 배치라는 기계가 있을 뿐이다. 과거, 철학에서 주체는 이런저런 경험을 통일시켜주는 인식과 세계의 최종 지반이었다. 마찬가지로 전통 소설에서 화자나 주인공은 각각 언표 행위 nonciation와 언표 nonc 를 통일시켜 소설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자였다. 그러나 배치라는 기계를 통해, 이제 소설의 화자는 소설 각각의 부분들 안에 '칸막이로 격리된 듯' 조각나 있게 된다. 이제 전체화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로 통일될 수 없는 조각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가 문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때로 배치·탈영토성·탈주선을 동의어로 사용하는데(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 153),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어떻게 프루스트와 카프카가 소설의 전체화되지 않는 조각들의 배치를 통해 기존의 지배적 질서로부터 탈주선을 이끌어내는가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물론 들뢰즈의 논의에는 한 가지 모호한 부분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프루스트와 카프카의 소설에서 그가 '블록'이라고 부르는, 전체화되지 않는 부분의 실제 단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가가 구별해놓은 소설의 장[章]인지, 혹은 들뢰즈가 저 나름대로 단위 구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주체와 화자를 통일성이 없는 부분들로 절단하는 기계 혹은 배치하는 기계는 그 주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주체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다른 자리에서 다루었으므로 이 자리에선 생략하기로 한다(필자의 글, 「철학과 경쟁하는 소설: 들뢰즈, 칸트, 프루스트」, 『이다』 창간호, pp. 384∼87;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44)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3. 45) 같은 곳. 46) 같은 곳. 47) 같은 곳. 48) 같은 책, p. 242. 49) 같은 책, p. 241. 이런 절단하는 기계는 비단 경제 체제의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가타리는 다른 두 가지를 예로 드는데, 과학의 영역과 언어의 영역이다. "과학의 역사는, 과학의 각 분과에 있어서 각각의 과학 이론이, 구조가 아니라 기계로 파악될 수 있는 장소에서, 이데올로기의 질서로 환원되려는 것을 현재와 평행을 이루도록 만든다"(같은 곳). 요컨대 새롭게 출현한 과학 이론은 과학의 구조를 재단해 새로운 과학의 구조를 수립하는 기계이다. 이 점은 언어의 영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목소리는 파롤parole 기계로서, 랑그langue의 구조적 질서를 재단하고 수립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같은 책, p. 243). 50) 같은 책, p. 248. 51)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28. 52) 「다니엘」, 5장 25∼28절. 53)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158. 54) 같은 곳. 55) 같은 책, p. 159. 56) G. Deleuze, "Trois probl mes de groupe," in F. Guattari, 위의 책, p. vii. 57) 같은 책, p. 247. 58) 같은 책, pp. 247∼48. 59) 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p. 105∼06. 60) G. Deleuze & C. Parnet, Dialogues, Paris: Flammarion, 1996(증보판), p. 125. 61)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p. 155∼56. 62) 같은 책, p. 136. 63) 같은 책, p. 132. 64) 같은 책, p. 23. 65) 같은 책, p. 237. 66) 같은 책, p. 238. 67) G. Deleuze, Diff rence et r p tition, Paris: PUF, 1968, p. 159. 68)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1. 69) 부수적인 얘기지만, 우리는 들뢰즈와 동시대인인 푸코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기획도 결국은 이와 동일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푸코는 들뢰즈와 유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친숙해져 있는 구분들d coupages과 분류들groupements을 의심해보아야 한다"(M. Foucault, L'arch ologie du savoir, Paris: Gallimard, 1969, p. 32). 70)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이라는 이 기계가 일으키는 공명의 효과를 또 다른 측면에서 기술하기도 한다. "공명들의 생산을 보좌해주고 메워주는 것은 부분적 대상들의 생산이"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9). 즉 공명 기계의 일은 다름아니라, 공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를 두 개의 상이한 부분적인 조각들로서 생산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를 전체화하지 않는 조각들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공명을 만들어내는 이 기계의 일은 바로 '생산'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용 및 절단 외에 생산이라는 기계 개념의 또 다른 함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생산 기계의 테마는 별도의 다른 지면을 요구할 만큼 장황하고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생산 기계에 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구조'도 일종의 기계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절단'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구조가 기계와 상반되는 개념임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들뢰즈는 의미sens의 발생과 그 의미의 비물질적incorporel 본성을 규명하는 자리에서, 구조는 의미를 '생산'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진정 구조는 비물질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이다"(G.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Minuit, 1969, p. 88). 71) J. Lacan, Le s minaire II, p. 94. 72) 같은 책, pp. 94∼95. 73) 물론 그 반대의 시도도 있었다. 라캉, 데카르트와 달리 파스칼은-그 또한 근세 과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기계 제작자였으니, 기상천외한 새로운 기계, 바로 계산기의 발명자다-매우 겸손하게도 기계가 인간의 '근본적인 상징 활동'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즉 파스칼은 이미 있어왔던 의자·책상 등의 도구와 근세에 새로 출현한 기계들을 본질적으로 구별짓고자 하지 않았다(같은 책, p. 94).     
24    들뢰즈 가타리 용어 설명 댓글:  조회:753  추천:0  2019-03-12
들뢰즈 가타리 용어 설명                                                     강도, 강렬도(intensité) : 모든 현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체가 지닌 힘에 의해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따라서 지금 있는 ‘어떤 것’은 항상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리듬은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 리듬을 강도, 강렬도라 한다. 강도는 순수차이를 포착하기 위해, 그것을 대립이나 모순으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힘의 변환을 통해 문턱을 넘는 변이와 생성을 포착하기 위해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이다. 개성원리[이것임](heccéité):개체가 지닌 개별고유성. 이 개념은 스콜라 철학에서 나온 용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을 둔스 스코투스학파가 존재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용어라고 말하면서, 이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물건의 개체화도 사람의 개체화도 아닌 사건의 개체화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바람, 강, 날, 혹은 한 날의 어떤 시간). 계열(série) : 계열이란 각각의 항이나 요소, 부품들이 다른 것과 접속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각각의 항이나 요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오직 어떤 계열에 들어감으로써(계열화됨으로써), 이웃한 항들과 관계를 통해 의미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동일한 부품이나 요소도 접속되는 항, 이웃하는 항이 달라지고 다른 계열에 들어가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계열체(paradigme):어떤 공통성을 지닌 기호 요소들의 집합(소쉬르). 기호 요소들의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호 요소의 명세서. 예를들면 한글 자모는 하나의 계열체다. 여기에는 자음 계열체(ㄱ, ㄴ, ㄷ,ㄹ…… ㅎ)와 모음 계열체(ㅏㅑㅓㅕ……ㅣ)가 있다. 이 계열체로부터 ㄱ, ㅏ, ㅌ, ㅏ, ㄹ, ㅣ 라는 기호 요소를 선택하여 '가타리'라는 낱말을 만들 수 있다. 어떤 공통성을 지닌 한벌의 기호를 가리킨다. 집안의 옷장에는 양복의 계열체, 팬티의 계열체, 양말의 계열체, 넥타이의계열체 등이 있다. 하나의 계열체는 공통적 속성을 지니며 그 계열체 안에 있는 각 단위기호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계통[문門](phylum) : 같은 어원의 어휘를 공유하기 때문에 동족관계에 있다고 추정되는 언어군(群). 공리계(axiomtique):공리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증명 없이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며,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를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배권력이나 자본이 자명한 듯 사용하는 관계틀 및 그 관념을 공리계라고 말한다. 기계(machine) :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라캉의 구조 개념에 대해 공격하면서 제시한다. 모든 주체적 움직임을 틀지우는 구조 개념에 대항하여, 가타리는 이른바 ‘구조’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흔히 정신적인 것이라고하는 것이나 무의식 등도 특정한 모델에 묶인 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움직인다(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계적(machiniqu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결정론적인 의미의 기계학(mécaniqe, mécanisme)과는 달리 이러한 기계적 작동을 강조하기 위해 기계론(machinisme, machine)을 내세운다. 기계론은 기계들의 접속에 초점을 맞추고, 그래서 기계들이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지만, 기계학은 상대적으로 자기 폐쇄적이고 외부 흐름과 단절된 코드화된 관계만을 지닌다. 기계는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기계는 기술적 기계뿐만 아니라 이론적, 사회적, 예술적 기계를 포함하는데, 고립되어서 작동하지 않고 집합적 배치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기술적 기계는 공장에서 사회적 기계, 훈련기계, 조사연구기계, 시장기계 등과 상호 작용한다. → 혁명기계, 전쟁기계, 문학기계, 표현기계. 기관 없는 신체(몸체)(corps sans organs) :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토넹 아르또에게서 빌려 온 개념으로, 유기체화 되기 이전의 신체를 가리키며 본성적으로 유기체화 되기를 거부하는 신체를 의미한다. 유기체는 이 신체에 포섭과 배제의 어떤 특정한 질서를 부과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란 하나의 카오스 상태, 즉 어떤 고정된 질서로부터도 벗어나서 무한한 변이와 생성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즉 단순한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인간 및 자연의 모든 요소가 지닌 파편들이 조립되는 하나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기관없는 몸체는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관들이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되지 않고 부분 대상 혹은 욕망하는 기계들 자체로 접속될 뿐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그 기계들이 등록되는 표면이 기관 없는 몸체이며 그것은 배아 상태의 알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사회체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동일성이 부여된 인격적 주체는 아니다. 주체는 욕망들의 연결과 분리를 통한 접합접속의 결과로 발생하는 효과일 뿐이며 그렇게 이해될 때 욕망은 인간적 구속, 가족 삼각형 및 사회 제도를 넘어 분열증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기표적(signifiante) : signifiante는 의미하다(signifier)의 현재 분사로서‘의미화하다’를 뜻한다. 이 말이 소쉬르에 의해 ‘기표’라는 명사로 사용되었고, 이 기표라는 말은 기호나 언어를 다루는, 또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유행이든 사진이든 모든 것을 다루는 여러 분야에서 가장 빈번히사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기호학이 기표를 특권화한다는 점, 기호들의 의미작용을 특권화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따라서 기표적인 기호 외에 아이콘이나 지표·다이어그램 등의 다른 기호를 함께 다룬 퍼스의 기호론을 더 높이 평가하며. 그래서 몸짓이나 표정처럼 기표 이전적인 기호(의미화하기 이전에 작용하는 기호), ‘주체화’처럼 탈/후기표적인 기호, 암호처럼 반기표적인(의미화에반하는) 기호 등의 다른 ‘기호 체제’(régime de signes)를 부각시킨다. 기호계(semiotique) :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기호적’이라고 한다. 기호계는 기호론[기호학](semio1ogie)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후자는 소쉬르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기표-기의 관계를 다루는 기표작용(signification)을 연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호학을 비판하며, ‘기호 체제’(regime de signes)와 거의 같은 의미인 기호계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내재성(immanence) : 내재성이란 외적인 어떤 초월적 항(신, 왕, 일자(一者), 이데아, 대문자 주체)인 척도의 도입 없이 상호적으로 변화하는 관계를 표시한다. 욕망의 내재성이란, 인접한 대상으로 끊임없이 치환되는 변환이 정신분석학처럼 아버지나 어머니·오이디푸스 등의 초월적 항에 소급되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내재적인 이유에 의해 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내재성의 평면[구도] 다양체(복수성)(multiplicité) : 다양성, 다기성. 절대자나 보편자가 아닌 무한자. 이러한 방향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기하는 욕망하는 다양체는 특이성(singularité)이 하나의 보편자나 절대자로 환원되지 않고, 강도를 지닌 채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성을 의미한다. 대상(objet) : 어린이는 발달단계에서 대상을 식별하면서 부모와의 관계를 맺어간다. 그 때 어린이는 다양한 육체적인 모습 가운데 태반, 젖가슴, 똥, 시선, 목소리 등의 대상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어린이는 발달단계에 따라 이 대상을 차례로 소비하고 버린다. 이러한 대상을 둘러싸고 어린이의 환상이 만들어지고 자아와 타자에 대한 관념이 형성된다. 이 대상을 부분대상(objet partiel)이라고 한다. 라캉은 이 부분대상을 좀 더 타자를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욕망을 담지한 것으로 보고 대상 a(objet a)라고 하였다. 소문자 a는 대문자 타자(Autre)와 대비되는 소문자 타자(autre)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대상 a에 덧붙여, 어린이가 부분대상과 실제대상과 사이에 가지고 놀거나 관계 맺는 대상을 과도적 대상(objet transitional)이라고 한 위니캇(Winnicott)의 용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도표(diagramme):고도로 코드화되고 정확한 생산규칙에 대응하는것으로, 그림이 구체적 대상을 재생산하는 데 비해 도표는 추상적 대상을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대수적 공식과 지도를 도표라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도표라는 개념을 대상들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해나가는 적극적인 도구로 생각한다. 되기[생성](devenir):욕망의 흐름은 그것이 인물, 이미지, 동일시로전환될 수 있거나 없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정서(affect)와 되기에 의해 진전한다. 그러므로 인간학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이름 붙여진 한 개인에게는 복수적이고 분명히 모순적인 욕망이 스며들 수 있다. 즉 여성되기, 어린이 되기, 볼 수 없게 되기 등과 공존한다. 지배언어는 국지적으로는 소수자 되기에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것은 소수언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카프카가 사용한 프라하의 독일어 방언, 주체나 목적을 지니지 않고 어떤 다양체가 다른 다양체에 의해 탈영토화될 때 겪는 과정, 조성과 기능을 확인해주는 생산 과정이다. 들뢰즈와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는 적을 부수는 구성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 되기가 혁명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구성 방식과 다른 구성방식을 강조하고 그것을 ‘분자적인’ 것이라고 한다. 랑그(langue):발화. 언어의 형식적 체계. 파롤(parole)과 대립되는 개념(소쉬르). 랑그와 파롤은 언어의 두 가지 다른 면이다. 파롤은 언술(speech)처럼 랑그를 실생활에 이용하는 언어행위이며 과정이다. 이에 비해 랑그는 파롤이 점차 규범화되어 이루어지는 언어의 추상적 체제이다. 리좀(rhizome) : 리좀은 ‘근경(根莖)’, 뿌리줄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 속으로 파고들어 난맥(亂脈)을 이룬 것으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사실상 모호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arbre)형(arborescence)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다. 수목이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임에 비하여, 리좀을 제기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이 지닌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발생, 그리고 새로운 접속과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리토르넬르(ritournelle) : 후렴구. 교향곡에서의 반복구를 말한다. 반복되면서 변화를 가져온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토르넬르를 실존적 정서(affect)를 결정화 하는 반복적인 연속체라고 하였다. 이 반복구는 소리 차원, 감정 차원, 얼굴 차원 등을 지니고 있으며, 끊임없이 서로 침윤해 간다. 시간의 결정(結晶)을 퍼뜨리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메타모델화(meta-modelisation) : 모델화는 복잡한 현상을 특정한 틀로 설명해 내는 것이다. 가타리는 프로이트적인 모델화가 환원론적인 설명에 치우친 것에 반대해서 분열분석적 모델화(메타모델화)를 강조한다. 분열분석적 모델화는 다른 모델화를 배제하고 하나를 선택하여 특권화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을 이질 발생성으로 향해 나가도록 하여 복잡화하고 그 과정을 풍부화하고 분기선과 차이들을 만들어 내려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모델화가 어떤 준거점으로 작용하지 않게 하면서 다양한 모델화로 나아가려는 것을 메타모델화라고 한다. 몰적(molaire) : 통계 법칙에 따라 기능하여 정확한 미세함, 차이, 특이성의 효과를 버리는 경직된 침전화를 나타낼 때 쓰는 용어이다. 몰적 질서는 대상, 주체, 자신의 표상, 자신의 준거 체계를 한정짓는 지층화에 일치한다. ↔ 분자적 미분/미분적(différentielle) : 미분은 아주 잘게 나누는 것이다. 공간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아주 얇은 공간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면이 되도록 만드는 것, 또 면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선으로……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3차원이 2차원이 되고 또 1차원으로 되는 것, 즉 차수가 낮아진다. 적분(intégral)은 그 반대로, 선을 무한히 많이 더해 서 면적을 만들고 또 면을 무한히 많아 더해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배치(agencement) : 다양한 기계장치가 결합되어 일체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구조, 체계, 형식, 과정 등 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배치는 생물학적 사회학적 기계적 영적 상상적인 구성요소 뿐만 아니라 이질발생적인 구성요소를 포함한다. 배치는 힘의 흐름 및 이 흐름에 부과된 코드 및 영토성과 관련되지만, 배치라는 개념에서 이 흐름은 코드와 영토성에 의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을 생산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모든 배치는 영토화하는 성분을 갖지만, 동시에 이처럼 탈영토화의 첨점을 포함하고 있으며, 탈영토화의 양상에 따라 배치는 하나의 고정된 기계이길 멈추고 분해되어 다른 기계로 변형된다. 그래서 배치는, 그것의 영토성 이전에 그것의 탈영토성에 의해, 탈 주선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한다. 무의식에 대한 분열분석이론에서 볼 때, 배치는 구조주의적인 프로이트 해석에서 라캉이 말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준거가 되고 환원의 고정점인 ‘컴플렉스’를 대치하는 것이다. 분열분석(schizo-analyse) : 분열분석의 기본방향은 소극적으로는 라캉식의 주조주의적 프로이트해석에 대한 비판과 더 나아가 프로이트자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환원론을 반대하고 기계적 작동에 대한 분석을 지향한다. 적극적으로는 언어학과 기호학 비판을 통하여 변증법에 대한 대안적인 사유방식을 구성해 나가려고 한다. 들뢰즈와 함께 가타리는 와 을 통해 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가타리 독자적으로는 , 을 통해 그리고 과 을 통해 분열분석을 소극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분열분석은 환원론을 반대하고 ‘기계적 이질발생성’에서 생기는, 특정한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아니라 카오스에서 구성되는 ‘카오스모제’라는 생성론으로 나아간다. 분자적인(moléculaire) :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분석과 사회분석에서는 몰(mole)적/분자적이라는 개념쌍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개념쌍은 변증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의 방향과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몰(적)’이라는 것은 어떤 하나의 모델이나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집중해 가거나 모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본이 모든 움직임을 이윤메커니즘에 맞추어 초코드화하는 것을 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는 모든 움직임을 노동운동이라는 단일 전선에 편제하여 다른 흐름을 통제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몰적인 방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몰적인 방향은 생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기존에 생성된 것을 특정하게 코드화할 뿐인 것 이다. 이에 반해 ‘분자적’이라는 개념은 미세한 흐름을 통해 다른 것으로 되는 움직임(생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세한 흐름은 반드시 작은 제도나 장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회 전반적인 분자적 움직임도 가능하다. 따라서 미시구조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구조 및 제도 속에서 흐르는 미시적 흐름 을 중시한다. 이러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블록(bloc):배치라는 용어와 밀접하다. 라이히가 사용했던 개념이다. 어떤 정서지각의 선분을 나타낸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 분석에서 유년기의 블록은 유년기 콤플렉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가장 다양한 지각 체계를 통해 작동하기 쉬운, 정신 발생단계를 통해 나아가는 강도 체계의 결정화에 대한 문제이다. 또 다른 강도의 블록의 예는 뱅퇴이유의 소악절에 의해 영감받은 프루스트에서 지속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음악적 블록이다. 비기표적(a-signifiante) : 가타리는 기표적 연쇄와 기표적 내용을 접합하는 기표적 기호학과 의미의 효과를 생산하지 않고 자신의 준거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통사체적 연쇄로부터 작동하는 비기표적 기호론을 구분한다. 비기표적 기호론의 예는 음악적 기보법, 수학적 자료군, 정보나 로봇의 통사법 등이다. 선분성[절편성](ségmentarité):지속적인 과정을 분리된 단계로 자르는 것. 선분은 양끝을 갖는 직선이다. 선분성이란 그처럼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절단되는 어떤 지속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가령 집 ·학교·군대·공장 등으로 명확히 절단된 사회적 단위, 학기단위로 시작과 끝이 명확히 절단되는 학교 학기제, 시간단위로 명확히 절단되는 수업시간.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명확히 절단되는 공장규칙. 작업이나 업무로 명확히 절단되는 활동, 시간별 동작별로 명확히 절단되는 분업화된 동작 등이 모두 선분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야”,“이봐 지금은 작업 시간이야” 등은 권력이 선분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잘 보여 주는 말들이다. 소수적(mineure) : ‘소수적’이란 말은 ‘다수적’(majeur)이란 말과 반대인데, 단순히 수적으로 적고 많다는 개념이 아니다. 가령 곤충은 인간보다 수가 훨씬 많지만 이 세계에서 인간이 다수자(majorité)라면 곤충은 소수자(minorité)고, 여성이 남성보다 수가 적지 않지만 남성에 대해여성은 소수자다. 즉 다수자 내지 다수성이란 척도로서 기능하며 그래 서 척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표준적’인 것이 되는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수적’이란 ‘지배적’ 내지 ‘주류적’이고, 언제나 권력이 함축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소수적인 것은그 지배적인 것에서, 다수적인 것(권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다수자적인(majoritaire)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소수자 되기(devenir-minoritaire)를 강조한다.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agencement collectif d'énonciation) : 어떤 진술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을 생산하는 수 많은 요인의 결집. 언표행위에 관한 언어학 이론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주위현실과 도표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주체 위에서의 언어적 생산에 집중한다. 개인화된 발화의 외관을 넘어서 실제적인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유용하다. ‘집합적’이라는 것은 사회적 집단이라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 대상, 물질적이고 에너지적인 흐름, 주체적인 무형적 대상, 수학적 아이디어, 예술 등의 다양한 것과의 관련을 함의한다. 얼굴성[안면성](visagéité) :얼굴, 말, 몸짓, 태도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엮어져서 나타나는 한 인물상이나 사건 또는 현상의 특징. 역능[역량](puissance) : 들뢰즈와 가타리가 사용하는 역능 개념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언어에서는 권력(불어로는 pouvoir) 개념과 대비되어 쓰이는 개념이다. 니체가 권력의지라고 했을 때 권력의 의미도 바로 역능(力能) 개념이다. 역능 개념은 대표제 모델에서 생각하던 권력 개념과는 달리 모든 특이성[단독자](singularité)이 지닌 잠재력을 말하며, 데카르트적인 이성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스피노자적인 욕망에 기초한 개념이다. 역능을 지닌 특이성들이 차이를 확인하면서 서로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권력대표가 아닌 새로운 사회(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문제의식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권력자의 지배 개념에서 벗어나 특이한 개별자가 지닌 새로운 것을 구성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영토성(territorialité) : ‘영토성’이란 원래 동물행동학에서 나오는 텃세라고 번역되는 개념이다. 가령 호랑이나 늑대·종달새 등은 분비물이나 다른 사물·소리 등으로 자신의 영토를 만든다(영토화, territorialistion).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을 변형시켜 다른 개념을 만들어 낸다. 가령 ‘탈영토화’(déterritorialistion)는 기왕의 어떤 영토(territoire)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다른 것의 영토로 만들거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경우 ‘재영토화’(reterritorialistion)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개념을 다른 영역으로, 배치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서 사용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다양한 흐름을, 그 흐름 자체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도록 열어주면서도(‘탈영토화’) 이윤획득메커니즘이라는 틀에 다시 포괄해 나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재영토화’)고 한다. 욕망(désir) : 들뢰즈와 가타리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강조하는 교조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프로이트가 초기에 진전시켰듯이 정신적 작용에 대한 역동적인 분석을 리비도경제 분석이라 하여 강조한다. 프로이트는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리비도경제분석을 문화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리비도경제분석을 더욱 욕망문제와 생물학적인 에너지론으로 끌고 갔던 라이히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인다. 라이히가 리비도를 성에 너무 집중한다고 본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체적이고, 기계적이며, 분열적인 욕망을 제시한다. 욕망은 일차적으로 신체에 작용하여 물질적인 흐름과 절단을 생산하여 신체의 각 기관을 작동시키는 힘이다. 또한 이러한 신체는 흐름과 생산을 절단하고접속과 채취를 행하는 욕망하는 수많은 기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욕망은 틀 지워진 제도 속에서 다양한 출구를 찾아 나서는 선들로 작동되며 이러한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 ‘욕망하는 기계’(machine désirant)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이러한 ‘욕망하는기계’는 특정한 모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분열적인 과정을 따라 움직인다. 더욱이 여기서 욕망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결여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생산하는 욕망을 제기한다. 욕망투쟁(lutte de désir) : 기존의 운동은 객관적 사회관계를 분석하고 객관적 이해에 입각한 투쟁을 생각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당연히 노조운동을 중심에 두고 나아간다. 그런데 가타리가 예로 들고있는 것처럼 미국노동자계급의 노조운동은 흑인이나 아시아인, 파트타임노동자의 축을 이루는 학생 쪽에서 보았을 때에는 노조대표를 축으로 자기이해를 지키려는 폐쇄된 경향을 지니며, 다른 이해나 다른 소수자와의 관계에서는 파시스트적인 자세로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권력의 생성메커니즘 자체를 공격하고 역능에 기초한 구성을 생각하는 가타리는 여기서 이해라는 문제설정을 넘어서 개인이나 집단의 움직임에 붙어 다니는 욕망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욕망투쟁은 기존의 이성적 판단과 이해의 관점에서 도외시되었던 문제들을 ‘물 밑에서 물 위로 드러나게’ 하며, 결정적으로 그간 죽어지내던 ‘뜨거운’ 주체들이 움직이도록 자극한다. 의미작용(signification):기표에 기의를 연결하여 기호를 만듦으로써 기호로 하여금 기의의 가치를 표현하게 하는 작용과, 기호에 담아 놓은 기의의 가치를 추출해내는 작용. 즉 기호를 만드는 기호작용과 기호를 풀이하는 기호해석의 과정.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작용. 정신적 개념을 현실에 부여하거나 또는 현실로부터 정신적 개념을 해독해 내는 일.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언어는 그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된 말 자체를 포함하여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할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언어는 기호학적 양태와 의미론적 양태를포괄한다. 기호학과 의미론, 기호와 담론, 인식과 이해. 해석하는 체제와 해석되는 체제, 언어적 기호 체제와 비언어적 기호 체제 등 두 가지 갈래를 지닌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특히 기호학에서는, 메시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로서 ‘문장’이 그 자체 하나의 종합임과 동시에 보다 작은 ‘단어’라는 단위에서생긴다(제1분절). 그리고 ‘단어’는 그 자체 하나의 종합임과 동시에 보다 작은 ‘음’이라는 단위에서 생긴다(제2분절). 이처럼 큰 단위로부터 보다 작은 단위로의 분절이 2단계로 나뉘어 행해지는 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형식과 실체, 내용과 표현 등으로 나누는 기호학적 조작을 이중분절로서 지적하고 비판한다. 인칭론적(personnologique) : 나, 너, 그, 우리, 너희들,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에 속하는 것으로 판정하고 그 틀 속에 집어넣어 이해하려는 방식을 말한다. 사람(인칭)의 역할에, 동일성의 역할에, 동일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전형적인 인물이 연기하게 하고, 강도를 축소하며, 분자적 수준의 투여를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한정한다. 사람 (인칭)의 역할에, 동일성의 역할에, 동일시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정신분석의 이론적 관념을 특징짓는다. 정신분석적 오이디푸스는 사람, 전형적인 인물이 연기하게 하고, 강도를 축소하며, 분자적 수준의 투여를 ‘인칭론적 극장’에, 즉 실제적인 욕망하는 생산에서 단절된 표상 체계(오이디푸스 삼각형화)에 투사한다. 일관성의 구도[평면, 판](plan de consistance) : 일관성이란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상호작용할 때에 나타나는 경향성을 말한다. 흔히 준거(reference)는 어떤 표준을 상정하지만 일관성은 표준을 상정하지 않고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로 딴 소리를 지껄이는 정신병 환자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정한 상호인식의 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관성은 단일한 기호(taste)를 생산할 수 있도록 처방에서 요소들을 결속하는 것이다. 흐름들, 영토들, 기계들, 욕망의 세계들, 그것들의 성질의 차이가 무엇이든 그것들은 동일한 일관성의 구도(혹은 내재성의 평면)에 이르게 된다.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횡단적통일체를 구성하는 절대적으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연접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떠한 고정된 질서나 구조도 갖지 않는 탈영토화된 순수한 강렬도들의 응집성을 말한다. 전쟁기계(machine de guerre) : 들뢰즈와 가타리가 국가장치의 포획기능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전쟁을 필연적으로 내재한 작동방식으로서 기계가 아니라 국가장치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면서 국가와 대결할 때는 구체적인 전쟁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접속[연결접속](connexion) : 들뢰즈와 가타리는 접속, 이접[분리접속](disjonction), 통접[접합접속](conjonction)을 구별한다. 접속은 ‘·.·와·.·’로표시되며, 이접은 ‘·..든‥‥든’ 내지 ‘·..이냐‥‥끼냐’로 표시되며, 통접은 ‘그리하여’로 표시된다. 접속은 두 항(입과 숟가락. 입과 성기)이 결합되어 하나의 기계로 작동하는 것(식사-기계, 섹스-기계)이 되는 것이고, 이접은 배타적인 방식으로든(이성이냐 동성이냐) 포함적인 방식으로든(이성이든 동성이든) 선택적인 방식으로 결합되는 것이며, 통접은 이런저런 흐름이 결합하여 하나의 귀결(그리하여 그들은 변태가 되었다. 그 결과 그것은 소화 기관이 되었다)로 귀착되는 것이다. 제어(asservissement) : 가타리는 예속(assujettissement)과 제어를 구분한다. 예속은 흔히 말하는 권력관계로서 나타나는 종속을 말하고, 제어는 사이버네틱스에서 자동기계적 제어의 의미로 사용한다. 주체성(subjectivité):들뢰즈와 가타리는 개별화된 주체 개념을 거부하고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쓴다. 주체성은 사물 자체로 어떤 불변하는 본질로 파악되지 않는다. 언표행위 배치가 그것을 생산하느냐 않는냐에 따라서 그러그러한 성질의 주체성이 있거나 없다. 예를 들어 현대자본주의는 매체와 집단적 장비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대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개인적 주체성의 외관은 실제적인 주체화 과정을 분별하려는 데에 유용하다. 주체집단(sujet-groupe):주체집단은 예속집단(assujetti-groupe)에 대비되는 것이다. 이 대비에는 미시정치적 함의가 있다. 주체집단은 외적인 규정력과의 관계 및 스스로의 내적 법칙과의 관계를 동시에 관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그에 비하여 예속집단은 모든 외적 규정력에 의해서 조정됨과 동시에 스스로의 내적 법칙에 의해서도 지배되는 경향 성을 지닌다(예를 들어 초자아). 주체화(subjectivation):하나의 주체의 자기구축 과정, 주체화(subjectifation)-특수한 고정된 주체성의 형성 과정. 지도제작(cartographie) : 배치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분석하기 위한방법. 지도제작 방법은 모사나 수목적인 방식과는 달리, 현실을 주체로부터 독립해 있는 물화된 실체로 다루지 않고 역동적인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가변화되고 새롭게 구성되는 것으로 분석해 나가려고 한다. 힘들과 그 힘들이 움직이는 선들을 벡터적인 움직임 속에서 파악해 나가려는 구성주의적인 방법을 지도제작이라고 한다. 지층화(stratification) : 가타리는 현실에서 대지 위에 두꺼워지는 현상으로 축적, 응고, 침전, 습곡의 현상을 지층(strate)이라고 한다. 하나의 지층은 매우 다양한 형식과 실체, 다양한 코드와 환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층화란 바로 사회 현실 속에 지층이 만들어지는 것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사회계층화는 지층화의 한 형태이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특수한 기계, 과정 또는 배치를 이루는 내재적 관계. 감옥, 공장, 학교, 죄수, 노동자, 학생 등의 형태화된 내용이나, 형법, 규약, 법규 등의 형태화된 표현과는 달리 형태화되지 않는 순수한 기능으로서의 양자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푸코에게서 판옵티콘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추상기계는 구체적인 과정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카오스모제(chaosmose):카오스가 일관성을 부여하고 사건들의 경과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 카오스(Chaos)+코스모스(Cosmos)+오스모제(Osmose)의 결합 신조어. 코드(code):코드는 어떤 관습이나 습관을 나타내기 위한 표식이나 기호이다. 코드 개념은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사회적 흐름과 물질적 흐름뿐만 아니라 기호적 체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코드화(codage):기호를 어떤 코드에 따라 엮어서 기호나 메시지를 만드는 조작. 코드작성. 코드화는 의미작용과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자의적이다. 송신자의 생각을 말이나 몸짓으로 또는 그림이나 글씨로 바꾸는, 즉 메시지를 바꾸는 과정이다. 초코드화(surcodage)는 다양한 코드의 의미를 하나의 대문자 기호나 기표에 결집해 나가는 것을 말하고,탈코드화(décodage)는 이미 소통되고 있는 코드화된 것을 해체하여 다른 것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탈코드화는 재코드화(recodage)로 되거나 횡단코드화(transcodage)로 될 수 있다. 탈주(도주)(fuite) : 들뢰즈와 가타리가 쓰는 탈주(도주) 개념은 탈근대사회사상을 대변하는 이름처럼 되고 있다. 사실 탈주 개념은 가타리에게서는 횡단성 개념 위에서 각 개인 및 집단이 자기 책임(아우토노미아) 하에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기 위한 시도를 나타낸다. 아나키즘적 분출로서의 탈주라기보다는 새로운 집단성을 구축해 나가는 것 을 강조한다. 따라서 탈주는 항상 탈주선(도주선)(ligne de fuite)을 타고가며 되기(생성)를 동반한다. 텐서(tenseur) : 텐서란 벡터 개념을 확장시킨 것으로 자연과학에서는 물체의 관성 모멘트나 변형을 표시하는데 쓰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텐서 개념을 언어활동과 관련하여 사용한다. 가령 ‘오늘밤’이란 말을 어떤 어조, 어떤 강세로 말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된다. 음성적 긴장이 만드는 그것은 동일한 기표조차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언어-외적인 것이지만, 언어활동에 본질적인 이 요소를 텐서라고 한다. 통사, 통사체(syntaxe, syntagmatique) : 계열체로부터 선별한 기호요소들을 조합한 결과 얻은 기호복합체. 구, 절, 문장, 코드, 메시지, 이야기, 지식 같은 것을 지칭한다. 통사체에서 중요한 것은 ‘관습의 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조합의 원리이다. 즉 어떤 통사체이든 특정한 이유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기호들을 선택, 조합한 것이다. 이 관습의문법, 조합의 원리는 사회적인 판단과 연결되어 있다. 소쉬르는 계열체를 수평적 관계(공시성)로, 통사체를 수직적 관계(통시성)로 본다. 특이성[단독성](singularité) :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수성(particularité)이라는 개념 대신에 특이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특수성은 언제나 보편성과 개별성의 이항대립 속에 머물며 보편성과 개별성의 연결고리로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반면 특이성은 개체에 고유한 특성을 지니는 개별성으로도 동일자나 본질의 관념으로 귀속되는 보편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특이성은 오히려 일반적 법칙 혹은 보편적인 구조의 관념을 허물어뜨리고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회적 실천을 둘러싸고 구성되는 계열에 고유한 가치만을 인정한다. 그러한 실천의 장 및 관계에 고유한 유일무이한 것을 특이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 개인이나 집단의 특이화(singularisation)나 재특이화(resingularisation)는 바로 스스로 다른 것이 되어 가면서도 서로 소통해 나가는 과정을 일컫는다. 혁명기계 (machine révolutionnaire) : ‘나쁜’ 장치를 대체하는 ‘좋은’(혁명적) 장치라는 발상을 넘어서기 위해서 가타리는 기계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더욱이 사회변혁을 위한 새로운 기계의 설립을 촉구한다. 이 새로운 기계는 기본의 작동방식을 전혀 다르게 움직이게 하면서 대중의 욕망을 해방하는 방향이어야 하며 그래야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 다고 한다. 횡단성(transversalité) : 고슴도치의 우화 ― 추운 겨울 어느 날 고슴도치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자 서로 찔려 아파서 다시 떨어졌다. 밀착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고슴도치들은 아프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감쌌다 ― 로 예시되는 횡단성 개념은 수직적 위계와 수평적 칸막이를 깨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도 가타리는 60년대에 정신 병원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의사-간호사-환자라는 제도적으로 결합된 3자 관계를 종래의 틀에서 해방하고 거기에 새로운 사회 변혁 모델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횡단성’ 개념을 착상하였다. 그러나 횡단성 개념은 단순히 그러한 소극적인 의미를 갖기보다는 새로운 집단적인 표현 양식, 새로운 무의식적 집단 주체가 드러나는 장소 및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특히 가타리는 그러한 횡단성을 가능케 하는 집단의 욕망에 대해 천착해 나간다.  윤수종 / 진보평론 제31호 2007년 봄호 / 보론Ⅱ/ 들뢰즈·가타리 용어설명
23    들뢰즈 가타리 용어 설명 댓글:  조회:1269  추천:0  2019-03-12
들뢰즈 가타리 용어 설명                                                     강도, 강렬도(intensité) : 모든 현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체가 지닌 힘에 의해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따라서 지금 있는 ‘어떤 것’은 항상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리듬은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 리듬을 강도, 강렬도라 한다. 강도는 순수차이를 포착하기 위해, 그것을 대립이나 모순으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힘의 변환을 통해 문턱을 넘는 변이와 생성을 포착하기 위해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이다. 개성원리[이것임](heccéité):개체가 지닌 개별고유성. 이 개념은 스콜라 철학에서 나온 용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을 둔스 스코투스학파가 존재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용어라고 말하면서, 이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물건의 개체화도 사람의 개체화도 아닌 사건의 개체화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바람, 강, 날, 혹은 한 날의 어떤 시간). 계열(série) : 계열이란 각각의 항이나 요소, 부품들이 다른 것과 접속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각각의 항이나 요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오직 어떤 계열에 들어감으로써(계열화됨으로써), 이웃한 항들과 관계를 통해 의미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동일한 부품이나 요소도 접속되는 항, 이웃하는 항이 달라지고 다른 계열에 들어가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계열체(paradigme):어떤 공통성을 지닌 기호 요소들의 집합(소쉬르). 기호 요소들의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호 요소의 명세서. 예를들면 한글 자모는 하나의 계열체다. 여기에는 자음 계열체(ㄱ, ㄴ, ㄷ,ㄹ…… ㅎ)와 모음 계열체(ㅏㅑㅓㅕ……ㅣ)가 있다. 이 계열체로부터 ㄱ, ㅏ, ㅌ, ㅏ, ㄹ, ㅣ 라는 기호 요소를 선택하여 '가타리'라는 낱말을 만들 수 있다. 어떤 공통성을 지닌 한벌의 기호를 가리킨다. 집안의 옷장에는 양복의 계열체, 팬티의 계열체, 양말의 계열체, 넥타이의계열체 등이 있다. 하나의 계열체는 공통적 속성을 지니며 그 계열체 안에 있는 각 단위기호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계통[문門](phylum) : 같은 어원의 어휘를 공유하기 때문에 동족관계에 있다고 추정되는 언어군(群). 공리계(axiomtique):공리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증명 없이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며,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를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배권력이나 자본이 자명한 듯 사용하는 관계틀 및 그 관념을 공리계라고 말한다. 기계(machine) :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라캉의 구조 개념에 대해 공격하면서 제시한다. 모든 주체적 움직임을 틀지우는 구조 개념에 대항하여, 가타리는 이른바 ‘구조’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흔히 정신적인 것이라고하는 것이나 무의식 등도 특정한 모델에 묶인 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움직인다(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계적(machiniqu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결정론적인 의미의 기계학(mécaniqe, mécanisme)과는 달리 이러한 기계적 작동을 강조하기 위해 기계론(machinisme, machine)을 내세운다. 기계론은 기계들의 접속에 초점을 맞추고, 그래서 기계들이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지만, 기계학은 상대적으로 자기 폐쇄적이고 외부 흐름과 단절된 코드화된 관계만을 지닌다. 기계는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기계는 기술적 기계뿐만 아니라 이론적, 사회적, 예술적 기계를 포함하는데, 고립되어서 작동하지 않고 집합적 배치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기술적 기계는 공장에서 사회적 기계, 훈련기계, 조사연구기계, 시장기계 등과 상호 작용한다. → 혁명기계, 전쟁기계, 문학기계, 표현기계. 기관 없는 신체(몸체)(corps sans organs) :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토넹 아르또에게서 빌려 온 개념으로, 유기체화 되기 이전의 신체를 가리키며 본성적으로 유기체화 되기를 거부하는 신체를 의미한다. 유기체는 이 신체에 포섭과 배제의 어떤 특정한 질서를 부과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란 하나의 카오스 상태, 즉 어떤 고정된 질서로부터도 벗어나서 무한한 변이와 생성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즉 단순한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인간 및 자연의 모든 요소가 지닌 파편들이 조립되는 하나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기관없는 몸체는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관들이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되지 않고 부분 대상 혹은 욕망하는 기계들 자체로 접속될 뿐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그 기계들이 등록되는 표면이 기관 없는 몸체이며 그것은 배아 상태의 알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사회체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동일성이 부여된 인격적 주체는 아니다. 주체는 욕망들의 연결과 분리를 통한 접합접속의 결과로 발생하는 효과일 뿐이며 그렇게 이해될 때 욕망은 인간적 구속, 가족 삼각형 및 사회 제도를 넘어 분열증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기표적(signifiante) : signifiante는 의미하다(signifier)의 현재 분사로서‘의미화하다’를 뜻한다. 이 말이 소쉬르에 의해 ‘기표’라는 명사로 사용되었고, 이 기표라는 말은 기호나 언어를 다루는, 또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유행이든 사진이든 모든 것을 다루는 여러 분야에서 가장 빈번히사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기호학이 기표를 특권화한다는 점, 기호들의 의미작용을 특권화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따라서 기표적인 기호 외에 아이콘이나 지표·다이어그램 등의 다른 기호를 함께 다룬 퍼스의 기호론을 더 높이 평가하며. 그래서 몸짓이나 표정처럼 기표 이전적인 기호(의미화하기 이전에 작용하는 기호), ‘주체화’처럼 탈/후기표적인 기호, 암호처럼 반기표적인(의미화에반하는) 기호 등의 다른 ‘기호 체제’(régime de signes)를 부각시킨다. 기호계(semiotique) :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기호적’이라고 한다. 기호계는 기호론[기호학](semio1ogie)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후자는 소쉬르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기표-기의 관계를 다루는 기표작용(signification)을 연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호학을 비판하며, ‘기호 체제’(regime de signes)와 거의 같은 의미인 기호계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내재성(immanence) : 내재성이란 외적인 어떤 초월적 항(신, 왕, 일자(一者), 이데아, 대문자 주체)인 척도의 도입 없이 상호적으로 변화하는 관계를 표시한다. 욕망의 내재성이란, 인접한 대상으로 끊임없이 치환되는 변환이 정신분석학처럼 아버지나 어머니·오이디푸스 등의 초월적 항에 소급되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내재적인 이유에 의해 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내재성의 평면[구도] 다양체(복수성)(multiplicité) : 다양성, 다기성. 절대자나 보편자가 아닌 무한자. 이러한 방향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기하는 욕망하는 다양체는 특이성(singularité)이 하나의 보편자나 절대자로 환원되지 않고, 강도를 지닌 채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성을 의미한다. 대상(objet) : 어린이는 발달단계에서 대상을 식별하면서 부모와의 관계를 맺어간다. 그 때 어린이는 다양한 육체적인 모습 가운데 태반, 젖가슴, 똥, 시선, 목소리 등의 대상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어린이는 발달단계에 따라 이 대상을 차례로 소비하고 버린다. 이러한 대상을 둘러싸고 어린이의 환상이 만들어지고 자아와 타자에 대한 관념이 형성된다. 이 대상을 부분대상(objet partiel)이라고 한다. 라캉은 이 부분대상을 좀 더 타자를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욕망을 담지한 것으로 보고 대상 a(objet a)라고 하였다. 소문자 a는 대문자 타자(Autre)와 대비되는 소문자 타자(autre)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대상 a에 덧붙여, 어린이가 부분대상과 실제대상과 사이에 가지고 놀거나 관계 맺는 대상을 과도적 대상(objet transitional)이라고 한 위니캇(Winnicott)의 용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도표(diagramme):고도로 코드화되고 정확한 생산규칙에 대응하는것으로, 그림이 구체적 대상을 재생산하는 데 비해 도표는 추상적 대상을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대수적 공식과 지도를 도표라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도표라는 개념을 대상들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해나가는 적극적인 도구로 생각한다. 되기[생성](devenir):욕망의 흐름은 그것이 인물, 이미지, 동일시로전환될 수 있거나 없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정서(affect)와 되기에 의해 진전한다. 그러므로 인간학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이름 붙여진 한 개인에게는 복수적이고 분명히 모순적인 욕망이 스며들 수 있다. 즉 여성되기, 어린이 되기, 볼 수 없게 되기 등과 공존한다. 지배언어는 국지적으로는 소수자 되기에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것은 소수언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카프카가 사용한 프라하의 독일어 방언, 주체나 목적을 지니지 않고 어떤 다양체가 다른 다양체에 의해 탈영토화될 때 겪는 과정, 조성과 기능을 확인해주는 생산 과정이다. 들뢰즈와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는 적을 부수는 구성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 되기가 혁명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구성 방식과 다른 구성방식을 강조하고 그것을 ‘분자적인’ 것이라고 한다. 랑그(langue):발화. 언어의 형식적 체계. 파롤(parole)과 대립되는 개념(소쉬르). 랑그와 파롤은 언어의 두 가지 다른 면이다. 파롤은 언술(speech)처럼 랑그를 실생활에 이용하는 언어행위이며 과정이다. 이에 비해 랑그는 파롤이 점차 규범화되어 이루어지는 언어의 추상적 체제이다. 리좀(rhizome) : 리좀은 ‘근경(根莖)’, 뿌리줄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 속으로 파고들어 난맥(亂脈)을 이룬 것으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사실상 모호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arbre)형(arborescence)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다. 수목이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임에 비하여, 리좀을 제기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이 지닌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발생, 그리고 새로운 접속과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리토르넬르(ritournelle) : 후렴구. 교향곡에서의 반복구를 말한다. 반복되면서 변화를 가져온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토르넬르를 실존적 정서(affect)를 결정화 하는 반복적인 연속체라고 하였다. 이 반복구는 소리 차원, 감정 차원, 얼굴 차원 등을 지니고 있으며, 끊임없이 서로 침윤해 간다. 시간의 결정(結晶)을 퍼뜨리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메타모델화(meta-modelisation) : 모델화는 복잡한 현상을 특정한 틀로 설명해 내는 것이다. 가타리는 프로이트적인 모델화가 환원론적인 설명에 치우친 것에 반대해서 분열분석적 모델화(메타모델화)를 강조한다. 분열분석적 모델화는 다른 모델화를 배제하고 하나를 선택하여 특권화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을 이질 발생성으로 향해 나가도록 하여 복잡화하고 그 과정을 풍부화하고 분기선과 차이들을 만들어 내려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모델화가 어떤 준거점으로 작용하지 않게 하면서 다양한 모델화로 나아가려는 것을 메타모델화라고 한다. 몰적(molaire) : 통계 법칙에 따라 기능하여 정확한 미세함, 차이, 특이성의 효과를 버리는 경직된 침전화를 나타낼 때 쓰는 용어이다. 몰적 질서는 대상, 주체, 자신의 표상, 자신의 준거 체계를 한정짓는 지층화에 일치한다. ↔ 분자적 미분/미분적(différentielle) : 미분은 아주 잘게 나누는 것이다. 공간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아주 얇은 공간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면이 되도록 만드는 것, 또 면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선으로……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3차원이 2차원이 되고 또 1차원으로 되는 것, 즉 차수가 낮아진다. 적분(intégral)은 그 반대로, 선을 무한히 많이 더해 서 면적을 만들고 또 면을 무한히 많아 더해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배치(agencement) : 다양한 기계장치가 결합되어 일체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구조, 체계, 형식, 과정 등 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배치는 생물학적 사회학적 기계적 영적 상상적인 구성요소 뿐만 아니라 이질발생적인 구성요소를 포함한다. 배치는 힘의 흐름 및 이 흐름에 부과된 코드 및 영토성과 관련되지만, 배치라는 개념에서 이 흐름은 코드와 영토성에 의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을 생산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모든 배치는 영토화하는 성분을 갖지만, 동시에 이처럼 탈영토화의 첨점을 포함하고 있으며, 탈영토화의 양상에 따라 배치는 하나의 고정된 기계이길 멈추고 분해되어 다른 기계로 변형된다. 그래서 배치는, 그것의 영토성 이전에 그것의 탈영토성에 의해, 탈 주선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한다. 무의식에 대한 분열분석이론에서 볼 때, 배치는 구조주의적인 프로이트 해석에서 라캉이 말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준거가 되고 환원의 고정점인 ‘컴플렉스’를 대치하는 것이다. 분열분석(schizo-analyse) : 분열분석의 기본방향은 소극적으로는 라캉식의 주조주의적 프로이트해석에 대한 비판과 더 나아가 프로이트자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환원론을 반대하고 기계적 작동에 대한 분석을 지향한다. 적극적으로는 언어학과 기호학 비판을 통하여 변증법에 대한 대안적인 사유방식을 구성해 나가려고 한다. 들뢰즈와 함께 가타리는 와 을 통해 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가타리 독자적으로는 , 을 통해 그리고 과 을 통해 분열분석을 소극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분열분석은 환원론을 반대하고 ‘기계적 이질발생성’에서 생기는, 특정한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아니라 카오스에서 구성되는 ‘카오스모제’라는 생성론으로 나아간다. 분자적인(moléculaire) :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분석과 사회분석에서는 몰(mole)적/분자적이라는 개념쌍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개념쌍은 변증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의 방향과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몰(적)’이라는 것은 어떤 하나의 모델이나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집중해 가거나 모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본이 모든 움직임을 이윤메커니즘에 맞추어 초코드화하는 것을 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는 모든 움직임을 노동운동이라는 단일 전선에 편제하여 다른 흐름을 통제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몰적인 방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몰적인 방향은 생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기존에 생성된 것을 특정하게 코드화할 뿐인 것 이다. 이에 반해 ‘분자적’이라는 개념은 미세한 흐름을 통해 다른 것으로 되는 움직임(생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세한 흐름은 반드시 작은 제도나 장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회 전반적인 분자적 움직임도 가능하다. 따라서 미시구조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구조 및 제도 속에서 흐르는 미시적 흐름 을 중시한다. 이러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블록(bloc):배치라는 용어와 밀접하다. 라이히가 사용했던 개념이다. 어떤 정서지각의 선분을 나타낸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 분석에서 유년기의 블록은 유년기 콤플렉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가장 다양한 지각 체계를 통해 작동하기 쉬운, 정신 발생단계를 통해 나아가는 강도 체계의 결정화에 대한 문제이다. 또 다른 강도의 블록의 예는 뱅퇴이유의 소악절에 의해 영감받은 프루스트에서 지속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음악적 블록이다. 비기표적(a-signifiante) : 가타리는 기표적 연쇄와 기표적 내용을 접합하는 기표적 기호학과 의미의 효과를 생산하지 않고 자신의 준거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통사체적 연쇄로부터 작동하는 비기표적 기호론을 구분한다. 비기표적 기호론의 예는 음악적 기보법, 수학적 자료군, 정보나 로봇의 통사법 등이다. 선분성[절편성](ségmentarité):지속적인 과정을 분리된 단계로 자르는 것. 선분은 양끝을 갖는 직선이다. 선분성이란 그처럼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절단되는 어떤 지속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가령 집 ·학교·군대·공장 등으로 명확히 절단된 사회적 단위, 학기단위로 시작과 끝이 명확히 절단되는 학교 학기제, 시간단위로 명확히 절단되는 수업시간.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명확히 절단되는 공장규칙. 작업이나 업무로 명확히 절단되는 활동, 시간별 동작별로 명확히 절단되는 분업화된 동작 등이 모두 선분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야”,“이봐 지금은 작업 시간이야” 등은 권력이 선분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잘 보여 주는 말들이다. 소수적(mineure) : ‘소수적’이란 말은 ‘다수적’(majeur)이란 말과 반대인데, 단순히 수적으로 적고 많다는 개념이 아니다. 가령 곤충은 인간보다 수가 훨씬 많지만 이 세계에서 인간이 다수자(majorité)라면 곤충은 소수자(minorité)고, 여성이 남성보다 수가 적지 않지만 남성에 대해여성은 소수자다. 즉 다수자 내지 다수성이란 척도로서 기능하며 그래 서 척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표준적’인 것이 되는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수적’이란 ‘지배적’ 내지 ‘주류적’이고, 언제나 권력이 함축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소수적인 것은그 지배적인 것에서, 다수적인 것(권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다수자적인(majoritaire)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소수자 되기(devenir-minoritaire)를 강조한다.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agencement collectif d'énonciation) : 어떤 진술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을 생산하는 수 많은 요인의 결집. 언표행위에 관한 언어학 이론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주위현실과 도표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주체 위에서의 언어적 생산에 집중한다. 개인화된 발화의 외관을 넘어서 실제적인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유용하다. ‘집합적’이라는 것은 사회적 집단이라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 대상, 물질적이고 에너지적인 흐름, 주체적인 무형적 대상, 수학적 아이디어, 예술 등의 다양한 것과의 관련을 함의한다. 얼굴성[안면성](visagéité) :얼굴, 말, 몸짓, 태도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엮어져서 나타나는 한 인물상이나 사건 또는 현상의 특징. 역능[역량](puissance) : 들뢰즈와 가타리가 사용하는 역능 개념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언어에서는 권력(불어로는 pouvoir) 개념과 대비되어 쓰이는 개념이다. 니체가 권력의지라고 했을 때 권력의 의미도 바로 역능(力能) 개념이다. 역능 개념은 대표제 모델에서 생각하던 권력 개념과는 달리 모든 특이성[단독자](singularité)이 지닌 잠재력을 말하며, 데카르트적인 이성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스피노자적인 욕망에 기초한 개념이다. 역능을 지닌 특이성들이 차이를 확인하면서 서로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권력대표가 아닌 새로운 사회(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문제의식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권력자의 지배 개념에서 벗어나 특이한 개별자가 지닌 새로운 것을 구성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영토성(territorialité) : ‘영토성’이란 원래 동물행동학에서 나오는 텃세라고 번역되는 개념이다. 가령 호랑이나 늑대·종달새 등은 분비물이나 다른 사물·소리 등으로 자신의 영토를 만든다(영토화, territorialistion).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을 변형시켜 다른 개념을 만들어 낸다. 가령 ‘탈영토화’(déterritorialistion)는 기왕의 어떤 영토(territoire)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다른 것의 영토로 만들거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경우 ‘재영토화’(reterritorialistion)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개념을 다른 영역으로, 배치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서 사용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다양한 흐름을, 그 흐름 자체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도록 열어주면서도(‘탈영토화’) 이윤획득메커니즘이라는 틀에 다시 포괄해 나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재영토화’)고 한다. 욕망(désir) : 들뢰즈와 가타리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강조하는 교조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프로이트가 초기에 진전시켰듯이 정신적 작용에 대한 역동적인 분석을 리비도경제 분석이라 하여 강조한다. 프로이트는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리비도경제분석을 문화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리비도경제분석을 더욱 욕망문제와 생물학적인 에너지론으로 끌고 갔던 라이히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인다. 라이히가 리비도를 성에 너무 집중한다고 본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체적이고, 기계적이며, 분열적인 욕망을 제시한다. 욕망은 일차적으로 신체에 작용하여 물질적인 흐름과 절단을 생산하여 신체의 각 기관을 작동시키는 힘이다. 또한 이러한 신체는 흐름과 생산을 절단하고접속과 채취를 행하는 욕망하는 수많은 기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욕망은 틀 지워진 제도 속에서 다양한 출구를 찾아 나서는 선들로 작동되며 이러한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 ‘욕망하는 기계’(machine désirant)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이러한 ‘욕망하는기계’는 특정한 모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분열적인 과정을 따라 움직인다. 더욱이 여기서 욕망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결여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생산하는 욕망을 제기한다. 욕망투쟁(lutte de désir) : 기존의 운동은 객관적 사회관계를 분석하고 객관적 이해에 입각한 투쟁을 생각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당연히 노조운동을 중심에 두고 나아간다. 그런데 가타리가 예로 들고있는 것처럼 미국노동자계급의 노조운동은 흑인이나 아시아인, 파트타임노동자의 축을 이루는 학생 쪽에서 보았을 때에는 노조대표를 축으로 자기이해를 지키려는 폐쇄된 경향을 지니며, 다른 이해나 다른 소수자와의 관계에서는 파시스트적인 자세로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권력의 생성메커니즘 자체를 공격하고 역능에 기초한 구성을 생각하는 가타리는 여기서 이해라는 문제설정을 넘어서 개인이나 집단의 움직임에 붙어 다니는 욕망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욕망투쟁은 기존의 이성적 판단과 이해의 관점에서 도외시되었던 문제들을 ‘물 밑에서 물 위로 드러나게’ 하며, 결정적으로 그간 죽어지내던 ‘뜨거운’ 주체들이 움직이도록 자극한다. 의미작용(signification):기표에 기의를 연결하여 기호를 만듦으로써 기호로 하여금 기의의 가치를 표현하게 하는 작용과, 기호에 담아 놓은 기의의 가치를 추출해내는 작용. 즉 기호를 만드는 기호작용과 기호를 풀이하는 기호해석의 과정.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작용. 정신적 개념을 현실에 부여하거나 또는 현실로부터 정신적 개념을 해독해 내는 일.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언어는 그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된 말 자체를 포함하여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할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언어는 기호학적 양태와 의미론적 양태를포괄한다. 기호학과 의미론, 기호와 담론, 인식과 이해. 해석하는 체제와 해석되는 체제, 언어적 기호 체제와 비언어적 기호 체제 등 두 가지 갈래를 지닌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특히 기호학에서는, 메시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로서 ‘문장’이 그 자체 하나의 종합임과 동시에 보다 작은 ‘단어’라는 단위에서생긴다(제1분절). 그리고 ‘단어’는 그 자체 하나의 종합임과 동시에 보다 작은 ‘음’이라는 단위에서 생긴다(제2분절). 이처럼 큰 단위로부터 보다 작은 단위로의 분절이 2단계로 나뉘어 행해지는 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형식과 실체, 내용과 표현 등으로 나누는 기호학적 조작을 이중분절로서 지적하고 비판한다. 인칭론적(personnologique) : 나, 너, 그, 우리, 너희들,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에 속하는 것으로 판정하고 그 틀 속에 집어넣어 이해하려는 방식을 말한다. 사람(인칭)의 역할에, 동일성의 역할에, 동일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전형적인 인물이 연기하게 하고, 강도를 축소하며, 분자적 수준의 투여를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한정한다. 사람 (인칭)의 역할에, 동일성의 역할에, 동일시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정신분석의 이론적 관념을 특징짓는다. 정신분석적 오이디푸스는 사람, 전형적인 인물이 연기하게 하고, 강도를 축소하며, 분자적 수준의 투여를 ‘인칭론적 극장’에, 즉 실제적인 욕망하는 생산에서 단절된 표상 체계(오이디푸스 삼각형화)에 투사한다. 일관성의 구도[평면, 판](plan de consistance) : 일관성이란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상호작용할 때에 나타나는 경향성을 말한다. 흔히 준거(reference)는 어떤 표준을 상정하지만 일관성은 표준을 상정하지 않고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로 딴 소리를 지껄이는 정신병 환자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정한 상호인식의 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관성은 단일한 기호(taste)를 생산할 수 있도록 처방에서 요소들을 결속하는 것이다. 흐름들, 영토들, 기계들, 욕망의 세계들, 그것들의 성질의 차이가 무엇이든 그것들은 동일한 일관성의 구도(혹은 내재성의 평면)에 이르게 된다.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횡단적통일체를 구성하는 절대적으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연접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떠한 고정된 질서나 구조도 갖지 않는 탈영토화된 순수한 강렬도들의 응집성을 말한다. 전쟁기계(machine de guerre) : 들뢰즈와 가타리가 국가장치의 포획기능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전쟁을 필연적으로 내재한 작동방식으로서 기계가 아니라 국가장치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면서 국가와 대결할 때는 구체적인 전쟁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접속[연결접속](connexion) :
22    내재성 / 김상환 댓글:  조회:962  추천:0  2019-03-12
내재성   김상환     내재성의 개념에는 들뢰즈의 미소가 담겨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쟁하던 모든 철학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철학에 쏟아 부었던 한평생의 수고에 던지는 회심의 미소이다. 내재성은 들뢰즈의 사유가 도달한 최후의 높이, 긍지의 높이를 표시한다. 우리는 적어도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2장(「내재성의 평면」)에 펼쳐진 눈부신 문장을 읽으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내재성은 물론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는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찍부터 들뢰즈 철학을 상징하는 어떤 구호나 문양 같은 구실을 해왔다. 어쩌면 고추장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은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들뢰즈가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손 등을 하나의 사발 속에 뒤섞기 위해 끌어들인 공통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비빔밥의 고추장에 해당하는 이 개념에 의존하여 들뢰즈는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에 맞서는 철학사의 전통을 일으켜 세우고 현대적 사유의 이미지를 주조하고자 했다. 이때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은 초월성의 이름 아래 집약된다. 니체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초월적 사유의 본성은 삶의 바깥에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세우는 데 있다. 문제는 이상적인 모델에 의거하여 삶의 세계를 분석, 해석, 평가하다 보면 삶의 세계를 단죄하거나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령 영화 속의 주인공을 기준으로 자신의 연인을 자꾸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해보라. 남과 비교하여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인격모독이기 쉽다. 마찬가지로 초월성의 철학은 생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던가? 유한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체적 삶의 세계, 우연으로 가득한 이 생(生)을 긍정하는 철학은 불가능한가? 생에 맞서 있는 낯설고 외재적인 기준이 아니라 생에 고유한 기준으로 생을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내재적 사유는 왜 초월적 사유보다 우월한가? 어떻게 더 엄밀하고 심오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들뢰즈의 철학을 끌고 가는 일관된 물음이다. 이런 물음 속에서 내재성은 생에 대한 긍정과 같고, 초월성은 생에 대한 부정과 같다. 들뢰즈의 초기 철학(초월론적 경험론)에서 초월적 사유는 재현적 사유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이때 재현은 있는 그대로의 차이(즉자적 차이)나 구별을 개념적 동일성이나 유비적 추론 등을 통해 환원적으로 재구성하는 절차를 말한다. 재현주의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은 즉자적 차이(강도적 차이)를 삶의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서 옹호한다. 이런 의미의 내재성이 문제일 때 들뢰즈 철학의 주요 고비는 플라톤주의 전통의 형상-질료 모델이나 거기서 비롯된 거푸집 모델을 거부하면서 개체화를 설명하는 데 있다. 원형에 해당하는 어떤 초시간적인 형상(본질)이 개체화에 선재한다는 것, 개체화는 무형의 질료에 대하여 그 항구적인 형상이 거푸집 구실을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재현주의 전통의 오래된 믿음이다. 그러나 내재성의 사유에서 개체화를 주도하는 것은 질료에 외재적인 불변의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질료 자체에 내재하는 창조적 변이의 능력에 있다. 이는 이질적인 재료들이 상호 공속(共續/共束)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형상을 조형하는 능력과 같다. 이때 공속성consistance은 어떤 주름운동 속에 함께 엮이고 함께 지속한다는 것se tenir ensemble을, 함께 지속하면서 어떤 잉여를 낳는 가변적 회로를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개의 고원』(1980)에서 내재성은 질료의 이런 자기 조형화 역량에 해당하는 공속성과 동의어로 사용된다(특히 11장 참조). 생에 대한 긍정이자 차이에 대한 옹호가 내재성 개념의 배후인 한에서 들뢰즈를 인도하는 궁극의 안내자는 니체이다. 특히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내재성의 사유가 도달해야할 최고의 정점을 표시한다. 그러나『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내재성의 사유를 구현하는 최상의 사례는 스피노자로 바뀐다. 스피노자는 이제 내재성의 철학을 완성한 유일한 철학자, 따라서 “철학자들의 왕자”(p. 49) 혹은 “철학자들의 그리스도이며,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 신비에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고 있는 어떤 사도들에 불과하다”(p. 59). 내재성 개념의 역사적 준거점이 니체에서 스피노자로 바뀐 것은 그 개념 자체의 함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달라졌다. 내재성은 이제 반-플라톤, 반-기독교의 전통을 회집하는 개념이나 개체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철학의 가능성 자체를 규정하는 개념이 되었다. 가령 철학은 어떤 조건에서 비로소 철학일 수 있는가? 철학이 철학일 수 있는 최소 요건, 철학과 비-철학을 가르는 최후 요인은 무엇인가? 철학이 종교나 예술 혹은 과학과 달라지는 분기점, 또는 철학이 시작되는 절대적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상대적 출발점이 아니라 절대적 출발점. 들뢰즈는 그것을 “설립instauration”의 계기로 간주한다. “철학은 개념의 창조인 동시에 〔내재성의〕 평면의 설립이다. 개념은 철학의 시작이지만, 평면은 철학의 설립이다. 〔……〕 철학의 절대적 토양, 대지, 또는 철학의 탈영토화, 철학의 정초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내재성의 평면이다. 철학은 그런 것들 위에서 자신의 개념을 창조 한다”(pp. 43~44). 내재성의 평면은 그 밖에 지평, 사막, 환경, 혹은 추상적 기계 등으로 불린다. 철학은 개념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개념의 체계로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개념적 유희는 개념화하기 어려운 어떤 암묵적인 직관 속에서 비로소 지속적인 역동성과 방향을 얻는다. 해석학에서는 그런 직관을 선-이해라 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철학자는 평생 오로지 한 가지 직관에 대해 말할 뿐이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론이 존재에 대한 어떤 선-존재론적 이해 속에 펼쳐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혹자는 철학을 어떤 세계관의 표현으로 보지 않는가.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의 평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개념적 유희가 태어나고 진화해가기 위해 철학자가 먼저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어떤 선-개념적 직관의 세계에 해당한다. 이 직관적 이해의 세계는 “무제한의 단일한 전체, 총체성Un-Tout illimité, Omnitudo”을 이룬다. 이 열려있는 총체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한한 운동에 있다. 그리고 “이 무한한 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왕복이다. 〔……〕 그것은 어떤 가역성réversibilité, 어떤 직접적이고 영속이며 순간적인 교환이다”(pp. 40~41). 그러나 무엇과 무엇 사이의 왕복과 교환인가? 그것은 “사유의 이미지”와 “존재의 질료”(p. 41) 사이의 가역적 운동, 어떤 주름을 만드는 이중화 운동이다. 이때 사유의 이미지란 사유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말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권리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가령 광기는 정당한 사유에 속하는가? 무엇이 참된 사유이고 의미 있는 사유는 어떤 위험이나 대가를 무릅써야 하는가? 철학적 사유는 이런 물음에 관련된 무의식적인 이해 위에 성립한다. 그 자체로는 개념적으로 사유될 수 없는 암묵적인 전제. 그런 전제는 사유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존재의 질료 혹은 자연에 대해서도 필요하다. 개념적 유희는 사유에 대한 묵시적 가정 못지않게 자연 일반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 선-이해 속에서 펼쳐진다. 들뢰즈의 내재성은 묵시적 직관의 상관 항이다. 아직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내용들이 회오리치는 세계. 그 세계는 개념적 유희와 더불어 시작되는 철학의 평면과 구별되어야 한다. “만일 철학이 개념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면, 내재성의 평면은 전-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p. 43). 내재성의 평면은 전-개념적 이해의 세계인 한에서 전-철학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외부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전-철학적”은 시간적으로 철학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슐라르가 가리키는 인식론적 장애는 개념적 사유와 더불어 비로소 성립하는 어떤 반-사유였다. 사유와 더불어 사유 속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바깥. 들뢰즈의 내재성도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 전제하되 철학의 바깥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같은 곳), 철학의 심층 속에 자리하는 외부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사유되어야만 하되 동시에 결코 사유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유 속의 비-사유라 할 수 있다. 〔……〕 그것은 사유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이지만 또한 절대적인 외부이기도 하다. 외적인 세계 전체보다 훨씬 먼 어떤 외부, 왜냐하면 내적인 세계 전체보다 훨씬 깊은 어떤 내부이기 때문이다”(p. 59). 우리는 이런 문장 속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를 식별할 수 있다. 가령 라캉은 의식에 대하여 무의식이, 또는 상징계에 대하여 실재가 내부적인 동시에 외부적임을 역설했다. 외심성 혹은 외밀성extimié이란 용어는 그런 위상학적 역설을 표현하는 신조어이다. 내면과 외면의 이분법적 대립을 깨뜨리는 이런 역설은 푸코와 데리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푸코의 고고학적 분석에서 근대적 코기토의 상관 항으로 등장하는 비사유l’impensé, 데리다의 해체론이 가리키는 바깥(형이상학적 울타리의 바깥)이나 해체 불가능자(대리적 보충, 흔적, 유령 등등) 등은 모두 외심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내재성의 특징을 꼽을 때 외밀성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가역성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은 두 얼굴을 지녔다. 사유와 자연, 퓌지스Physis와 누스Noûs가 그것이다”(p. 41). 내재성의 영역은 개념적 유희에 지속적으로 영감을 제공하는 두 가지 직관, 사유와 존재에 대한 암묵적 직관이 공존하는 장소이다. 하지만 규정성을 결여한 그 두 직관은 정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무한한 가역운동 속에 빨려 들어간다. 가역성 혹은 왕복운동. 정신과 자연에 대한 직관은 끝없이 서로 촉발, 중첩, 확장하면서 점차 식별 불가능해지고 마침내 어떤 단일한 전체를 직조해간다. 사유와 존재 사이를 오가는 “거대한 베틀 북”(p. 41). 그것이 내재성의 평면이다. “그 평면의 쉼 없는 왕래, 그 무한한 운동. 아마도 이것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제스처일 것이다”(p. 59). 내재성이 평면이라 불리는 것은 사유가 그 위에서 “무한한 속도”로 “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p. 44). 이때 무한한 속도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영감, 통제 불가능한 가속적 리듬 등과 관련된 표현일 것이다. 반면 질주는 변신 혹은 타자-되기와 관련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다른 것, 사유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로 되돌아와서 사유를 다시 유발하는 어떤 동물, 식물, 분자, 입자 등이 되지 않는다면 사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같은 곳). 내재성의 평면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때로 어떤 광기와 착란을, 때로 어떤 비명과 도착을 통과한다는 것과 같다. 내재성이 현기증을 일으키는 어떤 무한한 가역운동의 세계라면, 그 운동의 무한성은 카오스에서 온다. 철학이 진정한 의미의 창조, 개념의 창조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개념이 무화되는 어떤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점의 한없는 폭력, 무의미의 회오리를 살아낼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어떤 최초의 구도와 방향을 어림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의 토대가 처음 설립되는 장소는 그런 원점에 해당하는 카오스이다. 거기서 그려지는 내재성의 평면은 “카오스의 절단면,” 카오스를 가르는 “어떤 체”에 해당한다. 그것은 마치 체와 같아서 카오스에서 무한한 운동을 선별하되 거기에 공속성consistance을 부여한다. “철학의 문제는 사유가 침잠해 있는 무한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어떤 공속성을 획득하는 데 있다”(p. 45). 공속성은 이미 『천 개의 고원』(1980)에서 내재성의 다른 말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영토적 배치나 기계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질적인 질료들이 상호 중첩, 촉발하면서 어떤 가변적 회로(식별 불가능한 지대, 근방들)를 구성하는 자기 조형화 능력이 공속성의 초보적 의미이다. 그러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되는 것은 사유와 존재 사이의 공속성이다. 여기서 내재성 혹은 공속성의 새로운 개념화를 향도하는 거울은 사유의 속성과 연장의 속성을 동일한 외연 속에 겹쳐놓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있다. “스피노자는 철학을 완성했다. 철학이 상정하는 전-철학적인 바탕을 메웠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서 내재성은 실체나 양태로 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실체와 양태의 개념이 자신들의 전제인 내재성의 평면으로 귀속된다. 그 평면은 연장과 사유라는 두 얼굴을 우리에게 내민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존재의 역량과 사유의 역량이라는 두 역량이다. 스피노자, 그것은 내재성의 현기증이다”(p. 50).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성을 실체나 양태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둔다는 데 있다. 즉 스피노자의 속성은 개념 이전의 차원, 카오스에 최초의 원근을 개방하는 차원에 해당한다. 상호 평행-공속하는 사유의 속성과 연장의 속성. 그것은 단일한 내재성의 경제를 구성하는 두 반쪽이다. 이 두 반쪽이 하나의 동일한 외연 속에 겹쳐지기 위해서는 카오스의 운동을 따라잡는 무한한 속도의 사유가 실행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을 그런 무한한 속도의 사유가 실행되는 절차로 간주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초월성과 타협하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철학자로 간주한다. 이때 초월성은 내재성을 어떤 기체나 실체 혹은 어떤 주체나 대상에 귀속시킬 때 성립한다. “내재성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내재하고 〔……〕 자신이 내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속할 수 없도록 만든다. 어쨌든 내재성이 어떤 존재자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될 때마다 언제나 이 존재자는 틀림없이 초월자를 다시 끌어들이게 된다”(p. 47). 초월적 사유는 내재성을 어떤 것=X에 부여하는 여격(與格)의 사유와 같다. 여격의 사유에 힘입어 내재성을 참칭하게 된 존재자=X는 어떤 초월자로 둔갑한다. 철학사에 등장하는 신, 실체, 정신, 물질, 자연, 주체, 리(理), 기(氣) 등등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 다시 말해서 특정한 존재자를 존재로 착각해온 역사로 바라본다. 들뢰즈에게 철학사는 내재성 망각의 역사, 다시 말해서 내재성의 자기내재성을 잊고 특정한 존재자에 내재성을 부여해온 역사이다. 가령 유물론은 물질에, 유심론은 정신에, 코기토 철학은 주체나 의식에 내재성을 귀속시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내재성의 개념에 들뢰즈 최후의 미소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들뢰즈는 이 개념에 힘입어 마침내 서양 철학사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이에 올라섰다. 서양 철학사의 유래와 종말, 수많은 방황의 고비들, 근본적인 가상과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통쾌한 논리를 얻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들뢰즈가 남긴 마지막 글이 「내재성: 어떤 생명」(1995)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짧은 논문에서 죽음을 앞둔 철학자는 자신이 개체화의 바탕이라 부르던 선험적 초월성의 장(초월론적 장champ transcendental)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내재성의 평면을 다시 어떤 무-규정의 생명(정관사의 생명 la vie와 구별되는 부정관사의 생명 une vie)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최후의 들뢰즈가 내재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초기 철학과 후기 철학을 다시 통합하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내재성의 개념을 “모든 철학의 뜨거운 시금석”(앞의 책, p. 47)으로 삼고 있는 철학사 해석의 방법은 무엇보다 연속적인 변이의 과정을 보여주었던 들뢰즈 자신의 철학적 여정을 평가하는 데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http://webzine.moonji.com/?p=2301      현대프랑스철학의 개념들/김상환/웹진 문지/문학과 사상사  
21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기본개념 댓글:  조회:853  추천:0  2019-03-12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기본개념   프로이트와 라깡은 “욕망은 결핍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이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신기한 건 이러한 종류의 논란은 언제나 종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이것이 고전의 힘일 것이다. 논란을 끊임없이 끌고 가는 ‘힘’ 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어머니를 성적으로 강하게 갈구하던 아이가 남근기에 이르러 거세에 대한 공포를 겪어내고, 그것을 계기로 성적 정체성과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이론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철학의 세계에서 마음껏 활개 치도록 풀어놓은 라깡의 이론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의 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변용된다. 내용인즉슨 어느 것도 구획되지 않는 연속성의 상상계에서 말을 배움으로써 이름이 주어지고, 따라서 지칭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생겨남으로써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주체가 형성된 아기는 엄마와의 연속적인 관계에서 강제적인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엄마는 안돼! 엄마는 아빠거야!”랄까? 이렇게 아기는 엄밀하게 근친상간이 차단됨으로써 상징계의 질서 속으로 내던져지게 된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철학에서 보듯, 그들은 인간의 욕망이 결핍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의식적 행동의 기저에는 무의식적인 갈망이 있다는 것. 욕망이란 늘 채워지지 않지만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그것이 이 두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이다. 인간은 상징계 안에서 채워지지 않는 타인의 욕망을 쫓는다. 의사, 변호사가 되고자 하고, 대통령, 장관을 갈구하며 말이다.   “욕망은 생성적인 것이다.” 헌데 이 이론을 전면적으로 반박하고 나선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서마저도 『앙띠-오이디푸스』라고 명명할 정도다. 그들은 프로이트, 라깡에 대한 반박을 가족에서부터 시작한다. “어찌 욕망의 메커니즘을 너무도 좁은 가족 안에서만 보는가?”이다. 그들은 욕망개념을 이른바 가족드라마(family romance)안에 가둬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혁명적 사유 안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욕망을 당나귀 눈앞에 걸어둔 당근처럼 쫓아도 쫓아도 먹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예 출발점을 달리해서 욕망이란 끝없이 분출하는 어떤 생명력의 일종이라고 보았다. 즉, 기표 속에 욕망을 가두는 구조주의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욕망은 기표를 바꿔 놓기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기도 한다. 기표들의 체계에 저항하고 구멍을 내고, 적어도 보다 합리적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또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 가타리 역시도 기표체계를 부정하는 낭만적인 이론은 전개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랜 기간 고전의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에 대치되는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 냈다. 이 욕망에 관한 반대되는 이론들은 상충되어 철학계의 획을 그어 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무수히 그어 나갈 것이다. 이렇듯 공부하는 이들의 선택사항이 늘어가는 것, 어느 이론에 수긍할지 혹은 어느 변형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지 결정범위가 늘어간다는 것이 바로 철학의 매력이 아닐까? 1960년대에 들뢰즈는 가타리와 공동연구를 시작했으나 책들은 거의 들뢰즈 이름으로만 세상에 나왔다. 그와 다른 철학의 차이점은 이전까지의 철학은 표상의 철학, 존재의 철학 즉 총체화 하는 담론을 규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어찌보면 정신 분석학과 정치경제학을 통합하고 새로운 사유의 양식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공상 과학 소설에 비유할 만큼 기존의 철학과 거리가 있다고 보고 새로운 개념어를 만들었다. 푸코는 자기자신의 방법론으로 사회이론을 펼쳤다는 점에서 들뢰즈와 닮았다. 철학은 그 철학적 문제를 구성하는 틀 가운데 위치하며, 개별 철학은 그 철학적 이론으로 구성된다. 그리스 철학을 예로 들면 문제의 틀은 만물을 구성하는 아르케를 찾으려는 노력이라 할 수있고  탈레스는 아르케가 물이라고 생각했다. 철학 이론은 당대에는 중요할지몰라도 결국 철학사 적으로 남는 것은 문제의 틀이다. 들뢰즈나 푸코도 수백년 뒤에 그들의 이론 보다도 그들이 던진 문제의 틀이 철학사 적으로 남을 것이다.    철학사의 주류에서 일탈한 철학자들  스피노자, 흄, 니체,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철학사의 구성 가운데 어디에 위치시킬지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상은 철학의 전통적 흐름에서 빗겨나있다. 들뢰즈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중 그는 니체의 권력의지와 계보학을 그대로 인용한다. 권력의지는 자유의지와는 다른 거의 무의식적인 의지이다. 계보학은 누가 진리를 묻는가에 대한 계보를 찾는 것으로. 현실은 여러 가지 차별화 된 층 들이 상호 중첩적으로 작용한다. 그는 힘들의 성격은 권력의지로 평가되고 힘들의 기원은 계보학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보았다. 푸코도 서 지식을 고고학적으로 다룬다. 이는 계보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식의 체계를 중시하기보다 맥락을 중시하는 것이다. 칸트철학을 연구하는다는 가정하에 보면 평면적으로 칸트의 지식 체계 철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왜 이런 철학을 했고 어떤 힘이 칸트에게 작용했는가를 다루는 것이다. 지식의 체계보다는 맥락을 중시하는 것이다. 들뢰즈 역시 니체의 권력의지를 그대로 받아 들여 힘들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들뢰즈 철학의 키포인트는 욕망이다. 들뢰즈는 욕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설명 한다. 18세기 까지만 해도 욕망, 감정 같은 것은 철학의 소재가 아니었다. 철학은 이성으로 하는 이성의 학문이었다. 이후 칸트가 감정 이라 것을 철학적 범주에 넣으면서 감정이 철학으로 들어왔으나, 욕망은 19세기 빅토리아 시기까지만 해도 철학의 대상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욕망은 빈 구멍이라 했다. 2500년 동안 욕망은 자신에 없는 무엇을 채우려는 자신 밖의 무엇을 찾는 것 이었다. 라깡 역시 욕망은 체계적이고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욕망을 손실이나 결핍으로 본다. 기본적으로 욕망은 뭔가 비어 있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개념이었다. 반면 들뢰즈는 욕망을 생산하는 행위로 힘으로 본다. 욕망은 꼭 긍적적인 힘은 아니나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욕망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통하는 면이 있다.  들뢰즈 분석의 기본 도구는 '욕망하는 기계' 다. 기계는 근대철학에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욕망은 심리적인 에너지임. 욕망은 기계처럼 웅웅거리고 삐걱거리며 항상 뭔가를 생산한다. 기계란 개념 구조주의에서 주체로서의 인간이 탈 중심화 됨. 구조가 주체가 된다. 포스트구조주의에선 기본적으로 인간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근대적인 의미의 주체와는 다르다. 구별 하기 위해서 기계란 말을 만들어 쓴 것. 하이데거도 마찬가지지만 주체란 개념에서 인간이란 속성, 인격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욕망은 하나의 흐름이다.  현대 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언어에 대한 관심, 질 보다 양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다. 마르크스-양에 관한 철학 . 기계라 한 것은 주체의 도덕적인 측면 윤리적인 측면 같은 것을 배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흐름과 생성의 철학에서 욕망을 하나의 flow 흐름이라 했다. 그가 말한 욕망의 기계에서 machine은 우리말의 기계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 Machine엔 장치, 도구란 의미가 있다. 기계는 구체적으로 개별적 인간 일 수 도, 사회체제 일 수 도 있다.    욕망은 신체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선 침묵하라"하고 말했듯이 구조, 언어, 무의식 등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겨점에 선 개념들이 있다. 철학자들에게 있어 이런 선상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의식으로 구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항상 딜레마다. 기계나 신체란 개념 역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가계나 신체는 확실히 무의식적인 개념이다. 욕망, 신체, 기계는 다 무의식의 레벨에 속하는 것이지만 의식의 영역에서 다루기에 훨씬 사물적인 느낌을 가진다. 다루기가 자유롭다. 다른사람의 의식이 나에겐 무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기계, 신체라는 것도 인간이나 인간속성을 이야기 하는 것보다 무의식을 이야기 할 때 쉬워진다. 무의식의 영토도 펜이나 지우개처럼 자연소재 같은 느낌을 갖는다.    정신분석과 정치경제학의 연결  욕망하는 생산은 곧 사회적인 생산으로 상식적인 의미의 생산과 같은 것이다. 사회적인 장, 사회적 무대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욕망의 생산물로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양자의 관계를 찾고 결합시키려는 시도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둘을 통합하지 않고 애초부터 하나의 경제학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욕망하는 생산은 자본의 흐름에서 볼 때 리비도의 흐름 같은 심리적인 흐름과 같은 것으로 결국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에 양자 간의 관계는 따로 말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모든 사회는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필요성에 따라 사회를 구성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통제 없이 그대로 놔두는 것은 동물의 사회다. 인간이 욕망을 통제하는 방식은 코드화, 인코딩으로 동물계는 욕망의 통제가 없는 무코드화다. 코드는 충동의 흐름에 일정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충동의 흐름에서 질적인 특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양적인 흐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탈-코드화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방식의 탈-코드화를 ‘공리화’라고 부른다.    들뢰즈의 인간사회 분류  원시영토기계 - 다양한 욕망을 다양한 코드로 통제하는 사회로 욕망이 대상과 일체화된다. 욕망이 대상과 일체가 되는 도착증의 사회. 모든 활동이 욕망에 고착되어 있으므로 탈영토화는 없다.  고대군주기계 - 군주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어 욕망이 군주로 집중된 사회. 욕망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 편집되는 사회지만 욕망이 대지에서 벗어나는 탈영토화, 초코드화가 시작됨  문명자본주의 기계(자본주의 사회) - 자본을 중심으로 모든 욕망이 집중되기 때문에 욕망통제가 초코드화 한다. 그러나 여기엔 원시사회처럼 코드화가 병행되기도 한다. 그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의 이중성을 들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법적으론 자유롭지만 경제적으론 자본가에게 고용됨으로 실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함. 자본이 모든 현상을 통제함으로 전제군주식의 초코드화가 필요한 사회다.  고대사회에는 제한적인 탈영토화가 있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제한 적인 탈영토화가 시작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자본주의 안에 이미 자본주의 붕괴의 요소가 내재되어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운동이 정해진 수위를 넘어서는 것을 방치하면 체제가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탈 영토화를 그냥 방치하지 못한다. 다시 재영토화를 시도한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탈 영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영토화 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안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요소를 가진다. 자본주의를 방치하면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자동 붕괴론처럼 이윤률이 저하되고 결국 모든 자본은 자본가에게 축적된다. 그러나 자본가의 입장에선 생산된 잉여가치가 상품으로 소비되어야 하므로 노동자들이 빈곤해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상품의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윤율은 보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자체모순을 해결 하기위해 케인즈는 국가가 개입해 (국가독점자본주의) 독점자본을 관리하는 국가수요 유효수효를 주장한다.    영세민취로사업같은 것  자본주의가 탈영토화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것을 용인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태를 방치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함으로 자본주의는 스스로 다시 재영토화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자정능력, 수정 자본주의적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비판은 자본 자체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 자체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탈영토화하고 한편으로 초코드화 하면서 코드화 한다. 한편으로 탈영토화를 용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자본주의는 생래적으로 분열증에 걸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분열증이 지극히 정상인 사회다.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이념적으로 탈영토화 코드화를 추구하고 반자본주의 세력인 사회주의가 이념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해 탈영토화 탈코드화를 추구 했지만 결과적으로 또다른 재영토화에 머물고 말았다. 초코드화 한 것이다. 레닌이 1917년 혁명을 완수하고 나서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나라를 위해 내건 것이 신경제정책이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 생산력이 증대될 수 없는 것이다. 이념은 스탈린주의란 사회주의를 내결었지만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 자체는 탈영토화 코드화에 있으나 생산력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재영토화에 머물고 말게 된다. 초코드화의 예를 들면 천리마 운동, 대약진 운동 같은 것들이 있다.   들뢰주는 혁명론자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자본주의의의 분열증을 스스로 부정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정신 분석이란 가치와 오이디프스라는 수단으로 분열증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기본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자본주의의 오이디푸스 이데올로기 역시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 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란 수단으로 분열증을 계속 조작 억압하고 치료하는 재영토화의 도구이다. 자본주의는 정신분석과 오이디프스를 통해 재영토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재용토화 하면 탈 영토화가 안 되므로 자본주의적 발전이 없다. 탈 영토화를 주장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신분석 수단을 통해 재영토화를 하고있다. 그래서 그는 오이디푸스를 거부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주요 저서 중 하나가 다.  자본주의는 정신분석이란 도구를 통해 억압하고 치환하고 재영토화 한다. 사회적 현상과 리비도의 결합을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 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과 정치경제학을 결합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의 길은 분열증을 더욱 가속화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더욱 극한으로 밀고 나가 분열증을 더욱 가속화해 탈 영토화를 조장해야한다. 억압적 질서는 거부하고 탈코드화로 나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이중성을 철저히 거부해야 하고, 욕망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극복해야한다. 현실의 탈코드화 한 것들, 무질서한 것들, 이런 것들을 질서로 치료 하려는 시도가 근대의 이성이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무질서를 질서의 틀로 수용 한다면 발전이 없으므로 현실의 무질서, 탈코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권장해야 한다.  들뢰즈는 분열증과 분열증 환자를 구별 하고 있다. 무질서로 욕망의 흐름이 탈주하도록 해야 하지만 정도를 넘거나 때 이른 돌파하면 붕괴하게 된어 정신 분열증환자가 된다. 고전적인 혁명론은 분열증을 억제해 다른 이성의 코드화를 추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본주의의 극복은 욕망의 흐름을 억제하는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탈주해야 하고 돌파해 나가야 한다. 붕괴되면 정신 이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욕망의 흐름을 다른 기계와 창조적으로 접속 시켜야 파시즘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지 않음. 파시즘은 무솔리니가 어려워진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자 일치단결을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고전적 마르크스 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위기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해 위기가 공황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본주의가 탈영토화가 되지 못하고 재영토화 된 것이다.   빌헤름라이히는 프로이드와 마르크스를 통합의 원형을 이야기 한다. 파시즘을 정치적 역사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심리적,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 박정희정권 국민 대다수가 유신독재를 찬성 하지 않았는데 정권이 독재를 관철 시킨 독재정권이고 히틀러의 독일은 대중이 지지한 파시즘 정권이다.   처칠등 당시의 정치가들은 히틀러란 이상한 놈이 나와 유럽 역사를 파시즘으로 이끌었다고 단순하게 말했다. 독일의 파시즘은 괴벨스등이 주동이 되어 만들어낸 것이고, 대중은 괴벨스에 의해 선동 된 것으로 믿었다. 유럽은 광기어린 놈들을 제거되면 점잖고 올바른 도덕의 역사로 회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막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모순이 노출된 사건으로 보고 정치 경제학적 분석을 내렸다. 그러나 빌헤름 라이히는 대중 스스로가 파시즘을 원하고 억압을 원했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학자들은 흔히 선동을 통해 대중을 조작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선동 이전에 이미 대중이 파쇼를 원하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이다. 설사 대중이 파시즘을 원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파시즘에 동의 한 것은 이미 대중들이 파시즘을 수용할 심리적 조건이 성숙되었기에 그렇게 될 수 있던 것이며 더 나아가 대중 자체가 파시즘을 원하고 있었다. 즉 나치는 욕망의 조작이 계급적 이해를 압도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대중은 스스로 억압당하고자 하는 마조키스트이며 파시스트는 사디스트로 볼 수 있다. 대중은 억압을 원했다. 이런 관점은 파시즘을 욕망의 무의식적 흐름이란 관점에서 해석한 최초의 사례다.   들뢰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파시즘은 탈주의 선상에서 돌파 못하고 붕괴(break down)된 경우로 본다. 자본주의적 분열증을 극복하기위해 재영토화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탈주의 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탈영토화하지 못함으로 재영토화 된 것이라는 것이다. 욕망들이 대상에 고착 될 경우 파괴적 힘이 된다. 예를 들면 현실 사회주의란 탈코드화, 탈영토화를 이념으로 내세웠으면서 개혁코드화, 초코드화 된 것이라 할 수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은 사실 황제의 권력을 가졌다. 전제 군주의 시대는 곧 국가를 중심으로 초코드화 하는 것이다. 그는 현실 사회주의나 파시즘이나 같은 것으로 보았다. 사회주의야말로 1930년대 반파시즘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열심히 싸웠던 사람들이 소비에트 공산당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 둘의 심리적인 구조는 파시즘처럼 비슷한 양태를 취한다. 들뢰즈는 현실 사회주의도 돌파(break through)하지 못하고 붕괴된 것으로 본다.     천개의 고원의 리좀  리좀은 우리말로 하면 근경, 뿌리도 줄기도 아닌 뿌리-줄기, 줄기와 뿌리가 일체인 연근 같은 것이다. 들뢰즈는 서구인식론을 리좀적으로 설명한다. 기존의 서구인식론은 수목구조로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뻗어가는 구조로 보았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로마 철학 -> 중세 철학 -> 근대철학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은 과정을 지닌 것으로 일하고 위계적이다. 하지만 리좀은 수평적이며 단일하지 않고 복수적인 성격이 있다. 동일성보다 다양성이며, 초,탈코드화, 탈영토화된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기존의 철학은 총체적인 종합적인 담론 구조다. 리좀은 기존 철학처럼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나무구조 같지 않고 하나의 모델로 환원 되지 않는다. 리좀은 선을 기본 단위로 한다. 수평적 선의 구조. 들뢰즈는 리좀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하면서 이러한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철학 역사가 리좀 구조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푸코나 들뢰즈도 지금껏 그래왔듯이 역사 분석을 할 때 현재를 분석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분석한다. 사회적인 현상과 욕망의 현상이 일치하는 가에 대한 분석이다. 이들은 메이저에 가려져 왔던 마이너 역사에서 의미를 찾고 마이너가 오히려 메이져를 규정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역사는 항상 리좀적으로 구성되어 왔는데 우리의 인식은 수목형으로 완성되어버렸다. 나무구조는 점을 중심으로, 리좀의 구조는 선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전까지의 인식론적 관습에 의해 선적구조의 인식을 함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선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 선을 끊어 점으로 인식->분절화 함. 우리는 점을 묶어 선으로 인식->총체화 해야 함.    몰 개념 베르그송, 바실라르 등 프랑스 철학자는 독일 철학처럼 사변적이기보다는 자연과학적 비유가 뛰어나다. 몰틀은 분자로 분자의 덩어리에 비유 되는데 재영토화 하고 초코드화 한다는 점에서 리좀과 닮았다. 몰틀은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를 지향하고 몰적인 분절성은 딱딱한 선, 단단한 선, 초코드화, 재영토화 성향을 지니고 있다. 몰틀의 분절성은 유연함, 유연한 선, 무른선, 탈영토화, 탈코드화 성향/ 기능/ 운동을 한다. 분자적 분절성보다 몰틀적이 되어야 자본주의를 극복해 탈영토화로 갈 수 있다.  몰틀적 분절성은 양면적라 몰적인 분절성으로 갈 가능성이 있어 탈영토화 하지 못하고 재영토화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보수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면 몰틀은 절대적 운동성, 탈주화, 돌파로 연결 될 수 있다. 몰틀은 기본적으로 탈영토화 탈코드화 함으로 탈주선이 될 가능성이 충분 하다. 예를 들어 폭주족 ,갱단, 히피, 펑크음악 같은 것은 사회적 경계에서 탈주선 근처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네오나치즘은 붕괴의 케이스.  들뢰즈는 사회 발전의 동력은 학교, 기관, 기업, 국가, 정부같이 크고 단단하고 질서 정연한 곳에서 혁명적 동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선 혁명이 날 수 없는 기존의 세력이 집합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여의도, 강남, 강부자는 혁명의 주역이 절대 될 수 없다. 이들은 영원히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재영토화 할뿐이다. 초코드화에서 탈피할 수 없다. 오히려 탈코드화는 폭주족이 더 가깝다. 사회의 메이저 그룹, 중심 세력, 엘리트 그룹은 사회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 세력도 되지 못한다.    유목민 노마드  유목민은 탈주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관 되면서 정착민과 대비된다. 들뢰즈의 유목민은 실체적 유목민과 상징적 유목민, 둘 다를 가리킨다. 정착민은 국가 권력에 내재화 되어 초코드화 되어 있다. 노마드는 이런 정착민적인 속성을 거부한 벗어난 사람들로 늘 국가나 사회가 전제 군주로부터 탈주 한다. 현대의 전제 군주는 화폐다. 이런 탈현대적인 시대가 곧 오리라고 들뢰즈는 믿는다.  로마제국과 이슬람의 차이; 로마제국 1세기 - 전형적 정착민, 국가체계를 갖추고 전형적 전쟁 기계를 이용한 경우. 퇴역군인에게 영토를 주기 위해 영토 확장. 제국이 정복주체가 됨. 이슬람 7세기 - 전형적 유목민. 똑같이 정복 전쟁을 했는데 마호메트가 제국의 형태를 갖추는 과정 자체가 전쟁의 과정임. 제국 형성 과정=전쟁, 둘이 일치함  정착민과 유목민의 차이; 초코드화, 영토화, 재영토화에 대한 탈코드화, 탈영토화를 향한 노마드의 혁명이 역사다. 보수 엘리트가 역사의 주체라고 생각 하지만, 사실 그러지 않다 노마드적 혁명은 결국 역사적으로 진보주의에 속한다. 탈영토화 노마드적 혁명이 들뢰즈가 말한 혁명인 것이다.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코드라면 욕망을 단일한 중심으로 코드화 하는 것이 초코드화이다. 욕망은 해소 되어야 하는 것이지 억압되고 통제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탈주선을 돌파해야한다. 욕망은 혁명을 소망하는 게 아니라 욕망자체가 혁명이다. 욕망이 억압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이 혁명이다. 혁명의 형태는 욕망을 현실로 지속시킬 때 나오는 것이고 욕망을 추상의 형대로 환원하거나 재영토화 하는 곳에는 혁명이 없다. 혁명은 마음으로부터의 혁명 일수도, 정치 경제적 혁명 일수도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정치경제학 분석과 심리 분석 둘 다를 아우른다. 혁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말하기 어려우나 경제학적 범주에서 본다면 장애인을 보살필 필요가 있을까?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을 취업 시키는 것은 정상인을 취업 시키는 것보다 손해다. 장애인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19세기 빅토리아시기부터다. 들뢰즈는 장애인에 대한 초코드화나 장애인을 고용하는 차원이 아닌 장애인의 존재 자체가 더욱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에서 사회의 동력을 찾는다. 그에 따르면 마이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마이너가 아니다. 대중까지 포함한 메이저에 가려왔던 마이너에 대한 관심 동정은 재영토화라 할 수 있다. 마이너로부터 탈코드화 탈영토화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    # 복합적 신체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해 ‘우리가 기계가 아니다’ 라고 외치는데 기계가 맞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노동자는 비유가 아니라 실재로 산업기계의 이지적 기관이다. 인간이 어쩌다가 산업기계의 부속이 됐을까. 자본의 욕망(리비도) 때문이다. 자본은 자기 몸집을 불리기 위해 인간을 손으로, 화폐를 혈액으로 삼아 생산물을 낳는 신체다.  자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욕망하는 신체는 단일체가 아니라 복합체이고 기계처럼 작동한다. 욕망의 흐름 속에는 인간과 기계, 사물과 동물의 구별없이 모두 접속하여 네트워크 형태의 신체를 구성한다. 즉, 하나의 부분-기관이 항상 다른 부분-기관에 연결되면서 형성되는 리비도적 신체이다. 어떤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고 어떤 흐름을 절단-채취하는지에 따라 신체는 매번 다른 복합체의 기계적 기관이 된다.    접기 이러한 신체구성의 메커니즘을 라캉은 부분충동들의 몽타주라고 규정했다. 즉 충동적 신체는 미리 정해진 목적과 규칙에 따라 소재를 선택하고 결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주어진 소재와 우발적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소재를 조합하는 콜라주처럼 구성되는 신체이다. 신체는 결코 개체 보존이나 생식과 같은 총괄적인 목적성을 갖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부분충동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신체라는 것은 이처럼 무수히 많은 곳과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동시에 거대한 자본이라는 흐름에 유기적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않을 수 있는 보루로 작용할 수 있다. 자본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하는 욕망의 신체는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 코드  흔히 코드라고 말할 때, 코드는 충동의 방향과 성질을 결정하는 단항적 기표들의 연쇄다. 그리고 충동의 방향/의미란 곧 충동들의 결합방식과 그 사건적 의미. 코드는 충동기관들의 결합방향에 따라 신체들의 질적 특성을 결정한다. 여기서 방향이란 미분적 변이의 방향으로, 그런 변이의 방향에 따라 욕망하는 신체의 성질이 결정된다. 코드는 “흐름들의 성질 하나하나를 규정하는 것” 코드는 리비도의 양을 결정하며, 그 양에 따라 충동기관들의 가치가 결정된다.  자본주의가 획일적인 삶의 양식을 생산하는 이유는 일체의 코드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코드는 충동의 흐름에 일정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충동의 흐름에서 질적인 특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양적인 흐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탈-코드화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방식의 탈-코드화를 ‘공리화’라고 부른다. 소유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표시하는 재화의 코드적 가치가 상실되고 모든 재화는 화폐로 측정되는 교환가치만을 갖게 된다. 부의 정도에 따라 능력이 측정되고, 사는 동네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되고 등등. 이와 같이 양화된 충동기관들의 흐름이 결합되어 자본이라는 충만한 신체가 형성되고, 재화나 사람의 존재이유는 이 자본의 충만한 신체에 결부됨으로써만 확인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탈코드화는 사람과 사물을 분리시킨다. 전-자본주의적 코드 사회에서 사물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표시한다. 특정한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사물에 깃든 코드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소유와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탈코드화와 함께 사물의 가치는 양적인 상품가치(교환가치)로 환원된다. 상품화된 사물에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존재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타인에게 팔 수 있다는 의미, 즉 사물과 분리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탈코드화에 의해 사회적 생산단위였던 친족단위는 해체,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재편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의 주된 역할은 탈코드화된 인간의 생산, 즉 원자화된 개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가족 속에서 리비도적 신체는 낱낱이 분리된 유기체, 즉 개체로 재편되고 그 개인들은 자본의 충만한 신체에 달라붙는다. 일전에 ‘한겨레’ 김형태 변호사 칼럼에서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노동자’를 만들지 못해 안달하는 기현상에 대해 꼬집은 글도 이러한 맥락이다.    # 소외  맑스는 노동을 감성적 인간활동으로 규정한다. 노동의 소외란 감성의 소외다. 우리는 결코 감성적 신체의 일부가 아닌 것을 감각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대상이 자신의 감성적 신체 일부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감성적 실천 속에서 파악된 인간은 유기적 개체가 아니라 자연적, 인공적 대상과 함께 감성적 신체를 구성하는 공동체이다. 맑스는 이런 감성적 인간의 집합적 신체성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맑스는 감성적 인간활동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외란 그 주체적 감성활동(실천)이 수동적-관조적 감성으로 전도되는 현상이다. 소외의 결과 실천적 감성의 결과물은 수동적 감성, 즉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맑스는 이런 소외를 상품의 물신성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감성적 실천의 결과물에 불과한 상품이 마치 독자적인 생명과 가치를 지닌 것처럼 시장을 활보하며 창조자의 운명을 지배하는 물신이 된다.  최근 영어광풍을 보자. 영어의 가치는 세계화 시대의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미국식 회화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 자체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다. 영어는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물신주의적 믿음 속에서, 미국식 회화 능력의 유무로 계층화가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의 생산이 은폐되는 것이다.    # 혁명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히 헐벗고 가난한 자가 아니라 재산이 없기 때문에 고유한 정체성도 없는 자들, 안정된 지위가 없기 때문에 정당한 몫이 없는 자들, 자본이 없기 때문에 자본의 재생산기관인 국가도 없고 가족도 없고 사적 소유에 의해 정의되는 사적 인간, 즉 개인도 아닌 ‘무리’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 감성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인간대중이다. 여기에 프롤레타리아의 주체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런 저런 정체성을 지닌 감성적 인식대상이 아니라 감성적 실천 주체다.  혁명은 인과율의 법칙 속에서 오지 않는다.(지젝) 역사 발전의 법칙 속에서 혁명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자는 영원히 혁명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실천이다.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혁명적이다.(들뢰즈-가타리)  반면에 예속집단은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집단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외부 현실을 인식하는 집단이다. 이해와 목적의 틀 속에서, 인과율의 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집단은 언제나 외부 현실의 지배적 힘에 예속된다.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이유는 정신분석이 실천적 감성의 주체를 수동적 감성(인식)의 대상으로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법을 바꾸고 사물의 존재조건 자체를 바꾼다. 모든 법의 정초 과정은 폭력적이다. 이런 제헌적 폭력이 없는 혁명은 가짜 혁명이다. 레닌의 혁명이 폭력적인 것은 단지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이라서가 아니라 혁명 자체가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제헌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외부의 어떤 타자에게도 자신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는 자기 입법적 실천 행위이다. 그럴 때 자본주의 체계에서 그저 먹고 자고 자식만 낳는 존재 취급받던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감성의 질서로부터 스스로를 빼냄으로써 자본주의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혁명적 감성의 실천 주체가 된다.    ◆ 코드: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을 말한다.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TP, 313)  코드의 변이가 있는 곳에서는 단순한 첨가가 아니라 잉여가치 같은 새로운 차원(평면)의 구성이 일어난다.(TP, 314)    ◆ 환경  물질적 자연의 부분 중에서 코드화된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절대적 반복, 즉 절대적 코드화는 없기 때문에 환경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있으며 변한다.  모든 환경은 진동한다. 구성요소의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구성되는 시공간의 블록인 것이다. 예컨대 살아있는 것은 물질(materials)로 구성된 외적 환경, 구성요소 및 구성물질로 이루어진 내적 환경, 막이나 경계로 이루어진 중간환경, 에너지원이나 행위-인식으로 이루어진 병합환경을 갖는다. 모든 환경은 코드화되어있는데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러나 각 코드는 항상 코드변환(transcoding, transduction)의 상태에 있다.(TP, 313)  환경은 혼돈(chaos)에 열려있다.  환경은 혼돈에 열려있다. 혼돈은 소진과 침입의 위협을 가한다. 율동(리듬)은 혼돈에 대한 환경의 대답이다. 혼돈과 율동이 공유하는 것은 ‘사이’이다. 두 환경의 사이, 율동-혼돈 혹은, 캐오스모스이다. (TP, 313)  환경이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형태가 갖추어진 물질(formed substance)에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형식’(형태)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코드이다.  형태와 물질(substance), 코드들, 환경들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TP, 502)  * 주의: matter 와 substance의 차이  둘 다 ‘물질’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에 번역으로는 잘 구분이 안된다. substance란 형태가 부여된 matter이다. “Substances are nothing other than formed matters."(TP, 41) 예를 들면, 잉크병에 들은 잉크는 아직 형태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기에 (병의 형태는 별도이다) matter에 해당하지만 흰 종이 위에 일정한 형태로 배열되어 굳어진 잉크--문자--는 substance이다.    ◆ 층(strata)  코드들(환경들)이 서로 접합(articulation)되어 층(strata)을 이룬다. 그런데 층을 구성하는 접합은 항상 이중접합(이중협격)이다. 접합되는 것은 내용과 표현이다. 형식과 물질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반면에 내용과 표현은 실질적으로 구분된다. 내용의 접합과 표현의 접합에서 내용과 표현은 각각 고유한 형식과 물질을 갖는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상응관계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으며 기표-기의 관계도 없다. 양자 사이에는 실질적 구분이 존재하고, 상호 전제가 존재하고, 동형성(isomorphy)만이 있을 뿐이다.  - 층이 아니라 지칭이다. 어떤 물질적 환경들이 이중분절(절합, 접합)들이 하나의 지층을 형성한다. 제 3장 도덕의 지질학에서 표현된 내용/표현의 지층들을 이중분절의 관점에서 설명한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질로 옮겨진 SUBSTANCE는 그냥 실체로 옮기는 것이 나을 듯싶다.    ◆ 코드화(coding), 위로부터의 코드화(overcoding), 탈코드화(decoding)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코드화란 반복의 패턴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며, 탈코드화란 그 패턴의 소멸을 뜻한다. 위로부터의 코드화란 접합된 여러 코드들을 하나의 통일성 속에 묶어 놓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권력이 개입된다. 국가의 성립은 이러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대표적 경우이다. 뒤에서 살펴볼 리조움(뿌리줄기)이나 다수성(multiplicity)은 위로부터의 코드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 '위로부터의 코드화'는 초코드화로 탈코드화는 그대로 써도 무방할 듯싶다. 초코드화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코드들이 하나의 초월적 코드(기표)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 제시된 전제군주의 신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초코드화를 통해 여러 코드들은 하나의 초월적 기표, 즉 수목형 모델로 환원되고 통합된다. 단 리좀(구근식물-뿌리줄기)는 그런 초코드화를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하는 욕망의 다양한 흐름들 자체로 된다.    ◆ 영토, 영토화  환경구성요소들이 방향성(직선의 모양을 상상할 것--강사)을 잃고 차원성(평면의 모양을 상상할 것)을 띨 때, 기능적이기를 그치고 표현적이 될 때 바로 영토가 존재한다. 율동이 표현성을 가질 때 영토가 존재한다. 영토를 정의하는 것은 표현물들(matters of expression!!)(성질들)의 출현이다. 새나 물고기에 있어서 색의 예를 들어보자. 색은 내부의 호르몬 상태와 연관된 막 상태이다. 그러나 색은 일정한 유형의 행동(성적 흥분, 공격성, 도망)에 묶인 한에서는 기능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반면에 색은 영토적 혹은 더 정확하게는 영토화하는 표징--즉 서명signature--인 시간적 항상성과 공간적 넓이를 획득할 때 표현적이 된다. 문제는 색이 영토에서 예전의 기능을 다시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느냐가 아니다. 후자는 분명하다. 그러나 기능의 이러한 재조직은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고 있는 요소가 표현적이 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의미는 영토를 표시하는 것임을 함축한다.(TP, 315)  영토는 실상 환경과 율동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과 율동을 “영토화하는” 행동이다. 영토는 환경과 율동의 영토화의 산물이다.    ◆ 아쌍블라주(assemblage)    아쌍블라주는 환경으로부터 영토를 추출해냄으로써 시작한다. 모든 아쌍블라주는 기본적으로 영토적이다. 영토가 아쌍블라주를 만든다. 아쌍블라주는 영토적인 한에서 여전히 층에 속한다. 즉 내용과 표현이 구분되는 면에서 층에 속한다.  - 영어로 아쌍블라주로 옮기는 불어의 Angencement은 배치로 옮기는 것이 좋다. 제 10장 얼굴성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배치의 4가성이라고 지칭한다.    아쌍블라주가 층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표현이 기호체계, 즉 기호의 체제(a regime of signs)가 되고 내용이 실제 행위의 체제(pragmatic system), 즉 능동적 행동과 수동적 겪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semiotic system / pragmatic system)이 모든 아쌍블라주의 첫 번째 분할이다. 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 각 경우마다 말해진 것과 행해진 것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술 혹은 표현들(쉽게 말하자면 말해진 것--강사)이 몸들(물체들) 혹은 내용들(pragmata--강사)에 속성들로 “귀속되는”(attributed) 비물질적 변환(incorporeal transformation)은 층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물질적 변환에 대해서는 나중에 들뢰즈>가따리의 언어이론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임--강사). 층에서는 표현들이 기호들을 구성하지 않으며 내용들도 실제 행위(pragmata)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호들이 표현하고 실제의 일로 귀속되는 비물질적 변환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쌍블라주는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유효한 정도만큼 층에 속한다. 우리는 기호의 체제들과 실제 행위의 체제들을 그 나름의 층으로, 앞에서 언급한 광의의 의미의 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새로운 모습을 띠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좁은 의미의 층과는 다른 것 속에 있는 것이다. (TP, 504)    영토성(내용과 표현 포함)의 측면과 함께 영토를 가로지르고 가만있게 하지 않는,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하여 구성된다. 이 선들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선들은 영토적 아쌍블라주를 다른 아쌍블라주로 열어 놓는다.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에 직접 작용하여 그것을 태곳적부터 있었거나 장차 올 땅(land)으로 열어 놓는다(예를 들어, 독일 가곡에서 혹은 낭만주의 예술 일반에서 영토와 땅의 게임). 또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를 그것들이 발동시키는 추상적이고 우주적인 기계로 열어 놓는다.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은 환경의 일정한 탈코드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해서 확대된다. 코드가 탈코드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듯이 영토는 탈영토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다.    아쌍블라주는 4가(價)적이다. 1) 내용과 표현 2) 영토와 탈영토화.    ◆ 탈영토화  탈영토화는 영토를 떠나는 운동이다. 그것은 탈주선(a line of flight)의 작동이다.  1) 탈영토화는 탈주선을 가로막는 보상적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질 수 있다. 이럴 때 탈영토화는 부정적이라고 불린다. 모든 것이 재영토화로 쓰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잃어버린 영토를 “대표”(stand for)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 어떤 대상, 어떤 책, 어떤 기구나 체제를 재영토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기구는 영토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것은 실상 탈영토화를 수행하며, 다만 이는 즉시 재산, 노동, 화폐에의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진다.  2) 탈영토화가 긍정적(적극적)이 될 경우. 바꾸어 말하면 탈영토화가 재영토화를 누르고 재영토화는 이차적 역할만 하는 경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긍정성은 상대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이 그리는 탈주선은 구획되어 있고 연속적인 “절차들”로 나뉘며 블랙홀들로 가라앉고 심지어는 일반화된 블랙홀(큰 재난)로 끝나기 때문이다. 수동적 겪음(passion) 및 의식과 연관된 탈영토화가 일어나는 주체적 기호체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탈영토화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긍정적이다.  3) 절대적 탈영토화 : 절대적 탈영토화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여기서 “절대적”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먼저 탈영토화, 영토, 재영토화, 그리고 대지 사이의 관계들을 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영토 자체는 영토를 안에서부터 움직이는 탈영토화의 벡터들과 분리할 수 없다. (...) 영토적 아쌍블라주 자체가 다른 유형의 아쌍블라주들로 열려 있거나 그것에 의해 끌려가기 때문이다. 둘째, 탈영토화는 다시 상관되는 재영토화와 분리할 수 없다. 탈영토화는 단순하지 않으며 항상 다수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개의 형태들에 참여하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그것이 독특한 속도와 운동을 수렴시켜서 그것을 기반으로 일정한 순간에 “탈영토화된 요소”와 “탈영토화하는 요소”를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제, 본원적 작용(original operation)으로서의 재영토화는 영토로의 회귀를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이 탈영토화 자체에 내재하는 이 차별적 관계들을, 탈주선에 내재하는 이 다수성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땅은 탈영토화의 반대가 결코 아니다. 이는 “the natal"의 신비에서 이미 보여질 수 있는데, 여기서 열렬하고 탈중심적이며 강렬한 초점은 영토의 바깥에 있으며, 탈영토화의 운동에서만 존재한다. 대지, 빙하적인 것(the glacial)은 오히려 최고의 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에 속하며, 인간존재가 그것을 통해 우주의 힘을 따오는 물질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우리는 탈영토화된 것으로서 대지가 그 자체로 탈영토화의 엄밀한 상관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탈영토화가 대지의 창조자라고--단순한 재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땅과 우주의 창조자라고 불릴 수 있는 정도로.  이것이 “절대적인”의 의미다. 절대적인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이나 무차별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주어진 (상대적인) 양들을 초과하는 양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아니다. 상대적인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운동을 표현할 뿐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수적인(multiple) 것으로 간주된 “하나의” 몸(body)을 그것이 소용돌이의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는 매끄러운 공간과 연관시킬 때 절대적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로 간주된 몸을 그 몸이 움직이는 결이 진 공간, 비록 가상적일지언정 직선들을 가지고 측정하는 결이 진 공간과 연관시킬 때 상대적이다. 탈영토화는 두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탈주선을 방해하는 일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하거나 탈주선들을 축소시키기 위하여 구획작업을 하는 이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할 때 부정적이거나 상대적이다(그러나 이미 효과적이다). 탈영토화는 첫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새로운 대지를 창조할 때 바꾸어 말하면 탈주선들을 연결시키고 추상적인 활력선(an abstract vital line)의 차원(power)으로 끌어올리거나 공존지속성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을 그릴 때 절대적이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적 탈영토화는 그것이 초월적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로 반드시 상대적 탈영토화에 의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상대적 혹은 부정적 탈영토화도 작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포괄적인” 어떤 것으로, 대지를 위로부터 코드화하고 탈주선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결합시키는 대신에) 봉합하여 정지시키고 파괴하는 총체화하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 그리하여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혹은 심지어는 상대적인 탈영토화에서도 한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환점에서 탈주선들은 방해받고 구획될 뿐만 아니라 파괴 혹은 죽음의 선들로 바뀐다. 여기에 걸린 것은 실로 절대적인 것 속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다. 대지가 사방에서 에워싼 매장(埋葬) 및 자살 조직의 대상으로서 띠가 둘러지고 둘러싸이고 위로부터 코드화되고 봉합되느냐 아니면 대지가 공고화되고(consolidated) 와 연결되며 생성들로서 그것을 가로지르는 창조의 선들을 따라서 우주 속으로 넣어지느냐이다(니체의 표현: 대지가 빛이 되어라...). (TP, 508-510)    ◆ 리조움  층뿐만 아니라 아쌍블라주들도 선들의 복합이다. 선의 첫 번째 상태 혹은 첫째 종류의 선을 밝혀 보자면 이렇다. 선은 점에 종속된다. 사선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된다. 선은 형상적이든 아니든 윤곽을 구성한다. 그것이 구성하는 공간은 결이 진 공간이다. 그것이 구성하는 셀 수 있는 다수성은 항상 우월하고 보충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일자(一者)에 종속된다. 이러한 유형의 선들은 몰적이며 구획된, 원형의, 이원적, 수상(樹狀)의 체제를 구성한다.  두 번째 종류는 퍽 다른 분자적인 것으로서 “리조움” 유형의 선이다. 사선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며, 부수거나 뒤튼다. 사선은 이제 윤곽을 구성하지 않으며, 사물들 사이를, 지점들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그것은 매끄러운 공간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의 평면을 그려내는데, 이 평면은 그것을 가로지르는 차원들 말고는 다른 차원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구성하는 다수성은 일자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공존지속성(consistency)을 띤다. 이는 계급의 다수성들이 아니라 대중 혹은 무리의 다수성들이다. 규범적이고 법적인 다수성들이 아니라 변칙적이고 유목적인 다수성들이다. 생성의 다수성들이며, 변환의 다수성들이지, 셀 수 있는 원소들도 아니고 질서지워진 관계들도 아니다. 엄정 집합(exact aggregate)이 아니라 퍼지(fuzzy) 집합이다. (...)  그러나 일자와 다수적인 것(the multiple) 사이의 대립을 다수성들의 유형들간의 구분으로 대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두 유형간의 구분은 하나가 다른 것에 내재하는 것을 미리 배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 나름으로 방식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다수성들은 나무모양이고 다른 것들은 아니라는 식이라기보다는 다수성들의 수상화가 존재한다느 것이 초점이다. 이것이, 리조움을 따라 흩어져 있는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할 때나, 그 줄기들이 (특히 얼굴의 경우에 우리가 보았듯이) 공간을 모든 방향으로 결지어서 비교가능하고 분할가능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구획들을 형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또한, “대중” 운동 혹은 분자적 흐름이 그것을 구획하고 정류(整流)하는 축적과 정지의 지점들에서 결합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리조움의 줄기들은 항상 나무에 작별을 고하며 대중과 흐름은 나무에서 나무로 뛰고 나무를 뿌리뽑는 연관들을 창안하면서 항상 달아난다. 이것이 바로 공간을 매끄럽게 하기이며, 이는 다시 결이 진 공간에 재작용한다. 심지어는 그리고 특히 영토들이 이 심층적인 운동들에 의하여 동요한다. 언어도 그렇다. 언어의 나무들은 피는 눈과 리조움들에 의하여 뒤흔들린다. 그리하여 리조움의 선들은 그것을 구획하고 심지어는 결짓는 나무의 선들과 그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탈주 및 파열의 선들 사이에서 동요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개의 선들로 구성되는데 각 선은 그 위험을 지닌다. 우리를 옥죄며 우리에게 동질적 공간의 결들을 부과하는 구획된 선들뿐만 아니라 이미 이 미시적 블랙홀들을 나르는 분자적 선들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항상 그 창조적 가능성을 버리고 죽음의 선으로 전환될 위험, 순전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전환될 위험을 감수하는 탈주의 선들도 그렇다. (TP, 505-506)    ◆ 기계, 전쟁기계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계와 관련하여 두 가지 관점을 비판한다. 하나는 기계론자(mechanists)들의 견해로서 이들은 단순히 부분들의 조립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활력론자들(vitalists)의 견해로서 이는 기계를 생물체에 동화시키거나, 생물체를 기계에 동화시킨다. 이 두 관점이 공히 가지고있는 문제점은 대상을 통일성(unity, 혹은 일자에 의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들뢰즈 가따리가 재구축한 기계 개념은 기술공학적 기계(,the technical machine, 상식적인 의미의 기계)를 넘어선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다수성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이며, 통일성이 구현하는 폐쇄성으로부터의 해방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 가따리는 “영토적 아쌍블라주가 (자연적 조건에서든 인위적 조건에서든) 탈영토화의 운동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하나의 기계가 풀려나졌다고 말한다”(TP, 333)라고 한다.  다른 한편 그들의 기계 개념은 그 독특한 언표(enunciation)의 힘에 착목한 것이다. 언표란 예의 비물질적 변형을 일으키는 표현(말함인 동시에 행함인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앞의 내용--“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참조.  전쟁기계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탈영토화의 양자의 발산이 목적인 기계를 말한다. 즉 변이와 생성이 목적인 기계이다. 전쟁은 변이가 아니라 변이의 실패이다. 전쟁기계가 변화시키는 힘을 잃었을 때 남는 유일한 목적이 전쟁이다. 이럴 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거나 그 자체를 국가기구로 구축한다. 파괴만을 하는 것으로  전쟁기계는 법과는 아주 다른 법(nomos)이다. 국가형태는 자기자신을 재생산하며, 자기자신에 동일하게 남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서 전쟁기계는 변형 속에서만 존재한다. 기술적 창안뿐만 아니라 산업혁신에서, 종교적 창조뿐만 아니라 상업적 유통에서, 이러한 흐름들과 조류들은 이차적으로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도록 허용한다. (TP, 360)    ◆ 블랙홀    이는 탈영토화가 폐쇄되는 경우이다. 이는 때이르거나 극히 갑작스런 탈영토화의 조건에서, 경로들이 봉쇄될 때 일어난다. 이럴 때 기계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개별적인” 집단효과를 발한다. 들뢰즈 가따리는 혁신적 과정의 해방을 위해서는 우선 블랙홀로 떨어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반면에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거나 금제(inhibition)들이 서로 봉합되어 반향하면 공존지속성으로 열려져 나가는 대신에 아쌍블라주의 폐쇄가 일어난다. 마치 진공 속에 탈영토화되는 것처럼. 들뢰즈 가따리는 기계란 항상 아쌍블라주를, 영토를 열고 닫는 독특한 열쇠라고 한다.  탈영토화 재영토화 어떤 사물의 용도가 고정된 사용개념을 벗어나(탈영토화) 새로운 용도로 쓰이게 되는(재영토화) 개념으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손은 강의실의 영역에서는 공부하는 기계로 쓰입니다. 교수는 칠판에 손으로 분필을 가지고 글씨를 쓰고 학생은 손으로 노트에 글씨를 쓰는 공부 도구 역할을 합니다. 이 손의 용도는 식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에 들여오면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도구로 바뀝니다. 이 때 교실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벗어나 (이것을 탈영토화라고 합니다) 식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가져옴으로써 (재영토화) 손의 용도는 바뀝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어떤 사물과 연관된 기계적 관계를 생각할 때 이러한 영역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됨을 설명하는 철학적 용어입니다.  미셸 푸코는 현대의 권력을 신체 권력으로 파악한다. 강압이나 권위로 대중 위에 군림하는 거시 권력이 아니라, 개개인의 신체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포섭해가는 미시 권력이라는 뜻이다. 푸코는 이 신체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판옵티콘(pan opticon ; 일망감시체계)이라 한다. 이와 더불어서 그는 공간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주공간처럼 우리의 신체도 수직적, 수평적 공간 활동을 하고 있다.  푸코의 비판적 계승자인 질 들뢰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의 ‘영토’를 벗어나라(‘탈영토화’)고 권한다. 자기만의, 소수자의 새로운 영토를 만들라(‘재영토화’)는 주문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권력을 보다 확장해가는 거대 영토와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이제 사이버 공간에서도 자신의 의미,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거대 자본에 늘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소수자본도 그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여성, 노역자, 동성애자, 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투쟁은 눈물겹다.  빛의 속도의 시대에 출발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있다면, 비행기를 발명한다는 것은 추락을 발명하는 것이다. 아바타란 소멸을 연습하기 위한 가면의 존재들이다. 차라리 침묵하라. 혹은 감쪽같은 변신. 푸코와 들뢰즈를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유와 철학의 행동방침이다. 그는 다세포 소경인 내게 이렇게 말한다.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전원 지방적으로 행동하라"  
20    『천 개의 고원』 읽기 댓글:  조회:850  추천:0  2019-03-12
『천 개의 고원』 읽기 『천 개의 고원』 제1장, 2장, 3장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 이하 MP)』의 중심적인 문제는 배치(aggregation)의 문제, 특히 (나의 단견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배치의 문제이다. 사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회적 배치의 논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권력 형성체(물)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들이 『앙띠 오이디푸스 (Anti-Oedipus : 이하 AO)』에는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나는 그것들이 욕망, 탈주, 탈영토화의 선차성에 비해 눈에 띄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푸코의 질문이며, 그리고 이들이 그러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푸코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배웠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항상 구별을 행하면서, 혹은 심지어 예비적인 대립을 설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며,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배치의 방식의 상이한 종류들 사이에서 구별을 설정하거나 또는 상이한 다양체들(multiplicities)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이미 나는 다양체라는 개념에서, 우리가 AO에서의 다양체 개념의 사용법과 여기[MP]에서 다양체 개념의 사용법 사이의 변동을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AO에서 다양체는 모든 것을 초월적 통일체로 묶어버리는, 질서를 갖춘 총체성들에 반대하기 위해서 요청되었다. 이것과는 반대로 다양체는 모든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사방팔방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요점은 다양체들을 구별하는 것, 그리고 각 다양체 내부에서 구성적인 측면을 훨씬 명료하게 조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체들 중 어떠한 것도 무작위적이거나 아나키적이지 않다. 다양체들은 각각 조직되어 있으나 상이하게 조직되어 있다. 리좀 대 나무, 무리 대 대중은 상이한 다양체들 혹은 상이한 배치의 논리들을 설정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혹은 실재적으로, 각 다양체에 관하여 상이한 것은 그 구성이다. 리좀과 나무의(혹은 무리와 대중의) 차이는 상이한 구성에 있다. 설령 MP에서 그렇게 사용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개념 구성이 여기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처음 두 개의 장들은 이러한 구별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직접적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상당히 친숙해 있는 주장의 논리를 제시하고 싶다. 하지만 3장에 이르게 되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여기에서 논점의 차이를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바란다. 처음의 세 장에서 우리는 상이한 종류의 주장을 보게 된다. 제1장과 제2장은 우리가 수목적 구조와 체계보다는 리좀적 구조와 체계를, 대중보다는 무리를 더 선호한다라는 윤리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제3장은 그 제목이 이미 이 부분이 도덕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지시해주지만, 그러한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3장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도덕]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서술한다. 제3장은 단지 삶이 어떻게 분절되고 구조화되고 형성되는지 등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말할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들이 AO에서 제시한 첫 번째 요점, 즉 우리는 인간적인 것, 자연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는 바로 그 요점의 상관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장을 어떻게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제3장의 제목은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대지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이다. - 역주] 상이한 종류의 장들 사이의 이러한 구별로 인해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에서 존재(무엇이 있는가)와 당위(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놀라게 된다. (나는 존재Sein와 당위Sollen의 칸트/헤겔 틀에 놀랐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물학과 정치학을 연결시킬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러한 것 뒤에는 진정성(authenticity=충전성)의 담론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진정성(=충전성)의 담론에 따르면 생물학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은 간접적으로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명령(mandate)이 되는 것은 아닌가? ― 우리는 말벌과 서양란처럼 각자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혹은 대지의 조직처럼 조직을 창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는. 이들이 도덕의 지질학으로 의미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대지와 같이 되기? 당위를 존재로 번역하기? 어쩌면 내가 여기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몰입하고 있는 챌린저 교수와 생물학적 쟁점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거기에서 명시하고 있는 논쟁들의 끝에서부터 3장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하고 싶고, 그것이 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있는지 혹은 질문을 전환시키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 제3장은 생물학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사회사상의 여러 공준들 혹은 패러다임들의 자격을 박탈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제3장의 절반 이상을 기호와 의미작용에 관해서 논의한 다음에 이들은 언어의 제국주의, 즉 모든 기호 체계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따라서 언어에 대한 지시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는 해석적(interpretative) 패러다임을 공격한다. 혹은 이들은 이러한 입장을 구성한다. "비언어학적인 체계를 가진 모든 기호론은 언어라는 중개를 이용해야만 한다 … 언어는 다른 모든 언어학적, 비언어학적 체계의 해석자이다."(62-63)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명제를 주장하는 어떤 특수한 사상가를 인용하지 않지만, 이러한 관념은 다양한 구조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었다.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에서 구조주의 일반이 모든 구조의 조직화를 위한 보편적 모델로 언어의 명제를 사용한다고 규정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가 보편적인 모델이 아니며 단지 많은 기호들 중에서 하나의 기호 체제에 불과하며, 다른 것들에 대해 특권을 지니고 있지 않고 내용과 표현 관계의 한 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들이 언어학에 관해 다루고 있는 제4장과 기호체제에 관해 다루고 있는 제5장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질 논의이다. 하지만 제3장에서 이들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는 세 가지 상관적인 공격을 행하는데, 이것은 구조주의에 대한 세 가지 특정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단어와 사물의 상응,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분리. 이러한 도전 중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에 관한) 첫 번째 도전을 정립하기 위해서 이들은 푸코, 그리고 푸코가 에서 행한 감옥에 관한 분석으로 향해 간다. '감옥'이라는 단어가 그 내용의 표현, 즉 사물의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감옥이라는 사물은 '감옥'이라는 단어를 일차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사물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내용의 형식이라고 부른 것, 즉 학교, 군대, 병원 등과 같은 다른 내용 형식과 함께 어떤 지층(stratum)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형식이 관련될 수 있는 표현의 적합한 형식은,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감옥'이 아니라 '범죄(delinquent)'이다. "'범죄'는 '감옥'이라는 내용의 형식을 상호전제하는 표현의 형식이다."(66) 따라서 여기에서 사물은 단어에 상응하지 않으며, 내용의 형식은 표현의 형식과 관련된다. 감옥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상태이며, 건축이며, 일련의 감금의 실천들, 권력의 형성체 등등이다. 그리고 '범죄'는 실재로 단어나 기의로서 잘 지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에서 생겨나는 진술의 집합에서 구체화되는 것으로, 기호들의 체제로 잘 이해된다. 그러므로 푸코와 들뢰즈-가타리를 섞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상호 교차하는 두 가지 다양체, 즉 내용의 비담론적 다양체(권력의 형성체)와 표현의 담론적 다양체(기호의 체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두 다양체들은 상호 교차하지만 상응하지는 않는다. 이 다양체들은 추상적 기계 혹은 다이어그램(=도표)에 동등하게 참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보다 정확하게 쓴다. "이것들은 일종의 도표로서 … 작용하는 추상적인 기계의 공유된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67) 에서 도표는, 여러분이 기억하는 대로, 판옵티콘이었으며, 이 판옵티콘은 감옥만이 아니라 훈육 사회의 모든 제도들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푸코는 이렇게 묻는다. "감옥이 공장, 학교, 군대, 병원을 닮았으며, 이 모든 것들이 감옥을 닮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DP, 228) 이것이 놀랍지 않은 까닭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동일한 다이어그램 혹은 추상적인 기계, 판옵티콘을 내포하고 있거나 이것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단어는 사물에 상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현의 형식들과 내용의 형식들은 추상적인 기계에 동등하게 참여함으로써 상호교차한다. 현실적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이 여전히 좀 더 복잡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용과 표현 모두가 형식뿐만 아니라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푸코가 제시한 예에 대입해 보자. 감옥이라는 비담론적 다양체와 범죄 담론이라는 담론적 다양체는 각각 형식과 실체를 갖는다. 나는 감옥, 비담론적 내용이 어떻게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가질 수 있는지를 쉽게 이해한다. 즉 그것은 벽, 건물, 틀에 박힌 일과 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담론적인 것, 표현, 범죄의 담론이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가지는지는 나에게는 별로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표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의 물질성과 같은 어떤 것인가? 나는 그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표현을 여기에서 언어 이상의 것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범죄는 실제로 담론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실천들의 집합이며, 따라서 그것은 육체적(corporeal)인 동시에 이와 동등하게 비육체적이다. 어쩌면 이러한 실천들의 신체들과 이러한 담론의 물질성은 모두 표현의 실체일 것이다. 설명해야 할 것이 더 있다. 나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 기계의 공유된 상태에서 상호교차하며, 이러한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혹은 더욱 자세하게 말해서 감옥과 범죄는 판옵티콘에서 상호교차한다. 하지만 무엇이 내용과 표현을 교차하게 하는가? 혹은 이러한 상호교차의 논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무작위적인 것, 우연한 것일까? 아니다. 이것이 기계적 배치들의 역할이다. 기계적 배치들은 각각의 지층에서 내용과 표현의 상호교차 속에서 작동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기계적 배치들은 내용과 표현을 상호 조율시키고, 내용의 절편들과 표현의 절편들이 일대일 대응관계를 맺게 한다."(71) 기계적 배치들은 내용과 표현을 이것들이 속하는 추상적인 기계로 나아가게 한다. 기계적 배치물은 내용과 표현의 지층이 추상적인 기계들로 움직이게 하는 구성적인 중개자이다. 따라서 푸코의 예에서는 어떤 것이든 기계적 배치가 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감옥은 내용이며, 범죄는 표현이고 판옵티콘은 추상적인 기계이다. 내가 보기에 재판은 내용의 절편들(감옥, 감옥 건물, 판에 박힌 일과 등등의 절편들)을 표현의 절편들 (범죄의 절편들)과 묶어버리며, 이것들을 추상적인 기계(판옵티콘)를 향해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기계적 배치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전체 장치(내용-표현-배치)는 모두 이중 분절(double articulation)이다. 나는 이 정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요소들을 끌어 모으고 싶었다. "각 지층들은 내용과 표현의 이중 분절이다. 내용과 표현 모두는 실재적으로 구분되고 상호 전제 상태에 있으며, 서로 뒤섞인다. 내용과 표현과 함께 가는 머리 둘 달린 기계적 배치들은 자신의 절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72) 푸코의 작업으로 번역해 보자 : 감옥과 범죄는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것들은 재판이 자신의 절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기계적 배치들의 기능 때문에 서로 뒤섞인다. 나는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푸코적인 예를 통해서 이러한 개념들 중 몇 가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재적으로 나는 제3장의 끝부분에서 구조주의에 대한 첫번째 도전을 펼쳐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과 사물이 상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 향하는 이중 분절을 통해서 배치된다고 말한다. 구조주의에 대한 두 번째 도전은 토대와 상부구조적 요소들(이것은 근본적으로 기의-기표 관계처럼 동일한 형식을 취한다) 사이의 사회의 분리를 향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토대-상부구조라는 틀은 경제 대신에 내용을 부여하며, 그것[내용]에 표현 혹은 상부구조에 대한 확실한 우선성과 최종 결정을 부여한다. 혹은 이들은 실제로는 세 가지 수준들[심급들]을 본다. 내용의 경제적 토대 ; 배치들에 의해 점령된 상부구조의 첫 번째 심급 (이것은 알튀세르의 RSA(억압적 국가 기구)들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 표현을 설정하는 상부구조의 상위 심급으로 알튀세르는 이것을 ISA(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들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사회적 은유는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다른 지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내용과 표현은 또한 이중 분절의 유사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하나의 추상적 기계를 향하여 배치된다. 경제학은 내용과 표현으로 이루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사회 제도들도 교회나 학교처럼 상부구조적이라고 특징지어진다. 토대/상부구조라는 틀이 지닌 문제점,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 개념이 지닌 문제점은 사물들이 단순히 그러한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사회가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 오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본성을 오해한다 … 우리는 기호 체제의 본성을 오해한다. 기호 체제는 정확히 말해 권력 조직 혹은 배치들을 표현하는 것이지, 내용의 표현이라고 가정되는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 그것은 권력 조직의 본성을 오해한다 … 그것은 내용의 본성을 오해한다."(68-69) 구조주의가 지닌 문제점은 그것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오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격하게 실재성(reality)의 본성에 관한 과학적 질문, 즉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는 어떠한 우위성도 어떠한 결정도 없으며, 또한 내용과 표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한 우위성이나 결정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우위성은 추상적인 기계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은 이미 전제된 두 가지 평행한 형식화 작용과 결부되어 있다. 그 두 형식이 끊임없이 자신의 절편들을 교차시키고 서로에게 전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두 형식이 파생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서, 그 두 형식의 관계를 조정하는 기계적 배치들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그런데도 만일 이러한 평행론을 피라미드 이미지로 대체한다면, 우리는 내용(그것의 형식을 포함해서)을 가지고 생산의 경제적 하부구조를 만들게 된다. 추상적인 것으로 점철된 하부구조를 말이다."(68) 두 가지 형식들은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되며, 피라미드적 이미지는 경제적 토대에 추상적인 것의 특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그 최종심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AO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추상적인 기계는 내용과 표현에 대해 어떤 우위성을 부여받는다. 내용과 표현은 사실 추상적인 기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더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푸코의 틀과 이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은 생산적이고 일차적이다. 나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푸코의 주장과 매우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AO와는 반대로) 이 책에서 사회를 사고하려는, 그리고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사고하려는, 사회적 질서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사고하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력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에게 열려진 문제로 남은 것은 내가 지난 번에 설정했던 질문의 일종이다.[하트의 AO 읽기를 참조 역자] 즉 욕망하는 기계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중에서 어떤 것이 우위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생산하고 있는가?[욕망하는 기계가 추상적인 기계를 생산하는가, 혹은 추상적인 기계가 욕망하는 기계를 생산하는가?] (나는 내가 얼마 전에 인용했던 이러한 파생의 개념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나는 실재로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맥락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을 제기하기 되면 더욱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질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사회적 배치이론에 우리가 대면했을 때 답해져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제3장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되어 있는 구조주의에 대한 첫 번째 두 가지 도전들이었다. 말과 사물의 상응, 그리고 경제적 토대에 의한 사회적 상부구조의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도전은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구별과 관련되어 있는 세 번째 도전을 제공한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이제 다시 구조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전의 틀을 생각하면서 제3장의 앞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검토하고 싶다. 구조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전들이 문제라고 한다면, 3장의 앞부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러한 도전들을 어떻게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장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부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물학적 담론의 틀 내부에서 생명은 세포 화학에서부터 지질적 형성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이중 분절을 통해서 조직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 생물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는 어떠한 본성의 차이도 없으며 모든 생명(광물, 동물, 식물)은 똑 같은 선들을 따라 기능한다는 AO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 사회 역시 이중 분절에 따라서 조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그것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생물학적인 용어로 이중 분절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권위가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존재(Sein)와 당위(Sollen)에 관한 질문, 즉 존재하는 것과 존재해야만 하는 것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제3장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혹은 오히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을 회복하게 된다. 어떻게 우리는 도덕의 지질학이라는 제목을 (니체가 에서 행한 것처럼) 이해해야 할까? 지질학은 계보학을 대신하며 기원전 1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변화의 과정, 계보학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도처에서 항상 존재하는 고정되고 영원한 틀인 이중 분절에 대한 것이다. 이중 분절은 생명의 논리이며, 동등하게 대지와 사회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대지는 도덕을 되찾게 되며, 존재(Sein) 즉 존재하는 것은 당위(Sollen) 즉 존재해야만 하는 것을 되찾게 된다. 『천 개의 고원』 제4장, 5장, 6장 들뢰즈와 가타리는 MP의 서문에서 다양한 장 혹은 다양한 고원들이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어떤 순서로든 읽힐 수 있다고 썼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는 그렇게 되면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은 AO처럼 완고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AO에서 각 부분의 결과는 다음에서 체계적으로 수용되어 발전된다. 하지만 MP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좀이나 이중 분절 같은) 개념들이 하나의 고원에서 정립되고 나서 이후 다음 고원에서는 이렇게 정립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주장이 진보적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고원은 실재로는 충분하거나 자기 충족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 책 전체에서 제시된 좀 더 일반적인 논점을 지시한다. 물론 그 책에는 상이한 어떤 것이 있지만, 각각의 고원은 그 자체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그 어떤 고원도 책 전체를 읽기 전에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지난 주에 제3장인 도덕의 지질학을 읽으면서 겪었던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생물학적인 담론 때문에 좌절을 맛보았다. 이 생물학적 담론에서는 어떠한 윤리적인 개입 지점도 없으며, 정치나 화용론이 들어설 공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제3장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에는 정치적 개입의 지점들이 있다. 하지만 제3장에서는 아닐 것이고, 기원전 1만년에도 아닐 것이다. 나는 다른 고원들에서 정치적 계기를 발견해야 했으며, 다른 고원들의 관점에서 제3장을 읽어야만 했다. 생물학에서 실험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물학에서 어떻게 변주, 이행, 탈영토화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발견하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사물들이 우리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존재하게 만드는 실험일 것이다 ― 아마도 발견이 아니라 따라서 발명일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예는 스텔락(Stelarc)같은 현대의 신체 예술가들이다. 스텔락(Stelarc)은 자신의 실체를 성형외과 수술로 외적으로 변화시키거나 혹은 내부적으로는 위가 작동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정치적인지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간에 다룰 문제이다. 정치 제4장, 5장, 6장은 모두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영역에서 작동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어떤 방식으로 이 부문들이 정치적이며, 정치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싶다. 전제조건 중의 하나이자, 이러한 장들 중 처음 두 개의 장에서 언어학과 기호론(semiology)에 관한 질문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구조주의나 몇 가지 구조주의적 조류가 지적하고 있듯이) 언어가 모든 구조들과 조직들의 모델이 아니며, 오히려 언어의 문제는 단순히 기호체제라는 더 큰 질문, 기호계(semiotics)의 문제의 부분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기호체제가 무엇인지 혹은 기호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방식이 언어에서 출발해서 그 다음으로 확장하거나 여기에 무엇인가를 외삽하는(extrapolate)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히 상이한 궤적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최초의 근접점으로서 기호체제는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하고 있는, 사원의 파괴 시기 즈음의 고대 유태인 사회를 생각해 보자. "즉각적으로 기호계에서 긍정되고 있는 유대적인 특정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기호계는 다른 기호계 못지 않게 혼합되어 있다. 한편으로 이 기호계는 유목민들의 반-기표작용적 기호계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p.122) 유태인들은 방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기표작용적 기호계 그 자체와 본질적으로 관계되어 있다."(pp. 122-123) 이것에 의해 유태인은 제국적 사회를 꿈꾸거나 재건하며, 마침내,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는 그것은 특정한 후-기표작용적, 정념적 체제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제 이러한 혼합된 기호 체제는, 이러한 혼합된 기호계는 고대 유태인 사회에 다름 아니게 된다. (라보프와 같은 사회언어학자들이 언어가 또한 사회적이라고, 혹은 언어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이 [언어적] 기호 체제가 또한 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어떠한 기호체제도 사회 그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사회는 이러한 기호들의 체제에 다름 아니다. (혹은 사회는 또한 신체들의 체제라고, 기호체계와 구별되는 물리적 체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잠시 옆으로 젖혀두자.) 일단 우리가 기호체제의 좀 더 거대하고 적합한 틀에서 언어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면, 그리고 우리가 기호들의 체제를 사회라고 인식하게 되면, 이것이 정치적인 영역이라는 것, 즉 모든 질문들이 즉각적으로 폴리스의 문제, 사회적 장의 문제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영역이라는 것이 아프리오리(a priori)하게 분명하다. "언어는 그것이 언어학의 사태이기에 앞서서 정치적 사태이다. 심지어 문자성의 수준에 관한 가치평가는 정치적인 문제이다."(139-140). 하지만 단순히 사회적 결과를 지시하거나 사회적 결과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문제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내가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단어로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 주에 나는 대안들과 행동의 가능성을 지시하기 위해서 윤리학에 관해 다소 모호하게 말했다. 아마도 나는 윤리학보다는 화용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행동을 향한 이 장들의 첫머리(opening)이다. "화용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다"(82)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화용론은 기호계(semiotics)의 정치학이다. 여기서 이들이 정치적이라는 단어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정치를 행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은 실천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제일 처음 필요로 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여러분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제 정치행동에 대한 기준을 제안하고 있는지, 이들이 사용법에 관해서 혹은 어떤 것에 관한 특수하고 두 개의 상이한 특수한 사용법에 관해서 언제 말하기 시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수와 소수의 차이가 아마도 우리가 이들 장에서 얻는 가장 분명한 기준들이다. "와 는 두개의 상이한 언어들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두 가지 사용법 혹은 기능들을 부르는 말이다."(104) 언어의 다수적 용법은 언어의 통일성과 균일성을, 언어의 상수들의 고정성을 주장한다. 소수적 용법은 상수의 축소를 작동시키며 언어의 변주를 증식시킨다. "다수적 양태와 소수적 양태는 언어에 관한 두 가지 상이한 취급법이며, 이 중 하나는 다른 하나로부터 상수를 추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연속적인 변주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106)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다수파(majority) 용법, 즉 지배적인 표준과 언어의 소수파(minority) 용법, 즉 표준을 설정하지만 또한 종속적인 표준을 설정하는 것, 고정된 게토의 언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수자(minoritarian) 용법, 즉 어떠한 표준도 설정하지 않으며 단지 변주만, 즉 다수적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변주만을 생산하는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저자들은 소수적 언어를 발명했다. 혹은 보다 적합하게 말해서, 이들은 언어의 소수자 용법을 만들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인용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아름다운 표현에서는, 모든 위대한 책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졌다. 이러한 소수적 언어 혹은 소수적 문학이 다소간 카프카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책자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차이를 보다 거대한 구도에 투사해야 한다. 언어의 두 가지 용법, 말하거나 글쓰기의 두 가지 방식 뿐만 아니라 사회의 용법, 생활의 두 가지 방식에도 말이다. 삶의 다수적 혹은 다수파 방식은 사회의 표준을, "성인-백인-이성애자-유럽-남성"(105)을 지칭한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소수적 혹은 소수파는 따라서 비표준적인 삶의 방식을 지칭한다. 다수파와 소수파의 차이는 수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사실 소수파들은 대부분 수에 있어서 다수파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차이는 수의 차이가 아니라 역량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즉 다수파와 소수파의 차이는 역량 차이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다수파의 표식으로서 사회적 표준 혹은 상수를 지칭한다. 따라서 소수파적 삶의 방식은 종속된 체계, 혹은 하위체계를 지칭한다 ―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표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하위 문화에 관한 우리의 통념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영국 문화연구에서 발전된 하위문화에 관한 질문을 이런 맥락에 위치지우는 것도 흥미롭다 ― 특히 나는 딕 헤디지 Dick Hebdige의 책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수자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다음을 구별해야만 한다. 상수이자 동질적인 체계로서의 다수파, 하위체계로서의 소수파들, 그리고 잠재력있고 창조적이며 창조된 생성으로서의 소수자."(105-106) 하위체계 혹은 하위문화로서의 소수파가 지배적인 표준에 접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소수자 되기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나는 이 점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독일어로 글을 쓴 체코계 유태인으로서의 카프카는 어쩌면 독일어를 탈영토화하는데 있어서, 독일어를 외국어로서 발명하는데 있어서 괴테보다 더 나은 입장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어떤 지점에서 이것이 하위문화, 그리고 하위문화의 창조성에 관한 헤디지의 개념과 연결되는가이다. 따라서 소수자적 용법은 종속된 주민들에게 적합한 용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창조성에 의해 정의된다. 사실 소수자는 이러한 세 가지 중에서 창조성 혹은 생산의 유일한 원천이다. 다수파 용법은 단지 지배적인 표준만을 되풀이할 뿐이며, 소수파 용법은 종속된 표준을 반복한다. 다수파가 되기나 심지어 소수파가 되기도 없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동질적인 반복에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소수자적 용법만이 생성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생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명령어(order-words)의 맥락으로 되돌아가자. 명령어의 두가지 용법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들 중에서 다수적 용법은 지령 혹은 명령이다 ― "너는 이것을 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이들 각각은 거의 죽은 문장이다. 명령어의 다수적 용법은 항상 평결이다. 물론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용법은 아니다. "명령어는 항상 그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놀람의 외침이나 도주하라는 메시지와 같은 것이다."(107) 명령어의 소수자적 용법은 탈주선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이러한 탈주선들이 정치적인 대안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탈주 혹은 도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명령어 속에서 삶은 항상 죽음의 대답에 응답해야만 한다. 탈주함으로써가 아니라 탈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써. 즉 명령의 구성물을 이행[통과]의 성분으로 변형시킴으로써."(110) 탈주는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다수적 용법, 표준, 규범, 법에 대한 거부여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대안의 창조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탈주는 단순히 탈주―부정적이고 공허한 것일지 모르는―일 수는 없다. 탈주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즉 구성적 탈주. 이제, 내가 구성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규범, 새로운 다수파의 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인용한 구절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그것은 "질서의 조성을 이행의 구성요소로" 변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행이란 내가 구성적 탈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새로운 질서, 새로운 표준이 아니라 새로운 용법, 어쩌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가장 요약적인 형식으로 여기에서 정치학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즉 대안적인 용법, 이행, 구성적 탈주. 보충해서 말하자면, 소수자 정치학에 관한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성-되기"라는 용어를 귀찮을 정도로 쉽사리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싶다. (여성-되기라는 용어는 이미 AO에서, 슈레버 판사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슈레버 판사는 여성이 되어가던 사람이었다.) 이 용어는 여기에서 원칙적으로 소수자적 용법은 창조적이지만 다수자적 용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 혹은 다시 말해서 소수자적 용법은 생성들이라는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다수자-되기란 없다. 다수파는 결코 되기(=생성)가 아니다. 모든 되기는 소수자이다. 여성은, 그 수와는 무관하게, 소수파이며, 하나의 상태 혹은 하위집단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인간 전체와 관련해서 여성-되기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생성을 가능케 할 때 뿐이다. 여성이 이 생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자기 자신이 이 생성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 남성과 여성 모두를 변용시키는 여성-되기이다."(106) 남성은 다수파이며 여성은 소수파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많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표준은 남성을 통해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여성/소수파는 따라서 하나의 상태 혹은 하나의 하위 집단이며, 이것은 그 자체로는 창조적이지도, 전복적이지도 않다. 창조적인 것은 소수파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소수자적 용법, 되기이다. 여성-되기는 과정이며, 이 되기는 여성을 그 궁극점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더 여성적으로 되는 과정이 아니며, 또한 종국적인 이상적 정체성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슈레버 판사의 여성-되기는 단순히 그가 성별만을 변화시키는 한에선 여전히 오도된 것이다.) 여성-되기는 그 궁극점으로서 정체성을 지니지 않으며 또한 실제로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궁극점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안, 이행을 창조해내는 것은 남성이라는 표준으로부터 일탈하거나 혹은 탈주하는 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페미니스트적 실천, 페미니스트적 용법을 명명하는 방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 "여성-되기"라는 이 용어를 둘러싼 여러 흥미로운 논쟁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앨리스 자딘과 로지 브레도티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에 반대하는 글을 썼으며, 카밀라 그리거는 그것을 유용한 페미스트적 개념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여성 되기에 관해서 내가 인용했던 구절에서 생겨나는 소수자 정치학에 관해서 또 다른 첨언을 하고 싶다. 이러한 여성-되기는 모든 인류, 남성과 여성을 마찬가지로 변용시킨다고 이들은 말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처음부터 다수파는 좀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고 소수파는 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수와 소수가 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일단 우리가 다수와 소수를 두 개의 정치적 용법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다수자와 소수자는 역전된 방식으로, 절대적 방식으로 수와 관련을 맺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은 역전된다. 다수파는 추상적인 표준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는 한은 결코 그 누구도 아니며, 그것은 항상 이다 … 반면 소수파는 그가 모델로부터 일탈하는 한에서 모든 사람 되기이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역량을 갖게 되기이다. 다수자라는 '사실'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의 분석적 사실이며 모든 사람의 소수자-되기에 대립되는 것이다."(105) "연속적인 변주는 모든 사람의 소수자-되기를 구성하며, 이것은 의 다수자적 과 대립한다. 의식의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소수자-되기는 자율이라고 불려진다."(106) 나는 이 설명의 집단적 차원에 흥미를 느낀다. 이 설명은 때로 탈주에 관한 개체주의적 통념과 아주 비슷한 것을 비준한다. 하지만 소수자적 정치학은 집합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보편적이다. 혹은 적어도 잠재적으로 보편적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만인의 정치학이다. 추상화 나는 여전히 추상화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을 개괄하려고 한다. 이것은 대부분 추상적인 기계들에 대한 이들의 분석을 에워싸고 있다. 공통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빈번히 너무 추상적이라고, 특히 정치적 논의에 있어서는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나는 종종 이런 반응을 접한다. 그 이유는 추상적이라는 것이 관념적 영역에 속해 있다고 가정되는 반면, 실천적인 것은 항상 추상화의 최소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구체적이라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실천적 정치학에서 추상적인 것의 역할을 주장한다. 이를 위한 설명의 첫 번째 수준은 이들이 추상적인 것을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변동이 우리에게 중요한 까닭은 실재와 관련해서 이 두 가지 개념들이 가지는 위치이다. 관념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만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에 대립하지만 그것은 또한 완전히 실재적이다. (맑스에게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실재적 추상화"에 관한 맑스의 논의가 이것에 아주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틀 안에서 말하는 것은, 이러한 잠재성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현실적인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혹은 프랑스어의 의미에서 현실적(actuel)이 아닌 것은 공간적으로 현재적이지도 시간적으로 현재적이지도 않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실재적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가 가장 좋아하는 예는 프루스트의 기억(회상)이다. 기억은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따라서, 추상 기계 혹은 다이어그램은 그것이 비록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잠재적이며 완벽히 실재적이다. (판옵티콘에 관한 푸코의 이해가 하나의 다이어그램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판옵티콘은 잠재적,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러한 추상화의 수준에서 그것을 주장하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떻게 이 잠재적이고 추상적인 기계가 현실적인 것, 여기 지금 있는 것과 관련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도표장치(diagrammatic)에 의해 정의되는 추상적인 기계는 최종심급에서 결정하는 하부구조도 아니고 최상 심급에서 결정하는 초월적(transcendental) 이념도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인 기계는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도표적인 기계 혹은 추상적인 기계는 어떤 것(심지어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을 재현(=표상)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으나 도래할 실재적인 것, 새로운 유형의 실재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것이 창조의 점들 혹은 잠재성(potentiality)의 점들을 구성할 때마다, 그것은 역사의 외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역사'에 선행'한다. 모든 것은 도주하며, 모든 것은 창조한다. 하지만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강렬함의 연속체들, 탈영토화의 연접들(conjunctions), 표현과 내용의 추출물들을 산출해내는 추상적인 기계와 더불어."(142) 그러므로 정치 토론에서 당신더러 너무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결코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치행동은 전적으로 비현실적인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혹은 추상적인 기계를 통해서 흘러나온다. 다시 말해서 내가 몇 주전에 주장했듯이 추상적인 기계는 선행하며, 또한 그것은 생산적이다. 나는 이러한 "선도적인" 역할에 관해서, 혹은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실행되는 결정의 종류에 관해서 아주 많이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얼마 후에는 더 명료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조히스트 나는 추상화와 정치에 관한 이러한 물음이 스스로를 기관들 없는 신체로 만들려는 기획에 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추상적인 기계, 정합면(plane of consistency),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는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제 우리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추상적인" 혹은 "잠재적인" 기획에 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것은 어떻게 행하며, 무엇보다도 왜 그것을 행하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왜라는 질문에 대해 답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이며, 욕망에 고유한 정합면이다. (욕망은 그것을 부셔버릴 있는 결핍(=결여lack), 혹은 욕망을 끝낼 수 있는 쾌락(pleasure) 같은 어떤 외재적 심급도 지시하지 않는, 생산의 과정으로 정의된다.) (몇 주전의 편지에서 들뢰즈가 푸코와 푸코가 쾌락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여기에서, 그리고 각주에서 문자 그대로 또다시 받아들여진다는 것에 주의하라.) 따라서 BwO는 욕망이 아무런 목적 없이 자유롭게 산출할 수 있는 장이다. 우리는 또한 BwO가 장이라고, 강렬도들이 가장 잘 나타나고 성장하는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BwO는 강렬도=0 자체이지만 강렬도를 위한 적합한 매개(=환경medium)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즉 우리 자신의 행위역량과 사유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변용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기관들 없는 신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두 번째 절반부분에만, 변용될 수 있는 역량에만, 즉 가장 고조된 강렬도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BwO의 마조히스트적 구성은 우리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의 증가에 관한 훌륭한 예이다. 마조히스트는 실제로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 고통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마조히스트는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로 구성해서 욕망의 정합면을 뽑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통을 이용하는 것이다."(155) "마조히스트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을 이끌면서 동시에 채우는 전체적 배치를 구성한다. 그는 자신과 말과 여주인을 이용해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정합면을 구성한다."(156)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사례를 인용한다. 이 사례 속에서 마조히스트는 자신의 신체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강렬함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자기 파트너가 자신 위에 올라타서 승마용 구두로 자신을 차게 할 수 있을까를 계획한다. "다리들은 여전히 기관들이다. 하지만 승마용 구두는 BwO 위의 하나의 자국, 또는 지대로서 강렬도의 지대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156) 마조히스트는 그/녀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강렬도의 지대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BwO를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이것은 완전히 무정치적(unpolitical)이고 개별적인 실천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프로그램을 정치적 실천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들이 강조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 즉 변용될 수 있는 우리 역량의 증가에 상응하여 우리의 행위 역량과 사유 역량에서의 증가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마조히스트에 관한 예로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르다 그래서 나는 보다 적합한 것으로 보충하고 싶다. 우리는 BwO 만들기라는 이러한 개념을 이들이 언어학에 관한 장에서 제출했던 소수자적 생성이라는 통념의 보편성 및 창조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방식에 관해서 사고해야만 한다. 『천 개의 고원』제7장, 8장, 9장 얼굴성 얼굴성은 쉽게 파악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란 이 개념을 정체성과 정체성 형성체에 관한 변증법적 개념과 대조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얼굴성에 대한 배경으로서 인종 및 인종적 정체성을 변증법적으로 개념화한 사르트르와 파농의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사르트르/파농의 변증법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첫째, 지배적인 주체 (백인 유럽인)는 피지배 주체를 일관된 정체성으로 창조한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유태인을 만든 것은 바로 반-유태인들이다. 혹은 파농의 경우, 아프리카 "원주민"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창조한 것은 바로 유럽 식민지 지배자들이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사이드의 작업은 거칠게 말해서 똑 같은 노선을 따라 간다. 즉 "오리엔탈"은 유럽의 학제에서, 유럽 예술, 여행일지 등에서 창조되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문제로 되고 있는 하층민들(유태인, 아프리카인, 동양인)이 지배적인 유럽의 상상계에 의해서 창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주장은 이러한 정체성, 즉 현존하는 주체성들을 과잉결정하는 이러한 정체성이 식민 권력에 의해 창조되고 강제로 부과되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Jews)은 존재했지만 반-유태인들이 "유태인"(the jew)을 창조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존재했지만 식민지 권력이 "원주민"을 창조했으며, 이것은 "동양인"도 마찬가지이다. 식민지 지배자와 인종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정체성을 창조했으며, 타자(Other)를 발명하고 세계의 중간을 통해서 배제의 견고한 경계선을 설정하면서 이타성(alterity=異他性)을 극단으로 밀어 부쳤다. 파농이 말하듯이, 식민지 도시는 두 개, 즉 유럽이라는 자아와 원주민이라는 타자로 나뉘어진 세계이다. 하지만 변증법적 개념화는 이러한 최초의 창조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 그리고 이것이 사르트르와 파농의 걸출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인 유럽의 자아는 이러한 창조적 마주침, 이러한 타자의 발명 이전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적 자아는 오히려 그 과정의 마지막 결과이다. 백인 유럽 자아는 타자에 대한 그 대립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으며, 유태인, 원주민, 동양인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부정적 정체성, 즉 타자를 창조한 이후에 자아는 그러한 부정의 부정으로서 생겨났으며, 따라서 변증법적 구조로서 생겨났다. 백인 유럽 자아는 그 부정적 타자에 의존한다. 그러한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백인 유럽의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명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체성에 관한 이러한 변증법적 이론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얼굴성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얼굴성은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비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얼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종주의 이론이지만, 그것은 인종적 타자의 이론이 아니다. "만약 얼굴이 크리스트, 즉 어떤 보통의 이라면 최초의 일탈, 최초의 유형별 격차는 인종적이다. 황인종, 흑인종, 두번째나 세번째 범주의 인종들. 그들 역시 벽 위에 기입되어 있고 구멍에 의해 분포되어 있다. 백인의 자만인 유럽의 인종주의는 배제한다든가 누군가를 타자로 지적함으로써 진행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인종주의는 점점 더 특이해지고 지체되는 파동 속에서 적합하지 않은 특징들을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백색인의 얼굴에 의해 일탈의 격차들을 결정함으로써 작동되었다(...).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외부는 없다, 바깥의 사람은 없다."(178) 따라서 인종주의에 관한 이처럼 비변증법적 개념에서는 타자들은 없으며, 그 누구도 외부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인종적 차이 혹은 이타성은 타자, 극적인 차이를 통해서 배열(configure)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색인 얼굴의 표준으로부터 일탈의 수준에 따라 배열되는 것이다. 실제로 더욱 적합하게 말하자면 어떠한 배제도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유럽의 인종주의는 모든 이들을 백색의 스크린 위와 검은 구멍 속에 포함함으로써 기능한다 ― 지배적인 표준으로부터의 일탈의 수준에 의해 정의되는 위계 속에 그들을 포함하고 정렬시킴으로써. 그러므로 이것이 얼굴성에 대해 이해해야할 첫 번째의 것이다. 이것은 정체성들에 관한 부정적 변증법이 아니라 일탈의 수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배제를 통해서 기능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유형들의 위계를 정립한다. (얼굴성은 정체성과 무관한가? 얼굴은 정체성인가?) 그렇다면 얼굴성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단지 그것이 위계 혹은 지배에 관한 비변증법적 기계라는 것만을 알았다. "이러한 기계는 얼굴성 기계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 기계는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기 때문이며, 모든 신체와 그 윤곽들과 그 대상들의 얼굴화를, 전 세계와 모든 환경의 풍경화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181) 기계는 신체에 얼굴을, 혹은 세계에 풍경을 강제적으로 부여한다. 우선 얼굴 혹은 풍경이 신체나 세계에 각인된 정체성이라고, 그리고 정체성-생산 기계로서의 얼굴화라는 개념이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른 방향을 취한다. 이러한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은 하얀 벽이나 스크린과 검은 구멍의 조합이다. 하얀 스크린은 의미가 나타나는 표면이다. 그것은 의미작용의 체계이다. 다른 한편, 검은 구멍은 정념과 주체화(subjectification)의 점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몇 장을 거슬러 올라가서,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미작용을 둘러싸고 중심화된 네 가지 체제에 대해 묘사한 것을 기억해 내야 한다. 원시적 전-기표작용적 체제, 반-기표작용적 체제, 기표작용적 체제, 그리고 후-기표작용적 체제. 이것들은 또한 주체적이고 정념적인 체제이다. 그러므로 얼굴은 이러한 마지막 두 가지 체제, 즉 의미작용과 주체화의 조율된 배열(coordinated arrangement)이다. 특히 이들은 이 장에서 다시 얼굴성은 표현의 실체라고 말한다. 얼굴성은 의미작용과 주체화를 위한 물질적인 장소(locus)이다. "얼굴성은 의미작용들과 해석들의 집합 위에 물질적으로 군림한다. (심리학자들은 어머니의 얼굴과 아기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글을 썼으며, 사회학자들은 매스미디어 또는 광고에서 얼굴의 역할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전제군주-신은 자신의 얼굴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하나 또는 여러 얼굴을 한다."(115) 따라서 얼굴은 의미작용이나 주체화가 발생할 수 있는 장 혹은 환경이다. 하지만 얼굴은 중립적인 장이나 환경이 아니다. 얼굴은 특정한 의미와 주체성들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구성된다. 어머니의 얼굴에 대한 아이의 관계는 흥미로운 예이며, 아마도 이러한 얼굴을 부를 수 있는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해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보통 얼굴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얼굴 일반은 가능한 의미작용과 주체화를 결정하는 구성된 장이나 환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드보르가 스펙타클이라고 불렀던 것이 얼굴과 더 가깝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스펙타클처럼 얼굴은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지, 어떤 의미일지, 어떤 주체성들일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스펙타클처럼 얼굴은 지배형식에 상응하거나 지배형식을 결정한다. "얼굴은 정치이다."(181) 전제적인 얼굴 기계는 하얀 벽과 의미작용에 우선성을 부여한다. 반면 권위주의적 얼굴 기계는 검은 구멍과 주체화에 우위성을 부여한다. 물론 두 가지는 서로 혼합되어서 기능한다. 모든 얼굴은 전제적 체제와 권위주의적 체제, 의미작용과 주체화의 혼합이다. 이것에 대항하거나 반대하는 혁명적 정치학은 따라서 모든 선차적인, 전-얼굴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정체성(나는 이것이 새로운 얼굴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안하는 과정은 얼굴을 망가뜨리는(unmake) 것이다. "얼굴이 정치라면, 얼굴을 와해하는 것 역시 실재적 생성들, 전적인 잠행자-되기를 포함하는 정치이다. 얼굴을 와해하는 것은 기표의 벽을 관통하기, 주체화의 검은 구멍을 빠져나오기와 같은 것이다. 분열분석의 프로그램, 슬로건은 이렇게 된다 : 당신의 검은 구멍들과 하얀 벽들을 찾아라, 그것들을 알라, 당신 얼굴들을 알라 ; 이것이 당신이 그것을 와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당신의 탈주선들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188) 나는 여기에서 얼굴과 스펙타클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 드보르에게 스페타클은 항상 우리에게 외재적인 어떤 것이자 우리에게 투사되는 어떤 것, 극한에서 우리에게 투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다른 한편 얼굴들은 우리들이다. 얼굴들은 우리를, 우리의 검은 구멍들과 흰 벽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얼굴을 와해하는 것은 엄청난 규모로 우리 자신을 와해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탈주선에서 우리의 얼굴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사랑 얼굴을 와해하는 이 문제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탈주선들의 문제는 또 다시 이러한 탈주가 순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오인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와해라는 용어가 분명히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와해가 실제적 생성을 포함한다고, 더 중요하게는 이러한 와해가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탈주―내가 지난 주에 구성적 탈주라고 부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긍정적 측면이 항상 가장 인식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긍정적 측면, 이러한 창조적인 탈주가 이 책의 이 부분에서, 특히「세 개의 단편소설」이라는 고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초점을 얼굴의 정치학에서 사랑으로 바꿀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에서 사랑에 대한 몇 가지 기술들을 제시한다. 나는 이것이 상당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사랑, 그것은 정확하게 구성적 탈주이다.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것에서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 보자.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을 와해하기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흰 벽과 검은 구멍) 얼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거기에서부터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주체적 의식과 주체적 열정의 검은 구멍 안에서만 우리는 변형되고 뜨거워지고 포획된 입자들을, 주체적이지 않은, 살아 있는 사랑을 위해 다시 활력을 주어야만 하는 입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랑 안에서 각자는 타인의 미지의 공간들로 들어가거나 그것들을 정복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접속되며, 이 사랑 안에서 선들은 깨진 선들처럼 구성된다."(189) 여기에서 살아 있는 사랑은 부부의 죽어버린 사랑과 대립된다고, 혹은 그것은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참조(reference)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얼굴을 와해하는 과정에서만, 얼굴의 하얀 벽과 단절하고 얼굴의 검은 구멍들로부터 도주하는 과정들에서만 살아 있는 사랑은 도달한다. 그것이 이러한 사랑의 첫 번째 단계이며, 얼굴로부터의 탈주, 혹은 실제적인 포기이다. "나는 사랑과 자아를 포기함으로써 (...) 사랑할 수 있게 되어간다."(199) 얼굴의 와해하기를 작동시키는 탈주선들은 여기에서 자아의 포기이며, 자아를 비워버리는 것이며, 사랑은 이것과 결합된다. 이러한 자아의 비워버림을 나는 노출(exposure)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노출은 은폐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라거나 아무도 보지 못한 실제적인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도 남겨두지 않는, 드러내야 할 어떤 비밀도 남아 있지 않는 탈은폐(revelation)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더 이상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감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지각할 수 없게 되기,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사랑을 와해해 버리기. 자기 자신의 자아를 와해해 버리기 …"(197).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얼굴을 와해하기, 자신을 비워버리기, 노출 ― 이러한 것들이 사랑의 조건이다. 드러내야 할 비밀도 없으며, 사랑해야 할 자아도 더 이상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첫 번째 조건, 전제조건일 뿐이다. 사랑하기의 첫 번째 단계는 탈주, 자신을 포기하기이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는 합성(composition) 혹은 구성이다 ― 선들 혹은 공간들은 서로 구성되며, 혹은 내가 앞에서 읽었던 구절에서 인용하면 "각자는 타인의 미지의 공간들로 들어가거나 그것들을 정복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접속되며, 이 사랑 안에서 선들은 깨진 선들처럼 구성된다". 따라서 얼굴의 조직화를 벗어난 요소들은 사랑 속에서 접촉하게 된다. 여기에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자아도, 혹은 자아들도, 자아와 타자도 없다. 오히려 얼굴과 자아를 벗어났던 선들과 공간의 이러함 마주침은 새로운 합성, 새로운 관계를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얼굴에서 벗어난, 자아에서 벗어난 요소들의 이러한 새로운 합성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 관한 질문은 이러한 요소들의 양립가능성(compatability), 들뢰즈와 가타리가 합성가능성(compossi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것이다. 즉 이것들이 어떻게 새로운 합성, 새로운 구성을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것. 이러한 새로운 구성은 창조성, 즉 탈주선들의 긍정성이다.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주선들, 와해하기, 포기는 단지 부정적이지 않다는 훌륭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위험 혹은 우려가 있다. 하지만 위험은 과정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에서조차도 누군가의 창조적인 선이 다른 이에겐 감옥에 가둬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같은 유형의 두 가지 선들에 있어서도 선들의 합성, 한 선과 다른 선의 합성은 문제이다. 두 개의 탈주선들이 양립가능하고 공존 가능한지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기관들 없는 신체가 용이하게 합성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랑이 그것을 견뎌낼지도, 정치가 그것을 견뎌낼지도 확실치 않다."(205) 탈주선들은 만나야만 하며, 마주침에 있어서 새로운 관계를 서로 합성해야 한다. 이러한 마주침과 이러한 합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확실성도 없다). 이것은 오히려 사랑의 과제이다. 양립가능하고 합성가능한 선들을 발견하라. 마지막으로 그것은 사랑에서도 그러하듯이 정치에서도 그러하다. 탈주선들과 함께 혹은 그 이후에 도래하는 긍정적, 창조적 정치적 접근방법이야말로 사랑을 통해서 작동한다. 혹은 오히려 사랑에 의해서 정의되는 마주침과 합성의 동일한 논리를 통해서 작동한다. 그것은 분명히 더 나아가야만 하는 도약이다. (사랑에서 정치로). 하지만 그러한 경로는 「세 개의 단편 소설」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고 있다고 내가 보고 있는 전략이다. 국가 국가는 필연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무엇보다 국가는 일련의 상이한 신체들 혹은 기능들―전통적으로는 적어도 경찰, 군대, 입법, 사법, 행정부 등―의 합체(coalescence) 혹은 상응(coincidence)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국가 개념은 이러한 신체 혹은 기능들의 통일을 상상한다. 실제로 국가에 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던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유명한 구절에서 국가를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집행위원회라고 규정했다. 또는 엥겔스는 국가를 이상적인 집합적 자본가라고 불렀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무기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국가는 단일한(unitary) 무기이다. 국가는 지배적인 기능들의 다양한 대오로부터 추상되고 묶여지는 이상적인 점들이다. 국가는 정치권력의 잠재적 점이다. 이러한 통일성, 그리고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이러한 관계 때문에, 혁명은 맑스주의적 틀 안에서는 국가의 폐지로 간주될 수 있었다. 20세기에 맑스주의적 국가 이론의 일차적인 관심과 논쟁은 두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집중된다. 첫째, 지배계급에 대한 국가의 관계의 문제. (어떤 의미에서, 혹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부르주아지는 국가를 실제로 통제하는가, 혹은 국가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상응하는가). 둘째, 국가와 국가권력의 통일성 혹은 중심성 문제. 나는 이 중 두번째 문제를 들뢰즈와 가타리의 국가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배경으로 생각하며, 나는 이들이 알튀세르에서 푸코로 움직이는 일련의 논점들을 제기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했듯이, 국가를 권력의 단일한 원천 혹은 자리(locus)라고 간주하는 것은 명백히 추상화이다. 국가의 모든 행동을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단일한 개인이나 사무실은 없다. 국가의 중심은 실제로 대통령, 의회, 경찰서장, 장군의 사무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국가 장치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개념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결국 알튀세르는 국가 자체를 중심적인 점이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단지 다양한 국가 장치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이처럼 다양한 장치들은 분석 대상들 뒤에 있거나 그 위에 있을 수 있는 단일한 추상적 점이라기보다는 권력의 거점으로서의 적합한 분석 대상들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를 권력의 단일한 거점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장치들를 다양한 거점들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위치들, 장치들은 군대에서 학교, 교회에 이르기까지 공적인 동시에 사적이며, 억압적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이다. 푸코는 권력의 어떤 거점도, 어떤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알튀세르의] 이 움직임을 한 발짝 더 내딛었다. "합리성을 관장하는 합리성의 사령부는 존재하지 않는다."(HS 95) 심지어 제도들의 다양한 중심들도 없다. 푸코에게서 권력의 중심들은 사회적 장 전체로 뻗어나간 권력의 다양한 응용 지점들이다. 푸코가 국가는 존재한다고 말하든 말하지 않았든 간에 그는 국가가 권력 분석을 위한 적합한 대상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국가 개념은 맑스/엥겔스의 문제틀로의 복귀를 대변한다. 이 속에서 또 다시 국가는 잠재적인 단일한 점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분석의 대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국가의 중심화된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원시적인 국가 없는 사회들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분석에서부터 우선 출발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원시 사회들이 몇 개의 탈-중심화된 권위의 절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근대 사회는 그러한 절편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대신 국가 속에서 하나의 중심화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류학적 통념에 도전하면서 시작한다. 이들은 대신 절편적인 것과 중심화된 것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도 없다고 주장했다. 즉 절편적인 것과 중심화된 것은 근대 국가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함께 작동한다. 원시 사회와 근대 사회에서 권력의 차이는 중심화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중심화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절편화의 매끈함 혹은 견고성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견고한 절편성과 중심화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화가 내가 알튀세르/푸코의 경향에서 맑스/엥겔스로의 복귀라고 설정한 바로 그 점이다.) 이제 국가는 중심화된 권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사회 전체를 통해서 권력의 다양한 절편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명령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의 합리성을 관장하는 사령본부"라는 의미도 아니다. 나는 대신 맑스/엥겔스에게서 이미 국가는 잠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들은 국가의 중심화된 권력을 "마치 ∼처럼(as if)" 작동한다고 정식화한다 ― 국가는 마치 이상적인 집합적 자본가인 것처럼 작동한다, 혹은 더 낫게 말해서, 권력은 사회 속에서 마치 사회를 지휘하는(orchestrate) 이상적 집합적 자본가처럼 기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에 실재성과 잠재성이 동시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국가는 다양한 사회적 권력들이 서로 반향하는 공명 상자의 일종이다. "모든 중심들이 공명하고 모든 검은 구멍들이 눈들 뒤의 어떤 교차점과도 같은 단 하나의 축적점으로 모여드는 한에서 절편성은 견고하게 된다. 아버지의 얼굴, 교사의 얼굴, 연대장의 얼굴, 사장의 얼굴은 잉여를 만들어 내며, 다양한 원들을 가로지르고 모든 절편들을 다시 지나가는 의미작용의 중심과 결부된다."(211) 국가 자체는 이러한 잠재적인 잉여 지점 혹은 공명 지점으로 구성된다. 이제 실제로 이것만으로는 푸코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내가 몇 주 전에 인용했던 『감시와 처벌』의 한 구절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이 구절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쓴다. 학교가 군대를 닮았고, 군대는 공장을 닮았고 이 모든 것이 감옥을 닮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훈육 사회의 모든 제도들 사이에는 잉여 혹은 공명이 있으며, 이러한 잠재적 중심성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바로 국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편적 부분들 (교회, 학교, 군대)과 중심화된 장치들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모든 점들의 공명 상자이다."(224) 다음 단계로 설명하려는 것은 국가와 전쟁기계의 차이, 전체주의적 국가와 파시스트적 국가의 차이이다. 『천 개의 고원』제10장, 11장 어떤 차이가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가? 나는 여전히 세 번째 챌린저 교수 고원과 씨름하고 있으며, 이 책의 생물학에 관한 부문과 정치학에 관한 부문을 독해하는 나의 접근방법상의 차이와 씨름하고 있다. Rick이 이번 주에 이메일로 물어봤듯이, 나 혹은 우리는 생물학의 문제보다는 파시즘의 문제에 관해서 왜 그렇게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가? 아니 나는 이런 질문을 공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한편으로는 세포, 바위 혹은 새들의 배치와 홈패임(striation), 이것들의 조직화와 탈주의 대안을 다루는 구절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배치들과 홈패임, 인간의 조직화와 탈주의 대안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을 그토록 상이하게 다루는 것일까? 충분하게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배치와 홈패임, 이러한 조직화의 대안들은 실제로는 같은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인간주의이며, 나는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반-인간주의란 인간 본성의 법칙이 자연 전체의 법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이에 관해서 스피노자를 또 다시 인용해 보자. 스피노자야말로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언급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변용태(=정서)에 대해서, 인간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들을 공통적인 자연법칙을 따르는 자연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바깥에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들은 자연 속의 인간을 왕국 속의 왕국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 마치 인간 본성이 자연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듯이.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에 상응하여 모든 것들이 일어나게 되고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하게 되는 자연의 법칙과 규칙들이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똑 같은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어떤 것,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은 똑같아야만 한다 (...) 그러므로 ... 나는 인간의 행동과 욕구(appetites)가 선들, 면들, 신체들의 문제라는 듯이 이러한 것들을 사고할 것이다."({윤리학} 제3부 서문) 자연의 모든 것(인간, 세포, 바위, 새, 나무)은 똑 같은 법칙에 따라 작동하며, 따라서 똑 같은 홈패임, 배치들, 조직 대안들 등등을 통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식물의 성장이나 새의 교미, 혹은 지질 형성에서 다양체들에 대해 분석을 할 때,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양체와 은유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아주 똑 같은 다양체들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들은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똑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 속의 어느 곳에서든 그러한 다양체들이 작동하는 방식, 이중 분절이 작동하는 방식, 배치들이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이것들 사이에서 어떠한 대안들이 존재하는가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치적 조직화의 법칙을 이해하고 싶다면, 세포 생물학이나 식물 재생산을 연구해도 무방하다.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 자연법칙에 관한 분석의 수준을 나는 반-인간주의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분석적 수준에 덧붙여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에는 또 다른 수준들이 또한 있으며, 나는 이것이 인간을 필연적으로 특권화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말한 바대로 (적어도 매번) 그 텍스트를 자연법칙에 대한 분석일 뿐만 아니라 또한 행동이나 실천에의 권고로 읽는다. 그것은 우리가 바위, 식물이나 새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갑각류의 분절과 새의 리토르넬로에 관해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작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것들을 인간 조직화와 인간 사회에 관한 문제와 대안으로 번역한다. 바위와 식물도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실천의 대안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틀 안에서 이것들은 확실히 탈주선을 가지고 있다. 릭(Rick)에게 보내는 이메일 답신에서 욘(Jon)이 잘 지적했듯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퀴비에 보다는 제프리(Geoffrey)에게서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일부는 그가 자연 세계에서 현존하는 대안들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텍스트가 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며,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비인간적 자연에서의 대안들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작용할 수 있는 대안들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권고한다. 다시 말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참새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유형의 다양체에 비해 한 가지 유형의 다양체를 선호해야 한다고 새들에게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나무가 풀의 잎새들과 같아야 한다고 나무에게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이야말로 우리가 이러한 윤리학 혹은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의 한계설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한계설정과 관계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설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적이다. (스피노자가 말하기를 무한한 속성들이 있지만, 우리는 단지 사유와 연장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즉 그것은 세계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한계설정에 관한 진술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왜 우리가 생물학이나 지질학을 다루고 있는 논의와 (파시즘과 같은) 인간 사회 및 조직화를 다루고 있는 논의에 관해서 그렇게 상이하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려는 노력에서 이것을 하나의 시도로서 제안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것들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연법칙에 관한 연구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이것들을 똑 같이 다루어야 한다. 텍스트의 이런 측면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윤리학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사고하는 한 우리는 이것들을 상이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나 인간 활동의 문제만이 우리에게 실천의 장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인간을 상이하게 만든다. 반-미메시스(Anti-mimesis) 마침내 나는 이 장에서야 AO의 첫 페이지 이후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끌어온 은유에 대한 공격을 보다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유에 대한 공격이, 실제로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방(mimesis)에 대한 공격이라고 이해하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주장, 이 반-모방을 들뢰즈가 플라톤주의를 전복하기 위해서 오래 전에 선언했던 기획의 일부분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동안 미학 이론에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서 반-모방이라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닮음(resemblance), 무엇보다도 자연의 조직화의 논리로서 그 닮음을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물학자(=자연학 연구자)의 기억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한다. 자연사의 원리 문제 중 하나는 상이한 동물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것이 이해되어 왔던 원리적 방법의 하나는 계열들의 관계로서, 즉 동물과 그 기능들이 유비에 의해서 각자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물고기의 아가미는 포유동물의 폐와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들은 융의 원형을 사회적 혹은 문화적 관점에서 이러한 종류의 계열 닮음의 예로 든다.) 동물들 사이의 관계가 이해되어온 다른 원리적 방식은 구조의 관점에서였다. 여기에서 각각의 동물이나 기능은 (또 다시 유비에 의해) 초월적인 것과 관련되며, 예시들 사이의 내적인 동질성들을 통해서 구조를 정의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사회적 분석에서 이러한 두 번째 대안의 예로서 계열을 이룬다.) "… 두 가지 경우 모두 자연은 거대한 모방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자연은 단계적인 닮음에 의해 계열의 모델과 근거로서 존재자들 모두가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신이라는 최고항을 향해 나아가면서 진보적이거나 퇴행적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는 존재자들의 사슬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된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이번엔 질서 잡힌 차이에 의해. 모든 것이 모방하는 모델 자체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모방해야 할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거울 속의 모방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된다."(234-235) 여기에서 일반적인 주장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가 세계를 내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 그리고 모방을 통해서 닮음의 토대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 혹은 거대한 은유적 메커니즘을 통해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연이 조직화된 것도, 모방을 통해 기능하는 것도 아니며, 생성을 통해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생성은 결코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305) 생성은 어떤 특정한 귀결점이나 모델에 도달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은 운동의 일종 혹은 스타일이다. 예를 들어 쥐-되기는 쥐와 닮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쥐-되기는 쥐가 기능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것, 쥐의 무리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쥐는 또한 쥐-되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성이라는 것이 박물학자들의 질문, 즉 동물과 식물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며 이것들이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생성을 통해서 서로 관련되며 진화한다. 이제 생성들은 항상 다수파 혹은 표준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항상 소수자이다. 다시 말해서 패러다임은 계열적 혹은 구조적 닮음과 차이에서 표준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질문으로 변동한다. 생성은 항상 다수파로부터의 일탈이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에서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특히 인간의 생성들을 사고할 때,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어째서 남성-되기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남성은 특히 다수자인 반면, 생성은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다."(291) 남성은 일차적인 표준이기 때문에, (심지어 여성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도) 모든 생성은 (표준으로서의) 남성이라는 점을 벗어나며, 나아가 여성-되기는 일차적인 생성으로서의 특권화된 역할을 지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성은 여성-되기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남성의 여성-되기 속에서 그래야 한다"(292)와 같은 진술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표준적인 남성이 출발점이며, 여성-되기는 일차적인 생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똑 같은 정식화가 모든 다른 소수자적 생성들, 즉 유대인-되기, 흑인-되기 등등에서 유지된다. 이러한 모든 소수자-되기는, 적어도 인간에 관해서 생각할 때에는, 정치적이다. "소수자-되기는 정치적 사태이며, 역량의 작업 전체에, 작용적인 미시정치학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거시정치학의 대립물이며, 심지어 역사의 대립물이다. 사실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다수파를 정복하고 수중에 넣을지를 아는 일이다. 포크너가 말했듯이, 파시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흑인-되기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292) 이제 여기서 정치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 이 구절을 살펴보자. 내게 권력은 두 가지 요소들을, 즉 역량과 선택, 혹은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역량과 대안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되거나 되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을, 표준으로 남아 있거나 표준으로부터 일탈하는 대안을 가지고 있다. 좋다. 이제 내가 출발했던 곳, 즉 생성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 닮음과 모방에 대한 대안으로서 자리매김되었던 곳으로, 자연, 종, 인간 사회의 조직과 변동에 관한 대안적 설명으로 자리매김되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생성은 이러한 분석에서 일차적이다. 왜냐하면 생성은 (계열이나 닮음의 구조가 아니라) 자연의 조직화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모방은 미학적 영역에서도 또한 작동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자연사와 인간 사회에서 작동하는 것과 다르다기 보다는 똑같다고 느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모방이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정확히 말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자명한 세계의 복사로 이해하는 한에서, 그리고 다시 자명한 세계를 이데아적 형상들의 복사로 이해하는 한에서.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 또한 예술의 영역에서, 그것은 흉내내기, 모방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의 문제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어떠한 예술도 모방적이지 않으며, 모방적이거나 구상적일 수 없다. 어떤 화가가 새를 '재현'한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새-되기로, 새 자신이 다른 어떤 것, 즉 순수한 선과 순수한 색으로 되어가는 중일 때야만 비로소 행해질 수 있다."(304) 그러므로 예술은 결코 재생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술을 재생산으로 생각하는 것, 즉 자연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예술의 경우에는 복사들인데, 이것은 자연과 예술 양자의 역동적인 성격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려진 새는 새가 또한 선과 색으로 되어가는 한에 있어서만 새-되기이다. 예술은 생산이며, 이는 모든 자연이 생산인 것과 같다. 혹은 오히려 예술은 생성이며, 이것은 모든 자연이 생성인 것과 같다. "먼 옛날부터 회화는 언제나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시적으로 만들려고 해왔으며, 음악도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음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해 왔다."(346) 이 구절에서 나는 은유에 대한 반대 명령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려진 새는 새와 같은 것이 아니며, 재현도 아니다. 그것은 새의 새 되기, 혹은 새의 색과 선 되기와 같은 똑 같은 지위를 지니고 있는 하나의 새-되기인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가시적으로 만들어진다. 정합성과 합성(Consistency and Composition) 몇 주 동안 나는 MP의 일차적인 목표가 사회의 문제, 즉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제기하는 것이었다고 말해 왔다. 혹은 실제로, 나는 그것을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설정해야했다. 자연은 어떻게 함께 유지되는가, 자연은 왜 그렇게 근본적으로 다질적이거나 파편화되지 않은 채 있는가? "이것은 정합성의 문제이다. 다질적인 요소들의 '동시적인 성립'.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퍼지 집합이나 이산 집합을 이루고 말지만 마침내 정합성을 획득하게 된다."(323) 이제 정합성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다소 수동적인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합면 또한 일종의 배경막 혹은 공통성 혹은 교차점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를 생각하자. "정합면은 모든 구체적인 형태들의 교차점이다."(251) 하지만 나는 대신 우리가 정합성을 요소들이 동시적으로 성립되게 하는 어떤 작용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합성은 공고화(consolidation=다짐)와 같은 것으로, 계기적인 것이나 공존하는 것의 공고화된 응집체를 산출하는 행위이다 …"(300). 그러므로 정합성은 요소들의 공통적인 상태, 동질적 요소들의 집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질적인 요소들을 일관되게 만드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다. "정합성은 필연적으로 다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미분화의 산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질적인 것들이 그 공존과 계기들의 '공고화(=다짐)'를 통해서 서로 묶여지기 때문이다."(330) 따라서 정합성과 정합면은 동질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정합성은 오히려 다질적 요소들의 공고화(=다짐)의 과정이다. 이 때문에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했을 때 정합성에서 합성으로서의 변동을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정합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합성이 보다 분명하게 다질적인 요소들을 조직하거나 합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과정들을 설정한다. 이 과정은 스피노자에 관한 부문의 두 가지 기억들의 주제이다. 이러한 합성과정의 한가지 결과에 있는 것이 바로 개체원리(=이것임haecceities)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개체원리들은 다소간 원재료이며, 합성 과정으로 진입하는 다질적인 요소들이다. 개체원리라는 용어는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14세기?)의 책에서 나오는 것이며, 특히 개별화에 관한 그의 책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개체원리가 특이성(=단독성, 독자성singularity)이라는 용어와 함께, 스콜라 철학의 맥락에서는 적어도 교환가능한 것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개체원리는 개인, 주체, 사물, 혹은 실체와는 아주 다른 개별화의 양식이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설명한다. 개체원리는 오히려 계절, 하루의 시간, 바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시간의 낮, 혹은 그 색깔은 특이하다. 그것은 어떤 것과의 차이에서 포획될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의 이것임(thisness)에서만 정의된다. ('이것임'에 대한 의존, 혹은 '지금 당장'에의 의존은 종종 둔스 스코투스의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다소 상이하게 설명한다. "이것들은 분자들이나 입자들 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 모두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것은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개체원리들이다.(261) 혹은, 이들의 용어에 따르면, 이것들은 경도(운동과 정지의 관계)와 위도(변용의 역량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경도와 위도라는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가를 알지 못한다.) 개성원리들을 경도와 위도로 이처럼 정의하는 것은 이것들이 어떻게 합성 과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가 혹은 합성과정을 쉽게 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다. 한편, 그리고 에서 개별자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러한 정의를 따라서, 하나의 개별자는 운동과 정지의 공통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 신체들로 합성되어 있다. (운동과 정지는 경도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또 이제는 위도의 관점에서) 각 신체의 변용은 자신의 작용 역량과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모두 포함하여, 합성의 상이한 축을 결정한다. 이것은 들뢰즈가 그토록 좋아했던 스피노자적 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어떻게 합성될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일이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 전에는, 즉 신체의 변용들이 무엇이며 신체들이 어떻게 그러한 신체를 파괴하거나 그러한 신체에 의해서 파괴될 수도 있는 다른 변용들, 다른 신체의 변용들과 합성관계로 들어설 수 있거나 들어설 수 없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신체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257) 이러한 두 가지 축, 즉 경도와 위도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합성과정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가를 그것들이 명료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이러한 똑 같은 스피노자적 논리를 확장하고 리토르넬로를 일종의 합성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실제로 합성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특히 나는 리토르넬로를 시간을 다루고 있는 합성 과정으로 이해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리토르넬로는 프리즘, 시간-공간의 결정체이다. 그것은 시간을 만든다. "시간은 아프리오리한(=선험적)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리토르넬로가 시간의 아프리오리한(=선험적) 형식이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시간을 만들어 낸다."(349) 리토르넬로는 일종의 구성, 시간적 구성이다. 『천 개의 고원』제12장, 13장 이 두 개의 고원은 (문제 및 공리와 더불어서) 명제로서 조직화되어 있다. 나는 명제의 세 가지 집합을 본다. 첫 번째 집합(네 가지 명제, 유목론의 첫 번째 절반 부분)은 국가와 전쟁기계의 차이를 주장하며,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듯이, 국가에 대한 전쟁 기계의 외재성을 주장한다. 명제의 두 번째 집합(네 개 이상의 명제, 유목론의 두 번째 절반 부분)은 유목적 운동에 대한 전쟁기계의 관계에, 혹은 오히려 유목주의에서 전쟁기계가 출현하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명제의 마지막 세 번째 가장 큰 집합(포획이라는 고원의 전체 장치)은 전쟁기계가 국가 장치에 의해서 전유되거나 포획되는 수단에 대해 다룬다. 국가와 전쟁 기계 국가와 전쟁기계는 서로 대비해서 정의된다. 하지만 우선 국가 자체에서부터 출발하자. "국가는 주권이다."(360) 그리고 정치적 주권 자체는 두 가지 극들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제적인 극과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자의 극이, 혹은 오히려 한편으로는 권력(혹은 강권might)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리(혹은 법)를. 이것들은 우리가 사유학(noology)에 관한 부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국가에 관한 두 가지 주된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주권의 두 극에 상응하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먼저 참된 사유의 제국. 이것은 마법적 포획, 장악 내지 속박에 의해 작동하며, 근거의 효용성을 구성한다(뮈토스 mythos).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들의 공화국. 이것은 맹약 내지 계약에 의해 진행되며, 입법 조직과 법률 조직을 구성하며 근거를 정당화해준다(로고스)."(374-375) 보통 주권의 이러한 두 극, 즉 제국과 그 권력, 그리고 공화국과 그 권리(혹은 사법적 형성체)는 국가의 대안적 가능성들로 간주된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형태가 이러한 두 극들을 제한하거나 오히려 배분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국가는 제국과 공화국, 권력과 권리의 이중 분절이다. 이러한 이중 분절은 국가 장치들을 지층(stratum)으로 만드는 것이다. 국가 장치의 공간은 따라서 항상 홈패인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주권의 이러한 두 극들의 배분에 의해서 홈패인 공간이다. 정치적 주권(권위와 규칙)은 지층들 안에 위치 지어진다. 이제 우리는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 관한 고원에서 이미 언급했던 국가에 관한 정의를 기억해야만 한다. 거기에서 국가는 사회적 절편성의 (유연성이 아니라) 견고함에 의해서, 그리고 권력의 (분산이 아니라) 집중화에 의해서 규정된다. 견고한 절편성과 중심화는 국가를 다양한 사회적 역량들과 절편들이 서로 반향하는 공명상자의 일종으로 설정함으로써 인식된다. 따라서 국가 자체는 우리가 (판옵티콘과 같은) 공통적 다이어그램의 반복을 통해서, 학교, 감옥, 병영, 공장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제도들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잠재적인 잉여점 혹은 공명점이었다. 국가에 관한 이러한 두 가지 정의는 합쳐져야 마땅하다. 주권의 두 개의 머리의 배분을 통해서 작동하는 홈패임은 똑 같은 것이어야만 하거나 적어도 공명 상자의 중심화와 견고한 절편성과 일관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다음 세 가지 요소로 국가를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가는 (국지적이 아니라) 전면적인 통합[중심화]이며, (빈도가 아니라) 공명의 잉여 작용이며, (환경의 양극화가 아니라) 영토의 홈패임의 작동이다."(433) 따라서 나는 국가에 관한 이처럼 상이한 정의를 하나 이상의 완전한 정의의 협력적 요소라고 이해한다. 국가의 중심화 혹은 전면적 통합은 잉여작용에 의해서, 혹은 다양한 견고한 사회적 절편들에서 공통적인 다이어그램의 반복에 의해서 성취된다. 그리고 특히 권력의 중심부 각각(감옥, 병영, 학교)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공간의 공통적인 성층작용, 주권의 두 극들인 권력과 권리 사이의 공통적인 이중 분절이다. 따라서 국가는, 이제 다시 뒤로 돌아가서, 성층작용, 잉여작용, 중심화이다. 중심화는 지층들의 반복에 의해서 성취된다. 이것은 서로 반복되거나 서로 잉여적으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사회적 공간을 통해 작동하며 주권을 배분하는 이러한 지층들은 무엇인가? 음, 나는 지층들을 제도들 자체라고 읽고 있다. 즉 학교는 사회의 성층작용이며, 감옥도 성층작용이다 등등. 사실 나는 제도를 사회적 흐름들을 조직하고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성층들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주권을 사회적 장에서 분리된 권력의 심급으로, 사회에 대해 초월적인 권력의 심급으로 이해한다 ― 예를 들어, 홉스는 주권이란 사회의 가교를 이루는 권력이라고 말했다. 성층작용은 그러므로 주권이다. 지층들이 사회의 표면 위에서 자라나는 한에서는 말이다. 이러한 지층들로 이해될 수 있는 제도들의 벽들은 사회적 장에 대해 초월적이다. (벽들의 높이는 그것들의 초월성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제도들의 지층들은 국가의 중심적인 (아니면 잠재적인) 방 안에서 공명하는 주권의 잉여적 심급들이다. 하지만 전쟁기계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며, 유목론에 관한 고원의 첫 번째 절반 부분의 주요 논점은 바로 이러한 차이이다. "… 전쟁기계는 유목민이 발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쟁기계는 그 본질에 있어서, 매끈한 공간의 구성요소이며, 이러한 공간의 점거, 이 공간 안에서의 대체, 그리고 이 공간에 대응하는 인간의 합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전쟁기계의 유일하고 진정한 적극적인 목표이다."(417) 따라서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을 가로지는 운동과 이 공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배분을 모두 포함하는, 매끈한 공간의 구성으로 정의된다. 전쟁기계는 국가와 다르며, 심지어 전쟁기계의 매끈한 공간이 국가의 홈패인 공간에 반대되는 한에서는 국가에 반대된다. 그러므로 '전쟁 기계'는 실제로는 오도된 용어이다. 왜냐하면 전쟁기계의 본질은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 혹은 유목적 기계라고 불려지는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우리가 이러한 정의로부터 출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러 번 주장하듯이, 전쟁기계는 전쟁을 그 목표로 삼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초래된다면 그것은 전쟁기계가 이 기계의 적극적 목적에 대립하는 (홈을 파는) 세력으로서의 국가와 도시들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 바로 이 지점에서 전쟁기계는 전쟁이 되어간다."(417) 전쟁기계는 홈이 패인 공간과 접촉하게 될 때에만, 즉 국가와 접촉하게 될 때에만 전쟁에 대한 관계를 발전시킨다. (이것은 전쟁기계의 본질적 관계가 아니라 우연한 관계이다.) 전쟁기계가 이후 전쟁에 도달할 때라도, 국가의 폭력은 항상 이미 있는 것이다. 전사들의 폭력이 아니라 경찰과 교도관들의 폭력인 국가의 폭력은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기 어렵다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이것은 국가의 폭력이 항상 스스로를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이미 행해진 것으로, 마치 매일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제시하기 때문이다. "국가 경찰 또는 법의 폭력은 … [권리를] 포획할 수 있는 권리를 구성하는 동시에 [권력을] 포획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통합되고 구조적인 폭력으로 모든 종류의 직접적인 폭력과는 구별된다."(448) 국가의 이러한 간접적, 구조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두 계급들을 만들어낸, 맑스가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계급 분할을 재창조하는 폭력이 항상 매일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항상 이미 프롤레타리아트화되었다. 나는 홈패임 자체는 이처럼 항상 이미-존재하는 폭력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와 일치한다고 말하고 싶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감옥과 학교의 벽 자체는 권력과 권리를 결합시키는 폭력이며, 국가 사회의 관점 안에서 보았을 때에는 항상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국가(그리고 국가의 홈패임)는 폭력과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전쟁기계(와 전쟁기계의 매끈한 공간)는 어떤 특정한, 우연한 조건 하에서만, 전쟁기계가 홈패임으로 달려갈 때에만 폭력적이 된다. 국가와 전쟁기계가 이토록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들이 서로에 대해 그토록 외재적이라고 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이것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고 어떻게 서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전쟁기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통합될 수 없다. 전쟁기계가 국가와 접촉하게 될 때, 혹은 어떤 홈패인 공간과 접촉하게 될 때, 전쟁기계의 유일한 목표는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기계는 결코 국가를 사용하지 않는다. 반대로 국가가 전쟁기계와 접촉하게 될 때, 국가는 전쟁기계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쟁기계를 전유해서 작동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포획의 과정이며, 국가가 전쟁기계를 전유하는 과정이다. "국가의 근본적인 임무 중의 하나는 국가가 통치하는 공간에 홈을 파는 것, 혹은 매끈한 공간을 홈패인 공간을 위한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있다. 단순히 유목민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이주를 통제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사활적인 관심사이다 … 국가가 이것을 할 수 있다면, 국가는 온갖 종류의 흐름을, 즉 인구, 상품 또는 상업, 자금 또는 자본 등의 흐름을 어디서라도 포획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385-386) 따라서 국가는 단순히 매끈한 공간을 파괴하고 매끈한 공간을 홈패이게 하는 것을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매끈한 공간을 교통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국가는 유목민을 정착민으로 만들고자 할 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경로를 국가의 권력에 봉사하는 이주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국가는 흐름들의 포획에 의해 작동한다. 이 때의 포획은 흐름들의 운동을 보존하지만 규정된 경로에서 그 운동들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보기에 국가는 국가에 종속되는 매끈한 공간과 유목주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국가의 홈패임은 그 자체로 정적이며 고립되어 있다. 홈들 사이의 운동과 교통은 이것들 사이에 놓여 있고 이것들에 종속되어 있는 매끈한 공간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아마 똑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정착민의 국가 생산이 노동 이주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종의 포획된 유목주의로서의 노동 이주) 포획과 노동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획의 세 가지 장치들을 제시한다. 하나는 토지로부터 도출되는 지대이며,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 도출되는 이윤이며, 세번째는 화폐로부터 도출되는 이자 혹은 세금이다. 이 모든 포획 장치들은 축적(stock)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다. 지주는 땅의 축적을 통해 지대를 얻는다. 더 분명하게 말해서, 기업가는 노동의 축적 혹은 잉여 노동을 통해서 이윤을 얻는다. 이제 나는 이러한 축적이 실제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축적은 흐름이 멎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름이 바뀌는 것이며, 예를 들어 유목적 운동은 이주로 흘러가게 되는 방식이다. 국가는 방향이 바뀐(channeled) 역동주의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역동주의에 의존한다. [역주 ; channeled라는 표현은 channel(수로, 해협)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해낼 수 있듯이, (수로를 만들기 위해) 홈을 파다, (수로를 만들어서 강물의) 흐름을 바꾸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흐름, 혹은 방향이 바뀐의 표현으로 통일했지만, 두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포획 장치들 중에서 단지 하나에만, 즉 노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에만 초첨을 맞추고 싶다. 하지만 우선 나는 AO의 네 번째 장에서, 내가 상이한 방식으로 여기 저기에서 또 다시 제기하고 반박하고 있는 노동(labor)에 관한 논의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AO의 해당 부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동을 직접적으로 욕망과 연결시켰다. "욕망과 노동의 동일성은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하는 생산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한계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아주 탁월한 작용적 유토피아이다."(AO 302) 따라서 욕망과 노동은 적어도 동형적(isomorphic)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것은 아니다. 욕망과 노동은 모두 흐름들에 의해 정의된다. 게다가 이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상화와 재현에 의해서 똑 같은 방식으로 포획된다. "주체적인 추상적 노동은 사적 소유에서 재현되며, 그 상관자로서 주체적인 추상적 욕망은 사유화된 가정에서 재현된다. 정치경제학이 사적 소유를 분석하듯이 정신분석학은 두 번째 항목에 대한 분석에 착수한다."(303-304) 따라서 노동은 욕망과 똑 같은 종류의 생산적, 창조적 힘들이다. 하지만 욕망이 오이디푸스에 의해 통치되듯이 노동은 자본주의에 의해 통치된다. 분명히 AO에서 언급되고 있는 노동은 임금노동이 아니다 ― 임금 노동은 형태에서 통치 당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에 일치시키는) 이 노동은 맑스가 살아 있는 노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노동은 살아 있는 것, 불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사물들의 임시성, 그 시간성이며, 살아 있는 시간에 의한 형성체와 같은 것이다."( 361) 살아 있는 노동은 자본의 죽은 노동으로 변형된다. 혹은 실제로 아직 죽지 않은 노동, 좀비의 노동으로 변형된다. 하지만 MP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에서 이와 똑 같은 노동의 포획을 서술하기 위해서 이들의 용어를 변동시킨다. 이제 "자유로운 활동"이 살아 있는 노동을 대체하며, "노동"이 임금노동을 대체한다. 그리고 AO에서 재현(표상)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던 과정은 축적하기를 통해서 규정된다. "'자유로운 행위' 같은 유형의 활동들은 … 축적 덕분에 노동이라 불리는 동질적이고 공통적인 양과 비교되고, 연결되고 종속되어 가는 것이다. (...) 노동 자체는 축적된 인간 활동이다."(442) 여기에서 축적하기가 의미하는 바는 활동에 반복을 강제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노동과는 이질적인 자유로운 활동을 동질적인 것으로 변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활동의 포획 장치이다. 반복과 동질화 과정을 통해서 노동[포획장치]은 살아 있는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변형시키거나 자유로운 활동을 살아있는-죽은 활동으로 만든다. 이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좀비의 신화는 노동의 신화이며,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425) 여기에서 자유로운 활동은 그 무제한적인 흐름이 임금 노동이라는 홈에 의해서 방향이 바뀌어 왔다는 의미에서 홈이 패어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의한 노동자(worker)의 포획은 노동(work)에서 활동의 동질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노동자 운동의 방향 바꾸기나 제약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근본적으로 유목적이다. 혹은 심지어 "유목민화의 힘"이다. 그리고 자본은 그 흐름들을 차단하거나 방향을 바꾸어야만 한다. "맑스는 심지어 프롤레타리아트를 소외된 (노동labor)뿐 아니라, 탈영토화된 (노동)에 의해서 정의했다. [맑스가 원시적 축적에 대해서, 토지로부터 농민들을 청소하는 과정을 통한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과 나중에 새로운 공장에서 노동하는데 이용되었던 방랑자 계급의 창출에 대해서 쓴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두 번째 관점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서구 사회에서 유목민의 상속인으로 나타난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동방에서 기원하는 유목민이라는 주체들에게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유목민을 재빨리 등치시켰으며, 빠리를 유목민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와 비교했다."(558 n. 61) 그러므로 첫 번째 경우, 자유로운 활동은 이질적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활동은 노동 속에서 동질화되어야만 한다. 둘째, 프롤레타리아트는 탈영토화되었으며, 정주민으로 만들어져야만 하거나 노동을 통해 이주민이 되어야만 하는 유목민화의 힘이다. 중력은 속도에 부과되어야만 한다. 이것들은 포획 장치로서 노동이 갖는 두 가지 측면들이다. 즉 활동과 통제의 동질화 혹은 운동의 방향 바꾸기. 포획으로서의 자본주의적 노동의 이러한 측면들 모두는 매끈한 공간의 성층화(=홈패임)을 포함한다. 지구적 전쟁기계의 공리계들 이러한 고원들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국가에 의한 전쟁기계의 전유이며, 따라서 매끈한 공간의 홈패임이다. (혹은 오히려 홈패임들 사이에서 매끈한 공간의 활용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현재의 상황을 생각할 때, 즉 세계가 주권을 지닌 국민-국가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지구적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다양한 국민-국가들 위에 서 있는 일종의 지구적 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즉각 거부한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세계 규모의 초정부를 상정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461) 다양한 국가들은 따라서 내가 매끈한 지구 제국(global Empire)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의해 대체된다. "전쟁기계는 전체 대지를 통제하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매끈한 공간을 개혁한다. 총력전 자체를 초월해 훨씬 무시무시한 형태의 평화로 나아가고 있다. 전쟁기계는 목적, 즉 세계 질서를 스스로 받아들이며, 이제 국가들은 이 새로운 전쟁기계의 목표나 수단 밖에 갖고 있지 않게 된다. (...) [적은] 더 이상 국가나 심지어 또 다른 체제가 아니라 '임의의 적' [l'ennemi quelconque]이다."(421-422) 임의의 적 ― 카다피, 노리에가, 사담 후세인 등 어느 것이나. 나는 이것이 현대의 지구적 질서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텍스트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를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국가로부터 [역으로] 전쟁기계가 국가들을 자신의 질서 속에 종속시키는 상황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창조 및 자유로운 활동과 결합되어 왔던 전쟁기계와 그 자유로운 공간이 이제 어떻게 그 목표를 위해 지구적 질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혹은 내가 보기에 질문은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더 분명하게 제기되는 것 같다. 우리가 주권을 사회적 장에 초월적인 권력의 심급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특히 국가 공간의 홈패임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정의상 매끄러운 공간에서 있는) 이러한 지구적 전쟁기계가 어떻게 주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전쟁기계는 어떻게 지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AO에서 처음 보았고 이 고원들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공리계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기억하겠지만, 공리계는 자본주의의 내재성과 그 통제된 분열증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도입되었다. 현재의 상황에서, 공리계와 정치의 관계는 훨씬 더 긴밀해진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공리계는 실험과 직관에 대립하는 초월적, 자율적, 의사-결정적 역량이 결코 아니다."(461) 공리계는 때로 결정불가능한 명제들에 반대하게 되는 미결정적 변수들의 조합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임의의 적"이라는 체계는 하나의 공리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작업했던 것보다 냉전 이후의 세계를 훨씬 더 잘 서술해 준다.) 임의의 적이라는 것은 다른 해결책을 내놓는 다른 다양한 항들에 의해 만들어진 등식 속에서만 매꾸어질 수 있는 하나의 변수이다. 지구적 전쟁기계는 고정된 관계도, 초월적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홈패인 공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내재적 법칙을 통해서 그 다양한 조형(configurations)을 다룰 수 있다. 지구적 전쟁기계가 자본이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자본이 공리계에 의해서 구성되듯이 전반적인 전쟁기계도 공리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주권. 자본주의적 주권. 『천 개의 고원』제14장, 15장 내재성, 삶 『자본주의와 분열증』의 2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재성에 관한 물음이며, 그 최초의 기획은 내재성의 평면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틀을 초월적인 것에 대해 내재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 플라톤주의의 전복, 존재의 내재성을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범신론, (들뢰즈가 영화에 관한 두 번째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혹은 사회적, 정치적 용어로 말하자면, 이러한 지도그리기는 주체와 에고의 초월에 대해 욕망의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며, 더 분명하게는 국가의 초월에 대해 사회적 배치들의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출발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주 빠르게 훨씬 복잡해진다. 내재성 개념은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가치평가도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고, 이 개념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철학적 난제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자격을 부여하기. 들뢰즈는 그가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발간된 글, 아주 간략하고 촘촘한 문장으로 쓰여진 글에서, 내재성이라는 문제틀로 다시 돌아간다. (, Philosophie, no. 47, 1995) 이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직접적으로 내재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장(transcendental field)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즉시 초월적과 선험적을 구별한다. (이것은 기억하고 있다면 AO에서 나온 주장이다.) 경험에서 초월적인 것은 주체와 대상이다. 선험적 장은 어떤 대상도 지칭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과 구별되거나 경험적 재현과 구별된다. 오히려 그것은 순수한 비주체적 흐름이다. (나는 가타리가 바로 이 지점에서 선험적 장은 그러므로 기계적이라고 덧붙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이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기계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 된다 ― 어떤 대상도 지칭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는 것.) 따라서 "선험적 장은 내재성의 순수 평면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모든 초월로부터 도주하기 때문이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내재성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초월적인 것에 반대하여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체와 대상의 초월에 반대하여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내재성 자체에 대해 물을 수 있었다. 내재성은 어떤 것 안에(in) 내재적인 존재를 지칭하지도, 어떤 것에 대해(to) 내재적인 존재도 지칭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대상에 의존하지도,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 들뢰즈는 세계에 대해 내재적인 것에 관해 말하지 않았으며, 언어에 대해 내재적인 것, 심지어 삶에 대해 내재적인 것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이러한 순수 내재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내재성을 하나의 삶으로 설명한다. "순수 내재성은 하나의 삶이라고,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며, 내재성은 어떤 것 속에 있지도 않다. 순수 내재성은 이미 그 자체로 삶이다.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 내재성이다. 그것은 완전한 역량, 완전한 지복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 내재성인 삶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이 글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AO의 첫 부분에서 보았던 발생적 삶과 결합시켜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모든 종류의 삶(la vie quelconque = 임의의 삶)에 관한 통념과 결합시켜야 하는 것일까? 들뢰즈는 라는 디킨스의 소설에서 따온, 삶에 관한 예를 제공한다. 이 소설에서 모든 사람들이 욕하는 건달은 죽음의 지점에 이르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그를 염려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 공감을 느끼며, 그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다. 하지만 그가 회복되었을 때, 이들은 또 다시 왜 자신들이 그를 경멸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 주인공은 단지 하나의 삶으로만 드러난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그 개인의 삶은 내적 삶과 외적 삶의 사건들로부터, 즉 발생한 것의 주관성과 객관성으로부터 해방된 순수사건을 방출하는 비인격적이고, 특이한 삶에 그것의 자리를 내어준다. 모든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일종의 지복에 도달하는 지점에 이른 '유일한 인간(Homo tantum ; only man)' 그것은 더 이상 개별화가 아니라 특이화(=단독화)인 이것임(=개체원리haecceity)이다. 순수 내재성의 삶, 중성적인 삶, 선과 악을 넘어선 삶. 왜냐하면 사물들 사이에서 이것을 구현한 주체만이 삶을 좋음(good)이나 나쁨(bad)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별성의 삶은 사라지며, 더 이상 이름을 갖지 않는 사람의 특이한(singular) 내재적 삶에 자리를 내어준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다른 어떤 것과도 혼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이한 본질, 하나의 삶…" 이제 디킨스의 죽어가는 건달의 예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특이한 내재성, 하나의 삶은 결코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도처에 있으며, 그 모든 순간에 이러저러한 살아있는 주체와 이러저러하게 살았던 대상에 의해 경험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내재성의 평면에 대한 이러한 성찰을 선험적 장에 대한 기술에서 시작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단순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과 주체들의 총합이 아니다. 반대로 순수 내재성 자체, 삶은 완전히 잠재적이다. "그것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재성의 평면과 선험적 장 사이의 개념적 통일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것들은 모두 주체들과 대상들의 경험과는 판이하다. 삶, 순수한 잠재성은 이것들이 현실화되는 삶들과는 판이하다. 그 잠재성에 있어서 삶은 현실적인 삶들과 마주보고 있으며(subtend), 따라서 현실적인 삶들을 통해서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내재성의 평면과 선험적인 장을 초월적 주체들 및 대상들과 대립시키는 애초의 지점으로 다시 오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대조는 우선성, 생산성을 통해서 정의된다. "우리는 항상 내재성의 평면 외부에 속하게 되는 초월적인 것을 요청할 수 있다. 혹은 초월적인 것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귀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초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면에 적합한 내재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계속해서 구성된다. 초월은 항상 내재성의 산물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모든 초월을 생산하는 것, 특히 여기에서는 모든 주체나 객체를 생산하는 것과 마주할 뿐 아니라, 이것에 선행한다. 따라서 나는 내재성 개념의 정립을 세 가지 단계에서 바라본다. 첫째, 내재성은 플라톤적 형성이나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적 신의 초월에 대립되는 이-세계임이다. 두 번째 순간에, 우리는 이 세계의 현실성들(이 세계에 거주하는 개별적 주체들과 대상들, 그 자체로 초월적인 심급들)을 그 잠재성들로부터 구별해야만 한다. 순수한 내재성은 정확히 말해서 이 세계의 잠재성이며, 특이성으로서, 사건으로서의 이 세계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정립의 계기인데, 이 순수 내재성은 창조적인 핵심(core)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산적 동력으로서 설정된다. 우리는 왜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귀중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내재성은 모든 창조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산성의 관점에서 우선한다. 사회의 내재성 유럽 철학사에서, 내재성/초월 문제틀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영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이와 똑같이 정치적인 영역에도 속한다. 그리고 내재성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정립의 이 세 가지 요소들 혹은 단계들은 정확하게 정치적인 영역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 근대 철학에서는, 적어도 홉스 이후로, 국가는 사회적 평면에 대한 그 초월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다 ― 그리고 사회적 평면에 대한 국가의 초월과 자연의 평면에 대한 신의 초월 사이의 동종성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 초월적 주권은 초월적 신과 똑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 국가를 우월성에 대한 이러한 공간적 은유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그 고전적 정의 중에서, 국가를 "분명히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이라고 규정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마키아벨리의 군주, 그리고 심지어 근대 자본주의 국가도 이것들이 초월적인 한에서, 즉 이것들이 사회 위에 서 있는 한에서 모두 주권적이다. 그러므로 내재성을 정치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국가에 반대하여 사회를 긍정하는 것이며,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사회 내부에서조차도 여전히 초월의 요소들이 있다. 혹은 국가의 요소들이 있다. 이러한 정립의 두 번째 계기는 사회의 이-세계임 내부에서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매끈한 것과 홈패인 것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가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홈패임은 사회적 장 자체에 속하는, 사회적 장을 구조화하는 초월의 요소들이다. 내재성의 매끈한 평면은 순수한 비주체적 흐름이다. 반면 홈패임은 흐름들을 수로화하는 운하를 형성한다. 내가 감옥, 학교, 가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제도와 연결시키고 싶어하는 홈패임은 예속과 주체화의 메커니즘이다. 주체들은 이러한 홈패임 내부에서 존재하며, 홈패임 내부에서 우리는 주체로서 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정립의 세 번째 계기인데, 내재성의 평면, 혹은 매끈한 공간은 생산과 창조성의 자리(locus)이다.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들뢰즈가 모든 초월은 내재성의 산물이라고 말했듯이, 또한 이러한 정치적인 논쟁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끈한 공간이 모든 홈패인 공간에 연료를 제공하는 생산적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생산의 관점에서 또 다시 우월성은 내재성의 측면에 있게 된다. 매끈한 공간, 자유로운 활동, 그리고 다양하게 상관되어 있는 요소들이 초월과 홈패임에 대해 더 가치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창조성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산의 관점에서는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홈패임은 단지 산물일 뿐이다. 공리계들 내재성에 관한 이러한 정립의 뉘앙스가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초월과 내재성의 구별, 그리고 초월에 대한 내재성의 우선성은 바로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직선적이며 비문제적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각 지점에서 내재성이 초월에 비해 선호할만한 것으로, 창조성과 생산성의 관점에서도 우선적인 것으로 가치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 계기에서 내재성은 창조성 혹은 생산성과 자유에 결합되어 있는 반면, 초월은 그 종속과 통제를 산출하는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초월에 대한 내재성의 가치평가를, 들뢰즈가 가치평가의 기준으로서 니체의 작용적 힘과 반작용적 힘들을 분석했던 것과 쉽게 상호관련시킬 수 있다. 내재성은 항상 작용적, 창조적, 생산적이다. 반면 초월(국가, 홈패임, 주체, 객체)은 항상 반작용적, 억압적, 타성적이다. 따라서 내가 말했듯이, 내재성을 정의하는 것은 어쩌면 복잡한 일이지만, 그것을 가치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히 명백하다. 사실 나는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의 모든 정치학에 작동하는 기준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반작용적 힘들에 대해 작용적인 힘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모든 심급에서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가치있게 평가하는 것. 하지만 에서 이처럼 명확한 가치평가는 일차적인 방해물인 자본주의에 의해 아마도 또한 파시즘에 의해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나는 여기서 파시즘의 문제를 옆으로 젖혀 두고 싶다. 어떤 경우에 문제는, 파시즘이 과연 지배의 내재적 형식인가이며, 만일 그러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구별되는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이러한 가치평가의 기준에 대한 방해물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자본은 맑스가 말했듯이 내재적 법칙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또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일반적인 탈영토화와 흐름의 탈코드화를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방해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종속과 통제의 가장 엄격한 형태를 전개한다. 내재성의 그러한 기계가 그토록 억압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내재성이 중심적인 정치적 기준이라고 하는 개념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발전하는 혹은 실제로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 남아 있는 억압 기계로서의 자본주의의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리계를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설정한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일반적인 공리계이다. 나는 여기에서 공리계를 변수들 사이의 고정된 관계를 설정하는 개방된 등식들의 집합이라고 하는 수학적 정의를 통해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한 공리는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이다.) 공리계는 새로운 공리가 끊임없이 덧붙여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방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공리계가]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의 공리에 맞서기 위해서는 핵심 경제의 특정 부문들, 예를 들어 중공업을 주변 경제로 이전하는 것이 덧붙여져야만 할 것이다.) 공리계의 개방성과 다원적 성격은 공리계가 매번 어떠한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다거나,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부딪히고 그것을 처리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 중 어떠한 것도 공리계에 재앙적이지 않다. 공리계는 그 등식에 대해 부분적이고, 시험적이며, 심지어 과잉결정된 해결책을 통해 기능하는 데 익숙해있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본주의는 그 몰락을 통해서 기능한다고 말했을 때 의미하려고 했던 것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요점은 내재성에 관한 것이다. 공리계는 고정된 진술의 계열들이 아니라 변수들의 등식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정확하게 내재적이다. 변수들은 임의의(le quelconque) 요소들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가치실현의 등식으로 접속되는 노동을 맑스는 추상적 노동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을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travail quelconque)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 재단사의 노동, 직물공의 노동, 목수의 노동,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 변수들은 공리계를 매끈하고 내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공리계 자체에는 어떤 주체들도 객체들도 없다. 오히려 변수들만이 있으며, 이 변수들을 위해 주체들과 객체들은 자본주의의 각 전개 속에서 대체될 수 있을 뿐이다. 공리계의 변수들은 임의의 주체성들, 임의의 객체성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리계는 내재성의 평면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모든 초월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국가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공리계가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자본주의가 국가와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홈패임의 모든 상관된 힘들과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이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항상 국가 홈패임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석에서 관계의 두 가지 국면들이 출현하고 있는 것을 본다. 첫 번째 국면 속에서 자본주의는 국가-형태, 국가-형태의 홈패임을 사용하며, 두 번째 국면 속에서 자본주의는 국가를 넘어서는 매끈한 지배 형태를 발견한다. (이러한 국면들은 그들이 의도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의도일 것이다.) 일(Work)을 홈패임으로 기술하는 들뢰즈와 가타리 속에서 첫 번째 국면의 관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리-사회적 일 모델은 두 가지 이유에서 국가 장치의 발명품으로서 이 장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둘째, 노동은 시간-공간의 홈패임이라는 일반화된 작동, 자유로운 행위의 예속, 매끈한 공간들의 소멸(=무화) 등을 수행하는데, 바로 국가의 핵심적인 기획 즉 전쟁 기계를 정복하려는 기획은 노동의 기원과 수단도 되기 때문이다."(490-491)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에 대한 엄격한 통제(regimentation)를 공간-시간의 홈패임으로 인식하는 것은 쉽다. 예를 들어 공장의 구성에서, 그리고 그 공간의 코드화(예를 들어 일괄생산 라인을 따라 이루어지는 노동의 과제들과 더불어)에서 공간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하루를 일(work)과 여가로 분리하는 것으로, 또 노동일의 시간들에 대한 정교한 코드화로 시간을 인식하는 것. 이 국면은 또한 자본주의의 작동을 위한 지배적 구조로서 국민-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설명되어야 하지만 나는 좀 더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서 이것을 생략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홈패임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 아니며, 홈패인 자본이 자본의 유일한 형태인 것도 아니다. 매끈한 자본 또한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 국면들로 설정하고 싶으며, 오늘은 홈패인 국면에서 매끈한 국면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늘날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자본 유통의 형태들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별, 심지어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조차 점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홈패인 자본과 매끈한 자본간의 구별이며, 심지어 홈패인 자본이 매끈한 자본을 생겨나게 하는 방법이다 …"(492) 전자는 후자에 길을 내주고 있다, 즉 홈패인 자본은 매끈한 자본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핵심에 있어서 공리계이며, 그러므로 내재성의 평면, 매끈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매끈한 국면으로의 이행은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의 실현이며, 자본주의의 매끈한 본질의 실현이다. 이제 이렇게 실현된 매끈한 자본의 지배의 형태는 국가-형태도, 어떠한 종류의 초월도 아니다.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는 국가가 아니라 지구적 전쟁기계에 상응해야 한다. 지구적 전쟁기계는 그 어떤 전쟁보다 무시무시한 평화와 더불어 매끈한 공간을 지배한다 ― 그리고 여기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확하게 공리계를 통해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구적 전쟁기계가 임의의 적(l'ennemi quelconque)을 통해 기능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만, 이 지구적 전쟁기계의 공리계에 대해 암시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아주 단순 명확하다. 즉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국가가 아니라 이 지구적 전쟁기계가 자본주의에 실제로 적합한 지배 형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지구적 전쟁기계는 공리계를 통해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주의와 지구적 전쟁기계 양자의 공리계들에 관한 이 모든 논의가 제기하는 문제는, 공리계들이 내재성과 억압을 조합하는 것이 실제로 중심적인 정치적 기준으로서의 내재성 범주의 효용성을 탈선시키는 것일까?하는 것이다. (공리계가 그런 식으로 기능한다고 나는 주장했었다.) 아니면 이 양자의 공리계가 내재성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이 공리계들의 내재성은 어떤 방식으로 판이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일까? 공리계는 실제로는 일종의 가짜 내재성, 억제되고 제한된 내재성일까
19    리좀과 다양체 [스크랩] 댓글:  조회:1097  추천:0  2018-12-04
* 리좀과 다양체  리좀 rhizome은 넝쿨식물의 땅속줄기이다. 리좀은 뿌리가 흔들리거나 뿌리에 말썽이 있으면 전체가 죽어버리는 수목arbolic적인 사유에 반대하는 의미로 쓰인다.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내리거나 가지 뻗고 있는 물질” 이 아니기 때문이다. 넝쿨식물의 뿌리는 한 뿌리가 죽더라도 다른 뿌리로 살아낼 수 있다. 보통 넝쿨식물은 포기 나누기가 가능하고 넝쿨뿌리는 흙 아래로 뻗어내려 단단히 심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벽을 타고 얇게 사방으로 뻗친다. 넝쿨은 벽, 바위, 어디든 휘감는다. 넝쿨뿌리는 깊은 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은 먼지에도 몸을 댄다. 뿌리가 썩은, 죽은 수목위에도 내뻗친다.  리좀은 필연적으로 다양체이다. 리좀에게 있어서 뿌리는 중요한 기관이 아니다. 수목형 식물의 뿌리는 뿌리 내림과 뿌리박음 즉 움직이지 않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다. 여기 이곳에 머묾, 정적임, 부동성이 뿌리의 역할이다. 뿌리의 기능이 리좀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는 까닭은 리좀은 여기 머묾이 아니라, 뻗침, 뻗어 내림 여기 저기 사방팔방으로 뻗침에 있기 때문이다. 리좀은 움직임이다. 리좀은 운동인가? 이행인가? 리좀은 이곳에서 저 곳으로 상승하는 저 곳을 향하기 위한 매개와 모순을 간직한 운동이 아니다. 리좀이 운동이라면 “이 운동, 운동의 본질과 그 내면성은 대립도 아니고 매개도 아닌 다만 반복일 뿐이다.” 리좀은 여기에 있고자 함 저기에 가고자 함 모두 아니다. 리좀은 에레혼Erewhon을 다룬다. 에레혼은 원초적인 부재의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여기를 어떤 마주침의 대상으로 “지금들과 여기들이 항상 새롭고 항상 다르게 분배되는 가운데 무궁무진하게 생겨나는” 언제나 새롭게 재창조되는 ‘지금, 여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좀은 여기-지금에 있거나 있지 않다.  넝쿨식물의 뻗침을 리좀의 연결, 리좀의 접속이라고 부르자. 리좀은 만들고 부스고 연결하고 접속하는,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서 있는 야생적 다양체이다. 리좀은 형태가 미결정적이며, 접속의 양태에 따라 다른 존재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접혀있던 주름이 펼쳐진다. 그리고 개봉되면서 안주름진다.  리좀의 접속과 연결은 일종의 코드 꼽기(plug in)이다. 그러나 리좀이 플러그 인인 것은 기본 동체에 부가적 기능을 추가하는 점에서라기보다는 평행적 배열이며 코드 꼽기를 통해 “어떤 되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리좀은 기계와 같다. 리좀은 연결과 연결을 통해 연결들이 불어나는 기능적 측면에서 기계들이며, 기계들처럼 유기적이며 하나의 통일성과 체계성을 지니지 않았다. 무한한 연결이 가능하다는 점, 이것은 기계가 수행하는 절단과도 관련이 있다. 기계들은 절단들의 체계이다. 기계들이 절단하는 것은 흐름을 막고 있는 구조이다. 자름으로써 흐름은 흐른다. 절단이 흐르게 한다는 점에서 절단은 흐름의 연결이다.  그래서 리좀,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배치물이란 이러한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이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리좀의 연결은 연결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하나의 구조로 정착되지 않는다. 이 연결은 배열일 뿐이다.  무한 증식이 가능한 리좀, 다양체에 있어서 나라는 말은 불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말하지 않던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았고 빨려 들어갔고 다양화되었다.”  *그리고et 그리고 변주variation  리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에 머물러서 이것은 무엇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식물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식물들은 뿌리를 갖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어떤 바깥을 가지며, 거기서 식물들은 항상 다른 어떤 것, 예컨대 바람, 동물, 사람과 더불어 리좀 관계를 이룬다.” 우리는 무엇임, 항상 현재임과 같음에 묶여 있는 여기-지금이 아니라 언제나 바깥임 것과의 관계, 다른 것들에 대해 우리의 감각을 열어야 한다.  무엇이다 라는 규정성은 어떤 유사와 유비 기원의 그것!과의 동일성을 통해서 확보된다. 왕권은 혈연을 통해 계승된다. 적자는 피의 고유성과 기원과 맺은 동일성의 함유량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 e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et 그리고et 그리고et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 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 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그래서 리좀은 항상 무엇임인 것을 뿌리 뽑는다. 리좀은 그리고를 통한 연결과 되기이다.  “음악 형식은 단절되고 증식한다는 점에서도 잡초나 리좀에 비견될 수 있다.”  리좀의 관심은 변주(variation)시키기. 변주는 반복이다. 일정한 선율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 반복은 재현이 아니다. 일정한 선율과 주제가 되풀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변주를 재현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변주는 주제에 새로운 성격을 덧붙여가며 변형시킨다. 변주는 다양함과 관련이 있다. 변주에 있어서 주제 선율이 되풀이 된다는 점, 이것을 존재의 일의성에 비견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제 선율보다 주제 선율을 변주하는 방식이 변주곡의 아름다움을 좌우한다. 주제가 일종의 테마라면 주제는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변주는 처음 시작했던 변주에서 각각 다시 들었던 변주가 겹쳐지며 반복된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 ‘토카타’와 마찬가지로 변주는 주제를 훨씬 풍성하게 해준다. 변주는 다시 돌아오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울은 각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에 도달했어야 했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  변주는 주제를 극단으로 몰고 과장하고 과잉하며 흘러 넘쳐 풍부해진다. 화음과 화성의 변주를 통한 대위법으로, 박자의 빠르기와 장식음으로, 변주는 주제에서 가장 멀어졌다가 주제를 황홀하게 표현한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변주시켜라.” 라고 말한다. 왜 변주시켜야 하는가. 그것은 삶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풍성한 삶은 고요한 삶이 아니다. 예상되는 삶이 아니다. 변주가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변주를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다 다양하게 함축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삶은 세상살이의 선과 악, 세상살이의 평가에 놓인 좋음과 나쁨과는 관련이 없다. 자기 집을 가진 자들의 눈에 떠도는 집시의 삶이 얼마나 기약 없는 흔들림인가? 그러나 삶은 평면적인 번들거림, 광택이나 관조가 아니다. * 탈주, 에토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란 물음은 유효하지 않다. 어떤 삶이라고 물었을 때 어떤 삶은 삶의 목적에 관해 묻고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삶을 여행으로 은유했을 때 들뢰즈는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묻는 것의 무의미성을 말한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멈추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서부터 어디로 왔는가를 반추하고 떠올리기 보다는, 들뢰즈는 삶을 부추기고 도모한다. “슬로건을 통해 써라.” 짧은 문장으로! 단정적인 표현으로! 동요하고 있는 미확정적인 주절거림을 행동하도록 도발하고 호소한다.  “항상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을 늘이고 연장시키고 연계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 도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어 고른 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려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뿌리지 말고, 꺾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빨리빨리, 비록 제자리에서라도! 단지 하나의 관념을. 짧은 관념들을 가져라! 핑크 팬더가 되라.”  항상 떠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떠남이 아니라 언제나 중간이다. 중간은 평균치가 아니라 속도를 내는 장소, 능력의 한계를 표기하는 감각의 온도계를 박살내는 장소이다. 어떤 파괴적인, 폭력적인 상황, 옴짝 달싹 못하는 수동적인 놓여있음에 있는 장소이다. 이 장소에서 넘어선다는 것. 이 장소에서 넘어섬은 지금-여기로부터 탈주하고 우리는 탈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난다.  탈주하는 삶, 리좀, 다양체, 연결시키기는 어쩌면 시간을 잃어버리는 행위일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은 시시각각 언제나 항상 따라붙는다. 그것은 고독한 삶일지도 모른다.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금지당해 있기에 욕망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온하다. 불온한 삶을 욕망하는 것은 양화된 시간을 낭비한다.  이 낭비하는 시간이 삶을 표현하는 길이다. 이론적인 제시가 아니라 실천적인, 욕망하는 힘과 역량이며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에토스ethos이고 윤리학ethics이다. 그래서 삶은 배움이다.  “헛되이 보내 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 성과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시간을 헛되이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기호들을 배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게으른 삶이 바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  (따옴표 인용; 천개의 고원, 차이와 반복(질 들뢰즈))   
[들뢰즈] 배치, 기계, 탈영토화, 되기의 개념을 어떻게 몸으로 살까.     서평 글에서 옮겨본다.    지은이가 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 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한겨레. 2008.10.25)    -우리를 다른 목숨들, 개체들과 관계 맺는 기계라고 부르는데, 이 기계라는 말이 참 재미있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무언가 좀 그야말로 너무 딱딱한 느낌도 듭니다. 기계는 그 스스로는 존재하기 힘든 무언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싶은데요. 기계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인 반면에 생명체는 관계를 맺으면서 사니 기계라고 말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존재 자체가 스스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동양의 사고로 본다면 이 기계라는 말이 어딘가 좀 어감에 거슬리는데, 하여튼 서양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 기계란 말을 쓰면서 요즘 우리 근대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하는데요. 근대 사회를 말할 때는 기계라는 말이 어쩌면 어울릴 것도 같구요.      그런데 이 다음 말은 재미있습니다. 생각해볼 점이 있어요.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야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구 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언표적 배치란 말은 참 어려운데요.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라는 거지요. 이 언표적 배치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고, 늘 변화 무쌍하게 변해가지요. 기계적 배치란 말도 참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나중에 알아봐야겠습니다. 더 들어보지요.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 양식은 '차이 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 생성의 일시적 응결 상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 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재미있는 말입니다. 욕망하는 기계라는 말은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욕암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라는 거지요. 이것도 좋습니다.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 되면 좋겠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무언가의 권력이나 유행에 그냥 따라서 동일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어떤 권력이나 유행이 생기면 거기에 동일시되어 동일성의 섬이 아니라 동일성의 거대한 육지를 형성하면서 고착되고 있는게 아닐까요.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속에는 자본의 독점과 이윤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일성의 섬들이 하나의 게릴라처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타자성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참 좋겠는데요. 동일성의 섬이 너무나 확대되어 하나의 권력을 이루고 있을 때, 차이 생성의 바다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오염되는 거지요. 차이 생성의 바다라는 것이 어찌보면 이 세상의 근원적인 원시 자연의 그 무엇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저 동일성의 섬들은 크든 작든간에 어떤 형태로든 부서지게 되어 있지요. 해체되고 재 구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저 동일성의 섬에 안주해서 지금 자본의 힘 앞에 모여 있는 게 아닐까, 늘 우리의 무의식을 점검해봐야 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어떤 권력을 추구하는 섬에 안주해 있을 때는 자연 비평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싯점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라는 것, 저 위에서 말하는 언표적 배치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해 봐야 할 것도 같습니다.  또 옮겨보지요.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 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탙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 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 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기존에 이루어진 배치, 이미 동일성의 섬을 이루고 고착화되어 가는 섬의 배치를 푸는 작업이 바로 탈영토화가 되겠군요. 그렇다면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 특히 판타지를 하는 사람들은 이게 아주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하겠지요. 판타지의 생명은 기존의 동일성의 섬에 하나의 영토를 더 해주는 그런 재영토화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지요.재영토화가 아니라 탈영토화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판타지의 세계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특히 어린이문학에서 말하는 판타지는 더욱 이런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판타지와 전복의 문제는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탈영토화의 길을 가려면 당연히 기존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삶의 배치에서 탈주하려는 상상력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 상상력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상상력은 그냥 현실과는 동떨어지는 어떤 공상이라고 보면 안될 것 같습니다. 상상력은 하나의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사유를 자극하는 내면의 힘, 영감,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정신의 힘에서 나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에서 내면을 바라보는 그런 심리에너지의 문제가 역시 개입됩니다. 지금 이 자리를 탈주하는 상상력의 힘, 세계관의 힘은 바로 자신의 마음 속 우주에서 태어나는 거지요. 그런 사유, 에너지 모두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여기서 우리는 노자와 통하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외부 현실은 모두가 내면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태어나는 거지요. 노자의 말을 빌면요.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되는데, 이 된다는 말이 참 여럽군요. 판타지에서 어떤 한 시공간을 창조하는데, 그 창조된 시공간은 역시 스스로 그러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런 차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일시적인 섬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역시 헤체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섬일 수가 있겠지요. 아니면 그런 일시적인 섬을 뛰어 넘는 근원적인 도의 세계를 닮은 그 어떤 시공간으로 상징되는 곳일 수도 있겠지요. 이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더 공부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더 옮겨보지요.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라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 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이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 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도태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이 참 좋습니다. 판타지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지요. 바로 저 되기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마음 속 우주에서 되기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음 속 우주에서 되기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당연히 그 되기가 밖으로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현실에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고, 탈주와 탈영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거지요. 외부현실에서 탈영토화와 탈주를 꿈꾸며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몸에서는, 내면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되기의 상징이 태어나는 거지요. 아마도 꿈에서 다 그런 상징을 올려보내주지 않을 까도 싶습니다. 꿈만이 아니라 사유나 명상이나 상상력을 통해 저런 마음 속 우주에서 먼저 되기의 시공간이 생겨나겠지요. 태어나겠지요. 하여튼 판타지를 얘기할 때도 이 들뢰즈의 철학은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공부해 봅시다. 실제 작품을 통해 이런 사유를 더 발전해 나가면 좋을 것도 같습니다.  
17    천의 고원 댓글:  조회:1124  추천:0  2018-11-09
천의 고원   제1강 들뢰즈/가타리 사유 개관   ▶ 이 강의는 『천의 고원』 중 「변신」장을 생명철학적으로 심화시켜 이해하려는 강의이다. 피어슨의 저작(Pearson, Germinal Life, Routledge, 1999)을 따라 강의할 것이다. 마누엘 데란다의 저작 (Manuel DeLanda, Intensive Science & Virtual Philosophy, Continuum, 2002)이 들뢰즈 사유의 자연과학적 이해/확장에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저작들(Brian Massimi, A User's Guide to Capitalism & Schizophrenia, MIT Press, 1992; Parables for the Virtual, Duke Uni. Press, 2002) 또한 뛰어나다. 군지-페기오 유키오의 『生成する生命』도 들뢰즈를 기초적인 원천으로 삼고 있다.     ▶ 변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베르그송,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중요 하다. 개별화된 존재들, 개체들은 카오스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과도 같다. 그러나 카오스는 단순한 암흑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개체들이 거기에서 나와 거기에로 돌아가는 근원적 氣, 太虛와도 같은 이를 ‘공재면(plan de consistance)’이라 부른다.   따라서 개체화되어 있는 차원을 근거로 하는 사유들은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는 피상적이다. “배경(ground)을 일깨우고 형태[피겨]를 와해시키는 것보다 더 큰 죄(sin)는 없다.”(『차이와 반복』) 그러나 피상적 차원이 소홀히 되는 것은 아니다. ‘superficial’의 차원, 즉 표면의 차원은 깊이의 차원과 대등하게 중요하다. 것이다.   『차이와 반복』이 잠재성과 강도 개념을 중심으로 한 깊이의 철학이라면, 『의미의 논리』는 사건과 계열화 개념을 중심으로 한 표면의 철학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베르그송적 구도를 띤다. 형상들은 물질-생명의 운동에서 파생하는, 그것도 우발적으로 파생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우주의 근본 주재자가 된다.   전개체적-비인칭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서 ‘존재론’(전통적 의미)을 생각할 때 ‘이것(haecceitas)’에 관한 둔스 스코투스의 생각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기존의 존재론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존재들(entities)을 우리 시야에 펼쳐 주는 존재론. 이 존재론은 또한 ‘이것들’의 잠재적장으로서의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를 설정하게 만든다. (공재면은 궁극적 탈기관체이다)    개체화된 존재들 ― ‘기계들’(이 말에는 스토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부터 현대적 맥락까지 다양한 맥락이 스며들어 있다) ― 사이에서는 한편으로 영토화/탈영토화의 과정이 발생하고, 그와 더불어 감응(affectus)에서의 변화도 발생한다.   이로부터 갖가지 윤리적-정치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창조적 행동학(ethology)을 구상한다.        제2강 복잡성과 유기체    ▶ 들뢰즈/가타리의 주요 개념은 ‘creative involution’이다. 이 개념은 들뢰즈/가타리를 다윈뿐만 아니라 베르그송과도 구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를 이끈다. (『스피노자와 실천철학』에서 「스피노자와 우리」 참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배치의 한 요소로서의 인간이다. 이제 인간의 ‘진화’가 논의된다면 자연 및 생명체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보다 기계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 ‘환경’의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 ‘기계적 퓔룸(machinic phylum)’의 개념이 중요하다. 퓔룸은 연속적 변이(정도의 사유, 베르그송주의)의 바탕/주체로서 특이성을 실어 나른다. 퓔룸의 차원에서는 인간과 自然이 통합된다. 퓔룸은 디아그람과 쌍을 이루어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추상기계가 구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면 배치가 된다.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메카닉들은 인간-주체의 발명품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배치로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메카닉에 흡수된 비관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메카닉, 그리고 동식물들 등이 함께 형성하는 기계적 배치가 문제될 뿐이다. 아울러 언표적 배치가 함께 고려되면서 문화의 차원이 함께 다루어진다.  ‘공재면’, ‘내재면’은 카오스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구조-섬들 아래에 또는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장, 구조-섬들이 거기에서 개별화되어 나오고 또 그리로 돌아가는 기(氣)가 공재면, 내재면이다. 태허(太虛)에 해당한다. 氣, 太虛는 또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실체=자연=신이기도 하다. 같은 논리가 보다 구체적인 여러 층차들에서 적용될 때 ‘탈기관체’ 개념이 성립한다.   ▶ 들뢰즈/가타리는 다윈, 바이스만,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한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유기체보다 그 아래에서 지속되고 있는 ‘생식질’(바이스만)에 중점을 두고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몽동으로 대변되는) 개체화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것은 구조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탈주체주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각의 한 급진화인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유전이나 진화는 생물학에서 보다는 더 복잡하고 넓은 함의를 띠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현재 주류 이론인 신다윈주의, 유전학, 분자생물학을 흡수하지만 그 테두리에 갇히지는 않는다.  바이스만의 생물학과 더불어 복잡성 이론 및 자기조직화 이론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서 복잡성 이론은 물리학적 맥락보다는 생물학적 맥락을 가리킨다. ‘complexity’는 글자 구성 그대로 “함께-접혀-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의 이론이다. 자연도태의 주인공은 환경이고 생명체는 도태/생존의 순서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체와 환경은 연속적이며, 생명체는 개방계(open system)을 구성한다. 생명체는 단지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응답하는(repliquer) 것이다.(베르그송)   굿윈의 말처럼 생명체는 단순한 내적(유전자 수준에서의) 변이의 결과가 아니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며, 또 캠피스의 말처럼 적응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 자체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과정과 산물들은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도 이런 구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렐라에 따르면 생명체와 환경은 ‘상호 종화’와 ‘공결정(codetermination)’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보다 발달한 생명체일수록 이런 연계성의 복잡성도 커진다. 이 생각은 ‘탈영토화’ 개념으로 이어진다.    철저한 다윈주의자인 모노에게도 이런 생각은 나타나 있다. ‘도태압(淘汰壓=selective pressures)’은 유사한 생태권들(ecological niches) 내에서 살아가는 상이한 유기체들 사이에서의 종적(種的) 상호작용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기체는 이 과정에서 ‘선별적인’ 역할을 하며, 유기체가 더 발달될수록 자율성은 점점 더 커진다.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기계’와 ‘메카닉’을 구분하며, 모든 기계들을 내재면에 놓고서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부는 단지 선별된 외부이며, 외부는 단지 투영된 내부일 뿐이다.” 이는 윅스켈과 메를로-퐁티를 거쳐 들뢰즈/가타리로 이어지는 생각이다 (메를로-퐁티와 들뢰즈/가타리의 차이도 음미).   그리고 생명체의 자율성은 배치와 탈영토화에 관련해 이해되며 자기조직화도 이런 개념틀 속에서 이해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칸트로부터 오늘날의 자기조직화 이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통일성, 안정성, 동일성의 개념은 비판된다(그러나 이케다가 강조하는 동일성의 역할도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유전자 결정론과 대립한다. 최근의 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더 이상 물질적 구조의 부대현상(epiphenomenon)으로 보지 않으려는 입장을 다듬어 왔다.   유기체의 생명은 비선형적인 피드백 공정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자기조직계들(autopoietic systems)의 창발성(創發性)으로 이해된다. 유기체들은 자기조직 및 자기조절(self-regulation) 능력을 가진다. 생명은 DNA가 아니다. 분자들의 활동, 유전자들의 활동, 형태발생적 맥락 등은 단순한 연역관계를 맺지 않는다. 로버트 로젠은 바이스만의 생각을 전복시킨다. 체세포와 유기체가 중요한 것이다. 생명이란 형태발생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복잡계들의 창발적 현상이다.   진화 없이 생명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생명 없이 진화를 생각할 수는 없다. 생명체들은 단지 진화 과정의 매듭들인 것이 아니다. 생명체의 활동이 진화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제3강 탈기관체와 유기체     ▲ 들뢰즈/가타리는 분자 수준과 단백질 수준을 내용과 표현으로  파악. ▲ 내용으로부터 표현이 연역되는 것이 아니다. → 일방향적 설명(환원주의),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 ▲ ‘번역’이 아니라 코드의 잉여가치. ▲ 다윈주의는 대수(大數) 개념에 입각한 통계적 덩어리들을 다루는 몰적 사유. ▲ ‘비정상적인’ 동물-되기들. ▲ 탈영토화 개념이 코드의 잉여가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 (탈주선의 일차성도 상기.)    이로써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동일성의 사유)에서 벗어난다. ▲ ‘진화’라는 개념의 뉘앙스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것. ▲ 단지 이행, 다리 놓기, 턴넬 뚫기가 있음. creative involution! 퇴행도 점진도 아닌 되기가 있을 뿐.     ▶ 들뢰즈와 가타리는 층화(stratification)의 세 양태로서 유기체화, 기표화, 주체화를 든다. 유기체화로부터의 탈주는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유기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보존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지적했듯이 그 부분들은 그것 들이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한에서 극소의 자율성만을 가진다.   지구라는 탈기관체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을 나른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또한 층화가 발생한다. 층들의 체계는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강도들과 특이성들을 ‘포획’한다.   유기체적 층화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로 구성된 ‘체(corps)’를 ‘유기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유기층에서 유기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유기체와 탈기관체 사이에서의 ‘윤리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유래한 탈기관체 개념을 자신들의 체계로 흡수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탈기관체는 내재적 장이다. 그것은 강도들을 산출하고 분배하는 ‘욕망’(의 장)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유기체들이 탈기관체“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와 함께 있으며 늘 일정한 과정 속에 있다. 탈기관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탈기관체는 한 유기체의 구성에 포함되어 있는 접힘들, 침전들, 엉김들의 발생의 터가 되는 ‘초저속의(얼음 같은) 실재’를 구성한다.   그에 비해 유기체는 이 체 위에 존재하는, 그것에 형식들, 기능들, 위계적 조직화들, 초월성들을 주는/부과하는 층(stratum)을 구성한다.그러나 유기체와 탈기관체가 불연속적 타자로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1) 탈기관체는 층들 속에서 작동하기도 하고 또 탈층화된 공재면 위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즉 하나의 층으로 간주 되는 유기체에 (기관들의 견고한 조직화에 대립하는) 탈기관체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유기체의 층에 속하는 그것[유기체]의 탈기관체가 존재하기도 한다. 즉 유기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기체를 힘들, 강도들, 지속들의 보다 넓은 장 속에 위치시켜 보자는 것이다. 이 장 안에서 탈유기적 생명과 층화된 생명의 끝없는 상추(相推)가 계속된다. 베르그송 및 기학과 비교.   2) 탈기관체들의 ‘되기’는 ‘이것-임’/특이성을 통한 개체화, 그리고 영도(零度)에서 시작하는 강도들의 산출을 포함 한다. 이는 구분되는 계통들을 가로지르는 횡단성(橫斷性)을 낳는다. 결국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유기체 개념은 위계화되고 초월화된 조직화로 이해된 유기체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분자적 층위 또는 리좀적 층위를 선험적 장으로 제시함으로써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얽히는 카오스모스의 자연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탈기관체 개념은 자연철학만이 아니라 윤리학적 함축을 띠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신체=‘기계’에는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신체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것, 다른 신체들과의 좋은 만남을 이루는 것, 새로운 변양과 감응을 시도하는 것, 의미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이 중요하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와 기학을 함께 사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친 탈층화는 오히려 불행한 결과들을 낳기도 한다. 강도 높은 신체가 되는 것, 유기체로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제4,5 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 베르그송은 두 종류의 복수성(multiplicite)을 구분 :  ①수적, 공간적, 현실적 복수성과                                                                                 ②질적, 시간적, 잠재적 복수성.     → 이 구분은 과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 물질과 생명을 구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질적 복수성을 ‘다양체’로 부를 수 있다.   전통 사유가 일자와 다자의 조각그림-오려-맞추기의 사유(樹木型 사유)를 펼쳤다면, 베르그송-들뢰즈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성하는 다양체이다.     ▶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차이 1) 들뢰즈에게는 베르그송적인 급진적인 연속주의는 함축되지 않는다. 2) 들뢰즈에게는 물체와 생명체의 날카로운 구분보다는 이들이 함께 형성하는 배치가 문제가 된다. 3) ‘진화’의 뉘앙스가 훨씬 복잡하게 된다. (리좀, ‘산종(散種)’,  ‘창조적 첩화’.) 4) 베르그송 :  氣가 물질성과 생명성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들뢰즈    :  氣가 리좀 상태로 탈주하는 방향과 층화되고 석화되는 방향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베르그송-들뢰즈에 의해 ‘복수성’이라는 말은 실사(實辭)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실체들을 셈으로써 성립하는 서술어로서 ‘많음’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실사인 ‘다양체’가 되었다.   다양체가 포함하는 차이들은 ‘크기들(magnitudes)’이 아니라 ‘거리들(distances)’이다. 크기들은 등질적 공간에서 성립하고, 거리들은 연속적 변이가 발생하는 다질적 공간에서 성립한다. 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소산적 수’이고 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능산적 수’이다. 능산적 수는 곧 잠재적 수이다.   다양체는 강도들을 통해 측정된다. 강도는 크기들이 아니다. 20도와 20도를 합친다고 40도의 날씨가 되지는 않는다. 시속 60킬로로 10킬로를 두 번 달리는 것과 시속 120킬로로 10킬로를 달리는 것은 같지 않다. 단순한 양이 성립하는 것은 등질적 공간에서이다. 세계를 강도로 볼 때 수학적 환원주의는 거부된다. ‘intensity’는 ‘intension’과 통한다.(우리말 ‘강도’와 ‘내포’가 잘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intension’을 ‘내포도’ 또는 ‘內含度’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다양체는 선들과 차원을 가진다. 다양체는 계열들로 형성된다. 다양체가 함축하는 질적 복수성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은 (재)영토화와 탈영토화 때문이다. 다양체는 늘 생성한다. 접속, 영토화/탈영토화, 탈주선, ‘코드의 잉여가치’, 리좀, 창조적 첩화 등이 모두 이와 연관해서 이해된다.    생명체/주체 또한 다양체이다. 들뢰즈에게서 ‘균열된 나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진화’는 다양체의 생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다양체들의 생성은 곧 복합적인 형태의 소통을 함축한다. 이것은 매걸리스의 ‘공생적 발생(symbiogenesis)’ 개념과 통한다. 이는 리좀적 진화로서 기존의 분류학적-계보학적 틀을 깨는 횡단적 배치들(transversal assemblages)을 통해 진화를 이해한다.   DNA는 작은 레플리콘들(복제 단위들) ― 플라스미드들(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유전인자), 비루스들, 트랜스포손들(레플리콘들 사이에서 전이되는 유전자군) 등 ― 의 형태로 쉽게 돌아다닌다.   리좀 형태의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계열들의 속도와 방향이다. 때문에 리좀학은 ‘반계보학’이며 라마르크적인 방향성은 거부된다.   베르그송과 다윈은 공히 개체군들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복수성의 사상가들이다. 특히 신다윈주의는 발생을 속도, 비율, 계수들, 미분적 관계 등으로 파악한다. 발생은 미리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는 것이아니다. 이제 발생의 정도는 증가하는 완전도, 또는 분화, 부분들의 복잡성의 증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태압, 촉매작용, 전파 속도, 성장비, 진화, 돌연변이 등과 같은 미분적 관계들과 계수들에 의해 측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개체군을 몰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분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대수의 법칙에 근간하는 통계학,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고전적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리좀적 차원에 주목하는 것은 곧 분자적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개체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유의 수준을 개념적 유기성의 차원에서 구체적 지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곧 가장 구체적인 차이의 운동들에 주목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함축한다.   제6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 공재면으로서의 자연    조프루아 쌩-틸레르의 ‘추상동물’은 퀴비에가 그어놓은 경계선들을 무너뜨린다. 기관과 기능, 구조와 발생 유형들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속도와 강도에 기반하는 자연의 보편적인 면(面)을 발견했다. 조직화의 도안(조직면)은 무한히 유연한 추상기계로 화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내재면이고, 또 모든 것에 대해 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의성의 면(일의면)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자연이며, 장횡거의 태허(太虛)이다. 이 개념을 통해 개체화된 현실성의 세계로부터 전개체적-비인칭적 잠재성의 세계로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명계에서의 비정상적 결연, 창조적 첩화, 횡단적 소통들이 사유될 수 있다.   * 태허(太虛): 중국 사상의 기본적 개념의 하나로 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 라 불렀다. ‘태허’가 기의 본체를 가리킨다고 한 사람은 송(宋)의 장횡거(張橫渠)로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라 하고 기는 태허에서 생기고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함께 만물은 소멸하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즉, 기가 흩어진 모습이 태허라고 설명하였다.     ▲ 공존면: 현실화된 존재들의 공존 / 공재면: 잠재적 차원에서 모든 것들이 공존.  ▲ 일자성과 일의성의 차이  ▲ 장자의 제동(齊同)의 의미  ▲ 공재면 자체의 생성 (베르그송적 차이를 사유하기)  ▲ 차이와 동일성       제7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Ⅱ     ▶ 들뢰즈 사유의 구도는 결국 고대의 본질철학과 근대의 주체철학에 대립한다. 또 철학을 언어철학이나 사회철학, … 등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들과도 대조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사유하지만 그러나 경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 자연과학과의 연관성, 예술과의 연관성, 종합적-횡단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   ▶ 창조적 첩화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를 일체의 목적론적 함축을 배제하고서 사유하고자 한다. 발생의 정도, 복잡성에 입각한 위계를 비롯해 일체의 일방향적 사고는 배제된다. 횡단적 소통에 의한 ‘괴물들’의 탄생, 분자적 층위에서의 탈영토화, 퓔룸이라는 물질적 바탕에서의 새로운 존재들의 생성이 사유된다.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가능케 한다. 리좀의 개념. 베르그송에 여전히 함축되어 있는 진화의 방향성조차 거부된다.   창조적 첩화는 ‘동물-되기’와도 관련된다. 동물-되기는 인간의 의식적 되기의 맥락과 생명철학적 맥락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 동물-되기는 횡단적 소통을 통한 창조적 첩화를 뜻하며, 횡단적 소통은 또한 ‘되기의 블록’, ‘생성의 블록’과 관련된다.  첩화는 퇴행이 아니다. 예컨대 프로이트에게서 나타나는 퇴행은 창조적 첩화와는 대극적인 사유이다.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분화(differenciation)가 아니라 블록들의 생성이다.   다윈주의자들이 볼 때, 또 결정론적 태도를 가진 과학자들이 볼 때 리좀적 생성을 무조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금 완화된 결정론자들의 경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법칙의 복잡성이나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질 수 있다. 그에 비해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훨씬 급진적이며, 실증적 연구들의 통해 이런 대립이 해결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들뢰즈/가타리의 가설을 받쳐 주는 요소들 중 하나는 진화에서의 전염성, 유행성 변화이다. 이는 리좀적 방식의 진화를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이며, 도킨스 같은 유전자 결정론자조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루스=바이러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질적인 존재들(인간, 동물, 박테리아, 비루스, 분자, 미세기관들,…) 사이에서의 전염과 유행은 분명 진화를 복잡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도킨스는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전자 결정론과 다위니즘을 견지한다. 캠피스는 이 점을 비판하면서 도킨스의 ‘extended phenotype’을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들뢰즈/가타리의 생각은 매걸리스가 『세포 진화에서의 공생』에서 전개한 논의와 매우 가깝다. 진화에서 도태의 역할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신다윈주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진화에서의 진정 새로운 변화는 상이한 퓔룸들을 가로지르면서 나타나는 합병, 연합을 통해서이다. 합병과 연합을 통해서 유전자 자체에서의 큰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유전자에 입각한 일방향적 인과나 유전자를 항구적인 동일성으로 보려는 생각들은 거부된다.   더 나아가 개체군의 사유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개체들 이하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중층결정.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개방계적 연구방식(open systems approach)’을 선취하고 있다 하겠다.     제8강 자기조직화와 기계적 이질생성 ※ 지금까지 배운 내용 복습 ▶ ‘기계적 이질생성(machinic heterogenesis)’이라는 가타리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조직화 이론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한 요소이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서도 수용되지만 (이 이론은 ‘센트럴 도그마’로 대변되는 환원주의와 결정론을 논박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동시에 들뢰즈/가타리의 시각에서 볼 때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 이는 진화의 ‘기계적’ 성격과 관련된다.   ▶ ‘횡단적 소통’은 진화에서의 계통수들(genealogical trees)을 뒤섞는다. 물론 이 뒤섞임의 개념은 계통수 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뒤섞임까지 포함한 전체적 지형도를 볼 필요가 있다. 계통적 계열들은 그보다 근본적인 기계적 퓔룸을 전제한다. 기계적 퓔룸은 여러 계통들을 낳지만 동시에 물질적 힘들의 횡단적 움직임들을 통해 새로운 생성들을 낳는다. 계통수들은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진행되며, 친자관계/分岐(filiations)에 입각해 진행된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들은 새로운 결연들(alliances)을 통해 진행된다. 생성의 선은 특정한 매듭들을 가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로지 ‘중간(middle)’만이 있다. 이 중간을 통해서 생명은 ‘운동의 절대 속도’를 향유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사이(entre=in-between)’ 개념은 중요하다. 모든 것은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이는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생성의 장이다. 카오스를 통해서 개체들의 코스모스가 생성한다. 이러한 생성이 도태압을 무너뜨린다. 물론 도태압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도태압은 그것에 대응하는/응답하는 유기체들의 활동을 고려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곧 행동학적 배치들(ethological assemblages)을 함축하고 있다.   ▶ 기계적 배치들에의 주목은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자기조직화와의 비교를 통해 계방계들 로서의 생명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기 때문이다. 자기조직화 개념은 생명체란 자기차이성(自己差異性)을 보여주는 존재임을 잘 설명해 준다. 이는 곧 생명체가 계방계임을 말해 준다. 자기조직적 유기체 즉 ‘기계’(= 신체)의 기능은 그것의 특수한 유전적 구조 또는 조성(composition)으로 환원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의 구성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이다. 자기조직적 존재들은 스스로의 조직화와 경계들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들은 “조직화를 통해 닫힌” 존재들이다. 따라서 자기조직적 존재들의 진화는 차이들의 와류에서 계속 메타동일성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로 이해된다.(이케다 기요히코)   그런 동일성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해체(disintegration)가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조직화 이론은 자기동일성을 지키려는 개체들의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진화 전체의 창조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 사실의 문제를 넘어 삶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된다.   ▶ 기계적 진화는 이질생성들을 종합하며 또 ‘공재(共在=consistency)’의 형성을 포함한다. 기계적 배치들은 포텐셜 장들과 잠재적 요소들을 통해서 場을 만들어나가며, 종과 유의 구조를 넘어 기술적 -존재론적 문턱들을 가로지른다. 자기조직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장 위에서이다. 이것은 기계적 자기조직화를 기계적 이질생성으로 봄을 뜻하며, 자기조직화라는 모델에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한 비평형 개념을 도입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타자성(alterity)은 보다 넓은 경지에서는 창조적 진화를 위한 조건으로서 이해된다. 이는 배치들의 행동학과 관련된다.   제9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I     ▶ 지능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이해를 추구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폰 윅스퀼이 거론된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이 모두 윅스퀼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윅스퀼 (1864~1944) 독일의 동물학자, 비교심리학자 인간이 아닌 동물을 중심으로 동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동물과 그 동물이 속해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기능환(機能環)'으로 표현하고, 각 동물은 다시 넓은 자연 속에서 그 종(種 )의 독특한 환경 세계를 주체적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환경세계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환경 세계론은 새로운 생물행동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생물행동학자인 로렌츠나 틴버겐에게 사상적 으로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클라크 같은 사람도 마음을 ‘a leaky organ’으로 규정하면서 행동주체(agent)의 표상주의적 개념화 들을 벗어난 심신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입장들에 따르면 지능은 상이한 물질적 공재(共在)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능은 행동의 다각도의 측면들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하며, 행동은 개체들을 관통하는 복잡한 물질적 체계들(배치들) 및 계통적 혈통들과 유기체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리좀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 진화는 되기의 블록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제 ‘행동학(ethology)’은 행동주체의 ‘behaviour’에 대한 관한 담론에서 배치들의 운동에 대한 담론이 된다.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제10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Ⅱ     ▶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자극 -반응의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로렌츠는 본능적 행동은 해부학적 구조만큼이나 항상적이고 고정적이라고 말한다. 보다 복잡한 상황에서는 ‘본능적 복잡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로렌츠나 틴버겐은 이 메커니즘에 근거해서 종, 유, 나아가 문(phylum)까지도 분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근의 행동학은 행동의 패턴을 행위의 강도 조절, 시간 조절, 속도 조절에 기인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Thorpe, Merleau-Ponty) 더 중요한 것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를 벗어나 동물과 환경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둘러싼 게으른 논쟁에서 벗어나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항목이 환경적으로 안정적인가 그렇지 않은 가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동물들의 적응(adaptation) 자체가 학습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도 강조 되고 있다. (McFarland) 가변성과 유연성이 중요하다. 관계는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자기가 자기를 완벽하게 안다 가정해도 타자가 어떻게 나올지는 시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최근의 행동학은 이런 존재론적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 모든 영토는 다른 종들의 영토들을 포괄하거나 가로질러 간다. 로렌츠가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영토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영토성이 공격성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을 따라, 이런 구도에서의 자연을 음악적으로 파악 한다. 즉 자연에 대한 선율적인, 다성음악적인, 대위법적인 파악이다. 새들의 노래, 거미의 집짓기, 연체동물(예컨대 소라)의 껍질, 진드기 등이 그 예이다.   연체동물의 죽음은 소라게의 거주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목적론적 자연 개념 에서 선율적 자연 개념으로의이행을 함축한다.여기에서 자연의 기예(技藝)와 인간의 기예는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연체동물의 껍질과 게 사이에는 대위법적 관계가 성립하며, 여기에서 성립하는 되기에는 기능적인 요소들(성, 생식, 출산, 양육 등)만이 아니라 ‘sensibilia’도 포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의 이 창조적 양태를 ‘art=기예’라 부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의 분석을 더 밀고 나아가, 동물-되기는 적응의 대상들(traits)의 선별만이 아니라 물리-화학적 강도들과 근접성의 영역들(zones of proximity)의 작용까지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것들이 퓔룸적 혈통들을 가로지르며, 따라서 생명은 음악적인 ‘생성/되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본능과 학습을 둘러싼 논의가 아니라 ‘공재성(consistance)’에 주목하는 것이다. 공재성에 주목했을 때 리좀적 배치를 탐구할 수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행동을 중심들과 활동(activation) 사이의 선형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들로 모형화할 수 없다고 본다. 생물학적-행동적 기계학(machinique)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선천적인 것은 탈코드화되고 획득된 것은 영토화된다. 행동에서 배치로. 어떤 국소적 작용도 다른 것들과 얽혀 있고(coordinated) 중심적 주체가 없이 거대한 결과가 현실화된다/동시화된다. 여왕개미는 없다.   이는 곧 창발성(emergence)의 논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뇌들, 신체들, 분자들, 세계들(이들 모두는 서로의 영토들과겹치면서 존재한다)을 포괄하는 ‘산포된 지능(distributed intelligence)’을 통해 행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우프만이 강조했던 자기촉매작용은 하나의 유기체 내에서가 아니라 배치들 전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탄생도 특정한 메커니즘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산포의 결과일 뿐이다. 지연된 발생(예컨대 幼生生殖), 기관들의 특별한 탈영토화(예컨대 손과 발), 그리고 특히 환경의 상관적인 탈영토화(숲에서 초원으로). ‘잃어버린 고리’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배치의 변환인 것이다.       제11강 동물-되기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층화와 공재면/탈기관체가 밀고 당기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생명체는 층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인간의 비인간적 되기들’이 존재함을 역설한다.   모든 되기는 분자적이다. 이는 곧 생명체를 본질=종을 넘어 개체군으로 보는 것이고, 나아가 개체군으로 통계처리를 할 수 없는 ‘분자’의 차원에서 봄을 뜻한다.   의식적인 동물-되기는 인간에게서만 성립하지만, 자연세계에서도 동물-되기는 성립한다. 말벌의 양란-되기와 양란의 말벌-되기가 그 좋은 예이다.       양란 (tropical orchid)                                                                                                    ▶ 행동학적 접근에서 신체는 기관들과 기능들, 종과 유로 규정되기보다는 ‘감응(感應)’(스피노자의 ‘affectus’)하는 신체는해부학이나 분류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에 감응하고 스스로의 특이성들과 강도들의 장, 즉 ‘氣’를 변화시켜 자신의 존재 여건을 자발적으로 바꾸어가는 존재이다. 감응하는 신체의 감각은 식별 불가능 또는 규정 불가능의 지대 (地帶)를 통과한다.   한 개별화된 배치의 부분을 형성하는 동물의 능동적/수동적 감응들에 대한 윅스퀼의 논의는 스피노자와 연결될 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진드기의 예에서 중요한 것은 생리학적 특성들이 아니라 관계, 정도, 그리고 속도의 리듬이다.     ▶ 동물-되기는 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려는 융적인 시도가 아니라 차라리 층화가 더욱더 무너지고 공재면이 두드러질 미래를 염두에 둔 논의이다. 동물-되기는 인간적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가두어 이해하는 정신분석학과 대립한다.   동물-되기는 표상/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감응의 문제이다. 꼬마 한스와 말의 관계는 주관적 몽상의 관계가 아니다.   동물-되기의 감응은 실재적인(real) 것이다. 분자-되기는 종과 유라는 몰적 질서를 일탈한다.   ▶ 표상/재현은 인간적 형식과 질서를 절대시하는 문화주의와 도덕주의를 은폐 하고 있다. 동물-되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표상의 함정에 빠지는 것, 즉 신체를 기관들과 기능들의 질서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첩화에 있어 동물의 왕국은 강도와 근접성(진동들과 운동들)의 지대들에 의해 정의되는 탈기관체로 화한다. 여기에서 꼬마와 동물은 ‘주체들’이 아니라 복잡한 배치들에서의 ‘사건들’로 화한다. 배치들은 환경과 얽혀 있다. 시공간적 관계들은 사물의 술어들이 아니라 배치들 또는 복수성들의 차원들이다. 동물들은 공생적 복합체들에 들어가 활동한다. (포식 동물의 시공간)   ▶ 둔스 스코투스는 ‘이것’ 즉 개체화하는 차이 개념을 제시했다.(라이프니츠의 ‘완전 개념’과 비교) ‘이것’은 기존의 분류 방식을 깨는 무수한 ‘entities’들이다. 그것은 분자들/입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리라는 경도적 관계들과 감응을 주고받는 위도적 능력들에 관련된다. 그것은 전통적인 실체도 주체도 아닌 어떤 개체이다. 주체들은 이 속도의 경도들과 감응의 위도들의 카르토그라피 내의 개체군들로서 존재한다.   자연은 집단적 배치들로 존재하며 이는 ‘탈주체적 개체화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속도들과 역능들/감응들을 통해 진화한다.   중요한 것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몰적 구성체는 분자적 무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되기는 언제나 몰적 외연을 포함한다. 정신분석학은 되기들을 하나의 콤플렉스에, 몰적 규정의 콤플렉스(오이디푸스, 거세)로 환원시킨다. 프로이트가 늑대 인간의 여러 늑대들을 하나 즉 아버지로 환원시킨 것이 그 예이다.   ▶ 분열분석 또는 리좀학의 목적은 인종, 혈족, 종, 유 등과 같은 몰적 구분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 덩어리진 현상들의 선험적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맥락에서 이것은 미시물리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이 별개가 아님을 말한다. 이 차원에서는 열역학조차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배치는 통계학이 무너지는 탈주선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의 생성은 분열생성(schizogenesis)이며, 횡단적 소통, 포함적 선언들(inclusive disjunctions), 다성적(多聲的) 연언들(polyvocal conjunctions)을 통한 생성이다.   ▶ 몰적 구성체들은 분자적 힘들의 통합이자 총체화이다. 분자적 무질서의 부분적 대상들이 결핍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욕망은 결핍으로 파악된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은 분자적 복수성의 적극적 산포가 아니라 (신경증이나 거세 유형들에서 볼 수 있는) 거시적 규정성들의 주체들만을 다룬다. 욕망을 결핍으로 봄으로써 사람들은 욕망을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특정한 목적, 목표, 의도에 연관시킨다. 이로써 욕망은 생산의 실제 과정에서 유리되어 표상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12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I     ▶ 『천의 고원』에서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은 탈기관체 개념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윤리학적 함축이 깃든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알(卵)로서, 이것은 강도=0의 순수 잠재성이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자아가 자신의 되기를 실험하는 환경이다. 그러나 탈기관체가 층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탈기관체는 층화와 함께 있다. 탈기관체에의 추구는 기원에로의 되돌아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조건의 자발적 변이일 뿐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적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화와 주체화를 변이시켜 가는 것 또한 탈기관체를 통해서이다. 탈기관체는 탈아적(脫我的) 알(卵)이다. 그것은 타자성(alterity)의 장소이다. 그것은 창조적 첩화의 장소이다. 탈기관체는 ‘intense germen’(강도적 유아幼芽)이다. 그러나 이는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성/되기의 잠재성을 가리킨다. 기계적 이질생성과 리좀적 배치들에는 이런 생성/되기들이 항상 함축되어 있다.   ▶ 일직선적인 계보학적 기억들로부터 창조적 되기로의 이런 이행을 예시하기 위해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 家의 테스』를 생각해 보자. 테스는 유전자 결정론을 깔고 있는 비관주의적 소설이다. 여주인공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식질’의 또 하나의 예이며, 하디는 철저한 다윈주의에 입각해 테스나 주드 같은 부적응자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도태되는가를 그린다. 주인공들은 “잔혹한 자연법칙이 그들에게 떨어뜨린 감정(emotion)의 무게에 눌려” 신음한다. 모이라와 하마르치아는 본능과 유전형질(inheritance)로 바뀐다. 테스는 여섯 명의 데비필드 아이들을 보면서 맬서스를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연의 도안의 결과들일 뿐이다. 노도처럼 닥쳐오는 산업사회라는 객관적 환경, (에인젤 클레어를 실망하게 했던) 도덕적-문화적 환경 또한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이다.   ▶ 로렌스는 하디와 다른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분석한다. 로렌스에게 생명이란 잉여이며 넘침이다. 약동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약동이 있다는 것이다. 로렌스에게 생명은 탄력적인(elastic) 것이고 불연속적인(discontinuous) 것이다.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들이 언제나 같은 결론 으로 치닫는다고 본다. 자연과 사회에 의한 개인의 압살. 로렌스는 이 점에서 근대의 비극에는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에게도 볼 수 있는 위반(transgression)의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그렇다) 하디의 소설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법(칙)을 인식하고 사랑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에서 사랑은 늘 법(칙)과 그것이 가져오는 죽음이라는 결과에 의해 으깨어진다고 본다. 기억이 있을 뿐 생성/되기는 없다. DNA를 물신화(物神化)하는 도킨스의 생각도 바이스만-하디의 연장선상에 있다.     제13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Ⅱ     ▶ 그러나 『테스』를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테스가 리좀이, 탈주선이 되는 특이점들이 존재한다. 테스는 짙은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그 때에는 자연도 그녀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내부는 선별된 외부이고 외부는 투영된 내부인 시점이 도래한다. 거기에서 테스는 모든 것들과 격리되어 야생 동물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서 ‘희망찬 삶의 맥놀이’가 뛰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 어떤 기억도 없는 외딴 곳을 꿈꾼다. 그렇다면 테스가 알렉 더버빌을 죽이는 장면은 운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테스의 한계를 뜻하는가, 아니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여인으로 탄생하는 되기를 뜻하는가? 후자로 읽는 것은 하디를 배치들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인물들을 그린 작가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곧 ‘되기의 블록’ 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들뢰즈/가타리에게 글쓰기란 되기이다. 그것은 재현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선/삶의 선의 창조이다. 탈기표적, 탈주체적 창조, 얼굴 없는 창조. “모든 사람들처럼 되기.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어떤 사람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되기이다. 회색 위에 회색을 덧칠하면서 스스로를 그리기.”   ▶ 베르그송의 전통에 따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souvenir’와 ‘memory’를 구분한다. “우리는 어릴 적 기억을 가지고서 쓰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아이-되기인 아이와의 블록을 통해서 쓴다.” 사건에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을 시원이나 기억으로 흡수시키는 대신 그것을 특이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사유와 감응의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런 글쓰기는 정치적 함축을 띤다. 즉 그것은 소수 문학이며 ‘도래할 민중의 씨앗들’을 뿌리는 작업이다. 소수 문학은 한 몰적 집단은 민족학도 아니고 사적 관심사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분자적 개체군들에 주목한다.       제14강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에 정치적 과제를 부과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새로운 민중’과 ‘새로운 대지’의 구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절대적 탈영토화’와 자본의 ‘상대적 탈영토화’가 구분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주체와 대상’은 사유의 빈곤한 근사치일 ㅃ ㅃㅜㄴ이다. 사유는 영토(territory)와 대지(earth)의 관계를 포함해야한다. 이 관계에서 일차적인 것은 대지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ㅌㅏㄹ영토화의 운동들이다. (영토는 대지 위에서 일정한 형태를 취한다) 탈영토화를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지가 영토의 운동들과 맺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지가 특정한 역사적 규정들에 제약되지 않는 ‘순수 내재면’으로 이행할 때, 그리고 ‘무한한 디아그람적 운동들’을 포함하는 존재와 자연에 대한 사유의 내재성에 들어갈 수 있을 때 탈영토화는 ‘절대적’이 된다.   1) 내재면 위에서의 탈영토화는 (형식들, 기능들, 감응들의) 재영토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새로운 대지의 창조’에 입각해 재영토화를 정립한다.   2) 절대적 탈영토화는 “상대적 탈영토화와의 여전히 규정되어야 할 관계들에 관련해서 파악되고 작동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절대적’이란 사회와 역사의 초월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극복을 이끄는 개념이다.(베르그송의 지속과 비교)   ▶ 근현대 철학과 자본의 관계는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근현대의 철학들은 사회적-역사적 규정을 하나의 무한점(無限點)에까지 밀어붙여 다른 어떤 차원으로 넘어가곤 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철학은 그 고유의 교환가치를 띤 ‘정신의 부드러운 상업행위’도 아니고 ‘서구의 민주주의적 대화’에 고유한 순수한(disinterested) 사교성도 아니다. 그것은 영토들 및 인구들(개체군들)의 운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져 왔다. 즉 소통, 교환, 합의, 의견에 복종하지 않는 것, 통념과 명제에 속하지 않는 ‘para-doxa’의 추구가 철학이며, 때문에 새로운 대지와 새로운 민중을 지향하는 철학은 늘 탈시대적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유토피아적이다.   즉 철학은 자기 시대에 대한 비판을 극점(極點)으로까지 밀어 붙이는 정치적 행위이다. 문제는 단지 자아도취적일 뿐인 비판이나 강도론적 방법의 무능함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철학이 (절대적 탈영토화의 구축을 통해) 정치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들뢰즈의 사건론에는 이런 물음이 깃들어 있다. 사건을 위해 산다는 것(“사건의 자식이 되라”)이 중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 현재에 관련되는 대목은 부끄러움 이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시대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 그것과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다음 물음을 야기시킨다  : 내재면은 생명/삶을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에    예속시키는가?   -끝-     (소설네트워크)    
16    리좀 자료[스크랩] 댓글:  조회:966  추천:0  2018-11-06
《천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새물결)   1. 서 론 리좀   우리는 둘이서『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이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없는 몸체는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화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 접속 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에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특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 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어린 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 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다양체를 만들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징들. 원리 1과 원리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多質性)의 원리: 리즘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리즘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배치물이란 이러한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이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이것은 구조들을 분산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방이나 유사성은 없다. 다만 기표작용적인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공통의 리좀으로 이루어진 도주선이 있고, 그것을 향한 두 이질적인 계열의 폭발이 있을 뿐이다. 리좀은 하나의 반(反)계보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에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 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여럿〉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수염뿌리 유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위계적이지 않은 척 제시되고 언표될지라도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위계적인 해답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 유한한 수의 상태들과 그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는 전쟁 리좀이나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장군〉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n은 언제나 n-1이다.   중요한 점은, 뿌리-나무와 수로-리좀이 대립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이는 또 다른 새로운 이원론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 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한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일종의 반(反)계보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 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1장 리좀 :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영문과 최진범  1.책에 관하여  1)책이란 무엇인가  리좀이란 중심뿌리 없이 갈라지고 접속되는 모양을 가지는데 들뢰즈,가타리는 전통적인 책의 구성을 벗어나 책을 리좀과 같은 구도에 따라 만들려고 한다. '천 개의 고원'의 각 장은 다른 장과 이어질 수 있지만 독립적으로도 읽을 수 있는(평지와는 구별되는 높이와 강밀도를 갖는 여러 개의 고원으로 구성된 것이다.-형식의 문제  이 책은 두 사람이 쓴 것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발언한 것을 드러내기도 하고, 두 사람의 삶 속에서 관계했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각자가 여러 명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라고 말한다.-저자의 문제  책의 형식과 저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에서 두 사람의 책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는데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맑스의 자본  저자들은 "한 권의 책에는 분절의 선, 선분의 선들, 지층 및 영토성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책은 하나의 배치"라고 말하며 상이한 속도를 갖는 흐름들의 복합체라는 의미에서 "책은 하나의 다양체"라고 말한다.  **예 -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 , 맑스의 '자본'  2)책과 외부  어떤 책도 그 외부의 산물이며 책의 내부란 그것의 외부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사회,역사적 환경의 산물) - 예 :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스콜라철학의 개념이용, 국부론은 18세기 자본주의의 산물, 신채호의 역사적 상황)  외부란 사회,역사적 환경뿐 아니라 다른 책들, 그 책들이 대결하고자 하는 사유들, 독자들이 대결하고자하는 사유들, 이미 씌여진 어떤 책이 만나는 역사적 사건들도 포함한다.(사회주의 혁명을 향하던 시대에 '자본'을 읽는 것과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에 그것을 읽는 것의 차이, 독자의 관심분야의 차이, 그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책의 차이, 목적의 차이)  어떤 책도 그것이 어떤 외부와 만나는가에 따라 다른 내용과 다른 효과를 갖는다. 외부와의 접속지점에 따라 다른 책-기계가 된다.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서 책은 작동하며 다른 책-기계로 변환된다. 책은 그 외부와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주름이다.  3)책의 유형들  -수목형 모델(뿌리형모델)  중간가지를 거쳐 하나의 중심으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는 형태를 수목형 모델이라고 하는데 이런 책들은 하나의 결론에 귀착하며 하나의 전체성을 획득하는 책으로 유기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런 책은 반성적이며 고전적이고 이분법과 일대일대응의 방법이다라고 한다.  -총생뿌리(곁뿌리형)  저작집이나 전집처럼 귀착되는 중심은 없어도 여러 책들이 저자로 귀착되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한 명의 작가라 할지라도 역사적,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런 귀결로 인해 많은 작품들을 왜소화, 단순화시킬 수 있다. 또한 이는 책들이 각기 다른 외부와의 접속과 변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증식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리좀적 유형  각각의 장들이 정점없는 고원으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으며 각 고원들은 서로 다른 고원들의 환경이며 다른 고원으로 가는 표지판이기도 하다.(예: 원오 극근의 벽암록)  들뢰즈, 가타리는 뿌리형 책의 모델이 국가라고 본다. 이러한 국가의 초월화, 특권화는 세계질서에 로고스라는 내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국가에 종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외부를 통해 작동하는 책-기계는 외부에 따라 변이하는 책이란 개념을 낳음으로써 책이나 사유가 하나의 모델에 뿌리박는 것을 방해하고 상이한 외부를 향해 달리게 한다는 점에서 유목적인 사유를 촉발하며 국가장치에 반하는 (유목민적)전쟁기계가 된다.  "책으로 하여금 모든 유동적인 기계의 부품이 되게 하며 줄기로 하여금 리좀이 되게하는 배치"를 리좀적 유형의 책이란 개념을 통해 저자들이 말한다.  2. 리좀의 몇가지 특징들  1)접속의 원리  -접속(-와-) : A와 B가 등위적으로 결합하여 제3의 것인 C를 만들어내는 것  -이접 : 배타적 이접(A냐 B냐?), 포함적 이접(A든 B든), 둘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호오의 가치판단  -통접(그리하여-) :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어떤 하나의 통일체로 귀결되는 것, 여러기관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것(유기적통접)이나 여러 요소가 모여 하나의 흐름(흐름으로서의 통접)이 되는것  통상적으로 이접과 통접은 관련항을 하나의 방향으로 몰고가지만 접속은 두 항이 등가적으로 만나 제3의 것,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 이는 귀결점이나 호오의 선별이 없으며 접속의 항이나 지점이 달라지면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는 것이다.(생성의 가능성)  2)이질성의 원리  리좀은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접속가능성을 가지는데 접속은 어떠한 동질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양한 이질성이 결합하여 새로운 이질성을 생성한다. 반면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접속가능한 것을 특정한 계열로 제한하는 조치들이 국가적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의 '중심(일자)'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며 새로운 증식의 선을 통제한다.  3)다양성의 원리  차이가 차이로서 의미를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양성이다. 차이가 하나의 '일자'로 포섭되거나 동일화되지 않는 것이 다양성이다. 하나의 척도에 의해 차이들이 규정될 때 종류가 늘고 추가된다면 그것은 전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수목형 다양성'일 뿐이다.  반면 리좀적인 다양성은 하나의 척도로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의 집합이며 전체의 의미가 뒤바뀌는 다양성이다. 이는 배치의 문제인데 배치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서 전체의 의미가 바뀌는 다양체를 설명할 수 있다.(축구공의 문제)리좀은 접속하는 선의 수가 늘어나면 그에 따라 차원수가 증가하는 만큼 그 다양성내지 복잡성이 증가하는 프랙탈(?)한 다양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양체는 외부에 의해 정의된다."는 말은 어떤 외부와 어떤 접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전체의 형태가 바뀌는 리좀적 다양체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추가되는 외부의 선(외부로 분기하는 탈주선,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다양체가 정의된다는 의미이다.  4)비의미적 단절의 원리  -절단 :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자르는 것. 소리의 흐름을 일정한 언어적규칙에 따라 음소로자르고 절단된 것을 기표적 연쇄로 만들며 그것을 통해 소리를 의미화한다.  -단절: 주어진 선과 연(緣)을 끊는 것이고 그 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노다지-기존기표적계열에서 벗어나 다른계열의 일부가 되는 탈영토화, 탈주)  비기표적인 단절은 리좀의 특징이다. 이는 기원이나 근원적인 의미(일자)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채 떼어내어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오르키데와 말벌의 리좀-서로간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존재간의 비평행적 진화(?)) 리좀은 선들이 넘나들고 횡단,접속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두 개의 지층간에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이러한 비기표적인 단절을 주 지층간의 평행론이라고도 한다. 이는 '만나지 않는다'와 '상응한다'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5)지도그리기(cartographie)와 전사술(de'calcomanie)  이 두가지의 원리는 모방이나 재현과 관념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리좀이란 "모상이 아니라 지도"라고 한다. 지도는 구체적인 행동의 경로를 찾는데 사용되는데 이는 우리의 행동의 경로와 진행, 분기 등을 표시하여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다이어그램이다. 다이어그램으로서의 지도는 행동과 삶의 길/방법이 접속되고 분기되는 양상이고 그 경로들의 위상학적 관계이며 그 경로의 장애물의 적절한 표시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모상도 삶의 다이어그램이 되지 못한다면 지도가 아니라 '그림'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그 정확성은 삶의 경로를 그리는 데 필요한 요구에 의해서만 유의미하다. 데칼코마니는 접는 순간 원래 그렸던 형상이 접히는 면에 의해 변형된다.(탈모상) 현실에 따라 지도를 그리지만 그려지는 지도에 따라 변형되는 현실(?), 그것을 저자들은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한다. 몰적,분자적 선분성의 선들의 배치(?)  3.수목적 사유와 리좀적 사유  1)수목적 체계와 위계적 체계  수목에서는 중심과 가까운 것, 먼 것간의 위계가 발생하고 잔가지들은 중심에 동일화하고 그것과 포개진다. "수목적 체계는 의미화와 주체화의 중심을 포함하며 중심적 자동장치를 갖고 있다." 이는 상위이웃만이 있을 뿐 나란히 선 이웃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우정의 정리) 이 경우 다양성이란 중심으로 환원된다는 의미에서 사이비다양성이다. 이런 복수성의 '흉내'는 의미화와 주체화, 조직된 기억등과 같은 중심적 자동장치를 통해 각각의 개체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중심화된 위계체계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위계화에서 벗어나려면 중심(독재자)을 제거해야한다(n-1). 중심의 제거 그것이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이다. 비체계가 아닌 비중심화된 체계이다. 다양한 집결지를 만들 수 있는 체계이며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체계이며 접속의 항이 늘거나 줄어듦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라 할 수 있다.  2)초월성과 내재성  수목적 체계는 '일자'라는 중심으로 인해 초월적 사유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을 원리를 찾아 거슬러올라가는 사유, 그리하여 이를 첫 번째 원리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유이다. 이것은 그 보편적인 제1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이다. 근거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근거지움을 하이데거는 '신'이라고 한다('존재신론').  반면 연기적인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는 생각은 상호간의 내재적 관계에 의해 도든 것을 포착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재성은 서양에 대비한 동양의 고유한 사고방식을 특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서양의 사유의 모델은 각각의 생활의 형태와 관련이 있다. 서양이 숲과 밭의 수목적 유형의 농경과 목축의 모습이라면 동양은 스텝, 초원과의 관계를 맺으며 개체의 분열에 의해 진행되는 덩이줄기의 문화를 이루었다. (동서양의 차이의 예 1 : 성에 대한 상반된 태도 - 서양은 자손의 생산의 개념에서만 성을 허용, 동양은 양생술처럼 삶 자체의 기술로서 다루어졌다. 예 2 :관료제의 개념 - 계급에 상응하는 수목성의 도식에 따라 형성되는 서양의 관료제, 동양은 운하의 관료제로서 전제군주는 하나의 점이나 원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흘러가는 강, 일자가 아닌 리좀이다.)  3)리좀 속의 수목, 수목속의 리좀  리좀과 수목은 이분법적인 개념임은 분명하지만 두 개념 각각이 상대개념의 싹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가 겹치거나 포개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자들은 보고 있다.  이항적인 개념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고 그런 선택으로 좋은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의 의미도 아니다. 이는 이항적 대립선이 고정적이거나 항구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또한 탈주선이 허무주의적일 때 어떠한 선분성의 선들 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과 매끄러운공간이 더욱끔찍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리좀과 수목의 상호발생계기(가능성)를 가지고 있다. "리좀안에 수목적인 마디가 있으며 뿌리안에 리좀적인 압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상호대립이 아니라 "끈임없이 세워지고 부숴지는 모델에 관한것이며, 끊임없이 연장되고 파괴되며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들의 이분법적인 개념은 해체된다. 모든 것은 전화될 수 있고 연기적 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리좀도, 나무도 자성(自性)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평가가 초월적이란 것은 아니다. "표현과 행동을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 내재성의 구도위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리좀은 시작, 끝이 아닌 중간, 중도의 사유이다. 중간은 평균이 아니라 사물들이 속도를 취할 수 있는 표면이다. 수직적인 방향이며 하나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횡단적 운동이고 두둑을 무너뜨리고 중간에서 속도를 취하는 개울이다.  리좀은 일자성의 중심을 제거함으로써 내재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내재성이란 어떤 것의 본질이 달라진다고 보는 사유방식이다. 이는 모든 것을 일자로 통일하려는 초월성과 대립하며 그러한 초월자를 제거하거나(n-1)그것을 무나 공으로 전복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내재성속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의 고정된 본질, 내적인 본질이 없으며 다만 외부와의 관계에 따라 접속한 이웃과의 관계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고 본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재성은 외부라는 개념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사유이고 외부에 의한 사유이다.  리좀은 초월자를 제거함으로써 나무나 뿌리의 초월성을 내재성으로 바꾸는 것이며, 외부와의 접속이란 원리를 통해 '외부'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에서 내재성의 구도를 형성한다. 내재성의 원리에 따라 접속가능한 양태들 전체의 장을 내재성의 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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