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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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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예술과 삶(86-89) 댓글:  조회:801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213 예술과 삶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는 세 가지 구성요소 - 즉 편지, 단편소설, 장편소설 - 를 가지고 있다. 카프카의 문제는 기계가 [계속] 작동하도록 유지하고, 욕망하는 생산의 결말-개방적인 순환들의 형성을 통해 운동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약혼녀에게 보내는 편지들의 흐름들을 영속화하는 것과 흐름들의 영속화에 대한 단편소설들과 장편소설들을 쓰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에게는 예술과 삶 사이에 아무런 대립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카프카에게 삶과 글쓰기를 대립시키는 것이, 삶의 국면에서의 결핍, 약함, 불능 등을 통해 문학에서 도피처를 추구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너무나 기묘한 것임을”(K 74; 41) 발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편지들, 단편소설들과 장편소설들이 다중적인 횡단 접속들을 통해, 즉 세 가지의 모든 구성요소들에서 나타나는 소송의 메커니즘을 통해, 편지들을 단편소설들에 연결시키는 펠리체의 개-되기를 통해, 장편소설로부터 단편소설의 기계 목록들을 알려주는 관료제적 장치 등등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이 단순히 작가의 의식 속에 있는 삶과 예술의 상호 영향을 보여준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요점은 결국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가 그 자체로, 그가 “실제의” 편지를 쓸 때에나 그가 허구를 쓸 때 모두, 그가 [그것의] 일부가 되는 확대된 사회적 기계 내부의 하나의 “기계화하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카프카는 다양한 기계적 아쌍블라주들의 구성요소들 사이의 상호연결들을 계획하면서(charting) 사회적 장을 관찰하고, “그는 모든 연결들이 그를 문학적인 표현 기계에, 즉 그가 동시에 톱니바퀴이고, 기계공이고, 작동자이고, 희생자인 문학적인 표현 기계에 부착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K 106; 58) 『소송』에서 모든 사람이 법에 연결되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카프카 자신도 그렇게 모두 기계들의 아쌍블라주들로서 기능하는 - 사법적, 관료제적, 정치적, 상업적, 예술적, 가족적 등등의 - 관계들의 네트워크들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글쓰는 기계 역시, 그가 펠리체에게 편지를 쓰건 혹은 K에 대한 장편소설을 쓰건, 그러한 사회적 기계들 내에 빠져 있다. 카프카가 글을 쓸 때, 그는 활동한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사회적 행위의 폭넓은 장 내부의 활동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장에서 산만한 것들[논증적인 것들]과 산만하지 않은 것들[비논증적인 것들]은 서로 실천, 운동, 변용의 양식들에 영향을 미치면서 뒤얽혀 있다. 따라서 카프카의 글쓰기는 단순히 외부 세계의 정신적 재현도 아닐 뿐만 아니라, 토대의 경제적 현실에 대한 상부구조적인 미학적 논평도 아니다. “이러한 [탈영토화의] 선이 오직 정신 안에만 현존한다고 말하게 하지 말자. 글쓰기가 마치 또 하나의 기계가 아닌 것처럼, 그것이 마치, 출판과 독립적일지라도, 하나의 행동이 아닌 것처럼. 마치 글쓰는 기계가 또한, 이제 자본주의적이거나, 관료제적이거나 혹은 파시즘적인 기계들 안에 포획되지만, 이제 알맞은 혁명적 선을 추적하는, (어느 것보다도 더 상부구조적이지 않은, 어느 것보다도 더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기계가 아닌 것처럼.”(K 109; 60) 카프카가 글을 쓸 때, 그는 세계로부터 물러나지 않고 그 안에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방에 칩거하는 작가가 결코 아니며, 그의 방은 그에게 이중적 흐름을 제공한다. 스스로들을 형성하는 과정 중에 있는 실제적 아쌍블라주들 속에 끼워진,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위대한 미래의 관료제의 흐름. 그리고 가장 시대에 맞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탈주의 과정 중에 있는, 스스로를 사회주의, 아나키즘, 사회 운동들에 끼워넣는, 유목민의 흐름.”(K 75; 41)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하나의 기계로, 그것이 기능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 실재물로 간주한다. 『카프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글쓰기를 기계들의 세계 내부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삼중적 기계로 생각한다. 그들이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길게 주장한 것처럼, 기계의 본질은 연접적, 이접적, 통접적 종합들을 형성하는 것인바, 흐름들을 절단/연결하는 것이고, 포함적 이접들 속에서 흐름들을 중첩시키는 것이고, 강렬도의 유목적 파동들 속에서 흐름을 영속화하는 것이다. 기계들은 “기계화한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그 일부가 되는 순환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에게서 발견하는 기계들의 본질이다. 그들은 카프카의 천재성이 “남자와 여자가 그들이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인접한 활동들을 할 때에도, 쉴 때에도, 사랑을 할 때에도, 항의할 때에도, 분노할 때에도 역시, 기계의 일부라는 점을 숙고했다는 데에”(K 145; 81) 있다고 말한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욕망은 결코 기계 속에서 기계 만들기를 멈추지 않으며, 이전의 톱니바퀴 옆에 새로운 톱니바퀴를 만들어 내는 것을 - 비록 이러한 톱니바퀴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혹은 조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 멈추지 않는다. 기계를 만드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연결들, 분해를 유도하는 모든 연결들이다.”(K 146; 82)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하나의 다양체(multiplicity)임을, 그것의 전체가 그것의 다른 부분들 옆에 추가된 부분으로서 생산되는 기계임을 보여준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작품을 대성당에, 그리고 의복에 비유하지만, 들뢰즈는 대성당이 끝나지 않음을, 그리고 의복이 함께 꿰매지고 있는 과정 속에 영원히 놓인 쪽매붙임(patch-work)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다양체의 “일자”는 발산하는 계열들과 막힌 관들을 서로의 소통 속에 놓는 횡단선들을 통해 형성된다. 카프카의 기계는, 비교해 보자면, 훨씬 더 명확한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의 작품들은 「동굴」의 몰적인(molelike) 생물의 주거환경과 같은, 하나의 동굴을 형성하고, 분명한 입구나 출구도 없는, 가능한 탈출의 다중적인 지점들을 갖춘 상호연결된 터널들의 미로를 형성한다. 동굴은 바랭이(crabgrass)처럼 하나의 뿌리줄기[리좀]이다. 어느 것이라도 다른 것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들의 무중심적 증식인 것이다. 카프카의 편지들, 단편소설들 그리고 장편소설들은 이 동굴의 터널들이며, 바랭이 뿌리줄기의 마디들이다. 그리고 일기들은 “뿌리줄기 그 자체”이며, “카프카가 물고기처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다고 밝힌 (환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요소”이다.(K 76; 96) 편지들, 단편소설들 그리고 장편소설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고, 각각의 구성요소들은 연결들을 형성하고, 운동을 시작하고 계속함으로써 기능한다. 글쓰는 기계는 터널을 만드는 기계임과 동시에 그것이 파들어가는 터널들이며, “뿌리줄기를 만드는” 기계임과 동시에 그것이 형성하는 뿌리줄기이다. 그리고 기계가 더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그것은 더욱더 불완전해진다. 편지들의 흐름은 부부[관계의] 함정이 닫히면 멈춘다. 단편소설들에서 탈주선들은 봉쇄되고(「변신」), 특정되지 않은 기계의 목록들을 통해 모호하게 지시될 뿐이며(「어느 개의 연구」), 아니면 사회적 장으로부터 분리된 기계의 추상적 작동 속에서 고립된다(「유형지에서」). 그러나 장편소설들에서는 기계는 완전하게 기능하며, 연결들은 무한히 증가하고 확대된다. 「변신」과 같은 통일되고, “잘 만들어진” 단편소설들은 동굴 속에 너무나 많은 궁지들을 가지고 있는 반면, 끝나지 않은 장편소설들은 끝없이 계속해서 동굴을 파는 제대로 작동하는 굴 파는 기계들이다. 기계의 기능은 기계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기계화하면서 필연적으로 개방적인 다양체를 창조한다. 충분하게 만들어진, 완전한 기계는 미완성의 엔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에 대해서 말한 바처럼, “누구도 완전히 중단되었지만 모두가 서로 소통하는 운동들로부터 그렇게 완전한 예술 작품을 결코 만든 적이 없다.”(K 74; 41)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는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기술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능하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의 기능하기는 스스로에게서 개방적인 다양체를 만들어내고, 나선형의 동굴 혹은 확산하는 뿌리줄기를 만들어낸다. 글쓰는 기계는 사회적 기계들에 끼워 넣어지고, 그것들에 의해 횡단되며, 그것의 작동은 보편적인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들과 상호연결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며, 그것의 기능하기는 활동의 집단적 장 내부에서 발생한다. 특정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기계 내부에서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소수적 문학” - 언어가 탈영토화의 높은 단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언표의 집단적 아쌍블라주들을 통해 분절되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문학 - 의 개시자로 간주한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소수적 문학은 언어의 소수적 용법을 의미하며, 이러한 용법은 소수적인 글쓰는 기계의 기능하기에서 결정적이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예술과 삶(86-89)|작성자 옥토끼
14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법률 기계(78-86) 댓글:  조회:908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174 법률 기계 유형지의 고문 장치에서 우리는 추상적인 법률 기계를 만난다. 하지만 『소송』의 여러 에피소드들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형성되고, 완전하게 작동하는 법률 기계, 즉 사람, 텍스트들, 제도들, 실천들, 건물들, 사물들 등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사회적 기계의 다중적인 아쌍블라주를 발견한다. 『소송』에는 그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기계들(들뢰즈와 가타리가 “기술적인 기계들”이라고 언급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법의 다양한 요소들 - 그것의 관리들, 희생자들, 하인들, 조수들, 현장들과 장비들 - 은 하나의 기계로서 매우 [잘] 기능한다. 비록 기계를 흐름들의 체계로 폭넓게 규정하는『안티오이디푸스』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세우는 과정에서 노동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루이스 멈퍼드의 분석을 언급함으로써 “사회적 기계” 개념을 정교화한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멈퍼드는 파라오, 그의 사제들과 관료들, 그리고 실제로 피라미드를 세웠던 수천 명의 노예들이 함께 그 최초의 “거대-기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프란츠 르로의 고전적인 정의와 어느 정도 일치하게, 하나의 기계가 에너지를 활용하여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각각이 기능상 특화되어 있고,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작동하는) 저항 부분들의 조합으로 규정된다면, 그렇다면 위대한 노동 기계가 모든 국면에서 진짜 기계였다. 그것의 구성요들이, 인간의 뼈, 신경, 그리고 근육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그것들의 적나라한 기계적 요소들로 환원되고, 그것들의 제한된 임무들의 수행을 위해 엄격하게 표준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Mumford 191) 『소송』의 법률 기계는 파라오의 피라미드 건설 장치처럼 분명 노동 기계는 아니지만, 그것은 진정 일정한 종류의 작업을 수행하고 특정한 종류의 인간 상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카프카의 사회 기계가 욕망하는 생산의 결말-개방적인(open-ended) 사회적 기계라는 점이다. 『소송』에서는 모든 사람이 법에 연결되어 있고, 모든 장소가 사법적 행위의 장소이다. 체포[인상적인?] 관리들을 따르는 세 명의 무기력한 젊은이들은 은행원들이고, 은행의 저장실에서 K는 나중에 그들에 대한 K의 불평 대문에 채찍질 당하고 있는 체포[인상적인?] 관리들을 만난다. K의 아저씨는 K가 그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그 사건(case)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 아저씨는 K를 변호사에게 소개한다. 그 변호사의 하녀인 레니는 피고들, 변호사들, 판사들과 다 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가 티토렐리는 법정 화가이고 대성당 사제는 감옥 교회사(敎誨師)로 판명된다. K가 그의 사건(case)에 대해서 역시 들어 알고 있는 공장주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소송』169) 모든 곳으로 K는 가고, 법은 그와 함께 가며, 모든 곳에서 법은 에로틱하게 된다. K는 먼저 프뢸린 뷔스트너의 방에서 심문을 당하고, 창문 걸쇠에서 물신적인(fetishistic) 하얀 블라우스가 어른거리자, 나중에 그녀를 쫒아가 그녀의 목에 흡혈귀처럼 키스를 한다. 법정의 법전은 외설스런 그림들이 들어 있다. K는 우선 그에게 법정을 보여준 음탕하게 보이는 세탁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나중에는 레니에게 마음을 빼앗기는데, 그는 그의 변호사의 거처에 처음 방문하는 중에 그녀와 성교를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마조히즘적 에로티시즘이 프란츠와 뷜렘(Willem)의 채찍질을 퍼뜨리고, 티토렐리의 작업실 바깥의 젊은 소녀들의 얼굴은 “어린애같음과 비행의 복합물”(『소송』178)을 드러낸다. 따라서 법은 모든 것을 포위하는, 에로틱한 사회적 기계이다. 모든 사람은 법의 대행자이고, 모든 현장은 사법의 장소이며, 자신의 사건(case)을 뒤쫓는 K의 추격(pursuit)은 개인들, 담론들, 코드들과 사물들의 하나의 아쌍블라주로부터 다른 아쌍블라주로, 하숙집 아쌍블라주로부터 주택/법정 아쌍블라주, 은행 아쌍블라주, 법률 사무소 아쌍블라주, 스튜디오 아쌍블라주, 대성당 아쌍블라주로 이어진다. 연결된 구성요소들의 결말-개방적인 계열들, 내재적인 욕망으로 불러일으켜진 모든 것. 작가로서의 카프카의 행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소송』이 어떻게 끝없이 욕망하는 기계로서 기능하는지를, 부단한 그리고 영속적인 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종합의 발동기로서 기능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정교한 사회적 기계의 요점은 무엇인가? 카프카는 단순히 법의 불합리함(absurdity)을 증명하고 있는 것인가? 현대의 사법 장치들이 우스꽝스러운 루베 골드버그의 기계가 베케트식의 돌을 집어삼키는 기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카프카는 종종 사회 제도들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해지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비판적”이라는 게 사회적인 재현들에 대한 외부적인 논평을 의미하는 한에서만 [그것에] 동의한다. 그 대신 그들은 카프카가 “사회적 재현들로부터 언표의 아쌍블라주와 기계적 아쌍블라주들을” 뽑아냄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아쌍블라주들을 분해함으로써”(K 85; 46) 내재적인 비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글쓰기는 “이러한 이중의 기능을 갖는다 - 아쌍블라주들로 전사하는 것과 아쌍블라주들을 분해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K 86; 47) 카프카는 “크게 기뻐하며 웃는 작가이다.”. 그렇지만 또한 “극단적으로(?) 그는 정치적 작가이다.”(K 74; 41) 그리고 그의 정치적 행동은 아쌍블라주들을 전사하고 분해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사회적 재현들에 대해 논평하는 대신, 카프카는 그것들을 실험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송』은 “하나의 과학적 연구로, 기계의 기능에 대한 실험 보고서로 간주되어야 한다.”(K 80; 43-44) 그리고 그 기계의 기능하기는 그것의 분해하기가 곁들여진 기능하기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카프카의 정치 안에는 이미지적인 것도 상징적인 것도 없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 혹은 몇몇의 카프카의 기계들 안에는 구조도 혹은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우리는 카프카의 실험 속에는 해석도 의미(significance)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경험적/실험적 계획안들이 있을 뿐임을 믿을 뿐이다.”(K 14; 7)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재현들의 전사와 분해가 비판의 형식인가? 이러한 작동이 어떻게 실험의 유형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사와 분해가 동일한 것인가? 사회적 재현들을 아쌍블라주들로 전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익숙한 코드들과 제도들을 사회적 기계라는 낯선 용어들로 다시 쓰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듯이, 카프카는 법에서 관례적, 상식적 논리를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낯설게 한다. 『소송』에서 법은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이고, 고발들은 상술되어 있지 않으며, 범죄는 자동적으로 가정되어 있다. 접근할 수 없는 권위는 판결을 내리고, 판사들, 법정 관리들, 그리고 변호사들이라는 끝없는 수준들은 아무렇게나 선택된 피고들의 모호한 사건들(cases)을 처리한다. 규칙, 위반 행위들, 증거, 증명들과 평결들의 논리를 갖춘, 낯익은 법 체계는 사법과 공정함의 규범들과는 무관한, 권력의 비잔틴적[권모술수적] 메커니즘임을 드러내지만, 세력들의 위계, 즉 포괄적인 유죄의 추정 그리고 형벌 대행자들의 피할 수 없는 네트워크에 의해 조절된다. 이 메커니즘 속에는 신의 판결의 집행을 통해 신의 명령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신의 종교적 전통 속에 뿌리박은, 범죄의 문화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카프카가 사법 체계를 하나의 정교한 기계로 전사(轉寫)하는 것은 권력으로서의 법에 대한 비판을 구성한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송』의 이러한 차원이 -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 오직 예비적인 비판으로 기능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권위적인 사회적 제도들 자체에 의해 확증되고 유지되는 권력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프카는 권력이 본래적으로 중앙집중적이지도 위계적이지도 않으며, 누군가 소유하거나 결여하고 있는 어떤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관계적인 것으로서, 사법적 기계의 순환을 퍼뜨리고, 모든 개인들과 기계의 구성 요소들을 세력들의 장에 포함한다. 이러한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권력 묘사를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제1권에서 행한 푸코의 권력 분석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더욱이, 카프카는 권력의 순환이 또한 욕망의 순환이며, 법이 피고들을 심리하기 위한 기계일 뿐만 아니라, 권력/욕망이 모든 순환[회로]을 통해 스며드는 욕망하는 기계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권력의 문제가 단지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의 문제,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권력 관계를 특징짓는 리비도적 투자들의 문제, 피억압자들의 유순함과 자신들의 억압에 있어서의 공모의 문제라는 것을, 뿐만 아니라 훈육적 규제의 광범한 순환들 전반에 걸쳐 있는 강제(coercion) 심리(mentality)의 만연한 확산의 문제라는 점이다. 이것은 실제의 억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억압자들 및 피억압자들의 위치가 권력-욕망의 일차적인 순환의 이차적인 생산물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억압은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 양자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욕망의 이런 혹은 저런 아쌍블라주로부터, 기계의 이런 혹은 저런 상태로부터 흘러 나온다. ······ 억압이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K 103; 56) 하지만 카프카가 법을 욕망하는 기계로 전사하는 것은 또한 기계를 분해하는 것이며, 지배와 권위의 세력들이 예견할 수 없는 배치들 속에 풀려지고, 재구축되고 재배치되는 방식들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하는 생산에 두 개의 극 - 배제적이고 분리적인 흐름들의 분할인 편집증적인 극과 포함적이고 조합적인 흐름들의 종합인 분열적 극 - 을 설정했음을 기억한다. 카프카는 법에 대한 편집증적인 관점을, 중앙집중화되고 거리가 멀고, 전제적이고, 관리들・조수들・보조자들이라는 복잡한 관료제를 통해 구획되어 있고 관리되는 것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또한 법의 분열적 배치를, 법정 체계를 규정되지 않는 관계들 속에서 연결하는 수단이라고 상술한다. 은행은 은행 저장 사실(私室)을 통해 처벌 장치에 연결된다. 티토렐리의 작업실과 법정들은 도시의 반대편에 면해 있지만, 작업실의 뒷문은 법정으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공동주택 건물은 재판소를 수용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교체가능한 사무실들의 미로를 가지고 있다. 세탁부 프뢸린 뷔르스트너와 레니는 접속구들로 기능하면서 K를 사법률 기계의 초현실적 미궁 속의 다양한 길들로 내려 보낸다. K 자신은 하나의 전환(switching)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면서 법의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는 접속들을 매 접합 때마다 탐험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사법에 속한다면, 모든 사람이 사제에서 어린 소녀에 이르기까지 사법의 보조물이라면, 그것은 법의 초월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내재성에 의한 것이다.”(K 92; 50) 하지만 편집증적 및 분열적 극들이 모두 욕망의 극들임을, 법의 배제적이고 분리적인 적용과 법의 포함적이고 조합적인 활용이 사회적 장에서는 언제나 둘 모두 활동적임을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두 가지 공존하는 욕망의 상태는 법의 두 가지 상태이다. 한편으로 초월적인 편집증적 법은 결코 유한한 단편(segment)을 진동시켜서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대상으로 만들고, 이것 혹은 저것으로 결정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내재적인 분열-법은 하나의 사법[정의]처럼, 하나의 반법(反法)처럼, 편집증적 법을 그것의 모든 아쌍블라주들 속에서 분해하는 하나의 ‘절차’처럼 기능한다.”(K 108-9; 59) 『소송』의 모든 곳에서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규제들은 부과되고 있으며, 동시에  파열적이고(disruptive) 돌연변이적인 연결들이 자리잡고 있다. 아쌍블라주라는 말로 사회적 재현들을 전사하는 것은 편집증적인 법 내부에서 분열-법의 내재성을 펼치는 것이자, 법적 체계를 구성하는 낯익고 상식적인 요소들이 실제로 거대기계의 구성요소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거대기계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하나의 편집증적이고 위계적인 법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기계의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연접적, 이접적, 통접적 종합들을 형성하는 분열-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분해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동일한 것 - 내재성의 아쌍블라주들의 발견, 그리고 그것들의 분해 - 이다.”(K 109; 59) 그러나 전사와 분해의 작동들이 동일한 것인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만약 카프카가 법의 사회적 재현들을 편재하는 법적 기계의 아쌍블라주들의 맥락에서 전사한다면, 그는 비관례적인 형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현실들을 단순하게 다시 서술하고 있지 않다. 카프카가 야누흐(?)에게 말한 바처럼, 만약 예술이 거울이라면, 그것은 “언젠가, 시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거울이다.(Janouch 143) 어떤 의미에서 카프카의 예술은 미래의 거울이며, 『소송』의 사법적 기계장치에서 우리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 사악한 권력들”(K 74; 41)을 발견할 수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러한 권력들을 자본주의 미국, 스탈린주의적 러시아, 그리고 나치 독일의 관료적 상태들과 동일시한다. 다른 사람들은 현대의 경찰 국가들, 전체주의적인 체제들, 그리고 익명적인 관료제들에 대한 카프카의 선견지명이 있는 이해에 대해 논평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가 단순히 통찰력 있는 예언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소송』과 같은 작품들에서 그가 그의 시대에 현존하지만 나중에서야 자본주의적인, 스탈린주의적인, 파시즘적인 관료제들의 구체적인 형태들 속에서 현실화되는 펼쳐지는 관계들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그리고 특히 카프카가 고용되어 있던 노동자 재해 보험 회사에서) 작동하고 있는 일반화된 관료제적인, 경찰-국가적인, 전체주의적인 “기능” -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추상적 기계”라고 부르게 될 - 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체적인 아쌍블라주들 속에서 현실화되지만, 그것은 “탈주선들”의 가상실효적 평면으로서의 그러한 아쌍블라주들과 함께, 되기[생성]의 경향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잠재적인 현실화를 향하는 운동 방향들과 함께 공존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주어진 사회 질서의 현실적 아쌍블라주들은, 경향들과 생성들의 벡터들을 갖춘 이러한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의 실존을 전제하지만, 이 가상실효적 기능, 즉 추상적 기계에 의해 그려지는 선들을 따라 형태를 취한다. 그와 동시에 이 일반화된 기능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추상적 기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표지 역할(pilot role)”을 수행한다. “추상적 혹은 도식적 기계는,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재현하기 위하여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실제적인 것, 새로운 유형의 현실을 구축한다.”(MP 177; 142) 그러한 “도래할 실제적인 것”은 다양한 형태들을 띤다 -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적인 미국, 스탈린주의적인 러시아, 나치 독일의 관료제들. 비록 이것들이 이러한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에 의해 생산될 수 있었던 유일한 형태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모델의 복잡들 중의 하나가 욕망하는 생산에 내재하는 편집증적 및 분열적 극들의 공존으로부터 나타난다. 모든 사회적 질서는 (최소한 근대 시대에서는) 기존 질서의 변조, 근절, 재규정 혹은 재배치를 통해 실존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제는 오직 사회관계들, 코드들의 재기입, 물질적 대상들과 실천들의 재배치들의 복잡한 계열들을 통해서만 구체화된다. 그러한 제국적 관료제가 아무리 고정적이고, 대단하고, 구획적이고 위계적이 되어 나타나거나 그런 모습으로 실현되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형성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이중적 과정, 코드들과 관계들의 삭제와 다시 쓰기의 이중적 과정을 통해서 발생한다.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제국적 관료제의 형성에 있어서 표지 역할을 수행하며, 관료제 장치의 엄격하고 계층화된 형태들 속에서 동시에 재영토화하는 탈영토화의 길들을 열어놓는다. 하지만 탈영토화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은 제국적 관료제 내부에 실존하며 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국적 관료제의 다른 사회 형태들로의 변신들을 위한 표지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들 자체는 동시적인 탈영토화 및 재영토화의 선들을 따라 구축될 것이다. 탈영토화 및 재영토화의 이러한 가상실효적 벡터들이 어떤 특정한 형태들을 띠게 될지는 미리 결정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다양한 “미래의 사악한 권력들”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그와 꼭 마찬가지로 현재의 질서보다 더 좋은 사회 질서들로 귀결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유리한 위치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혁명적 기능을 고찰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의 계획이나 설계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어떠한 혁명적 행동 개념도 거부한다. 오히려 혁명적 행동은 변신, 변화, 생성을 통해, 좀체 예견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현재의 견딜 수 없는 상황의 변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변신의 선들은 언제나 탈영토화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의 형태 속에서 실제로 현존하며, 혁명적 행동은 단순히, 특별한 사회 체제에 의해 안정화되고, 형성되고, 코드화되고 있는 [어떤 것들을] 탈안정화하고, 탈형성하고, 탈코드화하는 힘들의 강렬화(intensification)를 통해 자신의 실현을 꾀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카프카의 정치적 전략은 억압적인 제도들에 저항하거나 유토피아적 대안들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이미 현존하고 있는 탈영토화하는 경향들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집단적 및 사회적 기계들이 인간 존재들의 엄청난 탈영토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카프카는] 그러한 경로를 따라, 절대적인, 분자적인 탈영토화의 지점까지 훨씬 더 나아갈 것이다. 비판은 완전히 무용하다.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이미 실제적인 가상실효적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체제 옹호자들, 관료들은 항상 이런 혹은 저런 순간에 운동을 정지시키고 있다).”(K 107; 58) 이러한 가속화된 탈영토화가 긍정적인 결과들을 낳을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 사이에는, 편집증적인 욕망하는 생산과 분열적 욕망하는 생산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욕망은 하나의 수프, 즉 관료제적인 혹은 파시즘적인 부분들이 여전히 혹은 언제나 혁명적 진동 속에 존재하는 단편적인 죽과 같기 때문이다.”(K 109-10; 60) 따라서 “우리는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 사이에, 혹은 심지어 욕망의 상이한 종류들 사이에 구분을 정밀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모두 역시 가능한 미래로 끌고 가야 한다. 비록 탈주 혹은 행진의 선들이 온건하고, 진동하며, 심지어 -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이 운동이 또한 그러한 선들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것을 희망하면서 말이다.”(K 107-8; 59) 그러므로 『소송』에서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법적 체계에 내재하는 관계들의 복잡함의 사회적 재현들에서 시작하고, 그것들을 사회적 기계의 다중적인 아쌍블라주의 용어들로 전사한다. 낯익은 법 체계는 삶의 모든 측면들로 확산하는 권력의 증식 메커니즘이 되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의 기능하기는 관계들의 편집증적이고 영토화하는 제한들과 법전화[코드화]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분열적이고 탈영토화하는 그물망들과 탈코드화에 의해서 동시에 방향잡혀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기계는 자신을 구축함과 동시에 분해하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기계를 전사하고 분해하는 것이 동일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카프카는 또한 기계의 탈영토화하는 운동들을 가속화하고, 기계의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연결들을 증식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래의 사악한 권력들”로 귀결되는 변신적 경향들을 드러내지만, 현실화될 혁명적 가능성들 역시 드러낸다. 그는 사회적인 제도들에 대해 논평하거나 대안들을 제시하기보다, 그의 세계 안에 내재하는 가상실효적인 탈주선들에 대해 실험을 행한다. 그는 “이미 사회적 장을 가로지는 전체 운동을 연장하고, 가속화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능동적인(acitve) 분해 방법”을 채택한다. “그것은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실제적인, 가상실효적 영역에서 작동한다.”(K 88-89; 48) 이 방법은 “하나의 해석도, 하나의 사회적 재현도 아니며”, “하나의 실험, 하나의 사회정치적 프로토콜”이다.(K 89; 49). 따라서 분해하기, 다시 말해 전사와 함께 있는 분해하기는 또한 실험이며, 이러한 점에서 『소송』은 “과학적 고찰, 기계의 기능하기에 대한 실험 보고서이다.”(K 80; 44)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법률 기계(78-86)|작성자 옥토끼
13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글쓰는 기계(74-78) 댓글:  조회:788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124  글쓰는 기계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유형지의 고문 기계는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욕망하는 기계의 유용한 사례로서 기능한다. 그것이 그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기계이기 때문에, 그것의 에로티시즘은 비인간적 메커니즘과 상호작용하는 고독한 희생자와 관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기능은 단연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하지만 『카프카』에서, 고문 장치는 단지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험하는 기계들 중의 단지 하나일 뿐이며, 그들은 그것이 최소한 독신자의 욕망의 생산과 연속의 관점에서 볼 때 카프카의 가장 성공적인 기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너무 추상적이며, 자신 안에 포위된, 너무나 고립된 실재물이다. 그것은 하나의 섬 위에 존재하는바, 특정되지 않은 유형지보다는 제도들에 연결되어 있다. 그 결과 그것의 요소들은 너무나 쉽게 아버지와 아들, 예의 지휘관과 관리/희생자라는 오이디푸스적 구조 내부에,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구약적 신과 무력한 메시아의 종교적 구조 내부에 동화된다. 그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기계는 조각들로 파열되고, 관리는 죽으며 탐험가는 섬을 탈출한다. 그 탐험가의 탈주를 제외하면 모든 운동은 끝나 버린다. 기계들의 기능은 “기계화하는 것” - 종합들을 형성하고, 이항적 연접들, 포함적 이접들과 유목적 통접을 통해 흐름들을 생산하는 것 - 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문제는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들을 종합하고, 다중적인 연접들, 이접들과 통접들을 형성하고, 그리하여 운동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글쓰는 기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흐름들의 운동을 기술하지만, 또한 운동이 봉쇄되는 방식들을, 그리고 흐름들의 연접들 속에 한정되고, 이접들 속에 포함되며, 통접들 속에 고정되는 순환들 속으로 흐름들이 제한되고, 규제되고, 코드화되고, 방향잡혀지는 방식들을 길게 이야기한다. 만약 욕망하는 기계들이 모든 곳에서 탈영토화하는 흐름들이라면, 그와 동일한 흐름들 역시 인식가능한 대상들과 안정적인 주체들의 조직된 양식들 속으로 끊임없이 재영토화되고 있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두 가지 극, 즉 흐름들을 한정하고 분리하는 “편집증적이고 파시즘적인 유형 혹은 극”과 “욕망의 탈주선들을 따르고, 그 벽을 헤치고 나아가 흐름들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분열혁명적 유형 혹은 극”(AO 329; 277)을 확인한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그들은 두 극들의 순환들의 지도를 만들고, 그것들의 보편적인 역사 속에서 세 가지 종류의 편집증적인 사회적 기계들(원시적, 전제적, 자본주의적)과 그것들 각각이 흐름들을 제한하고 조직하는 특징적인 수단들에 대해 기술한다. 정신분석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단지 이러한 분석의 일부일 뿐이며, 아버지-어머니-나의 오이디푸스적 삼각형은 단지 (이러한 경우에 욕망이 우선 가족 속에, 자아-주체 속에, 전체적이고 별개의 유기체들 등등 속에 위치지워져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욕망을 규제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들 내의 억제들 및 통제들의 일반적인 체계의 한 가지 구성요소일 뿐이다. 『카프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오이디푸스적으로 독해하는 것에 대해 반대함으로써 계속해서 정신분석에 대해 공격을 가하지만, 그들의 주요 목적은 운동의 생산, 지속, 증식의 맥락에서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활동들을 상술하는 것이다. 그들은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세 가지 구성요소들 - 편지, 단편소설, 장편소설 - 을 확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가 펠리체 바우어와 주고받은 서신들 속에서 편지들의 정수를 발견한다. 카프카는 그녀에게 편지로 구혼하고, 그 결과 약혼하게 되지만 결코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모든 편지는 일종의 연애편지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편지들의 지평 위에는 언제나 한 여인이 있으며, 그녀가 진정한 수신인이고, 그녀는 아버지가 필경 그로 하여금 헤어지도록 만든 사람이며, 그녀는 그의 친구들이 그가 관계를 깨뜨리기 희망하는 사람이다.”(K 53; 29)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펠리체를 만난 후 카프카는 곧바로 그녀와 정기적인 서신 왕래를 시작했고, 그녀에게 매일 편지를 썼으며 자주 답장을 쓰겠노라고 그녀에게 약속했다. 마침내 그들이 약혼하게 되었지만, 서신 왕래 전반에 걸쳐 카프카는 그들의 드문 만남들에 항구적인 장애물들과 그들의 결혼에 항구적인 반대들을 배치한다. 그의 지연은 카프카가 칭했던 바의 “호텔 속의 법정”에, 그의 의향들을 결정하기 위한 베를린의 Askanische Hof에서의 펠리체와의 인터뷰로 이어졌다. 그날 이후 그는 그들이 파혼했다는 소식을 그녀의 가족에게 분명하게 전했고, 카프카가 논평한 바처럼, “그들은 내가 옳았음을,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 반대하여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했다. 나의 결백 속의 악마.”(Diaries II, 65) 펠리체와 카프카는 잠시 동안 계속해서 편지를 썼지만, 결국 구혼과 서신 왕래는 끝나기에 이르렀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편지들은 “문학적 기계의 악마적인 권력을 직접적으로, 순수하게 제기한다.”(K 52. 59) 연애편지들은 사랑의 대체물이며, 부부 계약을 대체하는 악마적인 계약(언젠가 그는 펠리체로 하여금 그에게 매일 두 번씩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도록 만든다)의 생산물이다. 카프카는 드라큘라와 같아서, 펠리체에게서 생명을 빨아들이기 위해서 박쥐같은 편지들을 보낸다. 그는 자신을 말하는 주체[언표 행위 주체]와 이야기의 주체[언표 주체] - 집에 남아 있는 순수한 말하는 주체, 마찬가지로 편지들 안에서 과감하게 말하고, 물리적 만남들에 대한 장애들을 극복하기 위해 과감하지만 공허하게 시도하는 이야기의 순수한 주체 - 로 이중화한다. 편지들의 목적은 서신 왕래를 영속화하는 것이며, 결혼을 연기하고 리비도적인 글쓰는 기계의 작동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작가가 그 자신의 기계에 포획될 것이며, 흡혈귀가 “가족의 십자가와 부부의 마늘”(K 54; 30)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카프카의 편지들은 진실로 호텔 법정에 이르게 되고, 작가는 그 자신의 기계에 붙들리게 된다. “‘모든 순수한 속의 악마성’이라는 공식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K 60; 33) 그가 펠리체와 서신 왕래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프카는 그의 첫 번째의 잘 익은 단편소설인 「선고」를, 곧 이어 「화부」와 「변신」을 생산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바에 따르면, 편지들은 “어쩌면 원동력, 즉 그것들이 가져오는 피를 통해, 전체 기계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고”, 단편소설들은 “위험을 미리 보여주거나 그것을 마법으로 쫓아버리기 위해”(K 63; 35) 쓰여진다. 단편소설들은 탈주선들 - 함정들, 우리들, 감옥들, 막다른 길들, 폐쇄된 공간들, 그리고 협박하는 기계들로부터의 탈출로들 - 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들은 가능한 운동의 통로들을 추적하는 한편, 제한하고 죽이는 봉쇄들 역시 추적한다. 「선고」에서 게오르그 벤데만은 가족적이고 부부적인 강제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버지의 판결에 굴복한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동물-되기의 과정에 들어감으로써 가족과 업무(work)에 대한 그의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길을 탐험한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탈주선은 시종일관 절단되고, 세 번이나 그는 자신의 방 안으로 퇴각한다. 그의 누이는 그의 방에서 가구를 치워줌으로써 그의 곤충-되기를 격려하지만, 그레고르는 항의의 표시로 벽에 붙어 있는 사진에 달라붙는다(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초상화들과 사진들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코드들을 부과하는 것으로 시종일관 연결되어 있다). 그로부터 누이의 분열-근친상간적 욕망은 탈출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들에 아무런 도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가 집어 던진 가족적인 죄의 사과는 그의 몸 안에서 썩고, 결국 그는 죽는다. 모든 단편소설들이 「변신」처럼 그러한 파멸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원숭이는 인간-되기의 과정에 대해서 착수함으로써 자신의 우리를 탈출한다. 그는 “아닙니다. 자유는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요”라고 말한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혹은 어느 방향이든 탈출구가 필요했어요. 다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죠.”(Complete Stories 253-54) (원숭이의 이러한 말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물-되기와 탈주선의 본질 - 결코 자유가 아닌, 오로지 탈출뿐인 - 을 발견한다.) 하지만 원숭이가 탈출한다 해도, 그의 탈주를 계속할 아무런 수단도 없으며, 아무런 접속도 그의 동물-되기가 개시한 그 운동의 확대를 제공하지 못한다. 글쓰는 기계의 문제는 운동과 접속들의 문제이며, 독특하지만 결말-개방적인 순환들 속에서 탈주선을 영속화하는 종합들의 문제이다. 단편소설들에서 탈주선들은 닫히거나 끊어진 채로 남아 있다. 단편소설들의 구성요소들은 자기-파괴적인 기계나 공허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형성한다. 어떤 사례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기계가 기능하고 있는지를 지각하지만, 그것의 모든 부분들을 식별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단편소설들은 완전히 구축된 기계들보다는 기계 목록들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어느 개의 연구」의 일곱 마리의 노래하는 개들은 음악 기계의 기능적인 부분들인 것 같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기계인지, 그리고 그 부분들이 어떻게 여타의 구성요소들과 관계를 이루는지는 불확실하다. 또 다른 사례들 속에서, 별개이면서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기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떻게 그것의 연결들이 다른 요소들로 확장되는지는 미결정적이다. 유형지의 고문 기계는 이러한 추상 기계의 일종이며, 「가족적인 남자의 걱정들」의 신비한 Odradek - 평평한 별모양의 실패 모양의 사물로서, 실의 떨어진 부분들로 덮이고, 작은 목재 빗장이 그 별의 바깥을 가리키고 작은 장대가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빗장에 묶여 있으며, “충분히 무의미하게, 하지만 나름대로 완전히 종결된 것”(Complete Stories 428)으로 보이는 완전한 사물 - 가 꼭 그러하다. 또 다른 종류의 이러한 추상 기계는 「블룸펠트, 나이든 독신자」에서 등장하는데, “나란히 위아래로 뛰는, 푸른 줄무늬가 있는 두 개의 작은 하얀 셀룰로이드 공들”(Complete Stories 185)이 불가해하게 어느 날 블룸펠트의 문에 도착한다. 더욱이 이 추상적 기계, 기계 목록들은 블룸펠트의 두 명의 조수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분명한데, 이들의 기묘한 익살들은 튀는 셀룰로이드 공들과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복합 기계의 부분들로서 그러한지를,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 오직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세 번째 구성요소인 장편소설들 속에서 운동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며, 탈주선들이 특정한 순환들에 연결된다. 카프카의 세 편의 장편소설들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석에 의하면, 이것은 오직 글쓰는 기계가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완전한 기능하기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막스 브로트는 『소송』에 대해서, “프란츠는 장편소설을 끝나지 않는 걸로 간주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브로트는 “구두로 작성된 작가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소송이 최고 법정처럼 멀리까지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장편소설도 결코 종결될 수 없었다 - 말하자면 그것은 무한으로 연기될 수 있었다.”(『소송』에 붙이는 발문, p. 334) 『소송』처럼 『아메리카』와 『성』도 역시 끝이 없이 무한하며, 오직 그것들이 완전히 고장나지 않고 계속해서 작동하는 기계들이라는 점에서 완료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의 끝나지 않는 기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의 접속들의 특이성(specificity)과 다중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세 편 장편소설 모두를 다루고는 있지만 완전하게 기능하는 글쓰는 기계를 가장 잘 예시하는 것은 『소송』이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글쓰는 기계(74-78)|작성자 옥토끼
12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독신자 기계(68-74) 댓글:  조회:888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090 독신자 기계 부분적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의 척력과 인력의 운동들이 유목적 주체의 생산 속에서 “화해할 때”, “독신자 기계”가 탄생하며, 그것은 편집증적 기계와 기적을 행하는 기계의 형성을 뒤따르는 세 번째 요소의 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용어를 미셸 카루주 Michel Carroguges의 『독신자 기계』에서 차용했는데, 이 책은 다음과 같은 19세기의 여러 시기와 20세기 초반의 문학 작품들에 들어 있는 환상적인 기계들과 기계 같은 장치들에 대한 연구물이다. 포우의 「구덩이와 진자」(1843), 로뜨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1869), Villiers del l'Isle-Adam의 『L'Eve future』(1886), Jules Verne의 『Le Château des Carpathes』(1892), 알프레드 제리의 『Le Surmâle』(1902), 레이몬드 루셀의 『고독한 장소들』(1914), 카프카의 「유형지에서」(1914, 출판은 1919). 카루주가 말한 것 중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적 주체라는 개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거의 없지만, 그가 카프카의 유형지의 고문 기계를 다루고 있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문학 기계들로서의 카프카의 작품들에 접근하는 것을, 그리고 아울러 기계 일반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밝히는 데에 유용하다. 카루주는 카프카의 고문 기계와 마르셀 뒤샹의 위대한 예술 작품인 「자신의 독신 구혼자들에게 발가벗겨지는 신부조차」(거대한 유리)(1912-1923)에 나오는 기묘한 기계장치들 사이에 놀랄 만한 유사점들이 있는 것을 주목하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기획을 착상했다. 그 뒤에 그는 몇몇 다른 문학적・예술적 창조물들에 묘사된 기계들에서 유비적인 기계적 관계들을 발견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가 “독신자 기계의 신화”라고 이름붙인 현대 신화의 존재(existence)를 가정하도록 이끌었다. 이 신화 안에 “우리 시대의 네 겹의 비극, 다시 말해 기계론의, 공포의, 에로티시즘의, 그리고 종교 혹은 반-종교의 간섭이라는 난제(難題)”(Carrouges 24)가 새겨진다는 것이다. 그가 이 네 가지 테마들을 모든 작품 속에서 명명백백하게 분명한 것으로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카프카와 뒤샹의 기계들을 병렬시켜 놓음으로써, 이 두 작품들 양자 속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광범한 다른 사례들을 가로질러 그것들이 실재함(presence)을 알아낼 수 있었다. 카루주는 「유형지에서」의 고문 기계의 묘사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관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놀랄 만한 장치”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일종의 통속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맨 아래 있는 것은 ‘침대’, 맨 위에 있는 것은 ‘설계자’, 그리고 여기 중간에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은 ‘써레’라고 불린다.”(Completed Stories 142) 사형수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얼굴을 일렬로 솜이 덧대어진 침대에 숙이도록 한다. 써레에는 유리 안에 끼워진, 이빨 모양의 바늘들이 있는데, 이 바늘은 그 제물의 몸에 그가 어긴 계율을 새긴다.(우선 첫째로, “그대의 윗사람들을 공경하라!”) 침대와 써레 모두 계율이 새겨짐에 따라 미세한 진동에 맞춰 떨리고, 그것들의 복잡한 움직임들은 침대 위로 2미터 높게 솟은 검은 목재 상자인 설계자에 의해 조정되는데, 이것은 유형지의 이전의 지휘관의 난해한 설계들을 제물의 살 속의 상처 양식들로 옮기는 톱니바퀴들로 채워져 있다. 사형 집행은 12시간 이상 진행된다. 처음에 그 제물은 단지 고통만을 겪지만, 6시간 후에는 상처를 통해 자신의 비명(碑銘)을 해독하게 된다. “그러나 대략 6시간이 되었을 때쯤 그는 얼마나 조용해지는가! 계몽(啓蒙)이 머리가 가장 둔한 사람에게 도달한다. 그것은 눈 주위에서 시작한다. 거기로부터 그것은 빛을 발한다. 스스로를 써레 아래로 가도록 유혹할지도 모르는 순간.”(Completed Stories 150) 카루주는 사형 집행 장치가 하나의 단일한 구성(construction) 속에서, 즉 위에 있는 설계하는 메커니즘으로부터 아래에 있는 신체로 하강하는 끔찍한 법 속에서 사람과 기계를 결합시키는 점에 주목한다. 풍부한 종교적 암시들은, 기계가 예전에 신성한 명령들의 잔인하지만 효험 있는 계시를 제공했음을, 하지만 이전 지휘관이 죽으면 오직 비계몽적 고통이 그 메커니즘의 제물의 몫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기계의 작동에 자발적으로 따르지만, 자신의 얼굴에 ‘약속된 보상’을 받았다는 아무런 신호도 없이 죽는 그 관리의 경우에서처럼 말이다).(전집 166) 그래서 카루주는 카프카의 이야기에서 “신의 죽음이라는 비극”(Carrouges 48)을 발견하지만, [거기에] 기술적 공포라는 신화를 결합시켰다. 더욱이, 카루주는 제물의 자신을 가로지르는 그 기계의 꿰뚫는 동작들과, 고문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써레의 유리 창틀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관음증적 섹슈얼리티에 주목한다. 뒤샹의 「자신의 독신 구혼자들에게 발가벗겨지는 신부조차」(「거대한 유리」)에서 카루주는 기계론, 공포, 종교 그리고 섹슈얼리티라는 동일한 테마들을, 아울러 뒤샹 및 카프카의 기계의 구성요소들 사이의 다양한 유사성들을 발견한다. 「거대한 유리」는 어쩌면 이때까지 창조된 가장 복잡한 예술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것의 많은 구성 부분들 때문뿐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적 암시들과 뒤샹이 그 작품의 부속 요소들로 조립한 문서 자료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하다. 뒤샹은 「거대한 유리」의 다양한 대상들에 알맞은 이름들을 부여하고, 그것들의 기능적 관계들을 pataphysical(?) 주석들과 설명들의 어지러운 증식들 속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큰 판벽널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은 ‘신부’의 영역이고 아래쪽은 ‘독신자 기계’(혹은 ‘독신자 장치’), 또는 간단히 ‘독신자’ 영역이다. ‘신부’는 그녀의 영역으로부터 ‘독신자들’[총각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세 개의 ‘통기장치 피스톤들’(작품의 꼭대기에 위치한, ‘은하수’라 불리는 구름에 의해 둘러싸인 수평의 열 속의 세 개의 사각형들)을 통해 삼중의 암호로 소통시킨다. 카프카의 기계에서처럼 높은 곳으로부터의 기명이 아래의 신체들로 전사되고, ‘신부’의 바늘 같은 아래의 부속물에서, 카루주는 형벌 기계의 ‘써레’의 메아리를 발견한다. 죽음의 모티프가 신부를 ‘해골’과 ‘사람을 목매단 여성’으로, 그리고 ‘독신자들’[총각들]을 ‘군복과 제복의 묘지’로 뒤샹이 언급한 것 속에서 발견된다. 과학기술적 에로티시즘이 ‘독신자 기계’의 판벽널의 작동을 퍼뜨린다. (또한 ‘아홉 개의 사과 주형’ 혹은 ‘에로스의 자궁’이라고 불리는) ‘독신자들’, 그러니까 ‘독신자’ 판벽널의 위 왼쪽 편에 있는 아홉 개의 형상의 집합은 ‘모세관들’을 통해 가스를 방출하는데, 이 관들은 가스를 ‘조리’로 알려진 호형으로 연결된 일곱 개의 원뿔들로 옮긴다. 거기에서 가스는 냉각되어 ‘번쩍이는 금속 조각’으로 바뀐다. ‘번쩍이는 금속 조각’은 액체 부유물로 응축된 다음 나선 모양의 ‘터보건’(‘독신자’ 판벽널의 오른쪽 바닥) 아래로 떨어진다. 그런 뒤에 ‘비말(飛沫)들’이 ‘터보건’의 바닥에서 ‘검안사의 목격자들’(오른쪽 꼭대기)로 향하고, 거기에서 그것들은 ‘신부’ 판벽널과 소통된다. 통신하는 기계적 에로티시즘은 ‘신부’ 판벽널에서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신부’의 ‘나나니벌/섹스 실린더’는 ‘욕망 마그네토의 불꽃’을 조절하고, 그 때 그녀의 ‘매우 연약한 실린더들을 갖춘 모터’에 공급되는 ‘사랑의 가솔린’을 분비한다. 카루주에게 카프카와 뒤샹의 기계들은, 신성한 사람들이 없고, 또 무익한(sterile), 관음증적 에로티시즘에 의해 지배되는, 폭력과 죽음의 기계적인 문화라는 근대의 신화를 뜻한다. 카프카의 형벌 기계는 종교와 공포의 테마들을 젼경화하고, 뒤샹의 ‘거대한 유리’는 기계적인 에로티시즘의 테마를 전경화한다. 그리고 우리가 완전하게 형성된 “독신자 기계”를 만나는 것은 이 두 개의 통접(conjunction) 안에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독신자 기계를 네 겹의 현대 비극의 신화로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카루주의 범주와 그가 그 안에서 결합하고 있는 사례들이 눈부신 일임을 발견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신자 기계들은 욕망하는 기계들이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만큼 이야기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이 그 용어를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는 의미들과 카프카의 기계들에 대한 그들의 독해는 뒤샹의 ‘거대한 유리’와 카프카의 형벌 기계를 병치시키는 것에 의해 구체화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거대한 유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측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례들보다 더 좋은 사례이다. 그것은 흐름들의 순환들을 통해 분명하게 작동하는 기계이다. ‘독신자’의 가스는 냉각되고, 번쩍이는 금속 조각으로 절단되며, 안개로 바뀌고, 액체로 응결되어 연이어 전달된다. 한편 ‘신부’는 그녀의 ‘매우 연약한 실린더를 갖춘 모터’에 연료를 주는 사랑의 가솔린을 분비한다. 그것은 ‘시골뜨기 골드버그’ 기계의 특징들과 베케트의 ‘몰리’의 주머니-바위-입 기계를 결합하는데, 이것들은 우리가 자연의 아쌍블라주들에서 만나는 목적적인 비효율성과 비목적적인 효율성이라는 두 가지 극단들을 대표한다. ‘거대한 유리’의 복잡한(intricate) 장치는 ‘시골뜨기 골드버그’의 기구(器具)들(contraptions) 못지않게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다. 또 그것이 자신의 신비한 목적을 잔인하게 실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몰리가 바위를 빨아들이는 순환만큼이나 의도면에서 효율적이고 불투명하다. 뒤샹의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의 아쌍블라주는 이종의 실재물들의 생산하는 욕망의 배치를 비관습적인 양식들 속에서 교묘하게 예증한다. ‘피스톤들’, ‘은하수’ 구름, 욕망-마그네토, 맥박 바늘, 매우 연약한 실린더를 갖춘 모터, 모세관들, 나비 펌프, 초콜렛 분쇄기, 조리들, 가위들, 물방아, 수차, 전차, 터보건, 움직이는 추들, 시력 측정 차트, 따로 떨어져 있는 접시들, 달구어진 냉각기, ‘신부’의 옷들 - 이 모든 것이 일상적이고 기술적인 사물들의 있음직하지 않은 콜라주 속에 결합된다. 그리고 ‘신부’와 ‘독신자들’ - 즉 스스로는 아직 기계류들이면서 인간들(‘신부’) 혹은 추상적인 산업적 형태들(“아홉 개의 사과 주형”으로서의 독신자들) - 이 이러한 순환들 내부에서 통합된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유리’는 에로틱하게 만들어진 기계이지만, 그 안에서 리비도가 그것의 순환들 전반에 걸쳐 공평하게 분배되고 어떠한 단순한 인간적인 성적 관계들로부터도 기묘하게 분리되는 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독신자 기계를 묘사하면서 그것이 마치 ‘거대한 유리’와 유형지의 처형 기계의 합성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두 개의 기계를 이런 식으로 통합하는 것은 중요한 방식으로 둘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형벌 장치를 일종의 뒤샹의 기계로 바라보는 것은 카프카 작품의 유머, 아이러니, 그리고 불합리함을 고양시킨다. 카프카의 견지에서 ‘거대한 유리’를 보면, 겉으로는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뒤샹의 이종 요소들의 꼴라주는 중대한 사회적・정치적 효과들(ramifications)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둘을 독신자 기계들로 이해하는 것은 욕망하는 생산 안에서의 욕망의 본성을 분명하게 해준다. 중요한 것은 영어 “bachelor”나 독일어 “Junggeselle”에는 없는 단어 célibataire에 고유한 본래적인 모호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célibataire은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남성을 의미할 수 있고, 또는 순결하거나 독신인 남자일 수도 있다. 뒤샹의 ‘독신자 기계(machine célibataire)’는 그녀의 결혼하지 않은 구혼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있는 신부의 에로틱한 기계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무성적인 리비도의 순결한 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독신자 기계’라는 용어를 채택하면서 욕망의 반부부적・반가족적 본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성적 관계들의 구분들을 무시한다. 『카프카』에서 그들은 『변신』에서 그레고어가 그녀의 누이에 이끌리는 것이 분열-근친상간의 한 사례이며, 결혼의 규범들 내부에 혹은 어머니에 대한 오이디푸스적인 집착의 구조 내부에조차 조화될 수 없는 욕망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카프카의 작품들에서의 누이들, 하녀들, 그리고 창녀들의 계열들을 반부부적, 반가족적 욕망의 대행자들로 이해하고, 동일한 관점에서 카프카의 동성애적 이중체들, 형제들, 관료들, 그리고 고독한 예술가들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카프카의 예술 기계가 “하나의 독신자 기계”(K 128; 70)라고, 또 그것이 독신자, 즉 그것의 욕망이 카프카의 반부부적인 여자들이나 동성애적 남자들에 의해 열어젖혀진 연결들을 넘어서는 독신자라고 주장한다. “독신자는 근친상간적인 욕망이나 동성애적 욕망보다 더 거대하고 더 강렬한 욕망 상태이다.”(K 129; 70)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무차별하게 인간 그리고/혹은 비인간일지라도, 비개인적이기 때문이다. 뒤샹의 ‘거대한 유리’는 욕망이 모세관들, 조리들, 터보건들, 그리고 시력 측정 차트를 통해서 소통할 때, 신부와 그녀의 구혼자들 사이의 관례적인 인간관계가 붕괴의 과정에 놓일 때, 가장 독신자답다. 유형지의 고문 기계는 욕망이 장치, 희생자 그리고 증인의 순환들을 퍼뜨리고, 어떠한 부부적이거나 가족적인 것에 상당하는 것들이 그것의 운동을 방향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신자이다. 욕망은 여기에서 순수한 강렬도, 즉 기쁨과 고통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만들지 않는 황홀한 고문이다. 독신자 기계로서의 고문 장치는 “우리가 자기발정적인, 아니 오히려 자동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어떤 즐거움”(AO 25; 18)을 생산한다. 이는 단순히 고립된 희생자와 기계가 별개의 단위를 형성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욕망이 그러한 단위 전반에 걸쳐 분배되고, 희생자-기계의 순환들이 자기-발생적인(self-engendering), 그리하여 자동적인 자기-애정(auto-affection)이나 자기-유희(self-enjoyment)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도 없고 부부도 아닌”, 독신자는 “오히려 더욱 더 사회적이고, 사회에 위험하며, 사회를 배반하고, 그 자체로 집단적이다.” “최고의 욕망”인 독신자의 욕망은 “동시에 고독을 욕망하며 욕망의 모든 기계들과 연결되기를 욕망한다. 무엇보다 사회적이고, 고독하기에 집단적인 기계가 바로 독신자이다.”(K 130; 71) 카프카의 형벌 기계는 고독한 희생자를 고문하지만, 그것은 법 - 율법들, 범죄들, 평결들, 처벌, 죄와 속죄 - 의 기계이며, 그리고 그러한 만큼 그것은 곧바로 세상 속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사회적 기계이다.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뒤샹의 신부와 9명의 독신자들은 각각의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고, 그들의 욕망에 있어서 고독하고 독신적이며, 그럼에도 그들의 순환들은 많은 사회적, 예술적, 산업적, 과학적, 그리고 과학기술적인 영역들 속으로 확대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독신자 기계를 편집증적이고 기적을 행하는 기계들의 뒤를 잇는 것으로 특징짓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욕망하는 생산의 최고점, 다시 말해 그 안에서 부분적 대상들, 기관들 없는 신체와 유목적 주체가 모두, 자연과 사회정치적 현실에 침투해 있는 비개인적이고, 비인간적인 순환들 속에서 기능하는 욕망하는 기계이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독신자 기계(68-74)|작성자 옥토끼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8705599  제3장 카프카의 법률 기계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제2부에서 들뢰즈는 『찾기』가 하나의 기계라고 주장하며, 생산적 힘으로서의 작품의 기능을 강조한다. 『찾기』는 진리들을 생산하지만, 선재하고 있는 진리들을 발견하거나 그것들을 무로부터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에 대한 실험을 통해 그것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 자체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서도 효과들을 생산한다.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더욱 발전시키며, 카프카의 전체 작품을 “문학 기계, 즉 글쓰는[집필] 기계나 표현 기계”(K 52; 29)로 다룬다. 하지만 『카프카』에서는 다수성의 횡단적인 통일성 문제보다는 실제적인 것 안에서의 문학 기계의 효과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가 “소수 문학” - 높은 수준의 언어적 탈영토화에 영향받고 또 언표(enunciation)의 집합적 아상블라주를 표현하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학 - 의 개시자(practitioner)라고 주장한다. 카프카의 문학 기계는 하나의 소수 기계, 즉 그의 일기, 편지, 단편들, 장편들을 구성요소로 포함하는, 그리고 “장차 올 사악한 권력들이나 구축되어야 하는 혁명적 힘들”(K 33; 18)을 드러내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가지고 있는 기계이다. 그것은 또한 욕망하는 기계로서, 이것의 증식하는 계열, 연결자들 그리고 블록들은 흐름들과 강렬도(intensities)를 전송하고, 운동들을 유발하며 탈주선들을 열어젖힌다. 이 장에서 우리는 기계 개념 - 욕망하는 기계, 독신자(celibate) 기계, 법률 기계, 글쓰는[집필] 기계 - 을 고찰할 것이다. 그 다음 장[4장]에서 우리는 소수 문학 개념으로 돌아갈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와 욕망하는 생산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1970년판 부록에서 들뢰즈는 『찾기』가 여타의 현대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기능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현대 예술 작품은 의미(sens)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용법(usage)의 문제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PS 176; 129) 분석가의 일이란 그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성 부분들과 그것들의 작용(operation)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예술 작품은 하나의 기계이며, 어찌 보면 깊이나 영혼을 갖지 않은 어떤 것, 다시 말해 작동하거나 아니면 작동되지 않는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기계 개념은 『프루스트와 기계들』에서는 들뢰즈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며, 오직 『앙띠오이디푸스』(1972)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에서는 단지 예술 작품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들이 기계로 간주된다. “모든 곳에 기계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전혀 은유적인 것이 아니다. 결합되고 연결된, 기계들의 기계들. 기관-기계는 자원-기계 속으로 밀어 넣어진다. 어떤 것은 흐름을 방출하고, 다른 것은 그것을 절단한다.”(AO 7; 1) 이러한 기계들은 “욕망하는 기계들”이며, “욕망하는 생산”의 보편적인 과정의 구성요소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 용어들로써 의미하는 바는 어펙트(affect)로 가득 찬 편재하는 활동이다. 정신(psyche)을 이드, 에고, 슈퍼에고로 나누는 프로이트적 구분에 다소 장난스럽게 대응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개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을 욕망하는 기계들, 기관 없는 신체, 그리고 유목적 주체로 규정하는바, 그것들 각각은 욕망하는 생산의 특정한 국면과 연관되어 있다. 즉 생산의 생산(욕망하는 기계들), 등록(inscription)의 생산(기관 없는 신체), 소비/완성(consumption/consummation)의 생산(유목적 주체). 욕망하는 기계들의 간단한 모델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유아의 모델이다. 입-기계는 유방-기계와 짝이 되어 유방-기계에서 입-기계로 나아가는 젖의 흐름을 이룬다. 유아의 입-기계는 이어서 소화관(alimentary canal)의 다양한 기계들(식도-기계, 위장-기계, 장-기계, 요도-기계, 항문-기계)과 짝이 되어 유아의 신체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부수적인(collateral) 욕망하는-기계들의 다양한 회로들로 전환되어, 최종적으로 배설물들의 흐름들로 빠져나오는 영양물들의 흐름을 이룬다. 유방-기계 자체로부터의 젖의 흐름은 어머니의 입-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여러 영양물들로 확대되는 영양 회로로부터 생긴다.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들은 관통하는 사슬들이나 회로들 속에서 서로 다른 것과 짝이 되며, 그 각각의 회로는 계속-넓어지는 활동 네트워크들 속에 퍼져 있는 여타의 회로들(예컨대 어머니의 영양물들의 생산에 내재한 여러 회로들, 혹은 유아의 배설물들을 분해하는 것과 관계된 미생물의 회로들) 속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유아의 입-기계는 단순히 먹는-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호흡하는-기계, 토하는-기계, 우는-기계 등등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욕망하는 기계는 “일종의 코드를 가지고 있는바, 그 코드는 그 기계 안에 설계되고(engineered), 저장되어 있다.(stockpiled)”(AO 46; 38). 다시 말해, 모든 욕망하는 기계는 주어진 시간에 그 내부에서 기능하는 특정한 회로를 결정하는 전환(switching)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어떠한 회로도 다른 회로들과 고립된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유아의 영양 회로는 시각의 회로들(말하자면, 거실 등불에 초점을 맞추는 유아의 눈-기계), 후각의 회로들(부엌의 냄새의 흐름들과 짝이 되는 코-기계), 촉각의 회로들(열, 옷감들, 살, 안개, 공기의 흐름들과 접촉하고 있는 표피 기계들)과 연결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모든 회로들을 단일한(single) 표면 위의 매우 많은 선들처럼 새기고자 한다면, 그 격자(gird) 같은 표면은 기관 없는 신체 - 즉 공존하는 회로들(우리의 사례에서는, 영양・시각・후각・촉각 회로들)과 교호적인(alternating), 이접적인(disjunctive) 회로들(영양의, 숨쉬는, 우는 회로들)의 단일한 지도를 구성할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통일된 정신적인 신체 이미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첫째, 그것의 회로들은 어떠한 경험적 신체의 윤곽도 넘어서 무한정 확장된다. 예컨대 만약에 우리가 기관 없는 “유아의” 신체에 대해서 느슨하게(loosely)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기관 없는 신체 안에 어머니의 유방, 거실의 등불, 부엌의 냄새, 음식을 영양분과 찌꺼기로 바꾸는 미생물 등등을 포함시켜야 한다. 둘째, 그것은 그 용어가 갖는 어떠한 관례적인 의미에서도 하나의 통일체[단일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안에 통접(conjunctions)과 이접(disjunctions)이라는, 어떤 경우들에서는 함께 존재하고(coexist) 함께 기능하는(cofunction), 그리고 다른 경우들에서는 서로 이어지거나(succeed) 밀어내거나(supplant) 반작용하는(counteract) 이질적인 회로들을 포함한다. 욕망하는 기계는 “순수한 다양성, 요컨대 통일체로 환원될 수 없는 긍정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기관 없는 신체 속에서 “전체(whole)”를 만난다면, 그것은 “부분들의 전체일 뿐이지 그것들을 전체화하지 않으며, 부분들의 통일체일 뿐이지 그것들을 통일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별개로 구축된 새로운 부분으로서 그것들에 덧붙여진다.”(AO 50; 42) 셋째, 그것은 단순한 환상(fantasy)이나 심적 이미지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이지는 않으나 실제적인, 하나의 가상실효적[잠재적] 실재이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욕망하는 기계들에 의해 사후효과[잔효](aftereffect)로 생산되지만, 다른 점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의 작용에 선행하는 가능성의 조건이자, 어떠한 주어진 욕망하는 기계들의 사슬이 특정한 시간에 현실화할 수도 있는 잠재적 회로들의 격자이다.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우리가 두 개의 복합 기계들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들, 즉 “편집증 기계”와 “miraculating 기계”가 출현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들이 없다기보다는 규칙적인(regular), 고정된 조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반-유기체, 이접적 종합 양식이자, 끊임없이 무너지고 떠듬거리고 굳어지고 붕괴하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의 회로들을 분리하고 중단시키는 반-생산 기계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그와 동시에 다양한 욕망하는 기계들을 다수의, 횡단적으로 연결된 회로들 속에서 서로 관련을 맺도록 하는 기계이다. 편집증적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임박한(impending) 총체성으로서의, 즉 그것들이 불연속적인 단편들로 깨어지면서 피하는 박해적(persecutory) 질서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를 거절할(repel) 때 생산된다. miraculating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관 없는 신체를 - 마치 그것들이 그것의 불가사의한 표면의 방사물들(emanations)인 것처럼 - 끌어당길 때 나타난다. 기관 없는 신체가 이접과 종합 양자를, 분해(decomposition)와 조합(composition) 양자를 생산하기 때문에, 편집증적 기계와 miraculating 기계는 부단히 서로에게 피드백되는 욕망하는 생산의 무한히 진동하는(oscillating) 상태로 공존한다. 욕망하는 생산의 세 번째 구성 요소는 유목적 주체, 즉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 항상 욕망하는 기계들과 함께 기관 없는 주체를 넘어 방랑하는, 생산되는 것을 취하는 비율에 의해 규정되는, 어디에서나 되기나 아바타의 현상금(reward)을 수집하는, 그것이 소비하는 상태로부터 탄생하고 각각의 새로운 상태에 따라 재탄생하는, 이상한 주체이다.”(AO 23; 16) 만약 기관 없는 신체가 욕망하는 기계들의 회로들에 의해 격자직조된 표면으로 간주된다면, 유목적 주체는 그 표면에 새겨진 다양한 경로들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출몰하는 방랑(errant) 지점이자, 부가적인(adjunct) consommation(불어로 경제적 소비와 리비도적 달성을 의미한다) 기계이다. 유목적 주체는 세 번째의 복합 기계 - “독신자 기계”, “새로운 인간성 혹은 거룩한(glorious) 유기체를 낳는 기관 없는 신체 그리고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새로운 동맹”(AO 24; 17) - 의 형성을 통해 창조된다. 독신자 기계가 생산하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려 있는 울음 같은, 강렬한 사건(passage), 모양과 형상이 제거당한 순수하고 노골적인 강렬도의 상태들의 느낌과 같은, 거의 견딜 수 없는 정도(독신의 비참과 영광이 최고점에 이른)에까지 이르는, 순수한 상태에 있는 강렬한 양들이다.”(AO 25; 18) 기관 없는 신체는 영점의 강렬도를 구성하고, 욕망하는 기계들은 작용하면서 정서적인(affective) 강렬도의 다양한 차원들을 표시한다.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는 편집증적 기계에서는 서로를 밀어내고, miraculating 기계에서는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두 경우 모두 욕망하는 기계들은 강렬도의 긍정적인 차원들을 결정한다. 척력과 인력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강렬도의 차원들에서의 차이들이 생겨나서 강렬도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고, 이러한 각각의 이행에서 유목적 주체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독신자 기계를 형성하면서 편집증적・miraculating 기계들의 척력과 인력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기능 작용이 생겨난다. “요컨대, 척력과 인력의 힘들의 대립은, 어떤 체계의 최종적 평형 상태를 결코 표현하지 않는, 매우 능동적인, 강렬한 요소들의 개방적 계열을 생산하는 한편, 주체가 통과하는 무한히 많은 부동의 준안정적 상태들을 생산한다.”(AO 26; 19) 기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독신자 기계라는 관념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먼저 기계 개념 자체를 좀 더 심도 있게 탐구해 보아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개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을 기술한 뒤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떠한 의미에서, 어떠한 은유와 상관없이, 진실로 기계들인가?”(AO 43; 36) 그들은 기계가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된다”(AO 43; 36)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 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절단들은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개의 구성요소들과 관계된다. 즉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할-절단(portioning-cut), 유목적 주체를 생산하는 잔여-절단(reminder-cut)과 기관 없는 신체가 유래하는 분리-절단(detachment-cut). 모든 기계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베어 자르는 끊임없는 물질적 흐름과 관계되어 있다.”(AO 43; 36) 예를 들어 유아의 입-기계는 우유의 흐름을 절단해 들어가고, 유아의 항문-기계는 배설의 흐름을 절단해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가 기계와 흐름을 분리된 실재들(entities)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들은 실제로 하나의 단일한 과정을 구성한다. 유아의 입-기계의 입장에서 볼 때, 어머니의 유방-기계는 흐름의 원천이며, 이는 입-기계가 위-기계에게 흐름의 원천인 것과 같다. “간단히 말해, 모든 기계는 그것이 연결되어 있는 기계와의 연관 속에 있는 흐름의 한 절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자체가 하나의 흐름이거나, 혹은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다음) 기계와 연관된 흐름의 생산이다.”(AO 44; 36)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단-흐름들” 혹은 “정신분열적-흐름들”의 체계에 대해, 흐름과 더불어 다양한 중계국들과 처리국들에 의해 파열되는 물질-흐름의 회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와 같은 물질-흐름이 hylè(그리스어로 물질), 즉 이상적인(ideal) “연속적 무한 흐름”(AO 44; 36)인바, 이것은 분명 실증론적인 무생물의 흐름에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또한 (일부 생태학적 모델들에서처럼) 에너지, (정보 이론과 체계 이론의 일정한 형태들 속에서 규정된 바의) 정보, 그리고 (다양한 기호론적 모델들, 특히 피어스적 방향의 모델들에서 특징지어졌던 바의) 기호들의 흐름들을 포함한다. 각각의 흐름은 그것이 “순수 연속성”(AO 44; 36), 즉 시작이나 끝이 없는 단일한 항구적인(constant) 흐름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의 연속성이 절단 행위와 반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다. 왜냐하면 그 절단은 “그것이 이상적인 연속성으로서 절단하는 것을 함축하고 규정하기”(AO 44; 36)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절단이 접속적(connecitve) 종합을 수행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요소들을 어떤 공통의 흐름을 통해 서로 관계를 이루게 된다. 즉, 하나의 요소가 하나의 흐름을 방출하고, 두 번째 요소가 그러한 흐름을 절단하며,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세 번째 요소가 절단하는 흐름을 방출하는 등, 본성상 엄밀히 부가적인 이상적이며 결말-개방적인(open-ended) 요소 연결을 이루는 흐름-절단들의 연쇄들이 존재한다(a +b +c + x + ······,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AO 44; 36]). 그 기계의 이 첫 번째 단절, 그러니까 분할하는[분배하는]-절단은 절단함으로써 연결한다는, 파열을 통해, 다시 말해 특이하고, 무제한적인 과정 내부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분열-흐름을 통해 연속성을 확보한다는 역설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두 번째의 절단, 즉 이탈-절단은 이접적 종합, 즉 “a이거나 b이거나 c이거나 x이거나 ······” 유형의 관계를 창조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접들은 배제적이기보다는 포함적이며, 어떠한 선택지도 다른 선택지를 배제하지 않고, 각각의 요소는 차이나는 대로 긍정된다. 이러한 포함적 이접들은 모두 기관들 없는 신체의 격자를 구성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모든 기계는 다양한 기능들을 갖고 있고 다양한 활동 네트워크들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모든 기계는 “자기 안에 설계되어 있고, 저장되어 있는 일종의 코드”를 포함하고 있다.(AO 46; 38) 입-기계는 다양한 흐름들 - 음식, 액체, 공기 - 을 절단하고, 이러한 각각의 절단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타의 내적・외적 과정들과 결합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입-기계가 음식의 흐름을 절단한다면, 기능들의 복잡한 사슬이 입-기계의 음식-절단 내부에 기록되고 코드화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음식물을 섭취하는 유아의 사례에서, 등불의 반짝임, 부엌에서 나는 냄새들, 천 조각의 펄럭임 등등은 유아의 입-기계의 작동 속에서 코드화된 결합 사슬의 부분을 형성할 것이다. 등불 회로, 냄새 회로, 다양한 촉감 회로들과 영양 회로 들의 결합 사슬은 모두 기능들의 일종의 “덩어리들”을 구성하고, 입-기계의 특정한 작동을 - 먹는-기계일지, 숨쉬는-기계일지, 마시는-기계일지를 - 결정하는 이접들 각각과 더불어 결합된 회로들의 덩어리는 활성화되고, 그러한 덩어리는 회로들의 여타의 가능한 네트워크들로부터 이탈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탈-절단들은 “이질적인 사슬들과 연관되고, 석재들이나 날아다니는 벽돌들처럼, 이탈될 수 있는 단편들[선분들], 이동할 수 있는 저장물들을 따라 진행된다.”(AO 47; 39-40) 따라서 기계들은 물질적 흐름들 속에서 연결적(connective) 절단을 만들고, 그와 동시에, 결합된 기능들의 사슬들이나 덩어리들을 이탈시키는 이접적 절단들을 수행한다. 그렇지만 다양한 덩어리들이 포함적으로 분리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이탈된 덩어리들 모두의 기록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표면에 격자를 그린다. 세 번째의 절단인 잔여-절단은 하나의 잔여물, 즉 남겨진 무언가를 창조한다. 생산되는 것은 “기계의 곁에 있는 주체, 기계에 인접해 있는 부품(piece)이다.”(AO 48; 40) 그러한 주체는 우리가 살펴본 바처럼, 고정된 정체성이 없으며, 기관들 없는 신체의 격자를 횡단하는 강도(intensity)의 유목적 흔들림이다. 그것은 기계들 곁에 생산된 부분이지만, 그것 자체는 또한 “부분들로 나뉘어진 ······ 부분”이자 “사슬의 이탈들에 상응하는, 그리고 기계에 의해 수행된 흐름들의 분할들에 상응하는 부분들”에 의해 특징지어진 부분이다.(AO 49; 40-41) 하지만 이 주체가 “부분들 - 그 각각이 순식간에 기관들 없는 신체를 채우는 부분들 - 로 이루어진 한 부분이라면”(AO 49; 41), 우리는 그 주체가 부분들을 한데 모으지만 그것들을 통일시키지 않으면서 접속[통접]한다고 말하는 게 좋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 번째의 절단은 접속적[통접적] 종합을 수행하고, 연결적 흐름들과 이접적 사슬들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부가적인 부분 - “그것이 관통하는, 그리고 그러한 상태들을 낳은 상태들을 소비하는”(AO 49; 41) 부가적인 부분 - 속에서 합체하는 요약의 순간(summary moment)을 생산한다. 이 기계는 이제 절단들의 체계이며, 이 절단들 각각은 역설적인 종합을 수행한다. 분할하는[채취]-절단은 하나의 흐름을 깨뜨림과 동시에 부가적인 연쇄 속에서 다른 기계들과 연결하고, 그럼으로써 분리되지만 연결되는 요소들의 분열-흐름을 생산한다. 이탈-절단은 사슬들 사이의 이접들을 창조하지만, 선택적인 회로들의 공존 양식을 허용하는 포함적 이접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잔여-절단은 부분들로 나뉘어지지만 소비/완성의 요약 순간에 그러한부분들을 통접하는 잔여적 주체를 생산한다. 결국 이 모든 종합들은 다양체들, 즉 전체성이나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함께 기능하는 이질적인 실재물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연결적 종합은 관련된 욕망하는 기계들의 통일되지 않는 흐름을 창조하고, 이접적 종합은 이탈된 결합 사슬들의 전체화하지 않는 격자를 형성하며, 통접적 종합은 그것의 형성물 속에서 기능하는 부분들을 한데 모으는 전체화하지 않는 부속 부분을 생산한다.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만약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계들이라면, 그렇다면 기관들 없는 신체와 유목적 주체란 무엇인가?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한 것처럼, 욕망하는 기계들이 은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 기계들이라는 점을 “절단들의 체계”의 설명은 어떤 식으로 증명하고 있는가? 첫 번째 물음은 부분적으로 용어상의 문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안티오이디푸스』의 앞부분에서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욕망하는 기계들, 기관들 없는 신체, 그리고 유목적 주체로 규정하지만(identify), 책의 뒷부분에는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부분적-대상들, 기관들 없는 신체, 유목적 주체라고 언급하고, 이 세 가지 모두를 “욕망하는 기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기관들 없는 신체와 유목적 주체 역시 기계들이라는 것이다. 용어상의 편차는 세 가지 구성요소들의 본성에 의해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부분적-대상들(또한 “기관들-부분적인 대상들” 그리고 “부분적인-기관들”로 언급되는)은 기관들 없는 신체를 사후효과로서 생산하고, 유목적 주제를 부속 부분으로 생산한다. 부분적-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distinction)가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상호적인 공동기능(cofunctioning) 속에서 하나의 단일한 실재로서 작동한다. 실제로, 부분적인-기관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는 단일하고 동일한 사물이자, 분열-분석에 의해 그 자체로 생각되어져야 하는 단일하고 동일한 다양성이다. 부분적인 대상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직접적인 힘들이고,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부분적인 대상들의 야만적인[별종적인](brute) 물질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언제나 이러이러한 강렬도로 공간을 채우는 물질이고, 부분적인 대상들은 이러한 정도들이며, 강렬도 ‘0’의 물질의 출발점으로부터 공간 속에서 실제적인 것을 생산하는 이러한 강렬한 부분들이다.(AO 390; 326-27) 부분적인-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의 척력의 계기 속에서는 후자[기관들 없는 신체]가 “{부분적-대상들} 스스로 형성하는 순수한 다양성의 외적 한계를 기록하고”, 인력의 계기 속에서는 “기관들-부분적인 대상들이 그것에 달라붙고, 그것 위에서, 포함적인 이접과 유목적 통접의 새로운 종합들로 들어간다.”(AO 389; 326) 부분적-대상들은 “작동하는 부분들”과 같고, 기관들 없는 신체는 “고정된(immobile) 모터”(AO 390; 327)와 같아서 이 둘은 하나의 단일한 기계로 작동한다. 그리고 유목적 주체는 정말, 이 단일한 기계가 작동하면서 통과하게 되는 상태들의 소비이자 자기-향유(즉 자기-애정 auto-affection)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부분적-대상들만을, 그리고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가지 구성요소들 모두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욕망하는 기계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작동하는 부분들로서의 부분적인-대상들이 언제나 고정된 모터의 실존과, 기계가 기능하면서 통과하는 상태들의 실존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단순히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계들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주장과 관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를 흐름들 내부의 “절단들의 체계”라고 정의함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상식적인 구별들을 해체하는, 그리고 흐름(flux)의 다양한 경향들(currents)의 세계와 보편적인 절단 가정을 통해서만 상호관계적이게 되는 세계를 제시하는 술어(language)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절단들의 체계가 종합들의 체계라는 점이다. 『안티오이디푸스』의 마지막 장에서 부분적-대상들이 분산되어 있고,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고정된 관계가 없다고 길게 강조한 뒤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무엇이 이질적인 부분들의 전체화하지 않는 공동기능하기를 가능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무엇이 이질적인 부분들이 “기계들의 기계들과 아상블라주를 형성하도록”(AO 388; 324) 해주는지를 묻는다. 그들은 “종합들의 수동적인 특징 속에서, 아니, 같은 것이 되겠지만, 고려된 상호작용들의 간접적인 특징 속에서”(AO 388; 324) 그 해답이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종합들은 그것들이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며, 어떠한 선재하는 질서나 감독하는 지성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그것들은 통일된 전체에 따라 부분들의 상호적인 공동결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접적이다. 부분적인 대상은 주어진 흐름을 절단하고, 이어서 스스로 하나의 흐름을 방출하지만, 그것의 흐름을 절단하는 그 다음의 부분적인 대상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분적인 대상들의 연쇄의 형성은 간접적으로 작동하고, 매 단계마다 부분 옆의 부분의 결말-개방적인(open-ended), 직접적이지 않은 부가물이 작동한다. 흐름들의 포개짐과 함께 포함적인 이접들은 결합된 사슬의 격자를 가로질러 흐름들을 서로서로 간접적으로 연관시킨다. 일단 흐름들이 포개지면, 부분적 대상들의 치환(permutation)이 가능해지고, 결합된 사슬들의 격자를 가로질러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비결정적인, 간접적인 경로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 모든 간접적인 수동적 종합들은 - 2항체{연결적 종합}, 포개짐{이접적 종합}, 치환{통접적 종합} - 단일하고 동일한 욕망의 기계류이다.”(AO 388-89; 325) 결국,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기계들이란 “종합자들”이며, 간접적인 수동적 종합들의 생산자라는 것이다. 기계들은 간접적인 과정들을 통해 연결적, 이접적, 통접적 관계들을 형성하는 이질적이며 분산된 부분들이다. 그 부분들은 기능하고, 상호작용하고, 일하고, 작동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부분들을 유지한 채로 그렇게 한다. “기계”는 부분들을 서로 전체화하지 않는 관계 속에 놓는 것을 위한 이름이며, 동시에 관계 속에 놓이는 것을 위한 이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계들은 “기계” 자체이며,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기계들로 형성한다. “욕망하는 기계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세 가지 방식에 따라 절단하고 절단되는 것이다.”(AO 49; 41) 우주는 오로지 흐름들과 절단들로, 연결하고 포개지고 치환되는 분열-흐름들로, 스스로를 그 이상의 기계들로 기계화하는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기계들은 은유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것 속에서 기계들 이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계의 본질은 그것의 작용(action) 속에, 다양성들의 부분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을 생산하는 그것의 “기계화하기” 속에 존재한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의 문학론 제3장 카프카의 법률 기계[59-68]|작성자 옥토끼
10    [공유] 프루스트와 기호들[1-2장] 댓글:  조회:1169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7117280  『프루스트와 기호들』 읽기 제1장 기호의 유형 1.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통일성을 이루는 요소는 기억이나 추억, 비자발적인 기억이나 추억이 아니다. 여기에서 ‘찾아서(찾기)’는 ‘진리 찾기’의 찾기이다. ‘시간’도 ‘단지 지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표현(expression) 펼치다: ex-plic-quer: 접힌 것pli을 펼쳐내다 함축하다[접다]: im-pli-quer: 접어들이다 전개하다: develope 감싸다[감아들이다]: envelope 풀다: deroll 감다: enroll 의미 기호 explicate(사물 외재적인 지성의 작용이 아니라 지성 내재적인 사물의 작용) 설명하다 펼치다 지성의 활동인 설명 자연의 활동인 펼침 인식론적 존재론적 마들렌의 맛을 통해 그 안에 들어 있던 의미, 즉 과거의 콩브레가 설명되는 활동 물질적 기호(마들렌) 안에 들어 있는 의미(과거의 콩브레)가 펼쳐지는 활동 스피노자에게 지성이란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양태일 뿐이고, 따라서 지성의 소산인 지식 자체도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현의 소산이다. 객관적으로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연 안에도 있어야 한다.(에티카, I, 30; II, 7, 주석) 1.2 이 책은 배움[도제수업]의 이야기,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이다. 추억의 원천들이 아니라 배움의 원료들이자 배움의 선들. 실망과 깨달음의 운동. 프루스트의 플라톤주의(상기론). 기억은 배움의 도구일 뿐, 배움은 그 목적과 원리들을 통해 기억을 넘어선다. 이 책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1.3 모든 것은 기호를 방출한다. 모든 배우는 행위는 그러한 기호나 상형문자의 해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호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 위에 세워져 있다. 1.4 통일성과 다원성. [공통성과 특이성]. 기호들의 세계는 여러 개의 원들로 짜여지고 몇몇 지점들에서 서로 교차한다. 이 기호들은 각각이 특유하고 이런저런 분야를 구성한다. 세계들 모두의 공통점, 즉 각각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통일성은 세계들이 인물들, 대상들, 물질들이 방출하는 기호들의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해독과 해석만이 진리를 발견하고 배움을 가능하게 한다. 기호들은 동일한 종류에 속하지도, 동일한 방법으로 출현하지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독되지도 않으며 의미들과 동일한 관계를 지니지 않는다. 1.5 기호들의 종류 사교계 사랑의 그룹 감각적인 세계 예술의 세계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인 기호 예술의 기호 공허 거짓말 물질적 본질적 우리에게 작위적인 흥분을 주는 텅 빈 기호 우리에게 고통을 주면서 그 진짜 의미는 항상 더 큰 고뇌를 안겨 주는 거짓말의 기호 특별한 기쁨을 직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정직한 기호. 충만하고 긍정적이며 즐거운 기호. 원천이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기 기호들의 펼쳐짐, 전개 또한 여전히 물질적. 물질성을 벗은 기호.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 기호. 1.6 사교계의 기호: 많은 기호들을 방출하고 집결시키는 영역. 비동질적. 변화되고 응결되거나 다른 기호들로 대체되는 기호들. 기호가 어떤 행위나 생각을 대체하여 행위와 생각의 구실을 함. 고로 하나의 기호는 다른 어떤 것, 즉 외재적 의미나 관념적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행위의 관점에서 사교계는 기만적이고 잔혹하게 나타나며, 사유의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난다. 사교계에서 사람들은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만들어 낸다. 사교계의 기호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고 그것을 대체하며, 자기가 가진 의미들이 효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이 기호는 사유로 행위를 앞지르며 행위로 사유를 무화시키고,이런 것이면 충분하다고 공언한다. 상투적이고 공허한 기호들. 이 기호들을 거치지 않으면 배움은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 이 기호들은 텅 비어 있지만 이 공허함은 이 기호들의 의례적인 완벽성(형식주의)을 갖추도록 해준다. 1.7 사랑의 기호: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즉,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사랑은 무언의 해석 속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 해독(해석)해야 할 세계가 사랑받는 사람 속에 함축되어 있고 감싸여져 있으며 수형자처럼 갇혀 있다. 사랑의 다원주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감싸여진 채로 있는 미지의 세계들을 펼쳐 보이고 전개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사랑의 모순. 주관적인 사랑의 법칙. 질투. 사랑의 기호들은 오로지 자기가 표현하는 것을 감추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의 기호들이다. 미지의 세계들, 행위들, 사유들의 원천. 사랑의 기호를 해석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의 해석자이다. 이러한 그의 운명 자체는 ‘사랑받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는 모토에 얽매여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세계. 동성애. 근원적인 자웅 동체. 1.8 감각적 기호: 기쁨과 명령. 우선 특별한 기쁨이 찾아오고, 그 결과 이 기호들은 그 직접적인 효과로 인해 이전의 상태와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기호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유 작업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숨겨진 대상을 건네주면서 기호의 의미가 나타난다. 물질적인 기호들. 1.9 예술적 기호: 물질적 의미는 그것이 구현하는 관념적 본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에서의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다른 모든 세계들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감각적 기호들을 자기의 일부로 편입하여, 거기에 미학적 의미를 채색하고, 그것들에 잔존해 있는 불투명성에 침투한다. 감각적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에 의존한다. 관념적 본질은 감각적 기호들의 물질적 의미를 통해서 육화한다. 모든 기호들은 예술로 수렴한다. 모든 배움[도제수업]의 과정은 예술 자체에 대한 무의식적인 배움의 과정이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본질적인 것은 예술의 기호들 속에 있다. 제2장 기호와 진실 2.1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곧 진리 찾기이다. 진리란 본질적으로 시간과 관련된다. 자연, 예술,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진실]이다. 2.2 프루스트에게,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는 인간에게 선재하지 않는다. 기호의 폭력에 의해 진리 찾기를 강요당한다. 진리[진실]는 비자발적인 기호로부터 ‘누설된다.’ 2.3 고전 철학[인식론]의 잘못된 전제 = “우리는 사유하고자 하는 선 의지와 본성적으로 참된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명시적이고 규약적인 의미는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외현적인 기호가 감싸고 있고 그 기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런 의미만이 오로지 근본적이다. 2.4 강요와 우연. 진리는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대상을 우연이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우연한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고, 해독하고, 번역하고, 찾아내는 것 =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 2.5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인데, 이 설명은 기호 그 자체의 전개와 뒤섞이기 때문에, 찾기는 항상 시간과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시간의 네 구조(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리는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여러 종류의 기호들 각각은 그에 상응하는 특권적인 시간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간선들의 결합들을 증식시키는 다원적 체계가 존재한다. 기호의 종류들은 각각 불균등하게 여러 가지 시간선에 참여한다. 하나의 선은 불균등하게 여러 가지 종류의 기호들과 섞인다. 2.6 잃어버린 시간,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 존재했던 것들의 소멸, 존재들의 변화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기호들이 있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어떤 측면을 드러낸다. 이 기호들은 자기가 변질되어 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미리부터 꼼짝 않고 고정되어 버린다. 사교계란 매순간 변질되고 변화한다. 프루스트는 모든 변화를 베르그송적인 지속으로 여기지 않고, 탈퇴나 무덤을 향한 경주로 여긴다. 2.7 사랑의 기호들은 사교계의 기호들보다 훨씬 심하게 변질되고 소멸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함축한다. 만약 사랑과 질투의 기호들이 자기만의 변질 과정을 겪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끊임없이 사라질 준비를 하고, 그 파국을 미리부터 계속해서 모사(模寫)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우리가 지나간 사랑을 반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의 사랑이 그토록 생생하게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 이미 파국의 순간을 반복하며 그 종말을 예기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미래를 향한 이 반복, 이 파국의 반복. 2.8 감각적 기호들은 그 풍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변질과 소멸의 기호가 될 수 있다. 왜 비자발적인 추억[기억]은 우리에게 영원의 이미지 대신에 죽음의 격심한 감정을 가져다 주는가? 주인공이 종종, 기쁨을 연장시키는 대신에 번민으로 돌아가는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양면 감정을 우리는 바로 감각적 기호 자체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2.9 비자발적 기억. 옛날의 감각은 현재의 감각과 서로 겹쳐지고 결합되려 하며, 현재의 감각을 여러 시기들 위에 동시에 펼친다. 그러나 현재의 감각이 자신의 ‘물질성’을 옛날의 감각과 대립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 감각의 겹쳐짐에서 오는 즐거움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과 상실의 감정에게 자리를 내주고 쫓겨날 수 있다. 이러한 상실의 감정에 젖게 되면 옛날의 감각은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깊숙이 밀려나 버린다. 여기에는 기억의 가능성으로만, 즉 그 기억이 발생하는 모든 기호들 속에서 기억의 가능성으로만, 늘 머물러 있는 어떤 양면적인 것이 있다. 2.10 헛되이 낭비하는 시간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기호의 길들을 통해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이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이따금 불완전한 재료와 물질들은 간혹 우리를 황홀하게 만든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이 재료와 물질이 기호로서 풍부하기 때문이다. 2.11 항상 자기의 시간을 잃어 가는 가운데 기호의 매개에 의해서 배운다. 기호는 그 자체 관계에 이질성을 함축한다.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배우는 바와 닮은 점이 없는 어떤 사람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한다. 2.12 지성적이기만 한 진리들의 한계 = ‘필연성’의 결핍. 예술이나 문학에서 지성은, 항상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프루스트의 사유 일반(기억력, 욕망, 지성, 본질들에 관한 능력). 잃어버리는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과 관련해서는 ‘지성’이 사유를 제공하고 기호를 해석한다. 2.13 지성의 관념들은 슬픔의 대용품 구실을 한다. 어떤 경이로운 즐거움이 기억을 움직이게 하듯이, 고통은 지성이 탐구하도록 강요한다. 사교계의 가장 하찮은 기호들이 법칙으로 환원되고, 사랑의 가장 고통스런 기호들이 반복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점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지성의 소관이다. 우리가 시간을 헛되이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기호들을 배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게으른 삶이 바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2.14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선들이 있다. 각각의 종류의 기호들은 확실히 각각에 있어서 특권적인 어떤 시간선에 상응한다.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 기호 예술의 기호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 ↔ ↔ 다른 모든 시간들을 포함하는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기호들 각각은 또한 다른 시간에 겹쳐지고 다른 시간적 차원에도 참여한다. 모든 다른 차원들이 합쳐지고 그 차원들에 해당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예술 작품의 절대적 시간 속에서이다. 기호의 세계들은 진정한 ‘배움의 선’인 시간선들을 따라 펼쳐진다. 하지만 그 세계들은 이 선들 위에서 서로 간섭하고 서로 작용한다. 기호들이 시간선을 따라 전개되거나 설명될 때, 기호들은 반드시 이런 식으로 시간선과 대응하고 시간선을 상징하고 서로 교차하며, 진리 체계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조합을 이룬다. [출처] [공유] 프루스트와 기호들[1-2장]|작성자 옥토끼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7160727  제2장 프루스트의 기호 기계 『프루스트와 기호들』(1976)의 제3판에 붙인 서문에서 들뢰즈는 1964년에 『마르셀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제1부가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에 관계된 것인 반면, 1970년에 두 번째 판에 추가되고 1976년에 여러 장들로 나누어진 제2부는 “『찾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기호들 자체의 생산과 증식”에 관계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각각의 경우들에서 들뢰즈가 제기하는 문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잃어버린 시간(그리고 제7권의 되찾은 시간)을 찾아나서는 이 엄청난 찾기, 그 시간에 대한 조사와 탐색 - 의 통일성 문제이다. 그 본성에 의해 하나의 전체로 파악될 수 없는 어떤 것 - 즉 시간 - 을 그 자신의 주제로 가지고 있는 소설의 단일함(singleness)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파편들의 전체로서, 이 다수(multiple)의 통일성, 이 다수성(multiplicity)의 통일성은 무엇인가? - 즉 원리는 아니지만, 그와 반대로 그 다수와 그것의 연결되지 않은 부분들의 ‘효과’일 일자(One) 및 전체(Whole)."(PS 195; 144)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찾기』는 기호들 안에서의 “도제수업 이야기”(PS 10; 4)이지만, 발견(discovery)의 계속되는 과정과 예술 작품에서 기호들의 진리(truth)의 궁극적인 계시(revelation) 양자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만 하는 이야기이다. 기호들의 증식과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 『찾기』는 독자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들뿐만 아니라 “통일성 효과들”을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이다. 시간은 서술자의 연구 대상이자 그러한 연구가 일어나는 매개이지만, 시간은 또한 기호들과 『찾기』의 통일성 효과들을 생산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왜냐하면 “서술자의 차원(dimension)인 시간이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전체화하지 않는 [이것들의] 전체가 될 수 있고, 이러한 부분들을 통일시키지 않는 [이것들의] 통일성이 될 수 있는 힘(puissance)을 가지기 때문이다.”(PS 203; 150)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 들뢰즈의 기본적인 목적들 중의 하나는 비자발적인[무심결에 떠오르는](involuntary) 기억과 주관적인 연상이 『찾기』를 해석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통념(common notion)에 도전하는 것이다. 마르셀의 마들렌은 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일종의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7권의 『되찾은 시간』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기호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들이 단순한 심리학적 상태 이상의 것과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루스트에게 기호들은 수수께끼이며,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즉각적인 해독(decoding)을 거부하는 상형문자이다. 기호들은 드러냄과 동시에 숨기며, 그것들이 기호들로 기능하는 한에서는 즉각적인(immediate) 이해를 거부하고 간접적인(indirect) 판독 과정을 유도한다. 기호들의 내용들은 기호들 안에 싸여져 있고, 말려져 있으며, 압축되어 있고, 위장되어 있다. 따라서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은 그것들을 펼치는 것, 즉 그것들을 해설하는 것이다(라틴어로 explicare는 펼치다, 풀다의 뜻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들렌은 실제로 전형적인 기호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마르셀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기호의 해설은 “일본인들이 사기그릇에 물을 채운 뒤 그 안에 작은 종이 조각들을 넣고, 처음에는 문자나 형태가 없다가 나중에 물에 젖어서 펴지고 뒤틀려서 색깔과 특이한(distinctive) 형상이 나타나면 딱딱하고 알아볼 만한 꽃들이나 건물들, 사람들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즐거워하는 게임”(Proust I 51)과 같다. 그러나 마들렌은 네 가지 종류의 기호들 중의 하나만을 대표할 뿐이다. 첫째, 사교계의 기호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관습, 우아한 대화, 품위 있는 예절, 에티켓, 관행, 예의바름[예법] 등등이 포함된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여러 수수께끼들을 던진다. 왜 한 개인이 어떤 특정한 서클에는 허용이 되면서 다른 서클에는 허용이 되지 않는가? 하나의 사교 그룹을 다른 사교 그룹과 구별지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간접적인 언급, 슬쩍 엿보기나 힐끗 보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기호들은 결국 달리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고 단지 어떤 행동이나 생각의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이것들은 지루하고 상투적이지만, “이 공허함(vacuity)은 그것들에게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의례적인(ritual) 완벽성, 형식주의를 제공해준다.”(PS 13; 7) 둘째는 사랑의 기호들로서,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사랑하는 사람들(beloved)의 기호들이다. “사랑받는 존재는 판독해야 하는, 즉 해석해야 하는 세계를 함축하고[접고](implicate), 감싸고(envelope), 감금한다(imprison).”(PS 14; 7) 실제로 다수의(multiple) 세계들은 사랑받는 사람들 속에 접혀져 있으며,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사람들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숨겨지고, 신비스러운 풍경들을 펼치고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한 펼쳐진 세계의 일부로부터 배제되고, 이러한 이유로 해서 질투와 실망이 사랑의 진실을 유지한다. 사랑받는 사람의 소견은 불가피하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이 알 수 없는 세계들을 펼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사람의 거짓말들은 사랑의 상형문자들이다. 사랑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거짓말들의 해석이다.”(PS 16; 9) 세 번째는 마들렌, 베니스의 고르지 않은 포석(鋪石), 게르망트 호텔에 있는 빳빳하게 접힌 냅킨 등과 같은, 감각적 기호들이다. 이것들은 비자발적인 기억의 잘 알려진 기호들인바, 이것들로 인해 함축된 세계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감각적인(sensate) 경험으로부터 펼쳐진다. 마르셀이 마들렌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한순간 우리 뜰과 스완 씨의 정원의 모든 꽃들, 뷔봉(Vivnonne) 강에 핀 수련들과 그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 그들의 작은 집들, 교구 교회, 꽁브레 전체와 그 주위 환경들이 형상과 형태를 갖추고서, 마을들과 정원들과 똑같이, 내 찻잔으로부터 피어올라 존재하게 되었다.”(Proust I 51) 이러한 기호들은 압도적인 기쁨을 가져다주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며, 해석과 해설을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생각들(ideas)이나 회상이 합류(confluence)하는 단순한 연상 이상의 것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하한 감각 경험이나 기억을 넘어서는 본질들 - 꽁브레의 본질, 발벡의 본질, 베니스의 본질 - 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호들은 여전히 물질적이며, 그것들 안에 구현된 본질들은 빨리 지나가서[무상해서] 유지하기가 힘들거나 어렵다. 오직 네 번째 종류의 기호들인 예술 기호들 안에서만, 본질들은 탈물질화되고 그리하여 자율적이고 자기-유지적이게 된다. 비자발적인 기억의 기호들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의 목적들로서가 아니라 예술 기호들에 이르는 통로로서 중요한 것이다. 예술 기호들 안에서야말로 본질들이 그 자신의 완전하고 적절한 형태를 갖추고 드러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진리 - 기호들의 진리 - 찾기이지만, 그 진리는 선한 의지나 자발적인[의식적인](voluntary) 행동을 통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호들은 사유에 영향을 미치고, 불균형과 방향상실[혼미]을 초래한다. 고르지 않은 포석들이 가져다주는 감각(sensation)을 회상하면서 마르셀은 그것이 “이러한 그리고 이와 다른 감각들이 마주치게 되었던 우연적이고(fortuitous) 불가피한 방식(fashion)이야말로 그것들이 삶에 다시 가져다준 과거의 참됨으로 입증되었다”(Proust III 913)라고 언급한다. 지성에 의해 형식화되는 생각들(ideas)은 단지 “논리적인, 가능한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임의적으로 선택된다. 우리가 그 상형문자들의 패턴들을 추적할 수 없는 책이 진실로 우리에게 속한 유일한 책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형성하는 생각들이 논리적으로 정확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참된지는 알 수가 없다.”(Proust III 914) 그렇다면, 진리는 우연적임과 동시에 불가피하며, 그것의 탐험은 탐험해야 할 진리를 선택하는 기호들과의 우연한 마주침들을 통해 계속된다. 진리 찾기는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를 해설하는, 즉 그것의 숨겨진 의미를 펼치는 행위는 기호 자체의 펼침, 그 자체의 자기-전개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뜻에서, 진리 찾기는 언제나 시간적이고, “진리는 언제나 시간의 진리이다.”(PS 25; 17) 그러므로 들뢰즈는 마르셀이 기호들에 대한 그 자신의 도제수업 중에 마주친 네 가지의 시간 구조들을, 그 진리를 갖는 각각의 시간들을 구분한다. “지나가는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변화(alteration)의, 숙성(aging)의, 노화(decay)의, 파괴의 시간이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다양한 사교계 인물들의 신체적 노쇠의 명백한 형태 속에서, 그러나 또한 세련된[품위 있는] 사회를 선점하는 양식들과 방식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이 시간을 배반한다. 시간의 이행은 또한 사랑의 기호들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랑받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사랑과 질투의 기호들이 스스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즉 사랑은 결코 그 자신의 사라짐을 준비하는 것을, 그 자신의 파열을 흉내내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PS 27; 18) 그리고 감각적 기호들에서도 역시 시간의 노화가 감지될 수 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서 마르셀이 장화를 벗으며 그의 죽은 할머니를 회상하면서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느낄 때처럼 말이다.(Proust II 783) 오직 예술적 기호들에서만 지나가는 시간이 극복된다. 잃어버린 시간은 또한 “사람이 잃어버리는 시간”, 즉 사교계의 유희들의, 그리고 실패한 사랑의, 심지어는 마들렌의 맛과 같은 사소한 일들에 대한 감각적인 탐닉(indulgence)의 낭비적인 시간의 형태를 취한다. 그렇지만 더욱 진지한 사태들에 주의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된 작업과 강렬한(deep) 의도는 의지에 속하고 진리는 기호들과의 우발적인(contingent) 마주침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교계의, 사랑의, 그리고 감각적인 기호들의 낭비된 시간은 결국 마르셀의 도제수업, 즉 기호들에서의 하나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신비한 수단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판명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우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식으로 배우든지 그것은 항상 기호들의 매개를 통해서,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객관적인 내용들의 흡수(assimilation)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PS 31; 21-22) 세 번째 형태의 시간은 “되찾는 시간”이며, 이것은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시간이다. 겉으로 볼 때 프루스트는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성을 사용하는 것을 신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지성이 기호들과의 마주침의 필연성 속에 놓인 논리적 진리들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작동할 때뿐이다. 지성이 기호들과의 마주침 이후에 나타나면, 그것은 기호의 진리, 고로 시간의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능력(faculty)이다. “인상(impression)과 작가와의 관계는 실험과 과학자와의 관계와 같다. 과학자에게 지성의 작용이 실험에 선행하고 작가에게 그것이 인상 뒤에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Proust III 914) 회고적인[소급적인] 분석을 통해, 지성은 사교계의 공허한 기호들이 일반 법률들을 따르고, 사랑의 거짓된(deceptive) 기호들이 반복적인 테마들을 되풀이하며(reiterate), 본의 아닌 기억의 덧없는(ephemeral) 기호들이 비물질적 본질들을 드러낸다는 것을 밝혀준다. 이러한 뜻에서, 잃어버리고 낭비된 시간은 우리가 되찾는 시간이 된다. 그러나 네 번째 형태의 시간은 예술 작품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되찾은 시간”이며, 순수한 형태를 갖춘 시간이다. 이 시간의 진리는 모든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기호들을 변형시킨다. 마르셀은 순수한 시간을, 자신의 찾기의 종착점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마르셀의 도제수업은 네 가지 종류의 기호들 -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예술적인 기호들 - 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의 찾기 과정은 네 가지 형태의 시간 - 지나가는 시간, 잃어버리는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 으로 구조화된다. 그것은 또한 혼란과 실망이라는 필수적인 패턴들 속에서 자신의 복잡한 리듬을 발견한다. 마르셀은 불가피하게 두 가지 방식으로 기호들을 오해한다. 첫째, 그는 기호의 대상이 어쨌든 그 자체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찻잔 자체에서 꽁브레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처럼 반복적으로 차를 홀짝거린다. 그는 “게르망트”라는 이름을 계속 반복해서 발음한다. 마치 그 음절들 자체가 게르망트 부인의 위광(威光)(prestige)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일찍이 세상과의 마주침 속에서 “그는 기호들을 방출하는 사람은 또한 그것들의 코드를 이해하고 소유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PS 38; 27) 이러한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각(perception)은 본래 기호들의 성질[특성]들을 그것들이 기원하는 대상들에 귀착시키기 때문이다. 욕망 역시 대상 그 자체가 욕망적이라고 가정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받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지성은 마찬가지로 진리가 분절되고 소통되어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객관성을 향하는 고유의(inherent) 경향을 갖는다. 바로 이러한 편견이 우리로 하여금 대화, 우정, 작품[노동], 철학을 통해, 다시 말해 전통적인 추론적인(discursive) 사유의 선한 의지와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언제나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signify). 이렇게 해서 마르셀은 자신이 찾는 대상들에 대해서, 기호들에 의해 지시된 실재물들(entities)에 대해서 끊임없이 실망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종종 보상적(compensatory) 주관론으로 향하는데, 이것은 그의 도제수업의 두 번째 오류의 구성 요소가 된다. 만약 기호의 비밀이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속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주관적인 연상 속에 존재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연상들의 행사(exercise) 속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PS 48; 35) 즉 무엇이든지 다른 무엇인가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자발적인 기억이 주관적 관념 연합론[연상 심리학](associationism)의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마들렌은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 마들렌의 힘과 뱅퇴이유 소나타의 힘이 똑같이 엄밀히 개인적이고 색다른(idiosyncratic) 본성의 임의적이고 덧없는 연상들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기호의 비밀은 지시된 대상 속이나 해석하는 주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 속에 접혀진 본질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과 구별해 주는 것은 예술 안에서 기호가 비물질적이라는 점이다. 진정,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뱅퇴이유 소나타의 악절(phrase)을 울리지만, 예술적 기호는 소리의 매개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나의 본질, 하나의 생각이지 하나의 물질적 실재물이 아니다.1)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기호들에서 기호의 의미는 무언가 다른 것 속에서 발견되지만, “예술은 우리에게 진정한(veritable) 통일성 - 비물질적 기호와 완전히 정신적인 의미의 통일 - 을 제공해 준다.”(PS 53; 40-41) 들뢰즈는 프루스트에게 본질이란 “하나의 차이, 즉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이”(PS 53; 41)라고 주장한다. 들뢰즈는 마르셀의 다음과 같은 언급 속에서 우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강의 짐작을 한다. “작가에게 문체는, 화가에게 색채만큼이나,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vision)의 문제이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방법들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했을 질적 차이를, 세계가 우리들 각자에게 보여주는 방식의 유일성(uniqueness)을, 예술이 없었다면 영원히 모든 개인의 비밀로 남아 있게 되었을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Proust III 931-32) 각각의 개인은 특정한 관점에서 세계를 표현하고, “그 관점은 차이 그 자체, 즉 내적으로 절대적인 차이이다.”(PS 55; 42) 하지만 이것은 주관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주체의 기능[함수](function)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는 세계와 그것의 내적인 절대적 차이를 생산하지 않는다. 주체와 세계는 그러한 차이의 펼침을 통해 함께 출현한다. “본질을 해설하는[펼치는] 것은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 속에 스스로를 함축하고, 스스로를 감싸며, 스스로를 말아 올리는 것은 본질이다.”(PS 56; 43) 모든 주체는 비록 모호한 방식이긴 하지만 자신 안에 전 세계를 포함하는, 라이프니츠적인 단자(monad)와 같다. 세계는 단자들 속에서 스스로를 펼치고 해설하며, 세계는 각각의 단자 내부에서 펼쳐지고 해설된다. 개별적인 단자가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그 특수한 관점의 조명(illumination)에 의해 제한된다. 라이프니츠가 종종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는 하나의 도시와 같고, 단자들은 그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같다. 도시에 대한 이들의 다양한 관점들은 전체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에게는 세계와 그것의 단자들의 통일을 보장하기(ensure) 위한 “예정된 조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주체는 차이나는 세계를 표현하고, 오직 예술 속에서만 이러한 세계들이 상호간의 소통 속에 놓일 수 있다. 마르셀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자신이 보는 것과는 같지 않은 우주(universe)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이 없었다면 그 풍경들이 달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풍경들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을 우주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무엇을 보는지를 알게 된다. 예술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의 세상만을, 우리 자신의 세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스스로를 증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세계들을,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순환하는 세계들보다 서로 간에 훨씬 다른 세계들을 마음대로 다루게 된다.”(Proust III 932)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뱅퇴이유 소나타의 대화를 들으면서 스완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태초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아직 대지 위에 두 사람만[아담과 이브]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세상은 다른 모든 것에 닫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안에 결코 그것들 외에 다른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창조자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이 소나타의 세계.”(Proust I 382) 들뢰즈는 프루스트에게 모든 예술 작품은 태초, 즉 “근본적이고(radical) 절대적인 시초”(PS 57; 44)라고 주장한다. 각각의 작품에서 우리는 마르셀이 나이어린(adolescent) 소녀들의 얼굴에서 식별해 내는 것 - 우리가 바다 앞에 설 때 명상하는(contemplate) 자연의 최초의(premordial) 요소들의 그러한 부단한(perpetual) 재-창조를 상기시키는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play)"(Proust I 967) - 을 발견한다. 그러나 최초의 자연의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에 덧붙여 태초는 시간의 시초를 포함한다. 이것은 예술 작품 속에 드러나는 시간 - 질적으로 다른 시간, 본질들의 되찾은 시간 - 이다. 들뢰즈는 일부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자들이 창조 행위 속에서 펼쳐지기 전의 세계의 최초의(originary) 상태를 complicatio - “일자(One) 속에 다수를 감싸는 그리고 다수의 일자(One)를 긍정하는 주름[복합](complication)”(PS 58; 44) - 라는 용어로 지칭한다고 언급한다. 주름[복합]은 외부의 정상적이고 통시적인 시간이지만, 초시간적인(timeless)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 자체의 주름잡혀진[복합적인] 상태이다.”(PS 58; 45) 주름[복합]은 그것 자체 내부에 싸여진 시간, 즉 순수한 형태의 시간이다. 이것은 이후에 창조의 과정 동안에 현실적인 시간적 경험의 다양한 차원들 속에서 자신을 계속해서 펼친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은, 그[태초] 안에서 드러나는 본질이 “자연의 최초의 요소들의 부단한 재-창조”를 가져온다[초래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본질이 되찾은 시간, 주름잡혀진[복합적인] 시간, 순수 형태로서의 시간, 시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시간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시초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렇다면 본질들은 어떻게 예술 속에 구현되는가? 본질은 예술작품들이라는 물리적인 물질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만, “예술은 물질의 참된 변형(transmutation)이다.”(PS 61; 46) 그리고 예술이 물질을 변형시키는 수단은 스타일이다. 『되찾은 시간』에서 마르셀은 특별한 순간의 이질적인 감각들과 연상들이 단일한 경험 속에서 현재의 자극(stimuli)과 과거의 기억들을 결합시키는 방식을 고찰한다. 그는 작가가 주어진 장면의 개별적인 대상들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할 수도 있지만, “진리는 그가 두 개의 다른 대상들을 선택해서 그 둘 사이의 관계(connection) - 과학 세계에서 인과율에 의해 제공되는 유일한 관계와 유사한 예술 세계에서의 관계 - 를 진술하고, 그것들을 잘-가공된 스타일의 필연적인 연쇄들로 감쌀 때에만 그에게 성취될 것이다. 진리는 - 그리고 삶 역시도 - 우리가 두 가지 감각들에 공통적인 성질을 비교하면서 그것들의 공통적인 본질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시간의 우발성들로부터 해방시켜 메타포 속에서 서로 재통합시키는 데 성공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Proust III 924-25) 그렇다면 그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스타일은 메타포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서로 다른 대상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쇄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스타일은 말(words)의 단순한 놀이 이상이다. 상이한 대상들 사이의 연쇄는 공통적인 성질이며, 그것은 “이러한 명료한(luminous) 물질 속에 굳어진(petrified), 이러한 굴절하는(refracting) 환경(milieu) 속으로 내던져진(plunged)”(PS 61; 47), 하나의 본질의 표현이다. 본질은 “원래 세계의 성질”(PS 61; 47)이며, 스타일이라는 “필연적 연쇄들”을 통해서 예술가는 상이한 대상들로부터 “그것들의 공통적인 본질”을 “추출할” 수 있고, “시간의 우발성들로부터” 그것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더 나아가 만약 스타일이 메타포라면 “메타포란 본질적으로 변형(metamorphosis)”(PS 61; 47)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물질 내부에서 예술이 공통적 성질들을 통해 필연적 연쇄들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또한 물질의 변형을 유발한다. 엘스티르의 그림들 속에서처럼, 바다는 육지가 되고 육지는 바다가 되며, 물 같은 육지 형태들과 땅 같은(geological) 바다의 파도는 펼치는 힘들에 의해 횡단되는 유연한(pliable) 덩어리들(masses)로 작용한다. 스타일은 “물질을 정신화하고 그것을 본질에 적절한 것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불안정한 대립, 최초의(original) 주름[복합], 본질 그 자체를 구성하는 최초의(primordial) 요소들의 투쟁과 교환을 재생산한다.”(PS 62; 47) 만약 본질이 태초라면, 그것은 또한 창조의 계속적인 힘(power)이다. 본질은 근원적인(originary) 차이임과 공시에 개별화하는 힘(force)이다. 이것[힘]은 “그 자체로 스타일의 연쇄들 속에서 그것[본질]이 감싸는 대상들처럼, 그것[본질]이 스스로를 구체화시키는 물질들을 개별화하고 결정한다.”(PS 62; 48) 본질은 스스로를 반복하는 차이이며, 예술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를 통해 작동하는 자기-차이 및 자기-개별화의 부단한 과정이다. 차이와 반복은, 오히려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분리불가능하고 상관적인, 본질의 두 가지 힘들(puissances)이다.”(PS 63; 48) 세계의 성질로서의 차이는 “오직 다양한 환경들을 횡단하고 갖가지의 대상들을 통일시키는 일종의 자기-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긍정한다. 반복은 근원적인 차이의 정도들을 구성하지만, 다양성(diversity) 역시 적잖은(no less) 근본적인 반복의 수준들을 구성한다.”(PS 63; 48) 그렇다면 본질은 태초이며, 주름잡힌[복잡한] 시간 속에 있는 최초의 요소들과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펼쳐지도록 야기하는 세계의 계속적인 재-시초 속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시초이다. 예술작품에서, 물질은 변형되고, 비물질화되며, 본질에 적절한 것으로 만들어진다. 그 결과, 예술의 기호들은 투명하다. 그것들의 의미는 그것들[기호들]을 통해 작동하는 본질이다. 필연적인 연쇄들로 기호들을 감싸고 물질을 변형시키는 예술적 힘으로서의 스타일은 본질을 갖고 있는 것, 즉 세계를 펼치는 차이와 반복의 힘이다. “스타일로서의 기호의 정체성, 그리고 본질로서의 의미. 바로 이것이 예술 작품의 특징이다.”(PS 64; 49) 뷔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타일, 그것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스타일은 예술가-주체의 단순한 발명품이 아니다. 스타일은 주체를 관점으로 포함하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펼치는, 필연적으로 주체를 관통하지만 주체 내부에서 근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체를 그러한 세계의 구성요소로 구성해 내는 자기-차이화하는 차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타일은 사람이 아니다. 스타일은 본질 그 자체이다.”(PS 62; 48)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제2장 프루스트의 기호 기계(31-39)|작성자 옥토끼  
8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제1장 - 의미와 표면들[22-30] 댓글:  조회:814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6959622  의미와 표면들 『의미의 논리』(1969)의 13번째 절인 「분열증과 어린 소녀」에서 들뢰즈는 비평과 진단의 개념들로 돌아가서 어린이, 광인(le fou), 작가들(루이스 캐럴과 안토닌 아르토) 사이의 관계를 고찰한다. 들뢰즈는 “제버워키”에 대한 논평이 덧붙여진 아르토의 유사-번역에서 시작한다. 한 편의 시에 대해 아르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시를] 결코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LS 113; 92에서 인용) 캐럴의 무의미 운문(verse)이 종종 아동 문학으로 분류되고, 아르토의 대부분의 텍스트들이 일관되지 않은 정신병적 발산으로 읽히지만, “제버워키”의 두 판본들 사이의 차이는 어린 엘리스와 분열증을 대립시키는 것 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들뢰즈는 시, 자장가, 광적 산만함[주절거림] 이 세 가지 모두 합성어들(pormanteau words)처럼 유사한 테크닉들을 종종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위대한 시인은 어린이(한때 그도 그러했던)와 어린이들(그가 사랑하는)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광인은 시인(한때 그러했으며 [지금도] 계속 그러한)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가장 훌륭한 시 작품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도 이것은 어린이, 시인, 광인의 기묘한 삼위일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LS 101; 82-83) 캐럴과 아르토는 자신들의 제버워키들 속에서 상이한 문제들을 다룬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린이들의 노래들과 광인들이 꾸며낸 이야기들(inventions)에서 문제되고 있는 이슈들과는 다르다. “문제는 진단의 문제, 즉 하나의 조직화에서 다른 조직화로의 미끄러짐의 문제, 혹은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탈조직화(disorganization)[해체]를 형성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는 또한 비판의 문제, 즉 [그 안에서] 무의미가 자신의 형상을 바꾸고, 합성어들이 자신의 본성을 바꾸고, 언어 일반이 자신의 차원을 바꾸는, 차별적(differential) 수준들을 결정하는 문제이다.”(LS 102; 83) 들뢰즈에 따르면, 캐럴과 아르토의 대립 속에서 드러나는 진단 문제는 표면들과 심층들의 문제이고, 비판 문제는 그러한 두 가지 차원들에 특징적인 언어적 요소들의 문제이다. 캐럴의 표면들과 아르토의 심층들은 유아기의(intantile) 신경증과 정신분열적 분열(dissociation)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만, 진단이 비판에 의해 인도될 때에만, 정신분석 이론이 문학적 허구(invention)에 의해 인도될 때에만 그렇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루이스 캐럴의 작품들과 스토아학파의 사유를 유별나게 병치시킴으로써 sense, 즉 의미의 이론을 전개한다.1) 들뢰즈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거울 나라의 엘리스』와 여타 작품들의 무의미와 역설들 속에서, 캐럴이 스토아학파가 자신들의 비실체적 이론 속에서 분절하는(articulate) 의미라는 수수께끼 같은 표면을 재발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2) 스토아학파에게는, 오직 신체들만이 실제적인 존재를 갖는다(“신체들”이 심지어 영혼the soul과 같은 이러한 실체들entities을 포함하기 위해 가장 폭넓은 맥락 속에서 해석된다 할지라도). 신체들은 식물들과 동물들과 같은 유기적 존재들의 선들을 따라 성장하는, 자기-형성적인 실체들로 간주된다. 그것들은 그들 자신의 원인들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인과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간에 원인들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신체들은 우주, 즉 신이라는 유일한 신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신체들은 누군가 와인을 마시거나 칼이 살을 잘라내는 때처럼 스며들고 뒤섞이지만, 신체들의 능동들과 수동들은 서로에 대해 오로지 원인들일 뿐이지, 원인들과 결과들이 아니다. 칼은 살 속에서의 상처라는 결과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살과 칼은 신이라는 우주적 신체의 자기-원인적 전개 속에서 뒤섞인다. 그렇지만 신체들의 세계에 속하지는 않는다 해도 결과들과 같은 사물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실제적인 존재를 갖지 않지만, 단순히 “내속하고(insist)”, “지속하고(persist)”, “존속하는(subsist)” 표면 현상들이다. 그것들은 비실체적인 것들(asomata)이다. 스토아학파는 한 마리의 개가 길을 건너갈 때 그 걷기가 그 개의 신체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관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아가 나무의 “푸르러짐(greening)”을 나무 신체의 자기-원인적 전개에 의해 생산된, 똑같이 비실체적인, 단순한 표면 효과[결과]로 간주한다. 모든 곳에서 신체들은 효과들, 즉 안개나 아우라처럼 신체들 위에서 피어나는 표면적 방사물들(emanations)을 생산한다. 이러한 비실체적인 효과[결과]들은 그들 자신의 시간성을 갖는 사건들이다. 현재만이 실제적인 존재이며, 신체들은 영속적인 현재 속에서 실존한다. 한 신체의 지속(duration)은 연장된 현재, 즉 신이라는 신체의 위대한 현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시간의 총체성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들뢰즈가 크로노스라고 부르는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 - 즉 기억과 기대의 차원들 - 은 실제적인 존재(existence)를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지속하거나 내속하고, 들뢰즈가 아이온이라고 이름 붙인 사건의 시간 속에서 현현한다. 아이온의 시간은 부정사(不定詞), 즉 미구분성 속에 놓인 동사의 시간이자 비결정의 시간성이며, 현실적인 현재의 순간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는 시간이다. 순수한 생성(becoming)의 시간이 사건들을 알려준다. 한편 신체들은 순수한 현재 존재의 시간에 거주한다.3) 핵심적인 사건은 전투이다.(LS 122-23; 100-101) 전투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신체들은 다른 신체들을 만나서 서로 뚫고, 자르고, 찢고, 스며들지만, “전투”는 주어진 장소(locus) 어디에서도 현존하지 않으며 항상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한다. 전투는 신체들에서 퍼져 나오고, 안개처럼 그것들 위에 맴돈다. 그것은 신체들에 의해 하나의 효과[결과]로 생산되지만, 그것은 그것들의 가능한 만남들의 조건으로 그것들에 선재한다. 그렇다면 사건들은 신체들의 속성들이며, 동사들로 가장 잘 이해되는 존재의 태도들인 반면, 신체들의 실제적인 특징들은 자질들(qualities), 즉 명사들에 내재하는 형용사들이다. 하지만 사건들과 신체들이 각각 언어적 대응물들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언어 그 자체는 사건들에 대해 특권화된 관계를 갖는다. “사건은 생성(becoming)과 동연(同延)적이고, 생성 그 자체는 언어와 동연(同延)적이다.”(LS 18; 8) 스토아학파가 인식한 비실체적인 것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렉턴(lekton), 다시 말해 “의미화된 것”,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의미된 사물”이다.4) 그리스인이 이방인(Barbarian)에게 이야기할 때, 말은 이해될 수 없지만, 다른 그리스인이 그와 똑같은 말을 들을 때에는, 그 말은 이해된다.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소리 신체가 화자에 의해 말해지지만, 두 번째 경우에서는 어떤 것, 즉 의미의 표면 효과가 물리적인 소리들에 덧붙여진다. 이러한 언어적 효과들은 렉타(lekta), 즉 신체들의 표면들에서 발산되고 단어들과 사물들의 묘사(delineation)를 가능하게 해주는 “표현 가능한 것들”이다. 단어들은 의미를 표현하지만, 표현되는 것은 사물들의 속성, 즉 하나의 사건이다. 렉턴(lekton)은 단어의 음성적 신체의 표면임과 동시에 사물의 표면적 속성이다. 그것은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 즉 의미-사건들의 유일한 표면이다.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경계는 “그것들을 섞지도 않고 그것들을 통일시키지도 않는다(그것은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들의 차이의 분절(신체/언어)과 같다.”(LS 37; 24) 들뢰즈는 이 표면을 sens, 즉 의미(sense, meaning)라고 이름붙이고, 『의미의 논리』전반에 걸쳐서 언어적 의미의 역설들이란 것이 사건들 및 생성의 역설들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단어들은 의미를 이차적 효과로서 생산하지만, 어떤 점에서 의미는 언어가 그 내부에서 발생하는 요소로서 단어들에 선행한다. “베르그송이 말한 바처럼, 우리는 소리들에서 이미지들로, 이미지들에서 의미로 나아가지 못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처음부터’ 의미 내부에 놓는다. 의미는 내가 가능한 지시들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들의 조건들을 생각하기 위해 내가 [그 안에] 이미 놓인 영역(sphere)과 같다.”(LS 41; 28) 그렇다면 의미는 이런 점에서 언어의 앞과 뒤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과 그것의 잔여 효과의 앞과 뒤에 존재한다. 하지만 의미는 또한 결코 완전히 현존하지 않으며, 그러한 점에서 그것은 특정한 언어적 발화 속에서 표현될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는 오직 두 번째 발화 속에서 지시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의 의미는 이어서 세 번째 발화 속에서 지시되어야 하는 등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의미는 하나의 결론으로 소진되거나 귀결될 수 없는 지시들의 부정형(不定形)의(infinite)의 회귀(regression)를 낳는다. 사건처럼 의미는 현재에 존재해 본 적 없이 과거와 미래에 존재한다. 의미는 또한 자신 안에 무의미를 포함한다. 그러한 상상적 존재자들(그리핀들5)) 속에서 불가능한 대상들(네모난 원들) 그리고 심지어 1회적 단어들의 나열조차도 모두, 꼭 양식(良識)(good sense)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들뢰즈는 양식(le bon sens)이란 단일하게 제한된 의미이며, 유일한 방향의 의미라고 주장한다(불어의 sens는 또한 sens unique, 일방 도로에서처럼 “방향”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의미 속에서 인과관계들은 빈번하게 역전되고, 시간적 순서는 무시되며, 정체성[동일성]들은 혼동된다. 무의미의 역설들은 플라톤이 그리도 불신하는 “생성”의 역설들(Phielbus 24 a-d, Parmenides 154-55)이고, 더 뜨거움과 동시에 더 차갑고, 더 늙음과 동시에 더 젊고, 더 큼과 동시에 더 작은 대상들의 역설들이다. 엘리스는 과거의 그녀보다 더 크게 자라지만, 과거의 엘리스(엘리스 A)는 지금 되어가고 있는 엘리스(엘리스 B)보다 더 작다. 크게-되어가는-엘리스(엘리스 B가 되고 있는 엘리스 A)가 동일한 엘리스이지만(그러나 그녀는 A나 B 점 모두에서 더 이상 동일한 엘리스가 아니지 않은가?), 엘리스는 동시에(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결코 동일한 현재의 순간인 크로노스가 아닌 동일한 생성인 아이온의 내부에서) 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있다. 무의미 속에서는, 매우 단순하게, 세계는 동일한 아이온 속에서 모든 방향들 속에서 생성된다. 캐럴의 무의미는,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양식/일방향이 발생하는 의미의 다방향적 장(場)이다. 그리고 진정한 무-의미는 의미의 그러한 광범한 장(場)이 솟아나는 발생적 요소라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스나크 사냥(the Hunting of the Snark)』에서, “Snark"라는 단어는 ”shark"와 “snake”의 단순한 혼성적 조합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기능은 요소들의 두 개의 분기적 계열들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골무를 들여 그놈을 찾고, 주의를 들여 그놈을 찾았다. 포크와 희망으로 그놈을 쫓고 철도 주식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웃음과 비누로 그놈을 홀렸다. 스나크(Snark)는 신체들의 계열들(골무, 포크, 비누)과 비실체적인 것들의 계열들(주의, 희망, 삶, railway-share, 미소)의 접합이다. 그것의 무-의미는 의미(그 두 계열들)가 유래하는 차별적(differential) 요소이다. 만약 이 두 개의 계열들이 다수의 점들로 이루어진 분기적 선들로서 기하학적으로 생각된다면, “스나크”는 외관상 동시에 두 선들에 있는, 하지만 결코 주어진 순간에 어떠한 유일한 지점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우발점(aleatory point)”이다. 우발점으로서의 스나크는 엘리스가 양이 관리하는 가게에서 만나는 물건과 같다(『거울 속의 엘리스』): 그것은 그녀가 바라보는 어느 곳에도 없지만, 언제나 선반의 위쪽과 아래쪽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여지를 갖지 못한 빈 공간이며, 결정적(determinate) 요소들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비고정적 요소이다. 우발점과 그것이 내재하는 두 개의 분기적 계열들은, 들뢰즈에 따르면, 어떠한 구조의 최소한의 요소들을 구성하고, 의미의 영역이 무-의미의 우발점의 작동을 통해 발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건들의 영역은 우발점들의 작동으로부터 유래한다. 왜냐하면 우발점은 결국 단지 차이를 위한 비유(figure)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이는 (어디에도 스스로 고정되지 않는, 안정되지 않거나 유일한 정체성을 소유하지 않는) 스스로와는 다른 (분기적인 결정들을 통해) 자기-구별하는 (예컨대 발생적인) 차이화이다. 캐럴의 “제버워키”의 무의미는 의미의 표면적 작동(play)의 무의미이고, 제버워크의 추구와 획득을 통해 분기적 계열의 용어들을 드러내는 합성어들의 무의미이다. ‘Twas brilling, and the slithy toves / 저녁 무렵, 유연활달 토우브가 Did gyre and gimble in the wabe: / 언덕빼기를 선회하며 뚫고 있었다. All mimsy were the borogoves, / 보로고보들은 모두 우울해했고, And the mome raths outgrabe. / 침울한 라스는 끼익거리고 있었다. 험프티 덤프티가 설명하는 바처럼, brilling[저녁 무렵]은 “저녁 식사를 위해 음식을 끓이기 시작하는 시간인 오후 네 시”를 의미하고, slithy[유연활달]는 “유연하고 활달한”을 의미하고; toves[토우브]는 “오소리 같은 것 - 도마뱀 같은 것 - 그리고 타래송곳 같은 것이다.”(Carroll 187-88) 오후 네 시/끓이기, 유연한/활달한, 오소리/도마뱀/타래송곳: 제버워크의 우발점을 통해 생성된 복수적 계열들,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 위의 의미-사건들. 그러나 들뢰즈는 아르토가 캐럴의 시를 “번역한 것”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의미를 발견한다. Il était roparant, et les vliqueux tarands Allaient en gibroyant et en brimbulkdriquant Jusque là où la rourghe est à rouarghe a rangmbde et rangmbde a rouarghambde: Tous les falomitards étaient les chat-huants Et les Ghoré Uk'hatis dans le Grabugeumnet.(LS 103; 342에서 인용) 물론 이 텍스트를 험프티 덤프티가 다룰 것처럼 다루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아르토 스스로 “rourghe”와 “rouarghe”가 ruée(돌진하다), roue(차바퀴), route(도로), règle(규칙), route à règler(문자 그대로는 정해진 길, 비유적인 의미로는 똑바로 펴져야 하는 물건)를 결합시킨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rourghe”를 “slithy”의 번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비판적・진단적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캐럴과 아르토 사이에는 접촉의 지점들, 즉 아르토의 언어적 발명품들이 의미의 표면 위에 남아 있는 사례들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rourghe, rouargh, rangmbde, rouarghambde 등과 같은 계열 속에는, 단어들이 낭비적이고(profligate) 비조절적인 혼합물들, 상호뒤섞임(interminglings), 상호침투의 물리적 영역 내에서 다른 신체들과 상호작용하는 소리 신체가 되는 것처럼 의미의 표면이 분해되고 와해된다. 들뢰즈의 진술에 따르면, 정신분열자들은 종종 단어들을, 살을 공격하는 찢고 괴롭히는 물건으로 경험한다. 이것들은 정신분열적 신체와 섞이는 “수동-단어들”이다. 이 신체 자체는 일관된 기관으로 존재하지 않고 침투가능한 구멍들의 신체-여과기(body-sieve), 이질적인 토막들과 조각들의 파편적 신체, 안과 밖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없는 분리된 신체로서 존재한다.(LS 107; 87) 수동-단어들은 끊임없는 식인적 해체, 분해, 흡수, 배제 등의 놀라운 영역 속에서 뒤섞인다. 그러나 정신분열적 신체가 완전한 전체(totality) - 하나의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부분들이 없는, 날숨, 들숨, 발산, 유체 전송 등을 통해 모든 것을 하는(초월적 신체, 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LS 108; 88) 신체로서의 - 에 도달하는 계기들 역시 존재한다. 이 기적적인(miraculous)[신비한] 신체에 “능동-단어들”, 즉 음성적 재질의 분리될 수 없는 덩이들(blocks)을 형성하는 소리-신체들(sound-bodies)이 대응한다. 언어적 기호들을 조각난 음성적 요소[원소]들로 세분화하는[원자화하는] 수동적으로 고통을 겪는 수동-단어들과 달리, 능동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능동-단어들은 “분절 없는 언어”의 “독점적인 강세적 가치들”을 갖는다. (LS 108-9; 88-89) 아르토가 말하는 cris-souffles(외침들-호흡들)은 분리할 수 없는 소리의 혼합물들(amalgams) 속에서 자음과 모음을 융합하는 이와 같은 능동-단어들, 외침-단어들, 호흡-단어들이다. 수동-단어들과 는동-단어들은 의미의 진공(void)이지만, 그것들의 무-의미는 신체들의 무-의미이지 비신체적[비육신적] 표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무-의미의 두 가지 유형들, 즉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유형들 - 음성적(phonetic) 요소들로 분해되는 의미가 박탈된 단어 유형, 그래도(no less) 의미의 박탈이 없는 비분해적 단어를 형성하는 강세적(tonic) 요소들의 유형 - 과 관련된다.”(LS 110-11; 90) 아르토의 “제버워키”에서 표면들의 무의미는 수동-단어들과 능동-단어들, 놀라운 신체 파편들과 우아한 기관 없는 신체, 음성학적 파편들과 강세적 융합들에 자리를 내준다. 일부 정신분석가들은 캐럴에게서 정신분열적 모티프들을 지적해 왔다. 예컨대 엘리스의 변신하는 신체, 그녀의 음식에 대한 강박관념, 정체성의 혼란, 환각적인 인물들(3월 토끼, 미친 모자 제조인, 체셔 캣[늘 능글맞게 웃는 사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읽게 되면 “진단적인 정신병적 측면과 문학적인 비판적 측면 모두를 동시에 망쳐버리게 된다.”(LS 113; 92) 정신분석은 우선 “지리학적”이 되어야 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왜냐하면 표면들을 심층들과 구별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캐럴과 아르토를 구별하면서 들뢰즈가 우선 진단적 문제를 “하나의 조직화에서 다른 조직화로의 미끄러짐, 즉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탈조직화[해체]의 형성”(LS 102; 83)의 문제로 틀지운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것이다. 캐럴은 언어 속에서 양식/일방향에서 무의미로의 미끄러짐을 유발하지만,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그러한 표면은 유지된다. 양식/일방향의 조직된 규칙들(regularities)은 침식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의미의 조직된 형식들 - 분기적 계열들을 가로지르는 우발점들(aleatory points)의 작동에 의해 구조화된 형식들 - 로 대체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르토는 단어들의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해체, 기호들의 음성적 파편들과 강세적 덩이들로의 분해, 공존하는 파편적 부분들(shattering parts)과 융합적 합체들(melding accretions)의 흐름 속에서 다른 신체들과 뒤섞이는 비통어법적(asyntactic), 비문법적(agrammatical) 소리 신체들(기관 없는 신체들)을 다룬다. 그렇다면, 우리는 캐럴과 아르토가 제기한 비판의 문제가 왜 “무의미가 자신의 형상(figure)을 변화시키고, 합성어가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언어 일반이 자신의 차원을 변화시키는 구별적 수준들의 결정”(LS 102; 83)의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캐럴의 표면들에서는 언어가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고 무의미가 그 자신의 이상하게 구조화된 의미를 유지하는 반면, 아르토의 심층에서는 언어가 놀랍고 기적적인 신체들의 불가해한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린이, 시인, 광인의 기묘한 삼위일체”(LS 101; 83)가 떠오른다. 왜냐하면 캐럴처럼 어린이가 (자장가, 무의미한 구절들 등등에서의) 언어의 비신체적 표면 효과들과 노는 반면, 아르토처럼 광인이 신체적 심층 내부에서 소리의 흐름들의 움직임들을 겪고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어린이나 광인의 실천들과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실험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발명품들은 어린이들이나 광인들이 결여하고 있는 자율성, 비인칭성, 그리고 분석적 명석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캐럴은 재미있는 무의미를 만들 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에서 스콜라학파를 거쳐 마이농과 후설로 이어지는 전통의 발견물을 종합하는 전체적인 “의미의 논리”를 펼쳐 놓는다. 아르토는 언어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언어의 비분절적인 수동들과 능동들을 분절하고, 외침-단어들과 호흡-단어들을 잔인함의 극장으로 바꾸어 버린다.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문명의 임상의[진단자]들”(LS 277; 237)로서의 작가들을 논의하면서 신경증 환자들과 소설가들이 표면들에 존재하는 양식들을 대조한다. 신경증 환자들은 “가족 이야기”(프로이드의 Familienroman, 불어로는 roman familial, 문자 그대로는 “가족 소설”)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소설가들은 표면들로부터 “순수한 사건”, 즉 비인격화되어 주어진 예술 작품의 인물들과 행동들을 통해 펼쳐지는 사건을 뽑아낸다.6) 이와 유사한 예술적 자율성과 비인칭성은 시인/소설가로서의 캐럴을 어린이(그리고 성장한 어린이 신경증 환자)와 분리시킨다. 마찬가지로 시인/극작가로서의 아르토는 정신병적 징후들을 유출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들뢰즈는 정신분열적인 루이스 울프슨(Louis Wolfson)의 글들에서 아르토의 예술적 실천들에 이르는 유용한 지침들(guides)을 발견하지만, 울프슨의 텍스트들의 “아름다움, 밀도”는 “여전히 진단적”이며 그의 재능은 “아르토의 천재성과는 거리가 멀다.”(LS 104; 84) 울프슨의 징후들은 단일하고 풍부한(redundant) 이야기 속에서 그를 표현하는 반면, 아르토의 cris-souffles는 다양한 배경과 장면 속에서 다수의 형식들을 취한다.7) 『의미의 논리』는 언어에 대한 들뢰즈의 가장 확대된 논의이지만, 어떤 점에서 이 책은 그의 저작들 내에서 이례적인 지위를 점한다. 그렇게 장황하고 세밀하게 다루어진 표면들과 신체들의 대립은 『앙띠오이디푸스』와 이후의 책들에서는 사라진다. 실제로, 표면들과 심층들이 『앙띠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가 『천 개의 고원』의 일관성의 평면들 위에서의 아상블라주에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결국에는 결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8) 『의미의 논리』 후반부에서 들뢰즈는 프로이트적이고 라캉적인 용어법의 완전무장(full panoply)을 활용하면서 신체라는 심층들로부터 언어라는 표면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복잡한 정신분석적 설명을 전개시키지만, 『앙띠오이디푸스』에서 그는 정신분석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개시하고 그로부터 정신분석의 어휘를 사실상 내던진다. 의미는 신체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표면들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말해진다.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우주론에서 비신체적 사실들/사건들은 신체적 힘들(forces)과 대립되지만, 『니체와 철학』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해석의 의미는 힘(force)과 힘에의 의지의 관계들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기호론적 체계들의 결정요인들(determinants)로서의 힘과 역량(force and power)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는 들뢰즈의 대부분의 저작, 특히 『앙띠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푸코』 등에서 두드러진다. 결국, 『의미의 논리』에서의 몇몇 지점들에서 들뢰즈는 사건들에 대한 언어-중심적 관점을 진전시키는 것 같다. 그는 사건이 “생성과 동연(同延)적이며, 생성 그 자체는 언어와 동연적”(LS 18; 8)이라고, 또 “사건이 본질적으로 언어에 속하고, 사건이 언어와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 존재한다”(LS 34; 22),고 혹은 “사건들-효과들은 그것들을 표현하는 명제들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LS 36; 23)고 역설한다. 하지만 (15번 째 계열인 “특이성”에서 매우 잘 요약된)(LS 122-32; 100-108) 사건들의 특징들은 본질적으로 『천 개의 고원』에서 밑그림이 그려진 “생성”의 특징들이다. 그리고 생성들이 언어 외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가 거기에 존재한다. 사실상, 들뢰즈로 하여금 사건에 관여하는 그 자신의 자율적인 방식을 각각의 예술에 부여하는 예술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허용해 준 것은, 바로 언어와 사건 사이의 이러한 분리 가능성이다. 문학적 의미의 비판과 의학적 의미의 진단 사이의 관계에 대한 들뢰즈의 관심은 그가 정신분석 이론에 몰두했을 때 최고조에 이른다. 『마조히즘』에서 그는 징후학자들인 사드와 마조흐를 대비시킨다. 그들의 소설들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알려진 임상학적 존재들(entities)의 형식들을 분절한다. 『의미의 논리』에서 그는 왜곡된 표면들과 정신병적 심층들을 다루는 기호론자들로서의 캐럴과 아르토를 대립시킨다. 들뢰즈는 정신분석에서 벗어남에 따라 문학과 임상학적 의학 사이의 특별한 연결을 탐사하는 것을 그만둔다. 비록 그의 저작 전반에 걸쳐 그가 작가를 니체적 의미의 기호 해석자와 문명 치료사로 바라보는 폭넓은 생각(conception)을 유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프루스트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통해 들뢰즈는 글쓰기를 기호들의 펼침[설명]과 생산으로 고찰한다. 카프카에 대한 자신의 저작에서 들뢰즈는 “소수적 문학”의 작가를 문화의 진단자(diagnostician)로 취급한다. 1988년의 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프루스트의 “『찾아서』는 일반 기호학이자 세계들의 징후학이다. 카프카의 작업[작품]은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사악한 권력들에 대한 진단이다. 니체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은 문명의 의사들이다.”(PP 195; 142-43) 다음의 세 개의 장들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프루스트의 징후학과 사악한 권력들에 대한 카프카의 진단을 꽤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 들뢰즈가 문학에 어떤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인식하고자 할 것이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제1장 - 의미와 표면들[22-30]|작성자 옥토끼
7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제1장 일부[9~14쪽 댓글:  조회:743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6349732  제1장 질병, 기호들, 그리고 의미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저작을 집필할 계획에 대한 1988년의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들뢰즈는 “『비평과 진단』이라는 대강의 제목 아래 일단의 연구들을 구상했다”(PP 195; 142)고 말했다.1) 1993년에 드디어 그와 같은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들뢰즈의 마지막 저작인 『비평과 진단』은 18편의 논문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8편은 1970년과 1993년 사이에 간행되었던 것이고 나머지 10편은 새로운 연구물들이었다. 대부분이 문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일부는 철학, 정신분석, 그리고 영화와 관련된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자신의 대부분의 저작들 전반에 걸쳐 문학을 빈번하게 다루고 있고, “비판[비평]적인 것”과 “진단적인 것”이라는 주제는 일찍이 1967년의 『매저키즘: 냉정함과 잔인함에 대한 해석』에서 제안되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들뢰즈는 사드와 마조에 대한 그의 고찰을 통해 “아마 비판[비평](문학적인 의미에서의)과 진단(의학적 의미에서의)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관계 속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영향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문학과 의학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그 자체로 들뢰즈가 이미 『니체와 철학』(1962)에서 다루었던 것이었다. 여기에서 해석은 징후학과 기호학의 형태로 취급되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우선 비판[비평]의 개념과 그것이 들뢰즈의 니체적 의미에서의 의학과 맺는 관계를 간단하게 고찰할 것이며, 그런 뒤에 마조에 대한 그의 책에서의 비판[비평]과 진단의 상호 강화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미의 논리』2)에서의 기호들, 징후들, 그리고 의미 사이의 관계(connection)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들뢰즈가 어떻게 문학을 여타의 글쓰기 형태들과 구별하는지를 묻는 것이고, 들뢰즈가 문학적인 예술 작품들에 귀속시키는 특정한 기능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해석과 평가 들뢰즈는 니체가 “비판[비평]을 비판[비평]으로서 총체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최초의 철학자인”(NP 102; 89) 칸트에 의해 개시된 비판적 기획을 완성했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독해에 따르면, 칸트는 자신의 비판 철학 속에서 진리와 도덕성의 주장들[요구들]을 문제 삼지만, 그것들의 근저에 있는 가치들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그는 비판[비평]을 지식과 진리의 모든 주장들에 대하여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지식 그 자체나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힘으로서 간주했다. 마찬가지로 도덕성의 모든 주장들에 대하여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도덕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힘으로 간주했다.”(NP 102; 89) 니체는 비판을 그 극한까지 밀고 가서, 참된 것과 선한 것의 가치들을 포함하여 모든 가치들의 재평가를 수행한다. 들뢰즈는 니체의 비판[비평]에서 두 개의 기본적인 활동들 - 의미의 해석과 가치의 평가 - 을 구별한다. 두 활동들은 모두, 관계 속에서의 힘들의 질(quality)을 포함하는 해석, 그리고 주어진 힘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권력에의 의지의 질(quality)을 포함하는 평가(evaluation)라고 하는 힘들의 평가(assessment)를 수반한다. 어떤 대상(object)의 의미는 “사물을 전유하는, 사물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는(exploit), 사물을 파악하거나 사물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힘”(NP 4; 3)으로부터 비롯한다. 모든 힘은 실재의 일부(a portion)의 전유이며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소유해 온 힘들의 계승(succession)[계열체]의 역사이다. “단일한 대상, 즉 단일한 현상은 그것을 전유하는 힘에 따라 의미를 변화시킨다.”(NP 4; 3) 힘들은 항상 다중적이며, 그리하여 해석은 생득적으로 복수적이다. 힘들은 또한 이전에 동일한 대상들을 전유했던 힘들의 외관(guise) 아래 스스로를 은폐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해석의 기술(art)은 또한 가면들을 꿰뚫는 기술이다.”(NP 6; 5) 따라서, “하나의 현상은 하나의 가상(appearance) 혹은 심지어는 환상(apparition)이 아니라, 현실적(actual) 힘 안에서 그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징후이다. 철학 일반은 징후학이고 기호학이다. 과학 일반은 징후학적이고 기호학적인 체계이다.”(NP 3; 3) 예컨대,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는 “선”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노예의 해석이 그러한 대상에 대해 주인이 갖는 의미와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노예의 “선”은 주인의 “선”의 가면을 빌려 쓰지만, 그 단어[선]의 두 의미들은 힘들의 상이한 배치들로부터 비롯한다. 노예의 “선”은 힘들의 반동적인[반작용적인] 관계로부터 유래하는 반면, 주인의 “선”은 힘들의 능동적인[작용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노예는 주인의 우월(superiority)을 원망하고, 선한 것을 주인의 사악한 권력(power)의 부정으로 간주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주인은 선한 것을 단순히 그/그녀 자신의 존재의 긍정으로서 이해한다. 대상에 대한 노예의 해석은, 주인의 해석과 같이, 일정한 정신상태(mentality)의 징후, 힘들의 일정한 관계의 기호이고, 해석의 기술(요컨대, 노예의 해석들 그리고 주인의 해석들에 대한 해석)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들에 대한 주의 깊은 판별 - 그것들이 능동적인지 반동적인지, 고결한지 비열한지 - 에 달려 있다. 하지만 해석은 권력에의 의지를 포함하는 평가 활동과 짝을 이룰 때에만 그것의 완전한 의의(significance)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니체에게는 세계가 서로서로 관계를 이루는 힘들의 역동적인 양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힘들은 특정한 양들을 지니지만, 힘의 양은 다른 힘들과 떼어놓고 생각하면 잘못 해석된다. 모든 힘들은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관계된 두 개의 힘은 동일한 양을 갖지 않는다; 하나의 힘은 언제나 다른 힘보다 더 크며 힘들이 갖는 양들의 그와 같은 변별적인 관계들로부터 각각의 힘의 질이 유래한다. 그것들의 양들의 맥락 속에서 힘들은 지배를 하거나 지배를 당한다; 그것들의 질들의 맥락 속에서 힘들은 능동적이거나 반동적이다.(NP 60; 53) 그러나 힘들은 관계들을 산출하는 힘들의 내부에 역동적인 요소가 없다면 서로서로의 관계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와 같은 요소를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러므로 힘에 덧붙여지지만, 변별적이고 발생적인 요소로서, 그것의 생산의 내적인 요소로서 덧붙여진다.”(NP 57-58; 51) 변별적 요소로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이 갖는 양들의 차이들의 관계를 생산하고, 발생적 요소로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이 갖는 질들의 차이들의 관계를 생산한다. 만약 지배와 피지배가 힘의 양들을 가리킨다면, 그리고 능동과 반동이 힘의 질들을 가리킨다면, “긍정과 부정은 권력에의 의지의 근본적인(primordial) 질들을 가리킨다.”(NP 60; 53-54) 해석하는 것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결정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다.”(NP 61; 54) 따라서, 해석하는 것은 힘의 능동적인 혹은 반동적인 질을 평가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은 힘들의 주어진 관계 속에서 표현된 권력에의 의지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질을 평가하는 것이다. 힘, 권력, 그리고 지배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힘이 정의인” 그리고 “적자생존의” 조야한 기계론적 세계를 연상시킬 수도 있으나, 들뢰즈는 그러한 독해에 반대하는 중요한 구별들을 끌어낸다. 첫째, 그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권력에의 의지는 다른 권력에의 의지를 누르는(over)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다.3) 이러한 권력 관점은 주인을 원망하고 주인과 노예 사이의 권력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복수하기를 원하는 노예에 전형적이다. 능동적 힘들은 다른 힘들을 지배하지만, 지배한다는 것은 “형태들을 부과하고, 상황들을 이용[착취]하는 데 있어서 형태들을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NP 48; 42)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변태적이고, 자기-변형적이다. “변형의 역량(puissance), 즉 디오니소스적 활력(pouvoir)은 활동의 첫 번째 정의이다.”(NP 48; 42) 둘째, 권력에의 의지는 변용하는 힘(power)이자 변용되는 힘(power)이다. 신체[몸]는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힘들의 집합이다. 신체의 잠재력(potency)과 가능성(capability), 즉 그것의 역량(puissance)은 그것이 변용하는 힘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변용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에 의해서도 역시 결정된다. 신체의 변용되는 힘(power)은 필연적으로 수동성(passivity)의 형태가 아니라, “변용성, 감수성, 센세이션”(NP 70; 62)의 형태이다. 따라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의 감수성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NP 71; 62-63) 셋째,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단지 행동의 힘(power)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의 반응들을 행사하는 힘이기도 하다.(NP 127; 111) 모든 신체들은 힘들의 다수성으로 이루어지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능동적이고 반동적인 힘들의 결합(combination)으로 이루어진다. 뒤이어 각각의 신체는 능동적이자 반동적인 다중적인 힘들과 관계한다.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변별해내는 것은 그러므로 신체 내부에 있는 반동적인 힘들의 결핍이나 존재[현전] 여부가 아니라, 반동적인 힘들이 그들의 관계들을 펼쳐내는 방식(way)이다. 주인들은 때때로 우월한 힘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그것들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반응하고 계속 나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응들을 행사한다. 그와 반대로 노예들은 결코 우월한 힘들과의 관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은 잊을 수 없는 병리학적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반응들의 행사(discharge)를 불가능하게 하는 병든 기관을 갖고 있다. 그것들 속에서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의 모든 관계들을 감염시키고 힘들의 전반적인 반동-되기를 퍼뜨린다. 그렇게 됨으로써 힘들은 스스로에 대립하게 되고 자신들의 가능성들(capabilities)을 완수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결국, 들뢰즈가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술적 감수성 - 형성하고 창조할 수 있는, 변용성을 확장할 수 있는, 변태와 변형을 촉발하고 겪어낼 수 있는 의지 - 이다. 권력에의 의지의 철학은 “자신의 기쁜 메시지를 전하는 두 개의 원리들 - 의지하는 것 = 창조하는 것, 의지 = 기쁨 - 을 지니고 있다.”(NP 96; 84) 오직 노예들만이 지배(mastery)[주인됨]를 타자들의 종속으로, 타자들에 대한 무감각으로, 그리고 우월한 힘들로부터의 둔감성(invulnerability)과 고립으로 간주한다. 주인들은 창조적인 가치 부여를 통해, 타자들을 변용하고 타자들에 의해 변용되는 고양된 힘(power)을 통해, 그리고 자신들의 능동들과 반응들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긍정한다. 하지만, 니체가 파악한 바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가 힘들의 보편적인 반동-되기의 역사라는 점이다. 모든 곳에서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승리를 거두고, 모든 곳에서 노예들이 우세하다. 힘의 수적 우위와 양적 거대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쁜 양심의 질병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주인들이 자신들[의 내면으]로 돌아가고, 자신들의 힘들을 제한하여 자신들의 활력들(powers)을 현실화시키지 못하도록 힘들을 가로막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반동성과 원한(ressentiment)으로써, 삶에 대한 편재하는 증오로써 모든 인간들을 감염시키게 된다. 부정성의 질병은 보편적인 질병이며, 이런 이유로 긍정의 철학자들은 의사, 즉 질병의 기호들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진단자이자 치료법을 처방하는 치료사가 되어야 한다.4) 치료사로서의 의사는 삶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조하고, 이런 점에서 변태와 변형을 긍정하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새로운 가치들을 양식화하는 입법자로서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 ‘미래의 철학자’의 니체적 의미의 삼위일체”(NP86; 75)이다. 철학자-의사, 철학자-예술가, 철학자-입법자. 비판[비평]은 의미의 해석과 가치의 평가를 포함하지만, 해석이나 평가가 원래 수용적인(receptive) 활동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해석자를 독자로, 그리고 평가자를 비평가(critic)로 생각하지만, 니체의 해석자/평가자는 항상 철학자/예술가/입법자, 동시에 평가자(assessor)이자 창조자이다. 들뢰즈가 지적하고 있듯이, 니체는 예술을 청중보다는 예술가의 지위에서 바라본다.(NP 84-85; 74-75) 마치 그가 문헌학[언어학]을 단어들의 단순한 사용자들이 아니라 단어들의 발명자들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래서 또한 비판[비평]은 수용적이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능동적인, 변형하고 창조하는 해석과 평가의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비판[비평]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의 질병과 해독(poison)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용(acceptance)의 상징은 짐 나르는 짐승, 즉 자신의 등에 얹혀진 모든 짐에 대해 “Yea-Yuh”라고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나귀이다.5) 비판[비평]은 창조이지만, 그것은 또한 부정적이고 삶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기쁜 파괴이다. 긍정적인 비판[비평]의 디오니소스적인 “예[긍정]”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안다: 그것은 순수한 긍정이며, 그것은 허무주의를 극복했으며 부정에게서 그 모든 자율적인 힘(power)을 박탈했다. ······ 긍정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지 참고 견디고 위장하는 것이 아니다.”(NP 213; 185-186) 들뢰즈는 니체의 사유를 해석과 평가의 비판적인 철학으로 간주한다. 미래의 철학자는 의사이자 예술가이며 입법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조를 통해 삶을 긍정하는 예술가이다. 따라서 예술은 철학에 대한 니체의 개념화를 이해하기 위한 모델로 기능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예술이 철학의 역할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니체와 철학』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들뢰즈가 작가이자 사상가로서의 니체의 실천에 있어서의 문학과 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결(connection)[관계]을 정말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니체는 “철학 내부에 두 개의 표현 수단, 즉 아포리즘과 시를 통합한다. 이러한 형태들은 철학의 새로운 개념화를, 사상가의 그리고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포함한다.”(N 17) 아포리즘은 단편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복수적인 사유 형태이다.”(NP 35; 31) 그것의 대상(object)은 “존재의, 행위의, 사물의 의미이다.”(NP 35; 31) 아포리즘은 홀로 “의미를 분절할 수 있으며, 아포리즘은 해석이자 해석의 예술이다.”(NP 36; 31) 마찬가지로 시는 “평가이자 평가의 예술이다; 그것은 가치들을 분절한다.”(NP 36; 31) 아포리즘의 의미는 힘들의 관계들을 - 능동적인지 반동적인지 - 결정하는 변별적 요소로부터 비롯하고, 시의 가치는 그와 동일한 변별적 요소, 즉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 요소로부터 발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별적 요소는 항상 존재한다 할지라도, “또한 항상 시나 아포리즘 속에 함축되어 있거나 숨겨져 있다.”(NP 36; 31) 따라서 심화된 해석과 평가를 필요로 한다. 아포리즘은 해석이다. 그러나 2차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시는 2차적 평가를 필요로 하는 평가이다. 바로 이렇게 항상 존재하지만 아포리즘과 시 속에 숨겨진, 권력에의 의지의 변별적 요소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철학이, 시와 아포리즘과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완전한 해석과 평가, 즉 사고의 예술, 다시 말해 우월한 사유의 능력(faculty) 혹은 ‘묵상의 능력’을 구성한다.”(NP 36; 31)6) 문학은 니체에게 해석들과 평가들의 첫째-수준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그런 다음에 그는 문학을 철학적인, 둘째-수준의 해석과 평가에 할당시킨다. 그러나 니체가 철학과 문학의 혼성적 형태를 실천하는 철학적인 아포리스트/시인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철학적 목적들을 위해 문학적인 아포리즘들과 시들을 적응시킨 철학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7)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제1장 일부[9~14쪽]|작성자 옥토끼  
6    [공유] 들뢰즈의 표현에 관한 연구(김영희) 댓글:  조회:682  추천:0  2018-10-21
  출처 존재와 사유 | 동동 원문 http://blog.naver.com/mdpsjk/20021803817 들뢰즈의 ‘표현(Expression)’에 관한 연구*   김 영 희**부산대학교 철학과   요 약 문 이 글은 들뢰즈가 ‘표현’ 개념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사유를 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들뢰즈가 ‘표현’ 개념에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스피노자 연구에서다. 스피노자 연구에서 표현은 두 개의 트리아드로 나타난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실체, 표현들인 속성, 표현된 본질’의 첫 번째 트리아드와 ‘스스로를 표현하는 속성, 표현들인 양태, 표현된 변양(modification)’의 두 번째 트리아드. 실체는 속성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속성들은 양태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속성들은 일의적인 존재의 형식들이다. 수적으로 단일한 하나의 실체는 수적이지 않은 실재적인 구별들인 속성을 통해, 속성들의 표현인 양태를 통해 다양하게 표현된다. 따라서 존재는 하나의 단위(un unité)이지만, 여러 개의 의미로 말해진다. 표현 개념은 스피노자에게서 존재의 일의성을 새우도록 하며, 내재적 철학의 토대가 된다. 존재들 사이의 본성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역량 혹은 강도의 차이들만이 존재한다. 들뢰즈는 표현 개념을 통해서 첫 번째로, 차이의 존재론적 기반을 세우고자 한다. 들뢰즈가 표현의 트리아드를 통해서 주목하는 것은 양태의 차원이다. 양태들은 역량의 정도에 따라 변용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신체를 만나, 즐거움을 가지더라도, 그 즐거움은 여전히 하나의 정념, 수동적인 변용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와 함께 이루어진 그리고 우리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것은 선이다. 들뢰즈는 역량, 코나투스, 공통 개념 등을 통해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긍정의 사유를 제안한다. 이것이 ‘표현’ 개념을 통한 사유의 두 번째 기획이다.   ※ 주요어 : 들뢰즈, 표현, 재현, 차이, 다양성.         1. 들어가기   들뢰즈의 철학은 철학사의 탐구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주저들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니체, 베르그송을 넘나들며 자신의 독특한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다. 본 글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표현(expression) 개념 역시 앞선 두 철학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탐구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들뢰즈는 표현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이해하는 공통적인 개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표현’ 개념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에 대한 첫 번째 연구서인
5    천개고원 / 들뢰즈 댓글:  조회:906  추천:0  2018-10-20
용량 많아 퍼올릴수없어 사이트주소를 복제해 올려놓습니다. 사이트주소들을  클릭하면 해당페지로 이동합니다 ^^ 들뢰즈 천개의 고원 (1) http://cafe.daum.net/ko.art./am0K/841   들뢰즈 천개의 고원 (2) http://cafe.daum.net/ko.art./am0K/843   들뢰즈 천개의 고원 (3) http://cafe.daum.net/ko.art./am0K/844   들뢰즈 천개의 고원 (4) http://cafe.daum.net/ko.art./am0K/845   들뢰즈 천개의 고원 (5) http://cafe.daum.net/ko.art./am0K/846   들뢰즈 천개의 고원 (6) - 요약1 http://cafe.daum.net/ko.art./am0K/847   들뢰즈 천개의 고원 (7) - 요약2 http://cafe.daum.net/ko.art./am0K/848   들뢰즈 천개의 고원 (8) - 비인간주의 존재론 1 http://cafe.daum.net/ko.art./am0K/849   들뢰즈 천개의 고원 (9) - 비인간주의 존재론 2  http://cafe.daum.net/ko.art./am0K/850   들뢰즈 천개의 고원 (10) http://cafe.daum.net/ko.art./am0K/851   들뢰즈 천개의 고원 (11) - 대담 http://cafe.daum.net/ko.art./am0K/855   들뢰즈 천개의 고원 (12) http://cafe.daum.net/ko.art./am0K/856   들뢰즈 천개의 고원 (13) - 내재의 평면 . 다양체 http://cafe.daum.net/ko.art./am0K/857   들뢰즈 천개의 고원 (14) – 시네마 http://cafe.daum.net/ko.art./am0K/860   들뢰즈 천개의 고원 (14) – 예술 http://cafe.daum.net/ko.art./am0K/861   들뢰즈 천개의 고원 (15) http://cafe.daum.net/ko.art./am0K/863   들뢰즈 천개의 고원 (16) http://cafe.daum.net/ko.art./am0K/865   들뢰즈 천개의 고원 (17) http://cafe.daum.net/ko.art./am0K/869    
4    [공유] 들뢰즈 천 개의 고원 _리좀, 매끄러운 공간 댓글:  조회:836  추천:0  2018-10-19
 flower/ing | 혜령  http://iamflowering.blog.me/220300492890 / 잡초는 인간의 노력을 헛되게 하는 복수의 여신이다. (...) 우리가 식물, 짐승, 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 중에서 잡초가 가장 만족스런 삶을 영위해 간다. 그렇다, 잡초는 백합도 전함도 산상수훈도 낳지 않는다. (...) 결국 잡초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 풀은 유일한 출구이다. (...) 잡초는 일구지 않은 황폐한 공간에 있으며 그 곳을 채울 뿐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자란다. 백합은 아름답고 양배추는 먹을거리이고, 양귀비는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잡초는 무성하게 자란다. (...) 이것이 교훈이다." _헨리 밀러, Hamlet, New York : Carrefour, 1939, 105-106쪽 / 비트족, 언더그라운드, 지하의 것들, 밴드와 갱들, 바깥과 직접 연결접속되어 있는 측면의 잇다나 돌출들. 미국이 아무리 나무를 추구하려 해도 미국 책과 유럽 책은 다르다. "풀잎." (...) 나무 형태의 추구와 구세계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곳은 동부이다. 하지만 서부는 리좀적이다. 거기에는 선조 없는 인디언들, 끊임없이 달아나는 한계, 이동하고 교차되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다. 서부에는 미국식 "지도"가 있는데, 거기서는 나무조차 리좀을 형성한다. 미국은 방위를 뒤집었다. 마치 지구가 바로 미국에서 둥글어졌다는 듯이. (...) 미국의 서부는 동부의 가장자리이다. 미국의 여가수 패티 스미스는 미국인 치과의사의 바이블을 노래한다. 뿌리를 찾지 마세요, 수로를 따라가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_자본주의와 분열증2, 43-44쪽 / 프랑스 왕들은 백합을 선호했다. 백합은 비탈에 매달려 있을 만큼 깊은 뿌리를 가진 식물이기 때문이다.  / 어떤 것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비정확한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히 그것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도 아니고 근사치를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비정확함은 결코 하나의 근사치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일어나는 일이 지나가는 정확한 통로이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다양을 만들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 낼 방법이 필요하다. 솜씨 좋은 인쇄술도, 합성어나 신조어 같은 기민한 어휘 구사도, 대담한 문장 성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사실 이것들은 대개 이미지-책을 생산하려는 속임수, 다른 차원 속에 담겨 유지되고 있는 통일성을 산종하거나 해체하기 위해 사용되는 속임수일 뿐이다. 테크노나르시즘. 창조적 인쇄술, 어휘, 구문이 제 값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숨어 있는 통일성의 표현의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다양체의 한 차원이 되는 때뿐이다. 이런 식으로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우리는 우리에게 적합한 방식을 알지 못했다. / 사람들은 역사를 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정주민의 관점에서, 국가라는 단일 장치의 이름으로, 아니면 적어도 있을 법한 국가 장치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심지어는 유목민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대물인 유목론이 빠져있다. / 안드르제예브스키의 책 은 마침표없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 _p.53-54 n에서, n-1을 써라, 슬로건을 통해 써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 뿌리지 말고, 꺽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올바른 관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념을(고다르). 짧은 관념을 가져라!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독일 낭만주의 운동)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문학은, 그리고 영국 문학은 이 리좀적 방향을 명백히 드러냈으며,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 p.920 이미 오래 전에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여행을 결정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도시 한가운데서도 낯선 여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여행도 있다고.  [출처] [공유] 들뢰즈 천 개의 고원 _리좀, 매끄러운 공간|작성자 옥토끼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은 와 의 후속작에 해당한다. 이 책은 총 1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장’이 아니라 날짜가 붙어 있는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론을 제외한 나머지 고원은 순서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첫 번째 고원, ‘리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뿌리, 수염뿌리, 리좀 - 책의 문제 - 와 - 나무와 리좀 - 지리적 방향들, 동양, 서양, 미국 - 나무의 폐해 - 고원이란 무엇인가?”     * 신승철 샘의 멘션   - 천 개의 고원은 가타리의 저작 중 가장 읽기 쉬운 책입니다. (여기저기서 비명 섞인 탄식이 터져나왔다.)   - 들뢰즈: '차이의 철학'을 역설하던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면서 '욕망과 접속'하게 되지요. "욕망하는 기계"   - 푸코: 푸코는 가타리와 공동으로 연구하기도, 또 배려해주는 관계였다고. 특히 권력의 미시적인 움직임에 집중.   - 리좀은 풀뿌리에서 나오는, 관계 속에서 나오는 (녹색당의 어휘) '생태적 지혜', 나무에서 나오는 추상적인 진리, 분리된 진리는 아카데미의 방법론. (모든 의미화된 것에 의문을 가지세요!)   - 'n-1'은 유일 대신 다양성을 만드는 방법이다. 'n+1'은 초월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음.   - '고른판'은 모두가 다른 소리를 하지만 그러면서 결정을 내리는, 차이 속에서 공감을 하여 자발적인 의사수렴이 가능한 형태의 의사소통.   - 합일의 두 가지 층위 : 공통성과 보편성. 공통성은 우리 관계 속에서 찾아낸 합일점, 반면 보편성은 모든 상황에 적용가능한 진리 같은 합일점. 리좀의 사유로 얻어낸 합일점이 공통성에 기반한다면, 나무-아카데미 형태의 합일점은 보편성을 주장(또는 강제)한다.     * 참가자들의 멘션, 리좀 등에 대해   - 리좀은 구근, 덩이줄기, 땅밑줄기. 농사를 지어보니 알겠어요. 고구마가 바로 리좀이에요! // 담쟁이 넝쿨도 리좀.   - 기업 조직도는 전통적으로 수직적인 계층구조로 형상화되었지만, 구글 등 혁신적인 기업의 조직도는 네트워크 조직도의 형태, 방사형으로 뻗어나갑니다. 나무형태의 조직도와 리좀 조직도의 차이라고 봅니다. // 신쌤 코멘트, 가타리 曰, 생태계가 네트워크.   - IT쪽 용어로 텍소노미와 폭소노미 개념을 비교해보면 나무와 리좀 같습니다. 데이터가 개발자에 의해 카테고리화된 분류방식이 텍소노미, 수평적으로 검색어가 중복되는 분류방식이 폭소노미(클라우드 태그 같은 형태로),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데이터의 양이 많아지면서 폭소노미 방식이 효율적임.   -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지를 땅으로 전달하는 역할,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들고 땅으로 내려와 전달하듯이. 그러나 리좀은 수직적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도, 법, 영으로 거듭나는 것, "네가 나고, 나는 너다."   - 또 IT쪽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양체의 원리'는 '객체지향언어' 개념과 같음. (명쾌한 프로그래머의 설명을 들으며 한쪽에서 가타리를 이해하기 위해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 새누리당이 리좀 형태로 움직이고 있는가?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의 점조직은 뿌리줄기 스타일 정도? 의사결정의 중추에는 여왕님-나무와 이권집단이 결탁해 있다고 본다.       --- 아래는 읽는 데 집중이 하도 안 돼서 본문을 필사하며 메모한 흔적입니다. (제가 임의로 첨부한 메모는 #표시로 파란색 표시해두었어요.)   1. 서론 : 리좀, 본문 발췌독   (전략) 더 이상 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았고 빨려들어갔고 다양화되었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매우 다양한 날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질학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한 신을 꾸며낸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f: agencement, e: assemblage)을 구성한다. 책은 그러한 배치물들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f: multiplicité)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la multiple)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實辭 #명사나 용언의 어간처럼 실질적인 뜻을 나타내는 형태소#)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f: signification)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corps sans organes: CsO)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 없는 몸체는 끊임 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환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의 기관 없는 몸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다. 고려되고 있는 선(線)들의 본성에 따라, 선들의 농도나 고유밀도에 따라, 선들을 선별해내는 “고른 판(plan de consistance)”에 선들이 수렴할 가능성에 따라 여러 기관 없는 몸체들이 있다.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이다. 글을 양화하라. #양화란 量化를 의미하나?# 책이 얘기하는 바와 책이 만들어지는 방식 차이에는 차이가 없다. 하물며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표든 기의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접속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를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이처럼 책이 그 자체로 작은 기계라면, 이 문학 기계는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과,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을 낳는 추상적인 기계와 어떤 측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원용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글을 쓸 때의 유일한 문제는 문학 기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다른 기계와 이어질 수 있고 또 이어져야 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 기계(#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von Kleist를 의미하는 듯, 괴테와 카프카를 연결하는 작가라는 평, 작품 찾아볼 것#),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주의 기계 ...... (그리고 설사 우리가 문학을 통해서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은 분명 문학적인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닌가?) #이 괄호 속의 문장은 무슨 소리인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 이데올로기는 있지도 않고 있어본 적도 없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단위들, 수렴의 CsO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signifier)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앞서 나온 ‘글을 양화하라.’는 지시문과 같은 맥락의 비유인 듯. 여기서 ‘미래의 나라들’이란 표현은 아직 그와 같은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 책의 세 가지 유형   (p.14.) 책의 첫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중략)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중략) (p.16.)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겉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다. (중략)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택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쪼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 (중략) (pp.17~18.)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알듯말듯하지만 마음에 꽂히는 말이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l'unique)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 뭐가 좋고 뭐가 나쁘지?#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다. #갑자기 개밀이 왕바랭이가 됐다. 둘 다 외떡잎식물이며 벼과에 속하는 잡초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 하다. #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미궁에 빠져든다. 원예기술과 생물학과 정신분석과 언어학이 뒤섞인다. 리좀의 특성을 알려준대도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이 밀려온다.#     # 리좀의 특성 원리 1~6 (그러나 굳이 숫자로 분류해 설명한 이 원리들은 분절되지 않는 내용인 것 같다.)   (pp.19~20. :리좀의 특성)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계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고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초헤계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定言 #단정하여 말하기)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자으이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화행론: 1960년대 영국 언어학자들이 창시한 언어학 이론. 언어란 무엇인가보다 언어는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언어학의 한 유파. 언어의 의미를 ‘언어 행위 실천’에서 찾으려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실 언어 행위의 의미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명령어/질서어로 본다. 기존의 언어학과 언어철학이 가장 급진적으로 나아간 형태이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소쉬르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보편적이고 고정적인 언어인 랑그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를 부정하는 이야기#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바인라이히,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군대가 지지하는 사투리가 표준어가 된다.”라고 하는 오병헌씨의 인용문이 생각났다.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됨 기름 자국처럼 번져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pp.20~21. :리좀의 특성)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 다양은 사실상 실사로서, 다양체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주체나 객체, 자연적 실재나 정신적 실재, 이미지와 세계로서의 와 더 이상 관계 맺지 않게 된다. 리좀 모양의 다양체들은 나무 모양을 한 가짜 다양체들의 정체를 폭로한다.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 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양체의 본성이 변할 때에만 증가할 수 있다(따라서 조합의 법칙들은 다양체와 함께 증가한다). (중략, pp.22~23.)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고른판에 대해 말할 것이다. 비록 이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결접속들의 수에 따라 판의 차원 수가 커지기는 할 테지만. 디양체들은 , 즉 추상적인 선, 도주선(ligne de fuiete)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거해 정의되며, 다양체들은 이 선에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연결접속하면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고른판(격자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그리고 나서 도주선의 특징들을 설명한다. 얽히고 섥힌 나무의 가는 뿌리들을 상상하다가 갑자기 고른 판 위에 선이 뻗어가는 모양을 상상하려니 과부하로 죽을 것 같아서 넘어가기로 한다.#   (p.24. :리좀의 특성)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 이것들은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개미떼를 죽여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놈들이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더라도 끊임없이 복구될 수 있는 동물 리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나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과 이라는 조악한 형식으로도 말이다. 우리는 끊어도 보고 도주선도 그려 본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다. 선 위에서 전체를 다시 지층화하는 조직들, 기표에 권력을 다시 부여하는 대형들, 주제를 다시 구성하는 귀속 작용들, 즉 오이디푸스의 부활에서 파시스트적인 응고물에 이르키까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에 직면할 집단들과 개인들은, 단지 결정화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 개밀 역시도 리좀이다. 과 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선별의 소산일 뿐이며, 이 선별은 항상 갱신되어야 한다. (중략) # 그리고 탈영토화 운동과 재영토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서양란과 말벌이 인용되고, 비비와 고양이의 유전정보에 대한 비유까지 나오고, 악어와 카멜레온이 주변을 복제하지 않으며, 핑크팬더는 분홍 위에 분홍으로 자기 색깔로 세상을 그리는데 이것이 핑크 팬더의 세계-되기라는 미친 신들린 것 같은 설명이 나오고, 나는 눈물이 났다. 핑크팬더라니 핑크팬더라니 도대체 어쩌라고!#      (p.29~30. :리좀의 특성)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제도)과 전사의 원리 :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주축뿌리이건 수염뿌리이건)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예컨대 촘스키의 “나무”는 기저 시퀀스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항 논리에 따라 그것의 발생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정신분성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結晶)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도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 나무와 반대되는 리좀, 나무가 뿌리 중심에서 뻗어나가 위계적 질서인 반면, 리좀은...? #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 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 리좀이 지형이 아니라 지도라는 설명은 납득할 수 있다. 어렴풋이 맥락이 좀 잡힌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제기가 나와버린다. #     (pp.31~33.) 하지만 우리는 지금 지도와 사본을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대립시키면서 단순한 이원론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사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뿌리를 교차시키고 때로는 뿌리와 뒤섞인다는 것은 리좀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하나의 지도는 이미 자신의 고유한 사본들인 잉여 현상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하지만 그 역 또한 참이며, 따라서 문제는 방법이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놓아야 한다. (중략) # 그리고 사본의 위험함을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예로 드는데, 프로이트의 꼬마 한스와 멜라니 클라인의 꼬마 리처드 연구에 대한 살벌한 비판이 이어진 뒤 단호하게 경고한다. # 리좀이 차단되어 나무처럼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고 이제 욕망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니까.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을 좌절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작동한다. (중략)     (pp.35~37.)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내리거나 가지뻗고 있는 물질이 아니다. 부당하게도 “수상돌기(化石樹 #화석수라니, 수상돌기의 다른 말인가, 아님 어떤 은유일까?#)”라 불리는 것은 뉴런들을 연속적인 조직 내에서 서로 연결접속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중략)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나무가 심겨 있지만 뇌 자체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이다. (중략) 우리가 비록 긴 개념들로 이루어진 긴 기억을 가지고서 읽고 또 다시 읽는다고 해도 글을 쓸 때는 짧은 기억을 가지고서, 따라서 짧은 관념들을 가지고서 쓴다. 짧은 기억은 망각을 과정으로서 포함하고 있다. 짧은 기억은 순간과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시간적이고 신경적인 리좀과 뒤섞인다. 긴 기억(가족, 인종, 사회, 또는 문명)은 복사하고 번역한다. 하지만 긴 기억이 번역하는 것은 자기 안에서, 거리를 두고, 뜻하지 않게, “비시대적으로” 그러나 결코 동시적이지는 않게 계속해서 작용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뿌리-가지들의 집합을 고려한다면, 나무의 몸통은 밑에서 위까지 걸쳐있는 부분 집합들 중 하나에 대해 대립 절편의 역할을 한다. (중략) # 나무 모양과 뿌리 모양을 연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러나 뒤어어 나오는 세부적인 설명은, 아..... 몰라. 서양의 사고체계가 나무 같지만 동양은 아니라는 서술은, 정말로 모르겠다. 내가 아는 동양이 이미 서구화되어버린 또는 서구지향적인 동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오리엔탈리즘 또는 서양문명의 대안으로서의 동양문명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까? #     (pp.46~48.)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들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특질들과 연결접속되는 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리좀은 로도 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둘이 되는 도 아니며 심지어는 곧바로 셋, 넷, 다섯 등이 되는 도 아니다. 리좀은 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여럿도 아니고 가 더해지는 여럿(n+1)도 아니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구조는 점들과 위치들의 집합, 그리고 이 점들 사이의 이항 관계들과 이 위치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분할선들, 성층 작용의 선들이 여러 차원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 차원인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도 있다. 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이 선을 따라가며 본성이 변하면서 변신한다. 우리는 그런 선들이나 윤곽선들을 나무 유형의 계통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나무 유형의 계통들은 연결된다 해도 단지 점들과 위치들 사이에서만 자리가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와는 달리 리좀은 복제 대상이 아니다. 즉 그것은 이미지-나무로서의 외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고, 나무-구조로서의 내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다. 리좀은 일종의 반(anti-)계보이다.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기억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문자 표기법, 데셍, 사진과는 달리, 또한 사본과도 달리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지도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본이지, 역으로 지도를 사본으로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다. 위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며 미리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 집중화되어 있는 체계(설사 여러 중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와는 달리, 리좀은 중앙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이다. 리좀 안에서 중요한 것은 성(性 #성별?#)과의 관계이며, 또한 동물, 식물, 세계, 정치, 책, 자연물 및 인공물과의 관계, 즉 나무 형태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든 관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 리좀은 나무 형태와 다르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너덜거리는 모양일 것 같다. 뒤이어서 고원에 대한 설명. #     (pp.48~50.) 고원은 중간에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리좀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다음과 같은 아주 특별한 것을 가리키기 위해 “고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 위에서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들이 연속되는 지역. (중략) “강렬함이 연속되는 일종의 고원이 오르가슴을 대체한다.” 또 그것은 전쟁이나 정점을 대체한다. 표현과 행위를 그것이 지닌 가치 자체에 따라 내재적인 판에서 평가하는 대신에 외부의 목적이나 초월적 목적에 관련시키는 것은 서양적 정신의 유감스런 특질이다. 예를 들어 장으로 이루어진 책은 정점과 종결지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뇌처럼 미세한 균열들을 가로질러 서로 소통하는 책,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접속되어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 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일종의 리좀으로 기록했다. 우리는 이 책을 고원들로 구성했다. 우리는 이 책이 순환적 형식을 갖도록 했지만 그것은 웃자고 그랬던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우리는 각자 어떤 고원들을 선택할 것인지를 자문하고, 여기 다섯 줄, 저기 열 줄을 쓰곤 했다. 우리는 환각을 경험했으며, 작은 개미떼 대열 같은 선들이 한 고원을 단념하고는 다른 고원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수렴원들을 만들었다. 각각의 고원은 어느 지점부터든 읽을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고원과도 관계 맺을 수 있다. 다양을 만들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낼 방법이 필요하다. (중략) 우리는 단지 몇 단어를 골랐고, 그 단어들이 나름대로 고원으로 기능했을 뿐이다. 리좀학=분열분석=지층분석=화행론=미시정치. 이 단어들은 개념들이다. 하지만 개념들은 선들, 즉 다양체들의 이런저런 차원(지층들, 분자적 사슬들, 도주선들이나 단절선들, 수렴원들 등)에 부착되어 있는 수 체계들이다. 우리는 결코 과학의 지위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과학성도 알지 못하며 다만 배치물들을 알고 있을 뿐이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들이 있는 것처럼 욕망이라는 기계적인 배치물들이 있을 뿐이다. 의미생성도 없고 주체화도 없다. (중략)     (p.51.) 사람들은 역사를 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정주민의 관점에서, 국가라는 단일 정치의 이름으로, 아니면 적어도 있을 법한 국가 장치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심지어 유목민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대물인 유물론이 빠져 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선 훌륭한 작품들의 예가 거론된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예시이기 때문에 넘어간다.#     (p.53.) 어쨌든 과학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과학은 완전히 미쳐버릴 것이다. 수학을 보라. 수학은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굉장한 은어이며 유목민적인 것이다. 이론적 영역에서조차, 아니 무엇보다도 이론적 영역에서, 아무리 암시적으로 화행론적인 발판일지라도 개념들의 복사나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개념들의 절단과 진보보다는 낫다. 기표작용을 하는 절단이 아니라, 지각할 수 없는 단절을 행하라. 유목민들은 국가 장치에 대항해서 전쟁 기계를 발명했다. 역사가 유목민을 이해한 적은 없으며 책이 바깥을 이해한 적도 없다.   (pp.54~55.)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방법적, 교육학적, 통과제의적, 상징적인......)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운동에 대한 언급이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시작과 끝을 상정하지 않고 중간을 통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어떤 의미일까?# 나아가 미국 문학은, 그리고 이미 영국 문학은 이 리좀적 방향(sens)을 명백히 드러냈으며,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영미문학은 화행론을 행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 고원지대, 기차에서 만났던 시안 사람 왕선생이 자기 고향을 자랑하며 첫 마디로 시안은 ‘황토고원’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란저우도 간쑤성의 고원지대에 있으며, 쿤밍 역시 고원의 춘성이다. 중국영토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지는 망설여지지만 티벳고원도 빼놓을 수 없지. 독특한 문명이 꽃피었던 곳, 또는 한 나라의 수도가 있었던 도시들. 들뢰즈와 가타리가 중국의 지형을 생각했을 것 같진 않지만, 나에게는 이런 고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개마고원과 백두고원이 있고, 남한에는 무주의 진안고원이 있지. 언젠가 마이산에 가보고 싶다.     # 기계의 비유, 하필이면 왜 기계일까? 뭔가 프랑스적인 감성이 있는 것 같다.   # forvo.com 프랑스어 발음이 기억나지 않아 검색해보다 발견했다. 외국어가 녹음된 음원을 들을 수 있는 홈페이지. 각 지역의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올린다. 일테면 프랑스어의 경우, 프랑스 북부, 남부, 벨기에, 캐나다 등지의 사용자의 발음을 비교해 들을 수 있다. 그것도 전문적인 성우가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자발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출처] '1. 서론 : 리좀 '을 읽고 나눈 이야기들 정리해보았어요. /이동현|작성자 옥토끼  
2    리좀 / 들뢰즈 댓글:  조회:872  추천:0  2018-10-19
리좀   제1강 텍스트와 층화 I   『천의 고원』은 개념적 꼴라주이다. 상이한 담론공간에서 형성된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개념들이 모여들어 장대 하고 현란한 지적 꼴라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꼴라주 안에서 각 개념들은 본래의 의미에서 ‘탈영토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개념들과 ‘접속’됨으로써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개념들은 일방향적으로 즉 연역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서 비추어 주고 있으며, 하나의 개념 안에는 다른 모든 개념들이 접혀 있다. 각 개념들은 각 ‘관점’에 따라 일정 부분을 밝게 비추어 주지만, 다른 부분들은 숨긴다.   각 개념들은 『천의 고원』 전체를 ‘표현’한다. 개념들은 서로를 입체적으로 참조하며, 따라서 각 개념들의 의미는 책을 전부 읽었을 때에만 온전히 드러난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순환논리 앞에 서 있게 된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없다. 전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기에. 카프카의 저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은 재독(再讀)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독, 삼독, …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미증유의 새로운 사유 지평이 눈앞에서 활짝 열림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계는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 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생성되어 가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 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것, 고착화된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서론’에 해당하며, 서론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서론 역시 (『천의 고원』 자체를 포함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리좀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존의 책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리좀-책 개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리좀’ 개념의 포괄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책은 리좀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로서 작동하고 있다.    리좀의 일차적인 의미가 생성하는 관계, 차이 자체의 생성에 있다면, 그러한 사유를 통해 (고중세적 본질주의를 포함해) 근대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는데 있다면, 리좀을 이야기하는 주체들, 『천의 고원』의 주체들=저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떠올린다면, 저자들이 자기 언급적 논의로부터, 저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주체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논의는 ‘저자의 죽음’, 그러나 사실상 복수적 저자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둘이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각이 여럿이었기에, 그것에는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의 이름들을 남겨놓았는가? 관례상, 그저 관례상으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을, 또는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각할 수 없도록. […]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하지 않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자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의 한 측면이다. 주체의 죽음은 존재론/인식론의 맥락 이전에 윤리학적 맥락에서 등장 했다. ‘선험적 주체’(칸트) 개념은 세계를, 적어도 현상세계를 인간(의 의식)의 종합 및 구성을 기다리는 대상으로, 더 정확하게는 인식질료로 만들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런 식의 정립에 입각해 유럽적 주체는 비유럽 지역들을 그 눈길 아래에서 대상화/객체화했다. 그래서 선험적 주체의 죽음은 유럽 제국주의라는 주체의 죽음이다.   (따라서 탈주체주의 사유가 처음으로 사상사적 의미를 획득했던 것이 바로 인류학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남성 주체는 여성 주체를, 성인 주체는 아동 주체를, …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주체에게서 지배와 정복이 생겨난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주체의 죽음은 근대적/선험적 주체와 그 결과들에 대한 반성을 실마리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주체의 죽음은 주-객 분리와 ‘主體(Sujet)’=‘人間(Homme)’의 지배라는 근대 철학의 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저자-임은 주체-임의 한 방식이고, 그래서 주체의 죽음은 저자의 죽음도 함축한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변형을 뜻한다. 큰 주체의 죽음은 동시에 작은 주체들의 탄생이기도 하다. 저자의 죽음은 복수-저자 들의 탄생이다. “나”로부터의 탈주. “나”라고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경지로의 탈주.   “나”로부터의 탈주는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에서 사유하기, 즉 의식적/인칭적 주체로 마름질되기 이전의 비인칭적 개체화들, 나아가 현실적 개체로 고착화되기 이전의 비개체적 특이성들의 장에서 사유하기이다.   “비인칭적 개체화들,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세계, 이 세계는 누군가(ON)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일상적 진부함의 세계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디오뉘소스의 마지막 얼굴이자 또한 재현/표상에서 탈주하고 시뮬라크르들을 도래시키는 심층(深層)과 층-허(層-虛)의 참된 본성이기도 한 조우(遭遇)들과 공명(共鳴)들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곧 ‘만인(萬人)-되기’의 세계이다. 『천의 고원』에서 우리는 개념들의 꼴라주를 가로지르며 만인이 되고, 또 조우들=만남들과 공명들=함께-울림들을 만끽한다. 모든 이들의 ‘책’이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책을 한 사람의 주체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물질들의 이런 노동, 그것들의 관계들이 띠는 외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질학적 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선한 신을 꾸며내었듯이 말이다.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에도 분절화(分節化)의 선들과 절편성(切片性)의 선들, 층(層)들, 영토성(領土性)들이 있다. 그리고 또한 탈주선(脫走線)들과 탈영토화(脫領土化) • 탈층화(脫層化)의 운동들이 있다.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 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글쓰기의 새로운 윤리에 대면하고 있다: 책의 내부성을 극복하라. 현대적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이 과제를 우리는 들뢰즈와 데리다에게서 공히 발견할 수 있다.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 (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 텍스트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영혼 앞에 현존하는 의미, 진리의 담지자, 저자의 영혼이 외화(外化)된 표지, 영혼의 시뮬라크르로서의 책, 데리다는 책의 이런 개념의 외부에서 “담론적인 것이 비담론적인 것에 연계되고, 언어적 ‘기층(基層)’이 […] 전언어적 ‘기층’과 서로 섞이는” 짜기(texere)의 차원, 텍스트의 차원을 발견해낸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저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마치 복잡한 지질학적 운동의 저자=창조주로서 선량한 신=조물주를 상정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이 때 모든 것은 ‘신의 심판’, ‘신의 판단’이 된다)   책은 저자의 영혼이 외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외부성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외부성 들로서 “분절화의 선들과 절편성의 선들, 층들, 영토성들”, 그리고 “탈주선들과 탈영토화 • 탈층화의 운동들”을 언급 한다. 책은 구조의 측면에서 여러 선들, 층들, 영토(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의 측면 에서 탈주선, 탈영토화, 탈층화의 운동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책 개념을 논하는 서론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의 주요 개념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 우선 이 개념들을 정리해 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e)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articulation’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 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層化=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구분되어 존재 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 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年齡層)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다질적(多質的)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은 ‘탈기관(脫器管)’ 상태를 향하게 되고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 氣의 흐름이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脫層化)’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 ‘기계(機械)’는 일상어에서의 기계 ‘메카닉’과 구분된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물체’에 해당 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이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 [출처] 리좀 (1) - 텍스트와 층화 / 들뢰즈 핵심철학 리좀|작성자 옥토끼   제3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될 때, 즉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코드화) 존재할 때 ‘영토성’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됨으로써,   즉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언표적 배치와 기계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 한다. 그러나 여전히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으며,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고 해야 한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영토화도 탈영토화 의 흐름을 단절시킬 수는 없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   * 탈코드화 ― 영토화는 코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계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한 어떤 코드가 작동할 때 기계들은 일정한 영토화를 겪게 된다.   예컨대 도시의 ‘플랜’이라는 코드화가 작동하면 도시를 구성하는 기계들은 그 코드에 맞추어 영토화된다. 그러나 기계들의 본질은 욕망이기에(‘기계적 배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이다), 애초에 영토화는 탈영토화로 흐르는 욕망 위에 불안하게 형성되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교통질서라는 코드가 비현실적으로 무리하게 작동할 때 영토성은 와해되고 갖가지 탈영토화 행태들이 등장 하게 되며, 기계적 배치를 누를 힘을 상실한 코드는 탈코드화할 수밖에 없다.   법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뜻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에서 기계적 배치와 (탈)영토성이 일차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관계를 장기와 바둑의 비교를 통해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개념 규정들을 토대로 배치와 다양체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간다.   배치(agencement)   ― 사물들=‘기계들’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를 형성하며, 서로 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배치(配置)’(또는 다양체, 또는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단일한 하나의 ‘기계’)도 아니며, 또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의 영토성)과 언표들(의 코드)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 층화의 방향과 탈층화의 방향을 오가는 ―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그렇다고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기, 듣기, 사유하기, 대화하기, … 등의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강의’라는 이 배치는 다른 시간에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또 장소를 바꾸어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또 다른 기계들 및 코드들을 통해서 반복되기도 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그리고 경기 규칙들을 비롯한 여러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야구 경기’라는 배치는 우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에 반복되기도 하고, 같은 시간의 다른 장소 들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기계들과 코드들을 바꾸어 가면서 반복되기도 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그럼에도 강의, 야구 경기, … 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 하는 바로 이것들이 ‘배치’이다.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들을 그러나 전혀 새로운 눈길로, 참신한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의미이고 사유의 기쁨이 아닌가. 사유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 디아그람(diagramme) ―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디아그람’이라 부른다. 이 디아그람은 이질적인 두 배치를 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이어주고 있는 제 3의 차원이다.   여기에서 복잡하다 함은 그것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배치와 배치 사이의 관계, 더구나 (성격을 달리 하는) 기계 차원과 언표 차원의 관계임을 뜻하며, 역동적이라 함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하고 또 (존속하다가) 반복되는 존재임을 뜻한다(야구 경기가 열릴 때 디아그람이 작동하다가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며, 경기가 열릴 때면 다시 나타나 반복된다. 그리고 새롭게 변해 갈 수도 있다   ― 예컨대 야구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규칙이 바뀌기도 한다). 때문에 이 말을 ‘도표’나 영어식 발음인 ‘다이어그램’ 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치 못한, 아니 차라리 정반대 의미로의 번역이다. 디아-그람은 프로-그람과 대조된다. ‘pro’의 목적론적 뉘앙스와 ‘dia’의 생성론적 뉘앙스를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개념, 그리고 디아그람 개념은 푸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를 디아그람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기계적 배치는 ‘비담론적[신체적] 실천’이고 언표적 배치는 ‘담론적 실천’이다. 푸코는 병원, 수용소, 법원, 감옥, …을 비롯한 기계적 배치들과 정신병리학, 정신의학, 형법학, 범죄학…을 비롯한 언표적 배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디아그람들을 그 다원성과 역사성에 입각해 빼어나게 분석해 주었다.   인용된 구절   ―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 에서 알 수 있듯이,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과 ‘추상기계’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   (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 ― 분절선 들과 절편선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일탈해 가는 탈주선들 ― 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은 배치 개념의 핵심을 담고 있다. 배치라는 개념이 비교적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개념이라면, 다양체 개념은 길고 복잡한 의미맥락을 가진 난해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길다”고 한 것은 이 개념이 가우스-리만-베르그송-구조주의 등을 거치면서 제련(製鍊)된 개념임을 뜻하며, “복잡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자연철학적-윤리학/정치학적-미학적…인 여러 맥락을 동시에 압축하고 있는 개념임을 뜻한다. 일단 현재의 맥락에서만 잠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여럿은 주로 어떤 주체/주어에 귀속된다. “be attributed to”라는 표현은 최소한 세 가지를 의미한다.   1) 서술. 언어적 측면에서 술어는 주어에 서술된다.(attribute=predicate) 2) 귀속. “맛있다”가 ‘자장면’에 붙을 때(서술될 때), “맛있다”라는 성질은 ‘자장면’이라는 실체에 귀속된다(아리스토              텔레스가 표현했듯이 “부대한다”). 3) 표현. 귀속된/서술된 것은 귀속/서술의 대상을 표현한다. “맛있다”는 ‘자장면’을 표현한다.   여럿은 이런 식의 용법으로, 즉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되어 이해될 때 수적 복수성, 외적 복수성, 현실적 복수성의 역할을 맡는다. “그 날 온 사람들은 열명이다.” 열명이라는 복수성은 사람들이라는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된 양적인 여럿이자,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수성이다. 이렇게 여럿=다자는 귀속됨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이해된다.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다자”, 즉 일자의 쌍으로서의 다자(일자의 나눔을 통해 형성되고, 다시 합해짐으로써 일자 에로 歸一하는 그런 다자)가 아니라 순수 다자=여럿으로서의 여럿, 그리고 “~은 여럿이다”에서처럼 무엇인가에 귀속되는 여럿이 아니라 “여럿은 ~이다/한다”에서처럼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것은 ‘무엇’, 어떤 “것”, 어떤 실체, 주체, 주어이다. 그렇다면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어떤 집합체를 뜻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집합은, 그것의 요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의” 집합이며 여럿이 아니라 통일된 하나이다.   여럿이 완전히 봉합될 때, 하나의 통일성, 동일성을 가진 무엇일 때 그것은 여럿이 아니다. 여럿은 어떤 형태로든 불연속, 열림, (그리고 질적 측면들을 감안할 때) 이질성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이라 한 것은 어떤 하나(개체이든 집합체이든)가 아닌 진정한 여럿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주어로서, 어떤 ‘실체’ ― 기존의 실체 개념과는 판이한 어떤 실체 ― 로서,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실사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전통적인 실체 개념으로 포착되기 힘든 어떤 것, 주어의 역할을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여럿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배치와 다양체가 바로 그것이다. 배치와 다양체의 이 성격을 간파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천의 고원』의 문을 열게 된다.   *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은 기계들이다. 또 예술의 기법, ‘사조’, 구성방식, 전시의 관례… 등은 코드들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 기법… 등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이 말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술’은 이 모든 것의 집합인가?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이란 바로 하나의 배치이다. 예술가, 예술작품, …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 그것은 바로 배치인 것이다 [출처] 리좀 (2) - 기계, 배치, 디아그람|작성자 옥토끼   제5강 탈기관체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 ‘절편성’이다. 분절화는 잘라-붙임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책의 외부성에 대한 논의를 계기로 배치/다양체 개념을 잠정적으로나마 규정해 보았다. 다양체는 앞으로도 보다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배치는 극히 상식적인 무엇이다. 야구경기, 전시, 전쟁, 강의, 결혼식, 선거, 식사, 시위, … 이 모든 것, 바로 우리가 삶에서 영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배치이다.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보다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예컨대 ‘되기’ 개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이끌어내기, 이것이 『천의 고원』의 목적이다.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와 혼효면(plan de consistance) ― 이제 논의의 물꼬를 돌려 보자.   지금까지 배치가 무엇인지 논했다. 이제 배치가 변해 가는 방향, 즉 영토화/탈영토화, 코드화/탈코드화, 층화/탈층화의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가? 라는 가치론적 논의를 언급할 때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뒤로 미루고, 지금은 가장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지평에서 논하자. 이 경우 탈기관체 개념과 혼효면 개념이 핵심적이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 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 ― 방향성 ― 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 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 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 층들과 탈기관체의 구분을 비롯해 『천의 고원』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원적 구분을 기존의 이분법 ― 대립(opposition) ― 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이다.   예컨대 다음을 참조. “예를 들어 『천의 고원』이라 해도 형식적으로 보면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이항대립을 사용합니다. 유목성과 정주성, 무리와 군중, 분자적과 몰적, 마이너리트와 머조리티,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평활(平滑)공간과 조리(條理)공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 제각각 한쪽 편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철학을 전도하는 것은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속적인 것이 이항대립 내의 근저에 놓여지는 형태로 다른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362쪽)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분은 ‘이분법’이나 ‘대립’이 아니다. 즉 ‘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차이와 반복』에서 논의된 ‘유기적 재현’의 구도), 하나=전체의 양분으로서의 대립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이며, 예컨대 하나의 배치는 그 것보다 더 유목적인 것에 비해서 더 정주적인 것이고 더 정주적인 것에 비해서는 유목적이다.   가라타니가 들뢰즈/가타리의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런 사고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구절은 이미 헤겔-맑스의 관계를 놓고서 알튀세 시대에 논의된 내용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미 이 단계를 훨씬 넘어 그 후에 등장한 구조주의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담론사의 시계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즉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즉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그래서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는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는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 (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corps sans organes’ 개념을 가져왔다. 1947년 11월 28일 아르토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했다. 신의 심판은 신의 판단이다. 예컨대 신은 “허파는 방광 위에 있다”고 판단/심판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몸에서 허파는 방광 위에 있게 되었다.   神/造物主는 세계의 ‘소당연(所當然)’의 근거이다. 그래서 현실의 소당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심판/판단을 끝장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기관체의 추구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는가?”라는 인식적 맥락보다는 세계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분절체계, 부분들=기관들의 분절체계에 대한 전쟁의 선포이다.   대학은 기관들의 유기적 집합체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선 ‘인문대학’, ‘자연대학’, … 등을 선택해야 하고, ‘물리학과’, ‘생물학과’, …를 선택해야 하고, 다시 ‘광학 전공’, ‘역학 전공’, … 등을 선택해야 한다. 허파냐 심장, 비장, …이냐, 오른쪽 허파냐 왼쪽 허파냐, 어느 허파꽈리냐, … 프락탈 구조처럼 끝없이 기관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더 세분화된 기관들에까지 이어진다.   세상은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체이고, 우리는 늘 그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름’을 할당받아야 한다. 어디에 가나 기관들이 포진해 있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강압적으로 선택 당한다.(“너는 법과대학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해!”) 사실상 우리는 이미 자연에 의해 선택 당해서 이 세계에 ‘인간’이라는 이 종(種)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원숭이, 호랑이, 족제비, …도 아니고, 새나 물고기도 아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이것은 ‘신의 심판’이다.   그래서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것은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 즉 주어진 존재방식, 주어진 존재형식들에 저항 하는 것, 새로운 존재방식, 존재형식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인식적 맥락에서 “세계는 왜 꼭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으로, “~인가?”에서 “~이 될 수 있는가?”로 전환된다. 존재론은 저항의 담론, 투쟁의 담론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닌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 ‘현실적인 것(l'actuel)’은 개체들과 성질들(“S is P”!), 그리고 사회적 분절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현실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적인 것을 찾는다. 만일 존재론의 핵심이 현실의 가능 근거를 찾아 그 근거로부터 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면, 이들의 사유는 ‘잠재성의 사유’ 또는 ‘잠재적인 것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잠재성은 곧 특이성들과 강도들 ― “전개체적-비인칭적 특이성들과 비외연적인 강도들” ― 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의 4장과 5장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의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기관들의 분절체계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은 현실적 분절체계가 아닌 다른 분절체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분절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은 하나의 극한이며, 현실성 없는 추상적 꿈으로 그친다. 때문에 현실의 분절체계가 억압을 가져오는 한에서 새로운 삶에로의 운동은 항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탈기관체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 탈기관체는 기관들에가 아니라 유기체라 불리는 이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여기에서 모든 형태의 분절체계들을 보듬고 있는, 즉 그 위에서 이런/저런 분절체계가 성립하는(더 정확히 말해, 그것“이” 이런/저런 분절체계들로 분절되는) 바탕을 생각하게 되며, 이 바탕은 현실적인 것 아래의 잠재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탈기관체는 잠재성 차원을 개념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강도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공간이 아니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산출된 강도들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강도적인(intense), 형식화되지 않은, 층화되지 않은, 강도-높은(intensive) 모체[코라], 강도=0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기체의 외연(外延)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층들의 형성 이전의 알[卵]”이다.   * 여기에서 0[零]은 비움, 소멸의 의미로서의 제로가 아니라 차라리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서의 0, 즉 출발점 으로서의 0이다. 바로 뒤에 나오듯이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수한 양태들로 표현되는 출발점 ― “미분화된”이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출발점이 아니라 특정한 양태가 아니라 모든 양태들을 포용하고 있는 출발점 ― 이라는 점에서 강도=0이다.   * 이 때의 알=卵은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실제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잠재성, 탈기관체의 탁월한 예가 수정란이라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물론’은 편협한 유물론이 아니라 차라리 氣 일원론인 것이다. 그러나 氣에 무수한 종류들이 있듯이, 탈기관체에도 무수한 종류들이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추상적 일원론으로 귀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일의성’ 문제) 탈기관체가 ‘극한’으로 이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기계적 배치가 코드에 의해 영토화되어 있는 현실성 아래에서 잠재성을 들여다보며, 그 충만한 氣로 배치를 탈영토화해 나간다. 그래서 탈기관체는 ‘욕망의 내재장(內在場)’이며 “욕망에 고유한 혼효면”이다.   탈기관체는 어떤 정해진 무엇이 아니다. ‘탈(脫)’의 운동을 통해서 혼효면 쪽으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더 고착화되어 층화의 [수많은 층위들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한다. 층화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신의 심판/판단에 굴복하는 것이며, 혼효면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실험’으로 열린 길을 걷게 된다. [출처] 리좀 (3) - 탈기관체|작성자 옥토끼   제7강 글쓰기의 양화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 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 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 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 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 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 (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 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것이 중요하다. [출처] 리좀 (4) - 글쓰기의 양화|작성자 옥토끼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 『천개의 고원』 텍스트 읽기  - 서론: 리좀 부분 (p.14~20)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 즉 가 둘이 되는 것이다. 책의 법칙은 어떻게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 사이의 나눔을 주재하니 말이다. 하나가 둘이 된다. 이 공식을 만날 때마다, 설사 그것 이 모택동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표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반성되고 최고로 늙고 더없이 피로한 사유 앞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라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심지어 자연적 실재로서의 책조차도 축을 따라 곧게 뻗어 있고, 주위에는 잎사귀들이 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이 의 이미지로 이해 되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둘이 되는 하나 그리고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펼쳐간다.   이항 논리는 뿌리-나무의 정신적 실재이다. 언어학 같은 “선진적인” 학문조차도 이 뿌리-나무를 기본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데, 이 이미지는 언어학을 고전적인 사유에 병합시킨다(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적으로 진행되는 촘스키의 통합체적 나무가 그러하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이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 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를 크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원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이분법의 이항 논리를 대체한 것일 뿐이다. 주축뿌리가 이분법적 뿌리보다 다양체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축뿌리가 대상 안에서 작동한다면 이분법적 뿌리는 주체 안에서 작동한다. 이항 논리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 된다.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 가 더 포괄적인 비밀스런 통일성 또는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보상하는 건 아닌지.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꺾꽂이처럼).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포개 쓰기가 함축하는 이 보완적 차원 속에서 통일성은 정신적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계열들을 증식시키거나 다양체를 커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들은 어떤 방향에서는, 예컨대 선형적(線型的)인 방향에서는 완전히 타당하다. 한편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에서, 원환이나 순환의 차원에서 훨씬 더 확고하게 확증된다.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천사가 지닐 만한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언어들은 정당하게도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들 하는데, 적절한 말이다. 조이스의 언어가 단어들, 나아가 언어 자체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그것이 문장이나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 낼 때뿐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 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 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 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이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하다.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호 체제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 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 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계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출처] 리좀 (5) - 혼효면, 혼화면, 기계 / 책의 두 가지 유형|작성자 옥토끼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리좀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촘스키가 구사하는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하나의 점 S에서 출발해 이분법에 따라 진행한다. 리좀에서는 그와 반대로 각각의 특질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학적 특질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언어학적 특질은 전형적인 수목형의 사유를 보여준다. ‘homme’는 생명체/무생명체에서 생명체, 척추동물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 …로 이어지는 스무고개 놀이를 통해서 그 언어학적 특질을 부여받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특질(trait)은 촘스키적 특질(하나의 사물이 ‘유기적 재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성질들’도 아니다. 성질들이 관찰에 관련되는 형용사적 특징들이라면, 특질들은 감응과 강도에 관련되는 동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esse)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는가” 즉 능력(posse)의 문제이다.   짐을 끄는 말과 소 사이의 거리는 짐말과 경주용 말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독문학자와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하이데거와 콰인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물이 분류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관조 속에 드러내는 성질들도, 내면적 감정들도 아니다. 행동/행위와 과정에서, 강도로, 감응 으로 드러내는 특질들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리좀에서는 각종의 기호학적 고리들이, 상이한 기호체제들만이 아니라 상이한 지위의 사태들까지도 작동시킴으로써, 매우 다양한 코드화에 접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쉬르에서 연원하는, 기표 중심의 ‘기호론’ 보다 퍼스에서 연원하는 ‘기호학’을 선호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들은 사실상 기계적 배치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때문에 기호체제들과 그 대상들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의 경우, 그것이 명료한 것에만 논의를 국한시키고 랑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자 할 때조차도, 여전히 배치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적 권력의 유형들을 함축하는 어떤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촘스키가 말하는 문법성,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인 S는 통사론적 표식 기구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의 표식 기구이다 ―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 통합체와 동사 통합체 (첫 번째 二分, …)로 나누어라. 우리는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하나의 랑그를 의미론적이고 화용론적인 내용들에,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들에,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 정치에 연결시키는 추상기계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하나의 기호학적 고리는 다양한 언어학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지각적, 모방적, 신체언어적, 인식적 행위들을 얽는 덩이줄기와도 같다. 따라서 자체로서의 랑그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방언들, 사투리들, 속어들, 특수언어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화자-청자의 이상(理想) 같은 것은 없으며, 등질적인 언어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인라이히의 공식화에 따르면, 랑그는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어(母語)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지배적인 한 랑그에 의해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랑그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의 주위에서 안정된다. 그것은 구근(球根)을 이룬다. 그것은 줄기들과 지하수들을 통해서, 계곡물들을 따라, 또는 철로들을 따라 진화하며, 기름자국들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언제라도 내적인 구조적 분해를 통해 랑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뿌리들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늘 계통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적인 방법이 아니다. 반면 리좀적인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로 그리고 다른 등록부들(registres)로 탈중심화함으로써만 분석할 수 있다. 하나의 랑그는 무능력해질 때에만 자체의 차원에 폐쇄되는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또는 그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그래서 기표(작용)적인 단절들에 대항. 하나의 리좀은 임의의 어떤 곳에서 끊어지고 꺾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이런저런 선들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선들에 따라 수선하기도 한다. 이는 개미들에서조차 확인된다. 개미들은 동물-리좀을 형성한다. 그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기도 하며, 또한 끝없이 복구되기도 한다. 모든 리좀들은 자체의 절편선들을 내포하며, 이 선들을 따라 층화, 영토화, 조직화, 기표화, 귀속, … 등을 겪는다. 그러나 리좀들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며, 이 선들을 따라 끝없이 탈주한다. 절편선들이 하나의 탈주선에서 파열할 때마다 리좀에는 도약이 발생하지만, 탈주선은 리좀의 부분을 이룬다. 이 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초적인 형식으로조차도, 이원론 또는 이항 분할에 근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탈주선을 긋지만, 늘 그 위에서 다시금 전체를 재층화하는 조직화들을, 하나의 기표에 권력을 재부여하는 구조들을, 하나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들을 되찾을 위험에 처하곤 한다. 집단들과 개인들은 오로지 응결되기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들을 내포한다. 그렇다, 개밀속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다시 시작되어야 할 어떤 선별의 산물일 뿐이다.   탈영토화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양란(洋蘭)은 하나의 이미지, 말벌의 트레이싱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이 이미지에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자체 양란의 생식 기구의 한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며, 꽃가루를 실어 나름으로써 양란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말벌과 양란은 둘이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물론 양란이 기표적 방식으로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냄으로써 말벌을 흉내 낸다고(미메시스, 의태적 모방, 속임수 등)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층들의 층위에서만 참이다. 즉 흉내는 두 층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성립하며, 양란에서의 식물적 조직화가 말벌에서의 동물적 조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좀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 흉내/모방 이상의 그 어떤 것, 즉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원자가의 증가, 진정한 되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양란-되기, 이 되기들 각각은 한 항의 탈영토화와 다른 한 항의 재영토화를 함축하며, 두 되기는 탈영토화를 계속 더 멀리 밀고나가는 강도들의 순환을 따라 서로를 이끌어내고 또 서로 교대한다. 흉내내기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다. 두 이질적 계열들이 공통의 리좀으로 구성된 탈주선에서 파열되고 있는 것이다. 레미 쇼뱅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화의 도식들이 수목형 모델 및 혈통 모델 같은 낡은 형식들을 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하나의 비루스는 생식세포들에 접속해 스스로를 하나의 복합종의 세포유전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종의 세포들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면 이전 숙주에서 유래한 ‘유전정보들’을 옮기기도 한다. 진화의 도식들은 보다 덜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즉 수목형의 혈통 모델들을 따라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좀을 따라 이질적인 것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의 선으로 건너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의 논리이다.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 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 굴은 동물 리좀이다. 쥐 굴에서는 이동 통로로서의 도주선과 저장이나 서식을 위한 지층들이 때때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끝-   [출처] 리좀 (6) -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작성자 옥토끼    
1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리좀 해설 댓글:  조회:722  추천:0  2018-10-19
천개의 고원(새물결), 리좀, 4,5 문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동의 이유는 구조화(형식화)된 틀 속에서의 지속적인 노출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조화된 관점으로 바라보다가 개인들은 다양한 개인들을 만나고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다양한 관점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토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면, 그것은 배가 고파서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배가 아파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면, 음식을 찾아 먹는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배가 고픈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남과 동시에 배의 허기짐을 느끼게 되고, 식사를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상황등의 여러 이유들 때문이다. 여러 전제들을 토대로 우리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꼬르륵 소리를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파악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P.16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제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 버로스의 잘라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예로 들은 것처럼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배고픔을 나타낸다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선 여러가지 조건들이 갖추어 져야만 한다. 만약 이 조건들을 모른다면 꼬르륵 소리는 다양한 이유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친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이 배가 고파서인지 배가 아파서인지 정확히 파악해낼 수 없다. 친구가 그 소리의 이유를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한.)      이러한 전제들을 토대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 것, 이것을 리좀이라고 부른다. 리좀은 일반적으론 다양체의 형태로 존재를 하지만, 어떠한 조건들과 연결되었을 때, 하나의 의미를 나타낸다.     -P.17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리좀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를 말하기 전에 앞의 글,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한 단어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꼬르륵 소리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게 되지만, 전제가 존재해서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즉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해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도 분명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들뢰즈는 리좀을 쥐 굴, 감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의 이유를 살펴보자.      쥐굴의 경우, 쥐가 굴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다면 쥐 굴은 쥐의 식당으로 의미하며, 쥐가 굴에 들어가 잠을 잔다면 쥐 굴은 침실을 의미하고, 쥐가 천적을 피해 숨는다면 은신처를 의미한다. 즉 굴 하나가 쥐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활용도를 지닌 쥐 굴은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리좀과 같은 방식이 되는 것이다.        감자의 경우, 감자는 다양한 뿌리들 중간이나 끝에 감자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어떤 뿌리를 통해서든 말이다. 어떤 뿌리로든 간에 감자가 생겨난다는 점에서 감자는 다양한 뿌리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하나의 감자는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즉 감자는 다양한 뿌리에서 자라날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의 뿌리에서 감자는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리좀과 같은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자료 . 2 《천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새물결)   1. 서 론 리좀   우리는 둘이서『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이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없는 몸체는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화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 접속 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에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특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 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어린 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 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다양체를 만들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징들. 원리 1과 원리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多質性)의 원리: 리즘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리즘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배치물이란 이러한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이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이것은 구조들을 분산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방이나 유사성은 없다. 다만 기표작용적인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공통의 리좀으로 이루어진 도주선이 있고, 그것을 향한 두 이질적인 계열의 폭발이 있을 뿐이다. 리좀은 하나의 반(反)계보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에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 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여럿〉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수염뿌리 유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위계적이지 않은 척 제시되고 언표될지라도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위계적인 해답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 유한한 수의 상태들과 그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는 전쟁 리좀이나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장군〉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n은 언제나 n-1이다.   중요한 점은, 뿌리-나무와 수로-리좀이 대립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이는 또 다른 새로운 이원론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 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한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일종의 반(反)계보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 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출처]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리좀 해설|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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