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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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의 기록과 증언, 새로운 세대의 횃불   김호웅   조선왕조 후기의 뛰어난 문장가이며 서화가였던 유한준(1732∼1811) 선생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知则为真爱,爱则为真看, 看则畜之而非徒畜也)” 라고 했다. 사서오경이나, 성경 속의 말씀과 같은 이 금언(金言)은 1990년대 중반 한국의 미학자 유홍준 선생이 그의 명작《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우리 말로 멋지게 번역,소개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다. 이는 또한 뜨거운 가족애와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수년 간 불철주야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 마침내 《원색의 기억——동북에서 살아온 조선족가족의 이야기》(이하 이라 함)라는 장편수기(长篇纪实文学)를 펴낸 계영자씨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명언이라 하겠다.    사실 나는 계영자씨와는 대학 4년 동안 같은 교실에서 공부한 동기동창이다. 계영자씨는 대학에 들어올 때 벌써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는데 공부도 잘 했거니와 학급의 큰언니 구실을 했고 학급간부회의나 당지부회의 때 보면 자기의 소신과 견해를 똑 부러지게 이야기했다. 특히 대학을 졸업한 후 해변도시 대련에서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심심찮게 보고 듣게 되었다. 1998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고중부가 설립될 때 나는 하객(贺客)으로 초청을 받는 영광을 지니고 현지에 가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닷가에 있는 대련성(大连程)이라는 광장에 대련을 빛낸 천 명의 걸출한 인물들의 발자국이 대형 동판들에 찍혀 깔려있는데 그 속에 계영자씨의 발자국도 있었다. 다른 인물들의 발자국에 비해 좀 작지만 소담스러운 그 발자국, 그것은 그의 눈물겨운 분투의 역정과 출중한 업적을 그대로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후에 《추억이 깊은 곳에 파란 꽃이》라는 그의 수필집을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의 높푸른 이상과 격정, 인민교사의 미덕과 중학교 교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추억의 깊은 곳에 푸른 꽃이》라는 수필집에 대해서는 대련 현지의 유명한 시인 김파 선생, 연변의 저명한 평론가 김룡운과 최삼룡 선생이 상세히 소개하고 분석, 평가했다. 또 이 장편수기에 대해서도 계영자씨와 필자의 대학시절 담임선생님인 김병민 교수가 참신한 시각과 이론적 틀을 가지고 정곡을 찌르는 논평을 하였다. 자식, 안해, 어머니, 교장 등 일인다역(一人多役)의 배역을 훌륭히 연출한 계영자씨의 인간적 매력과 심령의 미, 그간의 노고와 업적을 높이 사준 최삼룡 선생의 분석과 평가에도 수긍이 간다. 또한 사회력사적비평, 다문화주의시각과 서사미학의 각도에서 《원색의 기억》이 가지는 인문학적 가치, 서사구조나 인물성격 등에 대해 간단명료하지만 깊이 있게 분석, 평가한 김병민 교수의 서문에는 더더욱 공감한다. 그러니 필자가 이 작품을 두고 다시 구구히 분석, 논의한다면 오히려 사족(蛇足)이 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이 장편수기를 읽는 동안 너무나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이상 이 작품의 역사적이며 미학적인 가치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각도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민족의 뿌리와 역사는 기억과 기록으로 남는다. 그것이 왕후장상의 공훈담이든 서민백성의 이야기이든, 또 자랑스러운 역사이든 수치스러운 역사이든 이를 기억하고 이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확실하게 실천하는 민족만이 영원히 생존할 수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말해준다면 예루살렘의 많은 유적들은 온갖 수난으로 점철된 유대민족의 슬픈 역사와 트라우마(tráumə), 즉 정신적 외상(外傷)을 기록, 증언하고 이를 넘어서 민족과 나라의 부흥과 독립, 발전과 번영을 약속해준다.    이 장편수기는 “나의 가족”, “남편네 가족”, “나의 교육사업성장사” 등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20세기 초부터 오늘에 이기까지 장장 100년의 역사를 5대에 걸치는 3십여 명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그야말로 청나라 말엽 4대 가족의 흥망성쇠를 다룬 조설근의 장편거작 《홍루몽》을 연상케 하는 방대한 가족관계이다. 구술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이 기나긴 역사와 수많은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작자는 어떻게 다루었을까? 물론 이 거창한 가족사의 중심에는 계영자씨가 있고 그의 시점으로 모든 인물을 다루고 평가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친정집의 역사, 시집마을의 역사, 작자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대의 생활사로 구성되는데 이 3부곡은 삼각형 파라미트 형 구조를 취한다. 한자로 말하면 쌓을 루자형(垒字型)구조를 이룬다.    먼저 1세와 2세들의 이야기다. 계씨, 신씨, 김씨 등 세 가족이 천신만고 끝에 중국 동북에 정착해 인척관계를 맺고 삶의 기반을 마련한다면 그중 계씨네 가족의 막내딸 계영자씨가 리씨네 가족에 시집을 감으로써 계씨네 가족과 리씨네 가족이 사돈이 된다. 여기서 리성해와 계영자 내외를 비롯한 3세와 4세, 지어는 5세들의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참으로 방대한 가문이요, 복잡한 인물관계를 이루지만 루자형 서사구조를 취함으로써 그 맥락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작자는 시간변조(Anachrony)와 같은 현대소설의 서사기법을 활용해 현재의 사건이 진행되는 도중에 과거의 사건들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현재의 사건을 진행시키는 중에 뒤이어 일어나는 사건을 앞질러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결합모티프(bound motifs, 생략할 수 없는 모티프, 스토리를 다시 이야기할 때 빼버리게 되면 사건의 연결을 혼란시키는 요소들)와 자유모티프(free motifs, 생략할 수 있는 모티프, 스토리를 다시 이야기할 때 빼버려도 서사체의 일관성을 깨드리지 않는, 즉 사건들의 전체적 인과의 연대기적 과정을 혼란시키지 않는 요소들)를 자유롭게 교차시키는 현대소설의 서사기법을 자유롭게 활용함으로써 기본 이야기줄거리에 새로운 가지를 치고 복선과 조응의 미를 창출하며 주요 인물들의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산재지구 조선족이민사의 예술적 화폭으로서 이 작품에 담겨진 아래와 같은 이야기들은 기존의 이민사 관련 작품, 특히 연변지역의 이민사 관련 작품에 비해볼 때 제재의 참신성과 작자의 탁월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하나는 동북으로 이주하게 된 원인을 다양하게 밝히고 있다. 리씨네 가족은 평안북도 태천군에 살 때부터 지체 높은 양반가문이었다. 하지만 아들놈이 동네의 아이들 싸움에서 이웃에 사는 보다 권세 있는 양반가문의 자식을 몽둥이로 때려눕힌 까닭에 그네들의 보복을 피해서 하는 수 없이 솔가도주해 압록강을 건너 동북지역으로 들어온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재해와 일제의 침탈로 말미암아, 또는 항일독립운동이나 교육구국을 하기 위해 정든 고국을 등지고 동북에 온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리씨네 가족처럼 특이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울며 겨자 먹기로 동북에 정착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의와 법도를 중요시하고 위계질서가 분명한 몰락양반의 가문, 그러나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살리면서 칠전팔기 동산재기 하는 리씨가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둘째로 “아리랑현상”에 대한 서사이다.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한 우리 민족의 이주는 한 번에 이루어지고 한 곳에 정착해 둥지를 틀고 살아온 게 아니다. 이들은 “9.18사변”이나 만보산사건 때처럼 전란을 피해 여러 번 이주를 하거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특히 물이 있고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더 좋은 고장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를 사학계에서는 “아리랑대오(阿里郞队伍)” 또는 “아리랑현상”이라고 한다. 계씨네 가족도 그러했다. 평안북도 선천군에 살던 이들 가족은 먹고 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선후로 심양, 휘남, 반석, 우란호트, 통료, 개원에 가서 살다가 다시 휘남을 거쳐 개원에 정착한다. 따라서 계씨 가족의 이민사와 정착사를 통해 동북지역의 지리와 인문 상황을 폭넓게 보여줄 수 있었다.    셋째, 이들이 살았던 다민족 내지 다문화적인 생존공간이다. 연변의 경우는 주로 조선인 농민들끼리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면 요녕성이나 길림성 북부, 내몽골지역의 경우는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과 잡거하는 거주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다민족, 다문화적인 거주형태는 여러 민족 간의 언어와 풍속의 차이, 갈등과 반목, 소통과 융합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이주민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갈등과 고뇌는 더욱 극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민족의 잡거형태는 조선인 이주자들에게는 단일문화형태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반성, 극복하는 계기로 되였고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다른 민족들과의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계기로 되였다.    이 장편수기는 상술한 사회문화배경을 폭넓게 제시하면서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조선인 이주민들이 원색적인 삶과 다양한 인물성격을 부각하고 있다. 서사작품의 가치는 이야기성에 의해 좌우지된다고 할 때 이 작품의 적재적소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은 읽을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하지만 수기나 평전의 경우 진실성은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전기적비평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프랑스 비평가이며 전기작가(传记作家)인 상트 뵈브(1804-1869)는 “나에게 좌우명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 그리고 오로지 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진실을 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주(传主)의 구술이나 자전(自傳)의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부풀린 부분이 있기에 마련이다. 또한 작자가 전주나 주요 인물들과 인척관계가 있을 경우에는 그 공(功)과 과(过)를 객관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저도 모르게 공적은 부풀리고 허물은 감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는 객관적인 태도와 냉철한 비판정신이 요청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책임지는 “오로지 진실”의 원칙을 가지고 계씨와 리씨 양가의 역사와 가풍; 양가의 조부모와 부모, 고모와 이모, 그리고 형제자매를 비롯한 모든 친인척들에 대해 그 원색적인 모습, 말하자면 이들 가문의 빛과 그늘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드러냈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친정마을의 경우를 보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벼농사를 하는 친정아버지, 그러나 그는 부모님에게는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아랫사람들의 의견은 덮어놓고 묵살하는 전통적인 효자요, 아버지상이다. 그리고 13살에 시집을 가서 팔남매를 낳았고 이들을 키우기 위해 그야말로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어머니, 하지만 시어머니 앞에서는 부르튼 소리 한 마디 못하고 꼬박꼬박 월급봉투를 바치는 어머니의 모습 역시 너무나 진실한 구시대 며느리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시집마을의 경우, 가문이 대소사를 쥐고 흔드는 지고무상의 어른인 할머니의 모습, 죽어지내는 아버지와 며느리의 모습도 잘 그렸거니와 할아버지와 어린 장손이 따로 밥상을 받고 나머지 식구들은 저만치 비켜 앉아 궁색하게 밥을 먹는 장면도 잘 그렸다. 특히 봉건시대의 유습과 권위, 가족관계와 가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광명뜨락(光明大院)은 그야말로 《홍루몽》의 가부(贾府)를 연상시킨다. 그 외에도 친정집의 여러 삼춘과 삼촌댁, 오빠와 언니들; 시집마을의 고모나 고모부, 그리고 시누이들의 형상도 너무나 생동하게 그렸다 하겠다. 특히 남존여비의 고루한 유습과 다른 민족과의 통혼에 대한 반대에 부딪쳐 실의와 절망을 하던 나머지 죽을 고비를 겪는 작자의 큰 언니,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에 가서 고된 일을 하다가 오진을 받고 이상한 주사를 맞고 까닭 없이 죽은 작자의 시동생 리성림, 아내를 한국에 보내고 쓸쓸하게 지내다가 술에 취한 나머지 벽과 침상 사이의 틈새에 끼워 숨진 작자의 시동생 리성광, 그야말로 코리안 드림의 여파에 찢어지고 부수어진 그들 가족의 커다란 아픔이요, 우리 조선족사회의 어두운 단면(断面)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 작품의 중심에는 작자의 자아형상이 서 있고 그의 예리한 시선과 시각이 전편을 관통하고 있다. 결혼식 날 새하얀 너울을 쓰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지만 큰상에 오른 음식 수를 헤아려 보는 계영자씨, 음식과 과일 등속이 서른여섯 가지라는 것까지 헤아리는 그 눈매도 매섭지만 신랑감과 처음 만나는 순간 그의 키가 1미터 72센티라는 것까지 한 눈에 알아본다. 작자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천부적인 관찰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가족과 일가친척에 대한 계영자씨의 남다른 사랑이다. 이 세상에 시집마을 일가친척의 내력이나 가족성원들 매 개인의 성격이나 아픔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며느리가 몇이나 될까? 계영자씨의 가족애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 그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까지 확산된다. 이 작품의 제3부는 자신의 교사생활을 다루고 있지만 전면에 나오는 것은 인민교사의 투철한 사명감을 안고 성심성의로 일하는 교사들과 천진무구한 아이들, 장난꾸러기 또는 상처를 입은 문제아들이다. 교장인 계영자씨의 모습은 다만 사려 깊은 그의 눈빛과 조용한 목소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어린 학생 역시 완정한 인격체라고 생각한다. 애들도 인간적인 존엄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은 반드시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하기에 섣부른 훈계나 무자비한 체벌(体罚) 대신에 쉬운 비유를 통한 대화와 소통, 도덕적인 감화에 초점을 둔다. 구소련의 교육가 마카렌코를 비롯한 저명한 교육자들의 저서를 폭넓게 읽은 계영자 교장은 아무리 이름난 문제아라 해도 그의 마음속에는 악마와 천사가 공존하고 있다고 본다. 그 악마를 쫓아내고 천사를 살려내면 새로운 인간으로 재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 나오는 하나의 이야기만 보기로 하자. 다른 학생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중학생을 교육하는 장면이다.    “정치교육처의 리종윤 주임과 담임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새로운 정황을 회보했다. 그래서 나는 리종윤 주임과 함께 그 학생을 찾았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언제나 나를 보면 “안녕하세요?” 하고 깊숙이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던 학생이었다. 그 날도 그 애는 깍듯이 인사를 했는데 별로 긴장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애가 꼭 물건을 훔쳤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미리 교육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정면적인 교육을 하기로 했다. ‘우리 몸이 더러워졌다고 하자꾸나. 온 몸에 덕지덕지 때가 끼었다면 어떠한 느낌이 들까?’ 하고 내가 넌지시 묻자 ‘몸이 가렵고 근질근질하겠지요.’ 하고 그 애가 대답했다. 나는 한 술 더 떠서 ‘몸이 가렵고 근질근질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하고 물었더니 그 애는 ‘목욕을 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나는 ‘맞았어, 옳게 대답했어. 몸이 더러워지면 목욕을 해야 해. 그건 정확한 선택이야’ 하고 그 애의 대답을 긍정하고 나서 또 물었다. ‘목욕을 하고 나면 기분이 어떠할까?’, ‘기분이 상쾌하고 홀가분해지겠지요’, ‘잘못을 저질렀다면 기분이 어떨까?’ 하고 내가 슬쩍 말머리를 돌리자 그 애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마음이 편치 않지요 뭐’, ‘몸에 진득진득 때가 낀다면 근질거려서 죽을 맛이겠지. 이 때 목욕만 하면 상쾌한 기분이 들거든. 같은 도리야. 잘못을 저지르면 마음이 편치 않고 괜히 심리적인 부담을 갖게 되는 거야. 솔직하게 잘못을 승인한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수 있어. 무거운 심리부담을 내려놓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상쾌하겠어. 너도 목욕하지 앉을래?’ 그 애는 마침내 입귀를 실룩거리더니 ‘저도 목욕하고 싶어요’ 하고 말하했다. 내가 한 마디 더 뚱겨주었다. ‘난 네가 성실한 학생이라고 믿어. 성실한 학생은 무엇보다 먼저 잘못을 승인해야 하고 온 몸을 가볍게 가질 줄 알아야 해. 이렇게 할 수 있겠니?’,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좋았어, 그렇다면 너는 언제부터 남의 물건에 손을 댔지?’”   그 중학생이 마침내 남의 물건을 훔친 사실들을 이실직고하고 나쁜 버릇을 고치고 좋은 학생으로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훌륭한 교사들이 교편을 잡고 이런 성자와 같은 교장이 학교를 관리하는 이상 이 학교가 학부모들의 신뢰와 성원을 받지 못할 리 없겠다. 학부모들은 교사의 얼굴을 보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옛사람들도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이름난 산이요,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신령한 못이다(山不在高, 有仙则名。水不在深,有龙則灵)” 라고 노래했으리라.    계씨와 리씨 두 가문의 1세로부터 5세에 이르는 여러 가족성원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작자가 시종일관 관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부조(父祖)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 세대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3세와 4세, 5세에 속하는 인물들을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때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하나는 대련을 비롯한 중국 현지에 남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고 그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해서 우수한 민족으로, 존경받는 민족으로 거듭나는 경우다. 리성해씨가 그러하고 작자를 비롯한 대련조선족학교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그러하다. 계영자씨의 부군 리성해씨,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는 수재다. 그는 대련수산학원을 졸업하고 대련시수산국에서 열심히 일해 “수산국의 컴퓨터 머리”로 불린다. 특히 그의 듬직한 성품과 일거수일투족은 양반가문 장손의 이름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일가친척의 장례는 물론이요, 동료나 친구들의 가문에서 장례를 치를 때마다 선참으로 달려가 시신을 감장하고 마른일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다.    특히 계영자씨를 비롯한 대련조선족학교 교사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연해도시 대련에 둥지를 틀고 열심히 일해 40여 명 소학생 밖에 없던 학교에 유치원을 앉히고 초중부에 이어 고중부를 설립하며 명문중학교로 부상시킨다. 두세 번씩 이사를 하면서도 군소리 하나 없이 철철 땀을 흘리며 일하는 교사들, 당과 정부의 지원을 유치하고자 수십 번씩 정부의 관련 인사를 찾아가고 간곡히 호소하는 교사와 직공들,앞 다투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지원하는 조선족 지명인사들과 학부모들, 이들은 중국을 삶의 유일한 터전으로 생각하고 교육을 통해 훌륭한 국민으로 거듭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이다. 리애순, 신옥근, 신참생, 리철을 비롯한 3, 4, 5세들은 한국과 일본으로 진출한다. 리애순은 여자는 조신하는 게 좋고 집안에서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다는 양반가문의 계율과 단속에서 벗어나 열심히 공부해 요녕대학 일본어학과를 졸업했고 결혼한 후에도 남편을 두고 일본에 나가 공부한다. 그는 마침내 석사,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일본에 정착하며 뛰어난 경영인으로 활약한다. 심옥근은 어떠한가? 그는 총명하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다. 그는 개원과 철령에서 공부했고 1995년 일본기업들이 중국에 대거 진출하는 기미를 알아채고 일본어를 전공하기로 작심했다. 마침내 요녕대학 일본어학과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에 가서 알바를 하면서 대학을 수소문하던 중 교토대학 문학과에 입학한다. 수사(修士)과정을 마친 심옥근은 박사과정에 입학하나 이를 접어두고 교토의 어느 한 다국적기업에 취직해 대외판매를 책임진다. 그녀는 결혼한 후 중국에 돌아오나 일이 여의치 앉자 다시 일본에 가서 원래 일하던 회사에 쉽게 취직한다. 그의 책임감과 능력은 회사 측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현재 그는 귀여운 아이까지 낳고 일본에 보금자리를 틀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기에 신옥근은 자기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하던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소설 을 읽고 나서야 그 답안을 찾았다. 중국에 남은 일본의 고아가 중국의 양아버지 손에서 자랐고 또 중국의 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일본에 있는 친아버지가 그를 보고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그는 ‘나는 대지의 아들이니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 고아도 고민과 갈등이 많았을 것이다. 내 몸에는 분명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나는 중국에서 자랐고 중국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 과연 나는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마침내 나도 일본이냐, 중국이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기로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온 이 땅이요, 나는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작자는 상술한 두 가지 삶의 형태에 대해 어느 한 쪽을 긍정하고 다른 한쪽을 매도(罵倒)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인물의 운명선과 전반 이야기를 통해 작자의 폭넓은 흉금, 새로운 사고와 견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작자는 우리 조선족은 이제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도 아니며 바람 따라 떠도는 부평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중국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모범적인 중국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면서 돈에 눈이 어두워 덮어놓고 농토와 삶의 기반을 버리고 한국으로, 외국으로 나가는 행태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세계화의 바람과 탈지역화의 물결은 피해갈 수 없는 법이니 우리의 자식들이 중국 여러 지역 내지 다른 나라로 뻗어나가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라고 본다. 새로운 세대들이 우리의 뿌리와 역사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더욱 열심히 살며 중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간다면 우리조선족의 문화영토는 오히려 더욱 넓어진다고 확신한다. 바로 여기에 작자의 남다른 혜안과 비전이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벌써 천애지각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혈육의 정으로, 개척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철통같이 뭉친 새로운 가족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하기에 이들 가족은 “문화대혁명” 때 억울하게 투쟁을 맞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온 가족이 떨쳐나섰던 것처럼 서로의 행보와 운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만 생기면 사면팔방에서 달려오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조선족의 피눈물 나는 이민사와 자랑스러운 투쟁사를 다룬 책자들이 적잖게 나왔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를 비롯해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 정판룡의 《고향 떠나 50년》, 김병민의 《와룡산일지》등을 대표적인 작품으로 곱을 수 있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구술, 회고, 취재, 기록을 통해 서로 독립되는 단편적인 작품으로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집대성한 사화(史話)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후의 분대장》은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사와 한평생 비정한 정치권력에 저항한 조선족의 대표적인 지성의 일대기를 다룬 자서전이요, 《고향 떠나 50년》은 뛰어난 총명과 지혜를 가진 한 조선족청년의 끈질긴 분투와 자랑스러운 성공의 역사를 기록한 자서전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와룡산일지》는 연변대학의 창립, 성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자랑스러운 족적을 남긴 훌륭한 교육자들의 일대기와 업적을 하나하나 돋을새김으로 기록한 “연변대학의 사기열전(史記列傳)”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계영자씨의 《원색의 기억》은 아마도 산재지역 조선족의 역사와 현실을 가족사의 형태로 폭넓게 다룬 최초의 장편수기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자라나는 세대의 진로를 밝혀주는 하나의 횃불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변조, 결합모티프와 자유모티프 등 다양한 서사기법을 동원해 거대서사와 미시서사를 결합시킨 방대하면서도 조리정연한 서사구조와 풍부한 이야기성, ‘오로지 진실’의 원칙에 입각해 산재지역 조선족사회의 다양한 인물성격과 인물군상을 창조한 점을 높이 사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족의 역사와 진로,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모색, 우리 민족의 이산(离散)과 분포 형태의 변화, 문화신분의 재구성 등 초미의 관심사에 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점 역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문으로 된 이 작품을 수정, 보완해 아름다운 우리 조선어로 번역, 출판해야 할 과제가 남았다. 이 작품의 “부록”들을 본문에 넣어도 무방하다고 보며, 소설적 기법을 차용해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3부의 경우 여러 소제목들에서 다룬 내용이 서로 편폭나 분량이 균일하지 않아 들쭉날쭉한 감을 주기에 일부 소제목들의 내용을 하나로 아우르기 바란다.    이로써 아름다운 연해도시 대련에 큰 족적을 남기고 우리민족 정신사의 큰 탑을 쌓아올린 우리 동창 계영자씨에게 경의와 축하를 드린다.    - 2018년 7월 16일    
7    [작품평] 수필의 현대성과 수필가의 자질 댓글:  조회:730  추천:0  2019-07-14
김호웅 남영도씨의 원래 이름은 남복실, 복실福实이라는 귀염성 있는 이름을 왜 영도璎桃로 고쳤는지 알 길이 없다. 평소에 복실씨라고 불렀으니 그냥 원래 이름을 부르기로 하자.  아무리 인용부호를 쳤지만 이모 벌, 적어도 큰언니 벌 되는 이를 두고 ‘가슴’이 큰 녀인이라고 대문짝 같은 문자로 잡지에 내다니,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가만히 생각하면 그야말로 절묘한 은유다. ‘가슴이 큰 녀인’, 이 이상 더 적절한 은유가 어디 있을가? 나는 복실씨보다는 10여살 더 많지만 대학시절에는 겨우 2년 선배였을 뿐이다. 학창시절에는 잘 몰랐지만 열심히 광고회사를 경영하면서 장학사업을 하고 있는 복실씨의 부군 리춘일씨와는 역시 허물없는 선후배 사이다. 더더구나 복실씨의 대학동창들인 정일남, 우상렬 박사와는 평생 같은 학과에서 일하고 있는 만큼 복실씨의 인간성과 재능, 그들 부부의 러브스토리까지 조금은 알고 있다. 주책머리 없이 좀더 늘어놓다가는 재수없이 ‘미투’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복실씨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입을 다물자. 아무튼 그 나무에 그 열매요, 그 사람에 그 글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젠 복실씨의 3편의 수필만을 보기로 하자.  는 한국 TV에 나오는 치타댄스에서 힌트를 받고 팔순이 넘는 시어머니와 지천명의 나이를 넘은 며느리와의 이야기, 말하자면 작가 자신과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수필이다.  하지만 나이가 원쑤다. 겉보기에는 밝고 명랑해보이지만 팔순을 넘기면서 어머니의 동작이 예전보다 느려지고 청력도 떨어지고 감각도 무뎌가고 있다. 집안에 치매환자가 있으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진다는 말에 복실씨는 더럭 겁이 나기도 한다. 어머니가 이런저런 실수를 할 때마다 복실씨는 잔소리를 한다. 제주도에 갔을 때는 어머니가 손가방을 숙소에 둔 채 공항까지 와버려서 숙소로 되돌아가서 찾아온 적도 있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치매를 들먹이며 어머니를 단속하게 된다고 했다.  여기서 나의 반성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게 되면 모든 것을 리해하고 깨닫게 된다. 복실씨는 비로소 세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압록강을 건너온 꼬마가 팔순고개를 넘기까지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어머니, “설명절이 오는 건 좋지만 나이 먹는 건 싫구나!” 하고 솔직히 털어놓는 어머니, 건강검진을 받고 “100살까지 문제 없겠수다!” 라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다시 싱글벙글 웃는 ‘미소할머니’가 되는 어머니를 충분히 리해하게 된다.  라는 제목은 위만주국 시기 연변 등지에서 활동한 소설가 현경준의 소설 을 련상케 한다. 현경준의 소설 은 아편중독자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여 명우와 규선이라는 조선인 청년의 재생을 그린 작품이다. 그렇다면 복실씨의 수필 는 현대인 또는 중산층의 취미생활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주지하다 싶이 개혁개방 40년, 우리 나라 중산층의 수는 대폭 늘어났고 낚시 등산, 음악, 미술, 독서, 려행 등 취미생활을 중요시하는 게 하나의 풍조로 되였다. 북경, 상해와 같은 대도시 시민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작가의 경우도 오십 평생을 살도록 악기라고는 하나도 다룰 줄 아는 게 없어서 늘 가슴 한켠에 서운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만난 가야금이 그 자리를 채워주었다. 하지만 따분하고 지루한 련습, 식지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나지만 반창고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 꼬박 2시간씩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니 다리가 저려서 물러날 것만 같다. 젊은 사람들은 척척 진도를 나가는데 복실씨의 손가락은 굵은 탓인지 아니면 감각이 둔한 탓인지 잘 튕겨지지 않고 그냥 제자리걸음이다. 그래서 창피스럽게 ‘나머지공부’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고의 나날을 거쳐 하나의 진리를 터득한다. 말하자면 멀리서 볼 때는 화려하고 멋있는 것들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실은 고된 련습과 노력의 결과물임을 깨닫게 된다. 어디 이 뿐인가. “전에는 현란한 손놀림과 우아한 선률로 나를 사로잡았다면 이제는 들뜨지 아니하고 차분하게 끈기 있게 다가갈 때 더 깊은 매력을 뿜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기에 작가는 “그저 물 흐르듯이 순리에 따라 살면서 가야금을 배우며 터득한 리치를 내 소소한 일상에 적용하여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지음이 되고 지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가야금을 배우는 과정은 자기의 마음을 갈고 닦는 과정, 인격적 수련의 과정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수필적 언어는 대체로 고유어에 바탕을 둔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여야 한다. 이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물론 듀엣(duet)은 영어로서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성부로 노래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생소한 영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공연히 작가의 음악적인 소양과 지식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을 뿐 일반 독자들에게는 너무 당황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세월 앞에 고개 수그리고 유자孺子의 소가 되여”라든지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현란한 손놀림과 우아한 선률”이라든지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노라 씩씩하게 말할 수 있다”와 같은 표현은 중국의 로신, 한국의 김춘수나 천상병의 시구를 려과없이 인용해서 오히려 이상한 느낌을 준다. 상호 텍스트성을 주창한 이들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남의 명언을 가져오더라도 그 출처를 밝히거나 아이러니나 역설, 패러디를 통해 변형시키고 자기화해야 한다. 하지만 맹자가 인의례지신仁义礼智信에서 의로움을 군자의 최고의 덕목으로 보았듯이 중산층의 조건과 덕목에서도 공분公愤에 의연히 참여해야 함을 필수불가결의 덕목으로 인정하는 만큼 수필의 제재령역을 좀더 확장하고 사회비판성을 지닌 작품들도 더러 쓰기를 바란다. 어머님과의 이야기는 많은 수필에 나오지만 북경의 멋쟁이 기업인 리춘일씨의 모습은 항상 베일에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이게 나 혼자의 궁금증일가? 출처: 2018 제4호
6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 댓글:  조회:4314  추천:3  2013-07-29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 김호웅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 년을 외따로 살아간들/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고려속요「정석가」에서 머리말 1990년대 초반 정판룡(鄭判龍) 선생이 “시집 온 며느리론”2), 즉 중국조선족문화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처음으로 논지를 편 후 조성일(趙成日) 선생이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를 전개했고3) 이러한 관점은 다다소소 차이는 있지만 김강일, 김관웅 등 선생에 의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4). 하지만 최근 황유복(黃有福) 선생은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성격과 이중적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조성일 선생은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고5) 황유복 선생이 다시 매몰차게 받아쳤다6). 조성일 선생과 황유복 선생은 중국조선족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이고 두 선생의 쟁론은 우리의 역사와 민족적 정체성 및 향후 생존과 발전전략에 관한 원론(原論)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음으로 이를 강 건너 불구경 식으로 대할 수 없다. 황차 본인은 중국조선족의 진로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고, 특히 디아스포라의 시학(詩學)으로 중국조선족 문학작품들을 다루어온 것만큼 두 선생의 논쟁(아래에 “조-황 논쟁”이라 약함)에 대해 명철보신, 수수방관할 수 없다.  상술한 문제에 비추어 이 글에서는 “조-황 논쟁”의 문제점을 살펴본 후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성격, 이중문화신분, “제3의 영역” 및 “접목의 논리” 등에 관한 필자의 소견을 내놓음으로써 학계의 보다 깊은 논의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1.조-황 논쟁의 초점과 문제점   조성일 선생이 지적한바와 같이 황유복 선생은 한국에서「중국조선족의 문화공동체」7)라는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들이다.  ▲ 조선족은 디아스포라가 아니다.  ▲ “조선족”은 “한반도의 족속”과 같은 민족이 아니라 “100%조선족”일 뿐이다.  ▲ 조선족에 대한 중국 지성인들의 불신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첫째, 황유복 선생은 조성일 선생의 기본적인 관점을 반박하지 않고 이른바 “이중성”이란 낱말을 꼬투리로 잡아 상대를 공격한다. 물론 조성일 선생의 논의에 일부 개념을 정치(精緻)하게 다루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총체적으로 정판룡 선생의 뒤를 이어 중국조선족문화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논의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황유복 선생은 중국의『현대한어사전』에서 “이중성(二重性)”이란 낱말의 뜻풀이를 이용해 조성일 선생의 지론을 반박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황유복 선생이 오류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 조선어에서 이중성은 다음과 같이 뜻풀이가 된다.  1. “한 가지 사물에 겹쳐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 (한국『새우리말 큰 사전』)   2. “한 가지 사물이 한꺼번에 아울러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 (조선『현대조선말사전』 )   3. “한 가지 사물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성질.” (중국『조선말 사전』) 이처럼 이중성이란 통일성을 전제로 하면서 그 속에 있는 모순성과 불일치성을 지칭한다. 그런데 황유복 선생은 통일성이라는 이 전제는 거론하지 않고 조성일 선생이 마치 “모순성과 불일치성”만 강조한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 조선어에는 쌍중성(雙重性)이란 낱말이 없기에 이중성(二重性)이란 낱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황유복 선생은 한어(漢語)의 언어습관과 한어 낱말의 함의를 가지고 조선어로 글을 쓴 조성일 선생의 전반 견해를 왜곡하고 공박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하면 말꼬투리를 잡아서 조성일 선생의 “조선족이중성론”을 논박함으로써 상대를 “궁지(窮地)”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둘째, 기실 개념 사용에 있어서 더 큰 혼란에 빠진 것은 오히려 황유복 선생 자신이라는 사실을 유식한 네티즌들이 지적하고 있다. “황유복 선생의 용어 사용에 혼동이 있다. 중국 56개 민족을 nation이라 했는데, 응당 ethnic group라 해야 한다. 황유복 선생은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고 따라서 조선족과 韓民族은 다른 민족이라고 했는데, 중국국민이 nation의 개념이고 조선족이 ethnic group의 개념이다. 따라서 ethnic group 면에서 조선족과 한민족은 같은 민족이고 조선족과 중국국민은 nation에서 같은 민족이다.”8) 보다시피 황유복 선생은 민족은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라는 점만 강조한 반면에, 민족은 혈연(血緣), 역사적 기억과 문화, 영토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무시함으로써 편면적인 논의를 하고 있다. 또한 황유복 선생은 한국계미국인들이 “탈한국적인 코메리칸사회”를 만들었듯이 중국조선족도 100여 년간의 이민사, 정착사, 투쟁사를 통해 이미 중국사회에 튼튼히 뿌리를 내린 것만큼 중국조선족이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다고 보는 것은 일종 허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중국조선족공동체가 한국사회와 구별되는 점만을 이야기하고 중국 주류사회와 구별되는 점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른바 탈모국(脫母國)적인 “100%의 조선족”을 운운하면서도 중국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 특히 민족교육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 특히 “100%의 조선족”론은 중국조선족과 모국과의 문화적 연계를 인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 인식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셋째, 황유복 선생은 조성일 선생을 비롯한 이른바 “이중성 논자(論者)”들은 중국 주류사회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 역시 지나친 노파심이라 하겠다. “허구의 이중성 민족론은 중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키워가고 있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은) 도리어 선족(鲜族), 즉 조선족이다. 그들은 김씨 부자에게 충성하거나 혹은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렇게 믿지 못할 민족이라는 비난이 중국의 지성인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열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9) 보다시피 황유복 선생은 중국의 한 사이트에 실린 네티즌의 글을 논거로 삼고 있는데,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사람을 과연 “중국의 지성인”이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세계적인 석학들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nd Said, 1935-2003), 가야트리 스피박(Cayatri C. Spivak, 1942- ), 호미 바바(Homi K. Bhabha, 1949- ) 같은 이들의 지론은 차치하더라도, 중국의 족군(族群)관계를 이론적으로 분석, 종합하면서 중화민족은 “다원일체의 구조(多元一體格局)”를 갖고 있다는 결론10)을 내린 비효통 선생과 같은 중국 최고 석학의 견해는 왜 고려하지 않는지?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이 가지는 이중문화신분에 관해서 중국의 민족학 학자 왕아남 선생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통일된 현대 중화민족국가내부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이중민족신분과 민족의식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역사가 남겨놓은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11) 또한 중국의 탈식민주의 문화이론가인 왕녕 선생도 “문화신분과 그 동일시는 천성적이고 변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분에는 천성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있는데,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있어서 한 인간의 민족과 문화 신분은 얼마든지 이중적이거나 지어는 다중적일 수 있다”12)고 하였다 주지하디시피 중국학계에서는 3천만 이상의 화인, 화교들을 디아스포라(流散 혹은 離散)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각종 저서들에서도 디아스포라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있고 이에 대한 중요한 학술회의도 여러 번 한적 있다. 일례로 현재 고등학교 통용교재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양내교의『비교문학이론교정』에서는 전문 "신분연구"라는 장을 설정하여 세계의 디아스포라문학을 논하면서 3천만 화교의 이중문화신분이 문학창작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13)  그럼 아래에 중국조선족공동체의 특성에 대해 좀 더 이론적으로,구체적으로 접근,논의해 보고자 한다.    2. 디아스포라와 이중문화신분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원래 “이산(離散), 산재(散在)를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주로 헬레니즘시대 이후 팔레스타인 이외의 곳에 사는 유대인 및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14)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인, 아르메니아인이나 세계 각국에 널려 사는 중국의 화교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들을 좀 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디아스포라(diaspora)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지난 세기 70년대 탈식민주의문화이론이 나오면서 소문자 디아스포라는 문화신분이나 소수민족담론에 있어서의 중요한 용어, 지어는 하나의 이론적 범주로 부상하게 되었다.  현대 “문화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학자 슈트아트 ․ 홀(Stuart Hall0, 1932- )은 『문화신분과 디아스포라』라는 저서에서 소문자 디아스포라를 처음으로 탈식민주의 비평의 중요한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소문자로 디아스포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사용한 이 술어는 그 직접적인 뜻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그 은유적인 뜻을 취했다. 디아스포라는 우리와 같은 분산된 민족공동체, 애오라지 모든 대가를 지불하면서라도, 심지어는 기타 민족을 큰 바다로 내몰면서라도 그 어떤 신성한 고향에 되돌아가야만 비로소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러한 특정 민족공동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부하고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종족’형식이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낙후된 디아스포라 관념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액운,그리고 서방이 이러한 관념과 동모(同謀)하고 있음을 보았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디아스포라 경험은 결코 본성이나 혹은 순결도에 의해 정의를 내린 것은 아니며 필요한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정의를 내린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결코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생존을 꾀하는 신분관념은 아니다. 말하자면 혼합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의를 내린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신분은 개조를 거치거나 그 차이성으로 말미암아 부단히 생산되고 재생산됨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갱신하게 되는 것이다. 독특한 본질을 가진 카리브 사람들은 바로 그 피부색, 천연색과 얼굴모습의 혼합이며, 카리브 사람들의 음식은 각종 맛의 혼합이다.디크 ․ 헤프디그의 재치 있는 비유에 의하면 이것은 ‘뛰여넘기’ 이요, ‘썰어서 뒤섞어놓기”의 미학으로서 이는 역시 흑인음악의 영혼이기도 하다.”15) 슈트아트 ․ 홀이 내린 이상의 정의로부터 알 수 있는바 소문자 디아스포라는 대문자 디아스포라에서 파생되었지만 “문화의 혼합성”, “신분의 생산성과 재생산성” 같은 새로운 뜻을 추가함으로써 보다 넓은 개념과 함의를 가진 새로운 용어로 된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외래어를 가급적으로 자기의 언어기호로 전환시켜 사용하기를 고집스럽게 견지해 온, 문화적 주체성이 아주 강한 중국에서는 이러한 소문자 디아스포라를 숫제 “족예산거(族裔散居)” 혹은 “이민사군(移民社群)”으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근대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전쟁, 시장경제 글로벌리즘 등 여러 가지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강제적이거나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슈트아트 ․ 홀이 내린 이상의 정의 중에서 “문화의 혼합성”, “신분의 생산성과 재생산성” 같은 내용이 첨가된 새롭게 확장된 소문자로서의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관심이 모여지는 것은 아이덴티티의 문제이다. 문화연구에서 신분이나 정체성이라는 이 두 개념은 영어에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다. 영어에서의 아이덴티티의 원래의 기본함의는 물질. 실체의 존재에 있어서의 통일된 성질이나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철학의 견지에 본다면 독일 철학가 헤겔이 제기한 “동일성”의 개념으로서 이를 영문으로 번역할 때 역시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했다. 이 경우에는 아이덴티티라는 개념으로 사유와 존재 사이의 동일성 문제를 설명하였는데, 이런 동일성 속에는 사유와 존재의 본질만이 아니라 양자 사이의 차이성도 내포되어 있는데 이 양자 사이에는 일종 변증적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당대의 중국의 문화연구 분야에서 서양의 철학, 인류학, 사회학과 문화연구의 영향 하에서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이 단어를 번역하여 사용하거나 정의를 내리는 경우에 적잖은 혼란이 존재하고 있다. 즉 학자에 따라 “인동(認同)”, “신분(身分)”, “동일(同一)”, “동일성(同一性)” 등 한어 단어들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명석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사천대학교 염가 선생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나의 이해에 의하면 당대 문화연구에서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이 단어에는 두 가지 기본적 함의가 있다. 첫째는 어느 개체나 집단이 특정한 사회에서의 지위를 확인하는 명확하거나 현저한 특징을 가진 의거나 척도, 이를테면 성별, 계급, 종족 등등인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분”이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를 나타낼 수 있다. … 다른 한 면으로 한 개체거나 집단이 자기의 문화상에서의 신분을 추적하거나 확인하는 경우에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동일성을 확인한다(認同)’라고 할 수 있다. 단어의 속성으로 보면 ‘신분’은 명사로서,그 어떤 척도나 참조계로서, 확장된 그 어떤 공동한 특징이나 표징이며, ‘동일성을 확인한다(認同)’는 것은 동사로서 다수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동일성을 확인하는” 행위를 뜻한다. … 오늘날 문화연구에서 고정불변의 본질주의적인 안광(眼光)으로 “신분”이나 그것을 확인하려는 입장은 이미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16) 문화연구에서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특정한 사회에서의 부동한 개체나 공동체의 “사회신분”과 “문화신분”이다. “사회신분”이나 “문화신분” 문제는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회와 문화 속에서 “나는 누구(身分)”인가? “어떻게, 왜 누구(認同)인가?”를 묻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문화신분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중국조선족은 “과경민족(跨境民族)”의 후예들로서, 근대적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왕조의 봉건학정과 자연재해 및 일체의 침탈로 말미암아 조선의 농민들을 비롯한 의병장, 독립운동가, 교육자, 문학인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연변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역에 와서 정착하였는데, 김관웅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은 애초부터 “‘집’잃고 ‘집’을 찾아 해매는 미아(迷兒)”들― 무국적자(無國籍者)들이었다.17) 이들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치발역복, 귀화입적(薙髮易服, 歸化入籍)의 치욕을 감내해야 하였고 일본의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에 의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1909년의 간도협약(間島協約), 1930년대 초반의 민생단사건, 만보산사건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들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양자택일의 고뇌에 시달려야 했고 궁극적으로 희생양의 비애를 맛보아야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에 온 조선인들은 논농사를 도입해 동북지역의 개발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고 반제반봉건의 중국혁명에 커다란 기여를 함으로써 중국 국민으로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이들은 중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릴 수 없었으며 자신의 물질문화, 제도문화, 행위문화, 정신문화 일반에 커다란 애착과 긍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100여 년간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민족교육과 문학예술을 통해 “조선족으로 살아남기”에 성공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은 엄연한 중국국민이로되 여전히 이중 문화 배경과 신분을 갖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의 이중문화신분을 두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의 세계에만 속하지 않는다. 나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인 동시에 미국인이기도 하다. 이는 나에게 기괴하면서도 실지에 있어서는 괴이하다고 할 수 없는 이중배역을 부여하였다. 이밖에 나는 학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든 신분은 모두 분명하지 않다. 매 하나의 신분은 나로 하여금 색다른 영향과 작용을 하게 한다.”18) 사이드와 같은 탈신민주의문화의 이론가들은 이중 내지 다중 문화 배경과 신분을 갖고 제1세계에서 제3세계의 대리인의 역할을 함과 아울러 제1세계의 이론을 제3세계에 전파해 제3세계 지식인들을 문화적으로 계몽시켰다. 『여용사(The Woman Warrior, 女勇士)』(1976)라는 작품으로 미국 주류문학계와 화인문학계(華裔文學界)에서 모두 이름을 떨친 바 있는 저명한 여성작가 양정정(楊亭亭, 1940-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신은 미국의 화인구역에서 자란 화인후예 여성작가이다. 그는 학교에서 거의 모두 미국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기억과 마음속 깊이에는 늙은 세대 화인들이 그에게 들려준 여러 가지 신물이 나면서도 전기적인 이야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비범한 예술적 상상력으로 쓴 이야기 그 자체는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이 아니라 보다 더 자전(自傳)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을 두고 적잖은 화예작가와 비평가들은 전통적인 ‘소설’영지(領地)에 대한 경계 넘기(越界)이며 뒤엎기(顚覆)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생활경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자전적 성분에 지나치게 많은 ‘허구’적 성분이 끼어있다고 말한다. 실지에 있어서 다중(多重) 문체를 뒤섞는 이러한 ‘혼잡식(混雜式)’책략이야말로 양정정의 ‘비소설(非小說)’로 하여금 미국 주류문학 비평계의 주목을 받게 하였고 영어권 도서시장에서도 성공하게 하였다. 양정정, 그리고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화예작가들의 성공은 비단 ‘다문화주의’특징을 가진 당대 미국문학에 일원(一元)을 보태주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화인문학의 영향도 넓혀주었다.”19) 에드워드 사이드나 양정정과 마찬가지로 중국조선족들, 특히 중국조선족 지성인들은“조선문화”와 “중국문화”라는 이중문화신분을 갖고 광복 전에는 중국 경내에서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이라는 이중적 역사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싸웠고 광복 후, 특히 개혁개방 후에는 중한 교류의 가교역할과 남북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문화”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한족은 물론이요, 기타 소수민족과도 구별되며 또 “중국문화”적 요소로 말미암아 중국조선족은 남한이나 북한 또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동포와도 구별된다.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었던 김학철 선생이 중일한 3국을 무대로 싸웠고 후반생을 피타는 고투로 중국에서의 입지를 굳혔지만, 임종을 앞두고 그 자신의 뼈를 고향인 강원도 원산(元山)에 보내기를 바랐던 사례20)에서 알 수 있다시피 중국의 주류사회에 참여, 적응하여 자기의 확고한 위치를 찾으면서도 자기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고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실체이요, 이중문화신분이다.   3. “제3의 영역” 또는 “변연문화형태”   연변을 비롯한 중국조선족의 거주지는 특수한 공간적 특성을 갖고 있다. 중국의 중심부로 놓고 말하면 주변부로 되지만 여러 민족이 더불어 살고 있고 경계 너머에 모국이나 다른 민족국가가 있기에 연변은 그야말로 호미 바바의 말 그대로 “제3의 영역”― “찬란한 변두리”에 속한다. 호미 바바는 “국가들 사이의 틈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국가적인 문화를 ‘위치 짓기(locality)’는 그 자체 내의 관계에 있어서 통합되지도 않았고 단일한 것도 아니며 그 바깥이나 너머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단순하게 ‘타자’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 경계선은 야누스적(Janus-faced)인 속성을 갖고 있으며 밖/안의 문제는 항상 잡종성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과정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사람들(people)’을 혼합하고 의미의 또 다른 측면을 생산해내며 또 필연적으로 그 정치화의 과정에서는 재현을 위하여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힘과 정치적인 적개심을 무력하게 만드는 측면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21) 호미 바바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특징인 자본의 전지구화현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여러 인종들 간의 교류를 통해 이질적인 문화들이 만나서 문화적 잡종성을 발생한다. 즉 현대사회의 변화는 지금까지 없었던 잡종적이고 전환적인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며 경계의 존재들로 하여금 창조적인 긴장감을 유발하게 하는 “제3의 영역”을 만들어내게 한다. 이러한 “제3의 영역”은 이질적인 문화요소들이 혼합, 용해, 재구성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김강일 선생은「변연문화의 문화적 기능과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적 우세」22)라는 글에서 중국조선족문화는 “변연성(邊緣性)”을 갖고 있으며 일종의 변연문화형태라는 관점을 내놓았는데,이는 호미 바바의 “제3의 영역”이라는 개념과 맞먹는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정치, 경제생활의 측면에서는 기본상 중국화(中國化)되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모국문화의 유전인자(遺傳因子)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을 갖고 있으며 중국조선족공동체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사이에 있는 “제3의 영역”― 변연문화형태에 속한다. 변연문화형태는 아래와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 변연문화형태란 두 문화의 틈새에서 일정한 요소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계통은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으며 그로서의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유대인 공동체, 동남아와 북미에 있는 화인(華人)공동체, 스위스의 독일인공동체, 캐나다 퀘벡의 프랑스인 후예들의 공동체 등에는 모두 이런 문화형태가 존재한다. 변연문화형태는 자기의 특수한 문화적 특질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두 개 이상 문화계통과의 쌍개방(雙開放)적 성격으로 나타난다. 둘째, 변연문화형태는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多重文化構造)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단일문화구조(單一文化構造)를 가진 문화형태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기능을 하고 있다. 시스템이론(系統論)의 시각에서 보면 변연문화란 새로운 문화계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단일한 문화계통에 비해 더 강한 문화적 기능을 할 수 있다. 셋째, 변연문화의 성격은 인류문화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미래의 세계는 다양한 문화계통들 간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그 어느 문화계통이든지 모두 자기의 전통문화만을 고수할 수 없다. 오직 복합적인 문화계통으로 새로운 문화기능을 창출해야만 그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적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 변연문화형태로서의 중국조선족문화는 많은 자신의 장점(長點)을 갖고 있는 동시에 자기의 많은 단점(短點)도 갖고 있다. 양쪽 문화에 발을 붙이고 있기에 늘 자신의 문화신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며 방황을 하게 된다. 즉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문화는 도대체 어떤 문화여야 하는가? 어느 쪽 문화에 기울어져야 하는가? 이리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이러한 변연성은 아주 많은 가변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늘 우왕좌왕한다. 1960년대에 일었던 “조선바람”에 중국조선족들은 근 10만 명 이상이나 조선으로 도망쳤었다. 2003년 연말 한국에서 발생했던 일부 중국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중국국적포기청원은 모국문화로의 일변도(一邊倒) 경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조선족민족교육 취소론자들은 중국문화로의 일변도 경향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중국조선족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중국은 지금도, 앞으로도 중국조선족의 유일한 삶의 터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 점은 한반도가 통일되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중국에 사는 이상 완전히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역시 아니다. 가급적이면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적극적으로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계속 연변을 비롯한 변연문화지역을 지켜야 하고 변연문화형태의 속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 거주지는 한반도의 원문화(原文化)와 중국문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변연문화구역이고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이므로 한반도의 중국진출이나 중국에서의 한반도진출에서 모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한반도나 중국에 모두 유리하다. 특히 중국조선족사회의 존재는 한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양측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신호를 창출하여 전달하는 극히 중요한 문화전환기능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족사회는 문화적으로 한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전환계통 혹은 문화중개계통의 기능은 상대방의 문화를 피수용자가 수용할 수 있는 문화신호로 전환하여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개 문화체계가 서로 대립되어 있고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방식과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을 때 문화전환계통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과 한국과 같이 이념과 제도의 차이로 인해 반세기 이상 분단된 상태에 있었던 문화계통들 간의 교류는 상호 이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점들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고 빠른 시일 내에 문화적인 융합을 이룩하자면 중국조선족사회와 같은 문화중개계통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4.맺는 말:“통합”의 원리와 “접목의 미학”   디아스포라는 이중적 문화신분을 갖고 있기에 모국과 거주국 사이에 갈팡질팡, 우왕좌왕할 뿐만 아니라 문화변용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다년간 중국인 디아스포라현상에 대해 연구를 해온 왕경무(王庚武) 선생은 모국과 거주국 문화 둘 중에 어느 쪽에 치우치는가에 따라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인(華人)들 중에서 다섯 가지 신분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들로는 잠간 여행하거나 거주하는 자(旅居者)의 심리, 동화된 자(同化者), 조절하는 자(調節者), 민족적 자부심을 가진 자, 이미 생활방식이 철저히 개변된 자이다”23) 라고 하였다. 여기서 베리(Berry)의 문화변용에 관한 이론을 참조할 수 있는데, 그는 문화변용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제1단계는 접촉단계로서 서로 다른 2개의 문화가 만나는 초기단계이고 제2단계는 갈등단계로서 이민자들이 수용하는 주류사회가 이민자들에게 변화와 압력을 가하는 단계인데, 이 때 이민자들은 기원사회(Origin Society)와 정착사회(Host Society)의 문화 정체성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다. 제3단계는 해결단계로서 문화변용의 특정한 전략을 사용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또한 베리는 소수민족집단 이민자들의 문화변용이 “다른 인종과 민족집단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와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이나 관습의 유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의해 문화변용은 통합, 동화, 고립, 주변화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통합(Integration)은 소수민족 이민자들이 거주국의 주류사회에 활발히 참가하면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는 경우이고, 동화(Asslation)는 이민자들이 주류사회에 활발히 참여하는 과정에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정체성을 상실하고 주류집단에 흡수되는 경우이다. 고립(Isolation)은 이민자들이 사회참여를 활발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문화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로서, 이들은 보통 차이나타운과 같은 소수의 이문화 집단의 거주지에 격리되어 산다. 마지막으로 주변화(Marginality)는 주류사회에 참여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문화도 잃어버리는 경우로서, 사회의 밑바닥 계층으로 전락하여 기성질서에 반항하는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갖게 될 수도 있다.24) 연변의 시인 석화(石華, 1958- )는 그의 시 「연변 ․ 7 ― 사과배」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가고 있다/ 백두산 산줄기 줄기져 내리다가/ 모아산이란 이름으로 우뚝 멈춰 서버린 곳/ 그 기슭을 따라서 둘레둘레에/ 만무라 과원이 펼쳐지었거니/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 땅의 기름기 한껏 빨아올려서/ 이 하늘의 해살을 가닥가닥 부여잡고서/ 봄에는 화사하게 하얀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푸름 넘쳐 내더니/ 9월,/ 해란강 물결처럼 황금이삭 설렐 때/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우리만의 『식물도감』에/ 우리만의 이름으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 ‘연변사과배’/ 사과만이 아닌/ 배만이 아닌/ 달콤하고 시원한 새 이름으로/ 한 알의 과일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25) 보다시피 석화 시인은 고국을 떠나 중국에 사는 중국조선족을 사과배라는 메타포를 동원해 노래하고 있다. 연변의 상징으로 되는 사과배는 함경남도 북청의 배나무가지를 베여다가 연변 현지의 돌배나무 뿌리에 접목시켜 만들어낸 새로운 과일품종이다. 연변의 사과배가 연변의 돌배나무 유전인자와 북청 배나무 유전인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듯이 중국조선족은 중화문화의 신분과 조선민족문화의 신분을 동시에 갖고 있는 특수한 민족공동체이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과 양가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박쥐처럼 기회주의로 살아서는 아니 된다. 중국조선족은 이제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도 아니고, 물결 따라 바람 따라 떠도는 부평초도 아니며, 아무 경계 없이 날아다니는 박쥐도 아니다. 중국조선족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곳은 중국땅이다.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삶은 이제는 결코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때로는 모국이나 거주국 양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고 의심을 받고 또 그래서 곤혹스럽고 방황을 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이러한 양가감정을 지니고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났고 앞으로 우리 뼈가 묻힐 곳이며 또 우리들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연변땅 또는 중국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모범적인 중국국민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고려속요「정석가」에서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라고 했듯이 우리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고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무궁화 삼천리강산에 대한 다함없는 향수와 사랑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가지 문화신분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1 : 1의 관계가 아니다. 더욱이는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외면한 이른바 “100%의 조선족”이라는 말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다. 다시 사과배를 예로 들면, 원예학에서는 북청의 배나무가지를 접수(椄穗)라 하고 연변의 야생 돌배나무를 접본(椄本)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접본은 당지의 야생나무를 이용한다. 그래야 새로운 품종이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여 잘 자랄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물론, 한국의 후지사과나, 미국의 피스장미거나 간에 그 생명이 바탕이 되는 뿌리인 접본은 예외 없이 야생종이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계시를 준다. 한 식물의 종이 아무리 인간에 의해 변이를 일으켰다 해도 그 원형은 자연 상태의 야생으로부터 진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경우도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을 가지고 살되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고이 간직하는 기초 위에서 중국 주류민족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해서 자립할 수 있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잃고 주류민족에게 동화되어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줄로 안다. 중국조선족공동체의 해체와 붕괴는 중국이라는 다민족국가가 지향하는 “다원문화”의 보존에도 하나의 비극이 될 것이다.  요컨대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제한된 기회구조 내에서 “제3의 영역”과 이중문화신분의 갈등을 해소하고 그 “특권”과 우세를 충분히 살려 신분상승을 추구하면서도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통합의 전략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합의 전략을 구사함에 있어서 거주국의 이민정책과 민족정책의 혜택도 받아야 하거니와 모국의 지원도 충분히 받아야 한다. 윤인진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모국과 거주국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모국과 거주국이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재외동포가 모국과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을 경우에 모국의 영향력은 커지게 되며, 특히 전지구화로 인해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모국이 재외동포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26)                   2010년 2월 13일 주해: 1)이 글은 2월 18일 한국 재외동포포럼(이사장 이광규) 제13차 정기포럼에 발표한 것이다. 2)정판룡,『정판룡문집』제2권, 1997년, 1∼15쪽 참조. 3)「조선족문화론강」,『문학과 예술』, 2006.4. 4)김강일, 허명철,『중국조선족 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년. 김관웅,「사과배와 중국조선족-중국조선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관견」, 모이자 사이트: http://moyiza.net 김호웅,「‘디아스포라의 시학’, 그리고 우리의 소설」,『문학과예술』, 2007. 3. 5)조성일,「조선족과 조선족문화 이중성 재론」, http://koreancc.com 참조. 6)황유복,「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어도 이중성민족은 없다」, 7)해외한민족연구소,『한반도 제3의 기회』,한국화산문화사, 2009.6. zoglo.net 에도 실렸음. 8)http://zoglo.net 참조. 9)해외한민족연구소 편찬,『한반도 제3의 기회』, 화산문화사, 2009년, 273쪽. 10)費孝通 等著,『中華民族多元一體格局』, 中央民族學院, 1989年版. 11)王亞南,「槪說中國是多民族國家還是統一民族國家」,『民族發展與社會變遷』, 民族出版社, 2001年, 140쪽 참조. 12)王寧,『‘後理論時代’的文學與文化硏究』, 北京大學出版社, 2009年, 133쪽 참조. 13)杨乃喬,『比较文学概论』(第三版),『比較文學理論敎程』, 北京大學出版社, 2008年2月. 14)『세계백과대사전』제8권, (한국)동서문화사, 1996년판, 4593쪽. 15)왕선패, 왕우평 주편 《文學理論批評術語匯釋》, 高等敎育出版社,, 2006년, 748쪽. , 16)閻嘉 「文化身分與文化認同硏究的諸問題」.『中國文學與文化的認同』,북경대학출판사, 2008년, 4쪽. 17)김관웅,「‘집’ 잃고 ‘집’ 찾아 헤매는 미아들의 비극」,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과 편, 『조선-한국언어문학연구』, 민족출판사, 2008년 12월. 18)Cf. Edwand Said, Rofleclions on Exile and Other Essays, pp. xxx-xxxi, p.397. 19)王寧,『‘後理論時代’的文學與文化硏究』, 北京大學出版社, 2009年, 133쪽 참조. 20)김호웅, 김해양,『김학철평전』, 실천문학사, 2007년 참조.김관웅「디아스포라 작가 김학철의 문화신분 연구」,http://koreancc.com 참조. 21)Nation and Narrationg 4. 이소희, 「호미 바바의 ‘제3의 영역’에 대한 고찰」,『영미문학 페미니즘』, 제9권 1호, 2001년, 104쪽에서 재인용. 22)김강일, 허명철,『중국조선족 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년. 23)Cf. Wang Gungwu, "Roots and Changing Identity of the Chinese in the United States", in Daedalus(Spring 1991). p.184. 王寧,『‘後理論時代’的文學與文化硏究』, 北京大學出版社, 2009年, 132쪽에서 재인용. 24)윤인진,「코리안 디아스포라」,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년, 36∼38쪽 참조. 25)석화,『연변』, 연변인민출판사, 2006년. 26)윤인진,「코리안 디아스포라」,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년, 43쪽 참조.    * 이 글은 2010.2.18 한국 방송통신대학교 재외한인학회포럼 발표요지임  
5    정판룡 선생, 우리 모두가 그이를 그리는 까닭 댓글:  조회:2937  추천:3  2011-10-13
      들어가며     올해는 정판룡 교수 탄신 80주년이요, 서거 10주기 되는 해이다. 선생은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교육자, 문학가, 사회활동가로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우리 모두가 선생을 그리는 까닭은 이런 공식적인 평가에 수긍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이는 그의 소탈한 미소와 걸걸한 목소리, 그의 신념과 사상, 사랑과 지혜가 이 연변대학교 캠퍼스의 상록수처럼 푸르싱싱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선생을 그리는 까닭, 그리고 선생을 기념하는 의미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한다.     1. 한 편의 감동적인 성장소설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과 선택에 따라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훌륭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Free Will)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거스를 수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고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는 법, 동서고금의 영웅은 모두 출신이 비천하지만 높은 뜻을 품고 초인적인 의지로 운명에 도전하고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하였다. 역사적 인물도 그러하고 허구적인 설화나 소설의 인물도 그러하다. 나폴레옹이 그러하였고 홍길동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선생 역시 출신은 비천하였다. 전라도 담양의 참빗장수의 아들이다. 1937년 3월, 여섯 살 나이에 부모님의 뒤꽁무니를 따라 압록강을 넘어 타발타발 만주의 영구로 왔다가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저 북만의 상지로 이주하였다.      다 아시는 에피소드지만, 상지조선족초급중학교 3학년 학생이던 정판룡은 1949년 3월 연변대학이라는 민족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풍편에 듣고 친구 둘과 함께 불원천리 연변을 찾아왔다. 무작정 입학을 시켜달라고 림민호 부교장에게 떼를 쓰다가 퇴자를 맞았다. 귀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라고 했던가, 그들 세 젊은이는 주덕해 교장을 찾아갔다. 입학시켜 주지 않으면 아침마다 교장님의 집무실에 출근해 청소부터 하겠다고 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위(政委)로 하르빈에 머문 적 있는 주덕해 교장을 큰집 어른처럼 믿고 마구잡이로 매여달린 것이다. 주덕해 교장은 슬그머니 림민호 부교장에게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이놈들을 일단 입학은 시키되 학급 학생들을 따라가면 그냥 두고 따라가지 못하면 잘 얼려서 노자를 줘서 돌려보내도록 합시다.”     수학학부에 입학한 정판룡은 그럭저럭 두 학기를 마쳤고 세 번째 학기부터는 어문학부에 자리를 옮기더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워낙 총기가 좋고 말주변이 좋고 공부욕심이 많은 정판룡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1952년 10월 21세 약관의 나이에 연변대학 교원으로 되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다.     정판룡이 두 번 째로 림민호 부교장의 눈에 든 것은 아마도 1950년대 중반이리라. 국비류학생을 선발해 소련에 파견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신청 일자도 이젠 며칠 남지 않았건만 감히 신청하는 학생이 없다. 시험성적에 따라 선발하고 그것도 동북국에서 몇 사람 뽑지 않는데 시골대학 학생이 덤벼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장대 겨룸이라고들 학생들 사이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청 마감일 림민호 부교장 집무실에 나타난 것은 역시 촌스럽지만 영민하고 오기가 있는 정판룡이었다. 림민호 부교장은 정판룡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래,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아는 법이지. 아무리 시골대학에서 공부한다고 하지만 뱃장과 패기까지 없어서야 되겠어.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어. 한 번 촌놈의 본때를 보여주는 거야!.”     하고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정판룡은 불철주야 공부하였고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출국유학생선발시험에 통과되어 세계 일류 대학인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였다. 끝없는 도전정신과 참다운 준비를 통한 무궁무진한 저력, 이게 정판룡 선생의 힘이자 매력이다.     청년 정판룡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과 분투는 계속된다. 중국의 북경, 상해에서 선발되어 온 유학생들은 시커먼 헐레브(빵)과 짓이긴 감자에 질려 배를 곯고 모스크바의 혹한에 움츠러들어 공부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해 갔다. 하지만 워낙 식성이 좋은 정판룡은 걸신이 든 사람처럼 헐레브와 감자를 달게 먹었고 밤낮 공부에 매진하였다. 5년 세월 와신상담 노력을 경주한 결과 《알렉세이 톨스토이 3부작 에서의 인민묘사 원칙》이라는 논문으로 당당하게 문학 부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 학위논문은 중국교육부로부터 우수논문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중국의 귀공자들이 수토가 맞지 않아 피골이 상접하고 폐결핵까지 얻어가지고 어깨가 축 처져 돌아올 때 조선족청년 정판룡은 부둥부둥 살이 오른 얼굴에 멋진 러시아 털외투를 입고 동방의 미녀 왕유까지 끼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이는 우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영웅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반세기 넘는 세월 정판룡의 신화는 얼마나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꿈과 용기, 동산재기의 기회를 선물하였던가.      2. 탁월한 선견지명과 두둑한 뱃장      연변대학 와룡산 기슭에 서있는 정판룡문학비에는 그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에서 따온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내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 초 연길에 살구꽃, 배꽃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려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열차에 앉았다."      자신을 키워준 조선족동포와 연변대학에 대한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돌아온 선생은 북경 사회과학원이나 부인 왕유 여사가 나서 자란 상해에 가서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유 여사를 설득해가지고 은사 림민호 부교장이 계시는 연변대학의 품으로 돌아왔다. 가끔 동료나 제자들이 왜 북경, 상해에 남지 않고 부득부득 촌스러운 연변에 와서 고생하느냐고 물으면 선생은 껄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큰 나라에 가서 재상으로 사느니보다 작은 나라에서 왕으로 사는 게 좋지 않은가.”     이는“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倭國)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말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하여 선생 자신의 동포사랑, 모교사랑을 대변한 말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지만 까놓고 말하면 이는 반은 농담이요, 반은 진담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선생이 북경이나 상해에 안주하였더라면 우수한 학자로 유족한 삶을 살았을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족형제자매들이 우러르는“왕”으로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조선족백성들 모두가 좋아하고 따르는 “민중의 벗”이요,“왕”이였다.     우선 선생은 타고난 총명과 근면성으로 《세계문학간사》(공저, 1981),《고리키전》(1985), 《외국문학강좌》(1990), 《제2차대전후의 세계문학》(1990) 등 저서와 교과서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전국 20여개 대학의 외국문학사 관련 교수들을 동원하여 4권으로 된 《외국문학사》를 펴냄으로써 중국 경내 대표적인 외국문학 연구자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뿐만 아니라 선견지명을 가지고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의 우세를 충분히 살리고 중국 경내 한국학의 초석을 쌓은 대표적인 학자였다. 1980년 중국조선문학연구회를 출범시켰고 1986년 북경대학교 학자들과 함께 북경대학에서 처음으로 조선문학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89년 중국 경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연변대학교에 조선학연구중심을 창설하고 《조선학연구총서》를 발간하였으며 《간명한국백과전서》등 무게 있는 책자들을 출간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자기의 특성과 강세에 맞은 연구영역을 새롭게 개척하는 탁월한 선견지명, 전략적인 안목과 바다 같은 흉금으로 천하의 인걸들을 모아 값진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걸출한 리더십, 이것 또한 정판룡 선생의 힘이자 매력이다.     다음으로 선생은 상아탑에 갇혀 자기의 연구영역에만 몰입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중국조선족사회의 역사와 현실, 미래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대중강연과 함께 회고록, 기행, 칼럼 집필에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그의 강연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학다식함으로 정평이 나있고 《세계견문》을 비롯한 기행들은 변화된 세계의 신선한 바람을 중국조선족사회에 몰고 왔으며 우리 모두의 세계사인식과 의식의 전환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선생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은 비단 정판룡 선생 자신의 일대기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 이민사, 정착사의 축도(縮圖)로 된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한국 웅진출판사에서 《내가 살아온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재판되었는데 한국인들에게는“중국을 알게 하는 안내서”로 널리 알려져 있고 지금도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조선족의 뿌리 찾기, 조선족의 문화 살리기에 초점을 둔 선생의 학문은 풍부한 사료, 실사구시의 전통, 심오한 철리와 형상적인 비유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정판룡선생은 현대대학경영의 이념과 체계를 본격적으로 연변대학교에 접목시킨 걸출한 교육자이며 행정가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정판룡 선생은 대학의 최고 자산과 기반은 교수진이며 대학교는 얼마나 많은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경영의 성패, 지명도의 높낮이가 좌우지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천편일률적인 자대로 교수를 선발하지 않았다. 수호(水滸)의 108명의 영웅호걸처럼 교수는 적어도 18반 무예가운데서 한두 가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선생은 설사 오척단신이라 하더라도, 술 잘 마시고 가끔 실례를 한다 하더라도 오직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고 강의를 잘하고 연구를 잘하면 그들을 안아주고 키워주었다. 연변대학의 김영덕, 김병수, 이해산, 허룡구 교수는 오척단신의 교수들이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고 고전번역에 멋진 강의로 소문이 났다. 서일권 교수는 중년에 상처하고 늘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갔지만 그의 어진 천품과 강한 행정력을 높이 사주고 학부장으로 발탁시킨 분이 정판룡 선생이다. 또한 최상철 교수로 하여금 습작학에서 신문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중국조선족신문사를 정립하고 일가(一家)를 이루게 한 분 역시 정판룡 선생이다.     그리고 선생은 적어도 연변대학교에서 대학교 교과서체계를 확립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연변대학교 교과서는 1950년대 림민호 부교장 시절 평양에서 지원받은 소련의 교과서와 조선의 교과서로 충당되었고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많은 학과목들은 교과서가 없이 강의되고 있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교수는 중요한 대목들을 두 번 세 번 읽어야 하였고 학생들은 팔목이 부러지게 필기를 해야 하였다. 개혁, 개방 후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선생은 림휘, 허호일, 서일권 교수와 함께 선참으로 《세계문학간사》(상, 하)를 펴냈다. 선생은 또 문학이론을 강의하는 임범송, 현룡순, 김해룡 교수를 내세워 《문학개론》을, 중국문학사를 강의하는 김영덕, 김병수, 허룡구 교수를 내세워 《중국문학사》(상, 중, 하)를, 습작학을 강의하는 박상봉, 최상철, 전국권, 김만석 교수를 내세워 《습작학개론》을 속속 펴내게 하였다. 이로써 교과서가 없이 강의하는 국면을 최초로 타개하였고 연변대학에서 자체로 편찬한 제1대 교과서체계를 확립하였다.     아무래도 선생의 가장 큰 기여는 조선언어문학 석사학위 수여권한과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쟁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문박식함과 중국학계 거물들과의 폭넓은 인맥과 교유는 선생이 석사학위,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쟁취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바탕으로 되었다. 문학이론계의 태두인 전중문(錢中文) 교수와는 모스크바대학시절 동기동창이다. 저명한 외국문학전문가이며 중산대학의 오문휘(吳文輝) 교수는 “연변대학의 정판룡 교수는 박식하고 말솜씨가 좋고 조직능력이 강한 교수”라고 말했다. 더욱이 동방의 석학(碩學)으로 불리는 계선림(季羨林) 교수는 “동북에서 동방문학학자로 정판룡 선생을 손꼽는다”고 하였다. 선생은 생전에 김병민, 김관웅, 이암, 전학석, 강은국, 채미화, 윤윤진, 최웅권, 김호웅, 허휘훈, 이애순, 문일환, 김형중 등 20여 명의 박사를 키워내고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를 국가급중점학과로 육성하는데 초석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사를 주관하는 부총장으로서 한국 통일원 전임 차관 동훈 선생, 한양대학교 이종은 교수 등과 손을 잡고 수십 명의 젊은 학자들을 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에 보내어 외국체류경험을 쌓고 학문을 연찬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정판룡 선생은 우리 연변대학이 산해관을 깨고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연 분이다.                      3.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제자에 대한 사랑     뛰어난 인물의 배후에는 반드시 위대한 스승이 있다. 아난(阿難)의 배후에는 석가가 있었고 베드로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가 있었으며 안연(顔淵)의 뒤에는 공자가 있었고 서애(西厓)의 뒤에는 퇴계(退溪)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판룡 선생의 배후에는 림민호 부교장이 있었다. 정판룡 선생은 림민호 부교장을 성심성의껏 본받고 배우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사숙(私淑)하고 존경하였다. 옛날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말하자면 임금님과 스승과 아버지를 같은 자리, 같은 가치에 놓고 생각했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 정판룡 선생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자기의 스승과 은사들을 극진히 모신 것 같다. 선생은 자신의 은사들인 림민호동상, 이욱문학비, 김창걸문학비를 세우는데 앞장을 섰고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진정이 넘치는 명문들을 남겼다.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사모님과 우리 제자들을 앞에 두고 림민호 선생의 동상 주변에 골회 한 줌 뿌려줄 수 없겠느냐고 간절히 소망하였다. 림민호 선생의 유가족도 흔쾌히 허락을 해주어서 우리 제자들은 림민호 선생의 동상 주변의 잔디밭에 좁다란 홈을 치고 정판룡 선생의 골회를 정히 뿌렸다. 천당에 가서라도 존경하는 은사님을 옆에 모시고 도란도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정판룡 선생, 스승에 대한 그분의 다함없는 존경에 우리 모두가 가슴이 뭉클했던 일이 어제 일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찍《곡절 많은 인생》(1〜2, 1989)이라는 글을 통해 림민호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최초로 소상하게 복원시켜 놓음으로써 일제치하 항일투쟁을 하다가 서대문감옥에서 7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렀고 연변대학 초대 부교장으로 18년이나 봉직한 탁월한 혁명가, 교육가의 빛나는 형상을 부각하기도 하였다. 결초보은의 사제 간의 의리, 세상인심이 조석으로 변하고 자그마한 명리를 탐내서 동가식서가숙 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정신인가.      정판룡 선생의 제자 사랑은 특별한 데가 있다. 남을 가르친다고 해서 누구나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박식한 학자라 해서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학자와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세상에는 위대한 학자이면서도 한 사람의 제자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 냉정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젊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젊은 생명의 앞날에 기대와 희망을 품고 그 생명의 성장과 발전에 깊은 관심과 두터운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자만이 스승이 될 수 있다.     선생은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고 제자가 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캐고 드는 분이 아니다. 선생은 무조건 제자를 믿고 일을 맡긴다. 비판보다는 칭찬을 많이 한다. 특히 자신의 평민적인 성격과 고금을 넘나드는 학문의 깊이, 전략적인 안목과 선견지명, 그리고 지행합일의 행동력으로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인다. 제자를 많이 두다 보면 영악스러운 자가 있는가 하면 어질고 약한 자도 있다.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처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물 덤벙 술 덤벙 실수를 하는 자도 있다. 선생은 모든 제자를 다 껴안아주되 언제나 약한 자를 두둔하고 우선 실수를 한 자를 구해주고 본다.    1980년대 말 이 아무개라는 학생이 면회를 온 처녀와 함께 남성기숙사에서 잤다(실은 이 아무개라는 학생이 처녀와 저녁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취침시간이 지났고 처녀는 사범학교로 돌아갈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남성숙사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조용히 잔 것이다)고 당장 퇴학처분을 내린다고 학교 당국에서 야단을 칠 때 정판룡 선생은 허허 웃으며 다음과 같은 유머로 난제를 풀어주었다.    “왜 젊은이인가?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실수를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른으로 될 수 있거든. 젊은 놈이 조금 실수를 하고 한 번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단매에 때려눕혀서야 되겠소? 다른 남학생들이 있는 데서 좋아하는 처녀와 한 침상에서 잤다고들 하는데 여관을 잡을 돈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사실 외국에서는 대학생이면 결혼도 할 수 있는데 뭘. 한 번 봐 주라구.”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실수를 했지만 정판룡 선생 덕분에 처분을 받지 않고 무난히 공부하게 된 이 아무개라는 학생은 지금 박사가 되었고 교수로, 당위서기로 출중하게 일하고 있다.     선생의 은총을 입고 이 아무개 학생처럼 구제불능의 처지에서 헤어난 제자는 기수부지겠지만 여기서 우리 큰형의 사례만 하나 더 들기로 한다. 1964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큰형 봉웅 역시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다녔는데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닐 생각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에 갔었다. 쪽지 한 장을 달랑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는지라 우리 어머니가 큰아들을 잃어버렸다고 대성통곡을 했고 평소 우리 집에 잘 놀러왔던 김창락, 한석윤, 류은종 등 학급친구들이 정판룡 교수를 모시고 득달 같이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때 정판룡 교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교수였는데, 그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 허허 웃으며    “이 집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젊은이가 아닙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사람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 사나흘 지나면 반드시 자기를 뉘우치고 어머니 곁에 돌아올 겁니다. 제가 봉웅이 어머니 앞에서 장담을 할게요.”    하더니 김창락 등 학급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봉웅이는 이삼일 후 분명 돌아오는 거야. 내가 알았으면 됐어. 호들갑을 떨며 학교에 보고할 건 없어. 봉웅이가 돌아온 후에도 내색을 내지 말고 이전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야 해. 알겠어?”     하고 다짐을 따고 나서    “봉웅이 어머니, 애들이 정심도 먹지 않고 헐레벌떡 쫓아왔으니 정심이나 차려주십시오. 저도 이 친구들에게 잡혀오다 보니 정심을 걸렀거든요.”     하고 비위 좋게 껄껄껄 웃었다.     정판룡 교수의 말대로 큰형은 사흘 만에 돌아왔고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 때 우리 동생들은 토끼처럼 귀를 강구고 문틈으로 정주방의 동정을 살폈는데, 그 때 뵌 정판룡 교수의 준수한 얼굴과 서글서글한 눈매를 잊을 수가 없다. 큰형의 일이 있은 후 우리 형제들의 눈에 정판룡 교수는 일개 교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비쳤고 우리 형제들은 정판룡 교수의 말씀을 성자(聖者)의 예언처럼 믿게 되었다.      선생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야기할진대 정판룡교육발전기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라도 깍쟁이라는 말도 있지만 전라도 담양 출신인 정판룡 선생은 의식주에 있어서 동전 한 푼도 아껴 쓴다. 솔직히 말하면 고급 구두 한 컬레 없고 정장도 별로 여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면 장바구니를 허줄한 자전거 핸들에 걸고 남새시장에 나가 남새장수 영감, 고기장수 아줌마들과 한 푼 두 푼 깎으며 흥정을 한다. 일본, 한국과 구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고 돌아올 때도 카메라 하나, 전기면도기 하나 사오지 않는다. 그러니 전라도 깍쟁이라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     하지만 의미 있게 돈을 쓸 줄 아는 분이 바로 정판룡 선생이다. 선생은 사모님과 함께 1980년대 초 스톡홀름대학에 가서 강연할 때 한 달에 4천 달러씩이나 받았지만 그 돈을 몽땅 유럽 각국을 여행하는데, 미국의 아라스카를 거쳐 하와이, 일본, 한국을 에돌아오는데 썼다. 거의 날마다 라면이나 끓여먹으면서 꼬박꼬박 장학금을 모아서는 대형 텔레비전이나 냉동기를 사들고 돌아오는 방문학자나, 외화를 움켜쥐고 돌아와 마치 금의환향을 한 듯이 거들먹거리는 방문학자들과는 워낙 격이 달랐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감동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96년 한국의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을 때 정판룡 선생은 상금에서 10만 원을 떼어내어 정판룡교육발전기금을 마련하였고 임종을 며칠 앞두고 사모님과 합의를 보고 다시 11만 원이라는 거금을 정판룡교육발전기금에 내놓았으며 병상에서 불우한 학생들을 불러놓고 일일이 장학금을 쥐어준 일이다.     참으로 선생을 다만 청산유수와 같은 주변으로 외국의 자금을 유치하는 사회활동가로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피와 살로 마련한 평생의 자산을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내놓음으로써 기부문화의 풍토를 조성하고 사랑의 실천에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4. 다문화주의 사고방식과 유머와 위트     연변대학의 교훈(校訓)은 진리, 사랑, 융합(求眞, 至善, 融合)이다. 이를 진리를 추구하되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 껴안으면서 더불어 살고 마침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이 교훈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다민족국가에서 조선족 중심의 민족대학을 경영하고 있는 우리 연변대학의 성격과 위치 및 바람직한 진로를 잘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들 간의 평등과 존중에 의한 공존과 융합이라는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 중국식 표현을 빌자면 이러한 조화(和諧)의 사상은 연변대학 초창기 주덕해, 림민호 선생에게서 비롯되어 박문일, 정판룡 선생을 거쳐 김병민 교장을 대표로 하는 현 지도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림민호 부교장은 모스크바 동방대학 졸업생이라 일찍이 국제주의, 바꾸어 말하면 다문화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었고 이를 대학교 인재양성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였던 교육자였다. 1951년 봄, 북경대학 동방언어학부 조선어학과의 마초군 부교수가 불원천리 연변대학에 찾아와서 해마다 조선어학과 학생들을 연변대학에 보내서 1년 간 씩 실습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을 들었다. 이에 림민호 교장은 박규찬 교무장을 보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불편 없이 공부하도록 하게 합시다. 중국의 역대 정권이 주류민족더러 소수민족의 언어를 배우라고 권장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황차 천하의 수재들이 운집해 있는 북경대학 학생들이 아닙니까?”     연변대학에서 북경대학 학생들은 그야말로 칙사(勅使) 대접을 받았다. 연변을 찾아온 북경대학 학생들 중에는 나중에 대성해서 중국 경내 조선고전문학연구의 일인자가 된 위욱승(韋旭升) 교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때 그 일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고 있다.    “우리가 앉은 열차는 저물녘에 연길역에 도착했지요. 그 당시 교무장으로 계셨던 박규찬 선생께서 수십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왔지 않겠습니까.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예쁘장하게 생긴 여대생들이 반갑게 달려 나와 우리 모두의 가슴게 일일이 생화를 안겨주더라구요. 똑같은 대학생인데 이렇게 열렬하게 우리를 환영할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더욱 놀라게 되었어요. 반듯하게 학생모를 쓰고 학생제복을 입은 수백 명의 대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두 줄로 나누어 서서 우리 실습생들을 연도환영하지 않겠어요. 맨 앞장에 선 악대는 쿵작쿵작 환영곡까지 연주했습니다. 이게 국빈대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해 여름에 북경대학 교장사무실 비서 진옥룡 선생이 다시 연변에 찾아와 림민호 부교장을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 때 림민호 부교장은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한어로나마 《시경(詩經)》에 나오는 문자를 동원해 “세상 사람들 모두다 형제(四海之內皆兄弟)가 아닙니까. 친자식처럼 돌보아줄 터이니 근심일랑 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하고 껄껄 웃었다.     정판룡 선생은 림민호 부교장의 수제자나 다름없으니 그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요, 또한 정판룡 선생 역시 모스크바대학에서 다문화사회를 체험한적 있는데다가 왕유 여사와 더불어 다문화가정을 만들었는지라 그의 “며느리론”은 그러한 생활경력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하나의 사상이요, 절묘한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문화주의(muticulturalism) 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한다.“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사회이다. 하지만 실지에 있어서 이러한 다문화주의 담론은 어디까지나 다수자 또는 중심부문화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에서 소수자 또는 주변부문화의 목소리는 외면되고 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해 시혜(施惠)의 우월감에 젖어있고 후자는 전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동화(同化)의 비애를 맛보고 있다. 말하자면 다문화주의담론에서 소수자의 정체성과 주변부문화의 존재가치에 대한 옹호와 존중은 망각되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일찍이 간파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분이 림민호 부교장과 정판룡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간(師弟間)인 이들 두 선생은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는 다수자와 담을 쌓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고수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낙후된 상태에서 다수자의 시혜만 받을 것이 아니라 다수자와 적극 교류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존중을 받는 존재로 부상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이른바 평등을 이룸에 있어서 소수자의 주체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보다 널리 확산하고 우리 민족의 피와 살로 되게 하기 위해“며느리론”을 내놓은 분이 바로 정판룡 선생이다.“며느리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 시집은 왔으되 허구한 세월 친정생각만 하고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집동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시집 어르신을 잘 모시고 남편공대를 잘하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 시집마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때라야만 비로소 친정을 도울 수 있고 친정마을과 시집마을에서 다 사랑과 존중을 받는 존재로 될 수 있다. 우리 조선족의 이중적문화신분을 염두에 둘 때,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할 때, 정판룡 선생의 “며느리론”은 우리 조선족의 진로 또는 우리 연변대학의 건학이념을 가장 형상적으로 풀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에 입각해 정판룡 선생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도 금발머리든 까만 머리든, 파란 눈이든 까만 눈이든 폭넓게 친구를 사귀었다.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한국인 교수를 만나면 나이를 따지지 않고 달갑게 아우노릇을 하였고 일본인 교수를 만나면 똑 부러지게 예의를 차리고 농담을 삼갔다. 또한 제자를 끝까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제자들이 자기의 날개를 키워가지고 중국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훨훨 날아가 자리를 잡게 함으로써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연변대학의 문화영토를 넓혀나갔다. 길림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윤윤진 박사; 북경민족대학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이암, 문일환 박사; 상해 복단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강은국, 강보유 박사 등이 좋은 사례로 되겠고 전국 200여개 소 한국어학과 교수의 80%가 연변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또한 좋은 사례로 되겠다. 정판룡 선생의 논리는 간단명료하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 법, 밤낮 우는 소리만 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면 절대로 다문화공동체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문화주의 사고방식과도 관련되지만 정판룡 선생은 유머와 위트의 귀재였다. 유머와 위트는 바다 같은 흉금과 건전한 정신, 풍부한 경륜과 지식을 가진 자만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선생은 강연이나 글에서 가장 원론적인 문제를, 가장 복잡한 정치문제나 학술문제를 가장 쉬운 비유로 풀어서 청중과 독자를 포복절도케 하는 유머러스한 기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평소 생활 속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난처한 국면을 타개하고 일을 추진하며 좌중을 즐겁게 했다. 선생이야말로 연변의 처칠이라 하겠다. 정판룡 선생의 유머와 위트를 알뜰하게 수집하면 책 한 권 분량은 충분히 되겠지만, 여기서 두 가지 사례만 들기로 하자.       첫째 사례:     선생은 무석에 살고 있는 왕씨 가문의 맏사위였다. 처갓집은 팔남매 대가족이라고 하는데 모두 공부를 해서 출세를 했건만 상해요, 요녕이요, 길림성이요 산지사방에 널려 살고 있었다. 한족가문에서는 대체로 막내네 내외가 부모님을 모시는 법인데 이 집안에서도 막내네 내외가 80고령의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형제자매들이 외지에 살다보니 노모에게 좀 등한했고 이를 막내네 내외는 은근히 섭섭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눈치를 챈 정판룡 선생은 어느 해 구정이 다가오자 여기저기 형제자매들에게 전화로 통문을 냈다. 이번 구정에는 반드시 무석에 있는 막내네 집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설을 쇠자고 말이다. 맏이의 분부에 동생들이 따라주었고 정판룡 선생은 밥상을 차리기 전에 동생들을 둘러앉히고 말꼭지를 뗐다.    “이 몇 해 간 막내네 내외가 어머님을 모시고 수고가 많았다. 우리 머리 큰 형제들이 어머님께 용돈도 부쳐드리지 못했으니 참으로 불효막심하다. 우선 맏이인 내가 깊이 반성을 한다.”     정판룡 선생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여기 앉은 형제들 중 중국공산당 당원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 음― 다들 당원이구나. 우리 당원들은 달마다 당비를 내지 않는가. 다들 내겠지. 허지만 우리는 여태껏 정기적으로 모비(母費)만은 내지 않았어.”    “모비”란 말에 동생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입들을 싸쥐었다. 정판룡 선생이 다시 위엄스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웃긴 왜 웃어. 내 말이 어디 틀렸는가. 당은 우리를 키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존재야. 하나하나가 모여 당이 되었으니 구체적 실체가 없단 말이야. 하지만 어머님은 여기 앉아 계셔. 어머님은 배 아프게 우리를 낳아주었고 우리 팔남매에게 골고루 젖을 먹여주었고 공부시켜 주었어. 하지만 우린 당비만 내고 모비를 내지 않고 있었단 말이야. 이제부터 이렇게 하자구. 우리 부부는 다 대학교 교수니까 한 달에 두 몫, 200원씩 내겠어. 임자들은 한 가정에서 한 몫씩, 100원씩만 내라구.”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조선족 맏사위의 제안에 동의를 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언약을 지켜서 달마다 무석의 노모에게 용돈을 부쳐 보냈는데 그 무렵 10여 년 공령을 가진 공무원의 노임이라야 500원 되나마나 하였는데 노모가 오히려 2명 공무원의 노임을 받는 형국이 되었으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유 사모님은 달마다 월급을 타서 노모에게 부치는 날이 한 달 중 제일 기쁜 날이 되었단다. 그리고 막내동서를 비롯한 형제들은 그때로부터 정판룡 선생의 말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들었다. 선생의 임종도 무석에서 온 막내동서가 지켜주었다. 이게 선생의 수완이고 멋진 유머이며 위트다. 이런 유머와 위트를 구사하는 데는 아랫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둘째 사례:     정판룡 선생과 현룡순 선생은 1950년대 초반부터 수십 년간 조문학부 동료로, 친구로 허물없이 지냈다. 하지만 평소 맑은 정신에 현룡순 선생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투로 존대어를 썼고 정판룡 선생은 “…그렇소”하고 하대를 하였다. 기실 현룡순 선생은 1927년 생으로 적어도 1931년 생인 정판룡 선생보다 네 살 손위였다. 하지만 제3차국내혁명전쟁에 참가하고 대학에 들어오다 보니 정판룡 선생의 후배로 되었고 현룡순 선생이 아직 학생딱지를 떼지 못하였을 때 정판룡 선생은 벌써 교원으로 되어 강의를 했다. 아무리 교원과 학생 사이라고 하지만 그게 고작 1-2년 동안이고 그 후로는 쭉 수십 년간 동료로 지내오지 않았는가. 황차 현룡순 선생 쪽이 네 살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 그냥 정판룡 선생에게 존대어를 쓴다는 게 아무래도 기분이 좀 나쁜 일이었다. 그래서 현룡순 선생은 술 한 잔 나눌 때면 부쩍 용기가 나서    “정 선생, 내 말 좀 들으시오. 내가 정 선생보다 네 살이나 더 먹었는데 왜 존대어를 써야 한다우. 이제부터는 너나들이를 하자구요, 너나들이를! 너나들이를 해도 내가 밑지지만 말이우.”     하고 달려들면 정 선생은 허허 웃으며    “이거 안 되겠구만. 옛날 사진을 공개해야 하겠소. 세월이 열두 번 변해도 제자가 어떻게 스승에게 너나들이로 달려든단 말이요, 버르장머리가 없이!”     이쯤 되면 워낙 착하고 주변이 없는 현룡순 선생은 좌중을 둘러보고 구원이나 청하듯이    “저 양반은 생뚱 같은 사진을 가지고 공갈만 친단 말입니다.”     하고 지고 만다. 이튿날 술이 깨면 현룡순 선생은 여전히 버릇처럼 정판룡 선생에게 “…그렇습니다”투로 깎듯이 존대어를 썼다.     그런 자리를 우리 제자들도 여러 번 보았는지라 다른 노교수님들에게 물어본즉 1950년대 초반 현룡순 선생네 학급 학생들이 봄나들이를 가서 찍은 사진이라고 하는데 새파란 정판룡 선생은 그래도 교원이랍시고  남녀학생들 복판에 틀거지 있게 앉아있는데 워낙 몸매가 왜소한 현룡순 선생은 정판룡 선생 무릎 앞에 한 팔을 고이고 누운 채로 다른 한 손으로 권총 모양을 해가지고 찍었다는 것이다. 두 분이 사제 간임을 증명하는 사진이라 이 사진 이야기만 나오면 현룡순 선생 쪽은 기가 죽고 말이 궁해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생의 유머와 위트는 동료들 사이, 스승과 제자들 사이의 활력소가 되었고 선생이 있는 자리는 마냥 즐거운 기분이 넘쳐났던 것이다.     나가며     사제애(師弟愛)는 우리 동양인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야 한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치고 제자는 스승을 믿고 따르고 존경해야 한다. 스승의 따뜻한 애(愛)와 제자의 돈독한 경(敬)이 서로 합쳐질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학식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우리는 사표(師表)라 하고 사부(師傅)라 한다. 스승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사도(師道)라 하고 스승으로부터 받은 큰 은혜를 사은(師恩)이라 한다.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학자 한퇴지(韓退之)는 유명한 《사설론(師說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승은 제자에게 첫째로 도(道)와 진리를 전하고, 둘째로 학업을 전수하고, 셋째로 사리에 대한 의혹을 풀어주어야 한다. (師者所以傳道授業解惑也)”이것이 스승의 세 가지 임무요 사명이다. 하지만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드물다. 제자의 인격성장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치는 스승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송나라의 대유(大儒)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自治通鑑)》에서 “경사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는 만나기 어렵다.(經師易遇, 人師難遇)”고 하였다. 말하자면 경서의 자구(字句)를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만 제자에게 공정한 도의를 가르치는,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진정한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항상 배우고 본받으며 때로는 격려해주고 때로는 충고해주고 때로는 채찍질 해주는 뛰어난 스승은 참으로 인생의 보배요, 정신의 등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정판룡 선생 같은 참스승을 만났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정판룡 선생은 하나의 성장소설이며 신화다. 그의 빼어난 총기와 패기,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과 근면성, 그리고 성공의 신화는 자라나는 세대들의 영원한 교과서가 되고 그들에게 무궁무진한 힘을 준다.          그는 세계문학의 연구분야에서는 더 말할 것 없고 조선족사회의 진로에 대한 모색을 통해 조선족백성들이 우러르는 “정신적 수령”으로 되었으며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해 평생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사재를 쾌척하여 정판룡교육발전기금, 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 등을 출범시킴으로써 후대사랑, 기부문화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전략가다운 혜안과 선견지명으로 연변대학의 특성과 우세 및 나갈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현대적인 대학경영의 이념으로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종합대학으로 끌어올린 연변대학 명교수의 한 사람이며 걸출한 교육가였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온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후예로서 다문화주의적인 관점으로 중국사회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지위와 진로를 모색하였으며 협애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소수자의 주체적 노력에 의한 여러 민족의 평등, 공존과 융합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특히 그의 평민적인 성격, 너그러움, 유머와 위트는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 어디서나 큰 힘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정판룡 선생을 그리는 까닭이다.     정판룡 선생의 정신은 우리 대학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며 그의 정신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빛을 뿌릴 것이다.                                      2011년 10월 2일         * 본문은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가 2011년 10월 2일 서 행한 발언원고이다.-조글로포럼 편자주  
4    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 (김호웅) 댓글:  조회:3274  추천:73  2010-05-11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4. 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석화의 시「연변 ․ 12 ― 아침에 부르는 처용가」는 신라시대의「처용가(處容歌)」를 재치 있게 패러디하고 있다.   아침 일어나보니/ 머리카락 서너 오리 베개 위에 떨어져 있다/ 이젠 내 두피와 영영 작별한 저것들을/ 지금도 내것이라고 우길수 있을가/ 지난겨울 둘러보았던/ 충남 부여의 고란사와 낙화암과 백마강이 떠오르고/ 삼천궁녀 꽃같은 치맛자락이 베개 위에 얼른거린다/ 백제는 이미 망해 간 곳이 없고/ 그를 이긴 신라도 사라졌으니/ 고구려의 높고 낮은 무덤들조차/ 북국의 차디찬 적설에 묻혀있을 뿐이다/ 어제까지 내 머리에 붙어있던 저것들/ 지난 밤 어수선하던 꿈의 조각들처럼/ 떨어져가고 흩어져가고 지워져가고/ 그리고 이제는 모두 잊혀져 갈것인가/ “원래는 내 해인데/ 앗아가니 어찌 하리요."/ 체조하는 달밤도 아닌데/ 「처용가」한 가락이 저절로 흥얼거려 진다//  이 시를 두고 “인생무상”의 시적주제를 표현했다고 볼수도 있겠으나,『연변』련작시의 총적주제와의 내적인 련관성을 념두에 두고 시 전체를 차분히 읽어나가면 시인 자신의 무상한 인생에 대한 달관의 태도와 함께 많은것을 잃고있는 조선족공동체의 현실적위기와 시인의 우환의식을 보여준다고 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백제, 신라는 더 말할것 없고 고구려의 높고 낮은 무덤들조차 북국의 차디찬 적설에 묻혀있다고 했다. 또 어디 그뿐인가. “어제까지 내 머리에 붙어 있던 저 것들/ 지난 밤 어수선하던 꿈의 조각들처럼/ 떨어져가고 흩어져가고 지워져가고/ 그리고 이제는 모두 잊혀져 갈것인가” 라고 개탄을 했으니 “시인의 머리카락 서너 오리”는 하나의 보조관념으로서 그것은 우리 겨레의 력사요, 영광이며 우리 겨레의 피붙이요, 가장 소중한 민족적 정체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소실되었고 우리 기억에서조차도 지워지고 있다고 했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앞에서 오히려 해학과 익살을 부려 체념을 하고있는것 같지만, 분명 우리 모두에게 깊은 사색을 던져주고있다.   석화 시인이 절묘한 용전(用典) 또는 패러디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의 분열과 조선족공동체의 붕괴위기를 꼬집고있다면, 박옥남은 생동하는 성격창조를 통해 민족적정체성 상실의 비극을 다룬다. 장손은 가문의 대통을 잇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막중한 책임을 안고있다. 하지만 단편소설「장손」의 주인공은 한족학교에 다녔고 조선음식보다 한족음식을 좋아하며 신수는 멀쩡하지만 일하기는 싫어한다. 계집을 좋아하고 여러 번 장가를 들다가 나중에는 중국여인의 품에서 죽어간다. 그런데 여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문상객들도 장밤 마작만 놀아댄다. “장손”의 렵총은 큰처남이 가져갔고 목이 긴 구두는 둘째처남이 가져가는데 오토바이의 “주권”을 두고 막내처남과 “형수”가 옥신각신 다툰다. 청승맞은 새납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개처럼 죽어가고 뜯겨가는 장손의 모습,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퇴색한 사진액자 하나가 허접쓰레기 같은 옷가지에 휘말려 나뒹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주어들고 보니 설날아침이면 차례상에 모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정사진이었다. 유물을 정리한답시며 여기저기 마구 뒤지는 통에 한데 끼여 나온 게 분명했다. 솜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와 앞가리마를  곧게 내여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붙인 한 할머니가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렸을 땐 차례제를 지내면서도 무섭다고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진이었다. 그러다 후에 철이 들면서 차차 익숙해져 다시 정을 가지고 대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일한 사진이었는데 이렇게 이곳에 흘려져 있을 줄이야.   조상의 영정(影幀)마저 챙기지 못하고 개처럼 죽어가는 모습인데, 이를 소설적인 허구로만 볼 수 있을까? 피땀으로 일군 땅을 지키지 못하는 조선족공동체의 현실, 우리의 말과 글, 민족교육의 터전마저 지키지 못하는 현실, “장손”은 결코 허구적인 인물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사촌동생”의 시점으로 모든 인물과 사건을 관찰, 묘사, 서술하면서 절제된 평가와 의론을 통해 냉철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갈피갈피에 펼쳐지는 조선족과 한족 문화에 대한 대비적 서술에도 작가 특유의 혜안과 재치가 엿보인다.    5. 맺는 말    다문화주의사회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이다. “다름”을 리유로 차별하지 않으며 “평등”을 리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사회인 것이다.    우리는 조선족을 연변의 사과배에 곧잘 비유다. 연변의 사과배가 연변의 돌배나무 유전인자와 북청 배나무 유전인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듯이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적 정체성과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이 하나로 결합된 이중적인 정체성 또는 이중적 문화신분을 갖고있는 특수한 민족공동체이다. 이제 조선족은 더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도, 물결 따라 바람 따라 떠도는 부평초도 아니며 아무런 경계 없이 날아다니는 박쥐도 아니다. 조선족이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곳은 중국이다. 석화 시인이「연변 ․ 7 ―사과배」라는 시에서 노래한바와 같이 조선족이라는 이 사과배나무, “우리만의 『식물도감』에/ 우리만의 이름으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 "연변사과배/ 사과만이 아닌/ 배만이 아닌/ 달콤하고 시원한 새 이름으로/ 한 알의 과일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문화를 공유한다고 해서 그것은 1 : 1의 관계는 아니다. 모든 나무의 생명력은 땅속에 뻗어있는 그 나무의 뿌리에 있다. 또 나무가 말라 죽고 있는 까닭은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말라 죽어가고있기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족은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고이 간직하고 자기의 말과 글을 지키며 중국의 주류민족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해서 자립할수 있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할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잃고 주류민족에게 동화되여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줄로 안다. 다문화주의 담론에 있어서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2009년 3월 25일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글싣는 순서  1. 들어가는 말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3.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5.맺는말
3    3. 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 (김호웅) 댓글:  조회:3922  추천:57  2010-05-08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3. 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디아스포라는 지역적공간이나 정신적공간에 있어서 아주 미묘한 “중간상태(median state, 中間狀態)”에 처해 있고 “경계의 공간(liminal, 閾限)”을 차지하고 있어 보다 넓은 영역을 넘나들수 있으며 그들의 작품세계는 모국과 거주국 사이에서 양가성 내지 혼종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디아스포라문학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표현하게 되며 두 문화형태의 혼종성 또는 공존상태로 나타난다. 여기서 두 민족의 어색하면서도 아이러니한 공존 상황을 석화의 시「연변 2, 기적소리와 바람」에서도 볼 수 있다.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 한족말로 우(嗚) ―/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바람은 퍼~엉(風) 불고/ 조선족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 바람 바람 바람 분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을 나는 새새끼들조차/ 중국노래 한국노래/ 다 같이 잘 부르고/ 납골당에 밤이 깊으면/ 조선족귀신 한족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저들끼리만 가만가만 속삭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월의 거리에 넘쳐나는/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   이 시는 상이한 것들이 갈등이 없이 공존하는 다문화적인 혼종성, 쉽게 말하자면 조선족과 한족이 연변땅에서 공존, 공생해야 하는 숙명 내지 필연성을 유머러스하게 이미지화한다. 제1연에서는 기차와 바람을 의인화하면서 우(嗚)―”와 “붕 ―”,  “퍼~엉(風)”과 “바람”과의 대조를 통해 조선족과 한족의 언어적인 상이성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제2절에서는 미물인 새들도, 납골당의 귀신들도 서로 상대방의 소리와 언어에 구애를 받지 않고 의사소통을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두 문화형태 간의 대화와 친화적인 관계를 하늘을 날며 즐겁게 우짖는 새와 납골당에서 구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귀신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유머러스하게 표현함으로써 몽환적인 색채를 십분 살리고 있다. 제3연은 이 시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내적 구조에서 보면 “전(轉)”과 “결(結)”에 속하는 부분인데 연변의 풍물시라고 할 수 있는 “6.1” 아동절의 모습을 색채적 이미지를 구사함으로써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논리로 자연스럽게 매듭짓고 있다.   박옥남 역시 조선족과 한족의 잡거지역, 즉 두 문화의 경계지대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소설「마이허」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2006년 한국 재외동포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마이(蚂蚁)”이란 중국어로 개미라는 뜻이고 “허(河)”란 강이라는 뜻인데 이 개미허리처럼 짤록짤록한 강줄기를 사이 두고 상수리촌이라는 한족마을과 물남마을이라는 조선족마을이 이웃해 살고 있다. 작품은 두 마을의 색다른 풍속과 습관을 비교하면서 배경을 제시한다.   민족이 다르면 언어도 다른 법이다. 그러나 말을 시켜보지 않아도 마이허가에 나와 빨래질을 하는 모습 하나만 보고도 어느 녀인이 상수리의 여인이고 어느 여인이 물남마을 녀인인줄 대뜸 알아맞힐수 있다. 먼저 빨래하러 나서는 모습부터가 다르다. 상수리의 여인들은 큰 대야에 빨랫감을 넘치게 담아 옆구리에 끼고 나오지만 물남의 녀인들은 빨랫감을 담은 대야를 똬리까지 받쳐서 머리 위에 이고 나온다. ……   한 편의 감칠맛 나는 비교문화론적인 에세이다. 좀 더 보자. 상수리촌 녀인들이 남편을 개떡 같이 여기는 습관이 있다면 물남마을 남성들은 오히려 안해를 패서 문밖으로 쫓아낸다. 상수리촌 남자들은 열에 아홉은 부엌일에 능숙하지만 물남마을 남자들은 종래로 부엌간에 들어가는 법이 없이 안해가 밥상을 챙기기를 기다린다. 상수리촌 사람들은 집짓기 전에 토담부터 쌓아올리지만 물남마을 사람들은 뜰 주위를 막는 법이 없이 이웃과 통마당을 쓴다. 상수리촌 사람들은 임자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남의 인분(人糞)이래도 자기 집 마당으로 끌어들이지만 물남마을 사람들은 도적질을 수치로 생각한다.   이처럼 풍속도, 습관도 완판 다른 한족마을과 조선족마을 사이에 청춘남녀의 사랑이 싹트나 그것은 애정의 비극으로 끝난다. 물남마을의 처녀 신옥이는 쑥색군복을 입은 퇴역군인에게 시집을 가는게 소원인데 그녀가 짝사랑을 했던 퇴역군인 총각은 방정맞게 임자가 있는지라 꿩 대신 닭이라고 상수리촌 두부방 쑨령감네 막내아들과 눈이 맞아 돌아간다. 마침내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부모에게까지 들통이 나는데, 신옥이는 아버지에게 늘씬하게 얻어맞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말리면서도 “빌어묵을 지집아가 죽을락꼬 환장이 났노? 무신놈의 망신살이 뻗쳐 해괴하게 되놈이 뭐고, 되놈이. 눈깔이 뒤집힛나? 오늘 니 죽고 내 죽고 그라고 마자고마. 이놈의 지집아야” 하고 아래턱을 달달 떤다. 이튿날 마을회관에서는 마을의 부녀들이 신옥이를 끌어다가 그녀의 “비행에 대해 침을 튕기며 공노했다.” 동네 안에 총각이 없어 하필이면 상수리의 되놈이였더냐, 시집을 못 가 바람이 났더냐, 쑨령감네 두부방에서 같이 자기까지 했다던데 그게 정말이냐, 처녀자로서 얼굴 깎이는 줄도 모르는 년, 동네 안에 나쁜 물을 들이기 전에 마을 박으로 쫓아내야 한다느니 뭐니, 좌우지간 입 가진 아낙마다 한 마디씩 질매(叱罵)를 했다. …이튿날 신옥이는 마이허 물굽이 쪽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작품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제4장을 보면, 신옥이가 죽어간 이야기는 이제 물남마을 사람들에게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고 그들은 열에 아홉은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 마을은 다 퍼먹은 김칫독이 되었는데, 상수리촌 사람들이 들어와 헐값으로 집을 사들이고 벽돌을 실어다 텃밭 둘레에 담을 쌓기 시작한다. 처녀 구하기가 고양이 뿔 구하기보다 어렵다면서 우는 소리를 하던 와중에 물남마을의 총각 하나가 장가를 간다. 한국 가서 돈을 벌어 부쳐주는 누나 덕분에 용케도 홀아비 신세를 면하게 된 귀식이라는 총각이 상수리촌의 한족처녀를 신부로 맞아들인 것이다.   신옥이의 애정비극을 생각 할 때, 조선족총각이 한족처녀를 데려왔으니 물남마을로 놓고 말하면 어깨가 으쓱할 일이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결혼장면이 보여주듯이 한족들에 의해 조선족마을은 완전히 잠식(蠶食)을 당했고 한족 습속대로 스스럼없이 처신하는 신부에 비해 신랑의 존재는 꾸어온 보리자루처럼 무색하다. 이민족의 물결에 휩싸인 조선족신랑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래에 논의하겠지만, 박옥남의 다른 단편소설「장손」에서 답을 구할수 있을것이다.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글싣는 순서  1. 들어가는 말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3.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5.맺는말
2    1.2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김호웅) 댓글:  조회:2662  추천:58  2010-05-06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김호웅(연변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최근 다문화주의(muticulturalism) 담론이 류행하면서 그것을 긍정하고 이상화하는 경향이 팽배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담론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류민족 또는 중심문화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에서 비주류민족 또는 주변부문화의 목소리는 외면되고 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해 시혜(施惠)의 우월감에 젖어있고 후자는 전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동화(同化)의 비애를 맞보고있다. 말하자면 다문화주의담론에서 비주류민족의 정체성과 주변부문화의 존재가치에 대한 옹호와 존중은 망각되고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그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중국조선족 군체(群體), 이들이 모국의 문화와 중국의 중심문화 사이에서 겪는 이중적갈등과 그들의 민족적정체성 찾기는 다문화주의담론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중국 주류민족과 조선족의 갈등과 화해의 논리에 대해서만 논의해보고자 한다. 즉 조선족작가들 중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작품화해온 시인 석화와 소설가 박옥남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문화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소수자들이 어떠한 고뇌와 갈등, 어떠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고있는가를 검토해 보고 이른바 다문화사회담론의 문제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석화는 최근『연변』이라는 시집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연변”이라는 이름으로 3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기본주제는 조선족공동체의 역사와 현실 및 디아스포라의 존재양상과 진로에 대한 시적 탐구이다. 석화 이전에도 이삼월(李三月, 1033~2009)  등 시인이「접목」(1993)과 같은 시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지만 “연변”이란 제목으로 조선족의 민족적정체성의 문제를 련작시의 형태로 집중적으로 다룬 시인은 석화이다. 시「연변 4―연변은 간다」에서는 석화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그건 모르는 사람들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연변은 원래 쪽바가지에 담겨 황소등짝에 실려 왔는데/ 문화혁명 때 주아바이랑 한번 덜컥 했다/ 후에 서시장바닥에서 달래랑 풋배추처럼 파릇파릇 다시 살아났다가/ 장춘역전 앞골목에서 무우짠지랑 같이 약간 소문났다/ 다음에는 북경이고 상해고 냉면발처럼 쫙쫙 뻗어나갔는데/ 전국적으로 대도시에 없는 곳이 없는 게 연변이었다/ 요즘은 배타고 비행기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동경, 북쪽으로 하바롭쓰키/ 그리고 사이판, 샌프란시스코에 파리 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인들 연변이 없을쏘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여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 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나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헷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요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족은 19세기 중반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주해 정착한 조선인의 후예들로서, 광복 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대체로 동북지역의 농촌에서 촌락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 개방 후 산업화와 도시화 물결과 시장경제의 흐름을 타고 농토를 버리고 도시에 들어와 품을 팔거나 장사를 했다. 이들의 발길은 동북삼성을 벗어나 산해관(山海關) 이남의 대도시에까지 뻗어나갔고 “88”서울올림픽 후에는 한국, 일본, 러시아까지 뻗어나갔다. 워낙 이민근성이 강한 조선족의 이주는 중국 경내 기타 민족의 추종을 불허한다. 석화의 시에서 이야기하다시피 비법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조선족의 이민물결, 이들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어느 구석”에도 연변사람들이 활개를 치며 걸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민열조로 말미암아 100여년간 가꾸어온 조선족마을은 텅텅 비어 있다. 이러한 실정을 조선족 산재지구(散在地區)의 현실을 소재로 가장 리얼하게, 역시 집중적으로 형상화한 작가는 박옥남이다.   박옥남의 단편「둥지」는 우리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진통과 붕괴 과정을 진실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이 작품은 진수라는 소년의 일인칭시점과 어조에 의한 생동한 세부묘사, 속담의 적절한 사용, 아낙네들의 개성적인 대화를 통해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피폐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남편을 한국에 보낸 진수 엄마와 촌장이 바람을 피우다가 들통이 나서 온 마을이 어수선한 가운데 진수네 집이 한족 왕가에게 헐값으로 팔리고 우리민족 어린이들이 뛰놀던 벽동소학교가 한족들에게 팔려 양우리로 변한다. “학교간판이 도끼날에 두 쪽으로 쪼개져 교실 창문 위에 거꾸로 덧박혀있”는 광경은 미상불 조선족농촌공동체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둥지가 부서진다면 알인들 어찌 성햐랴! 주인공 성수는 양우리로 변한 학교를 보면서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문득 저 집에 들어올 양들이 나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있던 집도 없어졌는데 양들은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좋은 벽돌기와집에서 살게 생겼으니 말이다.” ― 이 얼마나 눈물겨운 아이러니와 역설인가. 이처럼 이 작품은 이민풍조에 의해 조선족공동체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현실, 다른 민족에 의해 우리의 생활공간이 잠식을 당하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강한 민족적 우환의식을 보여주었다.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글싣는 순서  1. 들어가는 말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3.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5.맺는말
1    서민의 고뇌와 애환 댓글:  조회:2995  추천:122  2008-01-25
서민의 고뇌와 애환 —2008년 “CJ”상, “해란강문학상” 수상작품 심사평 김호웅 이번 심사는 조룡남, 장정일, 김호웅, 허휘훈, 리혜선 등 중견문인들이 맡았고 충분한 론의와 비교를 거쳐 강호원의 단편 “쪽빛”을 “CJ상” 수상작으로, 김양금의 수필 “늙은 버드나무”,  전춘매의 조시 “성밖도 성이다”, 김경화의 단편 “원점”을 “해란강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상기 수상작들은 리얼한 필치, 원숙한 문학적 장치와 기법으로 우리의 삶을 원색(原色)으로 보여주고있으며 밑바닥인생과 디아스포라들의 고뇌와 갈등을 통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고있다. 김경화의 단편 “원점”은 그 제목이 암시하는바와 같이 우리 생활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과장과 분식(粉饰)도 없이 원점에서 원색으로 보여준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경제적불황으로 말미암아 남성은 가정을 유지할 힘을 상실하고 녀성은 타락의 늪에 빠지기 쉬운데, 이 작품의 주인공 “언니”  역시 렴치와 정조 같은것은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다. 그녀는 설사 못난이요, 불구자라 하더라도 배불리 먹여주고 등 따뜻하게 입혀주기만 하면 그런 남정들의 품에 안겨 기생(寄生)하는 몰렴치한 녀인이다. 하지만 그러한 녀인의 타락을 부른것은 지지리 못난 가난이요, 그 장본인은 라태하고 무책임한 남성사회에 있음을 이 작품은 은근히 꼬집고있다. “언니” 남편은 가출해 오래동안 객지로 떠돌고있는 안해를 찾을 대신 "빨리 돈이나 부치라고 해라. 쌀이 거의 다 떨어진다" 하고 소리를 치는데 이러한 루추한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김동인의 소설 “감자”를 련상케 한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니”는 “가출이 아니라 어느 풀숲으로 잠간 소피를 보러 갔다”고 하면서 “그래, 그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언니는 잠시 오줌이 마려웠을뿐이야…” 하고 능청을 떨고있는데 이러한 아이러니는 작중 인물의 도덕적타락에 대한 신랄한 야유가 아닐수 없다. 강호원의 단편 “쪽빛”은 한국의 어느 한 외딴 섬에 있는 공장에서 벌어진 중국동포 정호와 한국인 우반장(禹班長)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인간평등주의 사회에서 지내온 중국동포와 가부장적인 수직론리에 젖은 한국인 사이에는 자연 갈등과 충돌이 생긴다. 중국동포 정호는 육중한 철판들이 부딪치고 쇠를 갈아내는 소음으로 진동하는 로동현장, 고된 로동과 변덕스러운 기후때문에 육신은 무너질것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한국인 우반장의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훈계와 욕설을 받아야만 한다. 우반장은 입만 열면 “씨팔, 씨팔” 하고 10살 손우인 정호에게 거리낌 없이 반말을 쓴다. 하지만 우반장에게서 “병신”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정호는 천둥같이 노해서 쇠파이프를 들고 길길이 뛴다. 결국 정호는 사장에게 들통이 나서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제야 우반장이 공장을 떠나는 정호를 붙잡고 “나는 집에 로모도 없구 툭 털면 먼지라카지만두 형님은 연변에 마누라에 자식들까지 두고 온 묌이 아닌겨?” 하고 한사코 붙잡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적절한 배경을 통해 분위기를 잡고 치렬한 갈등과 충돌을 통해 극적긴장감을 고조시키고나서 자연스럽게 화해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화해를 가능케 한것은 물론 두 밑바닥인생의 가슴속에 고여있는 따뜻한 인간애와 민족적동질성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쪽빛”인데 그것은 바다나 하늘의 색갈인 동시에 피줄의 색갈이며 격렬한 파란(波蘭)과 충격(衝擊) 뒤에 오는 평온과 순수의 빛이 아닐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치밀하게 계산한 상징을 내적장치로 깔고있다고 하겠다. 김양금의 “늙은 버드나무”는 자칫하면 평범한 수필로 지나쳐버릴수 있는 작품이다.  자고로 “나무”를 다룬 시인묵객이 하도 많기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버드나무를 소재로 다루었으되 내가에 실실이 늘어진 능수버들도 아니요, 공원이나 관광지에 소소리 높게 자란 버드나무도 아니요, 길거리에 초라하게 서있는 늙은 버드나무에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리얼하게 묘사한다. “터덜터덜한 줄기들에는 작으면 사발만큼, 크면 대야만큼한 혹들이 험한 바위너설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는” 늙은 버드나무, “허리만 한 아름이지, 키는 잘리고 잘려 기둥뿐인 난쟁이” 늙은 버드나무, “정수리에는 수관도 없이” 가냘픈 새 가지 몇대만을 겨우 키워냈기에 초라한 로구(老軀)에 찢어진 양산을 쓴것 같이 위태로와보인다”고 했다. 여기서 “늙은 버드나무”라는 메타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대문명에 의해 소외되는 우리의 전통적인 모습일수 있으며 획일주의와 편의주의적인 발상에 의해 비틀리고 찢기고 재단되는 인간의 생명이요, 자연의 모습일것이다. 늙은 버드나무라는 메타포를 적절하게 구사하고 버드나무라는 관습적상징을 개인적상징으로 전환시킨데 이 작품의 성공비결이 있다고 하겠다.   전춘매는 연변을 떠나 북경에 살고있는 녀성시인이니, 일종의 디아스포라적인 문화신분을 갖고있다고 하겠다. 향수는 디아스포라문학의 영원한 주제인데 이를 어떤 방식으로 시화(詩化)하는가가 중요하다. 시인은 호화로운 북경성에 살고있지만 자기 자신이 설 자리는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성밖에 성을 쌓는다. 성밖의 성은 하나의 허구요, 공상의 세계다. 이를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할 때 비로소 시가 성립된다. 시인은 성밖의 성을 두고 “바라만 보다가/ 보습날 하나 박고/ 바라만 보다가/ 씨 한번 뿌리고/ 그렇게 바라만 보다가/ 하아얀 마음의 기둥에/ 그리움의 기와를 얹어/ 소망으로 채워가는/ 또 하나의 고향집”이라고 했다. 공상속의 성을 다양한 이미지로 구상화(具象化)시키는 솜씨가 범상치가 않다. 또 시인은 북경골목의 평범한 랭면집을 찾는데 “이빠진 랭면그릇 상처 사이로/ 추억의 실바람이 싸늘히 불어와/ 세월너머 할머니의 랭면맛을 더듬게 한다.”고 했다. 얼마나 예리한 시적발상이며 얼마나 자연스러운 련상인가?  녀성글쓰기의 장점도 십분 살렸다고 본다. 수상작들이지만 언어를 한결 더 다듬어써야 할 보편적과제를 안고있다. 김경화의 단편 “원점”의 경우는 플롯이 산만하고 세부묘사가 결여되여있어 인물이 살지 못했으며 김양금의 수필 “늙은 버드나무”는 의론을 한 가닥으로 잡지 못해 현대문명에 의한 인간소외의 문제냐, 아니면 생명력의 찬미냐 하는 주제의 분열을 초래할 우려가 있고 전춘매의 조시 “성밖도 성이다”는 기승전결의 내적구조를 갖지 못해 느슨하게 풀린 감을 준다. 수상자 여러분에게 모두어 축하를 드리면서 이로써 심사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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