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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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선비는 죽일 수는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 댓글:  조회:677  추천:0  2021-09-26
김학철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김학철이라 하면 두 장면이 먼저 눈앞에 떠오른다. 하나는 1975년 그가 공판(公判)을 받던 장면이요, 다른 하나는 1980년 그가 무죄판결을 받던 장면이다. 1966년 김학철은 최고지도자의 개인숭배와 지식인에 대한 탄압을 비판한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한 까닭에 "문혁"시기의 공안당국에 의해 철창에 갇혔고 마침내 7년 4개월만에 공판을 받게 되었다. 1975년 4월 3일, 연길시 로동자문화궁전에는 1천 3백여명의 인파가, 그야말로 립추(立錐)의 여지도 없이 꽉 들어찼는데 김학철은 두 무지막지한 경관에 의해 단상에 끌려 올라왔다. 외다리에 엽장을 짚고 서있는 김학철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경관들은 그의 뒤통수를 치며 내리눌렀다. 김학철은 뒤통수를 내리치면 다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날은 자아변호도 용허되지 않았다. 김학철이 자신의 무죄를 두고 항변하자 경관들은 부랴부랴 걸레를 뜯어다가 그의 입에 아갈잡이를 했다. 김학철은 아예 엽장을 내던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삽시에 단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공판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군자는 죽어도 관(冠)을 벗지 않는다고 김학철은 일거수일투족을 다 의식적으로 했던것이다. 1980년 김학철은 24년이라는 비극적인 생활을 마치고 무죄판결을 받게 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감지덕지해서 눈물을 흘릴 일이지만 김학철은 달랐다. 공판을 받을때처럼 무죄판결 공포대회에 1천 3백명의 시민이 참가하지 않으면 불참이라고 선언했다. 12월 15일, 무죄판결 공포대회는 당교(當校) 회의실에서 열렸는데 다른 당사자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이제라도 살려주어 고맙습니다, 하고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김학철은 다음과 같이 소감발표를 했다. '나는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사람잡이를 업으로 삼는 인간백정들의 말로(末路)'에 쾌재를 부른다. 하지만 지난날 함께 싸웠던 친구들을 볼수 없어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광신(狂信)과 맹동(盲動)으로 소란스러웠던 "문혁"의 시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초연히 회장을 떠나버렸다. 이처럼 김학철은 신념과 의지의 사나이다. 그는 비정한 권력에 아부하고 굴종할줄 몰랐다.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여러 번이나 "죽일수는 있으되 욕보일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는 선비의 덕목과 위용을 생생하게 보여준 혁명투사요, 참다운 문학자였다. 젊은 시절, 그는 망국노가 된 마당에 일신의 영달과 부귀만을 위해 공부만 할수는 없었다. 그는 분연히 고국을 떠나 상해로 갔고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태항산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일본군에 잡혀 나카사키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지만 비굴하게 전향서(轉向書를) 쓰고 치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총상을 입은 다리는 썩어서 잘라낼수밖에 없었다. 그 다리는 지금도 감옥담장 옆에 묻혀있을 것이다. 새파란 나이에 한 다리를 잃었으니 무엇을 할것인가? 집안의 기둥같은 오빠가 한 다리를 잃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겠소? 하고 누이동생 성자가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내오자 김학철은 다리 한짝쯤 없어도 별문제다, 인간은 결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야, 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는 총대를 붓대로 바꾸어들고 문학창작에 매진한다. 어디 그뿐인가? 광복 후에도 아시아의 독재자들과 차례로 맞서 싸우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쪽으로 밀려갈 때 혼자서 해 솟을 동쪽으로 달려갔다. 65세에 복권이 되고 85세에 운명하기까지 김학철문학이라는 탑을 쌓아올리고 삶에 련련하지 않고 20여 일 곡기(穀氣)를 끊은 끝에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정한 권력에는 물론이요, 인간의 생리적인 한계와 죽음의 공포마저도 이겨낸 이 시대의 강자요, 철인(鐵人)다. 김학철은 권세에 아부굴종하고 권력의 앞잡이로 무고한 사람을 물어뜯은 "설치류(齧齒類)"들, 명철보신하고 시세에 편승하는 "숙주나물"들, 더욱이 자신의 과오와 허물을 감추고 오리발을 내미는 "카멜레온"들, 벼슬에 미친 "벼슬중독자들"을 눈이 찢어지게 미워했다. 아니, 절대 용서를 하지 않았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것에 도전하라." 적잖은 사람들은 이를 김학철의 유일한 유언으로 알고있지만 기실 유언이 또 하나 따로 있다. 김학철은 세상을 떠나면서 12명의 후배작가들을 불렀다. 유언 한장을 남기고 아드님더러 타이핑을 해서 출력한 후 하나하나 사인을 했다. 그 유언인즉 이러하다― 내가 여태껏 지켜본 바에 의하면 김, 임, 장 아무개는 자신을 뉘우칠줄 모르는 전대미문의 악인이고 박 아무개는 세상에 드문 어진 사람이다, 이를 세상에 알리고 가노라, 대개 이런 뜻이다. 이 세 "악인"이란 유다처럼 김학철을 팔아먹었지만 단 한번도 찾아와 반성하지 않은 배신자요, 악한들이다. 김학철은 평생 로신을 좋아했는데 그 역시 물에 빠진 개는 호되게 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요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유태계 작가이자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증언문학 "이것이 인간인가"(1947)를 보았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진 잔악한 행위와 비굴한 행위를 두고 "인간이 이처럼 잔혹할수 있는가? 또 인간이 이처럼 비굴할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김학철 역시 인간의 잔혹함과 권력의 비정함을 질타함과 동시에 권력에 비굴하게 빌붙어 동지를 팔아먹고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꾀한 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이들은 때가 되면 비정한 권력의 온상(溫床)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원광대학의 김재용박사는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에 김학철과 김사량 두분의 항일문학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다. 소쩍새 우는 호가장의 모텔에서 나는 김재용박사를 보고 왜 한국과 중국 사이를 넘나들면서, 호가장이라는 이 오지까지 찾아와서 김학철항일문학비를 세우고자 애를 쓰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학철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서울 파고다공원 길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2층 모텔에서였어요. 좁은 목조계단으로 삐걱삐걱 올라가면 2층에 5, 6평 되나마나한 방이 있는데 선생님은 아드님과 함께 거처하고 계셨습니다. 그 날 선생님 부자간을 모시고 육개장 한 그릇씩 나누어 먹는데 제가 '선생님은 어떻게 이 험악한 세상을 헤쳐나올수 있었구 이처럼 큰 인간승리의 탑을 세울 수 있었습니까? 선생님의 신조(信條)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선생님은 싱그레 미소를 짓더니 '사의 신(神)은 우리 인간들이 풀수 있는 숙제만 주는거야. 우리 인간이 풀수 없는 역사의 숙제란 없어. 다만 사람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느냐 마느냐의 차역이가 있을 따름이야." 김재용 박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확 뜨거워지더라고 했다. 그때부터 김재용 선생은 김학철 선생을 무조건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김재용 박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있다. 우리 모두 역사를 관장(管掌)하는 신(神)이 있다고 생각하고 약하고 어질고 성실한 자들의 편에 서서 비정과 불의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다. 제 일신의 영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일가족 생계 때문에, 자식의 진로 때문에 상하좌우 눈치만 본다. 밤중에 술판에서는 비분강개한 선비가 되지만 날이 새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산토끼처럼 조심스러운 소시민이 되고만다. 이 눈치 저 눈치만 보다가 몸을 사리는 여우같은 인간이 되고만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김학철이 필요하고 그의 의로움과 의젓함과 세상을 꿰뚫어보는 그의 추상같은 눈매가 필요한 것이다.   2016년 5월 29일 동북아신문
41    [현대시조] 나훈아 댓글:  조회:562  추천:0  2020-10-12
김호웅 연변대학교 교수 쌍봉촌에 달이 뜨네 동산마루 숲속에서 밤안개 밀어내고 부모형제 얼굴 뜨네 일본 간 막내처남 그 아내와 향설이도 바다에 떠오르는 저 달님을 보겠지 심양의 큰 처남네 천하장군 두 손주도 푸른 하늘 은하수 노래하며 춤 추겠지 이 사람이 눈이 없어 섬나라에 보냈는가 이십칠 년 긴긴 세월 타향살이 하는구나 우리 내외 덕이 없어 만나지 못하는가 막내 처남 글월 보니 눈물이 절로 나네 어느 시인 말했던가 매봉가절배사친이니 고개 들어 달을 보고 고개 숙여 고향생각 여러 형제 정성 모아 선산에 절을 하고 진우 아빠 동무해 술 한 잔 나누는데 내 자식들 흩어져도 정애만은 변함없다 부모님 하늘에서 빙그레 웃으시네 희영청 밝은 달님 부모님 얼굴이요 천애지각 골고루 살피여 주옵시니 오늘 밤 나훈아 노래 듣고 실컷 울어 보자꾸나   -경자년 10월 3,일, 고향을 사무치게 그리는 막내처남의 글월을 보고 김호웅 :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동북아신문        
40    [칼럼]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 (김호웅) 댓글:  조회:831  추천:1  2020-09-14
칼럼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 김호웅        1990년 늦가을, 정판룡 선생께서 학술회의 참가 차 미국을 거쳐 일본에 들렸다가 동경의 어느 호텔에서 재일조선인 거물급 인사들을 상대로 일본어로 강연을 했다. 그 무렵 나는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신분으로 동경에 체류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의 시중도 들겸 며칠 동안 함께 지냈다. 그래서 자연 강연장에 가서 정판룡선생께서 일본어로 강연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경청하게 되었다. 좀 발음이 어색했지만 워낙 배포 유하고 유머러스한 어른이라 당신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유감없이 펼쳤고 무시로 청중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일제시기 소학교 3학년 밖에 다니지 못한 선생께서 반백년이 지난 오늘도 슬슬 유모아까지 써가며 일본어로 강연하는데도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특히 강연 뒤끝에 결론 삼아 남긴 이야기는 지금도 새삼스레 내 뇌리를 친다. 그날 선생께서는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력사와 현실을 이야기하고 나서 조선족과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재외동포들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난 100년 세월을 되돌아보면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 형제들은 재일동포나 재미동포에 비해 한가지를 잘하지 못했고 한가지를 잘했습니다. 잘하지 못한 것이라면 재일, 재미 동포에 비해 볼 때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한 것이라면 일제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을 이겨내고 민족교육을 지켜내고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일, 재미 동포들에 비해 보다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미국과 일본을 두루 돌아보니 재일, 재미 동포들은 2세, 3세에 와서 거의 다 우리말과 글을 잃어버렸습디다. 일단 잃어버린 언어는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잘사는 일은 조만간에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등소평시대를 맞아 가난의 때를 벗고 유족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을 이미 마련했습니다. 그런즉 21세기에 우리는 재일, 재미 동포들 못지 않게 잘 살수 있을 뿐만아니라 여전히 우리말과 글을 쓰는〈조선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과 글을 잃은 재일, 재미 동포들은 더는〈조선사람〉으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좀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저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박수를 좀 쳐주십시오.》      청중들은 한참 어정쩡해 있다가 역시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우리 조선족형제들이 민족교육을 통해 이민사 100년을 기록하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구사하고《조선사람》으로 살게 된 일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허리에 천금을 두른 재일동포들 앞에서도 떵떵 큰소리를 치면서 자랑했던 것이다.      정판룡선생의 말씀에는 사실 깊은 철리가 깃들어있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불명확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애매모호한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세기 독일의 철학가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두고《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라고 한다면, 존재는 그 안에 거주한다.》고 하면서 언어를《존재의 집》라고 했다. 즉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언어는 민족의 력사를 담는 그릇이요, 민족의 얼을 담는 항아리이며 한 민족을 다른 한 민족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로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명한 언어학자인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선생 역시《우리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했고 당신에게는《한글이 목숨》이라고 했던 것이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력사도, 문화도, 정신도 다 잃게 되고 그 어디에도 몸담을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된다. 이는 청나라 동릉(清东陵)에 가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동릉은 하북성 준화시(遵化市) 경내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북경에서 서쪽으로 250리 떨어져 있어 자가용으로 두어시간이면 족히 가볼 수 있다. 나는 2008년 초겨울 북경포럼 때 주최 측의 배려로 가보았다. 북경에 있는 명황릉(明皇陵)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 않으나 1928년과 1945년 두번이나 도굴(盜掘)을 당해서 빈껍데기만 남은 황릉이라 좀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동릉에는 순치(1638~1661), 강희(1654~1722), 건륭(1711~1799), 함풍(1831~1861), 동치(1856~1874) 등 다섯 황제의 릉묘가 있는데 그들의 비석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원에 들어온 첫 황제인 순치의 비석을 보면 그 복판에 꼬불꼬불한 만주어가 커다랗게 새겨져있다. 하지만 그 뒤 황제들의 비석으로 오면서 그 복판에는 중국어와 만주어가 나란히 새겨진다. 이제 함풍황제의 비석을 거쳐 동치황제의 비석에 오면 그 복판에 중국어가 대문짝만하게 자리를 잡고 주인행세를 하고 만주어는 비석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무늬구실을 하고 있다. 언어와 민족의 함수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언어를 잃으면 민족도, 나라도 다 잃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도 대과(大过)는 없을 것이다.      정판룡선생의 일화를 꺼낸 김에 동릉을 견학했던 일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의 현실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조선족 중, 소학교가 점점 줄어들고 조선족학생들이 한족학교에 몰려가고 있다. 일부 학부모들은 이왕 중국에서 사는 것만큼 중국어만 잘하면 됐지, 조선어는 배워서 뭘 하느냐 하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우리 조선족자치주의 언어생활도 말이 아니다. 특히 간판이 그러하다. 조선어에 대한 무지, 지어는 왜곡과 경멸로 얼룩진 간판들이 버젓하게 거리와 관광명소들을 도배하고 있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고문구, 지어는 외설적인 표현들에 어른들마저 고개를 들기 어려운데 이러한 란잡한 언어문화 속에서 자라나는 후세들이 어떻게 바른 언어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다른 민족과 선의적인 경쟁을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우리 언어환경이 무너지면 자치주도 몸담을 곳이 없게 되고 기껏해야 허울 좋은 개살구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속수무책으로 수수방관할 수 있는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애착과 배움의 열정, 그리고 그 면면히 이어지던 전통은 어디로 갔는가? 언어를 잃고 영영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만주족의 전철을 우리가  다시 밟아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삼척동자에서 학발로인까지, 특히 조선어교육에 종사하는 이들과 이를 관장하는 인사들이 모여앉아 시급히 해결책을 내놓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2018년 8월 19일 연길에서  
39    [칼럼] 야브네학교와 명동학교(김호웅) 댓글:  조회:842  추천:0  2020-08-27
    유태인 천년사"라는 좋은 책이 나왔다. 유태인의 파란만장한 력사와 그들의 종교와 문화, 교육과 지혜, 그들의 세계적인 활약상을 소상히 소개했다. 유태사회에서는 제관장(祭官長)을 랍비라고 하는데 랍비는 유태인에게는 교사가 되기도 하고 재판관이 되기도 한다. 이 책에도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와 야브네학교에 관한 이야기는 나온다. 그 이야기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66년 유태민족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때 크게 활약한 랍비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요하난 벤 자카이다. 로마군대가 유태의 사원을 봉쇄하고 유태인을 전멸시키려고 했을 때 요하난은 온건파의 수령으로 있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강경파의 엄밀한 감시를 받았다. 그는 유태민족이 영원히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가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로마의 장군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요하난은 로마의 장군을 만나기 위해 큰 병에 걸린 것처럼 꾸며가지고 일부러 침상에 드러누웠다.그는 대승정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마침내 그가 죽어간다는 소문이 퍼졌고 얼마 있다가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의 제자들은 성안에는 묘지가 없다는 구실을 대고 그를 관에 넣어가지고 성밖으로 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경파 수비병들은 그가 정말 죽었는지 확인해 보겠다 했다. 그들은 칼로 관을 찌르려 하였다.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필사적으로 막아나섰다. 요하난은 제자들이 보호해준 덕분에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고 로마의 장군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요하난은 로마장군을 보고  "나는 당신에게 로마 황제에 대한 경의와 똑같은 경의를 표합니다." 하고 말했다. 로마 장군은 자기네 황제를 모욕했다고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당신은 분명 다음에 황제로 될 것입니다." 하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장군은 쓴웃음을 짓더니 "그렇게 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의 부탁은 무엇이요?" 하고 요하난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요하난은 정색을 하고 "단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방 한칸이라도 좋으니 10여명의 랍비들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 하나를 남겨주십시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학교만은 다치지 말아주십시오." 하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요하난은 예루살렘이 로마군사에 의해 조만간 점령, 붕괴되고 대학살이 자행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있었다. 그러나 학교 하나만 있다면 유태의 력사와 전통은 이어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마침내 요하난은 로마장군으로부터 "생각해보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얼마 후 황제가 죽고 장군이 황위에 올랐다. 예루살렘은 무지한 로마군사들에게 짓밟혀 그야말로 "돌 우에 돌이 없을 지경"으로 풍비박산이 났고 십자가마다에 유태인의 시신들이 디룽디룽 매달려있는 살풍경을 이루었다. 하지만 새 황제는 요하난과의 약속만은 지켰다. 그는 로마의 군사들에게 "작은 학교 하나만을 남겨두라"고 명령했다. 그게 바로 유명한 야브네학교였다. 이 학교에 남은 랍비들이 유태의 력사, 전통과 지식을 지켜내고 후세들을 키워냈음은 물론이다.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의 생활방식 역시 그 자그마한 야브네학교에 의해 지켜졌던 것이다. 이는 유태인에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전통이 얼마나 유구한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사실 세계에서 유태인만큼 오랜 세월 수난과 고통을 받은 민족은 없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만 나치 독일의 반유태주의 광란에 의해 600만명의 유태인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교육을 숭상하고 스승을 아버지보다도 더 존경하면서 대를 이어 열심히 공부했고 구름처럼 떠도는 디아스포라로 살았지만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세계 최고의 두뇌들을 육성해냈다. 유태인은 "세계에 세 위대한 두뇌를 기여했다"고 말하는데 이 세 두뇌란 바로  맑스, 프로이드,아인슈타인이다. 이들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령역에서 전대미문의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고 인류사회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유태인의 력사를 읽노라면 자연 우리 조선민족도 교육을 숭상하고 스승을 존경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민족이 아닐가 생각한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조선족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리상설 등은 이민초기인 1906년 10월 룡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1907년 리상설이 고종의 특사로 이준과 함께 네들란드 수도 헤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룡정촌을 떠나는 바람에, 특히 경제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서전서숙은 1907년 9월 1년만에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였다. 하지만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1908년 4월에 설립된 명동학교는 김약연 선생이 교장을 맡았는데 사면팔방에서 빼여난 선비들을 모셔다 교편을 잡게 하였다. 명동학교는 갈수록 명성을 드날려서 남북만과 로씨야 연해주,심지어는 조선에서까지 배움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 명동학교는 역시 일제의 간섭과 경영난으로 1930년대 초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10여년간 신문화의 보급과 민족의식의 함양에 크게 기여하면서 12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중에는 항일운동가와 교육자로 방명을 남긴 이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 민족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아리랑"을 만든 라운규, 통일운동가 문익환,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소설가이며 교육자인 김창걸, 불멸의 시인 윤동주, 주덕해를 혁명의 길로 이끈 공산주의자 김광진 등 수많은 영재들을 키워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약연은 우리 조선족의 요하난 벤 자카이요, 서전서숙이나 명동학교는 우리 조선족의 야브네학교라고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요즘 명동에 가보면 명동학교가 옛모습 그대로 복원된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김약연선생의 공덕비는 웃머리 한 귀퉁이가 뭉텅 떨어져나갔고 비문도 마모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였다. 해방후 김약연 일가가 지주로 성분을 받은 연고로 이 공덕비도 기석에서 뿌리가 뽑혀나가 마을 앞 개울가의 징검다리로 쓰였는데 이를 1980년대 초에 다시 가져다가 세운것이라 한다. 참으로 볼썽사납다 하겠다. 하루 빨리 원질이 좋은 백옥을 구해다가 곱게 다듬어 김약연 선생의 공덕을 돋을새김해서 세웠으면 한다. 우리 조선족교육의 터전을 만든 위대한 교육자의 공덕비이기 때문이다. 2016년 1월 9일
38    [서평] 백년사의 기록과 증언, 새로운 세대의 횃불 (김호웅) 댓글:  조회:517  추천:0  2020-08-27
백년사의 기록과 증언, 새로운 세대의 횃불   김호웅   조선왕조 후기의 뛰어난 문장가이며 서화가였던 유한준(1732∼1811) 선생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知则为真爱,爱则为真看, 看则畜之而非徒畜也)” 라고 했다. 사서오경이나, 성경 속의 말씀과 같은 이 금언(金言)은 1990년대 중반 한국의 미학자 유홍준 선생이 그의 명작《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우리 말로 멋지게 번역,소개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다. 이는 또한 뜨거운 가족애와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수년 간 불철주야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 마침내 《원색의 기억——동북에서 살아온 조선족가족의 이야기》(이하 이라 함)라는 장편수기(长篇纪实文学)를 펴낸 계영자씨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명언이라 하겠다.    사실 나는 계영자씨와는 대학 4년 동안 같은 교실에서 공부한 동기동창이다. 계영자씨는 대학에 들어올 때 벌써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는데 공부도 잘 했거니와 학급의 큰언니 구실을 했고 학급간부회의나 당지부회의 때 보면 자기의 소신과 견해를 똑 부러지게 이야기했다. 특히 대학을 졸업한 후 해변도시 대련에서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심심찮게 보고 듣게 되었다. 1998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고중부가 설립될 때 나는 하객(贺客)으로 초청을 받는 영광을 지니고 현지에 가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닷가에 있는 대련성(大连程)이라는 광장에 대련을 빛낸 천 명의 걸출한 인물들의 발자국이 대형 동판들에 찍혀 깔려있는데 그 속에 계영자씨의 발자국도 있었다. 다른 인물들의 발자국에 비해 좀 작지만 소담스러운 그 발자국, 그것은 그의 눈물겨운 분투의 역정과 출중한 업적을 그대로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후에 《추억이 깊은 곳에 파란 꽃이》라는 그의 수필집을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의 높푸른 이상과 격정, 인민교사의 미덕과 중학교 교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추억의 깊은 곳에 푸른 꽃이》라는 수필집에 대해서는 대련 현지의 유명한 시인 김파 선생, 연변의 저명한 평론가 김룡운과 최삼룡 선생이 상세히 소개하고 분석, 평가했다. 또 이 장편수기에 대해서도 계영자씨와 필자의 대학시절 담임선생님인 김병민 교수가 참신한 시각과 이론적 틀을 가지고 정곡을 찌르는 논평을 하였다. 자식, 안해, 어머니, 교장 등 일인다역(一人多役)의 배역을 훌륭히 연출한 계영자씨의 인간적 매력과 심령의 미, 그간의 노고와 업적을 높이 사준 최삼룡 선생의 분석과 평가에도 수긍이 간다. 또한 사회력사적비평, 다문화주의시각과 서사미학의 각도에서 《원색의 기억》이 가지는 인문학적 가치, 서사구조나 인물성격 등에 대해 간단명료하지만 깊이 있게 분석, 평가한 김병민 교수의 서문에는 더더욱 공감한다. 그러니 필자가 이 작품을 두고 다시 구구히 분석, 논의한다면 오히려 사족(蛇足)이 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이 장편수기를 읽는 동안 너무나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이상 이 작품의 역사적이며 미학적인 가치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각도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민족의 뿌리와 역사는 기억과 기록으로 남는다. 그것이 왕후장상의 공훈담이든 서민백성의 이야기이든, 또 자랑스러운 역사이든 수치스러운 역사이든 이를 기억하고 이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확실하게 실천하는 민족만이 영원히 생존할 수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말해준다면 예루살렘의 많은 유적들은 온갖 수난으로 점철된 유대민족의 슬픈 역사와 트라우마(tráumə), 즉 정신적 외상(外傷)을 기록, 증언하고 이를 넘어서 민족과 나라의 부흥과 독립, 발전과 번영을 약속해준다.    이 장편수기는 “나의 가족”, “남편네 가족”, “나의 교육사업성장사” 등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20세기 초부터 오늘에 이기까지 장장 100년의 역사를 5대에 걸치는 3십여 명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그야말로 청나라 말엽 4대 가족의 흥망성쇠를 다룬 조설근의 장편거작 《홍루몽》을 연상케 하는 방대한 가족관계이다. 구술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이 기나긴 역사와 수많은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작자는 어떻게 다루었을까? 물론 이 거창한 가족사의 중심에는 계영자씨가 있고 그의 시점으로 모든 인물을 다루고 평가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친정집의 역사, 시집마을의 역사, 작자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대의 생활사로 구성되는데 이 3부곡은 삼각형 파라미트 형 구조를 취한다. 한자로 말하면 쌓을 루자형(垒字型)구조를 이룬다.    먼저 1세와 2세들의 이야기다. 계씨, 신씨, 김씨 등 세 가족이 천신만고 끝에 중국 동북에 정착해 인척관계를 맺고 삶의 기반을 마련한다면 그중 계씨네 가족의 막내딸 계영자씨가 리씨네 가족에 시집을 감으로써 계씨네 가족과 리씨네 가족이 사돈이 된다. 여기서 리성해와 계영자 내외를 비롯한 3세와 4세, 지어는 5세들의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참으로 방대한 가문이요, 복잡한 인물관계를 이루지만 루자형 서사구조를 취함으로써 그 맥락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작자는 시간변조(Anachrony)와 같은 현대소설의 서사기법을 활용해 현재의 사건이 진행되는 도중에 과거의 사건들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현재의 사건을 진행시키는 중에 뒤이어 일어나는 사건을 앞질러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결합모티프(bound motifs, 생략할 수 없는 모티프, 스토리를 다시 이야기할 때 빼버리게 되면 사건의 연결을 혼란시키는 요소들)와 자유모티프(free motifs, 생략할 수 있는 모티프, 스토리를 다시 이야기할 때 빼버려도 서사체의 일관성을 깨드리지 않는, 즉 사건들의 전체적 인과의 연대기적 과정을 혼란시키지 않는 요소들)를 자유롭게 교차시키는 현대소설의 서사기법을 자유롭게 활용함으로써 기본 이야기줄거리에 새로운 가지를 치고 복선과 조응의 미를 창출하며 주요 인물들의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산재지구 조선족이민사의 예술적 화폭으로서 이 작품에 담겨진 아래와 같은 이야기들은 기존의 이민사 관련 작품, 특히 연변지역의 이민사 관련 작품에 비해볼 때 제재의 참신성과 작자의 탁월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하나는 동북으로 이주하게 된 원인을 다양하게 밝히고 있다. 리씨네 가족은 평안북도 태천군에 살 때부터 지체 높은 양반가문이었다. 하지만 아들놈이 동네의 아이들 싸움에서 이웃에 사는 보다 권세 있는 양반가문의 자식을 몽둥이로 때려눕힌 까닭에 그네들의 보복을 피해서 하는 수 없이 솔가도주해 압록강을 건너 동북지역으로 들어온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재해와 일제의 침탈로 말미암아, 또는 항일독립운동이나 교육구국을 하기 위해 정든 고국을 등지고 동북에 온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리씨네 가족처럼 특이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울며 겨자 먹기로 동북에 정착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의와 법도를 중요시하고 위계질서가 분명한 몰락양반의 가문, 그러나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살리면서 칠전팔기 동산재기 하는 리씨가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둘째로 “아리랑현상”에 대한 서사이다.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한 우리 민족의 이주는 한 번에 이루어지고 한 곳에 정착해 둥지를 틀고 살아온 게 아니다. 이들은 “9.18사변”이나 만보산사건 때처럼 전란을 피해 여러 번 이주를 하거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특히 물이 있고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더 좋은 고장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를 사학계에서는 “아리랑대오(阿里郞队伍)” 또는 “아리랑현상”이라고 한다. 계씨네 가족도 그러했다. 평안북도 선천군에 살던 이들 가족은 먹고 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선후로 심양, 휘남, 반석, 우란호트, 통료, 개원에 가서 살다가 다시 휘남을 거쳐 개원에 정착한다. 따라서 계씨 가족의 이민사와 정착사를 통해 동북지역의 지리와 인문 상황을 폭넓게 보여줄 수 있었다.    셋째, 이들이 살았던 다민족 내지 다문화적인 생존공간이다. 연변의 경우는 주로 조선인 농민들끼리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면 요녕성이나 길림성 북부, 내몽골지역의 경우는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과 잡거하는 거주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다민족, 다문화적인 거주형태는 여러 민족 간의 언어와 풍속의 차이, 갈등과 반목, 소통과 융합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이주민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갈등과 고뇌는 더욱 극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민족의 잡거형태는 조선인 이주자들에게는 단일문화형태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반성, 극복하는 계기로 되였고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다른 민족들과의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계기로 되였다.    이 장편수기는 상술한 사회문화배경을 폭넓게 제시하면서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조선인 이주민들이 원색적인 삶과 다양한 인물성격을 부각하고 있다. 서사작품의 가치는 이야기성에 의해 좌우지된다고 할 때 이 작품의 적재적소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은 읽을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하지만 수기나 평전의 경우 진실성은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전기적비평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프랑스 비평가이며 전기작가(传记作家)인 상트 뵈브(1804-1869)는 “나에게 좌우명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 그리고 오로지 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진실을 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주(传主)의 구술이나 자전(自傳)의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부풀린 부분이 있기에 마련이다. 또한 작자가 전주나 주요 인물들과 인척관계가 있을 경우에는 그 공(功)과 과(过)를 객관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저도 모르게 공적은 부풀리고 허물은 감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는 객관적인 태도와 냉철한 비판정신이 요청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책임지는 “오로지 진실”의 원칙을 가지고 계씨와 리씨 양가의 역사와 가풍; 양가의 조부모와 부모, 고모와 이모, 그리고 형제자매를 비롯한 모든 친인척들에 대해 그 원색적인 모습, 말하자면 이들 가문의 빛과 그늘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드러냈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친정마을의 경우를 보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벼농사를 하는 친정아버지, 그러나 그는 부모님에게는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아랫사람들의 의견은 덮어놓고 묵살하는 전통적인 효자요, 아버지상이다. 그리고 13살에 시집을 가서 팔남매를 낳았고 이들을 키우기 위해 그야말로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어머니, 하지만 시어머니 앞에서는 부르튼 소리 한 마디 못하고 꼬박꼬박 월급봉투를 바치는 어머니의 모습 역시 너무나 진실한 구시대 며느리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시집마을의 경우, 가문이 대소사를 쥐고 흔드는 지고무상의 어른인 할머니의 모습, 죽어지내는 아버지와 며느리의 모습도 잘 그렸거니와 할아버지와 어린 장손이 따로 밥상을 받고 나머지 식구들은 저만치 비켜 앉아 궁색하게 밥을 먹는 장면도 잘 그렸다. 특히 봉건시대의 유습과 권위, 가족관계와 가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광명뜨락(光明大院)은 그야말로 《홍루몽》의 가부(贾府)를 연상시킨다. 그 외에도 친정집의 여러 삼춘과 삼촌댁, 오빠와 언니들; 시집마을의 고모나 고모부, 그리고 시누이들의 형상도 너무나 생동하게 그렸다 하겠다. 특히 남존여비의 고루한 유습과 다른 민족과의 통혼에 대한 반대에 부딪쳐 실의와 절망을 하던 나머지 죽을 고비를 겪는 작자의 큰 언니,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에 가서 고된 일을 하다가 오진을 받고 이상한 주사를 맞고 까닭 없이 죽은 작자의 시동생 리성림, 아내를 한국에 보내고 쓸쓸하게 지내다가 술에 취한 나머지 벽과 침상 사이의 틈새에 끼워 숨진 작자의 시동생 리성광, 그야말로 코리안 드림의 여파에 찢어지고 부수어진 그들 가족의 커다란 아픔이요, 우리 조선족사회의 어두운 단면(断面)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 작품의 중심에는 작자의 자아형상이 서 있고 그의 예리한 시선과 시각이 전편을 관통하고 있다. 결혼식 날 새하얀 너울을 쓰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지만 큰상에 오른 음식 수를 헤아려 보는 계영자씨, 음식과 과일 등속이 서른여섯 가지라는 것까지 헤아리는 그 눈매도 매섭지만 신랑감과 처음 만나는 순간 그의 키가 1미터 72센티라는 것까지 한 눈에 알아본다. 작자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천부적인 관찰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가족과 일가친척에 대한 계영자씨의 남다른 사랑이다. 이 세상에 시집마을 일가친척의 내력이나 가족성원들 매 개인의 성격이나 아픔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며느리가 몇이나 될까? 계영자씨의 가족애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 그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까지 확산된다. 이 작품의 제3부는 자신의 교사생활을 다루고 있지만 전면에 나오는 것은 인민교사의 투철한 사명감을 안고 성심성의로 일하는 교사들과 천진무구한 아이들, 장난꾸러기 또는 상처를 입은 문제아들이다. 교장인 계영자씨의 모습은 다만 사려 깊은 그의 눈빛과 조용한 목소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어린 학생 역시 완정한 인격체라고 생각한다. 애들도 인간적인 존엄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은 반드시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하기에 섣부른 훈계나 무자비한 체벌(体罚) 대신에 쉬운 비유를 통한 대화와 소통, 도덕적인 감화에 초점을 둔다. 구소련의 교육가 마카렌코를 비롯한 저명한 교육자들의 저서를 폭넓게 읽은 계영자 교장은 아무리 이름난 문제아라 해도 그의 마음속에는 악마와 천사가 공존하고 있다고 본다. 그 악마를 쫓아내고 천사를 살려내면 새로운 인간으로 재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 나오는 하나의 이야기만 보기로 하자. 다른 학생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중학생을 교육하는 장면이다.    “정치교육처의 리종윤 주임과 담임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새로운 정황을 회보했다. 그래서 나는 리종윤 주임과 함께 그 학생을 찾았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언제나 나를 보면 “안녕하세요?” 하고 깊숙이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던 학생이었다. 그 날도 그 애는 깍듯이 인사를 했는데 별로 긴장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애가 꼭 물건을 훔쳤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미리 교육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정면적인 교육을 하기로 했다. ‘우리 몸이 더러워졌다고 하자꾸나. 온 몸에 덕지덕지 때가 끼었다면 어떠한 느낌이 들까?’ 하고 내가 넌지시 묻자 ‘몸이 가렵고 근질근질하겠지요.’ 하고 그 애가 대답했다. 나는 한 술 더 떠서 ‘몸이 가렵고 근질근질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하고 물었더니 그 애는 ‘목욕을 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나는 ‘맞았어, 옳게 대답했어. 몸이 더러워지면 목욕을 해야 해. 그건 정확한 선택이야’ 하고 그 애의 대답을 긍정하고 나서 또 물었다. ‘목욕을 하고 나면 기분이 어떠할까?’, ‘기분이 상쾌하고 홀가분해지겠지요’, ‘잘못을 저질렀다면 기분이 어떨까?’ 하고 내가 슬쩍 말머리를 돌리자 그 애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마음이 편치 않지요 뭐’, ‘몸에 진득진득 때가 낀다면 근질거려서 죽을 맛이겠지. 이 때 목욕만 하면 상쾌한 기분이 들거든. 같은 도리야. 잘못을 저지르면 마음이 편치 않고 괜히 심리적인 부담을 갖게 되는 거야. 솔직하게 잘못을 승인한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수 있어. 무거운 심리부담을 내려놓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상쾌하겠어. 너도 목욕하지 앉을래?’ 그 애는 마침내 입귀를 실룩거리더니 ‘저도 목욕하고 싶어요’ 하고 말하했다. 내가 한 마디 더 뚱겨주었다. ‘난 네가 성실한 학생이라고 믿어. 성실한 학생은 무엇보다 먼저 잘못을 승인해야 하고 온 몸을 가볍게 가질 줄 알아야 해. 이렇게 할 수 있겠니?’,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좋았어, 그렇다면 너는 언제부터 남의 물건에 손을 댔지?’”   그 중학생이 마침내 남의 물건을 훔친 사실들을 이실직고하고 나쁜 버릇을 고치고 좋은 학생으로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훌륭한 교사들이 교편을 잡고 이런 성자와 같은 교장이 학교를 관리하는 이상 이 학교가 학부모들의 신뢰와 성원을 받지 못할 리 없겠다. 학부모들은 교사의 얼굴을 보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옛사람들도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이름난 산이요,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신령한 못이다(山不在高, 有仙则名。水不在深,有龙則灵)” 라고 노래했으리라.    계씨와 리씨 두 가문의 1세로부터 5세에 이르는 여러 가족성원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작자가 시종일관 관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부조(父祖)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 세대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3세와 4세, 5세에 속하는 인물들을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때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하나는 대련을 비롯한 중국 현지에 남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고 그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해서 우수한 민족으로, 존경받는 민족으로 거듭나는 경우다. 리성해씨가 그러하고 작자를 비롯한 대련조선족학교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그러하다. 계영자씨의 부군 리성해씨,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는 수재다. 그는 대련수산학원을 졸업하고 대련시수산국에서 열심히 일해 “수산국의 컴퓨터 머리”로 불린다. 특히 그의 듬직한 성품과 일거수일투족은 양반가문 장손의 이름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일가친척의 장례는 물론이요, 동료나 친구들의 가문에서 장례를 치를 때마다 선참으로 달려가 시신을 감장하고 마른일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다.    특히 계영자씨를 비롯한 대련조선족학교 교사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연해도시 대련에 둥지를 틀고 열심히 일해 40여 명 소학생 밖에 없던 학교에 유치원을 앉히고 초중부에 이어 고중부를 설립하며 명문중학교로 부상시킨다. 두세 번씩 이사를 하면서도 군소리 하나 없이 철철 땀을 흘리며 일하는 교사들, 당과 정부의 지원을 유치하고자 수십 번씩 정부의 관련 인사를 찾아가고 간곡히 호소하는 교사와 직공들,앞 다투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지원하는 조선족 지명인사들과 학부모들, 이들은 중국을 삶의 유일한 터전으로 생각하고 교육을 통해 훌륭한 국민으로 거듭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이다. 리애순, 신옥근, 신참생, 리철을 비롯한 3, 4, 5세들은 한국과 일본으로 진출한다. 리애순은 여자는 조신하는 게 좋고 집안에서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다는 양반가문의 계율과 단속에서 벗어나 열심히 공부해 요녕대학 일본어학과를 졸업했고 결혼한 후에도 남편을 두고 일본에 나가 공부한다. 그는 마침내 석사,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일본에 정착하며 뛰어난 경영인으로 활약한다. 심옥근은 어떠한가? 그는 총명하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다. 그는 개원과 철령에서 공부했고 1995년 일본기업들이 중국에 대거 진출하는 기미를 알아채고 일본어를 전공하기로 작심했다. 마침내 요녕대학 일본어학과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에 가서 알바를 하면서 대학을 수소문하던 중 교토대학 문학과에 입학한다. 수사(修士)과정을 마친 심옥근은 박사과정에 입학하나 이를 접어두고 교토의 어느 한 다국적기업에 취직해 대외판매를 책임진다. 그녀는 결혼한 후 중국에 돌아오나 일이 여의치 앉자 다시 일본에 가서 원래 일하던 회사에 쉽게 취직한다. 그의 책임감과 능력은 회사 측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현재 그는 귀여운 아이까지 낳고 일본에 보금자리를 틀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기에 신옥근은 자기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하던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소설 을 읽고 나서야 그 답안을 찾았다. 중국에 남은 일본의 고아가 중국의 양아버지 손에서 자랐고 또 중국의 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일본에 있는 친아버지가 그를 보고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그는 ‘나는 대지의 아들이니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 고아도 고민과 갈등이 많았을 것이다. 내 몸에는 분명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나는 중국에서 자랐고 중국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 과연 나는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마침내 나도 일본이냐, 중국이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기로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온 이 땅이요, 나는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작자는 상술한 두 가지 삶의 형태에 대해 어느 한 쪽을 긍정하고 다른 한쪽을 매도(罵倒)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인물의 운명선과 전반 이야기를 통해 작자의 폭넓은 흉금, 새로운 사고와 견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작자는 우리 조선족은 이제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도 아니며 바람 따라 떠도는 부평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중국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모범적인 중국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면서 돈에 눈이 어두워 덮어놓고 농토와 삶의 기반을 버리고 한국으로, 외국으로 나가는 행태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세계화의 바람과 탈지역화의 물결은 피해갈 수 없는 법이니 우리의 자식들이 중국 여러 지역 내지 다른 나라로 뻗어나가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라고 본다. 새로운 세대들이 우리의 뿌리와 역사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더욱 열심히 살며 중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간다면 우리조선족의 문화영토는 오히려 더욱 넓어진다고 확신한다. 바로 여기에 작자의 남다른 혜안과 비전이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벌써 천애지각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혈육의 정으로, 개척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철통같이 뭉친 새로운 가족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하기에 이들 가족은 “문화대혁명” 때 억울하게 투쟁을 맞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온 가족이 떨쳐나섰던 것처럼 서로의 행보와 운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만 생기면 사면팔방에서 달려오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조선족의 피눈물 나는 이민사와 자랑스러운 투쟁사를 다룬 책자들이 적잖게 나왔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를 비롯해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 정판룡의 《고향 떠나 50년》, 김병민의 《와룡산일지》등을 대표적인 작품으로 곱을 수 있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구술, 회고, 취재, 기록을 통해 서로 독립되는 단편적인 작품으로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집대성한 사화(史話)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후의 분대장》은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사와 한평생 비정한 정치권력에 저항한 조선족의 대표적인 지성의 일대기를 다룬 자서전이요, 《고향 떠나 50년》은 뛰어난 총명과 지혜를 가진 한 조선족청년의 끈질긴 분투와 자랑스러운 성공의 역사를 기록한 자서전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와룡산일지》는 연변대학의 창립, 성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자랑스러운 족적을 남긴 훌륭한 교육자들의 일대기와 업적을 하나하나 돋을새김으로 기록한 “연변대학의 사기열전(史記列傳)”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계영자씨의 《원색의 기억》은 아마도 산재지역 조선족의 역사와 현실을 가족사의 형태로 폭넓게 다룬 최초의 장편수기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자라나는 세대의 진로를 밝혀주는 하나의 횃불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변조, 결합모티프와 자유모티프 등 다양한 서사기법을 동원해 거대서사와 미시서사를 결합시킨 방대하면서도 조리정연한 서사구조와 풍부한 이야기성, ‘오로지 진실’의 원칙에 입각해 산재지역 조선족사회의 다양한 인물성격과 인물군상을 창조한 점을 높이 사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족의 역사와 진로,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모색, 우리 민족의 이산(离散)과 분포 형태의 변화, 문화신분의 재구성 등 초미의 관심사에 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점 역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문으로 된 이 작품을 수정, 보완해 아름다운 우리 조선어로 번역, 출판해야 할 과제가 남았다. 이 작품의 “부록”들을 본문에 넣어도 무방하다고 보며, 소설적 기법을 차용해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3부의 경우 여러 소제목들에서 다룬 내용이 서로 편폭나 분량이 균일하지 않아 들쭉날쭉한 감을 주기에 일부 소제목들의 내용을 하나로 아우르기 바란다.    이로써 아름다운 연해도시 대련에 큰 족적을 남기고 우리민족 정신사의 큰 탑을 쌓아올린 우리 동창 계영자씨에게 경의와 축하를 드린다.    - 2018년 7월 16일    
37    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댓글:  조회:868  추천:5  2020-08-11
    김호웅/연변대학조한문학원교수   요즘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최학송, , 길림신문, 2019.3.4.)이란 글과 (대가 숲을 이룰 때, , zhixinzhe512.)라는 글을 읽었다.   의 작자는 라는 글에서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안티이오스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공동체의 붕괴 또는 부재를 기성사실화 하고 있다. 안티이오스는 천하의 장사였지만 대지에서 발을 떼는 순간 힘이 빠져 웬만한 상대에게도 번쩍 들려 바다에 처박힌다고 한다. 조선족사회도 대지를 떠난 안티이오스가 되여버렸으니 우리 족보와 같은 것들을 일찌감치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저장할수밖에 없다고 했다. 조선족공동체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들불처럼 타오르는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을 도무지 리해할수 없다.   하지만 오늘은 주로 라는 글에 대해 토론하고자 한다. 이 글은“누구도 같은 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두번 발을 담글 때 강은 같은 강이 아니고, 그도 같은 사람이 아니기때문이다”라는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만물류전(万物流转)의 사상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력사는 반복되며 력사는 오늘의 거울이 된다는 진리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산해관이남의 대도시에 자리잡은 젊은이들이 그 옛날 선비족(鲜卑族)처럼 강세문화속에 깊이 들어가 스스로 발을 빼지 못하고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철을 밟지 않을가 생각한다.   선비족은 옛날 북방에서 우리민족과 이웃해 살았고 종횡무진으로 맹활약을 했다. 그들은 선후로 10여개의 나라를 건립했고 중국의 절반 강산을 통치했다. 하지만 오늘 중국의 56개 민족중에는 선비족이 없다. 지금 선비족의 일부 후예들이 시버족(锡伯族)이라는 이름으로 신강, 료녕성과 길림성의 일부 지역에 남아있다만 그들은 이미 망망대해와 같은 중국에서 창해일속과 같은 존재로 되여버렸다.   물론 의 작자는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 산해관 이남의 대도시에 있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고충을 대변하고 있다. 현지에 조선족유치원이나 소학교가 없으니 자녀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설사 가정교육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배웠다해도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는 어차피 한어를 써야 하고 한어의 수준여하가 학업성적과 졸업배치를 좌우지하게 된다. 그러니 어차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는게 현명한 처사라고 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절해고도와 같은 상황에서도, 디아스포라로 천애지각을 떠도는 경우에도 자식들에게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유태인이 그러하고 중국인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제가 (김호웅, , 연변인민출판사, 2019년판.)라는 글에서 사례로 든 연변대학의 유일한 러시아인교수 다위도브선생의 자녀들이 그러하고 한국대전의 홍문장중화료리집주인 왕씨네 자녀들이 그러하다.   이중언어구사능력을 글로벌시대의 중요한 자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도시에서 끝끝내 자식들을 모국어를 아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자식들에게 모국어를 배워주자면 적어도 자식을 가정에서나마 모국어환경에 로출시켜야 하는데 이는 우리 젊은 부모들의 목표와 의지여하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 젊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중국어로 대화를 하기때문에 자식을 모국어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다.   그런데 라는 글을 보면 론리적으로 앞뒤가 서로 모순이다. 전반부에서는“이제 우리와 조선어의 관계는 가부장제혼인에서 벗어난 자유련애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와서는‘엄마의 언어’즉 모국어의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강조했다. 참으로 자가당착이 아닐수 없다. 도대체 모국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게 바람직하다는 말인지, 아니면‘엄마의 언어’모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인지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자의 론지는 분명하다.‘강물’이 바뀌였고‘사람’도 바뀌였다는 것이다. 즉 세상이 변한것만큼“누구도 우리에게 민족주의를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더욱이 우리 자녀들에게‘민족’을 부담으로 넘겨줄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를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로운 령혼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체성을 잃고 주류문화에 두손을 들고 나앉은 사람들, 달갑게 주류문화에 동화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이란 력사성을 띤 개념이요, 민족주의 역시 모든 력사단계에서 다 부정해야 할 명제가 아니다. 민족이란 개념을 두고 많은 견해들이 대립, 충돌하고 있다.   원초론과 근대론이 대표적이다. 스딸린은 원초론적 관점에서 민족이란 력사적으로 형성되였으며 공통의 언어, 공통의 지역, 공통의 경제생활 및 공통의 문화생활에서 보여준 공통의 심리자질을 가진 안정된 하나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하지만 베네딕트앤더슨은 민족은 근대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력사적구성물로서 그것은‘상상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베네딕트앤더슨 저,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나남, 2003.) 앤서니스미스 같은 학자는 원초론과 근대론의 종합과 절충을 시도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초적요소에 기반을 둔 근대적민족을 강조했다. 즉“민족은 공간적으로 위치 지어진 과거를 공유하는 전통을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적정체성”을 그 표지로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민족은 근대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시간속에 뿌리 박은‘손에 잡히는 민족정체성’의 재료로부터 구성된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신화의 공유뿐만아니라 력사적 기억의 공유가 있고 언어적, 문화적 전통의 공유라는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다.(앤서니스미스 저,이재석 역, , 그린비, 2018.)   민족이란 이렇게 숙명적인 존재인가 하면 또 오랜 세월을 거쳐 그 구성원들의 삶의 둥지로, 운명공동체로 되여왔다. 하기에 이어령선생은 민족은 옷처럼 추우면 입고 우면 벗어던지는 그러한 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잘리면 병신이 되는 손과 발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하였다.   민족공동체를 잃었을 때,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확인할 없을 때 인간은 무서운 고통과 고뇌를 경험하게 된다. 조선왕조 인조왕시기 연경(燕京)에 파견되였던 사신들이 이러한 아픔과 치욕을 경험한바 있고 알제리인의 후예이며 마르티니크 출신인 프란츠파농(1925~1961)이 이러한 아픔과 고뇌를 경험한바 있다.(프란츠파농 저, 이석호 역, 〈>, 인간사랑, 1998.) 또한 김사량의 단편 , 이창래의 장편 허련순의 장편 에 오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이 보존되고 그 민족이 강해야 그 구성원은 안정된 삶을 살수 있고 사람답게 살수 있다. 민족 또는 민족국가를 잃었을 때 우리는 창씨개명, 치발역복과 같은 치욕을 받아야 했다.   민족이란 이처럼 소중한 이기에 우리 민족의 선렬들은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자기의 목숨마저도 서슴없이 바쳤다. 우리 조선족의 선인들도 중국의 자유와 해방, 모국의 국권회복이라는 이중 력사사명을 짊어지고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싸웠다.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은 연변 땅에서 일어났고 우리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항일부대의 주요한 성원들이였다. 이러한 민족의 자랑스런 력사를 우리 후세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공연히 우리 자식들에게‘민족’이란 부담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될까?   민족과 언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의하고 불명확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애매모호한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라고 한다면 존재는 그 안에 거주한다”고 하면서 언어를‘존재의 집’라고 했다. 즉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수 있고 보존할수 있다. 이처럼 언어는 민족의 력사를 담는 그릇이요, 민족의 얼을 담는 항아리이며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다. 하기에 외솔 최현배(1894~1970)선생은 "우리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했고 당신에게는 "한글이 목숨”이라고 했다.   언어는 민족구성원들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될뿐만아니라 해당 민족의 사고방식과 심성(心性)을 가장 잘 드러낸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력사와 얼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에 고스란히 담겨져 살아 숨쉬고 있다.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지만 말과 글이 없으면 우리의 유구한 력사도 내 가슴에서 너의 가슴으로 전달될 없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얼도 그 모습을 갖출수 없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것을 잃게 된다. 력사도, 문화도, 정신도 잃게 되고 그 어디에도 몸담을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된다.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은 서로 다른 방언계통을 갖고 어 남북사이에 서로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지금도 간혹 복건성 남부(闽南) 출신의 인사가 북방에 와서 연설을 하면 상용중국어(普通话)를 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통역을 해야만 현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런데 한족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으로 되였을까?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자가 있었기 문입니다. 한자는 지극히 중요한 문화통일의 역할을 했다. 한자에 내재한 일맥상통하는 안정된 계승성, 공용성과 민족성은 거대한 응집작용을 했다. 한자가 없다면 한족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한자가 표의문자가 아니고 표음문자였더라면 역시 강대한 한족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럽처럼 몇십개 민족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말과 글은 그 민족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문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에는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경이 없고 민족의 계선이 없는 대동세계가 된줄로 착각하고 있다. 세상사람들 모두가 너나없이 한집이 되는 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아름다운 리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멀고먼 장래의 일이지 현실의 일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세계화의 진전이 빨라질수록 그만큼 민족주의 물결이 거세차게 일고 있다. 세계화는 개별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반면, 민족주의를 야기하고 다문화주의와 병행하게 한다. 따라서 세계화와 민족주의(또는 다문화주의)는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 두바퀴 구실을 하고 있다.   라는 글에서도‘다양화 자체가 미덕’이라 했다. 그렇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촌은‘세계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중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켜든지 오보에를 불든지 팀파니를 치든지 자기특유의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하모니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민족도 자기 문화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민족들과 조화를 이루야 한다. 공자의 말씀 그대로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세계가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민족마다 최선의 민족국가를 이룩하고 최선의 문화를 일구어내서 다른 민족과 서로 교류하고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중변주곡이요, 우리가 동경하는 미래 상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도 훌륭한 민족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 조선족만 해도 민족자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고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편의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스스로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고 있다. 사실 우리말과 글처럼 아름답고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언어와 문자도 세상에 별로 많지 않다. 총명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칠수 있고 설사 머리가 좀 둔한 사람이라 해도 열흘이면 깨칠수 있다. 또한 컴퓨터에 기초프로그램을 깔아야 기타 프로그램을 깔수 있듯이 먼저 모국어를 확고하게 배워두어야 다른 언어도 쉽게 배울수 있다.   이렇게 갈고 닦은 이중언어의 능력은 우리 조선족의 쌍날개로 된다.그런데 일부 젊은 부모들은 모국어라는 한 날개를 애초에 꺾어버리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정판룡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쳐준게 바로 다문화주의 사상이다. 다문화주의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한다.‘다름’을 리유로 차별하지 않고‘평등’을 리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다원일체의 조화로운 사회이다.   선생은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는 다수자와 담을 쌓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고수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락후된 상태에서 다수자의 도움만 받을게 아니라 다수자와 적극 교류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존중을 받는 존재로 부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른바 평등을 이룸에 있어서 소수자의 주체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사상을 보다 널리 확산하고 우리 조선족의 피와 살로 되게 하기 위해‘며느리론’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 시집은 왔으되 허구한 세월 친정 생각만 하고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집동네의 사랑을 받을수 없다. 이와는 달리 시집어르신을 잘 모시고 남편공대를 잘하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내서 시집마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때라야만 비로소 친정을 도울수 있고 친정마을과 시집마을에서 모두 사랑과 존중을 받을수 있다.(정판룡,,제2권, 연변인민출판사, 1997년판.)   우리 조선족의 이중문화 신분을 념두에 둘 때, 또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력사의 필연이라고 할 때 정판룡선생의‘며느리론’은 우리 조선족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진로를 가장 형상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에 립각해 정판룡선생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도 금발 머리든 까만 머리든, 파란 이든 까만 눈이든 폭넓게 친구를 사귀였다. 또한 제자를 끝까지 옆에 두고 싶어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그들이 자기의 날개를 키워 중국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훨훨 날아가 자리를 잡게함으로써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연변대학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령토를 넓혀나갔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법, 밤낮 우는 소리만 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면 절대로 다문화사회의 주체가 될수 없다. 허구한 세월 자포자기하고 주류사회에 얹혀사는 존재가 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당당히 지키면서도 총명과 지혜, 헌신성으로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기여를 함으로써 이 공동체의 존경받는 구성원으로 되여야 한다. 흑룡강신문
36    [두만강칼럼]사랑과 믿음의 기적 댓글:  조회:1148  추천:0  2019-12-05
나는 《민중의 벗― 정판룡교수》를 쓴 후 《림민호평전》을 펴내면서 정판룡선생이 림민호 교장을 많이 닮았고 림민호 교장은 쏘련의 저명한 교육가 마카렌코선생과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카렌코(1888-1939)는 쏘련의 불량아 보호시설 원장으로 3천여명의 불량아들을 사회의 유용한 인재로 키워낸 유명한 교육가이다. 그는 교육의 뿌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라고 인정했고 “훌륭한 아이도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 금세 어린 야수가 된다”, 청소년들에 대한 “신임, 그것은 으뜸가는 중요한 법률”이라고 했다. 그의 교육소설 〈탑 우에 휘날리는 기발〉(1938)을 보면 ‘악마’와 같은 부랑아와 비행소년들을 ‘천사’로 키워낸 과정, 특히 이 교육시설에 숨어있는 ‘악마’ 이고리 체르냐빈을 ‘천사’로 전변시키는 과정은 오늘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림민호 교장이 1928년에서 1932년까지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공부했으니 마카렌코의 사상과 철학을 배웠을 것이고 후에는 그의 소설들도 읽었을 것이다. 림민호 교장이 큰 사랑과 믿음으로 북만에서 물 첨벙 불 첨벙 찾아온 열일곱살의 홍안의 소년 정판룡을 큰 인물로 키워낸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정판룡선생을 두고 여러 편의 글을 쓰면서도, 더더구나 좋은 소재 하나를 손에 잡고서도 당사자가 생전이라 쓰지 못했다. 그 이야기인즉 이러하다. 어느 날 아침, 정판룡선생이 댁에서 양치질을 하는데 조용히 출입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하고 문을 따주니 얼굴이 퉁퉁 부은 남녀 두 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더니 덮어놓고 넙죽 절을 한다.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일인지 이야기부터 해봐.” 그제야 남학생이 고개를 들고 정판룡선생을 쳐다보다 말고 쿨쩍거린다. “선생님, 제가 혜자와 좋아하는 사이인 줄 아시지요?” “그래, 조금은 알고 있지.” 하고 정판룡선생이 허허 웃는데 이 자식이 다시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면서 “저의 불찰로 혜자가 아이를 뱄어요. 이 일을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혜자라는 녀학생도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더니 고개를 폭 숙인다. “어허, 이런 녀석들을 봤나? 이런 녀석들을! 난 1, 2절 강의가 있어. 그러니 저녁에 다시 와.” 하고 정판룡선생은 가방을 들고 나갔다. 남학생의 이름은 진수, 대가집 도련님처럼 이목구비가 수려한데 연변예술계의 거목 박선생의 아들이다. 혜자는 진수가 남몰래 좋아하는 녀학생인데 예쁘장하게 생겼고 공부도 썩 잘했다. 정판룡선생은 혜자가 임신까지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온종일 강의에 여러가지 사무를 처리하고 저녁에 댁으로 돌아올 때 정판룡선생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잠간 잊고 있었다. 문을 떼고 들어서니 두 녀석이 또 넙죽 절을 한다. 정판룡선생은 너무 억이 막혀 한참 창 밖을 보다 말고 물었다. “진수, 이 일을 아버님께서 알고 계셔?”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그럼 혜자는?” 혜자는 진수를 흘깃 건너다보더니 빌빌 울기만 한다. 정판룡선생은 “에끼 못난 녀석들!” 하고 픽 웃더니 “진수는 아버님께도 귀뺨을 맞을 각오를 하고 이실직고하란 말이야. 저 강건너에 진수네 고모님이 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자네 아버님께 말씀을 드릴 터이니 일단 혜자를 고모님네 댁에 맡기는 거야. 거기서 애를 낳고 1년간 있다가 돌아와 복학을 해요. 진수는 그냥 여기 남아 공부를 하란 말이야! 이 일은 나만 알면 됐어.” 라고 했다. 정판룡선생의 하늘같은 음덕으로 무난히 세상에 나온 진수와 혜자의 아들이 연변1중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청화대학을 거쳐 미국에 가서 석, 박사학위를 받더니 유명한 국립연구소에 취직했다고 한다. 진수선생네 내외는 그 아들 덕분에 여러 번 미국나들이를 했고 슬그머니 아들자랑을 하며 다녔다. 언제인가 진수선생이 나를 보고 “호웅씨는 정판룡선생과 같은 훌륭한 어른을 지도교수로 모셨으니 얼마나 좋겠어!” 라고 하면서 정판룡선생 덕분에 아들을 보게 된 일을 이야기한 적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에피소드를 〈정판룡, 우리 모두가 그이를 그리는 까닭〉이라는 글에 쓰고 그 초고를 진수선생에게 보였더니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결코 자랑거리가 아닐세. 호웅씨도 알지만 우리 집사람은 좀 예민한 편이거든. 제발 그 장면만은 빼주게!” 하고 신신당부를 하는지라 하는 수 없이 빼고 말았다… 각설하고 로신선생도 말했지만 “교육의 뿌리는 사랑에 있다.” 젊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이 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경사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는 만나기 쉽지 않다(经师易遇,人士难遇). 즉 경서의 자구(字句)를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만 제자에게 공정한 도의를 가르치고 사람이 가야 할 옳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학생들의 인격과 장끼를 인정하고 그 소중한 싹을 키울 줄 모른다.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젊은이들을 요구한다. 젊은이들은 실수하고 사고를 치기 마련인데 오늘의 교육시스템에서는 단 한번의 실수나 사고로 일생을 망치기 십상이다. 문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좀 마카렌코나 림민호, 정판룡 선생과 같이 젊은 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고 키워주는 아량과 지혜를 보여줄 수는 없을가? 한번 실수하거나 사달을 쳤다고 해서 단매에 때려눕힐 게 아니라 회과자신할 기회를 주는 게 어른이나 지도자가 할 일이다. 인간은 시련 속에서 자라는 법, 순탄하게 자란 애들보다 오히려 유명한 장난꾸러기나 애군이 그 어떤 계기, 또는 훌륭한 어른을 만나 대성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기 때문이다. 량산박의 영웅들이나 청석골의 영웅들을 보시라. 그들은 생김새와 성미도, 무예와 재능도 각각 달랐다.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너면서 제각기 자기 솜씨를 보였다는 말도 있지만, 다 같이 호랑이를 잡았으되 무송과 리규 역시 성격이 판판 달랐다. 소심한 무송은 술 열여덟 사발을 마시고야 산에 올랐다. 하지만 리규는 아예 범의 굴에 들어가 박도를 쥐고 한잠 늘어지게 자면서 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이러한 다양한 개성의 인간들을 존중하고 묶어세우는 게,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가슴을 터놓고 의 좋게 지낼 수 있는 ‘산채’를 만드는 게 멋진 지도자의 재능이요, 리더십이라고 하겠다. 길림신문 
35    [수필]격정과 랑만의 화신-림휘교수님 댓글:  조회:1027  추천:0  2019-07-14
격정과 랑만의 화신-림휘교수님 김호웅     2018년 5월 1일 아침, 연변의 천산만야에 연분홍 진달래가 피고 있는데 천하 명기 황진이黄真伊가 노래했듯이 인걸도 물과 같아 가고 아니 오는 법이라,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1기 졸업생이며 저명한 교수인 림휘林辉 선생께서 88세를 일기로 천수를 다 누리고 승천하셨습니다.  선생네 가문의 원적은 함경북도 명천군, 선생은 1930년 연길현 덕신구 안방촌德新区 安邦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습니다. 선생은 덕신소학교, 룡정중학교를 거쳐 1949년 4월 연변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선생은 정판룡, 권철, 최윤갑 등 동창생들과 함께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1952년 12월부터 1956년 2월까지 3년 반 동안 동북사범대학 연구부에서 쏘련문학을 전공했고 1956년 2월부터 1991년 정년을 할 때까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주로 로씨야문학과 쏘베트문학을 강의하셨습니다. 선생은 연변대학 조문학부 외국문학교연실 강좌장, 전국고등학교 동방문학연구회 리사, 길림성 외국문학연구회 부회장, 연변외국문학학회 부회장 등 직책을 맡고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해 일했습니다. 하여 선생은 1984년 길림성 고등학교 우수교사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인데 젊은 시절부터 팔방미인으로 불릴 만큼 다재다능했습니다. 학생연극단의 배우 겸 감독으로 뛰여난 연기와 리더십을 선보였고 학생시절에는 축구장을 주름잡는 미드필더로 맹활약을 하였으며 한때 연변대학 학생축구팀 코치를 맡기도 했습니다. 교수시절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축구팀 감독으로 ‘장기집권’을 하셨는데 선수 선발도 엄격하게 했지만 아무리 유명 선수라 해도 개인영웅주의를 부리면 가차없이 갈아치우곤 했습니다. 후보선수들은 선생의 지시에 따라 그라운드 밖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몸을 풀기도 했지만 정작 그라운드를 밟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애주가이신 선생은 권철선생 버금으로 두주불사斗酒不辞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气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호음이불란豪饮而不乱이라고 호쾌하게 마시되 단 한번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이 계시는 장소는 늘 흥성거렸고 선생이 없는 조문학부의 놀이판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기에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창립자이며 소설가인 김창걸선생은 “림휘는 천재야!” 하고 치하를 했다가 정치운동 때 학생들에게 영웅사관英雄史觀을 고취했다고 반성까지 한 적 있습니다. 선생의 강의는 연변대학에 정평이 나있고 거의 예술에 가깝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학생들을 단번에 휘여잡는 정열적인 눈빛, 조리정연하면서도 격정으로 넘치는 강의, 때로는 로씨야나 쏘련의 가곡이나 아리아까지 부르는데 그 노래솜씨 또한 프로가수를 뺨 칠 지경이였습니다. 이 시각도 “아 고요한 돈의 물결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눈물로 넘치누나” 하고 노벨상 수상자 숄로호브의 문학에 대해 강의하던 모습이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합니다.    선생의 제자사랑은 남다른 데 있었습니다. 선생은 정색을 하고 학생들에게 설교를 하거나 학문적인 문제만 미주알고주알 캐는 고리타분한 교수가 아니였습니다. 선생은 학생들의 친근한 벗이 되여주었습니다. 그 어려운 세월에도 학생들은 물론이요, 대학을 찾아오는 학부모들까지 따뜻하게 식사대접을 해주었습니다. 술 한잔 사주면서 허물없이 인생을 론하고 문학과 철학을 론하던 선생, 그래서 우리 제자들은 선생을 영영 잊을 수 없습니다. 선생은 사모님께서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는 바람에 강의와 연구에 많은 애로가 있었습니다. 황차 선생은 박봉으로 로모를 모시고 동생과 네 자녀를 키우고 공부시키면서 어렵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외국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훌륭한 저서들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정판룡, 허호일, 서일권 등 교수들과 함께 부지런히 붓을 날려 1980년에 조문판으로 《세계문학간사》를 펴낸 데 이어 1985년에 중문판으로 《동방문학간사》를 펴냈으며 허문섭교수와 손잡고 《조선고전문학선집》 전 20권을 펴내는 데도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특히 《동방문학간사》 는 국내 22개 소의 대학 교수들이 편찬한 국가통용교과서인데 선생께서 쏘련문학 부분을 맡아 집필하셨습니다. 이 저서는 유럽중심주의 문학사관을 뒤엎고 동방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적 위치에 놓고 서술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명리와는 담을 쌓고 달갑게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일하셨습니다. 사실 선생은 정판룡선생보다는 두어살 선배이지만 평생 그 분을 도와 성심성의로 일했습니다. 이처럼 정판룡, 림휘, 허호일, 서일권 네분 교수가 일심동체가 되여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노력했기에 외국문학교연실은 국내 일류의 교연실로 평가를 받았고 국내 외국문학연구를 리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평생 강좌장 이상의 벼슬은 한 적 없지만 언제나 학자의 량심과 혜안을 가지고 학과건설에 나서는 문제들을 정곡을 찔러 지적했고 자라나는 제자들을 이끌어주고 밀어주셨습니다. 축구감독의 혜안은 신진교사 양성에도 그대로 나타났는데 김관웅, 최웅권, 우상렬 등 박사도 선생께서 알심 들여 선발하고 키워준 덕분에 일가一家를 이루게 되였습니다. 여러분,  로년에 사모님을 잃고 중풍으로 고생하던 선생께서 이제는 만단시름을 털고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선생께서 남긴 고매한 인격, 불같은 격정과 랑만, 그리고 선생의 빛나는 업적과 아름다운 일화는 우리 모두의 귀감으로 될 것이며 우리 학원 내지 우리 대학 발전의 소중한 자산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우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생과 같은 원로 교수님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가르침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학원은 국가중점학과를 거쳐 글로벌 일류학과 프로젝트에 선정되는 쾌거를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선생께서 물려준 계주봉을 이어받아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비롯한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반석 우에 올려놓기 위해 대를 이어 노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황진이의 시조로 우리 모두의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 선생의 명복을 빌고저 합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평생의 지기들인 정판룡, 허호일, 서일권 등 선생들을 앞세우고 선생께서도 하늘나라에 가시게 되였으니 오랜만에 서로 얼싸안고 술 한잔 나누면서 그간의 회포를 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 하늘의 별이 되여 우리 제자들이 가는 길을 비추어주시옵소서!   출처:2018 제4호
34    [작품평] 수필의 현대성과 수필가의 자질 댓글:  조회:730  추천:0  2019-07-14
김호웅 남영도씨의 원래 이름은 남복실, 복실福实이라는 귀염성 있는 이름을 왜 영도璎桃로 고쳤는지 알 길이 없다. 평소에 복실씨라고 불렀으니 그냥 원래 이름을 부르기로 하자.  아무리 인용부호를 쳤지만 이모 벌, 적어도 큰언니 벌 되는 이를 두고 ‘가슴’이 큰 녀인이라고 대문짝 같은 문자로 잡지에 내다니,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가만히 생각하면 그야말로 절묘한 은유다. ‘가슴이 큰 녀인’, 이 이상 더 적절한 은유가 어디 있을가? 나는 복실씨보다는 10여살 더 많지만 대학시절에는 겨우 2년 선배였을 뿐이다. 학창시절에는 잘 몰랐지만 열심히 광고회사를 경영하면서 장학사업을 하고 있는 복실씨의 부군 리춘일씨와는 역시 허물없는 선후배 사이다. 더더구나 복실씨의 대학동창들인 정일남, 우상렬 박사와는 평생 같은 학과에서 일하고 있는 만큼 복실씨의 인간성과 재능, 그들 부부의 러브스토리까지 조금은 알고 있다. 주책머리 없이 좀더 늘어놓다가는 재수없이 ‘미투’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복실씨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입을 다물자. 아무튼 그 나무에 그 열매요, 그 사람에 그 글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젠 복실씨의 3편의 수필만을 보기로 하자.  는 한국 TV에 나오는 치타댄스에서 힌트를 받고 팔순이 넘는 시어머니와 지천명의 나이를 넘은 며느리와의 이야기, 말하자면 작가 자신과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수필이다.  하지만 나이가 원쑤다. 겉보기에는 밝고 명랑해보이지만 팔순을 넘기면서 어머니의 동작이 예전보다 느려지고 청력도 떨어지고 감각도 무뎌가고 있다. 집안에 치매환자가 있으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진다는 말에 복실씨는 더럭 겁이 나기도 한다. 어머니가 이런저런 실수를 할 때마다 복실씨는 잔소리를 한다. 제주도에 갔을 때는 어머니가 손가방을 숙소에 둔 채 공항까지 와버려서 숙소로 되돌아가서 찾아온 적도 있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치매를 들먹이며 어머니를 단속하게 된다고 했다.  여기서 나의 반성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게 되면 모든 것을 리해하고 깨닫게 된다. 복실씨는 비로소 세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압록강을 건너온 꼬마가 팔순고개를 넘기까지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어머니, “설명절이 오는 건 좋지만 나이 먹는 건 싫구나!” 하고 솔직히 털어놓는 어머니, 건강검진을 받고 “100살까지 문제 없겠수다!” 라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다시 싱글벙글 웃는 ‘미소할머니’가 되는 어머니를 충분히 리해하게 된다.  라는 제목은 위만주국 시기 연변 등지에서 활동한 소설가 현경준의 소설 을 련상케 한다. 현경준의 소설 은 아편중독자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여 명우와 규선이라는 조선인 청년의 재생을 그린 작품이다. 그렇다면 복실씨의 수필 는 현대인 또는 중산층의 취미생활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주지하다 싶이 개혁개방 40년, 우리 나라 중산층의 수는 대폭 늘어났고 낚시 등산, 음악, 미술, 독서, 려행 등 취미생활을 중요시하는 게 하나의 풍조로 되였다. 북경, 상해와 같은 대도시 시민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작가의 경우도 오십 평생을 살도록 악기라고는 하나도 다룰 줄 아는 게 없어서 늘 가슴 한켠에 서운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만난 가야금이 그 자리를 채워주었다. 하지만 따분하고 지루한 련습, 식지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나지만 반창고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 꼬박 2시간씩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니 다리가 저려서 물러날 것만 같다. 젊은 사람들은 척척 진도를 나가는데 복실씨의 손가락은 굵은 탓인지 아니면 감각이 둔한 탓인지 잘 튕겨지지 않고 그냥 제자리걸음이다. 그래서 창피스럽게 ‘나머지공부’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고의 나날을 거쳐 하나의 진리를 터득한다. 말하자면 멀리서 볼 때는 화려하고 멋있는 것들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실은 고된 련습과 노력의 결과물임을 깨닫게 된다. 어디 이 뿐인가. “전에는 현란한 손놀림과 우아한 선률로 나를 사로잡았다면 이제는 들뜨지 아니하고 차분하게 끈기 있게 다가갈 때 더 깊은 매력을 뿜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기에 작가는 “그저 물 흐르듯이 순리에 따라 살면서 가야금을 배우며 터득한 리치를 내 소소한 일상에 적용하여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지음이 되고 지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가야금을 배우는 과정은 자기의 마음을 갈고 닦는 과정, 인격적 수련의 과정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수필적 언어는 대체로 고유어에 바탕을 둔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여야 한다. 이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물론 듀엣(duet)은 영어로서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성부로 노래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생소한 영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공연히 작가의 음악적인 소양과 지식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을 뿐 일반 독자들에게는 너무 당황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세월 앞에 고개 수그리고 유자孺子의 소가 되여”라든지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현란한 손놀림과 우아한 선률”이라든지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노라 씩씩하게 말할 수 있다”와 같은 표현은 중국의 로신, 한국의 김춘수나 천상병의 시구를 려과없이 인용해서 오히려 이상한 느낌을 준다. 상호 텍스트성을 주창한 이들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남의 명언을 가져오더라도 그 출처를 밝히거나 아이러니나 역설, 패러디를 통해 변형시키고 자기화해야 한다. 하지만 맹자가 인의례지신仁义礼智信에서 의로움을 군자의 최고의 덕목으로 보았듯이 중산층의 조건과 덕목에서도 공분公愤에 의연히 참여해야 함을 필수불가결의 덕목으로 인정하는 만큼 수필의 제재령역을 좀더 확장하고 사회비판성을 지닌 작품들도 더러 쓰기를 바란다. 어머님과의 이야기는 많은 수필에 나오지만 북경의 멋쟁이 기업인 리춘일씨의 모습은 항상 베일에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이게 나 혼자의 궁금증일가? 출처: 2018 제4호
33    [칼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 댓글:  조회:981  추천:0  2019-07-12
김호웅(연변대학교 교수, 평론가)   무명씨(1917-2002)는 1940년대 초반 중경에서 항일명장 리범석을 만나 취재하고 사귀면서 장편소설 《북극풍정화北极风情画》를 펴냈다. 이 소설은 항일전쟁 직후 중경의 신문에 련재되여 그야말로 락양의 지가를 한껏 올렸고 1946년 대만에서 10만여부나 팔렸다. 2010년에는 하련생(夏辇生, 1948-)이《배에 걸린 달님船月》이라는 장편소설을 펴냈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가 있은 후 김구는 강소성 가흥에 있는 남호에 가서 한동안 피신해있었다. 그 곳에서 착하고 아름다운 배사공 처녀 주애보朱爱宝와 만나고 그 후 5년 동안 부부처럼 지냈는데 남경을 떠나 중경으로 갈 때 하는 수 없이 헤여진다. 김구는 이 애틋한 사랑과 리별을 두고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남경서 출발할 때 주애보를 본향인 가흥으로 보냈다. 그 후에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 시에 려비 백원 밖에 주지를 못했던 일이였다. 근 5년 동안 나를 위해 한갓 광동인으로 알고 살았지만 부지중 류사类似 부부이기도 했다. 나에게 공로가 없지 않은데 후기后期가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였다.” 하련생은 깊은 조사와 연구를 거쳐 이 한단락의 애정관계를 가공, 부연하여 김구와 중국처녀와의 전기적인 사랑이야기를 장편소설의 편폭으로 생동하게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신규식申圭植은 신해혁명에 참가한 유일무이한 외국인이라 손중산은 그를 두고 “나의 가장 절친한 조선의 동지” 라고 불렀다. 그는 또 “민국의 제일 호쾌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나이民国第一豪侠”인 진기미陈其美와 같은 거물과도 친구로 사귀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다. 류자명柳子明은 또 어떠한가? 무정부주의 즉 폭력혁명을 주장한 분이지만 더없이 깊은 정감과 의리, 겸허한 자세로 중국인들과 널리 사귀였고 그들에게서 성인圣人으로 대접을 받았다. 류자명과 파금巴金은 50여년 동안 의형제처럼 사귀였는데 파금은 류자명의 애국심과 인격에 매료되여 그를 모델로 소설까지 썼다.  이제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고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2018 제3호
32    아름다운 노래는 세월의 언덕을 넘어 댓글:  조회:3281  추천:5  2013-09-23
 지난 2012년 12월 초 조룡남(趙龍男)시인과 함께 길림성장백산문예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2박 3일로 장춘을 다녀오게 되었다. 최근 선생은 중병으로 여러번 병원신세를 졌다고 하지만 오진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건강하고 낙관적이였다. 하루밤은 열차에서, 하룻밤은 자그마한 호텔에서 원로시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선생이 한창 시적재능을 꽃피우던 20세 초반에 재수없이 “우파(右派)”로 몰려 장장 20여년동안 이 풍진세상에서 무진고생을 하였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선생의 지지리 고달팠던 인생의 갈피갈피에 기막힌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눈물겨운 이야기의 하나가《황성의 달(荒城の月)》이라는 일본가곡에 얽히고설킨 일화(逸話)라 하겠다.     맨 처음 《황성의 달》이라는 일본가곡에 접한것은 국민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란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이 노래를 미칠듯이 좋아한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어느 자그마한 양복점에서였다. 1940년대 초반 선생네 일가족은 로씨야 연해주와 이웃한 훈춘의 어느 자그마한 읍내에 살았다. 이 동네에는 아낙네들의 허드레치마나 애들의 옷가지를 만들어주거나 기워주는 조그마한 양복점 하나 있었고 또 동네에서 사오리 떨어진 산기슭에는 일본군병영이 있었다. 주말이면 젊은 일본군인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와서 읍내 장터를 돌아보거나 양복점에 들려 훈련중 찢어지거나 구멍이 난 군복따위를 수선해가지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토끼장만한 양복점 바람벽에 바이올린 하나가 댕그라니 걸려있었다. 이 집에는 애들도 보이지 않는데 이놈의 바이올린을 누가 켜는걸가? 군복을 맡겨놓고 걸상에 앉아 기다리던 일본군인들이 재봉사를 보고     “저 바이올린은 주인장이 켜는 겁니까?”     하고 물으매 사람 좋은 재봉사 아저씨는 잠간 고개를 돌리고 안경너머로 일본군인들을 뻐금히 건너다보더니    “심심할 땐 가끔씩 한곡 켜지요 뭐.”     하고 한 손으로 재봉기 바퀴를 그냥 돌리는데 일본군인들이 중구난방으로    “자, 그럼 어디 한곡 좀 들어봅시다.”     하고 청을 드는지라 재봉사 아저씨는 마지못해 일어나더니    “이거 오늘 망신하게 되었구려. 무얼 켜드린다? … 을 한 번 켜볼가요.”     하고 벽에 걸린 바이올린을 벗겨가지고 활을 당겨 몇번 음을 조정하더니 애수에 젖은 비장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일본군인들이 재봉사 아저씨의 연주에 맞추어 침울한 어조로 노래를 따라 부르더니 다들 시뻘겋게 눈시울들을 적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벌써 쿨쩍거리고있었다.     바로 그때 꿰진 홑바지를 들고 문지방 옆에 서서 오도카니 차례를 기다리던 개구쟁이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룡남이였다. 아니, 이게 《황성의 달》이라는 노래가 아닌가. 이 노래가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소년은 진작 배워서 알고있었던것이다.     그해 여름 국민학교에서 무슨 연주회가 있었는데 여선생님의 손풍금 연주에 맞추어 조룡남네 학급의 단발머리 소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비처럼 하늘하늘 독무를 추었다. 그때 연주한 노래 역시《황성의 달》이였다. 이 공연은 차차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합창으로 번져갔고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앞좌석에 앉아있던 일본인 교장이 성큼 무대우로 뛰어올라가더니 소녀를 닁큼 안고 한 바퀴 빙 도는 것이었다. 팔자수염을 기르고 평소 근엄한 표정으로 교사와 학생들에게 무섭게 굴던 교장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혀있었다. 조룡남은 이 이상야릇한 관경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황성의 달》이라는 노래만 들으면 왜 바늘로 찔러도 피도 나지 않을 일본인들이 눈물을 보이는것일가?     선생이 두 번째로 《황성의 달》에 접한것은 1950년대 중반이였다. 연변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인데 자료실에 있는 묵은 책들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일본잡지 몇권을 발견했고 그것을 심심풀이로 펼쳐보았는데 그 잡지에《황성의 달》이라는 노래가 실려있었다. 선생은 가사를 반복적으로 뜯어서 읽어보았다. 뜻은 대개 알만 한데 어려운 한자와 평소 잘 쓰지 않는 일본 고유어들이 많았다. 국민학교시절 일본인 군인들과 교장선생님이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짓지 않았던가. 선생은 이 일본가곡을 우리말로 확실하게 옮겨가지고 갖고싶었다. 하지만 선생의 일본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게다가 일본어사전도 없을 때였다. 이리저리 고심(苦心)하던 끝에 휴식시간에 백호연(白浩然) 선생을 찾았다. 그 무렵 백호연 선생은 연변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소설을 창작, 발표해 꽤나 문명을 날리고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도 일본사람을 뺨치게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호연선생은 잡지를 받아 얼핏 보더니    “일본의 명곡이거든. 헌데 이를 번역해선 뭘 하려나?”    “어릴 때 불렀었는데 곡도 좋고 가사도 맘에 들어서 그럽니다.”    “그럼 수업이 끝나거든 교연실로 와.”     45분 수업이 끝나자 교연실로 천방지축 뛰어갔더니 백호연선생은 원고지에 정히 번역한 원고를 건네주면서 빙그레 웃는다. 꾸벅 큰 절을 올리고 원고지를 받아가지고 교실에 돌아와 읽어보니 단편소설《꽃은 새 사랑속에서》를 쓴 작가답게 우리말로 미끈하게 변역해놓았다. 그후 선생은 《황성의 달》의 일본어가사와 함께 백호연선생이 번역한 조선어가사를 몽땅 외웠는데 지금까지도 한 글자 빠짐없이 기억하고있었다.     “홍위병들이 백호연 선생 친필 번역문을 압수해가는바람에 아쉽게도 영영 분실하고 말았지요. 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한 글자도 빼앗아가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자 나는 여러가지 언어로 된 번역본들을 두루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우리 집에는 이 노래가 실려있는 《일본의 노래(日本のうた)》1, 2, 3집과 삽화와 사진까지 실려있는 대형일본가곡집《고향의 노래(ふるさとのうた)》가 있어요. 내가 보건대는 한국의 번역, 중국의 번역, 지어는 김학철선생의 번역까지 다 가져다 비교해보아도 백호연선생의 번역이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해요. 노래를 완전히 감정화하고 번역한것이니 그렇게 좋을수가 없지요. 그것도 단 45분, 수업 한번 보는 시간에 번역한것이니 감탄할수밖에 없거든요. 정말 아까운 인재였지요.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한번 백호연선생의 번역으로 된 을 읊었더니 그때 자리를 같이하고있던 임효원시인이‘누군지 참 멋지게 번역했구만!’하고 찬탄하던 일이 기억되는군요.”     아무튼 조룡남선생은 은사님이 번역해 준 일본가곡을 보배처럼 정히 간수했다. 그런데 이 일본가곡때문에 또 한번 졸경을 치를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선생은 “우파”로 락인이 찍혀 훈춘지역의 구석진 시골을 전전하면서 말단교사로 일했는데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홍위병들이 선참으로 달려들어 가택수색을 하는바람에 자료함에 정히 보관해두었던 《황성의 달》이 나왔던것이다. 홍위병들과 그 막후에 서있는 좌파교원들은 “우파”가 일본가곡을 번역해 사사로이 숨기고있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을 했고 황성(荒城)을 천왕페하가 있는 황성(皇城)으로 해석하면서 “네놈이 지금도 황성의 달을 그리고있느냐?”고 무섭게 닦달질을 했다.“우파”감투를 쓰고 시골소학교에서 조용히 살던 선생은 날마다 고깔모자를 쓰고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고 선생네 댁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황성의 달》이라면 신물이 날법도 한데 그때로부터 또 18년이 지난 1983년, 조룡남선생은 김학철선생의《항전별곡》을 읽다가 세번째로 《황성의 달》과 마주치게 된것이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태항산지역에서 싸울 때, 밤마다 일본군과“대화(對話)”라는것을 하였다. 말하자면 적진 150메터쯤까지 접근하면 우선 징소리 대신 수류탄 한발을 터뜨려 “개막”을 알렸다. 고요한 적막이 뒤덮인 끝없는 전야에 이 느닷없는 폭발음에 놀라 깨지 않는 놈은 없다. 그런 다음 “프롤로그”로 일본여자 이무라 요시코(井村芳子, 당시 스물한살인 포로)가 고운 목소리로 《황성의 달》,《반디불의 빛(莹の光)》과 같은 일본노래를 부른다. 적군의 살벌한 마음을 녹이기 위한 수단이다. 연후에 반전(反戰)을 종용하는 강화(講話) 즉 정치선동을 한다. 모두 끝나면 “에필로그”로 밤하늘에 대고 총 몇방을 쏜다.“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뜻인 셈이다.      조룡남선생이 어느 날 김학철 선생을 찾아뵙고《항전별곡》에 나오는 《황성의 달》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니까 김학철 선생은 그 특징적인 천진무구한 미소를 짓고 껄껄 웃더란다.    “아무렴 잊을수 없는 곡이지요. 그 구슬픈 노래를 들으면 일본군인들이 향수병에 걸려 밤잠을 설쳤고 전의(戰意)를 상실해간것은 더 말할나위가 없지요. 사실은 그 무렵 태항산에는 일본의 반전작가(反戰作家) 가지 와다루씨와 그의 부인 이께다 사찌꼬씨가 와있었어요. 그때 나는 일본놈이라면 무조건 악귀, 살인귀로만 보여서 이를 갈았는데 이들 부부를 보고서야 ‘이런 일본사람도 있구나!’하고 시야가 갑자기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구요. 밤에는 가끔 오락회를 열곤 했는데 사찌꼬 부인이 을 불렀고 어느새 만좌(滿座)가 다 같이 따라서 불렀지요.‘봄날의 높은 루각에 꽃놀이 잔치,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하고 말입니다. 가지씨 부부도 그렇고 조선용군 젊은이들도 그렇고 일본제구주의가 망하지 않으면 다들 고국땅을 밟아볼수 없는 신세들였기때문이지요. … 마침 잘 됐어요. 며칠 후면 오오무라 선생이 연변에 오시게 되는데 그 량반이 무슨 선물을 할가 하고 고민을 하기에 을 담은 녹음테이프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우리 해양에게 말해서 조선생에게도 하나 복사해드려야지요.”     오오무라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요, 해양(海洋)씨는 김학철 선생의 아드님인줄은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해양씨는 녹음테이프를 CD로 바꾸어 드린다고 했으나 워낙 바쁜 사람이라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다. 그만 참을줄이 끊어진 조룡남선생은 한국 원광대학교에서 류학하고있는 아들에게 부탁해 《황성의 달》과 함께 10여명의 일본 유명가수들이 부른 노래파일을 이메일로 받았다고 한다. 조룡남 선생은 요즘도 《황성의 달》을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옛일을 되새기는것이 하나의 큰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그 날 장춘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룡남 선생은 언제든지 한번 놀러오면 들려주겠노라고 하였지만 나 역시 참을줄이 끊어져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놓고 한멜 검색창에 “황성의 달”을 입력했다. 몇초 사이에 일본의 남녀가수들이 부른 《황성의 달》이 떠오를뿐만아니라 이 가곡의 작사자와 작곡자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해석도 실려있었다. 그중 하나를 풀어놓았더니 애수에 젖은 비창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봄날 고루(高樓)에 꽃의 향연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천년송(千年松) 가지 사이로 비추는 달빛        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전쟁터의 가을에 서리 내리고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 몇 마리        빛나던 긴 칼에 비추이던        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황성의 밤하늘에 떠있는 저 달        변함없는 달빛은 누굴 위함인가?        성곽에 남은 건 칡넝쿨뿐        소나무에 노래하는 건 바람뿐        밤하늘의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        영고성쇠(榮枯盛衰)는 세상의 모습        비추려함인가 지금도 역시        아아, 황성의 달이여     가만히 들어보니“나라는 망해했어도 산천은 의구해/ 봄 깃든 성곽에 초목만 우거졌네 ”라고 노래했던 당나라 대시인 두보의 명시《춘망(春望)》을 련상케 하는 노래요,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페허에 실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라고 노래했던 1930년대 초 우리 류행가 《황성옛터》에 큰 영향을 끼친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사는 일본 고유의 음영의 미(陰影の美)가 서려있고 곡은 비창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이 들었다. 4절로 된 노래를 다 듣고보니 부서진 성터, 옛날의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는 오간데 없고 천년 묵은 솔가지 사이로 무심한 달빛만 흘러드는데 영고(榮枯)와 성쇠(盛衰)는 세상의 섭리인듯 어디선가 거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풀어놓고 다른 자료들을 검색해본즉, 이 노래는 도이 반스이(土井晩翠, 1871-1952) 작사에 타키 렌타로(瀧廉太郎, 1879-1903)의 작곡으로 되여있었다. 도이 반스이는 동경제국대학 영문학과 출신의 유명한 시인으로서 오래동안 문명을 날리면서 81세를 살아 천수(天壽)를 다 누렸지만 타키 렌타로는 24살의 애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타키 렌다로는 1879년 8월 24일 도쿄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요시히로(弘吉)는 대장성에서 근무하다가 내무성의 지방관리로 전직하여 가나카와현, 토야마현, 오이타현 다케다시 등지로 자주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타키 렌타로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일본 각지를 떠돌게 되였다. 그는 1894년 도쿄음악학교(현재는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해 1994년 본과를 졸업하고 연구과에 진학해 작곡과 피아노로 재능을 키워갔다.      명치시대 전반기에 많은 번역창가가 생겼으나 일본어가사를 무리하게 끼워 넣은 어색한 노래가 많아 일본인 작곡가에 의한 오리지날의 노래를 바라는 소리가 높아지고있었다. 그러한 요청에 가장 빨리 응한 작곡가가 바로 타키 렌다로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황성의 달》,《하코네 80리(箱根八十里》,《꽃(花)》,《사계(四季)》 등이 있는데 그중《황성의 달》은 1900년, 그러니까 그가 21살때 지어서 1901년 3월 《중학창가(中學唱歌)》에 처음 발표한 작품으로서 일본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곡이였다. 이 곡을 구상한 곳은 오이타현 다케다시에 있는 오카성지(岡城址)다. 성안에는 타키 렌타로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지금도 다케다역(竹田驛)에 렬차가 도착할 때면 이 곡을 들려주고있다고 한다. 이 곡은 세계로 펴져나가 1910년에서 1930년까지 구라파의 벨기에서 찬송가로 부르기도 하였다.     타키 렌다로는 1901년 일본인 음악가로는 두번째로 문부성 장학생으로 뽑혀 독일의 Leipzig음악원에 류학해 피아노와 대위법(對位法) 등을 배우게 되였다. 하지만 불과 2개월 후에 불행하게도 페결핵을 얻게 되어 1년 만에 귀국했고 부친의 고향인 오이타현에서 료양하지 않으면 아니 되였다. 하지만 1903년 6월 29일 그는 24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아쉽게도 세상을 하직하고말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어느 철인의 말도 떠오르지만,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국경을 넘고 민족과 리념의 벽을 넘어 영원히 정직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메아리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그 험난한 항일전쟁시절에 벌써 흑백논리를 벗어나 오히려 적국(敵國)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지고 향수를 달랬던 우리 조선의용군용사들의 넓은 흉금과 안목을 생각할 때, 무릇 자본주의나라의 작품이면 덮어놓고“황색가곡”이라고 벌벌 떨거나 길길이 뛰였던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 존재였던가를  깊이 반성하게 된다. 더우기 모진 세파에 부대끼면서도《황성의 달》.《반디불의 빛》과 같은 명곡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고 또 그러한 명작들을 밑거름으로 인생의 아픔을 딛고 《반디불》, 《황소》,《옥을 파간 자리》와 같은 주옥같은 명시들을 남긴 우리 원로시인 조룡남 선생의 한평생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진정한 예술작품은 그 누가 만들었는지를 막론하고 그것은 력사의 상흔(傷痕)밑에 돋아나는 새살이요, 세계의 모든 인종과 민족의 마음을 소통시키는 맑은 령혼의 샘물이며 별빛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에 요즘도 나는 조룡남 시인의 바이러스에 전염되여《황성의 달》을 내 애창곡의 하나로 간주하고 짬만 나면 컴퓨터를 틀어놓고 흥얼거린다.     “봄날의 높은 루각에 꽃놀이 잔치,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동북아신문 9월 22일자
31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 댓글:  조회:4314  추천:3  2013-07-29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 김호웅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 년을 외따로 살아간들/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고려속요「정석가」에서 머리말 1990년대 초반 정판룡(鄭判龍) 선생이 “시집 온 며느리론”2), 즉 중국조선족문화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처음으로 논지를 편 후 조성일(趙成日) 선생이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를 전개했고3) 이러한 관점은 다다소소 차이는 있지만 김강일, 김관웅 등 선생에 의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4). 하지만 최근 황유복(黃有福) 선생은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성격과 이중적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조성일 선생은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고5) 황유복 선생이 다시 매몰차게 받아쳤다6). 조성일 선생과 황유복 선생은 중국조선족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이고 두 선생의 쟁론은 우리의 역사와 민족적 정체성 및 향후 생존과 발전전략에 관한 원론(原論)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음으로 이를 강 건너 불구경 식으로 대할 수 없다. 황차 본인은 중국조선족의 진로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고, 특히 디아스포라의 시학(詩學)으로 중국조선족 문학작품들을 다루어온 것만큼 두 선생의 논쟁(아래에 “조-황 논쟁”이라 약함)에 대해 명철보신, 수수방관할 수 없다.  상술한 문제에 비추어 이 글에서는 “조-황 논쟁”의 문제점을 살펴본 후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성격, 이중문화신분, “제3의 영역” 및 “접목의 논리” 등에 관한 필자의 소견을 내놓음으로써 학계의 보다 깊은 논의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1.조-황 논쟁의 초점과 문제점   조성일 선생이 지적한바와 같이 황유복 선생은 한국에서「중국조선족의 문화공동체」7)라는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들이다.  ▲ 조선족은 디아스포라가 아니다.  ▲ “조선족”은 “한반도의 족속”과 같은 민족이 아니라 “100%조선족”일 뿐이다.  ▲ 조선족에 대한 중국 지성인들의 불신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첫째, 황유복 선생은 조성일 선생의 기본적인 관점을 반박하지 않고 이른바 “이중성”이란 낱말을 꼬투리로 잡아 상대를 공격한다. 물론 조성일 선생의 논의에 일부 개념을 정치(精緻)하게 다루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총체적으로 정판룡 선생의 뒤를 이어 중국조선족문화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논의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황유복 선생은 중국의『현대한어사전』에서 “이중성(二重性)”이란 낱말의 뜻풀이를 이용해 조성일 선생의 지론을 반박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황유복 선생이 오류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 조선어에서 이중성은 다음과 같이 뜻풀이가 된다.  1. “한 가지 사물에 겹쳐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 (한국『새우리말 큰 사전』)   2. “한 가지 사물이 한꺼번에 아울러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 (조선『현대조선말사전』 )   3. “한 가지 사물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성질.” (중국『조선말 사전』) 이처럼 이중성이란 통일성을 전제로 하면서 그 속에 있는 모순성과 불일치성을 지칭한다. 그런데 황유복 선생은 통일성이라는 이 전제는 거론하지 않고 조성일 선생이 마치 “모순성과 불일치성”만 강조한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 조선어에는 쌍중성(雙重性)이란 낱말이 없기에 이중성(二重性)이란 낱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황유복 선생은 한어(漢語)의 언어습관과 한어 낱말의 함의를 가지고 조선어로 글을 쓴 조성일 선생의 전반 견해를 왜곡하고 공박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하면 말꼬투리를 잡아서 조성일 선생의 “조선족이중성론”을 논박함으로써 상대를 “궁지(窮地)”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둘째, 기실 개념 사용에 있어서 더 큰 혼란에 빠진 것은 오히려 황유복 선생 자신이라는 사실을 유식한 네티즌들이 지적하고 있다. “황유복 선생의 용어 사용에 혼동이 있다. 중국 56개 민족을 nation이라 했는데, 응당 ethnic group라 해야 한다. 황유복 선생은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고 따라서 조선족과 韓民族은 다른 민족이라고 했는데, 중국국민이 nation의 개념이고 조선족이 ethnic group의 개념이다. 따라서 ethnic group 면에서 조선족과 한민족은 같은 민족이고 조선족과 중국국민은 nation에서 같은 민족이다.”8) 보다시피 황유복 선생은 민족은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라는 점만 강조한 반면에, 민족은 혈연(血緣), 역사적 기억과 문화, 영토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무시함으로써 편면적인 논의를 하고 있다. 또한 황유복 선생은 한국계미국인들이 “탈한국적인 코메리칸사회”를 만들었듯이 중국조선족도 100여 년간의 이민사, 정착사, 투쟁사를 통해 이미 중국사회에 튼튼히 뿌리를 내린 것만큼 중국조선족이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다고 보는 것은 일종 허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중국조선족공동체가 한국사회와 구별되는 점만을 이야기하고 중국 주류사회와 구별되는 점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른바 탈모국(脫母國)적인 “100%의 조선족”을 운운하면서도 중국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 특히 민족교육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 특히 “100%의 조선족”론은 중국조선족과 모국과의 문화적 연계를 인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 인식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셋째, 황유복 선생은 조성일 선생을 비롯한 이른바 “이중성 논자(論者)”들은 중국 주류사회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 역시 지나친 노파심이라 하겠다. “허구의 이중성 민족론은 중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키워가고 있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은) 도리어 선족(鲜族), 즉 조선족이다. 그들은 김씨 부자에게 충성하거나 혹은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렇게 믿지 못할 민족이라는 비난이 중국의 지성인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열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9) 보다시피 황유복 선생은 중국의 한 사이트에 실린 네티즌의 글을 논거로 삼고 있는데,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사람을 과연 “중국의 지성인”이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세계적인 석학들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nd Said, 1935-2003), 가야트리 스피박(Cayatri C. Spivak, 1942- ), 호미 바바(Homi K. Bhabha, 1949- ) 같은 이들의 지론은 차치하더라도, 중국의 족군(族群)관계를 이론적으로 분석, 종합하면서 중화민족은 “다원일체의 구조(多元一體格局)”를 갖고 있다는 결론10)을 내린 비효통 선생과 같은 중국 최고 석학의 견해는 왜 고려하지 않는지?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이 가지는 이중문화신분에 관해서 중국의 민족학 학자 왕아남 선생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통일된 현대 중화민족국가내부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이중민족신분과 민족의식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역사가 남겨놓은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11) 또한 중국의 탈식민주의 문화이론가인 왕녕 선생도 “문화신분과 그 동일시는 천성적이고 변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분에는 천성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있는데,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있어서 한 인간의 민족과 문화 신분은 얼마든지 이중적이거나 지어는 다중적일 수 있다”12)고 하였다 주지하디시피 중국학계에서는 3천만 이상의 화인, 화교들을 디아스포라(流散 혹은 離散)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각종 저서들에서도 디아스포라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있고 이에 대한 중요한 학술회의도 여러 번 한적 있다. 일례로 현재 고등학교 통용교재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양내교의『비교문학이론교정』에서는 전문 "신분연구"라는 장을 설정하여 세계의 디아스포라문학을 논하면서 3천만 화교의 이중문화신분이 문학창작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13)  그럼 아래에 중국조선족공동체의 특성에 대해 좀 더 이론적으로,구체적으로 접근,논의해 보고자 한다.    2. 디아스포라와 이중문화신분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원래 “이산(離散), 산재(散在)를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주로 헬레니즘시대 이후 팔레스타인 이외의 곳에 사는 유대인 및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14)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인, 아르메니아인이나 세계 각국에 널려 사는 중국의 화교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들을 좀 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디아스포라(diaspora)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지난 세기 70년대 탈식민주의문화이론이 나오면서 소문자 디아스포라는 문화신분이나 소수민족담론에 있어서의 중요한 용어, 지어는 하나의 이론적 범주로 부상하게 되었다.  현대 “문화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학자 슈트아트 ․ 홀(Stuart Hall0, 1932- )은 『문화신분과 디아스포라』라는 저서에서 소문자 디아스포라를 처음으로 탈식민주의 비평의 중요한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소문자로 디아스포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내가 여기에서 사용한 이 술어는 그 직접적인 뜻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그 은유적인 뜻을 취했다. 디아스포라는 우리와 같은 분산된 민족공동체, 애오라지 모든 대가를 지불하면서라도, 심지어는 기타 민족을 큰 바다로 내몰면서라도 그 어떤 신성한 고향에 되돌아가야만 비로소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러한 특정 민족공동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부하고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종족’형식이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낙후된 디아스포라 관념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액운,그리고 서방이 이러한 관념과 동모(同謀)하고 있음을 보았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디아스포라 경험은 결코 본성이나 혹은 순결도에 의해 정의를 내린 것은 아니며 필요한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정의를 내린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결코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생존을 꾀하는 신분관념은 아니다. 말하자면 혼합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의를 내린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신분은 개조를 거치거나 그 차이성으로 말미암아 부단히 생산되고 재생산됨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갱신하게 되는 것이다. 독특한 본질을 가진 카리브 사람들은 바로 그 피부색, 천연색과 얼굴모습의 혼합이며, 카리브 사람들의 음식은 각종 맛의 혼합이다.디크 ․ 헤프디그의 재치 있는 비유에 의하면 이것은 ‘뛰여넘기’ 이요, ‘썰어서 뒤섞어놓기”의 미학으로서 이는 역시 흑인음악의 영혼이기도 하다.”15) 슈트아트 ․ 홀이 내린 이상의 정의로부터 알 수 있는바 소문자 디아스포라는 대문자 디아스포라에서 파생되었지만 “문화의 혼합성”, “신분의 생산성과 재생산성” 같은 새로운 뜻을 추가함으로써 보다 넓은 개념과 함의를 가진 새로운 용어로 된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외래어를 가급적으로 자기의 언어기호로 전환시켜 사용하기를 고집스럽게 견지해 온, 문화적 주체성이 아주 강한 중국에서는 이러한 소문자 디아스포라를 숫제 “족예산거(族裔散居)” 혹은 “이민사군(移民社群)”으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근대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전쟁, 시장경제 글로벌리즘 등 여러 가지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강제적이거나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슈트아트 ․ 홀이 내린 이상의 정의 중에서 “문화의 혼합성”, “신분의 생산성과 재생산성” 같은 내용이 첨가된 새롭게 확장된 소문자로서의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관심이 모여지는 것은 아이덴티티의 문제이다. 문화연구에서 신분이나 정체성이라는 이 두 개념은 영어에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다. 영어에서의 아이덴티티의 원래의 기본함의는 물질. 실체의 존재에 있어서의 통일된 성질이나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철학의 견지에 본다면 독일 철학가 헤겔이 제기한 “동일성”의 개념으로서 이를 영문으로 번역할 때 역시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했다. 이 경우에는 아이덴티티라는 개념으로 사유와 존재 사이의 동일성 문제를 설명하였는데, 이런 동일성 속에는 사유와 존재의 본질만이 아니라 양자 사이의 차이성도 내포되어 있는데 이 양자 사이에는 일종 변증적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당대의 중국의 문화연구 분야에서 서양의 철학, 인류학, 사회학과 문화연구의 영향 하에서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이 단어를 번역하여 사용하거나 정의를 내리는 경우에 적잖은 혼란이 존재하고 있다. 즉 학자에 따라 “인동(認同)”, “신분(身分)”, “동일(同一)”, “동일성(同一性)” 등 한어 단어들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명석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사천대학교 염가 선생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나의 이해에 의하면 당대 문화연구에서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이 단어에는 두 가지 기본적 함의가 있다. 첫째는 어느 개체나 집단이 특정한 사회에서의 지위를 확인하는 명확하거나 현저한 특징을 가진 의거나 척도, 이를테면 성별, 계급, 종족 등등인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분”이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를 나타낼 수 있다. … 다른 한 면으로 한 개체거나 집단이 자기의 문화상에서의 신분을 추적하거나 확인하는 경우에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동일성을 확인한다(認同)’라고 할 수 있다. 단어의 속성으로 보면 ‘신분’은 명사로서,그 어떤 척도나 참조계로서, 확장된 그 어떤 공동한 특징이나 표징이며, ‘동일성을 확인한다(認同)’는 것은 동사로서 다수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동일성을 확인하는” 행위를 뜻한다. … 오늘날 문화연구에서 고정불변의 본질주의적인 안광(眼光)으로 “신분”이나 그것을 확인하려는 입장은 이미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16) 문화연구에서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특정한 사회에서의 부동한 개체나 공동체의 “사회신분”과 “문화신분”이다. “사회신분”이나 “문화신분” 문제는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회와 문화 속에서 “나는 누구(身分)”인가? “어떻게, 왜 누구(認同)인가?”를 묻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문화신분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중국조선족은 “과경민족(跨境民族)”의 후예들로서, 근대적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왕조의 봉건학정과 자연재해 및 일체의 침탈로 말미암아 조선의 농민들을 비롯한 의병장, 독립운동가, 교육자, 문학인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연변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역에 와서 정착하였는데, 김관웅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은 애초부터 “‘집’잃고 ‘집’을 찾아 해매는 미아(迷兒)”들― 무국적자(無國籍者)들이었다.17) 이들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치발역복, 귀화입적(薙髮易服, 歸化入籍)의 치욕을 감내해야 하였고 일본의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에 의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1909년의 간도협약(間島協約), 1930년대 초반의 민생단사건, 만보산사건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들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양자택일의 고뇌에 시달려야 했고 궁극적으로 희생양의 비애를 맛보아야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에 온 조선인들은 논농사를 도입해 동북지역의 개발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고 반제반봉건의 중국혁명에 커다란 기여를 함으로써 중국 국민으로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이들은 중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릴 수 없었으며 자신의 물질문화, 제도문화, 행위문화, 정신문화 일반에 커다란 애착과 긍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100여 년간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민족교육과 문학예술을 통해 “조선족으로 살아남기”에 성공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은 엄연한 중국국민이로되 여전히 이중 문화 배경과 신분을 갖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의 이중문화신분을 두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의 세계에만 속하지 않는다. 나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인 동시에 미국인이기도 하다. 이는 나에게 기괴하면서도 실지에 있어서는 괴이하다고 할 수 없는 이중배역을 부여하였다. 이밖에 나는 학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든 신분은 모두 분명하지 않다. 매 하나의 신분은 나로 하여금 색다른 영향과 작용을 하게 한다.”18) 사이드와 같은 탈신민주의문화의 이론가들은 이중 내지 다중 문화 배경과 신분을 갖고 제1세계에서 제3세계의 대리인의 역할을 함과 아울러 제1세계의 이론을 제3세계에 전파해 제3세계 지식인들을 문화적으로 계몽시켰다. 『여용사(The Woman Warrior, 女勇士)』(1976)라는 작품으로 미국 주류문학계와 화인문학계(華裔文學界)에서 모두 이름을 떨친 바 있는 저명한 여성작가 양정정(楊亭亭, 1940-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신은 미국의 화인구역에서 자란 화인후예 여성작가이다. 그는 학교에서 거의 모두 미국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기억과 마음속 깊이에는 늙은 세대 화인들이 그에게 들려준 여러 가지 신물이 나면서도 전기적인 이야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비범한 예술적 상상력으로 쓴 이야기 그 자체는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이 아니라 보다 더 자전(自傳)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을 두고 적잖은 화예작가와 비평가들은 전통적인 ‘소설’영지(領地)에 대한 경계 넘기(越界)이며 뒤엎기(顚覆)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생활경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자전적 성분에 지나치게 많은 ‘허구’적 성분이 끼어있다고 말한다. 실지에 있어서 다중(多重) 문체를 뒤섞는 이러한 ‘혼잡식(混雜式)’책략이야말로 양정정의 ‘비소설(非小說)’로 하여금 미국 주류문학 비평계의 주목을 받게 하였고 영어권 도서시장에서도 성공하게 하였다. 양정정, 그리고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화예작가들의 성공은 비단 ‘다문화주의’특징을 가진 당대 미국문학에 일원(一元)을 보태주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화인문학의 영향도 넓혀주었다.”19) 에드워드 사이드나 양정정과 마찬가지로 중국조선족들, 특히 중국조선족 지성인들은“조선문화”와 “중국문화”라는 이중문화신분을 갖고 광복 전에는 중국 경내에서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이라는 이중적 역사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싸웠고 광복 후, 특히 개혁개방 후에는 중한 교류의 가교역할과 남북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문화”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한족은 물론이요, 기타 소수민족과도 구별되며 또 “중국문화”적 요소로 말미암아 중국조선족은 남한이나 북한 또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동포와도 구별된다.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었던 김학철 선생이 중일한 3국을 무대로 싸웠고 후반생을 피타는 고투로 중국에서의 입지를 굳혔지만, 임종을 앞두고 그 자신의 뼈를 고향인 강원도 원산(元山)에 보내기를 바랐던 사례20)에서 알 수 있다시피 중국의 주류사회에 참여, 적응하여 자기의 확고한 위치를 찾으면서도 자기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고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실체이요, 이중문화신분이다.   3. “제3의 영역” 또는 “변연문화형태”   연변을 비롯한 중국조선족의 거주지는 특수한 공간적 특성을 갖고 있다. 중국의 중심부로 놓고 말하면 주변부로 되지만 여러 민족이 더불어 살고 있고 경계 너머에 모국이나 다른 민족국가가 있기에 연변은 그야말로 호미 바바의 말 그대로 “제3의 영역”― “찬란한 변두리”에 속한다. 호미 바바는 “국가들 사이의 틈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국가적인 문화를 ‘위치 짓기(locality)’는 그 자체 내의 관계에 있어서 통합되지도 않았고 단일한 것도 아니며 그 바깥이나 너머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단순하게 ‘타자’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 경계선은 야누스적(Janus-faced)인 속성을 갖고 있으며 밖/안의 문제는 항상 잡종성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과정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사람들(people)’을 혼합하고 의미의 또 다른 측면을 생산해내며 또 필연적으로 그 정치화의 과정에서는 재현을 위하여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힘과 정치적인 적개심을 무력하게 만드는 측면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21) 호미 바바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특징인 자본의 전지구화현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여러 인종들 간의 교류를 통해 이질적인 문화들이 만나서 문화적 잡종성을 발생한다. 즉 현대사회의 변화는 지금까지 없었던 잡종적이고 전환적인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며 경계의 존재들로 하여금 창조적인 긴장감을 유발하게 하는 “제3의 영역”을 만들어내게 한다. 이러한 “제3의 영역”은 이질적인 문화요소들이 혼합, 용해, 재구성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김강일 선생은「변연문화의 문화적 기능과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적 우세」22)라는 글에서 중국조선족문화는 “변연성(邊緣性)”을 갖고 있으며 일종의 변연문화형태라는 관점을 내놓았는데,이는 호미 바바의 “제3의 영역”이라는 개념과 맞먹는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정치, 경제생활의 측면에서는 기본상 중국화(中國化)되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모국문화의 유전인자(遺傳因子)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을 갖고 있으며 중국조선족공동체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사이에 있는 “제3의 영역”― 변연문화형태에 속한다. 변연문화형태는 아래와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 변연문화형태란 두 문화의 틈새에서 일정한 요소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계통은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으며 그로서의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유대인 공동체, 동남아와 북미에 있는 화인(華人)공동체, 스위스의 독일인공동체, 캐나다 퀘벡의 프랑스인 후예들의 공동체 등에는 모두 이런 문화형태가 존재한다. 변연문화형태는 자기의 특수한 문화적 특질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두 개 이상 문화계통과의 쌍개방(雙開放)적 성격으로 나타난다. 둘째, 변연문화형태는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多重文化構造)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단일문화구조(單一文化構造)를 가진 문화형태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기능을 하고 있다. 시스템이론(系統論)의 시각에서 보면 변연문화란 새로운 문화계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단일한 문화계통에 비해 더 강한 문화적 기능을 할 수 있다. 셋째, 변연문화의 성격은 인류문화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미래의 세계는 다양한 문화계통들 간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그 어느 문화계통이든지 모두 자기의 전통문화만을 고수할 수 없다. 오직 복합적인 문화계통으로 새로운 문화기능을 창출해야만 그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적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 변연문화형태로서의 중국조선족문화는 많은 자신의 장점(長點)을 갖고 있는 동시에 자기의 많은 단점(短點)도 갖고 있다. 양쪽 문화에 발을 붙이고 있기에 늘 자신의 문화신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며 방황을 하게 된다. 즉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문화는 도대체 어떤 문화여야 하는가? 어느 쪽 문화에 기울어져야 하는가? 이리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이러한 변연성은 아주 많은 가변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늘 우왕좌왕한다. 1960년대에 일었던 “조선바람”에 중국조선족들은 근 10만 명 이상이나 조선으로 도망쳤었다. 2003년 연말 한국에서 발생했던 일부 중국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중국국적포기청원은 모국문화로의 일변도(一邊倒) 경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조선족민족교육 취소론자들은 중국문화로의 일변도 경향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중국조선족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중국은 지금도, 앞으로도 중국조선족의 유일한 삶의 터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 점은 한반도가 통일되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중국에 사는 이상 완전히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역시 아니다. 가급적이면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적극적으로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계속 연변을 비롯한 변연문화지역을 지켜야 하고 변연문화형태의 속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 거주지는 한반도의 원문화(原文化)와 중국문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변연문화구역이고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이므로 한반도의 중국진출이나 중국에서의 한반도진출에서 모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한반도나 중국에 모두 유리하다. 특히 중국조선족사회의 존재는 한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양측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신호를 창출하여 전달하는 극히 중요한 문화전환기능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족사회는 문화적으로 한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전환계통 혹은 문화중개계통의 기능은 상대방의 문화를 피수용자가 수용할 수 있는 문화신호로 전환하여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개 문화체계가 서로 대립되어 있고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방식과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을 때 문화전환계통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과 한국과 같이 이념과 제도의 차이로 인해 반세기 이상 분단된 상태에 있었던 문화계통들 간의 교류는 상호 이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점들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고 빠른 시일 내에 문화적인 융합을 이룩하자면 중국조선족사회와 같은 문화중개계통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4.맺는 말:“통합”의 원리와 “접목의 미학”   디아스포라는 이중적 문화신분을 갖고 있기에 모국과 거주국 사이에 갈팡질팡, 우왕좌왕할 뿐만 아니라 문화변용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다년간 중국인 디아스포라현상에 대해 연구를 해온 왕경무(王庚武) 선생은 모국과 거주국 문화 둘 중에 어느 쪽에 치우치는가에 따라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인(華人)들 중에서 다섯 가지 신분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들로는 잠간 여행하거나 거주하는 자(旅居者)의 심리, 동화된 자(同化者), 조절하는 자(調節者), 민족적 자부심을 가진 자, 이미 생활방식이 철저히 개변된 자이다”23) 라고 하였다. 여기서 베리(Berry)의 문화변용에 관한 이론을 참조할 수 있는데, 그는 문화변용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제1단계는 접촉단계로서 서로 다른 2개의 문화가 만나는 초기단계이고 제2단계는 갈등단계로서 이민자들이 수용하는 주류사회가 이민자들에게 변화와 압력을 가하는 단계인데, 이 때 이민자들은 기원사회(Origin Society)와 정착사회(Host Society)의 문화 정체성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다. 제3단계는 해결단계로서 문화변용의 특정한 전략을 사용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또한 베리는 소수민족집단 이민자들의 문화변용이 “다른 인종과 민족집단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와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이나 관습의 유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의해 문화변용은 통합, 동화, 고립, 주변화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통합(Integration)은 소수민족 이민자들이 거주국의 주류사회에 활발히 참가하면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는 경우이고, 동화(Asslation)는 이민자들이 주류사회에 활발히 참여하는 과정에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정체성을 상실하고 주류집단에 흡수되는 경우이다. 고립(Isolation)은 이민자들이 사회참여를 활발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문화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로서, 이들은 보통 차이나타운과 같은 소수의 이문화 집단의 거주지에 격리되어 산다. 마지막으로 주변화(Marginality)는 주류사회에 참여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문화도 잃어버리는 경우로서, 사회의 밑바닥 계층으로 전락하여 기성질서에 반항하는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갖게 될 수도 있다.24) 연변의 시인 석화(石華, 1958- )는 그의 시 「연변 ․ 7 ― 사과배」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가고 있다/ 백두산 산줄기 줄기져 내리다가/ 모아산이란 이름으로 우뚝 멈춰 서버린 곳/ 그 기슭을 따라서 둘레둘레에/ 만무라 과원이 펼쳐지었거니/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 땅의 기름기 한껏 빨아올려서/ 이 하늘의 해살을 가닥가닥 부여잡고서/ 봄에는 화사하게 하얀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푸름 넘쳐 내더니/ 9월,/ 해란강 물결처럼 황금이삭 설렐 때/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우리만의 『식물도감』에/ 우리만의 이름으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 ‘연변사과배’/ 사과만이 아닌/ 배만이 아닌/ 달콤하고 시원한 새 이름으로/ 한 알의 과일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25) 보다시피 석화 시인은 고국을 떠나 중국에 사는 중국조선족을 사과배라는 메타포를 동원해 노래하고 있다. 연변의 상징으로 되는 사과배는 함경남도 북청의 배나무가지를 베여다가 연변 현지의 돌배나무 뿌리에 접목시켜 만들어낸 새로운 과일품종이다. 연변의 사과배가 연변의 돌배나무 유전인자와 북청 배나무 유전인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듯이 중국조선족은 중화문화의 신분과 조선민족문화의 신분을 동시에 갖고 있는 특수한 민족공동체이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과 양가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박쥐처럼 기회주의로 살아서는 아니 된다. 중국조선족은 이제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도 아니고, 물결 따라 바람 따라 떠도는 부평초도 아니며, 아무 경계 없이 날아다니는 박쥐도 아니다. 중국조선족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곳은 중국땅이다.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삶은 이제는 결코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때로는 모국이나 거주국 양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고 의심을 받고 또 그래서 곤혹스럽고 방황을 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이러한 양가감정을 지니고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났고 앞으로 우리 뼈가 묻힐 곳이며 또 우리들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연변땅 또는 중국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모범적인 중국국민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고려속요「정석가」에서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라고 했듯이 우리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고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무궁화 삼천리강산에 대한 다함없는 향수와 사랑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가지 문화신분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1 : 1의 관계가 아니다. 더욱이는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외면한 이른바 “100%의 조선족”이라는 말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다. 다시 사과배를 예로 들면, 원예학에서는 북청의 배나무가지를 접수(椄穗)라 하고 연변의 야생 돌배나무를 접본(椄本)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접본은 당지의 야생나무를 이용한다. 그래야 새로운 품종이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여 잘 자랄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물론, 한국의 후지사과나, 미국의 피스장미거나 간에 그 생명이 바탕이 되는 뿌리인 접본은 예외 없이 야생종이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계시를 준다. 한 식물의 종이 아무리 인간에 의해 변이를 일으켰다 해도 그 원형은 자연 상태의 야생으로부터 진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경우도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은 이중문화신분을 가지고 살되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고이 간직하는 기초 위에서 중국 주류민족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해서 자립할 수 있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잃고 주류민족에게 동화되어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줄로 안다. 중국조선족공동체의 해체와 붕괴는 중국이라는 다민족국가가 지향하는 “다원문화”의 보존에도 하나의 비극이 될 것이다.  요컨대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제한된 기회구조 내에서 “제3의 영역”과 이중문화신분의 갈등을 해소하고 그 “특권”과 우세를 충분히 살려 신분상승을 추구하면서도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통합의 전략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합의 전략을 구사함에 있어서 거주국의 이민정책과 민족정책의 혜택도 받아야 하거니와 모국의 지원도 충분히 받아야 한다. 윤인진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모국과 거주국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모국과 거주국이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재외동포가 모국과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을 경우에 모국의 영향력은 커지게 되며, 특히 전지구화로 인해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모국이 재외동포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26)                   2010년 2월 13일 주해: 1)이 글은 2월 18일 한국 재외동포포럼(이사장 이광규) 제13차 정기포럼에 발표한 것이다. 2)정판룡,『정판룡문집』제2권, 1997년, 1∼15쪽 참조. 3)「조선족문화론강」,『문학과 예술』, 2006.4. 4)김강일, 허명철,『중국조선족 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년. 김관웅,「사과배와 중국조선족-중국조선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관견」, 모이자 사이트: http://moyiza.net 김호웅,「‘디아스포라의 시학’, 그리고 우리의 소설」,『문학과예술』, 2007. 3. 5)조성일,「조선족과 조선족문화 이중성 재론」, http://koreancc.com 참조. 6)황유복,「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어도 이중성민족은 없다」, 7)해외한민족연구소,『한반도 제3의 기회』,한국화산문화사, 2009.6. zoglo.net 에도 실렸음. 8)http://zoglo.net 참조. 9)해외한민족연구소 편찬,『한반도 제3의 기회』, 화산문화사, 2009년, 273쪽. 10)費孝通 等著,『中華民族多元一體格局』, 中央民族學院, 1989年版. 11)王亞南,「槪說中國是多民族國家還是統一民族國家」,『民族發展與社會變遷』, 民族出版社, 2001年, 140쪽 참조. 12)王寧,『‘後理論時代’的文學與文化硏究』, 北京大學出版社, 2009年, 133쪽 참조. 13)杨乃喬,『比较文学概论』(第三版),『比較文學理論敎程』, 北京大學出版社, 2008年2月. 14)『세계백과대사전』제8권, (한국)동서문화사, 1996년판, 4593쪽. 15)왕선패, 왕우평 주편 《文學理論批評術語匯釋》, 高等敎育出版社,, 2006년, 748쪽. , 16)閻嘉 「文化身分與文化認同硏究的諸問題」.『中國文學與文化的認同』,북경대학출판사, 2008년, 4쪽. 17)김관웅,「‘집’ 잃고 ‘집’ 찾아 헤매는 미아들의 비극」,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과 편, 『조선-한국언어문학연구』, 민족출판사, 2008년 12월. 18)Cf. Edwand Said, Rofleclions on Exile and Other Essays, pp. xxx-xxxi, p.397. 19)王寧,『‘後理論時代’的文學與文化硏究』, 北京大學出版社, 2009年, 133쪽 참조. 20)김호웅, 김해양,『김학철평전』, 실천문학사, 2007년 참조.김관웅「디아스포라 작가 김학철의 문화신분 연구」,http://koreancc.com 참조. 21)Nation and Narrationg 4. 이소희, 「호미 바바의 ‘제3의 영역’에 대한 고찰」,『영미문학 페미니즘』, 제9권 1호, 2001년, 104쪽에서 재인용. 22)김강일, 허명철,『중국조선족 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2001년. 23)Cf. Wang Gungwu, "Roots and Changing Identity of the Chinese in the United States", in Daedalus(Spring 1991). p.184. 王寧,『‘後理論時代’的文學與文化硏究』, 北京大學出版社, 2009年, 132쪽에서 재인용. 24)윤인진,「코리안 디아스포라」,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년, 36∼38쪽 참조. 25)석화,『연변』, 연변인민출판사, 2006년. 26)윤인진,「코리안 디아스포라」,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년, 43쪽 참조.    * 이 글은 2010.2.18 한국 방송통신대학교 재외한인학회포럼 발표요지임  
30    정판룡 선생, 우리 모두가 그이를 그리는 까닭 댓글:  조회:2937  추천:3  2011-10-13
      들어가며     올해는 정판룡 교수 탄신 80주년이요, 서거 10주기 되는 해이다. 선생은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교육자, 문학가, 사회활동가로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우리 모두가 선생을 그리는 까닭은 이런 공식적인 평가에 수긍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이는 그의 소탈한 미소와 걸걸한 목소리, 그의 신념과 사상, 사랑과 지혜가 이 연변대학교 캠퍼스의 상록수처럼 푸르싱싱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선생을 그리는 까닭, 그리고 선생을 기념하는 의미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한다.     1. 한 편의 감동적인 성장소설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과 선택에 따라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훌륭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Free Will)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거스를 수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고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는 법, 동서고금의 영웅은 모두 출신이 비천하지만 높은 뜻을 품고 초인적인 의지로 운명에 도전하고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하였다. 역사적 인물도 그러하고 허구적인 설화나 소설의 인물도 그러하다. 나폴레옹이 그러하였고 홍길동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선생 역시 출신은 비천하였다. 전라도 담양의 참빗장수의 아들이다. 1937년 3월, 여섯 살 나이에 부모님의 뒤꽁무니를 따라 압록강을 넘어 타발타발 만주의 영구로 왔다가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저 북만의 상지로 이주하였다.      다 아시는 에피소드지만, 상지조선족초급중학교 3학년 학생이던 정판룡은 1949년 3월 연변대학이라는 민족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풍편에 듣고 친구 둘과 함께 불원천리 연변을 찾아왔다. 무작정 입학을 시켜달라고 림민호 부교장에게 떼를 쓰다가 퇴자를 맞았다. 귀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라고 했던가, 그들 세 젊은이는 주덕해 교장을 찾아갔다. 입학시켜 주지 않으면 아침마다 교장님의 집무실에 출근해 청소부터 하겠다고 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위(政委)로 하르빈에 머문 적 있는 주덕해 교장을 큰집 어른처럼 믿고 마구잡이로 매여달린 것이다. 주덕해 교장은 슬그머니 림민호 부교장에게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이놈들을 일단 입학은 시키되 학급 학생들을 따라가면 그냥 두고 따라가지 못하면 잘 얼려서 노자를 줘서 돌려보내도록 합시다.”     수학학부에 입학한 정판룡은 그럭저럭 두 학기를 마쳤고 세 번째 학기부터는 어문학부에 자리를 옮기더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워낙 총기가 좋고 말주변이 좋고 공부욕심이 많은 정판룡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1952년 10월 21세 약관의 나이에 연변대학 교원으로 되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다.     정판룡이 두 번 째로 림민호 부교장의 눈에 든 것은 아마도 1950년대 중반이리라. 국비류학생을 선발해 소련에 파견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신청 일자도 이젠 며칠 남지 않았건만 감히 신청하는 학생이 없다. 시험성적에 따라 선발하고 그것도 동북국에서 몇 사람 뽑지 않는데 시골대학 학생이 덤벼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장대 겨룸이라고들 학생들 사이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청 마감일 림민호 부교장 집무실에 나타난 것은 역시 촌스럽지만 영민하고 오기가 있는 정판룡이었다. 림민호 부교장은 정판룡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래,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아는 법이지. 아무리 시골대학에서 공부한다고 하지만 뱃장과 패기까지 없어서야 되겠어.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어. 한 번 촌놈의 본때를 보여주는 거야!.”     하고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정판룡은 불철주야 공부하였고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출국유학생선발시험에 통과되어 세계 일류 대학인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였다. 끝없는 도전정신과 참다운 준비를 통한 무궁무진한 저력, 이게 정판룡 선생의 힘이자 매력이다.     청년 정판룡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과 분투는 계속된다. 중국의 북경, 상해에서 선발되어 온 유학생들은 시커먼 헐레브(빵)과 짓이긴 감자에 질려 배를 곯고 모스크바의 혹한에 움츠러들어 공부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해 갔다. 하지만 워낙 식성이 좋은 정판룡은 걸신이 든 사람처럼 헐레브와 감자를 달게 먹었고 밤낮 공부에 매진하였다. 5년 세월 와신상담 노력을 경주한 결과 《알렉세이 톨스토이 3부작 에서의 인민묘사 원칙》이라는 논문으로 당당하게 문학 부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 학위논문은 중국교육부로부터 우수논문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중국의 귀공자들이 수토가 맞지 않아 피골이 상접하고 폐결핵까지 얻어가지고 어깨가 축 처져 돌아올 때 조선족청년 정판룡은 부둥부둥 살이 오른 얼굴에 멋진 러시아 털외투를 입고 동방의 미녀 왕유까지 끼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이는 우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영웅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반세기 넘는 세월 정판룡의 신화는 얼마나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꿈과 용기, 동산재기의 기회를 선물하였던가.      2. 탁월한 선견지명과 두둑한 뱃장      연변대학 와룡산 기슭에 서있는 정판룡문학비에는 그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에서 따온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내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 초 연길에 살구꽃, 배꽃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려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열차에 앉았다."      자신을 키워준 조선족동포와 연변대학에 대한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돌아온 선생은 북경 사회과학원이나 부인 왕유 여사가 나서 자란 상해에 가서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유 여사를 설득해가지고 은사 림민호 부교장이 계시는 연변대학의 품으로 돌아왔다. 가끔 동료나 제자들이 왜 북경, 상해에 남지 않고 부득부득 촌스러운 연변에 와서 고생하느냐고 물으면 선생은 껄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큰 나라에 가서 재상으로 사느니보다 작은 나라에서 왕으로 사는 게 좋지 않은가.”     이는“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倭國)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말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하여 선생 자신의 동포사랑, 모교사랑을 대변한 말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지만 까놓고 말하면 이는 반은 농담이요, 반은 진담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선생이 북경이나 상해에 안주하였더라면 우수한 학자로 유족한 삶을 살았을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족형제자매들이 우러르는“왕”으로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조선족백성들 모두가 좋아하고 따르는 “민중의 벗”이요,“왕”이였다.     우선 선생은 타고난 총명과 근면성으로 《세계문학간사》(공저, 1981),《고리키전》(1985), 《외국문학강좌》(1990), 《제2차대전후의 세계문학》(1990) 등 저서와 교과서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전국 20여개 대학의 외국문학사 관련 교수들을 동원하여 4권으로 된 《외국문학사》를 펴냄으로써 중국 경내 대표적인 외국문학 연구자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뿐만 아니라 선견지명을 가지고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의 우세를 충분히 살리고 중국 경내 한국학의 초석을 쌓은 대표적인 학자였다. 1980년 중국조선문학연구회를 출범시켰고 1986년 북경대학교 학자들과 함께 북경대학에서 처음으로 조선문학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89년 중국 경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연변대학교에 조선학연구중심을 창설하고 《조선학연구총서》를 발간하였으며 《간명한국백과전서》등 무게 있는 책자들을 출간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자기의 특성과 강세에 맞은 연구영역을 새롭게 개척하는 탁월한 선견지명, 전략적인 안목과 바다 같은 흉금으로 천하의 인걸들을 모아 값진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걸출한 리더십, 이것 또한 정판룡 선생의 힘이자 매력이다.     다음으로 선생은 상아탑에 갇혀 자기의 연구영역에만 몰입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중국조선족사회의 역사와 현실, 미래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대중강연과 함께 회고록, 기행, 칼럼 집필에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그의 강연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학다식함으로 정평이 나있고 《세계견문》을 비롯한 기행들은 변화된 세계의 신선한 바람을 중국조선족사회에 몰고 왔으며 우리 모두의 세계사인식과 의식의 전환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선생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은 비단 정판룡 선생 자신의 일대기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 이민사, 정착사의 축도(縮圖)로 된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한국 웅진출판사에서 《내가 살아온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재판되었는데 한국인들에게는“중국을 알게 하는 안내서”로 널리 알려져 있고 지금도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조선족의 뿌리 찾기, 조선족의 문화 살리기에 초점을 둔 선생의 학문은 풍부한 사료, 실사구시의 전통, 심오한 철리와 형상적인 비유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정판룡선생은 현대대학경영의 이념과 체계를 본격적으로 연변대학교에 접목시킨 걸출한 교육자이며 행정가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정판룡 선생은 대학의 최고 자산과 기반은 교수진이며 대학교는 얼마나 많은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경영의 성패, 지명도의 높낮이가 좌우지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천편일률적인 자대로 교수를 선발하지 않았다. 수호(水滸)의 108명의 영웅호걸처럼 교수는 적어도 18반 무예가운데서 한두 가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선생은 설사 오척단신이라 하더라도, 술 잘 마시고 가끔 실례를 한다 하더라도 오직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고 강의를 잘하고 연구를 잘하면 그들을 안아주고 키워주었다. 연변대학의 김영덕, 김병수, 이해산, 허룡구 교수는 오척단신의 교수들이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고 고전번역에 멋진 강의로 소문이 났다. 서일권 교수는 중년에 상처하고 늘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갔지만 그의 어진 천품과 강한 행정력을 높이 사주고 학부장으로 발탁시킨 분이 정판룡 선생이다. 또한 최상철 교수로 하여금 습작학에서 신문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중국조선족신문사를 정립하고 일가(一家)를 이루게 한 분 역시 정판룡 선생이다.     그리고 선생은 적어도 연변대학교에서 대학교 교과서체계를 확립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연변대학교 교과서는 1950년대 림민호 부교장 시절 평양에서 지원받은 소련의 교과서와 조선의 교과서로 충당되었고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많은 학과목들은 교과서가 없이 강의되고 있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교수는 중요한 대목들을 두 번 세 번 읽어야 하였고 학생들은 팔목이 부러지게 필기를 해야 하였다. 개혁, 개방 후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선생은 림휘, 허호일, 서일권 교수와 함께 선참으로 《세계문학간사》(상, 하)를 펴냈다. 선생은 또 문학이론을 강의하는 임범송, 현룡순, 김해룡 교수를 내세워 《문학개론》을, 중국문학사를 강의하는 김영덕, 김병수, 허룡구 교수를 내세워 《중국문학사》(상, 중, 하)를, 습작학을 강의하는 박상봉, 최상철, 전국권, 김만석 교수를 내세워 《습작학개론》을 속속 펴내게 하였다. 이로써 교과서가 없이 강의하는 국면을 최초로 타개하였고 연변대학에서 자체로 편찬한 제1대 교과서체계를 확립하였다.     아무래도 선생의 가장 큰 기여는 조선언어문학 석사학위 수여권한과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쟁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문박식함과 중국학계 거물들과의 폭넓은 인맥과 교유는 선생이 석사학위, 박사학위 수여권한을 쟁취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바탕으로 되었다. 문학이론계의 태두인 전중문(錢中文) 교수와는 모스크바대학시절 동기동창이다. 저명한 외국문학전문가이며 중산대학의 오문휘(吳文輝) 교수는 “연변대학의 정판룡 교수는 박식하고 말솜씨가 좋고 조직능력이 강한 교수”라고 말했다. 더욱이 동방의 석학(碩學)으로 불리는 계선림(季羨林) 교수는 “동북에서 동방문학학자로 정판룡 선생을 손꼽는다”고 하였다. 선생은 생전에 김병민, 김관웅, 이암, 전학석, 강은국, 채미화, 윤윤진, 최웅권, 김호웅, 허휘훈, 이애순, 문일환, 김형중 등 20여 명의 박사를 키워내고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를 국가급중점학과로 육성하는데 초석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사를 주관하는 부총장으로서 한국 통일원 전임 차관 동훈 선생, 한양대학교 이종은 교수 등과 손을 잡고 수십 명의 젊은 학자들을 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에 보내어 외국체류경험을 쌓고 학문을 연찬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정판룡 선생은 우리 연변대학이 산해관을 깨고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연 분이다.                      3.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제자에 대한 사랑     뛰어난 인물의 배후에는 반드시 위대한 스승이 있다. 아난(阿難)의 배후에는 석가가 있었고 베드로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가 있었으며 안연(顔淵)의 뒤에는 공자가 있었고 서애(西厓)의 뒤에는 퇴계(退溪)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판룡 선생의 배후에는 림민호 부교장이 있었다. 정판룡 선생은 림민호 부교장을 성심성의껏 본받고 배우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사숙(私淑)하고 존경하였다. 옛날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말하자면 임금님과 스승과 아버지를 같은 자리, 같은 가치에 놓고 생각했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 정판룡 선생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자기의 스승과 은사들을 극진히 모신 것 같다. 선생은 자신의 은사들인 림민호동상, 이욱문학비, 김창걸문학비를 세우는데 앞장을 섰고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진정이 넘치는 명문들을 남겼다.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사모님과 우리 제자들을 앞에 두고 림민호 선생의 동상 주변에 골회 한 줌 뿌려줄 수 없겠느냐고 간절히 소망하였다. 림민호 선생의 유가족도 흔쾌히 허락을 해주어서 우리 제자들은 림민호 선생의 동상 주변의 잔디밭에 좁다란 홈을 치고 정판룡 선생의 골회를 정히 뿌렸다. 천당에 가서라도 존경하는 은사님을 옆에 모시고 도란도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정판룡 선생, 스승에 대한 그분의 다함없는 존경에 우리 모두가 가슴이 뭉클했던 일이 어제 일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찍《곡절 많은 인생》(1〜2, 1989)이라는 글을 통해 림민호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최초로 소상하게 복원시켜 놓음으로써 일제치하 항일투쟁을 하다가 서대문감옥에서 7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렀고 연변대학 초대 부교장으로 18년이나 봉직한 탁월한 혁명가, 교육가의 빛나는 형상을 부각하기도 하였다. 결초보은의 사제 간의 의리, 세상인심이 조석으로 변하고 자그마한 명리를 탐내서 동가식서가숙 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정신인가.      정판룡 선생의 제자 사랑은 특별한 데가 있다. 남을 가르친다고 해서 누구나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박식한 학자라 해서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학자와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세상에는 위대한 학자이면서도 한 사람의 제자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 냉정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젊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젊은 생명의 앞날에 기대와 희망을 품고 그 생명의 성장과 발전에 깊은 관심과 두터운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자만이 스승이 될 수 있다.     선생은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고 제자가 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캐고 드는 분이 아니다. 선생은 무조건 제자를 믿고 일을 맡긴다. 비판보다는 칭찬을 많이 한다. 특히 자신의 평민적인 성격과 고금을 넘나드는 학문의 깊이, 전략적인 안목과 선견지명, 그리고 지행합일의 행동력으로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인다. 제자를 많이 두다 보면 영악스러운 자가 있는가 하면 어질고 약한 자도 있다.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처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물 덤벙 술 덤벙 실수를 하는 자도 있다. 선생은 모든 제자를 다 껴안아주되 언제나 약한 자를 두둔하고 우선 실수를 한 자를 구해주고 본다.    1980년대 말 이 아무개라는 학생이 면회를 온 처녀와 함께 남성기숙사에서 잤다(실은 이 아무개라는 학생이 처녀와 저녁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취침시간이 지났고 처녀는 사범학교로 돌아갈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남성숙사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조용히 잔 것이다)고 당장 퇴학처분을 내린다고 학교 당국에서 야단을 칠 때 정판룡 선생은 허허 웃으며 다음과 같은 유머로 난제를 풀어주었다.    “왜 젊은이인가?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실수를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른으로 될 수 있거든. 젊은 놈이 조금 실수를 하고 한 번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단매에 때려눕혀서야 되겠소? 다른 남학생들이 있는 데서 좋아하는 처녀와 한 침상에서 잤다고들 하는데 여관을 잡을 돈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사실 외국에서는 대학생이면 결혼도 할 수 있는데 뭘. 한 번 봐 주라구.”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실수를 했지만 정판룡 선생 덕분에 처분을 받지 않고 무난히 공부하게 된 이 아무개라는 학생은 지금 박사가 되었고 교수로, 당위서기로 출중하게 일하고 있다.     선생의 은총을 입고 이 아무개 학생처럼 구제불능의 처지에서 헤어난 제자는 기수부지겠지만 여기서 우리 큰형의 사례만 하나 더 들기로 한다. 1964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큰형 봉웅 역시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다녔는데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닐 생각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에 갔었다. 쪽지 한 장을 달랑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는지라 우리 어머니가 큰아들을 잃어버렸다고 대성통곡을 했고 평소 우리 집에 잘 놀러왔던 김창락, 한석윤, 류은종 등 학급친구들이 정판룡 교수를 모시고 득달 같이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때 정판룡 교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교수였는데, 그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 허허 웃으며    “이 집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젊은이가 아닙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사람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 사나흘 지나면 반드시 자기를 뉘우치고 어머니 곁에 돌아올 겁니다. 제가 봉웅이 어머니 앞에서 장담을 할게요.”    하더니 김창락 등 학급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봉웅이는 이삼일 후 분명 돌아오는 거야. 내가 알았으면 됐어. 호들갑을 떨며 학교에 보고할 건 없어. 봉웅이가 돌아온 후에도 내색을 내지 말고 이전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야 해. 알겠어?”     하고 다짐을 따고 나서    “봉웅이 어머니, 애들이 정심도 먹지 않고 헐레벌떡 쫓아왔으니 정심이나 차려주십시오. 저도 이 친구들에게 잡혀오다 보니 정심을 걸렀거든요.”     하고 비위 좋게 껄껄껄 웃었다.     정판룡 교수의 말대로 큰형은 사흘 만에 돌아왔고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 때 우리 동생들은 토끼처럼 귀를 강구고 문틈으로 정주방의 동정을 살폈는데, 그 때 뵌 정판룡 교수의 준수한 얼굴과 서글서글한 눈매를 잊을 수가 없다. 큰형의 일이 있은 후 우리 형제들의 눈에 정판룡 교수는 일개 교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비쳤고 우리 형제들은 정판룡 교수의 말씀을 성자(聖者)의 예언처럼 믿게 되었다.      선생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야기할진대 정판룡교육발전기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라도 깍쟁이라는 말도 있지만 전라도 담양 출신인 정판룡 선생은 의식주에 있어서 동전 한 푼도 아껴 쓴다. 솔직히 말하면 고급 구두 한 컬레 없고 정장도 별로 여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면 장바구니를 허줄한 자전거 핸들에 걸고 남새시장에 나가 남새장수 영감, 고기장수 아줌마들과 한 푼 두 푼 깎으며 흥정을 한다. 일본, 한국과 구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고 돌아올 때도 카메라 하나, 전기면도기 하나 사오지 않는다. 그러니 전라도 깍쟁이라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     하지만 의미 있게 돈을 쓸 줄 아는 분이 바로 정판룡 선생이다. 선생은 사모님과 함께 1980년대 초 스톡홀름대학에 가서 강연할 때 한 달에 4천 달러씩이나 받았지만 그 돈을 몽땅 유럽 각국을 여행하는데, 미국의 아라스카를 거쳐 하와이, 일본, 한국을 에돌아오는데 썼다. 거의 날마다 라면이나 끓여먹으면서 꼬박꼬박 장학금을 모아서는 대형 텔레비전이나 냉동기를 사들고 돌아오는 방문학자나, 외화를 움켜쥐고 돌아와 마치 금의환향을 한 듯이 거들먹거리는 방문학자들과는 워낙 격이 달랐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감동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96년 한국의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을 때 정판룡 선생은 상금에서 10만 원을 떼어내어 정판룡교육발전기금을 마련하였고 임종을 며칠 앞두고 사모님과 합의를 보고 다시 11만 원이라는 거금을 정판룡교육발전기금에 내놓았으며 병상에서 불우한 학생들을 불러놓고 일일이 장학금을 쥐어준 일이다.     참으로 선생을 다만 청산유수와 같은 주변으로 외국의 자금을 유치하는 사회활동가로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피와 살로 마련한 평생의 자산을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내놓음으로써 기부문화의 풍토를 조성하고 사랑의 실천에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4. 다문화주의 사고방식과 유머와 위트     연변대학의 교훈(校訓)은 진리, 사랑, 융합(求眞, 至善, 融合)이다. 이를 진리를 추구하되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 껴안으면서 더불어 살고 마침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이 교훈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다민족국가에서 조선족 중심의 민족대학을 경영하고 있는 우리 연변대학의 성격과 위치 및 바람직한 진로를 잘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들 간의 평등과 존중에 의한 공존과 융합이라는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 중국식 표현을 빌자면 이러한 조화(和諧)의 사상은 연변대학 초창기 주덕해, 림민호 선생에게서 비롯되어 박문일, 정판룡 선생을 거쳐 김병민 교장을 대표로 하는 현 지도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림민호 부교장은 모스크바 동방대학 졸업생이라 일찍이 국제주의, 바꾸어 말하면 다문화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었고 이를 대학교 인재양성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였던 교육자였다. 1951년 봄, 북경대학 동방언어학부 조선어학과의 마초군 부교수가 불원천리 연변대학에 찾아와서 해마다 조선어학과 학생들을 연변대학에 보내서 1년 간 씩 실습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을 들었다. 이에 림민호 교장은 박규찬 교무장을 보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불편 없이 공부하도록 하게 합시다. 중국의 역대 정권이 주류민족더러 소수민족의 언어를 배우라고 권장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황차 천하의 수재들이 운집해 있는 북경대학 학생들이 아닙니까?”     연변대학에서 북경대학 학생들은 그야말로 칙사(勅使) 대접을 받았다. 연변을 찾아온 북경대학 학생들 중에는 나중에 대성해서 중국 경내 조선고전문학연구의 일인자가 된 위욱승(韋旭升) 교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때 그 일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고 있다.    “우리가 앉은 열차는 저물녘에 연길역에 도착했지요. 그 당시 교무장으로 계셨던 박규찬 선생께서 수십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왔지 않겠습니까.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예쁘장하게 생긴 여대생들이 반갑게 달려 나와 우리 모두의 가슴게 일일이 생화를 안겨주더라구요. 똑같은 대학생인데 이렇게 열렬하게 우리를 환영할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더욱 놀라게 되었어요. 반듯하게 학생모를 쓰고 학생제복을 입은 수백 명의 대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두 줄로 나누어 서서 우리 실습생들을 연도환영하지 않겠어요. 맨 앞장에 선 악대는 쿵작쿵작 환영곡까지 연주했습니다. 이게 국빈대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해 여름에 북경대학 교장사무실 비서 진옥룡 선생이 다시 연변에 찾아와 림민호 부교장을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 때 림민호 부교장은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한어로나마 《시경(詩經)》에 나오는 문자를 동원해 “세상 사람들 모두다 형제(四海之內皆兄弟)가 아닙니까. 친자식처럼 돌보아줄 터이니 근심일랑 하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하고 껄껄 웃었다.     정판룡 선생은 림민호 부교장의 수제자나 다름없으니 그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요, 또한 정판룡 선생 역시 모스크바대학에서 다문화사회를 체험한적 있는데다가 왕유 여사와 더불어 다문화가정을 만들었는지라 그의 “며느리론”은 그러한 생활경력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하나의 사상이요, 절묘한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문화주의(muticulturalism) 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한다.“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사회이다. 하지만 실지에 있어서 이러한 다문화주의 담론은 어디까지나 다수자 또는 중심부문화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에서 소수자 또는 주변부문화의 목소리는 외면되고 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해 시혜(施惠)의 우월감에 젖어있고 후자는 전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동화(同化)의 비애를 맛보고 있다. 말하자면 다문화주의담론에서 소수자의 정체성과 주변부문화의 존재가치에 대한 옹호와 존중은 망각되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일찍이 간파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분이 림민호 부교장과 정판룡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간(師弟間)인 이들 두 선생은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는 다수자와 담을 쌓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고수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낙후된 상태에서 다수자의 시혜만 받을 것이 아니라 다수자와 적극 교류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존중을 받는 존재로 부상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이른바 평등을 이룸에 있어서 소수자의 주체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보다 널리 확산하고 우리 민족의 피와 살로 되게 하기 위해“며느리론”을 내놓은 분이 바로 정판룡 선생이다.“며느리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 시집은 왔으되 허구한 세월 친정생각만 하고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집동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시집 어르신을 잘 모시고 남편공대를 잘하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 시집마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때라야만 비로소 친정을 도울 수 있고 친정마을과 시집마을에서 다 사랑과 존중을 받는 존재로 될 수 있다. 우리 조선족의 이중적문화신분을 염두에 둘 때,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할 때, 정판룡 선생의 “며느리론”은 우리 조선족의 진로 또는 우리 연변대학의 건학이념을 가장 형상적으로 풀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에 입각해 정판룡 선생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도 금발머리든 까만 머리든, 파란 눈이든 까만 눈이든 폭넓게 친구를 사귀었다.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한국인 교수를 만나면 나이를 따지지 않고 달갑게 아우노릇을 하였고 일본인 교수를 만나면 똑 부러지게 예의를 차리고 농담을 삼갔다. 또한 제자를 끝까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제자들이 자기의 날개를 키워가지고 중국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훨훨 날아가 자리를 잡게 함으로써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연변대학의 문화영토를 넓혀나갔다. 길림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윤윤진 박사; 북경민족대학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이암, 문일환 박사; 상해 복단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강은국, 강보유 박사 등이 좋은 사례로 되겠고 전국 200여개 소 한국어학과 교수의 80%가 연변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또한 좋은 사례로 되겠다. 정판룡 선생의 논리는 간단명료하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 법, 밤낮 우는 소리만 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면 절대로 다문화공동체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문화주의 사고방식과도 관련되지만 정판룡 선생은 유머와 위트의 귀재였다. 유머와 위트는 바다 같은 흉금과 건전한 정신, 풍부한 경륜과 지식을 가진 자만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선생은 강연이나 글에서 가장 원론적인 문제를, 가장 복잡한 정치문제나 학술문제를 가장 쉬운 비유로 풀어서 청중과 독자를 포복절도케 하는 유머러스한 기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평소 생활 속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난처한 국면을 타개하고 일을 추진하며 좌중을 즐겁게 했다. 선생이야말로 연변의 처칠이라 하겠다. 정판룡 선생의 유머와 위트를 알뜰하게 수집하면 책 한 권 분량은 충분히 되겠지만, 여기서 두 가지 사례만 들기로 하자.       첫째 사례:     선생은 무석에 살고 있는 왕씨 가문의 맏사위였다. 처갓집은 팔남매 대가족이라고 하는데 모두 공부를 해서 출세를 했건만 상해요, 요녕이요, 길림성이요 산지사방에 널려 살고 있었다. 한족가문에서는 대체로 막내네 내외가 부모님을 모시는 법인데 이 집안에서도 막내네 내외가 80고령의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형제자매들이 외지에 살다보니 노모에게 좀 등한했고 이를 막내네 내외는 은근히 섭섭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눈치를 챈 정판룡 선생은 어느 해 구정이 다가오자 여기저기 형제자매들에게 전화로 통문을 냈다. 이번 구정에는 반드시 무석에 있는 막내네 집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설을 쇠자고 말이다. 맏이의 분부에 동생들이 따라주었고 정판룡 선생은 밥상을 차리기 전에 동생들을 둘러앉히고 말꼭지를 뗐다.    “이 몇 해 간 막내네 내외가 어머님을 모시고 수고가 많았다. 우리 머리 큰 형제들이 어머님께 용돈도 부쳐드리지 못했으니 참으로 불효막심하다. 우선 맏이인 내가 깊이 반성을 한다.”     정판룡 선생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여기 앉은 형제들 중 중국공산당 당원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 음― 다들 당원이구나. 우리 당원들은 달마다 당비를 내지 않는가. 다들 내겠지. 허지만 우리는 여태껏 정기적으로 모비(母費)만은 내지 않았어.”    “모비”란 말에 동생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입들을 싸쥐었다. 정판룡 선생이 다시 위엄스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웃긴 왜 웃어. 내 말이 어디 틀렸는가. 당은 우리를 키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존재야. 하나하나가 모여 당이 되었으니 구체적 실체가 없단 말이야. 하지만 어머님은 여기 앉아 계셔. 어머님은 배 아프게 우리를 낳아주었고 우리 팔남매에게 골고루 젖을 먹여주었고 공부시켜 주었어. 하지만 우린 당비만 내고 모비를 내지 않고 있었단 말이야. 이제부터 이렇게 하자구. 우리 부부는 다 대학교 교수니까 한 달에 두 몫, 200원씩 내겠어. 임자들은 한 가정에서 한 몫씩, 100원씩만 내라구.”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조선족 맏사위의 제안에 동의를 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언약을 지켜서 달마다 무석의 노모에게 용돈을 부쳐 보냈는데 그 무렵 10여 년 공령을 가진 공무원의 노임이라야 500원 되나마나 하였는데 노모가 오히려 2명 공무원의 노임을 받는 형국이 되었으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유 사모님은 달마다 월급을 타서 노모에게 부치는 날이 한 달 중 제일 기쁜 날이 되었단다. 그리고 막내동서를 비롯한 형제들은 그때로부터 정판룡 선생의 말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들었다. 선생의 임종도 무석에서 온 막내동서가 지켜주었다. 이게 선생의 수완이고 멋진 유머이며 위트다. 이런 유머와 위트를 구사하는 데는 아랫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둘째 사례:     정판룡 선생과 현룡순 선생은 1950년대 초반부터 수십 년간 조문학부 동료로, 친구로 허물없이 지냈다. 하지만 평소 맑은 정신에 현룡순 선생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투로 존대어를 썼고 정판룡 선생은 “…그렇소”하고 하대를 하였다. 기실 현룡순 선생은 1927년 생으로 적어도 1931년 생인 정판룡 선생보다 네 살 손위였다. 하지만 제3차국내혁명전쟁에 참가하고 대학에 들어오다 보니 정판룡 선생의 후배로 되었고 현룡순 선생이 아직 학생딱지를 떼지 못하였을 때 정판룡 선생은 벌써 교원으로 되어 강의를 했다. 아무리 교원과 학생 사이라고 하지만 그게 고작 1-2년 동안이고 그 후로는 쭉 수십 년간 동료로 지내오지 않았는가. 황차 현룡순 선생 쪽이 네 살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 그냥 정판룡 선생에게 존대어를 쓴다는 게 아무래도 기분이 좀 나쁜 일이었다. 그래서 현룡순 선생은 술 한 잔 나눌 때면 부쩍 용기가 나서    “정 선생, 내 말 좀 들으시오. 내가 정 선생보다 네 살이나 더 먹었는데 왜 존대어를 써야 한다우. 이제부터는 너나들이를 하자구요, 너나들이를! 너나들이를 해도 내가 밑지지만 말이우.”     하고 달려들면 정 선생은 허허 웃으며    “이거 안 되겠구만. 옛날 사진을 공개해야 하겠소. 세월이 열두 번 변해도 제자가 어떻게 스승에게 너나들이로 달려든단 말이요, 버르장머리가 없이!”     이쯤 되면 워낙 착하고 주변이 없는 현룡순 선생은 좌중을 둘러보고 구원이나 청하듯이    “저 양반은 생뚱 같은 사진을 가지고 공갈만 친단 말입니다.”     하고 지고 만다. 이튿날 술이 깨면 현룡순 선생은 여전히 버릇처럼 정판룡 선생에게 “…그렇습니다”투로 깎듯이 존대어를 썼다.     그런 자리를 우리 제자들도 여러 번 보았는지라 다른 노교수님들에게 물어본즉 1950년대 초반 현룡순 선생네 학급 학생들이 봄나들이를 가서 찍은 사진이라고 하는데 새파란 정판룡 선생은 그래도 교원이랍시고  남녀학생들 복판에 틀거지 있게 앉아있는데 워낙 몸매가 왜소한 현룡순 선생은 정판룡 선생 무릎 앞에 한 팔을 고이고 누운 채로 다른 한 손으로 권총 모양을 해가지고 찍었다는 것이다. 두 분이 사제 간임을 증명하는 사진이라 이 사진 이야기만 나오면 현룡순 선생 쪽은 기가 죽고 말이 궁해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생의 유머와 위트는 동료들 사이, 스승과 제자들 사이의 활력소가 되었고 선생이 있는 자리는 마냥 즐거운 기분이 넘쳐났던 것이다.     나가며     사제애(師弟愛)는 우리 동양인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야 한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치고 제자는 스승을 믿고 따르고 존경해야 한다. 스승의 따뜻한 애(愛)와 제자의 돈독한 경(敬)이 서로 합쳐질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학식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우리는 사표(師表)라 하고 사부(師傅)라 한다. 스승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사도(師道)라 하고 스승으로부터 받은 큰 은혜를 사은(師恩)이라 한다.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학자 한퇴지(韓退之)는 유명한 《사설론(師說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승은 제자에게 첫째로 도(道)와 진리를 전하고, 둘째로 학업을 전수하고, 셋째로 사리에 대한 의혹을 풀어주어야 한다. (師者所以傳道授業解惑也)”이것이 스승의 세 가지 임무요 사명이다. 하지만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드물다. 제자의 인격성장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치는 스승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송나라의 대유(大儒)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自治通鑑)》에서 “경사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는 만나기 어렵다.(經師易遇, 人師難遇)”고 하였다. 말하자면 경서의 자구(字句)를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만 제자에게 공정한 도의를 가르치는,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진정한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항상 배우고 본받으며 때로는 격려해주고 때로는 충고해주고 때로는 채찍질 해주는 뛰어난 스승은 참으로 인생의 보배요, 정신의 등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정판룡 선생 같은 참스승을 만났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정판룡 선생은 하나의 성장소설이며 신화다. 그의 빼어난 총기와 패기,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과 근면성, 그리고 성공의 신화는 자라나는 세대들의 영원한 교과서가 되고 그들에게 무궁무진한 힘을 준다.          그는 세계문학의 연구분야에서는 더 말할 것 없고 조선족사회의 진로에 대한 모색을 통해 조선족백성들이 우러르는 “정신적 수령”으로 되었으며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해 평생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사재를 쾌척하여 정판룡교육발전기금, 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 등을 출범시킴으로써 후대사랑, 기부문화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전략가다운 혜안과 선견지명으로 연변대학의 특성과 우세 및 나갈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현대적인 대학경영의 이념으로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종합대학으로 끌어올린 연변대학 명교수의 한 사람이며 걸출한 교육가였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온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후예로서 다문화주의적인 관점으로 중국사회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지위와 진로를 모색하였으며 협애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소수자의 주체적 노력에 의한 여러 민족의 평등, 공존과 융합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특히 그의 평민적인 성격, 너그러움, 유머와 위트는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 어디서나 큰 힘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정판룡 선생을 그리는 까닭이다.     정판룡 선생의 정신은 우리 대학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며 그의 정신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빛을 뿌릴 것이다.                                      2011년 10월 2일         * 본문은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가 2011년 10월 2일 서 행한 발언원고이다.-조글로포럼 편자주  
29    우리 문단의 재녀 박옥남씨 댓글:  조회:2039  추천:39  2011-04-28
 - 인물평 -     우리 문단의 재녀 박옥남씨                                          김 호 웅    요즘 시를 쓰고 수필을 쓰는 이들은 많지만 소설을 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시를 무지개 같이 현란한 빛이라고 하고 수필을 그러한 빛이 어린 아담한 신방이라 한다면 소설은 적어도 고래등 같은 팔간집이다. 이 집에는 부엌도 있고 정주도 있고 안방에 사랑채도 있다. 더더구나 늙은 시부모도 있고 철없는 시동생들도 있으며그밖에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일가친척들도 있어 툭하면 갈등이 빚어지고 아옹다옹 다투기 마련인데 소설가는 이러한 인간들의 갈등에 바탕을 투고 허구를 가미해 이야기를 엮고 성격을 창조한다. 그런즉 인간과 사회를 입체적으로 다면적으로 그리는 소설 쓰기란 아무래도 시나 수필을 쓰기보다 어렵고 그만큼 소설가를 얻기가 쉬운 노릇이 아닌가보다.   1980년대 초반 이원길씨가 <백성의 마음>과 <배움의 길>이라는 단편소설을 들고 나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놀랐던가. <연변문예> 소설편집이었던 한수동 선생은 이원길씨의 소설을 보고 너무나 반가와 “연변에 이기영이 나왔다, 이기영이!” 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었다. 과연 우리는 이원길씨의 구수한 언어와 재치 있는 이야기 솜씨를 만끽하며 여러 해를 즐겁게 살 수 있었다.   내가 20여 년 전 한수동 선생과 같이 한 이름 없는 작가의 출현을 두고 화들짝 놀란 것은 2006년 봄이었다. 목단강시에 있었던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2005 중국조선족문학 우수작품집> 심사 차 갔다가 우연히 박옥남씨의 단편소설 <둥지>를 읽게 되었는데 그의 예리한 주제의식과 감칠맛 나는 소설언어에 흠뻑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둥지가 무너지면 알인들 어찌 성하랴”는 말도 있지만 풍전등화 같이 흔들리고 있는 우리 농촌사회를 “둥지”에 비유하면서 어수선하게 털린 둥지 형국이 된 우리 농촌의 피폐상을 어린 소년의 시각을 통해 고발한 박옥남씨의 소설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흥분을 감출 길 없어 <새농촌 건설의 기폭제가 될 만한 소설>이라는 짧은 서평을 달아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사이트 등에 보내서 실었다.   하긴 그 짧은 서평에서 박옥남씨를 <톰아저씨의 집>을 쓴 스토우 부인에 비겨서 논의했는데 풋내기 작가를 너무 추어올렸다는 뒷말을 들을까봐 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맙게도 박옥남씨는 내 판단이 적중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녀는 2005년 단편 <둥지>로 <도라지 장락주문학상>을 수상하고 2006년 <도라지>잡지에 단편 <목욕탕에 온 여자들>에 이어 <마이허>를 발표해 2007년 <제1회 김학철문학상>을 거머쥐더니 올해는 <연변문학>에 연속 <내 이름은 개똥녀>와 <장손>을 발표했다. 또 풍편에 <붉은 넥타이>라는 장편수기로 한국 재외동포재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2, 3년 사이에 알찬 단편 4-5편을 써내고 굵직굵직한 문학상들을 거머쥐었으니 그는 작가적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했다고 하겠다.   박옥남씨의 출현은 적어도 아래와 같은 몇 개 방면에서 우리 소설문학으로 놓고 말하면 하나의 축복으로 된다고 하겠다.   첫째, 박옥남씨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의 자기의 본질과 특성을 자각하고 조선족과 한족, 중국과 한국이라는 두 갈래 문화의 합수목에서 문학의 살찐 고기들을 낚아 올리고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왼손잡이로서 부모님의 눈총과 꾸지람을 많이 받았었다. 말하자면 천성적으로 소외의 쓴 맛을 보았는데 하필이면 조선족과 한족이 어울려 사는 잡거지역에서, 오도가도 못 하는 중국과 모국의 사이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갈등을 뼈아프게 겪어야 하였다. 그의 단편 <둥지>, <마이허>, <장손>, <내 이름은 개똥녀> 등은 모두 그러한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편 <장손>의 경우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조상이 일군 땅을 지키기는 고사하고 부모님의 초상마저 지키지 못하고 개처럼 죽어가는 “장손”, 주변의 민족에게 맥없이 동화, 침몰되어 가는 “장손”의 비극을 다룸으로써 소설의 사회비판성을 고양시키고 있다.     둘째, 박옥남씨는 소도구들을 통해 은유, 상징 기법들을 소설에 기묘하게 도입하고 공간화의 기법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을 선보이고 있다. 둥지, 마이허, 장손, 개똥녀 등은 다분히 상징성을 띠고 있는데 그것들은 소설의 인물성격창조와 서사구조에 상징성을 부여해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특히 <목욕탕에 온 여자들>은 여탕이라는 특정 공간에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다양한 연령대, 계층과 성격의 여자들을 등장시켜 조선족 여성들의 육체적인 나상(裸像)만이 아닌 심적인 나상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   셋째, 박옥남씨는 방언에 바탕을 둔 생동하는 인물대화를 구사하는 명수이다. 그는 “거칠고 촌스러워 뚝배기 같은 사투리, 그러나 그 뚝배기 속에는 사골탕 같이 끓이면 끓일수록 감칠맛이 더 우러나는 사투리 자체의 진맛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그런 짙은 국물을 우려내서 독자들의 입맛을 돋우어주는 것이 내가 작품 속에 사투리를 쫑당쫑당 썰어 넣는 이유이다.” 라고 말한다. 참으로 박옥남씨의 소설은 인물의 대화를 절제 있게 설정하고 있으나 거개가 인물의 기질과 성격, 신분과 경력이 잘 드러나는 명대사이다. 그러한 명대사는 주로 다양한 사투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박옥남씨의 소설은 한창 진행형이요, 설사 이미 발표된 소설만을 깊이 논의하고자 해도 제한된 편폭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박옥남씨를 딱 한 번 만나보고 서로 두어 번 메일을 주고 받은 이야기를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없겠다.   바로 2007년 4월 23일 제1회 김학철문학상시상식 때다. <도라지> 잡지에서 본 시체 태양모를 쓴, 둥실하고 시원스럽게 생긴 귀부인의 모습과는 달리 박옥남씨는 중키가 되나마나한 키에 단정하게 정장을 한 모범교사의 모습이었다. 원고 없이 또박또박 수상소감을 말하고 나서 술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여러 문인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그린 듯이 앉아만 있었다. 실없이 치근덕거리는 문인들의 물음에는 좀 찬바람이 돌 지경으로 단마디명창으로 대답을 줄 뿐이었다. 그 날 주최 측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모시느라 경황이 없었고 박옥남씨는 파장이 된 장거리 같은 호텔을 혼자 지킬 수는 없어 그 날 밤차로 연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틀 후 문뜩 박옥남씨의 메일을 받은 것은 나였다. 천여리 길을 달려온 수상자를 동무해 주는 사람이 없어 밤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대상을 받고 술 한 잔 내지 못하고 떠나온 게 아무래도 결례가 된 것 같다고 하면서 방금 학교 앞 우체국에 가서 돈 1000원을 부쳐 보냈으니 심사위원들과 함께 식사나 하면 마음이 내려 갈 것 같다는 사연의 편지였다. 빈 말로 인사치레만 하는 얄팍한 여성들과는 달리 맺고 끊듯이 확실한 박옥남씨였다. 이왕 성의껏 보내온 돈을 돌려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우리 심사위원들은 국제호텔에서 술잔을 나누면서 박옥남씨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다음은 박옥남씨에게는 실례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받은 메일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     김호웅 선생님:     가뜩이나 바쁘신 일상에 저의 일까지 겹쳐 시간적으로 많이 시달렸을 줄로 압니다. <인물평>을 보았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남이 저를 평하는 말(그것이 폄하하는 말이든 치하하는 말이든)을 들으면 퍼그나 오랜 시간을 고민하는 여자입니다. 그만큼 저는 소심한 인간인가 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구석 쪽을 좋아합니다. 남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거추장스럽지 않게 몸을 숨기고 앉아 있을 때가 가장 맘 편하거든요. 오늘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고 보니 그 글이 나간 후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읽고 나서 다 잊어먹을 때까지 저는 몸을 한껏 옹송그리고 있을 겁니다. 못난 고양이에게 큰 우장을 씌웠다고 할까 봐서요. 아무튼 수고 많으셨구요. 좋게 봐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달의 문인> 평을 쓰시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 <붉은 넥타이>를 보내드렸을 뿐인데 그것을 연재하려 한다니 도통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재외동포재단에서 요구하는 4만자의 원고분량을 채우느라고 생각나는 대로 아무 소리나 긁적거린 것(그것도 한 달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뿐입니다. 한국 측 심사위원들은 좋게 보아준 것 같습니다만, 그 옛날 그 역사를 직접 겪어온 선배님들 앞에는 그 글을 감히 내놓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선생님의 제의를 받고 보니 이젠 더 이상 어디론가 뺑소니칠 길도 없는 듯싶네요.   하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다시 그 글을 보고 옳지 않은 표현이라든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곳을 골라 가차 없이 빼고 다듬어서 발표해주시기 바랍니다.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굳이 연재를 반대할 이유가 저에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믿고 맡기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절에 온 새색시 같은 일면이 있는가 하면 무슨 일이나 똑 부러지게 처사를 하는 박옥남씨다.   원고를 받아 다듬든지 말든지, 그 건 연변문학 편집진의 몫, 내 둔한 필치로 감당할 바가 아니다. 아무튼 조일남 주간이 쾌히 싣기로 응낙을 했으니 다음 기부터 박옥남씨의 장편수기 <붉은 넥타이>를 통해 그의 인간과 문학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박옥남씨의 건필을 빈다.                                        - 2008년 11월 13일 연길에서  
28    글로벌화와 다원공생시대의 문화전략 댓글:  조회:1693  추천:24  2011-04-28
글로벌화와 다원공생시대의 문화전략  ― 중국조선족사회의 생존과 발전을 중심으로 김호웅                                                  “세상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한국의 미학이론가 유흥준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는 게 이전과 다르니라.”고 했다.    오늘은 21세기 글로벌화라는 세계사적 변화에 대응해 탈식민주의문화이론과「갑신문화성명」, 변연문화와 접목의 원리에 입각해 민족문화를 고수하고 발전, 확장시킬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겸해서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한 대안을 생각해보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된 오늘 어느 한 지역이나 민족의 생존방식은 세계화의 물결과 세계사적 패러다임(paradigm, 사상이나 이론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1. 글로벌화와 인류가 직면한 양대(兩大) 문제       글로벌화(世界化, 全球化, global)라는 개념은 1992년 미국 피츠보(匹玆保)대학교 사회학교수 로버슨(羅伯森)이 그의 저서 『글로벌화』에서 처음 내놓았다. 세계화는 한 지역의 생활과 그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과의 의뢰성 또는 상호 역동성(互動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중국의 한 사무원의 개인 생활을 보면 그의 손목시계는 스위스 제품이고 텔레비전은 일본 마쯔시다 제품이며, 휴대폰은 삼성 제품이고 자가용은 독일 벤츠일 수 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생활도 세계화되고 있다. 특히 통신기술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해 지구촌을 순식간에 연계시킨다. 세계화는 3개의 마당(競技場)이 있는데 그것은 경제적, 정제(政體)적, 문화적 마당이다. 1)     하지만 글로벌화는 장구한 근대적 과정과 연계되며 오랜 역사발전의 소산이다.  17세기 중반 이후 영국의 산업혁명, 18세기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후, 세계는 거대한 변화를 경험했으며 인류의 삶의 여건은 많이 개선되었다. 특히 지난 100년 간 과학기술에 의해 전대미문의 기적을 창조했으니 핵기술(核技術), 우주항공(航天航空)기술, 컴퓨터인터넷(情報网絡)기술, 유전자(基因)기술의 발전만을 보아도 이는 너무나 명백하다.2)    특히 컴퓨터인터넷기술은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의 지구촌으로 되게 하였으며 60억 인류가 하나의 거대한 호텔에 입주한 형국으로 만들었다. 상술한 기술력에 의해 지구촌은 무한경쟁의 시대에 들어섰고 19세기 이후 인위적인 국경이 가지는 의미가 약화되었으며 그 대신 우수한 민족은 국경밖에 “문화영토”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구미 중심의 근대화는 인류에게 전례 없는 복음을 가져다줌과 아울러 그 병폐도 충분히 드러냈다.     첫째로 구미 중심의 근대사회의 생성과 발전은 봉건적 신분관계를 해체하고 자유, 평등, 박애에 의한 인간의 해방을 가져온 반면, 약소(弱小)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약탈과 지배를 감행했으며 후자에 대한 인종적 멸시와 국권 유린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샤무엘 헌팅턴이 그의『문명의 충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서구 중심의 근대화로 말미암아 오늘날 이념과 체재의 대립은 문명권 사이의 충돌로 비화되고 있다.    둘째로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적 관점과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서양의 근세철학에 기초한 구미 중심의 산업화는 인류역사상 전대미문의 물질적 부와 복지를 창조한 반면에 자연을 무차별하게 개발, 이용하고 환경을 오염시킴으로써 자연자원의 고갈과 지구의 황폐화를 초래했다.    구미 중심의 근대화는 결국 21세기의 양대 문제를 파생한다. 하나는 문명(또는 문화)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생태환경의 문제이다. 2001년 미국 뉴욕의 “9.11”참사와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폭발은 구미 중심의 근대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촉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여 1992년 세계 여러 나라 정상들이 모여 생태파괴와 환경오염을 극복하기 위하 리우선언3)을 채택하기도 했다.       2. 글로벌화와 다원공생의 시대에 있어서 중국 지성인들의 대응       오늘날 세계는 근대화, 글로벌화(世界化)가 진행되는 가운데 서양 대 동방, 강대 민족 대 약소민족 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두 가지 문제가 파생한다.     첫째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동방의 여러 나라들이 구미의 정신적 지배에서 벗어나는 문제이다. 구미의 동양연구 내지 동양학이라는 것은 동방에 대한 유럽의 문화적 지배양식으로서 거기서는 서양이 “문명=지배자\"로 설정되고 동양은 후진적, 기교(奇矯, 언행이 기괴하고 익살스러움)적 이미지로 다루어진다. 말하자면 구미와 동방의 이원대립을 조장하고 허구에 의해 동방의 “신화”를 창조함으로써 무력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문화적인 지배를 꾀하고 있다. 이리하여 약소민족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 낙후와 답보를 면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국민국가의 쇠퇴가 예상되면서도 국민=민족적 동일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소수파(minority)가 생긴다. 말하자면 세계가 하나의 시장경제에 급속도로 편입되어 가면 갈수록 한편에서는 각종 하위집단(이를테면 국가와 국가 사이에 끼인 약소민족들)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거기서 때로는 마이너리티 내셔널리즘 (minority nationalism, 소수의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 등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 그 민족의 일체성을 확보하고 발전시키려는 사상이나 운동, 민족주의 또는 민족자결주의)이라는 말이 발생하게 되어 자타 모두 “내셔널리즘”이라고 인정하는 집단적 정치행위가 활발해지고 있다. 최근 베네수엘라 등 남미 여러 국가에서 좌파세력이 정권을 잡고 미국의 독주(獨奏)와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거세찬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민족정체성의 갈등을 증언하고 문화제국주의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한 첫 사람은 프란츠 파농(1925-1961)이다. 파농은 북아프리카 알제리인의 후예로서 중부 아메리카의 마르티니크섬에서 출생했다. 그의 전기 『나는 내가 아니다』를 보면, 그는 “식민지의 조국” 프랑스가 독일 파쇼에 의해 강점당하자 비분을 이기지 못해 친구들과 함께 의용군을 무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들어가 참전한다. 그는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하고 베를린을 함락하는 전투에도 참가해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타지만 해방된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승전 축하 파티에서 오히려 프랑스 여인들의 질시와 외면을 당한다. 프랑스 여인들은 포로가 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병정들과는 춤을 추지 못해 발광을 하지만 아무리 자기들을 해방시켜 준 사람이라 해도 “깜둥이”들과는 춤을 출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파농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고 자문하게 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후에 파농은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조상의 땅―알제리에 가서 의학자로, 혁명가로 활동하는데 거기서 더욱 큰 충격을 받는다. 낮에는 전야에서 검은 피부를 드러내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일하고 장난질을 하던 알제리인들이 일단 주말이 되어 교회에 갈 때는 부끄러워 전전긍긍한다. 그네들은 백인 신부와 목사에게 검은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저마다 마스크를 끼고 나타난다. 무력에 의한 식민지배는 끝나가고 있지만 정신적인, 문화적인 지배는 계속되고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이리하여 프란츠 파농은『검은 피부, 흰 가면』(1954)이라는 명저를 내놓는다.    프란츠 파농이 경험했던 갈등과 비애는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로버트 김의 사건에서도 드러나고 제일조선인문학의 기반을 다진 김사량의 단편 「빛속에서」, 재미동포 작가 이창래의 『본토박이』에서도 볼 수 있으며 중국조선족작가가 김재국의 『한국은 없다』와 허련순의『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에서도 볼 수 있다. 정체성의 갈등은 이방에서 살고 있는 모든 해외동포들의 보편적인 정신적 고뇌이다.     그럼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identity)은 복수(複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하는 주체의 귀속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정체성의 분열은 커다란 심리적 고통을 동반하며 집단적인 폭력이나 성격의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들의 난동이나 재일조선인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의 경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체성은 복잡한 개념이며 여러 가지 국면과 상황을 내포한다. 민족적, 국가적, 사회적, 가정적 정체성의 문제가 모두 야기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민족적 정체성은 가장 본질적이며 21세기 “문명의 충돌” 시대에서 약소민족이나 그 개체가 가장 심각히 고민하는 문제이다.    프란츠 파농의 선구적인 업적에 토대하면서 에드워드 사이드, 호머 바바, 스피박 등에 의해 탈식민주의문화이론이 대두된다. 이들이 관심하는 초점은 약소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구미 중심의 식민주의체제의 권위를 뒤엎어버리는 문제였다. 사이드는 하위 주체의 담론은 구미사회에 통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아웃사이더, (局外者)”가 “인사이드, (테니스나 배구 등에서 공이 일정한 경계선 안으로 떨어지는 일)”로 될 때만이 하위주체의 의지와 염원을 구미사회에 관철시킬 수 있다고 했다. 호머 바바는 서구 중심의 권위를 깨뜨리는 대안으로 패러디의 방법을 내놓았고 스피박은 동방 여인들의 이중적인 피해 상황을 지적함과 아울러 “단절속의 반복”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내놓기도 한다.    탈식민주의문화이론과는 좀 다른 갈래이지만 “성찰적 근대론의 기수”들인 울리히 백, 앤서니 기든스, 스콧 래쉬 등은 구미 중심의 근대를 지양하고 이른바 근대를 더욱 “인간답고 아름다운 근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외에도 E.V 스퉁키스의 디아스포라(경계인)의 논리나 니니안 스마트의 “세계 종교”와 “세계철학”을 창출할 데 관한의 논리 등이 있다.    중국의 경우 여러 소수민족들이 자신의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논리가 최근 중국의 지성인사회에서 논의되고 있어 특별히 주목된다. 최근 중국의 북경에서는 “세계화와 중화문화”라는 테마를 걸고 《2004문화고위급논단》을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세계문명의 다양성을 고수하기 위한 「갑신문화선언」을 채택하였는데 이 선언의 요지는 두 가지로 개괄할 수 있다.    첫째, “그 어떤 국가나 민족이든지 모두 자기의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으며 외래문화를 자주적으로 선택, 수용하거나 또는 비완전(不完全)히 접수하거나 일부 영역에서는 완전히 접수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공동하게 관심하는 문화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둘째, “중화문화에 고유한 인격, 윤리, 이타(利他), 화해를 중요시하는 동방품격과 평화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인문정신은 오늘날 세계의 개인지상주의, 물욕지상주의, 악성 경쟁, 약탈적인 개발 및 여러 가지 근심스러운 현상에 대하여, 인류의 안녕과 행복에 대하여 모두 중요한 사상적 계시를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4)    이는 순수한 문화적 상대주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시대는 다양한 문명의 공존과 공생의 시대이다. 화단(花壇)에 비유하자면, 오늘의 문화적 제국주의 입장은 인위적이고 독단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꽃으로 화단을 통일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그리고 그 실현은 그 나머지 다른 화초들을 인위적으로 꽃밭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축출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꽃들이 스스로 경쟁할 수 있는 분위기를 처음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순수한 문화적 상대주의의 입장은 당분간 꽃밭의 통일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화단이 결코 서열화 될 수 없는 각양각색의 꽃들로 구성되어야 하고 꽃들은 자신의 모습에 끝까지 충실함으로써 전체적인 조화를 이룩한다고 보고 있다. 문명의 다양성과 공존, 공생을 주장하는 상술한 중국 지성인사회의 변화는 조선족의 문화건설에 푸른 등을 켜주고 있다.       3.  글로벌화와 다원공생시대의 문화전략      조선족공동체의 민족적정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론적 차원에서 언급한 분은 정판룡(1931-2001) 교수이다. 그는 조선족문화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면서 조선족은 중국이라는 대가족에 시집을 온 며느리와 같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에 시집온 며느리이기에 친정집에서 익힌 문화도 갖고 있고 그와 동시에 시집에 와서 배운 문화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런즉 조선족은 위선 시집살이를 잘 해야 한다. 오로지 시집살이를 잘 해야 시부모나 남편의 신뢰를 얻어 친정집을 도울 수 있다. 만약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늘 친정집 생각만 한다면 시집의 의심을 받고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5)     정판룡 교수의 “이중성격론”과 “며느리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융합론”을 내놓은 학자는 김강일 교수이다. 그는「변연문화의 문화적 기능과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적 우세」6) 라는 논문에서 중국조선족문화는 “문화의 변연성(邊緣性)”을 갖고 있다는 관점을 내놓았다. 이는 문화인류학에서 구미의 학자들이 내놓은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 라는 개념과 합치된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흩어 뿌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빌론 포로”7)를 계기로 고국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 말은 민족적인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로 해석되어 20세기에 와서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경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용되었다. 즉 디아스포라는 근대의 여러 가지 힘, 이를테면 정치권력, 경제력이나 군사력, 전쟁, 혁명 등이 낳은 “경계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민국가라는 틀에서 쫓겨난 존재로서 경계(혹은 변두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또는 민족들의 공동체이다.    중국의 조선족 역시 세계상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디아스포라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김관웅 교수는 이를 변연문화형태라고 표현했다.8) 그의 논리에 따르면 조선족은 과경(跨境) 민족, 또는 이민(移民) 민족으로서 혈통과 문화전통 면에서는 한반도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고 한민족(韓民族)과 동일한 민족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민족공동체로서 100여년 남짓한 세월 속에서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적극 참여하면서 점차 중국문화를 몸에 익히게 되고 점차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로 되었다. 즉 조선족공동체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사이에 있는 변연문화형태에 속한다고 했다. 그럼 변연문화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첫째, 변연문화란 부동한 문화의 사이나 변두리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계통은 세계 각지에 산재해 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유태인 공동체, 유럽의 스위스의 독일인공동체, 캐나다의 퀘벡의 프랑스후예공동체에는 이런 문화계통이 존재한다. 변연문화구역은 자기의 특수한 문화적인 특질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문화구역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과의 쌍개방(雙開放) 성격에 있다.     둘째,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多重文化構造)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단일문화구조(單一文化構造)를 가진 문화계통에서는 갖출 수 없는 기능을 갖고 있다. 시스템론의 시각에서 보면 변연문화란 새로운 문화계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기능을 나타낼 수 있다.    셋째, 변연문화의 성격은 인류 문화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미래의 세계는 문화계통간의 부단한 교류로 인해 복합적인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나타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느 문화계통이든지 모두 자기가 고유했던 전통적인 문화만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며 복합적인 문화계통으로 새로운 문화기능을 창출해야만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적인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 어떤 변연문화계통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 존재의 합리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란 부단히 변해 가는 생활환경에 대한 인간들의 필연적인 반응이고 적응방식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생활리듬의 가속화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변연문화의 형태는 두 개 이상의 문화권을 연결할 수 있는 모든 문화계통을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이 서로 맞닿은, 문화의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형성될 수도 있고 문화의 중심지역에서도 형성될 수도 있으며 또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 간의 상호 문화교류과정에서 형성될 수도 있다. 예컨대 중국조선족사회는 전자에 속한다면 미국의 한인사회는 문화의 중심지역에 형성된 변연문화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민족공동체는 모두 두 개 이상 문화계통간의 교차형태를 이루고 있기에 그것들은 모두 변연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변연문화계통의 가장 돌출한 문화적인 특징은 그것이 갖고 있는 강력한 문화전환기능에 있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정보화시대, 지식산업시대라고 한다. 오늘날의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변연문화는 세계의 각종 문화를 전환하여 전달하는 정보망의 망점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영역의 발전에 주는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변연문화계통은 모체문화보다도 더 많은 기능을 가지게 된다. 즉 원 문화계통속에는 없는 언어중개와 문화중개의 역할을 함은 물론이고 두 개 문화계통을 연결하는 문화전환계통까지 생겨나게 된다. 특히 변연문화구역은 지리적으로 두 개 이상의 문화권을 연결하는 위치에 처해 있으므로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상호 교류의 중요한 매개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러한 문화전환기능으로 빠른 시일 내에 보다 효과적으로 두 개 부동한 문화계통의 연계를 강화할 수 있다. 하기에 이러한 변연문화는 일반적인 문화계통에서는 구비할 수 없는 정치 경제, 문화적인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족문화의 경우, 그것이 변연성을 띠고 있다고 해서 그것은 모국문화와 중국문화의 1대 1의 기계적 조합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더욱이 중국의 주류문화에 기울어져 자기의 전통을 망각해서는 더욱 아니 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의 민족문화전통을 굳건히 지킴과 동시에 중국문화를 지혜롭게 수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조선족문화는 한반도에서 갖고 온 모체문화라는 접본(接本 혹은 臺木)에 중국문화라는 접목(椄木)을 가접시켜 새롭게 생겨난 문화라고 할 수 있다.9)          나무를 놓고 보면 그 생명의 바탕은 예외 없이 그 나무의 뿌리이다. 세계 제일의 품질을 자랑하는 한국 사과인 후지도 그 뿌리는 야생종인 매조의 일종이다. 그런데 매조의 열매는 크기가 도토리보다도 작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국에서 여왕의 자리를 차지했던 피스(평화)라는 유명한 장미꽃은 그 예술적인 색깔과 모양으로 세계인들을 매료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렸던 제1차 UN총회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모두 이 피스 장미꽃을 가슴에 꽂았다. 그런데 이 장미의 접본은 찔레뿌리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변의 사과배는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이 변연문화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배 역시 가접과수(嫁接果樹)이다. 말하자면 연변의 사과배는 북조선 함경남도 북청(北靑)의 배나무 가지를 연변의 산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생 돌배나무에 가접(嫁接)시켜 개발한 새로운 과수품종이다.    잡종강세(雜種强勢)는 사과배에서도 볼 수 있다. 가접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배 품종 - 사과배는 연변의 야생 돌배보다 훨씬 크고 달며 심지어 북청의 배보다 도 더 크고 달뿐만 아니라 배 껍질이 두꺼워 오래 동안 저장할 수 있다. 중국 산동성 라이양(萊陽)의 배나 한국 전라남도 나주(羅州)의 배가 유명하다고 하나 연변 사과배의 맛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국의 후지사과, 미국의 피스장미, 연변의 사과배의 경우 그 생명의 바탕이 되는 뿌리인 접본은 예외 없이 야생종이다. 이는 우리에게 커다란 계시를 준다. 그것은 나무의 생명의 바탕은 예외 없이 그 나무의 뿌리인 까닭이다. 한 식물의 종(種)이 아무리 인간에 의해 변이(變異)를 많이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 원형은 자연 상태의 야생으로부터 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식물의 경우 줄기나 잎보다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경우도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그러면 한 민족의 정신문화의 핵과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관념문화에 있고 그 관념문화를 담고 나르는 문자부호와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같은 데 있다. 민족이나 나라가 아닌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첨단과학의 권위자라고 해도, 또 아무리 대단한 작가나 예술가라고 해도 그가 영원한 인간이 되려면 그 정신의 접본은 제 민족의 정신문화와 그 역사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약소민족은 다양한 문화와의 접촉과 융합을 지향하되 오직 접본을 중요시하는 접목의 원리를 지킬 때만이 민족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고 주변문화의 자양분을 흡수해 보다 강대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100년간 이 접본의 원리를 고수함으로써 겨레의 얼을 지키고 중국땅의 문화민족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4. 글로벌화와 다원공생시대 조선족문화의 현황과 전망      세계사적인 글로벌화를 배경으로 1978년 중국에서 개혁과 개방을 실시하자 조선족의 제3차 이민이 시작되었다. 현재 조선족 인구의 4분의 1이 되는 50만 인구가 원래의 거주지를 떠나 한국, 일본,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여러 나라와 지역, 그리고 할빈, 목단강, 장춘, 길림, 연길, 심양, 대련 등 동북의 주요 도시와 산해관 이남의 북경, 청도, 상해, 광주 등 대도시와 연해지역에 진출했다.    외국에 나간 경우를 보면 현재 한국에 12만 명, 일본에 2만 명, 미국 뉴욕 및 뉴저지 일대에만 1만 여명이 살고 있는데, 뉴욕 및 뉴저지의 경우 그들은 조선족협회까지 출범시켰다.10) 연변의 경우만 보아도 연인수로 30만 명이 외국에 나가 일했거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11)    중국 경내 조선족의 유동상황만을 보기로 하자.    지난날 조선족은 주로 동북3성과 내몽골에 살았지만 지금은 송화강기슭으로부터 주강(珠江) 삼각주까지, 동부의 해변도시로부터 서부의 파미르고원까지 널리 퍼져있다. 연변의 경우만 보더라도 2001년 현재 농촌지역의 25% 인구가 도시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현재 청도, 연대, 위해를 중심으로 하는 산동반도에만 12만 명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여기서 조선족의 3차의 이민을 서로 비교해 보자.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의 이민을 제1차이민이라고 하고 1945년 이후 해방 공간의 이민을 제2차 이민이라 하며 1978년 이후의 이민을 제3차 이민이라고 한다.    1) 제1차 이민은 남에서 북으로, 조선반도에서 중국의 동북지역으로의 이민이며 고국에서 외국으로의 이민이다. 제1차 이민은 일제의 침탈에 의한 타의적인 이민의 성격이 다분하다면, 제2차와 제3차는 생존권 또는 부의 축적을 위한 자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2) 제1차 이민과 제2차 이민은 두만강, 압록강을 사이 둔 단선(單線)적인 이민이라고 한다면 제3차 이민은 다국적, 전방위(全方位)적인 이민이다.     3) 제1차, 제2차 이민은 농경문화 내에서의 지역적인 이동이라고 한다면 제3차 이민은 농경문화에서 산업문화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4) 제1차 이민은 중국 국민과의 융합을 의미하고 제2차 이민은 모국으로의 회귀를 의미하지만 제3차 이민은 다국 국민, 적어도 조선족, 중국인, 한국인과의 융합을 의미한다.     5) 제1차, 제2차 이민은 폐쇄적인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이동이지만 제3차 이민은 고도로 발달한 항공, 통신을 배경으로 한 입체적인 이동이다.     당면한 조선족공동체의 지각변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그 전망은 어떠한가? 당면한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산업화와 도시화, 정보통신과 무한경쟁의 시대이니 만큼 조선족의 인구이동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이문물결의 대세를 방관하거나 비난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내외 이주지에(移住地)에 우리민족의 문화영토를 개척하고 가꾸어나가는 것이 요긴하다.    한국 고려대학교 전임총장이며 저명한 문화학자인 홍일식박사는 일찍 1981년에 현존하는 지리적 국경의 공허성과 그것에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으로써 “문화영토”라는 개념을 내놓은 바 있다.12) 이 경우 한 나라의 국민이 다른 나라에 가서 영구히 살아가는 경우와 설사 영구히 거주하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나라에 그들 문화를 꽃피우거나 그 문화상품들이 선호되는 경우를 말한다. 한국의 경우 전자는 세계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코리안 타운이요, 후자의 경우는 한류 열풍과 같은 경우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국가와 국가 간에는 물론이요, 다민족 국가의 경우 지역과 지역의 사이에도 여전히 작용한다. 우리 조선족이 새로운 지역에 가서 자기의 문화적 뿌리를 내리고 주변의 민족과 더불어 잘 살면 바로 국경 밖, 전통적인 거주지역 밖의 자기 영토로 되는 법이다. 이 경우 민족의 총적 에너지는 쇠퇴, 유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산되고 그 총량이 커지는 법이다.    황차 세계화, 정보화사회는 다 중심시대요, 컴퓨터인터넷을 통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조성할 수 있어 연변을 중심으로 보다 폭넓은 문화영토를 경영할 수 있다. 이라한 견지에서 우리는 향후 조선족문화의 발전상을 아래와 같이 예언할 수 있겠다.     1) 많은 조선족인구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동북의 여러 도시와 농촌지역에 조선족공동체가 의연히 존재하며 동북지역의 조선족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 향후 20년, 길게 잡아야 30년 사이에 조선반도는 통일이 될 것이요, 그 때가 되면 연변은 다시 복 받은 땅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런즉 동북지역의 조선족공동체를 살리는 작업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흑룡강 해림시의 신합촌, 길림시 주변의 금풍촌, 심양의 주변의 만융촌, 화평촌의 경우와 같이 대도시 주변에 “집중촌”이 일떠서고 있다. 산업과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교육, 문화, 복지를 아우르는 “집중촌”은 향후 조선족공동체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해림시 신합촌은 이동춘 이사장의 인솔 하에 마을의 땅을 활용해 농촌집단기업을 만들었다. 즉 도시 근교에 자리를 잡은 마을의 지리적 여건을 십분 활용해 농경지를 아예 2, 3차 산업기지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다시 공업단지 · 아파트단지 · 문화오락단지 · 공원과 민속촌 단지로 나누어, 촌민들에게로 재분배한 것이다. 심양시 만융촌도 이와 비슷한 발전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이밖에 현재 논의되고 있는 조선족 “집중촌” 모델로는 중국 최대의 코리안 타운으로 유명한 심양의 서탑거리와 같은 “도시 중심형” 조선족공동체, 길림시의 아라디촌처럼 도시 외곽에 있지만 도시 중심에 일부 “집중촌”들을 끼고 있는 “중심촌형” 조선족공동체, 그리고 한국의 “두레마을”이 연변 등지에 세운 대규모 생태농업단지 등이 있다. 이처럼 선진적인 영농법을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농산품을 생산해야 조선족사회의 해체를 막고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경제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3) 산해관 이남의 북경, 천지, 청도, 상해 등지에 새로운 코리안 타운이 들어서고 있다. 이 새로운 코리안 타운은 중국조선족과 한국인사회의 통합형태로 나타난다. 청도, 위해,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산동반도에만 하더라도 12만 명의 조선족과 함께 6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북경의 조선족 인구는 1990년에는 7천 6백 명이었지만 2001년 현재 5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망경신성(望京新城)에는 6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13) 아무튼 조선족과 한국인이 통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민족사회를 이룰 전망이다. 청도에서 발간하는『연해소식』은 현지 조선족과 한국인들의 정신 ․문화적인 유대로 되고 있다.    4) 상술한 3개 여건이 주어지면 산업과 무역, 교육과 언론을 아우르고 동북과 황해권(黃海圈)을 연결하는 민족공동체 문화네트워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북아 우리민족 경제 네트워크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21세기는 동북아의 시대다. 중국이 거대한 시장과 전 세계에 걸친 강력한 화교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떠오르고 있듯이, 우리민족도 경제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 만일 남북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있는 우리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다면, 우리도 화교나 유태인 부럽지 않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14)    이러한 조선족공동체의 지각변동과 발전방향을 모색함에 있어서 가장 경계하고 심층적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는 민족적 정체성의 상실이다.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 개인과 집단의 부(富)의 축적은 의미가 없다. 일찍 중원을 지배했던 만주족이 자기의 문화를 상실함으로써 소금이 물에 녹듯이 자취를 감춘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족의 제3차 이민의 물결을 좌시(坐視)하지 말고 새로 일어난 우리민족의 공동체에 교육과 문화, 문학과 예술의 씨를 심는 작업을 서둘러야 하리라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산해관 이남으로의 인력 진출에 교육, 문화의 진출을 동보(同步)시켜야 할 것이다. 그 결과는 동북아 우리민족 경제문화 네트워크로 나타날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민족적 정체성을 고수하는 작업만 잘 한다면 제3차 이민물결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민족공동체의 풍요와 확장이지,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맺는 말      200여 년간 지속된 서구 중심의 근대화는 인류의 복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지만 문명의 충돌, 환경오염과 생태파괴라는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오늘의 인류는 서구 중심의 근대를 성찰하고 보다 인간적인 근대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민족문화의 평화적 공존과 선의적인 경쟁만이 보다 아름다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민족공동체도 이 새로운 세계문화사적 패러다임을 자각하고 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때만이 자체의 존재와 발전을 기할 수 있다.    앞으로 조선족사회는 우리 겨레의 얼을 지키고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중국문화를 비롯한 타민족의 문화, 예컨대 선진적인 공중도덕과 기업문화, 법치관념과 합리주의적인 행위방식 등을 받아들여 자정력(自淨力)과 자생력(自生力)을 높여야 한다. 특히 교육, 언론, 출판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의 자질 향상을 비롯한 전반 조선족의 문화적 힘을 키워야 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문화 고유의 운동법칙이다. 오직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살리고 그 경쟁력을 높일 때만이 우리 문화를 고수하고 그 문화영토를 넓힐 수 있다.    
  한 기업인의 철학(2)                    ― 우리의 부끄러운 술문화, 이젠 바꿀 때가 되었다 김호웅      NOKIA tmc 이재욱 회장은 20년 간 기업을 100배 성장시키는 경영신화를 창조한 한국의 근대화의 주역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새로운 비전과 도약을 위해 산업현장에서 갈고 닦은 자신의 독창적인 경영철학과 사상을 이야기함과 아울러 우리 문화의 여러 가지 병폐를 두고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 술문화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술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국민운동을 벌려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는데 참으로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요즘의 한국은 말 그대로 술 권하는 사회다. 최근 발간된『한국 사람들』이란 책을 보면 1995년 한국의 성인 남자는 한 달에 평균 열두 번, 여자는 여섯 번 정도로 술을 마신 것으로 나타났고 한국 국세청 조사에 의하면 1997년도 한 해 동안 음주 인구 1인당 소주 120병, 맥주 204병, 위스키 1병, 막걸리 12통을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지지 않는 음주량이다.    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더 있다. 모 그룹에서 최근에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달 술값과 책값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한 달 술값이 책값의 열 배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고, 술자리를 1차로 끝내는 사람은 1/3 정도에 그쳤고 나머지는 2~3차까지 간다고 답했다.    음주 차수가 많고 양이 많은 것만큼 한국인의 음주 문화 또한 독특하다. 한번 마시면 뿌리를 뽑아야 하는 폭음문화, 상대방과 보조를 같이하면서 술을 마셔야만 예의로 인정되는 대작문화, 그 외에도 비위생적인 “술잔 돌리기”와 야만적인 “폭탄주” 개발 등으로 한국인은 지구상 유례없는 독특한 술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술문화는 대학 캠퍼스까지 침투되어 신입생들이 입학하는 3월에는 이른바 신고식이라는 명분으로 술맛도 모르는 새파란 생도들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여 그들을 무리로 쓰러뜨리는 참극을 빚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한국의 술문화는 중국의 조선족사회에도 전파되어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지적해야 하겠다. 중국동포는 경제적 여건이 나빴던 관계도 있었지만 보통 술을 명절에나 마시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인, 관광객들이 연변에 들어오고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에 드나들면서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 사회에도 1차는 술집에서, 2차는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서, 3차는 양고기뀀집이나 사우나에서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는 문화가 정착했다. 요즘 연변에서도 흥이 나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 풍조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재욱 회장은  NOKIA tmc를 키우기 위해 18년간 1,000회 이상 비행기를 타고 300만 마일 이상 출장을 다니면서 쌓은 귀중한 외국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접대문화의 병폐를 더욱 깊이 있게 파헤친다. “한국인들은 중요한 비즈니스를 처리하기 위해 저녁식사를 한 후 좋은 요정이나 룸살롱 등에 가서 술을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문제는 술을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많이 마시는 데 있고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술을 술맛이나 그 술의 풍토문화도 잘 모르면서 과음하는 데 있다.” 이어서 이재욱 회장은 “국력도 그리 강하지 않고 어려움도 많이 예상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의 술문화는 망국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참으로 언중유골의 충언이 아닐 수 없다. 자고로 과음을 해서 일신을 망치고 주색잡기로 나라마저 망친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국인들은 피와 땀으로 한강의 기적을 창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재욱 회장의 말대로 아직 “샴페인을 터뜨려서는 안 된다.” 한국은 아직도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포위 속에 있다. 특히 한국의 옆에서 잠자던 사자와 같던 거대국가 중국이 급성장해 13억 중국인들이 몰려오는 이 마당에 취생몽사, 술타령만 할 때가 아니다. 이재욱 회장이 지적한 대로 “오천년 우리 역사에서 사실 제대로 먹고 좀 풍요롭게 산 것이 고작 한 이십여 년 남짓한 데 이대로 가다가는 아주 낙관적으로 봐서 10여 년, 나쁘게 보면 한 5년 안에 다시 옛날과 같이 중국에 의지하는 어려웠던 시절로 돌아갈지 모른다. 베짱이와 개미의 얘기가 우리에게 적용될 가능성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다.” ―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지적이며 적절한 비유인가?    물론 이재욱 회장도 술을 완전히 끊으라고 권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저녁식사와 함께 적당하게 즐기는 음주는 직장인들, 친구들, 관련기관의 사람들 사이에 마음을 터놓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설적이며 재충전의 기회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술을 섬멸해야 할 적군 정도로 생각하고 폭음이나 과음을 하는 습성은 분명 버려야 할 우리의 나뿐 습관”이라고 꼬집어 지적한다.    이는 애국, 애족의 불같은 마음을 가지고 한평생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뛰어온 걸출한 경영인 충언이니, 이제 우리 모두 술문화 바꾸기 운동에 동참해서 술은 드물게, 적게 마시고 1차로 끝냄과 아울러 술자리를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즐겁고 우아한 장소로 만들어가자. 그리고 즐겁고 품위 있는 술자리에서 충전한 열과 빛을 내일의 사업에 쏟아 붓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실천이 우리 사회를 밝아지게 하고 한국의 총체적인 국력을 늘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연변일보』, 2004년 12월 3일
26    한 기업인의 철학(1)― 무한경쟁시대의 『손자병법』 댓글:  조회:1585  추천:48  2011-04-27
한 기업인의 철학(1)― 무한경쟁시대의 『손자병법』   김호웅              몇 해 전 한국 근대화의 주역들인 정주영,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재욱 회장의  에세이『NOKIA와 영혼을 바꾸다』는 더욱 신선한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정주영 회장의『실패는 있어도 시련은 없다』와 김우중 회장의『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혈전 만리를 달려온 노장군의 무용담이라고 한다면 이재욱 회장의 『NOKIA와 영혼을 바꾸다』는 춘추전국시대를 제패한 명재상이 지은 진귀한 병서(兵書)라고 할 수 있다. 쉽게 표현하자면 전자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요, 후자는『손자병법(孫子兵法)』이라 하겠다.     『손자병법』에서는 남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다. 이재욱 회장은 예리한 국제적 감각과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진 전문경영인 대표이사이다. 그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나서 오늘의 세계는 무한경쟁시대이며 한국이 나아갈 길에는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동북아(東北亞)만 보더라도 일본, 중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한국을 조여 오고 있다. 특히 연 10% 이상의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13억 중국이 커다란 잠재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찌 보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궁지에 빠질 형국이다. 하기에 이재욱 회장은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샴페인을 터뜨려서는 아니 된다”고 경고한다. 그는 현재의 위기를 새로운 도약과 발전의 기회로 전환시키는 길은 “원래 총명하고 영리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신바람을 불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신바람을 불러내는 것”, 그것은 이재욱 회장의 독창적인 신바람의 경영학이다. 그는 구미 선진국의 경영철학을 맹신하지 않는다. 그는 흥과 힘이 절로 나는 사물놀이에서, 전 국민이 일심동체를 이룬 붉은 악마의 열띤 응원에서, IMF가 터졌을 때 집안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금붙이들을 들고 나와 줄을 섰던 국민들의 얼굴에서 신바람의 원형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한국인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분명한 목표와 동기부여만 주어진다면 힘이 솟구치는 민족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마음속 깊이 잠자고 있는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재욱 회장은 신바람을 이끌어내자면 국민에게 확고한 비전과 충분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지도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을 가진 지도자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신바람 나는 일을 만들고 그것을 신바람 나게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경영자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최고 경영자이다. 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최고의 CEO의 사표로 내세우면서 회사 구성원들 간의 믿음과 신뢰, 솔직한 대화와 합리적 분배, 부부처럼 친밀한 노사관계의 확립 등으로 회사원의 신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일깨워주고 있다.    이재욱 회장은 신바람의 경영학을 내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신바람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꼬집으면서 그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 그것들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남성과 대등하게 보장함으로써 그녀들의 사회참여의 폭을 넓힐 문제, 사교육의 팽창 등 현행 교육 제도와 내용을 혁신할 문제, 민족의 장래를 위해 서로 양보하고 힘을 보태 하나로 뭉쳐나갈 문제, 소모적인 저녁식사와 술문화를 바꿀 문제, 위인(偉人)을 많이 만들어 그들의 좋은 점을 본 받을 문제, 정부 측의 강압적인 경제제도를 갱신할 문제 등이다. 일례로 사교육과 입시전쟁은 국민의 부담을 가중하고 서울과 지역의 격차를 조장하며 서민의 위화감을 증대함으로써 국민의 신바람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재욱 회장의 에세이는 그의 심오한 경영철학과 함께 한국사회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으되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풍부한 지식, 소박하면서도 기발한 격언과 생동한 비유를 구사해 읽는 이들에게 잔잔한 미소와 함께 큰 깨달음을 선물한다. 이를테면「노사관계는 부부처럼」, 「일을 놀이처럼 하라」, 「일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와 같은 제목은 얼마나 간명하면서도 유머러스한가? 그리고 “마라톤에는 결승점이 있지만 국가 간의 경쟁은 종착역이 없다.” 라는 문장은 무한경쟁시대의 특징을 격언 식으로 쉽게 표현하고 있으며, 경영자는 신뢰와 믿음으로 아래 사람들의 책임감과 창의력을 유도해야 한다는 도리를 자전거를 타는 일을 가지고 풀이한다― 일단 “자전거가 탄력을 받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달려 나가면 핸들을 그리 꽉 잡지 않아도 된다. 너무 꽉 잡으면 작은 장애물에도 자칫 자전거가 심하게 요동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위트와 유머가 넘쳐 그야말로 읽을수록 신바람 나는 글이다.     이재욱 회장의 에세이를 읽노라면 자연 육곡 이이(1953~1584)의 근엄한 눈빛과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을 앞두고 십만양병(十萬養兵)을 주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재욱 회장도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진맥하고 전화위복의 지혜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창출할 수 있는 철학과 대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니 우리 어찌 옷깃을 여미고 경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애국, 애족의 충정과 행동하는 지성의 슬기와 지혜가 깃들어는 이재욱 회장의 “병서(兵書)”를 깊이 깨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대한민국은 이 무한경쟁시대에서도 영원히 불패의 기반(基盤)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한국 독자들의 일독(一讀)을 권유함과 아울러 이 귀중한 에세이집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중국, 일본,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해외동포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되찾고 민족적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계기로,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 3국이 한국인의 무궁무진한 저력을 알 수 있는 계기로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04년 6월 25일      
25    “북청 물장수”― 동훈 선생 댓글:  조회:2251  추천:19  2011-04-21
  “북청 물장수”― 동훈 선생    김호웅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두터운 정치서적이나 철학저서에서보다 한 인간과의 만남에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경우가 있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1년 반, 1995년대 중반 한국에서 1년 간 동훈(董勳) 선생의 슬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던가?      달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더욱 그리운 그 얼굴, 그 목소리! 오늘도 선생님네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아름다운 추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1. “북청 물장수”의 이야기       선생을 처음 만나 뵌 것은 1989년 12월 중순, 일본 와세다대학 정문 앞에 있는 자그마한 라면집에서였다. 이른 정심 시간이라 아직 손님은 별로 없는데 안쪽에 앉아있던 50대 중반의 신사가 조용히 일어나며 반겨주었다. 중키의 다부진 체구, 이마는 약간 벗어졌는데 안경 너머로 한 쌍의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매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판룡(鄭判龍) 교수의 사진첩에서 뵌 얼굴이었다.      선생은 밥상을 사이 두고 좌정하자 우리 대학교의 박문일(朴文一), 정판룡, 주홍성(朱紅星) 등 교수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자상히 물어왔다. 표준적인 서울말씨였으나 함경도 억양이 얼마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선생은 여러 해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문득 지나가는 고향사람을 만난 듯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은 1984년 8월 말 우연히 연변을 다녀간 후 우리 연변대학 중진 교수들과는 깊은 교분을 갖고 있었고 중국에 우리 민족의 대학을 꾸리고 있는 일이 너무나 대견해 젊고 유망한 학자들을 일본에 데려다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공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군, 부모님은 다 건재하신가?”    “예, 두 분 다 계십니다.”    “아버님의 고향은 어디지?”    “저희 아버지는 평남 출신이고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이라고 하던데요.”    “함경도? 난 함남 북청사람일세.”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함경남도 북청(北靑)이라면 지금은 북한의 사과 산지로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북청물장수’의 고향으로 유명한 고장이 아닙니까? 옛날 북청사람들은 약수 길어 팔아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고 하던데요.”      내가 한마디 알은 체를 했더니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허, 그런 이야기를 북청내기들에게 했다가는 귓뺨을 맞는다구요. 자식만을 공부시킨다면 북청물장수가 아니지. 북청물장수 물 길어 팔아 사촌을 공부시키구 마을 젊은이들을 공부시킨다구 해야 할 것일세…”      후에 선생의 주선으로 북청 출신의 사람들과 많이 사귀고 두루 책자를 보고 알게 된 일이지만 예로부터 북청땅은 교육을 숭상하고 그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한 고장으로 소문이 높았다. 조선왕조시대의 유명한 재상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은 “내 만일 북청에 귀양 오지 않았던들 어찌 높은 학문과 고결한 지조를 갖춘 북청선비들과 교유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했고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선생은 가는 곳마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는 북청을 돌아보고 “독립된 후 우리나라를 북청과 같은 고을로 만들고싶다”고 술회한바 있다. 그래서 “교육 없이는 북청을 논하지 말라”고들 한다.      북청물장수가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조선왕조 철종년대(1849-1863)이다. 당시 권세가였던 안동 김씨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의 서울 저택에 북청 출신의 김서방이 물을 길어댄 일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북청물장수들이 서울에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물장수를 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년대(1863-1907)부터이다. 1868년 북청군 신창 토성리 출신인 김서근(金瑞根)이라는 사람은 서울 돈화문 앞 단칸방에서 기거하면서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오는 고향 선비들의 시중을 들었다.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빨래를 했는데 물은 주로 삼청동 공원 안에 있는 약수터 물을 길어왔다. 부지런하고 인품 좋은 북청사람 김서근은 차차 물지게와 물통을 가지고 이웃 주민들에게도 물을 길어다 주었는데 상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그 소문은 이웃으로 번져가 물을 배달해달라는 집들이 불어났다. 그리하여 김서방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고향에 연락하여 친구들을 불러다 물도가(都家)를 만들었다. 이것이 북청물장수의 시작이며 수방도가(水房都家)의 원조(元祖)로 된다.    수방도가는 점차 서울의 명물로 등장했고 북청물장수들은 물지게로 물을 길어 벌어들인 수입으로 자식들을 서울에 데려다 공부시켰다. 그리고 많은 북청출신의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수방도가를 거쳐 갔다. 말하자면 지금의 아르바이트 식으로 잠시 수방도가에 행장을 풀고 물지게를 지고 학자금을 벌었던 것이니 만국충절(萬國忠節) 이준(李儁, 1859-1907)도 1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수방도가를 거쳐 갔었다.      수방도가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 수십 개로 불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호 연계를 맺고 서로 협동하여 체계적인 운영을 모색했다. 그 산물이 《북청청우회(北靑靑友會)》인데 이 장학회는 여러 수방도가에서 출자하는 자금을 기금으로 하여 북청군 출신 학생들에게 정기적인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활발하게 뒷바라지를 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가면서 북청물장수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권학사상(勸學思想)에 투철한 북청인의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르고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 서울에만 중산고등학교, 고명상업고등학교와 같은 10여 개 소의 학교를 설립했고 수많은 인걸들을 길러냈다.      이러한 북청물장수들은 시인 김동환(1901년~미상)은 그의 시「북청 물장수」(1924)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北靑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北靑 물장수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최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北靑 물장수                                                     동훈 선생은 함경남도 북청 니곡면(泥谷面) 출신인데 그의 삼형제는 서울에 올라가 하숙을 잡고 공부를 하던 중 “6․25”전쟁이 터져 서울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선생은 전임 국무총리 이홍구(李洪九) 선생과 동기동창으로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64년부터 1971년까지는『서울신문』,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을 거쳐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대통령비서관(政務, 司正 담당), 1975년부터 1979년까지는 통일원 차관(남북당국회담 대표) 등 정부 고위직에 있다가 1980년 남북평화통일연구소를 창립했고 1989년대 초반 전두환 군사정권이 나오자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1985년부터는 일본 동경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면서 남북통일연구에 집념하고 있었다…      그 날 정심으로는 초밥(壽司) 한 접시에 라면 한 그릇씩 올랐다. 맥주 한잔 청하지 않는다. 처음 뵈옵는 어른 앞이라 술은 주어도 사양하겠지만 빈 말이라도 “맥주 한잔 들지 않겠어?” 하고 물어주지 않는 데는 객지에 온 몸이라 얼마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2. 잊을 수 없는 가이겐(外宛)의 불고기 맛       지금도 젊은이들은 일본에 가면 돈닢이 우수수 떨어지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인들의 천국이지 가난한 나라에서 간 유학생들에게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매일 학교에 나가 수업을 받고 자료를 수집, 정리해 리포트(소논문 형태의 숙제)를 작성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하루가 눈 깜빡할 새에 지나버리고 삭신은 물러날 것만 같다. 나와 같이 장학금을 받는 사람은 그래도 얼마간 점잔을 빼며 지낼 수가 있지만 사비유학생들은 일년 열두 달 365일 다람쥐 채 바퀴 돌리듯 뛰어다녀야 한다. 개중에는 일본에 3, 4년씩 있었다 해도 술집 출입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웬만한 식당에 가도 맥주 한 병에 500엔(인민폐로 35원 좌우), 불고기 1인분에 5,000엔(350원)씩 하니 중국의 한 달 월급을 팔고 팔자 좋게 술집 출입을 할 유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친구가 좋다고 한번 모여 불고기 파티를 열어 보라. “와리깡(割勘)”― 제 각기 돈을 내여 계산을 해도 1인당 1만 엔(인민폐로 500원)씩은 내야 하니 친구 만나기도 무서운 곳이 일본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가면 그래도 드문드문 대접은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역시 천만에 말씀이다. 나는 일본에 1년 반이나 있었지만 지도교관 오오무라 교수 댁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일본인의 집에도 초청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학원생이요, 조교요 하는 대학가의 친구들 사이 역시 야박한 “와리깡”이니 중국에 처자를 두고 온 유학생들, 주렁주렁 금띠를 두르고 금의환향하기를 바라는 부모처자를 생각하면 슬쩍 구실을 대고 술좌석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 참으로 부자의 나라 일본이라 하지만 술 한 잔, 기름진 요리 한 접시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바로 이렇게 궁상스럽게 지내고 있는 조선족 유학생들 앞에 귀인이 강림했으니 그분이 바로 동훈 선생이었다. 우리는 선생의 지도와 후원을 받고《재일조선족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고 현지조사, 학술토론회 같은 행사를 빈번히 가졌다.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는 동경기독교회관을 견학했고 고구려 후예들이 건너와 살았다는 사이다마현(崎玉縣)의 유명한 고마진쟈(高麗神社)도 참관했으며 일본 제일의 관광명소 하꼬네(箱根), 닛꼬(日光)도 답사했다. 사꾸라 피는 4월, 단풍이 드는 11월이면 아름다운 신쥬꾸고엔(新宿御宛)의 푸른 잔디 위에 노천 파티를 벌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파티는 요요기(代代木) 부근에 있는 가이겐(外宛)이라는 불고기집에서 많이 했다. 나는 그렇게 맛있는 불고기를 다시는 먹어볼 것 같지를 않다. 늘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지칠 대로 지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늘 속이 출출하던 우리는 열흘 굶은 호랑이처럼 기름진 불고기를 포식했다. 선생은 한 구들 되는 자식들에게 어쩌다가 좋은 음식을 얻어다가 배불리 먹이고 있는 어버이처럼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실없이 젊은이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는 자꾸 술이며 안주를 새록새록 청했다. 술과 안주도 당신 자신이 직접 청하지 않고 나를 보고  “간사장 동지, 술이 좀 부족허구만. 한 잔 더 하지요. 고기도 좀 더 시키고…” 하고 화기 오른 안경을 벗으며 두 눈을 끔뻑해 보였다. 내가 친목회의 간사장 직무를 맡고 있다고 일부러 “간사장동지, 간사장동지”하고 일본식으로 개여 올리는 것이었다. 당신 자신은 친목회의 보통 회원이고 질긴 술꾼인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낮에는 절대로 술 한 잔 하지 않았고 일본 소주보다 맥주를 더 즐기는 편이지만 일단 저녁에 우리 젊은이들을 만나 기분이 좋으면 2차, 3차로 대작을 하군 했다. 그리고 술값은 꼭 당신 자신이 내군 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먼저 결산을 하면 크게 화를 냈다.      “이 봐, 동경바닥의 주인은 내가 아닌가? 썩 물러서게. 자네들의 술대접은 연변에 가서 받겠어!”      우리 유학생이나 방문학자들뿐만 아니었다. 학술회의나 무역상담 차로 일본에 온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 기업인들 모두가 동훈 선생의 신세를 지고있었다. 선생이야말로 우리 중국 조선족들에게는 동경의 급시우 송강(急時雨 松江)이었다.      1990년 8월 제2차 오사카조선학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중국 측 대표 96명이 동경을 거쳐 귀국할 때 역시 가이겐 불고기집에서 대접을 했다. 미닫이들을 활짝 밀어놓고 두 줄로 길게 차린 불고기상이 장관을 이루었는데, 8월이라 후끈후끈한 화기가 진동하고 불고기 굽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앉은걸음으로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술잔을 권하는 선생의 모습, 이마며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돋아 있었다. 참으로 보기에 민망했다. 연변사람들에게 무슨 신세를 졌기에, 중국 조선족과 무슨 인연이 있기에 이처럼 바람처럼 지나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처럼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일까?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그 무렵 우리는 조상의 나라 한국에 가 보고 싶었다. 1990년도라 그때만 해도 친척 초청이 아니고는 한국에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도 일본에 있는 중국 조선족 학자라면 찬스를 잡을 수 있었지만 아직 학문적 깊이가 없는 우리들을 어느 대학교에서 초청해 주며 설사 초청을 해준다 해도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우리 고학생들이 무슨 자금으로 한국나들이를 한단 말인가?    우리의 말 못하는 사정을 손 끔 보듯 하는 선생은 그 당시 오사카 국제해상운수주식회사 사장으로 계셨던 허영준 선생을 찾았던 모양이다. 그 때만 해도 허영준 사장은 재일동포들 중에 손꼽히는 기업인이요, 자산가였다. 그는 일본의 고베항(神戶港)과 한국의 부산항을 나드는 기선(輪船)과 화물선을 가지고 있었고 부산에 크라운호텔, 서울 강남에 리버사이드호텔을 가지고 있었다.      “허사장님,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젊은이들이 동경대학, 와세다대학과 같은 일본 명문대학에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한국을 모른답니다.”      “일본은 알고 자기의 모국은 모르다니요?”    격장법(激將法)이 바로 들어맞았는지라 동훈 선생은 한 수 더 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학을 하는 젊은이들이 아닙니까? 무슨 돈이 있어서 한국관광을 하겠습니까? 하나같이 머리들이 총명하구 열심히 공부들을 하니까 장차 큰 재목이 될 건데… 참, 나도 옆에서 보기가 딱하군요…”      “아니, 돈이 없어서 모국도 가보지 못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그 돈은 제가 내놓을 테니 동 선생께서는 주선만 해 주십시오.”      마침내 동훈 선생의 주선으로 우리 조선족 유학생 25명(그 가운데 金昌錄씨의 10살 먹은 딸과 金光林씨의 7살 먹은 아들놈도 있었다)은 고베(神戶)에서 오림피아호 기선을 타고 부산을 바라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의 크라운 호텔에 묵으면서 3박4일, 서울의 리버사이드호텔에 묵으면서 5박6일, 토끼장 같은 다다미방에서 살던 우리는 금시 중동 석유왕국의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매일 관광버스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모국의 도시와 명승고적들을 돌아보았고 저녁이면 저마다 널찍한 호텔 방을 차지하고 오랜만에 늘어지게 발 편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동훈 선생님은 허영준 사장네 팀과 함께 서울까지 날아와 우리들에게 일일이 용돈을 주었고 대통령 각하도 가끔 찾아오신다는 유명한 신라술집에서 연예인들까지 불러 풍악을 잡히며 풍성한 환영만찬을 베풀어주었다.      그 때 그 감격과 감동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3. “코리아인도 문화민족임을 알려 줘야지”      선생은 사모님과 아들 동헌(董憲)과 함께 동경에 살고 있었고 그분의 큰따님은 미국에서, 작은따님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선생네 가족은 동경에서 아파트를 전세 맡고 살았는데 내가 일본에 있는 사이에도 신쥬꾸구(新宿區)에서 시부야구(涉谷區)로, 다시 나카노구(中野區)로 자주 이사를 했다.      아직도 음으로 양으로 민족차별을 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요사스러운 일본인 부동산 업주들은 한국인에게 좀처럼 세를 주지 않았고 세를 주었다가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이런 저런 구실을 대고 아파트를 내게 했던 것이다. 선생네가 신쥬꾸구 쪽에서 시부야구 쪽으로 옮길 때, 우리 유학생 친구들 몇이 달려가 이사를 거들어준 적 있었다.      요통(腰痛)을 심하게 앓고 있는 사모님까지 나오셔서 짐을 싸고 있었는데 우리는 운송회사 직원들을 도와 짐을 메여 나르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선생만은 부지런히 화장실에서 욕조를 닦고 있었다. 당장 내야 할 집인데 괜히 부득부득 청소할건 뭔가? 오히려 옆에서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공자님 이사에 책 보따리밖에 없다더니 무슨 책 상자가 그렇게 많았던지! 우리가 5층에서 1층까지 이삿짐을 다 메여 내렸건만 선생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서 구들에 물수건을 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생은 허리를 펴고 우리를 둘러보더니    “짐을 다 내려갔으면 창문들을 닦아주게.”    하고 걸상을 내주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 낼 집인데 청소를 해선 뭘 합니까?”    선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선생은 물수건으로 문고리들을 샅샅이 훔쳐내고 있을 뿐인데 사모님이 곱게 눈을 흘기며 끌끌 혀를 찼다.    “저 양반은 이사할 때마다 저런 답니다. 새로 드는 집주인에게 코리아인들도 문화민족임을 알려 줘야 한다고 말예요. 열 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빌어야 할 땐데 번마다 참 코 막고 답답하지요.”    그제야 우리는 얼마간 깨도가 되어 선생을 거들어 일손을 놀렸다.    이젠 집안 어디를 보나 신접살림처럼 알른알른 윤기가 돌았다. 나는 분명 내일 찾아들 주인의 휘둥그런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참으로 우리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의 어디에 가서 살던지 밝고 깨끗한 모습을 보일 때, 자기의 인격과 품위를 지킬 때 세계인들도 우리를 다른 눈길로 볼 것이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사사건건, 구석구석에서 우리 촌뜨기 유학생들에게 귀감을 보여주었다. 우리와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일 없었고 약속 장소에는 단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와 계셨다. 그렇게 술을 즐기는 분이지만 낮에는 단 한 모금도 술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색 정복에 반듯하게 넥타이를 매고 다니시는 신사 풍의 깔끔한 모습, 그분의 단정하고 빠른 걸음은 우리 젊은이들도 무색케 했다.      “옛날 개념으로는 부자들 모두가 뚱뚱보로 되어 있지만 현대 부자들은 모두 날씬한 편이거든. 여기 일본의 마쯔시다나 쏘니의 회장도 그렇구 한국의 정주영, 김우중 회장도 그렇단 말이야. 그러니 호웅씨도 부자로 되려거든 체중부터 줄여야 하겠어.”      선생은 체중이 90키로로 육박하는 나를 두고 가끔 농을 걸기도 했다.      4. 넉넉한 유머와 백성의 통일논리      동훈 선생과 앉으면 언제나 우리 젊은이들 쪽에서 찧고 까불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만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 절대로 당신 자신의 인생경력이나 인생철학을 도도하게 펴내지 않는다. 혹시 좌중에 젊은이들을 상대로 고담준론을 펴내는 어르신네가 있으면 슬쩍 우스운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리군 했다.     하지만 선생은 박문일, 정판룡 등 선생들과 함께 앉은자리에서는 가끔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거나 진한 육담마저 꺼내군 했다. 그런 자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바나나」, 「저희야 동그라미가 있어야지요」와 같은 이야기는 영영 잊혀질 것 같지 않다. 실례지만 이 자리에서 하나만 옮겨보고자 한다.      ― 대한민국 어느 기업의 회장 어른께서 양쪽에 쭉 중진들을 앉히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 판인데, 비서란 놈이 살그머니 다가와 귀에 대고 한마디 여쭈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 오셨는데요!”    비서가 말하는 “그분”이란 물론 회장 어른이 비밀리에 좋아하는 젊은 여자지요.    “왜 또 왔지?”    회장 어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데 비서란 놈이 슬쩍 원탁 밑에 오른 손을 넣더니 먼저 장지(長指)와 식지(食指)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이것 아니면…”    하고 다시 장지를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것 아니겠습니까?”    하고 소곤거렸습니다.    장지와 식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는 건 돈을 의미하고 장지를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어 보이는 건 섹스를 의미함을 회장 어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회의 중이지 않는가? 임자가 알아서 잘 모시도록 하게!”    회장 어른이 난색을 하면서 비서를 물리치고 다시 회의를 주최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문서를 들고 들어오는 비서를 보고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지라 회장 어른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아, 어제 그분은 잘 모셨는가?”     그러자 비서란 놈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또다시 오른 손 장지와 식지로 동그라미를 지어 보이면서     “저희야 동그라미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이것으로 잘 모셨지요!”    하고 시뻘건 장지를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쯤하면 좌중은 그만 포복절도하게 된다. 말뚝이가 양반을 야유하고 골려주는 『봉산탈춤』의 현대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선생을 모신 자리는 늘 즐겁고 배울 것이 많다.    이러한 선생의 따뜻한 인간애와 뛰어난 유머 감각은 그의 칼럼에서도 유감 없이 드러난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30대 초반에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으로 맹활약을 했던 선생, 최근에도『동아일보』,『문화일보』에 칼럼들을 실어 세계정세의 추이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현 당국의 통일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다. 마침 여기에 필자가 눈에 띄는 대로 스크랩해 두었던 선생의 칼럼 몇 편이 있다.「統一논의-‘政治打算’해선 안 된다」(88.7.1) 「北京 東京 平壤서 본 서울」(97.12.15), 「개혁의 2가지 필요조건」(98.2.4), 「통일정책 大道로 가라」(98.2.13), 「이산가족문제 접근법」(1998.38), 「남북대화 大局的으로」(98.4.10), 「‘소떼 訪北’ 남북해빙 계기로」(98.6.15),「北韓 상공에서의 묵상」(98.12.29), 「욕심보다 ‘차가운 머리로’」(00.6.19) 등 9편이다. 선생께서 지금까지 제출했고 발표했던 수많은 보고, 칼럼, 논설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 에 지나지 않지만 이 9편의 칼럼을 통해서도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을 얼마간 엿볼 수 있다.       첫째, 선생 역시 1천만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통일철학은 철두철미 순박한 백성의 소원과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선생은 1947년 봄, 병석에 계시는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을 두고 북청을 떠났는데 그 동안 아버님은 옥살이와 강제노역, 끝내는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고 누이동생 경희와는 생리별이 되고 말았다. 하기에 선생은 말한다- “50년 세월을 하루같이 헤어진 혈육의 정을 못 잊은 채 끝내는 북녘을 향해 머리라도 돌려서 숨 거두게 해달라는 실향민들의 애통된 호곡에 이제 정말 귀를 기울여 한다. 한을 안은 채 한줌의 잿가루가 된 어버이 유해를 휴전선 북녘에 날려 보내며 흐느끼는 비운의 겨레를 외면하면서 거기에 무슨 민족이요, 통일이요를 외쳐대겠다는 건가.”      선생은 이산가족의 아픔은 도외시하고 제 잇속만을 채우려는 당국자들을 비판한다. “쌀을 주면 군인이 먹으면서 남침할 기운을 차릴 것이기 때문에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통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독일통일이 어쩌고 하면서. 요는 북한동포와 함께 살게 되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 비유하자면 옹졸한 졸부 집안에서 노부모도 귀찮고, 남루한 친척 왕래도 싫고 남남으로 살아야 내 돈이 축나지 않는다는 요지다. 결코 축복받지 못할 것이다. 순박한 백성들 사이의 흐뭇한 겨레사랑, 그리고 역사 감정을 함께 이어가는 것이 통일의 원점이 아닐까.”           둘째, 선생은 통일문제를 백성의 논리로 접근하고 있는 것만큼 “통일정책은 민족의 역사에서 큰 발전을 향한 웅대한 과제이므로 그 기조로부터 표현문구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기록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격조 높은 것”이어야 하며 “그 동안 쌓인 갖가지 당착 모순 불합리를 청산 정리하고 이치에 맞고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통일정책은 당당하고 대도(大道)로 가야할 것”이니 “남북관계에서 대결과 승패의 관념은 극복되어야 하고 ‘너’와 ‘나’가 ‘우리’로 되게 하는 데는 정직과 성실이 근본이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생은 “오늘날 대명천지에 잔꾀나 속임수에 넘어갈 사람도 없고 공작이나 술수에 의해 나라가 통일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무슨 기발한 계략을 내놓는 경쟁이 된다든지 나라 안팎의 하찮은 관중석을 의식해서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나 연출 같은 발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남북 사이의 접촉, 통일 논의에는 결코 ‘단독’도 ‘밀실’도 없다. 가상(假想)이지만, 남과 북이 마주하는 곳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자리 하나가 마련돼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의 눈’이 임하는 자리다. ‘역사의 눈’은 실로 냉철 엄격하며 후대 역사에 진실을 전하고 시비를 분별해 줄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눈’은 민족사적 정통성 위에서의 민족 발전과 민주주의의 상궤(常軌)를 일탈하지 못하도록 예의 주시할 것이다.”     셋째 선생은 통일정책은 북과의 상관관계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국내 정책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차 통일된 나라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미리 우리 주변에서부터 구현시켜 나가는 다양한 노력이 바로 통일정책”이며 “청결한 정부, 질서 있는 공평한 사회를 이뤄 바람직한 통일의 모태를 만드는 개혁이 바로 중요한 통일정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훈 선생님은 특히 개혁이 번번이 실패하는 원인을 꼬집고 나서 “개혁의 2가지 필요조건”을 말한다. 첫째는 개혁의 추진주체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법이라는 반성기능이 정상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필요조건을 논하면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개혁은 개혁을 이끌 사람들이 ‘규격(規格)’에 맞아야 할 것이다. 수없이 반복된 지난날 개혁시도마다 좌절된 경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알 수 있듯이,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규격에 맞을 때에만 국민은 한편이 돼주고 그래서 성취도 남겼다. 그 규격이란 어떤 것일까. 간단명료하다. 개혁을 들고 나왔으면 개혁의 전 과정에서 자신에게 엄격함으로써 흠 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감히 남(국민)에게 도덕률 준수까지 당당히 강청할 수 있자면 그들 자신이 행적과 도덕성에서 양심(良心)으로부터의 합격판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에 규격의 잣대가 헷갈리면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세상에 알려진 사기 변절 방탕에다가 이혼경력도 있는 사람이 어느 날 말끔히 단장하고 주례석에 서서, 인간이란 정직해야 하고 지조도 있어야 하며 조강지처와는 백년해로 운운하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손님들은 실소(失笑)할까, 존경할까.”    한마디로 동서고금을 주름잡는 해박한 지식,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긴  안목, 종횡무진의 비유와 풍부한 유머, 그래서 우리는 선생의 칼럼을 좋아한다. 바꾸어 말하면 선생을 통해 우리는 열 대학 교수들에게서 배운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5. “연변대학교를 잘 가꾸어야 조선족사회가 살아납니다.”      일본에서 어느덧 1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선생은 신쥬꾸에 있는 스미도모(住友) 빌딩 55층에 있는 대동문(大同門) 한식관에서 우리 부부를 위해 환송 파티를 차렸다. 그 때 일본에 있던 큰따님과 아드님은 물론이요, 사모님까지 불편한 몸에 쌍엽장을 짚고 나와 주셨다. 초밥에 불고기,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안주들을 많이 청해놓고 양껏 술잔을 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때 남긴 사진은 지금도 나의 가장 귀중한 기념물로 남아있지만 그 날 연변의 한 젊은 학도에게 남긴 한마디 말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연변의 명동학교가 유명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안수길(安壽吉) 선생의 소설에도 배경으로 나오지만 김약연(金躍淵) 선생과 같은 반일투사가 교편을 잡았구 윤동주, 송몽규 같은 민족시인들도 많이 배출했다구 하더군… 일본에 왔기에 하는 말이지만 일본에도 유명한 학교가 있었어요. 저 야마구치(山口)현에 가면 쇼오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유명한 사숙이 있어요. 명치유신을 주도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선도해나간 유명한 인물들, 말하자면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이도 히로부미(伊藤博文),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요시다 도시마로(吉田稔磨), 마에바라 이츠세이(前原一誠), 시나가와야 지로(品川彌二郞)와 같은 거물들을 길러냈단 말일세. 자그마한 시골 사숙에서 명치정부의 중신(重臣)들을 거의 전부 키워냈다는 말이 되겠지.      아무렴,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는 법이지. 우리말로 하면 개천에서 용 나고 말이야. 아무튼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간 친구들이 연변대학을 잘 꾸려주게. 연변대학교를 잘 가꾸어야 조선족사회가 살아납니다. 헌데 요즘 나를 바라고 일본에 오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뼈가 없단 말이야. 여기 3류, 4류 대학에 와서 뭘 하나. 동대(東大), 와세다(早稻田) 같은 명문대학이 아니면 안 돼요. 그런 명문대학에서도 일본인들을 젖히고 수석(首席)을 차지해야지…”      그 날 밤 동훈 선생은 사모님과 자제분들을 먼저 보내고 우리 부부를 데리고 동경의 밤거리를 거닐다가 자그마한 닌교(人形)들을 벽장에 총총 앉혀놓은 토속음식점에 들어가 또 술상을 마주 하고 앉았다. 선생은 우리 내외에게 정교한 손목시계 하나씩 선물하고 봉투 하나를 건네준다.     “일제 텔레비전이 좋다고들 하니까 이 돈으로 부모님께 텔레비전 한 대 사다가 선물하게.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선물이 없어야 안 되지.”      얼마나 마셨을까? 점점 말씀이 적어지고 술잔만 내는 선생, 이 새파란 젊은이와의 작별을 그토록 아쉬워하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마지막 작별은 아카사카(赤坂) 역에서였다.     “잘 다녀가. 그리구 일본땅에 늙은 형 하나 있다고 생각해 주게. 바쁘더라도 일년에 한 번씩 연하장이야 주겠지 허허…”    선생은 물기 어린 두 눈을 슴벅거리면서 돌아섰고 나는 승객들 속으로 사라지는 선생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10여 년 전 선생께서 북청물장수의 사랑으로 키워준 가난한 유학생들이 자랑스럽게 일본 명문대학의 박사학위들을 따냈다. 김희덕(金熙德)씨와 김광림씨는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상철(李相철)씨는 죠지대학(上智大學)에서, 한족인 노학해(魯學海)씨는 쯔꾸바대학(築波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동훈 선생님께서 길러준 20여명의 장학생들 중 그 대부분이 귀국해 연변대학의 중견 교수로, 지도일군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사범학원 원장으로 있는 이학박사 최성일(崔成日)씨, 외사처 처장으로 있는 황건씨, 일본어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권우(權宇)씨, 도서관 관장으로 있는 한철(韓哲)씨, 그 외에도 조문학부의 김병활, 체육학부의 김영웅 제씨들도 중견교수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참으로 선생께서 심고 가꾼 자그마한 솔씨들이 낙락장송으로 자라난 것이다.      선생은 연변대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인재들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의 기초건설에도 많은 기여를 하셨다. 1980년대 중반 선생께서는 대우그룹의 협찬을 유치해 한화로 3,000만원에 달하는 한국의 최신 학술도서 1,500권을 기증했다. 지금 전국 1,000여 개 소 대학교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연변대학교 정문도 한화로 2억 원 이상의 자금이 들었는데 역시 선생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마운 동훈 선생, 지금은 동경의 어느 거리를 거닐고 계실까, 아니면 서울의 대우빌딩에 있는 남북평화통일연구소에서 논문을 집필하고 계실까? 대한민국 통일고문회의 고문, 동아일보사 21세기평화재단 이사, 명지대학교 교수(겸), 사단법인 평화포럼 이사, 남북평화통일연구소 소장 등 중책을 맡고 일하는 선생은 1989년이래 남과 북의 교류를 위해 10여 차 북한을 방문했는데 지금도 노익장의 정열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연하장 한 장 띄우면서 선생의 건강과 가족의 평안을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 1998년 12월 20일 초고, 2004년 12월 20일 수정      
24    민초의 고뇌와 울분, 그리고 그 끈질긴 생명력 댓글:  조회:1885  추천:32  2011-04-20
민초의 고뇌와 울분, 그리고 그 끈질긴 생명력              - 2007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심사평                                                   김 호 웅   2007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심사는 조성일, 리상각, 김병민, 류흥식, 김호웅이 맡았고 반복적인 론의와 합의를 거쳐 시부분 본상에 김동진, 신인상에 리범수, 수필부분 본상에 양은희, 신인상에 방원, 소설부분 본상에 리휘, 신인상에 김금희, 평론부분 본상에 장춘식을 뽑았다. 평론부분 신인상은 마땅한 작품이 없어 공석으로 남겼다.  요즘 나라 사정을 보면 해마다 10% 이상의 고속성장을 기록하고 있고 신문, 잡지들에서 억대부자들의 얼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권리 없고 돈 없는 민초들은 집장만을 하랴, 자식의 학비를 대랴 그야말로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기본 문제가 빈부의 격차요, 지역격차다. 게다가 권력층의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민초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래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져야 한다”는 논리도 한 물 가게 되었다. 단순 투자에 의한 고속성장을 억제하고 이윤의 많은 부분을 서민의 수입 향상과 사회복지에 할애함으로써 내수시장을 확대해야 온당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는 논리가 대두하고 있고 사회분배의 공평성을 기해 빈부격차와 지역격차를 줄여야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는 논리도 지도층이나 서민 모두의 공감을 얻고 있다.   다른 민족의 경우를 보아도 고향을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날품을 팔아 살고 있는 수억 민공(民工)들의 존재가 큰 문제로 되고 있지만, 우리 조선족 형제자매들의 경우는 더욱 처참하다. 농촌에 처녀의 씨가 말라서 총각들이 장가를 들 수 없거니와 설사 가족을 이룬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한 쪽이 한국이나 러시아로 날품을 팔러 가있는 바람에 7, 8년씩 별거생활을 하기 일쑤다. 이들의 고뇌와 한, 외로움과 울분을 누가 달래줄 수 있으랴?   다행스러운 것은, 2007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상작들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었으되 전환기 빈부격차와 지역격차에 초점을 맞추고 민초의 고뇌와 울분을 대변하고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의 공감대를 획득하고 있다.  아래에 시, 수필, 소설, 평론 순으로 보기로 하자.   리범수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의 30대 미혼의 유머러스한 미남 강사인데 그의 시 또한 해학과 유머가 넘쳐 읽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그는 쉽사리 시를 내놓지 않지만 일단 시를 내놓으면 마치 시치미를 떼고 있던 마술사가 슬쩍 재주를 부리듯이 엉뚱한 시를 내놓는다. 대학원생 시절《형씨 K의 자취방 소묘》(2001)로 시단의 이목을 끌더니 지난 해 연변문학에 《잔돈은 지갑을 만나면 늘 계면쩍어한다》를 발표해 또 한 번 독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잔돈과 지갑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잔돈의 처지와 생리를 재미있게 풀어간다. 두부 한 모나 소금 한 봉지, 풋배추 한 단 사고 나면 한동네 친구처럼 만나는 잔돈은 GDP라는 난해한 외래문자와 행복지수라는 어물쩍한 신조어와는 사돈도, 팔촌도 되지 않고 아파트, 자가용과는 촌수도 없다고 했다. 또한 잔돈은 “혈색 좋고 체격 좋은 백 원 짜리의/ 뻣뻣한 얼굴을 쳐다보기 민망스럽고/ 둘이 합치면 더 위엄스런 하나가 되는/ 오십 원 짜리의 오만한 눈길도 서러워” 지갑을 만나면 늘 계면쩍어진다고 했다. 이 시는 능청을 떨면서도 완벽한 기승전결의 시적 구조를 갖고 나중에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지갑 속에 있고 싶어도 나돌기를 잘 하지만  언젠가는 오구작작 함께 모여서  점잖은 십 원 짜리라도 되어 보고 싶은  때 묻고 보풀 인 거친 꿈을 안고 산다.   이 시의 매력은 심통하게 제유(提喩)를 구사한데 있다. 제유는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또는 하나의 낱말로 그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비유법의 일종이다. 그러니까 “잔돈”은 가진 게 별반 없는 서민층을, “백 원 짜리”나 “지갑”은 가진 자를 뜻한다. 그런즉 이 시는 가진 자에 대한 빼앗긴 자의 열등감과 비난의 목소리를 완곡적으로 대변함으로써 빈부격차의 부조리한 사회의 정곡을 찌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리범수는 서민층의 “때 묻고 보풀 인 꿈”을 노래하고 있다면 김동진은 “말하는 이끼”, 즉 초민백성의 꿈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말하는 이끼》라는 시에서 더는 작아질 수 없는 눈과 귀와 가슴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바람소리, 새소리 듣고 있는 천년 바위, 나무와 더불어 살고 있는 작은 생명체--이끼를 노래한다. 이끼, 그것은 세상이 알아주든지 말든지, 끈질기게 살아가는 민초의 몸짓이요, 생리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시인은 가장 작은 생물체의 입을 빌어 위대한 우주의 법칙을 말해주고 있다.   방원의 수필 《할미꽃》은 할미꽃이라는 잘 알려진 메타포를 구사하고 있되 절제된 정감과 정확한 언어표현으로 늙으신 어머니로 은유된 할미꽃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고, 양은희의 수필은 작자의 일상을 기록하는 수기(手記)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민초의 삶과 죽음을 깊이 있게 사색하고 있다. 수필《일월의 빛》에서 작자는 세모(歲暮)에 역서를 펼쳐놓고 뜻 깊은 날마다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사랑스럽고 귀중하단다. 하지만 이러한 유한부인의 일상은 한 이름 없는 쌀가게 주인 내외의 드바쁜 일상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진다. 아파트 3층까지 쌀 포대를 메고 올라온 젊은 아낙, 빚을 갚고 남들처럼 허리를 펴고 살기 위해 숨을 죽이고, 그러나 이악스럽게 살고 있는 쌀가게 주인 내외, 그들의 알찬 삶에 비하면 한 유한부인의 삶이란 얼마나 사치스럽고 경박한 것인가를 잘 말해주었다. 역시 대조적인 수법으로 야생화 같이 끈질긴 민초의 삶과 생명력을 긍정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김금희의 단편《개불》은 “개불”을 소도구로 설정해가지고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는 몰염치한 여인의 형상을 창조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정조관념의 붕괴와 도덕적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불”은 바다에 사는 개불과의 환형동물(環形動物)인데 몸길이는 10-30cm이고 주둥이는 원뿔꼴이며 황갈색을 띤다. 바다 밑의 모래 속에 “U” 모양의 구멍을 파고 산다. 이 작품에서는 “개불”을 두고 “사람의 피부 같은 색깔에다 원통형의 몸통마저 차라리 남자의 그것과 너무 닮아있는데 게다가 그것을 만지면 꿈틀하니 수축이 되면서 제법 탄탄해진다”고 했다. 통설에 의하면 “개불”은 남성의 정기를 돕는다고 한다. 헌데 주인공 “여자”는 “개불”을 천하일미로 생각하고 있고 “개불”을 사주는 남자이면 마음도 몸도 다 허락한다.  “개불 굶은 지 벌써 다섯 달이 넘어간다”고 했는데 이는 이 “여자”가 얼마나 남성을 밝히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실은 남편과 좀 모순이 생겼고 그 남편이 두어 달 집을 비운 사이에 욕정을 참지 못해 “개불”을 사준 다른 남성과 통정을 했을 뿐이었다. 남편이 돌아오자 이 “여성”은 원상으로 돌아와 얌전한 아낙으로 둔갑하고 그녀의 가정에도 평화와 행복이 깃든다. 이처럼 이 소설은 “개불”이라는 소도구를 이용해 우리 사회의 편의주의(便宜主義)적인 발상과 성의 문란상을 풍자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성적 타락상을 다룬《개불》에 비해 우리사회의 성(性)과 애(愛)의 괴리, 허구한 세월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수많은 기혼 남녀들의 고통과 절규를 형상화한 리휘의 소설《울부짖는 성》은 우리에게 더욱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아내를 한국에 보낸 두 남성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원명은 나오지 않고 “물알”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물알”이란 덜 여물어서 물기가 있고 말랑말랑한 곡식의 알을 지칭하지만 세속에서는 허우대는 크나 힘이 없는 남성을 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물알” 역시 학교 배구대에서 쫓겨날 정도로 키 값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자식사랑은 지극해 모범 학부모로 통한다. 그는 아내가 한국에 간지 6년이나 되지만 지극정성을 다해서 아들 민호의 공부 뒷바라지를 한다. 그래서 민호는 학급에서 제일 공부를 잘한다.   뿐만 아니라 “물알”은 아내가 힘들게 벌어서 부쳐 온 돈을 한 푼도 헛되게 쓰지 않는다. 후에 아내가 돈을 부쳐 보내지 않아도 군말이 없이 지낸다. 그는 담임선생의 칭찬도, 친구의 부러움도 관계치 않고 묵묵히 애비 노릇만 할뿐이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물알”은 학부모회의에 와서도 끄덕끄덕 졸기만 한다.   어느 날 그는 아닌 밤중에 친구 산호(별명은 개미)를 불러 가지고 맥주 여섯 병을 마시고 나서 혀 고부라진 소리로 “여자 생각 나 죽겠다”고 호소한다. “여자 생각 나 죽겠다”― 이 어찌 “물알”만의 부르짖음이라고 하겠는가? 이 소설에 나오는 담임선생님의 말 대로 56명 학생 중 어머니나 아버지가 출국한 학생이 46명이니 82%를 웃돌고 있다. 80%의 부부가 장기간 별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인권 부재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연암 박지원 소설에 나오는 열녀 함양 박씨도 치솟는 욕정을 참을 길 없어 밤바다 동전을 매만지고 굴려 그 모서리가 다 닳아빠졌다고 한다. 성적 욕망은 인간의 무의식 중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며 성적 욕구불만은 사회의 불안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휘의 소설 《울부짖는 성》은 민초의 고뇌를 성적 욕망의 억눌림과 그 위기라는 차원에서 다룬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장춘식은 최근 몇 년간 현장비평의 선두에 서서 활발한 비평활동을 전개한 중견 평론가이다. 그는 평론《일상과 꿈 사이의 방황》에서 문예창작심리학과 형식주의비평방법으로 전춘매의 시집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현대문명에 권태를 느낀 나머지 동(動)적인 세계보다 정(靜)적인 세계, 현재의 시간과 공간보다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전춘매의 시의 특징을 포착함과 아울러 그의 시에 내재한 역설의 미학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했다. 특히 자기가 총애하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무분별하게 추어올리는 진부한 관행을 지양하고 전춘매 시인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감 있게 분석함으로써 건전한 현장비평의 한 모범을 보이고 있다.    2007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상작들을 민초들의 삶과 애환 및 그 생명력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소재와 주제는 전환기 우리문학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본질적으로 배부른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배고픈 자를 위해 존재하며 약한 자를 달래고 약한 자를 위해 항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의 소외(疏外)를 극복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 2008년 8월 12일, 연길에서   
23    디아스포라의 시학 댓글:  조회:2061  추천:43  2011-04-19
디아스포라의 시학김호웅         가을비 쓸쓸하게 내리는데        고독한 내 신세 구 누가 알아주랴        창밖에 구질구질 밤비 내리고        외로운 초불 켜고 머나먼 고국을 그리네.      당나라에 가있던 최치원(857~?)의 시이다. 12살 어린 나이에 만리타향 당나라에 가서 16년간이나 유학하고 벼슬살이를 살았던 최치원, 그는 이들은 이국타향에서 나그네로 떠돌면서 늘 소외감을 느꼈다. 그는 오매에도 고국  산천과 부모형제들을 그리고 고국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수많은 시문을 남겨 당나라에 크게 문명을 떨쳤는데 그 중 고국을 그린 가장 감동적인 한시가 바로 상술한 시이다.   이 시에서 보다시피 문학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물음에 답을 준다. 즉 “나” 는 누구인가? “나”의 생존상황은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거나 그러한 물음에 답을 줄 수 없는 문학은 의미가 없다. 요즘 세계적 범위에서 화두(話頭)에 오르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문학(diaspora writing, 離散寫作)이 이에 해답을 줄 수 있는데 사실 1990년대 이후 토니 모리슨, 주제 사라마구, 고행건, 오르한 파묵 등의 경우와 같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부분 작가들이 디아스포라였다.    약 200만으로 추산되는 조선족은 조선반도에 살다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동북에 정착한 과경민족(跨境民族)의 후예들로서 오늘도 여전히 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의 특성을 갖고 있다. 조선족공동체에 내재한 디아스포라의 성격을 인정하고 그 잠재적 창조성을 십분 발굴, 발휘할 때만이 우리 조선족문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 飛散)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인데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은 후 세계 각지로 나가 떠돌이생활을 해온 그러한 비참한 상황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유대민족은 자기의 고토나 고향을 떠나 타향, 타국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의 문화적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 둘째는 유대민족은 역사적으로 수난을 당했다(victimhood, 受害)는 의식이다. 셋째는 바빌로니아는 유대인들의 추방지요 그들이 수난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들이 자기의 문화를 재건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디아스포라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대역사에서 나온 디아스포라 개념과 현대 디아스포라 개념 사이에는 연계성도 있지만 구별점도 있다고 본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현대적인 디아스포라의 출발점으로 되지만 그 규범으로는 될 수 없으며 현대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형태를 다 대변할 수는 없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디아스포라는 주로 지난 20세기의 근대적인 여러 가지 힘, 이를테면 정치권력, 경제력이나 군사력, 전쟁이나 혁명 등이 낳은 “경계적인 존재”를 지칭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민국가라는 틀에서 쫓겨난 존재로서 경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또는 민족공동체이다.    이러한 디아스포라적인 인간 또는 민족공동체는 경계적인 삶, 변두리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부동한 문화와의 모순과 충돌 또는 교류와 영향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디아스포라의 개체 또는 민족공동체는 자기의 고토와 고유문화에 대한 짙은 향수와 집착을 갖는 동시에 다른 문화에의 동경과 접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디아스포라의 개체 또는 민족공동체는 문화적 변이(變異)를 일으키게 되며 혼종성(hybridity) 또는 다중문화신분(culture identity)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모체에서 찢겨나간 자의 상처”이고 아픔인 동시에 “일종의 특권이며 다시 얻을 수 없는 우세”로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잡종강세(雜種强勢)는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머 바바(1949- )는 새로운 문화는 다양한 문명들이 교차되는 “걸출한 변두리”에서 파생된다고 하였다.      물론 디아스포라는 다른 문화와 교류 또는 접목을 함에 있어서 자기 문화의 뿌리를 지켜야 만이 전반 인류문화의 다원화에 일조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주변 문명과 문화에의 일방적인 동화(同和)는 문명 또는 문화공동체의 개체수를 격감시키게 되므로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세계를 만드는데 불리하다.      디아스포라적인 실존상황과 가치관을 다룬 것을 디아스포라 글쓰기(diasporic writing, 離散寫作)라고 하는데 이를 광의적인 디아스포라 글쓰기와 협의적인 디아스포라 글쓰기로 나눌 수 있다.    광의적인 디아스포라 글쓰기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장구한 발전과정과 독특한 전통을 갖고 있다. 서방의 경우, “유랑자 소설(picaresque novelists)”이나 “망명작가(writers on exile)들의 작품이 그러하다. 유랑자 소설의 인물들은 시종 유동(流動)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데 그 전형적인 소설로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트웨인의《톰 소여의 모험》등을 들 수 있다. 몰론 이 경우 작가 자신이 외국에 망명했거나 외국에서 유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망명작가들의 경우는 그들 자신의 가정적 불행, 그들 자신의 지나친 선봉의식(先鋒意識)이나 기괴한 성격, 또는 그들 자신이 모국의 고루한 문화와 비평관행에 불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하는 수 없이 타국으로 망명한다. 그들은 외국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빛나는 작품을 창작해낸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그렇고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이 그러하며 또 아일랜드의 조이스, 영미 모더니즘 시인 엘리트가 그러하다. 이들은 외국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모국과 민족의 현실을 깊이 반성하면서 독특한 형상과 참신한 견해들을 내놓았다.   협의적인 디아스포라 글쓰기는 상술한 유랑자 소설과 망명작가 작품의 연장선 위에서 형성되었지만 주로 20세기 이후 현대적인 의미의 디아스포라 현상과 관련된다. 여기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문제들이 화두에 오른다.    첫째는 잃어버린 고토와 고향에 대한 끝없는 향수(鄕愁)이다.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바와 같이 망명이란 “개인과 고토, 자아와 그의 진정한 고향 사이에 생긴 아물 줄 모르는 상처로서 그 커다란 애상(哀傷)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향수는 디아스포라의 영구한 감정이며 그것은 또 잃어버린 에덴동산에 대한 인류의 원초적인 향수와 이어져 제국의 식민지배와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        둘째는 디아스포라는 모국과 거주국의 중간위치에 살고 있기에 “집”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국과 거주국 모두에게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 이를테면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잃은 자의 고뇌와 슬픔, 모체 문화로의 회귀와 그 환멸, 사랑과 참회를 통한 화해, 근대와 전근대의 모순과 충돌, 그리고 이질적인 문화형태들의 숙명적인 결합 등 감동적인 야야기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현대문학의 최고의 주제 ― 인간의 소외(疎外)와 맞닿아있으며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획득할 수 있다.    셋째로 디아스포라는 모국과 거주국 사이에서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아주 미묘한 “중간상태(median state, 中間狀態)”에 처해 있고 “경계의 공간(liminal, 閾限)”을 차지하고 있어 보다 넓은 영역을 넘나들 수 있다. 하기에 디아스포라의 경력은 풍부한 소재를 약속해 준다. 이국(異國)의 기상천외한 자연, 인정과 세태를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국이라는 타자(The other, 他者)를 통해 자기 민족과 문화를 비추어볼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형상을 창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국의 근대적 발전상을 확인하고 유토피아적 형상을 창조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이국의 식민지현실을 확인하고 모국의 식민지 현실을 재확인하는 이데올로기적 형상을 창조하는 경우이다. 둘 다 거대한 인식적, 미학적 가치를 가진다.     넷째로 디아스포라는 “중간상태”에 처해 있고 아주 미묘한 “경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디아스포라 문화계통은 쌍개방(双開放)적 성격을 지니며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다중문화구조를 규정한다. 이러한 다중문화구조를 가진 “제3의 문화계통”은 단일문화구조를 가진 문화계통, 즉 모국과 거주국의 문화계통에 비해 더욱 강한 문화적 기능과 예술적창조력을 갖게 된다. 특히 예술적 형식에 있어서도 고금중외의 우수한 문학과 예술의 기법을 십분 수용해 변형, 환몽, 패러디, 아이러니와 역설 등 다양한  기법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디아스포라의 시학에 비추어 조선족공동체와 그 문학에 대해 말해 보자.    우리문학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혜초의 여행기《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나 이 글의 서두에서 본 최치원의 한시《가을비 속에서》가 바로 광의적 의미에서의 디아스포라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조선족 문학의 경우 강소성 남통에서 외롭게 살았던 김택영의 시문(詩文),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활동했던 주요섭, 김광주의 소설들, 그리고 용정, 신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안수길, 최서해, 김창걸 등의 소설들을 모두 협의적인 의미의 디아스포라 글쓰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후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졌고 중국 공민의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으니 해방 전과 사정이 좀 다르다고 하겠으나 디아스포라의 아픈 기억은 여전히 집단무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의 조선족집거구는 여전히 조선반도 문화와 중국의 주류문화 사이에 있는 경계적인 지역이요, 여기에 살고 있는 작가들은 어차피 디아스포라의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황차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한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나라로의 이동 및 산해관 이남 대도시로의 이주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양산하고 있다.    조선족 작가의 경우, 연변을 비롯한 동북의 조선족작가들은 중국과 조선, 한국 사이를 자유롭게 나들고 있고 지어는 유순호처럼 미국에, 장혜영처럼 한국에, 김문학처럼 일본에 장기 거주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원길, 황유복, 오상순, 서영빈, 장춘식, 김재국처럼 조선족집거구를 떠나 중국의 수도요, 다양한 문화의 합수목인 북경에 “걸출한 변두리”를 조성해 가지고 활발하게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모두의 움직임을 통틀어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조선족 작가들은 이주초기부터 심각한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마음 놓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지 못했다. 한 때 모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착, 모국과 거주국 문화 사이에서의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의혹과 불신을 초래했다. 하지만 개혁, 개방 후 자유로운 문학의 시대를 맞아, 다원공존과 다원공생의 세계사적 물결을 타고 디아스포라의 삶과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그러한 갈등을 극복, 승화시켜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시각으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조성희의 단편소설《동년》, 박옥남의 단편소설《둥지》,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와 연변을 다룬 석화의 연작 서정시《연변》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럼 석화의 서정시《연변 2, 기적소리와 바람》을 보자.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 한족말로 우(嗚) ―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바람은 퍼~엉(風) 불고 조선족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 바람 바람 바람 분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을 나는 새새끼들조차 중국노래 한국노래 다 같이 잘 부르고 납골당에 밤이 깊으면 조선족귀신 한족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저들끼리만 가만가만 속삭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월의 거리에 넘쳐나는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    이 시는 상이한 것들이 갈등이 없이 공존하는 다문화적 혼종성, 쉽게 말하자면 조선족과 한족이 연변땅에서 공존, 공생해야 하는 숙명 내지 필연성을 유머러스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제1연에서는 기차와 바람을 의인화하면서 “붕 ―”과 우(嗚)―”, “바람”과 “퍼~엉(風)”의 대조를 통해 조선족과 한족의 언어적 상이성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제2연에서는 미물인 새들도, 납골당의 귀신들도 서로 상대방의 소리와 언어에 구애를 받지 않고 의사소통을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두 문화형태 간의 대화와 친화적인 관계를 하늘을 날며 즐겁게 우짖는 새와 납골당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귀신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유머러스하게 표현함으로써 몽환적인 색채를 십분 살리고 있다. 제3연은 이 시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내적 구조에서 보면 “전(轉)”과 “결(結)”에 속하는 부분인데 연변의 풍물시라고 할 수 있는 “6.1” 아동절 날,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 고 색채적 이미지를 구사함으로써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논리로 자연스럽게 매듭짓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시야말로 디아스포라 글쓰기의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고 필자가 앞에서 구구히 논의한 디아스포라의 시학을 일목요연하게 구현했다고 본다.    이제 석화 시인은 물론이요, 우리문단의 더욱 많은 작가, 시인들이 문화적 자각을 가지고 우리민족의 삶과 운명을 극명하게 파헤칠 수 있는 디아스포라 글쓰기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디아스포라, 그것은 우리 조선족문학의 “잃어버렸던 주제”요, 특성이며 세계문학과 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通路)이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2일, 연길 연서가 민항아파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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