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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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야브네학교와 명동학교(김호웅)
2020년 08월 27일 07시 32분  조회:889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유태인 천년사"라는 좋은 책이 나왔다. 유태인의 파란만장한 력사와 그들의 종교와 문화, 교육과 지혜, 그들의 세계적인 활약상을 소상히 소개했다.

유태사회에서는 제관장(祭官長)을 랍비라고 하는데 랍비는 유태인에게는 교사가 되기도 하고 재판관이 되기도 한다. 이 책에도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와 야브네학교에 관한 이야기는 나온다. 그 이야기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66년 유태민족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때 크게 활약한 랍비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요하난 벤 자카이다. 로마군대가 유태의 사원을 봉쇄하고 유태인을 전멸시키려고 했을 때 요하난은 온건파의 수령으로 있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강경파의 엄밀한 감시를 받았다. 그는 유태민족이 영원히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가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로마의 장군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요하난은 로마의 장군을 만나기 위해 큰 병에 걸린 것처럼 꾸며가지고 일부러 침상에 드러누웠다.그는 대승정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마침내 그가 죽어간다는 소문이 퍼졌고 얼마 있다가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의 제자들은 성안에는 묘지가 없다는 구실을 대고 그를 관에 넣어가지고 성밖으로 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경파 수비병들은 그가 정말 죽었는지 확인해 보겠다 했다. 그들은 칼로 관을 찌르려 하였다.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필사적으로 막아나섰다. 요하난은 제자들이 보호해준 덕분에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고 로마의 장군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요하난은 로마장군을 보고 

"나는 당신에게 로마 황제에 대한 경의와 똑같은 경의를 표합니다."

하고 말했다. 로마 장군은 자기네 황제를 모욕했다고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당신은 분명 다음에 황제로 될 것입니다."

하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장군은 쓴웃음을 짓더니

"그렇게 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의 부탁은 무엇이요?"

하고 요하난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요하난은 정색을 하고

"단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방 한칸이라도 좋으니 10여명의 랍비들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 하나를 남겨주십시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학교만은 다치지 말아주십시오."

하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요하난은 예루살렘이 로마군사에 의해 조만간 점령, 붕괴되고 대학살이 자행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있었다. 그러나 학교 하나만 있다면 유태의 력사와 전통은 이어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마침내 요하난은 로마장군으로부터 "생각해보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얼마 후 황제가 죽고 장군이 황위에 올랐다.

예루살렘은 무지한 로마군사들에게 짓밟혀 그야말로 "돌 우에 돌이 없을 지경"으로 풍비박산이 났고 십자가마다에 유태인의 시신들이 디룽디룽 매달려있는 살풍경을 이루었다.

하지만 새 황제는 요하난과의 약속만은 지켰다. 그는 로마의 군사들에게 "작은 학교 하나만을 남겨두라"고 명령했다. 그게 바로 유명한 야브네학교였다. 이 학교에 남은 랍비들이 유태의 력사, 전통과 지식을 지켜내고 후세들을 키워냈음은 물론이다.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의 생활방식 역시 그 자그마한 야브네학교에 의해 지켜졌던 것이다.

이는 유태인에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전통이 얼마나 유구한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사실 세계에서 유태인만큼 오랜 세월 수난과 고통을 받은 민족은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만 나치 독일의 반유태주의 광란에 의해 600만명의 유태인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교육을 숭상하고 스승을 아버지보다도 더 존경하면서 대를 이어 열심히 공부했고 구름처럼 떠도는 디아스포라로 살았지만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세계 최고의 두뇌들을 육성해냈다. 유태인은 "세계에 세 위대한 두뇌를 기여했다"고 말하는데 이 세 두뇌란 바로  맑스, 프로이드,아인슈타인이다. 이들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령역에서 전대미문의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고 인류사회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유태인의 력사를 읽노라면 자연 우리 조선민족도 교육을 숭상하고 스승을 존경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민족이 아닐가 생각한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조선족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리상설 등은 이민초기인 1906 10월 룡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1907년 리상설이 고종의 특사로 이준과 함께 네들란드 수도 헤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룡정촌을 떠나는 바람에, 특히 경제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서전서숙은 1907 9 1년만에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였다. 하지만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1908 4월에 설립된 명동학교는 김약연 선생이 교장을 맡았는데 사면팔방에서 빼여난 선비들을 모셔다 교편을 잡게 하였다. 명동학교는 갈수록 명성을 드날려서 남북만과 로씨야 연해주,심지어는 조선에서까지 배움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 명동학교는 역시 일제의 간섭과 경영난으로 1930년대 초 문을 닫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10여년간 신문화의 보급과 민족의식의 함양에 크게 기여하면서 12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중에는 항일운동가와 교육자로 방명을 남긴 이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 민족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아리랑"을 만든 라운규, 통일운동가 문익환,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소설가이며 교육자인 김창걸, 불멸의 시인 윤동주, 주덕해를 혁명의 길로 이끈 공산주의자 김광진 등 수많은 영재들을 키워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약연은 우리 조선족의 요하난 벤 자카이요, 서전서숙이나 명동학교는 우리 조선족의 야브네학교라고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요즘 명동에 가보면 명동학교가 옛모습 그대로 복원된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김약연선생의 공덕비는 웃머리 한 귀퉁이가 뭉텅 떨어져나갔고 비문도 마모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였다. 해방후 김약연 일가가 지주로 성분을 받은 연고로 이 공덕비도 기석에서 뿌리가 뽑혀나가 마을 앞 개울가의 징검다리로 쓰였는데 이를 1980년대 초에 다시 가져다가 세운것이라 한다. 참으로 볼썽사납다 하겠다. 하루 빨리 원질이 좋은 백옥을 구해다가 곱게 다듬어 김약연 선생의 공덕을 돋을새김해서 세웠으면 한다.

우리 조선족교육의 터전을 만든 위대한 교육자의 공덕비이기 때문이다.

2016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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