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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아래깡동과 마우재(허성운) 댓글:  조회:1864  추천:0  2020-08-03
아래깡동과 마우재 삶과 문화 (허성운) 아래깡동이란 말은 로씨야 연해주지역을 일컫는 함경도 사람들이 불러왔던 말로서 오늘날 우쑤리강과 흑룡강 일대를 아우르는 땅이름이다. 아래깡동 지명은 함경도 사람들의 력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과거로부터 근현대사를 관통하여 숨쉬며 살아있는 유서 깊은 오랜 땅이름이다. 사책에 의하면 7세기로부터 많은 몽골인들은 네스토리교(聂斯脱里教)를 믿게 되는데 이를 중국에서는 경교(景教)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몽골인들은 라싸 불교를 신봉하고 있지만 13~14세기까지만 해도 샤머니즘과 네스토리교를 믿어왔었다. 네스토리우스교가 동방에 전도된 것은 8~9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오랜 세월을 거쳐 오다가 16세기 이후 이슬람과 동정교에 의하여 밀려난다. 로씨야 연해주 석관무덤들에는 네스토리우스식 십자가가 새겨있으며 훈춘 팔련성 삼존불상 보살상에도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있다. 몽골에서는 네스토리교(聂斯脱里教)를 믿는 사람을 예리커훈(也里可温)이라고 부르는데 몽골어로 하느님 은총, 은혜를 받은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여있고 돌궐어로는 백인을 뜻한다. 여기에서 예리커훈의 소리와 뜻은 함경도 사람들이 말하는 아래 깡동이란 땅이름과 맥락이 이어진다. 즉 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1871년 지신허와 연추 등지에 살던 500여명이 아래깡동 사람들을 아무르강 지류인 사마라 강가에 이주시키고 블라고슬로벤노예라 땅이름을 붙인다. 로씨야어로 ‘신의 축복 받은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아래깡동이라고 써왔던 오랜 말을 로씨야어로 옮긴 지명으로 풀이된다. 기근과 학정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 매서운 삭풍을 헤치며 찾아들어온 아래깡동은 선인들에게 있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출구이자 자유와 방랑의 끝없는 대지였다. 극빈 속에서 강도, 살인 방화가 몰아치던 암울한 세월 속에 이들은 종교를 신봉함으로써 국적과 토지문서를 가질 수가 있게 되여 말 그대로 가난한 함경도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의 축복을 내린 곳이 아닐 수가 없었다. 력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래깡동은 분명 수많은 함경도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왔던 활동무대였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서 로씨야가 애훈조약과 북경조약을 체결하면서 아래깡동 땅을 강점한다. 학자들은 함경도 사람들이 로씨야인을 뜻하여 부르는 마우재라는 말 어원을 중국어(老毛子)에서 왔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사실은 만주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만주어는 얼굴과 머리털이 붉은 사람 또는 그런 탈을 쓴 귀신얼굴을 말한다. 민간에서는 마우재를 부에눈(함경도 방언 부엉이 눈) 등 다양하게 불러왔다. 아래깡동으로 오가는 길목에 놓여있는 중국 훈춘 라선동(羅鮮洞 )지명을 세계한민족문화대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신라(新羅)와 조선(朝鮮)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서 불렀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사실은 마우재 동네 루스키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오늘날 와서 아래깡동은 로씨야어로 프리모르스키(바다와 접해있는 땅이라는 뜻)라고 부르고 한국과 일본은 연해주라고 표기하고 있다. 함경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불러왔던 아래깡동이란 땅이름은 은페되고 기피되여가고 연해주란 말이 각종 서적은 물론이요 학술저서까지 공용어 대우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길목 아래깡동은 선인들의 삶이 살아 숨쉬던 땅이름이며 우리 력사의 주변부를 메워주기도 하고 외곽을 넓히는 기능을 분명하고 있지만 이처럼 소외되여왔다는 대목은 우리 모두가 주목하여보아야 한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언어 표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틀로 력사를 꿰여만들다 보니 결국 타자의 손에 의해 우리 력사문화가 주물리여가고 있다는 점이다. 로씨야와 일본 사료에서 함경도 사람들이 아래깡동을 개척한 력사를 남기려 하지 않거나 남기더라도 거지무리로 떠도는 구석진 사실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외곡했다. 로씨야인과 일본인보다 먼저 아래깡동에 들어서서 개척한 선인들의 력사를 실제로도 보지 못했기에 사실상 함경도 사람들이 진실된 력사는 방치되다싶이 되였다. 누렇게 빛바랜 아래깡동에서 찍은 박물관 사진 속의 사람들이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짓밟힌 운명에 분노하며 암울한 사회 부조리에 대한 자각과 공분 의식 속에서 자유의 태동이 미숙하게나마 이들의 눈빛에서 감지된다. 그러면서도 근대조선력사자료에는 이들을 법을 어긴 월경 죄인으로만 외곡하여 기술하고 있다. 차마고도, 비단의 길, 미국 서부 횡단도로와 같은 길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지여있지만 정작 우리 선인들이 아래깡동으로 진출한 개척루트는 오늘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어 력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아래깡동은 우리 력사가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왔던 기억의 언덕이며 수천만 선인들의 넋이 묻어있는 성지이며 우리 문화가 고스란히 숨쉬는 수원지이다. 선인들의 함경도 탈출루트를 따라 그 위대한 력사의 로정을 추적하다 보면 우리도 신발 끈을 고쳐매고 흰 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 아래깡동으로 가는 렬차에 올라설지도 모른다. 연변일보
106    려행이 고픈 계절(궁금이) 댓글:  조회:1036  추천:0  2020-07-29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떠나간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쯤 가고 있을가        “어디 쯤 가고 있을가”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다. 지난 토요일에 장거리 자전거 려행을 떠난 친구가 올린 사진을 보면서 떠오른 노래다. 자전거에 빠진 친구는 해남도와 청해호에 이어서 이번에는 내몽골로 향했다. 한번 떠나면 언제 온다는 기약도 없이 그냥 가는 데까지 간다. 방랑 시인 김삿갓이 시로 산천을 누볐다면 이 친구는 자전거로 섭렵하고 있으니 그 반경이 훨씬 너르다. 그만큼 보고 느끼는 것도 더 많을 건데 시인이 아니여서 모멘트는 조용하다. 한편 그 많은 풍경과 감수를 내가 가졌으면 하는 부러움도 있다.         나는 아직도 직장에서 이런저런 일에 매여 있는데 같은 나이의 친구가 몇년전부터 저렇게 무념무상으로 자전거 려행을 다니는 게 마냥 부럽기만 하다. 자동차처럼 기름을 넣는 일도 없고 산천을 찾아 다니니 고급호텔에 들 일도 없다. 그냥 지나가다 만나는 마을에서 잠깐 잠자리를 빌려서 하루 묵으면 또 다음날 아침의 즐거운 려행이다.        청해호의 경우 자전거로 한바퀴 돌려면 4~5일은 걸려야 한다. 차를 타고 지나오면서도 감탄이 쏟아지는 호수를 천천히 자전거로 돌면서 감상할 수 있는 풍경은 훨씬 더 색다를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애호도 체력도 없다. 편안하게 차안에 앉아서 경관도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이곳은 해발이 높아서 저녁에 술을 마시기도 좀 부담스럽다. 식당 주인의 말로는 청과주를 적당히 마시는 건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도 시험해본 적이 없어서 다가가기 두렵다. 마셨다가 만약에 반응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신체의 고통도 문제겠지만 남은 려행계획이 파탄되는 것도 무척 아까운 일이다.        일찍 라싸에서 2박3일을 있으면서 밤잠을 설친 교훈이 있어서 고원에서는 술과 샤워에 예민하다. 물론 체질이 맞는 사람들은 첫날에 술을 취토록 마시고 푹 자고 나면 그게 오히려 더 잘 적응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부럽기는 했지만 감히 실천은 못해봤다. 여기서 체질이 맞는다고 함은 체질이 좋다는 것과 구별해 봐야 한다. 현지인에 따르면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페활량이 커서 산소 소모량이 많기 때문에 고산 반응이 더 심할 수도 있다. 술에서 양보했으면 시원하게 샤워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현지인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돼 그날 저녁부터 온밤 꿈을 꾸는 것 같은 상태에서 헤매였다. 고원에서는 원래 산소가 부족한데다 샤워실은 공간이 좁아서 더 희박하다는 게 현지들의 해석이다. 따라서 이곳에 도착해서는 이틀정도 적응한 다음 샤워를 하는게 좋다고 한다.        친구는 전에 해남에서 자전거 려행을 하면서 마침 북경에서 출장을 간 친구를 만났다. 천애지각에 친구가 있다더니 바로 이런 경우다. 자전거 려행도 소중하고 출장도 중요하지만 이 한끝에서 만났는데 술로 반가움을 나누지 않으면 우정에 대한 례의가 아니다. 그날 둘은 각자의 계획을 다 제쳐놓고 환상의 상봉주를 밤 늦게까지 즐겼다.        우리는 자기 나라에 이렇게 환상적인 섬이 있음에도 동족의 나라라는 친근감에서 그런지 한국의 제주도를 잘 찾는다. 나도 례외는 아니였으니 일부러 려행을 다녀온 적도 있다. 제주도는 돌과 바람과 녀자가 많은 곳이라더니 며칠이고 우산을 들고 비속의 랑만만 즐기다가 왔다. 해남은 약 제주도 면적의 19배에 해당한다. 제주도에서도 자전거 려행을 즐기는 이들이 많던데 해남을 찾은 친구는 아주 광활한 무대에서 자전거도 마음껏 타고 부가 행운으로 약속에도 없었던 친구를 만났으니 정말 복받은 려행이였다.       청해나 해남은 먼저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 것과는 달리 친구가 이번에 떠난 내몽골 려행은 북경에서부터 자전거로 움직여야 한다는데서 더 도전적이다. 내몽골과 북경의 접경지에서 찍은 사진을 단체방에 올렸길래 양고기를 많이 먹고 보신해 오라고는 했는데 나는 북경의 입맛에 습관돼서 그런지 내몽골 현지에서 먹는 양고기라고 하여 특별히 맛있는 줄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후룬벨쪽의 물고기 료리가 더 인상 깊다. 내몽골 하면 다음으로 떠오르는 게 초원이지만 나는 후룬벨쪽의 바다를 방불케하는 호수가 더 인상적이다. 물론 내몽골은 동서 거리가 2400키로메터라 동부 중부 서부의 풍경이 각기 자체의 특점을 갖고 있다. 자전거로 전역을 돌기에는 벅찬 거리지만 우공이 산을 옮기는 정신으로 천천히 향수하면 시간문제다. 욕심을 내지 말고 한번에 조금씩 알아가며 해마다 다녀오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나는 려행을 나가지 못했으니 친구의 려행과 전에 다녀왔던 추억으로 오늘의 대리만족을 한다. 하늘을 다시 나는 그날 꼭 자세한 기록을 소중하게 남기고 싶은 하루다.       나는 지금 인생의 어디 쯤에서 가고 있을가.   궁금이
105    기대되는 농업현대화 댓글:  조회:1587  추천:0  2020-07-24
기대되는 농업현대화   김준환   요즘 우리 주변에서 농업현대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어 농민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우리 농업, 농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농사도 해볼 만한 직업이 되였다. 더는 맨주먹의 주먹구구식의 옛날 농사가 아니다. 농작업에 농기계를 운전해야 하고 컴퓨터로 전자상거래를 해야 하는 시대이다. 농사일이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 부럽지 않는 창업으로 되였다. 이제 농업은 더는 단순한 생산 위주의 산업이 아니다. 가공과 류통, 서비스 등 복합산업으로 전환되였다. 미래농업은 경쟁력을 갖추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우리 농업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며 날로 선진화, 규모화, 첨단화되는 농업의 새로운 흐름을 따르려면  농업현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우리의 농업발전도 급격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되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농사에 우주의 위성까지 활용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미래농업은  분야별로 지금보다 더욱 세분화되고 다양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양한 사회 요구에 부응하는 첨단농업기술의 발달이 예상되고 있으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곧 현대농업이다.   농업, 농촌 현대화는 현대농업 산업체계, 생산체계, 경영체계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 현대농업 경영체계는 혁신적인 농업 경영관리 방식으로 농업의 전반적인 생산률과 농업생산력 수준을 끌어올리는 농촌현대화의 중요한 조치로 되고 있다. 현대 경영리념은 선진과학기술과 량질생산요인을 인입할 수 있어 농업의 혁신력, 경쟁력, 생산능률과 비교효익을 제고할 수 있다. 농업현대화를 추진하는 데서 중점임무는 ‘3농' 분야의 부족점을 메우는 것이다.   지난 5년간 우리 주에서는 현대농업의 산업, 생산, 경영 ‘3대 체계’ 건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농업현대화의 진척에서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다. 지난해 전 주 농산물 가공업 판매수입은 314억 3000만원에 달했고 향촌관광 수입은 19억 6000만원에 달하여 농업 관련 봉사업의 융합발전 수준이 부단히 제고됐다. 그동안 우리 주는 살기 좋은 아름다운 행촌건설을 활기롭게 전개한 데서 국가급 아름다운 레저향촌 8개, 성급 아름다운 향촌 73개를 구축했다.   농업현대화는 미래농업이 가야 할 길이다. 농업현대화는 향후 우리 농업의 발전의 기회로 된다. 농업, 농촌 현대화를 다그쳐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 주는 이미 총체적 설계도를 내놓고 있다. 우리 주는 향후 특색농업, 효익농업을 부단히 장대시키고 ‘실정에 따라 량식업, 축산업, 림업, 관광업 발전시키는' 발전사로에 비추어 마을마다 특색품목이 있고 향진마다 특색사업을 만들어 중점산업이 두드러진 제1, 제2, 제3 산업이 융합된 현대농업 산업체계를 형성하려 한다. 그러려면 우선적으로 록색, 생태의 현대농업 생산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규모농업, 브랜드농업이 육성되고 신형 규모경영 주체가 확립되고 농업 사회화 봉사체계 건설이 뒤바침될 때 우리의 농업, 농촌은 크게 발전할 수 있다. 농업현대화를 추진하는 농업의 전면 승급, 농촌의 전면 진화, 농민의 전면 발전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농업, 농촌은 새로운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   연변일보 
104    진달래는 피고 천지꽃은 진다 댓글:  조회:1941  추천:1  2020-07-20
어릴 때부터 익혀온 고향 사투리가 엄청 많지만 그중에서도 천지꽃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꽤 오래 되였지만  필자는 아직도 진달래라는 표준어 대신 천지꽃이란 방언을 더 자주 쓰고 있다. 꽃부데(함경도 방언 꽃봉오리)가 앉은 가지를 꺾어 물병에 꽂아두면 연분홍 꽃이 곱게 피여난다. 해마다 천지꽃이 필 무렵 전쟁터에 나갔던 아들이 돌아온다고 즐거워하시던 외할머니 그러다 때아닌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면 천지꽃이 죽는다고 락루(함경도 방언 눈물 흘리다)하시군 하였다. 몇해 지나 아들 사망통지서를 받은 후로부터 천지꽃이 피기 시작하면 고령군 개포리라는 큰아버지가 죽은 곳 지명을 입속말로 곱씹어 외우군 하시였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필자는 낙동강류역 고령군 개포리 땅 큰아버지 시신이 밝혀있는 곳을 찾았어도 울 수는 없었다. 세월을 돌이킬 수 없어서 혹독하고 슬플 수만 없어서 그저 처절할 뿐이다. 이 세상에는 향긋한 향기로 코끝을 간질이는 화려한 꽃들이 많고 많지만 유독 천지꽃이 내 맘속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잡게 된 것은 어린시절이 꽃잎을 질근질근 씹어 단물로 배고픔을 달래던 추억만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숙성, 발효되여온 천지꽃이란 말은 알른알른 선인들의 체취가 묻어있어 살결처럼 따뜻한 체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 삶이 붉게 타는 리유는 바람을 타고 배재굽이를 넘나들었던 투박한 함경도 토박이말 천지꽃이 필자를 한껏 붉게 물들여놓았던 까닭인가 본다. 그 옛날 화전 불길처럼 산언저리에 붉게 피여나는 천지꽃은 아스라하게 떠오르는 추억같이 옛이야기를 품고 내 살과 피를 파고들어와 꽃떨기가 싱싱하게 피여나있다. 춘하추동의 순환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섭리라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지만 주름이 늘어가도 천지꽃 이름만은 엄동설한에서도 맘속에 만발하게 꽃을 피운다. 천지꽃 이름은 ‘天指花’로 오랜 고서에도 기록되여있고 천지꽃과 사춘격인 철쭉꽃 이름과도 서로 소리가 닮아있다. 제주도 남부 서귀포지역에서는 진달래를 젠기꽃으로 말하여왔고 젠기꽃을 꾹꾹 눌러 만들어놓는 빙떡을 젠기라고 불렀다. 몽골어에서는 테를지( 特日乐吉)라 한자로 표기하는데 천지꽃 뜻과 음이 일맥상통된다. 천지꽃잎을 뜯어 말리우면 짙은 향기가 풍기여 함경도에서는 예전에 절에서 가루를 내여 향불로 피워왔었다. 만주어에서는 천지꽃을 ‘niyanci hiyan’(安楚香)라 표현하고 있다. 일찍 피고 일찍 지는 꽃의 시주팔자 탓이라 할가 천지꽃 이름은 우리 력사 여백을 메워주기도 하고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기능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이제 바야흐로 우리 곁을 떠나 저 망각의 대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진달래광장, 진달래마을, 진달래국수, 진달래비행장 이름은 다투어 피여나 장관을 이루고 있지만 천지꽃이란 말은 각종 행사는 물론 여러 방송, 신문, 서적에서도 그 자취가 사라진 지 오래되여 이제 두 눈을 비비고 샅샅이 뒤져서 찾아보아도 좀처럼 보기 힘든 사어로 되여버렸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천지꽃이란 말을 쓰는 마지막 세대로 남아있는 가장 서글프고 고독한 세대일지도 모른다. 여러 줄기가 한데 어울려 무더기를 이루며 피여나는 천지꽃은 주로 뿌리로 번식하는 관목이다. 모든 꽃은 뿌리가 땅속에 박혀있으면 늦든 이르든 언젠가 꽃봉오리가 열리고 꽃이 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열매가 달리고 씨앗을 퍼뜨린다. 허나 천지꽃 뒤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천지꽃 뒤에 남은 것은 그 옛날 물병에 꽂은 꽃처럼 시들어버린 메마른 추억 뿐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를수록 천지꽃 기억은 지워지고 그 우에 진달래 이름이 덧씌워진다. 진달래는 피고 천지꽃은 진다. 천지꽃에 대한 기억은 때론 블랙박스처럼 압축되고 저장되여있더라도 종당에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차츰 삭제되여갈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말의 변천사에서도 보듯이 언어의 생로병사 시집, 장가는 연변과 함경도 방언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식한 학자들에게도 연변과 함경도 방언이 외목(함경도방언 따돌림)에 나고 왜곡되여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천지꽃 이름은 물리적으로 만지거나 끄집어낼 수 있는 물체가 아니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특별한 계기가 생기면 아직도 깊숙이 저장한 기억들을 불러내와 우리 마음을 흔든다. 다른 꽃들을 볼 때는 건성이지만 유독 천지꽃만은 우리 맘속에 자리잡고 들어와 힘겹고 지친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 꽃잎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천지꽃과 진달래는 동일한 꽃을 말하지만 천지꽃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진달래로 바라보는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진달래는 피고 천지꽃은 진다. 연변일보 
103    달팽이의 약속ㅣ그 시절의 반주임 댓글:  조회:373  추천:0  2020-07-13
달팽이의 약속ㅣ그 시절의 반주임   글 김현철 ·   졸업시즌이다. 또 한기의 친구들이 졸업장을 안고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난다. 그러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화려한 졸업식이 없고, 졸업사진이 없고, 크고 작은 리별의 풍경도 펼쳐지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친구들은 출입규제로 인해 숙소에서 챙겨갈 자기의 짐들도 직접 정리하지 못한채 누군가가 대신 정리해 우편으로 부쳐주게 됐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비상 리별이다.    졸업학년 학생들의 담임을 맡은 최선생님의 마음은 더욱 그렇다. 매일과 같이 교내출입신청을 하여 들어가서는 친구들의 서류를 포함한 자잘한 뒤처리들을 해주며 씁쓸한 배웅을 해준다. 혹은 잠깐 얼굴을 보며, 혹은 전화로, 혹은 위챗으로 정든 학생들을 이렇게 떠나보내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취직은 어떻게 하려는지, 류학은 계획대로 될려는지, 고향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쉽게 가셔지지 않는 하나하나의 걱정들은 무거운 축복이 되여 문자를 타고, 음성을 타고 개개인의 마음속에 전해진다.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난 4년을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는 일은 그 누구한테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수없이 반복했을 그 한마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며칠전 우연히 사무실에 들렸다가 홀로 씁쓸히 서류들을 들고 계시는 최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 이런 저런 유감을 남긴 채 맡았던 반급의 친구들을 떠나보내던 기억도 새록새록 살아났다. 만약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 그 일은 그렇게가 아닌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들도 주저리주저리 갈마들었지만, 만약은 없다. 이미 발생한 유감은 지금 앞에 있는 일들을 통해 미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저런 현실과 기억들을 마주하며 오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나의 반주임’ 선생님들을 한번 모셔보려 한다. 대학공부를 마치기까지 반주임을 만나기도 참 많이 만났다. 추억의 종착역에 도착할 무렵, 나는 과연 뭔가 특별한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을가?   소학교 1학년, 엄하기로 소문난 김선생님을 만났다. “물 뿌린 듯이 조용하다”라는 것이 어떤 조용함을 가리키는지, 나는 반주임의 수업을 통해 알게 되였다. 자습시간이 되여 선생님이 간혹 사무실에 다녀오시느라 자리를 비워도 교실은 글쓰는 소리, 교과서 펼치는 소리, 약간씩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군대규률이였다. 교실문은 앞문과 뒤문 두개였는데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소란스럽던 친구들이 일제히 뒤문 유리를 주시한다. 그러다가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슥 스쳐지나는 것이 보이면 일제히 바로 앉은 자세를 취하며 숨을 죽인다. 선생님이 앞문을 뚝 떼고 들어오는 순간, 교실은 그야말로 비장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러면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강의를 시작하시였다.    반주임은 숙제를 많이 내주시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특히 련휴가 있을 시에는 숙제가 얼마나 많은지 차라리 쉬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매번 휴가전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친구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숙제포치를 기다렸다. 법관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마음이라 할가… “련습집 세벌, 과문 두벌, 수학문제집 몇페지부터 몇페지까지, 1 하나 2 둘 이렇게 100까지 갔다가 다시 거꾸로 오기를 두번…” 몰래몰래 입을 딱 벌리며 숙제를 표시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련휴를 앞둔 즐거움과 설레임은 꼬물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음이 나오는 풍경이다. 간혹 놀음에 탐해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련휴가 끝나고 첫 수업에 들어오는 모습은 세상 무너지는 표정이였다. 그럴만도 했다. 반주임은 결코 그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숙제를 안해오거나 하면 꾸중은 물론이고 선생님은 에누리없이 매를 선사했다. 한번은 친구와 교실에서 ‘붙잡을래기’를 하다가 교탁에 부딪치는 바람에 먹물이 쏟아지면서 선생님께서 며칠간 정성들여 꾸려놓은 벽보란에 붙일 자료들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날 나와 친구는 호되게 맞았다. 또 한번은 장난을 치다보니 아래 학년 교실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그 일이 선생님한테 발각되여 또 엄청 맞았다. 맞을 당시에는 무섭기도 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귀한 자식 매 한대 더 치라는 말이 있 듯이, 귀한 학생 매 한대 더 쳐도 되는 세월에 선사받았던 선생님의 ‘매’는 지금 생각해봐도 귀한 매가 맞았다.    1998년, 조선족학교들이 하나, 둘 합병되던 시절, 내가 다니던 소학교도 어느날 예고없이 진중심소학교에 합병되였고 나는 새로운 반주임을 만났다. 예쁜 얼굴에 맵시나는 차림새를 한 한선생님은 전교에서 유일하게 전동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매번 운동장에 그림처럼 나타날 때면 많은 사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누가 봐도 우아하고 멋져보였다. 오후 자습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간식으로 아이스크림 혹은 과자를 사주시군 했는데, 아이스크림이 20전 정도 더 비쌌다. 매번 선생님은 “동무네 똰쟐삥치린 먹겠슴까, 발바닥과자 먹겠슴까?”라고 물었고, 친구들은 대부분 아이스크림을 원하면서도 가격차이를 아는지라 쉽게 대답하진 않았다. 마침 반급에 넉살좋은 개구쟁이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똰쟐!”하고 대답하군 했고, 그러면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상점에 다녀오시군 했다. 한학기 밖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신 미녀선생님이셨다.    6학년이 되니 또 다른 마을의 친구들이 편입되면서 반급 조정이 이루어지고 나는 처음으로 남자반주임 김선생님을 만났다. 준수한 얼굴에 축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주시는 선생님이셨다. 특히 남학생들한테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셨는데, 수업이 끝나고나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하곤 했다. 당시 싱글이였던 선생님은 “시간이 많았다”. 방학 기간에도 친척집을 빌려 우리한테 수학을 가르쳐주셨고 기회만 되면 우리를 데리고 자연을 만나러 나갔다. 겨울이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난로에 학생들이 들고 온 도시락을 덥혀주시였고 축구공이 귀한 세월에 질좋은 공을 구해오셔서 남학생들의 귀인이 되기도 했다. 훈훈하면서도 자상하셨던 선생님, 그후에도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3호학생이 됐니? 하시며 다른 동학들의 안부도 함께 물으셨다. 한번은 선생님이 수학응용문제를 설명해주셨는데 ‘사탕꿀’을 읽는 발음이 얼마나 구수한지 저도 몰래 침을 꿀떡 삼켰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또 새로운 반주임을 만났다. 년세가 있으시고 원칙성이 강한 원로 선생님이셨는데, 교실에서는 박력있게 강의에 열중하셨고 수업이 끝나면 자식들을 대하듯이 구석구석 까근하게 관심해주셨다. 집이 학교와 가까웠지만 선생님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몸이 꽤 웅장하셨던 선생님이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 척 들어서는 걸 보면 우리는 저도 몰래 어깨에 힘이 들어가군 했다. 목소리에 독특한 울림이 있었던 선생님은 교단과 교실 밖에서 서로 다른 풍격을 선보이며 학생들의 존경을 사시였다. 하지만 2학년이 되여 중학교들마저 합병되면서 반주임이 또 바뀌게 되였다. 선생님은 그게 못마땅하셨는지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를 만나도 웃어주지 않았다. 전에 없던 굳은 표정으로 완전 다른 사람이였다. 우리는 못내 서운했고 혹시 우리가 뭘 잘못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그 비밀 혹은 그 리유를 우리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고 이후에도 알 수 없게 되였다.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새로 바뀐 반주임은 젊은 남자선생님으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학생들과 롱담도 별로 하지 않으셨고 교류도 많지 않으셨다. 요즘으로 말하면 차도남에 가까운 분이셨는데 학생들이 부적절한 언행을 보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까주군 했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반급을 이끌어나가셨다. 말하자면, 굳이 포치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알아서 움직이게 하는 마력 같은 걸 갖고 계셨다. 누구든지 인정 사정 봐주지 않고 공평성을 기하셔서 얼핏 보면 차가운 분 같지만 그 속에 따뜻함도 묻어있었다. 아쉽게도 또 1년만 함께 하고는 재차 반급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반은 절반으로 깨져 다른 두개 반급에 합병되였다. 선생님과의 더 깊은 교류도 불가능해졌고 이후에도 기회는 없게 되였다. 또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관건적인 중3, 녀자선생님이신 김선생님이 맡으신 반에 나는 편입되였고 ‘굴러들어온 이방인’의 신세로 마지막 학년 스타트를 떼게 되는가 싶었는데, 마음이 넓으신 선생님은 편입된 우리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푸셨다. 그래서 반장도 셋이나 되였다. 원래 반급에서 직무가 무엇이면 그대로 유지시켜준다는 것이였다. 쪼개짐으로 인한 잠깐의 ‘상처’는 그렇게 빠르게 아물어갔다.    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면서도 선생님은 고중입시를 위한 밤자습에 나오셔서 우리를 지켜주셨다. 공부를 하다가 문득 머리를 들어 교탁을 바라보면 선생님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계셨고 간혹 눈이 마주치면 웃으시군 했다. 따뜻한 보온병물에 두유를 들고 오셔서는 배고플 텐데 타먹으라 하셨고 집에 딱한 사정이 있을 때면 아예 두 애들을 데리고 교실에 오시군 했다. 가끔 가다 친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꾸중은 안하시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면 애들은 자세를 바로 하며 책을 보는 시늉이라도 내군 했고, 고중입시 막바지가 되여서는 하나같이 열공모드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늘 솔직하셨다. 다 집어치우고 한국에 나가 돈도 벌고 싶지만 너희들 때문에 안간다, 하는 얘기도 무람없이 하셨다. 그러다보니 애들 역시 선생님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 밖에 없었다. 사생관계를 떠나서 동지 같은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친구들은 무난하게 고중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고1,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짐이 없는, 옷에 구김살 한줄 없는 녀자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처음 만난 날부터 다른 반에 옮기는 그날까지 단 한번이라도 선생님의 빈틈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분이셨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중 가장 빈도가 높으셨던 것은 여차여차 하면 문제 없죠예? 하는 것이였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일이여도 선생님의 차분한 설명을 듣고 마지막에 문제없죠예? 하는 마무리멘트를 들으면 거짓말처럼 자신감이 생기고 진짜로 별 문제 없어보이군 했다. 차분하면서도 자신감을 심어준 반주임, 태선생님은 그런 매력을 가진 분이셨다. 문과반, 리과반을 선택해야 될 시점에 이르러 마음 속으로는 언녕 문과를 택하고 있었지만 반주임을 떠나기가 싫어서 옹근 이틀을 숙소에서 끙끙 속을 앓았던 기억이 어제 같다.    문과반으로 옮겨가면서 또 새 반주임을 만났다. 듬직하고 위엄있고 멋진 남자선생님이셨는데 멀리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분이였다. 강의에서도 그렇고 회의나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불필요한 얘기는 철저히 하지 않으셨다. 정치과목을 강의하시는 분답게 항상 “전반 우리 학교의 진학률을 볼 때…”, “전반 중국의 대학교 분포 상황을 볼 때…” 등 폭넓고 개괄적인 용어들을 즐겨 사용하셨고 자주는 안하시지만 가끔 선보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동반한 유머는 번마다 그렇게 적절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알람시계의 고장으로 지각을 하게 되였는데, 허겁지겁 학교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해서 걱정했다 하고 한마디 하시며 시름을 놓는 반주임께 인사드리고 교실로 들어오는 마음이 더없이 따뜻했다.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60이라면 그걸 90이상으로 발휘하게끔 하는 힘을 지닌 분, 업간체조시간이면 우리반 대렬 젤 앞에서부터 유유히 뒤쪽으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존재만으로도 안전감을 부여하는 분, 그분이 우리에게 자주 해주신 말씀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큰 일은 작게, 작은 일은 없던 걸로”라고 하는 철학이였다. 그 말씀은 오늘을 살면서도 수시로 검증되고 있다.    대학에 오면 반주임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입술이 매력적인 한 남자선생님이 입학한 첫날부터 졸업할 때가지 우리 옆을 지켜주셨다. 옹근 4년이라는 시간, 얘기가 적으셨고 항상 묵묵히 챙겨주셨다. 별 일 없이도 우리가 수업하는 교실에 스윽 들어와서는 한바퀴 돌고 나가시군 했고 남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궁할 때면 묘하게 기숙사를 방문해 술 한잔 사주셨다. 모든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해주셨고 학생들한테 시켜도 되는 잔일도 가급적 본인이 직접 하셨다. 학생들은 누가 베풀어줬는지도 모르고 어떤 혜택을 받고나서는 나중에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반주임이 챙겨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전혀 변함없는 반주임, 묵묵히 흐르는 두만강처럼 오늘도 그 자리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폐교와 더불어 합병되고, 다시 조종되고, 그러기를 반복하며 나는 큰 걱정없이 학업을 견지할 수 있었고 그런 덕으로 많은 반주임을 만났다. 짧게는 반년, 길게는 5년반, 그러나 함께 한 시간과 상관없이 ‘나의 반주임’들은 내 마음속에 정중히 모셔져있다. 격변의 시절, 어려움도 적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은 그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은 추억, 소중한 기억으로 정히 기록되게 되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본인들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학생들에게 최선의 배려를 부여해주신 그 은혜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고맙게 느껴진다. 선생님들에도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겠거늘, 선생님들에게도 이런저런 생활고가 있었겠거늘, 본인이 맡은 반급의 친구들을 끝까지 품어주고 가르쳐주고, 한번 또 한번 보내주고, 그 마음을 이제 조금씩, 그러나 더 깊게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썩 오래전에 그분들이 이미 가르쳐줬는지도 모른다. ‘반주임’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책임에 대해서, 역할에 대해서, 한계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받아서 간직하고 있는 그 기억과 가르침들을 되새기며 오늘도 열심히 자기의 색상을 만들어가려 한다. 그렇게 쉼없이 찾아가는 동안, 그분들에게 괜찮은 학생으로, 현재 맡고 있는 친구들에게 무람없는 선배 같은 반주임으로 기억되고 싶다.    올해는 많은 것들이 ‘구름’ 우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세상이 평온을 회복할 그날, 지금의 이 흔적들이 비를 통해, 혹은 눈을 통해 우리의 피부에, 마음속에 잔잔히 적셔지기를 기대해본다. 영웅, 평범한 사람, 안타깝게 떠난 사람들, 그리고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된 어떤 사람들이 문득문득 마음을 울리는 요즘이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02    저개발은 곧 랑비 댓글:  조회:1547  추천:0  2020-07-13
최근 들어 우리 주에서 자원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사업이 다시 활성화 되고 있어 많은 기대가 간다. 그중 논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 지역의  논판을 리용한 논판양게가 다각적인 수입증대 효과를 내고 있다. 논판양게사업이 우리에게 막상 정착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려왔다.  농판양게사업에 앞서 일찍1989년에 우리 주는 우리 성에서도 맨처음으로 논판양어를 대면적에 일반화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2년이 지난 뒤 우리 성의 기타 지역에서 우리 주의 논판양어의 성공적인 경험을 받아들여 개발률을 높이고 기술적인 변화를 준데서 이들 논판양어호들에서는 1991년과 1992년에 헥타르당 순수입을 2400원좌우를  올리는 등 논판양어사업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논판양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우월한 기후, 물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우리 주의 논판양어사업은 어느 정도의 진전을 가져오다가 1991년에는 완전히 내버리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때만 하여도 우리 주는  30여만무의 논에 논판양어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난 세기 80년대말의 가치기준으로  무당 80~100원의 순수입 올릴 수 있다는 것도 기정사실로 되였다. 그런데 우리 주에서 이런 좋은 돈벌이가 무시당하였다. 여기에는 큰벌이에 매달려 적은 수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취약점도 있겠지만 더우기 우리 주에서 농민들이 논판양어를 일으키는 적극성을 부추기는 정책을 제정하지 않아 벼농사지구에서 이같이 좋은 효과를 가져올수 있는 항목을 방임해버리게 한데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때로부터 20여년을 넘겨 2017년에 들어 논판양어가 아닌 농판양게 기술이 다시 도입되고 그간의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논판양게 양식기술이 전면 보급됐다. 지금 우리 주의 룡정, 화룡, 안도 등 현, 시의 200헥타르 경작지에서 민물게농법, 오리농법이 보급되고 있다. 과학적인 엄밀성으로 따져볼 때 논판양게는 확실히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그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민물게가 벼의 해충을 먹어버려 벼의 충해를 감소시키고 수초를 먹어 제초로력을 덜며 그 배설물은 또 밑거름으로 되여 벼의 생장을 촉진하며 게가 논밭에서 경상적으로 활동하면서 물중의 산소함량을 중가시키므로 벼의 발육과 비료의 분해를 촉진할  수 있고 땅밑의 식물을 파먹는데서 토양의 통기조건을 개선할 수 있으며 물량이 보장되여 벼의 생장에 극히 리롭다. 저개발은 곧 랑비 김준환 효과성농업을 주창하고 있는 오늘 논판양게는 논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이 수입증대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몇 안되는 좋은 대상이다. 논농사에서 벼생산에만 매달린다면 얻어지는 그 수입은 어디까지나 한정 받게 된다. 하지만 논판양게는 논농사로 얻어지는 정당한 수입외에도 부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거량득의 효과가 있다. 벼농사에만 만족하지 않고 최근 주목받고 있는 논판양게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논농사의 최적지인 우리 고장에서 이처럼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개발을 하지 않거나 늦춘다면 농민에게는 그만큼 손해가 가게 된다. 저개발은 곧 랑비다. 연변일보 
101    대학입시와 찰떡 댓글:  조회:1645  추천:0  2020-07-10
[두만강칼럼] 대학입시와 찰떡 박숙자(대외경제무역대학교 부교수) 7월 7일부터 2020년 대학입시가 시작되였다. 전날 밤, 국내의 모 고급중학교 대문 앞에서 숱한 학부모들이 12시가 되기를 기다려서 학교에서 전문 만들어놓은 떡판에 찰떡을 붙였다. 그러면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찰떡처럼 척 붙는다는 것이다. 찰떡은 우리 민족이 명절이나 경사의 날에 거의 빼놓지 않고 먹는 음식이다. 그러니 인생의 중요한 고비인 대학입시도 경사의 날이라 수험생들이 이날 찰떡을 먹고 시험에 참가하는 것은 우리 음식문화에도 걸맞는 당연히 좋은 일이다. “오뉴월 찰떡은 까마귀대가리 만큼만 먹어도 힘이 난다”는 말이 있다. 왜냐 하면 찹쌀에는 단백질, 비타민 B1, B2, D, 칼슘과 같은 성분이 함유되여있어 면역력 증진에 도움이 되니 그럴만도 했다. 나는 41년전 대학시험을 치는 날 시골집과 멀리 떨어진 현성 중학교에 있다 보니 찰떡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 학급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생’들이 “우리는 대학 못 가도 ‘언니’는 꼭 가야죠.” 하면서 찰떡을 가져다주었다. 여러 ‘동생’들의 찰떡을 얻어먹은 덕분인지 나는 모교에서 수석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그 때 그 ‘동생’들이 참 고마왔다. 수십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해마다 대학입시 때면 그렇게 응원을 보내준 고마운 ‘동생’들이 생각나고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는 엿처럼 대학에 딱 붙으라고 만든 ‘합격엿’이 있다. 2003년 나의 아들이 대학시험 치기 전날 북경 대외경제무역대학교 교수 서영빈 대학동기가 아주 정교한 ‘합격엿’을 선물했다.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물론 나도 아들한테 찰떡과 엿을 먹였다. 그 덕에 아들은 중점대학에 입학했다고 나는 곧잘 자랑하기도 했다. 기실 아들은 그에 앞서 중학교에서 학업의 기초를 탄탄히 다지고 공부실력도 잘 쌓았기에 대학 입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한 것은 우리 민족의 우수한 찰떡문화가 언제부터 입시 때 학교문에다 찰떡을 붙이는 이상한 현상으로 변한 것이다. 알고도 모를 일이다. 첫째, 맛 좋은 찰떡을 밖에다 붙여서 랑비하는 것은 농경민족으로서의 우리의 본분에 위배되는 것, 둘째, 대학입시에 대한 학부모의 과잉관심이 수험생들에게 정신적 부담을 준다는 것, 셋째, 다른 민족에게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 등에 대해 심사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주위의 사람들은 우리의 찰떡붙이기를 이상한 눈길로 보고 있다. 심지어 학부모들이 너무 극성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요즘 우리 ‘문학교실’ 채팅방에서 찰떡을 붙이는 문제와 관련하여 토론이 벌어졌는데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고중 때인가 어느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찰떡을 붙이려면 붙고 싶은 대학에 갖다 붙여야지… 고중 문에 붙여서 고중 더 다니라는 거 아니냐고… 다 부질없는 짓이란 뜻으로 웃으며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찰떡을 붙여서 대학에 붙기를 바라는 학부모들의 마음은 리해할 만하다. 그러나 수험생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이런 처사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족문화 고양에 해를 끼칠 수 밖에 없다.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찰떡문화도 ‘합격엿’처럼 상징적 의미를 더해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수험생을 시험장에 보내고 학부모는 태연히 직장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다른 민족들의 우수한 입시문화를 본받으면서 좀더 문명하고 고상하게 승화시킴이 바람직하다. 중국의 1,071만 수험생이 동시에 시험을 치지만 다른 곳에서 이렇게 학부모들이 과잉반응을 보인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다. 찰떡을 붙이지 않아도 붙을 실력이 되면 붙는 것이고 실력이 안되면 못 붙을 것이다. 안되는 실력에 찰떡을 붙였다고 합격된다면 공부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학부모가 대학입시에 과잉관심을 보일수록 수험생들은 긴장해서 원래의 실력을 발휘 못할 수도 있다. 오히려 수험생에게 평소 대로 긴장하지 말고 차분히 림해보라고 하면 시험을 더 잘 칠 것이다. 래년부터는 좀더 현명한 처사가 따라갔으면 하는 부탁을 해본다. 찰떡을 붙이기보다 좀더 업그레이드된 보기 좋고 깜찍하고 편한 ‘합격떡’을 개발하여 선물도 하고 먹을 수도 있게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수험생들이 아무런 부담도 없이 시험에 림할 수 있지 않을가? 길림신문
100    대학입시와 애물단지 댓글:  조회:1440  추천:0  2020-07-08
     대학입시와 애물단지      궁금이      해마다 맞이하는 대학입시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한달을 지각했지만 지독한 바이러스도 이 신성한 시험을 막지는 못했다. 북경은 어제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해 수험생들의 기분을 한결 상쾌하게 협조했다. 고3학생들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지난 학업에 대한 총결산인 동시에 새로운 도약을 실현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어릴 때 마을에서는 고중졸업생도 대단한 학력이였던 적이 있었다.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졸업한 고중은 지금의 고중이 아니라고 했다. 거의 지금의 대학에 맞먹는 고학력이라는 말이다. 그런 시절에 할아버지에게는 일본 류학으로 대학을 마친 사촌동생 한분이 계셨다. 정말 가문의 영광이였다. 그 할아버지는 풍채도 름름하여 어린 내 눈에는 진짜 거물 같은 존재였다. 지금도 북경에 있는 대학과 북경대학이 헛갈리는 것처럼 그 할아버지도 도꾜대학(도꾜 대학)을 나왔다는데 도꾜 시내에 있는 대학인지 진짜 도꾜대학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고중 학력도 높이 보는 세월에 류학하여 나온 대학이라면 의실할바 없는 초고학력이였다.         기억속의 대학입시날에는 늘 비가 왔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해볕이 쨍쨍한 날보다는 비오는 날이 서늘하여 시험 능력발휘에 더 좋다고 위안을 해준다. 반대로 어제와 같은 화창한 날씨였더면 시험도 맑은 날의 기분에 따라 발휘가 더 잘 될것이라고 격려해주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내 자식 같은 학생들이 저마다 좋은 성적을 따내기를 바라는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는 날씨가 문제 아니였다. 지금처럼 과외는 없었지만 그래도 야간자습을 통일적으로 시키면서도 오로지 대학입시만 바라보고 고생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선생님들의 마음도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길림신문위챗공식계정에 따르면 길림지역 5개 조선족중학교의 올해 응시생은 총 134명이라고 한다. 평균으로 치면 한개 학교에 30명도 안 된다는 얘기다. 적을수록 소중한 조선족의 인재 후보들이다. 산재지역에서 어렵사리 꾸려가는 조선족중학교들의 노력이 갈수록 가상하다. 이 대목에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인구의 급감과 다른 학교로의 류실을 대서특필하면 꼰대라고 할가봐 깊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학생수가 적으면 적은 대로 뾰족하면 된다. 그리고 끝까지 내 자식은 조선족으로 만들겠다는 부모님들의 노력과 희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주변에도 공부 성적이 어떻게 되든 고향에 보내서라도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애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대도시의 전반적인 환경에서 그게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였다. 성장기의 언어 혼란이 부모들의 생각처럼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그런데 조선말을 안다는 건 자연스럽게 한개 외국어를 장악하는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부모는 없다. 타민족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전문 전공으로도 선택 할라니 소중한 언어자본인 것도 틀림없다.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였으니 대도시의 학교와 사회와 가정의 복합적인 여건하에서 우리말을 끝까지 남기려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애가 집에 오면 걔는 무슨 말을 하든간에 할머니가 끝까지 조선말을 하게 되면 애는 자기가 원하는 소통을 위해서라도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애를 키워보면 잘 알겠지만 장기간 부모손을 떠나 할아버지 할머니들 손에서 자란 애들에게는 또 다른 페단이 존재한다. 이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부모들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 분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초래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아무튼 대학입시는 그걸 거쳐야만 하는 당사자들의 고비인 동시에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님들의 심정 또한 그들 못지 않게 초조하다. 막바지에 부모들은 밖에 나가 한잔하는 것도 눈치보이는 민감한 시기이다. 애의 심기를 건드려서도 안 되고 음식에도 신경써야 되고 공부를 너무 시켜도 문제다.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강요해서도 안 되고 다른 애들과 비교를 하는 건 더 금물이다.         또 한개 반을 졸업시키는 선생님들의 심정이라고 평온할 리가 없다.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는 발휘만 잘하면 된다고 말은 쉽게 하지만 그래도 학생을 시험장에 들여보내는 선생님들의 심정 또한 형언하기 어렵다. 학생들의 미래가 첫째인 건 의심할 바없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그 사이 가르쳐온 교원의 수준을 고험하는 순간이기도 한다. 자기 학생에 대한 책임도 있고 다른 학교와의 경쟁도 현실적인 문제다. 대학교에 간 학생수도 경쟁이고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에 몇명을 보냈냐도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이른바 중점고중으로 인식된 학교라면 그 압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대학교가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빌 게이츠나 스티븐 잡스도 대학 중퇴생이라는 말도 한다. 뜻인즉 붙으면 당연히 좋은 일이고 못 붙는다고 하더라도 대학교 하나에 목을 맬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말은 쉽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올해 대학 졸업생은 874만명이고 대학 응시생은 1071만명이다. 붙는 것도 경쟁이지만 졸업후 취업 또한 만만치 않다. 20대에 겪게 되는 커다란 고민이고 방황이고 전환점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고 고향에는 또 “진학연”이라는 성대한 의식이 하나 더 추가된다.시험이 끝나고 이제 입학통지서가 나오는 계절이면 저마다 한상 차리고 지인들을 초대해 입학을 축복하는 모임을 성황리에 가진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연회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학입시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나 학교에 있어어나 가정에 있어서나 엄연한 대사이다.        애물단지는 대학입시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는 데서 부모님들의 로심초사는 계속된다.         천하가련부모심이다. 중국조선어방송넷 
99    가난은 자랑거리가 못된다 댓글:  조회:1372  추천:0  2020-07-06
[두만강칼럼] 가난은 자랑거리가 못된다 남명철 지난해 농촌에 있는 가까운 친척집에 위문 차로 갔었다. 지친은 남편도 저세상에 간 지가 오래고 아들딸도 모두 곁에 없는 칠십이 된 늙은이라 생활상에서 이것 저것 아쉬운 일이 많았는데 농촌빈곤부축 대상에 들다보니 경제적 지원도 적지 않았지만 사업인원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석탄을 날라다주고 벽의 회칠이며 문풍지까지 알뜰히 해주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그 친척이 “다음에 오면 자동으로 달리는 장애용 차를 사달라고 말해야지.” 하는 체면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자식들과도 사달라는 소리를 입 밖에 내지 못하면서 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것도 아닌 장애용 차를 욕심내다니. 그것도 장애자도 아닌 사람이. 참 너무하지 않냐고, 잘해줄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다고 열을 올리며 책망했었다.   전면적으로 초요사회(小康社会)를 건설하는 것은 국가의 전략으로서 2020년까지 빈곤에서 해탈하여 전면적으로 초요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예로부터 “가난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처럼 14억의 방대한 국가에서 총력을 기울여 전면적으로 빈곤해탈에 도전장을 던지는 장거는 고금중외에도 없었다. 우리 나라는 개혁개방 40년을 거치면서 전반 사회경제가 거족적인 전면발전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발전도상 국가로서 국가의 재력에는 아직도 제한성이 있고 또 지속가능한 발전을 보장하려면 중점대상 건설에 대한 투자와 단기간의 실효성이 높지 않은 미래산업과 과학기술 개발연구에도 힘을 기울이게 돼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자금은 항상 딸리기 마련이다. 빈곤부축 대상은 주로 ‘로, 약, 병, 잔(老弱病残)’인 만큼 사회적으로 집단적 양로를 한다든지 기초생활 보장을 실시한다든지 하는 유효한 정책시달이 속속 진행중이다. 또한 중장기 수익성 투자를 통하여 부축자금이 온건한 래원성과 지속성을 담보하고 동시에 농촌사업에서 실현가능한 경제건설프로젝트라면 거의 계획신청을 하는 대로 락착된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한 빈곤부축(精准扶贫)을 전반 빈곤부축 공정의 준칙으로 삼고 있지만 빈곤부축 사업 가운데서의 일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들이 점철돼있다.   우선 앞 다투어 우는 소리를 하거나 자기 혹은 지친들을 빈곤호로 분장하는 문제다. 빈곤호에게 물질적 지원이 따르는 것을 감안하여 량심이고 체면이고 모두 던져버리고 서로 우는 소리를 하고 수입까지 감추면서 옴니암니 따지고 궁상을 떠는 모습은 꼴불견이다. 기실 빈곤한 원인도 여러가지로서 별로 부끄러울 것은 없어도 결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근로치부하는 데 정부정책의 지속적이고 유력한 지지가 있을진대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그냥 빈곤호로 남아있는 데는 자신에게서 찾아볼 점들이 있는 것이다.   모 시에서 편벽한 농촌마을에 소 30마리를 사주고 방목의 유리한 점을 리용하여 치부하게끔 도왔는데 나중에 소가 한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영문을 물어보니 소가 병이 들었소 다리가 부러졌소 하는 등 리유로 잡아먹어버린 것을 당연지사인것처럼 얘기했다. “외상이면 부림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공짜로 생긴 것을 아예 먹고나 보자는 하루살이 발상이였다. 어느 기관의 하향간부는 자기가 맡은 집의 위생환경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어느 휴식날 도시락을 싸들고 안해까지 동원해서 함께 내려갔다. 온종일 안해는 털고 닦는 집안청소외에 빨래까지 해주었고 그는 마당과 집주위를 쳐내고 쓸어내고 말끔하게 정리해주고 돌아왔다. 그런데 한주일 후에 가보니 여전히 발 디딜 틈없이 지저분하더라는 것이였다. 명절같은 때 위문금을 갖다주면 받기 바쁘게 도박을 놀아서 잠간 새에 탕진하는 사람도 있고 무겁게 쌀포대를 메고 가면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헐값에 넘겨주고는 그 돈으로 식당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향간부들이 이것 저것 살뜰히 도와주니 감사함을 깊이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빈둥빈둥 놀다가도 어수선하게 널어놓은 자기 집 마당에 손대기 싫어서 “이 사람들이 올 때가 됐는데…” 하면서 공짜 일군을 기다리는 것이였다.   로약자와 병이 있거나 장애인이여서 구차한 사람들 또는 렬사가족이거나 그 시대에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사회의 온정을 베푸는 것은 천만지당하다. 하지만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게으름을 부려 빈곤한 사람, 전문적으로 정책과 인정의 틈바구니를 파고들면서 공짜만 노리고 걸핏하면 체면없이 어거지를 쓰는 사람, 사회가 아무리 혜택을 베풀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하는 단호한 규제도 있어야 될듯 싶다.    길림신문 
98    우리 민족 가족문화에서의 가옥 공간 사용에 대하여 댓글:  조회:1502  추천:1  2020-07-02
우리 민족 가족문화에서의 가옥 공간 사용에 대하여 박승권 “가족”이라는 학술용어는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집”이라는 술어로 통할 때가 많다. 그런데 “집”이라는 술어는 고향을 나타내는 지리적인 개념, 거주공간을 나타내는 물리적인 개념, “량반집”이라고 할 때처럼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정치적 개념 등 상하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리해되고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족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혼인에 의하여 결성된 하나의 사회 집단을 가리키며 그 가운데서 가장 작은 단위이고 사회의 기초로 되고 있는 개념이다. 머독(G. P. Murdock 1949)에 의하면 가족이란 주거를 같이 하고 경제적인 협동 및 자녀의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의 사회집단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가족은 아래와 같은 네가지 요소를 구비하였다 할 수 있다. 즉 가족은 우선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거주공간을 구비하고 있으며 생산과 경영 등을 함께 하는 경제적인 협동체이다. 그리고 가족 내부에는 혼인을 통하여 이루어진 부부관계가 존재하고 또 혈연관계를 기초로 하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이상의 요소들을 전부 다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하나의 공동된 거주공간에서 생활을 하여야만 하겠지만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례를 들면 대학공부를 위하여 집을 떠나 외지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대학생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친족단위이지만 거주 공간을 같이 하고 있지 않는 경우 가족과 구별하여 가구(household)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를 가리킨다.     1   앞에서 이야기하다싶이 거주공간으로서의 집은 가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빼여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보아낼 수 있다. 가족 내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위치와 역할 분담 등도 집 공간 사용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문화적인 관습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민족들에서도 공동으로 나타난다.    우선 우리 민족과 가까이 살고 있는 만족의 공간 리용을 살펴보자. 촌에 사는 만족들의 집들은 보통 집문 앞에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고 집 뒤에는 백양나무가 심어져 있다. 가옥은 낮은 담으로 외계와 구분되여 있다. 집은 정방(正房), 상방(厢房)이라고 하는 행랑칸, 축붕(畜棚) 즉 가축 우리, 그리고 변소 등으로 구분되여  대체로 비슷한 자리에 위치해 있다. 대문에 들어가면 안쪽에는 영벽(影壁)이 설치되여 있다. 남향으로 앉은 집은 서쪽, 가운데, 동쪽 등 세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서쪽 방은 존귀한 공간으로서 거기에는 조상을 상징하는 신판(神板)과 조종판(祖宗板)을 모신다. 북방의 한족들은 집의 북쪽 벽 아래에 상을 받쳐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의 서쪽 방에는 남북 향으로 된 온돌이 있고 또 서쪽 벽 밑을 따라 좁고 긴 모양으로 온돌이 있다. 온돌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신을 신은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지만 신을 신고 온돌에 올라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불손행위로 금기시되여 있다. 만족들은 온돌을 “만자갱(万子坑)”이라고 한다. “만자갱”은  중국 조선족 가옥에서의 온돌보다 그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서쪽 벽 아래 온돌 우에는 상이 받쳐져 있는데 여기에 그 가족의 조상이 모셔져 있다. 따라서 서쪽 온돌은 신성한 곳으로 인식되여 사람들이 함부로 앉으면 조상들께 불경스럽다고 하면서 꺼린다. 그리고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서쪽 벽에는 그림을 부치거나 달력을 걸거나 하는 행위 역시 금기시되여 있으며 매일마다 깨끗이 청소해준다.    그 외에 만족들은 한 구들에서 자더라도 어른들은 남쪽을 사용하고 자녀들은 북쪽을 사용한다. 그리고 년장자의 집에 가면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 하더라도 옆자리를 찾아 앉는다. 년장자들과 동석하는 것은 례절에 어긋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손아래 사람은 그 옆자리에 공손히 서있는 것으로 례의를 표시한다. 만약 외할아버지가 집에 방문하였다면 의례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접대하는 것이 례의인데 공교롭게 이 두 사람이 모두 외출 중이라면 외손자가 직접 접대한다. 이때 외할아버지는 온돌의 바른편의 상좌에 앉게 되고 외손자는 왼쪽 편에 두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공손히 접대하여야 된다고 한다.    유목지역의 몽골족들의 전통적인 집은 중국어로 포(包)라고 한다. 원형으로 된 집은 출입문과 화로 그리고 집에서 모시는 신 등 세 점을 이어 놓는 중심선을 기준하여 량쪽에 두 부분으로 나뉜다. 집 한가운데에는 화로가 설치되여 있고 신상(神像)은 출입문을 마주하여 제일 안쪽에 모셔있다. 모시는 신은 대체로 칭기스칸이다. 2006년 12월 내몽골 울란호트 지역에서 반농반목 생활을 하고 있던 몽골인들은 당시 포(包)가 아니라 일반 주택에서 살고 있었지만 신상은 집의 제일 안쪽에 상을 받쳐 모시고 있었다. 포(包)에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신상을 등지고 출입문을 향해 앉아 손님을 접대한다. 남자 손님은 신상을 마주하여 왼손 편에 앉고 녀자 손님들은 신상의 오른쪽 편에 앉는다. 남녀의 활동 령역이 좌우로 구분 된 것이다. 손님접대 때문에 녀자 주인이 상대 쪽으로 건너가야만 할 때에는 신상 앞을 지나거나 화로를 건너뛰면 부정 탄다고 한다. 반드시 출입문 쪽으로 에돌아 건너가야 한다. 신과 화신(火神)에 대한 경외심과 녀성에 대한 성적인 폄하가 동시에 존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의 집에 가면 주인이 앉는 자리와 가미다나(神棚) 그리고 부쯔단(仏壇)의 자리가 대체로 고정되여 있다. 주부는 부엌과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집주인은 상을 사이에 두고 주부와 마주 앉는다. 손님은 윗목에 모신다. 일본인 가옥에서 주인의 자리는 불가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의 아버지가 래방하였다 하더라도 이 자리는 차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2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집은 우선 양택(阳宅)과 음택(阴宅)으로 나뉜다. 양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산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고 음택은 저승에서 간 사람들이 사는 집이다.    전통적으로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인생의 종료가 아니라 공간적인 이동이다. 즉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이동이다. 죽은 사람의 무덤도 한 사람의 삶의 일부로 되여 있다. 사당은 세상을 떠난 조상의 령을 모시는 곳이고 무덤은 몸을 모시는 곳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대접은 산 사람과 비슷하게 진행된다. 전통적인 집안에서 신주를 집안에 모시거나 혹은 따로 사당을 지어서 모시는 것은 바로 이런 사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사에 대하여 잠깐 말한다면 우리 민족은 유교적인 관습으로 보통 사대봉사를 한다. 고려 공민왕시기 포은 정몽주는 제례규정을 제정하여 대부 이상의 관원은 삼대 봉사(三代奉祀) 하고 6품 이하의 신분을 가진 사람은 이대봉사 하고 7품 이하의 하급관원과 서민들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경국대전 예전 편에서는 사대부 이상은 사대봉사를 하고 6품 이상은 삼대봉사하며 7품 이하는 이대봉사하고 일반 서인(一般庶人)들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분의 차이로 구분되여 조상을 봉사하던 이런 관습은 갑오갱장(조선 고종 21년)이후로 반상의 구별없이 약화되면서 변화를 일으켜 일반 서민들도 사대봉사하기 시작한다. 서민들 중 신분 상승의 필요를 느끼던 일부가 먼저 가문의 지체를 높이는 행위의 일환으로 사대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사날이면 신주를 사당에서 꺼내 제사장에 모신다. 그리고 설, 청명, 추석과 같은 명절이면 집에 제사상을 차리고 차례를 지내거나 혹은 직접 조상의 묘소에 찾아가 추모행사를 한다. 이때면 저승에 사는 조상들과 이승에 사는 이들이 한 자리에 만나는 것이다.   가옥은 보통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 내외를 구분하였다. 사랑채는 집안 남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령역이고 안채는 녀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사랑채의 주인은 당연히 그 집의 가장이였다.  조선시대 남녀구분의 률법을 엄격히 지키는 일부 가족들에서는 남자는 주 공간인 사랑채에 침방을 따로 두어 평상시에는 이 방에서 잠을 잤다고 문헌들에서 기록하고 있다. 가장이 사랑채를 자녀한테 양보한다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권한을 물려준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큰 집들에서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을 쌓아 경계를 나누었으며 그 사이의 련결은 중문으로 통해 이루어졌다. 중문은 지리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였지만 성별적으로는 남녀의 령역을 구분하였다. “바깥량반”, “안주인”이라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령역 구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자들의 방문은 주로 정문과 직결된 사랑채에서 이루어지고 녀자들의 나들이는 옆문을 통하여 안채에서 이루어진다. 유교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조선조사회에서 이런 률법은 매우 엄하게 지켜졌다. 일부 가문에서는 현시대에도 가문이 엄수하여야 될 계률로 엄격히 고수하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유성용 종택 충효당(忠孝堂)에서 영국의 녀왕 엘리자베스가 방문하였을 때 녀왕을 정문을 거쳐 사랑채에서 영접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옆문을 통해 안채에서 접대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문중회의까지 열면서 고민하다 결국 아무리 왕이더라도 녀성이기 때문에 옛날 습관과 유교식 량반 문화대로 안채에서 의전을 갖추게 하였다는 여담도 있다.    물론 각 지역마다 그 가옥구조가 다르고 공간에 대한 리용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안방과 사랑채의 역할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3   중국 연변의 조선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에 1990년대 말 룡정시 한 농촌의 조선족가족에서 집 공간을 어떻게 리용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조사 대상은 길림성 연변 룡정시 태양향 중평촌의 양천 허씨의 집이다. 허씨는 함경북도에서 본적을 두고 있었으며 1980년대 중기까지 이 집에서 살다가 연길에 이사하였는데 이 집은 1990년대 말까지 존재하였다. 집 지은 지 오래된 관계로 새 집주인이 헐어버렸다. 아래의 자료는 이 집 맏딸인 허순자씨(63세)의 진술에 근거하였다.    일단 집은 네 귀와 사면에 나무를 심어 외부와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이렇게 경계가 불명확한 집들은 터전에 채소를 심는 계절이면 이웃과 밭고랑 싸움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여 집집마다 대개 이런 방법을 취해 분쟁을 미리 막았다. 1990년대 말까지 울바자를 세울 재료가 부족한 농촌에서는 봄이 되여서야 지난해 가을에 남겨 두었던 수수대로 개배재(울바자)를 쳐서 터전에 짐승들의 침범을 방지하였다.   사랑칸은 땔나무나 혹은 농기구들을 두는 곳으로 사용되였다. 그리고 소를 집에서 키울 때에는 사랑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깥쪽은 외양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사랑칸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를 살펴보면 그 자리는 대문과 가까이 한 자리이다. 사실 전통적인 가옥 구성에 있어서 사랑방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접빈객의 구실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이지 구성상 사랑방이라는 이름이 부쳐지기도 할만한 장소이다.    건너칸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를 키울 때가 있었는데 그때면 북쪽 벽 아래에 구멍(수궁이라고 함)을 만들어 소의 분뇨가 직접 배출되게 하였다 한다. 건너칸에는 겉곡을 저장하여 두는 뒤주가 있었다. 겨울에는 닭과 개와 같은 가축들이 여기에서 살게 한다. 이 때문에 남쪽으로 난 바람벽 아래 모퉁이에는 체구가 작은 가축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 대신 뒤주는 항상 덮개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추운 겨울철에는 정지칸으로 통하는 문(바당문이라 함)은 두꺼운 천이나 혹은 비닐로 봉페하여 출입을 막고 사람들은 건너칸을 통하여 외부로 출입하였다.    바당은 현관 구실을 하는 곳이다. 집에 들어서면 여기에 신을 벗어 놓는다. 구들은 보통 정강이 높이만큼 높다. 사람들은 신을 벗고 올라간다. 그 밑에는 부엌과 통하는 온돌이 연통(구새라고 함)까지 여러 고랑 놓여 있는데 고랑은 기수로 되여있는 것이 상례이다.    부수깨는 부엌의 아궁이를 말한다. 땅을 네모지게 어른 허리만큼 파고 들어가 불 아궁이를 만들고 그 우에 가마를 걸어두었다. 불을 지피지 않을 때에는 두꺼운 널로 이를 덮고 이를 구들 치우듯이 매일 닦아 깨끗이 거두어 두고 있었다.      정지칸은 집에서 공간이 제일 넓은 곳이다. 사람들은 주로 여기에서 생활한다. 그런데 부엌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남자들은 부엌과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동쪽과 남쪽 구역을 주로 사용하고 녀자들은 부엌과 가까운 구역에서 활동한다. 남자가 가마목의 따뜻한 곳을 찾아 앉으면 사내답지 못하다고 구박받기도 하였다 한다. 다시 말하면 정지칸의 동쪽과 남쪽은 웃쪽으로서 상좌에 속한다. 이전에는 식사할 때 밥상이 차려지면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위치로 자리를 찾아 앉는다.    고방에는 장롱이 있다. 집에서 안방에 속한다. 고방에 낸 창은 남쪽으로 낸 창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집에서의 귀한 물건들과 쌀독이 여기에 보관하고 있었다. 낮이면 이불을 잘 개여 여기에 두고 있었다.      웃방은 남자의 공간이다. 사랑채인 격이다. 체신을 지키는 손님들은 직접 웃방문으로 출입한다. 그리고 정지칸을 함부로 기웃거리거나 나오지 않는다. 추운 겨울이라도 체면을 지키는 남자 손님이 온다면 주인은 난방을 위하여 여러 겹으로 봉하였던 웃방 출입문을 출입이 가능하게 미리 손보고 여기에서 손님을 맞이하였다. 아무리 귀한 녀자 손님이라 하더라도 웃방에 함부로 올라가 앉는 것은 실례로 되였다. 경제적 형편이 부유한 집들은 웃방 우에 한 칸을 더 지어 한웃방이라고 부르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집들은 당지에서는 팔간집이라고 불렸는데 이 집 주인들은 해방초기 중농이나 혹은 부농으로 성분을 획분받아 그 후 2,30년간 정치적인 시달림을 받기도 하였다. 4세대가 같이 살고 있는 경우 한웃방에는 한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가 기거하고 웃방은 할아버지가 기거하였으며 정지칸은 아들이 자녀들과 함께 기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식사 시에는 팔각으로 된 작은 상으로 음식을 차려  한웃방에 계시는 한할아버지께 올려 갔다고 회상하였다.     변소는 집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변소 주위에는 나무들이 비교적 빼곡히 심어 쉽게 눈에 띄이지 않게 하였다. 변소는 창고와 사랑칸 사이에 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길을 내어 직접 다닐 수 있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굳이 그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차단하여 변소가 집과 외따로 떨어져 있게 하고 있었다. 변소를 가려면 돼지우리와 사랑칸 사이에 난 대문을 나가 돌아가야만 하였다. 뒷간은 멀어야 된다는 속담과 맞먹는 셈이다.   김치굴은 가을 김장철에 집 앞 터전의 맨땅을 어른 키 높이 조금 넘게 파고 그 우에 가리대를 얼기설기 얹어놓고 짚단 등으로 가린 뒤 흙을 두툼하게 덮어 굴처럼 만든 것이다. 김치굴에는 김치, 감자, 무우 등과 같은 과동 식량들을 보존하였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김치독을 꺼내어 깨끗이 씻어 건너방이나 사랑칸에 보관하여 둔다. 그리고는 김치굴은 헐고 그 자리는 흙을 메워 평평하게 하여 다시 터전으로 가꾸었다.    장독은 집안의 그릇을 넣는 식장 옆 부엌 쪽에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겨울철이면 기온이 령하 2,30도 내려가 장을 담근채 밖에 두면 동파되기 쉽상이다. 당지에서 집 밖에 장독대를 따로 설치한 집이 없었으며 장독은 여름에 씻어 말릴 때만이 해볕에 소독하기 위하여 밖에 내여놓았다고 한다.    이상은 20여년 전 연변의 한 농촌 마을에서의 집 공간에 대한 리용이다. 현재에 와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취사도구로 가스레인지가 보편화되고 보일러 등으로 난방이 되면서 “가마목”이 없어졌고 돼지 사육의 규모화에 따라 집집마다에 있던 돼지우리가 사라졌다. “김치굴”도 랭장고의 출현으로 없어지거나 혹은 시멘트 지하실로 되여 해마다 파고 메우고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졌다. “변소혁명(厕所革命)” 으로 이전에 멀리 하여야만 했던 변소가 집안으로 들어와 수세식 화장실로 되였다. 전통사회에서 집에서 태여나고 집에서 사망하는 것을 리상적으로 여기던 사람들이 지금은 분만이 가까이오거나 림종이 가까이 오면 병원을 찾는다. 뿐만 아니라 남녀 분공과 역할이 모호해짐에 따라 안팎의 경계도 희미해져 공간사용에서의 혼용도 존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간에 대한 인식과 사용은 인간의 문화적인 행위로서 지리적 · 정치적 · 경제적 · 문화적 등 다양한 여러 요소들이 서로 얽혀 작용하며 이런 각종 요소들 사이의 력학적인 관계속에서 시대적으로 그 의미가 재해석되고 재구성되고 력동적으로 실천된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박승권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97    팬이란 댓글:  조회:1517  추천:0  2020-06-23
팬이란 궁금이      연예인들이 공항에 나타나면 소리지르며 우르르 몰려드는 팬들을 보면서 저게 어떻게 가능할가 라는 의문을 줄곧 갖고 있었다. 나는 전에도 그랬거니와 지금은 더욱이 어떤 사람의 팬이 된다는 일은 평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팬이란 운동 경기나 선수 또는 연극, 영화, 음악 따위나 배우, 가수 등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했다. 그 뒤에 우리말로는 “애호가”로 순화한다고 친절하게 덧붙였다. 어쩐지 팬과 애호가는 색채상 느낌이 달라서 어떤 외래어는 순화하면 그 뜻을 완정하게 전달할 수 없는 애로사항도 있겠구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던 내가 지난주에 역중천이란 작가에게 꽂혀버렸다. 내 명에도 없는 이른바 팬심이라는 게 생기게 되였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왜 이 작가의 작품을 이제야 접하게 되였나 안타까울 정도로 한눈에 확 끌렸다. 보던 책이 떨어져서 서점에 갔는데 새책코너에 “중국남성 중국녀성”이란 책이 나와 있다. 요즘 책들은 무슨 랩을 씌우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비닐로 싸놓는지 모르겠다. 당장 랭장고에라도 들어갈 기세다. 어떤 책은 그 비닐을 뜯었다가 혹시 사지 않으면 안 될 같아서 포기한다. 그런데 이날은 내용이 궁금하지만 확인을 하지 못한채 그냥 샀다. 나는 원래 작가의 이름은 보지도 않고 새책코너의 추천이면 믿고 산다.         그런데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2018년의 책이다. 순간 약간 후회를 하면서 그래도 샀으니 랑비할 수는 없고 첫페지를 펼쳤다. 시골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교과서가 닳는다고 다들 뚜껑을 씌워갔고 다녔더랬는데 지금 책들이 또 그걸 본따고 있다. 원래 표지우에 한겹을 덧씌워서 뚜껑이 한장 더 있다. 그 뚜껑을 벗겨내면 안에는 같은 이름으로 앞표지가 있다. 그렇게 제목을 두번씩이나 나오게 할 리유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류행인지 다들 그렇게 책을 출판한다. 이 책도 역시 뚜껑은 있는데 벗겨내니 안에는 아무 글자도 없다. 얼핏 보면 그냥 내부용 참고자료 같은 느낌을 준다. 그 허술함에 또한번 의욕을 잃을번 했다. 책을 펼치니 글자도 작고 줄간격도 좁아서 이마살이 찌프려진다.         그런데 진주는 모래밭에도 빛난다더니 내용을 읽기 시작하니 3시간을 단숨에 내려갔다. 그 유혹적인 휴대폰도 한번 들여다보지 않고 모든 일을 멈춘 채 작은 글씨에 좁은 간격의 종이만 번지고 또 번졌다. 한장에 글씨가 많아서 번지는 속도도 더디건만 전혀 갑갑하다는 느낌이 없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정말 어떤 현상이든 외모로만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과 내용에 자신이 있으면 겉모양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지금까지 조선문과 중문 책을 통틀어서 문자만 보면서 크게 소리내 웃으며 본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물론 내 독서의 량과 폭이 좁아서 그렇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유머스럽고 박식하고 알기 쉽게 엮어내려갔다. 사실은 전통 문화와 력사를 다룬 내용이라 폭소를 자아내기 쉽지 않은데 어떤 분야에든 다 고수가 있었다. 삼국연의가 삼국지와 달라서 취미성이 더 있는 것처럼 력사문헌을 현실의 구미에 맞게 하기 위해 그 시대에는 있을 수도 없었던 표현까지 불어넣으며 재창작되는 책은 여럿 봤어도 이 책만한 문필과 론리와 유머는 만나본 적 없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으로 경동쇼핑몰에서 검색했더니 모든 저서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 자리에서 1-20권으로 된 전집을 샀다. 잘되는 놈은 넘어져도 떡함지에 엎어진다더니 원가격이 840원인 책이 주문을 클릭하자 329원으로 착하게 할인된다. 딱 마음에 드는 책을 공짜로 산 느낌이다. 사실 840원은 물론 그 보다 더 비쌌어도 이미 마음이 끌린 작가의 책이라 망설임없이 샀을 것이다. 그 가격에 사겠다는데 안된다며 기어이 할인해주겠다는데 그냥 고마울 따름이다.        전에 팬이 과격해져 스토커가 되는 뉴스들을 보면서 “미친놈”이라고 여겼었는데 정말 진심으로 빠지면 그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고 그냥 깨알같은 글을 빼곡히 박아놓은 누르께한 종이장에도 이렇게 끌리는데 살아 움직이는 연예인들한테는 정말 좋아서 숨이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였다. 거기에다 무려 이성 연예인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한 사람이 존경스러우면 오늘처럼 한개 내용으로 옹근 편폭의 위챗을 완성할 수도 있구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하루다. 그리고 팬이라는 게 이런 심정이구나는 뒤늦은 깨달음도 주책맞게 느끼게 된다. 팬도 무섭지만 그 팬심을 자극하는 사람이 더 위험해 보인다.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쉽지 않은 만큼 때론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 친구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한테 이런 시험을 했다. 매일마다 강아지한테 족발을 하나씩 던져줬는데 번마다 차분하게 앉아서 요리조리 잘 뜯어먹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한그릇 가득 담아줬더니 이 많은 분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먹는 건 까맣게 잊고 이리저리 물어다 감춰두느라고 바삐돌더란다. 한 책은 단숨에 잘 읽었는데 한꺼번에 산  20권도 그렇게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잘나가다 김새는 소리를 하는데는 내가 일가견이 있다. 중국조선어방송넷
96    가까운 사람이 쉽다 댓글:  조회:1495  추천:0  2020-06-02
가까운 사람이 쉽다 궁금이 아동절이다.    친구가 아침에 단체방에 문자를 올려서 이날은 어쩌다가 사이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던 날이라고 했다. 하긴 뢰봉아저씨가 절약을 위해 사이다 대신 랭수를 마셨다는 미담이 전해지던 때였으니 사이다도 그렇게 마음대로 먹었던 시기는 아니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친구는 소고기 사러 가는 날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아동절은 집에서 소탕을 끓여주는 날이였는가 본데 가정 형편이 꽤 좋았던 것 같다. 나는 흰헝겊신에 분필칠을 해서 광을 냈던 날이다.   예로부터 이날은 분명 어린이의 날인데 괜히 어른들이 덩달아 바쁜 날이다. 원래 녀성절은 남자들이 더 흥분하고 로인절은 자식들이 더 취하는 법이다.    “어느것이 얼굴이고? 어느것이 꽃이냐?”   어느해인가 고향의 6.1절 경축행사를 중계하던 아나운서의 입에서 나온 해설사다. 행사장에서 어린이들이 알록달록 색동저고리를 입고 커다란 리본을 팔랑이면서 꽃을 들고 있는 장면을 말로 생생하게 옮겨놓았다.    “와~ 저 방송원의 말이 멋있지 않습니까?”   내가 해설사를 듣는 순간 너무 흥분해서 옆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여쭤봤다.   “허~허~”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바와는 거리가 멀게 담담했다.  아버지의 이 랭정한 반응은 뭐지? 나도 저 정도의 해설사는 쓸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은데...   나는 아버지도 동요작가여서 일정한 문필을 갖추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면서도 그래도 어느것이 얼굴이고 어느것이 꽃이냐는 이 기가 막힌 표현에 덤덤한 건 겸손한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자식이란 놈이 아버지가 쓴 많은 동요에는 아무런 평가가 없다가 우연하게 라지오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를 가지고 난리냐는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최근에 출판사의 편집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다.   “아동문학사에서 1977년-1989사이에 률문문학분야 주요 작가로 부상된 분이고 문학상도 수상했다고 적혀 있네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사”라는 책에 씌여진 아버지에 대한 평가라고 한다. 금시초문이다.  30년이 지난 뒤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아버지에 대해 재인식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아버지가 “주요 작가”였다는 평가도 처음 듣는다. 아버지가 전문 교육을 받은 분도 아니고 시골집의 작은 방에서 할아버지가 독상으로 쓰시던 밥상을 책상 삼아 창작했던 작품으로 아동문학사에까지 오를 줄을 몰랐다. 사람은 이렇게 주변의 익숙한 것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나 보다. 동시에 번듯한 책상에 컴퓨터까지 갖춰놓고 상 하나 못 타는 나는 뭔가 싶으며 아버지가 뒤늦게 돋보인다. 그리고 칭찬과 인정이 무슨 사이다값도 아니고 왜 그렇게 아껴서는 아버지를 섭섭하게 했던가 싶기도 하다.   당시 연길시 교외의 어느 마을에서 어떤 청년이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신다면서 부지런히 찾아오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가까운 연길시내에도 쟁쟁한 작가들이 많으련만 아버지한테서 뭘 배울 게 있겠다고 이 먼 곳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고생할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나는 글을 잘 쓴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건 아니고 창작과 강의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어린 놈이 어른들사이에 끼여서 “저기요, 아버지한테서 뭘 배운다고 그러세요. 일찍 접는 게 좋을 겁니다.” 이렇게 나설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 여기에 실습하러 온 학생 치고 남은 학생이 없습니다.”   내가 실습을 갔을 때 그 회사의 직원 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뜻인즉 여기 와서 일정 기간 같이 있다 보면 우결함이 서서히 드러날 것이고 만약 나중에 인원을 모집한다면 우점보다는 결점이 더 작용할 것이라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와서 면접을 잘 보기보다는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하나의 결함을 이미 보여준 익숙한 사람이 더 손해라는 뜻이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점이 잘 보이고 잘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결함이 더 확대되여 보인다.   “온 여름 단 참외를 먹다가 막물에 가서 마지막 한개를 썩은 걸로 먹으면 앞에서 먹은 모든 맛을 다 버립니다.”   중학교 때 한어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다. 잘 나가다가 하나를 잘못해서 풀잎에 손을 베이지 말고 마무리를 잘하라는 뜻이였다. 일상생활에서 돈을 빌려도 마찬가지다. 두번 세번 빌려주다가 네번째에 가서 못주겠다고 하면 그 앞의 세번은 그냥 없던 걸로 된다. 또 시간이 돼서 재촉을 해도 돈 몇푼 가지고 인정머리가 없다고 욕을 먹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견지를 못할 거면 아예 그런 선례를 만들지 않는 게 오히려 낫다. 거절하는 당시에는 매정한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는 그게 오히려 원래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선택일 수도 있다. 특히 친구사이에는 더욱 그러하다. 화장실 갈 때 마음이 다르고 나올 때 생각이 다르다고 했듯이 간절했을 때의 마음은 여유가 생긴 다음에도 그대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다.    나는 명절 때 상사나 선배들께 인사를 할 때도 내가 이걸 쭉 견지할 수 있을지를 여러번 고민한다. 그래서 견지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다. 대신 시작을 뗐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어간다. 아니면 기다리던 사람도 실망하고 견지하지 못한 사람도 자책하게 된다.    “그 친구는 설마다 전화라도 한통 하던 게 최근에 와서는 무슨 섭섭한 일이 있는지 이제 련락을 뚝 끊었네.”   종래로 문안을 한 적 없는 제자는 원망하지 않아도 인사를 하다가 끊은 제자는 기억에 남는다. 뿐만아니라 옛날의 고마움과 현재의 섭섭함이 섞이게 되고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섭섭함만 점점 더해간다. 원래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과 삐치는 감정은 나이에 정비례한다.   고마움은 각성제가 필요한 주기적인 감정이다.   중국조선어방송넷 
95    깨달음을 위한 시간 댓글:  조회:1342  추천:0  2020-06-02
[대림칼럼] 깨달음을 위한 시간 이미옥 어느 해 봄에 “무문관(無門關)”이란 영화를 보았다. 세상과 문을 닫고 세 평 남짓한 방에서 무수한 세월을 하나의 화두를 붙잡고 보내는 스님들의 이야기. 실제 스님들의 3년 폐관 수행을 기록한 그 영화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웠지만 너무나 일상을 벗어난 이야기였기에, 스님들의 내면을 다 담아내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외부는 고요한 정적,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철저한 침묵이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벌어진다. 영화는 스님들이 삼년 폐관을 마칠 때까지 성실하게 그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지만 스님들이 그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왔는지 상상하는 것은 온전히 관객들의 몫이었다.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 깨달음이라는 것. 삼년 폐관 수행 끝에 두 명은 중도탈락을 하게 되고 그 중의 두 명은 고된 고행 끝에 암까지 얻게 되었다. 수행이 끝나고 11명의 스님 중 유일하게 인터뷰할 수 있었던 한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끝이 났는데 돌아보니 3년이란 세월이 안보여요. 나라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게 하고. 원하는 것이 많은 지. 나를 없애지 않고서는 이 공부에 들어가기가 참 힘들겠구나.ⵈⵈ” 개봉 첫 날 충무로의 한 극장에서 숨죽이고 이 영화를 보면서 여전히 가닿지 못하는 그들 내면의 깊은 심연에 또 한편 치열한 구도행위를, 나 또한 어느生에선가 해 본 듯 한 착각이 들어 문득 내 마음에도 깨달음을 향한 작은 방이 지어지지 시작했다. 세속적인 것들은 늘 바다생선처럼, 비린내를 풍기며 쉴 새 없이 반짝이며 유혹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 또한 덧없다는 것을 서른 중반을 넘기며 쓸쓸하게 깨달아 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사찰이라는 곳에 처음 가 보았다. 서울에서는 2시간 거리의 증평군에 위치한 미륵사라는 크지 않은 절이었는데 무려 22년 폐관 수행한 스님이 계시다는 것이었다. 친구 따라 가게 된 거였지만 내심 떨리고 기대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스님이 도통하셔서 전생까지 봐준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생은커녕 어린 시절 기억마저 곧잘 잊어버리는 나한테 있어 “전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뼛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편이 되지 않을까. 뭐든 좋다. 인간은 늘 자신을 새롭게 들여다보기 위해 타자가 필요하고, 타자로서의 거울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법이니까. 스님은 내가 전생에 치열하게 수행한 여러 생의 삶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온 것은 돈과 명예 같은 것을 추구함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10년 동안 한 우물을 파온 학문도 아니라고 했다. 일개미처럼 부지런히 쌓아온 삶의 모든 역사를 부정해버리는 듯한 뉘앙스에 묘하게 쾌감을 느꼈다. “모든 걸 버릴 수 있는가?!” ‘버리고 싶다. 아니, 버릴 수 없다. 아니, 버리고 싶다. 다시 생각해보면 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도 버리고 싶다.’ 이게 무어란 말인가. 생각해보니 언어의 벽돌을 하나하나 쌓는 일도, 인생의 단계를 한 땀 한 땀 수놓아 가는 것도 얼마나 진부한 일이었단 말인가. 내 눈에 비친 허무의 그림자가 확인되었다. 다크 서클을 타고 내려 온 허무의 그림자가 어느새 발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허무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니체는 이를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양분한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말 그대로 어떤 일을 목적함에 있어 크나큰 허무함을 느껴, 삶은 무가치하다고 느끼며 결국 자신조차 지양해버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체념과 저항을 반복하면서 부정하는 행위를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능동적 허무주의는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 왔던 가치가 빛을 바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과정 또한 자신의 정신이 성장하는 하나의 발판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금껏 추구해 온 환상과도 같은 세계를 더 이상 좇지 않고 새로운 창조를 준비하는 힘이다. 허무주의가 발생하는 것 또한 기존의 가치에 대해서 더 이상 수긍하지 못하는 “최고가치의 탈가치현상”으로 발생하는 것이니 자신이 납득할 만한 새로운 세상을 찾기 전에는 어쩌면 이러한 병리적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고 니체는 슬며시 경고한다.     니체는 사실,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그 결과 의미가 상실되어 인간이 어디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시대적 현상을 허무주의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시대적인 거는 개나 주라 하고, 내 허무함의 근원에는 늘 ‘죽음’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단순히 목숨을 다한, 물질적 소멸의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 모든 끝나가는 것들의 끝없는 순환에 대한 종결 같은 것이다. 시작을 하면서도 과정을 겪으면서도 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겨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의미를 창조하려는 창조력 자체가 간과되고, 실망이 지배적 상태가 . 하나의 ‘의미’를 믿지 못하는 무능력, ‘불신’” 이것이 수동적 허무주의의 특성이다. 세상이 그랬듯이, 스님 또한 어떤 방식이든 새로운 길을 제시했지만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했다. 니체의 말처럼, 허무주의에 대한 질문은 사회가 갖다 놓은 것이라 해도 그 해답과 선택은 결국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지구행성에서 부여된, 세상에서 주어진, 사회에서 지켜져야 하는, 성공과 인정으로 이끄는 모든 권위에 대한 불신을 뒤로 하고 새로운 과제를 찾아내는 일들 말이다. 그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또 다른 것에 쉬이 권위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들여다보는 자신의 조그마한 호흡에서 시작된다. 들이켜고 내쉬는 매 순간의 들숨, 날숨에서 비롯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새로운 목표가 없을 지라도 완전한 연소를 통해서 “철저한 허무주의”의 바닥을 보았을 때 비로소 통찰하고 다시 열망할 힘이 생긴다. 그것이 화려한 조명이 있는 무대 위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무대 아래 지하 18층이든 우리는 모두 나아가고 멈춰있다 또 나아간다. 생성, 상승, 번창도 있지만 쇠락, 퇴진, 소멸을 통해서 아파하고 죽어가는 것들 속에서 삶은 굴러간다. ‘스스로 긍정하는 힘’, 그 힘은 철저한 허무주의 끝에 오는 한 줄기 통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 아니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삶에 정답이란 없는 것처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깨달음에도 우리의 존재 양태만큼이나 무수한 길이 나 있다. 인사동에서 종각 가는 길에 걸어놓은 연등 행렬이 한 달 째 내려지지 않는다. 4월 30일 하기로 되어있던 연등행사가 코로나로 인해서 한 달로 연기되면서 연등도 계속 걸려 있는 것이다. 조금 전 뉴스에서는 그 연등행사마저 취소되었다고 한다. 5월 30일 이후면 사라질 저 아름다운 연등들, 시간이 가기 전에 오래오래 눈 안에 넣어두고 봐야겠다.        이미옥 약력: 서울대학교에서 한·중 현대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 재한조선족작가협회 평론분과장  
94    신의는 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 댓글:  조회:1484  추천:0  2020-06-02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나라는 상앙(商鞅)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영입해 변법을 실시하면서 점차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상앙의 변법은 순풍에 돛단 배가 아니었다. 많은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건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상앙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한방에 백성들의 호기심과 주목을 끈다. 그는 도성에 꽤 무게가 나가는 원목 하나를 세워 놓고 이런 방을 붙였다. “이 나무를 남문까지 운반해가는 자에게 10금을 줄 것이다.” 허나 이런 손 쉬운 일에 거금을 준다고 하니 믿는 사람이 없었고 뒷공론만 무성했다. 이에 상앙은 그 액수를 50금까지 올렸고 뱉은 말은 끝까지 책임질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드디어 한 장정이 속는 셈 치고 나서서 나무를 남문에까지 가져갔고 이에 상앙은 한푼도 곯지 않고 그대로 거금을 지불해 주었다. 그제서야 백성들은 상앙의 말을 믿게 되었고 따라서 변법의 실행도 탄력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중국인들은 신의와 신용을 따질 때 이 고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말에는 신용이 있어야 하고 그 신용은 일반백성에게도 고관대작에게도 그리고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경우에도 보편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요즘 미국의 WHO탈퇴선언이 이슈다. 근원적으로 따져본다면 미국은 수십년 전에 이미 WHO에 가입을 했고 이 기구와 엄연히 약속을 했다. 지원금도 물론 그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갑자기 탈퇴를 한다는 것은 신의를 포기하는 몰지각한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에 앞서 미국은 이미 많은 국제협약, 조약들에서 연이어 탈퇴행보를 이어왔다. 다양한 이유와 구실을 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경우는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마이 웨이를 외치고 나온 것이다. 뭐든지 내 뜻에 맞추라는, 나만이 정확하다는, 내가 정의의 사도라는 지나친 자만감과 유아독존식의 사유가 오히려 미국의 신의를 갉아먹고 있으며 책임적인 대국의 이미지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상앙의 두차례 변법으로 결국 진나라는 전국시대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2천년이 흐른 지금에도 신의와 신용은 사람 간 그리고 나라 간 반드시 지켜야 할 “금과옥조”이다. 이를 버리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조선어부 논평원/중국국제방송   
93    자신의 빅 픽처를 놓치지 말아야 댓글:  조회:1284  추천:1  2020-05-26
자신의 빅 픽처를 놓치지 말아야   글/ 주해봉 수필가   주해봉 약력: 흑룡강성 탕원현 조선족고급중학교 교사. 2000년에 한국 입국. 단편소설 '인생은 유희가 이니다', '주소 없는 편지', '변색안경',"외토리' 등과 수필 '생의 이미지', '깍쟁이 반추', '기다림의 멋' 등을 흑룡강신문, 료녕신문, 송화강, 은하수 등 신문과 잡지에 발표. 현재 고양시에 거주.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머나먼 남쪽 하늘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 ... ...  마음은 고향 하늘을 달려갑니다   가수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의 한 소절이다.  살펴보면 고향을, 고국을 그리는 노래들이 참 많다.  고향이란 낱말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이해가 되는데 "고국"이란 단어는 저도 모르게 "조국"이란 어구와 자꾸 헷갈린다.    고국이란 무엇이고 조국이란 무엇인가?  사전풀이대로 한다면 고국이란 (남의 나라에 있거나 또는 남의 나라로 떠났거나 남의 나라에서 돌아옴을 전제로 하여)  "고향인 나라" 라는 뜻으로 "자기 조국" 을 이르는 말이고 조국이란 자기의 국적이 속하여 있는 나라 혹은 자기의 조상이거나 부모가 대대로 살아오는 나라를 말한다. 어찌 보면 "고국" 과 "조국", 이 쌍둥이같은 명사지간에 별로 구별점이 없는 것 같지만 아무리 쌍둥이라 할지라도 필연코 그 어느 점에서든 구별되는 곳이 있듯이 기실 상세히 캐여보면 이질적인 있음이 감안된다.    적어도 국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면에서만도 뜻차이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따뜻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을 떠나고보면, 정들고 때묻은 고향을 떠나 낯설고 물선 적막한 타향을 헤매다보면 자연 따스한 그 품이 그리워나고 고향생각에 잠못이루게 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인간의 상정이라 하겠다.     실향민 (离鄉民) 이라고 하면 왕왕 사람들은 찢기고 걸키우고 쫓기어 볼품없는, 가난과 서러움으로 버려진 궁색한 모습을 저도몰래 떠올리게 된다.    우리들과 우리의 1세대들은 나라가 없어 또는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 반강제적으로 나라를 떠나 동표서랑 (东漂西浪) 의 험한 길을 헤매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서 용케도 만주로 들어와 뜨거운 자기의 두 손으로  화전밭 일구고 생활을 개척하였다.  최초에는 월경금지령 및 당시 사회의 어지러움때문에 떳떳이 살지 못하거나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숨어살아야 했으며 때로는 알심들여 가꾼 곡식도 남김없이 털리군 하였다. 이처럼 우리들과 우리1세대들은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살아온 구슬픈 역사를 엮어왔다.  이런 의미에서 놓고보면 간난신고 끝에 끝내는 합법적공민으로 된 오늘에  와서도 이향민들이 그토록 사무치게 고국을 그리게 되고 애절하게 고향을 부르고 있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이다.      기실 고국, 고향을 그리는 그 애타는 심정은 한시도 실향민들의 마음 속에서 지워진 적이 없겠지만 국문이 열림과 더불어 고국나들이가 상대적으로 빈번해짐에 따라 그 웨침과 그리움이 이상하리만치 높아지고 짙어졌다는 점, 그보다 그 고국이 아니면 이젠 생존할 수 없다는 의뢰심과 중독성에 빠졌다는 점이 필자 나름대로의 느낌이다.    적어도 첫 시작에는 그 부름과 그리움이 슬픔과 아픔으로 반죽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허나 지금에 와서 날이 갈수록 그 외침과 그리움이 어딘가 본의가 아닌 방패로 된 것 같다.    내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웃음이 아닌 꾸며낸 웃음은 언제나 어색하고 남에게도 시원하고 개운한 인상을 던져주지 못한다. 진정 아픔에 젖은 구슬프고 애절한 눈물만이 뭇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도 세 번 하면 역겹게 들리는데 그런 진심이 아닌 목소리로 고국이요, 고향이요 하며 외친다면 누군들 동정하고 귀를 기울이랴. 이런식의 멋적은 "만담"이 되풀이되다 보면 자연 상대방의 반감을 자아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불유쾌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법.    물론 우리들의 그 순수하던 망향심, 귀향심이 변태적으로 탈바꿈하게 된 원인도 파볼 수 있다. 역대로 약소민족으로서의 우리조선족은 외래의 침략을 받을대로 받아왔다. 일제의 36년 간의 그 몸서리치는 강점 사실 하나만 봐도 알고 남음이 있다. 그래서 부평초마냥 떠돌아다니는 ” 떠돌이민족" 으로 되었다. 그처럼 망국 실향민으로서의 "하루살이" 의식, 장기간 평균주의 풍토에 물젖어 형성된  "평균주의" 의식으로 전전긍긍하던 차에 갑자기 국문이 열리고 그래서 외화묶음을 만져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 갖은 방법을 다해 억지로라도 향수해보려고 모지름을 쓰는 억지심리, 의뢰심리가 형성된 것 같다. 이런 억지심리, 의뢰심리와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조종과 부축하에 귀향심, 망향심을 방패로 상대방의 사유방식에 어그나게 유감스런 언행을 취하게 되였으며 따라서 상대방의 호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써 보잘것 없는 모종의 개인목적을 이루고저 자기가 지금 몸 담고 있는 곳이 나의 나라, 나의 땅이라는 주인공의식 마저 망각하고 술덤벙물덤벙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 말에 낳은 정, 키운 정이란 말이 있다.    낳았으니 낳느라 그만큼 진통을 겪었을 것이고 키웠으니 키우느라 그만큼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문제는 낳기는 하였지만 이런저런 원인으로 제대로 거둬주지 못하는 부모가 있게 되는 것이고 비록 자기의 피줄을 타고난 자식은 아니지만 아글타글 애지중지 키워가는 부모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 살림이 넉넉치 못하여 간혹 헐벗을 때도, 배를 곯을 때도 있기 마련. 아무튼 그처럼 남의 자식을 용케도 키워냈다는 그 사실 본 자체가 한결 돋보이는 점이라 하겠다. 이런 부모를 후에 와서 계모, 계부라고 살림이 구차하다 꺼리며 미련없이 떠나가버리면 꼬물만한 인정마저 없는 배은망덕한 인간이라 하겠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인간이라면 기본이 돼야 한다.    물론 그렇다 해서 고국에서 우리 실향민들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아직은 부유하지 못한 우리의 경제와 문화를 포섭하고 부흥시키려는 고국의 진솔한 마음, 한 민족, 한 겨레만이 감지할 수 있는 동포애의 숨결을 우리는 몸 가까이에서 차분히 느낄 수 있다.    일찍 길림성 축구팀을 안아준 "삼성그룹"의 넓은 마음, 연변축구오동팀을 위해 혼신을 바쳐온 최은택감독, 10 여명의 불우학생들에게 조학금을 마련해준 "예산신문사" 의 따사로움, 경제난에 부대끼는 탕원현 고급중학교에 후더운 성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부산시 시민들의 뜨거운 마음, 재중어린이들이 하루빨리 훌륭한 인재로 자라나기를 기원하면서 "천재교육도감"계렬서를 듬뿍 선사해온 "한국일보"사의 따뜻한 손길, 그리고 해외동포들의 입국사정을 헤아려 취업방문의 길을 새롭게 열어준 한국정부의 고마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뜨거운 후원의 손길이고 박수쳐야할 정책이다.    그런가 하면 눈물이 나도록 섭섭한 일도 없지는 않다. 고국의 식당에서, 호텔에서, 공장에서 차별받는 우리 동포들 (실향민들)  재미, 또는 재일 등 다른 동포들은 어떤 활동도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하면서 유독 우리 재중동포에 한해서만은 되도록 제한하려는 고국의 처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법체류자라고 손목에 수쇄를 채우는 출입국사무소도 이해할 수 없다. 무엇때문일까?  구태여 수다스레 해석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세상에 완전완미한 것이란 워낙 존재하지 않는다. 철두철미하게 완벽한 것을 바라는 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만큼 우리는 좀 더 현실적 인간으로 되어야 할것 같다.  그러자면 우선 먼저 자신건설 (自身建设) 부터 착실히 해야 할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떳떳이 살아가자면 남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자기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손에 돈 좀 쥐어졌다고 개잡은 포수마냥 우쭐거릴 하등의 이유도 없다. 명석한 두뇌, 겸손하고 부지런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모르는 것은 가장 미련한 존재이다. 그렇다고 수시로 남 앞에 자기의 허물을 자랑하는 것 역시 아둔하기 짝이 없지만. 망향심은 나뿐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변태된 망향심, 다시말해서 맹목적인 망향심, 귀향심은 그릇된 것이다. 그로 인해서 우리들의 강한 생존의식이 흐려지고 생존자세가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계적 범위에서 경제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조만간은 남부럽지 않게 꿋꿋이 일떠서던 당년의 그 성격, 그 기질, 그 의식을 되살려, 그토록 악렬한  환경에서도 춥고 건조한 만주벌에 몇천만 헥타르의 수전을 개답하여 대국의 국민들을 놀래우던 월경조선인의 강잉한 정신을 되찾아 자기의 피땀으로 자기의 알창 노동과실을 창조하여 풍족한 자기의 세계를 꾸려야 할 것 같다.    오늘날 분명 우리는 정체성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 시대보다 개성이 존중되고 개인적 삶의 스타일이 보장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디아스포라의 특정된 환경하에서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가치화되는 현실사회에서의 물질의 풍요로움은 더욱더 우리를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하며 곤혹스럽게 한다.    생각밖으로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중태에 빠져 허덕이며 신음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정세 속에서 현실을 정시하며 옳바른 소비의식, 자체의 앞날을 고려할 줄아는 계획의식,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미래지향의식을 키워 생존개척에 힘 다한다할 때 현존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노라면 정녕 그러노라면 비록 "석쉼"한 목소리로 부른다 해도 고국은, 고향은 우리의 부름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구두대신 운동화"신고 달려간다 해도 우리를 달가이 맞아주고 껴안줄 것이다.    의뢰심 버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때, 어려움을 극복하며 오롯이 삶을 배워나갈 때 우리는 생의 노예가 아닌 생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빅 픽처 (big picture) 를 놓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92    역풍이 몰고 온 온라인수업 댓글:  조회:1374  추천:0  2020-05-21
역풍이 몰고 온 온라인수업 김정   새해벽두에 찾아온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 코로나 19의 여파로 지구촌사람들은 하루밤 사이에 ‘초롱 속에 갇힌 새’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유네스코의 3월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사태로 전세계적으로 15억여명의 학생들이 등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가 우리 나라의 2억 2000만 대중소학교 학생들은 교육당국의 “학교로 갈 수 없어도 학업은 멈추지 않는다.”는 발 빠른 대책으로 오프라인수업(교실수업)과는 별개로 일사불란하게 온라인수업에 들어섰다. 사실 인터넷을 리용한 온라인수업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궤도에 올라있다.  세계 수많은 유명대학에서는 온라인 공개 강좌를 위해 많은 교수들이 강의를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 기반을 둔 코세라에(Coursera)도 4000여개 강좌가 올라있어 결국 대학교 과목이 거의다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인터넷 강의만으로 정식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도 이미 많이 있다. 례를 들어 미국의 애리조나주립대학은 모두 90여전공의 학사학위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등록금은 전통적인 오프라인 과정의 30% 정도인데 여기에 3만명이 넘는 학생이 등록하고 있다. 연변대학에서는 2월 17일부터 온라인강의가 시작되였다. 필자도 처음으로 온라인강의를 접하면서 관중석에서 배우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열성팬마냥 마음이 들떠있었다. 교수님의 인터넷 첫 강의도 너무 기대되였다. 그런데 교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클로즈업되는 PPT와 함께 목소리만 들려왔다. 첫 온라인 강의여서인지 화면이 끊기고 음성이 끊기는 인터넷 접속불량 현상도 자주 나타났다. 하기야 전국의 수천만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온라인수업을 받다 보니 접속불량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학생들을 온라인이라는 보이지  않는 교실에 모여놓고 수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학교 문이 굳게 닫겨진 현시점에서 이런 방식으로도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며 우리 인생의 또 하나의 귀중한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온라인수업은 인터넷이 있는 곳이면 공간제약이 없이 어디서나 수업을 받을 수 있는 편리한 점이 있다. 집에서 수업을 편히 받을 수 있어 등교, 하교시간을 아낄 수 있고 ‘교통체증’ 때문에 쌓이는 교통비도 절약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이다. 또 코로나사태로 ‘집순이’가 되여버린 필자 같은 녀학생들은 화장하고 옷차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며 더우기 친구나 교수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자칫 온라인수업으로 마음의 탕개가 풀려 일상이 라태해지거나 자기통제능력을 잃어 ‘굴레 벗은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온라인수업은 더욱 높은 자률성이 요구된다. 따라서 자각적으로 학습하고 주동적으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자주학습 능력을 양성할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온라인수업는 또 오프라인수업보다 많은 기술적인 선진기능을 가지고 있다. 오프라인수업 때에는 출석체크를 교수님이 일일이 확인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온라인강의의 출석체크는 많이 수월해졌다. 교수님이 출석체크 공고를 올리고 학생들이 ‘확인’을 누르면 출석상황이 일목요연해진다.  온라인강의는 또 수시로 다시 볼 수 있는 기능이 있어 의문점이 있으면 교수님의 강의를 반복적으로 듣고 참고서적도 뒤적이노라면 사고의 범위도 넓어지고 더 깊어진다. 이렇듯 공간적으로 열리고 신심적으로 자유로운 온라인수업은 좋은 점도 많지만 ‘옥에도 티가 있듯’이 단점도 존재한다. 바로 학습의 실효성 문제이다. 온라인수업은 학생들이 교수님의 강의를 볼 수는 있지만 교수님은 학생을 볼 수가 없고 학생들이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기에 어떤 학생들은 출석체크를 하고는 영상을 틀어놓은 채로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가끔씩은 교수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 돌발질문도 하는데 ‘바다에 던진 돌’처럼 돌아오는 것은  ‘묵묵부답’이다. 한결 자유롭게 열린 온라인수업이지만 선생님과 눈빛을 맞춰가며 공부하는 오프라인수업보다 다소 교감이 말라버린 듯한 따분한 느낌도 들어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해난다. 특수한 시기에 나타난 온라인수업은 전통적인 우리 교육에 적지 않는 충격적인 문제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나가노라면 온라인수업도 오프라인수업에 못지 않은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강의의 이런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외국의 유명대학들의 인터넷강좌는 이미 단순하고 일방적인 강의 동영상이 아니라 학생과 교수간의 상호토론, 그리고 학생간의 대화도 가능해졌다. 그리고 강의중 수시로 퀴즈 및 중간고사를 시행하면서 이에 대한 교수의 즉각적인 반응과 건의로 교육효과를 높이고 있다. 전통적 대면강의가 완전히 불가능해진 이번 사태를 계기 삼아 우리 대학들과 대학생들도 온라인시대를 본격적으로 준비했으면 좋겠다. 능률적인 지식전달을 위해서는 새롭고 힘든 노력이 많이 요구되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다소 생소하겠지만 온라인수업이라는 ‘배움의 새 터전’에서 학업에 매진하는 것이 현시대 우리 대학생이 갖춰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연변일보 
91    내편 댓글:  조회:1346  추천:0  2020-05-20
내편 궁금이 “우리 편에 대해서는 안 좋은 일도 감싸줘야 되고 상대 편에 한해서는 좋은 일도 좋지 않게 보이게끔 해야 된다는 게 습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연예프로에 출연한 경찰관 출신의 국회의원이 한 말이다. 경찰관으로 있을 때는 옳고 그름이 분명해서 쉬웠는데 정치를 하게 되면서 자기의 원칙적인 생각을 감춰야 할 때도 있어서 어려웠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그런가 하면 우정을 유지하려면 지켜져야 하는 세가지 원칙을 서술한 책을 봤다.   “불합리한 요구를 제기하지 말고 친구의 사생활을 보호해주며 사사건건 내 편이 되여달라고 요구하지 말라.”   여기서 정치보다는 우정이 많이 너그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든지 친구가 내 편이 되여주면 든든하고 고마운 일이다. 한편 스스로도 내가 잘못했다는 걸 뻔히 알지만 그렇더라도 친구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섭섭한 것도 당연한 감정이다. 위챗이 생겨나면서 아래에 “좋아요”를 쳐줘도 내 편인 것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사람은 내 편에 목이 마르고 내 편에 감동을 느끼고 내 편에 취약하다.   편을 가르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만 사람은 어디까지나 감정동물인 만큼 내가 친하고 싶고 베풀고 싶은 사람이 분명 따로 있다. 한편 달라는 게 없이 미운 사람도 있다. 생각해보면 딱히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없고 나와 어떤 리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그냥 싫다. 이렇게 싫으면 그 사람의 우점도 탈아서 결점으로 생각하기가 일쑤다. 미운 사람 고운 데 없다는 게 그 말이다. 그럴수록 내 편이 더 소중해진다.   내 편의 대표적인 표현이 맞장구를 쳐주는 거다. 이런 현상은 상사에 대한 직원들 사이 뒤담화에서 아주 시원하게 등장한다. 평소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하소연할 출구를 찾고 있던 중 휴식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마침 동료가 툴툴거리며 들어온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상사가 아주 악덕 상사라며 줄줄이 억울함을 쏟아낸다. 이게 웬 떡이냐 싶은 동료는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신나게 동조한다. 그 뒤로 둘은 틈만 나면 휴식실에서 만나 원한을 해소하는 달콤한 시간을 가진다. 급결속을 다지는 내 편의 흡인력이다. 그런데 이런 불만 해소 방식은 나중에 다른 사람 앞에서도 “내 편”에 대한 뒤담화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내 편이 된 시작이 뒤담화가 계기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나 할가. 원망은 어떤 경우에도 정상적인 정서해소방법은 아니다.    이쯤에서 다른 사람이 불만과 원망이 많다고 떠드는 당신은 그럼 그렇게 도를 닦아서 불만에 한점 부끄럼 없냐고 질문한다. 잘 물어봤다. 나도 장장 10년이라는 세월을 불만에 원망을 타서 폭탄주를 마시며 세월을 보낸 적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정서의 위해성을 실감나게 잘 안다. 뒤돌아보면 해결된 것도 없고 그렇게 보낸 10년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세월이였는지 허무하다. 지금도 그 병이 완치된 건 아니지만 애써 자제하려고는 한다.    내 불만의 성수기에 주변에서 내 편이 돼 준 친구들이 얼마나 피곤했을가 라는 생각도 한다. 낮술에도 불러내고 휴식일에도 불러내고 오밤중에도 불러내서는 어떤 때에는 이튿날에 기억도 없는 불만을 수없이 쏟아냈다. 이튿날에 기억이 없다는 것과 그 당시에 열변을 토로하기에 신난 건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거기에 시원하게 동조해 맞장구를 쳐주었던 내 편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불만해소방식이 만약 효과가 있었더면 지속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짧은 시간내에 쏟아내는 통쾌함에 의한 스트레스 해소로 간의 건강에는 많이 도움이 됐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내 편의 간절함은 열애중인 련인 사이에서 녀자 쪽이 제일 간절하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한편이 돼야 한다. 그게 억지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래도 나를 설득하기에 앞서 먼저 내 편이 되여주십사 하는 게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누가 그런 줄 몰라요? 그냥 그렇다는 얘기예요. 좀 맞장구를 쳐주면 어디 덧나는지...”   남자가 하도 도리를 따지고 강의를 하려 들면 답답해서 나오는 녀성들의 마지막 대사다.   도리는 누가 모르는 게 아니고 론리성으로 따지면 녀성들이 훨씬 조리정연하다. 련애중에 다투면 남자들이 항상 지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말인데 녀성들은 다툼에서 이기면 자기가 도리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냥 성별상 타고난 론리구조와 강세에서 이루어진 필연적인 결과였을 뿐이다. 다만 그들은 내편의 간절함을 아는 만큼 여러 장소에서 내 편이 되여주는 의리를 잘 지킨다.    “의리”는 남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단어지만 남자들만의 전유물인 건 아니다. 많은 경우에는 자상함과 따뜻함에서 지켜지는 녀성들의 의리가 더 확고하다. 모성애의 바탕에서 나오는 헌신적인 배려가 의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 편은 언제나 나를 편하게 해주는 그런 편이다. (중국조선어방송 계정)
90    코로나가 주는 선물(이미옥) 댓글:  조회:1457  추천:0  2020-05-19
 [대림칼럼] 코로나가 주는 선물 이미옥 “아침에 눈을 뜨면 뉴스를 확인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코로나19가 하루가 다르게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삶도, 일상도 원인불명의 바이러스에 잠식당하고 있다.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감염의 확산과 함께 일상에 침투된다. 평온한 일상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오버랩 되고, 심리적 충격이 여진처럼 다가온다.ⵈⵈ”   2월 중순에 한국연구재단의 청탁을 받고 코로나 시대의 연구자의 시선에 대해 썼던 칼럼이다. 이 칼럼을 쓴 지가 석 달 지났다. 5월 중순, 다시 원고 마감을 앞에 두고 안일하고 게으른 마음으로 그때 칼럼을 다시 꺼내 보니, 웬걸 그때와는 달리 내 마음도 상황도 많이 변해 있다. 고작 3개월, 마음은 축 늘어진 기타줄 마냥 느슨해졌고 변화된 일상에도 그럭저럭 적응해가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코로나 수습기” 3개월을 보내고 나니 사실 무엇이 문제였는지조차 점차 망각되고, 눈부신 5월이 되어서는 얼어붙었던 마음마저 해빙처럼 살살 녹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얼마 전 이태원 집단 감염이 다시 터져버렸다. 코로나가 갓 불거진 2월만큼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진 않았으나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음을 경고해 주는 듯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3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니지만 인간의 생각과 습관과 가치관까지 변화시킬 만큼 긴 시간도 아니다. 특히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고 집단문화가 발달한 한국사회에 있어서 3개월은 참을 만큼 참은 인내심의 한계치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서울의 한 유흥가라는 작은 집단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라도 해도, “빙산의 일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잠재된 집단 무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술과 모임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 또한 “이런 삶은 너무 퍽퍽하지 않은가?”라는 생각과 함께 “사람들”에 대한 묘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니까.   이미옥 박사는 동양화 그림을 배우며 그림전시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코로나가 갖고 온 변화는 침체된 것처럼 보이는 삶–위축된 경제와 단절된 관계와 불투명한 미래까지-에서부터 일상의 작은 규칙들,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것 등 삶의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코로나 이후의 맞닥뜨린 냉혹한 현실이지만 반대급부도 분명 존재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차가운 현실의 이면에는 분명 또 다른 내용의 속지가 숨겨져 있다. 코로나로 인해 ‘국가의 감염병 예방 시스템이 새롭게 정비되고 방역 의료체계가 발전하고 환경오염이 줄고’와 같은 거창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홀로 있음의 경험을 통해서 내 자신의 마음 들여다보기가 가능해졌다. 늘 연결되고 확장하기를 원했고 뜨거움을 지향했던 삶의 속도를 늦추고 열기를 식히고 외부보다는 내면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보려고 하지 않았던 삶의 내면을 우리는 외부와 단절되면서 마주할 기회를 문득 갖게 되었다. 무리를 따라 다녀서는 발견할 수 없는 내 안의 자아, 그 내면의 자아가 체득한 삶의 비밀들, 구석구석 숨겨져 있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리를 비운 뒤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 볼 때만 만날 수 있는 메시지들.       어느 한 시인은 “마스크 쓰는 것을 통해서 온갖 부끄러움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얼굴을 가리고, 손 씻기를 통해서 그동안 했던 나쁜 일을 그만 두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나의 방식이 옳은가를 점검하여 네모난 가치관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성급하게 입을 열고 손의 것을 움켜쥐고 발걸음을 재촉해 왔는가. “시간은 금”이라고 외치며 시간을 분절하여 쓰고 공간을 넘나들며 무수한 사람을 만나고 외적 경험을 끊임없이 축적하는 분주함 속에서 살아왔다. 자신을 부단히 확장하는 것만이 삶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바람직한 길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그렇게 성공을 향해서 속력있게 달려온 삶이 어느날 문득 멈출 수도 있다는 것, 어느 순간 질병과 죽음은 삶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텅 빈 삶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코로나는 묵직하게 알려주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이 변화에 적응하기가 힘겹다. 과거에 비해서 축소된 일상은 삶의 소소한 즐거움 또한 앗아간 측면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삶의 변화가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해서 미래의 어떤 점에 다다르게 될지도 알 수 없고 함부로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나 코로나가 준 선물은,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와 함께 내면의 발견에 있으며 그것을 이겨내는 힘은 오롯이 ‘오늘’을 살아내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문득 코로나가 왔던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코로나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변화된 삶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미옥 약력: 서울대학교에서 한·중 현대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 재한조선족작가협회 이사. 동북아신문
89    상해지식청년과 조선족남편의 반세기의 정 댓글:  조회:502  추천:0  2020-05-19
필자(수림제): 하향 51주년에 즈음하여 이 글을 써 평범치 않았던 그때 그 나날들을 기념하련다 1969년 4월 19일, 상해지식청년인 나와 나의 고향친구들은 동북 변강의 연길현에 와 자리를 잡았다. 힘들고 아름다왔던 그 행복한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속에 생생하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하향 51주년에 즈음하여 이 글을 써 평범치 않았던 그때 그 나날들을 기념하련다. 1969년 7월 상해지식청년 수림제는 ‘무쇠 처녀’전투대를 이끌고 세린하저수지 시공에 참가했다.(좌1 수림제) 우리의 혼인은 남들과는 달랐다. 나와 류정윤은 만난 그날부터 모든 사람들의 강렬한 반대를 받았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다. 나는 상해지식청년이고 그는 토배기 농민이고 나는 한족이고 그는 조선족이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혼인은 연길현 세린하판에서 큰 풍파를 일으켰다. 그의 부모님들은 외부의 강렬한 영향을 받아 이 혼사를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나섰다. 그는 여섯 형제자매중 맏이다. 조선족의 풍속습관에서 맏아들은 가정의 모든 중임을 짊어져야 한다. 하기에 며느리를 고르는 것은 가정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였다. 허나 나에게는 조선족며느리로 될 조건이 하나도 없었다. 조선말도 모르고 살림 할 줄 몰랐으며 밭일 할 줄도 몰랐다. 그와의 결혼은 그야말로 허황한 꿈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과 부모님들의 반복적인 반대로 류정윤은 그만 앓아눕게 되였다. 공산당원이 어찌 지식청년과 련애를 할 수 있나? 집형편이 이렇게 어려운데 이런 계집애를 데려왔다가는 언젠가는 달아날 것이 뻔하다. 이런 저런 소문에 견디다 못해 그는 단식했다. 그는 단식으로 부모님들에게 항의했다. 얼마 안지나 그는 크게 앓았고 그 바람에 부모님들은 더럭 겁이 났다. 듣자 하니, 그때 시어머님은 모든 친척들을 모아놓고 이 혼사를 어떻게 하겠는가를 의논했단다. 결국 친척들도 할 수 없이 이 혼사를 인정했고 시어머님은 집체호에 와서 나를 찾아 말했다. “우리는 네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후에 우리 집의 가난한 생활에 네가 견뎌내지 못할가봐 그런거다. 만약 네가 상해로 돌아간다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하겠나? 그리고 우리 집안의 큰며느리를 하려면 네가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짊어지겠느냐 ? 네가 우리 조건에 부합되지는 않으나 아들의 뜻이 이러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더러 이튿날 아들을 가서 만나 보라고 했다. 풍파가 지난 뒤 처음으로 정윤과 만났을 때 나의 마음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수로 복잡했다. 그래 우리의 만남이 잘못된 만남인가? 아니면 연분일가? 그는 우리가 서로 부부로 되지 못하면 나더러 자기의 동생으로 되여달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사랑은 순결했고 진실했다. 이 사랑을 위해 나는 길림공업대학으로 갈 기회를 포기했고 시내에 들어가 일할 기회도 포기했고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도 포기했으며 눈앞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변의 가난한 산골에 남았다. 그것은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것이였고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시집간 그날부터 나는 꼭 좋은 며느리로 되리라 작심했다. 나는 조선말을 알아들어야 했고 조선말을 할 수 있어야만 했다. 나는 낮이면 그들의 대화를 한어로 번역해서 기록했고 저녁이면 2메터 길이에 1메터 너비의 침대에 누워 종이로 벽을 바른 작은 방에서 신문지로 도배한 천정을 바라보며 낮에 적어놓았던 조선말을 암기했다. 근 일년이라는 시간을 애써 공부했더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말은 자기의 특색을 갖고 있었다. 로인, 어린이에 대해 한어로는 같은 말이나 조선말로는 말하는 방법이 여러가지였다. 언어를 배우면서 나는 많은 웃음거리를 만들었다. 시부모님과 많은 불경스러운 말을 했으나 사후에 그들은 모두 리해를 해주었다. 나는 자신의 총명과 나날이 향상하겠다는 결심으로 언어의 관문을 넘어섰다. 나는 지금 조선말로 회의를 사회할 수 도 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조선족의 며느리로서 밥 짓는 이 관문을 꼭 넘어서야 했다. 그때 나는 너무 두려웠다. 부엌에는 세개의 크고 작은 검은 가마가 줄느런히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났다. 시어머님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자기와 함께 밥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 어려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고비를 넘겼는지 모르겠다. 조선족은 또 하나의 범절이 있는데 바로 아침식사를 다 준비하고는 반드시 두개의 밥상을 차려야 했다. 하나는 남자들 밥상이고 다른 하나는 녀자들의 밥상이다. 언젠가 손님이 왔는데 나는 기쁜 나머지 정윤의 옆에 가서 앉았다. 이를 본 시누이가 말했다. “올케는 어찌 자기 앉을 자리를 몰라요? 지금 어디에 가서 앉았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끝내는 참고 녀자들의 상에 돌아와 앉았다. 조선족은 또 한가지 습관이 있는데 다 만든 음식은 꼭 먼저 남자들 상에 놓아야 한다. 하여 그 시대에서 가마솥안의 제일 우층의 이밥은 시아버님과 남편 등 남자들이 먹었고 밑층의 옥수수 누룽지는 나와 시어머님이 먹었다. 그 시절 나는 시어머님의 지도하에 조선족의 여러가지 음식 료리법을 배워내 소위 말하는 진짜 조선족 아줌마로 되였다. 1973년 봄, 연길현 룡정 세린하공사 세린하 5대에서 나는 남편네 35평방메터되는 초가집앞에서 가족사진을 남겼다. 이 가정에서 나는 인내와 순종을 배웠다. 나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최고 지시’로 삼았다. 우리 집은 나까지 식구 아홉명이서 35평방메터 되는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모든 가족에게 다 이불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료리를 하든 국을 하든 기름을 넣지 않는다. 기름을 살 수 도 없었다. 매일이다싶이 된장에 된장이였다. 어떤 때는 소금 살 몇십전도 없어 돈을 꿔서 사야 했다. 이런 모든 것을 나는 다 겪어내야 했다. 그때 나는 상해 부모들이 나에게 보낸 돈을 모두 이 가정에 썼으나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이 가정을 선택했기 때문이였다. 어느 하루, 시어머니가 나를 찾아 말했다. 이전에 자기는 닭사양을 하면 닭이 죽고 돼지를 기르면 돼지가 죽어 부업수입이 없었고 배당금(分红)도 량식값을 제하기에 타지 못했단다. 그러면서 며칠뒤 동불사에 장날이 있는데 나보고 시아버님과 같이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님이 나더러 내가 좋아하는 씨암퇘지를 사오라고 했다고 정윤에게 알렸다. 남편은 동의했다. 그날은 4월의 어느 한 장날이였다. 나는 아침 일찍 시아버님의 소수레에 앉아 동불사로 향했다. 어쩐지 나는 그날 무척 기뻤다. 아주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아버님은 나더러 장마당에 나온 모든 돼지들을 돌아보게 했고 나는 그중에서 35원 주고 검고 큰 씨암퇘지를 샀다. 집에 돌아오자 시동생과 시누이가 돼지우리를 돌며 보고 또 보더니 돼지가 왜 이리 못생겼느냐고 했다. 온통 주름투성이인 돼지얼굴을 보며 나보고 돼지 고를줄 모른다고 놀려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십리 길을 오가며 돼지를 사왔는데 이렇게 놀려대니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하지만 나는 꾹 참고 꼭 돼지를 잘 키워내리라 작심했다. 그땐 돼지 기르는데 사료가 없었다. 모두들 산에 가서 풀을 캐다가 먹여야 했다. 나는 매일 산에 올라가 야채를 캐서는 마대에 메고 내려오면서 알심들여 돼지를 길렀다. 매일 아침 일어나 처음으로 하는 일이 바로 닭과 오리에게 먹이를 주고 돼지죽을 먹이는 것이다. 이 또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다. 닭들이 먹이를 빼앗아 먹는 것을 보노라면 나는 너무 재미있어 내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모두 잊군 했다. 곱지 않은 그 주름투성이 돼지가 우리 집에 온 뒤 우리 집 운명이 바뀌여졌다. 그놈은 해마다 두 배씩 새끼를 낳았는데 번마다 12마리 내지 15마리씩 낳았다. 처음에 25근에서 30근되는 새끼 돼지들은 15원 내지 25원에 팔 수 있었다. 이는 가난한 집안으로 말하면 재부가 아닐 수 없었다. 예닐곱근 되는 수탉이 그때는 4원 50전에 팔렸으니 말이다. 번마다 장에 갔다 돌아 올 때면 나는 나 절로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때로부터 시어머님은 우리 집의 모든 돈을 나더러 관리하게 했다. 시부모님도 모두 나한테서 돈을 타갔다. 이 역시 조선족 풍속의 하나다. 큰 며느리가 가사를 관리하고 살림을 주관한다. 시동생, 시누이가 시집 장가를 가기전까지 그때는 아주 가난했으나 우리 집은 모두가 한마음이였다. 나는 자신의 노력으로 고되고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 가정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이 가족의 인정을 받았다. 남편 정윤은 여섯명의 형제 자매중에서 맏이다. 그이와 그의 형제 자매들은 지금까지도 화목하다. 막내 녀동생은 그이와 17살 차이가 난다. 하여 그들은 형님이며 오빠인 그이를 아버님벌로 대한다. 정윤은 나와 형제 자매들에게 모든 일에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쟁론하지 말고 모두 자기부터 문제를 찾아보라고 당부하군 했다. 이 또한 가훈이라고 할수 있었다. 나의 큰 시누이는 남편이 집을 떠나면서 8살, 6살과 4살배기 아이들을 남겨놓았다. 둘째 시누이는 남편이 병으로 돌아가면서 8살과 6살 나는 아이를 남겼다. 그들은 모두 좋은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시집도 우리 집보다도 가난했다. 그때 나는 벌써 세 아이의 엄마로 되였다. 우리 집에 속하지 않았던 아이 다섯명이 한꺼번에 더 생겼다. 이는 우리 가정에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 가정의 살림을 맡은 나는 정윤의 얼굴을 보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시어머님과 로투구에 둘째 시누이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뻐스가 없어 모두 걸어가야만 했다. 이튿날 아침일찍 나는 20리를 걸어서 세린하에서 동불사로 갔다. 시어머님은 원래 나를 가지 말라고 했다. 길이 너무 멀어 내가 걷지 못할가봐 걱정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걸어서 동불사까지 갔다. 맙소사, 동불사에서 로투구까지 아직 십여리 길이 남았다. 어떻게 갈가? 나는 세린하와 동불사 길목에서 로투구로 향하는 화물차를 얻어 타고 가려 했다. 차량은 한대 두대 지나갔으나 누구도 세워주지 않았다. 나는 애가 날대로 났다. 로투구로 가는 차를 불러달라고 하늘에 대고 빌어보기도 했다. 나는 정말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차가 나의 앞에 와 서주기를 바라면서 계속하여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돌을 실은 차가 나의 앞에 와서 멈춰섰다. 희망이 보였다. 운전기사는 나를 로투구 철도 옆에 있는 마을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쉽게 둘째 시누이네 집을 찾았다. 나는 그녀의 처지를 정말 동정했다. 남편 없는 녀자가 어찌 홀로 농촌에서 생활하고 농사를 짓겠는가? 나는 정윤과 시부모님과 토론도 하지 않고 그날로 둘째 시누이네 일가를 데려와 시부모네 집에서 같이 살게 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모순이 생기기 마련, 모녀 사이도 매 한가지였다. 둘째 시누이는 엄마가 자기 애들을 원래 이 가정에 속하지 않은 애들이라며 다른 눈으로 본다고 여겨 말다툼의 씨앗으로 되였다. 그러자 시어머님은 매섭게 나에게 말한다. “너는 왜 내 동의도 없이 제 마음대로 그들을 데려 와서 집안이 부산해지게 만드냐?” 맙소사, 내가 잘못 했나? 시어머님과 딸의 불화로 시어머님은 늘 나에게 화를 냈다. 어느 하루, 나는 시어머님과 말했다. “어머님 딸은 나보다 어머님이 더 사랑하고 아낄겁니다. 맛 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딸이지 내가 아니잖아요. 이건 현실이에요. 내가 시누이를 어머님과 함께 있으라 한 것은 딸에 대한 사랑이 어머님이 나보다 엄청 더 크기 때문이예요.” 그뒤로 모녀 관계는 아주 좋아졌다. 외부모 가정에서 자란 두 시누이네 자식들은 모두 출세했고 지금은 미국, 일본과 한국에서 살고 있다. 다들 유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어 나는 시름이 놓인다. 살아가면서 부부사이에는 모순이 생기기 마련이다. 절대적으로 순탄한 부부가 없다. 어느 여름날 밤, 갑자기 누군가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그때 우린 자고 있었다. 정윤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사람이 없었다. 다시 문을 닫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뚝뚝뚝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련속 세번이나 정윤이가 문을 열어보았으나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무서워 이불속에 숨었다. 누구야? 야밤중에 와서 문을 두드려? 그림자도 소리도 없이. 뭐하는 짓이야? 정윤은 문을 닫은 뒤 큰소리로 나보고 일어나라고 했다. 나는 그가 그토록 성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나보고 말했다. 문 두드린 사람이 누구야? 너는 꼭 알거야, 빨리 그 사람을 대라. 나는 무섭고도 놀랐다. 누군지 내가 어찌 알랴? 의도가 무엇일가? 나는 울면서 정윤에게 말했다. “오랜 세월동안 당신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토록 어려웠던 나날에도 우리의 감정은 그렇게 확고했다. 당신이 평생 가난했지만 나는 당신의 인품을 보고 살아왔다. 그런데 도리여 나를 믿지 못하고 그 사람이 누군지 대라고?” 나는 엄청난 억울함을 당했지만 어떻게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정윤은 화김에 뒤방 창문 유리를 발로 찼다. 발에서 피가 흘렀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려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이튿날 점심, 내가 시어머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게 되였는데 시어머님이 물었다. “눈이 왜 그렇게 부었느냐? 어데 아프냐 ?” 나는 울면서 시어머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어제 야밤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온 저녁 내내 싸웠어요. 정윤은 내가 바람났다고 의심하며 화김에 유리창을 박살냈어요.” 시어머님도 그 사람이 누굴가 하고 이상해 했다. 점심에 시아버님이 밭에서 돌아왔다. 시어머님은 어제 저녁 누군가가 아들집에 와서 몇번이고 문을 두드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아들 며느리가 온 밤 싸웠다고 시아버님께 말했다. 시아버님의 대답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놀라 펄쩍 뛰게 만들었다. 시아버님이 우물쭈물 말했다. “바로 나야, 내가 술을 마시고 세번 문을 두드렸어요, 손자를 보고 싶어서 말이야.” 남아선호사상의 조선족 시아버님이 얼마나 손자를 아끼시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야밤삼경에 문을 두드렸다고 우리가 뭐라 할가봐 번마다 문을 두드리고는 우리 집 뒤마당의 옥수수밭에 숨어서 우리가 찾지를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뒤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을 호되게 닦아세웠다. 그러나 나는 시아버님의 마음을 리해했다. 그리고 정윤이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보아냈다. 리해와 순종은 가장 좋은 약이였다. 아들이 여섯살때 가족사진 낮에 일하는 외에도 밤이면 마을사람들을 도와 옷이며 모자며 앞치마를 가공해 수입을 늘여서는 살그머니 돈을 저금했다. 시부모님 환갑 되는 해에 그 돈으로 비단이불 한채를 마련하여 시아버님 환갑 선물로 드렸다. 환갑날에 며느리가 마련해준 비단이불을 덮어보는 것이 그때 많은 로인들의 념원이였다. 물론 시아버님의 념원이기도 했다. 조선족으로 말하면 이는 가족의 영광이였다. 나는 시부모님을 35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벽돌집으로 이사시켰고 그들로 하여금 천륜지락을 누리게 했다. 시어머님은 어느 한번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취재를 받으며 이렇게 기자에게 말했다. “미옥이와 같은 며느리는 하늘 아래 하나뿐이라오. 우리는 정말 행복하오.” 할머니는 어디 가나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자랑한다. 나는 그의 혈연없는 딸로 되였다. 시부모님 환갑잔치에서 큰절을 올린다. 나와 정윤의 사랑은 순결하고 진실하다. 사랑에는 계선이 없다. 진실만 있다면 기적은 반드시 있게 된다. 우리는 서로 보완하며 쉽게 이룰 수 없는 이 가정을 영위해왔다. 모순속에서 인내를 선택하고 론쟁속에서 순종을 선택했다. 나는 자신의 행동으로 그와 그의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수림제(寿林娣)며 상해 미옥이다. 이 이름은 빈하중농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나 또한 시간으로 증명했다. 나는 조선족의 큰며느리가 되기에 손색없고 이 대가족의 큰 살림군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을. 정윤은 자식으로서 효도하고, 아버지로서 자애롭고, 남편으로서 사랑을 주고, 인간으로서 관용을 베풀고. 자신에게 엄격하며 착실하게 일하고 청백하게 행동하여 나와 아들딸들에게 건강한 가정문화를 만들어주었고 화목하고 청렴한 가풍을 형성시켰다. 나의 마음속에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정신적 재산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진정으로 녀강자로 되였고 ‘민족단결모범’, ‘선진사업일군’으로 되였다. 나의 우수한 세 아들딸들은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하고 있다. 나는 그때 이 가정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본 대로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수림제(寿林娣) 편역: 길림신문 최승호
88    감춰진 '축복' 댓글:  조회:1328  추천:0  2020-05-15
감춰진 '축복' 이미옥 박사    이미옥박사: 현재 한국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 재한조선족작가협회 이사 “아침에 눈을 뜨면 뉴스를 확인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코로나19가 하루가 다르게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삶도, 일상도 원인불명의 바이러스에 잠식당하고 있다.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감염의 확산과 함께 일상에 침투된다. 평온한 일상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오버랩 되고, 심리적 충격이 여진처럼 다가온다.ⵈⵈ”   2월 중순에 한국연구재단의 청탁을 받고 코로나 시대의 연구자의 시선에 대해 썼던 칼럼이다. 이 칼럼을 쓴 지가 석 달 지났다. 5월 중순, 다시 원고 마감을 앞에 두고 안일하고 게으른 마음으로 그때 칼럼을 다시 꺼내 보니, 웬걸 그때와는 달리 내 마음도 상황도 많이 변해 있다. 고작 3개월, 마음은 축 늘어진 기타줄 마냥 느슨해졌고 변화된 일상에도 그럭저럭 적응해가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코로나 수습기” 3개월을 보내고 나니 사실 무엇이 문제였는지조차 점차 망각되고, 눈부신 5월이 되어서는 얼어붙었던 마음마저 해빙처럼 살살 녹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얼마 전 이태원 집단 감염이 다시 터져버렸다. 코로나가 갓 불거진 2월만큼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진 않았으나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음을 경고해 주는 듯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3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니지만 인간의 생각과 습관과 가치관까지 변화시킬 만큼 긴 시간도 아니다. 특히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고 집단문화가 발달한 한국사회에 있어서 3개월은 참을 만큼 참은 인내심의 한계치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서울의 한 유흥가라는 작은 집단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라도 해도, “빙산의 일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잠재된 집단 무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술과 모임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 또한 “이런 삶은 너무 퍽퍽하지 않은가?”라는 생각과 함께 “사람들”에 대한 묘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니까.   코로나가 갖고 온 변화는 침체된 것처럼 보이는 삶–위축된 경제와 단절된 관계와 불투명한 미래까지-에서부터 일상의 작은 규칙들,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것 등 삶의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코로나 이후의 맞닥뜨린 냉혹한 현실이지만 반대급부도 분명 존재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차가운 현실의 이면에는 분명 또 다른 내용의 속지가 숨겨져 있다. 코로나로 인해 ‘국가의 감염병 예방 시스템이 새롭게 정비되고 방역 의료체계가 발전하고 환경오염이 줄고’와 같은 거창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홀로 있음의 경험을 통해서 내 자신의 마음 들여다보기가 가능해졌다. 늘 연결되고 확장하기를 원했고 뜨거움을 지향했던 삶의 속도를 늦추고 열기를 식히고 외부보다는 내면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보려고 하지 않았던 삶의 내면을 우리는 외부와 단절되면서 마주할 기회를 문득 갖게 되었다. 무리를 따라 다녀서는 발견할 수 없는 내 안의 자아, 그 내면의 자아가 체득한 삶의 비밀들,  구석구석 숨겨져 있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리를 비운 뒤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 볼 때만 만날 수 있는 메시지들.      어느 한 시인은 “마스크 쓰는 것을 통해서 온갖 부끄러움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얼굴을 가리고, 손 씻기를 통해서 그동안 했던 나쁜 일을 그만 두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나의 방식이 옳은 가를 점검하여 네모난 가치관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성급하게 입을 열고 손의 것을 움켜쥐고 발걸음을 재촉해 왔는가. “시간은 금”이라고 외치며 시간을 분절하여 쓰고 공간을 넘나들며 무수한 사람을 만나고 외적 경험을 끊임없이 축적하는 분주함 속에서 살아왔다. 자신을 부단히 확장하는 것만이 삶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바람직한 길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그렇게 성공을 향해서 속력 있게 달려온 삶이 어느 날 문득 멈출 수도 있다는 것, 어느 순간 질병과 죽음은 삶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텅 빈 삶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코로나는 묵직하게 알려주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이 변화에 적응하기가 힘겹다. 과거에 비해서 축소된 일상은 삶의 소소한 즐거움 또한 앗아간 측면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삶의 변화가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해서 미래의 어떤 점에 다다르게 될지도 알 수 없고 함부로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나 코로나가 준 선물은,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와 함께 내면의 발견에 있으며 그것을 이겨내는 힘은 오롯이 ‘오늘’을 살아내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문득 코로나가 왔던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코로나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변화된 삶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출처 :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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