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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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묵향 천리, 덕향 만리 댓글:  조회:3212  추천:0  2020-08-01
김응준 시인은 고희를 넘었지만 쏟아져나오는 사랑시를 보면 자못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2020-07-31 09:11:14     1988년 여름, 상해 황포강 나루터에서 저자 고 김응준 시인)과 그의 우연이라 할가 아니면 인연이라고 할가, 시인 고 김응준 은사님과 교분을 쌓아온 지도 어언 6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59년 훈춘고중시절 한어과임이셨던 고인의 선정을 받아 한어과 대표를 맡아 하면서부터 은사님과 정분을 다져왔고 줄곧 은사 삼아, 형님 삼아 공경해오던차 지난 7월 7일 불행히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그냥 굳어져버렸다. 지난해 11월 중순 내가 치료차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병석에 계시는 은사님을 찾아뵌 것이 아마 그와 생전 맑은 정신상태에서 가진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내가 귀국하는 대로 함께 손잡고 리수일과 신순애의 사랑을 노래한 씨나리오를 쓰자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귀국 후 코로나사태로 하여 찾아뵙지 못하다가 사망 전날 병상을 찾았을 때, 둘째 딸 홍심이가 혼미중인 아버지의 귀에 대고 “장춘삼촌 오셨어요.”라고 알리자 즉시 눈을 뜨고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악수는 분명 은사님의 영면 전 우리 사제간 사귀여온 60여년 긴 세월의 마지막 석별에 찍은 종지부였다. 돌이켜보면 과연 ‘탄지일휘간(弹指一挥间)’이라고, 1959년 선생님께서 북경대학 중문학부 연수를 마치고 25세의 꽃나이 총각선생으로 훈춘고중 한어과임교원으로 부임되여 온 후 그의 검소한 차림새와 소탈한 성격, 더우기 생활 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학생들의 호감을 자아내면서 자석마냥 끄당겨 따르게 하였다. 수업 또한 인기 만점, 한어교연조의 한족교원들도 뺨칠 정도로 한자어 발음 성조(声调)표기 하나 틀림없이 확실하게 가르쳐주시던 그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한어작문과 문학에 뜻을 둔 제자들을 별도로 이끌어 문학의 꿈을 키워주신 은사님, 그래서 더욱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하였다. 특히 생활난으로 어려운 제자들에게 사랑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시던 그 시절 감격스러운 일화가 어찌 한두가지 뿐이랴! 지난 세기 50년대 후반 되게 어려웠던 년대에 은사님 가정형편도 초근목피로 겨우나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이였지만 가끔가끔 시골에서 온 이 제자를 자기 집으로 불러주었다 “이거라도 배불리 먹기요, 숙소에서 배곯기보다는 나을 거요…” 된장 한숟가락 떼여 수수밥에 발라주시던 은사님, 지금도 그 사랑, 그 정에 목이 메군 한다. 수수밥이나 두병밥으로 기아를 달랜 후 선생님의 침실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선생님의 공부비결도 발견하게 되였다. 이미 중국 명문대인 북경대학 연수까지 마친 상당한 수준이였지만 선생님의 침실 3개 벽면과 천정은 온통 친필로 쓴 한어 사자성구(成语)로 도배가 되여있으니 앉으나 서나 누우나 겨를만 있으면 한어성구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암기할 수 있었다. “아, 공부는 이렇게 하고 지식은 이렇게 쌓는구나…”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비법까지 배웠으니 어찌 은사님을 숭배하지 않고 또 따르지 않을 수가 있으랴! 1962년 6월, 중앙민족대학 입시를 앞두고 은사님은 반달 동안 무등 신경을 쓰시며 까근히 작문지도를 해주었다. 지어 연길로 시험을 치러 가는 날 아침 뻐스역까지 바래주면서 시험을 칠 때 우선 작문 출제를 제대로 포착하라고 재삼 당부하셨다. 이렇듯 인생의 전도에 관련된 관건적 시각에 친동생마냥 깐깐히 챙겨준 그 은혜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하여 세월이 가고 점차 ‘철’이 들면서 내 나이 칠십이 된 해부터 매년 음력설이면 빠뜨리지 않고 은사님께 ‘강다짐’ 세배를 올려왔다. 은사님께서는 또 매년 방학이면 100리, 200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도보로 춘화, 경신, 량수 등 오지에 사는 제자들 가정을 찾아 방문하셨다. 훈춘 시골 촌락 골목길에 은사님의 발자국이 찍혀졌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제자들과 학부모들은 여전히 그이를 ‘우리 선생님’이라고 친절히 부르고 있다. 새삼스레 위챗에서 읽었던 명언 두 구절이 떠오른다. “좋은 사람과의 인연은 소중하고 또 오래갑니다.” “란향백리(兰香百里) 묵향천리(墨香千里) 덕향만리(德香万里).” —백화문체로 풀이하면 “란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묵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네.” 고 김응준 은사님이야말로 1954년에 발표한 처녀작을 시작으로 문단 데뷔 66년 동안 무려 7000여수의 시가 창작과 더불어 저서 23부를 펼쳐내면서 천리(에 날린) ‘묵의 향기’를 《시향만리》(연변시인협회 간행물 제호)로 승화시키고 아울러 모든 제자, 친지, 동료들에게 믿음과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온 만리(에 날린) ‘덕의 향기’임에 손색이 없다. 6년 전 2014년 8월 9일 연길 국제호텔에서 가진 ‘김응준 시인 탄신 80돐, 문단 데뷔 60돐 및 최신작 《사랑으로 가는 길》 출판 기념회’에서 올린 축사 한 대목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날 옛 훈춘고중 7기 졸업생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내가 50여명 동창생들의 마음을 담아 은사님께 강태공(姜太公)에 관한 옛 전설 한토막을 들려드렸다. 옛날 강태공이 주무왕(周文王)을 도와 80세 되는 해에 상(商)나라를 무너뜨리고 주(周)나라를 세운 후 80년을 더 살아 160살을 누리였다고 하여 후세인들은 강태공의 인생을 ‘전(前)80, 후(后)80’이라고 불렀단다. 그러니 “은사님께서도 이미 80년을 살았으니 오늘 이 기념행사를 시점으로 ‘김응준 후(后)80년’ 생을 시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언을 하였다. 과연 은사님께서는 제언을 받아들이신 듯 탄신 80돐 기념회 후 즉시로 여생의 최종작품이라면서 장편서사시 《희비 쌍곡선》 창작에 살손을 대셨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년 후인 2016년 9월 급작스레 뇌혈전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생명이 경각에 놓인 상황에서도 이미 시작한 글이 중도이페될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시각을 다투어 혼신의 ‘피를 쏟아, 뼈를 갉아, 생명을 바쳐가며’(《희비 쌍곡선》 머리말) 무려 36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마무리하여 2018년 7월 드디여 세상에 내놓으셨다. 이러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만년에 로익장을 과시하면서 시가 창작 한 우물만 파온 고인에 대해 원로시인 김철옹은 그를 ‘시에 미친 사람’이라 평했고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는 고인의 장편서사시 《희비 쌍곡선》 서평에서 “우리 겨레의 시문학을 위해 열심히 뛴”, “한뉘 시를 위해 분투한 투사”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다사다난한 인생을 마감한 고 김응준 시인은 조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년에 안해를 잃고 만년에 딸자식을 앞세웠지만 완강한 의지로 파란만장한 인생고를 딛고 오직 시가 창작에 혼신을 다한 다수확 시인이다. , 등 500여수의 가사와 , 등 500여수의 애정시들은 고 김응준 시인의 대표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원로시인 김철은 《김응준시선집》 머리말에서 김응준 시인은 “고희를 넘은 사람이지만 쏟아져나오는 사랑시를 보면 자못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영원한 청춘’이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은사님은 시인이면서 또한 번역에도 상당히 능한 다재다능한 분이시다. 2009년부터 국가출판총서 ‘대중화문고(大中华文库)’의 특별위탁에 응해 중국의 고대명작 《론어》, 《당시선집》 및 수십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등 수많은 한문저서들을 조선문으로 번역하여 우리 민족 문화발전 창달에 한몫을 감당하였다. 시가 창작과 고한문 번역 자질을 겸비한 그이는 중국조선족 시가문단치고 흔치 않은 출중한 존재로 각인되여있다. 고 김응준 시인의 타계에 연변작가협회 김영건 부주석은 “중국조선족 문단에 ‘큰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애석함을 표했고 연변시인협회 전병칠 회장은 “중국조선족 시단은 훌륭한 시 스승을 잃었고 연변시인협회는 덕재 뛰여난 코기러기를 잃었다.”고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고 김응준 은사님께서는 80여성상을 그렇듯 젊고 빛나고 보람차게 살아오면서 항상 여러모로 우리의 귀감이 되였다. 수십년간 고인을 은사로, 형님으로 고이 받들어 모시게 된 긍지와 자랑을 맘속 깊이 새기면서, 재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림장춘                                     (필자는 “연변일보”사 선임 부사장, “연변일보”선임 부주필)
330    한국인은 “싸움족”? 댓글:  조회:3460  추천:1  2020-07-22
안창호와 외국인들, 그리고 한국”국민의사”의 말을 들어본다.   언젠가 어느 술상에서 오가던 얘기들이다. ㅡ “나(우리)는 잘 모르겠는데 왜 한국은 국기의 색갈부터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나눠졌을가?  옛날엔 조선이 8도라던데 지금은 남북조선에서 거의 모두 한 개도를 “남, 북”으로 갈랐기에 조선이 16도라고 한다. ㅡ  2차세계대전후 쏘,미등 대국들이 한개 조선을  남북   두개조선으로 만들었다면 조선16도(?)는  자체로 나눴는지  아니면 외국사람들이 나눴는지?   모두가 아무런 정답도 찾지못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음으로 넘겼다.    필자는 어제(7월19일)저녁 9시반에 한국 KBS방송에서 한국의 네 댓되는 엘리트들이 출연하여 고박원순서울시장의 사망을 화제로 한국언론계를 곁드는 것을 시청하였다. ㅡ 박웜순시장이 실종된후 8시간내에 언론에서 박시장실종에 관한 보도가 2300여차나 되였다.  박시장의 실종부터 8일간에 모 기자는 혼자서 무려 51건의 기사를 발표하였다. ㅡ기사중의 상당수는 무익한 정보고 오보며 거짓이였다. ㅡ한국 언론은 갈등을 조작하고 싸움을 붙이고 지켜본다. 언론의 “분탕질”이 실로 문제이다...   이에 비춰 필자는 이런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1, “한국, 한국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의 저자 베인 & 코리아 이성룡대표가(미국계 한국인) 10년간 한국을 드나들며 100개 이상의 한국 기업과 정부기관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조사를 하고나서  발표한 글이다.  ㅡ“언론들은 부정한 행위를 비난할 때와 똑 같은 노력으로 진정한 역할 모델의 사례를 알리는데 앞장서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문을 들추면 온통 부정적인 기사들 뿐이다.  언론의 관심은 스캔들을 폭로하는 데만 집중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조선, 동아, 중앙일보를1주일간 검토해 보고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들이 각각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보라. 긍정적인 기사가 1건이라면 스캔들과 관련된 기사가 최소한 7ㅡ8건은 될것이다.”  2,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핵심되는 인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내무총장을 지낸 안창호(1878.11. 9, - 1938. 3. 10.)의 글이다. .  “과거나 현재나 우리 동포들은 어디 모인다 하면 으레 싸운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은 사랑으로써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죽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 정직이 곧 애이다”   안창호는 계속하여“우리민족의 정의를 배양하는 데 관한  일곱 가지 제시”를 발표했다.  첫째, 남의 일에 개의치 말라. 우리는 걸핏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데 이제는 자기 허물만을 스스로 고치기에 전념하자.  둘째, 개성을 존중하자.  둥근 돌이나 모진 돌이나 다 쓰임새가 따로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나와 틀리다고 해서 나무랄 것이 아니다.  셋째, 자유를 침범하지 말자. 아무리 동지라고 해도 개인의 자유가 있다. 남을 내맘대로 리용하려다가 듣지 않는다고 욕하면 안된다.  넷째, 물질적 부탁들 하지 말자. 친구들간에 돈을 빌리려다 실패하면 등을 돌리는데 그렇다 하여 정의을 단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섯째, 정의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부모, 부부, 동지의 정의가 각각 다르다. 아무리 친해도 더 사랑하고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 신의를 지키자. 약속을 꼭 지켜야 정의가 이어진다.  일곱째, 례절을 존중하자, 친하다고 례절이 무너져선 안 된다.   (그런데 한민족의 유전자문제인지 안창호가 지적한 한국인의  고질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근년에 필자는 한국손님을 접대하면서 그네들 서로간의 싸움을 피부로 느꼈다. 한번은 같이 온 두분이 첫날 저녁부터  다투더니 3일만에 싸움으로 갈라졌다.  또 한번은 한번에 한국손님 5명을 접대했는데 역시 3일동안에 “내당→네당→우리당” 하면서 싸우다가 세 패로 갈라졌다.  그외도  . 한국에서는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도  “나무 위에 올라가기” 바쁘게 탄핵이요 심판이요 하면서 “나무를 흔들어” 떨구려니 말이다.) 3,  다음은  외국인들의 평가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트프는 자기의 저서(중국이 미국 된다)에서 각국 사람들의 기질을 이렇게 소개했다.  ㅡ 미국인이 두 명이면 법적 맞고소가 일어나며 중국인은 흥정을 하고 일본인은 친절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싱가포르인은 학교성적표를 보자 하고 대만인은 해외 이민을 의논하며 스웨덴인은 쎅스에 빠져들고 한국인은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4, 한국의 “국민의사”로 불리며 사회정신의학적으로 한국사회의 현상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시형박사가 자기의 저서(품격)에 올린 글이다.  “ 프랑스 파리의 어느 호텔에는 ‘한국 단체 손님 사절’이란 간판이 나붙어 있다.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들이 제멋대로 떠들고 싸우는 통에 호텔에서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다. 우리는 모였다 하면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는 너무 거칠며 너무 직정(直情)적이다. 합리적이고 이(리)성적이어야 할  국회토론도 그만 감정이 폭팔, 난투극이 벌어진다. 그게 또 방송에 그대로 보도된다. 아이들이 볼까 두렵다.  한국의 시위는 결렬하다. 길을 막는 건 예사고 유혈충돌, 방화, 투석,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 자기 회사 기물을 파괴, 불도 지른다. 구호부터 살벌하다. “결사쟁취”, “목숨까지 걸다니...”   한국사람들의 싸움이 오죽했으면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 일본인이 자기의 저서를 “한국인들에게 돌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쓴 책”이라고 언급하였겠는가.  5, 필자의 체험이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에 연길기아자동차정비서비스유한공사 사장이며 연변기아기술훈련원 원장인 박병현(朴炳玹)씨가 급병(심장병?)으로 급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원장의 급사를 “조선일보”(한국)에서는 “연길은 총칼의 도시”란 제목으로 1면 톱기사로 발표했다. 이에 “연변일보” 한국취재단(해외부)3명이1996년 12월 중순에 한국을 취재할때 “조선일보”편집국 국장과 함께 정치부주임을 찾아가서 “서울에는 급사사건이 발생하지 않는가? 우리도“서울은 총칼의 도시”라고 보도하라는가며 항의를 제기 하니 정치부주임이 하는 말이 “팔아서 돈을 버는 신문을 꾸리자니 할수 없지요.”며 황당히 답변하었다. 아마도 한국은 언론인들이 오보거나 거짓보도를 해도 장본인에 대한 책임이 없는것 같았다. 우리쪽은 철저히 조사하고 견결히 추긍하는데.  필자는  이시형 박사의 “한국인들의 ‘한차원 높은 품격을 위한 7가지 덕목”을  막글로 올린다.  1, 감정을 누르고 이(리)성으로 행동하는 절제, 2,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포용. 3,약간의 여유로도 함깨 즐거울 수 있는 배려, 4, 결과보다 과정의 가치를 알게 하는 정직, 5,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신의, 6, 현역으로 새롭게 데뷔하기 위한 필수ㅡ 배움, 7, 한국인다운 세계인으로 클로벌 마인드(세계적 인지도) 십수년 전 안창호의 “7가지 제시”에 따른 당대 이시형박사의 “7가지 덕목”이였다. 이 밖에  갑,을방의 서로가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몇 마디를 부언한다.  ㅡ“변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보수, 나와 다른 의견도 경청할 줄 아는 진보”, 진보는 “새것”이 왜 좋은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잘 가르칠 의무가 있고 보수는  귀를 열고 잘 들어야 할 태도가 필요하다...   오기활 2020년 7월21일
329    《바보님》의 서거를 두고 댓글:  조회:3427  추천:0  2020-07-20
《정치인은 바보다》 《그냥 바보로 지내겠다》던 한국 로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으로 《바보》 인생을 마감했다. 세상사에 암살, 피살, 모살로 인생을 마감한 대통령은 종종 있어도 《자살》한 대통령은 흔치 않다. 생의 마감까지 《바보》를 지킨 로무현은 명실공한 《바보》이다. 그런데 《바보》의 자살에 한국사상 최고로 조문객이 백만명이였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문객보다 3 배나 웃돈다니 《바보》의 《자살》과 《박통령》의 《피살》이 한동전잎의 량면이라 판단된다. 력사는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니말이다. 퇴임후 《성공한 농부》가 되려고 평범한 《시골촌부》로 지내던 《바보님》은 《끝 모를 고통》으로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며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는 유서를 남기며 자결을 선택하였다. 우리 조선족의 불멸의 영령 김학철선생이 《작가로서 글을 쓸수 없으니 인생이 끝났다》며 금식(禁食), 금약(禁藥)으로 생을 마감하듯이. 《바보님》의《끝 모를 고통》을 알고저 생전에 그가 남긴 글을 찾아보았다.  2009년 3월 4일.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린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한다.》 3월 5일.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가 말을 건다. 당신이 조금전에 뉴스에 나왔어요. 〈정치를 하지 마라〉는 글을 올린 모양이지요?》 《현실 정치이야기는 한마디도 안했는데? 공연히 시비들이야.》 아내가 다시 받는다. 《련속극 하나 끝나고 새 련속극을 하고 있는데, 자꾸 지난 연속극 주인공이 나오니 사람들이 짜증내는 거 아니겠어요?》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련속극에 나간 일이 없다. 《아니, 련속극에 나가기는 누가 나가오? 언론이 자꾸 나왔다고 쓰니까 사람들이 헛갈리는 거지.》 사실 그동안 현실 정치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하지 말란 법도 없지만 정치를 한다는 소리가 욕처럼 들려서 그랬다. 참 힘들다. 감옥이 따로 없다. 푸념이 아니다... 《바보님》이 대체 어느 수렁이에 빠져 이처럼 궁지에 몰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필자는 정치를 떠나서 《아량이 전혀 없는》 《한(韓)민족》의 고약한 《인품》과 과거형 《습관》이 괘씸해 했던 말을 다시 반추하며 또 뱉는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다. 필자는 한국인들 앞에서 히딩크를 곁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대통령도 외국인을 초빙해야 합니다.》 《 한국서 훌륭한 대통령이 나올수 없습니다.》 《 한국사람들은 사람을 나무 위에 오르라고 춰올리고는 나무를 흔들어 그 사람을 떨구니말입니다.》 전유는 말고 현유를 보면 그들은 로무현을 대통령에 올려놓고 흔들어서 1년후에 탄핵, 퇴임했는데도 계속 흔들어 서 《자결》을 해서야 법무부가 모든 관련 조사를 끝낸다고 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한국 정치에 이바지한 부분이 있는데 아직 그 평가를 받기도 전에 그와 같은 비극적인 조사결정을 했다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이는 어느 학자의 애탄이다. 《외로웠을 대통령, 서러웠을 대통령, 억울했을 대통령 미안합니다. 막무가내로 백성을 무시하는 이 세태에 민중을 닮은 대통령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군요,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요행이도 이렇게 추모하는 조문객이 있어서 천만 다행이다. 유태인은 《쓰라린 력사에 보복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 잊지는 않는다.》로 력사를 대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선진민족이라고 입자랑을 하는 《한(韓)민족》은? 《죽음은 견딜수 없지만 치욕은 견딜수 있다》 《치욕은 죽음보다 가볍다》는데 《바보님》은 정녕 무거움을 택했다. 그렇다면 《바보님》의 선택 마감이 한국정치인들에게 남긴 《유산》이라 할가? 아니면 《숙제》라 할가? 《이미 떠난 목숨은 되살릴수 없다지만 그의 뜻은 늘 되살아날것이고》 《그의 뜻은 모든 〈남은 자〉들의 몫이다.》 이밖에 단 한가지 유감이라면 《바보님》이 생각을 바꿔서 〈자살〉을 〈살자〉로 했더라면...하는 바람일뿐이다.   오기활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05-28]
32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7) 댓글:  조회:3490  추천:0  2020-07-10
숙제가 아닌 숙제로 훌륭한 강연을 청취하거나 값진 책을 읽고도 심득마저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공부를 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강연자나 저자가 나에게 숙제를 내지 않았지만 심득 두편으로 사회에 대한 나의 책임감을 단 얼마라도 표하고저 한다.  심득 1 만고(万古)의 본보기―김수봉(金守峰) 나는 1925년생으로서 올해 89세이다. 1987년에 연변농학원 식물학교수직에서 퇴직한 후 지금 조양천진 삼성촌(三成村)에서 식물과 동무하며 인생의 ‘2모작’농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 2013년 3월 6일, 나는 자연료법강습반에서 김수봉 회장의 강의를 듣고 일시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하여 나의 수강심득을 표명하고저 하니 심득의 평가는 독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겠다. 1) 록색보건기지 건설의 유공자 김회장은 극도로 험난한 환경 속에서 단련된 불사조로서 칠칠암야에서 불빛을 찾아내는 의력과 특기로 15가지 직업을 새롭게 바꾸면서 자연의학진료령역(自然医学诊疗领域)에서의 서광을 향해 달려 끝내 자기가 설정한 목적지에 도달한 만고의 본보기이다. 김회장의 지칠 줄 모르는 분투정신과 실천활동은 나를 감개무량하게 했고 또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십여년전에 나는 심한 어지럼증으로 룡정의 모 병원을 찾아갔다가 의사가 주는 한아름의 항생소를 들고 돌아오게 되였다. 그 때 나는 들고 온 항생소들을 몽땅 버리고 뜸(灸)으로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하였다. 항생소는 어지럼증을 조장하는 약제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병이 나면 뜸으로 치료하여 89세인 지금까지도 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나는 며느리의 갑상선암수술후의 재발을 막기 위해 뜸으로 치료를 했는데 이미 5년이 지났지만 재발하지 않았다. 딸의 유방암도 의사들은 수술치료를 권했지만 나는 뜸과 항암초약으로 치료해 지금까지 건강하게 보내고 있다. 대성시의 병원을 찾아다니며 거금으로 암병을 근치한 환자들이 얼마나 될가? 나는 물리료법이나 화학료법은 어느 정도는 치료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인체의 정상적인 세포와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인체의 면역력을 해친다고 알고 있다. 사람들의 체내에는 오장륙부의 출장소(出张所)인 반사구(反射区=经穴)가 있다. 안마봉(按摩棒)이나 크림통으로 정확하고도 끈질기게 반사구를 다스린다면 ‘기사회생(起死回生)’의 희망봉(希望峰)에 올라 개선가를 울릴 수 있다. 이 길이 바로 김수봉 회장이 첫마디에 말씀한 ‘새로운 희망의 믿음’이며 구세주이다. 지금 현대의사들이 속수무책이라는 인류의 의난병들을 특기의사(特技医师)들이 해결하는 실례가 적지 않다. 의학은 림상경험이 풍부하고 따라서 과학적인 리론이 뒤받침함을 력사가 증명한다. 림상경험의 맨 앞줄에 특기의사들이 서있다. 현대의학의 기초리론에는 림상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현실에서 보면 의난병치료에서 많은 난제가 뒤따르고 있다. 그것은 박사나 교수들의 론문에는 노벨상급의 발명창조가 많지만 그 론문들이 환자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2) 그의 교육리념과 ‘구세주의적’ 전략 금전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이 의롭지 못한 수단으로 얻은 재물이라면 결국에는 화를 면치 못한다. 마찬가지로 권력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라면 형사처분을 면치 못한다. 금전과 권력을 모두 손에 거머쥔 진시황도 불로초를 캐려고 동남동녀 500쌍을 동해국(东海国)에 보냈으나 종무소식으로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되였다. 로(老), 병(病), 약(弱), 사(死) 앞에서는 금전과 권력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학문의 세계는 끝이 없다. 마음을 비우고 지식을 갈망하는 삶을 산다면 스승의 강의가 사막이 비물을 흡수하듯이 종자를 키우고 결실을 맺으며 반복적으로 번식하여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됨으로써 기하학적 수자로 퍼져나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수봉 회장이 바라는 교육리념이며 구세주의적 전략일 것이다. 3) 연변대지에 뿌리를 박고 “연변은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연변대지에 떳떳이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정신적 기둥이다. 인생의 정신적 생명문화령역을 탐색하고 고창하며 실효적인 생명관리기능을 전수하는 김수봉 회장과 같은 분들이 있기에 우리 연변의 민생건설은 새로운 빛을 뿌리고 있는데 이는 우리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지구촌을 상대한 넓고 넓은 공간에서 오직 이 연길이란 작은 도시를 정착지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김수봉 회장이 너무너무 고맙다. 김수봉 회장의 강의 덕분에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식물학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만 살았던 나는 산정에 올라 높고 푸른 창공과 일망무제한 대지를 본 듯하여 인생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김수봉 회장에게 감사를 표하며 부디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김수철 2013년 3월 6일 밤 11시 15분  심득 2 중국 화장실혁명의 선도자―한성호(韩晟昊) 2016년 10월 15일, 나는 오기활선생이 사진과 함께 나에게 선물한 장편실화소설 ≪중한우호의 전기인물—한성호≫를 단숨에 읽고 천고의 기인이며 기재(奇才)인 한성호 박사에게 완전히 매료되였다. 길림신문사 남영전 사장은 한성호 박사를 “중한수교의 대업을 위해 한국 로태우 대통령의 밀사로 혁혁한 공훈을 세운 화교로서 그는 소설이나 신화에서 나오는 인물보다도 더 전기적이고 더 신화적인 기인(奇人), 기재(奇才), 기지(奇志), 기적(奇绩)적인 인물이다.”고 평하였다. 1927년 8월 28일, 길림성 장백현 반절구 금화향 리천동에서 출생한 한성호는 16살에 길림국립사범대학에 입학한 장백현의 첫 대학생이였다.  ‘8. 15’해방후인 1947년 토지개혁 때 한성호 일가는 자본가, 국민당특무, 반혁명폭동의 조직자 등으로 몰리고 사형판결을 받았다. 한성호는 처형되기 바로 전에 동창생친구의 도움으로 산속으로 도망을 치다가 추격하는 총탄에 맞고 쓰러져 심산 속에서 50여일간 사경을 헤맸다. 그러다가 요행 살아남은 그는 부득불 조선을 거쳐 한국으로 도망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한성호는 의학을 전공한 박사로서 한국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의 ‘어의’로 지냈다. 로태우 대통령은 취임한 며칠 만에 한중수교를 성사시키려고 대통령의 밀사로 한성호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한성호는 갖은 노력 끝에 한중수교를 성사시키고 말았다. 2000년 양력설 전야에 한성호 박사는 산동성정부의 초청으로 ‘태산 새 천년 축제’행사에 참가하였다가 관광명소의 화장실들이 똥오줌으로 넘쳐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돌아오자 바람으로 ≪한화천지≫(잡지)에 “산 우에 분변이 사태를 이룸은 산 아래 더러운 관료가 있음이다. 금그릇을 들고 더러운 돈을 벌며 나라와 민족의 얼굴에 똥칠을 하니 분노를 금할 길 바이 없다!”는 내용의 장편글을 발표하고 잡지 수권을 산동성 당정지도자에게 부쳐보냈다. 한성호 박사의 글을 읽고 크게 놀란 태안시당위 막진규 서기는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실태조사에 나섰다. 그리고는 2억 5,000만원을 투자하여 석달간에 2,216개 변소를 개조하였다. 태안시의 화장실혁명은 중국 화장실혁명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1993년 2월 19일, 한국정부는 중한수교 및 한중경제무역발전과 한의학연구에 특수한 기여를 한 한성호에게 한국 최고훈장인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한성호는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한국 ‘국민훈장’을 수여받은 위인이다. 나는 한성호의 시구로 숙제 2를 완성한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노니 개인의 득실에 초연하고 산과 들을 사랑하노니 견강함은 당연하니라 하늘과 땅을 사랑하노니 갈 곳은 오직 자연인가 하노라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저녁
327    “성했을 때 일을 더 많이 못한것이 후회 됩니다” 댓글:  조회:3688  추천:0  2020-07-01
지난 4월 27일, 필자는 “도문시 월청진 집중촌(원 홍광향농안촌)의 로아매가 무한보위전영웅들에 1만원을 헌금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집중촌 전임 당지부서 한진길(74)의 안내하에 로영애(73)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22년만에 만난 당년의 “꼬리없는 암소”로 불린 로영애는 2급지체장애자로 ”앉은뱅이”가 되여 집중촌의 파가이주로 전기와 물공급이 때없이 정지되는 “2호동네”에서 텔레비도 못보며 고독하게 지냈다.  “심장병으로 주원치료를 받다가 금방 출원하였습니다.” “병자는 약보다도 사람을 더 귀해 합니다” 생각밖으로 우리를 만난 로영애는 이렇게 말하며 넉넉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의며 기뻐하였다.               혁명렬사의 유복녀 로영애는 도문시 일광산기슭에 자리한 중개지팡에서 일광산의 기를 받고 태여난 혁명렬사 로동률의 유복녀다.  그의 아버지(로동률)는 결혼하자 10일 만에 참군한후 항미원조전선에서 장렬히 희생였고 그의 할아버지 또한 몇년사이에 둘째아들까지 잃다보니 생가슴을 앓다가 손녀(로영애)의 이름을 짓고 며칠후에 사망했다. 그러다보니 동네방네에 “중개지팡(동네이름)로씨네는 한집에무복한 4녀자가  산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성질이 과한 할머니가 더는 어쩔수 없이 “한구들에서 세 과부(할머니, 큰어머니, 어머니)가 살지 못한다며 제일 나어린 청상과부 어머니(태옥순)를 멀리 외딴곳으로 개가 시켰다. 이렇게 기억도 없는 나이에 엄마와 생리별을 한 로영애는 나이가 들면서부터 희생된 아버지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저 학교에서 단체로 조직해 보는 영화가 “전투편”이라고 하면 곧바로 집에 달려가서 한 장밖에 없는 아버지의 어슴푸레한 사진을 가지고 와서 영화를 보면서 영화속에서 사진의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찾느라고 눈정신을 팔았다고 한다.   책가방만 메고 다닌 “허망돌이”  “나에겐 아무런 학졸업증도 없습니다.”고 고백하는 로영애의 간추린 과거사다. 로영해는 소학교에 다닐때에 륵막염에 걸려 책가방을 멘 “허망돌이”로 지내다가 룡정고아원에 이송된후 14살에 도문에 돌아오니 학습성적이 안된다며 전일제중학교에 받지 않는데서 단 렬사후대라는 조건으로 민반(半工半?x)학교인 도문진중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런데 당년에 “떡판학교”(일을 많이 하기에 늘 떡을 쳐 먹는다고)라고 불린 도문진중은 이름이 학교이지 내내 일만 하는 학교였는데 일례로 학교건물까지 학생들로 운영하는 학교벽돌공장에서 생산한 벽돌로 학생들로 학교를 지었다. 그때 남보다 실팍한 로영애는 학교단지부선전위원으로 대홍벽돌공장(大红砖厂) 공장장의 책임을 3년간이나 맡고 죽을둥 살둥을 모르고 일을 했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부업을 하느라고 학생들을 3개월이나 동원하여 왕청현 하마탕에 가서  길닦이부업을 시켰다. “후 ㅡ “하고 긴 한숨을 짔는 로영애는 생각할수록 “일생에서 제일 큰 원한이 학교공부를 못한것이라 반추한다.   “독한”할머니와 일방통 “남도치”의 아래서 사회에 진출한후 로영애는 “녀자가 나돌면 절대 안된다”는 엄격한 할머니의 단속과 매일 초저녁이 되면 비자루를 내 흔들며 “ 8시 전에는 꼭 집에 들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호통하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시집갈 나이가 되자 “너는 내가 키웠으니 꼭 내말을 들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위엄에 감히 어쩔수 없어 아무런 대구(对口)도 못하고 할머니의 독단적인 주선으로 22살 나이에 최근에 외시에서 이사를 왔다는  “남도치총각”과 결혼 하였다. 결혼후 남편(배동섭)은 당신은 과수기술원부터 시작하여 대장, 회계 등 하고픈 일은 다하면서도 일방적으로 “한집에서 둘이 다 나돌면 안된다”는 엄포로 하여 혁명렬사의 후대라는 믿음으로 사회에서 맡겨주는 사업과 임무를 “지하공작”으로 남편의 눈을 속여야 했다. “그때 남편의 압력이 오죽했으면 내가 1973년에 당지부에 처음 올린 입당신청서도 남편의 눈을 피하느라고 쌀뒤주속에 숨겨 두었겠습니까?!”. 로영애가 남편의 “단속”에서 해방되기는 1988년 8월 28일에 입당 한 후부터였다. 90년대의 “신문인물 로영애는 지난 90년대의 상당한 신문인물이였다.  이하는 필자가 22년 전에 “연변일보“에 보도한 기사이다. 12월 19일, 필자는 도문1호선공공뻐스에서 도문시 홍광향 농안촌의 부녀주임 로영애(53세)를 만났다. 우연하게 기자를 만난 로주임은 수인사를 나누자바람으로 새해의 신문주문을 화제로 하였다. “졸업증도 없고 합격증도 없는 내가 농촌에서 신문까지 안보면 어떻게 정책을 알겠습니까?”  “나는 1973년에 촌부녀주임사업을 맡은 후부터 해마다 연변일보, 동북과학기술보, 가정신문... 등 신문잡지를 주문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학교졸업증도 없고 공무원합격증도 없는 농촌간부들이 신문을 안보면 머리가 텅비고 군중들과 얘기를 할 밑천이 없어서 “벙어리”신세가 된단다. 로영애는 당보를 통해 당과 나라의 방침정책을 학습하고 과학기술신문잡지를 통해 농업기술을 배우면서 광범한 부녀들을 치부의 길로 이끄는 선두자였다. 그는 1989년에 전 주에서 제일 처음으로 도문시 축목국과 손잡고 “농안촌양돈협회”를 조직해 과학양돈을 농안촌의 기둥치부산업으로 부상시켰다. 비록 그에게는 소학교졸업증마저 없다지만 그가 꾸준하게 신문잡지를 통해 당의 방침정책과 과학농법을 배우며 앞장서 농민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었기에 그에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10대녀걸”,  “길림성 3.8홍기수”,  “길림성로동모범”이란 당당한 “자격증”이 있다.  상품경제시대에는 “졸업증”을 내걸고 투정질만 하는 간부, 자리만을 치키면서 일을 해 못 내는 간부를 대중들은 외면한다.   알은 못 낳고 날마다 “꼬꾸댁”거리며 울기만하는 암탉은 기필고 나중에 주인의 버림을 당하고 만다 (연변일보, 1998.12.7.)                명불허전 1988년에 남편의 “구속”에서 해방되여 가물에 단비를 맞은 로영애는 하는 사업마다 “안된다”와 “못한다”와는 인연이 없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으로 거의 하는 일마다에 번창하였다.  3년간의 알찬 노력으로 로영애는 1991년에 “도문시10대표병”으로 당선된것을 시작으로 90년대에는 “길림성로동모범”, “길림성3.8홍기수”, “연변조선족자치주 10대녀걸”이 등 굵직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았다.  그야말로 노력의 뿌리는 쓰지만 노력의 열매는 그처럼 달았다. 오늘도 “당원은 정년이 없다”는 로영애는 지금 비록 “앉은뱅이”로 되였지만  당소조장(당원 22명)의 책임을 맡고 쌍지팡이와 택시차에 의거하여 로당원방문, 적극분자배양, 당원서류정리 등 당무사업으로 무척이나 다망하였다. 그는 지난해 3월 24일까지 7명의 당원을 발전시킨 뒤를 이어  올 7.1에 또 새로운 당원을 발전시킬 계획으로 지금 자료준비에 한창이였다.  “예비당원고찰자료와 신입당원자료준비로 또 한(한진길)서기를 못살게 굴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로영애는 여러가지 서류들을 한서기의 앞에 내놓으며 도음을 청했다.  .      무한보위전에 만원을 기부  이 몇달간 로영애는 코로나19와 사투하는 무명영웅들의 사적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고 한다. “생각해 보세요.우리 아버지 년대는 전쟁년대로 총을 들고 적들과 싸우며 나라와 가정을 보위하고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시대로 서로가 부러움 없이 모두가 만족하게 사는 시대입니다. 이런 화평시대에 행복한 가정을 떠나서 생명을 무릅쓰고 코리나와 싸우는 의무일군들의 정신이 얼마나 보귀합니까?” 무한보위전에서 희생된 부모들과 그들의 후대를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섭니다.” “나는 학비를 2원씩 낼 때부터 나라의 신세로 살아 왔습니다.  내가 이때에 나라의 빚을 갚지지 않으면 언제 갚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로영애할머니는 신체때문에 다니면서 방독물품을 사서 무한보위전에 기부할수 없어서 안타깝게 보내던차 지난 2월 27일에 당지부에서 당원들에게 무한보위전에 헌금할수 있다고 호소하자 이틑날(28)에 급히 택시를 불러 은행에 가서 현금을(만원) 찾아 가지고 도문시홍십자협회책임자한테 맡겼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지난해에 사별한 남편의 사진을 정중히 모신 유상앞에서 “내가 무한보위전선에 현금 만원을 기부 했는데 잘 했습두? 못 했음두?”라고 물었더니 남편이 “잘 했다!”며 희죽히 웃더라고, 그리고 두 아들에게 토론을 안하고 기부를 했다며 미안하다며 뒤늦게 알렸더니 둘째는 “어머니가 참 잘했다”고, 큰아들은 “좀 더 기부했더라면 좋았겠습니다”며 어머니에게 엄지를 보이더란다. 실로 그 엄마에 그 아들이였다.  아름다운 인생마무리 인터뷰는 일문일답으로 마감 했다. 문: 지금까지 인생에서 제일 기뻤던 일은? 답: 학생때 입단과 사회서 입당한 것이다, 문;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답: 첫째는 남한테 부담을 주지 않는 것, 다음은 나누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일전에 시부련회를 찾아가서 앞으로 불우이웃돕기활동이 있으면 동참할것이니 꼭 제때에 알려달라고 단단히 부탁했다. 문: 돌이켜 보면 미안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면? 답; 사회혁명을 한답시고 가정혁명을 잘 못한 것이다. 우리 아들이 둘다 리혼을 했다(리혼은 불법이 아닌데 말이다ㅡ 편자) 문: 아쉬운 일이 있다면? 답; 첫째는 공부를 못한것이 평생 아쉽고 둘째는 내가 아들로 태여 났다면 사회에 좀 더 많은 일을 했을것인데... 문: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답: 내가 성한 몸으로 마음대로 다닐때 일을 많이 못한 것이다 이 밖에 “이제부터는 자기몸을 알고 일(당소장)을 하세요”는 필자의 권고에 “그래도 조직에서 이런 페인을 믿고 신부름을 시키니 늘 기쁘게 생각하며 만족해 합니 생각한다”고 했다.    아직까지 나라의 빚을 채 갚지 못했다는 혁명렬사의 후대,   여생을 아름답게 마무리를 하려는 로영애의 인생마무리에 머리가 숙여진다.   오늘의 금상첨화라고 할가. 돌아오는 길에서 한진길이 “로영애가 도문본보기(图们好人)로 평선되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니까 필자가 오늘 만난 한진길과 로영애는 당년엔 “길림성로동모범”이요 오늘엔 사회의 훌륭한본보기였다. 부록: 한진길은 집중촌당지부서기로 33년, 현임 도문시 신민사회구역 기층당지부서기로 11년을 지내고 있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0년 6월 29일
326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6) 댓글:  조회:3740  추천:0  2020-06-18
16. “당신은 길림성에서 식물표본동정의 제1인자요!” 길림농업대학 곡안근(谷安根) 교수는 나보다 1년 년상으로서 그의 일본어수준은 상당하다. 그래서 우리 둘은 일어로 마음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이다. 우리는 모두 길림성에 있는 농업대학의 교수들인지라 사업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하여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밀접해졌다. “김교수한테 부탁하시오.” 1988년 7월에 길림성정부에서는 길림성 동부식물자원보편조사활동을 벌렸는데 이 활동의 기술고문으로 나를 초빙하였다. 그 때 성정부에서는 내가 주, 현(시) 2급 농업기술간부 식물조사훈련반 강의와 야외실습 지도에 최선을 다했다고 나에게 표창장까지 주었다. 통화지구 정우현에서 소집된 길림성 동부식물자원보편조사 관련 회의 때이다. 회의장에는 정우현에서 채집한 15,000장의 식물표본들이 전시되였는데 적지 않은 표본에 식물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전시장의 기술간부가 곡안근 교수를 찾아가 이름이 없는 식물표본을 감정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곡안근 교수가 “나는 식물생리학 전공이니 식물분류와 식물감정에 자신이 없습니다. 이 분이 전문가이니 이 분에게 부탁해보시오.”라고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표본감정에 나섰는데 다행히도 부탁을 받은 모든 식물표본들이 내가 능히 감정할 수 있는 것들이라 제때에 정확하게 감정한 데서 참가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당신은 길림성에서 식물표본동정의 제1인자요!” 1980년 3월경이다. 연변식물보호소 송동무와 나는 장춘에서 소집된 길림성식물보호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회의내용은 길림성에서 일본산 살초제 ‘살단(杀丹)’(수전살초제)을 시용한 결과를 일본제약공장 기술담당자에게 회보하는 것이였다. 송동무는 회의 전날에 20페지(A4용지)에 달하는 중문보고서를 나에게 주면서 일본어로 번역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보고서에 있는 식물명사들이 거의다 내가 아는 것들이라 나는 그 날로 번역을 끝냈다. 회의장에서 일본기술자들이 나의 일어번역에 매우 감탄해하였다. 당시 동북사범대학에서도 일어수준이 높다는 모 교수를 청해다가 번역임무를 맡겼는데 그 교수는 한동안 번역을 하느라 애를 썼지만 끝내는 그만두었다고 한다. 회의가 끝난 후 초대파티에서 곡안근 교수가 나를 찾아와 “당신은 일어수준도 상당합니다. 당신은 길림성에서 식물표본동정의 제1인자요!”라고 하며 나를 높이 평가해주었다. “김교수의 퇴직은 농학원의 큰 손실입니다.” 내가 정년퇴직을 한 후에 장춘에서 곡교수를 만나 한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때 서로 말이 오가던 중 곡교수가 어떤 말 끝에 “연변농학원에서 김교수를 정년퇴직시켰는데 내가 볼 바엔 농학원의 큰 손실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다짜고짜로 “쉿… 교수님, 큰코를 다칠 말씀을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롱담이면 몰라도 진담이면 큰일 납니다.”라고 하면서 곡교수님에게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계속하여“우리 연변농학원의 어떤 선생님도 이러루한 말을 했다가 뒤조사를 받았는데 결과적으로는 헛소문이라고 증실되였지만 말입니다.”라며 일부러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나에 대한 곡교수의 평가가 과분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평가가 아닐가 하는 생각에서 그 후 나의 사업의 동력으로 되기도 하였다.
325    [수기] 할머니의 유산 댓글:  조회:3453  추천:0  2020-06-12
                            필자 전복선  해마다 청명이면 나는 조상님들의 산소에 가지 못하는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기분이 착잡하기만 하다. 게다가 간밤에 밤새도록 내린 궂은비가 마침 하늘에 계시는 조상님들의 눈물처럼 생각되여 청명이면 누구보다도 할머니가 각별히 그립다. 아마 내가 예닐곱살쯤 되던 해 청명이였을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앞마당 터밭에서 마늘을 심다가 제사 상차림을 들고 산소에 가는 동네분들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엔 생활이 하도 가난한 때라 혹시라도 산소에 가야 만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맛있는 음식을 해가지고 산소에 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철없이 말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나중에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죽어서 저 뒤산에 묻히면 너희들도 저 사람들처럼 제사상 음식을 챙겨들고 산소에 갈게다. 그 때에 너도 해마다 청명이면 날 보러 올거지?” 하며 웃으시였다. 그 때 나는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면서도 약속을 하듯이 해마다 청명이면 할머니를 보러 꼭꼭 산소에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그 때 내가 할머니와 주고 받았던 그 얘기와 약속이 내 가슴을 아프게 파고 든다. 할머니 최금순은 18세 꽃나이에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다. 결혼 첫날, 할아버지 얼굴을 처음 봤을 때 할머니는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밤새껏 바자굽에 나가 달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죽이며 우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홍역 후유증으로 얼굴이 울퉁불퉁한 곰보로 되여 가까이에서 보면 거의 흉할 정도였다. 이팔청춘 꽃나이에 할머니는 얼굴이 예쁘고 손재간이 뛰여나 동네방네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할머니는 동그스름한 얼굴에 버들잎 같은 입술,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항상 웃는 듯한 실눈을 갖고 있었다. 행인들은 저 멀리서 할머니가 오시면 보고 또 보면서 할머니가 지나간 뒤에도 머리를 돌려 한참씩이나 뒤모습을 돌아보군 했단다.                                                                    최금순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가 비단결 같은 마음이여서 결혼 후 한번도 소리 내여 다툰적이 없었고 할머니는 한평생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산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할가, 두분은 결혼한 후로 두분 만의 사랑과 금슬이 넘쳐서인지 열두 자식을 낳으셨는데 열한 자식은 알지도 못할 병으로 요절되고 요행 외독자로 아버지(전원상) 한분 만을 겨우 키워냈다 한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자식을 잃은 슬픈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철없는 나이여서 할머니의 마음속에 깊이 묻힌 아픈 상처를 가늠할 수 없었고 할머니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도 올리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보다도 나를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워준 할머니에게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혜롭게 살림살이를 하는 것도 할머니에게서 더 많이 배웠다. 할머니는 사리가 밝고 마음이 착하셔서 동네분들을 돕는 것을 락으로 생각하셨다. 무엇보다 바느질 솜씨가 각별히 뛰여난데서 동네 이웃들의 옷이랑 예쁘게 지어 드리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다. 그 때 할머니가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서 어린 나한테 한뜸한뜸 배워준 바느질 솜씨 덕에 어른이 된 지금 옆사람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써먹고 있다. 할머니는 삼베천도 아주 깔끔하게 잘 짜셨다. 할아버지가 봄철에 심은 삼을 가을철에 베여 오시면 할머니는 그것을 가마에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다시 오리오리 실을 뽑아서 삼베천을 짜셨다. 삼껍질을 벗길 때면 저녁을 먹고 온집식구가 마루에 몰려 앉아서 어른들의 구수한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며 밤을 새웠다. 그 때 헐망한 초가집에서 생활했지만 화목하고 행복하게 보낸지라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할머니는 가지각색의 음식도 잘 하셨는데 특히는 증편을 빚는 솜씨가 뛰여났다. 동네 잔치상에 증편이 필수로 올랐는데 증편을 빚는 일은 무조건 우리 할머니의 몫이였다. 증편은 발효가 잘 되지 않으면 보송보송하게 부풀어나지 않아서 만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쌀가루 발효는 온도가 너무 높거나 너무 낮아도 안되고 시간도 적당하게 잘 맞추어야 한다. 보리싹을 물에 풀어 수분을 적당하게 맞추어 잘 이긴 쌀가루에 고루고루 섞은 다음 따뜻한 가마목에 놓고 이불을 덮어서 6시간 정도 발효시켜야 하는데 할머니는 냄새를 맡고 발효완성도를 짐작하시고 판단했는데 그야말로 프로급이였다. 할머니가 만든 증편에 예쁜 연지를 찍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였다. 나는 가는 나무가지를 십자형으로 쪼개서 염색물을 묻혀서 동실하게 부푼 증편우에 찍었는데 매번 증편을 할 때마다 연지를 찍으려고 가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언제나 가마뚜껑을 열겠는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군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나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시군 했다. 증편 외에도 할머니는 오그랑죽, 호박죽, 설기떡, 찰떡, 기름떡, 옥수수잎떡, 떡국 등 다양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을 잘 만드셨는데 할머니는 색다른 음식을 하실 때면 나에게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셨으며 늘 나의 음식 솜씨를 자랑하셨다. 우리 집에는 떡 방아가 있었는데 매번 떡을 할 때마다 나와 오빠가 숨을 할딱거리며 방아를 찧었다. 할머니는 방아돌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무 막대기로 방아돌의 쌀가루를 골고루 휘저어 주셨다. 방아를 찧을 때 맥이 풀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기도 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동년시절은 너무나 가난해서 1년에 추석과 설에만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생선은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다. 그 때 요행 생선이 생기면 아껴 먹느라고 소금에 푹 절여서 밥알만큼씩 먹었는데 생선을 특별히 좋아하시는 할머니는 생선반찬이 있으면 뼈까지 꼭꼭 씹으시면서 “바다물고기는 썩어도 맛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선을 먹을 때마다 메아리처럼 귀가에서 울린다. 할머니는 어려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셨기에 글에는 눈뜬 소경이였다. 그 때 생산대에 로인독보조가 있었는데 로인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드렸다. 할머니는 저녁에 독보조에서 낸 숙제를 할 때면 늘 나에게 물으셨는데 나는 그 때마다 제법 선생인 듯 우쭐했다. 동네분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었는데 보도원 선생님이 “원상(아버지 이름)이네 집 애들은 할머니를 닮아서 공부를 잘하는 것 같아요. 원상의 어머님은 독보조 로인들중에서 년세도 가장 많으신데도 숙제를 제일 잘해요. 그 년세에 당의 기본로선이랑 한글자도 빼놓지 않고 암송해 오십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라고 할머니를 칭찬하더란다. 할머니는 년세가 드셔서 무릎 관절도 아프고 허리도 휘였지만 주말마다 독보조에 가시는 일만은 한번도 빼놓지 않으셨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헐떡이는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워서 동생과 함께 할머니를 밀차에 앉히고 독보조 문앞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했다. “우리 부모는 녀자는 공부해서 쓸 데 없다면서 아들만 공부시켰다. 그래서 우리 사남매중 남동생만 학교에 다녔고 우리 세 녀자들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공부하고 싶어서 학교 마당에 가서 창문 너머로 강의하는 소리를 엿듣기도 했다. 그 때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는 부모님을 맘속으로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지금 너희들은 얼마나 행복하냐! 세상이 좋아서 공짜로 공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할매를 보더라도 너들 열심히 공부해서 꼭 대학에 붙어야 한다.” 할머니의 가슴 시린 말씀은 우리 형제가 열심히 공부하게 된 동력이 되였다. 우리 4남매를 대학공부 시키려고 어머니(오인옥)는 생산대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한편 사시장철 두부장사를 하셨다. 할머니는 매일 새벽 3시에 어머니와 함께 일어나서 콩 갈고 콩물을 짜고 부엌에서 한시간 남짓이 손풍구를 돌렸다. 할머니는 우리 4남매를 모두 업어 키우셨고 손주들의 뒤바라지 하시느라 고생한데서 늘그막에 허리가 거의 90도로 휘였다. 손주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74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헤여지던 그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86년 2월말, 개학날이 되여 집을 떠나려고 하는데 할머니는 나무 지팡이에 의지하여 내 손을 꼭 잡고 수염수염 논두렁까지 기어코 나오셨다.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는 이슬 맺힌 눈으로 그윽히 바라보시더니 뼈밖에 남지 않은 갸냘픈 몸을 내 몸에 기댄 채 한참 락루하셨다. “늙은이들의 일은 누구도 모른다. 이게 너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네 손을 놓고 싶지 않구나. 시간이 늦겠다. 이젠 그만 가보거라. 공부 꼭 잘해야⋯”라고 하시면서 말끝을 맺지 못하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시는 할머니 얼굴을 닦아 드리면서 “할머니 여름방학이 되면 또 올겁니다. 그 때까지 건강하셔야 돼요”라고 위로했다. 눈물고인 할머니의 그 애달픈 눈빛, 허물어지듯 논두렁이에 주저앉아 나의 뒤모습을 응시하며 손짓하시던 할머니,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날에 조각상처럼 오래오래 그 자리에 앉아서 백발을 흗날리시면서 뻐스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젓던 할머니⋯ 하늘이 무심키로 그 날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나는 고향에 가면 할머니가 앉아 계셨던 그 논두렁을 보면서 손녀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선히 떠오른다. 생전에 할머니는 딸 자식이 없는 것을 몹시 서운해 하셨다. 할머니는 딸이 없어서 어디에 놀러다닐 데도 없고 속이 타도 시원히 털어놓을 데도 없다는 말씀을 몇번이나 하셨다. 그래서 특별히 손녀인 나한테 정이 많으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어머니보다도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 꿈이였다. 할머니가 좋아 하시는 생선도 실컷 사드리고 할머니가 맛보지 못하셨던 귤이랑, 복숭아랑 바나나랑 사드리면서 할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꿈이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의 대학졸업도 지켜보지 못하고 총총히 떠나셨다. 손녀가 번 돈을 일전도 써보지 못하고 손녀가 해 드리는 반찬 한번도 드시지 못하고 산더미 같은 가난에 짓눌리시다가 하늘나라에 가셨다. 나의 할머니 최금순은 나에게 땅이나 집 같은 재물보다도 훨씬 값진 유산으로 ‘강한 생활력, 알뜰한 살림살이, 긍정적이고 남을 돕는 것을 락으로 하는 옳바른 삶’을 유산처럼 남기셨다. 할머니는 ‘가난뱅이 마음의 부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어언 34년 세월이 흘렀다. 할머니가 후세에 남겨주신 유산은 나의 생활의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슴배였고 할머니의 유산을 광동이라는 타향에서도 굳건히 지켜가며 해외에서 공부하는 딸에게도 전수하고 있는 나다. 하늘 나라에 계시는 할머니 사랑합니 /전복선 [ 길림신문 ]  2020-05-25
324    [수기 ] ‘미태혼’으로 맺은 ‘잠자는 공주’와의 사랑 댓글:  조회:4024  추천:0  2020-06-01
90대 로부부의 사랑 이야기 나는 연변농학원 정년 퇴직 교수인 김수철이다. 1925년 4월 1일에 룡정시 태양향 횡도촌 향양툰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고 일곱살에 백부님의 계자로 앞을 섰으며 열살에 마을의 서당인 ‘양홍사숙’에서 배움을 시작하여 1942년 1월에 결혼 나이(18세)가 되자 백부님의 강권으로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 때인 1월 31일에 결혼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 부부 사랑은 73년 간 이어졌다.                                                                                                김수철교수 아버지의 ‘선견지명’ㅡ‘미태혼(未胎婚) ’ 운명론자의 얘기로 세상에서 자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할 배필을 하늘이 정해준 ‘천생배필’ 또는 ‘운명의 씨앗’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네 약혼례가 전무후무로 사전에도 합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기에 우리 스스로 아버지가 ‘선견지명’으로 정해 준 ‘미태혼(未胎婚)’라 했다. 1920년대에 아버지 김창구(金暢九)가 연길시 백석구 4대에서 살면서 겨울이면 동내야학교를 다녔다. 그 때 웃동네 맹영철이란 동반 선배가 있었는데 맹의 문화수준이 아버지보다 높은 데다가 필법(笔法)과 구변(口辩)까지 좋고 경우가 바른데서 아버지는 맹씨를 숭배하였다. ‘저분과의 인정을 튼튼히 맺으면 천상 랑패가 될 일이 없겠는데…’ 언녕부터 이런 속궁리를 해오던 아버지는 어느 날 엉뚱한 생각으로 ‘맹씨와 사돈을 맺는 것이 묘안이다’ 고 생각하며 지체 없이 맹씨를 찾아가서 말을 건넸다. “맹유사(孟有司)…에!..에!...”, “…”, “…” “김유사(金有司), 오늘은 어찌된 일이요? 에, 에 …”, “그런게 아니라… 에…어떻게 말씀을 올린다…”,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요, 할 말이 있으면 시원히 하라니까…”, “예, 그럼 감히 말씀을 올리는데 우리가 사돈을 정하면 어떻소이까?”, “아니, 사돈이라니? 뚱딴지 같은 소리를…” “아니…예…말하자면 내가 딸을 낳고 맹유자가 아들을 낳으면…”, “아, 그런 말이였구만, 알만하이, 단마디로 우리 두집에서 낳는 자식을 약혼시킨다는 말이구려… 약혼을…” , “맹유자는 실로 말귀가 빠르네요, 바로 그런 말씀이우이다”, “아무렴, 그만한 말기야…그런데 아직까지 우리 집 사람이 태기도 없는 데다가 지금의 청년들이 자유 련애를 하는 판에 설마 혼사가 끝까지 성사될가 걱정되네요. 혼사말은 허타히 하는 것이 아닌데…” “후에 자식들의 혼령이 되면 그 때에 다시 …”, “…자식들의 앞날 일은 이쯤으로 마무리를 합시다.” 그날 저녁에 이렇게 아퀴를 짓고 두분은 조용한 곳을 찾아 대작을 하면서 아직까지 량가 부인들이 태기(胎氣)도 없는데 ‘미태혼’을 축복했다. 1924년 음력 8월 15일에 맹씨가 큰 딸로 맹영자가 출생했고 1925년 음력 4월 1일에 김씨도 큰 아들로 나 김수철(아명 乙祿)을 출생한데서 나와 맹영자의 결혼이 량가의 ‘부정배필(父定配匹)’로 이어졌다.   백부님의 강권                                                                               신랑 김수철, 신부 맹영자 공맹지도는 한 가문에 후대(아들)가 없다면 조상에 대한 불효라고 하였다. 하여 ‘갓바위집’ 제9대인 김창윤(金暢胤, 김수철 백부)이 아들을 잃고 ‘갓바위집’ 10대 장손으로 김수철이 7살에 백부의 계자로 되였다. 1941년 12월, 내가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에 진급한 기쁘던 날에 집에 갔더니 생각 밖에 백부님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결혼을 나에게 강권하며 무조건 순종하란다. 백부님은 언녕부터 계자가 결혼 년령(18세)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기에 1942년 첫날 내가 18세가 되자바람으로 동생(친부)을 불러 하루속히 손군을 안아보겠다며 며느리감을 곁드니 아버지는 며느리 감은 언녕 정했다고 했다. 백부님은 동생의 구구한 설명에 당장에서 친척을 밀사로 파견하며 손금보듯이 맹녀의 정황을 알아오도록 했다. 며칠 후 밀사의 회보에 따르면 맹씨 가문은 례절 밝고 인심이 좋고 경제가 넉넉한 가문이라고, 맹씨네 자녀는 5남 1녀로 모두 건강하고 총명하다고, 인물 좋은 맹녀의 단 한가지 흠이라면 아버지가 딸을 공부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백부님은 구수하벌에서 농촌 색시로 공부를 한 18세의 색시를 보고 죽자고 해도 못 찾는다며 결혼을 재촉하였다. 아버지의 선택에 백부님의 강권을 못 이겨 나는 1942년 1월 31일 (음력12월 6일)을 결혼 길일로 스스로 정하였다.   신랑의 〈아리랑〉에 신부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결혼 전날인 1942년 1월 30일 저녁이다. 나는 6간 초가집 방에서 초불을 켜놓고 9촌 할아버지(金炳活)의 지도하에서 ‘큰글’을 섰다. ‘큰글’이란 신부집에 보내기 위한 것인데 내용은 ‘백년해로를 맹세하는 신랑의 결심서’이다. 결혼 후 리혼을 하면 이 ‘큰글’종이를 절반으로 나눠서 각기 보관한단다. 이틑날 이른 아침, 아직 해 뜨지 않았지만 신랑이 떠날 준비로 모두가 서둘렀다. 신랑의 몸차림은 나의 주장대로 그냥 중학생 학생복과 겨울모자 차림이였다. 나는 이상분들에게 “색시를 잘 데려 오겠습니다”며 큰절을 올린 후 길을 떠났다. 조양천에서 삯을 내서 붉은 종이로 꾸린 꽃마차는 방울소리를 절렁절렁 울리면서 하얗게 눈이 덮인 산길을 따라 해뜨는 동남 백석구쪽으로 반시간 푼히 달려 20여호의 초가집이 산재한 백석구의 남향쪽 6간 초가집 마당에 서서히 멈췄다. 명절 옷차림을 한 하객들이 사방에서 신랑을 보려고 꽃마차 두리에 몰렸다. 여기저기서 “아무리 봐도 신랑 같지 않다”, “중학생이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꽃마차에 내린 내가 구두를 신은대로 ‘디딜패’를 밟으며 집문 앞에 이르니 신랑측 생빈이 다른 길로 문앞까지 와서 준비한 례단을 올린 후 전안례(奠雁礼)까지 끝내고 신랑 방에 들어서니 크게차린 신랑상이 들어왔다. 그럭저럭 큰상을 처리하고 나니 신부가 떠날 시각이 되였다. 이제부터는 신랑신부가 상면하는 극적인 장면이다. ‘아버지가 어떤 제비를 뽑고 나더러 펼쳐서 보라고 할가?’ 이런 생각이 앞섰지만 아버지가 정한 일이니 할 수 없었다. 하얀 꽃너울을 쓴 녀인이 나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서로 따로 서면 나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살결은 일반 녀인들보다 퍽 흰 편이다. 낯은 반반하고 특별이 보기 싫게 튀여 나온 곳이 없었다. 눈길도 아주 순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현실로 증명되였다. 꽃마차가 영원히 운명을 함께 할 맹양(孟娘)을 싣고 백석의 동구령의 오르막 길을 달리는데 말발굽 소리가 그렇게 가볍고 신나게 들렸다. 집마당에 도착하니 동내외의 하객들이 웅성거리며 밀려온다. 신랑신부가 꽃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었던지 6명의 한족 나팔(새납)쟁이들이 잔치집 마당에 나타나 축하의 나팔을 불어댔다. 그에 따라 온마당의 남녀로소 하객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신부를 맞이했다. 한족 나팔쟁이들에 따르면 지나가던 걸음에 조선족의 잔치 집을 만나 신랑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오매에도 잊지 못할 감사한 분들이였다. 어느덧 밤이 되여 결혼 축하 오락판이 펼쳐졌다. 참석자들이 5, 60명이 잘 되였다. 한동네 청년이 큰 박수로 오락 시작을 선포하고 신랑신부 상견례, 신랑신부 선물교환, 신랑신부의 독창과 합창...순으로 오락판이 이어졌다. 신랑이 절절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넘기고 신부를 걱정했는데 생각 밖에 신부는 물찬 제비마냥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 숙여 수줍은 인사를 하고 나서 미루 준비 했는지 〈홍도야 울지마라〉를 그렇게도 간절하게 불렀다. 신랑신부 합창으로 부부가 손 잡고 〈도라지〉룰 부르니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다음은 중학교 동창 리수호의 축사에 이어 신랑의 발언과 신혼 려행이다. 신랑신부 려행은 신랑신부서로가 팔을 끼고 방안을 한 고패 도는 것이다. 신혼 려행을 끝내니 신랑더러 략사(略史) 보고를 하란다. 나는 략사보고에서 우리들의 약혼은 ‘미태혼’이라는 것, 그 사이 신부가 너무나 보고 싶어 남들의 눈을 피해 늦은 밤길을 다니며 맹녀를 만나 보았다는 등 ‘아름다운 거짓말’로 하객들을 웃기였다. 오락판은 전체 하객들의 합창과 춤으로 여흥을 푼 다음 모두의 기립 박수로 페식을 선포하였다. 아침에 밖에 나가보니 밤새에 싸락눈이 내려 땅을 덮었다. 항간에서 신부가 다녀온 길을 눈으로 덮으면 신부가 시집에 안착하고 시집살이를 잘 한다고 전해지기에 모두가 기뻐했다. 아침 식사 후 사람들이 놀려왔는데 강희태씨가 간밤에 난데없는 부엉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겨울에 들리는 부엉의 울음소리는 경사의 길상이라고 했다. 실로 우리 부부는 4남 1녀를 낳고 금혼잔치까지 지내고 90이 넘도록 동고동락하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냈다. 나는 ‘안해’를 ‘집안의 해(태양)’라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중하듯 안해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딸과 함께 행복했던 안해 맹영자(왼쪽)   이하는 부인 탄신 93주년에 올린 나의 축수문이다. “오늘은 맹모의 93주년 생신 날입니다. 오늘의 행사를 명심하여 준비하고 참여하신 귀빈 여러분과 온집 식구들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로약한 몸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장모님을 부양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위 최명림(崔明林), 딸 김혜란과 보모( 保母), 그리고 맏아들 김상술 부부를 비롯한 자녀, 자부와 손자, 손녀, 증손 일동에게 맘속으로 깊이 간직해 오던 치하를 합니다! 맹모가 산출한 4남 1녀와 그의 자손으로 이뤄진 27명의 대가정은 모두 맹모의 잉태와 양육의 노력으로 이룩되였습니다. 그만큼 맹모는 위대한 녀성이며 나의 둘도 없는 ‘록색로친’ 입니다! 인생의 자연적인 산출과 사회생활, 찬란한 문화, 문명, 절대적인 사랑, 꿈, 행복 등 인류세계에 존재하는 모두가 바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창조한 걸작입니다. 한국의 안영희박사가 훈춘 경신 방천에서 아름다운 사막공원과 련꽃 늪을 비롯한 중, 조, 로 3국의 풍경을 만끽하면서 마음속 찬탄을 못이겨 올리는 말씀이 ‘어머니가 나를 낳았기에 나는 오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을 보게 되였습니다!’며 자기 몸을 낳아준 어머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도 50대 중반에 천신만고를 마다하고 두번째 장백산이라고 불리는 화룡 청산의 베개봉 절정에 올라가 만물을 굽어보며 베개봉의 암석에 ‘어머니’라는 위대한 석자를 새겼답니다. 세상에서 엄마를 잃은 젖먹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습니다. 이 순간 엄마를 잃은 아이가 부르던 노래 말이 떠오릅니다.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 오면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여 필 때마다 안아 주세요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눈에서 피가 흐른다 … … … 눈물이 앞을 가려 더는 읽을 수 없습니다…. 맹모는 문화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며 백석(白石)에서 순진하게 자랐고 18세에 갓바위 집 김룡천의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철이 없는 부군(夫君)의 랭대를 받으면서도 수십년을 힘겨운 수전 농사일에 종사하였습니다. 맹모는 젊은 나이에 조상들의 추석 성묘로 가는 길에서 늙으신 시아버님을 업고 구수하강을 건너며 시부모 효도를 다 하였습니다. 맹모는 4남 1녀의 잉태와 양육에서 갖은 생활난을 겪어냈으며 매서운 양력설날 추위에도 홀옷 맵시로 부군과 함께 산에 가 땔나무를 하면서도 아무런 군말이 없었습니다. 맹모는 가지가지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한마디 불평 없이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온 손색없는 참된 어머니 용사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어머님 품에서 자란 자식들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은혜에 보은하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우리 대가정의 창성 발전의 길을 펼쳤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비운을 구원해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항상 몇십년을 갈라졌던 리산가족이 상봉하는 그날처럼 서로 꼭 껴안고 쓰다듬어주면서 이날을 마지막으로 갈라지는 날처럼 아끼면서 서로가 산다면 그 인생의 길은 비단길이며 만화방초가 만발한 꽃길로 삶의 영원한 디딜패로 될 것입니다. 오늘의 비단길 개척자 맹영자 만세! 세상의 위대한 어머니들 만세! 만만세!! 여기에 오신 여러분의 건강 행복 만세! 2016년 추석 , 김수철올림    ‘잠자는 공주’ 인간에게 하느님이 내린 최대의 선물이 래일의 일을 오늘에 모르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2017년 5월 7일, 내가 훈춘 경신에 가서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식물을 찍고 돌아온 이틀 후인 5월 9일에 부인이 94세로 고종명을 하였다. 지난해 부인의 생일에 올린 축수문이 아직 1년도 못되여 추도문으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 축수문에서 내가 욕심을 버리고 ‘맹영자 만세!’를 ‘맹영자 백세!’로 표했다면 혹시 백세를 살았을 것인데 말이다. 후회막급으로 모대기였다. 맹녀와 함께 한 나의 인생사는 부모가 정해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 함께 파란곡절을 이겨내면서 분수에 넘친 우리들의 욕망을 실천한 인생사였다. 나는 맹영자씨를 평생의 동반자로 존중했다. 하기에 《길림성식물지》 출판을 위해 90고령에 혼자서 삼성촌에서 자취하면서 주방 벽에 부인의 사진을 정히 모시고 늘 감사한 마음을 표하군 했다. 2017년 추석 맹녀의 생일 날에 나는 ‘맹영자묘석비(孟英子墓石碑)’를 세울 때 비문을 ‘잠자는 공주’의 노래말을 선택했는데 자녀들이 그저 ‘자녀일동립비(子女一同立碑)’라고 쓰려니 늙은 나이에 토를 달지 못하고 묵묵히 따라 주었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지 못해 나는 〈잠자는 공주〉의 노래말을 오선생에게 보인다. 앵두빛 그 고운 두볼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면 그대는 잠에서 깨여나 나에게 하얀 미소지을가 그대여 어서 일어나 차가운 가슴을 녹여요   나는 ‘미태혼’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의 ‘미태혼’은 전무후무한 혼사(婚事)이다. 아버지에 순종함이 나의 효도였다. 아버지의‘선견지명’이 우리 부부의 금술을 끝까지 지켜 주었다.    / 오기활 대필
323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5) 댓글:  조회:3857  추천:0  2020-06-01
15. 못 잊을 기생 1994년 음력 1월 2일이다. 나는 한국의 이상래 박사, 이종일 교수, 안상덕 박사의 안내하에 3대루의 하나인 경상남도 진주의 남강 기슭에 자리한 촉석루를 유람했다. 촉석루는 고려말에 김춘광(金春光)이 세운 웅장한 목조루각이다. 이날 나에게 눈도장이 찍힌 것은 촉석루 뒤에 우뚝 솟은 의기사당(义妓祠堂)이였다. 의기사당에는 채색으로 그려진 명기생 주론개(朱论介)의 령정이 모셔져있었고 사당 앞 선바위에는 주론개의 애국정신을 노래한 시가 주옥같이 새겨져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론개의 애국절개를 상징하는 참대나무들이 의젓하게 자라고 있었다. 의기사당엔 한(恨)의 피눈물이 슴배여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의 도요도미 히데요시(丰臣秀吉)는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반도에 출정했다. 일제놈들은 경상남도 진주성을 함락하고 절승경개를 자랑하는 촉석루에서 승리의 축하연을 열었다. 그 때 왜놈들은 조선의 젊은 녀인들을 끌고 와 흥청망청 술을 마셔대며 희롱하였는데 끌려온 녀인들중에는 주론개라는 기생도 들어있었다 그 날 연회에서 론개는 언녕부터 사무치는 원한이 있었는지라 거나하게 된 왜장을 껴안고 분노에 사품치는 남강에 몸을 던졌다. 나는 의기사당을 돌아본 후에야 론개가 실존인물임을 알게 되였고 기생의 신분으로 나라에 충성한 론개의 애국정신에 매료되여 발걸음을 멈추고 필을 들어 그 자리에서 주론개를 노래한 주옥 같은 시문을 필기하였다. 론 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우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릿답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우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라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리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우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그런데 내가 소홀했던 걸가? 그만 시인의 방명(芳名)이 빠진 것이다. 너무나 유감스러웠다. 나는 촉석루를 떠나면서 아쉬워 몇번이고 다시 뒤돌아보았다. 남강의 푸른 강물은 도도히 흐르고 재빛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의기사당의 상공을 빙빙 돌고 있었다. 날새들도 슬픔과 한에 찬 우리 민족의 력사를 잊지 못하여 의로운 기녀인 론개를 기리는 듯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조선시대 충절의 본보기인 주론개의 생가와 마을의 복원공정이 1999년말까지 한화 50억원 투자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론개의 생가는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다. 일설에는 론개는 장령의 부인으로서 왜놈 장령을 죽이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장들의 축연에 참가했다고 하는데 그 진위 여부는 앞으로 연구할 문제이다. 나는 한국 유람을 통해 명기생 주론개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였고 론개의 애국정신에 감동을 받아 이 글로 론개를기린다.
322    암과 동행하는 장수비결 댓글:  조회:4386  추천:0  2020-05-22
필자는" 2012년 6월에 대장암 2기로 수술을 받은후부터 암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식생활을 완전히 바꿨다"는 환자를 통해 한국 국립 암쌘터 이(리)진수원장의 “암과 동행하는 장수비결”을 소개받고 이(리)원장의 일가견이 “참 독특하다!”는 필자의 생각과 믿음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저 이 글을 올린다. 이(리)진수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서 류학공부를 마치고 세계적인 암 치료병원으로 불린 미국 텍사스 MD엔더슨 암 센터에서 19년 동안 “닥터리”로 이름을 날린(192001년 미국 최고 의사)의사다. 특히 1999년 12월에 삼성 ‘이건희’ 회장을 직접 치료하면서 그의 이름이 한국에 알려진후 “한국의 암치료에 기여하는 것을 조국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고 귀국하여 한국 국립암센터부속병원장, 폐암센터장, 연구소장을 지냈다.   이하는 암에 대한 이(리)원장의 독특한 일가견이다. ㅡ 인간이 늙어지면 이런저런 병에 걸려 어차피 죽는다. 대부분의 암은 인간이 나이 들면 생기는 흰머리나 주름살과 같다. 우리는 ‘암=죽음’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암을 완치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안고서 함께 가야 할 ‘육체의 가시’로 여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명이 있는 자는 죽게 돼 있고 죽은 뒤엔 반드시 심판이 있게 된다. 83세에 폐암으로 사망한 영화배우 ‘폴 뉴먼’을 암에 걸려 죽었다고 말하기보다 늙어 죽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ㅡ 무엇보다 암 치료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바뀌어야 한다. 1, 암세포는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으로 일생에서 누구에게나   6번 내지 10번의  암세포가 발생한다. 암세포는 수십억개까지 자라야만이 진단이 가능하다. 암이 완치되었다고 함은 암세포가 작아져서 안 보인다는 말이지 다 치료되였다는 말이 아니다. 2, 인체내에 면역체계가 왕성하면 암세포를 파괴하고 암세포의 증식을 막아 종양으로 자라는 것을 방지한다. 3, 암에 걸렸다는 것은 여러 종류의 영양결핍에 걸렸다는 것으로 그 원인이 유전, 환경, 생활습관등에서 기인된다. 복합적 영양결핍을 극복하려면 보조식품을 포함한 섭생방식을 바꿔 인체의 면역력을 강화해야한다. 4, 화학료법은 급속히 자라는 암세포를 독물로 죽이는 것으로 암세포의 죽음과 함께 소화계통장기를 손상시키며 간, 콩팥, 심장 폐 등을 손상하게 된다. 방사선 치료도 암세포를 파괴하는 동시에 정상세포와 기관을 파괴하고 상처를 남긴다. 5, 초기 화학료법과 방사선 치료는 종양의 크기를 줄일 수 있을 뿐 장기간을 치료한다고 해도 더 이상의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6, 화학치료와 방사선치료로 그 독(毒)이 루적되면 면역체계가 와해되어 환자가 다른 감염과 부작용에 굴복하게 된다. 화학적, 방사능치료에 암세포가 변종되여 내(耐)성을 갖게 한다. 절제수술도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퍼지게 한다. 7, 효과적인 암 투병 방법은 암세포가 증식할수 있는 먹거리를 차단하여 암을 굶어 죽게하는 것이다. 암이 좋아하는 식품으로 설탕과 그 대용품이다. 식탁용 소금은 표백제 때문에 해롭고 천일염이 좋다. 우유도 해롭다. 우유를 대신하여 무과당 두유가 암을 굶주리게 할 수 있다. 암은 산성체질로 알카리성으로 바꿀 것, 육식은 산성이므로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피하고 생선을 먹는 것이 좋다. 닭고기는 조금 먹어도 좋다. 건과류와 과일을 먹으면 알칼리 체질이 된다. 콩의 조리 음식을 먹는것이 바람직하다. 녹(록)즙은 생 효소를 공급하여 쉽게 흡수되고 건강세포를 잘 자라게 한다. 커피, 초코렛을 피한다. 대신 항암성분이 있는 녹(록)차가 좋다 ㅡ 암은 마음, 신체, 정신의 병이다. 항상 긍정적이며 분노, 미움, 스트레스를 피하고 인생을 즐기며 편히 쉬여야 한다. 소식, 긍정적 태도, 마땅한 주거 환경을 가춰야 한다. 황금색 카레는 암병 예방에 가장 좋고 치매도 막아준다. 암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카레를 먹는 것을 일상화함이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이상을 제공하며 선택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오기활
321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4) 댓글:  조회:4296  추천:0  2020-05-20
14. 박사연구생 반욱(槃旭)이와 함께 첫 만남 아이산(阿耳山)은 대흥안령의 명승지이며 몽골족의 성지이다. 아이산에는 기화이초(奇花异草)도 많고 물고기가 떼를 지어 춤추는 대천(大川)도 많다. 내가 지금 펴내고 있는 ≪길림성식물지도감≫에 참고되는 희한한 식물들이 아이산에 수두룩하게 나있다고 생각하니 어깨춤이 절로 났다. 2016년 6월 9일 오전 9시 30분에 나는 길림성 서북의 신흥도시인 송원으로 향하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훈춘‒울란호트고속도로로 달리는 뻐스가 오후 3시경에 송원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저 로인이 70이래. 꼬부랑 할배가 꽃구경을 다니다니, 어쩌자구 저러노?” 내가 가는 곳마다에서 이구동성으로 이런 후론(后论)들이 뒤따랐다. 후론들이 여하하든 90대 로인을 70대로 보니 귀맛이 좋기만 하였다. 기실은 이번 원정도 92세 나이를 아랑곳않고 ≪길림성식물지도감≫에 배합할 사진을 찍으려고 혼자몸으로 떠났는데 말이다. 나는 송원에서 기차로 백성에 가서 하루를 묵고 울란호트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나는 뻐스의 차창 너머로 가고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내몽골초원의 산천초목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오매불망하고 찾아온 아이산거리는 오색이 령롱한 네온싸인으로 극락세계를 방불케 하였다. 번화한 거리중심의 값싼 려관은 이미 만원이였다. 겨우 찾은 려관방이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는 일박에 20원씩하는 허줄한 지하방이였다. 비록 호주머니에는 돈이 두툼히 있었지만 앞으로의 려정을 생각하니 눅거리 려관도 안식처로 느껴졌다. 오히려 고급호텔에 들었으면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였을 것이다. 이튿날은 비가 꽤나 내리는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도시 주변의 산에서 등산길을 찾느라고 종일 헤맸는데 등산길이 모두 인위시설(人为施设)로 막혀있었다. 맥없이 려관에 돌아오니 날이 벌써 어두워졌다. 이튿날엔 아침부터 묻고 또 물으면서 앞산에 설치된 케블카시설이 있는 스키장으로 올라갔다. 상대고도가 500m 정도의 산기슭에 이르니 기화이초들이 나를 아연실색하게 한다. 노랑양귀비, 서홍닥나무, 아시아톱풀 등이 나를 보고 빨리 오란다. 허기 찬 호기심을 겨우 누르면서 45도 정도의 경사진 벼랑도 맥 없는 줄 모르고 톺아올랐다. 식물삼매경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금년 봄 연길 중관촌전자상가에서 산 묵직한 디지털사진기로 첫여름의 여러가지 식물 100여장을 사진기에 담았다. 여기는 자연보호구역이여서 식물이 잘 보존되여있었다. 저녁에 려관에 돌아오니 딸과 사위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할빈에 있는 동북림업대학의 류삼규(柳参奎) 교수가 나한테 자기의 박사연구생 반욱을 보내니 현지 식물분류실습을 잘 지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란다. 3일후 젊은 한족 청년이 만면에 웃음을 담고 나를 찾아왔다. 젊은 박사연구생이 식물을 배우려고 할빈에서 나를 찾아왔다니 려관집 할머니와 젊은 부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로 달라졌다. 나는 젊은이의 체면을 고려해 지하방을 물리고 지상의 중급 방으로 옮겼다. 허허!… 젊은 박사연구생이 나의 몸값을 올린 셈이였다. 결국 자초지종을 캐여물으니 반욱이의 론문쩨마가 ‘미꾸리꿰미풀’인데 이 풀이 안달(安达)지역에 있기는 한데 도대체 몇가지가 있으며 그 이름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였다. 아무래도 도와주어야 시름이 놓일 것 같아 반욱이와 함께 류삼규 교수의 안달실험기지를 향해 떠났다. 식물연구기지에서 아이산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우리는 대경을 거쳐 내가 10년전에 3년 동안이나 드나들며 정을 묻혔던 안달에 도착했다. 안달에는 류삼규 교수의 식물연구기지가 있다. 나는 3년간 안달실험기지에서 알칼리땅에서 자라는 식물을 조사, 연구하면서 류교수를 도와 2006년에 ≪동북염지채색식물도감(东北盐地彩色植物图鉴)≫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그동안에 류교수의 소개로 일본 동경대학의 저명한 교수들과 친분을 맺었고 동경대학의 초청으로 란 론문을 발표해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영광까지 지니였다. 그러니 류교수의 식물연구기지는 나의 학습장으로 나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한 잊지 못할 실험지이다. 이곳은 평소에는 거의 비여있었다. 내가 있는 동안에 성실한 한족 로부부가 기지를 지키며 나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면서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나는 반욱이와 함께 3일간 미꾸리꿰미풀의 여러가지 모양의 견본을 찾아 표기하고 번호를 달아 금후의 검색에 차실이 없도록 면밀하게 꾸며놓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이번 걸음에 종류에 따라 감정을 하려고 했으나 자료문헌이 부족하고 실체현미경도 없어서 별수없이 조건이 마련된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가 안달‒할빈고속렬차를 타고 할빈에 갔더니 동북림업대학의 요인 두명이 할빈역에까지 나와 우리를 마중하고는 화려한 동북림업대학호텔로 안내하였다. ‘미꾸리꿰미풀’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나의 연구와 생활의 근거지인 조양천의 삼성촌에서 춘향이 리도령을 기다리듯 나를 고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루가 삼추같이 느껴져 잠자리에서 애써 눈을 감아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장백산천지행 반욱이는 사물감수능력이 뛰여났다. 그리고 려행, 참관, 견학 등 행사에서 기록을 확실하고도 상세히 할 뿐더러 또 여러 갈래의 경로를 통하여 지도, 사진, 려행안내 등 정보수집도 잘했다. 그 외의 몇번의 동행에서 그에게서 받은 제일 깊은 인상은 전화, 핸드폰, 컴퓨터, 팩스 등 현대적인 설비로 친필편지가 까맣게 잊혀져가는 시대에 그는 부지런히 손편지를 쓰는 것이였다. 그는 어디를 가나 우편엽서를 많이 샀고 쉴새없이 속필로 편지를 썼다. 한번에 적을 땐 10여장, 많을 땐 60여장에 이르는 친필편지를 려관에서도 쓰고 덜컥거리는 차에서도 쉼없이 쓰고 또 썼다. 나는 그렇게도 흥미롭게 편지를 쓰는 사람을 처음 봤다. 언젠가 최명림씨가 반욱이를 중, 조, 로 3국 접경지인 방천을 관광시킬 때도 반욱이는 조선과 로씨야의 토산물, 우표와 여러가지 기념품들을 빼놓지 않고 많이 수집하더란다. 이튿날에 장백산천지를 가기로 하였는데 이 소식을 접한 류삼규 교수의 친우들인 려춘성(연변대학)과 송씨(조양천농업은행) 부부가 반욱이를 동무해주기로 하였다. 장백산천지는 반욱이만 오르고 나머지 6명은 황송포습지에서 식물촬영을 하였다. 이번 걸음에 황송포습지 직원들의 친절한 협조와 려춘성과 송씨 부부의 도움으로 예기치 못했던 많은 종류의 식물들을 촬영할 수 있었다. 할빈역에서 2016년 6월 중순에 나는 반욱이와 함께 할빈‒연길고속렬차를 타려고 할빈역에 왔다. 할빈역에서 나는 민족의 독립투사인 안중근이 로씨야와 일본 군경들의 틈새로 몸을 빼면서 조선을 송두리채 수중에 넣은 주범인 이등박문을 보기 좋게 사살한 후 떳떳하게 “꼬레아 우라!”(로어로 ‘한국 만세!’)를 세번 웨친 광경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안중근을 그리였다. 안중근은 진작부터 이등박문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3년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결하여 속죄하기로 맹세했다. 마침 이등박문이 할빈을 방문하게 되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류동하와 함께 할빈으로 왔고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로씨야측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나오는 이등박문을 쏘아눕혔다. 31세에 나는 안중근은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3월 16일 10시에 단정한 자세로 “대한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피끓는 심장을 멈추었다. 절세의 애국자 안중근의 붉은 피는 아직도 식지 않고 이 땅을 적시며 사람들의 붉은 심장을 불태우고 있다…
320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 (련재13) 댓글:  조회:3563  추천:0  2020-05-10
후반전에“멋진 꼴!”을 인생은 2모작이다. 인생을 100으로, 50은 전반생, 50후는 여생이 아닌 후반생이다. 후반생은 전반생에서 저축해 온 것을 토대로 살아간다. 인생 60을 시작으로 후반전이다. 축구를 보면 멋진 꼴이 거의 모두 후반전에 난다. 인생사도 마찬가지로 후반생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그랜드모스는 71세에 그림을 시작했고 갈릴레오는 74세에 마지막 저서를 출판했으며 파블로카 찰스는 85세에 백악관에서 연주를 했고 버나드쇼는 96세때 가지를 치기 위해 나무에 올랐다가 다리를 상했다. 지능과 창의력은 다르다고 한다.  지능은 20쯤에 가장 완숙하고 창의력은 30후에 서서히 발달하다가 70부터 또 다시 상승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명가 1,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최고 창의력의 평균년령이 74세로 나타났다. 최종승부는 후반전이다. 후반전에 성공한 사람이진짜 성공한 사람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수자에 불과 하다. 나는 후반전에 승부를 걸고 더 멋진 꼴을 넣었다. 첫 “꼴”은 중조변경에서 1987년에 내가 정령퇴직을 하니1990년에 “중화인민공화국 도문동식물검역국”에서 나를 “延辺中朝辺境檢疫性杂草, 田園杂草種類及其分布調査硏究”사업 기술고문으로 초빙되였다. 하여 우리는 조사팀을 조직하여1992년 9월 20일까지 조사사업을 마무리를 하고 다음 보고문건을 작성하였다. 1, 項目鑑定大钢 2, 延辺中朝辺境檢役性杂草田園杂草種類及分布調査硏究工作報告 3, 調査点分布圖(地圖) 4, 延辺中朝辺境主要檢疫性杂草, 田園杂草名錄 5, 延辺中朝辺境田園杂草分區圖 6, 延辺中朝辺境田園杂草檢索表 그때 우리가 조사구역내에서 발견한 잡초가 모두 71科에 256属, 504種이였다. 그 중에는 검역성잡초 1종, 水田잡초 132종, 旱田잡초 169종, 果園잡초 337종, 熟地잡초 137종이 포함된다. 성해당부문에서1992년 9월 27일에 감정회를 소집하였는데 길림성정부에서 파견한 심양농학원식물보호전업의 백교수가 감정위원회 주임을, 장교수가 부주임을, 冠廣淸, 金洙哲 등이 위원으로 감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감정회는 만장일치로 우리가 작성한 보고문을 통과하고 성정부에 보고하니 성정부 해당부문에서 제때에 본 감정을 통과하였다. 이는 내가 후반전에 중조변경에서 넣은 첫번째 멋진 “꼴”이였다.     두 번째 멋진 “꼴”은  서울에서 1994년 8월 한국 “아카데마서적”에서 金洙哲, 安相得, 李相來의 공저로 세상 처음으로 “原色白頭山資源植物”을 출판하였다 “장백산은 “식물의 宝庫”로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장백산은 세상에서 만병통치의 灵葯으로 불리는 산삼의 분포 중심지역이고 잣나무, 오리나무더부살이, 참돌꽃 등 량온대의 유용자뭔식물의 분포지다.”“중, 한 두 나라전문가들이 ‘우리가 물려받은 자연은 그대로 보존하고 보호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며 유용한 식물은 순화, 번식, 개발하여 멸종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는 취지로 팀을무어 2년간 백두산의 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한 기초상에서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 등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배우는 각계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백두산 자원식물에 대한 좋은 지침서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원색백두산자원식물”을 집필하였다” 이는 “원색백두산자원식물”의 “머리말”의 한 단락이다   (부록); “원색 백두산자원식물”속의 뒷 이야기 ㅡ 나의 맏아들 相术이는 국비로 일본동경에서 전기공학연수를 마치고 돌아 올 때 나에게 니컨패카메라를 선물하였다. 나는 정년퇴직을 하자3ㅡ4년간 이 사진기로 백두산의 700여종의 식물을 선택적으로 찍고나서“백두산자원식물도감”을 출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원고를 가지고 연변인민출판사에가니 출판사에서 아직까지 원색사진 출판이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동양자원식물학회 회장으로 지내는 리상래박사와 강원도 춘천대학의 안상득박사가 서울에서 출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중, 한관계래왕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우리 농학원의 김병진교수가 친히 관계부문을 찾아 다니며 나의 원고의 출국수속을 끝내고 원고를 우편으로 안상득박사에게부쳐 보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갈려니 근친의 초청이 없이는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리상래박사가 나서 동분서주하면서 끝내 나의 출국수속을 마무리를 하였다.. 나는 1994년 1월에 중국 천진에서 비행기에 올라 상해를 경과하여 서울 김포공항에 내리니 리상래박사와 안상득박사가 마중을 나와 나를 서울대학 근처인 관악구의 어느 하숙집으로 안내하였다. ㅡ 나는 하숙집에서 독방을 차지하였다.리상래회장이 이부자리를, 안상득박사가 채색텔레비죤을 마련해 주었다. 하숙비가 한달에 한화로 40만(인민페로 4000원)이라고 하는데 리상래회장이 전담하였다. 나는 한 달을 기한하고 원고를 추고하며 내가 찍은 식물사진을 정리하면서 편집사업에 전념하였다. ㅡ 나는 밤 늦게까지 원고와 씨름을 하기에 아침늦게까지 잠을 자야 했지만 아침식사가 6시 반으로 제정되여 그때 너무나도 힘 들었다. 나의 방에 드나드는 사람은 단 초등학교를 다니는 6, 7살이 되는 계집애로 이름이  李宝美다. “아저씨 아침진지 드세요” 보미가 나를 부르면 어머니가 “할아버지라고 불어야지 아저씨라면 버릇이 없는 짓이야” 라고 딸애를 가르쳤다. 어느날 보미가 나에게 자기가 그렸다는 그림책을 들고와 자랑을 했다. 구레용으로 지면을 꽉 채운 그림은 구도가 좋았고 잘 그렸다. 내가 참 잘 그렸다니 보미는 국제미술경기에서 우수상을 따냈다며 은질컵까지 보여주었다. ㅡ 대개 열흘간을 지나니 하숙집 아줌마가 “이 방에 손님을 한 분 더 모실려니 될가요?”라고 묻기에 나는 대뜸 된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崔進旭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방한구석에 조립식 옷 걸이를 설치하더니 대뜸 10여벌의 옷을 상품처럼 진열 하였다. 수일이 지나자 그는 나와 허물이 없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기로 오기 전에는 어떤 독신녀와 동거를 하다가 갈라 졌다며 자기가 쓰던 물건을 그녀에게 다 주고 와도 아까운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최씨는 부산에 처가 있는데 자기가 늙었다고 곁에 가면 발길로 차내면서 싫어 하니까 새로운 애정을 찾으려고 서울에 왔다며 자기가 지금 어느 과자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는데 월급을 많이 받는다면서 서울서 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부산에 있는 처자들에게 돈을 붙이지 않아도 그들이 아무 문제없이 살아 간다며 아무런 주저도 없이 시원스럽게 말을 했다. 최씨는 기술이 팔방이라며 어선에서 큰 고기를 낚고 찍은 멋진 사진까지 보여주며 자기 자랑을 하였다. ㅡ하숙집 옆방에는 또 장기적으로 하숙하는 郑昌吉이라는 50대 남자가 있었는데 정씨는 나와 그냥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기에 서로간 허물없이 대화하는 사이로 되였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정씨는 자기가 다니는 奉天基督敎에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신자가 아니기에 갈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돌려 서울의 世波도 알겸 사회생활도 체험 할 겸 한번 다녀 오는 것도 랑패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따라 나섰다. 교회의 마당에 이르니 일부 신자들이 길 좌우에 줄을 서서 환영하였다. 어떤 신자들은 나의 손을 잡으면서 “무엇을 도와 드릴가요?”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례배당입구도 그 모양이 였다. 례배당에 들어가 책상을 마주하고 앉으니 곁에 있는 신자들이 나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책상 안에는 성경책이 있었고 례배당 벽 좌우에서 악사들이 줄지어서 찬송가를 불렀다. 례배가 끝날 무렵 돈 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복무원이 사람들을 빠짐없이 찾아 다녔다. 정씨가 “내가 당신의 몫까지 희사할 테니 념려 마십시요”하면서 나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례배가 끝나고 마당으로 나오니 역시 사람들이 길 량 옆에 줄지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나는 이날 교회에 다녀온 것 역시 인생을 연구하고 교인을 알고 그네들과 단결할 줄 아는 과당이였다고 생각하였다. ㅡ 근 40여 일간의 노력으로 편집을 끝내니. 어느날 리상래회장이 와서 “그간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유활동 시간입니다. 서울부근에 경치 좋은 곳이 많으니 구경을 떠납시다”고 하였다. 나는 평시에 생각했던 요구를 서슴지 않고(렴치없이) 제기 하였다. “나는 서울 구경보다도 우리 宗祖와 先祖들의 聖地를 參拜하고 싶습니다. 경주에 있는 中始祖金陽의 墓所,, 경상남도 固城에 있는 宗祖墓域, 전북 高敞의 斌吉公墓所를 참배하고 싶습니다. 이는 나의 평생 소원입니다.” 리상래회장은 나의 모든 요구를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만족시켜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고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제기 했구나는 생각으로 낯이 뜨거워 난다. ㅡ 2010 년 어느 여름에 내가 조양천 삼성촌에서 텔레비를 보는데 미국에서 진행된 국제급 골프경기에서 李宝美가 일등으로 “우승컵”을 수여 받는 장면을 보았다.   宝美란 이름이 하도 인상이 깊었기에 내가 나이를 따지며 계산해 보니까 확실히 내가 서울하숙집에서 함께 지낸 宝美가 옳았다. “보미만세!” 나는 혼자서 두손들어 보미만세를 부르고 “이 세상이 너를 위해 태여 났구나!”며 혀를 끌끌 찼다. 보미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부럼이 없이 이름값을 하면서 잘 살기를 기원한다.   세번째 멋진“꼴”은 연변대학에서 2004년에 “장백산 몇가지 항암식물 및 그의 약학연구 평가”란 제목으로 내가 쓴 영문론문이 “연변대학학보”에 실려 2등 우수론문으로 평선되였다. 2006년 4월2일에 연변대학 학보편집부에서 성대한 우수론문수상파티를 조직하였다.    내가 후반전에 넣은 “꼴”은2007년 아세아최고학부로 불리는 일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백두산식물세미나”에서 내가 “장백산의 야생식물”을 독강(獨講)등으로 계속하여 이어진다.  
319    현 운동대회에 참가하던 그날 댓글:  조회:4387  추천:0  2020-05-02
올해 내 나이 76살, 지금까지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세가지를 잊을 수 없다. 하나는 11살에 왕청현소학생운동대회 육상 선수로 선발된 것이다. 두번째는 처음 기차를 타 본 일이며 세번째는 지난해 75세 나이에 시급 로인운동대회에서 오성붉은기를 손에 들고 주석대 앞을 지나며 검열을 받은 것이다. 소학생 때 달리기를 잘한 나는 학급 1등은 내몫이였다. 1956년 ‘6.1’절에는 왕청현운동대회 100메터 달리기경기에서 2등을 따내 상품으로 필기장과 연필을 타기도 했다.                                      지난해 로인절 활동에 참가한 필자(앞줄 오른쪽으로부터 네번째) 당년에 석현진(왕청현 제7구) 대표로 선발된 륙상 선수로 진내 몇개 소학교에서 선발된 선수들과 함께 석현에 모여 집체훈련을 받고 ‘6.1’ 절에 왕청현소학생운동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11살이였다. 처음 기차를 타 보는 기쁨으로 련며칠 밤잠을 설치며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였다. 우리 마을(달라자) 바로 앞은 곡수 기차역이기에 우리는 밤낮이 따로 없이 분주히 오가는 기차들을 다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정작 운동선수로 선발되여 기차를 타고 왕청에 간다고 한 다음부터는 지나가는 기차를 볼 때마다 언제면 저 기차에 앉아 볼가는 생각만 했다. 어떻게 기차에 올라가는지, 기차 안엔 전기불이 있는지, 기차에서 대소변을 보려면 어떻게 하는지… 별의별 오만가지 의문들이 다 있었다. 생각 할수록 마음이 급해났다. 그때 기차라는 말만 들어도 걱정스러웠는 데 아마 우리 할아버지께서 하신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60대 중반이였는 데 그때까지 기차를 타 보지 못했다면서 한번은 맹랑하게도 발길이 몇걸음 늦어서 눈앞에서 기차를 놓쳐버렸다 했다. 그때 나보다 한살 아래인 외사촌 남동생이 겨울방학에 왕청에서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 갈 때 할아버지께서 손자를 기차에 태워 보내려고 곡수역까지 데리고 갔다. 마을 앞 도문북강(해란강과 가야하가 곡수에서 합쳐서 도문북강을 이룸)의 얼음강판이 너무나 미끄러워서 조심스레 걷다보니 그만 시간을 지체해서 곡수역 대합실에 금방 들어서자 기차는 고동을 치며 떠나려 했다. 이에 너무나도 다급했던 할아버지는 허둥지둥 대합실을 나서 문앞에서 두손을 마구 흔들며 “여보! 여보! 조금만 기다려 주오, 여기 왕청 갈 얼나(어린애)가 있소!” 하고 높은 소리로 기차를 불렀단다. 하지만 무정한 기차는 들었는둥 말았는둥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떠나더니 점점 더 빨리 달아나더라는 것이였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이 나의 귀전에서 맴돌며 나의 마음이 한없이 불안했다. 드디여 그날이 왔다. 우리 선수들은 줄을 서서 석현역 플래트홈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기쁨과 설레임과 함께 나의 마음은 행동이 늦으면 기차를 타지 못할가봐 초조함으로 가슴이 풍덩풍덩 뛰였다. 순간 저 멀리서 “뿡!ㅡ” 하는 기적소리가 울리며 달려오던 기차가 어느덧 “칙~푹~” 하면서 눈앞에 와 섰다. 뒤따라 멋진 철도복을 입은 렬차원들이 기차문을 쫙 열더니 손님들이 하나하나씩 층계를 밟고 내리자 우리 일행은 우쭐우쭐 층계를 밟고 기차에 올랐다. 그날 선수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나 같은 촌닭들이 많아서인지 우리 일행은 안으로 밀고 들어갈 념은 안하고 문어구에 콩나물마냥 빼곡히 붙어서서 밀치락닥치락 하면서 다음 역(삼도구)까지 서서 갔다. 그래도 기차를 타고 간다는 기쁨과 자부심에 둥둥 떠 있었다. 삼도구역에서 승객들이 줄줄이 내리더니 렬차원은 한무리나 되는 우리들을 떠밀며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나는 뜻밖에도 운 좋게 빈자리가 있어서 자리에 앉아 가게 되였다. 두리번두리번 기차안을 살펴보니 천장에는 전기불이 켜져있고 유리창문으로 바깥세상 구경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서인지 누가 말하는지 “다음 역은 신흥역이니 내리실 분들은 미리 준비하여주십시오”라는 말까지 들렸고 대소변을 해결할 수 있는 칸까지 있다기에 너무 놀랐다. 기차에서 내린 후 우리는 운동회 현장에 도착했다. 나는 농촌에서 태여나서 농촌학교에 다니다나니 성대한 운동대회나 검열식을 본적이 없다. 처음 수천명 학생들이 집체복장 차림으로 나란히 줄을 지어 검열하는 모습을 보니 꿈만 같았다. 맨 앞엔 대대장들이 교기를 들었고 그뒤로 항아리 만큼 큰 대고를 앞에 멘 녀학생들이 둥~둥~ 대고를 두드르며 주석단을 지나가고 그 다음으로는 나팔수와 관악대들이 띠띠따따를 불며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 새하얀 치마에 해군복 적삼을 바쳐입은 소고대가 소고를 두드리며 주석단 앞을 지나며 검열을 받았다. 나는 그저 눈이 휘둥글해지며 “야! 야!” 하며 황홀하기만 했다. 한편 검열대오 밖에 서있는 나 자신이 점점 초라해보이고 실망스러웠다. 선수로 뽑혀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까지 깜박 잊었다. 그처럼 멋지고 자랑스럽던 그들이 너무 부럽기만 했다.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느해인가 도문시제2소학교 ‘6.1’절 경축대회에서 나의 딸들이 고운옷차림에 소고를 치고 새장구를 치며 경축활동에 참가했을 때 나의 소원이 성취한 것처럼 생각하고 흥이나서 더 열심히 박수를 치고 남들앞에서 더 많은 자랑을 늘여놨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어제일 같지만 세월은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어 내 나이가 벌써 70대 중반이 되였다. 마음이 늙지 않아 북 치고 장구 치며 선수로서 우쭐거리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되여 로인활동실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였으니 믿어지지 않는다. 때마침 지난해 ‘8.15’ 로인절에 도문시 로간부국에서 로인들을 조직하여 운동대회를 열었다. 나는 물찬 제비마냥 새파란 적삼에 흰바지를 받쳐입고 머리엔 새하얀 모자까지 쓰고 오성붉은기를 흔들며 씩씩한 모습으로 주석대 앞을 활보하며 검열을 받았다. 멋지고 자랑스러우며 행복했던 그날의 모습을 나는 영원한 추억으로 간직하련다. / 최정금
31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2) 댓글:  조회:4665  추천:0  2020-05-01
“후날에 봅시다!” 1977년에 을 제정할 때 나는 동천궁(东川芎), 동당귀(东当归), 매발톱나무, 개암나무, 화서 등 중초약식물들의 약효, 세포조직해부, 분말현미경구조 등 부분을 담당하고 감정통과를 하여 해당 부문과 권위학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연변주약검소에서는 나를 약검소 임직원들과 다름이 없이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손형범은 연변주약검소의 요원으로서 ≪중국민족약지(中国民族药志)≫를 편찬할 때 적지 않은 부분의 편집을 담당했었다. 그 때 그는 동천궁, 동당귀의 조직해부도와 분말현미경구조 등 나의 자료들을 그대로 ≪중국민족약지≫에 편집해넣었는데 내가 이 약지편찬에서 큰 공을 세웠다며 ≪중국민족약지≫ 두권을 나한테 선물로 주었다. 그 후부터 나와 손형범은 더욱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1980년 10월 3일, 우리는 함께 중초약탐사로 룡정시 지신향 큰 쓰레산으로 가자고 약속하였다. 큰 쓰레산은 가파로운 벼랑이라는 뜻으로 작명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탄 택시가 지신향 원동골 산길을 따라 큰 쓰레산 기슭에 당도했을때는 오전 10시경이였다. 우리는 택시를 돌려보낸 후 가파로운 벼랑을 톺아오르기 시작했다. 산꼭대기에 오르니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다.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했지만 무성한 나무숲들이 꽉 들어찬 데서 우리는 길도 없는 산정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도시락으로 저녁을 대충 때운 우리는 풀밭을 담요로, 저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이불로 삼고 잠자리에 누웠다. 다행히도 내가 신문지 두장을 갖고 왔기에 한장은 깔고 다른 한장으로는 배를 가리웠다. 우리는 추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왕년 같으면 10월 3일이면 서리가 내렸을 수도 있었지만 마침 흐린 날씨 때문이라고 할가, 아니면 하늘이 우리를 측은히 생각했다고 할가 다행히도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날이 희붐히 밝아오더니 동녘하늘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님이 방긋 웃으며 솟아올랐다. 해님은 우리의 몸을 녹여주기라도 하려는듯 따스한 해 빛을 더 밝게 비춰주는 것이였다. 하늘의 덕분으로 우리는 감기에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지신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길가에서 여러가지 약초와 풀, 나무들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지친 줄도 모르고 또다시 식물조사에 나섰다. 지신에 도착하니 그동안 겪었던 모든 어려움들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푸짐한 점심상을 마주한 우리는 권커니 작커니 술을 마시면서 고진감래의 즐거움 속에 빠져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손씨가 나의 팔을 끌어당기며 기어코 연길로 가자고 청을 들었다. 그러자 나는 “난 오늘의 일을 절대 래일로 미루지 않습니다. 후날에 봅시다!”라고 말하며 손씨와 헤여진 후 곧바로 나의 연구실이 자리한 삼성촌으로 발길을 돌렸다. “후날에 봅시다!”라는 약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317    서로간 다름은 인정하고 틀림은 고치자. 댓글:  조회:4256  추천:0  2020-04-21
진정한 화합과 소통은 서로간의 다름은  인정하고 틀림은 고쳐면서 "큰면에서 공동한면을 찾고 작은면은 보류"( 求大同 存小义  )하면  이뤄진다.   당의 17기 6차 전원회의에서는 “백화만발 백가쟁명”을 조화로운 문화를 건설하고 인민을 교육하며 사회를 위해 복무하고 발전을 추진하는 역할로 발휘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론어』에 군자(君子)는 다른 사람과 화합하되 자기주장 없이 휩쓸리지 않고 소인배(小人輩)는 리익에 따라 뭉치되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을 “화이부동(和而不同)”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和)와 동(同)은 음식에 비춰 한 말로 다양한 재료와 물과 불이 어우러져 내는 맛을 ‘화’라고 하면 비슷한 재료만으로 만들어낸 맛 없는 국물을 ‘동’ 이라는 것으로 필자는 리해한다.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전설적인 성인 하우(夏禹)와 후직(后稷)의 이야기다. ‘ 하우는 백성이 물에 빠지면 자신이 치수(治水)를 잘못하여 물에 빠지게 했다고, 이는 그가 물에 빠진 백성의 립장에서 백성들의 분노까지  헤아린 것이며 후직은 굶주리는 백성이 생기면 자신이 일을 잘못하여 백성을 굶주리게 했다는 반성으로 백성의 굶주림을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한 추진력은 사회구성원들의 유기적인 협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러한 협력을 이끌어내는 건강한 피돌림이란 바로 소통(疏通)이다. 한국 서울영동농장 제 6 농장 오경배대표의 말이다. “틀리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은 부동한 개념으로 서로간 다름은 인정하면 되고 틀림은 고치면 됩니다.” “나와 김용복회장(서울영동농장)은 성격부터 음식 식성까지 완전히 다릅니다. 김회장은  대단한 애주가로 아낌없이 나눠주는 반면에 나는 술 한잔도 못하는 짠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23년간이나 서로 손을 잡고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둘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잘 맞는것 같습니다.” .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잘 맞는다”는 “동극(同極)은 서로 배척하고 타극(他極)은 서로 흡인”하는 음양학설에 맞는 말이다. 소금은 염소와 나트륨의 화합물로 생명체가 소금을 못 먹으면 죽지만 그렇다고 염소와 나트륨을 따로 각각 먹어도 중독되여 죽는다.  물은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로 산소는 불을 잘 붙게 하는 물질이고 수소는 불에 잘 타는 물질이지만 이 두 물질을 화합하면 불을 끄는 물이 된다.  자연계는 이렇게 괴상한 화확적현상과 놀라운 물리적현상으로 조화를 이룬다. 인간관계도 사람들 서로의 맞지 않는 의견들이 소통을 통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하고 옳바른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그런데 지난 “계급투쟁” “정치돌출” 때엔 사람들이 사회생존을 위해 틀에 짠 말과 남의 눈치에 따라 입발린 말을 해야 했고 정치와 권력자의 구미에 따라 “만장일치”와 “100%통과”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묵묵부답”까지 “다른 의견이 없으니 동의하는 것으로 통과한다”며 “만장일치”, 단결, 승리의 대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나중을 보면 “만장일치”와 “100% 통과(동의)”된 결의가 시달이 흐지부지했고 그 날 “공동히 책임진다“던 결의가 나중에 누구도 책임을 안 지는 “공동한 무책임”으로 흐지부지하게 되였다.  고대 유태사회의 “산헤드린”(판관들의 모임으로 최고 법원역할을 한 이스라엘의 재판기구)는 투표결과로 “만장일치”는 무효로 다음 날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가 다시 투표를 했다고 한다. 이네들은 언녕부터 신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일에 문제가 없이는 100%동의나 만장일치가 될수 없다는것으로 “부동한 의견이 없는 사회를 건강치 못한 사회”라고 했다.  공자는 “군자는 화합하되 자기 주장이 없이 휩쓸리지 않고 소인배는 자기 리익에 따라 뭉치되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며 군자의 화(和)는 각자의 견해, 주장을 하나로 잘 조화, 융합하는 것이고 소인배의 동(同)은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타인들과 같은 척 꾸미며 맹목적으로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으로 취급했다.   화합은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대화로 “대동소이”(大同小異)로 화합을 이룬다. 너와 나, 우리와 그들이 어울려 함께 사는 인간사회에서 서로간 소통이 안되고 화합의 묘미를 깨닫지 못하면 그 사회의 발전이 요원하다.  모두어 말하면 서로간의 다름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틀림은 고치면서 “대동소이”와 화합이 이뤄지게 된다. 오기활    
316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1) 댓글:  조회:4259  추천:0  2020-04-13
                     11. 송림 속에서 무명렬사를 만나다 나는 만년에 식물채집을 하면서 또 한번 잊을 수 없는 고행을 겪었다. 2006년 9월 10일, 나는 식물조사의 지점을 또 지신으로 정하였다. 그 때 나의 나이는 81세였다. 룡정에서 지신 성남까지는 그래도 택시를 불러서 멋지게 갔다. 다음부터는 도보였다. 식물조사라는 이 일은 자기의 ‘11호차’를 리용하지 않으면 안될때가 많았다. 떠날 때는 다소 걱정되기도 했지만 일단 현지에 도착하면 보고픈 초목들로 하여 흥에 겨웠고 종일 다녀도 피로한 감을 느끼지 못했다. 지신의 산은 온통 송림으로 덮였는데 이 때면 송이채집군들이 산을 메주밟듯 돌아다녀 수림 속 풀밭에 남은 그들의 발자국으로 하여 나는 외롭다는 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한창 식물채집에 도취되여 여념이 없는데 뜻밖에도 송림 속에서 ‘동북해방무명렬사비’를 발견하게 되였다. 주변에 잔디풀이 깔리고 우거진 나무숲 속에 가리워져있었기에 발견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다. 순간 마음이 퍼그나 아프고 괴로웠으며 그 정신적 위압에 눌려 불시에 내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따라서 혁명사업에 보귀한 생명을 바치고 고이 잠든 그들에 비하면 지금 나의 고생이 얼마나 보잘것없음을 느끼게 되였다. 나는 렬사비 앞에서 렬사들에게 묵묵히 머리 숙여 경의를 표했다. 연변은로혁명근거지로서 수많은 무명렬사들을 낳은 곳이기도 하다. 갑자기 젊었을 때 불렀던 가 떠올랐다. 가슴 우에 손을 얹고 쓰러진다 혁명군 가슴에서 흐르는 피 푸른 풀에 질벅해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 눈굽이 젖어들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신 죽는 법이 있다면 늦었지만 렬사들 대신 내가 죽고 렬사들이 나 대신 살아나 오늘의 행복을 누려보았으면…’ 혁명렬사들의 바람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남부럽잖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였을가? 이날 나의 머리 속에서는 혁명렬사비가 사라질 줄 몰랐고 “우리 나라 오성붉은기에 조선민족의 붉은 피가 슴배여있다.”고 한 모택동 주석의 말씀이 떠날 줄 몰랐다. 큰 쓰레산에 이르니 해가 서산에 기울었다. 나는 준비한 비닐박막으로 큰 바위에 의지해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정도의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지금은 맹수들도 거의 없게 되였고 또 이 나이를 먹으니 귀신도 두렵지 않았다. 단지 비바람의 습격만 두려울 뿐이였다. 9월의 밤인데도 다행히 밤날씨가 좋았기에 혼자몸이였지만 심산 속에서 안전하게 야영을 할 수 있었다. 날이 희붐히 밝아오자 나는 또 수림 속을 향해 걸어갔다. 남쪽 벼랑에 이르니 2~3m 높이의 기둥모양으로 된 석림(石林)이 한눈에 안겨왔다. 순간 천불지산(千佛指山)이 머리에 떠올랐다. 1985년 ≪룡정현지명지≫에 “하늘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왔으므로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였다. 천불지산 정상에 오르면 오봉산, 큰쓰레 노름바위 등 두만강의 이북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길림신문≫에서 본 룡정시 오정묵중의의 천불지산 관련 이야기이다. 천불지산은 룡정시 백금향, 삼합진, 지신진을 망라하여 총면적이 7만여헥타르에 달하는데 야생산삼과 송이버섯 등 진귀한 식물들이 많이 난다. 내가 부처님이 하사했다고 ‘천불지산’이라 불렸다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 그저 항간에서 구전되는 속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국가적인 차원에서 명명된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90년대 초반의 어느 날, 등산길에서 약재 캐는 로인을 만나 이 말 저 말을 나누던 끝에 산이름을 물었더니 천불지산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로인의 이야기를 허망한 전설로 마이동풍으로 흘러보냈는데 후날에 자료들을 찾아보니 그 전설 속의 인물이 실존인물(룡성스님)로서 그가 유명한 반일지사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천불지산에 비춰 “절승경개가 여기에 있으니…”란 시구가 떠올랐다. 나는 천불지산의 경관을 연길 모아산에 옮겨다 심는다면 얼마나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끌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아쉽도다! 지금은 관광객이 나 혼자뿐이니 천불지산이 독수공방 신세로구나!’ 이런 아쉬운 심정으로 천불지산을 등지고 한참을 걸으니 발목까지 빠지는 습지가 나타났는데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순군락(纯群落)을 이루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지신에서 삼합으로 넘어가는 접경지에 이르니 지신림장 일군들이 한창 북적이며 멋스러운 집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디서 오십니까?” “지신에서 오긴 했는데…” “무얼 하려고 오셨습니까?” “식물채집이지요.” “할아버지, 이곳은 식물채집이 금지된 구역이니 다시는 오지 마세요. 한번만 봐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오리다. 그런데 여기서 대명동(지금의 부유촌)까지 가려면 몇리를 더 걸어야 하오?” “70리를 더 가셔야 합니다.” 70리라는 말에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다른 한 젊은이가 나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사실은 대명동까지 70리가 안됩니다. 대략 17리 좌우 되는데 날이 저물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십시오.” 참 사람냄새가 나는 젊은이였다.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니 정말 고맙구려…” 나는 젊은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동남쪽으로 열린 골짜기를 향해 걸어갔다. 사실 내가 건설장의 일군들에게 “지신림장에서 한동안 일을 본 적이 있는 김상래를 아시오? 내가 바로 상래 아버지요…”라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도 그네들이 이 주책없는 늙은이에게 잠자리도 마련해주고 때시걱도 반반히 차려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페를 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숲속에서 나 홀로 야영을 하는 것이 더 편안할 것 같아 갈길을 재촉했다. 나는 남들에게 페를 끼치는 것을 참 싫어한다. 지금도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심지어 로친까지도 딸집에 보내고 혼자몸으로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계속 길을 걷다가 길가에서 엄청나게 큰 독활(独活)을 만나니 여기는 확실히 심산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산곡간을 걸으면서 곡간을 건너갔다가는 다시 건너오는 것을 몇번이나 반복했다. 짐작으로 25리는 잘되게 걸었는데도 17리 좌우 된다던 대명동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럴 즈음에 변덕스럽게도 “꽈르릉…” 하고 귀청을 때리는 듯한 우뢰소리가 울려 이 늙은이를 경악케 했다. 게다가 급하게 내물을 건느는 바람에 어지럼증으로 돌에 걸려 넘어져 온몸이 물참봉이 되였다. 더는 갈 수 없게 되였다. 사위가 어둑컴컴하여 좀처럼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낙비까지 억수로 퍼붓기 시작하여 나는 물가에서 꽤나 굵직한 버드나무를 꺾어 두 버드나무 사이에 걸쳐놓고 거기에 비닐박막으로 주머니모양의 하우스를 만든 후 그 속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하지만 말이 하우스지 앉지도 서지도 못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순간 숲속에서 만났던 혁명렬사들이 떠오르면서 이까짓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맞으며 보낸 이번 2박3일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야영이였다. 날이 밝자 바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산골을 따라 내려가니 하마양식장의 사나운 개가 길을 막아나섰다. 이 때 집주인이 나와서 돌아가는 길문을 열어주었다. 순간 넓은 시야에 삼합청천저수지가 안겨왔다. 다행히도 대명동(부유촌)에서 삼합진으로 가는 빈 택시를 만나 잡아타고 룡정에 있는 집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만년에 호기심에 의해 떠난 2박3일간의 식물조사에서 나는 찬비를 맞으면서 온갖 고생을 다 겪었지만 하느님의 덕분이였던지 감기에도 안 걸리고 성공적으로 조사를 끝마칠 수 있어 나에게는 대단한 축복이였다.
315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도 인생의 지혜다 댓글:  조회:4414  추천:0  2020-04-09
B녀는 전업주부로 안정적인 가정과 남편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친한 이웃이 찾아와서 그녀의 남편에게 다른 녀자가 있다는 소문을 알리니 “나는 너무 많이 알고 싶지 않아, 때로는 너무 알아서 상처를 입기도 하니까. 나는 내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해”라며 무엇을 더 알려고 하지 않기에 친한 이웃이 더는 아무 말도 못했다.    “모르는 게 약이다”, “무지가 축복이다” 는 속담이 있듯이 무엇을 알게 되면 그에 따른 고민과 걱정으로 괜한 병을 만들수 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듯 말이다.    로신은 평생 많은 사람들의 질투와 지탄을 받았지만 한 번도 자신의 립장을 해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바깥 세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립장을 고수한 채 계속하여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붓끝으로 령혼을 구원했다. 그에게는 붓끝이 무기였고 수술칼이였다.  로신은 붓끝의 힘을 믿었고 침묵하는 것이 해명하는 것보다 낫다며 애써 해명할 필요가 없는 리치를 언녕 알았던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랭대를 받거나 편견에 시달리면 억울한 나머지 어딘가에 한바탕 발산하고 싶은 생각을 하게된다. 이때 평가가 좋건 나쁘건 간에 그대로 신경을 쓰면 안된다. 화를 내는 것도 해명을 하는 것도 모두 소용이 없다.    “때론 활시위를 팽팽하게 하고 때론 느슨하게 하는 문무의 도를 하라”는 말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웃으며 비판을 듣고 “타인들이 지적한 결점이나 잘못에 문제가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에 힘쓰는 원칙”을 지킨다. 요컨대 칭찬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진심인지 거짓인지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자처하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앟는다.   로신은 바깥세계의 평가를 듣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태도로 대했다. 즉 바깥 세계의 평가를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자신의 길만을 묵묵히 걸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천부의 손가락질에 대하고 머리수그려 유자의 소가 되련다..."   이는  로신이 자신에 대한 모사이자 그의 강경한 의지였다..   때론 많이 생각하는 것이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많이 듣는 것이 안 들은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귀를 슬쩍 틀어막고 듣지 않는 것도 인생의 지혜다”고 한다.   귀를 슬쩍 막는 것은 만사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뭐라고 하건 나는 내가 갈 길을 간다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다. 좋은 의견과 건의는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첨이나 무시의 말은 마이동풍으로 듣고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바깥 세계의 평가가 어떻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시종일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할뿐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앟다.   오기활
31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0) 댓글:  조회:4391  추천:2  2020-04-01
10. 비 내리는 야밤에 도적으로 몰려 룡정현 삼합에서 지신으로 이어지는 오랑캐령은 나에게 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오랑캐령은 백여년전 할아버지가 아홉 식솔을 거느리고 조선 명천에서 연변으로 이주해올 때 피눈물을 흘리며 넘던 산마루로서 그 때 우리는 첫 인연을 맺게 되였다. 오랑캐령에는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산봉우리가 많고 락락장송—적송(赤松)이 우거지고 철따라 피는 철꽃들이 많아 대자연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룡정에서 가까운 이 명산은 나에게 식물학을 배우게끔 꿈을 키워준 ‘도사’이고 ‘은인’이며 나를 식물학자로 배육한 종자이며 옥토이다. 1976년 6월 3일, 채전의 도마도가 불그스레 익기 시작한 여름철에 나는 삼합행 뻐스를 타고 가다가 중도인 오랑캐령도로관리소 부근에서 내렸다. 그 때는 사진기도 없어 빈손에 두 눈만 챙기고 산야를 두루 누비며 식물고찰을 하던 시기였다. 때는 오전 아홉시 반이였다. 산골짜기에 들어서니 천남성이요, 등칡이요, 노랑송이풀이요 하는 보기 드문 식물들이 눈에 띄였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얼결에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한시가 지났다. 이제 30분후이면 룡정으로 돌아가는 막뻐스가 여기를 지나가는 판이다. 그런데도 나는 식물채집에 열중하다보니 룡정으로 가는 뻐스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암, 될 대로 되라지. 오늘 밤으로 룡정에 도착하면 되니까 마음 놓고 식물을 관찰하고 표본을 채집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뻐스를 놓친 나는 오후 2시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나무숲을 헤치며 식물채집을 계속하였다. 날이 어슬어슬 어두워져서야 나는 천불지산으로 가는 남북방향의 자동차길을 걸어 성남촌을 지나 지신진으로 향하였다. 뒤잔등에 비닐봉지로 정히 싸서 넣은 묵직한 식물표본배낭을 메고 걸어가는데 반디불들이 사방에서 켜졌다 꺼졌다 하며 숨박곡질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황홀한 반디불세계를 나는 처음 걸어보았다. 언제 또 이렇게 황홀한 반디불세계를 걸어볼 수 있겠는가! 순간 힘듦도 지침도 배고픔도 어느새 싹 가셔지는 것만 같았다. 지신을 지나니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동서로 이어지는 승지촌의 외골목이 지친 나에게는 끝없이 멀고 멀어보였다. ‘승지촌에 들려 룡정현당교에서 학습중인 상욱(둘째아들)이를 찾아갈가…지금 쯤은 한창 꿈속에 빠져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인차 마음을 고쳐먹었다. 야밤중에 옷이 다 젖고 또 지친 몸을 끌며 아들을 찾아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더라도 속 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았다. 순간 무겁던 발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고 무겁던 등짐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재바위골 어구도 지나고 신화촌도 룡정 서쪽 어구에 자리한 양계장도 지났다. 룡정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다리쉼을 하려고 길옆 채소밭머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후 채소밭을 지키던 한족청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오더니 다짜고짜로 한밤중에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느냐며 등뒤에 멘 짐을 수색하겠다는 것이였다. 나는 나의 짐에는 귀중한 것이 들어있으니 아무에게나 보여줄수 없다면서 생고집을 부렸다.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은 내가 도마도 밭머리에 앉아있으니 등에 진 것이 도마도라고 여겼던 것이다. 시원히 보여주었으면 쉽게 끝날 것을 내가 막무가내로 그들을 뿌리치고 길을 떠남으로써 일이 커졌다. 다행히 그들이 거의 합성리까지 따라오다가 지쳤는지 포기하고 돌아갔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번했다. 내가 새벽 2시경에야 집에 도착하니 집식구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의 처사가 너무 경솔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식물채집을 하면서 집식구들에게 많은 심려를 끼쳤다. 나는 이 글로 집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함과 동시에 집식구들이 나의 사업과 흥취에 대해 리해하고 지지해준 데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313    20 세기 말에 “챵비” 당한 원고 유감(遗感) 댓글:  조회:4520  추천:0  2020-03-25
기자들의 직업용어로 누가 쓴 원고가 발표 못 되면 그 원고가 “챵비”(抢毙) 당했다고 한다. 즉 “총살”당했다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말에 필자는 “연변일보” 기자로 원고를 “챵비” 당한 불미한 력사가 있었다.  비록  십 수년의 기자생애에서 단 한번 “챵비”를 당했건만 너무나도 “억울”해 지금까지도 그 원고를 잊을 수 없어 “챵비”를 당한 원고 유감을 이 글로 올린다.   이하는 “챵비”를 당한 원고와 “챵비”된 원인이다.   도문시 시장에 왜 돼지고기가 없는가?         지난 7월 11일부터 도문시 시내 시장매대에서 돼지고기를 볼 수 없다. 원인은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집체파시( 集体罢市)를 한데서.  이에 기자는  16일부터 몇 일간 여러 부문과 해당책임자들을 찾아 다니며 이번 사건을 조사하였다.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의 불만   1, 돼지고기경영업주들에 따르면 지금 잡은 돼지 한 마리당에 업주들이 내야하는 세금과 비용이 공상관리비(시장관리비) 20원(향상시장은 25원), 도살세 10원, 검역비 16원(실제검역비는 11원, 농업발전기금 6원), 도살비 15원, 돼지교역비 15원이다.  이밖에 위생비 5원, 치안비 4ㅡ5원, 국가세금 360원, 지방세금 40원, 매대비 90ㅡ 130원으로 매달 지출비용이 3000원이나 된다.   2, 관리가 혼란하다 2년래 세금과 비용을 낸후 령수증과 기타 표증을 발급받지 못했다. 지난해부터 물가조절기금으로 매년 20원을 내던 것을 올해는 매월 20원씩 냈다. 그리고 무슨 강습비라며 20원씩 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강습도 받지 못했다. 특히 해당부문에서 대리인을 내세워 검역을 하거나 수금을 하기에 믿음성이 없고 표증이 없기에 돈을 내고도 무슨 돈을 냈는지 모른다.   3,  불합리하다. 올해 7월부터 시공상행정관리국에서 산돼지(生猪)교역비로 마리당 15원씩 받는데 이 교역비가 이번 파시의 주요한 불씨로 되였다.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의 말이다.   ㅡ 시장관리비라며 잡은 돼지 마리당 20원 (혹은 25원)을 받아가는데 또  “돼지교역비”란 무었인가? 이는 시장관리비를 2중으로 내는 것이 아닌가?  “돼지교역비”는 산돼지를 파는 사양호와 돼지를 사서 잡아파는 도살호가 공동분담 해야 한다. 알아본데 따르면 다른 현과 시에는 “돼지교역비”가 없다.  그런데 도문시공상행정관리국에서는 “길림성 도시농촌무역시장관리조례” 제 23조에 따라 “돼지는 농부산물에 속하므로 교역액의 2%로 15원식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접수할 수 없다.       관계부문의 답복과 해석   1, 시축산국:   우리는 해당 규정에 따라 도살 전과 후의 검역비로 마리당 11원을 받고 시 재정국의 위탁을 받고 농업발전기금을 마리당 6원씩 받았다.  지난 6월 말까지 대리인을 내세워 검역과 수금을 하다가 표증관리가 혼란하고 검역의 질을 보증하기 어려워 7월부터 우리가 직접 검역하고 수금을 한다.   2, 시 물가국:   우리는 1995년 3월에 도살비를 돼지 마리당  15원으로 정했다. 그리고 시정부 4호문건에 따라 공상관리비의 20% 표준으로 부식물가격조절기금을 매월 마리당 5원씩 받았다. 지난해까지 시공상국에 위탁하여 수금을 했는데 올해는 아직 수금을 안했다.  공상관리비수금표준은 시물가국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치안비로 따로 비준한 적이 없다.   3, 시지방세무국:   해당 규정에 따라 돼지도살세로 돼지 마리당 10원씩 받는다. 우리가 타부분에 위탁하여 수금하다보니 수금한 표중이 없는 문제를 몰랐다.  부가가치세(增值税)로 국가세무국에서 정한 월 400원 중에서 우리가 10%로 40원을 받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월소득이 850원이상이면 5% 이상의 소득세를 내야 한다는 징수정책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4, 시공상행정관리국:   우리는 그들이 “파시” 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원인은 그들이 아직까지 자기들의 단체조직인 개체근로자협회만 찾았을 뿐 시정부나 우리 국을 직접 찾지 않았고 자기들도 “휴식”을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일이 발생한 주요원인으로 “돼지교역비”를 받는 문제라고 인정한다. 일전에 우리는 시당위, 시정부, 시인대 책임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다음의 견해를 조치를 통일하였다. ㄱ, 시공상국에서 정상적인 도경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그들에게 정면교육과 정면 인도를 진행해야 한다. ㄴ, 수금근거가 충분해야 한다. 공상국에서는 20일까지를 “선전교육일’로 정하고 그사이에 “돼지교역비”를 잠시 받지 않고 7월 8일부터 돼지고기경영업주들 속에 내려가 선전교양을 하기로 했는데 11일부터 이 일이 발생하였다. 우리는 1993년 7월에 통과한 “길림성 도시농촌무역시장관리조례” 제 23조에 밝힌 “무릇 무역시장에서 상품을 경영하는 단위와 개인은 모두 공상행정관리부문에 시장관리비를 바쳐야 한다. 농부산물, 경공업품과 기타상품의 수금비률은 교역액의 2%다”는 규정에 따라 돼지는 농부산물에 속하기에  교역액을 추산하여 마리당15원(2%)씩 정했다.   우리가 지금 수금하는 시장관리비 20원(25원)은 돼지고기교역비고 15원은 산돼지 교역비다 우리는 관리인원이 부족한데서 돼지장사군들을 따라 다니지 못하고 또 돼지임자를 찾을 수 없는 정황에서 돼지를 사는 도살호에서 “돼지교역비”를 받기로 하였다.   우리는 1993년 7월에 통과된 “조례”중 집행하지 못했던 규정을 지금 보충집행하는 것이다.   5, 시인대:   일전에 그들의 집체상소를 접대하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대는 이런 문제를 직접처리하거나 답복해주는 기관이 아님을 해석한후 그들의 의견을 듣고 그 정황을 해당부문과 책임자들에게 반영하고 조사사업을 진행하였고 다음의 인식을 통일하였다.   1, 개체공상호에 대한 관리를 가강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적극 부추켜야 한다. 지금은 세금보다 관리비가 높고 수금을 중시하고 관리를 홀시하는 현상이 확실히 존재한다.   2, 돼지를 팔고 사는 무형시장(류동시장)에서 세금과 비용을 납부함에서 생산자가 주체로 되여야 할 것이다.  “돼지교역비”를 구경 누가, 어떻게, 어떤 표준으로 내야 하는가는 문제를 심입하여 연구하고 적절한 처리와 조치가 필요하다.  공상행정관리부문에서는 정면으로 도살업자들을 인도하여 그들이 능히 리해하고 접수할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위탁문건이 없고 공증을 거친 위탁서가 없이 위탁인을 내세워 수금하는 것은 비법적이다. 위탁서가 없고 확실한 표증이 없이 수금을 할 때 도살호와 돼지고기경영업주들에게 수금을 거부할 귄리가 있다.   상술한 조사과정에서 기자는 해당집법부문에서 돼기고기경영업주(개체공상호)들에 대한 감독, 관리하는 사업에서 부당한 수금, 어수선한 표증관리, 그리고 경영업주들이 법으로 자기들의 합법적궐리를 보호 받는  법제의식 에 문제가 존재함을 발견하였다. 오죽하면 시공상행정관리국 법제반공실의 책임자가 기자에게 “지금 개체공상호들이 납부하는 부당한 금액이 호당 년평균액이 500원이 될것이다” 며 “나는 정년퇴직후 개체공상호의 법률고문이 되여 개체공상호들의 합법적인 권리와 리익을 보호하겠다”고 하겠는가.  기자는 본 안건의 해결관건은 개체공상업주와 해당관리감독부문에서  “길림성 도시농촌 무격시장관리조례” 제 23조를 어떻게 정확히 리해하고 착실하게 집행하는 가에 달렸다고 본다.  각급 해당부문에서는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제기한 많은 물음과 제의에 가급적으로 확실한 답복을 주어 그들의 “조례”집행 의무와 자각성을 제고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조치라고 본다.   본사기자 오기활     오늘에 부언:  필자가 민생문제해결로 당년에 며칠간이나 발품을 팔며 애서 쓴 이 원고가 림장춘부주필의 직접 편집하에 “연변일보” 1면 5단행으로 발고하기로 했는데 [姜:反面文章正面做,意在正面引导。学好,用好意“条例]란 회시(批示)에 따라 “챵비”되였다니 姜이 무슨 근거로 이 원고가 “반면문장”인지 리해할수가 없었다.   혹시 그때 姜의 생각으로  이 원고가 발표되면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더 많은 “알권리”를 찾고저 신나게 해당부문에 찾아다니며  “사단을 피울가봐” 두려워서?        
31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9) 댓글:  조회:4386  추천:0  2020-03-17
                                    9. 버섯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토배기 화실(画室) 버섯이 제일 많이 돋는 시기는 여름방학 때이다. 이에 비춰 나는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버섯그림을 그리기에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화실이 없었다. 생각 끝에 룡정 시교에 자리한 광신 5대의 초가 헛간을 화실로 꾸미기로 하였다. 이 헛간은 몇년전에 자식들을 동원하여 흙벽돌로 지은 창고로서 부자간의 합작품이다. 나는 비를 맞으면 안될 짐들을 한구석에 쌓아놓고 공간에 탁자를 놓았더니 화실로는 꽤 훌륭했다. 나는 도화지에 버섯을 스케치한 후 수채화염료로 색칠을 하였더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번이나 그리고는 버리고 또 다시 그리고는 버렸지만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그림그리기지만 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가 봐.’ 때로는 이런 원망들이 불쑥 튀여나왔지만 절대 포기할 줄을 모르는 나는 버렸던 그림들을 다시 주어서는 수정하고 색칠을 더했더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수정을 거듭한 결과 그림은 많은 진보를 가져왔다. 적색법(积色法)—이것이 바로 비결이였다. 나는 시작은 연하고 희미하게, 색도(色度)는 묽고 안개처럼 보일락말락하게 한 다음 점점 더 진하게 덧그리는 것이 바로 버섯 회화기법의 핵심이고 기본이며 비법임을 끝내 밝혀냈다. 이는 모두 락심하고 자포자기하던 데로부터 공자가 말했던 중용의 마음가짐, 심평기화(心平气和)의 마음가짐으로 한보, 한보 발전하면서 이뤄낸 성과였다. 따라서 나는 그림에 신심을 가질 수 있었고 제법 그럴듯한 명작품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지루한 시간에 끝없이 이어진 노력으로 한장, 한장의 버섯그림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그에 따른 명성까지 얻게 되여 나중에는 지방 신문, 잡지는 물론이고 국가급인 ≪민족화보(民族画报)≫에까지 나의 버섯그림 명작품들이 발표되였다. “당신의 연구성과는 대단합니다!” 1984년 8월 10일,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내몽골 훅호트시에서 ‘동북3성1구식물학학술보고대회(东北3省1区植物学学术报告大会)’가 열렸다. 이 대회는 중국 동북지구의 저명한 식물학자들이 운집한 대회였다. 이번 대회에는 흑룡강성에서 온 세명의 조선족대표들이 있었는데 우리 조선족들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연변의학원의 류영진(柳永镇) 교수와 동행한 데서 마음이 든든했다. 그 때 나는 나이가 57세였고 길림성식물학회 리사였다. 나는 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하였다. 나는 보고에서 송이버섯의 생태에 관하여 삼합진의 반생식물(伴生植物)을 보다 상세히 소개하였고 나의 송이버섯그림을 비롯한 다섯종의 버섯그림도 회람(回览)케 하였다. 이 대회가 끝나자 대회의 집행자였던 주이량(周以良) 교수[원 동북림학원 (东北林学院)의 부원장, 동북 식물분류의 최고권위]가 나를 찾아와 “당신의 연구성과는 대단합니다.”라고 하며 나에게 과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이량 교수는 버섯연구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분으로서 나의 버섯연구와 나의 버섯그림을 아주 높게 평가하였다. 주이량 교수는 버섯연구에 조예가 깊다보니 나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되였고 나의 버섯그림 역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였다. “무엇이든 알려고 애를 써야 숨어있는 비밀을 보아낼 수 있고 소리 없는 곳에서도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학교시절에 어문을 가르쳤던 최영수(崔营洙)선생님이 늘 하시던 이 말씀이 천만번 지당함을 다시한번 감수했다. “아주 목표 있구려…” 나는 동북사범대학 리여광(李茹光) 교수가 길림성을 놓고 말하면 버섯연구에서 가장 권위적인 인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우리 연변농학원의 리원겸, 함홍석 등 로교수님들과 같이 학술분야에서 활약했으니깐. 나는 이도백하에서 둬번 리여광 교수님을 뵌 적이 있는지라 어느 한번 출장길에 동북사범대학 리여광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표본서랍에 눈이 간 나는 교수님에게 물었다. “제가 교수님의 표본서랍을 열어봐도 괜찮을가요?” “그 표본들은 거의다 ‘떡달’버섯종류이니 부서질 념려가 없소. 그러니 마음대로 꺼내보아도 되오. 근래에는 이런 표본들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오히려 내 쪽에서 고맙구려…” 리교수님은 한동네의 ‘아바이’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었는데 나는 이렇게 좋은 분을 늦게 찾아뵌 것이 후회되였다. 나는 호기심이 가는 대로 버섯표본을 꺼내들고 보았다. 과거에 내가 표본감정을 했던 그 버섯과 똑같은 것이였다. “하, 이 사람아! 자네가 서랍에서 꺼낸 버섯표본을 보니 아주 목표 있구려.” “자네도 나처럼 버섯을 연구해보았는가?” “연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저 흥취에 끌려서 야외로 다니면서 버섯도 채집하고 그림도 더러 그려보았습니다.” 리교수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 나는 좀더 일찍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련만. 나는 이미 버섯연구에서 손을 떼고 만년을 보내고 있지만 그 때 리교수님을 늦게 찾아간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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