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http://www.zoglo.net/blog/wujihuo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칼럼/단상/수필

전체 [ 520 ]

320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 (련재13) 댓글:  조회:3022  추천:0  2020-05-10
후반전에“멋진 꼴!”을 인생은 2모작이다. 인생을 100으로, 50은 전반생, 50후는 여생이 아닌 후반생이다. 후반생은 전반생에서 저축해 온 것을 토대로 살아간다. 인생 60을 시작으로 후반전이다. 축구를 보면 멋진 꼴이 거의 모두 후반전에 난다. 인생사도 마찬가지로 후반생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그랜드모스는 71세에 그림을 시작했고 갈릴레오는 74세에 마지막 저서를 출판했으며 파블로카 찰스는 85세에 백악관에서 연주를 했고 버나드쇼는 96세때 가지를 치기 위해 나무에 올랐다가 다리를 상했다. 지능과 창의력은 다르다고 한다.  지능은 20쯤에 가장 완숙하고 창의력은 30후에 서서히 발달하다가 70부터 또 다시 상승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명가 1,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최고 창의력의 평균년령이 74세로 나타났다. 최종승부는 후반전이다. 후반전에 성공한 사람이진짜 성공한 사람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수자에 불과 하다. 나는 후반전에 승부를 걸고 더 멋진 꼴을 넣었다. 첫 “꼴”은 중조변경에서 1987년에 내가 정령퇴직을 하니1990년에 “중화인민공화국 도문동식물검역국”에서 나를 “延辺中朝辺境檢疫性杂草, 田園杂草種類及其分布調査硏究”사업 기술고문으로 초빙되였다. 하여 우리는 조사팀을 조직하여1992년 9월 20일까지 조사사업을 마무리를 하고 다음 보고문건을 작성하였다. 1, 項目鑑定大钢 2, 延辺中朝辺境檢役性杂草田園杂草種類及分布調査硏究工作報告 3, 調査点分布圖(地圖) 4, 延辺中朝辺境主要檢疫性杂草, 田園杂草名錄 5, 延辺中朝辺境田園杂草分區圖 6, 延辺中朝辺境田園杂草檢索表 그때 우리가 조사구역내에서 발견한 잡초가 모두 71科에 256属, 504種이였다. 그 중에는 검역성잡초 1종, 水田잡초 132종, 旱田잡초 169종, 果園잡초 337종, 熟地잡초 137종이 포함된다. 성해당부문에서1992년 9월 27일에 감정회를 소집하였는데 길림성정부에서 파견한 심양농학원식물보호전업의 백교수가 감정위원회 주임을, 장교수가 부주임을, 冠廣淸, 金洙哲 등이 위원으로 감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감정회는 만장일치로 우리가 작성한 보고문을 통과하고 성정부에 보고하니 성정부 해당부문에서 제때에 본 감정을 통과하였다. 이는 내가 후반전에 중조변경에서 넣은 첫번째 멋진 “꼴”이였다.     두 번째 멋진 “꼴”은  서울에서 1994년 8월 한국 “아카데마서적”에서 金洙哲, 安相得, 李相來의 공저로 세상 처음으로 “原色白頭山資源植物”을 출판하였다 “장백산은 “식물의 宝庫”로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장백산은 세상에서 만병통치의 灵葯으로 불리는 산삼의 분포 중심지역이고 잣나무, 오리나무더부살이, 참돌꽃 등 량온대의 유용자뭔식물의 분포지다.”“중, 한 두 나라전문가들이 ‘우리가 물려받은 자연은 그대로 보존하고 보호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며 유용한 식물은 순화, 번식, 개발하여 멸종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는 취지로 팀을무어 2년간 백두산의 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한 기초상에서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 등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배우는 각계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백두산 자원식물에 대한 좋은 지침서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원색백두산자원식물”을 집필하였다” 이는 “원색백두산자원식물”의 “머리말”의 한 단락이다   (부록); “원색 백두산자원식물”속의 뒷 이야기 ㅡ 나의 맏아들 相术이는 국비로 일본동경에서 전기공학연수를 마치고 돌아 올 때 나에게 니컨패카메라를 선물하였다. 나는 정년퇴직을 하자3ㅡ4년간 이 사진기로 백두산의 700여종의 식물을 선택적으로 찍고나서“백두산자원식물도감”을 출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원고를 가지고 연변인민출판사에가니 출판사에서 아직까지 원색사진 출판이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동양자원식물학회 회장으로 지내는 리상래박사와 강원도 춘천대학의 안상득박사가 서울에서 출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중, 한관계래왕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우리 농학원의 김병진교수가 친히 관계부문을 찾아 다니며 나의 원고의 출국수속을 끝내고 원고를 우편으로 안상득박사에게부쳐 보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갈려니 근친의 초청이 없이는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리상래박사가 나서 동분서주하면서 끝내 나의 출국수속을 마무리를 하였다.. 나는 1994년 1월에 중국 천진에서 비행기에 올라 상해를 경과하여 서울 김포공항에 내리니 리상래박사와 안상득박사가 마중을 나와 나를 서울대학 근처인 관악구의 어느 하숙집으로 안내하였다. ㅡ 나는 하숙집에서 독방을 차지하였다.리상래회장이 이부자리를, 안상득박사가 채색텔레비죤을 마련해 주었다. 하숙비가 한달에 한화로 40만(인민페로 4000원)이라고 하는데 리상래회장이 전담하였다. 나는 한 달을 기한하고 원고를 추고하며 내가 찍은 식물사진을 정리하면서 편집사업에 전념하였다. ㅡ 나는 밤 늦게까지 원고와 씨름을 하기에 아침늦게까지 잠을 자야 했지만 아침식사가 6시 반으로 제정되여 그때 너무나도 힘 들었다. 나의 방에 드나드는 사람은 단 초등학교를 다니는 6, 7살이 되는 계집애로 이름이  李宝美다. “아저씨 아침진지 드세요” 보미가 나를 부르면 어머니가 “할아버지라고 불어야지 아저씨라면 버릇이 없는 짓이야” 라고 딸애를 가르쳤다. 어느날 보미가 나에게 자기가 그렸다는 그림책을 들고와 자랑을 했다. 구레용으로 지면을 꽉 채운 그림은 구도가 좋았고 잘 그렸다. 내가 참 잘 그렸다니 보미는 국제미술경기에서 우수상을 따냈다며 은질컵까지 보여주었다. ㅡ 대개 열흘간을 지나니 하숙집 아줌마가 “이 방에 손님을 한 분 더 모실려니 될가요?”라고 묻기에 나는 대뜸 된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崔進旭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방한구석에 조립식 옷 걸이를 설치하더니 대뜸 10여벌의 옷을 상품처럼 진열 하였다. 수일이 지나자 그는 나와 허물이 없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기로 오기 전에는 어떤 독신녀와 동거를 하다가 갈라 졌다며 자기가 쓰던 물건을 그녀에게 다 주고 와도 아까운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최씨는 부산에 처가 있는데 자기가 늙었다고 곁에 가면 발길로 차내면서 싫어 하니까 새로운 애정을 찾으려고 서울에 왔다며 자기가 지금 어느 과자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는데 월급을 많이 받는다면서 서울서 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부산에 있는 처자들에게 돈을 붙이지 않아도 그들이 아무 문제없이 살아 간다며 아무런 주저도 없이 시원스럽게 말을 했다. 최씨는 기술이 팔방이라며 어선에서 큰 고기를 낚고 찍은 멋진 사진까지 보여주며 자기 자랑을 하였다. ㅡ하숙집 옆방에는 또 장기적으로 하숙하는 郑昌吉이라는 50대 남자가 있었는데 정씨는 나와 그냥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기에 서로간 허물없이 대화하는 사이로 되였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정씨는 자기가 다니는 奉天基督敎에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신자가 아니기에 갈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돌려 서울의 世波도 알겸 사회생활도 체험 할 겸 한번 다녀 오는 것도 랑패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따라 나섰다. 교회의 마당에 이르니 일부 신자들이 길 좌우에 줄을 서서 환영하였다. 어떤 신자들은 나의 손을 잡으면서 “무엇을 도와 드릴가요?”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례배당입구도 그 모양이 였다. 례배당에 들어가 책상을 마주하고 앉으니 곁에 있는 신자들이 나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책상 안에는 성경책이 있었고 례배당 벽 좌우에서 악사들이 줄지어서 찬송가를 불렀다. 례배가 끝날 무렵 돈 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복무원이 사람들을 빠짐없이 찾아 다녔다. 정씨가 “내가 당신의 몫까지 희사할 테니 념려 마십시요”하면서 나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례배가 끝나고 마당으로 나오니 역시 사람들이 길 량 옆에 줄지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나는 이날 교회에 다녀온 것 역시 인생을 연구하고 교인을 알고 그네들과 단결할 줄 아는 과당이였다고 생각하였다. ㅡ 근 40여 일간의 노력으로 편집을 끝내니. 어느날 리상래회장이 와서 “그간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유활동 시간입니다. 서울부근에 경치 좋은 곳이 많으니 구경을 떠납시다”고 하였다. 나는 평시에 생각했던 요구를 서슴지 않고(렴치없이) 제기 하였다. “나는 서울 구경보다도 우리 宗祖와 先祖들의 聖地를 參拜하고 싶습니다. 경주에 있는 中始祖金陽의 墓所,, 경상남도 固城에 있는 宗祖墓域, 전북 高敞의 斌吉公墓所를 참배하고 싶습니다. 이는 나의 평생 소원입니다.” 리상래회장은 나의 모든 요구를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만족시켜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고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제기 했구나는 생각으로 낯이 뜨거워 난다. ㅡ 2010 년 어느 여름에 내가 조양천 삼성촌에서 텔레비를 보는데 미국에서 진행된 국제급 골프경기에서 李宝美가 일등으로 “우승컵”을 수여 받는 장면을 보았다.   宝美란 이름이 하도 인상이 깊었기에 내가 나이를 따지며 계산해 보니까 확실히 내가 서울하숙집에서 함께 지낸 宝美가 옳았다. “보미만세!” 나는 혼자서 두손들어 보미만세를 부르고 “이 세상이 너를 위해 태여 났구나!”며 혀를 끌끌 찼다. 보미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부럼이 없이 이름값을 하면서 잘 살기를 기원한다.   세번째 멋진“꼴”은 연변대학에서 2004년에 “장백산 몇가지 항암식물 및 그의 약학연구 평가”란 제목으로 내가 쓴 영문론문이 “연변대학학보”에 실려 2등 우수론문으로 평선되였다. 2006년 4월2일에 연변대학 학보편집부에서 성대한 우수론문수상파티를 조직하였다.    내가 후반전에 넣은 “꼴”은2007년 아세아최고학부로 불리는 일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백두산식물세미나”에서 내가 “장백산의 야생식물”을 독강(獨講)등으로 계속하여 이어진다.  
319    현 운동대회에 참가하던 그날 댓글:  조회:3931  추천:0  2020-05-02
올해 내 나이 76살, 지금까지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세가지를 잊을 수 없다. 하나는 11살에 왕청현소학생운동대회 육상 선수로 선발된 것이다. 두번째는 처음 기차를 타 본 일이며 세번째는 지난해 75세 나이에 시급 로인운동대회에서 오성붉은기를 손에 들고 주석대 앞을 지나며 검열을 받은 것이다. 소학생 때 달리기를 잘한 나는 학급 1등은 내몫이였다. 1956년 ‘6.1’절에는 왕청현운동대회 100메터 달리기경기에서 2등을 따내 상품으로 필기장과 연필을 타기도 했다.                                      지난해 로인절 활동에 참가한 필자(앞줄 오른쪽으로부터 네번째) 당년에 석현진(왕청현 제7구) 대표로 선발된 륙상 선수로 진내 몇개 소학교에서 선발된 선수들과 함께 석현에 모여 집체훈련을 받고 ‘6.1’ 절에 왕청현소학생운동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11살이였다. 처음 기차를 타 보는 기쁨으로 련며칠 밤잠을 설치며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였다. 우리 마을(달라자) 바로 앞은 곡수 기차역이기에 우리는 밤낮이 따로 없이 분주히 오가는 기차들을 다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정작 운동선수로 선발되여 기차를 타고 왕청에 간다고 한 다음부터는 지나가는 기차를 볼 때마다 언제면 저 기차에 앉아 볼가는 생각만 했다. 어떻게 기차에 올라가는지, 기차 안엔 전기불이 있는지, 기차에서 대소변을 보려면 어떻게 하는지… 별의별 오만가지 의문들이 다 있었다. 생각 할수록 마음이 급해났다. 그때 기차라는 말만 들어도 걱정스러웠는 데 아마 우리 할아버지께서 하신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60대 중반이였는 데 그때까지 기차를 타 보지 못했다면서 한번은 맹랑하게도 발길이 몇걸음 늦어서 눈앞에서 기차를 놓쳐버렸다 했다. 그때 나보다 한살 아래인 외사촌 남동생이 겨울방학에 왕청에서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 갈 때 할아버지께서 손자를 기차에 태워 보내려고 곡수역까지 데리고 갔다. 마을 앞 도문북강(해란강과 가야하가 곡수에서 합쳐서 도문북강을 이룸)의 얼음강판이 너무나 미끄러워서 조심스레 걷다보니 그만 시간을 지체해서 곡수역 대합실에 금방 들어서자 기차는 고동을 치며 떠나려 했다. 이에 너무나도 다급했던 할아버지는 허둥지둥 대합실을 나서 문앞에서 두손을 마구 흔들며 “여보! 여보! 조금만 기다려 주오, 여기 왕청 갈 얼나(어린애)가 있소!” 하고 높은 소리로 기차를 불렀단다. 하지만 무정한 기차는 들었는둥 말았는둥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떠나더니 점점 더 빨리 달아나더라는 것이였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이 나의 귀전에서 맴돌며 나의 마음이 한없이 불안했다. 드디여 그날이 왔다. 우리 선수들은 줄을 서서 석현역 플래트홈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기쁨과 설레임과 함께 나의 마음은 행동이 늦으면 기차를 타지 못할가봐 초조함으로 가슴이 풍덩풍덩 뛰였다. 순간 저 멀리서 “뿡!ㅡ” 하는 기적소리가 울리며 달려오던 기차가 어느덧 “칙~푹~” 하면서 눈앞에 와 섰다. 뒤따라 멋진 철도복을 입은 렬차원들이 기차문을 쫙 열더니 손님들이 하나하나씩 층계를 밟고 내리자 우리 일행은 우쭐우쭐 층계를 밟고 기차에 올랐다. 그날 선수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나 같은 촌닭들이 많아서인지 우리 일행은 안으로 밀고 들어갈 념은 안하고 문어구에 콩나물마냥 빼곡히 붙어서서 밀치락닥치락 하면서 다음 역(삼도구)까지 서서 갔다. 그래도 기차를 타고 간다는 기쁨과 자부심에 둥둥 떠 있었다. 삼도구역에서 승객들이 줄줄이 내리더니 렬차원은 한무리나 되는 우리들을 떠밀며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나는 뜻밖에도 운 좋게 빈자리가 있어서 자리에 앉아 가게 되였다. 두리번두리번 기차안을 살펴보니 천장에는 전기불이 켜져있고 유리창문으로 바깥세상 구경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서인지 누가 말하는지 “다음 역은 신흥역이니 내리실 분들은 미리 준비하여주십시오”라는 말까지 들렸고 대소변을 해결할 수 있는 칸까지 있다기에 너무 놀랐다. 기차에서 내린 후 우리는 운동회 현장에 도착했다. 나는 농촌에서 태여나서 농촌학교에 다니다나니 성대한 운동대회나 검열식을 본적이 없다. 처음 수천명 학생들이 집체복장 차림으로 나란히 줄을 지어 검열하는 모습을 보니 꿈만 같았다. 맨 앞엔 대대장들이 교기를 들었고 그뒤로 항아리 만큼 큰 대고를 앞에 멘 녀학생들이 둥~둥~ 대고를 두드르며 주석단을 지나가고 그 다음으로는 나팔수와 관악대들이 띠띠따따를 불며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 새하얀 치마에 해군복 적삼을 바쳐입은 소고대가 소고를 두드리며 주석단 앞을 지나며 검열을 받았다. 나는 그저 눈이 휘둥글해지며 “야! 야!” 하며 황홀하기만 했다. 한편 검열대오 밖에 서있는 나 자신이 점점 초라해보이고 실망스러웠다. 선수로 뽑혀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까지 깜박 잊었다. 그처럼 멋지고 자랑스럽던 그들이 너무 부럽기만 했다.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느해인가 도문시제2소학교 ‘6.1’절 경축대회에서 나의 딸들이 고운옷차림에 소고를 치고 새장구를 치며 경축활동에 참가했을 때 나의 소원이 성취한 것처럼 생각하고 흥이나서 더 열심히 박수를 치고 남들앞에서 더 많은 자랑을 늘여놨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어제일 같지만 세월은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어 내 나이가 벌써 70대 중반이 되였다. 마음이 늙지 않아 북 치고 장구 치며 선수로서 우쭐거리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되여 로인활동실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였으니 믿어지지 않는다. 때마침 지난해 ‘8.15’ 로인절에 도문시 로간부국에서 로인들을 조직하여 운동대회를 열었다. 나는 물찬 제비마냥 새파란 적삼에 흰바지를 받쳐입고 머리엔 새하얀 모자까지 쓰고 오성붉은기를 흔들며 씩씩한 모습으로 주석대 앞을 활보하며 검열을 받았다. 멋지고 자랑스러우며 행복했던 그날의 모습을 나는 영원한 추억으로 간직하련다. / 최정금
31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2) 댓글:  조회:4172  추천:0  2020-05-01
“후날에 봅시다!” 1977년에 을 제정할 때 나는 동천궁(东川芎), 동당귀(东当归), 매발톱나무, 개암나무, 화서 등 중초약식물들의 약효, 세포조직해부, 분말현미경구조 등 부분을 담당하고 감정통과를 하여 해당 부문과 권위학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연변주약검소에서는 나를 약검소 임직원들과 다름이 없이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손형범은 연변주약검소의 요원으로서 ≪중국민족약지(中国民族药志)≫를 편찬할 때 적지 않은 부분의 편집을 담당했었다. 그 때 그는 동천궁, 동당귀의 조직해부도와 분말현미경구조 등 나의 자료들을 그대로 ≪중국민족약지≫에 편집해넣었는데 내가 이 약지편찬에서 큰 공을 세웠다며 ≪중국민족약지≫ 두권을 나한테 선물로 주었다. 그 후부터 나와 손형범은 더욱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1980년 10월 3일, 우리는 함께 중초약탐사로 룡정시 지신향 큰 쓰레산으로 가자고 약속하였다. 큰 쓰레산은 가파로운 벼랑이라는 뜻으로 작명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탄 택시가 지신향 원동골 산길을 따라 큰 쓰레산 기슭에 당도했을때는 오전 10시경이였다. 우리는 택시를 돌려보낸 후 가파로운 벼랑을 톺아오르기 시작했다. 산꼭대기에 오르니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다.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했지만 무성한 나무숲들이 꽉 들어찬 데서 우리는 길도 없는 산정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도시락으로 저녁을 대충 때운 우리는 풀밭을 담요로, 저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이불로 삼고 잠자리에 누웠다. 다행히도 내가 신문지 두장을 갖고 왔기에 한장은 깔고 다른 한장으로는 배를 가리웠다. 우리는 추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왕년 같으면 10월 3일이면 서리가 내렸을 수도 있었지만 마침 흐린 날씨 때문이라고 할가, 아니면 하늘이 우리를 측은히 생각했다고 할가 다행히도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날이 희붐히 밝아오더니 동녘하늘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님이 방긋 웃으며 솟아올랐다. 해님은 우리의 몸을 녹여주기라도 하려는듯 따스한 해 빛을 더 밝게 비춰주는 것이였다. 하늘의 덕분으로 우리는 감기에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지신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길가에서 여러가지 약초와 풀, 나무들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지친 줄도 모르고 또다시 식물조사에 나섰다. 지신에 도착하니 그동안 겪었던 모든 어려움들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푸짐한 점심상을 마주한 우리는 권커니 작커니 술을 마시면서 고진감래의 즐거움 속에 빠져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손씨가 나의 팔을 끌어당기며 기어코 연길로 가자고 청을 들었다. 그러자 나는 “난 오늘의 일을 절대 래일로 미루지 않습니다. 후날에 봅시다!”라고 말하며 손씨와 헤여진 후 곧바로 나의 연구실이 자리한 삼성촌으로 발길을 돌렸다. “후날에 봅시다!”라는 약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317    서로간 다름은 인정하고 틀림은 고치자. 댓글:  조회:3767  추천:0  2020-04-21
진정한 화합과 소통은 서로간의 다름은  인정하고 틀림은 고쳐면서 "큰면에서 공동한면을 찾고 작은면은 보류"( 求大同 存小义  )하면  이뤄진다.   당의 17기 6차 전원회의에서는 “백화만발 백가쟁명”을 조화로운 문화를 건설하고 인민을 교육하며 사회를 위해 복무하고 발전을 추진하는 역할로 발휘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론어』에 군자(君子)는 다른 사람과 화합하되 자기주장 없이 휩쓸리지 않고 소인배(小人輩)는 리익에 따라 뭉치되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을 “화이부동(和而不同)”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和)와 동(同)은 음식에 비춰 한 말로 다양한 재료와 물과 불이 어우러져 내는 맛을 ‘화’라고 하면 비슷한 재료만으로 만들어낸 맛 없는 국물을 ‘동’ 이라는 것으로 필자는 리해한다.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전설적인 성인 하우(夏禹)와 후직(后稷)의 이야기다. ‘ 하우는 백성이 물에 빠지면 자신이 치수(治水)를 잘못하여 물에 빠지게 했다고, 이는 그가 물에 빠진 백성의 립장에서 백성들의 분노까지  헤아린 것이며 후직은 굶주리는 백성이 생기면 자신이 일을 잘못하여 백성을 굶주리게 했다는 반성으로 백성의 굶주림을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한 추진력은 사회구성원들의 유기적인 협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러한 협력을 이끌어내는 건강한 피돌림이란 바로 소통(疏通)이다. 한국 서울영동농장 제 6 농장 오경배대표의 말이다. “틀리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은 부동한 개념으로 서로간 다름은 인정하면 되고 틀림은 고치면 됩니다.” “나와 김용복회장(서울영동농장)은 성격부터 음식 식성까지 완전히 다릅니다. 김회장은  대단한 애주가로 아낌없이 나눠주는 반면에 나는 술 한잔도 못하는 짠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23년간이나 서로 손을 잡고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둘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잘 맞는것 같습니다.” .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잘 맞는다”는 “동극(同極)은 서로 배척하고 타극(他極)은 서로 흡인”하는 음양학설에 맞는 말이다. 소금은 염소와 나트륨의 화합물로 생명체가 소금을 못 먹으면 죽지만 그렇다고 염소와 나트륨을 따로 각각 먹어도 중독되여 죽는다.  물은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로 산소는 불을 잘 붙게 하는 물질이고 수소는 불에 잘 타는 물질이지만 이 두 물질을 화합하면 불을 끄는 물이 된다.  자연계는 이렇게 괴상한 화확적현상과 놀라운 물리적현상으로 조화를 이룬다. 인간관계도 사람들 서로의 맞지 않는 의견들이 소통을 통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하고 옳바른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그런데 지난 “계급투쟁” “정치돌출” 때엔 사람들이 사회생존을 위해 틀에 짠 말과 남의 눈치에 따라 입발린 말을 해야 했고 정치와 권력자의 구미에 따라 “만장일치”와 “100%통과”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묵묵부답”까지 “다른 의견이 없으니 동의하는 것으로 통과한다”며 “만장일치”, 단결, 승리의 대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나중을 보면 “만장일치”와 “100% 통과(동의)”된 결의가 시달이 흐지부지했고 그 날 “공동히 책임진다“던 결의가 나중에 누구도 책임을 안 지는 “공동한 무책임”으로 흐지부지하게 되였다.  고대 유태사회의 “산헤드린”(판관들의 모임으로 최고 법원역할을 한 이스라엘의 재판기구)는 투표결과로 “만장일치”는 무효로 다음 날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가 다시 투표를 했다고 한다. 이네들은 언녕부터 신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일에 문제가 없이는 100%동의나 만장일치가 될수 없다는것으로 “부동한 의견이 없는 사회를 건강치 못한 사회”라고 했다.  공자는 “군자는 화합하되 자기 주장이 없이 휩쓸리지 않고 소인배는 자기 리익에 따라 뭉치되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며 군자의 화(和)는 각자의 견해, 주장을 하나로 잘 조화, 융합하는 것이고 소인배의 동(同)은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타인들과 같은 척 꾸미며 맹목적으로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으로 취급했다.   화합은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대화로 “대동소이”(大同小異)로 화합을 이룬다. 너와 나, 우리와 그들이 어울려 함께 사는 인간사회에서 서로간 소통이 안되고 화합의 묘미를 깨닫지 못하면 그 사회의 발전이 요원하다.  모두어 말하면 서로간의 다름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틀림은 고치면서 “대동소이”와 화합이 이뤄지게 된다. 오기활    
316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1) 댓글:  조회:3712  추천:0  2020-04-13
                     11. 송림 속에서 무명렬사를 만나다 나는 만년에 식물채집을 하면서 또 한번 잊을 수 없는 고행을 겪었다. 2006년 9월 10일, 나는 식물조사의 지점을 또 지신으로 정하였다. 그 때 나의 나이는 81세였다. 룡정에서 지신 성남까지는 그래도 택시를 불러서 멋지게 갔다. 다음부터는 도보였다. 식물조사라는 이 일은 자기의 ‘11호차’를 리용하지 않으면 안될때가 많았다. 떠날 때는 다소 걱정되기도 했지만 일단 현지에 도착하면 보고픈 초목들로 하여 흥에 겨웠고 종일 다녀도 피로한 감을 느끼지 못했다. 지신의 산은 온통 송림으로 덮였는데 이 때면 송이채집군들이 산을 메주밟듯 돌아다녀 수림 속 풀밭에 남은 그들의 발자국으로 하여 나는 외롭다는 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한창 식물채집에 도취되여 여념이 없는데 뜻밖에도 송림 속에서 ‘동북해방무명렬사비’를 발견하게 되였다. 주변에 잔디풀이 깔리고 우거진 나무숲 속에 가리워져있었기에 발견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다. 순간 마음이 퍼그나 아프고 괴로웠으며 그 정신적 위압에 눌려 불시에 내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따라서 혁명사업에 보귀한 생명을 바치고 고이 잠든 그들에 비하면 지금 나의 고생이 얼마나 보잘것없음을 느끼게 되였다. 나는 렬사비 앞에서 렬사들에게 묵묵히 머리 숙여 경의를 표했다. 연변은로혁명근거지로서 수많은 무명렬사들을 낳은 곳이기도 하다. 갑자기 젊었을 때 불렀던 가 떠올랐다. 가슴 우에 손을 얹고 쓰러진다 혁명군 가슴에서 흐르는 피 푸른 풀에 질벅해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 눈굽이 젖어들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신 죽는 법이 있다면 늦었지만 렬사들 대신 내가 죽고 렬사들이 나 대신 살아나 오늘의 행복을 누려보았으면…’ 혁명렬사들의 바람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남부럽잖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였을가? 이날 나의 머리 속에서는 혁명렬사비가 사라질 줄 몰랐고 “우리 나라 오성붉은기에 조선민족의 붉은 피가 슴배여있다.”고 한 모택동 주석의 말씀이 떠날 줄 몰랐다. 큰 쓰레산에 이르니 해가 서산에 기울었다. 나는 준비한 비닐박막으로 큰 바위에 의지해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정도의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지금은 맹수들도 거의 없게 되였고 또 이 나이를 먹으니 귀신도 두렵지 않았다. 단지 비바람의 습격만 두려울 뿐이였다. 9월의 밤인데도 다행히 밤날씨가 좋았기에 혼자몸이였지만 심산 속에서 안전하게 야영을 할 수 있었다. 날이 희붐히 밝아오자 나는 또 수림 속을 향해 걸어갔다. 남쪽 벼랑에 이르니 2~3m 높이의 기둥모양으로 된 석림(石林)이 한눈에 안겨왔다. 순간 천불지산(千佛指山)이 머리에 떠올랐다. 1985년 ≪룡정현지명지≫에 “하늘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왔으므로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였다. 천불지산 정상에 오르면 오봉산, 큰쓰레 노름바위 등 두만강의 이북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길림신문≫에서 본 룡정시 오정묵중의의 천불지산 관련 이야기이다. 천불지산은 룡정시 백금향, 삼합진, 지신진을 망라하여 총면적이 7만여헥타르에 달하는데 야생산삼과 송이버섯 등 진귀한 식물들이 많이 난다. 내가 부처님이 하사했다고 ‘천불지산’이라 불렸다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 그저 항간에서 구전되는 속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국가적인 차원에서 명명된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90년대 초반의 어느 날, 등산길에서 약재 캐는 로인을 만나 이 말 저 말을 나누던 끝에 산이름을 물었더니 천불지산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로인의 이야기를 허망한 전설로 마이동풍으로 흘러보냈는데 후날에 자료들을 찾아보니 그 전설 속의 인물이 실존인물(룡성스님)로서 그가 유명한 반일지사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천불지산에 비춰 “절승경개가 여기에 있으니…”란 시구가 떠올랐다. 나는 천불지산의 경관을 연길 모아산에 옮겨다 심는다면 얼마나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끌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아쉽도다! 지금은 관광객이 나 혼자뿐이니 천불지산이 독수공방 신세로구나!’ 이런 아쉬운 심정으로 천불지산을 등지고 한참을 걸으니 발목까지 빠지는 습지가 나타났는데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순군락(纯群落)을 이루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지신에서 삼합으로 넘어가는 접경지에 이르니 지신림장 일군들이 한창 북적이며 멋스러운 집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디서 오십니까?” “지신에서 오긴 했는데…” “무얼 하려고 오셨습니까?” “식물채집이지요.” “할아버지, 이곳은 식물채집이 금지된 구역이니 다시는 오지 마세요. 한번만 봐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오리다. 그런데 여기서 대명동(지금의 부유촌)까지 가려면 몇리를 더 걸어야 하오?” “70리를 더 가셔야 합니다.” 70리라는 말에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다른 한 젊은이가 나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사실은 대명동까지 70리가 안됩니다. 대략 17리 좌우 되는데 날이 저물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십시오.” 참 사람냄새가 나는 젊은이였다.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니 정말 고맙구려…” 나는 젊은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동남쪽으로 열린 골짜기를 향해 걸어갔다. 사실 내가 건설장의 일군들에게 “지신림장에서 한동안 일을 본 적이 있는 김상래를 아시오? 내가 바로 상래 아버지요…”라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도 그네들이 이 주책없는 늙은이에게 잠자리도 마련해주고 때시걱도 반반히 차려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페를 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숲속에서 나 홀로 야영을 하는 것이 더 편안할 것 같아 갈길을 재촉했다. 나는 남들에게 페를 끼치는 것을 참 싫어한다. 지금도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심지어 로친까지도 딸집에 보내고 혼자몸으로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계속 길을 걷다가 길가에서 엄청나게 큰 독활(独活)을 만나니 여기는 확실히 심산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산곡간을 걸으면서 곡간을 건너갔다가는 다시 건너오는 것을 몇번이나 반복했다. 짐작으로 25리는 잘되게 걸었는데도 17리 좌우 된다던 대명동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럴 즈음에 변덕스럽게도 “꽈르릉…” 하고 귀청을 때리는 듯한 우뢰소리가 울려 이 늙은이를 경악케 했다. 게다가 급하게 내물을 건느는 바람에 어지럼증으로 돌에 걸려 넘어져 온몸이 물참봉이 되였다. 더는 갈 수 없게 되였다. 사위가 어둑컴컴하여 좀처럼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낙비까지 억수로 퍼붓기 시작하여 나는 물가에서 꽤나 굵직한 버드나무를 꺾어 두 버드나무 사이에 걸쳐놓고 거기에 비닐박막으로 주머니모양의 하우스를 만든 후 그 속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하지만 말이 하우스지 앉지도 서지도 못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순간 숲속에서 만났던 혁명렬사들이 떠오르면서 이까짓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맞으며 보낸 이번 2박3일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야영이였다. 날이 밝자 바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산골을 따라 내려가니 하마양식장의 사나운 개가 길을 막아나섰다. 이 때 집주인이 나와서 돌아가는 길문을 열어주었다. 순간 넓은 시야에 삼합청천저수지가 안겨왔다. 다행히도 대명동(부유촌)에서 삼합진으로 가는 빈 택시를 만나 잡아타고 룡정에 있는 집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만년에 호기심에 의해 떠난 2박3일간의 식물조사에서 나는 찬비를 맞으면서 온갖 고생을 다 겪었지만 하느님의 덕분이였던지 감기에도 안 걸리고 성공적으로 조사를 끝마칠 수 있어 나에게는 대단한 축복이였다.
315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도 인생의 지혜다 댓글:  조회:3874  추천:0  2020-04-09
B녀는 전업주부로 안정적인 가정과 남편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친한 이웃이 찾아와서 그녀의 남편에게 다른 녀자가 있다는 소문을 알리니 “나는 너무 많이 알고 싶지 않아, 때로는 너무 알아서 상처를 입기도 하니까. 나는 내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해”라며 무엇을 더 알려고 하지 않기에 친한 이웃이 더는 아무 말도 못했다.    “모르는 게 약이다”, “무지가 축복이다” 는 속담이 있듯이 무엇을 알게 되면 그에 따른 고민과 걱정으로 괜한 병을 만들수 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듯 말이다.    로신은 평생 많은 사람들의 질투와 지탄을 받았지만 한 번도 자신의 립장을 해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바깥 세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립장을 고수한 채 계속하여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붓끝으로 령혼을 구원했다. 그에게는 붓끝이 무기였고 수술칼이였다.  로신은 붓끝의 힘을 믿었고 침묵하는 것이 해명하는 것보다 낫다며 애써 해명할 필요가 없는 리치를 언녕 알았던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랭대를 받거나 편견에 시달리면 억울한 나머지 어딘가에 한바탕 발산하고 싶은 생각을 하게된다. 이때 평가가 좋건 나쁘건 간에 그대로 신경을 쓰면 안된다. 화를 내는 것도 해명을 하는 것도 모두 소용이 없다.    “때론 활시위를 팽팽하게 하고 때론 느슨하게 하는 문무의 도를 하라”는 말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웃으며 비판을 듣고 “타인들이 지적한 결점이나 잘못에 문제가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에 힘쓰는 원칙”을 지킨다. 요컨대 칭찬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진심인지 거짓인지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자처하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앟는다.   로신은 바깥세계의 평가를 듣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태도로 대했다. 즉 바깥 세계의 평가를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자신의 길만을 묵묵히 걸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천부의 손가락질에 대하고 머리수그려 유자의 소가 되련다..."   이는  로신이 자신에 대한 모사이자 그의 강경한 의지였다..   때론 많이 생각하는 것이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많이 듣는 것이 안 들은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귀를 슬쩍 틀어막고 듣지 않는 것도 인생의 지혜다”고 한다.   귀를 슬쩍 막는 것은 만사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뭐라고 하건 나는 내가 갈 길을 간다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다. 좋은 의견과 건의는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첨이나 무시의 말은 마이동풍으로 듣고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바깥 세계의 평가가 어떻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시종일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할뿐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앟다.   오기활
31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0) 댓글:  조회:3850  추천:2  2020-04-01
10. 비 내리는 야밤에 도적으로 몰려 룡정현 삼합에서 지신으로 이어지는 오랑캐령은 나에게 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오랑캐령은 백여년전 할아버지가 아홉 식솔을 거느리고 조선 명천에서 연변으로 이주해올 때 피눈물을 흘리며 넘던 산마루로서 그 때 우리는 첫 인연을 맺게 되였다. 오랑캐령에는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산봉우리가 많고 락락장송—적송(赤松)이 우거지고 철따라 피는 철꽃들이 많아 대자연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룡정에서 가까운 이 명산은 나에게 식물학을 배우게끔 꿈을 키워준 ‘도사’이고 ‘은인’이며 나를 식물학자로 배육한 종자이며 옥토이다. 1976년 6월 3일, 채전의 도마도가 불그스레 익기 시작한 여름철에 나는 삼합행 뻐스를 타고 가다가 중도인 오랑캐령도로관리소 부근에서 내렸다. 그 때는 사진기도 없어 빈손에 두 눈만 챙기고 산야를 두루 누비며 식물고찰을 하던 시기였다. 때는 오전 아홉시 반이였다. 산골짜기에 들어서니 천남성이요, 등칡이요, 노랑송이풀이요 하는 보기 드문 식물들이 눈에 띄였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얼결에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한시가 지났다. 이제 30분후이면 룡정으로 돌아가는 막뻐스가 여기를 지나가는 판이다. 그런데도 나는 식물채집에 열중하다보니 룡정으로 가는 뻐스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암, 될 대로 되라지. 오늘 밤으로 룡정에 도착하면 되니까 마음 놓고 식물을 관찰하고 표본을 채집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뻐스를 놓친 나는 오후 2시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나무숲을 헤치며 식물채집을 계속하였다. 날이 어슬어슬 어두워져서야 나는 천불지산으로 가는 남북방향의 자동차길을 걸어 성남촌을 지나 지신진으로 향하였다. 뒤잔등에 비닐봉지로 정히 싸서 넣은 묵직한 식물표본배낭을 메고 걸어가는데 반디불들이 사방에서 켜졌다 꺼졌다 하며 숨박곡질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황홀한 반디불세계를 나는 처음 걸어보았다. 언제 또 이렇게 황홀한 반디불세계를 걸어볼 수 있겠는가! 순간 힘듦도 지침도 배고픔도 어느새 싹 가셔지는 것만 같았다. 지신을 지나니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동서로 이어지는 승지촌의 외골목이 지친 나에게는 끝없이 멀고 멀어보였다. ‘승지촌에 들려 룡정현당교에서 학습중인 상욱(둘째아들)이를 찾아갈가…지금 쯤은 한창 꿈속에 빠져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인차 마음을 고쳐먹었다. 야밤중에 옷이 다 젖고 또 지친 몸을 끌며 아들을 찾아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더라도 속 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았다. 순간 무겁던 발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고 무겁던 등짐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재바위골 어구도 지나고 신화촌도 룡정 서쪽 어구에 자리한 양계장도 지났다. 룡정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다리쉼을 하려고 길옆 채소밭머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후 채소밭을 지키던 한족청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오더니 다짜고짜로 한밤중에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느냐며 등뒤에 멘 짐을 수색하겠다는 것이였다. 나는 나의 짐에는 귀중한 것이 들어있으니 아무에게나 보여줄수 없다면서 생고집을 부렸다.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은 내가 도마도 밭머리에 앉아있으니 등에 진 것이 도마도라고 여겼던 것이다. 시원히 보여주었으면 쉽게 끝날 것을 내가 막무가내로 그들을 뿌리치고 길을 떠남으로써 일이 커졌다. 다행히 그들이 거의 합성리까지 따라오다가 지쳤는지 포기하고 돌아갔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번했다. 내가 새벽 2시경에야 집에 도착하니 집식구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의 처사가 너무 경솔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식물채집을 하면서 집식구들에게 많은 심려를 끼쳤다. 나는 이 글로 집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함과 동시에 집식구들이 나의 사업과 흥취에 대해 리해하고 지지해준 데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313    20 세기 말에 “챵비” 당한 원고 유감(遗感) 댓글:  조회:3916  추천:0  2020-03-25
기자들의 직업용어로 누가 쓴 원고가 발표 못 되면 그 원고가 “챵비”(抢毙) 당했다고 한다. 즉 “총살”당했다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말에 필자는 “연변일보” 기자로 원고를 “챵비” 당한 불미한 력사가 있었다.  비록  십 수년의 기자생애에서 단 한번 “챵비”를 당했건만 너무나도 “억울”해 지금까지도 그 원고를 잊을 수 없어 “챵비”를 당한 원고 유감을 이 글로 올린다.   이하는 “챵비”를 당한 원고와 “챵비”된 원인이다.   도문시 시장에 왜 돼지고기가 없는가?         지난 7월 11일부터 도문시 시내 시장매대에서 돼지고기를 볼 수 없다. 원인은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집체파시( 集体罢市)를 한데서.  이에 기자는  16일부터 몇 일간 여러 부문과 해당책임자들을 찾아 다니며 이번 사건을 조사하였다.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의 불만   1, 돼지고기경영업주들에 따르면 지금 잡은 돼지 한 마리당에 업주들이 내야하는 세금과 비용이 공상관리비(시장관리비) 20원(향상시장은 25원), 도살세 10원, 검역비 16원(실제검역비는 11원, 농업발전기금 6원), 도살비 15원, 돼지교역비 15원이다.  이밖에 위생비 5원, 치안비 4ㅡ5원, 국가세금 360원, 지방세금 40원, 매대비 90ㅡ 130원으로 매달 지출비용이 3000원이나 된다.   2, 관리가 혼란하다 2년래 세금과 비용을 낸후 령수증과 기타 표증을 발급받지 못했다. 지난해부터 물가조절기금으로 매년 20원을 내던 것을 올해는 매월 20원씩 냈다. 그리고 무슨 강습비라며 20원씩 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강습도 받지 못했다. 특히 해당부문에서 대리인을 내세워 검역을 하거나 수금을 하기에 믿음성이 없고 표증이 없기에 돈을 내고도 무슨 돈을 냈는지 모른다.   3,  불합리하다. 올해 7월부터 시공상행정관리국에서 산돼지(生猪)교역비로 마리당 15원씩 받는데 이 교역비가 이번 파시의 주요한 불씨로 되였다.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의 말이다.   ㅡ 시장관리비라며 잡은 돼지 마리당 20원 (혹은 25원)을 받아가는데 또  “돼지교역비”란 무었인가? 이는 시장관리비를 2중으로 내는 것이 아닌가?  “돼지교역비”는 산돼지를 파는 사양호와 돼지를 사서 잡아파는 도살호가 공동분담 해야 한다. 알아본데 따르면 다른 현과 시에는 “돼지교역비”가 없다.  그런데 도문시공상행정관리국에서는 “길림성 도시농촌무역시장관리조례” 제 23조에 따라 “돼지는 농부산물에 속하므로 교역액의 2%로 15원식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접수할 수 없다.       관계부문의 답복과 해석   1, 시축산국:   우리는 해당 규정에 따라 도살 전과 후의 검역비로 마리당 11원을 받고 시 재정국의 위탁을 받고 농업발전기금을 마리당 6원씩 받았다.  지난 6월 말까지 대리인을 내세워 검역과 수금을 하다가 표증관리가 혼란하고 검역의 질을 보증하기 어려워 7월부터 우리가 직접 검역하고 수금을 한다.   2, 시 물가국:   우리는 1995년 3월에 도살비를 돼지 마리당  15원으로 정했다. 그리고 시정부 4호문건에 따라 공상관리비의 20% 표준으로 부식물가격조절기금을 매월 마리당 5원씩 받았다. 지난해까지 시공상국에 위탁하여 수금을 했는데 올해는 아직 수금을 안했다.  공상관리비수금표준은 시물가국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치안비로 따로 비준한 적이 없다.   3, 시지방세무국:   해당 규정에 따라 돼지도살세로 돼지 마리당 10원씩 받는다. 우리가 타부분에 위탁하여 수금하다보니 수금한 표중이 없는 문제를 몰랐다.  부가가치세(增值税)로 국가세무국에서 정한 월 400원 중에서 우리가 10%로 40원을 받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월소득이 850원이상이면 5% 이상의 소득세를 내야 한다는 징수정책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4, 시공상행정관리국:   우리는 그들이 “파시” 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원인은 그들이 아직까지 자기들의 단체조직인 개체근로자협회만 찾았을 뿐 시정부나 우리 국을 직접 찾지 않았고 자기들도 “휴식”을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일이 발생한 주요원인으로 “돼지교역비”를 받는 문제라고 인정한다. 일전에 우리는 시당위, 시정부, 시인대 책임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다음의 견해를 조치를 통일하였다. ㄱ, 시공상국에서 정상적인 도경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그들에게 정면교육과 정면 인도를 진행해야 한다. ㄴ, 수금근거가 충분해야 한다. 공상국에서는 20일까지를 “선전교육일’로 정하고 그사이에 “돼지교역비”를 잠시 받지 않고 7월 8일부터 돼지고기경영업주들 속에 내려가 선전교양을 하기로 했는데 11일부터 이 일이 발생하였다. 우리는 1993년 7월에 통과한 “길림성 도시농촌무역시장관리조례” 제 23조에 밝힌 “무릇 무역시장에서 상품을 경영하는 단위와 개인은 모두 공상행정관리부문에 시장관리비를 바쳐야 한다. 농부산물, 경공업품과 기타상품의 수금비률은 교역액의 2%다”는 규정에 따라 돼지는 농부산물에 속하기에  교역액을 추산하여 마리당15원(2%)씩 정했다.   우리가 지금 수금하는 시장관리비 20원(25원)은 돼지고기교역비고 15원은 산돼지 교역비다 우리는 관리인원이 부족한데서 돼지장사군들을 따라 다니지 못하고 또 돼지임자를 찾을 수 없는 정황에서 돼지를 사는 도살호에서 “돼지교역비”를 받기로 하였다.   우리는 1993년 7월에 통과된 “조례”중 집행하지 못했던 규정을 지금 보충집행하는 것이다.   5, 시인대:   일전에 그들의 집체상소를 접대하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대는 이런 문제를 직접처리하거나 답복해주는 기관이 아님을 해석한후 그들의 의견을 듣고 그 정황을 해당부문과 책임자들에게 반영하고 조사사업을 진행하였고 다음의 인식을 통일하였다.   1, 개체공상호에 대한 관리를 가강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적극 부추켜야 한다. 지금은 세금보다 관리비가 높고 수금을 중시하고 관리를 홀시하는 현상이 확실히 존재한다.   2, 돼지를 팔고 사는 무형시장(류동시장)에서 세금과 비용을 납부함에서 생산자가 주체로 되여야 할 것이다.  “돼지교역비”를 구경 누가, 어떻게, 어떤 표준으로 내야 하는가는 문제를 심입하여 연구하고 적절한 처리와 조치가 필요하다.  공상행정관리부문에서는 정면으로 도살업자들을 인도하여 그들이 능히 리해하고 접수할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위탁문건이 없고 공증을 거친 위탁서가 없이 위탁인을 내세워 수금하는 것은 비법적이다. 위탁서가 없고 확실한 표증이 없이 수금을 할 때 도살호와 돼지고기경영업주들에게 수금을 거부할 귄리가 있다.   상술한 조사과정에서 기자는 해당집법부문에서 돼기고기경영업주(개체공상호)들에 대한 감독, 관리하는 사업에서 부당한 수금, 어수선한 표증관리, 그리고 경영업주들이 법으로 자기들의 합법적궐리를 보호 받는  법제의식 에 문제가 존재함을 발견하였다. 오죽하면 시공상행정관리국 법제반공실의 책임자가 기자에게 “지금 개체공상호들이 납부하는 부당한 금액이 호당 년평균액이 500원이 될것이다” 며 “나는 정년퇴직후 개체공상호의 법률고문이 되여 개체공상호들의 합법적인 권리와 리익을 보호하겠다”고 하겠는가.  기자는 본 안건의 해결관건은 개체공상업주와 해당관리감독부문에서  “길림성 도시농촌 무격시장관리조례” 제 23조를 어떻게 정확히 리해하고 착실하게 집행하는 가에 달렸다고 본다.  각급 해당부문에서는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제기한 많은 물음과 제의에 가급적으로 확실한 답복을 주어 그들의 “조례”집행 의무와 자각성을 제고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조치라고 본다.   본사기자 오기활     오늘에 부언:  필자가 민생문제해결로 당년에 며칠간이나 발품을 팔며 애서 쓴 이 원고가 림장춘부주필의 직접 편집하에 “연변일보” 1면 5단행으로 발고하기로 했는데 [姜:反面文章正面做,意在正面引导。学好,用好意“条例]란 회시(批示)에 따라 “챵비”되였다니 姜이 무슨 근거로 이 원고가 “반면문장”인지 리해할수가 없었다.   혹시 그때 姜의 생각으로  이 원고가 발표되면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더 많은 “알권리”를 찾고저 신나게 해당부문에 찾아다니며  “사단을 피울가봐” 두려워서?        
31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9) 댓글:  조회:3847  추천:0  2020-03-17
                                    9. 버섯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토배기 화실(画室) 버섯이 제일 많이 돋는 시기는 여름방학 때이다. 이에 비춰 나는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버섯그림을 그리기에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화실이 없었다. 생각 끝에 룡정 시교에 자리한 광신 5대의 초가 헛간을 화실로 꾸미기로 하였다. 이 헛간은 몇년전에 자식들을 동원하여 흙벽돌로 지은 창고로서 부자간의 합작품이다. 나는 비를 맞으면 안될 짐들을 한구석에 쌓아놓고 공간에 탁자를 놓았더니 화실로는 꽤 훌륭했다. 나는 도화지에 버섯을 스케치한 후 수채화염료로 색칠을 하였더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번이나 그리고는 버리고 또 다시 그리고는 버렸지만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그림그리기지만 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가 봐.’ 때로는 이런 원망들이 불쑥 튀여나왔지만 절대 포기할 줄을 모르는 나는 버렸던 그림들을 다시 주어서는 수정하고 색칠을 더했더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수정을 거듭한 결과 그림은 많은 진보를 가져왔다. 적색법(积色法)—이것이 바로 비결이였다. 나는 시작은 연하고 희미하게, 색도(色度)는 묽고 안개처럼 보일락말락하게 한 다음 점점 더 진하게 덧그리는 것이 바로 버섯 회화기법의 핵심이고 기본이며 비법임을 끝내 밝혀냈다. 이는 모두 락심하고 자포자기하던 데로부터 공자가 말했던 중용의 마음가짐, 심평기화(心平气和)의 마음가짐으로 한보, 한보 발전하면서 이뤄낸 성과였다. 따라서 나는 그림에 신심을 가질 수 있었고 제법 그럴듯한 명작품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지루한 시간에 끝없이 이어진 노력으로 한장, 한장의 버섯그림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그에 따른 명성까지 얻게 되여 나중에는 지방 신문, 잡지는 물론이고 국가급인 ≪민족화보(民族画报)≫에까지 나의 버섯그림 명작품들이 발표되였다. “당신의 연구성과는 대단합니다!” 1984년 8월 10일,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내몽골 훅호트시에서 ‘동북3성1구식물학학술보고대회(东北3省1区植物学学术报告大会)’가 열렸다. 이 대회는 중국 동북지구의 저명한 식물학자들이 운집한 대회였다. 이번 대회에는 흑룡강성에서 온 세명의 조선족대표들이 있었는데 우리 조선족들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연변의학원의 류영진(柳永镇) 교수와 동행한 데서 마음이 든든했다. 그 때 나는 나이가 57세였고 길림성식물학회 리사였다. 나는 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하였다. 나는 보고에서 송이버섯의 생태에 관하여 삼합진의 반생식물(伴生植物)을 보다 상세히 소개하였고 나의 송이버섯그림을 비롯한 다섯종의 버섯그림도 회람(回览)케 하였다. 이 대회가 끝나자 대회의 집행자였던 주이량(周以良) 교수[원 동북림학원 (东北林学院)의 부원장, 동북 식물분류의 최고권위]가 나를 찾아와 “당신의 연구성과는 대단합니다.”라고 하며 나에게 과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이량 교수는 버섯연구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분으로서 나의 버섯연구와 나의 버섯그림을 아주 높게 평가하였다. 주이량 교수는 버섯연구에 조예가 깊다보니 나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되였고 나의 버섯그림 역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였다. “무엇이든 알려고 애를 써야 숨어있는 비밀을 보아낼 수 있고 소리 없는 곳에서도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학교시절에 어문을 가르쳤던 최영수(崔营洙)선생님이 늘 하시던 이 말씀이 천만번 지당함을 다시한번 감수했다. “아주 목표 있구려…” 나는 동북사범대학 리여광(李茹光) 교수가 길림성을 놓고 말하면 버섯연구에서 가장 권위적인 인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우리 연변농학원의 리원겸, 함홍석 등 로교수님들과 같이 학술분야에서 활약했으니깐. 나는 이도백하에서 둬번 리여광 교수님을 뵌 적이 있는지라 어느 한번 출장길에 동북사범대학 리여광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표본서랍에 눈이 간 나는 교수님에게 물었다. “제가 교수님의 표본서랍을 열어봐도 괜찮을가요?” “그 표본들은 거의다 ‘떡달’버섯종류이니 부서질 념려가 없소. 그러니 마음대로 꺼내보아도 되오. 근래에는 이런 표본들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오히려 내 쪽에서 고맙구려…” 리교수님은 한동네의 ‘아바이’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었는데 나는 이렇게 좋은 분을 늦게 찾아뵌 것이 후회되였다. 나는 호기심이 가는 대로 버섯표본을 꺼내들고 보았다. 과거에 내가 표본감정을 했던 그 버섯과 똑같은 것이였다. “하, 이 사람아! 자네가 서랍에서 꺼낸 버섯표본을 보니 아주 목표 있구려.” “자네도 나처럼 버섯을 연구해보았는가?” “연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저 흥취에 끌려서 야외로 다니면서 버섯도 채집하고 그림도 더러 그려보았습니다.” 리교수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 나는 좀더 일찍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련만. 나는 이미 버섯연구에서 손을 떼고 만년을 보내고 있지만 그 때 리교수님을 늦게 찾아간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311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8) 댓글:  조회:3945  추천:0  2020-03-11
8. 식물이야기 창해로 흘러드는 벽계수마냥 흘러간 세월은 좀처럼 돌아올 줄 모른다. 90대 늙은이가 지난 동년시절의 일들을 겨우겨우 재생시킴은 염라대왕의 마수에서 단 한쪼각의 동년시절의 추억이라도 빼앗아내기 위함이라 하겠다. 필자는 요행으로 되찾은 기억쪼각들 속에서 몇가지 식물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첫 계몽선생은 10대 소년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게 되면 그 속에는 꼭 나의 스승이 있다.”고 말하였다. 공자님의 말 대로라면 나의 계몽선생은 나의 어린 시절의 딱친구였던 박경호를 꼽을 수 있다. 1935년의 화창한 봄날, 연길현 태양구 횡도자의 서쪽 구수하강변의 버들방천에서 나와 나의 딱친구들인 박재호(朴在浩), 박경호(朴景浩, 12살, 재호의 형), 한판돌(韩判乭), 손창익(孙昌翼, 10살) 등이 모여 여러가지 놀이를 하였다. 그 날 우리가 물고기잡이며 숨박곡질로 한창 재미나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박경호가 “누가 더 많은 종류의 풀을 뜯어오는가를 내기해보자.” 하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호응해나섰다. 박경호가 버들피리를 불며 시작을 알리자 우리는 너도나도 풀뜯기에 나섰다. 한식경이 지나 박경호가 다시 피리를 불자 우리는 모두 강변 백사장에 모였다. 먼저 박경호가 자기가 뜯은 풀들을 한가지씩 내놓으면서 그 종류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종류가 반복되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나중에 보니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30종의 풀을 채집하였는데 대체로 민들레, 돌피, 강아지풀, 시금치, 질경이, 마디풀, 소리쟁이, 할미꽃, 씀바귀, 조뱅이, 메꽃, 큰별꽃, 둥굴레, 너삼(쓴너삼), 짚신나물… 등이였다. 그런데 내가 양지꽃을 내놓으니 누구도 그 이름을 몰랐다. 내가 ‘봉기(또는 봉기풀)’라고 알려주니 모두들 “넌 이 풀의 이름을 어떻게 알지?” 하며 신기하듯 나를 쳐다봤다. 이리하여 나는 둘째할머니한테서 들은 ‘봉기풀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 어느 마을에 어른들이 말하는데 버릇없이 말참견을 하기 좋아하는 계집애가 있었다. 어느 날 그 계집애의 엄마는 동네 아낙네들이 놀러 오기로 약속했는지라 말참견을 하지 못하도록 딸애를 독 안에 숨겨놓았다. 얼마후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다가 한 아낙네가 “봄에 무슨 꽃이 제일 먼저 피는지 아는가?” 하고 물었다. 그 때 독 안에서 “봉기, 봉기…” 하는 계집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후부터 어른들이 말하는데 버릇없이 말참견을 하는 사람을 “봉기…” 하며 책망하였다고 한다. 박경호는 어린 나이에 식물을 종류로 나누어 채집하는 유희를 만들고 체험하게 한 신동이였다. 하여 나는 식물학을 전공하면서 나에게 다양한 식물의 종류를 분류하는 감성적 인식의 대문을 열어준 계몽선생을 딱친구인 박경호라고 말하고 싶다. 앵초(樱草) 병풍바위를 붉게 태우던 진달래꽃도 시들어가던 1934년 5월 중순의 어느 날이다. 나는 송아지친구인 한판돌(14살)과 함께 횡도자 남쪽 부근에 자리한 손창익네 집을 찾아갔다. 그 날도 갸름한 몸매를 자랑하는 창익이가 마중을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창익이네 마당에는 휘늘어진 수양버들이 서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진분홍꽃이 활짝 피여있었다. “을록(나의 애명)아, 이게 무슨 꽃이지?” “앵초꽃이란다.” “난 모르는데 너는 어떻게 알았니?” “우리 둘째할머니가 알려주셨어. 우리 둘째할머니는 풀이름을 많이 알어. 할머니가 나물 캐러 다닐 때마다 난 따라다녔거든.’ “이 꽃은 작년 봄에 내가 서쪽 강변 습지에서 떠다가 여기에 옮긴 건데 이렇게 곱게 피였어…” “야, 참 대단하구나!” “나도 인젠 이 꽃의 이름을 알게 되였구나. 근데 말이야, 이 꽃잎에서 물이 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는지 네가 아니?” “난 몰라.” “이 꽃잎의 중간에 도드라진 줄이 있단다. 여기를 찢으면 이렇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보이지?” “응, 보이는구나! 이 잎줄기에 물이 나오는 구멍이 있구나!” 그 후 나는 중학교에서 식물학을 배울 때 엽맥의 류관(流管) 속에 물과 영양물질을 운반하는 통로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세 사람이 길을 가게 되면 그 속에는 꼭 나의 스승이 있다.”는 공자의 말을 손창익을 통해 또 한번 터득하게 되였다. 손창익은 나의 식물해부학의 계몽선생이였다. 지금 횡도촌에서는 앵초(樱草)가 거의 볼 수 없는 절종식물로 되였다. 바람에 구름이 날리듯 손창익도 어느새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굳이 손창익네 집마당이 아니여도 그의 산소에 그를 기리는 앵초가 한포기만이라도 자랐으면 좋으련만… 나는 오늘도 고 손창익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큰송이풀 명월구 서쪽켠에 자리잡은 남구촌은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고장이다. 남구촌에서 서쪽방향의 산발을 타고 가느라면 엄청난 산령이 남북으로 가로누워있는데 이 산령과 고개가 바로 나의 식물학지식의 꿈을 키워주고 내가 백번을 물어도 백번을 내심히 가르쳐주던 ‘대자연의 도사’이며 아무 때라도 나를 한품에 안아줄 배움의 요람이였다. 이렇듯 나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산줄기의 이름이 바로 하발령이다. ‘하발령’이란 어원은 바로 만주어 ‘하르바’(견갑골)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한다. 하발령은 내가 전업지식이 막히거나 심심할 때 동네돌이를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다니던 곳이다. 2015년 8월 20일, 90세 고령이였던 나는 연길 남역에서 신분증을 보이면서 하발령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으려고 했다. 그러자 매표원은 하발령에서 기차가 멈추지 않으니 그 다음 역인 대석두역에서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되여 대석두를 거쳐 다시 하발령으로 떠나야 했다. 대석두에 도착하니 오전 10시경이였으므로 해가 이미 중천에 떠있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삼륜차를 잡아타고 하발령 습초지를 향해 떠났다. 멀리 바라보니 첫눈에 안겨오는 것이 큰송이풀이였다. 줄기는 1m 좌우이고 꽃이삭은 무성한 잎 속에서 쭉 빠져나와 공중을 향해 쳐들었다. 분홍색 나비모양의 꽃들이 굵은 꽃줄기에 주렁주렁 걸려있었지만 바람에도 끄덕없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리창복(李昌福)의 ≪대한식물도감≫을 보면 이 식물의 산지가 장백산으로 밝혀져있다. 1994년 2월에 나는 서울대학 자연물연구소 강당에서 이라는 제목으로 학술보고를 하면서 환등편으로 이 식물을 소개하게 되였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 학자들이 이 식물에 대해 익숙하지 못한 데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끝났다. 나의 학술보고가 끝나자 한국 현대식물분류학의 권위로 불리우는 이영로(李永鲁) 박사가 친히 연단으로 올라오더니 나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좋은 보고를 들었다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시각 나는 큰송이풀 덕분에 나의 몸값이 올랐다고 기뻐했다. 이런 연고로 나는 큰송이풀에 관심이 더 쏠리게 되였다. 울로초(乌拉草) ≪동북지서(东北志书)≫에는 “인삼, 담비, 울로초가 동북의 삼보(三宝)”라고 밝혀져있다. 옛날에는 울로가죽신, 또는 도로기, 도록신이라고 부르는 소가죽으로 만든 방한화가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 도로기신 안에 울로초를 넣고 신으면 발이 얼 근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울로초가 방한에 필요 없으니 ‘동북의 삼보’에 울로초 대신 록용이 올랐다. 나의 둘째어머니는 울로초를 ‘날비풀’이라고 불렀는데 정확한 이름은 ‘큰검정사초’이다. 습지를 다녀보면 울로초와 비슷한 식물들이 수두룩한데 민간에서는 울로초와 류사한 식물들을 통털어서 울로초라고 불렀으며 진짜 울로초처럼 사용하고 있다. 울로초와 류사한 식물들이 길림성 경내에서만도 99종으로 알려져있다. 무더기로 자라나서 덩어리로 되는 울로초를 연변사투리로는 ‘꼬지깨풀’이라고 부르고 울로초가 무성한 습지를 ‘꼬지깨판’이라고 한다. 솔 편자의 말: 김수철 교수는 ≪대중과학≫잡지 1979년 6월호부터 1981년 1월호에 이란 제목으로 연변의 솔종류; 력사와 현실; 솔잎의 유효성분과 작용; 솔잎의 용법; 송주(松酒)의 종류와 제법; 솔잎으로 예방, 치료되는 25종 질병; 비만은 질병의 온상(도해); 솔잎의 콜레스테롤청결작용(도해); 소화기질병; 급성위염; 간장질병; 만성위염; 호흡기질병; 관절염; 신경통; 마비; 부인병; 비뇨, 생식기 질병; 외과질병; 송진, 송화분, 솔씨; 솔의 항암작용 등의 순으로 글을 발표했다. 편자는 본문중 , 두편을 에 올린다. 력사와 현실 중국, 일본, 로씨야, 미국 등 나라의 민간에는 솔잎이 심신을 정화하여 건강장수케 하는 신통한 효과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선인이 되려고 속세를 떠나 산속에 들어가 기공을 하며 건강식으로 연명하는 수도자들이 세상만물중에서 솔잎을 건강식품의 첫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중국 고대의 풍부한 림상경험을 기초로 하여 집성한 ≪신농본초경(神农本草经)≫이라는 약물학저서에서도 솔은 오래 먹어도 탈이 없이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는 상약이라고 했는데 의미심장하다. 리시진의 ≪본초강목≫에서도 “솔잎은 기미(气味)가 쓰고 따스하며 독이 없고 풍습을 다스린다. 머리털이 나게 하고 오장을 편안하게 하며 비위(脾胃)를 튼튼하게 하고 주리지 않게 하며 장수하게 한다.”며 인체에 주는 솔잎의 보건 및 의료적 효능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솔잎에 뛰여난 건강효과가 있다는 고대인들의 림상경험이 현대의학의 리론과 실험에 의해 륙속 증명되고 있다. 지금 일본에서는 솔잎건강활동이 전개되여 솔잎으로 신체를 튼튼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도 2년전부터 송엽액을 계속 쓴 결과 높던 혈압이 내려가고 겨울이면 심하던 기침이 나아졌으며 감기에 덜 걸릴 뿐만 아니라 치통과 잠자기 전에 느껴지던 다리의 불편함 등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칠순의 고령이지만 장백산으로 다니면서 식물조사를 하거나 광주, 란주, 북경 등지와 한국의 제주도, 춘천 등지를 두루 다니거나 밤 늦도록 글을 써도 큰 탈이 없다. 하여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우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본문을 집필하는 바이다. 솔의 항암작용 의사들은 인체의 해부를 통해 암의 자연치유를 적지 않게 발견하고 있다. 암의 맹아가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암을 유발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평생보건에 주의하며 항암활성물질이 풍부한 비타민 등을 적당히 먹으면 부지불식간에 암의 맹아가 위축되여 사람을 해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다. 이는 인류에게 암의 예방과 치료의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복음으로 된다. 송엽액을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체액을 인체의 정상적인 생리활동진행에 가장 적합한 알칼리성으로 보장하게 되는데 이는 암과 같은 성인병의 예방에 주요한 생리적 기초를 닦아주는 것으로 된다. 솔잎에는 현대의 약리실험에서 확인된 엽록소, 카로틴, 비타민C, 플라보노이드, 테르펜, 탄닌, 펙틴, 섬유소 등 항암활성성분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몸안에서 암발생요소를 격퇴하는 유력한 통일전선을 이루고 있다. 카로틴, 비타민C, 플라보노이드 등은 항산화제로서 체내 여분의 활성산소를 해체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암증을 예방하거나 암병소를 축소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다. 몸안에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활성산소는 체내에 침입한 병원균과 같은 이물을 공격하는 작용을 하기에 건강을 도모함에 필수적인 존재로 된다. 그러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건강에 해로운 습관은 사람의 몸안에 과량의 활성산소가 생기게 한다. 여분의 활성산소는 정상세포까지 공격대상으로 오인한다. 하여 활성산소의 습격을 받아 세포의 지방이 산화되여 과산화지방으로 되면 세포의 로화를 야기하고 유전자가 계속 산화되며 손상을 받아 암유전자로 돌연변이함으로써 몸안에 암세포가 생겨나게 한다. 솔잎을 꾸준히 먹으면 솔잎 속의 항암성분이 활성산소를 억제시키는 작용을 하기에 암발생의 기회가 퍽 줄어들게 된다. 솔을 건강식품으로 장기간 복용하면 건강장수하게 된다는 주요한 리유의 하나로 항암작용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솔잎에 많이 들어있는 섬유의 항암작용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암에 쉽게 걸리는 원인의 하나가 바로 식물성 섬유를 멀리하는 데 있다. 솔잎에는 수용성 섬유와 비수용성 섬유가 들어있다. 찌끼를 밭아낸 송엽액에는 수용성 섬유가 들어있다. 섬유는 장내의 발암물질과 유해물질을 흡착하여 해독함으로써 암을 예방하고 세포의 로화를 늦추는 작용을 한다. 또 섬유는 대장에서 분해되는 해로운 세균을 줄여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산생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발암물질이거나 유해물질이 들어있는 변이 머물러있는 직장이나 S자결장은 암발생률이 높다. 섬유는 장의 연동을 촉진함으로써 변의 배출을 촉진한다. 따라서 장내의 유해세균에 대한 분해작용으로 발암물질이 많이 형성되기 전에 배변이 가능하여 대장암을 예방할 수 있다. 때문에 육식을 많이 하고 조섬유를 적게 먹는 서양인들에게는 대장암이 많고 식물성 섬유를 많이 먹는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에게는 대장암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므로 솔잎을 짧게 썰어 찌끼가 남지 않을 정도로 절구로 찧은 후 자주 먹으면 건강에 리롭다. 솔의 약효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면 금방 뜯어온 솔잎을 먹어야 한다. 그것은 싱싱한 솔잎으로 만든 록즙에는 그 어떤 고가의 상품약보다 활성상태의 건강소가 더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훈춘해당화 우리 백의동포의 노래에서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海棠花)’라는 가사가 나오면 어쩐지 어깨춤이 절로 난다. 그만큼 해당화는 우리 민족 정신의 구성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두만강 기슭에 자리한 연변의 훈춘 경신마을에 가면 모래언덕에서 아릿다운 모습으로 반겨주는 ‘톱스타’인 진분홍 해당화를 보게 된다. 붉게 타오르는 그 열매는 건강을 지켜주는 비타민덩어리이다. 나는 제철에 그 곳에 갈 때마다 흐르는 세월에 따라 사라지기만 하는 해당화가 아쉬워 떠나기 싫어진다. 해당화의 자생지는 중국 북부 해안 모래땅에 국한되여있지만 거의 멸종되다싶이 하여 그 자생정황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식물연구소의 권위들이 집필한 ≪중국고등식물도감≫에도 해당화가 올려졌는데 그것은 자생종(自生种)이 아닌 원예종(园艺种)이다. 이는 중국에서 해당화는 이미 멸종되여가는 ‘희귀종’임을 증명해준다. 나는 10여년전에 훈춘 반석에서 식물육종에 몸을 담고 있는 나의 제자 박영호(朴永虎, 훈춘시농업방송학교 부교장, 교수급 연구원)를 만나 그에게 “훈춘에 해당화기지를 만들고 관광업을 발전, 확대시키면 엄청난 경제적 수입을 얻게 되고 인민들의 생활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제발전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라고 해당화기지에 대해 건의하였다. 그 후 박영호는 훈춘해당화를 자기 식물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 모든 심혈을 몰부었다. 아래에 나는 박영호 연구원이 쓴 글을 인용한다. 저는 김수철 교수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연변농학원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 줄곧 훈춘에서 과수육종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2002년도 어느 날이였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이 저의 시험전에 오셔서 제가 운영하는 사과육종시험전을 지도하면서 이런 건의를 하셨습니다. “훈춘 경신에는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해당화자원이 풍부합니다.박선생이 경신 해당화를 연구해보세요. 해당화열매는 비타민함량이 아주 높고 항산화물질 또한 아주 풍부한 건강식품원료입니다. 좋은 해당화품종을 자원포(资源圃)로부터 시작하여 잡교육종을 한다면 좋은 과학기술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김교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훈춘해당화 삽목 번식과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14년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2013년부터 연변대학 설계신(薛桂新) 부교수와 합작하여 해당화 성분분석을 주제로 한 해당화 연구과제를 3년에 걸쳐 완성하였고 2017년에 성급 감정에 통과되였습니다. 감정회의에서는 “해당화연구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원포(资源圃)로 보귀한 자원을 수집하였고 두가지 좋은 류형으로 품종배육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되였습니다. 훈춘은 해양성 기후로 하여 겨울에는 너무 춥지 않고 여름에는 선선합니다. 따라서 경신에는 해양성 기후에 적응된 해당화가 잘 자랄 수 있습니다. 해당화는 장미속 식물입니다. 품질이 좋은 해당화는 국외는 일본의 혹가이도와 혼슈 중부, 로씨야의 연해지구와 깜챠뜨까반도, 그리고 한국의 동서해안 바다가 모래톱에 많이 분포되였습니다. 훈춘의 해당화는 우리 나라 2급 진귀품종, 길림성 1급 진귀식물로 선정되였습니다. 해당화는 키가 1.5m 좌우인데 형태가 개장형(开张形)으로서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고 병충해에 잘 견디며 특히 내한성이 아주 강합니다. 해당화의 가치와 약용을 략술한다면 첫째로는 과학연구가치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훈춘 경신진 자생해당화 자연분포만이 생태연구, 생물학연구, 유전자원연구에 아주 중요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관상용 가치입니다. 해당화는 꽃, 잎, 열매가 아름다우며 특히 해당화꽃이 뿜는 그윽한 향기는 사람들에게 아주 경쾌한 기분을 선사해줍니다. 그래서 해당화는 ‘꽃중의 왕’이라는 별호로 관상용 식물에서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셋째로는 해당화열매는 건강식품원료입니다. 해당화열매는 비타민C가 풍부하고 항암작용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였습니다. 해당화의 영양분함량은 귤의 22배, 사과의 100배, 딸기의 20배, 키위의 8배, 보리수아재비의 5배입니다. 해당화열매에는 당, 유기산, 단백질, 탄닌 등 18가지의 아미노산과 17가지의 광물질이 함유되였습니다. 특히 칼슘함량이 높기에 어린이들의 영양제로 리용됩니다. 일본, 한국 등 나라의 연구에 따르면 해당화는 약용, 미용, 로쇠방지, 항암, 혈당강하, 복사방지 등 여러가지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였습니다. 특히 해당화는 로쇠한 피부세포를 회복시켜주기에 미용효과에 좋고 피부세포의 활성을 제고하기에 피부재생작용도 합니다. 2018년 10월 20일에 열린 ‘중국원예학회’에서 제가 발표한 이란 론문이 모든 참가자들의 인정을 받았고 또 전문가들로부터 “훈춘에서 이 연구항목을 완성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해당화열매의 가공 및 신선식품종자원포(源圃)를 건립한 것으로서 국가 2급 보호식물을 개발하고 성 1급 진귀식물을 보호하고 개발하는 데 중대한 의의가 있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박영호
310    옛이야기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4799  추천:0  2020-03-03
         세상에 공짜가 없다                                               옛날에 지혜로운 왕이 신하들을 불러 “백성을 가르칠 인생의 방법을 쓰라”고 했습니다. 신하들은 온갖 지혜를 모아 “백성을 가르칠 인생의 방법”이란 책 열 두권을 편찬하였습니다.   왕은 책을 보고  근심스레 “이 책은 시간이 바쁜사람들이 읽기가 너무 힘들다.  한권으로 줄여 보아라”고   다시 명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 지혜릏 모아 한권으로 줄이니 왕은 그 책을 보고서 “참 잘 만들었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문맹자들은 볼수 없겠구나”하면서 들으면 바로 알수 있는 단 한줄 줄이라”고 또 다시 명하였답니다.  그래서 신하들의 오랜 연구끝에 나온 한  줄로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였습니다..이에 왕은 대만족하였습니다. 세상의 만사가 가고(去) 오는 (來) 거래입니다. 물이 수증기로 되어 하늘로 올랐다가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돌아오듯이 인간의 령혼도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오는 거래(去來) 입니다. 이 세상에 거래 아닌 것이 없으니 ‘道는 거래다’ 고  합니다. 그러나 공짜 거래는 없습니다.   물건을 샀으면 그 대가로 값을 치루는 것이 거래요 로동을 하였으면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도 거래며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것도 거래인 것입니다.   산속에 들어가 골짜구니를 향해 소리를 질러 봅시다. “너 이놈!” 하면 저쪽 에서도 “너 이놈!” 하고 대답 하고 “사랑해!” 하면 저쪽 에서도 “사랑해!” 하고 대답 합니다. 아뭇소리도 안하면 저쪽 역시 아뭇소리를 안합니다.   나에게 부딛쳐 오는 모든 것을 따지고 보면 자연이 모두 내가 짓고 내가 받는 리치임을 들려줍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고 미워하면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욕했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면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結을 맺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가고 옴에 피할 수가 없다[去來難避]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메아리다 “상대성 원리가 없지 아니하다. 착하게 행하면 착함이 오고, 악하게 행하면 악함이 오고, 적선지가(積善之家)에는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악지가(積惡之家)에는 필유여앙(必有餘殃) 이라“ (도덕경 43면) 이것이 바로 도덕원리입니다. “흔히 운이 좋다“  ”복을 타고 났다“ 는 말을 합니다만 그 운이나 복도 공짜는 아니라고 합니다. 운과 복은 어떻게 다를까요?  福은 전생 차생(此生)에 자신이 쌓아놓은 선행과 공덕의 결과물 이라고 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남을 위해 많은 것을 베풀어 자신의 인생 은행계좌에 저축을 많이 해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 먹는 것을 ”福을 타고 났다“ 고  합니다.   반면에 運은 때때로 그야말로 우연히 올 수도 있습니다. 투기를 해서 성공을 했다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運이라는 말이 ‘돌다, 돌리다’ 라는 뜻이 들어 있듯이 運은 은행에서 돈을 돌려 받은 (대출받은)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運이 좋아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노력 없이 ‘공짜로’ 얻은 것이니 그것은 무형 가운데 빚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불행해지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큰 運을 받고 그것을 유지 하려면 반드시 좋은일을 하여 일부를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福이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것이라면 運은 먼저 받고 나중에 주어야 하는 것 이라고 할까요? .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남의 것 먹고 빚지고 잘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메아리입니다. 주고 받는, 가고 오는 메아리! “여곡응향(如谷應響)-골짜기에서 메아리 치듯이 , 여형수영(如形隨影)- 형태따라 그림자 지듯이 ” (도덕경 63면) 오기활
309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7) 댓글:  조회:3431  추천:1  2020-03-01
                                          7. 의학과 맺은 인연 내가 6살 때 백부는 주역에 연구가 깊은 조양천의 명진사로 불리우는 최진사를 청하여 나의 팔자(출생 년월일, 시의 간지 두자씩)를 알려주며 나의 사주(四柱)를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때 최진사는 나의 사주팔자를 보고 역출한 운세에 따라 “이 아이의 천직은 명의(名医)이므로 이 아이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시우.”라고 당부했단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으로 꾸었던 꿈이 의사였다. 나의 의학공부는 1945년 ‘8. 15’해방후 리시진의 ≪본초강목≫, 허준의 ≪동의보감≫ 등 의학서적을 자습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1947년초, 나는 룡정의과대학의 학생모집광고를 본 후 물을 만난 고기마냥 주저없이 소학교 교직을 버리고 응시한 결과 룡정의과대학에 합격되였다. 하지만 룡정의과대학을 룡정에 있는 군정대학에서 이관(移管)하면서 신입생들의 정치심사를 재심하게 되였는데 결과 우리 집 가정성분이 ‘규편중농’이라는 데서 정치심사에 걸려 락방되였다. 제2차세계대전 때인 대동아전쟁 말기에 사회적으로 전염병이 류행되며 여러가지 이난병들이 나타났다. 그 때 우리 집에서는 내가 먼저 발진질부사에 전염되였고 내가 병이 나으니 백부와 7촌숙부 내외가 이 병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때로부터 나는 의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 백부, 7촌숙부 내외가 련이어 전염병에 걸리자 의원들이 자주 왕진을 다녔고 나도 심부름으로 의원네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 집에 왕진을 다닌 의원들로는 중흥툰(지금의 촌급 단위)에 있는 나의 숙부벌이 되는 김재혁(金在赫) 등 세명이였다. 김재혁은 내가 중의에 흥취를 가진 것을 알고는 나에게 허준의 ≪동의보감≫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우리 마을 동산 기슭 안굽에서 사는 한족인 왕의사한테도 종종 왕진을 청했는데 나는 약을 지으려고 그 집에 자주 다니기도 하였다. 왕의사는 50대 중년으로서 진단, 진맥을 잘했고 약첩의 음편(饮片)도 깨끗했으며 가루약종이 적었다. 나는 연길서시장에 가기만 하면 주머니를 거의다 털어서 낡은 책들을 구입하여 의사공부를 하였다. 당시는 전란 때여서 신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없었고 다만 낡은 책들을 회수하여 파는 간판도 없는 책가게들뿐이였다. 나는 해방전에 서울에서 출판한 ≪동의강화(东医讲话)≫라는 보급서적을 읽으면서 중의학기초리론을 공부하게 되였다. 토지개혁 때에 우리 집이 부농으로 청산되면서 이 책도 잃어졌는데 책 저자의 성명도 모르며 재독할 기회도 더는 없게 되였다. 해방초에 나는 연길서시장 고서점의 먼지 속에서 ≪편작심서(扁鹊心书)≫라는 작은 책을 입수하게 되였다. 편작은 중국 전국시대의 명의로서 당시 조(赵), 진(秦), 주(周) 나라에서 의술로 행세하였으며 그의 친필저서는 유실되였다고 한다. ≪편작심서≫는 송나라의 한 의사가 민간에서 편작의 약방문(药方文)을 수집하여 지은 책인데 이 책이 진짜로 편작의 약방문인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 책은 중의 리론과 림상을 겸한 론저로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에서 중심사상과 편작의 응용리론은 ‘대병의구(大病宜灸)’ 네 글자로 요약되였다. 즉 중병에는 뜸이라는 말이다. 내가 태양구활동중심에 다니며 모택동사상선전대 조직활동을 하던 때인1947년 봄의 어느 날이였다. 오후 세시경에 집에서 사람을 보내여 젖먹이가 생명이 위급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달음박질쳐 집에 도착하니 태여난 지 5개월밖에 안되는 둘째아들 상욱이가 낯이 새파랗게 질리고 들숨보다는 날숨이 더 많아 당금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아들이 사경에 이르렀는데 어디에 가서 의사를 모셔온단 말인가. 그 때에는 촌에 전화도 없어 의사를 모셔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대병의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나는 담요에서 솜을 뽑아 뜸쑥을 대신하여 불을 붙인 후 용천혈(涌泉穴, 발바닥)과 신관혈(神关穴, 배꼽)에 뜸을 반복했다. 한참후 날숨만 심하게 쉬며 울지도 못하던 애가 불시에 “응아―” 하며 울기 시작하더니 호흡이 정상적으로 되고 경련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증상도 사라졌다. 이렇게 솜뜸으로 아이를 살려낸 후에 관찰해보니 아무런 부작용도 후유증도 없었다. 아이의 급병은 풍한감기(风寒感冒)로 온 소아경풍(小儿惊风)으로서 솜뜸으로 깨끗이 치유되였던 것이다. 그 후부터 ‘대병의구’ 네 글자는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건강비법으로 되였다. 이 밖에도 몇가지 사례를 곁든다. 1) 1952년에 나는 신장결핵병에 걸려 혈뇨까지 보았는데 연변병원의 항균치료를 받으면서 지탱하다가 결국에는 1953년에 뜸으로 완치되였다. 2) 지난 50년대에 뜸으로 허리병으로 인한 ‘절름발’증상을 치료해 농학원의 뉴스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감기는 도꼬마리로; 배 아픈 병은 리질풀, 익모초, 쑥으로 치료하였다. 62세부터 병원을 몰랐고 94세인 지금도 뜸으로 몸건강을 지킨다. 3) 아들의 20년 허리디스크, 골증식도 한해 겨울 뜸으로 치료하여 완치하였다. 4) 며느리의 갑상선암 수술후 통증도 국부뜸으로 치료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유증이 없다. 5) 딸의 유종병(乳肿病)도 큰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장했지만 딸의 요구에 의해 뜸으로 해결했다. 지금 우리 집 식구들은 몸이 불편하면 나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절로 뜸을 뜨며 병을 치료한다. 2017년 초겨울 어느 날, 나는 창문 밑에 있는 침대에서 자다가 새벽에 문바람을 맞고 한동안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생각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초기중풍증세라고 판단하고 정신을 차려 억지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후 항상 준비하고 있던 보건상자 앞까지 겨우 기여갔다. 그런 후 용천혈에 뜸을 떴더니 한참후에 몸움직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부터 나는 한문으로 ‘죽음체험’이란 넉자를 침대머리에 붙여놓고는 오늘을 삶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다그치고 있다.
30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6) 댓글:  조회:3791  추천:0  2020-02-23
                                         6. 저주로운 성분‘딱지’ 나의 백부는 연길현 태양구(태양향) 횡도 9대(지금의 향양툰)에서 논농사를 하는 전형적인 독농가(笃农家)로 소문이 났다. 백부는 1943년전까지는 지주집의 논을 소작하는 소작농이였는데 1943년부터는 연길에 있는 한 지인의 소개로 연길금융부에서 대부금을 받은 후 집 근처의 수전 한쌍을 삼으로써 자작농으로 되였다. 해방후 백부네는 논 한쌍, 여섯칸짜리 초가집 한채, 소 한마리가 있었고 농망기에는 일군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여 1946년 토지개혁 때에 성분이 부농으로 획분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밭, 소, 여섯칸짜리 초가집, 손잡이재봉침까지도 몰수를 당했다. 다행히도 백부가 민분(民愤)이 없었기에 체형(体刑)은 면했지만 횡도 8대 강뚝마을의 헐망한 돌막단칸집에 이사를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돌막단칸집은 비록 헐망하였지만 서쪽에서 흐르는 구수하(조양하) 강물이 하도 좋고 또 마을사람들과도 가깝게 보낼 수 있어 나는 서운한 감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 때 분배를 받은 강변땅은 자갈돌이 많아 농사일은 힘들었지만 곡식낟알만은 잘 여물었다. 2년후 상급에서는 우리 집 부농성분을 ‘규편(纠编)중농’으로 바로잡아주었고 청산했던 집재산도 돌려주었다. 그러나 중농 앞에 ‘규편’이란 도장이 찍힌 것으로 하여 우리 가족들은 사회생활과 정치발전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규편’이란 부농을 시정하여 중농으로 편성한다는 뜻이였건만 당시에 기층간부와 군중들은 ‘규편(纠编)’을 ‘기편(欺骗)’으로 오해하며 ‘나쁜 편’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당시 당의 농촌계급로선은 “빈하중농에 의거하고 중농과 단결하며 지주부농을 고립시키는 것”으로서 중농은 단결대상이였다. ‘규편중농’은 나의 인생길에서도 거침돌이였다. 1946년 1월에 횡도 7대에 있은 나의 소학교동창인 임철순(任喆淳)의 소개로 나는 태양구중심소학교 교원으로 취직되여 옹근 1년을 동전 한푼 받지 않고 몇리 길을 통근하면서 교직에 충성하였다. 비록 무보수로동을 하였지만 날마다 천진하고 귀여운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이듬해에 룡정의과대학에서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나는 태양에서 도보로 룡정에 가서 시험을 쳤는데 합격되였다. 나의 첫 꿈은 의사였다. 1945년 ‘8. 15’후부터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리시진의 ≪본초강목≫, 허준의 ≪동의보감≫ 등 의학서들을 열심히 자습하였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소원을 성취하였으니 그 때의 기쁨을 한입으로 표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룡정의과대학이 개학을 하기도 전에 룡정에 있는 군정대학에서 룡정의과대학을 이관(移管)하면서 신입생들의 정치심사를 다시 하게 되였다. 하여 1주일후에 걸어서 룡정에 가 알아보았더니 그 놈의 ‘규편’딱지 때문에 내가 락방되였다는 것이였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35리 길을 걸어 고향에 돌아오니 정들었던 고향사람들이 모두 생소해보였고 또 나를 깔보고 경멸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규편’딱지 때문에 징병모집에도 신청할 수 없었다. 나의 앞길은 갈수록 막막하기만 하였다…
307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련재 5) 댓글:  조회:4049  추천:0  2020-02-19
                       5. 나의 첫 교직생활 1945년 12월, 내가 횡도자(横道子)에서 민주대동맹 태양지부 청년위원으로 한창 활약하고 있을 때 나의 소학교 2학년 동창생인 임철순(任喆淳)이 나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였다. 경상북도 이민의 아들인 임철순은 밤색 얼굴에 우뚝 선 코, 강직한 성격과 강한 결단성으로 하여 그에게서는 남성적인 기질이 다분히 느껴졌다. 게다가 음악, 미술, 체육 등 특장들까지 겸비한 데서 그는  태양구중심소학교의 둘도 없는 엘리트였다. 어느 날 철순이가 나를 찾아와 나에게 태양구중심소학교 교사로 가면 어떤가는 자기의  의사를 밝혔다. 나는 교육학이나 심리학 방면에 문외한이다보니 애들교학을 잘해낼 수 있을지 근심되면서도 마땅한 자리가 있다면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며칠후 철순이의 덕분이였는지 아니면 그 때까지만 해도 소학교교원이 많이 부족했던 사정에서였는지 아무튼 학교당국에서는 별말이 없이 나를 받아들였다. 내가 담임한 학급은 락제생학급으로 불리우는 1학년 2반이였다. 나는 락제생이 말 대로 그렇게 많다(25명)면 필경 담임교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1학년 1반의 담임은 리학림(李学林)선생이였는데 그는 이름 그대로 명실공히 훌륭한 교사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리선생은 교수안도 잘 짜고 학생들의 마음도 잘 헤아려주었기에 모든 학생들이 한결같이 그의 주위에 똘똘 뭉쳐 움직이였는데 나의 재간으로는 도저히 흉내도 못 낼 지경이였다. 나는 얼마간의 체험으로 유치원이나 소학교 저학년을 잘 가르치려면 사범교육을 받아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어느 날 우리 학급에서 모 학생이 학용품을 도적맞힌 사건이 발생했는데 나는 경솔하게 아이들의 말만 믿고 한 학생을 의심하던 데로부터 엄벌하기까지에 이르러 그 학생 부모의 불만을 사게 되였다.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고 해도, 또 설사 물건을 훔쳤다 해도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는데 나의 너무 경솔한 처사 때문에 일이 커지게 된 것이였다. 교사의 직책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나는 도리여 소학교 교직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학생의 이름이 권룡봉(权龙凤)이라는 것과 그의 아버지가 권춘길(权春吉)이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 글로써 그들에게 속죄하는 바이다. 내가 가르친 학급의 반장은 김주남(金柱男)이라고 부르는 녀학생이였는데 알고 보면 그 녀학생이 남자이름을 가진 것도 다 원인이 있었다. 주남의 부모님들은 련속 딸만 낳게 되자 주남이가 딸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이름으로 지었는데 그렇게 지으면 다음번에 낳는 애가 남자애일 가능성이 많단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우리 학급에서 공부했던 김주남, 임응수(任应洙), 권룡봉 등 귀여운 학생들이 매우 그립고 또 지금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만약 그네들이 나의 이 글을 읽는다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오르기도 한다. 이 밖에 그 시절에 나와 함께 걸어서 출퇴근하던 엄화수(严和洙)라는 교사도 잊을 수 없다. 그 때 우리 두 남자는 출퇴근길에서 마치 사랑을 나누는 련인마냥 여러가지 끝도 없는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서로 푸른 꿈을 키웠다. 엄화수는 나에게 가정생활 얘기도 허물없이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조양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된 그는 녀자친구를 사귀게 되였다. 그들 두 청춘남녀에게는 꿈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가끔씩은 함께 행복한 가정의 설계도도 그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씨가 녀자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는데 아버지와 두 형님이 결사코 반대해나서는 바람에 녀자친구는 울면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엄씨는 그 때 울면서 뛰여가는 녀자친구의 뒤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많이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의 사연을 듣고 난 후에야 그가 항상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였다. 썩 후에 전해들었지만 엄화수는 교직을 그만두고 연변조선족자치주수리국에 전근하여 일하다가 또 안도복흥저수지에 전근해갔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1년간의 소학교 교직생활이였지만 그 사이 정든 교사들의 이야기를 하려니 끝이 없다. 그 때의 많고 많은 얘기들중에서 한가지만은 빼놓을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보탬하려고 한다. 태양소학교 한계성(韩启星) 교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길시중앙소학교에서 전근해온 한교장은 정말 팔방미인이였다. 1946년 8월 여름방학에 한교장은 교사들을 조직하여 태양구 중심인 횡도자거리에서 문예공연을 하였는데 이 때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한교장은 작곡, 작사뿐만 아니라 교원들을 조직하여 라는 노래와 를 무대에 올렸으며 친히 바이올인반주까지 하였다. 그리고 15명의 교사들이 배역을 맡은 이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 연극에서 나는 일제의 통치하에 신음하는 가련한 농민들을 학대하는 경관역을 맡았다. 무대미술은 그의 지도하에서 내가 맡게 되였고 배우들의 화장도 처음에는 그가 하다가 나중에는 나에게 모두 맡겼다. 그 때 우리 학교에는 음악을 가르치는 김유신(金有信)이라는 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한교장의 지시에 따라 무대음악활동을 전부 맡아하였다. 김유신선생은 성악도 잘했고 또 특별히 긴 손가락으로 손풍금도 아주 잘 쳤다. 그뿐만 아니라 쭉 빠진 체격에 얼굴 생김새 또한 톱스타형으로서 그가 만약 지금 시대에서 살았더라면 아마도 숱한 녀성들이 그의 팬으로 되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공연이 너무나도 성공적이여서 공연후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물론 주변의 관중들까지도 태양소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모두 재간둥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6년 일년간의 교직생활은 나로 하여금 사상상에서 진보하고 실천 가운데서 교육에 관한 지식을 익히도록 하였다. 주안상을 차려놓고 서로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즐기던 그 때 그 시절이 70년후인 지금에도 그립기만 하다.
306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련재 4) 댓글:  조회:4156  추천:0  2020-02-10
4, ‘민주대동맹(民主大同盟)’ 청년위원으로 연길현 태양구 민주대동맹은 나에게 사회주의적 사상기틀을 마련해준 첫 혁명조직이였다. 지희겸(池喜谦, 연변대학 교수)이 연길에서 조직한 민주대동맹은 중국공산당 군중조직으로서 당을 옹호하고 당의 시정방침정책을 선전하며 국민당을 반대하여 사회의 치안을 유지하는 과도기적 기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때 촌민주대동맹의 위원들로는 리희일(李喜日), 최일룡(崔日龙), 김봉섭(金风燮), 김춘식(金春植) 등이였다. 당시에 연길현 태양구에는 우수한 청년들이 아주 많았는데 그 때에 촌민주대동맹에서는 유일하게 나를 청년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45년 12월, 촌민주대동맹에서 조직한 사회주의사상교육강습반이 개최되였다. 촌민주대동맹 위원들이 각각 강습내용을 분담한 후 매번 강의를 끝내고는 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태양구내에서 30여명이 입선되였는데 횡도자촌 민주대동맹 사무실에 집중하였다. 그번 강습반은 10여일간 열렸다. 강의교재는 당시 연변당정령도간부들이 정부사업일군대회에서 한 발언고를 내가 등사원지에 써서 등사기로 등사한 후 발급하였다. 학습내용은 중국사회주의혁명력사, 중국공산당 탄생, 당의 강령, 당의 혁명활동, 2만 5천리장정, 국민당력사, 국민당의 반민주 반혁명 진상, 국공합작 등 계렬적인 혁명기초지식이였다. 집체훈련은 위원들이 분공하여 강의하고 각자가 심득을 발표한 후 심득내용의 가부를 토론하였다. 대동맹의 사무실은 큰 온돌방에 이부자리까지 있어 합숙을 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토론할 수 있어 아주 편리하였다. 나는 강습반을 통해 혁명사업의 리론적 기초와 실천에 관한 기본리론을 터득하기 시작하였고 중국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의 리론적 기초에서 건립되였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2만 5천리장정을 완성한 위대한 업적도 알게 되였고 모택동, 주덕, 주은래 등 동지들의 백절불굴의 위대한 혁명적 정신과 혁명적 실천도 알게 되였다. 이 강습반은 나를 놓고 말하면 그 수확이 아주 컸는바 당시의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팔로군의 사상으로 머리를 무장하고 국민당을 철저히 반대하는 사상을 수립”한 듯하였다. 그 때 위원들은 구역을 분담한 후 기층에 내려가 같은 학습방법으로 거듭하여 강습반을 조직하였고 또 그 강습반에서 강습을 받은 지방대표들 역시 기층에 내려가 상술한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강습내용을 전수하였다. 이런 선전활동으로 하여 군중들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구별점을 비교적 깊이 있게 인식할 수 있었고 오직 공산당만이 중국을 광명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도리를 알게 됨으로써 공산당을 따르려는 확고한 마음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이 민주대동맹 조직활동은 군중들에게 토지혁명사업의 사상적 기초를 닦아주었다. 팔로군의 토지개혁공작대의 왕두(王斗)가 태양구에 파견되면서 토지개혁공작은 고조를 이루게 되였다. 나는 태양구에서 한동안 전개되였던 민주대동맹활동은 지방정권이 정식으로 수립되기까지 ‘8. 15’해방과 전란으로 어지러워졌던 군중들의 정견을 중국공산당의 주장 쪽으로 기울게 하였고 의식형태교육과 사회치안유지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민주대동맹에 참가한 것을 지금도 큰 영광으로 느끼군 한다.
305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3) 댓글:  조회:3896  추천:0  2020-02-01
               3. ‘국민최고학부’를 졸업하니까… 들어가는 말로 일본의 교육제도를 곁들어본다. 일본은 자기들의 식민지로 동북에 ‘만주제국’을 세우고 여러가지 정책으로 ‘만주국민’을 부려먹었다. 그 때 소학교 6년 졸업생은 ‘우급문화국민’, 중학교 3년 졸업생은 ‘고등문화국민’이라 칭했는데 고중 이상부터는 공부길을 어렵게 만들어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중학교를 졸업한 후 전업적인 직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이런 목적과 수단으로 중학교의 명칭을 ‘국민고등학교’라고 명명하였고 국민들이 중학교를 졸업하면 ‘최고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하여 자부감을 느끼며 더 이상의 학업을 포기하고 전업적인 직업에 일심하도록 하는 것이 일본교육제도에 대한 나의 인식이다. 아래는 송우혜(宋友惠)가 펴낸 ≪윤동주평전≫(열음사 출판, 1988년)에서 일본교육제도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고등학교’란 학제를 만들었다. 인생 전반에 대한 교양의 바탕이 없는 학문추구는 편파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 고등학교에서 교양과목을 이수하여 인격적인 바탕을 만들게 하고 그 우에다 대학의 전문지식을 쌓게 한다는 구상이였다. (≪윤동주평전≫ 152페지) 1897년에 세워진 숭실학교(평양)가 1908년에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정식으로 ‘대학’으로 인가를 받고 대학부와 중학부를 갖춘 관서제일의 신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았는데도 일제당국은 자기들의 교육제도로 조선인들에게 대학으로 ‘경성제대’ 하나만 두는 정책을 실시하여 ‘숭실대학’을 ‘숭실전문학교’로 격하시켰다. (≪윤동주평전≫ 294페지) 나는 일제 때인 73년전에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때 국민고등학교에서는 기본상 보통교육이 아닌 직업기능교육을 실시했다. 내가 처음 다닌 연길국민고등학교도 농학과 축목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중학교였는데 1943년에 왕청현을 축목현으로 건설한다며 연길국민고등학교의 축목전공생들을 모두 왕청에 집결시킴으로써 다시 다니게 된 학교가 왕청국민고등학교였다. 이 학교 역시 축목수의과를 전문으로 배우는 중학교였다. 그 때 내가 왕청국민고등학교로 가야 한다니 금방 결혼한 안해도 따라 가겠다며 울며불며했다. 하지만 중학생으로서 장가를 간 것만 해도 남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는데 뻔뻔스럽게 안해까지 데리고 가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되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비밀 아닌 비밀을 세상에 밝히는 것이지만 내가 방학 때마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 부부는 남몰래 부부다툼을 하군 하였다. 1944년말에 내가 왕청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학교에서는 나를 도문시친화목재주식회사(亲和木材株式会社)의 역축보건지도원으로 배치하였다. 그 때 나의 직접 상급은 키가 작달막하고 아담진 도노이(殿井)라고 부르는 일본인이였는데 그는 나를 직접 그의 회사인 화룡현 팔가자출장소(出张所)에 데리고 가서 그 출장소에 부임시키는 것이였다. 주식은 직원 단체숙사에서 했는데 로동자들의 대우는 노예와 다름이 없는 최하층 대우였다. 때마다 풀기 없고 썩은 냄새가 나는 조밥에 장졸임무우반찬을 먹었으며 랭수로 겨우 갈증을 풀었다. 나는 난생처음 이런 푸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스산한 곳마저도 나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글쎄 나더러 목재발구를 끌러 가란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물으니 벌목장인 고동하작업터로 가란다. 자체로 이부자리를 준비해야 한다기에 이부자리를 마련하려고 횡도에 있는 집으로 가니 안해는 다른 이부자리는 너무 헐어 내놓기 부끄럽다며 결혼 첫날 이불을 가지고 가란다. 그 때는 팔가자에서 고동하로 가는 교통편이 려객용 소철이였는데 정각운행이 아니였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석탄검댕이투성인 목재운반용 소철에 앉아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도 비싼 비단이불을 마구 덮는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나는 산골사람들의 뉴스인물로 되고 말았다. 고동하의 숙박과 식당 환경이 팔가자보다는 좀 났다고는 하지만 역시 거기에서 거기였다. 겨울이 오니 또 벌목시기라며 나를 고동하 상류인 로령(老岭)으로 가란다. 나는 고동하로부터 도보로 가면서 백설에 덮인 침활혼성림(针阔混成林)의 절경을 만긱하였다. 그 때는 21세 청춘이라 미에 대한 감수력이 뛰여났던 것 같다. 활엽수잎은 거의 모두 떨어지고 침엽수잎들만이 백설 속에서 독야청청하며 저 푸른 하늘을 향해 자랑을 떨치니 그 절경에 누구인들 매혹되지 않으랴! 채벌지역의 건물들은 모두 통나무로 지었고 붉게 달아오른 난로 안에서는 탁탁 소리를 내면서 토막나무들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하루세끼는 기껏해야 이밥에 마늘장졸임이였다. 피곤한 몸을 지탱하려고 잠자리에 들면 검정색 두루치기 이불이 람루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목재검사원은 왕등거(王登举)라고 부르는 한족이였는데 늘 나와 일어로 대화하면서 나를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이곳의 책임자는 와끼야마라는 일본인이였는데 그는 일본 북해도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다가 여기에 와서 벌목기술까지 맡고 있었다. 와끼야마는 산으로 다닐 때 늘 옆구리에 큰 칼을 차고 다녔는데 아무튼 나무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한테서 나무이름을 많이 배웠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 때의 배움이 정말 다행스러웠다. 당시 벌목한 나무운반은 화룡현에서 온 20여명의 소발구군들이 전담하였다. 그런데 그 해에 전염성이 아주 강한 구제역(口蹄疫)이 돌아서 한동안 원목을 운반하지 못했다. 구제역이란 소나 돼지 따위의 동물들이 잘 걸리는,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 병으로서 입의 점막이나 발톱 사이의 피부에 물집이 생기며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식욕이 떨어지는 증상을 말한다. 비록 죽는 확률은 높지 않았지만 소들이 이 병에 걸리면 발톱이 빠져 부릴 수 없으므로 벌목운수에 있어서 그 손실이 막대하였다. 팔가자출장소의 역축보건원인 나는 방역과 치료를 담당했기에 약품을 구매하러 조양천으로 자주 다녀야 했다. 한번은 내가 조양천의 숙부가 발진질부사(发疹窒扶斯)에 걸려 치료중인 것을 모르고 숙부네 집에 갔다가 그 병에 감염되기도 했는데 잠복기여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동안 전염병이 감염된 몸으로 송강출장을 자주 다녀야 했다. 그 때에는 송강을 안도라고 불렀다. 그 때에는 뻐스에 승객이 넘쳐나면 큰 화물트럭으로 대리운송을 하였다. 내가 출장임무를 끝마치고 팔가자출장소로 돌아갈 때 마침 잠복기였던 발진질부사가 발작하여 하루에 2~3번씩 전신경련을 일으켰다. 하루는 아픈 몸으로 겨우 뻐스정거장에 이르니 뻐스에 자리가 없어 트럭을 타지 않으면 안되였다. 송강에서부터 명월구까지는 8시간 걸린다. 비좁은 트럭에 앉아 오다가 세번이나 전신경련을 일으키고 나니 입이 말라 말도 번질 수 없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겨우 명월구기차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조양천에 이른 후 다시 화룡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서야 팔가자출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겨우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벽에 기대여선 후 혀가 꼬부라진 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발진질부사에 걸린 사람이오. 그러니 나한테 접근하지 마오. 빨리 나를 격리시켜야 하오!” 마침 출장소에 몇몇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행이였다. 출장소에서는 아다찌라는 일본성을 가진 청년을 나에게 배치하여 그 날 저녁 기차편으로 나를 조양천에 있는 숙부네 집까지 데려다주게 하였다. 그 날(1945년 4월 1일)인즉 바로 조양천 숙부가 운명한 날이여서 아버지, 백부, 둘째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친척들이 와있었다. 이런 북새판에 중환자인 나까지 갔으니 온 집안이 수라장이 되였다. 친척들은 나를 옆집에 보내였다.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헛소리만 치면서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1945년 4월 12일 10시경에 대양촌 류신툰에서 한 마차부가 우리를 태우려고 마차를 몰고 왔다. 마차부는 ‘아리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족 중년남자였는데 성은 장씨였다. 나는 백부, 둘째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게 되였는데 조양천 북쪽 태동 부근에 이르니 물도랑에서 쏴쏴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였다. 나는 고생스럽게 앓기보다는 오히려 죽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으로 이불을 헤치고 물에 뛰여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불을 꽁꽁 여며주며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니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될 수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나처럼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적잖게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나는 이불 속에 파묻혀 이런저런 환각에 빠지군 했다. 내 몸이 때론 물이 되고 때론 돌이 되고 때론 흙이 되면서 말이다. 나는 반주검이 된 몸으로 어떻게 집으로 갔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희미한 호롱불이 방구석에서 명멸하듯 사위가 어두워진 방안은 숨 쉬기조차도 너무 힘들었다. 온몸을 동강내여 온 방안에 뿌려놓는듯, 정신이 오락 가락하여 땅바닥에 잦아드는듯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환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때론 전혀 아픈 느낌도 받지 못할 때가 있었다. ‘죽을 때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나는 삼수(氵)변에 혀(舌)를 붙인 살 ‘활(活)’의 뜻을 그 때에야 실감했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혀가 젖어있어야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였다. 집에 돌아와 몇몇 의원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나는 건강한 몸을 되찾게 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송강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8. 15’해방을 맞이하게 되였다.  
304    인생의 지혜가 담겨있는 이야기들 댓글:  조회:4927  추천:0  2020-01-29
어느 날 려행자 다섯 명이 하늘 문 앞에 도착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하늘을 지키는 문지기가 려행자들에게 물었다. “나는 종교입니다.” “나는 청춘입니다.” “나는 리해입니다.” “나는 지성입니다.” “나는 지헤입이다,” 이에 하늘의 문지기가 말했다. “각자가 하는 일을 말해 보시오,” 그러자 종교는 무릎을 끌고 기도를 했다. 청춘은 깔깔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리해는 가만히 않아 이야기를 들었다. 지성은 분석해서 견해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혜는 한 편의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 안에는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1, 대왕의 선물이야기   먼 옛날에 성왕으로 소문난 대왕이 백 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두가 대왕을 사랑하고 존경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대왕의 생일례를 성대히 치르기 로 하였다. 생일날 밤. 그 나라와 이웃 나라의 고관대작들이 모두 생일례에 초대 되였는데 초대연의 입구는 선물로 산더미를 쌓았다. 만찬이 한참이던 중 대왕이 신하들에게 선물을 두 그룹으로 나누라며 선물을 보낸 사람들의 이름이 쓰인 선물과 이름이 없는 선물로 가르라고 명했다. 대왕은 후식을 들면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 선물들을 모두 가지고 오도록 명했다. 한쪽에는 크고 값진 선물들이 수백 개가 쌓였고 다른 한쪽에는 초졸한 선물이 몇 개 달랑 있었다. 대왕은 가득 쌓인 선물부터 풀어 보면서 그 선물을 보낸 사람들을 불러오게 했다. 왕은 한 사람씩 왕좌 위로 올라오게 한다음 이렇게 말했다. “선물 고맙네, 하지만 되돌려 주겠네. 나는 이제 자네에게 빚진 게 없네.” 왕은 선물이 뭐가 됐던지 일체 상관하지 않은 채 선물을 원주인에게 모두 되돌려 주었다. 대왕은 “산더미선물”을 모두 처리한 후 다른 선물 쪽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물들에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다. 이 선물은 아무 부담도 없으니 받도록 하겠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빚지고 싶지는 않다.” * * * 우리 모두가 두루 살아가면서 누구한테서 뭔가를 받을 때가 있게 되는데 그 때마다 본인과 상대방의 마음속에는 그것이 빚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빚으로 남는다면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게 백번 편안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도 뭔가를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아무런 부담이 없이 내가 받을 수 있다면 절대로 빚진 마음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아무도 당신에게 빚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당신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수 있게 된다.  오기활
303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2) 댓글:  조회:4120  추천:1  2020-01-22
                                                 2, 배움의 길에서 일곱살에 사당에 다니다 우리 태양촌 횡도마을에 김재원한문서당(金载源汉文书堂)이라는 작은 글방이 있었다. 이 서당은 70여평방메터 되는 초가집 온돌방으로서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책상도 없이 구들에 앉아 글을 배웠다. 김재원 훈장님은 늘 한복차림에 상투를 쪽지고 상투 아래는 망건으로 동였다. 외출할 때에는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고무신이나 삼으로 삼은 초신을 신고 다니셨다. 어느 날, 장가전이였던 숙부가 일곱살 나는 나를 데리고 서당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은 시험을 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상으로 백로지를 주는 행사가 있었다. 당시에는 시험을 보는 것을 선생님의 강의를 받는다고 하였다. 교과서는 명필이신 재원선생님이 백로지에 친히 붓으로 써서 만든 였다. 시험내용은 주로 배운 글을 암송하는 것이였는데 평점은 우수(顺通), 급격(通), 락제(不) 세가지로 나누었다. 누가 락제를 맞으면 훈장님이 문푸레나무로 만든 회초리로 그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그 날 서당에 붙었다는 리유로 백로지를 한장 받았다. 이것이 내가 출생후 훈장님한테서 처음 받은 영광으로서 어린 마음에도 서당이란 참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였다. 나의 상급생들은 ≪계몽편(启蒙篇)≫, ≪동몽선습(童蒙先习)≫, ≪통감(通鉴)≫ 등을 배웠다. 그 때 17세 가량 되여보이는 김재관이란 학생이 중국 고대력사교과서인 ≪통감≫을 배웠는데 한번은 배운 과문을 암송하지 못해 종아리를 걷어올리고는 훈장님께 “훈장님, 잘못했습니다. 되게 때려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훈장님은 그의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는 처벌을 면해주었다. 전체 생도(生徒)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감격해하였다. 휴식시간은 종을 울리는 것으로 알리였다. 서당 뒤에는 깊이 세메터에 달하는 우물이 있었는데 철따라 달라지는 타래붓꽃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물가를 장식해주어 어린 생도들의 가슴에 꿈을 심어주었다. 타래붓꽃잎을 입에 물고 빨면 “빼― 빼―” 하는 소리가 났으므로 그 때 이 풀을 ‘뺄꽃풀’이라고도 불렀다. 이 꽃은 잎이 탈리면서 자란다고 하여 타래붓꽃이라고 불리우다가 ≪마란꽃 필 때≫라는 영화가 나오면서부터 마란꽃으로 알려졌다. 90 고개를 넘긴 지금에 와서도 나의 머리 속에는 김재원 훈장님에 대한 기억이 날따라 깊어만 간다. 그이는 나에게 처음으로 책을 안겨주었고 붓글씨를 쓰는 재간을 배워주었으며 군자다운 거룩한 행실을 어떻게 키워야 함을 알려주셨다. 김재원 훈장님은 경상남도에서 오신 학자였으므로 말씨가 경상도의 구수한 사투리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훈장님의 말씨에서 종조의 옛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이는 ≪통감≫을 ≪옥편≫ 한장도 번지지 않고 막힘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치셨다. 훈장님 하면 그가 친필로 쓰신 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이는 나의 길고 긴 학습려정에서 첫걸음을 떼주신 잊지 못할 스승이다. 김재원 훈장님은 붓으로 친히 쓴 교과서를 나한테 선물해주셨다. 나는 이 교과서를 시작으로 오늘까지 86년이란 긴 배움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지페에 찍힌 인자하신 세종대왕의 모습이 김재원 훈장님의 모습과 너무 비슷한 데서 훈장님이 더욱 그립다. 훈장님이 나에게 주신 교과서는 중국 량나라의 주흥사(周兴嗣)의 저작인 ≪천자문(千字文)≫인데 이 ≪천자문≫은 “天地玄黄, 宇宙洪黄”으로부터 시작된 4언고시(四言古诗)로서 자연과 사회 현상을 아무런 문자중복도 없이 간결하게 개괄한 대단한 명작이다. 주흥사가 하루밤 사이에 이 대작을 쓰느라고 너무 골몰한 데서 검던 머리가 백발이 되였다고 하여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는 ≪천자문≫을 하루에 두줄씩 배웠다. 그 때 우리가 번마다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책을 번지다보니 책 한쪽 머리가 닳아서 볼모양이 없었다. 그래서 다 배우고 나서는 그 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천자문≫은 지금 배워도 리해하기 어려운 글인데 어린 나이에 배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다. 훈장님의 가정생활은 아주 어려웠다. 서당과 약 1,000메터 떨어진 곳에 그의 집이 있었는데 훈장님은 서당의 한쪽 방에서 독수공방을 하였다. 때로는 사모님과 동거하기도 했는데 어린 나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나는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1년 반 정도 하다가 신학사숙(新学私塾=阳兴私塾)이 서자 거기로 전학을 하였다. 열살에 소학교에 입학 일제 때 소학교 교수는 일어로 했다. 열살 때인 1934년에 나는 양흥사숙을 다녔다. 그 때 나의 첫 일어선생님은 김진하(金珍河)선생님이였고 1935년에 중흥사숙(中兴私塾)을 다닐 때에는 리명엽(李明烨)선생님이 가르쳤다. 교수방법이 김진하선생님보다 더 우수하였고 지식면도 넓었으며 그림과 야외스케치까지 배워주었다. 리명엽선생님은 숙제를 특별히 많이 냈는데 그 날에 배운 과문을 25번씩 쓰게 하여 일상생활에서 잘 활용하게끔 강조하였으며 이미 배운 지식들을 철두철미하게 리해하도록 가르쳤다. 그 때 김진하선생님은 년세가 많은 로인으로서 술을 즐겨 마셨고 리명엽선생님은 총각으로서 술담배를 멀리하는 뜻이 있는 유망청년이였다. 그 후 중흥촌(仲兴村)에 정규적인 학교가 서게 되자 중흥사숙이 해산되였다. 하여 리선생님은 다른 고장으로 갔다. 나는 일어회화기초를 김선생님한테서 닦았고 리선생한테서 더 능숙하게 배웠다. 나는 지금까지도 리명엽선생님을 숭배한다. 그는 교육구국(教育救国)의 정신으로 조선인의 출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선생님은 교실의 한곳에 일어동화집들을 가져다놓고는 과외독서를 장려하였다. 나는 3학년 때에 일문으로 된 ≪서유기≫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고 일문으로 된 소년잡지도 읽을 수 있었다. 리명엽선생님은 조선의 뜻있는 청년으로서 교육으로 민족의 출로를 찾아야 한다는 사상으로 1934년에 이곳 북방에 온 유지인사인 듯하였다. 그는 산설고 물 선 이역땅에서 친인도 없이 모든 사랑을 학생들에게 몰부은 교육열정가였다. 나는 지금도 유지청년이였던 리명엽선생님을 숭배하고 있다. 17세에 국민고등학교를 다녔다 1942년—1943년에 나는 연길국민고등학교 1학년—2학년을 다녔다. 그 때 일어를 조선인인 최선생님이 가르쳤다. 최선생님은 당시 고등관(高等官)시험 합격자로서 수준이 높았다. 그 때는 교과서가 없어 강판글을 써서 등사해 교과서로 하였는데 최선생님이 나더러 강판글을 쓰라고 하여(학급에서 나는 필체가 좋았다) 나는 학급의 등사판 교과서를 전담하였다. 3학년—4학년에는 왕청국민고등학교에 이관되여 왕청에 가서 축산수의과(畜产兽医科) 공부를 하였다. 그 때도 나는 일어교과서를 강판글로 써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리유 때문에서인지 나의 일본어성적은 비교적 좋았다.  일어공부 나는 해방전에 소학교부터 국민고등학교까지 일어로 교수를 받은 외에 해방후에 연변대학 농업학과 1학년을 다닐 때에도 일본인선생님한테서 일어로 화학교수를 받았다. 그리하여 나의 일어수준은 일본의 교수들마저도 “김수철 교수는 일어수준만으로도 교수자격이 당당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 로어공부 내가 로어공부를 시작한 것은 외조부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외조부는 젊어서 공부를 많이 하여 매우 유식하셨다. 무남8녀를 두었던 외조부는 아들이 없는 것으로 하여 속이 상해 늘 술과 친구하며 류랑생활을 하셨다. 그 때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외조부를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병에 걸렸다고까지 말했겠는가! 외조부는 외손군들이 보고 싶으면 우리 집에 오셨는데 나를 만나 처음 하시는 일이 나의 학습통신부를 보는 것이였다. 외조부는 나의 학습성적을 보고는 대단히 기뻐하며 “을록(乙录, 애명)이가 또 우등을 했구나! 정말 장하다!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외조부는 나에게 로어단어를 잘 가르쳐주셨다. 로어수준의 여하를 막론하고 어쨌든 나의 로어공부의 첫걸음은 외조부가 떼주신 것이였다. 후일에도 외조부는 나의 로어공부의 지지자였고 감독자였다. 나는 연변대학 농업전과 수의축산전업 1학년 때에도 로어공부를 하였다. 해방후에도 처음엔 류경룡선생님의 사모님인 리나선생님한테서 배웠고 하학기부터는 백계로인인 다위 또브로선생님한테서 배웠다. 당시 나는 매부네 집에 류숙했는데 여름이면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연길공원다리 부근의 강기슭에서 로어교과서를 랑독하였다. 소리를 내여 읽을 때면 곁에 사람이 있고 없고를 관계치 않았다. 이런 학습방법으로 나는 교과서의 모든 내용들을 암송하였다. 일년간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였더니 그 때 매부의 집으로 옷을 사러 오는 쏘련홍군들과도 능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1950년대는 중국에서 한창 ‘쏘련을 따라배우’는 시기였다. 1953년 겨울방학에 농학원에서 로어수준이 상당한 일본교사 오바라겐지를 모시고 50일간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로어학습반을 조직하였다. 그 학습반에 나도 참가하였다. 로어학습반이 끝난 후 연변대학 림민호(林民镐) 교장이 시험관을 파견하여 25명 교사들의 로어실력검정시험을 엄하게 진행하였다. 그 때 25명 교사들중에서 단 두명인 나와 김병진선생만이 합격되여 교내에서 큰 화제로 되였다. 그로부터 나는 학교에서 달마다 5원씩 발급하는 로어수당금을 받아 가난한 집살림에 보태군 하였다. 당시에 나는 교수를 할 때면 늘 쏘련참고서를 리용하였다. 그리하여 중국내의 문헌에도 없는 ‘가시상추(Lactuca seriola Torner)’란 식물을 채집하고 이 식물이 동북에서 처음 발견되였음을 ≪연변농학원학보≫에 발표하였다. ≪쏘련식물지(苏联植物志)≫는 나의 식물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길잡이로 되였다.  영어공부 1) 연길국민고등학교를 다닐 때인 1941년에 영어교과서 한권을 공부하였다. 2) ‘문화대혁명’ 때 연변농학원 농학과에서 조직한 교사단기영어강습반에 참가하였다. 3) ‘문화대혁명’ 때 농학과의 7명 교사들이 룡정에서 룡정3중의 영어교원을 초청하여 10여일간 영어강연을 수강하게 되였는데 나도 참가하였다. 4) 식물채집을 하는 과정에서 계획적으로 여러가지 형식의 영어공부를 견지하였다. 5) 영문필기장을 준비하고 필기련습을 부지런히 하였다. 이는 내가 식물학명(学名)을 배우며 필기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6) 1980년부터 록음기로 영어 발음, 회화를 열심히 공부했다. 7) VCD와 텔레비죤화면으로 영어학습을 견지하였다. 8) 평소의 영어학습(력사기초, 공구서적 준비 및 재정돈, ≪中医学≫ 영문서적, ≪中医学汉英对译本≫, ≪중영사전≫, ≪영한중사전≫ 등)을 바탕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겨우 영문론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2002년부터는 국제심포지엄에서 세편의 영문론문을 발표하였다. 총적으로 나의 외국어수준은 일어는 ‘通’이고 로어는 문헌을 볼 수 있는 정도이며 영어는 론문을 발표할 수 있는 정도이다. 라틴어는 식물명을 떠올리면 우선 라틴어로 그 명칭이 떠오르고 사전과 씨름하면서 식물의 새 종류 쯤을 발표할 수 있는 정도이다. 나에게 있어 외국어공부의 노하우라면 “길을 걸으면서 읽고 암송하는 ‘길공부’를 부지런히 견지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다니기를 즐긴다. 부득이한 경우 누구와 같이 가더라도 먼 목적지까지는 동행을 하지 않는다. 리유라면 ‘길공부’를 하는 데 동행자가 있으면 지장이 되기 때문이였다. 한국의 법정스님도 홀로 있기를 즐기였다. 도가들이 도를 닦는 산중수양도 아마 보제수나무 아래서 고행을 하면서 홀로 도를 닦는 것일 것이다. ‘길공부’ 역시 조용해야 한다. 나는 늘 혼자서 길을 걸을 때 외국어단어카드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미친 사람’이다. 조용한 곳에서는 소리를 내여 읽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묵독을 한다. 길을 걸으면서 공부를 하면 정신집중이 정말 잘된다. 나는 로어, 영어, 라틴어 공부를 길을 걸으면서 견지해왔다. 길은 나의 학교이다. 특히 식물채집은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데 이런 시간을 나는 외국어공부를 하는 데 돌리였다. 내가 길에서 얻은 공짜배기 외국어학습시간은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한입으로 말할 수 없이 많다. 내가 평생 해온 ‘길공부’는 등록금도 없고 학비도 없는 “꿩 먹고 알 먹기”식의 공부로서 부지런하다면 누구나 다할 수 있는 것이다.
30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1) 댓글:  조회:4174  추천:0  2020-01-16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오기활 저 인생은 한권의 책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책제목입니다. 당신의 가슴이 먹이고 당신의 걸음이 종이며 당신의 발이 연필이고 당신의 하루가 페지입니다. 페지는 당신의 시도, 노력, 즐거움 그리고 성취에 대한 매일을 기록합니다. 인간사랑, 자연사랑을 바탕으로 쓴 ‘김수철’의 비범한 인생사에는 그가 “세상에 태여난 리유와 목적이 가슴 뛰는 일을 하고 가슴 뛰는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기록되였습니다. 차 례 머리말 / 1 나는 하늘의 속셈을 진작 알았다 / 7 추천사: 가슴을 뛰게 하는 한권의 책 / 9 부언: 책의 저자에 관하여 / 14 제1부 가슴 뛰는 효사랑 제1장 고성김씨를 말한다 / 19 1. 고성군 / 19 2. 고성김씨 창세기(创世记) / 20 3. 고성김씨의 원류 및 그의 소종파(小宗派) / 22 4. 고성김씨 명천파 시조 김경현 / 25 5. “왕릉에 고합니다!” / 26 6. 연변고성김씨족보 발간사(发刊词) / 30 7. 연변고성김씨종친회 / 33 제2장 못 말리는 ‘갓바위집’이야기 / 37 1. ‘갓바위집’ / 37 2. ‘갓바위집’에서 울리는 400년 숨소리 / 40 3. “최씨네 과부를 어디에 숨겼소?” / 43 4. ‘갓바위집’ 팔주(八柱) / 46 5. 600리 길을 걸어서 찾은 삶터 / 49 6. 아버지의 ‘선견지명(先见之明)’ / 53 7. ‘갓바위집’ 계자 / 56 8. 신랑은 , 신부는 / 58 9. ‘지(池)진사댁 셋째사위’ / 64 10. ‘갓바위집’의 ‘경영학박사’ 리영숙 / 68 12. 증조부 탄신 137주년 기념회 / 70 제2부 가슴 뛰는 일 가슴 뛰는 삶 1. 배움의 길에서 / 75 2. 저주로운 성분‘딱지’ / 84 3. ‘민주대동맹(民主大同盟)’ 청년위원으로 / 86 4. ‘국민최고학부’를 졸업하니까… / 88 5. 나의 첫 교직생활 / 94 6. 의학과 맺은 인연 / 98 7. 식물이야기 / 102 8. 버섯이야기 / 114 9. 비 내리는 야밤에 도적으로 몰려 / 118 10. 송림 속에서 무명렬사를 만나다 / 121 11. “후날에 봅시다!” / 126 12. 장백산표 ‘특효감기약’ / 128 13. 후반전에 ‘멋진 꼴!’을 / 130 14. 박사연구생 반욱(槃旭)이와 함께 / 134 15. 못 잊을 기생 / 141 16. “당신은 길림성에서 식물표본동정의 제1인자요!” / 144 17. 숙제가 아닌 숙제로 / 147 18. 나, 일본학자 그리고 일본행 / 153 19. 93세에 동년을 회억하다 / 165 20. “나의 노력과 힘의 15%를 회보합니다.” / 168 21. “아니, 오늘이 생시요 꿈이요!?” / 170 22. ‘3인방’의 핍박으로 량산에 오르다 / 179 23. 명리를 위한 소작(小作)이 아닌 인생철학 대작(大作)으로 / 182 24. 잠자는 공주 / 185 후기 / 191 부 록 부록 1: 1. 감동의 스승 김수철 교수님 / 199 2. 김수철 년보(친필) / 203 부록 2: 신문, 잡지로 읽는 김수철 숨소리 1. 자연의 대문을 열어가는 사람 / 214 2. 경영인을 찾으라 / 231 3. 조선족 ‘리시진’은 125살은 산다고 / 235 4. 그 날, 또 다른 젊음을 보다 / 241 5. 얼굴이 뜨거워졌다 / 244 6. “한족이 해야 할 일을 조선족이 하니 영광이지요.” / 246 7. 불로송 / 251 8. 90대 고령의 ‘구멍난 양말’ 례찬 / 257 9.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삼고 / 260 부록 3: 연변농학분야의 반짝이는 별 —— 전임 연변대학 농학부 김수철 교수에 대한 이야기 / 262 제 2 부 가슴 뛰는 일 가슴 뛰는 삶 (제 2, 3부를 련재합니다) 1 , 600리 길을 걸어서 찾은 삶터 연길서역(西站)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5리 쯤 가면 백석구(白石沟) 4대 마을이 있다. 백석구는 동서로 뻗은 골짜기의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수양버들이 늘어선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이 청자가 누군지를 따질 새도 없이 너도나도 화자(话者)가 되여 손시늉을 하면서 마을 안팎의 일들을 늘어놓던 그 옛날의 고향모습이 어제 일 마냥 생생하다. 이 마을은 지난 세기 초에 조선족들이 모여서 오순도순 살면서 개척한 마을로서 이름을 백석두구(白石头沟)라고 불렀다. 백석구는 우리 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에 온 후 보따리를 풀어놓은 첫 고장이기도 하고 또 할아버지가 연변땅에 올 때 조선 함경도 명천에서 고성김씨 시조인 친부(亲父)의 유골을 등에 지고 와서 이장(移葬)한 곳이기도 하다. 1903년 6월, 할아버지는 32세 젊은 나이에 부인 강릉최씨(35세)를 잃고 독신으로 되였다. 게다가 1905년 10월에는 하늘처럼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가 55세의 나이로 별세하고 동생인 김병도(金秉涛, 23세)까지 돈벌이를 간다며 로씨야로 가버렸다. 이런 불운 속에서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다행히도 상처(丧妻)를 한 이듬해(1906)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청상과부인 리순애(23세)를 후처로 맞아들이고 또 그 이듬해에는 딸 김증봉(金曾凤)을 보기까지 하였다. 1904년에 로일전쟁의 승리로 득세를 하게 된 일본은 단숨에 조선을 먹어버릴 생각으로 강박적으로 한일의정서(韩日议定书)를 체결하고 보호국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촉진하였다. 일제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 그리고 해마다 이어지는 흉년으로 하여 조선땅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이 때 한발 먼저 동북지역 연변땅으로 이주한 고성김씨 명천파들은 할아버지에게 그냥 한 고장에서만 살지 말고 연변땅에 이주해오라고, 연변에 오면 먹을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때 할아버지는 어린 식솔들을 데리고 600리 길을 걸어 연변땅으로 가려면 적어도 20일은 걸려야 하니 어떻게 갈 것인가를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였다. ‘아무렴, 그냥 여기에 있다가는 일본놈들의 총칼에 맞아 죽거나 굶어서 죽을 판인데 가는 길에 죽더라도 살길을 찾아 연변땅으로 떠나자…’ 37세의 나이에 이런 비장한 결심을 내린 할아버지는 1909년 음력 7월초의 어느 날 친부인 김규언(金奎彦)의 묘를 파헤쳐 유골을 파내여 등에 지고 다른 간단한 짐은 당나귀의 등에 실은 후 일행 10명을 이끌고 조선 함경북도 명천에서 연변을 향해 떠나는 고행난행을 시작하였다. 그 때 일행으로 할아버지의 어머니, 후처인 리순애(28세), 장남인 김룡천(金龙川, 20세), 차남인 김창옥(金畅玉, 15세), 3남인 김창구(金畅九, 13세, 나의 아버지), 녀동생인 김련옥(金莲玉, 9세), 장녀인 김증봉(金曾凤, 3세), 동생인 김병완(金秉浣, 19세), 제수인 리분녀(李粉女, 15세)였다. 할아버지는 주린 배를 안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행길을 시작하였다. 눈물범벅이 된 어린 자식들의 손목을 잡고 ‘략탈혼’의 징벌로 병신이 된 다리를 끌면서 험난한 무산령을 넘고 두만강을 건너 산적들이 행패를 부리는 오랑캐령을 무릎걸음으로 겨우 넘어서야 조양천 백석 4대에 이르러 짐을 풀 수 있었다. 70여년전 이 마을에는 20여호 농가들이 동서향 골짜기를 따라 집을 짓고 조, 옥수수, 콩, 수수 농사를 하면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천수해(川水海, 조양천) 동북쪽 산골인 백석구에는 10여호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했다며 반갑게 맞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부둥켜안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여기에는 친척들이 많으니까 잠자리도 먹을 것도 근심할 필요가 없단다.” “여기서는 노력한 만큼 소득을 얻을 수 있으니 부지런히 일만 한다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어.” “해진 옷을 벗고 우리가 주는 옷을 바꿔입어.” “우리를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 새 환경에 적응될 때까지 우리가 도울 테니 아무 근심걱정을 안해도 돼.” “배고프다고 너무 급하게 많이 먹으면 오히려 탈이 날 수 있으니 천천히 먹어.” “…” “…” 말과 같이 피는 물보다 짙었다. 친척들의 진심어린 한마디 한마디가 할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였고 큰 위안이 되였다. 할아버지는 동생과 자식들을 이끌고 괭이로 나무뿌리를 파내면서 묵밭을 일구었고 또 밭머리에 토굴을 지은 후 할머니와 함께 둘이서 지냈다. 기타 식솔들은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한동안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2년후 온전한 토굴집을 짓게 된 할아버지는 식구들과 함께 한집에서 오손도손 살 수 있게 되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 백석구에 남아있는 선조들의 생활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정말 아름답고 다감하다. 벌거숭이던 백석구 마을 동쪽 골짜기에 춘하추동 사계절 푸른 옷을 입고 서있는 락락장송은 아버지 년대의 조상들의 산소 주위에 심어놓은 솔들이 씨를 떨구어 자라난 것이다.
301    [수기 30] 가장 뜻 깊었던 신변의 영웅 취재 댓글:  조회:4231  추천:0  2020-01-14
“인생 칠십고래희”라더니 어느덧 내가 73살 나이를 먹었다. 그러니 내가 하늘나라에 계시는 량 부모의 합한 나이(어머니32, 아버지40)보다 1년을 더 살았으니 이만하면 나의 명운이 좋은 셈이다고 하겠다. 지난 인생년륜을 손꼽아보면 농민으로 9 년, 당정기관에서 11년, 《연변일보》기자로 22년, 정년퇴직후 《길림신문》특별 기고인으로 있으니 나의 천직이 기자인셈이다. 지금까지 기자생활을 돌이켜보면 가장 뜻깊은 취재가 1986년부터 30년을 이어온 신변의 ‘라성교’ 고만길에 대한 취재이고 가장 뿌듯했던 취재가 1990년 제11차 아시아경기대회(북경)취재이며 가장 벅차게 일했던 시기가 ‘백성의 신문’으로 ‘연변25시’(《길림신문》부간)을 꾸리던 3년이다. 오늘 30년을 이어온 고만길 취재길을 반추해본다. 첫번째 취재 1986년 12월 24일 오후 2시 30분 경, 도문시교통국 도로관리단의 20여명 양로공들이 현지 시공원 고만길(34살, 조선족)의 인솔하에 도문-훈춘 도로 ‘K+700m’구간의 길닦이공사를 막날로 마무리를 할 때 북강 남쪽강변에서 몇몇 어린애들이 도문 북강물에 개구리가 있다면서 아직 채 얼어붙지 않은 강물옆 얼음판에 엎드려 물밑을 살펴보다가 림철섭(6살), 리동환(7살)이 그만 강물에 빠졌다. 마침 이 정경을 지켜보던 양로공들이 “아이가 물에 빠졌소!”라며 급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만길이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입었던 등산복을 벗어 팽개치고 맹호같이 강변으로 달려가더니 긴 목이 달린 솜신을 신고 장갑을 낀 채로 사품치는 강물 속에 뛰여들어 60여메터나 떠내려 간 철섭이를 구하고 거꾸로 들어서 물을 토하게 한 후 철섭이를 업고 가파롭기로 65도가 넘는 높은 강뚝을 톱아올라 1,000메터도 더 되는 도문시방송국 종업원주택구의 어느 집에 철섭이를 맡기고 다시 강변으로 달려왔다. 다행히도 구원된 동환이를 업고 철섭이를 맡긴 집에 눕혀놓았다. 애들이 정신을 차리자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1987년 2월 고만길 취재를 마치고 도문 북강 현장에서 물에 빠진 애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뒤줄 좌로부터 고만길, 필자, 양로단 당지부서기 박봉구).   그날 저녁 동네 사람들이 위문하러 만길이네 집을 찾아와서야 그의 안해가 알게 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나는 도문시당위 오명일 부서기를 만나 상황을 소개하고 고만길을 도문의 살아있는 ‘라성교’로 도문시 정신문명건설의 훌륭한 본보기로 수립하기로 했다. 1987년 1월 3일부터 나는 근 40여 일 동안 고만길의 부모, 형제, 고만길이네 동네 분, 학교동창, 고만길이 하향했던 촌, 그가 일하는 공사현장과 부근 마을, 고만길의 도움으로 사경에서 벗어난 사람들, 고만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과 기타 많은 목격자 등 120여명을 찾았으며 좌담회도 조직했다. 석자두께의 얼음이 하루저녁에 언 것이 아니였다. 지난 15년간 고만길은 사경에 처한 사람을 5명이나 구했고 만난 사람들마다 고만길을 ‘걱정도감’, ‘의무리발사’, ‘수리공’이라며 무슨 일에서나 한몫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고만길은 남을 위해 태여난 사람같다”며 감동을 먹었고 그는 선후 5차례 본 단위와 도문시교통국의 선진생산자로 평선되였다. 나는 고만길의 감동적인 사적을 제때에 도문시당위에 회보했다. 1987년 3월 10일, 도문시 당위와 정부에서는 전 시 문명건설 동원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자기를 잊고 남을 구원한 훌륭한 로동자’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그에게 1등공을 기입했다. 1987년 3월 13일 《연변일보》(조, 한문)는 고만길의 사적을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라는 제목으로 장편통신을 발표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87년 8월 7일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와 정부에서는 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자기를 잊고 남을 구원한 훌륭한 로동자’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1988년 5월 28일에 길림성교통청에서는 도문에서 전 성 교통계통표창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뢰봉학습 우수로동자’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하여 지난 세기 80, 90 년대에 전 사회적으로 뢰봉학습 운동과 함께 고만길을 따라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1988년 2월 14일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전 시 년말 사업총화대회에서 나에게 공을 기입, 표창했고 아울러 《연변일보》 사상 처음으로 기자가 지방정부의 표창을 받은 소식을 1면에 발표하였다. 두번째 취재 2012년 2월 29일, 나는 모주석이 ‘뢰봉을 따라배우자’고 호소한 49주년, ‘뢰봉학습 우수로동자’고만길을 따라배우는 학습열조를 일으킨 25주년을 기념하여 두번째로 고만길을 취재하였다. 그런데 내가 여러 곳을 수소문하여 겨우 찾은 고만길은 뜻밖에도 뇌출혈로 대수술을 받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언어장애로 겨우 말을 이었는데 2011년 5월 12일, 왕청-라자구간 도로건설 시공현장에서 갑자기 급성 뇌출혈로 쓰러져 왕청현병원에 호송되였다. 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고 언어장애가 왔다. 고만길은 지난 80년대에 조직의 배치로 연변교통학교에서 3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도문시건설국 시정관리처 기술자로 있었다. 그런데 단위가 경영불황으로 몇년간 로임조차 주지 못하다 결국 파산된데서 고만길은 58 세에 연변교통관리소의 림시 기술원으로 초빙되여 밥벌이를 하는 신세가 되였다. 고만길은 자기네 생활이 궁핍한데도 “자기네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며 기초생활보조를 신청하지 않아 녀동생이 보다 못해 최근에야 신청했다 한다. “지금 큰병에 걸리고보니 당년에 그 많은 좋은 일을 한 것이 후회되지 않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고만길은 “아무런 후회도 없습니다. 죽는 사람을 보고 누가 살리려고 하지 않겠습니까?”고 했다. 고만길의 안해에 따르면 수술후 고만길은 몸을 좀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병원복도층계의 손잡이에 의지하며 하루에도 몇번씩 1층부터 12층까지 오르내리며 재활치료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화장실이 불편하여 시내 아빠트를 세집을 맡을 때도 신체단련을 위한다며 4층을 선택했다고 한다. 고만길은 강철같은 의지로 “나는 병마를 꼭 이겨낼 것입니다.”며 몇번 반복해서 말했다. 취재후 필자는 고만길의 현황을 시당위 해당 부문 책임자에게 회보하고 시당위와 정부에서 수립한 도문의 산 ‘뢰봉’을 방문할 것을 건의하였다.(알아본데 의하면 방문을 조직하지 않았다) 세번째 취재 2012년 3월 31일은 해외로 진출한 고만길의 아들(고청남)의 결혼식 날이다. 필자는 이를 계기로 또 한번 고만길 가정과 고만길이 구원한 림철섭의 어머니를 취재하였다. 생각밖으로 25년전에 고만길의 사적을 제공했던 장정구씨를 만났다. 장정구는 “만길이가 남을 돕는 ‘병’은 못 고칩니다. 2년전에 만길이 친구의 병문안으로 병원에 갔다가 내 동생이 덮개 없는 하수도 구멍에 빠져 척추며 턱이며 골절되여 병원치료를 받는 것을 보고 ‘반드시 확실한 사고분석을 해야 한다’며 주동적으로 나서서 당사자가 제공한 선색에 따라 며칠 동안 조사를 하더니 그 덮개 없는 하수구가 도문시 모 회사의 하수구라는 것을 확인하고 회사를 찾아다니며 수차나 교섭한 끝에 회사에서 책임을 지고 수만원을 배상했습니다. 우리는 하수구에 빠진 것이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만길의 덕분으로 동생이 경제적인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고만길의 아들 고청남은 “당과 정부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큰 영예를 주어 우리도 영광스럽습니다. 아버지는 늘 국가의 유용한 인재가 되여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사경에 처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응당한 일입니다. 나도 그런 환경에 띄우면 선뜻이 나설 것입니다.”고 했다. 림철섭의 어머니 류영희는 “그날 철섭이가 물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임신 수개월 된 애를 잃었습니다. 철섭이가 사고를 당한 후 아이하나만 키우는 것이 불안하여 둘째로 딸을 낳았는데 벌써 23살입니다. 고만길의 덕분에 우리는 아들 살리고 딸까지 얻었으니 그를 잊을 수 없습니다.” 고 했다. 네번째 취재 2016년 6월 25일, 도문시 천남화장터 유체고별식에서 고만길(1954,2,2.ㅡ 2016.6.21)의 추도식이 있었다. 이날 고만길이 하향했던 도문시 석현진 송림촌의 촌주임과 당년의 집체호 정치호장 허송철이 소식을 듣고 고인을 추모했다.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고 이들의 비통과 함께 비까지 내렸다. “..고만길동지는사망전까지 부인에게 위탁하여 당비를 제때에 납부한 훌륭한 당원입니다.....고인의 죽음에 하늘도 눈물을 흘립니다.” 도문시 향상가 부유사회구역 당사업 책임자의 추도문중의 한구절이다. 림철섭의 어머니(류영희)에 따르면 림철섭은 대련민족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연구생공부를 마친 후 지금 일본 모 회사의 영업경리로 있습다. 철섭이는  고만길을 잊지 않으려고 1986년 12월 24일의 1224를 핸드폰번호 꼬리수로 선택했다. 지나온 30년간 고만길취재는 그가 자기가 한 일을 말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힘든 취재였고 감동적인 취재였다.  30년간의 취재에서 그가 자기로 자기의 사적을 말한 시간이 모두어 보면 기껏해야 한 시간이 푼한 정도로 기억에 남는다. 장정구씨의 말이다. ㅡ   만길이는 조만에 자기가 한 일을 말하지 않습다 1971년에 그가 오공5대 저수지에 물에 빠진 동렬이(간질병환자)를 구해내고서 만길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이 일을 알면 아이들이 동렬이를 놀려줄 것이니 누구도 말을 내지 말라고 당부를 한데서 동렬이가 죽은후인 15년만에 그 일이 공개되였습다...   고만길취재는 필자에게는 영웅을 따라 배우는 과당이였다. 부언으로 필자는 각급 당과 정부에서 당년에 수립한 영웅(모범)인물에 대한 경상적인 중시와 관심은 당과 정부에서 초심을 잊지않고 사명을 명기하는 중요한 내용임을 밝힌다. 필자는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 오기활                                                        [ 길림신문 ]  2020-01-09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