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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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경계 허물기 (우상렬) 댓글:  조회:4926  추천:49  2010-11-24
경계 허물기우상렬 연변대학 교수경계는 일종 질서. 그렇다하여 경계를 맹신하거나 그것에 매이면 그 삶은 답답해나고 가련해보인다. 1980년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올림픽 개최, 그런데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진영 불참. 1984년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올림픽 개최, 그런데 구소련을 위시한 절대다수의 사회주의진영 불참. 이른바 동서랭전시기 경계는 이렇게 분명하다. 정치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것 같은 스포츠에서조차 그 경계는 이렇게 침투되였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 “손에 손 잡고 벽을 허물고” 용하게 동서화합을 이끌어냈다. 동서의 경계를 허물고 랭전을 종식했다. 어쩌면 코리아의 다이내믹한 력동성이 한몫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곧바로 본격적인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글로벌화로 나아갔다. 이른바 각국의 정치, 경제가 함께 가는듯 했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일종 해체주의를 표방하는 철학사조가 전세계를 휩쓸면서 많은 경계들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소통의 길이 트였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숨통도 많이 트이고 삶도 훨씬 좋아진것은 아닐가. 나는 1980년대 초반 대학교에 붙어 열심히 연변으로 달려 왔다. 당시 연변은 분명 촌구석이지만 나에게 매력 만점. 연변에 오면 다른 나라, 다른 세상을 마음대로 볼수 있을것 같았기때문. 그런데 나는 연변에 와서 정말 답답해났고 서글퍼났다. 두만강이라는 국경이 나를 쩍 막아나섰다. 오히려 더 답답해났다. 나는 그때 인간을 저주했다. 지구는 너나 없이 둥글둥글 어울려 살라고 둥글둥굴하게 만들어진것 같은데 인간은 왜 이렇게 옹졸하게 니것 내것 따지며 “땅 긋어 자기 울안 만드는”거지? 내가 대학교 4년 기간에 머리를 갸웃하고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문제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였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아침에 마음만 먹으면 국경도 마음대로 넘나들수 있다는 그 말에 나는 그만 환심장을 했다. 그래서 결국 옹졸하고 알량한 내 마음도 풀렸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국제적인 문제, 자잘한 내 문제는 좀 그러니까 코앞에 빤히 보이는 우리 연길을 좀 보도록 하자.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그러니 분명 중국땅. 그래서 우리도 “담장쌓기”문화가 자연적으로 몸에 배인것일가, 조그마한 연길시 도처에 담장이 세워졌었다. 나와 너의 경계를 분명히 가르는 담장, 참 답답할시구!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담장허물기운동”이 시작되였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이였지만 그러나 이 일은 정말 잘 보아줄만 일이였다. 담장을 허무니 우리 모두들의 거리가 가까와졌고 연길시내는 그만큼 넓어졌고 밝아보인다. 실은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넓어지고 밝아졌다. 경계 허물기,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분명 보이거나 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경계들이 허물어지고있다. 그래서 미국의 어느 저명한 문화학자는 현재 “세계는 평평한것이다”고 했던가. 우리 문학에서도 경계는 허물어지고있다. 쟝르 하나만 놓고봐도 그렇다. 무슨 시요, 소설이요, 산문(주로 수필)이요 하지만 실제 창작을 보면 이들 사이 막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시―서정”, “소설―서사”하지만 서정과 서사는 워낙 쌍둥이자매. 그런만큼 서로 의지해 자기를 나타내는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 그럼 다시 “소설―픽션”, “산문―논픽션”을 보도록 하자. “픽션―허구”, 꾸미기란다. 그렇다하여 “천방야담(天方夜谈)”같은 기상천외의 이야기만 늘여놓아보라. 그것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게 리해가 차단되며 허황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니 이 허황함을 갈무리할 진실감을 주는 논픽션을 곁들여야 한다. 이것을 본질의 진실이다 해도 좋고 세부적진실이다 해도 좋다. 소설은 바로 픽션과 논픽션의 “새끼꼬기”―허허실실인것이다. 문학쟝르의 경계 허물기―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오면 올수록 그것은 도를 더 높여간다. 모더니즘소설, 그것은 픽션적인 슈제트조차도 없다. 애초에 심리, 그것도 무의식을 짓궂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모더니즘소설은 모두 모아 심리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무슨 표현주의니, “블랙유머”니, 마환(魔幻)사실주의니 하는것도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거기에 한술 더 뜬다. 비탈린 패러디로 마음껏 해학, 풍자의 꽃을 피우고 퓨전적인 기기괴괴―크로테스크한 미를 창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호텍스트성”으로 여러 쟝르의 글들도 마음대로 가져온다. 한마디로 여기서는 어떤 특정적인 쟝르개념이 없다. 지난해 《연변문학》(2009. 4)에 발표된 한영남의 “웬만하면 발을 사랑하시지”라는 “단편소설”을 좀 보도록 하자. 머리와 발이 뒤바뀐 현대―가치가 전도되고 광고가 란발하는 세상에서 진실과 가상은 뒤죽박죽이 된다. 그래서 작자는 나름대로 소시민적이게 별 볼일 없이 발이나마 가지고 이죽거려본다. 그러니 이 소설은 현대인의 뒤틀린 심리를 보여준 전형적인 모더니즘 심리소설이고 또 광고를 패러디하고 모나리자를 끌어들이는 “상호텍스트성”도 보이고 자조적인 내포화된 자기반영성도 얼마간 보이고있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특색도 다분히 나타내고있다 하겠다. 현재를 사는, 톡톡 튀는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방식―또 대담한 경계 허물기라면 경계 허물기라 하겠다. 그러니 세상보기, 세상일하기, 문단에서 지내기, 문학을 하기가 모두 그런것이 아닐가. 기본에 충실하고 질서를 지키는것이 존재의 사실이라면 경계를 허물고 넓게 시야를 가지는것은 또 발전의 도리가 아닐가. 연길시에서 담장을 허물어 좋은 일이 되였는데 우리도 담장을 허물면 어떨가. 조금은 아쉽더라도, 조금은 거칠더라도, 조금은 미숙하더라도 담장을 허물고 또 새로운 세계 대하는것이 어떨가, 좋은 마음으로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권장하는 내용이다. 2010.11.24
130    추천사 (2010 9.20~ 9.27) 댓글:  조회:1445  추천:31  2010-09-21
추 천 사     우상렬교수가 평론 《현대적인 소설서정》으로 제30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우상렬씨는 부지런한 필경(筆耕)으로 최근 년간 조선족문단의 중견평론가로 떠올랐다.   그의 수상평론은 “문예심리학과 현대소설기법에 대한 탄탄한 리론적 소양, 간결하면서도 질감이 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톡톡 튀는 새로운 관점들을 선보인 만담식의 문체가 압권이다”는 평을 받고있다.   금주의 문인으로 추천한다.   문학닷컴 편집부
129    [심사평] 력사와 현실에 대한 성찰과 예술적인 탐구 댓글:  조회:2881  추천:26  2010-09-07
    력사와 현실에 대한 성찰과 예술적인 탐구          - 2009년 제30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2010년 9월 7일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심사위원회  
128    [심사평] 제2회 두만강문학상 심사평 댓글:  조회:1507  추천:24  2010-08-02
제2회 두만강문학상 심사평우상렬  연변대학 교수심사위원들의 거듭되는 논의와 만장일치로 이번 제2회 “두만강문학상” 예선작 가운데 국내수상작으로 박초란의 단편소설 <날아라, 룡! 룡! 룡!>(<연변문학> 2009년 X호)과 해외수상작으로 공령희의 단편소설 <섬에서 만난 아이>( <통일과 문학> 2009년 여름호)를 선정했다.<날아라, 룡! 룡! 룡!>은 우리 조선족의 현실적 실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돈을 좇아 이리 내둘리고 저리 내둘린다. 북경, 상해, 심천, 서울, 온 가족이 국내외로 ‘산산쪼각’이 나 있다. 잘 살기 위해 우리는 마음에 없는 시집도 간다. 그런데 그 잘 산다는 의미가 돈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돈에 너무 지쳐있다. ‘돈 버는게 헐한줄 아냐?’가 이것을 잘 대변해준다. 끝없는 물욕에 매여 우리는 다람쥐 채 바퀴 돌듯이 한다. 그만큼 우리는 무미건조하고 메말라 있다. 메마른 ‘우물’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 소설이 단지 여기에 거치고 만다면 그것은 현실 폭로비판에 주안점을 둔 ‘비판적 사실주의’ 냄새를 많이 풍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분명 돈을 쫓되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정을 그리고 있다. ‘나’와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관계는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살 맛은 난다. 그리고 스물둘의 ‘나’가 갑자기 ‘마른 우물이 되여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럴수가.’로 경악하고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젊을수가 없었다.’로 성숙을 가져온다. 그런 만큼 노트북, 최신형의 핸드폰, 수많은 옷가지, 보석, 고급의 커피와 커피잔과 양주와 자가용, 일본남자의 비싼 아빠트나 차 등등 수많은 물질로 ‘그 우물을 채우기 위한’ ‘ 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였지만’ 채워지질 않는 줄로 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마른 우물, 바싹 마른 우물의 밑바닥을 멍청하니 들여다보면서 어느날 나는 문득 그 할아버지와 작은 귀여운 은빛룡을 떠올리고있었다…’ 결국 ‘날아라, 룡! 룡! 룡!’ 우리는 용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런데 이 용이 되는 데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데 있다. ‘네 몸을 보거라!’ ‘그 순간, 번쩍 내 마음의 눈이 띄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멍청해진 내 몸은 간 곳 없고 한마리의 작은 은빛의 아름다운 룡이 몸을 일으키고있었’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러면 우리는  ‘우린 누구나가 몸속에 우물 하나를 품고 살아가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현재 그 ‘바싹 말라버린 우물이 전엔 맑은 샘물들이 넘쳐흐르던 살아있는 우물이였다는걸…’ 발견하게 되고 우리 ‘몸속에 야광주’를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만이 ‘거리의 가로등들이 이 도시의 야광주마냥 빛을 뿜고’ 우리의 삶도 생활도 빛난다. <날아라, 룡! 룡! 룡!>은 결국 용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룡이라니? 그것을 굳이 령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늘이 촘촘한 몸뚱이를 번쩍거리며 구름우를 날아예는 한마리의 은빛의 아름다운 룡이였다.’ 세속의 ‘오물따위’의 ‘욕망덩어리’를 떨쳐버리고 비상하는 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구체적 대안하고 거리가 멀다. 다분히 상징적이고 낭만적이다. 문학작품이 사회학적 교과서가 아니라할 때 이런 상징과 낭만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승화시키고 고상한 경지로 나아가게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날아라, 룡! 룡! 룡!>은 정통적인 사실주의의 전형화하고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자잘한 생활세부에 대한 차분하고도 잔잔한 서술로 우리 서민들의 전반 원색적인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 신사실주의수법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似曾相識의 익숙하고 친근한 감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용정, 용문교, 용드레우물 등 지역적인 사항과 거기에 사는 인간을 통하여 지역 및 민족적인 특색을 살리면서 어디까지나 우리 조선족의 실존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전반 구조로 볼 때 객관적인 사실주의필치와 주관적인 표현주의수법을 잘 갈무리해내고 있다. 이를테면 작품의 주요흐름을 객관적인 사실주의필치로 끌고 가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주관적인 표현주의수법으로 마무리함으로써 그렇고 그런 세속적인 생활내용을 낭만적인 이상적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로부터 작품의 주제적 완성을 훌륭히 꾀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주관적인 표현주의수법을 구사함에 있어서 현대소설의 기본 본령으로 되는 ‘상징’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할아버지 및 우물, 그리고 용은 그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겠다. 여기서 흰 색, 흰 빛을 휘동한 할아버지는 우리의 신성한 선조, ‘바싹 말라버린 우물’과 ‘맑은 샘물들이 넘쳐흐르던 살아있는 우물’로 우리의 현재 메마른 삶과 지난날 생기가 넘치는 삶, ‘은빛의 아름다운 룡’으로 우리의 희망찬 앞날을 잘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개개의 상징 키워드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작품 마지막 부분의 상징세계를 엮어내며 전반 작품의 품위를 높이고 있다. 보다시피 여기서 ‘상징’은 하나의 수사법이기보다는 그것은 전반 작품을 최종 완성시키는 유기적 조성부분으로 되었다.<섬에서 만난 아이>는 우리에게 인간 보편의 바람직한 삶의 한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는 철리소설. 그것은 하나의 믿음과 희망. 섬에서 만난 아이가 이것을 말해준다. 그 아이는 섬에서 오늘도 기다린다. 죽어간 아버지와 떠나간 어머니를 기다린다. 어쩌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번히 알면서 기다린다. 마음이 그렇게 시키니깐. 아이에게 있어서 이 기다림은 믿음과 희망 그 자체. 바로 이 믿음과 희망이 있음으로 하여 ‘아이에게서 어떤 생생한 빛이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있어서 이 믿음과 희망은 삶의 지주. ‘빛은 모든것을 덮울수 있는 그 무엇이였’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이는 눈 먼 할머니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그 어려운 삶의 여건 속에서도 느끈이 잘 살아갈 수 있다.  주인 여자가 말한 ‘본디 희망이라는게 사람을 맹글잖것소.잉?’은 이것에 대한 좋은 주석으로 된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던 경식은 바로 이 ‘섬에서 만난 아이’한테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래서 ‘경식이 아이를 바라보자, 경식속에 자리잡고 있던 한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튀여나왔다. 아이는 섬에서 만난 아이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들은 하나가 된다. ‘빛속에 그들은 하나됨과 동시에 정신이 깃털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들은 서서히, 그러나 정교하고 세밀한 동작으로 꿈과 희망의 닻을 미래에 올렸다.’ 이에 작가는 ‘그때 힘찬 바람이 동쪽으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다.’로 힘을 실어주고 있다. 보다시피 그들은 정신이 자유롭고 그들의 미래는 꿈과 희망으로 넘친다. 그럼 이제 남는 문제는 왜 아이들인가 하는 문제. 일언이폐지하면 어른들은 복잡하고 아이들은 단순하다. 그리고 어른들은 보다 쉽게 회의적이나 아이들은 보다 쉽게 미래지향적이다. ‘바다를 향한 그 아이들의 얼굴이 처음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만족감과 희망으로 가득 찬 얼굴로 변해갔다.’ 보다시피 아이들은 보다 쉽게 더 넓은 바다와 공감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그 ‘어떤 만족감과 희망으로 가득 차’가지 않은가. 이것을 아이들의 童心 내지 赤子之心이라 해도 좋다. 어른은 삶에 부대끼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쉽게 이 귀중한 童心 내지 赤子之心을 잃게 된다. 실련에, 삶의 권태기가 없지 않은, 그래서 섬을 찾고 바다를 찾은 경식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럴진대 어른은 수시로 되돌아와서 아이들한테서 한 수 배워야 하는 법. <섬에서 만난 아이>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섬에서 만난 아이>는 예술수법에 있어서 역시 객관적 사실주의와 주관적 표현주의를 잘 갈무리하고 있다. 소설을 읽어 내려 가노라면 별로 재미가 슬한 세태적 인생실패자의 회색적 인생담을 듣는 듯하다. 거의 마지막까지 육박해가는 데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 결국 주관적 표현주의로 반전을 가져온다. ‘경식속에 자리잡고 있던 한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튀여나오’면서 새로운 경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방금 전까지의 어른의 기나긴 권태로운 이야기는 이 새로운 경지를 돋보이게 하는 혹은 깨닫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존재함을 알게 된다. <섬에서 만난 아이>는 바로 이 반전의 새로운 경지를 펼쳐 보이면서 주제적 승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래서 철리소설에 값한다. 그리고 <섬에서 만난 아이>는 역시 ‘아이’를 비롯한 상징코드들을 잘 살리고 있다. 바로 이런 상징코드들을 읽어 내는데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그리고 <섬에서 만난 아이>는 자연환경 묘사를 통한 무드조성 및 오감이 넘나드는 통감각적 묘사는 높이 사야 할 일품임에 틀림없다. 전반적으로 볼 때 <날아라, 룡! 룡! 룡!>이 우리 조선족의 현실적 삶의 실존을 보여주었다면 <섬에서 만난 아이>는 인간 보편의 바람직함 삶의 한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수법 면에서는 많이 닮아 있다. 비슷한 예술수법으로 부동한 내용을 소화해낸 케이스로 보면 되겠다. 문학의 한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줄로 안다. 앞으로 수상자 두 분의 계속되는 건승과 건필을 빌면서, 그래서 본인에게 새로운 심사평을 쓸 기회를 주기를 기원하면서 본 심사평을 가름하도록 한다. [끝]
127    [심사평] 현실과 실존 댓글:  조회:1522  추천:45  2009-08-02
현실과 실존 --제1회 두만강문학상 심사평 및 작품해설                        평심위원(대표) 우상렬 < 두만강> 창간호에 수록 된 12편 중단편소설은 우리 조선족의 대표적 문학지『연변문학』,『장백산』,『도라지』에 실린 秀作들로서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알 수 있게 한 대표적인 작품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이에『두만강』창간호에 수록한 것도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秀作들은 나름대로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어 심사위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심사의 고민 속에 빠졌음을 토로하는 바이다. 그 러나 심사는 어디까지나 심사인 만큼 상대평가의 잣대로 이미 선정되어 올라온 최국철의 <어느 여름날>, 박초란의 <스팽글>, 김춘택의 <장미를 지키는 남자>, 윤석원의 <토종이 어딨냐고?> 등 4편 중에서 대상작으로 최국철의 <어느 여름날>(국내상)과 윤석원의 <토종이 어딨냐고?>(해외상)를 뽑았다. 최 국철의 단편소설「어느 여름날」은 현 단계 농촌의 새로운 문제 즉 도시인들의 잠식문제를 고발하고 있어 이색적이다. 도시인들은 팽창하는 물욕의 마수를 농촌으로 뻗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농촌에 이 마수를 저지할 힘이 없다. 농촌문제의 심각성은 농촌,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여 나서서 싸워야 할 촌장이 이들과 단짝이 되어 돌아가는데 있다. 이 촌장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저지활동조차도 와해하는 핵심적 작용을 한다. 촌장이 바로 양보스에게 왈룡을 녹일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든가. 농민들 스스로는 너무 무맥하다. ‘현재는 10여호만이 미희미한 문패를 달고 숨소리를 죽이고 조용하게 살아간다. 어린이 첫돐 생일 잔치도 한번 없고 로인들의 회갑잔치도 없는 서편지경마을이라 … 아득한 섬 마을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래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 그래서 지경마을 사람들은 궐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왈룡이를 내세운 한 바탕의 난장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법적 대응도 할 줄 모른다. 그런 만큼 그것은 물 먹은 흙담처럼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가난하다. 물질적인 공세에 쉽게 녹아난다. 왈룡이의 중도이폐나 배신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결과적으로 ‘초여름을 잡으면서 뱀탕집간판이 붙으면서 영업이 시작되였다. 량보스네 펜션에는 시내에서 내려 온 갑부들로 밤낮으로 들컹거렸고 비단으로 온몸을 칠한 녀자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고달픈 남대천의 하늘과 그 하늘 아래에서 허위허위 위태롭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무차별적으로 희롱했다.’ 이 소설은 바로 중국이 개혁개방 후 줄기차게 산업화로 나아가면서 새롭게 부상된 도시와 농촌의 모순,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모순을 리얼하게 보여준데 1차적 가치가 있다. 이 외에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에 따른 한족들의 유입문제도 내비치고 있다. ‘서지경마을에서는 한족들이라면 당초에 곁에서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지만 조선말을 얼음에 박밀듯하는 왕씨네 세째와 네째의 두 형제의 천입은 결국 막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조선족 마을의 정통성 퇴색 및 파산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작가의 민족우환의식을 볼 수 있다. 그 리고 왈룡이와 왕싼의 대비를 통하여 작가의 민족성에 대한 사고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입에 발린 듣기 좋은 소리에 쉽게 붕 뜨고 하찮은 일에도 쉽게 격해나며 실속 없이 놀아나는 우리의 자화상. 여기에 왕싼으로 대표되는 한족들을 좀 보자. ‘아주 폄훼에 가까운 조크였지만 사람 좋은 왕싼은 대수로운 기색이 아니다’, ‘이들은 서지경마을에 들어 설 때 알뜰한 홀아비 석수쟁이 신분이였다.’ 不局小節에 실속 있게 놀아나는 그들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격. 이 소설은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 주인공 왈룡의 형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부각하였다. 이중적인 성격특성을 잘 조합해내고 있다. 얼숙은 면과 농민의 교활성, 우직하면서도 무른 면, 남한테는 한 없이 세고 색시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등 한마디로 개괄하기 힘든 풍부하고 다양한 면모의 성격특성이 살아 숨 쉬는 예술형상으로 성공시켰다. 그리고 이 소설은 함경도 방언을 능란하게 구사하여 지방적 특색을 잘 살렸다. 이것은 최국철 작가의 일관적인 문체적 특징인줄로 안다. 이로부터 놓고 볼 때 최국철 소설의 스찔적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언어표현에 있어서 유모아적 기질이 넘쳐나 작품 읽기에 재미를 더 해준다. 「토 종이 어딨냐고?」의 작가 尹 錫 元은 한국작가인 만큼 한국의 세태를 꼬집고 있다. 이를테면 단편소설「토종이 어딨냐고?」에서 주인공 장분수의 大智若愚적인 자조 섞인 1인칭수법으로 제 분수를 모르고 정말 푼수로 놀아나는 한국의 세태를 잘 꼬집고 있다. 장분수의 자조에는 ‘푼수’로 살지만 나름대로 ‘분수’에 맞게 사는 당당함과 비뚤어진 가치관에 제주제도 모르고 분수없이 날 뛰는 인간들에 대한 시니칼한 풍자가 도사리고 있어 뜻 깊다. 작품의 전반 주제도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전반 세계적인 근대화, 글로벌화 과정의 한 세태를 보여주고 있어 보편적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도 어필하는 바가 있어 한번 읽을만 하다. 그런데 이 자조적인 가치판단이 좀 혼란스러울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박 초란의 중편소설『스팽글』은 인간욕망의 문제 및 삶의 자세를 다루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만 욕망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스팽글로 상징되는 부질없는 욕망을 오히려 더 많이 부린다. 그래서 房奴, 車奴가 되고 끝없는 물질적 욕망의 노예가 된다. 현대인간들의 異化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로부터『스팽글』은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그래서 일종 보편적인 인간마음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주인공들도 영어문자로 부호화한 줄로 안다. 그런데 삶의 좌표를 굳이 禪의 불교적인 경지에 매치시키는 데는 異論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인 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상호 텍스트성을 잘 이용하여 주제사상을 거듭 강조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김 춘택의 중편소설『장미를 지키는 남자』는 제목의 남자 즉 아수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기사도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불가능할 때 억압된 욕망의 예술적 승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조지, 보들, 야마모도, 반야의 관계 및 이들의 아칭과의 관계를 통해서는 미국, 프랑스, 일본, 한국과 중국의 국제외교적인 역학관계를 내비치고 있는 듯하다. 즉 미국의 힘의 논리, 프랑스의 돈의 논리, 일본의 눈치보기와 돈힘을 더 한 논리, 한국의 난감함에 어쩔 수 없이 이런 논리에 놀아나기, 중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논리. 결과적으로 반야와 아칭의 끈질긴 돈독한 인간적 관계만 남아 한국과 중국의 유대관계를 강조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寓意소설로 읽힐듯하다. 그러나 그 구상이 묘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얽히고설킨 복잡한 국제 역학관계를 여실히 풀이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그 리고 이 소설은 반야와 아칭의 진정한 예술가와 누드모델의 자세 및 육욕의 합일 등을 통하여 ‘마음의 문’의 열고 닫는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대승불교에서 운운하는 일종 ‘반야’지혜를 내비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일종 상징소설로 읽을 수 있다. 즉 마음의 도를 터득하는 그런 경지창출의 상징소설. 물론 이런 도를 터득하고 경지를 창출해가는 주역은 반야이다. 그런데 이런 터득과 창출에 대해 동양의 가치를 높이 사려는 의도를 충분히 긍정한다고 해도 그 종결점이 왜 굳이 불교적인가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그리고 그 터득과 창출이 반야의 일종 자아 합리화와 변명에 불과한 감을 줄 때 그것은 새로운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박 초란의『스팽글』과 김춘택의『장미를 지키는 남자』는 비유, 상징 등 예술적 표현이나 기교 면에서 어쩌면 최국철의 단편소설「어느 여름날」보다 뚸어난 듯 하나 우리 조선족의 치열한 현실적 삶과 거리가 멀고 공히 세속의 문제를 일종 불교적 경지로 다스리려고 한데는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최국철의 단편소설「어느 여름날」은 이들 두 작품의 이런 취약점을 미봉하는 차원에서 오히려 돋보인다. 글 쓰기 지향점에서 놓고 볼 때 최국철의「어느 여름날」이 구체적인 우리 삶의 현실문제를 물고 늘어진 현실지향적인 작품이다면 박초란의『스팽글』과 김춘택의『장미를 지키는 남자』는 현실의 현상을 아우르는 보편성을 띤 실존문제를 물고 늘어진 작품이다. 사실 이 11편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면 대체로 현실과 실존이라는 이 글쓰기 지향점으로 개괄해볼 수 있다. 개혁개방 30년에 좋기도 했겠지만 우리의 삶은 많이 일그러져 있다. 우리 조선족의 삶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 작가들의 예각은 일단 여기에 집중되어 있는 줄로 안다. 이로써 조선족 작가의 사명감이 살아나는 줄로 안다. 구 호준의 단편소설「견공」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인간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개보다 못한 인간의 소외된 삶, 개로부터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밖에 없고 동류의식까지 느끼게 되는 인간의 소외적 삶이 리얼하게 잘 그려졌다. 그래서 ‘견공’이라고 부르게 되는 개. 예술수법 면에서 1인칭이나 3인칭에 비해 적게 구사하는 2인칭수법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개라는 소도구를 십분 잘 이용했다. 개와의 관계상에서 인간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잘 보여준 것이 성공적이다. 물론 ‘너’와 아들을 비롯한 가족,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좀 더 폭넓게 명확히 깔아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 ‘너’의 현실의 소외된 존재가 실감있게 안겨 올 수 있다. 김 경화의 단편소설「테테테」는 내 눈에 비친 ‘남자’의 전후 상이한 형상을 통하여 도시화와 시장경제시대에 우리 농촌사회의 황폐화를 보여주고 있다. 노신선생의「고향」을 읽는 듯하다. 그리고 이런 황폐화 속에서의 可憐天下父母心을 보여주기도 했다. 홍만호의 단편소설「리혼변수」는 들 뜨서 놀아나는 조선족 ‘그녀’와 대비되는 내실을 기한 듬직한 한족 ‘안해’ 및 흘러간 옛사랑을 비롯한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회억을 통하여 사랑위기를 극복해가는 낭만적인 사랑의 변증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의 변증법이 좀 안이하게 풀이되는 듯하여 깊이를 기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한 국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삶, 우리 문학의 새로운 한 메카로 떠올랐다. 어쩌면 마를 줄 모르는 우리의 영원한 문학의 샘줄기가 될 것이다. 전화의 단편소설「그곳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는 한국에서의 조선족의 피폐한 삶의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많은 관련 작품들과 비교적으로 고찰할 때 제재도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새로운 발굴도 없다. 그리고 지섭이라는 인물에 의해 주선을 끌고 왔으되 현상적인 나열에 거치고 만 감을 주며 광일이와 명길이의 이야기는 당돌하여 주선에서 이탈된 감을 준다. 슈제트 전개의 긴밀성이나 구성의 유기성이 많이 떨어지며 인물성격부각에서 흩어진 감을 주며 뚜렷한 전형형상도 창조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문 학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노정시키는 현실문제도 중요하지만 인간본연의 실존문제도 더 없이 중요하다. 현실문제에 대한 포착은 작가의 예민한 정치적, 도덕적 등 현실안광이 필요하겠지만 실존문제를 포착하는 데는 분명 현실을 꿰뚫어보고 아우르는 철학적 혜안이 있어야 한다. 아래에 보게 될 실존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현대인간들의 삶을 통하여 인간본연의 모습을 걸러낸 철학적 혜안이 내비치고 있다. 물론 이들 작품에 있어서 인간 본연의 실존문제는 서방의 실존주의의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처럼 살벌할 정도로 극단적이거나 치열하지는 않다. 적어도 동양, 아니 중국식 특색이 묻어난다.  리 여천의 단편소설「물구나무」는 모더니즘의 황당파 소설로 볼 수 있다. 인간실존의 황당함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리 정직하게 조용히 살려고 해도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치고 상할 때가 많다. ‘정말 말그대로 나무는 가만있으려 하는데 바람이 가만놔두려 하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 용수 및 그의 아버지, 그리고 소경소녀는 모두 전형적인 이런 희생자들이다. 특히 다치게 하고 상하게 하는 실체가 사회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주류담론이나 공권력일 때 그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띠며 더 할 수 없는 사회적 비극으로 치달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법기관의 무리한 조사로부터 오는 용수의 정신적 파탄 일보직전 및 ‘引蛇出洞’에 의한 용수 아버지의 하루아침에 ‘우파’분자로 전락, 자살은 그것의 생생한 보기가 되겠다. ‘처음에는 그래도 당당하던 그가 자기도 모르게 《죄인》이 되여 자기스스로가 자기를 용서할수가 없었고 불려다니는 자기 꼴이 한심해서 자신이 미워나기도 했다.’ 사법기관의 일방으로 몰아붙이는 심문에 아무런 죄 없이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용수의 심리토로. 우리 일반사람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세상인데 이 대명천지에 아직도 좌적인 ‘《세뇌》’운운하는 사법기관의 황당함은 용수의 심신을 정말 피곤하게 만들고 파탄일보 직전으로 내몬다. 보다시피 이 소설은 보편적인 인간실존을 우리의 현실적 삶과 매치시킴으로써 현실적 의의를 확보하기도 한다. 「물 구나무」는 황당한 실존 속에서나마 同病相憐의 인간의 정,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정, 사랑을 황당한 실존에서 살아가는 삶의 지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용수와 눈먼 소경의 관계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들 지간에는 흰색과 붉은 색에 관한 교류처럼 언어교류가 잘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끈끈한 정, 사랑 하나로 이심전심의 心心相印이 되어 있다. 이 소설은 여기까지, 인간의 정, 사랑을 갈구한 여기까지는 좋았었다.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 결국 세상을 안 보는, 외면하는 ‘소경주의’, 그리고 ‘세상을 거꾸로 보’는 ‘智者’로 등장하는 늙은이의 ‘의미심장’한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 데는 논의의 여지가 남는다. 허 련순의 단편소설「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걸기」는 일종 심리소설이다. 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어 보았자 그것은 나 혼자만의 넉두리에 다름 아니다. 소설제목도 심리소설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여주인공이 다이야몬드반지를 얻어 보고 잃어버리는 상황설정을 계기로 하여 보통 서민들의 횡재와 失財에 임해 느끼게 되는 의식과 무의식의 희노애락이 반죽된 다양한 심리세계를 형상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조선족의 정체성문제나 현실적 문제를 많이 물고 늘어진 허련순의 무거운 소설경향하고는 좀 다른 경향이 내비쳐 그녀의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듯하여 흐뭇하다. 슈제트전개에 많이 매달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소설경향을 놓고 볼 때 이런 심리소설은 돋보인다. 맛갈지고 수려한 언어표현력도 뛰어나다. 그런데 일부 세부적인 진실성에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김 서연의 단편소설「파리, 비둘기, 고양이, 301호남자 그리고 우방타워」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글쓰기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좀 이색적이다. 파리, 비둘기, 고양이의 먹고 먹히는 관계를 통하여 자연의 먹이사슬을 보여주었다면 나와 이들의 관계를 통해서는 현대인간들의 외롭고 무료한 실존, 그리고 자기도 주체할 수 없이 수시로 변하는 현대인간들의 얄팍한 심리, 그러면서도 자연에 맞선 인간중심적이고 우위적인 삶을 사디히즘적으로 누리는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와 301호남자의 관계를 통해서는 깊은 인간적인 유대보다는 자기의 이해득실이나 기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현대인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방타워의 시야에서의 소실은 현대도시생활에서의 현대인간들의 소외를 가장 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파리, 비둘기, 고양이, 301호남자 그리고 우방타워」의 주제의식은 전통적인 소설처럼 그 어떤 뚜렷한 중심이 있기 보다는 심히 파편적이다. 그리고 나의 긴 야행, 및 원고지는 샀으되 결국 노트북작업 등은 현대인간들의 마음 붙을 데 없는 무료함 및 자기도 주책할 수 없는 얄궂은 심리를 잘 보여주되 ‘파리에 관해 글쓰기’ 등등 잠꼬대 같이 긁적이기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글쓰기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권 중철의 「흔적」은 황당하고 과장된 수법으로 하나의 변형된 시대를 살아온 김팔순할머니의 운명을 통하여 모든것이 물욕으로 좌우되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시골에서 자라 시골에서 살아오면서도  김팔순 할머니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겪은 모든 정치사변을 다 겪는다. 그러면서도 소박한 시골사람의 본성을 잃지 않았고 비리와 비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중대한 력사적인 사변속에서 국내전쟁의 담가대로 참가를 하였고 남편을 <항미원조>에 보내여 공화국에 국민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 시대의 제물로 바쳐진 신세가 되었고 포로가 되여 돌아온 남편은 자살을 하게 되고 금전만능의 풍조가 만연한 오늘에 와서는 남편의 무덤마저 지키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비정과 비리와 날카롭게 맞서 싸워왔지만 결국 오늘의 현실앞에서 김팔순 할머니의 운명은 시대의 희생품으로 마감을 하게 된다. 이점에서 소설이 가지는 현실비판의 의의가 크다고 본다. 과장과 황당파수법을 기용하여 창작된 「흔적」은 현실비판의 주제를 다루는데 새로운 현장을 개척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소설의 전반 결구로 볼 때 흐트러진 감이 없지 않으며 언어사용에서의 분촌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수 없다. 이 상「견공」,「테테테」,「리혼변수」,「그곳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가 전통적인 사실주의 필치로 우리 조선족의 구체적인 현실적 삶을 보여주었다면 「물구나무」,「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걸기」,「파리, 비둘기, 고양이, 301호남자 그리고 우방타워」는 모더니즘의 황당파 수법이나 심리소설적 기법,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수법이나 기법을 잘 이용하여 우리 현대인간들의 보편적인 삶의 한 실존을 파헤쳤다는데 의의가 있다. 현실과 실존에 대한 예술적 조명, 생활을 전일체적으로 반영하는  문학, 특히 소설과 같은 서사문학의 본령이다. 이런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이번 12편의 秀作들은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름대로의 예술적 조명역할을 훌륭하게 해온 줄로 안다. 나는 현재 2009년 설을 맞으며 이 심사평을 작성하고 있다. 새로운 희망찬 한해의 출발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번 한해에 우리 문단의 보다 알찬 열매를 기대하면서 이 간략한 심사평을 가름하도록 한다.  2009년 설을 맞으며 [제1회 두만강문학상 심사위원; 리광일, 리여천, 우상렬, 리혜선, 장춘식, 허승호]
126    가난콤플렉스 댓글:  조회:4973  추천:66  2009-02-24
인간은 이 지구에 갓 왔을 때 지지리도 못 났다. 한 없이 가난했다. 전 인류적인 가난콤플렉스는 이로부터 쌓였다. 가난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채집문화, 수렵문화, 유목문화, 농업문화, 공업문화... 인간은 줄기차게 가난정복의 문화를 개발해왔다. 사실 종교라는 것도, 욕망을 죽이는 문화로서 이 가난콤플렉스를 떨쳐버리는 다른 한 방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콤플렉스를 상당히 떨쳐버린 듯하다. 그러나 사실 가난의 문제, 가난콤플렉스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문제로 남아있다. 흉년 세월에 공것 먹다가 배 터져 죽었다는 이야기, 지금 먹을 것이 흔한 세월이건만 공것을 먹을 때면 나도 모르게 많이 먹게 되는 것, 못 다 먹으면서도 버젖하게 차려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것, 뷔페에 가면 모조건 많이 먹기... 이것이 우리 가난콤플렉스의 거지근성 자화상 百態.가난콤플렉스는 인간의 허욕을 기껏 자극하고 인간을 아이러니에 빠뜨린다. 모택동은 일거에 사회주의혁명을 하여 가난문제를 해결한듯하다. 모택동시대 사회주의는 너나나나 피장파장 엇비슷하게 고만고만 살았었다. 餓不死, 撑不死의 평균주의, 가난콤플렉스가 그리 싹트지 않는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讓一部分人先富起來’의 등소평시대 사회주의, 가난콤플랙스가 살아난다. ‘先富起來’한 ‘一部分人’, 우리의 가난콤플렉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선망 내지는 질투의 눈길로 그 ‘一部分人’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一部分人’을 따라 잡기에 아글타글하였다. 요행 따라잡았다싶은데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우리보다 잘 사는 또 다른 ‘一部分人’이 눈에 띈다. 그래서 또 아글타글. 요행 따라잡았다싶은데 또 다른 ‘一部分人’...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삶의 질보다는 양에 엎어져 저 사람 수입이 얼마요, 저 나라 GNP, GDP 얼마요 하며 수자만 따지는 무깍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현재 바로 이 상대적 가난콤플렉스라는 현대적 질병에 빠져 다람쥐 채바퀴 돌듯 돈을 좇아 돌고 돈다. 그래서 먹고 살만 하건만 우리는 너무 피곤하다.가난콤플렉스는 과대망상증의 과시욕에 놀아나게 한다. 한국은 지난세기 중반까지도 눈물젖은 보릿고개에 잠겨 있었다. 보편적인 가난콤플렉스가 팽배했다. 그러다가 ‘우리도 하면 된다’는 민족적 결집점에 신바람을 피워 유럽인들이 몇 백 년 간 한 근대화를 30여년 만에 해제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가난콤플렉스를 떨쳐버린다. 이로부터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듯도 하다. 그래서 이런 해프닝도 벌어지는 줄로 안다. 필자가 1993년 한국에 유학갔을 때다. 하루는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한국 국내생 하나가 나보고 한다는 소리가 중국에도 겨울에 오이를 먹을 수 있어요였다. 마침 그날 식사메뉴에 오이채가 나와 있는지라 順手牽羊식으로 물어온다. 이런 겨울철에 중국에서는 오이를 먹을 수 없겠지하는 소리다. 박사생 꼬라지치고는 너무 수준이하의 물음이다. 사실 그때 중국에서도 오이쯤은 겨울 음식메뉴로 얼마든지 나왔으니깐. 그래서 내가 대답한다는 소리가 역시 박사생치고는 너무 수준이하의 소리-중국에서는 오이가 썩어나 돼지들이 먹고 있다고. 한국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더-강남 졸부이야기. 서울의 강남은 원래 촌구석이란다. 그런데 개발붐으로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며 가난콤플렉스에 쌓여있던 ‘촌놈’들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단다. 그래서 이른바 졸부양산. 하이칼라 양복에 삐까삐까 구두에 빈둥빈둥 무조건 거들먹거리기...사실 졸부는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고 중국에도 수두룩했었다. 어쩌면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양산되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 가난콤플렉스에 풀 죽어 있던 ‘촌놈’이 어쩌다가 하루아침에 ‘萬元戶’가 되면서 머리가 휙 돈다. 제정신이 아니다. 돈 많음을 자랑하고 싶다. 그래서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서 돈을 뿌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누가 돈 많은가하는 시합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니가 한 장 찢으면 나도 한 장 찢고... 꼴볼견! 사실 나도 이 가난콤플렉스의 과시욕에 놀아난 적이 있다. 우리가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절대적인 물질적 빈곤에 가난콤플렉스는 우리를 감싸고 돌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국방색 군복옷을 많이 입었다. 대학교 3-4학년 졸업 학년이 가까이 오면서 우리 반에는 가물에 콩나듯 양복쟁이들이 한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그 양복이 얼마나 입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래 내가 대학교를 졸업해서였다.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월급을 받는대로 눈을 찔끔 감고 고급양복 한 벌을 샀다. 그때 별로 브랜드의식도 없건만 브랜드의식도 살려 브랜드로 골라 잡았다. 그 브랜드라는 것이 알고도 모를 영어문자 몇 개를 박은 네모난 천쪼각으로 초라하게 오른쪽 소매 끝부분에 붙어있었다. 나는 양복을 입을 때는 항상 이 브랜드를 유표하게 보이느라고 오른팔에 신경을 많이 썼다. 사람들 눈에 잘 띠이도록 나도 모르게 항상 오른 팔을 앞으로 가져오곤 했다. 사실 그때 진짜 신사들은 이런 브랜드를 떼고 입는다던데... 개혁개방 초기 우리 조선족은 요란스럽게 설친 것 같은데 별로 잘 산 것 같지 않다. 개혁개방의 막차를 탄 듯한 아이러니. 漢族들은 잘 사는데, 우리는... 가난콤플렉스가 엄습한다. 그러다가 한국의 문이 열리면서 노다지판을 만난 듯 너도나도 한국행. 돈을 많이 번 것 같다. 가난콤플렉스를 날릴 것 같다. 그래서 모두들 ‘금의환향’에 흔전만전 돈 뿌리기. 현재 진행형이라니 더 없이 서글퍼난다. 가난콤플렉스는 변태의 온상이기도 하다.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가난 속에서 살아오신 분이다. 그 어려운 세월에 6형제를 키우자니 잘 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잘 살기 위해 노력해온 분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가난콤플렉스가 몸에 배인 분이다. 우리 6형제는 그래도 껄껄하게 잘 자라 현재 살만하다. 그런 만큼 우리 아버지도 잘 모신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께 소비돈도 잘 드리고 먹을 것, 입을 것도 잘 해드린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잘 챙겨만 둔다. 소비할 줄 모른다. 소비가 일종 사치 같고 죄악 같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어린 손자손녀들이 흘린 밥알들을 밥그릇의 밥알보다 더 맛있게 드신다. 가난콤플렉스가 우리 아버지를 ‘자린고비’로 만든 줄로 안다. 사실 우리 아버지만의 얘기가 아니고 어렵게 자란 사람이 성공하여 경제적 부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태적인 수전노가 되는 것도 대개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이 가난콤플렉스의 작간인 줄로 안다.과대망상증의 과시욕과 변태적인 ‘자린고비’ 내지 수전노, 가난콤플렉스의 아이러니한 두 양상-우리에게 무의식화되어 있다. 자기도 모르게 발동된다. 여기에 절대적 빈곤이나 상대적 빈곤이 아직도 우리의 가난콤플렉스를 안받침해주고 있다. 그만큼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가난콤플렉스는 떨쳐버려야 한다. 그래야 정녕 ‘촌놈’티를 벗고 멋진 신사가 될 수 있다. 삶의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고, 허욕에 들뜨기보다는 내실을 기하고, 적재적소의 소비를 할 줄 아는 삶의 자세를 굳혀야 한다. 그리고 適可而止, 知足者常樂의 道적인 경지도 추구해봄직하다.  2009. 설날
125    발표콤플렉스 댓글:  조회:4607  추천:57  2009-02-24
그래 이 세상에 발표하지 않기 위해 창작하는 글쓰기가 있단 말인가? 없다. 인간은 대개 발표콤플렉스에 놀아나기 때문이다. 쓰지 않고는 손이 건질건질해서 못 견디는, 발표하지 않고는 막달이 다 찬 애기를 낳지 않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이상한 것, 이런 것들이 심층적인 무의식속의 발표콤플렉스의 증후군.   인간에게는 분명 발표욕이 있다. 발표욕은 일반적인 표현욕하고는 좀 다르다. 일반 표현욕이 자연상태의 제멋대로의 것이다면 발표욕은 좀 세련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아줌마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것도 하나의 표현욕의 발산으로 볼 수 있다면 발표욕은 이런 제멋대로의 수다를 정제하고 적어도 진, 선, 미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표욕이 분명 웃음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드는 무의식적 표현욕을 기저에 깔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발표욕을 충분히 긍정받을 때 인간의 심신은 건강해진다. 나는 소학교 때 선생님께서 전반 학생들 앞에서 나의 작문을 읽어줄 때 기분이 얼마나 붕 뜻는지 몰랐다. 온 하루가 내 세상 같았다. 그래서 세계 개명된 나라는 모두 언론자유, 출판자유를 보장하고 있는가보다. 인간은 이런 발표욕이 억압당할 때 이른바 발표콤플렉스가 생긴다. 이런 발표콤플렉스는 이제 갓 문학을 시작한 문학지망생들에게서 많이 보게 된다. 발표를 못 해서 안달을 하는 그런 콤플렉스말이다. 지난 ‘80년대 초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우리 반의 많은 친구들은 문학에 열광했다. 그때 우리 학부에서 학생들 스스로 꾸리는 ‘종소리’라는 팜플렛잡지에 짧막한 시 한편 발표했을 때도 우리는 좋아서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위로 들뛰고 땅이 넓은 줄 모르고 가로 휘저으며 지랄발광을 했다. 어쩌다가 정식잡지에 게딱지만한 작품 하나 발표하면 전반이 떠들썩해난다. 야, 누구 어디에 뭐 발표했단다, 부러워 침이 질질 흘릴 정도다. 여기에 보너스로 원고료라도 받아 술 한 잔 내면 그것은 온통 잔치 기분이다. 처녀동지들은 작품 발표한 남성 총각동지들을 잘 나고 못 나고를 떠나 은근히 점찍어 두기도 한다. 전도유망한 젊은이니깐. 그때 정말 우리 반에 별 볼 일 없는 한 친구가 우연히 단편소설 한 편 발표한 덕에 아래 반 멋진 처녀동지의 프로포즈를 받아 입이 한발만 해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미워났는지 몰랐다. 아니, 쥐꼬리만한 작품 하나 발표 못하는 내 주제가 미워났다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필만 쥐면 일필휘지식으로 내리엮는 족족 인쇄화되어 발표를 식은 죽 먹기로 하는 문학천재들을 은근히 질투의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아직 발표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봐.이런 발표콤플렉스는 상당히 큰 에너지를 발산하기도 한다. 삼엄한 문학대혁명시기 八大樣板戱만 횡행. 작가들의 발표욕을 일거에 묵살. 발표콤플렉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쌓이고 쌓였던 시기. 그것은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 아니, 압박이 있으면 반항이 있는 법으로 수시로 폭발할 수 있는 하나의 활화산이기도 했다. 그래서 잠재창작이란 문학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이 잠재창작이란 바로 심층적인 무의식적 동기에서는 발표콤플렉스가 분출된 것임에 틀림없다. 보다시피 발표콤플렉스는 일종 목숨을 건 창작으로 내몰기도 한다. 김학철의 <20세기 신화>를 좀 보자. 당시 김학철은 억울하게 ‘우파’분자로 인생을 다 ‘조졌다.’ 창작자유를 박탈당했다. 마음속에 만강의 분노가 태동친다. 발표콤플렉스도 용솟음친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술에 걸린 듯 미친듯이 놀아난다. 이에 김학철은 <20세기 신화>를 쓴다. 그 미몽을 깨치고 신화를 부시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20세기 신화>는 발표할 수 없었다. 김학철은 자기 스스로에게만 ‘발표’하고만 셈이 되었다. 속이 얼마간 후련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성차지 않았다. 체증에 걸린 것 같다. 만 천하에 발표하는 것만이 그 체증이 풀릴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일본말로 창작을 시작. 일본으로 반출해 발표할 타산. 그러다가 이것도 무산되고 작가는 심한 고역을 겪게 되며 결국 작품을 창작해서 30여년이 지나 한국에서 빛을 보게 된다. 이 발표도 작가의 비상한 각오를 전제로 한 것이였다. 보다시피 한 작가에게 있어서 발표는 이렇게 중요하고 집요한 것이다.그럼 왜서 인간은 발표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가? 사실 글은 의식적인 현실차원에서 무슨 經國의 大事요, 立身揚名의 방편이 되기도 하겠지만 무의식적인 심층차원에서는 글쓴이 그 자신의 대상화, 제2의 나를 만드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로써 ‘나’는 갈지라도 글은 ‘나’ 대신 이 세상에 영원히 남아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文章之不朽之盛事라는 것이 되겠다. 그런데 그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듯한 아픔 그 자체다. 어머니들이 자식 낳이를 하는 것과 꼭 같다. 그래서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미운 자식 하나 없듯이 작가에게 있어서 자기 작품 우습게 보는 사람 없다. 다들 자기 작품을 갓난아기처럼 애지중지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단 발표되면 내 스스로가 사회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긍정을 받는 희열을 맛보게 된다. 여기에 긍정적인 여론이나 평론이 가미될 때 그 희열이 걷잡을 수 없이 배가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발표는 바로 이런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발표콤플렉스에 놀아날 때 발표만 하면 되는 식으로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코 꿰인 송아지처럼 전적으로 편집의사에 끌려 다니는 경우가 많다. 대개 문학지망생과 같은 햇내기들이 이렇다. 나도 아직 여기에서 못벗어났다. 발표콤플렉스에 놀아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대가들, 김학철과 같은 대가들은 이렇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이 쓴 글의 토씨 하나 다칠세라 온전한 면모로 발표되기를 주장한다. 워낙 그들은 발표콤플렉스에서 벗어났고 일반편집들보다 레벨이 높음에라! 진정한 발표는 바로 이런 대가들처럼 발표콤플렉스를 벗어난 발표에 있는 것이다.
124    중국 조선어 잘 나가고 있다 댓글:  조회:6385  추천:86  2008-10-31
중국 조선어 잘 나가고 있다우상렬 ‘중국 조선어 어디로 가나?’라는 문제를 두고 적어도 두 가지 관점이 팽팽히 맞설 줄로 안다. 하나는 낙관론, 다른 하나는 비관론. 필자는 낙관론자. 물론 맹목적인 낙관론자는 아니다.현재 우리가 학술적으로 조선의 조선어니, 한국의 한국어니, 중국 조선어니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이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이것인 것으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다 뛸 데 없는 우리 말과 글인 것이다. 일종 지역적인‘방언’차이라고나 할까,별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중국어의 경우 지역적인 방언차이하고는 천양지차다. 그래 남북한이 회담을 할 때 ‘통역’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 조선족은 남북을 자유롭게 접촉하면서 언어장애를 그리 느끼지 않지 않은가? 이런 거시적인 언어실천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중국 조선어는 이미 남북 모국어를 비롯한 범 세계적인 우리 말과 글과 하나가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 조선어 위기 및 그에 따른 비관론은 운운할 여지도 못 된다.그래 약 8천만 인구가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증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현재 남북 모국과 우리 조선족은 하나가 되어 돌아가면서 중국에서 우리 말과 글의 자장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일반 대학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유수의 명문 대학교에서도 한국어 열기는 현재 진행형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여기에 한국어 교수는 100%에 가깝게 우리 조선족들이다.물론 이들 가운데는 중국조선어식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크게 문제될 거는 없다. 일부 어휘사용이나 톤의 흐름과 같은 데서 지엽적인 문제는 생길지언정 한국어의 전반 어휘체계나 음운체계에서 빗나가는 것은 아니다. 워낙 근본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교통하기 전 중국에서의 우리 말과글 교육은 조선의 조선어식이었다. 조선의 조선어식이 우리 중국 조선어의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당시 이런 중국 조선어를 배운 한족을 비롯한 타민족들이 현재 한국어도 그 누구보다도 잘 구사하고 한국어 교육이나 연구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중국 조선어는 워낙 한국어와 ‘同根生’일 뿐만 아니라 쌍둥이 형제임에라! 이들은 오히려 조선의 조선어 및 중국 조선어라는 참조계를 하나 더 가짐으로써 우리 말과 글에 대한 광역의 폭을 확보할 수 있었고 한국어에 대한 인지나 교육 및 연구도 그 만큼 잘 된다고 한다. 자, 그러니 조선의 조선어, 한국의 한국어, 그리고 중국의 조선어는 근본적으로 같은 범 세계적인 우리 민족의 우리 말과 글이라는 거시적인 범주 차원에서 문제를 볼 때 비관론은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여기에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말과 글의 우수성을 떠올려본다. 필자가 중국인을 상대로 가르친 경험에 의하더라도 일단 우리 말과 글은 참 배우기 쉽다. 자음, 모음 척척 주어 맞추면 말이 되고 글자가 된다. 그리고 의성의태어를 비롯한 뚸어난 표현력도 두 말 하면 잔소리다. 바로 이런 언어이기에 유엔의 教科文组织에서‘훈민정음’한글을 세계문맹퇴치의 언어로 지정한 줄로 안다. 그리고 세계 많은 언어석학들이 우리 말과 글의 음운론 등 여러 방면의 가치를 충분히 긍정하고 있다. 언어는 도구.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효률적이면 최상의 도구. 우리 말과 글은 바로 이런 도구. 그러니 그 누구든지 우리 말과 글을 배워보았거나 사용해보면 그 매력에 빠져 버린다. 중국 조선어도 바로 이런 언어다. 우리에게는 중국 조선어를 바라보는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그런데 일반의 논리로 굳이 중국 조선어 자체를 쪽 놓고 보더라도 중국 조선어는 미래지향적인 거창한 존재의 이유를 확보하고 있다. 중국 조선어는 조선의 조선어, 한국의 한국어의 장점을 모두 보유할 수 있으며 보유하고 있는 입지에 있다. 물론 중국 조선어는 개혁개방 전에는 조선의 조선어에 경도되었다가 그 후는 한국의 한국어에 경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중국 조선어는 당지 중국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왔다. 그래서 중국 조선어는 난맥상을 드러내는 듯도 하다. 조선식, 한국식, 중국식…∼ 언어는 어디까지나 도구. 조선식이든 한국식이든 우리의 의사를 자유자재로 충분히 표달하고 교류할 수 있으면 다 좋은 것이다. 굳이 평양표준어요, 서울표준어요 하며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 현 단계  조선에서의 한국식, 한국에서의 조선식은 잘 통하지 않는다. 조선식이나 한국식은 이념,적어도 정서적으로 이념적인 것에 절어있다. 그래서 뿌리가 같은 ‘同根生’임에도 불구하고 일종 상호 배타성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사람 그 누가 평양시내에서 한국식으로 한 번 큰 소리로 말해보라. 아니꼬운 눈총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 사람 그 누가 서울시내에서 조선식으로 한 번 큰 소리로 말해보라. 적어도 이상한 눈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북경, 아니 우리 연길에서 한국 사람, 조선 사람 그 누구든지, 조선식이든지, 한국식이든지  마음대로 말해보라. 여기서는 아무런 꺼리낌도 없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것이다. 우리 중국 조선어는 남북 고국의 정치적 이념대립에서 그 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그러니 조선식이니, 한국식이니 하며 맹목적으로 따라 갈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들의 극단적인 고유어고수나 외래어남용 같은 나쁜 경향을 바로 잡고 조선식 표현의 阳刚之美와 한국식 표현의 阴柔之美 같은 장점을 아울러 제3의 중국 조선족식 우리 말과 글, 아니 통일Korean의 한 모델을 창출할 때 수 있다고 믿는다. <중국흑룡강조선신문>의 우리 글 구사는 기정사실화로 그 구체적인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바로 여기에서 중국조선어의 개방성, 역동성, 창조성이 돋보인다.중국 조선족의 남북 가교역할, 이런 지정학적 위치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중국 조선어 자체의 존재여부의 가장 큰 변수는 뭐니뭐니 해도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에 달려 있다. 소수민족의 언어문자를 존중하고 보호해주는 민족정책은 중국 조선어 존재의 근본 정치적 보장으로 된다.사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이런 소수민족정책을 펴왔고 앞으로도 계속 펴나갈 것이다. 다원 문화와 가치를 존중하는 전반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중국의 이런 소수민족청책은 더욱 각광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런 소수민족정책 하에 중국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선어의 전일체적인 교육이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연변대학교가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이런 정치적 보장이 있는 전제 조건 하에 중국 조선어의 뿌리와 샘골 역할을 할 남북 모국의 역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중국 조선어는 남북 고국과의 끊임없는 인적 물적 교류에 따라 풍전등화가 아니라‘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뿌리 깊은 나무고 가뭄에 마르지 않는 깊은 샘’이 되고 있다. 현재 모국의 정부 차원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민간 차원에서 우리 말과 글의 활성화를 위한 물심양면으로 되는 성원과 지원 및 조치는 이 뿌리와 샘골의 감로수에 다름 아니다. 조선족 학교를 비롯한 우리 말과 글을 직접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기관에 대한 대폭적인 성원과 지원은 무엇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취해진 일련의 조치들은 즉각적인 가시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실시된 중국 조선족 무연고자 노무취업을 위한 실무한국어시험제도는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한국어를 비롯한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중시와 활성화를 가져왔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앞으로 이런 제도와 조치는 중국 조선족 범위에 국한되지 말고 전반 중국인 노무취업 희망자를 대상으로 영역을 넓혀 나간다면 그 효과는 더욱 가시적이라 생각된다. 현재 주로 대학생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외에 중국에서의 우리 말과 글 관련 많은 이벤트들도 중국 조선어를 비롯한 우리 말과 글의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우리 말과 글 웅변대회 및 글짓기 백일장 등등은 중국에서의 우리 말과 글의 성세를 조성하고 있다.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모국의 존재 및 그 모국의 대폭적인 성원과 지원 및 실제적인 제도와 조치의 가동은 중국 조선어의 마르지 않는 활력수로 된다. 이 점을 현재 중국의 많은 소수민족들 가운데 본 민족의 언어문자는 있되 해외에 우리 조선족들처럼 모국이 없는 민족의 경우의 언어실태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언어의 현실적 논리는 경제적 논리와 문화적 논리에 긴밀히 부착되어 있다. 언어는 경제와 문화의 皮毛에 다름 아니다. 세계어가 번연히 있으면서도 영어가 세계어 행세를 하는 그 이면에는 바로‘대영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힘의 논리가 많이 작용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중국에서의 한국어붐도 1차적으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떠나서는 논할 여지가 못 된다. 한국 기업체의 활발한 중국진출이 중국인들의 한국어에 대한 현실적 필요를 자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한국의 경제적 위상 및 한국어붐은 우리 중국 조선어의 위상도 올려주었다. 우리 연변에서 한족들이 조선족 유치원 및 학교 선호는 그 한 보기가 되겠다. 현 단계 전 세계적인 시장경제 논리의 확산은 경제발전국의 언어가치를 계속 고양시킬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놓고볼 때 언젠가 조선 경제의 비약은 중국에서의 조선어붐을 몰고 온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현 단계 물론 경제적 논리가 우선이겠지만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선진국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문화적 가치가 점점 더 고양됨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논리로 볼 때 조선-한국의 전통문화의 우수성 및 여기에 접목된 중국 조선족 문화의 우수성은 한국어, 조선어 내지는 중국 조선어의 위상도 아울러 높혀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류, 바로 한국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중문화의 발산에 다름 아니다. 조선-한국 및 중국 조선족 문화의 우수성과 그 매력은 그 언어에 대한 친화력이나 감지로 나아가게 된다. 현재 중국의 많은 젊은애들은 바로 이 한류에 ‘감염’되어 우리 말과 글을 배우게 되었단다. 그렇다. 언어는 문화의 탑지체이고 전파매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경제적 속물보다는 문화민족으로 살아남는 것이 그 언어를 살리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중국 조선족은 고국의 전통문화와 중국의 새로운 문화를 잘도 갈무리해 나가면서 문화민족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는 중국 조선어 매력의 문화적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  이상 국내외적인 주객관적 논리로 볼 때 중국 조선어에 대해 비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눈 앞의 조선족 현실을 놓고 볼 때 그런 비관론을 갖는 것도 이해는 간다. 지난 세기 90년대 이래 조선족 인구의 마이나스성장, 본격적인 시장경제의 가동 및 도시화의 진척, 그리고 해외진출과 더불어 조선족 농촌마을의 급격한 파탄 등으로부터 야기된 조선족 학교의 절대적 감소 등 일련의 파노라마적으로 펼쳐진 ‘비극’적 사실은 그럴만하다. 그런데 祸속에 福이 있고 福속에 祸가 있는 법. 조선족 농촌의 파탄은 조선족의 증발을 의미하는 것은아니다. 그것은 도시에로의 진출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조선족 도시군락을 형성한다. 조선족 학교도 이제는 물량보다는 새로운 질적인 도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우리 조선족과 동고동락의 한 운명체가 된 신조선족으로 부상한 한국인들이 대거 몰려든다. 심양의 西塔, 북경의 望京... 산동 청도지역에서만도 20여만 명의 조선족-한국인군체를 이루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 이제  곧 중국에서의 100만 명 한국인 시대를 맞이한다고 하지 않는가. 한국인들의 역동적인 중국 진출 및 조선족과의 합류는 한국어와 중국 조선어의 융합을 이루게 되며 새로운 우리 말과 글의 자장을 형성할 것이다.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현대는 인터넷세상. 세상이 좁다하다 할 정도로 우리의 거리를 좁혀주며 하나로 만들고 있다. 인터넷세상은 우리 말과 글 도 하나로 이어놓았다. 한국의‘daum’을 비롯한 우리 말과 글로 된 포탈 사이트들도 참 많다. 이런 사이트들은 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어디에서든지 열어볼 수 있다. 우리 글뿐만 아니라 실시간대로 우리 말 뉴스도 접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어떤 외딴 곳에 가 있더라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향수병은 일단 이런 포탈 사이트로 떨어버릴 수 있으니 중국 조선어는 적어도 이런 사이트 내지 사이버공간에서 잘 살아남을 것이다.물론 이런 논리는 중국 조선어에 대한 민족적 사명감 등 당위성적인 논리가 밑받침 될 때 더 확실하게 살아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조선족은 고국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중국 조선족으로서의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우월감 등은 민족언어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른바 중국 조선어 위기설이니 비관론이니 하는 것도 실은 이런 민족언어에 대한 사랑의 다른 한 보기에 다름 아니다. <중국흑룡강조선신문>의 이번 ‘중국 조선어 어디로 가나?’라는 지상토론도 바로 이런 사랑에서 출발한 것인 줄로 안다.‘중국 조선어 잘 나가고 있습니다’, 필자의 낙관론이 중국조선어를 사랑하는 모든이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이 글을 가름하도록 한다.  2008-07-30  
123    독서와 인생 및 우리의 현실 댓글:  조회:4840  추천:87  2008-10-26
독서와 인생 및 우리의 현실(수정고) 우상렬 독서행위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기본특성의 하나이다. 독서는 인간이 정신양식을 먹는 행위이다. 인간은 독서를 통하여 인류의 지식을 공유하고 정서적 함양을 하며 거듭 새롭게 난다.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은 것도 바로 이 독서행위 때문이다. 그럴진대 독서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독서에 대한 인류의 이런 공감대는 세계적인 ‘독서시즌’을 정하고 우리가 오늘 무슨 ‘독서포럼’이니 하는 것을 논하게 만든다. 독서는 이 세상 가장 좋은 선생님이시다. 주지하다시피 현대는 지식폭발의 시대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무산계급의 대표적 문호 고리끼의 말처럼 ‘책이 인류 진보의 계단’이라 할 때 이것은 더 없이 기꺼운 일이다. 보아내기에 아름차고 바쁘다. 그래서 평생교육이라는 말도 나온 듯하다. 그런데 일일이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배우기에는 역부족이고 시간이 우리를 기대려주지 않는다. 전통적인 선생→학생 패턴의 가르치고 배우기는 공부하기의 하나의 입문에 불과하다. 어린이의 성장에 비겨 말할 때 일종 젖먹이 단계. 그래서 자기 절로 공부하는 독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 젖을 떼고 나름대로 영양분 흡수하기 식. 이른바 자습능력을 키워야 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 자습능력이라는 것이 결국은 스스로의 독파 즉 독서행위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 독서행위를 통한 자습능력의 함양은 지식폭발의 시대에 개개인의 취미 및 전공에 따라 나름대로 확실한 정신적 양식을 얻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魯迅은 말했던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듯하다고. 독서는 가장 편안한 친구와의 만남이다. 내 만나고 싶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 그런데 인간지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쉽지 않다. 피차간 트러블이 잘 생기고 다치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현대 서방의 지성 쇼펜하우엘은 비관적으로 설파한다. 인간지간의 관계는 고슴도치 관계라고. 추운 겨울 두 고슴도치는 춥다. 그래서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데 서로 부딪치는 순간 피차의 가시털에 찔린다. 그래서 서로 떨어진다. 그런데 또 추워난다. 그래서 또 다가간다... 인간의 관계는 이렇게 어색하고 서글픈 관계라는 것이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그래서 예로부터 중국 지성들은 이 세상에서 ‘知己’ 하나만 얻으면 족하다고 했던가. 인간관계의 비극이 묻어나는 말들이다. 그러나 책은 고슴도치처럼 가시털도 없고 ‘한길 물속’도 아니다. 책은 항상 거기에 있다. 너를 기다려준다. 니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응한다. 그리고 니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니가 보아내는 만큼 무대가로 준다. 니가 싫다고 하면 언제든지 물러난다. 책은 배반 같은 것을 모른다. 책은 가장 직실한 너의 친구임을 기억할지어!독서는 인생의 가장 즐거운 여행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人生不滿百. 그런데 세상은 넓고 돌아볼 곳이 많고 만날 사람이 많다. 인생의 이 아이러니, 바로 독서가 해결해준다. 보라, 책에 없는 것이 없지 않은가. 고금중외의 산천경개, 명승고적, 그리고 남녀노소의 인생살이, 그리고 세계지성들의 세상, 인생에 대한 사색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지 않은가. 두 발 걸음으로 걷는 여행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그것은 안락의자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며 周遊世界하는 경지다.독서는 겸허한 인간적 자세를 가지게 한다. 책은 인류지식의 무진장한 보물고. 진정한 인간은 책을 대하는 순간 즉 독서를 하면서 스스로의 무지를 느끼게 된다. 책속의 무진장한 지식량과 스스로의 제한된 지식량의 落差가 감지되면서 말이다. 책을 많이 보고 똑똑해지면 질수록 이 점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알량한 만능박사에 놀아나지 않으며 ‘무지의 용감’ 같은 만용은 더구나 부리지 않는다. 곡식이 여물면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는 식으로 인생의 겸허한 자세가 몸에 배인다. 결과적으로 대인관계에서도 언제나 이 겸허한 자세로 나오게 되는 만큼 원활해질 수밖에 없다. 독서는 고상한 인간적 대화를 하게 한다. 인간은 知, 情, 意적인 존재다. 구지욕에 불타고 진리를 추구하며 다정다감한 정서적 함양을 갈구하고 정의감에 놀아난다. 그리고 學以致用한다. 이로부터 거듭 自我完善해 나간다. 인간의 이런 知, 情, 意는 眞, 善, 美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인류의 책은 바로 이런 眞, 善, 美의 가장 집중적인 담지체이다. 그래서 독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알게 모르게 眞, 善, 美에 매치되게 한다. 이런 眞, 善, 美적 수양이야 말로 정녕 인간 대 인간의 고상하고 우아한 대화를 가능케 한다. 독서는 인간의 知, 情, 意→眞, 善, 美적 추구에 만족을 주는 감로수에 다름 아니다. 그럴진대 독서는 인생 그 자체다. 인생의 목적 그 자체다. 독서가 인생의 목적일진대 인간은 그것을 떠날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독서가 인간의 그 어떤 진학이나 입신양명의 수단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다. 수단적인 독서는 오히려 소외(즉 異化)의 독버섯으로 우리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이상 독서와 인생의 상승적 관계에 대해 일반적 논의를 전개한 전제하에서 우리의 현실을 좀 되돌아보자.독서에 재미를 부치자. 위에서 잠간 말했다시피 독서는 인생 그 자체다. 그 목적이다. 그래서 사실 재미를 부치고 자시고 운운할 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때까지 우리는 독서를 너무 수단적으로만 생각해온 듯하다. 소학생의 그 두드럭한 책가방, 그 두터운 안경알, 그리고 우리 부모들의 ‘야, 책 좀 보라!’는 무엇을 위했던가. 아무래도 보다 많이는 學而優則仕에 놀아난 것 같다. 學而優則仕가 강박관념으로 되어 우리를 내리누를 때 그 역시 더 없이 피곤하다. 우리 가르치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 책을 본다는 것은 참 피곤하다. 이른바 직업적인 책읽기의 역겨움, 나는 이것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나는 독서를 좋아하되 사실 그것은 내 스스로 좋아서 하는 노릇에 다름 아니다. 이런 직업적인 책읽기에 놀아날 경우 우리 교수님들조차도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그 무거운 책의 멍에를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하며 책과는 빠이빠이다. 그래서 책을 쓰레기종이장처럼 폐기처분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바로 이런 우리의 자화상이라서 그런지 우리에게는 죽을 때까지 책 보는 사람을 보기 참 드물다. 저 아인슈타인 같은, 손에 책을 놓지 않는 은발의 학자나 노교수를 보기 드물다. 책은 우선 내가 좋아서 읽어야 한다. 내 좋아서 읽다보면 알게 모르게 그것이 내 삶의 감로수가 되어 學而優則仕도 할 수 있고 잘 가르칠 수도 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독서의 뽀나스. 일종 무목적성의 목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지구가 폭발한다하더라고 책 읽는 재미를 버리지 못해 손에 책을 드는 그런 경지를 창출해야 한다.독서무드를 형성해야 한다. 시장경제, 세계적인 경제흐름의 추세다. 시장경제 좋기는 하다. 그런데 우리를 너무 용속하게 만든다. 돈밖에 모르게 만든다. 그래서 유수의 세계 많은 도시들에서 더러운 돈臭를 떨어버리는 문화도시를 지향한다. 물론 문화도시라는 것은 내연과 외연이 매우 풍부하겠지만 독서와 갈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도시가 문화도시가 되려면 적어도 독서무드가 흘러넘쳐야 된다고 본다. 그럼 독서무드란 무엇이냐? 책 읽는 분위기가 되겠지. 수시로, 곳곳에 책 읽는 사람들이 눈에 띠는 것만으로 그 무드는 살아난다고 본다. 이것은 하드적인 문제가 아니고 소프트적인 문제다. 바로 마인드의 문제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우리 연길시를 되돌아본다. 문화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듯하다. 노래 소리 더 높고 춤판이 잘 벌어진다. 좀 들뜬 감을 준다. 물론 이것도 문화긴 문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차분하고 알찬 독서무드가 더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책 보는 사람이 너무 적다. 시내버스 같은 데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시원한 강가나 쾌적한 공원의 벤취에서조차 책 보는 사람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한국이나 일본은 시내 곳곳에서 책 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아이는 아이대로 뛰어놀고 부부는 부부대로 해살이 따뜻이 내리비치는 공원벤취에 앉아 느긋이 책을 보는 저 유럽의 젊은 부부는 아름답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의 시내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책을 보는 승객들도 참 아름답다. 그리고 쌀쌀한 찬 기운이 돌건만 저 강가에 서서 다소곳이 책 보기에 몰입한 은발의 노인은 더 멋있다. 책 보는 사람이 아름다운 그런 무드를 창출해야 한다. 진짜 이런 무드가 창출될 때 서점직원의 눈에 비친, 서점에서 책은 사지 않고 온종일 책만 보고 있는 사람도 아름답게 보인다. 나는 한국의 서점에서 이런 체험을 해보았으나 아직 중국의 서점, 적어도 우리 연길서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우리는 書香門弟하고 거리가 멀다. ‘빈하중농’ ‘촌놈’출신들이 많다는 말이 되겠다. 못 배운 것이 恨으로 맻히고 콤플렉스로 쌓여있다. 그래서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키’는 우리들이 아니냐? 우리 조선족의 유명한 극작가 리광수의 오페라『사랑의 샘』은 그래서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는 너무 어렵게 살아오다보니 책이 없었고 독서전통이 없었다. 그럼 書香門弟란 무엇이냐? 그것은 집안에 책의 향기가 넘치고 그런 환경과 무드 속에서 자란 애들이란 말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것이 모자란다. 그래서 나는 제언한다. 새집 인테리어할 때 무엇보다 우선 서재를 하나 갖추자고. 그리고 그 서재를 세계명작으로 가득 차게 하자. 그리고 우리 어른부터 독서습관을 키우자. 시간이 나는대로 손에 책 드는 습관을 키우자. 上行下效라 우리의 애들은 耳濡目染, 알게 모르게 독서의 훈향에 빠져들게 된다. 책은 비치해 놓으면 보게 된다. 일종 조건반사적인 독서를 유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수시로 책을 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동네 책방, 도서관 같은 문화시설설립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경우는 한 社區에 적어도 한 책방, 한 도서관은 갖추어야 된다고 본다. 용정에 있는 김재권 선생이 운영하는 책방, 연길에 있는 한국 안병렬 교수 등이 운영하는 책방은 민간 차원의 좋은 스타트라 생각된다. 이들 책방운영은 뜻 있는 분들의 모범적인 동참의 한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처럼 ‘곳곳에 비치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지하철이나 백화점의 ‘만남의 광장’같은데 책을 비치한 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누구와 약속하고 한 걸음 앞서왔다. 거저 앉아 있거나 서 있자니 무엇하고 싱겁다. 그런데 마침 저쪽에 책이 비치되어 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책 쪽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고 손에 책을 들게 된다... 물론 이런 것은 모두 무료 운영이여야 한다. 그래서 책값이 천정부지로 비싼 요새 이런 책방이나 도서관 및 비치된 곳의 책이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될 줄로 안다. 책값 말이 나온 김에 관련 당국에 한 마디 제언한다. 현재 책값이 너무 비싸다. 우리 수입수준하고 비길 때 아이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이 되겠다. 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책을 사야 될 줄로 안다. 우리 학생들도 아우성이다. 그래서 아무리 시장경제라 하지만 관련 당국에서 책가격 책정에 개입하자는 것이다. 물론 강압적인 책가격 책정으로 인한 손해액은 財政補貼하는 식으로 보완하더라도 말이다. 책값이 싸야 사람들이 사보거나 서재도 꾸리고 책방이나 도서관도 운영하고 곳곳에 책을 비치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곳곳에서 책을 팔게 하자. 책을 팔겠다는 사람 누구든지 팔게 하자. ‘슈퍼마켓’에서조차 책매대를 쭉 벌려놓은 일본의 광경이 보기에도 좋더라. 정신양식을 파는 그 광경이.위에서 얘기했다시피 현대는 지식폭발의 시대. 지식폭발, 좋기만 한 것은 아님. 이 속에는 파편찌꺼기도 있음. 이른바 책의 남발로 쓰레기 같은 책도 많다. 책의 正道하고는 거리가 멀다. 시장경제로 인한 책의 상업주의 때문이다. 일시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고 저급적인 취미에 영합한 책들도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상업적인 조작으로 베스트셀러도 참 많이 만들어낸다.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꼭 좋은 책만이 아니다. 그래서 독서지도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이 알찬 책과 찌꺼기 책을 선별하는 그런 독서지도 말이다. 물론 이런 독서지도는 다양한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를 보면 ‘TV는 책을 말한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최신 볼만한 책들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그리고 조선의 인민대학습당에서 전문 독서지도인원을 두어 항상 독자들을 대기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전문 독서지도인원은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하는 독서 안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독자들이 책을 읽다가 어려운 문제나 의문 나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언제든지 척척 대답해준단다. 일종 ‘척척 할아버지’식.현대는 이미지시대. 전통적인 책 개념의 쇄신을 요구한다. 재현상상을 요구하는 종이책뿐만 아니라 각종 멀티미디어를 동원한 이미지‘책’도 현대의 책 개념에 포함됨을 알아야 한다. 어쩌면 후자 ‘이미지책’이 더 인기 있는 줄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새 뜨는 것이 콘텐츠산업이다. 쉽게 풀이하면 장르타파로서 그 전형적인 보기가 문자화된 작품을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고전명작들의 영상화작업 등등. 이것은 신세대에게 대환영을 받고 있다. 그리고 현대는 컴퓨터시대라 e-Book도 새로운 책양식으로 부상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럴진대 우리는 현대의 책흐름 추세에 맞추어 이미지’책‘이든지 e-Book을 많이 만들고 공급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술 한 잔 거나하게 되었을 때 인터넷접속으로 ‘百家講壇’ 명사들의 강의를 보며 들으며 노닥거리는 것이 인생의 한 樂. 고금중외의 지식이 절로 귀로 쏙쏙 들어오니 말이다. 우리도 이런 명사들의 강의를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본고는 세계 최고 지성 및 기업인의 하나로 알려진 빌․게이츠의 다음의 한마디 말로 가름하도록 하겠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동네 도서관이었고 하버드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다.’ 2008. 10. 23
122    회귀본능과 연변 (우상렬) 댓글:  조회:6046  추천:94  2008-10-10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회귀본능과 연변 우상렬 연변대학교 교수   인간에게는 회귀본능이란 게 있다. 落葉歸根이란거, 여우도 죽을 때면 자기가 나서 자란 곳을 향해 죽는 다는 그런 회귀본능. 연변이 우리 조선족에게 어떤 존재냐? 바로 우리의 이 회귀본능에 맞닿아 있는 영원한 정신적인 고향. 저 멀리 아득한 역사의 지평선에 ‘아, 고구려-’로 가슴 아련히 맺혀오는 곳, 여기에 지천에 널려 있는 발해유적은 우리의 무의식 심처의 역사적 뿌리를 확인시켜 준다. 그러다가 지, 지난세기부터 흰 옷 입은 무리들이 쪽박 하나 차고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난에 쪼들려 ‘월강죄’를 무릅쓴 죽음의 월강이었고 왜놈들 성화에 못 견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끈질기게 생명의 씨앗을 박아온 개척과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하늘땅과 싸우고 계급의 적과 싸우고 민족의 적과 싸우고... 벼농사 성공시키고 사과배 열매 맺게 하고 소비에트 정권수립, 항일열사 90%이상... 광복,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신생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 및 분배는 우리 삶의 뿌리의 비옥한 토양이었다. 그래서 3년 해방전쟁은 일단 우리 삶의 터전의 보위전이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달갑게 피를 흘리고 희생도 했다. 정말 투쟁과 혁명을 내놓고 우리 연변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의 어느 저명한 시인은 읊었던가, ‘산은 산마다 진달래/마을은 마을마다 열사비’! 연변은 우리의 땀과 피눈물이 슴배인 곳이다. 새 중국 및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탄생은 그야말로 우리 조선족의 봉황열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세웠네...’ 연변은 명실공히 우리의 삶의 고향이 되었다. 연변, 조선사람 세상. 우리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 조선노래 울려 퍼지고 조선춤 너울너울, 그리고 우리 말, 우리 글이 그대로 통하는 세상. 조선음식, 조선옷, 조선집, 조선어 간판, 조선족 학교, 조선족 신문방송... 아- 연변은 실로 중국 조선족의 상징코드, 아니 성스러운 메카! ‘안쪽’의 조선족들, ‘연변’하면 어쩐지 그리운 곳으로 아련히 젖어온다. ‘연변깍쟁이’, ‘연변치’, ‘연변촌놈’ 하면서도 못 잊어 외워보는 곳이 연변이다. 연변은 ‘안쪽’ 사람들의 ‘조선세상’ 콤플렉스의 대리 발산체. 연변은 ‘歌舞之鄕’, ‘足球之鄕’, 우리 조선족의 장끼를 한껏 뽐내는 곳. 연변은 우리 조선족 인재들이 참 많이 나기도 했다. 장군 조남기, 과학가 강청산, 문학가 김학철... 기라성 같은 존재들-우리 조선족의 진정한 스타들이다. 연변은 이런 스타들로 인하여 빛난다. 우리 조선족의 회귀본능을 자극한다. 개혁개방, 시장화, 도시화, 우리 연변은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조선족인구의 마이나스 성장, 조선족학교의 구조조정, 농촌의 황폐화, 연변이 무너지는 듯하다. 그래서 많은 조선족 지성인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우려의 목소리, 우리의 회귀본능의 다른 한 메아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현재 연변은 동공상태를 방불케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내지’로, 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연변을 잊지 못한다. 한때 연변 敖東팀의 활약에 얼마나 흥분하고 감격해했던가. 나그네는 연변의 ‘뚜-푸-’ 소리를 되 뇌이며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속에, 아낙은 자기도 모르게 연변노래를 흥얼거리는 속에 회귀본능을 달랠 것이다. 그들은 워낙 연변 胎志임에랴! 연변은 우리의 회귀본능이 가닿는 곳. 인간의 회귀본능을 달리 자궁회귀본능이라 하기도 했으랴! 연변은 바로 어머니 자궁과도 같이 포근한 곳. 연변은 항상 정답게 안겨오는 우리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 짐 지고 힘든 족속들아, 모두 오너라, 너희들의 흐르는 눈물 씻어주고 편안히 쉬게 하여주마!                                                        2008.10.3 사천 성도에서
121    천사와 악마 댓글:  조회:5828  추천:117  2008-05-27
천사와 악마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우리는 어머니 대지!~하고 잘도 외웠다. 워낙 대지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살 집을 주고... 우리 삶의 모든 필요함을 준다. 그래서 어머니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아, 천사 같은 존재! 그런데 대지는 또 우리에게 홍수, 해일, 가뭄, 그리고 이번의 사천지진 같은 훼멸성적인 재앙을 주기도 한다. 아, 악마 같은 존재! 그럼 대지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냐? 천사와 악마 같은 이중적인 존재. 세상만물은 대개 이런 것이다. 그럼 인간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유럽 사람들은 일찍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인간을 이렇게 보았다. 그럼 여기서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스티븐이 쓴『Jekyll博士와 Hyde氏』를 잠간 보도록 하자. 학식이 많고 자비로운 의사 지킬 박사는 바로 천사와 악마 같은 인간성의 선악을 분리하는 약품을 개발해낸다. 그런데 실험적으로 약품을 복용한 지킬 박사는 낮에는 착한 지킬 박사로 움직이지만 밤에는 악한 하이드로 변신하여 움직인다. 그래서 결국 지킬과 하이드는 인간의 이중인격을 상징하는 코드로 되었다. 이번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중국의 사천지진 관련 뉴스나 보도 글에 악성댓글, 이른바 악플을 단 네티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초상난 집에 와서 잘코사니를 부르는 그런 야비함, 무엇이라고 해야지? 절대 일시적인 장난 같은 것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인간의 악마성이 나타난 것으로밖에 나는 해석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한국의 帅男靓女, 신사숙녀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동방예의지국’에 먹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인간은 원수도 죽으면 그 시체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 바로 인도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천사 같은 면이다. 지진 참사로 시체가 무더기로 쌓이는 현장을 보면서도 그렇게 잘코사니를 부르니 천사하고는 십만팔천리나 먼 악마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일단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흥분한다. 중국의 네티즌들이 한국의 악플을 그대로 번역하여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다. 일종 공소다. 한국 사람이 자주 입에 올리는 세상에 ‘우찌’ 이런 일이...하는 식으로. 내 주위의 중국 사람들, 특히 내 학생들은 내가 마치 한국 사람이나 되기나 한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몸에 배인 샌님의 자세로 천사와 악마의 논리로 차근차근 풀이해나갔다. 맞다. 그들은 악마다. 인간의 악마성이 여지없이 발로된 한 케이스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손으로 꼽을 수 있는 극소수. 악플을 단 극소수. 사실 한국 사람은 참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정녕 인간적이다. 봐라, 이번 우리 중국 사천지진에만도 어느 국회의원은 천만 원, 어떤 기업가는 1억 원을... 그리고 여러 모로 국내 사정이 어려운데도 온 국민의 衆志를 모아 국가 차원에서 400만 불의 성금을 희사하고 119구조대까지 특파하는 정성을 보여 유수의 지원국이 되지 않았느냐? 천사가 따로 있냐! 한국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 악플을 단 극소수는 맑은 물을 흐리게 한 한 마리의 미꾸라지에 불과. 그러니 마구잡이로 싸잡아 한국 사람들 어떻고 해서는 안 되니라. 니네 말로 하면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법. 하물며 한국에는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음에라! 그러니 나무만 보고 수림을 보지 못하는 以偏槪全의 愚를 범하지 말지어다. 지금은 참 좋은 세상이다. 大鳴大放의 시대. 언론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인터넷 세상이 아닌가? 일반인들은 적어도 댓글을 통하여 자기의 의사전달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자유자재 속에 독버섯이나 악성종양이 자라기도 한다. 닉네임, 실명제가 아니라 닉네임이 허용되는 댓글달기에는 지킬 박사가 밤에 악마의 하이드로 변하는 경우와 얼마간 닮아있다. 밤이니까 나쁜 짓을 해도 다름 사람이 잘 못 본다=닉네임이니까 누가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잘 모른다. 다른 많은 요소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닉네임이라는 댓글방식이 이번에 한국 네티즌들의 악플을 실제적으로 부추기고 가능하게 했음은 분명하다. 바로 지킬 박사가 밤만 되면, 밤에만 하이드로 변하여 나쁜 짓을 하듯이. 사실 이런 악플 닉네임 네티즌들은 남이 모르는 댓글을 악마적으로 다는 외에 남이 자기를 빤히 알고 있거나 들여다보고 있는 경우에는 굉장히 천사 같은 착한 면을 보이기도 하리라. 그런데 여기에 바로 또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악마와 천사 같은 이중적 인격을 잘 조화시키지 못할 때 바로 인격 분열의 정신병자가 되기 십상이다.『Jekyll博士와 Hyde氏』의 지킬 박사도 바로 이런 인격분열 때문에 결국 자살하고 말았지 않았는가.    물론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인간의 기본 매너를 지키는 천사 같은 인터넷이용, 특히 댓글을 구사한다면 별문제겠지만 인간에게 악마 같은 면이 있다고 할 때, 그리고 인간이 감정적인 동물이고 현실의 오염된 환경 속에서 사는 한 실제적으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실명제, 적어도 댓글 실명제를 주장하는 쪽이다. 언론자유이되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자유. 마구잡이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욕하거나 사회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적인 사사로운 개인적 불만토로, 그리고 이번 비인도주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사천지진 참사 관련 악플 같은 경우 여론이나 도덕적인 지탄은 물론, 법적인 재제까지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인터넷세상, 적어도 댓글란의 쓰레기는 많이 사라지고 정화되고 깨끗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회의 불협화음은 사라지고 和谐사회가 이루어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악플 닉네임들의 인격분열 정신병을 막는 한 방편이 되기도 하겠다.  한국 사람은 情적이다. 정감적이다는 말이 되겠다. 智보다는 情에 더 치우치는 감을 준다. 그래서 다분히 충동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이번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의 악플은 일종 분풀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서울 성화봉송 때 일부 중국 유학생들의 폭력적인 불미스러운 행위에 한국 사람들의 중국시선은 고울 리가 없다. 중국 사람인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아닌데 하는 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 직접 폭행을 당한 한국 시민인권단체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정말 현대 민주사회의 성숙된 신사숙녀상-선진국상을 보여주었다. 사후 나와 이야기를 나눈 한 한국 교수는 배우는 학생들이 그랬으니까 어찌겠어요, 이해해야지요, 우리가 더 잘 가르쳐야지요라고 진정한 스승의 자세를 보인다. 이에 중국 유학생에 대해 아니쿵 저러쿵 손가락질하려던 나는 그만 얼굴이 붉어지며 내밀었던 혀를 움츠리고 말았다. 실로 조건반사적이지 않고 참고 견디며 이해해주는 고자세를 보였다. 원수도 포용할 수 있는 예수의 드넓은 사랑의 아량, 간디의 비폭력적인 악에 대한 저항을 보였다. 사실 예수고 간디고 자시고 韓민족에게는 악마나 악을 감화하고 녹여 내리는 그런 정신적 유전자가 있다.「처용가」, 역귀가 사랑하는 아내를 범하는 현장을 목격하는 처용, 악은 악으로밖에 갚지 않는 서양사람들이나 以牙還牙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녕 칼부림이 났을법한데 우리의 처용은 능청스럽기만 하다. ‘두 다리는 내헤인데/다른 두 다리는 누거의 것이뇨?’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大智若愚식의 넉두리에 축복이라도 해주듯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난다. 능청스럽다 못해 유머스럽다. 유머스러운 大乘적인 경지. 현대파의 생의 모든 의욕을 상실한 무감각한 블렉유머가 아니고 눈이 번쩍 띄이고 자숙하게 하며 생기가 넘치는 생생유머의 大乘적인 경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역귀는 처용 앞에 꿇어 엎드리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든가. 악은 악으로 치고 以牙還牙하는 대응법은 악이 악을 부르는 악성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 공자님께서 인간사랑 仁을 고취하지 않았든가. 바로 大乘적인 그런 사랑. 그래서 세계의 대문호인 러시아의 레브․톨스토이나 프랑스의 빅또르․유고의 작품에는 이런 사랑으로 충만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 전 중국에 공감대를 형성하며 울려 퍼진 ‘讓世界充滿愛’라는 노래도 이런 사랑의 메아리임에 다름 아니다. 이번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의 악플은 이런 大乘적인 사랑의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여유롭고 유머스러운 처용식이나 한 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한 쪽 뺨을 마저 들이대는 예수식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감화나 포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악은 악으로 치고 以牙還牙하는 세속의 小乘적인 치졸한 논리다. 나는 악플을 단 한국의 네티즌, 더 나아가서는 한국인 그 누구든지 이번 서울 성화봉송, 혹은 그 어떤 다른 원인으로 중국인에 대한 아니꼬운 감정이 응어리로 졌다하더라도 大乘적인 고차원의 처용식이나 예수식의 감화나 포용의 논리를 펴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잘 못을 저질렀을 때 감화되거나 포용될 때 정녕 내심 깊이로부터 참회의식이 싹트며 환골탈퇴하게 된다. 그래서 레브․톨스토이나 빅또르․유고는 좀 극단적으로 나가 경찰이나 감옥 같은 현실의 강압적인 법집행 실체의 인간개조의 효율성까지도 믿지 않는다. 나는 전번 서울 성화봉송 때 중국 유학생의 폭력 행위에 부상을 입은 시민인권단체의 한 성원이 이번 중국 사천지진에 헌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말 감복했다. 정말 聖人 같은 大乘적인 경지다. 이런 사람들이 희사하는 돈이야 말로 정말 義捐金이고 誠金이고 聖金이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정말 알게 모르게 열 받는 일이 많다. 우리 마음 깊이에 있는 악마가 불끈불끈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악마에 홀려 그 부름에 응하는 수가 많다. 감정적인 충동에 놀아나는 때가 많다. 그래서 일시적인 시원함을 느낀다. 그런데 더운 여름철에 찬물을 마시고 나면 또 마시고 싶은 격으로 목은 또 기갈 들고 속은 또 허전해나건만. 이래서 악의 미궁 속으로 빠져, 빠져 들고 헤매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악플을 단 한국 네티즌이나 우리 일반 사람들의 자화상. 그럴진대 우리 일반 사람들은 처용이나 예수나 위의 한국시민인권단체의 헌금을 한 분 같이 聖人 같은 大乘적인 경지에서 노닐기는 참 힘들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한국 네티즌들의 악플도 이해가 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우리 서로서로 이해하고 포용하고 껴안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참회가 곁들어진 진정한 사과가 필요하다. 글로벌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인간의 마인드다. 중국식으로 한마디 하면 理解萬歲라는 것이겠다. 이것이 인간이다. 바로 동물과 다른 그런 인간. 악플을 단 네티즌들 속에서 ‘우리 먼저 사과합시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한국은 참 멋지고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8. 5.25
120    기부문화 댓글:  조회:5127  추천:100  2008-05-26
기부문화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나는 한국에서 어느 곳에 불상사가 났을 때  TV모금액이 단방에 기하급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한국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국 사람들의 인정에 감복하고 말았다. 정말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이 몸에 와 닿았다. 그러면서 우리 중국에서 같은 경우에 억지로 월급에서 돈을 얼마 얼마씩 까는 형태에 대해 정말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사천지진에 국내 각 지역의 성금이 쇄도하는 것을 보고 나는 우리 중국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갈마들었다. 一方有難, 八方來助의 중국말이 그대로 먹혀들어가는 광경에 나는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일단 나는 이것을 이젠 우리 중국 사람들도 많이 살만하게 되었구나로 받아들였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소박한 그런 논리로. 인간은 지극히 동물적인 존재다. 우선 내부터 살고 보기다. 이것을 우리 중국 사람들이 많이 말하는 自私自利라 해도 좋다. 그래서 인간은 내 배부르고 등 따뜻해야 남을 생각하게 된단다. 우리 중국에서 말하는 溫飽 수준의 小康생활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중국 고대 지성 맹자도 인간은 배가 부른 후에 知禮義라고 했다. 배가 부르지 않고는 짐승과 같다는 것이다. ‘천사’도 배가 부른 후에 된다는 얘기다. 그럼 우리 중국이 溫飽문제를 전면적으로 해결한 小康생활 수준에 와 있단 말인가? 대답은 ‘아니올시다’. 아직도 奔小康 단계. 그렇지만 분명히 이전보다, 개혁개방 전보다 훨씬 살만하게 되었다. 이번 사천지진을 통해 보게 되는 우리 중국의 기부문화는 일단 여기서 기인한다. 현대 심리학의 제3차 물결을 몰고 온 미국의 馬斯若라는 유명한 심리학자는 한 술 더 떠서 인간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의, 식, 주 문제가 해결되고 귀속, 안전, 존경의 수요가 만족되면 인간 삶의 가장 높은 경지인 자아실현의 경지를 추구하게 된단다. 이번 사천지전에 자발적으로 달려가서 고생을 사서 하는 자원봉사자들 가운데는 이런 경지의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거액을 기부하고도 이름 한 자 남기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무조건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불행한 사람을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雷鋒 같은 사람들. 그렇다 해서 기고만장한 귀족이나 거만한 귀부인들의 하사나 베품하고는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거저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할 뿐이다. 그럴진대 이 사람들에게 기부를 유도하거나 압력을 가하거나 하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사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부문화가 몸에 베였거늘. 우리의 기부문화에는 아직 이들의 그림자가 적어 아쉽다. 그런데 단지 배부르고 따뜻해서, 그리고 자아실현의 고차원의 경지를 추구해서 기부문화가 이루어진단 말인가?  고사리 손에 한 웅쿰 쥐어진 1전, 2전…, 五保戶 할머니의 손에 쥐어진 꼬깃꼬깃한 쌈짓돈, 거지 손에 쥐어진 땟국이 흐르는 돈들이 의연금 상자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정녕 인간의 순정, 순수한 인간애 같은 것에 코마루가 찡해나고 말았네. 이것을 보편적인 인간적 동정, 인도주의라 해도 좋네. 인간에게는 분명 이런 것들이 있지. 그 천사 같은 면말이다. 사실 우리 일반 서민들에게는 이런 의미의 기부가 더 몸에 와 닿는다. 우리 누구든지 한 번쯤은 천사가 되어서 潇洒地走一回할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이것은 돈 액수에 관계없거늘. 어디까지나 마음이다,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내 정성을 보이면 된다. 그것이 돈이든지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이것이 바로 誠金이란 것이다. 그래 이것이 聖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기부문화에는 아직 무단적인 ‘행정명령식’이나 자기과시욕이나 억지춘향노릇하기나, 여하튼 誠金이나 聖金하고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우리 조선사람에게는 십시일반이라는 전통문화가 있다. 어려운 사람이 경조사를 치를 때 주위의 사람들이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대로 ‘잘난 것’,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대로 ‘못난 것’, 부자는 부자대로 많이, 빈자는 빈자대로 ‘적게’, 여하튼 돈이든 무엇이든 자기 성의껏 정말 誠金이나 聖金을 내서 원만히 일을 치르도록 한다. 이것이야 말로 상부상조의 전통적인 진정한 천사의 얼굴을 한 우리의 기부문화이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19일 현재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각 시와 현의 적십자회, 자선총회에서 모금운동 5일 만에 1천만 원의 성금을 답지했다는 뉴스를 보고는 그래도 우리 연변이구나 하며 혀를 찼다. 그 誠金에는 돼지저금통장에서 빼낸 어린 고사리 손의 돈이 있는가 하면, 직장을 잃고 재취업 준비 중이던 분의 쌈짓돈이 있기도 하고, 손자손녀들에게 부축되어 나온 할아버지의 차곡차곡 싸고 또 싼 용돈도 있다. 이것이야 말로 십시일반이란 것이다. 우리 연변은 어렵다. 잘 되는 기업 하나 없는 것 같다. 중소학교 교사들 월급조차도 제대로 못주는 곳도 있다. 우리 대학교 교수들의 월급도 아마 전 중국에서 가장 밑바닥에 맴돌 것이다. 일반서민들 ‘쿠리’ 비슷한 외국노무에 턱걸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장 순수한 인간의 정,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내가 좀 어렵더라도,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십시일반, 바로 우리에게는 이 십시일반이 있다. 이것이 衆志成城이란 것이기도 하여라. 바로 이 십시일반으로 우리는 길림성에서 장춘시, 길림시 다음으로 많은 모금액을 답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연변대학교만 해도 상당한 규모의 모금액을 답지했다고 한다.  우리 연변대학교는 또 의료진 22명으로 구성된 대학교병원 구조팀이 곧 현장으로 출발할 예정이란다. 우리 연변이 자랑스러웠다. 그 어떤 곳에 어려움이 생기면 항상 먼저 발 벗고 나서는 우리의 ‘십시일반’이 멋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사천지전 현장에 와 있는 나는 나하고 잘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한다. 우리 연변을 좀 보라고~ 우리 조선족을 좀 보라고~ 좀 생색을 내는 것 같아 무엇하기도 했다. 기부는 이렇게 자랑하는 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말이다. 여하튼 나는 우리 연변이, 우리 조선족이 멋있다. 진정한 기부문화를 온 몸으로 사르는 우리가 아니더냐! 그리고 노파심에 마지막에 한 마디, ‘십시일반’으로 씨 뿌려지고 자라나고 북이 돋아진 기부문화가 그 어떤 치사한 관리들의 실적 쌓기나 부패한 관리의 검은 속을 채우는데 희생되지 말고 정녕 誠金에 聖金으로 전달되어 재난의 현장에서 활짝 꽃이 폈으면 한다. 그래서 이재민들이 진정 지진으로 물질적인 집은 잃었으되 정신적인 집의 따뜻함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119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독립군 댓글:  조회:6812  추천:115  2008-05-11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독립군 우상렬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나는 독립군하면 총이나 들고 싸운 홍범도나 김좌진 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홍범도나 김좌진을 우리 민족의 영웅으로 우러러 마지않았다. 그런데 퍼그나 오래 전의 얘기로 한국 양반의 고장-안동의 안동대학교의 양반 선비 안병렬 교수가 우리 과에 교환교수로 와서 한 얘기에 눈에 번쩍 띄었다, 우리 조선족의 글 쓰는 양반들이야말로 진짜 독립군-문화독립군이란다. 그래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말로 창작을 하며 우리 얼을 지키는 일이 독립군이 아니란 말인가? 제2독립군, 문화독립군... 그럴 듯 했다. 나도 몰래 어깨가 올라가는 일이련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기라성 같은 문화독립군들이 있다. 나도 몰래 숙연히 머리가 숙여진다. 자, 그럼 문화독립군들의 행방을 좀 찾아가봅시다. 우리 같이 그들과 부둥켜 안아보고 그들의 체취를 느끼며 울고 웃어봅시다.   그런데 누구부터 만나보지요? 워낙 기라성 같은 많은 존재들이라! 아무래도 중국 조선족 문학의 정초자로서 쌍벽을 이루는 김창걸과 이욱부터 만나보는 것이 예의인줄로 압니다.      김창걸(1911―1991)은 일찍 위만주국시기부터 용정 장재촌, 명동촌을 무대로 문학창작을 진행했다. 그의 작품은 조선이주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깃들어있다. 땅 없고 힘없고 돈 없고, 모든 것이 없는 서러움뿐이지만 그래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성실하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단편소설「암야」를 보면 바로 가난이 청춘남녀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짓밟는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명손이는 결국 사랑하는 처녀 고분이를 데리고 ‘암야’를 헤치며 ‘광명’을 찾아 나아간다. 이 작품의 낭만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중국 조선족 이주先人들의 삶의 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스트라이크」등은 당시 용정 시내 학교들에서의 학생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잘 반영되어 있다. 김창걸의 이런 소설들은 그 자신의 삶의 체험의 문학이었다. 그래서 그 작품의 배경도 그가 실제로 살았던 장재촌이나 공부하고 활동했던 용정시가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재촌은 윤동주의 고향으로 많이 알려진 명동촌과는 삼합으로 가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비스듬히 동쪽으로 한 2리 상거해 있다. 장재촌은 스님의 신비한 위력에 결국 큰물에 ‘못 된 부자’ 집은 큰물에 잠기고 금기를 어긴 ‘착한 며느리’는 돌로 굳어지고 마는 비극적 색채가 없지 않아 있는 조선에서부터 지니고 내려온 ‘장자못 전설’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마을은 당시 북간도 이주민들 사이 민간대통령으로 떠받들리기도 한 김약연이 조선반도 모양을 본 따 터를 잡았다 한다. 그만큼 민족적 정서가 강했던 곳이다. 당시 명동촌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김창걸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인 올곧은 정신을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 신사참배, 국책창작 등 여러 방면으로 압박을 가해오자 단연히「절필사」를 쓰고 붓을 꺾는다. 그에게는 워낙 게발라 맞추기 하고는 거리가 먼 민족적 자존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추호도 일제에 영합하거나 아부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윤동주와 더불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이 면에서 실로 그는 정도부동하게 다다소소 ‘친일’의 냄새가 나는 글을 쓴 많은 동시기 다른 작가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히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장재촌 북녘에 우뚝 솟아 있는 선바위임에 틀림없다. 그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우리 연변의 누구나 다 아는 선바위-이 세상 둘도 없는 하늘이 내린 가장 훌륭한 김창걸기념비다. 그러나 이 하늘이 내린 기념비에만 내맡기는 것으로 우리는 성 차지 않는다. 그래서 별도로 우리 후배들의 예의를 차리는 차원에서 이 선바위 기슭에 다시 ‘김창걸선생문학비’를 세웠다. 광복 후 김창걸은 연변대학교가 서자 우리 조문학부의 교수로 부임한다. ‘글짓기’로부터 ‘문학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종 ‘通才’적인 재간을 발휘한다. 그러면서 절필했던 붓을 갈고 닦는다. 그의 문학창작도 이제야 마음껏 꽃피는가 싶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부터 터진 반우파투쟁 된서리가 이 꽃을 미처 피지도 못하게 덮쳤다. 무슨 민족주의분자. 그러나 선생은 함경도 사나이의 뚝 밸 하나로 그 모진 정치풍파를 이겨냈다. 그러나 창작의 아까운 좋은 시절은 그만 속절없이 가버리고 말았다. 인생 무상과 허무로만 취급하기에는 너무 안타깝다 못해 억울하다.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 영광스럽게도 김창걸 선생의 존안을 우러러 한두 번 보았다. 그때 선생은 이미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고 지팡이에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선생은 인생말년, 세상을 뜰 때까지 내내 병환에 계셨다.   이욱(1907-1984), 김창걸이 단편소설로 중국 조선족 문학을 정초지었다면 이욱은 시로 그런 작업을 했다. 이욱은 정초자답게 중국 조선족 문학에 있어서 ‘최초’의 몇 개를 독점한다. 일찍 1924년에 처녀작「생명의 례물」을『간도일보』에 발표하였으며 1947년 광복직후 최초로 개인시집『북두성』을 출판하였고 1956년에 북경에서 최초로 중국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되었으며 1957년에 최초로 북경 작가출판사에서 중문시집『장백산하』를 출판하였고 최초로『중국현대문학사』의 한 폐지를 장식하였다.「님 찾는 마음」(1930),「송년사」(1935),「금붕어」(1938) 등 광복 전 이욱의 서정시는 민족적 특성이 짙고 낭만주의색채가 진한 것으로 평가된다. 새 중국 성립 후 이욱은 연변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많은 시를 쓴다.『고향사람들』(민족출판사 1957),『연변의 노래』(작가출판사 1957),『장백산하』(작가출판사 1959) 등 시집들을 출판했는데 사회주의 사실주의 경향으로 흘렀다.『고향사람들』은 중국 조선족 문학의 장르상의 특색을 나타내는 최초로 서사시로 된다. 이는 이욱 시창작의 고봉을 이루며 건국 후 중국 조선족시문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이정표로 되는 성과적으로 꼽히고 있다. 이욱은 높은 수준의 한시도 능란하게 써서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그는 일찍 어릴 때 조부의 슬하에서 ‘사서오경’과 절구를 배웠던 것이다. 이욱은 해방 전에 주로 절구를 썼으나 간혹 율시를 쓰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대체로 詞를 썼다. 유고로 남긴 한시집『협중시사』에는 108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한시에 대해 중국 연변대 김동훈 교수는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로, 한국 숭실대 조규익 교수는 ‘그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의 시비는 두만강가 화룡현 로과향 호곡령 정상의 애나무숲속에 우뚝 세워져있다. 아마 이 시비는 중국 조선족 문인들 가운데 최초로 세워진 줄로 안다. 이 시비는 호곡령 아래로 흐르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 무산시를 마주보고 있다. 시비에 새겨진「할아버지 마음」, 그것은 ‘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은 그런 편안한 자연의 마음이다. 돌고 도는, 그러면서도 항상 새 희망이 넘치는 그런 자연의 순리대로 가는 마음은 초탈 경지의 할아버지의 편안한 마음이다. 1957년 무자비하고 삭막한 좌경바람이 부는 세월에 이렇게 편안한 시를 써냈다는 것이 참 기적처럼 생각된다.   김창걸과 이욱-두 중국 조선족문학의 정초자, 이들은 연변대학교의 성립과 더불어 우리 조문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나에게는 일단 다른 것을 다 떠나 선배교수님이고 원로교수님이 시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내 손은 떨린다. 사실 나뿐이 아니고 우리 과의 모든 교수님들은 이들로 하여 더 없는 영광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듬뿍 담아 두 분의 초상화를 학과 회의실 바른 벽에 정중히 모셔 놓았다. 오늘도 김창걸 선생은  바른 자세에 사나이 일언중천금의 꾹 다문 입을 한 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이욱 선생은 오른 쪽 팔을 오른 쪽 턱 가장 자리에 고인 채 정답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사실 우리 학과 회의실에는 몸을 좀 비스듬히 튼 채 우리를 보고 환한 웃음을 하고 있는 또 한 분의 중국 조선족 문화독립군이 있다. 그 이름은 정판룡이렸다. 말을 꺼낸 김에 정판룡 프로필로 들어가자. 내 은사님이니깐 먼저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찌하랴.     정판룡(1931-2001), 나는 일단 그분의 총기에 꺼벅 죽고 만다. 중학교를 졸업할까 말까하고 고등학교를 훌쭉 뛰어넘어 16세의 최연소 나이에 연변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다. 어린 나이에 공부도 쟁쟁하게 잘 했단다. 그리고 수석으로 졸업해서 학교에 교수로 남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중국 정부에서 조직한 구소련 국비유학시험에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합격하여 모스크바대학에 유학을 간다. 중국의 전 총리를 맡았던 李鵬하고 동창생이 되었다. 사실 생긴 거는 '별로' 같은데 얼마나 공부를 잘 하고 똑똑했으면 문학 준박사 학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같은 중국 유학생으로 전형적인 중국남방미인 타입인 王愈 사모님까지 턱 차고 금의환향한다. 이런 젊은이를 두고 앞날이 탁 트인 전도유망한 젊은이라고 하리라! 중국 사회과학원 등등 북경의 일류의 모모한 기관에서 프러포즈를 한다. 그러나 그분이 선택한 곳은 결국 연변대학교였다. 그분 문학비 정면에 우리말로 새겨진『고향 떠나 50년』에서 절록한 '내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초 연길에 살구꽃, 배꼿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리 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렬차에 앉았다'를 보라. 나는 그분의 진정이 어린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코마루가 찡해나고 가슴이 아련히 젖어난다. 연변대학교는 내꺼, 누가 뭐라도 나는 연변대학교를 지킬꺼야 하는 사명감이 절로 살아난다. 그분은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만큼 일단 학자로서 문학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외국문학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문학, 나아가서는 남북한 문학을 아울러 종횡무진으로 연구를 하고 평론을 하셨다. 사실 문학창작은 만년에 분망한 대학교 총장 보직을 그만두고 좀 한가해진 후 늦깍기로 시작했다. 그 주요 결실의 하나가『고향 떠나 50년』, 가장 자연스럽게 씌여진 글. 고향 떠나 50년의 숨 가쁜 인생살이가 가식 없이 소박하고 텁텁하게 엮어져 그 사람 그 식으로 감동을 준다. 우리가 이 감동에 흠뻑 젖어 있을 때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잃은 허탈감을 조금이나 달래고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그분이 한평생 몸 바쳐 온 연변대학교의 뒤 산으로 불리는 와룡산 양지바른 언덕에 2004년 서거 3주기에 기해 장방형 모양의 아담한 문학비를 세웠다.   채택룡(1913-1998년), 중국 조선족 아동문학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일찍 카프시기, 위만주국시기부터 주옥같은 동요동시를 창작해왔다. 세상은 암흑했어도 그의 마음은 항상 갓난 아기들처럼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그의 동요동시는 바로 그의 이 깨끗한 마음의 발로였으리라. 그런데 그의 이 깨끗한 마음으로 이 풍진세상을 살기에는 방어기제가 없어 너무 갸날펐다. 그래서 1950년 말 중국에서 반우파투쟁이 벌어질 때 연변에서 김학철과 같이 최초의 우파동지가 되기도 했으리라. 바로 이 우파가 되면서 우리의 천재적인 아동문학가는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그의 작품도 우파되기 전까지로 한하고 만다. 이 안타까움을 달래고자 연변아동문학연구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에서 중의를 모아 2004년 연길시인민공원 동쪽가녘에 펼친 책모양의 '채택룡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에 새겨진「병아리」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기념을 가름하려 한다. 삐악삐악 갓난 병아리 아장아장 걸음 익히나요리조리 조약돌 넘어깡충깡충 재주피우나 삐악삐악 갓난 병아리땅을 쪼아 아빠 흉내내나엄마등에 갸우뚱 올라포득포득 재주를 넘나 '병아리'를 상징체로 귀여운 아이들의 커 가는 모습 그 자체를 감칠맛이 나게 잘도 그려냈다. 그것도 동심의 시각에 비쳐 하나로 녹아들게 함으로써 동요동시로는 일단 성공을 하고 있다.   김학철(1916~2001), 중국 조선족문학의 확립자, 정신적 대부-‘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그의 임종 유언. 그는 어디까지나 사람답게 사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이 풍진세상과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다. 일본제국주의, 독재, 사회의 부정부패... 이런 것들와의 가차 없는 투쟁과 비판이 그의 문학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했다.『격정시대』, 일본제국주의와 총 들고 싸운 조선의 건아들-조선의용군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번한 조선의용군의 영원한 기념탑을 세웠다.『20세기신화』, 감히 ‘임금님은 옷을 벗었다’고 말한 어린이 같은 희대의 사나이. 관본위, 관료주의 행태를 여지없이 풍자한 ‘인육병풍’을 비롯한 일련의 ‘투창과 비수’ 같은 잡문들... 적어도 우리 연변은 그의 잡문들로 해서 많이 정화된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하여 얼마나 허전한 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던 차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김학철문학연구회’가 발족되고 그의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김학철에 관한 것은 ‘김학철문학연구회’의 사이트 에 들어가 보면 다 알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다 약하도록 하고 그의 기념비 두 개만 소개하는 것으로 가름하도록 하자. ‘김학철문학비’, 도문시 장안진 경내 생태문화관광구로 유명한 龙佳美苑에 삼각형 모양으로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우리 연변의 유명한 민족적 화백 필충국 선생이 전적으로 사재를 털어 세운 것이다.    ‘金學鐵抗日文學碑’, 중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최초로 한국의 실천문학사 김영현 사장의 구상과 발의 하에 중국과 한국의 여러 기관이나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추진되었다. 문학비제막식은 2005년 8월 5일 오전, 하북성 원씨현 흑수하향 호가장촌에서 국내외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그럼 왜서 이 호가장이냐하면 이 호가장은 바로 김학철을 비롯한 조선의용군 한개 분대가  1941년 12월 12일 새벽 일본군들과 격전을 벌이던 곳이다. 김학철은 이 격전에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는다.『격정시대』도 바로 여기서 끝난다. 그럴진대 이 태항산마루 역사적 현장에 金學鐵抗日文學碑를 세우는 것은 더 없이 뜻 깊은 일이다. 金學鐵抗日文學碑는 龙佳美苑의 김학철문학기념비와 마찬가지로 모를 많이 살려 김학철의 그 날카로운 작가적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여 좋았다. 金學鐵抗日文學碑와 나란히 역시 조선의용군 출신이고 이 태항산마루 항일전적지와 인연이 깊은 장편기행문『노마만리』를 쓴 김사량의 ‘金史良抗日文學碑’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사실 김창걸, 이욱은 광복 전부터 줄곧 이 땅에서 창작을 하며 중국 조선족의 문학전통뿐만 아니라 광복 후에는 한국과도 다르고 조선과도 다른 중국 조선족 문학의 ‘향토’적 특색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중국 조선족 문학전통을 논의할진대 우리는 두 젊은이-윤동주와 심련수(이들은 안타깝게도 광복 착 전 20대의 꽃 같은 나이에 희생되었다)를 잊을 수 없다. 사실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다. 그래 윤동주 하면 우리 민족의 구성원치고 누가 모른단 말인가? 용정 명동의 윤동주생가, 용정 동산중앙묘지의 윤동주묘소... 그런데 심련수에 대해서는 ‘아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잘 모르는 분들이 있으리라. 워낙 심련수는 새 천년 벽두에야 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말이다. 심련수의 유고가 오지단지에 넣어져 세월의 풍파를 피해 장장 50여년이나 땅 밑에 파묻혀 보관되어 오다가 그의 동생 심호수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었던 것이다. 심련수는 또 다른 하나의 혜성으로 떠올랐다. 가히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며 우리 중국 조선족 문단 내지는 세계 한민족문학사에서 한 폐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한국의 문학평론가 임헌영을 비롯한 뜻 있는 분들의 노력 하에 용정 실험소학교 캠퍼스에 심련수시비가 세워지기도 한다.   중국 조선족문학은 현재진행형이다. 문화독립군들은 오늘도 붓을 갈고 닦는다. 이 땅에 이 겨레가 있는 한 영원한 현재진행형이 될 것이다. 그럼 아직도 청춘의 정열로 주옥같은 시편을 토해내고 있는 원로시인 조용남의 기념비적 작품「반디불」과「비암산의 진달래」를 감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 치면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한들한들 온다야      반짝반짝 반디불     오다가도 간다야      얼른 쫓아 잡아라     불이 깜박 꺼졌네      반짝반짝 반디불      다시 전등 켰고나     살금살금 기여라     옳다 하나 잡혔다                       -「반디불」전문   이 동요는 2002년 8월에 연변대학 사범분원 캠퍼스에 건립된 ‘반디불비’ 정면에 새겨져 있다. ‘《반디불》은 지난 半世紀동안 우리 민족 어린이들속에 널리 愛唱되여 오면서 여러 世代어린이들의 童心世界에 밝고 따뜻한 꿈이 되어주었다.’-‘《반디불》碑建碑委員會’의 더 없이 높은 평가다. ‘반디불비’는 중국 조선족의 첫 동요비이다.    「비암산 진달래」(일명「봄이 오는 산」)를 감상해보자.   산, 산, 비암산 봄이 오는 산 봄눈 녹는 길목마다 피는 진달래꽃가지 부는 바람 연분홍 바람 네 마음 내 마음에 꽃물이 드네 꽃술을 세여보자, 꽃말을 읽자세저니벌 오십리에 밭갈이노래산, 산, 비암산 꽃이 피는 산꽃눈 트는 굽이마다 우는 솔쫑새 ―님아, 님아, 오시리 오시리잇고 일송정 추녀아래 꽃꿈이 곱네 꽃잎 따서 그리운 편지에 접어 룡정의 봄소식을 전하여주자   용정시정부에서는 2004년 봄에 한국 사람들에게「선구자의 노래」로 잘 알려진 용정 비암산 일송정의 관광지 조성 차원에서 이 시를 ‘일송정비’ 바로 옆에 자연석에 새겨놓았다. 진달래는 우리 연변의 ‘州花’로 중국 조선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비암산 일송정 주위에는 워낙 진달래가 곱게 피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비암산 진달래를 통하여 력사와 자연을 아우르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노래했고 꽃피는 봄으로 희망찬 새 력사시기의 도래를 노래했습니다.’-조용남 스스로의 고백.   이외에도 우리 중국 조서족의 문화독립군들은 많다. 이 짧은 한 편의 글로 다 엮기에는 너무 아름차다. 어떤 분들은 기념비 하나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소중한 한분 한분은 우리 민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리 마음속의 금자탑으로 빛나리라! 2008. 4. 17    
118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가 君子라 댓글:  조회:4294  추천:14  2008-05-11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가 君子라 연변대 우상렬 나는 남영전 선생이 우리 민족의 토템 운운하며 어줍잖은 이른바 42수의 토템시를 들고 나올 때 그런대로 그렇고 그런 것으로 보아왔다. 일종 가장 종족적이고 민족적인 토템을 운운하니 知之不知를 떠나 그 민족심이야 높게 사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알량한 생각에서.   그런데 남영전 선생이《도라지》잡지 2005년 3월호에 발표한 ‘논문’《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를 보고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나의 참을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2006년 11월 18일자로 ‘남영전 큰 형님께 좀 여쭤봅시다’라는 편지 한통을 인터넷을 통하여 띄웠다. 그리고 그 편지 끝에 ‘좀 대답을 해 주세요.’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런데 ‘남영전 큰 형님’은 오늘 이때까지 감감무소식이다. 무언이 승낙이라고 나는 남영전 선생이 나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남영전 선생이 상기 ‘논문’을 재탕에 또 몇 탕까지 한다니 실은 무언의 항변을 하고 있는 줄로 안다. 남영전 선생이 조성일 선생과 김관웅 교수가 그렇게 좀 나와줍시사, 우리 같이 시시비비를 논해보자고 하는데도 묵묵부답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무언이나 묵묵부답은 남영전 선생의 일관된 논쟁행태라 해야 하겠나...   그런데 이 문제는 무언이나 묵묵부답으로만 넘길 일이 아닌 줄로 안다. 워낙 민족의 뿌리나 민족의 정체성에 관계되는 대시대비의 문제이니깐. 조성일 선생이나 김관웅 교수가 그렇게 발 벗고 나서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는 이 대시대비의 문제 상에서 조성일 선생이나 김관웅 교수와 인식을 많이 같이 한다. 나는 일단 남영전 선생의《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를 논문으로 보기 거부한다. 적어도 인류의 다원기원설에 대해서는 전혀 무시하고 단일기원설만 고집하는 학문적 편향, 종족적 특색 및 유전자감식의 추궁을 당해내지 못하는 인류의 아프리카 공동조상설, ‘단군신화’에 대한 피상적인 풀이, 우리 민족의 갈래나 이동 및 족보 등에 기초한 기원풀이 등은 편파적이고 현상적이며 무단적인 면을 많이 노정하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설픈 心證적인 주장이 되고 말았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우리 禹가도 漢族들 禹임금 禹에서 오고 그 후예라니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는데 어쩐지 좀 찝찝한 데가 있는 데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자꾸 재탕을 하지 말고 상반되는 관점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따져보고 고고학이나 문헌 등 여러 방면의 증거를 더 확보하며 피상적인 논의보다는 보다 내실을 기한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 자꾸 재탕을 할 때 그것은 일종 아집과 만용으로밖에 안겨오지 않는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필자는 ‘남영전 큰 형님께 좀 여쭤봅시다’에서 얼마간 전개한 것으로 사료되니 여기서는 이에 그치도록  한다. 그럼 이제 남는 문제는 이런 ‘남영전현상(남영전 선생 관점이나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있기에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계시’이다. 이런 ‘계시’는 그 ‘현상’이 산생된 근원을 잘 알게 되면 자명해 질줄로 안다. 그럼 남영전 선생이 왜서 이런 사상누각을 만들어 냈겠는가하는 문제부터 알아보자. 顯名주의-이름 드날리기. 현대는 이름 날리기 대단히 좋은 세상이다. 남이 다 동쪽으로 갈 때 외고집으로 서쪽으로만 가도 된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주류 관점과 다른 외관점을 고집하면 이름을 드날릴 수 있다. 남영전 선생의《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는 사학계나 인류학(체질, 문화), 민족학 등 학계의 주류 관점하고는 다른 혹은 정반대의 관점을 피력함으로써 눈을 ‘번쩍’ 띄게 한다. 나는 처음《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라는 ‘논문’제목을 대할 때 토템문화야 말로 가장 종족적이고 민족적인 것이니 우리 현대인간들이 이것으로 거칠은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가자. 여기서 우리 민족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의 독특한 토템문화로 이 세상에 군림하자하는 식의 정상적인 논리로 논의가 전개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정반대다. 공동조상에 같은 토템문화로 인류가 기원하고 흘러왔으니 우리 인간은 다 형제고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무슨 거추장스러운 종족이고 민족이고를 떠나 圓融의 세계를 이루자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우리 민족은 華夏族의 곁가지니 거기에 동화되도 무방하고 어쩌면 당연지사라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인류의 대동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듯하여 그 스케일에 쇼크 받고 신기했다. 그런데 그것이 시적인 낭만을 외치거나 동화적인 세계를 보여준데 불과할 때 그것은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신기루는 현란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에 눈길을 빼앗기고 좇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잠간뿐인 것,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남영전 선생은 이 신기루에 기댄 虛名을 위해서 그 힘에 겨운 거창한 논의를 전개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영전 선생은 워낙 우리 조선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그래서 美名도 많이 나 있는 줄로 안다. 그런 만큼 그런 虛名을 위해 신경 쓸 소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和諧사회-조화로운 사회 만드는데 기여하기. 현재 중국의 국책의 하나는 바로 和諧사회-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있다. 참 멋진 사회이상이다. 매개 중국 사람들은 여기에 동참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남영전 선생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듯하다.《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는 여기에 바쳐진 ‘논문’같다. 이 ‘논문’의 기본 모토가 ‘圓融’이 아닌가? 남영전 선생은 그 어느 시집제목도 이 ‘圓融’으로 했고 결국 이 ‘圓融’이 남영전 선생의 하나의 토템으로 승화되고 있다. ‘圓融’이나 和諧가 많이 닮았지 않은가? 그 동기와 취지는 전적으로 긍정할 만 하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종족이나 민족적인 실존을 떠난 또는 그 실존을 ‘圓融’과 대립되게 보는 근본적인 관점에 있는 줄로 안다. 현 단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和而不同, 同而存異의 사고방식 및 가치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다원가치존중하고는 거리가 있다. 쉽게 말하면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는 변증법증 논리가 통하는 圓融으로 가는 것이 정도다. 이렇게 놓고 볼 때《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를 비롯한 남영전 선생의 관점이나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和諧사회-조화로운 사회 만드는데 정말로 기여하자면 그렇게 성급하게 논리적인 비약을 하거나 현상에 머물고 心證적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그런 만큼 남영전 선생은 근본 반향전환을 하거나 관점수정을 해야 할 것이다. ‘남영전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시각에서 논의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일단  顯名-이름 드날리기와 和諧사회-조화로운 사회 만드는데 기여하기로 나름대로 짚어보았다. 이에 대해 남영전 선생은 전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현재 나로서는 남영전 선생의 無知나 莫知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안 그래도《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에는 이런 無知나 莫知가 많이 눈에 띈다. 민족개념에 대한 풀이 하나만 놓고 보자. 민족학에서  민족에 관한 개념에서 혈연적인 요소는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중요한 요소를 배제하고 문화적인 요소를 강조하며 민족을 문화적인 차원에서 나눈단다. 이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기본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사실 민족을 문화개념으로 이해할 때 민족은 사라지고 만다. 문화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쉽게 그런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종 문화의 함정이기도 하다. 이른바 세계화라는 것도 실은 보편타당성의 기치 하에 모종 문화를 일방 통행시키려는데 문제가 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민족보수주의로 흐르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혈연의 요소와 민족의 다른 요소, 이를테면 경제, 언어, 심리 등을 유기적으로 연계시키고 이런 요소 하나하나에 녹아든 문화를 논할 때 그 문화는 구체성을 띠고 진실로 독특한 민족적인 문화가 되는 줄로 안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의 민족적 논의가 의의 있는 것이지 거저 막연히 추상적인 논의로 흘러서는 하등의 의의가 없다.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아는 것이 가장 총명하다. 공자님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가 君子라 했으리라. 자기 스스로를 알 뿐만 아니라 용감하게 자기의 不知를 승인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知에로의 출발이고 비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영전 선생은 이 점 나보다 더 잘 알 것으로 믿는다. 워낙 중국어나 고문에 나보다 밝으신 분이니깐. 그럴진대 진실로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의 君子行을 하여 결자해지를 하는 것도 대단히 바람직한 줄로 안다, 2008. 4.19 남영전 큰 형님께 좀 여쭤봅시다 우 상 렬   저는 형님께서 다년간 토템시 창작을 해오며 세계원융을 외쳐온데 대해 충분히 경의를 표합니다. 현실 실현가능성이야 제쳐두고라도 우리 인간이 원융으로 나아가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 인간은 형님이 추구한 세계원융과 비슷한 대동세계를 줄곧 추구해오기도 했습니다. 시는 과학이 아닙니다. 시는 세계원융이나 대동세계에 대한 인간의 아름다운 지향이나 소망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족한 줄로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님은 더 없는 인도주의자고 보편주의자로서 그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세계인의 아들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도라지》잡지 2005년 3월호에 발표한 론문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만은 저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님은 토템문화에 너무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형님은 독일학자 엥스트 ․ 카시르트의 토템관념을 《 <생명일체화>로 본 것을 전제로 하여 자연계에서 <모든 생명형태가 친족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원시인의<생명일체화> 관념은 (…필자 약) 따라서 자연계와의 조화를 이루고 인간 상호간의 형제적관계를 가져왔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융합을 실현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과연 토템이 이런 위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라마지 않은 인류의 영원한 가치인 《조화》, 《형제적관계》, 《세계융합》을 그래 토템이 이룰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엥스트 ․ 카시르트나 형님이 토템에 《생명일체화》를 허구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럼 가장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토템의 진실에 접근해봅시다. 사실 토템은 별 볼일 아닙니다. 토템은 정말 원시인의 ‘무지와 몽매’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지? 인간은 어디서 왔지? 이런 본능적인 뿌리의식에서 토템을 만들어낸 줄로 압니다. 그래서 그 별 볼일 없는 동식물이나 무생물들을 씨족 내지 종족의 시조나 조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원시인들은 다윈의 《종의 기원》같은 것들을 알 수 없었지요. 이렇게 볼 때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이 세상에 금방 온 원시인들의 왕성한 구지욕에서 토템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템은 약자의 논리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 좀 상상해봅시다. 그 황량하고 질서가 잡히지 않은 세상이 금방 열린 만황지초(蠻荒之初)에 인간은 어떤 존재였겠습니까? 인간은 약자입니다. 어디를 보나 두려운 존재뿐이었겠지요. 시커먼 밤의 장막, 윙웡 부는 바람, 꽈르릉 천둥지둥, 여기에 실제적으로 해를 끼치는 범이나 늑대 같은 맹수들의 횡포는 온통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도 잡는 간절한 심정으로 원시종족들이 자기를 지켜준다는 믿음의 허상 속에 일방적인 프로포즈로 토템이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원시인들은 바로 이 토템이 있음으로 하여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가져왔습니다. 이때 그 무슨 ‘배태와 생육의 각도에서 우리는 자연계야말로 모든 생물의 어머니라는것, 바꾸어 말해서 모든 생물이 자연계라는 이 공동의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운운할 여지가 못됩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자연이라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나온 여러 생물들사이에 친연관계’도 운운할 계제가 못됩니다. 그것은 처절한 양육강식, 적자생존의 원색적이고 야생적인 자연 그 자체입니다. 인간씨족 내지 종족들 사이의 관계도 여기서 예외가 아닌 줄로 압니다. 어머니-자연이나 ‘여러 생물들 사이에 친연관계’운운은 인간이 살아남고 배부르고 자연을 향한 인간의 횡포에 대한 리성적인 반성을 하게 된 지금에 와서 운운하게 되는 얘기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토템에 대해 원시인들은 존경스럽고도 두려운 존재 즉 敬畏의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토템은 하나의 기치로 되고 집결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신성시하는 터부문화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저는 형님의 《토템은 하나의 기치이고 일종의 정신이고 거대한 응집력이고 형제와 같은 뜨거운 정이며 전 인류가 함께 안고있는 아름다운 리상이다》고 결론 내린데 대해 동감을 표시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원시인들은 무생물조차 토템으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사실 원시인들은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생명이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른바 이심비심(以心比心), 어기류추(於己類推)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희로애락을 느끼니 주위의 다른 존재도 그렇겠다는 논리.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인간들이 말하는 만물유신론이나 애니미즘 같은 것들이겠지요. 그래서 원시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요. 과학이 창달한 오늘날 대명천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생태평형파괴, 환경오염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오늘, 토템의 현실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도의 타골이나 우리 중국의 곽말약이 자기의 시에서 노래한 범신론(汎神論)적 범애(汎愛)도 바로 이런 것과 맥이 닿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詩聖 자리도 일단은 여기서 찾아야 될 줄로 압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형님이 내건 토템의《생명일체화》, ‘토템의 영원한 가치원소’, 그리고 ‘현대인의 이런 현대병에 대처하여 인성의 원초인 토템관념을 완전무결하게 구현하는것은 그야말로 좋은 약이 아닐 수 없겠다.’ 가 일리가 있는 것이지 이것을 절대화하거나 과대 포장할 때 그것은 진리에서 빗나가게 되는 줄로 압니다.   사실 형님이 토템에 대해 위에서 본 《기치》이고 《정신》이고 《응집력》이고 《정》이며 《리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현대병치유의 처방으로 제시한 것은 일원론적인 인류기원론으로 볼 때 논리적으로 딱 맞아떨어집니다. 형님은 인류기원의 다원설보다는 일원론에 전적으로 섰구만요. 물론 형님을 비롯한 인류기원 일원론자들이 체질인류학에 있어서 키포인트로 되는 유전자론에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도 말입니다. 그러나 형님의 지적대로 ‘흥미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고고학연구에 의하면 아프리카이외의 다른 어느 구역도 인류의 탄생지였다고 할만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고 ‘아프리카인류선조의 이동설이 문화인류사가들의 공통적인 인식’으로 정말 되고 있다면 현 단계에 있어서 일원론이 진리겠지요. 그래서 당연한 논리로 ‘그러한즉 세계 각 지방에 널려 사는 여러 민족들이 모두가 아프리카선민의 이주민들이며 모두다 아프리카선민의 후예들이라는것이 정설로 되고 있겠지요. 형님의 이 론리를 훑어가면 토템→아프리카선민(원시씨족)→이주민(세계 각 지역의 인간들)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本是同根生’임에 틀림없다는 얘기가 되지요. 그리하여 씨족 성원들 사이의 인간관계가 ‘형제관계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형님은 바로 현대인간들의 《相煎何太急》하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 《토템시대 인간 상호간의 이런 형제적관계를 현대인간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적용할 수는 없을가?》를 고민하고 있는 어버이 같은 범인간애자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형님이 도달한 경지가 원융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세상이 종족, 민족 내지는 국가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없고 너나없이 하나가 되는 원융-대동세계로 나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지난세기말 동서냉전이 종식되면서부터 극성스럽게 세계화, 글로벌시대니 뭐니 하고 외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종족, 민족 내지는 국가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옴니암니 타투는 이율배반적인 양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워낙 세계화요, 글로벌이라는 것이 이른바 선진국 내지는 강대국들의 새로운 패권담론이고 함정이라는 논의도 만만치 않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정말 세상은 아벨이나 흥부보다도 카인이나 놀부 같은 놈들이 더 양산되니 말입니다. 백인과 흑인의 해먹은 종족적인 앙숙은 그만 두고라도 현재도 많은 곳에서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실은 우리의 원융이나 대동의 세계와는 너무 비딱하게 나가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형님은 ‘세계의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민족의 선조도 아프리카에서 건너왔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우리 민족의 시조탄생신화인 단군신화를 유력한 근거로 들고 있구만요.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단군신화의 발생지 삼위(三危)는 오늘날의 감숙성 돈황 막고굴부근의 삼위산(三危山)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에 석연치 않은 문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단군신화를 만들어낸 단군부족 즉 우리가 역사적으로 말하는 고조선사람들은 오늘날의 감숙성 돈황 막고굴 부근보다는 아무리 서쪽으로 멀리 가더라도 요동반도 쪽을 못 벗어난다는 것이지요. 요녕성 홍산문화유적지를 비롯한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 동검이 바로 그들이 사용하던 유물로 판명되고 있지요. 물론 단군신화의 발생지가 오늘날의 중국 감숙성 돈황 막고굴 부근의 三危山이라 할 때 조선민족의 아프리카선민이동설을 밑받침하는데 더 효과적이겠지요. 그리고 《단군부족은 후에 실크로드(비단의 길)를 따라 섬서성 진령(秦嶺)주봉 태백산을 넘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나왔다》는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어 지는 거겠지요.   형님은 분명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태백 운운에 눈이 번쩍 뜨이며 그것을 감숙성의 三危 혹은 三危山, 그리고 섬서성의 태백산에 대치시킨 것 같은데 사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삼위태백은 다분히 도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방향감각을 나타내는 三位太白(星)으로서 三危와는 우연히 ‘삼위’라는 조선말의 諧音을 이루었을 뿐 하등의 관계가 없는 줄로 압니다. 감숙성 三危山이나 섬서성 태백산이 도교의 성지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단군신화에서 도교적인 삼위태백이요, 불교적인 환인, 환웅(帝釋)이요, 유교적인 덕(德)을 나타낸 것은 후세의 기록자인 일연 같은 사람들이 해당 시기의 이데올로기나 도덕률에 맞게 부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조선민족은 전통적으로 중국을 상대로 사대주의로 많이 흐르다보니 무엇이나 중국에 많이 갖다 붙였습니다. 지명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한양이니 웅진 같은 중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도 수두룩한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신화, 특히 건국신화를 액면 그대로 이해해서는 그 원초적인 모습이나 원형(原型)을 파악하기 힘든 줄로 압니다. 그리고 형님은 우리 조선민족들이 《그곳(감숙성 돈황 막고굴부근. 필자 주)은 사막지대여서 여름철에는 일조시간이 길고 해볕이 뜨겁게 내리쬐기 때문에 단군부족사람들이 모진 더위를 막기 위해 흰 옷을 입었으며 나들이할 때는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너무 피상적인 논의인 줄로 압니다. 물론 옷 입는 습관은 기후풍토와 많이 관계되지요. 그렇다 하여 그것을 너무 직선적으로 단순하게 리해하면 웃기는 얘기가 됩니다. 여기에는 경제생활여건과 종교 및 민속신앙적인 복잡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중동의 더운 사막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보기에 답답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을 한 것만 보아도 이 점을 알 수 있지요.   형님은 우리 조선민족의 두 주류 군체를 북방계 유목민족과 남방계 농경민족으로 나누고 있는데 저는 이 관점에 기본상 동의하면서도 굳이 진령을 계선으로 잡아 북방계와 남방계의 이동을 포착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선민족의 275개 성씨 중 절반이상은 그 씨족의 시조가 진령이남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조선민족의 공씨(孔氏)는 공자의 후예이고 신안 주씨(朱氏)는 주희의 후예이며 남양갈씨(葛氏)는 제갈량의 후예이고 청해 리씨(李氏)는 악비의 후대이다. 필자의 시조 남민(南敏)은 당나라때의 봉양부 여남사람으로서 당나라 천보 14년(기원 755년)에 안렴사의 사신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당시 신라국에 표착하여 그곳에 자리잡게 되였는데 남씨가족의 시조로 되였다.’고 했는데 여기에도 참 껄끄러운 점이 한 두 가지 아닌 줄로 압니다. 우리 조선민족의 성씨는 확실히 중국 사람의 성씨를 많이 땄습지요.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그 성씨를 땄다하여 그 후예이거나 후대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 조선사람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기만 해도 고유어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 을지문덕, 백제의 아자개, 견훤, 신라의 노힐부득, 달달박박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지요. 그러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중국 唐나라의 문물제도를 도입하면서 중국문화에 경도한 나머지 조선사람의 성씨도 중국 사람의 세 글자 성씨를 본 따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때는 성씨와 혈연의 유착도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유신, 최치원, 박인량… 이런 식이 정식으로 되어 줄곧 현재까지 내리왔지요. 현재 한국에서 고유 우리말 이름짓기는 이것에 대한 한 반발로 볼 수 있지요. 물론 남의 성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주체성이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되겠습니다만 사실 고대나 중세에 있어서 이것은 세계보편적인 한 현상이 되겠습니다. 유럽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리스의 데비드는 멋과 용감함의 상징으로 유럽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성씨로 되고 있지요. 로마의 정복자 알렉산데르는 그 이름의 위용이 러시아까지 미쳐 러시아사람들 가운데는 알렉산데르로 성씨를 지은 사람이 참 많지요. 그리고『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기적의 창조자로 많은 사람들이 따서 짓는 성씨로 되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동서를 막론하고 성씨는 한동안 양반이나 귀족의 대단한 신분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일반 상민이나 서민들하고는 별 인연이 없는 것이 되기도 했지요. 워낙 일반 상민이나 서민들에게는 성씨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조선사람들 사이에 개똥이요, 차돌이요 같은 천한 이름은 상민들 속에서 이름이 없을 때 생겨난 이름이기도 하지요. 물론 성씨에 존비귀천의 신분적 색채가 가미되니 위조족보가 남발하기도 했지요. 유럽 같은 경우도 보면 스티본은 야장쟁이 출신을 지칭했지요.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일반 서민들은 성씨가 없다가 도구가와시기에 성씨가 허용되면서 산 아래에 산다하여 山下모모, 밭 한 가운데 산다하여 田中모모, 강 위쪽에 산다하여 河上모모 식으로 편리한 대로 성씨를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상층 양반이나 귀족들이 일반 상민이나 서민들에게 성씨를 하사하기도 했지요. 이른바 賜姓이 그것이지요. 이상 성씨에 대한 대체적인 갈래판을 통해서도 알다시피 성씨는 사실 별 볼일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단지 성씨를 통한 족속(族屬) 따짐은 대단히 섣부른 얘기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형님의 론문에서는 많은 발랄한 생각들이 피력되고 있는데 민족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립이 가장 새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발전사와 민족의 형성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 않다. 즉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구분된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이다.’ 일반적으로 민족을 구분하는 데는 공동한 혈연을 기초로 하고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에 의거하게 되지요. 그런데 형님은 여기서 선천적인 유전적 혈연을 빼고 후천적인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을 싸잡은 문화를 내세우고 있구만요. 물론 문화도 중요하지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문화로 나누어지기도 하지요. 유목문화, 농경문화, 상업문화 등등. 그래서 한 문화 속에 여러 다른 민족들이 포함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는 뭐니 뭐니 해도 민족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아무래도 혈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피는 못 속인다는 소박한 논리가 내 몸에 와 닿습니다. 아니다구요? 그럼 형님의 논리대로 400만 년 전《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선조의 후예들은 세계 도처에 널려 퍼지고 퍼져 오늘날 60억을 헤아리는 세계 각이한 민족의 인구를 형성하고있다》고 합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네 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는것이 인류사요 민족사라 하겠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무리 400만 년이 지났다 하지만 현재 인종갈래를 볼 때 체질인류학적으로 각 종족이나 민족마다 유전자가 다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모양새도 다른 데가 너무 많습니다. 피부색 하나만 놓고 보아도 흑인, 백인, 황인, 홍인, 갈색인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쌍겹눈과 단겹눈, 우뚝코와 납작코, 장신과 단신… 이런 것은 형님의 론리대로 이동하여 정착해서 살다보니 一方山水, 養一方人 격으로 나름대로의 생김새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별 무리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래도 석연치 않은 점은 체질인류학적으로 같은 백인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유전자적으로 확연히 다른 아리안족과 비아리안족, 그리고 샘족과 햄족으로 나뉘어 지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아리안족이라고 해도 게르만, 라틴, 슬라브 등으로 세분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 백인들이 지난 수세기에 걸쳐 아프리카흑인들을 사람취급하지 않으며 만행을 저지른 표면적인 이유로는 흑인들이 자기네와는 유전자가 다른 별종임을 많이 강조했지요. 사실 형님의 논리대로라면 아프리카에 끝까지 남은 흑인원주민들이 아프리카선민들의 유전자를 가장 잘 이어받은 순종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형님의 논리대로 우리 조선민족도 아프리카선민들의 후예라면 체질인류학적으로 그 선민들의 유전자 및 생김새와 같아야 하는데 분명 같지 않습니다. 뭐 그것은 유전자의 변이문제라고요? 현재 종족이나 민족 사이 유전자가 다르고 형체가 다른 것을 단지 유전자의 유전 및 변이만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 줄로 압니다. 유전자변이로 해석하기에는 피차간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는 거지요. 현재 각 종족이나 민족은 나름대로의 피를 나눈 혈연을 이루고 있지요. 피는 못 속이는 법입니다. 한국의 많은 사생아들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입양되어 갑니다. 커서 자아의식이 확립될 임박에 이들은 본능적으로 정체성의 갈등 내지 혼란을 느낍니다. 나는 왜 아버지, 엄마와 생김새가 다르지? 나는 왜 언니, 오빠, 누나와 생김새가 다르지? 나는 도대체 누구야?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에서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종족적,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피는 우리의 집단무의식적인 종족적, 민족적 胎志에 다름 아니지요. 그래 피, 혈연을 빼놓고 어찌 종족적, 민족적 논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형님, 현재는 형님이 잘 지적하다시피 《오늘 여러 나라의 경제는 세계일체화에로 나가고 있으며 세계 여러 민족들 간의 래왕은 날로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님이 또 잘 지적하다시피 현재는 분명 《민족문제와 민족 간의 모순은 의연히 세계 불안중의 주되는 요인의 하나로 되고 있으니 이것은 현대인의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적인 슬픔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분명 혈연의 종족, 민족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다 할 때까지 분명 종족, 민족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형님이 피타게 외치는 아름다운 세계원융이나 인간이 이때까지 추구해온 대동세계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종족, 민족을 전제로 한 원융이나 대동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은 줄로 압니다. 절대적인 융합이나 대동세계는 없는 줄로 압니다. 여러 종족, 민족의 화이부동(和而不同), 이이존동(異而存同), 바로 진짜 너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너가 있으며 그러면서도 너는 너고 나는 나인 그런 경지 말입니다.   남영전 큰 형님, 화(和)만 웨치고 부동(不同)은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화(和)는 부동(不同)을 전제로 하는것이 아닙니까?   부동(不同)이 없는 화(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좀 대답을 해 주세요. 2006. 11.18
117    인물값 (우상렬116) 댓글:  조회:5131  추천:103  2007-12-13
인물값우상렬우리 조선사람은 돈값보다 인물값을 잘 따지는 것 같다. 쩍 하면 인물값을 하라고 하지 않는가? 남자로 태어났다. 그럼 인물값이 무엇이냐? 부엌에 안 들어가기.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내자식 부엌에 들어가면 거시기 떨어진다고. 그리고 우리는 사농공상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니 장사는 지극히 천한 일. 장사를 하는 것은 인물값이 뚝 떨어지는 차마 못할 일. 그런데 漢族들은 인물값보다 돈값을 더 따지는 것 같다. 그들은 거시기 떨어진다는 얘기 없을 뿐만 아니라 배가 고프면 인물값이고 무어고 다 팽개치고 부엌에 내려가는 것은 약과고 장사든 무엇이든 다 잘 하는 것 같다. 중국 漢나라 때 罷出百家, 獨尊儒術, 유교의 기강이 확립되던 시기다. 그러니 유교에서 말하는 士農工商이요 하는 것도 이때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유명한 문장가 司馬相如와 새파란 과부 卓文君이 서로 눈이 맞아 私奔을 한다. 그들이 私奔을 해서 온 곳이 지금의 成都다. 그들이 成都에 와서 한 일이 무엇인가 하니 卓文君의 패물을 판 돈으로 술가게를 차렸다. 卓文君은 앞에서 해쭉해쭉 웃으며 손님을 반겨 맞고 주문을 받는 등 시세말로 하면 홀 서비스를 하고 司馬相如는 뒤에서 술이나 퍼주고 그릇이나 씻는 등 뒷바라지를 했다. 이들의 장사는 불티나게 잘 되었다. 미남에 재사 司馬相如와 미인에 과부 卓文君이 하는 술장사라 잘 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리라. 그것은 일종 私奔의 낭만적인 사랑이 깃들어진 술타령과 같은 멋이 있었으리라.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두고두고 지금까지도 司馬相如와 卓文君의 私奔 및 그 술장사를 외우고 있다. 成都 시가지 중심에는 바로 司馬相如와 卓文君의 낭만적인 사랑조작상이 있다. 사실 중국 사람들은 士農工商이고 무어고 떠나 분명 장사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다. 漢나라 賈誼의 『過秦論』과 司馬遷의『史記』의 ‘貨殖列傳’에도 장사치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던가. 그런데 그때 이들의 술장사도 분명 인물값에 못 가는 쪽 팔리는 일임에 틀림없다. 인물값을 따지는 卓文君의 아버지가 술장사하는 그들을 차마 보아줄 수 없어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하지 않는가?  그러면 우리 문학사에 어느 문인 장사했다는 소리 들어보았는가? 없다. 아니, 있기는 있다. 그런데 문인작가는 아니고 문학작품 속의 가상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허생. 실학이 싹튼 근대여명기에 선각자 박지원의 소설「허생전」에 나오는 주인공. 허생은 처음 인물값을 하느라고 10년 공부를 작심한다. 그런데 마누라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진절머리가 나서 인물값을 팽개치고 장사---꼴값을 하러 나섰다. 독점 매과점으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다. 그런데 인물값이 떨어지는 듯 했다. 그래서 가난한 거지들에게 무인도에 살길을 마련해주고 황금흑사심이라 남아도는 돈은 모두 바다에 처넣고 자기는 처음 출발했던 원점으로 돌아온다. 결국 인물값을 따졌던 것이다.나는 연길이며 우리 조선족이 많이 사는 곳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인물값을 잘 하는 그런 인물들을 참 많이 만나게 된다. 할 일 없으면 사구려 장사나 좀 해보지, 노가다나 뛰어보지… 내가 넌지시 이런 식으로 말을 던져보면 에익, 내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한다고, 그런 일은 漢族들이나 남방쿠리들이나 할 일이지, 나는 죽어도 그런 일을 못한다니까하고 쯔쯔 혀를 다신다. 그래서 백수건달들이 참 많다. 얼굴 화사하게 화장하고 부티 나는 남자의 애인이나 되어 등이나 쳐 먹자는 새기들을 보고 나는 또 싱겁게 건의한다. 할 일 없으면 양꼬치나 구워 팔든가, 아니면 구두닦는 노릇이나 하지 하면 흥,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얘기예요, 놀려도 분수가 있지, 그래 내가 그런 일 할 사람 같아 보이나요 하며 앵돌아진다. 그래서 백수기생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잘 난 인물값을 하겠다는 데는 말이다. 우리 다들 그래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漢族들 그리 인물값 하는 거 같지 않다. 나는 현재 거물급의 도시 重慶에 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를 나서 얼마 안 가면 상설 장마당이 있다. 나는 심심하면 여기에 간다. 뭐 물건 사러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 구경하러 간다. 여기는 참 별라별 가관의 장사치들이 다 있다. 너무 괴짜들로 보여 내가 하나하나 인물값을 매겨 주었다. 과학가--안경 알이고 테고 모든 것이 두툼한 안경을 건 훤칠한 중년의 사나이. 인물값을 보면 뛸 데 없는 위성이나 원자탄 쯤 연구해낸 연륜이 지긋한 과학가타입. 어떻게 장사하게 되었는가고 묻자 지난 세기 77년 대학문이 열리자 출세 좀 해 볼가 해서 죽자 공부는 했는데 자꾸만 名落孫三이 되어 자기는 대학 갈 운이 아닌 줄 아고 그때부터 한 노릇이 이 장사라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운명의 신에게 정배를 당한 ‘우파’ 과학가로 보였다. 화이트칼라--역시 안경을 걸었다. 안경 알이고 테고 모든 것이 얄팍한 신식 안경을 걸었다. 생긴 것도 갸날플 정도로 얄팍하게 생겼다. 인물값을 보면 현대의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스타일. 어째서 장사를 하게 되었는가고 물어보니 역시 몇 번 대학입학시험을 쳤는데 허약한 몸이 자꾸 딸려 실패하고 말았다 한다. 그래서 이 일 저 일 찾던 중 그래도 장사가 자기 적성과 건강 상태에 가장 맞더라는 것이다. 현대 西施--西施 어떻게 잘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갸름하게 생긴 것이 여하튼 西施 같았다. 인물값은 두말할 것 없이 경국지색. 모두들 그렇게 말하니 더 같았다. 이 西施는 魯迅의「故鄕」의 두부서시 양얼댁처럼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고 양꼬치를 구워 판다. 해쭉해쭉 웃으며 굽는 양꼬치는 그녀의 웃음이 어려 더 맛있어 보였다. 사람들 맛있게 잘도 사 먹었다. 그녀의 장사사연을 들어보았더니 자기네 집안 내력은 모두 장사할 팔자라서 그런단다. 백설공주--분을 뾰얗게 뒤집어 쓴 듯 천연의 백설공주. 인물값--피부 좋고 부드러운 전형적인 아담사이즈의 남방미인. 그래서 내가 지어준 백설공주칭호. 그런데 나를 지극히 ‘실망’시키는 것은 이 백설공주가 구두닦이를 하고 있다. 그것도 1원짜리 구두닦이 말이다. 우리 연길처럼 2원이나 좀 더 비싼 것이 아니고. 그래 그 잘 난 인물값에 왜 이 별 볼일 없는 구두닦이를 하는가고 물어보았더니 구두닦이 수입이 짭짤하게 괜찮은데 왜 우습게 보는가고 한다. 이외에… 여하튼 여기에는 인물값을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그들은 참 자기 주제에 맞게 인물값을 하며 실속 있게 산다고 생각된다.우리도 이젠 인물값이요 하는 꼴값 좀 적게 떨고 실속 있게 살아보자.나는 한국이 참 좋다. 한국은 우리 조선족의 용광로다. 우리 조선족은 한국에 가서 인물값을 그리 따지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따질려 해도 따질 수 있는 계제가 못 된다. 인물값을 따질 ‘좋은’ 자리는 우리보다 똑똑한 한국 사람이 먼저 다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가서는 노가다고 식당써빙이고 주방일이고 닥치는 대로 잘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새로운 인물값을 매겨 나가는 것 같다. 사실 못해낼 것도 없는 것 같은 일에서 우리의 인물값은 매겨진다. 2007-11-21
116    장수콤플렉스 댓글:  조회:4837  추천:101  2007-11-27
장수콤플렉스 우상렬이 세상에 새빨간 거짓말 세 가지가 있단다. 바로 늙은이가 빨리 죽겠다는 말이고, 처녀가 시집가지 않겠다는 말이고 장사꾼이 돈을 못 벌었다는 말이란다. 그렇다. 生老病死,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운명. 백년도 못 사는 인생, 그러니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 살기다. 장수,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쌓이는 것이 장수콤플렉스. 이것은 우리 누구도 이 장수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되겠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한 5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로 나타나며 汉族들에게는 好死不如懒活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젊어서의 요절을 더 없는 불행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것의 반대급부로 天寿를 누린 丧을 好丧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우리는 장수를 분명 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나타날 때는 우리에게는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십일홍에…’이며 汉族들에게는 ‘今朝有酒今朝醉’이다.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차지한 듯한 기고만장에 이 장수콤플렉스를 잠간 잊고 지낼 수 있다. 그러나 老, 나이가 들고 病, 병까지 겹치면 우리는 버쩍 정신이 들면서 건강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자연스럽게 장수콤플렉스가 솟아난다. 그러면서 장수노인, 장수촌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로부터 섭생법에 신경을 쓰게 된다. 缺啥补啥, 이 세상 좋다는 보약을 다 갖다 쓰며 불로장생을 꿈꾼다. 허울 좋은 불로초라는 이름도 이렇게 생겨났다.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발로 이 허황한 불로초에 미혹되어 300명의 동남동녀를 삼신산에 불로초 켜러 봉래 쪽으로 파견한다. 신선사상도 이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童顔鶴髮, 흰 수염을 훨훨 날리되 영원히 죽지 않고 자유자재의 경지에 노니는 것, 이것이 바로 신선이다. 세속세계의 우리는 신선과 놀 주제가 못 된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법. 적어도 신선과 우리는 타임밍과 공간이 맞지 않다. 신선세계에서의 하루는 적어도 인간세상의 몇 백 년이 된다. 신선세계에 잠간 들렀다오니 인간세상은 어느새 몰라보게 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신선세계는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신비의 세계. 도연명의『桃花原記』에서 도화원을 아무리 다시 찾아가려고 해도 그것은 헛수고다. 이것은 인간이 신선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다. 인간의 장수콤플렉스의 발산도 한풀 꺾이는 순간. 이로부터 인간은 더 없는 비극적인 허전함과 쓸쓸함에 잠기게 된다. 그래서 기술적인 양생법을 구사한 도교의 장생법이 우리의 장수콤플렉스를 얼마간 카타르시스다. 항상 역설적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도교는 장생의 비결로 清心寡欲을 말한다. 마음을 항상 깨끗이 가지고 물욕을 적게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仁者寿나  과식불여불식하는 도덕담이나 의학담으로 나타난다. 이로부터 清心寡欲의 도적인 삶의 경지가 펼쳐지기도 한다. 사실 도적인 이 삶의 경지만이 아니고 우리는 황제『素女經』의 소남소녀의 기를 받기 위한 동남동녀동품, 더 나아가 아예 죽음을 초탈한 경지에서 노닐려고 炼丹服丹하기, 젊은 사람의 피를 갈아대어 返老还童하기, 실로 해괴망칙한 별라별  장수콤플렉스의 짓거리에 놀아나기도 한다. 일대의 영웅 한무제는 신선도술에 놀아나 아침 이슬을 받아먹기도 하고 수은을 먹기도 하며 오히려 저승길을 재촉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 장수콤플렉스에 놀아나 오히려 즐길 인생도 못 즐기는 역설을 빚기도 한다. 그래 남녀 간의 화끈한 짝짜쿵 사랑도 자제하며 무슨 接而不入 식으로 하라지 않나. 사랑이 앞에 있어도 감질남만 나는 그런 사랑밖에 못하는 역설이 아니냐. 그래서 입으로 침 겔겔 흘리고 아래로 똥오줌 질질 갈기면서 여하튼 오래 사는 것, 개돼지처럼 살아도 오래 살기만 하면 장땅이라는 맹목성과 무지막지함의 好死不如懒活, 하루를 살아도 사람 같이 사는 것을 거부하는 역설이 빚어지기도 한다.인간은 장수콤플렉스를 발산해야 한다. 콤플렉스의 발산은 시원한 것. 실제로 심신건강에 좋다. 그러나 인간의 장수콤플렉스는 일단 인생의 무상과 허무라는 인간 본연의 실존에 부딪치게 된다. 인간은 살다보면 장수는커녕 내일 일도 대중하기 힘든 변화무상, 그리고 好人命不长의 허무, 그렇게 양생을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꼴깍 죽고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막 산 사람이 백년 장수하는 인생의 역설에 우리는 그만 두 손을 들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人命在天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홀가분하고 편하다. 다음 우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육체적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돌이 아니고 쇠가 아니고 고기덩이로 만들어진 이상 인간의 육체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육체적 연장-각종 미라의 출현은 이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대체 육체가 생겨난다. 이른바 비석이요, 동상이요, 화강암기념비요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노래 ‘천년 바위’도 바로 이런 것이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일진대  ‘차라리 죽어서 천년바위 되어…’ 길가에 서서 이 세상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그런데 아무리 비석이요, 동상이요, 화강암기념비요 해도 언젠가는 스러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의 장수콤플렉스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종교적인 이 세상에서 저 세상 가 살기가 고안된다. 그리고 육체를 정신으로 승화시킨 이름 남기기가 고양된다. 雁过留声,人过留名하는 식이다. 이른바 영웅되어  千古留芳하지 못할 바에는 臭名昭著,遗臭万年이라도 하자는 식. 2007-11-20
115    군인콤플렉스 댓글:  조회:4946  추천:83  2007-11-22
군인콤플렉스우상렬나는 어릴 때  커서 무엇이 될 래? 장가갈래, 군대갈래 하면 나는 두말할 것 없이 대뜸 군대갈래 했다. 군인이 되고픈 것이 나의 꿈이었으리라! 그때마다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셨다. 내 위에 형 하나가 장가갈래 했다가 아버지한테 혼쭐검을 당한 적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사내자식은 그래도 군대에 가야지하는 파다. 당신께서 군인이 못 되고 한 평생 농사꾼이 되신 것을 한 평생 후회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쩍 하면 한다는 얘기가 내가 군대에 갔으면 요꼴이 아니겠는데... 내가 동생들을 돌보느라 그만하는 식이다. 군대에 가고픈, 군인이 되고픈 소년영웅꿈은 우리 사내아이들에게 한 번쯤은 움찍했던 원초적인 욕망. 나도 여기에 놀아난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정색을 해서 군대에 가겠다, 군인이 되겠다하면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끄덕이며 그럴듯해 했다. 워낙 우악지다 못해 우둔하게 생긴 나의 생김샘김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년영웅꿈을 지금 아이들처럼 그렇게 호사스럽고 세련되게 키우거나 발산하지 못했다. 척 군모, 군복에 놀이감 권총을 차고 놀이감 돌격총을 쫘 갈기고... 그러면 어른들은 으악~으악~ 죽는 흉내를 내어주는 그런  거는 나하고 멀었다. 나는 거저 나 또래들하고 쥐어박고 나 딩굴고 지랄발광을 피우는 짓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장난을 친다는 것이 가벼운 것이 눈싸움이고 보통은 진흙덩이를 뜯어 서로 때리며 싸움질하기고 말타기에 한쪽 다리를 손으로 들어 올린 채 서로 박아치기를 잘 했다. 실제로 싸움도 많이 했다. 주먹으로 쥐어박기, 돌팔매치기, 單打에 무리싸움... 그래서 ‘싸움대장’이라는 이름도 땄다. 그때 해방군아저씨가 얼마나 부러운지 몰랐다. 다른 집에서는 형들이 척척 군대에도 잘 가는데 우리 집에서는 왜 하나도 못 가지, 나는 형들이 미워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리 넷째 형님이 정치심사요, 뭐요 하는 고비, 고비를 겨우 넘겨 내일 모레 군복을 입게 되었다. 그때 날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우리 큰 외삼촌문제가 들컥 불거져 나오며 일락천장이 되고 말았다. 우리 외삼촌은 술을 좀 좋아하고 풍악을 잡고 놀기 좋아했다. 그리고 신수니 뭐언지 해가지고 남의 사주팔자를 잘 봐주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우파반쪽인지 무언가 되어 있은 거 같다. 여하튼 큰 외삼촌의 문제는 넷째 형님의 인민해방군꿈에 결정타를 가했다. 그때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인민해방군이 값있을 때라 처녀동지들이 줄을 설 때다. 그때 넷째 형님이 군대라도 갔으면 일거양득 하겠거늘, 참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할밖에. 모두들 형님을 그렇게 위로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원래부터 큰 외삼촌을 곱게 보지 않던 터에 넷째 형님 일로 하여 개 닭 보듯 하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때 넷째 형님 못 지 않게 나도 기분이 대단히 잡쳤다. 꼭 마치 나의 인민해방군꿈이 깨어진 듯 했다.나는 소학교에 다닐 때 어쩌구려 홍소병團長이 되어서 양쪽에 호위병 되는 듯 두 여자애들을 끼고 제일 앞에서 깃발을 들고 학생대오를 이끌고 앞으로 걸어 나간 것이 무엇보다 신났다. 나는 그때 동존서, 황계광, 구소운 등 영웅들이 얼마나 멋져 보이고 대단해 보였는지 몰랐다. 내가 그렇게 못 죽는 것이 안타까워 나기도 했다. 나는 꿈에 ‘전 중국의 해방을 위하여, 동지들 전진...’ 꽝하고 몇 번 죽어보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며 ‘동존서’ 영화를 하루에 두 번 보기도 했다.  초중 2학년 때인가 학생들을 민병편제인지 무언지로 짜면서 민병連長이 되어 구령 한 번 크게 불러본 것이 그렇게 좋을 리가 없었다. 천군만마를 호령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나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소병團長이요, 민병連長이요 하는 짓을 무엇을 잘 못했는지 여하튼 오래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절실히 느껴지는 것이 好景不長의 인생무상. 사실 어쩌면 나하고 團長이요, 連長이요 하는 군대 벼슬자리하고는 아예 안 맞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團長이요, 連長이요 하는 ‘군관보직’의 해임은 나의 군대꿈을 접게 한은 것이 아니라 더 불태운 것이 틀림없다. 초중을 다닐 때 나는 지지리도 군모를 쓰고 다녔다. 사실 나뿐이 아니고 우리 또래 남자 애들 다 그랬다.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아무렇게나 책상 속에 꿍져 넣었던 초록색 군모를 슬슬 꺼내 왼 손으로 모자창을 쥐고 오른 손 주먹으로는 모자창 안쪽을 들이밀어 우뚝 솟게 고봉을 만든다. 그리고는 책상 오른 쪽 위 귀퉁이에 신주단지 모시듯 살며시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따르릉 종소리가 울리기 바쁘기 그 고봉이 된 군모를 쓰주기에 바쁘다. 그때 우리가 쓰고 다닌 군모는 거의 다 모방하여 만든 가짜 군모였다. 그때 초록색 군복도 우리가 가장 멋있어 하던 옷. 그것도 대개 모방하여 만든 가짜 것을 입고 다녔다. 그런데 이런 가짜 군모와 군복이 그렇게 소중하고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누군가 어디서 진짜 군모나 군복이라도 하나 얻어 썼거나 입었으면 당연히 그렇게 우쭐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 진짜 군복은 몸에 착 입고 다녔으니 괜찮았는데 머리에 쓰는 진짜 군모는 마음 놓고 쓸 수 없었다. 거리바닥에 이런 진짜 군모를 노려 둘이서 단짝이 되어 자전거를 타고 씽하고 지나가며 나꾸채는 데는 머리가 용케 붙어있는 것에 감사할 일일 뿐이다. 그때 이런 날치기를 당하고 빌빌 우는 친구들을 심심찮게 보았다. 참, 지금 보면 이런 모자나 군복이 그렇게 후줄끈하고 볼 품 없건만. 이 남방에 와 보니 건축현장에서 노가다하거나 막벌이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입기도 한다.        초중에서 고중에 올라갈 때 학교에서는 30%를 탈락시켰다. 그런데 이 30% 가운데 나의 ‘동지’들이 많았다. 나의 ‘동지’들은 거의 다 공부를 잘 못하고 ‘싸움대장’에 ‘연애대장’이 많다보니 줄줄이 남생이 꿰어져 나오듯 학교 문을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요행 거기에서 빠져 고중으로 올라갔다. 공부가 잘 될 리 만무했다. 그래서 고중 1년을 건중만중 보냈다.   고중 2학년에 올라갈 때 다시 70%를 탈락시키고 문과반 하나, 이과반 하나씩만 달랑달랑 남겼다. 이때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나의 동지들은 깡그리 ‘소탕’되고 말았다. 나는 이번에도 재수 좋게도 턱걸이 신세로 겨우 고2로 올라갔다. 그런데 거저 왼쪽 오른 팔 짤려 나간 신세가 아니고 완전히 고립무원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전부 공부만 하는 놈, 나 같은 놈은 없었다. 나는 그만 미쳐날 것만 같았다. 그때 18살의 나는 우울증이라는 것을 직실히 느껴보았다. 그래서 공부는 영 말이 아니었다. 엉망진창 그 자체. 그런데 나를 더 환심장이 나게 하는 것은 학교 문에서 ‘쫓겨난’ 그 공부를 못 하는 나의 ‘동지’들이 줄줄이 군대에 간다고 야단들이다. 내가 대학입학 시험을 반년 가량 더 남겨 둔 시점이다. 그때 나는 두말 않고 우리 ‘동지’들 사이에 끼어 군대지원을 했다. 대학시험이고 무어고 다 집어치우기로 했다. 그런데 그 인민해방군에 가지 못한 나의 형님이 어느새 이 소식을 듣고는 달려와  나의 이름을 박박 그어버렸다. 그 잘난 군대에 가 뭘 해, 너는 공부를 해라! 형님의 뇌성벽력 같은 소리. 나는 그때 처음에는 좀 멍해나다가 정신이 드는 순간 형님이 얼마 미워났는지 모른다. 형은 왜, 이래! 하며 박박 대드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때 아버지가 어흠, 어흠 하시더니 히야 말이 맞다, 그래도 공부를 하거라, 대학에 가거라하는 바람에 제풀에 기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앞가슴에 큰 붉은 꽃다발을 달고 군대에 가는 나의 ‘동지’들을 바라주면서 한 없이 울었다. 군대 가지 못하는 나의 신세가 한 없이 서러워서. 그럭저럭 나에게도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래서 나는 중점대학 첫 지망으로 중국인민해방군 낙양외국어학원을 찍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건만 군사학원의 입학통지서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또 한 번 황소 같은 숨을 몰아쉬며 크게 실망. 그래서 할 수 없이 운명이 챙겨주는 대로 연변대학에 왔다. 그런데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남경 쪽으로 오그르 군대로 몰려간 나의 ‘동지’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는 또 환심장이 났다. 일종 질투심 비슷한 것도 났다. 내내 따분한 강의듣기에 책하고만 씨름하고 있는 내 신세가 서글퍼나기도 했다. 대학공부고 무어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그 군인 ‘동지’들한테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들이 척 군복을 입고 총을 맨 사진을 부쳐올 때는 정말 부러움과 질투에 혼자 끙끙 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汽車兵에 차를 모는 사진이나 空軍地勤에 비행기 옆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부쳐오는 날에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밖에 나가 정신병자처럼 빙빙 돌면서 한 바탕 고함을 쳐서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남경의 명물인 현무호나 중산릉이며를 돌며 찍은 사진을 부쳐올 때는 그들이 얼마나 멋져보였는지 몰랐다. 일종 환상적인 낭만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부러 나를 꼴려주는 듯도 해서 기분이 잡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동지’들이 있어 얼마나 가슴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랑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나도 언젠가 군대에 가겠지 하면서 스스로 달랬다.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도 초록색 군복을 잘 입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인 그때까지도 군복은 하나의 패션이었다. 한 동안 나의 고향인 심양에서 湘西剿匪 시기에 입음직한 중국인민해방군의 군복이 유행했다. 노르께레한 색깔인데 실오리들이 人字형을 이루며 짜내려가 그것을 人字軍服이라 했다. 씻으면 색이 바라지면서 흰 색깔로 많이 변해갔다. 일종 노스텔지아 懷舊적인 군인향수의 옷이다. 나는 방학 간에 집에 갔다가 이것을 사 입고 와 한 동안 뽐내며 입고 다녔다.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 중학교 교사로 배치 받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 군대에나 배치 받았으면 하고 내 좋을 대로 생각을 굴리기도 했다. 그때 같은 졸업학년의 수학학부의 어떤 친구가 군부대로 배치 받아 간다는 소리를 듣고 부러워서 침을 겔겔 흘리기도 했다. 나는 결국 요녕성의 어느 조선족 중학교로 배치를 받았다. 그때 군대에 갔던 나의 ‘동지’들도 별 볼일 없이 다 돌아와 다시 촌놈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만나는 순간 짜식들, 니나 내나 그렇고 그렇네!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착실히 공부하도록 했다. 석사연구생에 겨우 붙었다. 그런데 석사연구생을 졸업할 임박 우리 학부의 허호일 교수와 이해산 교수가 나를 중국인민해방군 낙양외국어학원으로 추천을 한다. 낙양외국어학원에서 조선문학을 가르치는 황휘 교수가 석사졸업생 1명을 요구해왔던 것이다. 나는 두말없이 동의했다. 군대, 군인... 나는 그만 흥분의 도가니 속에 잠겼다. 군관이 되어 졸병들의 거수경례를 받는 나의 어엿한 모습이 상상되기도 했다. 고이 잠들어 있던 나의 군인콤플렉스가 발산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낙양외국어학원에서 한 번 와 보라는 말에 밤잠도 옳게 자지 못하고 설치다가 이튼 날 더딘 기차를 재촉하며 낙양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군사학원에 도착하여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니 그렇게 좋을 리가 없었다. 기분이 둥둥 떴다. 나도 이제 얼마 안 있어 입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막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학원의 높은 군관지도자들이 정말 여기에 와서 교관이 되겠는가고 묻는 말에 나는 얘! 두말하면 잔소리지요!하고 어깨에 힘을 주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랬더니 모두들 나를 군인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 돌아온 후 그렇게 부풀던 군인꿈이 펑 하고 터질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우리 학부의 김해룡 교수, 멋진 미학교수, 나를 당신의 후계자감으로 찍었다. 그래서 나를 ‘물’고 늘어진다. 그 잘난 군대학교에 가서 뭘 하는 가고 하면서 말이다. 거듭되는 설복에도 내가 끄덕도 하지 않자 김교수는 한 번 잘 생각해봐, 내 시간을 좀 주지라고 하고는 이튼 날 신새벽에 나의 기숙사로 달려와서는 문을 쾅쾅~ 두드린다. 어이, 상렬이, 생각해봤어, 그래도 여기에 남는 게 났지. 니 같이 술 좋아하는 놈이 거기 가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렀지? 그리고는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나의 결단을 촉구하는 판이다. 나의 군인꿈에 조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군관 盖帽에 군복을 입고 엄숙한 표정을 지은 군인꿈 속의 나와 머리칼은 부스스하고 눈에는 항상 노란 눈 굽을 달고 다니며 얼굴에는 땟국이 흐르고 옷은 온통 쭈그렁 투성이, 여기에 하라는 硏究는 잘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煙酒는 잘 해 술 한 잔 들어가면 세상이 콩알만 해 보이고 天不怕, 地不怕 식으로 간뗑이는 한 없이 불어나는 현실 속의 나를 하나로 클로즈업시켜 보았다.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水火不相容이라 할까... 나의 현실의식속의 이성은 이것을 또렷이 나한테 각인시켜 준다. 다음 순간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좋아하는 나의 뇌리에는 끔찍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술 취한 내가 총을 마구 휘둘러대는 무서운 모습... 나는 경악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낙양외국어군사학원을 포기하기로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조문학부에 남았다. 군인이 되는 꿈은 가슴 깊숙이 아련한 꿈으로 묻고. 그런데 이것이 수시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데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내가 학교에 남아 젊은 선생들의 일반 코스로 담임선생을 하며 신입생들을 데리고 군사훈련을 할 때다. 진짜 군관 군복은 아니고 허줄한 예비역 군관 군복을 입었는데도 기분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어깨에 힘을 주고 허리를 쭉 펴고 板正한 군인자세로 씩씩하게 돌아다녔다. 그랬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야, 그럴 듯 한데 하고 야단들이다. 신 났다. 그래서 진짜 군인이 되기나 한 듯이 학생들이 훈련하는 마당에 차렸, 경례, 정보로 걸었... 정색해서 같이 따라 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 학교 학생군사훈련 총 책임자는 아주 어린 나이에 군에 입대하여 풍상고초를 다 겪으며 대단한 군직에 올랐다는 나이 지긋한 분이었다. 그분은 생김생김도 윤곽이 뚜렷하게 생긴 것이 군인 같았다. 나는 그분이 대단히 존경스러웠다. 나는 달갑게 그분의 부하가 되었다. 그것은 일종 마조히즘적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어느 하루 딸 벌이나 되는 학생한테 반해 조강지처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신성스럽고 대단해 보이는 군인, 군복, 군직 등을 다 팽개치고 저 멀리로 종적을 감춘다. 고 여학생을 끼고 말이다. 나는 정말 허탈감에 빠졌다. 군인, 아니, 그 어엿한 군관도 그럴 수 있는가? 군대고 군인이고 군관이고 뭐고 다 개판이군. 그 미인관을 넘지 못한 종이범 같은 군관 ‘영웅’은 나의 군인의 꿈을 산산조각이 나게 했다. 그래서 나는 퉤! 더러워 죽겠어. 군인은 죽어도 안 해! 하며 돌아섰다. 군복 입고 항상 엄숙한 표정을 짓고 로봇 식으로 명령에 복종하기만 해야 하는 그런 생활이 한 없이 서글퍼나고 지겨워날 것이라는 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은 나하고 죽어도 안 맞는다는 ‘진리’가 터득되었다. 그래서 나는 홀가분해진 듯 했다. 그런데 나는 우리 학부에 군대에 갔다 온 선배 교수님들 몇 분을 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그들이 한 없이 부러워났다. 와, 군대까지 갔다 오고 교수까지 되고, 얼마나 멋져, 나의 내심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감탄. 사나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할 일이 많다고 하지만 군대 한 번 못 갔다 온 거, 군인 한 번 못 되 본 것, 어떤지 허전하고 아련히 아파온다. 그래서 한국의 그 군에 가기 싫어 별 지랄을 다 피우는 친구들이 이해 안 될 때가 참 많았다. 그런데 나는 군인이 되기 다 글렀다. 내 멋대로의 절대 자유경지를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나, 그리고 나이도 한 물 가고 젊음도 한 물 간 나는 군인이 되기 천만 번 글렀다. 그래서 나는 꿈에서 군인이 된 나를 종종 본다. 아니, 위풍당당한 장군이 되어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나를 종종 본다.             2007.11.19
114    네 얼굴에 침을 벹으마! (우상렬) 댓글:  조회:4548  추천:87  2007-11-22
네 얼굴에 침을 벹으마! 우상렬 대학교 신입생입학시즌. 신입생이 몰려온다. 商機를 잡은 재학생들 신입생의 돈주머니를 노려 난전을 벌이고 사구려를 외쳐대기에 바쁘다. 서로 터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시끌벅적 아귀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학교 졸업시즌. 졸업생들이 자기가 쓰던 물건을 팔기에 바쁘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열린다는 벼룩시장-대학생들이 물건을 내다 파느라고 제정신이 아니다. 어느새 이것이 우리 대학교의 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학교당국에서는 자기네 학생들이 商機를 잡을 줄 아는 똑똑한 학생들이요, 배운 지식을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지행합일자요, 그리고 근검절약하고 자아 독립할 줄 아는 등등 칭찬이 자자하다. 그런데 나는 자꾸 그만 허구픈 웃음이 나오고 만다. 그러다가 요새는 네 얼굴에 침을 벹으마!로 격해지고 말았다. 나는 대학생들이 돈에 미쳐나는 것을 못 보아 주겠다. 특히 선배라는 작자들이 멋모르는 신입생이나 아껴줘야 할 후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은 어쩐지 꼴볼견. 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다. 선배들이 따뜻이 마중해주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기도 했다. 나는 선배들이 챙겨준 그 졸업생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쓸 때마다 따뜻한 인간의 정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곤 했다. 나의 한 졸업생 술꾼 선배는 나에게 자기가 보던 책을 싹 넘겨주며 하는 말이 ‘야, 4년간 공부해보니 나는 공부할 놈이 아니야. 그러니 나는 돈이나 벌으련다. 이 책은 다 니가 가져. 너는 공부하면 될 것 같애.’나는 술꾼 선배의 이 한마디 말에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 선배가 넘겨준 사전들을 뒤지노라면 감개무량해난다. 몇 년 전에 우리 동북의 어느 명문대학교에 대학입시시험 채점을 하러 갔다가 졸업생들이 캠퍼스에서 자기가 보던 책을 다문 몇 푼이라도 받고 팔겠노라고 하루 점도록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멋진 선배가 생각키웠다. 선배는 현재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범한 선배는 꼭 부자가 되었을 거야! 그립다. 다음 순간, 서글픈 현실에 쓴웃음이 나왔다. 현재 내가 와 있는 이 남방의 명문대학교의 졸업생들은 우리 동북 명문의 졸업생들을 뺨칠 정도다. 자기가 쓰던 이부자리까지 내다 팔기에 바쁘니 말이다. 기숙사구역에서 이부자리를 사러 온 ‘무지랭이’ 촌아준마들하고 가격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은 참 가관이다. 돈을 모르고 순수하던 우리 대학생들이 언제 이렇게 돈에 아득바득이 되었지? 현재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나 돈을 아득바득 따지는 시장경제세상이니... 하고 모든 것을 여기에 밀어 붙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제3자에 원인을 돌리기 전에 진리와 착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야 할 우리 대학이 여기서 많이 빗나가 있음을 자성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청빈하지만 대바르고 꼿꼿한 선비정신을 잃었다. 적어도 우리 대학교는 학비 안 받는데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학생들하고 돈을 따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 대학 교수들 강의료 안 받고 강의할 놈 몇이나 되지?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언젠가 모두들 알아서 돈 버는 세상이랍시고 우리 대학 교수라는 양반들이 낮에는 강의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 여행사 가이드노릇도 하고 저녁에는 양꼬치를 구워서 팔기도 했지. 돈에 미쳐나면 이런 해프닝도 얼마든지 벌린다. 이런 우리의 철따구니 없는 자화상이 上行下效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나는 한국의 선배문화가 참 멋져 보인다. 한국은 자본주의, 우리보다는  한참 자본주의. 그런데 한국은 인정이 남아있다. 그래 한국에서 대학 캠퍼스에서 선배들이 신입생이나 후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걸 보았느냐? 그래 졸업생들이 자기가 쓰던 물건을 다문 몇 푼이라도 받겠다고 하루 점도록 서 있는 꼬락서니를 보았느냐? 나는 보지 못했다. 아니, 나는 보았다. 그들도 장사하는 것을. 그러나 우리처럼 쫀쫀하지 않고 영악스럽지 않은 자선바자회말이다! 그리고 나는 다만 선배들의 호기어린 깡다구와 지나친 관심에 신입생이나 후배들이 좀은  피곤해하는 것은 보았다. 기분 나쁘지 않은 그런 피곤함. 나는 우리 대학생들이 돈하고 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회에 나가 돈 버는데 이골이 트고 악돌이 되더라도. 우리 대학도 有敎無類, 학생들하고 돈 노름을 좀 적게 해야 한다. 대학생은 어디까지나 眞善美의 화신이고 대학교는 어디까지나 眞善美의 신성한 전당이거늘. 그러나 오늘날  眞善美가 어린 이런 충언은 사상누각의 허황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외치련다. 적어도 내가 몸담고 있는 연변대학,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학생들만이라도 그러지 말기를!   2007.11.1 
113    선녀와 나무꾼(우상렬112) 댓글:  조회:5283  추천:99  2007-11-22
선녀와 나무꾼  우상렬 우리에게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있다. 하늘의 선녀, 땅 위의 나무꾼,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던 날…’, 그들은 사랑을 한다. 이 사랑이야말로 정말 낭만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구전승 쾌자되는 듯 하다. 사실 이것은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중국의 ‘牛郎职女’, 일본의 ‘날개 옷을 잃어버린 千叶姬’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분포된 이야기이다. 신델렐라는 못 생기고 별 볼일 없는 여자가 시집가는 이야기라면 나무꾼의 이야기는 못 생기고 별 볼일 없는 남자가 장가가는 이야기이다. 신델렐라 이야기가 시집 못 간 처녀들의 백일몽이라면 나무꾼의 이야기는 장가 못 간 총각들의 백일몽이다. 우리 말에는 헌 신작짝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섭리를 나타내고 있다. 性比의 바란스를 나타낸 진리성을 띠고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처녀와 총각을 만들 때 모두 제 짝이 있도록 짝짝 맞게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처녀총각의 사랑을 아예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진리는 진리고 현실은 현실일 때가 많다. 진리와 현실이 겉돌 때가 많다는 말이 되겠다. 현실의 그 잘 난 남자들이 여자들을 너무 많이 꿰차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를 좀 보자. 3천궁녀를 거느리는 제왕들, 허용된 축첩제도에 다다익선으로 축첩하는 대신들과 귀족양반들, 그리고 부자들. 三妻六妾이라는 말도 이로서 생겨났다. 여기에 英雄好色, 英雄难过美人关이라 영웅까지 가세하니 나무꾼이나 牛郎 같은 최하층 일반서민들에게 차례질 처녀들은 애초에 모자란다. 이로부터 性比의 바란스가 깨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옛날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현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아랍권의 많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한 남자가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는 것은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리고 우리 현실의 이른바 잘 나가는 남자들을 보라. 권력 있고 돈 많은 남자들 말이다. 그들 사이에 통하는 말---沾花惹草, 家花不如野花香. 그래서 너도나도 情妇. 이런 情妇는 그 권력과 돈의 비례에 따라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이것을 새로운 축첩제도라 해야 되나. 바로 이런 축첩에 운 좋게 겨우 장가갔던 ‘나무꾼’이나 ‘牛郎’들은 다시 외톨이로 되는 비극을 맛보야 한다.  <金瓶梅>에서 무대랑이 서문경에게 색시 반금련을 빼앗기듯이 말이다. 아니,  <金瓶梅> 얘기가 아니고 우리 현실에서의 조선족 총각들도 마찬가지다. 1년에 한국으로만 시집가는 처녀가 몇 백명은 약과고 천명이나 된다고 하니 조선족 ‘나무꾼’ 총각들 장가가겠나 말이다. 물은 낮은데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 데를 바라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몇 년 전에 이런 小品 하나 보았다. 처녀기갈이 든 조선족 농촌의 총각들이 처녀마네킹을 색시인양 모셔놓는 해프닝을 희비극으로 보여준 내용이다. 이것이 단지质小品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현실의 한 자화상이라 할 때 서글프났다. 사실 처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위장결혼이요, 뭐요 해서 또 우르르 나가니 많은 홀아비들이 또 양산되는 판이다. 이른바 잘 사는 나라에서 여자 싹쓸이 해가는 판이다. 이로부터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의 性比의 역삼각도가 형성된다. 그럼 색시가 없거나 잃은 ‘나무꾼’은 어쩌야 하나? 하늘에 올라가 찾아야 하나? 그것은 너무 아득한 길이고 실효성이 적다. 그래서 나무꾼이 수닭으로 변해 하늘을 보고 애꿎게 울기만 하거나 牛郎도 칠월칠석에만 职女를 한 번밖에 못 만나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그러니 원천적인 개변을 해야 한다. 바로 ‘나무꾼’이나 ‘牛郎’의 신세를 고쳐야 한다. 아직도 전근대적으로 산에 가서 땔나무나 해 팔고 소궁둥이나 두드려며 밭을 갈아서는 처녀가 아니라 식은 죽도 못 얻어 먹는다. 현재 중국의 새농촌건설붐이 일고 있다.  천재일우의 기회다. 우리의 ‘나무꾼’들도 여기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이제 새농촌건설이 실효를 거둘 때 선녀도 날아내려올 것이고 职女도 아늑한 조선족 구들 아래목에서 천을 짤 것이다.   2007-11-20   
112    중경과 조선사람 (우상렬)(111) 댓글:  조회:5088  추천:97  2007-11-19
중경과 조선사람 우상렬나는 우리 조선사람이 씨앗 같은 기질이 있다고 생각된다.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가다가도 여기다 싶으면 떡 물고 널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중경은 중국 서남지구에 위치한 오지. 이제야 서부대개발이니 뭐니 하니 정말 개혁개방의 늦 차를 타도 한참 늦게 탄 듯한 감이 든다. 그런 만큼 여기는 그만큼 기회의 땅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항상 역동적이고 기회의 땅을 찾는 한국사람이 들어온다. 제조업을 비롯한 제1산업, 기간건설을 비롯한 제2산업, 식당, 사우나 같은 제3산업-서비스업이 중국정부의 서부대개발정책의 프러포즈 하에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온다. 2005년 5월 29일에 중경시인민정부와 한국의 중국주재대사관에서 주최한 2005년 ‘中國重慶․ 韓國友好周’가 중경에서 성대히 개막되었다. 한국대표단은 정부관원, 기업계와 연예계인사들로 도합 170명에 60여 업체가 참가했다. 중경시장 王鸿举가 개막식에서 축사를 했다. 6월 2일까지 ‘中國重慶․ 韓國友好周’ 기간에 투자간담회, 참관고찰 등 경제무역활동을 진행하였으며 동시에 한국영화주, 한국도편문화전람, 한국연예계스타방문공연 등 문화활동을 진행하였다. 2005년 현재 중경에 투자한 한국 업체는 농업, 공업, 기간건설, IT, 서비스업 다양한 영역에 걸쳐 현대자동차, 포스코, 효성 등 굴직굴직한 한국업체들을 비롯하여 44개 업체가 진출해 있고 투자계약 누계액은 5865만불에 달한다. 중경의 외래자본투자액의 10위권에 든다.  중경에는 전문 한국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중경한국공업단지’까지 갖추고 있다. 근년래 중경과 한국의 수출입 총액은 15%좌우의 증장속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과 중경은 제7대 무역파트너가 되었다. 또 얼마 전에는 中国商务部의 대폭적인 지지 하에 2007년 10월 25일에 韩国官民联合考察团을 상대로 ‘重庆投资环境说明会’를 진행했다. 그리고 덕수궁, 高麗食府 등 한식요리점이 신성한 입맛으로 3천2백만 중경사람들의 입으로 다가온다. 한국 연속드라마 『대장금』이 중경사람들에게 한국음식을 각인시켰다. 그들은 한국음식하면 ‘대장금’할 정도다. 그래서 호기심에 적어도 한번은 먹어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요리 중경요리 최고라는 의식이 강한 중경사람들의 입맛을 길들이기는 정말 쉽지 않은 줄로 안다. 덕수궁 책임자의 말을 들으니 처음에는 중경사람들도 잘 굽어먹고 하니 한국불고기가 먹혀들어가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홍보하고 맛들이고 한 결과 이제는 제법 먹혀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옛청사 및 광복군연고지 내방, 그리고 현대적인 紅鼎을 비롯한 6개의 골프장레저 등 인연으로 중경에 관광레저차로 오는 한국 사람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아시아나’가 인천과 중경 사이를 날아예고 있다. 현재 중경에는 한국 사람이 적어만치 몇 백 명은 잘 된다. 중경한국인협회 및‘한국인교회’는 이들의 聯宜體 및 만나의 장소, 교류의 장소가 되고 있다.「중경저널」은 이들의 소식통이 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인과 ‘먹이사슬’의 운명공동체가 된 조선족이 또 모여든다. 이들은 민족동질성 및 중한이중 언어구사 덕택에 대개 한국인이 경영하는 업체에서 일한다. 식모에서 통역, 가이드,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역할은 다양하다. 조선족 수도 제법 되는 것 같다. 중경조선족교회까지 있으니 말이다. 중경에는 사천외국어대학, 서남민족대학, 중경대학 등 대학이 적지 않다. 조선족 학생들이 이런 대학에 많이 붙어온다. 중경에는 조선족 대학생만 해도 백여 명 정도가 된단다. 작년에 조선족 대학생 한명이 장강에 뛰어들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해내고 그 자신은 사품치는 강물에 실종된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온 중경시내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그해 중경시선전부의 주최 하에 시민들이 뽑은‘2006년 중경을 감동시킨 10대 인물(2006年感动重庆十大人物)’의 한명으로 뽑혔다. 중경시장이 그 어머니를 중경으로 모셔 위로했다고 한다. 중경사람들은 한국인이나 조선족에 대해 아직 호기심을 잃지 않고 있으며 아주 우호적이다. 이런 호기심이나 우호적임이 못난 한국인이나 조선족한테 상처받지 않고 계속 이어가기를 기원해본다. 중경사람들은 한국은 미인이 많이 나는 곳, 탤런트가 많은 곳으로 알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화장품이나 미용광고는 쩍하면 한국 식이니 한국미인이니 하고 갖다 붙인다.‘한류’의 영향이라 해야 되겠나,여하튼 한국어를 배우는 젊은 애들이 많다. 사천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와 한국학연구중심이 중경의 한국어교육의 메카가 되고 있다. 사실 이 한국어과에는 대학입시를 통해 입학한 대학생 수는 입시규정 상의 제한으로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전 학교 제2외국어 선택과나 이른바 사회인을 대상으로 한 사회반에는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한국어붐이라 해야 하겠나, 여하튼 학생은 많고 강사가 모자라 나까지 동원되어 한국어를 강의한다. 고 새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차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을 대할 때면 나는 절로 열심히가 된다. 그런데 왜서 한국어를 배우냐고 한번 물음을 던져보았더니 의외로 정말 간단명료한 해답들이다. 한국 노래가 좋아서, 한국 드라마가 좋아서, 한국 탤런트가 좋아서... 한마디로 한국이 좋아서인데 나는 그들의 순수함과 홀가분함에 감동을 받았다. 그들의 이 순수함과 홀가분함이 부러웠다.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 가서 돈을 많이 벌겠다고 한동안 지랄발광을 하던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아득바득 삶에 코 꿰어 다닌 각박함과 억지가 많았지 않은가. 세대차요, 격세지감이요 하는 것이 확실하게 몸에 와 닿았다. 사천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에서는 1년에 4월과 9월에 나누어 2번에 걸쳐 한국어토익시험을 조직한다. 현재 매년 수험생수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어시험에 합격된 전제하에서 추첨에 의해 한국에 노무로 나가는 무연고자들의 비즈니스한국어시험도 이때 치르게 된다. 이때면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든다. 이번 시험에 감독을 하면서 조선족들이 시험을 잘 쳐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흐뭇해났다. 한국 바람에 한국붐이 계속 일기를 기원한다. 사실 중경은 일찍 광복 전에 한국 사람과 인연이 닿은 곳이다. 항일전쟁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이듬해인 1938년에 중경이 중국의 陪都가 됨에 따라 장개석 국민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훈련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중경은 한국독립운동의 한 메카가 된다. 1942년 11월 10일에 한국임시정부수립 제24주년기념강연회가 개최되었는데 周恩來가 ‘한국독립문제’로 주제발언을 했다. 그리고 1943년 12월 21일에는 한국독립운동 라디오좌담회가 개최되었다. 1944년 9월 22일에는 한국임시정부승인문제로 좌담회가 개최되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모택동은  장개석의 요청에 응해 중경에 와서 평화담판을 하게 된다. 이때 즉 1945년 9월 3일에 모택동은 자기가 묵고 있는 桂園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인원들을 접견한다. 1942년 10월 11일에는 중경의 중국방송국대강당에서‘韓中文化協會’가 성립된다. 회장에 임시정부 외교부장으로 있은 조소앙이 취임했다. 상무이사는 한국 측에 김규식, 중국 측에 孫中山의 아들인 孫科 등이 맡고 명예이사는 한국 측에 이승만, 이청천, 서재필 등, 중국 측에 周恩來, 馮玉祥, 郭沫落, 白崇禧, 張治中 등이 맡았다. 이 단체는 실로 한중 및 당시 중국의 國共인사들의 연합체였다. 1945년 10월 29일에는 협회창립 제3주년 기념식 및 한국임시정부 요인 귀국환송회를 개최한다.‘韓中文化協會’는 1946년 11일까지 중경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들어간다. 중경은 역사적으로나 현재로나 이래저래 조선사람들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 인연이 계속 이어가고 보다 좋은 일이 많이 맺어졌으면 한다. 200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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