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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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황유복교수 “이중성부정론”과의 대화 댓글:  조회:3510  추천:6  2013-07-31
황유복교수 “이중성부정론”과의 대화 ㅡ황유복교수의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를 읽고 조성일   황유복교수는 조글로 사이트에 올린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는 글을 통해 필자의 “조선족이중성론”을 가차없이 반박하였는데 필자는 더는 침묵하고있을수 없어 “대화”의 형식을 빌어 황교수의 견해에 대한 나름대로의 미숙한 생각을 또 한차례 굴려본다(아래 황유복교수와 필자의 이름을 황-조로 략칭함).   용어 및 그 뜻풀이 문제   황: 조성일선생님께서 또 한번 “二重性”과 “双重”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혼돈하시였다.   조: 나는 조선족으로서 조선어로 글을 쓰기 때문에 조선어의 단어 및 용어 사용과 개념풀이를 할때에는 조선말사전을 기준으로 삼는다. 조선어로 글을 쓸 경우 나뿐만아니라 다른 분들도 지켜야 할 원칙이라 생각된다. 우리 조선 말사전에는 “이중성”이란 낱말은 있어도 “双重”이란 낱말이 없다. 다만 《韓 漢詞典》이나 《中朝詞典》이나 《中韓辭典》 등에서 “双重”을 “이중(二重)” 의 동의어로 밝히고 있을뿐이다.   ◊이중: 二重, 双重 ◊이중적: 二重的, 双重的 -《韓漢詞典》(商務印書館, 1978년 출판) ◊ 双重: 이중 ◊ 双重國籍: 이중국적 ◊ 双重人格: 이중인격 -《中朝詞典》(조선외국문도서출판사, 중국민족출판사, 1986년 출판)   ◊ 双重: 이중(二重) ◊ 双重人格: 이중인격 _《새 中韓辭典》(徽文出版社 출판)   나는 바로 우리 민족 지성인들이 편찬한 조선말사전과 번역사전에 준하여 왕아남(王亞南)선생 글 가운데의 한 대목을 우리 말로 번역하여 인용할 때 “双重”이라고 원문 그대로 직역(원문을 존중하여)한 다음 우리말식으로 “이중(二重)으로 풀이하였다.   그런데 황교수는 한어(漢語)의 언어습관과 《現代漢語詞典》에 올린 한어 낱말의 용어와 그 풀이에 기대어 조선어로 쓴 나의 용어사용 및 풀이를 공박하고있는데 이는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다. 《現代漢語詞典》의 잣대를 들고 조선말사전에 따라 쓴 나의 글 가운데의 용어사용을 가차없이 공박하는 것에 한해서 나로서는 유감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황: “이중성(二重性)민족”이란 말은 하나의 민족을 욕하는 말이다.   조: “이중성” 낱말에 대한 풀이는 조선말사전이나 현대한어사전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조선말사전이나 현대한어사전이 시사하다싶이 “이중성”은 통일성을 전제로 하면서 그 속에 담겨져있는 모순성과 불일치성 등을 지칭한다. 하지만 황교수는 통일성이라는 이 전제를 불식하고 이른바 “모순성과 불일치성”만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 견해의 연장선에서 “이중성”이란 어떤 나쁜 것을 이르는 말로 간주한 나머지 “이중성민족”이란 말은 하나의 민족을 욕하는 말이라고까지 밀어부치고있다. 그렇다면 만일 모모 사람이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을 욕하는 말이 되는가?“이중언어”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있는가? 그리고 여기서 부언하고픈 것은 황교수가 중국내의 민족관계를 구체적으로 론할 때에는 각 민족간의 통일성만을 강조하고 그들간의 차이성과 모순 등은 불식하고있다. 이는 이률배반, 이중 마스크가 아닐까. 리해되지 않는다.   황: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고 따라서 “조선족과 한국의 “韓족”(이상한 말-필자)은 서로 다른 민족이다.   조: 황교수는 nation의 개념과 ethnic group의 개념을 혼돈하고있다. 중국에서는 중국석학들의 견해에 따라 nation은 정치민족, 현대민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풀이하고있으며 ethnic group는 우리 국가 내부의 족체(族體), 문화민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있는 것이 통례로 되고있다. 이러 상황에 대해 중국의 저명한 학자 왕련(王聯)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nation은 ethnic group와 다른바 nation이 더 크며 정치적의의를 더 가지고있다. 따라서 ethnic group는 nation 아래에 있는 족체를 지칭하는데 우리 나라의 한족, 회족, 장족 등이 모두 ethnic group에 속하고 중화민족은 nation이다.1)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애초에 조선족의 “이중성”개념을 풀이할 때 어폐가 있었던것과 같이 황교수도 상술한 개념 정리에 있어서 정치(精緻)하게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조선족 이중성 문제   황: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 이중성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로 해석된다. 한 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 하는것도 그 민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것이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 아니다. 100%의 조선족일뿐이다.   조: 20세기 초엽부터 중국의 학자들은 서방의 “일민족 일국가(一民族一國家)”, “민족_국가 일체화”라는 모식(模式) 을 뛰여넘어 “다민족국가”를 창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냈다. 파란만장한 오랜 세월을 거쳐 그 주장이 현실로 되여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다민족국가” 탄생되였다. 중국의 저명한 민족학 학자 비효통(費孝通)선생은 이 다민족국가의 구조는 “중화민족다원일체구조”(中華民族多元一體格局)라는 학설을 창조함으로써 이 학설이 중국 민족과 국가 관계 론술중에서 주류지위(主流地位)를 확보하게 되였다. 비효통선생의 이 학설의 내용은 방대한바 그중 몇가지 견해만을 간추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의 “50여개 민족단위는 다원이고 중화민족은 일체이다. 비록 50여개 민족을 모두 “민족”으로 지칭하지만 그 층차가 부동하다”. ◊ “각 층차의 다원관계에는 분분합합(分分合合)의 동태(動態)와 분이미렬(分而未裂), 융이미합(融而未合)의 다종 상황이 존재한다”. ◊ “고층차의 인동(認同)은 저층차의 인동을 대신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지어는 부동한 층차의 인동기초우에서 각자가 원유의 특점을 발전시킬수 있으며 다언어, 다문화의 정체(整體)를 형성할수 있다. 따라서 고층차의 민족은 그 실질에 있어서 일체(一體)이면서 다원적인 복합체이며 그 사이에는 서로 대립되는 내부모순이 존재하는바 차이적일치(差異的一致)라고 할수 있다”.2) ◊”하나의 자각적민족실체로서의 중화민족은 근 백년동안 중국이 서방 렬강과의 대항중에서 출현하였지만 하나의 자재적(自在的)민족실체는 몇 천년동안의 력사과정에서 형성되였다”.3)   상술한 비효통선생의 견해에 따르면 중화민족은 20세기에 형성된 자각적현대민족이고 한족(漢族)을 비롯한 50여개의 민족은 수천년 동안의 력사과정에서 형성된 자재적민족이다. 일체이면서 다원적인 복합체 그사이에는 서로 대립되는 내부모순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차이적일치”인것이다.   중국의 민족학 학자 왕아남선생은 민족의 개념, 민족신분과 민족의식 등을 두고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있다.   ◊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민족’과 ‘민족문화’의 개념은 기실 때때로 두가지의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광의적으로 말하면 ‘민족’과 ‘민족문화’의 개념은 긍정적으로 통일된 현대민족국가(nation)의미에서의 중화민족과 중화민족문화를 말하는것이고 특정된 의미에서 협의적으로 말하면 ‘민족’과 ‘민족문화’의 개념은 흔히 부동한 인구로 구성된 각 전통민족군체(ethnic group) 및 그 문화를 지칭한다”. ◊ “통일된 현대 중국민족국가내부에서 사람들은 쌍중(우리 말로는 이중-필자)민족신분과 민족의식을 갖고있다. 이는 그야말로 일종 회피할수 없는 력사유류(遺留)의 상황이다”. ◊ “기실 세계상의 허다한 국가를 두고 말한다면 ‘민족’의 개념도 역시 쌍중함의(涵意)를 가지고있다. 하나는 통일민족국가 의미상의 ‘현대민족’이고…다른 하나는 여전히 국내 아(亞)종족군체와 아문화공동체의미에서의 ‘전통민족’의 개념이다”.4)   왕아남선생의 견해에 따르면 중화민족은 중국의 국가민족인 “현대민족”을 말하고 중화민족의 하위개념에 속하는 50여개 민족은 ‘전통민족’이다. 따라서 중국의 각 민족 즉 각 전통민족은 “쌍중(이중)신분과 민족의식을 갖고있다.   중국의 저명한 민족학 학자 왕련은 “민족을 정치민족과 문화민족으로 획분하는 것은 내가 생각컨대 매우 필요하며 도리가 있다. 이른바 정치민족은…실제상 nation이고 문화민족은… ethnic group이다.” “문화민족의 개념은 종족, 언어, 전통 혹은 종교에 의해 정해졌고 정치민족은 국가, 령토, 공민신분과 정치원칙으로 정해진것이다”.5)   중국의 유명한 민족학 학자 왕명명(王銘銘)선생은 “중국에서 쌍중적인 문화 인동(認同)관념의 존재로 하여 우리의 인동은 줄곧 공민의식과 독특한 민족 식별이동의 모순통일로 교직(交織)되여 있다”.6) 이밖에 중국의 탈식민주의의 문화 리론가인 왕녕(王寧)선생도 《후리론시대의 문학과 문화연구》7) 에서 “신분에는 천성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있는데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있어서 한 인간의 민족과 문화신분은 얼마든지 이중적이거나 지어는 다중적일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상술한 중국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시사하다싶이 중화민족은 중국의 국가민족, 정치민족, 현대민족을 말하는것이요, 한족과 조선족을 포함한 50여개 민족은 전통민족, 문화민족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 두 류형의 민족개념은 부동한 속성과 성질을 가진 모순통일의 개념이다. 따라서 중국의 50여개 민족은 중화민족에 속하면서도 전통민족의 신분을 함께 가지고있는, 서로 다른 두가지 속성과 성질을 겹쳐 가지고있는 “이중성민족”이라고 일컬을수 있는것이다. 이는 “력사유류(遺留)”현상이라 말할수 있다. 동시에 우리 조선족도 중화민족에 속하면서도 전통민족, 문화민족으로서의 조선민족이며 조선족은 전통민족,문화민족의 견지에서 조선반도의 민족과 동일한 민족으로서 이중성을 갖고있다. 그런데 이 경우 한가지 덧붙이고싶은 것은 조선족이 조선반도의 조선민족과 동질성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중국의 정치적,문화적, 경제적 상황 등에 따른 이질성도 갖고있는 중국조선민족 문화공동체라는것이다. 따라서 탈모국(脫母國)적인 이른바 “100%의 조선족”을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 같지 않다. 중화민족과 조선족은 동일한 층차의 개념이 아니다. 전자는 상위개념이요, 후자는 하위개념이다. 우리는 이 점을 명기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 국민으로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중국대지에 튼튼히 발을 붙이고 중국의 법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며 중국의 각 민족간의 단결을 도모하고 중국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자기의 일체를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이 대전제이다. 또한 모국을 잊지 않고 중국과 조선반도의 합작. 교류와 관계정상화 그리고 조선반도의 통일, 인류의 진보와 세계평화 구축에 자기 나름의 기여를 해야 한다.   조선족에 대한 평가 문제   황: “허구의 이중성 민족론은 중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키워가고있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 세력의 활동일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민족은) 도리어 선족(鲜族),즉 조선족이다. 그들은 김씨 부자에게 충성하거나 혹은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렇게 믿지 못할 민족이라는 비난이 중국의 지성인들 사이에 만연되고있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열사가 가장 많은 민족,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있다.   조: 황교수가 인용한, “人民綱”에 올린 “肖河”의 말을 분석해 보면 조선족은 장족과 위구르족보다 못하며(한 민족과 다른 민족을 부정적으로 대비하는 자체가 잘못임)조선족은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으로 자신을 중국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며 조선족은 조선과 한국에 미친 민족으로 중상하였다. 이는 언어도단, 망언이라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조선족 가운데는 중국을 믿지 않고 우왕좌왕하거나 지어는 중국에 해로운일 저지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족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며 중국과 운명을 같이 하고있다. 과거나 현재나 중국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고있는 우리 조선족에 먹칠하고있는 “肖河”의 언어도단, 망언에 분노를 금할수 없다. 이는 나의 확고부동한 태도이다. 그리고 황교수가 나와 같은 “이중성” 론자(論者)들이 “중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키워가고있다”라는 어마어마한 덤터기를 들씌우고있는데 이는 “이중성” 론자들을 “분렬주의자”의 궁지(窮地)로 몰아부치려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황교수는“조성일선생께서는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살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아무런 조사도 실증자료도 따르지 않은“肖河”해외의 망언을 동조하고있는 황교수는 구경 어느 시대에 살고있다고 해야 할지, 구경 어느 쪽에 서서 이런 말을 하고있다고 해야 할지 현재 무지한 나로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중에 좀 더 생각을 굴려보겠다.   조선족문화 이중성 문제   황: 중국 조선민족의 문화는 광복전의 조선문화도 아니고 현재의 조선(남북을 포함한)문화도 아니며 한족의 문화도 아니다.8) 조: 나는 황교수의 이 견해에 대해 “조선족문화론강”과 “조선족과 조선족문화 이중성 재론”에서 반박한적이 있다. 황교수는 조선족문화의 이중성에 한해서는 지금까지 언급하고 있지 않는데 황교수의 고견을 듣고싶다.   몇 마디 더   황: ‘문화대혁명’ 당시 대자보와 같은 글을 평론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론쟁을 할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니다. 조선족이 민족언어와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다. 말장난보다는 지성인들이 해야 할 사회적 실천적노력에 힘을 모으자.   조: 황교수는 우리 조선족의 대표적인 지성인중의 한 분이다. 그의 학술성과를 평가절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중성”쟁론에서 황교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있을뿐이다. 이 쟁론은 말장난이 아니라 조선족의 신분과 조선족의 진로에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황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한가하지 않지만 분초를 쪼개가면서라도 론쟁에 뛰여들어 시비를 가르고 구동존이(求同存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겠는가. 황교수는 나의 글을 두고 “ ‘문화대혁명’ 당시의 대자보와 같은 글을 평론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하였는데 사람을 무시해도 너무 하지 않는가. 나는 내 글을 수준 높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의 글에 틀린 점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황교수가 오만한 자세로 “攻其一点 不及其餘”의 방법으로 나의 글을 전면 부정하고 매도하는데 한해서는 강건너 불보듯 할수 없다. 또한 나는 황교수의 말을 통해 나와 같은 사람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아니라 “말장난”만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외람된 말씀이지만 황교수가 그 도고하고 오만한 안하무인의 자세를 좀 낮추는 것이 옳치 않을까.황교수의 기탄없는 편달과 조언을 기대해 본다. 2010.2 주해: 1.《세계민족주의론》, 북경대학출판사, 2002년 출판, 7폐지). 2.《民族与社會發展》(민족출판사, 2001년 출판 81-83폐지) 3.《民族發展与社會變遷》(민족출판사, 2001년 출판 65폐지) 4.동상서,138-140폐지, 146-147폐지 5.《世界民族主義論》(북경대학출판사, 2002년 출판, 8-9폐지) 6.동상서,8-9폐지 7.북경대학출판사, 2009년 출판, 133폐지 8.황유복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에 관한 비교연구”, “문학과예술” 2005.5호 24폐지) 출처:중국조선족문화통신 2013-7-19 4:51:00
13    시비지심이 척박한 풍토 댓글:  조회:3030  추천:2  2013-07-29
시비지심이 척박한 풍토   조 성 일   시비지심   《맹자》의 “공손축장”(公孫丑章)에는 사단(四端)이란 말이 나온다. 사단이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이르는 말이다. 《맹자》의 4단에 나오는 수오지심, 사양지심, 측은지심 등은 모두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고 불쌍히 생각하거나, 겸손하고 사양하거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등으로 이들은 모두 수기(修己), 수신(修身) 즉 스스로를 관리하고 바로 세우는 덕성들인데 반하여 시비지심은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우리가 냉정하게 심중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것의 하나는 시비지심인것 같다.사물이나 리치, 사고, 행위가 옳은지 옳지 못한지를 구별하는 능력이 가장 기본이다. 필자는 불교를 믿지 않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심(三毒心) 가운데 ‘어리석음’이 곧‘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는 마음 상태’ 즉 시비지심 능력의 결손을 의미하는바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회와 자연의 질서,공정한 기준, 량심과 상식에 따라 판단하고 구별하지 못한다면 참된 사람이기를 포기한것과 다름이 없으며 그 결과는 사회를 소란시키고 정의가 죽고 정도가 눌리우고 불의가 판을 치게 된다. 우리 조선족문단과 일부 언론인들은 시비지심이 없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김문학은 10년을 웃도는 긴긴 세월에 중국을 비판하고 조선족과 한국을 비하하는 일본 우익세력의 어용문인으로 친일, 반화, 배족의 행각과 매문매필(賣文賣筆)활동을 진행하여왔다. 우리 동포사회의 일부 문인과 지식인들은 시비지심과 량심을 버리고 각종 수단을 리용하여 지속적으로 친일파 김문학을 비호하고 그에 대한 반대론자들을 좌적인 매질군(打手)으로 매도하는것이 그 일례라 해야겠다. 이로하여 우리 문인과 지식인 사회는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적반하장(賊反荷杖), 지록위마(指鹿爲馬), 어목혼주(魚目混株), 흑백전도, 차도살인(借刀殺人), 가화어인(嫁禍於人)등 비정상적인 일들이 판을 치면서 시비가 없는 정의부재의 대혼란속에 빠지고있다.   “김문학현상”의 핵심문제   “김문학현상”에 대한 론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찬반론자들이 계속 대립각을 세우고 “랭전상태”에 처해있다. 그런데 쌍방이 노리는 초점은 다르다. “김문학현상”의 찬양론자들은 “공기일점, 불급기여”(攻其一占, 不及其餘)의 수법으로 김문학이 주장하는 기본적인 지론을 회피하거나 은폐한 나머지 대방의 비판 문장에서 나타난 일부 거치른 말과 일부 과격한 현상에 대한 비판에만 예각적대응을 꾀하는데 반하여 “김문학현상”의 반대론자들은 김문학의 착오적인 지론을 거머쥐고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있다. 따라서 그 론쟁의 초점이 엇갈려 론쟁의 접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이는 아주 반상적인 현상이다. 이 론쟁에서 시비가 갈라지려면 “김문학현상”의 핵심문제를 에워싸고 백가쟁명을 벌려야 한다. 대방의 언어표현에 나타난 문제에 대한 론의로 김문학의 주장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덮어감추거나 묵살해서는 안되며 다른 방향으로 호도해서는 안된다. “김문학현상”에 대한 론쟁은 2000년대 초 김문학의 《중국조선족대개조론》,《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 ,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으로부터 인기되였다. 김문학은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을 빌어 “조선족녀성들은 20세기의 위안부”,“연해지역으로나 해외로 진출한 조선족녀성들은 창녀(娼女)군단”, “조선족사회는 남자는 도둑놈, 녀자는 창녀(娼女)인 남도녀창(男盗女娼)의 사회”, “남조선놈은 사기치고, 북조선놈의 인육(人肉)을 팔아 넘기는 중국조선족”, “사소한 배신도 습관이 돼버린 조선족”, “동굴속에 사는 조선족”, “조선족이 중국에 공헌한 건 김치와 개고기뿐”, “조선족사회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원”, “조선족은 초우센주(肏鲜族)”, “조선족은 팬티를 입은 원숭이” 등등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리고 《중국국민에게 고함》과 그 재탕인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이라는 책에서 중국을 “문화가 없는 문명 고국”,“문화를 반대하는 성향을 지닌 나라”, “문화의 사막”, “류망의 반리성주의가 살판치는 나라”, “우민정책으로 찌들어온 8억 아Q의 나라”, “례의렴치가 없는 후안무치한 나라”라고 매도하였다. 중국을 반대하는 김문학의 악렬한 행각은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2006년)이란 책 출판에 이르러 극도에 도달했다. 따라서 “김문학현상”에 대한 반대론자들의 비판은 점차적으로 이 책이 퍼드린 반화언론에 모를 박게 되였다. 그렇다면 “김문학현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필자의 천박한 생각에 따르면 일본 우익세력의 대변자로 나타나 일본군구주의의 죄행을 “력사적인 “공로”로 둔갑시킴과 아울러 무치하게 “수비립전(樹碑立傳)하여 가공송덕(歌功頌德)하며 중국을 비롯한 조선반도와 중국조선족의 력사외곡과 위대한 인물들의 공적을 말살하는 나발을 거침없이 불어댄것이라 말할수 있다.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표적인 책은 김문학의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 출판하려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김문학은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이란 책에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중국에 대한 “해방전쟁”이며 “五族協和”, “王道樂土”라는 위만주국의 건국리념은 일제 식민지전략의 지도이념을 찬양하면서 만주국은 “滿族國”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은 만주국의 “複制ㅡ擴大版”이라고 모독하였으며 일제의 점령구역은 “樂園”이라고 미화한 반면에 국민당 통치구와 공산당이 지배했던 해방구는 “地獄”이라고 모욕하였다. 남경대학살은 중국인이 조작한것이라 미친듯이 소리쳤고 모택동이 일본황군을 “반면교원”으로 삼고 평가한것을 제 마음대로 외곡하여 모택동을 “친일파”라고 악독하게 중상하였다. 심지어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수뇌부는 침화일본군 사령부와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장기간 손잡아 왔다고 력사를 외곡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을 항일전쟁시기에서의 가장 큰 친일한간집단이라고 모독하였다. 이에 반하여 일제의 조선과 중국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제2차세계대전시기 일본침략의 괴수 도죠히데키(東條英機), 남경대도살의 원흉 마츠이이와네(松井石根) 등 일본의 력대의 전범들을 영웅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최근 일본총리 아베가 산포한 일본의 침략전쟁을 일으킨 죄악을 부인하고 력사를 외곡하고있는 망언과 김문학의 망언은 동일한 것으로 김문학은 일본 극 우세력의 후설이고 충견임을 보다 분명하게 보아낼수 있는것이다. 중국화동사범대학 종계천교수는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력설하였다. “이 책에서 김문학은 자기야 말로 미친 소리를 마구 치면서 조국을 마구 무함하고 헐뜯었다. 그 언어는 악독하고 그 관점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책은 그야말로 일본 우익집단의 언론의 집대성이며 민족의 절개를 던져버리고 학술 량지(良知)를 구겨버리고 나라를 팔아서 이름을 날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야말로 구역질이 난다”. 김문학은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태여나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6년간이나 대학에서 강사노릇을 하였으며 문필작업도 벌렸다. 이것이 김문학의 원래의 문화신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김문학 문화신분은 완전히 변했다. 비둘기는 하늘을 날아도 콩밭은 못잊는다는 선인들의 말 있듯이 사람이 아무리 좋은데를 떠돌아다녀도 자기가 살던 고장을 잊지 못하는것이 통례이지만 김문학은 자기의 조국인 중국을 등지고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중국과 조선, 한국. 조선족을 비판의 과녁으로 삼았다. 그의 오만무례하고 자화자찬하고 안하무인의 정도는 우리 속담이 말해주듯이 “시아비 뺨을 칠 정도”이다. 그는 노상 코스모폴리탄 ㅡ세계인 혹은 우주인 다시말하면 자기는 중국, 한국, 일본…등을 초월한 “제3부류의 지성인”으로 자처하고 자랑하며 무치하게도 자기의 음흉한 의도를 감추고 그 무슨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문제를 처리하고 전도된 력사와 사실들을 다시 전도시키는 작업을 한다고 불어대고있다. 이는 어띠까지나 사람들을 기만하는 사기극이다. 로신선생은 “ ‘제3부류의 사람’을 론람”이란 잡문에서 이런 사람으로 되려는것은 “흡사 자기의 손으로 머리카락을 우로 끌어당겨 지구를 떠나려는것과 같은것이다”라고하였다. 이 얼마나 적중한 말인가! 김문학은 중국을 떠나 일본에 가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권세를 업어야 했다. 따라서 그는 “부귀공명”을 얻으려고 달갑게 일본 우익세력에 빌붙어 일본 우익세력을 대변하는 어용문인으로 전향하였던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조선족이라고 나발불며 세계인으로 고아대는데 이것은 종이로 불을 싸는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김문학은 민족, 국가를 초월한 “세계인”의 탈을 쓴 에누리없는 신친일파이다. 김문학의 현황을 분석해 볼때 애초에 일본우익세력의 울타리속에 들어갔기에 이제와서 그 울타리로부터 발을 뺄수 없는것이다. 만일 그가 오늘에 이르러 일본 우익세력의 반대편에 선다면 일본 우익세력이 용서하지 않을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따라서 김문학은 일본 우익세력에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며 량면삼도(兩面三刀)의 술책을 리용하여 기회주의적인 광대놀이를 하면서 신친일파의 길을 죽을때까지 걸어야 하는것은 그의 숙명이라고 해야하겠다.   연변에서 정의는 죽었는가   10년을 웃도는 짧지 않는 세월에 김문학에 대한 론쟁이 계속되여 왔다. 이 와중에 김문학의 신친일파의 모습과 그의 악렬한 본질이 백일하에 들어났다. 한국에서는 일찍 김문학을 신친일파로 찍었고 중국비교교육학회 회장이며 중국화동사범대학 종계천교수는 중국교육계의 유명한 권위적인 잡지로 알려져있는 “전구교육전망(全球敎育展望)”을 통해 철같은 사실을 들어가며 김문학은 매국적, 일본우익세력의 충복, 한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를 비롯한 연변의 적지 않은 문인들도 김문학의 친일행각을 10년 넘도록 지속적으로 비판하여왔다. 하지만 연변의 일부 문인, 문인단체의 책임자, 일부 사이트의 관계자들은 이런 정의적인 행동에 찬물을 퍼붓고 이에 반해 김문학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지지하고 비호하고 있음으로 하여 그에 대한 찬반론쟁이 지금까지 현재형으로 계속되고있다. 오래동안 우리 문단의 일부 문인들은 김문학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않으면서 그 무슨 “디아스포라형의 지식인”, “세기적인 문화반성을 하는 최고지성인”, “후기현대사회의 품격을 갖춘 지성인”이요 뭐요 하면서 하늘 높이 춰 올렸다. 김관웅교수가 어느 글에서 말했듯이 애초에 김문학을 극구 칭찬을 해댔던 우리문단의 일부 친구들이 김문학의 “신친일파”의 본질을 사전에 속속들이 알고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중에 김문학의 친일파의 진상이 적라라하게 세상에 들어나고 특히 김문학이 >이란 책을 빌어 상기한 악독한 언론들을 퍼뜨린것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이르러 우리 문단의 한 평론가는 그에 대해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김문학에 대한 이전의 그릇된 평가를 고집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 최근년간에 김문학의 글쓰기와 연구는 “조선족의 미증유의 현상이며 김문학의 의의는 그의 존재와 활동으로 하여 조선족 문학의 판도(版图)를 국제, 세계로 확장시켰다고 강조”했으며 “김문학은 조선족이 낳은 독보적 지성이며 앞서 달리는 문화선구자이기에 그에 대한 오해, 몰이해가 있는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지적했다.” (국제김문학팬클럽 심양지회장 선우옥련, 조글로미디어). 이 평론가는 중국공민이고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으로서 김문학의 >중의 반화언론을 보고도 김문학을 친일파가 아니라고 계속 변명하고 있는데 너무나도 어이 없는 일이다. 더욱 한심한것은 그가 “친일은 력사문제로 당시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 만주국건립의 건국리념을 찬양하고 일본의 중국침략을 구가하고 반공을 주장하는 등 친일행적 여부로 친일문학인가 아닌가를 판단해야 한다”(동상)는 잣대를 만들어가지고 광복 전에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 만주국건립의 건국리념을 찬양하고 일본의 중국침략을 구가하고 반공을 주장하는 등 친일행적”이 있으면 친일파이지만, 광복 이후에는 아무리 상기한 친일행적이 있어도 ‘친일파’가 아니라’는 자가당착의 황당한 론리를 펴면서 무치하게도 김문학의 반화곡조를 극구 감싸주고있는것이다. 이 평론가는 구경 어느 나라 사람인지, 중국의 존엄과 국익과 기본적인 정책과 주장과 엇서는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닌지 의심을 떨쳐버릴수 없다. 이런 평론가가 우리 문단에서 “대환영”을 받고있으니 우리 문단의 시비지심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최근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은 “김관웅의 문학심포지엄”을 준비할때의 사건인데 문단의 한 책임자는 이번 심포지엄에서 김문학관계의 쟁론문제를 다루지말라고 김관웅교수와 론문작성자에게 “지령”을 내렸다. 당사자들은 우리가 진행한 김문학에 대한 비판은 중국의 정책에 맞고 국익을 보호하는 정당한 행위인데 왜서 그를 다루지 못하는가고 문단 관계책임자에게 반대의견을 제기하였다. 이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복잡한 문제이기에 회피하라고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는 한편 만일 이 문제를 다루면 나의 상황이 어렵게 된다는것이였다. 결과적으로 심포지엄에서 김문학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면 안될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던것이다. 선행의 문단 책임자로부터 이번 책임자(전근하여 갔음)에 이르기까지 김문학에 대한 비판에 소극적이였고 지어는 반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묻노니 친일파를 비판하고 중국공산당의 정책과 주장에 반대곡조를 부른 반화파에 비판의 메스를 대는것이 무슨 잘못인가? 이를 저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어떻게 평가해야 옳은가? 조글로는 자기 사이트에 김문학의 전문코너를 설치하고 그의 프로필, 칼럼/수필,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신조선족”월경론, 김문학론/인터뷰, 활동사진 등을 올리면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돌리고있다. 조글로에 실린 김문학의 프로필에서 다른 단체의 이름을 빌어 김문학은“ ‘월경하는 글쓰기’를 전개한 문인으로서 ‘신조선족 지성의 기수,국제파 귀재, 동양비교문화의 작은 거인’ 으로 국제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극찬하고있는가 하면 또 지속적으로 김문학의 50권출판기념회, 70권출판기념회 등을 기사화하여 그를 선양하고있다. 또한 최근에는 김문학이 쓴 친일파 리광수를 미화한 “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중국의 위대한 문호로신을 친일파쪽으로 밀어부친 “로신과 리광수”, “비적”을 도원하여 폭력혁명을 하였다고 모택동을 비하한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등 글들을 사이트에 올려 방문객들의 분노를 야기시키고있다. 조글로는 무엇때문에 이런 정치적문제가 엄중한 김문학의 글들을 계속 올리고있는가? 이런 행동을 할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온것인가? 심히 의심되는바이다. 김문학은 비교문화학자라고 한다. 김관웅교수를 비롯한 “김문학현상”의 반대파들은 애초부터 그의 비교문화연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종여일하게 중국을 반대하고 중국의 근본적인 국익을 해치는 그의 황당하고도 독소가 잠재해있는 망언에 초점을 맞추어 비타협적인 론쟁을 벌려왔다 우에서 이미 말했지만 과격한 언사를 발산한 오류가 한때 있었지만 우리가 다룬 기본견해와 내용은 시종 정확하였다. 정의적인 주장이였다.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김문학현상”지지론자들은 넌지시 “김문학현상”의 내용이나 보질을 바꾸어놓는 투량환주(偸梁換柱)의 수법으로 중대한 시비문제에 한해서는 회피하고 감싸주고 대방의 언어표현에 관계되는 일부문제만을 꼬집으면서 그것으로 “김문학현상”을 무마시키고 비호하고 김문학을 극찬하는 한편 김관웅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을 극좌사조를 가진 자들이라고 타매하였다. 지어는 관방의 세력을 빌어 반대론자들의 입을 막고 억압하려고까지 하였다. 이런 치열한 론쟁속에서 중도파도 나타났고 강건너 불보듯, 먼 산우의 바위보듯하는 수수방관파도 있었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대로 왔다리갔다리하는 눈치보기파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파에 속하는 사람들의 심층에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잠재해 있겠지만 그중 공통한것의 하나는 “모난 돌 정 맞는다”는 속담이 시사하다싶이 사람이 모나지 말고 둥글둥글하게 살자는 처세철학인것같다. 옛날 황희 정승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황희 정승이 하인들이 싸우는 사연을 듣고는 “네 말이 맞다!”라고 한 뒤, 상대 하인의 말을 듣고서도 “네 말도 맞다!”라고 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아내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오?”하고 묻자 “당신도 맞소!”라고 했단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처세술에 순응하는것같다. 나아가 모난 돌을 배척하고 중상하고 모난 돌을 란타(亂打)하는 몽둥이노릇을 하는 사람도있다. 그런데 과연 아무때나 아무런 일이나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모난 돌은 정을 맞고 둥근 돌이 되여야 하는가? 특히 대시비문제를 가르기위해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에 걸맞는 날카로운 지론을 펴는 “정의지사”가 정을 맞아야 하는가? 그대답은 부정적이다. 중국의 인민 내부의 일상 생활에서나 작은 시비문제에서는 량보도 하고 융화와 조화를 이루는 “둥근돌”이 수요된다. 하지만 정치적인 대시비, 부조리와 비리, 비정은 곧은 나무처럼 굳건히 자기의 자세을 지키는 모난 돌”, 생벽을 뚫고나가는 “무소의 뿔”이 요청된다. 분위기가 소란하고 질서가 문란하거나 기풍이 바르지 못한 우리 동네 특히 우리 문단은 력사상의 천재적인 예술가들이나 과학자, 사상가들은 대부분 체세에 서투른 “모난 돌”이였음을 상기하고 “모난 돌”을 소중히 여기는 풍토를 조성해야 할것이다. 일본에서 극우세력의 대표주자인 아베가 일본총리로 당선되고 일본자유당이 정권을 거의 독점하는 추세가 나타나면서 오늘날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의 부활 조짐이 날로 더 명확해지고 있다. 아베정권의 이른바 “강대한 일본을 건설한다”는 이 슬로건에는 바로 평화헌법을 고쳐서 일본의 군대를 부활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목적이 숨겨져 있다. 일본침략의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극우정권이 일본군국주의의 옛길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점은 이미 세인들의 공동한 인식으로 되였다. 김문학현상은 바로 일본극우세력의 그늘밑에 돋아난 독버섯이다. 이런 동북아세아의 국제정치의 배경하에서 달갑게 일본극우세력의 후설로 되여 일본제국의의 침략전쟁을 극구 미화하고, 일본의 침화전쟁의 력사를 외곡하고, 중국공산당을 악랄하게 모독한 “김문학 문제”는 중국의 핵심적리익을 엄중하게 해친 대시비에 직결되는 이데올로기 면의 중대한 문제 일쁜만 아니라 중국의 국가와 민족이익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지극히 중대한 정치문제이다. 이는 단지 연변이라는 자그마한 지역사회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중대한 정치시비문제를 호도하거나 덮어감추려거나 묵살하려하거나 비호하거나 수수방관하거나 침묵을 지키는것은 중국공민으로서 중국의 량심있는 지식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며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는데 해가 되는 일이다. 특히 연변지역의 의식형태 분야를 주관하는 상급기관이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주길 바란다. 만일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간문인 김문학의 친일, 반화, 반공, 반민족의 엄중한 정치문제에 대해서 계속 보고도 못본척 하거나 심지어 이런 일을 덮어감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인식문제를 떠나서 엄중한 정치립장, 정치태도 문제로 볼수 밖에 없다. 나의 생각에 따르면 연변지역의 의식형태 분야를 주관하는 상급기관에서는 김문학의 정치적문제를 지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성하도록 교육을 진행하고 김문학의 코너를 설치한 사이트에 한해서는 그것를 삭제하도록 유도하는것이 바람직한것 같다. 그리고 연변 문단 책임자들도 이 문제 해결헤 앞장서주길 바라며 “김문학현상”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되지 않도록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하길 제의한다. 2013.7     부록 김문학의>   일본 祥伝社(黄金文庫) 출판2006,12 목록 (이 목록은 연변대학 김관웅교수가 번역한것을 재차 수정한 것이다)   프롤로그 : 친일파 중국인으로서의 고발   제1장 중국에 있어서의 "憎日"의 심층심리 - 이상하기 그지없는 "반일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리유는 (1) 일본인이 모르고 있는 "日本鬼子" 일본인 "賣春"사건으로 보는 중국인들의 과잉반응 우호국을 "鬼"라고 부르는 奇怪千萬한 나라 馬立誠씨는 왜 《인민일보》를 쫗겨났는가 (2) 국책으로서의 "反日憎日" 인터넷에 올린 치열한 반일 선동문 반일 프로파간다는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눈을 감고 싶은 중국 역사교과서의 왜곡 (3)모택동, 등소평 시대의 대일관계에서 배우라 일본에서 강도질한 중국인 류학생의 변명 공산당군대와 일본군대가 손을 잡았다는 새로운 사실 모택동은 일본에 "감사하다"고 말한 적 있다. 중국이여, 역사를 거울로 삼으라 (4) 궁극의 역사카드 "남경대학살" 南京攻防戰의 책임은 중국에 있다 왜 中國軍隊가 中國兵士들을 총격했을까 "30만명"설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사상자수가 뻥튀기 된 정말 중국다운 이유 자국내의 대량학살에는 입을 다무는 중국정부   제2장 일본은 사죄해서는 안 된다 - 自虐史觀, 당당하지 못한 외교에 대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 (1) "사죄"는 죄악이다 일본인에게서 잃어버린 당당한 자존심 중국은 "약자 같은 어린애"짓을 그만두라 인근 국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사죄하지 않는 중국 (2) "패전국 •日本"을 위한 변명 미국에 의해 척추가 부러져버린 일본인의 정신구조 "승자=정의"라는 데는 한계가 있다 戰後의 일본인들이 정말로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3) "日本의 전쟁에 긍지를 가지라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가져온 아시아에 대한 대공헌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비렬한 중국과 한국 (4) "야스구니(靖國)"라고 하는 일본문화 야수구니신사에 낙서를 한 대학생은 "반일영웅" 죽은 자를 채찍질하는 문화와 적과 제편을 같이 제사 지내는 문화 중국과 한국 이외의 외국에서도 참배하고 있는 사실   제3장 일본점령하의 중국의 진실 -일중전쟁 15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한 것은 어떤 쪽인가 (1) "滿洲國"의 위대한 유산 현대 중국이 완전히 부정하는 "滿洲國" 孫文이 획책했던 "滿洲賣却"계획 中華人民共和國은 滿洲國의 複寫-擴大版 (2) "滿洲國"은 "滿足國"이였다 新京의 도시계획으로부터 보는 일본의 의욕과 공헌 일본이 만주에 투입한 막대한 자본 西洋의 識者가 보아낸 滿洲國의 眞價 滿鐵시대의 기차는 지금보다 빨랐었다 (3) 日本占領區는 "樂園"이였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점령구" 러브레타를 출간하여 인세수입으로 살았던 노신 너무나도 대조적인 "해방구"의 실태 (4) "日本鬼子"의 진짜 모습 "三光政策"이란 것은 일본에는 없는 중국의 전통 興亞觀音에 기탁한 마쯔이이와네(松井石根) 大將의 념원 日華事變이후의 8년은 1년의 전투와 7년의 경제건설   제4장 新中國의 씨를 뿌린 일본 -明治이후 오늘까지 日本이 中國의 스승이였던 사실 (1)孫文과 일본 그리고 일본인 일본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없었다 孫文과 중국혁명에 한생을 다 바친 미야자키도우덴(宮崎滔天) 孫文이 주창했던 日中협력과 아시아의 단결 (2) 일본어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현대중국어 일본어로부터 중국어에 수출된 대량의 단어들 중국문단은 일본류학생들이 만들었다 지금도 진행중에 있는 일본문화의 수입 (3) 실현되지 못한 "伊藤博文首相" 초청계획 "伊藤首相" 초청계획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故宮의 보물들을 지켜준 이들은 일본군대였다 "敎育勅語"의 정신은 중국에서 지금도 살아있다 (4) 남아서 新中國建設을 도왔던 日本人들 戰後의 中國內戰에 參戰했던 日本人들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본인 의사와 간호부들의 일하는 자세 中國空軍의 기반을 다져준 하야시야 이찌로우(林弥一郞)소좌 國共兩軍의 싸움은 "日本遺産"을 쟁탈하기 위한 전쟁   제5장 "日中友好"를 해체하라 - 强要와 迎合의 "友好"로부터 진정한 관계의 구축에로 나아가야 (1) "自虐"의 日本人과 "超愛國"의 中國人 일본의 교육 붕괴는 세계의 웃음거리 自國의 國旗를 존경하지 않는 나라는 세계로부터 輕蔑을 당한다 (2) 東京裁判과 文化大革命 文化大革命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였는가 이미 증명되고 있는 東京裁判의 不當性 洗腦政策의 呪術의 束縛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日本의 悲劇 (3) 중국은 일본을 절대로 추월하지 못한다 대두하는 "中國威脅論"과 "日本沈沒論" 중국에서의 自然破壞 실태의 이모저모 집단賣春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중국의 敵은 중국 內部에 있다 隣國로서의 日本이 진짜 무서운 점 (4) "日中友好"론은 왜 위험한가 언제나 뒤틀리는 일밖에 없는 허위적인 "友好"관계 일방적인 규탄과 일방적인 迎合으로 점철된 30년 民主主義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리해할 수 없는 것들 좋은 말만 하면서 영합하는 것은 “간사한 친구”이다 (대체 이상의 뜻) 출처:중국조선족문화통신 2013-7-28 8:42:00  
12    어머니의 사랑노트-조성일 댓글:  조회:1615  추천:4  2013-05-28
어머니의 사랑노트 조성일 생명을 건 자식사랑 나는 지금도 지난날 책에서 본 영국의 한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인 실화를 잊을수가 없다. 그 실화의 줄거리를 간추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865년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밤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라는 고장의 언덕길을 남편 없는 한 녀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걷고있었다.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눈보라속에서 아기를 가슴에 감싸안고 언덕을 넘던 녀인은 어두움과 눈보라에 그만 길을 잃게 되였다. 이 녀인은 길을 찾으려고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가슴에 품은 아기만은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만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이 녀인은 눈보라속에서 동사하고말았다. 눈보라가 그친 다음날 아침 그 길을 지나던 어떤 행인에 의해 이 녀인이 발견되였다. 그런데 이 녀인은 앉은채 웅크리고 벌거벗은 알몸으로 죽어있었다. 추위속에 안고있는 아기가 추워할가 걱정되여 자기의 옷을 하나씩 벗어 아기를 감싸주느라고 이 녀인은 그만 알몸이 되여 동사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녀인의 품에 안겨있던 아기는 살아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런던 교외에 있는 착한 구두수선공이 이 아기를 데려다가 키웠다. 이 아기는 자라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어찌하여 동사하게 되였는지를 알게 되였다. 이 소년의 꿈은 자나깨나 유명한 인물이 되여 어머님의 은혜를 갚는것이였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어머님 은혜를 갚기 위해 큰 인물로 키워달라고 날마다 기도했고 하나하나 목표를 착실히 세우고 피나게 공부를 계속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하위직 공무원을 거쳐 영국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하게 되고 1916년 어머니가 세상 뜬지 51년이 되던 해에 영국 수상(1916-1922년)이 된다. 그가 바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1863-1945년)이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어렸을적부터 가슴깊이 새겨들은후 “어머니는 나를 위해 죽었다고, 나 대신 죽었다고, 알몸으로 죽었다고.”하면서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한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보다싶이 이 이야기는 가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엮은 눈물겨운 감동적인 실화이다. 이 실화가 시사하다싶이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에도 오로지 자식걱정만 하며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자식을 살리며 자식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는것, 이것이 바로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어머니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며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절대적사랑이다. 자식에게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은 그야말로 거룩하고 위대하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으며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절대적가치를 찾아볼수 없다. 우리가 “어머니”란 단어를 부르기만해도 마음이 포근해지고 코끝이 찡해오고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리유는 바로 어머니의 이런 헌신적이고도 희생적인 사랑때문이리라. 우리 속담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수십년의 세월속에서 정말 많은것들이 변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세월의 모진 풍파속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것이 있는바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임신과 출산은 녀성의 건강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데 예로부터 어머니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녀를 낳아왔다. 또 출산후에도 오래도록 자녀의 양육과 성장을 위해 이루 말할수 없는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자식이 어엿한 성인이 되여도 어머니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일뿐이다. 지어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허옇게 늙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걱정을 놓지 않는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배신할수 있어도 어머니는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결코 자식을 버리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포옹한다. 차고넘치는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영원한 사랑이다. 자식의 앞길을 열어주는 사랑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이 자라서 룡이 되고 스타가 되고 훌륭한 사람으로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기보다 나은 미래를 자식에게 주려고 헌신적으로 노력하는데서 집약적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의 앞날을 열어주는 사랑이라고도 말할수 있을것 같다. 중국의 고사성어에는 맹모삼천(孟母三迁)이라는 말이 있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맹자의 앞날을 위한 교육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했다. 처음에는 교외에 살았는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어 맹자가 죽은 사람을 묻는것을 보고 흉내를 내며 놀이를 하는것이였다. 이를 본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시장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맹자가 물건을 사고 파는 장사군들의 흉내를 내는것이였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 역시 맹자의 공부에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세번째로 서당근처로 집을 옮겼다. 맹자는 매일같이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놀이를 하고 놀았다. 맹자 어머니는 이에 안심하고 그곳에 정주했다고 한다. 여기서 맹자모삼천이라는 말이 유래되였다고 한다. 맹자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과 앞날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죄다 감내했다. 나중에 맹자가 명유(名儒)로 된데는 그의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이 깃들어있는것이다. 나의 어머니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어머니(김혜숙)는 학식도 없고 대단한 가문의 출신도 아닌 평범한 시골녀성이였다. 어머니가 38세 되던 해(1948년)에 아버지(조기형)가 제3차 중국 국내혁명전쟁에서 전사하자(그때 아버지 년세는 41세, 나의 나이는 12세, 내아래에 두 친녀동생과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갈데 없는 사촌녀동생이 있었다.)어머니는 남편없이 홀로 올망졸망한 우리 네 어린것들을 거느리고 화룡현 서성촌에서 살아가야 했고 자식들의 교육을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는 가랭이가 째지는 가난과 삼재팔난(三灾八难)의 고통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희망과 자식에 대한 큰 포부를 안고 자식에 대한 교육에 관심을 쏟았다. 지금도 어머니의 몇가지 일은 내 가슴을 뜨겁게 울리고있다. 그중 두가지만 골라서 이야기하련다. 한가지는 1950년 내가 화룡현(지금은 화룡시)서성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의 일이다. 당시 화룡현 서성촌에는 서성중학교가 있었다. 그때의 서성중학교는 사립학교였기에 학비는 자기가 부담해야 했다. 서발막대 거칠것 없는 생활난에 시달리는 어머니로서는 이 학비를 감당하기에는 태부족이였다. 나중에 내가 커서 안 일이지만 그 당시 어머니는 나의 중학교 진학을 두고 근심걱정이 태산같았고 고민과 번뇌로 하여 며칠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럴 때 서성촌지도부에서는 한결같이 어머니를 보고 나의 아버지가 김일성부대산하에서 반일운동을 했기에 나를 조선 만경대학원으로 보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 국내혁명전쟁에서 희생한 아버지의 분묘나 유골도 찾지 못했는데 나를 이 땅을 떠나게 할수 없었다는것이였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나의 학업을 중단시키고 시골에 파묻히게 할수는 없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자식을 꼭 공부시켜야 하고 공부는 때를 놓치면 힘들게 되며 공부만이 자식의 앞날을 열어주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수 있다고 느낀 어머니는 동분서주하면서 화룡현내의 각 중학교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화룡중학이 국립중학으로서 경제난이 심한 가정의 학생들에 한해서는 조학금을 발급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를 넘길세라 조급한 마음으로 50여리 길을 걸어 화룡중학에 찾아가서 관계 선생님을 만나 우리 집 가정상황과 나의 인적사항을 이야기하자 그만한 조건이면 화룡중학에 전학하면 조학금을 받을수 있다는 희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어머니 가슴속에서는 기쁨이 불꽃처럼 확 피여났다.어머니는 기쁨과 감격을 안고 힘드는줄도 모르시고 도보로 귀가하여 서성소학교 지도부와 서성촌 당지부에 알렸다. 어머니의 피타는 노력과 그들의 추천을 받게 되여 나는 화룡중학에 진학하게 되였다. 나의 조그마한 가슴이 기쁨으로 터질듯했다. 이렇게 되여 나는 어린 나이에 난생처음으로 어머니곁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하게 되였다. 진학은 기쁜 일이였지만 어머니 슬하를 떠난다는것은 가슴속이 물러나는듯 아픈 일이였다. 어린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어머니 마음도 마찬가지 심정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의 앞날을 위해 아픔을 감내했고 나도 아픔을 딛고 배움의 길에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머니의 이런 노력이 없었더라면 나는 막무가내로 진학의 마음을 접고 울며 겨자 먹기로 호미자루를 잡았을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다른 한가지는 아버지의 친필편지에 관한 일이다. 나의 아버지는 광복후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하여 1948년 희생되기전까지 후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인편을 통해 여러차례 친필편지를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편지를 접할 때마다 자식들을 모아놓고 모두가 듣도록 어머니가 직접 소리내여 느릿느릿 읽거나(어머니는 해방후 야학에 다니면서 조선어를 배웠음. 소학교 저급학년 수준.) 나더러 대신 읽으라 했다. 편지내용은 대체로 어머니에 대한 문한, 자식에 대한 관심, 전방의 소식, 고생을 락으로 삼으라는것, 혁명이 완수되면 잘살게 된다는것, 승리는 멀지 않았다는것, 어머니더러 촌정부 녀성사업에 적극 참가하라는것…등으로 요약할수 있다. 내가 아버지의 편지내용을 이토록 정확하게 기억하는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내가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어느 하루 저녁 나를 불러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변죽을 울리다가 농속에 보관해두었던 아버지의 네통의 편지를 꺼내여 나에게 넘겨주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성일아, 너의 아버지는 해방전엔 일본놈들과 싸웠고 해방후엔 중국의 혁명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것을 바쳤다. 너는 아버지의 혁명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젠 네가 다 컸으니 이 편지를 네가 영원토록 보관하라. 아버지는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했다. 해방전에 아버지사진이 몇장 있었는데 일본놈들의 감시와 추적대문에 그 사진들을 불살라버렸다. 해방후 전쟁때에는 아버지사진 한장도 없다. 아버지의 유산이란 이 편지뿐이다. 네가 어려울 때마다 이 편지를 보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되거라.”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편지를 나에게 남겨준것은 옳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키워주기 위해, 나에게 생의 의미를 정리하고 옳바로 사는 지혜를 터득시키기 위해서였을것이다. 이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어머니의 현장교육이였다. 나는 어머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지금까지 아버지의 네통의 편지를 보관하고있다. 그중 한통의 편지 원문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철자, 띄여쓰기까지)옮기면 다음과 같다. “혜숙동무 오래동안 소식을몰라 궁금하던차에 그대에곂지를 접견하니 반가운 마암 이루 측양할수 없오이다 그동안에 몸무고히 잘 잇으며 성일이 여러남매도 충실하며 복녹(우리 집에서 자라고있던 사촌 녀동생-필자 주)이도 별고없으며 북대지 원길(나의 외삼촌-필자 주)이택내도 무고하며 번탄(?)생산대여러 동무덜도 평안하온지 항상축복하난바이외다 이 동무난 싸흠터에서 건강한신체로 투쟁하고잇으며 여러동무덜도 잘싸우고잇슴니다 후방에서 잘 지원하여주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혜숙동무난 업는살림에 고생이 얼마나만슴니까?고생으로 생각지마시요 혁명을 완성한후이면 지금고생이 광영스러운일임니다 멀지않아혁명?시면 반가히마지할것임니다 그리고 생활에 대하여 사회에후원이 업슴니까? 김창원동무가 나가니 모든것을 물어셔 나가기를 바람니다. 할말은만흐나 다음다시쓰갯기이만끗침 회답을 바람 조기형 " 우리 민족의 속담에 “부모 팔자가 반팔자”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의 뜻인즉 자식이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이미 자식의 인생 절반은 정해진것이나 다름이 없다는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재산을 얼마나 물려받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가풍이나 부모의 성품, 인생관, 지식, 자녀교육에 대한 자각과 열정 등이 어떠냐에 따라 그 자식의 앞날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는것을 시사해주고있다. 나의 어머니가 하늘같은 남편이 세상을 뜨고 홀로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역경속에서 무서운 생활력을 갖고 자식의 교육과 앞날을 위해 몰부은 정성은 태양처럼 뜨거웠다. 어머니의 눈물과 고생과 고통과 사랑, 교육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였고 동생들도 건강하게 성장하게 되였다. 나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은 그야말로 지대하고 위대했다. 이 땅을 살아온 우리의 어머니 모두는 바로 자식을 위한 마음과 교육에 있어서는 한가지이다. 누군가가 “어린아이의 운명은 그 어머니가 만든다”고 한 말은 그 얼마나 지당한 말인가! 영원히 갚을수 없는 사랑 세계의 훌륭했던 어머니들의 삶은 추적해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받는것보다는 베푸는것을 천명처럼 생각하며 살았고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식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 녀성들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희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기에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어버이의 은혜 특히 어머니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넓고 끝이 없어 도저히 갚을수 없다고 하여 “호천망극(昊天罔极)”이란 사자성어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는가! 어느 자식이나 할것없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어머니의 무한대의 사랑의 빚을 진 채무자이다. 무엇으로 갚을수도, 탕감받을수도, 또 갚아도갚아도 못다 갚을 어머니사랑의 빚을 진 자식들이다. 우리가 살아 생전에 있는 힘을 다하고 갖가지 방도를 대여 어머니를 잘 모신다고 해도 어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수가 없는것이다. 실로 자식은 죽었다 깨여나도 어머니의 사랑의 은혜에 죄다 보답할수 없는것이다. 하기에 항간에서는 “다만 부모에게 근심걱정만 끼치지 않아도 효도한것”이라 하지 않는가.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수 없는 어머니사랑이지만 이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려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도 은혜에 대한 보답의 모자람을 느기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 경우 조선시대의 학자요, 정치가요, 문학가인 서포 김만중이 생각난다. 김만중은 한국문학의 3대선각자중의 한분으로서 훈민정음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켰다. 김만중은 병자호란때 자결한 애국충신인 김익겸의 유복자로서 어려서부터 어머니 윤씨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채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기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김만중의 맏손자 김춘택이 쓴 《북헌집》에는 김만중의 효성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여있다. “내 일찌기 선생(김만중)이 어머니(윤씨) 모시는 광경을 본적이 있거늘, 어리광을 떠나는것이 흡사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달라는 어린애와 같았다. 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얼굴에 미소가 솟도록 하기 위해 선생은 별의별 우습강스러운짓을 다하셔서 당시 어릴 때인 나(김춘택)로서도 따라 하기 힘들었다.””선생은 유복자로 태여나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것을 평생의 아픈 일로 여겨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성을 바쳤는데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모습은 마치 병아리가 어미앞에서 삐악거리며 노는것과 같았다.”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인 리재(李縡)의 《삼관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인(만중의 어머니 윤씨)은 옛날 력사나 별난 사실을 적은 책을 몹시 즐겨 읽거나 귀를 기울이군 했는데 서포(김만중)는 많은 이야기책을 모아서 그것을 읽어드리며 어머니를 즐겁게 하였다. 서포는 젊어서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나라의 일이 아니고서는 한번도 어머니곁을 떠난 일이 없었으며 벼슬을 그만두면 이른 아침에 어머니께 문안인사 드리러 가서는 저녁이 되여 자리에 드셔야 돌아오군 했다.” 이처럼 애틋한 효성을 지닌 김만중이지만 숙종의 버림을 받아 남해 외딴섬으로 귀향을 가다나니 어머니의 림종을 지키지 못해 몹시 괴로와했단다. 그의 마음인들 오죽했겠는가. 효성에 각별한 신경을 쓴 김만중과 같은 위인들도 어머니사랑에 대한 채무자로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 빚은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다. 그중 한가지만 말하면 어머니 생일때마다 일가친척이 모여서 식사 한끼는 해드렸지만 어머니의 회갑잔치나 고희연을 치러드리지 못한것이 지금 와서 뼈 아프게 후회된다. 어머니는 1970년에 회갑년이였고 1980년이 칠순 고희년이였다. 1970년은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라 안해와 장모는 정치적박해에 시달렸고 생활형편이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세 자식 기르기에 가슴을 쥐여짜야 했으며 나는 돈화 마호에 있는 “5.7간부학교(干校)”에서 로동개조를 하고있을 때라 집으로 마음대로 올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니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하시고 자기의 회갑잔치를 생각도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너 아버지도 없는데 내 홀로 무슨 회갑잔치냐고 하시면서 회갑잔치를 치르는것을 단호히 거절하셨다. 1980년은 어머니가 중풍에 걸려 고생하시던 해이다. 내가 회갑잔치도 못했는데 고희연을 조촐하게나마 치러드리려고 어머니에게 말씀 올렸더니 거절하셨다. “네 마음은 고마우나 친술잔치상을 받으면 내 마음이 더 아프게 될터이니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네가 차린 잔치상을 받은것으로 하겠으니 걱정 말고 마음을 놓고 자식들이나 잘 키워라.” 그후에도 어머니께서는 여러번 회갑잔치나 고희연에 대한 말만 나오면 반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당부를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1986년에 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되여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어머니의 일생은 불우했다. 아버지께서 반일운동을 하고 투옥되고 해방후에는 해방전쟁에 투신하고 일찍 세상을 뜨시다나니 어머니는 즐거운 부부생활을 얼마 하지 못하셨다. 잔밥에 빠져 해볕을 볼 겨를이 없었고 반평생을 흙속에 묻혀사시다가 도시로 들어오셨지만 병환에 시달리시다가 행복도 얼마 누리지 못하시고 불행하게 저승으로 가셨다. 어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고통과 희생의 련속이였다. 옛날사람들이 말하기를 고감진래(苦尽甘来)라 고생끝에 락이 온다고 했는데 나의 어머니는 그런 행운을 가지지 못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른바 대학공부까지 했다는 나는 반포지효(反哺之孝)와 반포보은(反哺报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이 들어 늙어갈수록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한 뼈 아픈 후회와 죄책감이 가슴을 치군 한다. 우리 조상들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했은즉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인것 같다. 자식을 위해, 조씨가문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삶을 포기해야 했던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살아서도 다 갚지 못했고 죽어서도 영원히 다 갚을수 없는 채무자요 숙명적인 불효자이다. 불효자는 운다. 어머니… -연변인터넷방송
11    땅거미 지는 인생의 길목에 서서 댓글:  조회:1449  추천:5  2012-03-13
1 제행이 무상하고 인생은 초로(草露)와 같다. 우리 민족의 가사 “로처녀가”에서는 “백년을 다 살아야 삼만륙천일”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사람의 일생은 끝없는 시간에 비하면 어이없이 짧은것이다. 게다가 인생은 달리는 흰 말을 틈으로 보듯이(白駒過隙) 가속에 가속이 붙어 빨리 흘러간다. 나도 어느덧70대 중반에 들어섰고 80대를 향해 숨가쁜 등반을 하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니 세월 가는 속도가 흐르는 물 같고 흘러가는 구름같고  쏜 화살같음을 피부로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 가는 소리도 몰아치는 삭풍같이, 사라져가는 기적소리같이 귀가에 아련하게 울리고 가슴속을 아프게 파고든다.  흘러간 세월을 뒤돌아보니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고통도 보람도 후회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탄 세월이 어찌하여 그렇게도 빨리 흘러가 버렸는지 하는 생각에 깜작 놀라게 되며 인생의 무상과 허무함을 감수하게 된다. 나의 인생엔 땅거미가 지기시작했다. 독일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것은 잠시동안 머물다가 죽음으로 줄달음친다. 식물과 곤충은 여름이 지나면 죽고 동물과 인간은 몇년이 지나면 죽는다. 죽음은 지치지도 않고 거둬들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변하지 않고 항상 제자리에 있을것이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늙기 마련이요, 늙으면 종당에는 죽기 마련이다. 선인들이 하신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이 지척(咫尺)”이라는 말씀의 뜻인즉 높고 먼 저 세상이 곧 지척간에 있다함이니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있지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나의 목숨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짧은 목숨으로서 저승을 “문턱밑”에 두고 여생을 힘겹게 직조하고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음과 죽음은 인생의 숙명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로서 모든 사람은 늙어서 죽는다는 천리(天理)를 확실히 알고있으면서도 될수록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더 꼬집어말하면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는  “묘한 욕심과 기대”를 가지고있다. 또한 사람들은 일찍 죽기보다는 늙을때까지 오래 살기를 원한다. 이런 심리를 두고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문필가인 몽테뉴는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죽을 시점에 도달했다는것을 쉽게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류념해야 한다. 그리고 실로 마지막 시간이라고 확신하고 죽는 사람은 실제로 극히 드물다. 여기에 바로 희망의 속임수가 우리를 쉽게 현혹시킬수 있는 리유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욱 심한 병에 걸려서도 죽지 않았으며 나의 현재 상태는 그리 절망적이지 않으며 또 최악의 경우에는 분명히 하느님이 기적적으로 나를 살려줄것이라고 계속 믿는다’”. 모든 인간은 죽음에 대해 확실히 알고있으면서도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는   이런 “묘한 욕심과 기대” 즉 불로장생의 욕망은 옛날 사람이나 현대인이 공통으로 갖고있는 불로장생콤플렉스다. 기원전 221년 39세에 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영원한 생명을 꿈꾸며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장수인이 되기위해 방방곡곡의 명산으로 신하들을 파견하여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하였다.사마천의 에 따르면 서불(일명 서복))이란 신하가 두 차례에 걸쳐 수천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와 장인들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찾아다녔다고 한다.그러나 그도 불로장생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결국 환갑도 못넘긴 5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그것도 외로운 신세로 객사하였다고 한다. 현대인들도 불로장생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젊은 시절에는 건강을 뽐내지만은, 나이가 들고 서서히 늙어가면서 병마에 시달리기까지 하면은 불로장생콤플렉스의 포로로 되는것이 보통이다. 나를 놓고말하면  좀더 오래살자고 건강에 좋다는 약은 될수록 죄다 사 먹으려 애를 쓰며 언론매체의 장수비결 소개와 약광고에 신경을 쓴다. 한때 나는 시내 거리를 걸어다니거나 뻐스를 타려고 뻐스역에서 기다릴때면 무료로 주는 약 관계 신문이나 자료라고 하면 주는족족 다 받아가지고 귀가하는데 집에 와서 보면 10여종이 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우리 민족의 속담 “땡감도 떨어지고 익은 감도 떨어진다”가 시사하다싶이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사람은 죽는데 있어서는 일반이다. 빠르고 더딘 차이가 있을뿐이다. 늙기 전에 일찍 죽거나 늙을때까지 오래 살다가 죽는 둘중의 하나이다. 대개는 일찍 죽기보다는 늙어서도 “젊께” 오래 살기를 바란다. 나이를 먹으니 지난날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젊음이 매우 부럽게 보인다. 젊은 사람을 보면 젊다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매료되게 한다. 늙으면 늙을수록 다시 한번 청춘을 되찾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며 따라서 자기의 늙음을 안타까웁게 생각한다. 내가 늙은것은 분명한데 누가 나를 보고  “왜 이렇게 늙었소”하면 반갑지 않고 “당신은 정말 젊어보이오…장수하겠소”하면 흡족해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 나이를 물으면 대답하기 꺼려하며 늙어갈수록 내 자신의 나이에 한살 더 보태는 일에 인색해지곤한다. 나의 이런 심리는 앞에서 말한 “묘한 욕심과 기대”의 완곡적인 표현, 다시 말하면 불로장생콤플렉스의 표현이라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독일의 문호 괴테의 거작 에 의하면 작중인물인 로학자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그레첸이라는 순진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이 소녀의 련정을 짓밟고만다. 그레첸은 파우스트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집을 파멸시키고 아이도 죽이고 자신도 감옥에서 죽는다. 인간은 젊음을 유지하려고 신경을 쓰지만 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른바 과분한 젊음의 욕망과 젊음에 대한 무리한 추구는 바람직하지 않다는것을 시사해주는것 같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로년은 분명히 찾아오는데 젊음에 집착한 나머지 무리하게 젊음을 유지하려고 하면 몸과 마음에 부담을 주게 되며 그렇게 되면 심적인 피로가 심해져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망칠수도 있다는 이야기로도 되겠다. 불로장생은 인간의 오랜 꿈이요, 자연의 섭리요, 인간 본연의 심성이니 누굴 탓할수 있으랴. 불로장생하여 손자 환갑잔치 얻어먹을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불로장생은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과 어리석음을 말해주는 상징이기도 한것것같다.인간은 태여나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주름잡으면서 언젠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누가 말했듯이 이것 역시 자연의 섭리라면 거스를수 없는 대세일지도 모른다. 해는 중천에 뜨면 기울고 달은 차면 이지러지듯이 인생도 어차피 세상에 태여나 한번 살다 가는 과정이기에 이왕이면 늙어도 더 건강하게, 더 젊게 될수록 오래 사는것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2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무려 1백8개의 번뇌를 가지고 살수밖에 없는 고통의 존재라고 말한다. 황혼기에도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며 로익장(老益壯)을 과시했던 시인 괴테는 “로인의 삶은 상실의 삶”이라고 하면서 상실의 내용을 건강, 돈, 일, 친구, 꿈 등 다섯가지에 두었다. 말하자면 사람은 늙어가면서 상술한 다섯가지를 상실하며 살아간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현재도 많이 류행되고있는바 생로병사(生老病死) 또는 “로년사고(老年四苦)”가 그 사례라 하겠다. “로년사고”란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 병고(病苦)를 이르는 말이다. 상술한 말들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들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특히 필자와 같은 늙은이들이 더욱더 공감하게 되는 말들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나의 현재상황을 짚어보면 퇴직후에도 월급이 있기에 빈고는 없고 또한 한 사회민간단체에 투신하고있기에 지금까지 무위고는 체험하지 못했다. 지금 문제시되고있는것은 병고와 고독고라고 말할수 있다. 늙었다는것은 그 육신이 닳았다는 뜻이다. 수십년간 사용해 왔기에 신체부위의 여기저기서 고장이 나서 작동이 잘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로인들이 가지고있는 로인병이 나의 육신에 하나하나 엄습하고있다는 말이 되겠다.. 60대까지만해도 “60청춘 닐리리”라고하면서 자기의 건강을 자랑하였지만 70대에 들어서니 완전히 딴 판이다. 기억력도 쇠퇴하고 로안(老眼)도 찾아들고  치아도 말이 아니고 하반신도 약해지고있다. 해마다 당뇨를 비롯한 여러가지 수치도 정상치보다 올라가는것을 목격할수 있다. 몸이 불편하니 금연도 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백주와 맥주도 집에서는 한잔도 마시지 않는다. 사회상의 이런저런 파티에서는 다만 그 자리의 분위기에 호응하려  맥주만 겨우 한두잔하는 신세가 되였다.  늙음도 서러운데 병고까지 겹치니 그 신심의 고통은 이루 말할수 없다. 로인으로 여생을 엮어감에 있어 또 다른 고통은 소외와 고립으로 특징되는 고독이다. 이는 대부분의 보통사람 특히 로인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정신적고통이다. 하지만 청년기나 로년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 이를테면 작가나 예술가나 과학가들은 남들과 격리된 실존적고독의 순간에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면서 그 어떤 깨달음의 지혜와 슬기의 자락을 붓잡는가 하면 성숙한 성찰과 관조, 고민을 통해 창조력을 높이기도 한다. 이 경우의 고독은 높은 단계의 고독이며 “나” 혼자만의 자랑스러운 고독이다. 이런 고독은 재생과 회복 그리고 창조의 원천을 의미하는 성스러운 고독이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음미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실존의 시간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홀로 있고자하는 욕구는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는 건강한 삶의 능력”이라고 하였다.고대 그리스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없는 자,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최대의 적이여서 고독을 두려워하지만 초인에게는 자기 자신이 최선의 벗이므로 칩거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나도 피가 끓어넘치던 청년시절에는 고독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조용한 환경속에서 홀로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펼쳐 한없이 날수 있는 고독의 경지를 그리워 했었다. 70십고개에 올라설때만 해도 이런 고독속에서 창작을 진행하면서 변변치 않은 글이나마 썼었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이런 상황은 이젠 옛말이 되여가는것 같다. 나는 “초인”도 아니요 그 무슨 특출한 “능력자”도 아니다. 한 보통문인으로서 나의 경우 60대 말 더우기 70대에 들어서면서 저도 모르게 건강이 나빠지고 기력이 쇠진하며 생명력이 감퇴되는 현상을 절감함에 따라 나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고독이 아니라 병적인 고독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학창시절의 동창들과 사회상의 친구들이 하나, 둘 먼저 떠나는것을 보게 되고 나이들면서 사회의 나들이와 교제가 어려움을 겪게 됨에 따라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의 활동도 점차 쇠퇴의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이 루적되여 나의 정신세계에 소외와 고독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소외와 고독감은 그 반세기동안 함께 살아오던 사랑하는 안해의 병사(病死)로 하여 생각보다 더 심각해졌고 나로 하여금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모진 상처를 입게 하였다. 그가 돌아오지 않을 먼길을 떠난지도 1주기를 넘겼다. 그가 떠난 빈 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이 빈 자리는 온 집안을 고독으로 꽉 차게 하였다. 생전에 나의 안해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옆에 누어있는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안해가 한 순간에 나를 리별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 때 내 가슴은 무너지는듯 하였다. 사랑하는 님이 없는 지금의 나의 집은 행복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고독으로 욱실거리는 “무명”의 좁은 울타리요 창살없는 “감옥”이다. 우울하고 말 한마디 없는 고독은 나로 하여금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괴로움과 무서운 불안속에서 몸서리치게 하고있다. 나의 마음의 심처에 기여든 이 차디찬 고독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공포로 변하였다. 고독은 이제는 더 이상 로맨스도 환상도 아니다. 나의 앞에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고독하게 이 세상에 태여나 어려운 세월을 숨가쁘게 경유하여온 지금의 나의 인생은 고독속에 저물어가는 인생이다.  누가 말한바와 같이 “인간은 그 누구라도 마지막에 ‘혼자’다. 오는 길이 ‘혼자’였듯이 가는 길도 ‘혼자’이다”. 늙고 병든 몸에는 눈 먼 새도 아니온다. 지금의 나는 아내를 잃어버린 “홀아비”며 “짝 잃은 기러기”나 다름없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의 나는 형체(形體)와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기고있는(形影相弔) 신세이며 형체와 그림자가 짝이 된(形影單雙) 처지에 놓여있다. 인생은 무력감에 빠지고 쓸쓸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독이 뭔지를 뻐아프게 체감한다. 무정한 세월에 실려 왕성했던 청춘은 흘러가고 김빠진 늙은이로 산다는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되였다. 이런 역경속에서 병고나 고독고의 포로로 되여 무력하게 죽어가는가 아니면 각고의 노력과 견강한 의지로 병고와 고독 다시말하면 늙음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문제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하여 곱게 늙다가 삶을 마무리하는가 하는 엄숙한 과제가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있다.   3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조선시대의 실학자이고 사상가이며 실학파 시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로년기에 그가 쓴 시에는 이라는 시가 있다.    “어둑어둑 강가마을이 저무는데/성긴 울타리엔 개짖는 소리 걸렸네/차가운 물결에 별빛은 고르지 못하나/먼 산의 눈빛은 되려 밝아라/끼니 잇는 일에야 좋은 계책 없건만/독서 즐김에야 등장불이 있다네/깊은 근심에 마음 졸임 그치지 않으니/어떻게 해야 일평생을 제대로 마칠까”.     이 시에서 다산 정약용은 늙어가는 처지에 욕심이나 채우고 끝내자는 일반 로인들과는 달리 깊은 근심에 잠기면서 어떻게 해야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가치있고 유용하게 보낼것인가를 걱정하는 그의 높은 뜻을 표출하였다. 육체적인 쇠퇴와 질병, 고독과 고립, 무력감과 허무감 등 일반적인 로년의 실존적인 문제점을 다산 정약용도 결코 피해 갈수는 없었다. 지어는 자신이 평생동안 이룩한 방대한 학문적성과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로년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 외면하거나 분식하거나 거짓위안을 도모하는 일 없이 그대로 직시하고 남다른 의력으로 자기의 신심(身心)에 스며든 병마들을 이겨가면서 만절(晩節)을 멋지게 지켜냈다. 18년의 귀양살이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 또 18년을 살면서 학문을 마무리하고 많은 학자들과 학술연구에 대한 줄기찬 토론을 전개했던 그의 로년기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세계사를 펼쳐보면 로년기에 업적을 남긴 위인들이 수두룩함을 발견할수 있다. 어느 지성인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 력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대-70대에 의하여 성취되였고” “23%는 70-80세 로인에 의하여 그리고 6%는 80대에 의하여 성취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결국 력사적업적의 64%가 60세 이상의 로인들에 기대어 창출되였다는 말이 되겠다. 이 통계가 불완전 통계라하더라도 세계의 위인들이 로년기에 많은 업적을 창조하였다는 이 기본 사실만은 틀림이 없는것같다. 17세기 동일의 세계적인 음악가인 요한 세바스챤 바하는 75세까지 살면서 명곡들을 작곡하였으며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는 82세까지 삶을 영위하면서 인생의 후반기에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으며 19세기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괴테는 76세의 고령에 를 쓰기시작하여 82세에 완성하였다. 20세기 불란서 최대의 화가인 파불로 피카소는 92세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펴냈다.    로년기에 원숙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 위인들을 이야기할 때 우리 조선족 문학거장 김학철을 잊을수 없다. 일제의 죄행으로 인해 왼쪽다리를 절단하게 된 척각작가(隻脚作家) 김학철은 초인간적인 완강한 의지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경유하면서 치열한 붓의 싸움을 벌렸으며 특히 로년기에 진입하여  그의 창작은 고봉에 이르렀고 그의 삶은 더욱 원숙해졌고 더욱 아름다워졌다. 65세에 정치적생명과 작가의 창작자유를 다시 찾은 김학철은 여생이 길지 않음을 느낀 나머지 자기 집 출입문에 “한인막고문”(閑人莫敲門)이라는 패찰을 붙혀놓고 두문불출 서재에 들어박혀 불철주야로 전력질주하면서 놀라운 문학성과를 떠올렸다. 그리하여 그는 장편소설 (상, 하 1986), 장편소설 (1996)을 비롯하여 수많은 소설, 수필, 잡문, 회상기 등을 후세에 남겨놓았다.    김학철은 수필 에서 오래 사는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래 사는것을 값어치가 있는 일을 많이 하기 위한 수단임을 시사해준다. 제한된 여생에 많은 일을 하자면 건강한 육체가 필수적임을 자각한 그는 척각의 몸이면서도 10년 옥살이때도 그러했지만 출옥한 후에도 자체로 움직일수 있는 그날까지 매일 아침 4시면 연길공원 소돈대(小敦臺)꼭대기에 오르거나 어두운 부르하통하 강뚝에 나가 가로수를 잡고 쌍지팽이를 던지고 아침단련을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로익장(老益壯)을 견지할수 있었고 자기의 로년기를 아름답게 가꿀수 있었다.    김학철의 생을 마감하는 과정마저도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상상할수 없는 한부의 숭고한 드라마였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인지하시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하나하나를 계획적으로 준비하였다. 그는 타계하기 20일전에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려고 작심한 나머지 친필로 유서를 작성하였다.   남기는 말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김학철   병원 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김학철은 이렇게 생의 마지막 20여일을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곡기(谷氣)를 끊고 태연하게 조용히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타계하기 15일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不義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우리 문인들은 그의 유언대로 화장후 일부 골회를 두만강물에 뿌려주고 일부 골회를 잘 포장하여 우편박스에 실어 두만강물에 띄워서 그의 고향 원산으로 향하도록 하되 그 골회함에는 “홍성길(김학철 본명) 이제 고향에 돌아갑니다”란 글을 첨부했다.    이 경우 중국 도가의 시조인 장자(莊子)의 말씀이 생각난다. 장자는 죽음에 림박해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려고 의논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천지로 관(棺)을 삼고 일월(日月)로 련벼(連壁)을, 성신(星辰)으로 구슬을 삼으며 만물이 조상객이니 모든것이 다 갖춰졌다. 나를 그냥 돌판에 버려라. 나를 묻는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을 빼앗아 땅속의 벌레와 개미에게 주는것이 공평하지 않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학철은 이런 리치를 일찍 스스로 터득하였는지 추도식도 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골회도 남다르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나는 김학철의 이런 처사를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회의 부담을 덜고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신경을 쓰며 의연했던 모습에 감동을 금할수 없다. 실로 위인들은 단순히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고 유한한 인생을 탓만하지 않고 여생을 아름답게 직조하였고 어느 지성인이 말했듯이 “죽음을 인간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通過儀禮)”로 대하면서 태연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우리의 귀감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죽는 그날까지 적극적인 삶을 살다가 조용하게 저승으로 간 위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나의 몸과 마음이 움츠러진다. 70대에 들어서서 생각밖으로 몸에 이상이 생기고 아내가 하늘나라로 간후 고독에 울면서 무기력과 비관의 늪에 빠져들어가던 한때의 내가 너무나도 부끄럽다. 나의 여생을 위인들처럼 아름답게는 하지 못하더라도 추하게는 만들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70대의 늙음을 먹고사는 나로서 앞날은 많지 않다.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앞날 다시말하면 래일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래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나에게는 오늘이 소중하다. 앞날이 많지 않은 나같은 로인에게는 오늘이 더더욱 중요하다. 쏜 살같이 흘러가는 세월앞에서  인생길에 땅거미가 찾아드는 길목에서 병고와 고독에 짓눌려 인생의 무상과 허무의 “타령”이나 부르면서 여생을 소극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역경을 타개하면서 이제 남은 한 순간을 지난날의 연장선에서 적극적인 삶으로 충만시키려고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그 어떤 변화에도 연연하지 않고 초심으로 일관하게 늙은 육체를 끌면서 갈길을 끝까지 가려고 작심해 본다.저항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깨끗하게 살았다. 내 처지에서 그런 격고(格高)의 경지에 이른다는것은 “그물로 바람잡기”, “태산을 안고 북해 건너기”와 같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부끄럼이 적도록 살고싶은것이 나의 바람이요 소망이다. “래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17세기 유럽의 철학가 바뤼흐 스피노자의 명언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 2011.7
10    추천사 (2010 8.30~9.6) 댓글:  조회:817  추천:32  2010-08-29
추 천 사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를 기리기 위한 문학제가 연변에서 곧 열린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기획하고 추진하고있는 문학계의 또 하나의 중요한 행사이다. 정기적으로 늘 이어지고있는 추진회의 문학행사들은 그 지탑을 잡고있는 조성일회장의 로고와 갈라놓을수 없다.   시대의 추이와 변화에 민감한 지성인의 자세로 로익장의 정열을 과시하며 만추를 불태우고있는 조성일회장, 금주의 문인으로 추천한다.   문학닷컴 편집부  
9    [뉴스]《윤동주문학제》10월28일 연길서 열린다 댓글:  조회:770  추천:31  2010-08-27
 제1회 《윤동주문학제》 10월 28일 연길서 열린다 8월 26일 오전, 연변주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에서 제1회 《윤동주문학제》를 개최할데 관한 소식공개회가 있었다. 윤동주(1917.12~1945.2)는 연변이 낳은 저명한 민족시인이며 저항시인으로 중국의 조선족뿐만 아니라 조선과 한국은 물론 일본, 미국 등지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시인이다. 윤동주 《서시》현판식 (좌 허응복, 우 조성일) 이번 소식공개회에서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 회장이 2010년 10월 28일~29일 이틀동안 열리게 되는 윤동주문학제의 일정과 내용에 대해 설명하였고 허응복 부회장이 추진회 산하에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윤사모)을 설립하기로 한 결정 및, 그  취지와 구체활동방안에 대해 설명하였다. 연변대학 김관웅 교수는 윤동주 이름으로 명명된 《윤동주문학제》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진행되여 왔지만 시인의 고향인 연변에서 해마다 열리는 문학제가 개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면서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주최하는 《윤동주문학제》가 연변의 조선족기업인 연변청년국제여행사 대교영업부의 후원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고 말하였다. 이번 공개회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회장단과 부분적 회원들 그리고 연변의 언론매체 기자 도합 20여명이 참가하였다. 소식공개회에 앞서 윤동주생가 주변에서 벌초하고 있는 참가자들. 참가자 일동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8    김학철문학연구의 새 지평을 연 비평서 댓글:  조회:1151  추천:34  2009-11-09
김학철문학연구의 새 지평을 연 비평서-김관웅, 김호웅의 《김학철문학과의 대화》를 평함  조성일   연변대학 교수들인 김관웅, 김호웅 두 형제의 공저로 된 문학비평서 《김학철문학과의 대화》(아래서 《대화》로 략칭함)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2009년 2월에 출간되였다. 이 비평서에는 19편의 론문과 평론 그리고 18편의 수필, 잡문이 수록되여있으며 비평서의 앞에는 연변대학 김병민교장의 추천사, 작자의 “자서(自序)”가 곁들여져있다. 필자는 최근에 이 비평서를 정독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 비평서는 필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정독하는  과정에 이 비평서가 김학철문학연구의 새 지평을 연 “불간지서(不刊之書)”라고 느껴져 변변치 못한 생각이라도 글로 옮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였다.  《대화》를 출간하게 된 근원적충동  격동의 20세기를 치열하게 사시다가 타계하신 김학철은 우리 민족이 낳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싸운 반일투사이며 그 어떤 정치적 폭압의 화택(火宅)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대의 불의에 과감하게 저항한 실천적인 현대지성이며 우리 민족의 문학발전사에 체험의 문학, 저항의 문학, 증언의 문학, 디아스포라문학을 떠올린 문학거장이다. 김학철문학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상징일뿐만 아니라 하나의 정신적좌표이기도 하며 또한 세계 우리 민족 디아스포라문학산맥중의 하나의 고봉이기도 하다. 연변대학의 교수들인 김관웅, 김호웅 두 형제는 어릴적부터 바로 김학철의 문학동네(연길)에서 태여나 자라면서 “먼 발치에서나마 쌍협장에 몸을 싣고 외다리로 걸어다니는 김학철의 모습을 보았었다”. 그러나 그때는 다만 김학철이 “가장 극악한 우파분자”라는 소문만 들었지 그와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본적도 그의 작품들을 읽어본적도 없었다. “문화대혁명”때도 이른바 “악독한 반동소설”때문에 “공판”을 받았다는 소문만 귀동냥으로 들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큰 형님(김봉웅)을 통해 그의 신상이나 경력을 들으면서 모름지기 “그 용감한 척각의 괴한”을 만나보고싶은 생각을 굴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속의 생각일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나중에“문화대혁명”이 마무리된후 김학철은 만기출옥을 하고 복권하게 되였고 김관웅, 김호웅 두 형제도 신진 소설가, 평론가로 문단에 등단하게 되자 두 형제는 김학철을 만나게 되고 김학철자택을 방문해 직접 그와 근거리 대화도 나눌수 있게 되였고 그의 작품을 열독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실로 “이때로부터 그의 문학, 즉 그 령혼과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된것이다.” 이런 와중에 김관웅, 김호웅은 저도 모르게 김학철의 문학세계에 심취되여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으면서 문학수업과 문학창작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고 김학철의 가장 열성스러운 독자와 문학팬이 되였고 그의 숭배자로 되였다. 이에 대하여 두 형제는 《대화》의 권두에 실린 “자서(自序)”- “거룩한 령혼과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있다. “우리 두 형제는 김학철의 생전이나 사후나 모두 시종여일 그의 숭배자이고 문학팬이다. 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이 없을것이다”. “우리 두 형제는 김학철의 정신과 그 정신을 담은 그의 문학은 우리 민족정신의 홰불 같은 존재이고 우리 민족문학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 같은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조리한 실존상황하에서 한평생 가장 사람답게 살아오면서 불의에 용감하게 저항을 해온 가장 인간다운 김학철의 거룩한 령혼과 만나고 또 수시로 대화를 나눌수 있다는 것을 이 삭막한 세상에서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 아닐수 없다”. 한 사람에게 령혼이 있듯이 한 민족에게도 령혼이 있어야 하며, 적진으로 돌진하는 군대에게 기치가 있어야 하듯이 난관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민족에게도 전진의 기치가 있어야 한다. 김학철은 중국조선족문학의 령혼이고 기치이며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의 령혼과 기치라고 할 수 있다. 김관웅, 김호웅 두 형제의《대화》는 중국조선족의 령혼과 기치를 확인하려는 이 근원적충동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런 충동이 있었기에 90년대 초반부터 김관웅, 김호웅은 평단의 앞장에 서서 김학철문학 관련 론문이나 평론, 수필, 잡문 등 창출에 심혈을 몰부었고 김호웅은 김해양과 공동으로 《대화》의 출간 전에 훌륭한 전기문학 《김학철평전》을 펴냈으며 하북성 호가장에 김학철문학비를 세우는 일에서도 앞장에 섰던것이다… 이번에 두 형제가 출간한 “대화”는 두 형제가 말하듯이 바로 상술한 근원적충동에 의한 “김학철과 만난 생명체험의 기록”이요, “령(灵)적인 대화”요, 김학철문학과의 지적인 대화라고 할수 있다. 이런 대화는 김학철 숭배자로서의 두 형제가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늘 시인처럼 강렬한 감정이입의 심리상태에 처했”기에 강렬한 감정활동이 개입되고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화》의 창의적인 시각과 사로(思路)  김학철문학비평발전사를 추적해 보면 그의 창작과 동보하여 선후로 담론식 촌평(寸評)시기(1946.4-1946.11), 비평 부재의 시기(1946.11-1950.12), 인상적비평 시기(1952.10-1957.6), 집중포격 및 탄압의 정치적비판 시기(1957.7-1980.12), 비평과 연구본연에로의 회기 및 본격적인 발전시기(1990년대-현재)를 경유하여왔다. 개혁개방후 김학철문학의 재활 및 거족적인 발전과 휘황한 성과에 고무된 국내외문학비평가들은 비평과 연구 본연에로 회기하여 80년대 말 특히 90년대 초부터 박충록,조성일, 최삼룡, 김동훈, 장정일,전국권, 전성호, 조일남, 리광일, 김경훈, 우상렬, 김성호 등을 비롯한 문학평론가들이 김학철문학에 대한 촌평, 인상적비평에서 탈피하여 리론적인 뒤받침이 있는 현장비평과 학문적인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으며 가시적인 성과를 떠올렸다. 하지만 김학철문학연구의 시각과 사로 및 방법론이 다양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김관웅, 김호웅 두 형제는 다년간 특히 이 몇 년동안에 김학철문학연구에서의 기성의 틀을 깨고 남다른 창의적시각과 사로에 기대어 독창적인 지론을 펴냄으로써 김학철문학연구를 새로운 차원에로 올라서게 하였다. 《대화》가 바로 이에 대한 웅변이라고 생각된다. 김관웅교수는 자기의 문학관을 두고 다음과 같이 피력한바가 있다. “우리의 교육이나 문학예술이 우리 민족문화를 보전하고 지키는 기능을 잃는 날이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가 일조에 봄눈마냥 녹아버릴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나는 오래전부터 민족적사실주의문학을 고창해왔다”. “김학철의 문학은 철두철미한 참여문학이며 그의 문학정신은 민족의 운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으로 특징지어 진다”.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김호웅의 문학관도 김관웅교수의 문학관과 대동소이하다고 생각된다. 두 형제는 이런 문학관의 조명아래 창의적인 시각과 사로를 무르익히고 종합적인 방법론을 채용하여 김학철문학을 새롭게 다루었다. 두 형제의 창의적인 시각과 사로는 이 비평서의 압권(壓卷)으로 되고있는 김학철문학에 대한 작품론적접근, 비교문학적접근, 작가론적접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있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M.H.에브램스는 《거울과 등불-랑만주의문락리론 및 비평전통》이라는 저서에서 “문학의 네가지 요소”, 혹은 “문학의 네가지 좌표”라는 유명한 견해를 제출했는데, 그는 문학은 일종 활동으로서 언제나 작품, 작가, 세계, 독자 등 이 네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인정했으며 문학창작 특히 문학연구나 문학비평은 모두 이 네가지 요소를 떠나지 못한다고 인정했다. M.H.에브램스의 이 “문학의 네가지 요소” 혹은 “문학의 네가지 좌표”를  다음과 같은 도표로 보여준바 있다.   세계 ↓↑ 작품 ↙↗  ↘↖ 작가   독자   김관웅, 김호웅의 《대화》는 바로  에브램스가 지적한 문학연구와 비평의 네가지 좌표에 근거하여 자기의 연구대상을 선정하고 평론집의 구성도 바로 이 좌표에 근거하여 설계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역시 이런 사로(思路)에 좇아 김학철문학을 단일한 각도가 아니라 다각도에서, 단일한 방법이 아니라 여러가지 방법론을 동원하여 립체적으로 조명하게 된 것이라고 믿어진다. 중국조선족평단의 학원파 비평가로서의 김관웅과 김호웅의 김학철연구는 바로 이처럼 체계적인 문학리론과 방법의 지도아래 진행된 아주 리성적인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또한 일반적인 인상비평과는 다른 이들 두 형제의 비평의 특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중의 “작품론적접근”은 주로 작품 본체에 대한 연구에 주력한 론문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중 대표적인 론문으로는 김관웅의 “《격정시대》 ‘혁명성장소설’의 성격”, “쏘공20차대회이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콘텍스트속에서 본 김학철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 김호웅의 “우리 문학의 산맥-김학철” 등을 들수 있다. 지난날의 김학철 《격정시대》에 대한 연구를 추적해보면 평론가들이 여러모로 다루었지만 “혁명성장소설”의 각도에서 《격정시대》를 체계적으로 다룬 론문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의 김명인, 신경림, 연변의 장정일은 자기의 글을 통해 김학철의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혁명성장소설”임을 지적했거나 또는 《격정시대》가 갖고있는 “혁명성장소설”의 속성에 대해 단편적으로 론의를 했지만 그 이상의 상세하고 구체적인 론의는 전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김관웅교수는 자기의 론문을 빌어 신력사주의적인 연구시각과 방법으로 《격정시대》가 갖고있는 “혁명성장소설”의 성격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분석과 서술을 가했다. 이 론문에서는 주로 주인공 서선장의 성장과정을 주축으로 하여 《격정시대》의 “혁명성장소설”의 성격을 파헤쳤는바 유년시절 서선장이 고향 원산의 주변환경과 그로부터 받은 영향, 소년시절 서선장의 서울에서의 정신적성장, 청년시절 서선장의 중국 상해, 남경에서의 정신적성장, 중앙륙군군관학교 졸업후 국민당군대에서의 서선장의 정신적성장, 조선의용대에서의 서선장의 정신적성장, 항일의 봉화가 타오른 태항산에서의 서선장의 정신적성장 등에 대한 분석과 서술을 통하여 《격정시대》가 전형적인 “혁명성장소설”임을 증명하였으며 혁명성장소설로서의 《격정시대》가 이룩한 사상, 예술적성취는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아직까지는 전무할뿐만아니라 전반 조선반도의 문학사에서도 전무하다고 평가하였다. 김관웅교수의 “쏘공 20차대회이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콘텍스트소에서 본 김학철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는 문학작품과 세계 사이의 상호 력동적인 관계에 주목한 무게가 있는 학술론문이다. 김관웅교수는 이 론문의 “들어가는 말”에서 《20세기의 신화》에 대한 기존연구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있다. “쏘공20차대회이후 국제공산주의운동이라는 콘텍스트를 떠나서는 김학철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의 주제와 사상을 깊이있게 리해할수 없다. 그리고 김학철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의 주제의 깊이와 사상의 높이는 중국조선족문학의 범위와 수준을 훨씬 초월했다. 그러나 우리 평단에서의 《20세기의 신화》연구는 아직은 중국 국내 정치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작품세계를 세계문학이라는 이 대배경속에 놓고 연구하려는 시도가 별로 없는 상황이다”.(1) 김관웅교수는 바로 이런 폐단을 감안하고 《20세기의 신화》연구에서의 새로운 돌파를 시도하였는바 이 론문을 통해 쏘공20차대회이후 국제공산주의운동이라는 콘텍스트와 세계문학이라는 대배경속에서 대담한 사유와 풍부한 사료를 동원하여 《20세기의 신화》의 높은 문학적가치를  천명하였고 《20세기의 신화》를 세계문학권으로 격상시켰다. 다시말하면 《20세기의 신화》등은 전 사회주의문학권에서의 “집중캠프문학”이나 “정견이 부동한 작가들의 문학(不同政見者文學)”의 계보에 올려놓았다.따라서 이 론문은 전 사회주의권에서의 “부동정견자문학”계보의 수립을 위해 초석을 다지는데 일조하였고 전 사회주의문학권문학에 대한 총체문학연구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생각된다. 실로 이 론문은 김학철문학연구분야에서의 “기려화타(奇麗花朶)”라고 할수 있다. 김호웅교수의 “우리 문학의 산맥 - 김학철”도 김학철문학에 대한 작품론적접근의 수작이다. 이 론문은 김학철의 작품에 반영된 그의 경력과 체험, 그의 창작의 길, 그의 정치미학적관점을 통하여 김학철과 그의 문학의 총체상을 체계적으로 그려내고 김학철의 인생과 문학을 문학사적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김호웅교수는 조선족비평계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김학철을 “조선, 중국, 일본을 무대로 싸웠던 ‘동아시아 일체형’의 혁명투사”이며 “그의 문학을 체험과 증언의 문학으로 규정”하였으며 “조선의용군 용사들을 위해 예술적기념비를 세우고 우리 문학의 한 공백을 메웠다”고 평가하였다.. 두 형제의 《대화》에서 김학철문학에 대한 비교문학적접근에 바쳐진 론문들은 주요한 자리를 점하고있다. 김관웅교수의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와 중국, 외국 문학예술 사이의 ‘상호텟스트성’연구”, “로신과 김학철의 잡문 비교연구”, “솔제니친과 김학철문학 비교연구시론”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김관웅교수는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와 중국, 외국 문학예술사이의 ‘상호텍스트성’연구”라는 론문에서 우리 평단에서 처음으로 비교문학의 시각과 방법론에 기대어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와 중국, 외국 문학예술사이의 상호텍스트성 연구를 진행하여 높은 학술적성과를 달성하였다. 이 론문은 그 성과로 보아 “쏘공 20차대회이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콘텍스트속에서 본 김학철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쌍벽을 이루고있다. 김관웅교수는 이 론문에서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와 로씨야, 쏘련문학 및 전반 구미문학 사이의 “상호텍스트성”,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와 중국문학사이의 “상호텍스트성”,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와 외국예술사이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과학적인 론증과 치밀한 분석을 통하여 《20세기의 신화》라는 이 문학테스트가 중국과 외국문학예술의 수많은 문맥들과 이어지는 모습을 설득력있게 묘파하면서 다음과 같은 창의적인 지론을 펴냈다.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는 다른 기호체계로서의 외국문학예술과 교섭하는 지점에서 량자는 ‘대화’를 벌였다. 창조적인 텍스트는 이러한 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텍스트이다.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가 바로 이런 창조적인 텍스트이다. 인류가 창조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문학예술의 맥락속에서, 또 인류가 창조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문학예술과의 충분한 대화속에서 김학철은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해냈던것이다.”(2) “김학철은 《20세기의 신화》에서 외국문학에서의 사회비판적, 사회부정적성향을 띤 텍스트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하고 상대방의 담론에 대응하여 자기의 담론을 조절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의 담론도 조절하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김학철은 자기의 텍스트 《20세기의 신화》를 중국조선족문학 나아가서는 중국, 조선문학에서도 가장 랭철한 현실비판과 가장 견결한 현실부정과 비판의 성향을 지닌 사실주의창작원칙에 립각한 정치소설로 되게 하였던것이다”.(3) 이밖에도 김관웅교수는 “솔제니친과 김학철문학 비교연구 시론”을 통해 솔제니친과 김학철문학의 동질성과 차이성을 학구적으로 검토하면서 “김학철은 그 문학세계가 도달한 사상예술적경지로 보아서 중국조선족문학의 범위를 초월한 작가”이며 “국내적인 각도에서 볼 때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는 중국조선족문학에서는 물론이고 전반 중국의 지난 세기 문학사에서도 가장 일찍 나타난 ‘수용소문학’이고 가장 전형적인 잠재창작의 표본”이며 “국제적인 각도에서 볼 때도…이 두 작품은 전 사회주의권에서의 가장 중요한 ‘수용소문학’의 대표적작품으로 자리매김을 하고싶다”하였다. 또한 “로신의 정신과 김학철의 문학”이란 론문에서 영향연구와 수평연구의 복합적인 방법으로 김학철이 로신을 숭배하고 따라배우게 된 주관 및 객관적원인, 로신문학에 대한 김학철의 수용과정, 로신과 김학철의 성장과정과 성격의 류사성, 로신의 정신과 김학철문학의 관련 양상, 로신문학과 김학철문학사이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감명깊게 서술하였다. 비평서 《대화》에서 또 하나 이채를 돋히는 것은 김학철문학에 대한 작가론적접근에 바쳐진 론문들이다. 이런 론문들중에서도 김관웅의 “김학철의 옥중체험과 문학창작”, 김호웅의 “김학철의 옥중체험과 그의 중편소설 ‘밀고제도’”가 대표적이다. 이 두 론문은 한결같이 “감옥살이전문가(專業戶)”인 김학철의 고통스러운 옥중체험을 빌어 그의 문학연구에 다각도로 접근하였다. 김관웅교수는 “김학철의 옥중체험과 문학창작”을 통해 전기적인 연구방법과 문학심리학의 시점으로 김학철의 옥중체험과 문학창작의 함수관계를 감동적으로 펴냈다. 김관웅교수는 이 함수관계를 다음과 같이 개괄하고있다. “김학철은 일제와의 싸움에서 총상을 입고 포로로 잡혀서 일본감옥에 갇혀 4년동안이나 철창생활을 하면서 젊은 나이에 다리 한쪽을 절단한다. 해방후에도 척각의 사나이 김학철은 장기간 역경에 처한다. 1957년 우파감투를 쓴 뒤로부터 24년동안 김학철은 사회로부터 비인간적인 정치적박해를 당했다. 특히 감옥에 갇힌 10년동안 인간의 가장 귀중한 자유를 상실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박탈당한다. 바로 이처럼 많은 귀중한것들을 박탈당했기에 그 빼앗긴 귀중한 존재들에 대한 김학철의 갈망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옥살이는 김학철에게 말할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의지를 더욱 굳세게 단련하였다. 장구한 고통스러운 세월속에서 김학철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수많은 인민대중의 고통을 절실하게 체험하게 되였으며 나아가서는 모든 인간들의 고통을 깊이 리해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김학철은 자기만이 아니라 전반 인민대중들을 불행의 구렁텅이에로 몰아넣는 그릇된 로선과 사회의 각종 비리에 대해 뼈에 사무치게 증오하게 되였으며 짓밟히는 약자들에게 대해 무한히 동정하고 사랑하는 휴머니즘적인 정신을 갖게 된것이다. 그리고 김학철의 고통스러운 옥중체험은 인간의 내재적인 정감을 꿰뚫어보는 관찰력과 감수성을 강화하여 인간의 내심세계를 훌륭하게 그려낼수 있게 했던것이다. 바로 이런 고통스러운 옥중체험은 김학철의 창작적충동과 예술적상상력을 격발시켰고 아울러 다른 사람은 가지고싶어도 가질수 없는 수많은 량질의 창작적소재를 확보하게 하였던것이다. 일언이페지하면 김학철의 문학은 고통의 예술적승화라고 할수 있는것이다.”(4) 김호웅교수의 론문 “김학철의 옥중체험과 그의 중편소설 ‘밀고제도’는 김관웅교수의 론문과 궤를 같이 하면서 김학철의 옥중체험과 김학철문학의 함수관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생동하게 천명하였다. “밀고제도”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추적해보면 1990년에 출간된 《중국조선족문학사》(1990)에서도 론의되지 않았고 그후에도 별로 다루지 않았다. 다만 2006년 연변대학교 김경희의 석사학위청구론문 ‘김학철 옥중체험문학연구’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을뿐이다. 김호웅교수는 옥중체험의 문학창작에 대한 영향 그리고 김학철의 중편소설 ‘밀고제도’의 사상, 미학적성취 및 그 문학사적의의에 대해 조선족평단에서 처음으로 전면적이고도 체계적인 론의를 진행하였다. 그중 한대목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다. “김학철의 중편소설 《밀고제도》는 투철한 인도주의적립장에 서서 인권을 유린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을 왜곡, 타락시키는 밀고제도에 대해 신랄한 풍자와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고 인간 생명과 존엄의 승리를 노래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사회비판성과 인문정신을 드높은 수작이다. 중편소설 《밀고제도》는 《20세기의 신화》와 달리 김학철 자신의 옥중체험을 다룬 자서전적인 작품이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시기의 저질적인 밀고풍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옥중체험을 다룬 그의 모든 작품들을 집대성하고있다는데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에 발표한 리원길의 《한 당원의 자살》(1985)과 함께 우리 조선족문학에 있어서의 “반성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다루어져야 할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보여준 2차적알레고리에 의한 서사구조상징성, 다양한 내적시점에 의한 현념의 조성기법, 참신한 수사기법과 유머는 우리 소설문학의 수준을 한단계 제고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김관웅이 지적한바와 같이 김학철의 《밀고제도》는 그의 《20세기의 신화》, 《죄수의사》등과 함께 로씨야 솔제니친의 《이반 제비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수용소군도》, 빠스쩨르냐크의 《의사 지바고》, 헝가리의 알텔 케스트러의 《정오의 암흑》등 반쓰딸린주의, 반개인숭배의 소설들과 함께 전(前)사회주의문학권에서의 ‘집중캠프문학’이나 ‘정견이 부동한 작가들의 문학(不同政見者文學)’과 같은 계보를 이루고있다”.(5) 총적으로 비평서 《대화》는 그 내용으로 보나 시각과 방법론으로 보나 표술(표술)방식에서 보나 모두 김학철문학연구에서 중대한 창신(創新)이 있다. 이 비평서는 “우리 문단의 현주소와 김학철문학연구의 수준을 대변”(김병민)하는 비평서로서 그 학술적가치와 재료적가치가가  높다. 따라서 김학철문학의 장편대론인 《대화》는 향후 김학철문학연구가들의 필독서로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두 형제의 비평스타일과 김학철문학연구에 대한 기여  연변대학 교장 김병민박사는 《대화》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김관웅박사는 나와 동갑이요, 김호웅박사는 나보다 두살 아래다. 우리 모두 정판룡교수의 문하에서 학위를 받았고 수십년을 함께 일해온터라 서로 너무 잘 알고있다. 성미가 불같고 비정과 비리를 용서할줄 모르는 김관웅박사는 워낙 총기가 좋은데 많은 독서를 해서 박학다식한 학자로 정편이 나있고 김호웅박사는 형과 달리 너그럽고 수완이 좋은데 달변에 달필로 소문이 나있다. 두 박사형제는 서로 성미는 다르지만 대학교 캠퍼스에서는 명교수로 문단에서는 재기 넘치는 작가, 평론가로서 조선족교육과 문학발전에 특수한 기여를 하고있어 늘 우리 모두를 가슴뿌듯하게 하고있다.”(6) 수족지정(手足知情)을 갖고있는 김관웅, 김호웅 두 형제는 재기가 넘치는 문학비평가이다.김관웅, 김호웅교수는 성격은 다르지만 학술연구와 문학비평에 들어가서는 특히 김학철문학연구에서는 지동도합(珍道合)하고있으며 상득익창(相得益彰)하고있는 것이다. 비평서 《대화》가 알려주다싶이 두 형제의 론문과 평문은 탄탄한 리론적바탕우에 세워진 글들로서 비평시각과 사로가 창의적이며 문학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분석, 론증정상(論證精詳), 광정박인(廣征博引), 언지성리(言之成理)가 특징적이다. 그들의 글들은 학구적인 론문 등의 전형적인 학자풍의 비개성적인 문장과는 달리 평론가로서의 명쾌한 가치판단과 개성적 풍격를 반영하고있으며 그들 비평의 근저에는 민족적사실주의와 인간 옹호의 인도주의가 물결치고있다. 그들의 비평에는 상술한 공통분모가 있으면서도 김관웅교수의 비평은 많은 경우 새로운 문제의 제기와 날카로운 필봉으로 자기의 비평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김관웅의 비평스타일은 병필직서(秉筆直書), 체대사정(體大思精), 강건함이 특징적인데 반하여 김호웅의 비평은 문필이 류려(流麗)하면서도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모습을 돋보이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실로 그들은 자기의 비평어법과 연구스타일을 구비한 비평가, 연구가라고 생각된다. 김관웅교수는 본 세기에 들어서서 김학철문학에 대한 평론과 연구를 본격적으로 활발하게 진행한 비평가로서 《대화》가 시사하다싶이 김학철문학 연구에서의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각과 방법론, 특히 비교문학의 시각과 방법론으로 김학철문학연구의 시야와 공간을 확장시켰으며 김학철문학을 세계문학권에 인입시켜 그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으며 또한 그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김관웅교수는 로신과 김학철 문학의 비교연구에서도 개척적인 역할을 하였는바 김학철문학연구에서 비교문학연구의 장을 연 개척자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김호웅교수는 김학철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일찍 1989년 김학철문학연구의 객관적분위기가 여의치 못한 환경속에서도 《김학철론》을 펴내어 조선족평단에서 처음으로 김학철문학에 대한 체계적연구를 시도하였고 그 후에도 김학철의 삶과 문학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지속적으로 거듭하면서 수많은 훌륭한 론문과 평론을 펴냄으로써 김학철문학에 대한 독창적인 지론을 펴냈다. 그는 김학철문학 연구의 활성화와 본격적인 진전(進展)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가 한국에서 펴낸 전기문학인 《김학철평전》(2008)은 김학철의 일대기에 대한 처음으로 되는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평전으로서 지금 바야흐로 국내외문단의 각광을 받고있다.  두 형제에 대한 희망사항  끝으로 두 형제에 대한 희망사항이라면 김학철의 삶과 문학연구에서 김학철 말년의 대문인관계의 장단점을 실사구시적으로 계통적으로 해부하며 김학철문학의 예술적인 면에서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론평이 있었으면 하는 점이다. 필자는 두 형제가 이런 희망을 현실로 탈바꿈시킬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있음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두 형제의 건필을 빈다. 2009.4 주: (1)  김관웅 김호웅《김학철문학과의 대화》2009년 2월 연변인민출판사 출판  128페지. (2)  동상서 192페지. (3)  동상서 192-193페지. (4)  동상서 406-407페지. (5)  동상서 420-421페지 (6)  동상서 4페지. 출처:중국조선족문화통신
7    사이버문학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101  추천:38  2009-05-14
일전에 필자는 《문예보》에서 호북성작가협회가 사이버문학작가들을 협회에 가입시킬데 관한 “입회조건세칙”을 반포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시대를 앞서가는 호남성작가협회의 창의적인 새로운 입회약관에 경탄을 금할수가 없었다. 개혁 개방 30년 동안에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 기타민족의 문학과 더불어 상전벽해의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안아왔다. 오늘의 시점에서 조선족문학의 기본격인 판도를 보면 “삼분천하”(三分天下)로서 다시말하면 순문학, 통속문학, 사이버문학으로 나눌수 있다.  이중에서도 사이버문학의 탄생은 조선족문학발전에서의 미증유의 변화를 선고한 “신문명의 호각(  號 角)”이라고 생각된다.우리 조선족의 사이버문학은 10년을 치닫는 력사를 엮고있는바 그 발전은 그야말로 비약적이다. 과학기술시대에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문학-사이버문학은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메일, 메신저, 태그(영상), 전자책 등을 통해 거족적으로 발전하고있다. 이와중에서 훌륭한 작품들이 속출하고있으며  사이버작가들이 배양되고있으며 문학대화와 문학쟁론이 생기를 띠고있다. 이 사이버공간에서는 시각성이 중시되고 정보공유에 있어 공간을 초월한 동시성, 실시간성으로 하여 소통의 쌍방향성이 확보된다.쌍방향성의 글쓰기는 첨삭 게시판의 활용이나 교환 평가라는 방식으로 활용되고있다. 이 사이버공간에서는 오프라인에서 보여주는 작가와 독자의 엄격한 분리 , 작가와 독자의 수직적계렬화의 전통적인 작가-독자의 관계가 해체되고 작가와 독자의 합일(合一)이 이루어지고있다. 또한 이 공간에서는 자률화와 정보전달의 신속화가 보장되며 아마츄어작가나 기성작가들이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벌리고있으며 작품을 창출함에 있어 무겁고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급속히 가볍고 감각적이고 흥미있는 이야기로 변주하여 주기도 하는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사이버문학은 많은 경우 오프라인의 문학과는 달리 언어적장식이 없는 진솔성, 무장식성이 보편적이며 방대한 서사(敍事)와 력사어경(語境)을 탈중심화와 복합적인 작은 서사로 해체하여 개인의식표달에 류의하고 일반인 군체의 진실한 상황을 대변함에 신경을 쓰고있는것이 보편적이다.우리 조선족 사이버문학은 하나의 유령(幽靈)이 아니라 생기와 활력으로 충만된 신생아로 몸부림치고있다. 10년을 치닫는 평탄치 않은 굴곡적인 길을 경유하면서 사이버문학은 고방자상(孤芳自賞)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날따라 문학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있는가 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있는것이다.우리 조선족의 사이버문학은 신생의 문학으로서 이런저런 미흡한 문제점을 안고있지만 쟁의와 의문속에서 생존하고 몸부림치고있으며 지속적으로 자기의 독특한 생존방식을 모색하고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그 주되는 발전양상은 건강하며 그 미래는 양양하다. 사이버문학은 우리 조선족의 전반문학세계에서 문학의 전파수단과 전파개질(介質) 고리에서의 “량(量)”적증가가 아니라 우리 조선족문학의 생태공간과 정체기제상의 “질(質)적풍부화이다. 지금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함께 공존하는 사이버문학의 세상이 바야흐로 열리고있다. 오프라인의 기성문학이 존중되고 온라인의 새로운 문학-사이버문학이 접목하면서 현 문학의 새로운 체계를 정립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굴려본다. 오프라인 문학과 사이버문학이 함께 공존, 병행하는 호동(互動), 호보(互補)의 길속에서 우리 조선족문학의 앞날이 더욱 밝아지리라고 믿어진다. 오프라인 작가와 온라인 작가-사이버작가사이에는 넘을수 없는 장벽이 있는것이 아니다. 수많은 청년아마츄어작가들은 사이버세계에서 자기의 글향(文香)을 피우기 위해 글꽃을 심고 자기의 기량을 련마하고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연변작가협회에서는 사이버문학에 관심과 배려를 돌릴뿐만아니라 전도가 양양하고 이미 괄목할만한 문학성과를 이룩한 나젊은 사이버작가들을 호남성작가협회처럼 회원으로 발전시키며 이에 따른 제도적장치도 마련하였으면 하는 욕심을 가져본다. 그리고 조건을 마련하여 사이버문학중의 좋은 작품도 선정하여 우리 문학지에 올리고 사이버문학작품집 출판도 하고 사이버문학상 시상도 조직하고 사이버문학세미나도 개최하였으면 하는것이 필자의 희망사항이다.
6    선비정신과 문학비평 댓글:  조회:1297  추천:49  2009-02-08
고대 선비정신의 원류 - 사마천사마천의 ≪사기(史記) ≫중의 “유림렬전(儒林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 기원전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 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似而非)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少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私設)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지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알아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였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로부터 “곡학아세”(曲學阿世)란 사자성어가 생겨났다.주지하다싶이 위대한 사학가이며 문학가인 사마천은 살아 생전에 상상하기 어려운 수모를 당했다. 궁형(宮刑)을 당하여 남근(男根)을 잃어버리게 되였다. 그로 놓고 볼 때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그대로 굴욕이였으며 절망이였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그냥 살아남았을뿐만 아니라 력사에 영원히 살아남을 성스러운 길을 선택했다. 그는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곡학아세하지 않았고 초인간적의지로 불후의 사서 ≪사기(史記) ≫를 저술했다.사마천은 바로 이런 지조와 절개를 지녔기에 자기가 배운 학문을 옳바로 펴볼 생각은 않고 자기의 견해와 학설을 굽혀가면서 권세에 아부하고 세상의 비위에 맞추는 “곡학아세”의 태도나 행동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 한 전형적 사례로 공손홍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불의에 항거한 사마천의 이런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은 현시대의 우리 문인과 학자들에게 커다란 계시를 주고있다. 사마천의 글쓰기의 원칙을 후세의 사람들은 “악한 것을 숨기지 않고 거짓으로 아름다움을 꾸며내지 않는, 붓을 잡고 진실하게 기록하는(不隱惡, 不虛美, 秉筆直書)” 실록정신(實錄精神)이라고 개괄하고 있다. 이런 실록정신은 중국 고전문학의 가장 오랜 사실주의정신의 원류 중의 하나로 되였으며 아울러 동양 선비정신의 원류로 되였는바 이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가장 소중한 유산중의 하나이다. “당대의 마지막 큰 선비” -  량수명량수명(梁漱溟, 1893-1988)은 중국 당대 저명한 사상가로서 외국의 사상계에서는 “중국의 마지막 대유(大儒)”, 즉 “중국의 마지막 큰 선비”라고 평가를 하고 있다. 량수명과 모택동은 동갑으로서 두 사람의 교분은 지난 세기 10년대 후반으로까지 소급되며 1949년 10월 1일 건국전까지만 해도 아주 친근한 사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건국 후 두사람의 관계는 차츰 버성겨지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량수명더러 정부에 들어와 같이 정치를 해보자”는 모택동의 호의를 량수명이 거절한데로부터 인기되였으나 진짜로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깨여진 것은 모택동의 제의에 의해 1953년 9월 9일에 있었던 중국정협상무위원회의에서 량수명이 중국의 토지개혁가운데서 나타난 편파를 지적하고 당시 중국에 엄존했던 성향차별과 공농차별에 대해 지적한 것이 도화선으로 되였다. 량수명의 의견은 집정당인 공산당에 대한 민주인사의 정상적의견이였지만 모택동은 이것을 아량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1953년 9월 18일에 있은 회의에서 모택동은 “사람을 죽이는데는 두가지 수단이 있는데, 장개석은 총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량수명은 붓으로 사람을 죽인다. 당신은 바로 붓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범이다.”라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량수명을 비판했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모택동의 돌연적인 비판에 량수명이 변명할 시간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수백명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량수명은 모택동의 기세에 조금도 숙어들지 않고 언쟁을 시작했다. “주석님께서 나의 변명을 다 들어줄 아량이 있다면 나는 이전보다 더욱 당신을 존경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이런 아량이 없다면 나는 당신에 대한 존경심을 잃을 겁니다.”량수명이 이렇게 말하자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만한 아량은 있습니다. 당신의 정협의원은 그대로 하도록 놔둘겁니다.” 모택동은 가능하게 이것은 량수명에게 은혜을 배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했을 수도 있었으나 량수명은 오히려 “그건 조금도 요긴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량수명의 이런 오만한 태도는 끝내 모택동을 격노시켰다.“조금도 요긴한 일이 아니라구요? 만일 당신이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만일 요긴한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제2차 정협회의가 열리면 내가 당신을 정협위원으로 그냥 남을수 있도록 당신 이름을 제기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그런 사상과 견해는 긍정적으로 틀린겁니다.” 모택동의 태도 역시 량수명을 격노시켰다. 량수명은 날카롭게 맞서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정협위원이 되고 안 되고는 이후에 볼 일이고 천천히 할 얘깁니다. 나는 지금 령도당인 공산당을 테스트해 보고 싶습니다. 당신네 공산당은 늘 우리를 보고 자아비평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들이 늘 입으로 말하고 있는 그 자아비평이 대관절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한번 알아보고 싶습니다. 모주석께서 만일 이런 아량이 있다면 저는 당신을 더욱 존경할겁니다.”㈜ 모택동과 량수명의 이 론쟁에서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량수명은 진정으로 맹자가 말했던 “부귀앞에서 음탕해지지 않고 권세와 무력앞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富貴不能淫, 威武不能屈)”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선비정신과 문학비평필자는 오늘날 우리 문단에서 사마천식의 고전적 선비정신이나 량수명식의 당대의 선비정신이 많이 퇴색하여 가고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수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문단과 학술계의 일부 문인과 학자들의 상황을 꼬집어 보면 기득권에 안주하고 불의와 비리와 타협하거나 그를 도외시하거나 “정치권력”, “문화권력” 심지어는 “경제권력”에 아부하면서 리해관계에 얽매여 시비를 전도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들이 얼른거리는 것 같다. 그런데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자신들의 이러한 “곡학아세”의 지조없는 문학비평의 실천을 “태양이 깨져서 무수한 별들이 된” 이 중심해체시대, 불확실성시대, 다원문화시대의 시대정신에 걸맞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반성과 참회의 필요성도 없다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는 점이다.하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곡학아세”와 담을 쌓은 현대의 참된 선비가 있으니 그가 바로 좌충우돌하며 불의에 도전하는 연변대학교의 김관웅교수라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굴려본다. 연변대학교 김병민총장은 지난 해 년말에 있었던 김관웅교수 “와룡학술상” 수상 축하모임에서 “김관웅씨는 연변대학의 력사에 나타난 굴지에 속하는  명교수요, 대학자로서 우리 대학교의 자랑이다”라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도 동감이다. 그가 갖고있는 학문적스케일과 그가 달성한 학문적 수준은 연변대학뿐만 아니라 국내외 학술계의 인정을 받고있는바 적어도 조선문학이나  중한비교문학 등 분야에서는 중국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조선반도의 남과 북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조선-한국학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다. 그의 천부적인 지적기질, 해박한 지식, 빼여난 기억력은 실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있다. 그는 동서방 문화에 대한 깊은 학문적 조예를  바탕으로 하여 대학강단에서 서양문학, 서방모더니즘문학, 조선문학, 20세기서방문학리론, 문학리론, 비교문학, 비교시학, 문화학, 세계문화사, 수필창작론 등 다양한 학과목을 가르치고 본과, 석사, 박사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면서 유망한 후학을 육성하는 “육영지사(育英之士)”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있다.독일의 철학가 칸트가 “여기에 독서하는 칸트가 있고 동시에 커피를 마시는 칸트가 있다”고 말한것처럼 김관웅교수도 한정된 시간속에서 다양한 지적작업을 벌리고있는바 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영위하고있을뿐만 아니라 문단과 예술계 및 문화분야에 진출하여 유명한 비평가로서의 문필작업을 줄기차게 벌리고있다. 본 세기에 진입하여 우리 문단과 예술계 및 문화분야에 질높은 글들을 쏟아내여 지성인들의 이목을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있다. 날카로운 시각, 기발한 아이디어, 해박한 지식으로 다져진 그의 글들에 필자는 노상 매료되군 한다. 필자는 그의 글을 통해 인간의 지혜와 지성(知性)의 결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터득하는데 큰 도움을 입고 있다. 문학비평이나 문학론쟁은 승부를 가르는 말하자면 챔피언에 목표를 둔 스포츠의 치렬한 경쟁이거나 휴식, 소일을 통해 즐기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유희나 오락이 아니라 심미감성체험과 리성이 통일된 과학적인 리성분석활동이며 심미가치분석과 시비판단의 엄숙한 지적작업이다. 옛문인들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근본이다(是非之心, 智之端也)”라고 지적했듯이 시비지심은 가장 지적인 작업중의 하나인 문학비평의 내핵인것이다. 따라서 훌륭한 비평가는 작품의 해명과 취미의 교정가이면서 불의에 도전하는 영원한 “도전자”이고 “시비군”이여야 한다. 극히 리지적인 소크라테스나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니체나 예민한 감수성과 격정을 가진 벨린쓰끼나 단창필마로도 정치적권세도 두려워 하지 않고 많은 론적들과 용감무쌍하게 논전을 벌렸던 호풍(胡風) 등 무릇 대비평가들은 례외없이 모두 불의에 도전하기를 좋아했으며 쟁투적 비평을 하는 것을 능사로 여겼다. 이를테면 19세기 러시아의 저명한 소설가 고골리가 불후의 장편거작 ≪죽은 넋≫을 창출하였을 때 벨린스끼는 남들이 너무나 추켜올려세운다는 비난이 쏟아질 정도로 칭찬하였지만 고골리가 짜리 러시아사회의 암흑과 비리들을 비호하여 극찬한 글에 한해서 벨린스끼는 지난날 고골리와 맺은 두터운 우정도 고려하지 않고 “고골리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써서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다. 이런 공명정대한 비판은 오늘도 여전히 교육적가치가 있는 에피소드로 문인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김관웅교수도 이처럼 시비지심을 갖고있는 문학비평가요, 대쪽같이 결이 바르고  경위가 틀리면 작두날에도 올라서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문학비평가이다. 필자는 “우리 문단의 흑마-김관웅교수”라는 글에서 김관웅 교수의 개성과 인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김관웅교수는 급하고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는 성미를 갖고 있다. 그는 기교를 부릴줄도 모르고 아첨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시도 참지 못한다.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은 워낙 시비를 마음속에 두고 겉으로 관용을 내비쳐야 하는 법이지만, 그는 성격적으로 관청에서 벼슬을 하는 것보다는 글방에서 선비노릇을 하는게 적성에 더 맞는것 같다. 그리고 김관웅교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달려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고야마는 성격을 가졌다. 설사 상대가 선생이던, 선배이던, 친구이던, 리해관계가 얽혀 있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정계의 요인이던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김관웅교수의 사전에는 숫제 ‘거짓’이나 “아첨” 같은 단어는 없는상 싶다. 그는 학문적 견해나 정치적 견해를 그 때 그 때의 세류에 따라 수정하거나 바꾸는, 바람 따라 돛 다는 그런 속물근성이 가득한 평론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대 바른 인격의 소유자이다”.   그의 비평문학의 가장 큰 특점의 하나는 심각하고 날카로운 문화비판성이다. 실로 그의 글은 “설망어검(舌芒於劍-혀가 칼보다 날카롭다)”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21세기에 진입하여 우리 문단에서 “적반하장(賊反荷杖)”,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시비 전도가 판을 칠 때 김관웅교수는 자기에게 오는 불리익을 마다하고 시비 가르기에 선두주자로 나섰는바  “김문학현상”에 대한 비판, 남영전씨의 “토템시”에 대한 직언, 최룡관씨의 “순수시 독선론”에 대한 해부, 박춘월씨의 단시 “록”에 대한  재해석 등은 그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로 하여 김관웅교수는 여러 차례의 필화(筆禍)를 당했지만 여전히 태연자약하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시비가름에 있어서 번번이 그의 옳음과 대방의 그름으로 인해 벌어진 것만은 아니지만, 십중팔구는 그가 옳았다. 그러면 김관웅 교수가 문단론쟁에서 많은 경우에 올바른 립장과 견해를 견지할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다학박식한 지식적 준비도 하나의 큰 버팀목으로 작용을 했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론가로서의 올곧은 주체정신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옛사람들이  “삼군이 통수를 빼앗겨도 괜찮지만 필부는 뜻을 빼앗겨서는 아니 된다(三軍可以奪帥, 匹夫不可奪志)”고 갈파했듯이 김관웅 교수는 이 몇년 동안 시종 자기의 “뜻(志)”, 즉 평론가로서의 올곧은 주체정신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드놀지 않은 자기의 주체정신으로서 부단히 변하는 사회현실과 문단의 현실에 대응하였던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로써 움직임을 제어하는 이정제동(以靜璪)의 삶의 지혜로 자신의 비평활동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관웅 교수는 언제나 변함없는 자기의 주체성에 립각하여 변화 많은 우리 문단에 대응하였으며 동서남북풍이 무시로 엇바뀌면서 불어쳐도 결코 동풍이 불면 동풍파로, 서풍이 불면 서풍파로, 남풍이 불면 남풍파로, 북풍이 불면 북풍파로 변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다고 하여 필자는 김관웅교수를 “완인(完人)”으로 분식하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도 인간으로서 자기의 약점을 갖고있다. 이를 테면 직사포같은 성미로 하여 가끔 오버하는 경우가 있는바 문단론쟁에서 때로는 과격하고 때로는 수단과 방법이 거칠고 때로는 표현의 강약완급에 류의하지 않는 흠집을 발로시키고있는 것 등이다. 이런 부족점들을 두고 이미 타계한 전학석교수는 생전에 “관웅인 사람은 좋은데 말이야, 때로는 오버를 해. 그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라고 지적하였다. 솔직담백한 김관웅교수는 전학석 교수의 이 말에  진심으로 승복을 했다. 그는 “나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자신이 결함투성이, 허점투성이다 보니 어느 모로 보나 결함이 없는 완벽한 성격을 가진 전학석 교수를 진심으로 탄복하여왔다. 전학석 교수는 우리 연변대학의 전형적인 젠틀맨이다. 단 한 점의 허점도 없이, 단 한마디의 실언도 없이,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거의 륙십 평생을 살아왔다. 옷차림새도 언제보도 깔끔하고 걸음걸이마저도 품위가 있고 점잖았다. 전학석 교수는 대체적으로 태음인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늘 전학석 교수를 나의 귀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이 분처럼 완벽한 남자로 돼보자고 한 동안은 결심을 내리고 자기를 다잡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죄다 허사였다. 범을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동시효빈(東施效嬪), 추녀 동시(東施)가 미녀 서시(西施)의 얼굴 찡그리는 모양을 흉내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꼬리를 사타구니에 끼우고 점잖게 군자처럼 처신해 보려고 하지만 리성이 조금만 왼 눈을 팔아도 내 천성의 개꼬리는 다시 빳빳이 쳐들군 한다. 아마도 내 천성의 관성(慣性)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의 일상생활과 대인관계나 글 중에 나타난 일부 미진한 점만을 편면적으로 꼬집으면서 그의 정확한 기본적견해와 비평성과를 무마하거나 부정하거나 지어 그에 대해 욕설을 퍼붓는 언행은 바람직하지 못하기에 삼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쩍하면 김관웅 교수를 법에 걸므로써 정상적인 문단 쟁명을 불식시키려는 것은 비신사적인 소행이라고 생각한다. 김관웅교수 등 비평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바로 상술한 점을 감안하여 필자는 김관웅 교수를 비롯한 우리 평단의 비평가들에게 몇가지 희망사항을 말하고 싶다. 홍응명의 저서 “채근담(菜根譚)” 에는 “산이 높고 험한 곳에는 나무가  드물지만 낮은 골짜기에는 초목이 무성하고, 물살이 센 급류에는 물고기가 없지만 잔잔한 못이나 소에는 물고기떼가 모여든다”는 명언이 있는데 우리에게 주는 계시가 크다. 현시점에서 김관웅 교수는 자기의 신분이나 문단에서의 위상으로 보아서 일방적으로 장비나 리규처럼 용맹스럽기만 해서는 안 되며 때로는 문단의 보다 많은 사람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너그러운 아량과 유연한 자세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외부로부터의 너무나 빈번한 무함과 밀고, 법정놀음 같은 것을 얼마간 무마하거나 완충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관웅교수와 같은 현대의 참된 선비들은 마땅히 보호되고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문단에 대한 필자의 희망사항이다. 이런것들은 김관웅 교수와 우리문단에 대한 필자의 희망사항들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희망사항은 아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는 하지만 모난 돌이야말로 좋은 돌이기에  김관웅교수가 향후 문학비평작업에서 자기의 부족점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과 반성, 개진을 거듭하면서 그 날카로운 모를 죽이지 말고, 그 강인한 초지(初志)를 굽히지 말고 계속 용왕매진(勇往邁進)하라는 점이다. 즉 김관웅 교수가 자신이 자신의 모를 다 죽인 둥굴둥굴한 돌이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김관웅 교수에 대한 필자의 가장 중요한 희망사항이다. 물론 문학비평작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곡학아세”와 담을 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곽말약 같은 대문호도 해방이후의 비상시기에 권세에 아부하며 수많은 쓰레기 같은 시들을 쓰고 맘속에 없는 말들을 숱해 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런 까닭에 세류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선비로, 참된 비평가로 되지면 자신의 올곧은 주체성에 따르는 드놀지 않는 지조가 요청되며 비범한 담량과 지조가 필요한 것이다. 흘러간 력사를 추적해보면 “곡학아세”와 담을 쌓은 선비들은 시대마다 의롭지 못하고 탐욕스런 사회 권력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력사적위기에 맞서서 저항하다가 엄청난 희생을 치뤘다. 그 단적인 사례로 호풍(胡風)아나 김학철을 들수있는데, 이들은 당시의 세류에 거스르는 자기의 정확한 문학관, 사회관, 정치관을 내세우다가 20년도 넘게 곡경을 치루지 않았던가. 오늘에 이르러 지난 시대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비리와 부정의 압력과 암전은 여전히 존재하는바 우리 문학비평가들은 어떤 역경속에서도 불의에 도전하는 남다른 지조와 용기와 용단과 량심을 가질 것이 요망된다. 우리 평단의 치명적인 결함의 하나는 시비관, 가치관의 결핍이고 평론가들의 책임감과 사명감의 결핍이다. 우리 문학비평의 전반적인 구조는 다원화가 되여야 하지만 매개 비평가들은 으레 자기의 독톡한 시비관과 가치판단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비평가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바로 우리 문학비평의 전반적구조가 다원화될수록 우리 매개 비평가들은 더욱 자신의 선명한 비평풍격과 개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처럼 천편일률이 아닌 비평의 개성화만이 우리 비평이 생기를 띠고 활발하게 발전할 수 있는 전제로 되는 것이다. 이 풍진세상의 티끌에 물젖은, 그 어떤 사사로운 개인의 리익관계에 따른 무원칙한 “성가대식의 송가비평(頌歌批評)”, “돈 받아 먹고 하는 봉투비평(紅包批評)”,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매인 인정비평(人情批評)”, “끼리끼리 놀아나는 울타리비평(圈子批評)” , ”권세자에게 빌붙는 아첨비평 (媚評)”, “눈치보기 상황비평” 등 너절한 비평은 설자리가 없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면에서 우리 비평가들에게는 자신을 정화하기 위한 끊임없는 각고의 노력이 요청된다. “채근담”에는 다음과 같은 명언이 있다. “사업과 문장은 육신이 죽으면 따라 사라지지만 애오라지 정신만은 만고에 썩지 않고, 부귀와 공명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바뀌어 지지만 애오라지 기품과 절개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느니라. 군자는 정신으로 사업이나 문장을 바꾸어서는 아니 되고, 기품이나 지조로 부귀공명을 바꿔서는 아니 되느니라. ”요즘처럼 물욕이 팽배하고, 도덕이 혼미해지고, 각종 가치관의 충돌이  심한 이 사회의 격변기는 “곡학아세”와 담을 쌓은 참된 선비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이다. 필자는 김관웅교수가 앞으로도 그 모난 돌의 정신을 그 무엇과도 바꾸지 말고, 자신의 그 저돌적인 기품과 드놀지 않는 지조를 그 무엇과도 바꾸지 말고 우리 조선족문단을 보다 깨끗하게 정화하고 찬란하게 쇄신하는 성스러운 길에서 보다 큰 기여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관웅 교수, 설혹 가는 길 이 험난하고 동행자가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생벽을 지르며 혼자라도 가이소!                                                                                               2009.1. 31주:모택동과 량수명의 관계 자료는 2007년 중앙문헌출판사가 출판한 “중국혁명과 건설과정에서의 력사사건 진상”을 참조)문화산맥 2009-02-05 15:09:45
5    [평론]리상각의 시를 론함 (조성일) 댓글:  조회:1012  추천:90  2008-07-07
리상각의 시를 론함조성일리상각씨는 20세기 50년대 중반 조선족문단에 데뷔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반세기를 주름잡으면서 자기의 삶을 시창작에 걸고 줄기차게 필경(笔耕)을 하고있다. 흘러간 세월에 리상각은 무시로 덮쳐드는 정치적풍파와 인생살이의 갖가지 어려움이 밀려드는 상황속에서도 빼여난 예술적기량과 각고의 노력에 기대여 20여권의 시집(장편서사시집, 서정시집, 시조집, 풍자시집 등)을 출간함으로써 조선족시문학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따라서 그는 조선족시단의 앞자리에 좌단(左袒)하고있는 거보적인 서정시인이며 시조시인이며 풍자시인이다.  시인 리상각씨의 창작년보를 훑어보면 서정시, 서사시, 풍자시, 시조 창작 등이 우리의 눈길을 끌고있다. 그는 문단에 데뷔하여 “문화대혁명”시기까지는 주요하게 리념적인 “송가”창출에 집착하다가 개혁, 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하여서부터는 시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시의 소재, 주제, 표현기법 및 기타 형식의 새로운 변주를 시도하는 대담한 창조적실험을 진행하였다. 그는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하여 인간사랑, 자연례찬, 현실참여 등과 직결되는 서정시, 시조창작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떠올렸으며 최근 몇년동안에는 시의 필봉을 풍자에 돌려 현실의 부조리와 삶의 모순을 비판의 도마우에 올려놓음으로써 우리 조선족시단에 시와 삶, 시와 현실의 간격을 허용치 않는 풍자시의 장을 열었다. 실로 그는 풍자시로 시의 령역의 개방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의미를 표출하였고 조선족시단에 저항세계의 신선한 풍경을 구축하였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필자는 주로 그의 시창작에 나타난 특징에 대해서 필자나름대로의 생각을 굴려보려 한다. 1. 인간미 추구와 초월적인 인격지향 리상각은 자기의 미학주장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고희에 이르러서야 이런 생각이 깊어졌다. 물론 시인은 인간미를 찬송하는것이 창작의 기본이다. 사랑과 인정과 꿈의 세계를 찬미하며 창조하는것이 시라고 주장하여왔다. 시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그려주는 예술이지만 그 속에 숨쉬는 인생의 꿈과 환상과 신념을 보여주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생에 대한 시의 지향성이다. 희망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고 지향성이 없는 시는 생명력이 없다.” 리상각은  인간미를 찬송하는것이 창작의 기본이며 사랑과 인정과 꿈의 세계를 찬미하며 창조하는것이 시라고 인정하고있다. 인간미에 대한 추구는 인정세계와 고향사람들을 다룬 시, 친지와 이웃들을 다룬 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시, 허위적이고 파행적인 삶을 비판, 풍자한 시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 저변에서 울리는것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깨끗한 삶에 대한 지향, 님의 상실, 고향상실, 민족의 비극으로 인한 향수와 한, 불의에 대한 도전이다. 특히 뜨겁고도 끈끈한 정을 기반으로 한 그의 사랑시는 사랑의 기쁨, 짝사랑의 외로움, 리별의 안타까움과 그리움, 실련의 아픔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있지만 그의 사랑시조에서 주조(主调)를 이루는것은  뜨거운 련모의 정과 애절한 그리움이라 생각된다. 이런 련모의 정과 그리움은 매우 깨끗하고 밝으며 순결한 지향점을 갖고있는것이 특징적이다. 시인의 이런 인간사랑과 인간미의 추구는 초월적인 인격리상을 자기의 시를 떠올리는 에너지로 삼고있다. 그의 시에는 하늘, 별과 같은 천체이미지, 다시 말하면 원격(远隔)이미지가 많은데 그는 삶의 근원적이면서도 존재론적인 의미를 되새기면서 속세와 멀리한 격고(格高), 경고(境高)의 탈속세계를 지향하고있는것이다. 이런 지향은 초월적인 인격리상이라 할수 있다. 삶의 문제를 도외시하거나 현실에 등을 돌린 비력사적랑만주의세계관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적인 면을 초극하려는 상징성을 갖고있는것이다. 그리고 또 죽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도 평온한 심태를 갖고있는 그의 달관의 경지를 넘볼수 있기도 하다.  가진것 하나 없는/ 한줄기 외길/ 아침해살 안고 떠나 어느덧 서산노을// 하늘끝 닿으면/ 하얀 쪽배 갈아타고/ 은하수 건너서/ 별바다 들어서리                                                              ―서시 “일엽편주”에서  티없이 깨끗한 하늘빛/ 조심조심 밝고 가노라니/ 어느덧 천국의 구름밭으로/ 들어섰나보다 나는/ 별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 듣는다                                                                                                   ―“눈 내리는 밤”에서 이런 지향은 “침묵”에서도 나타나고있다. “산이여”/ 나는 산을 불렀다// “산이여”/ 산도 산을 부른다// 마주쳐오는 소리/ 나는 산으로 다가섰다// 입을 다물고/ 산이 나를 외면한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침묵인가 산이여// 이제부터 나도/ 산이 되리라 이 시에서 산은 은둔이나 침잠의 처소로서가 아니라 탈속과 불변성, 강인, 인고, 앙망(仰望)의 정상이미지로 천체이미지와 궤를 같이하고있다. 서정적자아는 바로 이런 산과 일체가 되여 대화, 교감하고있다. 이 시를 읽노라니 부지중 리태백의 “홀로 경정산을 마주보면서(独坐敬亭山)”이라는 시가 련상되였다.  뭇새들은 하늘높이 날아가버리고/ 외로운 구름은 홀로 하늘에서 노니네// 서로 마주보아도 싫지 않은이/ 애오라지 자내 경정산뿐인가 하노라(众鸟高飞尽, 孤云独去闲. 相看两不厌, 只有敬亭山) 리상각시백의 “침묵”과 리태백의 “홀로 경정산을 마주보면서” 이 두수의 시는 비록 시제는 달라도 그 교묘한 솜씨는 똑같음을 발견할수 있다. 즉 두 시인은 모두 자신의 정감을 시적인 대상인 산에 이입하였다. 그리하여 시적대상인 산과 시적자아인 나는 동일성을 이루었으며 바로 그리하여 나는 바로 산이고 산은 바로 나로 되여있는것이다. 바로 이러하였기에 산은 친구처럼 친절하고 정취가 있는 인격체로 되여 시적자아와 서로 교감하고 대화를 나눌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리상각씨의 “침묵”은 김관웅교수가 지적하다싶이 물아일체(物我一体)의 경지에 오른 시이며 따라서 “동양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르고 동양적인 신운(神韵)이 있는 수작이다.” 이런 시는 초탈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는 나오기 어려운 시이다. 리상각의 시는 바로 이러한 초월적인 립장에 서서 여유만만한 태도로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굽어보면서 쓴것이라고 할수 있다. 필자는 리상각시백의 이러한 초월적인 인격리상이 곧 그의 시를 떠올린 에너지라고 생각해본다.  2. 자연의 생명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례찬 .그의 시문학에서 우리에게 싱그럽게 안겨오는것은 자연관계시이다. 그는 자연을 객관적상관물로 하여 자연과 인간의 친화력과 교감을 떠올리면서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의미를 지닌 생명성에 대한 감각적쾌감과 자연의 아름다움, 순결성을 찬미하는것이 특징적이다. 그의 시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과 싱그러움에 대한 감각적쾌감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망이 투사되여있다. 실로 그의 자연시에서는 풍경과 물상이 거의다 생명성으로 충일되여 자연과 시적“자아”가 상호 확산적교감을 보여주고있다. 적지 않은 경우 그의 시에서 자연물들은 흥겨운 분위기를 보이고 시적“자아”는 법열의 상태에 있다. 그의 이런 시들을 시적“자아”와 자연과의 극복할수 없는 “존재론적거리”를 전제로 한것이 아니라 량자의 친화력에 뿌리를 내리고있다. 따라서 그의 자연시에는 비극적정조가 거의 없는것이 특정적이다. 3. 풍자와 해학을 통한 사회비판  리상각시문학의 주제풍향에서 또 하나 이채를 보여주고있는것은 풍자와 해학을 통한 인륜도덕과 사회의 그릇된 풍조에 대한 비판이다. 리상각시백은 바로 옛 지성들의 올곧은 뜻을 귀감으로 하여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는 어지롭고 복잡한 세상, 어디서나 볼수 있는 추하고 고약한 현상에 비분강개(悲憤慷慨)를 참지 못해 비판적지성으로 나타나 풍자적메타포를 동원한 저항시편―풍자시 창출의 급물살을 일궈냈던것이다. 시집 《뼈다귀》에 수록된 풍자시들의 주제풍향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러가지 양상을 보여주고있지만 그중 주요한것들만을 간추려내면 혼탁한 세상에 칼질하기, 위정자들에게 물먹이기, 도덕적으로 추락된 인간들을 비꼬기, 사랑의 부재를 발가벗겨 창피주기 등이라 할수 있다.  버려진 뼈다귀를/ 제꺽 물고/ 흘끔거리며 간다// 흘끔거릴수록/ 빼앗자고/ 달려드는자 있다// 고기 한점도 없는데/ 무얼 바라고 이악스레/ 물고 뜯을가?// 뼈다귀 하나때문에/ 으르렁소리만/ 높아간다                                               ―“뼈다귀”전문                                                                                                                -       이 시를 읽으니 “니전투구(泥田斗狗)”라는 성구가 생각난다. 이 성구는 진흙밭에서 개들이 벌리는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을 빌어 인간사회에서의 사람들사이에서의 명쟁암투(明爭暗斗)를 일컫는 말이다. 시인은 고기 한점  붙어있지 않는 뼈다귀를 객관적상관물로 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서로 물고 뜯고 으르렁대는 “니전투구”의 현상을 풍자적과장과 예리화의 수법으로 희화화(戏画化)하고있다. 이 시에서 아무렇게나 내뱉는듯한 시인의 목소리는 뜻밖에 짙은 공명대를 형성하고있는것이다. 특히나 구성의 단단한 끝맺음과 상징성은 깊은 여운을 남기고있다. 이 시는 매섭고도 활달한 시선, 강인한 언어, 뛰여난 류추능력, 기발한 위트, 예리한 과장, 상징화가 종합적으로 멋지게 배합된 수작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웃음을 금치 못하게 하면서도 슬프고 섬찍하게 한다. 그의 이런 빼여난 시적작업은 높은 경지에 이른 시인의 솜씨를 엿볼수 있게 한다.  한자리만 지키고있어도/ 제가 할 일은 다한다// 한마디 말이 없어도/ 두려워하는자 있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도 추위와 배고픔을 모른다// 밤낮 외롭게 지내지만/ 욕심도 불평도 없다/ 두팔 벌린채 먼산 바라보며 세상을 우습게 안다                                  ―“허수아비”전문 이 시는 부귀공명이라는 이 “화택(火宅)”속에서 살아가는 권세나 재물때문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속세의 소인배들을 직설이 아니라 허수아비란 객관적상관물을 빌어 우의적(寓意的)으로 풍자, 조소한 또 하나의 수작이다. 이 시에 대해 김관웅교수는 다음과 같이 멋지게 평가하고있는데 필자도 동감이다. 부동과 침묵의 미학에 람루와 기아를 초탈하는 안빈락도(安貧乐道)의 청빈사상 및 독립오세(独立傲世)의 도고한 삶의 자세가 보이는 작품이다. 부귀공명을 탐내는 현실의 속인들을 우습게 아는 처사(处士)의 풍모를 허수아비라는 이미지를 빌어 표현한 점은 리상각시인의 대단한 시적안목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의 낯설기화의 한 성공의 사례가 아닐수 없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만고풍상을 겪고난후의 초탈에서 오는 깨달음에서 연유하는것이며 아울러 시인의 시창작에서의 보다 높은 예술적경지에로의 승화이다. 4. 그의 시어와 표현기법상의 특징 리상각시백은 언어적감수성이 예민하고 언어의 내포적의미를 재치있게 활용할줄 아는 장인(匠人)으로 안겨온다. 그의 시어는 평이하면서도 투명한 언어감각과 지적인 세련을 거느리고있으며 물흐르듯 활달하고 자연스럽다. 그의 언어에는 현란함이 없으며 굉장한 수식도 없다. 그의 언어의 평이성, 소박성과 지적세련성은 구체적현실에 대한 그의 깊이있는 성찰을 통해 얻어진것이다. 하기에 거기에는 경험의 진실성이 온전하게 자리잡고있는것이다. 또한 그의 최근 몇년간의 적지 않은 시들 특히 시집 《뼈다귀》는 리상각시백이 “서문”에서 고백하다싶이  “역설과 반어와 야유로 씌여진 아이로니시집”으로서  전통적인 예술기법의 계승과 더불어 현대시의 마력인 이미지, 상징, 역설, 아이로니 등 기법들을 시의 구성뿐만아니라 부분적인 언어표현에서도 자유분방하게 능란하게 활용함으로써 시의 예술적력도(力度)를 높여주고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고픈것은 모더니즘의 표현기법을 대담하게 차용하고있지만 시의 서정성과 운률을 살리고있으며 지어는 민요의 운률까지 돋보이게 하고있는것이 특징적이다. 그의 시에서 시를 전개시켜나가는 언어진술의 톤 자체가 싱싱하고 통쾌한 기개를 뻤셀遲막館?새로운 시적호흡에 적지 않은 성공을 보여주고있으며 다양한 언어의 춤은 탄력적인 공감대를 마련해주고있다. 이밖에도 그는 일상적인 비어(卑語)나 속어(俗語)를 과감하게 시에 도입시키는 새로움을 보여주고있다.    5. 그의 시풍 리상각씨는 결코 절망의 시인이 아니라 희망의 시인이요, 그의 시학은 희망의 시학이라 일컬을수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현실세계를 부정한다거나 떠나고싶은 생각을 갖기보다 현실세계중의 그릇된것들을 초극하고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마련하고싶은 생각에 물젖게 된다. 그의 시풍은 밝고 깨끗하며 향토적정서가 짙으며 섬세하고도 서정적이며 명랑하고 락천적이다. 그의 시는 사실주의, 랑만주의, 현대주의 등의 복합에 의한 변이적인 자기나름의 민족시로서 랑만적인 색채가 짙다.  “리상각시인은 깨끗하게 시를 쓰는 서정시인이다. 그의 시조도 마치 시조풍으로 쓴 서정시 같아서 정서적으로 느낌이 매우 좋다. 꽃바람 맞는듯한 상쾌함, 조약돌을 굴리는듯한 석수간의 깨끗함, 하얀 눈속에서 첫 련인을 만나는듯한 정다움, 이런것들이 하나의 복합체로 독자를 매혹시킨다.”(김철) 6. 희망사항 하지만 일부 시들에서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 내심의 고민과 고통, 한을 존재론적시각에서 파고 들어감이 부족한것 같으며 예술적인 견지에서 볼 때 묘사대상이 욕망에 가리워지고 감정에 휩싸여 묘사대상과 주체 사이의 심리적거리가 부족하며 감지한 사실을 형상화하기보다 론리화함으로써 추상화에 떨어지고 벌거벗은 육성이 직설적으로 울리고있다. 이런것들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리상각은 시집 《뼈다귀》의 “서시―일엽편주”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높낮은 파도길에/ 작은 갈잎 하나/ 떴다 가라앉았다/ 그네를 뛰며 간다// 외로운 꿈새/ 누구를 바라고/ 아슬한 물고개/ 넘어넘어 왔더냐     이 시가 말해주다싶이 리상각씨는 “일엽편주”가 되여 홀로 외로움을 씹으며 세월의 격랑에 휘말려 부침(浮沈)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리상각은 서정시인, 시조시인일뿐만아니라 훌륭한 풍자시인으로 자리를 굳히였다. 시인 리상각씨는 70 고개에 치닫고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젊음의 생기가 분출하고있는바 이 경우 시조집 《에밀레종소리》의 머리시조중의 마지막 몇대목을 새겨보는것은 무익한 일이 아닐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해솟는 산에 오르듯 하루 또 하루 엮어갈 황홀한 새 천년은 어쩌면 신비론 세상이리 기분이 둥둥 뜬다 필자는 리상각시인이 여생에 우의 시조에서 보여준 그런 젊음의 정서적흥분속에서 작은 그릇에 우주를 담고 읊을수록 맛이 나고 만방에 향기로운 우리 민족의 시의 꽃송이를 더욱 알뜰히 가꾸어나가길 바라마지않는다.  <<연변문학>> 2008년 5월호
4    문학거장 김학철선생님을 그리며 (조성일) 댓글:  조회:1277  추천:100  2007-09-29
문학거장 김학철선생님을 그리며-김학철선생님  6주기  추모사조성일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회장존경하는 김학철선생님!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천고마비(天高馬肥)의 풍요로운 가을철 추석날에 우리 문인 일행은  선생님께서 우리와 영별하신 또한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두만강가에 와서 생전 선생님의 거룩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추모행사를 펴내고있습니다.존경하는 김학철선생님!그간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용서를 빕니다. 선생님이 계시는 그 고장은 평화롭고 풍요하리라 믿습니다. 그 고장엔 선생님께서 그토록 증오하던 비리도 비정도 부조리도 폭압도 없는줄로 알고있습니다. 선생님의 명복(冥福)을 빕니다.흘러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는 항상 약자의 편에 서서  백두산도 한 손으로 옮길 것 같은 호탕한 기개를 가지고 불의에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살으셨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은 세인들이 우러러보는 설중송백(雪中松柏)이십니다.선생님께서는 바로 이런 기개와 정신이 있었기에 <동호직필(董狐直筆)>식으로 불의에 도전하는 무수한 잡문을 창출하였음과 더불어 건국후 중국 조선족문학에 <잡문시대>를 열어감에 있어서  <효시>(嚆矢)의 역할을 수행하셨습니다.선생님께서는 바로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전쟁 년대에 사경을 넘나드시면서 총칼을 들고 일제와 싸우셨으며  또한 그 처절한 항일투쟁을 누구보다 먼저 장편소설화하였으며 <현대미신>과 좌경적 로선에 불벼락을 안긴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출함으로써 현대조선족문학발전사에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중국 성구에 <개관론정>(盖棺論定)이라는 말이 있듯이  선생님은 항일투사이시며  올곧은 현대의 지성이시며 중국조선족문학의 거장이시며 세계 한민족의 문학계보에도 오른 저명한 전기적인 작가이십니다. 선생님의 파란만장한 인생력정은 우리 조선족의 한 많은 력사의 축도이며 어떤 역경속에서도 걲이지 않았던 선생님의 불굴의 의지와 불의에 도전한 과감한 용기는 우리 문인의 표상이자 귀감입니다.이 경우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픈 것은 선생님께서 생을 마감하는 과정마저도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 한부의 드라마였다는 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최후를 인지하시고 자신의 의지대로 하나하나를 준비하셨으며 유언을 남기시였습니다. 문인들은 선생님의 유언대로 화장후 일부 골회를 두만강물에 뿌려주고 일부 골회를  잘 포장한 우편박스에 실어 두만강물에 띄워서 선생님의 고향 원산으로 행하도록 하되 그 골회함에는 <홍성걸(김학철선생님의 본명) 이제 고향에 돌아갑니다>란 글을 첨부했음을 거듭 말씀드립니다.중국 장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장자는 죽음에 임박해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려고 의논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천지로 관(棺)을 삼고 일월(日月)로 련벽(連壁)을, 성신(星辰)으로 구슬을 삼으며 만물이 조상객이니 모든 것이 다 갖춰졌다. 나를 그냥 돌판에 버려라. 나를 묻는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을 빼앗아 땅속의 벌레와 개미에게 주는 것이 공평하지 않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선생님은 이런 리치를 일찍 스스로 터득하셨는지  자신의 골회를 남다르게 처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이런 처사를 통해 마지막순간까지도 의연했던 모습에 지금도 흠모를  보내고 있으며 특히나 고향과 민족을 생각하는 선생님의 치열한 민족정신에 감동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존경하는 김학철선생님!지금 조선족문단은 명암이 엇갈리며 시비가 전도되고 흑백이 명확히 갈라지지 않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있으며  현실에 혼탁한 면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는 선생님의 유언을 받들고 불의에 도전하면서 참된 삶을 엮기에 힘쓰며 우리 조선족문학발전을 위해 혼신을 이바지하겠습니다.끝으로 다시 한번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영원히 편안한 영면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2007년 9월 25일 두만강 강가에서
3    강경애 명예원상복구의 리면에 얽힌 이야기 댓글:  조회:1412  추천:101  2007-03-24
강경애 명예원상복구의 리면에 얽힌 이야기                                  조성일프롤로그 강경애(1906∼1944)는 일제식민지시대의 《간도》 룡정에 건너와  살면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대여 궁핍한 민중의 삶과 항일운동의 현실을 진실하게 그려내고 그 시기 《시대정신의 최대치를 구현한》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녀성작가이다. 강경애는 어두운 시대의 짧은 생애에 장편소설 2부, 중단편 17편, 기타 다수의 수필과 평론 등을 창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간문제》(1934), 《소금》(1934), 《지하촌》(1936), 《어둠》(1937) 등을 들수 있다. 강경애의 《간도》에서의 처절한 삶과 고투, 어둠의 시대에 남긴 빛나는 업적, 삶의 고투속에서의 쓸쓸한 죽음 등으로 하여 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녀류소설가를 경모해왔으며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작가 강경애를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문학전통으로 삼기 위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1998년 8월 룡정시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를 세웠다. 이 비석의 뒤면에는 강경애의 간단한 략력소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있다. 《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특유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작가이다. 강경애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국 녀성문인들의 사랑과 지원에 힘입어 이 문학비를 세우는바이다.》 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이처럼 문학비를 세워 강경애를 추모하고있는 와중에 강경애는 《김좌진암살교사범의 동거녀》라는 청천벽력이 연변땅에 떨어졌다. 한심한 일이였다. 우리는 수수방관할수 없었다. 백주발검(白晝拔劒)의 기사 한국문화관광부는 강경애를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하지만 이 거동은 한국내 일부 권위인사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한국의 한 기사에 따르면 2005년 《1월 4일 오후,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기자를 찾아왔다. A씨는 문화관광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강경애씨가 백야(白冶) 김좌진(1889∼1930)장군의 암살교사공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부 장관에게 지난해 11월과 12월, 두차례에 걸쳐 강경애에 대한 문화인물지정철회민원을 제기했다>면서 문화부의 답신 두장을 보여줬다. 문화부는 A씨의 질의에 대해 <2005년 문화인물은 각 시, 도 관련 단체에서 추천을 받아 전문가 13인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 넘겨서 선발을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관의 (친일행적)조사 등 인물검증을 거쳐 최종 선정한것이라면서 소정의 절차를 거친것이기때문에 선정사항을 번복할수 없다고 답했다.> <문화부는 귀하께서 제기하신 강경애씨가 (김좌진장군암살교사공범)이라는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자료가 없기때문에 문화인물로 선정됐다.>고 했다. A씨는 한국문화관광부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룡정의 비암산에 강경애문학비를 세운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문화인물로까지 선정했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 인물이 없는가.>》고 격분해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태가 엄중해지는 시각에 한국 조선일보사이트는 《강경애는 김좌진암살사주범의 동거녀》라는 강경애에 대한 모독기사를 올렸다. 이 기사는 한국 《월간조선》 2월호에 《월간조선》의 오동룡기자가 한국 전 광복회 회장인 리강훈의 회고록에 의해 추적해 펴낸 추적기사이다. 실로 이 기사는 우리가 경모하는 저명한 작가 강경애를 모독하는 《백주발검》이라고 하겠다.  정의감에 불타는 합의 지금도 잊을수 없는 지난해 2005년 1월 17일. 이날 종전대로 오전 8시경에 나는 사무실(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사무실)에 출근하여 첫 일과로 추진회사이트와 더불어 중국의 동포사이트 및 한국사이트를 방문하던 중, 조선일보사이트에 《월간조선》 2월호에 발표된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사주범의 동거녀》란 추적글이 올라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자기를 진정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바장이는데 추진회에 출근하는 40대 후배 김혁씨가 들어섰다. 김혁씨도 인터넷에 뜬 추적글을 보았는지라 우린 강경애 모독기사를 두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나 김좌진장군암살 진상여부에 대해 잘 모르고있는 우리로서는 이렇다 할 견해를 내놓을수가 없었다. 그때다. 사무실에 50대 초반의 리광인씨가 들어섰다. 리광인씨는 78년급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생이지만 대학졸업후 줄곧 조선족항일투쟁사를 전공한데서 뭔가 알고있을것 같았다. 2004년 3월부터 추진회에 출근했고 사이트에서 리함으로 통하고있는 리광인씨를 두고 강경애모독기사를 보았는가고 물었더니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리선생은 한국 인터넷에 뜬 추적글을 어떻게 보고있소?》 《전혀 엉터리없는 독단글입니다.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과 무관합니다.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사람은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사람입니다.》 리광인씨는 단마디로 강경애는 김좌진장봅矩李?nbsp;무관함을 자르고있었다. 《력사근거가 똑똑하오?》 《저한테 자료가 있습니다.》 나는 졸지에 희망의 섬광을 보아냈다. 우리 셋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서 강경애시시비비사이버토론을 벌리자는데로 합의를 보았다. 리광인씨는 론문으로 써내겠다고 시원히 대답했다. 이는 정의감에 불타는 합의였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력사의 숙제로 그냥 남아있는 일제식민지시대의 친일파숙청은 반드시 철저히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억울한 사람을 친일파로 몰아부쳐서는 안된다. 식민지 36년이라는 우리 민족의 근대성이 처한 곤경이 만들어낸, 식민지로부터 광복을 맞은지 6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이 저승에 간 사람까지 억울하게 만든다는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으로부터 강경애를 풀어주어 명예를 원상복구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력한 력사적증거를 확보하는 길밖에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사이버공간에서의 투창(投槍)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월 24일 월요일인데 리광인씨가 사무실에 들어서며 론문을 메일로 넘기였다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놀라마지 않았다. 짧디짧은 며칠새에 해당 력사자료를 검토하고 론문으로 만들기까지 하였다니 말이다. 알고보니 리광인씨는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란 론문을 토요일인 1월 22일에 써냈는데 그날과 이튿날은 련휴일이여서 월요일로 미루었던것이다. 리광인씨의 론문을 읽으니 조리정연하고 설득력이 강했다. 또 편집자의 말까지 쓴데서 나는 신중성을 기하여 수정하고 김혁씨에게 넘기였다. 김혁씨는 유망한 젊은 작가이고 우리 문단의 인터넷고수이니 수정고 《편집자의 말》을 제꺽 타자해냈다. 사이버토론에 관한 부분적 마디는 김혁씨의 의견에 좇았다. 짤막한 《편집자의 말》을 전례없이 세사람이 손을 댔다는 말이 된다. 《요즘 한국 <조선일보> 인터넷을 통해 일제 강점기 녀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이라는  뉴스를 게재하면서부터 혼선을 빚고있다. 이에 본 사이트는 리함의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라는 론문을 올리오니 국내외 지성인들이 강경애시시비비토론에 적극 동참하여주기를 바란다. 본 사이트는 <열린 마당>코너를 통하여 이 토론을 한동안 지속적으로 끌고나가려 한다. 이 토론은 어디까지나 실사구시하고 학술적으로 되여야 하기에 인신공격이나 불순한 정치적목적이 담긴 글이 오를 경우에는 관리자들이 삭제할 권한이 있음을 알린다.》(《문화산맥사이트 편집자의 말》) 김혁씨의 한동안의 긴장한 인터넷작업을 거쳐 이 편집자의 말과 함께 리광인씨의 론문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가 문화산맥사이트에 올랐다. 시시비비의 대중화를 기해 《열린 마당》코너에 올리고 공지사항에 또 강경애의 사진을 석장으로 이어 올리였다. 그때가 1월 24일 오전 10시였다.  여기에 또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이틀전인 1월 22일, 《도라지》문학지사이트에 북경의 장춘식박사가 반벽거사라는 필명으로 쓴 글 《조선족작가 강경애의 행적에 관련된 두 시각》이 이미 올라있었다. 리광인씨가 론문집필을 끝낸 1월 22일과 같은 시각이였다. 1월 24일 우리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강경애시시비비사이버토론을 벌리자 그날 밤 8시경에 장춘식씨가 필명으로 문화산맥사이트에 《소설가 강경애의 김좌진장군피살련루설에 대하여》와 함께 리광인씨의 론문을 본후의 추가론증을 올리였다. 북경의 40대 후배의 가담은 나에게 큰 힘으로 되였다. 강경애시시비비에 대한 사이버토론이 벌어진후 리광인씨는 이 사이버토론에 뛰여든 사람을 찾기 어려울것 같다면서 북경에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소수민족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 장춘식씨와 손을 잡고 이 사이버토론을 벌려야겠다고 속타산을 터놓았다. 내가 련계전화를 알리였더니 리광인씨는 주동적으로 장춘식씨와 통화하면서 긴밀한 합작을 기대했다. 이들은 서로 인연이 닿지 못한 사이였다. 하지만 장춘식씨는 쾌히 승낙하였다. 《열린 마당》코너에 오른 리광인씨의 론문을 보고 장춘식씨가 강경애의 1929년 룡정행을 두고 문의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에 리광인씨는 1월 25일 《반벽거사님께 해답》이란 글을 올리여 자기가 1929년설을 따르게 된 연유를 성의있게 밝히였다. 장춘식씨도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였다. 이같이 이들은 사람에 앞서 인터넷으로 인연을 맺고 자주 통화를 가지였다. 장춘식씨는 무게 있는 반론글들을 수차 올리면서 동참을 보이였다. 사이버토론이 깊이있게 벌어질수록 떨쳐버릴수 없는 하나가 내 마음을 울렸다. 1930년 1월의 김좌진장군 피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집단적인 비밀행동이였다는것은 사실로 밝혀지면서 강경애와 무관하다는것이 지적되지만 이 기간의 강경애의 행적은 밝혀야 했다. 1929년 첫 간도행설이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한데서 더욱 그러하였다. 이 점을 리광인씨와 이야기해보았더니 그때까지도 강경애연구전문이 아닌 광인씨로서는 상기 《반벽거사님께 해답》정도에 머무르고있었다. 그랬지만 리광인씨는 이를 꼭 밝혀내겠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드디여 2월 5일 우리 《열린 마당》코너에 리광인씨가 쓴 글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이 올랐다. 사이버토론이 벌어져 10일만의 일이였다. 이 글에서 리광인씨는 강경애의 간도행은 재래의 1929년이 아니라  1931년 봄이라고 일목정연하게 밝히여 나를 탄복케 하였다. 사연은 이러했다. 2월초의 어느날 리광인씨는 시가지에 볼일이 있어 나온 연변대학 리광일교수를 만났다가 그한테서 한국판 《강경애전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리광인씨의 청구에 리광일씨는 그 시각 하던 일을 미루고 연변대학 자기 사무실에 가서 리광인씨에게 《강경애전집》을 넘겨주었었다. 2002년 5월 수정증보로 되고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리상경 녀교수의 엮음으로 된 《강경애전집》이였다. 리광인씨는 보물을 얻기라도 하듯 며칠간 《강경애전집》을 깐깐히 독파하고 강경애 본인의 평론과 수필을 통해 강경애 첫 연변행이 1931년 봄이란것을 실증했다. 이외 여러가지 자료연구를 통해 써낸것이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이다. 내가 알건대 강경애의 첫 룡정행을 두고 강경애관련 연구학자들이나 해당 이들은 모두 1929년설을 따르고있는 실정이다. 연변대학 채미화교수나 북경의 박충록교수, 연변의 김순금선생, 조선의 은종섭, 김창현 연구가들 모두가 그러했다. 리광인씨가 밝히여낸데 의하면 이들 연구가들의 연구시원은 모두 조선의 김헌순학자가 쓴 《강경애론》이였다. 《강경애론》은 《현대작가론》에 실린 글로서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1961년에 펴낸 책으로 알려진다. 이 책에서 김헌순학자가 1929년이라고 하니 그후 학자들은 모두 이를 답습하고있는터였다. 큰 시름을 덜었다. 김좌진장군의 암살자가 밝혀지고 강경애의 첫 연변행, 다시말해 첫 만주행이 1931년으로 밝혀짐으로써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암살과 무관하다는것이 사실로 립증되는것이다. 연변대학 리광일씨가 큰 도움으로 되였다. 한국 리상경교수의 《강경애전집》이 아니였더면, 리광일씨의 도움이 아니였더면 1931년설을 인차 밝혀내기 어려웠을것이다. 따라서 리광일씨는 광인씨의 청구대로 한국의 리상경교수와의 련계를 이어주었다. 리광인씨는 리상경교수와 자주 메일련계를 가지는 가운데서 리상경교수를 통해 한국의 소식과 동태를 깊이 헤아릴수 있었다. 리상경교수는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고 강경애를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추천한 분이며 강경애시시비비에서 전렬에 나선 분이였다. 하지만 리상경교수는 김좌진장군피살력사를 모르고 그때까지도 강경애 첫 연변행을 1929년으로 본데서 힘있는 반론을 내놓을수가 없었다. 우리 문화산맥사이트가 시비를 벌리니 리상경교수는 상기 두가지 관건시비에서 큰 론거를 얻게 되여 강경애선정에서 끝끝내 관건적인 기여를 하게 되였다.  3월의 문화인물로 한국서 떠올랐던 강경애는 한달 푼히 문화인물란에서 소외되여 자취를 감추고있는 실정이였다. 이에 따라 나는 강경애에 관한 토의가 영향력을 과시하자면 한국의 문화관광부사이트에 우리 글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리광인씨는 나의 뜻을 헤아리고 인터넷에서 문광부사이트를 찾아냄과 동시에 한국문화관광부 정동채장관에게 드리는 글 두편과 강경애의 무죄함을 증명한 우리 글 8편, 도합 10편을 련속 올리여 한국의 지성인들과 배합해나섰다. 이밖에 《도라지》문학지에서도 수고가 많았다. 이 문학지사이트는 문학살롱코너와 자유게시판코너를 통해 장춘식씨의 강경애 관련글들을 제때에 올리고 우리 문화산맥사이트의 사이버토론글 4편을 《문화살롱》코너에 올리여 지성인들의 주의를 보다 환기시켰다. 《도라지》에서 이 모든것을 소리없이 이끈것은 반벽거사― 장춘식씨였다. 문화산맥사이트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강경애의 김좌 진장군암살시비》는 2005년 1월 24일부터 3월 7일까지 한달 남짓이 지속되였다. 도합 근 20편의 론문과 글들이 올랐는데 장춘식씨가 3∼4편의 글을 쓰고 대부분은 리광인씨가 썼다. 강경애, 천국에서 미소 짓다 2월 28일, 우리는 한국의 리상경교수와 한국문화관광부사이트를 통해 녀류작가 강경애는, 한동안 보류 혹은 락방될 위험끝에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최종  선정되였다는 바라고 바라던 뉴스를 접하였다. 그리고 한국 리상경교수가 보낸 한국문화관광부편 《2005년 3월의 문화인물 강경애》 책자를 받았다. 이는 단순한 선정이 아니라 강경애를 친일로 몰아가던  모독설에 대한 힘있는 반격, 강경한 부정이였다. 이로 하여 강경애는 천국에서 미소를 짓게 되였다.  이 뉴스는 그날로 리광인씨의 글 《강경애는 끝끝내 선정되였다》로 문화산맥사이트에 떴다. 《도라지》문학지사이트는 이 글을 적시적으로 본 사이트 자유게시판에 올리였다. 이튿날 3월 2일 그들 자유게시판에는 또 《강경애 명예원상복구에 힘바친 이들께》란 올드컴의 서명글이 올랐다. 머리가 수그러지는 감사한 글이였다. 이 글은 《도라지》사이트의 주선으로 문화산맥사이트에도 떠서 힘으로 되여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올드컴이란 김혁씨, 시시비비 모든 과정을 지켜본 김혁씨의 소행이였다. 그 글을 옮기면 이러하다.  《지난 몇달간 한국 매스컴들에서 반도를 들썽하며 혼선을 빚었던 강경애 김좌진암살동거범시비가 끝끝내 우리들의 승리로 락착을 보았다. 이는 우리 재중조선족의 문화의 힘을 환기시켜주고있다. 이 거대한 시비에서 북경의 반벽거사님, 연변의 리함님 등 여러 학자 지성인들이 사명감으로 강경애 위상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바치고있음을 그 동안 나는 보았다. 력사의 음영 헤치기작업에 로고를 아끼지 않은 반벽거사님, 리함님께 진심 축하와 감복의 인사를 드리고싶다.》 그리고 성숙이라는 필명으로 우리 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 《수고했수다》라는 치하의 글을 올렸는데 그 원문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녀류작가 강경애가 시시비비 끝에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으니 참 잘했수다. 여러 지성인들의 로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리함, 반벽거사님 고맙습니다. 특히 강경애시시비비토론을 벌린 문화산맥홈페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잘했수다. 수고했수다.》 한국의 리상경교수(3월의 문화인물선정위원회 위원)도 2005년 2월 28일에 리함에게 감사의 메일을 보내왔다. 《리함선생님께: 답신이 좀 늦었습니다. 강경애는 그대로 3월의 문화인물로 하기로 결정되였습니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여러 자료들을 제시하고 또 연변에서 문광부게시판에 글도 올려주시고 해서 친일파 운운은 사실무근인것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서도 과거사 정리 어쩌고 하면서 앞으로도 다른 인물을 놓고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역설적인것은 보훈처에서 제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10월에는 김좌진장군이 선정되여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관심 가져주십시오. 관련회의를 하면서 이쪽에서 제시했던 자료를 한부 첨부합니다. 참고해주십시오. 리광일선생님, 장춘식선생님께도 소식과 안부 부탁드립니다. 리상경 드림.》 력사의 진실앞에서 모든 허위와 모독은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강경애의 명예는 원상복구되였다. 이번 토론에서 시종 주장으로 뛴 사람은 리광인씨이고 다음은 장춘식씨였다. 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들의 사명감을 지닌 노력이 없었다면 강경애시시비비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릴수가 없었을것이다. 력사는, 조선족문학사는 이들의 수고를 잊지 않을것이다.  아마도 지금 강경애는 천국에서 악령처럼 따라붙으려 하던 친일, 살인 혐의에서 놓여나와 환한 미소를 짓고있을것이다.  에필로그  어느 누가 강박을 하지 않았는데도 일본극우세력의 충견(忠犬)노릇을 자청하는 《신친일파(新親日派)》들이 속출하고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감안하여 볼 때 일제식민지시대의 친일파숙청은 반드시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일제식민통치 36년, 광복후 60년 동안의 친일파숙청의 지연(遲延)이라는 이 콘텍스트를 념두에 두고 문제를 생각하기도 해야 한다. 강경애를 두고 친일론란을 벌렸듯이 개인별 적발도 필요는 하다. 그러나 반드시 신중성을 기해야 할것이며 단 한사람이라도 억울하게 만들어서는 안될것이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또다시 새로운 상처를 내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것이다. 그리고 친일문제해결에 있어서 개인별 적발과 동시에 구조적으로 친일문제에 접근하는것도 바람직할것이다. 우리 민족의 근대성이 처한 곤경이라는 큰 콘텍스트안에서 친일문제를 다시 파악함으로써 개별적 접근을 넘는 기관단체들의 참회운동을 일으키는것이 대안일수도 있다. 각 종교단체, 각 언론단체를 비롯한 각계 각층에서 친일을 고백함으로써 대관용으로 가는 길을 예비해야 할것이다. 이를테면 강경애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이라는 뉴스를 게재하여 혼선을 빚어냈던 한국 《조선일보》는 그래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수 있단 말인가?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으로부터 놓여나는 근본적인 길은, 대관용을 바탕으로 동아세아와 함께 21세기를 여는 열쇠를 따는 그 근사한 작업에 모국이나 해외동포들이 동참할수 있을터인데, 모국인 한국에서 소모적인 쟁론만 횡행하는 현실이 안타까울뿐이다. 특히 죄없는 사람에게 억울하게도 친일파란 감투를 들씌움으로써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가는 현실이 안쓰럽기만 하다.                                                      2006년 8월 <<연변문학>>2007년 2월호
2    [문학] 문인은 작품으로 살아남아야 (조성일) 댓글:  조회:1100  추천:96  2007-03-08
    정해년을 맞았다.    류수같은 세월은 무정하게 나를 «고희»의 령마루에 올라서게 하였다.일세의 호걸이였던 조조같은 사람도 «잔 잡고 노래하노니, 인생이 그 얼만고. 생각하면 아침 이슬 괴로움도 많을시고…»라고 했듯이 내가 «고희»의 령마루에 올라 몸부림치며 살아온 칠십평생의 로정을 돌아보니 춘몽같이 묘연하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허무하고 인생이 무상함을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살아간다는것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이 세상에  남기고 저 하늘끝으로 가려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람따라 되는대로 질퍽이다가 갈 때되면 가겠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삶을 포기하였거나 자기자신을 상실해버린것과 방불하다.      나는 젊은 시절에 문학을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문단에 발을 붙인 때부터 지금까지 글도 쓰고 작은 벼슬도 하면서 숨가쁘게 살아왔다. 글을 쓰느라고 분주하였지만 좋은 글을 쓰지 못해 참회가 가슴을 친다.    문인은 작품으로 평가되며 결국 작품으로 살아남는다. 돈을 많이 벌어서 보다 좋은 사업을 확장하거나 벼슬을 하여 권력의 맛을 보려는것은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할 노릇이지 나같은 문인에게는 당치 않는 일이다.    그런데 글쓰는 일, 다시말하면 작품생산은 홀로 외로움을 씹으면서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요청하는 어려운 작업이요, «마음의 오지»를 찾아나선 «도보고행승»의 고달픈 려정과도 같은것이다. 여기에는 첩경이 없다. 뒤문으로 드나들거나 누구에게 매달리거나 떼를 지어 몰려다니거나 줄타기를 하면서 이른바 «작품»을 발표하고 수상하려는 욕심은 버리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문인이란 «외도»해서 잘되는 법이 없다.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강직하게 살면서 곁눈을 팔지 말고 일심전력으로 지속적으로 작품생산에 이악스레 달라붙을 때야만 참다운 문인의 «보좌»에 앉을수 있는것이다. 나의 여생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였지만 숨이 붙어있는 한 치렬한 붓의 싸움을 벌려 작품쓰기에 열을 올리며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의 민족문화행사 추진에 박차를 가하겠다. 이는 우리 민족의 문화지키기와 살리기이기때문에 한줌의 보잘것 없는 육신을 소진하면서 최선을 다하려고 마음을 가다듬는다.-《문학과 예술》2007.1  
1    조성일 프로필 댓글:  조회:1424  추천:114  2007-03-08
조성일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회장문학평론가bbk3156@hanmail.nethttp://koreancc.com연변주당위 선전부 과장,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연변작가협회 주석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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