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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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사랑노트-조성일
2013년 05월 28일 15시 11분  조회:1616  추천:4  작성자: 조성일
어머니의 사랑노트

조성일

생명을 건 자식사랑


나는 지금도 지난날 책에서 본 영국의 한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인 실화를 잊을수가 없다. 그 실화의 줄거리를 간추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865년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밤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라는 고장의 언덕길을 남편 없는 한 녀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걷고있었다.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눈보라속에서 아기를 가슴에 감싸안고 언덕을 넘던 녀인은 어두움과 눈보라에 그만 길을 잃게 되였다. 이 녀인은 길을 찾으려고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가슴에 품은 아기만은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만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이 녀인은 눈보라속에서 동사하고말았다.

눈보라가 그친 다음날 아침 그 길을 지나던 어떤 행인에 의해 이 녀인이 발견되였다. 그런데 이 녀인은 앉은채 웅크리고 벌거벗은 알몸으로 죽어있었다. 추위속에 안고있는 아기가 추워할가 걱정되여 자기의 옷을 하나씩 벗어 아기를 감싸주느라고 이 녀인은 그만 알몸이 되여 동사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녀인의 품에 안겨있던 아기는 살아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런던 교외에 있는 착한 구두수선공이 이 아기를 데려다가 키웠다.

이 아기는 자라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어찌하여 동사하게 되였는지를 알게 되였다. 이 소년의 꿈은 자나깨나 유명한 인물이 되여 어머님의 은혜를 갚는것이였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어머님 은혜를 갚기 위해 큰 인물로 키워달라고 날마다 기도했고 하나하나 목표를 착실히 세우고 피나게 공부를 계속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하위직 공무원을 거쳐 영국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하게 되고 1916년 어머니가 세상 뜬지 51년이 되던 해에 영국 수상(1916-1922년)이 된다. 그가 바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1863-1945년)이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어렸을적부터 가슴깊이 새겨들은후 “어머니는 나를 위해 죽었다고, 나 대신 죽었다고, 알몸으로 죽었다고.”하면서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한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보다싶이 이 이야기는 가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엮은 눈물겨운 감동적인 실화이다. 이 실화가 시사하다싶이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에도 오로지 자식걱정만 하며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자식을 살리며 자식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는것, 이것이 바로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어머니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며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절대적사랑이다. 자식에게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은 그야말로 거룩하고 위대하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으며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절대적가치를 찾아볼수 없다. 우리가 “어머니”란 단어를 부르기만해도 마음이 포근해지고 코끝이 찡해오고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리유는 바로 어머니의 이런 헌신적이고도 희생적인 사랑때문이리라.

우리 속담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수십년의 세월속에서 정말 많은것들이 변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세월의 모진 풍파속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것이 있는바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임신과 출산은 녀성의 건강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데 예로부터 어머니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녀를 낳아왔다. 또 출산후에도 오래도록 자녀의 양육과 성장을 위해 이루 말할수 없는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자식이 어엿한 성인이 되여도 어머니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일뿐이다. 지어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허옇게 늙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걱정을 놓지 않는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배신할수 있어도 어머니는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결코 자식을 버리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포옹한다. 차고넘치는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영원한 사랑이다.

자식의 앞길을 열어주는 사랑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이 자라서 룡이 되고 스타가 되고 훌륭한 사람으로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기보다 나은 미래를 자식에게 주려고 헌신적으로 노력하는데서 집약적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의 앞날을 열어주는 사랑이라고도 말할수 있을것 같다.

중국의 고사성어에는 맹모삼천(孟母三迁)이라는 말이 있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맹자의 앞날을 위한 교육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했다. 처음에는 교외에 살았는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어 맹자가 죽은 사람을 묻는것을 보고 흉내를 내며 놀이를 하는것이였다. 이를 본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시장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맹자가 물건을 사고 파는 장사군들의 흉내를 내는것이였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 역시 맹자의 공부에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세번째로 서당근처로 집을 옮겼다. 맹자는 매일같이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놀이를 하고 놀았다. 맹자 어머니는 이에 안심하고 그곳에 정주했다고 한다. 여기서 맹자모삼천이라는 말이 유래되였다고 한다.

맹자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과 앞날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죄다 감내했다. 나중에 맹자가 명유(名儒)로 된데는 그의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이 깃들어있는것이다. 나의 어머니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어머니(김혜숙)는 학식도 없고 대단한 가문의 출신도 아닌 평범한 시골녀성이였다. 어머니가 38세 되던 해(1948년)에 아버지(조기형)가 제3차 중국 국내혁명전쟁에서 전사하자(그때 아버지 년세는 41세, 나의 나이는 12세, 내아래에 두 친녀동생과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갈데 없는 사촌녀동생이 있었다.)어머니는 남편없이 홀로 올망졸망한 우리 네 어린것들을 거느리고 화룡현 서성촌에서 살아가야 했고 자식들의 교육을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는 가랭이가 째지는 가난과 삼재팔난(三灾八难)의 고통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희망과 자식에 대한 큰 포부를 안고 자식에 대한 교육에 관심을 쏟았다. 지금도 어머니의 몇가지 일은 내 가슴을 뜨겁게 울리고있다. 그중 두가지만 골라서 이야기하련다.

한가지는 1950년 내가 화룡현(지금은 화룡시)서성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의 일이다. 당시 화룡현 서성촌에는 서성중학교가 있었다. 그때의 서성중학교는 사립학교였기에 학비는 자기가 부담해야 했다. 서발막대 거칠것 없는 생활난에 시달리는 어머니로서는 이 학비를 감당하기에는 태부족이였다. 나중에 내가 커서 안 일이지만 그 당시 어머니는 나의 중학교 진학을 두고 근심걱정이 태산같았고 고민과 번뇌로 하여 며칠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럴 때 서성촌지도부에서는 한결같이 어머니를 보고 나의 아버지가 김일성부대산하에서 반일운동을 했기에 나를 조선 만경대학원으로 보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 국내혁명전쟁에서 희생한 아버지의 분묘나 유골도 찾지 못했는데 나를 이 땅을 떠나게 할수 없었다는것이였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나의 학업을 중단시키고 시골에 파묻히게 할수는 없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자식을 꼭 공부시켜야 하고 공부는 때를 놓치면 힘들게 되며 공부만이 자식의 앞날을 열어주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수 있다고 느낀 어머니는 동분서주하면서 화룡현내의 각 중학교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화룡중학이 국립중학으로서 경제난이 심한 가정의 학생들에 한해서는 조학금을 발급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를 넘길세라 조급한 마음으로 50여리 길을 걸어 화룡중학에 찾아가서 관계 선생님을 만나 우리 집 가정상황과 나의 인적사항을 이야기하자 그만한 조건이면 화룡중학에 전학하면 조학금을 받을수 있다는 희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어머니 가슴속에서는 기쁨이 불꽃처럼 확 피여났다.어머니는 기쁨과 감격을 안고 힘드는줄도 모르시고 도보로 귀가하여 서성소학교 지도부와 서성촌 당지부에 알렸다. 어머니의 피타는 노력과 그들의 추천을 받게 되여 나는 화룡중학에 진학하게 되였다. 나의 조그마한 가슴이 기쁨으로 터질듯했다. 이렇게 되여 나는 어린 나이에 난생처음으로 어머니곁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하게 되였다. 진학은 기쁜 일이였지만 어머니 슬하를 떠난다는것은 가슴속이 물러나는듯 아픈 일이였다. 어린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어머니 마음도 마찬가지 심정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의 앞날을 위해 아픔을 감내했고 나도 아픔을 딛고 배움의 길에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머니의 이런 노력이 없었더라면 나는 막무가내로 진학의 마음을 접고 울며 겨자 먹기로 호미자루를 잡았을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다른 한가지는 아버지의 친필편지에 관한 일이다. 나의 아버지는 광복후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하여 1948년 희생되기전까지 후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인편을 통해 여러차례 친필편지를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편지를 접할 때마다 자식들을 모아놓고 모두가 듣도록 어머니가 직접 소리내여 느릿느릿 읽거나(어머니는 해방후 야학에 다니면서 조선어를 배웠음. 소학교 저급학년 수준.) 나더러 대신 읽으라 했다. 편지내용은 대체로 어머니에 대한 문한, 자식에 대한 관심, 전방의 소식, 고생을 락으로 삼으라는것, 혁명이 완수되면 잘살게 된다는것, 승리는 멀지 않았다는것, 어머니더러 촌정부 녀성사업에 적극 참가하라는것…등으로 요약할수 있다.

내가 아버지의 편지내용을 이토록 정확하게 기억하는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내가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어느 하루 저녁 나를 불러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변죽을 울리다가 농속에 보관해두었던 아버지의 네통의 편지를 꺼내여 나에게 넘겨주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성일아, 너의 아버지는 해방전엔 일본놈들과 싸웠고 해방후엔 중국의 혁명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것을 바쳤다. 너는 아버지의 혁명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젠 네가 다 컸으니 이 편지를 네가 영원토록 보관하라. 아버지는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했다. 해방전에 아버지사진이 몇장 있었는데 일본놈들의 감시와 추적대문에 그 사진들을 불살라버렸다. 해방후 전쟁때에는 아버지사진 한장도 없다. 아버지의 유산이란 이 편지뿐이다. 네가 어려울 때마다 이 편지를 보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되거라.”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편지를 나에게 남겨준것은 옳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키워주기 위해, 나에게 생의 의미를 정리하고 옳바로 사는 지혜를 터득시키기 위해서였을것이다. 이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어머니의 현장교육이였다. 나는 어머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지금까지 아버지의 네통의 편지를 보관하고있다. 그중 한통의 편지 원문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철자, 띄여쓰기까지)옮기면 다음과 같다.

“혜숙동무

오래동안 소식을몰라 궁금하던차에 그대에곂지를 접견하니 반가운 마암 이루 측양할수 없오이다 그동안에 몸무고히 잘 잇으며 성일이 여러남매도 충실하며 복녹(우리 집에서 자라고있던 사촌 녀동생-필자 주)이도 별고없으며 북대지 원길(나의 외삼촌-필자 주)이택내도 무고하며 번탄(?)생산대여러 동무덜도 평안하온지 항상축복하난바이외다 이 동무난 싸흠터에서 건강한신체로 투쟁하고잇으며 여러동무덜도 잘싸우고잇슴니다 후방에서 잘 지원하여주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혜숙동무난 업는살림에 고생이 얼마나만슴니까?고생으로 생각지마시요 혁명을 완성한후이면 지금고생이 광영스러운일임니다 멀지않아혁명?시면 반가히마지할것임니다 그리고 생활에 대하여 사회에후원이 업슴니까? 김창원동무가 나가니 모든것을 물어셔 나가기를 바람니다. 할말은만흐나 다음다시쓰갯기이만끗침 회답을 바람

조기형 "

우리 민족의 속담에 “부모 팔자가 반팔자”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의 뜻인즉 자식이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이미 자식의 인생 절반은 정해진것이나 다름이 없다는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재산을 얼마나 물려받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가풍이나 부모의 성품, 인생관, 지식, 자녀교육에 대한 자각과 열정 등이 어떠냐에 따라 그 자식의 앞날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는것을 시사해주고있다.

나의 어머니가 하늘같은 남편이 세상을 뜨고 홀로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역경속에서 무서운 생활력을 갖고 자식의 교육과 앞날을 위해 몰부은 정성은 태양처럼 뜨거웠다. 어머니의 눈물과 고생과 고통과 사랑, 교육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였고 동생들도 건강하게 성장하게 되였다. 나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은 그야말로 지대하고 위대했다.

이 땅을 살아온 우리의 어머니 모두는 바로 자식을 위한 마음과 교육에 있어서는 한가지이다. 누군가가 “어린아이의 운명은 그 어머니가 만든다”고 한 말은 그 얼마나 지당한 말인가!

영원히 갚을수 없는 사랑

세계의 훌륭했던 어머니들의 삶은 추적해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받는것보다는 베푸는것을 천명처럼 생각하며 살았고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식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 녀성들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희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기에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어버이의 은혜 특히 어머니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넓고 끝이 없어 도저히 갚을수 없다고 하여 “호천망극(昊天罔极)”이란 사자성어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는가!

어느 자식이나 할것없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어머니의 무한대의 사랑의 빚을 진 채무자이다. 무엇으로 갚을수도, 탕감받을수도, 또 갚아도갚아도 못다 갚을 어머니사랑의 빚을 진 자식들이다. 우리가 살아 생전에 있는 힘을 다하고 갖가지 방도를 대여 어머니를 잘 모신다고 해도 어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수가 없는것이다. 실로 자식은 죽었다 깨여나도 어머니의 사랑의 은혜에 죄다 보답할수 없는것이다. 하기에 항간에서는 “다만 부모에게 근심걱정만 끼치지 않아도 효도한것”이라 하지 않는가.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수 없는 어머니사랑이지만 이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려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도 은혜에 대한 보답의 모자람을 느기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 경우 조선시대의 학자요, 정치가요, 문학가인 서포 김만중이 생각난다. 김만중은 한국문학의 3대선각자중의 한분으로서 훈민정음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켰다. 김만중은 병자호란때 자결한 애국충신인 김익겸의 유복자로서 어려서부터 어머니 윤씨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채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기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김만중의 맏손자 김춘택이 쓴 《북헌집》에는 김만중의 효성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여있다.

“내 일찌기 선생(김만중)이 어머니(윤씨) 모시는 광경을 본적이 있거늘, 어리광을 떠나는것이 흡사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달라는 어린애와 같았다. 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얼굴에 미소가 솟도록 하기 위해 선생은 별의별 우습강스러운짓을 다하셔서 당시 어릴 때인 나(김춘택)로서도 따라 하기 힘들었다.””선생은 유복자로 태여나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것을 평생의 아픈 일로 여겨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성을 바쳤는데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모습은 마치 병아리가 어미앞에서 삐악거리며 노는것과 같았다.”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인 리재(李縡)의 《삼관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인(만중의 어머니 윤씨)은 옛날 력사나 별난 사실을 적은 책을 몹시 즐겨 읽거나 귀를 기울이군 했는데 서포(김만중)는 많은 이야기책을 모아서 그것을 읽어드리며 어머니를 즐겁게 하였다. 서포는 젊어서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나라의 일이 아니고서는 한번도 어머니곁을 떠난 일이 없었으며 벼슬을 그만두면 이른 아침에 어머니께 문안인사 드리러 가서는 저녁이 되여 자리에 드셔야 돌아오군 했다.”

이처럼 애틋한 효성을 지닌 김만중이지만 숙종의 버림을 받아 남해 외딴섬으로 귀향을 가다나니 어머니의 림종을 지키지 못해 몹시 괴로와했단다. 그의 마음인들 오죽했겠는가. 효성에 각별한 신경을 쓴 김만중과 같은 위인들도 어머니사랑에 대한 채무자로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 빚은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다. 그중 한가지만 말하면 어머니 생일때마다 일가친척이 모여서 식사 한끼는 해드렸지만 어머니의 회갑잔치나 고희연을 치러드리지 못한것이 지금 와서 뼈 아프게 후회된다. 어머니는 1970년에 회갑년이였고 1980년이 칠순 고희년이였다.

1970년은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라 안해와 장모는 정치적박해에 시달렸고 생활형편이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세 자식 기르기에 가슴을 쥐여짜야 했으며 나는 돈화 마호에 있는 “5.7간부학교(干校)”에서 로동개조를 하고있을 때라 집으로 마음대로 올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니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하시고 자기의 회갑잔치를 생각도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너 아버지도 없는데 내 홀로 무슨 회갑잔치냐고 하시면서 회갑잔치를 치르는것을 단호히 거절하셨다. 1980년은 어머니가 중풍에 걸려 고생하시던 해이다. 내가 회갑잔치도 못했는데 고희연을 조촐하게나마 치러드리려고 어머니에게 말씀 올렸더니 거절하셨다.

“네 마음은 고마우나 친술잔치상을 받으면 내 마음이 더 아프게 될터이니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네가 차린 잔치상을 받은것으로 하겠으니 걱정 말고 마음을 놓고 자식들이나 잘 키워라.”

그후에도 어머니께서는 여러번 회갑잔치나 고희연에 대한 말만 나오면 반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당부를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1986년에 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되여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어머니의 일생은 불우했다. 아버지께서 반일운동을 하고 투옥되고 해방후에는 해방전쟁에 투신하고 일찍 세상을 뜨시다나니 어머니는 즐거운 부부생활을 얼마 하지 못하셨다. 잔밥에 빠져 해볕을 볼 겨를이 없었고 반평생을 흙속에 묻혀사시다가 도시로 들어오셨지만 병환에 시달리시다가 행복도 얼마 누리지 못하시고 불행하게 저승으로 가셨다. 어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고통과 희생의 련속이였다.

옛날사람들이 말하기를 고감진래(苦尽甘来)라 고생끝에 락이 온다고 했는데 나의 어머니는 그런 행운을 가지지 못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른바 대학공부까지 했다는 나는 반포지효(反哺之孝)와 반포보은(反哺报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이 들어 늙어갈수록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한 뼈 아픈 후회와 죄책감이 가슴을 치군 한다. 우리 조상들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했은즉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인것 같다.

자식을 위해, 조씨가문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삶을 포기해야 했던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살아서도 다 갚지 못했고 죽어서도 영원히 다 갚을수 없는 채무자요 숙명적인 불효자이다. 불효자는 운다. 어머니…

-연변인터넷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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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apk333
날자:2013-05-29 21:42:13
오랜만입니다. 저를 잊지 않고 계시니 매우 고맙습니다. 저는 조글로를 통해 유치환의 친일에 대한 김선생의 글(유치환문학상설치에 대한 비판적태도를 포함)을 다 보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견해에 동감입니다. 우리 문단에 정도를 세우기 위한 김선생의 노력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추진회 사이트(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 유치환관계에 관한 선생님의 몇편의 글,연변대 김관웅교수의 2편의 글 그리고 다른 분의 글도 올렸습니다.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조성일
2   작성자 : 김송죽
날자:2013-05-28 21:08:45
아래글은 제가쓴겁니다.
1   작성자 : 조성일선생님
날자:2013-05-28 20:58:47
조성일선생, 이젠 아마 조선생께서도 다 알게되였으리라 믿는데, 나는 요즘 여러날을 한국에서도 친일론난에 말려들어 감히 버젓이 행사못하는 친일파한간문인 청마유치환의 문학제를 연변의 최룡관시인이 연변에 끌여다 감히 버젓이 유치함에 놀라 고심한 끝에 "이러면안되는데" 막아보려는데서 견결히 반대해 나섯던겁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연변작가협회를 얕잡아보는것일까, 아니면 쥐락펴락하자는걸까? 아닙니다. 그럴맘 추호도 없거니와 내라는 인간원체가 그럴만한 능력도없는 위인인거야 조선선생도 아는바아닙니까?
어떤 네지튼은 최욘관이를 배짱이 대단하다며 공공연히 나서서 칭찬하고 부추키는데 꼴불견입니다. 제정신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어는 연변주당위선전부 령도가 참여해 상을 주기까지 했다니 혼돈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왜서들 이럽니까? 연변은 후세에 대한 혁명전통교육을 몹시 중시하는걸로 알아왔는데 이제는 그것이 필요없다고 구중천에 집어던지는판입니까? 그러는것이 정책으로 이미 락실이 되였다면 나는 두손들고 일단 아예 입을 다물고말텝니다.
나의 립장은 정반대이니까요.
친일파한간문인임에 분명한 자의 문학제를 연변에서 유치함이 그래 장래문화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리란말입니까? 정녕 계속 그런다면 그러한 행사는 만민의 반감이나 쌓을 역행이라 보아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선생보기에는요? 연변에서는 왜 그모양잉 되여갑니까? 통탄할 일입니다.
연변문학평론계에서 침묵하고있으니 심히 의심이 가는군요, 조선생은 대체 어떤 견해를 갖고있는지 시원히 알고싶습니다. 저한테 알려줄수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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