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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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지심이 척박한 풍토
2013년 07월 29일 11시 02분  조회:3032  추천:2  작성자: 포럼관리자

시비지심이 척박한 풍토

 

조 성 일

 

시비지심

 

《맹자》의 “공손축장”(公孫丑章)에는 사단(四端)이란 말이 나온다. 사단이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이르는 말이다.

《맹자》의 4단에 나오는 수오지심, 사양지심, 측은지심 등은 모두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고 불쌍히 생각하거나, 겸손하고 사양하거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등으로 이들은 모두 수기(修己), 수신(修身) 즉 스스로를 관리하고 바로 세우는 덕성들인데 반하여 시비지심은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우리가 냉정하게 심중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것의 하나는 시비지심인것 같다.사물이나 리치, 사고, 행위가 옳은지 옳지 못한지를 구별하는 능력이 가장 기본이다. 필자는 불교를 믿지 않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심(三毒心) 가운데 ‘어리석음’이 곧‘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는 마음 상태’ 즉 시비지심 능력의 결손을 의미하는바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회와 자연의 질서,공정한 기준, 량심과 상식에 따라 판단하고 구별하지 못한다면 참된 사람이기를 포기한것과 다름이 없으며 그 결과는 사회를 소란시키고 정의가 죽고 정도가 눌리우고 불의가 판을 치게 된다.

우리 조선족문단과 일부 언론인들은 시비지심이 없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김문학은 10년을 웃도는 긴긴 세월에 중국을 비판하고 조선족과 한국을 비하하는 일본 우익세력의 어용문인으로 친일, 반화, 배족의 행각과 매문매필(賣文賣筆)활동을 진행하여왔다. 우리 동포사회의 일부 문인과 지식인들은 시비지심과 량심을 버리고 각종 수단을 리용하여 지속적으로 친일파 김문학을 비호하고 그에 대한 반대론자들을 좌적인 매질군(打手)으로 매도하는것이 그 일례라 해야겠다. 이로하여 우리 문인과 지식인 사회는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적반하장(賊反荷杖), 지록위마(指鹿爲馬), 어목혼주(魚目混株), 흑백전도, 차도살인(借刀殺人), 가화어인(嫁禍於人)등 비정상적인 일들이 판을 치면서 시비가 없는 정의부재의 대혼란속에 빠지고있다.

 

김문학현상의 핵심문제

 

“김문학현상”에 대한 론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찬반론자들이 계속 대립각을 세우고 “랭전상태”에 처해있다. 그런데 쌍방이 노리는 초점은 다르다.

“김문학현상”의 찬양론자들은 “공기일점, 불급기여”(攻其一占, 不及其餘)의 수법으로 김문학이 주장하는 기본적인 지론을 회피하거나 은폐한 나머지 대방의 비판 문장에서 나타난 일부 거치른 말과 일부 과격한 현상에 대한 비판에만 예각적대응을 꾀하는데 반하여 “김문학현상”의 반대론자들은 김문학의 착오적인 지론을 거머쥐고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있다. 따라서 그 론쟁의 초점이 엇갈려 론쟁의 접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이는 아주 반상적인 현상이다. 이 론쟁에서 시비가 갈라지려면 “김문학현상”의 핵심문제를 에워싸고 백가쟁명을 벌려야 한다. 대방의 언어표현에 나타난 문제에 대한 론의로 김문학의 주장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덮어감추거나 묵살해서는 안되며 다른 방향으로 호도해서는 안된다.

“김문학현상”에 대한 론쟁은 2000년대 초 김문학의 《중국조선족대개조론》,《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 ,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으로부터 인기되였다. 김문학은 《중국조선족대개조론》을 빌어 “조선족녀성들은 20세기의 위안부”,“연해지역으로나 해외로 진출한 조선족녀성들은 창녀(娼女)군단”, “조선족사회는 남자는 도둑놈, 녀자는 창녀(娼女)인 남도녀창(男盗女娼)의 사회”, “남조선놈은 사기치고, 북조선놈의 인육(人肉)을 팔아 넘기는 중국조선족”, “사소한 배신도 습관이 돼버린 조선족”, “동굴속에 사는 조선족”, “조선족이 중국에 공헌한 건 김치와 개고기뿐”, “조선족사회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원”, “조선족은 초우센주(肏鲜族)”, “조선족은 팬티를 입은 원숭이” 등등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리고 《중국국민에게 고함》과 그 재탕인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이라는 책에서 중국을 “문화가 없는 문명 고국”,“문화를 반대하는 성향을 지닌 나라”, “문화의 사막”, “류망의 반리성주의가 살판치는 나라”, “우민정책으로 찌들어온 8억 아Q의 나라”, “례의렴치가 없는 후안무치한 나라”라고 매도하였다. 중국을 반대하는 김문학의 악렬한 행각은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2006년)이란 책 출판에 이르러 극도에 도달했다. 따라서 “김문학현상”에 대한 반대론자들의 비판은 점차적으로 이 책이 퍼드린 반화언론에 모를 박게 되였다.

그렇다면 “김문학현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필자의 천박한 생각에 따르면 일본 우익세력의 대변자로 나타나 일본군구주의의 죄행을 “력사적인 “공로”로 둔갑시킴과 아울러 무치하게 “수비립전(樹碑立傳)하여 가공송덕(歌功頌德)하며 중국을 비롯한 조선반도와 중국조선족의 력사외곡과 위대한 인물들의 공적을 말살하는 나발을 거침없이 불어댄것이라 말할수 있다.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표적인 책은 김문학의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 출판하려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김문학은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이란 책에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중국에 대한 “해방전쟁”이며 “五族協和”, “王道樂土”라는 위만주국의 건국리념은 일제 식민지전략의 지도이념을 찬양하면서 만주국은 “滿族國”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은 만주국의 “複制ㅡ擴大版”이라고 모독하였으며 일제의 점령구역은 “樂園”이라고 미화한 반면에 국민당 통치구와 공산당이 지배했던 해방구는 “地獄”이라고 모욕하였다. 남경대학살은 중국인이 조작한것이라 미친듯이 소리쳤고 모택동이 일본황군을 “반면교원”으로 삼고 평가한것을 제 마음대로 외곡하여 모택동을 “친일파”라고 악독하게 중상하였다. 심지어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수뇌부는 침화일본군 사령부와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장기간 손잡아 왔다고 력사를 외곡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을 항일전쟁시기에서의 가장 큰 친일한간집단이라고 모독하였다.

이에 반하여 일제의 조선과 중국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제2차세계대전시기 일본침략의 괴수 도죠히데키(東條英機), 남경대도살의 원흉 마츠이이와네(松井石根) 등 일본의 력대의 전범들을 영웅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최근 일본총리 아베가 산포한 일본의 침략전쟁을 일으킨 죄악을 부인하고 력사를 외곡하고있는 망언과 김문학의 망언은 동일한 것으로 김문학은 일본 극 우세력의 후설이고 충견임을 보다 분명하게 보아낼수 있는것이다.

중국화동사범대학 종계천교수는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력설하였다. “이 책에서 김문학은 자기야 말로 미친 소리를 마구 치면서 조국을 마구 무함하고 헐뜯었다. 그 언어는 악독하고 그 관점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책은 그야말로 일본 우익집단의 언론의 집대성이며 민족의 절개를 던져버리고 학술 량지(良知)를 구겨버리고 나라를 팔아서 이름을 날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야말로 구역질이 난다”.

김문학은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태여나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6년간이나 대학에서 강사노릇을 하였으며 문필작업도 벌렸다. 이것이 김문학의 원래의 문화신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김문학 문화신분은 완전히 변했다. 비둘기는 하늘을 날아도 콩밭은 못잊는다는 선인들의 말 있듯이 사람이 아무리 좋은데를 떠돌아다녀도 자기가 살던 고장을 잊지 못하는것이 통례이지만 김문학은 자기의 조국인 중국을 등지고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중국과 조선, 한국. 조선족을 비판의 과녁으로 삼았다. 그의 오만무례하고 자화자찬하고 안하무인의 정도는 우리 속담이 말해주듯이 “시아비 뺨을 칠 정도”이다. 그는 노상 코스모폴리탄 ㅡ세계인 혹은 우주인 다시말하면 자기는 중국, 한국, 일본…등을 초월한 “제3부류의 지성인”으로 자처하고 자랑하며 무치하게도 자기의 음흉한 의도를 감추고 그 무슨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문제를 처리하고 전도된 력사와 사실들을 다시 전도시키는 작업을 한다고 불어대고있다. 이는 어띠까지나 사람들을 기만하는 사기극이다. 로신선생은 “ ‘제3부류의 사람’을 론람”이란 잡문에서 이런 사람으로 되려는것은 “흡사 자기의 손으로 머리카락을 우로 끌어당겨 지구를 떠나려는것과 같은것이다”라고하였다. 이 얼마나 적중한 말인가!

김문학은 중국을 떠나 일본에 가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권세를 업어야 했다. 따라서 그는 “부귀공명”을 얻으려고 달갑게 일본 우익세력에 빌붙어 일본 우익세력을 대변하는 어용문인으로 전향하였던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조선족이라고 나발불며 세계인으로 고아대는데 이것은 종이로 불을 싸는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김문학은 민족, 국가를 초월한 “세계인”의 탈을 쓴 에누리없는 신친일파이다. 김문학의 현황을 분석해 볼때 애초에 일본우익세력의 울타리속에 들어갔기에 이제와서 그 울타리로부터 발을 뺄수 없는것이다. 만일 그가 오늘에 이르러 일본 우익세력의 반대편에 선다면 일본 우익세력이 용서하지 않을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따라서 김문학은 일본 우익세력에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며 량면삼도(兩面三刀)의 술책을 리용하여 기회주의적인 광대놀이를 하면서 신친일파의 길을 죽을때까지 걸어야 하는것은 그의 숙명이라고 해야하겠다.

 

연변에서 정의는 죽었는가

 

10년을 웃도는 짧지 않는 세월에 김문학에 대한 론쟁이 계속되여 왔다. 이 와중에 김문학의 신친일파의 모습과 그의 악렬한 본질이 백일하에 들어났다. 한국에서는 일찍 김문학을 신친일파로 찍었고 중국비교교육학회 회장이며 중국화동사범대학 종계천교수는 중국교육계의 유명한 권위적인 잡지로 알려져있는 “전구교육전망(全球敎育展望)”을 통해 철같은 사실을 들어가며 김문학은 매국적, 일본우익세력의 충복, 한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를 비롯한 연변의 적지 않은 문인들도 김문학의 친일행각을 10년 넘도록 지속적으로 비판하여왔다. 하지만 연변의 일부 문인, 문인단체의 책임자, 일부 사이트의 관계자들은 이런 정의적인 행동에 찬물을 퍼붓고 이에 반해 김문학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지지하고 비호하고 있음으로 하여 그에 대한 찬반론쟁이 지금까지 현재형으로 계속되고있다.

오래동안 우리 문단의 일부 문인들은 김문학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않으면서 그 무슨 “디아스포라형의 지식인”, “세기적인 문화반성을 하는 최고지성인”, “후기현대사회의 품격을 갖춘 지성인”이요 뭐요 하면서 하늘 높이 춰 올렸다. 김관웅교수가 어느 글에서 말했듯이 애초에 김문학을 극구 칭찬을 해댔던 우리문단의 일부 친구들이 김문학의 “신친일파”의 본질을 사전에 속속들이 알고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중에 김문학의 친일파의 진상이 적라라하게 세상에 들어나고 특히 김문학이 <<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이란 책을 빌어 상기한 악독한 언론들을 퍼뜨린것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이르러 우리 문단의 한 평론가는 그에 대해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김문학에 대한 이전의 그릇된 평가를 고집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 최근년간에 김문학의 글쓰기와 연구는 “조선족의 미증유의 현상이며 김문학의 의의는 그의 존재와 활동으로 하여 조선족 문학의 판도(版图)를 국제, 세계로 확장시켰다고 강조”했으며 “김문학은 조선족이 낳은 독보적 지성이며 앞서 달리는 문화선구자이기에 그에 대한 오해, 몰이해가 있는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지적했다.” (국제김문학팬클럽 심양지회장 선우옥련, 조글로미디어).

이 평론가는 중국공민이고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으로서 김문학의 <<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중의 반화언론을 보고도 김문학을 친일파가 아니라고 계속 변명하고 있는데 너무나도 어이 없는 일이다. 더욱 한심한것은 그가 “친일은 력사문제로 당시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 만주국건립의 건국리념을 찬양하고 일본의 중국침략을 구가하고 반공을 주장하는 등 친일행적 여부로 친일문학인가 아닌가를 판단해야 한다”(동상)는 잣대를 만들어가지고 광복 전에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 만주국건립의 건국리념을 찬양하고 일본의 중국침략을 구가하고 반공을 주장하는 등 친일행적”이 있으면 친일파이지만, 광복 이후에는 아무리 상기한 친일행적이 있어도 ‘친일파’가 아니라’는 자가당착의 황당한 론리를 펴면서 무치하게도 김문학의 반화곡조를 극구 감싸주고있는것이다. 이 평론가는 구경 어느 나라 사람인지, 중국의 존엄과 국익과 기본적인 정책과 주장과 엇서는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닌지 의심을 떨쳐버릴수 없다. 이런 평론가가 우리 문단에서 “대환영”을 받고있으니 우리 문단의 시비지심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최근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은 “김관웅의 문학심포지엄”을 준비할때의 사건인데 문단의 한 책임자는 이번 심포지엄에서 김문학관계의 쟁론문제를 다루지말라고 김관웅교수와 론문작성자에게 “지령”을 내렸다. 당사자들은 우리가 진행한 김문학에 대한 비판은 중국의 정책에 맞고 국익을 보호하는 정당한 행위인데 왜서 그를 다루지 못하는가고 문단 관계책임자에게 반대의견을 제기하였다. 이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복잡한 문제이기에 회피하라고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는 한편 만일 이 문제를 다루면 나의 상황이 어렵게 된다는것이였다. 결과적으로 심포지엄에서 김문학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면 안될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던것이다. 선행의 문단 책임자로부터 이번 책임자(전근하여 갔음)에 이르기까지 김문학에 대한 비판에 소극적이였고 지어는 반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묻노니 친일파를 비판하고 중국공산당의 정책과 주장에 반대곡조를 부른 반화파에 비판의 메스를 대는것이 무슨 잘못인가? 이를 저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어떻게 평가해야 옳은가?

조글로는 자기 사이트에 김문학의 전문코너를 설치하고 그의 프로필, 칼럼/수필,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신조선족”월경론, 김문학론/인터뷰, 활동사진 등을 올리면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돌리고있다. 조글로에 실린 김문학의 프로필에서 다른 단체의 이름을 빌어 김문학은“ ‘월경하는 글쓰기’를 전개한 문인으로서 ‘신조선족 지성의 기수,국제파 귀재, 동양비교문화의 작은 거인’ 으로 국제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극찬하고있는가 하면 또 지속적으로 김문학의 50권출판기념회, 70권출판기념회 등을 기사화하여 그를 선양하고있다. 또한 최근에는 김문학이 쓴 친일파 리광수를 미화한 “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중국의 위대한 문호로신을 친일파쪽으로 밀어부친 “로신과 리광수”, “비적”을 도원하여 폭력혁명을 하였다고 모택동을 비하한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등 글들을 사이트에 올려 방문객들의 분노를 야기시키고있다. 조글로는 무엇때문에 이런 정치적문제가 엄중한 김문학의 글들을 계속 올리고있는가? 이런 행동을 할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온것인가? 심히 의심되는바이다.

김문학은 비교문화학자라고 한다. 김관웅교수를 비롯한 “김문학현상”의 반대파들은 애초부터 그의 비교문화연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종여일하게 중국을 반대하고 중국의 근본적인 국익을 해치는 그의 황당하고도 독소가 잠재해있는 망언에 초점을 맞추어 비타협적인 론쟁을 벌려왔다 우에서 이미 말했지만 과격한 언사를 발산한 오류가 한때 있었지만 우리가 다룬 기본견해와 내용은 시종 정확하였다. 정의적인 주장이였다.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김문학현상”지지론자들은 넌지시 “김문학현상”의 내용이나 보질을 바꾸어놓는 투량환주(偸梁換柱)의 수법으로 중대한 시비문제에 한해서는 회피하고 감싸주고 대방의 언어표현에 관계되는 일부문제만을 꼬집으면서 그것으로 “김문학현상”을 무마시키고 비호하고 김문학을 극찬하는 한편 김관웅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을 극좌사조를 가진 자들이라고 타매하였다. 지어는 관방의 세력을 빌어 반대론자들의 입을 막고 억압하려고까지 하였다.

이런 치열한 론쟁속에서 중도파도 나타났고 강건너 불보듯, 먼 산우의 바위보듯하는 수수방관파도 있었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대로 왔다리갔다리하는 눈치보기파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파에 속하는 사람들의 심층에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잠재해 있겠지만 그중 공통한것의 하나는 “모난 돌 정 맞는다”는 속담이 시사하다싶이 사람이 모나지 말고 둥글둥글하게 살자는 처세철학인것같다. 옛날 황희 정승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황희 정승이 하인들이 싸우는 사연을 듣고는 “네 말이 맞다!”라고 한 뒤, 상대 하인의 말을 듣고서도 “네 말도 맞다!”라고 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아내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오?”하고 묻자 “당신도 맞소!”라고 했단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처세술에 순응하는것같다. 나아가 모난 돌을 배척하고 중상하고 모난 돌을 란타(亂打)하는 몽둥이노릇을 하는 사람도있다. 그런데 과연 아무때나 아무런 일이나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모난 돌은 정을 맞고 둥근 돌이 되여야 하는가? 특히 대시비문제를 가르기위해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에 걸맞는 날카로운 지론을 펴는 “정의지사”가 정을 맞아야 하는가? 그대답은 부정적이다.

중국의 인민 내부의 일상 생활에서나 작은 시비문제에서는 량보도 하고 융화와 조화를 이루는 “둥근돌”이 수요된다. 하지만 정치적인 대시비, 부조리와 비리, 비정은 곧은 나무처럼 굳건히 자기의 자세을 지키는 모난 돌”, 생벽을 뚫고나가는 “무소의 뿔”이 요청된다. 분위기가 소란하고 질서가 문란하거나 기풍이 바르지 못한 우리 동네 특히 우리 문단은 력사상의 천재적인 예술가들이나 과학자, 사상가들은 대부분 체세에 서투른 “모난 돌”이였음을 상기하고 “모난 돌”을 소중히 여기는 풍토를 조성해야 할것이다.

일본에서 극우세력의 대표주자인 아베가 일본총리로 당선되고 일본자유당이 정권을 거의 독점하는 추세가 나타나면서 오늘날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의 부활 조짐이 날로 더 명확해지고 있다. 아베정권의 이른바 “강대한 일본을 건설한다”는 이 슬로건에는 바로 평화헌법을 고쳐서 일본의 군대를 부활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목적이 숨겨져 있다. 일본침략의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극우정권이 일본군국주의의 옛길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점은 이미 세인들의 공동한 인식으로 되였다. 김문학현상은 바로 일본극우세력의 그늘밑에 돋아난 독버섯이다.

이런 동북아세아의 국제정치의 배경하에서 달갑게 일본극우세력의 후설로 되여 일본제국의의 침략전쟁을 극구 미화하고, 일본의 침화전쟁의 력사를 외곡하고, 중국공산당을 악랄하게 모독한 “김문학 문제”는 중국의 핵심적리익을 엄중하게 해친 대시비에 직결되는 이데올로기 면의 중대한 문제 일쁜만 아니라 중국의 국가와 민족이익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지극히 중대한 정치문제이다. 이는 단지 연변이라는 자그마한 지역사회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중대한 정치시비문제를 호도하거나 덮어감추려거나 묵살하려하거나 비호하거나 수수방관하거나 침묵을 지키는것은 중국공민으로서 중국의 량심있는 지식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며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는데 해가 되는 일이다.

특히 연변지역의 의식형태 분야를 주관하는 상급기관이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주길 바란다. 만일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간문인 김문학의 친일, 반화, 반공, 반민족의 엄중한 정치문제에 대해서 계속 보고도 못본척 하거나 심지어 이런 일을 덮어감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인식문제를 떠나서 엄중한 정치립장, 정치태도 문제로 볼수 밖에 없다.

나의 생각에 따르면 연변지역의 의식형태 분야를 주관하는 상급기관에서는 김문학의 정치적문제를 지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성하도록 교육을 진행하고 김문학의 코너를 설치한 사이트에 한해서는 그것를 삭제하도록 유도하는것이 바람직한것 같다. 그리고 연변 문단 책임자들도 이 문제 해결헤 앞장서주길 바라며 “김문학현상”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되지 않도록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하길 제의한다.

2013.7
 

 

부록

김문학의<<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

 

일본 祥伝社(黄金文庫) 출판2006,12


목록 (이 목록은 연변대학 김관웅교수가 번역한것을 재차 수정한 것이다)
 

프롤로그 : 친일파 중국인으로서의 고발
 

1 중국에 있어서의 "憎日" 심층심리
- 이상하기 그지없는 "반일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리유는

(1) 일본인이 모르고 있는 "日本鬼子"
일본인 "賣春"사건으로 보는 중국인들의 과잉반응
우호국을 "鬼"라고 부르는 奇怪千萬한 나라
馬立誠씨는 왜 《인민일보》를 쫗겨났는가

(2) 국책으로서의 "反日憎日"
인터넷에 올린 치열한 반일 선동문
반일 프로파간다는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눈을 감고 싶은 중국 역사교과서의 왜곡

(3)모택동, 등소평 시대의 대일관계에서 배우라
일본에서 강도질한 중국인 류학생의 변명
공산당군대와 일본군대가 손을 잡았다는 새로운 사실
모택동은 일본에 "감사하다"고 말한 적 있다.
중국이여, 역사를 거울로 삼으라

(4) 궁극의 역사카드 "남경대학살"
南京攻防戰의 책임은 중국에 있다
왜 中國軍隊가 中國兵士들을 총격했을까
"30만명"설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사상자수가 뻥튀기 된 정말 중국다운 이유
자국내의 대량학살에는 입을 다무는 중국정부

 

2 일본은 사죄해서는 된다
- 自虐史觀, 당당하지 못한 외교에 대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

(1) "사죄"는 죄악이다
일본인에게서 잃어버린 당당한 자존심
중국은 "약자 같은 어린애"짓을 그만두라
인근 국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사죄하지 않는 중국

(2) "패전국 •日本"을 위한 변명
미국에 의해 척추가 부러져버린 일본인의 정신구조
"승자=정의"라는 데는 한계가 있다
戰後의 일본인들이 정말로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3) "日本의 전쟁에 긍지를 가지라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가져온 아시아에 대한 대공헌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비렬한 중국과 한국
(4) "야스구니(靖國)"라고 하는 일본문화
야수구니신사에 낙서를 한 대학생은 "반일영웅"
죽은 자를 채찍질하는 문화와 적과 제편을 같이 제사 지내는 문화
중국과 한국 이외의 외국에서도 참배하고 있는 사실

 

3 일본점령하의 중국의 진실
-일중전쟁 15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한 것은 어떤 쪽인가

(1) "滿洲國"의 위대한 유산
현대 중국이 완전히 부정하는 "滿洲國"
孫文이 획책했던 "滿洲賣却"계획
中華人民共和國은 滿洲國의 複寫-擴大版

(2) "滿洲國"은 "滿足國"이였다
新京의 도시계획으로부터 보는 일본의 의욕과 공헌
일본이 만주에 투입한 막대한 자본
西洋의 識者가 보아낸 滿洲國의 眞價
滿鐵시대의 기차는 지금보다 빨랐었다

(3) 日本占領區는 "樂園"이였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점령구"
러브레타를 출간하여 인세수입으로 살았던 노신
너무나도 대조적인 "해방구"의 실태

(4) "日本鬼子"의 진짜 모습
"三光政策"이란 것은 일본에는 없는 중국의 전통
興亞觀音에 기탁한 마쯔이이와네(松井石根) 大將의 념원
日華事變이후의 8년은 1년의 전투와 7년의 경제건설

 

4 新中國 씨를 뿌린 일본
-明治이후 오늘까지 日本이 中國의 스승이였던 사실

(1)孫文과 일본 그리고 일본인
일본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없었다
孫文과 중국혁명에 한생을 다 바친 미야자키도우덴(宮崎滔天)
孫文이 주창했던 日中협력과 아시아의 단결

(2) 일본어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현대중국어
일본어로부터 중국어에 수출된 대량의 단어들
중국문단은 일본류학생들이 만들었다
지금도 진행중에 있는 일본문화의 수입

(3) 실현되지 못한 "伊藤博文首相" 초청계획
"伊藤首相" 초청계획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故宮의 보물들을 지켜준 이들은 일본군대였다
"敎育勅語"의 정신은 중국에서 지금도 살아있다

(4) 남아서 新中國建設을 도왔던 日本人들
戰後의 中國內戰에 參戰했던 日本人들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본인 의사와 간호부들의 일하는 자세
中國空軍의 기반을 다져준 하야시야 이찌로우(林弥一郞)소좌
國共兩軍의 싸움은 "日本遺産"을 쟁탈하기 위한 전쟁

 

5 "日中友好" 해체하라
- 强要와 迎合의 "友好"로부터 진정한 관계의 구축에로 나아가야

(1) "自虐"의 日本人과 "超愛國"의 中國人
일본의 교육 붕괴는 세계의 웃음거리
自國의 國旗를 존경하지 않는 나라는 세계로부터 輕蔑을 당한다

(2) 東京裁判과 文化大革命
文化大革命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였는가
이미 증명되고 있는 東京裁判의 不當性
洗腦政策의 呪術의 束縛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日本의 悲劇

(3) 중국은 일본을 절대로 추월하지 못한다
대두하는 "中國威脅論"과 "日本沈沒論"
중국에서의 自然破壞 실태의 이모저모
집단賣春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중국의 敵은 중국 內部에 있다
隣國로서의 日本이 진짜 무서운 점

(4) "日中友好"론은 왜 위험한가
언제나 뒤틀리는 일밖에 없는 허위적인 "友好"관계
일방적인 규탄과 일방적인 迎合으로 점철된 30년
民主主義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리해할 수 없는 것들
좋은 말만 하면서 영합하는 것은 “간사한 친구”이다 (대체 이상의 뜻)


출처:중국조선족문화통신 2013-7-28 8: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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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7 ]

17   작성자 : 비련
날자:2013-11-17 14:38:38
한심합니다...
16   작성자 : 그리고
날자:2013-09-25 05:52:36
2차세계대전 발동과 유태인학살 책임을 철저히 반성한 유럽의 자유민주의 모범국가 독일에서는
일체 나치독일의 역사를 미화,분식하는 언행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만약 누가 그랬다간 여론의 성세호대한 질타와 뭇매를 맏게 되며 법적추궁도 받는다. 이른바 언론자유니 뭐니, 공권력을 동원한 학술탄압이니 뭐니 하지 않는다. 유럽의 모범 선진국가 독일도 이럴진대 일부 선진국물을 좀 먹었네 하면서 김문학비판에 대해 문화대혁명식이니 뭐니, 공권력동원이니 뭐니 하는 인간들...참 자유민주를 좋아하네..자유민주와 언론자유의 탈을 쓰고 기실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비열한 자들임.
15   작성자 : 근데요
날자:2013-09-24 19:25:52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도 한국계 일본인 학자 오선화교수의 입국을 불허했다는데 이것은 그럼 공권력의 간섭을 넘어서 폭거입니까? 문화대혁명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분들 그럼 대한민국이 문화대혁명을 하고 있는 겁니까? ㅎㅎㅎ
14   작성자 : 조선족
날자:2013-09-16 10:40:38
??????
조선족도 글쓰는 사람이 있다는게 신기하네 ㅋㅋㅋㅋㅋㅋㅋ
하여간 꼴에 남이하는건 다 따라할려고 .... 할건 다하네 ㅋㅋ
13   작성자 : 추천
날자:2013-08-30 09:49:37
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
12   작성자 : 북방문인
날자:2013-07-31 10:58:09
정말 한심한 인간이로구나
세살때먹은 버릇이 여든간다는 말은 여든가면 고쳐진다는 뜻이 아닌것 같다
여든이 돼도 못고친다는 뜻이다
문화대혁명이 정말 무섭다 펀펀한 사람을 이런 또랑이로 만들다니 ㅠㅠㅠ
11   작성자 : 신길남
날자:2013-07-30 21:11:48
이를테면 ‘청마 유치환의 문학제’와 관련하여 그렇다.
저항시인 윤동주와 항일투사 김학철의 문학이 살아있는 연변 땅에서 친일파 시인의 문학상 행사를 만든 것은 어디를 보나 옳지 않지만 그것을 공권력으로 규제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 문학행사의 부당함을 제일 처음으로 제기하였던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이런 행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간이 배밖에 틔어나왔다’고 비판하는 칼럼도 한편 썼던 적이 있었다. 학자나, 작가들은 여기까지 비판할 수 있다.
김관웅도, 조성일도 이 비판에 모두 동참했고, 또 끝까지 불길을 지펴올려 끝내는 이긴줄로 안다. 그러나 이기는 방법도 종당에는 그들이 배후에서 공권력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관계부문에서 참견했기 때문이라는 소린데, 이런 해결방법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마땅치도 않다.
이에 대하여 공권력을 움직였던 사람들은 아무리 비판해도 ‘최룡관(청마 문학상 시상진행자)이 꿈쩍도 안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가고 할 것이다. 그래서 여러 도경을 통하여 관계부문에도 반영하고, 종당에는 어느 권력자의 한마디가 이 문학상 행사 진행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번마다 어느 권력자의 참견, 또는 몇마디 말로 문제가 해결을 보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한 해결법은, ‘친일파 시인의 문학상 행사’를 연변에서 진행하는 것이 어떻게 부당하다는 도리를 널리 선전하고, 또 이 문학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못하게 각 지 조선족 학교들에 취지의 호소문을 발송하고, 또 더 나아가서는 문학상 행사장 앞에서 반대 데모라도 조직했어야 했다.
그래서 중국의 조선족 문학청소년들로 하여금 ‘친일파 시인의 문학상’을 받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원천적으로 이런 ‘문학상 행사’가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었다.
그래야 그런 부당한 문학상을 추진했던 쪽에서도 마음으로부터 승복했을 것이다.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마음으로부터의 승복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언제라도 또 이런 일이 재차 다시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솔직히 양심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하는 것 까지도, 이것은 학자가 해야 할 도리가 아니다. 이런 일을 주도하는 사람한테는 사회활동가, 또는 사회문화활동가라는 명칭을 붙여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조성일에게는 이런 호칭이 붙어져있지 않은가, 그는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사회문화 활동가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런 호칭에 어울리게 행동해야지 걸핏하면 공권력에 호소하고, 공권력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아름답지 못한 행위다.
10   작성자 : 일언
날자:2013-07-30 21:07:25
아래 량계초선생의 말씀 한구절을 소개한다.
학문이야말로 보편적인 영구성을 가지지만 정치는 순간순간 바뀐다.
정치에는 보평적인 영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哲学、科学上问题可以有普遍且永久性,政治上问题,祇是“当时此地”的,不会有普遍且永久性。
9   작성자 : 작가
날자:2013-07-30 08:55:42
아래 글은 유순호의 글에서 뽑아왔다.
국가 공권력을 학문에 끌어들여 공권력으로 어째보겠다는 행위는
어떤 국가들에서도 금기시하는 일이다.
특히 학자들은 모두 나서서 이런 행위가 옳지않다는것을 지적해야한다.
조성일선생님이 이렇게하는것을 정말 잘못하고있는것이라고 본다.
-----
발달한 선진 국가들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은 바로 국가 공권력이 학자들의 학문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특히 중국과 같이 과거 학자들이 정치가들에게 이용당하고, 그 정쟁에 휘말려들어 거의 씨가 마를 정도로 피비린 수난을 당했던 나라에서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오늘과 같이 선진국을 향하여 도약하고 있는 중국에서, 같은 학자들끼리 자기와 견해가 다른 학자의 학문적 주장을 꺽기 위하여 그 주장을 정치적으로 비약시키는 일이야말로 비루하고도 또 비루하며, 치사스럽고도 또 치사스러운 '짓거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친 '짓거리'를 공개적으로 나서서 호소까지 하고 있는 조성일에 대해서는 이제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
8   작성자 : 제1호 경계대상
날자:2013-07-30 03:12:00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몰아가서,

정치적으로 결판보려고 하는 조성일의 문화대혁명식의 작법을

오늘의 조선족 문단사회에서 경계대상 제 1호로 삼아야 한다.

누구라도 나서서 이런 더러운 '짓거리'에

동조하거나 또는 동정을 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철저하게 경계(警戒)해야 하고,

무자비하게 배격(排擊)해야 한다.
7   작성자 : 공평저울
날자:2013-07-30 02:14:52
조성일 회장님,
회장님처럼 꼭 공권력을 동원하고 관계부문에서 정치적인 힘으로 나서서
강압적으로 학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들의 언로를 차단하게 하는것만이 해결책이라고 봅니까?
그렇게 하여야 만이 진정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사랑하는 것이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는 것이며,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자기만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공산당에 충성하는 공산당원인 것처럼 착각하고
또 그렇게 위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식으로 상대방에게는 '반화, '반공', '매국', '배족'이라는 죄명을 잔뜩 씌워놓고
자신은 그 반대편을 가서 서서 다시 사람잡이를 하겠다는
그 '심보'를 독자들이 간파하지 못하리라고 오판했나본데, 그러면 독자들을 너무 수준 없게 보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공산당은 조성일 회장님을 아주 이쁘게 봐주는줄 아나 본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문화대혁명식의 사람잡이는, 중국공산당의 가장 치명적인 치부의 하나입니다.
그런 치부를 자꾸 앞장에서 드러내고 있는 조회장님을 이쁘다고 볼 것 같은가요?
그렇게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식한 것이 아니라, 무지한 것입니다.
요즘 시체말로 비유한다면, '이건 완전 또랑이 아니야.'라는 욕을 얻어먹기가 십상입니다.
조회장님의 희망하는 대로, 공권력이 개입하여
당장에서 '조글로'에서 발표되고 있는 김문학의 글을 모조리 삭제할 수 있고, 또 서점가에서 팔리고 있는 김문학의 책을 모조리 '금서'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김문학을 좋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에다가도 당장 재갈을 물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권력의 힘도 거기까지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사회는 결국 공권력이라는 폭력에 의한 강요와
굴복의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가 사상을 좌우하고 학문이 공권력에 굴종할 때,
지식인들이 모조리 '산송장' 취급을 받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때문에 그 상대방의 학문이 얼마나 나쁜 학문이던간에,
그 학문을 죽이기 위하여 공권력을 동원하려고 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은 문화대혁명식의 사고방식 말고 또 다른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6   작성자 : 조선족
날자:2013-07-29 15:47:55
몇일전 김문학의 친구인 친일파 오선화가 한국을 방문했다가 인천공항에서 거부당하여 일본으로 돌아간 사건이 발생했다. 오선화와 함께 친일매국매족한 김문학에게도 유사한 처분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한 인간을 평가할때 핵심이 중요하다. 김문학은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오선화와 같이 일본우익의 광견이 된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연변에 조성일, 김관웅과 같은 분들이 계셔서 다행이다. 그들이야말고 김문학의 정체와 본질을 분명히 파악하고 사명감을 같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전 유순호의 글을 보고 그의 팬이 된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제 쓴 그의 김문학을 변호하는 글을 보니 실망했고 팬노릇도 여기까지라는 판단을 하게된다.

끝으로 김문학의 정체를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 <<반일에 미친 중국, 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은 중국에서 출판거부를 당한책이다. 책을 낸 祥傳社도 일본의 보수성향의 출판사이다.
5   작성자 : 지나가다가
날자:2013-07-29 12:29:52
미친 '짓거리'를 공개적으로 나서서 호소까지 하고 있는 조성일에 대해서는 이제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그는 문화대혁명의 '잔재'이고 '유령'같은 사상의 소유자라고 높이 보아줄 수 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몰아가서, 정치적으로 결판보려고 하는 조성일의 문화대혁명식의 작법을 오늘의 조선족 문단사회에서 경계대상 제 1호로 삼아야 한다.
누구라도 나서서 이런 더러운 '짓거리'에 동조하거나 또는 동정을 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철저하게 경계(警戒)해야 하고, 무자비하게 배격(排擊)해야 한다.

4   작성자 : 시인
날자:2013-07-29 12:28:23

시인 - 2013/07/29 04:30:03






조성일이 사상을 관장하는 ‘관계부문’에서 제발 좀 나서줍시사 하는 것은, 결국 연변의 공권력을 불의에 빠뜨리려는 저의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리고 글로써 그런 호소를 할 때 그는 이미 스스로 학자가 아니라 정치적 야심가이며 투기꾼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나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一針見血 一針見血 一針見血 一針見血 一針見血
3   작성자 : 한국적딴조선족
날자:2013-07-29 11:29:19
조성일선생을 지지하오
2   작성자 : 분노
날자:2013-07-29 11:11:28
조아바이
왜 악명높은 "문화대혁명"의 피바람을 또다시 연변에서 일으키려 하는가?
1   작성자 : 안티수노
날자:2013-07-29 11:06:50
[趙成日式의 문단쟁명, 경계해야 한다]
[유순호, 뉴욕조선족 통신 대표, 재미 조선인 작가]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는 ‘불지치자’는 ‘무소불위’(不知恥者, 無所不爲)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는 속언(俗言) 중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무식하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고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면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부끄러운 줄을 모르면 아무 일이나 내키는 대로 용감하게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한 것이다.
이는 중국 조선족 문단사회에서 원로 대접을 받고 있는 조선일선생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아래 '선생' 두 자는 생략하겠다. 어제 조성일의 ‘시비지심이 척박한 풍토’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는데 너무 한심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사람이 늘그막에도 공부를 하지않으면 이렇게 무식해질 수 있구나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어진다. 또는 자신(기)딴에는 공부를 하고있다고 하겠지만, 손에 들고 있는 교과서가 모조리 엉터리 교과서이니, 그 엉터리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는 지식 또한 모조리 엉터리 지식인 것과 같은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 용감한 사람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해대는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조차 모른다. 그리하여 부끄러운 일을 해 놓고서도 항상 의기가 양양하다. 조성일이 그러하다. 오늘날까지도 이렇게 끝없이 사람들을 웃기고 있는 바보스러운 자신에 대해 남들은 다 측은하게 여겨 동정을 보내고 있는데 정작 그 자신만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채 항상 의기양양하여 또 다른 일을 벌리려 들고 있으니 그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조성일은 ‘시비지심이 척박한 풍토’에서 ‘연변지역의 의식형태 분야를 주관하는 상급기관이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주길 바란다.’고 눈물겨운 호소를 하고 있다.
‘만일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간문인 김문학의 친일, 반화, 반공, 반민족의 엄중한 정치문제에 대해서 계속 보고도 본척 하거나 심지어 이런 일을 덮어감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인식문제를 떠나서 엄중한 정치립장, 정치태도 문제로 볼수 밖에 없다.’
‘연변지역의 의식형태 분야를 주관하는 상급기관에서는 김문학의 정치적문제를 지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성하도록 교육을 진행하고 김문학의 코너를 설치한 사이트에 한해서는 그것를 삭제하도록 유도하는것이 바람직한것 같다.’
대개 이러루한 내용들을 기본 골자로 하는 글, '시비지심이 척박한 풍토'에서 조성일은 이제 학문으로는 도저히 김문학을 이길 수가 없으니, 그리고 쟁명도 해봤는데 도저히 자기들을 따라나서주는 사람들이 없으니 공권력이라도 나서서 좀 자기들의 역성을 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변 문단 책임자들도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주길 바라며 “김문학현상”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되지 않도록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하길 제의한다.
아울러 ‘김문학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또 한번 장황하게 널어놓았는데, 총적으로 ‘친일’, ‘반화’, ‘매국’ ‘배족’하는 글을 썻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확실하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적으로 해결해주지 않을 때는, 그렇게 해결해주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정치적인 입장에도 문제가 있으며 그렇게밖에 의심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을 최후통첩처럼 내리고 있다.
이러구러 총적으로 이제는 더는 학문적으로 쟁명은 못하겠고, 또 해봐야 이기지도 못하겠으니 공권력이 나서서 정치적으로 자기들의 편을 들어달라는 것인데 좀 더 찍어놓고 말하자면, 공권력이 자기들의 편을 들어서 이쪽 자기들의 반대편을 아주 묵사발로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너무 가소로와 실소를 금할 길이 없지만, 그래도 조성일에게 ‘꾀’를 하나 대주고 싶다. 사실 김문학비판에서 김문학의 학문을 철저하게 죽이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조성일은 등은 쩍하면 김문학의 학문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확실하게 문제가 된다는 관방의 법규조문을 기준으로 찾아 내놓으면 된다. 그리고 그 규정에 위반할 경우 어떤 처벌이 내려진다는 근거를 가지고, 국가 공권력을 향하여 처벌을 요청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내가 알기에 오늘의 중국 관방에는 근본상에서 그런 기준도 법규도 존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조성일 등이 계속 그런 식으로 집착하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야말로 어린이가 어른 한테 ‘놀잇감’ 사달라고 보채고 떼질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어린이도 아닌데 어린이처럼 놀고 있으니 결국 이렇게 ‘무식’하고 또 ‘무지’하기까지 하다’는 소리를 듣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그 '떼질꾼'들이 스스로 자신의 무식함 내지 무지함은 모르고 있다는데 있다.
지혜로운 인간은 남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김문학의 학문적 견해는 간혹 의문스러운데는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그런 의문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수준과 지식에다가 원인을 삼을 뿐이다.
그 외에는 대부분이 정확하다. 지금까지도 별로 틀린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물론 그 발견하지 못한 것도 여전히 나 자신의 수준과 지식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느 그렇다.
이를테면 조성일이나 김관웅같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문제로 삼는 ‘반일에 미친 중국, 친선을 구걸하는 일본’같은 책도 그렇다.
일본군국주의 침략의 괴수 도죠 히데끼가 애국자이고 영웅이라는 한 말이 어디가 틀리는가?
김문학은 그를 일본의 애국자라고 했지, 중국의 애국자라고 했는가, 도죠 히데끼 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도 모두 일본의 애국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 외에도 만주국을 ‘만족국’이라고 해서 나쁘다는 소린데, 당시 만주국의 경제가 굉장히 발달했고, 일본이 패망을 앞둔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만주국의 공업총생산량이 일본 본토의 공업총생산량을 초과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역사에 기재되어 있는 사실이다.
잘 사는 나라, 그것이 ‘민이생위본’하는 평민 백성들에게는 ‘만족국’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김문학의 주장이 만주국이 그 만주국을 반대하여 싸왔던 항일투사들에게 있어서도 ‘만족국’이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라면, 그것은 얻어맞아 싸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은가,
조성일이나 김관웅 등이 만주국이 그 만주국을 반대하여 싸웠던 항일투사들에게 있어서는 ‘만족국’이 아니라 치욕(恥辱)이며, 원한(怨恨)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김문학이 그 만주국 치하에서 풍의족식하면서 잘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만족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그 선택의 입장만 차이가 날 뿐, 만주국의 객관적 실체는 변하지 않는다.
또 실례로, 어떤 사람이 나서서 모택동의 잘못 된 정치로 말미암아 수천만명이 굶어죽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3년 대재해(인위적인 재해) 때에 비해서는, 만주국이 훨씬 더 좋은 ‘만족국’이었노라고 주장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G2국가에 든 나라인데 어떻게 만주국보다도 못했을 수가 있느냐고 억지공사를 편다면, 이것이야말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단장취의(斷章取義)하는 것이다. 대방은 ‘모택동의 잘못 된 정치로 말미암아 수천만명이 굶어죽었던 때’와 비교했는데, 이쪽에서는 그 ‘때’를 슬쩍 빼버리고 제멋대로 오늘의 G2 시절을 가져다 붙여버린 것이다.
이 책에서 보면 김문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될 때, 그 국가적 설계 형태가 만주국의 복제판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그리고 왜서 복제판인지에 대한 그 자신 나름대로의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김문학이 미처 제시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즉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가였던데 반해 중화인민국화국은 소련의 괴뢰국가였는 사실말이다. 적어도 창당, 개국 초기에 말이다. 그러나 만주국보다 위대한 것은, 점차적으로 장대해지면서 소련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고, 종주였던 소련과 당당하게 반목하고 노선투쟁까지 벌였다는데 있다. 그리고 소련도 만주국도 다 망해없어졌지만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당당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변하지 않는 객관적이 실체가 아닌가!
때문에 조성일은 ‘만주국이 만족국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아니다는 증거들을 제시해서 ‘옳다’고 고집하는 김문학의 주장을 반론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조성일과 김관웅은 만주국의 괴뢰 황제 부의, 말대 황후 완용 등의 팔자까지 들어가면서 만주국은 만족국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여럿편의 글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자신의 또 다른 주장으로 주장하면 되는 것이다. 학자로써 조성일이나 김관웅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은 딱 거기까지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들이 스스로 읽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까지 당신들이 빼앗고 가로채려고 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이 조성일이나 김관웅의 주장에 호응하지 않고,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자책해야지, 그렇게 따라나서주지 않는 독자들한테, 이 사람들이 모두 시비지심이 없으니 이제는 공권력이 나서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그래 무식한 자의 소행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조성일의 무식 내지 무지는 정도가 아니다.
김문학은 ‘남경대학살은 중국인이 조작한 것’이라 미친듯이 소리치지 않았는데도 ‘미친듯이 소리쳤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조성일의 모습이야말로 ‘미친듯’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을 왜 스스로 모른단 말인가,
나도 김문학의 이 부분의 글을 읽고 여러 자료를 뒤져가면서 분석해보았는데, 확실히 ‘남경대학살’은 가능하면 피할 수도 있었던 재난이었다.
그러나 김문학은 중국 국민당군 장령 당생지(唐生智)가 남경성을 지켜보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빚어진 결과로 보았다. 일단 장개석의 전략대로 맞붙어 싸워 지켜낼 수 없을 때에 제꺽 그대로 내주고 피해야 했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도 어느 원인을 집중적으로 선택하는가는, 그것을 선택하는 학자의 권한과 자유이다.
조성일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것은 마치도 조성일이 꼭 김문학을 ‘반화, 매국, 배족’으로 아무렇게나 보는 견해도 누가 함부로 강요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학자라면, 자기와 다른 학자의 견해에 대하여 학문으로 반박하고, 그 반박이 설득력을 얻기 위하여서는 더 많은 논거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논증해버리면 된다. 그런데 학자로써 할 수 있는 일은 딱 거기까지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왜 내 주장이 더 설복력이 있는데, 남들이 나를 따라주지 않는가’는 식으로 계속 불평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광경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구호를 웨치면 그것이 옳던 그르던 상관없이 무작정 따라서 구호를 웨치던 시절말이다. 조성일은 바로 그 시절에 크게 해먹었던 전력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그 시절의 풍토를 잘 알 것이다, 한 사람이 나서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만세’를 선창할 때, 만 사람이 무조건 따라서 함께 웨쳐야지 웨치지 않으면 바로 정치적 문제에 걸리군 했다.
조성일은 바로 지금도 그런 식인 것이다. 학문적인 문제를 꼭 정치적인 문제로 비약시키고, 꼭 그쪽으로 몰아가고 싶어하는 것이 조성일의 본심이라는 것은 이번 글에서도 너무 잘 드러나고 있다.
아닌가, 김문학의 학문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한지가 언제고 아베총리가 일본의 총리로 된 지가 언제의 일인데, 조성일은 아주 귀신같이 이 두사람을 또 한데 꿰어매놓고 있다. 이는 조성일이 스스로 정치적 감각이 아주 예민한 것 같아서 쩍하면 정치적으로 몰아붙이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정치의 생리에 대해서도 너무 무지하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보자,
그렇게 극우적인 아베가 일본 국민들의 다수의 지지를 받고 총리가 된 것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다수의 국민들이 다 극우적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왜 관방에서는 말끝마다, 나쁜 것은 일본의 일부 극우주의자들이고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좋은 국민들이라고 말하는가, 어느날 아베가 물러나고 또 돌베라는 인물이 나온다가 가설하자. 그러면 조성일은 또 그 돌베라는 인물에게다도 김문학을 가져다 붙일 것인가,
그런 식으로 사회적인 반일 기류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거기에다가 또 김문학을 가져다 붙여, 끝까지 정치적으로 문제를 시비화시키고 확장시켜가려는 의도는 너무 비렬하다.
이는 학자이기전에 스스로 문화대혁명에서 사람잡이에 이골이 텄던, 그와같은 나쁜 행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로 다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나이도 많이 잡수시고, 세상 경륜도 알만큼 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조성일이 왜 이렇게 한심한 ‘짓거리’를 계속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조성일 자신의 그 얄팥한 꼼수를 독자들이 간파하지 못하리라고 오판했나본데, 그러면 독자들을 너무 수준 없게 보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조성일 자신의 무지가 이런 망신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조성일은 자신의 긴 인생을 통하여서도 정치에 대하여 잘 못 배워도 한참 잘 못 배운 것 같다. 정치란, 절대적으로 대방을 궁지로 몰지 않는 것, 그리고 대방이 뒤로 튈 구멍을 만들어주는 것, 또 그리고 말 한마디를 해도 절대적으로 사절(死絶)하지 않는 것,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궁지를 몰지 않는 것이고, 또 자기에게도 뒤로 튈 구멍을 만들어두는 것이다.
정치란 꼭 같이 검은 것을 희다고도 말할 수 있고, 또 흰 것을 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치의 생리는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때문에 학자가 학문에 충실하지 않고 상대방 학자의 주장을 정치적으로 해결보려고 한다면, 그 정치의 생리에 익숙해야 한다.
학문에 의거하지 않고 또 법에도 의거하지 않고 오로지 정치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보려고 한다면, 그와같은 정치적 해결법이야말로 오늘 검다고 한 것이 바로 내일 가서 희게 될 수 있고, 또 오늘 희다고 한 것도 모레 가서는 다시 검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학문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결판보려고 하는 것은, 그 바닥이 너무 얕은 것은 말고라도, 그와 같은 비권위적인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결과는 언제든지 쉽게 되바뀌일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조성일이 이제 학문적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고하니, 굳이 정치적으로 몰아서 문제의 해결을 보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무식하고 무지한 행위인가,
나는 중국의 공권력을 그렇게 좋게 보지않지만, 그러나 중국의 공권력이 학문에까지 개입하여 어느 한쪽의 주장을 정치적으로 묵살하는 행위까지 저질을 수 있는 형편없는 저질수준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조성일이 재삼 사상을 관장하는 ‘관계부문’에서 제발 좀 나서줍시사 하는 것은, 결국 연변의 공권력을 불의에 빠뜨리려는 저의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리고 글로써 그런 호소를 할 때 그는 이미 스스로 학자가 아니라 정치적 야심가이며 투기꾼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나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진정으로 민족을 위해서 ‘배족’하는 행위와 싸우는 것이고, 진정으로 공산당에 충성하기 위하여 ‘반공’하는 행위와 싸우는 것이라면, 조성일은 보다 더 학문적으로 나와야 한다.‘제발 이제는 공권력이 나와주시기 바랍니다’와 같은 더럽고도 메스꺼운 호소를 하지말아야 한다.
그런데 조성일은 중국이나 또는 연변같은 풍토에서 ‘공권력이 나서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을 볼 수 없다’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권력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은 아주 나쁜 선례를 낳게 된다.
이를테면 ‘청마 유치환의 문학제’와 관련하여 그렇다.
저항시인 윤동주와 항일투사 김학철의 문학이 살아있는 연변 땅에서 친일파 시인의 문학상 행사를 만든 것은 어디를 보나 옳지 않지만 그것을 공권력으로 규제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 문학행사의 부당함을 제일 처음으로 제기하였던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이런 행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간이 배밖에 틔어나왔다’고 비판하는 칼럼도 한편 썼던 적이 있었다. 학자나, 작가들은 여기까지 비판할 수 있다.
김관웅도, 조성일도 이 비판에 모두 동참했고, 또 끝까지 불길을 지펴올려 끝내는 이긴줄로 안다. 그러나 이기는 방법도 종당에는 그들이 배후에서 공권력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관계부문에서 참견했기 때문이라는 소린데, 이런 해결방법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마땅치도 않다.
이에 대하여 공권력을 움직였던 사람들은 아무리 비판해도 ‘최룡관(청마 문학상 시상진행자)이 꿈쩍도 안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가고 할 것이다. 그래서 여러 도경을 통하여 관계부문에도 반영하고, 종당에는 어느 권력자의 한마디가 이 문학상 행사 진행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번마다 어느 권력자의 참견, 또는 몇마디 말로 문제가 해결을 보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한 해결법은, ‘친일파 시인의 문학상 행사’를 연변에서 진행하는 것이 어떻게 부당하다는 도리를 널리 선전하고, 또 이 문학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못하게 각 지 조선족 학교들에 취지의 호소문을 발송하고, 또 더 나아가서는 문학상 행사장 앞에서 반대 데모라도 조직했어야 했다.
그래서 중국의 조선족 문학청소년들로 하여금 ‘친일파 시인의 문학상’을 받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원천적으로 이런 ‘문학상 행사’가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었다.
그래야 그런 부당한 문학상을 추진했던 쪽에서도 마음으로부터 승복했을 것이다.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마음으로부터의 승복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언제라도 또 이런 일이 재차 다시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솔직히 양심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하는 것 까지도, 이것은 학자가 해야 할 도리가 아니다. 이런 일을 주도하는 사람한테는 사회활동가, 또는 사회문화활동가라는 명칭을 붙여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조성일에게는 이런 호칭이 붙어져있지 않은가, 그는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사회문화 활동가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런 호칭에 어울리게 행동해야지 걸핏하면 공권력에 호소하고, 공권력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아름답지 못한 행위다.
이미 조성일이나 또는 김관웅 등 사람들이 그동안 겪어온 인생이나 그리고 현재 처하여 있는 사회적 문화환경으로 볼 때, 그들이 학문적으로 김문학을 따라잡기는 글렀다. 적어도 김문학의 글에서 설파하고 있는 역사지식과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견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도리가 없다.
너무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한마디 더 짚고 넘어갈 말이 있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무식한 것과 무지한 것을 대충 옆동네 사촌쯤으로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무식한 사람은 말 그대로 학식이 없는 사람을 뜻하고, 무지한 사람은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조성일과 같이 무식한 옹(翁) 에 대비해 말하자면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것이다.
조성일이나 김관웅의 경우는 학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거의 대부분 엉터리 학식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무식이나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무식해도 무지하지는 말아야 한다.
즉 대방을 권력이나 힘이 아닌 도리로써 이겨야 한다는 것은 무식과 무지를 떠난 기본적인 상식과 관계되는 문제다.
인간은 모두가 무식하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가 몸 담고 있는 분야 더 나아가 관심이 있어서 일부러 학습하지 않은 분야는 자연스럽게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박식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분야가 범인에 비해 조금 넓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기본적인 상식과 관계되는 문제에서까지도 무엇이 옳고 그름을 모른채로 어리석은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조성일의 이와같이 무식하고 무지한 짓거리는 이제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차원이 다른 개념으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무식과 무지는 가방끈 길이와는 결코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성일의 어리석음은 근시안적인 사고에 의한 옹졸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난처한 상황, 이를테면 김문학을 비판함에 있어서 아무도 그들을 동조해주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지혜로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대처 방법 또한 전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김관웅같이 무식한 사람은 주변 사람을 조금 답답하게 할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큰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지한 조성일은 그 어리석음과 지혜롭지 못한 처신, 즉 공권력을 움직여 학문적 견해가 다른 대방을 작살내려고 하는 짓거리를 계속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주변을 곤혹스럽게 하고 때로는 심각한 피해까지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공권력을 움직혀 ‘친일파 시인 문학상 시상식’을 압살한 것은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든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것에서 단 맛을 느끼고 좀 더 나아가면 이제는 김문학에 대해서까지도 공권력을 움직여 작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잊지마시라, 당신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김문학의 학문을 정치적으로 몰아 공권력으로 압살(壓殺) 할 때, 김문학은 죽는 것이 아니라 더욱 유명해진다.
지금까지 그는 다만 쟁의를 일으키는 유명 학자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공권력의 탄압을 받게 될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적인 유명학자로 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성일, 김관웅 등 무지 내지 무식한 사람들과 김문학의 차이는 하늘의 달과 초야의 개똥벌레만큼이나 사이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원래 무식과 무지는 서로 자신들의 과오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무지한 자는 어떤 방법으로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최소한 자신이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주변에 그나마도 조금은 양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죽을 때까지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수수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발달한 선진 국가들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은 바로 국가 공권력이 학자들의 학문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특히 중국과 같이 과거 학자들이 정치가들에게 이용당하고, 그 정쟁에 휘말려들어 거의 씨가 마를 정도로 피비린 수난을 당했던 나라에서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오늘과 같이 선진국을 향하여 도약하고 있는 중국에서, 같은 학자들끼리 자기와 견해가 다른 학자의 학문적 주장을 꺽기 위하여 그 주장을 정치적으로 비약시키는 일이야말로 비루하고도 또 비루하며, 치사스럽고도 또 치사스러운 '짓거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친 '짓거리'를 공개적으로 나서서 호소까지 하고 있는 조성일에 대해서는 이제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그는 문화대혁명의 '잔재'이고 '유령'같은 사상의 소유자라고 높이 보아줄 수 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몰아가서, 정치적으로 결판보려고 하는 조성일의 문화대혁명식의 작법을 오늘의 조선족 문단사회에서 경계대상 제 1호로 삼아야 한다.
누구라도 나서서 이런 더러운 '짓거리'에 동조하거나 또는 동정을 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철저하게 경계(警戒)해야 하고, 무자비하게 배격(排擊)해야 한다.





2013년 7월28일 미국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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