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 장경매
녀자의 손이라면 부드럽고 물기가 촉촉한 살결에 미끈한 손이라 상상될것이다. 허지만 나의 손은 세월의 비바람속에서 손등의 손가락 마디마다 비슬나무껍질처럼 깊은 주름으로 주룩주룩하다. 손바닥은 소나무 껍질처럼 까칠까칠해서 비단 이불이나 침직물 옷을 만질 때면 스치는 감각과 그 소리에 가슴이 다 오삭해난다. 딱딱하게 굳은 살은 오래되여도 지워지지 않아 다듬지 않았다기보다 이젠 아무리 깍고 다듬고 해도 어쩔수없는 고질이 된것이다. 사정을 아는 동창들 모임이나 동료들과의 모임이면 몰라도 요즘 글을 쓴답시고 자주 참석하게 되는 지인들과 선배문인들 모임에 가게 되면 추한 이 손을 내놓기 부꾸러워 청하는 악수에도 뒤로 주춤주춤한다.
어느 년말총화 모임이였다. 나와 사교무를 추던 선배님이 사교무 끝나기 바쁘게 "녀자손이 그게 뭐요?" 하는 핀잔비슷한 말에 부꾸럽고 창피해 몸둘바를 몰라 쩔쩔 매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내 손을 돌려다오 할수도 없는것이다.
12살 나던 해 1970년.
엄마가 갑자기 중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그때부터 나에게는 고생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밥 짓고 저녁이면 엄마 약을 달이기 위해 숫불을 놓고 약을 달이기도 했다. 이렇게 80년도까지 장장 10년을 엄마의 호리원으로, 주부로 내 손은 마를새 없었다.
1978년, 작은진의 량식부문에 취직하였다. 하늘이 보이는 낡은 직장에서 날마다 찬물로 옥수수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가공했었다. 매일 찬물질하다 보니 손등은 갈라터져 참나무 껍질처럼 피더뎅이가 어룩어룩한채 줄이 죽죽 했었다. 그 이듬해 설에 문학애호가들 모임에 갈적에도 이 손때문에 한참 망설였다. 처녀였으니 그런 손으로 가기엔 정말 민망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청하는 부탁이니 사절할수도 없었고 해서 온밤 조개약을 바르고 더운 물에 담그고 하며 겨우 원모양 비슷이 해 갖고 갔었다.
그후 출고원으로 있을 때, 출고 할 때마다 지저분하게 널린 200근짜리 쌀마대를 일으켜 세워야 하고 끌어다 놓아야 하는가 하면 올려 놓아야 했다. 그러노라면 로동장갑 두세컬레는 해져야 한다. 벽돌 다듬기와 막먹는다.
그러하니 내 손 모양이 어떠하리.
녀자는 아이때 고생이 장고생이라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인것 같다. 남편을 만나도 역시 그 고생이였다. 농민호구, 무직업쟁이 남편이였다. 당시 나는 사회의 얕보는 눈길과 생활고로 항상 두어깨가 처져있었다. 못난 녀자의 허울을 벗어버리기 위해 나는 남편을 목단강직업대학에 보내여 3년간 공부시키로 했다.
남편을 보내고 보니 모든 일은 또 내가 해야 했다. 집안 일이건 밖에 일이건, 녀자일이건 남자일이건 가릴것 없이 내가 해야 했다. 남편의 학비와 생활비마저 이 손으로 해결했다. 직장에서는 해마다 선진일군으로 , 상금은 제1위로 년말이면 500원(그때 로임은 37원임)을 차지하군 했었다. 하여 빚을 지지 않고도 남편은 무난히 공부를 마칠수 있게 되였다.
엄마의 아픔을 덜기 위해 군말없이 일했고 딸애와 남편과 오손도손 재미있게 살기 위해 불평없이 사방 가리지 않고 휘ㅡ익 저어온 손이다. 이 손의 부지런함으로 내 집이 사랑으로 살졌다. 또 이 내 손이 인생을 바꿔준것에 감사함을 잊지 않고 갚으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모습에 감개 무량하다. 지금 층집에서 살아가는재미, 사모님이라는 멋진 녀인으로 된것에 지난날 나의 노력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끼며 스스로도 나 자신에게 탄복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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