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을 몇일 앞두고 있는데도 오전날씨는 그나마 따스했다. 고기압의 영향때문인지 아니면 연길의 지형이 분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직 집중난방이 들어가지 않은 민가나 여기저기 상가의 보일러에서 뿜어나오는 연기가 도시전체를 뿌옇게 만들어놓고 있다.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불교연구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정기 회원모임이 열린다. 일요일에 시간맞추어 나가보니 오늘따라 꽤 많은 회원들이 모여있었다. 몇달전부터 계획했던 일이긴 하나 오늘부터 정식으로에 “지장보살본원경”대한 강의를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도 모른다.
지난주까지“유마경”대해서 강의를 했는데 대승경전이여서 그런지 많은 신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신심을 내지 못하는듯했다. 그래서 이번에 소승경전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한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 10분 휴식하고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가졌다. 질문이 계속이어져서 점심11시가 되여서 마무리 지었다. 새로온 몇몇 회원들도 있었는데 오늘 강의에 참가하고 나서 환희심을 얻어 삼보에 귀의한다고 한다. 나로서는 기쁜일이 아닐수 없다. 신앙이 있다는것은 기쁜일이다. 아무 신앙도 없이 세월이 가는대로 육신을 맡기고 육신이 가는대로 정신이 끌려다닌다면 그건 바른 삶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이란 우리의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 확실하게 존재하는 일이나 물체를 바라면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의 히브리서에도 이런말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한다. 그 뒤에는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것을 안다”로 계속된다. 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말이다.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신앙의 정의로 널리 알려져온 명구이기도 하다.
이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바라는 대상이 결코 가정된 사실이 아니라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간에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에대한 믿음이다. 그 엄연한 존재에로의 바램과 확신을 신앙이라고 하는것이다. 즉 “아직 보이지 않는 사실을 확신한다”라는 말이 될수 있다. 그러면 엄연히 있는 그것은 또 무엇일까? 같은 장에서 예수가 말한다.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주실 도시이며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사는 지상의 이 세계는 가공이며 허망하다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현재 내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의 육신은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이 세상에 변화를 거치지 않는 사물은 없다. 모든것은 움직이고 있고 변화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경제도 모두 빠른속도로 변화하고 있는것이다. 물론 우리의 마음의 변화가 더욱 무섭고 빠르다. 그걸 많은 사람들은 감지못하고 있는것이다. 마치 따스한 물속에서 끓이는 개구리처럼 우리는 변화에 둔감하다가 그 변화속에서 죽고마는것이다.
불교연구회에서 “지장보살본원경”에대해서 강의를 해놓고는 여기서는 또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남들보기에는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이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내 자신을 반성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많은 강의을 해왔다. 리더십 과정을 개발해서 지금까지 10년넘게 강의해왔고 주역이나 음양오행에 대해서도 대학에서나 지역 클럽에서 강의해왔다. 엉뚱하게도 불교에 대한 강의 또한 몇년을 해왔는데 아직 내 신앙의 받침이 부족한듯한데 대한 반성이다.
법구경에는 이런말이 있다. 虽诵习多义 放逸不从正 如牧他牛 难获沙门果 时言少求 行道如法 除淫怒痴 觉正意解 见对不起 是佛弟子
현대 백화문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행하지 않는 방일한 사람은
남의 소를 모는 목자와 같아
사문된 결과를 얻기 어렵다.
경전을 아무리 적게 알아도
법을 따라 도를 행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어
지식은 정당하고 마음은 해탈해서
이승에도 저승에도 집착이 없으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제자이니라.
내가 여기저기서 경전을 얻어듣고 몇구절 외우고 있어서 건방지게 법문을 한답시고 강의를 한답시고 하고있지만 진정 수행하는 사람들에 견줄봐가 되지못함에 대한 반성이다. 이 시대의 많은 인텔리들이 그렇다. 아는척 배운척 자랑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종의 창백한 비애일 뿐이기도 하다. 지식이 많아도 행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지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유창하게 변명할수는 있어도 참다운 삶을 살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경전을 모를수록 해탈한것이라고 떠드는 강변자들도 더러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토로하는 사이비 제자들이다.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라라면 집착하지 않음을 행하는 자이다. 경전도 이승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자가 되는것이 진정한 수행인이고 신앙인이다.
가을도 다가고 입동에 들어선다고 하니 마음이 왠지 서글프다. 입동은 24절기 중의 19번째 절기이다. 겨울이 시작하는 날인것이다. 양기가 가장 약해지고 음기가 막 성하는 때여서 양생을 하는 옛사람들은 이날 보약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같으면 대체로 입동을 전후하여 김장을 담그기도 하고 햇쌀로 시루떡을 빚어 이웃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러한 풍습도 도시화 시대에서 어디갔는지 사라져 버렸다.
겨울을 맞는 해는 빨리도 어둠속에 자취를 감춘다.
농사군은 겨울에 들어설때 내년 봄을 준비한다. 씨앗을 가리고 쟁기를 거둔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할까?
준비를 하기위한 준비는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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