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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심리와 흔상심리의 충돌
2013년 02월 06일 09시 29분  조회:7935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창작심리와 흔상심리의 충돌
 
                          1. 시대와 독자
 
산업사회, 내지는 상품경제시대, 사람들의 문화가치관념의 변화와 더불어《랭각 문학》현상은 엄숙문학의 진동시대를 력사의 한페지로 밀어버렸다. 독자군도 랭각 되였다. 보다 실효성을 추구하는 독자들은 력사와 현실적인 내용을 다룬 실용적 문장들에 쏠리고 소일형, 오락형의 일반 독자들은 자극성, 희극성, 신비성이 짙은 통속독물을 추구하게 되였다. 이런 문화의 곤혹속에서 명백해진것은《현시대는 독자 가 문학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라는 결론뿐이다.
문학의 이런 불황기에 더구나 변연문학으로 된것은 시문학이다. 물론 인류정감이 사멸되지 않는 한 서정의 락토요 백화원인 시문학이 절멸될리 만무하지만 시는 점점 생존공간이 축소되고 있다는 현실을 그저 간파해버릴수는 없게 되였다.
문학장르들 사이에 원래 우렬의 구별이 없건만 어찌하여 불공평한 랭대를 받고 있는가? 필자는 시애호가로서 제나름의 사색을 달려보지 않을수 없다.
 
                                2. 시는 왜 쓰냐?
 
시는 왜 쓰냐? 하는 물음자체가 무의미하지만도 독자군들속에는 오해를 가지고 있는 현황을 숨길수 없을것이다. 주지하다싶이 시는《자아실현》의 일종 수단이면서 도 사회적창조활동으로서 누구를 위해 시를 쓰느냐? 하는 물음의 해답이 그속에 담겨 있다. 말하자면 시인들이 시를 통해 자기의 사상감정을 표달하는 목적은 시를 개방하 여 독자들의 심령속에 자기와 똑같은 정감, 지혜를 심어주려는데 있음이 자명하다 는것이다. 례를 하나 들어보자.

                                《단풍잎》
                                  사백 작
 
바람이 발뒤꿈치에
단풍잎을 던져왔다.
오, 가을이구나.
록색의 생명에도
더운 피가 끓고있었음을
서리를 맞은 후에야
나는 알았다.
 
이처럼 훌륭한 시들을 읊고 나면 일종의 감미로운 정서에 푹 잠기게 되고 지혜의 향도자를 만난듯 모종의 깨우침도 받게 되는바 인생살이에서 한가지 향수가 아닐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와 반대로 한번 읽고 나서 이런 시는 누굴 위해 썼나? 하는 곤혹부터 앞서는 시들이 많다. 그래서 독자들속에 《시시한것이 시》라는 불량 한 영향을 가심화하는 장본인이 되고있다.
시인(작가)과 독자는 기하학상에서의 직선으로 련계된 두점이고 사회학적으로 는 망망한 인해속에 서로를 흡인하는 진실된 마음이다. 창작심리기제로 말하면 문학 작품은 창작주체의《내분비물》이고 비자각적인《정신수출》로서 결과적으로 사회 대중에의《공헌》이 되여진다. 그러되 선결조건으로는 시인(작가)의《정신수출》 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선의적인 묵결하에서의 가치실현이다. 환언한다면 오직 열독 활동만이 모든 문학작품을 죽은 언어재료속에서 건져내여 현실적인 예술생명을 부여 해준다는것이다.
이렇듯 모든 문학창조활동은 세계와 인간존재사이에 진행되는 부가적련계로서 이런 새 령역의 개척은 유익하고 실용적인것을 제공하여 주면서 정신세계를 넓혀주고 사람들이 그로부터 심령의 새로운 체험을 쌓게 되며 나아가서 인간본연의 발전을 촉진한다. 이는 시만이 아니라 모든 문학예술의 숙명적인 사명이다. 그러나 가령 순 수 자신만을 위하고 타인의 정감각도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시라면 작자가 자사 적인 그만큼 독자도 그 시에 대해 자사자리적일수밖에 없다.
시창작은 가장 개성화되고 개인적재질이 뛰여나야 해낼수 있는 창조사업으로서 일반인과는 달리 일상생활속에서 신선하고도 특이한 예술적감지와 미학적사고를 요구 하며 생활에 대한 시인 자신의 심령세계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언어전달방식으로, 예술수법으로 표현할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시는 독자대중의 공통한 정서와 정감 세계에 보편적의의가 있는 미학적개괄, 독특한 미학창조가 되여야 하는 동시에 독자 들의 공명, 통감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미적자극물이 되여야 한다.
비록 시인이 자아를 해방할수록 그 시작품은 더욱 풍부한 자아를 낳고 또 시인이 자아의 충분한 로출과 석방상태가 되는것이 가장 리상적인 창작사유상태라지만 감각 이 곧 서정이 아닌것처럼 시인의 사인감정 일반이 곧 예술정감인것은 아니다. 오직 예술적감각만이 서정의 초월이 될수 있을진대 시인의 순수 자연정감과 예술정감에는 자연상태와 승화사이에 그것처럼 구별이 있어야 할것이다.
《한수의 시작품이 독자의 상상과 정감에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문자조합이라면 더는 예술로서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루나챠르쓰끼의 말은 현대 시창작에서도 금언으로 되고있다.전통적시학관이든 서방의 당대접수미학의 관점으로 보든 내적인 허무와 외적인 몽롱과 세기말적인 비애, 고독한 기분에 잠겨 있는 시들을 드문히 접하게 될 때 그것은 시인자신에 대한 학대만이 아니라 독자들에 대한 무책임한 학대라고 말하고싶다.
 
                      3. 시가 랭대받아야 하는가?
 
이 역시 공연한 물음일수 있다. 괴테는 일찍《누가 만약 시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그는 곧 야만이다.》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도《시는 력사보다 더 철학 적의미가 풍부하고 더 높은것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은 인류가 예술적으로 세계와 인생을 파악하는 창조활동이다. 따라서 문학예술활동에서 시야말로 인류가 자기의 사상을 표달하는 최고의 형식이 된다.
문학의 시조(始祖)로서의 시, 감각, 지혜의 총아로서의 시, 아름다운 절주의 창조로서의 시를 누가 부인하랴만 독자들은 어이 하여 괴테의 대성질호에 동조하지 않을가? 최근 《령점집단》에서 북경, 광주 등 5대도 에서 열독심리조사를 했는데 시가 제일 마지막이였다고 한다.(1997년 《잡문보》)
문화경험을 기초로 진행되는 자유적선택과정으로서의 문학교류에서 흔상심리 문제는 접수미학에 속하는 복잡한 학술문제로서 어떤 층차에서 문학이《독자문학》 으로 되여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한두마디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 우에서도 언급 했지만 문학예술교류는 어디까지나 선택적결약이므로 시문학이 랭대받는 원인을 작자 와 독자 량자에게서 다 찾아야 하겠지만 우선은 창작주체이자 미적자극물의 제공자인 시창작자에게서 찾아야 할것이다.
정보론과 미학론에서 확인되다싶이 한부의 예술작품은 유의적으로 조성된 독창성 과 그에 대한 리해성 사이에 변증관계가 고유되여있어 시인의 심리상태와 특수한 사유방식은 독자 일반의 심리상태, 사유모식과 충돌되였다. 이런 열독심리현상은 어느 시대에서나 불가피적이였는바 시라는 이 상록수는 늘 독자들의 몰리해와 트집, 지어는 도전과 거부심리의 풍운조화속에서 성장되여 왔다.
하다면 현대 우리 시대의 독자들은 어떤 시작품들에 더구나 거부감, 랭대심리를 가지게 되는가? 필자의 나름대로 판단해 본다. 례하여 시인자신도 아리숭한 개념과 잡다한 감각의 표현에 집념한 위현대파시, 인위적인 부호위기에서 조성된《난해시》, 분명 명석한 두뇌로 사유했으련만 의도적으로 그 의미를 짜증나도록 몽롱하게 표현한 시, 시인의 감성모호판단에서 기인되여 정감의 사인성이 극치에 달함으로써 독자 공감대 사이에 락차를 형성한“귀족적”인 시, 사상, 리념을 감각으로 전화시키려 시도했지만 선천적정감실조를 가지고 난 따분한 시, 순수 자아표현만 앞세우다보니 말세적인 애탄, 병없는 신음이 된 세태시, 부평같이 뿌리없는 리념의 전달에 급급 하여 시적의경을 물각해 버린 시, 감동과 감화에서 기인된 심장의 세찬 고동으로가 아니라 책상머리에서 고안해낸것 같은 창백한 철리시, 독자들이 기대하는 현실적이고 실혜적인 감각제공을 찾아보기 힘든 자아발설뿐인 시, 그리고 시가 시로 되여지는 외형이면서도 생명이 되여지는 운률미(외재률이든 상관없이) 임의대로 행을 나눈 극히 산문화된 시… 등등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속에 포함되기도 하겠지만 리성이 배제되여버리고 순간적감각의 표현, 몽환경과 하의식상태의 표현, 환상과 감각의 표현을 중시하는 상징파 시를 표방한 시들이다. 원래 비리성적환각과 직각은 애매하고 모호한것으로서 거기에 몽롱 한 함축미마저 나름대로 쓰기에 이른바 《몽롱시》라 명명된 시들도 많이 나왔다. 상징파적주지시에서 주지는 우주—인생에 대한 오묘한 철학적탐구와 암시를 기초로 하고있지만 감정은 랭정하며 암시적철리성은 흔히 현학적냄새가 다분하여 자칫 독자들을 오리무중에 빠뜨릴수 있다.
이 모든것은 분명“현대파시”의 결함이건만 그것을 절대적미학요구로 신봉하면 서《시에서 보배로운것은 그 뜻을 알아맞추는데 있으며》《시는 수수께끼가 되여야 한다》는 극단에까지 치달아오른 시인들도 있었으니 특정된 문화환경에 오래 습관 되여 온 독자들이 반응이 무디고 각이하게 랭담할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시는 오직 감각과 정서를 느낄수 있을뿐이며 그것이 시인들이 소망하는 예술적 효과라는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현실속에“자아”자체만의 표현이 아닌 예술 개성의 표현인 시가 환영을 받을수 있다는것이다. 사실 모시인의 인간적현실 개성의 표현은 그리 매력적이 못된다. 시인이 곧 시가 아니듯이 독자들이 감탄하게 되는것은 시인의 심미리상, 예술개성이다.《자기를 자신에게만 집중시키지 말고 세계를 자기 에게 집중시켜야 시인다운 시인이 될수 있다》는 고리끼의 말의 제시적이다.
물론 현대의 시일반에 대한 독자들의 보편적인 랭대심리를 단순히 전통수법에 대한 포기이냐? 현대수법에 대한 절대적미신이냐? 하는 표현형식여부에 귀결시킬수 는 없다. 그리고 시인의 내향적감수의 표달이냐? 외향적발설이냐? 하는것으로 우렬을 론단하는것도 타당하지 않다.
시는 초현실적인 표준으로 흔상대상을 판단할지라도 리해가 전제로 되여야만 효용이 있다. 리해불가능에는 예술적흔상이란 존재할 리유가 없기때문이다. 황차 리해자체가 필연적으로 어떤 미적쾌감을 부여하는것도 아님에랴! 모두어 말해서 시인이 전률하는 심령으로 감지하고 체험하고 진솔하게 표백한 시가 되지 못했을 때 시가 사회와 동고동락하면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구비하 지 못하고 순수 자아의 울타리안에서의 뇌까림이 될 때 시의 운명은 비참한것이다.
 
                                 4. 시의 포옹력은?
 
《단떼를 알려면 자기를 단떼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크로체는 말 했다. 하지만 참된 시인은 지음(知音)을 못만났다고 한탄하기전에 자기가 쓴것이 독자들의 기대와 신임을 저버리지 않았는가를 가늠해 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마음의 설레임이 시를 낳는다. 또 가장 아름다운 감동적인 언어로 그림같은 예술 경지를 창조하는것이 시이다. 그래서 시는 읽는다기보다 읊으며 흔상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서적으로 읊고싶어지는 시보다 고심히 연구하고 해석해야 할 시들이 더 많아졌다. 우리의 시문학은 어디서부터 길을 헛갈렸는가? 지난 한시기 너무 익어 서 씹을 맛이 없는 투명한 시. 그 이미지가 걸에 발가져서 음미할 여지가 없는 직설 시도 환영받지 못하지만 알둥말둥한 수수께끼도 시장이 없을것은 분명하다.
구호식송가시대는 지나갔다. 시의 력사는 반드시 새롭게 씌여져야 했다. 하여 80년대말기부터 《현대파시풍》이 수용되면서 시어의 형식과 풍격의 다양화방면에서 일정한 진전을 가져왔고 성과도 쌓은것은 사실이다. 시인의 대외우주의 객관적묘사를 집어던지고 내우주의 심오한 표현에 집중되는것이 시창작의 일대 풍조로 되였다. 이는 일대 진보이다. 그런데 그와중에 시가 개방된듯이 보이나 실상은 외계와 절연된 정서에 빠져있는 시작품들도 많이 나왔다. 이런 시들은 끝없이 우주의《수수께끼》를 제기하여 독자들을 소외시켜버렸다. 시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채 너무나 심대한 대가를 지불했음을 각성했을 때 결국 일종 기로에서 헤매다가 겨우 빠져 나왔는데 얼마 안지나서 다른 기로에서 방황한셈이다.
어떤 류형의 시이든 형식과 결구는 일정한 약속기제하에서의 문자조합으로 되여 야 하고 이런 조합은 어디까지나 가시도(可視度)를 전제로 감지의 공간과 공간 변화를 구성해야 한다는 창작작풍은 버리지 말아야 했다.시인은 수출자이면서도 흔상자로서 자기 감지의 표현을 되돌아와 감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류파의 시인 이든 타인의 각도에서 주관적이고 개체적인 심령심처의 은밀한것들을 정리,조절 하 여 표출시켜야 하며 독자의 상상이 미칠수 있도록 아량을 가지고 창작에 림해야 바람직하다. 기실 서방의 의상파시인들도 자기의 순간적감각에 대해 매우 엄숙한 태도를 가지고 시의 무의식속에 우연적이고 수기적(随机的)이며 은페적인 난해한것 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것을 삼가하였고 기괴한 시일지라도 독자들의 리해와 공명에 인위적장애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결약만은 준수하였다.
취미가 곧 생활론리는 아니지만 다같이 상상의 내용을 제약하고 규획하는바 모든 문학창작에서 자아초월을 기도할지라도 벗어날수 없는 약속기제이자 계약이기도 하다. 상징시, 혹은 극히 은유적인 시일지라도 교묘하게 숨겨진것이 명확한 이미지를 어떤 유익한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는것을 독자들이 심령으로 알아차릴수 있다면 그런 시적경지를 마다할 시독자는 거의 없을것이다.《시는 지력으로나 철학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로신)》
예술활동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것은 정감자체이다. 그래서 누군가 예술 가의 사인정감은 예술적정감의 대적이라고 말했다. 정감의 사인성의 배제에서 중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리성인소의 침투이다. 즉 시인은 자각적이든 비자각 적이든 순수의 개체경험의 수출과정에 상응한 정화, 공성화, 리성화 등 시화작업을 앞세워야 한다는것이다. 이에 대해 레르몬또브가 정당하게 천술했다.《위대한 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일반적인것… 인류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성격 속에는 인류가 살고있는 그만큼 일반적인것들이 들어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비탄속에서 모두가 자기의 내용을 알아차리며 그의 령혼속에서 모두가 자기것을 느끼며 그속에서 시인뿐만아니라 인간—인류적인 자기를 보게 된다.》
아주 지당한바 정감의 사인성에 자족하면서 스스로를 가두고 시의 모종 진리 에로의 향도적사명을 완수하는데 손색이 있는 시들을 용납할 시장은 갈수록 좁아 질뿐이다.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훌륭한 시인은 유미주의, 신비성, 섬세성보다 자신의 심령의 대상화의 효응에서만 눈부시게 현연되였던것이다. 리백이 자기의 시고를 마을의 무식한 로파에게 읽어주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때지난 전고일지라도 대중적 시인이라면 언어의 유희에 도취되지 말고 대상의 심오한 본질을 생활적이고 예술적인, 그러면서도 현학적이 아니게 전달해야만 시의 사회적효익이 기대 될것이다.
통감의 운용도 주관화의 효과만 고유되여 있는것이 아니라 사물의 미적본질과 객관화의 효과에 더 접근하고 있다는것을 부인하지 말자. 시인이 페쇄된 자족공간을 개방하고 시예술의 공통한 공간을 제공해주어야만 진정 예술정체성에 대한 초월이 이루어진다.《감촉할수 있는 형상으로 흐리마리하고 아리숭한 곁비유를 없애라. 진실성이 미의 덩어리로 엉키고 무게있는 단단한 체질을 가지게 함으로써 시의 생명력을 과시하라(애청)》
 
                                     5. 맺은 말
 
시평에서도 고기눈알을 진주라고 말하는식으로 자기 상상의 힘과 오성(悟性)으 로 시인이 그려놓은 륜곽에 리념을 보충하고 시에 담긴 뜻을 확대, 심화함으로써 재창작이 되지 않게 근신해야 한다. 그리고 평론자가 서정적인것을 지력적인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시에 력도, 심도를 부여하고있는 실례를 가끔씩 볼수 있는데 심히 삼가 할바이다.선천적으로 진실한 감정이 류실되였고 력사, 사회정신이 류실된 시, 튼튼히 발붙인 현실적정감이 결핍한 시, 대중의 희노애락과 동조하는면에서 인위적인 골짜 기를 파놓은 시는 보다 많은 독자들을 흡인할 매력이 없다.《수요가 없으면 생산이 없는것처럼 소비가 곧 수요를 산생시키는것이다.(맑스)》참으로 지혜적인 정서로 독자들의 심금을 틀어잡고 미의 경지에로 향도해야 한다.
1997년12월 20일- 2012년 12월 12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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