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http://www.zoglo.net/blog/cuijunshan 블로그홈 | 로그인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기행

(단편소설) 비술나무사랑
2013년 05월 10일 11시 23분  조회:11345  추천:0  작성자: 최균선
                                      비술나무사랑
 
                                          최 균 필
 
               ㅡ시대는 운명을 조종하고 운명은 인간을 거듭나게 한다ㅡ
                               
                                              작자

                                                1
 
    세상은 넓고도 좁다더니 생각지 않던 곳에서 생각하지 못한 때에 생각하지 않던 사람을 우연히 만날때가 있는 법인가보다. 며칠전 로인절을 즈음하여 청도시내 각 구 역의 로인협회에서 련환회모임을 가졌다. 내가 우리 협회를 대표하여 유일한 장끼인 시랑송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와 앉으려는데 한 녀인이 찾아왔다. 어덴가 안면이 익은 얼굴인듯 하면서도 잘 생각나지 않아 어정쩡해 있는데 그 녀자가 반색하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미안하지만 저 혹시 옛날 내몽골 소똥마을서 교원하시던 최선생님이 아니신지? 사회하는 분이 소개할 때 분명 균필이라 말한것같아서요”
    “나 균필이가 맞는데요, 누구신지? 그리고 내가 후룬베르에서 산것은 어찌…”
    “아이구머나, 맞구먼요, 저 생각안나요? 저 금순이예요. 그 소똥마을태생인 그 금순이라요 ”
     그제야 나의 먼지낀 기억의 쪽문이 빠끔히 열리며 내 인생의 한페지를 차지했던 이왕지사들속에 묻혀진 한 녀자의 얼굴이 확인되였다. 연출에 지장을 줄가봐 례의를 차릴여유도 없이 복도에 나와 마주섰다. 금순이가 내손을 와락 그러잡았다.
    “아이유,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요? 오빠는 늙어도 곱게 늙으셨네요, 기백도 여전하구요, 참, 나 얼마전부터 청양에 와서 살아요. 이런 활동에는 오늘 처음 왔구요. 그런데 따거는…옳거니, 영민이, 영애를 따라 왔겠지요? ”
    나도 옛인연이 싹 사그러진것이 아니여서 금순이가 무척 반가웠다. 례의 활달한 성격이던 그대로 말주머니를 풀면 청산류수였다. 나는 내추억의 한줄기인 소똥마을 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개방이 되고 한국의 문이 열리자 소똥마을 남도치들은 너도나도 조상의 나라로 나가서 국적을 올린 사람이 대부분이고 돈깨나 벌어가지고 자식들을 따라 연해지구 큰 도시로 옮겨앉다보니 소똥마을은 황페해졌단다.
    한때는 자유왕국이요 “제2대만”이요 하던 살기좋은 고장이 아니란다. 내가 소똥마을소학교를 떠나 치치할시조선중학교로 전근해가고나서 나의 반토굴막은 허물 어지고 비술나무만 고목이 되여 흘러가버린 마을의 쓸쓸한 정경을 굽어보고 있단다. 자기도 한국서 몇해간 벌어서 청양에 집이랑 사놓고 한국무역회사에 근무한다는 딸애네집에서 외손녀를 돌보고있단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비술나무얘기가 나오자 좀해서는 잠기지 않던 추억의 깊은 늪에 깊숙히 빠져버렸다.
    사람은 늙어서 추억에 살면 인생을 두번사는것과 같다고 하더라만 나는 두번 살자고 한사코 추억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추억이란 그 본인에게는 흥미로운 일이겠 지만 독자들에게는 그냥 낡은터에서 이밥먹던 얘기아니면 범을 잡았다는 옛날 호기를 자랑하는것으로 여겨지기마련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케케묵은 얘기를 꺼내는것은 지나간 나날에서 어떤 자족감을 찾자는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그렇게도 비틀어지고 전통뉴대가 망가져버림으 로써 인성이 훼멸되여버렸던 그 광란의 년대에 짓밟혔던 나의 못난 청춘기를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모종의 자성을 하게 하려는 욕심에서이다.
   사실 내게는 추억자체가 지겹다. 열기만 하면 판도라상자가 열리여 온갖 악과 고통들이 뛰여나올듯해서 겁부터 나기때문이다. 간혹씩 열어봐야 기쁨의 금싸락은 없고 슬픔속에 엉킨 앙금만 두껍게 갈앉은 내추억의 골방, 그 골방속에는 40여 년전의 처절한 긴 사연이 묵은 락엽처럼 썩고있다.
    때는 1976년, 신주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광란의 세월이 마감하는 때인지라 하늘 땅이 뒤번지고 인심이 뒤숭숭한 와중에 력사적인 대전변이 시작되였다. 돌이켜생각하면 그 한해는 한바탕의 악몽의 미성이였고 악몽에서 깨여난것은 이른 아침이였다. 일대의 영재 주은래가 사연많은 인생을 마치고 떠나버리고 대음모가가 운두르한에 불귀객이 되였지만 녀황의 미몽을 이루려고 살판치던 수도의 붉은녀왕이 단말마의 발악을 하던 비범한 한해였다.
    그런 살벌하던 때, 긴긴 세월 죽지못해 악착스레 살아온 나에게 마침내 운명의 신이 미소를 지어보였으니 시대가 운명을 조종하는것이 아니며 운명이 나를 거듭나게 하는것이 아니란 말인가. 한 사람이 지옥에 떨어져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쨍ㅡ하고 해뜰날도 있는 모양이다.
    어느날 나의 실락원에 꿈에도 생각지 않던 편지가 날아왔다. 내몽고 후룬베르 맹에 한구석에 자리잡은 한고얼인민공사 서라문(汉古尔人民公社西罗门)대대 조선족 소학교의 라성일교장이 보낸 초빙편지였다. 그동안 쑥밭이 되였던 민족교육을 재빨리 춰세우려면 자질이 높은 조선족어문교원이 수요된다는것이였다.
    편지를 몇번이고 거듭하여 훓어보았지만 초빙한다는 말은 또렷이 씌여있고 오랜 지기였던 라교장이 놀리느라 하는 말은 아님은 분명하였지만 나는 최면술에 걸린것 처럼 어리둥절해졌다. 그때까지도 우파감투를 쓰고있는 나를 교원으로 초빙한다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래서 한동안 답복하지 못하고 어정쩡해있는데 두번째로 편지가 날아왔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오지만 창조하기도 하는법이다. 어쩌다 찾아온 번대 머리 기회령감의 뒤머리를 꽉 잡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평생 처음으로 큰 용기를 앞세우고 군마사육장총부의 정공처로 찾아가 라교장의 편지를 내보였다.
    주눅이 드는 목소리를 추스르며 내평생의 꿈과 사연을 이야기하였지만 류간사란 작자는 내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아직 정책락실이 내려오지 않았으니 꿈도 꾸지 말라고 단마디로 잘라버리였다. 비는데는 강철도 녹는다지만 류씨는 그런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인간이 아님을 언녕 알고있는 나는 구지레하게 더 빌고싶지 않아 말없이 정공처를 나섰다. 속에서는 불덩이가 굴러다녔지만 모양은 분명 우거지상이 되여있었 을것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며 땅을 훑고있는데 누군가 내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얼결에 머리를 들어보니 총부의 오서기였다.
    “쑈추이,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겼나? 이렇게 풀이죽어있는 모양은 처음인데?”
    사람좋은 그의 너부죽한 얼굴에 계급성을 잠시 밀어놓은 자리에 인정미가 은근 히 흐르고 있었다. 그는 지원군으로 조선전쟁에 나가 상감령전투에서 2등공을 세운 혁혁한 전투영웅으로서 인간의 생존권리와 삶과 행복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였다. 그는 조선말을 아주 잘하였다.
    평시 방목장에 찾아와선는 함께 말을 타고 달리기도하였고 고무격려의 말을 해주군 하는 후더운 가슴의 사나이였다. 만날때마다 롱담비슷이 “잘하구있지? 대학생동 무가 일도 잘하고 책임성도 높다는 말을 많이 들었소. 여기서 인생이 끝나는것이 아닐테니 그냥 힘을 내라구 응?”하며 어깨를 다독여주는 형님같은 분이여서 그의 앞에서는 별로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속심을 털어놓을때도 있었다.
    그는 나의 고충을 끝까지 듣더니 나를 데리고 정공처로 들어가서 거두절미하고 류간사에게 명령조로 말하였다.
    “쑈추이가 소원을 이루게 하오. 원래 인간성도 좋고 그동안 말썽 한번 일으키지 않고 일도 잘하였으니 모범이라 할만도 하지 않소. 지금 형세가 달라지고있으니 당 안은 그냥 보류해두고 사람만 지방에 풀어보내시오. 곧 문건이 내려올테니 그때 정식으로 수속을 밟도록 합시다. 질질 끌것도 아니니 지금 정공처의 동의서를 함께 증명신을 써서 지방의 해당부문에 보내시오.”
   류간사는 얼굴에 난색을 짓고있었지만 입은 연신 “쓰, 쓰”를 외웠고 손은 소개 장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였다. 인제 되물릴수 없을 정도로 일이 진척되는것을 보며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번했다. 군인식으로 맺고끝는 오서기의 일처리에 머리가 숙여 지기전에 인정사정을 헤아리는 그의 인간적인 아량에 가슴이 뜨거웠다. 정공처를 나와 하늘을 쳐다보니 북국의 하늘은 더 푸르러보였고 해빛은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다. 기구한 비탈길을 허위단심 걸어온 나의 인생길에 서광이 비낀것이다.
    할빈정치감옥에서 닥달질 당하다가 여기 흑룡강성의 오지인 손오군마창에 로동개조범으로 끌려올때는 육신에 더운피가 끓어번지고 푸른 꿈이 창공을 날아예던 스물두살 대학생출신이였다. 내가 재난의 문인 입을 잘 건사하지 못하여 학생우파로 몰린후 내인생은 끝장났다고 모든것을 체념하였다. 17년이란 긴 세월, 승냥이떼가 욱실거리고 때때로 흑곰까지 출몰하는 까막골에서 말떼와 싱갱이질하며 청춘이 시들었고 교원이 되고 작가가 되려던 꿈도 구중천에 날아가버린지 오래다.
    남자나이 삼십은 이립(而立) 이라 하지만 나는 뜻도 세워보지 못하고 불혹의 고개를 가까이 바라보는 때에 이르렀으니 구곡간장이 뒤탈리지 않으랴, 속담에 헌신짝도 짝이 있다는 말이 맞아떨어졌는지 아니면 삼신할미가 끝까지 나를 저버리지 않은 탓인지 서른두살을 먹는해에 움안에서 떡함지를 받아안듯 앳된처녀가 제발로 굴러들어왔다. 중학교를 갓나온 처녀애였는데 살림이 하도 구차했던 탓인지 아무튼 장모가 될 분이 딸의 손목을 잡고 군마창까지 찾아와 평생을 맡긴다고 밀어주는바람에 나는 꽃같이 아릿다운 안해를 얻게 되였고 이듬해 떡돌같은 아들까지 척 보게 되였다.
    운명의 안배대로 어렵사리 얻은 안해와 손에 손잡고 자식들이나 잘 키우며 마음을 눅잦히고 살려고 작심하고나니 죽지못해 사는 삶이 살아야 하는 삶이 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젊은안해에게 내노라할수 있고 아들딸의 암담하던 전도도 그렇게 근심 하지 않도록 나를 떠밀어준 운명의 신이 공평한지 불공평한지 모르겠다. 눈에 띄이는 것이 말떼뿐인 이 군마사육장에서 반생넘어 썩다가 동족애도 다분하리라 믿어지는 조선족마을에 이사가게 되고 금상첨화로 인민교원의 신분이 된다하니 그때 심정을 내가 축적한 언어로는 일구난설이 아닐수 없었다.
   해토무렵, 나는 드디어 내청춘과 내설음이 범벅이 된 정한의 고장을 떠나게 되였 다. 많지 않은 가장집물을 몽골사람이 모는 마차에 싣고 얼음이 쩡쩡 소리내며 갈라 터지는 눈강의 얼음판을 건너 내몽골지역에 들어섰다. 내가 가는 고장은 내몽골 후룬 베이얼초원의 한귀퉁이에 자리잡은 조선족동네이다.
    들은바에 의하면 일망무제한 후룬베이얼초원에500여개나 되는 크고작은 호수들이 별처럼 널려있고 3000여갈래의 강물이 초원을 적시며 흐른다. 지명은 “후른호” 와 “베이얼호”라는 두 호수의 이름을 따서 지은것인데 “후룬”은 몽골어로 수달(水獭) 이라는 뜻이고 “베이얼”은 “수컷수달”이라는 뜻이란다.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신기한 후룬베이얼초원에 와보아야 진정 “람천록지(蓝天绿地)” 가 무엇이고 “록색정토(绿色净土)”어떠한가를 실감하게 된다. 가도가도 끝없는 일망무제한 초원의 여기저기에 별처럼 들어앉은 몽골포에서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석양에 물든 푸른 풀밭에 소와양떼 구름처럼 흘러가는데 준마를 탄 목민들이 구성진 노래를 뽑아올리는 정경은 그야말로 한폭의 풍경화를 방불케 한단다.
    그런데 이른봄, 허허벌판에는 되는대로 무져놓은 흙무지만 보여서 아름다운 초원의 풍경을 련상할수도 없었다. 초가들이 띄염띄염 널려있는 마을이 저만치 보이자 추위에 잔뜩 오그라들어있던 아들놈이 환성을 질렀다. 촌락은 촌락이로되 집들이 소똥처럼 되는대로 널려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소똥마을이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이 웃집사이가 어찌나 먼지 한번 마실가려면 자전거를 탄다고 하였다. 집들은 스산하기 짝이 없는데 옛날 지주네집 토성처럼 뗏장을 떠다가 두르고 버드나무까지 빼곡히 심어놓아서 매우 을산한 느낌을 주었다.
     이사짐을 라교장네 창고에 넣고 방에 들어앉으니 동태처럼 되였던 몸이 녹으면서 사맥이 나른해졌다. 라교장의 말로는 마을에 빈집이 한채 있는데 손질하면 꽤 살만하다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일찍 일어난 나는 집수리에 달라붙었다. 허물어진 부뚜막을 다시 쌓고 조선가마 두개를 척 걸어놓고 불부터 지펴보았다. 풍향도 갈팡질 팡하는 벌판에서 불길이 잘들지 않으면 야단이였다. 오래 비워둔 집이여서 내굴지나 않을지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불길이 잘들고 가마에서 물이 씽씽 끓어오르자 집안이 대뜸 훈훈해지여 살맛이 나는듯싶었다.
    흑손을 대충 비벼털고 마라초를 말아물고 새삶을 시작할 보금자리를 마음으로 보듬고있는데 난데없는 불청객 둘이 뛰여들더니 고래고래 고함부터 질러댔다. 험상궂게 생긴 중년남자의 얼굴은 아프리카 순토종처럼 가마밑굽같았다. 담이 큰 장정이 라도 어스름 달밤에 만나면 기절초풍할 몰골이였다.
    “나 누군지 알갔어? 빈하중농위원회 주임이야, 이 집 내허락도 받지 않고 가마부터 걸어? 되지 못하게스리, 어이, 민병련장 저 가마짝부터 밖에 내던지라구”
    라교장이 먼저 사정얘기나 들어보라고 그의 팔을 잡고 사태를 수습하려했지만 민병련장이란자는 흑선풍의 일언지하에 손이 데는지도 모르고 가마를 훌쩍 들어서 문밖에 내던졌다. 가마후렁으로 불길이 솟구치며 연기가 자욱해지고 불티가 사방에 흩날리여 집안이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였다. 위만시대 초원에 토비들도 삼가할 짓을 인정사정없는 두 사람은 아무꺼리낌없이 해대고있는것이였다.
    산설고 낯설은 고장에 말똥처럼 굴러든 신세라지만 이런 무지막지한 란동에는 참을수 없었다. 아무리 타지방사람이라해도 이건 인간대접도 아니였다. 주먹이 불끈 쥐여지고 입귀가 세차게 푸들거렸다. 십여년을 눈바람 맞으며 산전수전 다겪은 북국의 말몰이군이요 힘꼴깨나 쓰던 나로서는 그저 당하고만 있을수 없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법이다. 래일 다시 수갑을 차더라도 두 놈의 버릇을 고쳐주려고 작심했다. 처음부터 약하게 보이다간 장차 더 기승부릴게 불 보듯했다. 나는 부뚜막에 세워두었던 삽을 거머쥐였다.
    “이게 무슨 짓이요? 그래 사람사는 동네에서 사람이 할짓인가?”
    “뭐라구 씨부렁대는거야? 이 민병련장이 한번 맛을 보여줄가?”   
    “그래? 어디 해보자구, 제장할놈의…덥벼봐라!”
    내가 하늘이 낮다고 길길이 뛰자 라교장이 극구말리였다. 칼은 이미 뽑아든 형국이니 주저앉을수도 없었다. 라교장을 뿌리치고 삽날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두 작자는 대번에 기세가 누그러드는 징조였다. 약자앞에서 거센체하다가도 대방이 더 악지세게 나오면 뒤가 저려하는게 이런자들의 본성이다. 그동안 벼라별 사람들을 다겪어본 나로서는 그자들의 그런 심통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던것이다.
    “좋다, 너같은 놈들과 한마을에서 살지 않으면 그만이니 늬들죽고 나죽고 하자,”
    “가만! 그러면 인명사고 날거 아닌가? 이자 우리가 좀 과격했지만 좋도록 말해 보자구, 허참 저런 걍 도깨비가 다있어? 사실말이야 이 집은 누가 먼저 들기로 했단말이요. 그런데 당신이 맘대루 들자고 했으니…”
    나는 시비를 캐려고 생각하다가 광란의 세월에 미쳐난 자들에게 말도 통하지 않을것같아서 삽날로 봉당을 짓쫗으며 씩씩거렸다. 나어린 안해보기가 스스로 민망해져서 자격지심이 무분별한 격노를 솟구치게 했는지 몰랐다. 그자들은 어쩃든 이 집은 임자가 있으니 못든다고 그루를 박으며 나가버렸다. 부엌에 쪼크리고 앉은채 말없이 눈물을 훔치고있는 안해를 보기가 안쓰러워진 나는 밖으로 뛰여났다.
    집뒤 저만치 먼곳에 낮으막한 둔덕이 있었고 둔덕아래 집같은것이 보였다. 누가 부르기라도 한것처럼 발길을 옮기여 다가보니 벽체가 반나마 땅속에 묻힌 토굴막이 였다. 기울어진 처마끝에 고드름이 두룽두룽 매달려있었다. 원래는 마당이였는지도 알수 없는 집앞 공터에 늙은비술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어데서나 흔히 보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던 비술나무가 그날따라 각별히 마음을 끌었다.
    거의 한아름이나 되는 나무였는데 가지도 꽤나 무성해보였다. 나는 터실터실한 나무등걸에 걸터앉아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 어디서 씨가 날아와서 움이트고 뿌리를 내렸느지 알수 없는 비술나무는 이 허허벌판에 외로운 존재였지만 이 허물어지는 집 을 지키는 초병처럼 느껴졌다. 나는 떨어져나갈듯 위태위태한 문을 열고 토굴막안에 들어갔다. 집은 불성모양이였지만 나같은 이방인이 누구와 다투지 않고 안둔하기엔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놈의 번대머리같은 언덕바지에 이런 집이 남아있다는게 희한했다. 마치 나를 들어살라고 기다린듯싶었다. 이제 봄이 오고 여름이 되면 비술나무가 우거질것이고 터도 넓직해서 이랑이나 짓고 남새랑 심어먹을만했다. 나는 품이 많이 들어야 할 집 이지만 이런 집을 가지고 또 시비를 걸 사람은 더없으리라 생각되였다. 라교장도 교원으로 초빙해놓고 집한칸 마련하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그 집은 너무 헐망해서 아무도 욕심내지 않을것이니 먼저 들어놓고 차차 방도를 대보자고 하였다.
   한 이틀품을 팔아서 집을 손짓하고 거접하고 보니 안해에게 덜 미안했다. 그때 로부터 외로운 비술나무아래 외딴토굴막이 내집이 되였다. 그래서 마을아낙네들속에 서 나는 비술나무집나그네로 불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쩌면 이 별호가 내게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비술나무는 내한성이 강해서 만주땅 어디서나 볼수 있으며 내조성은 약하나 내공해성이 강한 나무이다.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도 저 비술나무와 같으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마음밭에 옮겨졌고 나의 새 생활의 믿음이 되였다. 외로운 비술나무가지에 봄빛이 무르녹더니 연록이 춘색을 더해주고 여름이 되니 록음이 우거져서 이름모를 새들이 날아들기도 하였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틈이틈이 집을 손질했더니 내버려뒀던 집같지 않다고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먼곳에 가서 물을 길어다 먹을일이 걱정이여서 큰 마음을 먹고 펌프까지 척 박아놓으니 10여메터아래 지심에 샘물단지를 뚫어놓았는지 물맛이 례사롭지 않게 좋았다. 경치좋은 풀언덕에 물맛까지 좋은 집터를 타지방사람에게 내준게 아초 잘 못되였다고 은근히 배를 앓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이야 이렇쿵 저렇쿵해도 나의 비술나무사랑이 그렇게 시작되였다.
                             
                                                                 2
 
      1백50여호 잘되는 큰 동네인 이 마을은 워낙 일제시대 벌목군으로, 떼목군으로 끌려와 눈강에서 뗏목을 타던 사람들로 이루어진것이였다. 일본놈들이 망해빠지자 똇목을 탈일도 없고해서 당시까지는 임자없던 이 허허벌판에 토벽집을 짓고 차차 수 전도 일구어 벼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였다. 조선팔도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벼라별 사람들이 다있었다. 경상도문둥이, 전라도깎쟁이, 덤베북청, 충청 도량반, 평안도무뚝뚝이, 경기도잰내비, 항해도얄개, 함경도보따리 등 구성이 복잡한 데다가 저마끔 제고 향사투리를 쓰면서도 꽤 어울리며 살아왔다고 한다.
    전국에서 공산풍이 불던 때 곳곳에 인민공사가 서고 큰가마밥을 먹던 시절에도 이 소똥마을 사람들은 제멋대로 밭을 나누어 개체농사를 하며 징구량임무를 완성하면 만사대길이여서 량식사정도 타고장처럼 팍팍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았다. 벼농사란 연 변과는 달리 건달농사였다. 봄에 밭갈이하고 대충 논삶이를 한후 벼씨를 훌훌 뿌린후 물만 대고 김을 매는 법도 없었다. 여름내 밭에 얼씬거리지도 않다가 가을걷이도 몽골사람들이 풀을 베는 큰낫으로 새초베듯 베눕혔다가 건기를 들였다가 제자리에서 탈곡기에 넣어 타작을 하다보니 뼈빠지게 짓는 벼농사가 아니였다.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너렁청한 터밭에 고추농사를 짓는게 큰 재미였다. 고추가 좋다고 멀리 할빈, 심양 등지까지 소문이 나서 가을이면 고추장사군들이 줄을 서다싶 이 해서 도거리로 사가다보니 고추를 판 수입만도 짭짤했다. 남자들은 여름내 여기 저기 호수를 찾아다니며 낚시질로 세월을 보낸다. 몽골사람들은 물고기를 먹는법을 몰라서 물이 있는 곳이면 팔뚝같은 메사귀들이 득시글거렸고 자라도 지천이였다. 하여 이밥에 물고기를 먹으며 태평성대를 누리였다. 먹거리가 풍족하고 인심도 풋풋 해서 전라도깎쟁이들도 우느소리 한마디 없었다고 한다. 타지방사람들 이 마을을 “제2대만” 이라 부르게 된것도 이에서 연유된것이라 한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조선팔도강산”도 광란풍에 휘말려들었고 인심도 흉흉해졌다. 팔에 완장을 찬 홍위병들이 생기면서부터 밤을 자고나면 난데없는 위만 경찰이 잡혀나왔고 “지주부농”들이 생겨나서 무산계급의 독재의 맛을 보게 되였다. 끔찍한 참상도 비일비재였다고 한다. “제2대만”이 갑자기 혁명성지가 되였던것이다.
    물건너 몽골족마을에서는 투쟁구호를 부르는 사람도 없었고 유선방송도 울리지 않는 무풍지대였다. 몽골사람들의 집담벽에 혁명구호를 써갈기면 밤새 흑매질을 하거나 아예 소똥을 발라놓아서 횟가루로 구호를 쓸수도 없게 하였다. 중화대지가 팥죽가마 끓듯해도 그들은 그냥 하던대로 초원에 가축을 풀어놓고 키우며 찡내는법이 없이 마음속으로 칭키스칸만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일제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고향마저 잃은후 이 만주땅에 끌려와 고역을 치르며 살던 사람들이라 서로서로 내막들을 빤히 알면서도 지주부농을 만들어내며 투쟁의 맛을 구워냈을뿐이다. 그래서 몽골사람들은 흰옷을 입은 족속들이 정신이 돌았다고 비웃으며 상종하지 않았단다. 그도 그럴것이, 논에 범이 새끼칠정도로 풀이 무성해져 산량도 형편없이 되고 량식고생을 하기시 작하였으니 말이다. 인간사회야 어떻게 시끌벅적하든 여기 후룬베이얼초원에는 예이제 철을 따라 봄이 찾아왔고 먼 강남에서 날아온 제비들이 처마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웠다. 그래도 농망기가 닥쳐왔다고 붉은기가 논밭에 꽂히고 농사차비에 한동안 분주했다.
    그러던 어느날, 언덕아래 옛개바닥에서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놀던 아들놈이 번쩍번쩍하는 손목시계를 주어들고 마당에 뛰여들었다. 그 시절에만도 재봉침, 자전 거, 손목시계는 세가지 큰 재산이였는지라 아들놈도 큰 보배나 주은듯 신나하였다. 혹시나 뉘집의것을 훔쳐왔나하고 닥달하였더니 놀다가 주은것이라고 실토정했다. 나는 한시름 놓았지만 비술나무집아들이 손시계를 주었다는 소문은 온 마을에 쫙 퍼졌다. 소문이야 어떻게 돌든 나는 시계를 임자에게 돌려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이튿날, 점심때에 빈하중농대표가 똥돌이라는 둘째아들을 앞세우고 찾아왔다. 한 창 집을 손질하고 있던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또 무슨 개소리를 하는가 보자고 기다리였다. 내가 알은체도 하지 않으니 빈하중옹대표란 자가 머뭇거리는 눈치였는데 홍위병대장이라는 똥돌이가 말을 걸어왔다.
   “어이, 이집애가 손목시계를 주었다는데 어데 있소?”
    오는 말이 곱지 않을줄 알았지만 공연히 밸이 꼬였다.
   “그 시계가 임자네들과 무슨 상관인데?”
    나는 똥돌이를 시답지 않게 일별했다. 못된송아지 뿔부터 난다고 소문이 광채롭지 않은 자였다. 강북에 몽골마을 처녀를 홀려내여 임신을 시켰는데 운래 심성이 호락화락하지 않은 몽골사람들이 민족망신을 시켰다고 말뚝에 달아매놓고 거의 죽도 록 채찍찜질을 안겼다고 한다. 그때 맞은 흉터가 지금도 보기흉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그게 무슨 말본새야? 내가 그 시계임자란말이야, ”
   말하는 꼴이나 얼굴기색이나 엉큼한 떼질을 쓰자는게 분명했다.
   “오, 그런가? 그런데  무슨패요? 시계줄은 어떤거구?”
   “무슨패기는 무슨 패야 동방홍패이지”
    내가 빈정거리듯 하며 확인을 요구하자 한참 머뭇거리던 똥돌이가 하는 대답이 그만 웃음을 왈칵 토하고말았다.
    “웃기는군, 동방홍뜨락또르는 있어도 그런 시계는 듣다가 처음이요. 어째, 공짜로 시계를 얻어가지자구? 미안하지만 나 이미 시계임자와 련락을 해놓았소. 어쩔테요?”
    그자들이 무작정 시계를 내놓으라고 야단법썩했지만 나는 들은체도 않고 내일만 하였다. 원래 속이 비여가지고 기세부리던 자들인지라 제무안에 취해 가버렸다.
   이튿날 공사중심소학교에 가서 내앞으로 부쳐온 우편물을 찾을겸해서 자전거를 빌어타고 공사마을에 갔다. 교무주임을 만나서 아들애가 시계를 주어온 사실과 마을 에 빈하중농대표가 제시계라고 찾아왔던 이야기랑 하고 시계임자를 찾아보라고 당부 하며 시계를 내맡겼다. 그럭저럭 하다보니 점심때가 지났다. 그때만도 손님 한사람을 청하기가 쉽지 않은터라 교무주임이 제집에 가서 식사하자는것을 사양하고 돌아섰다.  
    마을에서 그간 사정이 어떻게 돌아갔던간에 새로 이사온 사람으로서 가만있을수는 없고해서 공소사에 술서껀 이것저것 사들었다. 20리길을 되돌아오려면 힘도 들겠기에 식당에서 대충 요기하고 나오니 시간이 퍼그나 지났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서 대통로로 갈 생각을 접고 강을 건너 지름길로 가기로 작심했다. 강기슭에 이르기 바쁘게 부랴부랴 옷을 벗어부치고 자전거부터 둘러메고 강을 건넜다. 자전거바퀴가 물쌀에 밀리면서 여간 말째가 아니였지만 끝내 기슭에 올랐다. 한숨 돌리고 두고 온 짐을 가져올가 하는데 강건너서 한녀인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공연히 안심이 되지 않아서 재차 강물에 뛰여들어 속도를 내여 건너갔다.
    가까이서 보니 서른살이 채안되여 보이는 이쁘장하게 생긴 색시였다. 이쁘건 말건 내가 상관할바가 아닌지라 짐을 둘러메고 다시 물에 들어서려는데 녀자가 어줍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라고 해야 하나? 엥히, 따거라해도 괜찮겠죠? 따거, 나도 강을 건너 급히 가야 하는데 물살이 센지 어떤지 알수 없군요”
    “글쎄요, 나는 남자여서 그런대로 건넜는데…색시는 녀자몸으로 건널수 있을지 모르갓네구료”
    “나 소똥마을 친정집에 가는 길이예요. 친정에 둔 아이가 앓는다는 기별을 받고 급히 가야 하는데 큰길로 돌아가면 해저물것같아서 강을 건널가 했는데 혼자서…”
    뒤말의 뜻인지 건너달라는게 분명했다. 낯선데다가 젊은녀자를 어떻게 건늬여줄지 나도 파악이 없었다. 그러나 녀자의 눈빛은 말하고있었다. (첫눈에 조선사람인걸 알아봤데이, 마음도 고우실거고…
    나도 눈으로 말했다. (새파랗게 젊은 녀자가 겁도 없이 낯선남자을 어믿구 부탁하는거야? 여기 녀자들은 몽골처녀들을 닮아서 다 괄괄해진거여…?) 그러나 입밖 에 낼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인정사정없이 거절할수도 없고해서 뒤끝을 달았다.
   “정 그러면 내가 먼저 이 짐을 마저 건네다 놓고봅시다. ”
   “오빠, 혼자 가버리지는 않을거죠? 나 여기서 기다릴래요 꼭 다시 와야 해요, 네? 안그러면 나 어떡해요? ”
    녀자가 사정사정하는데 확답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할수 없이 다시 기슭에 올라 와서 말했다.
    “좋아요, 나를 믿고 하는 부탁같으니 그 짐과 겉옷을 벗어요. 먼저 건네다놓고 다시 봅시다”
    “오빠, 감사해요, 여기 술이 있으니 강을 건너기전에 한잔 하세요, 그러면 몸도 후끈해질거예요.”  
   녀자가 건네는 술병에 입을 대고 돌아서 있는 사이에 옷을 벗었는지 두루루 말아서 내맡겼다. 꽤 묵직한 짐을 한데묶어 머리위에 쳐들고 곧장 물에 들어섰다. 내가 건너기슭에 짐을 내려놓기도 전에 녀자가 손을 흔들며 재촉질하였다.
    “오빠, 그냥 그렇게 가면 안되여요. 응? ”
     낯모를 남자에게 그렇게 미쁘게 노는 녀자가 싫지않아서 숨돌 돌릴념도 못하고 나는 다시 강을 건넜다. 성숙할대로 성숙한 덩실한 체대의 녀자의 곡선미가 곳곳에서 “날 보쇼”하는듯 눈길을 잡아끌었다.
    “어서 준비해요, 내가 손잡아줄테니”
    “아이 참 어쩌나? 나 물을 몹시 무서워하는데, 손만 잡고는 안되겠는데…”
     참 괴짜였다. 그러는 녀자를 내버려둔다면 량심이 허락하지 않을것이다.
    “색시 참 여간내기가 아닌걸, 자 내손 꼭 잡으면 되니까 안심해요”
    녀자는 할수 없다는듯 하얀 팔목을 내맡겼다. 녀자를 아래쪽에 세우고 더듬더듬 돌부리를 피하며 천천히 건너는데도 녀자는 연신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무서워 말아, 이 가시내야, 자신도 없으면서 물건넌다고 온게 괴상하잖아?)나는 속으로 나무리며 녀자의 팔목을 더 세괃게 잡았다. 그런데 이런 랑패라구야, 한절반 건넜는가싶은데 녀자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휘뚱거리더니 내손아귀에서 벗어나고 말았던것이다. 물이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물을 무서워한다는 그녀에게는 어마어마한 물결이였을것이다. 어느결에 두어발이나 밀려가서 아우성치며 허우적거리는 녀자를 잡았을 때 녀자는 다짜고짜 내어꺠에 매달렸다.
    “아이, 하마트면 물귀신 될번했네, 이대로는 안되겠어요. ”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업고 건너면 안돼요? 나 죽을듯이 무서워…”
     녀자는 내가 대답하기도전에 칭칭 감겨들었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나는 이것저것 고려할것없이 아래쪽에 서서 등을 들이댔다. 녀자는 무작정 내등에 찰싹 들어붙었다. 잔뜩 부풀어있던 녀자의 젖무덤이 뭉클하며 미묘한 감각을 전하고있었다. 녀자가 무거운지 내가 맥이 빠졌는지 무척 힘이 들었다. 서른살이 저물도록 살아오면서 제안해도 업어본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생면부지의 녀자를 업고 강을 건너는것이 마치 소설을 엮는것 같았다. 녀자는 두팔로 내목을 꼭 끌어안았고 온몸을 실어왔다.
    기슭에 올라와서 등에서 내린 녀자는 거의 알몸인 나를 보고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버드나무뒤에서 겉옷을 걸치고는 한술 더 뜨며 나왔다.
    “사람을 도우면 끝까지 도우라고 했지요? 나 오빠의 자전거에 태워줘요. 은혜를 꼭 갚을테니까요, 저봐요, 해가 저물고 있잖아요? 여기는 몽골사람들 마을인데…”
    미모인데다가 꽤나 올똘해 보이는 녀자가 별스럽게 느껴졌지만 너무 허물없이 나오니 대낮에 여우귀신에게 홀리우는 기분이였다.
   “이 길을 처음 가본다지요? 나 길 잘아니께 걱정말고 지름길로 가자요”
    나는 말없이 싱그레 웃어보이고는 자전거에 핸들 량쪽에 짐들을 걸고 귀가길에 올랐다. 자전거가 들썽거릴때마다 녀자는 소녀애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내허리를 휘감 았고 머리를 등에 붙이기도 하였다. 누가 보면 장보러갔다가 돌아오는 부부로 생각 했을것이다. 지름길을 오느라 했지만 시간이 꽤 걸렸다. 마을이 저만치 다가왔다. 집집의 창가에서 새여나오는 석유등잔불빛이 초원을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련상 시켰다. 마을에 다 들어섰는데도 녀자는 자전거에서 내릴념을 하지 않았다.
    “오빠,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나 금순이라고해요, 좋은분 만나서 다행이예요”
    “아무튼, 보기드물게 헐찮은 색시요, 허허허…그쪽같은 색시는 처음인걸”
    “나 원래 왈패래요. 호호호…나 첫눈에 오빠가 마음에 푹 들었거든요”
     녀자는 마을 웃쪽으로 가면서 몇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토굴막같은 집도 집이고 그런 집에 이사와서 들었으니 집들이도 당연히 해야 하였기에 마을에 유지들과 집수리할 때 흙을 실어다준 평안도아저씨, 펌프를 박을 때 힘을 써준 젊은이들과 학교선생님들을 청해 비술나무아래에 술판을 벌렸다. 술판이 한창 흐드러질 때 마을에 센세이숀을 일으킬 일이 생겼다. 어제 물을 건네준 젊은녀 자가 술한병과 구하기 어려운 마른명태랑 들고 우리 집마당에 들어섰던것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곤혹스러워졌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알고보니 개차반같은 민병련장의 누이였고 가마까지 들어내며 못들게 한것이 바로 금순이때문이였단다. 사람은 천층만층 구만층이라더니 그런 날도깨비같은 사람과 한 핏줄을 타고났건만 성품이 완판 다른것에 왼고개가 탈리였다. 손님들이 다 헤여지 도록 안해를 도와 이것저것 거들던 금순이가 나와 마주앉았다.
    “동생한테서 듣고보니 우리 소학교에 새로 오신 선상님이라구예. 우리 저 개차 반같은 동생 행패도 부렸다문서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저때문에 이 집에 들게 되였고. 암튼 여러가지로 고마운데 또 여러가지지로 죄송하여요”
    그 오래비가 한 행세를 보면 상대도 하고싶지 않은 녀자이지만 낯선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며 등에 업히던 너무나 단순할만큼 직심인 녀자, 인연이 얽히고 보니 친누이동생같이 살갑게 느껴지는 녀자가 술까지 사들고 온데는 감격 그 자체였다. 금순이가 제동생을 어떻게 교육했는지 민병련장이란자도 더는 데설궂게 굴지 않았고 그가 빈하중농대표란 자를 어떻게 삶았는지 인정이 돌게 굴었다. 날이 차차 가면서 증오심도 차차 식어갔다. 참으로 인연이란 이리저리 얽혀돌고 인생은 지그재그인가.
 
                                                          3.   
  
    갓마흔에 첫버선이라더니 대학시절에 무르익힌 꿈이 17년만에 이루어져 마침내 교단에 나서게 되였다. 비록 촌마을에 허술한 소학교이고 정식교원도 아니였지만 내 게는 하늘에 별을 딴 격이였다. 오래오래 묵어있다가 터진 꿈이여서인지 인차 사업에 적응하게 되였고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나는 5학년을 맡았는데 학생이 20명이였다. 한어는 물론 몽골말도 제법 잘하였 다. 그러나 그동안 학업을 전페하다싶이 하여 새해가 되면 치치할시조선족중학교에 갈 애들이 머리가 텅텅 비여있었꼬 초원에서 갈개는 망아지들같았다. 비판대회장에나 끌려다니며 시키는대로 구호나 부르고 잔뼈를 굳혀온 그들은 북경의 위치도, 영원히 지지 않는다는 붉은태양이 있는 중남해도 몰랐고 천안문이란 말을 들어 알고있었지만 그 이상 아는것이 없는 반문맹들이였던것이다. 기초교육의 전당도 쑥대밭이 되였으니 그럴만도 했지만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었다.
    차차 아이들과 정이들면서 이 내몽골초원 한귀퉁이에서 생명의 꽃을 피워올린 우리 겨레의 후대들을 위해 일신을 바치리라 마음먹었다. 우선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안계부터 틔워주는게 급선무였다. 오래전부터 인연을 굳혀오던 치치할시 조선족소학 교의 교장선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교정황과 아이들의 상태를 상세히 적어서 초원에 흩뿌려진 우리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큰 학교에서 관심의 손길을 뻗쳐주기를 희망한다고 부탁에 부탁을 하였더니 내가 교원이 된것을 축하한다며 함께 손잡고 산재지구의 민족후대양성사업을 잘해보자고 호응해주었다.
    그때까지 학교에서 누구도 생각못했던 일을 내가 시작을 뗀것이다. 학부형들도 몹시 신기해 하였다. 라교장도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치하하였다. 치치할소학교에서는 자매학교를 맺자고 하면서 학생대표들을 거느린 세명의 교원을 파견했다. 소똥마을 소학교로 말하면 처음으로 맞아보는 귀빈들인지라 우리는 눈강나루터까지 마중을 나갔다. 난생 처음 초원을 구경하는 시내아이들은 초원에 흐르는 말떼들을 보며 환성을 올렸고 초원에 만발한 들꽃위로 날아예는 나비들을 보고 신기해 하였다.
    두 학교에서는 해마다 련합으로 하령영활동을 하며 문예연출, 시랑송, 웅변경연, 축구우의경기도 조직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음악선생이 학교무용복을 장만하러 치치 할시로 떠날 때 라교장은 제주머니를 털어 축구대운동복까지 사오라고 하였다. 그저 멋없이 뛰놀기만 하던 애들이 운예대로, 축구대로 뽑히게 되자 아이들은 살판을 만나 게 되였고 한적하던 초원소학교는 흥성거리기시작했다.
   나는 체육교원이 아니지만 축구교련을 맡았다. 뽈을 잘 다루고 못다루고 할것없었기에 우선 달리기를 잘하는 남학생 13명을 선발하여 매일 방과후마다 훈련을 시작했다. 종아리에 모래주머니름 쳐매고 체력을 올리는 훈련부터 시작했다. 차차 틀이 잡히자 축구시합도 조직하게 되자 일밭에서 돌아온 학부모들이 학교운동장에 구경나오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학교마당은 늘 흥성거렸다. 사람들은 이제야 조선족 들이 사는 냄새가 나고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학교답다고 좋아하였다.
    축구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은 열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여서 실력도 나날이 늘었다. 여름방학 하령영에서 벌인 축구시합에서 한다하는 치치할조서족소학교 축구팀을 홀가 분하게 이겼다. 내노력의 보람보다 아이들이 기세충천한 모습들이 얼마나 대견한지 몰랐다. 며칠간의 하령영은 여러가지 활동으로 다채롭게 진행되였다.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고 한겨레의 동포애가 혈관속에서 끓다보니 도시애들이고 농촌애들이고 한물 밥이 되여 정이 돈독해졌다. 헤여질 때 녀자애들은 영리별이나 하듯이 서로 부등켜 안았고 남자애들은 코를 훌쩍거렸다.
    다음해 하령영은 치치할빈의 명월도에서 조직하여 촌애들을 유람선도 태워보이고 문예경연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두 학교 사생들의 정은 형제의 정처럼 뜨거웠다. 비록 늦게 시작한 교원생활이였지만 나는 보람찬 삶이 무엇인지 절실히 느끼며 자기 가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게 얼마나 의미로운지 알게 되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 든 창의적이여야 한다며 어깨를 쳐주는 라교장에게 감사하기 그지없었다.
 
                                                          4.
 
      겨울이 이미 왔거늘 봄이 멀소냐? 라는 어느 명인의 말처럼 10년내내 신주의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구름이 마침내 가시고 하늘 맑고 봄바람 따스한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만악의 “4인무리”까지 볼장을 다 보다나니 그야말로 지정한 새봄이 온것이다. 오랜세월, 기뻐할 때 기뻐할줄 모르던 사회의 천더꾸러기인 나에게도 기쁨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때가 올줄이야, 복은 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지 만 내게는 복이 넝쿨채로 굴러들어왔다.
    군마사육장총부에서 보내온 소환통지서와 함께 내인생의 두번째 전환기가 서막을 열게 된것이다. 여기 초원에서 민반교원으로 있은지 8개월만이다. 17년동안 우파모자를 벗지못하고 운동때마다 “운동선수”로 나서서 투쟁비판을 밥먹듯하였던 나로서는 꿈에 승천한 격이다. 아마도 여기를 떠나야 할 징조였다. 그동안 정들대로 정든 아이들을 버리고 가버린다면 나는 배앓이는 배앓이대로 하고 팔삭둥이만 낳은 산모격 인셈이다. 20명 모두를 치치할빈 조선족중학교에 입학시키고야 말겠다던 호연지기도 공담이 될듯싶기도 하여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바라던 직업이던가? 내몽골초원에 뿌리내린 우리 겨레들의 삶터에 미래인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슴을 달구기도 하였던 나로서는 총부의 소환통지가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아직 알수 없는 상태이다. 1958년부터 문화대혁명 10년세월, 내가 겪어온 인생고는 나름대로 내인생의 궤적이고 력사이기도 하다. 로모가 생명이 경각에 달했 다며 속태우는 상해지식 청년이 너무 안되여서 몰래 차표까지 끊어주고 말에 태우고 룡진기차역까지 바래준게 들통이 나서 상해지식청년의 재교육을 파괴했다는 죄명으로 천명도 넘는 군중대회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받으면서도 나는 주눅이 들지 않았고 나의 꿈을 버리지 못하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낡이 밝기 무섭게 라성일교장을 찾아가 군마창총부의 소환통지서를 내보이고 열흘간 청가를 맡았다. 라교장은 고생고생하다가 이제야 정책 락실이 되는 모양이니 여기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앞날을 잘 고려해보라고 내고충을 헤아려주었다. 그동안 수고도 많고 성과도 컸지만 물은 낮은데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 데로 흐른다고 대학출신으로서 이런 촌소학교에서 재능을 썩일필요가 있겠느냐며 치치할빈시조선족중학교 교장에게 추천서도 써주며 등을 밀었다. 말몰이군으로 나날 을 보내며 애를 태우던 나를 민반교원으로나마 첫교단에 세워준 고마운 분이 이렇게 앞날까지 진심으로 생각해주니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감출리유도 없었다.
   
 
                                                          5
 
      이튿날 이른 아침, 길을 떠났다. 몽골사람의 마차에 앉아 허위단심 소똥마을을 찾아올때는 이른봄 눈덮힌 세계였는데 어느새 먼 산에 단풍이 불타고 천고마비 호시절 잔뜩 살이 오른 말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있다. 가없는 초원 어느 기슭에서 불어오는 선들바람이 그렇게 기분을 돋굴수 없었다. 맑게 개인 청청 하늘에 꽃구름이 둥실 떠나니고있다. 몇달새에 이 초원에 너무너무 정들었나보다.
    룡진역에서 차에서 내리자바람으로 뻐스를 갈아타고 군마사육장으로 달려갔다. 정공처를 찾아들어가니 류간사가 차겁지도 뜨겁지도 않게 맞아주었다. 그러면서도 정책에 따라 우파모자를 벗겨주고 군마창의 자제중학교에 국가교원으로 취직시킨 다는 문건을 내보였다. 이제 내가 수표할일만 남았다는것이다. 나는 너무 감격해서 말도 이어대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언어소통문제도 있고 조선족이니 될수만 있다면 제민족의 교육사업에 헌신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표백했다. 류간사는 이런 인사변동 은 혼자서 주관할수 없다면서 오서기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오서기는 당과 국가의 기본정책이 민족정책인만큼 본인의 의사와 요구를 들어주라고 지시하였다. 류간사는 내가 소똥마을에 내려가 있은 8개월간의 로임과 정부에서 내려보낸 안치금이 들어있는 저축통장까지 내주었다. 이 세상에서 인정은 씨를 말리 지 않았고 가슴이 따스한 사람들이 많았다. 수속을 다마쳤지만 기차시간이 지나서 군마창 초대소에서 하루밤 묵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저녁무렵 어떻게들 알았는지 몇해동안 함께 뒹굴던 방목대친구들이 말을 몰고 초대소앞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친구들은 끝내 해빛을 보게 되였다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오래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대접을 받으며 가슴이 찡해났다. 친구들은 저마끔 불에 구운 들꿩이랑 산중에 인삼이라는 구운 원숭이버섯이랑 내놓았다. 나도 배낭에서 소금에 절인 양고기랑 내놓았다. 풍성한 안주인지라 우리는 밤늦도록 통쾌하게 마셔댔다. 원래도 마실줄 모르는 술을 거나하게 마셨더니 잠이 오히려 저멀리 달아 나고 궁리만 엉크러졌다. 생각이 생각을 부르고 만약이라는 아름다운 동경이 또 만약 이라는 현실을 부르는 바람에 장밤을 눈한번 붙이지 못했다.
    서른두살까지 장가못가고 말잔등에서 세월을 보내던 외로운 사나이에게 하늘이 점지해주신 삼신할미처럼 어린딸을 데리고 와서 맡기던 고마운 장모님을 위해서라도. 비판투쟁받을 때마다 그저 눈물을 흘릴뿐 원망소리 한마다 없던 젊은 안해며 무럭 무럭 자라는 아들딸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새 앞길을 개척해야 했다.
    정책대로 안치금을 내주어서 돈이 적지 않다. 그 밑천으로 할빈시내에 들어가 장사를 시작하면 부자가 될수도 있을것이요 그러면 장차 아들딸을 외국에 류학을 보낼수도 있을것이다. 운명인듯 선택의 자유가 없던 나에게 선택의 자유가 쥐여졌다. 인생은 지그재그라 치치할시인가 아니면 뿌리깊은 비술나무래 오두막에서 살며 소똥 마을아이들의 왕으로 인생기록을 마칠것인가? 결국 나는 량손에 쥔 떡을 두고 고민하는 행복한 사람이 된것이다.
     이튿날 아침 군마창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오서기의 사무실을 찾아들어갔다. 오래 갈라졌던 동기를 만난듯 뜨겁게 껴안아주었다.
  “그래, 참 잘되였소, 세월이 가면 봄이 오는법이지. 인간대학을 오래 다닌셈치라구 하하하…축하하오.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사니 너무 섭섭해마오”
    그의 열정적인 대접에 또 한번 눈물이 나왔다. 그는 내가 스믈두살 어린나이에 군마창에 왔을 때 첫눈에 성실하고 선량한 전형적인 조선족청년이라는것을 알아보았 으나 형세가 형세인만큼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고 실토정을 했다. 그는 자기의 군용찦 차까지 내주어 룡진역까지 실어다주게 하였다. 참으로 군자요 내한평생 잊을수 없는 은인이였다. 인정이 비틀어져 서로 잡지 못해 하던 시절에도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 다는것은 인간세상을 위해서는 다행이 아닐수 없다고 생각되였다.
 
                                                   6.
 
    이튿날 먼저 할빈시교육국을 찾아가서 치치할시조선족중학교에 조선어문교원으로 취직할수 있다는것을 확인한후 나의 속심을 털어놓았다. 내 타산인즉 치치할시조선족 중학교의 교원신분으로 소똥마을소학교에 돌아가 몇해간 경험도 더 쌓을겸 초원의 아 이들을 위해 복무하려는것이였다. 이를테면 기층학교의 력량을 가강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하는 (抽调)형식으로 하자는것이였다. 교육국에서는 정말 대공무사한 사람이라며 대환영이였다. 그러면서 선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얼마든지 시내학교에 올 라올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담보까지 하는데는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수 없었다.
    기실 나로 말하면 대공무사한것이 아니라 식구들과 라교장이 평생 고생하고 있는 학교에도 미안하지 않게 절충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소똥마을로 돌아와 아이들앞에 나섰다. 어른들에게서 귀동냥을 했는지 내가 학교를 떠난다고 숭숭해하던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뛸듯이 기뻐했다. 라교장은 물론 곁에 선생님 들도 놀라워했으나 무척 환영하는 모습들이였다. 나는 안해에게 미안하여 구구히 해석하느라 말을 골라하였다. 나이는 나보다 퍼그나 어리지만 사리에 밝은 안해의 대 답이 내가슴을 그렇게 울릴수 없었다.
    “아이구, 그만하라요, 해석하는 자기 마음을 내가 모를까봐. 당신이 있는 곳이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감? 아이들이 크면 시내학교에서 공부할수 있다면 무슨 걱정있나요? 아이들때문에 그렇지 난 여기가 살기좋네요. 그리고 다 정부에서 옳바른 시책이 내려와서 번신하게 되였는데 자기리익만 챙겨서야 쓰갔나요? 내말 맞죠?”
    나는 더 할말이 없었다. 아이들의 눈이 아니라면 고마운 내 예쁜안해를 꼭 껴안아주고싶었다. 초원에 말떼들은 해마다 늘어가고 우리 학교는 아이들이 해마다 줄어들었지만 나는 마음이 흔들릴세라 열심히 일하였다. 내가 처음 축구대를 조직하고 모래주머니를 채워서 훈련시키던 애들은 치치할시중학교의 축구팀에 들어가서 번개니, 땅크니 하는 별호를 가진 선수로 맹활약하였다. 그 애들이 2학년이 되던해 전시중 소학교축구경기에서 우승하여 소문을 놓았다.
    속담에 훈장의 똥은 개도 안먹는다고 하였지만 나는 속이야 어떻게 썩어들든 교육사업이 너무 좋았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인정많은 아이들이 밉다가도 곱기만한 특유의 정때문에 많은 선생님들이 백발이 성성하도록 교단에서 헌신하고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웃으며 한고개, 울면서 한고개 사연도 많은 인생살이 고개를 넘으며 나는 소똥마을에서 10년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학생수가 점점 줄어들어 공사중심 학교와 합병이 되여서야 나는 정들었던 소똥마을을 홀가분하게 떠날수 있었다…
    비록 늙으막에 큰시내학교에서 교편을 얼마간 잡고있다가 정년퇴직하고보니 다시 가볼 기회가 없었지만 소똥마을과 미운정 고운정 다독이며 살았던 마을사람들을 잊은적이 없었다. 미움도 원한도 세월의 강물에 툭툭 털어 흘려버리고 둥글둥글하게 살 아야 하는 우리네 인생이 아니던가?
    금순이와의 인연도 끈끈하게 이어졌다. 내가 다정다감해서가 아니라 직심인 그녀가 그 끈을 내내 굵게굵게 꼬아왔던것이다. 금순이는 거의 해마다 고추가루며 차입쌀이며 심지어 메주콩까지 꿍져이고는 그 먼 소똥마을에서 우리 집에 찾아들군하였다. 말로는 중학교서 공부하는 딸년을 보러오는김에 가지고왔다고 하지만 나만은 그녀의 깊은 정을 알고도 남았다. 그래서 금순이라는 옛스러운 이름이 내 기억에 꼭 박혀있었을것이다.
    더구나 헐망한 토굴막집마당에 초병마냥 억차게 뿌리밖고 비바람, 설한풍속에도 오연히 치솟아있던 비술나무, 내 정신의 기둥이였던 그 비술나무는 더구나 잊지 못하고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에 챙김이 없던 추억의 문이 열린김에 비술나무사랑 이란 제목을 달고 단숨에 이 글을 써내려가게 되였는지 모른다. 
 
                          2012년 10월 16일 청도에서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2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200 5월의 서정미 2013-05-11 0 8314
199 (단편소설) 비술나무사랑 2013-05-10 0 11345
198 추리건 추론이건간에… 2013-05-07 0 8886
197 청탁평론의 득실 2013-05-02 0 9016
196 연설의 매력 2013-05-02 0 7662
195 드디어 승냥이가 이발을 앙다물고 2013-04-27 1 8766
194 거품의 미학 2013-04-25 1 7769
193 선입견과 편견의 오구 2013-04-23 0 8989
192 존재가 바로 리유인데… 2013-04-19 0 8854
191 (잡필) 꿈보다 해몽이…(외 2편) 2013-04-14 1 8472
190 (꽁트) 한 미치광이의 이야기 2013-04-10 1 8581
189 사람의 앞일은 모른당께로… 2013-04-06 1 9491
188 우리 형니미 얼매나 쎄다구 2013-04-02 0 8787
187 (소설)뒤골목의 녀인들 2013-03-31 1 11055
186 (교육수필)사립대학소감 한페지 2013-03-26 0 9916
185 풍물시조 100수 ( 61ㅡ100수) 2013-03-24 0 9180
184 풍물시조 100수 (31ㅡ60) 2013-03-22 0 7920
183 풍물시조 100수 (1ㅡ30수) 2013-03-21 0 8715
182 불상님 내게 훈계하시되… 2013-03-20 2 8904
181 무리와 우리 2013-03-16 11 9631
‹처음  이전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