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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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머나먼 사랑탑
2013년 08월 06일 06시 37분  조회:26700  추천:1  작성자: 최균선
                                                       머난먼 사랑탑
 
                                                            최 균 선
 
                          ㅡ사랑신의 영향은 각자 다르게 체현된다. ㅡ
 
    사랑과 인생은 동의어라고 할수도 있다. 그로써 인생의 비밀인즉 사랑의 비밀이 되기도한다. 아득히 흘러간 세월의 풍진속에 묻혀버릴 이야기, 먼훗날 기억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보면 그때는 들을수 없는 행동의 소리를 귀기울여야 조금은 들을수 있고 볼수 없는 행동의 모양을 애써 그려보아야 보일듯말듯 할것이다. 그래서 혼자라도 두고보려고 기억이 녹쓸기전에 이렇게 총총히 적어두는바이다.
    인생의 첫아침에 혼자 자아도취되여 비틀거리기시작한 내사랑의 초행길, 참으로 한생을 건 치렬한 사랑이야말로 광증에 불안해지고 정염의 불꽃이 작열하고…천국과 지옥의 사자가 엇갈아 끌어당여 한번 굴러떨어지면 다시 솟아나기 어려운 그런 곤혹의 동굴이랄가? 누구에겐들 인생길에 희로애락의 뉘앙스가 없으랴만 채익기도전에 짓씹어삼킨 풋살구같던 그 시절에 멋모르고 덤벼치다가 미쳐서 그냥 빠져버린데서 시작된 나의 애정의 희비극일막은 혼자서도 기막혀서 흐느끼며 적어본다.

                                        1.사랑을 찾아 천리길
 
    칠칠흑야,곁에서 주먹을 내질러도 모를만큼 밤하늘이 먹통같다. 몇시간전, 남양역 출찰구로 나오지않고 세워놓은 활물차바곤사이로 몰래 빠져나오다가 초병들게 발각되여 추격당하게 되였다. 죽기내기로 달리는데 “서랏! 서지 않으면 쏜닷!” 하는 악에 바친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선우는 겁결에 제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씨근덕거리며 달려온 초병이 무작정 팔을 비틀었다. 사무실같은 곳에 들어서니 가죽장화를 신은 두발을 테블우에 올려놓고 건방떨던 군관이 “좋아서 건너온놈 일이나 착실하게 할꺼이, 왜 도로건너가려고 도망왔어? 이젠 맘대로 오가지 못하는줄몰라? 래일 원지로 돌려보낸다. 알갓어? 이 자를 보초실에 가두었다가 래일 되돌려 보내라구…”
    선우의 귀향의 길에 악운이 닥쳤다. 다시 어느 농장에나 처박아두면 인생은 달리쓰일수밖에 없었다. 보초막에 난로는 피웠지만 몹시 썰렁했다. 밤이 점점 깊어졌다. 구석쪽 걸상에 쭈크리고앉아 밤을 새우다가 살펴보니 문밖에 섰던 보초병이 추위를 말리려고 난로가에 앉았다가 굳잠에 빠져 코를 곯고있었다. 생사관두에 용기를 내린 사람마냥 살며시 문을 빠져나와 강변쪽으로 줄행낭랑을 놓아 얼음이야 풀리고 있건말건 무작정 강판에 들어섰다.
   다행히 도문쪽 강기슭에서 얼음이 꺼졌기말이지 고기밥이 될번했다. 구사일생으로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제방뚝에 주저앉으니 방금 깬 악몽에 몸서리쳐졌다. 졸업하자 바람으로“님”을 찾아 강을 건너갔던 자신의 황당한 작동의 결과가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허물어진 신기루때문에 허탈감에 빠져 전신이 떨리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대로 있다간 얼어죽을수도 있었다.
    마침 제방뚝아래 멀지않은 골목에 둘째숙모의 집이 있었기망정이지 정말 곤욕을 치를번했다. 꼭두새벽에 불성모양이 되여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는 선우를 보고 숙모가 기겁초풍하였다. 바꿔입을 옷도 없어서 이붓숙부의 옷을 대충걸쳐입고 뜨시한 방에 들어가 누워버렸다. 불행중에도 신령님이 도와준덕에 살아서 돌아온것이다.
 《 야조야, 너 공부한다고 말리는것도 듣지않더니 와 이렇게 돌아왔노? 》
   선우는 숙모의 구시렁소리를 들으며 말며 하다가 그냥 노그라져 깊고깊은 꿈나락에 빠져들었다. 꿈속에 천애이역의 님을 만나고있었다. 사랑이란 때론 광증에 불안해지고 정염의 불꽃에 작열하기 쉽고…천국과 지옥의 사자가 엇갈아 지키는, 한번 굴러떨어지면 솟아나기 어려운 그런 곤혹의 동굴이던가.
   선우가 뒤쫓아간 님이란 강을 먼저 건너간 정희라는 계집애였다. 모습전체가 정교한 조각품같이 매력적인데가 있어 초중때부터 남자애들의 눈길을 빼앗는 백설공주였다. 한창 망울을 터친 꽃송이같이 싱그러움을 안겨주는 화사한 얼굴에 크고 까만 눈에는 태생적인 장난기가 비껴있고 상큼한 코아래 봉긋한 입술은 고집스러움을 여실히 읽게 하지만 아무튼 매력둥이다. 정감의 뒤고방에 오래잠들어있어야 할 선우의 몽롱한 이성의 꿈을 그렇게 때이르게 깨워놓기에는 넘치고도 남을 녀자애였다.    
    비록 소꿉동무는 아니였지만 선우가 소학교 졸업학년 때 룡강촌에서 모아툰에 이사와서부터 중학교 3년을 내내 한반에서 공부하고 그후에도 그냥 끈끈한 인연에 얽매였던 그들이다. 그만한 나이면 서로 내외하며 아닌체하는 계엄시대였지만 그들 만은 남달랐다. 선우는 학교문예대의 연극조주역이였고 정희는 무용선수였다. 그러다보니 그들 사이엔 “3.8선”이 없었다.
정희가 무용련습이 늦어질라치면 기다려달라고 청을 들었고 그 소리는 선우에게 황후의 지엄한 명령처럼 들리였다. 때는 한창 대약진의 먼지바람이 자욱하던 때인지라 마을에서 비료랑 모으는 임무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손을 잘맞추었다. 그 리고 쥐꼬리랑, 참새랑 바치는 임무를 완성하지 못해 안달하는 정희에게 늘 큰손을 내미는 선우였다. 어느날 노을빛에 물들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희가 제의했다.
《 얘, 선우 너 우리 무용대에서 농악무 안출래? 상고를 돌릴사람 모자란데…》
《 네가 우리 연극조에 넘어오렴, 너 감정객이여서 연극 잘할것같은데, 이번 극에 녀자주역을 시켜줄게, 어때?》
《 너? 그냥 개살구질 할래? 남은 정식인데 늘 헤식은 소리나 하구》
《 가고싶긴 한데 그 준호란새끼 보기싫어서 안갈란다.》
《 걔가 어때서? 오라, 너 질투하는거지? 그애가 잘생겼으니까 》
《 그새끼 좋아하니? 한번 패줄갑다. 히…너 울겠지? 너의 장차 신랑…》
《 뭐라구? 이 얼싸같은게, 다시 너와 노는가봐!힝!》
    그들은 이렇게 늘 티각태각하기도 잘했지만 이튿날이면 곧 봄바람에 눈녹듯 알륵이 풀어졌고 정은 그냥 씨알마냥 염글어갔다. 선우는 반에서 힘센축은 아니였지만 정희를 지키는데만은 용사로 자처해왔고 정희는 정희대로 그 마음을 읽고있었다. 그래서 늘 정나미돌게 굴었다. 무심히 웃는 꽃의 미소에 상사병이 걸린듯 선우는 너무 때이르게 이성에 눈이 떠버렸던것이다.
사랑은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도 문학을 가르친다고 그때로부터 선우는 책귀신이 되였다. 그리고 정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선우가 말솜씨가 좋아서라기보다 그 정성이 갸륵해서 들어주었는지 모르지만 늘 귀를 기울여주고 차차 웃고울었다. 그맘때 뿌쉬낀시집 한권을 얻어서 읽었는데 모방하여 써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정원인가 야채밭에 앵두나무 두그루 심었나이다” 를 “내 마음밭에 앵두나무 두그루 심었소 한그루는 나, 한그루는 그대, 두그루 앵두나무에서 앵두를 따시라”같이 껄렁한 시를 써가지고 주머니에 넣고다니며 줄가말가 하다가 그만 어데선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원래 앙숙이던 준호가 그걸 주어서 제짝패들에게 보이고나서 정희의 필통에 넣어 장난치는 바람에 그만 사달이 생겼다. 정희가 콩팔칠팔 야단을 치고 선우가 개망신을 당하리라고 기다렸는데 한강에 돌을 던진격이 되자 흥이 깨져버린 준호가 특대뉴스를 반주임께 전했다. 그래서 정우는 비평깨나 받았고《나그네》라고 놀림받게 되였다.
    선우는 정희가 소문을 낸것으로 알고 단단히 벼르고있었다. 마을에서 만나도 소닭보듯했다. 하루는 선우가 하학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을어구에서 정희를 기다리고 있다가 불쑥 앞을 막았다. 
《 이 계집애야, 너, 나 좀보자》
《 왜이래? 지금 보는건 보는게 아닌감?》
《 너 성풀이 할라면 나한데 할거지 왜 반주임에게 고자질했어? 시시하게?》
《 이 아새끼야, 내가 시시해? 네가 시시하지, 》
《 나, 그 시를 네필통에 넣지않았어. 가지고 다니다가 그만…》
《 넣었으면 어떻고 안넣었으면 어떤데? 넌 바보야, 저절로 어떻게 할줄몰라?》
    정희는 성이 독같이 나서 선우의 가슴을 어깨로 탁 밀쳤다. 전혀 방비없던 선우가 둥글소가 강판에 번져지듯 훌렁 자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희는 찬바람을 씽 일구며 돌아섰다. 그날 이후 그들의 그림자는 제각기 걷기가 되였다.
    얼마후 룡산2대앞에 있던 학교농업기지에서 삽으로 논밭을 번지던 날이였다. 한줄로 죽 서서 한삽한삽 번지며 나가는데 준호가 정희옆에 끼여들어서 시부렁거리며 선우쪽을 힐끔거렸고 여기저기서 키드득거렸다.
    얼굴이 빨개진 정희는 거의 울상이 되였다. 제무안에 취하여 어쩔줄 모르던 선우는 정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분노로 터져나왔다. 한달음에 달려가던 그 기세로 주먹을 내질렀다. 반주임이 다가와서 고래고래 욕을 해댔다, 녀자애들 앞에서 수모당한 준호가 정희의 삽을 뽑아들고 선우를 후려치려는 찰나, 정희가 본능적으로“선우야!”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얼결에 비켜서다가 어깨죽지를 호되게 강타당했다.
    더 가릴것이 없었다. 내친김에 입방아를 찧는 또래들앞에서 헛위세라도 피워야 했다. 손에 잡히는대로 뽑아든 삽으로 준호의 허리를 후려쳤다.《아이쿠!》소리와 함께 준호가 논판에 고꾸라졌다. 일이 크게 벌어졌다. 준호는 병원에 들려갔고 선우 는 백기로 뽑히고 여러차례 비판을 맞고나서 그만 서리맞은 시래기가 되였다…
    제딴엔 정희가 받은 수모를 갚아준다고 했지만 정희는 졸업할때까지 소닭보듯하였다. 사랑은 금이갔지만 인정은 끈질기였다. 실련의 우울덕분에 선우는 룡정고중에 붙고 정희는 룡정현위생학교에 붙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의연히 깊은 골짜기가 패여있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봄날 금이 실렸던 우정이 다시 어울리게 된 기회가 생겼다. 토요일이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일이 될라고 그랬는지 정희가 멀리 앞에서 한들한들 걸어가고있었다. 그래도 선우는 달려가 말을 걸어볼 엄두도 못내고 멀찍히 떨어져서 스적스적 따랐다. 그런데 마을이 저만치 보이는 해란촌의 제방뚝에서 어떤 술주정뱅이가 정희를 붙잡고 실랭이 질하였다. 정희가 선우쪽을 연신 바라보며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사랑하는 처녀앞에서는 겁쟁이도 몇분간은 용감해질수 있는법이다. 선우는 씽하니 달려들어 취한을 걷어차 뚝아래로 처박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정희의 손을잡고 내뛰였다…한참 달려서 마을앞에 와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정희가 숨가쁜중에도 발씬 웃었다. 열여덟, 한창 꽃펴나는 처녀의 웃음은 선우의 얼었던 가슴을 녹여주었다.
《 선우, 아니 오빠가 울뚝밸이 있는줄은 알았지만 어쩜 오늘 이렇게…》
    생뚱같이 오빠를 부르는 바람에 조금 기분이 잡쳐졌다. 한마을에서 숭허물없는 사이라도 아무개오빠라고 부르지만 그저 오빠라고 부르는 습관이 없었던것이다. 하지만 선우로서는 정희와 다시 화해하게 된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그후부터 그들은 집으로 올때마다 정다운 련인들처럼 어깨나란히 다녔다. 그들은 보다 성숙했다. 몽롱함이 벗겨질수록 신비스러운 감정의 꽃바구니를 엮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첫꿈은 무참히 깨여졌다. 정희네가 항미원조에 나갔다가 높은 군관이 되여 제자리에 주저앉은 아버지를 따라나갔던것이다. 망울을 짓기시작하던 선우의 첫사랑은 그렇게 피기도전에 멋없이 시들어버리고말았다. 정우는 막연한 다짐으로 시한수를 총망히 써서 정희에게 주었다.
 
                꽃은 피여 향기를 풍기기도 전에
                리별의 비바람에 시들어버리는가
                불붙는 한숨이 뿌리채 불태우건만
                붙잡아둘수 없는 나의 꽃송이여
 
                꽃이 필때 락화의 한을 몰랐던가
                리별을 있을줄이면 기약이나 말지
                힘겹게 가꾼 내고향 나리꽃이여
                나는 그저 바라보며 울어야 하니?
 
                떠나는 네 뒤모습을 그저 지켜보며
                가슴이 재돼도 아무말 할수 없구나
                바람따라서 흘러가는 저 쪼각구름이
                어디가서 뜨거운 내눈물로 쏟아질가
 
    정희도 떠나기 전날 편지를 전해주었다.
 
    선우야, 이 편지를 읽을 너의 얼굴 표정을 얼마든지 상상할수 있어, 나 어떡하면 좋니? 막무가내로 떠나야 하는 이 시각에야 우리의 정은 그저 돌아서면 잊어버릴 아이들 유희같은것이 아님을 가슴으로 느끼였어.
    한 녀자애에게 사랑의 의미를 알게해줘서 고마워, 차차 널 사랑하게 되여서 가슴이 부푸는 때에 이렇게 가야만하는 나는 어쩌니? 내마음속에 가둬두고 싶었고 그러다가 집착하게 된것같아, 그런데 뜻밖의 리별이 널 숨막히게 할것같아 가슴이 찢기는구나, 나도 일찍 너를 좋아했어, 네가 바보여서 내마음을 읽지 못하고 말썽만 피웠지만, 나도 인젠 널 사랑한다. 미안해, 이 말은 해도 아무소용없지, 바보같은 너에게 더깊은 상처가 될테니까,
    너무 속태우지 말아라. 사랑의 문은 이미 열렸으니까 네가 정녕 나를 잊지못하면 인차 뒤따라 나오길 빌어본다. 우리 아버지가 너의 학업을 도울수 있으리라 믿는 마음으로 내슬픔도 달래본다야, 비가 오는날엔 나의 눈물이라고 생각해라. 이렇게 떠나도 널 못잊을것 같기에 내눈물을 씻어줄 유일한 너, 내곁에 없을 때 나도 바보처럼 눈물을 찔찔 짤거야, 이 말은 진심이야,
  지금은 이렇게 가슴이 타지만 혹시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가끔씩 그리워하다가 잊어버릴가? 나 이렇게 떠나며 행복한줄만 알지? 오래동안 널 잊지 못할거라는 나를 믿어. 그런들 어쩌겠니?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테지? 네가 써준 시를 글자로가 아니라 가슴에 깊이깊이 새기고 간다.
    선우야, 잘 있어라. 마음만 있으면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만날수 있다고 믿는다. 너는 나를 꽃이라고 하지만 너는 정처없이 떠도는 구름이 되지마, 구름이 되고싶으면 동해바다 하늘에 날아와서 떠돌기를 바란다. …
 
     그렇게 떠난 정희는 한동안은 편지를 자주 보내왔다. 첫편지의 내용도 정우는 잘기억하고있다.
   
     선우야, 보고싶구나, 정말 그립다야
 
    매번 너에게 상봉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고있는 내가 우습니? 이제는 잊겠노라고
    너에게 고별의 편지를 쓸날이 올가봐 겁이난다. 아침이 되면 어제 고했던 작별은 태워버리고 다시 너에게 사랑한다는 이 편지를 쓴다. 어제도 아픈마음으로 너에게 보내지 못할 일기를 썼다. 쓰고써도 그저 가슴이 아프다는 말뿐이였다.
    잊혀지지 않겠지만 잊을거라고. 잊기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그래도 잊어야 하지… 생각을 다지지만 그게 잘안되는구나. 나없이 성공하라고, 잘지내라고. 행복하라는 축복의 말이 나오지않는다. 차라리 너를 잊는게 조금은 덜힘들련만 차마 너를 못잊는 내마음을 읽어주라, 열번, 백번…말하기는 쉬워도 견디기는 어렵구나. 전하지못할 일기이지만. 매일 매일 리별의 편지처럼 쓴다.……
 
    정희에게서 편지가 올때마다 무슨대사나 치르듯이 정우는 남몰래 회답편지를 썼다. 아니 마음을 종이우에 통째로 쏟아놓고 허비적거리였다.
   
    정희야, 너는 동해바다가의 경치를 말하기 좋아하지만 내가 바라는건 더이상 너에게 아픔이 되지않을 일만 생각한다. 너도 어쩔수 없다는걸 나는 알구있어, 너는 나를 부르면서도 언젠가 다른 사람을 보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네가 나를 부르는 소리만 한평생 기억할란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번 갈라지는 련습을 하면서 이튿날엔 곧 하하호호 웃었지? 그건 유희였구나.
    네가 떠나 허전한 자리, 그 빈자만큼 나는 그리움으로 메우고있단다. 난 지켜야 할 어머니가 있기에 가슴이 아파도 내가 할수 없는 일을 두고 너에게 따라가겠노라고 확답을 못하고있어 더구나 슬프구나. 너와 나의 이 지독한 미련을 언젠가는 끊어어야 할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황소울음이 나온다.
    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바보란 말은 나한사람밖에 알아들을수 없고 리해할수 없다는것을 너도 알겠지? 나 정말 바보가 맞는것같고 정말 바보가 되여지는것같다.  너에게 숨겨두었다가 세상에 드러난 그때의 내순정을 늦었을망정 진정으로 받아준 너를 찾아 나도 하루 스믈네번씩 날아가고있다…
    일년후 정희의 말처럼 외류바람이 동북각지에 불어쳐 너도나도 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정희에게서 또 편지가 왔다. 무작정 나오란다. 그러지 않아도 마음이 허궁떠있던 선우는 대학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곧장 정희를 찾아나가려했지만 홀어머니가 눈물로 만류하는바람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졸업을 앞두고 마침내 어머니에게 한마디 하고는 훌쩍 강을 건너가 방황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인차 찾아가지 못하고 황해도 해주의 한 사과농장에 배치받아서 일하게 되다보니 세월이 또 꽤나 흘렀다. 뒤늦게 도망쳐서 원산에 찾아갔을 때는 정희는 학교에 없었고 어데갔는지 알아볼 방법도 없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정희아버지가 부상당한 미열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자 꼭지 떨어진 호박신세가 된 그들은 원산을 떠났던것이다. 선우가 죽지부러진 새가 되여 다시 강을 건넌것은 두만강얼음이 풀리기 시작하던 지난 3월말이였다.
                           
                              2. 님은 다시 돌아왔어도
 
    인연은 끊기지 않는 법이던가, 그해 가을이 저무는 때에 아름찬 기쁨이 선우에게 찾아들었다. 정희어머니가 어느 공장에 배치되였다가 친혈육들이 있는 중국으로 너무 오고싶어 다시 두만강을 넘어왔다. 정희는 배운 호사지식을 써먹지 못하는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사랑하는 선우곁으로 간다니까 생각이 확 달라졌단다.
   그들은 해란강제방둑에서 만났다. 서로의 눈길이 눈길을 찾았고 오래오래 못을 박을듯 응시했다.
《 야, 눈자리나겠다. 귀신이나 보는듯한 낯을 해가지구》
《 또 훌쩍 날아가버릴가봐 그래.》
《 응, 그래 맞갖지 않으면 또 날아갈지도 모르지, 그래야 개 바위갔다온격으로 날찾아 팔도강산 헤매구돌지, 바보, 언녕 편지나 하구 왔어야지》
   정희가 선우의 가슴을 내지르려는 서슬에 와락 그러안았다. 천애이역에서 서로 찾아헤매던 두젊은넋은 그렇게 오래오래 굳어져있었다. 정희가 할딱거리다가 급기야 새된 소리를 뽑았다.
《 아이, 숨넘어간다. 그만…》
   정희의 입에서 단내가 확풍겨나왔다. 아니 향내였다. 꽃내음은 아니였지만 한창 부풀어오른 아릿다운 나이의 처녀에게서만 풍길수 있는 이성의 단내였다. 선우의 불같은 뜨거운 입술이 무작정 꽃술같은 정희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 저리가!죽일작정이야? 아이, 숨차…》
《 그래, 죽이고 싶도록 그리워했단 말이야,》
   선우가 입술을 채 떼지않고 반벙어리소리같이 중얼댔다.
    이번엔 정희가 선우의 목을 꼭 껴안았다. 남자의 몸에서 거센전류가 흘러나와 온몸을 짜릿하게 하였다. 풀어져버릴것만 같았던 두넋과 몸에 다시금 팽팽한 긴장과 충전을 일으키게 한 푸들치는 생명이 발산하는 전류였다. 오래동안 서로 그리워하다 가 만난 그들이였기에 세상에서 태여나 이렇게 티없이 깨끗한 키스에 뒤미처 불안한 마음에 몸이 달아오름을 느끼자 수집어진 정희가 먼저 팔을 풀고말았다.
    다시 두몸이 되였지만 둘이만 느끼고 알수 있는 사랑의 환희와 신비로움을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었으며 마술같은 힘에 빨려드는것을 걷잡을길 없었다. 가슴을 터놓고 나누는 그 속삭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둘도없이 매력적인 부호일것이다. 정희는 연분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온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가를 다시 한번 절감하면서 선우의 그 의젓한 모습을 가슴에 통채로 옮겨다심었다.……
    정희는 농사일에 숙맥이였지만 선우의 곁에 있다는것만으로도 밭일에 나가는것이 즐거웠다. 일터에서 눈으로 하많은 사연을 주고받는 신비한 느낌으로 하여 힘겨운줄 몰랐고 밤이깊도록 밀회를 가졌지만 피곤이 무엇인지 몰랐다. 사랑의 정은 그렇게 무르익어갔고 이제 더는 헤여나올길 없는 열련의 호수에 빠져 자맥질하게 되였다. 정희는 아예 선우의 사랑의 호수에서 익사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도적이 제발저리다고 속을 앓는것은 선우였다. 황홀한 사랑의 호수에 빠져들수록 숙명같은 비애에 젖는 때가 많았다. 억누를길 없는 사랑의 표식을 몇번이라도 찍을수 있는 그들 사이였지만 그에게는 달콤한 기쁨을 진동시키는 사랑의 금선 이 가장 슬픈가락을 연주할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수 없었던것이다. 아닌게아니라 멋모르는 농민들의 의식속에도 정치기후가 이상해져가고있었다. 농촌 사회주의교육이 터지면서 그리 눈을 밝히지 않던 출신을 처처에 캐기시작했다.
《 정희야, 난 어째 막연한 생각만 나면서 맥이 빠지는지 몰라,》
《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말 자꾸 할래? 천리를 헤매며 나를 찾았다던 그때 용 기는 시래기국에 말아먹었니?》
《 아니야, 우리 사이엔 넘을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걸 지금 날마다 말하잖아?
《 싫어, 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고 너불대던 네입을 잊지않고 있거든 》
《 고마워, 내정희야, 너 고추성격 언제까지 매울지 모르겠지만 좋아…》
    그들은 이렇게 은밀한 사랑에 세월을 포개여 쌓으며 해와 별을 두고 몇번이나 맹세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맹세가 모래우에 쓴 글이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한다던가?
《 엄마가 눈치챘어. 천장이 낮다고 펄펄 뛰네, 애를 먹을것같아, 우린 어쩌지?》
《 운명의 안배라면 내가 무슨수로… 너도 지금은 견결하지만…》
《 듣기싫어, 방법을 대야겠어》
《 무슨 방법?》
  조급증에 눈까지 울뚝해진 선우의 말을 정희가 중둥무이했다.
《 바보, 몰라서 그러니? 순진한체 하는거니? 엄마도 쑨죽을 밥으로 만들수 없도록 하자는거지…》
《 엉? 아아…아니야, 그러다가 무슨 경을 치라고?》
《 그래? 이 맹꽁이야, 누군 몰라서 그러는줄 알아?》
   련줄포를 쏘듯 줄욕하던 정희가 다시 선우의 귀에 입을 대였다.
《 지금도 강을 건너가는 사람들이 있다더라. 아니면 우리 둘이 건너갈가?》
《 그러면 두홀어미들이 기막혀 지레 죽을거야》
《 그럼, 어쩐단 말이야, 엥이, 나두 몰라.》
   달빛아래 아롱지는 정희의 눈물을 보는 선우의 두눈에서도 뜨거운것이 흘렀다.
   …어느새 새벽빛이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산아래 우사마당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리기시작했다.
건조실담배를 뜯어내여 널어놓고 일군들이 잠간 눈붙이려 집에 들어간 사이 그들은 뒤산에 올랐던것이다. 그들은 얽히고 서렸던 팔을 아쉽게 풀어내리고 제각기 다른 길로 산을 내리여 일군들속에 새여들었다. 정희는 눈물을 삼키노라니 문뜩 며칠전에 선우가 써준 시를 떠올라 가슴에 모닥불이 일었다. 제목은《내 인생길》이였다.
                             
                      기구한 인생의 오솔길에
                          나는 걸음마다에 짓채인 조약돌이였지,
                      사나이 칠석간장이 부서져
                          피맺힌 아픔이 굳어진 한의 덩이였나?
 
                      매말라 헐벗은 가지에
                          쓰디쓴 열매하나 외로웠지,
                      저것에도 있을법한 꽃시절
                          지금은 하늬바람에 떨고있구나.
 
                      쑥대 우거진 마음의 무덤가에
                          찢어진 추억의 돛폭,
                      굽이 많은 인생의 오솔길에
                          락엽에 묻힌 파아란잎새,
 
                      인습에 절은 지친가슴이
                          버리운 네거리에 헤매였어도
                      참고 이겨낸 고달픔은
                         인제 여기 오솔길에서 굳어지는가,
 
                      가시넝쿨 덮인 내 마음의 오솔길
                          내 사랑의 비탈길에
                      사나이 칠석간장이 부서져
                         피맺힌 아픔 조약돌로 딩구누나.
    
      정희는 그때나 이때나 시를 잘 모르지만 선우의 가슴에 이런 정한의 불덩어리가 굴러다니는데는 슬펐다. 시에 감동되였다기보다 선우가 쓴것이라서 자꾸 눈물이 났다. 선우도 울었다. 다만 그로해서 한가지만은  명백해졌다. 거절당한 사랑보다 사랑할 권리가 없다는것이야말로 열불이 터질일이라는것이다. 누구를 사랑하기때문에 가슴이 아프다는것은 얼마나 공평하지 못한 일인가? 사랑한다는것은 따스해지고 신이나는 느낌이여야 하련만 선우ㅡ자기만은 왜 사랑에 가슴이 찢어지고 멍들어야 하는 것인가? 이 시각도 자기 가슴에 밀착시켜 올 때 그 뭉클함과 따습은 체온과 달콤한 욕정이 더욱 참을수 없는 격정으로 펄펄 끓어오르는것을 식혀낼길 없었다.
    정희가 믿어주고 아껴줌으로써 소외된 이 인생마당에서도 생활의 한구석을 찾아 그녀를 삶의 기둥으로 삼아 살수 있게되였다고 굳게 믿던 그였다. 이제는 더 가슴이 죄이고 기다림에 목마를 일도 없지만 아픈추억으로 남을수도 있다고 절감할 때 오열이 북받친다. 천정이 너무 낮은 집에서 너무 오래살면 등허리가 휘여드는거처럼 정신도 압박감으로 하여 형태가 이그러지고 우울증과 심리장애가 오는법이다,
                                
                                         3. 잃어버린 사랑
  
    마침내 신주대지를 휩쓴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정치분위기는 소름이 끼치도록 살벌해졌다. 모든것을 부시고 모든것을 비틀어놓는 광란의 년대라도 인륜지락을 누리고 뒤끝에 생육이 연장되는 사람들의 본능만은 여전히 왕성해서 마을처녀들은 하나둘 시집을 가고 애엄마로 되고 친구들마다 무릎아래 올롱이 졸롱이가 뛰놀았건만 선우만은 풍랑이 세찬 세월의 물결우에 간신히 생의 노를 젓고있었다.
   로처녀로 늙어가던 정희도 세월이 점점 험악해지고 엄마말처럼 새끼도 락자없이 전도가 없을것이 불보듯해서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시집을 가기로 작정했다. 코를 꿰여 끌려다니는 소처럼 그저 일밭으로 오가는 선우의 꼬락서니가 청승맞아서 위로의 말한마디 하려해도 곁에서 어찌나 눈을 밝히는지 엄두도 못냈다. 정희가 약혼택을 낸다고 청년들을 청할 때 자기 사랑을 가진 궁금해서 묻어들어가 보았다.
    왕청 어디라고 소개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숫총각으로는 너무 골기 가 없는듯한 느낌이 들어 서운했다. 정희의 고추성격을 맹물에 삶으면 매워질수도 있겠지만 어째 석연치 않았다. 스스로 싱거운 걱정을 할것도 없다고 자신을 질책하는 의미로 생전처음으로 술을 억세게 마시고나서 강변에 나와버렸다.
    해란강다리 란간에 기대여 어둠속을 주절대며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며 연신 마라초를 태우며 혼자 도깨비 여울건너는 소리를 씹어냈다. 강바람에 흩어져가는 담 배연기처럼 사랑은 자취없이 사라질것인가? 사랑하고싶은 사람은 곁에 있었건만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가? 위해주고싶은 그 사람, 아, 못다 길어올린 속상한 사랑의 드레박질이여,
    모아산 고개를 타고넘은 밤바람이 삽시에 강물을 얼궈붙이고 자기는 맨발로 그 얼음판위를 건너면서 기슭에 닿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있는듯한 자신의 불운을 발견하면서 속썩은 한숨을 토하였다. 밤은 깊어가건만 인적이 끊긴 큰길을 꿈 길가듯이 걸었다. 그의 두눈에서는 꺾여진 자존심과 몸부림치는 절망, 분노의 빛이 번뜩이였다. 그 속에는 너무도 공상적이였던 자신에 대한 조소도 타번지고있었다.     
    정희는 약혼해서 한달만에 시집을 갔다. 시집가기 전날밤,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     
  
 …선우야,
    나는 래일 새벽차로 내 사랑이 꽃피던 모아산을 떠난다. 철석같이 맹세했던 그 사랑을 끝내는 지키지 못하고 가는 나쁜년이 이런 편지를 써서 무슨 소용이 있겠니만 이제 다시 다정한 말 나누지 못하고 이산과 저 산에서 바라봐야 할 리별이란 아픔을 달랠길 없어, 미안한 가슴을 눈물로 적시며 이 편지를 쓴다.
   네사랑, 내사랑을 찢어버리는 이 마당에 아픔만 밀물처럼 밀려들지만 나는 서러 워 울며간다는것만 알아달라. 눈물로 한글자 한글자 쓰는 이 편지, 다 쓰고나면 눈물에 얼룩져 글자마저 잘 안보이겠지만 사랑을 묻어두고 가는 내 마음이야 읽을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너의 초가집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마당에서 사랑의 맹세로 기약하던 저 별들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온갖 슬픔에 잠기게 되는구나. 정말 떠나야 하는 내마음 아리도 록 괴로움에 젖어 뜨거운 눈물만 나는구나. 다시 만날수야 있지만 나는 이미 다른 남자의 녀자가 되는 몸, 너도 이제 장가들면 다른 녀자의 남자가 되여 우리는 생전 보지 못하던 사람들처럼 그리도 서먹서먹하겠지?
    가슴속에 내리는 눈물의 비를 잉크로 삼아 하얀 편지지를 채우기가 왜 이리도 힘 겨울가? 편지지만 뿌옇게 보일뿐 내마음을 전하려는 편지는 엮어지지 않는구나. 손으로 눈물을 닦아도 훔쳐도 내가 쓴 글자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가 너를 생각하며 울 고있다는것은 나의 미래남편에게 죄를 짓는다는것도 생각하면서도 첫사랑에 목매는 나를, 눈물로 채워지는 나의 마지막 편지를 너는 읽을수 있니?
     늘 죄지은 사람처럼, 쫓기는 사슴처럼 황황해하던 네모양이 불쌍해서 시집가는 첫날각시의 설레이는 마음도 나는 모른다. 사랑한다고, 사랑을 찾아헤매였으면 왜그 용기로 나를 찎어넘기지 못했니? 시집가는 처녀로서 이런말을 하면 나쁜년이 되는줄 나도 안다. 이렇게 벌써부터 가슴이 타는데 내가 결혼생활에 행복할지 모르겠다.
    선우야, 마지막으로 네이름 불러보자. 청년답지 않게 두가닥 밭고랑이 깊숙히 건너간 환상가다운 번듯한 이마아래 늘 속심을 숨기고있는 형형한 눈, 견딜성을 말해주는듯싶은 턱, 넓은 어깨폭, 여느 남자애들보다 높고 탐탁한 동가슴…어느모로 보나 애정의 불행아는 아닌것같은데 너는 어찌하여 못생긴 새끼오리가 되였니?
     내앞에 있으면 왜 너는 바보가 되는지? 그래서 네가 너무 불쌍하고 사랑이 아픈지 모른다. 시집을 가고 첫날밤을 치러야 할 각시로서 지금 생각하면 네가 한편 고맙기도 하지만 그렇게 못나게굴던 네가 밉기도하다. 한쪽에 죄를 짓고 가더라도 한쪽에는 죄책감이 덜어질게 아니니? 미칠듯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미치지 못하니? 이렇게 가슴은 까맣게 타는데 왜 네가 나를 고이지켜주었는지 모르겠다.
    잘 있으란 말은 하고싶지 않아, 잘있으라고 네가 잘있을 처지가 아닌줄 나는 잘 아니까, 거짓같은 말로 아픈 네마음에 소금까지 뿌리고 싶지는 않다.
    선우야, 넌 바보다, 어설픈 사랑을 바보처럼 시작했던 그때처럼 그냥 바보다.               
    ………………………………………………
                                         너의 녀자였던 정희 씀
 
    아침차를 타기 위해 새벽같이 떠나는 둘너리들과 함께 정희가 마을뒤산을 오를 때, 선우는 마당가에서 몰래 눈물로 바랬다. 정희가 정말 마음의 눈이 있었다면 언녕 보아냈으리라. 정희의 뒤모습이 사라지자 선우는 자존심을 꺾어들고 오래오래 울었다. 울지않을수 있단말인가?불행해도 행복해도 첫사랑으로 돌아오는 법이라 하였거늘…
    정희가 나이를 잔뜩 먹었지만 공소사에 판매원으로 있다는 월급쟁이에게 시집을 간다고 부러워하던 마을아낙네들이 한달쯤 지나서 다시 정희가 리혼하고 돌아온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신랑이 고자쟁이여서 원래부터 마음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정희가 잔치이튿날부터 앙앙불락했다는둥, 남자가 아무리 주사를 맞으며 역사질해도 안되였다는둥, 로처녀여서 그런 일로 정신분렬증까지 왔다니 별랗다는둥 벼라별 억측 이 란무하며 한동안 아낙네들의 입이 심심하지않게 되였다.
  소문은 어데서 났는지 귀동냥을 하면서도 종잡을수 없다. 당사자가 그런 은사까지 한것은 아닐테고 외동딸이 시집가자 곧 리혼하고 돌아오게 된 정당한 리유를 밝히느라고 정희어머니가 발설했다고 생각할수밖에 없다. 선우는 혼자 설마설마 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정희가 본가에 돌아오는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다시 소문이 나래를 폈다. 5월이 저무는데도 그냥 첫날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다는둥, 자고깨면 엉엉 울다가도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 또 혼자 깔깔 웃어댄다는둥 소문이 무성할 때 선우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정희네 집앞에 있는 논바닥을 논삶이를 하다가 큰 마음먹고 랭수핑게를 대고 정희네 집마당에 슬며시 들어섰다. 정희어머니는 어데갔는지 보이지 않고 열려진 출입문을 기웃거리니 정말 정희가 두꺼운 첫날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선우는 자기의 눈에서 깊은 애수와 더불어 까닭모를 환멸감과 미움과 암담한 빛이 저도모르게 흘러나왔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해 도 불결한 표정이다. 결국 녹쓸어붙은 항아리에 허위의 불씨를 집어넣는 괴로운 마음이라고 해야 할지, 사랑은 거의 사색을 대신한다. 사랑은 모든것을 리해하고 용서하고 잊게하는 생명의 세찬불길이기도 한것이리라. 그러나 정감에 론리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선우는 체념을 지어먹어야 했다. 그에게 남은 인생의 의미란 문학에 대한 막연한 꿈과 잃어버린 사랑뿐이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정희를 사랑했다는것만이 진실로 남아있고 그외것은 죄다 무가치한것들이였다. 남들은 반란파요, 혁명이요, 투쟁이요 하고 광분할 때, 그런 광란속에도 끼일자격이 없다보니 오히려 세상을 등지고 사는격이 되기도 했다. 로총각의 이성에 대한 민감성, 걷잡을길 없는 충동, 그런 갈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억제되는 고민에서 분출되는 그 모든 욕념들에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사랑보다 정이 더 무서운 법이던가,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지만 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사랑은 좋은걸 함께 할때 더 쌓이지만 정은 어려움을 함 께 할때 더 쌓인다. 사랑때문에 서로를 미워할수도 있지만 정때문에 미웠던 마음도 되돌릴수 있는것이다. 사랑은 꽂히면 뚫고 지나간 상처라 곧 아물지 몰라도 정이 박히면 빼낼수 없는 독화살처럼 온몸이 아프게 하는듯했다.
   사랑엔 류통기한이 있지만 정은 숙성기간이 있는 모양이다. 정희와 나누던 그 사랑은 상큼하고 달콤하게 기억되지만 정은 이리도 아프게 선우를 울렸다. 사랑은 깨여지면 남이지만 정은 돌아서도 다시 하나로 엉키고있었다. 사랑이 깊어지면 언제 끝이 보일지 몰라 불안하였지만 정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선우의 가슴에는 마음대로 떼여버릴수 없어 더 무서운것으로 가슴을 지지 눌렀다.
 
                                            4. 사랑의 용량
 
     지지리 찌물쿠던 여름도 지나가고 찬서리가 모아산에 단풍을 수놓는 가을이 성큼들어섰다. 정희에게서 기적이 생기고있었다. 안쪽 어디서 중의질을 한다는 그의 삼촌이 무슨 약을 먹였는지 차차 완인으로 돌아고있다는게 마을아낙네들의 평가이다. 그녀를 위해서 너무나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선우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못할 난제를 안고 정희가 무상출입을 하기시작했다.
    누가 부른듯이 문을 떼고 들어와서는 방구석에 두루루 말아놓은 로총각의 때많은 이불에 기대여 앉으면 선우는 책상앞 걸상에 앉아야 했다. 마음에 준비없던 선우는 여간 어정쩡한게 아니였다. 정신이 또렷해 보이면서도 멍한것같기도 하여 정말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반신반의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미 메우기 어려운 깊은골짜기를 넘어 다시 손길을 섣불리 내밀수도 없었다.  
    그저 생각없는 사람처럼 하염없이 창호지를 바라보며 무덤덤히 앉아있기만 하는 정희가 저으기 겁을 주기도하였다.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할지, 그냥 정신이상자로 치부하고 자극하지 않는것이 상책일지 알수 없었다. 미친사람은 절대 자기를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말을 내뱉았다가 나쁜면으로 자극할수 있기에 정상인에게는 관심으로 들릴 병문안도 가볍게 하는게 아니였다.
    정희는 련며칠 그렇게 눈을 내리깔고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앉았다가는 간다온다 말없이 가버리군 하였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웃지도 않고 말도 먼저 건네지않는 정희와 마주앉아 있다는것은 선우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압박 그자체였다. 그렇다고 축객령에 자극받고 이상하게 나올것같았다. 인간의 정감사전에 진퇴유곡이란 어떻게 해석되고있는지… 마침내 선우는 무슨말이든 해야겠다고 작정하였다. 
《 정희, 오래간만이야, 정말 반갑다. 그런데 놀러왔으면 말이라도 해야지, 왜 말할라치면 기관총쏘듯하던 네가 입이 붙어있으니까 내가 먼저 답답하구나》
《 오, 이제야 말꼭지떼네, 내가 무슨말을 먼저할수 있다고 먼저 말하래? 내가 미친녀자라구 생각하지? 그리고 무섭고, 미워하고 그렇지? 그래, 나정말 미쳐있었던같아. 난 쌍통이지,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 미워할수밖에 있겠니?흐흑… 》
    말하는품을 보아서 전혀 횡설수설이 아니였다. 그동안 시도 때도없이 울었다는 정희의 흐느낌이 정상적인 사람의 진정한 슬픔에서 새여나오는 흐느낌인지는 파악이 없었다. 눈이 빛나고있었다. 정신이상이 온 사람은 눈빛부터 알리는법이다. 아무튼 운다는것은 정서의 골짜기에 메아리가 울린다는것이 아닌가? 차가울수도 더울수도 없었던 선우의 가슴에 련민의 정만은 그냥 넘치고있었다. 중병을 앓고나서 얼굴이 많이 망가져버린 정희의 얼굴을 바라보느라니 저도모르게 말이 튀여나갔다.
《 정희, 울지마, 너 우는모습 얼마니 보기싫은지 알지? 난 너를 한시도 미워한적이 없어, 내가 꺾지못한 꽃이라고 고운꽃을 곱지않다고 말할수 있겠니? 내마음에서 너의 모습은 그냥 그대로야, 각시가 되고나니 정말 성숙한것같을뿐…》
《 그말 진심이니? 날 놀리는거지? 아이, 우스워, 내가 지금도 사랑스럽다구? 하하하, 너정말 사람 잘웃긴다야 호호호…》
    정희는 이상야릇한 눈길로 선우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폭죽이 터지듯 깔깔 웃어제꼈다. 소름이 끼치는 웃음이였다. 더는 무슨말이 나갈것같지 않았다.
《 이러는 내가 무섭고 소름이 끼치지? 나도 내가 왜 이 집에 오게되는지몰라, 집문을 나서면 발길이 여기로 향해지는구나. 아직도 내가 올똘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거야, 나도 나를 믿을수 없는데 네사 더하겠지뭐, 미친녀자의 헛소리라고 생각하지말고 내말 좀 들어볼래? 말하지 않고는 가슴이 그냥 터질것같으니까》
《 그래, 듣지, 네말마따나 나 바보잖아. 말해봐, 무어든지》
    크고 검은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뜨는 정희의 눈가에서 구슬몇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남편될 사람을 처음 마주할 때 기대보다 실망이 너무컸다. 아마 선우의 사람좋은 얼굴과 비교하며 생긴 오차일지 몰랐다. 정우가 아무리 마음에 딱드는 남자인들 어쩐단 말인가? 시집가는 처녀에게는 우선 조건이 출신이였고 온사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출신이 좋은녀자가, 특히 자기같은 렬사의딸이 부농의 아들에게 시집간다는것은 가문의 비극만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대역부도한 일이였다.
   아무리 사랑이 강하다고해도 선우와는 영원히 어울리수 없는 처지이다. 그래서 월급쟁이고 출신좋고 장차 공소사주임이 된다는 남자에게 운명을 기탁하기로 마음을 정하고말았다. 첫날밤이다, 로처녀로서는 부끄러움보다 당연한 기대감으로 넘치는 화촉동방이였다. 그동안 선우와는 수없이 포옹하고 입도 많이 맞추었지만 정작 남자의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땅땅한 살결이 부딪쳐오느는듯싶더니 온몸을 짓누를때는 과거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알수 없는 신비감에 몸이 달아올랐다. 시집은 늦게왔지만 호사공부하면서 이성지합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 그녀였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지는 그 황홀한 서막은 열리지않았다. 처음이여서 그러려니 하고 내심히 기다리며 은근히 호응해보았지만 속은 이상하게 바질바질 타기만했다. 아무리 역사질해도 남자의 땀방울만 얼굴에 끈적거리고 거친 숨결만이 애타는 마 음에 부채질만 하였다. 스스로도 부끄럽고 민망스러워졌고 실망감에 신비감도 차차 사라지는것을 붙잡을수 없었다.
    남자도 풀이죽어 각시를 바로 쳐다보기를 주저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무슨 즉효라고 하면서 주사약을 가져와서는 맞고는 검질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역시 빈배를 맞추는 일밖에 해낸일이 없었다. 신혼의 밤은 구곡간장이 굽이굽이 녹아내린다더니 이게 무슨 밀월이란말인가? 정희는 공연히 신경질을 피우기시작했다. 남편도 제무안에 취했는지 숙직이라며 매일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이 없는 밤은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비여있다는것이 서러웠다.
    멋모르는 시어머니가 신혼에 외박이 말이되냐며 드러내놓고 닥달질하자 남편은 다시 한자리에 들었다. 실속없는 웅성이 비틀려졌는지 아니면 반발심에서인지 녀자의 몸을 탐하는데는 극성이였다. 그럴수록 정희는 욕정에 불탈대신 실망감에 앵돌아졌다. 남자는 그러는게 불만이여서 찡내다가 다투기도 하였다. 생각하면 남자도 불쌍했지만 자기가 더 불행해서 울기도 했다. 그렇게 신혼인지 밀월인지 한달이 지나가버렸다.
    집안에 차차 찬기운이 감돌기작했다. 시어머니와 말대꾸도 서슴치않았고 남편이 무슨 말을 걸어와도 단마디말로 건너뛰였다. 그러는 며느리를 시어미가 곱게 보아줄리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희는 할일도 없고 해서 낮잠을 자는게 일이였다. 그만 큼 밤에는 잠들수 없었다. 남편이 칭칭 감겨들어서 못자고 오만 잡궁리가 뒤얽히여서 잠들지못했다. 선우는 어쩌고있을가하고 생각하면 가슴에 억울함만 맺혔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녘에야 토끼잠이 들었다가 깨여나니 웬일인지 방문이 빠끔히 열려있는데 가마목에 흰옷을 떨쳐입은 선우의 어머니가 가마목에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돌아보니 선우의 높은 동가슴이 힘차게 오르내리고있었다. “아, 원래는 내가 선우네집에 시집왔던건가?” 다시다시 보아도 선우의 단정한 얼굴이였고 선우의 특색인 긴머리가 굽실거리고있었다.
    너무도 기쁜김에 발딱일어나 정주에 내려서며 “어머니, 왜 아직도 주무시지않고 그리앉아있습니까? 아침은 제가 지을게요. 쌀독이 어데있나요?” 정희가 방싯웃으며 다가서는데 선우어머니가 발딱 일어서며 욕부터 퍼붓는다.“이년, 이 량심없는 년아, 공부하는 내아들 강건너까지 홀려가더니 다시 돌아와서 속만 말려주다가 다른데로 시집간년이 무슨 염체로? 이년, 내 오늘 너를 가만놔두지…”  
    갑자기 마귀할미처럼 달려드는 선우어머니를 피하다가《악!》하고 소리치는 서슬에 깨여보니 꿈이였다. 갑자기 골이 뗑해내고 눈앞이 흐리마리해졌다. 정통편을 찾아먹고 누워도 낫지않았다. 겨우 아침을 치르고 나서도 그냥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어머니가 곱게 보든말든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벽에 있었던 악몽을 더듬어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속절없는 추억만이 얼기설기 갈마들었다.
   가도록 심산인가? 헌걸찬 남자를 버리고 출신좋은 남자라고 훌쩍 시집온 자신이 어리석지 않을수 없었다. 중매쟁이에게 홀딱 넘어간 어머니가 원망스럽기전에 자신이 더원망스러웠다. 지금 꼴같아서는 평생 아이하나도 낳아보지 못하고말것이 불보듯했다. 씨를 뿌리지못한 밭에 잡초밖에 더자랄게 있는가? 아이가 없고 가난하더라도 금슬만 좋으면 잘들산다고 하더라만 지금 남편에게는 세월도 그런 행복은 가져다 줄것같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선우의 모습만 서성거린다.
《  이 사람 새각시, 이게 무슨일이오, 시집와서 하루같이 그냥 잠만자니? 》
    저도모르게 흐느꼈던지 눈치하나는 되우 빠른 시어머니가 방문을 활짝 열어부치며 정식으로 질책하기 시작했다. 얼결에 이불을 제끼고 일어나앉았다.
《  아니? 며느리, 또 울었던거요? 신혼에 눈물이 나올일이라도 있소?》
《 예? 제가 울었습둥? 》
     어망결에 눈가에 손을 가져간 정희는 눈굽이 축축히 젖어있는것을 알았다.
《 며느리 이보게, 낮에 정 할일이 없으면 공소사에라두 놀러가서 남편도 거들어주며 무슨 얘기라도 나누어야 신혼부부같지 않겠소? 그좋은 신랑재를 두구 쯧쯧》
    그좋은 신랑재를 두고 무슨청승을 떠느냐는 시어머니말이 어째 그리우스운지 그만 “키드득”하고 웃어버렸다.
《 이 사람이 보자보자하이, 그게 무슨버릇이요? 시에미 말하는데 웃어대구?》
《 예? 제가 웃었습니까? 아이 웃었겠는데… 》
   정희의 시어머니는 억이막힌다는듯 한참 째려보다 방문을 쾅!하고 닫고는 힝하니 밖으로 나가는 모양이였다. 혼자 빈집에 남은 정희는 참지 못하고 그만 엉엉소리내며 울어버렸다. 점심에 집에 들어와 며느리의 눈이 퉁퉁 부어있는것을 이상하게 찍어보다가 구들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니 정희도 할말이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정희 자신도 자신이 이상하게 변해간다고 생각하였다. 시없이 웃음이 나왔고 혼자있을때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치며 울어제꼈다. 홀어미로 아들을 키웠다는 시어머니가 아들며느리의 사이가 심상치않음에 은근히 신경을 쓰고있던 차 며느리가 “히히” 하고 웃다가는 꺼이꺼이 우는것을 여러번 발견하였다. 문제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아들더러 얼른 병원에 데리고 진찰해보라고 윽발질렀다. 정희도 늘 머리가 아프고 실없이 눈물이나고 웃음이 터지는게 좋은징조가 아니라고 느끼던차라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병원에 갔다온 그날부터 남편의 눈길이 홱달라졌고 시어머니의 얼굴이 퍼러딩딩 해졌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그날 의사가 남편을 단독으로 불러놓고 ‘정신분렬증” 징조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귀뜸했단다. 무슨약인지 남편이 먹으라는대로 먹었지만 머리가 아픈것은 그냥 그본새였고 어디에 나사가 풀렸는지 웃음과 울음이 번갈아 터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차차 몸도 보기싫게 나기시작했다.
    결국 시집에서는 사람을 속였다며 리혼을 제출해왔다. 리혼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정희에게는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남편도 경계하는 눈치가 심해지더니 밤에도 친친 휘감겨들지 않았다. 이래저래 열불만 터지는 판이라 정희의 정신상태는 점점 엉망이 되여갔다. 현대녀자로서 리혼당하여 본가집에 쫓겨가는 일이 너무 희귀한 일은 아니지만 정희로서는 본가로 돌아가기가 죽기보다 더 싫었다. 무엇보다 비웃는듯 할 선우의 눈길이 떠오르면서 더구나 질색했다. 그럴수록 머리는 더 뗑해졌다.
    정희는 흐리마리한 정신에도 울고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제구심도 못하는 남자와 밤에 정도없이 살바하고는 리혼하고 재가하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군소리없이 리혼서에 도장을 찍었다. 결혼하여 두달이 채안되였다. 정희는 사람들이 미친녀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점점 더심하게 미쳐갔다…….
《 선우, 내하는 말이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지? 다행히 삼촌이 잘 치료해줘서 정신도 맑아지고 우선 머리아픈 증세는 없어졌어, 그러나 그냥 울고싶고 웃음이 나오군해, 나 인제 끝장인가봐, 재가라도 갈려고했는데…흑흑…》
   정희의 말은 끝났지만 선우로서는 무슨말을 할수 없었다. 그저 정희의 얼굴을 오래오래 바라보기만했다. 정희로서는 선우의 눈길에서 변함없는 믿음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날이후부터 정희는 매일이다싶이 찾아왔고 선우도 무랍없이 대해주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보다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될수록이면 그의 헝클어졌던 생각들을 다듬어주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줄지언정 매몰차게 차던질수 없었다.
   선우의 어머니도 정희가 있을때는 일이 날가봐 말없다가도 일단 돌아가면 야단쳤다. 마을에서도 아무리 장가비위가 난들 과부에다 미쳐났던 녀자에게 치근거린다고, 정치적으로 보아도 절대 아니될일이라고 입방아를 찧다가도 정희앞에서는 아닌보살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희가 금방 돌아가자 반란파두목으로 제노라고 살판치고있던 산호란놈이 정우를 찾아와 훈계했다.
《 너 매일 정희와 무슨 짓을 하는거니? 》
《 뭐? 내가 무슨짓을 할수 있을것같니?》
《 꿈도 꾸지마, 비록 정신이 나간 녀자라도 렬사의 딸이야, 네가 이러는건 무슨 남녀문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인거야, 큰일나기전에 생각을 집어쳐라, 아무리해도 넌 자격이 없는거다, 알아들었니?》
   선우는 하도 어이없어 상대하기조차 싫었다. 산호란 룡강촌에서 소학교도 함께다닌 고향친구였고 함께 이 모아툰에 분산호로 이사온처지였다. 그러나 선우는 문화혁명이 터지자 바로 이 고향친구에게 닥달질당하며 비판도 밥먹듯이 받고있는터이다. 온 동네일에 삐치지않는 일이없는 작자였다. 선우는 그의 가시돋친 말을 귀등으로 들을처지가 아니였지만 정희가 절로 찾아오는것을 내쫓을 생각도 없었다.
    정희를 원래의 그 모습대로 돌려세우는데는 과거에 묶어두는것이 제일좋다고 생각한 선우는 늘 중학교때 일이며 강건너던 일이며를 얘기하면서 정신이니 병이니하는 말은 일절 내지않았다. 한때 미쳤던 녀자이든 완인으로 돌아왔든 옛정은 정대로 굳어있으니 남이야 뭐라든 정희가 재가를 가기전까지는 더 자극주고 싶지않았다. 그래서 정희가 하는말을 귀담아 들어주었고 살뜰하게 대해주려 애썼다.
《 정희, 너 재가하고 싶다고 말하더니 시집안가니? 그러면 안돼, 오빠의 말처럼 여기고 좋은자리가 나지면 얼른 시집가, 아직도 얼마나 곱고 참한데말이야,》
    선우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정희가 악을 바락바락 쓰며 대들었다.
《네마음 내가 다안다, 권할것도없어, 난 다신 시집이란거 안가니깐, 시집이라고 갔다가 미쳐서 리혼당하고나니 인젠 시집소리는 듣기도겁나, 나는 한고개넘은 녀자여서 못할말이 없거든, 남자와 두달살았지만 변한건없어, 넌 믿고싶지 않을것이고 내가 이상하다고 여기겠지? 네가 서방가면 그때 나도 이 마을을 떠날거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보내면 안되니? 내가 정말 보기싫다면 놀러오지 않을게. 흐흑…》
    정희가 또 어깨를 들먹거리니 선우는 어찌할바를 몰랐다. 사랑이 없이 못살아갈것은 아니지만 정희를 사랑했던 그 기억마저 까맣게잊고 살아갈수는 없을것 같았다. 사랑이 마음의 명령으로 시작되는것이라지만 리성의 명령으로 물리쳐지지 않는것도 역시 사랑이 아닐가? 사랑을 잃어버린다는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정이라는것마저 잃었을때는 더구나 마음이 구멍이 펑 뚫릴것이다.
《 아참, 전번날 내가 간후 산호새끼 왔더랬지? 그새끼 뭐라하던?》
《 나 죽어도 너를 좋아할 자격이 없다구, 경치기전에 조심하래》
《 그새끼 나도 그냥 불러놓고 교육하느라 야단이야. 새끼를 둘이나 둔 놈이 치사하기는, 내가 이러구 돌아오니까 길가에 개살구처럼 입에 넣고싶으면 아무때나 따넣을줄 알았는지…입이 쓰거워서 더말하지않겠다. 》
《 그새끼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 주의해라, 승냥이는 양을 잡아먹겠다고 선포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왜 보이지않니? 하루건너 사원대회를 열구 나를 내세우더니? 너를 믿고 하는말이지만 나 그자식 안보는 날이면 살이진다.》
《 정말, 너 아무것도 모르지? 전번에 2대에서 영화를 돌리던 날, 집체호 복화를 무슨 쪼궁하는 문제로 담화를 한다며 먼저 데리고 올라오다가 저기 제방둑에서 짓을 쳤다지않니? 빈하중농회의서 희열이가 그러는데 중앙지시가 내려온 때 걸려서 모범 껨을 칠거래, 그 자식때문에 늘 소름이 끼쳤는데 콱 총살이나 맞으래라.》
   선우는 우물에 빠진놈에게 돌을 던질만큼 악하지는 않지만 듣던중 반가운 소리였고 앓던이를 뺀것처럼 시원해났다. 그냥 여기저기 물어떼는 벼룩이처럼 무슨트집이나 잡아가지고 계급투쟁을 한답시고 으시대더니 사필귀정인가, 아니면 량심을 바로 써야 된다는 말이 맞아떨어진것인가, 아무튼 산호가 그렇게되니 “타도”되였던 생산대간부들이 기를펴고 다시 나서게되였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7년남아 소란피우던 광란도 시들해지더니 정치분위가 나아졌고 선우의 처지도 좀씩 풀리였다. 신문에 통신글도 내주고 신문잡지에 시랑 발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흑판보를 꾸리는일도 맡기고 생산대 목수도 시키더니 난생처음 로동모범도 되여봤다. 이제야 사람대접받으며 살게되였다고 마음펴고 살려는 때에 그동안 장가도 못가고 늙어버린 아들을 보며 애를끓이던 선우의 어머니가 그만 황천길을 앞당기였다..
 
                                         4. 사랑의 열매
 
   로총각의 잠못드는 어느 날 밤, 문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정주구들에 올라왔다.
《쉿, 나, 정희야,》
《 정희? 너, 이밤중에? 미쳤니?”》
《 그래, 미쳤고 너때문에 그냥 미쳐있어, 등가교환하자는거 아니다, 나도 청춘을 이렇게 묵일수 없어, 네가 나무리지 않는다면 내 처녀를 너에게 바치고 재가든지 뭐든지 갈란다, 왜? 유치하다고 생각하니?》
  정희는 정말 미친녀처럼 옷을 와락와락 벗어버리더니 알몸으로 이불에 쏙새여드는것이였다. 선우는 정신이 다 아찔해났다. “너? 너…”소리만 나왔다. 그러거나말거나 정희는 몽글거리는 알몸을 밀착해왔다. “미쳤다고 무서워할것없어” 녀자는 한사코 남자의 가슴에 감겨들었다. 정욕에 달아오른 녀자는 남자를 위해 가시풀우에도 드러누울수 있다. 순간 애욕에 주렸던 웅성에 불길이 확솟구쳤다. 이런 돌발 상태에서 성인군자가 어데있으랴, 걷잡을길없이 숨이 차올랐다.
    창문으로 새여드는 달빛에 한껏 부풀어오른 하얀젖무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드디어 웅성이 쏟아내는 정염의 불덩이가 정희의 몸 구석구석에서 마구굴러다녔다. 그것이 순수동물적인 육욕이래도 좋다. 다른 남자가 부딪치고 비벼대던 라체, 흐느끼고 있는 녀자의 라체…그러나 본능이 부르고있는데 그게 무슨대수인가.
   정희의 눈에서 파란빛이 흐르고있었다. 마침내 단쇠처럼 뜨거워진 두입술이 녹아붙었고 녀자의 부드러운 손이 남자를 서서히 끌어올렸다. 정희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지더니 남자의 목을 죽어라고 껴안으며 울고있었다. 달도 창가를 비껴 서천가에 멀직히 걸렸다. 밤은 새벽으로 달리고 너무늦게 융합된 젊은육체는 서로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는것이 한스러운듯 얽히고 비탈리며 꿈틀거렸다……
《 정희,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우리 같이살자 응?》
《 바보, 오늘 지내보니 욕심이 생겼니? 또 가져봐, 이제 죽어도 원이없어… 》
    녀자는 도리를 감정으로 해석하고 남자는 리성으로 감정을 흥량한다. 선우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근육이 불끈거리는 넓은 가슴으로 정희의 가슴을 무겁게 그리고 더없이 살틀하게 덮었다… 정희는 기진맥진한듯 선우의 높은가슴을 벤채 죽은듯이 굳어졌다. 사랑은 두마음속에 뿌리박았지만 향락의 가지는 하늘로 뻗었다. 이제 누가 뭐래도 남자를 내주지 않으려는듯 목을 감은 두팔을 옥죄이며 전률하였다. 선우는 그동안 정희에게 가끔 가져보기도 했던 나쁜 선입견을 부끄러워하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꿈을 꾸는듯 느껴졌기때문이다.
    남자가 애욕의늪에 빠지면 리성을 잃기마련이다. 문제는 감정의 영구성인데 그런 마비상태가 오히려 더좋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성스럽고 진지한것이라면 감정의 충동으로 어떤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수라고 할수 없지않은가?
밀물이 다시 일렁이기 시작한 선우의 마음의 항구에 불안과 곤혹스러움과 의혹의 안개가 완전히 걷히면서 범상치않은 생각의 배가 닻을 내린것이였다.
    난생처음 녀자를 겪는 그로서 잘알수는 없지만 정희는 쉽게 몸이 달아오르지않아도 일단 달아오르면 식을줄 모르는 체질임을 느꼈다. 첫사랑에 장님이 되였을 때 정희는 자기를 가지라고했다. 만약 그때 선우가 어떻게 나온다해도 녀자의 덕성이 순종에 있다고 생각하는 정희는 기꺼이 다내주었을것이다. 드디어 치정의 절대적인 높이에까지 치달아오른 그들은 본능의 충격파에 실린 몸이든, 좋아서 내맡긴것이든 더 문제시될것이 없었다. 늦바람이 곱새를 벗긴다는 속담이 맞는것같다.
    앓음핑게를 대고 일밭에 나오지않던 정희가 부지런히 일밭을 쫓아다니기시작했다. 얼굴이 감스레 타고있었지만 보기가 좋았다. 눈으로 주고받는 언어가 그처럼 생동하고 풍부할수 없었다. 정희는 밭김을 매면서도 정열의 질풍노도에 지칠줄 모르던 선우를 떠올리며 혼자 얼굴을 붉히군했다. 선우의 남다르게 높고 떡버러진 가슴팍을 마주해도 몸이 달아오르고 속에서 불덩이가 이글거렸다. 녀자가 남자를 너무 밝히면 못쓴다고 시집가기전에 엄마가 말했지만 선우가 한없이 좋은걸 어쩌랴,
    선우와 함께누우면 정열이 금방 폭발하였고 불공정한 운명의 희생자, 사랑에 목말라있던 남자에게 무더기사랑을 폭폭 쏟아주고싶어지고 푸들치는 웅성의 기백을 확인할 때마다 그냥 버릇처럼 흐느끼면서 다시다시 감겨들군하였다. 남녀간의 감미로 운 사랑의 의미를 선우의 억센육체에서 확인할 때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이 사랑을 지켜가리라 윽벼르는 정희였다.
    엄마의 눈치를 보며 선우를 찾아가지 못하는 날에는 일찍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우면 선우의 숨소리가 들리는듯 가슴이 막혀왔다. 그는 자신이 앓고나서 더병적이 아닌가하는 부끄러움을 가져보았지만 심장을 속일수 없었고 온몸으로 체험하고있는 행복감을 말릴수 없었다. 선우를 바라보는 정희의 눈길에는 신뢰, 감격, 미안, 기대, 온유…그 어떠한 낱말로도 표현할수 없는 복잡한 감정세계의 세부들을 담고있었다.
    그렇게 꿈속같이 즐기던 정희는 문득 자기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음을 발견했다. 후과가 무서웠지만 끝내는 자신을 증명할 새생명이 잉태되였다고 생각하니 그 자체가 감동이였다. 한편 사랑의 진정한 고험이 시작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였다. 선우가 어떻게 나올지 알수 없고 그것이 훔친 사랑으로 말썽이 되겠지만 분명 둘이의 사랑의 씨앗임을 어찌 거절할수 있을것인가?
    정희는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선우를 해란강버들숲으로 불러냈다. 선우가 어정쩡해 서있자 긴두팔로 목을 휘감았다.
《 내말 놀라지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들어야해, 나임신했어? 기쁜가요? 우리의 사랑이 열매맺았어요, 나정말 완정한 녀자라는게 증명되였어, 당신은? 》
   정희가 갑자기 당신을 개어올리며 까불어대는데 갈피를 잡을수 없는 선우가 정희의 두팔을 풀어내리며 정색해서 물었다.
《 습니다는 무어고 당신은 또 무어야, 그리고 열매란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 인제부터 너가 당신이 되였어. 허물없던 동무사이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남편만 남았어. 바보, 나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는데 뭘 못알아들어? 이 문제를 조용히 토론하자고 불러냈어. 혹시 집에서 말하다가 언성이라도 높아지면 누가 지나가다가 엿듣기라도 하면 어째요? 난 당신무릎에 앉을래, 자, 이렇게, 아이 편안해라》
   선우는 그제야 무슨 감투끈인지 알았다. 무슨 밭이든 씨를 뿌리면 싹이 움트고 열매가 맺히는 법이지만 이건 다른일이다. 갑자기 두려워났다. 다른 친구들은 언녕 아들딸을 두었지만 자기에게만 때가 아니고 그게 사랑하는 정희라는데서 문제는 더구나 심각해진다고 생각하였다.
《 우리 결혼해. 내가 엄마를 설복할게, 이제 다쑤어놓은 죽을 설사 밥으로 만들자고 하겠어요? 대담하게 나오세요, 당신과 하는 말은 아니니 노엽게 듣지 말아요, 난 과부이고 정신나갔던 녀자로서 동등한 자격이니 엄마도 승인할거에요》
  선우는 정희의 말뜻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정희의 말이지 사회적인 평판은 아닌것이다. 이미 리혼한 녀자니까 가정파괴란 말은 안서겠지만 아직도 봄이온것도 아니고 봄이왔더라도 자기의 사랑의 꽃이 필때는 아니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욕심을 부리다보면 자기가 철저히 파멸되는것은 둘째치고 정희마저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 정희도 이점을 모를리없지만 감성적인 정희가 말을 듣지 않을게다.
  《 정희, 나도 인간이고 남자야, 이보다 더좋은일이 어데있겠어? 그런데 지금은 아닌것같아, 아깝더라도 아이를 지우는게 어때? 》
《 나도 많이 고려해보았어요. 그럼 어쩔가? 대상자가 없으면 류산도 못하는데, 나도 정말 갈팡질팡이에요, 아이참, 난 어쩌면 좋아?》
  정희가 또 버릇처럼 어깨를 달싹거렸다. 선우는 정희가 운다면 겁부터 더럭난다. 한창 좋은때에도 눈물을 줄줄흘리며 흐느끼는 녀자이지만 지금 경우는 다른일이다. 그들은 밤이깊도록 이랬다저랬다 하며 결정을 내리지못했다.
《 그럼 좋아요, 당신의 말대로 지웁시다, 이제 정식결혼하면 인차 생기겠지뭐. 그러나 여기서는 안돼요, 삼촌이 의사질하는 흑룡강 이춘에 가겠어요, 삼촌이 무슨 방도를 대줄거예요. 인차 행동해야 해요, 몸이나는걸 아낙네들이 눈치채면 큰일이니까, 내가 엄마몰래 준비하고 알릴테니 가만히 역전까지 배웅해줘요, 》
《 그게 좋을것같은데 혹시…에이, 내가 미안하오, 그냥 제좋은 멋에…》
《 바보, 그게 어째 당신잘못인가요? 내잘못이지, 그래도 난 좋아죽겠어…》
《 그렇게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가봐 걱정도 되구…….》
《 에이, 미친소리하지마》
  정희는 선우의 넓은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래오래 흐느꼈다.
                            
                                              5. 사랑의 봄은 오는가?
 
     며칠후, 정희와 선우는 모아산고개넘어 룡포동 골짜기를 내리느라고 숲속길을 걸었다. 뻐스를 탈수도 없었고 큰길로 걸어갈수도 없었다. 극비밀리에 진행되는 그들만의 유격전이여서 동네사람들에게 들키면 안될일이다.
《 이렇게 가면 힘들텐데 걸을만해? 》
《 힘센 남편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여? 힘들면 업어달랄게, 안돼?》
   그들은 손에손잡고 숲길을 헤쳤다. 단풍나무씨를 채집하느라 여러번 다녀본 길이라 대충 걸어갈만했다. 저녁차를 타니까 쉬염쉬염가도 되였다. 그들은 이깔나무아래에서 쉬였다. 이렇게 앉으면 정희는 아이처럼 무릎에 올라앉는다. 오늘따라 숲속의 풍경은 유멸난 정서를 자아냈다. 대자연은 푸른색갈만이 아니라 청신하고 맑은 갖가지 색채를 계절의 섬세하고도 열정적인 붓끝에 담아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있었다.
    참나무의 부드러운 연록색이 산등성이를 바탕색으로 칠해놓고 사색가인듯이 키높은 이깔나무들은 청갈색우듬지를 추겨들고 말이없다. 듬성듬성 들어선 사시나무들은 푸른잎사귀를 미풍에 떨며 고독을 쫓고있는데 그옆에 산버들이 수집음을 타는 듯 춘정을 머금고 긴머리를 풀어내리고있다. 이 모든 설레임과 빛갈을 하나의 음향과 푸름으로 조화시키며 소나무들이 숲의 왕자답게 억센 가지들을 펼치고섰다.
    정희도 제나름의 사색에 잠겨 말이없다. 세상에는 녀자를 점유하고 곧 식어버리는 사랑도있다. 그러나 선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좀 공상적인데가 다분하지만 얼마나 실제적인 남자인가? 시집갔다오고 미쳐나기까지했던 자기를 받아준 남자에게 자기는 영원히 갚을수 없는 빚을 지고있는것이다. 정희는 선우의 마디굵은손을 살며시 끌어다 가슴에 껴안으며 더없이 달콤하게 웃어주었다.
  사람이 진실을 말할 때에는 눈속에 빛이 움직인다. 그 진실이 또하나의 진실과 불꽃을 튕길때에는 더욱 진한 색갈을 띠는법이다. 선우는 정희의 눈에서 그것을 읽고있었다. 불행을 겪고있는 두젊은 심장이 뿜어올리는 빛은 그처럼 찬란하였다. 선우는 조금 풍만해진 정희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이처럼 부드러운 몸에 굽이굽이 서려있던 사나이의 정한을 마음껏 풀어놓게 해주고 신비로운 이성지합의 행복을 만끽하도록 정성껏 받쳐주던 정희의 몸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너무 소중하였다.
    정희의 몸이 전률하고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정우는 그 눈물을 말없이 빨아들이며 으스러지게 껴안아주었다. 정희가 다시 돌아오겠지만 또 애타게 눈이빠지게 기다리는 안타까움과 미쁜그리움에 속을태울것이다. 남자의 한가슴에 무지개를 띄워놓고 두번이나 사라진 아지랑이같은 녀자, 마침내 자기의 살뜰한 녀자가 되여진 정희를 껴안고 그냥 꺼이꺼이 울고싶기도 했다.
 《 정희야, 가서 자주 편지 할거지? 》
 《 그동안도 날 보고싶어하겠어? 보고싶어죽게 편지안할래,호호호》 
 《 참, 그런데 엄마에게는 어떻게하고 떠났어?》 
 《 머리가 자꾸 지끈거리구 정신이 아물아물해질때 많은게 좋은징조같지 않다고 거짓말했어, 그리고 내가 삼촌이 있는 병원에 호사로 갔다고 말하라 했어.》
   정희의 거짓말은 정말 물이 못새게 잘도 짠것이였다. 저녁 목단강행렬차에 정희를 앉히고 쓸쓸히 돌아서는 선우의 마음은 단지쓴지 몰랐다. 그동안 정희가 몰래 와서 반찬도 해주어서 살만했는데 이제 곧 수라장이 될것은 물론 저절로 밥을 해먹는 신세를 생각하면 정희를 하루급히 가마목에 앉히고싶은 마음이 불붙듯했다. 그런데 현실은 왜 나만 골탕을 먹이는것인가…며칠후 정희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선우님, 잘있어요? 나, 정말 그런게 맞아, 삼촌이 펄쩍뛰며 임자가 누군가 대라고 호령했지만 내가 머리만 붙안고 울어대면 곧 물렁팥죽이 되여버려,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이 편지를 쓰는 시각에도 내선우님의 달아오르던 숨소리가 가슴에 뜨겁게 느껴져서 그리워져, 상처받은 내가슴속 골방에 인제 척들어앉아서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면 눈물나요. 그 정열에 타던 숨결은 날마다 내마음의 골방에서 고패치고있어요. 그 숨결따라 내사랑도 끓어올라요.
   당신과 함께걷던 그 숲길이 보란듯이 가는 첫나들이길이였다면 얼마나 좋을가 생각했어요. 그날은 정말 하늘이 맑고 바람이 살틀해서 또 울어버린 나를 리해할수 있었겠지요? 당신이 내눈물을 빨아넘길 때, 나는 자꾸자꾸 울고싶어졌어, 당신과 헤여져 며칠이 안되지만 그날의 그 맑은하늘이야말로 당신이 나에게 펼쳐준 드넓은 사랑의 품이였어요. 그 하늘이 다시는 흐리지않고 비바람이 불어치지않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당신을 다시다시 꼭 껴안아봐요.
    남자들은 흔히 첫사랑을 잃은후에도 자신과 희망을 완전히 잃지않겠죠. 하지만 마지막 사랑을 잃는다는것은 나에게 생활의 의의와 자신심, 삶에 대한 애착마저 잃는다는것을 의미하고있어요. 나, 돌아갈 때 당신에게 이 세상에서 우리 둘에게 가장 귀중한 선물을 안고갈테니 조급해말고 기다려주어요…
 
    그렇게 첫편지가 오고 다시 련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희어머니에게 물을수도 없었다. 선우의 심통이야 터지든말든 봄은 제멋에겨워 풍성한 잔치를 무르녹이고있다. 호을호을 눈앞에서 아물거리는 아지랑이, 넋을 홀리는 파란하늘, 그리움을 실어주는 쪼각구름…어느새 봄도가고 격정을 인내한 꽃의 꿈이 지고있다. 분분한 락화, 꽃은 결실의 축복속에 꽃다운 최후를 마치는가? 봄의 서러운 사연을 주절대듯 쉼없이 흘러가는 해란강의 물소리, 버들숲에서 울어싸는 이름모를 새소리가 애간장을 뜯어도 봄은 기어이 가고 무성하는 태양의 계절, 여름이왔다. 
    기다림이란 속타는 조우이다. 그러나 님을 기다리는것은 즐거운 안타까움이다. 언녕 해결을 보고 돌아올 때가 되였건만 정희는 감감무소식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웬 헛소리냐. 또 흰나비처럼 영영 날아가버렸는가? 선우는 편지를 썼다가는 찢어버리군 하였다. 그것들이 흰나비가되여 정희를 찾아가고 땅속에 묻혀 하얀나리꽃으로 피여나기를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우나 무기력하고 성결하나 쉽게 얼룩지기도하는 인간의 감정을 포함하여 흰꽃처럼 스러져버리는것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선우는 이 세상이 더없이 두려워졌다.
   그러나 소리쳐 불러보아도 화답이없다. 달밝은 밤이면 모아산고개에 올라 정희가 있음직한 북녘의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달빛속에 들쑹날쑹한 저 먼 련산련봉은 비애의 무덤같이 우중충하기만 하였다. 삶의 고뇌, 죽음의 안녕, 영원의 수수께끼들을 산은 알고있으련만 침묵을 지키고있다. 구름속에서 숨박곡질하는 달은 웃지도않고 시들어버린 여름에 대한 미련을 울어싸던 풀벌레도 입을다문지 오래다. 어데선가 구슬픈 부엉이 울음소리가 선우의 가슴을 애절하게 후벼댄다.
    마침내 떠도는 소문에서 정희의 행각을 대충이나마 알았다. 정희가 삼촌의 련줄로 거기 향병원의 호사로 일하며 좋은자리가 나지면 거기서 시집을 갈거란다. 다른말은 없었다. 모르긴해도 정희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일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 한 일이다. 녀자가 새로운 환경에서 마음이 변해서는 안된다는 법은없다. 인제 원망도 너무 창백무력하다. 선우도 마침내 머리가 돌았다.
   사랑은 야심보다 현명하지못하다. 마를대로 메말라버린 감정을 치약처럼 짜내서라도 누구를 좋아해야 한다고, 그 어느곳에서 새로운 사랑이 있을것이라고,진정으로 정희를 사랑한다면 잘되기를 축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자기의 실제적인 감정은 그 경지에 미치는것을 방해하고있었다. “취처는 운수소관”이라 하였거늘 운명이 하는대로 하지않으면 무슨수가 있단말인가? 사랑은 강요가 아니거니와 더구나 명령이 될수는 없다. 정희가 잠시 자기손바닥우에 놓였던 수은이라 할 때 움켜쥐려고 그러 쥐면 영영 새여나가버릴것이다.
   사랑은 이성과 이성의 절반이 함쳐져 하나가 되는것이 아니라 할 때 자기의 사랑은 정희라는 하나의 존재와 자기의 존재, 둘이 완전한 하나로 되여질 때에라야만 믿고 살아갈 사랑이 되는것이라고 자기를 위안했다.정희까지 끝끝내 돌아오지않는다면 어찌 새로운 사랑을 믿을수 있단말인가? 사랑은 기다림속에 의지의 실천이다.
   선우는 결혼이란것을 접어버리고 문학에 미쳐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애정의 철저한 실패가 인생의 실패라고 하더라도 삶에 대한 애착심이 지꿎어졌고 역반심리가 강렬해졌다. 그저 이렇게 살다가 멋없이 일생을 마치기엔 자신이 너무 억울했다. 그는 늘 무표정한 얼굴이였지만 마치 얼음장밑에서 급류가 용용히 굽이치듯이 심방에서는 더운피가 사품치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지나온 나날보다 더 피가 랑자하고 더 고통스럽게 터져야할 상처를 감내하며 살수도 있다는 숙명같은 각오를 하였다.
                          
                                                    6. 실락원의 새 봄
 
    그맘때 장가를 못가고 늙어가는 선우의 꼬락서니에 속을태우던 숙모가 웬 로친을 데리고 선우네집에 들어섰다. 말로는 신을업고 점을 보아서 도문판에서 이름이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선우는 정치각오가 높아서가 아니라 쓸데없이 말썽이 날가봐 이게 어느때라고 점을치러 다니는가고 성을냈지만 꼬브랑 할머니가 다된 숙모의 정성에 찬물을 끼얹을수도 없고해서 감히 축객령은 내리지못했다. 고모가 점쟁이 더러 관상을 먼저 보아달라고 청들었다.
   점쟁이로친은 비스듬히 앉은 선우를 돌려앉히고 찬찬히 뜯어보더니 하는 말이 제법 유식하였다. 번듯한 이마가 높이 자리잡았으니 궁량이 트인 사람이요 이목구비가 단정하니 풍류의 기질을 가졌는데 하관에 동화살이 비껴서 이성지합에 복이 있으나  출신이 희살이란다. 취처는 운수소관이요 길흉화복을 손안에 쥐고나오는것이 사람인즉 손금도 보아야 운세를 점칠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선우는 귀신이 씨나락까먹는 소리를 한다고 속으로 우습게 여기면서도 무슨말이 나올가 궁금해서 일에 터갈리고 마디진 손을 내보였다.
  《 에구나. 명금하나는 잘쥐였구나, 여든두살까지 명줄이 뻗었네. 자식은 2남 1녀를 낳을복을 가졌지만 때를 놓쳤음이요 녀자의 금이 외따로 뻗어나가 금실은 찰떡같지 아니할것이요 나이를 많이먹구서야 성가할 운일세. 장가를 간다해도 한번 남의 문턱을 넘어서 액풀이를 하고난 녀자라야 조강지처가 될것이우.》
《 이제 화력서를 좀 보아볼가? 음,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되지 아니하매 도리어 개자식이 되였다. 룡이 높은하늘에 있어 온 바다를 바라고 령리한체하나 어찌하리오, 어느것을 취하고 어느것을 버리려노? 오른쪽에 일곱있고 왼쪽에 일곱이라 처와 첩이 서로 싸우니 하나도 제것이 없으리라.》
《 일곱같은소린 다뭔고, 하나라도 얻어야 장갠지 서방인지 가지비》
     숙모가 한소리를했다. 하긴 엄청난 풀이인지라 선우도 그저 시무룩히 웃었다.
《 에라, 불길한 소리는 그만두세, 자 다음해에것을 보아줄가? 비내리는 날 행인 진퇴량난이라 괴롭고 괴롭다. 상중이 되여서 서로 충돌하니 창파에 눈물을 뿌린다. 묶인나무가 어이자라리요. 구하고저해도 구하기 어렵도다. 기간 꽃다운 인연이 있어 녀자는 길하고 아름다울지어다.》
《 선우에게 맞지않는 소리라구? 숙모가 돼가지구 어째 자꾸 불길하게 군말이 많으우? 자, 지난해는 어떤했는지 보자. 동풍에 해빙되니 마른나무가 봄을 만났다. 좋은곳에 봄이저물매 저물게 남쪽하늘이 열릴줄 알았도다. 물이 성가에 흐르며 적은것이 쌓여 큰것이 된다. 락양성 동편에 복숭아꽃 빛난다.》
《 올해는 어떠냐? 에라, 버들꽃에 춘풍이라 꾀꼬리노래도 태평하나 늦게야 량마를 얻으니 어이 백락을 부러워할고? 천지가 득합하니 물건마다 이룸이 있으리라. 적은이, 걱정해봐야 쓸데 없소다. 룡이 북해에 들어가매 좋은일이 반드시 이루질괘이니 마침내 가중에 풍악이 울리고 만춘호접이 춤추겠구려. 음, 또 총각의 상에 만인을 희롱하며 살명이 섰으니 서른 네살쯤이면 어디 훈장자리라도 나질듯싶네》
《 에구, 성님은 꿈같은 소리만 하네그레, 훈장이야 가당하겠소만 빨리 장개를 들어야제, 저게 가문에 장손인데 씨라도 받아놓아야지비……》
   선우는 오지랖넓게 무슨 유물주의요 무신론자요 하는 어마어마한 말을 할 자격이없지만 듣기좋은 점쟁이의 말에 기분이 잡치지는 않았다. 점친 돈은 숙모가 내주었다. 세상에 예언가야 많지만 점쟁이 로친의 말은 무슨예언도 아니였으나 몇달안되여 나라에 잘알수 없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시작했다.
   겨울이 이미왔거니 봄인들 멀소냐? 세상엔 끝까지 울퉁불퉁한 길이란 없는법이다. 그리고 광풍이란 휘몰아칠때가 무시무시하지만 역시 잠풍할때가있고 해가 창천에서 웃을때가 있기마련이다. 쥐구멍에도 볕이 들날이 있다는 속담도 틀리지않았다. 살벌하던 대동란은 미성도없이 흐지부지해졌다. 시대의 선두주자가 말썽많던 세상을 남겨두고 타계하였기때문이다. 사람들이 불멸의 태양을 믿었지만 거인인들 생로병사의 섭리를 어이 힘으로 이겨낼수 있으랴,
   선우는 문학창작에 진전이 많았다. 시만 쓴것이 아니라 꽤나 긴 줄글도 발표하여 농촌사람치고는 조금 소문이 나게되였다. 꼭 10년동안이나 못난새끼오리로 살아오던 선우에게 앞길이 빠끔히 열리였다. 새인물이 등단하면서 사람을 들볶던 국책이 홱 달라진것이다. 때에 개산툰에 문우가 놀러왔다가 저아래 영성학교서 어문교원을 수요한다며 한번 덤벼보라고 추기였다.
    귀가 솔깃했다. 기회에는 필연성이란 없다. 오직 우연만이 있을뿐이다. 좋은기회만 있었을뿐 말째인 기회란 있어본적이 없었다. 우연한 일확천금은 있을수 있어도 우연히 현명해진 사람은없다. 기회령감은 결단성과 용기를 가진 사람의 손을 잡기좋아한다. 선우는 워낙 대학선생이 필생의 꿈이였다. 대학선생은 이미 물건너간것이나 민반학교에 교원이야 못해냐랴 자신감을 가지고있었다.
    희망은 곤궁에 빠진자에게는 약담배와같이 효력을 본다. 희망은 생명의 강심제이고 인생항로에 등대이다. 희망은 눈을 뜨고있는 선우의 깨지않는 꿈이다. 별로 가망성을 내다보지 않았지만 우둔한놈 곰잡는다했고 움안에서 떡함지를 받을수도 있거늘 밑져야 본전이라 큰맘먹고 영성학교를 찾아갔다. 막연한 희망에 운명을 걸고갔는데 룡산소학교에 있었던 양선생이 극구추천하는 바람에 문교장선생이 가지고 간 작품들을 두루 보고나서 흔쾌히 승낙하였다.
   상전벽해라 못난새끼오리가 어엿한 교원행렬에 끼이게된것이다. 다른사람에겐 대수로운일이 아니지만 선우로서는 후반생을 다르게 쓰게된 일대전환점이였다. 호사다마라고 진흙탕속에 미꾸라지가 “룡”이 되자니 심술부리는 사람들이 뛰여나와 애를 먹이였다. 은인은 어데든 있는법이던가? 산호에게 피터지게 얻어맞으며 타도당했던 원대대서기가 다시 올라오는 바람에 도움을 받을수 있었다.
    그는 원래 해방전쟁으로부터 인민군중위로 되기까지 산전수전을 겪은사람이였고 문학에도 뜻을 둔 사람인지라 인정사정에 밝았다. 선우는 이사라고 할것도 없이 트렁크 하나만 달랑들고 한많고 사연도 많았던 모아툰을 몰래 떠나버렸다. 그러나 정희에게 희소식을 알려야 할지말지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자기의 새생명도 지워버렸는데 무엇이 그를 더잡아당길수 있으랴싶으며 허무만 짓씹었다.
    교단에 오른지 두어달 되였는데 교장선생이 8월달 방학간에 민영교원을 정식교원으로 넘기는 시험이 있으니 잘준비하라고 귀뜸해주었다. 그러면서 정식교원이 되여도 어디로 전근하지 않는다는 선결조건이 붙는단다. 시험과목은 세가지뿐이였다. 그러지않아도 일취월장을 꿈꾸고있던 그로서 시험준비에 등한할리없었다.
    손꼽아기다리던 시험을 무난히치렀고 개학이되여 성적이 나왔다. 전향적으로 제일높은 점수라고 교장이 좋아하였다. 현에 가서 신체검사까지 마치고나서 드디어 국가교원이 되였다는 통지서를 받아안은 선우는 감격에 목이메여 한평생 인민교원으로서 충성을 다바치리라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리고 사람을 알아봐준 김시룡어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영성학교는 대대에서 꾸리는 학교였지만 초중, 고중반까지있었다. 지도부에서는 고중조선어교수까지 맡기였다.
   인생은 필연의 왕국에서 엮어지지 않는다지만 역시 우연한 일치도 있는법이던가? 어느 날, 은근히 속심을 주고받던 친구가 찾아와서 희한한 소식을 전했다. 정희가 난데없이 돐이지난 남자애를 업고 마을에 돌아왔다는것이다. 선우는 무슨감투끈인지 더듬어볼수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해도 아이까지 낳아가지고 올수는 없었다. 그러나 앙큼한 정희가 아이를 지우지않고 낳아서 업고 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못했다. 마을에 이런저런 억측과 류언비어들이 많다고 하였다.
    녀자들은 어떻게 심어진 씨앗이든 변함없는 모성애로 키우려한다. 왜 자기는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가? 정희가 그동안 소식한장 전하지 않은 내속을 조금 알것같기도 하였다. 정희가 깊은 호수라면 자기는 노없는 쪽배이였던가? 정희야말로 난해한 정감사전이고 자신은 엉터리해석자였던가? 사랑이란 쉽게 변하기에 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희가 소식이 없자 녀자의 가슴속에서 흐르는 정감이 언제나 청류인것은 아니라고 단정해버린 자신이 정희의 정에 미치지 못함을 절감했다.
    사랑은 시작부터 필연적이 아니기에 론리적으로 발전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은 해보았지만 사랑은 지배하는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것이라는 그런 높은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사랑은 서정시로 해석할수 없다. 행위만이 가장 좋은 설명서이다. 사랑은 바위처럼 가만히 있으면서 새들을 불러들이는것이 아니다. 사랑은 빵처럼 늘 새로 다시 만들어야 하는것이리라.
   선우는 친구에게 쪽지를 써주며 정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일요일날 선우는 20리길을 걸어서 떠났다. 개산툰으로 나가는 큰길을 건너 마을에 들어서려는데 아이를 업은 한 녀자가 마을아래 산굽이를 돌아 총총히 걸어오고있었다. 자세히 볼것도 없이 정희였다. 아아, 참으로 세상사란 요지경속같으니 어느것이 필연이고 어느것이 우연인지 누가 일일이 헤아려 볼수 있을손가?
   만화속세상에 만화같은 인생의 내함은 다양하고 풍부하여 수십억창생이 해석하는 한 풀이도 각색일수밖에 없다. 인생을 한권의 소설이라면 그들은 생활같은 소설을 읽는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소설을 엮었고 그들만의 사랑의 화폭으로 고조를 장식하고 있는것이다. 인생소설은 길수도 짧을수도 있지만 고난의 려정부분이 가장 크고 매력적인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사랑만은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착각힌다.
   그러나 선우는 자기들의 사랑이 완벽함에는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이 대단원만은 그렇게 완벽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랑은  반드시 시련과 행복을 함께준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행복의 뚜껑도 열어보지 못했을것이다. 끝끝내 도달할수 없을 듯 머나멀던 사랑탑이 지금 눈앞에서 솟아오르며 찬란한 빛발을 뿜어올리고있다. 허궁들리는 걸음에 앞서 마음이 달리였고 달리는 마음에 앞서 심장이 메아리쳤다.
《 정희야ㅡ!!!》
《 선우님ㅡ!!!》
    정희도 아이를 들추어대며 마주달려왔다. 그들은 다른 방향에서 지금 마주향해 달려오지만 이젠 같은방향을 바라보며 인생길 굽이굽이 여한을 찍으며 걸어가기 위해 달려오고있는것이다. 드디어 손과손이 얽히였다. 남의눈이 무서워 부등키지는 못하고 말없이 마주보았다. 서로의 눈길에는 감격과 위안, 신뢰와 존경, 충정의 빛으로 가득차있었다.
    그녀의 꽃술같은 속눈섭이 파르르 떨리며 마주붙자 맑은이슬이 맺거니덧거니 하다가 창백해진 두볼을 타고 쪼르륵 흘러내렸다. 웃음만 전염되는것이 아니라 울음도 전염되는 법이다. 선우도 뜨거운 눈물을 삼키였다. 그동안 선우는 정희의 울음에 너무도많이 전염되여 왔었다.
   이제 더 누구의 눈치를 볼것도없었다. 정희는 잔등에서 해득해득 웃는 아이를 내리여 선우의 넓은가슴에 안겨주었다.
《 고난의 박토를 뚫고 용케도 태여난 씨앗부터 받아요, 해석은 나중에 할게》
    선우는 서툴게 아이를 받아안으며 바보처럼 웃었다.
《 웃을때 바보처럼 순진한 그멋이 정말좋네. 선우선생님, 많이 원망했지요?》
《 원망이 아니라 원한이라고 해야 맞겠지, 요 흰나비야》
   그들은 서둘러 신작로를 따라 보란듯이 해란강으로 행했다. 그들만의 그자리가 기다리고있었다. 정희는 남편될 사람의 어깨에 기대여 멋모르고 뱅긋거리는 아들과 애비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눈굽을 찍고 또 찍었다.
《 여보세요, 먹고누었지요? 우린 운명의 틀을 짓부실 권리는 없었지만 그안에 무엇을 채워넣을지는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고 말할수 있겠지요?》
《  어쭈, 문장이 막나오네, 그렇소. 우리같은 사람들이 확신할수 있는것은 이 세상에 없었다고 해야 하겠지?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확신했기에 여기까지 왔구려. 당신은  내게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야, 그러나 그것을 따기위해서는 아찔한 벼랑끝에 나서야했어. 사랑은 그렇기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라.》
    《어쭈, 또 서정시를 쓰느라구? 하나도 감동되지않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때문에 사랑한것이 아니라 사랑할수밖에 없었기때문에 사랑했던거에요. 바보랑군,》
《 정희야, 고맙다, 누군가 첫사랑이 아름다운것은 흔히 이루어지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첫사랑은 이루어졌기때문에 더아름답고 비장한거야, 사막에서 쓰러지지 않고 내처가는 사람은 어딘가에 샘이 있으리라는 믿음때문이 아니겠어?》
《맞아요. 참, 나 정말 눈이 바로박힌 녀자이구, 원견이있어, 당신 국가교원으로 되였다는 말까지 듣고 얼마나 울었다구, 너무 감동되여서요, 당신 정말 대단해! 나 이제 작가부인에 사모님이 되였네, 호호호…호구에 올리지 못한 애지만 인제 잔치고 뭐고 당신 따라 결혼등기를 내고 그저 살아도 되여요. 엄마도 알고있어요, 당당한 국가간부가 되였는데 마다할리 있겠어요. 호ㅡ요렇게 고운 외손자가 생겼다고 너무좋아서 죽어지내요. 근데 우리 아기를 림시로 선정이라고 불렀어요. 힘들게 난 아기니까 멋진 이름을 지어줘야지요. 당신의 이름 선우정도가 좋지만 복잡해요. 호호호…》
《 뭐, 이름 잘지었네, 이름이 명과 관계된다지만 그저 부르기좋게 선우정이라 하면 어떨가? 남자니까 당신의 정자가 아닌 편안할 정(靖)자를 씁시다. 어떻소?》
《 선우정(鲜于靖)이라…좋아요, 선우의 정희라는 의미도 들어간것같네 호호호… 자, 어디 보자! 우리 작은 선우정님!!》
    정희는 아이를 높이추겨들고 빙돌리다가 깔깔웃어대다가 다시 셋이 한덩이로 엉키였다. 례의 정희는 맑은이슬을 한가득 머금고 선우를 쳐다보았다. 중천에 높이 뜬 해가 만리장천에서 뜨거운 열기를 쏟아주고있었다.…
 
                    
                              2000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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