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한 인간의 자아중심주의적인 품평은 인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수 있다. 말하자면 나를 좋게 대하면 벗이고 나에게 해로우면 원쑤로 되는 등의 심리모식이다. 원균이나 을사오적들과 친한 사람들이 있었고 리순신장군이나 안중근 지사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오리가 오리무리를 따르고 사람들은 류류상종으로 패당이 무어지는것이다.
인성은 이미 내려진 정의를 가리킨다기보다 인간의 자재성, 현존하는 본성을 가리키는것일진대 마땅히 인애와 흉포와 잔악성, 호상배려와 호상쟁투, 성실과 음모 궤계 등 인간성의 두극단을 포함해야 할것이다. 다른 동물처럼 자연에서 걸어나온 인류이기에 누구나 다 마음속에 야수성을 보류하게 된것이다. 인간은 약속력이 없으 면 짐승보다 더 잔악해질수 있듯이 력래의 인성악은 모든 동물의 소행을 합친것보다 더 악착하여 스스로 진저리쳐질것이다.
인류는 문명하고 동물은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하는게 인간의 평판이다. 인류가 얼마나 잔혹하게 동물을 대하는가는 불문하고 인간은 동류에 대해서 승냥이보다 더 잔혹하다는것을 자인하지 않고있다. 승냥이들은 동족을 대함에서 선의적이든 적의를 가지고 있든 조금도 감추지 않지만 인간은 지극히 허위적이다. 속으로는 절치부심하 면서도 웃음속에서 칼을 간다. 승냥이들은 적수와 선혈이 림리하게 할퀴고 물어뜯 으며 싸우다가 지게 되면 패자임을 승인하고 순순히 물러난다.
그러나 인간은 동류와 투쟁할 때는 명목이 많다, 칼로 베고 찍고 불태우고 물에 처넣고 총으로 쏴죽이고 폭격하고 독가스를 쓰고 원자탄을 쓴다. 고대중국에서 감행 한 주리틀기, 대못을 박기 등 혹형과 요참, 릉지처참, 차렬형 등 죽이는 방법을 동물 들이 억만년 진화해도 흉내내지 못할것이다. 승냥이들도 막부득이한 경우 동족의 고기를 먹기도 하지만 생존위기에 처했을 때는 로약병자들부터 먹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중심주의이다. 조물주가 인간을 빚을 때 악을 심어준것은 실수였을가? 아니. 조물주는 인간을 피냄새를 맡는 사냥개로 만들려하지 않았다. 하건만 인간의 진화는 살생의 진화였고 인간의 력사는 피의 력사였다. 진실한것도 인성이지만 그만큼 황당한것도 없으리라.
사람들은 매번 한마리 양을 잡아먹는 승냥이를 흉악하다고 질타한다. 그러나 인간무리의 서로의 횡포와 살륙의 현장을 살펴보라. 양을 잡아먹는 승냥이나 각마를 잡아먹는 사자를 비난할 리유를 잃고말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 유일하 게 확신할수 있는것은 변덕을 부린다는것이다. 례하여 길을 가다가 누가 넘어지면 웃 음거리이기에 아무도 넘어지지 않으면 싱겁게 생각하는게 우리네 인성이다.
순자의《성악》론이나 맹자의《성선론》이나 고자의《중용론》을 두고 아직 의론이 분분하나 시비의 진가는 잠시 제쳐놓고 인류력사를 돌이켜보라. 전 세계는 말고라도 조선조의 궁정비사가 인성의 잔악함을 여지없이 말해준다. 권력의 보좌를 위해서는 육친불인이고 골육상잔을 술마시듯 하였다. 악랄한 인성은 원래 탈권자의 성품이 되여질 리유가 없다. 하지만 권력욕에 혈안이 되면 혈육도 마상의 환난지우도 불길한 잡귀신으로 보였을게다. 그래서 권좌에는 성인이 따로 없다고 하는것이다.
자기를 해친자를 용서하는것은 관용이지만 인간성의 원리는 아니다. 누군가 자기의 악착한 인성을 발견하고 상심할 대신 너털웃음을 웃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한 개체생명으로 말하면 자기 원죄에는 인성의 상실과 자포자기도 들어있다.
포송령의《료재지이》에《견간(犬奸)》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줄거리를 간추려 말한다면 한 고장에 장사군이 있었는데 일년치고 많은 날을 외지로 떠돌아다 니다보니 그 안해가 늘 독수공방하였다. 규방의 적막을 이기지 못한 녀자는 욕정을 달랠 방법을 찾아냈다. 집에서 기르고있던 흰개를 훈련시켜《군사내》로 만들어서 매일처럼 흰둥이와 운우지정을 나누며 즐기였다.
어느 날 사내가 돌아와 안해와 동침하게 되였다. 그런데 질투심이 치민 흰개가 공공연히 방안에 뛰여들어 자기의《정적》을 물어죽였다. 인명사고는 즉시 관아에 고해졌다. 자세히 캐여묻지 않고도 사태를 짐작한 현령이 간부와 개를 사형수감옥에 가뒀다. 여기서 얘기가 거의 끝난것 같지만 더 경악할 일은 뒤에 벌어졌다. 두옥졸이 개와 녀자를 뜨락에 풀어놓고 사람들을 불러다가 개가 어떻게 녀자와 교합하는가를 구경시키고 돈을 받았는데 구경군이 백여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조금 황당한 옛얘기지만 두 옥졸과 백여명의 관람객들의 심리에서 인성속에 숨은 야수성의 경향을 엿볼수 있지 않을가? 물론 이야기가 보편성을 띠지 않는것도 사실 이고 그러한 인성의 표현으로 인성일반을 폄하해서는 안되지만 인류는 기나긴 세월 속에 야수성을 조금씩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완성된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려운것은 문명개화의 와중에 “이화”된 야성들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들이다. 아이를 납치해다가 불구로 만들어 거리에서 구걸하게 하거나 내달리는 자동차와 부딪치게 하고 배상금을 받아내는 놈팽이들이 있는가 하면 친딸을 해치는 금수만도 못한 패륜아들도 멸종되지 않고 륙속 까나고있다.
세계문명국이라는 미국의 병사들이 이라크의 감옥에서 포로들에게 감행한 성적 학대들도 인성속에 잠재한 수욕의 발작으로서 현대문명인의 수치스러운 행각들이 아닌가? 애정과 성애방면에서 드러나는 본성이 가장 적라라하다지만 그것은 인성이 아니라 인간성에서 도저히 용납될수 없는 야성도 아닌 인간악인것이다.
썩박돌도 돌이다. 인성이 훼멸된 인간도 인간이다. 그러나 다만 인피를 쓴 동물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할것이다. 현대문명의 세척제로 인성속에서 발작하는 가지가지 야수성을 조금이라도 씻어내려는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선량한 동기이다. 절대세계란 없다. 오직 상대세계만이 있다. 선속에도 악이 있고 악속에도 선이 있다. 그것이 선하다는것은 그 속에 이미 악이 포함되여 있기때문이다.
우리는 결과만 보고 원인은 따지지 않는다. 원인이 더욱 중요한데도 말이다. 자연은 간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는게 자연을 보호하는게다. 자연에는 쓰레기도 없다. 완전순환이다. 오염이란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가령 욕망을 버리고 또 버리면 마음에 괴로움도 미움도 없을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다. 물론 내는 철학가가 아니여서 이러한 상황을 바르게 리해할수도 평가할수도 없다.
졸문을 마무리하면서 자문해 본다. 당신이 인간성을 옹호한다고 말할 때 인간성에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것이 아닌가? 당신이 인간성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엔 당신은 스스로에게 만족한것이라는 명언이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이로써도 부족하다면 《우리가 인간성에 대해 정말로 유일하게 아는것은 변한다는것이다. 우리가 말할수 있는 인간성의 유일한 속성은 변화이다.》라는 와일드의 말을 첨부해둔다.
하긴 속심을 털어놓으면 오히려 조소를 살수 있는것이 오늘의 인정세태라 얼마나 공감이 생길지 모를 일이지만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에 불평부리고 탄식하며 인류에게 가망이 없는 기대를 걸어보는것도 일종 인성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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